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노크하는 탈피
1
2월의 청도는 그대로 완연한 봄이라 할 수 있다.기온이 얼마동안 령하에서 숨 돌린 덕분에 그나마 박스종이 두께만큼이라도 생겼던 얼음이 씽씽 불어치는 바다바람에 맥없이 풀어지고 겨우내 쓰러지지 않고 생기만 잃었던 풀싹들이 살판을 만났노라 쭉쭉 기지개를 켠다.
아직 여덟시도 되지 않았는데 리촌시장은 벌써 사람소리,오토바이소리,대장간같이 뭔가 쟁그랑거리는 소리로 벌써 북적거린지 오라다.
리촌하 강바닥을 평퍼짐하고 넓게 차지한 리촌시장은 청도에서 악명이 꽤나 높았다.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들이 여기저기서 썩어가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고작 2메터 넓이로 동쪽 한옆에 꺼져들어가 겨우 강이란 명맥을 이어가는 리촌하에는 하얗고 빨갛고 검은 비닐주머니들이 강을 따라 무언가에 줄지어 걸려서 흐르는 강물과 더불어 색동저고리처럼 하느작거리고 있었다.다행히 그 강을 가운데 두고 비릿한 해산물 매대들이 줄느런히 서있어 강의 썩은 냄새는 거의 의식할수 없었다.
력사유물마냥 조그마하게 남겨진 구역질나는 리촌하를 그나마 가장 멀리둔 서쪽에 조선족들로 이루어진 시장 코너가 있었다.노천시장이다보니 풍천이나 비닐쪼박으로 서로의 하늘을 덮었을뿐 통바람이 그대로 훑고지나가고 있었다.
매캐하고 시뿌연 새벽 공기를 헤가르며 짐을 나르는 장사군들의 얼굴엔 고단한 모습이 력력하다.어제 하루종일 실랭이질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이틑날의 장사몫을 장만하느라 밤잠을 빼앗긴게 분명했다.미처 눈도 붙이지 못했는데 또 약동하는 하루가 열려진게 틀림없었다.
장사짐들이 모여지고 쌓여지고 그러면서 한쪽으로 풀어지면서 벌써 다투듯 흥정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거 의란된장 한근에 얼마에요?”
어디선가 별로 서툰 한국말이 들려왔다.
지영이는 소리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도때도 모르고 불어치는 세찬 바람이 검은 비닐주머니 하나를 공중으로 날아올리며 꺼져들어간 리촌하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찌프러진 눈쌀넘어로 바로 코앞에 스물살 좀 넘겼을가 할 애숭이총각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사군 아주머니와 말을 걸고 있는것이 보였다.
(고중이나 졸업했을가? )
시무룩이 웃음이 나왔다.지영이도 언젠가 요란 끝마디 말만 들어가면 한국말인줄로 알았던 과거가 있었던것이다.
“6원입니다.”
“비싸군요.우리 연길에 가면 기껏해야 1원 50전 하겠는데요…”
“그럼 연길 가서 사잡수시오.”
“야,이 아줌마 참…왜 그래요? 좀 깍아주세요.”
“안되우!”
좀생이같은 총각과는 달리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했다.
“조선사람들은 뭐나 이렇게 비싸게 파니까 안된다니까.”
총각은 선자리에서 한동안 우물쭈물하더니 큰 결심이나 한듯 구시렁거리며 홱 돌아서 뒤쪽에 있는 한족매대로 다가갔다.이맘때는 한족장사군들도 어디선가 조선된장을 구해가지고 팔고 있었다.그래서 경쟁이 더욱 심했다.
(아직 자리를 튼거 같지 않은데 나쁜것부터 배웠네.망조 아닌지 몰라.덜 떨어진것들은 적게 와야겠는데…)
지영이는 리유없이 냉큼 총각이 비워놓은 그 자리에 척 들어서면서 들으라는듯 목소리를 높혔다.
“아주머니,된장 두근 주십시오.”
흠칫 돌아보는 총각의 몸짓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그러건말건 지영이는 손가락으로 된장을 찍어 맛보면서 수다를 부렸다.
“연변에서 의란된장하므 몰루는 사람 별로 없지므.의란된장 디게 마싯다 아이가.”
그러다가 지영이는 제풀에 혀를 홀랑 내밀었다.자기도 모르는새에 한국인 어투를 흉내낸것이다.이젠 그런것들이 몸에 흠뻑 배여졌는가보다.
피뜩 심사장이 머리속에 떠올랐다.아직까지 이불을 뒤집어쓴채 코 비뚤어지게 자고 있을 심사장이 매일 노래처럼 반복하는 “아이가” 소리가 혹처럼 자기한테도 붙어졌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남과는 다르겠다고 욱벼르며 버텨온 자기도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라니 억울하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넘겨주는 된장을 받아들고 돌아서던 지영이는 바닥에 어지럽게 버려진 무언가를 헛밟고 휘청거렸다.순간이나마 허리 부위에 통증이 스쳐지났다.그 통증은 몸이 평형을 잃으면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반응만은 아니였다.
집문을 나설 때부터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었다.
심사장이 찾아온 이틑날이면 꼭 일어나는 현상이였다. 웬 중늙은이가 그렇게도 힘이 무진장한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자기 말로는 비아그라 먹는 일이 종래로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걸 먹지 않고 쉰을 넘긴 남자가 그렇게 강할수 있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술 먹고 온 초저녁은 공식처럼 두번을 걸친다.그리고는 돼지처럼 잠들었다가 새벽 세시쯤에 또 한번 달려든다.이때가 당하기 가장 어려웠다.쉽게 버리기를 달가와하지 않는 심사장을 위해 지영이는 꽤나 오랜 시간을 허리를 꼬아가며 배합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영이는 시장을 더 돌아볼 생각을 버리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이 지나면 심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2
(몸보신 좀 시킬려구 했었는데…)
문고리를 잡으면서 지영이는 괜히 된장만 달랑 들고 돌아온 자신이 얄밉고 한심했다.
심사장과는 마지막 부딪침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좋으나 궂으나 근 6년을 살을 섞으며 지내온 사이였다.
“너 나를 정말로 좋아한건 아니지?”
“…”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기엔 섭섭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이 인생을 다 바쳐 사랑하기엔 솔직히 너무 늙어있는 심사장이였다.그래도 착실하게 챙겨주고 여러모로 인정을 심어준 심사장이기도 했다.
“나랑 업다캐도 니는 잘할꾸다.긍께 니는 그런 센스 잇따 아이가 .잘해?”
섹스 무드를 익히려고 한 말이 아니란건 지영이도 잘 알고 있었다.벌써 인수인계가 마무리된 상황이다.구태여 아닌 아첨과 발라맞춤이 필요없는 시점이다.그러기에 지영이는 코마루가 찡해나는 감동을 먹기도 했다.
악연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외곡적이여서 어쩔수 없이 옷자락 스친 인연이라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심사장과는 어딘가 전생에 매듭지은 연분이 있긴 있었다고 지영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운명의 조화는 언제나 그렇게 신비하고 절묘했다.
지영이가 엄마의 정체를 확 알아버렸을 때는 머리속이 텅 빈채 망연자실했었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럴수가 있냐고,이래서 되느냐고 열아홉 마음이 묻고 답하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
물론 엄마도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것이다.연길에서 한창 대학입시공부에 열중해야 할 딸애가 황해가의 낯선 도시에 불쑥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지영이는 리촌이란 동네를 그쯤에서 알게 되였다.
여기저기서 고층빌딩들이 다투기라도 하듯 우후죽순마냥 일어서고 있는 그 가운데 낮다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질서없이 모여앉은 동네였다.개발붐을 타고 청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고 있었으나 겨레들이 뭉쳐 자리를 튼 리촌은 얼핏 동북의 어느 시골도시를 련상케했다.줄느런히 내걸린 한글간판만 아니였어도 청도에 왔다는 느낌을 좀체로 받을수가 없었다.
안마방에 리발관에 식당,다방 등 그렇고 그런 어둡고 음침해보이는 장소들로 오불꼬불 미궁마냥 길다랗게 뻗은 향양2지로에서 유표하게 우뚝 솟은 층집을 마주하고 지영이는 안도의 숨을 간신히 몰아쉬였다.
“누굴 찾습니까?”
노크소리에 문을 열어준 사람은 신수가 멀끔한 60대 사나이였다.
그러나 지영이의 눈길은 늙은 사내보다 집안에 먼저 돌려졌다.빠끔히 열린 문짬으로 잠옷바람에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있는 엄마의 익숙한 모습이 엿보였다.2년을 못 본 엄마를 슬쩍 지나가는 눈길로도 알아볼수 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했다.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기억속에서 사라져 저으기 불안했던 지영이였다.불혹에 들어선 엄마는 여전히 그렇게 예쁘고 젊어보였다.
“아,아니…잘못 찾아왔어요.”
지영이는 입안 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한발 옆으로 비켜섰다.엄마의 모습이 인츰 집안 구석으로 사라졌다.
곧바로 문이 다시 닫혀지고 지영이는 찬바람이 그대로 왕왕 달려드는 계단에 비참하게 버려졌다.
“누구예요? 여자애 목소리 같던데…”
“아무것도 아니야.집 잘못 찾은 과객이야.어서 먹어.”
엄마의 어딘가 조급한 물음에 한껏 짜증이 얹혀진 사나이의 대꾸였다.
구겨질것 같은 마음이 이상하게도 목석같이 굳어져서 쉽게 꺽어지지를 않았다.
소한을 눈앞에 둔 한겨울날 난방장치도 없는 집안에서 잠옷바람으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아침 식사를 하는 엄마는 밝은 목소리만큼이나 행복할가 싶었다. 고향에서 심심찮게 보아온,그래서 인젠 면역이 되여진 그런 불륜이 정작 엄마라는 이름의 녀자와 초점을 맞추고보니 전혀 실감이 오지 않았다.
바보스럽게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그대로 엄마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계단벽에 기대여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지영이 옆을 그때 정장 차림의 깔끔한 40대 사나이가 느릿느릿 스쳐 올라갔다.훤칠한 키에 너부죽한 얼굴을 가진 중년신사였다.이따금 흘끔흘끔 지영이를 훔쳐보면서 정확히 엄마가 들어있는 집을 똑똑 점잖게 노크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이번엔 문이 열리는 대신 곡조가 달린 엄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먼저 새여나왔다.
“심정호입니다.저 배사장님 댁에 계십니까? 전화 연락하고 오는 길인데요.”
중년사나이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웬일인지 지영이를 돌아보았다.미간에 눈에 잘 띄이지 않는 기미가 박혀있었다.
“아,네~심사장님, 잠간만요~. ”
엄마는 옷을 갈아입는지 한동안 잠잠했다.이윽고 문이 안에서 밖으로 밀려 열려졌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심사장이라고 불리운 손님은 얼핏 한번 더 지영이 쪽을 훔쳐보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잇따라 집안에서 엄마와 손님간에 인사수작이 오가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심사장이란 사람은 웃음소리도 걸걸했다.반면 호들갑 떨던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나중엔 들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집안에서 불시에 신발을 찾아 신는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복자씨,어딜 가는거야?”
배사장이란 사나이의 텁텁하고 위엄기 어린 물음에 이어 엄마의 기여드는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왔다.
“잠간 나갔다 올게요.”
지영이는 후다닥 계단을 뛰여내려 무작정 거리로 달려나갔다.
뒤미처 문이 덜컥 열리고 또닥또닥 층계를 달아내리는 구두발소리가 뒤등을 때렸다.
굽이를 몇개 돌았는지 알수가 없었다.귀가에는 환각인듯 자기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싶었다.
“지영아!”
3
“예?”
“지영아!”
그렇게 엄마는 한번 더 불러놓고 넋잃은듯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본다.
“무슨 일임까? 오늘 엄마 영 이상함다”
지영이도 덩달아 비닐을 덧붙인 창문으로 눈길을 돌렸다.밖에서는 때마침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 새끼는 쌔시개처럼 어디루 바라댕기느라구 돌아오지 않니?덜렁수캐 같은게… 에이구 기갈이 번져진다.”
동생 지국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열두살난 지국이는 나이와 맞춤하게 개구쟁이였다.
“이 정신봐라.저낙때가 다 댔제.그래니까 구둘이 찹지.”
엄마는 부시시 봉당으로 내려가 신을 궤신고 지영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먼저 자부동 깔고 탄재 덮구 있어라.인차 불 땔게.”
“엄마,난 일 없음다.그런데 어째 그램까?”
“나뚜 일없다.그 모재하구 버버리수갑 뿌레달라.”
