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허강일 현상으로부터 보는 소비문학
장학규
허강일의 경우
세상을 아주 수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허강일이라는 이름의 사나이이다.
허강일이라면 적잖은 사람들이 머리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누구지? 듣도보도 못한 사람인데 뭐하는 사람이지?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눈썰미 좋고 기억력 좋고 거기에 세심한 사람이라면 아 그 친구를 말하는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거릴 것이다.
허강일은 1964년 11월 길림성 화룡시에서 3남1녀 중 세째로 태여났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자비반을 졸업하고 화룡시 로과진 공청단서기로부터 시작해 두루 연길시조선족구연예술단,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일보 등 직장을 전전하다가 현재는 연변일보 청도주재기자로 일하고 있다.
허강일은 어려운 년대에 힘들게 살았던 것은 틀림 없었으나 그래도 유복하게 세째로 태여나 아궁이 불도 몇번 지펴보지 못했을 정도로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기름, 간장, 소금부터 하나하나 터득하면서 료리에 재미를 붙이던 그는 가족식구들의 칭찬을 등에 업으면서 제법 그럴 듯한 료리를 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다 하는 주부들도 두손두발을 다 든다. 그가 만든 초두부와 고추순대, 구운 계란은 주변 친구들한테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 료리이다.
솔직히 허강일은 배움에 엄청 게으른 사람이다. 아니, 배움에 게으르다기보다는 선생을 따로 모셔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뭐나 저절로 터득하는 타입이다.
무사자통(无师自通), 바로 그 말이다.
허강일이네 집에 가보면 벽에 서예작품들이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명가의 작품이 아니라 그 자신이 쓴 것들이다. 얼핏 보기에 그럴 듯 하다. 자세히 봐도 대개 무난하다. 그러나 정작 그 붓글 쓰는 자세를 보게 되면 정말 감긴 눈도 더 감겠다고 할 지경이다. 일단 붓을 빗자루 잡는 자세로 틀어쥔다. 그건 서예 기본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고급 선지도 없고 정품 벼루도 갖추지 못했다. 무턱대고 먹통에 싸구려 먹을 쏟아놓고 그 투박한 손으로 글이랍시고 휘갈겨 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문외한들의 눈에는 그럭저럭 글 같아 보이는 작품이 탄생한다.
허강일이는 또 괜찮은 탁구 실력을 자랑한다. 평소에 일에 쫓겨 탁구장에 다니지도 못하지만 시합만 붙으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멋진 스매시를 날린 후 상대를 약 올리려고 뒤짐 지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며 으시대는 모습은 허강일만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악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새장구든 전자풍금이든 피리든 손에 잡기만 하면 곡을 맞춘다. 프로들 보기엔 어떨란지 모르겠지만 한량들 소일거리에는 든든히 한몫 막는다. 그렇게 세상을 모르고 흥에 겨워 두드리고 불어댈 때면 풍류가 따로 없어보인다.
허강일은 청도 바닥에서 한다하는 사회자로 통한다. 얼음에 박밀 듯 구수한 입담에 아마츄어 가수로서는 넘쳐나는 노래 실력을 발휘할 때면 행사장 여기저기서 감탄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때 연변방송국 MC를 력임하면서 사회하는 법도는 어느만큼 터득했을법도 하겠으나 노래는 정말 누구한테 배운 적 없는 순수한 자기 것이라고 뽐낼 때면 그저 기가 질린다.
허강일은 대강 이런 사람이다. 많은 경우 정규 훈련을 거치지 못한 “유격대” 스타일이다. 그를 마주하고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이 모르는게 무엇일가 궁금해진다.
그렇게 허강일은 다재이다. 흔히들 다재는 무재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경우 진리에 가까운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다재”를 문학이라는 특수한 범주에 대입해보면 참말로 다행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문학에서는 다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허강일은 문학에서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처럼 여기저기 다 기웃거리고 이거저거 모두 건드려본다. 스스로도 인물의 성격이요, 시대특성이요, 전형화요 형상화요 따위를 하나도 모른다고 공공연히 선언한다. 문학작품의 유일한 진리는 재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우아하지도 점잖지도 못해서 자기 작품은 절대로 상을 탈 수 없다고 “뽐”내기도 한다.
