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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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자치화 그 빛발에 비낀 그 모습들 댓글:  조회:558  추천:0  2022-07-21
자치화 그 빛발에 비낀 그 모습들 홍천룡     지난 세기 50년대 초반에 들어선 연변은 동산마루의 붉은 해를 맞아오는 이른 봄 아침나절이였다. 백의 민족 나그네들이 공화국 창건에 차린 아침상을 금세 물리고 마루장에 나앉아 신들메를 조이고 있는 중이였다. 이 땅에 주인들이 바뀌였고 마을마다 봄기운이 한결 무르녹았다. 련애없는 약혼바람이 불어쳤고 동네안팎에 잔치떡 치는 떡메소리가 그칠새 없었고 별무리 깜박깜박 조리치는 밤중에는 은밀한 ‘밤작업’이 소리없이 줄기찼었는데 그 뒤를 따라주는 멜로디가  영아들의 앙앙거리는 고고성이였다… 집집이 다 아이를 무우 뽑듯 대여섯에 일여덟씩 낳아 길렀다. 살림이 궁해서 아이를 못낳겠다는 부부는 없었다. 오히려 구차할수록 더 낳아 길렀던 것이 그 시절 또다른 양육풍경이 아니였던가 싶다. 그랬다! 지역출산이 고봉을 이루면 그 지역의 사회적인 희망이 커진다. 지정학적으로는 머나 먼 변강의 오지 연변, 서사학적으로는 20세기 50년대초반이 바로 우리 민족의 그런 희망이 커지는 시점이였다.   그런 배경속에서 자치의 기발이 변강의 창공에서 펄펄 휘날리게 되였고 자치화 빛발이 감로수마냥 저 언덕마을마다에  휘뿌려졌다. 바로 그 시기 또한 이웃나라 조선땅으로부터 포성이 은은히 들려오며 두만강 연안으로 전운이 감돌아 퍼질 때였다. 시대의 주제가 ‘항미원조, 보가위국’이였고 청춘의 제일 영광은 참군이였다. 자식을 보낸 부모님들, 남편을 보낸 녀인들, 오빠와 형님을 보낸 아이들…   어느 해인가 우리 마을 경철이네 집 방문웃쪽에는 붉은꽃에 노르무레한 렬사패가 걸렸다. 우리의 형님같은 친구ㅡ경철이는 태여나서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난 유복자였다. 그런 아이를 홀몸으로 키우는 경철의 엄마는 갈람한 버들허리에 갸름한 얼굴에다는 애잔한 서러움을 담고있는 녀인이였다. 했지만 경철에 대한 요구는 더없이 엄엄했다. 숙제공부를 꼭꼭 마치고는 엄마의 일손을 거들게 했다. 그런 경철의 엄마도 동네  아낙네들의 말밥에 올라 뒤잔등에 손가락질 받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생산대 우사칸마당에서 송학이네 엄마(생산대 대장 부인)가 경철의 엄마한테 상앗대질 하며 ‘바람재’니 ‘여우새끼’니 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경철의 엄마가 홀연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물기 어린 눈에 형형한 빛이 번뜩이였다. 경철의 엄마가 감쳐물었던 입을 매섭게 열었다.   “송학이 엄마, 오해하지 맙소. 송학이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 아니꼬마. ”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떨리는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 저는 절대 경철의 아버지 령전에 흙탕물이 튕기는 짓은 할수 없습꾸마. 더구나 우리 경철이한테 미안한 일은 절대 할수 없구요…”   그리고는 끝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후 경철이네 엄마는 짧은 호미를 쥐고 바람에 날리듯이 가분가분 돌아쳤고 겨울에는 늘 거름광주리를 팔목에 끼고 다녔고 밤이면 밤마다 가마니짜기기계를 밤중까지 덜컥거리였다…   이듬해 겨울 방학이였다. 하얀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던 어느 날, 과외보도원인 승무네 형님이 아이들을 불러서 경철이네 방문앞에 모이게 했다. 마을사람들도 줄레줄레 모여들었다. 미구에 하얀 창호지로 도배된 방문이 펄럭이며 서서히 열리였다. 곤색 동복에 하얀 계실수건을 두른 녀인이 나타났다. 경철이네 엄마였다. 나풋거리는 눈송이사이로 약간 상기되여 발그무레해진 얼굴이 안겨왔다. 마을에 예쁜 계집애 복순이가 쫑드르르 달려나가 붉은꽃을 경철의 엄마 앞가슴에 달아주었다. 그리고 승무 형님의 지휘에 따라 온 마을 아이들이 렬을 지어 소선대경례를 올렸다. 그날은 경철의 엄마가 시로력모범표창대회에 참석하는 날이였다. 그해 여름에 김매기대회전에 동네아줌마들이 다 동원되였고 그해 겨울엔 마을에서 거름모으기열조가 일어났었다…   자치주가 선 그 시절에 조선족녀인들은 행차복으로 한복을 많이 리용했고 70여년이 지난 오늘 연길의 녀인들은 나들이패션으로 각종 투피스를 애용하고 있다. 한복에서 맵시돋굼은 옷고름이 해주고 투피스 곡선미의 날씬함은 허리띠가 주름잡아준다. 그처럼 연길의 경관에도 옷고름에 허리띠가 되여주며 흐르는 두 줄기의 강이 이 고장 운치를 한결 더 돋구어 준다. 그 한줄기는 석인골안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연집강이고 다른 한줄기는 조양천으로부터 구수하를 말아물고 인평소완자굽이를 돌아 흘러드는 부르하통하이다. 두 줄기의 강물이 합류하는 합수목은 지금보다 강폭이 넓고 수면이 잔잔했다. 하여 우리는 시내돌이를 할 때면 바지가랭이를 걷어부치고 그 합수목을 건너가고 건너오며 물장난을 치군 했다. 그 합수목에서 몇발치 안되는 동북쪽강뚝아래에(지금의 영빈로와 삼꽃거리가 교차되는 부근) 콩크리트구조에 양철기와를 얹은 주택이 동남향으로 줄줄이 들어앉았는데 그중 유표하게 독집으로 틀고 앉은 일식 사저가 있었다. 더구나 대문곁에 자그마한 보초막이 있어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날씨가 찌물쿠는 여름철에는 그 보초막에서 좀 떨어진 비술나무 그늘아래에서 한담하는 로인들이 모여있었다. 그늘밑으로 가끔씩 들려오는 그 말 한마디가 지금도 귀가에서 맴도는것만 같다.   “그 량반 덕에 우리가 달마다 이밥을 먹어본다니까.”   어느 날, 우리 또래들이 부르하통하에서 미역감고 나와 그 집 앞을 지나다가 허연 적삼을 입은 사람이 창턱앞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등키에 몸매가 다부졌고 기름한 얼굴에 눈등이 지고 실눈이 가늘게 뻗친 면상이 인자한 인상으로 안겨왔다. 우리 동네 철국이네 아빠를 빼닮은 나그네모습이였다.   “주장마다배야!”   훈이가 나지막하게 속삭이였다.   “그럼 우리 들어가 소선대경례를 올리자야! 선생님이 존경하는 분을 만나면 꼭 소선대경례부터 올리라구 하셨잖아?”   우리는 보초막쪽으로 쫑드르르 몰려갔다.   “보초병아저씨가 해방군이니까 우릴 들여보낼거야.”   우리는 이렇게 제멋대로 지껄이며 흥분했다. 보초병이 의아한 눈길로 몰려드는 우리를 바라볼 때 앞장에 달려가던 훈이가 뚝 멈춰섰다.   “안돼! 오늘은 안돼! 넥타이를 매지 않았어.”   그제야 우리는 멈춰 서서 서로서로 마주 보며 눈을 띠룩거렸다. 더러는 런닝그에 팬티바람이였고 더러는 반팔내의에 짧은 바지였다.   “그럼 어쩔가? 맨몸으로 들어가 하면 안돼?”   “안돼! 우리 이게 무슨 꼴이니? 엄숙하지 못해. 선생님 앞이래도 그렇겠는데 하물며…”   우리보다 좀 어른스레 노는 훈이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더니 결단스레 말꼬리를 끊었다.   “돌아가자! 래일 학생복에 넥타이를 꽁꽁 매고 와서 소선대경례를 올리자꾸나!”   우리는 저마다 축 늘어지는 어깨를 꼬아대며 느릿느릿 보초막을 지나갔다. 어떤 녀석은 괜히 길가의 조약돌을 걷어차며 먼지를 일구었다. 그후 우리가 넥타이를 꽁꽁 매고 가서 만나뵈려고 잔비술로 울타리를 친 그집 주위를 배회했지만 어디에 꽁꽁 숨어계셨는지 그 모습이 더는 우리 눈으로 안겨오지 않았다… 그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줄은 그때 우리는 몰랐다. 만약 우리가 그때 아프리카의 흑인 아이들처럼 온몸이 까맣게 탄 그 꼴 그 모양새로 무작정 들어가 소선대경례를 올렸더라면 어떤 장면이 연출되였을가?  그 분, 그 ‘주장마다배’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맞아주셨을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그 ‘주장마다배’가 꼭 우리 동네 동엽이네 아버지ㅡ연변대학 교수이고 저명한 시인인 설인 선생님처럼 자기의 제자를 맞아주시듯이 우리를 맞아주셨을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꼭 무슨 말씀을 해주셨을 것이였으리라! 그리고 또 그 손, 그 옛날 항일의 봉화를 추켜들었던 그 손, 연안의 토굴집에서 등불을 켜던 그 손, 세전벌에서 논두렁감기에 나서 긴 삽자루를 거머쥐였던 그 손… 그 두툼한 손도 직접 잡아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였겠는가!   아, 가슴에서 날리는 붉은 넥타이를 꽁꽁 매고 오른팔을 머리우로 숭엄하게 추켜올리며 45°각을 맞추었던 그 소선대 거수경례, 영원히 ‘주장마다배’께 올리지 못했던 그 소선대경례…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영원한 주선을 그어주는 식재료가 무엇일가?  입쌀! 주총리께서 나라의 벼재배전문가로 첫손 꼽아주신 사람이 최죽송 아바이였는데 그 뒤를 이어 신풍대대벼품종과학실험보급과 원전화개발에 돌격대로 나선 그 마을 공청단조직의 골간 맴버들인 박수호, 강철 등 젊은이들의 호매로운 모습이 지금도 추억의 영사막에 생생히 떠오른다.   “신풍촌의 벼수확을 위하여 우리의 청춘을 이바지하련다!”   량식국에서 근무할 때에 나의 상사로 왕문란이라는 녀부국장이 계셨다. 보기만 해도 화애롭고 푼더분한 인상을 주는 녀성이였지만 당시 연길시 십여만 시민들의 생명줄인 식량공급을 책임진 요인이였다. 그녀는 원래 신흥량식공급소 제5분점의 일반 판매원이였는데 몇년간 피타는 노력으로 공급범위내에 든 수백호에 달하는 매 가정세대의 식량공급상황(한 가정내에서도 년령과 직업에 따라 부동한 공급표준이 있었음), 렬군속과 오보호, 장애불구자 등 특수가정에 대하여 손금보듯 하여 제때에 문전송달도 하였고 또한 숙달된 판매솜씨로 고객들을 탄복시키군 했으며 조선족고객이 다수인 상황을 고려해서 조선말도 배워내서 일반 교류에 막힘이 없었다.   “쌀 한알이라도 허실없이 시민들에게 제때에 공급해주기 위해 힘다하려 해요.”   그녀의 그 말 한마디…   수십년간 자치주현대화건설에서 특공을 세운 한 교통기구가 있다. 무엇일가? 바로 자동차 ㅡ 그것도 ‘해방패’트럭이다. 60년대 초부터 수백대, 수천대 ‘해방패’트럭이 연길과 연변의 도로망을 질주하면서 쌀, 석탄, 목재, 그 모든걸 다 날랐었다… 그런 ‘해방패’를 몰고 지구를 몇십고패 돌았고 수십년 안전행차를 하여 전국교통전선의 모범기수로 된 로운전기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연길시운수공사의 베테랑운전기사였던 윤학선이다. 아버지와 동료였던 그가 어느 땐가 나를 안아다 운전대에 앉히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이 녀석, 차놀음 잘 논다지. 크거들랑 사고치지 않는 운전수가 되거라.”   너부죽한 얼굴에 늘 미소를 짓고 다니던 그 모습에 그 롱담같은 말씀 한마디가 힘이 되였는지 나도 칠십고개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차를 몰고 다녔지만 사고 한번 치지 않았다.   이밖에도 추억속에 떠오르는 정겨운 모습들이 많았다. 갱핏하고 강의했던 김성희 시인, 시3중에 ‘3금선생’ㅡ 생금선생님, 옥금선생님, 어금선생님, 어머니와도 같은 선생님들, 소설가 박은 선생의 거쿨진 그 모습… 아, 그리고 정말 잊을수 없는 그 분ㅡ 우리 동네 정호엄마! 칠남매를 키워내면서 늘 빙그레 웃어주시던 그 모습, 막내가 배가 고프다고 울어보채도 빙그레 웃으며 달랬고 셋째의 ‘왕바신(방한용 솜신)’앞코가 터졌다고 벗어내치니 바늘쌈지를 던져주며 “한번 신깁재질 해봐라”하고 빙그레 롱담도 던지셨고 급성 맹장염에 걸린 넷째를 포대기에 둘둘 감아안고  단숨에 병원까지 달려갔다가 수술을 마치고 나오자 “죽지 않고 용케도 살아났구나!”고 빙그레 미소짓던 그 모습… 후에 칠남매중 대학생도 있었고 공무원도 있었고 공장선반공도 있었고 병원의사도 있었고… 저마다 성장가도를 달리면서 서로서로 어머니께 더 효도하느라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자치주창립 70주년을 맞아 그 빛발속에서 살아온 한 사람으로써 참, 감회가 깊다. 그걸 어찌 한두마디로 다 말할수 있으랴만 딱 한마디만 하라고 하면 다시 돌아가 그 70년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고 토로할 것이다. 이제 뭐 더 바랄게 있겠는가? 있다면 역시 딱 한가지! 자치주 미래에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출산고봉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연변일보 2022-07-21 12:05:21  
46    조심성도 ‘백신’이다 댓글:  조회:618  추천:0  2022-06-01
현대사회는 모든 사회시스템이 규범화, 디지털화, 질서화되는 관리형으로 순서 대로 수자에 맞추어 시계치륜처럼 착착 돌아간다. 시계가 귀했던 그 시절에 좀 성깔머리가 불거진 젊은이가 시계를 차고 다니면 어르신네 시름을 놓지 못했었다.   “손목시계가 아깝다. 몸살이 나서 견디겠나?”   그랬다. 무엇이나 와락와락 해재끼였던 그 세월에도 조심하라고 타이르는 어르신네의 조언이 준절했었다. 적지 않은 일들이 곡괭이나 삽따위를 가지고 수작업으로 진척되였던 그 시절에 작업중이래도 별로 조심할 주의력이 필요 없었다. 기운이 나는 대로 푹푹 파헤치면 눈에 뜨이게 흙무지가 생긴다. 헌데 오늘날 곡괭이는 둘째치고 긴 자루가 달린 삽을 좀 쓰자고 해도 어디가 구하기도 힘들다. 모든 것이 기계화, 자동화, 지능화에 의한 대뇌와 손가락으로 일사불란하게 빈틈없이 진척되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조작과정에는 언제나 늘 조심성이라는 주의력이 집중되여야 한다. 손가락클릭에 수자거나 반점 하나에 오차가 기입되면 그 후과가  상상 밖으로 튕기게 된다. 물론 예방시스템이 가설되여있지만 오늘날 생활과 사업에서는 그런 실수나 오차의 범위를 크게 허용치 않는다. 례컨대 이번 코로나사태는 원래 그처럼 당연했던 게 당연한 게 아니였구나 하는 도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자그마한 실수, 실수가 아니래도 일상생활 습관이 큰 재액을 몰아올 수 있고 죄를 범하지 않았는 데도 ‘죄범’으로 몰리고… 지어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게 된다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다시 고정관념을 타개하고 새로운 리념을 세워야 하겠다는 도리를 터득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되였다.   그래서 어느 지인이 지적한 “조심하는 것도 백신이다.”는 말을 풀이하고 싶다.   근년에 당중앙에서는 ‘온건한 발걸음’으로 온당하게 나아가자는 ‘온(稳)’자를 슬로건으로 착실한 작풍에 확실한 결과라는 리념을 수립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온건한 발걸음’의 포인트는 안전성이다. 안전을 지키는 제일요인은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조심성이다.  때문에 그 무엇을 하든 스타트라인에서부터 결승라인에 이르기까지 전반 과정에 조심, 또 조심을 가해야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일상에서 조심스레 노는 사람들을 얕잡아보고 소외시키는 페단이 적지 않다. 조심스럽고 꼼꼼한 사람을 좀스럽게 보고 보수통이고 시대의 락오자로 비하하군 한다.   모든 일에서 실수 없이 조심성을 지키려면 내력부터 키워야 한다. 내력을 키우자면 일시적인 결심이거나 격정적인 충동이거나 앙양된 투지로는 제대로 키워낼 수가 없다. 시간적 여유를 잡아서 일상생활이거나 사업에서 걸치게 되는 그 모든 일과의 반복성에 적응하며 꼼꼼한 처리에 결과를 따지는 것 그리고 거기에 앞뒤순서, 환경질서에 어울려가는 습성으로 키워내야 진정한 내성이 생긴다.   요즘 점점 녀자들의 파워가 막강해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엘리트층에 녀자들 얼굴이 점점 더 많이 비껴지고 색감적으로도 광을 치고 있다. 가정내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살림 뿐만 아니라 가옥, 이주, 전근, 지어 자식들의 혼인 등 대사처리에 이르기까지 언권을 거머쥐고 있다.   녀자들의 그런 파워가 어떻게 생겼을가? 바로 녀자들의 세밀함에서 오는 것이다. 그녀들은 장기간 자질구레해보이는 살림살이에서 남다른 관찰력을 키워냈고 혈육간 엉키고 감긴 정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내력을 다져낸 것이였다. 그런 섬세함으로 생활의 달고 쓴 맛을 지지고 볶아내면서 그런 힘을 키워냈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 환경의 변화, 과학기술의 제고와 보급이 녀자들의 이와 같은 세밀함에 걸맞아 떨어지고 있다. 앞으로 남자들도 세세한 습성을 키우면서 내성을 다져낸다면 녀자들 못지 않은 남성적인 파워로 폼을 잡아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역경이 지속적으로 심각해지는 환경 속에서 우리 사람마다 매사에 조심하는 습성을 다져내야 함은 이미 필수요인으로 부상되고 있다. 그런 습성이 몸에 배이게 하자면 노력도 노력이지만 한결 높은 수양과정을 거쳐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을 할 수 있다.”   피끗 들어보면 어딘가 좀 편면적인 것 같기도 한데 후날 사람들은 그 말을 명언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좀 큼직큼직하게 움직이는 지도일군이거나 사업가나 경영인들의 거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흔히 사소한 일이나 일상적인 실무에도 꽤나 신경을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낼 수 있다. 세상만사가 그렇다. 사소했던 작은 일이 큰일로 번져질 수 있고 대단했던 큰일이 사소하게 작은 일로 무마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지병에 비들비들 앓던 로인들이 더 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늘 몸에서 일어나는 이상증세에 주의를 돌리며 먹는 것, 입는 것, 투약에도 아주 조심한다. 그런 조심성이 크게 예방작용을 발휘했던 것이고 그런 조심성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누구던지 코로나역경을 이겨내고 삶을 느긋하게 오래오래 영위해가자면 조심성이란 이 ‘백신’을 수시로 맞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껴진다. 연변일보 2022-06-01 09:01:09
45    [단편소설] 《아부지―》 댓글:  조회:3004  추천:0  2016-01-06
