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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력사연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18년 06월 08일 00시 03분  조회:5001  추천:0  작성자: 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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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
    근대
    출생 1918년
    사망 1976년
    경력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인민군협주단 단장
    유형 인물
    직업 독립운동가, 음악가
    대표작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연안송가, 팔로군행진곡
    성별
    분야 역사/근대사

    요약 1918∼1976. 독립운동가, 음악가.

    개설

    아명(兒名)은 정부은. 별명은 유대진(劉大振). 광주 출신. 숭일학교와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첫째형 정남근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933년 봄 셋째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봉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하였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남경에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에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延安)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여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가 1976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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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인민해방군 군가 만든 정율성
시진핑 주석·문 대통령 모두 거론
“동지들에게 용기 주는 노래” 목표
해방 뒤 평양 거쳐 중국에 정착

5살에 상하이로 건너간 한유한
광복군 위해 독립군가 작곡
‘전화기’ 팔아 아동극장 설립
이승만 정권 비판하며 예술 몰두
[토요판] 기획

 

항일음악가 정율성·한유한의 삶

 

▶ 6월1~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특별한 음악회가 열린다. 정치적 노선은 달랐지만 항일과 음악이라는 뿌리를 공유했던 두 음악가, 정율성과 한유한의 곡들을 엮은 <바람과 구름이 되어> 오페라가 선보인다. ‘좌우를 두루 품은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겠다’는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목표를 좇아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가본다.

 

소속은 달랐으나 시선은 같았던 두 사람.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광복군과 팔로군, 남북으로 갈렸던 두 사람. 그러나 그들의 눈길은 늘 항일과 음악에 머물러 있었다.

 

올해 임시정부 수립 99돌을 맞아 한유한(1910~1996. 본명 한형석)과 정율성(1914~1976. 본명 정부은) 두 사람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특별한 음악회(6월1~2일 예술의전당 ‘백년의 약속’)가 열린다. 각자 놓인 처지와 상황, 정치적 노선이 달라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갈 기회는 없었지만 이들의 작품을 씨줄·날줄로 엮은 새로운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고 지난해 현충일 추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것처럼 좌우를 두루 품은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공연이다.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 정율성

 

 

젊은 시절의 정율성. 민속원 제공
젊은 시절의 정율성. 민속원 제공
1988년 덩샤오핑에 의해 중국의 인민해방군 군가로 인준된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은 항일이라는 공통의 기억을 지닌 중국과 한국 양쪽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2014년 시진핑 주석의 서울대 강연,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베이징대 강연 모두에서 정율성이란 이름이 거론됐다. 광주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독립운동을 하는 형제들과 함께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의 의열단 간부학교(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갔다. 군사훈련과 정치교육 위주의 수업 중에도 그의 마음을 잡아당긴 건 음악이었다. 정율성이 노래를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당시 김원봉 의열단장은 전화국 도청 업무를 맡은 그의 안전을 위해 ‘가수 지망생’으로 신분을 위장하도록 했다. 러시아 레닌그라드 음대 교수를 지낸 성악가 크리노바로부터 수업을 받도록 한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정율성이 수업료를 낼 수 없게 되자, 크리노바 교수는 꽃다발로 수업료를 지불하게 할 만큼 제자를 각별히 아꼈다.(<정율성>, 김은식 지음)

 

그러나 정율성은 공산주의자였던 김산과 매형 박건웅 등의 영향을 받아 의열단을 떠나 중국 공산당의 본부인 옌안으로 향한다. 형이 쓰던 만돌린과 바이올린, 그리고 <세계명곡집> 한권을 들고.(<인물로 본 한국근현대음악사>, 노동은 지음) 피비린내와 포연이 가득한 와중에도 루쉰예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전선에서 싸우는 동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노래를 만들자는 목표를 갖게 됐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라고 시작하며 항전의 의지를 표현한 ‘옌안송’은 그의 첫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최고위 지도자들의 격찬을 받았고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등을 작곡했다.

 

정율성이 1942년 조선의용군 시절 중국 타이항산에서 찍은 사진. 민속원 제공
정율성이 1942년 조선의용군 시절 중국 타이항산에서 찍은 사진. 민속원 제공

 

하지만 그의 가슴 한켠엔 일본군과 직접 싸우고 싶다는 열망도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타이항산 전선에 자원해 의열단의 옛 동지들이 만든 조선의용군에 합류해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주임으로 활동하며 2년간 최전선에서 싸웠다. 해방과 함께 평양으로 건너간 정율성은 음악교육·창작활동에 매진하다 한국전쟁 때는 종군해 남으로 내려온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그는 나중에 북한군 군가가 된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비롯해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대합창과 ‘동해어부’ 대합창 등의 작품을 남겼다.

