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산동, 그 무궁한 문학공간과 발전 잠재력
과거, 현재와 미래로 살펴보는 산동조선족문학
장학규
□ 들어가는 말
중국 조선족문단으로 놓고 말하면 산동은 많이 생소하고 후진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산동쪽으로 눈길을 돌려주는 평론인들이 거의 없다. 문단 행사를 해도 동북3성과 북경 등 전통적인 문단 구조내에서만 진행하고 산동은 아예 념두에도 없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조선족이 대규모로 산동반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여온다. 저그만치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리고 인구도 이젠 20만 명을 훨씬 웃돈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태여난 흑룡강성 목단강지구의 조선족인구보다 더 많은 수치이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여직 우리의 문화 터전이 전혀 마련되여 있지 않다. 공립 민족학교가 단 한곳도 없는것은 물론 문화관이나 예술관도 없고 합법적인 잡지사도 없다. 이곳의 문인들은 한마디로 고군분투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행한 일이 있다. 고향문단에서 이미 자리를 굳혔거나 또는 문학에 뜻을 둔 문인들이 하나둘씩 자꾸 이곳으로 합류하고 있는것이다.
이보다 더 다행한것은 각자 도생하던 이곳 문인들이 민간단체이기는 해도 “작가협회”란 이름으로 한데 뭉친것이다. 그리고 회원작품집을 해마다 간행하고 있는것이다.
이제는 산동에 주목해도 괜찮을것이다. 아니, 산동을 간과할수 없을것이다. 문단에서의 산동분동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리유는 산동의 과거, 현재에 대한 점검과 미래 가능성에서 보아낼수 있을것이다.
□ 조선족의 산동진출 시대배경과 현황
중국은 1976년 문화대혁명을 종결시키면서 세계 대가정으로 귀환했다. 특히 80년대 초반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의 문호를 대외로 개방하면서 새로운 경제건설의 붐이 일어났다.
산동성 청도시는 중국에서 최초로 대외로 개방한 14개 연해개방도시중의 하나로서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물가의 루대가 먼저 달을 얻는다고 그중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이 가장 선참으로 기회를 포착했다. 청도의 닭울음소리가 인천에서 들린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과 산동은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많은 인연을 가지고있었다.
한편 인근의 연태시와 위해시 등 연해지역에는 신라방이 여러곳 있었고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법화사 등 우리민족 선조들의 흔적과 발자취가 력력히 남아있었다.
이런 연고로 산동에는 일찍 우리민족 후예들이 더러 살고있었다. 그당시 청도를 비롯한 산동지역에는 퇴직군인, 과학기술자, 교사, 의사 및 특수 공업분야에 종사하는 전문 기능공 등 수백명에 달하는 우수한 조선족들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연태시 량가(梁家)촌에 사는 문분녀씨는 한국에서 화교인 남편을 따라와 70여년 말동무 하나 없는 동네에서 외롭게 살아왔다. 산동에는 이렇게 말할수 없는 사연으로 이름없이 살아온 조선족녀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제남군구 모부 참모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박인혁씨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60년대에 중조어업협정에 의하여 연태와 석도 등 항구 부근에는 조선어선들을 위한 조선족 통역들이 배치되였었다. 70년대 초반에는 조선족 군인들로 꾸려진 축구팀만 해도 3~4개 정도였다고 하며 그후 70년대 중반 46군단이 길림에서 산동으로 교체 주둔하면서 더 많은 우리민족 군인과 가족들이 이주해오면서 우리민족 여성군인 아홉자매의 사연이 “연변일보”에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
연태개발구에 위치한 연태동성(집단)공사에는 100여 세대 300여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 연태동성공사의 전신은 길림성 반석시 모 산골에 위치해있던 국가병기공장이였다. 개방후 국가 지령에 따라 1988년에 병기공업부로부터 수도강철공사에 귀속되였고 에어컨 생산합작자를 찾아 1993년도에 연태개발구로 집단 이주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런 기회와 배경으로 인해 산동의 첫번째 외자 기업은 당연히 한국의 몫이였다. 세계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은 중국과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까왔을뿐만 아니라 200만에 달하는 중국국적의 동포들을 가지고있었기에 언어 인문적으로도 우세를 가지고있었다.
