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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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가죽으로 설을 쇠다
2010년 12월 28일 08시 15분  조회:2470  추천:105  작성자: 허룡석

송아지가죽으로 설을 쇠다


허룡석



내가 아홉살나던 해에 수천만이 굶어죽으며 온 세상을 놀래운 우리 나라 3년재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맞띄우게 되였다. 그 시기에 전국 인민들은 어데라없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부종병에 시달리다 하루가 멀다하게 죽어나갔다. 세전이벌에서 벼농사를 짓는 우리 마을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때 국가배급을 타는 도시사람들보다도 농사를 짓는 농촌사람들의 량식고생이 훨씬 더 심했다 한다. 굶어죽은 사람들도 거의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였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해마다 지은 곡식을 모두 징구량으로 바쳤는지 인민공사 공공식당에는 먹을 량식이 없었다. 사람들은 일년사시절 공공식당에서 주는 하루 세끼 멀건 푸대죽으로 끼니를 에웠다. 그러다보니 피골이 상접한 어른이고 아이고 모여앉기만 하면 먹을 소리뿐이였다. 오죽하면 누군가 자기 허벅다리 고기라도 베여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가 우월한 사회주의제도를 모욕했다고 비판까지 받았겠는가.
그래도 상급에서 방법이 많았다. 간부들은 대식품으로 모자라는 식량을 보태라고 가지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방법에 따라 각 생산대 식당에서는 콩깍대를 가루내여 전분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피나무껍질을 벗겨 <송이떡>을 빚어먹기도 했다. 돈화인가 안도인가 먼 산에 가서 초탄을 (그때는 꼬지깨똥이라고 불렀다.) 캐다가 그것을 물에 불궈 우려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을 먹으면 어른이고 아이고 뒤를 보지 못해 고생들이였다. 며칠씩 뒤를 보지 못하면 비누물을 풀어먹이기도 하고 바르기도 하다가 그것도 안되면 꼬챙이로 돌덩이같은 뒤를 파내야 했다. 어떤 때는 뒤가 피투성이 되여 앉기조차 어려웠다. 배고파 초탄이라도 먹지 않을수도 없고 먹은 뒤에는 뒤가 막혀 죽을 고생이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온몸이 퉁퉁 붓기여 손가락으로 쿡 누르면 헛살이 우물처럼 패웠다. 년세많고 기력이 떨어진 로인들이 사흘이 멀다하게 세상을 떴다. 림종을 앞둔 로인들의 소원이란 죽기전에 입쌀죽 한종지 먹어보는것이였지만 그 소박한 소원도 만족시킬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 오니 먹을것이 더욱 모자랐다. 소학교에 다니던 우리 철모르기 애들은 학교 갔다오면 먼저하는 역사가 식당앞에 무져놓은 콩깍대무지를 옮기는것이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콩깍대무지를 옮기면 그 밑에서 떨어진 콩알 얼마라도 주어먹을수 있었다. 처음 몇번은 콩알 한두줌씩이라도 주어 나눠 먹을수 있었지만 너무 자주 옮기니 나중에는 여나문알씩밖에 주어먹지 못했다. 숱한 힘을 빼고 콩알 몇알 주어먹는것이 한없이 밑지는 일이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콩알을 냠냠 주어먹는것이 마냥 즐거웠다. 주어먹은 뒤끝이면 천진하게도 서로 쳐다보며 “너는 몇알 줏어먹었니?” 라고 묻군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사신과 싸우고 있을 때에도 무정한 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설이 오니 골치아파난것이 생산대간부들이였다. 설에마저 어찌 사원들한테 푸대죽과 대식품을 먹이랴는 걱정에서였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오래동안 굶주림에 뼈가 앙상하고 사흘이 멀다하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때에 뭔가 생활 개선이라도 할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때 생산대간부들이 련며칠 회의를 열고 전문 식당의 생활개선문제를 둘러싸고 토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도 뾰죽햔 수를 찾지 못했단다. 집체에서 기르는 빼빼마른 소나 돼지를 마음대로 잡을수도 없었다. 누가 제맘대로 집체물건을 다쳤다간 집체생산을 파괴하는 반혁명감투를 쓰기 십상이였다. 모두들 방도가 나지 않아 애궂은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을 때에 창고보관원이 들어와 언젠가 생산대창고에서 송아지가죽 한장을 본듯하다는 희소식을 알렸다. 그 소리에 생산대간부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고양이도 없어 못잡아먹을 세월에  이보다 더 기쁜소식이 없었다. 생산대간부들은 우르르 창고에 쓸어나가 창고안을 훌떡 뒤집었다. 그들은 어느 잡동사니밑에서 언제 처박아둔것인지 끝내 송아지가죽 한장을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 송아지가죽도 흉년세월에 무사치 못했다. 배고픈 쥐들이 송아지가죽가운데를 커다란 구멍이 펑 뚫리게 파먹었던것이다. 원래 크지 않은 송아지가죽인데다 <총명한> 쥐들까지 먼저 추렴하다보니 남은것이 얼마 안되였다. 생산대 300여명 인구가 함께 생활개선하기는 어림도 없었다. 생산대장은 맥없이 “어쩌겠소. 요것뿐이니 로인들만 대접시키기오”라고 했단다. 그말에 다들 찬동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도 없기보다는 나았다. 년세많고 저항력이 약한 로인들이 사원들과 함께 굶주림에 허덕이다보니 밤을 자고나면 로인들의 자리가 비여있었다. 50여호되는 생산대에 로인들이 몇분 남지 않았다.
