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김경화는 누구인가?
김경화 소설세계에 내재된 자아형상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문학작품은 작가 자신의 은폐된 인격이 상상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생활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 개체는 이 세상의 대부분 령역을 알수 없다는 한계성을 가졌다. 비록 수천수만년의 인류의 경험이 큰 보탬이 된다고 하더라도 일개의 인간은 온통 미지의 세계에서 허덕일수밖에 없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제한된 생활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 그러니까 작품에 내재된 견해나 주장은 작가의 경력과 지식바탕 그리고 주변 환경이란 테두리내에 한정되고 기반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을 뛰여넘는다는건, 다시 말해 초월이란 사실 너무 사치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결국 문학작품에서 작가는 나름대로 익숙한 분야를 펼쳐놓고 그속에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의 정체를 얘기하게 되여있는것이다. 미화가 되든 투정이 되든 발뺌이 되든 그 주인공의 몸에는 틀림없이 작가의 흔적이 묻어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목격자가 아니면 최소한 귀동냥이라도 한 사람이라야 독자를 설복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낼수 있다. 머리속에서 저절로 인물과 사건이 달려나올리 만무하고 그 단초나 모델은 꼭 현실에 존재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일단 작가를 료해하면 그 작품 해명도 상대적으로 쉽다고 본다. 필자의 경우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 작품론과 작가론이 함께 곁들여져야 비로서 완전한 평론이 된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기본 데이터도 가지고있지 않는 사람이 평론을 하게 된다면 오독의 확률이 배이상 높다고 확신한다.
김경화는 신세대 녀성작가중에서 비교적 삐여진 인물이다. 2007년에 첫 소설을 발표해서부터 몇년 안되는 사이에 수십편의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을 펼쳐낸 재간군이다. 그러나 쉽게 성공한 케이스라고 가볍게 넘기기에는 김경화의 신상정보들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
이제 김경화가 소설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 자신의 이미지와 메시지와 부호들을 한번 파보도록 하자.
그녀는 현장의 견증인이다
김경화의 고향은 청산리이다. 청산리는 항일독립투사 김좌진장군으로 인해 유명해진 고장이다. 그만큼 시시비비도 많았던 지역이다.
백과사전에는 “화룡현 청산리는 조선인 교민이 모여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룡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사방을 에워싸듯 둘러싼 주위의 산은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다.“고 적혀있다. 험준한 지형과 버스도 잘 통하지 않던 단절된 환경여건으로 청산리는 사건사고들이 곧잘 생기군 했다고 한다.
이웃 림장마을까지 5,60호 정도밖에 안되지만 우리민족 력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대첩이란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었었다. 일본군을 전멸했던 직소라는 곳도 바로 청산리에 위치해있다.
우리는 김경화의 소설들에서 자주 “청산마을”이나 “림장”이란 동네 이름을 접하게 된다.
소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의 배경은 “청산마을”로 부정을 저지른 엄마와 그 불륜의 결과물인 “나”, 그리고 오쟁이를 짊어진 “아버지”의 행패와 “엄마”의 외도사실을 토설한 “언니”의 운명을 교차적으로 그리고있다. 그러면서 엄마의 전철을 밟고있는 자신에 대한 인생궤도 수정을 설파하고있다. 인연의 덫에 걸려든 서로 다른 인간상을 통해 사랑의 함의를 부동한 각도에서 해부한 성공작이다. 그러나 일단 그런 결과를 도출한 그 원인에 대한 리해나 해석은 뒤로 미루고 우선 그 사건 자체가 참혹하고 리얼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암연”은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시내에서 살다가 부모가 리혼하는 바람에 동네 토호로 군림하고있는 할아버지네 집으로 온 “홍남”이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피를 속이지 못해 “영이”를 겁탈하려다가 살해하는 이야기를 쓰고있다. 이 소설에서는 “림장”이란 고장이 등장한다.
