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수박할머니,고 리애신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5월29일 00시00분    조회:98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수박할머니 (西瓜奶奶),연변의 1세대 ‘왕훙’이라 칭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시다.
 
모멘트와 미니블로그(微博)가 성행하던 시절, 지금의 ‘왕훙’들만큼 얼굴이 많이 알려진 수박할머니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결코 SNS덕분이 아니였다. 바로 연변축구였기에 가능했다.
 
당시 연변의 온갖 관심은 ‘연변축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던 때였으니 수박할머니의 등장은 각본없는 드라마같은 것이였다. 그런데 얼마전 수박할머니가 쓸쓸히 돌아 가셨다는 가슴아픈 비보를 듣고 6년전 수박할머니를 취재하면서 못다했던 에필로그를 오늘 다시 적어보려 한다.
 
 
 
우리들에게는 리애신이라는 실명보다는 수박할머니라는 별명이 더 익숙하다
 
2015년 6월 24일 《인터넷 길림신문》에 발표된 본사 김룡기자가 쓴 ‘80세 할머니 우리 선수들께 수박이나 사주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수박할머니가 세상에 가장 먼저 알려지게 되였다.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아가 무더운 날 땀흘리며 고생하는 선수들에게 수박이나 사먹이라고  1000원을 기부한 할머니의 축구사랑이 곧  파다히 퍼져 나가면서 할머니는 수박할머니로 불리우게 되였다. 할머니의 정체가 하도 궁금하여 나는 이튿날 어떻게든  할머니를 찾아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게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연변은 축구로 대동단결되여 있었고 수백명 축구팬들이 모인 연변축구팬 단톡방에서 할머니 이웃에 산다는 한 축구팬의 제보로 나는 연길 북대에 위치한 연북아빠트단지에 할머니가 살고계신다는 정보를 얻고 무작정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집도, 할머니도 찾을 수가 있었다.

 
2015년 6월 24일 오후 연변축구구락부를 찾아 선수들에게 수박이라도 사주라고 1000원을 내놓는 리애신할머니
 
인턴도 중견도 아닌 입사 5년차 기자였던 나에게 그날의 취재는 기자생애 최대로 힘들었던 ‘푸대접’ 인터뷰였다. 긍정코 좋은 기사감인데도 할머니는 취재를 완강히 거부하셨다. 하여 설득에만 족히 한시간 반이 넘어 걸렸다. 조용한 곳을 찾아 집안으로 들어가려 해도, 근처 휴식터를 찾아 앉자고 해도 너무나 확고했다. 그렇게 아빠트단지를 훨씬 벗어나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 가다보니 길거리 인행도에 멈춰섰다. 도움을 청해 선배기자들이 연변축구소식이 실린 신문을 갖고 달려온것이 큰 작용을 했다.
 
 
수박할머니는 연변축구에 대해 환히 ‘꿰뚫고’ 계셨다

그렇게 완강히도 취재를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거짓말처럼 신문을 반갑게 받아 펼치시더니 큰 소리로 연변축구기사를 읽으시며 즐거워 하셨다. 알고보니 할머니는 유일하게 신문으로 연변축구소식을 접하고 있었고  신문을 ‘코밑치성' 한 보람으로 어렵사리 인터뷰를 시작할수 있게 된것이였다. 할머니의 본명은 리애신이였고 78세 고령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연변축구의 과거와 현재상황, 지어 매 선수들의 신상정보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계셨다. 그러다 알게 된 가족사와 현재 지내는 상황이였는데 할머니는 북대신촌이 파가이주하면서 잠시 세집생활하고 있었다.축구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우리는 그날 리애신 할머니의 인생이야기를 덤으로 듣게 되였다.

당시 입고 계시던 옷이  20년째라는 단벌 신상 이야기며, 지붕에 물이 새서 대야 수십개를 받쳐 놓고 살던 이야기, 이곳저곳 수십번 이사를 하면서 살아왔다는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도 텔레비죤과 집전화가 없다는 소박하고 썰렁한 살림이야기 … 길바닥에 멈춰 선채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세시간을 훌쩍 넘겼다. 확실했던건 연변축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80고령임에도 홀로 살고 있고 하얗게 센 백발이 무척 외롭고 애처로와 보였던 기억이다.

할머니에게 드린 길림신문에 나의 전화번호를 함께 적어 드렸다. 나중에 신문이 나오게 되면 핸드폰이 없는 할머니셨기에 이 곳으로 전화를 걸면 꼭 신문을 갖다드리겠다는 약속을 남겨 주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야간근무를 해가면서 할머니 기사를 작성했고 지금 모두가 익숙히 알고 있는 그 이름‘수박할머니’는 그 기사에서 가장 처음으로 붙여졌다.그리고 후에 있은 이야기지만 수박할머니 취재기사는 길림신문상 1등상까지 수여 받았다.

