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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과 사투 벌이는 28세 중국동포 김향란씨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2월5일 15시36분    조회: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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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신문=서울) 나춘봉 특약기자 = “이젠 엄마도 힘들고, 돈도 없으니 수술을 포기하겠어요.”

  세 번째 골수이식수술을 거부하는 딸애의 말에 중국 동포 박경옥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 동안 딸이 병마와 싸우며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이겨냈고, 삶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지켜봤기에, 그 포기하겠다는 말이 삶에 대한 의욕상실 보다 어머니인 박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0년 25세 꽃다운 나이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 온 지난 3년은 김향란씨 본인과 어머니 박씨에게는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좋은 동생, 착한 딸”

  중국 헤이룽장성 상지시 하동향 북흥촌 사람들은 향란씨를 보면 ‘정말 착한 애”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늘 선천성 지적 장애를 앓는 언니를 데리고 다니는 향란씨의 모습이 그토록 대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 애들이 “바보”라고 놀려댔지만 향란씨는 그런 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니의 ‘모자람’을 채워주느라 무진 애를 썼다. 병원에서 ‘뇌신경발달이상’ 진단을 받은 언니는 말은커녕 걷기조차 힘들어 했다. 동생은 그런 언니에게 글을 익혀주고 걸음걸이를 가르쳤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딸 때문에 조급해하는 어머니에게 “언니가 천천히 하면 되잖아요. 내가 잘 가르쳐줄 거니 조급해 마세요”라며 타일렀다. 그렇게 향란씨는 언니를 끔찍이 아끼고 챙겼다.

향란씨(앞줄 오른쪽)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당시 한국에 있던 아버지(현재 연락 두절)에게
가족사진을 보낸다며 모녀 셋이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유일한 가족 사진이 되었다.

  남편이 가정을 박차고 한국으로 떠나면서 가정 부양책임 등 모든 집안일을 혼자 떠메게 된 박씨는 향란씨를 남편처럼, 친구처럼 여기며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박씨가 가족을 살리기 위해 2001년 마지못해 한국에 돈 벌이를 나오면서 향란씨에 대한 의지와 믿음이 더욱 커졌다. 향란씨는 외할머니와 함께 언니를 돌보고 보살폈다. 세수도 시켜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목욕도 시켜주며… 2005년 칭다오의 모 대학에 합격한 향란씨는 연로하신 외할머니를 걱정해 언니를 데리고 구학의 길에 올랐다. 학교주변에 셋방을 얻어놓고 언니를 직접 돌봤다. 낮 수업시간에는 화장실 가기마저 어려운 언니를 위해 모든 필요한 조치를 해놓았고 식사시간이면 집에 달려와 언니에게 밥을 챙겨주었다. 회사에 취직하여 2010년 칭다오에서 병이 나기 전까지 향란씨는 그렇게 엄마처럼 언니를 보살폈다.

“딸아, 아무리 힘들어도 내 옆에 있어줘”

  지적장애인 큰 딸을 둘째 딸과 연로한 부모들에게 맡겨두고 한국에 돈벌이를 온 박씨는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함께 있어줘야 할 딸들을 남겨두고 온 죄책감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강박관념으로 바뀌어 모질게 일에 달라붙었다. 박씨는 3년간 식재료를 보관하는 식당의 창고에서 숙박을 하며 일을 했다. 여름철엔 모기에 물려 온 몸이 보기 흉할 정도로 퉁퉁 붓기도 했다.

  그렇게 악착스레 모은 돈으로 박씨는 칭다오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두 딸을 위해 아파트를 마련하여 주었다. 두 딸이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에 박씨는 큰 위안을 느꼈다. 그런 집에서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향란씨가 그만 몹쓸 병에 걸렸다.

칭다오 모 한국회사에 취직한 향란씨는 사회인이 된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아름다운 청춘의 기록을 사진으로 남겼다.

  2010년 8월, 박씨가 아침시간에 중국 칭다오 집에 전화를 하면 둘째 딸이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할 때가 많았고 피곤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박씨는 그런 딸에게 “성인이 된 사람이 무슨 늦잠이 그렇게 많으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어느 날 생리가 멎지 않아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받은 향란씨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백혈병’이란 청천벽력 같은 진단결과를 전했다.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둘째 딸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벌을 주느냐”고 박씨는 자신과 하늘을 향해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빈손으로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던 박씨는 2010년 10월 달 향란씨를 한국에 데려왔다. 딸애를 구하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던 박씨는 큰 딸을 고향에 돌려보내고 칭다오의 집을 처리한 돈과 친지들에게서 빌린 돈을 합쳐 어렵게 6,000만원(한화)의 수술비를 마련했다. 그리고 박씨가 직접 골수기증자로 나서 2011년 4월 골수 이식 수술을 했다.

