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룡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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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후기]인생이 다시 태여나도록
2011년 02월 08일 23시 19분  조회:2376  추천:190  작성자: 허룡석

창작후기(수개고)

인생이 다시 태여나도록


허룡석



세월이 류수와도 같다더니 내가 연변작가협회에 와 몸을 담근지도 어언  5년철에 잡아든다. 사회의 시시비비한 여론과 일부 문인들의 욕총을 등에 지고 울며 겨자먹기로 작가협회의 문턱을 넘은지가 어제 같은데 이젠 퇴직할 나이가 가까와 온다. 천근무게 발길을 들여놓은 첫해는 문단의 <지진>과 <동란>속에서 보냈고 회원대표대회가 열린후부터는 마음을 열고 문인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며 지내왔다.

전국소수민족지구 당기관보중 유일하게 장장 9년간이나 시장으로 내몰려 장기간 로임도 제대로 내주지 못하던  연변일보사에서 내가 마지막 7년을 사장, 주필로 헐떡이였다. 다년간 로임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조직을 믿고 울분을 조용히 삭여오던 흥분된 편집기자들이 나중에는 조직이란 <보뚝>을 터뜨리고 프랑카드를 들고 주당위청사앞에 가 집단청원했다. 이튿날에는 분노한 퇴직일군들이 프랑카드를 들고 가 청원하며 원망스러운 당간부들에게 삿대질했다. 전국을 놀래운 기자들의 청원사건이 전국의 유일한 모범자치주에서 터졌다. 집정당의 기관보를 꾸리는 기자들과 거기에 한생을 바쳐온 퇴직일군들이 <어머니>청사앞에 가 <젖 좀 주소>하며 집단청원을 벌리기는 전국에서도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엄중한 정치> 사건이였다.

우에서 내리 누르고 아래에서 올리바치는 사면초가에 몰려 갖은 곤욕을 치르면서도 빈손으로 19층 청사를 지어놓고 다년간 노력했던 로임정책이 락실되니 본인은 광채롭지 못한 딱지를 쓰고 본의아니게 작가협회로 <승진>하게 되였다. 예상했던바와 같이 장기간 <놀던 물>에서 밀려 고패치는 <낯선 물>에 <풍덩> 빠지고보니 첫시작부터 온몸이 얼어들며 뻣뻣해났다.

일부 문인들이 <착오를 지고 (승진)해온 간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쌔려보았다. 지어 첫 주석단회의에서 어느 <각오높은> 어른은 “일보사에서 착오를 지고 쫓겨온 사람이 어떻게 작가협회주석을 하느냐?”고 공개적으로 힐문했고 어떤 어른은 나를 회원과 리사로 보충, 통과할 때에도 손자밥 떼먹은 <할배>마냥 천정을 쳐다보며 손을 들지 않았다. 또 어떤 어른은 인터넷에 글을 올려 문학도 모르는 사람이 주석을 한다고 명치끝이 따끔하게 꼬집기도 했다. 비록 <서리맞은 뱀>의 신세라도 마음은 파랗게 살아 “고래가 뭍에 밀려나니 개미들의 침노를 받는구나” 하는 허구픈 생각이 갈마들었다. 작가협회란 <이상한> 단체에 와  평소에 하찮게 보아오며 접촉하기조차 꺼려하던 <이상한> 사람들의 칼도마에 올라 이리저리 주물리운다는것이 그렇게 납득이 되지 않았고 서글퍼졌다. 당당하던 당기관보의 사장도 <날개가 부러지니> 이런 <모욕>과 <릉욕>을 당하는구나. 지방의 자그마한 사장도 <뭍에 밀려나> 이 꼴을 당하는데 국가주석을 지내던 류소기나 당의 총서기를 맡았던 등소평 등 큰 어른들이 억울하게 타도되여 <혁명파>란 허울을 쓴 무지막지한 인간들의 갖은 릉욕과 고통을 당했을 때의 그 심정이 어떠했을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굴려보았다.

비바람잘새없는 인간세상에서 사람이 살다보면 사업상의 불운, 개인적인 불행을 겪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보아진다. (적지않은 경우 운수탓이기도 하지만) 그런 위기에 봉착해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통제력을 잃지 않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을줄 안다. 불행을 여하히 대처하느냐는 앞날을 여하히 예측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나는 벙어리 랭가슴 앓듯 정신적 고통을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히며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것은 좌절했다 하여 락심하지 않고 성공했다 하여 지나친 기쁨에 도취되지 않는것이다.”는 면목도 모르는 나폴레옹의 명언으로 자신을 편달하기도 했다.

