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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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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바이러스 댓글:  조회:523  추천:0  2020-04-25
   단편소설   바이러스 장학규     1 애란이는 불안하게 출입문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당금이라도 문이 벌컥 열리며 민혜가 불쑥 들어설 것 같았지만 두시간 내내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쓸며 기다려도 벌써 와야 할 민혜는 돌아올 줄 몰랐다. 텔레비죤에서는 한창 무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방송하고 있었다. 그게 구경 어떤 바이러스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전염성이 강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병인 것만은 분명해졌다. (기집애, 하필이면 이런 비상시기에 나갈 건 뭐람?) 경자년 설날을 눈앞에 두고 집안이 부산해지기는 순전히 사춘기에 들어선 딸 민혜때문이였다. 지난해 부터 민혜는 자잘한 일에도 바락바락 대들었고 시도떄도 없이 애수에 잠겨서 울상을 짓군 했었다. 포동포동 살이 오르면서 처녀티를 나타내기 시작한 얼굴에 그늘이 질 때면 애란이는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자신의 얼굴보다 더 안타까웠다. 그보다도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라면서 억울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던 자기도 이 정도로 성장통을 겪은 거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아예 선장통이란 게 있었던지도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지금 세월에 무엇이 부족한가 말이다.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고 가지고 싶은 걸 달라는대로 사주는데도 만족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엄마, 사람 사는게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그러면 다 되는 거야?!” 민혜는 그럴 때마다 딴세상 사람을 보는 듯 눈을 크게 뜨면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럼, 그런 걸 내놓고 또 뭐가 있지?” “대화가 안돼! 아무튼 할 말이 없어.” 민혜는 은근히 엄마를 낮잡아보는 어투로 종알거리더니 창밖에서 뿌리를 잃고 떠도는 희뿌연 구름덩이만 멍하니 내다보았다. 애란이는 딸애의 그 태도가 정말 싫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모를 무시하는 건 그렇다치고 이 좋은 세상을 살면서 지구 말세가 닥친 것처럼 이마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몰골은 정말 보아주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뭐 어쨌다고 이러냐구?”   “나 아빠 말 듣고 세계명작을 본게 영 후회돼. 명작이란게 대개 다 비극으로 끝나고 주인공들의 운명이 비참하고 그렇잖아.” 민혜는 동에 닿지 않는 말을 지껄이고서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아버지를 건너다보면서 또다시 후하고 땅이 꺼져갈듯 한숨을 내쉬였다. 항상 이랬다. 주제를 따라 가는게 아니라 곁가지로 삐져가면서도 꼭 지기가 옳다고 아득바득 우겨대군 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아버지이란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컴퓨터를 보면서 킬킬 웃고 있었다. 민혜야. 이걸 봐. 유태인들은 말이야. 애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테이블 우에 세워두고 안아줄 것처럼 팔을 벌리고 유혹한단다. 음, 애들은 당연히 부모를 믿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들지, 그때 부모가 슬쩍 옆으로 피한대. 당연히 애는 땅에 떨어져 된통을 당하는 거지, 그때로부터 아무리 얼려도 다시는 안기지 않는단다. 세상에 믿을 건 오로지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교육을 그렇게 생생하게 시킨단다. 그럴 거면 왜 낳아서 키우냐구? 낳자마자 정글에 버려서 원시인, 야만인 만들어버리면 더 멋지잖아. 딸애가 사정없이 내쏘았다. 애란이도 덩달아 남편을 흘겨보았다. “애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 데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고 있어서 힘이 빠져있고 작은 일도 감당하기 힘들어하고 있어 보입니다. 퍼그나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심리상담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김씨 성의 심리상담사는 우아한 자세로 앉아서 기품있게 말했었다. 심리상담사까지 찾아가기는 우연한 일때문이였다. 하루는 민혜가 온밤을 부시럭거리면서 잠을 자지 않더니 아침에 일어나서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부산하게 집에 비치해둔 감기약을 찾아서 먹였으나 별로 효험을 보지 못하는 대신 점심 즈음부터는 코물까지 질질 짜기 시작했다. 이대로 더 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싫다는 애를 끌고 가까운 가도병원으로 갔다. 류행성감기라면서 링겔을 맞으면 된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애의 팔목에 침을 찌르려던 의사가 초풍할 지경으로 놀라는 것이였다. “아니, 이게 뭐냐?” “아무것도 아니예요. 긁히웠어요.” 민혜가 급히 옷소매를 내리면서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팔목에 서너줄 길게 지나간 상처가 유표하게 애란이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첫눈에도 인위적으로 긁은 것이란 걸 보아낼 수 있었다. “사람이 왜서 사는지 모르겠어. 멋대가리 하나도 없단말야.” 민혜는 막무가내인듯 혼자소리로 중얼댔다. 애란이는 흠칫 놀랐으나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았다. 의사한테 부모의 무심함과 무책임함을 그대로 들킨 것도 부끄러웠지만 그보다 괜히 애를 더 자극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앞서서였다. 집으로 돌아온 애란이는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멀리 고향병원에서 의사로 있는 동창한테 전화를 걸어 민혜의 상태를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놀랄 필요 없어.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현상이야. 한번 심리상담을 해보는게 좋을 거 같아. 애한테 뭔가 부모와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어.” 며칠 후 기회를 찾아 민혜와 스치는 말처럼 심리상담 한번 해볼가 얘기했더니 별로 거부하지 않았다. 아마 자기도 뭔가 터놓지 않으면 안되는 모양이였다. 민혜는 처음 만나는 상담사와 친구라도 되는듯 무람없이 말을 주고 받았다. 상담사가 엄마는 피해달라고 해서 애란이는 부근의 커피숍으로 기신기신 찾아들어가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 예쁘장한 마담이 지겨워할 정도로 시시껄렁한 화제를 두시간가량 주절댔다. 상담사가 전화 와서 상담실에 돌아가니 민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간 나가 있으라고 내보냈어요. 애가 자신보다 옆사람들의 감정을 더 많이 배려하는 착한 아이라서 혼자서 잘 참고 견디다가 이젠 마음의 그릇이 꽉 차서 한계가 온듯 합니다. 그릇을 좀씩 비워야 될 것 같습니다. 분노, 억울함 등 감정들이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감정들을 상심한 기분으로 대체해서 표현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잠이 안 올 때면 온통 상심한 감정에 휩싸여서 혼자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일단 애가 무슨 얘기를 하든 평가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동조하면서 잘 들어만 주세요. 그러면 아이가 믿고 다 분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야 홀가분하게 원상태를 회복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죠? 부모의 립장에서는 애한테 무엇이나 다 준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선택적이거나 강압적 또는 주관적으로 안겨준게 더 많은 거 같습니다. 보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밀어부쳤거나 아니면 학교서 꼭 갖추라고 요구한 걸 만족시킨 것에 불과한지도 몰라요. 실제로 애 스스로는 자기가 요구하는 건 거의 묵살되였다고 합니다. 애가 가지고 싶어하는 걸 주세요. 그게 애와 심리적으로 소통하는 길입니다. 그날 저녁 민혜는 시뚝해서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혀에 뼈가 들어간게 확연히 알렸다. 심리상담사로부터 기를 전달받은 모양이였다. 고양이를 사려면 얼마쯤 드냐고 물었더니 반나절 인터넷을 뒤진 후 가장 싼 것이 800원이라고 가볍게 말했다. 아빠가 평소처럼 랭소적인 멘트를 날리려는 걸 애란이가 눈짓으로 말리고 선선히 그러라고 허락했다. 너무 쉽게 답복해서인지 민혜는 한동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다가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인하고 불시에 흥분을 걷잡지 못하고 하늘이 낮다고 퐁퐁 뛰였다. “얼굴에 마스크라도 걸어라. 천박해보인다.” 남편은 여전히 달통되지 않는지 민혜를 흘기며 빈정댔다. 민혜는 이날 아침 엄마한테서 돈을 받아 인터넷으로 주문한 고양이를 가지러 나갔다. 그리고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2 민혜가 안고 돌아온 것은 오렌지 고양이였다. 순오렌지색이였는데 몸에 옅은 흰색 줄무늬들이 줄줄히 늘어서있었다. 영화나 만화에서 자주 보던 고양이의 모습이였다. 생각보다 많이 컸고 살져 있었다. 낯선 집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서인지 고양이는 박스 속에서도 불안하게 고개를 바닥에 깔고 있었다. 오후 두시가 지나서였다. 민혜는 한반의 친구 둘을 불러서 함께 애완동물가게에 갔고 거기서 고양이 사육에 관한 지식과 위생상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시 고양이 사료와 분변통들을 두루 사다보니 점심때가 되였다고 했다. 방학 후 여러날만에 만난 친구들은 헤여지기 아쉬워 칼국수 한사발씩 더치페이로 사먹고 오다보니 늦었다고 변명했다. 민혜는 긴 말을 하면서도 전혀 얹치는 법이 없었다. 애란이는 자기 할 말만 뚜뚜뚜 내뱉고 돌아서서 냉큼 고양이를 안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민혜의 등뒤에 대고 종주먹을 휘둘러댔다. 조걸 그저 어쩌래? 에휴 때려놓을 수도 없고. 어쩌면 좋을가 저걸 그저. 사실 애란이도 남편 못지 않게 동물을 싫어하고 있었다. 남편은 어렸을 때 개한테 한번 물린 후 모든 동물과 멀리하게 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민혜는 강아지를 욕심냈었지만 번마다 아빠의 단호한 거절을 받았다. 딸애가 달라는 거라면 심장도 빼줄 거 같은 남편은 유독 강아지한테만은 엄청 거부감이 심했고 알레르기가 있었다. 강아지라는 소리만 들어도 펄쩍 뛰였고 애의 고집을 꺾기 어려울 때면 어른답지 못하게 푹 기절해 넘어가는 퍼포먼스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도 민혜가 칭얼대면 고양이란 동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은근히 그쪽으로 애의 관심을 유도하군 했다. 글쎄 콩나물 비빔밥과 숙주나물비빔밥이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애란이는 슬그머니 화가 동했다. 따져보면 이번에 민혜가 첫마디에 고양이를 지목한 것도 어쩌면 아빠가 장기간 세뇌를 시킨 결과일 것이다. 애완동물은 거개가 비슷했다. 강아지는 안되고 고양이는 괜찮다는 론리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 남편은 타고난 사기군캐릭터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민혜는 거기에 홀딱 넘어가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왜 고양이였는지 애란이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였다. 운명의 조롱이라고 밀어부치기에는 좀 억지스럽긴 했으나 썩 달갑지 않은 일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애란이가 어렸을 적 집에서는 고양이를 키웠었다. 하얀 색의 고양이였는데 지금처럼 특식밥이 없이 그대로 막 풀어놓고 키웠었다. 산에 들에 헛간에 들락거리면서 쥐를 잡아먹고 살았었다. 가끔 그것도 집이라고 찾아와 발목에 매달릴 때면 먹다남은 밥덩이에 고기뼈 따위들을 던져주면 맛갈스레 먹군 했다. 산골마을에는 저녁만 되면 마땅히 놀거리가 거의 없었다. 해가 긴 여름에도 일곱시만 되면 주변 산들이 무서운 짐승마냥 시꺼멓게 둔갑했고 나무잎들이 바람에 으스스 소름 돋치는 소리를 내군 했었다. 어른들도 밤에는 마을밖에 나가기를 저어하던 그 시절 애란이에게는 고양이가 든든한 친구였다. 애란이네는 고양이 외에도 똥개 한마리도 키우고 있었다. 어느날 엄마가 동네에 놀러나갔다가 친구네 집 개가 새끼 여섯마리를 낳았다면서 하나 달라고 사정해서 겨우 얻어온 것이였다. 아버지는 강아지에 대해 특별히 애정을 쏟아부었다. 고양이가 옆에 오면 발로 툭 걷어차면서도 강아지는 아들이나 되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들어서 어깨에 올리군 했다. “빨리 커. 올해말 쯤이면 잡아먹을 수 있겠지.” 아버지의 목적은 거기에 가 있었다. 한줌이 되나마나한 강아지가 아버지의 눈에는 맛난 료리감이였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해 말이 지나서 이듬해 초봄에 강아지는 아버지에 의해 도살되여 바로 자기가 자란 집에서 아버지 친구들의 배속으로 골고루 들어가 소화되였다. 그날 술상은 자정까지 이어졌고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간 후 얼근하게 취한 아버지가 비스듬히 벽에 기대여 누운채 비자루 살을 꺾어서 이발을 뚜지며 애란이의 품에 안겨 자고 있는 고양이에게 주절주절거렸다. “올 여름엔 네 차례다. 알았어?” 잠결이였지만 애란이는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어린 가슴에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날 애란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자기 절로 알아서 돌아오겠지 하고 무심하게 지나쳤겠지만 먼저번 비몽사몽간에 아버지가 하던 말이 떠올라 집안팎을 샅샅히 뒤졌다. 그래도 고양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집에 돌아오니 엄마의 눈치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엄마는 애란이와 눈길을 마주치기 저어했고 무슨 말인가 할듯 말듯 하다가 입을 다물군 했다. “엄마, 고양이 봤어?” “으…글쎄…” “글쎄가 뭐야? 아버지가 고양이 잡아먹었지? ” “아니, 아직 먹지 못했어. 에그에그 벌써 죽었겠지…” 엄마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니 앞마당에 갓 파서 다시 메운 구덩이가 보였다. 판지 꽤 오란듯 흙이 벌써 깡깡 말라 주변의 흙색이랑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약간 솟아 올라온데다가 발로 밟은 흔적만 없었어도 그게 되파묻은 구덩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꺼꾸로 말하면 그 구덩이는 다시 메운지 반나절은 넘어된다는 증거였다. 애란이는 허둥지둥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꽛꽛하게 굳어지기 시작한 땅은 손자국만 낼뿐 파지지 않았다. 애란이가 애간장이 나서 사방을 둘러보는데 엄마가 눈치 채고 헛간으로 달려가더니 삽을 들고 나왔다. 모녀간이 달려들어 50센치 정도 파들어가니 마대 한자루가 드러났다. 마대 속은 조용했다. 아차 잘못되였구나. 속이 철렁하여 급히 아구리를 풀고 들여다보려는데 불시에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솟아나왔다. “어마나!” 자루를 풀던 애란이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한발 뒤에 서서 바라보던 엄마는 어느새 저만치 도망가 있었다. 사납게 튕겨나온 연기가 애란이의 눈앞에서 주춤 멈춰섰다. 고양이였다. 반나절 땅속에 파묻혀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애란이는 두손 모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고양이는 어린 주인을 잠간 바라보며 꼬리를 한번 흔들고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애란이는 이 평생 다시는 고양이를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갑자기 세상을 다 잃어버린 듯한 슬픔이 가슴 한가득 슴며들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틑날 아침 고양이가 다시 집을 찾아온 것이다. 애란이의 품을 파고드는 고양이를 아버지가 냉큼 꼬리를 잡아 나꾸어챘다. 와락 달려들 것 같던 고양이는 그러나 고스란히 잡혀갔다. 쥐를 잡던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버지를 긁어놓고 도망가기를 애란이는 바라고 바랐지만 고양이는 주인 앞에서는 영원히 약자라는 걸 애란이는 알리 없었다. 그렇게 잡혀간 고양이는 이번에는 애란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다시 마대 속에 들어갔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 마대 속에는 불을 지피고 남은 재가 가득 들어있었다. 고양이가 악을 쓸수록 재가루가 날려 고양이는 마침내 질식해 죽고 말았다. 그날 밤 아버지의 친구들은 또다시 고양이가 뛰놀던 구들에서 술상을 차렸다. 화제는 자연히 고양이 사냥에 관한 것이였다. 아버지네는 흥미진진하게 고양이 고기에 술잔을 기울이면서 별의별 기이한 살상법들을 서로 나누었다. 자루에 담아 돌로 물 속에 하루종일 눌러두었는데도 죽지 않더라는둥, 쇠줄로 목을 감아서 나무에 걸어놓고 반나절 트럼프를 놀고 올려다보니 그때까지도 허둥대더라는둥 하여튼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때부터 애란이는 고양이를 싫어했다. 남편처럼 모든 동물을 싫어할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고양이만은 마음 속으로부터 거부감이 생겼다. 아니, 안쓰러웠다. 고양이만 눈에 띄우면 조건반사적으로 땅 속에 파묻혔던 고양이가 마대 속에서 튕겨나오던 장면이 우렷히 머리에 떠올랐고 재가 가득 들어찬 마대 속에서 몇시간동안 발버둥치던 모습이 클로즈업되여 눈앞에 나타나군 했다. 거기에 아버지 친구들이 주고받던 고양이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들이 귀전에 들려 몸서리가 쳐졌다. 민혜가 사춘기를 앓지만 않았어도, 그것도 손목을 긁을 정도로 심한 상태가 아니였다면 애란이는 두번 다시 고양이를 집에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딸애의 방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애란이는 발뼘발뼘 다가가 문을 조용히 밀고 틈새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민혜가 고양이를 안은 채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문소리를 들었는지 머리를 쳐들었다. “고양이 이름이 뭐지?”   “아직 없어.” 애란이도 저 옛날 고향의 고양이가 이름이 뭐였던지 기억에 없었다. 아마 그 시절에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모모”하고 불렀을 것이다. “이젠 고양이도 사주었으니 공부 좀 해야잖아. 핸드폰은 그만 보고.”   “엄마, 나 이제 집에 들어온지 1초야. 숨도 돌리게 하지 않고 다그쳐?” “너 약속을 몇번째 깨고 있어? 지금이 고중입학을 앞둔 대목인데 1초라도 아껴야지.” “엄마 1초가 얼마 긴지 알아? 선생님이 입을 여는 순간 1초가 흘러가. 그 1초에 뭐한단 말이야?” 애란이는 억이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딸애는 개념을 이렇게 호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번날에도 아침에 머리를 감고 엄마더러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달라고 요구했다. 마침 아침 식사상을 차리던 애란이는 무심하게 스스로 말리라고 한마디 했다. 그런데 딸애가 대번에 드라이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낳을 때 내 등뒤에도 손 하나 만들어놓지. 어떻게 저절로 말린단 말야. 머리가 기름기 번지르해서 어떻게 학교에 가. 오늘 학교 못간다고 청가해줘. 막무가내란 말은 이런 경우가 적격일 것이다. 민혜는 항상 이 세상과 공멸할 그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파리도 고기다 하면 고기가 되는 것이고 조류다 하면 조류로 되는 억지를 과시하고 있었다. 3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았다. 사스때처럼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발원지 무한시가 도시봉쇄라는 급처방을 내렸다. 시내 공공뻐스, 지하철, 카페리, 장거리뻐스 운행을 중단한 것은 물론 공항이나 기차역도 무한시를 떠나는 통로를 잠시 닫아버렸다. 얼굴이 천박하지 않더라도 마스크를 걸게 된 상황이 바야흐로 닥친 것이다. 려행업을 하는 애란이는 이 징조가 얼마나 무서운 후과를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스때도 그랬고 조류독감때도 그랬다. 돈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냐 하는 문제였다. 특히 인터넷에서 “박쥐 먹는 미녀”라는 동영상을 본 후 애란이는 상황이 예상외로 심각하다는 예감을 느꼈다. 왕몽운이라는 녀성 블로그가 2016년 6월에 올린 이 동영상은 누리꾼들에 의해 맞춤하게 끌려나와 조림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왕몽운은 태평양의 섬나라인 팔라우에서 료리된 검은색 박쥐의 날개를 펼쳐보이기도 했다. 박쥐탕을 먹고나서는 카메라를 향해 “고기가 아주 질기기는 하지만 엄청 맛있네요”하고 말할 때는 막 구토가 나오기도 했다. 이번에도 사스때처럼 박쥐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그때도 박쥐의 사스 바이러스가 사향 고양이를 통해 옮겨졌을지도 모른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였다. 이번에는 무한의 재래시장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매개체로 지목된 대나무 쥐나 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애란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차를 몰고 슈퍼에 가서 먹거리를 한아름 사왔다. 남편과 둘이서도 모자라 싫다고 뻗치는 딸애를 우격다짐으로 끌고 주차장에서 식품들을 날라올렸다. 민혜는 여전히 그 식이 장식이였다. 고양이를 가져오기 전에도 만화복장을 사내라고 졸랐다. 다 큰 녀자애가 만화복장 입고 어떻게 거리에 나서냐고 따지니 만화축제때 입으면 되는게 아니냐고 자기쪽에서 당당히 맞섰다. 1년에 한두차례밖에 없는 만화축제에 가려고 수백원씩 하는 옷을 사입을 필요가 뭐냐고, 그 돈이면 평상복을 사고도 학용품 돈이 나온다고 설복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아침 일찍 일어나고 사기진작하는 것을 조건으로 온라인에서 만화복장을 주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뿐이였다. 이틀도 가지 못해 점심때가 되도록 기상할념을 하지 않았다. 꺠울랴 치면 방학때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한다고 야료를 부렸다. 매일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시까지 공부했는데 어쩌다 방학이 되여 잠 좀 자는게 무슨 죄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였다. 애란이는 되려 애가 안쓰러워 못이기는 척 물러났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였다. 열두시가 넘어서 마지못해 일어나서도 꼴기없는 모습이였다. 세수를 할념도 하지 않았고 구미가 없다고 밥을 안먹는다고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그러면 공부라도 하라고 하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면서 입을 삐죽거리고 다시 벌렁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이거 약속한 거랑 다르잖아. 신용이 없이 앞으로 어떻게 세상에 나설 거냐? 누군 이렇고 싶어 이래? 나절로도 어쩔 수 없단 말이야. 다 말라가는 풀더러 계속 그러면 죽을 거니 뿌리를 깊이 박고 수분을 빨아들이라고 말한들 소용이 있어? 애란이는 말문이 막혀 종주먹을 들고 그저 이거이거 하다가 제풀에 손을 내려버렸다. 설날도 집안 분위기가 부산했다. 민혜를 기다리느라고 두 부부간은 배를 곯으면서 점심때까지 기다렸다. 일년을 시작하는 첫날이라는 개념도 그랬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빠진 밥상이 너무 싱거웠기 때문이였다. 목덜미를 잡아 일으킬가? 좀 더 자게 냄두세요. 조만간 일어나겠지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자꾸 방치해도 되는 겨? 남편은 정말로 딸애의 머리채를 잡아챌 것처럼 민혜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기 바쁘게 민혜 대신 고양이가 뛰쳐나왔다. 열흘이 되도록 딸의 침대밑에 숨어서 지내던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조심스럽게 구석쪽으로 에돌아서 식탁밑으로 기여들었다. 귤빛 털을 약간 곤두세우고 줄무늬가 확 눈에 띄우는 꼬리는 바닥밑으로 질질 끌고 있었다. 처음에는 식탁밑에 그대로 주저 앉아 석쉼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차차 애란이한테로 다가오면서 머리로 발을 쓱쓱 비벼댔다.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애란이는 화들짝 놀라 발을 옆으로 뺐다가 고양이가 다시 머리를 박아오자 그대로 내버렸다. 고양이가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장면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 보아왔었다. 재가 가득 든 마대에 박혀서 질식해 죽어 아버지네 배 속의 기름기로 변해버린 고향의 그 고양이도 그랬었다. 오렌지가 아닌 화이트였지만 고양이의 재롱 수완은 대체로 비슷했던 것이다. 그 귀여운 것이, 박쥐처럼 질긴 것이 왜 인간의 배 속에 들어가야 하는지 아직도 골드바흐의 추측보다 더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랬다. 야생동물을 즐겨 먹는 중국인들의 류별난 음식문화가 이런 대형 전염병 유행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하긴 가족 같이 지내오던 사육 짐승도 인정사정없이 마구 도살하는 인간들이 자기네와 연분이라군 전혀 없는 야생동물에 련민을 가질리 만무하지 않는가. 덕분에 설련휴가 2월 2일까지 연장되였다. 애란이는 괜히 흥분되여 그 소식을 민혜한테 전했다가 즉시로 반격당했다. 그게 보통 백성이랑 무슨 상관이래. 사람은 369등으로 나뉘여져 있구 대부분 백성은 연휴랑 상관이 없단말야. 하루 놀면 하루 수입이 없어. 인간세상은 배 나온 사람들이 어리석은 인간들을 세뇌시켜 부려먹는 론리가 아니구 뭐야. 4 청도서도 확진 환자가 생겨났다. 위쳇 모멘트부터 시작해 각 채팅방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잇따라 마스크가 동이 났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배추 한포기에 80원씩 판다는 루머가 퍼졌다. 애란이는 피씩 웃었다. 아무튼 미리 준비해둔게 다행이였다. 계획적으로 먹으면 보름쯤은 넉넉하게 넘길 수 있었다. 려행사를 하면서 사스와 조류독감 시절을 겪은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겪으면서도 아무런 마련도 하지 않아 그때 된통을 당했었다. 선무당이 사람을 죽인다고 어디서 얻어들은 것은 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마늘을 많이 먹고 어쩌구를 재미로 지껄이군 했었다. 그러다가 먹거리가 떨어져 가까운 슈퍼에 달려가보니 필요한 물품들은 거개가 바닥이 났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세월을 넘겼던지 지금도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마늘을 물에 끓여 마시면 예방 가능하다는 토방법이 떠돌았다. 그러면서 마스크가 여벌이 없으면 알콜로 소독하여 재사용할 수 있다고 서로 알려주고 있었다. 더욱 기 막히는 소식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마스크를 주어다가 씻고 소독하여 다시 파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이였다. 세상에! 이 인간들을 그저 어쩄으면 좋단 말인가?! 애란이는 자신이 이 며칠 하루에도 수십번씩 앞뒤가 끊겨진 감탄어인 이거이거 그저그저를 주절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딸아이에 대해서도 그랬고 지어 말없이 눈치를 흘끔흘끔 보면서 다가서는 고양이에 대해서도 본능적으로 혀를 끌끌 차군 했다. 오렌지 고양이는 올 때보다 살이 많이 올라있었다. 아직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되지 않았는지 소심한 모습을 보였지만 주인들이 관심을 보이는 눈치만 보이면 머리부터 들이대며 자기를 예뻐해달라고 아양을 떨군 했다. 고양이는 애란이가 좋은지 아니면 만만한지 정작 자기를 사온 민혜는 놔두고 애란이의 주위만 뱅뱅 돌았다. 민혜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 외에는 여전히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밤늦게까지 방에 들어박혀 핸드폰을 뒤적였다. 그러다보니 고양이의 분변을 처리하는 일은 아빠에게 차려졌고 고양이와 놀아주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애란의 몫이 되였다. 새벽 두시쯤이 되면 고양이는 화장실에 들어가 분변통을 긁어대군 했다. 그건 고양이가 배변을 했다는 암시였다. 고양이가 똥오줌을 누고는 그것을 파묻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싸락싸락 하는 소리는 10분쯤 이어졌는데 조용한 집안에서 무척 신경을 긁어댔다. 지금 세상은 고양이 밥이 따로, 똥오줌을 받는 통과 그것을 파묻는 알갱이를 따로 팔고 있었다. 애란이는 또다시 사람들의 식재료가 되던 그 시절의 동물들이 불쌍하고 미안했다. 사람들이 먹다 남은 것들을 아무거나 던져주면 받아먹고 자라면서도 순순히 맞아주고 먹혀준 그것들의 삶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동물도 세상을 잘 만나야 해. 못난 세월을 탓해야지 뭐 별도리가 있는가. 하다면 그때 살육된 동물들이 원귀가 되여 다시 인간에게 복수하는 거란 말인가? 애란이는 흠칫 놀라면서 발밑을 파고 드는 오렌지 고양이를 툭 차버렸다. 킥 하는 소리와 더불어 저쪽으로 피해간 고양이가 웬일인지 캑캑캑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주둥이를 바닥에 대면서 무엇에 케킨듯 캑캑캑거리다가 다시 목을 쳐들고 허공에 대고 칵칵거렸다. “민혜야, 이 고양이 왜 이래?” 놀란 애란이가 소리치자 무관심인듯 아무 소리도 없던 민혜가 방에서 달려나왔다. 발로 고양이를 툭툭 건드려보더니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감기에 걸린 것 같대. 어린애 감기약을 사서 먹이면 된대.” “그럼 아빠가 약국에 갔다올게. 물약을 말하는 거겠지?” “아빠 그만둬. 지금 비상시기잖아. 고양이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돼?”   민혜의 얼굴에 걱정과 더불어 공포의 그늘이 어느새 자리잡았다. 주의해 살피지 않으면 쉽사리 보아낼 수 없는 반응이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반대로 삶에 대한 지향일 수 있었다. 애란이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 딸애가 생에 대한 욕망이나 미련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삶이 싫지는 않다는 의지가 아닌가.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한 듯 하더니 서서히 생기가 돋아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다음 순간 애란이는 더 깊은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차라리 내가 갔다 올게. 뭐 죽기보다 더 하겠어?” 민혜는 정말로 신을 찾아 신었다. 처음부터 두손두발 다 들어서 고양이 사는 걸 반대했던 아빠는 딸애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남편은 그렇게 독한 면이 있었다. 강대강으로 대들면 절대로 져주는 법이 없었다. 긴 세월을 그런 남편과 살아온 애란이는 남편한테 다가가 슬그머니 안아주었다. “애를 저렇게 나가게 내버려두면 어째요? 죽어도 우리가 먼저 죽어야지. 우리 사는게 다 저 애때문이 아니예요?!” 마른 장작처럼 쉽게 터지는 남편은 온순한 양마냥 애란이가 챙겨주는 마스크를 고스란히 끼고 밖으로 어슬렁 나갔다. 민혜는 그러는 아빠가 리해되지 않는듯 물그러미 뒤모습만 바라보았다. 초이틑날부터 아파트단지가 전면 봉쇄되였다. 업주가 아닌 사람은 일률로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남편이 아파트단지를 벗어날 수 있을지 또 문여는 약국이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반시간이 좀 넘어 남편은 요구대로 어린애 감기약을 사왔다. 민혜는 신기한듯 집에 들어서는 아빠의 손에서 물약을 받아들었다. “나갈 때 들어올 때 모두 검열을 받았어. 그대로 죄인 취급이야 죄인.” 이틑날 새벽 두시쯤 화장실에서 또 고양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배변을 하고 파묻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낮처럼 또다시 캐캑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사람의 기침소리 같은 그 소리가 몇분간이나 이어졌다. 이 난시판에 고양이까지 왜 저 지랄이여, 아, 짜증나. 참아요. 애 좋아하는 거잖아요. 심리상담사님도 애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라고 했잖아요. 내버려둡시다. 저게 심상찮단 말이야. 하필이면 지금 기침하고 저러지?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것도 고양이가 민혜방에서 같이 지내니 애가 더 걱정이야. 감기약 먹이면서 며칠 두고 관찰해보자요. 그날 낮에도 고양이는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종일 줄창 기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너시간만에 한번씩, 그것도 막 목이 막혀 죽겠다는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약을 두번세번 먹여도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도 고양이는 어김없이 변을 파묻으면서 기침을 꽤나 오래동안 해댔다. 이젠 애란이의 인내심도 한계점에 도달할 무렵이였다. 뜻밖에도 민혜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엄마, 우리 고양이 내버리자.” 정색해서 내뱉는 말이 하루밤새에 어른이 된 어투였다. 말을 마친 민혜는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고양이를 안아서 출입문밖으로 내던졌다. 인차 고양이가 문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후에 문밖이 조용해졌다. “아니, 너 그래도 괜찮겠어? 무슨 생각에 그런 결단을 내린 거야?” “사람부터 살아야잖아. 우리가 죽고 고양이 홀로 살아선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 저게 살아남았다 해도 결국 굶어죽겠지 아마.”   “그러니까 말이야.” 민혜는 전번날보다 더 심각하고 엄숙한 모습이였다. 밝은 전등빛 아래서 흙빛이 된 얼굴이 보다 결연한 인상을 주었다  “나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잖아. 엄마랑 아빠랑 주고 받는 말을 다 들었어. 나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부모를 놔두고 왜 고양이한테 의지해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구나. 우리 민혜 요새 고민 많았구나. 그런데 말이지. 내 보기엔 고양이는 순 감기에 걸린게 틀림 없을 거 같아. 우리랑 두주일 거의 같이 있었잖아. 요즘 도는 병이라면 우리도 벌써 열이 났었어야지.” 애란이는 말을 하다말고 스스로 이마를 탁 치고 후다닥 뛰여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문밖에는 고양이가 없었다. 실망해서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였다. 아빠트단지내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 나가보았지만 여전히 눈에 띄이지 않았다. 희붐히 밝아오는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애란이가 풀이 죽어 돌아서는데 핸드폰에 문자가 떴다. 엄마, 빨리 돌아와, 청도에 벌써 10여건 확진환자가 나졌대. 그잘난 고양이가 다 뭐라고, 얼른 와! 엄마를 걱정하는 민혜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여 왔다. 알써! 애란이는 자기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칠념도 않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어귀 계단에서 오렌지 고양이와 오며가며 만날 줄이야. 이것 역시 연분이야. 손을 벌리니 고양이는 마침 기다렸다는듯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더이상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감기일뿐이야 감기일뿐이라고. 잘 치료해줄테니 우리 건강하게 살자구나.” 머리 속에는 옛날 시골의 동물과 아직도 도살이 감행되고 있는 정글 속의 동물들이 교차적으로 떠올랐다. 5 정월 초닷새날 민혜는 위쳇방을 통해 12킬로짜리 알콜 한통을 샀다. 재난 속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식지 않는다. 위쳇그룹들에서는 마스크에 알콜에 식품에 팔지 않는 것이 없었다. 민혜가 아빠더러 아빠트단지 북문에 나가면 물건을 갖다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나가보니 정말로 알콜을 배달하는 차량이 와있었다.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니 알콜을 이미 용도대로 혼합해놓았으니 오가는 사람이 다친 물건이면 무조건 뿜어서 소독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마스크도 쓴 다음 알콜을 뿜어서 건사했다가 다시 써도 된다고 말했다. 일단 믿기로 했다. 그건 동시에 민혜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엄마, 이십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있어? 있지, 미리 다 준비해두었으니깐. 그럼 됐어. 우리 2월 17일 부터 온라인 수업을 한대. 아마 그때까지도 학교에 갈 거 같지 못해. 민혜는 부지런히 집안을 오가면서 소형 분수병으로 알콜을 뿜어댔다.                                     2020년 제2호
30    댓글:  조회:599  추천:0  2020-04-25
단편소설   탈 장학규     오후 다섯시가 겨우 넘었지만 창밖은 벌써 어둠이 어둑어둑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홍교수는 쏘파에 무료하게 기대여 앉은채 리모콘을 들고 부지런히 채널을 돌렸다. 100여개 채널을 아무리 바꿔도 대체로 볼만한게 없었다. 조잡한 고대복장을 아무렇게나 차려입고 음모궤계에 열중하는 내용이 아니면 이 화평한 시대와 동떨어지게 아직도 총칼을 집어들고 충아싸야 하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애들이 한창 밥상머리에 앉아있을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재미를 가미한답시고 공공연히 진한 배드신을 곁들이고 있었다. (저런 걸 보고 애들이 뭘 배우겠어?!) 홍교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푼더분한 얼굴에 심한 짜증이 부글부글 괴여오르고 있었다. 교육자인 홍교수의 눈에는 요즘 젊은이들의 상태가 엉망 그 자체였다. 허영과 사치가 극에 달하고 서로 시샘하고 다투고 공격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이였다. 이대로 방치하면 하늘이 무너지진 않는다 손쳐도 사회가 크게 기울게 틀림없었다. 인성교육이 시급한데도 그 중임을 맡아야 할 매체들이 암투와 적개심과 색정을 부추기는데만 열중하니 구제불능이 아닐 수 없었다. 가끔 예능프로그램이 나오기는 했으나 외국걸 그대로 패러디한 흔적이 진하고 아니 나오는 생쇼를 억지로 꾸며서 눈쌀이 저절로 찌프려지기도 했다. (대책이 없어 암튼. 너희들 클라스가 원래 저질스럽지.) 홍교수가 신경질스레 리모콘을 한옆으로 팽개치는데 침실쪽에서 안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종래로 들어보지 못한 호칭에 간사한 목소리였다. 홍교수는 부시시 일어나 침실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인데도 벌써부터 무기력하다. 아무런 격정과 감흥도 없다. 정말로 한때 심장이 두개인 듯 가슴이 널뛰였던 때가 있었을가 싶을 정도로 심드렁하다. 침실에서 안해는 화장대 거울을 마주하고 서있었다. 홍교수가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몸을 탈며 돌아보았다. 순간 홍교수는 흠칠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안해는 얼굴에 마사지팩을 하고 있었다. 눈, 코, 입만 뚫어지고 나머지 면상 전체가 새하얗게 덮힌 안해는 얼핏 해골 처럼 보였다. 가슴이 섬뜩했던 리유도 그때문이였다. “현박…” 현박은 홍교수가 안해를 시까스를 때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 현씨 성의 안해는 사회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중학교때 부터 동창이였다. 대학도 같은 대학을 갔고 졸업 후에는 같은 직장에 배치되였다가 한국 류학을 1년 사이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났었다. 홍교수가 한해 먼저 박사학위를 따내고 청도로 귀환하고 안해는 이듬해 박사공부를 마쳤다. “아빠!” 안해는 아양 떨듯 한번 더 불러놓고 빤히 홍교수를 쳐다본다. 얼마전 한국에 학술 교류를 갔다오더니 갑작스레 변해버린 호칭이다. 전에는 홍교수가 “미애야” 하고 부르면 “희철아 왜?” 하고 텁텁하게 대꾸했었다. 그들 부부간에는 여보당신이란 부름 자체가 생략되여있었다. 가끔 홍교수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현박” 하고 부르면 안해는 바로 “홍교수” 하고 되받군 했었다. “웬일이여?”   “오늘 무슨 옷 입고 갈까?”   그러고 보니 안해는 오늘따라 동네 할머니들 처럼 소매 없는 회색 내복에 자잘한 꽃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몸뻬를 입고 있었다. 전에 없는 모습이였다. 집에서 일 할 때는 언제 봐도 반팔 흰색 적삼에 스커트를 받쳐입고 깨끗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안해였다. “그것도 이번에 사온 건가?” “뭐 말이예요? 몸뻬?”   “응” “오사모님도 자택내에서는 몸뻬를 입으시더라구요. 그렇게 기품있는 분이 친정엄마 처럼 친근한 느낌이였어요. 집에서 움직일 때는 캐주얼보다도 훨씬 편하고 분위기도 좋아보였구요. 돌아올 때 남대문시장을 거쳐 몇견지 골라왔어요.” 오사모님이란 안해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의 부인이다. 안해가 억수로 닮고 싶은 모델이다. 홍교수가 말없이 시무룩히 미소만 띤채 되돌아서는데 안해의 종알대는 목소리가 애교처럼 등뒤에 따라왔다. “뭐 입으면 좋을가?” “아무리나 입어. 정장이 좋더만은” 홍교수의 기억에 안해는 정장외에 다른 옷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항상 반듯하고 점잖은 이미지의 안해였다. 어쩌면 이번 한국 행차가 안해에게 어떤 충격을 준게 틀림없었다. 성경, 코란, 불경과 동급의 성서를 펼쳐낼 것처럼 만사불구하고 학문에 얼굴을 틀어박고 살던 안해가 느닷없이 그 얼굴에 팩을 붙히기 시작한 것 부터 미스테리한 일이였다. 목소리가 말랑말랑해지고 호칭이 느끼하게 변한 것도 심상치는 않았다. 아빠가 뭐지? 오빠도 아니고 아빠가 뭐야 아빠가? 실은 옷차림에 크게 신경을 써야 할 자리도 별로 아니였다. 십년쯤 못본 고향친구와의 저녁 약속이였다. 새로운 이민도시 청도에서는 흔하디 흔한 일이였다. 태호와의 재회는 약간 희극적이였다. 서로 한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래왕없이 여직껏 지내왔었다. 보름전의 일이다. 퇴직을 앞둔 김학과장이 홍교수를 불렀었다. “홍교수, 이번엔 홍교수가 수고 좀 해줘야겠어요. 모레 미래독서회란 단체에서 ‘민족교육과 우리의 출로’라는 테마로 토론회를 조직하는데 우리 학과 교수가 가서 주제강의를 해달라고 요청왔네. 나 몸이 많이 말째여 아무래도 홍교수가 모처럼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당초 홍교수를 이 대학으로 불러들인 당사자인 학과장은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까지도 직접 호명을 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홍교수 홍교수 하고 불렀다.  “아, 글쎄요.” 홍교수는 잠간이지만 머뭇거렸다. 사실 홍교수는 그런 장소에 다니는 것이 딱 질색이였다. 주머니에 돈푼깨나 챙겨넣고 하늘이 낮다고 으시대는 꼬락서니들을 도무지 보아줄 방법이 없었다. 홍교수는 교수라는 허울도 별로 사답잖게 보는 사람이였다. 그 껍데기를 벗으면 모두가 똑같게 생긴 인간임에도 괜스레 폼을 잡는 짓거리가 꽤나 우습기도 했다. 특히 모임장소에서 한 인물 뽐내고파 안달이 나서 퐁퐁 튀는 작자들은 그저 눈꼴이 실뿐이였다. 홍교수는 세상을 등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었다. 학과장도 그 점을 잘 알기에 여직 홍교수를 사회활동에 내몬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였다. 퇴직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야 할 홍교수를 마냥 사회의 변두리에 방치해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간 그 토론회에서 홍교수는 뜻하지 않게 소굽친구인 태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오회장으로 불리는 태호는 그번 모임의 협찬인이였다. 굵직한 허우대에 값비싼 양장을 하고 붉은색 넥타이까지 맨 태호는 일견에도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희철이 맞구나. 난 홍희철 교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간대로 정말 너일까 싶더라. 이게 몇년만이니? 정말 반갑다.” 먼저 와서 주석대에 점잖게 앉아있던 태호가 행사장에 들어서는 홍교수를 먼저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반갑게 손을 잡았다. “어,.. 저…” 홍교수가 미처 반응을 못해 떠듬거리자 태호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왜 나를 몰라보겠어? 나 태호야. 뒤싸울의 오태호.” “아…” 그제야 홍교수는 눈앞의 이 번들번들한 사나이가 어렸을 적 한동네서 같이 자란 소굽친구 오태호란 걸 알아냈다.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태호 덕분에 홍교수는 이젠 기억에도 아리까리한 고향마을의 이름을 용케 기억해냈다. 뒤싸울, 옳지. 어렸을 때 앞싸울, 뒤싸울 하면서 오갔었지. “우리 10년전에도 만났었잖아. 너 한국서 금방 청도로 왔을 때 우리 달포쯤 같이 지냈었는데…” 물론 홍교수도 잊지 않았다. 아니, 여직껏 잊혀지지 않았었다. 마음 깊은 곳에 애써 깔아두고 그 기억이 되살아날가봐 어마지두 걱정하면서 근 10년을 살아왔었다. 정말이지 다시 더듬고 싶지 않는 아픈 상처였다. 그때 홍교수는 갓 한국에서 청도로 복귀했었다. 제자를 보기에 스승만한 눈은 없다고 대학시절의 은사였던 김학과장이 청도로 자리를 옮기면서 홍교수를 호출한 것이다. 한국어학과가 갓 설립되여 시동 중이라 대학에는 아무런 마련도 없었다. 김학과장은 학교에서 직접 영입한 인재이기에 여러모로 대우가 따라갔지만 홍교수는 숙소마저 없어 림시로 세집을 잡아야 했다. 처음으로 인간에게 타이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의식했을 무렵이였다. 학교에서는 길어서 반년은 세집살이를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안해 미애가 아직 일년 더 한국에서 박사공부를 해야 하기에 홍교수는 최대한 지출을 공제해야 하는 처지였다. 홍교수는 학교 부근에서 5평 남짓한 단칸방 하나를 세맡았다. 침대 하나를 들여다놓고 옷 트렁크에 책 보따리들을 갖다놓으니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실내에서의 활동은 침대우에서만 가능한 상황이였다. 그래도 홍교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불편이 습관되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누가 그랬던가.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로운 일터에서 한껏 재능을 펼쳐보리라 마음 다잡으니 이 정도의 어려움은 술자리 안주감도 되지 않는 일이였다. 홍교수가 유일하게 참기 힘든 일은 안해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하루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차가운 이불과 마주할 때면 마음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무너진다. 안해의 품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그들은 결혼한지 3년도 되지 않는 신혼부부였다. 중학교때 부터 찰떡 처럼 붙어다녔던 그들은 대학도 같은 대학을 선택했다. 직장에서도 매일 얼굴을 맞대다가 홍교수가 류학을 떠나니 안해는 견디지 못하고 일년만에 쫑그르르 한국까지 따라왔었다. 홍교수는 안해가 보고 싶을 때면 술로 달래군 했다. 청도는 그러기에 안성맞춤한 도시였다. 문만 열고 나서면 어디서든 청도맥주와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병사리로 담은 것이 있는가 하면 캔으로 봉한 것도 있었고 더우기 통에 부어놓고 내리 받아먹는 것도 있었다. 선술집에 가면 커다란 유리고뿌에 생맥주를 부어주기도 했고 어떤 가게에서는 주머니 옅은 나그네들을 위해 전문 비닐봉지에 생맥주를 떠서 팔기도 했다. 그날도 홍교수는 불면의 밤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밤중에 거리에 나섰다. 늦여름의 청도는 모질게도 더웠다. 자정을 치닫는 시간대인데도 골목에는 여기저기에 웃통을 벗어버린 남정네들이 맥주에 땅콩을 곁들이면서 더위와 싸우고 있었다. 원체 말썽을 싫어하는 홍교수는 얼근히 취해 왁짝 고아대는 주정군들을 피해 멀찌감치 사거리까지 씨엉씨엉 걸어갔다. 아무튼 잠이 오지 않는 날이다. 이렇게 밤새도록 걸어도 무방할 거 같은 기분이였다. 사거리를 건너 아무렇게나 자그마한 슈퍼에 들어가 봉지맥주를 사는데 주인인 듯한 사내가 자꾸 홍교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였다. 혹시 얼굴에 무엇이 묻었나 싶어 손을 들어 낯을 훔치던 홍교수는 정면으로 가게 주인과 눈길을 마주쳤다. (엉?) 두사람은 동시에 흠칫했다. “혹시 희철이?” “태호…?” 두 소굽친구가 이렇게 약속없이 고향에서 수천리 떨어진 청도에서 20여년만에 상봉한 것이다. “여긴 어떻게 왔어?”   “얼마전에 저 앞의 대학에 취직했어. 넌?” “글쎄 유학까지 갔단 말은 얻어들었다. 이 가게 내가 하는 거야.” “그렇구나.” 서로 상대의 집을 확인한 결과 홍교수의 세집이 훨씬 가까웠다. 두 친구는 한사람이 봉지맥주 두개씩 들고 세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으로 들어서던 태호가 느닷없이 빈정대는 어투로 두덜대는 것이였다. “이게 집이냐? 대학 선생이 이런 데서 산다는게 말이나 돼?” “대학교 선생이면 사람이 다른가?” “그건 아니구…”   홍교수는 자기 집으로 가자며 우기는 태호를 겨우 침대에 눌러앉혔다. 가운데 신문지를 펼쳐놓고 볶은 락화생 한줌과 슈퍼에서 가져온 마른 안주를 벌려놓고 둘은 봉지맥주 네개를 밤새며 다 마셔버렸다. “기막혀. 내 무식이 태산을 찔러도 이렇게는 안 산다. 이게 웬 꼬라지니? 자슥아.” “글쎄 그런 사연이 있다구.” “사연이구 뭐구 안되겠다. 내일 당장 우리집으로 가자. 방 세개짜리 아파트인데 어차피 비여있으니 같이 살자. 난 밥 할 줄 모르니 그것만 저절로 챙기면 돼.” “제수는 어쩌구?”   “말투 한번 고약하다. 형수지 어떻게 제수냐? 그나저나 내 마누리도 한국에 있어. 거기서 물건 해보내면 난 여기서 팔구 그런다구.” 이틑날 퇴근하기 바쁘게 태호가 차를 구해가지고 찾아왔다. 감동앞에서는 언어가 창백했다. 주인집에 한달치 집세를 더 주고 홍교수는 태호한테 공손히 끌려갔다. 태호는 가게일때문에 항상 한밤중에 귀가했다. 거기에 지역 사업가모임의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 이틀이 멀다하게 곤죽이 되여 돌아왔다. “희철아, 저거들 다 깡패출신들이여. 델꼬 가서 같이 술 먹고 싶어도 홍박이랑 어울리기 어려워. 양해해.” 아침은 언제나 홍교수가 했다. 시장을 보고 와서 료리를 다 해놓아도 태호는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어차피 사전 약속이 있었던 만큼 홍교수는 군말 없이 매일 열심히 아침상을 차려놓고 출근했다. 저녁에 돌아와 보면 밥상우의 밥과 채소는 폭격당한 듯 지저분하게 헤집어져 있었고 빈그릇들이 그대로 팽개쳐져 있었다. (자식이, 내가 뭐 자기집 종넘인줄로 아네.) 홍교수는 투덜거리면서도 상을 치우고 그릇들을 가셨다. 한달쯤 지난 어느날이였다. 그날은 휴일날이였고 홍교수는 집에서 다음주 북경에서 열리는 전국학술포럼에 내놓을 론문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였다. 오후 네시가 좀 넘어서 태호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희철아, 저녁에 친구 셋이 우리집에 술 마실러 가니 채소 좀 맛있는 걸로 서너가지 해놓아라.” 이번에는 장난기를 담은 “홍박”도 삭제된채 명령식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귀가 거슬리고 마음이 불쾌했지만 꾹 참고 시장에 달려가 새우와 바다물고기 그리고 여러가지 조개류를 한아름 사들고 와서 부지런히 씻고 데치고 삶고 볶고 지지면서 두시간 좋이 서둘러 한상 푸짐하게 차려놓았다. 미처 앞치마도 풀지 못하고 이마에 돋은 땀을 훔치고 있는데 태호를 선두로 시커먼 장정 셋이 줄레줄레 따라들어왔다. “아, 벌써 다 해놓았군. 희철아, 인사해. 이분들 다 이 부근에서 괜찮게 나가는 친구들이야. 저긴 식품하는 김사장이구 이쪽은 악세사리하는 방총경리구 여기 이분은 전자회사 하고 있는 심회장이야. 여러분, 이 친구는 내 동창입니다. 자 얼른 앉으시지요.” 홍교수가 소개 받는대로 알은체 하고 있는데 상대방들은 배가 더 급한지 주섬주섬 상에 들어앉아 저가락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술상은 세시간 넘어 끌어서 열시반에 끝났다. 그들은 서로 목청을 비기 듯 왕왕 소리치며 세상사를 주고 받으면서도 건너방에 그들을 위해 료리를 한 사람이 배를 곯으면서 책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2차로 노래방에 간다면서 우르르 쓸어나간 다음에야 침실문을 열고 나온 홍교수는 술과 물과 담배꽁초로 범벅이 된 밥상을 보고 억이 막혀 한동안 입을 하 벌렸다. 배가 무지 고팠지만 식욕이 동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냐 싶었지만 정말로 먹고 싶은 마음이 꼬물도 나지 않았다. 새벽 한시쯤 되였을가. 홍교수가 어슴푸레 잠이 들고 있는데 태호로 부터 또 한번 전화가 왔다. 친구들이 배가 고프단다. 밥을 하고 채소들을 덥혀 놓으란다. 홍교수는 대꾸없이 전화를 끊었다. 먼저 상에 쓰레기들을 깨끗이 거두었다. 태호 요구대로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친 후 료리를 덥혀서 솥에 그대로 두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너무 지저분한 거 같지는 않았다. 홍교수는 트렁크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그날 태호는 홍교수를 다시 찾지 않았다. 이틑날 점심 무렵에 태호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나 홍교수는 받지 않았다. 한참 후 문자가 날아왔다. 어디 있냐고 물었다. 다시는 낯짝 보지 말자 그렇게 답복하려다가 점잖게 학교에서 강의 중이라고 대답했다. 사흘날에도 전화벨이 울렸으나 홍교수는 조금도 주저없이 끊어버렸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에는 전화번호를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아무튼 홍교수는 독서회 강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행사가 끝난 후 태호가 별도로 술 한잔 하자고 끌었던 거 같다. 그 우직한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대목도 어슴푸레하다. “안해가 한국에 학술대회 참가하러 갔다가 오늘 돌아와. 마중 나가야 해.” 아마 그렇게 둘러댔을 것이다. 태호가 한사코 전화번호를 물어서 마지못해 대주고 도망치 듯 쫓기 듯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을 때 홍교수는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솔직히 별로 흥분할 일도 아니였다. 그들은 원래 결이 다른 사람이였다. 자신은 교수고 태호는 기업가이다. 노는 물부터 달랐다. 그들이 같이 어울리자고 끌어도 홍교수는 뽕 맞은 것처럼 동네 미쳐돌아가는 짓거리는 절대 못하는 타입이다. 그러면서 왜 삐졌던가 싶다. 교수라는 껍데기 한벌 걸치니 허영심이 배꼽까지 꽉 들어차서 괜한 일에도 자존심이 쉽게 스크레치 난 모양이였다. 예상대로 이틑날 태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녁에 부부 동반으로 식사하자는 요청이였다. “며칠 후 보자구. 안해가 며칠 출장갔다 오더니 몸살이 심해.” 십년 묵은 체증이 하루밤 사이에 풀렸는지 홍교수는 저도모르게 너스레를 떨었다. 스스로도 약간 어이가 털렸지만 별로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제 태호가 정말로 또 전화를 걸어왔다. 다시 핑계 대면 혼날 줄 알라면서 위협 아닌 위협까지 가했다. 강아지도 되게 당한 골목에는 가지 않는다는데 하면서도 홍교수는 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안해는 약속시간이 아득바득 다가올 쯤에야 방에서 나왔다. 흰색의 목폴라티에 롱스커트를 받쳐입고 유백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나오면서도 저절로 서먹서먹했는지 내려다보고 뒤돌아보고를 거듭했다. 어색하기는 홍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여직껏 반듯한 정장 차림새의 안해만 봐왔던 홍교수는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였다. 안해가 저 정도로 예뻤던지 의심이 들 지경이였다. 오늘 하루 안해는 기품있는 대학 부교수로 부터 시골아줌마로 갔다가 다시 시체 녀인으로 화려하게 부상한 것이다. 이번에 오사모님한테 단단히 세뇌당한 거라고 홍교수는 생각했다. 안해는 무슨 일에나 올인하는 성격이였다. 한번 어떤 사유모식이 형성되면 쉽게 바뀌지 않고 지궂게 한곬으로만 흘러가는 타입이였다. 홍교수 부부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태호는 로비 쏘파에 몸을 파묻고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테이블 우의 담배재떨에는 담배 꽁초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다가서는 홍교수를 째리듯 노려보는 듯 싶더니 인차 얼굴에서 분노를 몰아내고 웃음을 게발랐다. “난 홍교수가 아니 오는 줄로 알았어.” “그럴리가…” 홍교수는 태호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현박, 이 분이 내가 말하던 소시적 친구요. 인사해요.” 다시 태호를 향해 안해를 소개했다. “우리 안사람이여. 현씨구 지금 부교수 직함을 가지고 있어.” “아, 형수님, 반갑습니다.” 태호가 정색해서 허리까지 굽히면서 인사했다. 문뜩 10년 전의 일이 다시 환영마냥 떠올랐다. 자기가 형이라며 바락바락 우기던 태호가 아니였던가. 식당은 호텔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태호의 안내를 받으며 룸으로 들어서던 안해가 주춤하고 멈춰섰다. 그와 동시에 룸에 진한 화장을 하고 앉아있던 웬 요염한 녀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현선생님 아니세요? “ “혹시 지…지…” “현선생님 맞네요. 네, 제가 해순이예요. 지해순.” 두 녀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새된 소리를 지르며 퐁퐁 뛰기 시작했다. 작지 않은 룸이 두 녀자로 인해 꽉 찬 느낌이였다. 홍교수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이 데꾼해진 채 두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고 태호는 언녕 이런 장면에 익숙하다는 듯 슬슬 자리를 찾아 앉아서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보, 이 현선생님 덕분에 내 살아났어요. 우리 오늘이 있는 것도 현선생님 덕분이구요.” “엉? 뭔소리여?” 태호는 난처한 듯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고 이마살을 찡그리며 낮다랗게 중얼거렸다. “내 맨날 외웠잖아요. 한국서 일자리 떼우고 주머니가 바닥이 났을 때 마침 현선생님을 만나서 오사모님댁에 가정부로 들어갔다구요. 바로 그 은인이예요. 그 바람에 우리 가게가 살아남은 거지요.” 그 사실은 홍교수도 안해한테서 들어 아는 소리였다. 홍교수가 귀국하고 안해는 남아서 박사공부를 계속하던 어느 날이였다. 그날 따라 안해는 생리중이여서 심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려서 부터 조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고질로 남겨진 병이였다. 지도교수에게 말미를 맡고 동네 병원으로 가던 안해는 병원 문어구에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웬 녀인과 조우했다. 지금 처럼 늦가을이 다가오는 계절인데도 녀인은 홑옷을 입은 채로 오돌오돌 떨면서 담옆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눈길을 잠간 주고 받고 의사한테서 약을 받아 나오는데 아까 녀인이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 주저앉아있었다. 얼굴에는 진땀이 배여 있었다. 타향에서 온 사람이 분명했다. “여보세요.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니예요?” “네에…” 녀인은 낮다랗게 대꾸하고 얼굴을 깊숙히 파묻었다. “무슨 일이세요?”   “저 지금 하루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어요. 라면 하나 사주실 수 없겠어요?” 안해는 두말없이 녀인의 손을 끌고 슈퍼에 찾아들어갔다. 알고보니 녀인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으로 이름은 지해순이라고 불렀다. 한국에 나온지 1년이 좀 넘는데 하루도 놀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원래 시골에서 자란 터라 육체적인 고생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도때도 없이 욕설을 퍼붓고 쩍하면 노임을 잘라먹는 행태에는 견뎌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매일같이 악으로 버티며 한잎두잎 모아서 국내에 있는 남편에게 부쳐보내군 했다. 남편을 그 돈으로 자그마한 슈퍼를 시작했다고 알려왔다. 점차 규모를 늘려가면서 자금도 더 들어갈 무렵 해순이한테 뜻하지 않은 일이 들이닥쳤다. 그날 오후도 해순이가 함바집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문이 열리며 오야지가 어슬렁어슬렁 들어섰다. 평소에 틈만 나지면 집적거리던 오야지인지라 해순이는 바짝 긴장했다. 아닌게 아니라 오야지는 히물히물 다가서며 해순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해순이가 몸을 탈면서 한쪽으로 벗어나자 여직껏 한번도 목적을 달성 못한 오야지는 악이 받치는지 와락 달려들면서 독수리가 병아리 채듯 그녀를 덥썩 안아들고 그녀의 숙소로 마련된 안쪽 방으로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코에서는 역한 참이슬 냄새가 풍겨나왔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해순이가 발버둥치며 고아대는 소리가 현장에서 메아리쳤다. 급해난 오야지는 해순이를 그대로 바닥에 동댕이치고 꼬리빳빳이 도망쳤다. “너 어디 두고 보자.” 아닌게 아니라 며칠 후 함바집에는 해사하게 생긴 중년녀인이 찾아왔다. 오야지는 그 녀인이 새로온 식모라면서 인수인계를 마치고 당장 떠나라고 호령했다. 물론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원래 많지 않던 노임을 반나마 잘라버렸다. 불법 취업 중이였던 해순이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신분때문에 다시 취직이 되지 않았어요.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가게는 망하고 지금껏 헛수고한 셈이 돼요.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라도 되니 주선만 해주시면 열심히 일할게요.” 안해도 조선족이란 것을 알게 된 해순이는 손을 비비면서 애원했다. 원래 마음이 약한 안해는 머리가 뜨거워져 그 길로 해순이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왔고 이틑날에 곧바로 지도교수님 댁 가정부로 소개했다. 오사모님이 언제부터 참한 가정부를 찾아달라고 부탁해온 터였다. “너 같은 애면 딱 좋겠어.” 오사모님은 직방 대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안해더러 도와달라는 말이 분명했다. 안해도 그 일자리가 무척 욕심났다. 금방 귀국한 남편은 아직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고 자신도 일년 더 공부해야 하니 아르바이트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얼굴이 가려워 차마 자신이 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금전 유혹에 빠진 사람 처럼 보이는 것도 그렇고 박사 공부한다는 사람이 가정부 일을 한다는 것도 얼굴이 깎이는 일이라 생각되였다. 마침 그때 해순이가 오게 된 것이다. “소개해주고 얼마나 후회되던지. 얼굴에 철판 한번 깔면 모든 어려움이 일소되는데 왜 그리 간단한 일도 못했는지…” 안해가 두고두고 외워서 홍교수는 마치도 자신이 겪은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해후를 한 두 녀인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끝도 없이 재잘거렸다. 해순이 입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던 안해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언니”가 되여있었다. 홍교수는 태호를 슬그머니 건너다보았다. 술 먹어서인지 얼굴이 붉그스레해진 태호는 인플레이션이 심하던 입을 술을 붓는데만 사용하고 있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잠자코 홍교수가 술 들자면 들고 담배 피자면 피우고 따라 할 뿐이였다. 홍교수는 태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태호는 홍교수에게 죄책감도 가졌을 법 했다. 홍교수가 따분한 분위기를 깨려고 학과에서 “우리말축제”를 준비 중이라고 하니 태호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즉시로 자기가 협찬하겠노라고 나섰다. 절대 거절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기도 했다. 그간 대학공부를 하지 못한 알레르기가 심해서 괜히 호기를 더러 뽑으면서 살았다면서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술김이긴 했지만 진심이 전달되여 왔다. 간만에 두 친구는 밤이 깊어가도록 술을 주고 받았다. 상을 파하고 집에 돌아온 안해는 어렵게 준비해 차려입고 나갔던 옷들을 와락와락 벗어서 그대로 침대밑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다시 몸뻬를 찾아 주섬주섬 입었다. 헐렁해준 몸을 흔들면서 기분이 나는지 과장된 제스처로 거실을 한바퀴 돌기도 했다. “편해, 편해, 정말 편해. 이렇게 홀가뿐하고 편한 걸 놔두고 왜 그렇게 조이면서 살아야 했지?” 홍교수는 그러는 안해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조이면서, 참으면서, 절제하면서 살아왔던게 틀림없다. 풀고 헤치고 벗으니 한결 가벼운 걸 가지고 괜스레 너무 오래 억지춘향노릇을 한 거 같았다. 홍교수는 래일 학과장에게 “우리말축제” 협찬금 소식을 전할 일로 안해보다 훨씬 더 흥분되여 있었다.                                          2020년 제1호   창작수기 탈은 있으면 빛나고 없으면 편하다 장학규 인간은 사탄의 유혹을 못이겨 금단의 선악과를 먹으면서 락원에서 추방되였다. 알몸의 부끄러움을 알아 루추한 부위를 가린 것을 탈을 쓰기 시작한 기원이라면 인간은 그때로 부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감추고 가리고 덧칠하고 분장하느라고 억수로 악을 쓰며 살아온 셈이다. 따져보면 “탈”의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의복이 먼저 탈이였다. 모름지기 표정도, 신분도, 직무도 아무튼 인간의 몸뚱이 이외의 모든 것이 탈인 게 분명하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류의 력사는 어쩌면 부지런히 “탈”을 만들어 자신과 점점 멀어지는 과정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스스로를 더 잘 다듬고 더 멋지게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칭할지도 알바 없다. 아무튼 그래서 문명이란 허울을 만들어 쓰게 되였고 계급이나 신분이나 또는 규범들이 생겨나서 서로를 나누고 대립시켰던 것이 아닌가 싶다. 부지런한 사람이 부를 챙기고 덕이 있는 군자가 존경받고 힘있는 용사가 권리를 행사하고 총명한 사람이 지식을 가지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인류는 바로 이런 지성과 엔리트들에 이끌려 진화해왔고 구원의 긴 터널을 달리고 있다. 그들의 머리에 두른 광환의 “탈”은 빛날 수밖에 없고 또 천추만대로 이어가며 빛나야 하는 “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끔이지만 “탈”도 나름대로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녀인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값진 옷차림을 하거나 진한 화장을 하는 것은 출발점이 갸릇해서 즐겁기만 하다. 금전이나 리익을 위해 권세앞에서 간사함을 표현하는 행위도 어쩌면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능 발로라 량해가 닿을 듯도 싶다. 꼭은 아니여도 남을 해치려는 고의가 없다면 거짓도 품어줄만 하고 상대와 필요에 따라 부동한 역할을 배역하는 것도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데 “탈”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탈”들이 우리 사회를 더 다양하고 다채롭고 더 빛나게 장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로 되는 것은 그저 “탈”일뿐인데 그것을 고유 특권으로 착각하는 의식이다. 특히 스스로가 뒤집어쓴 “탈”이 아닌 경우는 더욱 그렇다. 스스로 찾아 쓴 것은 누구나 그것이 “탈”이고 또 어쩔 수 없이 썼다는 것을 잠의식에서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이 씌워준 “탈”은 그것이 “탈”인줄을 잘 모를 때가 없지 않다. 어떤 시점에, 어느 라인에 어정쩡하게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선택되여 “탈”을 뒤집어 쓴 채 그것이 혹시 하느님의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야비하게 주변을 짓밟고 다니는 인간들은 꼭 한마디 해주고 싶은 존재들이다. 너에게 “탈”이 용케 차려졌더라도 그것은 휘두르는 무기가 될 수 없으며 더욱이 너의 추악함을 덜어주는 면죄부일 수는 없다. “탈”은 남의 시각에서 빛나고 스스로는 벗을 때가 더 편하다. 아마도 나는 그래서 인간이 구원되여 복락원하는 그날을 기다릴 것 같지 못하다. 내가 못에 먼저 박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11일
29    막차 댓글:  조회:566  추천:0  2019-11-29