한여름, 남산언덕배기에 올라서면 시원한 송림이 맞아주고 그 한쪽 끝자락에 있는 남새밭도 보인다. 깔끔하게 꾸며진 남새밭이다. 파랗게 쪽쪽 줄을 선것은 부추요, 곱슬곱슬 퍼진것은 상추요, 넝쿨사이로 빨갛고 파란것은 도마도요… 가시나무가지들을 엮어서 빙 둘러 바자까지 쳤고 북쪽에는 이깔나무로 원두막도 지었다. 아들덕에 도시에 들어온 박령감이 아들네를 위해 꾸민 남새밭이였다. 지금 아들은 한창 잘 나가고있다. 말단정부인 향에서 현으로, 또 현에서 지구급 시정부로… 한창 떠오르는 아침 해님이였다. 박령감이 자부심을 가질수 있는 기둥감이다. (자식농사도 농사여!) 세상만사가 농사짓는 도리를 벗어날수 없다는게 그의 철학이다. 자식의 출세도 그렇고… 남새밭에 재미를 붙인 박령감은 땀을 흘릴수록 더 성수났다. 도시에 들어가면 밥 먹고 무슨 노릇을 해야 할가 하던 근심도 툭툭 털어버렸다. 저녁에 돌아올 때면 이것저것 뜯어서 배낭에 지고 온다. 《할배― 할배―》 집안에 들어서면 손자 손녀가 쫑드르 달려와 배낭부터 받아 들춘다. 도마도가 맛있다고 냠냠거리는 손자, 오이가 시원하다고 아삭아삭 씹는 모양 하는 손녀… 남새 한 배낭이면 집안엔 웃음꽃이 차넘친다. 로친도 새물새물, 그보다도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여나는것은 며느리다. 아들을 따라 향정부에서 시정부로 올라온 며느리는 어느 은밀한 부문의 자그마한 과장노릇을 한다. 《야, 모두 생생한것들이네. 아버님, 전번에 그 애호박 말이죠, 호박장이 너무 구수하다고 직장 동료들이 야단이얘요.》 《거 푼푼히 따왔으니까 먹을만큼 남기구 다 갖다 나눠주게. 그리구 그 사돈네에게두…》 《예, 아버님, 고마와요…》 삼복철에 들어서 남새들이 우썩우썩 재미 있게 잘 자라서 박령감은 더 흥이 났다. 그날도 박령감은 일찌감치 남새밭에 이르렀다. 《아니, 이런 이런… 누가?》 울바자의 삽짝문이 빠끔히 열려졌다. 저녁에 돌아갈 때면 자물쇠를 꽁꽁 잠그고 갔는데… 혹시? 바짝 긴장해진 박령감은 굵직한 나무가지를 쥐여잡고 살금살금 남새밭에 들어섰다. 저쪽켠에서 웬 사람이 괭이로 미처 손을 대지 못했던 묵밭을 뚜지고있었다. 뒤잔등만 보아도 그처럼 눈에 익은 모습이다. 아들이였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옛날 괭이보다 더 작은 녀석이 괭이를 휘두르며 《아부지, 나 여기에다 도마도랑 맛있는것만 심을래!》 하고 웨치던 그 챙챙한 목소리가 방불히 들리는것만 같았다. 《그만하구 좀 쉬여라!》 《아부지―》 아들이 빙그레 웃으며 그의 곁에 와서 털썩 주저앉는다. 인젠 관직도 꽤나 높아진 아들이지만 부모앞에서는 언제나 틀거지가 없다. 《아부지, 제가 바쁘다는 핑게로 한번도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뭐가 죄송스러워? 옛날처럼 밥벌이로 하는것도 아니고 운동삼아 심심풀이로 하는건데 뭐!》 《허허, 그렇죠. 건강이 첫째입니다.》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 고마울뿐이다. 아들을 정겹게 바라보던 박령감은 홀연 아들의 앞이마가 예전보다 훌렁 더 벗어진것과 희끗희끗 얼비치는 새치도 보았다. 저으기 가슴 한쪽이 아릿해났다. 《너도 힘들지?》 《전 괜찮습니다. 늘 시간에 매워서 좀 자유가 없을뿐이지… 저 회의시간이 다돼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거 차를 조심해 몰거라!》 아들은 일어나서 엉뎅이의 흙먼지를 툭툭 털며 몇발자국 떼더니 다시 돌아섰다. 《아부지, 제가 원두막 북쪽기둥밑에다 뭘 비닐주머니에 싸서 묻어놓았습니다. 별거 아니지만 누구든 다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세요.》 《그래라!》 박령감은 아들이 쓰던 괭이를 집어들고 원두막뒤로 돌아가서 구부정한 소나무앞에 세운 북쪽기둥을 찾아 그밑을 살펴보았다. 필경 아침에 파묻었을건데 어찌나 묘하게 묻었는지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꽤 중요한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부터 구질구질 내리던 비가 점차 억수로 퍼붓는 폭우로 변했다. 다음날 비가 즘즘해지고 서쪽하늘끝이 슬쩍 들리자 박령감은 부랴부랴 남새밭으로 달려갔다. 헌데 이런이런… 골짜기로 싯누런 골물이 사품쳤고 남새밭도 원두막도 온데간데 없었다. 문뜩 아들이 파묻은걸 잘 지켜달라던 부탁이 떠올라 원두막 북쪽기둥뒤에 있던 그 구부정한 소나무를 찾았다. 골물이 터지면서 소나무앞에는 낭떠러지가 깎아지른듯했다. 골물에 할퀴운 그 낭떠러지 웃부분에 노란 끈으로 꽁꽁 싸맨 비닐뭉치의 한쪽끝이 허옇게 내보였다. 위치로 가늠하나 땅이 패인 깊이를 보아도 틀림없이 아들이 파묻은것이 분명했다. 그는 허겁지겁 낭떠러지 끝머리에 이르렀다. 변두리의 땅이 쭉쭉 갈라지며 풀뿌리를 안은 흙덩이들이 부실부실 떨어져나갔다.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박령감인지라 옷을 벗어 땅에 펴놓고 거기에 엎드려서 포복전진했다. 낭떠러지 끝머리에 이르러 상반신을 반쯤 내밀고 오른팔을 길게 뻗쳐 그 비닐뭉치의 한쪽끝을 꽉 잡고 천천히 힘을 주며 잡아당겼다. 밑으로는 골물이 거품을 물고 소용돌이쳤다. 마침내 비닐뭉치가 흙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찡찡 저린 오른팔에 힘을 주며 간신히 그 비닐뭉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상반신을 일으키며 그 비닐뭉치를 안고 일어서려고 엉기적거렸다. 《와― 저기 사람이 있다. 죽자고 저런데까지…》 소나무사이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안겨왔다. 박령감이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쩍쩍 갈라졌다.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뭐 어쩔 새도 없었다. 박령감은 최후의 안깐힘을 다해서 비닐뭉치를 필사적으로 내던졌다. 그 비닐뭉치는 빙글빙글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더니 소나무곁에 가 뚝 떨어졌다. 《그걸 내 아들한테…》 순간, 큼직한 흙덩어리가 박령감을 태우고 와그르르 무너져내리더니 철썩― 하는 파도에 삼켜졌다… 사흘후에야 박령감은 병원에서 눈을 떴다. 아들도 보이지 않았고 로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꺼먼 양복을 입은 사람 셋이 자기를 지켜보고있었다. 《정신이 드셨군요. 로인 존함 박찬혁 맞죠?》 《그런데…》 생각밖에 박령감의 입에서 새여나온 말이 아주 똑똑하게 들리자 세 사람의 거동이 달라졌다. 그중 둘은 병상에 다가섰고 한 사람은 걸상을 끌어다가 탁자앞에 앉더니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꺼내들었다. 《아들 이름 박장덕 맞죠?》 《그런데는…》 그들은 까근하게 캐고들며 아들이 그 비닐뭉치를 언제 어디에다 어떻게 파묻었고 무슨 말을 했는가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그들 셋이 나간후 간호원이 들어와 점적주사병을 갈아주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별다른 예감이 들었다. 며칠후에 박령감은 퇴원했다. 집안에 들어서니 널직한 실내에 괴괴한 정적이 흘러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서니 원래 홀쪽하던 얼굴이 더구나 주름이 꽉 잡혀서 귀신처럼 강말라빠진 로친이 베개를 내던지며 넉두리를 했다. 《죽지 않고 돌아오긴 왜 돌아와? 제 새끼를 잡아먹는 이 두상짝아! 아이고 원쑤야, 원쑤!》 그날 밤, 박령감은 엽초 한주머니를 다 태웠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휘청거리며 사돈네 집으로 향했다. 마침 사돈네 내외간이 외손자와 외손녀를 학교로 보내느라고 택시를 잡고있었다. 《룡이야— 순이야—》 목갈린 그 부름소리에 차에 오르려던 두 아이가 뚝 멈춰서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배—할배—》 하며 달려오려니 했던 두 아이가 그 자리에 오똑 멈춰서서 야멸차게 한마디씩 내뱉는다. 《할배, 나빠!》 《할배, 미워!》 엉거주춤 멈춰선 박령감의 눈앞이 흐려졌다. 드디여 자제할수 없는 눈물이 꺼실꺼실한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돈네 내외간도 폴싹 늙은것 같았다. 평소 살갑게 대하던 안사돈은 입을 삐죽거리며 홱 돌아서 들어갔고 무던한 바깥사돈이 그래도 손을 잡아주었다. 《어이구, 늘그막에 이게 무슨 꼬락서니우…》 바깥사돈의 말에 의하면 그 비닐뭉치가 기실 《비밀장부》였는데 그것이 발각되여 아들과 며느리까지 여섯이나 불리워갔단다. 그룹적인 직권람용으로 인한 공금횡령죄에 걸렸다는것이다. 아직 금액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그 액수에 따라 극형이 떨어질수도 있고 몇년 내지 몇십년 동안 감옥밥을 먹을수도 있단다… 박령감은 가슴을 치며 돌아섰다. 스스로 자기의 아들을 감옥에다 처넣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제야 로친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기가 그걸 안고 물에 빠져죽었더라면 오늘 이런 변이 생기지 않았을거고… 아들 며느리를 감옥에다 처넣고 무슨 면목으로 산단 말인가? 박령감은 서서히 비장한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슈퍼에 들려 소주 한병에 월병 두개를 산 다음 다시 종합자료상점에서 농약 한병을 샀다. 그제날 뒤집 철구 에미가 마셨던 그 농약병과 똑같이 하얀 병이였다. 휘청거리며 남산에 올라 남새밭자리를 찾아 풀썩 주저앉은 박령감은 소주병과 월병, 농약병을 꺼내놓았다. 동그라미를 먹으면 가는 사람의 저승길도 무난해지고 이승에 남은 사람들의 일도 둥글둥글 잘 풀린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소주 한모금 마시고는 동그란 월병을 덥썩 깨물어 우물우물 씹었다. (지금쯤 그 녀석 이 애비를 원망하고있을테지…) 명치끝이 쨍— 해나며 주기가 서서히 올리퍼졌다… 문뜩 산너머 저 멀리, 파아란 논밭 저쪽으로부터 꼴단을 멘 아들녀석이 머리칼을 흩날리며 달려오고있다. 《아부지―》 아침이슬에 폭 젖어 얼음판같은 논뚝길이였지만 용하게 넘어지지 않고 달려온다. 어릴 때부터 정이 많았던 녀석이였다. 걸음마를 타기 시작해서부터 아버지만 보면 《아부지―》를 부르며 엎치며 덮치던 녀석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는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매일 식전에 나가 소꼴 한단씩 꼭꼭 메왔다. 가끔 등교시간때문에 더운 밥을 찬물에 훌훌 말아 후르륵 넘기고는 책가방을 둘러메고 달려가는 그 모습에 애 에미는 가슴이 아파 앙앙거렸다. 《그 꼴 한단이 없어 소가 굶어죽겠수? 래일아침부터 싹싹 걷어치워유!》 나도 가슴이 아파 강권하지 않았지만 그냥 새벽에 기어이 눈을 비비며 나가 꼴을 베왔던 녀석이다… 박령감은 다시 소주병을 들고 꿀꺽꿀꺽 연신 몇모금 마셨다. 술이 반병쯤 남았을 때 그는 농약병의 병마개를 따고 술병아구리에 맞춰서 쏟아넣었다. 삽시간에 하얀 술이 짙은 주황색으로 변했다. 어느땐가 아들이 희한하게 생긴 술병을 들고 와서 한잔 꼴똑 부었다. 그 술이 주황색이였다. 록용주인가 했더니 빠리에 갔다온 손님이 선물한 외국제양주라고 했다. 별맛일거라고 마셔보려는데 한병에 몇천원씩 한다는 말에 도로 잔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께서 반가와하신다면 몇천원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마라도 그냥 대접할수 있다고 아들이 장담했다. 그때는 그 말이 대견스러워서 그 잔을 다시 들고 굽을 쭉― 냈었다. 오늘날 그때와 색갈이 똑같은 술이 놓여있다. 그때의 그 주황색 술은 즐겁게 장수하라는 술이였고 지금의 이 주황색 술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그때 그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깟녀석이 월급을 얼마나 탄다고 그 비싼 술을 숭늉 마시듯했을가! 그때 벌써 잘못된거여. 왜 그 낌새를 채지 못했을가? 농사군이여서? 오로지 일만이 사람같은 사람을 만든다는 철학관이 깨지는 순간이였다. 그 비닐뭉치가 발각된것이 아들을 해친것이 아니라 그 주황색 외국제양주를 마신것이 아들을 구렁텅이에 밀어넣은것이라고 뒤늦게 뼈아픈 반성을 했다… 박령감은 또다시 소주병을 들고 그 주황색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그 하얀 농약병을 들고 나머지 농약을 다 소주병에 쏟아넣었다. 술은 주황색으로부터 검스레한 진홍색으로 변했다. 시골에 있을 때 뒤집 아들 철구가 지나가던 아줌마의 가방을 잡아채다가 아줌마가 반항하니 칼로 찍어서 살인사건을 빚어냈다. 그 가방안에는 잔돈 28원밖에 없었다. 그 28원때문에 철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때 철구 에미가 하얀 병에 들어있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 집에서는 어려서부터 아이가 하자는대로 귀엽게 키웠고 커서도 일을 시키지 않았기에 늘 빈둥빈둥 돌아다녔다. 《아이는 그렇게 키우는게 아니여. 무슨 잔일이라도 시켜!》 박령감이 늘 철구 에미를 보고 타일렀었는데… 그런 박령감은 아들한테 너무나도 많은 일을 시켰었다. 녀석은 소시적부터 일욕은 많았으나 물욕은 꼬물만큼도 없어서 오히려 제 노릇도 못할가봐 근심했었는데… 그러던 녀석이 오늘날 왜 돈에 환장했을가? 먹고 입을 걱정도 없고 생활도 그만하면 천당이나 다름없는데… 옛날 세월에는 일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지금 세월에는 뭘로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가? 그 리치를 터득하지 못한 자신이 한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구나 앞이 캄캄해났다… 박령감은 마지막으로 소주병을 들고 그 진홍색으로 변한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끝끝내 굽을 내고야말았다. 뒤이어 밸이 뒤탈리는듯 통증이 침습해왔다. 마지막 순간이 각일각 닥쳐오고있음을 느꼈다. 이 세상을 다시 한번 보고 가려고 눈을 크게 떴다. 모든것이 노랗게 변해가고있었다. 소나무도, 저 멀리 산너머 하늘도… 노오란 구름을 타고 철구 에미가 머리수건을 풀어쥐고 내흔든다. 《오지 맙소, 아즈버님, 뭘 잘못했다구 아즈버님이 여길 오자구 그램둥? 오지를랑 맙소.” 노오란 구름을 타고 머리를 풀어헤친 며느리가 두팔을 허우적거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아버님이 가시면 안돼요. 룡이와 순이가 있잖아요. 그 애들을 봐서라도…” 노오란 구름을 타고 로친이 휘우뚱 굽어지는 상체를 지팽이에 싣고 손가질하고있다. 《저 량심없는 두상짝같으니라구, 나를 버리고 혼자만 갈라나… 아이고 원쑤야, 원쑤.》 노오란 구름을 타고 고개를 뚝 떨군 아들이 다가오고있다. 《아부지, 이 불효자식이 마지막으로 빕니다. 제발 가지 마십시오. 제가 이제 깨끗하게 싹 씻고 나가서 다시 그 옛날 꼴단 메던 아들로 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부지―》 아들이 구름을 헤치며 막 달려온다. 샛노란 구름이 짓노랗게 변해간다… 박령감은 두눈을 더 크게 흡떴다. 눈동자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흰자위만 서리발 치듯 번뜩인다. 미구에 눈까풀이 서서히 내리처지며 그걸 깔아덮었다… 길림신문 2016.1.6
44    벼와 옥수수, 그리고 우리의 선택 댓글:  조회:4744  추천:4  2015-11-02
작년에 흑룡강대지를 돌면서 두가지 일에 가슴을 쳤다. 그 하나는 그 넓은 대지에 그처럼 많은 옥수수를 심은걸 보고 무릎을 쳤다. 대단해! 그 대단함은 흑룡강뿐만 아니였다. 장춘으로 가는 길림대지 역시 옥수수로 꽉 덮였는데 그처럼 빽빽한 밀식임에도 불구하고 푸르싱싱하게 잘 자라고있었다. 그리고 또 동북뿐만 아니였다. 산해관을 넘어 화북평원을 달려도 일망무제한 옥수수밭이 펼쳐졌고 황하를 끼고있는 중원지대를 빙빙 돌아봐도 가는 곳마다 설레이는 옥수수숲이 맞아준다. 《우리가 지금 먹고있는 음식가운데서 제일 많이 먹고있는것이 무엇일가?》 응답은 다양했다. 이밥이라는 사람이 많았고 밀가루라는 사람도 많았고 고기라는 사람, 지금은 그래도 채소라는 사람… 그외에도 콩, 우유 같은걸 곁드는 사람도 있었다. 다 틀렸다고 하니 모두들 의아해서 그럼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옥수수라고 하니 다 고개를 내흔들었다. 그래서 하나씩 례를 들며 해석했다. 우리가 먹고있는 고기와 알류, 돼지, 소, 양, 닭과 오리… 지어 물고기까지 모두 집중양식으로 키우는데 그 먹거리사료가 대부분 옥수수로 가공되고 또한 우리가 료리에 첨가해서 맛을 돋구는 조미료에도 옥수수성분이 많이 들어가고 더욱 광범한것은 과자나 빵, 사탕 그리고 여러 음식에 빼놓지 않고 들어가는 설탕, 지금은 역시 옥수수로 과거의 사탕수수나 사탕무우, 야자 같은 원자재를 대신해서 제조되고있다. 이밖에도 옥수수가 들어가는 먹거리품종이 너무나도 많아지고 있다. 옥수수는 많은 우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두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중 한가지는 당분이 많은것이다. 음식구조가 단일했고 영양이 결핍했던 농경사회에서는 당분이 많은 옥수수가 사람들의 영양균형을 지켜주는 위대한 작용을 놀았으나 음식종류가 다양해지고 입맛요구가 높아진 오늘날에는 오히려 해가 되고있다. 당분의 과다섭취로 인기되는 당뇨병과 같은 《현대문명병》이 지구촌 구석구석을 공략해가고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당분함량이 높은 옥수수를 너도나도 다같이 매일매일 아주 즐겁게 마시고 먹고있다. 옥수수의 또다른 한가지 약점은 수분이 많은것이다. 옥수수의 수분이 어떤 사회적인 영향을 끼칠수 있고 우리들의 경제생활에는 어떤 부담을 안겨줄수 있을가? 지난 세기 70년대 중반에 필자는 연길시량식국에서 사업한 적이 있다. 그당시 량식국은 전반 시민의 주식을 공급해주는 주요부문이였다. 당시 공급해주는 량식의 80%이상은 옥수수가공제품이였다. 옥수수쌀, 옥수수가루, 옥수수국수, 옥수수빵… 옥수수가루도 몇등급으로 나뉘여졌는바 순옥수수쌀로 가루를 낸 가루가 있는가 하면 옥수수알로 가루를 낸 가루도 있었는데 그 질적차이도 컸고 값도 달랐다. 당시 기차전용선이 량식창고안으로 들어오게 가설되여 매일과 같이 옥수수를 실어들여 대형 쌀뒤주에다 보관했고 검사원들은 륜번제로 시시각각 검사하군 했다. 그것은 수분이 많은 옥수수가 빨리 변질했고 일단 변질하기만 하면 삽시간에 퍼지군 해서 막대한 경제적손실은 물론 전반 시민의 량식공급에도 영향이 미칠수 있었던것이다. 가끔 옥수수가 변질해서 쌀뒤주를 헤치면 허연 김이 무럭무럭 피여오르고 술냄새와 같은 시크므레한 냄새가 코를 찌르군 했다. 특히 기후변화가 심한 봄철이나 초겨울에 많이 발생하군 했다. 그러면 량식국에서 지령을 떨구어 전반 시구역내의 모든 차량을 동원하고 직원, 학생, 기관간부, 군인 등 동원할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하여 량식창고의 옥수수를 동비행장으로 실어다가 넉가래로 훌훌 널어서 말리우군 했다. 동비행장에 넘쳐날 때면 모아산 넘어 동성용비행장으로도 날라가군 했다. 그럴 때면 우리 량식국 기관인원들은 빵과 사이다병을 들고 밤낮으로 뛰여다니며 지휘해야 했다. 그러다가 기상국으로부터 비가 온다거나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날아들면 더구나 《전쟁판》이 벌어진다. 당시 이런 말까지 있었다. 《일년에 옥수수 백근을 심어내는데 백원이 든다면 옥수수를 일년동안 보관하는데는 2백원이 든다.》 그때 그 세월에 수확해낸 옥수수의 수분함량이 그렇게 컸다면 지금 심어낸 옥수수의 수분함량은 그보다 휠씬 더 크다. 왜냐하면 옥수수의 품종이 개량되면서 통옥수의 크기도 커졌고 옥수수알도 말이빨처럼 훨씬 커졌다. 옥수수알이 커졌다는것은 그만큼 수분함량도 커졌다는걸 말해준다. 물론 지금 옥수수의 보관수단이 선진적이고 과학적이여서 건조(烘干), 통풍, 측정 등 시스템이 자동화되여 옛날처럼 동원식으로 말리우는 페단은 없어졌지만 경제적인 비용은 역시 엄청나게 들어간다. 이 큰 나라에서 옥수수경작면적이 나날이 늘어나고 옥수수의 수확고가 나날이 높아감에 따라 그만큼 보관비용도 늘어날것이고 거기에 따르는 난제들도 가중될것이다. 옥수수의 수확고가 나날이 높아가는것이 결코 좋은 일만 아니고 옥수수경작면적이 나날이 늘어나는것 역시 우려되는 현상이다. 물론 옥수수가 우리 나라에 대한 공헌은 더 이를데 없이 위대한것이다. 건국이후 전반 국민의 생명을 이어준 은인과 같은 곡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지금도 옥수수가 나라와 국민에 대한 공헌은 거대하다. 이 큰 나라에서 이 많은 인구가 배 부르게 먹을수 있고 육식을 마음대로 할수 있고 가공식품의 다양한 맛을 차원이 다르게 즐길수 있게 된데는 옥수수가 절대적으로 권위성적인 작용을 놀았기때문이다. 그리고 국민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농민들의 수입장성에서도 큰 기여를 한 곡물이다. 미래에도 역시 주요곡물로써 나라와 국민들의 량식안전을 지켜주고 인류의 음식안전을 수호해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수수가 결코 전반 국민의 리상적인 먹거리래원으로는 될수가 없다. 우리 국민의 삶과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음식결구가 점차 개변되여야 한다. 중국에는 지금 대개 두 부류의 음식습관을 지키고있는 사람들로 분류되는바 하나는 쌀밥을 위주로 먹는 부류와 다른 하나는 가루음식를 위주로 먹는 부류로 나눈다.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도 있고 채식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대개 장강을 계선으로 장강이남을 남방이라 하고 장강이북을 북방이라고 지정학적으로 구별했다. 쌀밥을 위주로 먹는 남방은 물이 많고 인구밀도가 높고 공상업이 발달했고 가루음식을 위주로 먹는 북방은 물이 적고 인구밀도가 성기고 공농업이 발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불균형은 전반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저애력이 되고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력사적으로 조성된 경제, 문화, 지리, 기후 등 여러 방면의 문제들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음식습관도 그중 일개 요인이였다. 특히 옥수수경작면적의 대량적인 확장은 이런 불균형을 축소시키는것이 아니라 점점 더 크게 기울어지게 하고있다. 북방의 곡물재배구조가 개변을 가져와야 한다. 그 관건은 옥수수의 재배면적을 줄이는것이다. 그러자면 옥수수를 대체할 곡물이 있어야 한다. 무슨 곡물로 옥수수를 대체할가? 지금으로서는 세가지 곡물이 그 후보로 되고있다. 밀, 벼, 감자이다. 감자는 원래 채소류에 속했던것을 이번에 국가에서 주요곡물로 정했다. 그럼 어느 곡물이 옥수수를 대체하는데 가장 적합할가? 정답은 세가지 곡물이 저마다 다 우점과 단점을 가지고있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선택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무얼 선택하는가 하는것도 중요하겠지만 누가 무얼 선택하는가 하는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민족은 밀과는 별로 큰 인연이 없었다. 허지만 감자와는 각별한 인연이 맺어진적이 있다. 이민초기에 골안에 정착한 사람들은 화전농사로 감자에 맛을 들인것이다. 감자는 채소의 특성도 가지고 있고 곡물의 특성도 가지고 있을만큼 영양가가 골고르게 풍부하다. 그당시 감자가 아니였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를 곯았을지 모른다. 허지만 감자를 주식으로 인정해준적도 없고 감자로 경제발전을 도모해본적도 없다. 그다음 옥수수와도 별다른 인연이 있었다. 옛날 터밭이나 자류지에다가 이것저것 여러가지 품종을 심는 가운데서 집집마다 옥수수만은 빼놓지 않고 심었다. 할아버지세대도 해마다 심었고 아버지세대도 해마다 심었고… 가꿀 땅만 있으면 옥수수는 빼놓지 않고 심었다. 하지만 옥수수도 역시 부식에 불과했고 대면적으로 심지는 않았다. 한전지대에서는 상황이 좀 달랐지만 아무튼 주요 생산대상은 아니였다. 우리 민족과 제일 특별한 인연을 맺은것은 그래도 벼다. 우리의 선배들이 풀밭습지, 초원평야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했기에 배를 곯지 않았고 타민족보다 잘살수 있었고 마을마다 학교를 세울수 있었고 문화를 발전시킬수 있었다. 벼농사로 국가에 대한 공헌은 더 이루 말할수 없을만치 거대하다. 조선족이 집중된 길림대지는 물론, 광활한 흑룡강대지와 드넓은 료녕평야에도 조선족의 벼농사가 거대한 힘을 과시했었다. 이러한 힘을 가지고있었던 우리 민족이 오늘날 벼재배로 옥수수재배를 대체할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있는것이다. 때문에 향후 짧은 기간내에 우리의 선택이 자못 중요한것이다. 어떻게 선택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공동히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다. 길림신문 2015-10-30  