“내 학교서 올 때 전화했음다.갠데 전화두 야바입디다.”
“얼루둥.”
“엇씀다.”
억울한듯 입을 비죽 내민 지영이를 본체만체 엄마는 털모자와 솜장갑을 받아들고 문을 나섰다.
엄마랑 함께 있을 땐 몰랐었는데 정작 혼자 남으니 아닌게 아니라 추위가 엄습해왔다.지영이는 말 잘 듣는 어린애마냥 엄마 분부대로 방석을 끄당겨 깔고 담요로 몸을 감쌌다.덜덜 떨리던 몸이 그제사 좀 풀리는듯 했다.스팀 있는 학교 숙사에 그대로 있었을걸 하고 후회했다.
연길에 올라가 고중에 다니는 지영이는 주말이면 꼭꼭 집으로 돌아온다.농사철엔 힘겨운 엄마를 돕기 위해 자주 집으로 돌아왔었고 정미까지 끝낸 이맘때는 엄마가 보고싶어 달려온것이다.
올해는 날씨도 좋았거니와 엄마가 하도 억세게 일한 보람으로 농사가 대풍을 안아왔다.
일송정을 뒤로 등지고 앉은 이 고장은 만청시기에 황제에게 진상되는 어곡을 생산하던 유명짜한 고장이다.윤기가 도는 시커먼 땅을 갈아엎고 그대로 벼종자를 뿌리면 주먹만한 낟알이 달린다는 전설같은 고장이였다.
그토록 기름진 논밭들이 코리아드림에 한족들 손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고 있었다. 토박이로서 온 마을에서 유일하게 농사를 짓고 있으면서도 엄마는 언제 얼굴 한번 찡그린적이 없었다.펀펀하게 살아있는 남편의 일손을 일절 빌리지 못하면서도 가끔 그 남편의 주정과 욕설을 받아야 하는 엄마였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시종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장리돈을 내여 한국 가려다가 사기당한 아버지의 빚을 꽤나 갚을만 하다고 얼마전에 전화로 기쁜 일인양 알려주기도 했었다.
실지로 지영이도 엄마한테 전할 기쁜 소식이 있었다.”꽃나라”잡지에서 벌린 전국조선족중학생 작문콩클에서 지영이가 단연 금상을 차지한것이다.그걸 계기로 텔레비죤방송국 소년아동부에서 지영이를 단독 취재하여 특별프로로 방송하기로 하였고 출판사와 중학생신문사에서 손잡고 지영이의 개인작문집을 내주기로 결정했던것이다.
(그새 무슨 일 또 생겼나?)
지영이는 여느때와 다른 엄마의 심상찮은 언행이 불안했다.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스르르 내려앉고 있었다.
바작바작 눈 밟는 소리가 가까와 오더니 초가집의 찌그러져가는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벼짚더미가 문이 좁다하게 먼저 밀려들어왔다.벼짚에 얼굴이 다 파묻힌 엄마뒤로 왕바람을 몰고 꼬리같이 후줄근해진 아버지가 따라들어섰다.
“지영이 왔구나.네리 오는가 했더니… 전화두 하재쿠…”
미처 지영이가 대꾸하기도전에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벼짚을 봉당에 던지면서 대들듯 아버지를 향해 홱 돌아섰다.
“듣기 싫소.소리개는 어째 치우?귀먹재 있소 여기?아부재기 찌르믄서.”
“이 머저리같은 안까이 보자보자 하니까 더러분양 한다.궁디 콱 차놔래?”
별소리가 아닌데도 엄마는 괜히 짜증을 부렸고 아버지 역시 언성을 높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양, 날래 차오..나뚜 메케사게 이렇게 살고싶지 않소!.”
“어째 주디 성한게 원쑤재.악새질 그만해라!계속 참아주니까 사래기 피는구나.”
”되게 쎄오.참아서…”
“에씨,오늘 그저 채도재 갖구 가달 찢어놓구만다.”
아버지는 정말로 살인이라도 저지르려는듯 신을 신은채로 구들에 뛰여올라 식칼이 든 찬장 서랍을 와락 뽑았다.너무 힘을 갑자기 준 탓으로 서랍이 통채로 부억바당에 놀라 서있는 엄마의 발밑에 떨어졌다.아버지는 그쯤에서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허둥지둥 부엌으로 내려가려는것을 지영이가 앉은 걸음으로 달려들어 발목을 끌어안았다.
“아부지 정신있음까?가매 태우구 에고 댕게두 모자랄 엄만데 아부지 지금 오끼 씀미까?”
지영이는 급한김에 고모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앵무새처럼 뱉어냈다.
아버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것이 대뜸 느껴졌다.그리고 가마목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손 놔라.’
그러나 지영이는 아버지의 발목을 부여잡은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아버지는 체념했는지 엄마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뚜 날마다 누쿠대해서 귀채나 파며 얼루재질 하고 싶지 않다.처깜부터 고치깔기 장사 하게달데 파토치지 않았으믄 이제는 돈 벌었재?”
“꼴 베기 싫소.돈 많이 벌어 곰태기 끼겠네.있는 돈이래두 곽지로 긁어가지 마오.”
“그러니 우추사게스리 꼼치지 말고 내노란 말이.”
“내 주먼지에 일전도 없소.”
“종재가 모둥개 맞게 드살 센 종재야.”
아버지는 체념을 했는지 지영이 손을 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엄마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부엌에 벼짚을 쑤셔넣고 불을 질렀다.장작불보다 벼짚은 빨리 타는것만큼 열기도 빨리 뿜었다.집안은 언제 찬바람이 감돌았냐는듯 온기가 서서히 퍼졌다.
밥이 다 되여갈 무렵 지국이가 온몸에 짚오래기를 달고 맞춤하게 돌아왔다. 엄마한테서 “개포시”란 욕을 먹으면서도 지국이는 밥만 맛나게 먹었고 또 인츰 한옆에 꼬꾸라져 잠들어버렸다.
“거 생지 좀 달라.내 숫궁기 빠졌나?자꾸 뭐나 잊어뿌리재.”
설거지 할러 내려간 엄마한테 상우에 있는 행주를 넘겨주면서 지영이는 다시 한번 물었다.
“엄마,집에 무슨 일 있었음까?”
창밖은 어느새 눈이 멎어있었다.
4
“어이 추버라!”
복자는 몸을 가볍게 떨며 걸음을 재우쳤다.
눈 쌓인 촌길은 걷기도 퍼그나 힘들었다.간밤에 내린 눈이 한자 두께는 되였으나 시내처럼 쓸거나 쳐내는 사람도 없어 처녀지에 첫발을 딛는 사람이 청소부인셈이였다.다행이 누군가 벌써 여럿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혀있었다.그 발자국을 겹디디며 걷느라고 복자는 여간만 부산을 떨지 않았다.
(이 넘의 촌구석에서 언제면 벗어날가?!)
촌사무실과 학교 내놓고 벽돌집 하나 없는 80세대의 오성촌에 이날 경사가 났다.김촌장네 막내딸 현옥이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게 된것이다.
신랑은 나이가 40대여서 그렇지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잘 생겼다고 마을에 언녕 소문이 퍼져있었다.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현옥이는 스물세살이라는 젊음이 밑천이였던 모양이다.
안쪽에서는 벌써 언제부터 이런 결혼이 있었다고 하는데 북도치만 모인 이 동네서는 처음 있는 일이였다.그리고 희사 역시 몇년만에 있는것이여서 온 동네가 북적거렸다.
복자도 아침 일찍 김촌장네 집으로 건너가는 중이였다.오라는 부름이 없어도 일이 생기면 서로 발벗고 나서는것이 이 마을의 유구한 전통이다.
마작을 번지다가 새벽녁에야 집에 돌아온 철주는 세상 모르고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자고 있었다.깨여있더라도 철주와 함께 가고픈 마음은 꼬물도 없었다.
(그저 가서 총객이나 보구 인차 오지므..총객이 올기나 한둥.한국총객은 타가소에만 있다던데.)
복자는 피씩 웃었다.
쌀장사군과 오늘 햇쌀을 팔기로 약속되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마을에 오랜만에 생겨난 결혼잔치를 실컷 구경하고픈 마음이다.아직은 어리지만 그래도 딸 가진 엄마로서 떠나는 남의 자식도 지켜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벌써 사위 욕심이 난 모양이다.웨딩드레스 입은 딸의 모습이 언뜻 머리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제 사흘만 지나면 연길에서 공부하는 딸이 돌아온다.
(내가 가시엄마 소리 들어야 할 나이가 됐단 말이?)
처음으로 세월이 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사고를 내기 위한 걸음이 틀림없었다.
잔치집에 이르기도전에 멀리서부터 몰려서서 웅성대던 사람들이 복자한테로 쫓아나왔다.
“지영이 엄마,오늘 각시 대반 좀 서야겠소.”
“방아간집 안까이가 대반 선다했잔쿠 뭠까?”
“글쎄 일이 비틀어졌단말이.낯이 빤빤한 젊은 여자 지영이 엄마밖에 없소..고생하오. ”
“난 대반 어떻게 서는둥 몰루꾸마.”
“지금 그거 아는 사람 하나뚜 없소. 대쑤 상이나 받구 술기 타구 동네 한바쿠 돈다우.”
복자는 주인집에서 챙겨주는 옷을 부산하게 갈아입고 신부옆에 들어가 앉았다.
신랑 신부 합상이 된 상에는 떡,과자,과일,사탕 등속이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옛날같았으면 젊은패들이 새까맣게 덮쳐들었을텐데 누구말마따나 씨종자가 말라버려서인지 중늙은이 서넛이 둘러앉은 속에 주례가 어줍잖게 상감을 치고 있었다.신부한테 부어지는 술 둬잔을 뺏앗아 대신 마신 복자는 안주라고 집다가 그나마 들은 흉내라도 내야겠다싶어 호들갑을 떨었다.
“쉰떡은 이런 상에 올리는게 아이잖음둥? 시시해진다구 그러던데 말이.”
“누기 그럽데? 아무래나 뭐라우? 배재밖에 술기 왔다우.나가깁소.”
소수레는 느릿느릿 마을돌이를 하기 시작했다.한번 지나간 길을 다시 되짚어 지나서는 안되는 법이라고 누군가 가르쳐주어 소수레는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다가 얼음길에서 그만 멈춰졌다.한겨울동안 길가에 아무렇게나 내버린 재더미에 구정물들을 부어 작은 산더미처럼 얼어붙은 그곳을 눈까지 가세하여 철을 신기지 않은 소가 도무지 지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복자는 소가 굽을 꺽고 넘어질가봐 신부를 꼭 부둥켜 안았다.살을 에이는 추위에 감기에라도 걸릴가봐 신부 몸우에 걸쳐진 털옷을 여며주기도 했다.
소수레가 그곳을 지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신부집에서 차려내온 술을 마시고 여럿이 소를 들다싶이 하여 간신히 지나온것이다.
복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술에 취한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길옆 울바자들을 무심히 건너다보았다.이때 빵빵 경적소리를 울리며 트럭 한대가 저 앞에서 지나가는것이 보였다
.아차! 복자는 속이 덜컥해났다.오늘 쌀장수가 쌀 사러 오기로 했던 약속이 불현듯 생각난것이였다.
“에이 재수 개판이구마.”
소몰이군이 투덜대며 옆골목으로 수레를 돌렸다.
“아즈바이,이렇게 가믄 더 멀지 않음둥?”
복자는 기겁한듯 소리질렀다.흐뭇하게 웃는 철주의 쪼잔한 얼굴이 새삼스레 스쳐지났다.
“남이 차 지나간 길도 아이 지나꾸마.”
무너져 내려 앉을것 같은 초가집 사이사이로 돌아오는 그 10분이 복자에게는 10년 맞잡이로 길어보였다.
속탄 복자를 아랑곳 않고 조촐해 보이던 혼례 일정은 길기만 했다.신랑의 처가 부모에 대한 절인사에 집 떠나는 신부의 눈물 겨운 작별 인사 그리고 여러 친척 이웃들의 기념 촬영까지 마치고나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여왔다.수고했다며 주인집에서 식사하고 가라는것도 물리치고 복자가 집으로 달려왔을 때는 창고에 쌓아놓았던 쌀더미도 철주도 간데온데 없었다.
(아이쿠, 버새같은 나그네 그 즈쌀에 돈은 알아가지구…)
복자는 그저 하늘이 무너지는 감각이였다.
그 쌀들은 그녀가 빚을 청산하고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일년동안 죽을둥살둥 모르고 일해서 거두어들인것이다.