《길림신문》에 실린 연변축구 소식을 읽으면서 즐거워 하시는 수박할머니

그 후로 모르는 번호로 번갈아가며 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수박할머니였다. 길가던 행인의 휴대폰을 빌리기도 했고 슈퍼에 들어가서 공용전화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연변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오전부터 경기시작전까지 나에게  몇번이고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이지 당시에는 할머니가 귀찮게만 느껴졌다. 전화를 받아보면 별다른 용무도 없었다. 자꾸만 언제 경기장에 나오냐고 물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게 분명했지만 그때는 그게 나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솔직히 알면서도 나는 귀찮다는 리유로 모르는척 외면하고 싶었다.

“연화야, 연화야…” 내 이름은 영화라고 시정해주는데도 자꾸만 연화라고 불렀고 할머니는 영화라는 이름보다는 연화라고 부르는게 더 편했나 보다. 지금도 “연화야, 연화야…” 하는 할머니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짠해난다.

수박할머니의 연변축구를 위한 뜨거운 열정과 애정이 길림신문을 시작으로 중앙매체들에서까지 널이 보도되면서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이슈 인물’로 되였다. 할머니의 축구사랑에 감동된 연변축구구락부에서도 할머니를 찾고 싶어했다. 할머니와 련락할 방도가 없어 길림신문사 기자에게 련락을 취해달라는 청탁이 왔다.

2015년 7월 18일, 연변팀 경기가 끝난 뒤 박태하 감독이 수박할머니에게 감사의 꽃다발 증정의식을 진행할 예정이니 할머니를 꼭 경기장에 모셔달라는 청탁이였다. 전화도 없는 수박할머니에게 이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나는 할머니집을 열번도 넘게 찾아 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갈때마다 문이 잠궈져 있어  궁여지책으로  집문고리에 쪽지를 끼워놓고 경기당일 지정한 위치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경기 당일 할머니는 쪽지의 약속대로 그 장소에 나오셨고 나는 매체 지정석인 옆구역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후반전이 시작해 경기에 정신팔려있는 사이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구락부측에서꼭 할머니를 모셔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진땀이 바질바질 났다. 반시간 넘게 경기장을 헤매면서 겨우 할머니를 발견했는데 수박할머니는 글쎄 화장실에 들렀다가 관람구역 반대쪽에 찾아가 앉으셨던 것이다.

경기가 끝나갈 무렵 할머니를 모시고 대기실로 가야 하는데 안간다고 견결히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의식따윈 필요 없다는 것이였다. 꽃다발을 받으려고 쌈지돈을 내놓은게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도 구락부측과의 약속이니 어떻게든 설득해서 모시고 대기실로 내려갔는데 그 와중에 꼴이 터져 할머니는 대기실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덩실덩실 춤추던 그 모습이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경기가 끝나고 약속대로 할머니를 경기장 잔디 한가운데에 모시기로 했는데 엄마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마냥 내품에서 우시는 것이였다. 이런 대단한 대접을 받으려고  돈을 의연했던게 아니라면서 혼자서는 도저히 못나가겠으니 꼭 나와 함께 나가자고 내 손을 잡아 끄시는 것이였다.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엉겹결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 영광스러운 잔디를 밟으며 나 역시 대본에도 없던 ‘배우노릇'을 해야 했다.

수박할머니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박태하감독, 오른쪽이 이날 동행한 김영화 기자

“할머니, 할머니 덕분에 선수들이 힘을 냈습니다.”

박태하 감독은 수박할머니 목에 정중하게 꽃다발을 걸어 드리며 오래도록 꼭 안아 주셨다. 할머니는 박감독의 품에서 또 다시 주체할수 없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꽃다발을 얼른 자신의 목에서 벗겨내여 다시 박감독에게 걸어 주었다. 관중석에서는 축구팬들이 그대로 남아 다 함께  수박할머니(西瓜奶奶)를 목터져라 외쳐주던 그 함성은 감동의 쓰나미로 밀려와 나를 비롯한 많은 축구팬들의 마음에 평생 잊지못할 연변축구의 감동을 남겨 주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렇게나마 수박할머니의 곁을 지켜줬던 나에게 할머니 비보 소식은 참으로 많은 과거를 떠올리고 또 생각해 보게 했다... 한때 축구팬들에게 누구보다 수박할머니 소식을 가장 발빠르게 전해주려고 애쓰던 나였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구보다 뒤늦게 수박할머니의 작고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 미안한 마음에 괴로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구보다 가슴 뜨겁게 연변축구를 열애하던 그 백발이 성성했던  모습, 전국 축구팬들에게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을 담아 연변축구를 알리는 빛나는 명함장같은 분이셨던 ‘수박할머니’, 그이의 모습은 나의 기억속에도, 우리의 기억속에도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연변축구가 프로리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수박할머니는 알고 가셨을가?

