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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담장을 허물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에서
자연은 이 세계이며,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다.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허풍을 떨어대는 예수도, 제우스도,시바도 자연의 품안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언제, 어느 때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허풍을 떨어대는 인간들도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은 전지전능한 아버지이며, 그 넓고 넓은 옷자락에 모든 생명체들을 다 품어 기른다. 시간의 수레바퀴도 자연의 힘으로 돌아가며, 이 자연의 힘에 의하여 만물이 태어나고, 그 모든 것들이 꽃을 피우며 그 일생을 마치게 된다. 개체는 생멸을 거듭하지만 종은 영원하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오며 자연의 역사는 그 힘찬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된다. 자연은 이 세계의 창조주이지만, 그러나 이 소유권은 모든 만물들에게 나누어 주는 소유권이지, 타인들의 삶을 짓밟고 유린하는 소유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소유권도 행사하지 않는 자연,자기 자신의 부를 다 버림으로서 영원한 만물의 소유주가 된 자연, 어느 누구도 그 재산을 빼앗거나 약탈해갈 수 없는 자연----. 자연의 재산은 결코 소멸되지도 않으며, 어느 누가 약탈해갈 수도 없다. 부자로서 죽는 것은 부끄럽다는 말이 있다. 부자라는 것은 타인들과의 밥그릇 싸움에서 승리하여, 타인들의 희생을 딛고 좀 더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부자는 만인의 공동소유인 자연(재산)을 지나치게 많이 소유했던 것이고, 따라서 이제는 그 사적인 소유물을 아낌없이 다 환원하고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이 자연의 삶을 그러나 사악한 혈연주의로 유린하여 ‘부의 대물림’을 하는 못된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성직을 세습하는 종교인들, 권력을 세습하는 정치인들, 부를 세습하는 재벌들은‘부자로서 죽는 것은 부끄럽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하루바삐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자연은 자연이 주인이며, 우리는 이 자연의 재산을 잠시 빌려 쓰고 가는 것이다. 부자는 자연의 재산을 가로채간 사기꾼이며, 영원한 범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는 담장이 없다. 이 담장의 원시적 형태는 일종의 영역 표시이며, 대부분의 동물들은 아직도 이 영역 표시를 하면서 살아간다. 영역은 그 주체자의 삶의 영역이며, 그 영역을 토대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영역을 둘러싸고 온갖 사나운 생존투쟁이 다 일어나지만, 그러나 이 영역 표시는 담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담장은 자본주의적인 양식이며, 이 담장은 소유권과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는 개인주의이며, 개인주의는 사회로부터 독립한 인간의 삶을 최고의 미덕으로 옹호하는 사상을 말한다. 작은 국가와 작은 정부를 옹호하는 대신에 사유재산을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불가침의 특권으로 숭배하고,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그 재산만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적인 인간들이기도 한 것이다. 만인평등보다는 소수의 예외적인 특권을 주장하고, 공동체 사회의 도덕이나 법률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더욱더 선호한다. 담장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며, 이 담장에 의하여 네것과 내것의 소유개념이 더욱더 명확해진다. 여기는 내 땅--내 집이며, 어느 누구도 함부로 이 담장을 넘어와서는 안 되며, 또한 이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담장을 잘 쌓아야 소유권 분쟁이 없어지고, 담장을 잘 쌓아야 개,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 모든 인간들의 근본 목표인 행복이라는 삶의 장미가 만발하게 된다. 담장은 행복의 성채이며, 고급문화의 초석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는 ‘버림의 미학’의 극치이며, ‘자연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가 있다.담장을 허물었다는 것은 사적인 공간을 허물었다는 것이고, 사적인 공간을 허물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소유권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너와 나는 남이 아닌‘우리’이며, 이러한 담장을 허물어버림으로서 모두가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을 추구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담장은 자연에 반하는 구조물이며, 이 담장을 신봉하는 자본주의는 살인, 강도, 강간, 사기, 횡령 등 온갖 범죄인들을 양산해내게 된다. 자연에는 소유권도 없고, 자연에는 범죄도 없다. 담장은 도덕과 법률을 만들고, 담장은 형무소와 죄인을 만든다. 담장을 허문다는 것은 사적인 공간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사적인 공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고”“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내자, 천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것처럼 만사형통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담장을 선호하면 도둑을 맞을까봐 전전긍긍을하게되지만, 담장을 헐어버리면 그는 천하의 주인공처럼 호쾌해진다. 하늘도 시인을 위해 있고, 해와 달과 별들마저도 시인의 영광을 위하여 떠오른다. 새소리도,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시인을 위해 있고, 산천초목도 시인을 위해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게 된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라는 시구가 그렇고,“하루 낮에는 노루가/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또한,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라는 시구가 그렇고,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기를 각오하면 죽는다.‘버림의 미학’은 ‘사즉생의 미학’이며, 자기 자신을 버림으로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주재하게 된다. 나를 버리면 탐욕이 없어지고, 탐욕이 없어지니까 충남 청양 땅과 충남 보령 땅의 영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천하 자체가 내것이기 때문에, 고작 몇 백평, 또는 몇 십만 평의 사유재산 때문에 타인들과 다투고 이전투구를 벌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공광규 시인의[담장을 허물다]는 충남 청양 땅의 칠갑산, 또는 충남 보령 땅의 오서산처럼 아름다운 시이며, 그 호쾌함이‘버림의 미학’으로 승화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호쾌하다. 거침이 없다. 우리 한국인들의 아름답고 씩씩한 기상이 이 [담장을 허물다]처럼 자라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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