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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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래도 중국갈래》책 출판 댓글:  조회:5275  추천:113  2007-12-11
  도서명: <이래도 중국 갈래?> 지은이: 차한필 분  류: 인문>인문일반 / 사회>중국사회 판  형: 신국판(153×225㎜) 쪽  수: 236쪽 가  격: 12,000원 발행일: 2007년 12월 15일 ISBN: 978-89-5861-070-0  03300 바코드: 9788958610700   “참 알다가도 모를 나라, 중국!” 한겨레신문 차한필 기자가 직접 경험한 중국 사회의 적나라한 실상! 이 책은 숨기거나 과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중국 곳곳에서 직접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하지만 잘 모르고 있는 중국에 대해 사실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래도 중국 갈래?” 하면서. 그렇다고 중국이나 중국인을 비난하는 책은 아니다. 다만, 모르고 갔다가 비싼 수업료 내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웃사촌’인 중국에서 당황스러운 일을 겪거나 손해 보지 않도록 미리 알고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펴낸 중국 안내서다. ■ 출판사 서평 중국, 중국인 하면 가장 떠오르는 이미지는? 넓은 땅, 셀 수 없이 많은 사람, 만리장성, 한자, 유교문화, 2008베이징올림픽, 2010상하이엑스, 여기에 만만디(천천히), 관시(관계), 짝퉁 천국, 지저분한 화장실…. 과연 이게 다일까? 이것만으로 중국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가까운 나라 중국의 진짜 모습이다. 편견 없이 화장 지운 맨얼굴의 중국 이야기다. 동포 사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부딪쳤던 많은 한국 동포(한국인)와 중국 동포(조선족), 열차나 버스, 택시에서 만난 중국인,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경험한 황당한 사건들, 이 속에서 저자는 감춰진 진짜 중국의 모습을 보았다. 경제대국 중국을 새로운 삶의 터전, 기회의 땅이라 여기며 지금도 수많은 한국인 사업가와 유학생들이 중국 땅을 밟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공장을 옮긴 한국 기업들, 중국 대학 졸업장만 따면 ‘만사 OK’라고 생각하는 유학생들, 과연 그들은 중국을 제대로 알고나 간 걸까?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라고 만만하게 보고 무작정 중국행 비행기나 배에 몸을 실은 건 아니었을까? 지금쯤 그들은 비싼 수업료 내고 중국을 알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상대 못할 나라라고 욕하면서 돌아왔을 테고.   지금 이 순간도 중국은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판치는 세상에서 ‘차이나 프리(China Free)’를 외친들,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보다는 중국, 중국인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길을 택하는 게 오히려 현명하다. 중국, 중국인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그들의 참모습 정도는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 적어도 손해 보지 않고 중국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무작정 가고 보는 중국, 이것만은 알고 가자! ■ 예의 없는 중국인들 중국인에게 양보란 없다. 양보는 고사하고 배려도 없다. 아니 배려를 떠나 예의가 없다. 사실은 예의가 없다기보다 수치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 더 맞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대하면 항상 당황스런 상황을 맞게 된다. 손해 보기 십상이다. 그러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중국을 욕한다. 하지만 미리 알면 당하지 않고, 욕하지 않을 수 있다. ■ 비명횡사 한국 동포 중국인들은 대체로 남의 사정을 봐주는 일 때문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수고하거나 손해 보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모른 체한다. 신고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곤란한 처지를 이용해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최대한 활용한다. 그래서 중국은 아직 외국인이 자유스럽게 활보하기엔 위험한 곳이다. ■ 진퇴양난 한국 기업 올라가는 임금 부담과 노동력 확보라는 이중고를 안고 있는 중국 진출 한국 기업들. 싹 바뀐 노동법과 복잡한 세무 제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결국 손해 보고 철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한-중 수교가 15년을 지난 만큼 이제 중국에 진출하려는 기업은 이전의 무작정 진출에서 벗어나, 중국의 법과 제도, 관습 모두를 제대로 알고 가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야만 실패를 줄일 수 있다. ■ 믿지 못할 동포 사회 중국 각 지역에서 만난 한국 동포들은 한국인회 등 동포단체들과 한국대사관, 총영사관 같은 정부기관에 대한 불평불만을 거침없이 마구 쏟아내고 있다. 이런 불신 속에 살아가는 한국 동포로서는 사실 믿고 기댈 곳이 자기 자신밖에 없다. 게다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도와야 할 한국 동포와 중국 동포 사이도 좋지 않다.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만큼 서로를 욕할 일도 많다. 그래서 바람 잘 날 없다. ■ 빈털터리 자영업자 철저한 준비 없이 몇몇 성공한 한국 동포 이야기만을 듣고 중국에 건너갔다가 채 1,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거나 남에게 넘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게다가 갈수록 강화되는 중국 정부의 불법영업 단속은 가뜩이나 힘든 한국 자영업자들의 목을 옥죄고 있다. 단속에 걸리면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빈털터리로 쫓겨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전 재산을 잃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일도 흔하다.    ■ 후회막심 중국 유학 최근 중국 유학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지만, 사실 자세히 알아보고 면밀히 따져보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더 크다. 힘들게 딴 중국 대학이나 중의대 졸업장이 한국에서 써먹을 수 없는, 무용지물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뿐인가? 술과 담배, 심지어는 유흥업소 출입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중국 학교는 ‘나 홀로’ 조기유학 온 어린 학생들을 단속하고 보호하지 않는다. 부모가 보살펴 주지 않아도, 선생이 제대로 안 챙겨 줘도 스스로 알아서 올바로 생활하고 공부할 수 있는 아이면 괜찮다. 그게 아니라면 무작정 가는 조기유학은 안 가느니만 못하다. 섣불리 갔다가 쓴맛 본 한국 기업인&유학생 한국에서 네트워크 시스템 구축 및 보안통제 관련 장비를 생산해 온 한아무개 사장은 중국에서 정보기술(IT) 산업이 태동할 무렵인 2000년, 중국 투자를 감행했다. 당시 국내 인건비 등이 올라 고비용 저효율인 데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에 중국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는 미래의 중국 시장을 내다보고 직접 투자에 나섰다. 해당 분야에 관한 원천 기술을 가지고 있던 그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각종 공장이나 빌딩건물 등에 필요한 네트워크 시스템 구축 및 보안통제를 위한 각종 장비를 생산해 판매하는 이 기업은 잇따라 들어오는 한국 기업과 외국 기업들이 공장을 짓고 사무실 빌딩을 건설하면서 곧바로 호황을 맞았다. 자체 기술력을 갖춘 데다 경쟁이 없는, 그야말로 ‘블루오션’ 시장에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이런 호황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이 기업의 제품과 똑같은 짝퉁이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짝퉁 제품을 본 한 사장은 깜짝 놀랐다. 제품의 로고에서부터 외관 성능까지 정품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았다. 그 뒤 주문은 뚝 끊겼다. 이렇게 빨리 그리고 똑같은 짝퉁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제때 상표 등록 등을 하지 못한 그의 불찰도 컸다. 결국 짝퉁의 저가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3년 만에 손을 들고 말았다. 현재 그는 자신을 망하게 한 바로 그 짝퉁 기업의 물건을 받아 시공해 주는 전문업체로 명맥을 이어가며,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 짝퉁 제품에 고배를 맛본 중국 진출 한국 기업 2001년 칭다오시 청양(성양)구의 한 촌에 공장을 세운 한국 기업은 당시 촌민위원회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05년 칭다오 시정부로부터 공장을 외곽으로 이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도시계획에 따라 이곳이 아파트 및 상가로 개발될 것이라고 했다. 공장터 소유가 가능한 한국 같았으면 ‘대박’을 맞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 반대였다. 이 기업은 규모가 작아서 공장 이전 비용을 감당하기 벅찼을 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이전을 거부해 파산 위기에 몰렸다. 시정부 쪽에서 철거 보상비를 지급한다고는 하지만 적정한 보상은커녕 공장 이전 비용에도 턱 없이 모자라는 금액을 제시했고, 그나마 지급 절차가 복잡해 언제 나올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촌민위원회에 임대료 등 각종 비용을 꼬박꼬박 납부했지만 영수증 처리를 한 게 아니어서 세무와 공상 당국으로부터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결국 공장은 옮기지도 못하고, 조사는 조사대로 다 받아 각종 명목으로 추징을 당하는 곤욕을 치른 끝에 더는 버틸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회사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 칭다오시의 정책 변화로 큰 피해를 본 노동집약형 한국 기업 최근 황정일 주중 한국대사관 정무공사가 음식을 먹다 복통을 일으켜 찾아간 병원에서 정맥주사를 잘못 놓는 바람에 숨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황 공사의 신분과 관련해 단순한 사고가 아닐 가능성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사고 처리와 장례 과정에서 보여 준 중국 정부와 사고 병원의 비정하고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중국에서 자란 그의 아들은 장례를 마친 뒤 서운한 마음을 담아 항의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2006년 4월 남편과 함께 중국 후난성(湖南省)의 한 관광지로 단체관광을 떠났던 한 50대 부인이 식당 화장실에서 실종되어, 다음 날 살해된 주검으로 저수지에서 발견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국내 뉴스로도 나왔고, 사건이 미궁에 빠지자 나중엔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되었다. 화장실에서 납치되어 여권과 현금 모두 강탈당한 뒤 살해되었고, 더욱이 주검의 일부가 훼손되어 장기밀매와 관련된 것으로도 의심되고 있다. 중국 남방을 관광하던 한 부부에게 일어난 황당한 사건도 있다. 운전기사가 남편에게 차가 고장 났으니 잠시 내려서 밀어 달라고 했다. 남편이 차에서 내리자 운전기사는 부인만 싣고 그대로 달아났다. 나중에 주검으로 발견된 그 부인한테서도 장기적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광저우, 선전, 칭다오, 톈진 등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한 곳에서는 사업이나 영업이권 다툼 등으로 중국인이나 중국 동포와 마찰을 빚어 살해되는 한국 동포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중국에서 비명횡사하는 한국 동포들 중국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있다. 중국에서 명문대라는 곳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질 않나 하는 생각에 정말 헛웃음만 나온다. 여러 기업을 알아봤는데 하나같이 허탕이다. 대만 기업에 지원했더니 직원이 이력서를 보고 하는 말이 “공고문 보셨나요? 여기는 대졸 이상만 뽑는다”고 한다. 황당해서 대졸이라고 하니 대만에서는 중국 졸업장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대만에서 인정받지 못할 줄이야. 홍콩 쪽 화교 기업에 지원했더니 같이 지원한 홍콩대 출신 친구는 서류전형에 붙었으나, 중국 대학 졸업장인 나는 떨어졌다. 한국 기업에 지원했다. 면접을 보는데 월급이 50만 원이라고 한다. 이제 뭘 해야 할지 고민이다. 왜 선배들이 국내 대학에 편입하는지 알 것 같고, 심적으로 매우 괴롭다. 중국에 왜 왔나 하는 후회뿐이고,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배운 건 한어능력검정시험(HSK) 10급의 실력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중국 졸업장뿐이다. -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잇장이 돼버린 중국 대학 졸업장(상하이 푸단대 유학생) 1999년 중국에서 5년간 중의대 유학을 마친 조아무개 씨도 국내 한의사 못지않은 실력을 갖췄다고 자부하며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중의대 졸업증으로는 한의원 개원은 고사하고, 한의사 시험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1994년 유학 갈 시점만 해도 2000년쯤에는 국내 한의사시험이 개방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국내 한의사들의 반발이 워낙 심해 한의사 시험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다. 아예 한의사 되기를 포기한 그는 지금 서울의 한 한의원에서 원무 일을 보고 있다. - 한의사 꿈 접은 중의대 졸업생 ■ 지은이_글 ․ 사진 차한필 《한겨레신문》 기자.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문리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1979년 전투경찰로 입대해 전남 영광, 고흥, 여수에서 지내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봤다. 경북대 도서관학과를 졸업한 뒤 연세대 대학원에 들어가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1990년). 노동부 산하 직업훈련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때 동참했다. 1994년부터 인천대학 강사, 숭의여대 강사 및 겸임교수를 지냈다. 2004년 한국기자협회 추천으로 중국 길림성(지린성) 연길에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중국어 연수와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친 뒤, 2005년 흑룡강성(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있는 동포 신문인 《흑룡강신문》에 초빙돼 논설위원 및 고문을 맡아 신문 편집과 제작을 도왔다. 중국 전역에 진출한 동포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중국 최남단(하이난성 싼야)에서 최북단(흑룡강성 막하)까지, 동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찾아 기획취재에 나섰다. 중국 전역에서 살아가는 한국 동포와 중국 동포들을 만나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삶과 애환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묶어 2006년엔 《중국 속에 일떠서는 한민족》이란 책을 펴냈다. 아울러 중국의 유명 관광지와 중국 최동단(연변자치주 훈춘 방천)에서 최서단(신장웨이우얼자치구 카스)까지 여행하고, 고구려․발해 등 민족의 역사 현장과 두만강변 북한지역을 탐방하였다. 그동안 20여 차례 중국을 오가며 조금씩 알게 된 중국의 모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가까이서 부딪히며 들여다본 중국은 놀라운 일, 믿기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이웃 나라 중국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게 많았다. 그래서 중국에 가더라도 알고나 가자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이래도 중국 갈래?” 하면서. 이 책은 중국에서 갑작스럽게 당황하거나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당신을 도와주는 안내서 구실을 톡톡히 할 것이다. hanphill@hanmail.net ■ 차례 1장 _ 예의 없는 공자의 나라 웃기지도 않은 ‘엉덩이 싸움’ 한판 절도범으로 변한 무서운 ‘이웃’ 정나미 떨어지는 ‘거드름’과 ‘표리부동’ 무책임한 중국 관료의 ‘큰소리’ 외국인은 일단 ‘불법체류자’ ‘고무줄’ 장사꾼에 놀아난 한국 관광객 ‘쓴 커피’ 한 잔과 떼인 거스름 도무지 적응 안 되는 ‘화장실 문화’ 2장 _ 목숨 걸고 사는 무법천지 죽어서도 보호받지 못한 신변 생명의 위협이 상존하는 치안 사각지대 ‘비명횡사’ 하는 한국 동포들 공룡박사의 ‘잃어버린 꿈’ 3장 _ 서비스 제로, 막가는 교통수단 이 ‘죽일 놈’의 택시기사(1) - 관광객 울리는 택시기사의 횡포 이 ‘죽일 놈’의 택시기사(2) - 정말 피해야 할 총알택시 불법투성이 제멋대로 시외버스 수치심도 없는 열차 안 사람들 4장 _ 대박 쫓다 쪽박 찬 한국 기업 중국 진출 기업의 고민(1) - 철수해야 하나, 커져 가는 고민 중국 진출 기업의 고민(2) - 싹 바뀐 노동법과 세금 폭탄 중국 진출 기업의 고민(3) - 진짜 같은 가짜가 판치는 짝퉁 천국 중국 진출 기업의 고민(4) - 욕하면서도 서로 찾는 묘한 동포 관계 바람 잘 날 없는 ‘재중 한국인회’ 오도 가도 못하는 한국 자영업자들 백두산에서 쫓겨나는 한국 호텔 5장 _ 독 품은 달콤한 유혹, 중국 유학 위험천만! 중국 유학(1) - 실패율 높은 ‘나 홀로’ 조기유학 후회막심! 중국 유학(2) - 써먹을 데 없는 중국 대학 졸업장 진퇴양난! 중국 유학(3) - 한의사 꿈 접은 중의대 졸업생 도피수단! 중국 유학(4) - 공부는 뒷전, 무늬만 유학생