아직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전인 1989년에 토프톤전자회사가 첫 한국독자기업으로 아름다운 해변도시 청도에 자리매김함에 따라 한국기업의 청도진출은 터진 봇물마냥 줄을 이었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7년에 이르러 재 청도 한국 기업수는 이미 6,000여개에 달했으며 한국 교민수도 12만 명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중국 동북3성 등 전통적인 거주지에서 조선족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2008년에 만난 청도시민족사무위원회 마전진(马前进) 부국장에 따르면 2000년도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청도시소수민족 호적인구가 3만 3천명으로 밝혀졌으며 3개월 이상 거주하는 유동인구는 20만 명이 넘는것으로 파악되였다. 그중 조선족인구가 절대대부분이라고 한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불황으로 떠나간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전체 산동성적으로 계산하면 현재 역시 2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살고있는것으로 추산되고있다. 호적인구도 8만명에 접근하는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부와 학술계 차원의 조사연구사업이 간간히 이어지고있다. 일찍 2007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리론정책연구실 박영일처장이 청도시를 방문하여 조선족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경청하였으며 2008년에는 천진시민족사무위원회 유홍원 연구실 주임이 남개대학 연구생들을 데리고 “도시진출 조선족사회”란 쩨마로 현지 답사를 다녀갔다. 2008년 산동성 중국공산당간부학교와 산동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공동으로 “산동반도 진출 조선족현황 조사”를 실시했으며 2010년에는 중국해양대학교 한국연구중심에서 “청도지역 조선족사회의 어제와 오늘”이란 테마로 좌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어 2011년 말에는 북경 중앙민족대학에서 중앙통전부 민족종교국 조학의 국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김성화 당위 부서기, 정책법규사 심림 처장 등 10여 명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청도조선족사회문제 해결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 민족사회의 형성과 문화형태
1992년 8월 24일 중한수교는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산동에 유입된 촉매제였다. 정부 산하의 투자유치국을 중심으로 세관, 은행, 병원, 관광, 법률, 호텔 등 분야의 조선족 인재들이 속속 전근되여 왔으며 한편 대학졸업생 위주로 시작된 한국기업관리일군들도 수요량이 늘어나면서 고중이하 출신들로 서서히 범위를 넓혀갔다.
조선족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는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은 민족교육문제였다.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조선족들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반면에 애들은 민족학교가 없어 동화될 위험에 노출되였다. 공립학교 설립을 위해 퇴직 군간부인 현귀춘씨를 위시한 유지들이 뛰여다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2000년 8월에 이르러 청도에 사립조선족학교가 세워지면서 그나마 민족교육의 명맥을 이어갈수 있었다. 현재 청도에는 정양학교와 서원장학교 등 2개의 사립조선족학교가 있고 연태에는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가 주관하는 주말학교가 수년간 가동되고있으며 위해시에도 여성협회 주도로 조선족어린이한글반을 운영하고있다.
다음은 조직의 부재이다. 고향에는 조선족마을이 있었고 정부에도 민족간부가 따로 있었지만 이곳에는 조선족을 통일적으로 관리할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현재까지도 각종 민간단체들이 난립하고 각자가 먹고 즐기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래도 문화의 기갈이였다. 민족이 생존해나가는데는 문화가 우선적인 요건이다. 교육이 상실되고 조직이 전무한 상태에서 문화의 전승이란 한낱 빈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1997년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의 설립은 하나의 리정비적인 사건이였다. 이 지사는 자체로 지역면신문을 발행하여 산동한겨레사회소식을 전달하는 한편 “푸른섬”이라는 문학 부간도 창간하여 처음으로 산동진출 조선족문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지면의 제한으로 부간이 취소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작품 특집을 짬짬히 펴내고 있다. 이 신문을 통해 알려진 작가들로는 리문혁, 김건, 류일복, 김미령, 송련옥, 리화, 최재문, 김운천, 홍걸, 리길룡 등을 들수 있다.
2005년에는 문학전문지인 “송화강”잡지가 청도에 진출했다. 이로써 산동조선족문인들은 비로서 자기의 진지를 가지게 되였고 본격적으로 문학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려나갈수 있었다. 2010년 초에 할빈 본사로 전략적인 철수를 하기까지 “송화강”잡지는 산동조선족문학창작활동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했다. 이 잡지를 통해 활약한 작가들로는 김기덕, 리호원, 김춘택, 리홍철, 조광명, 홍군식, 유해금, 홍순범, 박영희, 장학규 등을 들수 있다.
이에 앞서 2005년 4월에 창간된 “꽃노을”잡지(주필 김재룡)가 있다. 청도조선족로인협회 회간으로 출발한 이 잡지는 10년간 32기를 발행했으며 현재 잡지명을 “해안선”으로 고치고 더 넓은 독자층을 상대로 하게 되였다. 해안선문화전파유한회사로 소속을 바꾸면서 비교적 합법적인 신분이 된 “해안선”은 상업잡지가 판을 치는 치렬한 경쟁속에서도 광고 등재를 한사코 거절하면서 종합잡지의 길을 고집하고있다. “해안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된 작가들로는 김재룡, 홍영빈, 한춘옥, 정순금, 김명숙, 전향미, 최균필, 차설매, 홍태수, 장향화 등이다.
