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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론 /구석본
수목원을 거닐다 나무에 걸려 있는 명패를 보았다. 굵은 고딕체로 개옻나무라 쓰여 있고 그 밑 작은 글씨로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고 쓰여 있다. ‘추억이 약이 된다’ 멋진 나무야,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수액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그 명패를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로 읽기로 했다.
햇살이 영혼을 쪼아대던 봄날, 신경의 올마다 통증이 꽃처럼 피어오르면 약 대신 추억의 봉지를 뜯었다. 밀봉된 봉지에서 처음 나온 것은 시간의 몸, 시신時身이었다. 시신은 백지처럼 건조했다. 피와 살의 냄새조차 증발해버렸다. 그 안에 사랑과 꿈과 그리움들이 바싹 말라 부스러져 있었다. 그들의 근친상간으로 잉태한 언어들이 발화하지 못한 채 흑백사진으로 인화되어 있다. 약이 되는 것은 스스로 죽은 것들이다. 죽어서 바싹 마른 것들이다. 살아있는 것에서 독성을 느끼는 봄날이다.
약을 마신다. 정성껏 달인 추억을 마시면 온몸으로 번지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나의 영혼이 조금씩 말라간다. 언젠가 완벽하게 증발하면 나 또한 누군가의 추억이 될 것이다.
봄날, 추억처럼 어두워져 가는 산길을 홀로 접어들어 가고 있는 나를 본다. ----구석본 시집, {추억론}(도서출판 지혜, 2015년)에서
구석본 시인의 [추억론]은 그의 역사 철학적인 성찰의 소산이며, 한국문학사상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명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수목원을 거닐다가 나무에 걸려 있는 명패를 보았고, 그 명패에는 ‘개옻나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수액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일시적인 착시현상으로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라고 잘못 읽게 된다. 따라서 그는 곧 “수액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라고 제대로 읽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날 이후부터,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라는 명제는 그의 역사 철학적인 화두(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라는 주제는 그를 높이 높이 끌어 올리고, 그는 그 황금옥좌에 앉아서 그 모든 것을 굽어 보듯이, 그 주제를 통한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인다. “햇살이 영혼을 쪼아대던 봄날, 신경의 올마다 통증이 꽃처럼 피어오르면” 그는 “약 대신에 추억의 봉지를 뜯었고”, 그 추억의 봉지에서 “처음 나온 것은 시간의 몸”, 즉, “시신時身”이었던 것이다. “시신은 백지처럼 건조”했고, “피와 살의 냄새조차도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그 안에 사랑과 꿈과 그리움들이 바싹 말라 부스러져 있었고”, “그들의 근친상간으로 잉태한 언어들이 발화되지 못한 채 흑백사진으로 인화되어” 있었다. 약이 되는 것은 스스로 죽은 것(추억)들이며, 죽어서 바싹 마른 것들이고, 살아있는 것에서 독성을 느끼는 그런 봄날이었던 것이다. “약을 마신다. 정성껏 달인 추억을 마시면 온몸으로 번지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추억은 고통이며 통증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만고풍상의 그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추억은 고통일 수밖에 없으며, 이 고통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마르고 마르면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들을 퇴치할 수 있는 특효약이 되어 준다. 요컨대 만고풍상이 쟁여진 추억이 “고통이여, 올테면 오라! 나는 그 어떠한 고통도 두렵지 않다”라는 만병통치약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의 삶이 그러했듯이, 내가 죽어서 완벽하게 증발하면 “나 또한 누군가의 추억이 될 것이다”. 구석본 시인의 [추억론]은 최고급의 역사 철학적인 인식의 소산이며, 그 격세유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추억은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이 추억들을 역사 철학적인 봄볕 속으로 불러내어, 최고급의 특효약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시는 만병통치약이면서도 독성이 있다. 이름이 실력보다 앞서면 그는 사인史人이 되고, 실력이 이름보다 앞서면 그는 야인野人이 된다. 대부분의 진정한 시인은 이 야인野人의 텃밭에서 태어나고,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모든 역사의 진실들을 제대로 밝혀주게 된다. 그렇다. 추억은 약이 되지만, 그 인간----그 추억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삶은 독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추억의 본질을 새롭게 명명하고 그 실체를 밝혀낸 최고급의 인식의 힘이 구석본 시인의 [추억론]에는 수천 년의 세월을 찍어누른 듯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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