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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学奎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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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장학규 소설

하숙집
2014년 08월 31일 21시 47분  조회:1117  추천:0  작성자: 비전

단편소설
 
하  숙  집
 
장학규
 
 
   축축하게 누기가 들고 갑갑하도록 캄캄한 독신숙사다.보기에도 끔찍스러운 거미 한마리가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채 뚱기적거린다. 감방같은 느낌이다.아무래도 세상의 버림을 받은 죄수같은 감각이다.
  창밖의 교정에서는 영원히 지칠줄을 모르는 소년들의 천진란만한 웃음소리가 귀아프게 들려온다.나도 그들만 했으면 하면서도 그 부러움에 앞서 피동적으로 고독하게 그 웃음 소리들을 듣는 것이 어쨌던 질색이다.
  나는 쫓기듯 숙사문을 나섰다.구울러 다니는 낙엽에 석양빛이 물들어있다.절망과 낭만의 교묘한 회합이다.허나 그 낭만은 종당엔 추방을 당하고 말것이며 그러면 절망만이 그것의 응당한 귀속으로 될 것이다.하다면 하나의 낙엽에도 귀속은 있을진대 떠도는 부평초같이 중심을 잃은 나의 귀속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가? 그것을 찾고저 나선 걸음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안온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바쁜 걸음걸이들이었다.어차피 괴로와지는 마음이었다.벌써 오래전부터 이지의 힘으로선 도무지 억제 못할 해괴한 기운이 올리 뻗치고 있었다.종당엔 그것이 불치의 병을 희롱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불쑥불쑥 들기도 했다.남아 스물여덟이면 생활도 얼마쯤 고정이 되어있어야 할터인데.나 혼자만이라도 삶을 영위해갈 낭만의 터전을 마련했어야 할 것이다.그러면 불도 때보고 될 수 있으면 꽃도 키우면서 생활을 실습해 볼터이지만 항시 길 떠난 나그네처럼 할 일이 막연한 느낌이었다.
  방향이 없고 목표도 없이 두루 돌다가 세집 패쪽을 내건 한 집에 문뜩  뛰어드니 나를 맞아주는 것은 칠순에 가까운 유령같은 영감과 그 손자 손녀인듯한 참새같은 어린이 둘이었다.
  "누굴 찾수?"
  노쇠했으나 악센트가 진한 음성으로 미루어보아 절대 만만한 영감이 아니겠다는 인상이 들었다.모르긴 해도 아들 며느리를 놀이감처럼 쥐고 흔들만큼 과격한 성미의 노인임이 분명했다.나는 어딘가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면서 얼떠름해졌다.
  "세집을 맡자구요."
  "무슨 일을 하나?"
  명실공히 심문이었다.나는 몹시 기분이 잡쳤다.내가 무슨 일을 하던 돈을 주고 세를 맡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는 고까운 생각까지 들었다.허나 입에서는 생각밖으로 순순한 대답이 저절로 흘러나갔다.
  "교원입니다."
  "성친은 했는가?"
  "단신입니다."
  "그럼 좋네. 날 따라오게."
  노인은 더 말할 여유가 없다는 듯 빼빼 마른 팔을 한번 휘젓고는 복도에 나섰다.세집으로 내줄 방은 복도 저쪽에 있는상싶었다.이 시각 나의 사유는 완전히 정지되고 오직 몸만이 어쩔새 없이 영감의 뒤를 따랐다.내가 왜 이토록 주눅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우스울 지경이었다.여직껏 엿가락처럼 할아버지 옆에 붙어있던 사내애가 쫑그르르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스산한 한기가 얼굴을 스쳤다.아마도 오래동안 비워둔 방임에 틀림없었다.
  "전에도 여기에 사람을 넣었었네."
  노인은 마치도 개 돼지를 거둔듯한 태연한 기색으로 스스럼없이 말하더니 계속했다.
  "모두들 돈이 있으니까 먹기도 잘 하겠지.그래 조용히 해먹으면 누구 뭐라겠나? 귀 아프게 볶고 지지고 하니 이것들이..."
  그는 또다시 자기 몸에 붙어선 손자 손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철없는 자기들도 좋은걸 먹겠다고 야단이니 그 성화를 어찌 받아내겠나.그래서 내쫓아버렸네.자네는 교원이고 독신이니 받아주는줄 알게."
  말을 마친 노인은 수시로 집들이를 할 수 있다고 부언하고나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활개를 치며 걸어나갔다.그 씩씩한 걸음걸이를 보면 젊었을 때 곰을 서너마리 잡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나는 망연자실했다.좀체로 말할 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웬 일인지 할아버지를 그림자같이 따라 다니던 두 조무래기가 그때만은 문틀에 기대선채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흩어진 심리에 대한 평형을 잡기 위해서랄가.나는 그중 동생인듯한 사내애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지?"
  "순철이."
  퍼그나 담대한 대답이었다.어찌 보면 할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듯 싶었다.
  "오,순철이,넌?"
  계집애는 수집은듯 얼굴을 돌리면서도
  "순애."
  하는 대답만은 용케 했다.
  "몇살?"
  "야덜살."
  "순철이는?"
  "여섯살."
  이러루한 재미를 보다가 문뜩 이상한 감촉이 들어서 복도쪽을 넌지시 건너다보니 어느새 영감이 나타나서 경계하는 눈초리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순간 나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나는 급히 눈을 떨구고 한시급히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바로 그 즈음에 우물쭈물하던 계집애가 발꿈치로 동생을 건드리는가 싶더니 순철이란 녀석이 바로 앞으로 썩 나서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삼촌,돈!"
  철부지 애치고는 지나치게 명령적인 어투었다.했지만 거미 뒤다리도 걸리지 않는 그것들 한테서 "삼촌" 소리를 듣는 것이 어쨌던 싫지 않았다.돌이켜보면 몇해였던가.시골에서 대학에 갔다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이곳 도시에 배치 받아서부터 인정미가 찰찰 흐르는 이런 호칭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고 또 거의 잊어가고 있던 나였다.나는 호주머니에서 1원짜리 두장을 더듬어내어 한놈에게 한장씩 쥐어주고는 석고상같은 노인에게 내일 또 건너오겠다고 간다는 인사에 곁들어 말했다.생각밖으로 무뚝뚝해 보이던 노인이 나를 큰거리에까지 전송해주는 것이었다.
 