58    17. 투자 유의사항, 중국동포 변호사에게 듣는다 댓글:  조회:5018  추천:130  2007-10-21
산둥지역 중국동포 변호사에게 듣는다   ▲ 김옥 변호사(왼쪽 첫번째)가 한국 투자 회사 관계자와 공장 설립과 관련해 자문을 하고 있다.   현지 투자 무엇을 주의해야 하나? 산동지역은 한국 최대 투자 지역인데다 진출 기업 수도 가장 많다. 현재 산둥지역에 등록된 한국기업은 12000여개, 이 가운데 실제 운영되고 있는 곳은 8000여개로 조사됐다. 지금도 이곳에 진출하는 투자기업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투자 진출 기업들 가운데 많은 기업이 사전 실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잘못 판단해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결국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철수하고 있다. 이 지역 중국동포 변호사인 산동흥전변호사사무소의 김옥 변호사와 산동영양태업변호사사무소 이영태 변호사를 만나 중국 진출 한국 기업들이 가장 많이 부닥치는 문제와 그 해결책을 들어본다. 김옥 변호사-'시장조사 철저히하고 정부 관리 말 쉽게 믿어서는 안돼' 중국 정법대 출신인 김옥 변호사는 흑룡강성경제변호사사무소에 있다가 1997년 청도흥전변호사사무소로 옮겨 현재 칭다오한국총영사관, 칭다오한국인(상)회,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 등 수십개 협회, 단체의 법률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기업의 투자자문, 계약작성, 인수합병, 주식양도 등 제반 투자업무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는 김 변호사는 한국 투자기업의 실패는 대부분 정부 관리의 말을 너무 쉽게 믿다가 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바람에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 사례로 옌타이에 2000만달러를 투자해 강철회사를 설립한 한 한국 기업은 투자 당시 시정부 쪽에서 향후 10년간 고정가격으로 전력을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 에너지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중국발전과 개혁위원회에서 전기값을 상향 조정하는 바람에 원가부담이 크게 높아져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정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국가의 행정명령을 어길 수 없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계약서에 그 내용을 철저히 작성하지 못한 탓에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다. 이미 거액을 투자해 공장을 세웠기 때문에 철수는 불가능한 상태여서 뾰족한 대책 없이 공장을 돌리고 있다. 또 최근 칭다오시가 투자유치 방향을 첨단 하이테크 산업으로 유도하는 바람에 노동밀집형 기업을 외곽으로 밀어내는 도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찍 이곳에 진출한 노동밀집형 기업들이 반발하는 등 상당한 분쟁이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칭다오 주변 향진, 촌을 대상으로 계약을 맺은 한국업체들이 불가피하게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에 처해 있다. 앞으로 기업들이 정부와의 거래에서 특히 촌민위원회, 향진 관련 기관과 계약 체결 때 사전에 충분한 조사를 진행할 것을 권장했다.    2002년 한국의 한 중소기업이 청양구 한 촌에 입주 할 당시 촌민위원회와 계약을 맺고 공장건물을 세워 잘 운영해왔다. 2005년 들어 청도 시정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공장을 이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중국은 땅이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언제든 시정부나 국가가 도시계획에 따라 수용이 가능하다. 이 기업은 소규모 기업이어서 공장 이전 비용을 감당하기 벅찰 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도심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기를 거부해 파산 위기에 몰렸다. 정부 쪽에서 철거 보상비를 지급한다고 약속했지만 그 보상비 또한 얼마 되지 않는데다 지급되기까지 절차가 복잡해 언제 나올지도 모를 형편이다. 게다가 그동안 촌민위원회에 각종 비용을 납부했지만 영수증 처리를 한 게 아니어서 세무와 공상 부문으로부터 조사까지 받게 되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공장은 아직 옮기지도 못하고, 조사는 조사대로 받아 곤욕을 치르며 큰 손해를 보게 됐다. 김 변호사는 중국 법제가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투자는 특히 신중해야 한다며 우선 시장조사에 돈을 아끼지 말고 철저한 조사를 한 뒤에 투자를 결정하고, 그 다음 계약 작성 때 관계자들의 말을 경솔히 믿지 말고, 조급한 마음으로 대충 넘어가지 말고, 되도록 법률 전문가에게 맡겨 회사법, 경영법 및 계약법에 따라 꼼꼼하게 따져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을 권했다. 이영태 변호사-'중국에 오면 중국 법을 따라야' 요녕성 본계 출신인 이영태 변호사는 요녕대 법률학부를 졸업하고 1994년 위해에 진출해 1997년 4명의 변호사가 합작해 위해 최대 산동영량태업변호사사무소를 설립하고 현재 위해변호사협회 섭외사무위원회 변호사와 위해시 중재위원회 중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회사법과 형사건을 담당하는 이 변호사는 중국에 투자하면 중국 법을 지키고 그 법을 효과적인 무기로 활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원칙에 따라 돈을 벌 것을 강조한다. 특히 편법을 쓰는 것은 잠시 편한 것 같아도 큰 후환을 가져오기 때문에 정도를 걷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직물회사인 ‘갑’이라는 회사는 수출 오다가 많은 ‘을’이라는 회사의 제안으로 설비를 갖고 들어와 중국에 투자했다. 설비통관도 을을 통해 처리하고 중국에 온 다음 을과 함께 협력업체를 구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을이 부도를 내면서 채권자들이 연대책임을 갑에 묻고 갑의 설비를 압수하려고 했다. 이에 갑은 설비는 자기 회사 소유이지 을의 것이 아니라고 반발해 결국 법원에 기소됐다. 그러면서 세관까지 나서 조사 결과 갑의 설비가 통관 때 자동기계를 반자동기계로 등록해 세관법을 어긴 밀수 혐의까지 받았다. 결국 갑은 파산됐고 책임자 형사처벌까지 받게 됐다. 이 변호사는 갑이 회사를 독자 등록하고 설비 통관도 별도로 했으면 을과는 단순한 거래의 협력업체로 관계가 설정돼 을의 부도 여파가 갑에까지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진출 때 특히 회사가 회사를 유치하는 형태를 취할 때 불명확한 관계를 갖고 사업하면 큰 코 다치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위해대화목업실업유한회사는 1992년 10여만위안을 투자한 소규모 회사로 1996년 다른 회사에 200만위안 은행 담보를 섰다. 그뒤 이자가 늘어 400여만위안까지 되었지만 담보받은 업체가 빚을 갚지 못해 법정에 서게 됐다. 하지만 이 회사는 담보를 설 때 계약서류에 담보 범위와 내용을 한정해 작성해 결국 손해를 보지 않고 승소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결국 중국 법을 철저히 지키고 모든 계약이나 서류에 회사법과 경영법을 잘 따져 활용한 결과 현재 2억여위안의 자산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기업에서 회계사가 재정고문을 맡고, 변호사가 법률고문을 맡아 관련 서류를 면밀히 체크하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최근 중국의 노동법이 정비되고 농민공 보호조처가 강화됨에 따라 한국기업들이 지금부터라도 노동자와 계약체결, 노동보험가입 등 법을 철저히 지켜야 불필요한 노동분규나 나중에 임금 소송 등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주변 사람이나 회사를 믿기보다는 먼저 법을 존중하며 이를 철저히 지키는 준법경영을 하는 것이 성공의 첩경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57    16. 신형근 칭다오총영사관 총영사 인터뷰 댓글:  조회:3515  추천:140  2007-10-20
  칭다오는 한-중 교류의 상징적 도시   ▲ 신형근 주칭다오한국총영사관 총영사 “새로운 협력의 각오 필요한 시점” “칭다오는 한-중 교류의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경제 협력의 성공을 넘어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 본격적인 문화 교류를 해나가야 합니다.” 제2회 칭다오한국주간(2005년 9월)  행사 등으로 일정이 바쁜 신형근 칭다오총영사관 총영사는 차분한 태도로 칭다오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와 함께 앞으로의 협력 방향에 대해 설명해나갔다. 그는 “한국과 칭다오는 상호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에 좀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선양(심양)총영사관 총영사를 역임한 뒤 다시 이곳에 와 중국통으로 알려진 그는  현지 정부 관리나 언론인을 만날 때마다 유창한 중국어로  칭다오의 각종 정책이 지닌 문제점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칭다오시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대기업 편중 유치 정책이나 초기 투자자에 대한 봉사보다 관리 중심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외자우대 관련 상부 정책과 하부 정책의 괴리와 주강 및 장강삼각주에 비해 보수적인 정책 등 한-중 경제교류의 지속적인 발전에 지장을 주는 문제들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다. 칭다오 시정부 정책의 문제점 지적과 대안 제시도 그는 문제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도 제시한다. 대기업 편중 유치 정책에 대해서는 대기업들도 이미 들어온 중소기업들의 투자환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투자지를 선택하므로 칭다오 시정부는 현지 기업에 대한 배려로 이들이 대기업 유치의 안내자가 되도록 하는 ‘기업으로 기업을 유치하는 방안’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 가공무역 기업들이 갈수록 인력난과 지가상승 등으로 경영이 어려워지고 있어 이들 기업을 조건이 좋은 내륙지역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아직 경쟁력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업종별 도매상가를 육성해 제조와 유통이 결합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그는 한-중 카페리를 이용한 한국동포의 자가용 관광을 가능하게 하고, 한국 문화, 교육, 관광기구 현지사무소 개설을 허용하며, 칭다오항과 한국 항만도시의 자유무역지대 추진 등 구체적 조처와 제도적 장치 마련을 제안했다. 그는 “한국기업 진출 15년째인 현재 칭다오 진출 실제 운영 기업은 8000여개이며, 한국동포수는 8만명에 이르고, 대중국 투자의 1/4을 이곳에 하고 있다”며 “칭다오한국주간의 주제가 ‘한국인의 투자와 거주에 가장 적합한 칭다오’일 정도로 한국과 칭다오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협력 성과로 총영사관 단독건물을 완공, 한국 방문 산둥성 공무원들에 대한 복수비자 발급 시행, 선박을 이용한 한국 방문 산둥인들의 무사증입국 추진, 중소기업지원센터와 한-중 생산기술협력센터 그리고 코트라 투자기업지원센터 개설, 한-중 합자 칭다오국제은행과 한국중소기업은행 등 한국 금융기관들의 영업확장, 양국간 교통편의 지속적인 증편 등을 꼽은 그는 칭다오는 중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해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있으며 한-중 경제교류의 상징적인 도시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동포  역량 모아 교육 문화 수준 높여 문화 예술 학술 진흥시켜야 그는 중국동포와 한국동포의 상호협력 관계도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판단하면서도 아직 상호 불미스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과거 역사적인 이유로 한동안 단절기를 겪었고 현재도 국적과 제도가  다른 상황에서 만나 마찰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가운데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중국동포 가운데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중국 전체의 발전상황과 비교할 때 중국동포 사회의 활약은 미미하기 그지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동포사회의 역량을 결집해 민족 교육을 강화하고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교육 문화시설을 갖춰 문화와 예술과 학술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56    15.산둥 한겨레 '산둥남도 칭다오광역시' 댓글:  조회:5975  추천:121  2007-10-20
  ▲ 2005년 9월 칭다오한국인(상)회 주최로 열린 '제2회 청도한국주간 친선의 밤' 행사 장면   한국특구-‘산둥남도 칭다오광역시’ 한국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산둥(산동)반도에 북한과 맞닿은 연변에 버금가는 새로운 한겨레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대중국 투자의 전초기지로 벌떼처럼 달려든 한국기업과 봇물 터진 개혁 개방 정책에 따라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중국동포들이 날아온 산둥반도는 우리 민족 전통적 주거지인 동북 3성 다음으로 많은 동포들이 거주하는 중국 제2의 한겨레 사회로 급성장하고 있다. 칭다오를 중심으로 웨이하이(위해), 옌타이(연태), 르주(일조), 지난(제남), 요팡(유방) 등 산동반도 전역에 동포들이 진출해 코리아타운을 만들어가고 있다. 연변과 마찬가지로 이곳은 한국동포에게 그리 낯설지가 않다. 곳곳에 우리 글 간판이 걸려 있고 중국인조차 한국어 배우기에 적극적이어서 중국어를 몰라도 큰 지장이 없을 정도다. 15만7천제곱킬로미터의 면적, 인구 9200만명, 성도가 제남(지난)인 산둥성은 지리적, 역사적, 정서적으로 우리 민족과 가까워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이전부터 교류의 물꼬를 터기 위한 노력을 해왔고 홍콩 등을 통한 실질적인 무역이 이뤄져왔다. 산둥성 정부와 칭다오시 정부는 한-중 수교 전부터 일본을 통해 한국에 민간사절단을 파견하여 무역과 함께 투자유치를 추진했다. 개혁 개방 정책으로 무섭게 발전하는 광둥성이나 상하이시 등을 보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을 산둥성의 발전 파트너로 벌써 점찍어둔 탓이다. 오늘 산둥지역이 이렇게 ‘산둥남도 칭다오광역시’로 불릴 정도로 ‘한국 특구’로 자리잡게 된 것은 산둥성과 칭다오시 지방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한 투자유치우대 정책, 서비스정부 건설, 투자환경 개선 등의 결실이다. 지금도 미담으로 전해지는 사례로 칭다오시는 아이엠에프(IMF) 때 교하플라스틱유한회사의 한국 모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려 운영자금이 부족하자 당시 시정부에서 과감하게 지원에 나서 이 회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기업까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이후 경영이 호전된 이 기업은 칭다오 한국투자 대표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런 투자 여건 때문에 수많은 한국기업이 칭다오 외에도 옌타이(연대), 웨이하이(위해), 지나(제남) 등 산둥지역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또 성정부는 산둥 출신 재한국 화교 4만명을 자원으로 활용해 재한국 화상협회 등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수출입 규모를 늘렸다. 이들 화교가 한국으로 수입되는 농산물의 80%, 의류의 70%를 이 지역에서 가져감으로써 산둥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지 거주 한국동포들이 중국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칭다오, 웨이하이, 잉싱(영성)시에서는 한국어 텔레비전 방송을 개통하고, 웨이하이일보, 재경일보, 옌타이일보는 이미 한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인재를 구하기 위해 칭다오의 경우 부시장이 직접 인사 담당자와 함께 연변 쪽으로 가 100여명의 중국동포 공무원을 유치했다. 이런 정책에 따라 현재 윤명금 칭다오 라오산취(노산구) 부구장, 김광융 칭다오카이바취(청도개발구) 투자유치국 국장, 박철용 칭다오보세구 투자합작위원회 부주임 등 중국동포 간부들이 대거 등용되고 있다. 현지인들의 한국어 열풍도 크게 일고 있다. 산둥대학, 중궈하이양(중국해양)대학, 칭다오대학, 옌타이대학 등 주요 대학교에 모두 한국어과가 설치되어 있으며 일반 전문학교나 고등학교에서도 한국어과를 설치하는 곳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웨이하이만 해도 한국어 학원이 6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웨이하이정보공정학교에는 300여명 학생이 재학 중이며, 옌타이감사한국어학교에는 재학생이 8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한국어학과 졸업생의 취직률도 100%에 이른다. 이 결과 한국과 산둥은 1일 경제권, 나아가 1시간 경제권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인적 물적 교류도 급증하고 있다. 인천과 칭다오를 잇는 항공편이 매일 왕복 5편 이상이고, 부산~칭다오도 주 왕복 5편 등이며, 인천~옌타이 항공편도 매주 왕복 18편, 대구~옌타이도 매주 왕복 4편이 운항되고 있다. 인천~웨이하이의 위동페리 등 인천~칭다오, 인천~옌타이 배편도 주 왕복 3편씩 운항되고 있다. 한겨레 사회 형성과정-중국동포 15만여명, 한국동포 11만여명 산둥반도 전역에 생활하는 동포는 약 26만명을 넘어 2006년 3월께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칭다오한국총영사관, 코트라칭다오무역관, 칭다오한국인(상)회, 옌타이한국인(상)회, 웨이하이한국인(상)회, 칭다오시 민족종교국,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 조선족노년협회 등을 통해 조사한 결과 중국동포는 약 15만여명, 한국동포가 약 11만여명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칭다오에 중국동포 10만여명, 한국동포 약 8만명, 웨이하이에 중국동포 2만여명, 한국동포 1만5천여명, 옌타이에 중국동포 1만5천여명, 한국동포  1만여명, 기타 지역에 중국동포 한국동포 각각 1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총영사관은 한국동포들이 아이엠에프(IMF)를 계기로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산둥지역에 가장 먼저 진출한 동포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학 졸업 뒤 배치받은 사람들이었다. 