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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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일해저터널건설은 시대의 흐름이다 댓글:  조회:2156  추천:40  2009-03-04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한일해저터널건설은 시대의 흐름이다   2006년 11월, 필자는 부산발전연구원 주최의 한상 국제세미나에서 ‘동북아 물류중심도시로서 부산의 발전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부산과 후쿠오카시가 경제공동체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또한 작년에 부산시가 주최했던 한·일 해저터널에 관한 세미나에서도 ‘거제도-쓰시마 해저터널’에 대해 토론하면서 다시한번 부산-후쿠오카간의 경제공동체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랜기간 연변과기대 교수들과 함께해 온 동북아경제공동체 연구 활동의 결과를 지자체에 직접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보람있고 그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얼마 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부산시와 일본 후쿠오카시가 초광역경제권 추진을 선언한 것이다. 부산 허남식(許南植) 시장과 후쿠오카 요시다 히로시(吉田 宏) 시장은 2일 부산시청과 후쿠오카시청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갖고, 경제협력협의회 구성과 공동협력사업 발굴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산·후쿠오카 초광역경제권 형성 공동 협력'을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국내 광역·기초자치단체 등이 외국 도시와 자매결연하는 등의 교류 사례는 있었으나 외국 도시와 광역경제권을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도시는 초광역경제권을 구축해 부산시가 ‘국경 없는 경제시대’를 선도하고 시민들에게는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제공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돌파구를 구축할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이를 위해 경제 관련 단체장 각 7명으로 구성된 '경제협력협의회'를 구성, 함께 추진할 사업을 발굴하고, 경제포럼·세미나 등 경제교류 활동을 지원하기로 했다. 머지않아 두 도시는 조선·자동차·기계부품·IT·영화영상산업 등의 분야에서 상호 보완하는 동반자적 관계로 출발해 자유무역협정으로까지 발전해나갈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동북아의 평화공존을 위한 절묘한 힘의 비등점 위에 서 있다. 우리만이 이 그 좁은 역사의 협곡을 지나 이 강대국들을 평화공존의 시대로 이끌어갈 수 있다. 나는 한일해저터널이 단순히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누가 언제, 먼저 그 얘기를 꺼냈느냐는 케케묵은 과거의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또 지금 그걸 다시 들춰내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저 누군가가 내게 한일해저터널 건설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분명하게 이를 찬성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중해시대로부터 이곳까지 흘러온 세계 역사의 변천은 마침내 일본열도를 한반도에 결속시킴으로서, 동북아 전체를 한판의 키보드(Key Board)로 삼아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이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거듭나는 역사를 창출해나갈 것이다. 한일터널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만하는 대중교통인프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은 지정학적인 기능을 극대화시켜 모든 국제관계의 흐름을 통제, 조정, 관리하는 중추신경 제어장치와 같은 Multiple Fusion Leadership을 주변국들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이다.  지금 한중일 3국간에 논의되고 있는 동북아 FTA 같은 사안도 시작단계부터 한국이 조정 관리자로서의 헤게모니를 잡고 일괄 타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만하게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면서 그동안 한중일 3국간에 오랜 장벽이 되어왔던 과거 역사속의 피해의식과 현안문제들도 함께 정리하고 새로운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기약하는 상생 (相生)의 이정표를 세워갈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피해의식을 마치 대단한 유산이라도 되듯 틀어쥐고 있느니 차라리 미래를 향한 도전과 모험의 길을 택하겠으며, 일본이 다시 한반도를 경제 속국화 할 것이라고 우기면서 국수주의적인 고립에 빠지는 패배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일본과 함께 공생의 길을 택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의 열쇠로 열 개의 문을 여는 지혜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희생과 헌신 이 요구된다. 유럽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유럽연합`(EU)의 결성과정에서 유럽의 한 가운데 위치한 독일과 프랑스가 보여준 희생전략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몇 년 전까지 국제안보대사를 지냈으며, 지금은 EACOS 사무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상우박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우리는 처절한 30년 전쟁을 끝내고 근대 유럽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던 베스트팔렌조약의 정신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 서로가 상대방의 이익과 명예를 먼저 추구한다는 원칙을 기초로 평화와 상호신뢰를 구축했으며, 라인강 유역 운하사용권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중부유럽 전체 산업발전의 인프라를 제공한 것은, 당시 프랑스 마자랭 총리의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동아시아의 외톨이(한국)에서 동아시아의 중재자로 나서려면, 자국 국민들이 당장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이 그 시작이다.” 이렇게 동북아의 새로운 역사의 운명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인내와 헌신을 기초로 하는 희생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부응해 나는 부산에서 런던까지보다는 도쿄에서 런던까지의 꿈을 쫒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해 난 길, 나는 그 길 위에서 한국도 일본도 과거의 상처와 피해의식을 해결하고 진정한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대한해협의 해저에 터널을 뚫고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자. 확언하건대 이 거래 성사 여부가, 동북아시대 상생의 메치메이커로서 한국의 능력을 증명할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18    한일해저터널 어떻게 볼 것인가 댓글:  조회:2737  추천:32  2009-02-26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한일해저터널 어떻게 볼 것인가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2002년 월드컵이 한일공동개최로 결정됐을 때, 한국 여론의 절반은, ‘하나마나한 월드컵이다. 외국팀은 인지도가 높고 관광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할 것이다. 우리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식으로 실속도 못 챙길 것이고, 돈은 장삿속 밝은 일본에서 다 챙길 것’이라고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막상 한일공동개최가 결정되고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한국은 일본잔치의 들러리에 불과할 것이라던 우려가 얼마나 지독한 패배의식이자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이었는가가 여실히 입증됐다.   원정경기에서는 현지적응훈련의 질이 결정적으로 승패를 좌우한다. 경기가 다가오자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하루라도 더 현지적응훈련을 해야 하는 각국 대표팀들은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류비용과 인건비가 싼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중요한 시합을 앞둔 팀들은 볼거리가 많은 일본보다는 하루라도 더 연습을 할 수 있는 한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히딩크호가 이끄는 한국팀이 4강이라는 신화를 이루어내자, 일본에서 경기를 치른 팀들까지도 한국 관광을 한 뒤 귀국길에 올랐다. 세계적인 관광대국 일본의 나리타 공항은 그 땐 한국행 관광객들이 거쳐가는 경유지에 불과했다. 결국, 국민사기 고조와 대외적인 국가이미지 제고, 그리고 관광 등의 부수입 면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실속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일해저터널도 마찬가지다. 자존심강한 민족이기에 일본으로부터 받은 지독한 역사적 상처와 불쾌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현실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서 지혜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려의 핵심은 한일 해저터널이 본격 추진되면 후쿠오카와 쓰시마가 국제물류기지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부산항을 비롯한 우리 남해안의 주요항구들이 막대한 손해를 볼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비행기에서 이 지역을 내려다보라. 부산과 쓰시마는 하나의 포구 안에 있는 두 개의 나루일 뿐이다. 쓰시마와 부산의 거리는 불과 45킬로. 적어도 수천 킬로, 많게는 만 킬로를 넘게 이동하는 대륙 간 물류이동에서 45킬로 거리에 있는 이들 두 개의 항구는 하나의 물류기지나 다름없다.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맞잡고 서로의 장점을 합하여 세계에 이름난 첨단물류관광지로 계획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또한 국내의 입장에서 보면, 거제도와 부산만 일대를 한데 묶어 싱가폴과 홍콩을 능가하는 부산-거제도간 광역도시경제권 (TRI-PORT : 항구-공항-고속철도가 연결되는 국제항만도시)을 조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는데, 이렇게 만 된다면 태평양시대의 농축된 기류를 한반도를 거쳐 동북아시아 대륙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블랙홀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더구나 시대는 물류산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주변의 동북아 3국과 주변의 국가들이 물류중심지의 우위권을 놓고 각축전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러시아가 TSR(Trans Siberian Railway)을 지금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의 나진, 선봉지역까지 철도를 광궤로 시설을 현대화했고 중국과 일본이 노선을 둘러싸고 한판 승부를 걸었던 시베리아 송유관 건설은 러시아가 중국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이르쿠츠크 주 타이세트에서 중국의 국경을 따라 아무르 주 스코보로디노까지 연결하는 2.369킬로미터의 구간을 건설해 중국의 송유관과 연결하기로 했다. 일본과는 연해주에서 사할린 섬을 지나 일본까지 연결하는 고속도로사업을 논의 중이다. 일본은 2001년에 신종합물류시책 대강을 발표하고 물류기본법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2001년에 물류현대화 발전계획을 마련해서 황해연안지역에 외자유치를 위한 6개의 산업 클러스터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동북아의 물류 및 비즈니스 중심지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상하이와 베이징간 1,300km 고속철도건설 등 내륙지역의 인프라 확충과 함께 연안도시의 항만시설 확충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마디로 주변국 모두가 서로 나서서 어떻게든 국경을 허물고 길을 내어 인접국과 연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한반도만 덩그러니 고립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한반도는 지리적 조건이 동북아의 중심에 있고 세계 및 동북아 지역내의 모든 공항, 항만과 효율적인 네트웍을 구축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을 갖추고 있다. 한반도 주변상황을 살펴볼 때 시베리아의 천연가스를 비롯한 풍부한 자원을 중국, 일본, 한국이 필요로 하고 있고 일본의 첨단 핵심 기술과 자본재를 중국과 북한이 요구한다. 특히 남한의 100배 면적을 가진 중국은 거대한 산업 생산지이자 소비시장이다. 그 앞에 있는 한반도는 중국이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큰 물류산업의 호기를 낚을 수 있으며 특히, 동북3성 및 베이징, 텐진, 산둥성 등 발해만 지역경제권과 맞물려 중국 동북부지역의 물류 허브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동북아 물류산업에 있어서 만큼은 천운을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내 상황은 어떤가. 현재 북한이 중국을 모방해서 추진하고 있는 신의주특구와 나진 선봉지구는 북한의 체제 한계로 인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한국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자유구역정책이 여전히 규제가 심하고 타지역과의 형평성 문제에 걸려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경제자유구역제도는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나 속도를 낼 수 있을 뿐 우리같은 자유경제체제에서는 정부가 굳이 이를 주도하는 것이 오히려 활발한 민간차원의 경제구역개발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기술과 교통의 발달로 지구촌에 국경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물류와 사람의 이동은 갈수록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런 흐름에 맞춰 국토 전체를 자유구역개념으로 경영해서 성공한 나라가 바로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다. 우리도 지리적 잇점을 활용해 국토전체를 물류중심지화 하는데 승부를 걸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주요 항만들은 인근의 상하이나 홍콩에 물동량을 추월당하고 있다. 특히 중국 상하이는 배후지역의 경제성장과 물동량 증가에 힘입어 처리실적이 연간 30%씩 늘어나고 있다. 부산은 겨우 13%수준이며 그나마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해저터널을 건설해 우리 물류산업의 위기를 타개하고 동북아시대에 물류산업의 허브로 도약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일해저터널은 중국과 러시아를 한반도를 통해 일본과 연결함을 의미한다. 한반도를 통해 중국횡단철도(TCR, Trans China Railway)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Trans Siberian Railway) 등 ‘철의 실크로드’와 Asian Highway를 연결함으로서 시베리아의 석유나 가스 등 풍부한 자원을 대량 소비지역에 공급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협력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어 힘의 균형이 유지되므로 특히 우리같이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가 최고의 수혜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한일해저터널의 입지와 노선 설정은 지역경제발전 뿐만 아니라 국토균형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참고로, 일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한일해저터널의 루트는 큐슈의 탕진을 출발해 쓰시마 하도(下島)를 경유해서 거제도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에 반해 부산시에서는 당연히 쓰시마 상도(上島)에서 부산역으로 직결되는 노선을 희망하고 있다. 사실 유로터널의 경유에서도 알 수 있지만, 해저터널 자체만으로는 경제적 효과가 그리크지 않다. SOC 기반시설 운용 측면에서 보면, 해저터널 출입구 주변에 조성되는 대규모의 물류단지와 배후 공단 및 지역도시와의 연계성을 높이는 일이 경제지표를 끌어 올리는데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된다. 그런점에서 보면 쓰시마-부산 노선은 대도시인 부산이 KTX와 직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배후에 물류단지 및 공단을 조성할만한 가용면적이 부족하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점이다. 이 경우, 유로터널이 입지한 영국의 켄트(Kent)와 프랑스의 깔레(Calais)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특히 깔레 지역에 조성된 터미널은 700ha에 달하며 유럽에서 가장 큰 육송운송단지로 개발되어 영국의 히드로 공항보다도 규모가 크며, 단지 내 철도 연장이 50km, 도로연장이 50km에 달하는 규모다. 그런데 부산의 경우엔 가용부지가 거의없는 상태다. 반면에 거제도 지역은 배후에 가덕도(부산신항)와 진해 및 김해 평야지대가 곧바로 연결됨으로써 대규모 물류단지와 공단을 조성할 만한 가용면적이 충분하다. 그래서 장기적인 종합대책으로 볼 때는 거제도 노선을 택하여 거제도-가덕도(부산신항)-김해-부산을 연결하는 거부(巨釜)경제권을 형성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토 여건을 감안할 경우, 국토 균형개발을 위해 가장 시급한것은 수도권 중심의 단핵구조를 다핵구조로 바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앙 집중을 야기하는 수도권에 필적할 수 있는 대응권의 육성이 필요한데, 한·일 해저터널이 건설될 경우, 한반도 동남부 및 남해안과 직결되는 거부경제권은 명실공히 국토균형개발에 최대치의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일해저터널을 성사시키면 대내적인 국토균형개발에도 도움이 되지만, 대외적으로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이 동북아시대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는 최우선 국가임을 입증시키는데 아주 유리하다. 