복자가 후두둑 튀는 가슴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온 마을을 샅샅히 훑어 겨우 철주를 찾아냈을때는 이미 마작판에 천여원이나 되는 돈이 빨려들어간 뒤였다.
5
돈이 없어도 괜찮았다.
못 살아도 철주와 함께 한다면 행복할것 같았다.
둘이 맞붙어 벌면 가난은 쉽게 이겨낼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네 집에 얹혀사는 철주를 복자의 부모는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가끔 찾아와도 반가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특히 엄마가 더욱 그랬다.
“내 말 듣잰쿠 우기써봐라.면다재 들구 댕기며 비락질 하지 않나.”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쓰다달다 말없이 함구만 했다.그래도 철주는 렴치불구하고 잘도 찾아왔다.
“어마이,달기 모가지 한번 비틀어 보깁소.”
“가우가우,낯에 쎄때판 깔았소.?”
엄마는 인정사정없이 철주를 문밖으로 내밀었다.
“이 간나야.니가 꼬랑대 자꾸 흔들며 끄서들이니까 똘가두 안가지.”
복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는 엄마를 이겨낸적이 한번도 없었다.말없이 문을 나선다.엄마한테는 침묵이 제일 좋은 무기였다.
“딸 키워 쓸데없단데.내 얼매 끔찍하게 고바했는데…어시말 안듣구 잘되는 년 없더라.”
복자는 엄마의 지청구를 등에 달고 저 멀리서 기다리는 철주에게로 다가갔다.
5월도 다 가는 어느 오후였다.
뒤산에는 검붉은 진달래가 활짝 피였다.산자락까지 내리깔린 진달래밭사이로 오염 하나 없이 새말간 개울물이 찰랑이며 흘러내린다.한들바람에 살포시 떨어진 진달래꽃잎들이 개울물에 평화롭게 떠서 길게 흘러내리며 마을을 둥그렇게 돌아 지나간다.
새로 이영을 해올린 초가들은 나름대로 아담하고 참신한 기상이다.
아지랑이 실실히 피여오르는 들판은 언녕 초록색으로 물들었고 하늘에는 강남 갔던 제비들이 활개치며 훨훨 날아예고 있었다.
새해 농사에 떨쳐나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로 한껏 넘쳐났다.뭔가 절실히 기대하는 모습들이였다.무성한 소문과 더불어 뒤숭숭해진 시국과는 달리 농부들은 오히려 등어리에 힘을 얻은듯 씩씩한 걸음들이였다.
… …
화주석 손을 들어
해살을 보내주었네
… …
“저 앞동네선 조를 나눴다더라.”
함께 노래 부르며 신나게 가래줄을 당기던 선화가 느닷없이 힘을 푸는바람에 가래날이 평형을 잃으면서 가래밥이 복자의 발목에 떨어졌다.
“호호호…”
선화는 재미있다고 배를 안고 돌아갔다.복자는 선화를 밉지 않게 힐끗 노려보며 투덜댔다.
“이 간나봐라.바람났재?”
“바람은 미꿍기로 호박씨 까는 니가 났지므…”
그러다가 선화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래대를 거머쥐고 선 철주의 낯이 어느덧 새빨갛게 달아있었다.복자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끝내 엄마의 인정을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둘사이의 관계는 마을에서 이미 비밀이 아니였다.엄마도 이젠 지쳤는지 입으로는 여전히 험하게 비꼬아도 둘이 그림자같이 붙어서 일하러 나가고 또 돌아와도 말리지 않는다.
“그저 아가리 툭 쳐논다!”
종주먹을 쥐고 때리는 흉내를 내는 복자에게 왈패인 선화가 머리까지 내밀어준다.
“얻다.자부대두 끄서라.”
“저기 앞동네는 시범이라재?”
“응,먼저 뚜깨 열어보는 모애.잘되므 다른 동네서두 따라하구.”
“남방에선 개인으로 한다메?”
“그런거같으루하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이곳 시골에서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세사람은 아직 감지 않은 논두렁에 그대로 걸터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참새처럼 끝없이 재잘거리는 두 처녀의 화제에 몇번 끼워들지 못한 철주는 멋적었던지 아예 논두렁에 걸터앉은채 나무꼬챙이로 민들레를 캐기 시작했다.꽃이 핀 민들레가 많았지만 닥치는대로 캐서 주머니에 쑤셔넣고 있었다.
이야기에 열중하던 두 처녀는 재미난다는듯 잠시 말을 끊고 민들레 캐는 철주의 뒤모습을 물그러미 바라본다.해가 구름에 가리워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인 가운데 허리를 구부정하고 논두렁에 앉아있는 철주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도록 환상적이였다.
저녁노을이 진 서쪽하늘은 랑만일뿐만 아니라 그대로 유혹이였다.
그 하늘에로 끌려가는 젊은 마음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미래는 언제나 아름다왔다.
6
변화는 늦게나마 그래도 서서히 이루어가고 있었다.
밥곽만한 라지오를 베개맡에 놓고 연변방송을 듣고 또 남조선 케이비에쓰방송의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절목에 취해 여러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그사이 복자는 소원대로 미래 작가인 철주와 결혼에 골인했고 귀여운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그리고 듣기만 하던 호도거리책임제를 맞아 자기절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도 벌써 옛날이였다.
남매는 다섯살 차이로 탈없이 잘도 자랐다.속 한번 태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참말로 기특한 애들이였다.딸애는 말하는거나 하는 행동이나 그대로 어른이였다. 아버지를 닮아 글재간도 얼마나 좋은지 소학교때부터 크고 작은 작문콩클들에서 상들을 도맡아 타왔었다.아들도 놀음에 탐해 그렇지 총명하고 공부 잘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의 창고를 빌어 구들을 놓고 나무궤짝 두개를 가지런히 붙여서 그 우에 이불을 얹어 시작한 결혼생활 몇년에 이젠 초가나마 자기집도 가지게 되였다.그리고 14인치짜리 흑백텔레비죤도 갖추어놓았다.좀 작기는 해도 영상이 또렷하게 나오고 음색이 맑았다.
부지런히 일만 하면 남부럽잖게 살수 있다는 믿음이 섰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속에서도 복자는 마음 밑바닥에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편 철주의 눈에 띄이는 변화때문이였다. 처음에는 통신원 회의이요 업여작자 학습반이요 하면서 나다니는 철주를 대견하게 느끼기도 했다.신문에 짤막한 글들이 가물에 콩나듯 드문드문 나와도 그저 기쁘기만 했다.철주한테 반했던것도 바로 그 글재간때문이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꼬리를 쳐들었다.
자기 입에는 덕신담배가 제격이라며 엽초만 말아 피우던 남편이 어느덧 권연을 손가락에 멋지게 끼기 시작했다.그리고 무슨 넘의 학습반과 회의가 하필이면 농망기에만 하는지 모를 일이였다.잔뜩이나 한국으로 일할러 가거나 대도시나 연해도시로 장사를 떠나 농사하는 마을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면서 말동무가 없어지는 판에 남편마저 곁에 없으니 일할 맥이 나지 않았다.
(머절싸하게 왜 내 혼자해!)
생각이 삼천포로 달아나는것을 겨우 붙잡아 매두기도 했었다.
복자를 참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또 있었다.정미를 끝낸 이틑날이면 어떻게 알고 여러 소매점에서 남편의 외상술값을 받으러 찾아오는것이였다.
“굶은 승애요? 반지술 끊어본적 없는데 무슨 외상술 그렇게 퍼먹었소 양?”
자기 입이 언제부터 이렇게 걸죽했졌는지 복자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룡정 시내로 시집간 선화는 말랑말랑해졌는데 자기는 되려 세월에 닳아떨어졌다는 한탄을 가끔 하고 있었다.
“글친구들 올 때 먹은게요.집에 델구 오면 까마치 긁는 소리 아니므 퉁재 뚜들기는 소리나 하지.방법이 업지므.”
“글이구 나발이구 이제는 싹 걷어치우.거기서 밥나오 죽나오?”
복자는 꽥 소리를 내질렀다.글공부에 처음으로 싫은 소리를 한것이다.그러면서도 선선히 쌀을 떠서 외상값을 물어주었다.
그러나 어느날 문뜩 철주가 논을 한족한테 팔아버리자는 말을 꺼냈을 때 복자는 끝내 참을줄이 끊어져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얼빤한 나그네 귀구멍은 넓어가지구.논 팔구 내굴 퍼먹겠소. 바람 퍼먹겠소.”
“지금 안쪽에 고치깔기 데게 눅다우.그걸 연길 갇다 팔문 거저 부자재?힘들게 농사 짓겠소?”
“듣기 싫소.돈 벌 즈쌀인가 세꽁이나 쳐다보..”
“아 이 안까이 증말…”
발작할듯 뛰쳐 일어난 철주는 싱겁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괜히 나돌렸다는 후회가 들었다.남자도 밖에서 돌면 깨지는 법인가.글재간은 별로 늘어나지 않고 허튼 궁리만 속출했다.
“안쪽에 글친구 하나 있는데 한국사람 아는게 있는매.가짜 초청장 해주겠답데. ”
“돈 어디 있게?”
“이자돈 꾸지므.”
“무시게라우?지금 정신 있소?.얼빤한 짓 하지마오.”
“남조선 한번 갔다오무 썩어질 때까지 일하지 않구두 사는데.”
복자가 반대하건말건 철주는 기어코 한족한테서 5푼짜리 고리대금을 빌려가지고 부득부득 안쪽으로 떠났다.
몇달동안 소식이 끊겼던 철주가 관골이 튀여나온채로 마을에 나타난것은 그해도 다 저물어가는 어느날 한밤중이였다.
“짜팬당했소.친구하구 내 둘다 한국사람한테 짜팬당했소.”
철주가 돌아와서 보름동안 한 말은 이 한마디뿐이였다.
그리고 복자가 혼자 힘으로 어렵사리 거두어들인 낟알을 채권자인 한족들이 트럭으로 몽땅 실어갔다.살림집도 내놓고 또다시 남의 창고를 빌려 들었다.한 헥타르가 넘는 논의 경작권까지 빼앗겼으나 겨우 리자를 좀 더 갚았을 뿐이였다.
모든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아니,심한 마이너스가 되여버렸다.리자에 리지가 덧붙여지는 산더미같은 빚이 쌓여졌고 남의 논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형편이 되여버렸다.
7
밤은 깊어만 간다.
래일이면 딸은 연길에 있는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엄마 없어도 살만 하지?”
복자는 순진한 딸의 눈을 정시할수 없었다.
딸은 입을 꾹 다문채 화면이 시시로 떨어대면서 사람 모습이 자꾸 변형이 되는 텔레비를 신경질적으로 툭툭 두드릴뿐이였다.세월이 흘러 텔레비죤도 이젠 고물이 되였다.
말없는 딸을 묵묵히 건너다보며 복자는 훌쩍 커버린 딸을 처음으로 의식했다. 충격을 받고 울며불며 야료를 부릴것 같던 딸은 언녕 이럴줄 알았다는듯 무표정한 얼굴이였다.하긴 바로 그제도 당금 살인이라도 저지를듯 무섭게 날치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주던 딸이였다.
“니뚜 열일굽이다.골도 엄마보다 선새구.엄마 어째 이러는지 알만하재?”
“…”
“왜 말이 없니? 엄마가 꼴찌사니?”
“어딜 가자구 그럼까?”
이것도 집이라고, 어시라고 연길에서 추운 길을 진둥한둥 달려온 딸앞에서 부끄럽게 부부싸움을 한후 이틀만에 처음으로 입을 여는 딸이였다.
“선화아재 알만하니?거 용정에 시집간 엄마 동미말이.이원하구 지금 청도서 한국회사 식모로 일한다더라.”
“꼭 가야함까?”
“아까 곰방 전화했다.”
복자는 나무궤짝우에 싱겁게 놓여진 전화기를 물그러미 건너다보았다.향에서 무슨 통신우수향을 만든다고 억지로 놓아준것이다.그 전화기 값을 아직 갚지 못해서 심병으로 남아있는데 철주는 오히려 이게 웬떡이냐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기도 했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이렇게 살다간 내가 미칠거 같구나.”
복자는 속주머니에서 비닐로 꽁꽁 싼것을 꺼내 딸의 손에 쥐여주었다.
“얻다.애껴 쓰믄 한학기는 쓸거다.니 아부지가 도박판에 잃지만 않았어도 좀 더 줄수 있는데.”
