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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당원>에서 벗어나다
허룡석
대대 공청단서기로 일하면서 <연변일보>와 <연변인민방송국>의 골간통신원으로 활약하던 나는 1973년 가을에 행운스럽게 연변일보사 골간통신원강습반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때 부지런히 기사를 쓰고 괜찮게 쓴다는 전 주 각 분야에서 온 9명 골간통신원이 강습반에 참가했다. 그중 조선족이 4명이였는데 내가 제일 나어린 통신원이였다.
나는 연변일보사에서 두달 남짓한 동안 <기자>견습을 하면서 지구를 다스린다는 <위대한> 농민들보다도 그들을 보도하고 선전하는 기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훨씬 우월함을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또한 연길에 와 난생 처음 연변가무단의 화려한 무대공연을 보게 되였으며 이밥을 먹으나 단조로운 농촌생활보다 강냉이국수를 먹으나 차원높은 도시문화생활이 더 부러워졌다. 나는 가는곳마다 환대를 받는 기자사업을 아주 흠모하고 애착하게 되였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서든 기자로 일해보고 싶어졌다. 농촌에서 태여나 농촌에서 자랐지만 혁명의 요람이 결코 농촌만이 아님을 깊이 터득하게 된 계기가 되였다. 도시에서 보고 들은것으로 어섯눈이 떠졌는지 나는 어느 때보다도 농촌을 떠나려는 마음이 강렬해졌다.
그해 강습반이 거의 끝나갈무렵 하루는 내가 편집부에서 편집일을 배우고 있는데 대대당지부에서 일보사에 전화를 걸어와 나를 찾았다. 공사에서 입당조직담화를 한다고 통지왔으니 오늘 저녁차로 집에 돌아오란다. 대대당지부에서 나를 그해 입당대상으로 삼고 이미 공사에 명단을 올려보낸줄 알고 있는지라 나는 청가를 맞고 그날 저녁으로 뻐스를 타고 집으로 나갔다.
이튿날 오전 공사당위의 조직위원이 내려와 대대사무실 독칸에서 나와 조용히 조직담화를 했다. 그는 당원의 의무며 당의 분투목표며 입당목적이며를 까근히 물었다. 나는 처음 하는 조직담화라 아주 긴장했지만 그래도 별로 막힘이 없이 묻는대로 술술 대답할수 있었다. 조직위원도 아주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당규약>내용과 기타 당의 리론지식에 대해 몇가지 묻고는 장차 영원히 농촌에 뿌리밖고 새농촌을 건설할 사상준비가 되여 있느냐는 관건적 질문을 했다. 나는 다른 질문에는 그런대로 막힘없이 대답했으나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마음속 말을 솔직히 그대로 했다. 연변일보사에 가 학습하면서 장차 기자로 될 꿈을 키웠는지라 영원히 농촌에 뿌리밖으란 말이 어쩐지 내키지 않게 들려왔던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농촌에서 혁명하다가 혁명의 수요라면 조국의 어디든지 가서 계속 혁명할 사상준비가 되여있다고 했다. 그 말에 조직위원의 얼굴에서 대뜸 웃음기가 사라졌다.
“농촌사람이 농촌에서 혁명할 생각은 안하고 가긴 어딜 간단말이오?”
“전국은 한 장기판이라고 늘 말하지 않습니까? 전국의 어디에 가 혁명하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게 어떻게 마찬가진가 말이오. 사람마다 자기가 사는곳에서 열심히 혁명하면 중국혁명도 세계혁명도 그만큼 잘될게 아니겠소? 동무처럼 모두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한다면 이곳 혁명은 누가 하겠소? 그런 사람을 공산당원이라 할수 있겠소?”
“제가 입당하려는것이 중국공산당원이지 어디 우리 공사 당원입니까? 중국 공산당원이라면 중국의 어디에서든 혁명할수 있지 않습니까? 왜 꼭 우리 공사에서 일해야 혁명하는것이고 다른곳에 가면 혁명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이 동무 한다는 소리가 점점 말이 아니군. 크게 말하면 중국공산당원이지만 우리 공사에서 입당하면 우리 공사 당원과 마찬가지란 말이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어떻게 입당한단 말이오? 이 동무 나가 좀 돌아다니더니 비둘기사상만 배워왔구만. 수천수만 도시청년들도 농촌 집체호에 내려와 영원히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하겠다고 하는데 농촌사람이 농촌을 떠나겠다니. 정말 말이 아니군.>
조직위원이 화를 내자 나는 그만 아차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당시에 농촌에 안착하지 않고 도시로 올라가려는 사상을 날아가는 비둘기에 비하여 <비둘기사상> 이라 하였다. 당시 지식청년들 입당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가 영원히 농촌에 뿌리밖고 혁명할 사상준비가 되여있느냐 하는것이였다. 만일 비둘기사상이 있다는 락인이 찍히면 입당할수도 제발될수도 없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속심을 터놓은 통에 조직담화가 맹랑하게 끝났다.
