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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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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허강일 현상으로부터 보는 소비문학 댓글:  조회:551  추천:0  2019-11-29
  평론   허강일 현상으로부터 보는 소비문학   장학규         허강일의 경우   세상을 아주 수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허강일이라는 이름의 사나이이다.  허강일이라면 적잖은 사람들이 머리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누구지? 듣도보도 못한 사람인데 뭐하는 사람이지?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눈썰미 좋고 기억력 좋고 거기에 세심한 사람이라면 아 그 친구를 말하는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거릴 것이다.    허강일은 1964년 11월 길림성 화룡시에서 3남1녀 중 세째로 태여났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자비반을 졸업하고 화룡시 로과진 공청단서기로부터 시작해 두루 연길시조선족구연예술단,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일보 등 직장을 전전하다가 현재는 연변일보 청도주재기자로 일하고 있다.     허강일은 어려운 년대에 힘들게 살았던 것은 틀림 없었으나 그래도 유복하게 세째로 태여나 아궁이 불도 몇번 지펴보지 못했을 정도로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기름, 간장, 소금부터 하나하나 터득하면서 료리에 재미를 붙이던 그는 가족식구들의 칭찬을 등에 업으면서 제법 그럴 듯한 료리를 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다 하는 주부들도 두손두발을 다 든다. 그가 만든 초두부와 고추순대, 구운 계란은 주변 친구들한테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 료리이다.    솔직히 허강일은 배움에 엄청 게으른 사람이다. 아니, 배움에 게으르다기보다는 선생을 따로 모셔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뭐나 저절로 터득하는 타입이다.  무사자통(无师自通), 바로 그 말이다.    허강일이네 집에 가보면 벽에 서예작품들이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명가의 작품이 아니라 그 자신이 쓴 것들이다. 얼핏 보기에 그럴 듯 하다. 자세히 봐도 대개 무난하다. 그러나 정작 그 붓글 쓰는 자세를 보게 되면 정말 감긴 눈도 더 감겠다고 할 지경이다. 일단 붓을 빗자루 잡는 자세로 틀어쥔다. 그건 서예 기본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고급 선지도 없고 정품 벼루도 갖추지 못했다. 무턱대고 먹통에 싸구려 먹을 쏟아놓고 그 투박한 손으로 글이랍시고 휘갈겨 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문외한들의 눈에는 그럭저럭 글 같아 보이는 작품이 탄생한다.    허강일이는 또 괜찮은 탁구 실력을 자랑한다. 평소에 일에 쫓겨 탁구장에 다니지도 못하지만 시합만 붙으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멋진 스매시를 날린 후 상대를 약 올리려고 뒤짐 지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며 으시대는 모습은 허강일만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악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새장구든 전자풍금이든 피리든 손에 잡기만 하면 곡을 맞춘다. 프로들 보기엔 어떨란지 모르겠지만 한량들 소일거리에는 든든히 한몫 막는다. 그렇게 세상을 모르고 흥에 겨워 두드리고 불어댈 때면 풍류가 따로 없어보인다.  허강일은 청도 바닥에서 한다하는 사회자로 통한다. 얼음에 박밀 듯 구수한 입담에 아마츄어 가수로서는 넘쳐나는 노래 실력을 발휘할 때면 행사장 여기저기서 감탄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때 연변방송국 MC를 력임하면서 사회하는 법도는 어느만큼 터득했을법도 하겠으나 노래는 정말 누구한테 배운 적 없는 순수한 자기 것이라고 뽐낼 때면 그저 기가 질린다.     허강일은 대강 이런 사람이다. 많은 경우 정규 훈련을 거치지 못한 “유격대” 스타일이다. 그를 마주하고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이 모르는게 무엇일가 궁금해진다.  그렇게 허강일은 다재이다. 흔히들 다재는 무재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경우 진리에 가까운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다재”를 문학이라는 특수한 범주에 대입해보면 참말로 다행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문학에서는 다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허강일은 문학에서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처럼 여기저기 다 기웃거리고 이거저거 모두 건드려본다. 스스로도 인물의 성격이요, 시대특성이요, 전형화요 형상화요 따위를 하나도 모른다고 공공연히 선언한다. 문학작품의 유일한 진리는 재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우아하지도 점잖지도 못해서 자기 작품은 절대로 상을 탈 수 없다고 “뽐”내기도 한다. 재미로 쉽게 하는 문학, 이제 허강일의 문학세계에 들어가보도록 하자.    소품의 경우   허강일은 소품으로 세상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연변의 설맞이 야회에 소품을 가장 많이 출품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텔레비죤이 희귀했던 시절에 산재지구에서까지 그의 작품이 회자되였던 걸 미루어보면 이 방면에 대단한 소질이 있었던게 분명하다.    허강일의 첫 소품작품은 그가 만 22세가 되던 1986년에 발표한 “깨여진 사랑의 꿈”이다. 당시 화룡시농촌경연대회 참가 작품으로 창작된 이 작품에서는 말더듬이 총각이 공원에서 미모의 처녀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가 퇴짜 맞는 사건을 쓰고 있다. 작자 자신이 감독과 배역까지 겸하면서 자그마한 센세이숀을 불러일으켰고 화룡시예술단에 의해 전국순회무대에도 올랐었다.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떼떼”라는 조선산 인물이 중국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는 것이다. 당시는 조선텔레비죤을 많이 시청하던 때라 조선의 풍자극에 “떼떼”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했다. 허강일은 이 작품에서 그 인물을 모방하여 말을 더듬는 청년의 사랑이야기를 엮어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어 두번째로 선보인 소품 “기자가 오던 날”은 소품계에서 허강일의 립지를 굳힌 작품이였다.  이 작품의 경개는 간단하다. 기자가 마을 치보주임의 선진사적을 취재하러 왔다가 우연히 치보주임의 안해와 조우하면서 숱한 웃음거리를 만들어내다가 나중에 치보주임의 열다섯살날 딸애가 난산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게 된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결말로 막을 내린다.  이 작품 역시 작자가 감독과 배역을 겸하여 화룡시문예경연대회를 들썽케했고 화룡시예술단과 연길시구연단에서는 전국순회공연 절목으로 올렸으며 연변인민방송국에 의해 록음테프에 수록되기도 했다. 더불어 국경 40돐맞이 연변주구연콩클에서 창작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따안았다.  이로 인해 허강일은 20대의 나이에 연변희극계와 구연계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연변일보, 길림신문, 텔레비죤신문 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허강일 하면 1991년에 창작한 “돼지약”을 빼놓을 수 없다. 전국성적인 명성을 얻은 이 작품으로 하여 허강일은 ‘성해컵’전주전업예술단체소품콩클에서 대상을 수상한데 이어 ‘신력보컵’ 연변티비소품콩클에서도 대상을 거머쥐면서 그해의 쌍관왕이 되였다.    이 소품도 이야기 줄거리는 간단하다. 거리에서 돼지고기를 파는 박철호 총각에게 동네 아주머니가 손에 “돼지회충약”을 들고 황급히 찾아온다. 집에 돼지가 이틀째 똥물을 쏜다면서 이 약이 똥물 치료약이 맞냐고 문의하는 것이다. 민병련장까지 했던 박철호라 의례 박학다식할 줄로 믿은 것이다. 그런데 한자라고는 전혀 모르는 박철호는 체면에 모른다고 할 수 없어 “돼지 똥물싸개 물약”이 맞다고 능청을 떤다. 결국 돼지회충약을 통채로 먹은 아주머니네 돼지는 곧 죽게 되고 박철호는 톡톡히 망신하게 된다.  상기 작품들을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바 스토리가 간단하고 큰 기복이 없다. 주로 위트 있는 대화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고 그 웃음에서 어떤 계발을 받게 유도하는 것이다.    “말먹쟁이라도 돈이 어찌나 많은지 코를 풀어도 10원짜리 돈으로 푼다야.” (“깨여진 사랑의 꿈”에서) “헌법은 낡은 법을 헌법이라고 합니다” (“기자가 오던 날”에서) “형들이 동생을 마음대로 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형법입니다” (“기자가 오던 날”에서) “우리 딸이 열다섯살 때부터 남자친구와 같이 련애를 해도 혼인법의 위대한 가치를 높이 들고 가만 둬두는데…” (“기자가 오던 날”에서) “돼지란 천생적으로 태시없는 짐승이라 제가 먹고 싶어 하는 대로 먹이라.” (“돼지약”에서) “산속의 호랑이는 어째서 산 속의 약한 짐승들을 하루에 다 잡아먹지 않는가? 돼지란 넘도 이 한병사리 다 줘도 자기가 먹을 만큼 알아서 먹는다.” (“돼지약”에서)   장소 변경이 안되고 시간과 인물 수가 제한을 받는 소품의 특징상 대화가 사건 전개의 매개물인 것은 틀림 없다. 허강일은 이 점에서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까지 허강일은 장막 연극 2부와 100여편의 소품을 창작했으며 2000년에 연변티비 20세기연변소품력사총결산에서 소품창작대상을, 길림성 희곡소품 2인전 콩클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영예를 따안았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소품을 문학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혹자는 소품은 무대예술로서 문학으로 대우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긴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문학은 언어를 유일 재료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강일의 문학세계를 해부한다면서 우선 먼저 “소품의 경우”부터 언급하게 되는 리유는 뒤에 나오는 허강일의 모든 창작 종류나 스찔이나 방법들이 그의 소품과 너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이다. 어쩌면 소품에서의 경험과 성공이 없었다면 허강일의 문학창작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개인적으로 소품도 문학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무대에서 극으로 재생되기 전에 언어로 창작된 그 부분은 문학으로 쳐주어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사실 중국문학사에서는 그렇게 해왔다. 곽말약의 력사극과 조우의 희곡 등이 당당히 문학사에 올라있다. “백모녀”는 더욱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의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허강일의 첫 소설작품은 장편소설이다. “장백산”잡지 2014년 제4호부터 련재로 발표된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이 그것이다.  허강일은 평소 환담을 할 때면 자신은 글쓰기를 소설로부터 시작했다고 자주 말한다. 아무리 쓰고 써도 발표가 되지 않아 소품으로 전향했다고 우스개소리를 하기도 한다. 아마 그런 남모르는 노하우가 있었기에 첫 발표작을 아름차게 장편으로 장식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허강일이 “어둠의 장막”을 쓰게 된 동기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한번은 동생벌되는 친구가 찾아와 위챗에 련재할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노이즈마케팅을 잘만 하면 괜찮은 사업이 될 것이라는 말에 시작했다. 그런데 1만자 정도 썼을 때 동생이 맥빠진 소리로 사업은 가망이 없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미 쓰기 시작한 글을 멈추기 아까워 구상대로 계속 써내려갔다. 한달반만에 10만자 이상 부지런히 내려쓰면서 초학자 시절에 퇴고 맞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이걸 누가 내줄가 걱정도 많았다. 다행스럽게 주변 문우들이 돌려보고서 재미가 있다는 평판을 해주어 용기를 얻고 마무리 지어서 투고한 것이 덜컥 련재로 발표된 것이다.     이 소설은 개혁개방의 선두도시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조선족 만도와 미나, 그리고 한국인 민호의 사랑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슈제트의 기교나 인물형상의 다채로움보다는 약세군체들이 주류사회에서 생존해나가는 실태를 핍진하게 그리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도는 혼자서 10여 명 깡패를 상대할 만큼 주먹세계에서 한다하는 사람이지만 돈을 앞세우는 민호와 암흑세력을 달고 다니는 공안국 왕부국장과 장소장의 간계에 빠져 감옥에 들어가고 미나를 민호한테 빼앗기고만다. 소설은 만도가 출소한 후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개인영웅주의보다 경찰 출신의 의형제 종수와 그 종수의 동창생 왕형사라는 매개물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쪽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작자가 현실에 너무 집념한 나머지 사회악에 대한 일반 리해에 멈췄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우리문단에서 쉽지 않게 깡패세계를 다루었다는 점과 조선족의 연해진출 과정이 그토록 치렬했다는 력사를 까밝혔다는데서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그러나 본 평론에서는 내용에 대한 해부를 더 깊게 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문학사적의의를 다루려는 것이 아닌 만큼 적당한 언급에 그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평자의 앵글은 언녕부터 소비문학으로서의 허강일 소설의 경우는 어떤 특징을 나타내고 있냐에 맞추어져 있다.    우선은 간결성이다. 전반 작품에는 복잡한 인물 설정이 없다. 심리묘사도 거의 없고 감정선도 간단하며 성격 부각도 결여되여 있다. 또 단락을 살펴보면 거의 한마디가 그대로 한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두마디 이상의 단락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리고 스토리도 복선이 없고 쭉 단선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대량적인 대화의 사용이다. 이 점에서 소품의 영향이 퍽 진하게 묻어난다. 대화로 사건을 전개하는 소품을 쓰던 습관을 소설에 옮겨와 인물형상 창조에 활용하는 것은 물론 슈제트 역시 대화로 풀어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번째는 소품 형식을 액면대로 차용한 경우이다. 장소가 변경될 때마다 첫머리에 “xx식당”, “xx노래방”  이렇게 이야기 전개 마당을 명찰 달 듯 밝혀놓고서야 이야기를 이어간다.    끝으로 렵기성을 들 수 있다. 허강일은 신기하고 자극적이고 희소성인 것에 집념하는 모양새다. 그것을 듣기 좋게 “읽을 재미”라고 발뺌한다. 그런 거라야 독자들이 흥취를 가지고 들여다본다는 억지와 같은 주장이다.    두번째 발표작인 중편추리소설 “흉수는 바로 그놈이였다”도 “어둠의 장막”처럼 비슷한 프레임으로 짜여져 있다. 작자 스스로는 중국 조선족의 첫 추리소설이노라고 강조하지만 솔직히 거기에 의미를 두기보다 지루했던 시간을 손쉽게 보낼 수 있다는 안도 같은 게 더 좋았지 않았나 싶다. 복잡한 언어구조를 머리 써가면서 파악하기에 앞서 쉽게 이야기 속에 몰입하여 주인공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게 무엇보다 중요했던게 틀림없다.  중편소설 “향에는 점심때가 없다”에서는 소품의 풍자와 희극성 수법이 고도로 발휘된 작품이다.  허강일은 이외에도 투고 상태로 있는 미발표 장편소설 2부가 더 있다. 한편은 사전에 미리 흔상했던 고로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소설의 경우”에 예속시켰다. 물론 아직까지 보지 않은 나머지 한편의 장편도 여기서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가의 경우   굳이 “시가”라고 지적한 것은 허강일은 시 창작과 동시에 가사 창작에도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를 문학으로 판단 가능하냐는 문제는 “소품의 경우”와 같다고 보면 된다.  허강일은 시창작에서 많이 즉흥적이다. 화장실에 앉아서 용변을 보면서 시 한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변소칸 시인”이란 별호가 붙기도 했다. 어머니날에는 부모를 쓰고 스승의 날에는 은사를 찬미한다. 그리고 무엇이나 눈에 들어오면 곧바로 시화한다.   누가 여성을/꽃이라고 부릅니까// 드라마를 한시간 보고도/ 세시간을 말 할 수 있고// 만나서/ 세시간 말하고도/ 전화로 또/ 통화하자는/ 막중한 분들입니다// 침대머리에서/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마력을 갖고 있는 분들을/ 누가/ 백일도 못 피는/ 꽃이라고 합니까// 얌전하게 다가와/ 최고의 결책자로/ 자동적으로 탈변하는/ 거룩한 분들을/ 누가 감히/ 꽃이라고 부름니까// 여성은 함부로/ 거론할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이고/ 지구이고/ 우주이며// 더욱/ 중요한 건/ 자식을 낳은/ 위대한 엄마입니다// (“누가 녀성을 꽃이라고 부릅니까?” 전문)   운률은 있을지 몰라도 의인법이나 비유, 과장, 류사한 속성의 매칭 같은 시적 언어 수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서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인 듯 싶지만 사실 이 시를 읽다 보면 저도모르게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매력이 어디에 있냐도 딱히 찍어 말하기 어렵다. 그저 마실하 듯 하는 언어조합인데도 묘하게 흡인되는 것은 독자들 모두가 공감하는 생활의 진실이 부각되였기 때문이 아닐가 짐작해본다.  시 “고향”을 보면 더 직관적으로 맞혀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아름답다/ 안보면// 슬프다/ 가보면// 그립다/ 언제나//   3련6행, 평시조보다도 작은 시이다. 어쩌면 요즘 온라인을 달구는 “디카시”와 비슷해보인다. 여전히 기술함량은 별로 함유되여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가슴은 싸해난다. 직관적이기는 해도 시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하면 궤변이 될가? 이런 류형의 시들은 제목만 봐도 일목료연하다. “한복을 입었습니다”, “스승의 날, 스승 옆엔 내가 없었다”, “취한 날 인생을 배운다”, “강냉이를 보면”, “고독하면 차잔을 들어라” 등등이다.  물론 가끔 가다 대세나 조류에 합류되는 듯한 시들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가 그것이다.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 바람에 속아/ 가슴을 벌리고/ 춤을 추었을 뿐입니다//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 줄기에서/ 쪼개져/ 갸냘프게/ 태여나// 오래도록/ 간직되고 싶어/ 이쁜 모습/ 보였을  뿐입니다// 꽃의 웃음소리/ 들어도 못보고/ 꽃이 웃었다고/ 맘대로 말합니다// 이쁘다는 리유로/ 좋은 말/ 맘대로 가져다/ 찬미합니다// 열매도 못보고/ 사라질/ 기막힌 운명인 것을 알면서도/ 활짝 웃었다고/ 말합니다//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 피여서/ 피여서/ 피여서// 시한부 생명을/ 살다/ 간/ 운명일 뿐입니다.//    “꽃”을 사람에 비견해 “웃는다”로 형용하면서도 실은 “열매도 못보고” “사라질” 운영이기에 “오래도록 간직되고 싶어” “이쁜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는 시적 화자의 능청스러움이 엿보여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허강일은 가사 창작에서도 괜찮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그가 쓴 가사에 곡이 붙어서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매주일가로 방송된 노래도 여러 수가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해변의 아리랑”이다.   밀려오는 파도에 한몸을 싣고 저 멀리 정처없이 가고 싶다오 구름 따라 흘러가면 내고향 보일가 갈매기 울음소리 구슬피 들리네 아~ 아리랑 해변의 아리랑 목메게 불러보는 해변의 아리랑   막내아들 손잡고 백사장 따라 저 멀리 정처없이 가고 싶다오 이 길 따라 걸어가면 두만강 보일가 백사장 모래우에 망향가 적어보네 아~ 아리랑 해변의 아리랑 목메게 불러보는 해변의 아리랑   고향을 멀리 떠나 연해지역에 자리잡은 나그네의 망향가라고나 할가. 가사이니만큼 글자수를 맞추고 격식을 갖춘 고루함도 엿보이나 누구나 가슴 언저리에 파묻은 말을 직설적으로 피력했다는 데서 공감을 자아내는데는 충분했다는 평가이다.  이 노래는 연변라디오와 연변티비에서 매주일가로 방송했고 설맞이야회에도 올랐으며 노래방 가사 목록에도 올라있다.      시나리오의 경우   허강일은 “문인은 가난하다”는 명제에 항상 억울해하고 불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문인은 스스로 그 난처하고 난감한 궁지에서 벗어날 방식과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제는 중국 주류문단으로 진출하는 것이 하나의 지름길일 것이라면서 청도 주재 조선족교수들을 묶어 자신의 소설을 번역한다고 납뜨더니 후에는 조선과 한국이란 모국에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작가가 못산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며 예전에 문인은 서발 막대기를 휘둘러도 거칠게 없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모두 자신들이 못났기 때문이였다는 견해였다.  요즘 허강일은 또 하나의 루트를 발견한 모양새다. 이를테면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줄을 대야 한다는 야망이 생긴 것이다.    따져보면 허강일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데는 원인이 있다. 그의 장편소설과 추리소설이 발표된 후 그것을 드라마로 각색하겠다고 나선 제작사가 있었다. 아직도 검토중이기는 하나 허강일한테는 큰 힘이 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즉흥적이고 무슨 일이나 준비 없이 시작을 하는 허강일은 아예 내가 시나리오를 직접 쓰면 더 좋지 않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쉽게 생각하는 만큼 쉽게 접어드는 허강일이다. 그래서 요즘 미니 드라마 극본을 하나 창작했다. 물론 제작사의 요청이 전제되여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출구전략을 고민하는 허강일의 탐색전 겸 시도라고 보아도 무난하다.    시나리오는 소품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 물론 소품의 언어는 대부분 대화이지만 시나리오는 장소와 행동거지 그리고 환경묘사 같은 것이 가첨되고, 또 소품은 하나의 공간에서 진행되지만 시나리오는 시간과 공간이 수시로 변경된다는 차이점은 있다. 그러나 대사가 차지하는 비례와 박스식의 프레임에서는 거의 구별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황금단지”란 제하의 이 시니리오의 등장인물 분석만 봐도 대강 이야기 줄거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  김만복: 허풍쟁이, 황금단지를 발견한 사람, 고추자의 남편, 다단계에 말려들어 빚을 가득 걸머진 사람.  진동팔: 다단계 주모자, 새로운 돈벌이 항목에 미쳐 돌아가는 말 박사. 강수복: 리혼녀,  다단계 피해를 봤던 녀자, 쉽사리 허풍에 넘어가는 숙맥. 최룡국: 총각, 지식은 좀 있으나, 귀구멍이 너른 사람. 온라인판매에 대해 대충 아는 사람, 형세는 잘 아는 것 같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최로인: 춤꾼. 최룡국의 아버지, 수복의 로모 분녀와 황혼련을 꿈꾸는 관계. 방분녀: 최로인의 무용 파트너. 수복의 로모, 딸이 새 가정을 이루면 출가하려는 늙은 소녀.  김진호: 실사구시적인 상공인, 작은 가게를 차려놓고 열심히 사는 사람.   신지애: 조금은 들뜬 녀인,  김만복이가 추구했던 녀자, 새로운 것을 쉽게 접수. 오서기: 진에서 파견해온 당지부서기, 구체적인 업무는 모르나 실적을 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 박촌장: 주견과 식견이 없지만 욕심이 많은 사람. 고추자: 성격이 불같고 인간성이 돋보이는 체격이 억대한 녀자, 조호덕에게 끌려 다단계에 망했던 녀자 조호덕:   황금단지 막후 지휘자,  송창남: 지혜로운 공안일군. 시공안국에서 파견되여 온 빈곤부축 일군,  이  슬:   다단계 피해자가족 어린이. 고추자가 입   드라마로 촬영될 경우를 대비해 더이상의 토설을 절제하고 여기서 멈춘다. 단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만 보아도 틀림없이 허강일의 장끼인 코믹과 개그 그리고 렵기가 주 흐름일 건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간단명료한 필치가 여기서 극치를 이루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의 경우   허강일한테는 수필도 수십편이 있다. 대개는 사회현상을 질타하는 미니수필들이다. 수백자에서 천자가 좀 넘는 글들이 태반이다. 필을 댔다 하면 장편을 끌어내는 허강일이 수필에서만은 필묵을 아끼는 리유를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구미에 맞지 않냐고 보면 열흘이 멀다하게 한편씩 뽑아내고 그렇다고 할 말이 태산 같을 거 같은데 답새겨 나온 걸 보면 고작 천자 미만인 경우가 많다. 불가사의란 말을 이런 경우에 쓰는가 본다.  수필에서도 허강일은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딱 할 말만 하고 거기에 따끔한 침을 놓는 것이 일반적인 수법이다.    얼마 전 월드옥타 청도지회의 전임회장이 인기 정상에서 련임을 포기하고 단체장에서 물러나 화제를 모았다. 그는 산발적이던 단체를 200여명 회원을 거느린 방대한 경제단체로 체계화시켰고 국내외에 청도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련임의 문턱에서 사양했다. 그는 비단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회장을 원칙적으로 련임하지 못한다”고  정관까지 고쳐가며 회장 련임에 제동을 걸었다.  리유는 한가지-신진대사는 빠를수록 좋다는 자연을 섭리를 따른 것이였다. 그가 리임하는 날 200여명 회원들은 한결같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제가 잘한것 같습니까? 저보다 더 훌륭한 분이 분명 있습니다. 말뚝박기 인사는 한 단체의 발전에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마십시요. 인재가 없는 단체에 무슨 비전이있겠습니까? 저는 수레를 밀어주기  위해 수레에서 내렸습니다.” 그의 의미심장한 말이 귀에 쟁쟁하다. 그는 가장 깨끗한 마무리를 했고 회원들 속에 멋진 신사로, 공신으로 각인되였다. 자리의 매력은 끝없다.사람이 자리를 만드는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설사 그것이 생산대 대장 자리일지라도 매력은 여전하다.  호통 치던 사람이 호통질을 받아야 하는 립장이기에 더구나 그렇다. 방관자가 볼 때에는  “그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심할 뿐이다. 고인 물이 썩는다고  한 자리에 오래 묵을수록 “탈”도 많고 “말”도 많아진다. 박수칠 때 떠나라! 수레를 밀겠으면 수레에서 내려야 한다.   “수레를 밀려면 수레에서 내려야”라는 수필의 전문이다.  짥막한 글이라 전편을 옮겨놓는 것이 독자들의 리해에 더 편할 거 같아 퍼왔다. 작은 편폭에 큰도리를 담았냐 하면 대서특필도 없고 청산류수도 아니고 미사려구도 찾아보기 어렵다. 할 말만 딱 하고 맞춤하게 “수레”에서 내린 형국이다.  이런 미니수필이 현시대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하나의 추세를 이루고 있다. 누구라 없이 바쁜 세상이고 하나같이 여유가 모자라는 판에 미니수필은 문화욕구를 충족해주는 하나의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후에 적당한 계기가 나지면 미니수필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볼 생각이다.      맺는 말   한 때 우리 문단에 소비성문학에 치우친 작가가 나타났었다. 정통문학계에서는 소일거리, 마실거리에 불과하다고 타매를 받은 대신 일반 독자층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강일 작가가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오락성에 치우친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냐를 한번 토론해봐야 할 거 같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을 놓으면 스토리만 머리에 떠오를 뿐 아무런 여운이나 감동이 없는 소비성 작품, 즉석에서 휘갈겨 써서 던져주면 한번 피끗 보고 씨익 웃은 다음 던져버려야 하는 일회용 작품, 기교보다는 취미성에 더 치중한 유희형 작품들의 존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중국 영화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허용되고 또 인정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례로 풍소강(冯小刚)이 감독하고 갈우(葛优), 왕보강, 범위, 송단단, 성룡, 리영, 량천 등 한다 하는 배우들이 출연한 “개인맞춤제작(私人订制) 은 실생활에서는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실현시켜준다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대부호가 되고 싶다거나 권세가가 되고 싶을 경우 회사에서 고래등 같은 별장 또는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갖추어놓고 한동안 부자 노릇 또는 벼슬놀이를 하게 한다는 황당극이다.  또 문장(文章)이 감독하고 알리바바그룹의 마운과 리련걸, 오경, 홍금보, 황효명, 견자단 등 유명인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공수도(功守道)도 무술을 련마한 마운이 세상을 휩쓸다가 나중에 파출소를 무슨 무술의 본산으로 잘못 알고 쳐들어간다는 얼토당토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차피 소일거리로는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저것도 영화냐고 타매하는 사람도 없는 듯 싶다.    허강일은 자기는 작가가 아닌 잡가로 되련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작품은 첫째도 둘째도 재미라고 왼심을 쓰는 허강일은 자신의 소설을 3천자를 읽어서 볼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바로 버리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보귀한 시간을 들여 마른 우물을 들여다볼 까닭이 없다는 주장이다.    아무튼 허강일 현상으로부터 소비문학에 대해 한번 점검하고 쟁론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18    산동조선족문단의 주력으로 부상하는 70후들 댓글:  조회:440  추천:0  2019-11-29
  평론   산동조선족문단의 주력으로 부상하는 70후들   장학규     70후는 사각지대일가?   어느 문학 모임에 갔다가 후배문인으로부터 70후가 난청(难听)세대 아니냐는 불평 아닌 불평을 들었다. 60후는 문단의 대표주자라 당연히 주목받고 있고 8090후는 단절이 와서 발굴이요 배양이요 하면서 난시법석을 떨고 있는데 유독 70후에 대해서만은 함구하면서 전혀 배려가 없다는 지청구였다. 기성 문단을 마지막으로 지키는 세대를 이렇게 푸대접해도 되느냐 하는 볼멘소리로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많이 미안한 구석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60후에 대해서는 쟁의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듯 싶다. 나이로 만 50세에서 59세를 아우르는 이 세대는 문학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지난 세기 8~90년대를 거치면서 탄탄한 실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정력상으로도 한창 최고봉을 자랑하는 세대임에 틀림 없다. 우리 문단을 일구고 이끌고 또 키워왔던 선배문인들은 마침 정년퇴직 년세를 넘긴 분들이라는 점에서 60후가 문단의 중임을 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80 이후의 문인들은 신세대로서 기성문단과의 접목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에 태여난 이들은 상대적으로 글로벌화가 잘 되여진 행운의 세대이기도 하다. 전 세대들이 주어진 공간에서만 움직이면서 제한된 자원에 의지해 문학창작을 어렵사리 진행했던 점과는 달리 이들 신세대들은 전국 각지 나아가서 세계를 안방처럼 들락거리면서 인터넷이나 모바일이라는 뉴매개체로 나름대로 문학세계를 구축해왔다. 물론 여러모로 성숙이 요청되는 세대이기는 하나 추세적으로 시대의 앞장에 서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70후는 좀 애매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다. 재래문단의 막차에 올라탔던 이들은 미처 날개를 굳히기도 전에 터진 보물 같이 다가온 리향과 출국의 이슈에 매몰돼 터전을 잃고 뿔뿔히 흩어져 각자 도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전 세대와 같은 견고한 발판을 마련하지도 못했고 후 세대들처럼 네트워크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채 맹점에 망각되여 고군분투해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러한 력사시대적 배경에 위치해있었기에 70후들은 어쩌면 전 후 세대들보다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절대 아니다. 이들은 재래식의 기성문단을 나름대로 답습했던 고로 문학수양을 상대적으로 잘 닦을 기회를 가진 동시에 문단과 단절되지 않았으며 60후보다 훨씬 쉽게 신식 매개체와 도킹되면서 자신들의 문학 령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문단은 70후가 “하프”의 역할을 논다고 말할 수 있다. 앞을 받쳐주고 뒤를 끌어주는 “하프”가 70후이다. 또 경제학적으로 비유하면 “중산층”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중산층”이 두터울수록 그 문단은 비전이 있고 미래가능성을 점칠 수가 있다.  이제 이들을 주력이라고 부르게 되는 리유를 산동조선족문단에 견주어 살펴보려 한다.      산동을 문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가?   우선 개념 정리가 필요한 듯 싶다.  문단의 사전적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즉 문인들의 사회가 곧 문단이다.  중국의 해석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문단은 “문인의 모임 자리(文人聚会之所)”라는 것이다. 풀이하면 일정한 문인들이 모여서 어울려 활동하면 곧 문단이라는 말이다.  “문인들의 사회”, “문인들의 모임”이란 제기법이 좀 애매하긴 하다. 구경 어느 정도의 규모여야 사회고 모임인지 판단이 모호하다.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에 흑룡강에서 “북방문단”이란 제기법이 나왔을 당시 문학회의를 하면 모이는 규모는 왕왕 30여 명 좌우가 최고 수치였다. 문단에서 활약했던 작가들도 50명 정도로 손꼽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재의 료녕문단을 보더라도 정기적인 창작활동을 진행하는 작가수는 역시 거기서 거기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산동을 지역적으로 구분하면 청도, 위해, 연태, 기타 등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연변작가협회 청도지역창작위원회로 공식 지정된 청도조선족작가협회의 정식 회원은 55명이다. 이중 위해시에 11명, 연태시에 3명, 제남을 포함한 기타 지역에 2명,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청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회원들은 문학 포럼, 강좌, 탐방 및 회의때마다 참석하는 회원들이고 지면에 자주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이외 청도조선족작가협회 산하의 독서회에서 36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80년대 이후의 세대들로서 일주일에 한번꼴로 모여 독서소감을 나누고 가끔 한두편씩 글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꿈을 익혀가고 있다. 협회의 외곽 대오로서 든든한 뒤심이 되고 있다. 한편 200여명을 헤아리는 재청도조선족대학생들도 방대한 지원군이다. 이들은 작가협회의 행사때마다 도우미로 봉사해주면서 문단을 흘끔흘끔 기웃거리고 있다. 여기에 청도 소재 2개 민족학교와 산동 각 대학교 한국어학과의 수백에 달하는 선생님들도 엄청난 파워를 가진 력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는 수업과 학문에 여념 없어서 많은 분들이 동참을 망설이고 있지만 언젠가 한번 땅하고 터지면 그대로 황하의 홍수를 이루지 않을가 싶다.    산동에는 또 흑룡강신문이 20여년간 자리를 틀고 앉아 여러모로 문인들을 떠밀어주고 있다. 흑룡강신문 산동지사는 전문 문학면을 내여 산동 문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해주었는가 하면 위챗 계정에 “좋은 글” 코너를 개설하여 4년 여 간 지속적으로 현지 작가들의 글을 내주고 있다.  산동은 또 불행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더 있다. 자칫 모순 같은 이 말은 산동에서만 성립되는 론점으로 불행한 것은 공식적인 문학잡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경제가 상대적으로 활성화된 지역이여서 국가의 허용범위내에서 비공식 잡지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중에는 전문 문학적인 글만을 고집하는 “해안선”이라는 계간잡지도 있다. 15년 간 46기를 발행하면서 수천 편(수)의 글을 발표했다. 물론 “해안선”의 멤버들이 모두가 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인 것은 아니다.    산동의 문인들은 해마다 많은 행사를 치르고 있다. 신년회, 38여성의 날 기념, 여름철 문학탐방, 송년회 등 정기적인 행사 이외에도 출간기념식, 문학세미나, 도서판매 이벤트 등 활동을 자주 조직하면서 문학창작을 격려하고 협회의 위상을 제고시키고 있다.    이보다 더 주목할 일은 해마다 35만자에 달하는 회원작품집 “갯벌의 하얀 진주”를 출간한 것이다. 올해로 9권째에 이르는 이 대형 책자는 회원들의 작품을 점검하고 집대성한다는 의미 자체보다 지역 공식 문학지의 역할을 놀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산동은 작가 수, 작품 수, 후비력, 문학진지 등 제반 여건을 미비하나마 갖추고 있다. 문단이라 칭해도 “상상력의 가장자리(想象力的边缘)” 정도로 리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70후 작가와 작품 및 성과 분석   일전 어느 잡지에서인가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가 쓴 “평론도 재미있게 쓸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무척 공감이 가는 말이다. 펑론이라고 꼭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게 문자 유희로 인테리어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절에서는 좀 자유스러운 무드를 만들어보고 싶다.    거두절미하고. 단순 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 상대로 분석해보면 55명 회원 중 70후가 15명으로 21.5%를 차지하면서 최대의 년령그룹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문단에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로서 협회내에서도 중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리더십이 서서히 안착되여 가고 있다.    일례로 리홍철 시인은 2~3대 회장직을 력임한 바 있고 김영분 수필가는 현임 사무국장으로 활약하면서 협회 전반 사무를 도맡아하고 있다. 구인숙 작가는 김영분씨를 도와 행사의 세세한 부분을 도맡아 처리한다. 그런가하면 김국화 시인과 전향미 수필가는 전임 사무국 정, 부 국장으로 자기들끼리는 “정부” 사이라고 롱을 하고 있다. 이밖에 김미령, 윤명해 작가는 협회 부회장 직책도 맡고 있다.  아래에 한사람 한사람씩 거론하면서 그들의 면면을 소개하도록 하자.    우선 리홍철 시인이다. 1972년에 화룡시 룡문촌에서 출생한 리홍철은 “화룡치”로 통한다. 선배인 허강일 작가와 같은 고향이라고 해서 스스로들 “화룡 2천재”라고 부른다. 둘 다 하늘이 내린 재간둥이인지 아니면 재앙투성이인지는 옆에서 알 바 없다. 아무튼 주변에서는 “낡회”라고 칭한다. 새 회장에 비해 낡은 회장이란 뜻으로 “낡회”란 약칭이 붙어진 것이다. 