□ 문학단체의 설립과 주요 활동
문인 동아리나 문학지가 전혀 없는 신 개간지에서 산발적으로 “연변문학” 등을 통해 문학창작활동을 벌려오던 산동지역문인들에게 고향에서 원격 지원을 나온 언론매체와 문예지는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2000년 1월, 청도에 위치한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 회의실에서 연변작가협회 산동창작위원회 설립식이 있었다. 산동진출 조선족문인들의 첫 모임이기도 한 이날 설립식에는 산동성 각 지역에서 14명 대표가 모여왔으며 그중에는 한문으로 창작하여 중국주류문단에도 알려진 김창용씨와 백결씨가 들어있었다. 창작위원회 주임으로는 “김구평전”을 쓴 김운룡 작가가 선출되였고 부주임에는 김기덕과 장학규 그리고 청도대학의 리춘자 교수가 당선되였다. 당시 통계로 산동성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12명 있었다.
이 창작위원회는 2002년에 “연해문학”이란 회원작품집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김운룡선생이 암으로 투병하다가 작고하면서 흐지부지해지게 되였다.
이에 이어 2006년 하반기에 원로시인 리상각의 후원하에 김춘택의 창도로 재청도시인들로 '시조협회'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김기덕, 홍영빈, 리호원, 조광명, 홍군식, 송련옥, 김춘택, 리홍철, 박창묵 등 기성시인들이 참여했다. 아울러 청도조선족학교인 벽산학교에서 시조경색을 조직하는 등 나름대로 문학창작을 진행하는 동시에 사회활동에도 참여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시조협회는 문인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이도록 이끈 촉매역할을 놀았지만 문체의 국한성 때문에 산동에 거주하고있는 많은 작가들이 함께 어울리기 어려웠다.
당시 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더욱 많은 문인들이 산동에로 유입되였으며 청도대학, 중국해양대학, 청도농업대학 등 고등학교들에 한국어학부가 설립되면서 전업적인 문학리론가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후비력도 성장하고있었다.
이런 형세하에서 시조문인협회는 더 이상 문인들의 터전이 될수 없어 그 사명을 다하게 되였다. 대신 새로운 문학단체가 잉태하게 되였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청도연해조선족문인협회'이다.
이 협회는 2007년 12월 28일 청도에서 설립되였으며, 초기 회장에 리호원이 당선되고 김춘택이 수석 부회장 겸 비서장으로, 장학규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였다. 그후 2기, 3기 회장에 리홍철이 련임했고 현재 제4기 회장에 리문혁이다. 2013년 12월 이 협회는 회장단 회의를 통해 “청도조선족작가협회”로 명칭을 변경시켰다. 비록 청도라는 지역명을 사용하지만 회원은 산동성 전 지역에 포진해있으며 연변작가협회 회원만 18명 포함되여있다.
2008년 7월에 리호원 주임, 장학규 부주임으로 된 연변작가협회 청도창작위원회를 재설립하면서 청도조선족작가협회와 더불어 투톱 역할을 하고있다. 지금까지 모든 활동은 두 단체의 련합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실상 수뇌부는 하나로 통합되여있다.
이 협회는 해마다 계절에 따른 정기모임을 이어오고있을뿐만 아니라 “갯벌의 하얀진주”로 명명된 회원작품집을 이미 5권이나 발간했다. 30만자가 넘는 대형작품집인 “갯벌의 하얀진주”는 산동조선족문학인들에 대한 집중 조명인 동시에 산동조선족문학의 기념비로 점차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울러 2009년 2월 재중한국인회 정효권 회장의 후원을 받아 “리커문학상”을 시상했고 2011년 12월에는 청도시 성양구조선족기업협회의 협찬을 받아 전국을 상대로 “연문컵문학상”을 공모하여 성공적으로 시상식을 치르기도 했다.
한편 2012년부터 해마다 청도정양학교와 청도서원장학교를 상대로 백일장을 펼치고 있다.
∋ 창작활동과 성과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게 된다.
산동지역의 작가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와중에도 창작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단체의 힘을 살려 “청도특집”으로 각 잡지사에 등업했다. “송화강’은 모태였던만큼 해마다 특집이 실렸고 “연변문학”은 2011년 7호와 2013년 12호에 게재되였으며 “도라지’잡지는 2014년 2기에 발표되였다.
물론 개인별 작품 창작은 더욱 풍성했다. 김운룡, 김기덕, 조광명, 장학규, 리홍철 등이 선후로 각 문예지의 집중 조명을 받았으며 허강일은 2014년 4기부터 장백산 잡지에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을 련재하기 시작했다.
개인작품집도 줄기차게 출간되였다.
