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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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김대현선생 관련 인터부 2편/김철호 댓글:  조회:878  추천:0  2019-08-16
김대현선생이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듣고 많이 가슴 아팠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내가 연변일보 재직시절 김대현선생을 인터뷰한 글 두 편이였다. 이 글로 김대현선생의 타계로 아팠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한다.     ㅡ책 모아 7,8년에 3천권의 장서 마련한 김대현씨   트럼프, 마작, 장기, 낚시… 거의 모든 놀음에 등돌리고 장서에만 마음이 들떠있는 김대현(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부국장 겸 부주필)씨는 자신의 장서를 바라보는 재미로 산다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책모으기에 본격적으로 살손을 대기는 7, 8년전부터라고 한다. 그간 아글타글 모은 3천여권 책이 객실과 침실의 책시렁에 빈틈없이 꽂혔고 인젠 침대밑이며 베란다에마저 쌓아놓잖으면 안되게 되였단다. 그래도 공일날만 되면 안해의 눈을 슬쩍 피해 그간 챙겨두었던 소비돈을 갖춰가지고 거리의 책난전을 돌아보는데 어느 골목이건 샅샅이 뒤지면서 고서거나 희귀한 책들을 찾느라고 눈뿌리를 뺀다는 것이였다. 이러한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의 마음은 금덩이를 주었을 때보다도 더욱 들떠진다는 것이였다. 더구나 부르는 값이 저렴할 때면 그 기분이 둥둥 떠지고 어깨가 으쓱해진단다. 별의별 책이 다 있었다, 문학, 력사, 정치, 인물전기, 관광저서, 의서… 깔끔히 새것인 것도 있었고 보풀이 일어 원 모양을 찾아볼 수 없이 낡은 것도 있었다. 아무리 낡고 보잘 것 없어보이는 책도 그에게는 그처럼 소중할 수가 없었다. 알뜰히 챙겨서 정히 얹어둔 것을 내리워서 펼쳐보이는 손길은 귀중한 보배를 내보이는 것처럼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광복후에 조선에서 출판한 시집들인데 한 2백권 될 겁니다.” 객실의 책시렁 맨밑층에 얹은 책들을 가리켜보이면서 흐뭇이 웃는다. 어릴 때 애독하던 장편서사시 이면 같은 조선의 명시집들이 귀빠진 것 없이 꽂혀있었다. 조기천의 은 첫판본을 비롯해 각기 부동한 판본이 4권씩이나 있었다. 출판사, 출판 년월일이 미상인 귀서도 있었는데 책장을 펼치니 리광수, 안재홍, 리은상, 김동인, 김진석, 리태준, 정영섭, 양주동, 라빈, 박화성, 로자영, 박태원. 리조원… 등의 명문이 실린 작품집들이였다. 인쇄, 종이 등으로 보아 일본에서 출판된 책이 아닐가 의논해보면서 다른 책을 찾아쥐니 대정 2년(1914년) 서울에서 출판한 서예책이였다. 누구의 필법인지 그야말로 룡이 날고 범이 뛰는 필체였다. 어떤 책은 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1956년에 북경고적출판사에서 출판한 (1ㅡ10권)은 당시 3천부밖에 발행하지 않았으니 지금 3천부가 그대로 보존돼있다고 해도 40만 인구에 한조가 차례지는 꼴이니 참으로 귀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정 12년(1924년) 초판으로 된 , 소화 2년(1927년)에 찍은 , 1957년에 출판한 , 대약진시기의 … 김씨는 아무튼 책부자였다. 부자가운데서 책부자가 가장 흐뭇한 부자가 아닌가면서 우스개를 피우는 그는 죄우명처럼 삼는 명언이 하나 있다면서 수첩을 펼쳐보인다. “부자되기 위해 굳이 밭을 살 필요가 없다. 책 속에 만석의 곡식이 들어있는데. 편안히 살자고 고대광실을 살 필요가 없다. 책 속에 황금으로 지은 집이 있는데. 안해를 고르는데 거들떠보지 않음을 한탄하랴. 책 속에 옥같은 미녀가 줄쳐있는데.” “얼마나 멋진 명구입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저 책시렁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납니다. 보물고에서 산다는 기분으로 마음이 든든해지지요.” 안해가 먼지투성이의 책을 한아름씩 사들고 오는걸 질색해 하나 못들은척 자행을 고집한다는 것이였다. 민족유산은 나라뿐만 아니라 개인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책모으기가 그로서는 가장 적중한 작업이라는 것이였다. 