단편소설   막   차 장학규     해가 많이 길어지기는 길어진가 보다.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일곱시가 넘어가도 하늘은 서운한 듯 한가닥 밝은 빛을 렴치없이 그대로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정호는 날이 곧 어두워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느끗한 듯 하면서도 미처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 순식간에 까막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이 계절만의 특수이기도 했다.  어쩌면 세상사도 이 계절만큼 치렬하면서도 끝맛이 통쾌했으면 좋겠다. 지나간 모든 것을 찰라에 까맣게 까먹을 수만 있다면 행복은 행복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남모르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테고 고통이나 후회 같은 것은 아예 온데간데 형체도 없을 것이 아닌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과거라는 이름의 물건에 얽매여 마치도 세계말일이나 다 된듯 껌뻑 죽었다 살아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것은 정말로 사람이 할 노릇이 못되였다.  아직 한나절 달아오른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때이다. 거퍼 몇발작 걷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땀이 배이고 있었다. 정호는 어지러워오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휘청휘청 술취한 사람처럼 뻐스정류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벌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서 있었다. 손에 든 싸구려 부채를 버럭버럭 소리내여 저으며 더위를 식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슈퍼 랭장고에서 갓 사온듯 찬 물방울이 데롱데롱 매달린 생수병을 이마에 대고 있는 젊은이도 있었다. 어떤 남정네는 웃통을 드러내놓은채 부끄러움도 잊고 녀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갔고 무시당하기 한창 좋은 얍삽한 무리들은 그늘이 언녕 사라진 가로수밑으로 한걸음 물러나 피서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정호는 멍하니 거리 건너편 뻐스정류소를 바라본다. 저기서 29번 뻐스를 타면 첫 역이 은정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부근이다. 지금 이대로 달려가 은정이를 불러내고픈 충동이 사뭇 강렬하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따져 묻고 싶다. 떠나지 않으면 안되냐고 구걸이라도 할가부다. 그러나 은정이는 정호의 전화를 받지 않을게 분명하다. 문자도 씹을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저대로 훌쩍 떠나버리도록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눈앞에 미연이의 득의양양한 얼굴이 동영상처럼 떠올랐다. 종래로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였다. 인혜의 표정은 이상야릇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게 아리숭한 것은 그녀만의 디자인이다. 승원이는 소태 씹은 형상이다. 도대체가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사이 뻐스가 여러대 지나간 모양이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한 느낌이 들어 둘러보니 정류소에는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증발해버리고 자기 혼자만 달랑 남아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차가 남아있었다. 이 역에서 타면 반대방향으로 달리기에 은정이네 아파트는 제일 마지막 역전이 되는 셈이다. 29번은 환선으로 한바퀴 달리는데 대략 한시간 정도가 걸린다.  막차가 달려왔을 때 정호는 조금도 주저없이 뻐스에 올랐다. 스스로도 어떤 절박함에 쫓기는 느낌이였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모레면 은정이는 한국으로 떠난다. 명색이 류학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정호를 마음속으로부터 밀어내기 위해 그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뻐스에 오르자마자 정호는 난제에 부딪쳤다. 주머니를 발칵 뒤집어도 1원짜리 동전이나 지폐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정호는 돈관리를 제대로 할줄 모르는 편이다. 여유가 나지면 그때그때 다 술을 사먹는다. 그래서 종래로 지갑이란 것을 들고 다녀본 적이 없다. 원래 거기에 넣을 여유가 별로 없었지만 그거보다 뭐니뭐니해도 먼저 거추장스럽다. 몇푼 있으면 있는대로 바지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넣는다. 그게 훨씬 편하다. 그래서 동전은 거절이다. 주머니속에서 덜렁덜렁거리는 소리가 짜증나서이다. 1원짜리 지폐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그런 돈이 잔돈으로 나오면 그자리에서 기부함에 넣어버리거나 어떤 거리를 찾아 써버리고만다. 때문에 그의 주머니에는 1원짜리 돈이 들어있어본 적이 거의 없다.  정호가 난처해서 손을 비비고 있는 것을 곁눈질로 본 기사가 위챗페이로 지불 가능하다고 퉁겨준다.  (아, 그렇지.) 정호는 무안하여 저도모르게 차안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승객은 네댓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더위에 질렸는지 아니면 하루 일에 지쳤는지 누구라없이 활 열어젖힌 차창에 머리를 박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정호도 창문이 열려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여름인데도 에어컨이 없다. 기사 바로 머리 우로 선풍기 한대가 달랑 달려있을뿐이였다. 뻐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정호는 될수록 머리를 차창밖으로 많이 내놓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차가 주춤 역에 멈춰서면 살인적인 열기가 확 얼굴을 덮쳐 냉큼 차안으로 움츠러들군 했다.  그렇게 몇 역전을 달렸는지 알바 없다. 차츰 정호는 썰물과 밀물이 륜회하듯 하는 공기의 조화에 적응되여 바깥 풍경을 내다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도시의 밤은 폭염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네온등이 명멸하는 가운데 도처에서 스피커가 고아대고 있었고 음식점 식탁들이 가게밖으로 몰려나와 맥주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정호의 눈에 “소주실크”라는 간판이 들어왔다. 전에는 본적이 없는 자그마한 옷가게였다. 마네킹에 불륨이 선명한 치파오를 입힌 그 가게를 보노라니 1년 전 소주에서 은정이와 만나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정호는 패키지관광으로 소주 졸정원을 돌고 있는 중이였다. 바캉스의 계절이라고는 하나 관광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정호였다. 인혜만 아니였어도 이번 길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요사이 짬내서 한번 왔다가. 긴히 할 말이 있어.” 인혜가 이런 전화를 걸어왔을 때 정호는 갸우뚱했었다.  “무슨 일이여? 전화로 하면 안돼?” “글쎄 전화로 될 수 있는 일이면 굳이 왔다 가라겠어?” “돈 없어. 시간은 가득 남아돌아도…” “그럴 줄 알았어. 항상 그랬지.” 인혜는 정호의 대학 동창이자 첫사랑이였다. 대학 4년간 줄창 붙어다니면서 매일이다싶이 투계처럼 치렬하게 싸웠었다. 정호는 인혜한테 완전히 오픈된 상황이였다. 정호가 코숨을 내쉬여도 왜서 그런다는 원인을 한시간 정도 쉽게 분석해낼 수 있는 사람이 인혜였다.  “인터넷을 통해 청도중국여행사에서 패키지상품을 예약했어. 첫코스가 소주이니 그때 만나서 얘기해.” 인혜의 말대로 하면 인혜도 항상 그랬다. 뭐나 일방통행식으로 결정해놓고 통보하면 그만이였다. 산만하고 자유분방한 정호를 언제나 자기 뜻에 맞는 어떤 프레임에 가두어두려고 무지 애썼었다.  정호는 이번까지 소주가 세번째 행이였다. 청도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혜가 소주 삼성전자에 취직하자 짐을 들어다주느라고 따라왔었다. 둘은 힘든줄도 모르고 사흘동안 소주의 곳곳을 누볐다. 서로 까놓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두사람은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으로 되는 데이트일지도 모른다는 핍박감에 시달렸었다.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으로 인해 유명해진 한산사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왕 합려가 파묻혔다는 호구산도 그때 둘러보았다. 물론 중국4대명원에 속하는 졸정원에서는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일개인이 만든 정원이 감히 나라 임금의 후원과 어깨를 견줄 정도였으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은 말할나위도 없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인혜가 결혼을 하면서 정호는 축하차 다시 소주를 찾았다. 인혜와 한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은 김장우라고 불렀는데 훤칠한 체격에 인물도 멀쑥했다. 정호는 결혼식 이틑날로 청도에 돌아오려고 했었으나 오래간만에 모인 동창들이 한사코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졸정원을 찾았으나 웬일인지 그번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이다. 패키지라 별수 없이 팀을 따라 이동하다가 졸정원의 중부화원 견산루에서 그만 물가를 따라 세운 낮다란 돌란간에 주저앉아버렸다. 앞으로 가봤자 마냥 먼저번에 보아온 그대로일게 분명했다.  정호는 미지세계의 유혹이나 예측불가의 신비로움이란 것이 알고보면 허황한 것이란 것을 새삼스레 돈오했다. 사실 세상사란 종이 한장에 불과한 것이였다. 툭 뚫어놓고 들여다보면 세상은 거기서 거기요 별로 희한한 것도 아니였다. 몇년간 죽자살자했던 인혜가 덜렁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는데도 정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생하게 감지하고 있는 현재이다.  물속에서는 짙은 노란색을 띤 금붕어들이 하느작거리며 헤염치고 있었다. 가끔 한뺌 크기의 피라미나 송어들도 보였다. 물곬이 오불꼬불하고 깊숙한 걸 미루어보아 자칫 붕어나 또는 잉어도 있음직했다. 정호는 어렸을 적 시골 강가에서 반두로 송어를 건져내여 매운탕을 제법 맛있게 끓였었다. 여기서는 반두질은 무리겠으나 낚시 정도는 괜찮지 않을가싶다.  견산루 1층 바닥에 돗자리를 펴놓고 낚시대를 척 물에 드리우면 신선 부럽지 않을 거 같았다. 정호는 청도에서 매일 휩쓸려 다니는 친구들이 생각났다. 고기를 낚아채여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보글보글 매운탕을 끓인다면 시 쓴다고 너벌대는 홍철이넘은 완전히 미쳐날뛰지 않을가. 술깨면 자기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라는 물건을 지벌지벌 씹어대겠지 아마. 친구보다 녀자를 더 좋아하는 영철이는 못하는 술 둬잔 먹이고 바로 2층으로 올려보내면 그만이다. 견산루 구조는 좀 특이하다. 1층에서 2층으로 바로 올라갈 수 없다. 계단 자체가 없다. 꼭 1층 옆구리에 붙은 산허리를 타고 빙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그 2층 입구에다 역시 주색잡이인 영남이를 파수꾼삼아 세워두면 다른 넘은 올라갈 궁리도 못할 터이다. 아무래도 둘이 피박나게 싸울지도 모른다.  태평천국때 충왕 리수성이 견산루에서 주로 사무를 보았던 리유가 바로 이곳이 요지경같고 은밀하고 방어가 쉽기 때문이 아니였던가. “저 혹시 청도에서 관광팀 따라 오신 분 아니세요?”   정호가 한창 백일몽에서 헤매는데 웬 녀자가 뒤에서 챙챙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직도 환각에서 완전히 깨여나지 못한채 돌아보는데 녀인이 반갑다는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유, 맞네요. 우리 같은 팀이예요. 후, 이제 살았네요.” 20대 후반의 발랄하게 생긴 처녀였다. 목소리도 컸고 어투도 꺼리낌 없었다. 블랙 투피스 차림인 걸 보니 직업녀성같았다. 관광을 나서서도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별로 없을듯 싶었으나 눈앞의 처녀는 오히려 그 옷이 퍽 어울렸다. 불륨이 선명했고 한결 정숙해보였다. 특히 주름 한점 보이지 않는 생생한 얼굴이였다. 정호는 저도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정호는 어느덧 30대로 업되여있었다.  “팀에서 떨어졌지 뭐예요. 태평천국 어쩌구 해서 기념사진을 남기려고 2층으로 에돌아서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알수 있어야 말이죠. 길도 모르겠고요. 저 오불꼬불한 다리가 귀신을 물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저를 물귀신 만들려고 준비한거 같았어요. 호호” 가이드가 뻥친 말을 그대로 고지식하게 믿는 푼수떼기였다. 정호도 이곳으로 들어올 때 거기까지는 들었었다. ㄱ자형으로 꺾어지게 다리를 만든 건 귀신은 곧은 걸음밖에 걸을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가이드가 말했었다. 사람을 해치려고 뒤를 따르던 귀신이 곧추 걸으면서 물에 빠져 죽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시나리오였다. 정호는 처녀가 귀엽다는 생각에 피씩 웃고말았다.  “홀로 남아서 여유작작하시는 걸 보니 이곳이 첫걸음이 아니네요. 우리 빨리 나가요. 일행이 떠나면 큰일이예요.” 처녀는 무람없이 정호의 팔짱을 꼈다. 팔뚝에 가슴이 뭉클하고 맞혀왔다. 반갑고 믿는다는 표현이였겠으나 정호는 오히려 요즘 애들은 참 당돌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얼굴이 저절로 붉어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동원(东园)을 거쳐 정문으로 빠져나오는데 저만치에서 인혜가 손을 흔들어보였다. 흰팔이 드러나고 속옷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캐미솔에 미니스커트를 받쳐입었고 발에는 조리샌들을 걸고 있었다. 결혼하더니 성숙미가 한결 돋보였고 나젊은 부인다운 기품도 엿보였다.  “이분은?”   그들앞으로 다가온 인혜가 적의에 가득찬 눈길로 그때까지도 정호의 팔짱을 어정쩡 끼고 있는 처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저 눈길이였다. 대학졸업 1년전부터 미연이를 보는 인혜의 눈길이 바로 저랬었다. 우연히 정호와 미연이가 한 회사에 실습을 가면서부터였다. 두 련인사이가 삐걱거린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그리고 인혜의 거침없는 저주의 화법도 날따라 레벨을 더해갔다.  “그 더러운 손을 제몸에 대지 말아요. 징그럽고 구역질나요.” 인혜는 전혀 컨트롤되지 않은 언어폭력을 사랑이라는 미사려구로 포장하면서 정호를 시도때도없이 공격해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신창을 만들어놓고서도 기고만장해서 모든 잘못은 정호가 자신을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단짝이였던 미연이에게는 더욱 험악하게 굴었다. 결국 함께 청도에 남기로 했던 인혜가 난데없는 소주를 선택하면서 둘의 사랑은 사실상 금이 가버린 것이였다.  “갓 사귄 친구야.” 정호의 입에서 느닷없이 이런 대답이 흘러나갔다. 순간 정호는 스스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숭한 중국식 표현이 어떨 때는 정말 좋았다. “사귀다”는 말이 경우에 따라서 뉴앙스가 다르게 들린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노는 친구가 있고 련애하는 친구가 또 따로 있다. 어떤 친구와 어떻게 사귀냐에 따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달리 해석이 되고 리해가 되는 법이다. 그런데 옆에 처녀가 더 당돌한데가 있었다.  “저 은정이라고 불러요. 이렇게 뵙게 되여 반갑습니다.” 또렷한 조선말이였다. 정호는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내색않고 가만히 잠자코 있었다.  “네, 반가워요. 참 예쁜 아가씨네요.” 인혜는 대범하게 은정이의 손을 잡고 둬번 흔든 후 정호를 돌아보면서 어꺠를 으쓱해보이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갑자기 중요한 바이어가 오게 되여서 회사에서 호출이 왔어. 오라 해놓고 내가 시간을 맞출 수 없어 죄송하다고 알리려고 나왔어. 얼굴 이렇게 봤으니 너무 실례는 아니겠지. 나중 다시봐.” 돌아서는 인혜의 뒤모습이 그렇게 처량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틑날 팀을 따라 항주에서 령은사를 돌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쳐왔다. 인혜였다. 어제와 달리 얼굴에 웃음이 찰랑찰랑 맺혀있었다.  “어떻게 왔어? 바이어는 어쩌구?” 놀라는 정호와 달리 인혜는 차분했다.  “제공처럼 날아왔지.” 령은사가 저 유명한 제공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란 사실을 빗대고 하는 말이였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정호의 옆에 따라붙는 은정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인듯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어제와 판이하게 도고한 태도였다. 뭔가 낌새를 챈 모양이였다. 어쩌면 멀리 청도에 있는 미연이에게 확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였다. 그러면 당연히 은정이란 형체가 바로 들통날 수밖에 없을 것이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자가용을 몰고 관광차 뒤를 바싹 뒤따라왔을 터이다. 보지 않아도 비디오였다. 그런데 미연이는 왜 아무런 말도 없을가? 애당초 정호가 강남으로 내려온다는 사실을 미연이는 모르고 있었다. 잔꾀가 많은 인혜가 빙 에둘러 미연이의 입을 털었을 가능성이 컸다. 미연이는 남한테 쉽게 당하는 캐릭터이다. 졸업을 일년 앞두고 뜻하지 않게 정호와 같은 회사에 실습을 가서 몇달간 함께 있었지만 사실 둘 사이는 어쩌다가라도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동창끼리는 가끔 어깨동무도 할법 했으나 미연이는 언제나 정호를 피하는 눈치였다. 딱친구인 인혜와 련애하는 사이라고 그러는지 항상 정호와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습 문제로 인혜한테 날벼락을 맞은 미연이였다.  인혜가 소주로 떠난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누구보다 얼굴에 화색을 띄운 사람이 미연이였다. 그날로 미연이는 결연히 청도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누구도 그 리유를 알수 없었다. 오래동안 미연이의 꽁무니를 쫓아다닌 승원이가 아무리 함께 광주로 내려가자고 구슬려도 미연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승원이가 손을 들고 광주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대학을 졸업한지도 5,6년이 지났지만 그들 둘은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은정이는 저녁때까지 내내 풀이 죽은 모습이였다. 심상치 않았다.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냐 물었지만 막무가내로 머리만 저어댔다. 그러나 인혜가 저녁을 별도로 사주겠다고 정호를 단체식사장에서 끌어내자 은정이도 주밋주밋 따라나섰다.  “우리 동창사이 긴히 할 말도 있고하니 오늘저녁 피해주면 안될가?” 정호가 인혜의 눈치를 살피며 민망해하자 은정이는 오히려 자기가 억울한 듯 눈물까지 글썽여보였다. “단체에 제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이렇게 떠나버리면 저는 어떡하라구요. 가서 한마디도 삐치지 않고 입을 닥치고 있을테니 데리고 가주세요.” “괜찮아요. 같이 가요.” 인혜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정호보다 앞질러 대답하고는 그들을 끌고 거리에 나와 택시를 잡았다.  “루외루” 조수석에 앉아 외마디 단창을 뽑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인혜를 건너다보며 정호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한번 내려오라고 닥달해놓고 루외루에서 밥 한때 먹이려고 한건 아닐 것이다. 팀은 래일 상해를 거쳐 귀로에 오른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오늘 저녁밖에 없다. 그런데도 인혜는 은정이를 그대로 끌고 나온 것이다.  항주는 처음이지만 루외루는 낯설지 않았다. 남송 시인 림승의 “산 너머 청산이요 루각 건너 루각이네”로 널리 알려진 루외루이다.  낮에 서호를 유람할 때 눈으로 현물을 확인하기도 했었다. 한때 임금의 행궁으로도 역할을 했던 고산에 우뚝 솟아있는 루각이다. 산밑에 자리 잡으면서 서호와 엇비슷 수평을 다투는 루외루는 기세도 기세려니와 풍류도 이만저만이 아닌 듯 싶었다. 그속에서 질탕하게 흘러나오는 노래가락이 유람선까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정호는 대형 유람선보다 쪽배가 더 운치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탁한 서호물이 향기 넘치는 막걸리로 보이는 건 정호뿐일가. 영남이는 아예 한입에 다 마셔버릴듯 풍덩 뛰여내릴터이지. 홍철이는 너울너울 춤을 출가? 판소리 한마당 펼칠 것이다. 영철이는 한달음에 서씨같은 미녀의 품에 쓰러지렷다. 어화둥둥, 소동파님 반갑나이다, 백락천님 인사 올립니다 쿵당쿵당쿵쿵당… 그렇지만 궁전같이 으리으리한 루외루에서 내다보는 서호는 더욱 선경에 다름 아니였다. 루외루가 호화로운 왕궁이라면 서호는 여유작작한 천궁이다. 금빛의 석양이 뒤덮힌 서호는 도처에 일엽편주로 알록달록 장식되여 있었다.  정호는 술을 얼마 들이켰는지 모른다. 요염한 인혜가 아양을 떨면서 부어주는대로 마셔버렸다. 은정이가 쑥스러운듯 숙녀처럼 가장하며 따르는 잔도 몽땅 비웠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서로 빼앗아 먹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취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정호가 뇨기가 동해 비칠거리며 화장실로 가니 입구에 은정이가 쪼크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사이에 파묻고 있었다. 잠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치며 부르는데 느닷없이 은정이가 벌떡 일어서면서 정호에게 안겨왔다. 피하면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질 기세여서 정호는 어쩔 수 없이 은정이를 받아안았다.  “키스해줘요.” 은정이가 빨갛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이지 정호는 여직 그렇게 탐스러운 입술을 본 적이 없었다. 인혜는 섹시한 입술을 가졌고 미연이는 예쁜 입술을 가졌었다. 그러나 둘다 탐스럽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은정이는 정말 앵두처럼 먹고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탐스러운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몽롱한 의식속에서도 이러면 안된다는 자아와 정말 못 참겠다는 본능이 맞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두 입술은 맞붙고 말았다. 걸탐스레 정호를 빨아들이는 은정이의 입에서 연신 신음소리가 줄이어지더니 불시에 정호의 손을 잡아 언녕 풀어진 가슴 속으로 집어넣어주었다. 앑다란 천 한쪼박에 감싸여진 가슴은 겉보기와 다르게 엄청 풍성했다.  “이만 하자. 여긴 아니여.” 지궂게 매달리는 은정이를 겨우 떼여놓고 자리에 돌아오니 인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카운터로 내려가보니 인혜가 홀 경리인듯한 녀자와 오랜 친구인양 살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이미 결산을 맞추었는지 그들이 문밖에 나서도 뒤쫓아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식당에 들어설 때는 먼저 련락을 받은 듯 한무리 사람들이 마중 나오고 자리를 안내하고 했었다. 먹고나니 배설물밖에 나올게 없어서 배웅도 하지 않나 그런 얼토당토않는 궁리를 하는데 저 앞서 나가던 인혜가 정말로 풀밭에 엉뎅이를 까고 앉는 것이였다.  “이…제부터 노…노상…방뇨하기다 ㅎㅎㅎ”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지 정호도 꿰춤을 끌어내렸다.  “나간다 나간다 앞으로 나간다…” 그런데 한번 앉아버린 인혜가 다시 일어날념을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어느새 잠들어있었다. 두둥실 떠오른 만월에 하얀 엉덩이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정호가 급히 은정이를 불렀다. “얘, 여기 와서 이 친구 좀 일으켜줘.” “싫어요. 나 그런 시다바리할 사람 아니거든요.” 정호는 울며 겨자먹기로 인혜의 치마를 올려 입히고 둘쳐 업었다. 4년간 련애를 했던 녀자라 쑥스러움같은 것은 없었다. 인혜가 다른 사람의 와이프가 되였을망정 두사람의 몸에 잦아든 흔적까지 없어질리 만무했다.  은정이는 택시로 호텔에 가는 내내 웬일인지 물티슈로 입술을 닦고 또 닦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느닷없이 은정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솔직히 관광팀이 해단될 때까지도 정호는 자기의 전화번호를 은정이에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어떻게 내 남를 알았지?” “그건 알바 아니고요. 우리 이제 어떻게 할 셈이예요?”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이야?” “그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였나요? 항주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일도 아니였어요?” “우리 만나.” 두사람은 란카페점에서 조용히 만났다. 그 사이 은정이는 많이 야위여있었다. 은정이는 눈에 확 띄이는 미인은 아니였으나 어딘가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생김새도 어느 구석이나 비례에 딱 맞게 붙어있었다. 인혜는 눈이 기막히게 요염했다. 눈길을 한번 부딪치면 절대 이동불가다. 미연이는 허리가 섹시하다. 그대로 감겨들것 같다. 하지만 은정이는 좋은 곳도 나쁜 곳도 가려낼 방법이 없다. 어디나 평범해보이면서도 또 모두가 남달리 특이했다. “제가 이렇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계속 모른체 했을 거죠?” “글쎄 알은체 해야 할 일이 뭔가 말이야.” “그날 저도 많이 취했지만 어슴푸레 기억은 있어요.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잖아요.” “네가 내 손을 당겨갔어.” “그런 핑계는 말고요. 양심대로 말씀해줘요. 옷우로요 아니면 옷속으로요?” “그게 의미가 다른가? 형식에 따라 내용도 달라지는가.”   “그렇잖구요. 저에게는 엄청난 차이가 있걸랑요.” “시끄러. 사귀면 되잖아.” 은정이는 불시에 눈알이 데꾼해졌다. 그제야 보니 은정이의 눈도 인혜 못지 않게 매력이 있었다. 커다란 눈에 쌍거플을 떠이고 있었다. 특히 그 밑에 깊게 패이는 보조개는 사람을 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호와 은정이가 사귄다는 소문이 어느새 날개를 뻗쳐 친구바닥에 쫙 퍼졌다. 서른 넘은 덜먹총각이 마침내 외토리를 벗어나게 되였다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승원이가 신바람이 나서 야단이였다. 사실 그들둘사이는 미연이가 가운데 끼여있어서 시종 껄끄러웠었다.  정호와 은정이는 가끔 친구들 모임에 초대되여 가서 커플 대접을 받기가 일쑤였다. 은정이의 얼굴에는 하루종일 웃음이 떠날새가 없었다. 물론 정호도 이제는 좀 안정된 생활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시답지 않게 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우선 인혜였다. 멀리 소주에서 시끄러움도 마다하고 며칠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오거나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은정이 정체가 뭐냐? 전번에 왔을 때 보니 별로 임전한 녀자는 아니더라. 배운 바탕이 있냐? 경제적으로 여유있냐? 며느리를 차문하는 시엄마같았다.  그리고 또 한사람이 있었다. 미연이였다. 원래 말수가 적은 미연이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친구들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 정호의 모든 것이 자신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듯 일체 련락을 끊고 잠수를 타버린 것이다.  그러건말건 정호와 은정이의 관계는 일사불란하게 진척되여갔다. 달포전에 정호는 은정이네 집을 방문하여 은정이 부모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호쪽에는 량친이 모두 없는 터여서 은정이 부모의 허락만 받으면 혼사가 가능했다. 은정이 부모는 은정이 본인보다 더 좋아했다. 하루종일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도 과년한 딸을 시집 보내는 게 급선무였던 모양인지 지금 당장 짐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정호는 점잖게 사절했다.  며칠후 정호는 회사 숙소에서 나와 은정이네 아파트가 비스듬히 보이는 단지에 집을 세맡았다. 둘이 살기에 무난한 두칸짜리 아파트였다. 집주인이 조선족이라 집안이 알뜰하게 거두어져 있었다. 벽지만 바꾸면 그대로 입주할 수 있었다.  정호가 은정이를 데리고 장식시장을 돌며 벽지를 고르고 있는데 몇달간 종무소식이던 미연이가 문뜩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당장 만나야겠다는 것이였다. 정호는 은정이를 힐끔 건너다보았다. 은정이는 고도로 민감해진 듯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저도 함께 가요.” 검은 색 점퍼 스커트를 입고 나온 미연이는 여전히 그렇게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구겨진 모습이였다. 높다란 회전의자에 앉아 데이불우의 맥주잔을 달락이던 미연이가 그들이 호프바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도 일어서지 않고 그저 고개만 까닥였다.  “넌 잠간 빠지면 안되겠니?” 미연이가 찬 어조로 은정이에게 내뱉었다.  “언니…” “입 닥쳐!” 미연이가 히스테리적으로 소리 질렀다. 그바람에 정호는 초풍할 지경으로 놀랐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좋아, 자리 안내줄거면 여기서 다 까발리자구.” 미연이가 다시 차분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녀는 립서비스인양 미리 준비한 대사를 한글자한글자 토박토박 내뱉었다.  “저 애 잘 알지. 승원이 회사에 사무직원이야. 너희들 항주 인연도 승원이가 감독한 거였지. 조연은 인혜이구.” “언니…” “나를 너한테서 떼놓으려고 승원이가 기획한 거야. 그런데 너희들이 정말로 맞붙었잖아. 물론 승원이는 당연히 한시름 덜었겠지. 그런데 인혜는 아니였어. 그저 테스트해본 것뿐인데 니 마인드가 그 정도로 지저분할 줄 누가 알았겠어. 후회막급이였을 거야. 너희들 갈라놓으려고 뒤에서 벼라별 짓거리를 다 했어. 아니면 은정이한테 물어봐. 너를 여자들을 돌아가면서 퍼먹는 물방아쯤으로 생각하는 파렴치한으로 묘사했을 거야. 너희들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달이 나서 지금 청도로 날아왔어.” “언니는 저주 받을 거야.” 은정이는 얼굴을 싸쥐고 호프바를 빠져나갔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던 실내에 까닭없이 침묵이 흘렀다. 한낮이라 손님이 적은 원인도 있었지만 배려심 깊은 주인이 그들간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안하여 슬그머니 음악을 꺼버린 것이였다.  “이제 와서 그걸 깨트리는 이유가 뭐야? 왜 꼭 이래야 하지?” 정호는 갑자기 남편 잃은 미망인처럼 거멓게 보이는 미연이를 넋잃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가 장기쪽처럼 남들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참 싫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거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니? 내가 정말로 은정이를 좋아할 수 있잖아. 그렇다면 축복해줘야 하는게 아니야.” “그런 이유로 너의 불량을 위안받으려니 기대하지마.” 미연이의 온몸에 찬기운이 씽씽 감돌았다.  “그래, 니가 바라는대로 승원이한테로 돌아갈게. 어떤 것이 사랑이란 걸 생생하게 보여줄테다. 개념을 라면국물에 말아먹은 자식같으니라구.” 그후로 은정이도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고 문자를 보내도 회답이 없었다. 은정이는아마 많이 난처했을 듯 싶다, 승원이가 감독한 영화에 남주연을 꼬시기 위해 자청하여 녀주연으로 선뜻 나섰다는 사실이 미연이를 통해 남주연한테 알려졌으니 민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정호는 인혜가 진짜로 패키지 여행상품을 보내주리라 생각지 못했다. 아무리 승원이가 부탁했더라도, 그리고 정호 홀몸이 미안했더라도 그렇게 은정이와의 미팅을 만들어줄만큼  흉금 넓은 인혜가 아니였다. 인혜와는 몸을 섞으면서 치렬하게 사랑하고 닭처럼 지궂게도 싸우면서 살아와서 그녀가 눈 한번 굴려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있는 처지였다.  인혜가 결혼해서부터 둘 사이는 안부 인사외에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보고싶다는 생각이 사무칠 때가 많았지만 정작 할 말은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인혜가 선뜻 패키지 여행상품을 보내준 것이다. 정호도 인혜가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깊게 사랑했었다.  소주 졸정원에서 정호와 은정이가 팔짱 끼고 나오는 장면을 보고 인혜가 눈썹이 꼿꼿이 살아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연이였던 인혜로서도 단 하루만에 살을 맞댈 지경으로 가까워진 그들이 쉽게 접수되지 않았던 모양이였다.  그렇다면 질투때문에 소주에서 항주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그때까지 외롭게 홀로 사는 정호가 안스러워 나름 멋진 시나리오를 구상했으면 그대로 달리도록 내버려뒀어야 하는게 아닌가. 정호가 새로운 역전을 향해 달리도록 밀어줬어야 하지 않는가.  미연이도 그랬다. 정호의 마음이 자신한테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새차를 막차로 밀어붙힐 까닭이 뭐란 말인가. 처음부터 차가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정호를 말리지도 않아놓고 기어코 사랑이란 미명으로 막차로 정거시킨 그 심보야말로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그 구역질나는 미연이가 엊그제 뜻하지 않게 위챗문자를 보내와 은정이가 곧 한국으로 유학을 떠날 것이라고 알려온 것이다. 아무리 잘못을 구하고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다면서 은정이를 붙잡아두지 않으면 정말로 막차는 떠난다고 경고삼아 부연했다.  물론 승원이의 부탁을 받고 전하는 것이라는 핑계를 댔었다. 그리고 승원이와 결혼하게 된다고 덧붙혀 통보했다.  “알았어.” 정호는 한마디만 대꾸했다. 그리고 긴 시간을 고민했다. 은정이와는 오래 사귄 것도 별로 없었는데 석별앞에서 살이 에이는 아픔이 있었다. 사랑은 시간이 문제가 아닌 거 같았다.  말려야 한다. 잡아야 한다. 막차의 뒤모습을 쳐다보는 바보가 되여서는 안된다.   정호는자기때문에 한국행을 택한 은정이를 오늘은 기어코 만나서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29번 뻐스는 점차 식어가는 더위를 뚫고 갑자기 속력을 내여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앞으로 은정이네 아파트가 륜관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호는 그 역에서 내리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무작정 은정이네 집으로 찾아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은정이에게 사실은 자기가 승원이에게 감독을 위임했던 장본인이라고 고백할 생각이였다. 승원이네 회사를 들락거리면서 한눈에 은정이를 발견하고 특별히 부탁해서 각색한 시나리오라고 밝힐 것이다.                                      2018년 11월   
28    개미 투 댓글:  조회:890  추천:0  2018-09-10
단편소설   개미 투   장학규    “교육국 장처장이랑 미팅을 잡았어. 어렵게 만든 자리니까 다섯시까지 꼭 와야 해.”   문걸이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창학이는 마누라와 함께 한창 이사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을 한참 지난 시점이였지만 그들 부부는 먼지를 뒤집어쓴채 배를 촐촐 굶으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였다. “?”     창학이는 퀭해진 눈으로 안해를 바라보았다. 스마트폰 스피커를 열어둔 상태로 통화했기에 안해도 통화 내역을 다 들은 것이다. 안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였다. “알았어. 제시간에 도착할게.”   그들은 달포전에 살던 집을 팔아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골동네에서 경이를 공부시킬 자신이 없어서였다. 아파트가 속한 학교에 헛일삼아 가보았다가 창학이는 그만 초풍할 지경으로 놀라고 말았다. 단층집 십수채가 촘촘히 들어앉은 가운데 반급마다 6~70명씩 꽉 들어차서 벌집처럼 왕왕거렸었다. 주변에 하루가 멀다하게 일어서는 고층빌딩만 아니였어도 이게 정말 청도라는 동네에 있는 학교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날로 창학이는 조금도 주저없이 아파트를 복덕방에 내걸었다. 그리고 롱담같이 며칠도 안되여 팔려나갔다. “벌써 그 집을 기다린 사람이 있어요. 조손 삼대가 사는 가정인데 방이 세개이상인 큰집을 내놓으라고 해서 애먹었어요.” 태평양이라는 굉장한 이름의 복덕방 주인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요새는 둘쨰를 마음대로 낳게 하는 바람에 큰집이 대세라고 주절주절거렸다. 그리고 사나흘도 되지 않아 주인이 나졌으니 빨리 복덕방으로 나오라고 재촉했다.   진씨 성을 가진 구매자도 외지인이였다. 애가 둘이 딸린 젊은 부부였는데 자기네는 시내에서 집 사서 애들을 공부시킬 게제가 못된다면서 마치도 집 파는 창학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듯 두손을 애매하게 비벼대기도 했다. 그러는 그들을 보면서 창학이는 까닭없이 우월감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창학이는 자기 주변에서 대형 쓰나미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좀 심상치 않긴 했었다. 아파트 매매 계약에 따라 선불금 30프로를 받은 창학이는 닷새만에 이번에는 마야라는 다른 이름의 복덕방을 통해 중점중학교가 위치한 부근의 한 작은 아파트를 계약했다. 원래 살던 집보다 면적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지은지도 근 20년이 되는 낡은 아파트였으나 학교를 끼고 있다는 리유로 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그나마 큰 아파트를 판 덕분에 위치 좋은 작은 아파트의 선불금은 그런대로 맞출 수 있었다.    문제는 재래시장에서 배추를 사고파는 것도 아닌데 복덕방에 사람이 개미처럼 바글바글거린다는 점이였다. 이게 웬 시추에이션이지 하면서도 세상사에 많이 무감각해진 창학이는 심드렁하게 자기 할 수속에만 전념했다. 집 판 잔금을 받기로 한 시간대를 맞추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한달반내에 새집 대금을 일시불하기로 약속했다.   새집에서 남은 대출을 상환하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어느덧 두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더 지나 앞선 태평양복덕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월 대보름 휴가때문에 진씨의 새 신분증이 며칠 늦게 나오게 된다는 것이였다. 진씨의 신분증이 유효기를 넘겨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 창학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예상보다 열흘쯤 늦어질 거 같다고 했다. 신분증이 도착하면 바로 은행대출을 신청하면 보름내에 돈이 나올 거라고 아주 은행이 자기가 꾸린 것처럼 수헐하게 내뱉었다. “아주 꼴깝을 떠세요.” 전화를 닫고 창학이가 중얼거리는데 어느새 그 소리를 들은 안해가 오래간만에 얼굴을 풀고 맞장구를 쳤다. “글쎄요. 지랄도 잔치처럼 하네요 호호” 딸애의 진학이 큰 골치거리였던 안해는 학군내에 집을 샀다는 것만으로도 만시름을 풀 놓는 눈치였다.   얼마후면 무난하다던 진씨의 신분증이 아직 나오지 않은 대신 새집의 대출이 먼저 풀렸다. 일이 이대로 진행된다면 자칫 량쪽의 수속이 동시에 마무리될듯 싶었다. 앞뒤로 뛰여다니기 귀찮겠다고 투덜대고 있는데 마침 새집을 맡은 마야복덕방에서 다급히 호출했다. “지금 당장 모든 서류를 빠짐없이 챙겨가지고 오세요.”   초봄인지라 오후 다섯시가 넘기 바쁘게 날이 어두워졌다. 퇴근을 서두를 때에 사람을 부르는 것은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징조였다. 창학이네 부부는 서류봉투를 가지고 황황히 집문을 나섰다. “내부소식인데요. 새로운 아파트 구매제한정책이 내일 저녁 열두시부터 발효한다고 합니다. 외래인은 어떤 경우에도 집 두채를 구매할 수 없게 됩니다.” 덜 밉게 생긴 복덕방 매니저 아가씨가 불안한 목소리로 급촉하게 말했다. “저희들은 집이 한채인데요.” “아니, 저쪽 집 아직 명의 이전이 되지 않았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결국 이 집이 두번쨰 집이 되는 셈이예요. 내일이 지나면 이 집을 살 수가 없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늦은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복덕방에는 서류봉투를 들고 달려오는 고객들이 그치지 않았다. 창학이네 부부는 불안한 마음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매니저가 시키는대로 여기저기에 손도장을 찍고 싸인했다.   흔치는 않지만 창학이는 문뜩문뜩 자신이 거리바닥에 내몰린 개미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여기 치이고 저기 밀리면서 간신히 생존해나가는 미물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안해의 상태가 더 말이 아니였다. 지난해부터 반쪽이 된 얼굴이 어느새 시꺼멓게 죽어있었다. 창학이는 조이면 당장 부러질 거 같은 안해의 처량한 어깨를 가볍게 쓸며 어르듯 말했다. “여보, 우리 우유 먹고 좀만 버티자.” 힘내자는 말이였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맥빠진 소리였다.   이날따라 하늘에서는 때아닌 비방울을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가로수들은 바다바람에 앙상한 가지를 흔들며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래 심성이 예민한 안해는 양꼬치를 먹고 들어가자는 창학이의 제의를 무시하고 한사코 호프집을 찾아들어가더니 맥주 두잔에 그만 녹초가 되여버렸다. “우리 둘… 말이예요. 똥과 설사가 합친… 격이예요. 묽은~ 똥이잖아요.” 집에 돌아와서도 횡설수설하는 안해를 겨우 다독여 눕히고 긴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다싶이 한 창학이는 날이 밝아오기 바쁘게 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씨는 자기가 아직도 고향인 하남성에 있다고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런데 무슨 신분증 수속이 그렇게 오래 걸려? 임시신분증은 이틑날로 나오는데 지금 나를 엿먹이는거요? 당신까지 사람을 업신 여기는 거요?”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나이가 명함이라고 창학이는 나이차가 한돌개는 되는 진씨에게 말이 나가는대로 내뱉었다. 그러자 허우대가 멀쩡한 진씨가 생각밖에 비굴하게 죽어들어갔다. “형님, 미안합니다. 사실은 그 사이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급히 출장 다녀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이미 온바하곤 진짜 신분증을 만들어가야잖아요. 곧 나오게 됩니다. 며칠만 기다리십시요.”   이날 오후 느즈막에 관방 뉴스에 새로 제정된 아파트구매제한정책이 공포되였다. 신통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를 복덕방의 “내부소식”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당지 호적을 가진 시민 가정은 두채까지 가능하나 비호적 주민은 1채로 제한했다. 그것도 연속 12개월 개인소득납세증명이나 사회보헙납부증명을 제출해야 했다.   창학이는 속이 철렁했다. 10여년간 줄창 사회보험을 납부해오긴 했으나 털면 먼지가 나지 않는 법이 없다고 또 무슨 건덕지가 잡힐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창학이는 안해가 이 소식을 알면 또다시 쇼크를 받을가봐 입을 함구하고 크게 숨도 내쉬지 않았다.   그러나 안해는 어느새 벌써 알고 있는 눈치였다. 평시의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과 달리 코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창학이는 그만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당신 어제 맥주 둬고뿌하더니 더위까지 먹은겨? 아직 날씨가 이른거 아니오. 삼계탕 사다드릴가?” 안해는 그를 흘끔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계속 우려먹는 사골곰탕이잖아요. 금방 풀릴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조건에도 부합되니 괜한 신경 쓰지 말아요.” “나 그럼 시름놓고 공원 가서 장기나 둘가보다.” 창학이는 그러는 안해가 오히려 고마워 간만에 빈정거리는 어투로 대꾸했다. 따로 국밥이라고 딸애의 중학교 진학문제가 대두해서부터 안해와 한 채널에 들어보지 않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뭐 그러세요.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맞서봤자 짓이겨질 일밖에 있겠어요. 장기 두던 장기 바치던 마음대로 하세요.” 그날 마야복덕방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틑날도 역시 꿩구워먹은 자리였다. 사흘이 되여 창학이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거의 도달할 무렵 뜻하지 않게 진씨가 새 신분증을 가져왔으니 복덕방에서 만나 명의 이전 수속을 하러 가자고 전화가 왔다. “우리도 일 있다고 며칠 끌자구요.” 안해는 창학이가 진씨라도 되는듯 째려지게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지금 그 말씀 웃기시려고 하신 겁니까? 당장 5월이면 애 중학교 신청을 해야 하오. 어디 남들처럼 배포유할세 말이지.”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여직껏 속을 태운 걸 생각하면 일년정도 속태워줘도 과할 것 같지 않아요.” “그건 넌센스야. 얼른 준비하고 가보기오.” “정말이예요. 우리가 명의 이전을 해주면 이 집은 진씨거가 되잖아요. 그런데 저쪽 집이 지금처럼 계속 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 한데 나앉아야 하는게 아니예요?”   창학이는 불시에 이마를 탁 쳤다. 옳거니, 맞거니. 왜 그 생각은 못했을가 싶었다. 악수 뒤끝에 비수라고 진씨가 일단 잔금을 내고 명의 이전을 마치면 그날로 집을 내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였다. 창학이는 냉큼 핸드폰을 꺼내 새집을 주선한 마야복덕방을 연결했다. 지금껏 그렇게 민첩한 동작을 해본적이 없었다. 그들을 전문 책임진듯 전번날 만났던 덜미운 매니저 아가씨에게로 전화가 이어졌다. 매니저는 창학이의 말을 듣더니 다분히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서류는 그날로 부동산교역센터에 제출되였지만 관련 정책에 따라 잠시 스톱된 상태라고 설명한 후 다시 사회보험을 납부했냐를 확인하더니 그러면 문제 없을 거 같으니 저쪽 요구대로 진행하라고 말했다. 원래 설겆이 많이 하는 사람이 그릇을 자주 깨는 법이라 매니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니 어떡할 방법이 나지지 않았다. 하늘에 운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복장공장을 꾸리는 진씨는 납세증명만 한묶음 들고 왔었다. 그것을 본 은행 경리는 입을 딱 벌리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열흘 정도면 대출이 내려올 거예요.” 은행 경리는 복덕방 주인과 많이 가까운 듯 서로 눈웃음을 나누었다. 진씨는 히로뽕을 주사 맞은듯 금세 흥분해서 교복만 5년여를 만들어왔다면서 청도에서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자기가 만든 옷을 안 입어본 애가 없을거라고 희떠운 소리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대출 수속을 마치고 복덕방 주인이 이참에 부동산교역센터에 가서 명의 이전을 하자는 걸 창학이의 안해가 잔금을 아직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명의 이전을 하냐고 단마디로 거절해버렸다. 그리고 얼마후 대출이 예정대로 내려왔고 창학이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명의 이전 수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제 일이였다. 집을 일주일내로 내주기로 했지만 저쪽 집은 여직 소식이 없는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바람으로 막무가내로 이사짐부터 짜면서 부부는 오래동안 토론해온 화제를 또다시 꺼내면서 갑론을박했다. “아예 이 동네에서 대수 몇달 살 집을 구할가요?” “그럼 학교는 어떻게 붙이구?”   “당신 지금 운전 배우지 않아요. 면허 따내면 차로 데려다주면 되잖아요.”   “누가 데려다주는 일을 말하는 거요? 여기서 살아도 학교에 붙을 수 있었다면 왜 집을 팔았겠소. 머리만 잔뜩 길어가지고 우우” 창학이는 운전면허 얘기만 나오면 까닭없이 울화가 치밀군 한다. 자가용을 갖춘지는 여러해가 되였다. 시내 변두리에서 살다보니 출퇴근이 문제여서 차를 사기는 했어도 창학이는 사업상 관계로 매일 술상이 생겨 감히 차를 몰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안해가 면허를 받고 여직껏 몰고 다녔었다. 아마도 새로운 부동산정책이 곧 나올거라는 소식을 들은 이틑날일 것이다. 그랬다. 맥주 두 컵에 만취가 되였던 안해가 아침에 일어나자바람으로 창학이를 끌고 자동차운전학원으로 달려갔다. “이제부터 애를 학교까지 데려가고 데려올지도 모르니 당신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말고 운전 배워요.” 하는 생각이 언제나 액션수준이여서 그렇겠거니 하고 창학이는 안해가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학원 비용이 저그만치 5천원이 넘었다. 창학이의 한달 로임에 맞먹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양씨 성을 가진 코치라는 량반이였다. 생긴 것도 우락부락한데다가 텁기도 말이 아니였다. 마치도 십년 묵은 빚을 갚지 않았다는듯이 언제봐도 소에게 물린 상통을 하고 있었다. 안해의 스승이기도 한 양코치는 첫 며칠은 아주 살뜰하게 창학이를 대해주었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안해는 떠나면서 창학이 몰래 양코치에게 2백원을 질러주었었다. 그런데 그 약발이 겨우 3일밖에 가지 않았다. 첫 필기시험이 끝나서부터 양코치는 배워주라는 차는 고스란히 세워두고 학원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일삼았다. 항상 포인트를 못잡고 설왕설래하는 특기가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얘기를 한데 묶어놓으면 딱 한글자, 즉 돈이였다. 어느 코치네 학원은 2백원 내고 시험장을 두바퀴를 돌면서 연습한 것이 주효하여 시험에 단번에 넘어갔다느니, 어느 친구는 2백원을 옆자리에 앉은 시험관에게 질러준 덕분에 시험내내 그 코치의 암시를 받으면서 겨우 넘어갔다느니 하는 말들이였다. 모두들 그 말뜻을 알아듣고 슬그머니 양코치의 주머니에 마니를 질러주었던 모양이였다. 그러나 창학이만은 아니였다. 안해가 먼저 상납한 것도 있지만 사실 운전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집에 차가 있으면서부터 틈날 때마다 운전해온 터여서 웬간한 주차나 후진에는 5~6년 운전경험을 가진 안해보다도 나았다. 그러자 양코치의 심술이 노골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차를 연습해도 웬간해서는 창학이를 부르지 않았고 어쩌다 오르게 해도 소태 씹은듯 쓰거운 표정으로 노려보군 했다. 좀만 실수를 하거나 자기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바로 고성이 터지군 했다. “너 돼지니? 그 미련한 머리 가지고 무슨 차운전을 배운다고? 집 돌아가서 똥바지 벗고 자던가.” 그래도 실기시험을 창학이는 무난하게 넘어갔다. 다섯명이 가서 두명만 합격된 것이다. 양코치는 더욱 야료를 부렸다. “너 잘하잖아. 배울 필요 없어. 절로 가서 시험치라구.” 그날부터 지금까지 창학이는 한번도 운전대를 잡아보지 못했다. 여러가지 일이 한데 겹쳐서 정신없이 돌아친 원인도 있었지만 양코치가 전혀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동차운전학원은 그게 률이였다. 코치가 어느날 오라고 해야 가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동영상을 보면서 배워요 까짓꺼. 기술은 문제 아니잖아요. 주행시험은 세부적인 순서문제이니 인차 배워낼 거예요.” “그럼 학원비는 헛판게 아니요. 어떻게 해서라도 그넘의 양코치인지 양꼬치인지 하는 작자를 이겨야지. 하다못해 본전이라도 뽑아야 해.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을거야.” “됐어요. 탱크앞에서 돌도끼 휘두르는 격이예요. 우리 경이 일에나 신경 써요.” “저녁에 교육국 장처장이랑은 어쩔가? ” 가까운 친구인 문걸이앞에서 경이의 진학문제를 두고 속탄 얘기를 자주 했었다. 문걸이가 그걸 기억해두고 있다가 용케 장처장을 모셨다는 걸 창학이는 잘 알고 있었다. “가요. 애가 여직껏 타온 모든 증서를 다 가지고 가서 우리 경이가 얼마나 훌륭한 애인가를 알립시다.” 부부가 약속 장소인 해란강민속궁에 가니 거기에는 벌써 문걸이와 장처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일찍 떠났는데도 늦어서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미안해 어쩔줄 모르는 창학이에 비해 장처장은 문걸이가 미리 푹 고아놓은때문인지 오히려 제쪽에서 손님을 맞이하듯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어서 여기 앉아요. 이제보니 알만한 친구네요.” 창학이도 웬지 장처장이 낯익었지만 구경 어디서 보았던지는 아무리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도 많이 본듯한 모습인데요.” “왜 벌써 잊었어요. 접때 벽산학교 새청사 준공식에서 만났었잖아요. 저녁에 술도 함께 먹고 그랬었는데요. 수록원에 집 있는데 그걸 팔고 시내로 들어오련다고…” “아, 처남이 역시 수록원에 세집 들어있다고 그랬던가요?” “맞아요. 어때요? 집 팔고 샀어요?”   “네, 사긴 샀는데요. “ 창학이는 잘되지 않는 중국말에 손짓발짓까지 해가면서 여의치 못한 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장처장은 용케도 말 한마디 삐치지 않고 그대로 다 들어주었다. “그러면 일단 새집주인과 세입계약을 작성하십시오. 지금은 말입니다. 학교 주변에 세집을 얻어 살아도 입학이 가능합니다. 물론 다섯번째 순서로 명액이 남아야 되겠지만 역시 기회는 있습니다.” 그 정도의 정보는 창학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외래인이지만 학군내에 자기 집을 가진 네번째 순서의 애들도 겨우 턱걸이할지 말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세집에 사는 다섯번쨰 순서의 애들은 거의 도태되는 운명이란 것은 비밀도 아니였다. 창학이는 대화 와중에도 자꾸 등허리를 지르는 안해의 성화에 못이겨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를 식탁우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경이가 소학교 6년간 받은 3호학생 증서 12장과 전국성적인 콩클에서 받은 작문상, 성악상장들이였다. 그런데 창학이가 미처 설명도 하기 전에 장처장은 피끗 곁눈질해보더니 툭 잘라 말했다. “걷어넣으세요. 그런 증서 꼬물도 소용없어요. 학교에서는 호적과 집, 납세와 사회보험 여부 그런것만 본답니다. 우리 술이나 먹어요.” 창학이는 술 먹는 내내 허파에서 바람이 새여나가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장처장이 어쩌면 연기를 하는 거 같기도 하고 몽니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슬그머니 문걸이에게 저 자식 돈 좀 질러줘야 하는게 아니야 하고 묻는데 어느새 조선말을 꽤나 익힌 장처장이 귀동냥해 듣고서 대번에 손사래를 치더니 목이 잘려나가는 흉내를 냈다. 더이상 어떻게 말을 붙여볼 수 없었다. 술상은 멋없이 인차 끝났다. 더이상 미룰 수 없었다. 4월에 막 접어들었고 이제 5월부터는 인터넷 신청을 해야 했다. 들리는 소문에는 세입계약도 두달전이여야 유효하다고 한다. 이틑날 창학이네 부부는 아침 일찍 새집으로 향했다. 장처장이 별방법이 없다면 그들로서는 더 속수무책일수밖에 없었다. 길고 짜른 건 대봐야 안다고 우선 장처장의 충고대로 세입계약서라도 만들고 볼 판이였다. 그런데 새집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응대가 없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과부로 홀로 사는 녀주인의 잠꼬대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 새집 사서 나왔어요. 그 집 비워두었으니 급하면 먼저 들어도 돼요.” 창학이는 하마트면 하늘로 솟구칠번 했다. 세상에 어디 이런 떡이 있나 싶었다.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온셈이였다. 창학이는 흥분을 참느라고 무지 애썼다. 녀주인은 한시간 후에 복덕방에서 집열쇠를 넘겨주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들이 복덕방에 도착했을 때는 녀주인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들을 맞아준 것은 여전히 그 덜미운 매니저 아가씨였다. “마침 잘 오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드리려고 했어요.” “웬일이죠?”   “집문제가 해결되였어요. 새정책을 출범하자마자 즉시 발효되다보니 합리성이 없어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가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새 정책이 발효되기 전에 이미 부동산교역센터에 교부된 사안들은 원 정책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대요.” 뒤미처 들어온 녀주인도 그 말을 듣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창학이는 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멀쩡한 자기 집을 가지고 세입계약을 맺으려 했다가 열쇠를 받으려 복덕방에 가고 다시 거기서 매니저를 따라 부동산교역센터에 가서 일사분란하게 수속을 마쳤다. 나중 은행에 가서 잔금을 녀주인에게 이체하고보니 제법 길어진 봄날도 많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5월에 창학이는 인터넷으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다행히 새로 제작된 부동산권리증을 가진 덕분에 네번쨰 순서에 자리잡게 되여 그나마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제는 하늘에 운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차문해보니 네번째 순서의 아이들까지는 그래도 입학이 문제 없다고 했다. 이달에 창학이에게 또 한가지 호소식이 있었다. 호구포인트제에 창학이가 합격된 것이다. 지난해 1점에 목맸던데 비해 올해는 2점이 넘쳐난 것이다. 나이 점수 1점이 깎인대신 사회보험 1년이 늘어나면서 3점이 가산되였고 거기에 헌혈 1점이 추가되였던 것이다. 여전히 지난해의 그 메주같이 생긴 처녀가 서류를 접수했고 먼저번과 완연히 다른 깎듯한 태도로 묻는 말에 차근차근 대답해주었다. 바로 이 처녀가 기자증, 작가증, 수상증서들을 쓰레기인듯 테이블우에 던지던 그 당사자였다. “이런 건 쓸데 없어요. 다른 자격증은 없어요? 용접공 자격증이라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전기수리공 자격증이라든가 하는 거 말이예요.” 그때 느꼈던 모멸감을 창학이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하마트면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용접기술을 배울러 갈번 했었다. “집이 아무리 커도 중고주택이면 포인트 얼마 챙기지 못해요. 그집 팔고 새아파트 사는 방법도 있어요.” 그렇게 시까스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곰상해져서 아닌 아양까지 떨어주었다. “점수선을 넘었어요. 미리 축하해요.” 그러나 창학이는 심드렁했다. 경이의 중학교 입학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마당에 굳이 호적을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해놓읍시다요. 또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지 누가 알아요. 호적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요.” 안해가 창학이보다 더 적극적이였다. 몇년간 호적 없는 서려움을 너무 많이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수속이 시작되였고 7월 초순에 희소식 두개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심사를 거쳐 호적을 올리는데 동의한다는 통지와 심사를 거쳐 경이의 중학교 입학이 허락되였음을 알리는 통지였다. 창학이네 부부는 처음으로 퍼런 대낮에 서로 부둥켜 안고 미친듯이 키스를 하고 또 했다. 그런데 호적 등록을 하려고 파출소에 갔다가 창학이는 뜻하지 않게 운전학원의 양코치를 만났다. 알고보니 그도 외래인이였다. 이번에 어렵사리 포인트 적립이 되여 20년만에 청도시민이 되였다면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창학이를 괴롭혔던 자신을 잊고 오랜 친구를 대하듯 창학이를 끌어안기도 했다. “왜 차 배우러 나오지 않지? 새로 실시되는 주행시험이 좀 까다롭긴 해도 당신처럼 운전경력이 있는 사람은 요령만 터득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다음주부터 나오라구.” 며칠 후의 학교입학신청확인현장에서는 우연하게 진씨와 장처장을 만났다. 그들은 창학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저들끼리 웃고 지껄이면서 교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떄서야 창학이는 진씨의 큰아들애가 경이와 비슷하게 컸었다는 현실이 돌이켜졌다. “우리 처남이 수록원에 세집을 잡고 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창학이가 자기 사는 아파트를 말하니 장처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벌써 그 집을 기다린 사람이 있어요…” 태평양 복덕방의 말 많은 매니저의 한 첫마디가 이랬었다. 그렇다면 저 둘이 그 처남매부간이였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요지경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교무실의 열려진 문으로 학교 책임자인듯한 번대머리 남자가 허리를 굽석이면서 장처장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학부모들 뒤를 따라 확인 수속을 하러 교실로 한발작한발작씩 움직이면서 창학이는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만 들었다. 가슴이 무엇엔가 짓눌려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 미칠 것만 같았다. 조건에 부합되여 새로 입학하게 되는 학생이 저그만치 850명이나 된다고 한다.  늦게 온 학부형들은 관리인들에 의해 쫓겨나고 있었다. “이 부분까지예요. 나머지 분들은 내일 오세요. “ 한여름 물쿠는 날씨로 인해 복도까지 열기가 뜨거웠다. 차례를 기다리며 손으로 쉴새 없이 흐르는 땀을 훔치던 창학이의 눈에 신문 한장이 비집고 들어왔다. 새로 온 신문인듯 아까 관리인이 앉았던 책상우에 놓여져 있었다. 그건 이 동네에서 발행량이 가장 많은 신문인 반도도시보였다. 관리인은 꾸역꾸역 계속 몰려오는 학부형들을 말리느라고 찌는듯 무더운 밖에 나가 있었다. 창학이는 궁금해서보다 심심해서 그리고 부채삼아 바람이라도 일궈볼려고 신문을 집어들었다. 마침 커다란 톱기사 제목이 유표하게 확 안겨왔다. 테마당답게 표제가 석줄로 되여있었고 신문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호적 정책 출범! 조건 대폭 완화 간소화 대출, 신구 여부와 관계없이 90평이상 아파트를 구입했을 경우 호적 취득 가능  
27    왕로얼 별전 댓글:  조회:852  추천:3  2017-06-07
단편소설  왕로얼 별전 장학규   로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왕거장에 살고 있는 왕로얼이 위챗으로 청첩장을 보내왔다. 마누라가 둘째를 임신했다는것이다.  “모두들 큰 경사라면서 한턱 내라고 해서 방법없이 술상을 마련했어. 바쁘면 오지 않아도 돼.” 왕로얼을 알아서 꼭 20년만에 스물번째로 받는 청첩이였다. 왕로얼은 산동사내답게 번마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대범하게 말했었다. 그리고 꼭 꼬리를 달았었다.  “일 없으면 오든가.”  “그런데 나이가 얼마인데 또 애를 낳는다는거야? 딸애가 작년에 결혼했던가?” “링링이도 애를 품었어. 모녀가 같이 애 낳게 생겼단말이지. 겹경사가 났으니 한턱 쏠수밖에.” 왕로얼은 나의 로골적인 빈정거림에도 개의치 않고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왕로얼을 알기는 갓 청도에 왔을때의 일이다. 20년전의 일인데 왕로얼은 내가 세집을 맡은 집주인이였다.  청도에 와서 내가 처음 입사한 회사는 슬리퍼를 만들어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는 한국 제조업체였다. 재단, 봉제, 접착, 검사, 창고 순서로 어셈블리라인으로 이루어진 회사인데 규모가 꽤나 컸다.  나는 운좋게도 여직원 수백명이 미싱기에 다닥다닥 붙어서 해종일 드르륵 드르륵 신발을 박는 봉제작업장에 배치받았다.  출근하다보면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단조로움과 지루함이 동반하게 된다. 재단 현장에서는 한달에 한번 꼴로 꼭 사고가 난다고 선배들이 가만히 알려주었다. 조금만 신경을 다른데로 돌려도 재단기는 원단을 자르는게 아니라 사람손을 썩둑 해버린다고 소름 끼치는 소리로 귀띰했다. 창고에서 무료한김에 잠들었다가 사장한테 발각되여 쫓겨난 친구도 여럿이 되였다. 접착 현장은 그대로 살인적인 냄새로 진동했고 제품 마무리 단계인 검사 작업장은 해종일 긴장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넌 보기는 안 그렇는데 참 복있는 친구야.” 나보다 한달 먼저 입사하여 재단 일을 보는 화룡에서 온 선배가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나는 내가 복있는 사람인줄 전혀 모르고 살아왔었다. 선배의 말을 듣고서도 그저 덕담을 해주는것으로 생각했을뿐이였다. 그런데 세집을 찾으러 나가면서 정말 내가 복을 가진 사람이 맞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좋게 왕로얼을 만난것이다.  화학약품을 쓰는 관계로 우리회사는 청도 시내서 꽤나 멀리 떨어진 왕거장에 자리잡았다. 그때만 해도 청도는 매일이다싶이 한국기업이 무더기로 쓸어들고 있었지만 왕거장은 상대적으로 구석진 고장이라 고작 세개 기업만 자리를 틀었을뿐이였다. 우리회사가 그중 컸는데 직원이 500여명이 되였다.  산동사람들은 듣던 말대로 정말 부지런했다. 거의 집집마다 공장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휴일에는 농사일을 하면서 억척스레 살아가고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예전에는 못살아서 관동으로 떠났을가고 갸우뚱했었는데 정작 그들의 농작지란것을 보고 경악했다. 세상에 그걸 어떻게 경작지라고 말할수 있단말인가?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새노란데다가 풀기 하나없이 푸실푸실 갈라졌다. 그것도 한집에 차례진 면적이 1.5무 아니면 고작 2무 정도였다. 거기다 땅콩 심고 고구마 심고 오이 심고 가지 심고 고추 심고 별의별거 안 심는게 없었다.  그 척박한 땅을 대처하는 그들만의 비법이 따로 있었다. 그 비결은 화장실에 있었다. 집집마다의 화장실에는 배설물을 받아주는 큰독이 묻혀있었다. 그것들을 모아두었다가 요긴하게 써먹는것이였다. 물론 이것은 후에 할 이야기이다.  여건이 여건이였던만큼 왕거장 사람들은 일찍부터 다종경영을 하고있었다. 밭농사, 바다고기잡이는 물론 회사 출근에 거리 장사에 닥치는대로 돈이 되는 일이면 다했다. 특히 집집마다 세집을 내고있었다. 마을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외지인이 갑작스레 늘어난것이다.  나도 회사에 직원숙사가 따로 없어 세집을 찾아야 했다. 하여 첫날 퇴근하자마자 마을로 내려갔다. 집집마다의 벽에 나붙은 임대광고를 훓어보다가 아무렇게나 찾아들어간 집이 바로 왕로얼네 집이였다. 출입문을 떼고 들어서니 주방 겸 식당이였고 량쪽으로 사랑채가 달린 구조였다.  마침 왕로얼네는 손님이 와서 일찍한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였다. 내 나이또래인 왕로얼은 산동사람답지 않게 왜소한 체구를 가졌었지만 성격은 역시 호방하고 시원했다.  “세집 찾으러 왔습니다.” 내가 미안해 두손을 비비며 겨우 내뱉는데 출입문을 등지고 앉았던 왕로얼이 냉큼 돌아보며 손짓했다. “일단 한잔하고 봅세. 들어오면 모두 손님이라구. 마침 잘 왔어. 한잔 해.” 초봄이라지만 한쪽 구석에 난로가 있어 집안은 별로 춥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왕로얼은 솜옷에 국방색 군용외투까지 걸치고있었다. “임대 놓는다해서 들어왔는데…” “좋아좋아, 그건 문제 아니야. 술 먹구 취하면 저 서쪽방에 들어가 자면 된다구. 어서 앉아.” 왕로얼은 나의 해석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옆에 눌러앉혔다.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오늘 운수 좋게 큰 우럭을 낚았어. 이거 우럭찜이니까 한번 맛 보시지?” 왕로얼은 생면부지인 나와 몇십년은 친한듯 어깨를 다독이더니 술잔을 넘겨왔다. 나는 마지못해 한잔을 받아 마시고 다시 세집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왕로얼이 고기 한점을 집어 나의 입가에 가져왔다. 내가 자리에 앉았을무렵 우럭은 이미 반나마 먹은 상태였었다. 한모금 집어보니 다른 고기와는 달리 쫀득하고 맛이 독특했다. 국물이 멀건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가. 내 성깔같았으면 고추가루를 벌겋게 뿌리고 숟가락으로 국과 고기를 듬뿍 떠서 술 한잔과 함께 넘기면 제법 좋을거 같았다.  “친구야, 이 술은 꼭 다 먹어야 돼. 여기 법이거든. 주배 석잔, 부배 석잔은 기본이야.” 왕로얼은 코물을 벌렁거리면서 술상에서 자기가 주인이고 마누라는 부주인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자기네 두사람이 붓는 여섯잔 술을 무조건 마셔줘야 하는게 례절이란다.  “고기는 그렇게 헤집으면 안돼. 여기 바다가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때 절대 번지지를 않아요. 고기가 배처럼 생겼거든. 고기를 뒤집으면 배가 번져진다는 말과 같단 말이야.” 날씨도 안 더운데 괜히 머리가 어떻게 헤까닥해졌지 않나 의심될 지경으로 왕로얼은 시도때도 없이 나의 실수를 교정해주었지만 왠지 기분이 잡쳐지지는 않았다. 넘쳐나는 열정이 에때움을 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한잔두잔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당겨서 나절로 찾아먹으면서 어지간히 취해버렸다.  이틑날 퇴근하고 트렁크를 끌고 다시 찾아가니 왕로얼은 서쪽 방을 벌써 비워두고있었다. 내눈에는 중학생 같아 보이는 왕로얼의 마누라가 세살난 딸애를 앞세우고 이부자리를 갖다 펴주는 사이 나는 왕로얼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임대비 얼마 주면 돼?” “좋아좋아.” 왕로얼은 너스레만 떨었다.  “얼마 받을거냐고 묻는데 좋아가 뭐니?” “좋아좋아, 괜찮다니까.” 그 “좋아좋아”가 한달후에도 이어졌다. 첫달 로임을 받고 집세 얘기를 꺼내니 왕로얼이 또다시 넉살 좋게 “좋아좋아”하는게 아닌가? 자식이 꽈배기를 쳐드신것도 아닌데 밸밸 태극권을 꼬는 모양이 꽤나 유치찬란했다. 나는 미리 회사 동료들한테 물어서 이 동네 세집 시세를 알고있었다. 하여 800원 월급에서 200원을 꺼내 왕로얼의 딸 링링의 조그마한 손에 쥐여주었다.  “엄마를 갖다줘 응?” 저녁에 왕로얼이 채소 두가지를 볶았다. 하나는 땅콩 볶음이고 다른 한가지는 매운 맛조개였다. 바지락에 말린 붉은 고추를 썰어서 볶아내는 매운 맛조개는 청도 생맥주와 궁합이 아주 맞았다. 그사이 나는 이삼일에 한번꼴로 비닐봉지에 생맥주를 받아와서 왕로얼하고 마셨기에 왕로얼이 채소를 한다고 처음 왔을 때처럼 미안해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우리 친구하기로 했잖아?” 왕로얼이 맥주를 부어주며 말했다.  “그런데?” “친구란게 써먹자구 있는게 아니야?” “그렇지” “슬리퍼 좀 갖다주라마. 마누라가 욕심내서 말이야.” “아…그거 말이야…알다싶이 난 봉제팀이야. 내 뒤로 접착이 있고 큐시가 있어. 완성품은 창고로 들어가. 어디 볼수 있어야 말이지.” “관리인들은 모두 너희들 사람이잖아. 한두컬레야 못 얻겠나 아무렴.” 그 친구 한마디에 나는 빡세게 거절 못하고 며칠동안 혼자서 낑낑 갑자르다가 결국 생산을 책임진 한국인 마과장을 찾았다. 세집에서 신으려고 그러니 슬리퍼 둬개 살수 없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전량 수출인데다가 미처 생산이 따라가주지 못해 재고품이 없다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내가 념두에 둔것은 검사팀에서 골라낸 불량품이였다. 불량품은 하루 작업이 끝날무렵 작두로 자르는것이 회사 규정이였다. 그것이 절대 회사밖으로 흘러나가서는 안되였다. 마과장도 물론 내가 어벌크게 그것을 노리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마과장이 웬일인지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지나가는 어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퇴근하고 찾아와.” 후에 마과장은 어느 술자리 끝에 나에게 불량 슬리퍼를 준 리유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머리 많이 다쳐 헛소리치는 놈팽이로 보여 화가 꼭뒤까지 치밀어 순간이지만 회사에서 짜를 생각까지 했었다. 겁대가리 상실한게 참 건방져보였다. 염병지랄도 가지가지라고 언감생심…그러다가 문뜩 이넘이 진실하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놈 같으면 슬쩍 서리할 궁리부터 할터인데 돈 주고 사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적어도 도적넘 컨셉은 아니였다. 잠간 더위 먹은것쯤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돌리니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더란다.  “나가서 절대 누구하고도 말하지마. 사장 귀에 들어가면 나부터 목이 날아난다. 알겠어?” 마과장은 내가 찾아가니 도적이 강아지를 꾸짖듯 낮은 소리로 다짐을 주고 책상밑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싼 물건을 건네주었다.  물론 나도 세집에 돌아와서 왕로얼한테 단단히 을러멨다.  “신은 집에서만 신고 밖에 끌고나가지마. 내 쫓겨나는거 보기 싫으면 말이야.” 이듬해 날씨가 좀 풀리자 왕로얼은 고기배를 팔아버렸다. 주변 해역에 고기가 적어진것도 원인이였지만 해상사고가 빈발하여 도무지 무서워 못하겠다는것이였다.  그때문에 왕로얼은 아버지와 대판 싸우기도 했다. 평생을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왕로얼의 아버지는 거쿨진 체격에 우락부락한 성격을 가지고있었지만 또 쉽게 마음을 풀기도 했다. 50대 중반의 젊은 할아버지인 그는 언제 다퉜냐싶게 손녀인 링링을 안고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기야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못하는 법이니까 맥버린 모양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왕로얼이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것을 육감적으로 느꼈다.  3월달에 접어들면서 왕로얼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콩을 심는 계절이라면서 며칠동안 부지런히 돌아치더니 하루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야. 래일 쉬지? 나하고 밭에 나가자.” 이틑날 왕로얼은 나를 깨워서 밥을 먹으라고 다그친후 뭐가 그리 급한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왕로얼의 녀편네가 차려준 밥을 느직느직 먹고 집문은 나서던 나는 그만 못볼거 보고 동공이 작살나고말았다. 왕로얼이 변소간에서 똥물을 퍼내고있었던것이다! 주위에는 지린내와 구린내가 진동하고있었다.  “이넘아, 웬 짓거리냐? “ 일년간 그 일을 볼 때마다 똘랑똘랑 주루룩주루룩 소리내며 큰독에 떨어져서 이상했었다. 저게 꼴똑 차면 어쩔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예 더 넓고 깊게 구뎅이를 파놓는게 실용적일거 같았다. 그런데 넘쳐나는 경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왕로얼이 내가 출근한 사이에 내다버린 모양이였다.  “자식이 자기 똥 보고 짓는 강아지와 똑 같네.허허허” “그런데 퍼런 대낮에 뭐하는거야? 밭에 가자 했잖아?” “맞지, 이걸 메고 가야해” 왕로얼은 시무룩히 웃으며 멜대로 인분을 담은 물통을 메고 어슬렁 대문을 나섰다.  왕로얼네 밭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뒤산에 있었다. 멜대를 멘 왕로얼이 저만치 앞에서 휘청휘청 걸어갔다. 물통이 몸 률동에 맞추어 흔들거렸고 액체의 인분이 출렁이면서 두줄의 가느다란 금을 그어가고있었다. 나는 엄지와 식지로 코를 틀어막고 소에게 물린 상통을 하고 저만치에서 따라갔다.  밭에 이르자마자 왕로얼은 바가지로 인분을 퍼서 부지런히 밭에다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냄새도 냄새지만 무슨 일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 멀찍히 물러나 서성이기만 했다. 한참을 왔다갔다 하면서 인분을 밭에다 골고루 뿌린 왕로얼이 한옆에 널부러진 삽을 가리키면서 나한테 말했다. “내 집 가서 한번 더 메고 올테니 그사이 저기 뿌린데 땅을 삽으로 파서 번져.” “이눔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저런 일 시켜. 안한다 안해.” “자식이 싸대기 왕복으로 쳐맞을라.” “주둥이 세탁하고 다녀. 깐죽대다간 발에 밟힌 빈 맥주캔 모양이 될수도 있다구.” 그러면서도 나는 순순히 삽을 찾아들고 땅을 번지기 시작했다. 포크레인 놔두고 삽질한다는 말이 그른데 없었다. 하기사 1무3푼밖에 안되는 땅뙈기에 포크레인이 무슨 소용이랴. 그날 저녁 왕로얼의 마누라가 수고했다면서 술상을 차려내왔다. 여전히 땅콩 볶음과 매운 맛조개에 생맥주였다. 왕로얼과 몇년 붙어살더니 왕로얼 음식솜씨까지 따라배운 모양이였다. 한가지 더 늘어난거 있다면 토란국이였다. 토란은 쪄서 먹는줄로만 알았는데 국도 제법 맛있었다.  “우리 둘을 좀 너희 회사에 취직시켜주라.” 술이 좀 얼근해지자 왕로얼이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요구해왔다. 기실 왕로얼이 고기배를 팔아치울때부터 이런 요구를 해올줄 미리 짐작했었다. 하긴 우리회사도 미싱사가 모자라 죽는 판이였다.  “너는 모르겠고… 니 마누라 미싱할줄 알지?” “그거야 말해서 아나? 우리집 옷견지 몽땅 마누라가 손수 지은거야.” “배 고플때 흰소리가 잘 나온다더라. 너 만날 굶고 다니는건 아니니? 허허허” “너 혹시 곤충인거니? 왜 사람말 통 알아듣지 못하니? 그러지 말고 잘 말해달라. 그러면 음력 6월달에 한잔 잘 살게.” “근데 왜 하필 6월이야?” “링링이 세살 생일이 그때야.” 그것은 왕로얼을 알아서 처음으로 받은 공식 청첩인셈이였다. 물론 붉은 청첩장을 직접 받은건 아니여도 왕로얼의 표정에서도 초청이 분명한것을 알수 있었다.  왕로얼의 마누라는 내가 관리하는 미싱현장에 취직이 되였고 왕로얼도 운수 좋게 접착부서에 배치받았다.  그해 음력 6월 초하루날에 나는 동네 식당에서 벌어지는 링링의 세돐생일잔치에 부조돈 200원을 내고 참석하였다. 마침 그날은 또 산동사람들이 꽤나 륭중하게 쇠는 “과반년(过半年)”날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석하여 즐겼다. 그날 밤 왕로얼네 부부가 건너방에서 밤을 패면서 부조돈을 세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소리가 내 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때로부터 나는 해마다 왕로얼의 초청을 받고 이런저런 파티에 참가했다. 산동사람들은 무슨 관습이 그리도 많은지 달포에 한번씩 꼭 무슨 명목의 명절이 있었다. 그리고 법도 많았다. 봄철이면 사위가 장인장모한테 싱싱한 고등어를 가져다준다. 나이가 쉰만 넘으면 자식들이 알아서 상복을 미리 준비해둔다. 어린 자녀한테 양부모를 만들어주는것도 큰행사에 속했다. 그때면 친척, 친구들이 모여 한바탕 축하연을 베풀군 했다. 링링도 양부모를 찾았고 나도 그 주연에 초청받아 갔었다.  취직한지 5년이 된 어느날 나는 나의 직접 상급인 마과장과 트러블이 생겨 밸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과장은 나에게 불량 슬리퍼를 가만히 챙겨준 당사자였다. 어지간히 정이 들었던 사람이였는데 별로 큰 일도 아닌걸 가지고 천둥같이 화를 내더니 다시는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거기에 비하면 왕로얼은 코마루가 찡하게 따스한 면이 있었다. 내가 왕거장을 떠나던 날 왕로얼은 여전히 땅콩 볶음과 매운 맛조개에다 생맥주로 대접했다.  그후 나는 시내의 다른 회사를 이곳저곳 전전하면서도 왕로얼과는 자주 련락이 통했고 1년에 적어도 한번꼴로 꼭 왕거장에 다녀갈 일이 생겼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왕로얼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아버지 돌아가셨어!” “왜 앓는다는 말도 없었잖아?” “그렇게 되였어. 그저 알리는거니 오지 않아도 돼.” “어디지?” “집이야.” 그럴려니 했다. 재작년인가 왕로얼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때도 병원에 모시라는데도 왕로얼의 아버지부터 쓸데없는 돈을 판다면서 왼고개를 틀었었다. 동네 의사를 보이면 된다면서 한사코 집에서 운명을 맞이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가보니 짐작대로 왕로얼의 아버지는 전에 내가 들었던 방에 반드시 눕혀져 있었다. 이제 고작 예순 중반이 좀 넘은 사람인데 모질(耄耋)의 노인같아 보였다.  왕로얼은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을 거의 찾을수 없을만큼 평온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가끔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나한테 다가온 왕로얼은 미안하다는듯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문 오는 사람들이 많아 너만 붙들고 있을수 없구나. 량해해다구.” “괜찮아, 나 좀 마당에서 바람이나 쐴게.” 그 사이 왕로얼네 집은 변화가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왼쪽 편으로 창고 비슷한 건물이 한채 늘어난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왔을때만 해도 오른쪽에 창고가 있어서 웬간한 물건은 거기에 챙겨두고있었다. 솔직히 세사람의 살림에 창고는 그 하나면 충분했다. 굳이 창고 하나를 다시 지어야 할 리유가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후 나와 왕로얼은 어느 허름한 간이식당에 마주 앉았다. 여전히 땅콩 볶음에 매운 맛조개를 두고 생맥주를 기울렸다.  “창고 하나 새로 지었더구나.” “응” “괜히 마당이 좁아터졌더라. 쓸데 없이.” “지금 그 말씀 웃기려고 하신거 아니지? 쿡쿡…” “왜 내가 무시당할 말이라도 한거니?” “그게 아니구 오라잖으면 이곳이 개발된대. 동네가 철거된단 말이야.” “아!” 정확히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초겨울에 왕로얼네는 마침내 새아파트 세채를 분배받았다. 그것도 개발상이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맞바꾸었다면서 왕로얼은 은근히 으시댔다.  “너두 얼른 집을 마련해야지.” “내야 집 살 돈 어디 있어?” “청도 온지도 이젠 16년이 됐잖아. 자꾸 움직이니까 돈은커녕 먼지도 안붙잖아.” 왕로얼은 새끼손가락으로 코구멍에서 코딱지를 훑어내며 정색해서 훈계하기 시작했다. 몸에 걸친 국방색 군용외투는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때 입었던 그 옷인듯 옷소매가 때로 반들반들했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살면 안되니? 지금 데리고 사는 녀자가 몇번째야? 이번에는 끝까지 갈거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보니 왕로얼네 부부간은 그때까지도 내가 소개해준 슬리퍼회사에 다니고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딸 링링이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가 다니는 회사에 들어가 일하고있었다.  “기집애들 공부시켜 쓸데 없어. 돈이나 쾅쾅 벌게 해야지. 링링아, 니 찐아저씨 봐라. 저게 대학생이야.” 왕로얼은 심심하면 나를 끌어넣어 공부 무용론을 펼쳐내군 했다.  그날 왕로얼네 새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나는 난생 처음 비애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모름지기 촌놈이라고 은근히 무시했던 왕로얼이 산같은 무거운 압력이 되여 나를 지지누르고있었다. 다음다음해 나는 큰 마음을 먹고 여기저기서 돈을 꿔서 선불금을 내고 다시 은행대출을 받아 70평 남짓한 아파트 한채를 구입했다. 아무렴 왕로얼한테 업수임을 그대로 당할수만은 없었다. 대출 갚을 일때문에 마음이 많이 얼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마침내 내집이 생겼다는 성취감이 모든것을 압도했다.  소식을 들은 왕로얼은 휴일날을 잡아 마누라와 딸을 대동하고 진둥한둥 찾아왔다. 새집을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쉴새 없이 주절댔다.  “좋아좋아, 집이 구조가 마음에 들어. 네모반듯하고 칸마다 창문이 달려 환하구. 작은 면적에 비하면 분포가 합리하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졌어. 봐, 이러니 얼마 좋아. 여기서 밥 먹구 넌 책 좋아하니 저기 책장 놓으면 좋겠구. 정말 인테리어 내가 책임질게. ” 나는 왕로얼이 이렇게 긴 말을 조리있게 하는걸 처음 보았다.  “내 집 장식하면서 남은 재료가 적잖아. 아마 이 집 하나 장식해도 될거 같아. 일단 먼저 시작하자구.” 이틑날 왕로얼은 차로 타일이며 바닥재며 목재들을 가득 실어왔다. 집 세채를 장식하면서 남은것인데 버리자니 아깝고 어디 보관할데도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차에는 면목 모를 장정 둘이 묻어왔다.  “내 친구들이야. 여기는 목수고 저 넘은 미장이야. 돈은 줄 필요없고 그저 밥만 먹여주면 돼.” 그날따라 왕로얼은 어색하기는 해도 양복차림새였다. 아마 왕로얼을 알아서 양복차림새는 처음인거 같았다. 언제나 낡아빠진 구두를 궤차고 있던 발에 반들반들한 새구두가 신겨있었다. 아마 그 새구두에 맞추느라고 양복을 찾아입은 모양이였다. 왕로얼은 투박한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내 동생이야. 유명 대학 졸업생이라구. 대단한 인물이니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돼. 나와는 거의 20년 사귀여왔어. 저 친구자 나라고 생각하고 일 잘해주어.” 그날부터 왕로얼은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와 인테리어 진척 여부를 물어왔다. 그리고 휴일만 되면 꼭꼭 달려왔다. 왕로얼이 오는 날 점심이면 새집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술상을 벌렸다.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바를 몰라 그저 때만 되면 좋은 안주에 술을 대접하는것으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달이 채 안되여 인테리어가 완성되였다. 왕로얼이 재료를 많이 가져다주었지만 그래도 인테리어를 하다보니 이것저것 모자라고 보태야 할것들이 많아서 적잖은 돈이 들어갔다. 결혼증은 타지 않았지만 몇년째 같이 사는 녀자가 친정에서 돈을 얻어온것이 좀 남아서 나는 조용히 왕로얼을 불러 물었다.  “저 친구들 거의 한달이나 일했는데 하다못해 수고비라도 얼마쯤 줘야 하는게 아니여?"” “좋아좋아.” 왕로얼은 동에 닿지 않은 대답을 하며 돌아서 친구들옆으로 가려고 했다. 나는 무작정 왕로얼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야. 친형제도 장부를 맞춘다고 했잖아. 하루도 아니고 한달씩이나 어떻게 공짜로 일 시켜먹어.” “좋아좋아…” 왕로얼은 말귀를 흐리면서 은근히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 그도 친구들을 맨손으로 보내기에는 어딘가 미안했던 모양이였다. 그렇다고 나에게 구체적인 액수를 제출하기는 더욱 어려웠던게 분명했다. 왕로얼의 눈에는 또다시 그를 처음 만났을떄의 그런 희미하고 아리숭한 표정이 어려있었다. 나는 시무룩히 웃으면서 미리 준비해둔 2만원을 슬쩍 왕로얼의 주머니에 질러주었다. 왕로얼은 생각밖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손으로 막거나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들이 떠나간지 사흘이 되여서 내가 한창 새집에 들어가려고 짐을 싸고있는데 난데없이 모를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본능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기 바쁘게 억센 톤을 가진 사람이 성급하게 물었다.  “당신 왕로얼한테 장식비 안줬어?” 나의 머리는 순식간에 수백번 회전했다.  “준적 없는데요. 그런데 누구시지요?” “붕붕…” 전화가 대답도 없이 끊어져버렸다. 통화질이 별로여서 목소리를 판별할수 없었지만 꼭 어딘선가 많이 들었던 목소리가 틀림 없었다.  그해 음력 섣달에 왕로얼의 딸 링링이 결혼식을 올렸다. 링링의 남편은 조선족이였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관리원이였는데 계장 직책을 꿰차고있었다.  “대학생이야. 우리 링링이는 고중도 다니지 못했잖아. 복이 덩쿨채로 굴러온거야. 한번 와봐. 역시 너같은 조선족이야.” 나는 왕로얼의 지청구에 못이겨 한번 가서 만나보았다. 여러모로 삐여난 총각이였다. 신수도 멀끔했지만 례절도 밝아 왕로얼은 그저 끔뻑 죽는 시늉을 했다.  “너네 민족 참 훌륭해. 술도 몸 돌려서 먹구. 사람은 그래서 배워야 한다고 했어.” “그런 넌센스가 어디 있어? 포인트 못잡고 횡설수설하는 특기 참 부럽다.” “왜 사람을 욕해. 지금 니까지 올리춰주는 중이잖아. 어이 상실한거냐?” “니가 십수년 나를 공부 필요없는 전형으로 몰았잖아?” “언제 쌍팔년도 소리하고 자빠졌어?!” 왕로얼은 나의 어깨를 한번 쥐여박고 허허 웃었다. 나도 덩달아 시원하게 웃었다.  “마침이다. 너도 이 참에 링링이 결혼날 마누라한테 웨딩드레스 입히구 결혼식 신고해라.” 왕로얼 덕분에 나도 안해한테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등장했다. 안해는 그날따라 더없이 행복해보였다. 부부 관계도 나이를 먹는다더니 이젠 미운정 고운정 들대로 든 안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안해는 왕로얼네 일이라면 만사불구하고 등을 밀었다.  “얼른 가봐요. 그 나이에 둘째를 임신했다니 정말 축하해줄 일이예요. 가서 배 한번 만져보고 와요. 우리도 생길지..” 안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있었다. 마침 안해는 출근해야 해서 시간을 낼수 없었던것이다. “남의 녀자 배를 어떻게 만져?” “가까운 사이에 그게 뭐 대수예요. 제가 미리 전화해둘게요.” “하긴 그 자식한테 부조돈만 해도 숱해 빼앗겼다. 마누라 배 한번 만져본다고 야단은 하지 못하겠지.” 나는 실없는 웃음을 킬킬 웃으며 문을 나섰다. 소태 씹은듯 입을 쩝쩝 다실 왕로얼의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올랐다.                               2017년 1월 19일 청도에서 
