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 활동을 하며 편석촌은 정지용과 함께 ‘출발’, ‘날개’, ‘가을의 과수원’ 등 수많은 시들을 발표했습니다. 1936년에는 그는 조선일보를 휴직하고 도호쿠대학 영문과와 와세다대학 영문학부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두 곳 모두 합격한 그는 도호쿠대학을 선택했습니다. 유학을 위해 사표를 냈지만 당시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은 그를 휴직 처리하고 장학회에서 학비를 보조해주도록 했습니다.
그는 유학 당시 영미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흄, 엘리엇, 리처즈 등의 이론을 연구하고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한국 문학계에 주지주의적 문학이 자리 잡는데 앞장섰습니다. 연구 도중에도 그는 창작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1939년 졸업을 한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에서 교수로 초빙받았지만, 조선일보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기자로 복직하면서 학예부장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40년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면서 실직한 그는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영어 과목이 폐지되고는 수학을 가르쳤는데 당시 그의 제자로는 시인 김규동*과 영화감독 신상옥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항상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영국 신사처럼 걷던 훤칠한 키의 스승'으로 기억했습니다.
*김규동(1925~2011): 함경북도 경성 출생의 시인으로 경성고보를 거쳐 연변의대를 수료하고 평양종합대학을 중퇴했다. 경성고보 시절 스승이었던 김기림의 영향을 받아 전쟁, 도시문명 등을 소재로 한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많이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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