솔직히 사회에서는 문학이 전성기를 맞을 때에도 문인들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단위마다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문학을 한답시는 관계도 없는것 같지는 않다. 문학이 저조기를 맞고있는 지금은 그런 시선이 더하면 더했지 짝지지는 않을것이다. 어떤 사람은 작품을 보고 작가를 우러르다가 우연히 한번 만나보고는 만나지 않기보다 못했다고 후회했고 어떤 사람은 명성만 듣고 찾아갔다가  벌레를 삼킨듯 오만상을 찡그리며 돌아서기도 했다. 물론 극소수 문인들의 짓이겨진 형상이기는 하나  쥐 한마리 한가마 죽을 흐린다고 사회상에서 문단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망가져있음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기에 나도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가봐 소설을 쓴답시던 80년대초에도 작가협회 회원에 가입할 생각은 꼬물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하늘의 풍운 측량키 어렵고 인간의 화복 짐작키 어렵다더니 몇십년후에 내가 그런 <이상한> 단체의 《두목》으로 오게 될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와보니 아닌게아니라 첫시작부터 일부 문인들의 언행이 <이상하게> 안겨왔다. 일보사사장으로 있을 때에는 굽석굽석하던 사람들도 벼랑에서 떨어져 정신을 추지 못하는 사자는 마음대로 발길질해도 네가 감히 나를 어쩔소냐고 깨고소해하는 당나귀의 심사를 가졌는지 도처에서 불량한 여론을 일으키고 장애를 설치했다. C.h스퍼선의 말과 같이 “진실이 장화를 신고있는 동안 거짓과 비난이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격이였다. 또한 권력과 간부들에게 남다른 불만과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일부 문인들에게 내가 <복수>의 과녁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어느 한번 한 평론가는 술좌석에서 롱담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한적있다.

 “시인, 작가와 정신병환자는 종이 한장 차이요. 당신은 지금 정신병원 원장으로 온셈이요. 정신병환자들과 어울리자면 당신도 정신병환자질 해야 할거요..”

나는 사회에서만 그렇게 보는가 했더니 <환자>들도 그런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그 말을 우스개로 받아넘겼다.

“당신들 <정신병환자>들끼리 그런 말을 했으니 망정이지 주석이란 작자가 그런 소리를 했더면 <원장>이 되자마자 <정신병환자> 들한테 맞아 죽었을거요.”

그러면서도 <제1정신병원>에서는 수적으로 <우세한> 환자들이 <약세>에 처한 의사들을 정신병환자라고 손가락질하며 욕한다던데 첫 시작부터 안겨오는 <행실>들을 보아 <제2정신병원>에서도 수적으로 우세한 <환자>들이 얼떨떨하게 추락된 <원장>을 <정신병환자>라고 몰아부치며 고달프게 굴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그후부터 나는 말썽많은 이 <병원>에서 여느 때에 <원장>이 되고 여느 때에 <환자>로 되여야 할가를 고민하기도 했다. 늘 <원장>인척 <뒤짐>지고 <어험어험> 건가래떼며 나다니면 <환자>들이 눈꼴사나와 <돌총질>할것이고 늘 <환자>들과 섭쓸리며 얼굴에 <검댕이칠>하고 싸다니면 “너까지 정신이 나갔냐?”고 우의 <위생청>어른들이 눈을 부라릴것이였다. 장차 실천속에서 <도>를 잡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부 문인들의 시비와 여론이야 어떠하든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대다수 회원들은 <문학을 모르는> 나를 포근히 받아주었고 대다수 리사들도 회원대표 대회에서 <다리부러진> 나를 주석으로 선거해주었다. 이에 너그럽고 정직한 많은 회원들과 리사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일부 <환자>들의 이상한 짓거리는 계속되였다. 어떤 <환자>는 나무뒤에 숨어 전문 <원장>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다가 <원장>이 어쩌다 출국하거나 출장가도 정신없이 <위생청>에 달려가 고자질하기도 하고 어떤 <환자>는 원칙에나 사업수요에 10만 8천리나 떨어진 <정신나간> 편파적 요구를 제기했다가 만족되지 않으면 다른 리유를 거들어 가는 곳마다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어떤 <환자>는 이제 <원장>이 자리를 내면 자기가 <원장>이 된다고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홍보>하기도 했다. 또 어떤 <환자>는 분촌을 가리지 못하고 무슨 일에나 나서 관여하며 <재판관>노릇을 하려고 허둥대기도 했고 어떤 <환자>는 <정신병원>이 조용하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며 <각설이>탈을 쓰고나와 말썽을 만들어 떠들어대기도 했다. <제1정신 병원>환자들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전기막대기로 자기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의사들이 무서워 뒤에서 주먹질 한다지만 <제2정신병원> <환자>들은 <헝겊막대기>도 손에 쥐지 못한 <원장>마저 두려워하기는커녕 되려 턱밑에 달달 달리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어떤 <환자>들은 자기가 미워하는 <환자>를 한몽둥이로 쳐죽이려고 닉명으로 편지를 써 사처에 띄우거나 인터넷으로 있는 일 없는일 한데 뭉그려 서로 고발하고 무함하고 헐뜯으며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짓거리도 서슴없이 하여 문단에 혼란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런 편지와 메일을 받을 때면 문단에 이처럼 덕성이 모자라는 <문인>들이 끼여들어 <물을 흐리고> 있으니 사회에서 문단의 이미지가 구겨지지 않을수 있겠느냐는 허탈감을 금할수 없었다.