김운룡은 2000년에 인물전기 “김구평전”을, 2002년에는 중단편소설집 “화려한 시절의 동화”와 대하력사소설 “광야의 아리랑”을 출간했으며 김기덕은 2001년에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를, 장학규는 2003년에 수필집 “머리잃은 곤혹”과 2014년에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을, 홍영빈은 2006년에 시집 “바람의 색갈”과 2013년에 시집 “바람가는 길”을, 조광명은 2012년에 수필집 “그리하여 마침내 도시여”를, 김춘택은 2008년에 동화집 “닭털비를 맞고 무너진 로마제국”을, 홍군식은 2006년 시집 “360℃고독”, 2008년에 르포 “시대를 클릭하는 CEO”(합저)를, 김운천은 2015년에 수필집 “언덕길은 걷기가 좋아”를 출판에 교부했다.
문학상 수상 정황도 가히 대풍년이라고 할수 있다.
김기덕은 2001년에 한국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수상을 시작으로 겉잡을수 없이 2009년에 시 “부엉이 바위(외3수)로 문학세계 제5회문학상 시부문 금상을, 2011년 시 “알고싶은 영일만”으로 제1회 청마문학상 부상을, 2011년 시 “못 다간 그 길”로 “연문컵” 대상을, 2012년 8월 시 “정미소(외3수)”가 제2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상을, 2013년 8월 제3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상 공로상을, 2014년 시 “가을빛”으로 료녕일보 기원컵 압록강문학상 시 부문 금상을, 2014년 8월 제4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문학공모 공로상을 획득하는 등 장거를 이루어냈다.
조광명도 2009년 11월 도라지 수필 대상을 따안은데 이어 2010년에는 단편소설 “날개를 심다”가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대상을 획득하였으며 2011년에도 소설 “하품”으로 제31회 “연변문학상” 우수상을 거머쥐였다.
장학규는 2005년에 수필집 “머리잃은 곤혹”으로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3등상을 수상했다.
리화는 2012년에 수필 “선녀야 계곡물에 막걸리 부어라”로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부상을 받은데 힘입어 2014년에는 수필 “겨울수채화에는 그리움이 물들고”로 “흑룡강신문 제2회 랑시문학상” 우수상을 차지했다.
이외 홍영빈은 2008년 “리커문학상”을, 리홍철은 시 “이 계절 추락하는 나무잎에”로 한국해외문화교류회 대상을, 전향미는 2015년 수필 “고향에는 지금도 눈이 내린다”로 한국 “동포문학” 수필부문 우수상을, 최재문은 2014년 수필 “코끼리아저씨의 족쇄”로 제3회 연변작가협회 가야하인터넷문학상 최우수상을, 한춘옥은2009년 수필 “하나 하나의 아픔을 이기면서”로 제1회 연변인민방송국 생활수기 대상과 2011년 시 “하늘나라”로 “연문컵” 가작상을, 김명숙은 2009년 수필 “엄마야 아빠야”로 “료녕조선문보” 제1회 “기원컵”압록강문학상 우수상과 2010년 수필 “파란 꿈을 이루기까지”로 연변인민방송국 생활수기공모에서 우수상을, 김미령은 2000년 수필 “바다가 준 행복”으로 “은하수”잡지 “영동컵” 2등상을 수상했다.
작품수가 방대한것은 물론 창작성과 역시 눈부시다는것을 알수 있다.
∋ 대표작가 및 작품 분석
1, 김운룡과 대하력사소설 “황야의 아리랑”
김운룡은 1943년에 길림성 부여현에서 태여났다. 36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지만 왕성한 창작열정을 보이면서 선후 단편소설집 “사랑의 그림자”, 장편소설 “밀림의 딸”(공저), “새벽의 메아리”, 전기 “리홍광의 이야기”, “남만봉화”, “김구평전”(한문) 등 10여권 작품집을 출판했으며 조선족문단에서 널리 명성이 알려져있다.
“황야의 아리랑”은 미완성의 대하력사소설이다. 김운룡은 이 소설을 9부작으로 설정하였지만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1권 3부만 완성하고 아쉽게 저 세상으로 떠났다.
소설은 우리민족의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사를 쓰고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가시밭길과 그 수난의 과정에서 펼쳐지는 줄기찬 투쟁, 그리고 주인공들의 애잘한 사랑이야기를 엮고있다. 특히 주목되는것은 작자의 남다른 용단으로 리념적금기지대에 깊숙이 들어가 소외되고 외곡되고 굴절된 력사의 진실을 밝힌것이다. 이 대하력사소설에서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실명이며 이들의 사상에 덧칠하지 않고 그대로 비추었는바 안중근, 홍범도, 김좌진, 김구, 리동휘 등 민족주의자들의 반일투쟁을 정면에 놓고 직접 묘사해 금구를 돌파하여 력사의 진실에 다가섰다는 평을 받았다. 이 소설은 또한 반세기에 걸친 우리민족의 반일투쟁사를 전면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혹은 편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극복한것으로 하여 역사자료적가치를 가지고있다.