26    향이의 맞선 댓글:  조회:812  추천:1  2017-05-23
  단편소설   향이의 맞선       향이는 눈 오는 길을 질척질척 걸었다. 올들어 처음 오는 눈이다. 눈은 내리면서 그녀의 마음처럼 녹고있었다.  올 겨울은 참 유별나다. 살얼음이 새벽에 좀 생겼는가싶다가도 거퍼 점심전에 녹아 없어지는것도 그렇고 시도때도 없이 비가 실실 내리는것도 그렇고 많이 반상적이다. 왕년엔 그래도 겨울 흉내를 내느라고 손바닥 두께의 얼음이 얼기는 했었다. 그리고 하다못해 일년에 둬서너번 눈이랍시고 날리기도 했었다. 음달진 구석에는 아직 봄은 꿈도 꾸지 말라는듯 흰눈이 소복히 쌓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전혀 아니다. 어쩌다 온다는 눈이 하늘하늘 발밑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는 인차 또 비를 뿌린다. 도대체가 말릴수 없다. 겨울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하늘만 보고는 전혀 판단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향이는 기쁘다. 실없이 자꾸 킬킬 웃음이 나가는것을 참을수 없다.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이 캡처되여 우렷이 떠오른다. 집을 나설때 하던 엄마의 말이 새삼스럽게 귀가에서 쟁쟁거린다.    “왕청 총각이라는구나. 정말 이전에 그 애 …이름 뭐더라? 건이든가 맞지? 그 애도 왕청애였지 아마?” “몇천번 얘기했어? 왕청사람이 아니라고? 청도서 태여났단 말이야.” “글쎄 말이다. 아무래도 니 명에 왕청이 찰거마리처럼 들어붙었는 모양이구나.” 엄마가 이렇게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반듯하게 차리고 나서면 아직도 30대로 착각하게 하는 엄마는 딸이 어느새 그 착각하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위기감에 젖어들면서 갑자기 로쇠해진듯 싶었다. 남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할가봐 좀체로 화장도 할념을 하지 않았다. “딸을 과년시켜놓고 무슨 체면에 얼굴 분칠이냐고 욕할거잖아...” 고작 2년이였다. 2년만에 엄마는 백기투항해버렸다. 처녀 귀신이 되여도 왕청 총각은 절대 안된다며 바락바락 악을 쓰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거퍼 1천날의 3분의 2를 조금 넘기고 더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그만 엔진이 펑크나버린것이다.  어느날 엄마가 조용히 향이를 불렀다.  “엄마네 뜨개 모임에 새로 흑룡강 언니 하나가 왔는데 참한 총각이 있다면서 소개해주겠다는구나.” 청도에는 다른 동네에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희한한 모임들이 많았다. 어투와 습관이 서로 다른 동네에서 오구작작 모여와서 함께 어울릴수 있은데는 그런 모임들이 한몫 단단히 하고있었다. 처음에는 옴니암니 다투고 모순도 많았었지만 점점 청도의 날씨처럼 미지끈해지고있었다.  “싫어.”   향이는 단마디에 거절해버렸다. 아직도 건이를 밀어내지 못한 향이의 마음에는 다른 남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것이다.  “글쎄 나도 좀 께름직하긴 하더라. 어쩌면 방정맞게도 또 왕청 총각이라니 말이다.” 엄마는 차라리 잘되였다는듯 중얼거리더니 인차 얼굴을 흐리고 난색을 지었다.  “총각은 좀 괜찮은 모양이더라. 포장회사를 꾸린다던가? 왕청사람이면 뭐라니? 사람이 똑똑하고 돈 잘 벌면 되는거지.”   엄마는 우왕좌왕 말에 두서가 없었다. 웬간해서는 물러서지 않던 원칙도 저절로 마구 허물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뒤에다 붙이는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니 명에 왕청이 찰거마리처럼 들어붙었는 모양이구나.” 엄마가 왕청사람을 싫어하는 리유는 연길에서 왕청사람한테 사기를 당하면서부터였다. 세집살이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2만원이면 한국로무 보내준다고 꼬셔서 그 돈을 가로채서 도망간 사람이 바로 왕청 출신이였던것이다. 엄마는 5년동안 고리대금 본전에 리자를 갚으면서 어느 하루 이를 갈지 않은 날이 없었다. 피난민처럼 한밤중에 이불짐을 꿍져지고 연길을 도망나온 엄마는 평생을 두고 그 아픔을 잊지 못할듯싶었다. 물론 아버지는 곁불에 매일매일 들볶이군 했었다. 그 왕청사람을 집에 끌어들인 사람이 다름 아닌 아버지였기때문이였다.   “이젠 니 나이도 서른이다. 사람 좋으면 되잖아. 왕청사람도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 더 많더라. 우리가 딱 나쁜 왕청사람 만나서 그렇지. 그리고 그 언니한테 둘이 한번 만나게는 하겠다고 언질을 주었다.”   향이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엄마가 성격적으로 강세적이여서인지 향이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종래로 엄마와 정면으로 대든적이 없었다. 엄마 역린을 건드려서 결코 좋은 일이 없다. 자칫 일년내내 들들 들볶이면서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 만나라고 하면 만나면 무난하다.    그래서 향이는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거나 얼굴이 스르르 붉어지는 그런 스릴은 느낄수 없었다. 남자만 봐도 쥐구멍을 찾게 되는 그런 나이는 이미 지나가있었다. 그보다도 남자란 동물에 감흥 자체가 사라져버린것이다.   눈 오는 겨울날이였다. 눈은 내리면서 비물처럼 흐르고있었다. 요즘 겨울은 칼라가 선명하지 않다.  향이는 질척이는 거리에서 블랙션 커피숍을 마주하고 섰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바엔 들어가긴 들어가야겠는데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맞선 장소를 이런곳으로 선택했는지 알수 없었다. 폼 한번 잡아보느라고 그런건가? 자기가 이렇게 우아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뭐 그런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인가?    향이는 자기도 놀랄 정도로 힝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향이는 녀자이고 또 처녀지만 커피숍같은 곳은 좀 서먹하다. 아니, 서먹하기보다는 적응이 잘되지 않는다. 차라리 식당같은데서 미팅하는게 더 적성에 맞다. 좋기는 소주를 깔쭉댈수 있는 장소면 많이 자유스럽다. 손삿대질이랑 하면서 인생이 어떻고 사랑이 저떻고를 재잘거릴수도 있을거 같다. 향이는 입을 오므리고 호호 하면서 낮고 천천히 얘기를 주고받는데는 습관이 잘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벌써 이렇게 진부하게 변했다는 점에 또한번 소스라치듯 놀란다. 아직 인생 시동도 제대로 걸지 못했는데 벌써 시들시들 꺼지고있는게 억울하기도 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홀안에는 오가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등불을 빌어 홀안을 한바퀴 둘러보아도 눈에 띄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빈상에 파리만 앉았다가 가는 집인듯싶었다.    이때 구석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게 언뜻 보였다. 아주 잠간이긴 했지만 향이는 전률하듯 몸을 흠칫 떨었다. 그때 귀가에 엄마가 언니라고 부르는 뜨개 모임의 그 흑룡강아줌마가 전화에서 하던 말소리가 들렸다.  “커피숍에 가면 너를 한눈에 알아볼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 그대로 가면 돼.”   하다못해 상대의 전화번호라도 달라고 하니 아줌마는 근심걱정 붙잡아매두라는듯 달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향이는 상대가 자신을 알고있을 확률이 높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가 홀에 들어서기 바쁘게 누군가 손을 젓고있었다. 아직 어두운 홀안에 적응이 되지 않은 눈은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있었으나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저도몰래 불안해지고있었다.    그때 향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그녀가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또 애타게 기다리는 이름이 떠올랐다. 건이였다. 2년전에 소리없이 사라진 건이였다. 열흘동안 꼬박 미친듯이 전화했지만 줄곧 전원이 꺼진 상태로 흔적도 찾을수 없었다. 그 뒤로 향이도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언젠가는 부재중전화를 보고 련락해오리라 믿었지만 2년동안 건이는 다른 전화로도 다시 걸어오지 않았다. 철저히 잠적해버린것이다.    “킬킬…”   향이는 눈물과 함께 터져나오는 웃음을 도무지 참을수 없다. 어쩌면 그렇게 의뭉스럽고 능청스러울수 있는지 생각만 해도 건이가 대견스럽다. 스러워 스러워 스러워를 곱씹어 내뱉어도 건이가 매파를 내세울 궁리까지 했다는건 정말로 믿을수 없었다. 그토록 마음이 여렸던 건이가 얼마나 안달이 났으면 2년동안 갈고닦아서 매파를 보냈을가 싶었다.    커피숍의 희미한 구석에서 건이를 확인했을때 향이는 가슴이 미여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다. 건이의 마음속에 자신이 차지하고있는 분동을 알게 된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자신이 건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시한번 절실히 느꼈기때문이였다. 여느 남자에게 마음 한번 준다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지만 그 한번 준 마음을 거둔다는것이 얼마나 더 어렵다는것을 향이는 2년이란 시간을 통해 새삼스레 다시 터득한셈이다.  “그간 공장을 세우고 길을 닦느라 많이 바빴어.”   건이가 변명삼아 말했지만 향이는 고깝다거나 괘씸하다는 그런 서운함이 없었다. 건이는 썰렁한 개그를 펼칠 정도로 계산적이지 않다는것을 향이는 너무 잘 알고있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만났던지 향이는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의 일거일동을 지금도 레코드판처럼 오차없이 기억하고있다.    4년전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가 자리잡은 청도에 뿌리를 내린 향이는 우연한 기회에 월드옥타에서 조직한 차세대리더양성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였다. 화이트칼라 생활보다는 창업쪽에 더 집념하던 차에 쉽지 않게 만난 기회였다.    그날도 눈이 내렸다. 그것도 펑펑 내렸다. 모두들 청도 와서 처음 보는 폭설이라고 말했다. 차가운 바다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눈꽃을 날려 제법 한겨울의 풍경을 도출하고있었다.    그러나 호적문제로 부모를 떠나 멀리 동북 고향에 가서 3년간 공부하면서 대학입시를 맞았던 향이에게는 이 정도의 눈은 말그대로 눈에 차지도 않았다. 동북 겨울의 차가움과 매정함에 결코 비길수 없이 많이 누그러져있는 청도의 겨울이였다.    그런데도 캠프에 참가한 원우들은 춥다고 야단이였다. 집에서 옷견지를 더 가져오지 않았다고 후회하는 친구들이 생각밖으로 많았다. 오구작작 침실에 모여앉아 카드를 치면서 수료식이 시작될 저녁시간을 기다리고있었다.    유독 한사람만이 흩날리는 눈보라를 헤치면서 눈사람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건이였다. 향이가 건이의 존재를 알게 된것은 그때가 처음이였다. 건이는 특별히 잘 생긴것도 아니였다. 보통 키에 어딘가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였다. 특히 먹물을 쏟아부은듯 짙은 눈섭이 위엄기를 더해주고있었다.   수료식은 열광의 도가니속에서 끝났고 향이는 어느새 많이 취해있었다.    녀자가, 그것도 처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는게 말도 되지 않을법하지만 향이는 고중시절부터 가끔 취하군 했었다. 그때는 엄마가 그리우면 비슷한 애들이 모여서 독한 빼갈을 홀짝거리기가 일쑤였다. 대학때는 남자동창들한테 업혀서 숙소로 돌아간적도 많았다.    한번은 졸업을 앞두고 남녀 동창 10여명이 가을놀이 캠핑을 나간적이 있었다.  캠핑 첫날밤 향이는 남자 동창들의 권유에 못이겨 죽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어떻게 쓰러졌는지 자신도 몰랐다. 아무튼 한밤중에 방뇨가 급해 뛰쳐나가 아무렇게나 숲속에 엉치를 까고 내버리고 자기 잠자리로 돌아온다는것이 그만 흐리멍텅 남자들 텐트에 기여들어가 그대로 코를 박고 잠들었다. 그러다가 가슴이 답답해 눈을 떠보니 웬 남자의 다리가 배우에 올라와있었다. 다행히 남자들도 모두 돼지처럼 뻐드러져있었다.    향이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부끄러움보다는 참 다행이였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런 상황에서는 신사가 따로 없다. 하물며 술 먹은 남자는 짐승의 본질을 드러내기 마련이잖은가. 그런데도 향이는 짐승의 무리에서 용케 자신의 처녀성을 지켜낸것이다.    그후부터 향이는 취해도 정신만은 도사린다. 처녀성이 중요해서만이 아니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처녀로 남아있는 녀동창은 보호동물처럼 적었다. 향이는 그보다도 흐리멍텅하게 녀자의 첫번을 멋대가리 없는 사람한테 주고 평생을 후회할가봐 더 걱정이였다.    수료식에서도 그랬다. 향이는 눈앞이 흐려왔지만 신경의 끈은 놓지 않았다. 짐작했던대로 술상에서 화끈했던 친구들은 시탐삼아 몇번 향이곁에 와서 넌지시 지껄여보았다가 여의치 않았던지 인차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향이는 시무룩히 웃으며 여유작작 와인잔을 즐겼다. 그러다가 향이가 이젠 집에 갈때가 되였다고 생각하며 비칠거리면서 일어서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했다. 언제 나타난지 알바 없는 건이였다. 술 마실때 그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이틑날 향이가 눈을 떠보니 자기 방이였다. 건이가 아파트단지앞까지 차로 데려다준 기억까지는 났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건이한테서 핸드폰 메시지가 벌써 들어와있었다. 아마도 원우 통신록을 뒤져서 향이의 전번을 알아낸 모양이였다.    “일어났으면 점심에 해장술 한잔 할가요?” “데이트 신청이신가요?” “그렇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구요.” “저 주사가 심해요. 자칫 후회막급이예요.” “같이 취합시다. 인생 너무 맑아도 피곤하네요.”   향이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주저없이 건이가 오라는 “청향관”이라는 한식당으로 찾아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건이는 먼저 와서 료리를 주문해놓고 기다리고있었다. 테이블에는 갓 보글보글 끓여낸 된장국이 군침을 당기고있었다. 향이는 건이에게 눈인사를 마치기 바쁘게 방약무인인듯 숟가락으로 된장국을 듬뿍 떠서 입에 넣었다. 뜨거운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배속을 후끈 덮혀주었다.    ‘와, 속이 시원하다!” 건이는 말없이 시무룩히 웃기만 한다. 향이는 다시 숟가락을 집어들었다가 싱거운듯 내려놓는다.  “여자가 꼴불견이지?” “아니, 난 그런 니가 좋아.” “별걸 다 좋아하고 자빠졌네. 변태냐?” “응, 변태 맞아,”   둘은 금세 어색함을 털어버리고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학창시절 얘기도 나눴고 창업이야기도 했으며 주변의 시시껄렁한 에피소드도 털어놓았다. 왔다리 갔다리 이야기가 설왕설래하는 사이 주변손님들은 하나둘씩 가버리고 2층에는 그들만 남았다.    해장술에 다시 취한다는 말이 틀림없었다. 향이는 거퍼 맥주 두병도 채 마시지 못하고 해롱해롱 취해버렸다. 엊저녁 술이 채 깨지 못한 탓이다. 향이는 점점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건이는 할 말이 무진장 남아있는지 정력이 뻗쳐 끝없이 중얼거렸다.    향이는 희미해져오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이 좀 드는듯싶었다. 그러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으려고 변기쪽에 있는 휴지에 손을 뻗치는 순간 몸이 평형을 잃으면서 향이는 벌러덩 화장실 바닥에 넘어졌다. 머리는 어쩔새도 없이 변기통을 들이박았다. 입에서는 저도모르게 악 소리가 터져나갔고 심한 통증이 밀물처럼 엄습해왔다.    “웬일이야? 어디 많이 다쳤어?”   건이가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들어왔다. 무작정 뒤로 향이의 량쪽 겨드랑이에 손을 질러넣고 일으켜 세웠다. 다급한 김에 큼직한 손이 향이의 두툼한 가슴우에 얹혀진것도 모르고있었다. 향이는 허우적거리면서 건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그럴수록 건이는 향이가 더 큰 사고를 낼가봐 그러는지 뒤에서 더욱 억세게 끌어안았고 향이는 점점 건이의 품속으로 파묻히고있었다. 향이는 더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밀폐된 공간탓인지 괴괴하고 적막한 느낌까지 주었다. 향이는 건이의 단단한 가슴이 기둥처럼 듬직했다. 거기에 소리없이 기대고있을라니 불현듯 잠들고싶다는 욕망이 간절해졌다. 빙빙 돌던 머리속도 진정이 된듯 조용해졌다.  “자 이젠 나가자.” 건이는 향이를 끌어안은 손을 풀기 아쉬워하면서도 조용히 말했다. 귀가에 스쳐오는 건이의 숨결이 급촉했다.  “아니, 좀만 더 있어.”   향이는 자극을 받은듯 부시럭거리면서 몸을 돌려 건이의 품에 다시 파고들었다.    그러고보니 향이는 건이를 적잖게 알고있는상 싶었다. 차세대프로그램에 건이란 남자외에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눈사람을 만들었고 수료식때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있었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그런 감각은 누가 귀띰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몸의 세포가 먼저 느끼고있는것이였다.   향이는 고개를 들고 건이의 얼굴을 물그러미 쳐다보았다. 잘난 얼굴은 아니였다. 그렇지만 모난 얼굴은 틀림없었다. 어딘가 고집이 어리고 포기를 잘 모르는 그런 얼굴이였다. 향이는 이런 개성적인 얼굴이 좋다. 아니, 전형적인 호인보다는 각이 선명하게 나져있는 사람이 향이는 더 좋았다.    “나를 좋아했던거야?” “응.” “그래서 멀찌감치 나를 따라다녔어?” “알고있었구나.” “새침을 뗀게 아니고 나를 끝까지 챙기나 지켜봤지.”   향이가 손을 뻗쳐 건이의 얼굴을 만지려는 찰나 건이의 입술이 허둥지둥 덮쳐왔다. 투박하고 어설픈 건이의 손이 향이의 옷우에서 방향을 잃고 마구 헤맸다.    이듬해, 그 이듬해 겨울에도 꽤나 눈이 왔다. 얼음도 손바닥 두께쯤 얼었붙었다. 바다바람은 역시 청도가 틀림없다는듯 기승을 부렸다. 아마 바람만 아니였어도 청도의 겨울은 결코 춥지가 않았을것이다.    그해가 다 가는 어느날 건이는 선물을 사들고 향이네 집을 찾았다. 2년간의 열애사실을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향이의 통보를 미리 받은 부모들도 손님 접대 준비에 바빴다. 사위 마중에 장모님이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간다는 말처럼 엄마가 더 부산을 떨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사람이유?” “청도에서 태여났습니다.” “부모의 고향이 어딘가 말이지.” “왕청입니다.”   그때 엄마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신경질적으로 손사래를 치더니 느닷없이 언녕 향이를 통해 알고있는 사실을 물었다.  “지금 무슨 일하고 있소?” “뭐 좀 해볼가고 여기저기 알아보는중입니다.” “무직업자로 놀고있다고 하면 될 일가지고…”   엄마가 괜히 트집을 잡고있다는것을 향이는 대뜸 알아차렸다. 왕청이라는 지명이 엄마한테는 알레르기이고 스트레스라는것을 향이는 잘 알고있었다. 청도로 이주한지도 10년이 가까워오지만 고향에서 형성된 그 프레임에서 엄마는 시종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젊디나 젊은 사람이, 그것도 대학공부까지 한 사람이 지금까지 부모 등 쳐먹고 산다니 말이나 되우. 이 혼사 우리 동의 못하겠으니 얼른 나가우.”   엄마는 건이가 가져온 선물꾸레미를 통채로 문밖에 내다놓으며 무작정 건이를 쫓아냈다.    엄마와의 마라톤식 전쟁은 그때로부터 시작되였다. 향이는 울며불며 사정도 해보았고 입을 악물고 단식도 해보았다. 그러나 엄마한테는 만사가 통하지 않았다.    건이가 열번쨰로 엄마에게 쫓겨나던 날 둘은 “술독”이란 간이식당으로 기여들어가 깡술만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청도의 밤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야심한 밤에 행인도 드물었다. 그사이 날씨가 많이 풀려있었다. 훈훈한 바람이 눈물범벅이 된 두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고있었다. 둘은 손잡고 걷다가도 문뜩 멈춰서서 취한듯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한번 붙은 두 입술은 좀체로 떨어질념을 하지 않았다. 어눌한 건이에 비해 향이는 많이 공격적이였다. 기어코 건이의 입을 열고 혀를 깊숙히 들이밀었다. 허공에서 떠도는 건이의 손을 잡아 가슴속에 넣어주기도 했다. 향이는 이제 이 남자를 놓아주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우리 어디 가요. 저기 저 집에 가요.”   향이는 취한듯 노끈한 어조로 주절댔다. 길 건너편에 “쉼터려관”이란 간판이 손저어 부르고있었다.    2년간 그들에겐 서로를 탐할수 있는 기회가 참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사고없이 넘겼었다. 순결을 지킨다는 그런 고루한 리유는 아니였던거 같다. 사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관념 자체를 모르고있다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향이도 특별히 그 욕구를 거절하려는 본능같은것을 가진것은 아니였다. 건이가 싫지 않았고 그가 막 충동적으로 달려들때는 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꼭 그 대목에 가서 건이가 아니면 향이가 리유없이 제어기능을 작동한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왜서 여직껏 남들이 다 하는 그것도 못하고 지내왔는지 스스로도 모르고있었다. 오늘에 와서 향이는 그러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고있었다.    자그마한 려관의 프론트에는 신수가 말쑥한 중늙은이가 있었다. 건이가 신분증을 더듬는 사이 중늙은이는 향이를 힐끔힐끔 건너다보고있었다. 그러건말건 향이는 수속을 끝마친 건이를 따라 룸안으로 들어갔다.    절망감때문인지 건이는 험하게 향이를 다루었다. 룸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벽쪽으로 밀어부치더니 긴 키스부터 퍼부었다. 전에는 둘데가 마땅치 않아 갈팡질팡하던 손이 어느새 로련하게 변신해 스스럼없이 궤춤안으로 쑥 들어왔다. 그건 처음으로 있는 일이였다. 향이는 웃몸을 건이한테 오픈한지는 꽤나 오랬다. 그러나 하신을 침범당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랑행위를 할때마다 허우적대던 그때의 건이가 아니였다. 당돌한데가 있었다. 향이는 저도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갔다. 건이가 하는대로 몸을 맡겨버렸다. 건이는 무대공연을 하듯 그녀의 옷을 한견지 한견지 벗겨냈다. 연후 훌쩍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 희미한 등불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출렁거렸다. 건이는 야수마냥 그녀의 몸우에 덮치더니 한입에 향이의 왼쪽 젖가슴을 물었다.  “아!” 아픔보다 짜릿한 느낌이 먼저 엄습해왔다.    건이는 부지런히 애무하면서 아래몸을 움직여 그녀의 다리를 벌리려고 무등 애썼다. 향이도 어느덧 황홀한 경지에 깊이 빠져들고있었다. 머리속에 무수한 꽃보라가 터졌다가 하얗게 비여가는 느낌이였다.   바로 그때 출입문이 벌컥 열리면서 향이의 아버지가 한달음에 뛰여들어왔다. 손에는 야구방망이같은 물건이 들려있었다. 그뒤로 프론트의 중늙은이도 따라들어왔다.    “쿵!” 미처 반응할사이도 없이 건이는 아버지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저만치에 나가 넘어졌다.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이 되였다.   “자식이, 오늘 죽여치우고말테다!” 아버지가 사나운 짐승마냥 울부짖으면서 몽둥이를 다시 쳐드는 찰나 향이는 부끄러움도 잊은채 알몸뚱이채로 건이의 몸우에 엎어졌다.    “아빠, 죽일려면 나부터 죽여요. 내가 건이를 여기까지 끌고왔어요. 이렇게 살고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빨리 죽여줘요!”   아버지는 라체의 딸이 민망했던지 얼굴을 외면하더니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옷 입고 얼른 꺼져. 꾸물거렸다간 이 참에 죽여버릴테다.”   아버지는 건이에게 호통치고 프론트의 중늙은이를 끌고 나가버렸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들은 마작친구였다. 향이가 언젠가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놀음돈을 갖다준적이 있었는데 그때 향이를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떠나간 건이는 다시 향이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향이를 철저히 잊으려는듯 전화를 꺼버리고 잠적하더니 얼마후에는 살던 아파트마저 팔아버리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하긴 머리가 깨진것보다 가슴속에 생긴 피멍이 더 아팠을것이다.    향이는 지금껏 건이를 려관으로 끌고들어갔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기어코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좀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부모를 설득했더라면 혹시 성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항상 향이를 괴롭혔다.     그런데 다시는 이 세상에서 만날수 없을것만 같던 건이가 갑자기 나타난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미팅을 요구하지 않고 매파를 내세워 맞선보는 형식을 취한것이다. 어쩌면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할수 있었을까?   건이는 아버지한테 한번 되게 맞으면서 정신이 펄쩍 들었다고 한다. 정말 자기가 무슨 체면에 향이를 허락해달라고 했던지 알수 없었다고 한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벌어둔 돈도 없었다. 여느 친구들처럼 늙은 부모들의 등을 쳐먹으면서 살수는 없었다.  얼마후 건이는 부모를 설복하여 아파트를 팔고 세집을 잡았다. 집 판 돈을 투자하여 친구 몇이서 포장회사를 설립했다. 아이템이 좋았던 관계로 회사는 설립 당해로 투자금을 회수하였고 이듬해부터 이윤이 나오기 시작했다.    “며칠전에 새 아파트를 샀어. 이젠 당당하게 청혼해도 될거 같더라.”   건이는 향이 엄마의 반대 리유에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원래 건이는 청도사람이였다. 청도에서 태여났고 청도에서 자랐다.    “킬킬…”   향이는 집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맞선 소식을 기다릴 엄마가 떠올라 걷잡을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가 궁금했다.    “아무래도 니 명에 왕청이 찰거마리처럼 들어붙었는 모양이구나.”   맞선 상대가 건이란것을 알고서도 이런 말이 나올수 있을지 의문이였다. 어쨌던 엄마한테는 엄청난 난제이겠지싶다.    향이는 눈 오는 길을 질척질척 걸었다. 올들어 처음 오는 눈이다. 눈은 내리면서 그녀의 마음처럼 녹고있었다.  왕년에 비해 올 겨울 청도는 많이 따스했다.    2017년 2월 2일  
25    개미 댓글:  조회:818  추천:0  2017-01-13
단편소설   개  미   장학규        9월달이 맞냐 의심할 정도로 이제 아침 일곱시인데 대지는 벌써 열기로 후끈후끈 달아있었다. 아직 몸을 몇번 휘젓지도 않았는데 몸이 끈적거려나면서 목덜미에 땀이 번져나기 시작했다.  이 동네는 대개 이렇다. 이맘때가 가을 호랑이라고 불리우는 무더위가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는 시기이다. 서둘러 가을을 불러들이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곳의 초가을은 오히려 여름을 압도할 지경으로 살인적이다.    경이는 여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6학년이 되도록 매일매일 두드려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있었다. 오늘도 엄마한테 질리게 난시 맞고도 면역이 되였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밥상에 마주앉아 느적느적 밥을 먹었다. 통학뻐스가 올 시간이 되였는데도 막무가내로 늑장을 부리는 경이를 보다못해 창학이는 딸애의 책가방을 한손으로 들고 무작정 집밖으로 나왔다. 매일이다싶이 반복되는 액션이였다.  (자식이 딱 개미같아. 밟혀죽을 걱정도 안하고. 아니 개미가 아니고 완전히 배짱이야.) 창학이는 저혼자 실실거리다가 탁 하고 침을 내뱉었다. 마침 길가던 개미 한마리가 난데없이 날아온 걸직한 액체에 파묻혀 허우적거렸다.  (어, 미안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다가가던 창학이는 한무리의 개미가 줄쳐서 어디론가 가는것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병사들처럼 일렬로 길게 행렬을 지어 걸음을 재우치는것이 장관이였다. 어떤 넘은 재주를 부리는지 갈지자 걸음을 하면서 다른 넘들의 앞길을 막고있었고 간혹 오던 길을 부랴부랴 되돌아가는 넘도 보였다. 아마 급히 나오다보니 집에 뭔가 두고 온 모양이라고 창학이는 생각했다.   창학이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동물에 남달리 련민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특히 몸체가 작은 곤충류는 그저 불쌍한 생각만 들었다.  이른 아침에 개미들은 무얼하려 가는지 알수 없었다. 일개미들이 먹이 찾으러 나가는지 모를 일이였다. 아직 날씨가 좋을때 미리 겨울 량식을 준비해야겠지.  찬찬히 여겨보니 놀랍게도 개미들의 집이 아파트단지내의 대리석바닥길 밑에 있는상싶었다. 대리석이 서로 이어진 틈서리에 작은 흙무지가 여러개 보였다. 그것도 한곳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개미의 집이 보였다.    “아빠 뭘해?” 창학이가 혀를 차면서 개미의 생존능력에 찬탄을 아끼지 않고있는데 어느새 왔는지 경이가 물었다.  “아니야.” “아니긴 뭐 아니야. 혀까지 낄낄 찼잖아?” “개미가 너보다 더 부지런해서 그랬다. 왜?” “그럼 개미 아빠 해” “그럴가?” 경이는 이젠 제법 입씨름을 할줄 안다. 전에는 고분고분하던 애가 요즘 들어서는 자주 대들군 한다. 저절로는 반항기라서 그렇단다. 세상 모르는게 없는 요즘 애들이다. 그래도 창학이는 딸애와 매일 토크쇼를 하는게 꽤나 재미있다.   부랴부랴 애를 다그치면서 대문을 빠져나갔지만 통학뻐스는 그때까지 오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늦다고 실컷 애를 들볶아도 열에 아홉번은 뻐스보다 먼저 도착하여 10여분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아마 경이가 심드렁해진것도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번에 딱 한번 통학뻐스보다 늦어지면 바로 전화가 날아온다.  “경이 아빠,  왜 아직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냥 안면몰수하고 버럭 한소리할가 하다가도 괜스레 애가 학교에서 미운 털이 박혀서 구박을 받을가봐 참군 했다. 바람 줄창 맞다가도 통학뻐스가 다가오면 허리를 굽석이는 퍼포먼스를 일삼아야 하는 자신에 비해 상대는 항상 당당했다는 억울함은 언제나 창학이를 불편하게 했었다. 그래도 뻐스보다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게 맞다고 항상 경이앞에서는 대범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다가 전번 학기에 한번은 하학시간을 한시간이나 넘겼는데도 뻐스가 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전화를 할가말가 수십번을 견주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전화를 넣었다.    “여보세요…” 자기도 한번쯤은 “왜 아직도 오지 않아요?”하고 말하고싶다는 충동이 일어날 즈음이였다. “아, 경이 아버님, 미안합니다. 이제 곧 떠날게요.” 통학뻐스 지도사 선생님은 이쪽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나름대로 련주포처럼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창학이는 한동안 어리벙벙한 상태에 빠졌다. 전화 씹은거 맞지? 그래 전화를 씹은거잖아. 스스로 자문자답하다가 불시에 울화가 울컷 치밀어올랐다.  사람 말 잘라먹어? 선생이란게? 생선 토막도 아니구 제멋대로 남의 말을 잘라먹어? 목구멍에 걸려 큰일 나려구 어디서 감히?  그러나 인차 화산같이 부풀어올랐던 분노가 허무하게 내려앉았다. 쳐든 핸드폰을 째지게 노려보면서 창학이는 이가 빠져서 말이 헛나가는것은 용서가 되여도 말이 저절로 빠져서 이가 헛나가면 큰일이라고 자신을 힘겹게 위안하고 있었다.    통학뻐스는 다시 반시간을 훌쩍 넘어서 왔지만 지도사 선생님은 왜서 한시간 반이나 늦어졌는지는 해석치 않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다시 훌쩍 떠나가버렸다.  (이런 제길!) 창학이는 지도사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경이한테 쏟아붓듯 저도모르게 꽥 소리질렀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어떤 사람이 학교 정문에다 흙을 잔뜩 가져다가 쌓아놓았어. 뻐스가 나올수 없어서 다른 뻐스를 불러서 그걸 타고 오느라고 늦었어.” 경이는 묘하게도 아버지가 화를 내는 대목을 잘 알고있었다. 그런 날에 정면으로 충돌하면 자기만 손해라는걸 잘 아는 경이는 또렷또렷하게 설명했다.  “흙은 왜? 웬놈이 흙은 왜 정문에 쌓아놓았는가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창학이는 그 길로 학부모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전 내린 폭우로 인해 학교 담장이 무너지면서 이웃공장의 창고 벽을 짓뭉개놓았다고 한다. 학교서 사람을 파견하여 보수해주겠다는것을 공장주가 거절하고 수만금을 내라고 협박했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저렇게 양아치 수작을 부린다는것이였다.    경이가 다니는 학교는 사립학교이다. 공립민족학교가 없어서 애를 한족으로 만들고싶지 않는 사람들은 목돈을 팔면서 그곳으로 보내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웃사이더의 처지가 늘 그러하듯이 뜻하지 않는 불상사들이 자주 발생하군 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너무 엄중했다. 지랄도 가지가지라지만 나어린 학생들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건 범죄행위나 다름없었다.    창학이는 그날로 시장 공개메일에 민원편지를 발송했다. 자신이 기자신분임을 먼저 밝히고 다시 국가지원이 전혀 없는 민족사립학교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이어 저런 불법행위를 엄단할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단순한 분쟁을 넘어 이미 법에 저촉했다고 강조했다. 며칠후 답복 메일이 날아왔다. 학교 담장이 무너져서 공장벽을 파손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고 쌍방이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했다고 알려왔다. 흙무지를 학교 정문에 쌓아놓은 행위가 학생들을 볼모로 잡은 위법행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석도 없었고 그 흙무지를 어떻게 한다는 처리의견도 없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창학이는 그런 답복이 돌아올줄 미리 알고있었다. 그래서 입만 쩝쩝 다셨을뿐 다시 질의를 하지 않았다. 정신님이 마실 다녀가신것도 아니고 알아서 말을 줄여야지 아니면 명이 먼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였다.    경이를 학교에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안해는 출근이 늦어졌다고 야단법석을 놓고있었다.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하나 내고 몇년간 오바마보다 더 바쁘게 돌아치는 안해이다.  창학이는 주방으로 직행했다. 생각대로 그릇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안해가 과장된 제스처로 설레발을 칠때면 대개 설겆이를 하지 않고 바로 나가기 위해서라는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있는 창학이는 심드렁하게 밥사발을 들고 식탁에 마주앉았다.  오늘은 주말이여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나흘을 출근하고 사흘은 자기절로 지배하는 화이트맨이다. 거꾸로 일주일동안 매일 열시간이상 인터넷을 헤매야 하는 “오타쿠”식 인간이기도 했다. 안해도 그걸 알고있어서인지 금요일만 되면 꼭 회사에 일찍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 창학이는 시무룩히 웃었다.    밥을 다 먹고 설겆이를 끝내고 치솔질하고 담배 한가치 피워 물고 쏘파에 다가가 티비를 켜기 바쁘게 폭발적인 뉴스가 흘러나왔다. 방금 조선 풍계리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약 5.0의 인공지진파가 감지됐다는것이였다. 후다닥 서재로 달려들어가 컴퓨터부터 켰다.    창학이는 뉴스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다. 영상화면이 아무리 직관성을 가진다해도 인터넷 속도와 규모를 당하지 못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인터넷밭은 벌써 발칵 뒤집혀져있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글을 볼수 있는게 창학이의 최대 우세이다. 그래서 한시간도 채 못되여 지진의 상세한 위치와 강도, 진원의 깊이 그리고 세계 각국의 즉시적인 반응 같은것을 인차 료해할수 있었다.    (오늘 주식이 또 폭락이겠구나!) 07년의 폭락사태와 지난해의 널뛰기장을 모두 겪어본 창학이는 속이 철렁했다. 10년이 다 되도록 본전도 못 찾아오고있는 창학이다. 그때문에 안해한테 심심하면 몰려댄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주식시장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창학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이제는 도가 틀때도 되였는데 아직도 조건반사적으로 술덤벙 물덤벙인 자신이 꽤나 멍청해보인다.  중국은 세계의 보편적인 논리와 질서로 판단하면 잘못이다! 바로 그거였다. 미국 연방 기준금리가 또 동결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때 증시가 올리 솟구칠줄로 믿었던 대부분 개미들은 곤두박질치는 주가로 인해 가슴을 졸여야 했다. 반대로 중국 증시가 신흥시장 지수 편입이 불발되였을때는 되려 선방했고 영국의 브렉시트 공포에도 상해종합지수는 상승폭을 키웠다.    도대체 이넘의 시장이 뭐가 어떻게 된 갈래판인지 창학이는 도무지 알수 없었다. 페어플레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마당에서 뛰여봤자 벼룩이지 싶다. 머리 썩이지 말자. 타률에 짓밟혀 사는 중생에게 사고력 요구는 사치가 분명했다. 자기 인생 자체가 사건사고에 세상에 이런 일이인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운명이란 소리도 하지 말자, 진짜 운명할수도 있는것이다.   창학이는 모니터에 박았던 눈길을 베란다로 돌렸다. 이 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공간이 바로 베란다이다. 웬간한 방 반쪽은 될 정도로 넓은 공간이다.    처음 입주했을때는 별로 폼을 잡는라고 인테리어를 멋지게 하고 의자와 차탁을 갖다놓고 식후 휴식공간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초라한 인생은 아무래도 말릴수 없었던지 하나둘 쓰지 않는 물건이 그곳에 쌓여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만 창고로 전락해버렸다.    그래도 풍류기는 그나마 남아있어서 해빛이 잘 드는 쪽에 흙을 반쯤 담은 스티로폼박스를 비치해놓았다. 그것은 경이의 시험전이였다.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면서 거기에 일년내내 채소를 심는다. 요즘은 배추씨를 뿌려서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고있었다.     불현듯 스티로폼박스벽에 시커먼 물체가 기여다니는것이 보였다. 눈이 별로 안좋은 창학이는 부시시 일어나 휘청휘청 베란다로 다가갔다. 개미였다. 설마 하고 둘러보니 그것도 한두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오가고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어느새 스티로폼박스 흙속에 개미구멍이 생겨있었고 베란다바닥은 물론 서재 마루바닥에서도 몇마리 넘실넘실 춤추며 보란듯이 기여다니고있었다.    (아, 어느새 이것들이…) 개미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개미는 한번 침입하면 거침이 없다. 그것도 굴을 만들 정도면 심각하다.    창학이는 급히 살충제를 찾아들고 일단 기여다니는 개미부터 저격했다. 한번 살충제를 맞은 개미는 몇발작 움직이지 못하고 바로 몸을 쪼그리고 죽거나 아니면 훌렁 번져져서 죽어버렸다. 내친 김에 흙속의 굴을 뚜져서 그곳에도 한줄기 시원하게 살충제를 분사했다. 개미들이 떼를 지어 죽어나가는 환영이 방불히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아차, 잘못 죽였나? 하나하나 잡아서 집밖으로 내버리면 될걸 가지고…) 창학이도 주식시장에서는 개미이다. 개인투자인으로서도 그렇고 약육강식으로 죽어나가는것도 개미와 그대로 닮아있다.  올해 주식시장에서 완커(万科)가 많은 화제를 몰아왔다. 바오넝(宝能)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맞서 6개월 넘게 주식 거래를 중단했던 완커가 거래를 재개하자마자 련속 며칠 하한가를 기록했었다. 그러나 왕스(王石)는 분명 개미는 아니였다.    점심을 먹고 오후장이 시작될때 마춤하게 깨여난다는것이 그만 막장쯤에야 소스라치듯 뛰여일어났다. 장세가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오히려 전날보다 조금 상승한 포인트에서 장을 마감하고있었다.    조금 있으면 경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창학이는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문을 나섰다. 애를 맞이하기전에 저녁장을 보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6학년이면 이제 저절로 갔다왔다할수 있는 나이이다. 그런데 아파트 앞 거리가 무법천지 차량들로 너무 붐벼 위험하다. 요즘에는 녀학생 실종사건도 자주 터져 도무지 마음 놓고 혼자 내놓을수 없다.    경이는 래년이면 중학교로 올라간다. 그게 창학이에게는 큰 골치거리이다. 어차피 현지 중학교로 진학해야 하는데 받아줄 학교가 마땅치 않다. 지금 살고있는 아파트 소속 중학교는 시골중학교이다. 단층으로 된 교실에 6~70명씩 가두어놓고 공부랍시고 시키는 락후하고 원시적인 학교이다. 시설이나 설비나 거의 80년대 수준이였다.   경이는 공부도 잘했다. 반급에서 항상 앞자리를 다투는 애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좀 좋은 학교에 보낼것을 충고하고있다.    그런데 창학이는 이곳에 호적이 없다. 인맥을 찾더라도 일단 호적이 있으면 좋은 학교에 붙기가 그만큼 우세를 가진다. 거기다 학교 소속 구역에 집까지 있으면 거의 입학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창학이는 안해와 상의하고 현재 사는 140평 되는 집을 팔고 실험중학교 부근의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곳으로 가면 겨우 80평되는 집밖에 사지 못한다. 그래도 애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창학이는 1년전부터 호적을 올리는 방법을 여러모로 수소문했었다. 시정부 규정에 따라 100평이상짜리 새 분양 주택을 구매하면 호적을 얻을수 있으나 창학이가 현재 사는 집은 중고주택이다. 대학생도 왕년의 졸업생은 호적 혜택에서 제외됐다.    그러다가 루적 점수로 호적을 얻을수 있는 방법이 생겨났다. 그 점수제대로 자기절로 두루두루 맞추어보니 요구 커트라인인 백점을 훨씬 웃도는 150점이 되였다. 무슨 수능시험도 대입시험도 아니고 그저 시민이 되는건데 커트라인이라니 한참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도 창학이는 진지하게 모든 서류를 챙겨들고 인력자원과사회보장국이라는 부서를 찾아갔다.    창학이를 맞아준 사람은 메주를 아무렇게나 주물러놓은듯한 20대 초반의 햇내기 처녀였다. 입가를 실룩거리면서 창학이가 내민 서류를 꺼내 훑어보는가싶더니 뭔가 하나를 던져왔다.    “이건 아니예요.” 보니 문학상증서였다. 성급이상 수상증서는 20점을 준다고 해서 하루종일 서재를 뒤져서 겨우 찾아낸것이였다.  “왜 안되죠? 거기에 성위선전부와 성민족사무위원회의 공인이 찍혀있잖아요?” “성위나 성정부의 공인이여야 해요.” “성위 선전부는 성급이 아닌가요?” “그건 청급이지 성급이 아니예요. 통지를 알아보지 못했나요?” 수평이 모자라다는 소리로 들렸다. 요런 발칙한것 봐라. 사타구니 습기도 안마른 계집년이 참한건 배우지 않고 나쁜 행실만 먼저 흉내내잖아. 자료나 받아서 정리하고 보관하는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나 하는 주제에 어디다 대고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넌 수평이 높아서 좋겠네. 비행기에다 물병 달고 온거냐? 창학이는 괜스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주머니에서 기자증을 꺼내 던져주었다.  “이건 몇점 되겠습니까?” 메주처녀는 한눈으로 흘끔 보더니 그대로 다시 던져왔다.  “이것도 안돼요.” “자격증도 30점이라고 했잖습니까?” “기술자격등급증서를 말합니다.” 그러더니 뭔가 다시 던져왔다.  “이것도 쓸데 없어요.” 작가증이였다.  “다른 자격증은 없어요? 용접공 자격증이라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전기수리공 자격증이라던가 하는걸 말이예요.” 그러니까 붓쟁이보다 땜쟁이가 더 좋다는 말이잖은가. 창학이가 입을 하 벌리고 억이 막혀있는데 메주처녀는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컴퓨터를 뚝딱거리더니 모든 서류들을 한꺼번에 테이블에 던져왔다.  “2점이 모자라요. 안되겠네요.” 어디서 또 2점이 떨어져나갔는지는 알바 없지만 아무튼 창학이는 안달아나서 금방 울화가 치밀어오르던것을 모두 잊고 톤을 낮추어 비굴하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가요?” “혹시 봉사활동같은데 다닌적 있어요?” “취재로 자주 다니기는 합니다만 별도 증명은 없습니다.” “그럼 헌혈은 해봤습니까. 헌혈 1차에 1점이거든요.” “아, 그래요?”   창학이는 두말없이 서류들을 챙겨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퇴근한 안해에게 2점이 모자란다는 얘기를 하기 바쁘게 안해의 입에서 고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독주 한잔 마시고 횡설수설하듯이 한동안 중국식 “카스트”제도를 성토하더니 맥이 진했는지 쇼파에 주저앉았다. 사업을 하면서 승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라는것을 잘 아는 안해는 결국 가슴으로가 아니라 뇌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였다. 슬그머니 창학이쪽으로 몸을 옮겨와 의논조로 물었다.    “피 한번 뽑으면 1점이라고 했나요?” “그렇게 말하더군.” “그럼 우리 둘 한사람 한번씩 뽑아요. 2점 모자란다고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내 한사람이 헌혈해야 할걸.” “한사람 이름으로 해달라지요뭐. 피 공짜로 주겠다는데 그런 요구 안 들어주겠어요?”   이틀이 지나서 시내로 일보러 나갔던 안해가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에 헌혈차가 있네요. 그런데 다른 사람 이름으로 피를 뽑을수 없다네요. 아무래도 당신이 와야겠어요.”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달려가니 안해는 헌혈차의 그늘밑에 맥없이 쪼크리고 앉아 나무꼬챙이로 바닥에 뭔가 신경질적으로 긋고있었다. 기진맥진하듯 어깨가 축 처진 왕짜증난 모습이였다. 창학이는 코마루가 찡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사장 명색을 여러해동안 하면서 안해가 저렇게 기가 죽어서 있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었다.    (자식이 뭔지 쯔쯔) 창학이는 안해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곧바로 헌혈차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안해도 뒤따라 들어왔다.  이젠 몸매가 망가질대로 망가진 사십대의 중년 녀인 둘이 무슨 이야기인가 속삭이다가 창학이가 들어서니 하던 말을 멈추고 별로 반갑지 않다는듯 심드렁한 어투로 물어왔다.    “헌혈하시겠어요?” 창학이는 말하기도 귀찮다는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두사람이 번갈아가며 아침에 기름기 있는 음식 먹었냐 술은 먹었냐 요즘 감기 걸리지 않았냐 약은 먹었냐 몸에 무슨 질병은 없냐고 물어왔다. 창학이는 무작정 머리만 가로저었다.    “선생님의 키와 몸무게로 보아서 400ml은 뽑아도 괜찮겠네요. 400ml 뽑을가요?” “아니오. 200ml 만 하세요.” “너무 적은데요.” “그럼 300ml 하세요.” “아예 400ml 뽑으면 안돼요? 많은 분들이 그 정도로 헌혈하는데요.” “헌혈도 강박으로 하는겁니까?” “아, 아니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해가 알수 없다는듯 물어왔다.  “400이나 300이나 별 차이 없겠는데 왜 그렇게 화내고 그랬어요?” “사장님, 장사 그렇게 하세요? 며칠후 또 한번 헌혈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뽑고 나중 죽어라구요?” “아…” 안해는 그제야 무슨 영문인지 알았다는듯 고개를 까닥까닥해댔다.  그러나 며칠후 창학이는 단숨에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전번날 헌혈한 증서를 가지고 다른 헌혈차를 찾아가니 그곳 사업일군이 외성인을 보듯이 창학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는것이였다.  “공익사업에 동참하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규정상 안되겠습니다.” “왜요?”   창학이는 사색이 되여 외마디 소리를 뽑았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유일한 희망이 동강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엄습해왔다.    “전날에 의사가 400ml를 헌혈하라고 충고하는걸 무서워 300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이 며칠 지내보니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고해서 200쯤 더 헌혈해도 괜찮겠다싶어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건 알겠습니다만 헌혈량에 따르는것이 아니라 헌혈차수로 판단합니다. 두 헌혈사이 시간은 반년이 되여야 합니다. 손님의 신체건강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글쎄 제가 괜찮다는데도 안됩니까?” “국가규정이 그래요. 감사합니다.”   창학이는 풀이 죽어 돌아왔다. 점수제 신청은 이번달로 마감한다. 반년후에야 다시 헌혈할수 있다면 결국 점수제에서도 1점에 목매달게 된것이다. 창학이는 비참한 마음에 아무나 붙잡고 푹 취하고싶었다.    그후 며칠동안 창학이는 안해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았다. 깔아준 멍석우에서도 못했다는 자책감은 쉽사리 가셔지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생각이 항상 무협지수준이라는 느낌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였다. 차라리 사막에다 배를 띄우고 말지 그렇게 자책하고 있는 와중에 하루는 안해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걸어왔다.    “여보세요.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 순리에 따라요. “ 하느님 맙소서. 아침 메뉴 같은걸로 먹었더니 견해도 같아졌네. 부부란 이심전심으로 정말로 통하는데가 있다고 속으로 한탄했다.    늘어지게 시장을 보고 돌아왔지만 그때가지도 통학뻐스는 오지 않았다. 늦은 오후 시간에도 해볕은 마냥 따갑다. 창학이는 가로수 그늘밑으로 찾아들어갔다. 10년도 더 되였을법한 플라타나스 나무이다. 여러해전에 다 큰 나무를 기중기로 심던 장면이 떠올라 창학이는 허글픈 웃음을 떠올렸다. 식수는 애목을 골라 심는걸로 알았던 창학이는 기중기로 그것도 10메터가 넘어보이는 나무를 옮겨다 심는 장면을 보고 그저 입을 딱 벌렸었다. 저런 나무들을 어디서 파오는지 알바 없었고 저렇게 심어서 살아날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나무들은 용케도 살아났다. 물론 어떤 나무는 일년내내 링거를 달았었다. 좀 학문이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건 영양제라고 했다.  전에 링거를 맞던 자리가 아직도 남아있냐를 살피던 창학이는 장관의 장면에 또한번 전률했다. 개미 대군이였다. 한줄로는 줄쳐 올라가고있었고 다른 한줄로는 쉬임없이 내려오고있었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를 살펴보았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려서 가는 길도 어디인지 끝없이 줄이어 행군하고있었다.    창학이가 싱겁게 아래우를 살피고있는데 웃통을 벗어던진 웬 청년이 이상한지 다가와 따라서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웬 영문인지 알았다는듯 갑자기 땅바닥의 개미행렬을 구두발로 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했다. 머리나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개미들이 여기저기 나딩굴었다. 그래도 개미들은 용감하게 계속 줄이 이어나갔다. 청년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나무에 다가가더니 우로 기여오르는 개미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질러 죽이는것이였다. 그렇지만 개미들은 여전히 포기를 모르고 뒤를 이어 오르고 또 올랐다.    창학이는 차마 눈뜨고 그 란폭한 거동을 지켜볼수 없어 거리로 눈길을 돌렸다. 저만치에서 통학뻐스가 달려오고있는것이 보였다.                                                        2016년 9월 청도에서 
24    26년 댓글:  조회:892  추천:1  2016-10-21
단편소설    26년         1. 발치에 책 한권이 널부러져 있다. 겉표지는 어느새 떨어져나가고 하아얀 속지가 부끄러움을 잃고 척 드러누워 있다.  친구집에서 저 책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책가위는 있었다. 검은 색이 주바탕이 되어진 어눌한 디자인의 책이었다. “26년”이란 제목의 책이었는데 소설책인지 시집인지 아니면 사회교양책인지 회억록인지 또는 어떤 다른 유형의 책인지 전혀 알바 없었다. 그런 분류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또 알고싶은 마음 자체도 없었다.    책이라는 물건에 관심을 가져보기는 어제가 처음이었다. 무료해서 막 미칠 것 같은 경우를 여러번 당하고나서 그럴 때 혹시 책이라도 몇장 뒤적거리면 하다못해 숨이나마 고르게 내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어들었을뿐이었다.   친구는 책이 아까와서 그저 죽어가는 상통을 지어보였다. 책이 할아비도 아니고 돈덩이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가슴 아플까 싶었다. 하기사 책보다는 밉상인 손님이 싫어서 눈쌀을 더 많이 찌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기는 했었다. 술 한잔 얻어먹는 게 그렇게 고역인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진이는 베개를 등밑에 받치고 누운채로 발을 이불밖으로 내밀어 책을 당겼다. 고시원 방은 난방이 되어있지 않아 발을 꺼내놓기 바쁘게 오싹해났다. 칼로 에이는듯한 추위가 발등을 통해 금세 대뇌로 전달되어왔다. 진이는 미처 책을 다 끌어오지 못하고 급히 발을 이불속으로 다시 숨겼다. 이불속은 노가다판에서 친한 손씨 아저씨가 창고 구석에서 뒤져냈다는 손바닥만한 전기담요 덕분에 그나마 따스했다.    책은 무릎 부근까지 올아와 있었다. 손을 내밀어봤지만 한뺌 차이 정도로 잡혀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발을 내밀어 걷어올리면 바로 잡을 수 있을 듯도 싶지만 진이는 그러고싶지는 않았다.  올해는 왕년에 비해 별로 춥지 않고 따스한 편이라고 매스컴들이 맨날 아양을 떨고 있지만 정작 난방이 안된 집에서 살아들 보시라고, 그러면 추위가 무엇이란 걸 금방 알게 되실 거라고 진이는 괜히 속으로 심술을 쓰고 있었다. 사실 진이도 크게 추위를 타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창 젊은 시절 고향에서 뛰놀때는 영하 30도 추위에도 솜옷 따위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지난 번 청도로 날아갔을 때도 홑바지에 팬티 바람으로 온동네가 먼지 나도록 뛰어다녔었다. 그게 옆사람들 보기에는 크게 놀랄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득한 옛날에 유행했던 국방색의 군용솜외투를 온몸을 감싼 그 자식이 얼굴을 뒤덮은 구레나릇을 만지면서 뭐랬던가? “타마디, 이넘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여.” 분명 첫마디가 그랬었다.  “이 날씨에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이런 차림새로 나올리 없어. 암, 그렇구말구. 거시기 얼어떨어져 개 주워먹게 멀리 던져버리고 말아. ”   고작 영하 2도에 엄살을 떠는 놈팽이가 진이에게는 더 이상한 넘으로 보였다. 그렇게 놈팽이들을 우습게 본 덕분에 진이는 팬티 한장 달랑 남겨진채로 어느 생소한 바다가에 버려졌다. 주위에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산자락이었다. 차디찬 바다바람이 막힘 하나 없이 그대로 불어와 훌 온몸을 한번 감아돌고 달아나군 할 때마다 전율이나 하듯 후두둘 떨려났다. 고향의 겨울날씨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떠나올 때의 서울과도 많이 달랐다. 다행히 30여년 다져놓은 몸이 그런대로 쓸만 했다. 그리고 산등성이를 돌아나오면서 뜻밖에도 떠돌이군들이 지어놓은 움막 비슷한 집 한채를 발견하였고 집앞의 나뭇가지에 남루하기는 해도 대수 몸에 걸칠 수 있는 옷견지들이 걸려있었다.  (자식들이 아직 독하지는 못하군. 흐흐흐)   진이는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성은 산에 둘러싸여 있었고 산에는 싸리나무들이 무리져 자라고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겨울 불쏘시개로 싸리나무를 베어가군 했다. 싸리를 베어간 자리에는 뽀죽뽀죽한 그루터기들이 서슬 푸르게 남아있다. 그속에 맨발로 서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진이는 씨물씨물 웃음이 나왔다.            2. “광이가 왔다.” 엄마가 전화로 이런 말을 걸어왔을 때 진이는 이상야릇한 전율을 느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며칠째 광이가 시도때도 없이 머리속에 떠올랐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호랑이도 제 소리 듣는 귀는 열두자란 말이 그른데 없는 모양이었다.    단풍이 든 산야에 싸리그루터기가 송곳처럼 촘촘히 서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치는 가운데 맨발의 소년이 막무가내로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루터기를 밟지 않고 이 싸리밭을 벗어날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린다.    “너한테 여러번 전화했는데 자꾸 핸드폰을 끈 상태더란다. 그래서 우리한테 연락왔더라.” “요새 밧데리 다 나간줄 모르고 있었소. 그런데 광이는 왜 왔다우?” 엄마는 미처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마 광이가 옆에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 난처했을 것이다. 엄마는 광이 이름만 나와도 별로 기죽은 목소리다. 광이는 공무원 출신이다. 옛날 같으면 떵떵 소리치면서 살 넘이다. 그런데 1년전부터 심심하면 전화를 걸어와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묻군 했다.    진이는 이불속에서 기어나와 잽싸게 옷을 주어입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쳐들어 양말을 꿰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이면서 절반쯤 양말이 꿰진 발로 꽝하고 무엇인가 밟았다. 인츰 심한 통증이 발바닥으로부터 엄습해왔다. 발을 들어보니 벌써 일주일째 발치에서 나딩굴던 책이었다. ‘26년’인가 하는 제목의 그 책은 진이가 여러날 째 발로 끌어왔지만 결국 손에 잡지 못한 그 책이었다.  부랴부랴 7호선 지하철을 타고 조선족들이 줄레줄게 모여사는 대림으로 가면서 진이는 그냥 싸리밭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진이도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광이가 약속대로 돈을 가져오지 못하면 싸리밭에 세워둘거라고 엄포를 벌써 놓았었다. 진이네는 그 경고대로 실행했을뿐이었다.  광이도 사실 좀 그랬었다. 전처럼 곱다랗게 돈을 가져와 진상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진이네는 그 돈으로 학교 부근의 소매점에서 담배랑 먹을 거랑 사서 뒷산에 가 하루종일 즐기면 될 일이었다. 정 돈을 구할 수 없으면 아예 종적을 감추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광이는 고지식하게 자기 발로 학교에 걸어와 돈을 더이상 구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래서 진이네는 광이를 우격다짐으로 뒷산으로 끌고 갔다.    뒷산은 진이네의 아지트와 같았다. 그곳은 일년사시절이 모두 경치였다. 봄에는 민들레꽃이 샛노랗게 덮혔고 여름에는 함박꽃이 활짝 피어났다. 가을에는 개암을 까먹기 좋았고 겨울에는 산토끼가 뛰어놀군 했었다. 이맘때는 동네방네에서 싸리나무 가을을 하고난 뒤여서 그루터기들이 부채살처럼 쫙 뻗어나간 계절이었다.    진이네는 단짝이 넷이었다. 진이를 포함해 둘은 부모가 한국에 가있고 하나는 고아였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감옥에 수감되어있었다. 모이다보니 어떻게 끼리끼리 그렇게 모여졌다. 솔직히 진이는 돈이 별로 그립지 않다. 할머니한테 입만 벌리면 매일 백원 하나씩은 타내올 수 있었다.  “가져가라. 먹고싶은 걸 다 사먹어. 네 에미애비 다 니를 위해서 그 고생이지.”  할머니는 초중에 올라온 진이를 따라 현성에 세집을 잡은 후로부터 손자가 남한테 업수임당할가봐 매일이다싶이 용돈을 주머니에 질러주군 했다. “아끼지 말고 팍팍 써라. 그리구 혼자 먹지 말고 옆에 애들 더러 나눠줘. 그래야 친구들이 많이 생긴다.”   아닌게 아니라 욱이가 먼저 접근해왔다. 고아원에서 자란 욱이는 먹을 것만 보면 밸까지 다 꺼내주는 인간이었다. 다음 철이가 자기네 패거리에 끼어들라고 제의해왔다. 감옥에 갇힌 깡패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거친 철이는 패거리 두목노릇을 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민이는 처음에 철이랑한테 돈을 뜯기다가 나중 그들과 섭쓸리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초중 3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다른 애들은 대부분 떨어져나가고 그들 넷이 단짝이 되어 매일 붙어다니군 했었다.    “여기가 좋겠지?” 시다바리나 다름없는 민이가 철이에게 잘 보이려는듯 물었다.  “니 보기에는 어떻니?” 철이가 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왕좌왕하는 철이도 진이한테만은 가끔 양보하군 했었다. 언젠가 욱이를 때리는 철이를 말리다가 진이와 철이가 오히려 대판 싸운적이 있었다. 물론 주먹바닥에서 뼈마디를 굳혀온 철이한테 얻어맞긴 했지만 진이의 강기에 철이도 얼마간 주눅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후부터 철이는 진이한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글쎄, 벌 주는 거니까 비슷하면 되겠지.” “애들아, 동창끼리 이러지 말자. 나중 생기면 또 줄게.” 광이가 아무리 손을 비비며 사정해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넷은 한사코 발버둥치면서 뻗치는 광이를 싸리그루터기들이 촘촘히 박힌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약살바른 욱이가 광이의 구두를 벗겨서 저만치 던져버렸다.    그 일로 인해 진이와 철이는 퇴학처분을 받았다. 욱이는 오갈데 없는 고아라고 학교에서 특별히 처분을 보류했고 민이네는 교장한테 많은 돈을 썼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진이의 엄마도 그 소리를 어디서 얻어듣고 자기도 돈을 쓰겠다며 얼리고 닥쳤다. 불법체류 신세인 엄마는 그저 전화로 애걸복걸할 수밖에 없었다.    “진이야. 제발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응? 앞으로는 대학 나오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받아.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는지 알잖아. 모두 너를 위해서잖아.”   그러건말건 진이는 다시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20여 년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진이의 엄마, 아버지는 규제 조건이 완화되면서 자진신고로 귀국했다가 2년 후 다시 한국으로 떠났다.  “니 결혼할 돈도 벌고 아파트도 사줘야지.” 엄마는 떠나면서 진이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원래 공부를 잘한 광이는 그후 고중을 거쳐 대학까지 나왔고 배운 전업에 따라 현성 공상국에 배치받았다. 국가적인 직업 배치가 없어진 마당에 쉽지 않게 좋은 운이 따라준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잘 나가는 거 같던 광이가 몇년 후의 어느날 갑자기 직업을 때려치우고 청도로 진이를 찾아왔었다. “처음에는 돌멩이를 주워 들고 싸리그루를 하나씩 짓이기면서 한걸음씩 나왔어. 그런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 나중에는 옷을 벗어 오른 발 감고 바지를 벗어 왼발 감고 막 걸어나왔지. 여러번 찔려 피도 나구. 약 오르니까 아픈줄도 모르겠더라. 그렇게라도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서서 죽겠니?” 오래전 시절의 일이라 광이는 대수롭지 않게 술을 마시면서 마실삼아 얘기했지만 진이는 속이 질려서 말이 아니었다.   (그때 왜 산동넘들처럼 옷까지 벗겨버릴 생각을 못했을까? 쿡쿡. 그랬으면 우리가 살인죄라도 먹었을까?) 결국 보면 옷을 벗기고 신발을 남겨준 산동넘들이나 신발을 벗겨놓고 옷견지는 고스란히 놔둔 자기들이나 아둔함의 극치랄까 전형이랄까 아무튼 피차일반에 피장파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전철속에서 혼자서 키들거리고 있었다.        3.   광이는 사흘만에 학원에 취직이 되었다. 중국어를 배워주는 학원이었는데 숙사도 있어 광이는 출근하자 바람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너도 아무 일이나 찾아해. 노가다 뭐라니? 남들 다 하는 건데.” 광이는 떠나면서 이렇게 뇌까렸다.    (자식이, 누군 그런 도리 몰라서 이러고 있는줄 알아? 배 부른 사람이 굶은 넘의 배고픔을 모른다더니 체…) 진이는 괜스레 발치에 널부러진 “26년”을 흘겨보았다. 광이가 이틀간 와서 묵으면서 어느새 다시 발치까지 밀려나간 책이었다. 진이는 별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발을 내밀어 책을 끌어오려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또 무릎 근처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벌써 한달째 진이는 이러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청도를 한번 다녀온 후부터 만사가 귀찮아졌고 무슨 일이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몇년을 굴러온 노가다판이 몸서리가 나도록 거부감이 생겼다. 막돼먹은 오야지의 거친 욕지거리가 점점 역겨웠고 먼지와 땀범벅인 현장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래서인지 평소 현장에서 남달리 진이를 잘 챙겨주던 손씨 아저씨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진이는 진한 감동보다 먼저 스트레스 비슷한 짜증부터 앞섰다.    “아우야, 왜 안나오는겨? 어디 아픈겨?” “아니, 그저요. 이만 끊어요.” “글라므 안된다 아이가. 돈 벌어 아들내미 대학 보낸다믄서?” “글쎄요…” “그게 무슨 대답이가? 교포들 통병이더라꼬. 개주머이에 은자 몇푼 들면 정신 싹 이자뿌리는 거…” 손씨 아저씨는 안타까운듯 높은 톤으로 질책했지만 진이는 오히려 심드렁했다.    정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싶어진다. 그런데 다른 곳에는 취직이 잘 되어지지 않는다. 가방끈이 짧아서 어디에 이력서를 마구 들이밀 게제가 못된다. 이럴 때면 자기도 모르게 광이가 못내 부러워진다. “야야, 걷어치워. 그따위 공부해서 뭐해? 대학 물 먹은 넘이 초중도 못나온 나를 찾아왔잖아?” 허여멀쑥한 광이가 반듯한 양복 차림새로 청도에 왔을 때 진이는 비단에 싼 개똥이라고 속으로 비웃었었다.     그런데 그 광이가 진이의 소개로 한국기업의 현장 관리로 들어간지 반년도 되지 않아 사무실로 불려 올라가더니 인츰 계장 뱃지를 궤찼다. 회사근무 10년 경력에 얼마전 겨우 계장이랍시고 나돌기 시작한 진이에게는 얼굴이 띠끔한 일이었다. 다시는 광이앞에서 으시대지 못했고 곧 초등학교에 진학할 아들애에게 공부왈을 훈학하기 시작했다.   “우리 명이는 꼭 공부 잘 해야 해. 알겠어? 우리집에서도 대학생이 나와서 이 더러운 운명을 좀 개변시켜야 해.”   그 명이를 위해 진이는 결연히 10년 회사 노하우를 박차고 엄마가 있는 서울로 떠났다. 엄마네는 선후 20여 년을 그곳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진이를 잘 먹이려고 아득바득했고 지금은 진이의 아들 명이를 위해 목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장모가 돌보는 명이는 공부도 잘했었다. 3학년이 되도록 해마다 3호학생을 따왔고 계속 학년에서 1등을 했다. 민영학교이지만 그래도 조선족학교여서 우리말을 또박또박 잘도 했다. 그런 걸 마누라가 중국에서 살자면 한족들 무리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기어코 2만원이나 퍼주고 좀 괜찮다는 한족학교로 전학시켰다. 탈은 그때로부터 생겼다.    “자네 아무래도 한번 들어왔다 가야겠어.” 장모의 전화를 받은 진이는 느닷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누라가 아닌 장모가 전화올 때는 호소식인 경우가 거의 없다. 자기 마음대로 명이를 한족학교로 돌려놓고 아내는 성질이 불같은 남편앞에서 언제나 숨 죽이고 지냈다. 명이가 반간부도 못하고 성적이 중등에 머물고 3호학생도 되지 못했다는 등등 소식은 모두 장모가 전해주고 있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진이는 화가 동했고 그러면서도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신 할머니는 그때 어떻게 아버지 엄마에게 자기의 소식을 전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한번 학교까지 따라가봐. 무슨 일이 꼭 있을 건데.” 장모의 부탁대로 진이는 명이의 뒤를 멀찌감치 따라갔다. 4학년 애답지 않게 걸음이 무거웠다. 집에서 거리 두개를 사이둔 학교까지 가는데 명이는 꼬박 반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가다가는 주춤 멈춰서서 거리를 멀거니 바라보는가 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하군 했다.    학교 정문앞에는 머슴애들이 한무리 뭉쳐있다가 명이를 발견하고 다가오더니 빙 둘러섰다. 그중 명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자식이 다짜고짜 명이의 책가방을 들추는 것이 보였다. (오, 지금은 소학교때부터 이런 일을 하는군. 많이 진화했네.” 진이는 광이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광이의 아버지는 그들이 광이의 호주머니를 들추는 것을 발견할 때면 “이넘들 그러면 못써” 하고 훈계하지 않으면 곧추 담임선생님께 일러바치군 했다.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 애들의 버릇을 고쳐주지 못한다는 것을 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진이는 큰 기침을 둬번 한 후 애들을 헤집고 들어갔다. 아버지를 발견한 명이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내 이 애의 아버지인데 어디 너 한번 보자.” 진이가 꽁무니를 빼려는 우두머리의 팔목을 틀어잡기 무섭게 그넘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야마야, 사람 죽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눈물콧물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진이는 사정없이 애를 담장 밑으로 끌고가 귓쌈을 연속 서너대 후려갈겼다. 야들야들한 뺭에 금세 굵은 손가락자국이 새겨졌다.  “이제 한번만 더 그러면 발목대기를 분질러버릴테다. 알았어?” “네, 제발 용서해주세요.”   이틑날은 보란듯이 명이와 함께 가지런히 걸어서 학교에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 버릇들이 덜 떨어진 모양으로 학교 정문에는 여전히 한무리의 애들이 몰려있었고 그 속에는 어른도 둬사람 섞여있는 거 같았다. 진이는 별 생각 없이 그들 옆을 스쳐지나 명이를 학교내로 들여보내고 돌아섰다. 그때 온 얼굴에 구레나릇이 덮힌 웬 사나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국방색 군용외투는 때가 번지르했고 수염에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잔뜩 게발려있었다. 어느새 진이의 전후좌우에 시커먼 장정들이 빙 둘러서있었고 허리에는 딱딱한 물건이 대여왔다.  “어이 친구, 우리랑 어디 좀 가자구.” “저 애가 당신 아들인가? 몇달째 우리애한테서 돈을 빼앗아냈다구.” “이 자식이 사람 때려놓고 지금 나하고 도리 따지고 있네.” 날아오는 주먹을 냉큼 한손으로 받는데 홀옷을 입은 허리춤이 또다시 섬뜩해왔다.  “친구야. 양아치처럼 비겁하게 이게 뭐야? 자신 있으면 우리 단둘이 한번 붙어보자.” 구레나릇은 의외인듯 놀라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이 자식이 어딘가 돌았어. 그렇지 않구서야 이 날씨에 이런 차림새로 다닐 수 있을라구. 바다가에 던져 얼군 새우 만들어버려. 거시기 떨어지면 강아지들 좋아하겠네 흐흐흐”   놈팽이들이 너털 웃음을 남기고 돌아서는 그 뒤에 대고 진이가 한마디 박았다.  “이걸로 끝내는 거다. 아니면 니들 모두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이틑날 진이는 여전히 명이를 앞세우고 학교로 갔다. 애들 우두머리인듯한 그 자식이 먼저 와서 우물쭈물하더니 무슨 보따리를 말없이 내밀었다. 진이가 헤쳐보니 전날 벗기운 자신의 옷가지들이었다.  다음날도 명이와 함께 학교로 갔다. 그날은 아무 사람도 정문에 서있지 않았다. 하학하여 집에 돌아온 명이도 이 며칠은 자기를 괴롭히는 애들이 없다고 말했다.        4. “저녁에 뭘해?” 광이가 이런 전화를 걸어왔을 때 진이는 또다시 “26년”을 무릎 근처까지 거의 끌어오는 중이었다.  “내사 뭐 할 일 있나?” 진이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손으로 책을 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한뺌 정도 거리가 모자랐다. “그럼 곱창에다 한잔 빨자. 내 쏠게.” “그래, 알았어.”   불현듯 찬바람이 불어치는 바닷가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나무가지에 걸린 헌 옷가지들을 벗겨내어 벌거벗은 몸을 감싸던 자신의 모습이 방불히 보인다. 고향의 뒷산도 환영인듯 나타난다. 그속에서 광이가 옷과 바지를 벗어 발을 동여매고 있다. 아득하게 검푸른 색으로 펼쳐진 바다와 새노랗게 물결쳐간 산자락은 칼라만 달랐을뿐이지 그 기세나 웅장함이나 멋스러움은 별로 다를바 없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고 될법도 한 일인가? 주제넘은 자식같으니라고. 타마디.” 구레나릇은 분명 그 한마디를 내뱉고 시다바리들을 이끌고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낯설고 황량한 바닷가에는 파도소리만 요란했다. “저 넘을 저렇게 놔두고 가도 괜찮을까?” 광이를 홀로 야산에 세워두고 나오면서 마음 약한 민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었다.    그러나 진이나 광이나 둘 다 살아남았다. 죽지 않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서울의 한 거리에서 마주 앉아있다. “어서 마셔라. 술 식겠다.” “한잔 달리자.” “응, 한잔 댕겨라.” 둘은 승부 내기나 하듯 연거푸 술잔을 기우렸다. 인차 술 기운이 오르고 얼굴들이 붉어졌다.  광이는 난생 처음 많은 말을 했다. 어느날 문뜩 술을 먹자고보니 주변에 온통 노인들이 포진해있었고 유일한 학교가 폐교되면서 몇 안되는 어린이마저 사라져갔다고 사직한 원인을 말했다. “그대로 뒀다간 아들애를 망치겠더라고. 안 그래도 만날 중국말만 해요. 우리 다닐 때는 한 학급에 세개 반씩 애들이 와글와글했었는데…” 진이는 또한번 가슴이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싸리나무는 곧게 자라는 것보다 비스듬히 자라는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가을할 때도 낫을 사선으로 세워가지고 베기에 그루터기가 대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기게 된다.    광이는 고향을 떠나기 전날 뒷산에 올라갔다고 한다. 마침 그때가 가을철이어서 옛날처럼 싸리밭에 다시 서보았다. 물론 신은 신은채로였다. 이제는 누구도 그의 신을 벗겨버릴 수 없었다. 돌을 들어 싸리그루터기를 짓이겨보았다. 쉽지 않았다. 돌이 빗나가면서 싸리그루에 손이 찔리기도 했다. 살짝 스친 거 같은데도 핏방울이 줄레줄레 흘러나왔다. 광이는 그 상처를 처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루터기 한개를 짓이기는데 몇분이 걸린 거 같았다. 열서너살 나이때 어떻게 그것들을 짓이기면서 나왔던지 스스로도 놀랍고 장했다. 그런 골기와 용기로 세상을 마주하면 못 이겨낼 일이 없을 거 같았다. 청도를 선택한 이유는 조선족이 많이 모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족 민영학교도 있어서 애를 바로 입학시켰다. 그런데 입학 당시 두개 반급이던 것이 일년후에 한개 반급으로 줄어들었고 다음해는 스물명 좀 안되게 남았다. 고향의 전례를 답습하는 모양새였다. 주위 사람들이 다시 여기저기 떠나기 시작했고 또 어떤 집들에서는 애를 한족학교로 옮겨갔던 것이다.   광이는 한국을 떠나 다시 청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아들애가 성장하는데에는 그나마 청도만큼 적합한 고장이 없을 거 같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남이 모두 포기한다고 하여 자신도 거기에 휩쓸려서 안될 일이라고 모박았다. 바람 맞으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격이지만 어쩌면 진이의 생각과도 비슷했다.    “오늘 올나이트(通宵) 가는 거야.” “안돼. 술 여기까지 하고 찢어지자(分手).” 광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밖으로 나온 진이는 기지개를 켜면서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겨울기운이 페부를 시원하게 훑어주었다.    요즘 기온이 뚝 떨어질 것이라고들 한다.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추위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진이네가 자랄 때는 고향의 겨울은 마냥 30도 밑에서 흘러갔다. 그래도 재미있기만 했고 훈훈하기만 했다. 고작 이따위 추위가 다 뭐냐?!   진이는 청도의 그 바닷가에 다시 찾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이가 고향을 떠날 때 뒷산의 싸리밭을 찾은 것처럼 자기도 그 바닷가에서 한번 안면몰수하고 버럭 멋지게 성질 한번 써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거 같았다. 아무튼 개같은 인생에 엿같은 일밖에 더 있을까 싶었다. 하기야 여래불도 물에 빠지면 저절로 헤엄쳐서 나와야 한다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발악밖에 남은 게 더 없겠지.    진이는 약간 정신이 가출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찬공기가 다져진 집안은 냉랭하기만 했다. 전기담요에 전기를 올리고 이불속에 기어들어가려다가 문뜩 여직껏 발치에서만 맴돌던 책이 떠올랐다. “26년”이던가 하는 그 책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광이의 연락을 받고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던 책이었다. 이불을 발칵 뒤집어도 “26년”은 어디로 기어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절로 발이 달려 달아났을리는 없었다. 도둑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출입문을 점검해보았으나 문을 뜯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시 이불을 뒤집었으나 여전히 책은 보이지 않았다.    “26년”이 잃어진 것이다.     진이는 그 “26년”을 꼭 찾아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여직 한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책이었다. 그 컨텐츠를 확인하고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믿고 있었다. 
