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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두만강여울소리> 인상기
림금산
내가 제일 처음 <두만강여울소리>시가탐구회에 참가한것은 이미 20여년전의 일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올해까지 <두만강여울소리>가 매년 한차씩 열려 이미 26회를 맞았으니 강산이 거의 두번하고도 반은 변한셈이다. 그기간 나는 “두만강여울소리”에 신진으로도, 중견으로도 많이 참석했었고 이 몇년간은 연변작가협회 시분과 리성비주임, 김영건주임 등 시인들과 함께 “두만강여울소리”의 조직자의 한사람으로서 참가하다보니 감회가 깊다. 그런 감동의 스토리들을 순간순간 적고싶은 충동을 느껴 나름대로의 감수를 적기시작하였음을 먼저 말해둔다.
1984년에 김성휘, 정몽호, 김파 등 시인들에 의해 길림성도문시에서 발족된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모임은 제1회부터 제5회까지는 도문에서 펼쳐졌으며 제6회부터는 연변뿐만아니라 흑룡강성, 료녕성, 장춘, 길림, 북경 등지의 전반 중국조선족 시인들과 평론가들을 포섭하는 시인축제의 마당으로 되였다. 올해까지 장장 26회를 맞은 <두만강여울소리>는 관념소통, 시단진맥, 감정교류, 시낭송 등 다채로운 활동으로 중국조선족시인들의 만남의 장이였으며 우리 민족 시인들의 제일 큰 성회(圣会)였다. 이날만은 시인과 시인들, 평론가들이 맘껏 시창작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나 애로를 말하는 날이였고 량껏 술잔을 부딪치는 날이였고 맘껏 취할수있는 날이였고 밤을 패며 트러프를 노는 날이였고 맘껏 자기의 신작을 낭송하는 날이였다.
1. 두만강 기슭에서
그날 우리가 중조변경선에 착 붙어있는 연변 룡정시 삼합진에 도착한것은 오전 9시 반좌우였다.
당시 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주임으로 사업하시던 림창연(필명:림연)주임의 인솔하에 제6회<두만강여울소리>가 바로 조선땅을 마주한 룡정시삼합진에서 열리게 된것이였다. 우리는 삼합진정부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두만강가에 이르렀다. 전국에서 모여온 40여명의 중견시인들을 맞은 두만강은 너무나 조용히 그러나 한껏 부풀어 말없이 흘러흘렀다. 강우로 반짝반짝 해빛을 휘뿌리며 두만강은 정다웁게 흘러흘렀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때 연변의 시인들외에 할빈에서 박문봉씨가, 길림지구에선 조광명씨가, 그리고 통화지구에선 김정호씨가 참가한걸로 기억된다.
그때 우린 열렬한 시창작토론모임에 뒤이어 삼합교두에 올라도 보았고 삼합진 바로 맞은켠에 있는 조선회령군도 눈주어 바라보았다.
이미 작고한 시인이지만 그땐 아주 중견시인으로 맹활약을 보이던 화룡시인 김문회선생은 멀리 회령군을 가리키며 자기 외할아버지가 회령에서 산다고 감회깊이 이야기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번에도 왕년과 마찬가지로 투표형식으로 저마다 준비해간 시탐구작들을 한편씩 내놓고 무기명투표를 하였는데 나의 졸시 <산으로 가는 소녀>도 상을 타게 되여 더없이 기뻤다.
저녁에는 또 삼합진부련회에서 진의 여성들을 조직하여 시인들과 함께 즐거운 무도만회도 열어주었다.
회의기간에 또 윤동주묘지를 배알하고 룡정고중학생들과 시낭송모임도 가지였다.
삼합진을 떠나는 마직막 날엔 보슬보슬 보슬비도 잔잔히 내려 나는 두만강의 석별의 인사로 가슴깊이 간직하였었다. 며칠후 나는 <연변일보>에 <비내리는 두만강>이란 수필을 발고하여 그번 제6차<두만강여울소리>를 기념하였다.
제7회<두만강여울소리>도 룡정에서 열렸는데 룡정시정부와 문련의 많은 협찬을 받았다. 두만강을 답사하고 백금향에 가서 불시에 돌아가신 김성휘시인님 옛집도 참관하고 김성휘유상을 걸고 김성휘를 추모하기도 했다. 대신저수지에 가서 <룡정의 노래>창작모임도 가지고 룡정고중에 와서 학생들과 함께 시낭송모임도 가졌다.
2. 금삼각-훈춘에서
제8회와 제9회 <두만강여울소리>는 유서깊은 금삼각지인 중국, 조선, 로씨야 삼국지대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다.
림창연과 김응준선생께서 친히 훈춘에 가서 훈춘시문련주석 정영석씨와 상의하여 경비와 장소를 마련했다.