요즘에는 청도서 “줘마네 목장”이란 식당을 꾸리고 청해성 서녕시 주변 장족목장의 청정양고기를 공수해온다고 “홍사장”이라고 개칭되였다. 역시 리홍철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달아진 호칭이다. 이 친구는 화룡 골안에서 호랑이를 애완묘(宠物猫)처럼 키워오면서 이쑤시개가 필요할 땐 호랑이 꼬리에서 털 한대씩 뽑아 이를 쑤셔왔다는 뻥쟁이로 말도 엄청 빨리 해서 귀를 도사리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리홍철은 입이 빠른 만큼 데뷔도 무척이나 일찍했다. 열여덟살 나던 1989년에 벌써 연변일보에 시 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리홍철은 한번 대디딘 걸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사천리로 내달리면서 지금까지 시, 수필, 소설 등 작품을 450여편(수)를 발표했다. 그간 연변일보 대성상을 포함 해외문학상, 동포문학상 등 굵직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면서 문단 중견의 위치를 굳히고 있다.  리홍철의 작품에서 소설이 차지하는 분동은 작지만 무게는 상대적으로 크다. 작가가 직접 겪은 서부생활 배경의 소설들 때문이다. 우리에게 많이 생경한 만큼이나 신비한 면사포를 쓰고 다가온 리홍철의 소설들은 문단에 생신한 바람을 불어넣어주었다. 그중 대표작이 이다. 일망무제한 초원의 장막에서 길가는 행객들과 부딪치면서 “줘마”는 바깥세상을 동경한다. 그러나 종당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장막으로 되돌아간다. 혹자는 결말이 비극적으로 처리되였다고 비판한다. 그건 타민족의 문화를 모르고 하는 얘기이고 문학의 사명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한 판단이다. 자기의 자대와 시각으로 함부로 타민족의 모습을 저울질한 우를 범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리홍철의 현재까지 작품 중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리홍철의 문학적 평가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이 될 것이라 믿는다.    1975년 길림성 영길현에서 태여난 김영분은 얼핏 첫인상에도 조용한 스타일이다. 가깝게 지낸다는 언니 문인 김신자씨의 말을 빈다면 맏며느리 같은 형상이다. 무던하고 다심하고 주변을 잘 챙겨준다. 풍편에는 말을 꽤나 잘한다고 들리는데 정작 모임때에는 긴 말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얼굴이 찡그려질 때가 없고 항상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고 “아, 그렇네요. 맞아요.” 그렇게 짤막하게 반죽을 쳐주어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김영분은 속성파(速成派)에 속한다. 2016년에 료녕신문에 처녀작 을 발표해서부터 짧디짧은 2년반 사이에 50여 편 작품을 각 문예지에 발표하고 글쓰기를 시작해서 1년 만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증을 따낸 실력파이다. 가방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바쁜 와중에도 끈질기게 한달에 꼭꼭 한편 이상 글을 쓰는 근면함이 있다.  칭찬할라치면 “정말로? 이 정도가 부지런한 거예요?”하고 기업인다운 반문이 나온다.  이미 문단에 발을 붙인 김영분의 작품은 성격과 직업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결 성숙미가 있다. 일례로 수필 를 들 수 있다. 파워와 결단력을 가리키는 “카리스마”를 우리말로 “칼있으마”로 변형시켜놓고 “칼”의 속성을 끄집어내여 “이루고저 하는 것에 열정을 집중해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성실하고 꿋꿋한 모습”이 “칼있으마”라면 지금 여러가지를 시도하면서 새롭게 인생에 시동을 거는 자신도 그걸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 글은 제목부터 내용, 그리고 구조까지 새롭게 안겨오는 좋은 글이다.    리화는 한번 연구해볼만한 대상이다. 실제 발표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문단에 잘 알려진 케이스이다. 10여년전 처음 협회 활동을 나와서 지금까지 발표작이 50여 편이다. 가히 많다고 할 수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라지》잡지 ‘장락주문학상’에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을 거머쥔 베테랑이다. 그리고 편집들로부터 원고 청탁을 자주 받는 작가중의 한사람이다.  리화는 1979년 길림성 안도현에서 출생하여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흑룡강신문사에 입사한 학원파이다. 남과의 대화에서 거의 토를 달지 않고 태클을 전혀 걸줄 모르는 성격이다. 작은 가슴에 큰 용암을 품어서인가, 리화는 자기의 속심을 술로 푼다. 술을 억수로 좋아하는 타입이고 술상에서 먼저 일어서는 법이 극히 드물다. 비단 술을 즐길 뿐만 아니라 술을 맛나게 마실 줄도 안다. 취기가 올라도 전혀 흐트러지는 말이나 행동이 없고 술잔을 굽낼 때마다 “캬, 맛좋다”하며 제법 호매롭고 무드를 살릴 줄 안다. 애리한 외모에 말쑤가 적은 반면 글은 생각밖으로 기세가 당당하고 스케일이 크다. 그래서 실제 인물과 글을 이어주기가 쉽지 않다. 리화의 글에서 풍겨나오는 남성적인 파워와 한량다운 풍류는 다른 사람이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리화의 글에는 술이 특히 많이 등장한다. ‘장락주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는 제목부터 향기로운 술냄새가 풍긴다. 그림처럼, 시처럼 떠오르는 이런 제목의 재생적 효과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물론 글 속 주인공의 초탈한 움직임과 심리적 발로는 그대로 일품이다. 모름지기 이 수필은 언제까지도 계속 회자될 것이라 믿는다.    전향미는 70후 중에서 맏언니 격이다. 열정이 넘쳐나고 마음이 뜨겁다. 불의에 참지 못하고 할 말은 꼭 하고 사는 사람이다.  1971년 길림성 서란에서 출생한 전향미는 장춘중의학원을 졸업했다. 흔히 문학과 의학은 서로 통한다고 한다. 의학은 인간의 신체를 다루고 문학은 인간의 령혼을 연구하는 리유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직업은 물과 불만큼이나 성격이 다르다. 로신이 문학과 의학 사이를 넘나들면서 차거웠다 더웠다 하자니 너무 힘들어서 의사를 때려치웠다는 것처럼 전향미도 의료계를 떠난 지 이슥하다.  아무튼 전향미에게는 태생적으로 문인의 끼가 다분히 슴배여있는 듯 하다. 전향미의 글은 흥분점이 많고 즉흥적인 모습이 진하다. 가히 달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얼음에 박 밀듯 파죽지세를 이룬다. 전향미의 글은 꼭 어느 한편을 대표작이라 뽑아놓고 해석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 세부적인 특색이 강한 리유때문이다.    으슬으슬 추운 날엔, 따끈한 구들장에 엉덩이 지지며 둘러앉아 부컬짝 요란스레 두들겨보자. 소리치다 배고프면 김치국에 밥 말아 먹고 된장국에 밥 비벼 먹자.( 에서) 내가 뒤따라 나가면서 “우리 집 개고기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개고기 좋아. 그런데 로반냥 사람이 더 좋아”라고 하신다. 어깨가 으쓱해져서 “사람이 개보다 더 좋단 말씀입니까?”했더니 하늘을 향해 꺼이꺼이 웃어제낀다. 아무렴 그렇겠지. 개와 PK를 한다면 내가 낫겠지. 이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조본산의 소품 볼 때 웃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다. 개도 표정이 무궁무진하다고 했거늘.(에서) 딸애 방 문에는 “전씨성을 가진 녀자 환영하지 않음”이라는 종이장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남편의 오케이 싸인이 능청스레 웃고 있다. (에서)   웃음을 질질 흘리면서 내려보지 않을 수 없는 능란한 필치가 돋보인다.  전향미는 짧은 경력에도 흑룡강신문 ‘록환문학상’ 대상을 거머쥐는 등 등단 6년에 수차 상을 타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권연이는 연변대학과 한국 국민대학의 쌍석사 출신이다. 1978년 태생인 권연이는 길림성 교하시에서 태여났으며 70후에서는 늦깍이에 고학력자에 속하나 스스로 자꾸 정신줄이 없다거나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푸념한다. 규모가 엄청 큰 학교에서 한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신분이라 바쁜 업무에 쫓기다 보면 뭐나 다 챙기기 어려우면서도 언제봐도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지 않고 항상 자기 몸에서 문제점을 반성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미 80여 편(수)의 작품을 발표하여 기성문인의 반렬에 들어선 권연이는 중국조선족교원수필 최우수상을 비롯해 수차 수상의 영예를 지녔고 수필 는 2017년 《송화강》문학상 대상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으며 시 , , , 등 4수는 《민족문학》잡지에 전재되기도 했다.   사랑한다고/ 숨막히도록 껴안고/ 죽어도 놓지 않을 듯 하더니/ 한줄기 새벽 찬비에/ 무더위도 사랑도 질식해버리고 말았네/ 빈허울만 남겨놓고/ 여름은 그렇게 식어버렸네/ 금세 돌아서서 떠날 차비를 하고 있네// 나는 잡지 않기로 했다네/ 기어이 떠나려는 여름을 잡지 않기로 했다네/ 저 산너머에서/ 까치발하고 서성이는/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올/ 가을이 기다린다네// 나는 가을을 부를 거네/ 나는 가을로 갈 거네// (시 전문)   뿌리 깊은 나무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던가. 그만큼 권연이는 사람도 듬직하여 쉽게 드놀지 않는다.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사람 치고 거짓말 같이 글이 태평무사하고 느끗하다.    구인숙은 1972년 료녕성 심양시 소가툰에서 출생하여 료녕사범대학 외국어과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엘리트이다. 외견에서도 지적미와 세련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구인숙은 문장을 다듬을 때 글자 한자도 꼼꼼히 따지는 성미이다. 글을 봐달라고 보내온지 얼마 안되여 어느 단어를 수정했다면서 재다시 보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단어 하나를 두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경상도와 함경도의 부동한 발음과 리해를 분석하는 신고도 아끼지 않는다. 커피숍 사장님이여서 손님(독자)에게 배려를 돌리는 세심함이 일견에도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한 덜덜한 모습도 보인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는 식으로 주변에서는 꽤나 신경을 모으는 일에도 가볍게 넘어갈 줄 아는 센스가 있다. 그러기에 구인숙의 글에는 , 와 같은 소탈하고 어찌보면 속세에 때묻은 듯한 글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제되고 질서적인 글들이다. 요즘 《민족문학》잡지에서 구인숙의 수필 을 전재한다는 희소식이 날아왔다. 이제 서서히 날개를 펼 시점인 거 같다.      1970년에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태여난 리길룡은 일단은 먼저 기업인이다. 일찍 청도에 진출하여 컴퓨터학원을 꾸렸다가 지금은 무역업에 올인하고 있다. 20여년을 경제사회에서 굴렀던 만큼 장사군 기질이 다분하다. 2000년도에 사업건으로 현지 진출 민족신문사에 들린 것이 계기가 되여 흑룡강신문에 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중단편소설 수십편을 발표했다. 목단강사범학교를 나온 것이 큰 밑천이 된 것이다. 고참 청도조선족으로서 그의 글에는 조선족들의 눈물겹고 피어린 정착사가 아프게 기록되여 있다. 중편소설 를 비롯해 대부분 글들이 초창기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깡패, 마약, 매춘, 칼부림, 살인 등 그 시절의 아픈 상처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2017년에 중단편소설집 를 출간한 리길룡은 지금 장편을 완성하고 수개중에 있으며 동시에 본인이 익숙한 인터넷 공간에서 줄기차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74년 범띠인 김미령 역시 료녕성 사람으로 무순에서 태여났다. 일찍 1997년에  등단한 김미령은 수필 으로 《은하수》잡지 2등상, 수필 가  한국 KBS방송국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인생경력이 굴곡적이였던 만큼 글에서는 진한 아픔이 비쳐지고 있다. 글을 처절하게 다루는 전형으로 , , 처럼 제목부터 온통 상처다.    김염화는 1977년에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하여 연변대학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현재 청도농업대학 한국어학과 학과장으로 사업하는 학자형 작가이다. 키가 웬간히 큰 남자도 김염화 옆에 서면 해발고도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인물 체격이 쭉 빠진 사람이다. 줄곧 순탄하게 엘리트 길을 걸어온 거 만큼이나 글을 자로 잰듯 모나게 쓴다. 김염화의 평론 을 보면 전문학자의 흔적이 대번에 보인다. 소설의 인물형상을 관계도를 그려서 보여주는가 하면 사건의 시공간적 구조를 파헤치는 프로다운 솜씨도 나타낸다. 인물형상부터 스토리 전개까지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살피고 조명했다. 흔히 독후감 형식의 평론에 치우치는 것과는 격이 다르고 프레임 자체가 한차원 업그레이드되여있다. 평론인이 결핍한 산동문단에는 가뭄에 단비요 혜성 같이 나타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외에 연변문학에 발표된 단편소설 으로 얼굴이 알려진 윤명해 소설가(1975년생), 20여년 간 수필만 고집하면서 수십편 작품을 발표한 김명숙(1973년생), 그리고 김국화(1970년생), 리숙(1974년생), 림복화(1973년생), 최영란(1974년생) 등이 아직 있으나 지면상 관계로 더 전개하지 않는다.   리더가 수요되는 세대   얼핏 보기엔 좋은 소리만 해서 허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70후 역시 더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한 세대를 이끌어갈만한 리더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윤림호선생이 북방문단에서 거목으로 자리매김했을 때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였다. 조광명선생이나 한영남선생도 30대에서 느끗하게 한몫을 담당했었다. 70후면 만 40세에서 49세 사이로 문단에서 한 목소리를 낼 때가 틀림없다. 어쩌면 60후보다 더욱 날파람이 있어야 할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크게 뚝 부러질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문학을 취미로 한다거나 생계가 우선이라거나 업무가 바쁘다거나 하는 핑계도 얼마든지 일리가 있고 설복력이 있다. 그러나 반론적으로 문학은 그런 경우에 해야 제맛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문학을 하는 것이지 팔자 좋고 똥집이 편한 사람은 글을 쓰지 못한다고 말하면 억지고 궤변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언어수련을 좀 더 해야 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전세대들은 참말로 어려운 여건속에서 문학창작을 해왔다. 볼 것이 제한되여 있는데다가 봉페된 환경에서 들은바도 많지 않았다. 신문마저 희귀했던 그 시절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독서했고 오로지 쓰고 또 쓰면서 문학수양을 쌓았다. 요즘 세상은 책이 도처에 널려있고 티비나 인터넷을 통해 지식이 쓰나미처럼 전달된다.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정보도 섭취할 수 있다. 사람하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글을 발표해서 30편에서 50편 사이가 관건적인 시기이다. 이때는 경험적인 이야기가 바닥이 나는 대목이고 스스로도 자기 글을 판단할 수 있는 시점이다. 아이구 이젠 쓸게 없소, 못 쓰겠소 하고 맥버리면 바로 끝장이다. 그리고 그 3~50편 글을 가지고 평생 문인입네 하고 자랑하고 만족하면서 살게 된다. 지금 대개의 문인방에서 살판치고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류형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맞아죽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문학엔 지름길이 없다. 오직 꾸준한 노력과 지구력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2019년 3월 22일  
17    손바닥으로 문학을 보다 댓글:  조회:967  추천:1  2017-11-19
평론 손바닥으로 문학을 보다 박일 선생의 오백자소설 묶음을 읽고   장학규       올 하반년 들어 흑룡강신문 문학면이 갑자기 볼거리가 더 늘어났다. 박일 선생이 느닷없이 벽소설 묶음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뭐 별거 아닌 걸 가지고 괜스레 오두방정을 떠냐 그럴 사람들이 많을 거 같다. 하긴 새삼스럽지는 않다. 벽소설 하면 모르는 사람도 없을 거고 또 우리 문단에서는 대접도 잘하지 않는다.    요즘 좀 평론인의 구실을 해보려고 간만에 근간에 출간된 “중국조선족”이란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고나온 소위 “우수작품선”들을 뒤져보니 례외없이 벽소설은 전혀 취급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솔직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럴려니 하고 미리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다른 거 같다. 그저 벽소설이였다면 아마 필자도 대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칫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박일 선생이 “오백자소설”이란 “아이콘”을 들고나온 것이다.    오백자소설?   오백자소설!     벽소설에는 명칭이 엄청 많다. 서양에서는 플래시 픽션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손바닥소설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소소설 또는 미형소설이라고 지칭하는 반면 우리는 여직껏 벽소설로 더 익숙한 거 같다. 오백자소설이란 명칭은 그만큼 많이 생경하다.    압축성이 강한 표의문자인 한자에 반해 표음문자인 한글은 서술적으로 길어질수밖에 없는 특성을 가진다. 오백자는 많은 경우 배경을 깔기에도 채 미치기 어려운 분량이다. 거기에 사건의 기승전결과 인물의 심리 갈등을 내포하자면 아무리 언어의 고수라 해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박일 선생은 우리문단에서 널리 알려진 벽소설 대가로 현재까지 2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벽소설집만 이미 3권을 출간했다. 다년간 벽소설 창작만 고집해오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며 문단에 벽소설이란 쟝르를 정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해왔다. 평생 신문업에 종사해오면서 터득한 신문의 특성과 벽소설의 기술을 접목하여 한때 “신문소설”이란 타이틀을 달고 1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사스가 한창 살판칠 때 “요즘 녀자들”이란 제목으로 사스에 관한 벽소설을 내놓았으며 신문에서 사람들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경만 하고 구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보고 “?”란 신문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여 작품이 시대와 밀접히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오백자소설도 우리문단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당연이라는 표현도 생략하는 리유는 박일선생이 우리문단에서 벽소설가로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5백자도 세계적으로 보면 긴 픽션일지도 모른다. 일례로 여섯 단어로만 이루어진 헤밍웨이의 “아기 신발을 팝니다. 한번도 안 신었어요”가 유명하다. 언어를 통한 재창조가 문학의 속성이라고 할때 이 소설은 많은 상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팩트는 아니다.    그러므로 작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주제를 완벽하게 소화한것이 이번 오백자소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우선은 얽음새에서 소설의 프레임을 구성한것이 먼저 돋보인다.    “그때 그 할머니”는 2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오백자내에 담아내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딸애의 고중시절 학부형 회의에 참석했다가 주석대에 앉은 할머니의 자식교양담을 듣게 된다. 두 아들을 모두 청화대학을 졸업시키고 박사로 키워 해외로 진출시킨 할머니의 경험담은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수수하게 공부를 하는 자식들이 부모곁에서 효도를 한다”였다. 그 소리를 듣고 허탈에 빠진 학부형들이 교장을 찾아 항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20년후 “나”의 딸도 명문대를 나와 독일류학을 떠나 그곳에 정착하면서 외손주가 열살이 되도록 두번밖에 만날수 없는 현실에 그때 그 할머니의 감수를 체험하게 된다.    “어떤 부부”는 가히 최고의 액션이라 부를만 하다. 이 소설은 아라비아수자 1,2,3,4,5까지 동원하여 다섯장으로 단락을 나누어 주식시장에서 거금을 날린 안해가 속이 재가 되여 담배를 입에 붙이게 되는 속사정과 안해의 동창생인 “애금”이와 단둘이 두번이나 술을 마신 남편의 죄의식을 모순의 단초로 만들어 핍진하게 기술했다. 오백자소설로서는 한계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류형이나 특성의 글은 이외에도 반년간 운남에 출장 갔다가 에이즈에 걸려 돌아와 마침내 심리적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속세와 담을 쌓았다는 “출가”, 대학 다닐 때 친구의 밥을 훔쳐 먹기를 일삼던 “진규”가 후에 대성하여 큰 연구단위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한다는 “게으른 친구”, 평소 수자도 쓸줄 모르는 네살난 딸애가 인터넷 쇼핑에 빠진 엄마를 지켜보다가 어느날 인터넷으로 우산을 샀다는 아라비안나이트같은 사연을 다룬 “인터넷 쇼핑” 등을 들수 있다. 이 소설들은 하나같이 생활의 편린이나 단면을 카트에 담을수밖에 없겠다는 벽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리해 또는 상식을 깨드린 공동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묘한 결말로 앞의 서술을 한꺼번에 커버해버린 작품들이다.    “랭동실”은 수산물회사 김과장이 랭동실에 들어갔다가 갇히면서 동사한 사건을 쓰고 있다. 령하 30도에서 꼼꼼한 김과장은 문이 열리지 않아 밖으로 나갈수 없다. 추워서 입술이 떨리고 온몸이 오그라든다. 손가락마저 얼어서 글을 쓸수 없다고 얼어죽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날 전기 고장으로 랭동실은 작동을 멈추었고 동태상자들이 오히려 녹아버렸고 김과장의 시체도 전혀 얼지 않았다. 이 소설은 인간의 자기 최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명약”도 비슷한 루트다. 삼복철에 로인협회에서 잡은 개고기를 방아집 할머니만은 전혀 드시지 못한다. 그런데 며느리가 한번 다녀간 후 방아집 할머니는 갑자기 흥분제를 주사 맞은듯 입맛이 살아나 “국에다 밥을 말아 한사발을 다 잡숫더니 반사발 더 달라”고 한다. 며느리가 틀이를 가져오면서 맛갈스러운 보신탕을 들게 되였다는 시나리오이다.    이와 류사한 소설로 길에서 만난 두 로인이 전혀 동에 닿지 않는 대화를 서로 주고받다가 그중 한 사람이 보청기를 끼지 않았다고 사죄하면서 오해가 풀리는 “두 로인”, 출장 갔던 아들이 어머니를 주려고 사온 목도리를 할머니, 안해, 손녀가 모두 손녀의 선물로 잘못 알면서 서로 다른 감수를 느끼는 “목도리”, 평생 남편에게 10원이상 술을 사준적이 없는 안해가 조카들의 타발에 큰 마음 먹고 100원짜리 술을 사다주지만 언녕 길들여진 남편의 입에는 8원짜리가 더 좋다는 “말자선생” 등이 속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것처럼 상식도 어떤 때는 외곡이 된다는 설명이다.    세번째로는 작가의 의도가 파묻혀 거듭 읽으면서 사색을 하게 만드는 소설들이다.    “돌”은 딸애가 김의사네 진렬대에서 “사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을 가만히 가져오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 돌은 딸애가 김의사의 아들 천식이가 군에 가기전에 선물했던 것이다. 왜서 그 돌을 딸애는 되찾아왔을가? 작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해졌다. 젊은 남녀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을거다. 아니면 처녀가 너무 총각이 그리운 나머지 가슴에 품고 자려고 가져왔다. 또는 소중한 사랑의 상징물이 오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게 싫어서였다. 여러 각도로 읽힐수 있다.    “잘못 온 문자”는 개그맨 친구 흥수한테서 온 위챗 문자로부터 시작된다. “흥수”는 “태수”인 “나”를 “진수”로 잘못 알고 “나”의 흉을 본다. “내”가 돈 오백원을 꾸고 갚지 않았다면서 그런 실속없는 “나”와 사귀는 녀동생을 잘 단속하라고 “진수”에게 주의를 준다. 이 위챗 문자가 정말로 잘못 온것인지 아니면 “흥수”가 묘하게 연출한 극본인지는 작자가 밝히지 않았기에 알바 없다.    이 부류에 속하는 소설로 비행기에서 흑인청년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잠을 자는지 반항이 없는 서양처녀를 묘사한 “비행기에서”, 한국에서 귀국한 친구를 미국에 있다면서 만나러 오지 않는 사연을 다룬 “전화” 등이 있다.    끝으로 생활 일반사를 그린 소설들로 남의 흠만 잡고 자기 잘못은 모르는 “동료사이”, 다 키워놓았더니 이제는 부모를 외면하고 남자친구 말만 듣는 딸애의 인지상정을 묘사한 “못난 계집애”, 앞으로 의사가 될 딸애더러 하모니카를 계속 불고 춤도 더 배워 환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되라는 “의사”, 시골총각들의 지꿋은 장난질을 지혜롭게 막아냈다는 “천식이” 등이 있다.    시험성을 띤 동기치고는 20편에 가까운 분량은 별로 방대해보인다. 내용은 물론 형식도 각각이다. 례사롭지가 않다. 꼭마치 하나의 프레임으로 굳히고싶어하는 눈치이다.   평자가 주목하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평론이니만큼 작품에 대한 조명에 많은 필묵을 들였지만 사실 미안하게도 평자의 관심은 작품의 내용에서 언녕 떠나있었다. 내용에 대한 리해는 적당한 선에서 그치면 그만이다.    솔직히 디지털 시대를 맞으면서 문학의 재편성은 불가피해졌다.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위챗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어떤 형식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더 빨리 다가가고 접수되냐를 분석해보지 않을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오백자소설이 좋은 표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본다.   생활절주가 빨라지면서 요즘 사람들은 두터운 책을 듬직하게 들여다보기에는 무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여유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일을 나가서는 식사도 스낵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손님 접대나 쉽지 않게 회식이 차려져 포식에 만취하는 상황도 없지는 않다. 글 읽기도 대체로 비슷하다면 억지는 아닐것이다. 분주히 동서남북을 오가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함께 이동하는 스마트폰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문학을 접목하여 스낵처럼 틈틈의 시간을 타서 소비하고 소화하게 하는것이 요즘 문학의 사명이라면 또다른 궤변이 될가?!   그래서 오백자소설이 하나의 대안이 될거라고 판단해본다. 나중 이불속에 들어가 책을 들거라는 섣부른 믿음보다 일단 먼저 독자들의 핸드 즉 손바닥에 문학을 심어야 할 것이다.    박일선생만이 할수 있는 선구자적 노력에 감사하고 박수를 보낸다. 부록 박일 오백자소설 3편 어떤 부부         1  안해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2  -왜 피워?  -그저!  안해의 입에서는 대답대신 뽀얀 담배연기만 나왔다.         3  그러다가 안해는 몸져누웠다.  동창생 애금이가 보러 오겠다고 전화오는걸 안해는 “오지 마!”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속이 꿈틀했다. (정말 귀신같은 녀자네. 내가 애금이와 단 둘이 딱 두번 술을 마셨는데 그걸 어찌 알가?)        4  -담배를 끊어!  -왜요?  -미안해! 잘못했어!   -호- 당신이 미안하다구?  5   안해는 요즘 주식에서 련속 곤두박질 했다. 부부가 아글타글 모은 돈 이십만원을 몽땅 밀어넣고도 동창생 애금이한테서 꾼 십만원마저 허리를 뭉청 날려버렸다. 그래서 속이 타 담배까지 피우고 있는데…     그때 그 할머니    딸애가 고중 다닐 때다.  어느 하루, 나는 학부모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주석대엔 할머니 한분이 있었다. 교장선생은 십여년전 이 학교를 졸업한 할머니의 두 아들은 모두 청화대학을 나왔고 박사가 되였는데 현재 큰 아들은 미국에, 작은 아들은 캐나다에 있다고 소개를 한후 할머니의 경험담을 경청한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 말은 엉뚱했다.   -에그, 자식은 공부는 잘 하지 못해야 좋수다!  -제가 제일 후회하는게 뭔지 아세요? 두 자식 공부 너무 시킨겁니다. 제가 부러워 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입니다. 못난 나무 산을 지킨다고 공부를 수수하게 하는 자식들을 보면 거의가 부모곁에있더군요.    -저런 허튼 소릴 들으라고 우리를 불렀나?   그날 나와 여러 학부모들은 교장선생을 찾아가 항의 했다.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내 딸도 명문대를 나와 독일류학을 갔었고 후에는 그곳에 남아 독일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멀리 있으니 친 딸이 아니라 그저 반가운 “해외동포” 같았다. 이젠 외손주도 열살이나 되는데 그사이 딸네가 한번 놀러왔고 우리 부부가 한번 놀러가니 그만이였다.   언제부턴가 그때 그 할머니가 생각났다...      출가    명수는 갑자기 출가하여 까까머리 중이 되겠다고 했다.   “당신 미쳤어요?”   안해는 하늘 땅이 맞붙는것 같았다. 너무 울어서 목도 쉬였다.  “아빠, 가지 말아요!”   유치원에 다니는 딸애도 엄마따라 울어서 얼굴이 통통 부었다.  회사일로 반년남짓 운남에 가있는 사이도 안해가 외로워 한다며 밤마다 전화 한통씩 걸어오던 살뜰한 남편이 아니던가? 귀여운 딸애가 눈에 밟힌다며 만화책이며 놀이감이며 사흘이 멀다하게 부쳐보내던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던가?   “당신 밖에 다른 녀자 생겼어요?”  “아니...”  “그럼 혹시 사람을 죽였거나 무슨 큰 죄를 지었어요?”  “아니...”  “그럼 도대체 왜요?”  “... ...”  명수는 묵묵 부답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명수는 또박또박 글을 쓴 메모 한장 남겨놓고 끝내 떠나갔다.   -여보, 미안하오! 사랑하는 당신과 딸애 곁에 더러운 에이즈병이 있어서야 되겠소...    
16    경험자의 전통 답습이 주는 계시 댓글:  조회:620  추천:0  2017-02-19
경험자의 전통 답습이 주는 계시 한춘옥 수필 “어처구니가 돌리는 맷돌”의 묘미 장학규   경험자는 모종 의미에서는 베테랑을 지칭한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겪었지만 그것에 대한 리해나 상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경험자라고 일컬을 수 없다. 경험자는 비단 몸소 현장을 체험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관련 지식을 장악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할 것이다.  한춘옥선생에게 경험자란 타이틀을 스스럼없이 달아주게 된데는 모름지기 그런 경우를 여러차례 귀동냥했거나 목격했기 때문이다. 청도라는 이민족지역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떡메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 한춘옥이다. 타민족한테 페가 될가봐 모두가 출근한 한낮에 화장실에서 떡메로 찰떡을 쳤다는 일화는 사뭇 감동을 자아낸다. 슈퍼에 나가면 손쉽게 사먹을수 있는 장류나 김치류를 직접 담궈 먹는 건 물론 가끔 엿까지 달여서 열린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그 향기롭고 달달한 냄새에 갈가던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기도 한다.  한춘옥은 어머니가 살림살이를 참 깐지게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또한 손재주가 비범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너나없이 배고픈 어린시절을 보냈었지만 그래도 색다른 음식을 바꿔가면서 해먹는 재미로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한다. 부모의 솔선수범이 전통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였다.  맷돌에 대한 설파도 우선 그런 생활적인 토대가 있었기에 한폭의 자연화마냥 진실하다.  서두에서 작자는 맷돌을 돌리면서 등장하고 있다. “온집안에 그윽한 향기를 날리며 사락사락 절주있게 돌아가는 맷돌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엄마 손때 묻은 맷돌은 기나긴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돌아가고 있다.”는 지문으로 미루어 아마 지금쯤 작자가 아파트에 맷돌을 갖추어두었다고 믿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참 난감한 일은 요즘 젊은이들이 맷돌이 무엇인지 모르는것이다. 그래서 “편평한 돌 두개를 위아래로 겹쳐놓고 아래돌의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추어 손잡이인 어처구니로 회전시킨다.”고 맷돌의 생김새와 구조를 설명하는 자상함을 선사하지 않을수 없다. 자칫 군더더기 같은 이 대목이 전반 글을 살아나게 하는 역할을 놀고 있다. 민족과 더불어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맷돌”이 이젠 “믹서기”에 의해 대체되고 “박물관”에 전시된 처지가 되여 그 모양과 역할마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은 코마루부터 찡하게 만든다.  물론 맷돌에는 과거세대의 많은 추억이 묻어있는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작자에게 맷돌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마주 앉아 가난을 갈고 고부갈등을 가는 매개물이였으며 까칠한 메밀이 매끌매끌한 묵으로 변신하는 먹거리였으며 콩을 많이 넣어도 되는 놀이감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자가 노린 것은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에 대한 아쉬움만은 아니다. 생활 절주가 빨라지면서 “여유와 정”을 점차 잃어가는 인간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있다. 인내와 믿음, 사랑과 화합의 소중함을 “맷돌”이라는 상징물에 접목했다면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하기에 작자는 분명 젊은이들에게 많이 생소한 “맷돌”을 청도에도 갖다놓는다. “암맷돌바다와 숫맷돌육지는 서로 껴안고 수많은 충돌과 마찰로 백사장을  펼치는 “ 장관을 만들어낸다. 가히 녀장부다운 호매로움이라 하겠다.  한편 동시에 어쩔수 없이 감성적인 녀성이라는 “한계성”때문에 향수를 자아내는 이률배반적인 장면을 여기저기 흘러놓는다. “엄마의 삶을 분쇄하면서 가족들의 주린배를 채우고 생활의 편리와 윤택을 가져다준 맷돌은 참 많은 옛말을 갈아냈다.”, “세대주들은 빙빙 돌면서 비벼 갈아내는 화해의 맛과 멋에 한가닥 곤두서는 자신감을 키웠다.”, “엄마의 긴긴 날 설움은 하나로 망울져 하냥 사락대는 맷돌소리에 마음 싣고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애통과 그리움을 갈고 갈았다.”, “맷돌같은 부대낌에서 화해로 가는 옛날 부모님들처럼 서로 껴안고 따뜻하게 살아보고 싶다.” 등 섬세하고 부드럽고 감칠맛나는 말마디들을 조미료로 많이 섞어넣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통문화와 사회 비전을 유기적으로 이어놓은 성공작이다.        부록:   수필 어처구니가 돌리는 맷돌 한춘옥     온집안에 그윽한 향기를 날리며 사락사락 절주있게 돌아가는 맷돌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엄마 손때묻은 맷돌은 기나긴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돌아가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맷돌은 생활속에서 사용하기에는 비효율적인 물건이요 단지 옛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인테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 청도의 어처구니는 자연의 맷돌을 하루도 쉼없이 잘도 돌리고 있다.   옛날에 석기인들이 최초로 회전축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낸것이 바로 맷돌이였다. 편평한 돌 두개를 위아래로 겹쳐놓고 아랫돌의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추어 손잡이인 어처구니로 회전시킨다. 마치 부부가 서로 만나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둥글게둥글게 갈아가듯이...    요즘 커피세대들과 자판기세대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맷돌이지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맛깔나는 음식을 하는 생활의 필수품이요 보물이였다. 지금은 믹서기가 자리바꿈을 했지만 오랜 세월동안 돌고 돌아야 했던 맷돌은 박물관에 모셔졌어도 그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겼다.     엄마의 삶을 분쇄하면서 가족들의 주린배를 채우고 생활의 편리와 윤택을 가져다준 맷돌은 참 많은 옛말을 갈아냈다. 어쩌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서로 마주 앉아 맷돌의 어처구니를 돌리며 가난을 갈고 고부갈등을 갈아 냈으리라. 단단한 돌로 다듬어진 맷돌은 이민의 삶과 설움을 갈아내며 인내와 사랑을 키워냈다. 아이들은 사락사락 돌아가는 맷돌소리만 들려도 맛있는 밥상을 상상하면서 달콤한 군침을 흘리며 코를 벌름거렸다. 어린시절에는 딱딱한 콩알이 부드러운 젖빛두부로 까칠한 메밀이 매끌매끌한 묵으로 변신시키는 맷돌의 마술이 너무도 신기했다. 엄마는 무더운 삼복철에 메밀을 물에 불려서 맷돌에 곱게 갈아 묵을 만든다. 암맷돌과 숫맷돌이 서로 껴안고 갈아 만든 묵은 천하일품이다. 들깨와콩을 갈아서 고소하고 선들선들한 콩물을 만든다.   물같은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빠른것이 지!” 하면서 신나게 묵그릇에 바가지로 콩물을 푹푹 떠담는다. 콩과 메밀에 삶도 조곤조곤 갈아내시는 아버지는 허허하하 만족스럽게 웃으시며 가족들에게 인정을 팍팍 심어준다. 암맷돌과 숫맷돌이 서로 껴안고 수많은 충돌과 마찰이 만들어낸 부침개와 떡, 묵과 두부는 우리에게 진수성찬이였고 천국같은 행복이였다. 세대주들은 빙빙 돌면서 비벼갈아내는 화해의 맛과 멋에 한가닥 곤두서는 자신감을 키웠다. 덕분에 자식농사와 벼농사를 부지런하게 잘도 하셨다. 아마도 부드러운 두부에 양념장을 듬뿍 올려놓고 술잔을 쭉쭉 내면서 체력을 키웠는가 보다.    엄마의 긴긴날 설움은 하나로 망울져 하냥 사락대는 맷돌소리에 마음 싣고 부모형제와 생이별한 애통과 그리움을 갈고 갈았다. 부대끼며 마찰로 돌아가는 맷돌에서 여유와 인정을 터득했다. 부모님의 깊은 마음을 알수없는 나는 두부콩을 갈때면 그냥 신나는 놀이처럼 덤벼본다.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돌리지만 둥글소처럼 떡 버티고선 맷돌은 심술부리며 어처구니 없는 나를 골탕 먹인다.    엄마와 마주 앉아 어처구니를 잡고 돌리면서 나는 여유의 매력에 인정이란 따뜻한 선물을 받았다. 맷돌은 욕심부리지 않고 물과 콩의 맞춤형에 따라 적절하게 걸쭉한 콩즙을 갈아낸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조급해서 맷돌 아가리에 콩을 많이 넣어준다. 변성기같은  이상한 소리와 더불어 콩 알맹이가 줄줄 흘러 나온다. 머들머들한 콩짜개가 보이니 엄마는 나를 흘겨보며 “맷돌을 속힐려구? ”하면서  옆구리에 흘러나오는 콩즙을 숫가락으로 아가리에 떠넣는다. 맷돌은 성실과 기다림을 가르치는 어르신처럼 참신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요즘은 빨리빨리 공회전을 어지럽게 돌리며 여유와 정을 많이 잃어버리는 어처구니가 많다. 세상이 많이 각박해진다. 맷돌같은 부대낌에서 화해로 가는 옛날 부모님들처럼 서로 껴안고 따뜻하게 살아보고 싶다. 단번에 갈아버리는 믹스기보다는 맷돌이 갈아내는 구수한 맛과 멋이 그립다.     나는 청도에서 해안선을 바라보며 바다와 육지의 멋진 맷돌에 빠져든다. 하얀포말은 엄마의 넋이 되여 파도어처구니를 끝없이 돌린다. 암맷돌바다와 숫맷돌육지는 서로 껴안고 수많은 충돌과 마찰로 백사장을 펼친다. 맷돌아, 우리마음에 애환과 갈등을 갈며 여유와 정으로 사락사락 돌고 돌아라!