23    빈하로 레전드 댓글:  조회:902  추천:1  2016-04-08
    단편소설   빈하로 레전드     그해 나는 스물두살난 애숭이 남자애였다. 코밑에 달린 수염 몇대를 치켜세우면서 남자인체 허세를 부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어쩌다가 청도의 어느 거리바닥에 내팽개져 있었다. 그 거리는 빈하로라고 불리웠으며 이름에 걸맞게 이촌하가 바로 옆에서 흐르고 있었다.  90년대도 반나마 훌쩍 지나가면서 세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진하게 사람들을 내리누르던 무렵이었다. 행운스럽게 두 세기를 살게 된 사람들이었지만 얼굴들은 그렇게 밝지도 흥분되어 있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같이 생계에 시달린 축 처진 모습들이었다.  특히 빈하로에 기생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라는 테마에 별로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빈하로 바로 남쪽에는 이촌하 재래시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홀쪽하게 말라버린 강바닥에 알록달록한 천막들이 길다랗게 펼쳐진 노천시장이었다.  청도의 아침은 대개 여기서부터 열린다. 날이 어스푸레 밝아지기 바쁘게 여기저기서 딩강댕강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그러면 빈하로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가들이 따라서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다.  길이가 2킬로도 되나마나한 빈하로에 한글간판을 내다 건 상가만 저그만치 80개가 넘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당이나 상점을 내놓고도 여관, 노래방, 커피숍, 헤어샵 등이 촘촘히 들어서있었다.  나는 이 거리에 들어설 때마다 저도모르게 이상야릇한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진지도 모르고 흐리멍텅하게 22년을 고스란히 지켜온 동정을 잃어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빼았겼다고 형용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즈음에서 여자란 물건을 바로 알아버렸다. 마치 헤어샵이 무엇일가 갸우뚱하다가 그대로 끌려들어가 머리를 깎고 나온 것과 같은 버전이었다.  내가 이 거리를 이틀만에 다시 찾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저앞 서울헤어샵 바로 길 마주켠으로 사람 둘이 비스듬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20여 미터 들어가면 창문에 “대박소개소”라고 쓴 나무패쪽이 보인다. 고향에서는 생소하지만 청도에서는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소개소이다. 주로 직업소개를 해주지만 수요에 따라 이런저런 엉뚱하고 치사한 주선도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 그리고 전화기 한대로 마른 땅에서 헤딩하는 식으로 쉬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 소개소를 통해 나는 청도에서의 첫 직장을 찾았다. 그리고 취직한지 일주일만에 그 직장의 부장이란 사람의 성화에 못이겨 이 소개소에 전화를 했었다.  “이봐, 미스터 장, 어디 근사한 아가씨 없어?” 휴식시간에 밖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마부장이 어슬렁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었다.  우리 회사는 슬리퍼를 만들어 일본으로 전량 수출했는데 300여명 여직원들이 다닥다닥 미싱기에 매달려있는 그런 제조업 회사였다. 뽄딩 접착도 봉제와 한 라인으로 이어져 있어 냄새는 물론 실내 온도도 살인적이었다.  회사에 한국인이라고는 사장외에 생산을 책임진 마부장과 무역을 관장하는 조부장 이렇게 세명뿐이었다. 나는 남보다 늦게 입사하여 무역이나 총무쪽의 좋은 일자리는 벌써 남들이 차지하여 현장관리로 들어갔다.  입사 첫날 쉰고개인 마부장은 다른 두 조선족 현장관리와 나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미스터 장” 그때 마부장은 이렇게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나를 부르는 말인줄을 몰랐다. 처음 듣는 말이어서 나름대로 강아지한테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것처럼 한국인들은 사람한테도 그렇게 제마음대로 별호를 붙이는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우리 이젠 한가족이야 한가족, 알갔어? 한가족이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지?” “네에” 나는 알둥말둥 했지만 무작정 고개부터 개어올렸다.  이틑날부터 마부장은 정말로 한가족처럼 나를 대했다.  “임마, 여기 와.” 이틑날 현장에 나온 나에게 마부장은 손가락을 까댁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는 그것을 “말을 깐다”고 해석했다. “미스터 장”이란 강아지 부르는듯한 호칭도 첫날 후 종적없이 사라지고 대신 “임마”가 내 새로운 호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번이 두번째로 불리는 “미스터 장”이었다.  “왜 없어?” 마부장은 가족처럼 무랍없이 나의 호주머니를 들추어 담배 한가치를 피워물고 깊게 연기를 토해냈다.  “뭐가요?” “뭐긴 뭐야? 임마! 아가씨 말이지. 너 아가씨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내 호칭은 다시 “임마”로 돌아갔다.  마부장은 도둑처럼 현장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더니 목소리를 죽여서 말을 이었다.  “돈 주고 한번 할 수 있는 아가씨말야. 이 동네에 많다고 들었는데…” “그런 건 난 정말 몰라요.” “임마, 거 소개소에 한번 전화해봐. 그 사람들은 잘 알거잖아. 저녁 퇴근후에 갈 거라고 전해.” 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무시하고 마부장은 나더러 전화하라면서 자기 사무실로 떠밀었다. 덕분에 나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시원한 사무실에서 잠시나마 호사하게 되었지만 구경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서성이다가 마부장이 다시 찾아와 재촉해서야 겨우 소개소 전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애교가 다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눈앞에는 불현듯 소개소 여 사장의 해반주그레한 얼굴이 떠올랐다. 30대 후반의 덜 미운 여자였다. 목소리만 들으면 애어린 처녀같은 묘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였다.  “저…미스터 장인데요. 거 있잖아요. 며칠전에 끌신 만드는 공장에 취직시켜줬잖아요.” “끌신이라? 아, 슬리퍼 회사 그러네요. 기억나네요. 무슨 일이죠?” 나는 꺽꺽거리면서 마부장의 요구사항을 겨우 전달했다. 무슨 말인지 나절로도 두서가 잘 잡히지 않는데 생각밖에 상대방은 곧바로 알아듣고 있었다.  “오늘 저녁이요? 언제든 수시로 오시라고 그러세요. 절대 뒷일이 없으니까 안심하시구요.” 저녁에 마부장은 식사를 마치기 바쁘게 시내에 볼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나를 데리고 회사를 나섰다. 난생 처음 하이야를 타보는 나는 마부장의 뒤에 붙어섰다가 그가 운전석 문을 열기 바쁘게 따라서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운전석으로 발 한짝을 들여다놓던 마부장이 금세 얼굴이 붉어지면서 와락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못 나와 임마! 거기 어디라고 감히 앉어. 얼른 앞좌석에 가 앉아. 건방진 녀석!”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뿌옇게 욕을 얻어먹고 황급히 앞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는 길에 마부장은 성낼 때와는 달리 퍼그나 온화한 어조로 운전석 바로 뒤는 귀빈석으로 운전자가 모셔야 하는 사람이고 그 옆자리는 다음으로 중요한 손님이 앉게 된다고 승차 매너를 알려주었다. 더불어 나처럼 상급을 모시고 다니고 길을 안내해야 할 가이드 역을 맡은 사람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이론과 실례를 들어가면서 반시간 좋이 얘기했다.  소개소 여사장을 따라 10여 분 걸어서 향양2지로의 어둑시그레한 골목에 들어서니 2층 단독주택이 나타났다. 여 사장은 그 집이 자기네 “아지트”라고 소개했다. 내가 아지트란게 도대체 무엇일가고 궁금해하고 있는데 마부장은 한시가 급하다는 듯 여 사장이 가리키는 2층으로 한달음에 달려올라갔다. 그 와중에도 나를 잊지 않았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저 우리 미스터 장도 한칸 마련해줘요.” “마음 놓으세요. 사~장~님~” 여 사장은 길게 말꼬리를 늘여붙히며 대꾸한 후 나를 향해 왼쪽 눈을 끔벅거렸다. 나이에 비해 주책없는 동작이었으나 웬일인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여 사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부터 참으로 여자답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김새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하는 행동 역시 너무 여성스러워보였다.   “미스터 장, 여기요.” 여 사장은 웃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초점없이 올려다보다가 나한테로 다가와 손을 뻗쳐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뭉클한 앞가슴이 간단없이 팔에 맞혀왔다.  “저기로 가요. 미스터 장을 위해 특별히 따로 준비해두었어요.” 10평쯤 되어 보이는 방이었는데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침대에 눌러앉힌 여 사장은 왠지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얼굴에 홍조를 띠운 채 한동안 말없이 서성이기만 하던 여 사장은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듯 허리를 굽혀 아까처럼 나의 어깨를 서슴없이 안았다. 모름지기 힘을 주어 나의 팔로 가슴을 실었던 것이 분명했다. 팔이 그녀의 가슴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심장이 느닷없이 세차게 쿵쾅 튀기 시작했다. 엄마 젖을 떠나서 처음으로 그런 부드러움을 체험하고 있었다. 코속으로 여자의 향기가 스멀스멀 밀려들어왔다. 이윽고 여 사장의 취한 듯한 목소리가 귀밑을 간지럽혔다.  “좀 기다려요. 탱탱한 아가씨 보내줄게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내가 혼잡해진 머리를 털며 어리둥절해있을 무렵,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웬 처녀애가 조용히 들어섰다. 초봄의 날씨에는 좀 추워보이는 흰색의 원피스를 호리호리한 몸에 착 붙게 차려입은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어매고 있었다. 둥글스럼한 여 사장과 달리 그녀는 갸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줍음때문인지 얼굴은 피빛처럼 물들어있었다. 내 또래가 분명한 그녀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던지 들어선채로 주춤 멈춰선 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여 사장의 날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뭐하고 있어?” 처녀애는 화들짝 놀라는가 싶더니 냉큼 나의 옆에 와서 앉았다.  “저는 청이라고 불러요.“ “나는 학.”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대답을 해놓고 제풀에 멋적어 고개를 숙였다. 청이라고 부른다는 여자애도 뒷말을 찾을 수 없다는 듯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사 나누었으면 얼른 물 들고 들어가야지.” 문밖에서 여 사장의 차거운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심술이 마디마다 덕지덕지 묻어났다.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여 사장한테 잘못 보였던가를 되새겨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갈 때 무의식적인 것처럼 나의 손을 잡아 자기 배쪽으로 갖다 대주기까지 했던 여 사장이었다. 혹시 청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청이는 죄지은 사람처럼 후다닥 뛰쳐나갔다.  청이가 다시 방으로 들어온 건 그로부터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 사이 몸의 곡선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원피스대신 잠옷 같은 훌렁한 꽃옷을 바꿔입은 청이는 언제 수줍었냐는듯 뜨거운 김이 물물 피어오르는 소래를 들고 들어오더니 들뜬 목소리로 재촉했다.  “얼른 옷을 벗어요. 제기 씻어드릴게요.” 내가 어정쩡해있는 사이 청이는 나의 웃옷을 벗어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연후 바지 벨트로 손이 가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지마저 벗겨내렸다. 팬티 한장 달랑 남을 때까지 나는 마네킹처럼 청이가 하는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청이가 팬티를 잡는 순간 나는 기절초풍할 지경으로 놀라면서 침대위로 훌쩍 뛰어올라갔다. “이러지 마! 이러면 안돼!” “처음인가 보네요…” “난…부장님을 모시고… 왔을뿐이야…” 청이는 한사코 이불을 몸에 감싸고 숨어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막무가내인 듯 호 한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부시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러면 전 사장님께 혼나요. 사장님이 꼭 먼저 씻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입속 말로 종알거리던 청이가 그대로 몸을 밀착해왔다. 구석까지 밀린 나는 더이상 피할데가 없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당장 귀구멍에 꽉 들어찼다. 참새 같은 심장이 툭툭 튀는 것이 팔뚝을 통해 전달되었다. 아까 여 사장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뭉클하지도 않았고 포근하지도 않았다. 빨려들어갈 거 같은 느낌도 없었다. 단단하게 다져진 살덩이가 다소곳이 솟아나 대어온 거 뿐이였다.   우리는 그렇게 가지런히 붙어서 누운채로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여자랑 같이 누워있기는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때 소학교 졸업을 앞둔 나는 이웃집의 한살 어린 희자란 여자애를 얼려서 우리집 웃방에 이불을 덮고 같이 누웠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된통을 당한 적이 있었다. 여자가 많이 궁금했고 그렇게 여자랑 누워있으면 애가 생기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버지에게 반나절 쫓겨서 도망 다닌 후부터 다시는 여자들 옆에도 가지 못했다.  지금은 가끔 몽정도 하고 수음도 하지만 여자를 구경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어코 잠자는 남성을 깨우치고 있었다.  청이가 몸을 꼼지락거리면서 손이 왔다갔다 하더니 어떻게 나의 거시기를 다쳐놓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 물건이 성난 듯 용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도무지 그것을 주체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낑 신음을 토해내면서 허둥지둥 청이의 몸위로 올라갔다. 팬티를 내리고 다시 청이를 발가벗기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듯 싶었다. 막 입구가 보이는 그때 머얼건 액체가 허무하게 물총처럼 쑥쑥 뿜어져나갔다. 청이의 그곳엔 순식간에 어지럽게 젖어버렸다. “이걸 어쩌지? 이걸 어째?” 청이가 아우성을 지르며 후다닥 뛰어내리더니 부끄러움도 잊은듯 하얀 엉덩이를 드러낸채로 물로 씻어내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물을 끼얹던 청이가 무슨 감촉을 느꼈던지 멍하니 자기를 내려다보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피씩 웃어버렸다.  “내려와요. 제가 씻어줄게요.” 청이의 손짓에 이끌려 나는 나체인채로 대범하게 바당에 내려섰다. 그때까지 대야에 능청스레 앉아있던 청이는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불쑥 손을 내밀어 내 물건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이렇게 앉아요. 그래야 씻기 좋지요.” 청이는 앉은 자세로 뒷걸음치면서 물을 끼얹어 씻어주기 시작했다. 처음 하는 일이어서 신기했던지 씻다가는 들여다보고 다시 물을 끼얹으면서 장난기가 발동한 듯 톡톡 쳐주기도 했다. 나는 그러는 청이를 내버려두다가 불시에 손을 뻗쳐 아직 입은채로인 그녀의 웃옷속을 뒤졌다. 청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겉옷외에는 가슴띠가 전부였다. 나에게 딴딴한 감촉을 주었던 것은 바로 그 갑옷 같은 가슴띠때문이였다. 보라색 가슴띠를 겨우 젖히고 말랑말랑한 속살을 더듬을 때까지 청이는 쉴새없이 종알거렸다.  “사장님은 씻어주는 게 제일 먼저 순서라고 했는데 왜 남자란 게 도망가구 그랬어요? 사실 저도 처음이라 잘 몰라요. 이렇게 씻으면 되는 거죠? 아,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힘쓰고 그러죠?” 그때 윗층에서 퉁탕퉁탕 계단을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미스터 장, 미스터 장”하는 마부장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예” 하고 대답하며 부지런히 옷을 찾아입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울안에서 마부장과 소개소 여 사장이 무슨 얘기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여 사장의 손에는 돈뭉치가 쥐여있었다. “짜아식이, 총각때를 벗었구나 후훗” 마부장이 나와 청이를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마부장은 일찍 돌아가게 된 연유를 얘기했다. 급한 불을 먼저 끈 후 담배 한대 피워 물고 2차 준비를 하는데 왠지 퀴퀴한 냄새가 나더란다. 중국집들이 대개 냄새가 나는 터라 의례 그럴려니 했는데 다시 코를 끙끙거려보니 분명 옆에 누운 여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머리에 기름이 번져 엉켜붙었는가 하면 목 아래로 검게 때가 번져있었다. 땀이 아직도 배여있는 여자의 배에 손을 올려서 살짝 긁어보니 손톱밑이 금세 때가 들어찼다.   “구역질 나서 죽는 줄 알았어. 안되겠어. 이게 방법이 아니야. 아무래도 파트너를 찾아야 할 것 같아. 소개소 사장한테 교포 여자를 부탁했으니 내일쯤은 소식이 있을 거야.” 정확히 이틑날 저녁무렵에 소개소에서 전화가 왔다. 파트너를 찾아놓았으니 내일 와서 면접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사되면 파트너에게 한달에 3천원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매일 연장작업을 적어도 세시간씩 해야 하는 내 월급이 고작 5백원이였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는 마부장의 설명을 통해 파트너란 보모 겸 애인이란 뜻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밥도 해주고 집안 거두매도 하고 빨래도 하고 더불어 잠자리까지 함께 해주는 그런 역할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갑자기 자신의 값어치가 기생보다도 형편없이 작다는 것을 뻬저리게 체감했다.  마침 다음날에 일본 바이어가 오게 되어있어 마부장은 몸을 뺄 수 없었다. 개미 채바퀴 돌듯 하던 마부장이 큰 결심이나 한듯 나에게 말했다.  “내일 말미를 줄테니 니가 대신 가봐. 젊고 이쁘고 깨끗하면 되는겨. 괜찮다 싶으면 며칠후 내가 직접 볼러 갈 거라고 전해줘.” 나는 이렇게 뜻하지 않게 빈하로에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이틀만에 들르는 빈하로였지만 모든게 새롭고 생기 있어 보였다. 전에도 빈하로가 격정이 넘치는 거리라는 생각은 자주 했지만 솔직히 신선한 충격을 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것이 청이때문에 오는 환각 비슷한 감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시각도 청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몽정 비슷하게 빼앗긴 동정, 나는 그것을 빼앗겼다고 형용할 수 밖에 없었다. 내 22년 순정이 그 한번으로 그만 오염되고 만 것이다. 비록 동물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나는 이미 나의 총각을 청이에게 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청이의 딱딱한 가슴을 잊을 수 없었고 나를 씻어주던 그 부드러운 손길을 잊을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아,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힘쓰고 그러죠?” 하던 청이의 귀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저도모르게 온몸이 힘으로 굳어지군 했다.  나는 청이가 많이 보고싶어졌다. 한 여자가 그렇게 그리워지기는 난생처음이었다. 한번밖에 보지 못한 처녀를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소개소 여 사장이 청이를 다시 불러주게 할 수 있을까에 골몰하다보니 나는 어느덧 골목길 끝머리까지 갔다가 길이 막혀 되돌아오는 역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개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저도모르게 하늘이 하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소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청이였다. 청이가 쇼파에 단정히 앉아있었다. 불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흰색의 원피스를 입고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청이가 문을 떼고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얼굴에 홍조를 띠고 벌떡 일어섰다.  “이제 보니 둘이 아는 사이였군요.” 여 사장이 빈정대는듯한 어조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 파트너란 사람…” “네, 맞아요.” “안돼요!” 놀란 쪽은 시까스르는듯한 여 사장이 아니라 오히려 내쪽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높아지리라고는 나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유리창문이 드르릉 떨리는 것을 직감하며 나는 애써 침착하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부장은 쉰이 넘은 사람이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벌 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그날 청이를 미스터 장한테 보낸 거예요. 청이가 숫처녀인 건 아시죠? 첫 경험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게끔 배려했던 거예요. 아니면 그때 벌써 마부장한테 차려졌을 거예요.” “사장님 고마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이는 아직 어려요. 사장님…” 나는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는줄도 모르고 쉴새 없이 손을 비볐다. 여 사장은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마살이 깊게 찌프러진 걸 보면 그녀가 많이 짜증나고 귀찮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둘에 비해 정작 당사자인 청이는 되려 태연하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청이가 늘쩡늘쩡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 미스터 장과 잠깐 얘기하고 올게요. 오후에 전화 드릴테니 그때까지는 마부장과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여 사장이 괘씸하다는 듯 입을 실룩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청이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거리에 나섰다.  빈하로는 여전히 분주하고 흥성했다. 여기저기서 사구려 소리가 구수하게 들려왔고 음식들이 익는 냄새가 풍겨왔다. 느끗하게 구경하며 흥정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간만에 따스해진 봄날의 화사함이 묻어있었다.  “왜 그랬어요?” “뭐가?” “아까 사장님하고 막 다투다싶이 했잖아요. 미스터 장과 무슨 상관인데요?” “몰라.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청이는 피씩 웃었다.  “저를 좋아해요?” “응” “한번밖에 보지 못했는데두?” “매일 보는 사람만 좋아하란 법은 없잖아.” 청이는 더이상 말이 없이 앞장서 허영허영 걸어갔다. 어느새 그제 왔던 향양2지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저 여기에 집을 잡고 몇달 째 직업을 찾았지만 결국 취직이 되지 않았어요. 겨우 초중을 졸업했거던요. 돈이 다 떨어져 집세도 밀리고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신세예요.” 청이는 자기 밑천을 다 들어내기로 작정한듯 나를 자신의 세집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단칸방이었는데 허술한 나무침대 옆으로 취사도구들이 질서없이 쌓여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청이의 모든 재산인듯한 트렁크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저라고 왜 이런 일을 하고 싶겠어요. 그러나 살아야 하니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저 번화한 빈하로는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저는 벌써 일주일째 채소는 없이 맨국수만 먹고 있어요.” 침대에 걸터 앉은 청이는 어깨를 달싹이며 흐느꼈다. 어깨가 오르내릴 때마다 나무침대는 악기 반주하듯 삐꺽삐꺽 낮다란 아픈 소리를 냈다. 그게 더 마음이 미여졌다. 나약하게 무너져버런 아련한 청이의 몸매를 차마 그저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청이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었고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는가 싶더니 불시에 힘이 들어가면서 나의 손을 꽉 틀어잡아왔다. 동시에 몸을 나의 가슴에 기대왔다. 향기롭고 부드러운 여체가 한가슴 가득 안겨들어왔을 때 그 달콤한 행복감은 이루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녀의 길다란 머리채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냄새는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인차 청이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손을 풀고 나의 품에서 떨어져나갔다.  “전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어요.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못한 만큼 못해본 일이 없어요. 걱정 말고 저의 일에 더이상 삐치지 마세요. 이겨나갈 수 있어요.” “그게 고생하고 같은 뜻이 아니야. 그 사람은 오십이 넘은 사람이란 말야. 아버지 벌도 될 수 있다고.” “그래서 미스터 장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예요.” 청이는 침대로 올라가 반듯하게 드러누워 쭉 기지개를 켰다. 몸이 키질하는 순간 젖무덤이 불쑥 솟아오르면서 눈을 자극했다.  “소개소 사장님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렇긴 하더라고요. 저의 첫번이 악몽처럼 평생 따라다니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날 기회를 놓친 대신 오늘 미스터 장과 소중한 기억을 만들고 싶어요.” 청이는 내가 미처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누운채로 옷을 와락와락 벗기 시작했다. 전번에 보았던 보라색 가슴띠에 이어 그날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흰색의 망사 팬티가 드러났다. 반나체로 침대에 길다랗게 누워있는 청이는 마음의 승화를 얻었는지 한결 평온했다. 요염한 모습으로 높이 솟은 젖무덤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고 들여다보일듯말듯한 팬티는 나의 마음을 마귀같이 유혹하고 있었다.  “얼른 올라오세요. 저도 그날 후로 미스터 장을 많이 생각했었어요. 참 순진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말이예요.” 이틀만에 다시 보는 청이는 갑자기 어른이 되어진 느낌이었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차분한 어조에는 성숙된 여인의 매력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나는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허겁지겁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누군가 형체 없는 것이 안돼 하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나의 손은 어느새 청이의 가슴띠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전날의 경험때문에 나는 쉽시라 청이의 젖가슴을 한줌 가득히 틀어잡을 수 있었다.  “어머, 벌써 힘쓰고 그러네요.” 청이도 어느새 노련한 선수가 되었는지 나의 그것을 툭툭 건드렸다.  “어서 오세요. 저의 첫번을 남김없이 미스터 장에게 다 줄게요. 그러면 저는 아무 유감도 없이 어려운 발걸음을 내디딜 것 같아요.”  바로 청이의 그 한마디가 나의 거친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나는 그만 오리무중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동정이 청이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 나는 여직 청이를 가진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그 머얼건 액체가 나의 동정이었다고 한시각도 의심치 않았으며 청이에게 나의 동정을 전달했다고 철같이 믿었었다. 하다면 나와 청이는 아직도 동남동녀가 틀림없단 말인가? 나는 청이를 일으켜 세운 후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정중하게 원피스를 입혔다. 역시 원피스에 감겨진 청이의 몸매는 눈부시게 이뻤다. 그리고 사람이 빨려들어가도록 깊고 그윽한 눈동자에는 티하나 없는 순수함이 들어있었다.  청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그러건 말건 나는 청이의 손을 끌고 빈하로에로 나갔다.  점심 시간이 아득바득 다가오고 있었다. 빈하로에는 어느새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호객하는 조선말이 튕겨나왔다. 그중에서도 “창원밥집”이란 간판을 건 식당의 호객 행위는 그대로 괴짜에 버금갔다.  “식사하려는 게 맞지예. 이 동네서 우리집 밥이 제일 맛있어유,”  나이 쉰은 되었을법한 뚱뚱한 아주머니가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냉큼 다가와 나와 청이의 손을 한줌에 몰아쥐고 실내로 끌었다.  나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처럼 하면서도 슬슬 청이를 식당안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얼리고 닥치면서 겨우 청이가 죽고싶도록 먹고프다는 된장국과 소고기 볶음을 청한 후 주인집 전화를 빌려 소개소에 전화했다. “아, 네, 미스터 장인데요. 청이가 거기 안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른 사람 소개해보시죠.” 저쪽에서 해반주그레한 여 사장이 뭐라고 종알대고 있었지만 나는 그대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고 멀뚱하니 나를 쳐다보는 청이앞에 마주 앉았다.  “나 청도로 올 때 뭔가 해보려고 돈을 좀 가져왔어. 고향에서 양고기 뀀을 구워봤으니 빈하로에서 그걸 해볼 생각이야. 청이는 김치 만들어서 팔던가. 둘이 손 맞들고 벌면 배 곯을리는 없잖아.” 청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쉴새 없이 오가는 인파속에서 무슨 답안을 얻으려는듯 청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 청이가 결국 내 마누라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 딸을 낳아 키우면서 20년을 줄창 “브래지어”를 “가슴띠”라고 부르는 촌넘이라고 나를 놀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젠 제발 조선말이라고 하지 말고 한국말이라고 그렇게 말해요. 우, 미스터 장인지 뭔지 아무튼 고집불통이야.” 마누라는 시도때도 없이 이렇게 나를 시까스르고 있다.   
22    두 녀인의 포옹 댓글:  조회:1054  추천:1  2015-12-23
  단편소설   두 녀인의 포옹   기나긴 한여름 해도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산새들의 다정한 지저귐도 숲속에 잠든지 이윽하고 야수들의 울부짖음이 간단없이 들려왔다.  술주정뱅이같이 익살스레 생긴 검은 바위는 킥킥거리며 그녀를 비웃는듯 했다. 그녀는 그만 우뚝 멈춰섰다. 그녀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 등의 버섯짐은 급작스레 천근같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아래다리가 떨려나 그 자리에 쿡 물러앉았다.  이제 같이 온 사람들을 찾는다는것은 더욱 말이 아니였다. 그녀는 저으기 후회되였다. 버섯무지를 발견한후 그들과 함께 캤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것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뒤늦은 후회였다. 그녀가 버섯을 다 캤을 땐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찾아헤맸던것이다. “간나새끼들…” 그녀는 공연히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그녀의 낯색은 새까맣게 질렸다. 푸들푸들 튀는 가슴을 부여잡고 황황히 자리를 떴다.  한마장이나 되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서니 개울물이 나졌다. 그앞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가로놓여있었다. 그녀는 미처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릴 엄두도 못내고 개울을 건넜다.  원래는 개울을 따라 내려갈가고 생각하였다가 어쩐지 이 산이 익숙해보여 그대로 산을 톺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와서 천근같이 무겁던 짐도 그녀에게 아무런 중압을 주지 못하고있었다. 그녀는 한시급히 산봉우리를 올라가려는 일념뿐이였다. 그녀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산 저쪽에는 나무집이 있었다.  점심때에 누군가 나무집에 들어가 다리쉽이나 하자고 제의한것을 욕심많은 그녀가 한사코 우겨서 길을 재촉했던것이다.  끝내 산봉우리에 올라섰다. 그녀는 급히 눈을 들어 산아래를 굽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산언덕에는 나무집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녀는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흥, 네년들이 나를 따돌렸지만 나는 죽지 않아. 죽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네년들보다 더 많이 캤어.) 기쁨에 겨워 막 달려내려가던 그녀는 웬 일인지 우뚝 멈춰섰다.  나무집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가? 사냥군이 아니면 삼림지기일것이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풍만한 젖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홱 돌아섰다. 똑마치 저 나무집안에서 웬 음충한 눈길이 그녀를 훔쳐보는것만 같았던것이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또다시 우뚝 멈춰섰다. 가면 어디로 간단말인가? 앞으로 간다는건 죽음을 의미할뿐이다.  옳지. 점심에 밥을 먹으면서 볼라니 주위에는 온통 인삼밭이였다. 틀림없이 인삼장의 집일것이다. 그렇다면 저 집에 녀인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인삼이란 한해두해에 다 키울수 있는것이 아니다. 남자주인은 꼭 생활을 보살펴주는 녀인이 수요될것이다. 그런데 어느 녀인이 이 심산벽곡으로 기여들어오려고 하겠는가? 그녀라면 절대 돈을 벌려고 이런 곳에 오지 않을것이다.  승냥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려왔다. 그것은 홀쪽한 배를 살고기로 채우려는 야수의 피비린 울부집음이였다.  그녀는 엉겁결에 뒤로 둬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그만 얼굴을 싸쥐고 서럽게 울었다.  “어~엉, 어~엉…” 문득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울려왔다.  초풍할 지경으로 놀란 그녀는 저도모르게 산아래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나무집을 향해 달려갔다.  “왕왕…” 그녀가 금방 나무집을 둘러싼 바자에 다가섰을때 집앞에 쪼그리고 있던 개 세마리가 불시에 그녀한테로 달려오며 사납게 짖어댔다.  “워리, 왜 야단이야!” 나무집 문이 열리며 웬 녀인이 초롱불을 들고 나왔다. 한족저고리를 입은 그 녀인은 바른손에 렵총을 들고 곧추 바자로 다가왔다. 밖의 사람을 발견한 한족녀인은 어지간히 놀라는 눈치였다.  “당신은 누구예요? 귀신인가요? 사람인가요?” “승냥이… 아니, 사람이예요.”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버섯 캐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어요.” 그녀는 절망과 애원에 찬 눈으로 한족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족녀인은 드디어 바자문을 열어주었다.  “빨리 들어와요.” 그녀는 비칠거리며 울안을 지나 집안에 들어섰다.  단칸집이였는데 딴 사람은 없었다. 나무벽에는 온통 짐승가죽을 박아놓아 한결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그녀는 저도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왜 바깥주인은 안보이나요?” “어제 일보러 촌에 내려갔어요. 오입질하느라고 오늘도 안오는가봐요.” 한족녀인은 가는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도와 버섯짐을 내려놓았다.  “몽땅 버섯인가요? 많이도 캤네요.” 부러움에 젖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눈길은 버섯짐을 핥고있었다.  “네. 그런데 혼자서 무섭지도 않나요?” 한족녀인의 속셈을 알아본 그녀는 되도록 말머리를 돌리려고 애썼다.  “뭘요. 돈 벌자면 이런 고생도 해봐야지요. 아이구 버섯이 먹음직도 하네요.” 버섯짐을 풀어보던 한족녀인은 갑자기 환성을 질러댔다. 어쩔새도 없이 한족녀인의 얼굴에는 탐욕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저는 여기서 2년나마 보냈지만 종래로 이렇게 먹음직한 버섯을 보지 못했어요.” “그래요? 그럼 인사로 좀 드리지요.” 그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사해요.” 한족녀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듯이 부엌으로 가더니 큼직한 소래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그 소래에다 절반쯤 채워주었다. 그랬건만 한족녀인은 크게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금방까지도 다사하던 한족녀인은 급작스레 새침해졌다. 참 맹랑한 일이였다. 바로 그만한 버섯때문에 그녀는 동료들과 헤여졌던것이다. 그런데…. “여직 저녁을 잡숫지 않았겠군요?” 한족녀인은 소래를 원래의 자리에 탕 놓더니 속에 없는 말을 했다.  “아니…” 웬 일인지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라 아래말을 잇지 못했다.  한족녀인은 그이상 말이 없이 밥그릇들을 가마에 되는대로 집어넣고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녀도 체면이고 뭐고 지킬새없이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가 앉았다.  얼마후 밥상이 차려졌다. 그녀는 게눈감추듯 밥 한사발을 제꺾 먹어치웠다. 그녀는 이날처럼 젓가락질을 재치있게 해본적이 없었다.  “몹시 시장했군요.” 한족녀인은 야릇한 웃음을 띄우며 밥 한사발을 떠서 넘겨주었다.  “제가 아주머니라면 언녕 이 집으로 찾아왔을거예요. 여기에 남정들이 10여명이 있더라도말이예요.” “그건 왜요?” 그녀는 밥사발을 받으면서 리해할수 없다는듯 눈을 슴벅이였다.  “왜선가구요? 살아야 하기때문이지요. 남정들한테 시달림을 당하더라도 승냥이 밥으로는 되지 않겠어요.” “그건 또 왜요?” 그녀는 이상하다는듯 한족녀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상할게 없어요. 사람은 좋으나 궂으나 사람과 함께 있어야지요. 하물며 생사관두에 고려할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녀는 새삼스레 밥맛이 없어져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족녀인의 철학이 도무지 리해되지 않았고 따라서 일종 혐오감이 생겼던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가요?” 한족녀인은 밥그릇을 거둘념도 않고 그녀앞으로 한걸음 다가앉았다.  “듣고 있어요.” “제가 금방 이곳에 왔을때의 일이였어요. 그날도 남편은 일보러 촌에 내려갔어요. 그런데 말이예요. 남편이 떠나서 얼마 안지나 웬 사나이가 물 얻어먹으러 들어왔어요. 미끈한 사내였어요. 그런데 물 먹고 인츰 간다던 그가 날이 어두워질때까지 갈념을 안했어요. 결국 그를 여기에 묵게 했지요.” “어마나,” 그녀는 저도모르게 이마살을 찡그렸다. “여기에요? 단 둘이서요?” “한밤중이 되니 그 자식이 슬금슬금 기여드는것이 아니겠어요…” “저런, 그래서요?” “저는 발칵 성을 내였어요. 남편 없는 아낙네라고 업신 여기지 말아요. 사내대장부면 황소처럼 일부터 잘해야 해요. 이 ‘할미’가 욕심나면 일솜씨부터 보여줘요 하면서 슬슬 구슬렸지요. 그러니까 그 자식은 저절로 물러나는것이였어요. 이틑날 일어나서는 온종일 김을 맸지요.. 이렇게 이틀이나 김을 매주고는 남편이 돌아오자 꼬리빳빳이 내뺏어요. 호호호…” 이때 밖에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한족녀인은 잽싸게 뛰여일어나더니 냉큼 렵총을 거머쥐였다.  “아마도 인삼장에 곰이 뛰여들었나봐요.” “곰이요?” 그녀는 후다닥 놀라며 무작정 한족녀인의 팔소매를 틀어잡았다.  “나가지 말아요. 전…무서워요.” “안돼요. 인삼장은 우리의 생명이예요. 남편이 돌아와서 물으면 저는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곰이란놈이 한번 뛰여들면 인삼장이 결딴나요.” “그러면 저는 어째요?” “저 구석에 큰 칼이 있지 않아요. 저것으로 문을 지키고있어요.” 문가로 걸어가던 한족녀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돌아서서 새파랗게 질린 그녀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한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요. 혹시 제가 잘못되면 저의 남편이 돌아올때까지 인삼밭을 지켜줘요. 그는 오입쟁이이니 주의해야 해요.” 비장하게 후사를 부탁한 한족녀인은 밖으로 뛰여나갔다. 개짖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리는가싶더니 잇달아 땅 하는 총소리와 더불어 캐갱갱하는 개들의 단말마적인 울부짖음도 동시에 들려왔다. 그뒤로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그녀는 황급히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달빛을 빌어 웬 거무스레한 물체가 엉기적거리며 집으로 다가오는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길은 어느덧 구석에 있는 큰 칼에 가 멎었다. 그녀는 급히 일어섰다.  급촉한 숨소리가 문가에 다달았다. 그녀는 고도로 긴장되면서 칼을 부여잡았다.  “삐꺽” 문이 맥없이 열렸다. 그녀는 심장의 압축을 느끼며 급히 칼을 쳐들었다. 그러나 인차 허공에서 멈춰졌다.  문가에는 목에 렵총을 건 한족녀인이 맥없이 주저앉아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어깨를 부여잡은채 일어서려고 모지름을 쓰고 있었다.  “곰에게 좀 핥이웠어요. 덕대우의 봉지약을 가져와요.” 그제야 제정신이 벌컥 든 그녀는 부산하게 한족녀인을 부축하여 구들에 앉히고는 약을 찾아들었다.  “손을 치워요.” “이리 줘요.” “왜 이래요. 빨리 치워요!” 한족녀인은 더 고집하지 않고 손을 치웠다. 그녀는 상처자리에다 약을 쏟아놓기 바쁘게 돌아서서 버섯주머니를 쫙 찢었다. 꽁꽁 다져졌던 버섯들이 쏟아져나오면서 봉당에 마구 뒹굴었다. 그랬건만 그녀는 한족녀인의 상처를 싸매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족녀인은 의혹에 찬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볼뿐이였다.  밤은 깊어만 갔다. 그들은 한이불속에 들었다. 이불은 한채밖에 없었던것이다. 한족녀인은 인차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리뒤척 저리 뒤척 종시 잠들수가 없었다. 이 하루가 그녀에겐 꿈속의 세상에서 헤매는것만 같았다. 그녀가 풋잠에 들었을 때 무엇인가 그녀의 하신을 더듬고있었다. 한족녀인이였다. 아마도 옆사람을 자기 남편으로 여긴듯싶었다. 그녀는 가법게 한족녀인의 손을 밀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를 꼭 껴안는것이였다. 어찌도 억세게 끌어안았던지 도무지 물리칠수 없었다. 그녀는 하는수없이 내버려두었다. 급기야 그녀는 강렬한 충동을 억제할바 없어 한족녀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충동은 이성간의 그런 성적충동과는 다른 일종 미묘하고 아리숭한 충동이였다. 여하튼 그녀는 그 포옹속에서 그 어떤 만족을 얻고있었고 영원히 그렇게 포옹하고싶은 심정이였다.  “날이 밝아오는군요.” 한족녀인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는 알릴듯말듯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요. 응당 밝아야지요.”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듯싶었다. 그녀는 그들이 자기를 찾아나선 사람들일것으로 짐작하면서 살풋이 눈을 감아버렸다. 
21    낚시 댓글:  조회:1383  추천:1  2015-06-25
  단편소설   낚   시 장학규   눈앞이 어느새 흐릿흐릿해온다. 그나마 물고기 배처럼 희끄므레하던 서쪽하늘도 기진맥진한듯 검게 손을 들고있었다. 선웅이는 별로 바쁘지 않다는듯 느릿느릿 걸었다. 내리막길인데다가 길에 자잘한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깔려있어 여러번 발을 접질러 넘어질번 했다. 다행히 눈감고도 다닐수 있는 익숙한 길이기에 어렵지 않게 봉변을 피할수 있었다. 이제 이 내리막을 지나서 50여 메터 정도를 나가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호수가 나진다. 그물치는 매생이 급들이 가끔씩 부담없이 떠다니는 대수 보아줄만한  웅뎅이이다. 옛날에는 저 앞의 백사하와 이어지는 만(湾)이였다고 한다. 그게 막히면서 호수가 이루어진듯 싶지만 분명히 석호는 아니였다. 인공적인 흔적이 도처에 엿보이고있었다. 옆으로는 무성한 나무숲이 산처럼 높이 뻗치고 있어 바로 도심에 린접하고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수 없이 한적한 곳이다. 저 앞으로 쉴새없이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들이 분주히 오가지 않는다면 정말 도심에 이런 낚시터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선웅이는 나무숲을 등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량옆의 풀들이 깨끗이 베여지고 평퍼짐한 바닥이 닦아진 좋은 낚시터였다. 그곳은 거의 선웅이의 전용 터라고 할수 있을만큼  일년치고 대부분의 시간을 선웅이가 차지하고있는 곳이다. 오늘도 혹시 누가 먼저 자기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을가 못내 속을 조였었다. 낚시군들은 대개 익숙한 터를 선호한다. 물깊이도 그렇고 그곳에서 노니는 고기류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한번 자리를 빼앗겨 달리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기란 말처럼 그렇게 수헐치는 않다. 그래서 베테랑 조사님들은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아직은 밤낚시가 일찍한 시점이다. 선웅이는 느릿느릿 낚시가방을 열고 일단 낚시대부터 맞추었다. 낚시줄을 고정시키고 찌에 케미컬라이트를 부착하는데 부시럭부시럭 사람이 다가오는 인기척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석쉼한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일찍하시오.” 얼핏 건너보니 전혀 생소한 얼굴이였다. 예순쯤 되여보이는 로자였는데 선웅이와 서너발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더니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 네.” 선웅이는 외마디 단창을 뽑은다음 더이상 아는체 하지 않고 곧바로 떡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선웅이는 이 동네 낚시군들과 거의 면목이 있다. 만나면 서로 굵직한 롱담도 주고받을수 있는 사이이다. 그런데 로인은 처음 보는 사람이였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오면서 떡밥이 제대로 반죽되는지 감이 도무지 잡혀오지 않았다. 후레쉬를 켜서 보니 생각밖으로 그런대로 대수 쓸수 있는 정도는 되여있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선웅이도 이젠 웬만해서는 손느낌으로도 떡밥을 만들수 있었다. “이 사람아, 헤드랜턴은 없나? 후레쉬는 빛이 너무 강렬해요.” 그때 아까 그 로인이 저쪽에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얼핏 짜증같아 보이는 말인데도 로인은 온화한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하고있었다. 불과 3~4메터 건너에 있지만 로인은 이젠 점과 각이 모두 없어진 검은 물체로만 보여졌다. “아, 네.” 선웅이는 또다시 짤막하게 중얼거리면서 본능적으로 낚시가방에서 헤드랜턴을 더듬어잡았다. 인츰 파란색 불빛이 호수면을 어지럽게 오갔다. 선웅이는 급히 랜턴을 머리에 고정시키고 낚시에 떡밥을 끼기 시작했다. 어둠과 더불어 오가는 차들이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저 앞 백사하 강뚝으로 저녁 산보를 나오기 시작했다. 스모그와 소리의 벽이 많이 엷어진 시간대여서인지 가까운 거리의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바로 옆에서 소곤거리는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 춘양댁네 새 차를 바꾸었당꼬.” “춘양댁이 누꼬?” “거 무지? 말 꽁댕이마다 말이 말이 하는 할무이 있자너.” “오 그 할무이 아들이 돈 잘 번댄다. 갠데 문 차 또 산대지? 지금 굴리는것도 새차 아니가?” “글켔지? 뭐 아오디 에이 8이라나 무나. 80만이라카면서 말이말이 글더라구.” “왜 몇십년만에 생리통이 되돌아온갠가? 별걸 다 배 아파?” “배 아프긴 물? 울도 먹고 살만큼은 살루.” “글카나. 그 집 따래미도 여간 날구뛰는겨. 요즘 상가 두개씩 갖구있는 집 몇개 있을까나. 부러버 마.” “누가 부러바할새나.”     주고받는 말들이 조선말들이여서 선웅이는 귀를 잔뜩 세우고있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던가. 백메터이상 빛을 비추며 줌 기능까지 갖춰 편리한 랜턴을 머리에 걸고있는 선웅이가 고스란히 듣고있는줄도 모르고 귀먹은 동네라고 여기고 스스럼없이 말하고있었다. 아무리 물고기들이 빛을 보고 인지하지 못하는 블루 랜턴이라 해도 사람은 볼수 있는게 아닌가.     (하여간 머리 아퍼!)     선웅이는 잔뜩 골난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낚시대를 잡아챘다. 먹이감이 깨끗이 털려버린 빈 낚시코가 랜턴 불빛속에서 약 올리듯 하느작거렸다. 잠간 정신을 팔고있으면 그렇게 빈털터리가 되여버리는 낚시때문에 선웅이는 인내심을 많이 잃어가고있었다. 이젠 도정신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어신을 감지할수 있는 케미컬라이트만 주시하니 그렇게 생생하던 말소리들이 금방 소음장치가 된듯 가뭇없이 사라졌다. 캄캄한 수면우에 놓여진 케미컬라이트 불빛과 바람소리가 멎어버린 조용한 수면을 은밀히 흔드는 찌울림이 한결 흥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굵은 씨알의 붕어가 손아귀에 들거라고 확신하면서 찌 솟음과 더불어 낚아챘지만 웬걸 여전히 홀쪽 말라버린 낚시코였다. 그러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선웅이는 차츰 영문없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담배 한대 하지 않을라나?” 문득 바로 등뒤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와 선웅이는 그만 초풍할 지경으로 깜짝 놀랐다. 저쪽에 있던 로인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다가온것이다. 표정을 전혀 읽어낼수 없는 어두움속에서 로인은 어떻게 선웅이의 불만을 감지하였는지 두서없이 뒤말을 이었다. “실은 … 기침 둬번 …오면서…” 그러면서 알뜰하게 불까지 붙인 담배대를 내밀었다. 얼결에 그걸 받아들고 선웅이는 허구픈 웃음이 나오는걸 겨우 참았다. 괜히 손을 들었다가 제뺨 치는 형국이 되고말았다. 사실 선웅이는 담배를 끊은지 벌써 반년이 되여오고있었던것이다. “콜록 콜록 …” “담배 못하나보군. 그런데 먹이집 만들었나?” 로인은 여전히 자상한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금방 있었던 난처함을 완전히 털어버린듯 티가 묻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차!) 선웅이는 그제서야 여직 먹이집도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거마저 잊어버릴수 있단말인가. 오늘은 꼭 한쪽 뇌를 분실한 느낌이였다. 많이 다치지 않고서야 머리 회로가 이렇게 자꾸 단절될리 없잖은가. 선웅이는 기계적으로 알갱이 고기밥을 서너줌 호수에 던졌다. 사르르 호수물을 가르는 소리가 스릴있게 들려왔다. “아직 대어가 출동하기는 좀 일찍하네. 작은 친구들 두둑히 먹게 내버려두게. 그 작은 배들 금방 채워진다네. 그리고 먹이집을 발견하고 어른들이 어슬렁 찾아오면 저절로 알아서 물러나네. 급해말라구.” 선웅이는 그만 마음이 도적맞힌 느낌이 들면서 얼굴이 뜨뜻하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고참 조사님이 분명했다.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선웅이의 현재 기분상태를 파악하고있었고 그래서 다가와 해학적으로 귀띰해주고있는것이다. 선웅이는 로인이 언제 자기 자리로 돌아갔는지 모른다. 사실 선웅이도 밤이나 새벽이 되면 대어들이 활발해진다는것쯤은 상식적으로 알고있었다. 물고기들도 커가면서 본능적인 경험이 많아진다. 경험과 본능이 경계심으로 이어지면서 한낮보다는 고즈넉한 어둠을 틈타 사냥에 과감히 나선다. 그리고 먹이감인 민물새우 등이 물가로 가까이 나오는 시간대가 또 밤시간대인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찌놀림이 적어졌다. 대신 한번 움직였다싶으면 그대로 물속에 처박히듯 곤두박질쳤다. 눈으로 그걸 확인하고 머리의 빠른 회전을 통해 팔로 전달되는 그 전률은 그저 아찔할 지경이였다. 주먹만한 붕어 한마리는 미처 낚시대를 쳐들기도전에 백메터 속도로 옆의 풀속을 향해 내뺐다. 선웅이가 젖먹던 힘을 다해 붕어의 주둥이를 물밖으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놓칠번했다.  한뺌 정도의 붕어들이 그물망태에서 퍼덕거리면서 시끄럽게 소리를 낼 즈음에 복부가 느닷없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남들은 대변이 마려우면 홍문이 무거워온다지만 선웅이는 배에 통증이 먼저 찾아온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죽을 병인줄로 알았다. 급하게 볼 일 먼저 보고 그다음 약을 먹으려니까 아픈 배가 금세 탈이 없어졌다. 그런 일을 여러번 반복해 겪고보니 배 아프면 의례 뒤가 나오려니 했고 그게 신통하게도 백프로 맞아떨어졌다. “붕~붕~붕~” 그나마 가스가 뿜겨나가는 경우는 덜 괴로웠다. 솔직히 선웅이는 고기가 한창 앞다투어 물려대는 지금 이 시각에 자리를 뜨고싶지 않았다. 무리채로 몰려다니는 물고기는 한번 물기 시작하면 잇따라 줄줄히 물었다. 그러다가 아니 하고 한번 가버리면 한동안은 다가오지 않는 법이였다. (배속에는 대장균이 적당히 있어야 한다니까.) 그러나 선웅이는 얼마 뻗치지 못하고 곧바로 투항해버렸다. 가스가 다시 나오지 않는대신 붕어를 끌어올리느리고 힘을 쓰기 바쁘게 바지가 끈적거려왔던것이다. (젠장…) 선웅이는 낚시대를 그대로 내던지고 허둥지둥 나무숲속으로 올라갔다. 언덕으로 높이 솟은 나무숲은 올라가는 길이 사선으로 좀 가팔라 미끌었지만 그런대로 기여올라갔다. 나무숲은 반경이 20메터도 되지 않았지만 은근히 울창했고 깊숙했다. 마침 동남풍이 불어 로인한테 냄새가 풍길 념려는 없었다. 궤춤을 내리기 무섭게 부르륵 방귀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한 소리가 나면서 액체화된 대변이 줄달음쳐나왔다. (저녁에 뭐 잘못 먹었나?) 선웅이가 주저앉은채로 손으로 배를 주물럭거리는데 나무숲 밑에서 먼저 그 로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마 누군가와 통화하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틀림없는 조선말이였다. 하느님 맙소서. 아까 로인이 말을 걸어왔을때 별로 억양이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었다. 대략 남쪽 동네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했었다. 청도라는 도시가 원래 동서남북 사람들이 모여들고 드나드는 고장이라 판별이 어려운것도 사실이였다. 그렇다면 로인도 아까 호수 건너편에서 들려온 대화를 엿들었음직했다. 아니, 틀림없이 들었을것이였다. “언제 떠난다구?...그렇게 빨리?... 여기서 일 안되면 가야지므… 글쎄 다 망한다구 하더라만…” 로인은 아까처럼 유창한 중국말을 하지 않고 순 조선말로만 대화했다. 아무래도 가까이에 있는 선웅이가 들을가봐 언어를 바꾼게 틀림없었다. 호수 건너편의 사람들도 그런 심태였을것이다. 어쩌면 로인도 그게 참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공감한것이 아닐까. 선웅이는 배속을 깨끗이 비웠지만 자칫 내려가면서 소리라도 만들면 로인의 대화가 중단될거 같아 주저앉은 그대로 넌지시 멈춰있었다. 아직 단풍을 모르는 초가을의 향기로운 꽃냄새가 살살 실바람을 타고 전해왔다. “삼성이 협력업체 100여개 달고 서안에 들어갔다면서?.... 먼저 가서 기회 잡아야지…응. 모르긴 해도 이제 다 서안으로 튈거다. 10년내로 여기 조선족인구 절반 이상 줄어들거다…뭐 해먹을게 있어야 말이지. 그래말이다…모두들 오더 떨어져서 빈털터리야. 빛 좋은 개살구이지…응 그러자. 나 밤낚시 나왔다. 아들 속타하는거 눈앞에 두고 볼수 있어야지. 내일 오후에 만나자. 그래.,,” 전화를 끊었는지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선웅이는 선뜻 내려가지지 않았다. 한참동안 더 앉아있다가 다리가 막 저려와서야 부시시 일어나 늘쩡늘쩡 벨트를 조였다. 밤은 깊어갔다. 어느 사이 기온도 많이 내려가 몸이 차갑게 떨려왔다. 낮기온이 30도를 치달아도 한밤중에는 쌀쌀한게 이 고장의 기후이다. 선웅이는 기척없이 자리로 내려가 우선 파카를 찾아내여 몸에 걸쳤다. 금세 온몸이 따스해오는게 느껴졌다. 그 파카는 선웅이가 지난해 한국 출장을 갔다가 특별히 시간을 내여 남대문시장에 가서 산것이다. 별로 큰 돈을 준것도 아니지만 품질은 나름대로 일류였다.  바느질이 제법 꼼꼼해 질기고 단단한것은 물론 가볍기도 하고 따스하기도 해 선웅이는 낚시질 나갈때마다 꼭꼭 챙겨다녔다. 선웅이는 급한김에 아무렇게나 한옆에 버렸던 낚시대를 주어들고 다시 낚시질에 집념했다. 한꺼번에 나를 잡아가소 하고 물려들것만 같았던 물고기들이 그러나 오래동안 도무지 물려주지 않았다. 역시 자리를 비워둔게 문제였다. 물고기는 잡힐때 계속 낚아야 하는 법이다. 시간이 얼마 흘렀는지 선웅이도 알수 없었다. 무거운 정막이 두텁게 내리드리우고 한기가 어설렁 침습해오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자정대를 넘긴거 같았다. 팔뚝 같은 붕어가 다시 물리기 시작했고 더불어 추위에 손발이 오징어 타듯이 살살 쪼그라들어왔다. “어, 어…” 선웅이는 저도몰래 외마디 떨리는 소리를 내면서 급히 도구상자를 열었다. 그속에는 물을 끓여먹을수 있게 버너와 코펠이 비치되여있었다. 선웅이는 번마다 낚시질 나오면 코펠에 물고기를 삶아서 술 한잔 마시는것으로 추위를 덜군 했다. 굵은 붕어 두마리를 깨끗이 다듬어서 냄비에 넣고 물이 끓어오기 시작할 무렵 느닷없이 소변이 마려웠다. 어두컴컴한 한밤중이라 보는 사람도 없어 그 자리에 일어선채로 옆으로 방뇨하면서 그 경황에도 머리를 돌려 헤드랜턴으로 찌를 지켜보는데 방정맞게도 그때 찌가 심하게 둥둥 떠올랐다. 선웅이는 소변을 멈추고 후다닥 낚시대를 잡아챘으나 이미 미끼는 략탈당한 뒤였다. 게다가 불시에 속옷으로 되들어간 거시기가 브레이크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뇨를 줄줄 흘리면서 살이 찜찜해왔다. 꿩 잃고 알 깬 형국도 아니고 어쨌던 많이 랑패상이였다. 그나마 그 사이 고기가 잘 익어있어 다행이였다. 고추장을 크게 풀지도 않았는데 주변에는 온통 구수한 고추장냄새가 풍겨왔다. (흐흐흐. 이제는 나도 조선족인줄 알아차렸겠네.) 아무래도 저쪽 로인을 요청하는게 인사인듯 싶었다. 선웅이는 후레쉬를 켜들고 로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 사람아, 헤드랜턴으로도 올수 있잖아? 후레쉬는 빛이 너무 강렬해요.” 지청구도 아니고 욕은 더욱 아닌 이런 자상한 타이름이 튀여나올거 같았지만 예상외로 파라솥밑에 의자를 놓고 앉은 로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로인은 어느새 잠들어있었다. 늙은 사람들은 초저녁 잠이 많다더니 맞는 말이였다. 금방까지도 선웅이는 로인이 낚시대를 던지는 소리를 들은듯싶었다. 선웅이는 발뺌발뺌 뒤걸음쳐 물러났다. 선웅이는 홀로 술 두잔에 붕어 두마리를 발라먹고 도구와 그릇들을 거두고 다시 낚시질에 몰입했다. “스르륵 스르륵…” 새벽 이슬이 내리는 소리가 방불히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긴 흘렀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선웅이는 갑자기 전률하듯 몸을 뒤탈았다. 이슬 내리는 소리가 이렇게 선명할리 만무했다. 다시 귀를 도사려보니 아까 자기가 뒤를 보던 수풀속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그것도 한사람이 아니였다. 선웅이는 머리칼이 쭈볏이 곤두섰다. 본능적으로 랜턴을 끄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잭나이프롤 거머잡았다. 이 시간대에 이 자리에 사람이 나타난다는건 상서로운 징조는 아닐것이다. 잠간이기는 했지만 로인쪽으로 조금 움직일가 생각을 굴렸다가 괜히 애매한 로인에게 불똥이 튈거 같아 선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일단 여기서 싸움이 붙으면 잠귀가 밝은 로인이 금방 깨날것이다. 와서 도우지 않더라도 그사이 경찰에 신고만 해줘도 큰 도움이 될것이 틀림없었다. “스르륵 스르륵…” 풀잎을 밟는 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나무가지를 스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림짐작으로 인기척이 아까 선웅이가 대변을 보던 자리쯤에 들어선것 같았다. (제발 그 물똥 좀 밟고 한넘 넘어져라.) 백치같은 넘은 천치같은 생각을 굴리는 법인가보다. 선웅이가 막무가내로 온갖 궁리를 펼치는 사이 다가오던 인기척이 문뜩 뚝 멈춰졌다. “집에 가야해. 엄마가 야단한단말이야.” 뜻밖에도 들려오는 목소리는 애리애리한 녀자애의 목소리였다. 순간 선웅이는 긴장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그리고 녀자애의 말이 역시 조선말이라는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지금 두시가 넘었어. 우리 집에 돌아가자.” “내일부터 볼수 없는데 좀 더 있으면 안돼?” 징징대는 남자애는 아직 목청도 채 여물지 않은듯 했다. “온 하루야. 식당에서 노래방까지…엄마는 그저 너를 바래주는줄로 안단말이야. 오늘 우리 한 일 알면 난 죽어.” “이미 한바하고 한번 더 하자. 노래방에선 사람이 갑자기 들어올가봐 조마조마해서 혼났다.” 말소리가 뚝 끊기고 대신 애무가 이어지는지 간간히 신음소리가 낮다랗게 들려왔다. 선웅이는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그대로 낚시질도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했다.  생각같아서는 어린애들의 철딱서니없는 행각을 저지하고싶었지만 딱히 어떻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어쩡쩡해있는 사이에 녀자애가 속삭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다시 들려왔다. “벌써 끝났어?” “급하니까 …이걸 어쩌니.” 남자애는 죄지은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녀자애는 별로 개의치 않는듯 한결 밝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만 집에 돌아가자.” “좀만 더 있으면 안돼.” “너 계속 끝없이 칭얼대면 어쩌니? 오늘 벌써 두번이잖아. 그렇게 싫은거 왜 가? 안 가겠다고 뻗치란 말이야.” “대학 안 갈수 없잖아. 말로는 여기서 시험칠수 있다고 해도 그게 아직은 실행단계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더라.” 락담한 남자애는 주절주절 두서없이 말했다. “너도 명년이면 고향에 돌아가 공부할테지.” “아마 그러겠지.” 두사람의 목소리가 오던 길로 멀어지더니 나중에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가 가까와오는 시점이였다. 생물체로서의 인체가 가장 취약한 시간대였다. 선웅이는 하품을 길게 하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더이상 낚시질할 흥취가 없어졌다. 낚시대를 거두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선웅이는 개떡같은 인생이라도 찰떡같이 살아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동녘이 바야흐로 희게 기지개를 켜는지 주변 물체들이 흐릿하게나마 어른거렸다. 선웅이는 짐을 지고 일어섰다. 후레쉬를 켜려다가 괜히 단잠을 자는 로인을 깨울가봐 한발짝한발짝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미처 다가가기도전에 로인이 서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먼저 눈에 띄였다. 어느새 로인도 깨여있었다. 그리고 선웅이가 다가오고있는것도 벌써 눈치채고있었다. “집에 돌아가시오?” 로인은 뒤돌아도 보지 않은채 말을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로인은 고기망태를 들어 그속에 든 고기를 그대로 호수에 다시 방류하고있었다. “아, 고기를 그대로 놓아주네요.” “암, 손맛을 즐겼으면 그만 족하우. 고기는 고기대로 살아야겠지.” 로인은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러는 로인뒤로 선웅이는 지나치면서 아마 이 평생 다시는 낚시질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    에볼라 에볼라 댓글:  조회:987  추천:1  2015-04-22