촌장네 딸 현옥이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던 날 도박판에서 우격다짐으로 쌀판 돈을 뺏아내여 결김에 그 즉시로 한족 빚군을 갖다주었다.앞으로 살 궁리로 조금 손을 보고나니 겨우 리자를 맞출수 있었다.벌써 3년째이다.빚은 좀체로 줄어들줄 모른다. 한족 빚군은 전자계산기로 수자를 쳐가며 일전한푼 차이나지 않게 꼼꼼히 계산했다.악착하기가 “꽃파는 처녀”에서의 지주와 같았다.일년내내 뼈 빠지게 일해서 저넘 좋은 일만 한다는게 억울했다.영원히 해빛볼 날이 없도록 자기를 그런 억울한 지경으로 내몬 남편이 죽이고싶도록 저주스러웠다.
“내 힘들어 죽더래도 니네 둘 대학까징 얼매든지 꿍할수 있으니 아무 생각말구 공부 잘해야 한다.알았제?”
“엄마..”
딸이 조용히 복자옆에 다가와 앉았다.
“니는 일없는데 맨날 덜컬이 돼갖구 돌아댕길 지국이가 더 걱정이다.”
“내 공일날마다 와서 씻어 입히겠음다.집이 가찹는데 걱정 아이해도 됨다.”
“응.허덕간 덩때우에 빨래비눌이랑 빨래갈기랑 있다.”
“알았음다.”
“힘들면 외할매집에 갖구가구.아부지 시켰다믄 똘겨날거니까 니 절루 갖구왔다구 해라.”
아침을 먹고 나간 철주는 여직 돌아올줄 모른다.
철주는 여전히 그 식이 장식이였다.연길 어떤 회사에서 한국산업연수생을 모집한다고 한다.그래서 몇달동안 연길 가서 살다싶이 하다가 풀이 죽어 돌아왔다. 이번에는 심양에 있는 아는 친구의 먼 친척되는 사람이 한국으로 “터우뚜(밀출국)”를 알선해준다면서 달려갔다가 얼마쯤 선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뒤띠가 뽀애서” 돌아왔다.얼마전에는 한국으로 가짜 시집을 가는 길림처녀애의 아버지로 가장해서 나갈수 있다고 흥분하더니 웬 영문인지 더 이상 별말이 없었다.집에 와서는 마작판에서 살다싶이 한다.주머니에 돈도 없을텐데 어떻게 밖으로 나돌아 다니고 또 도박을 노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아무캐나 살라지므 .족대기 손목대기 다 자긴데 달렸는데 관할할 방법이 있나.)
복자는 남편이란 인간에 대해 완전히 체념한 상태였다.그 인간과 근 20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만 해도 지리리 소름이 끼쳤다.
이젠 지겹다.진저리난다.아직도 복자를 자기를 흠모하고 숭배하는 신데렐라소녀로 착각하는 남편이 한심스러웠다.
(저 인간과 같이 살면서 가락지 하나 얻어 못차보구서 개고생만 했단말이.전생에 무슨 원쑤 졌는지?)
이날따라 남편에 대한 원망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그러나 가증하더라도 여직껏 참으며 살아온것이 자식들때문이라고 핑계를 둘러붙이기에는 막상 떠나려고 작정한 이 자리에선 너무나 초라해보였다.
“후,날이 밝겠다.자자.”
복자는 전등을 끄고 드러누웠다.
한겨울 밤은 괴괴하기만 했다.이따금 씽씽 불어치는 바람에 초가지붕의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묵중하게 들릴뿐이였다.
앉은 자세로 한동안 부동하던 딸이 이윽고 이불을 살며시 쳐들고 찬기운과 더불어 들어와 가슴에 스르륵 안긴다.정말 오래간만에 모녀간이 한이불을 덮은것이다.두 몸이 맞대이는 순간 뭉클하는 감각이 팔에 맞쳐왔다.딸애의 몸이 이 정도로 영글었을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잔더리 긁어줄가?”
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 아득한 옛날 잠투정하는 딸에게 자장가대신 잔등을 긁어주는게 복자의 천륜지락이였다.
인차 딸애가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8
복자는 헉헉거리며 힘겨웁게 계단을 톺아오른다.다리를 들었다 내릴 때마다 눈앞에 꽃보라가 터지는 느낌이다. 직업소개소로 올라가는 마흔개도 되지 않는 계단을 두번이나 휴식하며 올라왔다.
(스푼이 뭐랬더라? 국재더라?)
기억이 아물아물했다.
벌써 이틀째 배를 곯리다싶이 하고 있었다.주머니엔 정말 단돈 10원밖에 남지 않았다.소개비 200원을 낼 형편이 아니지만 복자가 믿고 찾을수 있는 곳은 그래도 직업소개소밖에 없었다.
청도에 온지 두달이 넘었다.
선화가 소개해준 한국회사에서 식모로 거퍼 한달도 일하지 못하고 쫓겨났다.복자는 한국인들이 하는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간혹 무슨 소리냐고 재확인하려고 귀를 곤두세우며 “예?” 하고 가까이 다가서는 복자를 한국직원들은 정신이 잘못된 사람쯤으로 여기고 피하기가 일쑤였다.그리고 복자가 하는 말도 한국직원들은 적잖게 알아먹지 못하고 있었다.어쩔수 없이 언성을 높이며 두번 세번 곱씹어 말해야 했다.아마 그런것들이 모순의 단초가 되였을것이다.
“아줌마,거 냅킨 갖다주세요.”
“냅킨이란게 머임둥?”
거의 기어가 맞아돌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고향에 있을때 성격처럼 드러내놓고 당돌하게 묻기도 했었다.
“이 아줌마 먼소리 하는지 몰겠네.냅킨 좀 줘요..냅킨 몰루는가봐 히히.”
신경이 막 긁히우는 이런 비아냥소리도 자주 나왔다.
현장통역으로 뛰는 교포들중에 왕청에서 온 총각이 한사람 있었다.송씨 성을 가진 사람 좋은 총각은 복자가 민망했던지 가끔 가만히 퉁겨주었다.
“찬찐즈 그럼다.”
“아 찬찐즈면 찬찐즈지 무신 냅킨이야?”
“아이구 아줌마,찬찐즈는 중국말입니다.흐흐.”
고향 사람한테까지 아즈마이가 아닌 아줌마로 불리우는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로해서 트러블이 생길 이유는 없었다.
어쨌던 그게 연분이 되여서 한국 직원들 입에서 모르는 말이 나오면 전처럼 당자에게 대들듯 묻지 않고 우선 왕청 송총각부터 찾았다.
“아줌마,포크 좀 씻어주세요.”
“총객이, 포크란게 머이요?”
“차재를 말함다.”
그러던 송총각이 웬일인지 얼마후부터는 늦게 식당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복자와 한국직원들이 의사교류가 되지 않아 서로 죽을 쑬대로 쓴후에야 맞춤하게 들어섰다.복자와 시선을 마주칠가봐 저어하는듯 외면하기도 했다.
어느날 총무과장이 조용히 불렀다.
“아줌마,달리 일자리 찾아야 할가 봅니다.”
“가라는 말이구만.내 한 밥 맛없었습니까?”
“그런게 아니구 좀 사정이 있어서요.회사에서 아줌마한테까지 통역을 붙여주기는 곤난하거든요.”
20여일에 확실하게 기억한 한국말은 “키” 하나뿐이였다.열쇠를 키라고 부르는 족속도 있구나 하고 그 말을 들은 순간에 한탄했던게 기억에 도움이 되였을것이다. 그다음은 거의 공백이였다.듣고 기억하고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나이가 나이인만큼 잊음도 헤펐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한게 있었다.고향에 있을 때 “아즈마이”던 자기가 “아줌마”로 변해진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였다.
짐을 들고 거리에 나섰지만 차마 선화를 다시 찾을수 없었다.
원래부터 일솜씨가 재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자기가 일자리 하나 못 찾으랴싶은 자존심도 있었다.
청도에 왔을 때 처음 들었던 민박에 짐을 들여놓고 바로 직업소개소들이 빼곡히 들어선 빈하로에 찾아갔다.
코리아타운으로 탈변하고 있는 빈하로의 정수부분은 길이가 고작 2백미터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그 작은 거리의 량옆에 한글 간판을 내건 상가가 무려 7,80집이나 되였다.식당,옷가게,식품점, 노래방,직업소개소 등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들어선 빈하로는 조선족들로 바글바글거렸다.
“아줌마,연변사람이구만요.”
“연변사람인데는?”
“연변사람 취직이 잘되지 않습니다.일단 연계는 해봅시다.”
그렇게 직업소개소에 등록비로 20원 내고 한달을 기다렸으나 귀신이 곡할 일로 정말 취직이 되지 않았다.제집마냥 소개소에 죽쳐 앉아 일자리를 기다리면서 때마다 만두 하나에 죽 한그릇씩 사먹는데도 주머니 사정은 적자 지점에 당금 이르고있었다.
그보다 더 청천벽력은 선화를 찾을 방법이 없어진것이다.일자리 찾으면 다시 련계한다고 차일피일 미루었다가 얼마전 회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선화 역시 사직하고 나갔다는것이였다.서로 주소를 가지지 못한 딱친구가 청도서 이렇게 갈라지고 말았다.
“후!”
복자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추스리며 소개소에 들어섰다.좀 일찍했던 모양으로 평소 북적대던 소개소엔 주인외에 아무도 없었다.
“아줌마,마침 잘 왔네요.파트너라도 한번 해보실래요?”
소개소 녀주인은 여느때 없이 반색했다.
“아무래나 좋지므.그런데 파트너란게 도대체 뭐요?”
오늘도 취직이 되지 않으면 빌어먹어야 한다는 핍박감에 사로잡혔던 복자는 무작정 답복부터 했다.
“남자랑 일단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그저 부부처럼 그렇게 사는거예요.”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젊은 녀주인보다 오히려 복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악세사리 회사를 경영하는 환갑을 넘긴 한국분인데 40대의 믿음직한 여자를 찾아달래서요..아무래도 아줌마가 적임자일거예요.성사되면 소개비도 그쪽에서 내고 노임은 한달에 2500원 줄거구요.어떠세요?”
“… …”
복자는 근20년만에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였다.복자는 잠시라도 빌어먹으며 질긴 목숨을 연명해야 할 처지가 못되였다.한시급히 산더미같은 빚을 허물어야 하고 아들딸을 남부럽잖은 인재로 키워야 한다.
9
배사장이란 사람의 뒤를 따라 아파트에 들어설때까지도 복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였다.낯도 코도 모르는 생소한 남자가 전혀 무섭지 않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을 주지 않았다.그만큼 뭐가 뭔지 도무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머리는 혼돈상태에 빠져있었다.
(악세사리하는 회사라구 했지.악세사리란게 뭘가?)
궁금한것도 많았다.아무렴 신수가 멀끔한걸 보니 굉장한걸 차리고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꽤나 큰 집이였다.얼핏 보기에 방이 여러개 있는듯 싶었다.넓직한 응접실엔 고급 쇼파가 위압감있게 놓여있었고 그 마주켠 벽에 어마어마하게 큰 텔레비죤이 걸려있었다.텔레비죤이 벽에 걸린걸 복자는 난생 처음 보았다.
“신 벗어요.”
사나이는 찡그린 눈매로 하찮다는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예순 넘긴 남자답지 않게 힘있는 목소리였다.겉모습을 보아서는 쉰 초반정도밖에 되여 보이지 않았다.
“짐 일로 주어요.”
배사장은 손을 내밀어 무작정 그녀의 짐을 빼앗아 구석쪽에 처박았다.그리고는 쇼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티비에서 희한하게 한국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복자는 기계적으로 배사장이 시키는대로 움직였다.
겉옷을 벗어 한옆에 치운후 우선 바닥부터 닦았다.노란색의 장판지를 깐 바닥은 닦기가 퍼그나 쉬웠다.그러나 생각밖에 먼지가 많이 나왔다.녀자손이 닿지 않은 집안이라는걸 대번에 알수 있었다.걸레를 여러번 새로 씻고 그러면서 복자는 열심히 바닥을 닦아나갔다.응접실을 닦으면서 뒤통수가 웬일인지 따끔해나 얼결에 돌아보니 배사장이 쇼파에 앉은채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불똥이 떨어질것 같은 그런 눈길을 복자는 잠재의식에서도 거의 몰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바닥을 다 닦은후 빨래감들을 찾기 시작했다.여기저기서 뭉치고 쌓이고 내버린 빨래감들이 나왔다.침실 옷장에서 나온 한가지 물건이 복자를 잠시 난처하게 만들었다.그건 녀인용 삼각 팬티였는데 진한 붉은색인걸로 미루어보아 꽤나 젊은 녀인의 소유가 틀림없었다.옷장에 걸려진것이 아니라 그대로 옷장 바닥 한구석에 팽개쳐져 있었다. 속부분에 코물같은것들이 잔뜩 발려져 있었는데 그저 버려진것과는 달리 먼지도 앉지 않았고 습기 많은 고장에서 흔히 보는 곰팡이도 끼지 않았다.복자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그것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빨래를 하고나니 짧은 초봄해가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어져 어둠이 물들고 있었다.
