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소감]
채운산: 소외된 사람들, 그들의 아픔을 아파한다
바야흐로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는 이 때 《길림신문》 ‘두만강’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여 참으로 영광입니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저의 한 친척입니다.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림업작업소의 로동자였던 그는 한국바람에 안해를 떼우고 그 충격에서 헤여나오지 못해 풍을 맞아 결국 양로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매번 그를 보러 양로원에 찾아갈 때마다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고 또 떠나올 때면 창문가에 서서 손을 흔드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처럼 가족이나 사회의 버림을 받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세상의 구석에 밀려나 사각지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 그들을 볼 때마다 주인한테 쫓겨난 길고양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군 하였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나나 지령감, 미숙이 그리고 민우는 모두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길고양이와 다름없는 불우한 처지의 티끌 같은 생령들입니다.
비록 사회가 발전하였다고 하지만 아직도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 대로 삶에 대한 갈구가 있고 인간답게 살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뜨거운 가슴과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다만 그 누군가의 버림을 받아 ‘길고양이’가 되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부모일 수도 형제일 수도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애달픈 삶을 조명하고 그들의 아픔을 호소하고저 한 것이 바로 제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문학에 대한 개념이나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때문에 각자가 자기 나름 대로 글을 쓰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문학이 다양화, 차별화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김철호:수상은 ‘빚’이고 ‘독’
집체호 시절이던 1974년 초봄, 연길현문화관에서 문학보도원으로 일하시고 계시던 김영남선생님이 생산대대에서 흑판보랑 꾸려 글개나 쓴다고 소문을 놓고 있던 나를 찾아와 밤을 패면서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나더러 거짓말하라는 겁니까?” 듣다 못해 한마디 내뱉는 나의 말에 무릎을 탁 치면서 “그렇다니깐!” 하며 술병 밑굽 같은 두터운 근시안경을 추스르던 선생님 모습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시키는 대로 없는 거짓말을 잔뜩 꾸며 만든 글이 소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 해 《연변문예》 제10기에 나간 것이 처녀작이니 이 길에 들어선 지도 근 반세기, 44년이 됩니다.
그러나 여건이 되지 않아서 한때 문학을 놓으려고까지 하다가 동시를 썼고 성인시도 썼습니다. 그러나 문학의 첫걸음을 뗀 소설을 항상 잊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시를 쓰면서도 시보다 소설을 더 많이 읽습니다. 한국에 자주 다니면서 세계적인 소설가들의 작품을 많이 사서 읽었습니다. 후배들이나 제자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기념으로 시집은 쉽게 주지만 소설책은 잘 주지 않습니다. 찐득한 첫사랑의 미련 같은 그런 감정이랄가요? 소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엔 이야기가 많이 쌓여있는데 필을 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글줄도 모자라고 기력도 모자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두려움입니다. 외국소설을 많이 읽었는지라 눈이 잔뜩 높아져서 어지간한 건 소설 같지가 않아 손을 댈 수가 없었고 자칫 웃길 것 같기도 해서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련습 삼아, 마지막 기념 삼아 두편의 소설을 써보았습니다. 소설을 후배소설가에게 보였더니 “발표는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선배는 시인이지 소설가는 아닙니다. 소설을 쓰지 말 것을 권합니다. 그냥 시인으로 살아요.” 하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나도 겸손하게 수긍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버리기가 아까왔습니다. 버리지 않아서 생긴 것이 오늘의 문학상입니다. 후배의 말을 나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천만지당합니다. 다시 읽어도 소설로서의 모자람이 많습니다. 솔직히 수상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수상이라는 것 참 ‘독’이 있습니다. 처음 동시를 썼을 때 상을 탔습니다. 그것이 ‘빚’이 되고 ‘독’이 되여서 20여년을 견지했더니 제법 동시가 인정받게 되였습니다. 이번의 수상도 나에게 그런 ‘빚 갚음’의 ‘독’이 되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독’과 ‘빚’ 때문에 소설을 쓰고 픈 마음이 자꾸 생기는 걸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답을 주겠지요.