1961년 따롄(대련)수산학원을 졸업하고 옌타이에 배치를 받아 외사판공실 섭외과장까지 지낸 손익규(71) 옌타이조선족노년협회 회장(71세)이 1세대로 꼽히며, 이후 칭다오나 웨이하이 등지에서 해군으로 근무하다 퇴역한 군인 출신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에는 중국동포가 10여가구에 그쳐 고향이나 성씨를 불문하고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동북 3성에 있던 중국동포들이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중 후반부터였다. 1989년에 웨이하이로 온 권주일 웨이하이범진실업유한회사 총경리 등이 이 시기 진출자들이고, 이어 1990년 인천~웨이하이 위동페리 항로가 열리면서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오가던 중국동포들이 새로운 살길을 찾아 이곳에 눌러앉으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훈 산둥서울기계설비유한회사 총경리 등이 이 부류의 사람이다. 한국 투자기업인 토프톤전기회사가 1989년 칭다오 칭양취(청양구) 선가채촌에 자리잡으면서 한국 기업의 산둥 진출에 물꼬를 텄다. 1990년 인천~웨이하이 위동페리 항로가 개통되고, 1992년 한-중 수교, 1994년 칭다오한국총영사관 개관 등이 이어지면서 한국의 제화, 방직, 복장, 포장, 완구 등 노동집약형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현지 정부나 국영회사들도 한국기업 유치를 목적으로 중국동포 공무원이나 사원을 모집하기 시작하고, 한국기업 취업이나 관련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중국동포들이 운집하면서 산동 한겨레 사회는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한겨레 사회 경제 실태-대중국 투자 1위, 노동집약형에서 기술집약형으로 코트라칭다오무역관의 자료를 보면 2004년 말 현재 한국의 산둥지역 투자 누계는 7108건, 투자액은 79.88억달러에 이르러 한국의 대중국 투자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과 산둥의 교역액은 한-중 교역액의 14%를 차지하며, 한국은 산동의 최대 수입대상국이며 수출대상국으로는 일본, 미국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가공무역 중심의 한국 투자기업이 들여오는 기계설비, 원부자재 수입액이 전체 대한국 수입액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전기기기류, 플라스틱 제품, 철강, 연료유, 편직물, 유기화학제품, 가죽, 광학, 계측기기류, 자동차 등을 수입하고 있다. 수출품은 전기기기류, 철강, 편물 제의류, 보일러, 기계류, 철도차량, 어패류, 가죽제품, 알루미늄 등이다. 투자액 1000달러 미만의 중소제조 투자업체가 90% 이상을 차지하며 섬유, 의복, 전자, 기계, 신발, 완구 등 노동집약형 산업에 편중하고 있다. 정기 해운 및 항로가 개설된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 지역에 투자의 9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칭다오지역 투자는 2004년 말 누계로 6831개 항목, 계약액 125.12억달러, 실 투자액 67.57억달러로 외국인 직접투자의 38.3%, 32%, 34.2%를 차지하고 있으며, 방직, 기계제조, 식품가공, 피혁제품, 완구, 플라스틱, 전자통신, 가구 등 40여 항목에 달한다. 한국기업 고용직원수는 30.2만명으로 외자기업 종사인원의 59.5%나 되고, 한국기업의 수출실적은 210억원으로서 외자기업 수출의 46.35%를 차지했다. 옌타이의 경우 외자기업 8653개 가운데 한국기업은 2286개이며, 실 투자액은 누계로 30억달러에 이르러 홍콩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복장, 가죽제품, 전자, 기계, 가구, 중장비 등 20여개 항목에 투자했다. 주요 진출 한국기업은 두산중공업, 현대중공업, 청호그룹, 대한시멘트, 엘지, 에스케이, 텔슨전자 등이며 최근 대우해양조선의 조선업 투자도 확정됐다.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던 웨이하이는 한국이 세운 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2005년 7월 말 누계 3151개 항목, 계약액 73.3억달러, 실 투자액은 33억달러로 외자기업 총투자액의 65.3%를 차지한다. 2005년 상반기에 유치한 항목만도 337개, 계약액 13.89억달러, 실 투자액 4.97억달러에 이른다. 한국과의 수출입총액은 26억달러로 위해 전체의 47%를 차지한다. 주요 진출 한국기업은 대우자동차부품유한공사, 삼성, 위동항운, 금융수산유한회사 등이 있다. 곽복선 코트라칭다오무역관장은 현지 정부의 투자유치전략 수정과 진출기업들의 인력난, 고임금난, 전력난 등의 요인으로 한국투자의 주종을 이룬 제화, 방직, 복장, 포장, 완구 등 노동집약형 산업은 점차 설자리를 잃고 있는 반면, 전자, 화학섬유, 자동차부품 등 기술집약형 투자가 늘고 있으며 최근 투자액 1억달러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들이 성사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동포 기업체도 칭다오에 약 1000곳, 웨이하이에 500곳, 옌타이에 200곳 등이 있으며 1천만위안 이상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도 50여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커지는 한겨레 사회-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에 코리아타운 형성 청도의 12개 행정구역 가운데 코리아타운이 제대로 형성된 곳은 청양구와 이창구 이촌을 들 수 있다. 류팅(유청)국제공항을 끼고 칭다오의 북쪽 관문에 위치한 청양구는 한국기업이 가장 일찍 진출한 지역인 동시에 현재 동포가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의 톨게이트 양쪽으로 평양 만수관, 흥이원 백화점, 세진자동차, 메산전기온돌, 현대지게차 등 150여개 업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외에도 중성로 북쪽 1킬로미터 거리에 80여개 상가가 들어섰으며, 남탄촌 부근과 청양세기공원 주변에도 60여개 상가가 입주해 있다. 청양구 입체교차로 동서쪽에 위치한 와리촌도 한국기업 진출과 함께 50여개 상가가 들어서 한국마을로 변했다. 칭다오 최대 청양구도매시장에도 20여개의 중국동포 매장이 설치됐다. 청양구 안에 개업한 동포 상가는 800여개로 그 가운데 90% 이상이 음식점, 노래방, 식품가게 등 서비스업이다. 청양구에만 3만명의 중국동포와 1만여명의 한국동포가 모여 이들이 주거하는 아파트 단지도 늘어나고 있다. 청양세기공원 앞 남탄촌 안에 위치한 열해원 아파트단지에는 한국동포 30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고, 영부상소구, 신청화원에도 중국동포 200여가구가 살고 있다. 발해만화원의 경우 900여가구 가운데 동포들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칭다오 중국동포 최대 밀집지역으로 불리는 이창구에는 중국동포 2만5천여명, 한국동포 2000여명이 살고 있다. 빈허루 양쪽에는 금성광고, 청원식품, 서란무역, 한국성 등 90여개의 상가가 빼곡히 들어서 '한국거리'로 불리고 있으며 빈허루시장에도 40여개의 중국동포 매장이 설치됐다. 칭다오지역은 비교적 물가가 싸고 아파트값도 낮아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요즘은 아파트값이 2~3년 전에 비해 두배 이상 올랐다. 바이퉁화원에 동포가 250여가구, 형원소구에 200여가구, 동남서원에 100여가구가 살고 있으며 새로 개발하는 아파트 단지마다 몇십가구씩 입주해 있다. 한국총영사관, 청도한국인(상)회 등 한국 기관과 단체들이 자리잡고 있는 노산구의 삼우아파트, 루이나화원, 첸시룽웬화원 등 30여곳의 고급 아파트단지와 화원별장에는 한국동포 1000여가구, 중국동포 100여가구가 살고 있으며, 부자동네인 시남구에도 금도화원, 빈해화원, 복태광장, 범해명인광장 등 고급 오피스텔 혹은 고급 아파트단지에 한국동포 1만여명, 중국동포 5천여명이 살고 있다. 해상왕 장보고 장군이 신라관을 설치했던 웨이하이시는 현대의 '신라방'으로 변모하고 있다. 유엔으로부터 '세계 주거환경개선 최적의 모범도시'로 선정된 이곳엔 동포들이 시정부를 중심으로 환취구와 경제기술개발구, 첨단기술개발구의 제왕궁 등 3곳에 몰려 있다. 첨단기술개발구의 제왕궁에는 약 400여가구의 중국동포들이, 경제기술개발구 황관소구에는 한국동포 400여가구가 각각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시 중심의 재부광장에도 약 100여가구의 동포들이 살고 있으며, 개발 중에 있는 '한국성'도 향후 코리아타운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옌타이시에서 동포들이 가장 집중된 지역은 내산구의 석골촌과 황해성시화원으로 약 500여가구가 살고 있다. 주변엔 한국동포가 운영하는 크라운호텔, 신라호텔 등이 있으며 식당, 식품가게, 미용실 등 서비스 업체가 30여개에 이른다. 한국 대기업들이 진출한 경제개발구에도 황해별장, 쟈허웬 등과 해변가 지역에 동포들이 몰려 적은 곳은 10여가구, 많은 곳은 100가구 가까이 모여 살고 있다. 개발구의 태산로와 주강로에도 청정회, 통도야지 등 10여개 한식당이 들어섰으며 조선궁, 귀빈, 백두산, 인천상행 등 개발구 안 식당과 상가들이 50여개에 이른다. 교육 문화 인프라도 갖춰-동포들의 새 터전으로 자리잡아 산둥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동포들의 현지 정착에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교육, 문화 인프라가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다. 칭다오 이창구 동왕부에 위치한 청도조선족소학교는 2000년 8월에 설립됐다. 국가 정식 인가를 받아 운영되는 이 학교는 12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현재는 26명의 교직원에 170여명의 학생을 키우는 학교로 성장했다. 유치원과 소학교 전원 기숙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향후 중고교도 증설할 계획이다. 김장웅 교장은 운영자금 부족 등 여러 가지 제약요인이 있지만 민족 문화와 언어 보급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청도한국학교(법인대표 이태희)는 2004년 7월 교육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한국동포 자녀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부까지 설치되어 있으며 향후 고교까지 증설할 예정이다. 현재 학생 210여명, 교사가 30명이다. 중국에서 공식 인가된 연태한국국제학교(교장 박찬흥)는 2001년에 설립되었다. 유치원부터 고교과정까지 설치된 이 학교는 한국동포 자녀를 상대로 운영하며 교직원 60여명, 학생 380여명이다. 1992년에 설립된 옌타이감사한국어학교(교장 냉술해)는 한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지만 현재 중앙민족사무위원회 등 해당부서의 지원을 얻어 동포를 위한 유치원, 초등부와 중고교까지 갖춘 종합학교로 꾸려갈 방침이다. 칭다오한국인(상)회 신택준 사무국장은 중국해양대학에 450명, 청도대학에 500명, 과학기술대학에 35명 등 100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다고 말했다. 산둥대학 웨이하이분교, 훠둥(화동)예술학교, 따광훠(대광화)국제유학생학교, 외국어교육센터, 웨이하이번역학교, 중스(중세)외국어교육, 하얼빈공대 웨이하이분교 등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한국 학생도 300여명에 이른다. 한국인상회와 조선족기업가협회-현지 진출 기업과 한겨레 사회 구심점 역할 다해 칭다오 웨이하이 옌타이 등에 조직된 한국인(상)회는 현지 진출 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한국동포의 화합과 단결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회원사가 657개인 칭다오한국인(상)회는 칭다오 시정부와 한국총영사관 등과 협조해 한국주간 행사를 2회째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한류' 전파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수향 회장은 회원사 및 현지진출 한국기업들에 대한 서비스를 확대하고 한국기업의 합법적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채규전 옌타이한국인(상)회(회원사 206개) 회장은 한국동포와 동포기업의 각종 애로사항을 조사해 민원업무 처리와 정부 협조 등의 업무를 전개하고 있다며 해마다 한국동포체육대회도 개최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원사가 493개에 달하는 웨이하이한국인(상)회도 한국동포와 회원사들의 친목과 협력을 통한 권익수호, 기업경영에 부딪히는 애로사항 해소와 정보교류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 한국인(상)회는 중국동포 사무국장, 사무장을 두고 한겨레 사회의 화합과 협력을 일궈나가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1997년 37개 회원사로 출범한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는 이창구, 청양구, 황도에 분회를 두고 있으며 170여개의 회원사로 구성돼 있다. 기업가협회는 중국동포 사회와 정부를 연계하는 가교 역할을 하며 중국동포 사회의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 황민국 회장은 칭다오시 정협(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협회는 운동회, 송년모임, 초청공연 등의 행사를 주최해왔다. 칭다오조선족노년총협회(회장 김재룡)도 19개 분회를 두고 900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총협회는 해마다 노년운동대회와 문예공연을 펼치고 있으며 이들의 문예공연은 정부의 행사에 단골로 초청되는 등 호평을 받고 있다. 웨이하이, 옌타이 등에도 조선족기업가협회가 태동을 하고 있다. 웨이하이에서는 2004년 9월11일 조선족기업인협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옌타이에서도 이성진, 서정민, 최용덕, 김희옥 등 중국동포 기업인과 유지인사들의 발기로 옌타이조선족기업가협회 설립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곳 한겨레 사회는 한국인(상)회나 조선족기업가협회, 조선족노년협회 등이 구심점 역할을 하고, 골프, 등산, 축구, 낚시 등  50여개에 이르는 각종 동호회 등을 통해 뭉쳐지고 있다. 신형근 칭다오총영사관 총영사는 이 지역 한국동포와 중국동포는 비교적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뤄나가고 있다며 일부 불협화음도 있지만 이로 인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봐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향 칭다오한국인(상)회 회장은 한국 기업의 청도 진출에 중국동포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며 향후 한겨레 사회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국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은 중국동포와 한국동포는 불가분의 관계라며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협회간, 업체간의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손익규 옌타이조선족노년협회 회장은 한국기업의 진출로 한겨레 사회가 커지면서 중국동포들이 자신의 뿌리를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고 민족적 긍지감도 가지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권기종 옌타이부산고무제품유한공사 총경리는 대부분의 중국동포 기업가들은 초기 한국회사의 관리직으로 일을 배운 뒤 독립해 오늘에 이르렀다며 한국 기업의 진출이 없었다면 오늘 같은 중국동포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한겨레 사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산둥지역은 이미 제2 민족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신뢰와 성실로 올라선 내몽골 출신 중국동포 기업가 “정직과 성실로 고객과 한국동포 기업가의 믿음과 협력을 얻었습니다.” 내몽골 출신 중국동포로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학생회장을 지낸 전문길(42) 상하이택문실업유한회사 동사장(대표이사)의 말이다. 스웨터를 전문적으로 수출하는 이 회사는 지난해 4500만위안이 넘는 수출실적을 올렸다. 그는 1988년 대학을 졸업을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상하이시 안전국에 배치돼 이곳에 오게 됐다. 오자마자 그는 상하이시와 한국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시정부에서 통역을 맡게 됐다. “1년반 동안 통역으로 일하면서 김우중 대우 전 회장 등 한국 기업인과 만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분들의 도움으로 1989년 말 시정부에서 나와 독립을 했습니다.” 그는 상하이에서 최초로 50만달러를 투자한 한-중 합자기업 태원인쇄기계공장을 맡아 운영했다. 51%의 주식을 소유한 그는 온 정열을 쏟아 공장 운영에 나섰다. 하지만 창업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수출제품에 하자가 발생해 구매자(바이어)로부터 클레임을 당해 단 한번에 150만달러를 날리게 됐다. 회사는 하루 아침에 부도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인쇄공장을 접은 그는 미쓰비시 엘리베이터 판매 대리를 맡아 영업에 나섰다. 직접 자전거를 타고 상하이 시내를 헤집으며 엘리베이트를 팔았다. 방문업체에 도착하면 자전거에서 내려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담을 마친 뒤 다시 보통 옷차림으로 부동산 개발회사 등 고객을 찾아다녔다. 운도 따랐다. 마침 상하이에는 아파트 등 고층건물 건축 붐이 일었다.  자본금 1500만위안, 직원 40명인 엘리베이터 회사는 그동안 3000대를 넘게 팔았다. 그의 사업 수완과 태도를 눈여겨 본 한국동포 기업가가 그에게 스웨터 전문업체인 크로커다일의 구매자를 연결해주었다. 그래서 차린 회사가 택문실업유한회사다. 의류에 대해 전혀 몰랐던 그는 밤잠을 설치며 의류 관련 지식을 팠다. 1여년 만에 1000여 가지 의류제품의 칼라와 사이즈를 줄줄 외게 됐다. 상하이에만 스웨터 관련 의류업체가 3000여 개나 된다. 이 회사들의 평균수명은 1.9년. 결국은 자기와의 경쟁에서 이긴 회사만 살아남는다. 2000년부터는 외국에 직접 수출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수출액을 1억원으로 잡고 있다. 업계에 소문이 나면서 2004년부터는 유명 의류회사인 엘르사와 거래를 시작했다. 또 그는 쑤저우의 스웨터 하청공장을 합작형식으로 흡수통합했다. “무능한 사장은 있어도 무능한 직원은 없다”는 그는 “아무리 힘든 시련을 만나도 인재만 있으면 재기할 수 있다”며 “직원들에게 기대와 전망을 심어 회사와 공생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한다”고 자신의 경영철학을 강조했다.