재미로 쉽게 하는 문학, 이제 허강일의 문학세계에 들어가보도록 하자.
소품의 경우
허강일은 소품으로 세상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연변의 설맞이 야회에 소품을 가장 많이 출품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텔레비죤이 희귀했던 시절에 산재지구에서까지 그의 작품이 회자되였던 걸 미루어보면 이 방면에 대단한 소질이 있었던게 분명하다.
허강일의 첫 소품작품은 그가 만 22세가 되던 1986년에 발표한 “깨여진 사랑의 꿈”이다. 당시 화룡시농촌경연대회 참가 작품으로 창작된 이 작품에서는 말더듬이 총각이 공원에서 미모의 처녀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가 퇴짜 맞는 사건을 쓰고 있다. 작자 자신이 감독과 배역까지 겸하면서 자그마한 센세이숀을 불러일으켰고 화룡시예술단에 의해 전국순회무대에도 올랐었다.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떼떼”라는 조선산 인물이 중국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는 것이다. 당시는 조선텔레비죤을 많이 시청하던 때라 조선의 풍자극에 “떼떼”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했다. 허강일은 이 작품에서 그 인물을 모방하여 말을 더듬는 청년의 사랑이야기를 엮어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어 두번째로 선보인 소품 “기자가 오던 날”은 소품계에서 허강일의 립지를 굳힌 작품이였다.
이 작품의 경개는 간단하다. 기자가 마을 치보주임의 선진사적을 취재하러 왔다가 우연히 치보주임의 안해와 조우하면서 숱한 웃음거리를 만들어내다가 나중에 치보주임의 열다섯살날 딸애가 난산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게 된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결말로 막을 내린다.
이 작품 역시 작자가 감독과 배역을 겸하여 화룡시문예경연대회를 들썽케했고 화룡시예술단과 연길시구연단에서는 전국순회공연 절목으로 올렸으며 연변인민방송국에 의해 록음테프에 수록되기도 했다. 더불어 국경 40돐맞이 연변주구연콩클에서 창작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따안았다.
이로 인해 허강일은 20대의 나이에 연변희극계와 구연계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연변일보, 길림신문, 텔레비죤신문 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허강일 하면 1991년에 창작한 “돼지약”을 빼놓을 수 없다. 전국성적인 명성을 얻은 이 작품으로 하여 허강일은 ‘성해컵’전주전업예술단체소품콩클에서 대상을 수상한데 이어 ‘신력보컵’ 연변티비소품콩클에서도 대상을 거머쥐면서 그해의 쌍관왕이 되였다.
이 소품도 이야기 줄거리는 간단하다. 거리에서 돼지고기를 파는 박철호 총각에게 동네 아주머니가 손에 “돼지회충약”을 들고 황급히 찾아온다. 집에 돼지가 이틀째 똥물을 쏜다면서 이 약이 똥물 치료약이 맞냐고 문의하는 것이다. 민병련장까지 했던 박철호라 의례 박학다식할 줄로 믿은 것이다. 그런데 한자라고는 전혀 모르는 박철호는 체면에 모른다고 할 수 없어 “돼지 똥물싸개 물약”이 맞다고 능청을 떤다. 결국 돼지회충약을 통채로 먹은 아주머니네 돼지는 곧 죽게 되고 박철호는 톡톡히 망신하게 된다.
상기 작품들을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바 스토리가 간단하고 큰 기복이 없다. 주로 위트 있는 대화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고 그 웃음에서 어떤 계발을 받게 유도하는 것이다.