  이날 내가 짐을 꾸려가지고 하숙집에 이르렀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젊은 주인내외는 그때까지 퇴근하지 않았고 영감이 두 손군을 거느리고 내가 들 집안을 깨끗이 거두고 한참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왜 인제야 오나? 물건은 다 가져왔나?"
  목석같던 어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수다였다.그러고보면 영감은 내가 처음 받았던 인상처럼 그렇게 까다롭고 몰인정한 것도 아니었다.아무렴 년장자이니까 후배 앞에서 좀 자존을 세워본거겠지.나는 이렇게 풀이함으로써 마음에 석연치 못한 구석을 몰아내보기도 하였다.
  "저의 물건이라야 이불짐에 책궤밖에 없는걸요.오후쯤에는 그릇에 땔 것,먹을 것들을 사야겠어요."
  나는 찰거마리같이 살살 기어드는 순철이를 꼭 껴안고서야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눅잦힐수가 있었다.이젠 나에게도 나를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가정 같은 것이 있구나 하는 환심이었다.
  "숙사에 있으면 이런 시끄러움이 없을텐데..."
  "아닙니다.거기에 있으니 사람이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착각뿐이었습니다.실례이지만도..."
  "부모 떠나 고생이 오죽하겠나.이후부턴 여기를 자기 집으로 간주하게."
  "감사합니다."
  이쯤 말하고 있을 때 밖에서 느닷없이 싸구려 소리가 들려왔다.순애가 홀딱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인츰 발로 동생을 건드리는 것이 내 눈에 안겨왔다.암시를 받은 순철이가 조건반사적으로
  "삼촌,돈!"
  하며 손을 내미는데 똑마치 나의 존재가 그의 타액을 자극하는 조미료인듯한 감도 없지 않았다.했건만 노인은 노인대로 느슨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지켜보는데 그 눈길속엔 무엇을 갈망하는 뜻이 어슴푸레 나타났다.나에겐 그것이 더 좋았다.애들더러 그러면 못 쓴다고 호통쳐 내쫓는다면 내가 이 가정에서 외목나고 소외된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차라리 애들 친삼촌을 대하는것처럼 "뭘 좀 사먹게 돈 좀 쥐어줘!" 했더라면 내 마음에 더 큰 위안이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갈마들기도 했다.나는 주저없이 한놈에게 50전씩 나눠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또 한번 실면의 고험을 이겨내야 했다.밥 먹듯 실면을 거듭해온 나였지만 이날 저녁만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나는 스스로 이 가정의 한 성원으로 되어간다는 의식이었다.젊은 주인 내외와도 면목을 익혔는데 퍼그나 선량한 분들이었다.짐작대로 노인이 이 가정을 좌우지하고 있었다.
 