43    비에 젖은 환상의 메아리 댓글:  조회:4611  추천:2  2015-10-27
 요즘 꿈얘기가 많아지고 있다. 밤마다 꾸는 꿈이 아닌가! 어제저녁에는 베개를 안고 장가드는 꿈에 시집가는 꿈을, 오늘 저녁에는 서로서로 끌어안고 아기낳을 꿈을, 그럼 래일 저녁에는 무슨 꿈을 꿀가? 아마도 돈 많은 부자꿈… 우리 나라의 주석이신 시진평동지도 중화의 꿈에 대해 얘기하셨고 우리 민족의 첫 녀대통령이신 박근혜녀사도 통일의 꿈에 대해 얘기하셨고 젊은이들은 창업에 대한 꿈을 토로하고 어르신들께서는 장수꿈을 연구하시고 녀인들은 미인꿈에 귀여움을 떨구요 사나이들은 “평화”의 꿈을 꾸고들 있다. 꿈이란 현실이 아닌 현실을 동반한 환상이다. 환상이기에 현실과의 거리가 멀고 좀 아득하게 보이거나 아슴프레하게 보인다. 꿈이 묘한것은 그 아득한 거리감과 아슴프레한 시각감을 조절할수 있는 공간을 이루어주는것이다. 이런 공간적인 플랫폼조절에 의해 꿈과 현실의 류사성법칙이 작용하여 그 어떤 정신력을 격발시키기도 한다. 례컨대 “엊저녁 꿈에 꽃을 보았더니 오늘 그 녀자를 만난거야!”라는 식으로 꽃과 녀자는 “곱다”는 류사성으로 꿈과 현실의 거리감을 줄여줌과 동시에 그 어떤 가능성과 희망으로 신경세포를 자극해주는것이다. 그외에도 동시성, 의인성 등 여러 가지 법칙에 의해 꿈과 현실이 서로 짓이기여지고 반죽되면서 꿈속에 현실이 있고 현실속에 꿈이 있게 될 때가 많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꿈에다 비현실적인 환상을 부여시키고 신앙할 때가 있게 된다. 그러한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현란해보인다. 헌데 꿈을 깨고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너무나도 검고 먼지처럼 부옇게만 보인다. 그야말로 천지현격식이여서 비교가 안되는것이다. 비교가 안되니 꿈은 꿈대로 꾸고 현실은 현실대로 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현실이 비참하면 꿈을 좀 작작 꾸고 좀 자그만치 보따리꿈이나 꾸어야 될수록 그 격차를 줄일수도 있을텐데 많은 사람들의 많은 경우에는 이와 정반대로 되는 현상이다. 한 시골 마을의 밤이다. 푸대죽에다 삶은 감자 두알을 먹은것이 배에 차지 않아 소년은 초저녁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낮에 소여물을 써느라 채 하지 못한 숙제도 있지만 전기가 없는 골안이라 등잔불을 켜야 하겠지만 아버지가 성냥개비와 기름을 랑비한다고 급한 일에도 엽초 한대 태울 시간내에만 켜게 했다.시골의 밤은 여름에도 그렇게 길어질수 밖에 없었다. 숙제를 할수 없었기에, 책을 볼수가 없었기에 소년은 늘 뒤뜨락 오얏나무뻐등가지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하늘의 별과 달을 올려다 보았다. 검푸른 융단을 펴놓은듯한 밤장막에 깊게도 박히고 얕게도 박혀서 수없이 총총 반짝이는 별들을 다 헤여보려고 여러번 시도해보았지만 번마다 헛수고에 불과했다. 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달, 달은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횅창 밝은 보름달이 뜨는 초저녁이면 당금 팔을 쑥 내밀면 차디차게 만져질것만 같기도 했다. 헤아릴수 없는 별들, 만져질것만 같은 달, 그 별과 달이 소년을 환상의 꿈나라로 끌고 들어가군 했었다. 꿈나라로 들어갈 때마다 너무나도 눈부시고 찬란한 장면들이 펼쳐지군 했었다. 그래서 “야—“하고 감탄이 나갔고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였다. 그 감탄육성과 비음에 젖은 흥얼거림이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가면서 천고의 고요함을 깨뜨리며 멀리멀리로 퍼져나가는듯, 사라지는듯 하더니 웬걸, 다시 공간을 타고 되울림으로 은은하게 들려오군 했다. 밤안개에 젖었는지 새벽이슬에 젖었는지 그 울림은 늘 음울한 저음으로 변해있었다… 그 울림, 그 메아리의 울림이 음울하고 슬펐기에 소년의 허파를 촉촉이 적셔주며 주린 창자를 달래주었고 기나긴 시골의 밤과 더불어 기나긴 환상의 터널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하였다.환상의 꿈속에에서 작곡되고 편곡되여 울리는 메아리는 자연의 바람소리와도 달랐고 동물들의 울음소리와도 달랐다. 왜서 달랐을가? 소년은 해석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달랐을가? 소년은 설명할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만 환상속에서 느껴보는 감각뿐이였다. 소년은 음악에 대해 몰랐고 노래소리도 별반 들어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예술의 감화를 받으며 심신을 도야시키지 못하고 자랐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들을수 있는 리듬적인 곡조래야 동구밖 개울가와 논밭으로부터 울려오는 개구리들의 대합창이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자갈사태가 쏟아지듯 요란했고 방문을 꾹 닫으면 자장가인양 요요하게 귀가를 간지럽혔다. 그러다가 유선방송이 집집의 처마밑에 가설되면서 “사회주의 좋다”라는 노래소리가 대합창으로 들려왔을 때 소년은 얼마나 격동되였는지 모른다. 그처럼 명랑하고 박력있는 선률에 전신을 부르르 떨기도 했었다. 그해 보리고개를 넘으면서 마을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두 아기가 영양보충도 하지 못한채 류행성질병에 걸려 죽고말았다… 소년은 크면서 문학명작도 적지 않게 독파했고 노래도 많이 배웠고 세계명곡도 가끔 들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법칙이 아닌 법칙적인 정감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져들고있음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돌아설수도 없게 되였었다. 문학도 비극적인 작품에 빨려들고 노래도 슬픈 선률에 빠져들군 했다.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작품들, 가슴을 차분히 적셔주는 선률들, 눈물속에서 울부짖는 주인공들의 비명이 가슴속에서 울렸다가 다시 메아리로 울리며 뇌리를 칠 때면 전신이 찢겨나가는 처절함을 느껴보고 끊어질듯 마는듯, 스치는듯 마는듯, 아리고 쓰려나는 바스음에 목구멍이 말라들 때면 애절함에 가슴을 푹 잠궈놓고싶어진다. 가난에 쪼들릴수록 욕망은 더 커지고 운명이 비참해질수록 희망이 더 커지고 모든것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꿈은 더 커진다. 일반적으로 서양음악을 감상하다가 보면 늘 심정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바로크음악의 최고봉을 이룬다는 바흐의 고전기악곡을 들어보면 역시 음울한 기분에 빠져들고 차이콥스키의 “비창”이나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을 들어보면 역시 비장한 심정을 금할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세계명곡도 음악적선률로 인간의 가장 비통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비애에 잠긴 현실속에서 현실의 비분으로 씻겨지는 미래의 환상세계를 상상해볼수 있게끔 했다. 폭풍전야의 해변가, 천년  바위를 들부시며 포효하는 물보라, 트럼펫고음이 빼주는 번개불뢰성에 반주되는 관악대의 일사분란한 기세, 다뉴브강의 굼실거리는 물결소리, 폴란드대초원에서 구름떼처럼 하얗게 흐르는 양떼무리, 바이올린고음이 요요하게 뽑아내는 비단자락 찢겨날리며 반주되는 현악대의 도고한 자세, 시베리아의 기나긴 봇나무숲을 끝없이 지나가는 군인들대오… 음악의 흐름을 따라 고저장단강약의 리듬의 률동속에서 련상되는 장면들이다. 몇백년, 몇천년 찬란하게 꽃피워온 문화의 꽃봉오리속에서 왜서들 전쟁을 벌려 포연이 자옥한 비참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일가? 그 비참세계도 역시 음악속에서 막을 올렸다가 음악속에서 막을 내렸었다. 막을 내린다음부터는 그것이 되울림으로 되여 시대라는 벽에 부딪치면서 변성되여 왔다. 소리, 윈시적인 소리는 야만의 울부짖음이였고 정리된 소리는 문명의 부름이였다. 야만의 울부짖음은 대부분 강자의 소유였고 문명의 부름소리는 대부분 약자의 호소였다. 약자의 호소였기에 언제나 비에 젖어 애절함을 토로했다. 그 애절함이 선량한 마음들을 적셔주면서 공명을 일으키고 그 심장마다에서 굽이치던 공명이 다시 메아리로 울려 더욱 부드럽고 온화한 공간을 이루어주게 되는것이다. 그 공간속에서 또한 원래의 그 실감나던 원성을  다시 들어볼수가 있고 이쁘고 고운  원래의 그 아릿다운 형태를 다시 볼수가 있어서 감동을 금할수 없게 한다. 약자의 약하고 여린 렬세, 그것이 서로 엉키고 쌓이면 그 어떤 힘이나 무력으로서는 억누를수도 없고 제거할수도 없는 지하막장의 어마어마한 저력으로 형성된다. 그러다가 일단 그 어떤 파렬구나 분출구가 생겼을 때에는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화산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인류는 아직까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화산폭발”을 공제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화산폭발”의 주요 요소인 마그마의 형성과정도 어찌보면 약자의 처지와 비슷한 것이다. 문제는 “마그마의 용암분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하온도의 가열, 액체가스의 팽창, 고체 화강암의 용해반응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자연의 힘을 빌어 종합적인 작용이 이루어지기때문이다. 그런 여러 가지 종합적인 작용에 의해 일어난 “화산폭발”은 그 무진장한 에너지로 주변의 자연형태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개변시키는것이다. 새롭게 산맥을 이루고 새롭게 강줄기를 빼고 새롭게 평야를 이루어준다. 물론, 그 과정에 자연에 주는 피해도 엄청나게 클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약자, 약소군체에 잠재되여있는 저력도 이처럼 막대하고 막강한것이다. 그 막대하고 막강한 저력을 이끌어 낼수 있는 “분출구의 작용”이 바로 “비에 젖은 소리”를 내는것이다. 우리의 사상, 우리의 리념, 우리의 철학관이 그 소리의 일부분이고 우리의 문화와 우리의 언어로 창작되고 부각되는 예술품들, 역시 그 소리의 일부분 메아리로 되여 울리고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아직까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약소군체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강한 소리를 낼 때가 적지 않았었다. 약한 사람이 강한 소리를 내자고 하면 가끔 힘에 부칠 때가 있지만 약한 사람이 약한 소리를 내면 힘에 부치지 않고도 길게 뺄수가 있게 된다. 약한 사람들의 약한 힘이 이 과정에서 약하지 않은 저력으로 모아질수가 있다. 오늘 이 밤에도 총총한 별무리들 사이로 밤이슬에 푹 젖어 가늘어진 그 어떤 메아리가 끊어졌다가는 이어지면서 아득하게 들리고 있다.                                                                                                         
42    문예창작과 “계획생산” 댓글:  조회:4470  추천:4  2015-09-21
어느 땐가 어느 한 문학세미나모임에서 만난 문우가 필자를 보고 명년엔 어떤 창작계획들이 있는가고 격려적인 관심을 돌렸다. (그래, 묵은 해도 가고 새해가 밝아오고 있을 때라 새해계획도 세워두는것이 좋아! ) 그날 저녁으로 담배 한갑을 태우면서 창작계획을 세워보았다. (…단편쯤은 그래도 한달에 한편씩은 탈고해버리고…가만있자, 한편에 2만자씩 쳐도 일년 열두달이면 20만자도 넘지? 좀 과하군! 전문직업창작원도 아닌데 뭐, 밥먹고 글만 쓰겠나! 그럼 두달에 한편씩은 어떨가? 그래, 좀 여지도 둬야지. 수필도 쓰고 칼럼도 써야 하니까. 두달에 한편이면 1년에 6편, 이 6편가운데서 2편쯤은 지구급 문학상에다 견주고 한편쯤은 국가급에다 걸어봐야지. 그리고 수필도 한편쯤은 빛을 낼만한 상이라도 타고…)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나니 어딘가 좀 흥분이 되였다. 진작 일찍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더라면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창작해냈을가? 인젠 글을 쓴다고 필을 끄적거린지도 30년이 넘는다. 30년동안 매년 이런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현하였더라면 아마 발표된 작품이 언녕 내 키를 넘었을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동안 문학상도 얼마나 탔을가!… 허나, 계획을 세웠다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문예창작인것 같다. 계획을 세우고 창작에 달라붙은 그 해에는 그 계획의 절반에 절반도 안되는 소설 한두편밖에 발표하지 못했고 수필과 같은 잡문도 서너편밖에 써내지 못했고 명목이 번다한 여러 가지 문학상에는 후보작으로 거론된 작품조차도 없었다. 문예창작이란 좀 특별하다면 특별한것이다. 하자고 마음만 먹어도 안되는 일이다. 원고료를 로임만큼이나 줄 때에는 문예창작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많았었다. 서넛가운데 한명쯤은 문학도라고 필을 날리며 모두들 숱한 원고를 써냈지만 발표률은 1%도 안되였다. 노력하는것만큼 수확을 얻을수 있는 작업이 아니였다. 그리고 문예창작이란 조건이 구비되였다고 다 좋은 작품을 창작해내는것도 아니였다. 지식을 갖추어야 문예창작을 할수 있다고 해서 대학문을 나왔지만 제대로 창작품을 낸 대학생들이 얼마 안되고 창작의 원천인 생활체험을 많이 겪어야 명작을 써낼수 있다고 해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질도 해보고 공장에 내려가 로동자질도 해보고 부대에 들어가 군생활도 해보고 두루두루 부동한 령역에 여러 가지 전업실무를 다 섭렵해본 사람일수록 큰 작품을 써냈다는 소릴 못들어봤다. 세계를 돌만치 다 돌아보았다는 국제적인 작가들이 세계적인 명작을 내놓았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지만 집구석이나 시골에 붙박혀있던 토배기작가들이 세계문단을 들썽거렸다는 말은 가끔씩 들어보군 했다. 그리고 또 문예창작이란 갖춤새를 다 갖추고 준비가 잘된 상황에서만 가능한 작업만도 아니였다. 준비없는 전투는 패전하기 마련이고 준비없는 농사는 흉작을 맞아올수 밖에 없겠지만 문예창작은 좀 이와 다를 때도 있었다. 구상을 무르익히느라 오래오래 낑낑 갑짜르며 이래저래 더덕더덕 붙히고 깁고 뜨개질해서 내놓은 작품일수록 그닥잖은 작품이 될 때가 많았고 그 어떤 순간적인 시각에 불꽃처럼 반짝 튕기는 령감의 꼬리를 답싹 잡았을 때에 그것이 명작이 될 때도 있었다.  문예창작은 또한 상을 많이 주고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명작이 나오는것도 아니다. 명작은 두부모처럼 틀에 맞춰서 내오는것도 아니고 아파트건축물처럼 설계도면에 따라 시공해내는것도 아니였고 더구나 항목건설처럼 투자해서 효과를 보이며 나오는것도 아니였다. 얼마만큼 큰상을 주겠으니 얼마만큼 큰 영향력이 있는 명작을 써내라고 하면 써낼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있을가!  돈을 퍼붓는다고 명작이 주렁주렁 열매를 맺는것은 아닌것 같다. 어쩌면 시장경제의 자본운영법칙과 맞지 않는것이 문예창작인것만 같기도 하다. 이런 리치쯤은 누구나 다 터득하고 있다. 헌데 지금 이런 리치를 무시하고 “계획”이 아닌 “계획창작”에 의한 문예작품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그 어떤 기념행사를 위해서 문학작품을 창작하거나 그 어떤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창작되는 작품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우리의 문학에도 만백성이 기념하는 력사의 빛나는 사실이 문학적인 작품으로 창작되여야 하고 전기적인 색채를 띤 민족영웅들이 문학적인 형상으로 부각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문학창작의 주류가 되는것은 아니다. 우선 그것은 력사에 존재했던 기성사실을 기록하는 실록이 위주로 되여야 하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 전제가 있다. 때문에 창작이 위주인것이 아니라 실록이 위주인데 거기에다 문학적인 수법으로 색감을 색다르게 부여할 뿐이다. 기실 기념성적인 력사와 전기적인 인물들에 대한 조명은 력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을수 있다. 문예작품에서 생명력은 창작이다. 우리의 문예창작주류가 이러한 계획적인 기념행사와 인물전기에 매워지질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문예창작이 한층 더 높은 창공에서 나래를 펴칠수 있지 않을가! 그다음 여러 가지 류형의 프로젝트에 따르는 공모식작품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특정된 시기에 특정된 프로젝트때문에 공모활동을 벌려 작가들의 힘을 빌기도 하고 그 방면에 대한 창작을 고무격려하는것도 필요한것이고 또한 공모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우수작품들이 창작되였던것이다. 허지만 공모활동은 필경 림시대책이고 장구지책이 아니다. 때문에 모 종 “계획”적인 요구나 조건에 응해야 공모에 선정될수 있기에 이러저러한 속박을 면치 못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이런 활동에 응하는 습괸이 생기게 되면 자연히 창작개성이 마모될수도 있다. 창작개성 역시 문예작품의 생명력인것이다. 이 밖에도 “계획”성적으로 창작이 작업화조작으로 유도되는 페단들이 적지 않다. “기인우천(杞人忧天)”이라 뭐 쓸데없는 근심이지만 우리의 창작주류가 흐려질가봐 한두마디 해본다.  