15    산동, 그 무궁한 문학공간과 발전 잠재력 댓글:  조회:799  추천:1  2017-01-06
평론   산동, 그 무궁한 문학공간과 발전 잠재력 과거, 현재와 미래로 살펴보는 산동조선족문학   장학규     □ 들어가는 말 중국 조선족문단으로 놓고 말하면 산동은 많이 생소하고 후진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산동쪽으로 눈길을 돌려주는 평론인들이 거의 없다. 문단 행사를 해도 동북3성과 북경 등 전통적인 문단 구조내에서만 진행하고 산동은 아예 념두에도 없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조선족이 대규모로 산동반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여온다. 저그만치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리고 인구도 이젠 20만 명을 훨씬 웃돈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태여난 흑룡강성 목단강지구의 조선족인구보다 더 많은 수치이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여직 우리의 문화 터전이 전혀 마련되여 있지 않다. 공립 민족학교가 단 한곳도 없는것은 물론 문화관이나 예술관도 없고 합법적인 잡지사도 없다. 이곳의 문인들은 한마디로 고군분투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행한 일이 있다. 고향문단에서 이미 자리를 굳혔거나 또는 문학에 뜻을 둔 문인들이 하나둘씩 자꾸 이곳으로 합류하고 있는것이다.  이보다 더 다행한것은 각자 도생하던 이곳 문인들이 민간단체이기는 해도 “작가협회”란 이름으로 한데 뭉친것이다. 그리고 회원작품집을 해마다 간행하고 있는것이다.  이제는 산동에 주목해도 괜찮을것이다. 아니, 산동을 간과할수 없을것이다. 문단에서의 산동분동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리유는 산동의 과거, 현재에 대한 점검과 미래 가능성에서 보아낼수 있을것이다.      □ 조선족의 산동진출 시대배경과 현황  중국은 1976년 문화대혁명을 종결시키면서 세계 대가정으로 귀환했다. 특히 80년대 초반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의 문호를 대외로 개방하면서 새로운 경제건설의 붐이 일어났다.  산동성 청도시는 중국에서 최초로 대외로 개방한 14개 연해개방도시중의 하나로서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물가의 루대가 먼저 달을 얻는다고 그중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이 가장 선참으로 기회를 포착했다. 청도의 닭울음소리가 인천에서 들린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과 산동은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많은 인연을 가지고있었다.  한편 인근의 연태시와 위해시 등 연해지역에는 신라방이 여러곳 있었고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사 등 우리민족 선조들의 흔적과 발자취가 력력히 남아있었다.  이런 연고로 산동에는 일찍 우리민족 후예들이 더러 살고있었다. 그당시 청도를 비롯한 산동지역에는 퇴직군인, 과학기술자, 교사, 의사 및 특수 공업분야에 종사하는 전문 기능공 등 수백명에 달하는 우수한 조선족들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연태시 량가(梁家)촌에 사는 문분녀씨는 한국에서 화교인 남편을 따라와 70여년 말동무 하나 없는 동네에서 외롭게 살아왔다. 산동에는 이렇게 말할수 없는 사연으로 이름없이 살아온 조선족녀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제남군구 모부 참모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박인혁씨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60년대에 중조어업협정에 의하여 연태와 석도 등 항구 부근에는 조선어선들을 위한 조선족 통역들이 배치되였었다. 70년대 초반에는 조선족 군인들로 꾸려진 축구팀만 해도 3~4개 정도였다고 하며 그후 70년대 중반 46군단이 길림에서 산동으로 교체 주둔하면서 더 많은 우리민족 군인과 가족들이 이주해오면서 우리민족 여성군인 아홉자매의 사연이 “연변일보”에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  연태개발구에 위치한 연태동성(집단)공사에는 100여 세대 300여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연태동성공사의 전신은 길림성 반석시 모 산골에 위치해있던 국가병기공장이였다. 개방후 국가 지령에 따라 1988년에 병기공업부로부터 수도강철공사에 귀속되였고 에어컨 생산합작자를 찾아 1993년도에 연태개발구로 집단 이주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런 기회와 배경으로 인해 산동의 첫번째 외자 기업은 당연히 한국의 몫이였다. 세계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은 중국과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까왔을뿐만 아니라 200만에 달하는 중국국적의 동포들을 가지고있었기에 언어 인문적으로도 우세를 가지고있었다.  아직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전인 1989년에 토프톤전자회사가 첫 한국독자기업으로 아름다운 해변도시 청도에 자리매김함에 따라 한국기업의 청도진출은 터진 봇물마냥 줄을 이었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7년에 이르러 재 청도 한국 기업수는 이미 6,000여개에 달했으며 한국 교민수도 12만 명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중국 동북3성 등 전통적인 거주지에서 조선족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2008년에 만난 청도시민족사무위원회 마전진(马前进) 부국장에 따르면 2000년도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청도시소수민족 호적인구가 3만 3천명으로 밝혀졌으며 3개월 이상 거주하는 유동인구는 20만 명이 넘는것으로 파악되였다. 그중 조선족인구가 절대대부분이라고 한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불황으로 떠나간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전체 산동성적으로 계산하면 현재 역시 2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살고있는것으로 추산되고있다. 호적인구도 8만명에 접근하는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부와 학술계 차원의 조사연구사업이 간간히 이어지고있다. 일찍 2007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리론정책연구실 박영일처장이 청도시를 방문하여 조선족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경청하였으며 2008년에는 천진시민족사무위원회 유홍원 연구실 주임이 남개대학 연구생들을 데리고 “도시진출 조선족사회”란 쩨마로 현지 답사를 다녀갔다. 2008년 산동성 중국공산당간부학교와 산동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공동으로 “산동반도 진출 조선족현황 조사”를 실시했으며 2010년에는 중국해양대학교 한국연구중심에서 “청도지역 조선족사회의 어제와 오늘”이란 테마로 좌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어 2011년 말에는 북경 중앙민족대학에서 중앙통전부 민족종교국 조학의 국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김성화 당위 부서기, 정책법규사 심림 처장 등 10여 명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청도조선족사회문제 해결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 민족사회의 형성과 문화형태 1992년 8월 24일 중한수교는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산동에 유입된 촉매제였다. 정부 산하의 투자유치국을 중심으로 세관, 은행, 병원, 관광, 법률, 호텔 등 분야의 조선족 인재들이 속속 전근되여 왔으며 한편 대학졸업생 위주로 시작된 한국기업관리일군들도 수요량이 늘어나면서 고중이하 출신들로 서서히 범위를 넓혀갔다.  조선족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는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은 민족교육문제였다.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조선족들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반면에 애들은 민족학교가 없어 동화될 위험에 노출되였다. 공립학교 설립을 위해 퇴직 군간부인 현귀춘씨를 위시한 유지들이 뛰여다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2000년 8월에 이르러 청도에 사립조선족학교가 세워지면서 그나마 민족교육의 명맥을 이어갈수 있었다. 현재 청도에는 정양학교와 서원장학교 등 2개의 사립조선족학교가 있고 연태에는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가 주관하는 주말학교가 수년간 가동되고있으며 위해시에도 여성협회 주도로 조선족어린이한글반을 운영하고있다.  다음은 조직의 부재이다. 고향에는 조선족마을이 있었고 정부에도 민족간부가 따로 있었지만 이곳에는 조선족을 통일적으로 관리할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현재까지도 각종 민간단체들이 난립하고 각자가 먹고 즐기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래도 문화의 기갈이였다. 민족이 생존해나가는데는 문화가 우선적인 요건이다. 교육이 상실되고 조직이 전무한 상태에서 문화의 전승이란 한낱 빈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1997년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의 설립은 하나의 리정비적인 사건이였다. 이 지사는 자체로 지역면신문을 발행하여 산동한겨레사회소식을 전달하는 한편 “푸른섬”이라는 문학 부간도 창간하여 처음으로 산동진출 조선족문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지면의 제한으로 부간이 취소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작품 특집을 짬짬히 펴내고 있다. 이 신문을 통해 알려진 작가들로는 리문혁, 김건, 류일복, 김미령, 송련옥, 리화, 최재문, 김운천, 홍걸, 리길룡 등을 들수 있다.  2005년에는 문학전문지인 “송화강”잡지가 청도에 진출했다. 이로써 산동조선족문인들은 비로서 자기의 진지를 가지게 되였고 본격적으로 문학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려나갈수 있었다. 2010년 초에 할빈 본사로 전략적인 철수를 하기까지 “송화강”잡지는 산동조선족문학창작활동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했다. 이 잡지를 통해 활약한 작가들로는 김기덕, 리호원, 김춘택, 리홍철, 조광명, 홍군식, 유해금, 홍순범, 박영희, 장학규 등을 들수 있다.  이에 앞서 2005년 4월에 창간된 “꽃노을”잡지(주필 김재룡)가 있다. 청도조선족로인협회 회간으로 출발한 이 잡지는 10년간 32기를 발행했으며 현재 잡지명을 “해안선”으로 고치고 더 넓은 독자층을 상대로 하게 되였다. 해안선문화전파유한회사로 소속을 바꾸면서 비교적 합법적인 신분이 된 “해안선”은 상업잡지가 판을 치는 치렬한 경쟁속에서도 광고 등재를 한사코 거절하면서 종합잡지의 길을 고집하고있다. “해안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된 작가들로는 김재룡, 홍영빈, 한춘옥, 정순금, 김명숙, 전향미, 최균필, 차설매, 홍태수, 장향화 등이다.   □ 문학단체의 설립과 주요 활동  문인 동아리나 문학지가 전혀 없는 신 개간지에서 산발적으로 “연변문학” 등을 통해 문학창작활동을 벌려오던 산동지역문인들에게 고향에서 원격 지원을 나온 언론매체와 문예지는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2000년 1월, 청도에 위치한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 회의실에서 연변작가협회 산동창작위원회 설립식이 있었다. 산동진출 조선족문인들의 첫 모임이기도 한 이날 설립식에는 산동성 각 지역에서 14명 대표가 모여왔으며 그중에는 한문으로 창작하여 중국주류문단에도 알려진 김창용씨와 백결씨가 들어있었다. 창작위원회 주임으로는 “김구평전”을 쓴 김운룡 작가가 선출되였고 부주임에는 김기덕과 장학규 그리고 청도대학의 리춘자 교수가 당선되였다. 당시 통계로 산동성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12명 있었다.  이 창작위원회는 2002년에 “연해문학”이란 회원작품집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김운룡선생이 암으로 투병하다가 작고하면서 흐지부지해지게 되였다.  이에 이어 2006년 하반기에 원로시인 리상각의 후원하에 김춘택의 창도로 재청도시인들로 '시조협회'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김기덕, 홍영빈, 리호원, 조광명, 홍군식, 송련옥, 김춘택, 리홍철, 박창묵 등 기성시인들이 참여했다. 아울러 청도조선족학교인 벽산학교에서 시조경색을 조직하는 등 나름대로 문학창작을 진행하는 동시에 사회활동에도 참여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시조협회는 문인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이도록 이끈 촉매역할을 놀았지만 문체의 국한성 때문에 산동에 거주하고있는 많은 작가들이 함께 어울리기 어려웠다.  당시 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더욱 많은 문인들이 산동에로 유입되였으며 청도대학, 중국해양대학, 청도농업대학 등 고등학교들에 한국어학부가 설립되면서 전업적인 문학리론가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후비력도 성장하고있었다.  이런 형세하에서 시조문인협회는 더 이상 문인들의 터전이 될수 없어 그 사명을 다하게 되였다. 대신 새로운 문학단체가 잉태하게 되였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청도연해조선족문인협회'이다.  이 협회는 2007년 12월 28일 청도에서 설립되였으며, 초기 회장에 리호원이 당선되고 김춘택이 수석 부회장 겸 비서장으로, 장학규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였다. 그후 2기, 3기 회장에 리홍철이 련임했고 현재 제4기 회장에 리문혁이다. 2013년 12월 이 협회는 회장단 회의를 통해 “청도조선족작가협회”로 명칭을 변경시켰다. 비록 청도라는 지역명을 사용하지만 회원은 산동성 전 지역에 포진해있으며 연변작가협회 회원만 18명 포함되여있다.  2008년 7월에 리호원 주임, 장학규 부주임으로 된 연변작가협회 청도창작위원회를 재설립하면서 청도조선족작가협회와 더불어 투톱 역할을 하고있다. 지금까지 모든 활동은 두 단체의 련합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실상 수뇌부는 하나로 통합되여있다.  이 협회는 해마다 계절에 따른 정기모임을 이어오고있을뿐만 아니라 “갯벌의 하얀진주”로 명명된 회원작품집을 이미 5권이나 발간했다. 30만자가 넘는 대형작품집인 “갯벌의 하얀진주”는 산동조선족문학인들에 대한 집중 조명인 동시에 산동조선족문학의 기념비로 점차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울러 2009년 2월 재중한국인회 정효권 회장의 후원을 받아 “리커문학상”을 시상했고 2011년 12월에는 청도시 성양구조선족기업협회의 협찬을 받아 전국을 상대로 “연문컵문학상”을 공모하여 성공적으로 시상식을 치르기도 했다.  한편 2012년부터 해마다 청도정양학교와 청도서원장학교를 상대로 백일장을 펼치고 있다.   ∋ 창작활동과 성과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게 된다.  산동지역의 작가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와중에도 창작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단체의 힘을 살려 “청도특집”으로 각 잡지사에 등업했다. “송화강’은 모태였던만큼 해마다 특집이 실렸고 “연변문학”은 2011년 7호와 2013년 12호에 게재되였으며 “도라지’잡지는 2014년 2기에 발표되였다.  물론 개인별 작품 창작은 더욱 풍성했다. 김운룡, 김기덕, 조광명, 장학규, 리홍철 등이 선후로 각 문예지의 집중 조명을 받았으며 허강일은 2014년 4기부터 장백산 잡지에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을 련재하기 시작했다.  개인작품집도 줄기차게 출간되였다.  김운룡은 2000년에 인물전기 “김구평전”을, 2002년에는 중단편소설집 “화려한 시절의 동화”와 대하력사소설 “광야의 아리랑”을 출간했으며 김기덕은 2001년에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를, 장학규는 2003년에 수필집 “머리잃은 곤혹”과 2014년에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을, 홍영빈은 2006년에 시집 “바람의 색갈”과 2013년에 시집 “바람가는 길”을, 조광명은 2012년에 수필집 “그리하여 마침내 도시여”를, 김춘택은 2008년에 동화집 “닭털비를 맞고 무너진 로마제국”을, 홍군식은 2006년 시집 “360℃고독”, 2008년에 르포 “시대를 클릭하는 CEO”(합저)를, 김운천은 2015년에 수필집 “언덕길은 걷기가 좋아”를 출판에 교부했다.  문학상 수상 정황도 가히 대풍년이라고 할수 있다.  김기덕은 2001년에 한국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수상을 시작으로 겉잡을수 없이 2009년에 시 “부엉이 바위(외3수)로 문학세계 제5회문학상 시부문 금상을, 2011년 시 “알고싶은 영일만”으로 제1회 청마문학상 부상을, 2011년 시 “못 다간 그 길”로 “연문컵” 대상을, 2012년 8월 시 “정미소(외3수)”가 제2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상을,  2013년 8월 제3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상 공로상을, 2014년 시 “가을빛”으로 료녕일보 기원컵 압록강문학상 시 부문 금상을, 2014년 8월 제4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공모 공로상을 획득하는 등 장거를 이루어냈다. 조광명도 2009년 11월 도라지 수필 대상을 따안은데 이어 2010년에는 단편소설 “날개를 심다”가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대상을 획득하였으며 2011년에도 소설 “하품”으로 제31회 “연변문학상” 우수상을 거머쥐였다.   장학규는 2005년에 수필집 “머리잃은 곤혹”으로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3등상을 수상했다. 리화는 2012년에 수필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로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부상을 받은데 힘입어 2014년에는 수필 “겨울수채화에는 그리움이 물들고”로 “흑룡강신문 제2회 랑시문학상” 우수상을 차지했다.  이외 홍영빈은 2008년 “리커문학상”을, 리홍철은 시 “이 계절 추락하는 나무잎에”로 한국해외문화교류회 대상을, 전향미는 2015년 수필 “고향에는 지금도 눈이 내린다”로 한국 “동포문학” 수필부문 우수상을, 최재문은 2014년 수필 “코끼리아저씨의 족쇄”로 제3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인터넷문학상 최우수상을, 한춘옥은2009년 수필 “하나 하나의 아픔을 이기면서”로 제1회 연변인민방송국 생활수기 대상과 2011년 시 “하늘나라”로 “연문컵” 가작상을, 김명숙은 2009년 수필 “엄마야 아빠야”로 “료녕조선문보” 제1회 “기원컵”압록강문학상 우수상과 2010년 수필 “파란 꿈을 이루기까지”로 연변인민방송국 생활수기공모에서 우수상을, 김미령은 2000년 수필 “바다가 준 행복”으로 “은하수”잡지 “영동컵” 2등상을 수상했다.  작품수가 방대한것은 물론 창작성과 역시 눈부시다는것을 알수 있다.    ∋ 대표작가 및 작품 분석 1, 김운룡과 대하력사소설 “황야의 아리랑” 김운룡은 1943년에 길림성 부여현에서 태여났다. 36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지만 왕성한 창작열정을 보이면서 선후 단편소설집 “사랑의 그림자”, 장편소설 “밀림의 딸”(공저), “새벽의 메아리”, 전기 “리홍광의 이야기”, “남만봉화”, “김구평전”(한문) 등 10여권 작품집을 출판했으며 조선족문단에서 널리 명성이 알려져있다.   “황야의 아리랑”은 미완성의 대하력사소설이다. 김운룡은 이 소설을 9부작으로 설정하였지만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1권 3부만 완성하고 아쉽게 저 세상으로 떠났다.  소설은 우리민족의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사를 쓰고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가시밭길과 그 수난의 과정에서 펼쳐지는 줄기찬 투쟁, 그리고 주인공들의 애잘한 사랑이야기를 엮고있다. 특히 주목되는것은 작자의 남다른 용단으로 리념적금기지대에 깊숙이 들어가 소외되고 외곡되고 굴절된 력사의 진실을 밝힌것이다. 이 대하력사소설에서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실명이며 이들의 사상에 덧칠하지 않고 그대로 비추었는바 안중근, 홍범도, 김좌진, 김구, 리동휘 등 민족주의자들의 반일투쟁을 정면에 놓고 직접 묘사해 금구를 돌파하여 력사의 진실에 다가섰다는 평을 받았다. 이 소설은 또한 반세기에 걸친 우리민족의 반일투쟁사를 전면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혹은 편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극복한것으로 하여 역사자료적가치를 가지고있다. 한편 이 소설은 또한 가족사와 민족사를 밀착시켜 한 가족의 가족사로부터 민족사, 특히는 우리민족 독립투쟁의 투쟁사를 엮고있다. 뿐만아니라 애정선과 민족수난사의 밀착, 서사와 서정, 철리의 밀착도 이 소설이 안고있는 특징이다.  2, 김기덕과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 김기덕은 1950년 길림성 교하시에서 출생하여 1972년부터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선후 연변제일사범학교와 연변대학 통신학부 정치전업을 졸업했으며 1993년에 청도에 진출했다. 1981년 시 “코스모스”로 등단한 김기덕은 현재까지 3000여 수의 시와 수십편의 수필을 발표하여 조선족문단의 다산작가로 손꼽히고있다.  한편의 좋은 시를 세상에 출품시키는 작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시를 써본 시인들은 잘 알 것이다. 한 수의 시를 완성하기 위하여 여러 번 갈고 깎고 다듬고 지우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몸에 깊숙이 배여있다.  일년에  수백편의 시를 써오면서 한 수의 좋은 시를 내여놓으라면 그리 만만치 않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시속에 시인의 예리한 초점이 맞춰지고 최대의 카리스마로 압축시킨 강도 높은 함축이 시행마다 깊게 깔려 있는 시, 읽어보면 손으로 만져질것 같고 코를 대면 예상했던 글향이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을 할것만 같은 시를 일년에 한수를 창작한다는것이 그리 쉽지를 않은것이다 2002년 저자가 한국 월간 문학세계에서 출판한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에서 “풀잎”이란 시가 그 례로 들수 있다. 즉 100년이 넘는 시간을 세개의 단어로 함축시키고 다이아몬드처럼 강도 높은 빛을 발산하게 하는 노력이 뚜렷하게 엿보여주는 것이 자랑스럽다. 풀 잎//그 어느날 밤/짚신이 지나가고/그 어느날 밤/ 고무신이 지나가고/그 어느날 밤 구두신이 지나가며/厄이 풀잎에 길게 누웠다//넘어진 풀잎은 누워서/설레는 소리를 연습하고/그 뒤에 황소같은/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밟히면 일어서고/또 밟히면 또 일어서고…/끝끝내 일어서는//풀잎에도 厄을 딛고 일어서는/뼈가 있나 보다//그것으로 끝이 없는 들/만경창파에/책 한권 쓰나보다// 풀잎은 이 세상의 높이를 전부 남에게 사양하고 자신은 가장 낮은 바닥을 선호하며 짚신에 밟히고 고무신에 밟히고 구두신에 밟혀 사는 흔히 볼수 있는 우리민족의 력사와 너무나도 가까운 일이다. 짚신 고무신 구두신으로 한백년의 력사를 함축시키며 강한 뼈로 밟히면 일어서고 또 밟히면 또 일어서는 기백과 지혜가 력력히 숨쉬고 있음을 감지할수 있는것이다. 3, 홍영빈과 시집 “바람 가는 길” 1939년 흑룡강성 통하현에서 태여난 홍영빈은 병약한 신체와 가난한 살림때문에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굳은 의지와 이악스런 노력으로 1973년에 처녀작 “봄은 어디에”로 등단, 현재까지 시집 2권과 300여 수의 시를 발표했다.  “바람 가는 길”은 1장 “나를 찾아서”, 2장 “세상과 세월”, 3장 “바람과 나무와 별과 시”, 4장 “생명예찬” 등 총 4장으로 나뉘여졌다. 홍영빈의 시는 시골집 무쇠솥에 우려낸 구수한 숭늉같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것 같다. 현란한 언어가 없지만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솔직한 표현과 알송달송한 몽롱미가 없어도 마음까지 편한 시어의 선택은 홍영빈만의 창작풍격이다.  막차 //밤 아홉시 정각 /나는 집에 가려고 막차에 올랐다/ 네온등 꽃 수놓아 협곡을 달리는/ 막차에 앉아서 해보는 자문 / 이제 훗날 그 어느 역에서/ 마음 놓고 안식처에 내려야 할 / 막차를 탈 승차권은 / 마련 되었는지? 시에서의 막차는 마지막 뻐스가 아닌 시인이 살아온 전반 인생에 대한 회고의 시간인것 같다. “막차”를 보면  시인 자신이 보인다.  자맥질 // 물속 자맥질로 먹이 사냥하는 물새가 / 물의 깊이를 다는 모르고 살 듯 / 하늘을 자맥질하며 노니는 날새도 / 하늘의 높이를 다는 알지 못하지만 / 새들은 저마다 즐거운 삶을 사는거다 /… 주어진것에 만족하고 주어진것을 누리는 삶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홍영빈 시인도 스스로를 날개를 펼줄 아는 한마리의 새라고 했다. 좋아하는것을 마음껏 할수 있는 자유를 가진 스스로가 날개를 펼줄 아는 새라는것은 홍시인의 만족스러운 삶을 말하는것이 아니겠는가? 4, 최균필과 중편소설 “봇나무” 최균필은 1939년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했다. 할빈농업기계학원을 졸업하고 문화대혁명때 투쟁을 받으면서 그토록 사랑했던 문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있다. 1955년 “연변문예”에 단편소설 “부임’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선후 “연변문예” 신춘문예상, “연변문예” 가작상을 수상했다.  “봇나무”는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이 일인칭인 “나”로 시작하는것도 그렇고 이름이 작자가 쓰고있는 필명인 “최해”인것도 그렇고 또 “할빈농업기계학원의 재교생”이라고 밝힌것도 그렇고 틀림없는 작자 자신이다.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 하루아침에 우파로 몰려 대흥안령 오지에 있는 군마장으로 끌려간다. 사랑하던 러시아 처녀 올랴를 잃은 대신 대도시 상해에서 온 소연이라는 처녀와 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다. 조선족총각과 러시아처녀 그리고 상해 한족처녀란 삼각관계는 그 자체가 취미성을 한층 돋구게 된다. 물론 두 감정이 모두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그대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그보다 그런 애끓는 사랑을 통해 그 저주스런 년대에 대한 타매 강도가 한결 강해질수밖에 없는게 묘한 장치가 아닐수 없다. 사람들은 행방이 묘연해진 올랴로 인해 아쉬움을 느끼는 한편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그 비인도적인 세상을 탓할수밖에 없고 소연이의 결과를 통해 사람에게 지역과 신분의 차별을 만들어놓은 인간세상을 한탄할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소설의 력사적 사명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싶다. 5, 김건과 그의 “돌” 계렬시 1941년 길림성 연길시에서 출생한 김건은 1962년 통화시지질탐사학교를 졸업하고 지질탐사사업에 종사했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중화전국공상업련합회 석재업상회 회장직을 력임했다. 1979년 처녀작 “진달래”로 등단한 로익장으로 현재까지 400여 편(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원로 시인 김건은 석재사업을 하면서 시를 다작하였는데 특히 연변시인협회 "시향만리" 2012년 제9호에 발표한 시 "돌"(외 44수)이 대표성을 띠고있다.  김건은 입이 없는 돌과 특별한 사랑을 나누면서 특이한 초인간적인 감각으로 돌과 남다른 대화를 하고있다. "돌"// 태초에 철없는 돌은/정에 뜯기워 다듬어졌다/골 지나 벼랑에 부딪친 모래알 같은 정소리/심산에 부셔져 아픔으로 헤매이다/ 거치른 손에 내려/ 장알이 되여 못으로 박혔다//​돌은 광음에 실려 발돋움하고/인간은 초침 우에 걸음마를 익혔다/어느덧 돌은 톱에 썰리여  다듬어졌다/다이아몬드의 굳음에 찢기여/돌이 훤칠한 몸매로 계단에 오를 때/거치른 아픔에  제몸을 가누기 어려웠다.//기구한 돌의 운명은/한때의 기억으로 빛나다/광풍이 몰아치던 어느날/돌은 물에 베이어 다듬어 졌다/돌은 처음으로 아픔을 잊었다/그리고 멀지 않아 호텔로 들어설/그 날을 머금고 눈부시고 있다// 못난 돌이 석공을 만나면 이미지가 변화되듯이 돌이 김건 시인을 만나면 좋은 시가 되는 리유가 바로 돌에 대한 오랜 기간 깊은 애착과 세심한 관찰 그리고 끈질긴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시 “돌”의 첫 련에서 “철 없는” 돌을 석공의 정에 의해 새롭게 변신되는 돌의 리성적인 성찰을 밝은 재 조명에 맡겨두고 시의 2련과 3련에서는 눈부신 호텔로 이주하는 참신한 결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대목이 유난히 이색적이었다. “돌”외에 깊이 있고 무게 있는 수편의 시가 있었다. 선인들의 말씀처럼 돌 하나로 탑을 세울수가 없듯이 향후 청도작가협회의 영예로운 앞날은 수많은 돌로 일어설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6, 장학규와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 장학규는 1964년 흑룡강성 해림시에서 태여났으며 선후 료녕신문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신문사에서 편집, 기자로 근무해왔다. 1984년에 데뷔하여 현재까지 여러가지 쟝르의 작품 300여 편을 발표했으며 수필집 “머리 잃은 곤혹”과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을 출간했다.  “청도로그인”은 15편 단편소설 전부가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다는데서 다소 이색적이다. 그리고 연해진출 조선족들의 삶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재현시켰다는데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는 절망의 변두리까지 몰린 사업가가 기적적으로 생의 의욕을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있다. “갈대의 뿌리는 얼마나 깊을가”에서는 젊은 창업자의 밑뿌리를 파내고있다. “가장자리”에서는 약세군체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고있으며 “바람의 옵션”에서는 뿌리를 함께 하고있는 두 남녀가 이역타향에서 펼치는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를 다듬고있다. “인저리타임”은 민족렬근성이 객지에 와서도 근절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었고 “조깅”은 민족의 출로를 탐색하고있어 주목된다.  이외 글들도 역시 동일한 배경에 놓인 부동한 인물들의 형상을 통해 조선족들의 창업사, 이민사를  재생하고있으며 나아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점과 향후 나아갈 길 등을 고민하고있다. “청도로그인”은 제목이 제시하는바와 같이 문학작품집에 앞서 조선족의 새로운 이민력사기록과 같은 존재로 봐도 무방하다.  7, 리홍철과 단편소설 “줘마” 1972년 길림성 화룡시에서 출생한 리홍철은 1988년 연변일보에 시 “이발자국”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99년 “연변일보” 대성상을 수상했다. 현재까지 시, 수필, 실화 등 300여 편(수)를 발표했으며 청도조선족작가협회 2,3기 회장을 담임했었다. “줘마”는 작자가 목격한 실생활을 소재로 삼고있다. 현재 청해성에서 음식업을 하고있는 작자는 가게도우미로 일하면서 세살난 아들을 키우는 열아홉살난 녀자를 보면서 타민족의 생활습관과 혼인관에 깊이 들어가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700킬로를 달려 직접 무리초원을 답사했으며 무리대초원에서 열여덟살난 젊은 며느리와 조우하면서 장막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였다. “줘마”는 그렇게 탄생했다. 너무나도 원시적이고 태고연한 자연환경에서 넋을 잃었던 반면 그 고요한 수면밑에서 소용돌이치는 아픔도 감지했으며 타민족의 안광으로 “줘마”들이 장막을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슬을 벗어던지는 용기를 가지기를 바라게 되였다. 하지만 “줘마”는 결국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장막으로 되돌아오면서 문화의 속성과 막무가내를 다시한번 감내해야 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그대로 생소하고 낯설은 환경을 보여주었으며 미지의 신비세계와 이색적인 민족문화와 렵기적인 사건들을 그려내여 시각 충격과 더불어 예술적인 심미향수를 받게 한다.  8, 허강일과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 허강일은 1964년 길림성 화룡시에서 출생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길시조선족구연예술단, 연변인민방송국 등에서 사업하다 2005년부터 연변일보사 경제부 기자, 주청도 특파기자로 일하고있다. 장막극, 소품 등 100여 편 발표했으며 이외 약간의 수필과 시작품이 있다.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은 허강일의 첫소설이다. 소설은 개혁개방의 선두도시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조선족 만도와 미나, 그리고 한국인 민호의 사랑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있다. 슈제트의 기교나 인물형상의 다채로움보다는 약세군체들이 주류사회에서 생존해나가는 실태를 핍진하게 그리고있어 시사하는바가 크다. 만도는 혼자서 10여 명 깡패를 상대할만큼 주먹세계에서 한다하는 사람이지만 돈을 앞세우는 민호와 암흑세력을 달고다니는 공안국 왕부국장과 장소장의 간계에 빠져 감옥에 들어가고 미나를 민호한테 빼앗기고만다. 소설은 만도가 출소한후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있지만 개인영웅주의보다 경찰출신의 의형제 종수와 그 종수의 동창생 왕형사라는 매개물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쪽에 무게를 더하고있다. 작자가 현실에 너무 집념한 나머지 사회악에 대한 일반 리해에 멈췄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우리문단에서 쉽지 않게 깡패세계를 다루었다는 점과 조선족의 연해진출 과정이 그토록 치렬했다는 력사를 까밝혔다는데서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9, 기타 리화는 흑룡강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그 문학적재능이나 창작성과를 봐서 별도로 코너 하나를 만들어도 무방하나 아직은 경력이 모자라 “기타”에 넘어온 케이스이다. 그만큼 애연한 외모와는 달리 스케일이 크고 시원하게 쑥쑥 나가는 스찔이다.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 “내 머리에 꽃핀 하나 달아줄수 있나요”, “내 DNA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등 제목만 봐도 대범함이 철철 넘친다.  한춘옥은 교원 출신답게 많이 경험적이고 지적미가 풍기는 녀류작가이다. 그녀의 수필들에서는 “생각체력”이거나 “근육저축”,”건강은행”과 같은 생경한 단어들이 시도때도 없이 불쑥 튕겨나온다. 한편 “숭늉세대”, “컴퓨터세대”, “굴뚝시대”, “밥가마가 말하는 세월”과 같은 너무 생동하고 형상적인 표현들이 모든 글들에 관통되여있다. 그래서 글에 많이 로련하다는 생각이다.  최재문은 론쟁형 수필가이다. 성공작 “고양이와 물고기 그리고 지렁이”나 “인생의 네비게이션”이나 또는 “10분이상 고민하지 마라”를 포함하여 그의 모든 글은 론리가 정연하고 론점이 명백하다. 빈틈 하나 없이 잘 다듬어져있어 마치도 쇼핑에 나선 귀부인의 모습이다.  전향미는 글이 많지 않지만 글마다 잘 여물어 혼자 보기 아쉬울 정도이다. 필력이 자유분방하고 전개가 일사천리로 달린다. 수상작품은 물론 “바다와 중년의 녀인 그리고 친구”, “아버지와 술” 등 거의 모든 작품이 툭툭 튀는 개성으로 한눈에도 전향미의 글이란것을 알수 있게 한다. 앞날이 기대되는 재치군이다. 김미령은 생활형 수필가이다. 한번씩 아플때마다 글이 나오고 그 글은 또 그렇게 아프다. 글을 아프게 처절하게 다룰줄 아는 진정한 글쟁이이다. “나 슬퍼서 산다”, “엄마가 필요해”, “빌려쓰는 인생” 글제목부터 상처가 보인다. 김명숙은 항상 생김새나 성격처럼 무덤덤한 스타일이다. 들끓는 격정이 없는대신 사연을 한올한올 풀어주는 센스맨이다. “신깔개를 파는 할머니”, “돌려받지 못한 책”처럼 덤벼침이 없이 차근차근 설명하는 이야기형이다.  유해금은 대학교수이지만 시인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많이 흥분형이고 즉흥형이다. “당신속에 머무는 순간”같이 절절한 사랑 웨침도 있고 “눈 내리는 밤의 비소리”처럼 정서적인 표달도 있으며 “만추의 리별”과 같은 되새김도 있다.  리문혁은 기업인답게 “받은 사랑은 베풀어야 한다”, “배려의 예술”과 같은 인생돈오의 글을 많이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이외 김재룡, 김철우, 김운천, 정순금, 차설매, 홍걸, 장향화, 김국화, 윤명해, 리정복 등 특색있는 작가들이 있지만 지면상 일일히 거론하지 않는다.  나가는 말 산동은 역전이라는 말이 있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나가거나 해외와 국내를 드나들때나 산동을 거쳐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오간다. 문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돌이켜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알게모르게 많이 사라졌다. 리호원은 할빈으로 금의환향했고 김춘택은 연변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조광명은 광주로 남하했고 홍군식은 태평양 넘어 미국으로 떠났다. 류일복은 고국땅에 자리잡았고 송련옥도 선조의 고향으로 귀환했다. 대개는 날개가 언녕 굳세진 거물급들이여서 못내 섭섭하고 안타깝지만 격정의 시대에는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느낄새도 없이 조용히 다가와 감격을 주기도 했다. 벽소설 대왕으로 널리 알려진 박일선생이 퇴직후 청도로 옮겨왔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야회에 소품을 가장 많이 내놓은 허강일씨가 만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역시 산동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심양조선족문학회 평론분과 주임이던 김례호씨도 청도에 집을 마련하고 그루를 박았다. 저명한 평론가 리장수선생이 위해쪽으로 이사왔고 청도에서 항주로 떠났던 장학규는 다시 청도에 세번째로 입성했으며 한때 문학과 등지고 살았던 김건도 활기찬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보다 신진들의 약진이 더 돋보인다. 리화, 최재문, 한춘옥, 전향미, 유해금, 김미령 등은 송화강잡지에서 수필특집을 묶어줄 정도로 어느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김재룡, 김철우와 김명숙은 기성문인의 길을 드팀없이 지켜나가고있다.  여기에 200여명의 방대한 그룹을 형성하고있는 청도조선족대학생련합회 회원들이 근거리에서 호응하고있다. 앞날이 훤하게 뚫린 형국이다.  이제는 들어올 사람들만 있지 나갈 사람은 거의 없는걸로 알고있다. 모두가 집을 사고 뿌리를 내렸다. 그렇다면 산동은 앞으로 더 멋진 문학의 터전이 닦아진다는 반증이 아닐까? 아무튼 두고볼 일이다.    주: 본 론문 저술과정에서 김기덕, 리홍철 등 많은 분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14    자투리 에피소드로 엮은 대형 화폭 댓글:  조회:552  추천:0  2016-06-24