  나의 생활은 또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하냥 굳어졌던 얼굴이 점차 피어가고 웃음으로 장식되면서부터 동료들은 노총각이 색시감을 봐둔게 틀림없다고 어림짐작으로 놀려주기도 했다.나는 또한 나대로 별로 해석을 가하지 않고 사실이 그렇다는듯 함구무언으로 그들을 대하기가 일쑤였다.그러니까 동료들은 더욱 기가 올라 사탕을 사내라 한턱 내라며 야단이었다.나도 그런 인사가 있어야겠다고 자각하고 있었다.비록 이성벗을 사귄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가정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인하는 그 자체가,또 거기서 삶의 낙취를 한껏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축할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허나 일단 호주머니를 들추었을 때 나는 나의 돈이 눈에 뜨이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 발견하였다.까딱하면 이 달의 생활비용도 이어대기 어렵겠다는 위구심을 안겨주는 그만한 돈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나는 의아해졌다.아무리 머리를 짜봐야 통이 크게 돈을 써본적이 없는 나였다.
 
  주인집 영감은 내가 들어서부터 매일이다싶이 손군들을 달고 마실을 다녔다.입담은 썩 좋은 축이 못되지만 위만시대때 일제의 행패같은 얘기를 할라치면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구수하게 당기는 맛이 있었다.우리가 이야기에 정신을 팔면 조무래기들은 저희들끼리 희희덕거리며 뛰놀았다.우리의 이야기가 끝날 때면 그들의 놀음도 알맞춤하게 마무리 짓는데 그때면 순애는 버릇처럼
  "뭘 먹고싶다야."한다.
  그러면 순철이는 대뜸 내앞으로 뛰어와
  "삼촌,돈!"
  하는 것이었다.
  "오냐.순철이 곱다.순애는 밉구."
  흘러나오는대로 하는 자연적인 말이였지만 실상 그것은 내 진심의 말이기도 했다.나를 하늘같이 믿고 무랍없이 대하는 순철이가 진정 더 귀여웠다.만나면 언제나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오직 순철이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표달하는 순애에겐 정이 잘 가지 않았다.저게 저렇게 여우처럼 역어서 앞으로 무엇이 될가 하는 걱정을 앞세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그래서 우정 순철이에게는 어김없이 50전을 쥐어주지만 순애에겐 20전쯤 던져주기가 일쑤였다.
  "요잘난거,좀 더 줘!"
  그년이 이렇게라도 나서면 허허 웃으며 돈을 더 얹어주련만 순애는 언제나 투정없이 납작 받아들이는 것이었다.그것이 내 마음에는 더 밉상스러웠다.
 