“화장실 가서 샤워 좀 해요.”
그때까지 쇼파에 앉아 말없이 티비만 보던 배사장이 문뜩 그녀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예?”
“냄새 나니까 목욕 좀 하란 말이에요.”
“저녁 밥 먼저 해놓고 목욕 하겠습니다.”
“저녁 나가서 먹어요.일단 샤워 먼저 하세요.”
배사장이 이마살을 잔뜩 찡그리는것을 보고 복자는 그만 입을 다물고 옷 입은채로 화장실에 들어갔다.금방 바지를 내리고 있는데 화장실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배사장이 도적놈처럼 어슬렁 들어섰다.게슴츠레 풀어진 눈이 그녀의 아래도리를 훔쳐보고 있었다.복자는 본능적으로 무릎까지 내려진 바지를 급히 추슬러 올렸다.
“숫처년감? 수집음 타게?”
배사장은 흐물흐물거리며 다짜고짜 그녀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그녀의 몸이 어쩔새없이 배사장의 품에 안김과 동시에 허리띠가 터져나가면서 바지가 스르르 발우에 흘러 떨어졌다.
“더 참을수 없어!벌써 몇달 굶었어!이러다간 병난단말이야.우리 샤워 같이 하면서…그것두 하구…시간 절약두 되잖아…”
배사장은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흰샤쯔에 감싸인 그녀의 두툼한 젖가슴을 허비듯 움켜잡고 씩씩거렸다.그제야 복자는 배사장이 어느새 웃통을 벗어제낀걸 발견하고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안깐힘을 쓰면서 허둥지둥 배사장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그러나 배사장은 바위마냥 끄덕도 하지 않았다.인차 얼굴에 식은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허기진 배가 후들후들 떨렸다.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이러지 마시오.내 자식 둘이나 있습니다.”
“엉?”
배사장은 손을 풀고 어이없다는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파트너로 들어온거 아니란 말이지?난 파출부 찾은게 아니거든요.옷 입고 빨리 이 집에서 나가요.”
“아,아닙니다.”
“뭐가 아니란 말이야.돈 없어 굶어지낸다고 해서 내가 봐준건데…이제 한건 잡았다구 생각하는 모양이네. 당신들 그런 얌체한 궁리 걷어요. 거지 본성 여구하네 인간들!”
“잘못했어요.”
복자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도 못했다.그리고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몰랐다.무조건 손을 비비며 잘못을 빌었다.그래도 배사장은 용서할 생각이 꼬물도 없는상 싶었다.바지주머니에서 백원짜리 지페 한장을 더듬어내여 복자 눈앞에 벌려보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걸 갖구 빨리 가!당신들 그 더러운 무리로!”
복자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퍼그나 오래동안 홀시된 그녀의 몸덩이는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있었다.그러나 여기서 쫓겨나가는 날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바싹 도사리지 않을수 없었다.
화장실안은 잠잠해졌다. 배사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만 싹싹 비벼대는 그녀를 물그러미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손에 들고 있던 지페를 그녀의 브래지어속에 집어넣었다.복자가 그것을 꺼내려고 허우적거리는데 배사장이 명령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로 내버려둬!글고 내 바지 벗겨!”
복자는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저도 몰래 손은 배사장의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가슴이 널뛰듯 심하게 들볶았다.
“당신도 다 벗어요.”
두사람이 실 한오리 걸치지 않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배사장은 승리자의 미소를 머금고 흔상하듯 그녀의 육체를 쓸어보았다.오른손 중지를 뻗쳐 아직도 탄력이 있는 유두를 꼭 눌렀다.유두가 젖살속 깊숙히 밀려들어가 보이지 않는대신 젖무덤이 통통히 살아났다.배사장은 신음하듯 낑 소리지르며 남은 젖가슴을 입으로 물었다.동시에 왼손을 뒤로 움직여 샤워기를 틀어놓고 물살이 고르롭게 퍼지는 샤워기 밑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애 둘이라구 했던가?전혀 그렇지 않네.아이구 이 몸매 기막혀!어디 애 낳은 여자같다구…그리구…이건 처녀보다 더 조이네…”
물줄기때문인지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입안으로 짭짤한것이 흘러들면서 으윽 날숨이 흘러나갔다.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철주한테 안해로서의 책무를 거부한지도 2년은 넘은거 같았다.가슴이 미여오면서 머리가 빙빙 도는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10
청도에서 소포가 왔다.
여전히 하물발송인의 주소가 적혀있지 않은것이였다.언제나 그랬다.그래도 엄마가 보내온것이라는걸 지영이는 알수 있었다.
디자인이 새롭고 활발한 한국제 복장이였다.엄마가 잊지 않고 계절마다 맞춤하게 보내주고있었다.이번에는 겨울복이였다.
지국이 몫도 있고 또 주말인지라 지영이는 집으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지영이는 이 집의 매니저가 되여있었다.엄마는 돈이고 물건이고 지영이한테로만 보냈다.2년이 가까와오는 사이 지영이는 그 돈들을 알뜰하게 챙겨 아버지가 진 빚을 거의 갚고있었다.
새 학기엔 지국이를 연길로 전학시킬 생각이다.마을 학교가 학생래원의 공백으로 이번 학기를 끝으로 페교되고 향중심학교로 통페합된다고 한다.향소재지가 연길보다 별로 가깝지도 않았다.
지영이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렸다.지국이를 생각하면 그저 자랑스럽기만 했다.
엄마가 소리없이 훌쩍 떠난 뒤부터 지국이는 갑자기 철이 들어 어른이 되여진 느낌이였다.밤낮을 모르고 밖에서 나돌던 지국이는 누구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짓말같이 엄마가 떠난 빈자리를 스스로 메우고있었다.
“누나야,된장국 어떻게 끓이니?”
술에 푹 취해 다니는 아버지가 늘 찾는 된장국이다.
지국이는 그렇게 배워서 지영이가 학교로 간 닷새동안을 된장국만 끓여 아버지와 함께 먹었다.다시 미역국을 끓이는 방법을 배워주면 다음 한주일은 꼬박 미역국만 해서 먹었다.그렇게 몇달동안 지나더니 제법 여러가지 국을 끓여낼줄 알았다.물론 국만 달리 했을뿐 상에 오르는것은 언제나 이밥에 김치류밖에 없었다.그들은 여태껏 그처럼 먹으며 살아왔던것이다.
(지국아!)
속으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한달음에 집문앞까지 달려온 지영이는 그만 목석같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연길서시장에서 옴니암니 따지며 사온 짠지봉지가 저도모르게 땅에 스르륵 떨어졌다.
발칵 열려진 출입문으로 외할아버지가 동네사람 몇을 데리고 한창 짐들을 밖으로 내오고있었던것이다.
“할배,왜 이럼까?”
“먼저 할매한테 가 있어라.좀 있다 보자.”
과묵한 외할아버지는 더이상 달다쓰다 말없이 짐만 들어내였다.
(아차!)
지영이는 땅이 꺼져들어가는 현기증을 느끼며 허둥지둥 외가집으로 달려갔다.
지국이는 팔에 흰붕대를 감은채 가마목에 죽은듯 누워있었다.그 옆에 앉아 지국이의 손을 꽉 부여잡고 있던 외할머니가 지영이에게 구들에 올라오라고 가볍게 손짓했다.
“할매,이게 무슨 일임까?지국이 누구하구 싸웠음까?”
“쉿!”
외할머니가 목소리를 낮추라는듯 급히 눈짓을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숨소리조차 없던 지국이가 갑자기 전기에 맞은듯 후다닥 뛰여일어났다.
“개새끼들 어디 니죽구 내죽구 해보자!”
조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렇게 큰 힘이 나오는지 외할머니와 지영이 둘이서도 이겨내지 못해 질질 문밖으로 끌려나갔다.바로 그때 짐을 가지고 돌아오는 외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철썩!”
외할아버지의 손이 번쩍하더니 어느새 지국이가 저만치에 나가 넘어졌다.눈알이 금방 뒤집어지는가 싶더니 입에서 흰거품이 실실 흘러나왔다.지영이는 미친듯 뛰여가 동생의 머리를 쳐들어올렸다.
“지국아!지국아!...할배 왜 이럼까?지국이가 뭐 잘못했음까?”
외할아버지는 한사코 발버둥치며 발악하는 지영이를 밀쳐버리고 냉큼 지국이의 멱살을 거머쥐고 집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구들에 던져버렸다.
“쿵!”
지국이는 나무단 넘어지듯 구들에 나가 뒹굴었다.
“짐승보다 못한 그것도 애비라구 역세 들어?너까지 이러믄 니집은 망한거다. 알았니? 자식아!”
눈물코물 범벅이 되여 악악 외마디 소리만 지르는 지영이 무릎에 머리를 무겁게 내맡기고 지국이는 퀭해진 눈으로 외할아버지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지영이는 외할머니와 마주 앉아 사연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아버지는 도박을 놀다가 적지 않은 돈을 잃었었다.이 사람한테 좀 빌리고 저 사람한테 얼마 빚지면서 판을 계속 이어가다가 더는 빌려주는 사람도 빚을 얹어주는 사람도 없어지면서 말다툼이 벌어졌고 결김에 아버지는 품에 간직하고 다니던 칼로 상대방을 찌르고 도망친것이다.다행히 칼이 빗나가 큰 사고가 생기지는 않았으나 상대방은 그걸 핑계로 집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어린 지국이에게 을러멧었다.
“나 잡아갑소 하구 지국이가 가만있었더면 아무 일 없었겠는걸…지두 아버지 일이 밸이 터지니까 막 대들었는 모애더라.그래 그넘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팔을 얻어맞았구…”
11
“여보세~요?”
저쪽에서 엄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지영이는 되도록 맑은 목소리로 조용히 불렀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귀에 소곤대듯 가느다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맘대로 하지 말랬잖니?출근시간에 전화질하면 회사서 좋아 아이 한다.”
“엄마, 급한 일이 있어 그럼다.지국이 연길초중에 붙었는데 학교서 선새들이 부모 주소를 달람다.부모 여파레 없구 바까테 나가 있으면 성적표도 부처주구 그러면 챈쯔하구 손도장두 찍구 그래야 함담다.”
지영이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새학교 이름과 학년 그리고 새로 맡은 세집의 전화를 숨죽여 알리면서 어쩐지 영화에서 보던 특무같단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청도에 가더니 많이 변해 있었다.정체가 희미하고 신비했다.여직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었다.그리고 무슨넘의 회사가 전화를 걸수는 있어도 마음대로 받을수는 없게 규정했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아부지 있잖니?”
“아부지 종적 감춘지 몇달됨다.”
“그 인간 또 어디 갔어?”
“터우뚜로 한국 갔단 말도 있구…”
지영이는 엄마가 주소를 한자한자 불러주는대로 열심히 적었다.그리고 가슴속 깊숙히 새겼다.
원래는 이게 아닌데 하고 지영이는 도리머리를 저었다.아버지의 행실을 일러바치고 지국이의 현황을 알리고 그리고 자기의 타산도 털어놓으려고 작심했었다.아무래도 엄마의 소심스런 행보가 지영이의 의심을 자아낸게 분명했다.
솔직히 언녕부터 엄마의 정체를 알고싶었다.아픈 엄마가 그들 오누이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는 육감적으로 느껴지고 있으나 그 고통의 깊이나 무게를 실감할수가 없었다.이미 성인이 된 지영이는 그것을 묵인하고 지나칠수가 없었다.
엄마는 전혀 생각지 못할것이다.이시각 지영이는 자기 인생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있었다.
지영이는 아버지가 칼로 남을 찌르는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는바람에 생각보다 일찍 지국이를 연길로 데려왔다.겨울방학이 닥쳐오고 다시 새학기를 기다리기엔 지국이가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지국이가 엄마의 실종으로 번쩍 철이 들었다면 이번엔 아버지의 무지한 행실로 인해 한결 조숙해진 모습이였다.
외할아버지한테 된 매를 맞은후 한바탕 크게 앓고난 지국이는 해종일 가도 별로 말이 없었다.무표정한 얼굴로 책만 보는 지국이가 퍼그나 안쓰러웠다.