  평론   자투리 에피소드로 엮은 대형 화폭 박일 장편소설 “안개 흐르는 태양도”의 엮음의 미학   장편소설을 이렇게도 쓸수 있구나.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박일선생의 장편소설 “안개 흐르는 태양도”를 읽으면서 첫 인상이 이러했다. 책을 다 읽고서가 아니라 한쪽으로 읽으면서 줄곧 이런 곤혹에 빠지기는 처음이였다. 글에 흥취를 가지기 시작해서부터 자로 재듯이 네모반듯한 장회소설이나 또는 스케일이 거대한 력사소설이나 아니면 적어도 구체적인 이야기 줄거리를 가지고 얼기설기 실타래가 된 모순들을 풀어나가는 신소설에 익숙해왔었다. 아니, 익숙이라기보다는 장편소설은 의례 그렇게 써야 하는줄로 알고있었다. 그래서 장편소설의 경우 우선 먼저 거대한 주제와 복잡한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리해하고있었다. 물론 편폭의 요구가 우선이기는 하겠지만 책 1권이상의 분량이여야 한다는 특성은 그것이 장편이냐 중편이냐 아니면 단편소설이냐를 구분하는 아주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문제이기때문에 요구 사항에 넣지 않는게 오히려 정상적이다. 그러니까 장편소설은 다양한 인물과 복잡한 여러가지 사건을 통해 인간사회를 깊이있고 폭넓게 종합적으로 그리는것이 특징이다. 장편소설은 인생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체험을 바탕으로 풍부한 사상과 깊이 있는 인생관을 제시하게 된다. 아울러 체계성, 복잡성은 장편소설의 구조적인 특성이라 해야겠다. 그리고 장편소설이라면 인물의 성격과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리고 해부해야 하는게 다음 수순이다. 소설의 “플롯(plot)”이란것은 결국 인물이 리드하여 끌고가기 마련이다. 플롯 전개가 다채롭고 인기를 끌려면 무엇보다 그 라인에 서있는 인물의 형상 디자인이 변화무쌍하고 다차원적이여야 한다. 자칫 슈제트가 밋밋하거나 무미건조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인물이 고루하고 경색되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편소설의 경우 메마른 인물형상 또는 빈약한 인물성격은 그대로 작품 실패란 결과를 몰아오게 된다. 풍성한 인물의 내면 묘사는 어쩌면 이야기 자체를 릉가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홀시할수 없는것이 전편 작품을 관통시키는 시대배경이다. 절대적인것은 아니지만 장편은 그 부피만큼이나 아우르는 력사시기가 길고 거대할수밖에 없다. 인물이 아무리 퐁퐁 살아움직인다하여도, 전달하고저 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거창하더라도, 얼기설기 짜임새를 어느정도 정교하게 짜더라도 일단 그것들이 위치해야 할 좌표가 매치되지 않으면 결국 돈 끼호떼식의 랑패상이 되고만다. 하기에 장편소설이라면 한세기를 넘나드는 넓은 무대까지는 몰라도 적어서 한개 시대를 착실하게 반영할수 있는 공간 정도는 되여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안개 흐르는 태양도”에는 이런 장치나 시설이 전혀 없다. “전혀”라는 표현이 과장되기는 했으나 우리는 이 소설에서 상기한 요소들을 거의 찾아볼수 없는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지고있으며 좋은 평판을 받고있다. 전통적이고 또 정통적인 장편소설에 대한 리해를 단번에 뒤집어버린 “안개 흐르는 태양도”는 그래서 새삼스럽게 다시 연구해봐야 하는 가치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대체 어떤 구조적인 특점들을 가지고 있는것인가?   미니소설의 형식을 빌린 장편소설 이 소설은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수 있는 작품이다. 장편임에도 짤막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든다. 소설은 2박3일간의 동창모임에 대해 쓰고있다. 그 짧은 시간을 가히 장편이란 장자에 부끄럽지 않을36만자로 담아냈다. 소설은 “기차역”, “할빈공항” 등 47개의 소제목을 설정하고있다. 슈제트 전개의 편리성을 위해 시간과 장면 등에 따라 나누는 장절이기에 앞서 47개 소제목 모두가 각각 하나의 이야기로 되여있는 특수한 구조이다. 즉 47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여있어 헤쳐놓으면 각자가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가 되고 모아놓으면 서로가 상부상조되는 완정한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장기간 벽소설 창작에 전념해온 작가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작은 편폭에 스토리를 담아내야 하는 벽소설 창작에서 경험을 루적한 작가는 장편소설에서도 그 장끼를 발휘해 생각밖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 책자로 묶어지기전에 ‘장백산”잡지에 먼저 련재로 발표하면서 모름지기 독자들의 접수력에 많은 신경을 도사린 흔적이 엿보인다. 그리고 조글로에 십수차 다시 연재되면서 드라마같은 소설이라는 평가도 받게 된다. 요즘같이 절주가 빨라진 세월에 장편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가 좀 무리이다. 시간에 쫓기는 독자들이 장편이란 몸체에 우선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슬슬 뒤걸음치는 독자들을 책상앞으로 당겨오자면 일방적인 우격다짐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정사정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탕”을 맛보이는 회유도 두번이상 더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것인가? 이때 박일 선생만의 남다른 노하우가 빛을 발하게 된것이다. 작가는 도도한 서술을 회피하고 바로 이야기 그 자체로 들어가서 토막토막 이야기를 만들어낸것이다. 독자들은 미니소설을 읽듯이 장편 한부를 다 읽고도 장편을 읽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경지에 포섭된것이다. 이 점은 작가의 창작후기에서도 충분히 엿볼수 있다. 작자는 “남들이 쓰는 소설과 얼굴이 많이 다르게 내식대로 장편소설을 쓰려고 마음 먹은지가 오래된다.”면서 “짧은 미니소설을 많이 써온 자신의 장끼를 장편소설속에 충분히 드러내 하나의 정체속에서 나오는 줄거리마다 깜찍하고 재미나게 엮겠다는 생각이였다.”고 창작전에 미리 그런 계획을 가지고있었다는 고의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일단 이 소설은 얽음새에서 벌집의 모양새다. 꼭꼭 다져진 륙각형의 독립적인 집이 한데 모여서 벌집이라는 완정한 집을 이루듯이 이 소설은 각자가 짤막한 이야기들이 모여서 거대한 장편을 이루어낸것이다.   인물과 사건을 구체화하지 않은 구조 앞에서 필자는 이 소설이 미니소설의 형식을 빌렸다고 주장했다. 형식적인 특점을 규정한것인데 이를테면 벌집처럼 공동분모를 가진 개개의 집들이 얼기설기 얽혀 모름지기 하나의 큰 집이 만들어졌다고 형용했다. 그렇다면 “작은 집”과 “큰 집”의 관계 설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양자는 물론 종속의 관계이고 대립통일의 관계일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대세적인 흐름말고도 이 소설은 어느 장편소설과 다른 나름대로의 특점을 따로 가지고있다. 일단 항구적인 인물이 없다. 이 소설은 전편 작품을 관통시키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다. “백일호”와 “구금자”가 첫시작에 등업하고 또 마지막으로 커튼콜하는 장면때문에 자칫 이들이 주인공일것이라고 착각할수 있지만 절대 그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필묵을 좀 더 허비하였을뿐 두사람이 꼭 주인공이여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행사 장소를 섭외한 당사자이자 학급 반장 출신이라는 신분외에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빠질수 없는 인물성격의 형성, 발전, 승화의 과정 등이 모두 결여되고 두사람을 통한 사건의 전개도 유기적으로 질서있게 배치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형상이 상대적으로 포만감을 이루었다는 점은 승인해야겠다. 다음 인물의 성격이 유동적인것에 동조하면서 사건도 복합적 구성방식을 선택하여 서로 닿지 않는 많은 에피소드들을 고리로 연결시켰다. 이 특점은 47개의 소제목(이야기)을 들여다보면 더욱 두드러지게 알린다. 소설의 발단은 25년만의 동창모임이다. 자연히 전반 작품을 꿰는 화제는 2박3일간의 활동 스토리이다. 그래서 “별무리호텔”,”출석부”같은 집합행사가 앞서게 되고 “숲속의 비밀”이나 “수영장”, “녀자의 눈물”, “몽야술집”과 같은 레전드가 벌어지게 되고 더불어 “보배찾기”, “야식장”, “태양도에서“, “우등불야회”와 같은 즐거운 장면이 벌어지게 되며 이어 “”잠들수 없는 밤”이나 “”기념사진” 또는 “석별의 정”과 같은 아쉬운 대목도 있게 된다. 이 라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쭉 이어졌다고 볼수 있다. 물론 25년만에 차례진 동창들의 만남이기에 학창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회억도 피면할수 없다. 서로 만나면 자연히 당년에 우리는 어찌하였고 누구누구는 어떻게 했다는 얘기가 오가게 된다. 하여 “뚝배기”, “짝사랑”, “돼지족발”, “칠색박사” 등 학창시절 잊을수 없는 일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필자가 꼼꼼히 손꼽아본 결과 이런 류의 글이 대개 17개 정도가 되였다. 그리고 동창들이 오래간만에 모이면 두말할것없이 졸업후의 생활이 더 궁금하기 마련이다. 그간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고 지금은 무엇을 어느 정도 이루었냐가 가장 큰 관심사일수밖에 없다. 때문에 “수련이”, “철규”, “최윤희”, “좁쌀선생”, “김운재”와 같은 굵직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두루 따져보면 이런 글은 19개 이상이다. 당연히 별종같은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백청아”. “박화”와 “”젊은 세대” 같은 글들이다. 동창모임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다. 상기한 이런 이야기들은 제목이 독립적인것만큼이나 등장하는 인물도 수시로 바뀌면서 나름대로의 사연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호상 침투되고 호상 교차되면서 실타래같이 얽혀졌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 읽은듯 다시 빠져들고 빠져들었다가 또 다 읽은것같은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이 작품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경중이 따로 없이 모두가 그대로 주인공이 되여버리고 실타래처럼 한올한올 풀어가야 할 모순도 제시되지 않았으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주제도 도출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없고 사건이 없고 그리고 주제가 없는 “3무’가 이 소설이 가지고있는 최대 특점이라 해야겠다.   핵심적인 포인트는 “조미료” 이같은 시스템적인 시도가 전반 작품에 미칠 영향은 절대 과소 평가할수 없다. 자칫 흐트러지거나 최종적으로 실패를 불러오기가 십상이다. 그런 도전과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작가의 구상이 실천으로 옮겨진데는 나름대로 그어떤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요즘 주식마당에서 떠도는 말처럼 기본면(基本面) 즉 펀더멘털을 탄탄하게 엮을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다면 작품을 형성한 골격이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의 모델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도에서 별로 짝지지 않는다는것이다.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그 파워는 어디에서 오는것일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꼭마치 료리사같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료리는 재료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리고 조미료나 소스에 의해서 서로 구별되기도 한다. 일단 재료는 서로 다른걸로 선택할수밖에 없다. 어차피 테이블 하나를 똑같은 재료로 채울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조미료나 소스의 역할이다. 신맛을 내냐 단맛을 내냐 아니면 쓴맛을 내냐 매운맛을 내냐는 대개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능숙능란하게 “조미료”를 샤용할줄 아는 사람이여야 한다. 자명한바 여기서 말하는 “조미료’는 무엇보다 우선 언어를 지칭한다.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전제에서 새삼스럽게 언어문제를 내세우는것은 좀 중뿔난 얘기같지만 사실 우리는 오래동안 언어란 요소를 많이 소홀히 해온것도 부인할수 없다. 사건을 꾸미는데 지나치게 집념해오면서 사건이 어느 정도로 굴곡적이고 반전이 크며 스케일이 큰가에만 성공의 추를 매달아왔던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많은 글들은 아직도 7~80년대의 언어로 장식되여있다. 요컨데 소설가는 먼저 이야기군이여야 하는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재치있게 엮는건 바로 언어이다. 메마르고 조잡하며 창백한 언어로 구술한 이야기는 비록 그 사건 자체의 렵기와 신비 및 파워로 인해 잠시적으로 감동을 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원할수는 없다. 결국 문학작품의 승부는 언어에서 나뉘여진다. 언어가 매칠하면 사건이 좀 서툴어도 별로 흠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 꾸미기에만 주력하는 사람치고 오래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반면에 언어수련에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은 작은 사건에도 방대한 화폭을 담아내면서 성공일로를 걷는것을 많이 보게 된다. “안개 흐르는 태양도”는 언어로 승부수를 던진 전형으로 볼수 있다. 전편 작품은 그대로 언어의 향연이다. 특히 서술어보다 대화어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위트가 넘치는 대화속에 무르녹은 유머, 익살, 우스개, 육담들은 그대로 반짝이는 구슬과 같은 존재로 이 소설을 한줄에 꿰어놓았다. 작가는 장인답게 공력을 들여서 47개의 이야기에 하늘의 별같이 무수한 구슬을 흩어놓아 장관을 형성한것이다. 작가의 탄탄한 언어수양을 한눈에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가장 많이 사용된것은 우스개소리이다. 거의 갈피마다에 등장하면서 무드를 적당히 조절해주고있다. 어쩌면 익살하고도 통하는 우스개는 일반적으로 단마디 형식으로 나타나 순간적인 웃음을 유도한다. 묵직한 화제를 가볍게 넘기는 수법에 다름 아니다. 우스개와 비슷하지만 상대적으로 약간 더 전개가 되는 유머의 사용도 만만찮다. 얼핏 손으로 꼽아보아도 완정한 형식의 유머가 20개 정도는 된다. 말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억울할수밖에 없는 유머의 대량적인 사용은 때와 장소를 다분히 활성화시키기 위한 조처로 볼수 있다. “야식장”이란 장절에 이런 대목이 있다.   … 한 가정에 “사랑해요”와 “안 사랑해요”란 두 쌍둥이 자매가 있었수다. 어느날 아버지가 물었수다. 너희들 두 자매중 하나는 군대를 가야 하고 하나는 대학으로 가야 할것 같은데 누가 어디로 가겠느냐?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입이 빠른 동생 “ 안 사랑해요”가 제꺽 “저는 군대!”하고 손을 들었대유. 그렇다면 대학으로 가야 할 자매는 누굴가요? 시-작! “대머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마치도 약속이나 한듯 녀동창들이 동시에 “사랑해요!”하고 한입처럼 웨친다. “그러면 그렇겠지. 우리반 녀성들이 한결같이 이 ‘대머리’를 사랑한다니까.”   보다싶이 25년만에 만난 동창들의 우애와 절묘하게 매치된다.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한 오락의 일종이자 의사소통의 한 형태인 유머의 삽입은 그래서 전반 작품을 살아나게 하는 매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홀시할수 없는것이 육담의 공식적인 등장이다. 옛말같은 구두식 이야기에 가끔 등장하는 육담이 소설에, 그것도 대량으로 등장하기는 아마 이 소설이 처음일것이다. 육담은 주로 성에 관한 소재로 꾸며진 민담이기에 외설담이라고도 한다. 민간에 가장 널리 퍼져있으면서도 남녀간의 색정이나 성생활을 소재로 다루고있다는 리유로 저속하다는 판정을 받아 글에서는 모름지기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져 공개가 껄끄럽다. 그런 육담이 이 소설에 저그만치 20여 컬레가 소개되고있다. 따분함을 넘기기 위한 장치이기에 앞서 말그대로 서로 허물없이 말할수 있는 동창들간의 관계와 그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법이 아닐가싶다. 소설의 돈오 구태여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표준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실례로 잘 표현했다. 본 평론은 이 소설의 형식적인 부분만 살펴보았다. 즉 소설을 어떻게 엮었는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았다. 흔히들 구성은 작품의 주제를 뒤바침하는 부수적인것이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엮음새가 꼭 주제를 위해 봉사할 까닭은 없다고 본다. 건축사는 디자인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집이 멋들어지게 지어졌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것이다. 그 집에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집 짓는 사람이 신경을 도사릴 사안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주제선행의 십자가를 벗어던져야 할때가 아닌가싶다.  
13    리화 수필에서 드러나는 작가적 스찔 댓글:  조회:793  추천:0  2016-03-18
평론 리화 수필에서 드러나는 작가적 스찔     작품은 작가의 손을 벗어나면 객관적인 존재가 된다. 작품 한편을 두고 부동한 해독이 나오게 되는 리유이다. 또한 그래서 대부분 평론이 먼저 작품해석에 치중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평론이 단순한 문장 해부의 기능만 수행한다면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많은 평자들은 글의 내용에 집착한 나머지 작가의 개성이나 스찔은 지나쳐버리는 경향이 심하다. 우리의 평론이 독자들이 대부분 인지하고있는 내용에 대한 장황한 설명에 그치고있다고 비판받고있는 대목이다. 특히 나름대로 글은 이렇게 저렇게 써야 한다고 도도하게 지적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  어쩌면 일련의 작품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작가의 창작 개성을 살펴보는것이 더 보람찬 평론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출발점에서 필자는 근년에 문단에서 조용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리화의 수필에 주목했다.  남달리 시조에 애착을 보이고있는 리화는 시창작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량적으로 수필을 더 많이 창작하였고 성과도 수필에서 거두고있다.  리화의 수필을 읽다보면 금세 리화의 글일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앞세우게 된디. 쉬운 말로 풀이하면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전제하에서도 이건 리화의 글이겠구나 먼저 짐작하게 된다. 그만큼 리화의 수필은 리화만의 모습과 냄새와 색갈이 진하게 묻어있다.    제목으로부터 보는 작가의 스찔 작가의 스찔은 어느 한편의 글이나 어느 한시기의 작품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창작활동에 관통되는 특성을 가진다. 때문에 작가가 어느 정도로 성숙했냐를 가늠하는 척도는 그 작가가 자체의 스찔을 얼마나 형성하고있냐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의 스찔은 여러면에서 표현된다. 심리학에 정세(定势)라는 말이 있다. 일종 마음의 준비상태를 지칭하는 말인데 “정세”는 앞으로의 행위활동에 정향 또는 반향적인 추동역할을 놀게 된다.  문학창작에도 모름지기 “정세”란것이 있다. 작가가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냐에 따라서 그에 어울리는 형식의 작품이 형성되는데 작가의 스찔은 바로 그렇게 저도모르게 작품속에 녹아버리게 되며 내용과 형식의 제요소에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그 일례로 창작의 첫 순서가 되는 제목을 살펴볼수 있다. 형상적으로 표현하면 제목은 작품에서 출입문과 같은 역할을 가진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제목부터 특색이 있다. 일단 제목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을때 그 작품은 이미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수 있다.  그럼 리화 수필의 제목에서 어떤 작가적인 스찔이 엿보이는가 살펴보자. 앞에서 필자는 리화가 시적 재능을 갖추고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그래서인지 리화는 수필 제목도 시적인 정서가 다분한걸로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솨~솨~’ 카드고개 넘어가네(흑룡강신문)”는 시 같은데 많이 쓰이면서 감탄의 뜻도 함께 나타내는 종결토 “네”가 들어갔는데다 의성의태어 “솨~솨~”가 가미되여 제법 운률이 전달된다. 제목 자체가 시어로 되여진 케이스이다.  “도라지” 잡지 “장락주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는 그대로 풍월을 읊는 격이다. “선녀”를 불러놓고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고 명령하는 언어구사는 시인다운 배짱이 아니고서는 상상해내기 어렵다. 더불어 작가가 전달하고저 하는 이미지를 한결 형상화하는 효과를 거두고있다.  “내 머리에 꽃핀 하나 달아줄수 있나요(흑룡강신문)”에서는 수줍은 녀자의 아름다운 소원 하나가 간절하게 호소되고있다. 수십년후 파파 백발로인이 되여서도 “꽃핀”을 달고싶은 녀자의 본성을 이보다 더 정서적으로 표달할수 있을까?! “사쿠라야, 톡톡 터져라, 꽃비 내려라(장백산)”는 2행 시구가 그대로 글의 제목이 되여진 구조이다. 제목이 두마디로 이루어져 특이하고 생경한것만큼이나 호기심을 부쩍 당겨준다. 읽지 않으면 밥맛이 잃어질 지경이다. 여기서도 의성의태어 “톡톡”이 사용된 경우로 작가의 스찔이 한결 드러나는 대목이다.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겨울 수채화에는 그리움이 물들고”는 정서적인 색채를 매개물에 접목시켜 상상의 폭을 한층 넓혀주고있으며 대구법을 활용한 “날아라 양말, 달려라 맨발(도라지)”은 향음자음의 분포에서도 가사적인 특색을 먼저 보아낼수 있다.  이외에도 시적 표현을 시도한 제목으로 “취미(료녕신문)”, “새벽, 소리를 듣다(송화강)”, “주방이여, 나의 천국이여(장백산)” 등이 있다.  리화 수필 제목의 또다른 특색으로 서사성을 꼽을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목은 글의 내용을 고도로 함축하는 언어를 선택하는게 주류적인 흐름이라 해야겠다.  그러나 리화는 제목을 풀어쓰기를 즐긴다. 그것을 굳이 “서사성”이라고 해석하는건 짤막한 제목일망정 대개 하나의 사연을 담아내고있기때문이다.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도라지)”는 인생을 살면서 겪는 풍파와 그것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수련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고있다. 그런데 그 수련의 주인공이 “나”가 아니고 “도반”이다. “도반”은 불교용어로 함께 불도를 수행하는 벗을 가리킨다. 자칫 지인의 인생수업 과정을 말하는것처럼 보이나 실은 작가 자신의 체험을 스스로에게 전하고있는것이다.  “내 DNA는 어디로 흘러가는가(흑룡강신문)”는 반문구를 사용한 그대로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DNA 기원을 더듬고 현재 상황을 검토하고 미래의 불활실성에 대해 탐구하고있다.  “게임, 그 세상에도 희노애락은 있었다(송화강)”는 말하려는 주제가 일목료연하다. 어쩌면 내용을 더 읽을 필요가 없어져보인다.  “이제 일년, 상큼한 인연(송화강)”도 누군가와 엮은 1년간의 연분을 얘기하려는 목적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류형의 작품은 “그런 꼬리 하나 필요했다(도라지)”, “계절의 옥상에서 락원을 만나다(도라지)”, “네모난 내가 동그란 꿈을 꾸다(장백산)” 등이 더 있다.  제목이 주제를 담아내는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화의 제목에서 색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수 있다. 특히 “다, 가”와 같은 종결토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제목 자체가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전달하려는 이미지가 한결 또렷하고 명확하다.    예술적표현방식으로부터 보는 작가의 스찔 작가의 스찔은 제재, 주제를 포함한 작품 전반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래도 작가의 스찔은 예술적표현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고집하고싶다. 언어를 유일재료로 하고 언어의 파악을 통해야만 형상재창조가 가능하다는 문학의 특성상 어떠한 류형의 언어를 자주 선택하고 어떠한 문체를 구성하기를 즐기냐에 따라서 작가들은 서로 구별된다. 김학철선생의 글에서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냄새를 직접 맡을수 있었다면 림원춘선생의 작품에서는 향토적이고 구수한 정서를 바로 접할수 있었다.  여기서 한마디 짚고넘어가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우리문단에서는 작가의 문체연구에는 많이 등한한거 같다. 장기간 작품의 내용에만 집념하는 경향이 강하고 가끔 문체에 눈길을 돌렸더라도 미문(美文)에만 필묵을 할애할뿐 다른데는 신경을 도사릴 궁리 자체를 하지 않는다. 천편일률적인 문장구성과 문장 다듬에 구미가 굳어진 느낌이다. 작가는 언어를 나름대로 조합하는 특성이 있고 그러다보면 그것이 하나의 스찔로 굳어져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색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방법에서의 특수성을 찾아내는것은 그 작가의 스찔을 료해하는 하나의 도경이 되기도 한다.  리화의 수필은 우선 산문이라는 그 자체에 충실하여 짜임새가 느슨하고 긴박감보다 넉넉함을 선사한다. 작가의 여유로운 성격과 많이 담아있다. 특히 작품 갈피에 자작시를 한두개 끼여넣는것이 거의 습관이 되고있다. 리화 수필 작품의 절반이상에 시작품이 삽입되여있다는것을 감안할때 그것이 이미 작가의 하나의 “고질”로 고착되였다고 결론내려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그중 “바다를 듣다(장백산)”에는 4수의 시가 들어있다. 여기서 작가의 자유분방함과 느끗함을 엿볼수 있다. 한편 대자연과 인간사회에 대한 작가의 락관적인 정서와 진취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리화 문체의 또 하나 잘 드러나는 특징은 남성적인 추세와 취향이다.  “취미(료녕신문)”는 첫머리에 “수퍼에 가면 술 코너에서 한참씩 서성대군 하는 나는 애주가이다. 가끔은 맛있게 보이는 술 몇병 골라와서 맛보기도 하지. 나한테 작은 소원이 하나 있어. 널직한 집에서 살게 되면 술창고 하나 따로 마련하는거야. 세계 각국의 미주들을 갖춰놓고 그 술을 따라 마실수 있는 다양한 술잔들을 쭉~ 진렬해놓고 방문하는 사람에게마다 한잔씩 권하는거야.”라고 적고있다. 연후 술에 취해 된장국을 찾는 장면, 술을 보면 그속에 뛰여들고싶은 심정, 술과 박치기하려는 충동 등을 핍진하게 그리고있다.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면 녀성의 글이라고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작품의 파워가 강세적이고 스케일이 확장적이다.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도라지)”에서는 서두에 “막걸리 담은 호리병을 옆구리에 찬”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직 술을 마시기전인데도 “청담(清潭)”을 보고 선녀가 되고싶어지고 “내가 선녀라면 먼저 나무군 꼬셔야지. 내가 일부러 놓은 사랑의 투명한 날개옷 덫에 걸린 사냥군과 한평생 살아보고싶다.”고 통 큰 상상부터 앞세운다. 이어 “오솔길로 흰 수염을 내리쓰는 신선들이 나타남직도 하다”면서 “그러면 선주(仙酒)는 아니지만 내 컬컬한 막걸리 한잔 권해보고싶을텐테”라고 소원한다. 끝내 “계곡이 시작되는 정상에 이르러 막걸리 호리병을 꺼내여 퐁퐁 솟는 샘물에 담근다…샘물처럼 시원해진 막걸리가 그대로 시원한 감로수가 되여 혀끝을 적시고 목구멍을 적신다. “. 작가는 이쯤에서 “선녀인들 나에 비기랴, 신선인들 나에 비기랴.”면서 “취하지 않는체 하는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지레 취해서 흥겨워지는건 자연의 몫일지라…나도 취해보고 너도 취해보자”고 격정 높이 부르짖는다.  황진이와 같은 도고함과 대범함 그리고 일필휘지로 내달리는 기세가 돋보인다. 그보다 웅성미에 대한 고양을 통해 자연의 기적과 화려한 경치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한번쯤은 일탈할수 있다는 주장이 동감된다.  “바다를 듣다(장백산)”에서도 어김없이 남성의 점유물같은 “술”이 등장한다.  “술을 마셨다. 정확히 맥주 한병을 아주 잠간사이에 비워버렸다. 컵의 필요함도 못 느끼고 병 그대로 꿀꺽꿀꺽 마셨다.” 서두의 말마디들이다. 세마디가 3개 단락으로 나뉘여져 있다. 빠른 절주와 동시에 패기가 넘쳐난다. 바다를 듣기 위한 전주치고는 나름 요란하다. 바다의 지름과 깊이에 전률해서인가 아니면 바다의 속도와 기세와 사나움에 두려움을 느껴서일까. 작가는 바다에 앞서 먼저 취해있다.  상기 류형의 수필들을 분석해보면 언어 선택에서 격앙적이고 즉흥적이며 밝고 생동한 언어가 주를 이루고있다. 하나의 창작흐름을 형성하기 위해 단어 하나라도 의식적으로 다듬고 또 다듬은 흔적이 진하다.    수사법으로부터 보는 작가의 스찔 작가라면 물론 다양한 수사법을 능숙능란하게 다룰줄 알아야 한다. 장기간의 창작실천과정에서 수사법은 작가의 필속에 이미 녹아들어 특별히 신경을 도사리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나오게 된다. 머리속에 생각이 돌기에 앞서 필이 먼저 알아서 달려나가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래도 여러가지 수사법중에서도 작가가 자신의 애호에 따라 특별히 선호하고 손에 익고 또 자주 쓰는 수사법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그것이 작가간의 직관적인 구별이 된다.  리화는 창작에서 중단법과 생략법을 유달리 많이 쓴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사용하고있다고 말할수 있는데 말마디가 끝을 맺지 못하고 갑자기 중단되거나 느닷없이 생략되고있다.  “적어도 나한테서는.” (“취미”에서) “강제적인 의념을 주면서.” (“내 머리에 꽃핀 하나 달아줄수 있나요”에서) “력사는 굳어지고 문명은 흐르고 바뀌고…” (“내 DNA는 어디로 흘러가는가”에서) “저렇게 나한테로 동그스름한 해평선으로 휘우듬 항하며 달려오는것이.” (“바다를 듣다”에서)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거의 확인을 안하지만.”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에서) “풀과 꽃과 나무와 곤충과 새와 강아지와 그리고 이 땅과 교감하고 하나가 될수 있는 그런 꼬리 하나.” (“그런 꼬리 하나 필요했다”에서) “계절은 흐르고 풍경은 바뀌는것.”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에서) “마치도 기운 양말이 가난의 상징인것처럼.” (“날아라 양말, 달려라 맨발”에서) “이룩하고싶은게 너무 많고 이룩해드리고싶은게 너무 많은데 벌써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이 다가왔다면…” (“계절의 옥상에서 락원을 만나다”에서) “어쩌면 다이아몬드의 변치 않는 강력한 힘보다 강한건 변하기전에 지켜내는 힘인지도…” (“옥반지”에서) 우의 례문들에서 볼수 있는바 리화한테는 어떠한 토도 한개 단락을 마무리짓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접속토, 규정토는 물론이고 주어를 보좌하는 격토나 도움토도 미안한줄 모르고 문장을 종결해버린다. 그것도 대부분 경우 생략부호가 인용되지 않고 그대로 마침표가 되여있다. 시가 아니고서는, 그리고 리화가 아니고서는 두번 다시 볼수 없는 진한 풍경이다. 리화가 리화일수밖에 없고 리화의 글이 금방 눈에 들어오는 남다른 특별한 특징중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리화가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 또 렬거법을 들수 있다.  “풀과 꽃과 나무와 곤충과 새와 강아지와 그리고 이 땅과 교감하고 하나가 될수 있는 그런 꼬리 하나.” (“그런 꼬리 하나 필요했다”에서) “나, 이 시대의 사내가 되여, 나, 이 시대의 한량이 되여” (“바다를 듣다”에서) “술이야, 풍경아, 그리고 사람아, 이 세상아, 취한 나를 아름답게 봐주렴. 취한 나도 아름다우니께.” (“취미”에서) “종교는 없어도 수련은 있었던거 같다. 참다운 나를 더 크게 키우고 거짓의 나를 더 작게 하기 위해 부단히 갈등하고 발버둥치면서 살아온 그 하루하루가 모두 수련이였던것 같다. 많이 아프고 두려움 많고 나약했던 자신을 더 건강하고 더 굳세고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 내면과 싸우고 나를 둘러싼 환경과 싸워온 시간들이 모두 수련이였던것 같다.”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에서) 실례를 들자면 너무 많아 여기서 그치고저 한다. 단 작가가 렬거법을 자주 사용하는 리유는 자신의 감수와 주장을 독자에게 주입하는 효과를 노린 원인도 있겠지만 어순의 율동을 지향하고 절주미와 세련미를 추구하는 작가의 본능적인 욕구가 그 원동력이 되였다고 볼수 있다. 특히 단순 단어의 렬거보다 단일문들의 렬거, 나아가서 복합문 형식의 렬거 조합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리화의 수필을 조금이라도 유의해 살펴본 독자라면 리화는 심리묘사나 정서적인 느낌에서만 렬거법을 활용하는것이 아니라 행동 또는 동선같은 대목에서도 점진식 렬거법을 씀으로써 독자들을 자기가 목적한바로 끌고간다는것을 발견할수 있을것이다. 
12    김경화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1033  추천:1  2016-03-01
평론   김경화는 누구인가? 김경화 소설세계에 내재된 자아형상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문학작품은 작가 자신의 은폐된 인격이 상상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생활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 개체는 이 세상의 대부분 령역을 알수 없다는 한계성을 가졌다. 비록 수천수만년의 인류의 경험이 큰 보탬이 된다고 하더라도 일개의 인간은 온통 미지의 세계에서 허덕일수밖에 없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제한된 생활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작품에 내재된 견해나 주장은 작가의 경력과 지식바탕 그리고 주변 환경이란 테두리내에 한정되고 기반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을 뛰여넘는다는건, 다시 말해 초월이란 사실 너무 사치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결국 문학작품에서 작가는 나름대로 익숙한 분야를 펼쳐놓고 그속에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의 정체를 얘기하게 되여있는것이다. 미화가 되든 투정이 되든 발뺌이 되든 그 주인공의 몸에는 틀림없이 작가의 흔적이 묻어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목격자가 아니면 최소한 귀동냥이라도 한 사람이라야 독자를 설복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낼수 있다. 머리속에서 저절로 인물과 사건이 달려나올리 만무하고 그 단초나 모델은 꼭 현실에 존재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일단 작가를 료해하면 그 작품 해명도 상대적으로 쉽다고 본다. 필자의 경우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 작품론과 작가론이 함께 곁들여져야 비로서 완전한 평론이 된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기본 데이터도 가지고있지 않는 사람이 평론을 하게 된다면 오독의 확률이 배이상 높다고 확신한다.  김경화는 신세대 녀성작가중에서 비교적 삐여진 인물이다. 2007년에 첫 소설을 발표해서부터 몇년 안되는 사이에 수십편의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을 펼쳐낸 재간군이다. 그러나 쉽게 성공한 케이스라고 가볍게 넘기기에는 김경화의 신상정보들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  이제 김경화가 소설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 자신의 이미지와 메시지와 부호들을 한번 파보도록 하자.    그녀는 현장의 견증인이다 김경화의 고향은 청산리이다. 청산리는 항일독립투사 김좌진장군으로 인해 유명해진 고장이다. 그만큼 시시비비도 많았던 지역이다.  백과사전에는 “화룡현 청산리는 조선인 교민이 모여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룡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사방을 에워싸듯 둘러싼 주위의 산은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다.“고 적혀있다. 험준한 지형과 버스도 잘 통하지 않던 단절된 환경여건으로 청산리는 사건사고들이 곧잘 생기군 했다고 한다.  이웃 림장마을까지 5,60호 정도밖에 안되지만 우리민족 력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대첩이란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었었다. 일본군을 전멸했던 직소라는 곳도 바로 청산리에 위치해있다.  우리는 김경화의 소설들에서 자주 “청산마을”이나 “림장”이란 동네 이름을 접하게 된다. 소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의 배경은 “청산마을”로 부정을 저지른 엄마와 그 불륜의 결과물인 “나”, 그리고 오쟁이를 짊어진 “아버지”의 행패와 “엄마”의 외도사실을 토설한 “언니”의 운명을 교차적으로 그리고있다. 그러면서 엄마의 전철을 밟고있는 자신에 대한 인생궤도 수정을 설파하고있다. 인연의 덫에 걸려든 서로 다른 인간상을 통해 사랑의 함의를 부동한 각도에서 해부한 성공작이다. 그러나 일단 그런 결과를 도출한 그 원인에 대한 리해나 해석은 뒤로 미루고 우선 그 사건 자체가 참혹하고 리얼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암연”은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시내에서 살다가 부모가 리혼하는 바람에 동네 토호로 군림하고있는 할아버지네 집으로 온 “홍남”이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피를 속이지 못해 “영이”를 겁탈하려다가 살해하는 이야기를 쓰고있다. 이 소설에서는 “림장”이란 고장이 등장한다.  “흐르는 소리”도 살인사건을 다루고있다. 약혼까지 했던 “홍이”가 한동네에서 사는 “산호”의 애를 배면서 “산호”가 약혼남이 데려온 친구들한테 죽임을 당한다는 스토리이다. 여기서도 “림장마을”이 나타난다.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도라지”잡지 수상작인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는 불륜과 폭행과 배신 등 인간의 어두운 구석을 다루고있는바 “청산”,”림장” 두 곳이 모두 언급된다. 이 두 곳은 현실에서 이웃인것처럼 소설속에서도 원 형태 그대로 적라라하게 아래우 마을로 모습을 보인다.  자명한바 그곳은 이야기가 많은 동네인것이 분명하다. 물론 모든 사건의 원형이 그대로 실재했다고 보기는 무리이나 적어도 그곳은 창작의 동력이고 끊임없이 소재를 제공해주는 원천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이다 김경화는 “상처가 있어 우리는 위로받는다. 나의 소설은 상처가 있는 한 그냥 씌여질것이다.”고 말했다.  하다면 김경화의 상처란 어떤것일가? 그것이 알고싶지 않을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김경화의 작품을 더 깊이 파고들수 있는 관건고리일수도 있지 않을가. 김경화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바로바로 맞혀오는것들이 있다. 모든 작품들이 얼기설기 얽혀있어 마치도 장편소설을 헤쳐놓은듯한 느낌이 든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에서 나오는 관상쟁이가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도 나온다. 그것도 묘하게 모두 기차역에서 만난다. 이 두 작품에서 나오는 “엄마”는 모두 불륜의 당사자이다. 계렬작품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다. 그런데 다른 작품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계속 나타난다. “원점”에서의 “언니”가 “베거아리랑”에도 버젓하게 등장한다. 내 집에서 공부하는 “조카”도 여러 소설에 얼굴을 내민다. “개구리는 없다”에서의 “엄마”는 틀림없이 “베거아리랑”의 “언니”의 변형이다.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오빠”는 두가지 부류이다. 하나는 가정 타격에 의한 폭군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가 많고 의리가 강한 형상이다. 그런데 둘다 묘하게 마흔을 올려다보면서도 장가를 여직 들지 못한 로총각이다.  김경화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체로 “엄마”, “언니”, “오빠”가 위주이고 슈제트는 기본상 “가난”.”불륜”, “살인”이 주선률이다. 배경은 콩이나 강냉이를 심는 이밥 없는 동네이고 기름개구리와 송이버섯이 특산인 산골마을이다.  그래서 김경화의 아픔을 추리해본다.  먼저는 가슴에 한이 맺힌 가난이 아닌가 싶다. 겨우 배나 불릴가말가한 한전 뙤기밭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먹을것 입을것 배울것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수 없었던, 그나마 돈이 될만한 기름개구리와 송이버섯은 주먹세계에 의해 착취당해야 하는 억울함이 항상 앙금으로 남아있는듯 하다. 대부분 작품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는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형상을 그리고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듯 하다. 그리고 기름개구리를 떠올린 글이 “개구리는 없다”, “흐르는 소리”, “내가 살던 고향은”, “적마, 산을 내려오다” 등이 있고 송이버섯을 다소 비친 글도 “암연”, “흐르는 소리”,”내가 살던 고향은” 등이 있는걸 보면 작가의 남다른 가슴 앓이를 넘겨볼수 있다.  그래도 작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것은 몰락하는 농촌공동체와 타락하는 도덕관념 그리고 후대 교육이 피페해지는 현실일것이다.  “개구리는 없다”에서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행복했던 한 가정이 금전만능주의 세레를 받고 풍비박산나고 후대가 벼랑끝에 몰리는 과정을 묘사하고있다. “아이”의 엄마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친구의 말을 들은 후부터 남편과 티각태각하더니 끝내는 리혼하고 한국으로 시집가는 길을 택한다. 한국남자한테 얹혀 살다가 거기서 도망나와서 같은 교포남자와 붙어사는 파렴치한 행실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내에 남겨진 아들의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자기 인생만 즐기는 동물본능적인 삶에 안주하고 아들애가 사라져도 전혀 찾을념을 않는 윤리상실증에 빠져있다. 결국 “아이”는 절망한 나머지 이 세상과 맞서는 길을 선택하고만다. 작가는 이 글을 다룸에 있어서 쇼크료법을 사용, 온몸에 소름이 쭉 끼치게 한다.  “내가 살던 고향은”은 나날이 황폐화되는 농촌현실을 말하고있다. 13년만에 찾아오는 고모네 집은 “이불장유리가 떨어져 대신 천을 쳐놓은것까지” 이전과 똑같았다. 밭이 개발범위에 들어 우에서 보상이 내려오고 공장이 들어서서 돈도 타먹었지만 그 덕분에 “고기새끼두 없고” “학교도 마사지고” “풀도 다 노랗게 말라버리고” “개구리가 변종이 된” 고장이 되여버렸다.  “원점”은 남편이 펀펀하게 살아있는 “언니”가 탈가하여 어느 총각과 붙어살다가 그 총각이 머리 수술하면서 다시 귀가하는 사실을 쓰고있다.  모두가 현재 우리 주변에서 계속 벌어지고있는 생생한 일들이다. 말하자면 우리민족 모두의 아픔이고 우리 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아픔은 아직도 장시간에 걸쳐서 치료해야 할 고름이고 또 어쩌면 상처가 너무 커 영원히 치료불가일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해서 김경화는 계속 소설을 쓸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녀는 실천파이다 살기 위해서, 글 쓰기 위해서 김경화는 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빠졌을법한 코리안드림에 편승한다. 사랑하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섯살난 아들을 떠나 출국길에 오른다. 분명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리고 단편소설 “떼떼떼”에 이 대목이 그대로 나온다. “베거아리랑”에도 이런 설명이 나온다.  물론 김경화가 간 곳은 한국의 “청주”이다. 그리고 종사하는 업종은 식당이다. 이 점도 글을 써야만 하는 김경화의 소설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청주” 관련 소설은 지금까지 필자가 본것은 4편이다. 그중 중편소설 “베거아리랑’이 기존의 어려운 가정 소재를 한국까지 연장하여 다룬 반면 나머지 3편은 청주 현지에서 살아가면서 겪은 사연을 적고있다.  인상이 깊게 남는것은 단편소설 “잠이 들다”이다. 스토리는 별로 새롭지가 않아 보인다. 줄거리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장안의 화제에 자주 오르는 케이스이다. 아버지의 도박으로 엄마는 떠나고 형제들은 뿔뿔히 흩어진 한국 총각이 자기보다 두살 이상이고 일곱살난 딸까지 있는 조선족 녀인을 만나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동경하다가 현실의 벽에 막혀 실패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것은 소설의 성숙도보다는 작가적인 발견이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얼굴을 맞대고 부딪쳐온지도 20여년이 되여온다. 그간 조선족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살아온 존재였고 한국인은 항상 도고하게 우에 군림해온 주체였다. 그런데 “잠이 들다”는 이 량자를 평등한 위치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순이”가 일방적으로 인공류산을 했어도 “그”는 치미는 화를 간신히 참고 산후 조리까지 알뜰히 해준후 유유히 떠나버린다. 특히 “그”의 마지막 행위인 “잠이 들다”가 소설의 제목이 되여진게 흥미롭다. 조선족이냐 한국인이냐는 론쟁을 이젠 잠재울때가 되지 않았냐는 뜻 같기도 하고 서로 신경을 끄고 살자는 말 같기도 하다. 아니면 지나간건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같기도 하다.  “날개를 접는 시간”은 색다른 류형의 소설이다. 조선족의 눈으로 한국사회의 실태를 반영하고있었다. 순수하게 한국인의 생활상만을 보여준 작품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시사하는바가 적지 않다. 우선 바른 한국 젊은이의 형상을 보여주었다. 민영이는 아버지가 다리가 불편한데다가 치매에 걸리고 누나는 지력장애가 있지만 항상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고있었다. 미끈한 외모에 깨끗한 옷차림의 반듯한 청년이였다. 다음은 잃어졌던 민영이의 신 한짝을 되찾는 장면을 통해 진취적인 사람은 재기의 기회가 꼭 찾아온다는 진리를 호소하고있었다. 역시 제목을 “날개를 접는 시간”으로 단것이 돋보인다. 새가 날개를 접는것은 새로이 날개를 크게 펼치기 위한 전주가 아닌가?!  “여름감기”는 한국에서 8년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조선족이 자신을 돕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있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저버리고 악덕사장과 사사로이 합의를 해버렸다는 에피소드이다. 조선족의 자질 제고를 호소하는 따금한 글이라 하겠다.  모름지기 이 글들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것이 분명해보인다. 특히 “날개를 접는 시간”에는 작가의 아들인 “은비”가 거론되면서 실생활과 중첩되는 감도 없지 않다.   그녀는 이야기군이다 김경화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간군이다. 가슴 아픈 사연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차분하게 대처한다. 좀체로 격정이 끓어넘치는 경우가 없다. 자칫 랭담하고 무감각적일거라는 느낌이 진하다.  소설을 다룰줄 아는 고수이다.  작가가 독자가 되여 희로애락에 허우적거리면 그건 연기이지 창작이 아니다. 글쓰는 사람이 배우가 되여지는 경우면 꾸민 흔적이 진할수밖에 없고 따라서 독자들에게는 코미디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  그래서 김경화의 소설은 지극히 간단하다. 소설적인 장치가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할만큼 스케치적이다.  “환자들”은 연변병원에서 여러 계층과 년령대의 녀자들이 링겔을 맞으면서 주고받는 대화가 주를 이루고있다. 많이 싱거워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냄새가 억수로 난다. 흩어진듯 모아지고 중축을 잃은듯 다시 탄력을 받는 여기에서 작가적인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테테테”도 녀자들의 동네 마실놀이같은 소설이다. 오빠의 친구 “성주”의 부탁을 받고 사람 찾는 광고를 써주고 다시 “성주”의 삼촌이 젊었을때의 에피소드를 돌아보고나서 아들과 조카를 챙기는 일상을 보내다가 죽은 사람의 장례에 참가하는 등 거의 한줄로 꿰기 어려운 사실을 얘기하고있다. 읽기에 편하고 참으로 재미나다는 감각이다.    그녀는 적마이다 김경화는 적마 계렬 소설을 3편이나 썼다. 구경 적마란 무엇을 의미하고 왜서 적마에 집념하냐는 아무래도 작품 분석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에서 김경화는 작중 화자를 통해 “나는 어찌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길 잃은 한마리의 적마처럼 무작정 헤매고 방황했었다.”면서 “속에서부터 끓어번지는 이 엄청난 불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고 절규한다. 그러면서 “아, 적마여서 불행할수밖에 없는 녀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는 “적마”에 대한 설명이 한결 구체적이다. 관상쟁이의 말을 빌어 “역마살이 끼였소. 앞으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야겠군.”라며 다소 관념적인 운명론을 펼치더니 주인공이 “이제 적마, 적마가 되리라. 삶을 향해 용감히 돌진하는 적마, 그 무엇에도 물러서지 않고 저돌적으로 앞만을 보고 달리는 적마가”라고 다짐한다.  적마 계렬의 다른 한 작품인 “암연”에서는 “적마”에 대한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적마”는 역시 기구한 운명과 그 운명에 과감히 도전하는 형상에 다름 아니다.  아무튼 김경화의 전반 작품을 살펴보면 “김경화는 적마이다”가 최종 결론이 아닐가싶다. 많은 사건을 경험하고 많은 아픔을 겪고 많이 부딪치면서 싸우고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적마의 형상이 되여야 하는것이 김경화의 팔자이며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김경화의 사명이다. 