  상하이(상해)시 민항취(민행구) 룽바이(용백)지역의 즈텅루(자등로)에 들어서면 한글간판의 식당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북한식당 모란각, 자유식당 전문 개고기점, 장백산 보신탕, 청학동 묵, 미미사 연변전문요리, 설렁탕, 자장면 등등.’ 약 500미터 가량 되는 이 거리는 선양(심양)의 시타(서탑)거리처럼 전형적인 코리아타운의 모습을 띄고 있다. 한식점만 30여개에 이르고, 미용실, 빵집, 학원, 노래방, 술집, 안마방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즈텅루가 상하이에서 코리안타운으로 급성장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에 식당이 처음 들어서기는 2003년 6월로 보신탕 전문 '자유식당'이 문을 열었다. 자유식당이 개업한 뒤 굿프랜드, 신라원 등 한식당들이 잇따라 들어섰고 이후 수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즈텅루가 본격 개발된 것은 2004년 4월 거리가 확장되면서부터였다. 자유식당 주인 이희숙는 “처음 문을 열 땐 이렇게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설 줄 꿈에도 몰랐다”며 “단골손님 대부분은 한국동포들로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주말엔 예약 없이 자리잡기 어려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다. 특히 보신탕, 삼계탕과 함께 솥뚜껑 삼겹살, 설렁탕, 손수 빚은 묵 등 토속적인 우리 음식이 인기를 끈다. 이곳 하루 유동인구는 6000여명, 음식점 손님 4000여명, 주차 차량은 400~500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과 멀리 떨어진 푸둥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이곳을 찾아오고, 웬만한 중국 택시기사들도 이 거리를 알고 있다고 한다. 오후 6시가 넘어서면서 즈텅루 가로등이 하나 둘씩 밝혀지자 한적했던 거리에 자동차 경적 소리가 잦아지면서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한다. 중국동포 반찬가게도 시장 안에 들어차 한편, 즈텅루 농산물시장엔 중국동포 반찬가게가 들어차 있다. 우리말 간판이 내걸린 반찬가게엔 각종 김치, 짠지, 젓갈, 순대, 떡, 양념류 등 민족 전통음식이 푸짐하게 널려 있다. 시장에 이렇듯 반듯한 가게들이 들어서기 전에는 중국동포들이 길가에서 김치나, 짠지, 떡 등을 팔다 저녁이 되면 단속 나온 관리원들과 좇고 좇기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루벌이로 삶을 이어가는 중국동포 노점상의 불안함과 어려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에 따라 동포단체는 시장 안에 입주해 안정된 판매 여건 속에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룽바이민족종교위원회에 도움을 청했다. 2004년 7월, 이 위원회 위원인 중국동포 김진호씨가 나서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즈텅루농산물시장을 선정해 반찬가게 매장을 만들었다. 이곳은 이제 상하이에서 우리 먹거리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명소로 떠올랐다. 이곳에서 김치를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박춘자씨는 "가게를 내 장사를 하니 요즘은 단골손님이 제법 늘어나고 있어요. 마음 편하게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아요“라고 기뻐했다. 옆가게 김춘자씨도 ”이제는 소비자의 구미에 맞게 자신의 특별한 반찬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순대와 떡을 팔고 있는 박은옥씨와 임춘숙씨는 "가게가 밀집해 경쟁이 심해졌지만 그래도 장사하는 맛이 난다”고 웃음을 지었다.
53    12. 이우를 바꿔놓은 한겨레 상인 댓글:  조회:3216  추천:98  2007-10-20
하루평균 전세계 구매자(바이어) 10만여명 몰려 “성탄절은 서양인이 만들었지만 장식은 이우 사람이 한다.” 저장(절강)성  이우(의오)시 상인들이 들려주는 자랑이다. 이우에서 수출된 크리스마스 트리, 산타클로스 모자 등 성탄 관련 상품이 미국, 유럽을 비롯해 전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나온 말이다. 성탄 용품만이 아니다. 전자제품, 가전제품, 문구, 피혁, 장난감, 실내 장식품, 액세서리, 스타킹, 심지어 이쑤시개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상품이 이우에서 중국 전역 나아가 세계시장으로 퍼져 나간다. 이우 시내 있는 소상품 시장(점포 5000여개)과 국제상무성이 대표적인 상가 건물이다. 4층 규모의 대형 도매쇼핑 센터인 국제상무성은 현지에서는 푸티엔(복전)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도매점포 2만7천여곳이 들어서 있다. 이어 100만제곱미터에 약 1만2000개의 점포가 들어선 국제상무성 제2센터가 2005년 말 개장했다. 중국 상무부 자료를 보면 이곳에는 중국은 물론 주변국가 10만여개 기업에서 만드는 32만여종의 상품이 모두 모여 있다. 그러다 보니 전세계 구매상인(바이어)들이 모여들어 하루평균 10만여명이 이곳을 찾느다. 푸티엔 시장의 제품은 애초 논바닥이었던 이곳에 들어선 근처 공장에서 대부분 만든다. 이우가 소상품 집결지가 되면서 중국 전역 소상품 제조상들이 생산공장을 옮겨 공장과 점포, 세계시장을 연결하는 원스톱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 한국동포가 5000여명으로 가장 많고, 중동인이 4000여명이며, 일본인은 100여명으로 숫자는 작으나 대부분 직접 공장을 가지고 무역을 하며 고급품을 취급 하고 있다. 중동인은  악세서리에 관심이 많으며 손이 커 상인들이 선호하고 있다. 푸티엔시장은 2002년 10월 건립 당시 9㎡ 기준으로 임대료(1년)가 2만위안이었으나 현재 3년 사용권을 가진 매장 한곳이 100만~200만위안으로 급등했다. 이우의 발전 뒤안길엔 한국동포가 있었다. 한국동포 무역상들이 이우의 소상품 유통시장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한국동포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는 아이엠에프로 한국경제가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던 1998년. 당시 이우의 상품은 값은 쌌지만 제품의 질이 따라가질 못했다. 한국동포들은 현지 상인들에게 제품의 질을 높일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제품을 주문하면서 손수 디자인한 물건(샘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우 상품이 자연스럽게 세계 수준으로 향상됐다. 송용구 이우한국인(상)회 사무국장은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우 상인들은 사실 한국동포들에게 상당히 고마워한다”며 “한국동포 무역상들이 한국과 이우뿐 아니라 이우와 제3국 시장을 연결하는 고리 구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동포들은 주로 악세서리를 위주로 양말, 넥타이 등을 취급하며, 현지에 공장을 차리고 있는 사람도 3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물류,운송업체와 요식업, 오락, 숙박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100여명 된다. 푸티엔시장에는 한국상품 매장이 30여개가 성업 중이며, 푸티엔시장 제2센터에는 2500제곱미터 규모에 45개 한국상품 전문매장이 들어선 한국관이 2004년 7월 문을 열어 세계 구매상(바이어)에 한국상품을 수출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인(상)회, 동포사회 문제점 해결에 적극 나서 소도시 이우시에도 한국동포와 중국동포들이 몰려들어 몇 년 사이 급속한 팽창을 하면서 풀어야 할 문제도 적지 않다. 먼저 동포 무역업자들끼리 과당경쟁을 불러 수수료가 낮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실패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식당, 술집, 민박, 슈퍼 주인 등 누구 하나 무역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심지어 술집 아가씨까지도 낮에는 무역을 할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수수료가 20% 수준에서7%까지 내려가 독자적인 유통망과 특성 있는 품목 없이 맹목적으로 뛰어든 수많은 한국동포들이 사업에 실패해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기술 유출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이 장점으로 내세우는 악세서리 디자인과 제조공법이 현지인에게 그대로 전수돼 현지 상인들로부터 오는 경쟁 압력도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동포 가운데는 돈을 좀 벌면 곧바로 유흥업소 업소를 찾아 흥청망청 하는 바람에 열심히 살아가는 이곳 동포들의 이미지를 먹칠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 중국동포 가운데서도 꾸준하게 일을 해나는 것보다는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한건’만을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많아 조심해야 할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우한국인(상)회가 발벗고 나섰다. 2000년 설립된 한국인(상)회는 2004년 7월19일 서울에서 열린 저장(절강)성투자유치행사를 성공적으로 주관하고 이우시와 서울시 중구청 사이의 자매결연을 성사시키는 등 시정부를 적극 돕고 있으며, 한국동포체육대회, 교통안전캠페인, 자연보호캠페인 등 행사를 벌여 한국동포의 이미지 향상을 도모했다. 그리고 한국기업 중국동포를 위한 중간관리자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해 이미 세 차례나 진행하는 등 중국동포와의 협력 공생관계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 중국동포들도 이성환씨를 초대 조선족협회 회장으로 추대를 하며 협회를 만들어 이우 한겨레 사회에 동참해나갈 계획이다.
52    11.쑤저우에 뿌리내리는 한겨레 지역사회 댓글:  조회:3523  추천:90  2007-10-20
  ▲ 취재차량 기사가 쑤저우 지리를 몰라 교통위반을 하자 경찰이 스티커(벌금 200위안)를 발부하고 있다. 관광지에서 공업지역으로 탈바꿈 한 쑤저우 상하이 인근 항저우(항주)와 함께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진 쑤저우(소주)가 공업도시로 급속하게 탈바꿈을 하고 있다. 쑤저우는 날씨가 좋고 물이 풍부해 일찍이 낙향한 귀족들이 졸정원 유원 등 유명한 정원들을 꾸며놓고 여생을 보낸 곳으로, 도시 전체를 연결하는 수로가 발달해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우리에게 먼저 알려졌다. 하지만 중국 최대 경제도시 상하이에서 육상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다 창장(장강)을 끼고 있어 해상운송의 지리적 이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쑤저우는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에 발맞춰 재빠르게 공업도시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쑤저우에도 한국기업의 진출이 이뤄졌고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쑤저우에는 한국이나 상하이에 본사가 있는 현지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으며 이곳에 있는 한국동포들 대부분은 이들 공장 관리자와 그 가족들로 구성돼 있다. 이곳에만 한국기업이 300여개, 중국동포 기업이 150여개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근 도시 곤산, 오강, 상수, 장가항, 태창 등지를 합치면 모두 500여개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쑤저우엔 1990년대 초부터 한국동포 여행객과 기업인이 드나들면서 여행사 가이드나 음식점 등을 운영하는 중국동포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2년 이후 큰 폭으로 증가세를 보여 현재는 중국동포 5000여명, 한국동포 4000여명으로 늘어 한겨레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동포 5천여명 한국동포 4천여명...2002년부터 크게 늘어 오춘길 쑤저우조선족협회 회장은 “중국동포들은 대부분 한국과 일본기업이 대거 진출하면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됐다”며 “동포들이 이들 기업의 기술자, 재무, 통역 등 중간관리자로 근무하거나, 나중에 독립해 무역, 제조, 가공, 요식, 오락업 등에 진출해왔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는 대학 졸업 뒤 이 지역 국유기업이나 정부기관에 배치받았다가 창업을 한 동포도 100명에 이른다. 이밖에 삼성은 삼성전자 등 계열사 6개 기업의 현지공장을 이곳에 배치하고 납품업체들도 함께 진출시켜 이곳을 ‘삼성도시’로 만들며 최대 외국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겨레 사회가 형성되면서 쑤저우 인근 도시인 곤산, 오강, 상수, 장가항, 태창 등지를 포함해 동포 음식점, 슈퍼마켓, 노래방, 민박 등 서비스업체도 늘고 있다. 한편, 이곳에서 중국동포 체육대회가 5년째 열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 회장은 “지난해 열린 운동회에는 1000여명이 참여해 현지인들로부터 중국동포의 단합된 힘과 문화 수준을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또 주말마다 자발적으로 구성된 6개 축구팀들이 모여 경기를 하며 동포들의 단합과 교류, 협력을 위한 친선을 도모하고 있으며, 회원이 70여명에 이르는 동포 노인협회도 구성돼 있다. 오 회장은 “이곳에 건실한 한겨레 지역사회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지 않은 한국동포와 중국동포의 협력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한국인(상)회와 각종 동호회를 통한 활발한 교류를 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키워 더욱 무르익고 성숙된 화합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51    10. 코트라(KOTRA) 이효수 중국본부 본부장 댓글:  조회:3711  추천:98  2007-10-20
  ▲ 이효수 코트라(KOTRA) 중국본부 본부장   지금이 중국 내수시장 선점할 절호의 기회 “중국 투자는 매력적인 만큼 위험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임 노동력을 활용한 제3국 수출형 제조업 투자에서 고부가가치형 투자로 방향을 돌려, 활성화하고 있는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해야 합니다. 중국은 이제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탈바꿈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효수(사진) 코트라(KOTRA) 중국본부 본부장의 긴급 진단이다. 이 본부장은 "아직까지 한국의 모기업과 한국산 원부자재 의존도가 높은 중국 투자기업 간의 거래확대 등으로 대중국 수출이 증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이런 현상이 점차 사라지면서 대중국 수출이 급격히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대중국 수출 증가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최근 중국이 취하고 있는 투자개방 업종 확대와 유통시장 개방 등 내수시장 활성화 정책에 맞춰 가전, 통신, 기계, 자동차, 물류, 금융 등 고부가 가치형 투자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02년부터 중국은 우리나라 최대 해외투자 대상국으로 떠올라 2004년 7월 말 현재 1만3306건, 108억5048만달러로 전체 해외투자 실적의 55%와 23.6%를 차지하며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 안 성별 투자건수와 금액에서 산둥성이 4461건, 30.08억달러로 모두 1위를 달리고 있으며, 투자금액에서 강소성이 20.06억달러로 2위에 오르는 등 2002년 이후 화동지역에 대한 투자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산둥성 등 특정지역에 대한 집중 현상이 개선되면서 창장(장강)삼각주(상하이 장쑤 저장), 환발해(베이징 톈진 다롄), 주장(주강)삼각주(선전 광저우 둥관 혜주)로 투자비중이 고루 늘어나고 있다. 이는 중국의 3대(창강삼각주, 주장삼각주, 발해만지역) 전략과 양대(서부 및 동북) 대개발 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개방화 투명화 법제화 최근 들어 한국의 투자 건수와 액수가 산둥성에서 창강삼각주로 중심 이동을 하면서 그동안 집중적으로 진출하던 노동집약적인 소규모 제조업가 줄어들고 고부가가치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의 진출이 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예로 삼성전자(쑤저우), 금호타이어(난징), 포스코특수강(장쑤성 창자항), 한국타이어(자훙), 효성티엔시(저장성 자싱), 엘지전자(난징), 이마트(상하이), 현대하이닉스(우스) 등의 진출을 꼽을 수 있다. 이 본부장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중국 시장은 개방화, 투명화, 법제화의 길을 가고 있다”며 “지금이 중국 내수시장을 선점할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찌감치 중국 내수시장에 뛰어들어 성공한 예로 신라면의 농심, 초코파이, 주방제품 크린랩, 전자저울 카스전자, 방역업체 세스코 등을 들었다. 또 그는 “한국기업이 중국시장에 진출하려 할 때 상대적으로 준비가 부족하고 중국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적응에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걲는 것 같다”며 상대적으로 대만이나 홍콩 기업은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유럽 기업은 준비를 치밀하게 하는 데 비해 중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편이고, 일본은 중국과의 감정적인 문제가 걸림돌이 되는지 예상 외로 적응을 못하고 있으며 전략적으로도 투자를 꺼리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대외정책 특성과 변화 미리 읽어야    그는 중국의 대외 정책이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낭패를 당한 경우로 아직 상하이에 진출을 못하고 있는 국민은행을 들었다. 1990년대 중반 상하이에 진출한 국민은행은 아이엠에프 때 경영이 어려워 철수한 경력 때문에 최근 다시 들어오려고 해도 중국에서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다며 상당 기간 국민은행의 상하이에 진출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중국의 투자 개방 등  각종 정책변화에 따른 한국기업의 수출유망 분야로 건설중장비와 발전설비, 송배전설비 등을 들었다. 그리고 주택건설에 따른 내부 건자재, 주방설비, 에너지 절약상품을 꼽았으며,  환경보호 관련 대기오염 처리 및 방지설비, 수질오염 처리 및 급수시설, 폐기물처리설비 등도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했으며, 정보화 관련 통신장비, 중계기, 네트워크 제품, 셋톱박스 등 첨단 디지털 제품을 주력 수출품으로 키워가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50    9. 부풀어 오르는 화동 한겨레 사회 댓글:  조회:3306  추천:102  2007-10-20