“말먹쟁이라도 돈이 어찌나 많은지 코를 풀어도 10원짜리 돈으로 푼다야.” (“깨여진 사랑의 꿈”에서)
“헌법은 낡은 법을 헌법이라고 합니다” (“기자가 오던 날”에서)
“형들이 동생을 마음대로 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형법입니다” (“기자가 오던 날”에서)
“우리 딸이 열다섯살 때부터 남자친구와 같이 련애를 해도 혼인법의 위대한 가치를 높이 들고 가만 둬두는데…” (“기자가 오던 날”에서)
“돼지란 천생적으로 태시없는 짐승이라 제가 먹고 싶어 하는 대로 먹이라.” (“돼지약”에서)
“산속의 호랑이는 어째서 산 속의 약한 짐승들을 하루에 다 잡아먹지 않는가? 돼지란 넘도 이 한병사리 다 줘도 자기가 먹을 만큼 알아서 먹는다.” (“돼지약”에서)
장소 변경이 안되고 시간과 인물 수가 제한을 받는 소품의 특징상 대화가 사건 전개의 매개물인 것은 틀림 없다. 허강일은 이 점에서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까지 허강일은 장막 연극 2부와 100여편의 소품을 창작했으며 2000년에 연변티비 20세기연변소품력사총결산에서 소품창작대상을, 길림성 희곡소품 2인전 콩클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영예를 따안았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소품을 문학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혹자는 소품은 무대예술로서 문학으로 대우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긴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문학은 언어를 유일 재료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강일의 문학세계를 해부한다면서 우선 먼저 “소품의 경우”부터 언급하게 되는 리유는 뒤에 나오는 허강일의 모든 창작 종류나 스찔이나 방법들이 그의 소품과 너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이다. 어쩌면 소품에서의 경험과 성공이 없었다면 허강일의 문학창작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개인적으로 소품도 문학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무대에서 극으로 재생되기 전에 언어로 창작된 그 부분은 문학으로 쳐주어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사실 중국문학사에서는 그렇게 해왔다. 곽말약의 력사극과 조우의 희곡 등이 당당히 문학사에 올라있다. “백모녀”는 더욱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의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허강일의 첫 소설작품은 장편소설이다. “장백산”잡지 2014년 제4호부터 련재로 발표된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이 그것이다.
허강일은 평소 환담을 할 때면 자신은 글쓰기를 소설로부터 시작했다고 자주 말한다. 아무리 쓰고 써도 발표가 되지 않아 소품으로 전향했다고 우스개소리를 하기도 한다. 아마 그런 남모르는 노하우가 있었기에 첫 발표작을 아름차게 장편으로 장식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허강일이 “어둠의 장막”을 쓰게 된 동기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한번은 동생벌되는 친구가 찾아와 위챗에 련재할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노이즈마케팅을 잘만 하면 괜찮은 사업이 될 것이라는 말에 시작했다. 그런데 1만자 정도 썼을 때 동생이 맥빠진 소리로 사업은 가망이 없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미 쓰기 시작한 글을 멈추기 아까워 구상대로 계속 써내려갔다. 한달반만에 10만자 이상 부지런히 내려쓰면서 초학자 시절에 퇴고 맞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이걸 누가 내줄가 걱정도 많았다. 다행스럽게 주변 문우들이 돌려보고서 재미가 있다는 평판을 해주어 용기를 얻고 마무리 지어서 투고한 것이 덜컥 련재로 발표된 것이다.
이 소설은 개혁개방의 선두도시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조선족 만도와 미나, 그리고 한국인 민호의 사랑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슈제트의 기교나 인물형상의 다채로움보다는 약세군체들이 주류사회에서 생존해나가는 실태를 핍진하게 그리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도는 혼자서 10여 명 깡패를 상대할 만큼 주먹세계에서 한다하는 사람이지만 돈을 앞세우는 민호와 암흑세력을 달고 다니는 공안국 왕부국장과 장소장의 간계에 빠져 감옥에 들어가고 미나를 민호한테 빼앗기고만다. 소설은 만도가 출소한 후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개인영웅주의보다 경찰 출신의 의형제 종수와 그 종수의 동창생 왕형사라는 매개물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쪽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작자가 현실에 너무 집념한 나머지 사회악에 대한 일반 리해에 멈췄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우리문단에서 쉽지 않게 깡패세계를 다루었다는 점과 조선족의 연해진출 과정이 그토록 치렬했다는 력사를 까밝혔다는데서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그러나 본 평론에서는 내용에 대한 해부를 더 깊게 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문학사적의의를 다루려는 것이 아닌 만큼 적당한 언급에 그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평자의 앵글은 언녕부터 소비문학으로서의 허강일 소설의 경우는 어떤 특징을 나타내고 있냐에 맞추어져 있다.
