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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2017년 08월 21일 15시 26분  조회:418  추천:0  작성자: 장학규
겨레의 딸 민족의 넋
항일로전사 리화림을 찾아서 
 
 
얼마전 기자는 금방 92돐 생일을 지낸 로항일투사 리화림녀사를 방문하였다. 고령임에도 그이의 정신과 담소는 그처럼 정력적이였다. 
기자는 첫대면이였지만 그이가 얼마전 써낸 장편회억록 “원정(征途)”의 내용을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1
리화림 녀사는 1905년 1월 6일에 조선 평양시 경창리의 한 빈한한 시민가정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아시아패권을 쟁탈하기 위한 일로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매듭지어 조선의 외교권이 송두리채 뽑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다사다난한 시대에 태여나서 자란 리화림 녀사는 망국노의 설음을 한껏 맛보았었다. 다행한 것은 인자한 어머니 김인봉씨와 어려운 살림때문에 배움을 빼앗긴 민족독립활동가인 큰오빠 리춘성씨의 적극적인 추진하에 미국인전도사가 꾸린 사립학교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여 초기계몽교육을 받았다. 동시에 조선인 선생님들로부터 리순신, 안중근 등 민족영웅들의 사적을 상세히 알게 되여 애국주의사상을 무르익혀갔다. 
그무렵 충실한 기독교신자인 어머니는 아들 춘성씨의 반일활동을 몰래 도와주고 있었다. 어느 하루, 리화림녀사는 어머니의 불품을 정리하다가 깊히 숨겨둔 태극기를 발견하였다. 여직껏 단군신화나 춘향전 같은 고전적인 이야기만 해오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큰 비밀이 있을줄은 몰랐다. 그것이 계기가 되여 그들 모녀간의 거리는 한결 가까와졌을 뿐만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민비피살사건도 료해하였으며 망국의 진정한 원흉이 어떤자들이란 것도 알게 됐다. 일제에 대한 원한의 씨앗은 어린 가슴속에 그렇게 심어졌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리화림 녀사는 오빠 리춘성씨의 비밀 련락원이 되였다. 어머니는 “군자금”조달에 나섰고 그녀는 오빠네가 찍어낸 삐라를 숨겨두고 비밀문건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한번은 오빠가 금방 새로 찍은 삐라를 집에 가지고 왔는데 왜놈의 끄나불이 어느새 낌새를 맡고 뒤를 쫓아왔다. 위급한 그 시각에 불쑥 꾀가 떠오른 리화림 녀사는 재빨리 삐라를 어린 조카애가 덮고 있는 이불속에 밀어넣는 동시에 조카애를 힘주어 꼬집어놓았다. 철부지 조카애가 자리러지게 울어대자 그녀는 달래는척하면서 삐라를 조카와 함께 이불에 감싸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차례의 위험은 그녀의 민첩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하여 모면되였다. 
어머니는 물론 로련한 혁명가인 리춘성씨마저 그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도화선이 되여 1919년에 “3.1운동”이 터지자 열다섯살난 리화림 녀사는 동학들과 함께 거리에 뛰쳐나가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일제군경과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하여 리화림 녀사는 의지를 련마했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1920년 리화림 녀사는 숭의녀자중학 유아사범반에 입학하였다. 재학기간 평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조직된 “력사문학연구회”에 참가함으로써 처음으로 공산주의 리론과 접촉할 수 있었으며 학습을 거쳐 공산주의 사회란 구경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였고 공산주의를 실현하여야 비로서 인민의 행복한 생활이 보장된다는 도리를 초보적으로나마 인식하게 되였다. 
유아사범반을 졸업한 후 전라도, 함경도를 전전하면서 고험을 겪은 리화림 녀사는 1927년 11월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최전렬에서 맹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해산되자 방황과 고뇌속에서 모대기던 리화림 녀사는 특무와 경찰의 검문까지 받게 되여 부득불 30년도초에 조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2
1930년 3월, 리화림 녀사는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하였다. “모험가의 락원”으로 유명한 상해는 당시 여러 제국주의 렬강들이 제각기 한구역씩 뜯어가지고 있는 형편이였다. 