11    비정상 죽음으로부터 보는 비인간적 사회속성 댓글:  조회:803  추천:2  2016-02-20
    평론   비정상 죽음으로부터 보는 비인간적 사회속성   현춘산 장편소설 “호란강반의 비가”에서 나타나는 비판의식   장학규     현춘산선생은 지금까지 수필집 3권과 장편소설 1부를 출간했다. 다산이라고는 할수 없겠지만 문학을 생명처럼 여기고 거기에 혼신의 정열을 쏟아붓는 많지 않는 작가중의 한사람인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60대 중반인 현춘산선생은 70세전까지 두번째 장편소설 '검은 땅의 전설'을 마무리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한창 집필에 전념하고 있으며 여생에 단편소설집 한권과 에세이집 한권 그리고 장편소설 '호란강반의 비가'를 한문으로 출판하는것이 목표라고 한다.  현춘산선생의 대표작품은 장편소설 “호란강반의 비가”이다. 이 소설은 “흑룡강신문” 제13회 신춘문예당선작으로 신문에 련재될때부터 많은 쟁론과 화제를 불러왔던 작품이다. 논란거리였던 이 소설이 2010년말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쟁명은 일단 물밑으로 갈아앉았으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발효를 거듭하고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번 다시 끄집어내여 헤치고 뒤번지고 긁지 않으면 안될 문제작이라는걸 먼저 밝혀야겠다.  소설은 1958년 5월 중국공산당 제8기전국대표대회 제2차회의의 정신에 따라 성세호대하게 일어난 대약진 및 그와 동시에 출현한 인민공사화 운동을 그 사회력사적 배경으로 하고있다. 시간적으로는 대략 1958년 겨울부터 1959년 10월까지 채 1년이 좀 안되는 기간에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있다. 이 시기는 “반모진(反冒进)”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면서 전민적강철제련과 무엇에나 “공(公)”자만 내세우던 좌경로선이 살판치던 민감한 시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스토리는 두갈래로 병행되여 전개된다. 우선 조선족마을인 강남대대에서 원래의 농업생산합작사로부터 인민공사로 과도하는 과정에 림기호를 필두로 한 강남대대와 공사당위원회 서기 진장해를 대표로 하는 착오로선간의 아슬아슬한 모순 투쟁과 그 착오로선의 구체적인 형태인 공산풍과 평균주의 및 허풍치기사조로 인해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리고있다. 다른 한갈래는 농촌의 지식계층을 대변하는 호재덕교장과 교사들사이의 의식형태상의 차이를 통해 상부구조의 부조리실태를 고발하고있다. 필자는 “호랑강반의 비가”의 본연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현춘산선생의 단행본들은 물론 여기저기 널려있는 산재적인 작품들도 가급적 모두 찾아 읽어보았다. 현춘산선생이 이 장편소설을 창작하게 된 동기와 의거 그리고 합리성여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그런 자료들을 이 평론에 활용하였음을 밝힌다.    비판과 반성의식이 주선률 “호란강반의 비가”는 정치적색채가 농후한 작품이다. 중국이라는 특수한 정치체제속에서 자칫 엄중한 후과를 몰아올수 있다는 점에서 우선 먼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정세봉선생의 “볼쉐위크의 이미지”로 인해 문단지진을 겪었던 우리로서는 사뭇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력사적진실에 어느정도로 접근하고 그 반성의 폭이 얼마나 클지 관심이 쏠리지 않을수 없다.  현춘산선생은 1950년도 태생이다. 대약진시기에 그는 만 8~10세였다. 사맥을 확연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기억은 가지고있을수 있는 나이인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토지개혁이나 농업생산합작사와 같은 사연들을 근거리에서 동냥해 들었을법도 하다. 동시대인으로서의 생물학적 시계는 필경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나마 뒤로 달려와서 듣는 사람들보다 또렷하고 정확할수밖에 없다.  그래서인가 그의 많은 글들에 기아로 인한 에피소드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특히 호조조 조장으로서의 아버지가 토지재분배때 상등논의 제비를 뽑고도 “간부”라는 신분때문에 그 논을 다른 집에 양보하고 대신 척박한 알카리성땅인 갈대밭 7무에 씨를 뿌렸으나 3년동안 피낟알도 거두지 못하고 배고픔에 허덕였다는 사연이 수필 “가난은 영광도 수치도 아니다”를 포함하여 적어도 다섯편의 글에 기록되여있다. “가난뱅이 현가”라는 뜻인 “츙센”이란 별호를 달고 다니는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같은 감정을 쉽게 보아낼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이 아버지의 형상을 “호랑강반의 비가”에도 재현하고있다. 작가 스스로는 순박한 농민인 “조덕보”가 아버지의 모델이라고 밝히고있다. 어리무던하고 말수가 적으며 위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점까지는 거의 일치해보인다. 그러나 신분적인 면으로 보나 작품의 형상화측면에서 보나 “조덕보”보다는 “림기호”가 더 “아버지”를 닮아보인다.  “림기호”는 강남촌 개척자의 한사람인 “림치수’의 아들로서 토지개혁때 부친을 설복하여 토지와 역축을 내놓게 한후 강남촌의 리더로 부상한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대약진운동의 발발과 더불어 급속하게 악화된 식량난과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무리한 생산활동을 눈앞에 보면서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결국 농민의 아들인 “림기호”는 상급의 지시를 무시하고 농민들이 탈곡하면서 낟알을 쭉정이에 섞어넣고 못 먹게 하는 종곡을 찧어 먹고 또 한밤중에 논밭에 나가 벼이삭을 잘라오는 행위들을 묵인한다.  소극적인 반항이기는 하나 시사하는바가 작지 않다. 역시 공산당원인 작가는 조직과 인민대중의 리익이라는 명제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해온게 분명하다. 인민의 질고를 외면하고 당의 결정이라면 무조건 복종하고 집행하는 무뇌아적인 조직관념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을것이다. 고지식한 아버지라면 어떤 립장을 취했을가도 한번쯤 생각해보았을것이다.  결국 “림기호”는 공사서기가 파견한 민병들의 총구를 가슴으로 막아나서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선다.  “더는 모든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는 온순한 양으로 살수 없었다. 생존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을 위하여 더 이상 강포와 탄압에 숙어들수 없었다.” 작가는 “림기호”의 행위를 이런 강도높은 지문으로 변호하고있다. 많이 민감해보이고 위태위태해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풀이해보면 인민의 편에 선다는것은 결국 공산당이 시행착오를 겪다가 자신의 원 위치로 회귀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뭔가?! 이런 정치적인 반성은 현위 부서기인 조광한테서도 반영된다. 로선투쟁의 확대화를 두고 공사서기 진장해와 론쟁하면서 “중국에 무슨 자본주의가 있소? 소 한마리가 자본주의요? 수레 한대가 자본주의요?”하고 질책한다. 따라서 “백성이 기아선에서 헤매고있는 참혹한 현실앞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두가지 사상, 두갈래 로선 투쟁으로 세뇌가 된 당의 기층간부들이 군중의 질고를 도외시한채 이렇게 빈 말공부만 하고있는것이다.”고 의론을 펼친다. 조광은 또 농민들의 적극성을 북돋구기 위해 생산대를 나누는것을 지지하고 종곡대신 콩을 심어 보리고개를 넘길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그 년대에도 정책착오를 시정하려고 애쓰는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착오로선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은 오히려 학교라인에서 더 격렬하고 직설적이다. 체육교원 “최민수”를 위시한 엘리트들은 “대약진은 부실공사고 인민공사는 유토피아”라고 열변을 토하고있으며 강호석 같은 사람은 아예 우경분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날을 세우고있는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최민수”는 우경분자로 락인 찍혀 학교에서 쫓겨난다.   반면인물로 공략하는 허위명제 이 소설은 3명의 반면인물을 등장시키고있다. 솔직히 그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필자와 같은 후생들에게 공산당 내부의 이색분자들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 격정의 년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흔히 맹신적이여서 사회와 민중에 많은 피해를 주기는 했을망정 머리속은 항상 붉었고 또 자신들의 행위가 인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철같이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의례 추측하고있었기때문이다. 문화대혁명때처럼 투기적이고 카멜레온적인 사람들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역시 어느 세월에나 나쁜 사람들은 틀림없이 있다는 천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있다.  이 소설의 첫번째 반면인물은 공사서기 진장해이다. 부자집 말먹이군 출신으로 그 밑천때문에 해방군 기병부대의 하층 지휘관으로 있다가 영안진 진장으로 전업한 진장해는 그때까지도 말을 타고 다녔으며 “타마디”를 노상 입에 달고 다녔다. 그는 당시 정책로선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고있는 코미딕한 인물로 한겨울 추위에 우사를 개조하여 공공식당을 꾸리라고 강요하거나 얼어붙은 흙덩이를 까서 늪을 메워 논으로 만들것을 명령하는 등 동 끼호데식 존재이다. 한편 탈곡을 앞당기라고 련합탈곡기를 보내주고 흙을 폭파하라고 뢰관을 제공하는 등 더러 귀여운 면도 있다. 그러면서도 세번이나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입에서 쌀을 빼앗아가면서 총까지 동원하는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진장해의 소행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비인간적인 한 단면을 엿볼수 있다.  진장해의 비리나 부패는 의외적이다. 인민공사화로 인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 진장해는 공사식당의 작은 칸에서 기름에 튀긴 두부와 밀가루지짐을 먹는가 하면 배맞아 돌아가는 젊은 과부에게 밀가루와 좁쌀을 보내주기도 한다. 그 비상세월에 새집을 짓는다며 집재목을 공짜로 챙기고 끌끌한 로력을 무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두드러진 반면인물로 호재덕을 꼽을수 있다. 호재덕은 시골량반 가정에서 태여나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조선전쟁에 참가했던 호재덕은 어느 전투에서 겁을 먹고 부상병들을 데리고 후퇴하라는 최장진 중대장의 명령을 거역하고 홀로 살아남아 귀국후 시골학교의 교장으로 출세한다. 한편 리상주의자인 그는 학교에다도 식당과 기숙사를 만들었고 전혀 신빙성이 없는 과수원을 계획하기도 한다. 의사를 속여 알콜을 타내와서 물을 타서 마시는가 하면 취해서는 안해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욕하고 때린다. 우파를 잡아낸다고 애매한 정종구선생을 물어먹는가 하면 입으로는 로동대중 어떻구 떠벌리면서도 농민들이 진짜 락후하다고 깔보기도 한다. 나중에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들통날가봐 최장진 중대장의 아들인 “최민수”를 우파로 몰아 쫓아버린다. 성격이 모순투성이인 호재덕은 인간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할수 있다.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나젊은 “최민수”의 죽음에 추호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데서 그의 잔인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인물도 례외적인 결과를 맞이한다. 안해한테서마저 “하루종일 남을 해칠 궁리만 하는 사람이지 교육자가 아니”라고 점찍혀진 호재덕은 항미원조시기의 불미한 행실이 적발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문교조리”로 승진한다.  세번째 반면인물은 마을의 치보주임인 김종팔이다. 양아치 격에 해당하는 김종팔은 어머니 윤씨가 처녀시절에 항일군과 김치굴에서 벌인 한번의 정사로 생겨난 인간이다. 외모마저 추악하게 생긴 김종팔은 치보주임이라는 권세를 믿고 약자들한테 행패를 부리고 고자질을 일삼는 망나니 행실을 일삼는다. 아직 철부지인 어린애를 부농분자의 손자라면서 혼줄내주는가 하면 식량통제권으로 자기배만 채운다. 나중에 홀로난 과부 리봉숙을 겁탈하다가 실수로 죽이고 자기도 그만 사형을 받는다.  작가는 이 세 반면인물을 통해 그당시의 진실한 시대상을 보여주고있으며 아름다운 념원이 꼭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는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한편 어느 시대에나 체제에 기생하면서 악행과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꼭 있다는 명제를 새롭게 제시했다.     진실한 력사의 축도 및 거울 서두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호란강반의 비가”는 1958년 겨울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년이 좀 안되는 시간을 다루고있다. 그리고 50여호 250여명 인구밖에 안되는 강남대대를 취급하고있다.  그러나 유심히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라게 될것이다. 즉 250여명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에서 1년간 15명이나 죽어나갔고 3명이 정신이상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그중 자연사는 딱 3건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정상적인 죽음이였다. 전대미문이라는 단어를 시용해도 결코 과하지 않은 기막힌 기록이다. 석도길은 남포에 맞아죽었고 미순이는 변질된 두병을 먹고 죽었다. 동호는 끓는 죽가마에 빠져 죽었고 그때문에 윤씨는 뇌출혈로 횡사하고 남편과 아들을 다 잃은 리봉숙은 그만 실신해버린다. 마을의 좌상인 강덕칠령감은 비녀뿔소를 지키려고 장마철에 강을 건너다가 빠져죽고 유망한 지식인인 최민수는 자기를 해친 호재덕을 구하다가 홍수에 밀려간다. 옥점이와 영순이는 흔들개늪에서 먹을것을 찾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처자식의 투쟁장면을 목격한 오재식은 흐릿한 정신속에서도 충격을 받고 기절해죽는다. 리봉순은 강간당하다가 질식해 죽고 김종팔은 그 대가로 충살형을 받으며 가정과 사업, 직위를 몽땅 잃은 림기호는 사품치는 호란강에 몸을 던지고만다. 김분숙, 조덕보, 울산댁 등 자연사까지 포함해 어느 한 죽음도 가볍게 넘길수 없다.   필자는 이 사건들이 대개는 실재했던거라고 생각한다. 현춘산선생의 많은 글들에 그런 흔적들이 남아있기때문이다.  현춘산선생은 자신의 문학생애를 돌이키는 글에서 “조선전쟁의 총포소리속에서 태여나 농업합작화, 대약진, 인민공사화,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때가지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다. 비교적 특수한 나의 경력은 몇권의 장편으로 기록할만 한것이다. 더구나 대약진, 문화대혁명처럼 전대미문의 민족과 나라의 대재난을 겪어오고서도 그것을 글로 남기지 못한다면 후대에 얼마나 미안하랴 싶다.”고 토로한바 있다.  한때는 농촌기층간부였고 공산당원이며 교원인 현춘산선생이 피와 생명으로 점철된 력사화폭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인것은 결코 무엇을 폭로하자는 타산은 아닐것이다. 아직도 그 시절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에게 적나라한 실례로 그 불가함을 해석해준거라면 정곡을 찔렀다고 할수 있겠다. 세상의 그 어떤 이념과 주의도 무수한 생명을 짓밟는 대가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호소이며 진정 인민을 위하는 정당은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수 있는 도량과 흉금을 가지고있다는 위안이며 오늘의 풍요로운 삶이 절대 쉽게 온것이 아니라는 경종이기도 하다.  력사의 진실은 덮을수도 덮어서도 아니된다는 도리를 이 소설은 예술적진실로 서술하고있다.    맺는 말 지금까지는 이 소설의 줄거리와 인물들의 사회적속성 및 표현하고저 하는 주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작품의 구조적인 특성이나 인물이나 사건의 전형화 문제 등 아직도 토론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으나 이 평론의 취지와는 별개의 문제여서 다른 기회에 언급하도록 하기로 한다.   
10    분노 뒤에 찾아드는 사색 댓글:  조회:711  추천:1  2016-01-07
분노뒤에 찾아드는 사색 리주천선생의 단편소설 "땅땅버버리"를 읽고   “땅땅 버버리”!   너무 너무 생동한 화면이였다. 제목이 립체적이고 작품 전체가 추호의 가미도 없는 스케치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분노가 터진다.   에익, 망부석같은… 그만한 실패에 뭐 “혼이 언녕 죽”었다고? 그 론리,그 추리대로 하면 이 세상에 송장이 되여 살아가는 인간이 수없이 많을것이다.   삶이라는것이 고행일진대 그것이 달갑게 받아들여지고 거기에 거꾸러지지 않을때에야 인생은 비로서 뜻있고 보람찬것이다. 한국의 정주영옹도 수천만원의 빚더미에 주저앉았더라면 오늘의 현대그룹이 나질수 없는거고 “우선 빚쟁이가 되여봐야 부자가 되는 비결을 알수 있다”는 철학도 펴내지 못했을것이다. 그런 용기와 도량이 없다면 남을 웃기게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도 말아야 하는것이다. (안그렇습니까? 김동수형님)   그러나 일단 분노를 터뜨리고보니 인차 심각한 표정이 되지 않을수가 없다. 무엇때문에 이 나라 이 땅덩어리에서는 천시가 주어져도 지리와 인화가 뒤받침되여주지를 않으면 많은 경우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하는건가? 단지 우리가 “닭무리에 끼인 학”이기때문인가? 아닐건데…”닭”들도 “동수형님”과 꼭같은 봉변을 당하는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던것이다. 무언가 꼭 다른 원인이 있을것이였다.    “땅땅 버버리”는 무언중에 이 점을 착안하고있는것이다.   “동수”의 경우는 행운의 신이 추파를 보냈었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짠지장사를 나왔던 사람이 경기 좋은 음식점을 경영하게 되였으니깐. 개혁개방정책과 공백이라는 천시요소가 갖추어진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입도 함박만큼 벌어졌던것이다. “…큰 맘 먹고 시작했는데 일이 될것 같구만…” 그만큼 시장경제학적인 안광으로 보면 앞날이 환히 내다보인다는 얘기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시경은 썩 길지 못했다. 처음에는 쏠쏘리패들이 외상놀음으로 애를 먹이더니 이어서 경쟁 적수가 나타나고 뒤따라 공상국이라는 관청이 생떼를 먹이고 나중에는 진짜 실력파인 깡패가 대두하여 음식점을 망가먹기에까지 이른다.    자명한바 작자가 노린 점도 바로 상기한 소위 중국의 “실정”을 백일하에 폭로하자는데 있는것이다. 필자 자신도 개체호노릇을 1년간 해본적이 있어 잘 알고있지만 중국에서 그 어떤 장사를 하자면 공상, 세무, 공안, 깡패 등 4대 요소를 끼고있어야 비로소 운영이 되여가는것이다. 경영수단이거나 서비스같은것은 물론 차요적인 것이다. 여기엔 “황제가 멀다”는 운운도 성립되지 않는다. “황제”를 가까이 모시고있는 베이징에 가보아도 꼭같은 도리로 돌아가고있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법제건설이 아직까지 멀었다는것으로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제정한 법은 허다히 많다만 그것을 제대로 집행하는 질서가 보장되여 있지 못하니깐 경제가 기형적으로 운행되어가고 따라서 사람들의 심리도 비틀어져간것이다.   그러니 “동수”의 실패는 필연적이였다. 모난돌 정 맞기로 지리와 인화의 우세가 없이 단지 천시만을 믿었던것은 우둔한 처사였다. 게다가 악성순환으로 형성된 나약한 국민성의 작간으로, 매번 역경에 처할때마다 법에 의거할 념은 못하고 소극적으로 타협하는 방향에로 나아간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정기풍이 쉽사리 싹 트고 생성할수 있는 하나의 온상을 발견할수 있는것이다.   우에서 우리는 “동수”가 실패할수밖에 없는 사회적요소들을 파보았다. 두말 할것 없이 “동수”가 결과적으로 실패의 운명을 가지게 된것은 그 자신의 심리소질, 문화층차, 사회적응성 등 자체요소와도 밀접한 련관성이 있는것이였다.    무었보다도 땅을 떠나는 “동수”의 최초 동기부터 불행의 근원이 묻어있는것이다. “그 땅이 내 배를 위안할수 있었던들 세상물정에 눈 어두운 내가 이렇게 객지에서 허둥거리겠소.” 하는것처럼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주밀하고도 장원한 계획이 없이 물덤벙술덤벙으로 고향땅을 등진것이다. 짠지장사를 하다가 음식점을 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미쳐 냉큼 덤벼 들고, 어찌보면 이러한 성격특징이 우리민족의 통병이 아닐가.  한족들은 집 한채를 지어도 몇년간 돈을 벌고 무엇을 우선 사들이고 무엇을 후에 하는가를 면밀히 타산을 한다. 우리민족은 무엇이나 눈앞에 닥쳐서야 응부하고 그것도 심각한 반성과 타산을 할 사이없이 총망히 덤벼드는것이다.    “동수”도 음식점을 차리기전에 그것의 성공여부를 잘 따져보고 관청이나 깡패들이 시끄럽게 굴때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것을 조금이라도 연구했더라면 그처럼 속수무책이 될수가  없을것이다. 반대로 말할때 “나”란 사람이라도 만나지 못했더라면 “쏠쏘리”패들한테 벌써 망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맹목성과 주먹구구가 우리에게 되안겨준 가장 훌룡한 례물이라고 말해도 가히 잔인하다고는 말할수 없을것이다.   다음은 “동수”의 성격기질문제인데 남을 너무 믿는것도 그가 최종적으로 빈털터리가 되고만다는 예언이 되는것이다. 장사군은 제 애비도 속인다는 말처럼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자면 필요한 거짓말도 더러 할줄 알아야 하는것이다. 더우기 상인의 경우는 자신의 리익이 침해당하는 일에 손을 대는것은 만성자살이나 다름없다.    “동수”는 “옆집 로반나그네”의 가련한 소리에 속아 그 집에 가서 일을 봐준다. 결과 명성도 손님도 모두 빼앗기고만다. 시장경제속에서 경쟁적수는 윈쑤와 다름이 없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먹어치우는 생사관두에 경쟁 적수를 돌봐주는것은-극단적인지는 몰라도-백치의 행위나 다름없다.    하긴 그래서 결국 옆집에서 쳐온 뺨도 맞은거고 파산도 당하고 만것이다. “동수”에게는 더없이 보귀한 경험이 될 일이건만 “혼이 언녕 죽”었으니 더 할 말도 없다. 하물며 “동수가 다 음식점 꾸리다니?.” 하는 의문까지 곁들어 나왔으니 말하면 눈물밖에 될것이 없는것이다.   (제발…이런 사람들은 나오지도 마십시오. 민족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진정 능력있는분들도 세밀한 계획표를 꾸미고 나오십시오. 무정한 현실은 결코 패자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정감으로 리해하고 받아주기에는 훌룡한 소설이다. 또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에 발표된 적지 않은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살찌우고 키우기에 없어서는 아니될 정신식량으로서의 소설이다. 그래서 민족천대시하라는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냄새가 안받침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적으로 긍정하고싶은 마음이다.   * 본 평론은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에 발표되였음.