시인들은 강폭이 한껏 넓게 펼쳐져 흐르는 두만강하류의 금모래불에 들놀이장도 펼치고 두만강에 시원히 불궈놓은 맥주도 마이면서 그립던 회포와 감정을 서로서로 맘속깊이에서 꺼내 나누었다. 심양에서 온 료녕신문사 부주필 림금산선생이 옛친구들이 권하는 술을 량껏 마시는 모습은 참 보기좋았다.
<시인 일요일>에 방천, 장령자 등곳을 돌아보고 훈춘의 노래모임을 가졌으며 당창건 70돐기념시낭송회를 시 3중학생들과 함께 가졌다.
제9회도 역시 훈춘시에서 열렸다. 훈춘시 사타자를 참관하고 훈춘시제1고중학생들과 함께 시낭송모임도 가졌다.
3. 오동성 돈화에서
당시 연변작가협회시분과 부주임으로 사업하시던 김철학선생님과 김학천주석의 땀흘린 노력으로 우리는 이번 제16회 <두만강여울소리>를 유서깊은 돈화시에서 열게 되였다.
돈화시인대에서 부주임사업을 맡아보던 한 조선분과 돈화시민족사무위원회에서 그때 많이 협조해주어 정부차원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해주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그렇게 화려한 별장식호텔에 류숙하게 되였고 유명짜한 오동제약공장이며 정각사(正觉侍 )며 발해국 정혜공주묘며를 돌아보았고 열렬한 시탐구토론뒤끝에 시인들간의 즐거운 정감교류도 하였다. 그때 정혜공주묘에 다녀오면서 리상각시인님한테서 들은 발해국력사이야기는 퍽 인상깊었으며 연변대학 김관웅박사께서 <오늘 중국조선족시인들은 무엇을 써야하나?>란 제목의 기조발언을 하시였다. 그리고 당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였던 최룡관님께서 중요한 연설도 한걸로 기억되고 록원호텔 총경리 박향숙씨께서 (이미 작고한 기업가이며 소설가임) 일정한 금액을 협찬해준걸로 기억된다. 26년동안에 돈화시에서 열린 <두만강여울소리>는 아마 이번이 처음이였다.
4.백두산아래 첫동네에서
유영호시인님의 알찬 노력으로 제17차<두만강여울소리>는 달이 밝고 물이 맑기로 소문높은 백두산아래 첫동네 안도현 명월진에서 막을 내렸다.
작가협회에서는 상무부주석 김호근씨와 창작련락부의 방룡남씨가 참석하여 많은 조언을 주었었다. 후원금이 모자라 마지막날 안도저수지에 들놀이 가자던것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일로 여러 시인들은 서운한 마음으로 헤여졌다. 이번 <두만강여울소리>에는 외성의 시인이 거의 없은걸로 기억된다.
제18회 <두만강여울소리>도 역시 안도현 석문진에서 열렸는데 석문진당위와 진정부의 많은 방조와 지지가 있었다. 당시 안도현석문진 당위 량성복서기는 나젊고 패기있는 간부였는데 문학도 퍽 좋아하시는 분이였다. 지금은 안도현 문교부현장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5. 아름다운 가을의 별장에서
깊은 산속, 아늑한 별장 옆으로 골짜구니엔 맑디맑은 실개천이 오연히 흐르고 산기슭에는 들국화가 탐스럽게 피여있었다.
별장안에서는 개고길 삶는 내음이 고소하게 풍겨나와 코밑을 간지르고 저만치 도문에서 온 녀류시인들의 깔끔한 모습이 산과 물과 함께 시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이미 도문에서 이틀동안 제20회 <두만강여울소리>의 열렬한 토론모임과 수상식, 20주년기념식을 마친 뒤를 이어 마지막날엔 석현 봉오동저수지에서 동쪽으로 깊이 파고들어 이 풍경이 아름다운 가을의 골연에 올라온것이다. 여기에서 시인들은 마지막 개고기만찬으로 석별을 맞이하게 된것이다. 그번 외성 시인으로는 할빈에서 오신 한춘(원명-림국웅)평론가와 길림시에서온 리상학씨, 대련에서 오신 김파시인이였다. 그날 개고기추렴이 끝나자 시낭송모임도 가지였다. 김응준시인, 한춘시인, 김경희시인, 등 5-6명 시인들이 그날 시낭송을 한걸로 기억된다. 시낭송모임 사회자는 당시 시분과 위원이였던 림금산 시인이였다.
6. 천년송을 바라보며
연변의 수부도시인 연길시는 날따라 아름다운 변강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어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제15차와 제19차 <두만강여울소리>가 연길시에서 있은 뒤를 이어 제23차가 연길시에서 열리게 되였다.
