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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의 눈
장학규의 에세이를 두고
전경업
두 눈이 모두 정면에 있는 동물들은 사냥 물을 추적할 때에 목표물을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으로만 목표물을 보면 입체감이 적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요, 두 눈이 초점을 집중시킬 때 목표물의 거리와 크기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또 하나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내는 그런 눈인 것이다. 아마 많이는 문화예술인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장학규의 에세이들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 우리들이 눈길을 돌리지 않았던 것들, 우리들이 그저 지나쳤던 것들을 많이 읽게 된다.
‘황관의 배후’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중국님이 16금, 22은, 12동의 성적으로 종합 성적 4위에 랭킹되었을 적에 중국은 들끓었다. 개인들이거나 집단이거나 조직이거나 정부 부문들이거나 모두가 격동으로 들끓었고 ‘우리도 인젠 체육강국의 행열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고아댔다.
그러나 장학규가 느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속의 비해을 보아냈던 것이다. 12억 인구에게 16금, 22은, 12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바로 장학규가 ‘체육강국’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의 현상을 뚫고 보아낸 것이다.
바로 남들이 보지 않았거나 보지 못했거나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을 보아내고 그것을 가차없이 짚어내어 도마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장학규의 에세이의 매력은 여기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다시 한 걸음 나아가 독자들에게 역시 제3의 눈을 가져다주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바로 체육강국이라는 자아만족의 ‘황관’을 여지없이 깨어버리는 동시에 장학규의 에세이는 다시 독자들에게 그러면 ‘우리는?’이라는 물음을 가져다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에세이밖에 있는 무언의 함의를 읽도록 하는 제3의 안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빈 소리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명실이 부합되지 않는 ‘황관’을 쓰고 멋없이 자만하지 말고 착실하게 실속을 다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결말을 읽었을 적에 우리는 자연히 ‘우리는 어떠한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 조선족은 문화소질이 제일 높다고 하는데 그것이 결국 졸업장에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민족의 종합 소질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래서 장학규의 에세이를 읽노라면 자연 자기를 반성해보게 되고 또 반성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성장을 하게 되고 새로운 것을 보아내게 되고 제3의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피페를 찌르는 에세이만이 아니다.
인정을 다룬 에세이 역시 그런 것이다.
‘소중한 연분’을 읽고나면 우리는 자연 ‘연분’에 대해 다시 한 번 느껴보게 되고 인정을 아끼게 되는 것이다.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는다는 그 일겁의 세월(세월이라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방식이지만) , 그런 세월이 열 번을 흘러야 하나의 연분이 된다는 이야기를 옛말처럼 들어 느끼면서 우리들은 저도 모르게 자기 주위의 인정과 연분들을 돌이켜보게 되고 다시 한번 그 연분과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분을 말할 적에 ‘십년의 공덕을 닦아야 한 배(船)를 타고 강을 건넌다(十年修得共船渡)’라는 말을 사용하기 좋아하지만 개성의 장학규는 그것을 버리고 천문수자로도 다루기 어려운 ‘겁(劫)’이라는 고사와 표현방식을 썼던 것이다.
하여 장학규의 에세이들에서 우리는 이장수, 한춘, 윤림호 등 인정이 철철 넘쳐 흐르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학규의 에세이는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러면서도 침처럼 정곡을 콕콕 찔러주는 필체와 칼날 같은 안목은 우리들에게 장학규만의 개성을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형식만을 따지고 실속은 텅 비어있는 현상황에 대한 고발(얼씨구 대신 침 한대), 개혁과 개방과 더불어 한국 나들이가 보편화되면서 자기의 입각점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열이 오른 머리에 끼얹어주는 찬물(우리는 분명 중국사람이다), 창조와 노동으로 치부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아주는 호소(개체호 소의), 외래 문화에만 미치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전통의 미와 문화를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대갈 일성(극단족속) 등 에세이들에서 우리는 장학규의 에누리없이 병집을 잘라내려는 개성적인 수술칼을 느끼게 된다.
어려운 생활고를 겪어오면서 남보다 몇 갑절의 정신적인 고통을 작은 체구로 버텨내면서 자학으로 자기 문학인의 생을 열어가는 장학규는 바로 문학인의 세 번 째 눈을 가진 사람이다.
불교에서는 혜안(慧眼)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천안(天眼)이라고 하는 미간 사이에 있는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세 번 째 눈, 이 눈을 문학인의 시각에서 말한다면 아마도 발굴의 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장학규가 바로 그런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2002년 10월
낙엽지는 길림의 용담산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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