41    아문 상처를 꼬집어내는 짜릿한 아픔 댓글:  조회:4723  추천:5  2015-08-31
요즘 영화보기모임을 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휴식시간을 리용해서 영화 한편을 보고 제가끔 나름대로 관후감을 털어놓고는 이러쿵 저러쿵 서로 쟁론을 벌리기도 했다. 참, 재미있고 의의있는 모임이였다. 영화란 늘 실생활보다 한층 높은 차원에서 각색되는 생활의 재현이기에 많은 감동에 가슴을 적시게 되고 이외의 충격에 심장이 툭툭 뛰게 되고 화면속의 짙은 정감흐름에 피의 흐름이 빨라지게 된다. 지금은 영화예술도 예전보다 휠씬 다채롭고 우아해졌고 발전했다. “하리파인(下里巴人)”식의 직설적이고 적라라하고 직감적인 표현수법으로부터 점차 “양춘백설(阳春白雪)”식의 굴곡적이고 은유적이고 회유적이고 은은하고 유모아적인 표현수법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주제의 심각성, 인물들의 이미지, 줄거리의 파노라마적인 굴곡성도 실생활의 방울방울 떨어지는 이슬의 세절속에서, 평범한 백성들보다 더 평범한 배우들의 세련된 연기에서, 화려한 화면의 클로즈업화로 시력효과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영상의 기교로  피곤해지는 관중들의 시각적정서에 활성산소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이미지로 새롭게 오픈되고 있는 영화들을 보면서 한가지 뚜렷한 공명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상을 새롭게 느껴보았다. 흘러간 세월속에서 우리 만백성들이 이러저러한 정치와 경제적인 동란과 격변의 폭행에 릉지처참 당하고 상처를 입었던 아픔을 다시 살살 긁어내여 아련하고 알싸한 아픔을 다시금 느껴보게 하는 과거사의 재현이였다. 개혁개방초기에 우리의 문학과 영화작품들에서 이러한 과거사들을 “상처문학”이라든가 “뿌리찾기”창작활동을 통해 저수지의 수문을 활 열어젖혀놓은듯 왈왈 토해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적라라하게 노기충천하게 직설적으로 활딱 벌거벗고 수십년의 종천지한을 성토식으로 풀어냈었다. 그렇게 풀어내고 씻어내고 처치했기에 그 아픔의 상처가 점차 아물어버렸던것이다. 헌데 오늘날에 와서 작가와 예술가들은  그 아물어버린 상처를 다시금 뜯어내며 잊어먹을가 하던 그 아픔을 재차 되새겨보게끔 시도하고 있다. 그제날처럼 주먹을 내들고 구호를 웨치는 성토식이 아니라 잔잔한 생활의 흐름을 타고 아득해지는 추억속에서 아련하게 떠오르는 음미식의 예술적매력을 보이고 있다. 영화 “귀래(归来)”에서는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억울하게 당했던 한을 한 녀자의 병태적인 기다림속에서 아련한 회한을 금치 못하게 하였고 영화 “세월속의 영화(电影的往事)”에서는 한 녀자애의 변태적인 성장과정을 통해 되찾을수 없는 그때 그 사람들과의 친분을 위해 소리없는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고 영화 “살자니 살면서(活着)”에서는 해방전 가족의 변천사로부터 해방전쟁의 처참함, 그리고 해방후의 생산자료의 공영합작화, 대약진의 용광로의 불길, 재해년의 배고픈 고생, 문화대혁명의 뒤죽박죽에 이르기까지의 입었던 상처를 해학적으로 긁어내여 쓰디쓴 웃음속에서 아련한 아픔을 감내하게 한다. 너도나도 다 알고있는 세월속의 그 이야기였고 또 반복적으로 표현되였던 사회문화적테마이지만 또 다른 형식으로, 또 다른 맛으로, 또 다른 색채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사람들의 령혼속에, 사람들의 정감속에 깊숙이 잠겨있었던 그 앙금을 체로 쳐내는 감화력을 보이고 있다. 정말 잔잔한 경이로움에 세세히 젖어드는 매력이였다. 구호식이나 성토식같은 표현수법으로서는 표현할수 없는 매혹적인 감화력이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종합예술로서의 이처럼 매혹적인 매력을 종합적으로 표현하자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종합예술분야에서는 아직 이런 종합적인 예술매력을 추구함이 부족한것 같다. 우리의 문학에서, 우리의 가무에서, 우리의 화술에서, 우리의 촬영에서 아직까지 잔잔하게 아련하게 소리없이 가슴을 적셔주고 해학적인 유머속에서, 은은한 음미속에서, 굴곡적인 회유속에서 여운을 남기며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할만한 작품들이 너무나 적다. 새 작품들이 나올 때마다 대단하다고 좋다는 절찬의 소리는 높아가고 있지만 진정 독자나 관중들의 공명을 자아낼만한 작품은 너무도 적은 실정이다. 예술은 량으로 판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질로 승전고를 울린다고 고금중외의 경전명품들이 경종을 울려준지도 이슥하다.  
40    도농일체화와 우리의 농촌 댓글:  조회:3696  추천:4  2015-08-08
전반 중국의 새로운 경제발전모식에서 도농일체화가 가장 거창하게 추진되여 왔고 또한 거대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갈길이 멀다. 멀기에 조급정서를 극복해야 한다. 먼길을 급급하게 가다보면 다리를 상할수도 있고 길을 외낄수도 있다. 목전 도농일체화 추진사업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보면 예상보다 복잡하여 균형이 잡히지 못하고 있다. 작년까지만해도 도농일체화는 일종 발전동력을 시동하는 열쇠처럼 관건화제로 떠올랐지만 금년에 들어서면서 확연하게 쑥 잦아들었다. 경제가 발달한 지역과 락후한 지역과의 격차가 커지고 있고 대중도시와 미형소진들과의 차이도 벌어지고 있으며 하드웨어건설은 올라가고 있지만 소프드웨어건설이 따라가지 못하고 치적은 휘황하지만 인성본위주의를 구현할수 있는 배려정책이 따라가질 못하는 등 페단이 크다. 또 적지않은 지구에서 인프라건설은 보기좋게 해놓았지만 농민들의 민생과 관련되는 취업, 보험, 의료위생, 교육문화 등 방면의 환경조건들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도농일체화는 우선 민생조건개선을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 특히 농민들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추진시켜야 한다. 농민들을 도시시민으로 만들자면 우선 자원배치면에서 도시시민들과 동등한 공유권을 지배할수 있게하여야 한다. 취업수익, 양로보장, 복리보조, 의료보험, 교육평등, 문화향유 등 모든 면에서 진정한 도시시민이 될수있게끔 해주어야 한다. 지금 중국에는 농촌호적에 등록된 농민이 무려 8-9억에 달한다. 그중 절반을 도시시민으로 만들자고해도 천문학적 자금이 들어가야 한다. 적지않은 지역에서 지방재정으로는 이런 자금을 해결하기가 곤난하다. 이처럼 도농일체화에서 자금이 큰 걸림돌이라면 농민들 토지가 또한 관건적인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아직까지 농촌토지가 농촌금융처럼 자본화가 되지못했다. 토지의“3권재확립”이 된 다음에 토지의 류전과 경영에 대한 법제정립이 아직 명문화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단시일내에 전부 다 명문화될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도농일체화를 추진시킨다면 기필코 많은 후유증을 남기게 될것이고 그 후유증이 시도때도 없이 재발하면서 나중에는 엄중한 후과를 초래할수도 있다. 동북3성에 분포되여 있는 우리 조선족농촌의 실정을 따져보아도 대부분 도농일체화를 조화롭게 추진할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일부 도시와 린접해 있는 고장에서 도시의 확장건설에 그저 땅을 떼우고 현금을 받아쥐는 “건설일체화”에 말려들 뿐이다. 수박을 잃고 깨를 줏는 격이라할가! 협상, 협동, 협력이 아닌 매매관계로 추진되고 있는“도농일체화”이다. 그리고 지금 일부 지방에서는 도농일체화계획에 따라 향진과 향진이 합하고 촌과 촌이 병합하고 마을과 마을이 조정통합되면서 원래의 조선족전통마을들이 먹히우고 있다. 마을의 명칭도 없어지고 조선족 농촌간부들의 립지도 적어지고 따라서 언어환경도 점차 바뀌여지고 있다. 조선족이 다나가고 적어진데다가 이런 조정통합이 강행되면 더구나 풍전등화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앞으로 외국로무송출이나 도시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귀향창업을 시도해 보려고해도 환경은 더 어렵게 될것이다. 우리의 땅을 지키고 민족농업의 실력을 키우는데도 매우 불리하게 될것이다. 물론 도농일체화가 진척됨에 따라 여러가지 우대정책들이 제정되면서 우리에게도 유리한 조건들이 많이 주어지고 있다. 그런 우대정책들을 리용하고 그 덕을 보자면 너무 급급히 서둘지 말아야 한다. 더 좋은 정책과 근본적인 법규는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완벽한 형태로 나오게 될것이다. 그 시간을 리용해서 우리는 선전고동사업을 많이해야 한다. 귀향귀농할 사람들을 고무하고 기회를 바로잡도록 일깨워주어야 한다. 지금부터 사람마다 능력을 키우고 마을마다 실력을 다져놓으면 앞으로 도농일체화 추진사업에서 진정 협상의 일방 대표로, 협력의 파트너로 될수있는 자격을 따낼수 있을것이고 막대한 부의 창조자가 될수 있을것이다. 중국의 절강성이나 강서성 일대를 돌아보면 도시와 농촌을 분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농촌가운데 도시가 있고 도시가운데 농촌의 생태문명이 있다. 그 고장에서는 향진기업이나 촌민위워회가 도농일체화의 주동권을 쥐고 있기에 그 어마어마한 수익도 남먼저 배분받을 자격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헌데 우리 여기에서는 도시의 개발상들이 주동권을 쥐고 있기에 땅의 경영자인 농민들은 피동이되여 건설수익을 배분받을 권리조차 제대로 향수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토지가 징용되면 토지보상비만 받아 챙길뿐이다. 우리가 도농일체화 과정에서 당당한 수익배분자가 되자면 어떻게 해야 할가? 지역에 따라 부동한 대책이 필요하겠지만 한가지 원칙만은 통일되고 견지하고 지켜야 할것 같다. 바로 우리 농민들 리익을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는것이다.     연변일보 2015-8-5
39    로동과 자본, 그 수익격차와 책임소재 댓글:  조회:3696  추천:2  2015-07-27
로동, 세상을 알기 시작해서 삶의 기본기능이 로동이라고 기본상식으로 전수받은 우리였기에 지금까지 로동을 우리의 기본 본분으로 지켜왔었다. 로동으로 먹고 살면 그건 영광이요 놀면서 먹고 살면 그건 수치였다. 그래서 놀면서도 잘먹고 잘 살았다는 지주나 자본가들을 증오했고 부지런히 일만 하면서도 못사는 로동자나 농민들을 사랑하고 동정해왔었다. 헌데 어느 때부터였던가? 놀고먹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을가? 앞으로는…) 불안해질수밖에 없는 사회현실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불안해지는 근심거리를 무시하고 사회는 노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물질적문명이 더 발전하고 풍요로워지고있었다. 세계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든 선진국 대부분 나라들에서는 절반이상의 국민이 일자리가 없이 “놀고먹는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놀고먹는 국민들이 수치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단다. 지금 우리 사회가 놀고먹으면서도 수치감을 모르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놀자고 해서 노는것이 아니라 놀수 밖에 없는 사회로 되고 있다. 우선 산업이 부단히 분화되고 개혁됨에 따라 모든 분야에서 집약된 기술과 과학응용이 로동을 대체시키고 있다. 옛날에 백사람이 하던 일을 지금은 열사람이 하게 되였고 앞으로는 열사람이 하던 일을 한사람이 하게 된다. 한 사람이 해도 그제날 백사람이 할 때보다 효과가 엄청 더 크다. 효과가 큰만큼 로동하는 사람들의 수익도 올라가야 하는것이 순리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수익이 올라가긴 가지만 경제효익의 증장폭도와는 비기기가 가련할 정도로 거부기걸음이다. 로동력을 팔아 수익을 얻는 로임은 계약제수입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계약제수입은 원가가 낮고 위험이 적고 정기적으로 현금을 줠수 있는 등 우점이 있는 반면에 시간, 강도, 질, 수량 등 작업환경에 얽매워야 하고 계약된 수익에 공제되여야 한다. 로동이 창출해낸 리윤을 배분받을 권리가 없다. 리윤은 누가 가져가는가? 리윤은 자본의 몫이다. 로동이 창출해낸 잉여수입은 자본을 투자한 사람이 가져간다. 지금은 자본이 모든걸 영위해 나가는 세월이다. 자본만 투자하면 항목도 나오고 거기에 따르는 우대정책도 나오고 로동력도 나오고 나중에는 엄청난 리윤도 나오는것이다. 그런 자본이 세계를 변신시키고 있다. 각계, 각 계층, 여러 업종, 국제적관계를 포함해서 모든 분야, 모든 령역에서 자본만 투자되면 못해낼 일이 없다. 자본투자에서 얻은 리윤의 일부분은 투자한 사람의 수익으로 되고 일부분은 재투자에 투입되여 다시 더 큰 리윤을 창출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의 량성순환이다. 자본을 굴려서 나오는 이런 리윤의 다른 한 사회적속성은 책임감과 위험성이다. 투자할 때 항목을 제대로 쥐는가 못쥐는가에 따르는 책임과 위험, 국가법률과 각종 정책규제를 제대로 지켰는가 못지켰는가에 따르는 책임과 위험, 로동자들의 안전생산과 계약로임을 제대로 지불했는가 못했는가에 따르는 책임과 위험, 아무튼 체력로동이나 뇌력로동을 포함해서 전반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책임과 위험을 다 감당할수 있는 리윤이 나와야 하는것이다. 로동자가 로력을 판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자본을 투자한 사람을 찾아가야 하지만 자본을 투자한 사람이 리윤을 보지 못했을 때에는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가? 사회에 널려진 소비자들을 찾아가야 하고 시장을 찾아가야 한다. 헌데 무정한 시장은 리윤을 보지 못했다는 그 어떤 구실이나 사정을 들어주지 않는다. 때문에 자본으로 리윤을 보자면 막강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조선족사회도 역시 로동력자원은 풍부한데 자본운영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로력시장에는 뛰여들었지만 자본시장에다는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방면에서 우리는 지금 타민족에게 뒤지고 있다. 중국에는 지금 많은 투자이민들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로 자본수출을 확장해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로무송출단계에서 20여년동안 머물러있었다. 개화문명에서는 언제나 앞장에 섰던 민족이였는데… 지금 국내적으로도 자본축적, 융자도경, 긍융활용 등 방면의 여러가지 규제들이 완화되면서 많은 기회를 포착할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합작, 협업, 공영의 조건과 기회가 많이 주어지고 있다.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시장이 우리에게 장터를 마련해놓고 기다려 주질 않는다. 목전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어떻게 하면 로무송출과 자본축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면서 로무송출을 위주로 한 수익의 다원화를 실현시키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방면에 우리는 지금 우세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여러가지 플랫폼으로 구축할수 있게끔 실제적으로 리드할수 있는 조직적체계가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 자본이라는 이 시장경제의 핵을 돌릴수 있는 여러가지 류형의 조직들이 나와야 한다. 절대 조직의 규모나 급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시장에서는 규모가 크다고 해서 우선하고 급이 높다고 해서 우대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땅이 있다. 땅을 토대로 한 고향을 플랫폼으로 여러 가지 경제적실체를 조직할수 있고 우리의 문화를 플랫폼으로 각종 민간단체를 조직할수 있다. 지금 적지 않은 민간단체들이 나왔고 조직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자본을 주축으로 삼지 않고 조직되였기에 조직된 분야, 자기의 령역, 전업성실무범위내에서도 시장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외부로는 의뢰성적인 지원, 협찬에 의거하고 내부로는 수금, 모금, 의연에 의거하고 있다. 이런 운영방식도 필요하겠지만 앞으로는 점차 자본운영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질수 있고 더 크게 발전할수 있다. 자본운영에서의 관건은 책임감이다. 무릇 그 어떤 조직을 조직하든지간에 그 조직에 련관되는 사람과 일에 대해 책임질수 있어야 한다.   로동이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창조해낸만큼 지금도 앞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런 영광스러운 전통적인 본분을 지켜나가자면 계속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 지켜내기가 곤난해지는 세월의 흐름이다. 한 차원 더 높은 “자본운영”이라는 “로동”속에 뛰여들어 어떻게 새로운 “로동기능”을 닦겠는가고 고민해보아야 할 시기에 이른것 같다.       
