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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시대의 영웅이였다
ㅡ<산골의 녀수재> 황순옥을 추모하여
허룡석
시대가 영웅을 낳고 영웅이 시대를 이끌어 가던 세월, 우리 연길현 동성공사(지금의 룡정시 동성용진)에는 전국과 성, 주에 이름을 떨친 선진인물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전국로력모범 김시룡, 전국3.8붉은기수 리옥금, 귀향지식청년 본보기 려근택, 전국청년기준병 림관동, 성로력모범 박봉금, 주10대청년기준병 마옥순 등 이외에도 적지 않은 선진인물들이 있었다. 모주석저작 학습기준병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산골의 녀수재> 황순옥도 그 시대가 낳은 영웅이였다. 또한 이 시대의 영웅이 연변은 물론 길림성 나아가서는 전국의 모주석저작을 학습활용하는 열조를 힘있게 추진해나감에 있어 간과할수 없는 기여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력사의 흐름과 더불어 시대의 영웅들도 점차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가게 되였다. 40대이상이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황순옥도 룡정시광영원에서 만년을 조용히 보내다 고혈압, 심장병 등 질환으로 지난해에 84세를 일기로 세상떴다. 한시대의 영웅도 하나의 평범한 별찌가 되여 사라졌다. 하지만 이러한 지난날의 영웅들을 기억하고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이 영웅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될것이다. 그의 타계 한돐을 맞으며 나는 우리의 자랑으로 존경해왔던 그녀를 고개숙여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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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1월 7일 연길현 동성용 베틀골에서 태여난 황순옥은 일곱살때 주보중과 함께 혁명하던 아버지 황기범을 잃었고 22살 꽃나이에 해방을 맞았다. 렬사인 아버지의 혁명의지를 이어받으려는 불타는 의욕으로 그는 1946년에 민주대동맹에 참가하여 부녀위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에는 토지개혁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당학습적극분자로 활약하면서 당조직에서 맡겨준 여러가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그는 첫사람으로 야학교에 다니며 목마른 사람 물마시듯 부지런히 글을 배웠다.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그리고 남편과 어린애를 가진 가정주부가 낮에는 고된 농사일하고 밤이면 10리나 떨어진 야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는 야학교와 조남기 등 공작대에서 가르치는 모주석저작들을 학습하면서 점차 혁명의 도리를 깨치게 되였다. 그는 모주석의 말씀이야말로 혁명의 진리라는 리치를 터득하고 모주석의 말씀대로 실제에 련계시켜 활용해야겠다는것을 깊이 느끼게 되였다. 문맹에서 벗어나 책을 줄줄 읽을수 있게 되자 그는 앞장서 생산로동에 참가하는 한편 짬짬이 시간을 타서 <모택동선집>을 탐독하였다. 그는 모주석저작 단행본을 학습하다가 <모택동선집>이 출판되자 1956년부터 제1ㅡ4권을 통독하기 시작하였다. <신민주주의론> 같은 단행본은 50번좌우씩 읽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 등 <로3편>은 백여번씩 반복적으로 읽어 한글자도 틀림없이 전부 암송할수 있었다. 이밖에도 그는 많은 맑스ㅡ레닌의 저작을 읽었으며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신문을 애독하며 국제국내형세를 료해하였다.