9    변혁기의 인생을 감오하며 댓글:  조회:886  추천:1  2015-12-26
변혁기의 인생을 감오하며 김운룡선생의 단편소설집 "사랑의 그림자"의 인간상 고찰   김운룡선생하면 흔히 력사학자 또는 력사소설가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사실상 김운룡선생의 저서와 창작생애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견해 내지 정의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만큼 항일투사의 자손으로서 김운룡선생은 항일을 둘러싼 우리 민족의 이민사, 수난사, 투쟁사에 남달리 집념하고 있으며 따라서 김학철, 리근전, 윤일산, 김송죽, 김길련 등등과 더불어 민족력사 바로 알기와 민족의 뿌리의식을 고양하는데 많은 힘을 이바지해왔다.  그리고 더욱 보귀한 점은 환갑을 넘긴 김운룡선생이 창작관성에 얽매이지 않고 시야를 새로 정비하여 한창 대하 력사소설 "광야의 아리랑"의 창작에 무비의 정력을 몰붓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던가. 특히 작가론의 경우에는 그 작가가 태여나게 되는 시대배경과 사회환경을 무시할수 없다. 독립운동지사의 자손이라는 운명은 김운룡선생으로 하여금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지 않을수 없게 하였고 의식형태에 관여하는 국가공무원이라는 경력은 그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1979년,36세의 나이에 처녀작 "한 실련자의 눈물"(한문)로 문단에 데뷔했다는것은 좀 늦은 감도 없진 않으나 그해가 바로 이 땅에서 좌경사조를 점차 청산하기 시작한 해빙기라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력사소설가 김운룡"의 뒤늦은 탄생은 별로 해괴한 일이 아니다. 필경 그 이전의 살벌했던 년대에는 금기도 너무 많았었다. 실제로 "력사"나 "민족"이란 테마는 너무도 민감하고 묵중한것으로 남다른 경력, 견식이나 노력이 없이는 운운하기도 어렵다. 다른 문학쟝르보다 기술적인 문제 시스템이 많을수 밖에 없고 그런만큼 상대적으로 더 길고 어려운 작가적인 고행을 겪게 된다. 하기에 우리는 대한민국림시정부와 조선의용군이 활동한 지역을 샅샅이 답사한 김운룡선생을 만나게 되고 따라서 김운룡선생이 작가수업의 실행으로 굵직한 력사적품 사이사이에 현실주제로 펴낸 단편 편린들을 접하게 된다. 지금 필자의 앞에도 력사무드의 주류에서 삐어진 "편린"들의 묶음인 "사랑의 그림자”가 놓여있다. 물론 이것이 확실히 작가적인 준비작업으로 이루어진 "편린"이냐가 논란의 게제가 될수도 있다. 하지만 김운룡선생의 전반 작품활동에서 현실주제의 작품들이 적은 비중을 분담한다는것은 의논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것은 그게 아니다. 김운룡선생에게도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주제의 작품들이 적잖게 있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흥분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그림자"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주지하는바 이 시기는 맞춤하게도 중국사회가 변혁기로 막 들어선 시기였다. "전형(转型)"이라는 단어가 난무할 지경으로 정치나 경제계는 물론 문학도 그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을수 없었다. 여러가지 문학사조가 나타나고 색다른 문학주장들이 제기되었다. 20세기 80년대는 말 그대로 다시 돌이켜보게 되는 획기적인 시기였다. 물론 재래로 시대변천에 둔한 반응을 보여준 민족문학의 고루한 인습때문에 동안을 두고 억지로 따라간 약점도 보아내게 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김운룡선생의 작품들에서 다른 곳에서는 대면한 적이 없는 생경한 인물, 특이한 인물, 개성적인 인물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상형의 생경한 인물 대체로 이 부류의 인물들을 생경하다고 말하게 되는것은 지금의 시각으로서는 리해가 잘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러한 주인공들이 모순이나 갈등이 설정되여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의 주장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주와 선주"(1984년)의 주인공 은주는 산촌의 교육사업에 헌신할 결의가 되여진 처녀이다. 어려서 장백골에서 자랐던 은주는 학교가 없고 선생님이 없는 시골 어린이들의 설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 하기에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멀동학교에 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별 무리가 없다. 문제는 선주가 남자친구를 찾아서부터 생긴다. 로처녀로 늙어가는 선주를 사랑밖에 모른다고 타매하는가 하면 공안국에서 사업하는 애인을 멀동으로 조동시키면 되지 않느냐며 가능성도 없는 충동질에 신경을 몰두한다. 나아가서 "난 멀동산에 사랑을 심을래." 하는 혁명적랑만주의를 펼치기도 한다. 인물형상이 극단화에로 나아간 전형이다. 다행히 결말이 희극적으로 반전이 되면서 최미자선생이 림업부문에서 사업하는 남편과 함께 멀동으로 오는가(합리성 내포) 하면 은주에게 합당할 법한 "박창혁"이란 남자선생도 등장한다. 사실 작가의 설계도에는 이상이 없다. 산재지구의 민족교육은 시종 정부나 민족유지의 골치거리였다. 금방 정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인민과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한다."는 기치를 내건 문학도 당연히 거기에 주목하게 되였고 따라서 관성적인 작법으로 전형이라는것을 수립하게 되였다. 그 시절에 흔히 그랬던것처럼 은주도 전형화가 지나쳐 코미디언같은 별종이 되고있지만 이 인물은 중국 사회가 서서히 변화되여가고있음을 깨닫게 하는데 모름지기 일조하고 있다. 1984년이면 농촌에서 이미 도급제를 실시하고 도시에서는 연해개방도시를 가동한 시기였다. 농민들은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였고 도시는 인구유동의 관제를 늦추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와지게 되었다. 중국농촌인구의 역성장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나타난 문제는 어쩌면 현재에도 우리가 안고있는, 또 풀기 어려운 난해한 문제가 아닐가 싶다. "탑"도 그런 쪽으로 논리 가닥을 뻗고 있다. 25년간이나 촌당지부서기 사업을 해온 조성구노인에게는 남에게 말 못할 아픔이 있다. 25년간 룡포동네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 쪼들리고 가난한 생활을 이어왔다. 민족학교도 그냥 초가집이다. 그것이 사회체제가 빚어낸 악과라는것을 조성구노인은 젼혀 모르고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대를 이어 쌓아온 탑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식으로 민족사회라는 좁은 테두리속에서 문제를 찾기 때문에 그는 고향을 떠나는 시각까지도 답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사회조직의 말단에 위치한 조성구노인도 책임을 져야 할 일이였다. 허나 "남처럼 이렇게 저렇게 돈을 벌수 없는 처지다. 그저 아껴 먹고 아껴 입는것으로 돈을 모아야 했다."는 조성구노인에 대한 묘사에서 지나온 우리 사회의 비극을 우선 반성케 한다. 그렇지만 조성구는 참회를 할 대신 오로지 민족사회에 불만하는것으로 안주하며 "닭알을 한알 두알 모아서 팔고 돼지를 키워 팔고 그리고 김치장사를 하고 약재를 캐서 한푼두푼 모으는.." 고리오식 구두쇠생활을 영위한다. 그것을 촌학교 재건을 위한 의식적인 행위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설에서 우리는 조성구가 꼭 학교재건에 나서야 할 아무런 리유와 계기를 발견할수 없다. 그러니까 조성구는 한낱 범인에 불과하다. 그더러 "민족의 탑" 운운을 시키는것은 어딘가 형이상학이다.  이러한 조성구의 형상은 이 소설이 처했던, 개인주의와 자유화가 고조에 치달았던 1988년 좌우의 사회현실과 상당히 외곡되고 있다. 어쩌면 그렇다는 사실이 이 인물의 존재의 합리성을 다소 잉태하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쓸쓸한 충격을 주고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시절에나 있을 은주나 조성구에게는 많은 의문이 묻어있다. 지나간 력사의 매듭을 헤치는 실마리의 인간상이 아닐가 싶다.   특이한 이야기와 인물의 특이화 평론인의 감각은 이 부류의 작품들을 한마디로 렵기적인 성격을 띠였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그전도 아니고 그후도 아닌 바로 20세기 80년대 중기의 문단이 다원화로 진입했던만큼 이런 성격의 소설도 비로서 출현이 가능케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것은 시간적으로 폭이 많이 벌어진 상기한 "리상형의 생경한 인간상"을 묘사한 작품들과는 달리 이 부류는 1986년과 1987년 2년 사이에 집중되였다는것이 주목된다. 우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80년대 중기의 문단은 활발한 양상을 띠고있었다. 상처문학, 반성문학, 개혁문학이 절대적으로 주류를 이루었던것이 그전의 문단의 상황이였다면 80년대 중반을 분수령으로 문단은 점차 다양화로 매진하였다. 한편 금전의 충격, 의식형태의 분화 등으로 하여 혼란한 국면도 조성되였다.  문학인들은 급변하는 시대를 나름대로 읽고 리해하면서 예술상상과 예술기교를 남김없이 발휘하여 그것을 반영하기에 급급했다. 우리 문단도 물론 주류사회와 주류문단의 충격을 받을수밖에 없었다.  김운룡선생의 경우 이 시기에 정부주관의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었기때문에 소설에서도 자연히 경제문제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하여 우리는 이런 소설들에서 변수가 많은 기업가들의 특이한 이야기들과 만나게 되고 금전으로 인한 갈등이나 인간관계를 통해 불쑥불쑥 나타나는 색다른 인간상을 접하게 된다.  "황금세계"의 백기준은 이중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성위서기의 부름까지 받을만큼 부자가 된 그의 눈에 조강지처 봉녀는 행시주육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만큼 봉녀의 행색도 좀 구차하다. 배운 것이 없어 말을 함부로 하고 몸 거두매를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순임이는 청순하기만 하다. 젊고 예쁠뿐만 아니라 공장을 그대로 맡겨주어도 될만큼 경영재능도 갖추고 있다. 백기준의 마음이 순임이쪽으로 쏠리게 되는것은 당연한 일이고 순임이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백기준은 결국 사랑없는 혼인을 고집하게 된다. "아지 못할 사랑이여"의 강상호는 더 나아가 도인같은 인물로 형상화되였다. 그는 안해 월옥이가 윤칠이와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참을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군희의 유혹을 물리칠수 있는 심리적 준비가 되여있다. 오직 "모범공장장"답게 사업에만 몰두하는 로보트식 생활만을 탐닉한다. 결과 월옥이의 배반을 당하고 군희마저 잃게 된다. 이 소설은 월옥이라는 인간상을 상당한 깊이로 그리고 있다. "성체육학교 예술체조지도원"이라는 신분은 그녀에게 랑만과 풍류를 즐길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템포를 맞추지 못하는 강상호때문에 월옥이는 단연 월선을 단행한다. 그것도 남편한테 내놓고 론쟁할수 있을만큼 당당하게 단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이나 타매같은 흔적은 꼬물도 찾아볼수 없다. 오히려 여러 입을 통한 변명이나 동정이 사처에 널려있다. 분명 질책의 분동을 강상호쪽에 올려놓고있는것이다. 상기 두 소설에서 공통점은 순임이나 군희를 통해 시대변천에 따른 새로운 혼인관, 애정관을 제시했다는것이다. 물론 당시의 실정에서 순임이의 로골적인 유혹이나 군희의 당돌함은 어색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문학적인 안광으로 볼때 백기준이 성격기질상 두 선을 긋고있기 때문에 순임이가 끼여들 틈이 생겼고 강상호는 사랑에서 시종 피동적인 지위에 서있기에 군희의 접근을 불러오고 그뒤에 따르는 반감도 재촉했다는 해석 역시 그럴듯 하다고 본다.   "압록강의 넋"은 제3자가 등장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구조에 많이 치우치는듯한 비환리합의 고루한 사랑이야기를 담고있다. 향숙이는 800원의 빚때문에 백치의 색시가 되고 밤마다 시고모의 감시하에 옷벗는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우숙이 오빠"와의 사랑도 상대방 가족의 반대로 실패하는 불행한 녀인이다. 이 작품이 돋보이는것은 향숙이가 이런 운명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짠지장사로부터 시작해 "석동호텔"의 지배인이 된다는 이색적이고 아이러니한 운명그라프때문이다.  지금 보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가령 우리가 정말 영화에서처럼 1987년으로 가볼수 있다면 그때 이런 이야기는 전설과 같은 충격을 주게 된다는것을 알수 있다. 역시 향숙이도 하나의 대상물이 되여졌으며 사회중심이 경제에로 전환된 시점에서 그녀의 특이한 형상과 함께 한 시대를 떠미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을것이다. "구름의 벽"도 혼인등기까지 한 녀자(안해)와 리혼도 하지 않고 다른 녀자를 안해로 데리고 산다는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두말할것 없이 얼마 안되여 금전으로 인해 부부간에 감정위기가 닥치게 되고 맞춤하게 전에 버림받은 녀자가 한 인물이 되여 기적같이 나타난다. 이제는 계월이같은 인물의 느닷없는 출현에 크게 놀라지  않아도 될것 같다.   시대와 맥박을 함께 하는 개성화된 인간상 어쩌면 이 부류가 전반 작품집의 주류부분이 아닐가 싶다. 문학이 현실생활의 반영이라고 할때 초랑만주의나 초현실주의보다는 사회와 시대에 밀착된 작품이 그래도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한 시대를 정확히 료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것보다도 당시 문단에서 유행되였던 사조나 주장들이 혹은 원형대로 혹은 창작수법으로 녹아들어 우리 앞에 나타나고있는것이 신기스럽기만 하다.   "인심"은 그 창작년대(1983년)가 귀띔해주고 있는것만큼이나 과시 상처문학의 범주에 들수 있는 작품이다.  전반 줄거리에 꿰여진 아픔들은 단 하나의 상처에서 오게 된다. 27년전 "나"의 아버지가 의외의 사고를 당하면서부터이다. 입원치료를 거치자면 백원은 있어야 했지만 그 돈을 도무지 구할수가 없었다. 대대당지부서기였던 아버지가 고지식하게 무당 만근이란 부당하다고 상급에 사실대로 회보한 보응이였다. 다행히 군관인 외삼촌이 결혼비용으로 부친 돈이 마침 도착해 아버지는 병치료를 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빌미가 되여 “우리 가정”의 아픔이 곧바로 이어진다. 우선 첫날 이불도 없고 상도 받지 못한 외숙모가 앙탈을 부리며 떠나갔고 뒤이여 외삼촌의 새살림을 보러 갔던 어머니가 쫓겨오고 아버지의 상사와 나의 희사에도 외삼촌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뿐이 아니다. 어머니의 회갑상을 마련하려고 "우리 내외"가 시내로 갔던 김에 외삼촌네 집에 들러보니 그날은 마침 외삼촌의 큰딸 용순이의 잔치날이였고 청첩도 받지 못한 불청객들은 거지와 같은 구박과 대접을 받게 된다. 저주 받을 그 년대의 자그마한 사건 하나가 둘도 없는 혈육사이를 20년간이나 벌려놓고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생동하고 실감이 난다. 맏이인 "나"는 무던하면서도 주대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민족 녀성상인 외유내강형이고 외삼촌은 우유부단하고 안해한테 쥐여사는 전형이다. 가장 잘 다루어진 인물은 외숙모이다. 퉁명스럽고 실리적이며 솔직한 일면도 가지고 있다. 이런 인물들의 부동한 성격이 등장하고 충돌하면서 가난이 결코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주제를 유도해낸다. 따라서 새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부활한 "쌀독에서 인심이 니온다"는 천고명을 재확인한다.  "곱사등 황말구"는 새로운 아품을 체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지주의 손자로 태여난 황말구는 천대와 기시를 받을대로 받아온 인간이다. 작가는 그의 과거를 의식적으로 회피하고있지만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곱사등이 되는 사실에서 그 세월의 반인간성, 반사회성을 얼마든지 상상해낼수 있다.  물론 작가의 치중점은 거기에 있는것이 아니였다. 하기에 우리는 장애인이지만 정부의 배려로 기술을 익혀 부자의 꿈을 이루어가는 황말구를 보게 된다. 황말구의 비극적 근원은 어디까지나 불구라는 그 자체에 있는것이라고 소설은 항소하고있다. 동네 아낙네들의 식후 한담거리가 되고 지어 자기가 도와준 봉수한테서도 "...오성구하고 붙었으면 그래도...그렇지만 말구하고말이야..." 하는 멸시의 평을 듣게 된다. 말구에게는 피리외에 친구가 없고 생활동반자 역시 있을수 없다. 웬 사기군 처녀한테 3,000원을 떼운후부터 그는 녀자들을 더 경계하는듯 하다. 그러나 "나”에게만은 예외었다. 봉사 아버지를 가진 나는 남들처럼 황말구를 대할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의 부드러움과 선량함이 황말구의 얼어든 마음을 녹여주었던지 그는 용기를 내여 "나"에게 접근해왔고 여러 기회를 리용하여 "나"를 도와주었다. 그 행위는 결코 여느 사람처럼 음특한 마음에서 생겨난것이 아니였다. 인간사이에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싶었을 뿐이였다. 그런데 그런 행위들이 결국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황말구는 두 시형에게 얻어맞아 머리가 터지고 "나"도 남편한테 맞고 동네에서 머리카락을 잘리우는 망신을 당한다. 이어 황말구는 나의 청백과 명예를 되돌리려고 결연히 죽음을 택한다.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황말구의 형상을 통해 우리 사회 장애인들의 어려운 삶을 실감케 한다. 원체 동정을 받고 도움을 받아야 할 장애인들이 오히려 기시 받고 박대당하는 사회현실을 질타한것이다. 이 소설은 "장애자보호법"이 나온 바로 그 전해에 창작된 것으로 선각자적 역할을 충분히 발휘한것으로 된다.   "사랑의 그림자"는 다른 류형의 피해자를 등장시키고있다.  산월이는 부모가 도맡아 정해준 혼인으로 하여  병신이 된 성룡이와 살아가는 불행한 녀인이다. 그녀는 밤마다 이어지는 성룡이의 변태적인 발악과 행패를 초인간적인 의력으로 감내한다. 어차피 그녀도 동정을 자아내는 약자가 분명하지만 련민에 앞서 울분부터 터진다. 그녀의 불행은 스스로 자초했다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팔자 타령만 부르며 체념에 빠져 있는 산월이의 형상은 얄밉기만 하다. "병신인데 불쌍해요", "남이 욕해요.죄 만나요." 따위의 낡은 륜리도덕관념으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고집하는데는 억이 막힐수밖에 없다. 더우기 성룡이가 병이 위중해 병원에 입원한 사이 박털보와 곽천이의 변을 당하고난 산월이가 말도 안되게 성룡이를 출원시켜 데리고 오는 장면에서는 주먹이 불끈 쥐여지기도 했다. 이것이 그 시대 우리 녀인상일가고 생각하면 그저 서러워지고 소름이 끼친다. 한편 도의적인 멍에를 걸머진 산월이의 정조관이 "나"의 출현으로 하여 조금씩 흔들리고 변화되여가고 있는것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밝은 생활양식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작품집의 표제로도 되여있는것을 보면 작자가 특별히 만족하고 득의하는 소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산월이의 형상을 다각적으로 해부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작가의 심미취향 같은것을 유인해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산월이는 성룡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녀자의 직분을 지키고 정절을 지킬 따름이다.". 그래도 그녀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만다. 어디로 갔을가? 물론 "그녀는 불구자남편을 버리고 행복을 찾을 녀인이 아니다.". 하다면 그녀가 성룡의 옆으로 다시 돌아올수도 있다는 제시인가? 누구처럼 기적같이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와서 성룡이의 병을 고치고 행복하게 살아갈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작가는 대답하지 않았다.산월이는 그런 확정성과 불확정성을 동시에 가지고있는 인간상이다. 허울뿐인 남편을 위해 일생을 희생할 각오가 되여있는가 하면 외간남자인 "나"에게 마음을 내여줄 여유도 있다. 모순당착한 산월이의 형상을 통해 우리는 변혁기를 살았던 우리 민족 녀성들의 고민과 몸부림을 느껴받을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산월이의 거처나 앞날이 별로 중요한것도 아니란 말이다.  "노을이 사라진 곳"은 상기 작품들과는 맥락을 달리하는 소설이다. 녀인의 몸체까지 포함한 모든것이 점차 상품화되여가는 현실에서 울고 웃는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격변기에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림해야 하는가 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도출하고 있다. 형민이의 무능이 숙녀를 사창가의 녀인으로 만들었다면 궤변일가. 적자생존의 시대에 살면서 안일을 자랑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런 현상에서 전반 민족의 반성을 촉구하는 사색거리가 아닐가. 종합적으로 김운룡선생님의 작품은 매우 활달한 문제를 보여주고있다. 시대감을 지니면서도 초월의식이 뛰여난다. 자기 탐색의 주제를 이 정도로 구체화할수 있는 작가가 20세기 80년대의 새로운 문학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을 모을만 하다.  * 이 평론에서 "양귀비꽃"은 별종으로 제외하였음을 특히 밝힌다.    *주: 본 평론은 2005년 7월 김룡운선생 편저로 된 작가론 "김운룡과 그의 소설연구"에 수록되었음.
8    두번째로 맞다든 운명의 시련 댓글:  조회:852  추천:0  2015-12-26
두번째로 맞다든 운명의 시련 박옥남의 단편소설 “썰물”(흑룡강신문 1993.4.17 진달래 부간)을 두고   흠집 많은 글 지나치게 비감적이고 체념적인 글이여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몇가지 의문을 제기해본다.  첫째, 우리민족의 현상태가 과연 소설에서 반영한것처럼 그렇게 처참한가 하는것이다. “썰물”을 읽으면서 필자는 본세기초의 대이민의 장면과 겹쳐지는듯한 환영이 들었었다. 비록 작자의 발뺌이 여러곳 되지만 그 어수선하고 허탈에 가까운 장면은 아무래도 1세들의 전철이라 해야겠다.  다음은 주인공의 행위가 모순투성이이다. 동서의 편지 한장에 만삭이 된 안해로 하여금 도보로 17리 길을 걷게 하고 쇠울타리를 타고 넘게 하는 역사를 시키는 남편이 어쨌던 정상적이 못되는 축이다.  세번째로는 제목의 내연인데 썰물이라면 해안에 사납게 덮쳐들었다가 물거품만 남겨놓고 꼬리 빳빳이 바다로 내빼는 그것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성행되는 류행어 “바다로 나간다(下海)”는 말과 상통된다고 할가. 그렇지만 여기서 결국엔 두가지 함의로 나타나고있는데 “하해”라는 긍정적자세에 앞서 썰물현상자체에 접근하는 피난살이식 삶이 더 핍진하게 그려진것이다.    문제를 시정하는 돌파구 괴변같기도 하지만 필지는 상술한 의문에 스스로의 대답을 주고저 한다. 물론 작품에서 반영한 사실들은 보편성을 띠지 못했다. 필경 오늘날의 대추세는 도시에로의 진출이지 살길이 막혀서 부득불 나서 자란 고향땅을 도망치듯 떠나가는 현상은 국부적인것이다. 국부적이라는 전제가 붙게 되는이상 그것의 존재함을 의미하게 되는것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존재하는 모든것은 합법칙성을 갖는다는 철학적 명제로부터 볼때 우리는 그런 현상을 외면하거나 무시할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필자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진것이다. 무엇때문에 근 한세기의 이민사-대규모적인 이민-를 가지고있는 우리가 당초보다 별로 나을데 없는 생활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것인가? 이번의 도시에로의 “이민”도 어쩌면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는 격이 아닐가? 악성순환의 결과가 나타날 우려는 없을가? 이런 물음에 얼마만한 해답을 준다는 의미에서 “썰물”은 우리민족의 현재와 장래를 판단하고 구상하는데 “급시우”로 된다고 필자는 인정하고있다.    우리 비극의 근원은 문화의 폐단 “썰물”은 하나의 비극이다. 그 어설픈 기분과 초라한 행색은 읽는이로 하여금 슬픔과 격분에로 끌려가게 한다. 잘 살려고 땅의 부름대로 고향이고 조상이고 할것없이 팽개치고 몰려왔던 우리민족이 오늘날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미 때를 묻힌 땅을 떠나려는것이다. 그것도 당연과 묘하게도 일치를 이룬 “보따리행차”인것이다. 하다면 우리는 언제가야 종착역을 모르는 이런 떠돌이 인생을 결말짓고 드디여 충실하고 보람찬 삶을 누릴것인가? 이런 현상의 근원을 “썰물”에 맞추면서 풀어보는것도 무익한 일은 아닐것이다.  소설이 제시하다싶이 “근용”이는 생활개선을 위해서라면 고생을 달게 받아낼줄 아는 위인이다. 그래서 어지러운 토목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천리 타향길로 만삭이 된 안해를 끌고 떠나는것이다. 오직 “아이들이 어렸을때 벌어야 한다”는 리유때문에 5푼 변리도 두럽지 않았고 고향에서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에게는 유리했던것이다. 자명한바 고향에서는 “근용”이의 리유가 실현될 가망이 없는것이다. 거꾸로 풀이한다면 “근용”이가 “아이들이 어렸을때 벌어야 한다”는 당당한 리유를 세워놓았을때 그의 가슴에는 이미 5푼 변리돈 맡아 멀리 가느냐 아니면 천시, 지리, 인화(天时地利人和)의 3대 우세를 가진 고향에서 알맞는 일감을 찾느냐 하는 천평이 놓여진것이다. 결국 그는 체면 유지에 백기를 들고만것이다. 체면유지, 이것이 바로 우리문화에서 홀시할수 없는 하나의 폐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민족은 결코 게으른 민족이 아니다. 근년에 세게 불어치는 한국바람, 독련체바람에서도 볼수 있는바와 마찬가지로 우리민족은 곳곳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생을 견뎌내며 부지런히 일들을 하고있다. 문제는 고향이라는 이 괴물에 있다. 왜 꼭 나가야만 하는가. 해종일 빈둥빈둥 놀지언정 “남(본민족)”이 보는데서는 “구차한 노릇”을 안한다는 태도들이다.  “초라해요. 너무너무 초라해요. 부끄럽단말이예요.” “근용”이 딴에는 이만한 리유라면 아주 근사해보였을테이지만 아버지와 딸을 남겨두고 간 그 허름한 초가삼간을 근용이의 집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될가. “저것 보지. 근용이가 떠나갔으니 저건 근용이의 집이 아니야. 그러니 근용이는 초라하지 않아. 부끄럽지도 않구.” 이런 멍텅구리는 없을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체면유지라는것도 어찌보면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 아닐가. “안불견 심불번(眼不见心不烦)”의 자아모순에 빠져 자신을 망치고 후대를 망친것이 체면유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직접적혜택이라고 하면 과한 빈정거림이 될지도 모르겠다.    행위 충동이 주는 계시 물론 필자는 도시에로의 진출을 비난하려는 생각이 꼬물도 없다. 개혁개방의 대형세하에서 인구류동, 도시진출은 불가피면적이다. 그 폭이 크고 그 규모가 클수록 나가는 사람에게나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나 모두 리로운것이다. 문제로 되는것은 우리 행위의 충동성과 맹목성에 있는것이다.  “근용”이는 동서의 편지 한장을 달랑 받고 고향을 떠나가는것이다. 그것의 진위를 가릴 념도 않고 만삭이 된 안해와 어린 아기를 끌고 낯선 타향길에 나서는 그 행위에 우리민족의 못난 형상이 반영되여있다.  “남들이 다 떠나가버리고나니 여기서 살 맥이 안나요.” “근용”이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 행위의 천진함과 유치함을 인츰 보아낼수 있는것이다. 그러니 앞날의 타산보다도 “남이 다 갔다.” “여기서 실기 싫다.”는데 그 출발점이 귀결되는것이다.    악성순환의 고배 필자의 근심이나 우려도 그래서 생겨난것이다. 우리가 시장경제의 대추세에 수응하는 본능이 너무나도 미약하고 소극적이기때문이다. 일단 대추세와 본능 이 량자가 충돌을 일으킬때 우리가 산산쪼각난다고 판단을 내리지 않을 아무런 근거도 없다. 반면에 그런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것을 “썰물”은 형상적으로 해답해주고있는것이다.  “근용”이의 안해는 집문을 나서기 바쁘게 “진짜 남자라면 녀편네 이런 고생 시키지 말아야 남자지.” “한국 같은데선 녀자 일 시켜먹고 사는 남자 사람값에두 못간대요.” 하면서 돈 벌기전에 호강 부릴 생각부터 다듬는다. 한국형편이 우리같았을적에 그 녀성들도 피타는 노력을 경주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무턱대고 “횡적비교”를 하는 여기에 우리의 운명은 이미 주어져있다.  한편 우리의 체면유지의 폐단과 행위의 충동성 및 맹목성으로 하여 다시 한번 운명의 우롱과 시련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 “남이 다 가니” 나도 가야 하고 그러니 여기 한무리 저리 한부락이 모여사는 현상이 다시 출현될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래부터 응집력이 강한 민족이니깐. 다른 종족과는 배합이 잘 안되는 민족이니깐. 또 부분적으로 이미 실증된 사실이다.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익숙해지고 그러면 또다시 체면유지가 머리를 쳐들게 될것이라는것을 지나온 력사로부터 짐작할수 있는것이다. 그때 가서 또 한번 서로서로 샘을 쓰고 자비심을 비기다가 월경과 도시진출에 이은 제3차 대추세가 나타나면 다시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질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다. 소위 썰물이 나갔다가 밀물이 들어오는것처럼. 제발 밀물만은 되지 말아줍소서 하고 기원할수밖에 없는 필자다.    맺는 말 “썰물”은 력사의 차원에서 우리민족의 렬근성가운데서 몇가지 흠집을 면바로 짚어내였다. 민족발전 민족부흥을 기하는데 유익한 탐색을 하였다는데서 필자는 그래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싶다. 한편 문학작품으로선 너무 산만하고 합법칙성이 기울어졌다는 유감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다. 
7    숙명이 만들어낸 선물 댓글:  조회:807  추천:1  2015-06-25
  평론] 숙명이 만들어낸 선물 김운천 선생의 수필집에 부쳐 들어가는 말 고향의 선배님이 책을 내게 되였다. 그리고 아름차게도 그 서평을 나에게 부탁해왔다. 당연히 내 수준이 별로 높아서가 아닐것이다. 고향사람으로서 남보다는 여러모로 료해가 깊기 때문일것이다. 사실 나는 평론은 작가론이 좀이라도 곁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작자의 경력이나 성격 등 내막을 잘 모르면서 평론을 하면 그 깊이나 넓이를 제대로 파내지 못할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내가 김운천 선생의 책자에 문학비평을 할만한 적임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문학비평이 이름만 비평일뿐 찬양일색으로 도배되는 현실에서 작자와 친분이 있는 내 평이 오히려 합리성을 가질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 크게 사양하지는 않았다. 해림이란 고장은 연변을 제외한 산재지구에서는 문화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일찍 광복전후에 해림에서 활동했던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후에 중국은 물론 나아가서 조선과 한국에서도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 당시에 벌써 영화음악을 창작했던 작곡가 조두남씨, 작사가 윤해영씨, 평양로농국장 배우로 유명한 김산씨, 중국동방가무단 무용쏠로 부단장 최미선씨 등이 그 대표적인물들이다. 이들은 해림에 자리잡고 많은 문예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 질펀한 문화토양은 후에도 많은 문예인들을 양성하였다. 단 문학방면만 봐도 조선족문학의 태두라고 할수 있는 김철 시인, 북방시단의 거목 한춘 시인, 저명한 소설가 윤림호 선생, 실화대부이자 신문업계 대표자 홍만호 선생 등등이 해림벌에서 출생, 성장 또는 창작활동을 전개했었다. 당연히 김운천 선생도 그중의 한분이였다. 김운천선생을 알기는 지난세기 80년대 중반이였다. 당시는 한춘 시인과 리장수 평론가가 흑룡강신문사로 자리를 옮겨가고 윤림호 소설가가 문학인들의 주축으로 활약하던 시기였다. 솔직히 문학하는 사람은 대개 다분히 “멍청”한데가 있는 법이다. 질리게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고 고루하고 고단하다. 이런 점에서 김운천 선생 역시 례외일수가 없다. 문학모임때면 만나게 되는 김운천 선생은 첫 인상에도 달변이였다. 둥굴넙죽 푸더분한 얼굴에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고있었다. 말을 시작했다하면 마치도 누구와 싸울것처럼 고지식하게 마냥 진지한 표정이 되여 격정에 넘쳐 열변을 토하군 했다. 김운천 선생이 고리타분할수밖에 없는 리유 역시 만만치 않다. 그와 마주 앉으면 두마디안에 교육 얘기가 나온다. 그는 25세 안팎의 젊은 나이에 벌써 공사 단위서기와 공사혁명위원회 부주임이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향단위서기와 부향장인셈이다. 전도가 창창한 그가 글에 랍치되여 정계에서 교육계로 인생궤도를 변경했다. 허나 그는 30년이 넘은 지금도 자기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한테서는 주변에서 흔히 보게되는 누구누구랑 어떻게 “혁명”을 했다는 이야기는 죽어도 듣지 못한다. 백번 같이 앉아도 백번다 지루하고 답답하게 교육이 어쩌고 문화가 저쩌고이다. 그에게는 고루한 일면도 없지 않다. 스타일이 매양 변함없이 그대로이고 고집이 강해 쉽사리 꺾어지지 않는다. 보수성향이 강한 편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지나치게 개방적인 언행에는 이마살을 자주 찡그린다. 그래서 고단할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요즘같은 경제시대에 하다못해 로변가게라도 차리는게 득이 될것도 같지만 퇴직한지도 여러해되는 김운천 선생은 융통성없게도 글쓰기를 계속한다고 야단이다. 이 고단한 길을 버리지 못하는 김운천 선생은 이미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숙명에 포박된 사람이다. 이제 그 고단한 삶과 고단한 숙명을 그의 작품을 통하여 해부해보도록 하자. 생활령역으로 널리 연장된 고지식 들어가는 말에서 우리는 김운천 선생이 자기의 주견을 설파하기 좋아한다는것을 설명했다. 주견은 어찌보면 나만의 견해이므로 남과 다른 가치관을 가졌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수필에서는 우리에게 많이 생경하고 또 잘 납득되지 않는 주장들이 불쑥불쑥 나온다. “살짝붕어”는 납주레기를 잡아온 아들을 보면서 10년전 어느 학부형으로부터 납주레기 대접을 받던 일을 쓰고 있다. 그 납주레기를 “살짝 붕어”라고 형용하던 일을 회상하면서 서로가 전혀 닮아지지 않은, 일반 사람이라면 절대 련상할수 없는 “나는 그속에서 인민교원의 중대한 사명감을 다시 한번 무겁게 느꼈다.”고 말한다. “두부 한모에 이어지는 생각”도 제목과는 련관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두부 한모에 22.5전씩 밑지면서도 콩으로 두부를 바꾸어먹는 우리민족의 낙후한 시장경제의식을 질타한것이다. 그러니까 “보토리(외토리)”는 이 문장에서 그저 두부를 바꾸어 먹는 주체에 다름 아니다. “두부 한모”하고는 련결고리를 도무지 찾아볼수 없다. 가히 이색적이라 할수 있는 이런 문장은 아주 많다. “겉도는 대화”는 분명 선생님과 학생간에 방법 방식이 달라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사안임에도 작자는 “평소 대화를 많이 가져야 진정한 사랑과 관심을 부어넣을수 있다.”고 설파한다. “신문촌이 되였으면”은 경제발전과 더불어 메말라가는 문화생활의 실태를 고발하고있다. 특이한것은 “우리신문조차 보기 싫어하구서야 어찌 문명의식을 갖추었다고 말할수 있을가”라면서 “문명촌건설과 문명집거구의 건설을 하자면 뭐니뭐니해도 ‘신문촌’이 먼저 되여야 한다.”는 결론을 만들어낸다. “경기의 주동권과 삶의 자세”는 시드니올림픽으로부터 신변의 두 친구의 실례를 끄집어내여 “인생도 주동권이 중요하다.”는 코드가 맞지 않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쇠말뚝”은 싸구려 소를 사서 치부꿈을 꾸던 아버지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설왕설래가 되여버린 구조이다. 얼핏 보면 융통성이라군 꼬물도 없는 이런 수필들은 무시되기 십상이다. 물론 주제와 내용이 잘 도킹되지 않고 사건과 인물이 서로 기어가 맞물리지 않는 이런 글들은 우선 먼저 그 합리성부터 의심을 자아내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것들이 사람 좋게 고지식한 작자의 본연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두부 한모에 이어지는 생각”을 실례로 외토리도 장가 들고 두부 한모도 싸게 사먹으면 아니 좋냐로 해독하면 별로 무리는 없을것이다. 어차피 이래저래 누이 좋고 매부도 좋자는 고지식한 마음을 담았기때문이다.  고리타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리타분은 경직을 의미한다. 반성을 모를때 사물은 메말라가고 생기를 잃게 된다. 우리는 김운천 선생의 작품에서 참으로 숨이 막히게 지루하고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고행길”은 인생길을 자전거로 열어간다. 그렇게 어렵게 열어온 인생길이지만 작자는 추호의 원망도 없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그야말로 노력과 분투, 모험과 도전, 결투와 죽음을 각오한 고행의 길이였다면서도 “고생도 내가 사서 한것이고 화와 복도 내가 만든것이였다.”고 세월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리고 자신이 모든걸 짊어진다. 누구처럼 한번쯤은 못난 년대의 탓을 할만도 했건만 답답하게 나의 차실만 살핀다. “이 밤도 별빛이 흐른다”는 어머니가 장애인이 되는 장면부터 “자신의 불찰”로 규정해버린다. 돈 없고 의원도 없는 그 세월의 잘못은 그대로 간과해버린다. 소학교 5학년 생인 “내”가 야밤에 의사를 데리러 령 세개를 넘으면서 짐승들의 위협을 받은 것도 고작 인생이 그렇다는 체념 정도로 지나친다. 아픈 몸으로 일을 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형상을 강직한 성품으로 굳혀버리기도 한다. 그런 어머니가 사망할때 독자들은 마침내 참을성을 잃게 된다. “부끄러움”은 일단 앞집에 물 길으러 갔다가 게사니와 싸우는 “나”와 터밭에 물 주는 “사내”가 “탐욕”으로 해석된다는게 아이러니하다. “류학생마을’을 읽어본다”는  거액의 수속비를 팔면서 류학길에 오르는 사람들에 대한 충고를 담았다. “제자의 사랑에 미치던 나날에”도 페교를 앞둔 스산한 교정에 조선어문선생님을 “조선엄마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학생이 왔다는 이야기를 쓰고있다. 상기한 글들은 한결같이 사회배경이 결여되여있다. 사회의 병페나 부조리, 모순들이 배제된 자아반성적인 글은 공감도도 약하고 설복력도 높지 못하다. 결국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단절된 력사속에서 삶을 연출한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것들이 고의적인 문장 장치가 아님을 글을 통해 인츰 느껴받을수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더욱 억이 막히고 숨이 넘어가지 않는다.  이 부류의 수필들에서 강하게 풍겨나오는 메시지는 작자 본신이 그 시대에 공감도가 비교적 높다는것이다. 수혜자로서의 우월감도 가끔 보이고 가해자의 역할을 논적이 없다는 당당함도 느껴진다. 필자가 높이 사는 점도 바로 이 점이다. 이념의 지배에 쉽게 휘둘리는 중국사람들은 어떤 시대나 사건을 보는 시각이 매우 단일하다. 바꾸어 말하면 다양성이 상실된 시대에서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살고있다. 그러니까 김운천 선생의 담담하면서도 거의 반성을 모르는 집필 풍격이 비록 각박할망정 어느 정도는 나름대로 점수를 주고싶다. 변화를 거부하는 고루한 이야기들 김운천 선생은 자기가 옳다고 느끼는건 절대 물러서지 않는 강한 고집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분명 낡은 사유나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나름대로 새로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하는 모습이 알린다. “나의 명함장”은 32년만의 동창모임에서 경리, 원장, 교수, 공정사, 과장, 주임 일색인 동창들의 명함장을 받아든 “내”가 주눅이 들기는 고사하고 독특한 나의 명함장 “교육론문복사본”을 내민다는 이야기를 담고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케이스이다. 그만큼 우리민족의 고루한 형상이 잘 반영되고있다. 세월은 요란한 발자국소리를 내면서 문명시대로 성큼 들어섰다. 짚신을 신고 초모자를 쓰던 시대는 아득히 멀어졌다. 지금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야 하고 정교한 명함을 들고 다니면서 자신을 해석해야 한다. 이런건 이 시대의 매너고 센스고 예절이다. 허영이 아니고 교제의 규칙이다. 그걸 무시한다는건 변화를 거부한다는 뜻이고 시대의 락후자로 남아있겠다는 의미이다. “밑창 없는 수렁길을 따라서”는 10만원에 달하는 빚을 지고 한국에 불법체류한 사실을 쓰고 있다. 난무하는 욕설, 더럽고 위험한 일, 본토인보다 낮은 대우에 시달리는 불체자들의 신세를 적고있다. 법을 지키지 않고 기능이 모자란데다가 의력까지 약한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기에 앞서 성급히 자본주의의 병폐부터 질타하고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써먹은 그대로의 답습에 불과하디. 그래서 오히려 련민이나 동정이 잘 가지 않는다. 이러고보니 이 부류의 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말이 되여진거 같다. 사실 이것은 가치관의 차이라고밖에 해석할수 없다. 작자로서는 그런것들이 꼭 지켜야 할 가치일지도 모르겠고 한편 섭섭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일로 평생 남을지도 알바 없다. 그래서 기록적인 차원에서는 넘어갈수 있다고 판단된다. “벼랑길”도 한국 불법체류시절에 126명 조선족이 부산항으로 밀입국하다가 한국해경에 잡히는 뉴스를 본 소감을 털어놓고있다. “우리말은 흙덩이고 외국말은 진주보석이냐”는 한국의 외래어문화를 비판하고있다. “한국노래방에서 있은 일”은 한국에서 “고향의 봄”을 부르면서 나의 살던 고향 중국을 생각한다는 스토리이다. “강한 녀자냐 약한 녀자냐”에서는 “자기한테 차례진 생육임무도 완성하지 못한다면 어찌 민족앞에 책임지는 강한 녀자라고 말할수 있겠는가”라고 질의하기도 한다. 사람 좋은 김운천 선생이 쉽지 않게 화를 내는 대목들이다. 그리고 또 내남이 대강 다 알고있는 일이고 남의 사정보다 내 입장에서 팔짱 끼고 한 말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우리문단에서 꼭 던져버려야 할 고루한 고질임에 분명하다. 지속되는 고단한 삶 숙명적으로 고단한 삶을 짊어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 김운천 선생이 그중의 한사람이다. 서두에서 구구히 설명했지만 김운천 선생은 창창한 벼슬길을 버리고 어려운 교육사업에 뛰여든 사람이다. 그리고 다시 가시덤불인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계몽은 김운천 선생의 직업이고 묵직한 십자가가 되여버렸다. 그래서 퇴직한지 수년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 고행의 길을 더듬고있다.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들며”가 전형적이다. 4명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개수업에 교원 및 유관인원 지도간부 등 30여명이 참석한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다. 그것도 3명 학생을 한족학교로부터 되찾아왔기에 4명이 되였다면서 타민족학교에 간 학생들을 끌어오는 방식이 민족교육을 살리는 하나의 방법이 될수 있다고 일갈, 작자는 그것을 형용하여 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30개 학교가 이제는 겨우 10개 정도 남은데다 그것도 10명 정도되는 학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앞에서 우리는 가슴을 조이지 않을수 없다. 작자를 따라 그 해결책을 더듬어야 했다. “한국어에 깃든 사랑”은 아버지의 한국방송 청취를 가로막던 “내”가 조선어교원으로 30년, 퇴직후에도 원동학원에서 “부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어를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작자의 민족어에 대한 깊은 사랑을 토로했다. 특히 재미있는것은 한개 반에 50~60명이 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전교 학생이 40명도 되나마나하던 모교의 현실을 되돌아보며 이 숱한 타민족학생들을 조선족학생으로 만들수 없을가”고 엉뚱한 궁리를 하는 대목이다. 점차 조금씩 사라져가는 민족과 민족어에 대한 아쉬움이 얼마나 강렬했을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전반 작품집에서 이 부류의 수필이 가장 많은 편폭을 차지하고 있다. 작자의 신분과 경력, 바램 같은것이 모름지기 그대로 반영되고 투영된것이다. 아동독물이 적은 현실을 폭로한 “속마음을 달래우며”, 조선말매체 통신원들의 단절현상을 못내 아파하는 “짧아지는 ‘뒤줄’”, 학업을 중단한 학생에 대한 사죄심정을 그린  “못 잊을 가시사연”, 흑룡강대학 한국어반의 50여명 학생을 데리고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의 민속촌에 견학간 사실을 적은 “도심속에서 만난 한국의 일각”, 외국어선택문제를 다룬 “영어는 샘이 깊은 물이다”, 피아노 소녀를 그린 “꿈을 실은 아리랑 선률”, 가정풍파로 학업을 중단한 제자를 쓴 “저 푸른 대안으로 쪽배는 떠났는데”, 만방중학교 합창단이 “전국제4기 중소학생예술절”에서 1등을 수상한 사실을 다룬 “푸른 바다가 갈매기노래를 실어온다”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글들에는 마디마디마다 작자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고 아픔이 새겨져있으며 희망을 잃지 않은 오기가 자리잡고있다. 전반 작품집에서 가장 긍정하고싶은 부분이다. 더불어 김운천선생을 가장 잘 설명할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끝맺는 말 평론을 하다보면 분류를 나누어서 설명하는것이 가장 편하다. 통계학적인 수법의 도입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문학작품은 다른 과학령역처럼 무조건 줄을 세워서  갈라놓을수는 없다. 일목료연하고 효과적이여서 차용하는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차피 억지로 편입되여지는 글들이 있게 되고 한편으로 어느 분류에도 섞이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게 마련이다. 김운천 선생의 작품들도 례외없이 그렇게 빠진 작품들이 적지 않다. 구경 어떤 글들이냐고 한사코 차문한다면 그중 두개 정도를 례로 들수 있다.  수필 “사랑의 거짓말”은 전반 작품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론리적으로 짜여져서 분류가 어렵게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살면서 가끔 선의의 거짓말을 할수밖에 없고 또 그런 거짓말은 필요하다고 설파하고있다. 한편 성공적인 수필로 “실수”을 꼽을수 있다. 잘못 걸려온 마작전화로부터 건축 실수, 수술 실수로 번지면서 사소한 실수라도 엄청난 후과를 초래할수 있다는 보편적인 가치를 서술했다. 학교나 문화나 두루 작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글이여서 주목된다. 아울러 이 두편의 글을 통해 작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수 있게 되여 다행스러운 생각이 든다.  
