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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근대 출생 1918년 사망 1976년 경력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인민군협주단 단장 유형 인물 직업 독립운동가, 음악가 대표작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연안송가, 팔로군행진곡 성별 남 분야 역사/근대사 요약 1918∼1976. 독립운동가, 음악가.
개설
아명(兒名)은 정부은. 별명은 유대진(劉大振). 광주 출신. 숭일학교와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첫째형 정남근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933년 봄 셋째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봉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하였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남경에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에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延安)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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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주석·문 대통령 모두 거론
“동지들에게 용기 주는 노래” 목표
해방 뒤 평양 거쳐 중국에 정착
5살에 상하이로 건너간 한유한
광복군 위해 독립군가 작곡
‘전화기’ 팔아 아동극장 설립
이승만 정권 비판하며 예술 몰두
항일음악가 정율성·한유한의 삶
▶ 6월1~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특별한 음악회가 열린다. 정치적 노선은 달랐지만 항일과 음악이라는 뿌리를 공유했던 두 음악가, 정율성과 한유한의 곡들을 엮은 <바람과 구름이 되어> 오페라가 선보인다. ‘좌우를 두루 품은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겠다’는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목표를 좇아 두 사람의 삶을 따라가본다.
소속은 달랐으나 시선은 같았던 두 사람.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광복군과 팔로군, 남북으로 갈렸던 두 사람. 그러나 그들의 눈길은 늘 항일과 음악에 머물러 있었다.
올해 임시정부 수립 99돌을 맞아 한유한(1910~1996. 본명 한형석)과 정율성(1914~1976. 본명 정부은) 두 사람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특별한 음악회(6월1~2일 예술의전당 ‘백년의 약속’)가 열린다. 각자 놓인 처지와 상황, 정치적 노선이 달라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갈 기회는 없었지만 이들의 작품을 씨줄·날줄로 엮은 새로운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고 지난해 현충일 추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것처럼 좌우를 두루 품은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공연이다.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 정율성
그러나 정율성은 공산주의자였던 김산과 매형 박건웅 등의 영향을 받아 의열단을 떠나 중국 공산당의 본부인 옌안으로 향한다. 형이 쓰던 만돌린과 바이올린, 그리고 <세계명곡집> 한권을 들고.(<인물로 본 한국근현대음악사>, 노동은 지음) 피비린내와 포연이 가득한 와중에도 루쉰예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전선에서 싸우는 동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노래를 만들자는 목표를 갖게 됐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라고 시작하며 항전의 의지를 표현한 ‘옌안송’은 그의 첫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최고위 지도자들의 격찬을 받았고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등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 한켠엔 일본군과 직접 싸우고 싶다는 열망도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타이항산 전선에 자원해 의열단의 옛 동지들이 만든 조선의용군에 합류해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주임으로 활동하며 2년간 최전선에서 싸웠다. 해방과 함께 평양으로 건너간 정율성은 음악교육·창작활동에 매진하다 한국전쟁 때는 종군해 남으로 내려온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그는 나중에 북한군 군가가 된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비롯해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대합창과 ‘동해어부’ 대합창 등의 작품을 남겼다.
부인 딩쉐쑹의 양부인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중국으로 돌아가 영구 정착한 그는 “음악의 원천을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중국 곳곳의 오지를 돌아다니며 민속음악을 채집했다. 이 시기 정율성의 음악은 군가풍에서 서정성 짙은 가곡·동요·영화음악·가극 등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그 역시 문화혁명의 태풍을 피해갈 순 없었다. 1966년 ‘특무’(간첩) 혐의로 감금되고 모든 창작활동이 금지됐다. 비밀리에 작곡을 하며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76년 복권된 지 몇달 만에 베이징 외곽에서 고기를 잡다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정율성 연구에 매진해온 임해철 호남신학대 교수는 “문혁으로 수모를 받으며 고향 땅을 그리워한 그는 남과 북, 중국 어디에서도 완전히 속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항일 디아스포라, 한유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5살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한유한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자장 속에서 정율성과는 다른 정치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그를 지탱한 것은 무엇보다 항일이었고, 해방 이후 친일파를 기반으로 세력을 쌓은 우익 정치인들과는 평생 담을 쌓고 살았다. 차재근 한유한형석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한유한은 1948년 귀국한 뒤 줄곧 고향인 부산을 떠나지 않고 살면서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득세한 친일파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흔히 말하는 우파가 아닌 항일 디아스포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짚는다.
한유한은 어려서 의열단에 뛰어든 정율성보다 체계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상하이 신화예술대 예술교육과를 졸업했고, 이후 중국국립음악원에서 전문 교육과정을 밟았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집안 사정으로 17살짜리 한유한을 남겨두고 귀국하면서 명주로 만든 태극기 한폭, 조선의 흙 한줌을 건네며 의학 공부를 하라고 했으나,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한유한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임시정부 요인 조성환으로부터 ‘예술로 나라를 구하라’는 말을 따르게 된다.
사범대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던 한유한은 1935년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해 중국 최초의 첫 아동극장을 만들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뒤 중국군에 입대한 그는 국민당 전시공작간부훈련단 음악교관으로 일하다 나월환 대장이 이끄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해 예술조장을 맡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들의 피복비를 마련하기 위해 1940년 시안에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인 <아리랑>을 작곡, 초연했으며,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입대해 ‘압록강 행진곡’ ‘광복군 제2지대가’ ‘조국행진곡’ ‘여명의 노래’ 등 다수의 독립군가를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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