  ▲ 중국 경제개발의 상징으로 상하이 푸둥에 세워진 둥방밍주(동방명주) 타워.   부풀어 오르는 화동 한겨레 사회 ‘마치 고무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상하이(상해)를 중심으로 한 화동지역에서 급팽창하고 있는 한겨레 사회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중국의 경제 수도 상하이를 비롯해 난징(남경), 쑤저우(소주), 우스(무석) 등으로 구성된 창장(장강)삼각주 경제권역인 화동지역은 중국 최대 교통, 물류 중심지이자 금융, 무역, 상업 중심지라 할 수 있다. 화동 경제권은 중국 국민총생산의 27.5%, 대외무역의 55.7%, 소비액의 약 20%를 넘어서는 등 최근 들어 발전의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덩샤오핑(등소평)이 개혁 개발의 상징으로 내세운 광둥 선전의 성공과 함께 중국 경제의 자신감을 드러내기 위해 추진한 상하이 푸둥 개발이 대성공하면서 중국은 일약 세계 속의 경제 강국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에 따라 상하이는 중국의 경제 수도로 꼽히며 상하이 출신 인사들이 베이징(북경) 출신을 제치고 정치 권력에서도 실세로 떠오르게 하는 뒷받침이 됐다. 이 지역에 동포들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한국동포는 대기업들이 홍콩이나 대만을 통해 상하이에 금융, 무역 관련 법인을 세우면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종산 상하이한국인(상)회 회장 등 1987년부터 중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한국 대기업이나 상사 주재원들이 초창기 멤버들이다. 1992년 최초로 서울~상하이 직항로가 개설되고, 한-중 수교가 이뤄지며 한국동포들이 밀려들어왔다. 이에 따라 한국 회사 직원, 여행사 가이드 등으로 진출하는 중국동포도 늘어나게 됐다. 1980년대 중반 대학 졸업 뒤 상하이 안전국에 배치받아 현재 상하이택문실업유한회사 이사장으로 있는 전문길씨 등이 중국동포 1세대로 꼽힌다. 1992년 12월 코트라 중국본부, 1993년 5월 주상하이 한국총영사관이 잇따라 개관되며 삼성, 에스케이, 엘지, 포스코 등 대기업의 진출이 확대되었고, 2001년을 전후로 이우(의오), 쑤저우, 우스 등 상하이 주변지역에 의류, 섬유, 신발, 액세서리 등 노동집약형 한국 중소기업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무역, 식당, 가게, 민박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중국동포의 진출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현재 한국과 상해를 오가는 항공편만 해도 매주 60편에 이를 정도로 이곳에서 동포들이 많은 활동하고 있다. 조선족 8만명 한국인 7만여명…2000년부터 본격 진출 화동 한겨레 사회는 현재 10만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코트라(KOTRA) 중국본부, 주상하이 한국총영사관, 한국인(상)회, 중국동포 관련단체 등을 통해 알아본 결과 중국동포 약 8만명, 한국동포 약 7만여명이 상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하이에 중국동포 6만명, 한국동포 5만명, 이우에 중국동포 8천여명, 한국인 5천여명, 쑤저우에 중국동포 5천명, 한국인 4천명, 난징과 우스에 중국동포와 한국동포 각 2천여명, 항저우 닝보(녕파)에 각각 1천여명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에는 주상하이총영사관, 코트라 중국본부, 한국무역협회, 한국담배인삼공사, 부산시사무소, 경상남도사무소 등 10여개 한국 기관과 단체들이 진출해있으며, 동조살롱, 동방살롱, 기독기업가협회(CBMC) 등 중국동포 기업가 관련단체도 10여개나 활동하고 있다.   코트라 중국본부 자료를 보면 한국기업의 화동지역 투자액은 30.38억달러로 전체 대중국 투자액의 30.0%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수출품목은 액정설비, 집적회로, 엔진오일, 컴퓨터 부품, 자동차 부품이며, 수입품목은 무선통신 등 전자부품, 철, 비합금의 평면압연제품, 컴퓨터 등으로 교역액이 335.64억달러(수출257.31억달러, 수입78.33억달러)에 이른다. 약 2000여개의 한국의 기업과 기관이 진출해 있는데 우리은행, 산업은행 등 5개 은행과 증권회사, 보험회사 등 금융기관도 포진해 있다. 상하이에는 주로 대기업이나 상사 주재원들이 많고, 투자는 주변 장쑤(강소), 저장(절강)지역에 많이 이뤄지고 있으며, 섬유, 의류, 신발 등 저임 노동력을 활용한 제3국 수출형 제조업체가 전체 투자건수의 약 85%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투자 개방 업종 확대와 내수시장 활성화로 가전, 통신, 기계, 자동차, 유통, 금융 등의 투자 비중도 점차 늘고 있다. 한국 화동투자액 30.38억달러 대중국 투자의 30% 달해 화동지역은 산둥(산동)성 및 둥베이(동북) 3성에 비해 투자건수가 적은 반면 건당 투자액이 많은 대형 프로젝트들 많다. 우스에 10억달러를 투자한 현대하이닉스, 쑤저우에 있는 싱가포르 공단에 4억달러 투자한 삼성전자, 장쑤성 창자(장가)항에 2.4억달러 투자한 포스코 특수강, 난징에 1.2억달러를 투자한 금호타이어, 저장성 자싱(가흥)에 각기 1.7억달러를 투자한 한국타이어와 효성T&C, 난징의 엘지전자, 상하이의 이마트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트라 중국본부 이효수 본부장은 “한국 기업의 화동 진출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상해는 재고품 또는 사양산업의 이전지가 아닌 최첨단 제품으로 진출해야 하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 정보기술(IT)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하이테크산업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며 “ 기업운영에서도 이제는 꽌시(관계)보다는 준법경영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동포 기업은 주로 상하이에 무역 서비스업, 쑤저우 우스 등에 신발, 의류, 전자 등 제조업, 이우 등에는 소상품무역, 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상하이 동진그룹, 상하이택문실업유한회사, 상하이금석무역유한회사, 상하이동마국제무역유한회사 등 제법 규모를 갖춘 기업도 100개에 이르며, 식당, 노래방, 민박, 식품가게, 자문업, 부동산 중개소, 소형 제조업체, 무역, 물류회사, 여행사 등이 약 1천개가 넘는 업체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상하이 룽바이 완커 구베이 등에 코리아타운 형성 한겨레 사회가 가장 먼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상하이 룽바이(룡백), 완커(만과), 구베이(고북) 등 주거지역에 동포 상권이 들어서면서 코리아 타운이 형성됐다. 이곳에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 병원, 학원 등과 같은 편의시설이 많이 몰려 중국어를 몰라도 지장이 없을 정도다. 상하이 민항(민행)구 룽바이 지역은 한국동포와 중국동포가 어울려 사는 전형적인 코리아 타운이다. 10년 전만해도 논이 있던 이곳은 철거민들을 위한 서민 주택으로 개발이 됐다. 1998년부터 중국 동포들이 먼저 이곳에 자리잡기 시작했고 2000년을 전후로 한국동포들이 몰려들었다. 최근엔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부동산 값과 물가가 많이 올라 대기업 상사 주재원을 포함해 한국동포의 수가 늘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만 한국동포와 중국동포가 각각 2만여명씩 상주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등로, 청삼로, 황화로, 홍송로 주변에서 식당, 가게, 민박, 노래방, 부동산 중개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황화로에서 김해민박을 운영하고 있는 김명옥(56)씨는 가신화원 아파트에만 민박이 10여개나 있으며 룽바이 지역에 100개 가까이 있다고 말했다.   구베이 지역에는 현재 한국동포가 약 2만명, 중국동포가 약 1만여명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베이 지역은 1990년대 초 상해로 진출한 한국기업 주재원들이 가장 많이 거주한 곳으로 최초의 한국동포 밀집지역이다. 당시 영사관과 대기업들이 모여 있었고 중국의 정책에 따라 이 지역에 외국인 거주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일본과 다른 외국기업의 주재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완커는 구베이를 개발한 완커그룹의 이름을 따 이름이 바뀌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8천명, 한국동포는 4천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구베이보다 집 임대료가 싸고 녹지가 잘 조성되어 동포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 또 한국학교가 한동안 이곳에 있어 한국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동포들이 많이 살았다.   푸둥신구에 거주하는 한국동포는 3천여명, 중국동포는 3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푸둥신구가 개발될 때인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이곳 거주 동포는 20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2003년부터 급격히 늘어나 지금은 4천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2003년 6월 개항한 푸둥국제공항과 가깝다는 것과 쾌적한 주거환경 및 원활한 도로교통 등으로 상주인구가 늘고 있다. 중국동포 우리말 교육 및 문화시설 찾기 힘들어   상하이지역에 거주하는 한국동포 자녀는 대부분 한국학교(학생수 700명)에 다니며, 주변 한족학교나 국제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 학교, 학원 등 교육시설은 제법 갖춰져 자녀교육에는 큰 차질이 없다. 반면, 중국동포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은 있지만 초등학교 이상 교육기관은 전혀 없어 광둥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자녀를 주변의 한족학교에 보내고 있어 우리말 우리글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다. 중국동포들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는 있지만 중국의 교육정책과 현실적인 제약 등으로 뾰족한 대책이 없는 형편이다.   1993년 30~40개 업체가 모여 출발한 상하이한국인(상)회(회장 이종산)는 현재 회원사가 300여개에 이르고 있다. 골프, 축구, 테니스 등 17개의 동호회와 동문회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친목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주변 도시에도 지역별로 한국인(상)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상)회가 현지 한국동포 사회를 이끌며 총영사관 등 정부 관계부서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국인(상)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과 분파 행동이 끊이지 않는 등 상당한 문제점도 안고 있다. 이에 비해 제대로 조직된 중국동포 단체는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각종 단체나 기구를 자유로이 설립할 수 없는 중국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지역별로 뭉치려는 움직임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상하이의 경우 동조살롱에 10여개 업체, 동방살롱에 30여개 업체, 기독기업가협회(CBMC)에 50여개 업체 등이 모여 각종 행사와 모임을 가지며 교류와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동포사회 일체감 위한 교류활동 활발해   이외에도 축구를 중심으로 한 중국동포 모임이 활발한 편이다. 제4회 장백산컵 축구경기에 8개 팀이나 참석해 앞으로 상하이 중국동포 체육대회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화동지역 한국동포와 중국동포의 교류와 친목도 기업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호 이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추세다. 이종산 상하이 한국인(상)회 회장은 “동포는 단순한 물리적인 만남이 아니라 화학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극복해야 할 문제점도 있지만 한층 성숙된 관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길 상하이택문실업유한회사 이사장도 “동포 관계가 많이 돈독해진 것을 체감할 수 있다”며 “한겨레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로서 상호 의존, 협력, 발전해가는 일은 당연한 순리”라고 강조했다.
49    8. 인터뷰 스피드물류 김철룡 사장 댓글:  조회:3445  추천:75  2007-10-20
  ▲ 김철룡(32) 광둥 광저우 스피드물류 사장     “사람 몸에서 피가 제대로 돌아야 건강이 유지되듯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원활한 물류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광둥성 광저우에서 물류 전문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철룡(32) 스피드물류 사장의 말이다.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물류회사만도 광저우에 40개가 넘고 선전에도 20여개나 될 정도로 이곳 광둥지역엔 물류회사가 많다. 그 이유는 중국 인구의 5.8%, 면적 1.85%에 불과한 광둥성이  중국 경제 규모의 30%를 넘게 차지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 여건 등으로 경제구조가 대외의존도가 높은 외향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광둥은 홍콩 마카오 대만 등 화교 자본을 통한 임가공 수출 전초기지 구실을 하면서 외부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독특한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따라 광둥은 가전, 통신기기, 완구, 시계, 신발, 가방 등의 세계 최대 생산거점으로 자리잡아 전세계 물류 유통의 중심지가 됐다. 아울러 해마다 광둥에서 대규모 종합박람회가 두 차례나 열리고 전문분야별 전람회도 끊이질 않아 물류 유통의 규모는 갈수록 커가고 있다. 19살이 되던 1993년 이곳으로 온 연변 화룡 출신인 김 사장은 핸드백 신발 배낭 스키장비 등을 생산하는 한국 회사에서 통역과 현장관리 업무를 하다 1998년 독립을 해 액세서리 완구 등을 제조 수출하는 회사를 차렸다. 한국 등에서 주문받은 제품을 제때 보내지 못하는 등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되면서 물류의 중요성을 깨닫은 그는 직접 물류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외교역 비중이 높은 경제구조를 가진 이곳에서는 물류가 곧 생명입니다. 고객의 입장에서 물류 서비스를 해야 고객이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답게 그는 항상 남보다 한발 앞선 자세로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물류 서비스를 개발해냈다. 그의 이런 물류 서비스에 대한 자세가 결국 이곳 물류의 개혁을 이뤄냈다. 광저우에서 홍콩을 통해 한국으로 물품을 실어낼 경우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광저우에서 화물차를 이용해 웨이하이(위해)로 물품을 가져간 뒤 한-중 카페리를 이용해 한국으로 보내 4일 만에 물품을 인천에 도착하게 했다. 비용은 좀더 들지만 더 빠른 운송을 요구하는 고객의 변화된 요구를 미리 읽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안이었다. 욕심을 부리다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초창기 불법 물건을 실어나가다 한국 인천세관에 물건을 모두 압수당해 고객에게 30여만위안을 손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고객에 대한 신뢰를 위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1년6개월 걸쳐 갚아나가면서 그 위기를 벗어났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 그는 이후 불법 물품의 유통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 결과 업계에서 스피드 물류는 불법 물품의 유통은 절대 하지 않는 회사로 인정받게 됐다. 아울러 그는 안정된 물류 시스템을 바탕으로 이곳 우수제품을 골라 고객들에게 보내주는 '맞춤 무역'도 추진하고 있다.  큰 자본이 들지 않는 물류업에 너도나도 뛰어드는 바람에 어려움도 적지 않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전에 한 컨테이너당 118달러나 하던 운임비가 지금은 35달러로 떨어졌다. 물류 업계 전체가 과당 또는 덤핑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그는 제살 깎아먹기식의 경쟁을 자제하고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물류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물류업계 협의회 구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그는 광둥조선족기업가연합회 광저우지부장을 맡아 중국동포 기업가의 상호 협력과 발전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동포 젊은이로 이뤄진 ‘스피드축구팀’을 후원하며 이곳 동포사회의 단합과 친목에도 많은 후원을 하고 있다. 