한편 이 소설은 또한 가족사와 민족사를 밀착시켜 한 가족의 가족사로부터 민족사, 특히는 우리민족 독립투쟁의 투쟁사를 엮고있다. 뿐만아니라 애정선과 민족수난사의 밀착, 서사와 서정, 철리의 밀착도 이 소설이 안고있는 특징이다.
2, 김기덕과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
김기덕은 1950년 길림성 교하시에서 출생하여 1972년부터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선후 연변제일사범학교와 연변대학 통신학부 정치전업을 졸업했으며 1993년에 청도에 진출했다. 1981년 시 “코스모스”로 등단한 김기덕은 현재까지 3000여 수의 시와 수십편의 수필을 발표하여 조선족문단의 다산작가로 손꼽히고있다.
한편의 좋은 시를 세상에 출품시키는 작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시를 써본 시인들은 잘 알 것이다. 한 수의 시를 완성하기 위하여 여러 번 갈고 깎고 다듬고 지우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몸에 깊숙이 배여있다.
일년에 수백편의 시를 써오면서 한 수의 좋은 시를 내여놓으라면 그리 만만치 않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시속에 시인의 예리한 초점이 맞춰지고 최대의 카리스마로 압축시킨 강도 높은 함축이 시행마다 깊게 깔려 있는 시, 읽어보면 손으로 만져질것 같고 코를 대면 예상했던 글향이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을 할것만 같은 시를 일년에 한수를 창작한다는것이 그리 쉽지를 않은것이다
2002년 저자가 한국 월간 문학세계에서 출판한 시집 “천년이 가도 잠들지 않는 파도”에서 “풀잎”이란 시가 그 례로 들수 있다. 즉 100년이 넘는 시간을 세개의 단어로 함축시키고 다이아몬드처럼 강도 높은 빛을 발산하게 하는 노력이 뚜렷하게 엿보여주는 것이 자랑스럽다.
풀 잎//그 어느날 밤/짚신이 지나가고/그 어느날 밤/ 고무신이 지나가고/그 어느날 밤 구두신이 지나가며/厄이 풀잎에 길게 누웠다//넘어진 풀잎은 누워서/설레는 소리를 연습하고/그 뒤에 황소같은/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밟히면 일어서고/또 밟히면 또 일어서고…/끝끝내 일어서는//풀잎에도 厄을 딛고 일어서는/뼈가 있나 보다//그것으로 끝이 없는 들/만경창파에/책 한권 쓰나보다//
풀잎은 이 세상의 높이를 전부 남에게 사양하고 자신은 가장 낮은 바닥을 선호하며 짚신에 밟히고 고무신에 밟히고 구두신에 밟혀 사는 흔히 볼수 있는 우리민족의 력사와 너무나도 가까운 일이다. 짚신 고무신 구두신으로 한백년의 력사를 함축시키며 강한 뼈로 밟히면 일어서고 또 밟히면 또 일어서는 기백과 지혜가 력력히 숨쉬고 있음을 감지할수 있는것이다.
3, 홍영빈과 시집 “바람 가는 길”
1939년 흑룡강성 통하현에서 태여난 홍영빈은 병약한 신체와 가난한 살림때문에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굳은 의지와 이악스런 노력으로 1973년에 처녀작 “봄은 어디에”로 등단, 현재까지 시집 2권과 300여 수의 시를 발표했다.
“바람 가는 길”은 1장 “나를 찾아서”, 2장 “세상과 세월”, 3장 “바람과 나무와 별과 시”, 4장 “생명예찬” 등 총 4장으로 나뉘여졌다.
홍영빈의 시는 시골집 무쇠솥에 우려낸 구수한 숭늉같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것 같다. 현란한 언어가 없지만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솔직한 표현과 알송달송한 몽롱미가 없어도 마음까지 편한 시어의 선택은 홍영빈만의 창작풍격이다.
막차 //밤 아홉시 정각 /나는 집에 가려고 막차에 올랐다/ 네온등 꽃 수놓아 협곡을 달리는/ 막차에 앉아서 해보는 자문 / 이제 훗날 그 어느 역에서/ 마음 놓고 안식처에 내려야 할 / 막차를 탈 승차권은 / 마련 되었는지?
시에서의 막차는 마지막 뻐스가 아닌 시인이 살아온 전반 인생에 대한 회고의 시간인것 같다. “막차”를 보면 시인 자신이 보인다.