결과적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을 터주고 중국으로 하여금 그들이 필요로 하는 남북한 안정과 국가장기발전계획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물류비용 절감을 위해 기술과 자금을 풀어 한반도 전체를 제조산업과 IT기술을 접목시킨 ‘중간재 첨단부품 R&D 허브기지’로 특화시키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일본과의 밀접한 협력관계를 통해 최종소비재 제조공장인 동시에 세계 최대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중국을 장기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남해안이 어떤 바다인가. 한려수도를 따라 물결치는 그 푸른 바다는 열두척의 배로 일본수군 10만명을 전멸시킨 충무공의 혼이 서린,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이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의 땅에서 일본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도모하며 화해와 휴양과 선린의 터로 발전시켜나간다면 이 또한 얼마나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인가.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감정적인 불편함을 뒤로 미루고 자신과 이웃나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동북아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한일해저터널을 성사시켜야 한다. 한일해저터널건설은 시대의 흐름이다   2006년 11월, 필자는 부산발전연구원 주최의 한상 국제세미나에서 ‘동북아 물류중심도시로서 부산의 발전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부산과 후쿠오카시가 경제공동체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또한 작년에 부산시가 주최했던 한·일 해저터널에 관한 세미나에서도 ‘거제도-쓰시마 해저터널’에 대해 토론하면서 다시한번 부산-후쿠오카간의 경제공동체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랜기간 연변과기대 교수들과 함께해 온 동북아경제공동체 연구 활동의 결과를 지자체에 직접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보람있고 그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얼마 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부산시와 일본 후쿠오카시가 초광역경제권 추진을 선언한 것이다. 부산 허남식(許南植) 시장과 후쿠오카 요시다 히로시(吉田 宏) 시장은 2일 부산시청과 후쿠오카시청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갖고, 경제협력협의회 구성과 공동협력사업 발굴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산·후쿠오카 초광역경제권 형성 공동 협력'을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국내 광역·기초자치단체 등이 외국 도시와 자매결연하는 등의 교류 사례는 있었으나 외국 도시와 광역경제권을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도시는 초광역경제권을 구축해 부산시가 ‘국경 없는 경제시대’를 선도하고 시민들에게는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제공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돌파구를 구축할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이를 위해 경제 관련 단체장 각 7명으로 구성된 '경제협력협의회'를 구성, 함께 추진할 사업을 발굴하고, 경제포럼·세미나 등 경제교류 활동을 지원하기로 했다. 머지않아 두 도시는 조선·자동차·기계부품·IT·영화영상산업 등의 분야에서 상호 보완하는 동반자적 관계로 출발해 자유무역협정으로까지 발전해나갈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동북아의 평화공존을 위한 절묘한 힘의 비등점 위에 서 있다. 우리만이 이 그 좁은 역사의 협곡을 지나 이 강대국들을 평화공존의 시대로 이끌어갈 수 있다. 나는 한일해저터널이 단순히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누가 언제, 먼저 그 얘기를 꺼냈느냐는 케케묵은 과거의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또 지금 그걸 다시 들춰내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저 누군가가 내게 한일해저터널 건설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분명하게 이를 찬성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중해시대로부터 이곳까지 흘러온 세계 역사의 변천은 마침내 일본열도를 한반도에 결속시킴으로서, 동북아 전체를 한판의 키보드(Key Board)로 삼아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이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거듭나는 역사를 창출해나갈 것이다. 한일터널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만하는 대중교통인프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은 지정학적인 기능을 극대화시켜 모든 국제관계의 흐름을 통제, 조정, 관리하는 중추신경 제어장치와 같은 Multiple Fusion Leadership을 주변국들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이다.  지금 한중일 3국간에 논의되고 있는 동북아 FTA 같은 사안도 시작단계부터 한국이 조정 관리자로서의 헤게모니를 잡고 일괄 타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만하게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면서 그동안 한중일 3국간에 오랜 장벽이 되어왔던 과거 역사속의 피해의식과 현안문제들도 함께 정리하고 새로운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기약하는 상생 (相生)의 이정표를 세워갈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피해의식을 마치 대단한 유산이라도 되듯 틀어쥐고 있느니 차라리 미래를 향한 도전과 모험의 길을 택하겠으며, 일본이 다시 한반도를 경제 속국화 할 것이라고 우기면서 국수주의적인 고립에 빠지는 패배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일본과 함께 공생의 길을 택할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의 열쇠로 열 개의 문을 여는 지혜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희생과 헌신 이 요구된다. 유럽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유럽연합`(EU)의 결성과정에서 유럽의 한 가운데 위치한 독일과 프랑스가 보여준 희생전략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몇 년 전까지 국제안보대사를 지냈으며, 지금은 EACOS 사무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상우박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우리는 처절한 30년 전쟁을 끝내고 근대 유럽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던 베스트팔렌조약의 정신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 서로가 상대방의 이익과 명예를 먼저 추구한다는 원칙을 기초로 평화와 상호신뢰를 구축했으며, 라인강 유역 운하사용권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중부유럽 전체 산업발전의 인프라를 제공한 것은, 당시 프랑스 마자랭 총리의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동아시아의 외톨이(한국)에서 동아시아의 중재자로 나서려면, 자국 국민들이 당장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이 그 시작이다.” 이렇게 동북아의 새로운 역사의 운명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인내와 헌신을 기초로 하는 희생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부응해 나는 부산에서 런던까지보다는 도쿄에서 런던까지의 꿈을 쫒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해 난 길, 나는 그 길 위에서 한국도 일본도 과거의 상처와 피해의식을 해결하고 진정한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대한해협의 해저에 터널을 뚫고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자. 확언하건대 이 거래 성사 여부가, 동북아시대 상생의 메치메이커로서 한국의 능력을 증명할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17    KTX 등장과 한반도의 미래 댓글:  조회:2479  추천:28  2009-02-23
세 번째 이야기  동  북  아  네  트  워  크   를      구축하라 -F T A  와  T & T KTX 등장과 한반도의 미래 단군이래 최대국책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국고속철도(KTX)가 공사가 개통된지도 벌써 햇수로 5년째다. 이로서 한국은 독일 ICE, 스페인의 AVE, 일본의 신칸센(新幹線), 프랑스의 TGV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 고속철도 보유국이 되었다. 고속철도의 개통은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변화시키면서 한반도의 국토이용방식과 국가산업전반에 걸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운 좋게도 고속철도 시승식에 두 번씩이나 참가했었다. 한번은 중견기업 CEO그룹인 후박나무회원들과 함께였고, 한번은 연우포럼 임원들과 함께였다. 우리는 대개 모르고 살지만, 문화예술분야에 독창적인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한국 사람들은  문화예술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섬세하게 반응하고 감격하고 환호를 하는 반면, 과학기술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상당히 반응이 무딘 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얼마 전 베이징에서 7위의 종합성적을 거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온 국민이 열광하며 기뻐하는 반면, 우리나라가 세계 5위국의 원자력 대국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사람조차도 없을 정도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그것도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더 먼저 고속철도를 갖게 됐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무척이나 설레어 하며 고속철도를 두 번이나 시승한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는 듯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 고속철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고속철도건설은 단순히 철도건설기술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기계, 전기, 통신, 건설 분야의 기술과 풍부한 경험이 필요하다. 요즘같이 재화와 사람의 이동이 많은 시대일수록, 재화의 가치에서 물류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그 때문에 이동수단의 기능뿐 아니라 이동수단의 품질도 중요한 시대가 됐다. 즉, 교통은 시간을 줄여주는 안전한 이동수단이어야 하는 동시에 쾌적하고 품격있는 그 무엇이어야만 한다. 그 때문에 고속철도는 그 압도적인 속도만큼이나 차별화되는 품격과 안전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하고 그 때문에 최첨단의 관련기술들이 요구되는 고부가가치 기술이자 상품인 것이다. 즉, 고속철도를 가졌다는 것은 그 관련 기술 분야에서 한국이 세계적인 수준을 갖고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KTX는 장차 언젠가 한·일간에 해저터널이 뚫리면 일본 열도와 한반도 그리고 중국 대륙을 복합적으로 연결하는 동북아 대중교통인프라의 첨단 운송수단이 될 전망이다. 이는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유럽에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미치게 될 것이다. 교통, 물류, 통신, 금융, 에너지 등의 경제교류 부문의 확장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 외교, 안보, 군사, 문화, 기술, 교육 등 제반 분야에 걸쳐 세기사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때 부산을 시발점으로 기획하기보다 인식의 폭을 넓혀서 도쿄를 시발점으로 하게되면, 도쿄-부산-서울-북경-모스코바-유럽으로 연결되는 유라시아 대륙철도망은 태평양으로부터 아시아, 유럽과 영국, 그리고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의 4분의 3을 망라하는 지구촌의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지구촌의 종주국인 미국이 세계흐름의 변방에 서게 될 지도 모른다. 고속철도는 생각하기에 따라 역사를 새로 쓰는 신기원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중요한 의미와 가능성을 가진 채 우리의  KTX가 개통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KTX을 시승하면서 우리가 일구어낸 시속 300킬로미터의 아찔한 승차감에 감격했고, 그 짜릿한 감격 속에서 오랫동안 꿈꾸어온 동북아시대가 한발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이 일은 내가 그동안 연변과기대 교수들과 함께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에 힘입어 중국 동북 3성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이 한반도와 연해주 지역으로 긴밀히 교류해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만일 한국에서 고속철도가 개통될 경우, 이 철도는 북방지역(중국, 러시아, 몽골)뿐만 아니라 장차 남쪽으로 일본열도와도 연결되어 동북아 일대를 신천지로 변모시켜놓을 것이라는 그 ‘믿음’을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되어준 셈이다. 그러나 이 믿음을 온전한 실체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결국 한·일 해저터널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지금까지 양국 정부와 연구기관에서 논의된 한·일 해저터널 노선은 3개 안으로 압축돼 있다. 일본 규슈 사가현 가라쓰-쓰시마 아랫섬-경남 거제시(209㎞), 일본 가라쓰-쓰시마 윗섬-경남 거제시(217㎞), 일본 가라쓰-쓰시마-부산(231㎞) 등 노선이다. 이는 그동안 해저터널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해왔던 일본 측 연구결과를 기초한 것이다. 터널의 길이는 영국-프랑스를 잇는 유로터널 50.54㎞의 4배가 넘어 이 터널이 만들어질 경우 해저터널 중 세계 최장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들 3개 노선은 서로 장·단점을 갖고 있다. 먼저 쓰시마 하도(下島)를 거쳐 거제도로 가는 노선은 거리는 가장 짧지만 바다 밑으로 가는 거리가 가장 길다. 쓰시마 상도(上島)를 거쳐 거제도로 가는 노선은 쓰시마를 횡단하는 것 외엔 첫 번째 노선과 같다. 마지막으로 부산으로 연결되는 안은 노선이 비교적 직선이지만 가장 길고 지진대를 지난다는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KTX와 직결되므로 물류 연결성 및 효율성이 좋고 경제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또 해저(海底) 부분이 128㎞로 다른 안에 비해 20㎞ 가까이 짧다. 공사비는 60조-100조원, 공사기간은 15-20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공사비 약 14조원, 공사기간 6년이었던 유로터널에 비해 공사비는 5배, 공사기간은 3배가 넘는다. 역사적으로도 한국의 동남경제권과 일본의 서남부해안의 경제권은 9세기 신라시대 장보고 선단이 양국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하나의 영역으로 경영했던 곳이었다. 당시 장보고 선단은 부산항에서 쓰시마항을 거쳐 하카다-카라츠-나가사키-다자이부 로 통했고 경주의 외항인 울산, 감포, 포항을 거쳐 돗토리현, 시네마현으로 연결하는 항로를 개척했다. 특히 외국 문물의 집적지였던 기타 큐슈의 다자이부太宰府 를 통해 한반도의 생산물은 물론 중국과 중동의 선진문물을 수출하고 일본의 황금과 명주 그리고 무명을 수입하면서 한일해협권의 경제협력을 계속해온 바 있다. 그러나 한일해저터널건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양국간에 다양한 의견교환과 연구조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사업타당성이 주 논란거리다. 한국해양대 박진희 물류시스템학과 교수는 일본에서 대륙으로 수송되는 물동량의 통과료만 챙겨도 ‘남는 장사’라며 적극 추진을 요구한 바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부산-오사카 간 물류 비용이 현재는 컨테이너 1개(20피트 기준)당 665달러지만 해저터널이 건설되면 472달러로 거의 30% 절감된다. 또한 해저터널 건설에 의한 성장잠재력 증가율은 일본의 경우 5% 이내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9~150%(*확인요망)일 정도로 상당히 잠재력이 높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2002년 여름에 건설교통부의 요구로 교통개발연구원이 `한일 해저터널의 필요성 연구’라는 제목으로 타당성조사를 한 바 있는데 당시 언론이 보도한 그 최종보고서의 결론은 대략 이러했다.  부산에서 일본의 쓰시마(대마도)를 거쳐 큐슈지방을 연결하는 한일해저터널 건설의 타당성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이 최종보고서에서 연구원측은 거제도(A,B안)와 부산(C안) 등을 출발하는 3가지 노선 안을 검토대상으로 삼았다. 연구원측은 한중일 교역량, 세계 및 동북아 컨테이너–항만–항공 물동량 등을 비교, 분석한 결과 노선이 짧은 A안(230km, 공사비 34조원)이 상대적으로 양호하다고 지적했으나 ‘거제지역에 대한 철도 인입에 문제가 있는 등 모든 노선이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일 양국 간에 해저터널건설에 관한 담론이 시작된 건 꽤 오래전부터다. 양국 수뇌차원에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오고갔음에도 불구하고 한일 해저터널에 관한 담론이 이렇게 부정적인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무척이나 해묵은 이유로서 한일해저터널에 관한 최초의 담론이 1940년대 일본이 대동아공영 실현 계획의 하나로 구상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직도 한일해저터널이 마치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붙어있는 시나리오쯤으로 치부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두 번째는, 결과적으로는 한국이 일본을 대륙으로 연결시키는 경유지로 전락하고 실익은 종착점이 있는 일본이 다 챙기지 않겠는가 하는 염려 때문이다.