48    7.선전 한겨레 마을 '이젠 돌아가기 싫어요' 댓글:  조회:3297  추천:101  2007-10-20
  ▲ 도원거 아파트 단지에 더불어 살고 있는 중국동포들. 이들은 대체로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천에 자리잡는 한겨레 마을     중국이 개혁 개방도시로 시범 개발한 선전에는 랴오닝(요녕)성 선양(심양)의 시타(서탑)과 같은 집중적인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도원거 동방화원 등에 중국동포가 20~30가구씩 모여 살고, 화교성 등엔 한국동포가 20~30가구 모여들어 한겨레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모두 ‘돈 따라 자식 따라 날아온 철새’들로 새로운 중국 한겨레 거주 판도를 그려가고 있는 것이다. 도원거 아파트 단지에는 30가구가 입주해 있는데 대부분 헤이룽장(흑룡강)성 계서지역 출신으로 해마다 10여가구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나이든 사람들 중심으로 노인협회(중국에는 노인협회의 활동이 왕성한 편이다. 정년퇴직을 하고 난 뒤에도 연금 등의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데다 느긋한 생활과 태극권 춤 등으로 건강을 다지기 때문에 주로 춤을 추거나 마작을 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등 친목을 도모하거나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도 설립하고 각종 문예행사도 가지며 동포의 단합과 미풍양속을 지키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도원거 아파트 단지는 심천에서 5만여가구 규모의 최대 아파트단지로 가격(제곱미터당 3000위안 수준)이 싸고, 교통이 편리한데다 교육 여건도 좋아 동포들이 선호하고 있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심천 최고 청화실험학교는 외지인도 도원거 아파트를 사 입주하면 현지인과 동등한 혜택을 주어 연간 학비를 2만5000위안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 거주하는 동포들 대부분은 아들이나 딸이 직장에 나가면 손자, 손녀들을 돌보거나 민박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는 고령층이 많다. 노인협회를 맡고 있는 김재덕(72) 회장은 “동포들 대부분이 손자나 손녀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데려오는가 하면, 단지 안 휴게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면 수다를 떨기도 하고, 주말엔 자식들과 함께 해변가로 소풍을 나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최근 노인협회가 발족되면서 각종 문예공연, 단체쇼핑, 공원하이킹 등의 행사를 벌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날씨나 음식 등이 맞느냐는 질문에 “첫해 적응하기가 어색했지만 겨울에도 꽃이 피며 춥지 않은데다 김치나 된장 등 전통음식은 담가 먹고, 동북지방 쌀이나 소고기 등도 시장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며 “이제 추운 동북지방에 돌아가면 오히려 못살 것 같다”고 말해 주거와 생활여건이 뛰어난 이곳에 대체로 만족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동포도 "돌아가기 싫어요" 한편, 대기업 선전지사나 중소기업 관리자로 파견 나온 사람이 대부분인 한국동포들은 비교적 새로 지은 아파트인 화교성, 동방화원 등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거주환경이 좋은 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산 투자 개념으로 집을 사놓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더욱이 홍콩과 가까워 홍콩지사 등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도 가족은 심천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사업을 하다 3년 전 이곳으로 와 한국인(상)회 회장을 맡고 있는 강희방씨는 “선전 지사에서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거주환경이 뛰어난 이곳에 가족을 두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며 “이에 따라 한국인(상)회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이들 자녀도 많이 등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심천에는 베이징에 있는 국제학교 수준으로 학비가 꽤 비싼(연간 1만5천달러 이상) 한국국제학교가 있으며, 심천대학에도 중국어 등을 배우는 한국 유학생이 3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사라진 고향마을 심천서 되살려 2003년 10월 벌어진 제1회 광둥조선족운동회에서 ‘학모팀’이라는 축구팀이 화제에 올랐다. 이들은 자신들이 떠나오면서 사라진 고향마을을 잊지 못해 애틋한 맘을 담아 이곳에서 만든 축구팀에 고향마을 이름을 붙여 되살렸다. 1980년대 중반 흑룡강성 계림향 계동지역에서는 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이곳 일본 투자기업에 취업을 하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중국동포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계림향에서 가장 작은 마을인 80가구의 학모촌에서도 박영철(37)씨가 먼저 심천으로 오고난 뒤 친구와 친척들이 하나둘 떠나오면서 고향마을은 날로 줄어들었다. 2003년 초 중국 전역에서 시행된 행정구역 합병 때 학모촌은 인구 수가 기준에 미달해 이웃마을 동명촌에 합병되어 사라졌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70여명의 이 마을 사람들에겐 할아버지 세대가 개척하여 부모의 태줄을 묻은 곳이고 자신들이 태어나 자라며 꿈을 키우며 정이 든 70여년 역사의 고향 마을이었으니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에 이 마을 출신 박영철, 임학철, 심정남 등이 축구팀에 마을이름을 되살리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만장일치로 찬성해 학모팀이 탄생하게 됐다. 학모촌 사람들은 1950년대부터 축구를 잘했다. 마을 대항전을 벌인 땐 훨씬 큰 마을 팀과 맞붙어 늘 이기곤 해 ‘학모촌 개고기’란 별칭도 얻었다. 학모팀을 구성한 뒤 선전 둥관 혜주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선수들이 모여 칠갑산, 서라벌 등 동포 축구 동호회와 경기를 펼치며 고향 잃은 설움을 달래고 있다.
47    6.인터뷰-남상욱 주광저우총영사관 총영사 댓글:  조회:3206  추천:98  2007-10-20
▲ 남상욱 주광저우총영사관 총영사 ‘중국 전문가’란 있을 수 없어    “중국 전문가란 있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중국 베이징총영사를 거쳐 2003년 광저우총영사로 부임해 중국에서만 5년을 넘게 외교관 생활을 하고 있는 남상욱 총영사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중국 31개 성 가운데 국민총생산, 세수, 외자유치 등 1위, 중국 전체 수출액의 30% 이상 차지, 가전 통신기기 완구 시계 신발 등 제조업의 세계 최대 생산기지, 한국 경제 규모의 90% 수준, 중국 최대 물류·유통 중심지, 한국의 대중국 수출 30% 및 흑자 규모 51.1% 차지, 진출 한국기업 319개(공식등록), 총 투자액 3억8600만달러...” 남 총영사가 광둥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줄줄 외는 숫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는 “광둥지역은 북방지역과는 전혀 다른 정책과 경제활동, 생활방식을 갖고 있다”며 “부임 이래 광둥성을 알아가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고 말한다.   광둥은 기회와 보람의 땅    그는 “1980년 초 중국의 개혁 개방에도 한국 기업의 광동지역 진출은 일찌감치 투자에 나선 홍콩이나 대만, 일본에 비해 10여년이나 늦었으며, 2000년 이전엔 산둥(산동) 천진(톈진) 등 중국 북방지역에 비해서도 투자 규모가 훨씬 적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선전을 포함한 광동 지역은 임가공 수출이 발달한 지역으로 한국 원부자재 수요가 크고 홍콩과 인접해 해상 및 육상 환적이 편리한데다 세관 통관절차 등 정책의 개방도가 높아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광둥으로 갈수록 집중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둥지역은 개방 초기 홍콩, 대만, 일본 기업의 대거 진출로 발전을 거듭해 산업구조가 이미 고도화하고 있다”며 “한국의 투자도 이젠 첨단기술 중심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광동지역에 제대로 눈길을 돌려 중국 대륙 전체로 진출하는 창구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집약형 투자에서 벗어나 자본기술집약 산업으로 투자 내용을 바꾸어 현지 경쟁력을 높인 다음 중국 내수시장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중국 내수시장 진출 위한 투자 나서야    사실 광둥성 정부는 최근 개방 초기 들어온 홍콩 대만 일본과 이어 들어온 한국의 노동집약형 기업들에 대해서는 각종 특혜를 없애는 등 이제 그만 나가줬으면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그는 “현재의 선전 광주 둥관 등으로 이뤄진 ‘작은 주강 삼각주 지역’이 앞으로 홍콩 마카오 광둥을 묶는 ‘큰 주강 삼각주 지역’으로 팽창하면서 지금보다 경제 발전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라며 “한국이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더욱 크게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동지역 한겨레 사회에 대해서도 그는 급팽창할 것으로 내다봤다. “1995년 서울과 광저우의 직항로 개설과 함께 한국동포의 광동 진출이 시작돼 2001년 8월 광저우영사관이 열리면서 활발해졌다”며 “영사관 통계를 보면 재광둥 한국동포는 2001년 3000명, 2002년 7500명, 2003년 1만5000명, 2004년 2만9500명으로 해마다 두배씩 증가해 2005년 말에는 최소 4만5천명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전은 서울 강남보다 좋은 주거환경 갖춰    그는 “이곳에 진출한 한국동포는 대부분 무역회사 주재원, 무역업자, 대기업 직원, 중소기업 관리자로 사업과 생활이 기본적으로 안정돼 동포 이미지를 흐리거나 내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현상이 드물다”며 “그리고 광동지역의 생활환경 또한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좋아 광저우의 경우 1명당 연소득이 8839위안이나 되고, 심천의 경우 서울의 강남지역 못지않은 주거환경과 문화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이곳 한국동포들은 외국인이기에 가지는 치안에 대한 우려 외에는 다른 면에서는 대체로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겨레 사회 첫 단추 잘 꿰야    또 그는 “이 지역 중국동포들도 대부분 고학력자나 기업인으로 성공한 사람들로 이뤄져 한국동포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시하거나 원망하는 일 없이 업무상 상호의존, 협력하면서 지내고 있어 대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동포와 중국동포가 각각 한국인(상)회와 기업가연합회를 이뤄 동호회 등을 구성해 활발한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며 “첫 단추를 잘 꿰야 하듯 초기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겨레 사회 형성과 확장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46    5.투기 바람 일고 있는 하이난섬 해변가 별장 아파트 댓글:  조회:3155  추천:72  2007-10-20
▲ 사계절 휴양지로 집중 개발되고 있는 중국 최남단 하이난섬 해변가에 자리잡은 별장식 아파트.    사계절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중국 최남단 하이난섬에 별장용 아파트 등에 대한 투기 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섬 전체를 달구고 있다.  하이난성 정부는 지난 10여년간 하이난 개발 초기 부실화된 건축물을 70% 이상 강제적으로 처리해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시켜왔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초반부터 관광 등을 통해 하이난섬을 찾은 사람들이 부동산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최근엔 투기 성향을 보여 과열 조짐마저 일고 있다.  지난해 국경절(10월1~7일) 연휴기간 부동산 구매를 목적으로 하이난을 찾은 관광객이 70~80%를 차지했으며 최근에는 타이, 홍콩, 저장(절강), 베이징, 상하이 등지의 개발자본도 몰리고 있다.  이들은 이미 전망이 좋은 해변가 지역 주택과 별장식 아파트의 70%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베이징 자본은 개인별장이나 호화형 주택을 선호한 반면, 상하이 자본은 대부분 일반  주거용을 택했고, 온저우(온주)와 타이저우(대주)의 저장(절강) 자본은 조합 형태의 투기자본 성격으로 진출해 있다. 이에 반해 중국동포 등이 다수를 이루는 동북 쪽 사람들은  노후 거주를 목적으로 아파트를 마련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동포와 한국동포도 잇따라 가세    40여년부터 하이난섬의 한 병원에서 수간호원으로 있다 퇴직한 진순옥 할머니에 따르면 지린(길림)성의 한 부대병원 간부였던  김아무개씨는 지난해 50여만위안을 주고 산야시 해변 남해화원 아파트단지에서 100여제곱미터짜리 아파트를 샀다. 이후 이들 부부는 무더운 여름은 상대적으로 시원한 동북에서 지내고, 9월 말쯤 하이난섬으로 들어왔다가 이듬해 4월까지 따뜻한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들처럼 추운겨울을 피해 해남에 아파트를 산 퇴직한 노년층 중국동포들이 적지 않은 데 이곳 남해화원에만도 여러 가구가 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여행사 직원 등으로 근무한 젊은 중국동포들도 거주와 동시에 투자 목적으로 아파트를 사들이고 있다. 현재 하이난에 여행사 가이드 있는 중국동포는 약 200여명이나 되며 이 가운데 대부분이 산여시 해변가에 적어도 한채 이상 아파트를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중국 상하이와 칭다오 등에서 부동산 투기 붐을 일으킨 바 있는 한국동포의 발길도 잦다. 상하이에서 의류공장을 하고 있는 오아무개씨는 2003년 사스 발생 직후 이곳 아파트 값이 폭락하자 중국돈 500만위안을 들여 이곳 삼아시 해변가에 위치한 남해화원 아파트를 제곱미터당 3000위안 미만의 가격으로 10채를 사들였다. 이후 2004년부터 이 아파트 값은 폭등하기 시작해  지금은 제곱미터당 1만원선을  넘어서고 있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최근 산야, 하이쿠 등에 투자 또는 거주 목적으로 한국인들이 사들이는 아파트는 대체로 90~120제곱미터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뜀질하는 부동산가격    산야시의 해변가 가운데서도 아룡만, 대동해, 삼아만의 바다 수질에 따라 주변 아파트의 값이 다르다. 부유층 휴양지로 바닷물 수질이 뛰어난 아룡만은 호텔과 호화저택이나 주택이 많고 일반 아파트는 거의 볼 수 없다.  이곳에는 기업인들이 지은 별장이 80여채 들어서 있다. 대체로 한채에  2000만~3000만위안이나 한다. 이와 바닷물 수질이 버금 가는 대동해, 삼아만에는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다. 해변 전망이 좋은 별장식 아파트는 지난해 제곱미터당 8000원에서 올해는 이미 만원선을 훌쩍 넘어섰다.  해변가 아파트 값이 오르면서 시내 주택 값도 덩달아 오르고 있다. 산야 한 여행사 직원 이아무개씨는 지난해 시내에서 제곱미터당 2700원짜리 주택을 마련했으나, 현재 4000원으로 올랐다. 그는 시내 일반 주택도 값이 많이 올라 제곱미터당 7000원짜리 아파트가 수두룩하며 3000원이하론 집을 살 수 없다고 한다. 산야에서 30여년을 산 장아무개씨는 "3~4년 전만해도 제곱미터당 700~800원짜리 집이 많았고 새집도1000~2000원이 넘지 않았다"며 "값이 이렇게 오를 줄 알았더면 미리 집을 사놓는 건 데"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45    4.인터뷰-최용균 광둥조선족기업가연합회 회장 댓글:  조회:3085  추천:116  2007-10-09
최용균 광둥조선족기업가연합회 회장 ▲ 최용균 광둥조선족기업가엽합회 회장(오른쪽), 왼쪽은 연합회 상무부회장이며 비서장인 김용씨. “중국 대륙 땅끝에서도 같은 핏줄끼리 결혼하고 싶어 하고, 된장국에 쌀밥을 말아먹고 싶어 하며,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향수를 간직한 동포들이었습니다.” 2003년 10월 ‘광둥 중국동포 체육대회’ 행사를 치르며 느낀 최용균(41, 사진) 광둥조선족기업가연합회 회장의 이곳 동포에 대한 감회다. “많은 동포들이 연합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동포모임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입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많이 논의하고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무실을 마련하고 실무진을 구성해 동포들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갈 생각입니다.” 지금은 내실 다질 때...청사진 마련 뒤 실천할 터 연합회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조용하면서도 야무지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그의 태도에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품성을 느낄 수 있었다. 1986년 헤이룽장(흑룡강)성 하얼빈공대를 졸업한 뒤 이곳에 국가배치를 받아 선전공업발전총공사에 근무를 하다 독립한 그는 지금 전자신호를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기술을 가진 ‘심천승합테크놀로지’ 총경리(사장)로 성공한 기업가로 자리잡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진흙탕 바닥에 천막집과 판잣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며 “‘상전벽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오늘의 선전이 많이 발전했다”고 강조하는 그의 모습에서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오늘의 중국을 이뤄낸 개혁 개방시대 초기 정착민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심천에는 중국 전역에서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일본기업이 들어오면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족들이 취업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한국기업이 몰려오면서 본격적인 진출을 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선전과 광저우를 중심으로 중국동포가 수만명에 이르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중국동포들이 늘어나다보니 현지 한족을 중심으로 동포에 대한 좋지 않는 면만 들춰내는 일이 일어났다. ‘모두들 교회에만 모여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한다’ ‘질이 낮은 사람들만 와 있다’는 둥 근거도 없고 터무니없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중국동포 이미지 개선 위해 기업가연합회 만들어 “2003년 초 중국동포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뜻있는 기업가들이 모여 이야기하다가 연합회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광둥조선족기업가연합회’의 출범 배경을 설명했다. 젊은 기업가들이 동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기업가 모임은 선전에서 주도하고 이후 광저우와 둥관, 혜주 등에서 자연스럽게 합류해 연합회로 만들어져 현재 10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연합회는 지부별로 축구팀을 조직해(현재 15개 축구팀) 매주 축구시합을 하며 회원 간의 우의를 다지고 있다. 그는 “연합회가 구성된 뒤 가장 먼저 한 행사가 이곳에 퍼져 있는 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없애기 위한 ‘중국동포 체육대회’였다”고 말했다. “2003년 10월1~3일 열린 운동회는 대성황이었습니다. 광둥지역에 흩어져 있던 5만명의 동포 가운데 5천여명이나 모여들었죠.” 그때의 엄청난 열기를 전하며 동포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내일의 중국동포 사회를 구상하는 그의 자세에서 민족의 앞날을 밝게 점칠 수 있었다. 시급한 민족 교육 및 문화 활동 적극 지원 방침 그는 또 “동포들이 몰려들면서 아이들 교육문제가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으나 우리말과 민족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시설이나 기관이 전혀 없다”며 “앞으로 이를 위한 단체나 개인이 나서면 연합회 차원에서 적극 지원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이곳에 함께 살고 있는 한국동포와의 교류와 관련해 “현재 한국인(상)회와는 각종 행사에 서로 초청을 하는 등 비공식적 교류에 그치고 있지만 앞으로는 기업운영 차원에서 좀더 서로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44    3.활력넘치는 개혁 개방 일번지 광동 한겨레 댓글:  조회:3099  추천:75  2007-10-06