 

숫자보로 기록된 정율성의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악보. 민속원 제공
숫자보로 기록된 정율성의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악보. 민속원 제공
정율성이 1947년 평양에서 부인 딩쉐쑹과 함께 찍은 사진. 민속원 제공
정율성이 1947년 평양에서 부인 딩쉐쑹과 함께 찍은 사진. 민속원 제공
중국 윈난성의 주민들로부터 민요를 수집중인 정율성. 민속원 제공
중국 윈난성의 주민들로부터 민요를 수집중인 정율성. 민속원 제공

 

부인 딩쉐쑹의 양부인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중국으로 돌아가 영구 정착한 그는 “음악의 원천을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중국 곳곳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민속음악을 채집했다. 이 시기 정율성의 음악은 군가풍에서 서정성 짙은 가곡·동요·영화음악·가극 등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그 역시 문화혁명의 태풍을 피해갈 순 없었다. 1966년 ‘특무’(간첩) 혐의로 감금되고 모든 창작활동이 금지됐다. 비밀리에 작곡을 하며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76년 복권된 지 몇달 만에 베이징 외곽에서 고기를 잡다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말년의 정율성. 민속원 제공
말년의 정율성. 민속원 제공
13억 중국인들에겐 ‘혁명음악의 대부’로 꼽히지만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한에서 외면받았던 정율성이 재조명된 데는 광주 남구청 공무원 강양식씨의 공이 크다. 남구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의 생가를 발견한 그는 ‘꿈에서도 정율성을 만날 만큼’ 그의 삶에 매료됐다고 한다. 중국을 방문해 부인 딩쉐쑹과 딸 딩샤오디 등과 신뢰를 쌓으며 원고와 사진, 악보 등 각종 자료를 구했다. 강씨의 정성과 노력이 있었기에 2005년 남구청 주최로 제1회 정율성국제음악제가 탄생했고 지금까지 중국과 광주를 오가며 음악제가 이어지고 있다.

 

정율성 연구에 매진해온 임해철 호남신학대 교수는 “문혁으로 수모를 받으며 고향 땅을 그리워한 그는 남과 북, 중국 어디에서도 완전히 속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항일 디아스포라, 한유한

 

 

젊은 시절의 한유한.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젊은 시절의 한유한.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5살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한유한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자장 속에서 정율성과는 다른 정치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그를 지탱한 것은 무엇보다 항일이었고, 해방 이후 친일파를 기반으로 세력을 쌓은 우익 정치인들과는 평생 담을 쌓고 살았다. 차재근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한유한은 1948년 귀국한 뒤 줄곧 고향인 부산을 떠나지 않고 살면서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득세한 친일파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흔히 말하는 우파가 아닌 항일 디아스포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짚는다.

 

한유한은 어려서 의열단에 뛰어든 정율성보다 체계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상하이 신화예술대 예술교육과를 졸업했고, 이후 중국국립음악원에서 전문 교육과정을 밟았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집안 사정으로 17살짜리 한유한을 남겨두고 귀국하면서 명주로 만든 태극기 한폭, 조선의 흙 한줌을 건네며 의학 공부를 하라고 했으나,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한유한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임시정부 요인 조성환으로부터 ‘예술로 나라를 구하라’는 말을 따르게 된다.

 

숫자보로 기록된 한유한의 ‘압록강 행진곡’. 이 곡은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숫자보로 기록된 한유한의 ‘압록강 행진곡’. 이 곡은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한유한이 중국 아동극장에서 상연한 아동극 ‘귀무’ 포스터.
한유한이 중국 아동극장에서 상연한 아동극 ‘귀무’ 포스터.

 

사범대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던 한유한은 1935년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중국 최초의 첫 아동극장을 만들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뒤 중국군에 입대한 그는 국민당 전시공작간부훈련단 음악교관으로 일하다 나월환 대장이 이끄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해 예술조장을 맡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들의 피복비를 마련하기 위해 1940년 시안에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인 <아리랑>을 작곡, 초연했으며,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입대해 ‘압록강 행진곡’ ‘광복군 제2지대가’ ‘조국행진곡’ ‘여명의 노래’ 등 다수의 독립군가를 작곡했다.

 