16    동북아FTA와 한국의 손익계산서 댓글:  조회:2569  추천:33  2009-02-20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동북아FTA와 한국의 손익계산서  그동안 아시아지역의 FTA체결 경쟁은 일본과 중국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은 아세안과 FTA를 통해 자국의 거래시장에 아시아 각국들을 흡수하는 전략으로 아시아 경제의 주도권 장악에 한 걸음 앞서 가고 있다. 한국은 이들에 비하면 아직도 초보단계다. 하지만 앞으로 한국은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힘의 비등점 역할을 하며 동북아 FTA의 주역이 되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한국은 지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이다. 지난 2001년 한중일 3국간 FTA문제에 관해 한중일 삼국이 공동연구를 한 바 있다. 당시 공동연구에는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일본의 종합연구 개발기구(NIRA) 그리고 중국의 국무원발전연구센타`(DRC) 등 권위있는 국가 연구기관들이 참여 했는데, 그 중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그것은 한중일 FTA가 시행될 경우 최대 수혜국은 한국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한중일 3국간에 동북아 FTA가 체결되면 3개국 모두 이익이 되지만, 특히 한국이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학술토론회에서도 같은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9월에 있었던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회장 이승률) 국제학술회의에서 이창재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과 아베 가즈토모 일본 도쿄전기대 공학부 교수, 리싱즈훙 중국사회과학원 박사 등은 한ㆍ중ㆍ일 3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경우 3국 모두 국내총생산(GDP)과 수출, 교역조건이 개선되며 특히 한국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창재 소장은 2005년 연구결과를 근거로 한ㆍ중ㆍ일 FTA 체결시 한국은 장기적으로 GDP가 5.15% 상승할 것으로 예상돼 중국(1.54%)이나 일본(1.21%)보다 큰 경제적 효과를 얻을 것으로 평가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3국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는 정치적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한국 정부가 동북아경제공동체(NAEC) 설립을 주창하고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아베교수도 한국이나 일본 모두 급성장 중인 중국과 가까운 시일 내에 FTA를 체결할수록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면서도 중국과의 FTA 체결로 타격을 입을 특정 산업 분야의 반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국내 정치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시행 초기에는 FTA체결상대국에 따라 한국의 무역흑자가 일시적으로 줄고, 일부산업의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수출 증대, 국가 산업의 효율적 구조조정, 통상마찰 축소, 외국인 투자 확대, 국민후생 증대로 국가경쟁력이 강화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일본은 선진기술을, 중국은 우수하고 값싼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순수과학 및 군사기술은 발달했으나 연구개발(R&D)의 현장응용은 미흡한 상태다. 일본은 90년대 이후 10여 년 동안의 장기 경기침체로 시장의 역동성이 상실됐고, 고비용과 자국 R&D에만 의존하는 폐쇄성이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이에 비해 한국은 우선 기술 측면에서 일본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갖고 있고, 60년대 섬유 및 신발, 70년대 전자 및 조선, 80년대 자동차 및 철강, 90년대 컴퓨터 및 반도체 등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산업으로 성장시킨 성공경험을 가지고 있어 ‘동북아 R&D 허브’로서의 기반을 갖추고 있다. 또 인구대비 고학력 인구비율이 세계 5위 이내로 우수한 인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점도 동북아 허브 구축 가능성의 잠재력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된 것이다.  바로 이런 평가들로 인해 동북아 FTA의 최대수혜국이 될 한국이 이를 성급히 추진했다가는 양국에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오해를 살 입장에 처한 것이다. 또한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우리 국내 사정도 걸림돌이다. 북한 핵문제, 장기적인 노사분규 및 파업, 산업기반 공동화현상, 국내정치 불안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국제경쟁력은 지금 심각할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게다가 동북아 FTA의 당사국인 일본과 중국이 FTA에 대한 반론이 거세다. 특히 일본은 중국과의 FTA를 꺼리고 있다. 양국 간 시장이 개방됐을 때 일본농업이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같은 문제로 중국과의 FTA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도 한국이나 일본과 FTA를 맺기에는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산업기술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에 경쟁력이 뒤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중국은 또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의 FTA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한중일 FTA가 그리 다급하지 않다. 따라서 세 나라 모두가 납득할 수 있고 이해득실이 균등하게 분배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역사적, 산업구조적, 사회정서적인 차이가 극명한 세 나라가 최종공동합의에 이르기까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다 실제로 세 나라는 국가차원의 제도적인 협력경험도 적을뿐더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서 볼 수 있었던 강력한 국제정치적 리더십도 부족한 상태다. 그래서 필자는 미국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최근 국회 동의를 앞두고 있는 한미 FTA체결과 한·EU FTA를 성사시킨 후, 그 여세를 몰아 한·일 FTA와 한·중 FTA를 추진하고, 최종적으로 한·중·일 다자간 FTA로 가는 방법이 최선책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세계적인 금융공항을 초래할만한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터졌다. 지난 10월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정부는 연일 계속되는 환율 폭등과 주가 폭락으로 각계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우려 속에서 마땅한 대안을 찾는 데 숨 가쁜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한 대책으로이명박 대통령이 10월 2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한·중·일 금융정상회담’ 제안과 함께 삼국간 통합금융체제 방안을 주장한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평가된다. 이와 공조하여 정부는 10월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IMF 연차총회에서 차관급 회의를 갖고 한국·중국·일본 등 3국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발(發) 글로벌 금융위기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800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 공동펀드를 만드는 방안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세계 경기의 본격적 불황에 대비, 한·중·일 3국이 재정지출을 확대해 경기 부양에 나서는 등 동북아 경제권이 공조 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중국과 일본 정부에 제안하기도 했다. 사실 아시아펀드의 경우, 그동안 중국과 일본이 주도권 싸움을 계속해오던 터라 만일 이에 실패할 경우 우리의 대외 신인도에 피해가 있을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 어느 쪽도 상대가 동북아 역학구조의 주도권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가 심적 부담이 적은 편이다. 즉, 중국과 일본이 부상할수록 동북아의 역학조절의 주도권은 한국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게 돼 있는 것이다. 그 분위기를 파악한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동북아 역학구조의 중재자로 도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북아 FTA룰 이끌어내는 일에 새로운 창의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경제저널리스트인 샤오민제는 한국의 이런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한국 경제는 1997년 이후 매우 건실해졌으므로 국내 상황에만 함몰돼 조급해 하지 말고 큰 시각으로 3개국 FTA의 틀에서 회복의 열쇠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금융 차원의 논의를 넘어 3개국 FTA 논의를 하루 빨리 시작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동아시아 3개국이 함께 하지 않으면 국면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성장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협력하느냐 에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FTA를 하면, 3개국 경제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경제의 회복 시기를 앞당기게 될 것이다. 세계경제의 판도를 바꾸며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자신감과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일본의 저력, 그리고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의 IT인프라와 반도인의 독창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교역규모 10위권의 경제력을 합성해서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돈과 기술과 시장과 문화를 갖춘 배타적인 지역경제권(Regional Economic Block)으로서 동북아경제협력체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과 경제공동체 관계에 놓여있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연결되면서 장차 1,2O년 안에 세계경제총량의 3분의 1 이상이 동아시아시장을 통해야만 순환하게 되고, 마침내 북미와 유럽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를 3등분하는 지구촌 3지역권 정립시대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즉, 9.11 사태 이후 일방적으로 국제사회의 신질서를 창출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화정책을 완화시켜 진정으로 이 지구촌 사회의 안정과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할 수 있는 견인차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가 서로 협력할수록 이익이 극대화되는 상생관계임을 인식시키고, 경제적으로는 각기 자국의 민족주의적 폐쇄논리에서 벗어나 3국 일체의 정신으로 동북아 통합시장을 창출하도록 하는 한편, 문화적으로는 한자문화권의 이상향인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주창함으로서 정서적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다시 말해 전국가적인 총력을 쏟아부어서라도 삼국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경제문화 협력 통합시장 모델을 개발해 동북아 FTA의 매치메이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샤오 민제는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동북아에서만큼은 위기가 아니라 동북아 FTA성사에 결정적인 기회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와 더불어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을 동북아시대의 매치메이커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말하고 싶다. 기회를 잡아야 한다. 놓치면 위기가 되어 돌아온다.
15    시대의 키워드 FTA와 T&T 댓글:  조회:2574  추천:33  2009-02-19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유럽의 나라들은 2천년 동안 반목의 세월을 살아왔다. 북극에 인접한 북유럽인들은 해적으로 불렸고, 중부유럽의 프랑스와 독일은 방탕한 문화로 비난받았으며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은 잔인한 살육과 독재의 땅이라며 서로를 비난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가 2001년 동구유럽 8개국을 회원으로 받아들인 이후 불과 몇 년도 되지 않아 25개회원국은 강력한 공동체로 변신했다. 그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건 유럽대륙을 티켓 한 장으로 오갈 수 있는 철도망과 대륙과 섬을 연결하는 터널이었다. 시대의 키워드 FTA와 T&T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독특한 세계 경제 흐름의 하나는, 특정지역 국가들 사이에 배타적인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한 경제 블록화 현상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1952년 유럽지역 내 석탄산업체연합에서 시작돼 1993년에는 단일통합화폐인 유로를 사용하는 유럽공동체(EU)가 탄생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994년, 미국을 중심으로 캐나다와 멕시코가 가입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출범했고, 이에 긴장한 중남미와 미주지역 34개 국가들이 연합해 지난 2005년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발족시켰다. 이런 추세 속에서 우리가 속한 동북아지역만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유일한 대룩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유럽, 미주지역의 경제 블럭화에 밀려 씁쓸한 경험을 거듭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뒤늦게 지역경제연합체를 구성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촉발된 동아시아 지역경제권(Regional Economic Block) 통합운동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2003년 10월 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남아 국가연합(ASEAN) + 3국(한중일)정상 회의’를 계기로 아시아에서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또 연이어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아시아 국가간 FTA체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최근 FTA전략은 체결 당사국간 무역협정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다자간 협상을 우선하는 새로운 세계무역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추세 속에서 앞으로 가장 크게 주목받을 만한 아시아지역 경제공동체가 바로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FTA이다. 아시아 최대 제조공장이자 소비시장인 중국, 아시아 제일의 경제강국인 일본, 거기에 세계 유수의 IT대국이자 인터넷강국인 한국이 공동으로 FTA를 체결한다는 것은 곧 삼국의 시장을 통합한다는 의미고 그것은 인접한 주변 아시아국가의 시장판도를 좌우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경제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새로운 시장이 등장함을 예고하는 빅이슈이기 때문이다. FTA가 한중일 삼국의 시장통합을 의미한다면 T&T(turnnel & turnnel)는 물류통합을 의미한다. 즉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일해저터널과 한중해저터널이 복합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한·중·일 삼국을 1일 경제생활권으로 거듭나게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교통망은 TCR, TSR ,TMR등과 접속되어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유라시아 뉴 실크로드’의 활로를 열어놓게 될 것이다. FTA와 T&T의 기능적인 결합, 바로 이것이 동북아시대를 여는 두 개의 축이고 이 두 개의 과제를 어떻게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이상적으로 성사시키느냐에 동북아의 미래가 걸려있는 것이다.
14    한반도는 동북아시대의 성지 댓글:  조회:2543  추천:42  2009-02-12
 두 번째 이야기 동     북    아    시   대     의         주    역    들  한반도는 동북아시대의 성지    또 한 가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반도인의 독특한 기질이다. 흔히 동아시아의 자궁에 비유되는 한반도는, 중국을 거쳐 온 모든 아시아문명의 정수가 찬란하게 꽃피운 곳 일 뿐 아니라, 그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보고다. 그것은 문화예술분야에 독창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우리 민족특유의 능력에도 기인한 바 있겠으나,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영향도 결정적이다. 반도란 원래 대륙을 바라보고 뒤로는 배수진을 친 지형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산실인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다양한 문화충격들을 더 이상은 보낼 곳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 거대한 가마처럼 고스란히 품고 곪삭여서 이를 완성시키고, 원형을 보존하는 전통이 있다.  그런 흔적들이 우리 역사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가장 최근의 예를 든다면 조선왕조의 성립이다. 조선왕조는 중국대륙에서 출발한 성리학의 기본 이념인 인의예지신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아 실제로 도덕정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다. 중국에서조차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으면서도 결국은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뛰어넘지 못한 채 그저 이상적인 도덕정치이론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달랐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고 성리학의 도덕론에 입각한 여론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근대적인 관료정치체제를 갖춘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이후 600년간 사림과 학계, 여론과 사법부가 막강한 힘을 발위하며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를 실현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정치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이 성리학의 기준에 의해 철저하게 검증받았고, 모든 과정이 공개적으로 결정되고 상세하게 기록됐다. 왕은 관료들의 신뢰와 동의 없이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통유교국가로 세계 유교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 600년의 치열한 자취는 오늘날 세계학계에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중세 도덕국가 연구에 가장 정통적이면서도 신뢰할만한 기록을 제공하고 있다. 그 때문에 창덕궁과 종묘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세계의 내로라하는 불교유적들과 나란히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신라의 치열한 위민사상,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이 땅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이상적인 불국을 만들고 싶어했던 고대 한반도 통치계급의 염원이 기하학이라는 최첨단 과학속에 용해된 불가사의다. 이 외에도 한국은 아시아문화의 정수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로 주목받고 있다. 고대 한자의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 유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라, 중국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선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나라.......이것이 바로 반도인의 저력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주목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근대화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현대 정치사회사상 유일한 나라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건국 60주년을 즈음하여 세계평화포럼의 김진현 이사장이 한 일간지를 통해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1945년 이후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세계 140여개의 제 3세계 국가 중에서 정치민주화, 시민자유, 근대경제성장, 교육과 과학기술의 고도화, 사회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개방과 해외 진출이라는 근대화의 요소를 완벽하게 성취한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중국 인도 등 인구대국의 절대 가난 탈출은 역사적인 일이지만 이들의 근대화진입은 아직 에너지, 환경, 인구구조변화, 물, 전염병 등 문제군의 대국이 된 것일 뿐, 문명적 선진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싱가포르 경제가 최선진인 듯 보이지만 정치 언론의 자유는 아직 후진이어서 부자세습 정권이 끝난 뒤의 운명은 불투명하다.          지금 대한민국 5천만 시민은 현대적 모든 자유 - 선거, 표현, 결사, 거주와 이동, 외국여행, 소비와 직업과 교육선택, 그리고 전통적 신분계급으로부터의 자유 - 를 누리고 있다. 동으로는 일본열도에서 서로는 우랄산맥에 이르는 아시아 50개국 40억 인구 중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근대시민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일본은 아무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신분사회요, 신민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또 과학기술, 예술, 산업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선진수준과 겨루고 있다.         ......동양의 전통문명에서 2천년 이상 성숙한 한국인들이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그것도 일본같은 제국주의가 아닌 평화적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은 문명사적 기록이다. 즉 우리는 동양의 전통문명을 가지고도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한 지구촌 유일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 역시 반도인의 독특한 기질을 증명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통찰하는 시각으로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문명사적 쾌거로 정의한 김진현 이사장은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전통과 미래가 충돌하고 대결하는 단층으로 보는 시각에 단호히 반기를 든다. 대신 그 양극의 문화와 가치들을 성공적으로 융합해낸 민족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현 이사장은 더 나아가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근대화혁명을 세계 보편적 모델로 승화시켜 21세기 후반에 전개될 지구촌 인류사회의 새 질서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중국과 일본을 넘어 지구차원에서 대륙과 해양, 동양과 서양, 지역과 세계, 전통과 근대의 융합점이 되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저력을 갖고 있는 반도인이다. 주변의 이질적인 문화를 품는 완충지대로서 핵심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질적인 외부의 충격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품고 곪삭혀서 완성시키는 독보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기질을 생각하면, 반도인은 사실, 외부 충격을 겁낼 필요가 없다. 최대한 문을 넓게 열고 다양한 문화와 충격을 받아들여 그것을 새로운 문화창출의 밑천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대를 앞두고 왜 우리가 반도성을 회복해야 하는 지는 이쯤이면 납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에 할 일은 오직 하나, 누구와도 손을 잡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자인 서울대 하영선 교수는 이를 그물망국가에 비유했다. 