졸작에 후한 점수를 준 평의위원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발표의 문을 열어준 길림신문사에 감사 드립니다.
수상소식이 날아온 날이 4월 29일, 음력으로 3월 14일. 나의 생일날이였습니다. 감동은 배로 컸습니다.
박장길: 두만강, 내 고향의 강 이름
내 고향의 강 이름과 같은 ‘두만강’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여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고 더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작년 6월 ‘창작휴가’란 배려로 중국작가협회 북대하 ‘작가의 집’에 갔었습니다. 근 10일 동안 매일같이 맨발로 백사장을 걸으면서 푸른 바다를 한자락씩 찢어가지며 쓴 시가 오늘 영예의 수상작인 〈바다〉입니다.
사람은 세갈래 길에 의하여 예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사색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높은 길입니다. 둘째는 흉내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셋째는 경혐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은 가장 괴로운 길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창작은 아름다운 고통이고 작가의 인생은 지구전입니다. 즉 창작은 올리막길입니다. 나의 선택은 운명적으로 경험에 의한 가장 괴로운 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입니다. 전통을 타파하지 않으면 얽매입니다. 전통이 없으면 목동이 없는 양떼이나 혁신이 없으면 시체와 같다고 합니다. 자기만을 고집하면 부끄럽게도 답보, 퇴보하게 됩니다.
최근에 시의 성역을 넓히고 나의 시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여러 류파의 시론 공부에 ‘붉은 정열’을 쏟으며 깊이 느꼈습니다. 시를 창작할 때에는 모든 시의 리론을 잊어버리는 것이 시의 시론이라는 것을!
나의 등을 밀어주는 퍼런 힘으로 무겁게 출렁이는 바다, 세상이 힘들 때마다 그 바다 앞에 지친 마음을 보내 세웁니다. 퍼렇게 멍들더라도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힘든 쉰아홉고개를 넘으리라. 험한 세월의 고개를 넘어가리라.
김정권: 손가락은 오늘도 아프다
수상소감을 쓴다는 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그러고 보면 고민이란 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시라는 걸 늦게 쓰면서 운 좋게도 세번째로 쓰는 소감인데 매번 쉽게 쓰자 하면서도 신중해지는 까닭은 그만큼 흥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롤모델을 놓고 글을 쓰는 것 역시 행복한 일입니다.
가을이 한참 배 불러 갈 즈음 평론가 김몽선생으로부터 전화 한통 받았습니다. 두만강 부근에 함께 가자는 청이였습니다. 두만강에 가본 지도 꽤 오래되고 강바람도 쏘일 겸 선뜻 받아들이고 이튿날 곧장 그리로 갔었습니다. 저희를 먼저 반겨주는 건 처마 낮은 마루에서 해빛을 쫓던 닭들이였고 줄을 지어 울바자를 둘러싼 속이 빈 항아리들이였습니다.
한 녀인이 문을 열고 나오는데 얼핏 봐도 아주 왜소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까만 손이 저의 손을 잡을 땐 언뜻 참 일을 많이 한 손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저희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한 것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였습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웃방 절반도 더 차지한 까아만 피아노였습니다. 그 옆엔 구정이 길게 누워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벽에는 비파가 부착되여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집안은 어딘가 ‘부조화’인 풍경인 것 같았습니다. 이따금 허리가 몹시 굽은 로구의 할머니가 보였습니다. 구순된 그녀의 로모였습니다.
그녀가 담근 붉은 앵두술이 거나하게 되자 의례히 그녀의 연주를 들어볼 차례였습니다. 먼저 교본에 따라 피아노를 쳤고 구정을 긁고 비파를 뜯었습니다.
두만강은 그녀의 집에서 50메터도 되나 마나 했습니다. 우리는 두만강에 나가 종일 바람을 쏘이며 거닐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본 전부였고 그 실존인이 다름 아닌 〈촌부의 音〉이였습니다. 홀로 로모를 모시고 자식을 멀리 보내고 밭을 다루면서 글을 쓰는 녀인이였습니다.