1963년 9월의 어느날, 주당정 직속기관간부들이 연변로동자문화궁에 모여 한 40대의 농촌부녀가 하는 모주석저작학습보고를 듣게 되였다. 발언고 한장 없이도 체계가 잡히고 론리가 째인 보고를 장장 세시간반동안이나 얼음에 표주박 밀듯 하는 그녀를 보고 간부들은 찬탄을 금할수 없었다. 그녀는 모주석저작중의 그처럼 많은 인명, 지명, 년대를 하나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모주석저작 몇권 몇페지에 무슨 단락의 글이 쓰여있다는것도 자기가 낳은 아이 이름 부르듯 익숙히 알고있었다. 이 보고를 계기로 중공연변주위에서는 전 주에서 모주석저작을 학습하는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도록 동원하였다. <연변일보>에서는 <한폭의 붉은기> 라는 장편기사와 함께 <황순옥동무의 고심히 학습하는 정신을 학습하자.>는 사설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되여 황순옥이란 이름없던 농촌부녀가 모주석저작을 통달했다는 소문이 한입두입 퍼져나가 그녀의 학습경험을 듣겠다는 요청이 빗발치듯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후 황순옥은 주내 여러 대학교와 사범학교, 국가기관, 군중단체들에 가서 보고를 하였다. 그의 보고는 가는 곳마다 청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황순옥은 연변에서 대중적인 모주석저작학습열조를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학습을 견지하면서도 부녀대장, 정치대장사업을 맡아하면서 1960년 9월에 입당하였으며 60년대, 70년대에는 주부련회 부주임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해에 황순옥은 길림성부련회의 초청으로 장춘에 가 보고하게 되였다. 중앙에서도 녀기자 2명을 파견해보냈다. 대회에서 그가 조선말로 말하면 번역으로 따라간 분이 한어로 번역하였지만 듣는 사람들은 발언고 한장 없이 록음기마냥 줄줄 내리엮는 한 시골녀인의 류창한 저작학습보고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길림성 당위서기였던 오덕은 격동되여 황순옥의 손을 꼭 잡아주며 우리 성에서 나타난 <산골의 녀수재>라고 높이 치하하였다. <길림일보>에서는 황순옥의 사적과 그의 보고를 대서특필했다.
이에 앞서 1963년 <3.8절>에는 당시 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이였던 엽검영의 초청에 의해 북경에 가서 보고를 하게 되였다. 보고를 알아듣기 쉽고 조리정연하게 어찌나 잘하는지 황순옥은 중국군사과학원, 중국인민해방군총후근부, 중공중앙당학교, 중앙민족학원, 북경시부련회, 중앙인민방송국 등 부문을 돌아다니며 7차례 보고를 하였다. 많은 중앙간부들이 그의 보고를 듣고 연변의 시골에 저처럼 훌륭한 조선족 모주석저작학습기준병이 있다는데 혀를 차지 않을수 없었다. <인민일보>와 기타 중앙의 보도매체들에서 <산골의 녀수재> 황순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황순옥은 돌아오는 길에 또 심양군구, 연변군분구 등 부문들에 들려 모주석저작학습 경험소개를 하였다.
모주석저작학습에서 큰 성과를 올린 그에게는 많은 영광이 뒤따랐다. 황순옥은 선후로 현, 주, 성, 나아가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으며 현, 주, 성 당대표대회 대표 및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는 또 여러차례 현, 주, 성의 모주석저작 학습열성분자대표대회에 출석하였고 북경에 가 6번이나 모주석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녔다. 황순옥의 이름은 장강남북에 울러퍼졌다.