국내의 소개인이 가리킨대로 리화림 녀사가 찾은 이는 유명한 애국자인 김두봉선생이였다. 비록 조선공산당은 해체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과 추구를 그때까지도 고이 간직한 리화림 녀사는 고려공산당출신인 김두봉선생을 통해 상해의 조선공산당인들과 접촉할 것을 갈망했으나 그 내부의 파벌투쟁이 심하다는 소개를 듣고는 저도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국외에 나와서까지 집안다툼을 벌리는 것이 민망스럽기도 했다. 원쑤에 대한 불 타는 적개심을 한가슴 가득 안은 리화림 녀사는 무모한 파벌투쟁에 휘말려들기도 싫었거니와 직접 일제와의 혈전장에 나사고싶어 김두봉선생의 소개를 거쳐 오래전부터 숭배해오던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구선생이 친히 령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때가 바로 세계를 놀래운 “9.18사변”이 일어난 1931년 가을이였다. 
“한인애국단”은 상해림시정부의 소속하에 있었는데 김구선생이 대장직을 겸임하고 할빈역두에서 조선총독 이또 히로부미를 쏴죽인 안중근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선생이 참모직을 맡고 있었다. 이 조직의 임무는 주로 일제의 요인들과 조선의 간첩과 변절자를 암살하는 행동으로 전 세계에 조선민족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따라서 조선민족을 항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는 것이였다. 원체 성격이 테러형식이였던만큼 이 조직은 성립초기부터 녀성 성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김구선생과 면대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가 어찌도 절절하게 자신의 경력과 애국심을 호소하였던지 김구선생은 감동된 나머지 파격적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업의 편리를 위하여 리화림 녀사는 리춘실이라는 이름을 리동해로 고쳤다. 
처음 리화림 녀사의 임무는 상해에 온 조선교민, 특히는 녀성들을 고찰하고 감시하는 것이였다. 이기간 리화림 녀사는 남다른 지혜와 총명으로 조직에서 맡겨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여 김구선생의 칭찬까지 받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일선활동에도 참가하였다. 
한번은 김구선생의 애인 신분으로 변장하고 김구선생과 함께 조선에서 온 특무를 유인하여 깜쪽같이 해치운적도 있었다. 
이 조직은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가지 거사를 해내였다. 그것은 리봉창의사의 일본천황암살사건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폭발사건이였다. 이 두 사건의 획책자는 김구선생, 리화림 녀사는 두 사건에 직접 참여한 력사의 견증자로 오늘날 건강하게 생존해있다. 
1931년 7월초에 일제의 도발하에 발생된 “만보산사건”은 중조인민간에 불신과 반목정서를 일으켰다. 두 나라 인민을 깨우쳐 공동한 원쑤를 대적하기 위해 김구선생은 리봉창의사와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901년 수원의 중산가정에서 태여난 리봉창의사는 일어를 류창하게 구사할 뿐만아니라 어느 한 일본귀족처녀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리봉창의사는 이 점을 리용하여 일본에 잠입한 후 천황이 열병식에 나오는 기회에 암살하려고 타산하였다. 그때 김구선생의 비서격이였던 리화림녀사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고 리봉창의사에게 작탄 두개를 감출 수 있는 내의를 밤도와 지어주었다. 비록 1932년 1월 8일의 암살행동은 천황을 놀라게 하는 것으로 실패를 선고했지만 세상에 조선인의 기개를 널리 전했던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일본침략자들은 천황의 생일을 계기로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졌다. 리화림녀사는 윤봉길의사와 부부명의로 홍구공원에 잠복하여 그번 모임을 타격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사전에 두사람은 지형을 고찰한 후 알맞는 자리까지 잡아놓았다. 후에 리화림녀사가 일어를 잘 모르는데다가 두사람이 행동하면 목표물이 커서 불편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윤봉길의사가 혼자서 거사하기로 결정되였다. 그러나 리화림 녀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활동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1932년 4월 29일의 민족사에 당당한 한자리를 굳히게 되였던 것이다. 