단편소설   에볼라 에볼라         (왜 아직도 오지 않지?) 티비는 출입문 우쪽으로 고정되여있어 프로를 시청하면서도 들어오는 사람들을 그때그때 바로바로 확인할수 있었다.  마침 뉴스프로시간이였는데 한창 하남성의 한 녀대생이 학교로 돌아가던중 실종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있었다. 붙는 불에 키질인셈이였다.  홍교수는 달아오른 가마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벌써 네번째로 듣는 녀대생 실종사건이였다. 달포전에 중경 녀대생이 불법택시 운전기사에 의해 살해돼 암매장된 사실이 전해지더니 20여일전에는 남경에서 실종된 녀대생이 결국 변사체로 발견되였다는 소식이 보도되였다. 홍교수가 사는 이 동네도 안전지대는 아닌듯 싶었다. 얼마전 성도회지에서 한 녀대생이 불법택시 운전기사한테 끌려가 나흘동안 감금되여 성폭행당하다가 요행 공안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었다.  (도대체 무슨 세상이 되자고 이러지?) 홍교수는 지금 대학동료 철민이를 기다리고있다. 정확히 말하면 철민이는 동료에 앞서 먼저 제자이다. 홍교수가 이곳 대학으로 전근하기전에 가르쳤던 학생이다. 그 학생이 졸업하고 모교에 남아 교편을 잡은걸 홍교수가 특수인재영입프로젝트에 올려 스카우트해온것이다.  아직 이른 저녁무렵이여서인지 된장국집내에는 손님이 별반 없었다. 가게 주인인 뚱보마담도 카운터에 들어앉아 할일없이 티비를 쳐다보고있었다.  성격이 활달한 뚱보아줌마는 속이 편한만큼 살집도 매일매일 불어나고있었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웬간한 녀자의 다리보다 굵은 팔을 쭉 올리뻗어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바로 저 손맛이 이 장국집을 부근에 유명짜하게 만들었다.  홍교수가 이 장국집과 도킹된것은 순전히 철민이때문이였다. 철민이가 해변도시로 갓 조동해왔을 무렵이다. 대학기숙사에 얹혀 사는 철민이는 교내식당에 질린나머지 속풀이하려고 학교 주변을 돌다가 발견한것이 바로 이 “대흥식당”이다. 덕분에 전 학과 선생님들이 다 알게 되였고 이곳에서 간단한 친목 모임도 자주 가지기도 했다. 그래도 대흥식당이란 정식 이름을 대면 열에 아홉은 뭐가 뭔지 모른다. 반면에 장국집이라면 용하게도 모두들 잘 알아먹는다.  “저런 저런…물에서 시체가 발견되네요…” 뚱보마담이 혀를 끌끌 차며 홍교수쪽을 힐끔 건너다보았다. 홍교수는 자기와 하등의 상관도 없는 일인데도 별로 속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였다.   (결국 죽고마는구나!) 그때 출입문이 드륵 열리면서 철민이가 들어섰다. 거쿨진 몸매가 아름차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철민이는 신발을 벗고 올라와 울방자를 틀고 앉으며 유난히도 큰 덧이를 활짝 드러내며 물었다.  “아니…” 홍교수는 왜 이 자식한테 이렇게 정이 흠뻑 들었던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물론 철민이가 공부를 남달리 잘했던 원인도 있었다. 그러나 덩치 큰 철민이가 큰 의지가 된다는게 더 큰 리유일지도 모른다. 아들이 없는 홍교수는 가끔10년 터울이 나는 딸애와 철민이를 겹쳐놓는 환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댁 부근에서 한잔 하실거지 왜 이 먼곳까지 오셨습니까? 오늘은 수업도 없었잖아요?” “그게 글쎄…” 때맞추어 음료수가 올라오고 이어 미리 주문한 료리가 올라와 홍교수는 궁지에서 빠져나올수 있었다.  사제간은 시시껄렁한 세상화제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역시 뚱보마담의 손맛은 일류였다. 풋배추와 두부에 감자까지 넣고 끊인 된장국은  빨간 고추가루를 듬뿍 뿌리고 한숟가락 뜨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기 바쁘게 금세 속을 편안하게 다듬어주었다.  “선생님, 오늘 왜 자꾸 그렇게 멍때리고있습니까? 선생님답지 않네요.” “그래?” “무슨 일 있는거지요?” “실은…오늘 혜경이가 학교 숙사에 들어갔어.” 혜경이는 홍교수의 무남독녀이다. 올해 금방 대학에 붙은 신입생이다. 홍교수가 기어코 우겨서 자기가 가르치는 대학으로 끌어온것이다. 학과는 달라도 옆에 두고 지켜봐야 마음이 놓일거 같았다. 그만큼 혜경이를 여직껏 단독으로 어디 내놓은 적이 거의 없었다.  “아, 선생님도 참 …이제 본지 몇시간이라고 벌써 이러십니까? 허허허…” 철민이는 또 큰 덧이를 훤히 드러내고 껄껄 웃는다.  (임마, 헛다리 고마 짚어라.) 그러나 홍교수는 내색없이 후룩후룩 장국만 들이켰다. 뭔가 철민이에게 부탁하려던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서른 넘은 더벅머리 총각이 직접 부탁하지 않아도 그 정도 눈치는 있겠지싶었다.  한사코 택시로 모셔다준다는 철민이를 밀치다싶이 보내놓고 큰거리로 나오니 막힘없는 바다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더불어 바다생물의 비릿한 냄새도 함께 코끝을 간지럽혔다. 해변의 가을밤 하늘은 마냥 소시적 고향의 밤하늘처럼 맑고 투명했다. 듬성듬성하게 깜박이는 별들도 향수를 자아내기에는 족했다.  혜경이한테서는 여직 전화 한통도 없었다. 홍교수의 지청구로 혜경이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서는 즉시로 전화를 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렇게 답복받은후 한집식구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홍교수는 딸애보다 한발 앞서 집을 나섰었다.  원래는 산보나 하고 집으로 들어갈려고 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어떻게 멀리 학교까지 왔다. 오히려 잘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있다가 딸이 무탈하게 잠든다는 인사를 받고 돌아가면 더욱 마음이 놓일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혜경이는 그후로 몇시간이 흐른 지금도 전화를 줄념을 않는다.  홍교수는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더듬어 찾아냈다. 련락인리스트에서 딸애의 이름을 찾아내여 클릭하려다가 딸애의 화난 얼굴이 떠올라 포기하고말았다.  “아빠, 내가 뭐 어린애야? 이만 끊어요.” 혜경이는 틀림없이 이렇게 나올것이 분명했다. 항상 그랬다. 부모가 무엇을 어떻게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관심을 거부하는 딸애였다.   홍교수는 발 가는대로 몸을 맡겼다. 딱히 어디로 가야할지 그 자신도 알수 없었다. 그리고 어디든 가도 무방하다는 마음이였다. 유독 집으로만 가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였다. 사랑하는 딸이 갑자기 비여진 그 공간에는 단 한순간도 멈추어 숨을 쉴수가 없을거 같았다.  그러고보니 안해한테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쉽지 않다. 딸의 문제로 평소에 몇번씩 전화를 해오는 안해였다. 그러한 안해가 아무런 채근도 없다는건 적어도 딸의 행방을 알고있다는 말이 된다. 지금까지 딸과 함께 집에 있지 않으면 학교에 돌아간 딸년이 엄마한테 무사함을 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간건 아닐가?) 홍교수는 다시 마음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분명 남편이 걱정하고있을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자기 혼자 집에 돌아가 태평무사하게 이불속에 들어가면 어쩐단말인가. 도대체가 녀자들은 자기밖에 모른단말이야.  틀림없이 혜경이는 학교에 돌아갔다. 아홉시가 넘으면 기숙사는 “통금시간”이 된다. 학생관리의 편리와 사고방지를 위해 기숙사에서는 엄격한 시간관리를 한다. 기숙생들은 그걸 두고 “통금시간”이라고 뒤에서 수군들거리고있다. 그걸 혜경이가 모를리 없다. 그리고 또 그걸 지키지 않을수도 없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전화하지 않았지? 엄마한테만 했을리는 만무한데…) 홍교수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고 딸의 전번을 누르려는데 눈앞 사거리에서 무언가 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불시에 들려왔다. 곧이어 칙하고 자가용이 급정거하는 요란한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고 다시 여성용 스쿠터가 길가에 나뒹구는것이 눈속에 들어왔다.  홍교수는 화들짝 놀랐다. 가슴이 쿵짝쿵짝 세차게 튀기 시작했다. 주변사람들과 허둥지둥 앞으로 달려갔다.  교통사고였다. 딸애 또래의 녀자애가 그것도 둘씩이나 차에 치여 널부러져있었다.  인명사고까지는 면했지만 피자국이 흥건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높은걸 보면 크게 다친게 틀림없었다. 실컷 절하고보니 남의 집 묘라더니 괜히 놀랐다며 가슴을 내리쓸던 홍교수는 저도몰래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속으로 했던 생각이라고 해도 인류령혼의 공정사라는 교육자가 사고 현장에서 안도를 할수 있었다는게 너무 창피했다. 더는 이렇게 망상에 시달리고싶지 않았다. 무작정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뜻밖에도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안해였다. 잠투정이 잔뜩 묻은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왜 당신이 이 전화 받아?” “내 전화 내 받지 않구 누가 받아요?” 안해는 상대하기 싫다는듯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이런 젠장…” 안해는 초저녁 잠이 류달리 많다. 그리고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치면서 옆사람들이 자지 못하게 난시를 피운다. 근년에 와서는 더욱 늙은 냄새를 풍긴다.  전화번호를 보니 틀림없는 혜경이의 번호다. 그런데도 자기 전화라니?  아, 홍교수는 그제야 생각났다. 혜경이가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한국에서 출장중이던 홍교수는 소식을 듣고 딸과의 약속대로 한화 80여만원을 주고 삼성캘럭시S5를 사왔었다. 그 덕분에 골동품 핸드폰을 들고 다니던 안해는 딸애의 샤오미 Mi3을 대물림으로 물려받았다. 그러니까 홍교수는 혜경이의 새 핸드폰번호를 입력하지 않았던것이다.  거리에서 대책없이 서성이는 홍교수의 눈에 오색불빛이 어둡게 깜박이는 스탠드바 하나가 발견되였다. “반달”이라는 다분히 시적인 냄새를 풍기는 스탠드바였다. 흔히 “지존”이나 “황궁”이나 “제호”와 같은 신분을 암시하는 이름이 아니면 “야미인”이나 “에게해” 같은 야한 뉴앙스를 풍기는 명칭이 대부분이였다. 지적인 냄새를 풍기는 스탠드바를 홍교수는 처음 보았다. 아무튼 앉을만한 자리가 있어서 무엇보다 감사했다. 적어도 학교 “통금”이 시작될때까지만이라도 이곳에 있고싶었다. 아니, 혜경이가 전화를 해줄때까지 있어야 했다.  코구멍만한 출입문과는 달리 실내는 퍼그나 넓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좌우로 길게 늘어선 스탠드에 마주 앉은 손님들이 열심히 칵테일을 즐기고있었다. 가끔 실음악도 연주하는 모양으로 한옆으로 무대가 설치되여있기도 했다.  홍교수가 바텐더에게 칵테일 한잔 부탁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가볍게 툭 쳐왔다. 흠칫 놀라며 얼굴을 돌려보니 이십대 초반의 낯선 젋은 아가씨 하나가 오래간만에 만나는 사람마냥 반가운 웃음을 한가득 띄우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싸구려 향수내를 진하게 풍기고있었다. 아무리 노출을 지향하는 세월이라지만 이건 너무 했다. 유니폼이 분명한 꽉 조인 옷은 젖무덤 하나 제대로 가리지 못해 훤히 드러났고 하의는 실종된듯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선생님, 저 양주 한잔 사주시죠?” 아가씨는 악수를 거부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듯 옆으로 다가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술장수하는 아가씨들은 “사장님”을 개여올리지 “선생님” 소리는 잘하지 않는다. 하다면 이 아가씨가 무슨 냄새라도 맡은것인가? 혹시 우리학교 학생이 아닐가?  학생들이 등록금을 벌려고 밤업소에 들락거린다는 소문은 벌써 교내에 파다하게 퍼진지 오라다. 이 동네서는 대학생들이 아직 오피스텔같은 고급 사무소에서 알리바이트를 할 기회가 거의 없다. 슈퍼나 매장같은 곳이 상대적으로 점잖은 업종이다.  대신 봉투가 많이 엷다. 식당 또는 심부름센터들은 그보다 돈을 좀 더 주지만 일이 많이 힘들고 더럽다. 그래서 얼굴이 조금이라도 반반한 녀자애들은 벌이가 쉽고 편안한 밤업소를 택하고있었다.  “칵테일이라도 괜찮아요.” 홍교수가 덤덤하게 그대로 앉아있자 묵인으로 알았던지 아가씨는 손저어 바텐더를 불렀다.  “여기 꼭같은걸로 한잔 더 부탁해요.” 요즘 애들은 당돌하기 이를데 없다고 홍교수는 속으로 한탄했다. 별종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수치심이란것이 전혀 없이 세상에 나설수 있냐 그 말이다. 이건 헤픈것도 아니구 파렴치한것도 아니구 도대체가 무슨 생각으로들 사는지 모르겠다.   “왜 표정이 그렇죠? 가슴이 아픈가 보네요?” “그럼 살덩이같은 내 돈이 떨어져나가는데 안 아파?!” “아우 유머스럽네요. 대박이야 대박.” 아가씨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소리내여 깔깔 웃었다. 제스처가 지나치게 과장되였고 소리가 구새먹은듯 텅 비긴 해도 나름 귀여운데가 있긴 있었다. 몸을 달삭일때마다 통통 튀여나온 젖살이 흔들리면서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저런 탄력있고 싱싱한 가슴을 만져본지도 아득한 옛날일이였다. 마누라는 이젠 많이 늙었다. 욕망이란것이 싹 식었는지 축 처진 물렁한 젖가슴에 손이 닿는것마저 주책이라며 무지 질색한다. 물론 침대를 같이 써본지도 오래되였다. 녀자를 안아보고싶다는 잠의식이 서서히 깨여나면서 아래도리가 간만에 용을 쓰기 시작했다. 홍교수는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도 속물이기는 매한가지라고 속으로 꾸짖었다.   “학생이지?” “어떻게 아셨죠?” “왜 이런 일을 하고있어? 대학에서 배운것들이 억울하지도 않아?” 그건 홍교수도 풀지 못한 숙제였다. 생존기술을 배우려고 대학에 온 애들이 대학공부가 필요없는 생존기술을 활용하고있다는게 일단 리해되지 않았다. “”승자는 강한자가 아니라 살아남는자라는걸 모르시나보죠.” “색다른 가문의 유전자이군.” “주옥같은 망발은 사양하구 술이나 마시자요.” “먹어. 그렇더라도 입은 세탁하고 다니자.” 분위기가 굳어지면서 대화가 뚝 끊어진 두 사람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무드가 엉망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1차 장국집 술이 이제 요동칠때가 되였는지 홍교수는 속에서 열물이 올리솟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 코구멍으로 된장국냄새가 흘러나오는듯 싶었다. 홍교수는 표정없이 자기를 건너다보는 아가씨에게 량해를 구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러나 더부룩한 속과는 달리 배속의 이물질은 쉽사리 나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손가락을 질러넣어봤지만 웩웩 마른 소리만 흘러나왔다. 손을 깨끗이 씻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이프로 입가까지 샅샅히 훔친 홍교수가 체면있게 자기 자리로 되돌아왔을때는 아까 옆에 앉았던 아가씨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많이 욕했겠지. 늙다리가 생까고 자빠졌다구.) 홍교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서운하기보다는 속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저런 딸을 둔 애비는 어떤 심정일가 잠간 고민해봤다. 홍교수 자기 같으면 당장 아버지를 사퇴하고말것이다. 하기야 멀리 있는 애비가 딸자식이 저러고있을리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있을것이다. 용케 붙은 대학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서 가족을 빛내줄거라 믿고 허리 휘는줄도 모르고 생활비 한푼이라도 더 보낼려고 아득바득하겠지.    같은 또래의 딸자식을 가진 홍교수로서는 강건너 불구경만은 아니였다. 물론 마냥 후라이팬에 콩 튀기듯 방방 뜰수만도 없었다. 콩가루집안이 어디 따로 있다던가. 돈 떨어지자 배고프다고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세상 못할 노릇이 따로 없다. 그나마 혜경이는 참했다. 여러모로 삐여났다. 예쁘기도 하고 공부도 잘하고 속도 깊었다. 게다가 등록금, 생활비 념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보니 인간은 역시 레벨차이가 엄존한다. 적어도 혜경이는 생활난으로 인해 일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인간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접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였다.  실내에는 여전히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있었다. 그사이 손님들이 부쩍 늘어나 스탠드에 빼곡히 들어찬것은 물론 구석구석에 놓인 테이블도 빈자리가 없었다.  홍교수는 마시던 잔을 마저 굽내고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은 어느새 열한시를 넘어서고있었다. 스탠드바에 들어선지도 잠간인듯싶은데 벌써 두시간이 훌쩍 지난것이다. 이래서 세월은 류수라는 말이 나왔나보다.  혜경이한테서는 여전히 전화가 없다. 인젠 잠들어도 한참이였겠지싶었다. 홍교수는 좀은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날씨는 변해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더니 여직 자기 중심으로 자란 혜경이는 지금도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있었다.  홍교수는 웨이터의 부축을 받으면서 스탠드바를 나왔다. 평소보다 별로 더 마신것도 아닌데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놀리면서 홍교수는 빨리 어딘가 눕고싶다는 생각을 앞세웠다. 이제는 집으로 가야할때가 된듯 했다. 딸이고 뭐고 안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게 도리에 맞는거 같았다. 안해를 생각하면 취중에도 많이 미안했다. 안해로부터 오래동안 마음을 비워왔다. 마음의 비중이 딸애한테로 옮겨간줄도 모르고 여직껏 살아왔다. 어쩌면 안해도 홍교수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텅텅 비여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화를 무작정 닫았듯이 마음도 닫아버렸는지 알수 없다.   해변도시의 밤거리는 여전히 식을줄 모른다. 바다도 잠들었는지 잠잠하다. 바람이 한풀 꺾인 한가을 날씨는 열기로 푹푹 찌고있었다. 긴 거리 량옆에는 웃통을 벗어제낀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양꼬치에 청도맥주를 마시고있었다. 늦더위를 날려버리기에는 알맞춤이란듯이 장사치들의 호객소리 또한 요란하다.  홍교수는 괜한 유혹에 말려드는거 같아 머리를 긁적이며 차도에 내려섰다. 택시를 잡고 집으로 갈참이였다.  그때 한무리의 대학생들이 홍교수를 밀치다싶이 하면서 욱 거리를 가로질러갔다. 열명이 넘어되였는데 남녀로 짝을 지어 팔짱을 끼고 히히닥거리고있었다. 어디서 한잔 이미 걸친듯한 애들이 들고 안고 멘 물건중에 텐드 가방도 들어있는걸 보니 아마 해변가로 나가는 모양이였다. 이 야심한 밤에 탠드를 들고 나간다는건 귀교를 포기했다는 증명이였다. 하다면 바다가에서 이 밤을 지새운다는 말인가?  홍교수는 본능적으로 그들 뒤를 따라갔다. 배 고픈건 참아도 궁금한건 못 참는 홍교수이다. 자기 학교 학생들의 밤 모습이 이런것이였다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닌게 아니라 애들은 백사장에 탠트를 치기 시작했다. 10여명에 탠트는 고작 세개뿐이였다. 이윽고 탠트가 세워지고 랜턴이 켜지더니 왁자지걸 고아대며 패를 나누어 기어들어가고있었다. 아마 야식부터 시작할참인가보다. 실컷 먹고난후엔 그대로 엉켜져 자는건가. 홍교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해변길을 따라 쭉 늘어선 건물들은 거개가 고급 별장이나 호텔 또는 오피스텔같은것들이였다. 그중 한 호텔 한쪽 옆구리로 걸린 “찜질방”이라는 우리글 간판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홍교수는 비틀비틀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기는 열번도 글러먹었다. 도무지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아야 말이지. 이건 산넘어 산이다. 고개 넘어 열두고개다. 산마다 더 무겁고 고개마다 더 힘겹다. 젠장. 찜질방은 홍교수의 심정과는 별개로 성업을 이루고있었다. 자정을 치닫는 시점에도 프론트앞으로 손님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있었다.  홍교수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이제는 시야에서 희미해진 백사장쪽을 힐끔 뒤돌아보았다. 밥이 되던 죽이 되던 이젠 신경을 그만 끄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먹었지만 웬일인지 그게 잘 되여지지 않았다.  저 멀리로 아직도 등불은 켜진대로 있었다.  열쇠를 받아든 홍교수는 2층 목욕탕에 잠간 들려 가운을 바꿔입고 곧추 4층 찜질방으로 올라갔다. 원래는 3층의 헬스장에 들려 러닝머신을 좀 밟으며 술을 깨볼가고 생각했다가 그러면 땀 흘려야 하고 그러면 목욕탕에 들려야 하고 또 그러면 전화를 받을수 없다는 강박감에 쫓겨 부랴부랴 찜질방을 찾았다.  홀안은 무슨 피난처인듯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누워있었다. 사실 홍교수는 이런 시설에 잘 적응되지 않는 타입이다. 시끄럽게 코 고는 사람이 많은데다 자면서 뒹굴뒹굴 구부는 사람이 한두명은 꼭 있기때문에 소음이나 접촉에 민감한 홍교수는 많이 불편했다. 특히 덮는것이라군 전혀 없어 배가 허전한게 마냥 싫었다. 그런데 오늘은 오히려 그게 더 좋을거 같았다. 홍교수는 자기가 부지불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가봐 더 걱정이였다.  홀중앙에 걸린 대형 티비는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제멋대로 돌아가고있었다. 스크린을 올려다보기 맞춤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누운 홍교수가 좌우로 둘러보니 그나마 서너명은 자지 않고있었다. 다시 눈길을 돌려왔을때는 드라마가 막 끝나고 뉴스가 방송을 타고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성행하는 에볼라에 관한 소식이 톱뉴스로 전해지고있었다. 일단 한국에 입국한 나이지리아인이 고열 증세를 보여 격리조치되였다는 소식이였다. 중국은 아직 관련 보고가 없다는 뉴스에 이어  반기문유엔사무총장이 “에볼라와의 전쟁”을 선언하고있었다.  이 치명적인 출혈열을 일으키는 필로바이러스과 바이러스인 에볼라는 1976년에 처음 발생했었다. 근 40년 이어온 에볼라는 현재에도 효과적인 백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있다. 치료법이 부재한 에볼라는 그래서 더 무섭다. 홍교수가 눈을 떴을때는 아침 다섯시가 되여오고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두시간 정도를 깜박 잠들어버린것이다. 안 잔다 안 잔다 하면서도 결국 잠귀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깜박 졸아버렸다. 핸드폰을 살펴보니 부재중 전화는 여전히 없었다.  홍교수는 부시시 일어나 2층으로 내려갔다. 탈의실에서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데 밤새 여러곳을 전전한 몸뚱이가 쑤시고 근질거려 도무지 견딜수가 없었다. 잠간 망설였지만 곧 걸쳤던 옷을 다시 벗고 곧추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여느집과 마찬가지로 사우나도 있었고 한증막도 즐길수 있었다. 찜질방도 비빔밥처럼 짬봉이 되여있었다. 그러나 홍교수는 흥심이 없어져 샤워기에 사워만 하고 바로 나왔다.  결산을 마치고 거리에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생각밖에 전화 한통이 들어와있었다. 액정에 “혜경이”라고 적혀있었다. 어제 안해와 통화하던 그 번호였다.  홍교수는 그만 소태 씹은 심정이 되여버렸다. 긴긴 한밤중동안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전화가 말도 안되게 딱 목욕탕에 들어간 그 10분안에 울렸다니 도대체가 인간세상이란게 요지경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안해가 분명한 그 전화의 메세지는 구경 어떤것일가? 외박한 리유를 채근하는것일가? 아니면 딸애의 소식을 전하는것일가? 혹은 다른 어떤 중요한 소식을 알릴지도 모르잖은가? 그러나 홍교수는 콜백하지 않았다. 해보았자 우선 먼저 어제밤의 궁색한 행적을 하나하나 해석해야 하니까 피곤할 일이다. 당해도 집에 가서 당하자 그렇게 마음 먹고 택시를 잡아타고 소 채찍하듯 기사를 다그쳐 집으로 돌아왔다.  초인종을 누르고 후줄끈해서 서있는데 문이 덜컥 열렸다. 빨려들듯 집으로 들어서던 홍교수는 문을 열어주고 미처 몸을 돌리지 못한 딸애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빠~” 혜경이는 볼부은 소리였지만 홍교수는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 어리벙벙한 표정이 되였다.  “엉? 넌 왜 집에 있어?” “전 집에 있으면 안돼요?” 혜경이는 부딪친 얼굴을 손으로 누르며 억울한듯 종알거렸다.  “글쎄 그게 아니고…어제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잖아? 아침에 돌아온거야?” “어제 안 나갔어요. 왠지 엄마랑 하루 더 자고싶어서 가지 않았어요.” “아!” 홍교수는 금세 어지럼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안해와 딸애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쳐다보는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홍교수는 비칠거리며 침실로 곧추 걸어들어갔다. 침대에 넘어지기 바쁘게 하늘땅이 빙빙 돌기 시작하면서 머리속에서 번개같은것이 쭉 흘러내렸다. 방불히 혼령이 어둡고 깊은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느낌이였다. 홍교수는 끊어지는 그 혼줄을 붙잡으려고 버둥거렸으나 도무지 주체할수 없었다.                                             2014년 9월
19    노크하는 탈피 댓글:  조회:1252  추천:1  2015-01-25
중편소설   노크하는 탈피       1   2월의 청도는 그대로 완연한 봄이라 할 수 있다.기온이 얼마동안 령하에서 숨 돌린 덕분에 그나마 박스종이 두께만큼이라도 생겼던 얼음이 씽씽 불어치는 바다바람에 맥없이 풀어지고 겨우내 쓰러지지 않고 생기만 잃었던 풀싹들이 살판을 만났노라 쭉쭉 기지개를 켠다. 아직 여덟시도 되지 않았는데 리촌시장은 벌써 사람소리,오토바이소리,대장간같이 뭔가 쟁그랑거리는 소리로 벌써 북적거린지 오라다. 리촌하 강바닥을 평퍼짐하고 넓게 차지한 리촌시장은 청도에서 악명이 꽤나 높았다.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들이 여기저기서 썩어가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고작 2메터 넓이로 동쪽 한옆에 꺼져들어가 겨우 강이란 명맥을 이어가는 리촌하에는 하얗고 빨갛고 검은 비닐주머니들이 강을 따라 무언가에 줄지어 걸려서 흐르는 강물과 더불어 색동저고리처럼 하느작거리고 있었다.다행히 그 강을 가운데 두고 비릿한 해산물 매대들이 줄느런히 서있어 강의 썩은 냄새는 거의 의식할수 없었다. 력사유물마냥 조그마하게 남겨진 구역질나는 리촌하를 그나마 가장 멀리둔 서쪽에 조선족들로 이루어진 시장 코너가 있었다.노천시장이다보니 풍천이나 비닐쪼박으로 서로의 하늘을 덮었을뿐 통바람이 그대로 훑고지나가고 있었다.   매캐하고 시뿌연 새벽 공기를 헤가르며 짐을 나르는 장사군들의 얼굴엔 고단한 모습이 력력하다.어제 하루종일 실랭이질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이틑날의 장사몫을 장만하느라 밤잠을 빼앗긴게 분명했다.미처 눈도 붙이지 못했는데 또 약동하는 하루가 열려진게 틀림없었다. 장사짐들이 모여지고 쌓여지고 그러면서 한쪽으로 풀어지면서 벌써 다투듯 흥정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거 의란된장 한근에 얼마에요?” 어디선가 별로 서툰 한국말이 들려왔다. 지영이는 소리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도때도 모르고 불어치는 세찬 바람이 검은 비닐주머니 하나를 공중으로 날아올리며 꺼져들어간 리촌하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찌프러진 눈쌀넘어로 바로 코앞에 스물살 좀 넘겼을가 할 애숭이총각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사군 아주머니와 말을 걸고 있는것이 보였다. (고중이나 졸업했을가? ) 시무룩이 웃음이 나왔다.지영이도 언젠가 요란 끝마디 말만 들어가면 한국말인줄로 알았던 과거가 있었던것이다. “6원입니다.” “비싸군요.우리 연길에 가면 기껏해야 1원 50전 하겠는데요…” “그럼 연길 가서 사잡수시오.” “야,이 아줌마 참…왜 그래요? 좀 깍아주세요.” “안되우!” 좀생이같은 총각과는 달리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했다. “조선사람들은 뭐나 이렇게 비싸게 파니까 안된다니까.” 총각은 선자리에서 한동안 우물쭈물하더니 큰 결심이나 한듯 구시렁거리며 홱 돌아서 뒤쪽에 있는 한족매대로 다가갔다.이맘때는 한족장사군들도 어디선가 조선된장을 구해가지고 팔고 있었다.그래서 경쟁이 더욱 심했다. (아직 자리를 튼거 같지 않은데 나쁜것부터 배웠네.망조 아닌지 몰라.덜 떨어진것들은 적게 와야겠는데…) 지영이는 리유없이 냉큼 총각이 비워놓은 그 자리에 척 들어서면서 들으라는듯 목소리를 높혔다. “아주머니,된장 두근 주십시오.” 흠칫 돌아보는 총각의 몸짓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그러건말건 지영이는 손가락으로 된장을 찍어 맛보면서 수다를 부렸다. “연변에서 의란된장하므 몰루는 사람 별로 없지므.의란된장 디게 마싯다 아이가.” 그러다가 지영이는 제풀에 혀를 홀랑 내밀었다.자기도 모르는새에 한국인 어투를 흉내낸것이다.이젠 그런것들이 몸에 흠뻑 배여졌는가보다. 피뜩 심사장이 머리속에 떠올랐다.아직까지 이불을 뒤집어쓴채 코 비뚤어지게 자고 있을 심사장이 매일 노래처럼 반복하는 “아이가” 소리가 혹처럼 자기한테도 붙어졌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남과는 다르겠다고 욱벼르며 버텨온 자기도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라니 억울하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넘겨주는 된장을 받아들고 돌아서던 지영이는 바닥에 어지럽게 버려진 무언가를 헛밟고 휘청거렸다.순간이나마 허리 부위에 통증이 스쳐지났다.그 통증은 몸이 평형을 잃으면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반응만은 아니였다. 집문을 나설 때부터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었다. 심사장이 찾아온 이틑날이면 꼭 일어나는 현상이였다. 웬 중늙은이가 그렇게도 힘이 무진장한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자기 말로는 비아그라 먹는 일이 종래로 없다고는 하지만 그런걸 먹지 않고 쉰을 넘긴 남자가 그렇게 강할수 있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술 먹고 온 초저녁은 공식처럼 두번을 걸친다.그리고는 돼지처럼 잠들었다가 새벽 세시쯤에 또 한번 달려든다.이때가 당하기 가장 어려웠다.쉽게 버리기를 달가와하지 않는 심사장을 위해 지영이는 꽤나 오랜 시간을 허리를 꼬아가며 배합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영이는 시장을 더 돌아볼 생각을 버리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이 지나면 심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2   (몸보신 좀 시킬려구 했었는데…) 문고리를 잡으면서 지영이는 괜히 된장만 달랑 들고 돌아온 자신이 얄밉고 한심했다. 심사장과는 마지막 부딪침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좋으나 궂으나 근 6년을 살을 섞으며 지내온 사이였다. “너 나를 정말로 좋아한건 아니지?” “…”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기엔 섭섭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이 인생을 다 바쳐 사랑하기엔 솔직히 너무 늙어있는 심사장이였다.그래도 착실하게 챙겨주고 여러모로 인정을 심어준 심사장이기도 했다. “나랑 업다캐도 니는 잘할꾸다.긍께 니는 그런 센스 잇따 아이가 .잘해?” 섹스 무드를 익히려고 한 말이 아니란건 지영이도 잘 알고 있었다.벌써 인수인계가 마무리된 상황이다.구태여 아닌 아첨과 발라맞춤이 필요없는 시점이다.그러기에 지영이는 코마루가 찡해나는 감동을 먹기도 했다. 악연이라는 표현은 어딘가 외곡적이여서 어쩔수 없이 옷자락 스친 인연이라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심사장과는 어딘가 전생에 매듭지은 연분이 있긴 있었다고 지영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운명의 조화는 언제나 그렇게 신비하고 절묘했다. 지영이가 엄마의 정체를 확 알아버렸을 때는 머리속이 텅 빈채 망연자실했었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럴수가 있냐고,이래서 되느냐고 열아홉 마음이 묻고 답하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 물론 엄마도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것이다.연길에서 한창 대학입시공부에 열중해야 할 딸애가 황해가의 낯선 도시에 불쑥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지영이는 리촌이란 동네를 그쯤에서 알게 되였다. 여기저기서 고층빌딩들이 다투기라도 하듯 우후죽순마냥 일어서고 있는 그 가운데 낮다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질서없이 모여앉은 동네였다.개발붐을 타고 청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고 있었으나 겨레들이 뭉쳐 자리를 튼 리촌은 얼핏 동북의 어느 시골도시를 련상케했다.줄느런히 내걸린 한글간판만 아니였어도 청도에 왔다는 느낌을 좀체로 받을수가 없었다. 안마방에 리발관에 식당,다방 등 그렇고 그런 어둡고 음침해보이는 장소들로 오불꼬불 미궁마냥 길다랗게 뻗은 향양2지로에서 유표하게 우뚝 솟은 층집을 마주하고 지영이는 안도의 숨을 간신히 몰아쉬였다.  “누굴 찾습니까?” 노크소리에 문을 열어준 사람은 신수가 멀끔한 60대 사나이였다. 그러나 지영이의 눈길은 늙은 사내보다 집안에 먼저 돌려졌다.빠끔히 열린 문짬으로 잠옷바람에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있는 엄마의 익숙한 모습이 엿보였다.2년을 못 본 엄마를 슬쩍 지나가는 눈길로도 알아볼수 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했다.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기억속에서 사라져 저으기 불안했던 지영이였다.불혹에 들어선 엄마는 여전히 그렇게 예쁘고 젊어보였다. “아,아니…잘못 찾아왔어요.” 지영이는 입안 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한발 옆으로 비켜섰다.엄마의 모습이 인츰 집안 구석으로 사라졌다. 곧바로 문이 다시 닫혀지고 지영이는 찬바람이 그대로 왕왕 달려드는 계단에 비참하게 버려졌다. “누구예요? 여자애 목소리 같던데…” “아무것도 아니야.집 잘못 찾은 과객이야.어서 먹어.” 엄마의 어딘가 조급한 물음에 한껏 짜증이 얹혀진 사나이의 대꾸였다. 구겨질것 같은 마음이 이상하게도 목석같이 굳어져서 쉽게 꺽어지지를 않았다. 소한을 눈앞에 둔 한겨울날 난방장치도 없는 집안에서 잠옷바람으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아침 식사를 하는 엄마는 밝은 목소리만큼이나 행복할가 싶었다. 고향에서 심심찮게 보아온,그래서 인젠 면역이 되여진 그런 불륜이 정작 엄마라는 이름의 녀자와 초점을 맞추고보니 전혀 실감이 오지 않았다. 바보스럽게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그대로 엄마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계단벽에 기대여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지영이 옆을 그때 정장 차림의 깔끔한 40대 사나이가 느릿느릿 스쳐 올라갔다.훤칠한 키에 너부죽한 얼굴을 가진 중년신사였다.이따금 흘끔흘끔 지영이를 훔쳐보면서 정확히 엄마가 들어있는 집을 똑똑 점잖게 노크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이번엔 문이 열리는 대신 곡조가 달린 엄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먼저 새여나왔다.  “심정호입니다.저 배사장님 댁에 계십니까? 전화 연락하고 오는 길인데요.” 중년사나이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웬일인지 지영이를 돌아보았다.미간에 눈에 잘 띄이지 않는 기미가 박혀있었다. “아,네~심사장님, 잠간만요~. ” 엄마는 옷을 갈아입는지 한동안 잠잠했다.이윽고 문이 안에서 밖으로 밀려 열려졌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심사장이라고 불리운 손님은 얼핏 한번 더 지영이 쪽을 훔쳐보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잇따라 집안에서 엄마와 손님간에 인사수작이 오가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심사장이란 사람은 웃음소리도 걸걸했다.반면 호들갑 떨던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나중엔 들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집안에서 불시에 신발을 찾아 신는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복자씨,어딜 가는거야?” 배사장이란 사나이의 텁텁하고 위엄기 어린 물음에 이어 엄마의 기여드는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왔다.   “잠간 나갔다 올게요.” 지영이는 후다닥 계단을 뛰여내려 무작정 거리로 달려나갔다. 뒤미처 문이 덜컥 열리고 또닥또닥 층계를 달아내리는 구두발소리가 뒤등을 때렸다. 굽이를 몇개 돌았는지 알수가 없었다.귀가에는 환각인듯 자기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싶었다. “지영아!”   3   “예?” “지영아!” 그렇게 엄마는 한번 더 불러놓고 넋잃은듯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본다. “무슨 일임까? 오늘 엄마 영 이상함다” 지영이도 덩달아 비닐을 덧붙인 창문으로 눈길을 돌렸다.밖에서는 때마침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 새끼는 쌔시개처럼 어디루 바라댕기느라구 돌아오지 않니?덜렁수캐 같은게… 에이구 기갈이 번져진다.” 동생 지국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열두살난 지국이는 나이와 맞춤하게 개구쟁이였다. “이 정신봐라.저낙때가 다 댔제.그래니까 구둘이 찹지.” 엄마는 부시시 봉당으로 내려가 신을 궤신고 지영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먼저 자부동 깔고 탄재 덮구 있어라.인차 불 땔게.” “엄마,난 일 없음다.그런데 어째 그램까?” “나뚜 일없다.그 모재하구 버버리수갑 뿌레달라.” “내 학교서 올 때 전화했음다.갠데 전화두 야바입디다.” “얼루둥.” “엇씀다.” 억울한듯 입을 비죽 내민 지영이를 본체만체 엄마는 털모자와 솜장갑을 받아들고 문을 나섰다. 엄마랑 함께 있을 땐 몰랐었는데 정작 혼자 남으니 아닌게 아니라 추위가 엄습해왔다.지영이는 말 잘 듣는 어린애마냥 엄마 분부대로 방석을 끄당겨 깔고 담요로 몸을 감쌌다.덜덜 떨리던 몸이 그제사 좀 풀리는듯 했다.스팀 있는 학교 숙사에 그대로 있었을걸 하고 후회했다. 연길에 올라가 고중에 다니는 지영이는 주말이면 꼭꼭 집으로 돌아온다.농사철엔 힘겨운 엄마를 돕기 위해 자주 집으로 돌아왔었고 정미까지 끝낸 이맘때는 엄마가 보고싶어 달려온것이다. 올해는 날씨도 좋았거니와 엄마가 하도 억세게 일한 보람으로 농사가 대풍을 안아왔다. 일송정을 뒤로 등지고 앉은 이 고장은 만청시기에 황제에게 진상되는 어곡을 생산하던 유명짜한 고장이다.윤기가 도는 시커먼 땅을 갈아엎고 그대로 벼종자를 뿌리면 주먹만한 낟알이 달린다는 전설같은 고장이였다. 그토록 기름진 논밭들이 코리아드림에 한족들 손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고 있었다. 토박이로서 온 마을에서 유일하게 농사를 짓고 있으면서도 엄마는 언제 얼굴 한번 찡그린적이 없었다.펀펀하게 살아있는 남편의 일손을 일절 빌리지 못하면서도 가끔 그 남편의 주정과 욕설을 받아야 하는 엄마였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시종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장리돈을 내여 한국 가려다가 사기당한 아버지의 빚을 꽤나 갚을만 하다고 얼마전에 전화로 기쁜 일인양 알려주기도 했었다. 실지로 지영이도 엄마한테 전할 기쁜 소식이 있었다.”꽃나라”잡지에서 벌린 전국조선족중학생 작문콩클에서 지영이가 단연 금상을 차지한것이다.그걸 계기로 텔레비죤방송국 소년아동부에서 지영이를 단독 취재하여 특별프로로 방송하기로 하였고 출판사와 중학생신문사에서 손잡고 지영이의 개인작문집을 내주기로 결정했던것이다. (그새 무슨 일 또 생겼나?) 지영이는 여느때와 다른 엄마의 심상찮은 언행이 불안했다.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스르르 내려앉고 있었다. 바작바작 눈 밟는 소리가 가까와 오더니 초가집의 찌그러져가는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벼짚더미가 문이 좁다하게 먼저 밀려들어왔다.벼짚에 얼굴이 다 파묻힌 엄마뒤로 왕바람을 몰고 꼬리같이 후줄근해진 아버지가 따라들어섰다. “지영이 왔구나.네리 오는가 했더니… 전화두 하재쿠…” 미처 지영이가 대꾸하기도전에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벼짚을 봉당에 던지면서 대들듯 아버지를 향해 홱 돌아섰다. “듣기 싫소.소리개는 어째 치우?귀먹재 있소 여기?아부재기 찌르믄서.” “이 머저리같은 안까이 보자보자 하니까 더러분양 한다.궁디 콱 차놔래?” 별소리가 아닌데도 엄마는 괜히 짜증을 부렸고 아버지 역시 언성을 높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양, 날래 차오..나뚜 메케사게 이렇게 살고싶지 않소!.” “어째 주디 성한게 원쑤재.악새질 그만해라!계속 참아주니까 사래기 피는구나.” ”되게 쎄오.참아서…” “에씨,오늘 그저 채도재 갖구 가달 찢어놓구만다.” 아버지는 정말로 살인이라도 저지르려는듯 신을 신은채로 구들에 뛰여올라 식칼이 든 찬장 서랍을 와락 뽑았다.너무 힘을 갑자기 준 탓으로 서랍이 통채로 부억바당에 놀라 서있는 엄마의 발밑에 떨어졌다.아버지는 그쯤에서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허둥지둥 부엌으로 내려가려는것을 지영이가 앉은 걸음으로 달려들어 발목을 끌어안았다. “아부지 정신있음까?가매 태우구 에고 댕게두 모자랄 엄만데 아부지 지금 오끼 씀미까?” 지영이는 급한김에 고모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앵무새처럼 뱉어냈다. 아버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것이 대뜸 느껴졌다.그리고 가마목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손 놔라.’ 그러나 지영이는 아버지의 발목을 부여잡은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아버지는 체념했는지 엄마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뚜 날마다 누쿠대해서 귀채나 파며 얼루재질 하고 싶지 않다.처깜부터 고치깔기 장사 하게달데 파토치지 않았으믄 이제는 돈 벌었재?” “꼴 베기 싫소.돈 많이 벌어 곰태기 끼겠네.있는 돈이래두 곽지로 긁어가지 마오.” “그러니 우추사게스리 꼼치지 말고 내노란 말이.” “내 주먼지에 일전도 없소.” “종재가 모둥개 맞게 드살 센 종재야.” 아버지는 체념을 했는지 지영이 손을 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엄마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부엌에 벼짚을 쑤셔넣고 불을 질렀다.장작불보다 벼짚은 빨리 타는것만큼 열기도 빨리 뿜었다.집안은 언제 찬바람이 감돌았냐는듯 온기가 서서히 퍼졌다. 밥이 다 되여갈 무렵 지국이가 온몸에 짚오래기를 달고 맞춤하게 돌아왔다. 엄마한테서 “개포시”란 욕을 먹으면서도 지국이는 밥만 맛나게 먹었고 또 인츰 한옆에 꼬꾸라져 잠들어버렸다. “거 생지 좀 달라.내 숫궁기 빠졌나?자꾸 뭐나 잊어뿌리재.” 설거지 할러 내려간 엄마한테 상우에 있는 행주를 넘겨주면서 지영이는 다시 한번 물었다. “엄마,집에 무슨 일 있었음까?” 창밖은 어느새 눈이 멎어있었다. 4     “어이 추버라!” 복자는 몸을 가볍게 떨며 걸음을 재우쳤다. 눈 쌓인 촌길은 걷기도 퍼그나 힘들었다.간밤에 내린 눈이 한자 두께는 되였으나 시내처럼 쓸거나 쳐내는 사람도 없어 처녀지에 첫발을 딛는 사람이 청소부인셈이였다.다행이 누군가 벌써 여럿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혀있었다.그 발자국을 겹디디며 걷느라고 복자는 여간만 부산을 떨지 않았다. (이 넘의 촌구석에서 언제면 벗어날가?!) 촌사무실과 학교 내놓고 벽돌집 하나 없는 80세대의 오성촌에 이날 경사가 났다.김촌장네 막내딸 현옥이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게 된것이다. 신랑은 나이가 40대여서 그렇지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잘 생겼다고 마을에 언녕 소문이 퍼져있었다.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현옥이는 스물세살이라는 젊음이 밑천이였던 모양이다. 안쪽에서는 벌써 언제부터 이런 결혼이 있었다고 하는데 북도치만 모인 이 동네서는 처음 있는 일이였다.그리고 희사 역시 몇년만에 있는것이여서 온 동네가 북적거렸다. 복자도 아침 일찍 김촌장네 집으로 건너가는 중이였다.오라는 부름이 없어도 일이 생기면 서로 발벗고 나서는것이 이 마을의 유구한 전통이다. 마작을 번지다가 새벽녁에야 집에 돌아온 철주는 세상 모르고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자고 있었다.깨여있더라도 철주와 함께 가고픈 마음은 꼬물도 없었다. (그저 가서 총객이나 보구 인차 오지므..총객이 올기나 한둥.한국총객은 타가소에만 있다던데.) 복자는 피씩 웃었다. 쌀장사군과 오늘 햇쌀을 팔기로 약속되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마을에 오랜만에 생겨난 결혼잔치를 실컷 구경하고픈 마음이다.아직은 어리지만 그래도 딸 가진 엄마로서 떠나는 남의 자식도 지켜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벌써 사위 욕심이 난 모양이다.웨딩드레스 입은 딸의 모습이 언뜻 머리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제 사흘만 지나면 연길에서 공부하는 딸이 돌아온다. (내가  가시엄마 소리 들어야 할 나이가 됐단 말이?) 처음으로 세월이 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사고를 내기 위한 걸음이 틀림없었다. 잔치집에 이르기도전에 멀리서부터 몰려서서 웅성대던 사람들이 복자한테로 쫓아나왔다. “지영이 엄마,오늘 각시 대반 좀 서야겠소.” “방아간집 안까이가 대반 선다했잔쿠 뭠까?”   “글쎄 일이 비틀어졌단말이.낯이 빤빤한 젊은 여자 지영이 엄마밖에 없소..고생하오. ” “난 대반 어떻게 서는둥 몰루꾸마.” “지금 그거 아는 사람 하나뚜 없소. 대쑤 상이나 받구 술기 타구 동네 한바쿠 돈다우.” 복자는 주인집에서 챙겨주는 옷을 부산하게 갈아입고 신부옆에 들어가 앉았다. 신랑 신부 합상이 된 상에는 떡,과자,과일,사탕 등속이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옛날같았으면 젊은패들이 새까맣게 덮쳐들었을텐데 누구말마따나 씨종자가 말라버려서인지 중늙은이 서넛이 둘러앉은 속에 주례가 어줍잖게 상감을 치고 있었다.신부한테 부어지는 술 둬잔을 뺏앗아 대신 마신 복자는 안주라고 집다가 그나마 들은 흉내라도 내야겠다싶어 호들갑을 떨었다. “쉰떡은 이런 상에 올리는게 아이잖음둥? 시시해진다구 그러던데 말이.” “누기 그럽데? 아무래나 뭐라우? 배재밖에 술기 왔다우.나가깁소.” 소수레는 느릿느릿 마을돌이를 하기 시작했다.한번 지나간 길을 다시 되짚어 지나서는 안되는 법이라고 누군가 가르쳐주어 소수레는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다가 얼음길에서 그만 멈춰졌다.한겨울동안 길가에 아무렇게나 내버린 재더미에 구정물들을 부어 작은 산더미처럼 얼어붙은 그곳을 눈까지 가세하여 철을 신기지 않은 소가 도무지 지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복자는 소가 굽을 꺽고 넘어질가봐 신부를 꼭 부둥켜 안았다.살을 에이는 추위에 감기에라도 걸릴가봐 신부 몸우에 걸쳐진 털옷을 여며주기도 했다. 소수레가 그곳을 지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신부집에서 차려내온 술을 마시고 여럿이 소를 들다싶이 하여 간신히 지나온것이다. 복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술에 취한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길옆 울바자들을 무심히 건너다보았다.이때 빵빵 경적소리를 울리며 트럭 한대가 저 앞에서 지나가는것이 보였다 .아차! 복자는 속이 덜컥해났다.오늘 쌀장수가 쌀 사러 오기로 했던 약속이 불현듯 생각난것이였다. “에이 재수 개판이구마.” 소몰이군이 투덜대며 옆골목으로 수레를 돌렸다. “아즈바이,이렇게 가믄 더 멀지 않음둥?” 복자는 기겁한듯 소리질렀다.흐뭇하게 웃는 철주의 쪼잔한 얼굴이 새삼스레 스쳐지났다. “남이 차 지나간 길도 아이 지나꾸마.” 무너져 내려 앉을것 같은 초가집 사이사이로 돌아오는 그 10분이 복자에게는 10년 맞잡이로 길어보였다. 속탄 복자를 아랑곳 않고 조촐해 보이던 혼례 일정은 길기만 했다.신랑의 처가 부모에 대한 절인사에 집 떠나는 신부의 눈물 겨운 작별 인사 그리고 여러 친척 이웃들의 기념 촬영까지 마치고나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여왔다.수고했다며 주인집에서 식사하고 가라는것도 물리치고 복자가 집으로 달려왔을 때는 창고에 쌓아놓았던 쌀더미도 철주도 간데온데 없었다. (아이쿠, 버새같은 나그네 그 즈쌀에 돈은 알아가지구…) 복자는 그저 하늘이 무너지는 감각이였다. 그 쌀들은 그녀가 빚을 청산하고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일년동안 죽을둥살둥 모르고 일해서 거두어들인것이다. 복자가 후두둑 튀는 가슴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온 마을을 샅샅히 훑어 겨우 철주를 찾아냈을때는 이미 마작판에 천여원이나 되는 돈이 빨려들어간 뒤였다.   5     돈이 없어도 괜찮았다. 못 살아도 철주와 함께 한다면 행복할것 같았다. 둘이 맞붙어 벌면 가난은 쉽게 이겨낼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네 집에 얹혀사는 철주를 복자의 부모는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가끔 찾아와도 반가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특히 엄마가 더욱 그랬다. “내 말 듣잰쿠 우기써봐라.면다재 들구 댕기며 비락질 하지 않나.”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쓰다달다 말없이 함구만 했다.그래도 철주는 렴치불구하고 잘도 찾아왔다. “어마이,달기 모가지 한번 비틀어 보깁소.” “가우가우,낯에 쎄때판 깔았소.?” 엄마는 인정사정없이 철주를 문밖으로 내밀었다. “이 간나야.니가 꼬랑대 자꾸 흔들며 끄서들이니까 똘가두 안가지.” 복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는 엄마를 이겨낸적이 한번도 없었다.말없이 문을 나선다.엄마한테는 침묵이 제일 좋은 무기였다. “딸 키워 쓸데없단데.내 얼매 끔찍하게 고바했는데…어시말 안듣구 잘되는 년 없더라.” 복자는 엄마의 지청구를 등에 달고 저 멀리서 기다리는 철주에게로 다가갔다. 5월도 다 가는 어느 오후였다. 뒤산에는 검붉은 진달래가 활짝 피였다.산자락까지 내리깔린 진달래밭사이로 오염 하나 없이 새말간 개울물이 찰랑이며 흘러내린다.한들바람에 살포시 떨어진 진달래꽃잎들이 개울물에 평화롭게 떠서 길게 흘러내리며 마을을 둥그렇게 돌아 지나간다. 새로 이영을 해올린 초가들은 나름대로 아담하고 참신한 기상이다. 아지랑이 실실히 피여오르는 들판은 언녕 초록색으로 물들었고 하늘에는 강남 갔던 제비들이 활개치며 훨훨 날아예고 있었다. 새해 농사에 떨쳐나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로 한껏 넘쳐났다.뭔가 절실히 기대하는 모습들이였다.무성한 소문과 더불어 뒤숭숭해진 시국과는 달리 농부들은 오히려 등어리에 힘을 얻은듯 씩씩한 걸음들이였다. … … 화주석 손을 들어  해살을 보내주었네 … … “저 앞동네선 조를 나눴다더라.” 함께 노래 부르며 신나게 가래줄을 당기던 선화가 느닷없이 힘을 푸는바람에 가래날이 평형을 잃으면서 가래밥이 복자의 발목에 떨어졌다. “호호호…” 선화는 재미있다고 배를 안고 돌아갔다.복자는 선화를 밉지 않게 힐끗 노려보며 투덜댔다. “이 간나봐라.바람났재?” “바람은 미꿍기로 호박씨 까는 니가 났지므…” 그러다가 선화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가래대를 거머쥐고 선 철주의 낯이 어느덧 새빨갛게 달아있었다.복자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끝내 엄마의 인정을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둘사이의 관계는 마을에서 이미 비밀이 아니였다.엄마도 이젠 지쳤는지 입으로는 여전히 험하게 비꼬아도 둘이 그림자같이 붙어서 일하러 나가고 또 돌아와도 말리지 않는다. “그저 아가리 툭 쳐논다!” 종주먹을 쥐고 때리는 흉내를 내는 복자에게 왈패인 선화가 머리까지 내밀어준다. “얻다.자부대두 끄서라.” “저기 앞동네는 시범이라재?” “응,먼저 뚜깨 열어보는 모애.잘되므 다른 동네서두 따라하구.” “남방에선 개인으로 한다메?” “그런거같으루하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이곳 시골에서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세사람은 아직 감지 않은 논두렁에 그대로 걸터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참새처럼 끝없이 재잘거리는 두 처녀의 화제에 몇번 끼워들지 못한 철주는 멋적었던지 아예 논두렁에 걸터앉은채 나무꼬챙이로 민들레를 캐기 시작했다.꽃이 핀 민들레가 많았지만 닥치는대로 캐서 주머니에 쑤셔넣고 있었다. 이야기에 열중하던 두 처녀는 재미난다는듯 잠시 말을 끊고 민들레 캐는 철주의 뒤모습을 물그러미 바라본다.해가 구름에 가리워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인 가운데 허리를 구부정하고 논두렁에 앉아있는 철주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도록 환상적이였다. 저녁노을이 진 서쪽하늘은 랑만일뿐만 아니라 그대로 유혹이였다. 그 하늘에로 끌려가는 젊은 마음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미래는 언제나 아름다왔다.     6   변화는 늦게나마 그래도 서서히 이루어가고 있었다. 밥곽만한 라지오를 베개맡에 놓고 연변방송을 듣고 또 남조선 케이비에쓰방송의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절목에 취해 여러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그사이 복자는 소원대로 미래 작가인 철주와 결혼에 골인했고 귀여운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그리고 듣기만 하던 호도거리책임제를 맞아 자기절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도 벌써 옛날이였다. 남매는 다섯살 차이로 탈없이 잘도 자랐다.속 한번 태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참말로 기특한 애들이였다.딸애는 말하는거나 하는 행동이나 그대로 어른이였다. 아버지를 닮아 글재간도 얼마나 좋은지 소학교때부터 크고 작은 작문콩클들에서 상들을 도맡아 타왔었다.아들도 놀음에 탐해 그렇지 총명하고 공부 잘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의 창고를 빌어 구들을 놓고 나무궤짝 두개를 가지런히 붙여서 그 우에 이불을 얹어 시작한 결혼생활 몇년에 이젠 초가나마 자기집도 가지게 되였다.그리고 14인치짜리 흑백텔레비죤도 갖추어놓았다.좀 작기는 해도 영상이 또렷하게 나오고 음색이 맑았다. 부지런히 일만 하면 남부럽잖게 살수 있다는 믿음이 섰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속에서도 복자는 마음 밑바닥에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편 철주의 눈에 띄이는 변화때문이였다. 처음에는 통신원 회의이요 업여작자 학습반이요 하면서 나다니는 철주를 대견하게 느끼기도 했다.신문에 짤막한 글들이 가물에 콩나듯 드문드문 나와도 그저 기쁘기만 했다.철주한테 반했던것도 바로 그 글재간때문이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꼬리를 쳐들었다. 자기 입에는 덕신담배가 제격이라며 엽초만 말아 피우던 남편이 어느덧 권연을 손가락에 멋지게 끼기 시작했다.그리고 무슨 넘의 학습반과 회의가 하필이면 농망기에만 하는지 모를 일이였다.잔뜩이나 한국으로 일할러 가거나 대도시나 연해도시로 장사를 떠나 농사하는 마을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면서 말동무가 없어지는 판에 남편마저 곁에 없으니 일할 맥이 나지 않았다. (머절싸하게 왜 내 혼자해!) 생각이 삼천포로 달아나는것을 겨우 붙잡아 매두기도 했었다. 복자를 참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또 있었다.정미를 끝낸 이틑날이면 어떻게 알고 여러 소매점에서 남편의 외상술값을 받으러 찾아오는것이였다. “굶은 승애요? 반지술 끊어본적 없는데 무슨 외상술 그렇게 퍼먹었소 양?” 자기 입이 언제부터 이렇게 걸죽했졌는지 복자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룡정 시내로 시집간 선화는 말랑말랑해졌는데 자기는 되려 세월에 닳아떨어졌다는 한탄을 가끔 하고 있었다. “글친구들 올 때 먹은게요.집에 델구 오면 까마치 긁는 소리 아니므 퉁재 뚜들기는 소리나 하지.방법이 업지므.” “글이구 나발이구 이제는 싹 걷어치우.거기서 밥나오 죽나오?” 복자는 꽥 소리를 내질렀다.글공부에 처음으로 싫은 소리를 한것이다.그러면서도 선선히 쌀을 떠서 외상값을 물어주었다. 그러나 어느날 문뜩 철주가 논을 한족한테 팔아버리자는 말을 꺼냈을 때 복자는 끝내 참을줄이 끊어져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얼빤한 나그네 귀구멍은 넓어가지구.논 팔구 내굴 퍼먹겠소. 바람 퍼먹겠소.” “지금 안쪽에 고치깔기 데게 눅다우.그걸 연길 갇다 팔문 거저 부자재?힘들게 농사 짓겠소?” “듣기 싫소.돈 벌 즈쌀인가 세꽁이나 쳐다보..” “아 이 안까이 증말…” 발작할듯 뛰쳐 일어난  철주는 싱겁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괜히 나돌렸다는 후회가 들었다.남자도 밖에서 돌면 깨지는 법인가.글재간은 별로 늘어나지 않고 허튼 궁리만 속출했다. “안쪽에 글친구 하나 있는데 한국사람 아는게 있는매.가짜 초청장 해주겠답데. ” “돈 어디 있게?” “이자돈 꾸지므.” “무시게라우?지금 정신 있소?.얼빤한 짓 하지마오.” “남조선 한번 갔다오무 썩어질 때까지 일하지 않구두 사는데.” 복자가 반대하건말건 철주는 기어코 한족한테서 5푼짜리 고리대금을 빌려가지고 부득부득 안쪽으로 떠났다. 몇달동안 소식이 끊겼던 철주가 관골이 튀여나온채로 마을에 나타난것은 그해도 다 저물어가는 어느날 한밤중이였다. “짜팬당했소.친구하구 내 둘다 한국사람한테 짜팬당했소.” 철주가 돌아와서 보름동안 한 말은 이 한마디뿐이였다. 그리고 복자가 혼자 힘으로 어렵사리 거두어들인 낟알을 채권자인 한족들이 트럭으로 몽땅 실어갔다.살림집도 내놓고 또다시 남의 창고를 빌려 들었다.한 헥타르가 넘는 논의 경작권까지 빼앗겼으나 겨우 리자를 좀 더 갚았을 뿐이였다. 모든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아니,심한 마이너스가 되여버렸다.리자에 리지가 덧붙여지는 산더미같은 빚이 쌓여졌고 남의 논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형편이 되여버렸다.      7   밤은 깊어만 간다. 래일이면 딸은 연길에 있는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엄마 없어도 살만 하지?” 복자는 순진한 딸의 눈을 정시할수 없었다. 딸은 입을 꾹 다문채 화면이 시시로 떨어대면서 사람 모습이 자꾸 변형이 되는 텔레비를 신경질적으로 툭툭 두드릴뿐이였다.세월이 흘러 텔레비죤도 이젠 고물이 되였다. 말없는 딸을 묵묵히 건너다보며 복자는 훌쩍 커버린 딸을 처음으로 의식했다. 충격을 받고 울며불며 야료를 부릴것 같던 딸은 언녕 이럴줄 알았다는듯 무표정한 얼굴이였다.하긴 바로 그제도 당금 살인이라도 저지를듯 무섭게 날치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지켜주던 딸이였다. “니뚜 열일굽이다.골도 엄마보다 선새구.엄마 어째 이러는지 알만하재?” “…” “왜 말이 없니? 엄마가 꼴찌사니?” “어딜 가자구 그럼까?” 이것도 집이라고, 어시라고 연길에서 추운 길을 진둥한둥 달려온 딸앞에서 부끄럽게 부부싸움을 한후 이틀만에 처음으로 입을 여는 딸이였다. “선화아재 알만하니?거 용정에 시집간 엄마 동미말이.이원하구 지금 청도서 한국회사 식모로 일한다더라.” “꼭 가야함까?” “아까 곰방 전화했다.” 복자는 나무궤짝우에 싱겁게 놓여진 전화기를 물그러미 건너다보았다.향에서 무슨 통신우수향을 만든다고 억지로 놓아준것이다.그 전화기 값을 아직 갚지 못해서 심병으로 남아있는데 철주는 오히려 이게 웬떡이냐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기도 했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이렇게 살다간 내가 미칠거 같구나.” 복자는 속주머니에서 비닐로 꽁꽁 싼것을 꺼내 딸의 손에 쥐여주었다. “얻다.애껴 쓰믄 한학기는 쓸거다.니 아부지가 도박판에 잃지만 않았어도 좀 더 줄수 있는데.” 촌장네 딸 현옥이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던 날 도박판에서 우격다짐으로 쌀판 돈을 뺏아내여 결김에 그 즉시로 한족 빚군을 갖다주었다.앞으로 살 궁리로 조금 손을 보고나니 겨우 리자를 맞출수 있었다.벌써 3년째이다.빚은 좀체로 줄어들줄 모른다. 한족 빚군은 전자계산기로 수자를 쳐가며 일전한푼 차이나지 않게 꼼꼼히 계산했다.악착하기가 “꽃파는 처녀”에서의 지주와 같았다.일년내내 뼈 빠지게 일해서 저넘 좋은 일만 한다는게 억울했다.영원히 해빛볼 날이 없도록 자기를 그런 억울한 지경으로 내몬 남편이 죽이고싶도록 저주스러웠다. “내 힘들어 죽더래도 니네 둘 대학까징 얼매든지 꿍할수 있으니 아무 생각말구 공부 잘해야 한다.알았제?” “엄마..” 딸이 조용히 복자옆에 다가와 앉았다. “니는 일없는데 맨날 덜컬이 돼갖구 돌아댕길 지국이가 더 걱정이다.” “내 공일날마다 와서 씻어 입히겠음다.집이 가찹는데 걱정 아이해도 됨다.” “응.허덕간 덩때우에 빨래비눌이랑 빨래갈기랑 있다.” “알았음다.” “힘들면 외할매집에 갖구가구.아부지 시켰다믄 똘겨날거니까 니 절루 갖구왔다구 해라.” 아침을 먹고 나간 철주는 여직 돌아올줄 모른다. 철주는 여전히 그 식이 장식이였다.연길 어떤 회사에서 한국산업연수생을 모집한다고 한다.그래서 몇달동안 연길 가서 살다싶이 하다가 풀이 죽어 돌아왔다. 이번에는 심양에 있는 아는 친구의 먼 친척되는 사람이 한국으로 “터우뚜(밀출국)”를 알선해준다면서 달려갔다가 얼마쯤 선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뒤띠가 뽀애서” 돌아왔다.얼마전에는 한국으로 가짜 시집을 가는 길림처녀애의 아버지로 가장해서 나갈수 있다고 흥분하더니 웬 영문인지 더 이상 별말이 없었다.집에 와서는 마작판에서 살다싶이 한다.주머니에 돈도 없을텐데 어떻게 밖으로 나돌아 다니고 또 도박을 노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아무캐나 살라지므 .족대기 손목대기 다 자긴데 달렸는데 관할할 방법이 있나.) 복자는 남편이란 인간에 대해 완전히 체념한 상태였다.그 인간과 근 20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만 해도 지리리 소름이 끼쳤다. 이젠 지겹다.진저리난다.아직도 복자를 자기를 흠모하고 숭배하는 신데렐라소녀로 착각하는 남편이 한심스러웠다. (저 인간과 같이 살면서 가락지 하나 얻어 못차보구서 개고생만 했단말이.전생에  무슨 원쑤 졌는지?) 이날따라 남편에 대한 원망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그러나 가증하더라도 여직껏 참으며 살아온것이 자식들때문이라고 핑계를 둘러붙이기에는 막상 떠나려고 작정한 이 자리에선 너무나 초라해보였다. “후,날이 밝겠다.자자.” 복자는 전등을 끄고 드러누웠다. 한겨울 밤은 괴괴하기만 했다.이따금 씽씽 불어치는 바람에 초가지붕의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묵중하게 들릴뿐이였다.  앉은 자세로 한동안 부동하던 딸이 이윽고 이불을 살며시 쳐들고 찬기운과 더불어 들어와 가슴에 스르륵 안긴다.정말 오래간만에 모녀간이 한이불을 덮은것이다.두 몸이 맞대이는 순간 뭉클하는 감각이 팔에 맞쳐왔다.딸애의 몸이 이 정도로 영글었을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잔더리 긁어줄가?” 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 아득한 옛날 잠투정하는 딸에게 자장가대신 잔등을 긁어주는게 복자의 천륜지락이였다. 인차 딸애가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8     복자는 헉헉거리며 힘겨웁게 계단을 톺아오른다.다리를 들었다 내릴 때마다 눈앞에 꽃보라가 터지는 느낌이다. 직업소개소로 올라가는 마흔개도 되지 않는 계단을 두번이나 휴식하며 올라왔다. (스푼이 뭐랬더라? 국재더라?) 기억이 아물아물했다. 벌써 이틀째 배를 곯리다싶이 하고 있었다.주머니엔 정말 단돈 10원밖에 남지 않았다.소개비 200원을 낼 형편이 아니지만 복자가 믿고 찾을수 있는 곳은 그래도 직업소개소밖에 없었다. 청도에 온지 두달이 넘었다. 선화가 소개해준 한국회사에서 식모로 거퍼 한달도 일하지 못하고 쫓겨났다.복자는 한국인들이 하는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간혹 무슨 소리냐고 재확인하려고 귀를 곤두세우며 “예?” 하고 가까이 다가서는 복자를 한국직원들은 정신이 잘못된 사람쯤으로 여기고 피하기가 일쑤였다.그리고 복자가 하는 말도 한국직원들은 적잖게 알아먹지 못하고 있었다.어쩔수 없이 언성을 높이며 두번 세번 곱씹어 말해야 했다.아마 그런것들이 모순의 단초가 되였을것이다. “아줌마,거 냅킨 갖다주세요.” “냅킨이란게 머임둥?” 거의 기어가 맞아돌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고향에 있을때 성격처럼 드러내놓고 당돌하게 묻기도 했었다. “이 아줌마 먼소리 하는지 몰겠네.냅킨 좀 줘요..냅킨 몰루는가봐 히히.” 신경이 막 긁히우는 이런 비아냥소리도 자주 나왔다. 현장통역으로 뛰는 교포들중에 왕청에서 온 총각이 한사람 있었다.송씨 성을 가진 사람 좋은 총각은 복자가 민망했던지 가끔 가만히 퉁겨주었다. “찬찐즈 그럼다.” “아 찬찐즈면 찬찐즈지 무신 냅킨이야?” “아이구 아줌마,찬찐즈는 중국말입니다.흐흐.” 고향 사람한테까지 아즈마이가 아닌 아줌마로 불리우는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로해서 트러블이 생길 이유는 없었다. 어쨌던 그게 연분이 되여서 한국 직원들 입에서 모르는 말이 나오면 전처럼 당자에게 대들듯 묻지 않고 우선 왕청 송총각부터 찾았다. “아줌마,포크 좀 씻어주세요.” “총객이, 포크란게 머이요?” “차재를 말함다.” 그러던 송총각이 웬일인지 얼마후부터는 늦게 식당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복자와 한국직원들이 의사교류가 되지 않아 서로 죽을 쑬대로 쓴후에야 맞춤하게 들어섰다.복자와 시선을 마주칠가봐 저어하는듯 외면하기도 했다. 어느날 총무과장이 조용히 불렀다. “아줌마,달리 일자리 찾아야 할가 봅니다.” “가라는 말이구만.내 한 밥 맛없었습니까?”   “그런게 아니구 좀 사정이 있어서요.회사에서 아줌마한테까지 통역을 붙여주기는 곤난하거든요.” 20여일에 확실하게 기억한 한국말은 “키” 하나뿐이였다.열쇠를 키라고 부르는 족속도 있구나 하고 그 말을 들은 순간에 한탄했던게 기억에 도움이 되였을것이다. 그다음은 거의 공백이였다.듣고 기억하고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나이가 나이인만큼 잊음도 헤펐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한게 있었다.고향에 있을 때 “아즈마이”던 자기가 “아줌마”로 변해진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였다. 짐을 들고 거리에 나섰지만 차마 선화를 다시 찾을수 없었다.   원래부터 일솜씨가 재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자기가 일자리 하나 못 찾으랴싶은 자존심도 있었다. 청도에 왔을 때 처음 들었던 민박에 짐을 들여놓고 바로 직업소개소들이 빼곡히 들어선 빈하로에 찾아갔다.  코리아타운으로 탈변하고 있는 빈하로의 정수부분은 길이가 고작 2백미터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그 작은 거리의 량옆에 한글 간판을 내건 상가가  무려 7,80집이나 되였다.식당,옷가게,식품점, 노래방,직업소개소 등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들어선 빈하로는 조선족들로 바글바글거렸다. “아줌마,연변사람이구만요.” “연변사람인데는?”   “연변사람 취직이 잘되지 않습니다.일단 연계는 해봅시다.” 그렇게 직업소개소에 등록비로 20원 내고 한달을 기다렸으나 귀신이 곡할 일로 정말 취직이 되지 않았다.제집마냥 소개소에 죽쳐 앉아 일자리를 기다리면서 때마다 만두 하나에 죽 한그릇씩 사먹는데도 주머니 사정은 적자 지점에 당금 이르고있었다. 그보다 더 청천벽력은 선화를 찾을 방법이 없어진것이다.일자리 찾으면 다시 련계한다고 차일피일 미루었다가 얼마전 회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선화 역시 사직하고 나갔다는것이였다.서로 주소를 가지지 못한 딱친구가 청도서 이렇게 갈라지고 말았다. “후!” 복자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추스리며 소개소에 들어섰다.좀 일찍했던 모양으로 평소 북적대던 소개소엔 주인외에 아무도 없었다. “아줌마,마침 잘 왔네요.파트너라도 한번 해보실래요?” 소개소 녀주인은 여느때 없이 반색했다. “아무래나 좋지므.그런데 파트너란게 도대체 뭐요?” 오늘도 취직이 되지 않으면 빌어먹어야 한다는 핍박감에 사로잡혔던 복자는 무작정 답복부터 했다. “남자랑 일단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그저 부부처럼 그렇게 사는거예요.”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젊은 녀주인보다 오히려 복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악세사리 회사를 경영하는 환갑을 넘긴 한국분인데 40대의 믿음직한 여자를 찾아달래서요..아무래도 아줌마가 적임자일거예요.성사되면 소개비도 그쪽에서 내고 노임은 한달에 2500원 줄거구요.어떠세요?”   “… …” 복자는 근20년만에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였다.복자는 잠시라도 빌어먹으며 질긴 목숨을 연명해야 할 처지가 못되였다.한시급히 산더미같은 빚을 허물어야 하고 아들딸을 남부럽잖은 인재로 키워야 한다.     9     배사장이란 사람의 뒤를 따라 아파트에 들어설때까지도 복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였다.낯도 코도 모르는 생소한 남자가 전혀 무섭지 않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을 주지 않았다.그만큼 뭐가 뭔지 도무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머리는 혼돈상태에 빠져있었다. (악세사리하는 회사라구 했지.악세사리란게 뭘가?) 궁금한것도 많았다.아무렴 신수가 멀끔한걸 보니 굉장한걸 차리고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꽤나 큰 집이였다.얼핏 보기에 방이 여러개 있는듯 싶었다.넓직한 응접실엔 고급 쇼파가 위압감있게 놓여있었고 그 마주켠 벽에 어마어마하게 큰 텔레비죤이 걸려있었다.텔레비죤이 벽에 걸린걸 복자는 난생 처음 보았다. “신 벗어요.” 사나이는 찡그린 눈매로 하찮다는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예순 넘긴 남자답지 않게 힘있는 목소리였다.겉모습을 보아서는 쉰 초반정도밖에 되여 보이지 않았다. “짐 일로 주어요.” 배사장은 손을 내밀어 무작정 그녀의 짐을 빼앗아 구석쪽에 처박았다.그리고는 쇼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티비에서 희한하게 한국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복자는 기계적으로 배사장이 시키는대로 움직였다. 겉옷을 벗어 한옆에 치운후 우선 바닥부터 닦았다.노란색의 장판지를 깐 바닥은 닦기가 퍼그나 쉬웠다.그러나 생각밖에 먼지가 많이 나왔다.녀자손이 닿지 않은 집안이라는걸 대번에 알수 있었다.걸레를 여러번 새로 씻고 그러면서 복자는 열심히 바닥을 닦아나갔다.응접실을 닦으면서 뒤통수가 웬일인지 따끔해나 얼결에 돌아보니 배사장이 쇼파에 앉은채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불똥이 떨어질것 같은 그런 눈길을 복자는 잠재의식에서도 거의 몰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바닥을 다 닦은후 빨래감들을 찾기 시작했다.여기저기서 뭉치고 쌓이고 내버린 빨래감들이 나왔다.침실 옷장에서 나온 한가지 물건이 복자를 잠시 난처하게 만들었다.그건 녀인용 삼각 팬티였는데 진한 붉은색인걸로 미루어보아 꽤나 젊은 녀인의 소유가 틀림없었다.옷장에 걸려진것이 아니라 그대로 옷장 바닥 한구석에 팽개쳐져 있었다. 속부분에 코물같은것들이 잔뜩 발려져 있었는데 그저 버려진것과는 달리 먼지도 앉지 않았고 습기 많은 고장에서 흔히 보는 곰팡이도 끼지 않았다.복자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그것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빨래를 하고나니 짧은 초봄해가 어느덧 서산으로 기울어져 어둠이 물들고 있었다.  “화장실 가서 샤워 좀 해요.” 그때까지 쇼파에 앉아 말없이 티비만 보던 배사장이 문뜩 그녀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예?” “냄새 나니까 목욕 좀 하란 말이에요.” “저녁 밥 먼저 해놓고 목욕 하겠습니다.” “저녁 나가서 먹어요.일단 샤워 먼저 하세요.” 배사장이 이마살을 잔뜩 찡그리는것을 보고 복자는 그만 입을 다물고 옷 입은채로 화장실에 들어갔다.금방 바지를 내리고 있는데 화장실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배사장이 도적놈처럼 어슬렁 들어섰다.게슴츠레 풀어진 눈이 그녀의 아래도리를 훔쳐보고 있었다.복자는 본능적으로 무릎까지 내려진 바지를 급히 추슬러 올렸다.  “숫처년감? 수집음 타게?” 배사장은 흐물흐물거리며 다짜고짜 그녀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그녀의 몸이 어쩔새없이 배사장의 품에 안김과 동시에 허리띠가 터져나가면서 바지가 스르르 발우에 흘러 떨어졌다. “더 참을수 없어!벌써 몇달 굶었어!이러다간 병난단말이야.우리 샤워 같이 하면서…그것두 하구…시간 절약두 되잖아…” 배사장은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흰샤쯔에 감싸인 그녀의 두툼한 젖가슴을 허비듯 움켜잡고 씩씩거렸다.그제야 복자는 배사장이 어느새 웃통을 벗어제낀걸 발견하고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안깐힘을 쓰면서 허둥지둥 배사장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그러나 배사장은 바위마냥 끄덕도 하지 않았다.인차 얼굴에 식은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허기진 배가 후들후들 떨렸다.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이러지 마시오.내 자식 둘이나 있습니다.” “엉?” 배사장은 손을 풀고 어이없다는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파트너로 들어온거 아니란 말이지?난 파출부 찾은게 아니거든요.옷 입고 빨리 이 집에서 나가요.” “아,아닙니다.” “뭐가 아니란 말이야.돈 없어 굶어지낸다고 해서 내가 봐준건데…이제 한건 잡았다구 생각하는 모양이네. 당신들 그런 얌체한 궁리 걷어요. 거지 본성 여구하네 인간들!” “잘못했어요.” 복자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도 못했다.그리고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몰랐다.무조건 손을 비비며 잘못을 빌었다.그래도 배사장은 용서할 생각이 꼬물도 없는상 싶었다.바지주머니에서 백원짜리 지페 한장을 더듬어내여 복자 눈앞에 벌려보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걸 갖구 빨리 가!당신들 그 더러운 무리로!” 복자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퍼그나 오래동안 홀시된 그녀의 몸덩이는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있었다.그러나 여기서 쫓겨나가는 날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바싹 도사리지 않을수 없었다. 화장실안은 잠잠해졌다. 배사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만 싹싹 비벼대는 그녀를 물그러미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손에 들고 있던 지페를 그녀의 브래지어속에 집어넣었다.복자가 그것을 꺼내려고 허우적거리는데 배사장이 명령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로 내버려둬!글고 내 바지 벗겨!” 복자는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저도 몰래 손은 배사장의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가슴이 널뛰듯 심하게 들볶았다. “당신도 다 벗어요.” 두사람이 실 한오리 걸치지 않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배사장은 승리자의 미소를 머금고 흔상하듯 그녀의 육체를 쓸어보았다.오른손 중지를 뻗쳐 아직도 탄력이 있는 유두를 꼭 눌렀다.유두가 젖살속 깊숙히 밀려들어가 보이지 않는대신 젖무덤이 통통히 살아났다.배사장은 신음하듯 낑 소리지르며 남은 젖가슴을 입으로 물었다.동시에 왼손을 뒤로 움직여 샤워기를 틀어놓고 물살이 고르롭게 퍼지는 샤워기 밑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애 둘이라구 했던가?전혀 그렇지 않네.아이구 이 몸매 기막혀!어디 애 낳은 여자같다구…그리구…이건 처녀보다 더 조이네…” 물줄기때문인지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입안으로 짭짤한것이 흘러들면서 으윽 날숨이 흘러나갔다.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철주한테 안해로서의 책무를 거부한지도 2년은 넘은거 같았다.가슴이 미여오면서 머리가 빙빙 도는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10       청도에서 소포가 왔다. 여전히 하물발송인의 주소가 적혀있지 않은것이였다.언제나 그랬다.그래도 엄마가 보내온것이라는걸 지영이는 알수 있었다. 디자인이 새롭고 활발한 한국제 복장이였다.엄마가 잊지 않고 계절마다 맞춤하게 보내주고있었다.이번에는 겨울복이였다. 지국이 몫도 있고 또 주말인지라 지영이는 집으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지영이는 이 집의 매니저가 되여있었다.엄마는 돈이고 물건이고 지영이한테로만 보냈다.2년이 가까와오는 사이 지영이는 그 돈들을 알뜰하게 챙겨 아버지가 진 빚을 거의 갚고있었다. 새 학기엔 지국이를 연길로 전학시킬 생각이다.마을 학교가 학생래원의 공백으로 이번 학기를 끝으로 페교되고 향중심학교로 통페합된다고 한다.향소재지가 연길보다 별로 가깝지도 않았다. 지영이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떠올렸다.지국이를 생각하면 그저 자랑스럽기만 했다. 엄마가 소리없이 훌쩍 떠난 뒤부터 지국이는 갑자기 철이 들어 어른이 되여진  느낌이였다.밤낮을 모르고 밖에서 나돌던 지국이는 누구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짓말같이 엄마가 떠난 빈자리를 스스로 메우고있었다. “누나야,된장국 어떻게 끓이니?” 술에 푹 취해 다니는 아버지가 늘 찾는 된장국이다. 지국이는 그렇게 배워서 지영이가 학교로 간 닷새동안을 된장국만 끓여 아버지와 함께 먹었다.다시 미역국을 끓이는 방법을 배워주면 다음 한주일은 꼬박 미역국만 해서 먹었다.그렇게 몇달동안 지나더니 제법 여러가지 국을 끓여낼줄 알았다.물론 국만 달리 했을뿐 상에 오르는것은 언제나 이밥에 김치류밖에 없었다.그들은 여태껏 그처럼 먹으며 살아왔던것이다. (지국아!) 속으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한달음에 집문앞까지 달려온 지영이는 그만 목석같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연길서시장에서 옴니암니 따지며 사온 짠지봉지가 저도모르게 땅에 스르륵 떨어졌다. 발칵 열려진 출입문으로 외할아버지가 동네사람 몇을 데리고 한창 짐들을 밖으로 내오고있었던것이다. “할배,왜 이럼까?” “먼저 할매한테 가 있어라.좀 있다 보자.” 과묵한 외할아버지는 더이상 달다쓰다 말없이 짐만 들어내였다. (아차!) 지영이는 땅이 꺼져들어가는 현기증을 느끼며 허둥지둥 외가집으로 달려갔다. 지국이는 팔에 흰붕대를 감은채 가마목에 죽은듯 누워있었다.그 옆에 앉아 지국이의 손을 꽉 부여잡고 있던 외할머니가 지영이에게 구들에 올라오라고 가볍게 손짓했다. “할매,이게 무슨 일임까?지국이 누구하구 싸웠음까?” “쉿!” 외할머니가 목소리를 낮추라는듯 급히 눈짓을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숨소리조차 없던 지국이가 갑자기 전기에 맞은듯 후다닥 뛰여일어났다. “개새끼들 어디 니죽구 내죽구 해보자!” 조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렇게 큰 힘이 나오는지 외할머니와 지영이 둘이서도 이겨내지 못해 질질 문밖으로 끌려나갔다.바로 그때 짐을 가지고 돌아오는 외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철썩!” 외할아버지의 손이 번쩍하더니 어느새 지국이가 저만치에 나가 넘어졌다.눈알이 금방 뒤집어지는가 싶더니 입에서 흰거품이 실실 흘러나왔다.지영이는 미친듯 뛰여가 동생의 머리를 쳐들어올렸다. “지국아!지국아!...할배 왜 이럼까?지국이가 뭐 잘못했음까?” 외할아버지는 한사코 발버둥치며 발악하는 지영이를 밀쳐버리고 냉큼 지국이의 멱살을 거머쥐고 집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구들에 던져버렸다. “쿵!” 지국이는 나무단 넘어지듯 구들에 나가 뒹굴었다. “짐승보다 못한 그것도 애비라구 역세 들어?너까지 이러믄 니집은 망한거다. 알았니? 자식아!” 눈물코물 범벅이 되여 악악 외마디 소리만 지르는 지영이 무릎에 머리를 무겁게 내맡기고 지국이는 퀭해진 눈으로 외할아버지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지영이는 외할머니와 마주 앉아 사연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아버지는 도박을 놀다가 적지 않은 돈을 잃었었다.이 사람한테 좀 빌리고 저 사람한테 얼마 빚지면서 판을 계속 이어가다가 더는 빌려주는 사람도 빚을 얹어주는 사람도 없어지면서 말다툼이 벌어졌고 결김에 아버지는 품에 간직하고 다니던 칼로 상대방을 찌르고 도망친것이다.다행히 칼이 빗나가 큰 사고가 생기지는 않았으나 상대방은 그걸 핑계로 집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어린 지국이에게 을러멧었다. “나 잡아갑소 하구 지국이가 가만있었더면 아무 일 없었겠는걸…지두 아버지 일이 밸이 터지니까 막 대들었는 모애더라.그래 그넘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팔을 얻어맞았구…”     11     “여보세~요?” 저쪽에서 엄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지영이는 되도록 맑은 목소리로 조용히 불렀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귀에 소곤대듯 가느다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맘대로 하지 말랬잖니?출근시간에 전화질하면 회사서 좋아 아이 한다.” “엄마, 급한 일이 있어 그럼다.지국이 연길초중에 붙었는데 학교서 선새들이 부모 주소를 달람다.부모 여파레 없구 바까테 나가 있으면 성적표도 부처주구 그러면 챈쯔하구 손도장두 찍구 그래야 함담다.” 지영이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새학교 이름과 학년 그리고 새로 맡은 세집의 전화를 숨죽여 알리면서 어쩐지 영화에서 보던 특무같단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청도에 가더니 많이 변해 있었다.정체가 희미하고 신비했다.여직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었다.그리고 무슨넘의 회사가 전화를 걸수는 있어도 마음대로 받을수는 없게 규정했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아부지 있잖니?” “아부지 종적 감춘지 몇달됨다.” “그 인간 또 어디 갔어?” “터우뚜로 한국 갔단 말도 있구…” 지영이는 엄마가 주소를 한자한자 불러주는대로 열심히 적었다.그리고 가슴속 깊숙히 새겼다. 