38    “일대일로”청사진에 비추어보는 우리의 벼농사 댓글:  조회:3562  추천:2  2015-07-06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이 변하고 력사의 흐름에 따라 세월이 변한다. 70여년전, 제2차세계대전이 최후의 판가리전 포연으로 세계를 자옥하게 삼키고 있을 때였다. 세계 방방곡곡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실업기아, 통화팽창, 금융위기, 무역페쇄, 무너진 공장건물,  동강난 레루쪼각…어디로 가나 눈뜨고 볼수 없는 비참한 참상이 평화의 새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세계는 어느 길로 나아갈것인가? 세계적인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이 전쟁후의 경제발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 등 대국의 제의하에 련합국의 명의로 국제적인 금융경제회의가 1944년7월에 미국의 브레턴우즈에서 열리게 되였다. 모두 44개 나라가 참가하였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스가 참가하여 전후경제발전에 대한 방안을 내놓았고 기타 여러 나라의 금융전문가들도 분분히 자기들의 방안을 제기했었다. 중국의 국민당대표이며 대자본가인 공상희도 장개석의 위탁을 받고 참가하여 나름대로 자기의 방안을 내놓았었다. 모두들 “너 락후한 중국에서 뭐 어째보겠다고 어실대느냐”하는 야유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튼 그 회의석상에서는 전면적이고 실행가능성이 있는 방안들도 많이 제기되고 어처구니없는 방안들도 적지 않게 나왔지만 모두 부결당하고 나중에 미국이 제기한 방안이 통과되였던것이다. 원인은 단 한가지, 당시 미국이 세계의 경제최대강국으로 부상했기때문이였다. 제1차세계대전까지는 영국이 세계최강국위치를 지켜왔었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서 미국이 영국을 밀어내고 그 위치에 서게 되였던것이다. 이것이 자본사회의 진리이다. 누가 실력을 갖추면 누가 앞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 회의에서 미국돈—딸라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하는 황금에다 꿰매여놓았고 국제적인 화페로 인정하고 딸라를 위주로 한 국제적인 화페체계를 구축하기로 하고 “국제화페기금조직”, “세계은행”, “국제무역조직” 등 3대국제금융기구와 경제무역기구를 내왔었다.  그때로부터 국제경제금융질서는 이 3대기구를 통해 돌아갔고 미국을 따른 나라들이 경제적리득을 많이 따게 되였다. 그 가운데서도 영국이 시종 미국의 뒤를 따르며 지켜주었었다. 우리는 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말한다. 그런 변화가 7번 일아난 뒤에 세계적인 경제금융질서도 뒤바뀌기 시작했다. “뭐 어째보겠다고 어실대느냐?” 하는 눈총을 받던 중국이 과연 국제적인 경제금융무대에서 “어실대”게 되였다. 중국경제가 세계급정상으로 부상되면서 세계금융시장중심이 구라파로부터 아세아로 전이되였다. 자원이 풍부하고 로동력이 집중된 아세아에 많은 투자항목들이 생겨나고있었다. 자본투자가 활성화되면서 아세아의 많은 신흥국가들이 경제적으로 궐기하게 되였다. 그 결과 돈도 많아지게 되였다. 세계딸라총액의 3분의 2가량이 아세아에서 돌고있다. 이는 어마어마한 목돈이다. 그런데 그 돈이 각국, 각자의 손에 흩어져 있어서 집중해 쓸수가 없는게 흠이였다. 자원이 풍부하고 로동력도 많고 땅도 넓은데 돈까지 흔해져서 할일들이 많아졌다. 할일들이 많아졌지만 할수 있는 일들이 많지 못했다. 왜서? 력사적으로, 환경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계절기후적으로 적지 않은 장애들이 가로놓여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고 관건적인 고리는 인프라건설이 따라가지 못하는것이였다. 이 면에서 중국이 앞장에 나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세인을 놀래울만큼 고속경제의 장성을 은근하게 이룩해낸 중국인들에게는 한마디 명언이 있었다. “부유해지려면 길부터 닦아라!” 짧디짧은 십 여년동안에 중국의 고속철로와 고속도로가 광활한 대지에 거미줄처럼 늘어지게 되였고 콩크리트화된 도로가 미세혈관처럼 천애지각 깊고깊은 시골오지마을까지 사통팔달되여 거대한 경제적부가가치를 창출할수 있는 거대한 교통망을 구축해놓았던것이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있는 중국이 이번에 아세아와 구라파를 이어놓을수 있는 유라시아경제활성망을 구축하자는 “일대일로”의 청사진을 펼쳐냄과 동시에 ”아세아인프라시설투자은행(AIIB)”의  오픈방안도 내놓았다. 내놓자마자 세계여론의 주목을 끌었고 여러 나라의 옹호와 지지를 얻었고 순간적으로 50여개 국가의 신청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특히 70여년간 미국의 뒤를 따랐던 영국에서 선두적으로 태도표시를 했다. 영국의 태도표시가 선동원배역을 놀았던것이다. 그러자 독일, 불란서 등 서방 주요 국가들에서도 인차 뒤질세라 태도표시를 했다. 그들의 태도표시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대일로”의 전략적인 청사진에 큰 먹을알이 묻혀있음을 말해준다. 역어빠진 영국사람들은 절대 밑지는 노릇을 하지 않기 위해 상황변화에 눈치가 빠르다. 먹을알이 클뿐만아니라 그것이 지속적인 지구성을 띤 수익성보장이 가능함도 보아냈던것이다. 과거 70년은 딸라를 쥐고 놀았는데 미래 몇십년내지 몇백년은 아마도 인민페를 쥐고 놀아야 놀멋이 있겠구나 하는 감각을 찾았던것이다. “일대일로”의 기나긴 연선에 분포되여있는 인구는 44억에 달하고 경제총액은 20여만억딸라에 달한다. 인구, 자원, 지형, 인문, 제도, 문화, 법률, 신앙, 기후 등 모든 환경과 여건이 복잡하게 얽혀진 지역이고 아시아, 구라파, 아프리카 등 3대주를 이어주고 련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지면제한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곤난한데 “일대일로”청사진을 펼쳐놓고 우리 민족과 관련되는 방면을 찍으라면 필자는 농업을 꼽겠다. “일대일로”연선과 연해에 포함되거나 련접되는 나라와 지역이 약 60여개가량 되는데 대부분 나라와 지역에서 부동한 농작물을 부동한 규모와 부동한 재배법으로 경영하고있다. 이번 “일대일로”청사진에 비추어 보면 주요한 인프라건설항목은 도로, 철로, 항공,  통신, 무역 등 “3통(통로, 통항, 통상)”에 관한 항목들이고 농업은 그 뒤로 후기기초건설에 속하는것이였다. 허지만 역시 빠질수 없는 항목이고 미래지향적으로는 제일 인기항목으로 될 주요한 항목으로 부상될 부분이다. “일대일로”전략에는 두갈래 길이 개척되게 되는데 하나는 “해상실크로드경제벨트”이고 다른 하나는 “륙지실크로드경제벨트”인바 “해상실크로드경제벨트”연선의 나라와 지역에는 벼재배업과 과농업이 전통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고 있고 “륙지실크로드경제벨트”연선의 나라와 지역에는 목축, 밀, 목화 등 내륙성축농업이 전통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이 지역의 량식안전과 음식결구개선에 벼재배업이 필연코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것이다. 헌데 이 내륙지역에는 또 기후변화가 크고 지형이 복잡하고 경작환경이 악렬하다. 때문에 열대나 아열대지방의 재배모식으로는 벼농사가 곤난해진다. 오직 한대나 북한대지역에서 벼재배경험이 있는 재배농들만이 이 지역의 수전개척에 성공할 가능성이 큰것이다. 우리 민족이 바로 이 방면에 이미 쌓아놓은 경험도 있고 또한 실력과 능력을 갖출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우리 민족이 이 방면에 그 어느 타민족보다 우세적인 특점과 령성을 지니고 있고 잠재력도 크다. 앞으로 민족의 기둥산업으로 부상시킨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글로벌적인 슈퍼파워까지 과시할수 있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일대일로”청사진에 의해 “아세아인프라시설투자은행(AIIB)”이 오픈하고 거기에 동서방의 적지 않은 나라들의 투자금이 집중되고있다. 남의 돈으로 창업할수 있고 자기를 발전시킬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것이다. 기회가 마련되였다고 누구나 다 그 돈을 쓸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 돈을 쓸수 있는 수준과 아이디어, 능력, 실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이 방면에 원래 내력과 능력이 있었지만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리념상에서 아직 공감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에 사유가 아직 전통적인 관념에서 완전히 해탈되지 못하고 있다. 30여년이란 개혁개방의 풍파를 헤쳐왔고 외국의 선진문화에도 많이 젖어들었지만 아직까지도 품팔이교역에 잔돈벌이로 만족해하고 있다. 전번에 동북아삼각지의 새별로 떠오르는 훈춘에 가본적이 있다. 조선과 로씨아로부터 해양수산물이 밤낮없이 왈왈 밀려들고 있었다. 지금 동해안의 해산물이 오염을 받지 않은 청정해산물이라고 대도시의 고급미식계에서는 부르는게 값이다. 훈춘시내에 수산물가공업체가 수십호나 되자만 가공이 딸리고 운송이 딸렸다. 비행장이 없기에 백여리밖의 연길이나 머나먼 목단강으로 달려야 했다. 원래 훈춘에는 조선족이 대부분이였기에 무슨 일에나 조선족들이 앞장에 나서군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좋은 기회에 수산물가공업체나 조선무역, 로씨아무역에 나서는 업주나 실무원, 운전수들을 보면 대부분 타민족들이였다. 그들의 년간수입은 적어서 몇십만원이고 많아서 몇천만원이였다. 우리의 로무송출수입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우리가 자라나고 살아왔던 고향에서 우리가 섰던 자리가 서서히 변화되는 과정이였다. 그렇다고 나도 그런 업종에 뛰여들수 있을가? 당신에게 뛰여들수 있는 자격증이 있는가? 그 업종에서 다져온 경력, 기능, 실력, 인맥, 신용, 장비 등 방면의 기초가 든든해야 하고 만일의 위험을 감당할수 있는 책임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런 자격증이 없으면 아무리 자기의 고향에서, 자기의 땅떵어리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해도 그저 구경만 할수 밖에 없다. 구경만 하면 참여할수 없고 참여권이 없으면 발언권도 없고 발언권이 없으면 품위가 당당해질수가 없고 품위가 당당해질수 없으면 떳떳한 존엄을 지키기가 곤난해진다. 지금 우리의 조선족농촌에서 일어나는 변화도 역시 이런 문제를 말해주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 좀 농사나 지어보자고 해도 여러 가지 장애와 난제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례컨대 벼농사를 하자고 해도 능력과 실력도 있어야 하고 자본도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경험과 힘으로 해왔지만 지금은 자금과 관리로 해먹는다. 그리고 지출과 수입을 맞추자면 규모경영을 해야 하는데 대개 10헥타르이상 다루어야 평형을 잡을수 있고 십여만원이상의 여유돈도 쥘수 있게 된다. 이러자면 모든 생산자료를 갖출수 있는 재력, 과학적으로 전반 생산과정을 관리할수 있는 지능, 그리고 남의 수전을 장기적으로 임대해올수 있는 신용이 있어야 한다. 헌데 지금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임대해주었던 자기의 땅도 되찾기 곤난해하고 있다. 몇년간 임대밭을 다루어온 사람들이 내놓으라면 그저 순순히 내놓지 않기때문이다. 이런 상횡이 몇년간 더 지속되면 자기의 땅이 있다해도 그 땅을 자기마음대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는 토지에 대한 여러가지 법적규제가 작용하는데 총적으로 농사에서 손을 떼는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될수 밖에 없는것이다. 자기의 땅을 자기의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그 무슨 품위나 존엄을 운운할수 있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위기감을 가지고 바야흐로 다가오고있는 위기를 직시해야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 대책에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위치, 우리가 지니고있는 령적인 내력, 력사적으로 다져온 선지선각적인 충격력,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수준, 우리의 생산적응력을 되살려 내자면 우리의 민족기질에 맞는 민족경제의 기둥산업을 만들어내야 하고 거기에다 모든걸 집중투자하고 거기에서 민주집중제관리를 실행하고 거기에서 지속적인 수입의 다원화를 이룩하여 고층차의 부를 창조해내야 선전적인 민족으로 부상할수 있다. 이 기둥산업으로 될 분야가 바로 벼농사이다. 다른 산업은 우리  민족의 기둥산업으로 될수가 없다. 그럼 왜서 벼농사가 우리의 기둥산업으로 되여야 하는가? 그 배경과 리유는 무엇인가? 벼농사가 현실적으로 우리의 기둥산업으로 될수 있는가 없는가? 그 근거와 조건이 무엇인가?  벼농사를 기둥산업으로 하면 어떤 득과 실이 있게 될것인가? 그 디지털수치와 실질적인 판단은 무엇인가? 그리고 구경 어떻게 해야 우리식의 벼농사를 우리 민족의 기둥산업으로 부상시킬수 있을가? 그 구체적인 보조와 조치가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 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언급해보련다.  
37    30대와 30년을 말하고싶다 댓글:  조회:3846  추천:1  2015-06-17
대개 사람들은 30년을 인생의 한 고비로 삼는다. 벌써 30살을 먹으면 인생 한고비를 넘은 셈이 된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런 고비를 몇번이나 넘을수 있을가? 기껏해야 세번이다. 사람에 따라 나름대로 한번 넘는 사람도 있고 두번 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의 경력을 따져보면 첫 고비를 어떻게 넘느냐가 두번째 고비를 잘 넘길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건적인 다리로 되고있다. 그럼 어떻게 이 관건적인 고비를 넘겠느냐가  그다음 문제로 떠오른다. 산고개를 넘을수 있는 등산이 그 답안이다. 신, 지팡이, 물 등 필수품은 물론, 제일 중요한건 길을 제대로 찾는것이다. 길을 잘못 찾으면 세시간에 넘을수 있는 고개를 다섯시간이나 땀을 흘리며 넘어야 할 때가 있고 또한 고개를 넘지 못하고 에돌게 될 때도 있게 된다. 그럼 고개길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찾을수 있을가? 이미 한두번 그 고개를 넘은 선배가 있다면 알려줄것이고 없다면 지도를 찾아보아야 할것이다. 헌데 인생고비를 넘는 고개길은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 어느 선배도 가보지 못했고 그 어느 지도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초행길을 골라주었던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와 물어볼수도 없고 그 무엇을 뒤지며 찾아볼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세대는 그 고비를 두번 넘은 세대이다. 30여년전 그 첫 고비를 넘을 때 우리는 서로들 만나서 가끔씩 한탄을 튕기군 했었다. “야, 우리가 정말 불행한 세대다!”  태여나서 한창 자랄 때 먹을것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입을것 제대로 입지 못했고 배가 고파 서러웠고 추워서 주눅이 들며 자랐더니 “문화대혁명”이라는 풍운에 감겨들어 공부도 제대로 못했고 학교문을 나서자마자 “광활한 천지”에 나가 단련하느라 밥벌이재능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도시로 돌아와 직장을 찾아 쥐꼬리만한 로임을 타면서 시집장가를 가야 했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쪽방세집살이를 해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얼마 안가서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파산의 변두리로 밀려나가게 되였다… 우리의 첫 인생고비는 그러한 사회환경속에서 넘게 되였다. 지금 우리의 자식들이 곧바로 인생의 첫 고비를 맞아오거나 바야흐로 넘고있다. 그래서 그들과 30년이라는 인생의 한 고비를 두고 하고싶은 말이 많아진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은 우리처럼 인생의 첫 고비를 고생스레 넘기지 않을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사회가 문명해지고 경제가 발전할것이고 문화가 개화될것이니 자유분방하고 랑만적으로 행복하게 넘길것이라고 믿어왔었다. 확실히 지금 그들은 먹을것 입을것 걱정없이 그 고비를 넘고있다. 헌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30대가 거의 없다. 30대라면 30대로서의 행복을 느껴볼 때이다. 그 행복을 느껴보지 못한다면 인생의 첫 고비를 행복하게 넘길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그 뒤로 이어질 기나긴 인생로정이 그냥 행복해질수가 없게 될수도 있다. 그럼 왜 지금의 30대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가? 사회환경이 살만하고 풍요로워졌는데도 말이다. 그들과의 담화를 통해 여러 방면의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다는걸 알았다. 직업, 혼인, 양육, 류학, 창업, 출신…등등, 그 가운데서도 직업때문에 고민하는 30대들이 가장 많았다. 특히 대학이나 중등전문학교를 나온 30대들도 적지 않게 직업때문에 방황하고 있었다. 역시 지금도 경제문제가 대다수 젊은이들이에게 행복을 마련해줄수 있는 토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헌데 우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순 경제적으로만 따지는것이 아니라 존엄이 있고 품위가 있고 지향성이 있는 직업과 일거리, 기능연수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세대와는 한차원 더 높은 요구이다. 요구가 높기에 그런 직업은 문턱이 높아지고 있다. 문턱이 높아지니 웬간한 지식수준이나 기술이나 기능을 가지고는 그 문턱을 넘기가 가빠지고 있다. 그러니 웬간한 수준에서 좀 남보다 뾰쪽하게 내밀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니 자연 압력이 커질수밖에 없다. 압력이 커진 후과는 필경 치렬한 경쟁을 도래하게 된다. 경쟁이 치렬해지면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물론 더 치렬해지는 경쟁에 뛰여들어야 하고 문턱을 넘은 사람들도 더 치렬해진 경쟁에 뛰여들어야 한다. 경쟁이 치렬한 환경속에 뛰여들면 대부분 사람들이 행복해질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대략 만여종의 직업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30대들이 요구하는 직업은 겨우 30여종밖에 안된다고 한다. 거기에 또 이 30여종의 직업도 시기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단히 변화되고 있다는것이다.  그러니 30대의 직업구하기가 지금도 경쟁이 치렬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치렬해질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에 안휘성합비대학의 온원개학자님이 당시 젊은이들이 무슨 업종의 학문을 전공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한적이 있다. “앞으로 인기업종이 될 비인기업종을 골라야 합니다.(要选择将来成为热门的冷门)” 그때 당시 인기업종이 지금은 비인기업종으로 되였고 그때 당시 비인기업종이 지금은 인기업종으로 된 업종이 많다. 당시 온원개학자님의 말을 듣고 비인기업종의 학문에 달라붙어 변함없이 지금껏 견지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 해당부문의 거물급연구일군으로 되였다. 그래서 지금 인생의 첫 고비를 바야흐로 넘고있는 우리의 자식들, 우리의 30대들도 한번 좀 진지하게 심사숙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주제넘게 든다. 목전 인기업종으로 부상되고있는 그 30여종의 직업에만 신경을 쓰지 말고 비인기업종으로 미래지향적인 전망이 있는 업종은 어떤것들이 있는가를 한번 세세히 검토해보면 좋지 않겠는가! 우리는 지금 류행성바람에 한곬으로 몰켜다니는 페단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무송출을 택해서 목돈을 번다고 해서 나도 기어이 그 길로 나가야 하는가? 많은 젊은 또래들이 연해지구에 나가 외자가공업기업에 들어가 괜찮은 관리직에서 틀거지있게 보낸다고 하니 나도 그런 기업을 찾아가야 하는가? 류행이란 오색샤쓰에 유혹되면 큰꿈을 꾸지 못한다. 로무송출이란 남의 밑에 가서 남이 짜놓은 기틀안에서 남의 지시대로 남의 일을 하는것이기 때문에 희망직업이 있을수 없는 로동력만 파는 분야인것이다. 벌써 자원지배에서 서로지간 공동공유하지 못하고 로무일군자신이 밑지며 들어가는 직업인 셈이다. 그리고 토지가 눅고 로동력이 풍부한 아세아지역에서 가공업체는 그 류동성이 빈번해질수밖에 없다. 중국의 로동력원가가 높아지자 적지 않은 외국가공업체가 베트남, 필리핀 등 로동력이 더 눅은 동남아지역으로 옮겨갔다. 일반적인 가공업체는 일떠서면서 3년, 균형을 유지하면서 3년, 파산의 변두리에서 악을 쓰며 3년이라는 말이 있다. 대부분 가공업체는 10년을 유지하기 곤난하고 소수의 가공업체만이 기적같이 살아나 더 높은 차원에서 놀게 된다. 때문에 만약 그대가 가공업체에 뜻을 두고 직업을 구하겠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남이 한다고 남의 뒤를 따라가면 남의 이불을 쓰고 남을 위해 꿈을 꿀수밖에 없게 된다. 30년,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봐도 그렇고 한 민족의 운명을 놓고 봐도 그렇고 한 나라의 흥망성쇄를 놓고 봐도 그렇다. 30대들이여, 지금껏 걸어온 30년의 경력을 소중하게 여기고 다시한번 30년의 재도약을 꿈꾸려면 한 30년쯤 내다볼수 있는 혜안을 예리하게 닦아놓으시라! 무얼로 닦아야 할가?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자신이 활용할수 있는 철학사상으로, 자신이 겪어온 사회경력으로, 자신이 펼칠수 있는 상상의 날개로 꾸준하고 변함없는 탐구와 추구, 창신적인 사유와 불같은 열정, 대담한 도전으로 얼마든지 그런 통찰력을 닦아낼수 있는것이다. 30대에서 30년을 귀중하게 여기시라!      