작가협회는 인민단체로서 회원은 작가협회편제를 점하는것도 아니고 로임을 받는것도 아닌데 왜 일부 <환자>들이 원칙적시비문제도 아닌 문단일에 이처럼 <관심>을 가지는지 도무지 리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어떤 <환자>일수록 로임을 주는 단위일보다도 과외로 하는 문단일에 보다 <관심>을 가지는가 그 <성분>을 따져보지 않을수 없었다. 따져보니 뭔가 알것 같았다. 원래 바라지도 않던 <성분>이 복잡한 <병원>에서 <원장>노릇하기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훨씬 힘들고 귀찮아 나는 <위생청>에 찾아가 펀펀한 사람을 <정신병환자>로 만들기전에 앞당겨 <퇴원> 시켜줄것을  신청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환자>는 필경 소수였다. 정직한 다수의 회원들은 말썽거리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고 문단의 화목을 바라며 열심히 자기글을 써나갔다. 또한 공평공정하며 량심있고 원칙있는 많은 분들이 여러모로 나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위안해주고 리해해 주기도 했다. 그것이 내가 오늘까지 <맞아죽지 않고> 그런대로 <원장>을 지탱해 올수있는 힘이 되여주었다. 

광채롭지 못한 벙거지를 쓰고 작가협회에 온후 나는 되도록이면 목소리를 죽이고 키를 낮추었다. 한번 <서리맞은 뱀>의 신세라 물론 사업의욕과 열성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맡겨진 직책은 리행해야 했고 해야 할 일들은 해나가야 했다. 고정된 문학사업자금이 조달되지 않는 형편에서 체면을 무릅쓰고 해마다 여기 저기에서 자금을 인입해들이고 50주년경축 행사를 벌리고 대사기와 번역작품을 출판하고 각종 세미나 등 문학행사를 벌리고 <연변작가협회문학상>, <김학철문학상>, <화림신인문학상> 등 여러 종류의 문학상시상식을 제때에 펼치고 산하 여러 창작위원회의 문학활동을 경제적으로 부축여주고 기관지주문을 보조하고 나젊은 작가들을 양성하고 연변밖의 창작위원회들을 순방하고 회원들간에 모순과 갈등이 생기면 화해시켜주고 중국작가협회에 우수작품을 추천하고 중국작가협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등 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느긋이 해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작가협회주석이라면 글을 써야 했다. 나도 80년대초에 소설창작을 하느라고 머리를 극적거리며 <아리랑>, <연변문예>, <은하수>, <소설집>, <연변일보>등 간행물들에 소설 10여편과 수필, 동화, 잡문, 칼럼 등을 100여편 발표하기도 했다. 그후 점차 령도직위에 오르면서부터 맡은바 실무에 전력하기 위해 해도 좋고 안해도 누가 뭐라지 않는 과외로 하는 문학창작을 아예 놓아버렸다. 내가 주위를 두루 살펴보니 본직업과 과외로 하는 문학을 함께 쥐고있는 문인들 가운데 크게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직으로 하고있는 맡은바 실무만은 남보다 뒤져서는 안되였다. 그런데 작가협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구석에 팽개쳐버린지 오랜 무즈러지고 털이 빠진 문학창작의 필을 다시 찾아들어야 했다.

내가 작가협회에 온 초기에 한번은 청탁에 의해 <연변문학>에 칼럼 한편을 발표하게 되였는데 편집부에서는 나의 이름과 함께 <소설가>라는 호칭을 붙이게 되였다. 그런데 이에 불복하는 한 어른이 주필한테 전화를 걸어 “그 사람이 대체 소설을 몇편이나 썼길래 소설가라 하느냐.”고 힐책했다. 후에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 어른 말씀 틀리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을 쓰지 않은지도 20여년이 되는데 소설가라하기엔 가당치 않았다. 하지만 내심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작가협회주석이 문학창작을 할줄 모르면 어찌 작가들과 어울릴수 있으며 작가들을 거느리는 주석이라 하겠는가. 돈도 권세도 없는 자기중심의 작가들이 남다른 개성과 건드릴수 없는 자존심으로 살아가는데 자기들한테 붙여진 자랑스러운 호칭을 자격미달인 사람한테 공짜로 씌워주는게 불편하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학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학으로서의 본연이 따로 있었다. 만일 이 사회에 작가란 군체가 없다면 사회에 대해 책임지고 민족에 대해 책임지며 력사에 대해 책임지는 민족문화와 인류문화의 한 구석이 크게 구멍뚫리게 될것이다. 아무리 모지름써도 돈도 벌지 못하고 권력도 없는 작가들 더우기 모어로 창작하는 소수민족 작가들은 이 사회의 <불쌍한 >군체이다. 하지만 이들은 또한 민족문화의 번영과 인류문명의 발전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는 위대한 군체였다. 아글타글 뼈를 갈아온 <품싹>도 운운할수 없는 지금 형편에서 돈을 벌려고 글을 쓰는 우리 민족 작가는 거의 없는것 같다. 또한 까딱하면 정치풍파에 걸려들어 곤욕을 치를수도 있다. 하면서도 이들이 왜 험난한 이 길을 고집하고 있는것일가? 그 어떤 사명감과 민족감이 없다면 가능할수 있을가? (물론 어떤 문인은 나좋아서 하는 노릇이지  그까짓 사명감이요 민족감이요 하는 입에 발린 소린 운운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로서도 지난날 문단테두리밖에서 문단을 들여다 볼 때와 문단에 들어와 몸을 담구고 있을 때의 감정에 점차 미묘한 변화가 생기며 문인들을 리해하고 문인들을 동정하고 위대하면서도 불쌍한 문인들을 위해 힘써 대변해야겠다는 책임감도 지니게 되였다.