자맥질 // 물속 자맥질로 먹이 사냥하는 물새가 / 물의 깊이를 다는 모르고 살 듯 / 하늘을 자맥질하며 노니는 날새도 / 하늘의 높이를 다는 알지 못하지만 / 새들은 저마다 즐거운 삶을 사는거다 /…
주어진것에 만족하고 주어진것을 누리는 삶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홍영빈 시인도 스스로를 날개를 펼줄 아는 한마리의 새라고 했다. 좋아하는것을 마음껏 할수 있는 자유를 가진 스스로가 날개를 펼줄 아는 새라는것은 홍시인의 만족스러운 삶을 말하는것이 아니겠는가?
4, 최균필과 중편소설 “봇나무”
최균필은 1939년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했다. 할빈농업기계학원을 졸업하고 문화대혁명때 투쟁을 받으면서 그토록 사랑했던 문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있다. 1955년 “연변문예”에 단편소설 “부임’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선후 “연변문예” 신춘문예상, “연변문예” 가작상을 수상했다.
“봇나무”는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이 일인칭인 “나”로 시작하는것도 그렇고 이름이 작자가 쓰고있는 필명인 “최해”인것도 그렇고 또 “할빈농업기계학원의 재교생”이라고 밝힌것도 그렇고 틀림없는 작자 자신이다.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 하루아침에 우파로 몰려 대흥안령 오지에 있는 군마장으로 끌려간다. 사랑하던 러시아 처녀 올랴를 잃은 대신 대도시 상해에서 온 소연이라는 처녀와 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다. 조선족총각과 러시아처녀 그리고 상해 한족처녀란 삼각관계는 그 자체가 취미성을 한층 돋구게 된다. 물론 두 감정이 모두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그대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그보다 그런 애끓는 사랑을 통해 그 저주스런 년대에 대한 타매 강도가 한결 강해질수밖에 없는게 묘한 장치가 아닐수 없다. 사람들은 행방이 묘연해진 올랴로 인해 아쉬움을 느끼는 한편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그 비인도적인 세상을 탓할수밖에 없고 소연이의 결과를 통해 사람에게 지역과 신분의 차별을 만들어놓은 인간세상을 한탄할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소설의 력사적 사명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싶다.
5, 김건과 그의 “돌” 계렬시
1941년 길림성 연길시에서 출생한 김건은 1962년 통화시지질탐사학교를 졸업하고 지질탐사사업에 종사했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중화전국공상업련합회 석재업상회 회장직을 력임했다. 1979년 처녀작 “진달래”로 등단한 로익장으로 현재까지 400여 편(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원로 시인 김건은 석재사업을 하면서 시를 다작하였는데 특히 연변시인협회 "시향만리" 2012년 제9호에 발표한 시 "돌"(외 44수)이 대표성을 띠고있다. 김건은 입이 없는 돌과 특별한 사랑을 나누면서 특이한 초인간적인 감각으로 돌과 남다른 대화를 하고있다.
"돌"// 태초에 철없는 돌은/정에 뜯기워 다듬어졌다/골 지나 벼랑에 부딪친 모래알 같은 정소리/심산에 부셔져 아픔으로 헤매이다/ 거치른 손에 내려/ 장알이 되여 못으로 박혔다//돌은 광음에 실려 발돋움하고/인간은 초침 우에 걸음마를 익혔다/어느덧 돌은 톱에 썰리여 다듬어졌다/다이아몬드의 굳음에 찢기여/돌이 훤칠한 몸매로 계단에 오를 때/거치른 아픔에 제몸을 가누기 어려웠다.//기구한 돌의 운명은/한때의 기억으로 빛나다/광풍이 몰아치던 어느날/돌은 물에 베이어 다듬어 졌다/돌은 처음으로 아픔을 잊었다/그리고 멀지 않아 호텔로 들어설/그 날을 머금고 눈부시고 있다//
못난 돌이 석공을 만나면 이미지가 변화되듯이 돌이 김건 시인을 만나면 좋은 시가 되는 리유가 바로 돌에 대한 오랜 기간 깊은 애착과 세심한 관찰 그리고 끈질긴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시 “돌”의 첫 련에서 “철 없는” 돌을 석공의 정에 의해 새롭게 변신되는 돌의 리성적인 성찰을 밝은 재 조명에 맡겨두고 시의 2련과 3련에서는 눈부신 호텔로 이주하는 참신한 결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대목이 유난히 이색적이었다. “돌”외에 깊이 있고 무게 있는 수편의 시가 있었다. 선인들의 말씀처럼 돌 하나로 탑을 세울수가 없듯이 향후 청도작가협회의 영예로운 앞날은 수많은 돌로 일어설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6, 장학규와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
장학규는 1964년 흑룡강성 해림시에서 태여났으며 선후 료녕신문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신문사에서 편집, 기자로 근무해왔다. 1984년에 데뷔하여 현재까지 여러가지 쟝르의 작품 300여 편을 발표했으며 수필집 “머리 잃은 곤혹”과 단편소설집 “청도로그인”을 출간했다.