즉 세계와의 관계를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엮는 네트워크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구한 동양적 전통 위에 서양중심의 근대화에 성공한 저력을 바탕으로 반도인의 기질을 발휘하여 이제는 국제사회 속에 탄탄한 그물망을 갖춘 동북아의 매력국가가 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인접 해 있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배우고, 한편으로는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균형감각을 발휘해서 동북아시대를 꽃피울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윤활유가 되어야 하고, 길이 되어야 한다. 대륙으로 가고자 하는 일본, 태평양연안으로의 진출을 원하는 중국, 그들은 지금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들과 최상의 관계를 갖는 것은 단순히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자국의 안위나 도모하는 피동적인 전략이 아니다. 다가오는 아시아대륙시대를 앞두고 도도한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즉, 저 멀리 지중해로부터 시작해 환태평양시대를 거쳐 흘러온 서진(西進)의 역사 흐름을 다음 시대의 주역인 아시아대륙시대로 안내하는 민족도약의 기회를 잡자는 것이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와 최대한의 서비스기능을 발휘해 양국을 고객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독보적인 가치를 극대화해서 최상의 서비스로 포장해 부가가치를 챙겨야한다. 균형과 포용으로 동북아의 평화로운 공존과 발전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천성이고,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두바이에 세계의 투자가들이 몰리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곳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아랍과 서방이 만나는 독보적인 완충지대이기 때문이다. 글로벌시대의 최대 강국은 바로 이런 관계성이 높은 나라다. 부가가치 높은 관계성으로 세계 교류의 장이 되는 나라가 강대국이다. 두바이가 지금 세계 최고의 소득을 올리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을 보라. 두바이에는 지금 세계적인 기업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고 있다. 동북아엔 홍콩과 싱가폴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게 거리나 문화적 친밀감으로 볼 때 한국만한 완충지역은 없다. 더구나 IT와 정보화, 관계성이 국력이 되는 21세기를 맞아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부가가치를 활용해, 역사상 최초로 세계중심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동북아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가 한국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이렇게 시대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시각을 넓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안에서만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 그래서 사회를 이분화하고 친북이니 반미니 싸우는 데 힘을 낭비하지 말고 동북아를 무대로 세계로 나가 그물망같은 국제관계를 만들라고 말한다. 동쪽으로만 향했던 우리의 외교중심을 이제 서쪽으로 더 넓혀서 중국대륙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바라보고 미래를 구상해야 한다는, 역사의 요구는 지금 우리의 결단과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 동북 3성과 러시아 연해주, 환황해 지역경제권, UNDP 관련 지역 및 한반도 국제정세에 관해 그동안 협의하고 구상해왔던 생각들을 간추려 국민들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동북아경제중심국가론’에 대한 담론을 다시 시작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한·중·일 3국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는 동북아 FTA와 해저터널(T&T) 프로젝트를 한 묶음의 대안으로 구체화시킴으로서 현실적이고 역동적인 한반도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13    신이 내려준 축복,반도성 댓글:  조회:2782  추천:33  2009-02-11
두 번째 이야기 동북아시대의 주역들  신이 내려준 축복, 반도성 한 때, 우리 사회에서 동북아란 용어가 식자들 사이에서 약방의 감초 격으로 풍미했던 적이 있었다. 중국수교가 이루어진 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정, 경, 관,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가장 폭넓게 다루어 온 정책과제 중 하나가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종종 대두된 화두가 한반도 동북아 허브론이다. 동북아허브의 역할이란 한마디로, 대륙의 상징인 중국과 해양의 상징인 일본을 연결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이를 인프라삼아 동남아, 연해주, 시베리아, 몽골, 중앙아시아 등과 연결시켜 미래사회를 아시아, 유럽대륙 간 경제공동체시대로 이끌어냄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도도하게 서진하는 인류 역사의 흐름이 한국에 요구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아직도 동북아의 진로는 윤곽이 잡히지 않은 상태다. 아니 오히려 중국과 일본의 무관심속에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감이 없지 않다. 최근에 한중일 삼국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사건들, 즉 고구려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나,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집요한 망언과 일련의 시도,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한국의 지나친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대응 방법들은, 동북아 세 주역의 관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게다가 숯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북한 핵문제로 인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태이고,  동북아 관계성 확립에 중심역할을 해야 할 한국은 내부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와 경기침체, 이로 인한 심상치 않은 국론분열조짐으로 스스로 족쇄를 채운 듯 한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반도가 동북아 사회에서 허브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우리에게 중국도 일본도 갖지 못한 독보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반도성이다.  즉 천운이라 불러도 좋을 역사적 기회를 눈앞에 두고, 우리가 반드시 회복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 바로 반도성이라는 기질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이 반도성이라는 것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아니,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우리는 반도국이란 표현을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다. 반도인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외면하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와같이 반도인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인식은, 일제강점기에 싹튼 것이다. 대륙도 섬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지대, 너희는 그저 대륙과 섬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그러니 너희는 대륙진출을 꿈꾸는 일본을 위해 존재하는 한낱 길에 불과하다던 일본의 집요한 세뇌의 결과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한반도인 우리의 지정학적인 운명에 대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가진 반도성이란 게 그런 아무쓸모도 없는 것일까. 우리는 반도성이란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고서도 그토록 기피했던 것일까. 지난 8월, 건국 60주년을 앞두고 우리나라 각계 각층의 석학 60명이 60일에 걸쳐서 연속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첫 번째 연사는 많은 이들이 예상한 대로 20세기 한국 최고의 석학이신 이어령교수였다. 그날 그는 조국이 탄생하고 성장하며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60주년을 맞는 감동적인 과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생애 가장 큰 기쁨이라고 전제하면서 ‘우리말에 내일이라는 순 우리말은 없어도 모레, 글피라는 순 우리말은 있다. 당장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위대한 민족’이라는 말로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심오한 사색과 책임있는 각성으로 우리들이 일상에 묻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현대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와 같은 지식인이라고 할까. 그런 이어령 교수 만큼 우리의 반도성에 대해 극명하게 해석한 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옮겨본다.          ‘.....흔히 한국은 반도라서 지정학적으로 불운하다고 말합니다. 중국과 일본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끊임없이 시달려야 한다구요. 그래서 동북아시대니 뭐니 하는 것도 그리 반가와 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중국과 일본 그 두 나라만으로 동북아시대가 잘 돌아갈 거라고 보십니까? 전형적인 대륙문화국가인 중국과 전형적인 해양문화국가인 일본은 충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충돌하는 한 동북아에 평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기 위해선 제 3의 완충지대가 필요한데 두 나라 사이엔 반도인 한국 밖엔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북아시대의 성패는 한국의 반도성 회복에 달려 있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한국의 반도성 회복에 중국, 일본의 공존과 번영과 평화가 걸려 있는 겁니다. 열쇠가 우리 손안에 있어요. 이건,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원래 반도국가가 그래서 중요한 거죠. 이탈리아반도의 로마가 유럽지역의 모든 문화를 융합해서 위대한 문명을 싹틔웠죠. 이슬람교와 불교가 인도차이나 반도 안에선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죠. 그게 반도국가가 꼭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완충지대가 없다면 어떤 문명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반도국가라는 것은 한계나 약점이 아니라 축복이고 장점이고 기회죠. 우린 반도성 회복과 반도국가의 역할에 우리의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걸 잘해야 주변국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도 우리 조상들이 그 역할을 기가막히게 잘 해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떻게 하고 있는 줄 압니까. 반도라는 걸 부인하면서 자꾸 한 쪽으로 치우쳐요. 한때는 대륙문화 흉내 내면서 해양문화를 극렬히 배척하고 비하했지요. 그래서 일본의 침략을 자초했구요. 최근에는 또 어떻습니까. 해양문화인 일본의 싸구려상업문화를 추종하면서 중국 문화를 얕보는 경향이 강하죠. 한쪽 편에 기울면 이건 죽자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를 소화해야 합니다. 균형을 지키면서 모두 감싸 안아야 합니다. 양팔을 연결하는 어깨 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요. 세상 어느 나라도 할 수 없는, 한국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그거고, 그러니까 양국이 강대국이 될수록 우린 좋아해야지요. 두려워할 게 아니라. 왜냐, 우리의 상품가치가 그만큼 높아지니까요.’   얼핏 들으면 기발한 역발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반도성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이처럼 냉정하면서도 긍정적으로 선언한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어령교수의 지적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여실히 입증된다. 과거, 우리가 겪은 국가적 위기는 모두가 한쪽으로 치우친 데서 시작됐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 역사에 치명적인 치욕을 안겨주었던 병자호란과 일제강점이다. 병자호란때에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나치게 의식해 신흥세력인 후금을 자극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당시 수많은 조선의 처녀들이 유린을 당했고, 귀족의 자제들이 인질로 끌려갔으며 왕이 후금의 장수 앞에 세 번 머리를 땅에 찧으며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했다. 그때 만일 왕이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를 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후금에 편입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2천 년간 중국의 왕조가 수없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도 그들과 외교관계를 통해서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해온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빠져 절대 흔들려서는 안되는 대외정책까지 틈새가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이 우리의 땅을 강점하고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잠식하는 동안에도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일본을 파악하고 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변화와 야심을 잠재울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댓가를 우리는 톡톡히 치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보는 시각은 지금이나 그때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감정적으로 일본을 대할 뿐, 그들을 연구하고 그들식으로 접근해서 그들을 이해시키려 하는 노력은 여전히 드물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정치사회문화경제, 모든 면에서 아직도 일제 강점의 후유증을 앓고 있고, 지금도 그들의 주도면밀한 한국연구를 따라갈 일본전문가들이 없는 형편이다.  어쩌면 한반도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 자신보다 그들이 더욱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한번쯤 중국과 일본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살펴본다면, 한반도의 존재가치를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속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한반도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그 중요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집요하게 독도에 대해 미련을 갖고 심지어는 망언도 서슴치 않는 것이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을 감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한반도를 자국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필사적인 전략이자 경쟁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한반도를 보는 양국의 시각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는 중국대륙의 동쪽 끝, 그러니까 중국이 태평양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혜의 연안반도다. 동으로는 일본열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태평양바다에서 일어나는 태풍과 홍수, 해일을 온몸으로 막아준다. 때문에 태평양으로 뻗어갈 천혜의 항만시설이 즐비하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일본은 가장 먼저 동해안에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포구를 조성했다. 포항, 속초, 원산, 청진 등 많은 항구들이 그때 조성됐다. 또한 태평양에서 흘러드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접점으로 삼면의 바다엔 풍부한 해양자원이 있고, 동서양 어느 나라로든 공해 상을 통한 접근성이 뛰어나다. 실제로 지금도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해외로 나갈 때는, 일본의 서부해안에 있는 항만을 이용하는 것보다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항구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물류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천혜의 길목에 위치한 한반도의 주권을 한국이 차지하고 있음으로서 중국은 동북지역경영에서 한계를 뼈저리게 경험해야 했다. 실제로 중국의 동북삼성은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중국문화와 산업의 심장부인 산동반도와 동북삼성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은 한반도와 필연적으로 유대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일본에 있어 한반도가 갖는 가장 커다란 매력은 대륙의 일부라는 점이다. 작은 섬나라라는 치명적인 왜소함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과도 직접 국경을 마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과 지상교역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그토록 집요하게 무력과 불법을 동원해 한반도를 점령한 뒤, 영원히 그들에게 복속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일본화 시키려 했던 것이다. 더구나 요즘 같은 글로벌시대에는 ‘존재감’ 만큼 중요한 것이 ‘관계성’이다. 얼마나 많은 나라들과 원활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존재가치가 높아진다. 그 나라들이 강대국일수록 징검다리역할을 하는 나라의 존재가치도 높아진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중국과 일본에겐 한반도와의 관계, 특별히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자 거의 선진국에 근접한 한국과의 연대가 절실하다. 전혀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진 두 나라, 장차 다가올 역사의 주역이 되고 싶어하는 두 강대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12    반도국가 한국의 두 가지 얼굴 댓글:  조회:2838  추천:40  2009-02-06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주역들 반도국가 한국의 두 가지 얼굴 2002 월드컵이 끝난 직후 외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2002월드컵이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얼마나 높여주었는지 실감했을 것이다. 그 전에는 미국이나 유럽을 가면 아시아인에게 대개는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하고 물었다. 하지만 월드컵 이후에는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혹시 코리안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생긴 것이다. 왜소한 체격의 한국선수들이 유럽 강호들을 차례로 무릎꿇게 만든 것이 단순히 홈그라운드의 잇점 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고 또 호감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애써 끌어올린 한국의 긍정적인 대외이미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연구에서 드러난 거짓과 불법행위들이 세계인들을 경악시킨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다시한번 세계인들의 격찬을 한 몸에 받으며 한국인의 저력과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과시했다. 그 과정에서 히딩크에 비견되는 또 한사람의 스타감독이 탄생했다. 야구감독 김경문. 그는 특히 선수들을 신뢰하는 힘으로 선수들이 필드에서 잠재적인 능력까지 아낌없이 발휘하게 하는 마법으로 컨디션이 바닥이었던 타자 이승엽, 큰 경기에 경험이 전혀 없었던 약관 스무살의 투수 류현진에게 세계 최강팀을 능히 압도할 만한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베트남에서 한 한국인 대학생이 사귀던 베트남 여대생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을 지켜보던 베트남의 한 수사당국자는 사의를 표하기 위해 달려간 외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은 화를 잘 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려요.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 비춰진 한국의 양면성이다. 단 한번의 월드컵 유치로 많은 선수들을 세계적인 축구명문클럽에 진출시킨 나라, 뛰어난 상상력으로 매년 세계적인 영화제를 깜짝 놀라게 하는 걸작들을 만들어내는 나라, 세계적인 과학자와 예술가, 목사와 건축가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나라, 그러나 그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 캠퍼스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매너의 스포츠인 골프장에서 캐디를 때려 물의를 빚는 등 자기 통제가 되지 않는 민족, 자국으로 시집 온 외국인 며느리들을 학대해서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하는 배타적인 민족....... 그래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서구 열강들의 눈빛은 늘 불안하다. 뛰어난 재능과 상상력을 가진 민족,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불안정한 이면을 갖고 있는 나라. 그래서 완벽하게 신뢰하기엔 뭔가 부족한 나라, 이것이 한국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여기에 북한의 핵문제도 한몫 단단히 한다. 세계인들에게 신흥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는 두 나라, 중국과 일본, 그 사이에 있는 우리의 이미지는 냉정하게 말해 아직은 선진국이 되기엔 뭔가 약간 부족한 그런 나라일 뿐이다.   그것은 이웃국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지난 여름 베이징 올림픽이 치러지는 기간 내내 우리는 당혹스런 경험을 했다. 거대한 한류시장인 중국에 강력한 반한감정이 확산됐던 것이다. 계기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여자양궁경기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반한감정은 올림픽경기가 치러지는 기간 내내 곳곳에서 볼상 사납게 불거져 우릴 불안하게 했다. 그 한 켠에서 일본인 관람객들은 오성기와 일장기를 함께 흔들며 적극적으로 중국선수들을 응원했다. 일본은 경기침체의 위기를 겪는 동안 중국의 등극을 지켜보며 중국을 향한 외교노선을 노골적인 ‘친화작전’으로 선회했다. 일본은 중국을 더 이상 경쟁자로 대하지 않는다. 아시아패권을 공유할 파트너로 대우하면서 일본 특유의 민첩함을 발휘하고 있다. 일본이 아시아지역내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 데 중국과의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급변하는 위상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단언컨대 앞으로 중국이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력은 지난 반세기 미국이 이 나라에 미친 영향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날 것이다. 지난 2세기, 세계적인 역사대국에서 세계 최고의 빈곤국가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중국은 한반도문제에 막강한 힘을 미쳤다. 하지만 미국의 보호아래 반세기를 살아온 우리는 사실, 그런 중국의 진면모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의 조상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우리가 종종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오긴 했으나, 우리 조상들은 전 역사를 통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중국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것은 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생존전략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의 중심 질서를 이루고 있는 오늘까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당당한 독립국가로 중국과 대등하게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비결은 바로 준비된 관계정립이었다. 조상들은 치열하게 중국과의 관계정립을 연구했고 준비했고 실천에 옮겼다.    