“흐르는 소리”도 살인사건을 다루고있다. 약혼까지 했던 “홍이”가 한동네에서 사는 “산호”의 애를 배면서 “산호”가 약혼남이 데려온 친구들한테 죽임을 당한다는 스토리이다. 여기서도 “림장마을”이 나타난다.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도라지”잡지 수상작인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는 불륜과 폭행과 배신 등 인간의 어두운 구석을 다루고있는바 “청산”,”림장” 두 곳이 모두 언급된다. 이 두 곳은 현실에서 이웃인것처럼 소설속에서도 원
형태 그대로 적라라하게 아래우 마을로 모습을 보인다.
자명한바 그곳은 이야기가 많은 동네인것이 분명하다. 물론 모든 사건의 원형이 그대로 실재했다고 보기는 무리이나 적어도 그곳은 창작의 동력이고 끊임없이 소재를 제공해주는 원천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녀는 아픈 사람이다
김경화는 “상처가 있어 우리는 위로받는다. 나의 소설은 상처가 있는 한 그냥 씌여질것이다.”고 말했다.
하다면 김경화의 상처란 어떤것일가? 그것이 알고싶지 않을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김경화의 작품을 더 깊이 파고들수 있는 관건고리일수도 있지 않을가.
김경화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바로바로 맞혀오는것들이 있다. 모든 작품들이 얼기설기 얽혀있어 마치도 장편소설을 헤쳐놓은듯한 느낌이 든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에서 나오는 관상쟁이가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도 나온다. 그것도 묘하게 모두 기차역에서 만난다. 이 두 작품에서 나오는 “엄마”는 모두 불륜의 당사자이다. 계렬작품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다. 그런데 다른 작품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계속 나타난다. “원점”에서의 “언니”가 “베거아리랑”에도 버젓하게 등장한다. 내 집에서 공부하는 “조카”도 여러 소설에 얼굴을 내민다. “개구리는 없다”에서의 “엄마”는 틀림없이 “베거아리랑”의 “언니”의 변형이다.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오빠”는 두가지 부류이다. 하나는 가정 타격에 의한 폭군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가 많고 의리가 강한 형상이다. 그런데 둘다 묘하게 마흔을 올려다보면서도 장가를 여직 들지 못한 로총각이다.
김경화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체로 “엄마”, “언니”, “오빠”가 위주이고 슈제트는 기본상 “가난”.”불륜”, “살인”이 주선률이다. 배경은 콩이나 강냉이를 심는 이밥 없는 동네이고 기름개구리와 송이버섯이 특산인 산골마을이다.
그래서 김경화의 아픔을 추리해본다.
먼저는 가슴에 한이 맺힌 가난이 아닌가 싶다. 겨우 배나 불릴가말가한 한전 뙤기밭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먹을것 입을것 배울것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수 없었던, 그나마 돈이 될만한 기름개구리와 송이버섯은 주먹세계에 의해 착취당해야 하는 억울함이 항상 앙금으로 남아있는듯 하다. 대부분 작품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는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형상을 그리고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듯 하다. 그리고 기름개구리를 떠올린 글이 “개구리는 없다”, “흐르는 소리”, “내가 살던 고향은”, “적마, 산을 내려오다” 등이 있고 송이버섯을 다소 비친 글도 “암연”, “흐르는 소리”,”내가 살던 고향은” 등이 있는걸 보면 작가의 남다른 가슴 앓이를 넘겨볼수 있다.
그래도 작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것은 몰락하는 농촌공동체와 타락하는 도덕관념 그리고 후대 교육이 피페해지는 현실일것이다.
“개구리는 없다”에서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행복했던 한 가정이 금전만능주의 세레를 받고 풍비박산나고 후대가 벼랑끝에 몰리는 과정을 묘사하고있다. “아이”의 엄마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친구의 말을 들은 후부터 남편과 티각태각하더니 끝내는 리혼하고 한국으로 시집가는 길을 택한다. 한국남자한테 얹혀 살다가 거기서 도망나와서 같은 교포남자와 붙어사는 파렴치한 행실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내에 남겨진 아들의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자기 인생만 즐기는 동물본능적인 삶에 안주하고 아들애가 사라져도 전혀 찾을념을 않는 윤리상실증에 빠져있다. 결국 “아이”는 절망한 나머지 이 세상과 맞서는 길을 선택하고만다. 작가는 이 글을 다룸에 있어서 쇼크료법을 사용, 온몸에 소름이 쭉 끼치게 한다.