“청도로그인”은 15편 단편소설 전부가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다는데서 다소 이색적이다. 그리고 연해진출 조선족들의 삶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재현시켰다는데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는 절망의 변두리까지 몰린 사업가가 기적적으로 생의 의욕을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있다. “갈대의 뿌리는 얼마나 깊을가”에서는 젊은 창업자의 밑뿌리를 파내고있다. “가장자리”에서는 약세군체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고있으며 “바람의 옵션”에서는 뿌리를 함께 하고있는 두 남녀가 이역타향에서 펼치는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를 다듬고있다. “인저리타임”은 민족렬근성이 객지에 와서도 근절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었고 “조깅”은 민족의 출로를 탐색하고있어 주목된다.
이외 글들도 역시 동일한 배경에 놓인 부동한 인물들의 형상을 통해 조선족들의 창업사, 이민사를 재생하고있으며 나아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점과 향후 나아갈 길 등을 고민하고있다.
“청도로그인”은 제목이 제시하는바와 같이 문학작품집에 앞서 조선족의 새로운 이민력사기록과 같은 존재로 봐도 무방하다.
7, 리홍철과 단편소설 “줘마”
1972년 길림성 화룡시에서 출생한 리홍철은 1988년 연변일보에 시 “이발자국”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99년 “연변일보” 대성상을 수상했다. 현재까지 시, 수필, 실화 등 300여 편(수)를 발표했으며 청도조선족작가협회 2,3기 회장을 담임했었다.
“줘마”는 작자가 목격한 실생활을 소재로 삼고있다. 현재 청해성에서 음식업을 하고있는 작자는 가게도우미로 일하면서 세살난 아들을 키우는 열아홉살난 녀자를 보면서 타민족의 생활습관과 혼인관에 깊이 들어가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700킬로를 달려 직접 무리초원을 답사했으며 무리대초원에서 열여덟살난 젊은 며느리와 조우하면서 장막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였다. “줘마”는 그렇게 탄생했다. 너무나도 원시적이고 태고연한 자연환경에서 넋을 잃었던 반면 그 고요한 수면밑에서 소용돌이치는 아픔도 감지했으며 타민족의 안광으로 “줘마”들이 장막을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슬을 벗어던지는 용기를 가지기를 바라게 되였다. 하지만 “줘마”는 결국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장막으로 되돌아오면서 문화의 속성과 막무가내를 다시한번 감내해야 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그대로 생소하고 낯설은 환경을 보여주었으며 미지의 신비세계와 이색적인 민족문화와 렵기적인 사건들을 그려내여 시각 충격과 더불어 예술적인 심미향수를 받게 한다.
8, 허강일과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
허강일은 1964년 길림성 화룡시에서 출생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길시조선족구연예술단, 연변인민방송국 등에서 사업하다 2005년부터 연변일보사 경제부 기자, 주청도 특파기자로 일하고있다. 장막극, 소품 등 100여 편 발표했으며 이외 약간의 수필과 시작품이 있다.
장편소설 “어둠의 장막”은 허강일의 첫소설이다. 소설은 개혁개방의 선두도시 청도를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조선족 만도와 미나, 그리고 한국인 민호의 사랑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있다. 슈제트의 기교나 인물형상의 다채로움보다는 약세군체들이 주류사회에서 생존해나가는 실태를 핍진하게 그리고있어 시사하는바가 크다. 만도는 혼자서 10여 명 깡패를 상대할만큼 주먹세계에서 한다하는 사람이지만 돈을 앞세우는 민호와 암흑세력을 달고다니는 공안국 왕부국장과 장소장의 간계에 빠져 감옥에 들어가고 미나를 민호한테 빼앗기고만다. 소설은 만도가 출소한후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있지만 개인영웅주의보다 경찰출신의 의형제 종수와 그 종수의 동창생 왕형사라는 매개물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쪽에 무게를 더하고있다. 작자가 현실에 너무 집념한 나머지 사회악에 대한 일반 리해에 멈췄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우리문단에서 쉽지 않게 깡패세계를 다루었다는 점과 조선족의 연해진출 과정이 그토록 치렬했다는 력사를 까밝혔다는데서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9, 기타
리화는 흑룡강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그 문학적재능이나 창작성과를 봐서 별도로 코너 하나를 만들어도 무방하나 아직은 경력이 모자라 “기타”에 넘어온 케이스이다. 그만큼 애연한 외모와는 달리 스케일이 크고 시원하게 쑥쑥 나가는 스찔이다. “도반은 지금 수련중입니다”, “내 머리에 꽃핀 하나 달아줄수 있나요”, “내 DNA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등 제목만 봐도 대범함이 철철 넘친다.