1966년에 황순옥은 전국소수민족참관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 국경관례에 참가하였으며 전국각지를 순회방문하였다. 그는 서안에서 서안사변시기 장개석이 피신했던 돌바위도 보았고 팔로군판사처도 돌아보았다. 그는 대경을 참관하였고 남니만에도 가 보았으며 조국의 발전하는 모습을 자기의 눈으로 체험하였다. 그 과정에 그는 녀영웅 류호란의 어머니와 장사덕의 어머니를 만나 따뜻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주석이 연안에서 만나보았던 미국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도 만날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황순옥도 <문화대혁명>때 곤경을 면치 못하였다. 촌의 반란파들이 그를 붙잡아다 대대사무실에 가두어놓고 주덕해의 죄장을 적발하라고 핍박했다. 그가 도리를 따지니 반란파들은 그에게 <보황파>, <외국간첩>, <가짜전형>이란 감투를 씌우고 날마다 비판, 투쟁했다. 그래도 그는 혁명절개를 굽히지 않고 꿋꿋이 뻗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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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가을철이였던것 같다. 우리가 연길현제11중학교(지금의 동성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여서였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기쁜소식을 전해왔다. 오후에 전교사생들이 북경에 가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전국모주석저작 학습기준병 황순옥을 연도환영하러 간다는것있다. 우리는 와하고 환성을 올렸다. 그때 벌써 전국에 이름을 떨쳤던 황순옥은 우리 마음속의 본보기였다. 농촌부녀인 그가 어떻게 되여 모주석저작학습을 그렇게 잘했을수가 있었을가. 원래부터 남다른 총명과 재질을 타고 났을가. 후에야 그가 남다른 노력을 많이 들였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신변의 영웅처럼 학습에 노력하여 장차 나라의 기둥감이 되리라 다짐하던 터였다. 그런데 황순옥이 우리 공사에 있다는것만 알았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우리 심목중의 황순옥은 영화배우마냥 인물체격이 뛰여난 녀성이였다. 그때에는 영웅이라 하면 빠진데 없이 모든것이 훌륭했고 계급의 적이라 하면 옳은것 하나 없이 부정적 선전할 때라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영화에서도 잘라고 멋진 배우는 정면역을 하고 못생기고 쬐쬐한 배우는 반면역만 하지 않는가.
오후에 우리는 반급별로 줄을 지어 룡정과 연길로 통하는 큰길로 나갔다. 우리는 뻐스역에서부터 공사청사입구까지 길 량켠에 쭉 늘어섰다. 우리는 황순옥이 뻐스를 타고 오는가 천진하게 생각했는데 뜻밖에 까만 승용차를 타고 왔었다. 그때는 농촌에서 승용차를 보기 드문 때라 우리 공사 영웅이 승용차를 타고오니 우리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왔으며 황순옥을 더더욱 우러르게 되였다. 환영대오가 길 량켠에 늘어선것을 보고 승용차는 환영대오의 첫 어구에서 멈춰섰다. 그러자 까마반드르르한 차문이 열리더니 흰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받쳐입은 녀인 한분이 사뿐 내렸다. 뒤이어 검은 제복을 입은 간부같은 분이 몇분 내렸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쳐댔다. 대기하고 있던 공사간부들이 다가가 황순옥에게 꽃다발을 안겨드렸다. 황순옥은 한손으로 꽃다발을 안고 한손을 저어 사의를 표하며 우리가 서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는 서로 더 잘 보겠노라고 가느다란 목을 빼들며 죽어라고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게 뭔가. 우리 앞으로 지나가는 황순옥의 모습은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가. 영웅이라는게 작달막한 키에 생김새는 우리 농촌어머니들과 다른바 없었다. 옆의 한 녀학생도 박수치다말고 눈이 올롱해서 <음마, 딸곰보네.>라고 했다. 선생님 한분이 그 말을 들었는지 대뜸 눈을 부라렸다.
우리 눈에 비쳐진 황순옥이란 영웅의 형상이 너무 수수하다는 인상이였다. 우리가 영화에서 자주 보아오던 마음속의 영웅인물형상과는 많이 틀렸다. 우리는 저으기 실망했다. 영웅도 별랗게 생기지 않았구나. 그런데 어떻게 영웅이 됐지. 보지 않기보다 못했다. 보지나 않았더면 황순옥은 영원이 우리 마음속에 강설금의 영화배우같은 우상으로 남아있었을것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우리가 너무나 유치하고 천진했었다.
