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조선족향 장복촌 당지부서기 마덕운.
유수시 연화조선족향에는 의지할곳이 없는 조선족아이를 자기집에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운 한족 당지부서기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이야기의 장본인은 바로 연화조선족향 장복촌 당지부서기인 마덕운이다.
1995년 연화조선족향 장복촌의 조선족농민 현청산은 한국로무송출로 정든 연화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막부득이한 선택이였다. 백혈병으로 수년간 고생하던 안해는 결국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남은것은 거액의 빚뿐이였다. 농사만 지어서는 빚갚기 힘든 상황이였다. 현청산이 한국으로 가게 되니 집에는 어린 아들 현명호만 남게 되였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장복촌 당지부서기 마덕운은 현청산을 찾아 그의 아들 현명호를 자기집에 데려다 기르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현청산은 그말을 듣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원래 한 마을에서 마덕운과 사이좋게 지내긴 했지만 마덕운이 이렇게 발벗고 도와나설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기때문이다.
마덕운의 안해 함보란도 현청산의 안해 박복자와 한 마을에서 어릴때부터 함께 자란 가까운 사이여서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그러던 친구가 저세상으로 가니 함보란의 마음도 더없이 비통하였다. 마덕운은 안해 함보란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13살밖에 안되는 현명호를 자기집으로 데려왔다.
그때 마덕운부부에게도 현명호와 동갑내기인 아들 마극송이 있었다. 마극송도 현명호가 자기집으로 온다니 여간만 기뻐하지 않았다. 원래 한 마을에서 태여나서 같이 자란 송아지친구였으니깐 말이다.
마덕운네 집에 갓 왔을때의 현명호(왼쪽) 키작은 애가 마극송
마덕운은 현명호를 자기집에 데려다가 친아들 못지 않게 돌보며 키웠다. 아들방에서 함께 자게 하고 학습하게 했으며 한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신발과 옷을 사도 모두 아들애와 똑같은것을 사입혀 마을사람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모두들 마극송과 현명호를 쌍둥이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마덕운은 항상 현명호가 마음상에서 허전해하고 고독해하고 눈치밥이라도 먹지 않는지 늘 신경을 썼으며 자주 명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우스개도 하면서 부모없는 아이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음식상에서도 맛나는 음식을 명호한테 더 집어주면서 살뜰히 대했다. 비가 올때에는 우산을 챙겨주고 눈보라칠때에는 따뜻한 거위털옷을 입혀주면서 부모 못지 않은 따뜻한 사랑을 보내주기에 애썼다.
소학교와 중학교의 학부모회의에도 마덕운이 계속 학부모자격으로 참가하여 명호의 학습성적과 학교생활의 일거일동을 료해하여 가르침을 주었으며 명호를 우수한 성적으로 연화조선족중소학교를 졸업시켰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마덕운은 현명호를 연화조선족향정부에 소개하여 2년남짓이 연화향정부 통신원사업을 하게 하였으며 한국에 있는 아버지 현청산이 아들 명호를 한국에 보내라고 하니 자기가 친히 뛰여다니면서 한국수속을 하여주었으며 할빈으로부터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도 사주고 친히 할빈공항에까지 데려가 비행기에 앉혀 보냈다.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현명호(오른쪽)와 마극송.
이렇게 마덕운은 조선족 어린이 현명호를 시종 자기 친자식처럼 대하면서 덕재가 겸비한 훌륭한 청년으로 키웠다. 남의 자식을 데려다 키운다는것은 말이 쉽지 행동에 옮기자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한두날도 아닌 장장 6년세월을 아무런 보수도 바라지 않고 진심으로 남의 자식을 정성다해 키운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같은 민족도 아닌 타민족의 어린이를 이처럼 키워준다는것은 더더욱 조련찮은 일이다.
장복촌당지부서기 마덕운과 그의 안해 함보란 그리고 그의 온가족이 조선족 아이를 친자식처럼 따뜻이 보살피고 키워준 사실은 연화조선족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민족단결의 이야기로 길이길이 전해질것이다.
/김삼철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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