한춘옥은 교원 출신답게 많이 경험적이고 지적미가 풍기는 녀류작가이다. 그녀의 수필들에서는 “생각체력”이거나 “근육저축”,”건강은행”과 같은 생경한 단어들이 시도때도 없이 불쑥 튕겨나온다. 한편 “숭늉세대”, “컴퓨터세대”, “굴뚝시대”, “밥가마가 말하는 세월”과 같은 너무 생동하고 형상적인 표현들이 모든 글들에 관통되여있다. 그래서 글에 많이 로련하다는 생각이다.
최재문은 론쟁형 수필가이다. 성공작 “고양이와 물고기 그리고 지렁이”나 “인생의 네비게이션”이나 또는 “10분이상 고민하지 마라”를 포함하여 그의 모든 글은 론리가 정연하고 론점이 명백하다. 빈틈 하나 없이 잘 다듬어져있어 마치도 쇼핑에 나선 귀부인의 모습이다.
전향미는 글이 많지 않지만 글마다 잘 여물어 혼자 보기 아쉬울 정도이다. 필력이 자유분방하고 전개가 일사천리로 달린다. 수상작품은 물론 “바다와 중년의 녀인 그리고 친구”, “아버지와 술” 등 거의 모든 작품이 툭툭 튀는 개성으로 한눈에도 전향미의 글이란것을 알수 있게 한다. 앞날이 기대되는 재치군이다.
김미령은 생활형 수필가이다. 한번씩 아플때마다 글이 나오고 그 글은 또 그렇게 아프다. 글을 아프게 처절하게 다룰줄 아는 진정한 글쟁이이다. “나 슬퍼서 산다”, “엄마가 필요해”, “빌려쓰는 인생” 글제목부터 상처가 보인다.
김명숙은 항상 생김새나 성격처럼 무덤덤한 스타일이다. 들끓는 격정이 없는대신 사연을 한올한올 풀어주는 센스맨이다. “신깔개를 파는 할머니”, “돌려받지 못한 책”처럼 덤벼침이 없이 차근차근 설명하는 이야기형이다.
유해금은 대학교수이지만 시인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많이 흥분형이고 즉흥형이다. “당신속에 머무는 순간”같이 절절한 사랑 웨침도 있고 “눈 내리는 밤의 비소리”처럼 정서적인 표달도 있으며 “만추의 리별”과 같은 되새김도 있다.
리문혁은 기업인답게 “받은 사랑은 베풀어야 한다”, “배려의 예술”과 같은 인생돈오의 글을 많이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이외 김재룡, 김철우, 김운천, 정순금, 차설매, 홍걸, 장향화, 김국화, 윤명해, 리정복 등 특색있는 작가들이 있지만 지면상 일일히 거론하지 않는다.
나가는 말
산동은 역전이라는 말이 있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나가거나 해외와 국내를 드나들때나 산동을 거쳐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오간다. 문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돌이켜보면 낯익은 얼굴들이 알게모르게 많이 사라졌다. 리호원은 할빈으로 금의환향했고 김춘택은 연변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조광명은 광주로 남하했고 홍군식은 태평양 넘어 미국으로 떠났다. 류일복은 고국땅에 자리잡았고 송련옥도 선조의 고향으로 귀환했다. 대개는 날개가 언녕 굳세진 거물급들이여서 못내 섭섭하고 안타깝지만 격정의 시대에는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느낄새도 없이 조용히 다가와 감격을 주기도 했다. 벽소설 대왕으로 널리 알려진 박일선생이 퇴직후 청도로 옮겨왔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야회에 소품을 가장 많이 내놓은 허강일씨가 만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역시 산동땅에 뿌리를 내렸으며 심양조선족문학회 평론분과 주임이던 김례호씨도 청도에 집을 마련하고 그루를 박았다. 저명한 평론가 리장수선생이 위해쪽으로 이사왔고 청도에서 항주로 떠났던 장학규는 다시 청도에 세번째로 입성했으며 한때 문학과 등지고 살았던 김건도 활기찬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보다 신진들의 약진이 더 돋보인다. 리화, 최재문, 한춘옥, 전향미, 유해금, 김미령 등은 송화강잡지에서 수필특집을 묶어줄 정도로 어느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김재룡, 김철우와 김명숙은 기성문인의 길을 드팀없이 지켜나가고있다.
여기에 200여명의 방대한 그룹을 형성하고있는 청도조선족대학생련합회 회원들이 근거리에서 호응하고있다. 앞날이 훤하게 뚫린 형국이다.
이제는 들어올 사람들만 있지 나갈 사람은 거의 없는걸로 알고있다. 모두가 집을 사고 뿌리를 내렸다. 그렇다면 산동은 앞으로 더 멋진 문학의 터전이 닦아진다는 반증이 아닐까? 아무튼 두고볼 일이다.
주: 본 론문 저술과정에서 김기덕, 리홍철 등 많은 분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