“누나,내 꼭 대학갈거야.그리구 맹세코 남보다 더 잘 살거다.”
순순히 지영이를 따라와 연길의 어느 초급중학교에 붙은 그날 지국이는 세집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응,알았다.”
지영이는 줄 끊어진 구슬마냥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칠념 않았다. 코밑이 검스레해지고있는 지국이를 대견한듯 바라보았다.지국이가 든든하고 미더웠다.
“이젠 누나가 니를 꿍할게.꼭 우리 가정을 다시 일궈세워야 한다.응?”
“응!”
지영이가 얼마전 학교를 중퇴한 사실을 지국이도 알고있었다.어린 마음에도 누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얼기설기 복잡하게 엉켜진것이다.
그날 두 오누이는 하루종일 연길시내를 헤집고 다녔다.공원에도 가보고 부르하통하 유보도도 거닐었고 눈뿌리 아득하게 넓은 연변대학 교정도 활보했다. 시골에서만 자라온 지국이의 눈에는 무엇이나 모두 신기했다.특히 연변대학 본교 청사앞에서 지국이의 눈빛은 부리부리 빛났다.
“누나,내 공부 잘해 꼭 대학생이 될거야.”
지국이는 오전에 세집에서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되뇌였다.그러는 지국이가 지영이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풍지박산이 나는 이 가정에 지국이는 마지막 타오르는 초불인셈이였다.
며칠후 지영이는 고향을 떠나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사랑하는 동생, 외로운 동생 지국이를 홀로 두고 떠나는 고향은 정말 떠나고싶어 떠나는것이 아니였다.차창밖을 스쳐지나는 눈 덮인 익숙한 산과 들을 묵묵히 내다보며 지영이는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는 고향에 속으로 작별을 고하였다.
12
“지영아!”
분명 엄마의 부름소리를 들은것 같았다.
집안에서 심사장이란 사람과 낮다랗게 인사말을 주고 받던 엄마가 부산하게 신을 찾아신을 때 지영이는 말로 형용할수 없는 예감이 엄습해왔다.본능적으로 돌아서서 거리로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또닥또닥 계단을 급하게 뛰여내리는 엄마의 발자국소리가 뒤잔등에 울림이 되여 맞혀왔다.굽이를 여러개 돈듯 했는데 엄마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환각처럼 시종 귀등에 매달렸다.
“지영아!”
환각이 아닐지도 모른다.쫓기듯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타고 묵고있는 서라벌호텔에 돌아왔을때까지도 엄마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고막을 간지럽히고 있었다.그러나 그 부름소리는 시도때도 없이 억양이나 장단이나 고저가 자꾸 변화되였다.이따금 전에처럼 시원시원하고 서글서글한 음성이였다가 곧바로 간드러지게 외곡되여 애교를 풍기기도 했다.귀를 틀어막아도 그 생동감은 좀체로 사라지지 않았다.과거와 현재가 짬봉이 되여 허영으로 머리속에 우렷이 떠오른것이다.구경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가상인지 도무지 가려낼수 없었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 지영이는 소리없이 울었다.통곡이라도 칠것 같았는데 목청이 답답하게 막혀있었다.발버둥질이라도 할것 같았는데 사지에 전혀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엄마한테 배신당했다는 느낌은 진한편이 아니였다.꼭은 그렇지 않아도 비슷한 예감은 언녕 있었다.오면서 잠간 들렀던 북경에서 가이드로 뛰는 친구가 그대로 주저앉으라고 만류하는것을 뿌리치고 기어코 청도로 강행한것도 엄마가 어느 정도로 구겨져 있더라도 얼마든지 량해할수 있다는 심리적 준비가 되여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어쩔수 없었다는걸 알고있습니다.딸이 이만큼 컸으니 엄마는 이젠 집에 돌아가 쉬세요.)
지친 엄마를 만나 가장 하고싶은 말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엄마는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구질구질하지도 않았다.옛날보다 얼굴이 더 화사했고 몸매도 많이 피여있었다.하필이면 륙십을 넘긴,그것도 한국령감이냐는것이 지영이가 좌절과 피해의식을 느끼는 원인인지도 모른다.이젠 연길 거리바닥에서도 쉽사리 볼수 있는 현지처의 신분,정말 엄마가 그 밝은 목소리만큼 행복할가싶었다.그 행복이 위장한것이 아니고 진실한것이라면 지영이는 그래도 엄마를 축복해줄것이였다.
마음을 정리하고 호텔을 나선 지영이는 자기가 꼬박 하루밤 하루낮을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짧은 겨울해는 지평선너머로 사라지고 어둑어둑 검은 장막이 내리덮히고 있었다.
지영이는 발길이 가는대로 홍콩중로에 들어섰다.정면으로 “신가장”이란 뻐스역이 보였다.불과 7,8년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동북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동포들이 모여들던 지저분한 농촌마을이였다.허나 지금은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이 낮다하게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목표없이 느직느직 앞으로 걷노라니 “제일식당”이란 한글간판이 눈에 띄였다.조건반사적으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뭘 좀 먹어야겠네.)
문뒤에 대기하던 복무원이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서니 어두워지는 하늘과는 달리 좀 일찍한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피뜩 보니 안쪽 구석쪽에 남자 손님 하나가 소주를 들고 시름없이 출입문을 건너다 볼뿐이였다.
지영이는 창문옆에 자리를 찾아앉으며 무심코 넙죽한 얼굴의 그 손님을 다시 돌아보았다.마침 그쪽도 지영이한테로 눈길을 주는 참이였다.
(어디서 보았더라.)
어딘가 낯익어보였지만 지영이는 굳이 기억을 더듬고싶지 않았다.세상을 살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스쳤을터인데 얼굴 익은 사람이 어디 한둘뿐인가 .
이날따라 술을 먹고싶었다.일단 유명한 청도맥주 한병 시키고 료리를 주문했다. 료리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네온빛이 반짝이는 창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엄마에 대해 잠시라도 걱정을 삼가기로 했다.고요한 엄마의 삶을 흔들어 깨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엄마가 행복하다면 다행이였고 그만이였다.
이젠 지영이 자신이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였다.북경으로 친구를 다시 찾아갈가고 생각했다가 인츰 도리머리를 저었다.그건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는것과 다를바 없었다.엄마를 찾지 못했다는건 구실이 되지도 않았고 청도의 일자리가 시원치 않더라는 핑계도 호기를 뽑으며 떠난 자신에 대한 부정이였다.이대로 청도에 남는다는것도 대개 난감한 일이였다.엄마를 가까이 두고 아니 만날수 없었다.모녀간이 상봉하는 날이면 엄마가 불행으로 다시 굴러떨어지는 날이라는건 보지 않아도 비디오였다.연길로 되돌아가는것으로 방향을 잡아보았으나 지국이앞에서 엄마의 씨나리오를 빈틈없이 짜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그사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왔다간듯 했으나 별로 기억에 없다.료금을 지불하면서 풀어진 눈으로 둘러보니 식당안에는 여전히 처음 들어올때 보았던 얼굴이 익어보이는 그 손님뿐이였다.그쪽에서 눈인사를 보내오는듯 싶었으나 지영이는 외면하고 매대우에 놓인 광고잡지 하나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13
명나라 관리들이 쓰던 모자 비슷한 모양의 시정부청사앞의 54광장에서 지영이는 머뭇거렸다. 그옆에 “복태광장”이란 간판을 건 오피스텔이 있었다.건물이름에 광장이란 수식을 단것은 처음 보았다.
지영이는 손에 든 잡지에 명시된 방을 찾아 노크했다.
“네,누굴 찾으시죠?”
“안녕하십니까?편집일군 모집한다기에…”
“그래요?일루 오시죠.심사장님~!”
얼굴에 잠이 다닥다닥 배인 녀직원이 이끄는대로 30평이 되나마나한 사무실 뒤쪽에 낮다란 칸막이를 따로한 곳으로 따라갔다.
좁다란 칸에 비해 무지 큰 사무상에 마주 앉아 잡지책을 뒤적이던 한 사나이가 부름소리에 얼굴을 쳐들고있었다. 둥글넙적한 얼굴에 량미간에 연한 작은 기미가 있는 그 사나이를 보는 순간 지영이는 흠칫 놀랐다.이틀전 저녁에 제일식당에서 보았던 그 손님이였던것이다.여전히 어디선가 여러번 본듯한 얼굴이였다.특히 그 기미가 인상적이였으나 딱히 기억나지 않았다.대방도 의외라는 눈치더니 인츰 알은체를 했다.
“알만한 분이시네요.앉으시죠.”
심사장은 첫눈에 풍기는 점잖은 인상과 같이 어조도 부드러웠다.
“학교는 어디를 나왔죠?”
“고중 필업 못했음다.”
“광고를 보셨으면 저희 요구조건 잘 알겠는데요?”
“예.근데 대학 필업했다구 꼭 글 잘 쓰는건 아닙니다.”
당돌한 지영이의 대답에 심사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고중에서 교내잡지의 주필질 했습니다.그런데 항상 저급학년 학생들이 글을 더 잘 썼습니다.글이란건 감수성이 뛰여나고 필력이 좋아야 쓸수 있는겁니다.대학 나왔다구 다 잘 쓰는건 아닙니다.”
지영이는 내친김에 사정없이 내뱉었다.호텔에서 잡지를 뒤적이다가 초빙광고를 보고 시험삼아 응한것뿐이였다.취직이 되지 않아도 무방했다.며칠 청도에서 놀다가 엄마 현황에 대한 핑계가 만들어지면 연길로 돌아갈 생각이였다.제1해수욕장은 이미 다녀왔다.날씨가 추워서 바다물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바다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대해보는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웬일인지 바다는 멀리 내다볼수록 수평이 높아지는 느낌이였다.바다물이 륙지에 당금 쏟아질것처럼 서서히 서있는 모습을 보고 야릇한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자기만 그렇게 보이는가싶어 옆사람들한테 물어보니 모두들 확실히 바다물은 멀리 내다볼수록 륙지 수평선보다 높아 보인다는것이였다.
“우리가 찾는건 기자가 아니고 편집이거든요.”
“그건 저도 압니다.편집도 마찬가지입니다.그저 되는대로 맞추는게 편집이 아닙니다.독자의 구미에 맞게 원고를 선별해야 하고 새로운 열점을 포착하여 논쟁도 만들어야 합니다.이거 보십시오.어디 잡지입니까?”
지영이는 들고온 잡지를 차탁우에 올려놓았다.
“하도 심심해서 잡지를 찾아 다 훑어보았는데 작년거나 지금 새로 나온 잡지나 표지만 다르고 내용은 비슷합니다.지어 광고순서도 꼭 같습니다.이러면 누가 다시 이 잡지를 보겠습니까?한기만 꾸리면 되는게 아니예요?보는 사람도 없는 잡지에 누가 광고를 낸답니까?”
“내일부터 출근하시오.”
심사장의 분부로 지영이는 그날로 회사 숙사로 옮겨왔다.
지영이는 바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바쁘게 일이 추진되였다.지영이가 “청도진출 한국기업 성공노하우”란 코너를 만들자고 제의하자 거의 모든 한국단체장들과 면목이 있는 심사장은 곧바로 누군가와 련락을 맞춰주고 취재를 나가라고 내쫓았다.사회효익도 무시 못한다며 날따라 커가는 조선족사회에도 눈길을 돌리자고 말하니 즉시 편폭을 할애하여 조선족관련이벤트를 홍보했다. 인터넷에서 긁어내고 광고문만 싣는데 습관되였던 잡지사가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한주일에 한번 정도는 회식을 하던 무형규칙이 깨졌다고 투덜대는 직원들도 있었다.
물론 지영이는 더욱 바빴다.거의 두달이 되여오는 동안 회사에서 식사해본적이 몇번 없었다.더우기 광고래원면에서 현지 중국기업들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비중을 두고 중요시하자는 잡지사의 운영방침이 확정된후부터 지영이는 심사장을 따라 매일이다싶이 밖에서 나돌았다.
심사장은 첫인상처럼 호기스런 사나이였다.괜히 폼잡는 일반적인 한국인들과는 달리 근무시간이외에는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다녔다.회사 직원치고 심사장의 어깨를 한두번 두드려보지 않은 직원이 없었다.노래방에서 술 한잔 잘되면 그대로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목청이 터지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틈만 생기면 직원들을 불러 모아서 술도 자주 사주어 모두들 그를 형님 오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특히 인정에 목마른 지영이는 더욱 그랬다.심사장의 매 하나의 동작과 매 한마디 말이 모두 그렇게 멋질수가 없었다.