다년간 연변민간문예가협회일을 맡아보았고 또 당시 시분과 주임이였던 리성비시인은 제23차 <두만강여울소리>를 알심들여 조직하였는데 회의 전날에 벌써 민간예인들을 여러분 모시고 연길시에서 10리가량 떨어져있는 소하룡에 회의장을 마련하였었다. 시인들과 평론가, 대학생, 민간예인 등으로 60여명 지성인들이 참가한 이번 모임은 주로 민간예인들의 인기프로로 멋지게 장식되였었다, 기조발언과 시작품평의를 뒤이어 판소리, 타령, 가야금독주, 시낭송, 새장구춤 등 독특한 민족색채로 다음어진 모임에서 흑룡강녕안중학교에서 오신 시인 최화길씨도 시낭송을 하였고 목단강출판사에서 온 김성우시인, 원로시인 조룡남, 신진 최연미, 중견시인 김경희 등이 상을 받아안았다. 멀리 대련에서 오신 김파시인과 기업가이며 룡정시종업원휴양소소장인 오정묵시인도 자신들의 새로 출판한 시집을 여러 시인들께 선사하였었다. 모임가운데 또 젊은 시인들은 흥분을 못이겨 동산에 올라 천년송밑에 자릴 정하고 오락회도 열었으며 년세있는 시인들은 아예 회의장 마당가에 있는 정자에 올라 트럼프치기와 마작치기도 벌렸었다.
7. 유서깊은 화룡에서
제12회, 제13회, 제14회 <두만강여울소리>가 모두 화룡에서 펼쳐졌다. 그 몇년간은 호곡, 선경대, 유동하, 유동림장, 아동저수지 등 화룡의 명승지들이 모두 시인들의 마음을 열어주었으며 시흥을 돋구어주었음을 깊이 느끼지않을수 없었다. 이 기간 심양의 박화시인 장춘의 남영전시인님도 몇번 화룡에서 만났었다.
화룡시에서 열린 제24차 <두만강여울소리>는 연변작가협회 제8차작가대표대회가 열린후 처음 여는 모임이였으며 새로 바뀐 작가협회 지도부와 시분과 지도부에서 처음으로 맞는 여울소리인것만큼 인기도가 높았고 참가자가 많았고 범위도 그중 제일 컸던걸로 기억된다.
새로 부임된 작가협회 허룡석주석의 직접적인 뒤받침하에 새로 부임된 시분과 김영건주임과 림금산 부주임의 알찬 노력으로 회의는 준비가 잘 되였고 한차원 높았었다.
특히 화룡시당위와 정부에서 각별히 중시해주었고 시인 박장길씨의 열찬 노력으로 이어진 화룡시민족호텔의 적극적인 후원은 <두만강여울소리>를 왕년에 비해 더욱 활발하고 열렬하게 진행될수있도록 하였다. 이번 <두만강여울소리>개막식은 시분과 부주임 림금산씨가 사회하였다. 개막식에서 자치주당위 선전부의 채영춘부부장이 친히 친필족자를 화룡시 민족호텔에 주었으며 멀리 수도 북경에서 오신 원로시인 김철선생의 열정적인 축사는 참가자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번기에 외성에서 오신 분들로는 김철부부, 할빈에서 온 김창희시인, 천진에서 온 신진 양화 등이였다. 워낙 흑룡강에서 5-6명시인이 오기로 돼있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같은 날 할빈서 흑룡강조선족문학회(회장:한춘) 기바꿈회의가 있었기때문에 김성우, 한영남, 한춘, 최화길 등이 오지못했었다.
평론가들의 기조발언과 열렬한 토론, 탐구작에 대한 평의를 거쳐 선경대유람과 유동림장을 탐방했으며 원로시인 김철시인이 유동림장에 족자를 써주셨다, 저녁에는 연변가무단, 조선족예술단, 연변구연단 등단위에서 모처엄 초청돼온 인기스타들이 로천무대에서 날밝히는 공연을 펼쳐 이번 <두만강여울소리>는 시종 화기롭고 흥에 넘치는 환락의 장이 마련되여 시인들을 마지막까지 축제의 분위기속에 잠기게 하였다
8.늦가을의 생태골
제25차 “두만강여울소리”는 길림성안도현 만보진 생태골(국가급)에서 늦가을의 풍요로운 자연의 품속에서 즐겁게 진행되였다. 대련에서 김파시인이, 할빈에서 한춘시인이 참석하시여 회의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어 주셨다. 한춘시인은 회의 전날부터 명월진에 도착하여 역전앞 여인숙에서 회의군들을 기다리다 대련서 오시는 김파선생을 마중하여 합류하고 장장 하루밤 함께 배갈을 녹이면서 그립던 회포와 시에 대해 이야기꽃을 많이도 피웠단다. 이튿날 연길시인들이 큰 뻐스를 타고 가서 야 우리는 두 유명한 시인과 다시 합류하여 함께 만보진으로 향할수있었다.
