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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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화 그 빛발에 비낀 그 모습들
2022년 07월 21일 19시 54분  조회:558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자치화 그 빛발에 비낀 그 모습들

홍천룡
 
 
지난 세기 50년대 초반에 들어선 연변은 동산마루의 붉은 해를 맞아오는 이른 봄 아침나절이였다. 백의 민족 나그네들이 공화국 창건에 차린 아침상을 금세 물리고 마루장에 나앉아 신들메를 조이고 있는 중이였다. 이 땅에 주인들이 바뀌였고 마을마다 봄기운이 한결 무르녹았다. 련애없는 약혼바람이 불어쳤고 동네안팎에 잔치떡 치는 떡메소리가 그칠새 없었고 별무리 깜박깜박 조리치는 밤중에는 은밀한 ‘밤작업’이 소리없이 줄기찼었는데 그 뒤를 따라주는 멜로디가  영아들의 앙앙거리는 고고성이였다… 집집이 다 아이를 무우 뽑듯 대여섯에 일여덟씩 낳아 길렀다. 살림이 궁해서 아이를 못낳겠다는 부부는 없었다. 오히려 구차할수록 더 낳아 길렀던 것이 그 시절 또다른 양육풍경이 아니였던가 싶다. 그랬다! 지역출산이 고봉을 이루면 그 지역의 사회적인 희망이 커진다. 지정학적으로는 머나 먼 변강의 오지 연변, 서사학적으로는 20세기 50년대초반이 바로 우리 민족의 그런 희망이 커지는 시점이였다.
 
그런 배경속에서 자치의 기발이 변강의 창공에서 펄펄 휘날리게 되였고 자치화 빛발이 감로수마냥 저 언덕마을마다에  휘뿌려졌다. 바로 그 시기 또한 이웃나라 조선땅으로부터 포성이 은은히 들려오며 두만강 연안으로 전운이 감돌아 퍼질 때였다. 시대의 주제가 ‘항미원조, 보가위국’이였고 청춘의 제일 영광은 참군이였다. 자식을 보낸 부모님들, 남편을 보낸 녀인들, 오빠와 형님을 보낸 아이들…
 
어느 해인가 우리 마을 경철이네 집 방문웃쪽에는 붉은꽃에 노르무레한 렬사패가 걸렸다. 우리의 형님같은 친구ㅡ경철이는 태여나서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난 유복자였다. 그런 아이를 홀몸으로 키우는 경철의 엄마는 갈람한 버들허리에 갸름한 얼굴에다는 애잔한 서러움을 담고있는 녀인이였다. 했지만 경철에 대한 요구는 더없이 엄엄했다. 숙제공부를 꼭꼭 마치고는 엄마의 일손을 거들게 했다. 그런 경철의 엄마도 동네  아낙네들의 말밥에 올라 뒤잔등에 손가락질 받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생산대 우사칸마당에서 송학이네 엄마(생산대 대장 부인)가 경철의 엄마한테 상앗대질 하며 ‘바람재’니 ‘여우새끼’니 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경철의 엄마가 홀연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물기 어린 눈에 형형한 빛이 번뜩이였다. 경철의 엄마가 감쳐물었던 입을 매섭게 열었다.
 
“송학이 엄마, 오해하지 맙소. 송학이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 아니꼬마. ”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떨리는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 저는 절대 경철의 아버지 령전에 흙탕물이 튕기는 짓은 할수 없습꾸마. 더구나 우리 경철이한테 미안한 일은 절대 할수 없구요…”
 
그리고는 끝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후 경철이네 엄마는 짧은 호미를 쥐고 바람에 날리듯이 가분가분 돌아쳤고 겨울에는 늘 거름광주리를 팔목에 끼고 다녔고 밤이면 밤마다 가마니짜기기계를 밤중까지 덜컥거리였다…
 
이듬해 겨울 방학이였다. 하얀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던 어느 날, 과외보도원인 승무네 형님이 아이들을 불러서 경철이네 방문앞에 모이게 했다. 마을사람들도 줄레줄레 모여들었다. 미구에 하얀 창호지로 도배된 방문이 펄럭이며 서서히 열리였다. 곤색 동복에 하얀 계실수건을 두른 녀인이 나타났다. 경철이네 엄마였다. 나풋거리는 눈송이사이로 약간 상기되여 발그무레해진 얼굴이 안겨왔다. 마을에 예쁜 계집애 복순이가 쫑드르르 달려나가 붉은꽃을 경철의 엄마 앞가슴에 달아주었다. 그리고 승무 형님의 지휘에 따라 온 마을 아이들이 렬을 지어 소선대경례를 올렸다. 그날은 경철의 엄마가 시로력모범표창대회에 참석하는 날이였다. 그해 여름에 김매기대회전에 동네아줌마들이 다 동원되였고 그해 겨울엔 마을에서 거름모으기열조가 일어났었다…
 