  동료들에게 실언을 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은 납덩이같이 굳어지고 있었다.인격과 신용의 가치를 새삼스레 인식했던 것이다.남아 일언 중천금이라 했는데 자신이 번진 말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 어떻게 이 세상에 발을 붙이겠는가 하는 부끄러움에 온종일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다행히 동료들의 성화는 길지 않았다.그러니 돈이 떨어져서 여차여차하게 안되었다는 구차한 해석을 가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그러나 저러나 돈의 행방을 추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아무렴 혼자 벌어서 혼자 쓰기에는 족할 것이다.게다가 나에게는 아직도 많은 생활의 과제가 남아있는 것이다.가정을 일구고 집을 해결하고 저금도 얼마간 있어야 자식도 옳바로 키워낼 수가 있는 것이다.더는 이처럼 흐리멍텅한 장부를 하면서 생활할 수 없었다.정신을 차려야 한다.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경고를 주면서 하숙집으로 통한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삼촌!"
  목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순철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나의 품에 안겼다.문어구에는 주인집 영감이 순애의 손목을 잡고 자애로운 웃음을 띠우며 서있었다.
  "삼촌,돈!"
  바로 그 말이 분명했다.날마다 빠짐없는 필수 과목이었다.언제나 그러했다.염치를 모르는 순철이가 달려나오고 순애는 수집은듯 할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있으면서도 눈길은 꼿꼿이 이쪽으로 쏠리는 이런 풍경화는 벌써부터 내 머리속에 생동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나는 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따라서  여직껏 종적을 찾을바 없던 일종의 답안을 획득하고 있는 시각이기도 했다.
  "순철아,미안하다.오늘은 돈이 없구나."
  나는 처음으로 순진한 어린애의 요구를 거절했다.나도 살아야 한다는 자각을 앞세우니 별로 자격지심도 들지 않았다.
  "응-안되.난 삥굴 사먹을래!"
  "없다는데두."
  "그럼 20전만."
  이때면 부끄러움이라곤 전혀 모르는 순철이가 귀찮았다.저쪽에 서서 대견스레 손자녀석을 바라보는 영감이 야속하기도 했다.오히려 말없이 서있는 순애가 이때만은 코마루가 쩡해나도록 고마왔다.나는 별수없이 호주머니를 들추었다.방정맞게도 20전짜리 지전이 딱 한장 있었다.그것을 받아쥔 순철이는 좋아라고 퐁퐁 뛰며 할아버지한테로 달려갔다.그와 동시에 순애가 가지러진 울음을 터뜨렸다.자기한테도 얼마간 차례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가 그 희망이 물거품이 되니 새삼스레 설음이 북받쳤던 모양이었다.그렇다고 한장밖에 안남은 대단결표를 던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나는 노인과 순애에게 양해를 구하는 뜻으로 두 손을 벌려보였다.생각밖으로 노인의 얼굴이 무섭게 이그러지는가 싶더니 불시에 요동치는 손녀를 길거리로 밀치고는 휑하니 집안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이었다."꽝!" 하는 폭탄작열을 방붚케 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나의 부푼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그날 밤 주인집에서는 말다툼이 벌어졌다.영감이 나를 내자는 것을 젊은 주인내외가 한사코 반대하는상 싶었다.에라.될대로 되라지.나는 구들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이왕지사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그러니까 자연 자신의 아둔함이 스스로 발견되었다.혈육이란건 정분이나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어린 것들이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때 호통쳐 아버리거나 학용품을 사는데 써야 한다고 타일러 주는 것이 친삼촌다운 거동일 것이다.그들의 구미만을 맞춰준 나의 행실에는 그 누구의 환심을 사려는 동기가 다분했던 것이다.그러고보면 나는 사실상에서 이 가정의 성원으로 될 수가 없었다.죄꼬만 녀석들의 장단에 멋없이 놀아난 내가 가련할 뿐이었다.그야말고 꿩 잃고 알까지 깬 격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주인집에서는 나를 내지 않았다.그러나 영감은 다시 마실을 오지 않았다.퇴근시간에도 문어구에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이전의 그 화기애애한 기분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허나 두 조무래기만은 예나 다름없이 여전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내가 눈에 띄우기 무섭게 순철이는 여전해 "삼촌,돈!" 하는 것이 예사였고 보호신을 잃은 순애는 저만치 물러서서 물욕의 눈길을 던져오군 하였다.그렇지만 나는 아주 기고만장하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없어!"
  이쯤이면 비위좋은 순철이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전처럼 생떼질을 쓰지 않는 것을 보아 어린 심령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모양이었다.
  가끔 시꺼먼 복도 너머로 유령같은 영감의 그림자가 비쳐지기도 했다.전보다 허약해진듯 했으나 매양 날카로운 두눈에서는 살기같은 무서운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나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어쩔수 없었다.언젠가 의식도 못한채 목 졸려 죽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여 그후로부터 나에겐 밤중에 문을 꽁꽁 닫아걸고 자는 습관이 생겨났다.따라서 한밤중까지 밖에서 술을 퍼마시게 되었다.
 