“내가 살던 고향은”은 나날이 황폐화되는 농촌현실을 말하고있다. 13년만에 찾아오는 고모네 집은 “이불장유리가 떨어져 대신 천을 쳐놓은것까지” 이전과 똑같았다. 밭이 개발범위에 들어 우에서 보상이 내려오고 공장이 들어서서 돈도 타먹었지만 그 덕분에 “고기새끼두 없고” “학교도 마사지고” “풀도 다 노랗게 말라버리고” “개구리가 변종이 된” 고장이 되여버렸다.
“원점”은 남편이 펀펀하게 살아있는 “언니”가 탈가하여 어느 총각과 붙어살다가 그 총각이 머리 수술하면서 다시 귀가하는 사실을 쓰고있다.
모두가 현재 우리 주변에서 계속 벌어지고있는 생생한 일들이다. 말하자면 우리민족 모두의 아픔이고 우리 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아픔은 아직도 장시간에 걸쳐서 치료해야 할 고름이고 또 어쩌면 상처가 너무 커 영원히 치료불가일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해서 김경화는 계속 소설을 쓸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녀는 실천파이다
살기 위해서, 글 쓰기 위해서 김경화는 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빠졌을법한 코리안드림에 편승한다. 사랑하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섯살난 아들을 떠나 출국길에 오른다. 분명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리고 단편소설 “떼떼떼”에 이 대목이 그대로 나온다. “베거아리랑”에도 이런 설명이 나온다.
물론 김경화가 간 곳은 한국의 “청주”이다. 그리고 종사하는 업종은 식당이다. 이 점도 글을 써야만 하는 김경화의 소설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청주” 관련 소설은 지금까지 필자가 본것은 4편이다. 그중 중편소설 “베거아리랑’이 기존의 어려운 가정 소재를 한국까지 연장하여 다룬 반면 나머지 3편은 청주 현지에서 살아가면서 겪은 사연을 적고있다.
인상이 깊게 남는것은 단편소설 “잠이 들다”이다. 스토리는 별로 새롭지가 않아 보인다. 줄거리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장안의 화제에 자주 오르는 케이스이다. 아버지의 도박으로 엄마는 떠나고 형제들은 뿔뿔히 흩어진 한국 총각이 자기보다 두살 이상이고 일곱살난 딸까지 있는 조선족 녀인을 만나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동경하다가 현실의 벽에 막혀 실패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것은 소설의 성숙도보다는 작가적인 발견이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얼굴을 맞대고 부딪쳐온지도 20여년이 되여온다. 그간 조선족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살아온 존재였고 한국인은 항상 도고하게 우에 군림해온 주체였다. 그런데 “잠이 들다”는 이 량자를 평등한 위치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순이”가 일방적으로 인공류산을 했어도 “그”는 치미는 화를 간신히 참고 산후 조리까지 알뜰히 해준후 유유히 떠나버린다. 특히 “그”의 마지막 행위인 “잠이 들다”가 소설의 제목이 되여진게 흥미롭다. 조선족이냐 한국인이냐는 론쟁을 이젠 잠재울때가 되지 않았냐는 뜻 같기도 하고 서로 신경을 끄고 살자는 말 같기도 하다. 아니면 지나간건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같기도 하다.