“흐메…내 일카다 죽능기 아닌교.”
술만 먹으면 경상도사투리가 나오는 심사장이였다.
한국업주들과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형식을 중시하는데 반해 술량으로 합작여부를 결정하는 우직한 중국사장들과 만난 날이면 심사장은 언제나 이런 하소연을 내뱉었다.그것도 절반이상 지영이가 대신 마셔주는데도 심사장은 많이 힘들어했다.
“오늘 오만데 댕겼다 아이가.술도 마이 묵구.힘드이까 청양서 자구가자.”
심사장은 길옆 모텔을 가리키며 휘청휘청 그쪽으로 걸어갔다.
“사장님,택시 타구 회사 돌아갑시다요.”
지영이가 아무리 말려도 쓸데 없었다.
“조막디이가 믄소리 글케 많아.퍼뜩 탁배기 사오지 못할가.”
겨우 심사장을 방에 들여놓고 지영이는 지청구를 이겨내지 못해 술사러 나왔다.막걸리는 있을수 없고 가까운 가게에서 캔맥주 다섯개에 안주로 땅콩같은것을 사들고 돌아왔다.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리없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당금 죽는다던 심사장이 겉옷을 벗어버리고 쏘파에 앉아 멀쩡한 정신으로 한창 텔레비를 보고있는것이 아닌가.
“오데가노?”
술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지영이에게 심사장이 물었다.
“저두 힘들어 죽겠어요.좀 누워야겠어요.”
“이런 싸가지라구.니 싸가지없이 군거 내 몬참는다.너 면접하는 날도 털페이 짓거리 했다 아이가.”
“사장님,제가 그렇게 만만해보이세요? 막말하게…”
“마,시끄러.그런 밴댕이 소가지 가지고…우예댔던그건 미안타.한잔 마셔.”
지영이는 싱겁게 웃고말았다.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심사장이 넘겨주는 캔맥주를 받아 한입 깔죽 마셨다.
“내 널 처깜보구 십껍했다 아이가.꼭 배사장네 파트너랑 비스무리하다닌께.”
“건…무슨 말씀이죠?”
“…”
심사장은 말없이 맥주만 들이켰다.
14
탕탕탕
급하게 문두드리는 소리에 지영이는 간신히 눈을 떴다.아직 바깥은 희끄무레했다. 옷 입은채로 잠들어있었다.새벽까지 먹은 술에 많이 취했었다. 어떻게 자기방으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아가씨,큰일 났어요.어제 함께 온 손님이…”
지영이는 불길한 예감에 벌떡 뛰여일어났다.
심사장은 화장실 입구에 사지를 뻗고 누워있었다.아마 화장실에 가다가 몸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듯 싶었다.심사장이 심장병이 있는걸 잘 알고있는 지영이는 급히 가방에서 비상용약을 찾아내여 먹였다.얼굴색이 평온을 찾을무렵 련락을 받고 온 구급차가 심사장을 청양구인민병원으로 실어갔다.
“좀만 늦게 와도 큰 일 날번 했습니다.도대체 옆에서 뭘하구 있은겁니까?환자가 저 정도로 술을 먹게 하다니.”
의사는 지영이가 환자의 가족이기라도 하듯이 닦아세웠다.
번잡한 입원 수속을 끝마치고 병실에 돌아오니 심사장은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진채 링게르주사를 맞고 있었다.무심하게 각선이 선명한 심사장의 준수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영이는 금방 의사가 보여준 애매한 표정이 생각나 피씩 웃었다.
(나를 딸로 본건가?)
머리가 가로저어졌다.두 사람의 외모나 실지 년령을 따져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식을 대하는 그런 눈치가 아니였다.
(하다면 애인으로 착각했단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영이는 끔쩍 놀랐다.딸로 보인게 아닌것처럼 마누라로 볼리도 만무한 일이였다.그러고보니 의사의 입가에 얄삽한 실웃음이 걸려있었던것 같기도 했다.지영이는 억울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골치아픈 일이군.)
심사장은 홀로 중국에 와 회사숙사에 직원들과 함께 있었다.그의 가족상황에 대해선 지영이는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그러니까 어차피 그녀가 그 멍에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된다.솔직히 지영이는 심사장이 싫지 않았다.년령차이만 아니라면 그의 애인도 될수 있겠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저도몰래 붉어졌다.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자리잡았는지 몰랐지만 여하튼 벌써부터 심사장의 잔장난들을 모르는척 좀씩 받아준 지영이였다. 지영이는 망연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불시에 여직 지국이에게도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왜 이자 전화하니?엄마가 누나를 자꾸 찾는데…”
“뭐라구 했어?내 청도 갔다구 그랬니?”
“사실대로 말했지.그러므 어떻게 해야 하길래?”
“알았어”
병실에 돌아오니 그사이 심사장은 깨여나있었다.지영이를 보는 눈이 심상치가 않았다.
“고마워요.수고했습니다.”
지영이는 웬일인지 피씩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고맙습다이.수고하십니더 이래야잖아요.”
심사장은 쑥스러운듯 얼굴을 돌렸다.
“사모님한테 알려야 하지 않나요?”
“아니,괜찮아.그 사람 캐나다 이민 갔걸랑.내 병 내가 아니까 걱정말아요. 심장발작이야."
심사장은 의사가 말리는것도 뿌리치고 사흘만에 출원했다.과도한 피로나 또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충고를 받은 지영이는 심사장이 잠시 회사에 나오는것외에 모든 일을 일절 도맡아했다.일을 마치고나서는 숙사에서 심사장의 시중을 열심히 들었다.
어차피 심사장이 망하면 자기도 거꾸러진다는 현실을 청도에 있는 두달간 지영이는 심각히 인식하고 있었다.나날이 황페화되고 있는 고향의 소식은 지영이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있었다.향락과 퇴페가 살판치는 고향에 지영이가 한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서있어야 할 정토가 보이지 않았다.지영이는 절대로 엄마처럼 당하며 사는 삶을 선택할수 없었다.그만큼 심사장의 존재가 더없이 소중했고 절실했다.
지영이는 짜게 먹는 편인 심사장을 위해 친히 담담한 료리를 만들어 대접했고 지방이 높은 고기류를 제한했다.거의 군입질을 하지 않는 심사장은 침대머리에 과일을 깍아놓아도 지키지 않으면 아예 먹을념을 하지 않았다.그래서 강권하다싶이 하여 먹이고나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15
“띵동”
차임벨을 여러번 눌러도 대답소리가 없다.아마도 깊이 잠든 모양이였다.
지영이는 조용히 호텔방문을 열고 들어갔다.짐작대로 심사장이 이불을 뒤집어쓴채 죽은듯 꼼짝않고 있었다.지영이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혼자서 상대하기 어려울거라며 부득부득 따라 출장나오더니 이틀만에 꼬꾸라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막무가내로 지영이는 심사장과 한 방에 들어 그를 호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영이는 잠시 자기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몸을 일으켜 출입문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버릇처럼 흠흠 코숨을 들이켰다.고약한 땀내가 코구멍으로 말려들어왔다. 옷장에 옷을 벗어 걸어놓고 솟옷바람으로 조용히 화장실에 들어갔다.샤워기를 틀어놓고 브래지어를 벗고 있는데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심사장이 도적놈처럼 어슬렁 들어섰다.
“아!’
지영이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급히 브래지어를 추슬렀다.급한 바람에 왼쪽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뭐예요?나가요!”
지영이가 새된 소리를 지르던말던 심사장은 넋을 잃은채 지영이의 가슴에 눈길을 박고 움직일념을 하지 않았다.지영이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브래지어를 들어 가슴을 덮은후 심사장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숫처년감?많이 부끄럼 타네.”
떨리기는 심사장도 마찬가지였다.애써 그녀의 몸에서 눈길을 떼면서도 자기의 감정을 숨길려고는 하지 않았다.
“네 몸이 기막히게 예뻐!가슴 한번 만져보고 싶어.”
심사장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냉큼 그녀의 브래지어를 당겨내렸다.지영이가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오른손 중지를 뻗쳐 탱탱하게 돋아난 그녀의 유두를 꼭 눌렀다.유두가 젖살속 깊숙히 파묻히는대신 젖무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심사장은 낑하고 신음을 토해냈다.그러나 거기에서 심사장은 손을 풀었다.
“미안해.니가 돌아온걸 몰랐어.소변이 급했던거야.”
심사장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그녀가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심하게 충혈된 그것을 꺼내 쏴하고 변기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왠지 지영이는 쿡하고 웃음이 나왔다.심사장이 철부지 어린애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무서운 마음도 가뭇없이 사라졌다.일을 마친 심사장은 별로 부끄럽거나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이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가버렸다.
지영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있다가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버리고 샤워에 열중했다.치솔질까지 마치고 슬그머니 나와 티셔츠와 반바지를 찾아 껴입은 지영이는 침대쪽으로 곁눈질해 보았다.심사장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 자기 침대에 걸터앉아 티비를 보고있었다.
테이블우에는 아까 취재나가면서 지영이가 깍아놓은 사과가 그대로 뻣뻣하게 말라있었다.지영이는 신경질이난다는듯 새사과를 꺼내 쓱쓱 깍기 시작했다.
“와따,깍지마라안카나.구미없다 아이가.”
“어뜩 드이소.얼라인감?맨날 얼리게.”
“니 할무이같다.절믄 지지비.”
“아자바니,처납사도 한알 깨물구 자래.”
심사장은 막무가내로 사과를 받았으나 입에 가져갈념을 않고 뚫어지듯 지영이의 얼굴만 쳐다보았다.철딱서니없는 어린애인것 같으면서도 총기좋고 생각밖의 아이디어가 술술 나오는 지영이에게 순하고 부드러운 일면도 있었던것이다.
“내땜에 니가 세빠지는구나.”
“퍼뜩.”
“얄궂타.나 천천히 자묵을랑까 가입시다.”
“안요.”
지영이는 아예 심사장과 마주 앉은 자세로 눈을 감아버렸다.누가 이기는가 어디 보자는 심산이였다.심사장도 내기 하자는듯 사과를 손에 든체 먹을념을 않았다.시간은 침묵속에서 흘렀다.
지영이는 엄마를 생각했다.시간이 나면 엄마가 떠올랐지만 분주히 일에 몰입하는것으로 간신히 떨쳐버리군 했었다.솔직히 엄마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엄마가 가냘픈 몸으로 간신히 펼쳐주는 그늘밑에서 오늘날까지 살아온것이다.엄마의 젖을 파먹고 자란 자기가 영문 모르고 엄마의 피눈물까지 짜서 먹었다는 자격지심이 들었다.철들어서부터 엄마는 돈때문에 아버지와 투계처럼 싸운 형상이였지만 그 엄마한테 언제나 감사했다.그리고 그 엄마에게 묵직하게 들씌워진 멍에를 자기가 벗겨줘야 했다.엄마가 계속 그렇게 고달픈 인생을 영위하게 할수는 없었다.
이젠 전화를 할 때가 된것이다.집안을 다 망쳐버린 아버지도 밀출국으로 한국으로 가더니 이젠 정신이 버쩍 들었는가보다.아버지는 글쟁이답게 외가집으로 두툼한 반성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그리고 엄마와 다시 만나 잘살겠다며 한국에서 많은 돈을 팔아 초청장까지 해서 보내왔다.오늘 지국이는 그 소식을 전하면서 엉엉 소리내며 울었었다.그 울음은 기쁨의 울음이였고 안도의 울음인줄 지영이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지국이를 위해서도 엄마를 돌려보내야 했다.이제 엄마에게 얹혀졌던 그 짐을 지영이가 릴레이로 짐어져야 했다.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고 개운해졌다.새 인생을 시작한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겨 원망과 서러움을 한껏 토로할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신심이 생겼다.
‘아!’
지영이는 가볍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옷을 입은채로 심사장의 침대우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사장의 쇠몽둥이같은 다리가 아래배를 짓누르고 있었고 털이 부시시한 손이 티셔츠우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이상하게 반감이 오지 않았다.코고는 소리가 요란한걸 보니 잠든 지영이를 침대에 눕히고 자기도 따라 잠든것이 분명했다.지영이는 심사장을 깨울세라 누운 자세 그대로 손을 내밀어 전등을 꺼버렸다.
16
도어맨이 인사할념도 않고 넋잃은듯 쳐다보는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지영이는 곧바로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석노인해수욕장에 린접한 기린호텔 2층이다.
지영이는 레지에게 콜라를 한컵 시켜놓고 쏘파에 깊숙히 몸을 파묻었다.지영이는 커피에 알레르기같은것이 있었다.야근을 하다가 동료들이 먹는 커피를 따라 마시고 이틑날까지 잠을 자지 못해 죽는줄 알았다.그뒤로 다시는 커피를 입에 대지 않았다.