36    상해에서 맛본 먹거리의 변화 댓글:  조회:4240  추천:1  2015-06-17
  나는 이번까지 상해를 네번 갔다왔다. 대도시의 대명주로 각인되는 상해는 세기적인 차원에서 세계적인 풍운을 감싸고 번창해지는 도시이다. 그 옛날,   아마도  60년대 중반이라고 기억되는데 우리 마을 미자네 아저씨가 상해에 갔다왔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조무래기들이 그집 울안으로 오구구 모여들었다. 그때는 마을 뉘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무리를 지어놀던 조무래기들이 무작정 그 집으로 몰려간다. 그러면 꼭 무슨 먹을 알이 생기지 않으면 생각밖의 선물이 생긴다. 최저한 개눈깔 사탕 한알 아니면 딱지그림 한장쯤은 얻어가질수 있었다. 어느 공장의 채구원으로 객지출장이 업이라고 하는 미자네 아저씨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신사타입이였다. 상해사탕이라고 우리에게 두알씩 나눠준 사탕이 예쁜 빨락종이에 감싸진것이 신기했고 더구나 그 맛이 특별했다. 감스레한 색깔을 띤 그 사탕은 개눈깔사탕처럼 단맛도 있었고 우유냄새도 나고 또 별다른 특이한 고소함도 있었다. 그리고 얼음처럼 깨지는 개눈깔사탕처럼 딱딱하지 않고 아주 녹씬해서 씹어먹기에도 부드러웠고 녹여서 빨기에도 사르르 살살 녹았다. 아무튼 별맛이였고 먹은다음 여운도 감미로웠다. 참, “상해제”라면 굴러떨어지는 말똥도 명품으로 여길만치 그 시기 그 세월에는 “상해”란 이름자체가 브랜드였다. 사람마다 집집마다 그처럼 부러워했던 손목시계, 자전거, 재봉기 등 귀물도 “상해제”가 제일이였다. 1984년도에 처음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보슬비가 잔잔하게 내리는 새벽녘이였다. 황포강부두가를 나서니 골목량켠에 거머칙칙한 구식층집들이 숨막히게 늘어섰는데 아래층 대부분이 분식점이였다. 목천으로 된 허연 문발을 휙 걷어젖히고 들어서면 까마반드르르한 식탁과 걸상들이 쪼롱쪼롱 줄을 서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메뉴는 칼국수가 아니면 삭면이였다. 종지만한 사발에 한줌도 안되게 담긴 국수는 둬어번 젖가락질해서 후루룩 다 넘길수 있을만치 가련했다. 다들 서너 사발씩 재꼈지만 포식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맛도 없었다. 너무나 슴슴했다. “이게 상해음식이 맞나!” “상해”에 대한 우상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였다. 그 이튿날 남경로와 “와이탄(外滩)”을 돌아보고 그럴듯한 식당을 찾아가 상해료리 몇접시를 청해서 연변배갈에다 안주해보았다. 손바닥만한 접시에 까풀치기로 살짝 얹혀놓은 료리들은 역시 슴슴하고 맛이 없어서 식욕을 돋구지 못했다. 돌아올 때 과자, 사탕과 술을 샀는데 별로 특색이 없었다. 상표만 “상해제조”로 되였을뿐이였다. 두번째로 상해에 갔을 때는 근 10년후인 90년대초반이였다. 상해사범학원 졸업생인 로선배님을 모시고 갔기에 여러 가지 기념활동에 참가할 기회도 가졌고 여러 교수님들의 저택에 초청되여 접대받기도 했다. 고급연회의 고급료리도 검식해보았고 주민가정의 밥상에도 앉아보았다. 역시 슴슴하고 담담하고 량이 적은 것이 그 특징이였다. 세번째로 상해에 간것은 역시 근 10년후인 새천년을 맞은 이듬해였다. 거리식당들의 외관이 많이 달라져있었고 우육면, 패스트푸드 등 스낵바가 흥기하고 있었다. 과자, 사탕등속도 다양하고 풍부해지고 있었다. 이번에 네번째로10여년이 퍽 지난다음 가보니 음식거리의 풍경이 완전히 탈바꿈되고 있었다. 자그마한 분식점들은 찾아보기도 힘들고 칼국수 한사발 먹자고 해도 환경이 우아하고 깨끗하고 인테리어가 완벽하게 된 체인점같은데 들어가야 했다. 좀 소문이 나고 괜찮은 음식점료리를 맛보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것이 정상으로 되고있었다. 그리고 중국 각 지방의 특색음식들이 상해의 먹거리골목에서 자리를 넓혀가고있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운남의 따이족들이 와서 꾸린다는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맛보았다. 꽤나 규모가 있는 식당이였는데 이름모를 열대야채로 만든 료리도 많았고 일반 곡물로 만든 주식도 다양했다. 생각밖에 입쌀과 찹쌀가루로 만든 떡종류가 많았는데 우리의 떡종류인 인절미나 송편, 가래떡, 경단,  증편과도 같은 것들이 많았다. 다만 이름이 다르고 모양이 다를뿐 그 원재료, 가공과정이나 맛이 비슷할것 같았다. 몇개 맛을 보니 우리의 떡보다 순수함이 부족했고 쫀득쫀득한 질긴감도 못했지만 단맛이 강해서 식욕을 돋구고 있었다. 그저 설탕같은 단맛이 아니고 고소함이 밑받침된 복합적인 감미로움이였다. 아마도 당도가 강한 열대식물로 가공해낸 즙이나 첨가제를 투여한것만 같았다. 그런 단맛으로 입맛이 고급차원으로 치달아 오르고있는 상해사람들의 구미를 당겨내고 있었던것이다. 남경로 서쪽에 있는 대형슈퍼마켓내의 식료품전문매장을 돌아보았다. 곡물로 만든 떡종류만 해도 몇백가지 품종이 배렬되여 있었다. 포장이 예쁘고 심층적인 세밀가공에 다양한 첨가제를 복합리용해서 고급적인 품종으로 승화시킨것들이였다. 경단과도 같은 새알심 두개를 넣고 정교하게 포장한걸 인민페 십원을 주고 사먹어 보았는데 역시 달고 부드럽고 살살 녹아빠졌다. 연길에서는 튀긴 새알심을 한근에 8원씩 한다. 그리고 입쌀튀김으로 만든 과자(연변에서는 과줄이라고 함)의 종류가 특별히 많았고 예쁘게 모양을 내서 특색을 돋구었다. 그밖에도 분명 우리의 숸떡이나 시루떡과 다름없는데 여러 가지 모양새로 다양한 포장으로 알맞는 첨가제로 독특한 맛을 둗구어 내서는 고급제품으로 업그레드시켜 고수입을 창출하고있는 품종들이 많았다. 분명 거칠고 투박한 우리의 시골음식과 다를바 없는건데 심층적인 세밀가공을 거치니 상해의 신사숙녀들이 멋스레 검식의 달콤함을 즐길수 있는 고급음식으로 부상되는것이였다. 돌아올 때 차안에서 먹으려고 연변에서 생산해낸 누룽지를 몇봉지 사려고 두루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누룽지를 달라고 하면 다 광동이나 락양에서 생산해낸 기름에 튀긴 누룽지들뿐이였다. 다행히 딸애가 인테넷사이버마켓을 통해 사가지고 차에 오를수가 있었다. 연길에 와서 서시장떡매장에 가보니 인자해보이는 녀인들이 찰떡을 큰 대야에 골똑골똑 담아놓고 주먹떼만큼 뚝뚝 떼서 맛을 보라고 손님들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의 전통음식이 전국시장으로 나갈수 있고 더 멀리 국제시장으로도 나갈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가? 그런 브랜드가 되자면 얼마만한 시간이 수요될가? 우리가 어떻게 발걸음을 떼야 할가? 우리의 주요 산업인 벼재배에서 나오는 입쌀의 부가가치를 높이자면 우리 음식의 특점을 고려하지 않을수가 없지 않겠는가!      길림신문              
35    보이는 돈과 보이지 않는 득 댓글:  조회:3814  추천:1  2015-05-28
우리의 생활에서 돈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우리의 미래도 아마 돈으로 계단을 쌓아놓고 올라가야 할것같다. 그래서 돈은 벌어야 하고 벌기 위해서는 써야하고 쓰기 위해서는 또 벌어야 한다. 버는만큼 써야 하고 쓰는만큼 벌어야 하겠지만 인간의 삶이란 늘 균형을 바로 잡을줄 모르고 생활환경이 또한 공평공정하게 저울추를 고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쓰는것이 버는것보다 클때도 있고 버는것이 쓰는것보다 클때도 있게된다. 이처럼 균형이 잡히지 못하면 불만이 생기고 균형이 잡히면 또 욕망이 생긴다. 이런 균형을 영원히 잡아줄 미래는 아마도 돈이 필요없다는 공산주의 사회에까지 가야 실현될것같다. 불만을 해소하는데 약은 돈이고 욕망을 억제하는데 약도 돈이다. 돈이란 눈에 보이는 순간부터 자력을 생성시키고 손에 잡히는 순간부터는 활력을 활성화시키고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부터는 자제력을 잃게한다. 때문에 돈은 늘 눈에 보이고 손에 쥘수 있어야만 마음의 균형을 잡을수가 있게된다. 사람이 돈을 수시로 볼수없고 쥘수없는 처지에 빠지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허전해지게 된다. 언제나 돈을 볼수 있고 쥘수 있다면 늘 힘이 생기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이것이 돈이 있는가 없는가하는 차이이다. 그래서 우리의 눈길은 늘 돈을 따라가게 되고 우리의 손은 늘 돈을 향해 뻗쳐지게 되는것이다. 돈은 요마이기도 하고 부처님이시기도 하다. 그 요술에 빠지고 보면 돈을 얻을 때도 있고 떼울 때도 있게된다. 많은 경우에 얻을 때는 힘들게 얻고 떼울 때는 손쉽게 잃게된다. 돈이 많은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된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면 자연 돈벌기가 힘들게 된다.일반적으로 돈이 보이는 곳에서 돈을 벌자면 안전과 위험이란 두가지 티켓을 떼야한다. 그런데 위험한 티켓을 떼고 위험한 동굴에 들어서려는 사람은 많지못하다. 기실 위험한 동굴에 황금매장량이 휠씬 더 많다. 허지만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밑천을 처넣어야 할때도 있고 자유를 잃어버릴 때도 있고 신용을 지키지 못할때도 있고 피를 흘려야 할때도 있고 지어 생명을 내놓아야 할때도 있게된다. 그래서 모두들 막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는 위험티켓을 떼려고 하지않는다. 기실 안전한 동굴에는 황금매장량이 크지 못하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그 동굴내에 모여들어 자기 힘으로 안전하게 버는 돈벌이에서 서로 경쟁을 벌릴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늘날 자본화시대의 로동력시장을 이루게 된다. 로동력시장에서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빠르고 가장 실질적이고 가장 공평합리한 교역이 진행되기에 돈이 직접 보이고 돈을 직접 줠수가 있다. 이것이 로동력시장의 매력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역, 이 고장은 세계적으로도 로동력자원이 제일 풍부한 곳이며 또한 바야흐로 기계산업, 첨단과학기술산업이 발빠르게 보급될 고장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의 주변로동력시장은 어떻게 변화될가? 구구한 설명없이도 무사자통(无师自通)으로 알아맞출수 있다. 한 철학가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추상적인것에 더욱 힘이 있는것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 가끔 자기도 모르게 놀라운 깨달음에 가슴이 섬뜩해질 때가 있게 된다. 례컨대 돈이 보이지 않는 곳에 더 큰 득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같은것들 말이다. 적지 않은 사회적현상에 대해 우리에게는 무엇이라고 해석할수 없는 수수께끼들이 많고도 많다. 생로병사, 인간이 누구나 다 걸쳐야 할 한개 과정이지만 사람에 따라 어떤 이는 살아도 값이 없고 어떤 이는 죽어도 값지다. 무엇이 이런 차별을 조성시켰을가? 바로 보이지 않는 돈과 정신이다. 일례로 한 사람이 연길시민인가 북경시민인가 아니면 서울시민인가 하는 부동한 신분에 따라 그 리면에는 엄청 큰 격차를 보이는 리득이 깔려있는것이다. 똑같은 년대에 태여나고 똑같은 농업에 종사해왔고 똑같은 농민호구를 가지고있는 농민이지만 강음시 화서촌의 농민호구와 왕청현 중평촌의 농민호구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를 두고 있다. 일단 화서촌의 촌민호적에 오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일년 열두달 고이 놀아도 수십만원내지 수백만원의 수익을 배분받게 된다. 그런데 중평촌의 원 촌민들 가운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자기의 돈을 팔면서 농민호적을 고쳐버렸다. 그 호적에서 얻는 리득이 없거나 적었기 때문이였다. 이 근년에 해마다 수십만명의 중국관광객들이 한국유람길에 올라서 서울이나 제주도에다 인민페를 삐라 뿌리듯 뿌리고 돌아온다.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도 지금 수십만명이 나가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한쪽에서는 나가 돈을 뿌리고 오고 한쪽에서는 나가 돈을 벌어오고 있다. 나가 돈을 뿌리고 돌아오는 중국의 관광객들 대부분은 중산계층에 속하는 부자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보이는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득을 본 덕분에 돈을 물쓰듯 쓸수 있게 된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자원수익성에 대해 다시금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땅,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제도와 정책에 얼마나 많은 “황금”이 매장되여 있을가! 례컨대 부부결합으로 이루어진 한 가정, 그 가정에서 태여나는 새생명, 그들의 교육, 그리고 감정파렬, 리혼, 방황하는 아이들, 고향마을의 소실, 민족의 례의범절, 신용구축, 관념갱신, 공유공조리념, 뭉침단결의 플래폼건설 등 여러 방면에 보이지 않는 목돈이 얼마나 깔려있고 얼마나 지출되고 있는지를 좀 묵은 장부도 들춰보고 새장부도 청리해서 그걸 활성화시킨다면 얼마나 큰 재부를 창조해낼수 있을가!  연변일보 2015년 5월 27일
34    조선반도의 통일, 우리는 어떤 자세로 맞아올가? 댓글:  조회:5633  추천:5  2015-04-29
조선반도의 통일, 우리는 무슨 자세로 맞아올가?                                홍천룡   길상동물인 양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 부두러움, 온순함으로 사람들의 믿음과 동정, 그리고 사랑을 사고있다. 금년은 그런 양의 파아란 기운을 띠고 있다는 청양 해이다.     양해에  들어서 화창한 봄날을 맞으며 평화의 화기로운 따스함을 체감하는듯 싶다. 특히 동북아의 중심지로 늘 국제적인 여론에 오르내리는 조선반도의 새해정세를 놓고 또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분단 70년을 맞아오며 남북정상이 모두 통일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높이였다. 70년동안 분단의 아픔을 품고 고개고개 아리랑고개를 넘으며 신음해온 배달겨레에게 또다시 한번 희망의 불꽃을 튕겨주고있다. 이번에는? 번마다 희망으로 번뜩이다가 실망으로 돌아간 적이 인젠 하도 여러번이여서 흥분한 뒤끝에는 늘 랭정한 의문표를 달아두군 한다. 그래 조선반도가 정말로 통일될수 있을가? 언제쯤 될가? 어떤 방식으로 될가? 그것이 대박이 될가 아니면 쪽박이 될가? 더구나 그 변두리밖에 서있는 우리 조선족들에게는 어떤 영향이 미쳐올수 있을가? 우리들도 관심을 돌려야 할 국제적인 중대사인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앞날에 그 어떤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줄 변수가 될 요소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통일은 떼놓은 당상인것 같다. 언제 어떻게 되느냐가 답안이 안나왔을뿐이다. 세계적으로도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고 시간적으로도 21세기라는 적시적기에 들어섰고 민심적으로도 상하좌우의 공명공감을 이루고 있다. 더는 미룰수 없는 력사적인 사명으로 해결이 요청되는 시점에 이른것이다. 조선반도의 통일은 의심할바 없이 대박을 안아올것이고 또한 의심할바 없이 쪽박도 생성시킬것이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국방적으로 각기 따지고 보면 대박으로 맞아올 분야도 있고 쪽박으로 굴러떨어질 분야도 있다. 경제적으로는 통일된 한반도가 세계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교통요새로, 자본, 자원, 자금의 축적지로, 거대한 물동량이 소용돌이 칠수 있는 물류허브로 부상될것이다. 그 수익성을 조선반도자체에서만 향유하는것이 아니라 주변의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여러 나라들에서도 공유하게 되고 세계강국인 미국도 득을 볼것이다. 그 가운데서 자기의 특점을 리용해서 지정학적으로 득을 볼 나라도 있고 자원이나 자본우세로 득을 볼 나라도 있고 기술우세로 득을 볼 나라도 있게 될것이다. 이 몇개 나라가 지금 세계의 정치경제를 주물럭거릴수 있는 나라들이고 또한 서로간의 경쟁을 치렬하게 벌리고있는 나라들인것이다. 조선반도의 통일은 그들지간의 치렬한 경쟁을 치밀한 협력과 합작으로 이어줄수있는 뉴대로 될수 있는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반도는 정말 세계라는 이 계란속의 노란자위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지금 그 노란자위를 만질수도 있고 똑 떼서 맛을 볼수도 있는 위치에 서있다. 허지만 밥상에 마주 앉았다고 누구나 다 그 노란자위를 먹을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걸 먹을수 있는 신분자격, 순서위치, 체면례의가 갖춰져야 하는것이다.    조선반도의 경제적통일은 우선 팽창되고있는 글로벌자본의 투자력을 폭발시키는 신호탄으로 될것이다. 자본이 집중되면 조선반도와 그 지역의 지정학적특점에 따르는 각 방면의 인프라건설이 활발해지게 된다. 거기에는 공업, 농업, 상업 등 전통적인 산업뿐만아니라 정보통신,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 현대화첨단적인 새산업도 동시에 공동하게 개발되고 영위되여 나갈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좋은 팔자소관에 행운을 타고 이 세상에 태여난 세대인것 같다. 전쟁도 피해왔고 살을 에이는 분단의 칼날에도 찍히지 않았고 오늘날 조선반도의 대안에다 자리를 잡아놓고 마음대로 나들이를 할수 있는 군체가 되였다. 이제 조선반도의 경제적통일이 실현되는 날이면 우리 이 군체, 우리 이 민족이 이 위치에 서서 우리의 능력으로 해야 할 일들은 얼마나 많고 또 얼마나 벅찰것인가! 허나 그런 좋은 일들은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이루어질 일들이 아니다.    항간에는 예전부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속담이 있다.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들의 개발사를 두루 살펴보면 개발의 전반 과정에서 득을 본건 대개 외국이나 타지방의 실력자본과 강권집단세력들이였고 본지방 토배기들은 대개 쫓겨나는 신세가 되거나 최하층으로 굴러떨어져 빈민신세를 면치 못하군 했었다. 통일된 조선반도의 미래도 역시 세계투자실력가들의 개발대상으로 될것이다. 그러면 자본이 집중되고 금융이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이 줄을 쳐서 헤아릴수 없이 모여들게 된다. 자본이 엉키고 돈이 돌아가는 곳에는 언제나 기름기 자르르 돌아서 사람들을 모아들게 유혹시키는것이다. 무슨 사람들이 모여들가? 돈을 가진 사람, 기술이 있는 사람, 전업지식을 갖춘 사람, 관리능력이 있는 사람…아무튼 실력가, 자본가, 전문가, 활동가, 기회주의자들의 모험적게임을 즐길수 있는 천당으로 될것이다. 그런 천당은 누구나 다 들어올수 있다고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 문턱이 높아서 누구나 다 들어갈수 있는것도 아니다. 그럼 우리도 들어갈수 있을가? 물론,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이 땅, 이 고장을 위해서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린 주인인데 주인이 제집안으로도 못들어간다면 그건 세상도리에 맞지 않는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헌데 흘러간 력사에도 그랬고 바야흐로 다가올 미래에도 여전히 면치 못할 어불성설이 너무도 많았고 또한 너무도 많아질것이다. 사회의 발전도 그렇고 어느 민족의 흥망성쇄도 그렇고 늘 이러저러한 어불성설속에서 구불떡거리며 굴러왔었고 또한 계속 구불떡거리며 굴러갈것이다. 앞으로 조선반도의 통일도 결코 우리 모든 코리안이 상상했고 바랬던것처럼 그런 리상적인 통일은 아닐것이다. 조선반도의 처지를 여러 방면으로 아무리 따져봐도 리상적으로 통일될 환경이나 조건을 갖추기는 어렵게 되여있다. 통일되였다 해도 여전히 내부모순과 대외갈등이 첨예하고 치렬해질것이다. 그때 가서도 여전히 미지의 초행길이 될것이니깐. 때문에 우리가 통일된 조선반도에서 자기의 위치를 어디에다 어떻게 고정시키겠는가 하는 문제가 지금부터 심각하게 제기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통일이 되여 대박이 터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저 보기만 하고 박수만 쳐주어야 할 구경군이 되고 “응원단”이 되고 말것이다.    구경군이 되지 말고 직접적인 참여자가 되자면 지금부터 자격신분증을 따기에 노력해야 한다. 우선 실력을 키워야 한다. 실력을 키워야 자본축적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우리에게 지금 무슨 실력이 있는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실력을 보일만한 실력이 없다. 개혁개방 30년동안 사람마다 집집마다 경제적으로 정도 부동하게 번신하였지만 정체적인 실력은 미약해졌고 무너질 위험에까지 이르렀다. 다행스러운것은 그 기초돌들이 아직 완전히 밀려나가지 않은것이다. 그래서 다시 실력을 키울수 있는 희망이 보인다. 그 기초돌이란 바로 우리의 땅과 우리의 언어문자이다. 땅으로 경제실력을 키워낼수 있고 언어문자로 문화실력을 키워낼수 있다. 전제조건은 뭉침이다.  뭉쳐야 땅도 지켜낼수 있고 문화의 기발도 수호할수 있다. 흩어지면 우리는 실력을 운운할수 없게 된다.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뭉치겠는가를 너도나도 다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신용을 지키는 민족이 되기에 애를 써야 한다. 경제개발이 심화되고 자본이 집중되고 항목건설이 집단화로 활발해지고 창조경제와 공영경제가 나래를 펴게 될수록 신용이 모든 통로를 소통시킬수 있는 푸른등으로 된다. 신용을 지킬수 있는 관건은 문명해지고 그  문명을 지키는것이다. 개화되여가고있는 문명사회의 문명수칙을 남먼저 지킬줄 아는 민족이 되여야 한다. 신용만 지키면 기타 어불성설적인 문제는 다 풀리게 된다. 이 두 가지 문제만 점차 해결되여도 우리는 이제 바야흐로 통일될 조선반도내외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우리의 자원도 지켜낼수 있고 거대한 자본도 축적할수 있고 막강한 실력도 키울수 있고 엄청난 투자도 할수 있는 통일된 조선반도의 “노다지판”에서 주인장으로도 될수 있고 품위있는 민족으로도 부상될수 있다.  