  활력 넘치는 개혁개방 일번지 광둥 한겨레 ▲ 광저우에도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식당 `대장금'이 생겨 손님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 경제의 견인차로 나선 광둥(광동)성은 인구 8642만명, 면적 17만8000제곱킬로미터로 각각 중국 전체의 5.8%, 1.85%에 불과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국민총생산(GDP) 1위, 외자유치 1위, 대외교역 1위를 자랑하며 지난 10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고속 성장을 이루고 있다. 광둥성은 중국 최초의 개혁 개방지역으로 초기부터 대만, 홍콩, 마카오를 비롯한 화교자본(전체 외국자본의 60% 이상)과 미국, 일본, 유럽 등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한국기업은 정치적, 지리적 요인 등으로 산둥(산동), 랴오둥(요동)반도 쪽에 비해 이 지역과의 교역이나 투자는 미미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과 광둥성의 직교역 비중은 30% 미만에 머물렀고 대부분이 홍콩을 통한 간접교역 방식이었다. 그러나 1992년 한-중 수교 뒤 한국과 광둥성의 교역은 급물살을 탔고, 2000년대 들어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해 광둥성의 생산 및 기반시설을 활용하려는 한국기업의 투자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현재 한국의 대중국 수출의 30% 이상이 광둥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동포의 광둥지역 진출도 크게 늘고 있고 아울러 중국동포의 동반 진출도 붐을 이뤄 활력 넘치는 광둥 한겨레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중국동포 약 6만여명, 한국동포 약 4만5천여명 모두 11만여명 넘어 1980년대만 해도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동포 사회는 2005년 말 현재 12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한국총영사관, 현지 한국인(상)회, 조선족기업연합회 등을 통해 조사한 결과 광둥지역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는 약 6만여명, 한국동포도 약 4만5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선전(심천)에 중국동포 3만여명 한국동포 2만여명, 광저우(광주)에 중국동포 1만여명 한국동포 8천여명, 둥관(동관)에 중국동포 8천여명, 한국동포 5천여명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 개방 시범도시 선전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디딘 동포는 1982년 당시 건축공정병으로 이곳에 파견돼 심천 도시건설에 앞장섰던 김재광씨 등 5명의 군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심천실업유한공사 총경리(사장)인 김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같이 온 동료들은 고생만 실컷 하고 다들 돌아 가버렸지요. 나는 그때 공정부대가 일반 회사로 전환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 남았죠”라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 사실 그는 심천의 경제발전 과정을 직접 보고 느끼며 혜택을 고스란히 누린 대표적 초기 정착민이다. 그 이전에도 광둥지역에 배치받은(중국은 대학생이 졸업하면 당에서 특정 지역 특정 회사를 지정해 그곳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도록 배치를 한다) 조선족도 몇몇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중국동포로 알려지지 않고 신분증마저도 한족으로 바뀌어 한족화됐다고 한다. 1988년 하얼빈공대를 졸업한 뒤 선전에 배치받은 광둥조선족기업가연합회 최용균 회장은 “당시 이곳에는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도 없었고 제대군인이나 대학생을 포함해서 동포는 고작 몇 십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1993년에 연변을 떠나 광저우에 정착한 광저우스피드물류유한회사 김철룡 대표도 “동포들의 이 지역 진출은 선전보다 더욱 늦어 초창기 동포 관련 기업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며 “1995년 서울~광저우 직항로 개설로 물꼬가 터이고, 2001년 8월 광저우한국총영사관 설립 등을 계기로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동포와 함께 중국동포가 몰려와 최근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동포 일본기업과 한국기업 뒤따라 진출 중국동포가 이곳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선전 등 이 지역 경제특구에 몰려온 일본기업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공부한 중국동포는 이곳에 진출한 일본기업의 통역, 총무업무를 맡아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도 중국인들보다는 말도 통하고 일처리가 빠른 중국동포를 고용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그러다가 한-중 수교 이후 한국기업이 들어오면서 중국동포의 진출은 급격하게 늘어난다. 200년대엔 중국동포오 한국동포가 운영하는 서비스업소와 임가공 제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오늘의 한겨레 사회로 발전했다. 교역규모 크게 늘어, 투자는 아직 미미 광저우코트라 자료를 보면 2004년 11월 말까지 한국의 대광둥성 수출은 132억1천만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29.1% 늘어났으며, 중국수출액 453억달러의 약 30%, 흑자규모 186억달러 가운데 51억1천만달러가 광둥성과의 교역을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교역규모에 비해 투자는 미미한 수준이다. 광동성 진출 한국기업은 319개(순 투자기준), 총투자액은 3억8600만달러로 광둥성 외자유치 가운데 건수기준 3%, 금액기준 4%에 그친다. 광둥성에 가장 많이 투자한 기업은 삼성그룹으로 선천, 둥관, 혜주 등지에 총 6개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현대 포철 LG전자 LG화학 등이 진출해 있다. 중국동포 기업으로는 1000여개로 추산되나 그중 1000만위안 이상 규모를 갖춘 업체는 100여개에 이른다. 광둥지역은 제조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초기 일본이나 한국기업에서 근무하다 독립해 가방, 완구 등 봉제업으로 성공한 중국동포들이 많다. 이밖에 사출, 금형업체와 식품가공 등에 종사하는 기업인도 나타나고 있다. 베이징대를 졸업한 이학철씨의 선전한융유한회사는 ‘상가김치’를 광둥지역은 물론 홍콩과 마카오까지 수출하고 있다. 또 서비스업 가운데 음식점, 노래방, 식품가게,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중국동포들이 많다. 이 가운데 김용수씨가 운영하는 선전 이화원 한식당은 자산가치가 1천만위안을 넘으며  2개의 분점을 두고 있다. 중국 최대 물류 유통 집산지답게 물류분야에 활약하는 중국동포 기업도  40여개나 된다. 김철룡씨의 광저우스피드물류유한공사는 선전 광저우 웨이하이에 3개 지사를 두고 영업력을 키워가고 있다. 전자분야에 종사하는 중국동포 기업은 80% 이상이 한국, 일본, 대만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엔 고학력, 첨단기술 소유자들이 독립해 휴대폰 배터리, 주변기기, 가전, 광전자, 신소재 등 분야에서 연변 출신의 남화섭 회장이 이끄는 선전할루야전자유한회사와 최영균 사장의 선전승합테크놀로지유한회사 등 점차 규모화하고 있는 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중국동포 현재 만족, 미래 낙관, 민족 교육 및 문화 아쉬움 커 광저우 바이윈(백운)구 운천취정아파트에서 명월민박을 하고 있는 윤덕화 박수자씨 부부는 “주변에 아파트를 임대해 민박을 경영하거나 사무실을 운영하는 동포들이 20여가구에 이른다”고 말했다. 선전 바오안(보안)구 도원거에는 헤이룽장성 계서 출신 중국동포 30여가구가 모여 산다. 이렇게 광저우 원경로, 광원신촌 부근, 선전 사정, 도원거 , 화교성, 동해화원 등지에 중국동포와 한국동포가 모여 식당, 식품점, 노래방 등 업소가 늘면서 소규모 한겨레 사회(코리아 타운)이 형성되고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월소득 1만위안 이상 한국동포가 50% 이상이었으며, 중국동포는 5천~1만위안 소득계층이 반 이상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주는 대기업의 주재원이나 중소기업 사주인 한국동포들은 대부분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반면, 기타 물류, 유통분야에 종사하는 한국동포는 아파트를 임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동포의 경우 선전이나 광저우에 온 지 7~15년인 35살 이상은 대부분 할부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싼 아파트 값에도 거주조건이나 환경은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생활에는 대부분 만족한다고 답했으며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이나 걱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자녀 교육문제와 문화생활에 있어서는 불만을 나타냈다.  한국동포 자녀들은 대부분 국제학교나 주변 한족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선전의 경우 영어교육을 강조하는 리중, 백석주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중국동포의 경우 대부분 거주지 한족학교에 다니고 있어 민족언어 교육이 발등에 떨어진 불로 떠올랐다. 몇몇 인사들이 중국동포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설립을 말은 하지만 가시화하려면 재정이 뒷받침되고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거의 실현 불가능한 일이어서 2세 교육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울러 먼저 정착한 자녀들을 따라 이곳에 온 기성세대나 노인들은 따로 즐길만한 문화활동이 거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한국인(상)회와 조선족기업가연합회 지역사회 구심점으로   한국인(상)회나 조선족연합회가 지역 한겨레 사회의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 선전 광저우 둥관 혜주에 각각 있는 한국인(상)회는 한국동포의 화합과 단결을 이루고 있다. 강희방 선전한국인(상)회 회장은 “한국기업의 현안문제나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동포 자녀를 위한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등 각종생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혁 광저우한국인(상)회 회장은 “중국 진출 한국기업의 창구가 되도록 하겠다”고말했다. 이한성 둥관한국인(상)회 회장은 “주강삼각주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한 제조업체의 홈페이지를 개설해 기업활동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활발한 한국인(상)회의 활약에 현지 정부에서도 투자유치나 투자환경 평가 등에 많이 기대를 하고 있다. 반면 중국동포의 경우 초기 대거 진출에 따른 부작용으로 자질이 낮은 일부 동포의 추태, 범죄률 증가 등으로 이미지가 추락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최용균, 김재광, 태백, 김용수, 유성호, 김철룡, 남화섭, 최춘서 등 동포 기업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광동조선족기업가연합회는 2003년 출범시켰다. 이후 연합회는 2003년 10월1~3일 ‘광둥조선족 제1회 운동회’를 개최해 5천명의 중국동포가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뤘으며, 2004년 1월엔 ‘제1회 광동 조선족문예공연’ 행사도 성공적으로 치러 부정적인 중국동포 이미지를 불식시키며 현지 정부의 인정을 받아 각종 행사에 공식 초대되고 있다. 연합회는 또 민족전통문화계승, 자녀교육, 취직, 결혼 등 문제까지도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선전 금봉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해 전문인력 2명을 뽑아 홈페이지(http//:www. gdclweb.com)를 개설해 정보와 자원을 공유하고 있다. 한겨레 사회 화합과 공생의 미래 밝다 광둥 한겨레 사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사업 마인드가 높고 수준 있는 한국동포와 조선동포가 많아 서로 화합과 공생이 가능한 협력관계를 만들어가기가 수월할 것으로 보인다. 남상욱 광저우 총영사는 이 지역 중국동포 기업인의 자질을 인정하면서 한국 기업의 현지 정착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함정오 광저우코트라 관장은 “중국동포는 중국 진출 한국동포에 무형자산”이라며 “서로 잘못된 선입견을 버리고 믿음을 키우면서 방해되는 요소를 하나하나 제거한다면 좋은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화섭 선전할루야전자유한공사 회장은 “중국동포는 반드시 한국과의 교류와 협력이 있었기에 오늘 같은 중국동포의 모습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한국동포와 중국동포의 모순은 가치관과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미워도 다시한번, 못해도 다시한번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세계가 하나가 되는 마당에 편견을 버리고 공존, 공생, 공영의 길을 모색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광둥조선족기업가연회 상무부회장이며 비서장인 김용씨는 “ 호에 대한 비방과 질책에 앞서 자기 문제점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다 보면 원망과 반목이 사라질 것”이라고말했다. 한국기업에서 오랜 동안 인사담당을 맡아온 이춘재씨는 “한국기업에서 중국동포를 채용할 때 고교 졸업생도 대학 졸업생 이상의 대우를 해주는 사례를 들면서 중국동포도 스스로 실력과 자질을 키워야 상호 돈독한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3    2.맨땅에 헤딩으로 떼돈 번 하이난섬 한국농장 댓글:  조회:2953  추천:93  2007-10-05
 중국속에 일떠서는 한민족(2)맨땅에 헤딩으로 떼돈 번 하이난섬 한국농장 차한필 한겨레신문 기자 관광 왔다 들른 열대농장에 반해 삶의 방향 바꿔 “1997년 중국 하이난(해남)섬에 관광을 왔다가 아름다운 풍경과 열대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기후 조건에 반해 이곳에 농장을 꾸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이난성 산야(삼아) 근교에서 열대과일 농장을 개척해 2006년 봄 첫 수확을 앞두고 있는 경남 진주 출신의 김용선(54)씨가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는 말이다. 그는 한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장사를 해 모은 돈으로 고향 근처 지리산 자락에 농장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땅값이 워낙 비싸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이곳에 관광을 와 여행사에서 관광코스로 넣어놓은 열대과일 농장을 둘러보다가 ‘이거다’라는 생각에 삶의 방향을 중국 최남단 섬으로 돌리게 된다. 무모하기보다 위험하기까지 한 도전 “그 뒤 해마다 두세 차례 이곳을 찾아 농장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농사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인데다 더욱이 이곳에서 나는 열대과일은 먹어보지도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정말 맨땅에 헤딩을 한 셈이죠.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시행착오 정도가 아니라 무모하기까지 한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급한 마음에 농장부터 사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땅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김씨 같은 경우는 백발백중 사기당하기 십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씨는 통역을 하던 중국동포에게 사기당하고, 이곳 관리와 주민으로부터도 땅 소개, 계약서 작성, 재료구입 과정 등에서도 피해를 보아 농장을 차리기도 전에 200여만위안(한국돈 약 3억원)이나 되는 돈을 날리는 등 엄청난 ‘학비’를 치렀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김씨는 우여곡절 끝에, 2000년 6월 삼아시 교구에 350무(1무는 중국평수로 약 1000평, 한국평수로는 약 300평, 미국평수로 1아르에 해당)의 땅을 30년간 임대해 농장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에는 김씨가 절망 속에서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쓰러워하던 연변 왕청 출신 중국동포 김영옥씨의 도움이 컸다. 현재 농장 총경리를 맡고 있는 김영옥씨는 당시 김씨 집에 파출부로 오가며 그의 사정을 알게 됐다. 김 총경리는 “김씨가 이곳 법규와 절차, 관습을 전혀 모르고 좌충우돌 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도와주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농장 일 전문가가 돼버렸다”며 웃는다. 김 총경리의 도움으로 농장을 확보한 그는 한국에 있던 집과 밭을 다 팔아 ‘마지막 도박’을 걸었다. 산비탈을 파헤치며 언덕 위에 텐트를 쳐놓고 잠을 자며 ‘하면 된다’는 억척스러운 의지 하나로 버텼다. 억척스런 의지로 파파야 첫 재배 성공해 첫해 집과 창고 등 생활공간을 마련하고, 2001년 망과 묘목을 심는 동시에 수박을 재배해 약 5만위안의 수익을 올렸다. 이를 파파야 종자를 사는 데 재투자했다. 담배연기를 쐬어도 죽는 파파야는 재배하기 극히 어려운 작물로 어지간한 기술과 경험이 없으면 엄두도 낼 수 없다고 한다. 근처 대만 농장주한테서 파파야 종자를 구입해 기술지도를 받는 한편, 파파야를 재배하는 주변 농장을 찾아다니며 경험을 귀담아 듣고 정성껏 재배에 나섰다. 대체로 몇 차례 실패 끝에 싹을 틔우는데도 김씨는 첫 재배에서 기적처럼 성공을 했다. 같은 종자로 아홉 차례나 실패한 현지 한 농장주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기술지도를 요청할 정도였다. 김씨의 재배 방법을 들은 그 농장주는 “한국인은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라며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다른 농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비료 대신 한국식 퇴비를 자체 생산해 해마다 두 차례씩 거름을 주며 유기농법을 고집했다. 그 결과 3년 산 망과 나무의 굵기와 높이가 다른 농장의 7, 8년산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가 재배한 파파야는 하이쿠농산물시장에서 도매상들이 가장 앞다투어 구매하려는 ‘한국농장’ 과일로 이름 나 있다. 현지 주민과 일꾼을 식구처럼 삼아 동고동락 그가 농장 경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주민들과 관계를 잘 유지하고 고용인들을 제 식구처럼 대하며 함께 동고동락했기에 가능했다. 초기 농장을 만들면서 힘들었던 것은 주변 주민들이 농장 물건을 마치 제집 물건처럼 가져가는 것이었다. 농장 주변 주민은 하이난섬 원주민 가운데 하나로 대륙의 한족과 달리 이족이라는 소수민족이었다. 이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김씨가 농장을 만들기 위해 돈 들여 마련해놓은 각종 장비나 시설을 몰래 가져가버리는 것이었다. 공안(경찰)에다 신고를 해도 전혀 해결되지도 않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한국식으로 돼지도 잡고 음식을 만들어 마을 잔치를 벌이며 ‘신고식’을 마친 뒤, 마을 사람들을 농장에서 고용하겠다고 제안해 그 문제를 해결했다. 또 그는 일꾼들을 위해 자신의 집보다 먼저 고용인 숙소부터 지었다. 숙소에 위성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추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급여도 다른 농장보다 높게 주고, 보름마다 한번씩 회식도 하며,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옷이나 시계 등 선물도 챙겨주며 관리했다. 그 결과 지난 4년 동안 일꾼이 한 명도 바뀌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농번기엔 다른 농장은 일꾼을 못 구하지만 이곳엔 일꾼이 찾아왔다. 2002년엔 ‘붉은 악마’ 티셔츠로 일꾼들의 복장을 통일시키자 평소 주말에 집으로도 가지 않고 숙소에만 머물던 이들이 이 옷을 외출복으로 입고 마을에 나가 자랑하며 다녔다고 한다. 그는 게으르고 불성실한 그들에게 참된 농사꾼의 길을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앞장서서 나무뿌리를 줍고 쓰레기를 모아 태우며 근면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깨끗하고 부지런하며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고야 만다는 한국인의 이미지를 심어줬다. 그 결과 그는 18개 이족 마을에서 모두 인정하는 지역 유지로 대접받고, 해당 공관과 관계자들로부터도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300만위안(한국돈 약 4억5천만원)을 들여 건설한 한국농장엔 망과, 파파야 등 1만3천여그루의 열대과일과 식물이 첫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앞으로 열대과일을 한국과 일본 등지로 수출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맨 땅에 헤딩으로 일군 농장의 땅값도 크게 올라 검게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 그동안 고생한 보람을 찾은 듯 보였다.