원래는 이게 아닌데 하고 지영이는 도리머리를 저었다.아버지의 행실을 일러바치고 지국이의 현황을 알리고 그리고 자기의 타산도 털어놓으려고 작심했었다.아무래도 엄마의 소심스런 행보가 지영이의 의심을 자아낸게 분명했다. 솔직히 언녕부터 엄마의 정체를 알고싶었다.아픈 엄마가 그들 오누이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는 육감적으로 느껴지고 있으나 그 고통의 깊이나 무게를 실감할수가 없었다.이미 성인이 된 지영이는 그것을 묵인하고 지나칠수가 없었다. 엄마는 전혀 생각지 못할것이다.이시각 지영이는 자기 인생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있었다. 지영이는 아버지가 칼로 남을 찌르는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는바람에 생각보다 일찍 지국이를 연길로 데려왔다.겨울방학이 닥쳐오고 다시 새학기를 기다리기엔 지국이가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지국이가 엄마의 실종으로 번쩍 철이 들었다면 이번엔 아버지의 무지한 행실로 인해 한결 조숙해진 모습이였다. 외할아버지한테 된 매를 맞은후 한바탕 크게 앓고난 지국이는 해종일 가도 별로 말이 없었다.무표정한 얼굴로 책만 보는 지국이가 퍼그나 안쓰러웠다. “누나,내 꼭 대학갈거야.그리구 맹세코 남보다 더 잘 살거다.” 순순히 지영이를 따라와 연길의 어느 초급중학교에 붙은 그날 지국이는 세집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응,알았다.” 지영이는 줄 끊어진 구슬마냥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칠념 않았다. 코밑이 검스레해지고있는 지국이를 대견한듯 바라보았다.지국이가 든든하고 미더웠다. “이젠 누나가 니를 꿍할게.꼭 우리 가정을 다시 일궈세워야 한다.응?” “응!” 지영이가 얼마전 학교를 중퇴한 사실을 지국이도 알고있었다.어린 마음에도 누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얼기설기 복잡하게 엉켜진것이다. 그날 두 오누이는 하루종일 연길시내를 헤집고 다녔다.공원에도 가보고 부르하통하 유보도도 거닐었고 눈뿌리 아득하게 넓은 연변대학 교정도 활보했다. 시골에서만 자라온 지국이의 눈에는 무엇이나 모두 신기했다.특히 연변대학 본교 청사앞에서 지국이의 눈빛은 부리부리 빛났다. “누나,내 공부 잘해 꼭 대학생이 될거야.” 지국이는 오전에 세집에서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되뇌였다.그러는 지국이가 지영이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풍지박산이 나는 이 가정에 지국이는 마지막 타오르는 초불인셈이였다. 며칠후 지영이는 고향을 떠나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사랑하는 동생,  외로운 동생 지국이를 홀로 두고 떠나는 고향은 정말 떠나고싶어 떠나는것이 아니였다.차창밖을 스쳐지나는 눈 덮인 익숙한 산과 들을 묵묵히 내다보며 지영이는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는 고향에 속으로 작별을 고하였다.     12     “지영아!” 분명 엄마의 부름소리를 들은것 같았다. 집안에서 심사장이란 사람과 낮다랗게 인사말을 주고 받던 엄마가 부산하게 신을 찾아신을 때 지영이는 말로 형용할수 없는 예감이 엄습해왔다.본능적으로 돌아서서 거리로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또닥또닥 계단을 급하게 뛰여내리는 엄마의 발자국소리가 뒤잔등에 울림이 되여 맞혀왔다.굽이를 여러개 돈듯 했는데 엄마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환각처럼 시종 귀등에 매달렸다. “지영아!” 환각이 아닐지도 모른다.쫓기듯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타고 묵고있는  서라벌호텔에 돌아왔을때까지도 엄마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고막을 간지럽히고 있었다.그러나 그 부름소리는 시도때도 없이 억양이나 장단이나 고저가 자꾸 변화되였다.이따금 전에처럼 시원시원하고 서글서글한 음성이였다가 곧바로 간드러지게 외곡되여 애교를 풍기기도 했다.귀를 틀어막아도 그 생동감은 좀체로 사라지지 않았다.과거와 현재가 짬봉이 되여 허영으로 머리속에 우렷이 떠오른것이다.구경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가상인지 도무지 가려낼수 없었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 지영이는 소리없이 울었다.통곡이라도 칠것 같았는데 목청이 답답하게 막혀있었다.발버둥질이라도 할것 같았는데 사지에 전혀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엄마한테 배신당했다는 느낌은 진한편이 아니였다.꼭은 그렇지 않아도 비슷한 예감은 언녕 있었다.오면서 잠간 들렀던 북경에서 가이드로 뛰는 친구가 그대로 주저앉으라고 만류하는것을 뿌리치고 기어코 청도로 강행한것도 엄마가 어느 정도로 구겨져 있더라도 얼마든지 량해할수 있다는 심리적 준비가 되여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어쩔수 없었다는걸 알고있습니다.딸이 이만큼 컸으니 엄마는 이젠 집에 돌아가 쉬세요.) 지친 엄마를 만나 가장 하고싶은 말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엄마는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구질구질하지도 않았다.옛날보다 얼굴이 더 화사했고 몸매도 많이 피여있었다.하필이면 륙십을 넘긴,그것도 한국령감이냐는것이 지영이가 좌절과 피해의식을 느끼는 원인인지도 모른다.이젠 연길 거리바닥에서도 쉽사리 볼수 있는 현지처의 신분,정말 엄마가 그 밝은 목소리만큼 행복할가싶었다.그 행복이 위장한것이 아니고 진실한것이라면 지영이는 그래도 엄마를 축복해줄것이였다.  마음을 정리하고 호텔을 나선 지영이는 자기가 꼬박 하루밤 하루낮을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짧은 겨울해는 지평선너머로 사라지고 어둑어둑 검은 장막이 내리덮히고 있었다. 지영이는 발길이 가는대로 홍콩중로에 들어섰다.정면으로 “신가장”이란 뻐스역이 보였다.불과 7,8년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동북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동포들이 모여들던 지저분한 농촌마을이였다.허나 지금은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이 낮다하게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목표없이 느직느직 앞으로 걷노라니 “제일식당”이란 한글간판이 눈에 띄였다.조건반사적으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뭘 좀 먹어야겠네.) 문뒤에 대기하던 복무원이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서니 어두워지는 하늘과는 달리 좀 일찍한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피뜩 보니 안쪽 구석쪽에 남자 손님 하나가 소주를 들고 시름없이 출입문을 건너다 볼뿐이였다. 지영이는 창문옆에 자리를 찾아앉으며 무심코 넙죽한 얼굴의 그 손님을 다시 돌아보았다.마침 그쪽도 지영이한테로 눈길을 주는 참이였다. (어디서 보았더라.) 어딘가 낯익어보였지만 지영이는 굳이 기억을 더듬고싶지 않았다.세상을 살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스쳤을터인데 얼굴 익은 사람이 어디 한둘뿐인가 . 이날따라 술을 먹고싶었다.일단 유명한 청도맥주 한병 시키고 료리를 주문했다. 료리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네온빛이 반짝이는 창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엄마에 대해 잠시라도 걱정을 삼가기로 했다.고요한 엄마의 삶을 흔들어 깨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엄마가 행복하다면 다행이였고 그만이였다. 이젠 지영이 자신이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였다.북경으로 친구를 다시 찾아갈가고 생각했다가 인츰 도리머리를 저었다.그건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는것과 다를바 없었다.엄마를 찾지 못했다는건 구실이 되지도 않았고 청도의 일자리가 시원치 않더라는 핑계도 호기를 뽑으며 떠난 자신에 대한 부정이였다.이대로 청도에 남는다는것도 대개 난감한 일이였다.엄마를 가까이 두고 아니 만날수 없었다.모녀간이 상봉하는 날이면 엄마가 불행으로 다시 굴러떨어지는 날이라는건 보지 않아도 비디오였다.연길로 되돌아가는것으로 방향을 잡아보았으나 지국이앞에서 엄마의 씨나리오를 빈틈없이 짜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그사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왔다간듯 했으나 별로 기억에 없다.료금을 지불하면서 풀어진 눈으로 둘러보니 식당안에는 여전히 처음 들어올때 보았던 얼굴이 익어보이는 그 손님뿐이였다.그쪽에서 눈인사를 보내오는듯 싶었으나 지영이는 외면하고 매대우에 놓인 광고잡지 하나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13     명나라 관리들이 쓰던 모자 비슷한 모양의 시정부청사앞의 54광장에서 지영이는 머뭇거렸다. 그옆에 “복태광장”이란 간판을 건 오피스텔이 있었다.건물이름에 광장이란 수식을 단것은 처음 보았다. 지영이는 손에 든 잡지에 명시된 방을 찾아 노크했다. “네,누굴 찾으시죠?” “안녕하십니까?편집일군 모집한다기에…” “그래요?일루 오시죠.심사장님~!” 얼굴에 잠이 다닥다닥 배인 녀직원이 이끄는대로 30평이 되나마나한 사무실 뒤쪽에 낮다란 칸막이를 따로한 곳으로 따라갔다. 좁다란 칸에 비해 무지 큰 사무상에 마주 앉아 잡지책을 뒤적이던 한 사나이가 부름소리에 얼굴을 쳐들고있었다. 둥글넙적한 얼굴에 량미간에 연한 작은 기미가 있는 그 사나이를 보는 순간 지영이는 흠칫 놀랐다.이틀전 저녁에 제일식당에서 보았던 그 손님이였던것이다.여전히 어디선가 여러번 본듯한 얼굴이였다.특히 그 기미가 인상적이였으나 딱히 기억나지 않았다.대방도 의외라는 눈치더니 인츰 알은체를 했다. “알만한 분이시네요.앉으시죠.” 심사장은 첫눈에 풍기는 점잖은 인상과 같이 어조도 부드러웠다. “학교는 어디를 나왔죠?” “고중 필업 못했음다.” “광고를 보셨으면 저희 요구조건 잘 알겠는데요?”   “예.근데 대학 필업했다구 꼭 글 잘 쓰는건 아닙니다.” 당돌한 지영이의 대답에 심사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고중에서 교내잡지의 주필질 했습니다.그런데 항상 저급학년 학생들이 글을 더 잘 썼습니다.글이란건 감수성이 뛰여나고 필력이 좋아야 쓸수 있는겁니다.대학 나왔다구 다 잘 쓰는건 아닙니다.” 지영이는 내친김에 사정없이 내뱉었다.호텔에서 잡지를 뒤적이다가 초빙광고를 보고 시험삼아 응한것뿐이였다.취직이 되지 않아도 무방했다.며칠 청도에서 놀다가 엄마 현황에 대한 핑계가 만들어지면 연길로 돌아갈 생각이였다.제1해수욕장은 이미 다녀왔다.날씨가 추워서 바다물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바다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대해보는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웬일인지 바다는 멀리 내다볼수록 수평이 높아지는 느낌이였다.바다물이 륙지에 당금 쏟아질것처럼 서서히 서있는 모습을 보고 야릇한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자기만 그렇게 보이는가싶어 옆사람들한테 물어보니 모두들 확실히 바다물은 멀리 내다볼수록 륙지 수평선보다 높아 보인다는것이였다. “우리가 찾는건 기자가 아니고 편집이거든요.” “그건 저도 압니다.편집도 마찬가지입니다.그저 되는대로 맞추는게 편집이 아닙니다.독자의 구미에 맞게 원고를 선별해야 하고 새로운 열점을 포착하여 논쟁도 만들어야 합니다.이거 보십시오.어디 잡지입니까?” 지영이는 들고온 잡지를 차탁우에 올려놓았다. “하도 심심해서 잡지를 찾아 다 훑어보았는데 작년거나 지금 새로 나온 잡지나 표지만 다르고 내용은 비슷합니다.지어 광고순서도 꼭 같습니다.이러면 누가 다시 이 잡지를 보겠습니까?한기만 꾸리면 되는게 아니예요?보는 사람도 없는 잡지에 누가 광고를 낸답니까?” “내일부터 출근하시오.” 심사장의 분부로 지영이는 그날로 회사 숙사로 옮겨왔다. 지영이는 바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기 바쁘게 일이 추진되였다.지영이가 “청도진출 한국기업 성공노하우”란 코너를 만들자고 제의하자 거의 모든 한국단체장들과 면목이 있는 심사장은 곧바로 누군가와 련락을 맞춰주고 취재를 나가라고 내쫓았다.사회효익도 무시 못한다며 날따라 커가는 조선족사회에도 눈길을 돌리자고 말하니 즉시 편폭을 할애하여 조선족관련이벤트를 홍보했다. 인터넷에서 긁어내고 광고문만 싣는데 습관되였던 잡지사가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한주일에 한번 정도는 회식을 하던 무형규칙이 깨졌다고 투덜대는 직원들도 있었다. 물론 지영이는 더욱 바빴다.거의 두달이 되여오는 동안 회사에서 식사해본적이 몇번 없었다.더우기 광고래원면에서 현지 중국기업들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비중을 두고 중요시하자는 잡지사의 운영방침이 확정된후부터 지영이는 심사장을 따라 매일이다싶이 밖에서 나돌았다. 심사장은 첫인상처럼 호기스런 사나이였다.괜히 폼잡는 일반적인 한국인들과는 달리 근무시간이외에는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다녔다.회사 직원치고 심사장의 어깨를 한두번 두드려보지 않은 직원이 없었다.노래방에서 술 한잔 잘되면 그대로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목청이 터지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틈만 생기면 직원들을 불러 모아서 술도 자주 사주어 모두들 그를 형님 오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특히 인정에 목마른 지영이는 더욱 그랬다.심사장의 매 하나의 동작과 매 한마디 말이 모두 그렇게 멋질수가 없었다.  “흐메…내 일카다 죽능기 아닌교.” 술만 먹으면 경상도사투리가 나오는 심사장이였다. 한국업주들과는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형식을 중시하는데 반해 술량으로 합작여부를 결정하는 우직한 중국사장들과 만난 날이면 심사장은 언제나 이런 하소연을 내뱉었다.그것도 절반이상 지영이가 대신 마셔주는데도 심사장은 많이 힘들어했다. “오늘 오만데 댕겼다 아이가.술도 마이 묵구.힘드이까 청양서 자구가자.” 심사장은 길옆 모텔을 가리키며 휘청휘청 그쪽으로 걸어갔다. “사장님,택시 타구 회사 돌아갑시다요.” 지영이가 아무리 말려도 쓸데 없었다. “조막디이가 믄소리 글케 많아.퍼뜩 탁배기 사오지 못할가.” 겨우 심사장을 방에 들여놓고 지영이는 지청구를 이겨내지 못해 술사러 나왔다.막걸리는 있을수 없고 가까운 가게에서 캔맥주 다섯개에 안주로 땅콩같은것을 사들고 돌아왔다.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리없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당금 죽는다던 심사장이 겉옷을 벗어버리고 쏘파에 앉아 멀쩡한 정신으로 한창 텔레비를 보고있는것이 아닌가. “오데가노?” 술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지영이에게 심사장이 물었다. “저두 힘들어 죽겠어요.좀 누워야겠어요.” “이런 싸가지라구.니 싸가지없이 군거 내 몬참는다.너 면접하는 날도 털페이 짓거리 했다 아이가.” “사장님,제가 그렇게 만만해보이세요? 막말하게…” “마,시끄러.그런 밴댕이 소가지 가지고…우예댔던그건 미안타.한잔 마셔.” 지영이는 싱겁게 웃고말았다.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심사장이 넘겨주는 캔맥주를 받아 한입 깔죽 마셨다. “내 널 처깜보구 십껍했다 아이가.꼭 배사장네 파트너랑 비스무리하다닌께.” “건…무슨 말씀이죠?” “…” 심사장은 말없이 맥주만 들이켰다.     14     탕탕탕 급하게 문두드리는 소리에 지영이는 간신히 눈을 떴다.아직 바깥은 희끄무레했다. 옷 입은채로 잠들어있었다.새벽까지 먹은 술에 많이 취했었다. 어떻게 자기방으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아가씨,큰일 났어요.어제 함께 온 손님이…” 지영이는 불길한 예감에 벌떡 뛰여일어났다. 심사장은 화장실 입구에 사지를 뻗고 누워있었다.아마 화장실에 가다가 몸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듯 싶었다.심사장이 심장병이 있는걸 잘 알고있는 지영이는 급히 가방에서 비상용약을 찾아내여 먹였다.얼굴색이 평온을 찾을무렵 련락을 받고 온 구급차가 심사장을 청양구인민병원으로 실어갔다. “좀만 늦게 와도 큰 일 날번 했습니다.도대체 옆에서 뭘하구 있은겁니까?환자가 저 정도로 술을 먹게 하다니.” 의사는 지영이가 환자의 가족이기라도 하듯이 닦아세웠다. 번잡한 입원 수속을 끝마치고 병실에 돌아오니 심사장은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진채 링게르주사를 맞고 있었다.무심하게 각선이 선명한 심사장의 준수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영이는 금방 의사가 보여준 애매한 표정이 생각나 피씩 웃었다. (나를 딸로 본건가?) 머리가 가로저어졌다.두 사람의 외모나 실지 년령을 따져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식을 대하는 그런 눈치가 아니였다. (하다면 애인으로 착각했단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영이는 끔쩍 놀랐다.딸로 보인게 아닌것처럼 마누라로 볼리도 만무한 일이였다.그러고보니 의사의 입가에 얄삽한 실웃음이 걸려있었던것 같기도 했다.지영이는 억울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골치아픈 일이군.) 심사장은 홀로 중국에 와 회사숙사에 직원들과 함께 있었다.그의 가족상황에 대해선 지영이는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그러니까 어차피 그녀가 그 멍에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된다.솔직히 지영이는 심사장이 싫지 않았다.년령차이만 아니라면 그의 애인도 될수 있겠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저도몰래 붉어졌다.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자리잡았는지 몰랐지만 여하튼 벌써부터 심사장의 잔장난들을 모르는척 좀씩 받아준 지영이였다. 지영이는 망연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불시에 여직 지국이에게도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왜 이자 전화하니?엄마가 누나를 자꾸 찾는데…” “뭐라구 했어?내 청도 갔다구 그랬니?” “사실대로 말했지.그러므 어떻게 해야 하길래?” “알았어” 병실에 돌아오니 그사이 심사장은 깨여나있었다.지영이를 보는 눈이 심상치가 않았다. “고마워요.수고했습니다.” 지영이는 웬일인지 피씩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고맙습다이.수고하십니더 이래야잖아요.” 심사장은 쑥스러운듯 얼굴을 돌렸다. “사모님한테 알려야 하지 않나요?” “아니,괜찮아.그 사람 캐나다 이민 갔걸랑.내 병 내가 아니까 걱정말아요. 심장발작이야." 심사장은 의사가 말리는것도 뿌리치고 사흘만에 출원했다.과도한 피로나 또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충고를 받은 지영이는 심사장이 잠시 회사에 나오는것외에 모든 일을 일절 도맡아했다.일을 마치고나서는 숙사에서 심사장의 시중을 열심히 들었다. 어차피 심사장이 망하면 자기도 거꾸러진다는 현실을 청도에 있는 두달간 지영이는 심각히 인식하고 있었다.나날이 황페화되고 있는 고향의 소식은 지영이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있었다.향락과 퇴페가 살판치는 고향에 지영이가 한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서있어야 할 정토가 보이지 않았다.지영이는 절대로 엄마처럼 당하며 사는 삶을 선택할수 없었다.그만큼 심사장의 존재가 더없이 소중했고 절실했다. 지영이는 짜게 먹는 편인 심사장을 위해 친히 담담한 료리를 만들어 대접했고 지방이 높은 고기류를 제한했다.거의 군입질을 하지 않는 심사장은 침대머리에 과일을 깍아놓아도 지키지 않으면 아예 먹을념을 하지 않았다.그래서 강권하다싶이 하여 먹이고나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15     “띵동” 차임벨을 여러번 눌러도 대답소리가 없다.아마도 깊이 잠든 모양이였다. 지영이는 조용히 호텔방문을 열고 들어갔다.짐작대로 심사장이 이불을 뒤집어쓴채 죽은듯 꼼짝않고 있었다.지영이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혼자서 상대하기 어려울거라며 부득부득 따라 출장나오더니 이틀만에 꼬꾸라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막무가내로 지영이는 심사장과 한 방에 들어 그를 호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영이는 잠시 자기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몸을 일으켜 출입문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버릇처럼 흠흠 코숨을 들이켰다.고약한 땀내가 코구멍으로 말려들어왔다. 옷장에 옷을 벗어 걸어놓고 솟옷바람으로 조용히 화장실에 들어갔다.샤워기를 틀어놓고 브래지어를 벗고 있는데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심사장이 도적놈처럼 어슬렁 들어섰다. “아!’ 지영이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급히 브래지어를 추슬렀다.급한 바람에 왼쪽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뭐예요?나가요!” 지영이가 새된 소리를 지르던말던 심사장은 넋을 잃은채 지영이의 가슴에 눈길을 박고 움직일념을 하지 않았다.지영이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브래지어를 들어 가슴을 덮은후 심사장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숫처년감?많이 부끄럼 타네.” 떨리기는 심사장도 마찬가지였다.애써 그녀의 몸에서 눈길을 떼면서도 자기의 감정을 숨길려고는 하지 않았다. “네 몸이 기막히게 예뻐!가슴 한번 만져보고 싶어.” 심사장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냉큼 그녀의 브래지어를 당겨내렸다.지영이가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오른손 중지를 뻗쳐 탱탱하게 돋아난 그녀의 유두를 꼭 눌렀다.유두가 젖살속 깊숙히 파묻히는대신 젖무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심사장은 낑하고 신음을 토해냈다.그러나 거기에서 심사장은 손을 풀었다. “미안해.니가 돌아온걸 몰랐어.소변이 급했던거야.” 심사장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그녀가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심하게 충혈된 그것을 꺼내 쏴하고 변기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왠지 지영이는 쿡하고 웃음이 나왔다.심사장이 철부지 어린애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무서운 마음도 가뭇없이 사라졌다.일을 마친 심사장은 별로  부끄럽거나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이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가버렸다. 지영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있다가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버리고 샤워에 열중했다.치솔질까지 마치고 슬그머니 나와 티셔츠와 반바지를 찾아 껴입은 지영이는 침대쪽으로 곁눈질해 보았다.심사장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 자기 침대에 걸터앉아 티비를 보고있었다.  테이블우에는 아까 취재나가면서 지영이가 깍아놓은 사과가 그대로 뻣뻣하게 말라있었다.지영이는 신경질이난다는듯 새사과를 꺼내 쓱쓱 깍기 시작했다. “와따,깍지마라안카나.구미없다 아이가.” “어뜩 드이소.얼라인감?맨날 얼리게.” “니 할무이같다.절믄 지지비.” “아자바니,처납사도 한알 깨물구 자래.” 심사장은 막무가내로 사과를 받았으나 입에 가져갈념을 않고 뚫어지듯 지영이의 얼굴만 쳐다보았다.철딱서니없는 어린애인것 같으면서도 총기좋고 생각밖의 아이디어가 술술 나오는 지영이에게 순하고 부드러운 일면도 있었던것이다. “내땜에 니가 세빠지는구나.” “퍼뜩.” “얄궂타.나 천천히 자묵을랑까 가입시다.” “안요.” 지영이는 아예 심사장과 마주 앉은 자세로 눈을 감아버렸다.누가 이기는가 어디 보자는 심산이였다.심사장도 내기 하자는듯 사과를 손에 든체 먹을념을 않았다.시간은 침묵속에서 흘렀다. 지영이는 엄마를 생각했다.시간이 나면 엄마가 떠올랐지만 분주히 일에 몰입하는것으로 간신히 떨쳐버리군 했었다.솔직히 엄마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엄마가 가냘픈 몸으로 간신히 펼쳐주는 그늘밑에서 오늘날까지 살아온것이다.엄마의 젖을 파먹고 자란 자기가 영문 모르고 엄마의 피눈물까지 짜서 먹었다는 자격지심이 들었다.철들어서부터 엄마는 돈때문에 아버지와 투계처럼 싸운 형상이였지만 그 엄마한테 언제나 감사했다.그리고 그 엄마에게 묵직하게 들씌워진 멍에를 자기가 벗겨줘야 했다.엄마가 계속 그렇게 고달픈 인생을 영위하게 할수는 없었다.  이젠 전화를 할 때가 된것이다.집안을 다 망쳐버린 아버지도 밀출국으로 한국으로 가더니 이젠 정신이 버쩍 들었는가보다.아버지는 글쟁이답게 외가집으로 두툼한 반성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그리고 엄마와 다시 만나 잘살겠다며 한국에서 많은 돈을 팔아 초청장까지 해서 보내왔다.오늘 지국이는 그 소식을 전하면서 엉엉 소리내며 울었었다.그 울음은 기쁨의 울음이였고 안도의 울음인줄 지영이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지국이를 위해서도 엄마를 돌려보내야 했다.이제 엄마에게 얹혀졌던 그 짐을 지영이가 릴레이로 짐어져야 했다.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고 개운해졌다.새 인생을 시작한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겨 원망과 서러움을 한껏 토로할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신심이 생겼다. ‘아!’ 지영이는 가볍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옷을 입은채로 심사장의 침대우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사장의 쇠몽둥이같은 다리가 아래배를 짓누르고 있었고 털이 부시시한 손이 티셔츠우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이상하게 반감이 오지 않았다.코고는 소리가 요란한걸 보니 잠든 지영이를 침대에 눕히고 자기도 따라 잠든것이 분명했다.지영이는 심사장을 깨울세라 누운 자세 그대로 손을 내밀어 전등을 꺼버렸다.     16     도어맨이 인사할념도 않고 넋잃은듯 쳐다보는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지영이는 곧바로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석노인해수욕장에 린접한 기린호텔 2층이다. 지영이는 레지에게 콜라를 한컵 시켜놓고 쏘파에 깊숙히 몸을 파묻었다.지영이는 커피에 알레르기같은것이 있었다.야근을 하다가 동료들이 먹는 커피를 따라 마시고 이틑날까지 잠을 자지 못해 죽는줄 알았다.그뒤로 다시는 커피를 입에 대지 않았다. 엄마의 부름을 받고 나온것이다.부른 엄마는 아직 미팅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반달전에 엄마와 어색한 첫만남을 이미 가졌었다. 엄마는 죄인마냥 지영이 앞에서 얼굴을 쳐들지 못했다.지영이는 지영이대로 엄마가 민망하여 말문이 막혔었다. 2년여전 추운 겨울날밤 동북의 초가집에서 다 큰 딸애의 등을 긁적여주던 자상한 엄마였다.그때 그 꺼칠하던 손은 기름을 바른듯 반들반들하게 변했고 때이르게 잔주름이 갔던 얼굴도 언제 그랬더냐싶게 탄력으로 피여있었다.리유를 불문하고 지금의 엄마가 보기에 더 좋았다.그러나 나긋나긋해진 엄마는 오히려 서먹서먹했다.투박하고 진한 연변말을 쓰던 엄마가 새삼스레 그리워지기도 했다. “오,벌써 왔구나.” 회억에서 깨여난 지영이는 일어서려고 몸을 추스렸다가 엄마가 앉으라며 내리 흔드는 손길에 눌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래 기다렸겠구나.거리에 나섰다가 갑자기 생각나는게 있어 다시 들어가 전화 둬개 하다보니 이제 왔다.” 엄마는 옆에 다가온 레지한테 커피 한잔 주문한후 곧바로 주제에 들어갔다. “오래동안 깊이 생각하고 너의 말대로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다.할배할매 의견두 그렇고.니 애비가 나에게 절망을 가져다주고 악을 심어주었지만 그래도 너희들 아버지이다.내가 한때 그렇게 좋아했던 남자이기도 하고…” “엄마!” 지영이는 엄마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아버지가 터우뚜 하느라구 빚 많이 졌답니다.엄마 초청장에두 돈 많이 썼을거구. 일해 버는 돈 빚 갚느라구 정신없을겁니다. 엄마, 또 고생길이니 잘 생각하세요.” “엄마가 돈에 환장한줄 알았어?니 아버지가 사람구실만 했더라도…” 엄마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돈이란건 맞들구 벌면 생기는거란다.아버지도 쉰이 눈앞이니 이젠 철이 들었겠지.빚은 벌어 허물면 되니 걱정말고 이제 니 일을 얘기하자.가정일은 엄마 아버지한테 맡기고 학교에 다시 가는게 어때?” “아니요.” “왜?” “나두 이젠 컸습니다.우리 가정이,그리고 엄마가 어째서 오늘까지 오게 되였는지 너무 잘 압니다.아직도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지국이까지 망칠수는 없습니다.지국이는 내가 지키겠습니다.” “이럴줄 알았다.” 엄마는 한숨을 깊게 내쉬였다.한동안 모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엄마는 투정하듯 커피를 훌훌 불며 마셨고 지영이는 애매한 콜라잔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기만 했다. 지영이가 어색한 장면을 타개하려고 1층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온 사이 자리에는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났다.뜻밖에도 심사장이였다.미간에 연하게 찍힌 기미를 새삼스레 쳐다보면서 불현듯 엄마를 처음 찾아갔던날 복도에서 이 사나이를 만났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차가운 계단을 오르며 점잖게 지영이를 힐끔힐끔 돌아보던 심사장이 새삼스레 머리속에 떠올랐던것이다. “지영아,인사해라.심사장님이시다.” “따님이예요? 사모님을 꼭 닮으셨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바를 모르는 지영이와는 달리 심사장은 퍼그나 여유가 있었다.엄마가 모르게 슬쩍 눈을 껌벅이기도 했다.지영이도 어정쩡 맞인사를 올릴수밖에 없었다. “아,안녕하세요.” “심사장님,이걸 한번 보시죠.저 애가 고중에 다닐 때 낸 책입니다.” “고등학교때 벌써 책을 냈었습니까?” 심사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는듯 엄마가 꺼내놓은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믿기지 않기는 지영이도 마찬가지였다.“노크하는 탈피”라는 제목의 그 책은 엄마가 청도로 떠나던 그해 늦가을에 출간한것으로 여직 엄마한테 보내지 못했던것이다.보아하니 지국이가 보내준것이 틀림없었다. “지영아,심사장님은 광고잡지를 운영하고 계신단다.앞으로 심사장님의 도움과 가르침을 많이 받아야 할것이다.그리고 심사장님,우리 애 이만하면 어때요?” “말씀하신것보다 더 훌륭하네요.” “감사합니다.그럼 부탁할게요.”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엄마가 자리를 뜬지 이윽하도록 지영이는 그 자리에 꼼짝않고 앉아있었다.뭐가 뭔지 갈피가 잡혀지지 않았다.엄마가 어떻게 자기를 심사장한테 부탁할 궁리까지 했단 말인가.참 인간의 연분이란 천갈래 만갈래로 엮어져서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법이란 말인가. “사장님은 저를 언녕 알아보신거죠?” “아니,막연히 그럴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였어.사실 배사장네 집에 들어가서 저 밖에 사모님 꼭닮은 아가씨가 서있어요 하고 말하니 부랴부랴 신을 찾아신고 나가시더군. 그래서 따님이 있을거라 짐작은 했어.확신했다면 전번날 청양에서 심장병 발작하던 날이랄가.처음으로 지영이가 그날 계단에서 만났던 아가씨란걸 기억해냈던거야 .” 그때 지영이의 귀가에는 애간장 끓는 엄마의 부름소리가 메아리쳤다. “지영아!” 그 부름소리는 환각이 아니였다.엄마는 주소를 알려주고 곧바로 후회했다고 한탄했다.언젠가 지영이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것이라는 불안감에 마음을 졸였고 그 예감이 드디여 현실로 되였을때 가슴이 터지는 아픔에 정신나간 사람처럼 거리를 헤맸었다고 고백했었다. 배사장은 사랑하고싶어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였다.엄마에게 배사장은 잠간 머물다가 떠나는 기댈목에 불과했다.몸이 부드럽고 탄력있게 변모했어도 마음은 오히려 치유하기 어렵도록 상처가 더 깊어졌던것이다. “오늘 어디든지 데리고가요.” 지영이는 심사장이 가는대로 바다가에 자리잡은 은해대주점에 갔다.맛갈스런 해산물 료리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부어주는 맥주만 사양없이 받아마셨다.  이날 지영이는 처음으로 심사장한테 처녀의 순결을 고스란히 바쳤다.     17     심사장은 아직도 이불을 뒤집어 쓴채 일어나지 않고있었다 지영이는 주방으로 들어가 금방 리촌시장에서 사온 의란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이 지나면 심사장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어쩌면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캐나다에 이민간 심사장의 마누라가 어느날 문뜩 찾아와 최후 통첩을 내린것이다. 지영이랑 6년간 살아왔다는 사연을 멀리서도 어떻게 알아버린것이다.심장병이 있는 남편을 6년간 보살펴준 대가로 잡지사를 넘겨주기로 했다.더불어 고맙다는 인사까지 잊지 않는 매너있는 녀인이였다. 지영이는 그런 녀인이 저으기 미안했다.자기앞에서 과시하는 도고함과 우월감이 말 한마디면 스르륵 무너질수 있다는것을 지영이는 잘 알고있었다.그녀를 지탱하는것은 온몸을 감싼 금은 장신구같은 허영뿐이란걸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그러나 그 한장의 종이를 뚫어놓고싶지 않았다.마지막 자존이라도 남겨주는게 례의였다. 심사장 말대로 정말 자기가 그를 사랑했더냐 하는 물음엔 자신이 없었다.처음엔 동정심이 출발점이였다.신수가 멀끔하고 성격도 호방한 심사장이 심장병으로 앓고있어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게 안스러웠었다.직원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뒤소문이 두려워 슬슬 피했지만 지영이는 그럴수가 없었다. 지영이는 이 사나이가 그들 가정이 재기할수 있는 마지막 짚오래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절박감을 느꼈다.엄마를 고향으로,아버지옆으로 억지로라도 밀어보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지영이는 심사장을 포박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였다.심사장이 의외의 사고를 당해서는 안되였다.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고향에 돌아가 사창가에서 헤매고 떠돌아다닐 자신이 얼른거려 괴로웠다.지영이는 엄마와는 달리 자기의 운명을 자기 손에 거머쥐고싶었다. 꿈속에서나마 지영이는 심사장에게  꼭 안겼었던걸 다행으로 생각했다.강렬한 충동까지는 몰라도 포근한 느낌이였다.그보다도 믿음이 더 중요했다.정신없이 꿈나라에 헤어들어간 지영이를 들어서 침대에 눕히고도 심사장은 그녀를 점하지 않았었다.본능적인 관성으로 꿈결에 지영이를 끌어안았으나 결코 점한것은 아니였다.그리고 거기서 끝이였다.이틑날 일어나서는 여전히 상하급관계로 손을 맞잡고 일을 해나갔다. 가끔 심사장이 장난기가 발동한듯 지영이의 손이나 몸을 만지작거렸지만 그녀가 항의를 제기하면 즉시로 멈추군 했다. 몸을 허락한 후에도 지영이의 동의가 없으면 심사장은 그녀한테 치근거리지 않았다.아파트 하나 세맡자고 건의했다가 지영이한테 퇴짜맞고 심사장은 어린애처럼 한동안 심술을 부리기도 했었다.그러나 얼마 안되여 노여움이 풀어졌고 그들은 서로가 필요할 때 가끔 만나서 즐겼었다. 심사장은 호방한 성격만큼이나 그 방면에서도 대단한 에너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한번 겪고나면 지영이는 뼈마디가 막 문드러지는 고통을 느끼군 했다.얼마나 무지하게 다루는지 어떨 때는 막 귀뺨을 올리 붙이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그의 입에 가슴이 빨려들어가면 꼭 세계말세와 같았다.피를 맛본 이리의 이발처럼 그는 사정을 둘줄 몰랐다.그래서 그 일을 치르고 난후이면 다시 만나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하지만 며칠 못가서 그녀는 그가 다시 사무치게 그리워지군 했다. 아무튼 그렇게 오늘에까지 왔다. 엄마는 그해로 한국으로 나갔다.아버지와 함께 억척같이 일하며 돈을 벌고 있다. 지국이도 작년에 무난하게 청화대학에 붙었다.부모가 한국에 있기때문에 가정대표로 지영이가 북경까지 따라갔었다. 그때 지영이는 온세상을 통채로 차지한듯 기뻣다.그리고 돌아오면서 억수로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이제 래일이면 심사장도 떠나간다.깊게 사랑했던건 아니였으나 지영이한테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다.심사장이란 기댈목이 아니였더라면 아마 지국이마저 지켜내기 어려웠을것이다. “흠흠,구수한 된장찌개로군” 어느새 일어났는지 심사장이 뒤로 다가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지영이는 가슴에 올라온 심사장의 손을 어루쓸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몸보신 좀 시키자 했었는데 생각처럼 안되네요.” “몸보신에 된장찌개이상 없능기라.”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구요.”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고 두사람은 진짜 부부같이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저… 사무실을 청양으로 옮기기로 했어요.” “왜?” “시내쪽에 땅값이 비싸구 그래서 모두들 청양쪽으로 이사가고 있습니다.고객이 가는데로 따라가는게 시장법칙이거든요.” “닌 언지나 머리가 빨리 돈다닝께.글치만 야바우 좆도 많은 세상이니께 꼭 조심혀.” 식사후 심사장의 요구로 둘은 청양으로 새사무실 보러 떠났다.심사장이 넘겨주는 핸들을 잡고 지영이는 새로 시원하게 뻗은 청은고속도로에 올랐다.래일부터 지영이가 주인이 될 신형 엘란트라는 백킬로에서도 속도감을 보이지 않고 편안하게 나갔다. 저 멀리 청양이 바라보였다.여기저기 공사장이 벌려진 청양은 활약이 넘친 대신 어수선하기도 했다.허물려 나가는 낡은 공장들,그속에 관성적으로 밀려나는 한국기업도 더러 있었다.야반도주가 이슈가 되여진 이곳에 한판 승부를 걸고 지영이는 다가오고있다. “ 니캉내캉 뿌꿈노리 이것으로 끝이구나.” 심사장이 감개무량해서 중얼거렸다. 지영이는 젖어오는 눈빛으로 차창밖을 내다보았다.바야흐로 만물이 재생하는 봄날이 태동하고있었다.       끝   
18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 댓글:  조회:1277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 장학규 사방이 쥐죽은듯 괴괴하다. 칙칙한 어둠이 깊고 무겁게 드리워있다. 문득 눈앞에 암황색 비슷한것이 서서히 펼쳐지더니 인차 연분홍색으로 변한후 또다시 피빛같은 붉은색으로 천천히 번져갔다. 그와 더불어 어딘가 못 견디게 강렬한 아픔이 침습해왔다. 피할려고 눈을 감은것 같은데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혼령이 돌아온 모양이네요.” 귀가에서 전혀 생소한 말소리가 모기소리처럼 낮다랗게 들려왔다. “선유했는줄로 아셨습니까?” 석쉼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날숨이 머리카락을 조용히 스쳐갔다. “글쎄요. 시간이 시간인만큼 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럴리가요. 이분의 양수는 아직 길고도 깁니다.신선이 되자면 아직 수련을 많이 닦아야 합니다.” 이윽고 말소리가 뚝 끊기고 또다시 어두운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스스로도 지금 어딘가 누워있다는 감각이 잡혀왔다. 눈을 떠볼려고 무지 애를 썼으나 웬일이지 전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까 원래 눈을 감고있었던건지 아니면 떴던 눈을 다시 감았던건지 전혀 판단이 안되게 헷갈렸다. 아마 팔까지 허우적거렸던 모양이다. “무량천존, 이러면 안돼요. 좀만 더 꼼짝 말고 누워있으세요.” 석쉼한 목소리가 달래듯 말해왔다. 마음 한구석에서 저 말씀은 꼭 들어야 할것이라고 속삭여왔다. 곧바로 신경을 느슨히 풀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온몸이 그대로 둥둥 떠서 훨훨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저아래 밑으로 쭉 펼쳐진 산이 기막히게 예뻤다. 산세는 부드럽지만 겉은 거칠게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덮혀있었다. 나무의 초록색보다 바위의 회색빛이 더 많이 보일 정도로 순도높은 바위산이다. 굵은 바위덩치들이 곳곳에서 힘자랑을 한다. 거기에 노란색의 야생 원추리꽃이 돌틈사이를 이악스레 비집고 피여나와 한폭의 선경같이 매혹적이였다. 이 산이 해상제일명산이랬던가? 이곳이 북구수라는 동네였던거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물소리가 똘랑똘랑 들리는가싶더니 순식간에 폭포가 되여 요란한 잡음을 만들어냈다. 우에서 내려다보니 폭포는 세단계로 꺾어져서 흘러내리면서 못 두개를 이루고있었다. 우아하게 말하면 담이고 대수 형용하면 구덩이였다. 우에 위치한 못은 입구가 항아리 모양을 하고있었는데 물속이 파아란 색을 형성하여 그 깊이가 얼마인지 전혀 알수 없었다. 5~6메터는 쉽게 될거 같았다. 아래 못은 상대적으로 넓은대신 투명하게 밑바닥을 들여다볼수 있었다. 그 옆으로 커다란 석주정이 있었는데 거기에 “조음폭포(潮音瀑)’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그 글자는 특별히 당대 서화대가 엽공작(叶恭绰)이 쓴것임을 밝히고있었다. 옆사람들이 두런두런 말하는걸 들어보니 이 폭포는 밑에서 올려다보면 흩날리는 물보라가 고기비늘처럼 보인다고 하여 “어린폭포(鱼鳞瀑)”로도 불린다고 한다. 그러나 우에서 내려다보니 벼랑을 만나면서 어쩔수 없이 떨어지는 물도랑에 다름아니였다. 바위돌에 부딪치면서 생기는 조수같이 사나운 물소리는 역시 듣기에 좋았다. 그리고 그 아래 파아랗게 누워있는 못도 시원함을 풍겨주고있었다. 가끔 강렬한 태양빛에 의해 못에 채색무지개가 걸렸다 사라지군 했다. 그때마다 항아리처럼 생긴 못의 입구는 저 옥황상제가 계시는 신선세계로 통하는 길목처럼 유혹을 질질 흘려놓아 사람을 한없이 설레이게 하였다. 푸른 옷을 입은 선녀가 환한 웃음을 머금고 손짓해 부르는상 싶었다. 아니, 정말로 지구인력처럼 강하게 끌어당기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걸음 다가가 선녀의 손을 엉거주춤 부여잡고싶었다. 혹시나 나무군더러 챙기라고 벗어놓은 날개옷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몸이 어느새 가벼운 새처럼 허공에 날았다. 솔나무들이 바람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고 무지개도 사뭇 기쁜양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금방 풍덩하는 요란한 물소리가 제법 귀청을 때려왔다. 순간이기는 해도 날리는 물방울이 오색찬란한 화환으로 멋지게 변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였다. 지지리도 참기 어려운 기나긴 정적의 터널을 지나온거 같았다. 어쩌면 삼라만상과 더불어 혼곤히 잠들어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듬는데 아까 그 석쉼한 목소리가 다시 침묵을 사정없이 깨버렸다. “깨여난지 한참 된것 같은데 이젠 일어나시지요?”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보니 침대가 아니고 구들에 누워있었다. 일견에도 어느 도관의 료방(寮房)이 틀림없었다. 숨을 들이쉬기 무섭게 진한 향내가 코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밝은 해살이 비쳐드는 넓은 창문쪽에는 진무대제(真武大帝)와 삼관신상(三官神像)이 모셔져있었다. 봉당에는 두사람이 서있었다. 람색의 홑두루마기를 입고 혼원건(混元巾)을 머리에 두른 나이 젊은 사람은 묻지 않아도 이곳 도관의 도사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어딘가 낯익어보이는 예순쯤되여 보이는 로인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꾸러기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선복수(善福寿)님은 어디서 오신 뉘십니까?” 인자한 얼굴의 도사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산아래 하장에서 사는 봉입니다.” 봉은 황망히 기여일어나다가 속옷 바람인것을 발견하고 급히 이불을 다시 둘렀다. “제가 어떻게 이곳 선궁에 오게 되였습니까?” “오전 일 하나도 기억나시지 않습니까?” 오전이라? 노산 북구수를 등반한것은 오전 8시무렵부터였고 아홉번째 물구비를 돌았을무렵은 해빛이 가장 따가운 10시쯤이였던 기억이 났다. 파도소리 같았던 폭포의 울부짖음이 귀가에 다시금 메아리쳤다. 그리고 천상의 입구같던 깊은 웅덩이가 선히 떠올랐다.  “빈도는 재밥을 준비해오겠습니다. 상세한건 이분한테 물어보십시오.” 젊은 도사는 설명을 옆에 선 늙은 향객한테 미루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이윽고 누군가에게 나지막하게 무엇을 분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림짐작으로 점심시간이구나 싶었다. 넌짓이 로인을 건너다보니 여전히 익살꾸러기처럼 가는 미소를 입가에 띄운채 말이 없었다. 일본인같은 코밑수염이 인상적이였다. 좀 잔인해보이는 인상이였다. 어쩌면 시종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을것 같은 늙다리였다.  봉은 재빨리 집안을 둘러보았다. 머리맡에 그의 옷가지가 차곡차곡 개여있었다. 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등산용의류들이였다. 한국 관광을 갔을때 아울렛에서 코오롱이란 브랜드로 내의부터 자켓까지 통일하여 등산용품을 구입했다. 흔히 제조사마다 주력제품이 따로 있어 진정한 산꾼들은 등산제품을 같은 회사거로 구입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봉은 방수만 되면 되고 편하면 된다는 대수간단팬이다. 자기가 싫증난 곳에서 남이 싫증난 고장으로 이동하는것이 관광이란것처럼 봉이는 남이 싫증낼지도 모르는 브랜드를 들고 오면서도 별로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느낌은 없었다.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고 바닥에 내려서면서 오 그렇지 등산화만은 례외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 등산화만은 트랙스타로 고르라고 해서 별도로 선택했던것이 유일한 례외였다. 그의 등산 장비중에서 그래도 제일 값진 것은 배낭이였다. 그것은 봉이 산것이 아니다. 미국제 그레고리 배낭은 선물로 받은것이다. 물론 그 배낭이 계기가 되여 이번 산행을 떠난것이다. “어딜 가시우? 인사 한마디 없이 그렇게 떠나는 법이 어디 있소?” 로인이 싱겁게 중얼거렸다. 봉은 그러건말건 아무 대꾸도 없이 배낭을 메고 문을 나섰다. 사합원처럼 사방이 집으로 둘러쌓인 그 가운데 향객들이 혹자는 향을 올리고 혹자는 도사님께 점괘를 묻고있는것이 보였다. 봉은 조용히 왼손편으로 따라 신묘에 들어선후 잠간 멈춰섰다가 향로와 삼보거리에서 두손을 마주잡고 허리굽혀 절을 올렸다. 연후 한발짝 걷고 또 큰 절 올리고 다시 한발짝 걸으면서 큰 절을 올리니 바로 향로가 모셔진 보단앞이였다. 손에는 미처 향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향을 향로에 꽂는 흉내까지 내고 삼배구두의 례를 올렸다.  도관을 나서니 구불구불한 왼딴 산길을 따라 쌀쌀한 봄바람이 어슬렁 불어왔다. 어느새 하늘이 낮아졌고 구름이 검게 무거워왔다. 공기속에 습한 립자가 뿌려지는것 같더니 인차 바람에 딸려 침방울같은것이 얼굴에 스쳐왔다. 봉은 아무래도 비오려나보다고 생각하며 씨엉씨엉 산길을 걸어올라갔다. 량옆으로 돌부리가 들숭날숭 보였고 낮다란 솔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있었다. 산길이 도대체 어디로 통하는건지 봉이는 알지 못했다. 알고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어디로 무얼하려 가는지 그 자신도 모르고있었다. “좀 기다리시우. 같이 갑시다.” 아까 늙은이가 어깨에 멜가방을 하나 메고 허둥지둥 뒤쫓아왔다. 평복을 한 차림새만 보면 별로 산행에 익숙한 사람은 아닌것 같았다. 헐레벌떡 다가온 늙은이는 한번 피뜩 봉을 쳐다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한번 심심히 느낀것이지만 세상인심이란게 원래 그렇게 야박한건가보오. 기껏 살려주어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달아나고 말이오.” “…?” “내사 도사님 대신 불평하는거잖소. 근데 폭포서 왜 뛰여내리셨소?” 눈앞에 다시 한번 천궁을 향한 입구가 나타났고 파도소리같던 폭포소리가 귀가에 울렸다. 그러고보니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 틀림없었다. 아침 8시에 등산을 시작해서 10시쯤에 조음폭포에 다달은것이다. 다르다면 봉은 뛰여내리지 않았다. 푸른 못에 입구가 있었고 거기에서 선녀들이 대기하고있었다. 뛰여내린것과 요청되여 내려간것은 본질적으로 구별이 된다고 알려주고싶었다. 분명 봉은 누군가 파아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초청하는것을 보았었다. 그리고 울긋불긋 꽃보라가 맞이해주는것도 목격했었다. 그걸 어떻게 뛰여내렸다고 표현을 할수 있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속된 인간들은 마냥 자기 립장에 서서 자기식으로 세상을 아무렇게나 해석하는것이다. “꼭 그렇게 망가지는 방식이 아니여도 죽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소. 자동차나 방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가스 밸브를 틀어놓고 음악을 감상하다가 가는 로맨틱한 방법도 있고 또는 혈관을 베여놓고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때까지 섹스를 하는 장렬한 방법도 있다네. 더 호방한 방법은…” 이때 하늘에서 후둑후둑 비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끊긴 산길에 급기야 바람소리가 요란하게 가득찼다. 산허리까지 내리드리운 검은 구름이 브르릉 떠는가싶더니 불시에 쾅하고 화려하게 폭발했다. 비방울이 굵어지면서 인차 쉴새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로인은 더이상 말이 없이 멜가방에서 비옷을 꺼내 걸치고 휘청이며 앞서 걸어나갔다. 봉도 얼굴의 비물을 훔치며 승벽하듯 뒤따랐다. 역시 명품은 명품이였다. 접지력이 좋은 트랙스타 등산화는 비물속에서도 전혀 미끌지 않고 발이 편했다. 창의 두께도 알맞춤해 바람을 안고 걷는데도 피로감이 별로 들지 않았다. 류운정이라는 정자에서 한숨 쉬고싶었지만 로인이 아무런 말이 없어 그대로 지나쳤다. 점점 로인에게 끌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쩌면 로인이 온하루 그와 더불어 함께 했던것 같았다.  “저 앞산이 말이 엎디여있는 모습같다고 와마봉이라고 하네. 여기서 한 오십보 나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나지는데 거기서 비를 피하는게 어떤가?” 로인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추적추적 산비탈쪽으로 걸어갔다. 로인은 이 동네 지리를 환히 꿰뚫고있다는듯 곧추 동굴로 찾아갔다. 그것은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하찮았다. 입구는 산비탈을 등지고 나졌는데 바로 우쪽으로 돌무지가 쌓여있었다. 높이는 성인 목부위 정도 높았고 비대한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수 있는 넓이였다. 안에는 겨우 서너명이 앉을만큼의 공간이였고 입구외에 따로 출구도 없이 모두 막혀있었다. “이건 청산가리네. 입에 대면 즉사하지.” 로인은 비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비옷을 벗어 구석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멜가방에서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은 진한 색의 병을 꺼내 아래우로 한번 흔들어보인후 땅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연후 다시 가방을 뒤지더니 이 동네 특산인 랑아대백주 두병을 끄집어내였다. 그것은 원액 70도인 선물용 술로서 값이 만만치 않은 물건이였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하게 삶을 론쟁하면 어찌 풍류스럽다하지 않겠소. 도수가 높은만큼 쉽게 취하기도 하겠지. 더이상 유감없이 할 말 다하고 취할대로 취한다음 마지막으로 청산가리를 타서 쭈욱하는게 대범하기도 하고 군자스럽기도 하고 얼마 좋소?! 이 방법이 아까 말하자던 호방한 죽음이오.” 로인은 남의 말을 하듯 무표정하게 지껄이더니 정말로 병마개를 따서 미리 준비해온 종이컵에 따랐다. 장난꾸러기같은 모습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흐들흐들 기름기가 번져진 얼굴에 쭈욱 깔렸다. 사람을 제압하는 살기같은것이 꼿꼿하게 날이 선 눈길속에 흐르고있었다. “죽음이란것은 신성한것이네. 그래서 홍모보다 가볍거니 태산보다 무겁거니 하면서 죽음을 달리 형용하는것이오. 말하자면 외형적으로 같은 죽음인것처럼 보이지만 실지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다른것이 죽음의 실체요. 어디 말해보오.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선택했었소?” “장사에 실패해서 큰 빚을 지었습니다.” 그레고리배낭이 화근이였다. 무역업에 갓 올인한 봉에게 한국 민사장은 혜성같이 다가온 은인이였다. 작은 오더를 가끔 뿌려주고 결제도 깔끔하게 제때에 해주었다. 그렇게 몇달간 달콤한 밀월이 이어졌다. 달변인데다 사내답게 시원한 성격인 민사장은 봉을 제주도에 데리고가 직접 가이드역까지 맡아주었다. 그때 민사장은 통크게 그레고리배낭을 선물로 봉에게 주기도 했었다. 봉도 배낭관광족이여서 그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가는 물건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 순간 가슴 언저리까지 축축히 젖혀주던 짜릿한 감동은 지금까지도 리얼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였다. 봉이 귀국후 그 배낭 가치의 수백배가 넘는 물건을 계약금도 없이 후불 약속으로 보낸후 민사장은 불시에 지구상에서 증발해버렸다. 물건을 받았다는 답복도 없었고 핸드폰은 이미 사용중지가 되여버렸다. 급히 한국에 달려갔으나 민사장은 사무실을 이미 물려버린 뒤였다. 전세로 살던 집도 처분한지 여러날이 되였다. 세관기록에도 민사장이 물품을 차실없이 인수했음을 밝혀주고있었다. 알만한데는 다 뒤져보고 또 걸어둘만한데는 다 신고식을 올리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왔을때는 어느새 새여나간 소문을 들은 당지의 하청업체 사장들이 둥지를 틀고 앉아있었다. 째지게 가난했던 시절을 함께 했던 안해의 정말 오래간만에 피여난 얼굴이 그사이에 주름살이 한결 더 깊게 파여갔다. 일단 살던 집과 타고 다니던 차를 팔고 얼마 안되는 류동자금까지 깡그리 털어 빚을 절반나마 갚았다. 그간 거래를 틀면서 정을 쌓아왔던 하청업체 사장들도 더이상 닥달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올게 없으니 시간을 주자 그런 셈법 같았다. 아무튼 봉은 난생처음으로 목표도 없고 욕망도 없는 회색기를 맞았다. 세집에서 하루하루 감각도 없는 세월을 보내는중에 오늘 새벽 문득 구석쪽에 그대로 꿍져져있는 이사짐에서 비죽히 얼굴을 내밀고있는 그레고리배낭을 발견하게 되였고 그래서 그 길로 무작정 산행을 나서게 된것이다. “자, 한잔 받으시우.” 로인은 자기 먼저 종이컵을 들어 쭉 들이킨후 다시 한컵 부어 내밀었다. “별게 아니군. 공수래 공수거라 했잖소. 돈은 몸밖의 물건이라 난 거기에 대해 크게 집념해본적이 없수다. 쌓이면 수자같고 허물어지면 먼지같아서…” 봉은 두손으로 종이컵을 받아들고 로인처럼 목을 꺾고 단숨에 넘겼다. 칼같이 날카로운것이 목줄을 타고 내려가더니 순간적으로 욱하고 치밀어올라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급히 튕겨 일어나 입구로 달려갔으나 입에서는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껄껄, 도수가 높은 술은 얼리면서 마셔야 하우.” 봉은 제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컵을 돌려주었다. “선배님은 웬일로 이곳에 오게 되였습니까? 역시 사연이 있을법한데요.” “선배는 무슨…형님이라고 부르게.” “형님…?” “그래. 난 말이야. 아우를 만나려 특별히 온걸세.” “…?” “아직도 기억 못하는군. 자네가 뛰여내리기전에 난 바로 자네 옆에 앉아있었어. 멋있었네. 솔직히 속되기는 해도 한폭의 그림같았네. 그래서 자네의 물품들을 챙겼어. 물론 사람은 못가에서 손씻던 도사님이 구했지. 물가에 가까운 루대가 먼저 달을 얻는다했잖은가?!” 저런 달변을 스크린에서 자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전생의 인연처럼 꼭마치 어디선가 낯익었던것도 그때문이였던 모양이다. “난 살면서 내절로 손을 내밀고 달라고 한적이 거의 없었어.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가져와서 떼맡기듯 던져놓고 가는거야. 건사할데 없어 박스에 담아 쓰레기처럼 침대밑에 넣어두기도 했어. 그런데 내일이면 곧 퇴직하는데 갑자기 여럿이 와서 집안을 뒤지는거야. 장물이라면서 싹 빼앗아가고 말이야. 그리고는 쌍개란것을 선포했지. 원래 내것이 아니니까 가져가면 뭐라나? 이날 이때까지 두루 살았으니까 나락으로 떨어진다해도 원이 없어. 정말 이 산을 내집처럼 수도 없이 다녔어. 언젠가 이 동굴에서 햇병아리같은 계집 둘을 끼고 그 노릇한적도 있었어. 내가 참을수 없는건 배신감이야. 물어먹은 넘도 차압한 넘도 판결을 내린 넘도 다 나한테 코밑치성을 했던 사람들이란 말이야. 우에서 한마디 발호하니까 바로 군대처럼 하나같이 뒤로 돌아섯 하더란 말이지.” 로인은 진실로 감정이 동한 모양으로 컵을 움켜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기세가 넘치는 로인의 퍼포먼스에 봉은 떨리는 눈길을 동굴밖으로 돌렸다. 창대같은 비줄기가 억수로 퍼붓고있었다. 시뿌연 하늘은 정지된듯 움직이지 않았고 사방은 비소리만 진동하고있었다. 갑자기 주먹만한 돌멩이가 쿵하고 입구로 떨어지더니 이어 가는 돌덩이들이 따라서 주룩주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동굴로 들어올때 우쪽에 돌무지가 쌓여있던것을 본 기억이 났다. “산사태가 발생할 모양입니다. 아까 보니 웃쪽에 시공하다 남겨진 잔해들이 불안하게 보이던데...” “그게 자네 뜻과 맞물리지 않는가?” 어느새 평정을 찾은 로인이  이미 비여진 컵을 내밀었다. 봉이 엉거주춤 컵을 받기 바쁘게 맞춤히 술을 부어주었다. “오. 지금 자네가 나를 걱정해주는건가? 감동적인데…그렇지만 여보게, 홀로 가긴 적적하잖은가?! 자네가 마다하지 않는다면 내가 배동해주겠네. 난 조라고 부르네.” 조씨는 백가성 첫글씨가 자기 성이 된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만큼 그는 운이 좋았다. 태항산 깊은 산골에서 추천을 받아 대학을 가면서 순탄한 인생길을 걷게 되였다. 작은 향진의 교사로부터 시작하여 수백만 인구를 가진 대도시에서 한얼굴 내놓고 다니기까지 사람들이 입에 떠올릴수 있는 공직을 하나하나 모두 겪으면서 한번도 인생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문전성시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권력이나 금전은 허무했다고 조씨는 설명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것이 괴로웠다고 한다. “자네 신기루를 보았는가? 난 젊었을때 청도 앞바다에서 정말로 보았단 말일세. 장관이였지.” 조씨는 두문불출하고 매일 허황한 인터넷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경외의 자살사이트에 심취하게 되였다. 거기서 갓 20대의 취라는 친구를 만났다. 아이디가 녀성화된데다가 화법이나 문장구성이 섬세하고 절제된 형태를 보여 처음에는 녀자인줄로 알았다. 마침 같은 청도 출신이여서 가까이 다가서게 되였고 결국 화상채팅을 이루면서 허무하게 남자인것을 알게 되였다. 취는 외형상으로도 애잔하게 생겨 련민을 자아냈다. 곱게 키워오던 애완견이 잃어져서 살고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따위 사연으로는 자살 리유가 되지 않는다고 설복했지만 취의 태도는 굽힘이 없이 견결했다. 대학입시에서 락방한것도 원인중의 하나라면서 오히려 조씨의 당당하지 못함을 비판해왔다. 당장 래일 동반자살하자고 제의해왔다. “그래…그럽시다.” 조씨는 한마디로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였다. 시간은 오전 여덟시 반, 지점은 조씨가 노산 북구수 동굴로 정했다. 그러나 10시가 가까이 다가오도록 취는 나타날념을 않았다. 조씨는 씨무룩이 웃었다. (암, 그러면 그렇지. 아직은 인생이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나이이지.) 조씨는 죽음이 무섭진 않았지만 외로운 고혼이 되기는 싫었다. 멜가방을 다시 둘러메고 내려오다가 조음폭포에서 잠간 다리쉼을 하는중에 예상외로 바위돌에서 다이빙하는 봉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것이다. “첫눈에 자네가 마음에 들었어. 술에 취하면 하루 행복하고 사람에 취하면 평생 행복하다 했네. 우리 오늘 남은 평생을 즐겨보세. 자 간베이!” 조씨는 벌써 좀 취해있었다. 혀는 그나마 잘 돌아가고있었으나 몸이 휘청이였다. 돌무지는 자꾸 굴러내리면서 점차 입구를 막아올리고있었다. 이제는 얼굴 하나 내밀정도의 구멍만이 남아있었다. 원래 빛이 어두운 동굴이 더 어두워졌다. 봉은 배낭에서 비상용 후레쉬를 꺼내 켰다. 순간 동굴안이 환하게 밝아왔다. 두사람은 잔을 돌려가며 많은 말도 주고받았다. 봉은 창업의 어려움을 많이 호소했고 빚독촉으로 몇번이나 죽으려 했던 일을 돌이켰다. 조씨는 그 로반들을 거개 잘 안다면서  왜 자기를 찾지 않았냐고 타발해왔다. 그땐 당신을 몰랐잖느냐고 하니 조씨는 지금도 자기가 나가면 개자식들이 벌벌 길거라고 호기에 차서 씨벌렸다. 조씨는 조씨대로 관가의 에피소드를 끝없이 이어갔다. 그들에게 이제는 물러설 뒤길이 없었다. 둘은 입구가 다 막히기전에는 절대 청산가리를 먹지 말자고 약속했다. 봉은 그 약속때문인지 본능적으로 자꾸 입구쪽을 돌아보게 되였다. 웬일인지 입구는 더이상 막히지 않고 빠금하게 하늘을 내비치고있었다. 어쩌면 비가 멎은듯 싶었다. 으릉으릉하는 우뢰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번쩍하는 번개치는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봉은 안해에게 자기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음으로 봉만 믿고 살아온 안해였다. 그녀에게 빚만 잔뜩 남겨주고 소리없이 사라진다면 진정 사나이다운 처사가 아니지 않는가. 최소한도로 자기가 왜서 이 길을 택했다는 설명은 해줘야 했다. 그리고 대학입시를 앞둔 딸년에게 한마디 뭔가 말해주고싶었다.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으나 핸드폰은 집에 두고왔는지 없었다.  봉은 조씨에게서 핸드폰을 빌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동굴속이여서 신호소리가 전혀 없었다. 주춤 일어서서 입구에 남은 구멍쪽으로 비틀비틀 다가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겨우 신호가 터져 두번도 울리지 않아 안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종일 어디 가 있어요? 지금 속히 집에 오세요.”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가?” “급한 일이 아니고 기쁜 일이예요. 오전에 영사관에서 전화 왔는데 당신더러 속히 한국으로 나가라네요. 한국경찰에서 민사장을 붙잡았는데 돈을 찾을수 있을거라네요.” 봉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졌다. 입구가 다 막히지 않은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하느님 맙소서. 말 한마디 못하고 멍청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봉의 옆으로 조씨가 어슬렁 다가왔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조씨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봉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아 주머니에 넣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는게 좋겠지? 도사님께서 자네의 양수가 아직 길다고 했어.” 살고싶은것은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미련이 너무 많았다. “오늘은 아닌 모양이야 처음부터. 하늘이 울바자를 치지도 않는데 억지로 그속에 갇히려고 하는건 무리지.” 조씨는 구멍쪽으로 손을 내밀어 돌을 파내기 시작했다. 쉽게 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움직임이 진동이 되였는지 우에서 이번에는 흙이 한무더기 굴러내려왔다. 저렇게 흙이 계속 굴러내려 정말 약정처럼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린다면 어째야 하냐고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고있는데 갑자기 밖으로부터 가느다란 손이 쑥 들어와 흙을 그대로 퍼내갔다. “조씨 삼촌, 안에 계셔요?” 취였다. 나약하고 유연해보인다는 조씨의 자살 파트너 취였다! “응. 취, 나 맞아. 너 언제 왔지?” 조씨는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구멍을 파나갔다. “온 하루 산을 헤맸어요. 포기하고 내려가다가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어요. 조씨 삼촌, 누구랑 함께 있어요? 저랑 같이 가기로 약속했잖아요.” “글쎄 그렇게 되였구나. 도덕경에 이르기를 전쟁을 잘하는 용장은 무용을 뽐내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으며 적을 잘 이기는 자는 적과 다투지 않는다고 했네라. 우리 자살을 입에 달고 살지 말자.응?” “네에” 두사람은 안팎에서 미친듯이 손으로 돌무지를 팠다. 손끝에 피가 흥건이 흘러내리고있었지만 멈출념을 하지 않았다. 봉도 달려들어 이악스레 구멍을 팠다. 구멍은 점점 넓어졌다. 기어나갈수 있는 넓이가 된줄도 모르고 그들은 계속 파고 또 팠다. 2013년 4월 초순 청도 문향재에서  