그렇게 황순옥을 본것이 처음이였다. 그때로부터 꼭 10년이 지난후인 1974년 가을부터 내가 공사에 올라가 공청단위서기 사업을 하면서 황순옥이와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공사간부들이 하향갔다가도 올라오면 모여앉아 학습토론을 하거나 대비판회의를 하군 하였다. 그때면 공사당위 위원이였던 황순옥과 김시룡도 자주 회의에 참가하군 했다. 그런데 김시룡과 황순옥이 마주 앉으면 두분이 종종 웃음을 머금고 언쟁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분은 실천가이고 한분은 리론가여서 그런지 견해가 같지 않을 때가 있는것 같았다. 김시룡은 “농사군은 뭐니뭐니해도 알맥을 들이고 진땀을 흘려야지 말만하면 농사가 저절로 되느냐.”고 했다. 그러면 황순옥은 “농사군이라도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는 정신이 있어야 하며 수레를 끌어도 방향을 잘 보지 않으면 수레가 구렁창에 빠진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웃으며 “두분의 말씀이 모두 옳다.”고 화해시키기도 했다. 그때 나는 연변일보사의 골간통신원으로 활약하면서 이들의 사적과 대비판하는 내용들을 신문과 방송에 적지 않게 발표했다.
그때는 7.1절이면 공사에서 해마다 공사직속기관 당원간부와 각 대대 당원간부들이 참가하는 당원대회를 열고 선진당조직과 우수공산당원을 표창하군 하였다. 그럴때면 공사당위에서는 당위서기의 당사업총화연설과 함께 전국에 이름을 떨친 우리 공사의 자랑인 김시룡이나 황순옥중 한분을 내세워 연설하게 하는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좀 골치아픈 일들이 생기군 했다. 연설을 못하겠다는 실천가인 김시룡을 억지로 내세워 보고를 하게 하면 거푸 10분도 되나마나 하여 끝내므로 시간배치상 큰 구멍이 생겼다. 리론가인 황순옥을 내세워 연설을 시키면 발언고 한장 없이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줄연설을 하여 점심때를 훨씬 넘기군 했다. 하여 공사당위에서 황순옥에게 연설을 시킬 때면 <절대 한시간을 넘기지 맙소>하는 부탁을 곱씹어야 했다. 그러면 황순옥은 <알았습꾸마>하면서도 정작 연설을 할라치면 그걸 다 까먹고 늘 시간초과를 했다. 그러면 사회자가 자주 나가 귀뜸해서야 보고가 마무리될수 있었다. 아무리 잘하는 보고라도 때시걱을 넘기면 모두가 짜증나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황순옥의 꾸준한 학습정신과 남다른 총기와 기억력에 감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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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인무리>가 타도되고 화국봉이 당중앙사업을 주관하면서 중앙에서는 <모택동선집> 제5권을 출판하게 되였다. 그때 연변에서 로농병대표들이 초청을 받고 북경에 들어와 조문으로 번역되여 나온 제5권을 심열하게 되였다. 모주석저작학습기준병인 황순옥도 농민대표의 신분으로 북경에 들어와 우의빈관에 자리잡고 있었다. 북경에서 공부하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하학후에 우의빈관으로 찾아갔다. 황순옥은 나를 보더니만 너무 반가와 “에구, 탄서기구만.” 하며 두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북경에서 황순옥을 만나니 아주 반가왔다. 내가 “아주머니가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고 북경에 오셨으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고 하니 황순옥은 환히 웃으면서 “글을 다루는게야 쫜쟈(전문가)들이 할 일이지 내같은 촌노친이 뭘 알겠소..” 라고 했다. 황순옥은 말씀은 이렇게 해도 아주 책임적으로 매편 문장들을 까근히 한글자 한글자 읽어보면서 리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리해하기 쉽게 번역하도록 의견을 제기하였다고 했다.