42    1.하이난섬에서 느끼는 한겨레의 숨결 댓글:  조회:3605  추천:87  2007-10-05
중국속에 일떠서는 한민족(1)하이난섬에서 느끼는 한겨레의 숨결 차한필 한겨레신문 기자중국 최남단 하이난섬에도 한겨레는 숨쉬고 있었다 중국 맨 아래쪽에 위치한 면적 3.4만 제곱킬로미터의 하이난(해남)섬은 1500킬로미터의 아름다운 해안선과 200만제곱킬로미터의 푸른 해역에 풍부한 수산자원, 수천종의 열대식물이 자라고 있는 자연환경보호 지역으로 최근 사계절 휴양지로 본격 개발이 되면서 중국인들이 평생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하는 환상의 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00여명의 중국동포와 한국동포가 정착하고 있는 하이난에는 해마다 6만여명의 한국 관광객이 다녀가고, 삼성광케이블이 하이쿠(해구)보세구에 5억여위안을 투자해 기업활동을 하는 등 한겨레의 자취가 점점 짙어가고 있다. 적도의 불볕 더위 아래 몰아치는 해풍에도 꺾이지 않는 야자수처럼 하이난섬에 뿌리를 내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을 더듬어본다.   일제 때 징용의 한이 서린 곳   중국의 제주도로 불리는 최남단 하이난섬은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다. 2차대전 당시 1940년 초 일제는 하이난섬을 중국 본토 침략과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아 한반도에서 1000여명을 징용해 도로공사, 공항건설, 터널공사 등에 투입해 결국 완공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완공과 더불어 패전을 눈앞에 둔 일제는 이를 감추기 위해 징용한 한인들을 모두 생매장하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2차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중국 내전에서도 군사적 요충지인 하이난섬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43군 소속의 수십명 중국동포들이 목숨을 바쳐 해방을 이룬 이곳 하이난은 이렇듯 우리 민족의 피가 짙게 스민 고장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부터 중국동포들 진출해 이곳에 우리 겨레가 찾아들기는 약 15년 전, 1990년대 초부터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광둥(광동)성에 속한 미개발 섬이었던 이곳은 중국 최초의 개혁개방도시 선전(심천)을 비롯해 연해지역에서 잇따라 개혁개방 성과가 나타나자 중국 국무원의 결정에 따라 1988년 하이난성으로 승격됐고, 동시에 전국 최대 경제특구로 승인됐다. 이에 따라 장밋빛 개발전망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곳은 ‘노다지판’으로 알려졌고, 1990년대 초부터 ‘10만 하이난 진군’을 불렀다. 일확천금을 노린 이들과 함께 들어온 중국동포들은 한때 20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선전과는 달리 하이난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떨어져 있는데다 시장 규모, 물류 등의 문제로 제조업 진출이 불가능해지면서 장밋빛 청사진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무작정 하이난으로 흘러들어온 중국동포들은 대부분 다단계판매 조직에 가입해 각종 화장품, 보건품, 금시계, 가전제품 등의 판매에 나서 친척, 친구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례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상당수는 힘든 일거리를 아예 외면해 결국 오도가도 못하며 한국동포 교회 등에서 ‘식객’으로 있다가 연해지역으로 빠져나갔다.   한-중 수교로 정착에 성공한 중국동포 많아   하지만 그때부터 이곳에서 버티며 섬나라의 새 주인으로 정착한 사람도 적지 않다. 고교 졸업 뒤 1990년 해남에 첫발을 내민 헤이룽장(흑룡강) 무단장(목단강) 출신의 김미자(36)씨는 외국호텔, 일본회사 등을 전전하며 힘든 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1992년의 한-중 수교는 김씨에게 더없는 기회로 다가왔다. 수교 뒤 사계절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해변, 풍부한 수산물, 값싼 골프장 등 이곳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한국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났다. 그는 1997년 한국적 캐나다인과 합작해 여행사를 설립했다. 이어 하이쿠에 첫 한국요리점 ‘한강정’(漢江婷)을 차렸다. 이어 산야(삼아) 해변의 산하이티엔(산해천)호텔(5성급) 안에 한식당 한강정을, 하이쿠에 한강정 3호점을 열어 경영하고 있다. 하이난성이 한국 제주도와 자매결연을 맺을 때는 통역을 맡아 하이난성 정부의 대외교류에 일익을 담당했다. 또 그는 한국의 전통음식과 궁정요리를 선보인 ‘하이난한국미식문화축제’를 2년 연속 성공적으로 개최해 ‘대장금’ 열풍을 하이난에까지 불러일으켰다. 섬지역 특성을 살려 수산물 경영에 나선 중국동포도 적지 않다. 헤이룽장 하얼빈 출신의 남명동(39)씨는 저장(절강), 광둥 일대서 수산물 가공공장을 세워 연간 1000만달러 대일본수출을 해왔다. 1990년대 후반 산야경제개발구에 냉동공장을 세워 칼치 등을 수매가공해 한국에 수출하고 있다.   이밖에 10년간 해남성 정부 소속 관련기구, 방송, 대외무역, 의료위생, 교육 등 분야에 중국동포들이 전근해와 뛰어난 실적을 보이며 자리잡고 있다. 랴오닝(요녕)성 조선족사범학교에서 30년간의 교직을 마치고 하이쿠에 온 허창환 선생은 ‘한국어학교’를 꾸려 이곳 사람들을 상대로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알리고 있다.   하이난을 터전으로 삼는 한국기업 및 동포도 점차 늘어 이렇게 천혜의 땅 하이난섬엔 여행사, 음식점, 유흥점, 통신 및 수산물가공업 등에 종사하는 중국동포와 한국동포가 약 400여명에 이른다. 1990년대 후반 한국과의 항공편이 개통되면서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 관광업 관련 업종이 30여개로 주를 이루고 있다. 2004년도 한국 관광객은 약 6만명(외국관광객 가운데 1위)이었으며, 2005년 9월 한국과의 항공편이 추가 개통돼 한국 관광객이 연간 10만명 시대가 올 것으로 예측된다. 관광업과 시내 음식점, 유흥점을 운영하는 사람들 말고도 하이난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아 찾아드는 한국동포도 늘고 있다.   몇해 전 관광을 왔다가 이곳 열대농장에 눈독을 들여 투자에 나선 김용선(54)씨. 경남 진주 출신인 그는 산야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산지 350여무(1무는 중국평수로 약 1000평, 한국평수로 약 300평 정도, 미국 평수로 약 1아르, 30년 임대)를 개간한 망고농장 주인이다. 중국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도전하는 바람에 정착하는 동안 여러 차례 돈을 사기를 당하며 좌절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이곳에서 알게 된 연변 출신의 중국동포 도움으로 농장을 일군 뒤 특히 재배가 어렵다는 파파야재배기술까지 터득했다.   한국 기업의 진출도 늘어나고 있다. 2004년 첨단기술을 갖춘 ‘삼성광케블’이 하이쿠보세구에 생산기지를 건설해 터를 닦은 이후 한국기업의 진출이 이어지고 있다. 투자액이 5억위안에 이르는 이 회사는 연간 실적이 5.4억위안을 넘어 하이난성 정부의 각별한 관심 속에 최우혜정책 특혜를 받고 있다.   또 최근엔 하버드대 출신인 이동우 공룡박사가 “하이난 티엔아이하이커(천애해각) 쪽엔 공룡 발자국이 엄청 많은 등 이곳이 공룡의 집단 서식지였을 가능성이 크다”며 공룡테마파크 및 전시관 건립을 하이난성 정부 관계자와 논의하고 있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쥬라기공원 영화에 사용된 공룡 모형을 제작해 납품한 팀의 일원으로 한국과 대만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22차례 공룡전시회를 연 공룡 전문 큐레이터이다.   최근 부동산 투자 붐에 동포들의 참여도 두드러져   최근 하이난섬이 휴양지로 각광을 받아 개발 붐이 일면서 아파트 등에 대한 투자가 붐이 일고 있다. 특히 상해와 선전 등지의 부자들이 별장으로 아파트를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주택값이 크게 오르고 있다.이와 함께 몇해 전부터 동북지역 중국동포들이 하이난 관광길에 오르며 이 지역에 대한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겨울철 모진 추위가 넉달 넘게 이어지는 북방에 비해 온화한 기후에 아늑한 해변경치 그리고 요양지를 방불케 하는 거주환경에 매료된 동포들은 앞다퉈 아파트를 사서 겨울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한국동포들도 골프관광과 휴양 등을 위해 이곳에 투자에 나선 사람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해마다 10월에 와서 이듬해 3월까지 머물며 지내는 동포들이 늘어 이곳 동포들과 함께하는 명절모임, 해변놀이를 벌이는 등 한겨레 나름의 전통과 문화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41    《중국속에 일떠서는 한민족》련재를 시작하며 댓글:  조회:2480  추천:71  2007-10-05
'중국 한겨레 사회 리포트'라는 제목의 특별기획입니다.기획취재는 2005년 8월28일부터 2006년 1월15일까지 심천지역(심천, 광주, 해남, 홍콩 등)을 시작으로 상해(소주, 이우, 남경, 항주 등), 청도(위해, 연태 등), 북경, 천진, 심양(대련, 단동 등), 장춘(길림, 연길 등), 할빈(목단강 등)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한 수교를 기점으로 한국기업의 대거 진출은 중국동포의 주거 행태에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전통적인 농촌사회 중심에서 한국기업이 많이 입주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속속 진출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중국 경제발전의 견인차로 일컫는 6대 경제권역 대도시에서 중국 진출 한국인과 합류해 새로운 한겨레 사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겨레 사회는 서로 상부상조, 상호의존, 공동발전의 화합의 장을 열어가면서 현지에 정착하는 한편, 한겨레 상권을 형성해 현지의 주요 경제주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아울러 민족 교육을 위한 학교, 문화예술단체, 언론, 각종 협회, 동호회를 창설, 운영하고 관련 행사를 활발히 전개하면서 한겨레 사회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에 중국 한겨레 사회의 형성과 발전과정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집중적인 조명을 통해 그동안 이뤄온 민족의 화합과 발전의 성과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 모습을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또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제대로 파헤쳐 한겨레 사회가 좀더 효율적이고 건전한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일조하는 데 기획의 취지가 있습니다. 현지에서 취재한 중국 한겨레 사회의 살아있는 모습으로 여러분께 다가가겠습니다. * 차한필기자의 이 리포트들은 《중국속에 일떠서는 한민족》이라는 소책자로 한국 예문서원에서 출판하였고 한국 문화관광부의 2006 교양도서로 선정되였습니다.-편자주 
40    한가위 보름달 만들 ‘반달 송편’을 빚자 댓글:  조회:6240  추천:91  2006-09-20
차한필/칼럼니스트, 중국동포 전문가, 한겨레신문 기자, 저자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한가위’가 다가온다.올해는 윤7월 때문에 다른 해보다 좀 늦은 10월 들어 한가위를 맞게 됐다.중국 국경절과 맞물린 탓에 동포들도 모처럼 명절다운 명절을 지낼 수 있게 됐다.중추절 또는 추석이라고도 하는 한가위는 설날, 한식, 단오, 동지와 함께 우리 민족 5대 명절 가운데 하나지만 오늘날에는 민족 최대 명절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사회가 도시화하면서 한가위가 다른 명절에 비해 풍작을 이룬 고향의 넉넉함과 청명한 날씨 등 계절적인 편안함을 지닌 탓이기도 하다.한가위는 신라 때부터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락국으로부터 전해졌다고도 한다. 6부로 이뤄진 신라에서 각 부의 여자들이 7월16일부터 한달 동안 길쌈과 적마를 해 많고 적음을 살펴 8월15일에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 서로 축하하며 가무와 각종 놀이를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가배’라고 했다.한가위 풍속으로는 강강술래와 씨름, 활쏘기, 가마싸움, 소싸움, 거북놀이 등 풍년을 축하하는 놀이문화가 있다. 또 여름내 농사로 바빴던 일가친척이 함께 만나 하루를 즐기는 ‘온보기’와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에서 만나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반보기’ 전통도 있다.우리 민족은 한가위와 함께 오월 ‘단오’를 중요한 명절로 여겨왔다.중국도 단오 때 대나무 잎으로 싼 원추형 모양의 찹쌀밥인 ‘종자’(중즈)라는 음식을 먹고, 한가위 때는 보름달 모양의 과자인 ‘월병’을 나누어 먹는 등 나름대로 전통 명절로 지내고 있다.하지만 오늘의 중국은 설날인 ‘춘절’과 한식이나 단오에 해당하는 ‘노동절’과 한가위에 해당하는 ‘국경절’을 명절처럼 지내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 동포 대부분은 중국의 절기에 맞춰 휴식을 하고, 설날이나 단오, 한가위 같은 우리 민족의 전통 명절은 잊어버리거나 알고 있어도 중국 습관을 따라 지내고 마는 게 현실이다.우리 민족의 명절과 중국의 절기는 같은 날이라 하더라도 그 유래와 지내는 의미와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고 그래서 엄연히 다르다.중국동포 민속학자인 천수산씨는 “민속명절은 민족 전통문화를 이어나가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며 “특히 우리 민족의 명절은 우주 만물과 공생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새로운 힘을 얻는 원천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민족의 명절이 1960~70년대 민족분자 대숙청과 문화 대혁명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져버린 뒤 지난 40년간 민족 전통문화의 맥이 끊어진 상태로 무관심 속에 지내온 것이 오늘의 동포사회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민족의 명맥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척도인 명절을 지내는 일조차 변질된다면 민족 문화의 상실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동북3성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퍼져 있는 동포사회에서 민족의 특성을 살린 명절을 지내는 일을 시급히 되살려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부터라도 단오절과 추석을 민족의 대명절로 정하고 이를 고리로 민족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한가위 음식으로는 '송편'이 대표적이다. 송편을 예쁘게 잘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고 해서 쌀 반죽에 손자국을 내며 꿀·밤·깨·콩 등을 넣어 반달 모양의 송편을 쪄냈으며, 솔잎을 깔아 후각적 향기와 시각적 멋도 곁들였다.송편은 왜 반달 모양으로 빚었을까?서로 반달을 만들어 결국 보름달을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을까?이번 한가위에는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서로 ‘반달 같은 송편’을 빚으며 ‘보름달 같은 공동체’를 이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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