 
3
1932년 늦여름, 리화림녀사는 마침내 김구선생의 투쟁방법이 썩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결연히 혁명의 발상지인 광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조선민족당에 가입, 이름을 리화림으로 고치고 중산대학 의학원 부속병원에서 견습간호원으로 일하면서 학습과 투쟁을 결부하는 공식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에 중산대학 법률학부에 다니는 김창국씨와 결혼, 아들 우성(雨星)을 낳고 갈라졌다. 자식을 사랑하는 세상 부모들의 마음은 매한가지지만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데 미소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안온한 가정을 버리고 선뜻 투쟁의 한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1936년 1월, 조선민족당의 파견을 받고 광주를 떠나 남경에 도착한 리화림녀사는 조선민족혁명당총부(개칭됨) 부녀국에서 위원사업을 하였다. 부녀의 지위와 권리를 제고시키는 선전활동에 몸담았고 결국 그것이 가정 모순을 초래하여 짤막한 제2차 혼인생활을 결속지었다. 
이듬해 겨울, 일본군이 남경에 대한 공격을 다그치자 로약병자를 이끌고 중경으로 전이, 여기서 김구선생과 희극적인 재상봉을 하였다. “한인애국단”시절에 의식적으로 숨겼던 공산당원의 신분을 이번엔 자랑스럽고도 솔직하게 김구선생에게 고백하였다. 
“그럼 이후 다시 만나지 맙시다.”
김구선생의 이 한마디 말로 그들은 지척에 있으면서도(림시정부도 중경으로 옮겼다.)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비록 김구선생을 그렇게 흠모하고 존경하였지만 리념의 차이는 거래의 장벽이 되였던 것이다. 
그만큼 리화림 녀사는 이미 사상적인 전변과 성숙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광대한 근로대중을 압박과 착취속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키려면 오직 공산주의 한길로 나갈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굳혔던 것이다.
1938년 10월 10일에 성립된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약산)는 리화림녀사를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 무한보위전에서 그녀는 광주견습간호원시절에 익혀둔 의술로 적지 않은 부상병을 구해주었다. 
그후 국민당정부의 소극항전정책에 불만을 느낀 조선의용대는 41년도에 항전의 봉화가 세차게 타오르는 태항산에로 진입하여 팽덕회, 라서경 등 팔로군지도자의 접견을 받았으며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사령원 무정)으로 개칭되였다. 리화림 녀사는 부녀대 대장으로 임명되여 가렬처절한 전투속에서 더없는 용감성을 보여주었다. 1945년 무정 사령원의 파견으로 연안중국의과대학에 20기 학원으로 들어갔으며 연안에서 일제의 무조건투항을 영접하였다. 
 
4
일본이 투항한 후 조선의용군은 국민당의 간섭과 교란으로 하여 제때에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런 정황하에서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중국해방전쟁에 떨쳐나섰다. 
1946년 리화림녀사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부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적했으며 중국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그 산하 제1분교(연변의학원 전신)에 배치받았다. 1948년에 사업의 수요로 조선인민군 제6독립군단 전선의무소 소장으로 전근하였다. 
“6.25”조선전쟁이 폭발된 후 어느 한차례의 상병원 호송길에서 리화림 녀사는 미국비행기가 던진 폭탄에 다리부상을 입고 후방병원으로 이송되였다. 
1952년 여름에 2등 을급잔폐증을 발급받고 선후로 료녕와방점 강복(康復)병원 기술과 과장, 심양의사학교 부교장, 교통부 위생처 기술과 과장, 연변위생국 부국장, 국장 등 직을 력임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한인애국단”에 참가한 경력으로 하여 3년간 옥살이도 하였으며 1978년에 대련시칠실 시찰원으로 조동하였다. 
현재 리화림 녀사의 생활은 혁명전쟁년대처럼 소박하고 근검하다. 기자를 영접한 리화림 녀사는 곤색데트론 옷에 헝겁신을 신고 있었다. 리화림녀사는 그렇게 아낀 2만원 돈을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연변아동문화기금회에 1.2만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기자를 마주한 자리에서 리화림 녀사는 대련시정부 판공청 로간부처에서 그의 일상 생활을 관리하고 있는데 별 불편함이나 부족점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6일 92세 생일때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찾아와 축하해주었으며 특히 시부련회에서 병치료 귀걸이를 선물로 가져왔다면서 자신은 큰 공로도 없지만 당과 정부 및 인민은 크나큰 영예를 안겨주었을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그렇게 하고싶었던 대학공부까지 시켜줬으며 오늘은 또 즐거운 만년을 보내라고 이처럼 관심해준다고 감개무량해서 말하였다.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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