우선은 간결성이다. 전반 작품에는 복잡한 인물 설정이 없다. 심리묘사도 거의 없고 감정선도 간단하며 성격 부각도 결여되여 있다. 또 단락을 살펴보면 거의 한마디가 그대로 한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두마디 이상의 단락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리고 스토리도 복선이 없고 쭉 단선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대량적인 대화의 사용이다. 이 점에서 소품의 영향이 퍽 진하게 묻어난다. 대화로 사건을 전개하는 소품을 쓰던 습관을 소설에 옮겨와 인물형상 창조에 활용하는 것은 물론 슈제트 역시 대화로 풀어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번째는 소품 형식을 액면대로 차용한 경우이다. 장소가 변경될 때마다 첫머리에 “xx식당”, “xx노래방” 이렇게 이야기 전개 마당을 명찰 달 듯 밝혀놓고서야 이야기를 이어간다.
끝으로 렵기성을 들 수 있다. 허강일은 신기하고 자극적이고 희소성인 것에 집념하는 모양새다. 그것을 듣기 좋게 “읽을 재미”라고 발뺌한다. 그런 거라야 독자들이 흥취를 가지고 들여다본다는 억지와 같은 주장이다.
두번째 발표작인 중편추리소설 “흉수는 바로 그놈이였다”도 “어둠의 장막”처럼 비슷한 프레임으로 짜여져 있다. 작자 스스로는 중국 조선족의 첫 추리소설이노라고 강조하지만 솔직히 거기에 의미를 두기보다 지루했던 시간을 손쉽게 보낼 수 있다는 안도 같은 게 더 좋았지 않았나 싶다. 복잡한 언어구조를 머리 써가면서 파악하기에 앞서 쉽게 이야기 속에 몰입하여 주인공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게 무엇보다 중요했던게 틀림없다.
중편소설 “향에는 점심때가 없다”에서는 소품의 풍자와 희극성 수법이 고도로 발휘된 작품이다.
허강일은 이외에도 투고 상태로 있는 미발표 장편소설 2부가 더 있다. 한편은 사전에 미리 흔상했던 고로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소설의 경우”에 예속시켰다. 물론 아직까지 보지 않은 나머지 한편의 장편도 여기서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가의 경우
굳이 “시가”라고 지적한 것은 허강일은 시 창작과 동시에 가사 창작에도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를 문학으로 판단 가능하냐는 문제는 “소품의 경우”와 같다고 보면 된다.
허강일은 시창작에서 많이 즉흥적이다. 화장실에 앉아서 용변을 보면서 시 한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변소칸 시인”이란 별호가 붙기도 했다. 어머니날에는 부모를 쓰고 스승의 날에는 은사를 찬미한다. 그리고 무엇이나 눈에 들어오면 곧바로 시화한다.
누가 여성을/꽃이라고 부릅니까// 드라마를 한시간 보고도/ 세시간을 말 할 수 있고// 만나서/ 세시간 말하고도/ 전화로 또/ 통화하자는/ 막중한 분들입니다// 침대머리에서/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마력을 갖고 있는 분들을/ 누가/ 백일도 못 피는/ 꽃이라고 합니까// 얌전하게 다가와/ 최고의 결책자로/ 자동적으로 탈변하는/ 거룩한 분들을/ 누가 감히/ 꽃이라고 부름니까// 여성은 함부로/ 거론할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이고/ 지구이고/ 우주이며// 더욱/ 중요한 건/ 자식을 낳은/ 위대한 엄마입니다// (“누가 녀성을 꽃이라고 부릅니까?” 전문)
운률은 있을지 몰라도 의인법이나 비유, 과장, 류사한 속성의 매칭 같은 시적 언어 수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서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인 듯 싶지만 사실 이 시를 읽다 보면 저도모르게 끌려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매력이 어디에 있냐도 딱히 찍어 말하기 어렵다. 그저 마실하 듯 하는 언어조합인데도 묘하게 흡인되는 것은 독자들 모두가 공감하는 생활의 진실이 부각되였기 때문이 아닐가 짐작해본다.