엄마의 부름을 받고 나온것이다.부른 엄마는 아직 미팅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반달전에 엄마와 어색한 첫만남을 이미 가졌었다.
엄마는 죄인마냥 지영이 앞에서 얼굴을 쳐들지 못했다.지영이는 지영이대로 엄마가 민망하여 말문이 막혔었다. 2년여전 추운 겨울날밤 동북의 초가집에서 다 큰 딸애의 등을 긁적여주던 자상한 엄마였다.그때 그 꺼칠하던 손은 기름을 바른듯 반들반들하게 변했고 때이르게 잔주름이 갔던 얼굴도 언제 그랬더냐싶게 탄력으로 피여있었다.리유를 불문하고 지금의 엄마가 보기에 더 좋았다.그러나 나긋나긋해진 엄마는 오히려 서먹서먹했다.투박하고 진한 연변말을 쓰던 엄마가 새삼스레 그리워지기도 했다.
“오,벌써 왔구나.”
회억에서 깨여난 지영이는 일어서려고 몸을 추스렸다가 엄마가 앉으라며 내리 흔드는 손길에 눌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래 기다렸겠구나.거리에 나섰다가 갑자기 생각나는게 있어 다시 들어가 전화 둬개 하다보니 이제 왔다.”
엄마는 옆에 다가온 레지한테 커피 한잔 주문한후 곧바로 주제에 들어갔다.
“오래동안 깊이 생각하고 너의 말대로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다.할배할매 의견두 그렇고.니 애비가 나에게 절망을 가져다주고 악을 심어주었지만 그래도 너희들 아버지이다.내가 한때 그렇게 좋아했던 남자이기도 하고…”
“엄마!”
지영이는 엄마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아버지가 터우뚜 하느라구 빚 많이 졌답니다.엄마 초청장에두 돈 많이 썼을거구. 일해 버는 돈 빚 갚느라구 정신없을겁니다. 엄마, 또 고생길이니 잘 생각하세요.”
“엄마가 돈에 환장한줄 알았어?니 아버지가 사람구실만 했더라도…”
엄마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돈이란건 맞들구 벌면 생기는거란다.아버지도 쉰이 눈앞이니 이젠 철이 들었겠지.빚은 벌어 허물면 되니 걱정말고 이제 니 일을 얘기하자.가정일은 엄마 아버지한테 맡기고 학교에 다시 가는게 어때?”
“아니요.”
“왜?”
“나두 이젠 컸습니다.우리 가정이,그리고 엄마가 어째서 오늘까지 오게 되였는지 너무 잘 압니다.아직도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지국이까지 망칠수는 없습니다.지국이는 내가 지키겠습니다.”
“이럴줄 알았다.”
엄마는 한숨을 깊게 내쉬였다.한동안 모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엄마는 투정하듯 커피를 훌훌 불며 마셨고 지영이는 애매한 콜라잔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기만 했다.
지영이가 어색한 장면을 타개하려고 1층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온 사이 자리에는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났다.뜻밖에도 심사장이였다.미간에 연하게 찍힌 기미를 새삼스레 쳐다보면서 불현듯 엄마를 처음 찾아갔던날 복도에서 이 사나이를 만났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차가운 계단을 오르며 점잖게 지영이를 힐끔힐끔 돌아보던 심사장이 새삼스레 머리속에 떠올랐던것이다.
“지영아,인사해라.심사장님이시다.”
“따님이예요? 사모님을 꼭 닮으셨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바를 모르는 지영이와는 달리 심사장은 퍼그나 여유가 있었다.엄마가 모르게 슬쩍 눈을 껌벅이기도 했다.지영이도 어정쩡 맞인사를 올릴수밖에 없었다.
“아,안녕하세요.”
“심사장님,이걸 한번 보시죠.저 애가 고중에 다닐 때 낸 책입니다.”
“고등학교때 벌써 책을 냈었습니까?”
심사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는듯 엄마가 꺼내놓은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믿기지 않기는 지영이도 마찬가지였다.“노크하는 탈피”라는 제목의 그 책은 엄마가 청도로 떠나던 그해 늦가을에 출간한것으로 여직 엄마한테 보내지 못했던것이다.보아하니 지국이가 보내준것이 틀림없었다.
“지영아,심사장님은 광고잡지를 운영하고 계신단다.앞으로 심사장님의 도움과 가르침을 많이 받아야 할것이다.그리고 심사장님,우리 애 이만하면 어때요?”
“말씀하신것보다 더 훌륭하네요.”
“감사합니다.그럼 부탁할게요.”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엄마가 자리를 뜬지 이윽하도록 지영이는 그 자리에 꼼짝않고 앉아있었다.뭐가 뭔지 갈피가 잡혀지지 않았다.엄마가 어떻게 자기를 심사장한테 부탁할 궁리까지 했단 말인가.참 인간의 연분이란 천갈래 만갈래로 엮어져서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법이란 말인가.
“사장님은 저를 언녕 알아보신거죠?”
“아니,막연히 그럴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였어.사실 배사장네 집에 들어가서 저 밖에 사모님 꼭닮은 아가씨가 서있어요 하고 말하니 부랴부랴 신을 찾아신고 나가시더군. 그래서 따님이 있을거라 짐작은 했어.확신했다면 전번날 청양에서 심장병 발작하던 날이랄가.처음으로 지영이가 그날 계단에서 만났던 아가씨란걸 기억해냈던거야 .”
그때 지영이의 귀가에는 애간장 끓는 엄마의 부름소리가 메아리쳤다.
“지영아!”
그 부름소리는 환각이 아니였다.엄마는 주소를 알려주고 곧바로 후회했다고 한탄했다.언젠가 지영이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것이라는 불안감에 마음을 졸였고 그 예감이 드디여 현실로 되였을때 가슴이 터지는 아픔에 정신나간 사람처럼 거리를 헤맸었다고 고백했었다.
배사장은 사랑하고싶어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였다.엄마에게 배사장은 잠간 머물다가 떠나는 기댈목에 불과했다.몸이 부드럽고 탄력있게 변모했어도 마음은 오히려 치유하기 어렵도록 상처가 더 깊어졌던것이다.
“오늘 어디든지 데리고가요.”
지영이는 심사장이 가는대로 바다가에 자리잡은 은해대주점에 갔다.맛갈스런 해산물 료리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부어주는 맥주만 사양없이 받아마셨다.
이날 지영이는 처음으로 심사장한테 처녀의 순결을 고스란히 바쳤다.
17
심사장은 아직도 이불을 뒤집어 쓴채 일어나지 않고있었다
지영이는 주방으로 들어가 금방 리촌시장에서 사온 의란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이 지나면 심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어쩌면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캐나다에 이민간 심사장의 마누라가 어느날 문뜩 찾아와 최후 통첩을 내린것이다. 지영이랑 6년간 살아왔다는 사연을 멀리서도 어떻게 알아버린것이다.심장병이 있는 남편을 6년간 보살펴준 대가로 잡지사를 넘겨주기로 했다.더불어 고맙다는 인사까지 잊지 않는 매너있는 녀인이였다.
지영이는 그런 녀인이 저으기 미안했다.자기앞에서 과시하는 도고함과 우월감이 말 한마디면 스르륵 무너질수 있다는것을 지영이는 잘 알고있었다.그녀를 지탱하는것은 온몸을 감싼 금은 장신구같은 허영뿐이란걸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그러나 그 한장의 종이를 뚫어놓고싶지 않았다.마지막 자존이라도 남겨주는게 례의였다.
심사장 말대로 정말 자기가 그를 사랑했더냐 하는 물음엔 자신이 없었다.처음엔 동정심이 출발점이였다.신수가 멀끔하고 성격도 호방한 심사장이 심장병으로 앓고있어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게 안스러웠었다.직원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뒤소문이 두려워 슬슬 피했지만 지영이는 그럴수가 없었다.
지영이는 이 사나이가 그들 가정이 재기할수 있는 마지막 짚오래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절박감을 느꼈다.엄마를 고향으로,아버지옆으로 억지로라도 밀어보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지영이는 심사장을 포박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였다.심사장이 의외의 사고를 당해서는 안되였다.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고향에 돌아가 사창가에서 헤매고 떠돌아다닐 자신이 얼른거려 괴로웠다.지영이는 엄마와는 달리 자기의 운명을 자기 손에 거머쥐고싶었다.
꿈속에서나마 지영이는 심사장에게 꼭 안겼었던걸 다행으로 생각했다.강렬한 충동까지는 몰라도 포근한 느낌이였다.그보다도 믿음이 더 중요했다.정신없이 꿈나라에 헤어들어간 지영이를 들어서 침대에 눕히고도 심사장은 그녀를 점하지 않았었다.본능적인 관성으로 꿈결에 지영이를 끌어안았으나 결코 점한것은 아니였다.그리고 거기서 끝이였다.이틑날 일어나서는 여전히 상하급관계로 손을 맞잡고 일을 해나갔다.
가끔 심사장이 장난기가 발동한듯 지영이의 손이나 몸을 만지작거렸지만 그녀가 항의를 제기하면 즉시로 멈추군 했다.
몸을 허락한 후에도 지영이의 동의가 없으면 심사장은 그녀한테 치근거리지 않았다.아파트 하나 세맡자고 건의했다가 지영이한테 퇴짜맞고 심사장은 어린애처럼 한동안 심술을 부리기도 했었다.그러나 얼마 안되여 노여움이 풀어졌고 그들은 서로가 필요할 때 가끔 만나서 즐겼었다.
심사장은 호방한 성격만큼이나 그 방면에서도 대단한 에너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한번 겪고나면 지영이는 뼈마디가 막 문드러지는 고통을 느끼군 했다.얼마나 무지하게 다루는지 어떨 때는 막 귀뺨을 올리 붙이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그의 입에 가슴이 빨려들어가면 꼭 세계말세와 같았다.피를 맛본 이리의 이발처럼 그는 사정을 둘줄 몰랐다.그래서 그 일을 치르고 난후이면 다시 만나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하지만 며칠 못가서 그녀는 그가 다시 사무치게 그리워지군 했다.
아무튼 그렇게 오늘에까지 왔다.
엄마는 그해로 한국으로 나갔다.아버지와 함께 억척같이 일하며 돈을 벌고 있다.
지국이도 작년에 무난하게 청화대학에 붙었다.부모가 한국에 있기때문에 가정대표로 지영이가 북경까지 따라갔었다. 그때 지영이는 온세상을 통채로 차지한듯 기뻣다.그리고 돌아오면서 억수로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이제 래일이면 심사장도 떠나간다.깊게 사랑했던건 아니였으나 지영이한테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다.심사장이란 기댈목이 아니였더라면 아마 지국이마저 지켜내기 어려웠을것이다.
“흠흠,구수한 된장찌개로군”
어느새 일어났는지 심사장이 뒤로 다가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지영이는 가슴에 올라온 심사장의 손을 어루쓸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몸보신 좀 시키자 했었는데 생각처럼 안되네요.”
“몸보신에 된장찌개이상 없능기라.”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구요.”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고 두사람은 진짜 부부같이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저… 사무실을 청양으로 옮기기로 했어요.”
“왜?”
“시내쪽에 땅값이 비싸구 그래서 모두들 청양쪽으로 이사가고 있습니다.고객이 가는데로 따라가는게 시장법칙이거든요.”
“닌 언지나 머리가 빨리 돈다닝께.글치만 야바우 좆도 많은 세상이니께 꼭 조심혀.”
식사후 심사장의 요구로 둘은 청양으로 새사무실 보러 떠났다.심사장이 넘겨주는 핸들을 잡고 지영이는 새로 시원하게 뻗은 청은고속도로에 올랐다.래일부터 지영이가 주인이 될 신형 엘란트라는 백킬로에서도 속도감을 보이지 않고 편안하게 나갔다.
저 멀리 청양이 바라보였다.여기저기 공사장이 벌려진 청양은 활약이 넘친 대신 어수선하기도 했다.허물려 나가는 낡은 공장들,그속에 관성적으로 밀려나는 한국기업도 더러 있었다.야반도주가 이슈가 되여진 이곳에 한판 승부를 걸고 지영이는 다가오고있다.
“ 니캉내캉 뿌꿈노리 이것으로 끝이구나.”
심사장이 감개무량해서 중얼거렸다.
지영이는 젖어오는 눈빛으로 차창밖을 내다보았다.바야흐로 만물이 재생하는 봄날이 태동하고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