그날밤 나는 이리궁싯 저리궁싯하며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었다. 낮에 한 조직담화를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후회막급이였다. 남들처럼 마음에 없는 소리라도 영원히 농촌에 뿌리밖고 새농촌건설에 청춘을 다 바치겠다고 할것이지 하필이면 자기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아 조직위원을 화나게 할게 뭐람? 공사당위에서 입당문제를 토론할 때에 만일 조직위원이 나의 실적여부와 관계없이 아무촌의 아무개는 비둘기사상이 농후해서 몇해 더 고험해봐야 하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끝이 날것이 아닌가. 이건 일생문제를 결정하는 관건적 조직담화였는데. 그렇다고 래일 찾아가서 잘못했다하고 다시 이야기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후회해도 이젠 엎지른 물이라 주어담을수도 없었다. 에잇. 될대로 되라는 배심으로 나는 이튿날 일찍 연변일보사로 돌아갔다. 내가 조직담화하러 갔다온줄 아는 기자선생님들이 어찌 되였는가, 희망이 있는가고 관심조로 물었으나 나는 맥빠진 소리로 별 희망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들 그 말을 겸손한 말로 받아들일뿐이였다.
영원히 끝나지 말았으면 하는 강습반의 아쉬운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어느듯 우리는 <기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강습을 마친 나는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이 부풀다가도 실패된 조직담화를 생각하면 저도모르게 어깨가 처지군 하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당지부에서는 조직담화에 대하여 일반언구도 내비치지 않자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아마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것 같았다.
1974년 1월중순의 어느날 대대당지부서기가 나를 찾았다. 내가 대대사무실로 가니 로지부서기가 나의 입당이 비준되여 내려왔다는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결과라 나는 혹시 롱담이 아닐가고 지부서기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엄숙한 기색을 보고 나는 그것이 실말임을 믿게 되였다. 나는 심장이 쿵쿵 밖으로 튀여나올듯 하였다. 로지부서기가 여사여사하게 계속 노력하라고 적지 않게 고무격려의 말을 해주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그저 고개만 끄떡끄떡 하였다. 내가 조직의 요구에 어긋나게 그렇게 <엉뚱한 소리>를 했는데도 어떻게 입당이 비준되였을가? 조직위원이 당위토론회에서 나의 <험담>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은 나의 머리속에서 오래도록 맴돌던 수수께끼였다. 후에 내가 공사에 올라가 조직위원과 함께 사업할 때에도 나는 그걸 감히 물어보지 못했었다.
몇년후 내가 대학에 간후 첫 여름방학에 집에 왔다가 마을길에서 우연히 나와 조직담화를 했던 공사의 조직위원을 만나게 되였다. 알고보니 내가 대학에 간후 그가 우리 마을에 집을 잡고 이사왔다. 우리 마을이 공사마을과 가까와 그때 일부 공사간부들이 집값이 싼 우리 마을에 와 자리잡기도 했다. 조직위원은 대학생을 만나 반갑다며 자기집에 가 한잔 하자며 기어코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술상에 마주 앉아 그때에야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의문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조직담화할 때 내가 그렇게 엉뚱한 소리를 해 비준이 안될줄로 알고 몹시 후회했는데 어떻게 비준이 되였는가고 물었다. 조직위원이 시무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자기가 겉으로는 나를 비판했으나 속으로는 이눔이 그래도 배짱이 있어 속심말을 한다고 느꼈다는것이다. 자기가 여러해 조직위원을 하면서 많은 하향, 귀향지식청년들과 조직담화를 해 보았지만 모두가 입에 발린 듣기 좋은 <원칙말>을 하는데 너처럼 <원칙에 어긋나는> 속심말을 하는눔은 처음 보았단다. 짧은 기간이나마 신문사에 가 보고 들어서인지 남들과 뭔가 다르더라는것이였다. 말로는 모두가 영원히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하겠다고 하지만 정작 입당시켜놓으면 서로 농촌을 떠나가지 못해 안달이였다. 그럴바에는 정직하게 속심말을 하는 청년을 입당시키편이 났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래서 당위회의때에 나와의 조직담화를 아주 우수하게 회보했다는것이다.