  바로 내 하숙집과 멀지 않은 거리에 선술집 하나가 새로 섰다. 등잔불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자주 그 거리를 오가면서도 나는 그 선술집을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다가 배수가 급해 문뜩 멈춰선 곳이 그 선술집 문앞이었다.술이 술을 보고 손짓했던지 나는 무작정 문을 떼고 들어섰다.이름 그대로 자그마한 선술집이었는데 나처럼 가난한 선비들이 출입하기에 알맞춤한 곳이었다.해사한 계집 하나가 구면이기라도 한듯 냉큼 마주 오며
  "무엇을 들겠어요?"
  하는데 달콤한 그 목소리는 사람의 간장을 싹 녹여줄듯 하였다.
  "배갈 두냥에 마마콩 하나."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바로잡으며 쪽걸상에 주저앉았다.
  "보아하니 술을 꽤나 마셨군요."
  "왜? 마셨는데는?가져와."
  계집은 입을 오무리고 매대쪽으로 가더니 술과 낙화생 말고도 계란볶음과 무우짠지를 더 가져왔다.나는 의아해졌다.
  "나한텐 돈이 그렇게 없어."
  "제가 한턱 내는셈치지요."
  "어허,나한테 이런 복도 있나."
  나는 자조하는듯 한바탕 너털 웃음을 웃어댔다.
  "저를 정말 몰라 보겠어요? 학부형회의에도 몇번 참가했었는데요."
  "그래? 이거 실순데...누구더라?"
  "우리 태호는 자주 선생님을 외우고 있어요.훌륭한 분이시라구요."
  "태호?...그러면 아가씨는 그 누님되는 분이구먼.실례했습니다.이거 오늘 술 먹어서..."
  나는 저으기 불안해났다.사회적으로 높이 모시는 교원의 형상에 먹칠한듯한 감이 들었다.그래서 술 한잔 찌우는 것으로 마음의 흔들림을 억제했다.옥란이라고 부른다는 그녀는 인츰 일어나 술 한잔을 따랐다.
  "괜찮아요.그런데 기색이 영 말이 아니구만요.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었나봐요."
  그녀의 고운 얼굴에는 퍼그나 근심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히 새겨졌다.그 표정이 코마루가 시큰해나도록 고마왔다.하여 나는 어쩔새도 없이 나의 번뇌와 고통 그리고 내가 겪은 일들을 자초지종 이야기해 주었다.그녀는 잠자코 듣기만 했는데 간혹
  "아이참,그랬구만요."
  "저런,그래서요?"
  하는 따위의 찬탄사들을 빼내어 나의 연설이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나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밤도 이슥하였다.누구의 제의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 길로 찬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 거리를 거닐었다.알고보니 그 선술집은 옥란이가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후부터 나는 자주 그 선술집으로 드나들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우리 둘사이에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서로 허물없이 무도장,영화관으로 다니던데로부터 점차 포옹하고 키스하는 단계에 진입했던 것이다.영근 사나이의 정열은 무서운 것이었다.때론 옥란이쪽에서 배겨내지 못하여 좀 억제하라는 충고를 하여왔다.집을 사고 가장집물을 일구자면 이미 번 돈으로선 모자라니 한 일이년쯤 참아달라는 요구였다.했건만 나는 독신생활에 진저리가 났던 터였다.그만큼 정이 그리운 나였다.어느 한번의 밀회끝에 나는 또다시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혔다.
  "좀만 더 기다려요.당금이예요.5만원만 채우면 정식 결혼하자요."
  "그저 돈 소리구만.돈이 없으면 이 세상이 돌지 않겠구만."
  "왜 그리 고집스러워요? 당신도 돈이 없으니 이 꼴이 아니예요."
  옳아,옳거니.나한테 돈이 있으면 세상은 나에게 추파를 던져줄 것이다.푼전이 없으니 냉대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실 그녀의 논조를 반박할 힘이 없었다.
  "어쩌겠어요?견딘바하곤 여름까지 기다려요.보세요.봄이 닥쳐왔어요.멀지 않았어요.그 영감두상은 제가 다스릴게요."
  "그만두오.적어도 나에게는 최후로 발악할 수 있는 진지는 있어야 하는거요.나는 절대 질식할 것만 같은 그 독신숙사에 되돌아 갈수 없소.하물며 주인집 영감은 내가 독신이기에 받는다고 성명한바도 있었소."
  "저를 못 믿겠다는 암시죠.좋아요.내일 영감을 설복 못하면 그길로 결혼등기를 하자요."
  옥란이는 더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듯 내쏘고는 자리를 떴다.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맴돌았다.하긴 그것도 좋을상싶었다.색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영감의 분통을 터쳐보는 것도 별로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영감과 여직껏 별일 없이 무사하게 지낸 것도 따져보면 나의 흠집이 그에게 잡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제 영감에게 미끼를 던져주어 그로 하여금 길길이 날뛰게 한다면 옥란이에게 아무리 적중한 이유가 있어도 나의 요구를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리라.
 