오늘에 와서 나는 나를 욕하고 꼬집던 문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런 욕과 꼬집음이 나를 <핍박>하여 문학의 본연에 대해 보다 깊은 사색을 가지게 했고 무즈러진 필이나마 주어들고 다시 문학이란 <량산>에 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욕이 사랑이라고 그런 욕소리속에서 우리 문단에 문학애호가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 아니겠는가.

산에 가면 산노래 부르고 들에 가면 들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후부터 나는 이름만 띤 허수아비 주석이 되지 않기 위해 글쓰기에 열중했다. 수필과 칼럼을 쓰기 시작하던데로부터 짬짬이 중동방문기를 써 <연변문학>에 10기에 거쳐 련재하고 후에는 그것을 보충, 수개하여 <신비한 아랍땅으로 가다>는 장편기행을 펴냈다. (기행내용과 련계시켜 썼던 쏘련과 동구라파사회주의 나라들이 왜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며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섭취해야 하는가? 지난날 우리 나라에서 세계혁명을 한다고 발달한 나라들과는 등을 지고 아랍, 아프리카 등 지역의 가난한 나라들을 숱해 무상지원하고 계급투쟁학설에 따라 각 나라 반정부세력들을 대폭 지지한 력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하는 등 이른바 우에서 눈을 밝히기 쉽다는 내용들이 5만자가량 도끼질 당하여 작품의 품위가 많이 떨어졌지만) 그후 근 30년전에 손을 대보았던 소설창작에 집념하며 본명과 필명(매진)으로 <장백산>에 중편소설 <팔부형이 이사가다>를, <연변문학>에 중편소설 <해후>를, (<울부짖는 원혼>이나 <진혼곡>으로 되여야 할 제목이 두리뭉실하게 고쳐져 제목과 내용이 어울리지 않아 많은 독자들의 의혹을 자아내기도 했다. 아마 아직도 다른 지구보다 개방되지 못한 정치환경속에서 웃어른들의 눈치에 너무 신경 쓴 탓인것 같다.) <도라지>에 단편소설 <전자뇌ㅡ 경례>를 발표하였다. 이외 <문화시대>, <연변녀성>, <단풍 수필집>, <로년생활>, <농가> 등 잡지와 출판물들에도 여러 쟝르의 작품 50여편을 발표하였다.

이번 작가초대석에 발표되는 <인생3부곡> 수필은 나의 다년간의 사업실천과 생활체험에서 떠오른 령감들이다. 사람이 한생을 살다보면 널뛰기처럼 쉼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고 더 승진하고 발전하자면 맘에 없는 <정치>도 해야 했다. 뽈차기처럼 지도의 기전술에 따라 열심히 뛰여야 하지만 <축구도박>처럼 <정치 도박>에 말려들면 인생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가지 소용돌이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순진한 사람들은 남을 자기만큼 믿다가 혹은 일만 일이라 하다가 언젠가는 거기에 빠져들어 골탕을 먹기도 한다. 단편소설 <장기들의 반란>은 지난 단오절 련휴일에 쓴 작품이다. 비록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지만 장기들을 이인화하는 기법으로 부정부패를 질호해보자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인체 장기들의 공능을 얼마감이라도 알아야 했기에 잠간이나마 <의학공부>를 하는 계기로도 되였다.) 이번에 함께 발표되는 잡문 <낯가죽은 엷으면 좋느리라>와 <아첨쟁이의 속마음>도 25년전에 연변일보사 편집판공실 부주임으로 있을 때 칼럼으로 쓴것인데 당시 사회와 관청바닥에서 갈수록 범람하기 시작하고 백성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부정부패를 겨냥한것들이다. 그런데 웬 일인지 지금 발표해도 늦을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잡문으로 수개하여 여기에 내놓는바이다. 이외에도 여러편의 작품들이 여러 잡지들과 종합집에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문학작품의 내재적 령혼에는 시종 하나의 정신이 관통되여 있는바 그 정신이 바로 작가가 마음속으로부터 부르고 싶은 <노래>인것 같다. 문학창작은 한 작가의 량심으로서 바로 예술화된 문학적언어로 자기의 량심을 써내고 민족의 량심을 써내며 력사적 량심을 써내고 나라의 량심을 써내는것이라 하겠다. 그 어떤 작가나 모두 자기가 보고 듣고 겪어온  잊을수 없는 생명적 생활체험을 예술화하여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는것이 아니겠는가.