“날개를 접는 시간”은 색다른 류형의 소설이다. 조선족의 눈으로 한국사회의 실태를 반영하고있었다. 순수하게 한국인의 생활상만을 보여준 작품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시사하는바가 적지 않다. 우선 바른 한국 젊은이의 형상을 보여주었다. 민영이는 아버지가 다리가 불편한데다가 치매에 걸리고 누나는 지력장애가 있지만 항상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고있었다. 미끈한 외모에 깨끗한 옷차림의 반듯한 청년이였다. 다음은 잃어졌던 민영이의 신 한짝을 되찾는 장면을 통해 진취적인 사람은 재기의 기회가 꼭 찾아온다는 진리를 호소하고있었다. 역시 제목을 “날개를 접는 시간”으로 단것이 돋보인다. 새가 날개를 접는것은 새로이 날개를 크게 펼치기 위한 전주가 아닌가?!
“여름감기”는 한국에서 8년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조선족이 자신을 돕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있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저버리고 악덕사장과 사사로이 합의를 해버렸다는 에피소드이다. 조선족의 자질 제고를 호소하는 따금한 글이라 하겠다.
모름지기 이 글들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것이 분명해보인다. 특히 “날개를 접는 시간”에는 작가의 아들인 “은비”가 거론되면서 실생활과 중첩되는 감도 없지 않다.
그녀는 이야기군이다
김경화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간군이다. 가슴 아픈 사연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차분하게 대처한다. 좀체로 격정이 끓어넘치는 경우가 없다. 자칫 랭담하고 무감각적일거라는 느낌이 진하다.
소설을 다룰줄 아는 고수이다. 작가가 독자가 되여 희로애락에 허우적거리면 그건 연기이지 창작이 아니다. 글쓰는 사람이 배우가 되여지는 경우면 꾸민 흔적이 진할수밖에 없고 따라서 독자들에게는 코미디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
그래서 김경화의 소설은 지극히 간단하다. 소설적인 장치가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할만큼 스케치적이다.
“환자들”은 연변병원에서 여러 계층과 년령대의 녀자들이 링겔을 맞으면서 주고받는 대화가 주를 이루고있다. 많이 싱거워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냄새가 억수로 난다. 흩어진듯 모아지고 중축을 잃은듯 다시 탄력을 받는 여기에서 작가적인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테테테”도 녀자들의 동네 마실놀이같은 소설이다. 오빠의 친구 “성주”의 부탁을 받고 사람 찾는 광고를 써주고 다시 “성주”의 삼촌이 젊었을때의 에피소드를 돌아보고나서 아들과 조카를 챙기는 일상을 보내다가 죽은 사람의 장례에 참가하는 등 거의 한줄로 꿰기 어려운 사실을 얘기하고있다. 읽기에 편하고 참으로 재미나다는 감각이다.
그녀는 적마이다
김경화는 적마 계렬 소설을 3편이나 썼다. 구경 적마란 무엇을 의미하고 왜서 적마에 집념하냐는 아무래도 작품 분석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적마, 여름을 지나가다”에서 김경화는 작중 화자를 통해 “나는 어찌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길 잃은 한마리의 적마처럼 무작정 헤매고 방황했었다.”면서 “속에서부터 끓어번지는 이 엄청난 불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고 절규한다. 그러면서 “아, 적마여서 불행할수밖에 없는 녀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적마, 산을 내려오다”에서는 “적마”에 대한 설명이 한결 구체적이다. 관상쟁이의 말을 빌어 “역마살이 끼였소. 앞으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야겠군.”라며 다소 관념적인 운명론을 펼치더니 주인공이 “이제 적마, 적마가 되리라. 삶을 향해 용감히 돌진하는 적마, 그 무엇에도 물러서지 않고 저돌적으로 앞만을 보고 달리는 적마가”라고 다짐한다.
적마 계렬의 다른 한 작품인 “암연”에서는 “적마”에 대한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적마”는 역시 기구한 운명과 그 운명에 과감히 도전하는 형상에 다름 아니다.
아무튼 김경화의 전반 작품을 살펴보면 “김경화는 적마이다”가 최종 결론이 아닐가싶다. 많은 사건을 경험하고 많은 아픔을 겪고 많이 부딪치면서 싸우고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적마의 형상이 되여야 하는것이 김경화의 팔자이며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김경화의 사명이다.
잘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