의 공연 당시 포스터.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src="http://img.hani.co.kr/imgdb/resize/2018/0525/00503531_20180525.JPG"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643px;" title="한유한의 오페라 <아리랑>의 공연 당시 포스터.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
한유한의 오페라 <아리랑>의 공연 당시 포스터.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그는 해방 직전 한미합동특별유격훈련(OSS)에 참가했고 광복군 송환 작업까지 마무리지은 뒤 1948년에야 귀국했다. 광복군 활동 당시 인연을 쌓았던 당시 이범석 국무총리가 정부 요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고향 부산에 정착해 창작·교육활동에 전념했다. 유족들은 한유한이 이승만 체제에 발을 담그는 것에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버지 한흥교 역시 진보당 경남도당위원장을 맡을 만큼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한유한은 임종을 앞두고 매국노가 매장돼 있는 국립묘지엔 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지금도 양산 솔밭산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한유한이 동지들과 자유아동극장을 짓는 모습.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한유한이 동지들과 자유아동극장을 짓는 모습.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귀국 뒤 그는 사재를 털어 경남도 공립 문화극장을 리모델링하고 극장장을 맡았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이 극장은 임시 국회의사당, 미군 전용극장으로 쓰이다 미군의 실수로 전소된다. 경남도가 한유한에게 아무런 사례를 하지 않고 극장 터를 팔아치웠지만, 그는 제대로 된 예술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꺾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준 ‘백색 전화기’(당시엔 주택 몇채 값에 해당할 만큼 고가였다)를 팔아 1953년 자유아동극장(야간엔 색동야학교로 운영)을 설립했다. 재정난으로 문을 닫기까지 2년 동안 500회 공연에 아이들 11만8천여명이 다녀갈 만큼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유한의 예술적 피는 그의 오촌 조카인 가수 한대수에게서도 흐르고 있다.

 

말년의 한형석.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말년의 한형석.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제공
한유한은 이후 음악에서 탈극, 수영야류 등 전통연희로 예술세계를 확대해간다. 문화평론가 이지훈씨는 “한유한이 중국에서 목표했던 ‘구국예술’은 고국에선 ‘공공예술’로 살아났다”며 “자유아동극장 건립 당시 직접 썼던 문구 ‘우리 힘으로 세우자’는 자발적인 예술활동을 통한 공동체 회복의 이상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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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953년 4월22일 판문점에서 공산군과 유엔군 사이에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1953년 9월 송환 거부 포로들을 관할할 중립국 인도의 1개 여단이 입국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인도군의 판문점행 기차 이동을 방해하자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날아왔지. 전국에 산재해 있던 송환 거부 포로들 2만2000여 명도 판문점 근처에 집결했지. 오늘날 우리가 보는 판문점은 당시 한국에 왔던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 교환 장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란다. 인도군의 관할 아래 양측의 치열한 설득을 거쳐 포로들 대부분은 남과 북, 그리고 중공과 타이완을 택했지만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있었어. 중립국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었지. 그 가운데 중국 사람 열두 명을 제외한 ‘코리안(Korean)’은 76명이었어. 인민군 출신은 74명, 한국군 출신은 2명.

이들은 왜 중립국을 택했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일 거야. 이를테면 어느 인민군 출신은 ‘조선’에 산 것이 전쟁 기간뿐이었다고 해.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싸웠고, 중국 통일을 이룬 마오쩌둥이 휘하에 있던 조선족 사단 몇 개를 통째로 북한에 양도함에 따라 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압록강을 건넜던 거야. 조선인이되 중국에서 산 세월이 길었던, 조선어보다는 중국어가 더 익숙했을 현대사의 불운아라고나 할까. 그에게 북한이란 남한만큼이나 생경한 곳이었겠지.

또 앞서 말했듯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지긋지긋한 친공(親共)과 반공 대결의 후유증도 있었어. 친공 측이 장악한 수용소에서는 반공 포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반공 측이 장악한 수용소에서는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는 일이 무시로 벌어졌던 상황이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을 것도 같아. 전쟁이 멎긴 했지만 또 언제 포화가 불을 뿜고 서로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지 모를 한반도를 떠나고 싶은 마음, 이해가 가지 않니?

인민군 출신이 상당수였지만 76명 대부분은 가고 싶은 나라로 미국을 희망했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은 참전국으로 중립국이 아니었지. 그들은 일단 인도로 가야 했어.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서도 분단과 대립의 공포는 지속됐어. 중립국행이라는 목표 아래에서는 하나였으나 76명 포로들도 인도파와 남미파로 갈린 거야. 신생국 인도는 친공 성향을 보였고, 남미의 중립국을 희망한 포로들은 인도를 선택하겠다는 포로들을 빨갱이로 보았다는구나. 그 두 집단은 서로 100m 내에 접근하지 않는 식으로 ‘분단 체제’를 만들었다고 해.

 


 

그 ‘대결’은 1954년 2월21일 인도 마드라스 항에 도착하면서 일단 끝났지. ‘인도파’들은 즉시 인도 남부로 보내져 기술 교육 등을 받았지만 나머지 ‘남미파’들은 다시 한번 기나긴 기다림을 겪어야 했어. 포로 아닌 포로로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이들 가운데 몇 명은 북한으로 귀환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소망하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주하게 됐지. 그들 앞에 펼쳐진 삶이란 어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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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0 아버지 김철호 "하얀 심장" 쓰다, 아들 김휘 "빨간 심장" 그리다 2018-10-13 0 3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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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영원히 산이 된 "산사람"들... 2018-10-13 0 3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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