어느 네티즌이 할머니를 추모하며 남긴 댓글이 가장 눈에 띄였다. 연변축구가 바로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던 수박할머니가 그동안 부진했던 연변축구의 힘든 나날을 어떻게 보냈을지 정말 궁금하다. 돋아나는 희망처럼 연변축구의 프로리그 귀환을 수박할머니는 살아생전 분명히 학수고대하셨을것이다. 수박할머니는 이미 떠나 가셨지만 할머니가 남겨준 연변축구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열정의 메세지는 영원히 연변축구팬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박할머니, 고 리애신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길림신문 김영화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한국 속 작은 중국 “장사하고 싶어도 상가가 없다” 대림2동에 중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상권이 활성화되고 있다. 사진은 대림2동 도깨비시장 거리. 아주경제 김현철·권경렬·노경조 기자 = "대림2동 상권은 경기를 타지 않습니다. 권리금이 치솟아도 상가를 넘기지 않는 이유는 이 권리금으로 다른...
  • 2013-12-11
  • 한평생 농사군으로 황소처럼 일하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박두현. 《세월이 류수》라더니 아버지께서 저 세상에 가신지도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셋째딸 동선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그날부터 이 딸은 종래로 아버지를 잊은적 없습니다. 세월이 좋아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애절하게 가...
  • 2013-12-09
  •   (흑룡강신문=서울) 나춘봉 특약기자 = “이젠 엄마도 힘들고, 돈도 없으니 수술을 포기하겠어요.”   세 번째 골수이식수술을 거부하는 딸애의 말에 중국 동포 박경옥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 동안 딸이 병마와 싸우며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이겨냈고, 삶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누구보...
  • 2013-12-05
  • 4년간 주덕해주장의 경호원을 지낸적 있는 곽해선(郭海善, 80세)옹은 쉽게 자기 경력을 내비치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또 남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소수민족지역 공무원들은 민족을 막론하고 반드시 소수민족언어로 말할줄 알아야 자격있는 공무원이라고 한다. 혹 조선족자치주 초대주장의 경호원으로 사...
  • 2013-11-29
  • 연길시 남양사회구역 경로전통미덕 이어가 “로인들의 오늘이 우리의 미래다.” “로인들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하다” 연길시 진학가두 남양사회구역에서는 로인을 존중하고 로인을 사랑하며 로인을 돕는 경로분위기를 형성하여 사회구역의 로인들이 보다 편하고 보다 즐겁게 만년을 보내게 하고있다....
  • 2013-11-28
  •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정태룡(58살)씨와 지체장애 2급판정을 받은 허채란(56살)부부는 목발없이는 한발작도 내디딜수 없다. 남보다 느리지만 이들 부부는 늘 멈추지않는 걸음을 옮긴다.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무리 별볼일 없더라도 살면서 포기해야 할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숫...
  • 2013-11-27
  • 또 하나의 풍년해이다. 훈춘시 반석향 맹령촌의 산골짜기와 들은 울긋불긋 사과로 뒤덮였다. 벌거우리하고 어린애머리통만한 사과들이 가지휘게 달려 보는이들을 경탄케 한다. "우리 촌의 사과산업발전에는 이름없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시농업국의 안종헌이야말로 첫손 꼽을만한 무명영웅이지요." 맹령촌 리호...
  • 2013-11-25
  • 연화조선족향 장복촌 당지부서기 마덕운. 유수시 연화조선족향에는 의지할곳이 없는 조선족아이를 자기집에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운 한족 당지부서기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이야기의 장본인은 바로 연화조선족향 장복촌 당지부서기인 마덕운이다. 1995년 연화조선족향 장복촌의 조선족농민 현청산...
  • 2013-11-23
  • 설경촬영 떠났다가 선봉령에서 폭설에 갇혀 19시간만에 구조돼 눈에 갇혀 움직일수 없게 된 박군걸기자의 승용차(박군걸기자 제공). 지난 11월 17일에 연변지역을 강타한 폭설로 인한 각종 재난과 사고소식이 빈번한 가운데 연변주 화룡시소방대대에서 발부한 한편의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해당 기사...