나는 그말을 듣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인생의 관건적 시각에 내가 귀인을 만난것이였다. 만일 그때 입당하지 못하고 몇년 더 고험을 받았더면 나의 인생행로는 완전히 바뀌여졌을것이다. 나는 찰찰 넘쳐나는 술잔을 공손히 받쳐올리며 나의 심정을 그처럼 리해해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그후에도 나는 인생길에서 적지 않은 귀인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은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일생동안 귀인만 만날수는 없는것이다. 그후의 사업가운데서 고지식한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것이면 아무리 상급지도자가 뭐래도 자기주장을 밝히며 잘 관철하지도 집행하지도 않아 “령도말을 듣지 않는다”느니 “사람이 보기와는 달리 고집불통”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더러 남들이 겪지 않는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사람의 타고난 천성은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고치기 어려운가 본다.
입당한지 얼마 안되여 당령이 토끼꼬리만큼밖에 안되는 내가 어떻게 되여 대대당지부의 한결같은 추천과 공사당위의 비준을 거쳐 대대당지부서기로 되였다. 대대당지부서기들중 나이가 가장 어린 나는 일년후에는 공사에 올라가 공청단서기로 사업하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나의 꿈을 실현하려고 해마다 대학에 갈려고 제기하였으나 공사당위에서 비준하지 않았다. 내막을 아는 간부가 가만히 알려준데 의하면 내가 후계자양성명단에 들어 조직에서 놓지 않는단다.
이듬해 겨울에 나는 한 생산대에 공작조로 내려가 징구량임무를 완수하던중 발목이 절골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성이 강해서인지 그 무슨 오기에서인지 나는 쌍지팽이를 짚고 그 다리를 끌고 계속 출근하며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탓이였는지 발목뼈가 잘 잇기지 않아 오래도록 그냥 절룩거리며 다녔다.
그해에도 나는 대학에 가겠다고 제기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현에서 정식간부편제지표가 내려왔다. 나는 공사에 올라온지 2년이 되지만 아직 정식편제에 넘지 못한 림시간부였다. 이 지표는 몇년에 한번씩 내려오는 지표였는데 쉽게 차례지지 않는 <철밥통>지표였다. 공사당위에서는 이번 지표를 나한테 줄려하는데 만일 대학신청을 고집하면 이 지표를 다른 사람한테 돌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니 대학신청을 했다가 대학에도 못가고 지표도 잃을 가능성이 있으니 나더러 신중하게 고려하란다.
나한테는 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이리궁싯 저리궁싯하던 나는 계속 대학신청을 하기로 작심했다. 어느 <떡>이나 다 차지할수는 없었다. 정식간부 편제지표는 후에라도 가질수 있지만 대학갈 기회는 많지 않으므로 령도눈에 잘못보이더라도 한번 더 부딪쳐 보고 싶었다. 내가 다리를 상해 절룩거리며 다니는데다 해마다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것이 그냥 붙잡아두기도 안되였던지 공사당위에서는 내가 대학에 가는것을 끝내 동의하였다. 하여 나는 중앙민족학원에 가 공부하고 돌아와 내가 그처럼 하고 싶어했던 기자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간부로 제발되여 <혁명>의 수요로 계속 농촌에서 사업하던 동료들이거나 후에 제발된 후배들의 처지는 모두가 불행했다. 중점간부양성대상으로 지목되여 대학에도 가지 못하고 각 공사와 진에서 부서기, 부사장, 부진장으로 사업하며 새농촌건설에 청춘을 바쳐가던 지식청년들이 <4인무리>가 꺼꾸러진후 <4인무리>가 양성한 로케트식 간부로 지목되여 80년대초에 모두 면직되였다. 면직된후에는 나이가 넘어 대학시험에도 참가할수 없었고 도시에 들어오려 해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사업에서 좌절을 당하다보니 혼인이 불행해진 사람도 한둘이 아니였다. 한때 지식청년들의 우수한 대표들이 영원히 농촌에 뿌리밖고 새농촌을 건설해야 한다는 당의 말을 들었다가 생각밖으로 력사의 희생품으로 되고말았다.
남보다 우수했던 그들이 만일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대학으로 갔더라면 그들의 앞길은 휘황했을것이며 그들의 인생행로는 다시 씌여졌을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념원을 접고 혁명의 수요에 복종한것이 <죄>가 되여 력사의 무대에서 밀려나게 되였다.
사람들의 자유와 선택을 제멋대로 유린하고 희롱하던 그러한 독재적력사는 재연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광활한 천지에는 할 일도 많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숱한 지식청년들의 애환도 묻혀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행운아였다.
2010년 <농가> 제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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