33    벗튕기는 조선산 물고기를 두고 댓글:  조회:4058  추천:2  2015-04-13
ㅡ홍천룡이 보는 조선족 농업과 농촌 농민 일전에 신문에서 조선산 수산물이 장춘시장에서 최고의 인기상품으로 불이 펄 나게 팔렸다는 기사를 보고 저으기 놀랐다. 이 근년에 와서 중국상품이 조선시장에서 잘 팔리고있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조선상품이 중국시장에서 잘 팔리고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기 때문이였으리라. 인젠 아득하게 가물거리는 기억이지만 지난 세기 60년대 초반에는 조선의 나일론양말이 중국에서는 인기몰이였었다. 대개 두가지 특점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그의 탄성이고 하나는 그의 질긴 내마모성이였다. 탄성이 강했기에 미를 추구하는 녀자들의 마음에 들었고 질기고 탄탄해서 남자들도 선호했다. 목천양말은 하루이틀만 신으면 구멍이 펑펑 나서 더덕더덕 기워서 신어야 했지만 나일론양말은 아무리 신어도 구멍이 잘 뚫어지질 않았다. 화학공업품이여서 그렇게 질기게 만들수 있는것이다. 공업품이 부족했던 그 시기에는 나일론양말이 화학합성품이였기에 인기몰이로 될수 있었고 오늘날 화학공업품이 수도물처럼 왈왈 쏟아져 나오니까 세월이 바뀌여 자연산 물고기가 인기몰이가 되고있다. 공업의 급속한 발전과 농업의 현대화가 지금 우리의 혀끝을 위협하고있다. 무엇을 먹어야 안전할가? 먹거리의 안전감이 인간사회의 제일 대사이다. 지금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하는 채소과일이 있을가?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수확해내는 량곡이 있을가? 호르몬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사료로 기르는 가축가금이 있을가? 몇년전에 내몽고에서 한 사람이 양똥을 비료로 쳐서 재배한 입쌀을 상해의 모 회사에다 한근에 30원씩 팔았다고 하니 모두들 나발을 분다고 했다. 헌데 지금 그런 쌀을 한근에 50원씩 판다고 하면 모두들 여전히 나발을 분다고 할가! 앞으로 값이 계속 올리 뛸것은 점점 희귀해질 무공해먹거리가 될것이다. 자연적으로 우리 연변같은 고장은 고유의 청정함을 품고있는 고장이다. 산이 많고 물이 맑고 수풀이 우거졌기에 모든 오물을 천연적으로 려과시킬수 있는 공능을 가지고있다. 거기에 산, 구릉, 평원,분지가 골고루 비례에 맞게 분포되여있어 자연적으로 서로 보완할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져있고 경위도 역시 유리한 각도에 위치해 있고 기후 또한 사계절이 분명하고 무상기가 맞춤해서 만물이 영양분을 알맞게 흡수할수 있다. 그래서 이 고장에서 나는 입쌀이며 과일이며 가축가금이 질적으로 기타 지방의것보다 우수하다. 그래 우리의 입쌀이 내몽골모래땅에서 나는 입쌀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래 우리의 황소고기가 초원의 모우고기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래 우리의 과일이 열대지방 과일보다 못하단 말인가! 특히 사과배에 대해서는 좀 억울함을 호소하고싶다. 룡정으로 가는 도로 량켠에는 연변의 자랑이였던 만무사과배과원이 쫙 펼쳐져있다. 지난 세기 90년대까지만 해도 해마다 사과배철이면 크고작은 각 단위의 총무들이 제일 바쁘게 뛰여다닐때가 되군 했었다. 집집마다 최저한 두세 상자씩 사두었고 좀 괜찮은 집들에서는 까맣게 얼궈서는 《뚱리(冻梨)》를 해두고 겨우내 그 시원컬컬함을 풀군 했었다. 헌데 지금은 그 풍경과는 전혀 다른 실태를 보이고있다. 사과배철이 훨씬 지난 12월말까지도 길 량켠에 움막을 치고 사과배를 팔지 못해 속을 태우고 있는 과농들을 볼수 있다. 왜서 우리의 사과배가 잘 팔리지 못하고있을가? 왜서 우리의 사과배가 그 숱한 과일들가운데서도 값이 제일 눅어졌을가? 오래전 일이다. 내몽고, 하북 등 여러 지구에서 연변에 와서 사과배묘목을 한대에 몇원씩 주고 사갔다. 그 묘목이 인젠 성숙되여 해마다 주렁진 사과배를 선사해서 당지 과농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고있다. 지금 겨울철이면 그곳 사과배가 연변시장으로 들어오는 판국이 돼버렸다. 지금 남방 열대지방의 과일들이 많이 들어오고있는데 그 가운데는 우리의 사과배보다 더 좋은것도 별로 많은것 같지 않고 또한 우리의 사과배보다 못한것도 별로 적지 않은것 같은데 우리가 우리의 고장기후에 알맞는 자연산을 견지해나간다면 그 어느땐가에 가서는 꼭 시장의 각광을 받을때가 있게 될것이다. 조선의 자연산 물고기도 몇년전에는 싸구려였었다.     길림신문 2015년 4월 11일
32    시장경제의 핵 —자본 댓글:  조회:4093  추천:3  2015-04-10
시장경제의 핵 —자본            홍천룡 봄바람에 훈훈해지는 3월, 중국의 전국인대、정협회의가 련이어 막을 내리면서 세계가 중국경제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시장이 인젠 세계시장에 대한 영향이 너무나도 커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무엇을 수입하면 세계시장에서 그 무엇이 값이 올라가고 중국에서 그 무엇을 수입하면 세계시장에서 그 무엇이 값이 떨어지군 한다. 중국에서 내수시장을 확대하면서 경제실력이 가강되였고 상당한 국유기업과 민간경제실체들이 거대한 부의 왕국을 잉태시켰고 자본을 끌어들이던데로부터 인젠 자본을 수출하게 되였다. 가공업에 투자하던데로부터 자원개발에도 투자가 크게 미쳤고 문화산업에도 그 투자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고 있다. 늘 저 언덕아래로 중국이란 땅떵어리에서 먼지만 풀썩거린다고 게슴츠레 눈꺼풀을 깔고보던 세계의 눈길이 놀랍게도 산봉오리정상으로 쏠리며 데꾼해질 때 중국은 또한 서비스업, 그것도 금융서비스업에까지 손을 큼찍하게 뻗치고 있다. 대국의 경제시장화가 이처럼 막강하게 발전하리라고는 뭇사람들이 미처 상상조차 못했던것이다. 무엇이 이처럼 큰 시장을 빙빙 돌릴수 있는 동력이 되였을가? 다름 아닌 자본이였다. 시장경제의 핵이 바로 자본이다. 핵무기가 터지면 인류사회의 가장 참혹한 참극이 벌어질수 있고 핵발전기가 돌아가면 에네르기의 원자재 값이 뚝뚝 떨어지게 되고 시장의 핵인 자본이 돌아가면 거대한 부의 왕국을 창조하게 된다. 자본의 위력이 19세기말까지 서방의 물질문명토대를 닦아놓았고 자본의 복사파가 20세기의 아세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경제동립을 흥기시켰고 자본의 폭발로 지금 21세기의 지구촌플래폼경제가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다. 플래폼경제의 활성화는 대국의 시장을 한층 더 활기를 띠게 한다. 중국의 금융업체에서 기준금리를 상하로 조절할 때마다 서울의 가정주부들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중국의 통화정책이 긴축되거나 완화될 때마다 중소기업가들이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왜? 돈 때문이다. 개도 안먹는다는 돈때문이다. 기실 돈이나 자본자체는 그 무슨 실질적인 물질재부를 창조하는것이 아니다. 돈이란 교환의 중매작용을 놀고 분배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역할이 물질재부를 창조하는 관건적인 역할을 놀게 된다. 그래서 돈을 그 누가 먼저 쥐는가에 따라 그 누구는 물질재부를 창조할 길에 들어설수 있는 선도권을 잡게 되고 그 누가 돈을 많이 쥐는가에 따라 그 누구는 남보다 더 많은 물질재부를 창조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서로들 돈을 더 빨리, 더 많이 끌어모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라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매 사람들마다도 다 그렇고…가만히 따져보면 마치도 이 세상이 돈때문에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빠질 때가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남보다 돈을 더 빨리, 더 많이 모을수 있을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비법들이 있을수 있고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할수 있다. 그 가운데서 주요하게는 남의 돈이나 사회적자본으로 자기의 재부를 창조할수 있는 지혜와 실력이 있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또는 소그루빠의 힘으로 어느 정도 실현할수 있겠지만 자본운영은 좀 곤난하게 된 오늘의 현실이다. 일정한 사회적기반을 토대로 하는 실력이 다져지지 않으면 나서서 춤을 춰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자본의 시장환경이 이미 이뤄졌기때문이다. 옛날에는 힘으로 해먹었다. 그래서 전쟁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실력과 지혜로 해먹는다. 실력을 다지자면 협심, 협동, 협업이 필요하다. 즉 뭉쳐야 한다. 말로만 뭉치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뭉치고 자본을 고리로 한 경제적인 합영으로 뭉쳐야 한다. 이런 뭉침은 관념갱신이 그 전제로 되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래일에 돈으로 오늘의 재부를 창조할수 있는 슬기와 담략이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세계의 넘버원이 된지도 이슥해진 미국에서 국민대부분이 빚을 걸머진채 살고 있다. 빚을 걸머진 사람들이 법에 걸리지 않고 빚을 걸머진 사람들이 신용을 잃지 않고 빚을 걸머진 사람들이 떳떳하게 재부를 창조하고 있다. 그들은 래일에 생길 돈을 앞당겨 끌어다가 오늘에 써야 할 돈과 합쳐서 오늘이란 이 시간에다 투자한다. 그러면 벌써 예산이 확 달라진다. 이틀에 써야 할 돈을 하루란 시간에다 다 처넣으면 그만큼 효과가 더 커진다고 인정한다. 즉 래일에 생길 돈이 원래 생길 돈보다 한배는 더 커진다는것이다. 이렇게 하자면 그만큼 담이 커야 한다. 담만 크면 또한 모험이 크게 된다. 모험을 피면하자면 슬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슬기는 오직 자본운영의 실천에서 올수 밖에 없다. 시장화경제속에서 각종 규제가 점차 완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도 자본에 대한 관념갱신이 있어야 할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죽게 벌고 나서도 앞으로 경제적위치나 사회적위치를 제대로 찾아서지 못할수도 있는것이다.    