이를 위해 선조들은 중국식 예와 가치관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비록 한반도의 작은 나라였지만, 세계의 중심이라 자처하는 중국을 감동시키는 우방이 됐고, 심지어 공자는 생전에 ‘진정으로 예를 알고 이를 지킬 줄 아는 동이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런 조상들의 비범한 능력과 치열한 노력 덕분에 강국이 약소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그 정글과 같은 시대에 - 물론 종종 나라를 잃을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 그들과 철저한 신의와 예의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국호와 자국의 영토를 지키며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중국의 저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며 지난 100년간의 경험만을 앞세워 묘한 우월감에 빠져있다. 물론 70년대 이후 우리가 이룩해온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과정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해내지 못한 감동적인 성과요, 자랑스런 역사다. 그러나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 불과 4천만의 인구로 우리가 이룩한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건 경이로운 기록이다. 그와 함께 얼마 전까지도 한국을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로 바라보던 그들의 시각이 현저하게 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두 마리의 거대한 공룡, 즉 13억의 경제대국 중국과 세계 2위의 경제강국 일본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이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갈수록 그 나라가 갖고 있는 재화가치만큼이나 주변국과의 관계능력이 그 나라의 국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면에서 한국은 아직 국제사회에서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분명 전쟁의 폐허위에서 순식간에 개발도상국의 단계를 지나 선진국의 잠재력을 갖춘 중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건, 차원이 다른 싸움이다. 비유하자면 아마추어가 프로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아마추어의 세계에서는 50점짜리와 80점짜리가 싸운다. 당연히 80점짜리가 연승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80점에 머물러 있는 한 그는 프로세계에서 단 1 승도 올릴 수 없다. 프로의 세계는 99점짜리와 100점짜리의 싸움이다. 100점이 되어야 선진국이고, 99점의 함량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중진국이다. 1%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다. 그러니 80점짜리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기란 그만큼 치열하다. 때문에 지금 한국이 경주해야 할 것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1%인데 그것이 나는 관계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설 수 없다. 마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긴 했지만, 단 한 게임도 이기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고 월드컵 4강을 이룩하고도 그에 못지않은 부도덕과 비인간적인 사고들로 우리의 우방에 종종 실망과 불안감을 안겨준 것처럼, 더구나 동북아에서 가장 작은 영토와 인구를 갖고 있는 나라로서 인구 13억의 중국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하기 위해서라도 ‘선진국의 잠재력을 가진 만년 중진국’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11    이자나기 신드롬 일본의 부활 댓글:  조회:2987  추천:43  2009-01-28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주역들제 2의 이자나기 신드롬을 꿈꾸다, 일본의 부활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거울, 칼, 곡옥(曲玉)을 가리켜 신기삼종, 즉 건국신 이자나기(伊邪那岐)가 세명의 일본인 선조에게 내려준 세 가지의 신기라고 말한다. 일본 고유문화의 뿌리가 되는 이 세가지가 현대에 와서는 세계에 메이드인 재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 시기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폐허나 다름없었던 일본열도에 결정적인 재기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힘겹게 전후복구의 가파른 고갯길을 넘고 있었던 50년대말부터 60년대 초,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로 벌어들인 달러를 밑천으로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일본은 이 천운의 호경기를 건국신 이자나기가 선물했다 해서 ‘이자나기 경기(景氣)’라고 불렀는데, 최근 일본기업들 사이에선 다시 한번 일본경제 회복을 꿈꾸며 ‘신 신기삼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신 신기삼종은 바로 디지털 카메라, DVD 리코더, PDP TV를 의미한다. 이 세 상품은 모두 디지털 상품이자 묘하게도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강자로 군립하고 있는 한국의 주력상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에 밀려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일본 반도체 업계가 이 세가지 상품의 시장을 다시 석권함으로서 일본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최근 일본 경제내부에서는 그동안 미국에 휘둘리던 컴퓨터와 IT시대가 지나가고 드디어 일본이 기다리던 디지털 가전제품의 시대가 왔다는 판단 하에 상당히 시장상황을 고무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은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일단 내부적으로는 고령화와 부실채권, 정경유착과 구조적인 디플레이션 등의 악순환을 극복해야 하고 밖으로는 기필코 아시아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여야 한다. 아시아대륙과 연결되지 않는 일본은 결국 침몰하는 항공모함과도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임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여년 간 일본사회를 움직여온 것은, 아시아를 시장으로만 바라보고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볼 줄 모르는 보수적인 정치세력과 변화를 거부하는 관료집단, 그리고 재계의 뿌리깊은 기득권 세력과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연대’였다. 그동안 일본의 모토는 일본은 결코 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세기의 예만 들어보더라도 일본은 아시아지역 내에서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었다. 대동아공영이라는 미명아래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목숨과 재산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 씻을 수 없는 역사적 만행을 부인함으로서 아시아사회 속에 공분을 일으킨 바 있다. 지금도 일본은 과거의 만행은 아랑곳없이 미국의 비호아래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며 중국과 한반도 및 러시아 극동지역을 최신예 첨단무기로 포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시대의 도래와 함께 중국만큼이나 중요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문제는 당사자인 일본 뿐 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및 환태평양지역의 모든 관계국들에게 비상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더군다나 최근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경기회복을 선언했다. 10여년간 계속된 기업의 혹독한 구조조정과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10    아시아의 블랙홀,중국의 비상 댓글:  조회:3150  추천:54  2009-01-15
두 번째 이야기 시대의 주역들                                                지난 200년간, 한중일 삼국은 제각기 남들처럼 살았다. 담벼락을 높이 쌓아 올리고 각자의 색깔을 만들고 각자의 목소리만 높여가면서 살아왔다. 그 세월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와 미움을 키워 왔으며, 그만큼 멀어져갔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소통의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는 이제 담을 허물어야 한다. 나를 열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중일 삼국은 이제 아시아의 허브이자 세계역사를 이끌어갈 아시아대륙시대의 삼두마차다.  아시아의 블랙홀,중국의 비상인류역사상 가장 앞선 선진국은 어느 나라일까. 미국, 프랑스? 혹은 영국? 최근 100년간의 역사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만 더 거슬러 올라가도 이 대답엔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이전, 대략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의 대답은 또 다르게 변한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 나라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모든 시대 세계의 석학들은 한결같이 말하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선진국. 그 해답의 주인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중국이다.   1820년 이전까지 중국은 세계 GDP의 33%정도를 차지하는 대국이었고 그 이전 2000년 동안 중국은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중국의 1인당 소득은 12세기까지는 서방세계의 1인당 GDP보다 높았고 18세기까지는 세계 평균보다 더 높았다. 콜럼부스가 미국대륙을 발견했던 16세기 대 항해 시대에도 중국은 포르투칼이나 네덜란드보다 더 큰 규모의 앞선 기술을 가진 선박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략 1820년경부터 중국은 내전과 기근으로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청왕조의 부패와 민중의 극심한 빈곤,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내란과 소요 속에서 세계 최고의 대국 중국은 서서히 침몰해갔다. 이때가 중국으로선 진시황 통일 이후 가장 참담한 시기였다. 이때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내전과 공산화를 거치느라 세계 3분의 1을 차지했던 경제규모가 불과 2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아에 허덕이는 11억 인구의 나라.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그 막대한 인구를 빈곤의 고통 속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지리한 공산혁명에 이어 수많은 지식인들을 암흑세계로 내 몰았던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중국에 그 누구도 희망을 걸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중국엔 무서운 태풍이 불고 있다. 침몰해가던 거함 중국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중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빠른 경제성장, 그리고 최대의 인구를 가짐으로서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만큼 그들의 자존심도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가고 있다. 그들의 자존심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주요 사회 경제 지표들이다. 중국은 지금 세계 최다 외자유치`(2008년 1월 현재, 1조6,000억불)국이며 매해 두 자릿수의 초고속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계 최대 생산공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13억이라는 세계 최대 인구와 전 세계 화교권과 홍콩을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 경제공동체 보유국이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년 10월 15일에는 중국인들의 자신감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가 성공적으로 우주탐사를 하고 돌아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일을 두고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이룬 쾌거’로 보고 있다. 중화민족 천년의 꿈이란 항아(嫦娥)’의 전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전설은 사약을 훔쳐 용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갔다?미녀에 관한 전설로 그 사건이 얼마나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는지 짐작케 한다. 한껏 고조된 자긍심을 반증하듯 중국항공우주국은 3년 안에 달 탐색선 항아 1호 발사계획을 발표했다. 거기에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지금, 진시황의 중국통일이후 역사적으로 늘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패권주의적인 중화의 자존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충천해 있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의 놀라운 성장은 1980년대 초, 덩 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그가 중국재건을 위해 채택한 것은 중화사상과 경제건설, 그 두 가지였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다. 흑묘백묘론이란, ‘검은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즉 사회주의건 시장경제건 중국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면 뭐든 좋은 것이며 그것을 채택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방세계는 이러한 덩 샤오핑의 결정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가장 중국적인 선택이었다. 어떤 정치이데올로기가 지배를 하고 있건 중국인을 지배하는 사상은 중화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이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덩 샤오핑은 일부 중국공산당 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주의의 중요한 대 원칙인 계획경제를 버리고 과감하게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초, 중국 동남부지역에 있는 작은 어촌마을 선전을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세계 시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홍콩과 대만의 기업들 그리고 동남아에 있는 화교자본들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중국식의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탄생했다. 덩 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 이어 장쩌민의 국가발전 3대 지향론, 즉 현대화, 미래화, 세계화는 세계 시장질서 속에서 중국이 다시 한 번 세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특히 후진타오는 21세기형 리더로서 2010년까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완성하기 위해 선진 생산력대표, 선진문화대표 그리고 폭넓은 인민이익대표 라는 이른 바 `3개 대표론‘을 주창해 경제, 문화예술, 복지의 세계핵심분야의 선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후진타오 정부가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샤오 캉(小康:풍요한 수준의 삶)‘, 즉, 인민 하나하나가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관된 정책속에서 부패한 청나라 왕조와 오랜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던 중국의 민중들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위해, 내일을 위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국민으로 변했다. 그 결과, 20여년이 지난 오늘, 세계는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공룡, 중국의 위협에 맞서 자국의 경제 챙기기에 골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중국은 이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태풍의 눈으로 등극했고, 세계는 중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경제전문가 마틴 울프는 중국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으며, 이제 세계는 적당한 대응책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할 때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미국에게 있어 지금의 중국은 20세기 일본과 옛 소련을 합쳐 놓은 것 같은 강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중국의 부상 이후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인 미국과 유럽연합의 경제가 위축되고 있으며 중국의 성장과 함께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아시아대륙에서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온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중국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지도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부시보다는 후진타오가 더 환영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최대 교역국이 미국에서 중국으?바뀌었다. 한반도에 끼치는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지대하다. 많은 사람들이 북핵문제를 풀어가는 주도권이 미국과 북한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막후에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은 정치사회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동북아뿐만 아니라 아시아대륙 전체를 역동적인 대륙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중심 진원지에 있는 중국은 국제 정치, 외교, 통상, 금융, 문화, 기술 등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로 변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당제국`(大唐帝國)의 부활’ 또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 중국중심의 세계질서)의 재현‘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켠에서는 뜨는 중국, 지는 미국이라는 시니컬한 비유도 흘러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중국의 부상과 함께 세계 질서의 중심이 아시아 대륙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9    동북아시대의 신호탄, 아시아경제가 살아난다 댓글:  조회:3150  추천:42  2009-01-12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新 풍속도> 동북아시대의 신호탄, 아시아경제가 살아난다   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미국으로부터 초유의 금융재앙이 불어 닥쳤다. 대미 경제의존도가 높은 우리는 직접적인 손실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도 달러가 폭등하는 등 금융시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거의 원폭투하를 당한 듯한 상황의 미국금융계는 물론이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아시아까지 강력한 후폭풍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아시아의 실물경제 회복은 최소 1년 정도는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이 사태를 지켜보던 일본의 한 경제전문가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의 경제리서치 회사 다이와 소켄의 샤오 민제 책임 이코노미스트는 이번의 경제위기는 내년 2/4분기부터 한·중·일 중심으로 회복세로 돌아서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얘기다. 세계 경제의 물꼬는 늘 미국이나 유럽선진국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심각한 금융위기가 한·중·일 삼국으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경제 회복과 성장으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회복되고 이어 주변 국가들과 세계가 그 혜택을 볼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경제권력이 서구사회로부터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국제경제를 연구하는 한국인 경제전문가들도 같은 시각이다. 맥킨지 한국 금융기관 전문가 그룹의 리더인 김용아 파트너는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다소 아시아를 주춤하게 했지만 그러나 아시아의 성장엔진은 여전히 힘차게 박동하고 있다고 전제하며 최근 아시아 경제를 이끌어가는 네가지 트렌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그 첫 번째는 아시아경제의 회생이다. 1980년대 아시아의 총생산은 세계 총생산의 19%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7년 현재 36%로 성장했고 2020년이 되면 45%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아시아는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유럽과 북미가 부상하기 까지 아시아가 누렸던 황금기를 되찾아 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같은 지역내에 있는 우리의 경제에도 긍정적인 파급효과가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두 번째는 중간시장이 발달하고 있어 세계일류 대국중심의 고가시장과 중국, 인도와 같은 저가시장의 사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우리 한국과 같은 나라가 점유할 수 있는 시장규모가 전체 시장의 50%규모로 확대됐다. 세 번 째는 아시아전역에 도시화와 사회간접자본 투자 그리고 교육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20년 뒤에는 아시아의 도시인구가 10억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보다 약 두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응하는 다양한 사회간접자본투자가 이루어질 예정이어서 건설, 철강, 중공업 분야에서 경쟁력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10년 내에 경영자급 산업인재가 적어도 10만명이상 추가로 요구될 것이며 중간직급 수요는 지금도 매년 평균 25%씩 증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1500개 이상의 신규 대학과 직업학교가 필요해진다. 교육인프라가 발달한 한국으로서는 새로운 시장 확대가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국가간 연대현상이다. 10년전만 해도 아시아국가 들 사이에 연대현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2010년까지 한국을 비롯한 32개국가를 연결하는 총연장 만 4천킬 로미터 길이의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가 건설된다. 26개 국가를 연결하는 철도네트워크도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싱가폴 국립대학의 키쇼어 마흐부바니교수도 그의 저서 <헬로 아시아>에서 앞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글로벌 리더는 미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중국과 인도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세계 인구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비서구가 성장하면 세계는 더욱 평화로워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아시아의 도약은 서양의 개념을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므로 서구 입장에서도 이를 환영하고 이같은 변화를 서구가 수용하면서 세계질서를 재편성해야만 세계 평화와 안정이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죤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도 일찍이 아시아를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메가트랜드의 하나는 아시아 시대가 열릴 것이며 이미 세계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서양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이후 아시아지역 내의 무역총액이 아시아와 미국, 유럽간의 무역 총액을 넘어섰고 세계 GNP(국민총생산)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구촌이라는 대형 화물트럭을 역동적으로 달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이전처럼 구미 각국이 아닌 바로 이 아시아, 그것도 우리를 포함한 일본과 중국이 있는 이 동북아라는 의미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동아시아의 경제규모가 유럽이나 북미를 넘어서는 날이 멀잖아 올 것이다. 그 동아시아의 핵심국가가 바로 한국, 일본, 중국이며 이를 동북아라고 부른다. 즉 아시아대륙시대는 동북아시대를 의미하는 것인데, 최근 이 세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다.  