송아지가죽으로 로인들께 설을 쇠여드린다는 장엄한 결정이 선포되자 로인들은 기쁨으로 들끓었고 다른 사람들은 맹랑하다는듯 입만 쩝쩝 다시였다.
설전날에 송아지가죽을 삶게 되였다. 숱한 사람들이 식사하는 식당에서 송아지 가죽을 삶으면 불편하기에 식당뒤집마당에 커다란 중국식가마를 걸어놓고 송아지 가죽을 삶게 되였다.
벼짚으로 송아지가죽을 그을리는 냄새가 어찌나 구수한지 어른 아이할것없이 멀건 푸대죽을 한 사발씩 떠주는 식당으로 가지 않고 뒤집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가마를 둘러서서 닭알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나도 다섯살우인 둘째누나의 손을 잡고 그속에 끼워 서서 연신 입술을 감빨았다.
그을린 가죽을 칼로 썩썩 긁어 손가락너비만큼씩 베여 가마에 넣으니 가죽끓는 냄새 또한 기막히게 구수했다. 그 냄새가 오래동안 고기라군 구경도 못한 사람들의 목젖을 어찌나 심하게 자극하는지 보는 사람마다 련속 방아를 찧지 않을수 없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목안이 근질거려 기침까지 콜록콜록 깇어댔다.
실은 로인들을 자시라고 했지만 로인들마다 손자손녀생각에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소고기>라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던가부다. 로인들은 집안에 들어가 국물이나 훌훌 마시고는 자기한테 차례진 손가락만큼한 삶은 소가죽을 한두개씩 들고나와 자기 손자손녀들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을 받아쥔 애들은 날듯이 기뻐하며 맛갈스러운 소가죽을 정신없이 빨아댔다. 한꺼번에 먹는것이 아까와서 자랑스레 빨기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나에게는 그것나마 차례지지 않았다. 삶은 송아지가죽을 걸탐스레 빨아대는 애들을 부럽게 바라보다못해 나는 누나를 쳐다보며 졸랐다.
“누나, 나두 저걸 먹어볼래…”
“글쎄 없는걸 어찌겠니…”
“저 애걸 좀 빌려달라해, 나두 빨아보게…”
“그 애것두 하나밖에 없는데…”
먹을것이 귀하니 인정마저 박해져 누구 하나 나에게 가죽  끄트러기마저 쥐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누나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그을린 소가죽을 칼로 긁던 자리에 쪼크리고 앉았다. 소가죽에서 긁혀나온 검댕이를 손가락으로 묻혀 혀끝에 대여보니 그것도 찝질한게 꽤나 고소했다. 나는 검댕이를 쥐여 마구 입에 쑤셔넣었다.
갑자기 큰 발가락이 삐죽히 나온 자그마한 솜신 두짝이 나의 시야에 안겨왔다. 고개를 쳐들고 보니 새초롬한 얼굴을 한 누나가 나의 앞에 오똑 서있었다.
“헤헤, 누나 이것두 맛있어…” 나는 계면쩍게 웃었다.
검댕이로 어룽어룽해진 나의 자그마한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누나는 나를 와락 일쿼세우더니 나의 손을 끌고 쮕쥉 집쪽으로 내뛰였다.
“누나, 검댕이 아직두 있는데…”
“누가 그따위걸 주어먹으래…’
내가 끌려가면서 쳐다보니 발가우릿하게 언 누나의 눈에서는 두줄기의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나의 눈물을 보니 웬지 나도 가슴이 뭉클해났다.
그후 내가 어른이 되고 애아버지가 된후에도 누나는 명절때 집안식구들이 모여앉으면 그때 그 일을 께내면서 자주 눈물을 짓군 했다.
“그때 소가죽을 얻어먹지 못해 검댕이를 주어먹던 오래비가 얼마나 불쌍하구 기막히던지…”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부르짖으며 사람잡이만 하던 <계급투쟁>과 <혁명>이란 무시무시한 낱말이 사라지고 개혁개방의 옳바른 시책으로 지금은 세월이 많이 달라졌다. 이젠 먹을것이 흔해빠져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안먹고 밥을 적게 먹고 건강식을 찾으며 다이어트를 한다. 림종을 앞둔 로인들이 죽기전에 입쌀죽 한그릇 먹어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는 일이 더는 없게 되였다. 전국 인민들을 전례없던 굶주림이란 도탄속에 몰아넣었던 그런 력사는 재연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가난은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니까.

2010년 <연변녀성>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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