6    새로운 문예 컨텐츠의 가능성 댓글:  조회:1145  추천:0  2015-03-29
평론 새로운 문예 컨텐츠의 가능성 박일선생의 벽소설 특집을 곁들여 이 자리에서 구태여 벽소설이란 무엇이냐고 도도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대개의 평론이 자타가 다 알거나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것들을 대서특필하는 경우여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니까 평자의 의무는 무엇무엇해도 해독이 우선이라 해야겠다. 어떤 의미에서 평론은 먼저 감상문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고 나름대로 느끼고 체득한것을 숨김없이 적어야 하는것이 평론의 본연의 모습이 아닐가싶다. 그래서 작품은 읽는이에 따라 리해도 다르고 평가도 다르다고 하게 된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작품속으로 들어가보자. 좀 딴지같은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왜 “요즘 사람들”을 톱으로 올려놓았을가를 한참 생각해보았다. 선뜻 리해할수 없는 대목이였다. 작품의 내용은 글쟁이 작가가 친구인 화가의 초청으로 그 집에 갔다가 화가의 아들에게 세배돈을 남보다 적게 내여 구설에 올랐다는 간단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글은 어느모로 보아도 뛰여난데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컨텐츠가 새로운것은 절대 아니였다. 배금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은 여기저기 부지기수이다. 그렇다고 스토리가 굴곡적인것도 절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여러번 곱씹어 읽어보니 비로서 이 글이 타깃이 되고 메카가 되여진 리유를 좀은 알것 같았다. 편집자의 깊은 고심이 자리잡은 흔적이 보인다. 이 글의 작가는 주인공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몰래 소파밑에 록음기를 두고 가게 했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그 록음기가 반짝이는 포커스가 된게 분명하다. 미니픽션의 매력은 흔히 이처럼 어느 한점에 귀결된다. 특히 박일선생의 벽소설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수법이기도 하다. 결말이 딱 한순간으로 반전이 되여 원유의 리해를 뒤집어버리는 기교이다. “요즘 사람들”도 그런 경우다. 모든 렌즈를 “세배돈”에 집중시켜 얼핏 요즘 세상에 성행되는 금전만능주의에 대한 질타로만 추측하게 만든다. 가령 그것만이 목적이였다면 주인공이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가고 남은 사람들이 이렇쿵저렇쿵 입방아를 찧는것으로 작품을 마무려도 큰 무리는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굳이 소파밑에 “록음기”를 메가톤 무기로 숨겨두었다. 왜서일가? 록음기는 기록의 도구이고 재생의 기계이다. 금전으로 모든 가치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모티브에 이어 함부로 사람 평가를 하는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첨가한것이 아닐가. 작가가 노린것은 이 사회의 비뚠 가치관과 더불어 못난 병폐를 파내는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한편 록음기를 준비하고 갔다는건 미리 마음속으로 어떤 테스트를 기획하고 있었다는 증명으로 된다. 그러니까 남보다 늦게 가고 또 남과 달리 세배돈을 50원밖에 주지 않는 등 모든 순서가 미리 짜놓은 액션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되겠다. 지식분자의 도고함과 고결함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노란 머리수건”은 상대적으로 쉬운 해석이 나온다. 그것도 그럴것이 이 작품은 디테일하게 모든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았기 때문이다. 한돐반도 안된 딸애를 잃고 3천여리나 떨어진 타향으로 천방지축 그 딸을 찾으러 달려왔던 어느 젊은 어머니가 공원에서 자기 딸과 비슷한 여자애를 만나 잠간 슬픔과 고통을 잃고 “천륜지락”을 즐기다가 자칫 랍치범으로 오해받을번 했다는 이야기이다. 할머니를 혼절하게 할번 했던 장면이나 나중 할머니가 손녀더러 불쌍한 이모 목을 안아주라고 타이르는 대목은 그대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생동하고 핍진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조금 의외였던 점은 저렇게 가슴 아픈 사연을 어떻게 웃으면서 이야기할수 있었을가 하는것이였다. 박일선생의 남다른 예술기교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가슴이 더 멍해나고 얼얼해진다. 이 작품의 인기는 웃음에 눈물을 심은데에 있다고 말할수 있다. “장가 잘 가는 달수”는 느긋하게 올방자를 틀고 앉아 호랑이 담배 피울때 얘기를 듣는 무드이다. 달수는 또래 친구들이 장가갈 무렵에 벌써 딸이 학교에 다닐 정도로 일찍 련애하고 또 장가간 장본인이다. 쥐약을 먹을 지경으로 사랑했던 조강지처 어금이를 내쫓고 그뒤에도 장가를 세번이나 간다. “장가 잘 가는 달수”는 제목부터 유머스럽다. 작품속의 대화도 “소프트파워”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이다. “…넌 애고 난 어른이야!” – 장가 먼저 간다고 으시대는 모습이 선하다. “임마, 장가 늦게 갈바하곤 한 십년 더 참지 그래. 그러면 내가 너의 장인이 될수도 있잖아…” - 능글거리는 몰골이 바이 밉지는 않다. “…무도장에 찾아와선 무조건 내 멱살을 잡는거지.” – 어금이가 무도장 다니는건 바람난 자기를 잡기 위한것이라고 고자질하는 장면도 대개 익살스럽다. “…아직도 그 녀자와 사냐?” – 도합 네번 장가간 남자다운 호언이라 해야겠다. 이 글은 호악에 대한 평이 한마디도 없다. 잘했니 못했니도 아니고 좋다 나쁘다도 없다. 어쩌면 가장 박일선생과 닮은 작품이라고 할수 있겠다. 박일선생이 자리한 곳에는 항상 즐거운 웃음이 동반한다. 타고난 자투리 이야기군인 박일선생은 기억력 역시 바상하여 동네방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일명 육담이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유머 그 자체이다. 그러나 평자가 되여서 가장 호감이 가는 글은 그래도 “너편 내편”이다. 남다른 사상성이 내포되여서가 아니다. 뛰여난 예술성을 과사해서도 아니다. 어쩌면 현시대 우리에게 하나의 계시를 주는 글이 아닐가 싶어 특별히 주목하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을 유머작품으로도 분류하여 볼수도 있겠지만 필경 유머와 벽소설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유머작품은 슈제트와 별개로 그저 웃음을 자아내는데 목적을 두지만 벽소설은 유머처럼 아주 짧다는 유사성을 가지는 한편 상대적으로 완정한 이야기가 있고 소설의 형태를 갖추어 기승전결이 필요하다는것을 작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듯하다. “너편 내편”은 글자수가 고작 500자도 아니된다. 그래서 하나의 가능성을 점쳐본다. 요즘 세상은 디지털세상이다. IT가 발달되고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웹소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웨이보, 웨이신 등이 플랫폼이 되면서 모바일 작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박일선생의 벽소설은 유머스럽고 짧다는 특점이 있다. 벽소설 자체가 편폭이 짧은 문장형식인것은 물론이지만 박일선생은 그 기초하에서 되도록 더 짧게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손바닥소설이라는 평가를 자주 받아왔다. 독자들은 재미나고 재치있는 그의 소설을 통해 울고 웃으며 미적향수를 받게 된다. 슬픈 이야기도 될수록이면 해학적이고 명랑한 필체로 쓰려고 애쓰고 있으며 대부분 작품들은 결말이 교묘해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이런 특점들은 오늘날의 “이동 독서 환경”과 묘하게 매치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일선생에 대한 집중조명은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수 없다. 박일선생은 평자가 초학자였을때 벌써 벽소설가로 문단에 알려져있었다. 지금까지 벽소설을 170여 편 발표하였으며 벽소설집 제3권을 준비중에 있다. 그의 작품은 량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중국조선족문단에서 누구도 비견할수 없이 앞장서있다. 그래서 저명한 평론가 김룡운선생은 10여년전에 벌써 박일선생을 “중국조선족의 벽소설대왕”이라고 평가한바 있다. 그뿐이 아니다. 박일선생은 직접 창작실천에 몰두하는것은 물론 “미니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평론문장도 발표함으로써 우리평단에 전문성을 띤 벽소설에 대한 정의가 없는 공백을 메우기도 했었다. 박일선생에 대한 조명은 어쩌면 우리문단의 미래 출로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종이 작품보다 웹소설이 환영받고 대형문장보다 미니소설이 인기인 현재 독자들이 고루하고 편향적이고 수준 저하라고 타매하기보다 새로운 령역도 개척하고 확보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만큼 새로운 문예 컨텐츠의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선보일때가 온거라고 믿는다. 몸에 밴 농경사회의 낡은 진물을 털고 진정 산업사회의 성원답게 글로벌에 융합해가는게 우리가 갈 길이다. 물론 이 말은 평단이 그런 구실을 못했다는 원망은 아니고 그나마 흑룡강신문이 그런 과실을 남먼저 알아차리고 지금이라도 보완해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밝히는데에 불과하다. 좀 섭섭하다면 지면상 제한으로 4편의 작품밖에 오르지 못한것이다. 언젠가 한번 크게 다루어볼만한 여지가 있다고 본다.
5    "관광문학"의  기와  정 댓글:  조회:762  추천:0  2014-11-14
평론   "관광문학"의  기와  정 -조룡기선생의 근작 수필을 곁들여   장학규       요즘 "관광문학"이란 제기법이 항주시 나아가서 전반 절강성에서 성행하고 있다."관광"과 "문학"을 접목시켜 독특한 문화현상을 이룬다는 말이다.   저명한 작가 왕욱봉(王旭烽)은 몇년전에 자기의 소설 "남방에는 가목이 있어(南方有嘉木)"가 모순문학상을 획득한후 소설에서 묘사했던 차산지에 관광객이 부쩍 늘어났던 사실을 예로 들면서 문학이 관광산업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강조하기도 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관광도시로서의 항주, 나아가서 관광대성으로서의 절강성의  이러한  제기법이 새로운 것 만큼이나  당위성을 가진다고 부언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사스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는 관광업에 문학이 동조하는 것은 상업대뇌가 발달한 남방인들다운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솔직히 중국문단에서 "관광문학"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이론에 앞서 실천의 과정을 장기간 거쳤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노신의 글들에서 강남수향의 남다른 매력을 이미 느꼈었다.오봉선(乌蓬船)이 하느작거리는 운하와 민가사이를 이어주는 십리장랑(十里长廊)은 언녕 우리의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었다.그리고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던 "공을기"가 회향두를 세며 선술을 마셨던  "함형술집"도 오늘날 너나없이 찾아가는 명소로 되고 있다.그만큼  한족들의 애향심은 삼협이민들속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난데가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흔히는 유행어로 "뿌리의식"이란 말로 일축하고 있지만 우리가 뿌리가 옅기 때문에 주위 환경에 대한 묘사보다는 슈제트 엮기에만 집념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또 너무 어린 판단이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는 따스한 애심을 가지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을 한껏 찬미한 조룡기선생의 근작 수필들과 만나게 된다. 여행기가 아닌 수필에서 계렬형식을 취해 많은  편폭과 필묵을 할애하면서  현재의 주거환경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는건 그 고장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뒤바침해주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일이다.이립지년에 "2인세계"에 들어선 조룡기선생이 비로소 사랑을 습득하고 또 그 사랑이 "기"가 되어 주위 환경을 더욱 아름답게 내다보도록 촉구하였는지 모른다.     아마도 조룡기는 구제불능으로 심한 "련항증(恋杭症)"을 앓고 있는 모양이다.   "천당의 향기를 맡아보았습니까?"에는 "항주의 봄은 정말로 못 말리는데가 있다"는 좀은 과장된 구절이 있다.그 못말리는 연유를 그윽한 용정차의 차향때문이라고 작자는 밝히고 있다.나라 국(国)자를 써서 국차로 알려진 서호 용정차의 산지이기에 항주는 다도(茶都)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항주를 말하자면 당연히 용정차를 피해갈 수 없다.용정차의 다도(茶道)에는 향을 맡는 문차(闻茶),잎모양새를 살펴보는 관차(观茶),맛을 보는 품차(品茶) 등 세가지가 있다. "용정차의 매력은 글자 하나만으로도 족하다.".초두자는 쌍10이요 인은 8이요 목은 80이니 차(茶)자가 108이란 수자를 대변한다고 호소한다.아울러 "차를 마시며는 108세까지 살 수 있고 108개의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항주의 가을은 작가에게 더 매력적인가 본다.   "하늘이 주는 향기도 주어야..."는 들어가는 말로 "...지팽이를 짚고 계수나무아래서 쉬어가는 늙은이의 중얼거림은 소동파,백낙천 시인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이다."는 낭만적인 장면이 펼쳐진다.항주 노인들의 중얼거림도 유명시인들의 명구보다 멋지다는 말인가? 하다면 항주는 말 그대로 신선들의 세계란 말인가? 아니면 이 땅의 사람들은 모두가 시인이란 말인가? 시인이 되고싶어 시인이 되어진게 아니고 항주 자체가 저도 모르게 시인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적격일 것 같다.그만큼 만롱계우(满陇桂雨)의 계화꽃 향기는 사람을 취하게 한다.인간이 만들어낸 차향보다는 "월중유단계 자고발천향(月中有丹桂 自古发天香)"이란 계향이 더 환상적이라는 발상에서 향토에 대한 작자의 남다른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항주의 모든 것이 작자의 눈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우산은 주인이 없다"에서 우리는 "들고 다녔던 우산이 얼마나 될가...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는 작자를 상대하게 된다. 겨울철에도 구질구질 비가 내리는 항주에서는 우산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물건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산 망각증이 생겨난 것은 중국 4대 미인중의 한사람인 서시를 빼여닮은 서호때문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그리고 그 우산 망각증이 즐겁게 인정되는 이유를 "내가 두고 내린 우산이 다른 관광객들에게 제공되어 비 내리는 소제에 펼쳐졌다고 생각해보라.더욱 좋기는 그 관광객이 한쌍의 연인이라고 생각해보라."고 낭만적인 서호정에 귀결시키고 있다.나아가서 이러한 자연에 대한 사랑을 "비오는 날이면...친구에게 우산을 뽑아주고싶다."는 한층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기 때문에 흐린 날씨가 많고 습기가 많은 것이 항주의 지리기후적인 특점이다.그래서 가정주부에겐 골치거리이고 이방인에게는 퍼그나 눈 시리게 하는 것이 빨래감이다.베란다에 만국기마냥 펄럭이는 빨래들,걸릴것 못 걸릴것 할 것 없이 모두 전시된 그 빨래들도 작자에겐 아름다운 풍경으로 감지된다. "비 오는 날,빨래가 걷혀버린 비어있는 베란다를 보면 이름 못할 적막을 느끼게 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아득한 어둠속과 같이 느껴질 정도이다.날개 잃은 베란다에 내다 말리우는 여자의 그 정성에 지난날의 오점들이 지워지고 오늘만이 눈부시는 하늘의 태양에 걸리게 되는걸가?" ("베란다여,날개를 펼쳐보여라!")     "멀어서 느끼는 아름다움"도 그런 쪽으로 가닥이 뻗는다.시내인구가 400만에 이르는 대도시에서 10층 아빠트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일반 중등도시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는 높이의 아빠트를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좀 싱거운 노릇일 수도 있다.하지만 항주에서는 그럴수 밖에 없다.역사문화 유명도시로서의 항주는 유럽의 경험을 답습하여 옛도시구역의 건축고도를 엄격히 공제하고 전통적인 도로망 구조를 보호함으로써 서호와 항주시의 관계 및 천계윤곽선을 잘 처리하고 있다.때문에 10층 높이에서도 여인의 도시를 한껏 굽어볼 수 있는 것이다.그것이 작자에게는 태산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있다.나아가서 서호를 바로 베란다 밑으로 굽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게 되고 그 실천으로 서호를 둘러싸고 있는 보석산을 때때로 등산하는 신고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300여 차의 서호 유람선 승선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각도를 바꾸면서 항주라는 이 도시를 읽기에 노력하고 서호의 매력을 발굴하는데 심혈을 몰붓는 그 정열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그때 그때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 조룡기의 성숙이 돋보인다.     "알아서 하기"는 상기 두편과 좀 이색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셔틀버스에 앉아 시내로 돌아오면서 "이맘때면 서호는 그 어느때보다 요염한 자태로 뽐내고 있을 때가 아니가."하는 서정토로에서 서호에 향한 작자의 현현한 정을 역시 읽을 수 있다.     이외에도 항주의 밤문화를 조명한 "술집(酒吧)의 남자들", 중국 미술학원을 둘러본 감상기 "잘나면 잘난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등 항주에 향한 작자의 현현한 정을 엮은 글들이 적지 않다.     이로써 우리는 조룡기수필이 제시한 길을 따라 항주를 한바퀴 관광하였고 따라서 조룡기선생의 근작 수필들을 "관광문학"으로 귀속시킬수 있는 "기"를 살펴보았다.한마디로 주위 환경에 대한 애착이 그것이고 그 환경에 대한 지궂은 탐구가 그것이며 그런 결실로 미적 감수를 얻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관광문학"이 지방형상을 수립하는데에 이런 것들로서는 부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조룡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많은 장치로 덧보탬되고 있다.     우선은 언어의 사용을 들 수 있다.조룡기는 남달리 미문을 형성시키는데 집념하고 있다.특히는 서호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시적 언어를 대량 삽입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 점은 조룡기의 일관적인 특점이기도 하다.     사실상  제목들을 보면 서호와는 무관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편폭을 할애하면서 그것도 찬사의 어구를 사용하면서 서호 나아가서 항주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작자의 의도적인 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항주의 비줄기는 대개 가늘다.잔잔한 비속에서 유람선이 천천히 앞으로 이동이 되면 주위의 일체가 서서히 자기 신비의 베일을 벗기어간다." ("우산은 주인이 없다")   "서시가 서호가에 나와 머리를 감으려 하는듯..."   ("알아서 하기")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면 서호는 완연 다른 풍경을 가져온다...수양버들과 복숭아나무들에 곱게 물감을 들이고 있는 가로등과 호수면에서 떠다니는 작은 초롱불같은 인공섬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전체 서호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술집의 남자들")  이런 재치있는 언어구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한번 서호에 다녀오지 않으면 안되게끔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제공스님이 출가했던 영은사나 "용비어천가"에도 묘사했던 전당강 역류 그리고 "백사전"에 등장하고 노신의 문장에도 나왔던 뇌봉탑에 대해서도 작자는 다함없는 사랑을 안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다음은 글의 구성이 자유분방하다.굳어진 모식이 없고 필 가는대로 따라간듯한 인상이 진하다.그만큼 자로 잰듯이 글을 쓴 흔적이 없고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관광지로 끌고간 자리도 없다.관광자체가 그렇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가? 아무튼 내용과는 별도로 관광지에 대한 소개도 될 수가 있었고 그렇다고 인터넷 자유게시판처럼 글이 너무 흩어졌다는 느낌도 별로 받을 수가 없다.     또 하나는 주제와는 무관하게 항주의 날씨.서호의 코스.관광의 계절 등 관광정보를 대량 알리고 있어  이색적이기는 하지만 대신 "관광문학"의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도 따라 든다.     상술한 것들이 조룡기 근작 수필들을 "관광문학"으로 판별하는데 "정(精)"의 역할을 논다고 평하면 궤변은 아니리라.     아무튼  감각이 딱 들어맞혀오는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향수이다.그러기에 평자는 감각이 알려주는대로 "관광문학"이란 시점에서 조룡기의 수필을 다루었고 따라서 작자의 의도나 노린 점 같은 것은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4    벽소설가 김군과 그의 문학세계 댓글:  조회:798  추천:0  2014-10-07
  평론 벽소설가 김군과 그의 문학세계      김군의 벽소설집 "사랑의 외연"이 출간되였다.알알이 꽉 여문 59편의 벽소설로 묶어진 작품집은 그만큼 무겁기만 하다.낯도 코도 모르는 한 한국인에 의해 출판되여서인가? 그렇찮아도 한번쯤 김군을 곁들며 무언가 말하려고 하던 참이였는데 마침 출판 소식이 전해져 다행이라 생각된다.     김군이 누구냐?    물론 이런 질문도 따져보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그만큼 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니깐. 언론이나 문예지에 몸 담은 그런 직계가 아니니깐.료녕성 신빈현의 한 교원에 불과한 그를 중시해줄 사람이 없는것도 해괴할리 없다.   필자는 좀 괴벽한 사람이다.남들이 서로 올리추고 내리출 때 나름대로 "방계부대"에 눈길을 돌리고 자료 수집에 나서게 되였고 그러는 와중에 발견한 사람이 바로 김군,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에 예고도 없이 차를 여러번 바꾸어 타면서 문뜩 찾아갔었다.   김군을 면대해보니 여러모로 삐여진 사람이였다.180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을 가졌었다.50대의 사나이에게 "준수"라는 단어 사용이 좀은 억지에 가까운 느낌이 들지만 실지로 김군은 그런 형용에 부끄럼 없이 젊고 생기있는 모습을 하고있었다.본명도 아이러니하게 김진수(金真秀)이다.   소주 한근쯤은 숭늉 마시듯 례사롭게 굽내는 김군은 필자와의 10년 년령차이도 불구하고 너나들이로 망년지교를 맺자고 접어드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편벽한 신빈현의 교육부문에서 사업하면서 20여년간 주로 벽소설을 꾸준히 창작해온 무명인물이기도 했다.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벽소설은 저그만치 200여편,이외에도 단편소설 수편과 1편의 중편소설,그리고 100여편의 수필과  20여수의 시가 있다.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수자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직껏 김군을 잘 모르고있었을가? 우리 문단에서 벽소설가로 이미 작고하신 박은선생과 아직도 창작에 무비의 정열을 쏟고있는 박일선생은 꼽고있지만 유독 김군만은 빠드리고 있는것이다.작품수와 수상경력이 상기 두분에 손색 없는 김군을 말이다.그 원인은 주로 아래와 같은 몇가지에 있다고 본다.   우선 지역성이다.김군의 활동범위는 주로 료녕성에 국한되여있다.료녕에는 공개간행물이 없기에 망각된 구석으로 될수밖에 없는것이다.   다음은 김군작품의 70프로이상이 신문의 문예부간지에 발표된것이다.주지하는바 우리의 평론계는 종래로 신문문예부간지따위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는다.물론 종합간행물에 실린 글도 작품 취급을 받지 못한다.   끝으로 활동성이다.재야계 문인들은 언론지나 문예지를 찾아다니며 안목을 익히는것이  자신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환절인데 김군은 소탈한 성격과는 달리 그런데는 또 숙맥이였다.   김군의 처지는 한두마디로 말하기 어렵다.애처롭다면 너무 비감적인것 같고 서글프다면 어딘가 비중이 경감되는 느낌이다.아무튼 그를 동정하기에 앞서 그의 작품세계를 파헤침으로써 공정한 평가를 기대해보는것이 더 좋을것이다.     넓은 사색의 공간을 주는 여운미     어찌보면 우리 사회는 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농후한것 같다.당연히 실력이 모자라니까 어디서 두루 얻어들은 소리로 눈가림을 하거나 자신의 "유식"함을 뽐내려는것이 우리 문인들의 고루한 인습인것 같다.그래서 대수라도 알고있는것을 모두 쏟아놓아야 남들이 긍정해줄줄로 알고 대서특필하기를 즐긴다.마치도 독자들은 멍청이인듯 모든것을 글쓴이가 혼자서 이야기하기에 읽고나면 남는것이 꼬물도 없다.기실 작자가 말한것은 독자들도 알고있는 일이기때문이다.   김군은 위인이 그렇듯이 좀체로 뽐내는 법이 없이 언제나 겸손하다.경상도 사나이답게 호매롭기는 하나 비위 거슬리는 호기는 도무지 없다.술 한컵을 부어놓고 "먹어라"가 아니고 "먹는다"하는 단마디로 먼저 굽내는 스타일이였다."안 먹으면 어쩔란다"라는 억지도 전혀 없다.   때문에 그의 글에서도 이래라 저래라 또는 이렇다 저렇다는 식의 서술이 없이 독자 나름대로의 리해나 해석에 스스럼없이 맡겨버리는 어른다운 멋이 있다.바꾸어 말하면 김군의 작품은 확 드러나는 주제가 없다.독자의 감상수준을 충분히 긍정한다는듯 많이는 주제선행의 전통에서 벗어남으로써 깊은 여운미를 풍기고있다.   수상작이며 역시 대표작이라고도 할수 있는 "사랑의 외연"은 남새장사를 하는 녀인이 자신의 첫 련인과 동명인 고객에게 덤으로 채소를 안겨주는 간단한 사실을 쓰고있다.작자는 "그녀"의 동기에 아무런 설명도 가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녀의 배경도 설정하지 않았다.하기에 독자들은 제가끔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밖에 없다."그녀"가 너무도 다정다감한 녀인이여서 시종여일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있다는것,또는 "그녀"가 이미 리혼하고 애타게 첫사랑과의 파경중원(破镜重圆)을 기대한다는것,혹은 인젠 바람날 나이가 되여 첫사랑과의 밀회를 그리고있을지도 모른다는것,아무렇게나 뜻풀이가 가능해진다.   사실상 인류가 수천년 사랑을 영위해오면서 그 내포에 대한 정의는 벌써 규명해놓은지 옛날이다.그러나 사랑이 복사하는 외연은 폭이 너무도 넓어서 도무지 종잡기 어려운것이다.두말할것 없이 거기에 작자의 주장이나 의도 같은것을 삽입하는것은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거꾸로 풀이한다면 작자의 동기가 베일에 가리워져 있을수록 독자들에겐 사색의 공간이 그만큼 넓어지고 작품은 새김할 여운미가 더욱 진하게 풍기기 마련인것이다.여하튼 "그녀"의 소박한 행위와 절절한 마음을 통해 독자들은 진한 사랑의 내음을 맡게 되고 따라서 아름다운 동양화 한폭을 머리속에 우렷이 떠올릴수 있는것이다.   "여름 타는 녀인"도 인물체격이 쭉 빠진 미모의 녀인이 무더운 한여름철에도 치마 입기를 거절하는 장면만 쓰고있다.멋 부리기를 즐기는 젊은 녀성들의 공성이랄가."그녀"도 여름이 오면 다른 녀인들처럼 슈펴에 가서 치마 한견지쯤은 쇼핑한다고 한다.그러나 종래로 입지 않는단다.남들이 보지 않는 자택에서도 입을념을 하지 않는단다.왜서일가? 궁금하다.그녀의 종아리에 생채기가 있을것이다.아니면 음특한 남성들이 날씬한 다리에 매료되여 따라다닐가봐 두려워서이다.여러번 그런 일이 있어 인젠 두렵다.그렇지도 않으면 무작정 치마를 배격하는 심리병이 있을것이다.작자가 설명하지 않고 알려주지 않았기에 독자들은 나름대로 짐작할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대파적 창작수법을 도입한것도 아니다.자연주의 냄새가 얼마간 풍기는것도 사실이나 그것과 등호를 치기에는 사실주의 성분이 너무도 많다.슈제트 자체가 한코한코 이어졌고 장면이 놀랍도록 진실하다.그리고 인물의 행동이 엉뚱한데가 없이 질서정연하고 대화도 론리성이 강하다.그런데도 작자가 노린 점이 은페되여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 도무지 잡혀지지 않는다.단지 영문 모를 녀인의 영문 모를 행위가 마그네슘 섬광에 의해 재현되듯 우리의 눈앞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될 뿐이다.물로 그녀는 아름다왔다.   이처럼 독자가 완전한 피동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는 아마도 김군의 작품에서 처음일것 같다.주제 선행의 고루한 인습에 물젖은 우리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여직껏 우리는 현대파냐 사실주의냐 하는 문제에만 쟁론의 초점을 모았을뿐이였지 사실주의 자체도 계속 파고들수 있는 여지와 계기가 있다는것은 의식하지 못했었다.아니,전혀 거기에 관심이 없었던것이다.   사물은 내부의 끊임 없는 모순투쟁으로 라선식발전을 한다고 철학은 말하고있다.이것이 진리라고 전제할 때 사실주의 전통도 개변의 여지가 다분한것은 두말이면 잔소리이다.말하자면 전통이란것은 요지부동한 개념이 아닌것이다.전통은 수시로 변할수 있으며 전통은 또한 수시로 창조할수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언젠가 김군은 이렇게 말한적이 있었다.   "인간은 특별한 리유가 없이 발큰 성을 낼수도 있는 사유론리를 가지고있다.따라서 자기의 사상을 한사코 은페시킬수도 있는 보호의식을 가지고있는것이다."   풀이해 말한다면 문제는 하나이지만 답안은 여러개일수도 있다는 말이다.3원 3차 방정식 같다고나 할가.그 어느 답안이나 모두 정확하다는 얘기가 되겠다.     함축과 진실에 받쳐진 독특한 심미관     최대한으로 숨긴다는것과 최대한으로 줄인다는것은 모름지기 김군의 창작풍격이다.하긴 편폭의 제한을 받고 있는 벽소설 자체의 특성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김군과 얘기해보면 오히려 그의 성격기질에서 유인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수 있다.   김군은 자신의 창작성과를 그의 글쓰기처럼 간단하게 "운이 좋았다"라는 한마디로 귀결시켰다.그의 인생길은 퍼그나 순탄했다고 한다."문화대혁명"때의 초중졸업생으로 고향에 돌아간 그는 철자는 물론 띄여쓰기도 잘 모르는 형편에서 민영교원으로 채용되였고 그뒤 사범학교에 추천되는 영광이 차례졌으며 졸업후에는 소학교,중학교,현 교원연수학교로 두루 전전했었다.그사이에 연변대학 통신학부에 입학하여 1986년에 졸업증을 타기도 했단다.이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창작성취도 있을리 만무하다는 귀납이다.   "운"이란 운수의 간칭이다.사전을 들춰보면 운수란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써는 어떻게 할수 없는 천운과 기수라고 한다.그러니까 숙명론적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단어인것이다.기왕 하늘과 땅 그리고 돌아가는 운명의 조화였다면 인간의 노력은 마땅히 무시되여야 할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군의 생애를 다시 들추어보지 않을수 없다.그 세대 사람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김군도 십여세의 한창 나이에 배움의 길을 잃고 귀향한다.가령 운의 작간이 제대로 되였다면 그는 곧장 대학으로 진입했어야 할것이다.그리고 민영교원으로 초빙되고 사범학교로 추천되는 오직 김군만이 선택될수 있는 그 조건과 노력을 우리는 간과할수 없는것이다.   우리 앞에 김군은 이런 형상으로 나타나고있다.천자도 아니되는 짤막한 글을 쓰기 위해 수권의 책을 읽는다.벽소설에 취미를 붙여서부터 벽소설에 관한 잡지와 책자를 주문 또는 구매하여 탐독한다.그의 책상머리에는 20여년간 줄곧 "벽소설 선간"이 놓여있다.그는 비록 볼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직접 생활과 부딪쳐서 글감을 발굴하군 한다.   설날에 우편물을 받고서 감수했다는 "보람",우편물을 받은 당사자가 우편물을 배달하는 주인공으로 달랑 신분을 바꾸었을뿐 자기가 직접 겪은 진실한 사실을 간단하게 쓰고있다.물론 글속의 "김선생"도 작자 자신임은 두말이면 잔소리이다.제목만 없었더라면 우편물을 전달한 그 행위결과를 "보람"과 이어주기에는 모자라는 장치가 너무도 많다.고루한 사유모식으로 추리를 한다면 아무리 벽소설일지라도 "수위실 아바이"는 비오는 날  우전국으로 전보 가지러 가기전에 두루 심리전을 거쳐야 하고 또 "김선생"에게 그 전보를 전달한 후엔 뿌듯함을 느껴야 정상적일법도 한 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사실을 스케치하고 카피를 떠버린 거기에는 작자의 고의가 숨어있다."왜?"라는 되새김을 부추기도록 의경속에 생명반성을 직접 담아버린것이다.   실생활과 찰나의 령감을 그대로 적고있는 이런 작품을 례로 들자면 적지 않다.   "어느 하루"에 등장하는 구두닦이 동창생도 진짜 모델이 있다.틀림 없는 김군의 동창이였고 신빈현성에서 구두닦이를 하고있었다.김군의 소개로 필자가 구두발을 내밀고 앉아 직접 취재를 하여 신문 1면 톱기사로 올린적까지 있는 사람이였다.한국바람이 몹시 불어치던 20세기 90년대말,한 조선족사나이가 코리안드림에 흔들리지 않고, 그것도 타향이 아닌 친인들이 지켜보는 고향땅에서 떳떳하게 구두닦이를 하고있었다.그때 그분이 한 말 "한국바람에 조선사람들 코풀 힘이라두 생긴건 사실이지만..."이 그대로 벽소설 "어느 하루"에 등장하는것만 봐도 김군의 창작태도가 아주 해학적이란걸 알수 있다.나아가서 작가가 어떤 심미효과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선히 느껴진다.   이외에도 로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옮긴 "할머니의 사랑이야기", 밥을 먹다가 주었다는 "밥상머리에서 주은 이야기" 등이 있다.   "운이 좋았다"는 단마디 짧은 대답에 너무 긴 해석을 했다.기실 문체는 되도록 소박하게 처리하고 짜임새는 반대로 정교하게 꾸미기에 집착하는 김군의 스타일은 이번 출판된 소설집의 앞부분에 작가의 말 제목을 "혀 짜른 소리"로 단것만 보아도 대강 짐작을 할수 있을것이다.아마도 숙명같은것이 따라다니는가부다.     흑색유머와 과장으로 이루어낸 환상미      분량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많다고 해야 할것이다.김군의 성격 및 김군의 개성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것이다.   김군은 여유를 잃는것을 대가로 하는 그 어떤 일도 할념을 않는다.현소학교 교장 자리도 시간을 잡아먹는 일감이라고 선뜻 벗어버리는 "패기"를 가진 사람이다.남들은 그 자리를 서로 다투느라고 혈안이 되지만 김군은 히쭉 웃고 뒤로 물러났다.그 이유는 역시 글쓰기이다.담배 한대 느끗하게 피워물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작품을 발굴,구상,완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김군을 만나게 된다.주방일을 돌볼 필요없는 중년 남성이 할 일 없이 채소시장에서 빈들빈들 돌아다닌다.괜히 매일 먹는 채소를 만지작거리거나 불량한 마음을 품은 사람같이 장사군 아줌마들을 뚫어지게 살펴본다.그렇게 거기서 "사랑의 외연"과 같은 소재를 주었단다. 남자가 백화점에 자주 다니는것도 드문 일이다.사지도 않으면서 실없이 판매원아가씨와 가격흥정하는것도 싱겁기만 하다.김군이 로천시장이나 슈퍼나 백화점에 다니는것은 "여름 타는 녀인"과 같은 이야기를 줏기 위해서라고 한다.그래도 김군이 제일 즐겨 찾는곳이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환담하는 자리이다.독보조던 길거리던 또는 아빠트단지내의 공원에서던 그런건 상관없다.그런 자리라면 천하기문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니깐.그런 자리에서 걷어낸것들을 굳이 라렬하자면   우선은 "심양사람"이다.난생처음 도회지 그것도 심양 구경을 간 "달광"이가 심심하던차 호텔을 쳐다보다 낯선 젊은이 둘과 맞닥뜨린다.상대가 뭘하냐고 묻자 "달광"이는 몇층이나 되는가 세여보는중이라고 대답했고 심양에선 층집을 세려면 매층에 돈 2원씩 내야 한다는 협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약삭빠른" "달광"이가 17층까지 센걸 5층을 셌다고 거짓말 하여 10원을 내게 된다.그로써 "심양사람도 그저 그렇구나" 하는 결론을 도출해낸 "달광"이는 퍼그나 으쓱해진다.동네방네에 많이 떠돌아다니던 과장된 이야기이다.재미로 소일거리로 읽을만한 작품이다.   다음은 꽤나 심각한 "외지녀자"이다.마촌장의 작풍문제를 밝히려고 현규률검사위원회의 장씨가 파견된다.자신의 신분을 농업국 직원으로 숨기고 마촌장과 대작을 하게 된 장씨는 예기치 않게 마촌장과 렵기적인 내기를 하게 된다.장씨가 나가서 들고온 팬티 냄새만 맡고 어느 집의 누구거란걸 두번이나 마촌장은 대뜸 알아맞췄다.억이 막힌 장씨는 가게에서 새 팬티 하나를 사가지고 와서 마촌장네 암소 궁둥이에 둬번 비벼대고 들어왔다."이번에야 흥!" 냉소했지만 마촌장은 "이건 우리 집 냄새 비슷한...외지녀자의것이 분명해!"라는 "정확한 판단"을 한다.그 내기가 본질 겸 자백 겸이 되여서 마촌장은 직에서 나떨어지고 장씨도 도덕적인 멍에로 내부 비판을 받게 된다는 야싸한 이야기이다.육담마당에나 들어갈상 싶은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회문제가 저 정도로 심각하고 위험한 경지에 이르렀다는걸 감안할 때 유머보다는 경종으로 받아들이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작가도 한번 웃고말자는 쪽으로 타이밍을 맞춘것은 아닐것이다.   "속죄"도 좀은 과장되고 좀은 유머화된 그런 쪽으로 맥락을 같이 한다.림종을 앞둔 령감이 량심 발견인듯 전에 바람 피웠던 사실을 고백하고 마누라의 용서를 빈다.저 세상으로 가는 령감이 심리평형이라도 이루라고 마누라는 자기도 바람 피웠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다섯째 딸의 아버지가 령감이 아니란것이다.결과는 생각밖에 속좁은 령감의 명을 재촉하였다.첫돐 제사날에 마누라는 그런 일 없었다는걸 밝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이 소설은 인성이 상당한 깊이로 다루어진 작품이다.자기의 잘못은 남의 용서를 받기를 원하면서도 남의 차실은 쉽사리 량해할수 없는 인심의 량극을 블랙유머를 통해 또렷하게 표현하였다.작가는 마누라의 입을 빌어 령감을 속좁은 사람으로 타매하지만 실지로 인간으로서 참말로 극복하기 어려운것이 바로 남 말 하기 쉽다는 것이다.한치 눈앞도 캄캄한게 인성이고 그런 인성앞에선 누구나 우렬이 없다고 보면 역시 극단일가?     맺는 말     책을 받고 단숨에 읽었다.오랜만에 독서의 취미를 느껴보는거 같다.벽소설집이라는 테마가 흥미로왔던 점도 있었지만 바쁜 세월에 바로바로 읽기에 편한것이 벽소설이라는 설명을 실감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특히 작가와는 10여년 사귀여왔었기 때문에 그 내역을 비교적 잘 아는 편이여서 작품론에 작가론을 곁들었음을 정중히 밝힌다.        어
3    김학철 작품의 문체론적 특성 댓글:  조회:662  추천:0  2014-09-02