31    《중국 제1촌》의 부의 격차—《성분》 댓글:  조회:4327  추천:2  2015-03-30
ㅡ홍천룡이 보는 《3농》 《중국 제1촌》이라고 자랑하는 강소성 화서촌, 중국농민들의 부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억만농민들이 마음속으로 동경하는 고장이다. 그런데 화서촌에 들어가서 심층조사를 해보면 경제적수익을 둘러싸고 정치적권익을 둘러싸고 문화적향수를 둘러싸고 부동한 층차와 부동한 계층에서 부동한 차원을 이루고있었다. 중국사람들의 제일 큰 재산인 주택부터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달랐다. 화서촌의 원주민, 즉 당지 토배기들은 촌에서 새로 지은 최고급 별장식화원에서 살고있었고 화서촌의 발전에 의해 주변마을에서 호구를 화서촌 촌민으로 고친 주변토배기들은 몇년전에 지은 별장에서 살고있었다. 타지방으로부터 기술일군이나 관리일군으로 초빙되여 오면서 호구를 화서촌에 붙히게 된 화서촌의 중견층들은 고급아파트에서 살았고 그다음 외지로부터 일자리를 찾아오며 호구를 붙혔거나 아직 호구를 붙이지 못한 사람들은 일반 아파트에서 살고있었다. 화서촌이 일떠서기전이였던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까지는 이런 격차가 없었다. 그랬던 이들에게 돈이 생기게 된것은 화서촌의 땅덩어리때문이였고 그 땅덩어리에서 살아왔던 사람들때문이였고 공산당의 농촌시책이 좋았기때문이였고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나간 오인보란 사람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오인보란 사람이 마을사람들을 한길로 뭉치게 했고 화서촌사람들이 그를 믿어주고 그가 가리켜준 길을 따라 나갔던것이다. 만약 오인보란 사람이 없었고 화서촌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화서촌의 부유가 이룩될수 없었을수도 있다. 그래서 화서촌이란 명칭이 자원이 되고 화서촌 토배기란 호구가 자원이 됐다. 자원수익이 그들을 부유해지게 하였다. 주변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과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그 자원을 바라보고 온것이였다. 때문에 그들은 상술한 격차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받아들이고 거금을 내면서도 호구를 화서촌에다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격차가 다원화로 형성되면서 지속적이고 세대적인 계승으로 이어지고있다는 점이다. 동일한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해도 수입격차가 있게 되고 한마을에서 함께 살아도 복리면의 격차가 있게 되고 마을병원에서 같은 병치료를 해도 완전면비, 절반보조, 전액감당 등 격차가 있다. 또 교육, 양로, 보험, 리윤배분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격차가 있는바 이런 격차가 대를 이어내려가는 대물림으로 이어지고있다. 이런 격차가 오늘날 화서촌에서만 있을수 있는 불평등일가? 이런 불평등은 시장경제란 환경이 승인해주는 공정적인 불평등으로서 그 내재적인 합리성과 자본운영의 정당성을 가지고있기에 지속적인 연장선을 그을수 있는것이다. 아무튼 정치적인 환경이나 경제적인 환경속에서 절대적인 균형을 이루기란 어렵게 되는 사회적발전이다. 이런 불균형속에서 우리의 설자리를 닦아놓아야 하는것이 격변기에 처한 우리의 앞길에 나타나게 될 난제이고 의무인것 같다. 재부의 장기적인 창조와 발전의 지속적인 추진력을 가지려면 우리의 자원적인 우세를 다시금 정리하고 심층적으로, 종합적으로 개발하여 우리들 자신한테만 아니라 우리의 후대들에게도 토배기적인 《호구》를 우리의 고향땅에 붙히고 당당한 《성분》을 획분받도록 해야 한다. 이런 《성분》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자원성수입이 결핍하게 되고 부유의 왕국에 들어서기 곤난해지게 되며 정치적으로도 정당한 위치에 서기 곤난해지고 문화적으로도 품위가 떨어지게 된다. 우리 세대가 이미 이런 처지에 빠져들 위험에 봉착하였다고 할 때 이 시점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아래세대도 의연히 품위가 떨어진 삶을 이어받을것이다. 우리의 후대들에게 토배기적인 좋은 《성분》을 넘겨주자면 우리가 관념을 갱신하고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설 땅이 있다. 땅이 있으면 화서촌같은 《왕국》을 건설할수 있는 토대를 닦을수 있는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어느 타민족보다 종합자질이 높은 인재들이 많다. 인재가 있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 인재가 많으면 《오인보》 같은 사람이 나타날것이고 언젠가는 조선족 《화서촌》이 일떠설것이다.       길림신문 2015년 3월 23일자   
30    농촌호구, 팔자호신부로 되는가 댓글:  조회:4251  추천:3  2015-03-11
도농일체화의 실현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호구제도를 개혁하여 농촌호구도 도시호구로 마음대로 고칠수 있게 하였다. 숱한 농민들이 《만세!》를 부를것만 같은 개혁이였는데 생각밖으로 랭랭하기 그지없었다. 왜 이렇게 되였을가? 지난 세기 70년대 초반이라고 기억된다. 하루는 붉은꽃을 단 《해방표》자동차가 마을어귀에 들어서자 진규네 아버지가 둥근 술상을 들고 앉은걸음을 쳤고 진규네 어머니가 두팔을 너울거리며 빙글빙글 돌아쳤다. 《저팔계》라는 별명을 달고다니는 진규형님이 장가를 든단다. 동네에서 세상 보기 부끄럽게 생겨서 장가들기도 부끄럽겠다고 한해두해 나이를 먹어가며 로총각으로 몰리던 젊은이가 장가를 든다니 모두들 궁금증이 동했다. 어떤 색시가 그런 로총각한테로 시집오는걸가? 입이 귀쪽으로 째지게 된 진규형님이 조수석에 앉은 색시를 건뜩 들어서 노오란 돗자리우에다 살짝 내려놓았을 때 동네 아낙네들부터 절찬이 터져나왔다. 《어마나, 곱기도 곱네!》 《어쩜, 기울어도 너무 기운다니까》   …… 왕청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시집온다는 색시가 우리 아이들 눈에도 호박꽃같이 곱다는 감이 들었다. 그때 나는 리해할수가 없었고 어딘가 불공평성을 느꼈다. 그처럼 고운 녀자가 왜 진규형님같이 못생긴 남자한테로 시집오게 되였을가? 헌데 그런 불공평성이 진규형님네 집에서만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것을 보아냈다. 그후 마을 여러 집에서 그처럼 고운 시골색시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고있었다. 그런 불공평성이 생기게 된 그 원인은 호구제도에 있었던것이다. 농촌호구와 도시호구, 상품량 배급과 비상품량 불급, 당시 그 차이가 얼마나 컸을가? 그 고운 얼굴을 가진 시골처녀들이 예쁜 얼굴과 미끈한 체격을 가지고 도시의 로총각들한테로 시집오는것만큼 더 컸다고 나는 인정했다. 도시로 시집온 그녀들의 앞에는 고운 인물값을 깎아내리는 흥정이 끊임없이 진행되였다.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찾자고 해도 호구가 없기에 받아주는데가 없었고 아이를 낳아도 호구를 붙일수 없었고 호구 없는 아이는 학교에 붙어도 돈을 더 내야 했고 여러 면으로 되는 섧은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처녀들의 도시진출은 혼인이라는 이 외나무다리로 점점 더 몰리게 되였다. 《이원화》제도의 불공평성이였다. 도시와 농촌, 자원공유에서의 불평등이였다. 경제수입, 교육문화, 의료보험, 출생양로 등 모든 삶의 조건과 환경을 제도적으로 차별있게 제정해놓은것이다. 다시 말해서 출생자의 출생지와 가정성분에 따라 《팔자》가 정해지는것이였다. 도시사람들은 평생 도시에서 살수 있고 농촌사람들은 평생 농촌에서 살아야 할뿐만아니라 그 자녀들까지도 그 팔자를 이어가게 되였다. 그래서 농촌처녀들은 자기의 청춘과 그 권익을 바꾸려고 한것이다. 거기에는 앞으로 있게 될 자녀들의 앞날도 기탁되는것이였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불공평적이던 호구제도가 공평적으로 개혁된다고 하는데도 왜 농민모두들 주저하고있을가? 여러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주요하게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 면에서 개혁이 심화되고있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제일 주요한 문제는 경제문제이다. 경제문제가운데서도 제일 관건적인 문제는 토지문제이다. 도시생활에서 일자리가 관건이라면 농촌생활에서는 토지가 관건인것이다. 도시에서는 일자리에서 돈이 나오고 농촌에서는 토지에서 돈이 나온다. 돈이 나오는 토지에 대한 정책이 바뀌고있고 토지에서 나오는 돈의 줄기가 갈래갈래 여러갈래로 뻗어지고있다. 토지가 개조의 대상이 되고있을뿐만아니라 자본의 원천으로도 되고있는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였고 그 어떤 기대감을 가지게 되였다. 도시사람들보다 더 높은 경제수익을 얻을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게 된것이다. 그래서 주저하고있다. 다음 농촌사회에 대한 여러가지 규제가 점차 완화되고있는 추세를 새롭게 보이고있다.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있는 중국에서 만약 농업이 발전하지 못하면 절름발이가 되고마는것이다. 지금 여러 선진국가와 자유무역협정을 맺고있는데 제일 복잡하고 시끄럽고 껄끄러운 장애가 농업의 미발달에서 빚어지고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국가적으로 더욱 우월한 혜농정책을 제정해내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농업이 점차 현대화적인 산업으로 부상하는데 경제개혁의 심화, 문화교육제도의 개혁, 양로보험제도의 개척, 의료위생제도의 합리화 등 자원공유의 공평성이 관건적인 역할을 놀 때가 된것이다. 이 모든 변화를 지금까지 농민호구를 가지고있는 농민들이 페부로 느끼고있고 무언가 알릴듯말듯한 《천도복숭아》가 하늘에서 떨어지고있다는 감을 느끼고있어서 주저하고있는것이다. 수천수백년동안 이 큰 대지에서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있었고 토지의 대다수를 다루어왔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제일 최하층에 억눌려있었고 문화적으로도 언제나 미개화상태에 빠져있었으며 여러 면에서 사회의 주류계층에 서지 못했었다. 그런 그들이 오늘날 하루 아침사이에 모든걸 바꾸고 《팔자》를 고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누구도 담보할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농민호구를 가지고있는 우리 조선족농민들은 어떻게 할것인가? 이 좋은 기회에 《농민모자》를 활 벗어버리고 말것인가? 신중해야 할 문제이다. 고장에 따라 가정에 따라 정황이 다르고 각기 다 자기의 특수정황이 있겠지만 아래와 같은 몇가지 문제는 꼭 짚고넘어가야 할것 같다. 국가적으로 미래에는 도시호구나 농촌호구나 다 똑같게 자원공유를 하게끔 만든다고 하지만 앞으로 농촌에 호구를 붙이기가 지난 세기 70년대에 도시에 호구를 붙이기만치나 어려워질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농촌호구를 가지고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호구에 따라 토지를 가지고있는 사람들과 토지를 내놓은 사람들이 있다. 토지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은 농촌토지정책을 잘 장악해야 한다. 지금이나 앞으로도 많은 혜농정책이 토지를 통해 관철되게 되고 그것이 또한 장기적인 일종 자원수입으로도 될수 있게 된다. 그리고 토지가 없는 농민이라도 각종 사회보장혜택이 차례질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절대 홀시하지 말고 루락이 없게 하면서도 적극적인 조건을 창조하여 더 많은 혜택을 쟁취하기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또 농촌집체수익분배권도 있기에 어느땐가에 가서는 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질만큼이나 큰 목돈이 생길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의 농민호구를 보존하고 여러 면의 다원화수익을 지속적으로 보장하려면 우리 마을마다에 기존했던 촌민위원회와 당조직을 정돈하고 강화해야 한다. 농촌에서 이 두 조직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토지가 있어도 제대로 리용할수 없고 《3권재확인》이 된다고 해도 땅에서 나오는 수익을 제대로 받아챙길수도 없게 되며 나아가서는 《팔자호신부》로도 될수 있는 농민호구도 보존하기 곤난하게 된다. 이 점에 좀 중시를 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길림신문 2015년 3월 10일자  
29    약점이면서도 강점인 연변농업의 특색 댓글:  조회:3968  추천:2  2015-03-06
연변농업의 미래발전을 두고 무엇이 앞으로 발전장애로 될것인가 하는 문제를 론할 때면 이러저러하게 부동한 관점들이 나오군 하지만 한가지 공통으로 접점되게 공인하는 문제가 있다. 바로 규모가 작다는것이다. 규모가 작은 탓에 규모화, 집약화, 기계화적인 현대농업을 실현하기에 힘들다는것이다. 확실히 연변의 지형에 따라 현대화적인 기계화농업을 추진시키자면 장애가 큰것이다. 반산구지구여서 산이 많고 평원이 흩어져있다. 대면적의 거창한 기계화농업을 실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고장이다. 규모를 확대할수 없기에 농업에서의 고수익을 따내기 곤난하다는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공인하는 인식이다. “개천에서 룡이 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일반 바다에서도 룡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개천에서 룡이 나타날수 있을가? 변증법적유물론철학에는 안된다는것도 될수 있다는 설이 있다. 즉 구체적으로 말해서 고수익을 따낼수 없다는 곳에서 고수익을 따낼수도 있다는 얘기로 된다. 현대기계화농업을 실현하기 곤난한 연변지대에서 농업의 고수익을 따낸다는것이 가능할가? 지금은 현대기계화농업을 “석유화학농업(石化农业)”이라고도 한다. 이런 농업에는 여러가지 단점들이 있다. 우선 고도의 지식구성, 기술기능, 관리모식이 병합되여야 하는데 장기간 우리 농촌에 이런 인재가 결핍하게 된다. 그다음 자연재해보다 더 심각한 석유공황이 들거나 석유값이 치달아 오르면 그 피해가 전반농업을 파멸로 몰아갈수도 있다. 그밖에도 토양의 경화를 초래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게 된다. “석유화학농업”이 발전할수록 환경오염이 더 커진다. 때문에 우리 연변에서는 이런 “석유화학농업”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자연실정에 맞는 농업생산을 해야 장기적인 고수익을 따낼수 있는것이다. 그러면 연변의 자연실정이란 무엇일가?  우리 연변은 반산구지대로써 크고작은 산들이 련봉을 이루며 뻗어나간 사이사이로 평원과 구릉이 알맞게 들어앉은 고장이다. 그래서 수림이 우거지고 하천이 얼기설기 엮어져있고 온대대륙성기후에 따른 사계절이 분명하고 해볕이 특별히 좋은 곳이다. 이런 고장에 제일 적합한것이 곧바로 자연생태농업이다. 생태농업의 전망은 점점 밝아오고 있다. “석유화학농업”보다 더 높은 고수익을 지속적으로 따낼수 있는 최고도경인것이다. 자연생태건설을 리상적으로 해놓으면 그 어떤 자본보다도 큰 자본이 되는것이다. 생태농업의 주요특점중 한가지가 그의 종합성이다. 농업구조를 조절하고 최적화해서 자연생태체계의 모든 공능을 충분히 리용할수 있으면 농업, 림업, 목축업,어업,특종재배업 등 여러 업종과 제1,제2, 제3산업이 서로 배합하여 다층차, 다원화, 다양성, 다방면적인 립체화종합생산능력과 종합경제효과성을 제고시킬수 있다는것이다. 연변의 자연지형이 바로 이런 특점과 알맞는다.  생태농업의 또 한가지 주요한 특점은 그의 지속성이다. 자연생태농업을 발전시키면 토양의 비옥도가 장기적으로 보호될수 있고 환경오염을 막을수 있기에 생태평형을 보존할수 있다. 생태평형을 보존할수 있으면 모든 농부산물과 특산물의 안전성을 보장할수 있기에 점점 높아가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만족시켜줄수 있고 따라서 지속적인 경제효과를 볼수 있게 되는것이다. 연변의 지형이 바로 이런 지속성을 유지시킬수 있는 객관환경을 제공해준것이다. 연변의 자연지형을 놓고 보면 산이 많은것이 특징인데 산이 많으니 수림이 우거지고 수림이 우거지니 공기의 이온화가 잘되여 만물의 생장에 좋은 영향을 주게 되고 공기의 이온화가 잘되니  수분이 많이 생성되여 물을 만들어내고 물이 많으니 각종 식물이 잘자라고 식물이 많아지니 거기에 기생하는 곤충과 균이 많아지고 곤충과 균이 많아지니 동식물의 생장에 유리한 생태평형을 유지해주는것이다. 이처럼 좋은 자연환경을 리용하여 생물농업, 유기농업, 록색농업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관광농업, 전통농업, 뜨락농업을 유기적으로 결부시키고 거기에다 미형기계화, 미형가공화작업을 추진시키고 과학적영농에 량성순환기제를 만들어 놓으면 연변농업의 고수익은 따놓은 당상이 되는 셈이다. 20세기는 자본이 축적되는 곳, 문화가 꽃피는 곳,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면 21세기의 중엽부터는 신선한 공기, 맑은 물, 록색먹거리가 나는 곳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게 되여있다. 그때 가면 연변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튕길것이다. 지금 중국에도 돈많은 “환경난민”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때문에 지금부터 자연생태환경을 보호하고 공업오염을 막아야 한다. 연변은 공업을 발전시킬 곳이 아니다. 공업의 확장을 막아야만 공업의 “점원오염(点源污染)”도 막을수 있고 농업의 “면원오염(面源污染)도 막을수 있게 된다.     
28    영화에 울고 웃었던 나날들 댓글:  조회:3889  추천:0  2015-02-13
  전번날 영화를 보자고 해서 지인 몇이 텔레비죤방송국관람실에 가서 “귀래(‘归来’ 한국번역명 ‘5일의 마중’)”라는 영화를 보았다. 저명한 소설가 엄가령의 원작을 개편하여 장예모감독이 연출하고 공리와 진도명이 주역을 맡은 영화였다. 명작가와 명감독에 명배우들이 합작해서 찍은 영화라 볼만한 영화였다. 영화는 그래도 명감독에 명배우들이 찍어야 영화 같은 멋이 난다. 은은하고 알싸하게 가슴을 적셔주는 스토리에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빈틈없는 짜임새에 영화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중을 잔잔한 추억속에서 깊어가는 회한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정말 오랜간만에 보는 영화였다. 어느때부터 영화를 보지 않았지? 기억에 아리숭하다. 왜서 영화를 보지 않게 되였을가? 역시 아리숭해서 모르겠다. 영화라면 미쳐서 오금도 추지 못했을 때는 또 언제였던고? 그 옛날 한창 세상물정에 어섯눈을 뜰 때에는 영화가 참, 좋았었지… “ㅏ、ㅑ…”를 받아 외울 시절에 줄을 쳐서 영화관으로 들어간다고 하면 정말 좋아서 퐁퐁 뛰기도 했고 영사막에서 빛을 뿌리는 오각별과 더불어 우렁찬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울려퍼지면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짝짝 쳐댔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영화가 무슨 영화든지간에 영화를 본다면 무조건 좋았던 영화에 미친 시절이였다. 그래서 제일 처음 본 영화가 무슨 영화였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최초에 제일 재미 있게 본 영화는 “꼬마방울”이였다. 전반 영화의 경개가 어떠했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두 뺨이 뽈록 삐여져 나온 “꼬마방울”의 익살스러운 형상만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때부터 영화가 옛말처럼 재미있구나 하는 감을 느끼게 되였다. 그다음 좀 커서 공포와 긴장감에 떨며 본 첫 영화가 구쏘련의 영화“구역 당비서”였다. 영화는 처음부터 자욱한 포연속에서 피난민들의 공포에 질린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전쟁이란 저렇구나 하는 무서움에 떨었다. 무섭기에 더 보고싶어졌던것 같다. 마치도 무서운 귀신옛말을 더 듣고싶어하는 심리와 같다 할가. 그후 울면서 본 첫 영화가 조선에서 찍은 영화인데 영화제목은 생각나지 않고 대개 이야기정절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한 가난한 집 녀자애가 밤나무밑에서 떨어진 밤을 줏고 있는데 지주집 아들놈이 자기네 밤을 도적질한다고 밤나무에 올라가 가시 돋친 밤열매를 그대로 내뿌린것이 녀자애의 눈을 쳐놓았던다. 병원에 갔으나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하고 소경이 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만 눈물을 흘린것이 아니라 우리 반, 아니 전체 우리 학교 학생들이 다 눈물을 흘렸었다. 두번째로 울면서 본 영화 역시 조선영화였는데 제목은 생각나지 않고 대략 경개는 이러했다. 한 녀교원이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남학생을 업고 다니며 공부시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찍은것이였다. 그 영화를 보고 쓴 나의 감상문을 선생님이 우리 학급 학생들앞에서 격동적으로 읽던 정경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 그 영화의 주제가 첫 곡은 지금도 얼마쯤 흥얼거릴수 있게 되였다. 하루도 아니라네 한달도 아니라네 춘하추동 사시절 오고가는 십리 길 비바람 불어쳐도 눈보라 몰아쳐도 …… 영화를 보면서 제일 많이 울었고 또한 울면서 본 사람이 제일 많았던 영화는 아마도 조선의 “꽃 파는 처녀”였을것이다. 우리 학급 동학들이 다 울면서 보았고 우리 학교 전체 사생원공들이 다 울면서 보았고 연변관중들이 다 울면서 보았고 전 중국이 다 울면서 보았던 영화였다. 도시뿐만아니라 농촌시골에서도 움직일수 있는 사람들은 다 동원되였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그 세월에 소수레에 앉아서, 손잡이뜨락또르에 앉아서, “2·8”식뜨락또르적재함에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앉아서 도시의 영화관으로 몰려갔고 가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었다. “꽃 파는 처녀”가 왜서 그많은 사람들을 울렸을가? 앞으로 다시 그 많은 사람들을 울릴수 있는 영화가 나올수 있을가? 지금 젊은이들을 앉혀놓고 그 영화를 다시 돌린다면 어떤 반응들이 있을가? 최초에 제일 비감에 젖어 본 영화는 “문화대혁명”직전에 제작된 “농노”라는 영화였다. 서장의 그 비참했던 농노제도와 그 제도가 몰락되고 붕괴되는 과정을 “챵바”라는 주인공을 통해 반영한 영화였는데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이 컸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웃으며 보았던 영화는 아마도 “리쌍쌍”이라는 중국의 희극영화였다. 저명한 배우 중성화와 장서방이 주역을 맡아서 당시 농촌생활가운데 나타나는 낡은 보수사상과 새로운 문명정신지간의 갈등을 희극적으로 반영한 영화였는데 그 당시 관중들을 많이 웃겼었다. 제일 통쾌하게 본 영화는 아마도 “문화대혁명”기간에 싫증나도록 보아온 “3전”영화들이였을것이다. “갱도전”, “지뢰전”, “유격전”… 너무나도 싫증나게 본 덕분에 지금에 와서 별로 할 말도 없다. 제일 싫증나게 본 영화들은 역시 “문화대혁명”기간에 정치적임무로 보아온 소위 본보기극들을 각색해서 촬영한 경극영화들이였다. 경극과 영화는 원래 각기 다른 예술표현형식이였는데 그걸 한데다 얼버무려 놓으니 정말 격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세절들이 많아서 보기에 너무 갑갑해 날 때가 많았다. 제일 처음 놀랍게 본 영화는 “망향(望乡)”이라는 일본영화였다. 영화에 기생들의 생활이 반영되였던것이다. 당시 우리 단위의 처녀애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어마나, 영화에다 저런 장면까지 다 찍어낸다니!”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장면을 피해 보았었다. 보지 말아야 할것을 본것처럼 자기절로 자기쪽에서 망측스럽다고 쑥스러워했던것이다. 제일 랑만적인 분위기에 빠져 본 영화는 인도의 영화들이였다. 인도영화는 대개 스토리도 서민생활에 가깝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아서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영화에다 춤과 노래를 유기적으로 잘 배합시켜 전반 분위기를 잘 띄우는것이 특징이였다. 이밖에도 맹물을 들이켜듯 제일 슴슴하게 본 영화들도 있고 제일 괘씸스레 본 영화도 있고 제일 길게 본 영화도 있었고 또한 별나게 본 영화들도 많았었다. 아무튼 영화에 깃든 이야기들을 하자면 끝이 없을상 싶다. 그 시절을 겪은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영화구경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있었을것이다. 영화를 통해 정감을 키웠고 영화를 통해 사상을 수립했고 영화를 통해 세상물정을 깨치게 된 경우가 많았던 그 시절, 영화관이 사회적인 공공대학으로 되여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일대들의 성장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것이다. 요즘 영화에 흥취를 가지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있다고 한다. 영화관람수입이 수백억원에 달한다고 하니 기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 조선족생활을 반영한 영화도, 특히는 전통적인 생활풍습을 보여줄수 있는 좋은 영화, 즉 명품영화도 제작되여 나왔으면 하는 기대도 걸어본다. 다시금 영화에 울고 웃을 날이 돌아오게끔! 연변일보 2015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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