수십년간 언론계에서 사업하며 크고 작은 부문, 높고 낮은 간부들과 자주 접촉하고 변화무쌍한 관청사회에서 보고 들은것이 많다보니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소재로 쓸만한 글감들이 참 적지 않음을 문단에 온후에야 깨닫게 되였다. 다년간 모래속에 묻혀있던 문학적 창작소재의 진주를 여기에 와서 발견한셈이다. 지난날 문학창작과 담을 쌓고있을 때에는 그러한 소재들이 길바닥에서 나뒹구는 모래알에 지나지 않았으나 글을 쓸려고 작심하니 그 모래알들이 모두 하나하나의 진주로 빛을 뿌리며 다가오는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이란 자기가 살고 사업하던 원적지를 떠나 지난날의 생활과 시간적 거리가 생긴후에야 비로서 그때를 돌이켜 보게 되고 회억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가 본다. 그래서 문학창작도 일종 회억에 대한 문학적서술이라 하지 않겠는가.

갈수록 놀라운 활약을 보이는 중국 주류문단과는 달리 최근년간 중국조선족 문단에는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무게있게 다루는 작가가 가물에 씨나듯 했다. 또한 회원들의 성분을 보아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깊이있게 쓸만한 생활체험을 가지고 있는 작가도 사실 많지 않다고 느껴진다. 나는 나의  상층사회 (비록 중앙급이나 성급은 아니지만)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사회문제와 부정부패를 다룬 문학창작을 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하지만 수십년간 필을 놓았다가 다시 문학창작을 할려니 창작기교가 따라 가지 못함을 깊이 느끼게 되였다.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다년간 언론부문의 책임자로 있으며 사업수요로 리론서적은 적지 않게 보았으나 문학서적은 거의 뒤적이지 못하였다. 그것도 거의 한문과만 접촉하다 보니 전에 익혔던 우리 말과 글을 많이 잊어간 상태였다. 구슬도 꿰여야 보배지 널려있으면 모래와 다를바 없다지 않는가. 하여 주석이란 베일을 벗어버리고 언어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한편 창작에서의 소학생이 되여 허심하게 여러 소설가와 평론가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글을 쓰고있는 형편이다. 한 평론가는 “작가가 되려면 주석이란 모자를 벗어제치고 저자거리의 광대가 되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지당한 말이다. 주석이라는 감투를 쓰고 글을 쓰게 되면 그 어떤 심태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가지가지 제한을 받게 될것이지만 저자거리 광대의 신분으로 글을 쓰면 아무 부담없이 글을 마음껏 피룰수 있을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하자면 용기가 필요했다. 누군가 자기는 “낮에는 사회주의를 하고 밤에는 자본주의를 한다”더니 나야말로 “낮이면 주석이 되고 밤이면 저자거리의 광대”로 되는셈이였다. 나의 글쓰기에 여러모로 가르침을 주고있는 정직한 여러 소설가, 평론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라는 리치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회원중 한해에 한편의 글이라도 쓰는 사람이 20%가량 되고 경상적으로 글을 쓰는 회원은 10%도 되나마나 하다는것이 회원들 자체의 평가이다. 어떤 회원은 돈이 들어가는 작가로부터 (출판비를 내야 함으로) 돈을 내지 않는 <아나운서>로 탈바꿈하여 없을수록 좋을듯한 문단의 <확성기>역할을 하며 시시비비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협회 주석으로서 열심히 글쓰기를 배우며 부지런히 글을 쓰는 실제행동으로 무언의 본을 보여야 하지 않을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가져보았다. <절기>를 놓쳐 남보다 썩 뒤늦게야 <모내기>를 시작한 탓인지 비록 알알이 여문 글농사는 아니라도 부지런히 글농사를 짓다보면 풍작을 이룰 때도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글을 자주 써도 욕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은것 같다. 랭면을 온면으로  만드는 주제에 주석이라는 사람이 할 일 없으니 들어앉아 <밀가루반죽>만 주무른다고. 아마 이 자리는 글을 안써도 욕, 글을 써도 욕인가부다. 하지만 이미 <이상한> 모난 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이상 숫구멍에 정을 맞지 않으면 되려 이상할것이다.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어진다더니 글을 쓰다보면 종종 엉뚱한 욕심이 생기기도 하는것 같다. 그것은 한번도 써보지 못한 장편소설을 써보겠다는 욕심이다. 또한 다년간의 사업실천속에서 내가 뼈저리게 느꼈던 민족문화사업발전에 대한 밀어버릴수 없는 사명감으로 지금 짬짬이 <일보사 사장>이라는 장편소설을 집필하고있다. 짧지 않은 7년간 일보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이 직접 겪은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개혁개방중 경제건설에만 중시를 돌리고 소수민족문화발전은 홀시하는 엄중한 실책으로 소수민족문자로 된 당기관보마저 장기간 시장에 내몰려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가운데서 나타난 내부적 모순과 외부적 갈등 및 상급간부들의 부당한 처사와 부정행위 등을 내용으로 경제건설시기에 소수민족지구에서 여하히 당의 민족정책을 실속있게 관철집행하여 소수민족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며 민족단결을 강화하고 변강의 안정을 도모할것인가 하는 중대한 주제를 반영하려 하고있다. 하지만 나를 걱정하는 어떤 분들은 또 화를 자초할가봐 쓰지 말라고 권유하는가 하면 기어코 쓰겠으면 퇴직후에 발표하라고 귀뜸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밀어버릴수 없는 민족적 사명감으로 <우직한 곰>은 지금도 헐떡이며 계속 <땅을 뚜지고> 있다.