평론   김학철작품의 문체론적 특성   장학규          현재 우리 문단에서 어느 작가가 가장 독자들의  환영을 받느냐 묻는다면 그 대답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흑룡강신문사의 한차례 조사에서 -김학철 한분만 추천합니다-는 한 독자의 글이 힘있는 답복일 것이다.비록 그것이 지나치게 어리고 감정적이기는 했으나 종래로 한 작가가 독자-일개인일지라도-의 마음을 통채로 독차지했다는 사실이 드물었다는 걸로 미루어보면 김학철선생에게 남다른 신통한 재주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이 필자가 김학철선생의 문체를 연구하게 된 시초의 동기였다.     옹근 작품에 일관된 작가의 개성(스찔)은 주로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문체는 언어학에서 연구하는 과제이고 문학작품에서의 언어는 형식의 범주에 속한다.그러니까 필자의 이 글은 제목 자체부터 사상성보다 그 예술성을 더 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지난날 우리는 형식의 내용에 대한 의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그만 형식의 독립적인 심미적의의와 가치를 홀시하고 말았다.모종 견지에서 말할 때 문학의 흥성은 형식과 내용이 똑같은 분동으로 작용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중국 문학사에서 백화문이 일대 문학혁명을 가져왔다면 조선에서도 신소설이 문단을 활기띠게 하였었다.그렇다는 역사가 또한 필자가 속이 켕김이 없이 한 문학위인의 문체를 진일보 탐구하게 된 필연적인 근거였다.     그러면 김학철선생의 작품에서 구경 어떤 문체론적 특성들이 표현되었는가를 분석해보자.     가장 돌출하게 표현되었고 또 다른 작가들과 가장 구별되는 특성은 어음수단의 사용에서 나타난다.선생은 모든 작품에서 의식적으로 생활과 밀착된 인민어,구두어를 골라 썼다.말체의 색채를 가진 문법수단의 사용은 두말할 것 없이 독자와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친절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형상성과 생동성을 기한다는 각도에서 그리고 언어를 파악함으로써 상상으로 재창조한다는 언어예술의 특점에서 볼 때 언어는 생활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표현적 효과는 더 빠르고 더 좋은 것이다.일례로 큰 파문을 일군 잡문 "동서남북풍"의 서두를 보기로 하자.   "풍향기는 바람이 부는대로 나붓기기 마련이다.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다 순응만 하면 되니까.팔자치고는 상팔자이다.그러나 사람은 필경 풍향기가 아니므로 바람이 부는대로 분주살스레-이리 나붓기고 저리 나붓기고만 할 수 없다./   지난 세월 동풍에 돛을 달고 만부부당의 기세로-장비야 내 배 다칠라-내닫던 양반들이 요즘에 와서는 또 서풍에 신바람이 나서-콩엿 사먹고 버드나무에 올라가는 개모양-기염만장하는 것을 보면/   '이 좋은 구경을 놔두구...곡마단구경을 갈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욕지거리가 절로 난다..."      미사려구라곤 한마디도 없이 지문을 꾸몄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통해 반영된 작가의 증오의 감정이 남달리 진실하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물론 그 진실성을 안받침해준것은 숙련된 대중어란 것은 자명한 일이다.이런 특성은 어느 한편의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닭알파문", "쪼로르기", "심상찮은 소경력", "사색하는 동물"을 비롯한 선생의 모든 잡문에 관통된 것으로서 작자는 그것으로 독자와의 호흡의 통일을 이룩하였으며 훌륭한 심미적가치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토사용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대격토 "를/을"과 복수토 "들"을 희한하게 많이 썼는데 주로는 소설에서 강조의 표현적효과를 위해서였다."네번째총각"에서 필요없이 사용된 복수토 "들"이 27개였고 "를/을"은 24개였다. "고민의 표준"도 7:17의 비례로 씌어졌다. 장편소설 "격정시대"는 더구나 "들,를/을" 천지인데 미처 통계해낼 방법이 없어 흑룡강신문 진달래부간(1985년 4월 6일부)에서 발췌한 대목을 보았는데 만자남짓한 글에 놀랍게도 그 비례가 23:30이였다.이외에도 "를"대신 "들을"을 -례하면 세면주머니들을,삐라들을 등- 쓴 곳이 5곳이나 되었는데 이런 "군더더기"는 글체를 의식적으 로 말체의 형태로 꾸며놓아 강조외에도 예상밖의 표현적효과를 거두었으니 이를테면 작자와 독자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듯한 화기애애한 기분을 이룬 것이다.자명한바 이런 심리적접근은 독자들을 끌고 나아가서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도록 유혹하는 것이다.작품은 우선 읽을 멋이 있어야지 그렇찮으면 실패작이라 할수 밖에 없다.모름지기 선생은 읽을 멋에 상당한 공력을 들인 것이다.     다음은 형상어의 대량적인 사용이었다.문학예술작품은 전형적인 사실과 인물을 형상화의 수법을 통하여 독자의 정서에 미학적으로 작용하게 하는 것이다.아무리 생신한 재료라 하더라도 형상어를 떠나서는 독자들의 공명을 자아내기 어려운 것이다.따라서 독후미감도 운운할 화제가 못되는 것이다.선생은 "노신의 방향"에서 "우리는 노신선생댁 문앞에 다다르자 몸속에 꼴딱 채워가지고 온 '연료'가 다 들나서 단 한치도 앞으로는 더 나갈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으로 권위를 앞두고 의지가 나약해진 인간을 맥맥한 기계에 비유함으로써 생동성을 배로 끌어올렸으며 "오염된 양심"에서 "국민당군대가 온 것을 꺼리여 자란이들은 슬슬 다 피해버린 까닭에 (나는 국민당군대가 아니요 하고 웨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를 환영한 것은 네댓살에서 열두어살까지의 어린 공민들뿐이었다."처럼 "어른"을 "자란이"로 , "어린 애들"을 "어린 공민들"로 바꾸어 씀으로써 마치도 그 장면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듯 만들었다.이밖에도 형상적이고 우습강스러운 표현을 통해 작가의 애증을 토로하기도 했다.형상어에 의한 웃음의 화폭은 선생의 일대 특점이다.독자들은 웃음속에서 심미적감수를 받게 되고 따라서 한차례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이것은 일부 작가들이 마치 선교사인듯 분장하면서 화려한 언사들을 지루하게 마구 내뿜는 현실과 완전히 대립되는 김학철적인 개성 내지 문체이다.     선생은 인물묘사에서도 장황한 서술체를 회피하고 형상적인 대화를 통하여 그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그려내기를 즐겼는데 그렇게 그려낸 인물들은 완전완미형의 냉혈동물인 것이 아니라 생기가 넘치고 피와 살이 있는 생활적인 인간이었다.특히 대표작 "격정시대"를 보면 거의 모든 장절마다 실없는 "말장난"이 있었다.지어 싸움마당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이런 "말장난"은 어디까지나 속되고 용속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생활적인 진정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이제 그 예 하나를 들어보자.    "트럭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였을 때 신명이 난 '오셀로'가 저도모르게 뛰어일어나 '오-이!' 하고 웨치며 두손을 흔드니 적재함우의 놈이 돌아보고 마주 손을 흔들며 굽인돌이로 돌아갔다.'저 자식이 나를 보구 좋아하지 않는가!'   '오쎌로'가 신기로와 하며 감탄 비슷이 말하였다.   '마점산장군을 알아본게지.' 마점산은 '오로'의 성명이다.   '아니야,초록은 동색이야.그놈두 먹자주의가 틀림없어.'   '오로'의 먹자주의는 유명하였다.   '그 왜놈의 새끼,왜 한방 갈길 생각을 안하구...손을 흔들어.'   '오쎌로'가 전장귀신이 되면 그 계집애가 좋아서 펄펄 뛰라구?'   '어느 계집애가 좋아서 펄펄 뛰여?'    '아,맥주병 찜질당한 계집애지 어느 계집애여?'   귀대하는 길에서 여럿이 받고 차기로 이와 같이 '오쎌로'를 시달구었다.     보다싶이 비단 "오쎌로"의 용감성과 먹자주의가 생동하게 묘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혈기방장한 의용군 대원들의 낙관적인 정신도 동시에 표현되었다. 이런 묘사수법은 필묵을 많이 들이는 지문에 비해 오히려 더 생생하고 활약적이다.그래서 그런지 선생의 작품은 우선 인물부터 진실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다음은 구성상의 특징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잡문에서 돌출하다.잡문은 노신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노신의 잡문은 거개가 1원1차식으로 되었는데 "원"을 논점이라고 한다면 "차"는 논거인 것이다.노신은 일반적으로 한가지 사실,혹은 거기서 파생된 사건들을 부동한 측면에서 해부하면서 논점을 논증하지만 그와는 달리 김학철선생은 병렬적인 풍부하고 다양한 재료와 실례를 들기 좋아했는데 작은 것,엷은데로부터 점차 큰것,깊은데로 전개되었다.어느 잡문이나를 막론하고 적어서 두개이상의 논거가 있는데 "동서남북풍"은 그중 많은 것으로서 6개가 들어있다.다양한 실례의 인용은 잡문의 실용성을 크게 확대하였으며 잡문으로 하여금 더욱 예술적이 되게 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잡문은 문학이 아니라고 인정하던 편견을 바로잡고 그것의 문학적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끝으로 다양한 수사법의 사용이다.물론 이 점은 모든 작가가 회피하지 못하고 갖추어야 할 전제조건이지만 선생은 유별나게도 생략법과 중단법을 많이 쓴다.어찌보면 깊은 여운을 깔아주자는 속셈인 것 같지만 수사학은 문체론과 다른 것이어서 여기서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없는 재간이나마 김학철선생의 작품에서 나타난 문체론적 특성을 살펴보았다.능력과 재료의 제한으로 수박 겉핥기로 되었으니 이것을 필자의 연구성과라고 하기에는 짜장 부끄러운 일이다.허나 필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초학자들에게 얼마만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게끔 김학철선생의 작품을 애독하면서 느낀 점들을 숨김없이 그대로 적었다.한편 자신이 아직 젊었으니까 앞으로 연구할 시간이 많다는 것,그래서 여기에 나타나는 부족점을 능히 미봉할 수 있다는데서 얼마간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2    윤림호 소설의 미, 륜리학적 취향진단 댓글:  조회:832  추천:1  2014-09-02
평론   윤림호소설의 미,윤리학적 취향진단                                                                     장학규       머리글     오늘날 북방소설문단에서 윤림호는 변론할 나위도 없는 당당한 스타이다.문학년령의 각도에서 보면 아직은 청년작가행렬에 서야 하는 41세의 나이에 2권의 개인작품집을 펴내였고 여러권의 다인작품집에 오른 윤림호이다.뿐만 아니라 "은하수", "송화강","도라지","아리랑","천지" 등 잡지들의 수상대에 여러번 올랐었고 성소수민족문학상,연변작가협회상,해외에서 날아온 불교법왕상 등 큼직한 성과도 올린 윤림호이다.또 "투사의 슬픔"과 같은 작품들은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국에까지 소개되었었고 작품 발표총수의 3분의 1남짓이 평단에서 운운하고 있다.이러한 성과는 북방은 물론 연변문단에서도 드문 일이다.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윤림호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윤림호의 창작방법은 물론 사실주의수법이다.유구한 역사와 휘황찬란한 전과를 이어온 사실주의 수법은 여전히 효과적인 창작방법중의 한가지로 공존공영을 제창하는 시대에서 절대 비난거리로 되지 말아야 한다.그러나 본 글은 그런 시비에는 걸려들념을 않고 오로지 사실주의 수법을 통하여 표현된 윤림호의 부동한 창작년대의 미학 및 윤리학적 취향을 진맥하고저 한다.   여러 독자층의 감독,연구에 편리를 주고저 본 글은 작가의 2권의 개인작품집만 참고자료로 삼았음을 밝힌다.   1,전단계: 전통적 윤리도덕에 뿌리를 둔 작품이 대다수     현재까지의 윤림호의 창작활동은 1985년을 분계선으로 하여 전후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즉 첫 개인작품집의 출판이 횡적가름선이 되었다는 말이다.   주지하다싶이 윤림호의 창작초기는 전국 여러 분야에서 좌경 노선의 흑운을 몰아내고 반성과 극복,나아가서 재기를 시도하던 시기였다.문단도 예외없이 스스로의 점검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하여 자연 상처문학과 같이 지난 시절에 대한 성토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따라서 그간 냉대되고 멸시되었던 인성이 새롭게 큰 화제거리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윤림호는 물론 시대의 관성에 밀리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여 그의 전단계 작품들은 주로 빈번한 운동세례를 걸치면서 비틀어지고 뒤범벅이 된 윤리도덕관념을 둘러싸고 진행된 것이다.   히트작품 "투사의 슬픔"은 참회의식을 다룬 작품이다.염창록이는 사랑에 충실한 인간이었다.문벌관념이 엄격했던 낡은 사회에서 부자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과감히 여염집 계집애를 추구하는 새 사상의 소유자였다.그래서 부자간에 대판 싸움까지 벌어졌고 나중엔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감옥에서 영옥이와 희극적인 재상봉을 한 창록이는 옛사람이 되살아나 순사의 직분도 불구하고 지하당에 정보를 날라주고 또 영옥이를 구원하는 실제 행동으로 사랑의 심정을 표달한다.마침내 영옥이의 꼭 닫쳤던 마음의 문을 열어제치고 사랑을 획득한다.그러나 그 대가가 너무나도 엄청났다.사랑하는 이의  총에 맞아 불구로 되었는가 하면 동란의 년대에는 반혁명으로 몰려 심한 투쟁도 받았다.그에 비해 영옥이는 너무너무 행복했다.단란한 가정을 소유했고 항일 여투사로 대접받고 있었다.그러니까 옛연인의 죽음을 두고 흘리는 투사의 눈물은 단지 창록이가 불쌍하다는 차원에서 흘리는것 만이 아니었다.창록이의 홀몸에 대비한 양심 발견이 그 밑바닥이었고 창록이의 생존함을 안 후에도 모종 원인으로 찾지 못했다는 가책이 그 둘러리였다.두말 할것 없이 투사 역시 피와 살이 있는 보통 인간이었던 것이다.작가는 이 글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생소했던 영웅형상을 창조했던 것이다.돌부처같이 정감이란 전혀 없는 영웅형상에 아주 습관되었던 독자들에겐 자식앞에서 과거지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참회할 줄 아는 영옥이란 이 인물은 그렇게도 생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이 당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었다.한편 주인공의 양심 발견을 통하여 체현된 순수한 애정미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준다.창록이는 오직 사랑을 위하여 직업도덕마저 버리고 연락원 노릇을 했으며 평생을 장가 들지 않았으며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도 영옥이와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성분이나 사상 따위를 사랑에 융합시켰던 그때나 돈,가정을 사랑에다 연계시키는 지금에 비기면 진정한 사랑의 이미지가 확 안겨오는 마당이었다.이 점이 또한 이 작품으로 하여금 성공의 길로 닫게 한 미적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성과작 "개를 잡은 사람"은 작가 사상경개의 그대로의 표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구체적인 해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이 작품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태양은 내일 또 뜬다"에서의 염라왕의 말을 한단락 먼저 인용해보자.   "...첫부류는 지상나라에서 창생을 위하여 공덕을 쌓다가 불행히 이사오게 되었거나 만창생이 우러르는 부류로 12층대의 첫층에 받들어 모시옵고...12층대 지옥에 있는 무리는 악을 덕으로 삼던 무리오이다..."   보다싶이 "덕은 쌓은대로 가고 죄는 지은대로 간다."는 전통도덕관념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단순한 인과보응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런 경지에 빠져들어간 주인공들에게 반드시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호인인 작가의 개성과 맞물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개를 잡은 사람"에서 조봉규는 자기밖에 모르는 위인이다.고향다리 건설할 때 일전한푼 내지 않는가 하면 최과부 남편이 죽었을 때 급히 수요되는 관널을 팔아먹으면서 주지 않는다.뿐더러 이웃 문서방네 집이 무너지게 되어도 일손을 도우기는커녕 시까스르기만 했고 나무 몇가지를 빌리는 것마저 거절한다.마침내 하늘이 크게 노하여 덩실하던 기와집이 일조에 재더미가 되고 조영감 자신은 그만 병석에 눕고만다.그래도 마을에는 동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명절 분위기에 휩싸인다.좌상 아닌 좌상 오영감의 환갑잔치를 온 마을이 일떠나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인간공동체에 외면당한 조영감은 질식할 듯한 외로움에 모대긴다.물론 결말이 희극적으로 반전이 되면서 조영감의 새 출발을 암시하고 있으나 인과보응의 범주에 들기에는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그 시대배경을 빼거나 바꾸어놔도 마찬가지로 이해되고 접수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윤리도덕이란 것이 실제 인간사회에 적용된다는 말이 아닐가.최소한 인간행위의 준칙으로도 될 수 있고 사회질서의 보장에도 유익할 것이다.모름지기 작가의 초점도 그런 쪽으로 돌려진 것이 분명하다.그로써 인간의 행위미를 규명한 것이다.     "삼자경"은 "사람은 본래 착했다."는 말로 시작된다.선량한 인성은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감동하고 선호하는 바이다.대표작 "호박꽃"은 인간공성으로서의 선이란 구경 어떤 것이며 그것이 파급시켜주는 사회적 공감은 어떠한 것인가를 형상적으로 밝혀주었다.거기에 사회미로 통한 인격의 미를 유기적으로 조합시킴으로써 심미주체로 하여금 고도의 예술적 미감을 갖게 하였다.   자식 낳이도 못해본 장모는 수수한 농촌 여인이었다.하지만 장모의 몸에는 만사람의 심금을 울려줄 수 있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는데 그것인즉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 선량한 마음이다.이붓 딸의 남편이 대학에서 꾸리는 문학강습반에 추천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장모는 불편한 몸으로 진둥한둥 40리 길을 달려온다.가정의 끌끌한 일군인 영수를 사위 대신 남겨놓고 장모는 병약한 몸으로 집안팎 일을 돌본다.그래도 언제나 환한 얼굴로 "천벌" 소리를 외우고 닭모가지를 비틀 것을 추긴다.대학에 가게 된 영일이에게 새옷을 갖춰주려고 연 닷새째나 점심을 굶어가면서 장마당을 오르내렸고 약값을 공부하는 영일이와 사위의 용돈으로,그리고 아버지의 술돈으로 내놓는다.장모의 약궤를 열었을 때 주인공들은 물론 독자들도 깜짝 놀란다.장모의 이러한 행위들은 친어머니 못지 않은 혹독한 모성애가 그 출발점이었다.자신의 생명을 걸어야만 하는 막부득이한 사정이라면 계모라는 입장은 왜소하고 애매하다.물보다 진한 것이 피이기 때문이다.그것마저 서슴치 않았다면 물론 선량한 덕성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그러한 행위미가 자사자리한 아버지의 형상과 격렬히 충돌되면서 공명대가 강한 장모의 인격미가 형성되게 된 것이다.나아가서 그러한 인격미가 일종의 사회미로 통하고 인정되는 것이 인간사회의 어쩔 수 없는 도덕관념이라는 해석이기도 한 것이다. 또 사실상 장모의 형상은 방대한 위력을 과시하면서 이붓 사위뿐만 아니라 석고같은 아버지마저도 끝내 울렸으며 따라서 수천의 독자들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윤림호 전단계 작품의 주요한 취향성문제를 살펴보았다.두말할 것 없이 이 시기 모든 작품들을 상술한 부류들에 억지로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이를테면 수상작 "자취"가 그렇다.이 소설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개혁개방자태가 바로 다음 단계의 주류로 되는 것이다.   2,후단계: 비판의식의 앙양과 새로운 시각의 윤리관     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중국대지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농업구에서는 도급제를 기본상 실현했고 공업구에서는 연해개방도시,경제특별구들을 확정하고 가동했다.국문이 서서히 열림과 더불어 장기간 페쇄되고 구속되었던 사상이 활기 띠기 시작했고 백가쟁명,백화만발의 분위기가 새롭게 조성되었다.이런 시대의 변모에 가장 빨리 합세한 분야가 곧바로 문단이었다.지성적이고 양심적인 문인들은 한결같이 일떠나 시대와 동조하면서 비판적인 안광을 가지고 인간의 본질과 개성을 까밝히기 시작하였다.   윤림호는 들끓는 시대격정을 피부로 느끼고 소위 문제작,반향작,파문작들을 연달아 내놓았다.물론 창작은 작가 개인의 사유활동인만큼 역사를 가르듯 그 어느 한 시각을 확정해서 가를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우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윤림호는 전단계에서 이미 "자취"와 같은 탐구적인 작품을 발표했었다.그 맹아가 이쯤에 와서 합리적인 계승과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깊섶의 들국화"는 당시에 상당한 호성을 받았던 작품이다.   소설은 두 여인의 동일한 운명그라프를 통하여 사랑이란 권리로도 강박으로도 얻을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다.그러나 이런 주제보다도 인간심리,인간생리에 대한 진실한 반영이 퍽 돋보였다.최형근은 항일비밀연락원, 새사회지도간부의 신분에서 선후로 월향이와 계모를 강간하여 손에 넣는다.그리고 사랑의 적수에게 추호의 사정도 없이 호된 강타를 안긴다.작가가 즐겨 부각했었던 도의적이고 이상적인 인물형상과는 너무나도 판이했다.월향의 형상도 약간 빗나가는 실정이다.한번 마음을 주면 평생을 변치 않는다는 전통 사유모식에 굳어진 월향이지만 여자는 한 남자만 알고 죽는다는 윤리관념을 무시하고 서습없이 수수밭에서,오두막집에서 옛연인과 정을 나눈다.계모는 더욱 노골적이다.달아오른 욕정을 식히려고 거리낌없이 군사내들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이붓 자식에게도 분별없는 정열을 쏟아붓는다.그녀들은 낡은 정조관념의 배반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녀들을 대함에는 동정과 지지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그 행위들이 정주제에 충실하게 복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최형근에게 본능이란 기댈 언덕을 마련했다면 월향이나 계모에겐 인지상정을 부여하고 있다.그래서 우선 인물부터 진실하다는 감각이다.다른 일면으로 윤리도덕이란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잡혀온다.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은 심령의 공명과 육체적향수가 같은 분동으로 작용한다는 역설이 당금 안겨온다.이 점은 우리 소설이 애정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인간육정을 의식적으로 외면해버렸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된다.     단편소설 "천치 빵덕이" 역시 인간본질을 파헤친 작품이다.은원관념이 공공연히 멸시되는 삶의 현장에 착안점을 두고 날따라 메말라가는 인정세태를 시사하고 있다.   빵덕이는 그 자신이 천치였던 관계로 피동적인 인생을 영위하게 된다.좁쌀 한자루에 팔리워 서캐 서말이라는 장외톨의 안해가 되는가 하면 철부지 방국이의 고집에 넘어가 안해된 책임과 의무를 무시하기도 한다.장서방이 넘겨주는 쌀과 돈을 납작납작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추호의 후회나 가책도  없이 장서방을 밖으로 내몬다.반면에 싫다는 방국이를 한사코 붙쫓으며 눈먼 사랑을 퍼붓는다.그에 비해 사유가 건전한 방국이는 고의적인 배반을 한다.천치누나가 힘겨웁게 펼쳐주는 그늘밑에서 탈없이 자라고 공부했건만 자기를 보고파 찾아온 빵덕이를 더러운 송충이 피하듯 한다.뿐더러 누나와 함께 살게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장외톨의 소 네마리를 끌고 가서 감옥에서 놓여나왔지만 그것이 장외톨이나 빵덕이의 덕이 아니라 친구들의 신세로 일축해버린다.그때에야 빵덕이는 천치의 감각에서도 "세상에서 누가 제일이야? 그래도 내 서방이지..." 하는 체득을 얻고 장서방을 찾아나섰지만 그는 이미 타역의 객이 된 뒤었다.   이 소설은 경제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표면화된 인간의 자사자리한 본질적 측면을 생동하게 그려내였다.그로써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구경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넓은 사색의 공간을 두고 던지고 있다.한편 인간의 개성이 고도로 발휘될 때 윤리도덕이란 얼마나 무맥한 것인가를 예술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단편소설 "산촌의 단풍"은 윤리도덕이 즐겨 타매했던 제3자를 정면으로 내세우고 있어 한때 큰 물의를  일으켰었다.그러나 곰곰히 파보면 작가의 도전적인 자세보다도 낡은 관념을 짓부신 동시에 새롭게 구축한 작가 나름의 새 윤리관이 퍽 심각하다.   소설은 서로 교차되고 평행되는 다층차적 철리구조를 설계하였다.   우선 가정 윤리가 사회윤리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남달리 독특하다.영송이는 안해있는 몸으로 장옥이와 정을 나누고 임신까지 시킨다.재래의 관습대로 보면 영송이는 정파답지 못한 패덕한이며 타락된 인민교원의 형상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송이는 사후 덕골 사람들이 "신성한 영지로 받들고 주인을 선택하여 모시"는 사뫼산을 오뫼산으로 개칭할만큼 위신이 높았다.여기서 우리는 공공사업과 가정 생활 이 양자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고 있지만 또 각자가 완전히 틀려진 개념이라는 판단을 쉽사리 터득할 수 있다.바꾸어 말하면 산촌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안일한 도회지 환경도 마다하는 영송이의 정면형상은 그의 사생활의 어두운 면에 의하여 압도되거나 말살되지 말아야 한다는 작가의 변론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이 점은 우리 사회의 고루한 인습에 대항한 것으로 된다.   다음은 영송이의 사생활을 어떤 입각점에서 해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얼핏 보기엔 영송이의 논리는 자리잡을 바탕이 전혀 없다.을녀는 현처량모형의 여인이다.굳고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외모 또한 아름답다.반면에 장옥이는 "잠이 다닥다닥 핀" 못난 얼굴의 여인이었고 자연을 대비한 생존력이 형편없이 미약했다.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나 가정울타리에만 인생의 낙취와 삶의 가치를 부가할 수 없는 것이다.낙후한 덕골의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치려는 영송이를 좁은 안광을 가진 을녀로선 지지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영송이는 심한 고뇌속에서 모대긴다.부부간의 감정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 멀어져가고 소실되어갈 때 나타난 장옥이는 동정과 사랑으로 영송이의 얼어드는 마음을 녹여주었고 영송이로 하여금 계속 산촌의 후대교양에 헌신하게 하였다.이러한 성애에 도덕멍에를 씌우기는 어려운 일이다.오히려 사랑의 진실한 함의가 노출될뿐이고 인생의 참뜻이 전달될 뿐이다.   끝으로 장옥이의 형상이 가장 인간 본성에 접근한다는 얘기이다.못생긴 인물로 하여 남성세계에서 축출당한 장옥이는 독신주의를 신봉하게 된다.하지만 그녀 역시 7정6욕이 있는 싱싱한 인간이었다.그리고 마음 심처에 모성애를 간직한 정상적인 여인이었다.장옥이의 본능의 부활은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인 영송이를 만나서였다.용모가 단정할뿐만 아니라 고상한 정신세계마저 갖춘 영송이앞에서 장옥이의 도고한 마음가짐은 와그르르 무너지고 따라서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그렇다고 누구처럼 꼭 결혼을 전제로 하는 사랑은 아니였다.오로지 마음의 기탁을 찾은 것이며 그로써 영송이를 본받아 덕골의 후대양성에 전력할 것을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장옥이의 성격발전은 그 계기가 미덥기에 타매할 수 없고 영송이를 구했다는 사실적인 후과를 초래했기에 적극적이다.     상기한 작품외에도 대표적인 것들로 "낙엽","할미꽃" 등을 들수 있다.물론 한결같이 낡은 윤리도덕관념들을 질타하고 새로운 정조관,절개관,효성관을 제시하는 작품들이지만 지면상 제한으로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총적으로 윤림호의 두번째 단계의 작품들은 주로 비판성격을 띠면서 비극을 이루고 있는데 감각주체인 독자의 정서파동을 통한 미적감수가 상당히 효과적이다.또 남들이 건드리기 무척 저어하는 처녀지를 과감히 개간하면서 보여준 시대조류보다 앞선 작가의 심미시각이 탄복된다.   맺는말     윤림호작품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평론은 아마 이 글이 처음일것이다.그렇다고 이 글이 정론으로 되어진다는 말이 아니다.한 작가에 대한 평가는 토론과 쟁명을 거치게 되며 종당엔 역사가 판단을 내리기 마련이다.단지 이런 기회가 너무 늦게 온 것이 서글프다는 느낌이며 "재야계" 문인에게도 얼마만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하여 서툰 글이나마 엮어서 내놓는바이니 평론계뿐만 아닌 여러 선생님들의 기탄 없는 지적과 가르침을 바라마지 않는다.                                                                                        1995년 7월 18일 해림에서  
1    구겨진 현실사회와 대응되는 황당한 인물형상들 댓글:  조회:629  추천:0  2014-09-02
평론   구겨진 현실사회와 대응되는 황당한 인물형상들 -박향숙작품집 "꿈속의 누각"의 인간상 고찰 장학규   1     "여사장의 이야기"의 작자 박향숙씨가 최근 소설집 "꿈속의 누각"을 출판하였다.박향숙 하면 소설가로보다는 기업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그만큼 기업성공의 노하우로 각광을 받아왔던 여기업가로 세상에 더 인기적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향숙씨는 전업작가들이 혀를 내두를 지경으로 창작에도 무비의 정열을 쏟아붓고 성과를 올리는 실정이니 그에 대한 연구도 불가피한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집 "꿈속의 누각"에 수록된 전반 작품들을 분석해보면 대체적으로 잡혀지는 인상들이 있다.우선은 슈제트구성이 아주 단순명료하다는 것이다.간단하다 못해 어떤 작품은 그대로 시정거리의 만담얘기와도 흡사하다.회사의 규장제도와도 통하는 데가 있어 한번 스쳐지나가면 금방 작자가 전달하고저 하는 내용이 잡혀온다. 직업상 특점이라 할가.무의미한 것을 걸러내는 필터링능력이 문학창작에도 적용되었다는 느낌이다. 다음은 언어구사에서 소박하고 생활에 발붙인 구어체가 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미사려구가 없이 생활을 바로 퍼포먼스 해버린 패턴이다.박향숙의 작품은 일단 한편만 접촉하면 다음부터 태그를 붙이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언어상태가 원시적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인물형상이 의식적인 변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이 부분이 바로 본 글에서 특별히 언급하고저 하는 박향숙작품의 주요 특점이다.    2     "언 감자꽃"의 주인공 연이는 어쩌면 남의 손에  잘 다듬어지는 인형과 같은 존재이다.출국유학을 떠나는 남편이 그녀의 웃음을 독차지하고싶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말에 연이는 신고도 바다하지 않고 시골에 언 감자꽃을 찾으러 떠나며 그로써 "성세호대"한 웃음 끊기운동을 벌린다.눈물 겨운 그녀의 정성과는 달리 5년만에 돌아온 남편은 송충이 대하듯 그녀를 외면한다.   "기다리는 전화"는 어딘가 모르게 러시아의 "관리의 죽음"을 닮은 코미디같은 작품이다.선전과장 김철수는 잘못받은 전화 한통때문에 무척 고민한다.그는 자신의 차실을 미봉하려고 여러곳에 찾아가나 그들은 전화를 건 사람이 아니었다.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전화는 청소부 마상철이 걸어온 것이었다.   "뱁새의 로맨스"에서 용구는 논문집을 천권만 팔아주면 저자명단에 오를 수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나중에 그가 제 돈을 내어 2천권을 주문하지만 부쳐온 책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성정부과학기술서적 편찬기금회의 후원으로 이교수가 독자출판한다는 기이한 아이디어였다.   "인생유희"에서도 과학연구일군인 복만이는 뜻밖의 방조와 저자 이름 배렬문제라는 괴이한 현상에 직면한다.    "천당입장권"은 이승과 저승에 갈라져있는 두 주인공이 등장하여 더욱 해괴하다.윤리도덕적인 냄새가 다분하지만 정호라는 인간의 언행을 미루어보아 양심의 가책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저승사자가 직접 복수작전을 펼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꿈속의 누각"은 그대로 꿈속의 현장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임재수가 소설창작회사를 꾸린다는 것부터가 천방야담에 가까운 소리이다.그리고 백일몽이 아니면 되려 궤변이라 할 지경으로 그의 사업은 번창한다.뿐만아니라 동시에 세 여인의 몸을 향수할 수 있는 행운이 차례진다.임재수의 발상은 언제나 새롭다.김치공장의 생산과정으로부터 흐름식소설창작이라는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며 소재를 구매 또는 판매한다는 아이로니한 행위가 있게 된다.꿩 먹고 알 먹기로 인계가 적용되며 판매를 촉동하기 위해 명인효과를 등장시킨다.어쩌면 기업가다운 제스처라 할 수 있겠다.임재수의 실패도 따져보면 문화자질이 낮다거나 투기적이라든가 하는 합리적인 요소가 배제된 반면 시장판단착오와 실수적인 투자에 돌려지고 있는 것이다.   3     우에서 우리는 박향숙작품의 대체적인 윤곽을 살펴보았다.자명한바 작자는 독특한 창작개성을 이루고 있는것 같다.필자는 나름대로 박향숙씨의 창작개성을 황당성,풍자성,비판성으로 귀납했다.   그럼 이제 돌아서서 작자의 창작개성을 뒤받침해주는 인물형상을 해부하기로 하자. 황당한 인물들을 내세운 그 기저에는 구겨진 현실사회에 대한 풍자 및 비판이 깔려있는것이다. 개혁개방이 중국에 가져다준 혜택과 번영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페단을 초래해온것도 역시 현실이다.중국인들은 곧잘 "세기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말 그대로 세기말적인 광란이 지금 도처에서 발발하고 있다. 권력에 대한 끈질긴 집착과 날따라 탐오,회뢰 등 비리가 살판치고 투기가 성행하고 생활풍조가 난잡해지고 방탕해졌다. 이런 사회적인 페단앞에서 법은 상대적으로 무기력해졌고 도덕과 윤리는 속수무책이 되어있다. 언어로써 생활을 재반영한다는 나약한 문학이 할수 있는 작업이라면 고작 어떻게 하면 더 직관적으로 현실사회를 재생시키는가 하는 문제뿐이다. 물론 황당파적창작수법만큼 적절한 방법도 없을 것이다.   순수한 황당소설이 아닌, 변태속에 사회생리를 이접하고 부조리에 현실골격을 맞춘 예술의 진실 즉 제2자연을 작자는 창조한 것이다. 두말할 것없이 그가운데는 어리광대적이고 비정상적인 인물들이 서있는것이다.   4     연이는 자기희생정신이 아주 강한 인물이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웃음도 직장도 모두 내버릴수 있는 심리적준비가 되여있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인륜의 논리에 부합되어 존경의 대상으로 될 것도 같지만 작품의 전반 과정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동정과 타매가 방울져 있을뿐 긍정의 흔적은 조금도 없다. 바꾸어 말하면 작자는 연이를 비판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해방을 부르짖은지도 한세기가 되어오는 이 마당이 아직도 남성이 독자 주도하고 따라서 여성은 그 비위를 맞춰서 미용도 하고 옷맵시도 차려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웃음도 팽개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는 것이 아닐가.   김철수의 형상에서 우리는  하층관리들의 누추한 몰골을 엿볼 수 있다. 우로 바라오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자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 있다.김철수도 그중의 일원일뿐이며 다르다면 이 인물을 통해 비판되는 것이 현실인사제도라는 것이다. 능력과 열정에 관계없이 오로지 당권다들의 말 한마디에 승급여하가 결정되기에 아첨과 예물이 흥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하층관리들의 고충도 더해지고 나아가서 매일 전전긍긍한 상황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용구는 투기분자의 전형이다. 물론 햇내기라고 꼭 뱁새일 것은 아니지만 업무수준이 아직은 밑바닥인 용구가 어벌 크게 교수의 논문집에 이름을 올리려고 발버둥치는데는 그로서의 이유가 있었다. 이를테면 직함평의에 밑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든든한 밑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직함평의나 승급시에 사업년령이요 논문이요 수상증서요 하는 따위의 문제에 부딪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형식주의를 절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출내기가 논문집에 집념하는 것을 타매할 수 없는 입장이다.   복만이는 관료주의에 반항하는 인물형상이다. 실력파인 그는 실권파들의 틈새에 끼어 숨도 바로 못쉬고 매사에서 여의치 못하다. 그러던중 한번의 히트로 대뜸 인기인물로 부상한다. 노비도 결산받고 직함도 해결받을 가는성이 있게 된다. 물론 관료들의 상투적인 수법에 걸려 고민속에서 허덕이게도 된다. 관장(官场)의 생생한 재현이라 하겠다. 문외한들이 어떤 도경 또는 어떤 수단을 통해 영도직위에 올라 업무에 정통한 인재들을 이래라 저래라 하며 마구 지휘하는 것은 중국의 일대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도 많이 보아온 풍경이라서 복만이의 고민에는 별로 무감각했고 나중에 결말이 희극적으로 반전이 될 때에는 야릇한 쾌감도 느낄 수 있었다.   정호는 개방시기가 만들어낸 방탕아라 할 수 있다. 어느 시기나를 막론하고 대개 풍류객은 모두 있는 법이지만 오늘에 사는 외도군들은 정상을 벗어난 행위들이 많다. 밥 먹듯이 아내를 갈아대는가 하면 딸같은 여자와 살을 섞고 동시에 여러명의 이성과 접촉하는가 하면 오락장소에서마저 거리낌없이 성행위를 감행한다. 소위 "형세에 발맞춤"하는 것이라든가, 아무튼 복만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질타보다는 사회병집의 수술에 더 치중된 인물이다.   임재수는 불공평한 분배방식에 도전을 건 영웅이다. 자기가 그토록 흠모했던 이정수주필이 그 지명도와 재능과 꼭 반비례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소위 박사, 교수, 작가들이 소학교도 졸업 못한 기업가 앞에서 사맥을 못쓰는 것을 놀랍게 보았을 때 우리의 영웅 임재수는 비애와 절망을 느꼈고 추호의 미련도 없이 자신의 이상 방향을 변경시킨다. 임재수는 또한 얼기설기 엉켜진 관계망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득죄할 수 없는 부문들에서 손길을 뻗쳐와 그의 회사는 어느새 "처제회사"로 전락되며 그때문에 끊임없이 오작품들이 생겨나 회사의 정상적인 운영에 영향을 끼친다.이 땅에서 일을 벌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해본 일이다.임재수란 인물이 풍자의 대상이 되었든 어쨌든 이 인물이 우리에게 던져준 사색의 여운은 한이 없다.그만큼 적시적이고 가치가 큰 인물이라 할가.   5     소설 문체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격이 없다.박향숙씨의 경우는 슈제트를 단선적이고 평면적으로 진행시켰고 언어는 미사려구를 피면하고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였다.창작수법상에서는 물론 과장법을 인용하였고 황당성을 돌출시켰다.그러나 한마디 부언하고 싶은 것은 박향숙씨의 소설은 결코 황당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사실주의와 황당파의 가운데 속하는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편할 것이다.아니,사실주의 수법과 황당수법이 동시에 개입된 수법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아무튼 보귀한 시도를 해주어 무척 반갑다.아울러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넣어주어 다행스럽고 행운스럽다.   그러면서 이런 풍격을 보다 성숙시키면서 새로운 탐구와 성취를 거두기를 바란다. *주:본 평론은 1999년 6월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특간 제64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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