  이날 우리가 하숙집에 이르니 주인집 영감은 두 손군을 거느리고 볕쪼임을 하고 있었다.그번의 그 불쾌한 일이 있어서부터 처음으로 그가 밖에 나온 것을 본 나였다.그간 노인은 퍽 눈에 띄게 늙었었다.우리를 발견한 그는 주춤거리며 일어섰는데 날카롭던 눈은 정기를 잃고 지어는 멀게 보이기도 했다.인생이 허무하달밖에.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한사코 우리만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당금 청천벽력이 떨어질것 같은 징조였다.
   "할아버지,안녕하세요?"
   옥란이는 익살꾸러기처럼 허리까지 굽혀 반갑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그런데 당금 날벼락이 튕겨나올 것 같던 영감의 입에서 생뚱같은 대답이 튕겨나올줄이야.
  "죽지는 않았네."
  옥란이는 나를 돌아보며 입을 샐쭉거리고는 자기를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두 어린애를 끄당기는 것이었다.
  "너 이름이 순철이지? 삼촌이 일러줬다.옛다.5원이다.그리구 순애에게도 5원."
  나는 눈이 데꾼해질 지경이였다.이건 순전한 "회뢰"였다.하다면 옥란이가 영감을 설복한다는 방식이 고작 이런 것이였는가!
  "그런데 새긴 누군지?"
  영감의 얼굴에 가득찼던 적의는 어느새 사라지고 오래간만에 회심의 웃음이 떠올랐다.
  "저의 애인입니다.미혼처 알지요?"
  "좋네 좋아.자네도 성가할 때가 지났지.좋은 일이구말구."
  영감은 나의 시까스르는 말을 푸접 좋게 받아넘기고는 옥란이를 붙잡고 일장설화를 풀어놓기 시작했다.물론 위만시대때 일제의 행패같은 얘기들이었다.노인은 또다시 이전의 그 형태로 되돌아간 것이다.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어쩌면 저럴수가 있을가? 과연 돈의 위력일가? 그러나 그 얘기만은 이전처럼 그렇게 구수하지 않았다.아니,오히려 구역질이 나도록 역겨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란이는 가끔 맞장구를 치면서 이야기에 정신을 팔았다.나는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분노를 눅잦힐 수 없어 홱 돌아서 집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문이 조용히 열리며 옥란이가 들어섰다.나의 눈치를 흘끔흘끔 훔쳐보던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나의 품에 몸을 기대였다.나는 무작정 그녀를 밀어냈다.
  "노여웠군요.이게 생활예술이란거예요.돈이 정이거든요.게다가 당신처럼 질금질금 줄 것이 아니라 한번에 푸짐하게 주어 할 말이 없게 해야 하는거죠."
  "나는 정으로 주는거지 돈으로 주는 것이 아니야.더우기 거기처럼 수완을 쓸줄도 모르니깐."
  "사람을 비꼬지 말아요.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오히려 내 형상이 손상받았다고 생각되는데..."
  "고집불통이군요.그러기에 여직껏 무슨 일이나 막히지요."
  "맞소.나는 오직 양심대로 살려는 일념뿐이지 수단을 쓰고 틈을 타서 출세하려는 생각이 꼬물도 없었소.내가 이런 사람인줄 알았으니 어서 물러가오."
  나는 히스테리환자마냥 마구 부르짖었다.믿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 할가.마음의 의지가 되고 생활의 신조를 굳혀주었어야 할 옥란이마저 정상적인 사유를 변태적으로 보고 있으니 내 마음에 애써 쌓아올린 희망의 탑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옥란이는 얼굴을 싸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취약한 내 마음을 산산이 쪼각내고.
   이틑날 나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하숙집에 돌아와 이불짐을 쌌다. 여느때 없이 다정다감해진 영감이 한사코 나를 말리는 것이었다.
  "어디루 가자구 이러나? 사람이 자꾸 움직이면 먼지도 안 붙는다는데..."
  "저도 모르겠습니다.아무렴 살아나갈 길이 나지겠지요."
  주인집영감을 하직하고 거리에 나서니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에 불어왔다.바야흐로 격정의 새봄을 메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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