  • 2013-11-22
  • 연길시제3중학교 종미영학생. 11월 16일 저녁, 연길시제3중학교에 다니는 종미영(18세)학생은 연길천성쇼핑광장부근에 있는 학원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골목입구에서 남성용지갑을 주었다. 안에는 현금 한묶음과 령수증 여러장이 들어있었다. 지갑을 주은후 종미영은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알렸다. 《아...
  • 2013-11-22
  • 화룡시 서산소학교에는 품덕도 좋고 학습성적도 좋아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몸에 듬뿍 받고있는 공금령이라는 녀학생이 있다. 그런데 얼마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있던 그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가까운 병원에 호송되여 긴급치료를 받았지만 병세를 확진할수 없어 또 연변병원에 호송...
  • 2013-11-21
  • 130명 고아, 결손가정 아이들을 부양한 중위기씨 심장병으로 쓰러져   “불우아이들과 함께라서 더 맛있어...” 왕청현 대명사회구역의 “봄비 사랑의 집”의 “애심아버지” 중위기씨(60살)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거느리고 아침 일찍 새벽운동에 나섰다가 갑자기 쓰러져 병...
  • 2013-11-21
  • “형사경찰로서 자아희생을 겁내면 안되죠, 앞으로도 이런 사건이 터지면 례외가 아닙니다.” 올해 31세에 나는 남궁승인(南宫胜仁)은 연길시공안국 형사경찰대대 인신침범사건정찰중대의 한 일반 조선족형사이다. 사업에 참가한지 그닥 오래되지 않고 또한 공안국 형사경찰대대에 입문한지는 1년밖에 되지 않지...
  • 2013-11-20
  • 아이들과 함께(두번째줄 우로부터 여섯번째 남수부서기)/ 사진 리성복 특약기자 연길시 북산가두 단연사회구역 당총지 부서기를 맡고있는 남수(42세)씨는 고혈압환자지만 자기 직책을 훌륭히 완수해 주민들의 칭찬을 받고있다. 연변대학의 한 학생이 생활난에 부딪쳤다는 말을 듣고 푼푼치 않은 상황에서도 매달 200원씩 이...
  • 2013-11-19
  • 조선족불구자 김영화 일전 장백조선족자치현심계국, 현발전개혁국, 현불구자련합회에서는 공동으로 돈을 모아《장백 좋은 사람》이며 조선족불구자인 김영화한테 가치가 6600원에 달하는 전동휠체어를 가져다주었다. 장백현 십사도구진 삽사도구촌에 살고있는 김영화는 어려서부터 선천성 척추(脊柱)병에 걸려 다리가 마비...
  • 2013-11-16
  • 1953년 아홉자식들과 함께 있는 아버지, 어머니(뒤줄 오른쪽 첫벗째 13세 나는 작자 김영자) 나의 어머니는 93세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림옥련이라 부르는 어머니는 글공부를 하지 못해 평생 자기 이름을 써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빈궁속에서도 아홉자식을 낳아키워준것만도 고마운데 공부까지 시켰다. 자식농사...
  • 2013-11-15
  •      “내 자식과도 같은 나젊은 소방장병들이 더 안전하게 불을 끄고 생명을 구조하도록 하기 위해 이 총을 만들었습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일전, 훈춘시의 열정시민 최선생은 자신이 발명한 소방용격파권총(消防破拆手枪)을 가지고 주공안소방지대훈춘대대를 찾아 소방장병들로부터 발...
  • 2013-11-14
  • 길림시 선영구의 한 로인협회에는 올해 79세 나는 안련복로인이 있다. 젊었을 때는 전국 로동모범으로 활약했고 지금은 로인협회에서 로인들과 함께 마지막 여생을 뜻깊게 보내고있다. 안로인은 《남보다 일 좀 더 하는것이 참말 행복한 일이요》라고 한다. 로인활동일이면 안련복로인은 언제나 일찍 활동실에 가서는 깨끗...
  • 2013-11-14
  •   “량부모를 일찍 여의여서인지 아프고 힘든 로인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손길이 다가가고 보살펴드리게 됩니다. 때론 하루에 2~3시간도 못 자지만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편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룡정시 하서가두 봉림촌 봉림 2대에서 봉림로인락원을 경영하는 림계화(46세)씨의 진...
  • 2013-11-12
  •          미국 국회의사당앞에서 딸과 함께 지난 8월 14일부터 9월 13일까지 나는 손자가 미국 뉴욕대학에 붙은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미국을 유람하는 행운을 갖게 되였다. 14일 저녁 나는 대련에서 한국 아시아나려객기에 올라 한국 인천에 도착했다가 거기에서 다시 미국비행기에 오...
  • 2013-11-11
‹처음  이전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