시 “고향”을 보면 더 직관적으로 맞혀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아름답다/ 안보면// 슬프다/ 가보면// 그립다/ 언제나//
3련6행, 평시조보다도 작은 시이다. 어쩌면 요즘 온라인을 달구는 “디카시”와 비슷해보인다. 여전히 기술함량은 별로 함유되여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가슴은 싸해난다. 직관적이기는 해도 시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하면 궤변이 될가?
이런 류형의 시들은 제목만 봐도 일목료연하다. “한복을 입었습니다”, “스승의 날, 스승 옆엔 내가 없었다”, “취한 날 인생을 배운다”, “강냉이를 보면”, “고독하면 차잔을 들어라” 등등이다.
물론 가끔 가다 대세나 조류에 합류되는 듯한 시들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가 그것이다.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 바람에 속아/ 가슴을 벌리고/ 춤을 추었을 뿐입니다//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 줄기에서/ 쪼개져/ 갸냘프게/ 태여나// 오래도록/ 간직되고 싶어/ 이쁜 모습/ 보였을 뿐입니다// 꽃의 웃음소리/ 들어도 못보고/ 꽃이 웃었다고/ 맘대로 말합니다// 이쁘다는 리유로/ 좋은 말/ 맘대로 가져다/ 찬미합니다// 열매도 못보고/ 사라질/ 기막힌 운명인 것을 알면서도/ 활짝 웃었다고/ 말합니다// 꽃은 웃은 적 없습니다// 피여서/ 피여서/ 피여서// 시한부 생명을/ 살다/ 간/ 운명일 뿐입니다.//
“꽃”을 사람에 비견해 “웃는다”로 형용하면서도 실은 “열매도 못보고” “사라질” 운영이기에 “오래도록 간직되고 싶어” “이쁜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는 시적 화자의 능청스러움이 엿보여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허강일은 가사 창작에서도 괜찮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그가 쓴 가사에 곡이 붙어서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매주일가로 방송된 노래도 여러 수가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해변의 아리랑”이다.
밀려오는 파도에 한몸을 싣고
저 멀리 정처없이 가고 싶다오
구름 따라 흘러가면 내고향 보일가
갈매기 울음소리 구슬피 들리네
아~ 아리랑 해변의 아리랑
목메게 불러보는 해변의 아리랑
막내아들 손잡고 백사장 따라
저 멀리 정처없이 가고 싶다오
이 길 따라 걸어가면 두만강 보일가
백사장 모래우에 망향가 적어보네
아~ 아리랑 해변의 아리랑
목메게 불러보는 해변의 아리랑
고향을 멀리 떠나 연해지역에 자리잡은 나그네의 망향가라고나 할가. 가사이니만큼 글자수를 맞추고 격식을 갖춘 고루함도 엿보이나 누구나 가슴 언저리에 파묻은 말을 직설적으로 피력했다는 데서 공감을 자아내는데는 충분했다는 평가이다.
이 노래는 연변라디오와 연변티비에서 매주일가로 방송했고 설맞이야회에도 올랐으며 노래방 가사 목록에도 올라있다.
시나리오의 경우
허강일은 “문인은 가난하다”는 명제에 항상 억울해하고 불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문인은 스스로 그 난처하고 난감한 궁지에서 벗어날 방식과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제는 중국 주류문단으로 진출하는 것이 하나의 지름길일 것이라면서 청도 주재 조선족교수들을 묶어 자신의 소설을 번역한다고 납뜨더니 후에는 조선과 한국이란 모국에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작가가 못산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며 예전에 문인은 서발 막대기를 휘둘러도 거칠게 없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모두 자신들이 못났기 때문이였다는 견해였다.
요즘 허강일은 또 하나의 루트를 발견한 모양새다. 이를테면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줄을 대야 한다는 야망이 생긴 것이다.