우리는 공사에서 함께 사업하던 때를 회억하기도 하고 내가 떠나온후의 인사변동과 돌아가는 형편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북경에 온후의 학습정황을 말씀드리기도 하고 내가 보고 들은 북경의 정황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황순옥은 갑자기 “그렇지, 그걸 탄서기한테 보여야지. 좋은겐지.”하더니 옷장을 뒤지는것이였다. 잠시후에 그는 목에 두르는 수건 하나를 찾아내여 나에게 보여주며 “북경에 왔던김에 며느리한테 주자구 산건데 고운지 모르겠단데.”라고 했다. 수건은 당시에 전국적으로 류행되던 쥐면 한줌밖에 안되는 메린스수건이였다. 연분홍색을 띤 얄포름한 수건은 내가 보기에도 예뻐보였다. 내가 북경에 온후 한창 류행되는 이런 메린스수건과 포물신을 사달라는 고향사람들의 신부름을 꽤나 했기에 처녀들과 아줌마들이 당시 어떤 색상을 좋아하는지를 좀 알고 있었다. 내가 “아주 잘 골랐습니다. 정말 곱습니다.” 했더니 황순옥은 환히 웃으면서 “북경에서 공부하는 탄서기 곱다문 곱겠지. 시름을 놨단데.” 라고 했다.
그의 둘째며느리는 연변의 이름난 한 가수의 언니였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언니가 목소리나 인물이나 동생보다 훨씬 나아 워낙 언니가 가수로 되야야 하는데 어떻게 되여 동생이 되였다고 했다.
황순옥이 저작학습기준병이 되여 밖으로 많이 나다니다보니 애들을 키우고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남편의 몫으로 많이 남게 되였다. 둘째며느리를 삶은 후에는 며느리가 가정일을 많이 돌봐야 했다. 그것이 미안스러워 북경에 왔던 걸음에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챙겨주고싶어한것 같았다. 그때는 그렇게 만나보고 학교로 돌아왔다. 북경에 있는 주인으로서 고향손님에게 북경료리 한 접시라도 사드렸어야 했으나 그때는 나도 5전이 없어 뻐스에 갇혀 곤경을 치르던 때라 생각대로 되지 못했다. 썩후에 황순옥을 만나 그때 식사대접도 못해드려 정말 미안했다고 하자 황순옥은 “그때 공부하는 학생한테 무슨 돈이 있었겠소.”라고 웃어넘겼다.
1989년 봄, 내가 연변일보사 사회생활부에서 사업할 때 연길에서 황순옥을 취재한적 있었다. 황순옥이 둘째아들을 따라 연길에 올라와 살고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국에 이름난 모주석저작학습기준병으로서 <문화대혁명>이 전격 부정되고 개혁개방시책으로 시장경제에로 전환되고 있는 때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가 해서였다. 나는 아들집의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집을 찾아갔다. 집은 신흥가에 있었는데 황순옥은 없고 유치원을 꾸린다는 며느리와 아들이 있었다. 둘째아들은 나의 웃학년생으로서 잘아는 사이였다.
황순옥은 시내에 들어온후 별로 할 일이 없어 자주 산으로 달래캐러 다닌다고 했다. 그날 오전에도 달래캐러 가고 없었다. 내가 그의 아들과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노라니 아닌게 아니라 황순옥이 점심전에 달래주머니를 들고 들어왔다. 비록 시내에 들어와 산다하지만 농촌아낙네의 시골티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인사를 올리자 그녀는 “탄서기가 기자로 있는다더니 잘 지내느냐?”며 아주 반색했다. 우리는 무람없이 이야기끈을 풀었다. 나돌아다니는 자기때문에 집안팍일 돌보며 고생하던 남편이 1973년에 별세하고 맏아들이 암으로 돌아가고 막내딸도 불행히 죽다보니 줄곧 농촌에서 혼자지내다가 둘째아들을 따라 이렇게 연길에 와 살게 되였단다.