자치주가 선 그 시절에 조선족녀인들은 행차복으로 한복을 많이 리용했고 70여년이 지난 오늘 연길의 녀인들은 나들이패션으로 각종 투피스를 애용하고 있다. 한복에서 맵시돋굼은 옷고름이 해주고 투피스 곡선미의 날씬함은 허리띠가 주름잡아준다. 그처럼 연길의 경관에도 옷고름에 허리띠가 되여주며 흐르는 두 줄기의 강이 이 고장 운치를 한결 더 돋구어 준다. 그 한줄기는 석인골안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연집강이고 다른 한줄기는 조양천으로부터 구수하를 말아물고 인평소완자굽이를 돌아 흘러드는 부르하통하이다. 두 줄기의 강물이 합류하는 합수목은 지금보다 강폭이 넓고 수면이 잔잔했다. 하여 우리는 시내돌이를 할 때면 바지가랭이를 걷어부치고 그 합수목을 건너가고 건너오며 물장난을 치군 했다. 그 합수목에서 몇발치 안되는 동북쪽강뚝아래에(지금의 영빈로와 삼꽃거리가 교차되는 부근) 콩크리트구조에 양철기와를 얹은 주택이 동남향으로 줄줄이 들어앉았는데 그중 유표하게 독집으로 틀고 앉은 일식 사저가 있었다. 더구나 대문곁에 자그마한 보초막이 있어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날씨가 찌물쿠는 여름철에는 그 보초막에서 좀 떨어진 비술나무 그늘아래에서 한담하는 로인들이 모여있었다. 그늘밑으로 가끔씩 들려오는 그 말 한마디가 지금도 귀가에서 맴도는것만 같다.
 
“그 량반 덕에 우리가 달마다 이밥을 먹어본다니까.”
 
어느 날, 우리 또래들이 부르하통하에서 미역감고 나와 그 집 앞을 지나다가 허연 적삼을 입은 사람이 창턱앞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등키에 몸매가 다부졌고 기름한 얼굴에 눈등이 지고 실눈이 가늘게 뻗친 면상이 인자한 인상으로 안겨왔다. 우리 동네 철국이네 아빠를 빼닮은 나그네모습이였다.
 
“주장마다배야!”
 
훈이가 나지막하게 속삭이였다.
 
“그럼 우리 들어가 소선대경례를 올리자야! 선생님이 존경하는 분을 만나면 꼭 소선대경례부터 올리라구 하셨잖아?”
 
우리는 보초막쪽으로 쫑드르르 몰려갔다.
 
“보초병아저씨가 해방군이니까 우릴 들여보낼거야.”
 
우리는 이렇게 제멋대로 지껄이며 흥분했다. 보초병이 의아한 눈길로 몰려드는 우리를 바라볼 때 앞장에 달려가던 훈이가 뚝 멈춰섰다.
 
“안돼! 오늘은 안돼! 넥타이를 매지 않았어.”
 
그제야 우리는 멈춰 서서 서로서로 마주 보며 눈을 띠룩거렸다. 더러는 런닝그에 팬티바람이였고 더러는 반팔내의에 짧은 바지였다.
 
“그럼 어쩔가? 맨몸으로 들어가 하면 안돼?”
 
“안돼! 우리 이게 무슨 꼴이니? 엄숙하지 못해. 선생님 앞이래도 그렇겠는데 하물며…”
 
우리보다 좀 어른스레 노는 훈이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더니 결단스레 말꼬리를 끊었다.
 
“돌아가자! 래일 학생복에 넥타이를 꽁꽁 매고 와서 소선대경례를 올리자꾸나!”
 
우리는 저마다 축 늘어지는 어깨를 꼬아대며 느릿느릿 보초막을 지나갔다. 어떤 녀석은 괜히 길가의 조약돌을 걷어차며 먼지를 일구었다. 그후 우리가 넥타이를 꽁꽁 매고 가서 만나뵈려고 잔비술로 울타리를 친 그집 주위를 배회했지만 어디에 꽁꽁 숨어계셨는지 그 모습이 더는 우리 눈으로 안겨오지 않았다… 그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줄은 그때 우리는 몰랐다. 만약 우리가 그때 아프리카의 흑인 아이들처럼 온몸이 까맣게 탄 그 꼴 그 모양새로 무작정 들어가 소선대경례를 올렸더라면 어떤 장면이 연출되였을가?  그 분, 그 ‘주장마다배’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맞아주셨을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그 ‘주장마다배’가 꼭 우리 동네 동엽이네 아버지ㅡ연변대학 교수이고 저명한 시인인 설인 선생님처럼 자기의 제자를 맞아주시듯이 우리를 맞아주셨을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꼭 무슨 말씀을 해주셨을 것이였으리라! 그리고 또 그 손, 그 옛날 항일의 봉화를 추켜들었던 그 손, 연안의 토굴집에서 등불을 켜던 그 손, 세전벌에서 논두렁감기에 나서 긴 삽자루를 거머쥐였던 그 손… 그 두툼한 손도 직접 잡아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였겠는가!
 