퇴임후에는 <병원>에서 사업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감수와 사실들을 바탕으로 <제2정신병원 원장>이라는 장편소설 집필도 구상해보고 있다. 소설은 시장경제발전 시기에 소수민족문학이 전에없이 추락되고 소수민족작가들이 <아나운서>로 전락되여 가는 현실에 립각하여 작가와 사회, 문학과 정신문명, 경제발전과 문화발전 관계를 기술하면서 소수민족문학발전도 당의 민족정책을 떠날수 없으며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문화, 문학이 발전하지 못하면 한 나라 문명도 운운할수 없다는 주제를 피력해보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물론 작품가운데는 주제를 둘러싸고 그간 우리 <병원>에서 벌어진 수많은 시시비비한 사건들이 빠질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이 발표되면 <병원>밖의 사람들은 놀랍고도 재미있게 볼것이지만 <병원>내에서는 말벌둥지 터질줄로 예상된다. 어떤 <환자>는 스스로 번호에 따라 자리를 찾아 앉아 <정신없이> 떠들것이며 지난날 <환자>들 서로가 모르던 많은 <병원>안의 내막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원장>으로서 이 <병동> 저 <병동> <환자>들의 <고자질>과 <하소연>, <욕설>을 거의다 듣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병원>의 시시비비가 누구보다도 많다고 해야 할것이다) 필을 대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도 없지 않지만 이는 그때에 가서 다시 볼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 모든것에 자신이 있어한다.”는 격언과 같이 이도 안난 녀석이 콩밥을 먹으려는 주제넘은 창작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이 절반이라고 하려고만 하면 그리 어려운 일인것 같지는 않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숱한 무모한 짓을 하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 나에게는 이제 글쓰는 소원 하나면 족하다. 물론 원숭이가 금가락지를 낀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고 초학자가 글 몇편을 쓴다고 해서 작가로 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상상의 탑을 세워보는것도 허망한 일은 아닌것 같다. 우리 문단에는 10년, 20년만에 명작 한편 내놓는 대가도 필요하겠지만 해해년년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어볼 자그마한 글이라도 부지런히 쓰는 문학애호가도 필요할것 같다. 주추돌, 자갈, 모래가 어울려야 집이 되는것처럼.

나는 그저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가봐 걱정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능력이 모자람을 한탄하면서 분발할뿐이다. 이후 내가 여하히 글을 쓰든 어느만큼 쓰든 나 스스로는 자신을 영원히 애숭이 문학애호가로 여길뿐 절대 작가로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작가는 사회적으로 받들어모셔야 하는 인류령혼의 기사라는 고상한 호칭을 갖고 있기에 덕성과 작품이 독자와 사회적인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작가라 할수 없기 때문이다. 덕성과 작품중 분명히 어느 한쪽 혹은 량쪽 모두 미달인데도 글 몇편 발표하고 책 한두권 출판하고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대단한 작가인척 머리를 쳐들고 큰 소리치며 다니기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도적자리에 있을 때 사람들이 기억하는것은 권력의 힘이고 자리를 낸후에도 사람들이 기억하는것은 능력의 힘이며 죽어서 진정의 꽃다발을 받을수 있는것은 덕성의 힘이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크고작은 문학행사때마다 초청을 받아 출석하고 앞자리에 모시우고 축사를 하도록 하는것은 주석이란 우사모를 쓰고있기 때문이지 내 본인이 위대해서, 존경해서, 보고파서, 좋아서가 아닌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찌보면 내가 눈을 펀히 뜨고 어쩔수 없이 남들한테 <리용>되고 있을뿐이다. 우사모를 벗고 자리를 내면 이런 <황홀한 리용>도 금방 사라지게 된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고 자기를 아는 자는 명철한 자이다. 남을 이기는 자는 장군이고 자기 스스로를 이기는 자는 원수(元帅)이다. 인간의 가치를 종국적으로 가장 잘 발휘할수 있는것은 권력도 재산도 지식도 아니라 사람의 됨됨인줄 안다. 권력, 재산, 지식은 영원한것이 아니지만 인간은 마지막 숨을 톱을 때까지 됨됨이를 가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덕성 다음으로, 덕성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을 다른 한 인간우에 올려 놓는다”는 에디슨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지혜를 얻기전에 돈을 얻은 자는 잠시밖에 돈주인 노릇 못하고 덕성을 얻기전에 지식을 얻은 자는 평생 말썽을 등에 지고 다닌다”는 명언으로 자기에게 경종을 울릴것이다.
정력과 열성, 능력만 따라 간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영원히 퇴임하지 않는것이 글쓰기<사업>인것 같다. 나는 지금 글쓰기를 다시 배우게 된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문학사업에 대한 공헌은 운운못해도 퇴임한후에도 또다시 일할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한셈이다. 만일 내가 계속 일보사 사장으로 있다가 순조롭게 퇴임하게 되였다면 사회적 명성은 이즈러지지 않았겠지만 아마 다시 문학창작을 하게는 되지 않을줄로 안다. 지난날의 그 색안경에 막혀 <이상하게> 보아오던 <환자>들과 섭쓸리기 싫어서, 자존심 때문에, 체면때문에, 신심이 없는 등 원인은 여러가지라 하겠다.