17    필터링 댓글:  조회:1054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필터링 장학규 환은 자기가 왜서 이름마저 알바 없는 이곳으로 허둥지둥 찾아왔는지 모른다. 량쪽으로 클래식한 건물들이 우중충 들어섰고 그 가운데로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리가 오불꼬불 뻗어있다. 청기와 또는 회색의 기와장들이 지붕우에 스산하게 얹어져있고 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붉은색 기둥 사이로 투박한 널판자로 된 대문들이 줄줄히 열려져있다. 그 사이로 연기와 음식냄새와 서로 다른 물건들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들이 범벅이 되여 한꺼번에 터져나와 거리를 꽉 메우고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왁작지껄 고아대는 소리도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거리를 거닐거나 가게앞 쪽걸상에 걸터앉았거나 집안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옷차림새 역시 알록달록 가관이였고 몽치같은 팔뚝을 드러냈거나 아예 여러가지 동물을 문신한 알몸뚱이를 그대로 내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처음에 환이는 배가 좀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프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뭔가 아무거라도 대충 요기거리가 없을가 그렇게 방안을 구석구석 뒤지다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결김에 거리로 향한 창문을 열었다. 순간 뭔가 대뇌를 왕 하고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였다. 그것은 형체가 전혀 없는 소리라는 물건이였다. 최저 80데시벨이상이였다. 그 현장에 직접 몸 담으면 바로 100데시벨로 업그레이드될게 틀림없었다. 환이는 배 고픈건 잘 참아도 궁금한건 죽어도 참지 못한다. 하물며 정말로 배가 고픈데야 어쩐단말인가. 길 떠난 나그네에게는 배가 시간이고 다리가 방향이다. 환이는 그러나 급할게 없다는듯 늘쩍늘쩍 거리에 들어선다. 언제나 환이는 자신의 일을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기 십상이다. 진실한 자기가 구경 어떤 모습인지 그 자신도 잘 모른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오가고 여기저기서 사구려소리가 요란하다. 환이가 혹시나 제법 먹을만한 음식이 없을가고 부지런히 난점들을 살피는 와중에 마주 다가오는 웬 아가씨와 가며오며 어깨를 부딪쳤다. “땡~” 환이의 손에서 동전 하나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면서 저만치로 딩굴어갔다. 그것은 1원짜리 동전이였다. 환이의 왼손에는 언제나 1원짜리 동전이 쥐여져있었다. 그 동전은 요술장이인듯 가끔은 주먹속에 조용히 들어있다가 슬그머니 엄지검지중지 가운데 끼워지기도 하고 가끔은 손등을 타고 오르기도 한다. 그 동전은 환이의 호신부나 다름 없는 물건이였다. 아니, 환이의 분신처럼 10년은 그의 몸에 붙어서 함께 해온 물건이였다. 흙색이 된 환이는 세상 한번 볼만하다는듯 꼬물도 사죄할 의향이 없이 계속 두리번거리며 나아가는 아가씨를 쏘아볼 겨를도 없이 급히 동전을 뒤쫓아갔다. 다행히 동전은 행인의 발길에 부딪쳐 방향을 바꾸면서 어느 탁자밑으로 기여들어가 주저앉았다. 환이는 한달음에 달려가 탁자밑으로 무작정 기여들어갔다. 그때 누군가 발로 동전을 지려밟았다. “이봐 친구, 그게 몇푼이라고 야단인가?” 목소리가 퉁방울 굴리는 소리였다. 머리를 들어보니 온 얼굴에 구레나릇인 험상궂은 사나이가 한주먹도 안된다는듯 환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탁자밑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다리 네쌍이 더하기 모양으로 마주 앉아있었다. 마작판이였다. 구레나릇이 나무토막같은 다리를 치우고 동전을 집어들어 환이앞에 내밀었다. “마침 잘 됐어. 나 잠간 소피 보고 올테니까 나대신 두판만 놀아줘. 딱 두판.” 환이가 보배인양 동전을 공손히 받아들기 바쁘게 구레나릇은 꺽쇠같이 우직한 손으로 환이의 팔목을 잡아 일으켜 의자에 눌러앉혔다. “난 잘 놀줄 모르는데…” “멱은 볼줄 안다는 말이지? 그치?” “거야 뭐…” 상대 세사람은 모두 예순이 넘어보이는 사람들이였다. 그중 두사람은 령감쟁이였는데 둘 다 겨릅대처럼 강말라있었다. 나머지 한사람은 로친네였는데 두 령감과 정반대로 부쩍 몸이 퍼져있었다. 메주처럼 커다란 젖두덩이 웃옷을 고무풍선처럼 불려놓고있었다. 로친은 입술을 벌겋게 칠하고 거기에 담배를 끼워물고있었다. 구레나릇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요청한 두판보다 한판 더 놀았다. 정확히 한고패가 돌아오는셈이다. 마작은 동네마다 노는 방법이 달라 시작하기전에 관련 규정과 방법들을 묻느라고 시간을 어지간히 랑비해서 그렇지 그렇잖으면 아마 두판은 더 놀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세판에서 환이가 한판 “후”해서 구레나릇이 내놓고 간 돈이 오히려 불어나서 다행이였다. 환이는 주사위를 손에 들고 아까 구레나릇이 사라지던 쪽으로 바라보았다. 저만치에서 구레나릇이 돌아오다가 어떤 안경쟁이와 악수를 나누며 지껄이는 모습이 보였다. 허리를 굽히고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떠올리고있는것을 보니 상대가 꽤나 세력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인거 같았다. 그런 대면이라면 오래가지 않는다는것을 환이는 잘 알고있었다. 패쪽을 쌓는 시간이면 맞춤하게 돌아오겠지싶어 느끗하게 담배 한가치 피워무는데 마주켠에 앉은 로친네가 꽥 소리질렀다. “이 자식아, 세월 다 간다. 얼른 안 던져?” 환이는 자기가 왜서 이런 재수없는 자리에 캐스팅되어 이 수모를 당하는지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주사위를 치고 패쪽을 다 집어올때까지도 구레나릇은 오지 않았다. 다시 눈길을 피뜩 들어 건너다보니 빌어먹을 구레나릇이 그사이 안경쟁이를 놓아보내고 이번에는 거리에서 군밤을 파는 웬 아낙네의 어깨를 끌어안고  히히닥거리고있었다. (배포 하나는 두둑한 넘이네.) 이번에도 환이가 용케 후했다. 그전부터 마주켠 로친네의 신경질이 슬슬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먼저는 웃집 령감이 동작이 꿈뜨다고 “벌써 손가락에 중풍 온겨?” 하고 야단하더니 다음엔 아래집 령감이 패 잘못 던져서 졌다면서 “머리가 비면 팔다리가 고생해.”하고 고아댔다. 짓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것을 잘 아는 환이는 히죽히 웃으면서 “지랄 고만하셔.”하고 시까슬렀다. 길길히 뛸것만 같은 로친네가 꼬리를 내린 대신 어느새 돌아온지도 모르는 구레나릇이 환이의 뒤통수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과부집 숫캐처럼 함부로 나대면 죽는수가 있어.” 몽타주 하나는 기똥차게 잘 나올거 같은 구레나릇이 자리를 내주려고 일어나는 환이를 그대로 다시 눌러 주저앉혔다. “그만 놀고 밥 먹으러나 갑시다. 내 한턱 낼게요. 친구도 같이 가.” “갑세.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는데 쉽지 않구려.” 머뭇거리며 일어서는 령감들 뒤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선 로친네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문뜩 환이를 건너다보며 의미있게 눈을 끔벅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기기 다행인줄 알어. 저 친구 숨쉬는거 내놓고 다 거짓말인데 오늘은 간만에 부처님이 되실 모양이야.” 환이는 그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삥 뜯길 주머니도 없었다. 갈비 뜯는 날이 명절이라고 아무렴 먹을것만 있으면 좋았다. 한동안 잠자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다시 냈다. 청룡의 해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텅 비여버린 몽뚱이로 맞이할수는 없다. 어차피 사나이로 태여난바에는 한번 달리는 말처럼 인생을 채찍질하면서 살아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자면 에너지 보충은 필수적이다. 거리 가운데쯤에 위치한 자그마하고 지저분한 란저우손국수집에서 소고기국수 한사발씩 앞에 놓고 맥주를 청했다. 두 령감쟁이는 시다달다 말없이 맥주에다 소고기국수를 부지런히 먹었다. 대신 뚱보 로친은 마냥 측은한 눈빛으로 환이를 힐끔힐끔 건너다보군 했다. 구레나릇은 술보다는 말에 더 재미가 있는 모양이였다. 그가 침방울 튕기는 동안 두 령감은 먹던걸 깨끗이 비우고 고맙다고 허리를 둬번 굽석이고는 자리를 떠버렸고 나중 남은 로친은 그래도 말 한마디 남겨놓고 나갔다. “하여간 뻥치는데는 챔피언감이야. 고만 지껄이구 저 친구 보내줘.” 그다음 싸구려 맥주 한병을 얻어먹고 기분이 좋아진 환이는 웬 영문인지도 모르고 구레나릇에게 이끌려 한 건물앞에 이르렀다. 클래식한 건물더미속에서 쉽지 않게 야한 현대식 건물이였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겁나게 위압감을 주었고 알록달록 네온등 빛이 집안에서부터 눈시리게 뿜겨져나왔다. 나이트클럽이였다. 출입문에서부터 긴 복도까지 량옆으로 아가씨들이 쭉 늘어서있었다. 아직은 약간 이른 시간인데도 속옷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밤유니폼을 입은 아가씨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닥거리고있었다. 빵 냄새가 유달리 심한 백인아가씨가 여럿이 보였고 석탄에 그을린듯한 흑인아가씨 하나도 유표하게 그속에 끼여있었다. 크고 작고 실하고 야위고 제나름대로 천태만상이였지만 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것만은 한결같았다. (아차 잘못 걸렸구나!) 환이는 미처 속이 철렁할 사이도 없이 구레나릇에게 끌려들어가 구석쪽으로 개굴처럼 펑 뚫린 룸에 그대로 구겨박혀졌다. 이윽고 맥주가 박스채로 들어오고 곧이어 마담의 손길을 따라 다 벗어버린듯한 아가씨들이 한줄로 쭉 들어섰다. 노래방이 레스토랑이 되여진건 벌써 수년전부터 많이 보아온터였지만 나이트클럽까지 노래방술집 짬봉이 되여진건 처음 이였다. 모름지기 스릴이 발동했다. 환이는 흥분이 지나친듯 겉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환이는 자주 한다. 자조적이고 자기기편적이기는 하나 그렇게 아큐처럼 생각하면 마음 하나는 참 편했다. 만사를 포기한듯한 환이의 자충수에 구레나릇은 약간은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그랬건말건 환이는 그중 빵빵해보이는 아가씨 하나를 지목하여 옆에 앉혔다. 구레나릇은 생김새처럼 취향이 유달라서 온몸이 숯같은 흑인계집애를 손저어 불러놓고 그 자리에서 냉큼 통통하게 튀여나온 젖통을 한웅큼 거머쥐고 주물럭거렸다.  술이 둬순배 돌았을무렵 환이는 파트너 아가씨를 끌고 사람들로 붐비는 홀속에 들어가 한바탕 흔들었다. 온몸에 땀이 배여나고 기분이 붕붕 떠올랐다. 파트너 아가씨의 어깨를 부여안고 룸에 다시 돌아와 맥주컵을 거머쥐니 아까부터 환이를 살피듯 주시하던 구레나릇의 경계하는 눈빛이 서서히 풀려가고있었다. 구레나릇은 참 오래동안 참아와 정말 더이상 참기 어렵다는듯 흑인 파트너의 허리를 무작정 끌어안고 춤과 노래로 아우성판인 홀안으로 휘청휘청 나갔다. 환이는 느끗하게 파트너에게 맥주 두고뿌를 연거퍼 권했다. 마침내 파트너가 뇨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환이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한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웃옷을 잽싸게 주어들고 부랴부랴 나이트클럽을 나와버렸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는 한결 흥성했다. 그러나 환이는 그런걸 구경할 흥심이 가뭇 사라졌다. 구레나릇이 당장 쫓아나와 뒤덜미를 거머쥘것만 같았다. 환이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만사불구하고 앞으로 닫기 시작했다.  필터링같은 가로길을 두개 뛰여넘었지만 환이는 여전히 가슴이 세차게 뛰였다. 어떻게 튀여나왔던지 이제는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똑마치 악몽같은 느낌이였다. 악몽도 꿈이라면 꿈이다. 꿈은 자라는 속성이 있다. 악몽이 자란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유산이 되여 평생을 두고 묵직하게 따라다닌다면 진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것 같았다. 환이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될수만 있다면 그 악몽을 기억에서 삭제하고싶었다. 환이는 본능적으로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사람들틈에 구레나릇외에도 자신을 노리는 다른 사람들이 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다. 피해망상증이 아니라 자기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은 쉽게 남들의 먹잇감이 될수도 있다는 도리를 문뜩 발견한것이다. 환이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길옆 가게안으로 쑥 들어갔다. 잠간 숨이라도 돌리고싶었다. 이제는 구레나릇이 뒤쫓아오지 못할것이라고 짐작했다. 가게는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넓었다. 악세사리를 진렬한 매장이였는데 질서정연한 실내처럼 들락거리는 사람도 없어 한결 조용했다. 분위기탓인지 환청이 가뭇없이 걷어지고 마음이 저절로 평온해왔다. 아마도 환이의 할딱이는 숨소리때문인지 아니면 환이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안쪽 문이 말없이 열리면서 늙수그레한 한 로인이 걸어나왔다. “거… 궁민이라는 분 맞아유? 조궁민?” 환이를 보는 눈이 많이 부드러웠다. 그런 자상한 눈길을 환이는 오래간만에 보는 느낌이였다. 로인은 기력이 쇠잔하여 말하는 톤은 낮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끈기가 있어보였다. “전 환이예요.” “사장님이 아까부터 기다리셨수. 이쪽으로 오십소.” 로인은 환이의 대답을 별로 새겨듣지도 않고 바로 환이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안내했다. 환이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해석도 못하고 로인이 끄는대로 따라 들어갔다. 뜻밖에도 문을 열고 나가니 안쪽엔 제법 움직일만한 울안이 나졌고 그 뒤로 “흠삼진”이라는 간판을 내건 어마한 공장건물이 있었다. 백여명 녀직원들이 여기저기 널려서 여러가지 악세사리를 조립하고있었다. 사장 집무실은 2층에 있었다. 전씨 성을 가진 사장은 퍼그나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이였다. 서류를 보다가 사람이 들어오자 점잖게 일어나 그때까지 꿔온 보리자루처럼 어정쩡 서있는 환이에게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전입니다.” “전…” “허허허, 전국 전이 아니구 전세계 전입니다.” “그게 아니구요. 사람 잘못 아신 모양입니다. 전 가게에 구경 들어온 사람일뿐입니다.” “아, 그래요? 가끔 왔다가 그런 핑계를 대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다시 잘 생각해보십시오. 앞으로 큰 일 하자면 밑바닥부터 잘 다져야 합니다.” 환이는 괜한 오해를 산게 억이 막히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음차양차로 본의 아니게 우연히 끼여들긴 했지만 아예 이대로 후딱 취직해버리는것도 별로 나쁘지는 않을거 같았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는 어린애처럼 인생길을 그렇게 타박타박 걷고싶었다. 그러면 마음이 많이 든든해지고 편안해지겠지.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환이는 점잖게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털면 먼지뿐인 주머니에 손을 깊숙히 질러넣고 진렬장을 거쳐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 경황에도 혹시나 해서 두리번거리던 환이의 얼굴이 금세 시꺼멓게 질려갔다. 저 멀리서 천으로 머리를 싸맨 구레나릇이 쇠파이프를 질질 끌며 오는것이 보였던것이다. 고무신짝에 착 달라붙은 껌보다도 더 질긴 넘이였다. 저걸 떼여버린다는게 조련찮다는 심각한 위기감이 앞섰다. (잘못 걸려들었구나.) 이날 두번째로 터져나온 한탄이였다. 다행히 구레나릇은 아직 환이를 발견하지 못하고있었다. 고개를 빳빳하게 올려세우고 앞만 내다보며 오고있었다. 환이는 웃옷을 벗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총총 걸음으로 앞으로 달렸다. 그나마 날씨가 차츰 어두워져오는게 다행이였다. 그래도 방심할수는 없었다. 행여 구레나릇에게 잡히면 뼈다귀도 추리지 못한다는걸 잘 알고있었다. 달리면서 다시 돌려 생각해보니 자신의 노릇이 참 한심했다. 하필이면 꼭 이 한길로만 줄창 달릴 필요가 있냐 말이다. 그것은 결국 궁지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구레나릇이 우직하여 이 길로 따라온다고 하여 환이 자기도 티나게 이 길로 계속 달아나야 한다는 법은 없잖은가. 길은 여러갈래가 있었다. 직진하는것이 한 방향이라면 좌우로 커버를 돌면 역시 새로운 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잠자코 있는것도 하나의 선택이 될수도 있잖은가. 옳지, 그게 좋은 방법일수도 있다. 환이는 아까 공예품회사에서 차를 대접 받으면서 여유를 즐겼을걸 그랬다고 괜히 후회를 하면서 아무렇게나 문이 열려진 가게로 빨리듯 들어갔다. 거짓말처럼 진짜로 차를 판매하는 가게였다. 여직껏 대수 익혀온 룡정차, 노산녹차, 기문홍차, 철관음, 대홍포, 벽라춘, 말리화차, 보이차는 물론 이름을 제대로 밝힐수 없는 차들도 많았다. 그러나 손님은 오히려 그 가지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손님을 접대하는 직원은 주인인듯한 사람 달랑 혼자였다. 들어오는 손님에게 차물도 대접하고 또 손님의 요구대로 이것저것 샘플도 보여주고있었다. “여기 와서 차나 한잔 드시우.” 매대앞을 왔다갔다하면서 열심히 구경하는듯한 환이에게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가게 한쪽 구석쪽에 나무뿌리로 멋지게 조각한 큼직한 차탁이 있었고 거기에 앉아 차를 마시던 마지막 손님도 주춤 일어서는중이였다. 환이는 차탁쪽으로 걸어가 밖에서 들여다보기 쉽지 않은 각도를 찾아 점잖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쪽 환한 쪽으로 앉으시죠.” 주인은 환이의 속내도 모르고 지궂게 요청했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이리 한산하죠?” “아, 그러면 물건 가지러 온 분이 아니시네.” 주인은 뜻을 알바 없는 희미한 웃음을 흐들흐들한 얼굴에 떠올렸다. 흥분에 많이 들떠있던 언성도 금방 어눌하게 내려앉았다. 환이는 그만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순간이지만 스파이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암호접속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물건이라?) 전생까지 옹근 두생을 합쳐도 옷스침 한번 없는 사람한테 와서 무슨 물건을 가져간단 말인가? 환이는 여기서 가져갈수 있는 물건이 어떤것인지도 몰랐고 가져가야할 물건도 없었다. 솔직히 환이는 물건 가지러 온것이 아니라 숨으러 온것이다. “뭐 견주지 말고 까짓껏 한번 대담하게 접어들어봐요.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장사에 딱 들어맞아요. 나한테서 차를 도매해간 사람치고 여직껏 밑졌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역대리를 달라면 그것도 가능하니까 잘 생각해봐요.” 그제야 환이는 웬영문인지 조금은 알것 같았다. 이런 바보라구야. 차집에 와서 차 내놓고 무엇을 가져간단말인가. 환이는 손을 들어 스스로 자신의 뒤통수를 탁 쳤다. 자기는 모름지기 곤충 컨셉이여서 사람 말을 바로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타입이라는 한심한 생각에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히니 숨통이 졸리지 않을수 없잖은가 말이다. 환이가 대략 난감하여 뭔가 말하려고 고개를 쳐드는데 가게 앞으로 때맞추어 여러 사람이 왁짝 고아대며 지나갔다. 얼결에 건너보니 입에 거품을 문 구레나릇이 앞장서서 걸으며 악에 받쳐 소리치고있었다. “감히 이 어른을 사기치다니? 겁대가리 회쳐 먹었군. 이넘 잡히기만 해봐라.” 환이는 앉은 자세로 시무룩이 웃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이 뺑소니를 쳐버린것이다. 어쩌면 후둑후둑 튀던 심장이 눈깜짝할 사이에 랍치당한 모양이다. 돌아보니 구레나릇에게 죄진 일이 쪼매도 없었다. 마작을 대신 놀아달라고 골골거려서  놀아준것뿐이고 밥 사준다해서 따라가 맥주 한병 얻어먹은데 불과했다. 그리고 나이트클럽은 끌려가다싶이 했었다. 주머니가 땡그라니 비여버린 환이가 환장했다고 아가씨 궁둥이치러 그 비싼 곳으로 찾아간단말인가. 주변에 널려있는 아주 닳아진 아줌마들의 손목이나 한번 잡아보고 그것을 스킨쉽으로 자위하며 즐거웠던 환이였다. 골기있게 살자. 살바에는 사람답게 살자. 이것저것 다 두렵고 여기저기 모두 무서우면 어떻게 산단말인가. 입도 헤프고 몸도 헤프고 마음마저 헤픈 환이지만 태생적으로 뼈마디 하나만은 굵었었다. 원래 세상이란게 그런 법이 아닌가. 쌍코피 터지게 악쓰며 살아야 밥상에 변변한 반찬 한가지라도 더 올라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려들면 세상에 무서운게 뭐란 말인가. 환이는 벌떡 일어섰다. 온몸에서 주체할수 없는 힘이 우뚝 솟아오르는게 저절로도 느껴졌다. 가게 주인은 환이의 뜻밖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뒤로 둬걸음 주춤 물러섰다. 우묵하게 꺼져들어간 눈속에 일종의 경악같은것이 자리잡고있었다. 그러건말건 환이는 고개를 약간 숙여 목인사를 가볍게 올리고 활개를 치며 가게를 벗어났다. 구레나릇네들이 한번 훓고 지나간 거리에는 낯설고 생소한 사람들로 다시 꽉 채워져 여전히 흥성거렸다. 량쪽으로 클래식한 건물들은 여전히 우중충 끝없이 이어지고있었고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리는 마냥 오불꼬불 길게 누워있었다. 청기와 또는 회색의 기와장들이 지붕우에서 어느새 고요히 잠들었고 칠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붉은색 기둥 사이로 열려진 투박한 널판자로 된 대문들로 지칠줄 모르는 사람들이 쉴새없이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곳에서는 연기와 음식냄새와 서로 다른 물건들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들이 범벅이 되여 끊임없이  쏟아져나와 거리를 화끈 달구고있었다. 특히 사람들이 불륨을 최대한도로 높혀 왁작지껄 고아대는 소리는 그대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거리를 거닐거나 가게앞 쪽걸상에 걸터앉았거나 집안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옷차림새 역시 각양각색으로 천차만별이였고 내노라며 몽치같은 팔뚝을 드러내거나 아예 여러가지 동물을 문신한 알몸뚱이를 그대로 내놓은 사람들도 가끔 보였다. 환이는 이제 허기질 일이 없었다. 궁금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발이 방향잡이여서 사거리에서 유턴해서 새길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구레나릇과 오며가며 마주칠 일도 없어졌다. 대신 주먹속에서 슬그머니 나와 엄지검지중지 사이에 조용히 끼워졌다가 손등을 타고 멋지게 오르던 1원짜리 동전이 그만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환이의 어깨를 부딪치는 바람에 대리석 바닥에 “땡”하고 떨어지면서 대굴대굴 앞으로 굴러갔다. 환이는 먼저번처럼 황황히 뒤쫓아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발길에 부딪쳐 어딘가에서 멈춰설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환이는 이제 그 동전이 멈춰서는 곳에서 인생에 한판의 승부를 크게 걸리라 다짐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2014년 1월 초 청도에서  
16    청도로그인 댓글:  조회:1283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청도로그인 장학규   1 신우는 달려오는 택시를 막아서며 무작정 손을 설레발처럼 흔들었다. 벌써 20분은 훌쩍 넘긴것 같다. 출퇴근 고봉기도 아닌데 지나가는 택시마다 밉상스럽게 손님이 앉아있었다. “올라타!” 신우는 위동이에게 소리치고 차 뒤문을 열고 미꾸라지처럼 쏙 기어들어갔다. 비대한 그가 이날처럼 민첩하게 움직인것은 처음이였다. 위동이와 한 아파트단지에 살고있는 신우는 생김새와 알맞게 한국에서 노가다판을 7~8년 구불다가 식당주방장을 한 마누라와 함께 청도로 귀국하여 추어탕집을 꾸린지 불과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신문업을 하는 위동이가 가끔 손님들과 더불어 추어탕집에 다니다보니 친하게 되였고 따지고보니 또 동갑에 한동네여서 바로 말을 놓고 야자치기를 하게 된것이다.  위동이는 실웃음을 가늘게 지으며 미안하다는듯 길옆에서 그들과 더불어 20분간 좋이 함께 택시를 기다렸던 이름모를 두 녀인에게 목례를 올리고 부랴부랴 택시에 올라탔다. 뒤통수에 가시같은 눈길이 그대로 꽂이는것을 육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자식이, 신사인척 하기는…” “글쎄 그러나 이러나 욕 먹기는 마찬가지기는 하구나.” “그러니까 차 몰고 가자고 했잖아” 신우가 투덜대는중에 택시기사가 어디로 갈거냐고 무척 짜증섞인 어조로 물어왔다. 불 같은 신우가 욱 하면서 한 성격하려는것을 위동이가 눈으로 어르듯 말리며 “교남.”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가 인차 이어서 “옛날 해변고속도로로 갑시다.” 하고 보충했다. 산동사내답게 우덕진 체격을 가진 기사는 시다달다 별 대꾸없이 그대로 차를 몰아댔다. 위동이는 이 자식이 도대체 말귀나 알아들었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색 않고 신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잔치집 가는데 술 안 먹을수 없잖아. 괜히 차 몰고 갔다가 잡히면 어쩔라고?” “퍼런 대낮에 웬넘이 잡는다더니?” 신우는 언제 기분 나빴더냐는듯 장난꾸러기처럼 대꾸했다. 위동이는 터덜터덜한 신우가 그래서 좋았다.  “잘못 걸렸다가는 12점이야 한꺼번에. 아니면 보름이구.” “글쎄 그게 어디 쉽냐구? 얼빤한 넘들이나 걸리지.” “세상 일 모른다. 거 왕경리 있잖아. IT업 한다던 그 친구말이. 며칠전 우리랑 모가만식당에서 한잔 하고 이촌으로 들어가다가 걸렸어. 면허 찢기구 보름 땡강했어.” “왕경리 술 별로 못하잖아?” “히히히…” “자식이 허파에 바람 들렸나? 헤식게 웃기는…” “거 청양입체교에서 308국도에 내리면 와리 십자길 있잖아. 거기 교통경찰이 가끔 있는데 왕경리가 용케 경찰 눈을 피해 건너갔거던. 그런데 갑자기 머리에 물이 들어간거야. 아무래도 그 길이 이촌 가는 길 같지 않더래. 그래서 차를 척 길가에 세워놓고 시벌건 얼굴을 한채로 술냄새까지 풍기며 교통경찰한테 다가가 이 길이 이촌 가는 길이 옳냐고 물었다는거야. 흐흐. 자기 절로 지옥문을 열었짐. 얼빤한 자식이 후후…” “후하하…세상에 술 먹구 교통경찰한테 길 묻는 양반도 있구나 하하하…” 빠끔히 열린 차틈사이로 불어들어온 초봄의 싱그러운 바람이 급작스레 터진 상쾌한 웃음을 그대로 차창밖으로 훌 실어날라갔다. 오전 11시가 성급하게 막 꼬리를 내린 시간이였다. 그들은 지금 친구 덕호의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청양에서 교남으로 나가는 길이였다. 자가용으로도 좋이 한시간 정도는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동북 고향에 있을 때는 현성 사이를 오가는 일이 꽤나 번거롭고 그리고 아주 먼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청도에서 십수년 살고보니 이제는 그 정도의 거리는 대강 이웃에 마실 다니는 느낌이였다. 결혼식은 11시 58분에 거행된다. 이제는 결혼식 시간은 물론 정월 대보름에 왠쇼를 먹고 팔월 추석이면 쭝즈를 먹는 등 대개는 중국인 행세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본뜨면서 살아가고있는 셈이다. 이대로 달리면 그럭저럭 시간을 맞출수 있을것 같았다. 택시는 어느덧 여고구해상대교(女姑口跨海大桥)우를 달리고있었다. 저 앞으로 당장 청도의 새로운 핫이슈로 떠오른 홍도(红岛)가 거인마냥 숨 막히게 다가오고있었다. 미래 대청도의 공간 중심과 교통 중추로 기획된 홍도경제구는 블루경제구가 국가프로젝트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대청도의 새로운 발전엔진으로 부상하고있었다. 한때 청도시정부가 이전해올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더니 새해에 들어와서 난데없이 정무센터가 곧 자리잡을것이라는 관방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현지정부의 행정심사비준서비스센터의 이전만으로도 홍도는 어마한 파워로 위압감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인구 10만도 안되는 어촌구역에 70만 인구를 수용하는 청도판 ‘포동’을 건설하느라고 여기저기서 공사판이 여념없다. 새우양식장들이 해변가를 따라 촘촘히 널려있는것이 한눈에 보였고 그 너머로 칙칙한 갯벌이 육지까지 길다랗게 누워있었다. 세상에 유명한 홍도바지락이 이 지역에서 나온다. 이곳이 간척지로 변해버린다면 또 하나의 전설이 사라지는 셈인가. “투다리 총부가 이 동네에 자리잡은지 여러해 됐어. 한회장은 참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야.” “청도의 전설이지므. 직업소개소로부터 그룹회사 총수, 이건 그대로 드라마야.” 위동이의 찬탄에 신우도 간만에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에 수백개 체인점을 두고있는 투다리는 조선족기업가가 이끌고있는 그룹회사이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 교남으로 들어가는중에 길을 잃고 잠간 헤맸다. “우리도 내려서 교통경찰한테 물을가? 술 먹은것도 아닌데 무서울게 없지 킬킬” 신우가 옆구리를 지르며 킬킬거린다. 덕호한테 전화로 길을 물으니 거듭 창미달전자회사를 지나왔냐부터 물어왔다. 고속도로를 내리면서 바로 왼손편으로 있는 창미달전자는 위동이도 여러번 다녀간 기업이였다.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온 김씨성의 조선족이 그 주인이였다. 건물 자체를 구입하고 전자제품을 생산하고있는 김사장은 그래서 청도진출 조선족중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로 세인의 주목을 받는 기업인이였다. “창미달 지나서 두번째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달려와. 양옆을 돌아보지 말고 곧추 앞으로 와. 얼마나 푸른 하늘이냐. 그 하늘아래 내가 서있으니까.” 참새같은 친구는 그 와중에도 일본 영화 “추격체포”의 대사까지 흉내내면서 주절거렸다. 려행사를 꾸리는 덕호와는 사업건때문에 만나 사귄 친구인데 말이 쉴새없는게 흠이라면 흠이였다.  그나저나 현장에 도착했을때는 덕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길에서 버벅이는 사이에 결혼식 시간이 되여 행사장으로 들어가버린것이다. 대신 풋면목이 좀 있는 덕호의 처남이 당황한 눈빛을 하고 길가에서 서성이고있었다.  안내를 받으며 혼례식이 한창 진행되고있는 행사장에 들어가 조심스레 식탁에 앉다가 위동이는 누군가 급작스레 어깨를 와락 끌어안는바람에 초풍할 지경으로 놀랐다. “니 위동이 아니야? 아이구 여기서 만나다니, 이게 몇년만이냐?” 얼굴도 미처 보지 못했는데 대방이 집안이 떠나갈듯 고아대며 위동이를 더 조여왔다. 위동이는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손에 힘을 주어 대방의 팔을 뜯어내고 돌아보았다. 실제로 반가운 친구가 맞았다. 한고향 한마을에서 함께 자란 짜개바지친구 범철이였다. 위동이가 대학에 가면서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 20년이 다되는 셈이다. 2 느닷없이 웃층에서 들려오는 와당탕 소리에 눈을 뜨면서 습관적으로 손목을 쳐다보던 위동이는 불시에 후다닥 뛰여일어났다가 아 정말 오늘이 일요일이지 그렇게 속으로 주절대면서 도로 벌렁 드러누웠다. 시침은 오전 9시 38분을 가리키고있었다. 교남에서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범철이하고 반가운 김에 잔치상이 파하기 바쁘게 2차로 노래방에 가서 뭉글뭉글한 아가씨를 끼고 양주에 맥주에 와인까지 벌려놓고 마신것까진 생각났다. 그리고 범철이가 황도에서 식품무역을 하고있고 위동이가 어렸을적에 삼촌삼촌하고 불렀던 범철이 아버지가 월요일에 뒤늦은 환갑연을 크게 차린다는 말이 맞춤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깜박했던지는 전혀 모를 일이다. 제길…지난해 마흔을 넘기면서부터 드문드문 발생하는 현상이였다. 전에는 아무리 많이 마시고 짬봉하면서 먹어도 흐트러짐 한번 없이 꼿꼿이 자기발로 집까지 찾아왔었다. (신우가 데려다준거겠지.) 정상적인 생리반응인지 아니면 정말 어딘가 나사가 풀려서 잘못된건지 자신도 알수가 없었다. 오늘은 청도시내로 나가야 한다. 대학동창인 남수가 둘째아이 돐잔치를 굉장하게 차리기로 한것이다. 둘째도 딸년인데 큰딸하고 꼬박 12년 차이나고있었다. 남수는 작은 딸 얘기만 나오면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요즘 청도는 터울차이가 크게 나는 둘째를 낳는 바람이 꽤나 거세게 불고있었다. 남수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저 자식이 어떻게 저렇게 가정적이 되였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대학때부터 남수는 좀 바람기가 있었다. 뭐 바람기라기보다는 허울이 원래 잘 생겼으니까 녀학생들이 잘도 따라다녀 련애경험이 풍부하달가. 아무튼 위동이가 녀학생이랑 말 몇번 못했을 즈음에 남수는 벌써 학교 주변의 루추한 려관방을 자기집처럼 드나들었다. 청도에 와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도 그 식이 장식이였다. 더우기 단위의 파견을 받고 협력해주던 한국사장을 차버리고 포워딩회사를 독자적으로 오픈하고나서부터는 아예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사실 영업을 뛰느라고 여기저기 쏘다니는것도 있었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녀자 사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것이다. 남수는 딸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쯤에 한번 크게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 몰린적도 있었다. 그날도 남수는 바이어들과 더불어 노래방에서 2차를 하고 배동했던 아가씨를 끌고 방을 열었다. 수학공식같은 일이여서 그렇겠거니 여기고 각자가 자기 뜻대로 뿔뿔이 헤여졌다. 그런데 남수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마누라한테 교대해야 한다는 핍박감은 있어서 일을 끝내기 바쁘게 아가씨를 쫓아버리고 부랴부랴 바지를 꿰차고 새벽이슬과 더불어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오래동안 독수공방한 남수의 마누라가 발정이 난 모양으로 새벽까지 눈꼽을 뜯으면서 기다렸다가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참지 못하겠다는듯 불시에 그의 벨트를 낚아챈것이다. 순간 고름같은것이 가득 들어찬 콤돈이 거시기에 그대로 걸린채 밑으로 축 처져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엉? 이거 왜 여기 걸려있지?” 그때 술이 확 깨버린 남수가 얼결에 했다는 말이다. 마누라는 히스테리 들린듯 가위를 집어들고 달려들었고 남수는 그러는 마누라를 피해 어느새 문밖으로 도망쳐버렸다. (아이구 못살아…) 위동이는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배를 끌어안고 뒹군다. 아닌 새벽에 동창 마누라한테 불리워가서 추궁당하고 아닌보살하고 헤식은 바보인척 하면서도 위동이는 억울함이나 창피함이나 힘든 느낌이 전혀 없었다. 대신 자꾸 웃음이 복부에서 생겨나 목줄기를 거쳐 구강에서 터지는것을 참느라고 죽는줄 알았다. 남의 불행이 경우에 따라서 전혀 감염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처음으로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그 온몸에 충만하는 에너지를 해소하느라고 그 집을 나서서부터 거짓말 보태 달반가량 미친넘처럼 웃으면서 다녔다.  “이거 왜 여기 걸려있지?” 친구들이 남수를 만나 인사삼아 건네는 말이다. 가끔 “그건 왜 거기 걸려있지?” 이렇게 변형시키기도 하고 좀 멀면 “저건 왜 저기 걸려있지?’” 그런 식으로 시까스르기도 했다. 암튼 그런 남수가 둘째를 만들고나서부터 술담배 끊기보다 더 어렵다는 풍류행객을 칼로 자르듯 그만 딱 끊어버렸다. 마누라도 이젠 다 풀렸는지 남편을 보는 눈이 적의보다는 정이 좀 더 담겨있었다. 그래도 상처는 잘 잊어 안지는지 동창들 모임때면 꼭 과거를 꺼내 한번 료리해야 마음을 놓는다. 그때마다 장소의 분위기는 “이거 왜 여기 걸려있지?” 하는 복창과 더불어 바람 높은 하늘에 띄운 연마냥 붕 뜨군 했다. 열시가 다 되어서야 위동이는 부시시 일어나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30만 좀 넘어 주고 뽑은지 갓 두달도 되지 않는 신형 혼다 엘리시온은 흔들림 하나 없이 장성로를 따라 북으로 굴러갔다. 술에 찌든 몸을 풀려고 힐링스파로 찾아가는 길이였다. “정사장님, 어서 오세요.” 후론트에서 뭔가 직원들에게 분부하던 미스리가 위동이를 발견하고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언제봐도 해사한 미스리이다. 이 힐링스파가 생겨서부터 지금까지 8년간 굳건히 한우물을 파고있는 미스리이다. “윤사장님은 참 복도 많습니다. 미스리를 저한테 양보하면 안되겠습니까?” 언젠가 위동이가 가목사 출신의 윤사장에게 정색을 하고 건의한적이 있었다. 윤사장이 골프를 치던 손님을 접대하던 힐링스파는 집사같은 미스리의 인솔하에 계속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사장은 있나?” “진국장이 만나자고 해서 공안국에 갔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니…” 위동이는 곧추 3층의 남탕으로 들어가 대수 씻은후 다시 4층에 있는 안마실로 찾아갔다. 태국식 진한 마사지를 받고나니 11시반이 되어왔다. 잠간 가운을 입은채로 황토방에서 피곤한 눈을 감았다가 저도 몰래 피씩 웃음이 나갔다. 자기절로도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아닌게 아니라 주변 손님들이 웬일인가 하여 그를 흘끔흘끔 건너다보고있었다. (이게 아닌데...) 위동이는 머쓱하여 가운을 여비며 일어섰다. 바로 달포전에 위동이는 남수와 더불어 이 힐링스파에서 사우나를 즐기고 갈라졌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보니 남수가 웬일인지 먼저 와 문밖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남아도는 팬티 하나 주라.” “왜?” “바지속이 이상하게 허전해서 손 넣어보니 팬티 안입고 힐링스파 나왔네. 이대로 집가면 혀가 열가닥이라도 해명 못해.” “킬킬킬…이번에는 이거 왜 여기 안 걸려있지구나 흐흐흐” 위동이는 배를 끌어안으면서도 고스란히 새 팬티 한장 찾아 넘겨주었다. 솔직히 나이 어린 동창 마누라한테 시달굼을 받고싶지 않았다. 해명을 하고 증명을 서는 일도 치사했다. 그보다 남수의 진지한 모습이 새삼스레 감동을 주고있었다. 이런걸 두고 격세지감이라던가. 힐링스파를 나와 차에 오르면서 스마트폰을 보니 남수한테서 전화가 세번이나 걸려왔었다. “웬일이냐?” “어디 가 죽었다가 이제 나오니? 언제 올거냐?” “지금 떠나는 길이다.” “임마 그러면 행사 끝나잖아.” “끝나면 조오치. 내사 가서 부조돈만 주면 되는데므.” “돈이 싫단다. 박사가 된다면서 볼편을 쥐였다.” “정양학교에 우수 학생 하나 생겼구나.” “누가 아니라니? 교장선생님도 오셨으니까 얼른 와.” ‘알았어.” 오늘은 술을 피할수 있을란지 모를 일이다. 아무렴 차를 끌고가니까 사람을 덜 시달구겠지. 하다못해 누구처럼 술 먹고 길 가다가 어리버리하게 교통경찰한테 길을 물을 정도는 아니 되겠지싶다. 솔직히 청도의 골목골목 길을 교통경찰보다도 더 훤하게 꿰고 있는 위동이기도 했다. 3 아침에 홀리데이인 오피스텔에 위치한 회사에 나가서 작업지시를 하는 사이에도 범철이한테서 전화가 두번 걸려왔다. 어제부터 계산하면 벌써 다섯통째이다. 위동이는 좀 짜증이 났다. “왜 또 전화니?” 아마도 볼멘소리였던지 범철이답지 않게 기여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쁜 모양이구나? 그럼 끊을게.” ‘아니, 말해. 무슨 일이냐?” “아버지 그러는데 니가 먹물 많이 먹었으니까 아버지 략력을 소개해주었으면 좋겠다는구나.” “알았어. 지금 곧 갈게.” 위동이는 수시로 회사 업무를 체크할수 있도록 비서인 미스권더러 하루종일 핸드폰을 켜놓고있으라고 분부하고 바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속도가 빨랐던 모양으로 속이 울렁거리면서 욱하고 뭔가 치밀어올라 하마트면 그대로 오바이트할번 했다.  오래동안 위에 쌓이고 쌓인 알콜이 화학반응을 하는 모양새다. 어제도 안 마신다 안 마신다 하면서도 선후 빼갈 둬병은 들이킨거 같다. 점잖은 교장선생님과는 오래전부터 알고지내는 사이였다. 92무의 토지를 사서 자체 교사건물까지 짓고 새로운 정착지에서 민족교육에 전념하는 정양학교의 이야기는 거의 전설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있었다. 하기에 어떤 장소에서나 위동이는 학교 관계자들이 눈에 띄우면 꼭 찾아가서 깍듯이 인사 올리고 술을 권해왔었다. 어제도 남먼저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술 한잔 권하고 한쪽 구석에 숨어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동창들이 위동이를 그저 내버려두지 않았다. “왜 저기 숨어있지?” 왜 여기 걸려있지가 왜 저기 숨어있지로 버전이 바뀐건 물론 “경찰아저씨, 술구멍이 어디유?” 왕경리가 찾아가던 이촌이 어느새 술구멍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어쩌면 청도바닥이 참 작았다. 고작 이틑전 일이 벌써 쫙 퍼진것이다. 그렇게 왁짝 고아대고 히히닥닥거리며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악세사리회사를 운영하는 한국인 문사장의 전화를 받고 대리기사를 불러 청양으로 돌아올때는 별로 길지 않은 초봄의 해가 꼬리를 감춘 뒤였다. 그리고 다시 곧 한국으로 철거하게 되는 문사장과 더불어 섭섭한 술에 위로의 술을 겸해서 두루 3차를 거치다보니 늦은 초봄의 아침해도 빠끔히 동녁하늘을 희게 물들이고있을 때였다. “어허허…” 하품이 줄달음쳐 나왔다. 교주만해상대교에 올랐을즈음 도어홈에 놓아둔 핸드폰이 성급하게 울렸다. 운전중에 통화하는것도 처벌대상이라지만 망망대해우에 놓인 다리우에서는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대교답게 눈뿌리가 모자라게 쭉 길게 드러누운 교주만해상대교는 그저 보기에도 기가 질렸다.  “여보세요.” “나 문사장인데 정사장 지금 어디예요?” “아, 고향 어르신이 환갑연을 차리게 되여 지금 황도로 나가는 길입니다. 속이 괜찮아요?” “지금 막 일어나는 중입니다. 정사장 암튼 대단해요. 또 전투겠네요.” “매일매일 그렇고 그렇습니다.” “점심 약주 한잔 할려고 했는데 안되겠네요. 담에 기약합시다.” “네, 문사장님, 일 잘 될거니까 힘내세요.” 위동이는 진심을 담아 축복했다. 문사장은 위동이가 탄복하는 몇 안되는 한국기업가중의 한사람이다. 한때는 직원이 800여명에 달했으나 최저임금의 상향과 원자재 가격 폭등 및 환경보호정책의 실시로 로동밀집형 기업은 살아갈 립지가 점점 좁아져만 갔다. 여태껏 비쳐낸것만도 다행이였다. 그리고 빚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떠나는 모습도 문사장다왔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라고 했네. 내 1년안에 꼭 새로운 아이템을 가지고 다시 오리다.” 엊저녁 문사장이 취해서 곱씹고 곱씹던 말이였다. 황도 금사탄까지 가는데 차가 많이 막혔다. 얼마전 교남시와 통합되여 대 황도구로 거듭난 이 지역에는 경제기술개발구, 보세구, 화물항구 등이 밀집되여있어 청도의 또다른  성장모델로 변하고있었다. 단순히 리모델링이 아니고 거의 재건축 수준으로 간다고 보면 틀림없다. “너 일본차 몰고도 황도에 막 들어오는구나!” 벌써 밖에서 기다리던 범철이가 과장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조어도 사건이 불거지면서 발생한 일본제 자동차의 피해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다. 청도서는 황도의 일본기업이 제일 피해가 심했다. 파나소닉의 전자부품공장 등 일본 기업 10곳에 시위대가 쳐들어가 불을 지르고 생산라인을 파괴했다. 또 대형유통업체인 쟈스코 이오지마를 습격하여 창고에 보관되여있던 상품 1500만 어치의 절반 정도를 약탈해갔다. 도요타자동차 청도판매 1호점이 방화되는 등 타지역에서도 억울한 피해가 발생하면서 일제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차 브랜드에 오성홍기를 딱지처럼 붙이기도 하고 량옆 차문에 “조어도는 중국땅”이라는 글을 스티커로 새기기도 했다. 범철이네 식구들과 더불어 노인의 프로필을 정리하고보니 행사 시간까지 아직 시간반 정도 남아있었다. 소대 대장까지 하면서 위세가 있었던 범철이 아버지는 어느새 버쩍 말라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였다. 대신 범철이 어머니는 옛날 그대로 인정이 넘쳐나 시종 위동이 옆에 붙어앉아 손을 잡고있었다. “어렸을때부터 공부 잘하더니 끝내 출세했구나.” “범철이에 비하면 나는 거지나 다름 없어요.” “넌 기자잖아. 돈 가지고 바꿀수 없지.” 범철이 아버지가 맞춤하게 끼여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쉽지 않게 홍조가 떠오르고 눈에는 광채가 났다. “범철이 고생 많이 했네라. 배운게 있나? 뒷심이 있나? 고작 돈 3백원을 차비로 청도 와가지고 머리가 비였다고 한국사장의 괄시를 받으면서도 꾹 참고 10년 꼬박 쌍발했는데 망할넘의 사장이 오밤중에 튀는 바람에 근 2년 노임을 날리고 허망 나앉았어. “아버지…” “넌 가만 있어. 맞지 않나. 겨우 거리바닥에 천쪼각을 펴놓고 한국식품을 소매하다가 청관넘들한테 구박은 또 얼마 받았다고. 차차 작은 가게 하나 임대했는데 이번에는 공상국, 세무국, 소방대에 깡패까지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걸 시다바리하느라고 똥줄 뀌였어.그렇게 지금까지 6년 좀 넘어 체인점만 네개여.” “우리 아버지 노망이셔. 나가 담배 한대 피자.” 범철이에게 끌려나가면서 위동이는 참 오래간만에 따스한 인정을 느꼈다. 사실 범철이한테 청도 조선족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신우는 수년간 부부가 한국가서 일해 목돈을 들고 와서 창업했고 남수는 대학 졸업후 특수인재로 청도에 인입되였다가 독립한것이다. 위동이 자신은 본사의 파견을 받아 온것이다. 그러니까 적수공권인 범철이는 순수 자기 노력과 힘으로 일어선것이다. “오늘 저녁 우리집에서 밤 새도록 옛날 얘기랑 하자. 우리 부모님들이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 오래간만에 본다.” “나도 그러고싶어. 그런데 아무래도 다음날로 미뤄야 할것 같구나.” “왜?” “찐따거라고 아는지 모르겠다. 한때 시남구 지역에서 내노라 하던 양반이야. 호텔도 하고 복장공장도 차렸던 분이야.” “소문 들어 알고있어.” “그분의 장인이 오늘 새벽에 세상 떴다는구나. 오늘 밤 지켜주고 내일 화장터까지 가야 해.” “실은 나도 친구들 만나면 그저 넘기기 어렵지.” 4 황도를 떠난것은 저녁 8시가 좀 넘어서였다. 차를 몬다는 핑계를 내세웠어도 어차피 맥주 두컵 정도는 마신것 같았다. 거기다 전날의 알콜이 채 분해되지 않은 상태여서 슬그머니 울기가 올랐었다. 다행히 범철이 부모가 위동이를 붙잡고 앉아 호랑이 담배 피울적 얘기를 늘어놓는바람에 엉거주춤 그때까지 주저앉았다가 저녁밥까지 얻어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교주만 해저터널을 벗어나면서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였냐를 깊이 느꼈다. 7800메터나 되는 바다밑 긴 터널을 지루하게 달리고 금방 출구를 나와 유턴하는데 앞에서 느닷없이 경찰이 나타나 손을 흔들었다. “정례검사입니다. 면허증 좀 봅시다.” (나무아미타불!) 속이 철렁했지만 내색않고 침착하게 면허증을 찾아 넘겨주었다. 경찰은 대수 훑어보는듯 하다가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전문 술냄새만 맡는 경찰의 얄팍한 수작이였다. “하이얼로에 가자면 어떻게 가지요?” 엎딘김에 절이라고 위동이는 경찰에게 가까운 길을 물었다. 느닷없이 술 먹은 왕경리가 떠올라 입가에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순간이나마 괜히 왕경리처럼 긁어 부스럼 만드는게 아니냐는 위구심도 없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경찰은 상세하게 가르쳐주는것이였다. “저 앞의 동서쾌속도로에 올라 그대로 곧추 달리면 하이얼로가 나집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위동이는 더이상 지체없이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았다. 가끔 40킬로, 60킬로 하면서 속도제한피켓이 나왔지만 별로 짜증내지 않고 가라는대로 느끗하게 차를 몰았다. 어림잡아도 아마 1년에 화장터 출입을 스물번은 하는거 같다. 대수 그런대로 그럭저럭 지낼수 있는 집은 상여가 나가는 시간을 맞추어 화장터에 가면 된다. 그러나 연고가 있어 좀 가깝고 앞으로도 꾸준히 함께 가야 할 집은 밤시간을 함께 보내주는게 법처럼 되여있다. 장례집은 자정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초저녁쯤엔 친척들이 망자를 지켜준다. 그리고 청도는 조선족로인협회가 동네마다 있어 상사를 도맡아 처리해주고있다. 친구들이나 동료 또는 가까운 사람들이 날을 새는것은 솔직히 주인의 면목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봐라, 이런이런 사람들이 와서 조문하고 밤을 함께 새준다 뭐 이런 심리가 다분했다. 신분이 어지간한 친구가 많고 힘이 되여주는 형제들이 적지 않다는 무언의 선언도 되는셈이였다. 모여온 사람들은 별로 할 일도 없고 늦은 밤에 술 한잔 나누고 그다음은 트럼프판을 벌리는게 관례였다. 찐따거는 말그대로 김씨 형님이란 말이다. 찐따거는 연변 출신으로 지금도 중국말에 엄청 서툴고 입만 열면 진한 사투리를 쓰고있다. 언젠가 조선족 망년회때 찐따거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연변버전으로 엮어 대박을 터친적이 있었다. 제목부터 깔끔하게 ‘천지꽃’이라 고쳐 불렀다. 내 베기시러 가게쓰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뭐이라 아이 할께 콱 갑소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천지꼬즈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망태기로 끄너가지구 그기다가 너러놓겠쓰구마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게가는 발짝마다 그 꼬즈  (가시는 걸음 걸음 노인 그 꽃을) 막 디디메 콱 갑소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내 베기시러 간다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써거져도 아이 울겠쓰꾸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쳤나싶었지만 그 집에 가보면 교육사업을 하면서 받은 상장들이 수두룩했다. 연변주급은 물론 성급, 전국급의 상장도 있었다. 그리고 한족 친구들도 어지간히 많았다. 중국말이 나가지 않아 갑자르는것만 보면 어떻게 의사교류가 되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옆에는 중국인 친구들이 빌사이가 없었다. 찐따거는 청도바닥을 남보다 좀 일찍 밟은 편이였다. 80년대 말이였다. 여름방학시간을 리용하여 그 세월에 아주 희한한 물건이였던 데코데를 가져다 팔려고 광주쪽으로 나가다가 잠간 청도에 들르게 되였다. 속이 뚝 떨어지게 된장국 한사발 먹으려고 려관 주변을 발칵 뒤집었지만 조선족식당이라군 없었다. (이게 될만한 장사군!) 찐따거는 그 길로 고향으로 회군하여 학교에 사표를 낸후 가산을 다 팔아가지고 다시 청도로 왔다. 그렇게 식당을 시작했다가 규모가 좀 작은 호텔로 번져졌고 다시 호텔에 든 한국손님과 합작하여 복장공장을 꾸리는데로 나아갔다. 찐따거는 드물게 처음부터 창업루트를 걸어온 사람이였다. 물론 일사천리로 내달린것도 아니였다. 한번은 복장 원단이 자꾸 딸려 80만원을 요구대로 원단공장에 선불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와야 할 원단이 감감무소식이였다. 모든 라인이 3일이나 멈춰서는 사고가 터지고 전화로 사정하고 사람이 찾아가 다그치고 해도 진씨 성의 한족사장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보니 진씨가 원단을 다른 회사에 우선 공급하고있었던것이다. 어차피 이쪽은 선불금을 냈으니 코가 궤여졌다는 계산이였다. “이 간나새끼 내르 얼빤하게 보느구나.” 동업자인 한국사장의 눈치도 눈치거니와 당장 코앞에 다가온 납기일이 더 큰 문제였다.  찐따거는 무작정 가스통 두개를 차에 싣고 진씨네 공장으로 찾아갔다. “천창재, 챈디 뿌요라. 뚱씨 게이뿌게이? 뿌게 워 스라.(진사장, 돈은 싫다. 물건 줄래 안줄래? 안 주면 난 죽는다.)” 찐따거는 가스통으로 진씨의 사무실 출입문을 막아놓고 밸브를 틀어 연후 곧바로 그 우에 앉으면서 주머니에서 라이타를 꺼내들었다. 너 죽고 내 죽자는 찐따거의 거동에 진씨는 그만 아연실색하여 부들부들 떨었다. “찐따거, 지금 당장 보내줄테니까 이러지 마오.” 그 진씨가 바로 위동이보다 한발 앞서 조문을 와서 인사중이였다. “정사자이, 느께와쓰까 벌금해야겠다이.” 찐따거는 뒤이어 들어서는 위동이를 다짜고짜 식탁쪽으로 끌어갔다. “술마개 누가 따주.” 오래동안 서로 다녀 벌금이란게 술 먹인다는 소리란것을 잘 알고있는 위동이는 사양도 없이 술잔을 받았다. 오늘은 다시 움직일 일이 없으니 술 먹어도 괜찮을거 같았다. 저쪽 안쪽에서 알만한 사람들이 벌써 “떠우띠주”를 노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다. 구경군중에 시립병원에서 신경외과전문의로 일하는 장박사가 보여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다. 장박사가 답례를 하는상싶더니 어느새 사람들틈을 비집고 다가왔다. “오래간만입니다.” “반갑습니다.” 장박사에 진씨까지 끼여들어 술상이 꽤나 법석거렸다. 5 철썩 철썩 파도가 여느때보다 사나왔다. 찬공기가 몰려오면서 기온이 떨어질거라더니 아닌게 아니라 바람이 기승을 부린다. 왁작지껄하던 인간들의 소음이 가뭇 스톱되고 유독 바람소리가 회오리치는게 섬찍하기도 했다. “제일식당이야. 싹다 그기로 와야대.” 찐따거가 일행을 와락 이끌고 떠나간 마당에 위동이와 장박사만 남았다. 따로 약속한것도 아니였지만 암묵적으로 뭔가 통하는 모양이였다. 찐따거의 장인은 원래 묘지를 사서 안장하려고 했었다. 저그만치 십수만원을 써야 했다. 사전에 노인협회에 자문했었는데 묘지를 쓰면 첫 삼년은 설이나 지일날은 물론 청명, 추석 등 날에도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계획을 취소했다. 상주여야 할 아들은 한국에서 일하고있고 딸 하나는 고향에 그대로 있었다. 찐따거 말을 빈다면 자기도 언제 어디로 훌쩍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 제사상을 모시기 어려웠던것이다. 불확실성은 화장터에 납골당을 모시는 방안도 부정했다. 결국 노인들의 건의대로 골회를 바다에 뿌리는걸로 결정되였다. “어쩌면 바다물을 타고 정말로 고향에 찾아갈지도 모르잖아요.” 장박사는 약간 비감에 젖은 어조로 낮다랗게 말했다. 원래 목소리가 작은데 어조마저 착 갈아앉아 위동이는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 “내 말은 저 노인이 내일쯤은 조선반도에 등륙할거란 말이요.” 위동이는 본능적으로 장박사의 손길을 따라 바다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해빛이 맞춤하게 반사되면서 눈을 자극하여 눈물방울이 맺혀졌다. 장박사는 시무룩이 웃었다. “감성적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위동이는 뭐라고 변명하려다가 별로 무료한 노릇같아서 다시 눈길을 해변으로 돌렸다. 저 앞으로 올림픽요트센터가 바라보였다. 북경올림픽을 계기로 건설된 요트센터는 지금 청도의 표지성건축물로 자리매김하고있었다. 부지면적이 45헥타르가 되는 거대 건축군을 해변에다 지으려면 무엇무엇해도 방수처리가 엄청 중요했다. 그런데 그 방수공사에 리짼방수라는 청도조선족업체도 참여했다. 이 회사는 노산구정부 프로젝트는 물론 북해중공조선공장과 청도해저세계의 방수업무도 맡아 시공하기도 했다. “바다도 누군가 흔드니까 출렁대는게 아닙니까?” 위동이는 자기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내뱉고 장박사를 건너다보았다. “자, 우리도 자리 찾아갑시다.” “좋지요. 글찮아도 한잔하고 싶었습니다.” 둘은 마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흥부식당’이였다. 한국영사관이 위치한 부근인데 조용하고 아담하고 고급스러운 한국식당이였다. 장박사와는 13년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때 위동이는 금방 청도로 조동해온 장박사를 취재하게 되였다. 한국기업의 대대적인  진출과 더불어 청도는 여러 분야의 조선족 인재가 대폭 수요되였다. 대부분 투자유치분야에 집중되였지만 의료, 세관, 공항, 관광, 매체 등 부문에도 동북의 조선족들이 수혈되여왔다. 장박사도 그중의 한사람이였다. 나이가 동갑인데다가 두루 가정사도 엇비슷하고 위동이 엄마와 장박사가 또한 동성동본이여서 둘은 만나자마자 인차 친한 사이로 되였다. 장박사는 그후 병원의 파견으로 일본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실은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따로 만나자고 눈치했습니다.” 장박사는 참 난감하다는듯 서양인들처럼 두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과장된 제스처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만큼 많이 고민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우물쭈물할 일이 없잖아요.” “하긴…내 아무래도 해외동포 하나 만들것 같소이다.” “엉?” 위동이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두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러는 위동이가 재미있다는듯 장박사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띄우며 느닷없이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얼마전 카카오톡으로 받은건데 너무 신기해서 그대로 두었소.” 위동이는 스마트폰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요즘의 아들 시리즈”란 문장이였다. 1, 사춘기가 되면 남남, 군대 가면 손님, 장가 가면 사돈. 2, 낳을땐 1촌, 대학 가면 4촌, 군대 다녀오면 8촌, 결혼하면 사돈의 8촌, 애 낳으면 동포, 이민 가면 해외동포. 3,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4, 출가시킨 후에 아들은 큰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딸은 이쁜 도둑 5,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진 아들은 내 아들. 6, 딸 둘에 아들 하나면 금메달, 딸만 둘이면 은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동메달, 아들만 둘이면 목메달. 7, 3대 정신나간 여자: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며느리의 남편을 아직도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8, 노후생활: 아들 둘 둔 엄마는 모시기를 서로 미루는 바람에 오며가며, 딸 둘 가진 엄마는 해외여행, 딸 하나 가진 엄마는 딸집 설거지, 아들 하나 둔 엄마는 양로원. 위동이는 허리가 부러져라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히스테리 들린듯 웃어제꼈다. “껄껄껄…그러니까 명호가 이민간단 말입니까?” “남은 정색해서 말하고있는데 이러면 너무 하는게 아닙니까?” “아, 미안. 아까 메시지 너무 웃겨서요. 그나저나 명호 올해 대학졸업이잖습니까?” 명호는 한중수교후 청도호적 첫 조선족대학생으로 화제를 몰아왔던 인물이다.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 떠난다우.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나.” “심각하군.” “그러니까요. 난 떠돌이가 우리세대에서 마무리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쎄 아버지, 할아버지 시대는 정말 먹지 못해서, 살기 힘들어서 정든 고향을 떠나온게 아닙니까. 우리까지도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지금은 생각하는거면 다 가질수 있는데도 뭐가 모자란건지?” “자아가치 또는 인간의 존엄 뭐 그런 유혹때문에 아닐가요?” 위동이는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장박사는 더이상 말이 없이 부지런히 맥주를 들이켰다. 둘은 승벽이라도 하듯이 한잔 또 한잔 들이키다보니 잠간사이에 6병짜리 세트 하나가 없어지고 새로이 한 세트가 들어왔다. 다시 말없이 한병을 비울 무렵 어눌한 무드를 깨려는듯 위동이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위동이가 그걸 무시하고 술잔을 드는데 장박사가 침묵을 깨뜨렸다. “받어요.” “괜찮습니다. 또 술 먹자는 전화입니다. 백프로…” 어차피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했다. 남수처럼 꼭 팬티를 입으란 법은 없다. 사람은 노팬티바람으로도 그네를 날릴수 있는거다. 목 졸라 토하게 하는게 무슨 장땡인가. 되는대로 살자. 우리가 이룩한것으로 만족을 하면서 살자. 뒤일은 뒤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자. 이렇게 장박사에게 말하고싶었지만 웬일인지 그 말이 목안에서 맴돌뿐 도무지 나가주지 않았다. 아무렴 말 안해도 장박사처럼 알만한 사람은 눈길로도 표정으로도 알아듣는다. 무엇이나 다 말해버릴 리유는 없다. “들은 주령인데 마지막으로 건배제의를 하나 합시다.” 문밖에 대리기사가 대령하고있다는 보이의 전갈을 받은 위동이는 맥주컵을 들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 청도 와서 가족같이 지내온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가’하고 선창을 떼면 우리같이 ‘족같이’하고 합창을 합시다 그려.” 장박사는 잠간 어리둥절했다가 불시에 후다닥 뛰여일어나며 잔을 부딪쳐왔다. 순간 청도의 그 하나의 공간에 색다른 주령과 웃음이 동반되여 가득 채워졌다. “가~” “족같이~” 그리고 오래오래 회오리가 되여 메아리쳤다. 위동이와 장박사가 어깨동무를 하고 “흥부식당”을 나섰을때는 사납던 바람이 어느새 사그라지고 따스한 봄날씨로 변해있었다. 앞마당의 파란 풀싹이 돋아난 그 사이로 거리로 나가는 길이 유난히 뚜렸했다. 내일도 일상을 계속 영위해가자. 한국인병원의 김원장과 약속대로 먼저 미팅하고 그다음은…옳지 전화 계속 들어오고있지….                                   2013년 3월 청도에서
15    조깅 댓글:  조회:1058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조     깅       장학규   (젠장, 글로벌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마인드상태부터 글로벌로 가꿔보시지?! 글로벌이 뭐 말라비틀어진 거시기인가?) 만득이는 자기도 모르게 횡 하고 코방귀를 뀌면서 아파트 대문을 열었다. 어제 괜스레 기업인 상대의 무슨 정부 모임에 강제나 다름없이 억지로 불리워갔다가 질리도록 글로벌 타령만 잔뜩 듣고 돌아와 온밤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대뇌의 메모리 용량이 고작 그 정도의 인간들이 허망 무대에 어쩡쩡 올라서서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그 식이 장식으로 앵무새같이 레코드판이나 돌리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변화가 없는 지루하고 고루한 스타일은 범죄나 다름없다고 귀띰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장 짐을 싸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를 일이였다. 벌써 여러번 도대체 이곳에서 사업을 할거냐는 위협적인 경고를 받았었다. (고상한 흉내내는것도 유분수지. 흥!) 바깥은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초겨울 비가 비실비실 날리고있었다. 정말 못 말리는 세상이다. 새벽 여섯시가 가까와 오고있지만 하늘은 아직 먹물을 뿌린채로 시꺼멓다. 숨이 꺼억 막힐것같이 짙게 깔린 어둠사이로 비방울이 소리없이 날려와 얼굴에 묻는다. 만득이는 문밖에서 잠간 머뭇거렸다. 이대로 계속 조깅을 나가야 하는건지 스스로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11월 중순에도 비오는 동네가 새삼스러운듯 희한하기도 했다. 늦둥이인 만득이처럼 한참 늦어진 비가 지굿게 이른 새벽에 내리고있다. 고향도 이맘때 이 시각에는 이처럼 어둡다. 계절로 비스듬히 어두웠지만 한쪽에서는 폭설이 쌓이고 한쪽에서는 비물이 고인다. 아파트 앞으로 백사하가 길다랗게 누워있다. 로산 자락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사실상 흐름을 거의 멈춘 강이다. 폭우가 내릴때마다 저수지에서 홍수 방지 차원에서  마지못해 잠간 방류할뿐 나머지 시간은 내내 웅뎅이처럼 물이 고여있는 강이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대수 멋있는 강처럼 느껴진다. 만득이는 느적느적 걸어 아파트단지를 벗어났다. 그 사이 동녁하늘이 물고기 배처럼 희끄므레하게 변해오고 있었고 언제 비방울이 오싹하게 뿌려졌냐싶게 미적지근한 바람이 페부를 훓는다. 산소가 흡입되면서 이산화탄소가 밀려나는 순간은 참으로 후련한 느낌이였다. 한창 늦잠을 향수해야 할 만득이가 볼품도 없는 백사하에 매료되여 조깅을 다니기 시작한것은 불과 나흘전의 일이다.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양부장이였다. 그날 만득이는 좀 열이 받아있는 상황이였다. 아침에 회사 나오려고 집문을 가볍게 여는데 뭔가 문이 열리는 동시에 땅에 종이장 하나가 스르르 떨어졌다. 호기심이 동해 허리를 굽혀 주어서 들고보니 이번 주일내로 거주증 수속을 하라는 당지 파출소의 통고문이였다. 시뻘건 공장까지 찍힌 그 통고문은 주어진 시간내에 거주증 수속을 하지 않으면 벌금을 할것이라고 강한 어투로 경고하고있었다. 약이 부쩍 오른 만득이는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구정부의 열선전화를 호출했다. “나 외지인은 분명한데 이곳에 내 돈을 주고 집을 샀거든요. 내 집에 내가 사는데 왜 거주증 만들어야 하우? 당지 사람이던 외지 사람이던 집 없어 남의 집 빌려들면 그게 거주증 발급 대상이 아닙니까?! 누굴 벌금한다고 위협입니까?” “미안합니다. 정책이 그러니까요.” 사무적이고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 말입니다. 분명 틀렸는데도 정책입니다 하고 핑계 달고 밀어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겁니까?”     “천천히 해결합시다.” 그 천천히가 대강 몇년이 될지 몇십년이 될지 그건 누구도 알수 없는 일이였다. 어차피 만사를 체념하면서 살아가는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밤을 문 입을 해가지고 출근하는데 5분도 채 안되여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동네파출소에서 온 전화였는데 벌금얘기는 실례라면서 취소하고 그러나 거주증은 시간이 나는대로 와서 수속하라면서 아니면 여러가지로 정책적인 수혜를 받지 못하게 된다고 완곡하게 설명했다. 암튼 2라운드에서는 심리적으로나마 이긴 셈이였다. 그래서 링에 오른 김에 전화를 걸어온 경찰 친구에게 느끗하게 다른 질의를 들이댔다. “제 려권이 기한 완료되였습니다. 외지 호적도 당지에서 려권을 발급 받을수 있다구 들었는데요. 가능합니까?” “제 소관이 아니여서 잘 모르겠습니다.” 먼저번과 비슷한 텁텁한 소리가 돌아왔다. “정책이 그렇게 되여있지 않습니까?” “몰라요. 아마 고향에 돌아가서 수속을 다시 밟아야 할거예요.” 대방은 더이상 귀찮다는듯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 이런 쓰벌…” 만득이가 3라운드에서 멋지게 펀치당하여 카운트다운 상태로 회사에 들어오는데 눈치 없는 양부장이 정면으로 다가왔다.  회사에서 인력 부분은 양부장의 몫이였다. 총무 한사람 받아들이는데 굳이 사장인 만득이에게 재가를 받지 않아도 될 일이였다. 어쩌면  양부장으로서는 좀 난처하기는 했었다. 팔팔한 애들이 입사했다가 거퍼 업무도 익히기 전에 금세 달아나군 했다. 화가 잔뜩 난 양부장이 이제부터는 조선족보다 한족 위주로 직원을 채용하자고 볼이 부어 제기해왔다. 조선족만 받는다는것은 만득이가 회사 설립 초기에 세워놓은 직원채용규정이였다. “그건 안돼!” 심통 맞은 양부장이 파리를 날리기 시작한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알맞고 적중한 사람을 고르는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사람을 찾을수 없다고 투정부리면서 차일피일 미루더니 이날 방정맞게 서류 뭉치를 들고와 만득이더러 재가해달라고 요청한것이다. “마음에 들란지 모르겠는데 이 정도도 겨우 찾았습니다.” “그래?” 만득이는 내색 없이 양부장이 내민 서류철을 받아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멋지게 사인해버렸다. 다른건 몰라도 사인 하나는 만득이를 따를 사람이 주변에는 별반 없었다. 기실 필치를 자랑하기보다는 반칙을 일삼는것은 경박을 넘어 일종 악이란것을 양부장에게 귀띔해주고싶어서였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별로 튀는데가 없는 양부장이 회사 초창기부터 내리 쭉  10여년간 중견으로 자리를 굳혀온 리유는 그가 여직껏 사장의 말에 토를 달아본적이 없는데다 마음의 눈을 다른곳에 팔지 않았기때문이다. 만득이는 그 점을 높이 사왔었다. “보시지 않으십니까?” “뭘?” “어떤 사람인지 말입니다. 하기사 나이는 꽤 먹었어도 얼굴은 많이 동안이더라구요. 그리고 묘하게도 사장님과 한고향 출신이데요.” “엉?” 양부장이랑은 같은 채널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끔 둘이 묘하게 도킹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손이 맞는다는 느낌이 들때는 대개 그런 경우였다. 만득이는 호기심에 쫓겨 서류철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순간 저 아득한 고향의 들판이 우렷이 떠올랐다. 거칠것 하나 없는 일망무제한 논밭사이로 훓어지나는 북풍이 윙윙 소리를 내며 눈보라를 산지사방으로 날려준다. 오붓한 농가집 구들은 그래도 마냥 따스하다. 이모는 어딘가 놀러가고 해가 중천에 두둥실 떠오른 시각까지도 누나는 일어날 념을 않는다. 매끈하게 퍼진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돋아있다. 조용히 불러보아도 대답은커녕 숨소리도 없었다. 잠보다는 감기에 지친 몸이다. 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아준후 살그머니 이마를 짚어보았다. 크게 뜨겁지는 않았다. 다시 더듬더듬 손을 잡아보았다. 솜같이 부드럽고 포근했다. 한결 마른 입술이 수분을 갈구하고있었다. 입술을 맞닿이듯 가까이 대고 혀를 살짝 갖다붙였다. 마음 밑바닥에서 쿵쾅 하고 천둥이 울고 찌르릉 전률이 흘렀다. “김민정” 입속으로 되뇌인다는게 모름지기 저절로 소리가 되여 나왔다. 프로필은 물론 사진까지 오차 하나 없이 틀림없는 민정이 누나였다. “으음…” 꼬박 20년을 도망치듯 의식적으로 피해다닌 이름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지는 이름이기도 하다. 민정이 누나하고는 그 눈보라 사납게 휘몰아치는 겨울날 낮에 고향집에서 인연이 종쳤던 셈이였다. 하필이면 만득이의 혀가 민정이 누나의 입술에 닿이는 찰나에 민정이 누나가 가벼운 신음을 하면서 이불을 훌 걷어찬것이다. 더불어 꽉 조인 흰 적삼속에 꼬옥 감춰진 봉긋한 젖가슴이 산등성이마냥 우뚝 눈앞에 솟아났다. 그건 그대로 지진을 잉태하고 용암을 끓이고 분출을 대기하는 산등성이였다. 그리고 항거를 절대 허용치 않는 사탄같은 유혹이였다. 만득이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심령의 이끔대로 손을 경건하게 그 산등성이에 얹고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지고 머리가 하얗게 비여갔다. “아이구 이넘아, 너 뭐하고 있어?” 만득이의 손을 치운건 언제 들어온지도 모르는 이모였다. 민정이 누나는 계속 깊은 잠속에 빠진듯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만득아, 너 자꾸 이러면 민정이 시집도 못간다. 알겠니?” “나하구 살면 되잖아요.” “누나잖아 민정이가.” “혈육관계도 없는데므.” “그리구 나이도 너보다 세살이나 많지 않아.” “민정이 누나 아버지도 이모보다 나이 적잖아요?” “이 자식이 아무래도 안되겠다.” 이모는 그 길로 멀리 청도에 있는 만득이 삼촌에게 전화하여 만득이를 데려갈것을 요청했고 만득이는 동네집 신세를 지던 몸이라 싫어도 민정이 누나 옆을 떠나야 했다. 그후로 한번도 민정이 누나를 만나보지 못했다. (벌써 20년이 되였구나,) 그러니까 가슴으로 고향을 뜨겁게 그려온지가 어느새 20년이 되여오는 셈이다. 눈 없는 이곳의 미적지근한 겨울이 다가오면 항상 저멀리 처마밑에 고드름을 만드는 고향의 겨울이 떠올랐고 주변 농군들이 바짝 메마른 누르끼한 땅에 인분을 퍼놓고 종자를 뿌리는 봄날이면 어린시절 늘 보아왔던 시꺼면 흙에 그대로 싱싱하게 곡식이 자라던 고향의 비옥진 들판이 눈앞에 우렷이 나타났다.  만득이는 발 가는대로 추적추적 강변을 거닐었다. 금방 수천금을 들여 새로 정비한 강변유보도는 줄곧 308국도까지 이어지고있었다. 원래 만들어놓았던 유보도를 새롭게 리모델링하는것은 물론 그 옆에 웅덩이와 풀밭으로 방치되였던 자리에 4차선 대통로를 쭉 빼고 어디서인가 아름드리 나무들을 가져다가 옮기고 있었다. 출퇴근하면서 일년남아 트럭들이 왔다갔다하고 기중기가 나무를 들었다놓았다 하고 검은 구름같은 먼지가 뭉게뭉게 올리솟는것을 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던 만득이였다. 애들이 다닐 학교가 모자라서 수백명이 죽기내기로 하나의 명액을 두고 경쟁하는 동네에서 학교 10개는 거뜬히 지을 거금을 애궂은 강변에다 퍼붓고있었다. 바로 얼마전에 만득이는 풋면목있는 어느 교장에게 인민페 두묶음을 던져주고 친구의 애를 명액이 도저히 없다는 그 학교에 붙인적이 있었다. 돈을 판 친구가 에잇 이넘의 지랄같은 동네에서 못살겠네를 주절거리는것을 그래도 고향을 이미 떠나온바엔 뿌리를 굳건히 박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말리기도 했지만 사실 콘트라스트(反差)가 심한 이런 대목에서는 만득이 자신도 심리평형을 잡기 어려웠다. (망할 넘의…) 느닷없이 박쥐 여러마리가 눈앞을 희미하게 날아지나는것이 보였다. 아닌 계절이라기에는 조금은 포근한 날씨여서 날벌레들이 꽤나 설쳐대고있었다. 박쥐가 새냐 쥐냐 하는 논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다툼보다 더 멋대가리 없지만 식충성적인 박쥐가 기어코 초겨울의 새벽 하늘을 난다는것은 좀 심각한 일이였다. 어쩌면 대만 작가 백양의 말처럼 일찍 일어난 “새”에게 먹을 벌레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박쥐도 어쩌면 생존경쟁에 떠밀려 도심속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어둠과 침침함에 익숙하고 적응된 박쥐도 관성에 밀려 어느 정도 내몰린 상황이겠지만 만득이는 이렇게 집 부근에서 박쥐를 면대하기는 처음이였다.  가끔 강물속에서도 가마우찌같은 물새가 요란한 물소리를 내고 낮게 나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백사하 가운데 볼품없이 또치까처럼 높다랗게 쌓여있는 펌프우물이 어쩌면 가마우찌들의 휴식터일지도 모른다. 그 펌프우물은 일찍 백사하 물줄기가 끊기기전부터 시민들에게 음료수를 공급하던 시설이였다. 당지에서 새로운 수원을 확보하면서 운행을 중단하고있지만 수요될때에 언제든지 수시로 가동할수 있도록 항상 보수하고있는터였다. 언젠가 한번은 이웃집 로인에게 저 물탱크를 왜 없애버리지 않는거냐고 물었었다. 로인은 제법 심각한양 그게 바로 청도인들의 생존방법이라고 답했다. 자연적인 여건이 부족하기에 어차피 남보다 일찍 시작하고 남처럼 버리지 않고 남따라 하지 않게 된다는것이였다. 배고픔을 참지 못했을때는 남부녀대하여 관동으로 떠났고 오늘날 국문이 열리자 또 고향에 돌아와 창업하는게 바로 산동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렇찮으면 이 험악한 동네에 사람이 남아있지 못했을거라고 했다. 다행히 그렇게라도 서둘렀기에 그나마 허리띠를 조금은 풀어놓고 살만하다면서 입에 침방울을 튕겼다. 여건이 여의치 못하면 일찍 출발하고 빨리 처리하고 자주 움직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기실 따져보면 만득이도 이름이 느질뿐이지 사람은 많이 조숙했던거 같다. 부모가 한국으로 나가면서 만득이를 민정이네 집에 맡겨두었다. 원체 두집이 평소에 네것내것 따로없이 더불어 쓰는 많이 가까운 사이였던 원인도 있었지만 만득이가 유별나게 민정이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기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민정이가 공부도 배워주고 돌봐도 주면 우리가 마음 놓을거다.” 그해 민정이는 열여덟이였고 대학입시를 앞두고있었다. 물론 민정이도 만득이를 무척 귀여워했다. 초중 3학년생인 만득이는 한창 사춘기를 앓고있었다. 민정이가 메이크업을 할라치면 멀찌감치 서서 얼굴을 붉힌채 힐끔힐끔 훔쳐보군 했다. 그런 눈치를 민정이 누나가 모를리 없었다. “얘, 여기 와.” “왜?” “오라면 올거지.” 만득이는 웬지 민정이 누나의 말은 항거 못한다. 그처럼 부드럽고 가늘었지만 도무지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다. 민정이보다 주먹 하나는 더 커버린 만득이가 쑥스러운듯 기가 질려 다가오기 바쁘게 만득이 얼굴에 크림을 한손가락 듬직이 찍어놓고 민정이는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너 이걸 맛보고 싶어 그렇게 쳐다본거지?” 어느날 하학하고 집에 돌아온 만득이는 집에 아무도 없는 기회에 민정이 누나가 홀로 사용하는 웃방에 살그머니 들어갔다. 책상우에 이름 모를 화장품이 여럿 있었다. 전번에 민정이 누나가 얼굴에 찍어주던 크림도 보였다. 우선 그걸 살짝 열어보았다.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질렀다. 그건 크림 냄새가 아니라 그대로 민정이 누나 냄새였다. 민정이 누나가 스쳐지날때마다 항상 맡게 되는 냄새였다. “너 이걸 맛보고 싶어 그렇게 쳐다본거지?” 민정이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흔적나지 않게 조금 손가락으로 찍어 얼굴에 바르려다가 그대로 혀바닥으로 가져갔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무슨 맛인지 전혀 감각이 없었다. 다시 한옆에 오렷이 서있는 립스틱을 더듬어쥐었다. 뚜겅을 열었으나 속살을 올릴 방법이 없어 포기했다가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당기거나 밀어서 안되는거 보니 비틀면 될것 같아 조심스레 비트니 스르륵 시뻘건 속살이 솟아올라왔다. 거울을 마주하고 평소 민정이 누나가 하던것처럼 입술에 발라보았다. 생각처럼 잘되여지지 않았다. 입술이 순간적으로 립스틱이 더덕더덕 찍히면서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버렸다. 급히 냅킨을 찾아 입술을 닦았으나 여전히 닭잡아 먹은 형상이였다. 할수없이 물로 입술이 아려날때까지 박박 씻어냈다. 그런데  저녁에 민정이 누나가 조용히 만득이를 불렀다. “너 내 크림에 손을 댔지?” “아니…아닌데…” “니 얼굴에 용건이 딱 써있어. 아닌 보살할 생각 말어.” 만득이의 DNA는 거짓말을 못하도록 메모리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도 흔적나지 않도록 조심했는데도 인차 들통나는것을 보면 민정이 누나 말처럼 그의 얼굴에 뭔가 씌여져있는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민정이 누나가 그걸 알아차린게 오히려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너 혹시 나를 좋아하는거니?” “누나니까.” “그렇구나.” 만득이는 아차했지만 이미 엎질러놓은 물이였다. 민정이 누나 얼굴에 실망같은 그늘이 가볍게 흘러지나가는것을 보고 만득이는 정말이지 그저 죽고만싶은 심정이였다. “그러면 오늘밤 누나하고 잠간 시내 갔다오자.” 학교가 위치한 시내는 마을에서 채 5리도 떨어지지 않았다. 가운데 해랑하가 흐르고 그 강에 건설된 다리에서 가끔 여러가지 사고가 생기군 했었다. 늦여름이라 해도 고향의 밤은 차가웠다. 하늘 높이 하얗게 떠오른 하현달은 찬 빛만 발산하고 있었고 그옆으로 촘촘히 둘러싼 별들도 추운듯 바들바들 떨고있다. 대학입시를 반년 좀 넘어 남겨둔 민정이 누나는 언제나 저녁밥을 학교에서 먹고 밤 자습까지 마친후 돌아왔었다. 집에 왔다가 다시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모부가 한국 나가면서 민정이 누나를 챙겨줄 사람이 없었던 리유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던 민정이 누나가 만득이를 데리고 마실가듯 학교를 한바퀴 돌더니 곧 도로 집으로 다시 가잔다. 밤에도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친구들과 인사말 몇마디 나눈것이 고작이였다. 그저 그 정도 말을 하려고 밤걸음을 걸은건지 그저 궁금하기만 했지만 만득이는 용케 참아냈다. 해랑하대교를 건널때 민정이 누나는 어슬렁 만득이한테로 다가와 팔을 끌어안았다. “여기에 강도가 가끔 나타난다면서?” “거짓말이야.” 만득이는 저도모르게 얼굴이 겁기로 긴장해졌지만 억지로 태연한체 대꾸했다. “우리 다리밑으로 한번 내려가볼까?” 민정이 누나가 이끄는대로 둘은 다리밑으로 내려갔다. 가을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물이 많이 낮아진 느낌이였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강물은 바닥까지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버들나무가 듬성듬성 자라있는 땅바닥사이로 강물이 여러갈래로 갈라졌다 모아졌다 하면서 똘랑똘랑 물소리를 내고있었다. 가끔 새끼손가락만한 고기들이 물을 거슬러 오르면서 찌르륵찌르륵 소리를 낸다. “고기들이 왜 물살을 거슬러오르기 좋아하는지 알아?” “아니…” “그건 살아있다는 증명이야. 활어역수(活鱼逆水)라 했어. 죽은 고기는 물을 따라 떠내려가…”  민정이 누나는 하던 말을 삼키고 물살을 거슬러올라가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손을 쑥 내밀었다. 순간 상체의 평형이 기울어지면서 미처 잡기도전에 물속으로 엎어졌다. 힘을 불시에 쓴 탓이였다. 허우적거리다보니 웃옷이 거의 다 젖어버렸다. “아 추워.” 민정이 누나는 겉옷을 벗어 짜다가 기침을 쏟아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득이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가가 뒤에서 민정이 누나를 꼬옥 껴안았다. 차가왔다. 인차 따스해졌다. 그리고 포곤해왔다. “이 죄꼬만 넘이…” 이렇게 야단칠것 같던 민정이 누나는 그러나 몸을 털지 않았다. 만득이 존재가 없는듯  조용히 짜던 옷을 계속 비틀고있었다. 그날부터 민정이 누나는 다시 만득이를 닦아세우지 않았다. 멀찍이 서서 훔쳐보아도 모른체 가만히 있었다. 가끔 만득이가 민정이 누나의 손을 잡고 만져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떤때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뒤에서 살짝 안아도 타발하지 않았다. “이 철딱서니 없는것아, 다 자란것이 누나하고 그게 뭐야?” 대신 이모의 입에서 난데없는 잔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너 자꾸 그러면 민정이 시집도 못간다.’ 이런 험한 지청구도 튀여나왔다. 그리고 그해 초겨울에 만득이는 고향의 따뜻한 구들에 혼곤히 잠들어있는 민정이 누나를 흔상하다가 이모로부터 축객령을 받았던것이다. 하늘이 이젠 제법 밝아왔다. 조깅을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어슴프레 보이기 시작했고 까치들도 가로수에 오구작작 모여앉아 재잘대고있었다. 혼탁한 백사하도 새벽의 비때문인지 둔덕진 구역에서는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여름에 낮아졌던 물이 초겨울이 되면서 오히려 불어나는 눈치였다. 찌르륵 찌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지저분한 쓰레기가 널려있는 방파제에 다가가보니 제법 보아줄만한 붕어들이 무리지어 상류쪽으로 헤염쳐 올라가는것이 얼결에 보이고있었다. 그 붕어들을 환영하는듯 가끔이지만 웃쪽 풀밭에서 팔뚝만한 잉어들이 풍덩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백사하에 고기가 있다. 로산저수지에서 방류할때 딸려온 고기들임에 틀림없다. 흐름이 거의 멈춘 백사하에서 그 고기들은 작은 흐름을 이용하여서라도 우로우로 오르고있었다. 만득이도 이젠 뭔가 결판을 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벌써 전부터 하고있었다. 아직은 돌도 소화시킬 왕성한 나이이다. 그리고 얼마간 성숙을 가져오면서 뜨거운 가슴보다 차가운 머리가 더 절박해진 시점이다. 만득이는 항상 생각은 뇌로 하는것이지 가슴으로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의과대학을 나온 민정이 누나가 홀몸이 되여 20년만에 다시 나타났을때 만득이는 그것이 자기의 운명임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어디가 자기의 귀속인지 알아버렸다. “이 여자 당장 불러와.”   그때 양부장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였다. “지금요? 이 여자를?” “그래, 지금 당장.” “지금은 곤란한데요. 아마 고향에 돌아가는 기차에 있을겁니다.” “고향은 왜?”   “정리할것이 많다고 합니다. 애 학교문제도 있고 아무튼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새해부터 출근하겠다네요. 아무튼 한달밖에 남지 않았잖아요.” “아, 잘됐어. 애를 그곳에서 계속 학교 다니도록 해줄테니 오지 말라고 해, 아니 연락 번호 나를 줘!” 만득이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있는지 자신도 알아들을수 없었다. 눈이 데꾼해진 양부장을 사무실에 그대로 놔두고 만득이는 정말 오래간만에 두둥실 뜬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틑날부터 잠을 잃은 만득이는 모름지기 조깅을 시작하였다. 날이 완전히 밝아왔다. 그런데 가시권은 반경 50메터도 되는것 같지 않았다. 더 멀리는 안개 같고 구름 같고 또 먼지 같은것에 의해 담벽처럼 막혀서 보이지 않았다. 요즘 다시 기승을 부리는 스모그탓이다. 고향의 하늘이 기억에 새롭다. 티 한점 찾아볼수 없이 맑고 깨끗했던 하늘이 태반이였다. 사람의 모습이던것이 급작스레 짐승의 형상으로 변하고 산수가 불시에 수목으로 바뀌는 흰구름의 조화는 신비하기만 했다. 봄이면 아지랑이 몰몰 피여오르는 가운데 강남 갔던 제비가 하늘을 오르내리며 회귀를 자랑했고 여름에 접어들기 바쁘게 싱그러운 꽃향기에 실려 잠자리들이 너울너울 춤춘다. 가을이면 애처로운 울음을 남기며 새로운 서식처로 자리를 옮기는 기러기떼가 줄을 이었고 겨울이면 솜같이 가벼운 눈꽃이 하늘하늘 춤추며 내렸었다. 고향은 대체로 랑만이였고 동화였다.  불현듯 일찍 빨리 자주를 강조하던 이웃집 산동로인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추세에 끌려서 덩달아 고향을 떠나는 시점이 오히려 고향이 기회를 잉태하는 타이밍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동을 찾아왔다가 되돌아가는 산동사람들처럼 말이다. 백사하도 그 사이 부쩍 들끓기 시작했다. 붕붕 차들이 다니고 여기저기서 쿵쾅하고 시공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만득이는 먼지가 다시 일기 시작한 백사하를 등뒤에 내버려두고 아파트단지로 가볍게 접어들었다. 민정이 누나에게는 고향에 따로 설립할 회사의 관리를 책임지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고향이 어쩌면 만득이가 남보다 더 일찍 돌아가야 할 인생역이 될지도 모른다.