그녀의 손끝에 맞아 아픔을 내는 피아노가 보입니다.
그녀의 손끝에 긁혀 통한을 치는 구정이 보입니다.
그녀의 손끝에 뜯겨 그리움 씹는 비파가 보입니다.
그 소리들에 저의 지금의 이 마음도 함께 실어 두만강에 보냅니다.
량영철: 장손이라는 이름으로
아홉살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한무리의 어른들이 내려와 학교에서 공부하는 나를 불문곡직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떴던 것입니다. 그 날부터 나는 사흘간 상복을 입고 머리 숙이고 조문객들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장손이라는 사실도 그 때 알게 되였습니다.
그 때부터였을 겁니다. 내가 한해도 빠짐없이 청명과 추석이면 할아버지 산소로 성묘하러 다녔던 것은. 그리고 왜 나는 다니는데 할머니는 다니지 않는지 의문을 가졌던 것은.
장손이였던 고로 나는 할머니의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자식들이 모시지 않는 할머니를 모시게 되는 ‘영예’도 지니게 되였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였지요. 할머니가 후처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직 밝히지 못한 또 다른 비밀들을.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서 나는 할머니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쑥꽃을 꼭 수필로 쓰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쓰기는 고사하고 십년간 잠수를 타고 말았습니다.
긴 잠을 잔 죄로 지난해 수필 네편에 소설 세편을 썼습니다. 수필 세편과 소설 한편은 《장백산》잡지에 보냈고 〈쑥꽃〉은 청명날 아침에 썼는데 리영애선생이 5월 4일자로 《장백산》잡지보다 먼저 내줬으니 후에 썼으나 컴백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그렇게 컴백한 작품이 상을 받는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오래동안 문단과 떨어져있던 사람이 발표도 하고 상도 받는다니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입니다.
중국에 왔다가 돌아간 지 얼마 안됩니다. 그런데 또 중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이래서 사는 게 재미 있는 걸가요?
이미 상으로 결정 났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따라서 몸이 문단으로 돌아왔으니 더 좋은 작품을 쓰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아직 쓰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들도 쓸 것입니다. 장손이라는 이름으로.
김경화: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봅니다
수상소식을 접한 것은 늦은 오후였습니다.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 시골에 계시는 여든넷의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그만 돌아오려고 막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던 참이였습니다. 얼떨결에 ‘두만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돌아오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로지 글을 쓴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저는 제 노력이나 재능에 비해 과분한 사랑과 인정을 받아왔고 받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감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항상 어깨를 두드려주며 힘내라고 격려해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선생님과 제 글을 상으로 뽑아주신 평의위원님들께 감사드리고 이런 자리에서 이런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상을 만들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산과 들이 푸르러가고 분홍빛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는 5월에 이런 축복의 시간이 선물처럼 제게 주어진 것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풍경〉을 쓰기까지의 그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을 돌아보면 아직은 울컥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어떤 날과도 다르지 않은 삶의 한 페지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지금 내가 마주앉은 창 너머로 검은 카텐처럼 드리운 밤의 어둠이 있고 그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희미한 불빛 몇개가 있습니다.
나는 캄캄한 어둠이 아닌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있습니다.
김향란: 준비된 눈물
서커스를 관람하면서 펑펑 울게 될 줄은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려행상품의 하나로 들어있는 서커스관람 때문에 낯선 서커스극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몰랐습니다.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품고 있던 아픔이 눈물이 되여 서커스란 대목에서 자신의 분출구를 찾았던 것입니다.
아직도 가슴에는 흘릴 눈물이 준비되여있어 마음이 위안되고 풍요로와집니다. 감성이 메마르지 않은 거겠죠.
슬플 땐 슬픈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풀어갑니다.
아플 땐 흐를 눈물이 있어 아픔을 씻어나갑니다.
뭐라 가슴에 할 말이, 채 못한 말이 남아있을 때 글쓰기로 마음에 힐링을 줍니다.
고마운 분들의 격려와 지지로 잠시 쉬였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제 마음을 다독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길림신문/사진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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