8    동북아,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댓글:  조회:3512  추천:50  2009-01-05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新 풍속도> 동북아,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이미 3년 전의 일이다. 모스크바 코스타(KOSTA:한국유학생회) 강의를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북경을 경유하게 됐다. 그런데 그날, 공항의 국제선 청사탑승구역 곳곳에 대형 화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공항직원에게 물었더니 설날을 맞아 고향을 찾는 대만기업인들에게 중국 정부가 특별히 대만 타이페이로 직항하는 항공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비록 상설 항공편은 아니었지만, 중국과 대만간의 직항노선이 시작된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그동안 중국본토와 대만 사이에는 이른바 3불통(不通)이라고 하는 장벽이 있었다. 통행·통상·우편교류가 그것이었는데 그 중 통상과 우편교류는 이미 무너졌고, 마지막 남아있던 직접통행금지조항마저 이날을 기해서 끝내 무너진 것이다.         ‘2005년 1월 29일은 우리 중국인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 주요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들은 모두 이렇게 흥분했다. 중국과 대만의 TV와 신문들은 앞 다투어 직항항공이 뜨고 내리는 감동적인 활주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날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에서 각각 출발한 비행기들이 타이베이(臺北)와 카오슝(高雄)의 공항에 도착했다. 실로 56년만에 중국과 대만을 가로막고 있던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동북아시대를 위해 달려온 나에게 그 사건은 무척이나 감동스러웠다. 하지만 그 사건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의미있게 받아들일 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일본에 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설연휴를 기해 후쿠오카에 갈 일이 있었다. 마침 일본 건국기념일(2월 11일)과 겹쳐 일본관광객과 대만과 홍콩, 상해, 청도 등에서 설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온 중국인들이들로 호텔이 북적댔고 내가 일행과 함께 노천온천탕에 갔을 때도 탕안에는 한국과 중국, 대만 등에서 온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원래 아시아 사람들은 목욕탕 같은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쉽게 말을 걸지 않는다. 대개는 아시아인 특유의 숫기없는 성품 때문이고 일부분은 말을 걸어봐야 별로 좋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아시아인들 사이의 오랜 불신과 비하심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시아인들 사이에 이런 오랜 감정의 장벽이 많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한류열풍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확실히 과거보다는 아시아인들 상호간에 호감을 갖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그날 그 노천온천탕에서 나는 그 진면목을 확인했던 것이다. 모두 알몸으로 탕 안에 앉아 있었으니 조금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국과 일본, 대만사람들과 진지하게 각자의 모국어와 서툰 영어를 섞어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어, 일어, 영어와 한국말이 하나의 공간 안에 떠돌며 격의없이 어울려 대화하는 정경을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꿈꾸고 바라는 공생하는 아시아의 모습이 결코 멀지 않다는 사실에 감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대륙에서 온 중국인 상인들과 대만 청년들이 지난 1월 29일의 직항항공운행에 대해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그들은 중국 정부가 2030년까지 해저터널을 뚫어 중국 베이징과 대만의 타이베이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정치적 대립감정 없이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그런가 하면 나가사키(長崎)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50대 일본인 한 사람이 더듬거리는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욘사마’열풍과 한류의 영향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혀를 내두르면서 소니, 히타치, 후지쯔 등 일본 10대(大)기업들의 순이익을 모두 합쳐도 이루지 못한 ‘순이익 100억불’ 실적을 한국의 삼성전자가 단독으로 이뤄낸 일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이 한국에 대해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는데, 오히려 그는 일본의 경제재건 뿐 아니라 한일간 FTA를 위해 문화교류와 경쟁과 충격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해 나를 무척이나 감동시켰다. 홍콩의 투자자문회사에서 일한다는 한 30대 중국인은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화상대회를 한국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동안, 부동산, 물류 등 전통산업에 주력해왔던 화상기업들이 최근에는 IT·금융·게임·에너지 부문 등으로 투자영역을 확대해가는 추세이므로 이 분야의 한국기업들과 윈-윈(Win-Win)관계 형성을 기대할만 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나도 그동안 외신을 통하여, 세계 500대(大) 화상기업들의 시장가치만 6천억 달러에 이르며, 또한 전 세계 곳곳에 약 6천만 명에 이르는 화상들이 동남아, 북미 등에 네트워크를 구축해놓고 그 활동영역을 빠르게 확장해가고 있는 만큼, 한국기업들이 화상들과 세계무대로 동반진출 할 경우 상당한 시너지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던 중에 뜻하지 않게 일본의 한 노천온천탕에서 중국 화상들의 세계경영전략과 투자계획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한·중·일의 시장통합에 관한 기대와 관심은 비단 나와 같은 몇몇 사람들 소수만의 생각이 아님을 다시한번 감격스럽게 확인을 한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앞으로 동북아시장통합을 이룩하려면, 정치와 경제는 나라마다 그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고 그래서 마찰도 뒤 따르지만, 기술과 문화는 함께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기술과 문화교류를 통해 중·일·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고, 중국·한국·일본의 수도를 잇는 ‘베세토(Be-Se-To) 관광벨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으며, 이때 각국 주민들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동북아 통일 한자체’를 제정해서 공용화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성주박사의 지론을 빌려 동북아 통합시장이 ‘다양성 속의 하나’를 이룬 유럽연합(EU)과 같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정치적 타협과 제도권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미래 동북아의 주역인 한·중·일 젊은이들에게 ‘친구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민간차원의 노력이 더 급선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동북아 FTA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주역인 아시아 경제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의 젊은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교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동북아 삼국 젊은이들의 문화, 학술, 기술 교류를 위한 대규모 공동펀드 (가칭 에라스무스 펀드 Erasumus fund)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일본인 중년신사가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의 발언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중국과 한국간의 역사왜곡과 영토분쟁 등으로 인한 단절의 벽을 깨고 동북아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시급한 과제가 삼국 공동역사연구회 및 공동역사교과서를 만들어 내는 일이며, 화합과 통일을 의미하는 ‘화(和)의 철학’을 동북아 3국이 공유하고 있는 만큼, 서로를 이해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각국이 솔선수범하며 노력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매우 고차원적인 의견을 제시해 내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최근 ‘중국은 날아가고, 일본은 뛰어 온다’ 는 말이 유행하는 반면 한국은 북한 핵문제와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로 좌충우돌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한·중·일 FTA 문제는 삼국간의 이해충돌로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어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뜻하지 않던 이 온천대화를 통해 깊은 위로와 치유를 받았다. 이날 내가 느낀 것은 한·중·일 구성원들 사이에선 어느 새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사적인 앙금과 풀어야 할 숙제가 우리들 사이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가 과거의 기억은 흘러가는 시간에 흘려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새로운 이웃이 되고 싶어하고 있었다. 동북아시대는 그렇게, 가슴을 열고 마음을 나누는 일부 동북아인들을 통해 이미 시작되고 있는 듯 했다. 
7    동북아 시대가 오고 있다 댓글:  조회:6098  추천:55  2008-12-31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여태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우리는 이제부터 치열하게 그리고 정말 열심히 동북아라는 말과 친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도 한국인에서 동북아인으로 확대해석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한국인의 울타리를 벗어나 진정한 동북아인이 되는 데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동북아는  우리 후손들의 풍요와 선진한국의 자존심이 걸린 생존코드다.  동북아 시대가 오고 있다나는 세계지도 보기를 좋아한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한쪽 벽에 칠판 크기로 붙어있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세계지도를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한국은 가까이 다가서야만 겨우 보이는 작은 나라이지만 묘하게도 그 세계지도의 한 가운데, 중요한 거점처럼 위치하고 있다. 그 의미심장해 보이는 점 위에 서서 동서남북으로 드넓게 펼쳐진 오대양 6대주를 보고 있노라면 일찍이 함석헌 선생이 말했던 세계역사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역사의 시작은 동양에 있고 발달은 서양에 있다. 정신만이 높고 물질은 낮다는 말이 아니요, 발달만이 장하고 지킴은 작다는 말이 아니다. 높음 낮음도 없다. 다 제 할 것을 할 뿐이다. 정신문화의 씨가 동양의 흙에 떨어지자 역사의 주역은 서양으로 갔다. 그리하여 충분한 분화의 자유로운 토구(討究)가 허락되었다. 만일 동양에 그대로 있었다면 약해지고 갇혔을는지 모른다. 분석에 또 분석, 의심에 또 의심, 비판에 또 비판하는, 가만 두는 것이 하나도 없는 서양의 손으로 갔으니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 그 물질의 큰 힘으로 동양사람을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동양은 그 밑에서 자유와 진보가 귀한 것임을 배워야 했다.                  이제 오늘은 서구 문명의 폐해가 끝에 오르게 된 때다. 이제 동양은 그 품갚음을 하여 서양을 건질 때가 되었다. 그 교만하던 서양의 입에 동양소리가 차차 높아가고, 동양은 그 힘든 곤학(困學)을 거의 마칠 때가 되어온다. 이제 당한 문제는 동서종합을 하는데서 한 단 높은 새 지경에 오르는 일이다. 이러한 세계역사의 테두리와 방향 안에서 우리의 자리와 할 일을 발견해야 한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함석헌 선생의 이 글은 내가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소중한 가르침 중의 하나다. 이 구절을 생각할 때마다 한국이 인류 역사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되새겨보곤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도도한 인류 역사의 흐름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됐는데, 그런 시각으로 인해 나는 인류가 흘러온 역사를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짓는다.   <지중해시대> 기원 전후, 중앙아시아와 북부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부유럽이, 반도국가 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인류역사상 최초의 복합적인 지역통합 문화권을 탄생시킨 시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으며, 법 제도와 군국주의 공화정치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 화려했던 시대의 종말을 가져온 것은 그 누구도 주목하지 못했던 팔레스타인 반도의 작은 바닷가마을인 갈릴리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를 탄생시켰고, 이후 수많은 고난과 핍박속에서도 불길처럼 전 세계로 확산됐다. 마침내 위대한 사도인 바울에 의해 기독교는 지중해를 건너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다. 기독교는 인류 역사상 서진(西進)을 일으킨 출발점이 됐다.   <유럽대륙시대> 로마제국의 분열과 멸망 이후 세계 역사의 중심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대륙으로 옮겨갔다. 이른바 유럽대륙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의 특징은 강력한 전제정치제도와 카톨릭에 기반을 둔 귀족중심의 문화였다. 이 시대의 리더는 프랑스와 독일이었다. 그 시대 파리는 세계 문화와 산업, 문학을 지배하는 강력한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소비문화와 갈수록 심각해지는 계층 간의 극심한 신분격차와 빈부격차로 인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자각하는 정치적 실험정신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서는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사회과학의 발달, 부국강병을 위한 중상정책, 종교개혁 및 시민운동 등이 파생했다. <대서양시대> 침체된 유럽대륙문화에 뒤를 이어 세계 질서를 지배한 세력은 뛰어난 경험주의적 수용능력과 해양성기질에 바탕을 둔 진취성이 뛰어났던 영국이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의 서쪽에 있던 섬나라였다. 유럽의 변방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은 유럽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데 그 어느 나라보다 열심이었다. 여기에 기독교(성공회)를 국교로 받아들여 민심을 결집시킴으로서 섬나라의 한계를 뛰어넘어 쟁쟁한 유럽 국가들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서양시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대서양은 섬나라 영국의 앞마당이 되었으며, 그 후 영국은 남유럽의 스페인, 포르투칼 등과 함께 제국주의적 경향을 같이 하면서 세계의 3분의 1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함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미주대륙시대> 1500년대 들어서자 영국은 인구증가와 더불어 심각한 실업율에 시달리게 됐다. 자연히 콜럼부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런 흐름은 당시 런던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연극이 ‘서쪽으로!’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드디어 1606년 영국인 105명이 신천지를 향한 꿈을 품고 미주대륙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신대륙에 영국의 법률과 가치관이 똑같이 적용되는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그들은 결국 인디언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모두 몰살당함으로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최초로 미주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은 1620년 영국 성공회의 핍박을 피해 상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대륙으로 향했던 102명의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이전의 영국인들이 허황된 꿈을 품고 금광을 찾아다녔던 것과는 달리 스스로 땀흘려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일구었으며 인디언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아나감으로서 미국대륙을 발판으로 인류역사의 전환기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청교주의는 미국대륙에 민주주의와 민본주의를 심는 원동력이 되었고, 귀족중심의 사회를 완벽하게 탈피해 진정한 시민사회를 미주대륙에 정착시키는 주역이 된다. 미주대륙시대를 특징짓는 두 축은 유럽대륙문화의 반성과 영국의 영향력이었다. 유럽대륙 문화의 반성은, 크게 정치적, 종교적 개혁, 상업과 교육과 기술을 숭상하는 시민사회 등장, 그리고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 등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영향력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근면과 정직, 땀과 평등을 중시하는 도덕관 형성과 증기기관 및 기계식 동력장치 같은 영국의 발달된 기술을 바탕으로 산업자본주의의 발달, 그리고 경험론적 가치관과 입헌 민주주의 체제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미주대륙에 뿌리내린 법치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합리적 실용과학주의 등의 가치규범은 다양한 인종, 문화, 개성을 폭넓게 통합하는 국가통치 질서를 낳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로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투쟁과정에서 세계정의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이후 소련의 몰락과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에는 대중민주주의와 세계화 정책의 기수로서 국제정치, 외교, 통상, 경제, 군사, 교육, 과학, 기술,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석권하는 초강대국`(Pax Americana)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환태평양시대> 20세기 세계에 가장 큰 변화와 영향을 끼친 2대 사건은 소련의 몰락과 일본의 등장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의 지식층 관료들과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가 일본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흔히 말하는 20세기 후반의 환태평양시대는 미국과 일본의 합작품이다. 두 개의 핵폭탄으로 제국 일본의 단말마적인 야욕을 잠재운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의 정치안정과 경제회복을 지원함으로써 반미감정을 해소하고 친미노선을 확고히 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미국은 세계 최대의 적성국가인 중국과 소련을 방어하는 태평양지역 최전방 군사전략 요충지로 필리핀과 일본(한국포함)을 선택하고 두 나라에 막대한 군사력을 지원했다. 그 덕택에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한국전쟁 특수를 계기로 세계가 놀랄만한 빠른 속도의 경제건설에 성공했다. 성공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태평양을 발판삼아 미국, 캐나다, 호주, 남미, 동남아, 중동, 유럽 등에 메이드 인 재팬 선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탈 아시아’정책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 국가이기를 거부했던 일본은 패전 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미국 다음가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미국과 함께 환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아시아 대륙시대> 우리는 잘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일본의 세기적인 성장 이후 전 세계 국가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아시아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18세기말부터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와 상인 그리고 일본과 청을 통해 들어온 신기술들이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동안 잠복상태에 있다가 20세기 중반 광복과 더불어 성장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 뒤 국토분단이라는 상처 속에서도 한국은 민주공화국의 통치체제를 갖춘 뒤, 빠른 근대화과정과 국제화, 그리고 개방사회로의 변신을 거듭한다.  