14    일탈 댓글:  조회:1187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일    탈 장학규   동이는 허우허우 돌밭길을 걸어나갔다. 어깨에 걸친 낚시장비가 당장 미끌어 떨어질듯 안스럽다. 저 앞으로 조그마하게 옴츠러든 웬 녀인이 손에 비닐주머니를 들고 힘겹게 바위돌 사이를 헤집고 나가고있었다. 우에는 자잘한 분홍꽃 무늬의 저고리를 입고 밑에는 검정색 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아래우 전혀 대칭이 되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것을 보니 매일 같이 이 바다가에서 게나 다슬기 또는 바지락 따위를 줏는 주변 동네 아낙네가 분명했다. 동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낚시장비를 추슬렸다. 스스로 듣기에도 숨결이 거칠고 무거워온다. 해변가는 대개 모래톱으로 이루어졌을것이라는 멋스러운 감동을 보기 좋게 산산쪼각내버린것은 청도라는 해변도시에 와서야 생긴 일이다. 그전에는 바다옆에 이렇게 험한 바위돌들이 널려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한 20년이 되어오는 셈이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면 그저 아찔하기만 하다. 난생 처음 바다란 것을 보고 또 난생 처음 바다가에 널려진 바위돌틈사이로 신기한듯 팬티바람으로 넘나들다가 급작스레 덮치는 파도에 밀려 허망 나뒹군 적이 있었다. 머리가 뗑해나고 손바닥이 여기 저기 긁히워 나갔다. 젊은 혈기에서였던지 자존심이 무척 상했었다. 한쪽 발과 손을 큼직한 바위에 뻗치고 집체같이 덮쳐오는 파도를 다시 한번 맞받았다. 별 저항 없이 동이는 가볍게 훌쩍 들리워서 자리를 떠버렸고 파도는 동이를  그대로 바위에 던져버린후 파도는 몰방울로 으깨여져 유유히 흘러나갔다. 동이는 그제야 바다가 물방울로가 아니라 주체하기 어려운 마귀와 같은 힘과 파워로 이루어졌다는걸 새삼스레 뼈 저리게 느낄수가 있었다. 동이는 항상 자신이 세개의 분신이 되어 있는것을 느끼고 끔쩍끔쩍 놀란다.  무일푼의 백수로부터 성공신화를 만들어낸 점잖은 기업가의 형상은 동이의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이었다. 가끔은 오기가 발동해 무모한 일에 발을 적셨다가 한방 크게 당하고도 반성없이 또다시 도전을 일삼는 모습은 동이의 다른 캐릭터였다. 그리고 점차 이 두 분신사이를 넘나들며 흐뭇했다 방황했다 호방했다 후회했다를 번복하는 회수를 늘이면서 새로운 분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10월 중순의 청도의 아침 해살은 미안한줄도 모르고 그저 따갑기만 하다. 여기저기에 바다 해빛에 그을려 시꺼매진 장정들이 심드렁하게 갯바위낚시질에 여념이 없었다. 동이는 될수록 사람들과 멀찍히 떨어진 바위돌우에 찾아올라갔다. 얼결에 보니 아까 그 비례를 잃은듯한 녀인이 바지락 주이는 념두에도 없다는듯 저쪽 바위우에 주저앉아 바다너머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바지락을 캐느라고 저쪽 갯벌에서 적잖이 뭉갰는지 흙으로 얼룩덜룩해진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발밑의 투명한 바다물속에 우럭 여러 마리가 시름없이 헤어다니는것이 보였다. 동이는 미끼를 끼우고  낚시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동이가 낚시에 재미를 들인것은 8년전의 일이었다. 10여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사업을 한답시고 해운업을 벌렸을 무렵이었다. 고객이라고 처음 찾아온 사람은 생각밖에도 조선족이었다. 동북의 교하란 고장에서 청도의 해군에 입대했다가 장교로 퇴역하고 무역업에 뛰여든 송씨 성의 사나이였다. 그는 해군에 몸담았던 경력만큼 바다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고 그래서인지 “명수 1호”로 명명된 낚시전용선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동이는 조깅낚시 또는 선상낚시란것을 접하게 되었다. 해안에서 100킬로 정도 떨어진 먼 바다로 몇시간동안 나가서 장애물이 거의 없는 뻘 지역에서 대형 우럭을 노리는 낚시질은 정말 신났다. 수심이 깊고 사용하는 추의 무게와 낚여 올라오는 대형우럭때문에 일반 스피닝릴이나 장구통릴로는 많은 어려움이 따라 주로 전동릴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해안가에서도 우럭은 역시 낚을수 있다는것을 그 즈음에 알게 되였다. 우럭은 회유성 어류가 아니라 사시장철 갯바위나 방파제 주위와 먼바다의 좌초된 배에서 서식하는 토착 어종이라 쉽게 만날수 있었다. 그리고 강한 탐식성 육식어종이여서 먹이에 대한 공격성이 강하므로 낚기도 쉬웠다. 우럭은 그리고 맛도 일미였다. 갯바위낚시에 걸려드는 우럭은 대개 어른 엄지만큼 굵직한것이였다. 낚아올린채로 그 자리에서 껍질을 발라 초장에 찍어먹으면 말그대로 두사람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지경이였다. 그런데 생각처럼 오늘은 고기가 잘 물리지 않았다. 퍼그나 화창하고 온화한 날씨에 물빛마저 푸르고 맑았으나 당장 막 무리지어 성급하게 걸려들것 같던 우럭은 커녕 숭어, 도다리류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겨우 우럭 둬마리 건지고 동이는 기진맥진해버려 처음으로 낚시대에서 눈길을 떼고 건너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때 마침 이쪽으로 힐끔 돌아보는 옷맵시가 대칭이 깨진 그 녀인과 눈길이 마주쳤다. 녀인은 그때까지도 석노인마냥 굳어진듯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낡은 옷차림과는 달리 깨끗한 얼굴에 오관이 마춤마춤하게 박혀있었다. 다듬고 나서면 꽤나 미인이라는 말을 들을거 같았다. 느닷없이 그녀가 결코 당지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를 치면서 동이는 처음으로 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먼길을 달려온 흔적이 력력했고 허기에 찬 표정이 뚜렷했다. 손에 보물마냥 꼭 잡혀있는 흰색 비닐주머니에는 다슬기같은 물건이 여럿 담겨있었다. 녀인은 인차 눈길을 바다쪽으로 돌렸고 머쓱해진 동이도 손팔을 통해 전달해오는 스릴을 느끼며 황급히 낚시를 들어올렸다. 제법 보아줄만한 우럭 한마리가 올라왔다. 조심스레 고기를 그물망에 넣어두고 다시 낚시를 던지니 기다렸다는듯 자그마한 우럭 한마리가 또 걸려나왔다. 송사장과 도킹되면서 동이는 한결 신심이 백배했다. 동이 인생에 시동이 걸린것도 그 무렵이였다. 한국 사장이 흘려주는 콩고물을 받아먹던 동이는 송사장과 거래하면서 세상에 타고난 종자란게 따로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터득했다. 이제는 수도 없이 돌리고 돌린 레코트판이다. 스팸메일 같은 과거로 무조건 삭제하고프기만 한 아픈 기억이다. 따져보면 동이는 타이밍이 귀똥차게 좋지 않았다. 대수 중학교 정도 다닌 넘도 청도에 오자마자 척 대리 자리를 차지하던 세월이였지만 대학을 졸업한 동이는 달반 넘어 취직이 되지 않다가 그것도 직업소개소 덕분에 진성이라는 제조업회사에 현장관리로 들어갔다. 슬리퍼를 생산하여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는 한국회사였다. 화이트칼라가 아니라 듣기 좋게 말하면 블루칼라였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식사전에 작업 준비를 해야 하고 저녁 여섯시에 직원들이 퇴근한다음 뒷거두매까지 말끔히 해야 했으며 저녁 식사후에는 하루 생산량 및 불량품을 체크하고보면 새벽닭이 회치는 시간이였다. 하루 한시 동반 입사한 미스터 양은 사나흘 지나서부터 시도때도 없이 줄줄 코피를 흘리군 했다. 무엇보다 동이를 참기 어렵게 했던것은 남씨 성을 가진 사장이였다. 예순이 넘은 령감태기가 어디서 정력이 그렇게 넘쳐나는지 식전 새벽부터 고함을 지르면서 3층 숙사에서 달리듯 내려오군 했다. 아직 늦잠에 익숙한 동이네들은 처음에는 괜히 그 고함소리에 놀라서 부랴부랴 옷들을 걸치고 현장에 우르르 달려나갔다. 혹시 무슨 잘못된 일이 있을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사장은 동이네들이 놀라서 낯이 흙빛이 되는게 재미있어서였다. 그리고 어둑어둑한 새벽녁에 일자로 줄을 세워놓고 사훈을 외게 하는게 신나는 모양이였다. 사장은 매일이다싶이 하루에도 열두번 넘어 고함을 질렀고 그때마다 동이네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어쩔줄 몰랐다. 호랑이같은 남사장이 개구쟁이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대개 좋은 오더가 떨어졌거나 바이어한테 한바탕 칭찬을 받은 직전이었다. 그때면 작은 키만큼 작은 발에 특대 슬리퍼를 궤고 수백명 직원이 미싱작업을 하는 현장으로 개잡은 포수마냥 데뷔하여 여직원들의 궁둥이를 차주기도 했다. 채운 여직원들이 줄줄이 천쪼각을 붙인 테이프를 사장의 등뒤에 붙여놓았고 그걸 번연히 알고 있는 남사장은 그대로 현장을 한바퀴 돌면서 개그굿을 펼쳤다. 좀 담대하고 짓궂은 나이 먹은 여직원들은 아예 테이프모자를 만들어서 사장의 머리에 얹어주었고 남사장은 그대로 팔짱까지 지르고 미싱 라인사이의 좁은 복도에 갈라선 여직원들 사이를 비벼지나가기도 했다. 한족 여자애들은 버릇 한번 잘못 굳히면 이상제하도 없다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지나가는 어투로 귀띰했지만 오히려 동이네들이 직원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야단이였다. 한번은 한국에 두고 온 서른살 어린 마누라가 생남했다면서 갑작스레 현장에 뛰어오더니 열개 라인의 스위치를 몽땅 꺼버렸다. 그리고 동이를 시켜서 식당 아줌마 세명을 몽땅 현장으로 불러왔다. 그리고는 회사밖에 세워둔 수박트럭을 통채를 몰고 들어와 반나절 넘어 수박잔치를 벌렸었다. 그 일화가 청도의 아리비안나이트가 되였다.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미스터 양은 첫달 로임을 받자마자 사직서를 제출했다. 동이도 욱하는 충동을 겨우 참았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랬던가. 사람이 붙어있기 어려운 이런 곳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막에다 배 띄우기를 석삼년만에 남사장은 공장을 그 사이 배를 두번이나 슬그머니 불려놓은 한족 여직원의 오빠한테 넘겨주고 동이만 끌고 무역업에 올인했다. 하긴 동이외에는 거퍼 석달이상 일한 관리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나마 일본 바이어를 틀어쥔 덕분에 오다를 뿌리고 마진을 남기는 일은 무난했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우왕좌왕하다가 남사장은 동이더러 포워딩회사를 오픈하도록 하고 자기는 오다를 뿌리고 여직원 오빠는 제품을 생산하고 동이는 그것을 일본으로 보내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부랴부랴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물망태에 고기가 묵직하게 들 무렵에 바다물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저만치 아득하게 밀려나갔다. 시계를 보니 금방 열시에 올인하고 있었다. 동이는 갯바위장화를 착석하고 바다물을 따라 느적느적 걸었다. 한 백미터 정도 나가니 물이 주춤 머물러 서는것이 육안으로도 얼핏 보였다. 동이는 갯바위낚시질로 맞춤한 높은 바위 덩이에 올라 짐을 풀고 자리를 잡았다. 그건 썩 전부터 눈여겨 본 자리였다. 밀물이 다시 밀려와도 바다물에 잠기지 않는 맨바위였다. 일단 담배쉼부터 하려고 주머니를 주섬주섬 더듬다가 이상한 느낌에 돌아보니 아까 그 건너편 녀인이 휘청이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가냘픈 몸매는 바다바람에 당장 날려갈것 같았지만 한사코 기다싶이 하여 톺아오르더니 그중 가장 높은 바위우에 터벅 주저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흰색비닐주머니가 들려있었는데 그사이 바지락도 여러 개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으로 이동하면서 닥치는대로 주어담은 모양이였다. 동이와는 비스듬히 5~6미터 사이두고 있어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고도 녀인의 일거일동을 살펴볼수 있었다. 녀인은 엄청 힘들었던지 가뿐 숨을 톺고있었다. 본능적으로 숨소리를 따라 올려다보던 동이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녀인이 주저앉은채로 돌쪼각으로 바지락을 까더니 날것 그대로 허겁지겁 입안으로 쓸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량미간에 박힌 검은 기미가 유난히 눈에 띄였다. 동이가 놀라고 의아한 눈빛으로 건너다보는것도 모른채 녀인은 손에 잡히는대로 바지락을 까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더니 더 이상 없던지 이번에는 다슬기를 까는 소리가 요란했다. 까딱까딱 바람에 실려 다슬기 까는 소리가 한결 다급해 보인다. 카악카악 사래기 들린 상태 역시 성급하다. 동이는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수 없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매치 안되는 옷차림은 물론 그 칙칙한 옷가지에서 풍겨나오는 고약한 냄새, 그리고 녀인의 입으로 흘러들어가는 바다 생물들의 버려진 허울까지 어느 하나도 그저 흘러지나가지 않았다. 도대체가 저 녀자의 정체는 무엇일가 몹시 궁금했다. 허술하게 지나치고 무시하기에는 저 눈빛이 너무 강인했다. 지저분하고 꾀죄죄한 천쪼각에 감싸진 조그만 육체는 굳센 의지로 뭉쳐있었고 까아만 눈동자는 지적인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특히 량미간에 자리잡은 검은 기미는 동이를 동화와 같은 아득한 저 옛날로 이끌어갔다. 동이네 이웃에는 동이보다 두살 어린 쌍가매란 녀자애가 살고 있었다. 평소에 동이 뒤를 꼬리처럼 따라다녔던 쌍가매는 그러나 동이가 소학교에 진학하면서 그 보기 흉한 량미간의 기미때문에 점차 동이한테 기피대상이 되였다. 동이는 반급 애들이 쌍가매 똥가매 하면서 놀리는것도 싫었고 점 점 돼지점 하는것도 짜증났다.  그래도 쌍가매는 쌍가매대로 눈치코치 없이 동이가 싫어하는것도 모르는양 잘도 따라다녔다. 그 시절에는 먹거리도 많이 모자랐다. 한창 뼈마디가 자라고 굵어지는 나이라 항상 뭔가 먹고 싶었다. 다행히 동이의 할배가 소대 우사간에서 소를 먹이고있어 동이는 틈틈이 콩기름을 짜고 나머지 찌꺼기를 다져서 만든 일명 두병이란것을 가끔 얻어먹군 했었다.  시커멓게 타고 단단한 두병이지만 먹고난후면 고소한 뒤맛도 있었다. 그래도 동네애들과의 생존경쟁에서 두병은 동이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두병으로 힘센 넘을 회유하기도 하고 밉상인 넘에겐 검게 타기만 했지 제대로 익지 않은 두병을 주어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 쌍가매에게도 그런 약수를 쓴거 같았다. 두병을 한사발 다 먹어야 데리고 다닐것이라고 했더니 급병맞을 계집애가 넘어도 안가는 생두병을 억지고 넘기고 뒤가 막혀버린것이다. 배를 잡고 대굴대굴 딩굴며 울어대는데 동이는 어쩔줄 모르고 쩔쩔매기만 했다. 그러다가 무작정 쌍가매를 끌고 변소로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도 부끄럼을 알고 숨어야 한다는걸 알아서 변소로 찾아들어간것이지만 그게 자신이나 쌍가매에게 얼마나 큰 후환을 만들었는지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 변소에 숨어 들어가서 나무판자에 쌍가매를 훌쩍 올려세우고 바지를 끌러내리고 밑구멍에 손을 넣고 후비는데까지는 문제 없었다. 엄마가 쩍하면 그의 똥구녕을 후벼주었던것이다. 그런데 짖궂은 하나님은 동이에게도 선악과를 먹이기 시작한것이다. 눈길이 자기도 모르게 자꾸 쌍가매의 그곳으로 쏠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렇게 한번 두번 눈길을 주다가 똥구녕을 후비던 손으로 그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방정맞게 때맞춰 그곳을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급한 일을 보려고 변소문을 열었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였다. 반동분자는 그 종자때부터 퇴페적이다. 빈농의 후대를 여우처럼 홀리는 반동분자들의 책동을 뿌리부터 잘라야 한다. 쌍가매는 지주성분을 가진 할아버지와 함께 매일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어느날 한밤중에 그 집식구들이 마을에서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 뒤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강넘어 저쪽 나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 나라에서는 맛있는 입밥에 소고기국을 먹는다고 했다.  그렇게 동이는 쌍가매와 헤어졌고 세월이 흐르는동안 기억에서마저 잊어버렸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그른데 없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시간은 오후 한시를 넘기고 있었다. 동이는 낚시대를 거두고 물에 고여놓은 고기그물망태를 들어올렸다. 큼직한 우럭 10마리 정도 꺼내여 껍질 바르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한옆에 모아두었던 우럭 껍질을 바다새들이 마음놓고 먹도록 멀찌감치 뿌려던지고 마른 나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해변에는 별라별 오가잡탕들이 다 있어서 땔감은 쉽사리 모아졌다.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나무꼬챙이에 꿰고 있는데 저쪽에 있던 녀인이 불시에 튀여일어나는것이 보였다. 집에 가려나보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꼬꾸라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는것이였다. 푹 꺼져들어간 눈은 탐욕으로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동이는 눈인사로 함께 먹자고 요청했다. 녀인은 예상외로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동이는 별수 없다는듯 고기가 굽히는대로 입에 넣고 맛나게 먹었다. 참이슬 한병이 잠간사이에 배속에 들어갔다. 해나른해져서 더 굽기 싫어질 무렵에는 아예 날것채로 고추장에 찍어 입에 털어넣었다.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그 맛은 어떻게 형용할 방법이 없었다. 녀인은 지쳤는지 더이상 이쪽을 보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웬일인지 동이는 괜히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그물망태에서 10여마리 꺼내 껍질을 바른후 누렇게 구웠다. 그리고 그 녀인과의 중간쯤 되는 거리에 가져다놓고 돌아섰다. 얼결에 보니 그 사이 녀인이 데꾼하게 뜬 눈으로 동이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건말건 동이는 휘적휘적 내려와 턱 퍼진 바위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파아란 하늘에는 갈매기떼들이 유유작작 날으고 있었고 그 밑으로 우뚝 솟은 로산은 해상제1명산답게 기세당당했다. 언제가 로산에 자리잡은 태청궁에 출가나 할가부다 생각했다가 저절로 쓴웃음이 나갔다. 자기처럼 주육풍류에 절을대로 절은 중생을 도가 역시 거절할게 당연했던것이다. 머리뒤로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녀인이 고기 가질러 오는게 틀림없었다. 동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눈의 동이를 보면 녀인의 용기도 사라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오던 발걸음소리가 멈춰섰다. 한동안 아무런 기척도 없더니 다시 멀어져가는 발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동이는 괜히 큰일을 한듯 눈을 더 지긋이 감았다. 따가운 해빛이 눈까풀을 뚫고 들어와 눈안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황홀했다. 거기에 술기운이 더해져 몸이 둥둥 뜨는 기분이였다. 귀가에 느닷없이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파도가 바위를 덮치는 소리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파도소리를 들어본것도 참 오래간만의 일이였다. 동이는 후다닥 놀라면서 뛰여일어났다. 어느새 잠이 흠뻑 들었던 모양이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물고기망태가 놓여있었고 주변은 온통 바다물로 둘러있었다. 동이가 잠든 사이에 밀물이 다시 밀려들어온것이다. 동이는 조건반사적으로 우쪽을 올려보았다. 녀인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말할것 없이 고기망태는 그녀가 건져서 갖다놓은게 분명했다. 동이는 씨익 웃었다. 그러자 그녀 역시 해말간 웃음으로 답례했다. 동이는 괜스레 궁둥이를 툭툭 털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손바닥만한 바위덩이우에 갇혀있었다. 해안가는 어느새 저만치에 밀려가 있었고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고기도 잡히지 않는다. 동이는 멜가방을 뒤적였다. 참이슬 한병이 걸려나왔고 생수 두병이 딸려나왔다. 잠시 담배 한대 뽑아서 깊게 서너모금 빨다가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리고 다시 땔감을 모아보았다. 다행히 점심에 별로 피우지 않아 꽤나 많이 남아있었다. 아직은 희미하나마 볼수 있어 여기저기 돌면서 불이 붙을만한 물건이면 무작적 걷어모았다. 저쪽의 녀인도 후다닥 일어나더니 주변을 돌면서 나무가지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바다는 해만 넘어가면 바로 어두워졌다. 녀인은 다가와 모은 나무가지들을 내려놓고는 소리없이 다시 물러갔다. 밤은 바야흐로 깊어가고 파도는 점점 소름 끼치게 높아갔다. 아마도 어둠에 배겨내기 어려웠던지 녀인이 어느덧 눈앞까지 내려와 앉았다. 동이는 개의치 않고 불을 피웠다. 그리고는 느끗하게 앉아서 그물망태기에서 고기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껍질을 바르는것도 귀찮아졌다.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금세 퍼져나갔다. 해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동이는 썰물이 대강 언제쯤 나간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때까지 하다못해 불씨라도 쪼일려면 최대한 땔것을 아껴야 했다.  동이는 얼추 구워진 고기 한마리를 녀인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김에 생수 한병과 참이슬병도 함께 나란히 놓아주었다. 녀인도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고기를 냉큼 집어 입안에 넣고 씹더니 참이슬을 한모금 털어넣었다. 안주 먼저 먹고 술 먹는 사람은 동이는 처음 보았다. 녀인은 소주를 다시 동이앞으로 밀어놓더니 그제는 생수를 들고 한모금에 굽을 내버렸다. 동이도 술을 한모금 마시고 날고기채로 입에 넣고 씹다가 갑자기 집에 이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우리 말로 바위에 갇히게 된 사연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핸드폰을 닫다가 이상한 느낌에 녀인을 쳐다보니 녀인은 어느새 퉁방울처럼 둥그런 눈을 하고있었다. 우수가 가득하던 눈에서 겁기가 밀려나고 대신 믿음이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다. 녀인은 한걸음 더 다가앉았고 얼굴은 한결 펴지고 홍조가 떠올랐다. 녀인은 동이가 술병을 갖다놓기전에 두손으로 그대로 받았다. 그리고 저절로 그물망태에서 고기 한마리를 꺼내 껍질을 쭉 바르는것이였다. 무척 로련한 솜씨였다. 바다와 많이 익숙한 사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술병을 주고 받았고 고기 안주는 스스로 자기몫을 해결했다. 가끔 녀인은 참이슬병을 불가에 갖다대고 설명서를 들여다보군 했다. 읽을줄 알고나 그러는지 동이로서도 판단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어눌한 무드속에서 참이슬 한병을 굽내고 사그라진 불더미를 마주하고 말없이 오래동안 마주앉아있었다. 시간이 응고된듯 했지만 웬일인지 지루한 감은 없었다. 녀인은 나이로 보아 동이와 비슷해보였지만 풍진세월을 겪을대로 겪은 사람마냥 많이 지쳐있었다. 동이는 그 만장같은 사연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것을 직감으로 느끼고있었다. 침묵이 그녀를 지탱해주는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밤은 깊어만 갔다. 해안쪽에서는 불빛이 대낮같이 밝아있었다. 엎어지면 코닿은 육지를 눈앞에 두고 그들은 갈수가 없다. 원래는 육지와 이어진 길이였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육지와 생지옥처럼 갈라지고 막혀졌다. 혹시 어느 파도 하나가 갑작스레 바위 전체를 덮쳐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다에 그대로 훌렁 나떨어질것이고 그다음 서로 살겠다고 대방을 끄잡고 실랭이하다가 함께 바다 깊숙히 침몰할것이다.. 시체는 얼마 안되여 주변 어부들로 인해 마춤하게 건져질거고 자칫 장례식이라도 치뤄주면 그 이상 호강이 없는거로 만족해야 할것이다. 물론 어부들은 그들 주머니속에 든 물건들을 몽땅 고스란히 털어내 냉큼 차지할건 분명하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탐욕스럽다. 인지초 성본선은 참 웃기는 말이다. 동이는 자기도 끔뻑 놀랄 정도로 흥 하고 코방귀 뀌고 주머니를 더듬어 돈지갑을 꺼냈다. 아무런 생각없이 잔돈만 내놓고 100원짜리 지페를 몽땅 꺼내여 헤어보았다. 1800원이였다. 그는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돈을 움켜쥔 손을 녀인앞으로 내밀었다. 어부들한테 멋대가리없이 바쳐질것이면 하다못해 잠간이라도 그녀한테 선심을 쓰고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듣는게 낫겠다는 충동이 그더러 그런 당돌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더욱 아이러니한것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동이를 지켜보던 녀인이 별로 주춤하는 멋도 없이 그대로 돈을 받아서 주머니 깊이 질러넣은것이다. 순간 동이는 자기가 환청같은 공간에 들어가있었다는걸 느꼈지만 다시 어떻게 돌이킬수는 없었다. 동이는 자조하듯 허글픈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하는 짓이 언제나 뻐스 떠난다음에 손드는 편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저 아득한 옛날의 쌍가매가 동시에 떠올랐다. 량미간의 검은 기미가 녀인과 묘하게 캡처되었다. 바로 그거였다. 쌀쌀한 바다바람이 급작스레 불어왔다. 파도는 한결 사나워졌고 따라서 추위가 엄습해왔다. 바다가는 주야의 기온차가 엄청 심했다. 녀인은 오싹 몸을 떠는가싶더니 콜록콜록 기침을 가볍게 해댔다. 동이는 겉옷을 벗어 녀인에게 건넸다. 이상하게 녀인은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몸떨림이 육감으로도 전해졌다. 동이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녀인 옆으로 다가가 옷을 그녀의 몸에 걸쳐주었다. 손을 허우적거리며 털어내던 그녀가 문뜩 거절을 멈추는가 싶더니 불시에 동이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겨왔다. 그때 유표하게 량미간에 자리잡은 검은 기미가 선하게 동이의 눈안에 들어왔다. 동이는 녀인을 밀쳐내는것도 잊은채 멍하니 그 기미만 들여다보았다. 녀인의 몸은 가늘게 떨고있었다. 허름한 옷속에 속절없이 감춰진 젖가슴은 생각밖에 무겁고 두터웠다. 아직은 생기가 남아있는 몽뚱이였다. 녀인은 동이의 품에 기댄채 슬그머니 눈을 감아버렸다. 약간 젖힌 얼굴은 동이를 향해있었고 도톰하게 올라온 입술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듯 싶었다. 동이는 한동안 굳어진듯 서있었다.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리솟은건 얼마후였다. 동이는 그것을 주체할 힘이 없었다. 녀인의 신음은 한결 급했고 몸은 금세라도 활활 타버릴듯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동이는 손을 녀인의 가슴우에 올리고 한웅큼 틀어잡았다. 알맞춤하게 크고 부드러웠다. 녀인은 손을 뻗쳐 동이의 벨트를 풀어내렸다. 바지가 무릎밑으로 스르르 흘러내려가고 찬바람이 휑하니 아래도리를 훓어지나갔다. 녀인의 손이 팬티속으로 들어오는 찰나 동이는 그대로 녀인을 바위우로 쓸어넘겼다. 동이는 자신의 분신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어쩌면 세 분신이 하나가 되여 그 자신이 되어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했다. 갈라져 제마끔 용을 쓸때는 미워나기도 했지만 가끔 한몸에서 뭉쳐서 힘을 발산할때는 대견하기도 했다. 내일이면 남사장이 한국에서 들어온다. 기를 잔뜩 살리고 안하무인식으로 노는 남사장이지만 귀여운데가 많기도 했다. 마냥 넘쳐나는 정력이 그 하나였다. 그와 어울리자면 잠을 미리 자두어야 하고 다리도 쉬여두어야 하고 특히 마음을 비워두어야 한다. 그렇게 맞추어가는것이 또한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재미인듯싶기도 했다. 차고 딱딱한 바위바닥을 의식하고 동이가 눈을 떴을 때는 녀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금방 한바탕 일장춘몽을 꾸고 헤어나온 느낌이였다. 동이는 그것이 진정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가을에 춘몽이 어불성설이다. 동이는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고 행장을 챙겼다. 썰물이 밀려나간 뒤었다. 어두컴컴한 돌바위길은 걷기가 한결 불편했다. 동이는 허우허우 돌밭길을 걸어나갔다. 어깨에 걸친 낚시장비가 당장 미끌어 떨어질듯 안스럽다. 동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낚시장비를 추슬렸다. 스스로 듣기에도 숨결이 많이 거칠고 힘겹다. 저 멀리 어두움속에 조그마하게 옴츠러든 녀인이 힘겹게 바위돌 사이를 헤집고 나가고있는 모습이 환각인듯 어슴푸레 보이고있었다. 이제는 입은 옷색상이 전혀 보이지는 않지만 이 바다가에서 게나 다슬기 또는 바지락 따위를 줏는 주변 동네 아낙네는 아니란것이 분명해졌다. 이름이 무엇인지 묻지 않은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쌍가매는 아니겠지…  
13    인저리타임 댓글:  조회:929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인 저 리 타 임 장 학 규   조씨는 맥이 풀리는듯 낮다란 바위돌우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2월이면 청도는 봄철에 접어든다고 말할수 있다. 겨우내 푸들푸들하던 나무들이 살판 만난듯 새움이 돋아나고 얼뚱말둥하던 민물의 살얼음이 어느새 풀려진다. 그러나 황해가의 봄바람은 여전히 매우 날카롭다. 만주벌판처럼 쌩쌩 소리내며 달려드는건 아니여도 옷섶을 와락 헤치며 몸을 오싹하게 하는 매서움이 있다. 기온은 영상에서 맴돌아도 귀가 얼어가는 느낌은 겨울이나 다를바 없다. 청도의 바다는 하루에 두번 고조와 저조가 반복되는 반일조이다. 철썩 철썩… 만조때에는 노한 파도가 그대로 집채처럼 해안바위를 부신다. 천군만마처럼 우야야 달려와서 방울방울로 산산히 부셔져내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간조에는 물우에 훌쩍 드러난 해변 바위사이를 가로막은 낮다란 방파제를 볼수 있다. 그것은 밀물에 딸려온 고기들이 다시 썰물과 더불어 바다 깊이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아주 원시적이고도 효과적인 장치이다. 염전처럼 바다물이 방파제안에 갇히면서 작은 바다고기들이 그속에 허우적거린다. 그때면 맞춤하게 갈매기떼들이 달려든다. 박력감있고 속도감 넘치는 갈매기들의 날개짓에 사람들은 저절로 매료된다. 싱크를 맞추어 나란히 날면서 손님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노오란 부리로 냉큼 집어삼키는 모습은 전률 그 자체이다. 흰색의 몸뚱이 밑으로 길게 뻗은 황색 다리를 달싹이며 한껏 낮아진 바다물에서 고기를 집어먹는 자태도 그저 귀엽기만 하다. 조씨는 특히 간조때를 좋아한다. 운이 좋으면 돌틈에 기여든 게를 쇠줄로 끄집어내는 재미는 물론 갯바위에 찰싹 들어붙은 굴도 더러 캘수 있다. 이젠 다슬기 정도는 별로 눈에 차지 않는다.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방파제안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엄지굵기만한 우럭을 공짜로 주을때도 있었다. 그 재미에 조씨는 매일 48분 차이로 시간이 뒤로 밀리면서 나타나는 간조때를 용케 맞추어 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바다를 아는 친구 하나가 조씨보다 먼저 나타나서 한바퀴 서리해버리고난 뒤였다. 얼굴이 분칠한것처럼 하얀 사내였는데 평소 조씨가 다니던 루트대로 묘하게 다니면서 싹쓸이하고있었다. 훤칠한 키에 멋이 철철 흘러넘치는 회색의 윈드 재킷 차림새였다. 얼핏 보기에 이 동네를 그저 스쳐지나가는 행객이 분명했지만 방정 맞게도 밥알 한톨 흘리지 않을 정도로 샅샅히 훑고있었다. “씨발, 재수에 옴 붙었군. 어디서 굴러온 넘이지?” 조씨는 흰얼굴 뒤를 잰걸음으로 쫓아갔지만 그 긴다리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체념한듯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술덤벙 물덤벙이 성격인 조씨는 입안소리도 남들 듣기에는 마냥 요란하다. 아닌게 아니라 앞서가던 흰얼굴이 주춤 멈춰서면서 획 돌아섰다. “이제 그 말 나더러 한겁니까?” 정확히 조선말이 되돌아왔다. 하느님 맙소서. 조씨는 가끔 친구들로부터 언젠가는 주둥이가 찰떡이 되어 돌아올수 있다는 경고를 듣는 사람이다. “아, 그게 뭐…말하자면…” 조씨가 미역 감다 물 먹은 넘처럼 꺽꺽거리는데 흰얼굴은 냉소를 머금고 다시 마이웨이 행보를 이어갔다. 무표정한 얼굴표정도 그렇고 끼있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운 사람이 분명했다. 조씨는 흰얼굴의 우덕진 뒤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돌아섰다. 아무래도 오늘은 가게에 점잖게 붙어있어야할가부다. 조씨네가 저 멀리로 부두가 비스듬히 바라보이는 이곳에 국밥집을 오픈한지도 벌써 서너해가 되여온다. 처음에는 항구를 오가는 동포들을 념두에 두고 차렸지만 요즘에는 색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온다. 팔도방언으로 와글와글 끓던 그 많은 동포들이 어느덧 과거로 굳어져버렸고 대신 클릭되여진건 쏼라쏼라 팅부둥세상이였다. 주변에 살면서 어느새 국밥에 길들여진 혀꼬부라진 당지인들이 단골로 자리매김한데다 오가는 관광객들이 다른 동네 음식을 맛본다며 찾아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가게에는 어느덧 손님 서넛이 들어있었다. 조씨가 그나마 바다생물을 반봉다리라도 들고 들어오는 날이면 마누라는 공짜 해물국밥을 만들수 있어서인지 기뻐 날뛰기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도로 잔소리는 없이 대수 넘어가주었다. 그러나 빈손인 경우에는 때시걱 준비로 굽은 허리를 펴면서 말없이 쏘아보기가 일쑤였다. 오늘도 례외가 아니였다. 쌀쌀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독기 어린 마누라의 눈길을 직시할수 없어서 조씨는 고개를 숙인채 주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바닥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 느닷없이 들려오는 조선말에 조씨는 본능적으로 홀안을 내다보았다. 가물에 콩나듯 드물게 들려오는 조선말은 조씨에게 언제나와 같이 위안이였고 또한 아픔이였다. 뜻밖에도 소리의 임자는 아까 바다에서 조우했던 흰얼굴이였다. 첫인상처럼 참말로 남다른 사람이였다.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 흰얼굴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손님들이 맥주로 목을 추기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였다. 그러나 맞춤맞춤하게 먹고 얼른얼른 나가야 할 국밥집에 와서 술 한병도 아니고 “한잔”을 달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흰얼굴이 유일했다. 어느새 흰얼굴이 구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었다. 번연히 폼잡는듯한 인상을 주는 회색의 윈드 재킷은 벌써 벗겨져 무릎옆으로 구겨져있었다. 사실 흰얼굴은 신사타입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그런 부류였다. 몰골은 허여멀쑥했지만 자세나 언동이나 옷차림이나 서로 매치가 잘되지 않는것이 첫눈에도 알렸다. 소고기국밥을 받아놓은 자리 바로 옆에 아까 바다에서 주어담은 해물 주머니를 놓아두고 있었다. “쯔쯔쯔…” 마누라가 혀를 끌끌 찼다. 영문 모르는 조씨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니 마누라는 귀속말로 소곤거려왔다. “자기가 들고온 굴에다 김치를 넣고 해물국밥을 말아달라는걸 거절했어요.” “주인장, 술 한잔 주시오.” 흰얼굴이 많이 신경질이 난다는듯 다시 한번 갈린 목소리로 재촉했다. “예에, 인차 나갑니다.” 자그마한 가게라 홀서빙 도우미가 달랑 미스 왕 한사람이다. 그래도 한때 그럭저럭 괜찮게 나갈때는 일군도 여럿 썼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쁠때는 조씨도 웨이터 역할을 놀아야 한다. 조씨는 마누라가 말리는것도 뿌리치고 새 술병을 따서 두냥짜리 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들고나갔다. 홀안은 봉당과 구들로 양분되여있다. 올방자 틀고는 마냥 불편할 한족들을 위해 한쪽으로 맨 봉당에 테이블 세개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구들우에도 맞춤하게 상 세개를 일자로 놓았다. “아, 우리 구면입니다그려.” 흰얼굴은 의외라는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업이 업이니만큼 조씨도 몹시 반가운듯 악수를 청하고나서 모든 손님들에게 그랬던것처럼 밑반찬에 서비스로 삶은 땅콩 한접시를 얹어서 내놓았다. 흰얼굴은 많이 감동을 먹었는지 연신 감사를 치켜올렸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같은 민족 만나니 제일 반갑네요.” 조씨는 그런 겉치례 인사에 인젠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였다. “청도 처음 오시는 길이네요.” “아니요. 3년전에 청도에 와서 한국회사에 취직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겨우 밥먹고 살 정도밖에 안되더라구요. 그 정도 살자고 고향 떠나온건 아니잖아요. 몇번 이곳 저곳 옮겨다니다가 어떻게 운으로 고기배를 타게 되였는데 1년 좀 넘어 일해보니 세상에 사람새끼가 제일 못해먹을게 배넘이라 이번에 접안하는 기회에 때려치우고 귀국하는 길입니다.” 조씨는 아까 바다가에서 흰얼굴이 아주 익숙하게 해물서리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무렴 그렇겠지. 그래도 대수라도 배 타본 사람이 뭔가 알긴 아는 법이였다.  “그럼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길이네요.” “고향 가봤자 마을에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나 찾아볼가 생각중입니다.” 조씨가 흰얼굴과 몇마디 너스레를 떠는 사이에 마누라의 부름소리가 두번이나 날아왔다. 조씨는 황급히 주방으로 물러나와 마누라가 넘겨주는 음식그릇을 다른 손님들의 상에 배달해주느라고 어느덧 흰얼굴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항상 그랬다. 특별히 단골손님이 아니고 일반 손님은 거쳐가는 즉시 잊혀지는 법이다. 흰얼굴이 언제 자리를 떴는지 조씨는 몰랐다. 손님들을 다 보내고 청소하면서 보니 흰얼굴이 앉았던 상에 해물꾸레미가 그대로 놓여있는것이 보였다. 마누라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는 일이란다. 대신 계산을 맞추면서 카운터에 놓인 가게 명함장을 집어 주머니에 넣더라고 알려주었다. “나중 혹 문의할게 있으면 카카오톡 넣을게요.” 그렇지만 카카오톡 때릴거란 흰얼굴은 그뒤로 감감무소식이였다. 하기사 모기 배꼽마저 빼먹을 요즘 세상에 누구를 믿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였다. 그뒤로도 조씨의 채바퀴 돌리는 일상은 여전히 반복되였다. 매일 잊지 않고 간조때를 맞추어 바다가로 나가는것도 멈추지를 않았다. 하루에 밀물이 두번 들어오고 썰물이 두번 나가는 바다처럼 국밥집도 매일 두번 손님이 들어왔다 나가는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날은 점심시간이였다. 음력 보름이 가까와오는터라 밀물이 해변가를 꽉 채우고있었다. 일찍 들이닥친 카페리 손님들을 한바탕 치르고난 가게방은 폭격 맞은것처럼 지저분했다.  창밖 풍경도 별로 신통할게 없었다. 행인이 드물게 오가는 한산한 거리에는 때아니게 늦여름 바람이 훑어지나면서 휴지쪼각들을 날리고있었다. 항구쪽 검푸른 바다우에는 갈매기떼들이 날개를 펴고 우쭐 춤을 추고있는것이 보였다. 꽈아악 꽈아악 하는 울부짖음 소리가 방불히 들려오는듯 싶었다. 갈매기와 대칭되듯 알록달록한 여러가지 연들이 하늘이 모자라게 높이 높이 떠올라있었다. 이곳 시민들에게는 둘도 없는 취미 놀음이 연띄우기였다.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 불현듯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잠시 손님이 들지 않을것이라 믿고 주방에서 담배쉼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던 조씨는 흠칫 놀랐다. 말소리가 무척 귀에 익어 본능적으로 구들쪽을 힐끔 내다보았다.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 국밥집에 와서 술 한병도 아니고 “한잔”을 달라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조씨는 후다닥 뛰여일어났다. 친지도 아니고 연고가 깊은 사람도 아니였지만 어차피 마음속에 계속 응어리로 남아있는 사람이였다. 아닌게 아니라 흰얼굴이 구들우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사이 패션이 바뀌여져 있었다. 회색의 윈드 재킷을 입어야 할 캐릭터가 말도 안되게 몸에 꽉 낀 런닝셔츠우에 헐렁한 드레스 셔츠를 입고있었다. 물론 양복은 어느새 벗겨져 무릎옆으로 구겨져있었다. 조씨는 선반우에서 술단지를 내렸다. 오미자, 구기자에 양삼따위를 넣어 담근 근들이술이다. 그건 솔직히 흰얼굴때문에 만들어진것이다. 전번에 흰얼굴이 다녀간후로 조씨는 처음으로 가게 운영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보았다. 사실 조씨도 다른 식당에 홀로 갔다가 작은병들이 술은 입맛에 안맞고 입맛 맞는 큰 술 한병은 부담이 되여 맨밥을 먹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손님의 수요가 시장이 아닌가. 조씨는 시골에서 하던대로 약주를 담가보았다. 손님들의 반응이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알고보니 순 국밥집 손님중에도 다모토리 술군이 더러 끼여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반년 좀 넘었는데 웬 호들갑입니까.” 흰얼굴은 조씨가 겉치례 인사를 하는것도 모른채 급급히 해명했다. 정확히 시간까지 기억하는걸 보니 흰얼굴도 조씨네 국밥집에 깊은 인상이 남았던 모양이였다. 얼굴은 때가 아니라 먼지로 얼룩덜룩해져있었다. 모름지기 꽤나 지체있는 모습이였다. 조씨는 흰얼굴이 전에 두고간 해물꾸레미도 있고 하여 마누라가 시장에 나가고 없는 기회에 해물국밥을 진하게 끓여서 내왔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말도 마시우.” 흰얼굴은 괜스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척 억울한듯 이마살을 잔뜩 찡그리면서 하많은 사연을 호소하려는듯 입을 실룩거렸다. “배넘 노릇 며칠 해본덕에 회 뜰줄 좀 알아서 회집 차려봤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아 밑천만 날리고 걷었습니다.” “겨우 서너달만에 맥을 버린겁니까?” “견적을 보면 딱 답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바로 한국갈 기회가 나졌네요.” 조씨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마침 밖에 나갔던 마누라가 돌아왔다. 보스에 캐셔이기도 한 마누라를 조씨는 많이 어려워한다. 어려워하는만큼 마누라가 지키는 자리에서는 조씨가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지 않는것이 거의 법처럼 되여있다. 흰얼굴이 언제 나갔는지 조씨는 그냥 모른다. 마누라 말로는 흰얼굴이 나갈때 먼저번처럼 가게 명함장을 챙기고 나갔단다. 그러나 그 뒤로 흰얼굴은 여전히 전화를 해오지 않았다. (아마 정말 한국에 나갔나보다.) 조씨네가 흰얼굴의 생김새마저 다 잊혀갈 무렵 별로 시원치않은 한해도 무난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여파는 오가는 행객들의 모습에서도 인차 엿볼수 있었다. 전에는 큰짐 작은 짐 챙겨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따리 따이궁은 물론 청도에 와서 한판 사업을 벌려보려는 웅심을 가지고 전 재산을 싸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부두에 나가면 사람을 마중하느라고 여기저기서 훈민정음 피켓을 내들고 있었다. 국내선이던 해외선이던 반갑다고 부둥켜 안고 란리도 아니였다. 팔도방언이 범벅이 되여 항구의 하늘을 시끌법적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배웅하러 나온 사람이 더 많았다. 보따리를 꿍져지고 떠나는 사람들의 뒤모습은 마냥 서글프다. 어린 자식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겨우 발걸음을 옮기는가 하면 누군가를 의식하며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불안한 눈빛도 있었다. 그런 어수선한 항구 국제여객터미널로 조씨는 들어섰다. 한국에서 10여년 불법체류하다가 자진신고하고 귀국하는 동서를 마중하기 위해서이다. 이곳에 올때마다 항상 느끼는것이지만 선착장도 세관이 될수 있다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고작 난간 둬개에 검사대 한번으로 국경 역할을 한다는게 아이러니했다. 조씨의 인생경험에 국경이란것은 강으로 그어지거나 아니면 산에 철조망을 두르고 만들어지는것이다. 국방군의 순라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바다의 국경이 너무 생소해서 올때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바다에 금을 그을수도 없고 하늘우에 구름이 그대로 길다랗게 거쳐있고 바다속의 물고기가 왔다갔다 하고 바다새들이 철따라 오가고 하는데 령물이라는 사람들은 오히려 갇혀서 검문검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심하기도 했다. 아무튼 조씨로서는 인간세상이 참 요지경이라는 느낌뿐이다. 오늘도 날씨는 스산하기 그지없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셔지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는 가는 비줄기를 뿌리고있었다. 방향감이 없이 좌충우돌하는 바다바람도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는 밉상이다. 항구를 오가는 선박들의 고동소리도 마냥 서글프고 애처롭다. 줄지어 나오는 손님들속에서 동서를 발견한 조씨가 남달리 톤이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대구 손을 흔드니 멀리서도 동서가 전형적인 시누런 이발을 환하게 드러내고 시무룩이 웃는것이 보였다. 조씨가 입국장을 나선 동서의 손에서 트렁크를 받아드는데 불시에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쳐왔다. “여기서도 만납니다.” 고개를 들고보니 흰얼굴이였다. 기억이란게 참 희한한 물건이였다. 어떤 사람은 매일 보는거 같은데 도무지 기억에 남지 않지만 흰얼굴은 거퍼 몇번 만나지 못했어도 보자마자 기억에 퍼렇게 살아오는것이 아닌가. 그래도 남의 국수사발에 괜히 초치는 흰얼굴이 별로 반갑진 않았다. “글쎄 말이유.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가는게 아니라 오는겁니다. 한국서.” 흰얼굴의 패션이 그사이 다시 바뀐것을 조씨는 놀랍게 발견했다. 물이 간 검정색 점퍼에 짙은 토색의 구식 캐주얼화를 받쳐 신고있었다. “접때 간다더니 기어코 갔구마이.” 조씨는 더이상 흰얼굴과 말섞기 싫어 동서의 짐을 끌고 씨엉씨엉 앞서 걸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국밥집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어디로 갔을법한 흰얼굴이 멀쩡하게 뒤따라와있었다.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 흰얼굴은 구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소리쳤다. 천천히 점퍼를 벗더니 무릎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조씨는 흰얼굴의 주문대로 순대국밥에 약술 한잔을 가득 부어 가져다주면서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간지 얼마 안되지 않습니까?” “반년 안되였을걸요.” 흰얼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사이 얼굴이 많이 검실해졌고 살도 크게 빠져있었다. “한국에게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거의 거지취급이지요.” “부자 대접 받자고 간건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온갖 더러운 일, 힘든 일, 어려운 일을 다 하면서 중국에서도 받지 않는 괄시를 받는건 정말 참을수 없습니다.” 동서가 오래간만에 온데다가 또 다른 손님도 돌봐야겠기에 조씨는 잘 드시란 인사를 마치고 물러났다. 그리고 동서와 마주앉아 세상살이를 주고받느라고 흰얼굴이 언제 갔는지 미처 살필 사이가 없었다. 나중 손님들이 모두 나간다음 문뜩 생각나 마누라에게 물었더니 흰얼굴이 계산하면서 카운터에서 가게 명함장을 한장 짚어가더라는것이였다. 그렇지만 역시 한번 간 흰얼굴은 전화를 다시 걸어오는 법이 없었다. 동서는 달포정도 머물었다. 고향에 가보았자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중국에 남은 외동딸은 초중도 졸업하지 못하고 북경에 가서 몇년동안 뒹굴더니 어떻게 여행사 취직이 되여 지금은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 동서와 함께 나갔던 조씨의 처제는 여직 한국에 숨어서 살고있다. 그대로 남아서 돈을 벌다가 동서가 중국에서 자리를 잡으면 때맞추어 돌아와 살면서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다시 한국으로 나갈 생각이였다. 동서는 우선 딸애가 있는 북경에 가겠다고 했다. 가능하다면 2년 후 다시 한국으로 나갈때는 딸애를 데리고 갈 타산이였다. 합법적인 신분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느꼈다면서 동서는 한국에서 겪은 일화들을 매일매일 들려주었다. 원체 얼음에 박밀듯 달변인 동서는 한국과 한국인의 나쁜점만 부각해 말했다. 그러면서도 또 나간다고 한다. 그것도 딸애까지 끌고 가겠다고 한다. 조씨는 아무래도 리해되지 않았다. 동서가 북경으로 떠나가는 날이다. 오후 기차라 동서는 집에서 늦잠을 자고 조씨는 조씨대로 가게에 나와 점심 준비로 바삐 보내고있었다. 어쩌면 하늘이 구멍이 뚫린 모양으로 기분 나쁘게 비방울을 날리고있었다. 시커먼 구름이 낮다랗게 떠서 뭉게뭉게 떠도는가 하면 바다가답게 맵짠 바람이 한껏 불어치고있었다. 일년치고 바람 잘 날이 며칠 없었다. 그 덕분에 바다가에는 연들이 마냥 떠서 하늘을 장식하고있다. 군용외투로 온몸을 꽁꽁 감싼 로인들이 줄을 길게 늘이고 당겼다 풀었다 하는 품이 제법 전문가다운 멋이 있었다. 긴줄배기 룡연으로부터 독수리연은 물론 작은 잠자리연까지 연놀이군들의 손끝에서 한껏 재주를 부리고있었다. 멀리 질주하는듯 하더니 금세 춤추는 자세로 멈추는가 하면 낮게 맴돌더니 불시에 소소리 높이 올리솟구치기도 했다. 모든것이 연놀이군들의 손놀림에 달려있었다.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 조씨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흰얼굴의 석쉼한 목소리였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목을 내밀고 홀을 내다보았다. 다른 누가 아닌 흰얼굴이 버젓이 구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간 날씨가 조금 풀려서인지 흰얼굴은 갈색의 엷은 양털셔츠를 차려입고있었다. 겉옷은 검은색의 양복인듯 벌써 무릎옆으로 구겨져있었다. 조씨는 흰얼굴에게 이 차림새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고향에요.” 흰얼굴은 소태를 씹은듯 이마살을 잔뜩 찡그렸다. “정말 뭔가 해볼려고 했었는데 도대체가 할 일이 없네요. 중국은 무슨 업이나 다 꽉 들어찬 느낌입니다그려.” ”그럼 일단 출근하면서 기회를 찾아볼거지요?” “아니요. 청진기 갖다대기전에 진단이 먼저 나옵디다.” 조씨는 입을 가시면서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흰얼굴이 아무 국밥이나 알아서 달라고 하여 별 생각없이 콩나물국밥을 내놓았다. 끓이기 쉬운 원인도 있었지만 갖다놓고보니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고향 초가집 한구석에 벼짚으로 엮은 콩나물시루가 우렷이 떠올랐다. 가둑나무로 기둥을 해서 받치고 밑에 큰소래를 놓고 물받이로 쓰던 그 콩나물시루는 한가정의 버팀목이기도 했었다. 떠나는 동서에게 점심을 대접하려고 집으로 잠간 갔다오는 사이에 흰얼굴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마누라에게 물어보니 이번에는 흰얼굴이 가게 명함장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쿠 얼마나 말을 조리있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깜짝 속히겠더라구요.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사람이데요.” 마누라는 인민재판을 마치듯 한마디 툭 던지고 다시 가게 일에 분주했다. 동서와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고 술 한잔 나누면서 조씨는 할 말을 잃은듯 했다. 머리속에는 엉뚱하게 별로 엮인것도 없는 흰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조씨가 다시 바다가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간 동서가 다녀가면서 소홀히 했던 해물 서리를 더 지굿게 해나갔다. 솔직히 조씨는 바다를 엄청 좋아한다. 아마도 조씨의 심저에는 바다의 유전자가 살아숨쉬는게 틀림없다. 확실하게 한방 날리는 바다바람도 마음에 들었고 바다하늘을 나는 갈매기와 연도 짜릿한 스릴을 준다. 특히 썰물로 인해 해면이 가장 낮아지는 간조때면 바위 틈서리에 기여든 게나 돌바위에 그대로 붙은 굴을 잡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누라의 지청구도 여전하다. 그나마 해물꾸러미를 대강 들고오는 날이면 공짜 해물국밥을 할수 있어서인지 별 말이 없다. 그러나 빈손인 경우에는 일에 지친 허리를 구부린채 독기있게 쏘아보군 했다. 조씨는 이제는 그런데 습관되여있다. 대신 신경이 도사려지는 일이 한가지 추가로 생겼다. 가게 일을 하다가도 시도때도 없이 홀안을 내다보는것이였다. 어쩌면 갑지기 구들에서 석쉼한 목소리가 울려올것 같아서이다. “주인장, 여기 술 한잔 주시오.”    
12    하숙집 댓글:  조회:1117  추천:0  2014-08-31
단편소설   하  숙  집   장학규        축축하게 누기가 들고 갑갑하도록 캄캄한 독신숙사다.보기에도 끔찍스러운 거미 한마리가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채 뚱기적거린다. 감방같은 느낌이다.아무래도 세상의 버림을 받은 죄수같은 감각이다.   창밖의 교정에서는 영원히 지칠줄을 모르는 소년들의 천진란만한 웃음소리가 귀아프게 들려온다.나도 그들만 했으면 하면서도 그 부러움에 앞서 피동적으로 고독하게 그 웃음 소리들을 듣는 것이 어쨌던 질색이다.   나는 쫓기듯 숙사문을 나섰다.구울러 다니는 낙엽에 석양빛이 물들어있다.절망과 낭만의 교묘한 회합이다.허나 그 낭만은 종당엔 추방을 당하고 말것이며 그러면 절망만이 그것의 응당한 귀속으로 될 것이다.하다면 하나의 낙엽에도 귀속은 있을진대 떠도는 부평초같이 중심을 잃은 나의 귀속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가? 그것을 찾고저 나선 걸음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안온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바쁜 걸음걸이들이었다.어차피 괴로와지는 마음이었다.벌써 오래전부터 이지의 힘으로선 도무지 억제 못할 해괴한 기운이 올리 뻗치고 있었다.종당엔 그것이 불치의 병을 희롱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불쑥불쑥 들기도 했다.남아 스물여덟이면 생활도 얼마쯤 고정이 되어있어야 할터인데.나 혼자만이라도 삶을 영위해갈 낭만의 터전을 마련했어야 할 것이다.그러면 불도 때보고 될 수 있으면 꽃도 키우면서 생활을 실습해 볼터이지만 항시 길 떠난 나그네처럼 할 일이 막연한 느낌이었다.   방향이 없고 목표도 없이 두루 돌다가 세집 패쪽을 내건 한 집에 문뜩  뛰어드니 나를 맞아주는 것은 칠순에 가까운 유령같은 영감과 그 손자 손녀인듯한 참새같은 어린이 둘이었다.   "누굴 찾수?"   노쇠했으나 악센트가 진한 음성으로 미루어보아 절대 만만한 영감이 아니겠다는 인상이 들었다.모르긴 해도 아들 며느리를 놀이감처럼 쥐고 흔들만큼 과격한 성미의 노인임이 분명했다.나는 어딘가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면서 얼떠름해졌다.   "세집을 맡자구요."   "무슨 일을 하나?"   명실공히 심문이었다.나는 몹시 기분이 잡쳤다.내가 무슨 일을 하던 돈을 주고 세를 맡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는 고까운 생각까지 들었다.허나 입에서는 생각밖으로 순순한 대답이 저절로 흘러나갔다.   "교원입니다."   "성친은 했는가?"   "단신입니다."   "그럼 좋네. 날 따라오게."   노인은 더 말할 여유가 없다는 듯 빼빼 마른 팔을 한번 휘젓고는 복도에 나섰다.세집으로 내줄 방은 복도 저쪽에 있는상싶었다.이 시각 나의 사유는 완전히 정지되고 오직 몸만이 어쩔새 없이 영감의 뒤를 따랐다.내가 왜 이토록 주눅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우스울 지경이었다.여직껏 엿가락처럼 할아버지 옆에 붙어있던 사내애가 쫑그르르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스산한 한기가 얼굴을 스쳤다.아마도 오래동안 비워둔 방임에 틀림없었다.   "전에도 여기에 사람을 넣었었네."   노인은 마치도 개 돼지를 거둔듯한 태연한 기색으로 스스럼없이 말하더니 계속했다.   "모두들 돈이 있으니까 먹기도 잘 하겠지.그래 조용히 해먹으면 누구 뭐라겠나? 귀 아프게 볶고 지지고 하니 이것들이..."   그는 또다시 자기 몸에 붙어선 손자 손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철없는 자기들도 좋은걸 먹겠다고 야단이니 그 성화를 어찌 받아내겠나.그래서 내쫓아버렸네.자네는 교원이고 독신이니 받아주는줄 알게."   말을 마친 노인은 수시로 집들이를 할 수 있다고 부언하고나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활개를 치며 걸어나갔다.그 씩씩한 걸음걸이를 보면 젊었을 때 곰을 서너마리 잡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나는 망연자실했다.좀체로 말할 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웬 일인지 할아버지를 그림자같이 따라 다니던 두 조무래기가 그때만은 문틀에 기대선채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흩어진 심리에 대한 평형을 잡기 위해서랄가.나는 그중 동생인듯한 사내애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지?"   "순철이."   퍼그나 담대한 대답이었다.어찌 보면 할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듯 싶었다.   "오,순철이,넌?"   계집애는 수집은듯 얼굴을 돌리면서도   "순애."   하는 대답만은 용케 했다.   "몇살?"   "야덜살."   "순철이는?"   "여섯살."   이러루한 재미를 보다가 문뜩 이상한 감촉이 들어서 복도쪽을 넌지시 건너다보니 어느새 영감이 나타나서 경계하는 눈초리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순간 나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나는 급히 눈을 떨구고 한시급히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바로 그 즈음에 우물쭈물하던 계집애가 발꿈치로 동생을 건드리는가 싶더니 순철이란 녀석이 바로 앞으로 썩 나서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삼촌,돈!"   철부지 애치고는 지나치게 명령적인 어투었다.했지만 거미 뒤다리도 걸리지 않는 그것들 한테서 "삼촌" 소리를 듣는 것이 어쨌던 싫지 않았다.돌이켜보면 몇해였던가.시골에서 대학에 갔다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이곳 도시에 배치 받아서부터 인정미가 찰찰 흐르는 이런 호칭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고 또 거의 잊어가고 있던 나였다.나는 호주머니에서 1원짜리 두장을 더듬어내어 한놈에게 한장씩 쥐어주고는 석고상같은 노인에게 내일 또 건너오겠다고 간다는 인사에 곁들어 말했다.생각밖으로 무뚝뚝해 보이던 노인이 나를 큰거리에까지 전송해주는 것이었다.     이날 내가 짐을 꾸려가지고 하숙집에 이르렀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젊은 주인내외는 그때까지 퇴근하지 않았고 영감이 두 손군을 거느리고 내가 들 집안을 깨끗이 거두고 한참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왜 인제야 오나? 물건은 다 가져왔나?"   목석같던 어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수다였다.그러고보면 영감은 내가 처음 받았던 인상처럼 그렇게 까다롭고 몰인정한 것도 아니었다.아무렴 년장자이니까 후배 앞에서 좀 자존을 세워본거겠지.나는 이렇게 풀이함으로써 마음에 석연치 못한 구석을 몰아내보기도 하였다.   "저의 물건이라야 이불짐에 책궤밖에 없는걸요.오후쯤에는 그릇에 땔 것,먹을 것들을 사야겠어요."   나는 찰거마리같이 살살 기어드는 순철이를 꼭 껴안고서야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눅잦힐수가 있었다.이젠 나에게도 나를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가정 같은 것이 있구나 하는 환심이었다.   "숙사에 있으면 이런 시끄러움이 없을텐데..."   "아닙니다.거기에 있으니 사람이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착각뿐이었습니다.실례이지만도..."   "부모 떠나 고생이 오죽하겠나.이후부턴 여기를 자기 집으로 간주하게."   "감사합니다."   이쯤 말하고 있을 때 밖에서 느닷없이 싸구려 소리가 들려왔다.순애가 홀딱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인츰 발로 동생을 건드리는 것이 내 눈에 안겨왔다.암시를 받은 순철이가 조건반사적으로   "삼촌,돈!"   하며 손을 내미는데 똑마치 나의 존재가 그의 타액을 자극하는 조미료인듯한 감도 없지 않았다.했건만 노인은 노인대로 느슨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지켜보는데 그 눈길속엔 무엇을 갈망하는 뜻이 어슴푸레 나타났다.나에겐 그것이 더 좋았다.애들더러 그러면 못 쓴다고 호통쳐 내쫓는다면 내가 이 가정에서 외목나고 소외된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차라리 애들 친삼촌을 대하는것처럼 "뭘 좀 사먹게 돈 좀 쥐어줘!" 했더라면 내 마음에 더 큰 위안이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갈마들기도 했다.나는 주저없이 한놈에게 50전씩 나눠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또 한번 실면의 고험을 이겨내야 했다.밥 먹듯 실면을 거듭해온 나였지만 이날 저녁만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나는 스스로 이 가정의 한 성원으로 되어간다는 의식이었다.젊은 주인 내외와도 면목을 익혔는데 퍼그나 선량한 분들이었다.짐작대로 노인이 이 가정을 좌우지하고 있었다.     나의 생활은 또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하냥 굳어졌던 얼굴이 점차 피어가고 웃음으로 장식되면서부터 동료들은 노총각이 색시감을 봐둔게 틀림없다고 어림짐작으로 놀려주기도 했다.나는 또한 나대로 별로 해석을 가하지 않고 사실이 그렇다는듯 함구무언으로 그들을 대하기가 일쑤였다.그러니까 동료들은 더욱 기가 올라 사탕을 사내라 한턱 내라며 야단이었다.나도 그런 인사가 있어야겠다고 자각하고 있었다.비록 이성벗을 사귄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가정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인하는 그 자체가,또 거기서 삶의 낙취를 한껏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축할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허나 일단 호주머니를 들추었을 때 나는 나의 돈이 눈에 뜨이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 발견하였다.까딱하면 이 달의 생활비용도 이어대기 어렵겠다는 위구심을 안겨주는 그만한 돈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나는 의아해졌다.아무리 머리를 짜봐야 통이 크게 돈을 써본적이 없는 나였다.     주인집 영감은 내가 들어서부터 매일이다싶이 손군들을 달고 마실을 다녔다.입담은 썩 좋은 축이 못되지만 위만시대때 일제의 행패같은 얘기를 할라치면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구수하게 당기는 맛이 있었다.우리가 이야기에 정신을 팔면 조무래기들은 저희들끼리 희희덕거리며 뛰놀았다.우리의 이야기가 끝날 때면 그들의 놀음도 알맞춤하게 마무리 짓는데 그때면 순애는 버릇처럼   "뭘 먹고싶다야."한다.   그러면 순철이는 대뜸 내앞으로 뛰어와   "삼촌,돈!"   하는 것이었다.   "오냐.순철이 곱다.순애는 밉구."   흘러나오는대로 하는 자연적인 말이였지만 실상 그것은 내 진심의 말이기도 했다.나를 하늘같이 믿고 무랍없이 대하는 순철이가 진정 더 귀여웠다.만나면 언제나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오직 순철이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표달하는 순애에겐 정이 잘 가지 않았다.저게 저렇게 여우처럼 역어서 앞으로 무엇이 될가 하는 걱정을 앞세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그래서 우정 순철이에게는 어김없이 50전을 쥐어주지만 순애에겐 20전쯤 던져주기가 일쑤였다.   "요잘난거,좀 더 줘!"   그년이 이렇게라도 나서면 허허 웃으며 돈을 더 얹어주련만 순애는 언제나 투정없이 납작 받아들이는 것이었다.그것이 내 마음에는 더 밉상스러웠다.     동료들에게 실언을 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은 납덩이같이 굳어지고 있었다.인격과 신용의 가치를 새삼스레 인식했던 것이다.남아 일언 중천금이라 했는데 자신이 번진 말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 어떻게 이 세상에 발을 붙이겠는가 하는 부끄러움에 온종일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다행히 동료들의 성화는 길지 않았다.그러니 돈이 떨어져서 여차여차하게 안되었다는 구차한 해석을 가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그러나 저러나 돈의 행방을 추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아무렴 혼자 벌어서 혼자 쓰기에는 족할 것이다.게다가 나에게는 아직도 많은 생활의 과제가 남아있는 것이다.가정을 일구고 집을 해결하고 저금도 얼마간 있어야 자식도 옳바로 키워낼 수가 있는 것이다.더는 이처럼 흐리멍텅한 장부를 하면서 생활할 수 없었다.정신을 차려야 한다.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경고를 주면서 하숙집으로 통한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삼촌!"   목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순철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나의 품에 안겼다.문어구에는 주인집 영감이 순애의 손목을 잡고 자애로운 웃음을 띠우며 서있었다.   "삼촌,돈!"   바로 그 말이 분명했다.날마다 빠짐없는 필수 과목이었다.언제나 그러했다.염치를 모르는 순철이가 달려나오고 순애는 수집은듯 할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있으면서도 눈길은 꼿꼿이 이쪽으로 쏠리는 이런 풍경화는 벌써부터 내 머리속에 생동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나는 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따라서  여직껏 종적을 찾을바 없던 일종의 답안을 획득하고 있는 시각이기도 했다.   "순철아,미안하다.오늘은 돈이 없구나."   나는 처음으로 순진한 어린애의 요구를 거절했다.나도 살아야 한다는 자각을 앞세우니 별로 자격지심도 들지 않았다.   "응-안되.난 삥굴 사먹을래!"   "없다는데두."   "그럼 20전만."   이때면 부끄러움이라곤 전혀 모르는 순철이가 귀찮았다.저쪽에 서서 대견스레 손자녀석을 바라보는 영감이 야속하기도 했다.오히려 말없이 서있는 순애가 이때만은 코마루가 쩡해나도록 고마왔다.나는 별수없이 호주머니를 들추었다.방정맞게도 20전짜리 지전이 딱 한장 있었다.그것을 받아쥔 순철이는 좋아라고 퐁퐁 뛰며 할아버지한테로 달려갔다.그와 동시에 순애가 가지러진 울음을 터뜨렸다.자기한테도 얼마간 차례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가 그 희망이 물거품이 되니 새삼스레 설음이 북받쳤던 모양이었다.그렇다고 한장밖에 안남은 대단결표를 던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나는 노인과 순애에게 양해를 구하는 뜻으로 두 손을 벌려보였다.생각밖으로 노인의 얼굴이 무섭게 이그러지는가 싶더니 불시에 요동치는 손녀를 길거리로 밀치고는 휑하니 집안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이었다."꽝!" 하는 폭탄작열을 방붚케 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나의 부푼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그날 밤 주인집에서는 말다툼이 벌어졌다.영감이 나를 내자는 것을 젊은 주인내외가 한사코 반대하는상 싶었다.에라.될대로 되라지.나는 구들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이왕지사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그러니까 자연 자신의 아둔함이 스스로 발견되었다.혈육이란건 정분이나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어린 것들이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때 호통쳐 아버리거나 학용품을 사는데 써야 한다고 타일러 주는 것이 친삼촌다운 거동일 것이다.그들의 구미만을 맞춰준 나의 행실에는 그 누구의 환심을 사려는 동기가 다분했던 것이다.그러고보면 나는 사실상에서 이 가정의 성원으로 될 수가 없었다.죄꼬만 녀석들의 장단에 멋없이 놀아난 내가 가련할 뿐이었다.그야말고 꿩 잃고 알까지 깬 격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주인집에서는 나를 내지 않았다.그러나 영감은 다시 마실을 오지 않았다.퇴근시간에도 문어구에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이전의 그 화기애애한 기분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허나 두 조무래기만은 예나 다름없이 여전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내가 눈에 띄우기 무섭게 순철이는 여전해 "삼촌,돈!" 하는 것이 예사였고 보호신을 잃은 순애는 저만치 물러서서 물욕의 눈길을 던져오군 하였다.그렇지만 나는 아주 기고만장하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없어!"   이쯤이면 비위좋은 순철이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전처럼 생떼질을 쓰지 않는 것을 보아 어린 심령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모양이었다.   가끔 시꺼먼 복도 너머로 유령같은 영감의 그림자가 비쳐지기도 했다.전보다 허약해진듯 했으나 매양 날카로운 두눈에서는 살기같은 무서운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나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언젠가 의식도 못한채 목 졸려 죽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여 그후로부터 나에겐 밤중에 문을 꽁꽁 닫아걸고 자는 습관이 생겨났다.따라서 한밤중까지 밖에서 술을 퍼마시게 되었다.     바로 내 하숙집과 멀지 않은 거리에 선술집 하나가 새로 섰다. 등잔불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자주 그 거리를 오가면서도 나는 그 선술집을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다가 배수가 급해 문뜩 멈춰선 곳이 그 선술집 문앞이었다.술이 술을 보고 손짓했던지 나는 무작정 문을 떼고 들어섰다.이름 그대로 자그마한 선술집이었는데 나처럼 가난한 선비들이 출입하기에 알맞춤한 곳이었다.해사한 계집 하나가 구면이기라도 한듯 냉큼 마주 오며   "무엇을 들겠어요?"   하는데 달콤한 그 목소리는 사람의 간장을 싹 녹여줄듯 하였다.   "배갈 두냥에 마마콩 하나."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바로잡으며 쪽걸상에 주저앉았다.   "보아하니 술을 꽤나 마셨군요."   "왜? 마셨는데는?가져와."   계집은 입을 오무리고 매대쪽으로 가더니 술과 낙화생 말고도 계란볶음과 무우짠지를 더 가져왔다.나는 의아해졌다.   "나한텐 돈이 그렇게 없어."   "제가 한턱 내는셈치지요."   "어허,나한테 이런 복도 있나."   나는 자조하는듯 한바탕 너털 웃음을 웃어댔다.   "저를 정말 몰라 보겠어요? 학부형회의에도 몇번 참가했었는데요."   "그래? 이거 실순데...누구더라?"   "우리 태호는 자주 선생님을 외우고 있어요.훌륭한 분이시라구요."   "태호?...그러면 아가씨는 그 누님되는 분이구먼.실례했습니다.이거 오늘 술 먹어서..."   나는 저으기 불안해났다.사회적으로 높이 모시는 교원의 형상에 먹칠한듯한 감이 들었다.그래서 술 한잔 찌우는 것으로 마음의 흔들림을 억제했다.옥란이라고 부른다는 그녀는 인츰 일어나 술 한잔을 따랐다.   "괜찮아요.그런데 기색이 영 말이 아니구만요.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었나봐요."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퍼그나 근심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히 새겨졌다.그 표정이 코마루가 시큰해나도록 고마왔다.하여 나는 어쩔새도 없이 나의 번뇌와 고통 그리고 내가 겪은 일들을 자초지종 이야기해 주었다.그녀는 잠자코 듣기만 했는데 간혹   "아이참,그랬구만요."   "저런,그래서요?"   하는 따위의 찬탄사들을 빼내어 나의 연설이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나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밤도 이슥하였다.누구의 제의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 길로 찬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 거리를 거닐었다.알고보니 그 선술집은 옥란이가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후부터 나는 자주 그 선술집으로 드나들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우리 둘사이에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서로 허물없이 무도장,영화관으로 다니던데로부터 점차 포옹하고 키스하는 단계에 진입했던 것이다.영근 사나이의 정열은 무서운 것이었다.때론 옥란이쪽에서 배겨내지 못하여 좀 억제하라는 충고를 하여왔다.집을 사고 가장집물을 일구자면 이미 번 돈으로선 모자라니 한 일이년쯤 참아달라는 요구였다.했건만 나는 독신생활에 진저리가 났던 터였다.그만큼 정이 그리운 나였다.어느 한번의 밀회끝에 나는 또다시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혔다.   "좀만 더 기다려요.당금이예요.5만원만 채우면 정식 결혼하자요."   "그저 돈 소리구만.돈이 없으면 이 세상이 돌지 않겠구만."   "왜 그리 고집스러워요? 당신도 돈이 없으니 이 꼴이 아니예요."   옳아,옳거니.나한테 돈이 있으면 세상은 나에게 추파를 던져줄 것이다.푼전이 없으니 냉대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실 그녀의 논조를 반박할 힘이 없었다.   "어쩌겠어요?견딘바하곤 여름까지 기다려요.보세요.봄이 닥쳐왔어요.멀지 않았어요.그 영감두상은 제가 다스릴게요."   "그만두오.적어도 나에게는 최후로 발악할 수 있는 진지는 있어야 하는거요.나는 절대 질식할 것만 같은 그 독신숙사에 되돌아 갈수 없소.하물며 주인집 영감은 내가 독신이기에 받는다고 성명한바도 있었소."   "저를 못 믿겠다는 암시죠.좋아요.내일 영감을 설복 못하면 그길로 결혼등기를 하자요."   옥란이는 더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듯 내쏘고는 자리를 떴다.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맴돌았다.하긴 그것도 좋을상싶었다.색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영감의 분통을 터쳐보는 것도 별로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영감과 여직껏 별일 없이 무사하게 지낸 것도 따져보면 나의 흠집이 그에게 잡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제 영감에게 미끼를 던져주어 그로 하여금 길길이 날뛰게 한다면 옥란이에게 아무리 적중한 이유가 있어도 나의 요구를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리라.     이날 우리가 하숙집에 이르니 주인집 영감은 두 손군을 거느리고 볕쪼임을 하고 있었다.그번의 그 불쾌한 일이 있어서부터 처음으로 그가 밖에 나온 것을 본 나였다.그간 노인은 퍽 눈에 띄게 늙었었다.우리를 발견한 그는 주춤거리며 일어섰는데 날카롭던 눈은 정기를 잃고 지어는 멀게 보이기도 했다.인생이 허무하달밖에.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한사코 우리만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당금 청천벽력이 떨어질것 같은 징조였다.    "할아버지,안녕하세요?"    옥란이는 익살꾸러기처럼 허리까지 굽혀 반갑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그런데 당금 날벼락이 튕겨나올 것 같던 영감의 입에서 생뚱같은 대답이 튕겨나올줄이야.   "죽지는 않았네."   옥란이는 나를 돌아보며 입을 샐쭉거리고는 자기를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두 어린애를 끄당기는 것이었다.   "너 이름이 순철이지? 삼촌이 일러줬다.옛다.5원이다.그리구 순애에게도 5원."   나는 눈이 데꾼해질 지경이였다.이건 순전한 "회뢰"였다.하다면 옥란이가 영감을 설복한다는 방식이 고작 이런 것이였는가!   "그런데 새긴 누군지?"   영감의 얼굴에 가득찼던 적의는 어느새 사라지고 오래간만에 회심의 웃음이 떠올랐다.   "저의 애인입니다.미혼처 알지요?"   "좋네 좋아.자네도 성가할 때가 지났지.좋은 일이구말구."   영감은 나의 시까스르는 말을 푸접 좋게 받아넘기고는 옥란이를 붙잡고 일장설화를 풀어놓기 시작했다.물론 위만시대때 일제의 행패같은 얘기들이었다.노인은 또다시 이전의 그 형태로 되돌아간 것이다.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어쩌면 저럴수가 있을가? 과연 돈의 위력일가? 그러나 그 얘기만은 이전처럼 그렇게 구수하지 않았다.아니,오히려 구역질이 나도록 역겨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란이는 가끔 맞장구를 치면서 이야기에 정신을 팔았다.나는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분노를 눅잦힐 수 없어 홱 돌아서 집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문이 조용히 열리며 옥란이가 들어섰다.나의 눈치를 흘끔흘끔 훔쳐보던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나의 품에 몸을 기대였다.나는 무작정 그녀를 밀어냈다.   "노여웠군요.이게 생활예술이란거예요.돈이 정이거든요.게다가 당신처럼 질금질금 줄 것이 아니라 한번에 푸짐하게 주어 할 말이 없게 해야 하는거죠."   "나는 정으로 주는거지 돈으로 주는 것이 아니야.더우기 거기처럼 수완을 쓸줄도 모르니깐."   "사람을 비꼬지 말아요.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오히려 내 형상이 손상받았다고 생각되는데..."   "고집불통이군요.그러기에 여직껏 무슨 일이나 막히지요."   "맞소.나는 오직 양심대로 살려는 일념뿐이지 수단을 쓰고 틈을 타서 출세하려는 생각이 꼬물도 없었소.내가 이런 사람인줄 알았으니 어서 물러가오."   나는 히스테리환자마냥 마구 부르짖었다.믿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 할가.마음의 의지가 되고 생활의 신조를 굳혀주었어야 할 옥란이마저 정상적인 사유를 변태적으로 보고 있으니 내 마음에 애써 쌓아올린 희망의 탑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옥란이는 얼굴을 싸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취약한 내 마음을 산산이 쪼각내고.    이틑날 나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하숙집에 돌아와 이불짐을 쌌다. 여느때 없이 다정다감해진 영감이 한사코 나를 말리는 것이었다.   "어디루 가자구 이러나? 사람이 자꾸 움직이면 먼지도 안 붙는다는데..."   "저도 모르겠습니다.아무렴 살아나갈 길이 나지겠지요."   주인집영감을 하직하고 거리에 나서니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에 불어왔다.바야흐로 격정의 새봄을 메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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