늘 하던 지랄도 한달간 하지 않으면 먹먹해진다는데 몇십년동안 놓은 무즈러진 문학창작의 필을 퇴임한후에 다시 든다고 해서 돌연히 명작이 튀여나오겠는가. 그러면 나는 영광스럽게 퇴임한 대가로 되려 이젠 뭘하며 여생을 보내야 할가를 고민하게 될것이다. <오쟁이>를 지고 작가협회로 올 때는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눈을 질끈 감고 들어왔지만 인자하신 <하느님>은 그 대가로 나에게 문학창작을 다시 배울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것이다. 퇴임후에 마작이나 놀고 낚시질이나 하며 한가하게 지낼가봐 성스러운 <일자리>걱정을  해준셈이다. 그 <일자리>를 위해 문학이란 <멍석>이 활짝 펼쳐져 있고 주위에 가르침을 줄수 있는 단수높은 <지도>들이 줄줄이 둘러서있는 지금부터 그 <멍석>우에서 뒹굴며 글쓰는 <지랄>을 배우게 한것이다. 그래야 퇴임후에 곁에 <지도>가 없이도, <맨땅>에서라도 독자적으로 <지랄>할수 있을것이 아니겠는가. 행복은 결코 많고 큰데만 있는것이 아니다. 작은것을 가지고도 고마와하고 만족할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는것이 아닐가.

그간 사람들의 <이상한> 눈길을 끄는 <병원>에 몸을 담그고 늘 <환자>들과 접촉하며 <원장>을 몇해 했더니 나도 무슨 <병균>에 <감염>되였는지 언제부턴가 <정신이 나가기> 시작한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마흔에 신는 첫 보선도 아니고 퇴임할 림박에 와서 얼굴에 <검댕이>칠을 하고 문학이란 <멍석>우에서 뒹굴며 남들한테 아득히 뒤진 창작을 한답시고 <지랄>하겠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갈비뼈 아룽아룽한 여윈 몸에 널다란 팬티를 걸치고” 하는 그 <지랄>이 꼴불견이라도 한참 꼴불견일줄 안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체면을 무릅쓰고 <지랄>하며 <땀을 흠뻑> 흘리느라니 유익한 점도 있는것 같다. 지난날 그 무엇엔가 틀어막혔던 숨통이 훤히 열려지고 다년간 나의 몸에 굳어졌던 그 어떤 딱지가 뚜둑뚜둑 떨어져나가고 얼기설기 엉켰던 그 어떤 틀이 망가져내리며 순수하고 천진하고 성실하던 지난날의 <빈하중농> 본연으로 <치료>되는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또한 어떤 <환자>들의 <개떡>같은 말도 <호떡>같이 들어줄 아량도 생겨나고 <각설이>같은 <환자>도 <갑순이>로 보아줄 <원장>의 느긋한 여유가 생겨난것 같기도 하다. 만일 그런 여유가 없이 지난날 엄숙하고 원칙적인 국장과 사장으로 있던 때의 시각과 <각오>대로라면 <정신나간> <환자>들과 밤낮 책상을 두드리며 할키고헐키는 살벌한 전쟁의 나날을 보내야 했을것이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오다 자기가 걸어온 길을 우연히 돌이켜보노라면 전에는 감감 모르고 지냈던 신기루도 발견하게 되는것 같다. 나도 공직사업의 마지막 역에 이르러 내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더듬어보다가 나로서도 놀라운 사실에 아연해지기도 했다. 그것이 우연인가 필연인가. 나는 지나간 내 생애에서 아직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세개의 25년을 감각없이 겪어온것이다.

첫째는 20살에 남에게 떠밀려 덩덩하게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을 쳤다가 미역국먹고 25년후에 연변인민방송국 국장,총편집으로 되였다.

둘째는 23살에 자신의 끈질긴 노력으로 연변일보사 전 주 통신원강습반에 (도합 9명 참가, 그중 조선족 4명) 뽑혔다가 25년후에 연변일보사 사장, 총편집으로 되였다.

셋째는 31살에 기자사업을 하는 여가에 첫 단편소설 <사랑과 령혼>을 연변작가 협회기관지인 <연변문예>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가 25년후에 연변작가협회주석, 당조서기로 되였다.
거짓말같은 세개의 25년, 수수께끼같은 세개의25년,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세개의 25년, 번번이 우연으로 맺어진 인연이 번번한 그 필연으로 공직사업을 마무리짓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의 인생길은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기전부터 사전에 이미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것일가? 누구한테나 거의 모두 불가사이한 우연이 있겠지만 나한테도 이런 우연이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하느님>은 내가 자신이 이미 정해놓은 이 틀에서 벗어날가봐 나를 그처럼 진통을 겪게 하면서도 마지막 우연을 기어코 이 틀에 맞춰넣어 필연으로 만든것일가? 아무튼 인생길이란 신비하고도 종잡을수 없는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인생길에서 더러 곡절을 겪긴 했으나 선량한 량심을 가죽속에 집어넣고 깨끗하게 걸어온 지난날에 자부심을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본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 또한 후회되는 일도 없다. (다만 마음 아팠을 때 대학졸업시 학교에서 학교 혹은 북경의 사업단위나 기관들에 남으라 할 때 부모의사를 거역하고 북경에 남아 발전했더면 나의 인생이 어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은 몇번 굴려본적 있다.) 좌절과 아픔이 바로 성숙이고 각성이라더니 좌절도 하나의 보귀한 재부로서 사람을 보다 리지적이고 랭철하게 하며 인생철학을 보다 깊이 터득하게 하는것 같다. 물은 락차가 커야 경관을 이루고 산은 기복이 심해야 절승경개가 된다는 도리일가.

