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은 모친의 생신이었다. 1928년생이니 꼭 아흔. 환갑이며 칠순 등에 ‘잔치’를 하지 않았기에 올해는 나름 성대하게 축하하고 싶었다. 동생과 뜻을 모았지만, 어머니는 “집에 우환이 있는데 무슨 잔치냐”며 가족끼리 조촐하게 밥이나 먹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일요일에 정말 가족만, 친척이 없다시피 하니 12명만 모여 근사한 데서 점심을 먹긴 했다. 그렇다 해도 생신 당일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아침 일찍 부모님 댁에 가서 집으로 모셨다. 우리 부부라도 챙겨 드리고 싶어서였다.
"이제 주변에 사람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여든아홉 아버지의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중앙포토]
식사 후 과일을 드시면서 아버지-당신은 여든아홉이다-의 이야기에 잠깐 먹먹했다. “이제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함께 월남한 고향 친구분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거나 아예 기동을 못 해 만나기 힘든 탓이란 설명이었다. “아무개는 치매가 왔고…후배 아무개는 몇 달 전 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여든이 안 됐으니 요즘으로 치면 참 일찍 간 셈”이라는 둥 두서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머니는 조용했다. 평생 살림만 했으니 사귄 이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당신이 몸이 불편한 데다 멀리 있거나 해서 왕래하기 힘든 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요즘은 만나는 분이 통 없으니 당연했다.
사실 내 입장에선 실감하기 힘들다. 60대 중반이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하는 일도 있고,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친구며 후배도 여럿 있다. 게다가 카카오톡이며 SNS의 도움으로 십여 년 만에 동창과 연락이 닿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잘 나가는 친구가 앞장서 동창끼리 미술관에 가자며 온라인 사발통문이 돌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없는 데서 오는 적막감 혹은 막막함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한데 “이제는 늙은이가 온다고 꺼릴까 싶어 친구 장례식에도 갈 수가 없고, 설사 내가 세상을 떠난다 해도 연락할 사람도 별로 없네”라는 이야기에는 적으나마 공감이 갔다.
'전우애' 나누던 회사 친구들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낼까
때로는 얼굴을 붉히고, 때로는 물밑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랜시간 '전우애'를 나누었던 보고싶은 동료들. [사진 pixabay]
퇴직 무렵, 당시 툭하면 구조조정이니 뭐니 해서 명예퇴직 바람이 불었다. 비슷한 연배가 계열사로 떨려 나거나 퇴물 취급을 못 견뎌 자진해 사표를 내거나 해서 하나둘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밥이야 후배들과도 먹을 수 있지만 지난 시절 경험을 공유한 친구를 찾기 힘들자 마땅히 속을 털어놓을 데가 없어 아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냥 좋았던 사이가 아니라 때로는 얼굴을 붉히고, 때로는 물밑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우애’를 나누던 이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지방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고교 동창이 어찌어찌 선이 닿아 저녁을 먹자고 십여 년 만에 메시지가 왔다. 한데 강남에서 보잔다. ‘내가 사는 일산에서는 지하철로도 한 시간 넘게 걸리는데 밥 한 끼 먹자고…’ 싶다가 그래도 ‘ㅇㅋ’를 쳤다. “있을 때 잘하자”란 생각에.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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