북한과의 긴박한 대치상태, 군사정권의 독재로 야기된 정치적 갈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월남전 파병, 중동건설 붐,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내수산업의 활성화, 그리고 수출입국의 목표를 달성하면서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60년대부터 치열하게 계속되어온 민주화운동은 86년 민주항쟁으로 결실을 맺었고, 마침내 88서울올림픽을 통해 불과 30년전 전쟁의 폐허였던 한반도의 기적같은 성장과 변신,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한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신생 독립국가로서 50년 만에 이룩한 세계 경제교역규모 10위, OECD가입, 개인소득 1만불, 등의 주요 경제지표가 말해주듯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발전모델로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20세기 후반 최대의 역사를 만든 주역으로 떠오른 것이다. 여기에 최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 오랜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새롭게 아시아의 리더로 재등극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는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년간 서구중심의 역사속에 깊은 침체기에 빠졌던 아시아의 불꽃이 다시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6    환갑나이, 낯선 화두에 목숨 건 백발의 청년 댓글:  조회:6068  추천:55  2008-12-2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4]환갑나이, 낯선 화두에 목숨 건 백발의 청년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따지고 보면 나도 시쳇말로 꽤 글로벌한 사람이다. 아이들이 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교회를 나가게 된 후 유명 목사님들을 따라 선교 여행차 세계를 많이 돌아다녔다. 아내와 함께 미국, 유럽, 러시아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숱한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남들은 그저 TV나 책에서 간접경험에 그친 곳들을 나는 직접 찾아가서 그 땅을 밟아보고 그 공기를 마시며 그 나라의 체취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름대로는 화려하게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인생치고는 지금 내가 들고 다니는 명함에 박힌 용어들이 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명함은 각각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이승률’,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회장 이승률’  ‘연변은 뭐고 또 동북아는 뭐야? 그게 언제 유행했던 말이더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다음 언론인들이 한 때 떠들다가 지금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묻혀진 말 아니었던가. 한국인이 우주를 오가는 시대에 이 무슨 캐캐 묵은 용어들이야?’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의문에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작 이 화두를 붙들고 살고 있는 내 자신도 사람들에게 ‘연변’과 ‘동북아’란 단어를 설명할 때마다 무척이나 답답하다. 첫 번째는 사람들에게 전혀 흥미를 주지 못하는 화두를 뒤늦게 붙들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해서고 두 번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붙들고 몸살을 앓아도 부족할 화두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답답해서다. 1990년 가을. 내 삶을 뒤흔든 한 크리스챤 지도자(연변과기대 김진경 총장)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동북아라는 개념과 조우했을 때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리에 어느 날 실수로 뚝 떨구어 놓은 귀찮은 분실물같이 느껴졌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밀어내기를 계속하다가되려 그것이 내 운명이자 동시에 시대의 화두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미래와 희망이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제껏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일본과 미국이 있는 동쪽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역사의 중심은 늘 그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 100년 동안에 일어난, 서양세력의 영향에 물든 겉모습 현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세월은 우리들에게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역량을 배우도록 이끌어 주었지만 한편, 2분법적인 이념 분쟁?전통사회와의 단절을 가져온 갈등의 세월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이전의 수천년에 걸쳐 인류역사의 저변을 흘러온 근원적인 물결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동쪽에서 불어온 강력한 서구화의 바람에 휩쓸려 우리의 중심좌표를 勞儲値홱?것이다. 지난 백년, 우리 민족이 겪어온 난관과 위기는 어쩌면 이와같은 방향 감각의 혼돈과 미숙함에 기인했는지도 모르겠다.  ‘방향이 잘못 되었다면 속도는 무의미하다’ 간디가 한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성장 신기록을 세운 민족이라 해도, 아무리 위대한 문화적 역량과 독창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난 민족이라 해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우리에게 오늘이 험난했듯이 미래 또한 그럴 것이다. 모두가 동쪽을 바라보며 일본과 미국을 향해 박수치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을 등에 업고, 그들이 가르쳐 준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중국이 있는 서쪽으로 향하리라. 관용과 조화의 미덕을 가슴에 품고, 잠자고 있는 땅 - 21세기 지구촌의 신천지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하는 서부 개척사를 펼치리라.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와 유럽을 지나 중동지역 팔레스타인 땅에 까지 나아가리라. 그 길에 우리 민족의 미래가 있으므로, 동북아를 변화시킬 새로운 활로가 있으므로, 그리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땅에 깃들어 있으므로 나는 그 길로 나아가리라. 이와 같은 역사의식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갖고 자신을 회고 해 볼 때, 나는 한동안 내게 가장 가까운 분이면서도 의식적으로 멀리 대하고 있었던 나의 선친에 대한 생각으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끊임없는 탐구욕에 이끌려 이리저리 방황했던 젊은 날의 과오는, 결국 누구보다 맏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의 상처를 남겼다.그런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 내게 유업처럼 남겨주셨던 고문서와 일기문과 사진 자료들은 이제 세상에서 어느 귀한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그것은 한마디로 자식으로 하여금 한민족 역사의 회복을 꿈꾸게 만든 거룩한 각성의 유품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나는 이를 “나의 아버지와 테라우치문고”란 글에서 자세히 썼다.그리고 이 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과 희망을 내 마음속에서 재발견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뜻 깊은 효도의 길이 되었다.  
5    [역사는 어디로 흐르느가]-프롤로그 댓글:  조회:3040  추천:45  2008-12-1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총장   내가 중국의 변방지역인 “연변”과 “동북아”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한분의 크리스챤 지도자를 만나면서 부터이다. 그 분을 만나고 그 분과 함께 연변과학기술대학 운영을 위해 18년이라는 세월을 동고동락 해 오는 동안에 나는 자연스럽게 동북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연변”과 “동북아”를 기반으로 하여 아시아 존에 새로운 희망의 역사(“동북아공동체사회”)가 펼쳐지기를 꿈꾸며 활동하고 있다. 이런 과정속에 그때그때 마다 부닥쳐온 국제 정세의 사안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연우포럼(한민족 칼럼공동체)」에 기고해 온 글들을 묶어서 만든게 이 책이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탁월한 학문적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랜세월 동안 축적된 경험적 지식과 감각을 토대로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 세차게 구비치고 있는 세계역사의 한 흐름을 해석 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껴왔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동북아시대 역사의 흐름에 대한 내재적 통찰을 추구하는 한 어린 탐구자의 고백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점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조금 설명하는것이 독자들께 편퓔?제공하는 방법이 된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사람의 행岵訣嗤? 이를 이해하는 바탕위에서 책을 읽을 때, 비로소 저자의 생각과 꿈과 희망의 진면목이 전달되지 않겠는가! 사람이란 결국 그가 살아왔던 삶의 총체적인 이념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인격적인 가치가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4    [프롤로그-3] 나이 마흔 셋, 문득 달음박질을 멈추다 댓글:  조회:3053  추천:41  2008-12-1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3]나이 마흔 셋, 문득 달음박질을 멈추다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이런 것을 신의 섭리라고 하는 걸까. 그렇게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던 그 해 가을,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종류의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 때가 1990년 10월 초, 북경 아시안게임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때였다. 그 즈음 나는 아내와 함께 주로 골프장 조경공사를 맡아서 일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앞으로 중국의 골프장 사업이 상당히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업허가를 얻기 위해 중국을 오가곤 했었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라곤 북경과 상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고 있던 단 두 곳 뿐 이었다. 아직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라 중국정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수교 전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선점효과가 있을 것 같아 주변 건설업자들과 컨소시엄을 만들기로 하고, 이 사업의 대표가 되어 매월 청도(靑島)시를 방문해 중국측 관리들과 협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국제관광개발지역 내 골프장으로 허가 난 땅을 적정가격으로 매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국제협상경험이 전혀 없는 청도시 책임자들이 값을 터무니없이 부르며 배짱을 내미는 통에 협상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당시 중국 양상곤 국가주석의 아들 양소명이란 이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만나러 베이징의 한 호텔로 올라갔을 때 나는 다른 또 한분의 한국인과 약속이 중복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는 분이었기에 그에게 먼저 말씀을 하시라 양보를 하고 옆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나는 그가 무슨 일로 이 실력자를 찾아왔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내심으로 너무 시간을 빼앗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경청을 했다. 이윽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귀만 곤두세운 채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얘기가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내가 이제껏 세상가운데서 부대끼며 만났던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히 나와 같은 공간 안에 있었고 내 눈앞에  존재하면서도 오늘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는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원래는 한국 출신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20년 넘게 생활하는 동안, 대학교수도 됐고 또 사업도 해서 비교적 크게 성공을 한 편입니다. 그 후 1986년도에 중국사회과학원 초빙 교수로 북경에 와있는 동안, 우리 동족들이 사는 연길, 길림, 장춘, 하얼빈 지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보니 조선족들이 그들의 고유한 말과 글은 지키고 있지만 고등교육기관이 없어서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 있는 재산을 팔아와서 연길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우려고 하니, 당신 부친께서 국가권력자이시므로 내가 하는 일을 협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중국에 돈 벌러 온 것도 아니고,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 투자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중국에 선진교육을 전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중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분야의 교육을 통해서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어서 대학을 세우려고 하는 겁니다. 선생께서 나를 한번 도와주세요” 그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에 버려진 조선족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의 남은 생애와 이제껏 살아오면서 쌓은 학식과 재산을 가져다가 황량한 중국 동북 땅에 대학을 세우게 해달라고 중국지도자를 설득하러 온 사람이었다. 나는 중국에 골프장을 지어 돈 벌 기회를 얻고자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돈벌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웬지 모르게 자신의 존재감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것을 깨달았다. 그가 꿈꾸는 미래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그런 아름다운 꿈이 없었다. 그점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자신을 무참하게 느껴지도록 까지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 흘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동안 내 자아에게 물었던 질문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쩌면 이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거센 폭풍우처럼 내 가슴을 뒤흔들었다. 서울에 돌아온 다음, 나는 잠시 내 삶의 달음박질을 멈추고, 곰곰이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2주후에 서울에 출장오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제발로 찾아갔다. 그래, 그가 꿈꾸는 미래를 나도 믿어보기로 하자. 그 미래를 내 꿈 삼자. 그의 손발이 되고 그의 도움이 되고 아예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버리자. 오늘은 일단 접어두고 미래를 믿어보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를 만나 그와 함께 일할 것을 먼저 제의해보자.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 내 모두를 던져도 좋다고 느껴지는 그 무엇을 위해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 셋, 베이징의 그 어수선했던 호텔에서 느낀 감동이 지금까지도 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3    [역사는 어디로 흐르느가]-목차 댓글:  조회:3460  추천:51  2008-12-14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목차  프롤로그    85년, 비닐하우스의 봄 나이 마흔 셋, 문득 달음박질을 멈추다 환갑나이, 낯선 화두에 목숨 건 백발의 청년 나의 아버지와 테라우치 문고 첫 번째 이야기  동북아는 우리의 미래다 동북아 시대가 오고 있다  <新 풍속도> 한중일의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동북아시대의 신호탄, 아시아경제가 살아난다 두 번째 이야기 동북아시대의 주역들    아시아의 블랙홀, 중국의 비상 제 2의 이자나기 신드롬을 꿈꾸다, 일본의 부활 반도국가 한국의 두 가지 얼굴 신이 내려준 축복, 반도성 한반도는 동북아시대의 성지    세 번째 이야기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라 -FTA와 T&T 시대의 키워드 FTA와 T&T 동북아FTA와 한국의 손익계산서 KTX 등장과 한반도의 미래 한일해저터널,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일해저터널건설은 시대의 흐름이다 한중해저터널 논의의 출발점 세계의 해저터널과 동북아 T&T 한중해저터널을 뚫고 T&T 시대로  한·중·일 해저터널과 동북아경제협력체 구상  네 번째 이야기  코리안 섬 게임을 창출하라 흥부의 재해석, 포용의 성공전략 길을 닦아라, 미래는 꿈꾸는 게 아니라 달려가는 것이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먼저 이야기 하라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섬김을 받으려면 경쟁을 포기하라. 이기고 싶다면    문제가 아닌 꿈을 공유하라 다섯 번째 이야기 중화를 품고 중원을 넘어가라 중화경제권이 뭉치고 있다  인류역사상 최강의 요새, 중화(中華)의 현주소 중국, 패권주의와 평화공존의 기로에 서다    조선족 사회 대망론(待望論) 한․중․조 삼자합작, 두만강유역개발사업에 거는 희망 여섯 번째 이야기  희망의 역사를 위하여   중국땅에 꽃피운 동북아의 희망, 연변과기대 연변과기대의 성공비결 북한 영변과 두 가지의 핵폭탄 사랑의 핵폭탄, 평양과기대를 낳다 평양과기대, 남북한이 함께 만든 기적  일곱 번째 이야기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민박회 사람들 경희궁의 밤 백두산의 소수민족 올림픽 오리엔탈 쇼크, 중국과의 미래를 기대하며 역사는 서쪽으로 흐른다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운동 거듭나는 천년의 꿈 여덟 번째 이야기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요한바오로 2세와 마하트마 간디 일곱가지 사회악과 일곱가지 리더십 네덜란드식 리더십 - 공백 제로의 원칙 T림프구의 상생 매직-공생을 위한 후퇴 에필로그  