이번 모임도 림금산부주임이 사회하였으며 시인들은 생태골에서 당지에 소문높은 일품인 양을 잡아 통채로 구워놓고 즐기였고 고급호텔에 류숙하여 휴식도 취하고 서로 감정도 교류하면서 만보의 가을밤을 노오랗게 구워냈다. 이번 모임에 안도현 인민정부 량성복 부현장이 물심량면으로 많이 도와주셨으며 직접 회의에 오셔서 시인들을 만나보고 축사를 하였다. 1박2일로 회의는 마무리되였는데 최기자, 김동진, 박장길, 심명주, 김경희, 최화길 등 7명이 우수상을 받아안았고 한춘, 김학송, 김영건, 등이 평심위원을 맡아보았었다…
9.끊어진 다리밑으로 두만강은 계속 흐른다
제26차 “두만강여울소리”는 도문시량수진 온성다리를 배경으로 오붓이 펼쳐졌다.
회의전 먼저 도문시두만강강뚝공원에서 고정몽호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60여명의 시인, 평론가, 문인들과 정몽호시인님의 부인, 따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문시 당정 지도분들과 연변작가협회 지도부성원들이 시비를 제막하였으며 화환을 올리고 김영건주임의 축사와 더불어 기념사진도 남기였다. 도문시정부 김기덕시장님께서 후원한 이번 시비제막식과 두만강여울소리는 제막식에 이어 량수진에 가서 시탐구모임을 계속하였다. 시인들은 일제가 2차대전때 끊어놓고 간 온성다리에서 쓸쓸한 마음으로 기념사진을 남겼으며 멀리 동쪽으로 보이는 두만강건너 왕재산홰불도 서글프게 바라보았다. 이번 탐구작가운데서 심명주, 심예란, 최기자, 박장길,등이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황인정,여순희 등이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장시인상은 정몽호부인께서 후원한것으로 이번이 처음이였는데 앞으로 해마다 약간명씩 시상하기로 한것이였다.
장장 26년을 주름잡아온 <두만강여울소리>는 그 기간 연변작가협회를 중심으로 해서 연변 8개현시의 당정지도자들의 많은 중시와 방조를 받았으며 8개현시의 문련, 민족사무위원회, 고등학교와 기업가들의 많은 알찬 도움을 받아 시종 거창한 흐름을 보였음을 우리는 가슴깊이 명기해야 한다. 그리고 혁혁한 공헌을 하시고 이미 작고한 정몽호, 김성휘, 박화, 김문회, 허룡구, 문창남, 김호근, 황장석, 김동호, 김창석, 등 시인들의 시혼을 알뜰히 추억해야 할줄로 안다.
두만강의 원천은 백두산이다. 그리고 두만강은 중조 두나라의 계하(界河)이며 조선족은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에 정착했다. 때문에 두만강에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애환이서려있다. 바로 이렇게 전기적 색채를 띄는 두만강기슭에서 26년전부터 우리 민족의 시인들은 북중국(北中国)의 새봄과 더불어 티없이 깨끗한 민족적 량심과 치열한 문학정신으로 <두만강여울소리>를 발족시켰다는 것은 단연코 우연치 않았음을 나는 마음으로 새긴다
장장 26년의 려정을 걸어온 <두만강여울소리>는 극<좌>로선의 기형적인 시창작틀을 깨는 중국조선족시문학의 <혁명>이였고 리얼리즘시창작군체속에서 해체되여 모더니즘기발을 든 시 개혁파들간의 <백가쟁명>이였다. 이속에서 우리의 민족시는 나날이 영글어 갔고 탈태환골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기도가 높은 시인들이 배출되였으며 성과작들이 창작되였다.
의심할바없이 <두만강여울소리>는 중국조선족시문학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마멸할수없는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중국조선족시단에서뿐만아니라 전반 중국시단, 나아가서는 해외에서까지도 굉장히 인기가 있는 <두만강여울소리>는 10주년때 도문시 두만강변에 <두만강여울소리>시비를 쪼아새겼고 20주년때는 력대로 <두만강여울소리>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을 모아 수상작품집 <두만강은 흐른다>를 출판하였다.
이제 30주년때와 40주년때… 는 또 어떤 비석을 쪼아새기고 어떤 명시선을 쏟아내겠는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부푼다…창창히 흐르라, 두만강여울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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