어떤 종류의 성공이든 성공하려면 자신을 팔아야 한다. 자기의 시간, 노력, 꿈, 재능, 힘 지어 뼈까지 갈아가며 쟁기질해나가야 한다. 이런 자질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 사람이 재간있는 <선수>냐 아니면 단순한 <팬>이냐 하는것이 판별된다. 운동장에 나서면 모두 선수라 자처한다. 문단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두 문인이라 자처한다. 하지만 진정한 <선수>와 소리치는 <팬>은 실천속에서 금방 구별된다. 작가협회에서 회원을 받아들일 때에는 조건이 구비되는 <선수>만 받아들이지 <팬>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보면 적지 않은 문인들이 <선수>로 들어왔다가 <팬>으로 뒤바뀌여 <관중석>에 올라가서는 <어느 선수 천재다>라고 소리치며 올리추지 않으면 <어느 선수 ×같다>며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나는 이런 <팬>들이 자리를 오껴앉은 <관중석>에서 순순히 내려와 다시 <선수>로 복귀되여 <운동장>에서 땀을 철철 흘리며 뛰여다니는, 명실이 부합되는 <선수>가 되기를 바란다. 

 피아노는 훌륭한 악기로서 그것을 다룰줄 아는 예술가의 손에서는 아름다운 선률이 흘러나오지만 그것을 다룰줄 모르는 사람의 손에서는 귀찮은 소음이 쏟아져나온다. 문학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진정 문학을 할줄 아는 사람한테서는 <아름다운 선률>이 흘러나와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문학을 아는척 하는 사람한테서는 <귀찮은 소음>이 쏟아져나와 독자들을 돌아앉게 한다.

작가협회 회원이라면 누구나 그 명칭에 걸맞게 문학창작에 정진하며 부단히 새로운 성과를 거두어야 할줄 안다. (물론 전문작가가 없는 지금 자기가 몸을 담그고 있는 단위의 본직업이 첫째이다.) 나도 <원장>을 할 때까지 <환자>들을 위한 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보통환자>의 자격으로 그 명칭에 걸맞게 열심히 문학이란 <피아노치기>를 잘 배워 독자들을 돌아앉게 하는 <귀찮은 소음>이 아니라 독자들을 모여들게 하는 <아름다운 선률>이 쏟아져 나오도록 힘쓸것이다. 그러면 나의 후반생도 어쩌면 전반생의 모든 겉치례와 가면들을 홀랑 벗어버리고 여생에 문학에 정을 붙힌 문학의 <피아니스트>로 다시 태여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일생을 순풍에 돛단듯 살아온 사람은 자부심에 살고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은 슴슴하게 살고 좌절을 겪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알며 산다했다. 인생의 참맛을 아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을것이다.

비록 복잡다단하긴 했으나 지나간 문단에서의 5년철을 돌이켜보면 감개가 무량하다. 본의아니게 <지구>에 추락되여 들어와 <외계인>이 체험하지 못했던 많은 보귀한 생활을 체험하게 되였다. 이러한 체험은 나의 인생에 지워버릴수 없는 값있는 락인으로 찍혀있을것이다. 돈 주고도 살수 없는 이러한 뜻깊은 인생체험을 할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시간이 지나며 보면 나는 내가 문단에 들어와 세운 <원칙>이 옳았음을 가슴 뿌듯이 느끼게 된다. 그것인즉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장작은 나른한 끈으로 묶어야지 장작으로 묶을수 없다는 리치다. <환자>들이 <정신없이> 나와 <도끼>를 휘두르며 펄펄 뛸 때는 춰주고 달래고 피하여야지 <원장>인 내가 너한테 질소냐고 함께 <칼>을 빼들고 <정신없이> 맞대결하면 너팔고 나팔고 조상까지 파는 일로밖에 되지 않을줄 안다. 무술계의 진정한 고수(高手)는 자기의 강함을 쉽게 나타내지 않고 평소에 느슨한 태극권으로 자신의 재간을 감춘다했다. 꼭 생사결단을 내야 할 일이 아니라면 남이 치면 피하고 남이 진공하면 물러서고 남이 쫓으면 달아나면서 <연약>함으로 <강함>을 대처한다. 곁에서 보기엔 연약하고 무능하게 보일수는 있어도 그것은 흔히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인배들의 호들갑일뿐이다. 하지만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본다 하겠다. 고수는 편파적인 충둥질에 드놀지 않고 쉽게 칼을 빼들어 애매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한 문학애호가를 <작가초대석>에 초대하여 문인들과 속심을 터놓고 교류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장백산>잡지 편집부에 감사한 마음이다.

2010년 8월 
<장백산> 2010년 제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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