따져보면 허강일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데는 원인이 있다. 그의 장편소설과 추리소설이 발표된 후 그것을 드라마로 각색하겠다고 나선 제작사가 있었다. 아직도 검토중이기는 하나 허강일한테는 큰 힘이 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즉흥적이고 무슨 일이나 준비 없이 시작을 하는 허강일은 아예 내가 시나리오를 직접 쓰면 더 좋지 않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쉽게 생각하는 만큼 쉽게 접어드는 허강일이다. 그래서 요즘 미니 드라마 극본을 하나 창작했다. 물론 제작사의 요청이 전제되여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출구전략을 고민하는 허강일의 탐색전 겸 시도라고 보아도 무난하다.
시나리오는 소품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 물론 소품의 언어는 대부분 대화이지만 시나리오는 장소와 행동거지 그리고 환경묘사 같은 것이 가첨되고, 또 소품은 하나의 공간에서 진행되지만 시나리오는 시간과 공간이 수시로 변경된다는 차이점은 있다. 그러나 대사가 차지하는 비례와 박스식의 프레임에서는 거의 구별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황금단지”란 제하의 이 시니리오의 등장인물 분석만 봐도 대강 이야기 줄거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
김만복: 허풍쟁이, 황금단지를 발견한 사람, 고추자의 남편, 다단계에 말려들어 빚을 가득 걸머진 사람.
진동팔: 다단계 주모자, 새로운 돈벌이 항목에 미쳐 돌아가는 말 박사.
강수복: 리혼녀, 다단계 피해를 봤던 녀자, 쉽사리 허풍에 넘어가는 숙맥.
최룡국: 총각, 지식은 좀 있으나, 귀구멍이 너른 사람. 온라인판매에 대해 대충 아는 사람, 형세는 잘 아는 것 같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최로인: 춤꾼. 최룡국의 아버지, 수복의 로모 분녀와 황혼련을 꿈꾸는 관계.
방분녀: 최로인의 무용 파트너. 수복의 로모, 딸이 새 가정을 이루면 출가하려는 늙은 소녀.
김진호: 실사구시적인 상공인, 작은 가게를 차려놓고 열심히 사는 사람.
신지애: 조금은 들뜬 녀인, 김만복이가 추구했던 녀자, 새로운 것을 쉽게 접수.
오서기: 진에서 파견해온 당지부서기, 구체적인 업무는 모르나 실적을 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
박촌장: 주견과 식견이 없지만 욕심이 많은 사람.
고추자: 성격이 불같고 인간성이 돋보이는 체격이 억대한 녀자, 조호덕에게 끌려 다단계에 망했던 녀자
조호덕: 황금단지 막후 지휘자,
송창남: 지혜로운 공안일군. 시공안국에서 파견되여 온 빈곤부축 일군,
이 슬: 다단계 피해자가족 어린이. 고추자가 입
드라마로 촬영될 경우를 대비해 더이상의 토설을 절제하고 여기서 멈춘다. 단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만 보아도 틀림없이 허강일의 장끼인 코믹과 개그 그리고 렵기가 주 흐름일 건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간단명료한 필치가 여기서 극치를 이루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의 경우
허강일한테는 수필도 수십편이 있다. 대개는 사회현상을 질타하는 미니수필들이다. 수백자에서 천자가 좀 넘는 글들이 태반이다. 필을 댔다 하면 장편을 끌어내는 허강일이 수필에서만은 필묵을 아끼는 리유를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구미에 맞지 않냐고 보면 열흘이 멀다하게 한편씩 뽑아내고 그렇다고 할 말이 태산 같을 거 같은데 답새겨 나온 걸 보면 고작 천자 미만인 경우가 많다. 불가사의란 말을 이런 경우에 쓰는가 본다.
수필에서도 허강일은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기교에 얽매이지 않고 딱 할 말만 하고 거기에 따끔한 침을 놓는 것이 일반적인 수법이다.
얼마 전 월드옥타 청도지회의 전임회장이 인기 정상에서 련임을 포기하고 단체장에서 물러나 화제를 모았다.
그는 산발적이던 단체를 200여명 회원을 거느린 방대한 경제단체로 체계화시켰고 국내외에 청도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련임의 문턱에서 사양했다.