아, 가슴에서 날리는 붉은 넥타이를 꽁꽁 매고 오른팔을 머리우로 숭엄하게 추켜올리며 45°각을 맞추었던 그 소선대 거수경례, 영원히 ‘주장마다배’께 올리지 못했던 그 소선대경례…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영원한 주선을 그어주는 식재료가 무엇일가?  입쌀! 주총리께서 나라의 벼재배전문가로 첫손 꼽아주신 사람이 최죽송 아바이였는데 그 뒤를 이어 신풍대대벼품종과학실험보급과 원전화개발에 돌격대로 나선 그 마을 공청단조직의 골간 맴버들인 박수호, 강철 등 젊은이들의 호매로운 모습이 지금도 추억의 영사막에 생생히 떠오른다.
 
“신풍촌의 벼수확을 위하여 우리의 청춘을 이바지하련다!”
 
량식국에서 근무할 때에 나의 상사로 왕문란이라는 녀부국장이 계셨다. 보기만 해도 화애롭고 푼더분한 인상을 주는 녀성이였지만 당시 연길시 십여만 시민들의 생명줄인 식량공급을 책임진 요인이였다. 그녀는 원래 신흥량식공급소 제5분점의 일반 판매원이였는데 몇년간 피타는 노력으로 공급범위내에 든 수백호에 달하는 매 가정세대의 식량공급상황(한 가정내에서도 년령과 직업에 따라 부동한 공급표준이 있었음), 렬군속과 오보호, 장애불구자 등 특수가정에 대하여 손금보듯 하여 제때에 문전송달도 하였고 또한 숙달된 판매솜씨로 고객들을 탄복시키군 했으며 조선족고객이 다수인 상황을 고려해서 조선말도 배워내서 일반 교류에 막힘이 없었다.
 
“쌀 한알이라도 허실없이 시민들에게 제때에 공급해주기 위해 힘다하려 해요.”
 
그녀의 그 말 한마디…
 
수십년간 자치주현대화건설에서 특공을 세운 한 교통기구가 있다. 무엇일가? 바로 자동차 ㅡ 그것도 ‘해방패’트럭이다. 60년대 초부터 수백대, 수천대 ‘해방패’트럭이 연길과 연변의 도로망을 질주하면서 쌀, 석탄, 목재, 그 모든걸 다 날랐었다… 그런 ‘해방패’를 몰고 지구를 몇십고패 돌았고 수십년 안전행차를 하여 전국교통전선의 모범기수로 된 로운전기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연길시운수공사의 베테랑운전기사였던 윤학선이다. 아버지와 동료였던 그가 어느 땐가 나를 안아다 운전대에 앉히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이 녀석, 차놀음 잘 논다지. 크거들랑 사고치지 않는 운전수가 되거라.”
 
너부죽한 얼굴에 늘 미소를 짓고 다니던 그 모습에 그 롱담같은 말씀 한마디가 힘이 되였는지 나도 칠십고개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차를 몰고 다녔지만 사고 한번 치지 않았다.
 
이밖에도 추억속에 떠오르는 정겨운 모습들이 많았다. 갱핏하고 강의했던 김성희 시인, 시3중에 ‘3금선생’ㅡ 생금선생님, 옥금선생님, 어금선생님, 어머니와도 같은 선생님들, 소설가 박은 선생의 거쿨진 그 모습… 아, 그리고 정말 잊을수 없는 그 분ㅡ 우리 동네 정호엄마! 칠남매를 키워내면서 늘 빙그레 웃어주시던 그 모습, 막내가 배가 고프다고 울어보채도 빙그레 웃으며 달랬고 셋째의 ‘왕바신(방한용 솜신)’앞코가 터졌다고 벗어내치니 바늘쌈지를 던져주며 “한번 신깁재질 해봐라”하고 빙그레 롱담도 던지셨고 급성 맹장염에 걸린 넷째를 포대기에 둘둘 감아안고  단숨에 병원까지 달려갔다가 수술을 마치고 나오자 “죽지 않고 용케도 살아났구나!”고 빙그레 미소짓던 그 모습… 후에 칠남매중 대학생도 있었고 공무원도 있었고 공장선반공도 있었고 병원의사도 있었고… 저마다 성장가도를 달리면서 서로서로 어머니께 더 효도하느라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자치주창립 70주년을 맞아 그 빛발속에서 살아온 한 사람으로써 참, 감회가 깊다. 그걸 어찌 한두마디로 다 말할수 있으랴만 딱 한마디만 하라고 하면 다시 돌아가 그 70년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고 토로할 것이다. 이제 뭐 더 바랄게 있겠는가? 있다면 역시 딱 한가지! 자치주 미래에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출산고봉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연변일보 2022-07-21 1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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