그간 저작학습을 그냥 하는가고 물으니 황순옥은 예전과 다름없이 모주석저작과 맑스 ㅡ레닌의 저작 내용을 술술 이야기했다.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에 대하여 물으니 그는 개혁개방이 좋기는 한데 사람들이 너무 돈만 돈이라 하고 사회치안이 복잡해지고 사람들의 혁명성이 내려가는데 대해 우려를 표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변해가고 있는것 같은데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지 걱정된다고 했다. 현실이 저작학습내용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으니 오랜 저작학습기준병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나는 그를 취재했던 글을 그대로 연변일보에 발표했다.
연길에 와 아들네와 함께 살던 황순옥은 그후 피치못할 사연으로 자기가 살던 고향에 돌아가 다시 혼자살게 되였다. 장기간 농촌사업에서 당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온 황순옥이 농촌에서 고독히 지낸다는것을 알고 주부련회에서 렬사의 자녀인 그더러 영예원에 가서 만년을 보내라고 알선하였다. 룡정시당위와 시정부의 관심으로 황순옥은 1995년 3월부터 룡정시영예원에 들어와 만년을 즐겁게 보내게 되였다.
2005년 11월초, 연변일보사에서 사업하던 나는 룡정시에 갔다가 당시 룡정시당위에서 사업하고 있던 윤영일부서기의 안내로 모처럼 영예원에 가 황순옥을 찾아뵈였다. 황순옥은 나를 보자 너무 반가와 “탄서기가 왔느냐.”며 나를 마구 끌어안았다. 나도 어머니를 만나는 마음으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때 이미 80고개를 올라선 그는 머리가 하얗게 세였고 얼굴에는 흘러간 세월의 년륜이런듯 굵다란 주름이 얼기설기 했다. 그는 많이 로문해있었다. 하지만 정신은 아주 밝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올랐다. 황순옥은 나의 손을 잡고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의 침실을 돌아보고 생활형편을 알아보기도 했다. 영예원 박금철 원장이 황순옥이 영예원에서 보내는 상황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학습에 고질이 된 그는 날마다 뜨락에 나가 우편배달부를 기다려서는 남먼저 신문을 받아보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저녁이면 텔레비뉴스도 빠짐없이 시청하였다. 그러다보니 영예원로인들속에서 황순옥은 국제국내정세를 제일 잘 알고있는 <정치가>, <박사>로 되였다. 우리는 기준병의 본색을 잃지 않고있는 로영웅을 모시고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내가 떠나오면서 나의 마음이라며 용돈봉투를 드렸더니 황순옥은 영예원에서 뭐나 다 해주어 돈이 필요없다며 극구 사절하였다. 옆에서 윤영일부서기와 박금철 원장이 남도 아니고 할머니를 잘 알고 한고향인 허사장의 성의이니 어서 받으라고 간권해서야 그는 마지 못해 돈을 받으며 눈굽을 훔쳤다. 나는 작별하며 황순옥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박금철원장에게 우리의 로영웅을 잘 보살펴드릴것을 부탁하였다. 황순옥은 뜨락에까지 내려와 떠나가는 나에게 오래도록 손을 저어주었다. 나는 그 걸음에 윤영일부서기와 함께 우리 공사 또 다른 한분의 영웅인 리옥금의 집에 찾아가 반갑게 위문하고 용돈을 드렸다.
그렇게 만난것이 마지막 상봉으로 되였다. 그후에는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더는 그를 찾아뵙지 못하였다. 그것이 나의 마음속에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였다. 그가 세상을 뜰 때에도 내가 출장가고 없다보니 나는 그의 추도회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올해 6월 그가 세상뜬지 한돐이 되는 때에 나는 또다시 룡정시영예원을 찾았다. 박금철원장이 황순옥이 세상뜰 때의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의 추도회는 주부련회와 룡정시당위 및 시정부의 관심과 배려로 원만히 치러졌다.
나는 황순옥이 나를 바래주었던 영예원뜨락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두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묵묵히 기원했다.
<황순옥어머니, 평생을 학습하시느라 너무 고달피 보내셨습니다. 천당에서는 제발 편히 쉬십시오.>
2009년 <연변녀성> 제8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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