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샌드위치의 값어치
장학규
사람들은 흔히 가운데 끼운 경우를 샌드위치 신세라고 한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상급과 하급 사이에 있는 중층 간부, 가정에서 늙으신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 있는 세대주, 생활에서는 모순 쌍방을 중화해야 하는 매개인 등의 처지가 바로 그거다.
굳이 나이도 거기에 적용한다면 나 같은 중년의 나이가 샌드위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생 경륜을 많이 쌓아 가히 도사급이 되어서 여유작작 만년을 즐기는 노년층과 아직은 세상의 본연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어 마냥 보라색 희망에 즐겁기만 한 청소유년층에 비해 중년의 나이는 괴롭기만 하다. 지나온 길이 아픔으로 점철되었는가 하면 앞날은 불확실성으로 매양 오리무중이다. 몸이 마음을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곤혹속에 빠지기도 하고 백일몽 같은 환각속에서 지옥 사자와 조우할 때도 드문 있다. 이 무렵부터 죽음이라는 물건이 근접 거리에서 서성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샌드위치 신세가 참말로 피곤하다고 한다. 전후좌우로 밀리고 치우치고 뭉개지고 짓이겨지면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실지 이런 이해는 사람들의 편견일뿐이다. ‘샌드위치’라는 음식의 형상에 대한 오해이고 모독이다.
샌드위치는 게으른 자의 얍삽한 욕구로부터 발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샌드위치 백작 4세인 존 몬테규가 카드 도박에 깊이 심취한 나머지 어떻게 하면 카드 게임을 멈추지 않고도 허기와 식욕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가고 고민하던 중 생겨난 음식이라고 한다. 시종들이 배를 촐촐 굶으면서 카드에 집념하는 주인이 안쓰러워 고안해낸 음식이 같이 어울려 놀던 카드 친구들의 공감을 얻어내면서 널리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샌드위치, 얇게 썬 두 조각의 빵으로 상에 오른 아무 요리를, 이를테면 채소류, 고기, 달걀, 치즈 등을 감싸면 바로 샌드위치가 된다. 우리의 김밥과 공예적으로 비슷한 모양새다.
샌드위치는 만드는 이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지만 어쨌던 쉽게 수시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되어있고 대부분 사람들이 선호하고 있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해왔다.
한낱 간식에 불과했던 샌드위치가 세계인이 열광하는 음식으로 부상한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무엇무엇해도 빵과 여러가지 재료의 궁합이다. 맨 빵만으로는 슴슴하기 짝이 없고 그렇다고 다른 부자재만 먹기에는 너무 게걸스러워 보이고 또 배를 불리기가 조련치 않다. 두가지가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알콩달콩 어울려서 인간의 식욕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관건적인 포인트는 그래도 두 빵조각 사이에 든 식자재들임이 분명하다. 다양한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어 맛을 내고 또 영양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빵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누군가 구워서 팔고 있지만 그 안의 식자재는 사오더라도 꼭 다듬고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른다. 공력이 들어가는 만큼이나 그것이 샌드위치의 맛을 최종 결정한다고 할 때 재료의 중심적 역할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샌드위치로 형용되는 인간그룹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입장과 위치와 경우가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가운데에 있다는 점만은 공통성을 가진다. 세상은 이들을 둘러싸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위아래를 소통시키고 전후좌우를 터쳐주어야 할 소임이 맡겨져 있다. 이 역할이 구실을 못하면 혈관이 막혀 뇌손상이 오거나 사족을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인간세상이 마비가 된다는 얘기가 되겠다.
경제상의 중산층도 샌드위치에 어울린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요즘 세계는 중산층의 두터움 여부에 따라 선진국, 개도국, 후진국으로 나뉜다.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중산층의 몰락은 사회의 비극이라고까지 형용하고 있다.
가운데 있다는 것은 결코 갇혀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장이 사처로 혈액을 공급하여 동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엔진이 가동되어 기계의 역할이 이루어지듯이 가운데는 조화와 발전을 이끌어내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남에게 감싸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쓸모 없으면 누가 가운데 끼워준단 말인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들떠 볼리 만무한 일이다. 내남에 두루 필요하고 도움이 되고 그러면서 억수로 편하고 쉬운 사람들이 바로 샌드위치형 사람들이 아닌가.
샌드위치를 호도하거나 먹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우기 스스로 샌드위치임을 자임하면서 염세적인 인간으로 굴러떨어져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며 모름지기 가치 없는 사람으로 추락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샌드위치여도 당당해질 때, 샌드위치가 되어 보람이 느껴질 때, 샌드위치가 행복으로 다가올 때 우리의 인생은 값어치를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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