2    [프롤로그-2] 85년,비닐하우스의 봄 댓글:  조회:3510  추천:48  2008-12-03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2]85년,비닐하우스의 봄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내가 동국대학 불교철학과에 입학한 것은 75년 3월. 결혼을 하고 첫 아들까지 낳은 뒤였다. 어렸을 때는 나름대로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조숙하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남들처럼 공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게 그리 시답지 않게 보였고, 그래서 극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는 가운데 연거푸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대학을 다시 들어간 것은, 오랫동안 스스로 정상궤도를 벗어난 삶을 살아온 듯한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즈음, 뜻하지 않은 생활고를 겪게 됐다. 당시 차남 동헌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세들어 살던 갈현동의 집 주인이 사채를 값지 못해 집달리가 들이닥치는 통에 갓난 아이와 산후 몸조리도 채 하지 못한 아내를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된 것이다. 다급했던 나는 채권자와 협상을 해 그 집을 다시 450만원에 구입하기로 했다. 수리를 해서 팔면 8백만원은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돈을 빌려 집을 사들인 뒤,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인부들을 데리고 집을 수리했다. 그리고 목표했던 대로 집을 8백만원에 팔고 나니 빌린돈을 갚고 날릴 뻔한 전세금 100만원과 공사비를 제하고도 100만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그 다음 해인 1978년에 강남 영동시장 앞에 12평짜리 사무실을 임대해 아내의 전공분야를 살려 회사를 차렸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반도환경개발의 전신인 반도조경 & 종합환경계획연구소였다. 사업분야가 내 전공(불교철학)과는 전혀 다른데다가 나는 공부를 마치면 교수로 나갈 계획을 갖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아내 혼자서 사업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 한국전력, 현대건설 등에 근무하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조경설계 및 시공관련 업무를 맡을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그렇게 발로 뛴 결과 개업 후 2년까지는 좀 고전을 했지만 3년째가 되던 해 평택화력발전소의 설계 및 시공에 턴키베이스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성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돼서 이후 국내 원전 및 각종 발전소 부지의 공원화계획을 우리 회사의 기술력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을 지금도 회사의 큰 실적과 보람으로 삼고 있다. 여하튼 그 일을 계기로 형이상학적인 철학의 세계에 빠져 살던 나는 시장경제의 돈 맛과 사업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3년간 아내는 주로 조경공사를 진행했고 나는 주택건설사업으로 영역확장을 시도하며 순탄하게 사업을 키워갔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짓기로 한 주택공사 현장을 점검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택시기사가 도로변에 있는 화단 분리대를 보지 못하고 들이받는 바람에 차가 순식간에 전복되는 대형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아내는 얼굴 전체를 80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수을 받았으며 나는 머리두피가 심하게 깨졌다. 3개월간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해있는 동안 나는 별여놓은 주택공사를 중단할 수가 없어 아내의 동창인 강남의 부동산 업자에게 일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그해 말 우리가 퇴원을 했을 때  현장공사는 도중하차 상태였고 인건비와 자재비는 고스란히 외상으로 남겨져있었으며, 그 여자는 종적을 감추고 난 뒤였다. 하루아침에 힘들게 발전소 공사를 해서 번 돈을 다 날리고 빚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아내와 나는 그 이듬해 봄 모든 것을 채권자들에게 내주고, 역삼동에 있는 빈 땅을 빌려서 지은 다섯평짜리 비닐하우스로 이사를 가야 했다. 도로변에 조경수를 심어 행인들의 눈에 비닐하우스가 띄지 않도록 가리고 전기와 상수도는 담장 너머에 있는 연립주택의 한 마음씨 좋은 주부의 도움으로 공급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부부와 세 살 난 딸 현주까지 세 아이를 데리고 비닐하우스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어린이날이 됐다. 아내는 봄철이라 한창 조경공사가 바빠 현장에 나갔고 나는 아내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으로 놀러나갔다. 뚝섬에 애들을 풀어놓고 노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그늘에 앉아 깡소주를 마시며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은 강물은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데, 무심히 그 물결을 보고 있던 나는 그 물결 위로 그동안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며 흘러가는 게 아닌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달타>에서도 싯달타가 젊은 시절,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수많은 얼굴들과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싯달타는 그것을 영겁의 흐름으로 윤회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현재의 내 참담한 상황을 생각하며 허탈하게 강물을 보고 있는데 문득 한 얼굴이 희죽희죽 웃으며 커다랗게 다가왔다. 그는 15년 전에 자살한 내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온 몸이 떨리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갖고 있던 술병을 깨서 그 조각을 손목에 갖다 댔다. 죽고 싶었다. 손목을 긋고 그 손목을 흘러가는 강물에 담근 채 5분만 지나면 나는 조용히 이 모든 아픔과 상처와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살충동!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자살충동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손목을 그으려고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병조각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찌를 수가 없었다. 맘 속에선 찌르고 모든 것을 끝내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그렇게 혼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딸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큰 아들이 달려오며 현주가 넘어졌어요 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딸아이에게로 달려가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나서 한참 뒤 마음을 진정한 후, 강가로 다시 돌아온 나는 깨진 병조각을 주워모아 부근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그 강가를 떠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두 아들 놈이 조금만 더 놀다오겠다고 보챘다. 그러라고 하고선 딸아이를 데리고 비닐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안 돼서 갑자기 옆집 담장 쪽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듯한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난 도둑들이 들어왔나 싶어 빗장을 올려 밖을 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놀러나갔던 두 아이가 담장을 넘어온 것이었다. 호통을 치며 까닭을 묻자 아이들이 시무룩해지며 이렇게 말했다. ‘앞쪽으로 들어오기가 싫어서요.......’ 아이들은 비닐하우스로 들어오는 게 너무 창피했던 것이다. 비닐하우스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으면 담장을 타고 들락거렸을까. 두 아이는 마치 옆집 연립주택에 사는 아이들처럼 행세 하려 했던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공사장에서 돌아온 아내를 붙들고 밤새도록 울었다. 그 비닐하우스는 나의 현실적인 무능한 삶의 밑바닥이었다. 또한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부모와 친구를 비롯한 모든 지인들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오면서 지푸라기 잡듯 남몰래 지켜온 일말의 자존심마저 무참히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 밑바닥에서 현실의 참혹한 진실을 깨달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 자신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비애를 느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바닥한가운데서 나는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내는 내게 교회를 나가 하나님께 어려움을 의탁하고 도움을 청하자고 했다.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존심과 철학적 의지를 상처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인내하며 살아오다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신앙을 권해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업부터 살려야 할 것 아니냐고 버럭 화를 냈다. 교회 가는 건 막지 않을 테니 나에게도 강요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시켰다. 이후 오년간, 나의 완강한 태도로 우리 가족은 매년 연초부터 이산가족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아내는 오랜 관습대로 기도로 한해를 시작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고 나는 그런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으로 가곤 했다. 그런데 89년 연말, 나는 스키장으로 여행갈 준비로 바빴는데 세 아이가 내 방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올해는 스키장을 가지 말고 엄마와 함께 신년금식기도회를 가자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상황앞에서 나는 일단은 그러자고 대답을 해놓고는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도 아닌 기도원을, 그것도 금식기도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래 한번 굶어보자’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1월 1일 새벽 일찍 가족들과 함께 오산리 금식기도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무 기대없이 기도원에 갔던 나는, 둘째날 오후 쉬는 시간에 어느 장로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이 척박한 세상 한가운데서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지금까지 내가 찾아 헤맸던 진리의 주체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나의 영혼을 구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불교철학을 전공하면서까지 그토록 원했던 해탈의 찬란한 극점을 통과하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마치 100살의 나이에 눈이 멀고 나서야 심안이 열려 평생을 찾아오던 진리를 깨닫고 천상으로 인도되어진 파우스트처럼 “저 밑바닥에서 벽공으로”라는 외침을 토하면서 나는 거듭나는 부활의 기쁨을 깨닫게 되었고, 그 다음날 기도원을 내려올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1    [프롤로그-5]데라우치문고와 나의 아버지 댓글:  조회:2705  추천:78  2007-03-18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프롤로그-5]데라우치문고와 나의 아버지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2006년 5월 13일, 우면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예술의 전당은 마치 연두빛 치마폭을 몸에 두르고 한가롭게 가로 누워있는 듯했다. 눈부신 5월의 신록이 어느 때보다 싱그럽게 느껴졌던 그 날,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있었다. 당시 예술의 전당에선 경남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테라우치 문고> 유물들을 특별전시하면서 관련 학술세미나가 열리게 돼 있었다. 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간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김 용배 예술의 전당 사장이 개회사를 마치자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사람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었다. 유청장은 <테라우치 문고> 소장유물 환수는 그동안 성사된 해외유출유물 환수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으며 유물환수를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 순간 내 가슴 한 켠이 뭉클해져왔다. 유물 환수의 공로자 중 맨 먼저 거론되는 이름.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테라우치 문고>의 존재를 맨 먼저 확인하고 그 유물을 고국으로 되찾아오기까지 6년 여 동안이나 오직 한 마음으로 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 이 종영, 그는 바로 돌아가신 내 선친이시다.   아버지께서 처음 <테라우치 문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건 1990년경이었다. 평생 교육공무원으로 일해오신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신 뒤 문중 종친회(고성 이씨)의 일을 맡아보고 계셨다. 자연히 문중관련 기록과 문건들을 정리하시게 됐는데, 우연히  1974년 9월호 <월간서예지>속에서 고려시대 송설체의 대가인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선생의 진적 중 2점이 <테라우치 문고>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조이신 행촌 선생의 글씨는 비명 등을 통해 더러 확인된 경우는 있으나, 진적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2점의 진적이 선조의 행적을 밝히는 데 중요한 문건이 되리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이 사실을 종친회에 알린 뒤, 종친회의 관심과 지원 속에 행촌 선생의 진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직후 일본으로 건너간 <테라우치 문고>의 소장유물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어 애를 태우다가 7개월여 가 지난 뒤에야 겨우  <테라우치 문고> 유물들이 일본 야마구치 현에 있는 야마구치여자대학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는 일본 야마구치여자대학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아버지는 <데라우치 문고>와 조우하게 되었고, 그 만남은 이후 아버지의 후반 생애를 관통하는 전환점이 됐다. 원래 목적은 <테라우치 문고> 유물속에 행촌 이암선생의 진적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선조의 유품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학자와 시문(詩文)의 대가, 임진·병자 양란의 명장, 충신들의 육필시고가 수백 점이나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문화재강탈이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했다는 사실을 피상적으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드러난 실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 날 아버지가 받은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그 억울하게 포로된 우리 유물을 어두운 이국의 창고 속에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그리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인 국사편찬위원장 박 영석 위원장에게 알렸다. 깜짝 놀란 박위원장이 일본으로 달려갔다. 빛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어두운 창고 한 켠에서 백년 가까운 세월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좀이 먹어들어간 흔적이 역력한 유물을 본 박 위원장은 ‘포로로 잡혀온 것도 억울한테 암까지 걸려 죽어가고 있다‘며 통탄해마지 않았다. 이후 박 위원장과 아버지는 이 유물 환수에 뜻을 같이 하고 국회 한일친선협회와 의원연맹 등을 통해 공식적인 반환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과거에 약탈해 간 문화재를 본국에 반환한 예는 거의 없다. 때문에 반환작업은 처음부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무엇보다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야마구치대학과 기증자인 테라우치가(家)를 설득하는 게 급선무였다. 한 두점이 아니라 천 점이 넘는 막대한 수량의 역사적, 문헌적 고증가치가 뛰어난 유물을 쉽게 내어줄 리가 없었다. 그런 즈음 결정적인 협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경남대학교였다. 당시 경남대학교는 개교 50주년(1996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의 환수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박재규 총장을 비롯해 학교 관계자들이 해외로 그 대상유물을 물색하러 다니던 중, <테라우치 문고>에 대해 듣고 민간교류차원에서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마침 경남대학교는 우리나라와 최단 거리에 위치한 야마구치대학과 학술교류를 추진하고 있던 중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경남대학교가 전면에 나서서 야마구치대학 측과 반환교섭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는 조건없는 기증의사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1995년 11월 11일 기증각서 조인식을 하기로 했다. 몇 년간 노심초사하며 매진해온 환수작업이 거의 성공했다 싶었는데 급기야 염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유물환수단은 조인식을 하러 떠나면서 이 사실을 각 언론사에 알렸다. 사실 그동안 해외 유출 문화재가 공공기관끼리의 정식 기증절차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온 예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런 탓에 각 언론사에서 앞 다투어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는데 논조가 대부분 ‘총독 테라우치가 강탈한 약탈문화재 반환’이라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에서는 이 점을 가장 염려했었다. 그들이 선의로 그 유물을 내어준다 해도 그것이 한국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가를 그들은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여지없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 기사를 본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가 대경실색을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직후 양측에서는  ‘유물을 못 주겠다.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내용을 통고해왔다.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환수단은 포기하지 않고 야마구치대학과 테라우치가를 상대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행히 ‘당일 오후 5시까지 ’강탈‘이 아닌 ’수집‘으로 바꾼 정정기사를 내 주면 협상에 응할 수 있다고 양보해왔다. 이후 환수단 측에서는 전화통을 붙잡고 주요언론사와 피말리는 입씨름을 했고, 그 결과로 한 신문사가 ‘경남대학교 총장의 말에 의하면 테라우치 총독이 수집, 일부 사가지고 갔던 유물’이라는 정정 기사를 짤막하게 써주었다. 환수단은 그 지면을 크게 확대해 야마구치대학과 일본 언론사에 보내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그렇게 극적인 기부증서 조인서약을 이루어냈고 마침내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1월 24일, 기증각서에 의거한 97종 134점이 경남대학교 인수인단의 손에 의해 고국으로 되돌아왔다.   나의 선친께서는 70세 되던 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즈음에, 당신 생애가운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이냐고 여쭤 보았다. 그러자 선친은 서슴없이 <테라우치 문고> 유물반환에 기여한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선친이 <테라우치 문고> 속에서 선조 이암선생의 유품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학자와 시문(詩文)의 대가, 임진·병자 양란의 명장, 충신들의 육필시고가 잔뜩 소장되어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오셨을 때 좋아하시던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찍어온 사진들을 방바닥에 잔뜩 늘어놓고 밤새도록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껄껄 웃으시면서 기쁨에 겨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지금도 순수한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역사의 회복을 위하여 헌신했던 이름없는 한 민간인의 눈물어린 집념과 수고를 기억한다. 나는 이렇게 뜻 깊은 생애를 살다 가신 선친이 무척 자랑스럽다.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사심도 없이 당신 앞에 주어진 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마치 적진 탈환을 위해 산화한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탑처럼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 조용히 외롭게 서 계신 것이다. 그러나 자식 된 내 마음속에는, 그 분이 걸어가신 길의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어떤 위인이 걸어갔던 흔적보다도 더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그래서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내가 18년이 넘도록 아무 대가 없이 오직 민족사랑으로 연변과기대 사역을 위해 쫓아다니고, 또한 평양 과기대 건립을 위해 의로운 동역자를 찾고자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니는 동안에, 더러는 지치고 또한 남이 몰라준다 싶어 섭섭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이 외롭거나 슬프지 않은 것은, 나보다 더 외로운 길을 걸어 마침내 귀중한 내 민족의 유물을 되찾아 오신 아버지의 덕행과 겸손이 나에게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도 이제 환갑에 이르렀다. 나는 내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인가? 나는 조국과 민족의 역사앞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연변과기대를 통해서 중국 조선족사회의 고난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애환 속에 묻혀 있는 「독립의지와 개척정신의 문고」라도 찾아 나설 것인가?아니면 평양과기대를 통해서 그 땅 속 깊이 붉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피와 눈물의 「혈류대하문고」라도 찾아 나설 것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지금 떠나고 있는가? 5월의 푸른 숲으로 난 길은 정녕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가? (2008.11월 수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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