그는 비단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회장을 원칙적으로 련임하지 못한다”고 정관까지 고쳐가며 회장 련임에 제동을 걸었다.
리유는 한가지-신진대사는 빠를수록 좋다는 자연을 섭리를 따른 것이였다.
그가 리임하는 날 200여명 회원들은 한결같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제가 잘한것 같습니까? 저보다 더 훌륭한 분이 분명 있습니다. 말뚝박기 인사는 한 단체의 발전에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마십시요. 인재가 없는 단체에 무슨 비전이있겠습니까? 저는 수레를 밀어주기 위해 수레에서 내렸습니다.”
그의 의미심장한 말이 귀에 쟁쟁하다.
그는 가장 깨끗한 마무리를 했고 회원들 속에 멋진 신사로, 공신으로 각인되였다.
자리의 매력은 끝없다.사람이 자리를 만드는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설사 그것이 생산대 대장 자리일지라도 매력은 여전하다. 호통 치던 사람이 호통질을 받아야 하는 립장이기에 더구나 그렇다.
방관자가 볼 때에는 “그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심할 뿐이다.
고인 물이 썩는다고 한 자리에 오래 묵을수록 “탈”도 많고 “말”도 많아진다.
박수칠 때 떠나라!
수레를 밀겠으면 수레에서 내려야 한다.
“수레를 밀려면 수레에서 내려야”라는 수필의 전문이다. 짥막한 글이라 전편을 옮겨놓는 것이 독자들의 리해에 더 편할 거 같아 퍼왔다. 작은 편폭에 큰도리를 담았냐 하면 대서특필도 없고 청산류수도 아니고 미사려구도 찾아보기 어렵다. 할 말만 딱 하고 맞춤하게 “수레”에서 내린 형국이다.
이런 미니수필이 현시대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하나의 추세를 이루고 있다. 누구라 없이 바쁜 세상이고 하나같이 여유가 모자라는 판에 미니수필은 문화욕구를 충족해주는 하나의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후에 적당한 계기가 나지면 미니수필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볼 생각이다.
맺는 말
한 때 우리 문단에 소비성문학에 치우친 작가가 나타났었다. 정통문학계에서는 소일거리, 마실거리에 불과하다고 타매를 받은 대신 일반 독자층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강일 작가가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오락성에 치우친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냐를 한번 토론해봐야 할 거 같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을 놓으면 스토리만 머리에 떠오를 뿐 아무런 여운이나 감동이 없는 소비성 작품, 즉석에서 휘갈겨 써서 던져주면 한번 피끗 보고 씨익 웃은 다음 던져버려야 하는 일회용 작품, 기교보다는 취미성에 더 치중한 유희형 작품들의 존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중국 영화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허용되고 또 인정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례로 풍소강(冯小刚)이 감독하고 갈우(葛优), 왕보강, 범위, 송단단, 성룡, 리영, 량천 등 한다 하는 배우들이 출연한 “개인맞춤제작(私人订制) 은 실생활에서는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실현시켜준다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대부호가 되고 싶다거나 권세가가 되고 싶을 경우 회사에서 고래등 같은 별장 또는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갖추어놓고 한동안 부자 노릇 또는 벼슬놀이를 하게 한다는 황당극이다.
또 문장(文章)이 감독하고 알리바바그룹의 마운과 리련걸, 오경, 홍금보, 황효명, 견자단 등 유명인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공수도(功守道)도 무술을 련마한 마운이 세상을 휩쓸다가 나중에 파출소를 무슨 무술의 본산으로 잘못 알고 쳐들어간다는 얼토당토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차피 소일거리로는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저것도 영화냐고 타매하는 사람도 없는 듯 싶다.
허강일은 자기는 작가가 아닌 잡가로 되련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작품은 첫째도 둘째도 재미라고 왼심을 쓰는 허강일은 자신의 소설을 3천자를 읽어서 볼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바로 버리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보귀한 시간을 들여 마른 우물을 들여다볼 까닭이 없다는 주장이다.
아무튼 허강일 현상으로부터 소비문학에 대해 한번 점검하고 쟁론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