흉해진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지만 박씨는 딸 앞에서 강해야 했다. 박씨는 “딸애가 살아주기만 바란다”며 향란씨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로 혼신의 힘을 쏟았다. 백혈병환자에게 작은 바이러스 감염도 치명적인 요소가 되기에 박씨는 최대한 조심하며 보살폈다. 딸애가 쓰는 식기를 비롯한 모든 용품은 매일 물에 끓여 소독을 했고 물도 4시간에 한 번씩 끓여 먹이다보니 새벽에도 일어나 물을 끓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집안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향란씨의 입맛을 맞추느라 끼니마다 다양한 영양소를 살린 미음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박씨의 이런 지극정성과 적극적인 치료 자세에도 불구하고 향란씨의 병세가 그 해 11월에 다시 악화되었고, 두 번째 이식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엄마,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해”

  아빠의 버림을 받고 장애인 언니와 자신을 돌보며 막심한 고생을 다한 어머니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남달랐던 향란씨는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자주 하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런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향란씨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언니를 보살피는 등 꿋꿋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어머니를 괴롭히는 장본인이 된데 대해 향란씨는 못내 괴로워했다. “엄마 정말 미안해. 엄마를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병이 난 뒤 향란씨가 어머니에게 자주 한 말이었다.

2차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은 향란씨가 힘든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이었지만
간호사의 카메라를 향해 옅은 웃음을 짓고 있다

 

2012년 2월에 시행한 2차 골수이식 수술은 제대혈을 이용하다 보니 1차 때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향란씨는 2차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을 때 약화된 페기능 회복제로 임상실험 무료 약을 신청하기도 했지만 체중미달로 포기해야 했다.

  1차 수술에서 집의 모든 재산을 날려버린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향란씨는 두 번째 수술 비용을 위해 어머니가 어떤 노력을 들였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딸을 살리겠다고 동분서주한 박씨의 노력으로 향란씨의 사연이 전파를 타게 됐고, 교회와 사회복지단체 등에서 성금이 답지해 어렵사리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어머니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향란씨는 올 해 9월 친구와 같이 병원을 찾아 혈액검사를 받고 악화된 수치를 통보받은 후 어머니에게는 수치가 좋아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의 추궁에 바로 밝혀진 거짓말이었지만 향란씨는 악화된 수치를 감추고 이대로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검사결과를 보고 대성통곡하는 어머니를 끌어안은 향란씨는 “2차 수술을 받고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아 너무나 기뻤는데…. 엄마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며 ‘미안해’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흐느꼈다.

“죽기 싫어요. 정말 살고 싶어요”

  세 번 째 골수이식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향란씨는 강하게 거부했다. 어머니 박씨는 “완치 확률이 1%에서 100%가 될 수 있고 100%에서 1%가 될 수도 있지만 넌 그 1%의 확률을 버리면 안돼… 지금까지 널 위해 살아온 엄마를 위해서라도..”라며 향란씨를 설득했고, 주치의 교수도 가세했다.

  향란씨의 밝고 강인한 모습을 많이 지켜봤던 간호사들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어떤 간호사는 향란씨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완쾌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주위의 환자들도 “향란씨의 엄마처럼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수술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설득했다.

  이처럼 어머니 박씨와 주변사람들이 근 한 달 가까이 달랜 끝에 향란씨는 3차 이식수술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골수 기증은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는 언니가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3차 수술은 아직 확실한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주치의는 내년 1월로 수술을 예상하고 있지만 수술비용을 마련하지 못하면 무산될 수 도 있다. 올해 3월부터 박씨는 매일 일당을 뛰고 있지만 하루 수입은 5만~6만원으로 겨우 생활을 꾸려가는 형편이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 2동의 어느 작은 지하방에서 만난 향란씨는 머리칼이 많이 빠져 머리 속살이 훤히 보였지만 얼마 안 되는 머리칼을 뒤를 묶었다. 향란씨의 형형한 눈망울에서 삶에 대한 강인한 의욕이 뿜어져 나왔다. 향란씨는 말했다. “죽기 싫어요. 무서워요. 정말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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