요즘 어떤 도서관에서는 적치된 책을 페서로 처리해버리는데 대해 참으로 가슴 켕긴다 한다. 30, 40년대의 책은 아주 드물고 50년대 찍은 책도 얻기 힘든 상황인데 도서관에서 이렇게 책을 없애는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50년을 주기로 책이 소실되는데 지금 손쓰지 않으면 어떤 책은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각별히 책읽기를 즐겨 야금야금 모았으나 “문화대혁명”, 집이사 등에서 밀대를 맞다싶이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하여 가슴 썩였댔는데 7, 8년 심혈을 쏟으니 또 이렇게 모아지더라면서 노력하면 먹은 마음이 꼭 이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책 외에도 그는 몇 점의 수석을 갖춰놓고 있었고 옛날 다림이같은 고물도 몇 점 챙기고 있었으나 별로 눈길이 쏠리지 않았다. 그런데 신문, 잡지에서 귀중한 력사사료, 명언, 수필, 시, 기행문, 관광소개 같은 것을 가위질해 모은 것이 수천 편 된다는 말에는 마음이 동해 그 자료를 보니 확실히 모두가 주옥같은 자료들이였다. 도서를 포괄해 이런 자료들은 그의 편집, 집필 사업에 큰몫을 보태준다고 한다. “액외수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해 몰래 책을 사들여 핀찬을 들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인젠 그것이 가장 즐거운 일로 고정이 되여버려 저로서도 자제할 수 없고 안해도 더는 어쩌지 못하지요.” 김대현씨는 조금 시뚝한 기분이기도 했다.(1998년 10월 연변일보)         수석가 김대현씨 강따라 계곡따라 수석찾아 15년 “수석엔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지요”   수석(壽石)에 정이 들어 애석(愛石)생활을 즐긴지도 어언 15년 세월, 지난 15년동안 초라한 행각으로 강따라 계곡따라 다닌 길 얼마인지 모른다는 김대현씨(연변백두산수석학회 고문)는 수석과 정을 나누면서 날이 갈수록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고 한다. 이제 강물이 풀렸으니 올해에도 부지런히 탐서해야겠다면서 며칠전 두만강탐석길에서 주었다는 돌 하나를 내보이였다. 보자마자 “이건 ‘물개’군요!”했더니 “그렇지요!”하고 미소를 띄운다. 한 손 우에 얹을 만큼의 알맞춤한 오석인데 심통하게도 앞부분에 “눈” 두개 패여있고 “코구멍”까지 있었다. 더욱 묘한 건 다른 석질로 된 “입”이였다. 온 몸이 몽땅 까마반지르한 오석인데 어떻게 되여 주둥이에만 골라넣은듯 누른색 돌이 박였을가. 볼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지난 토요일(4월 1일), 백두산수석학회 동료 6명은 올해의 첫 탐석에 나섰다. 도문에서 10리쯤 내려가면 신기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앞 두만강자갈밭이 탐석지였다. 쌀쌀한 날씨지만 첫 탐석에 나선 동료들은 금덩이 줏는 심정으로 자갈밭에 눈길을 박았다. 그러나 해종일 헤매도 별로 신통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까만 “눈동자” 하나가 김대현씨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눈동자”였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살살 모래흙을 파헤쳤다. 다른 한 “눈동자”까지 드러났다. 가슴이 후둑후둑해 났다. 긴장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쇠갈구리를 깊숙이 박은 후 돌을 흙속에서 후딱 빼냈다. 강아지새끼처럼 귀여운 돌이였다. 재빨리 두만강물에 헹구었다. 깨끗이 씻긴 돌은 찬란한 오색인데 얼핏 보기에도 틀림없는 “물개”였다. “돌줏기가 그래서 재밌다는 겁니다. 면바로 좋은 돌 하나 주으면 둥둥 뜨는 기분이죠. 보십시오. 이 ‘눈’,  ‘코’, ‘입’이 얼마나 묘합니까. 이 돌은 우리 집에서 두번째로 좋은 돌입니다.” “그럼 첫번째 돌은요?” 시렁에 얹힌 까마반즈르한 돌 하나를 가리킨다. 주은지 꽤 오래지만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그 돌 역시 오석이였다. 빈틈없이 잘 수마된 돌은 단순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굴곡이 있고 평범한 것 같지만 신비한 운치가 배여있었다. “1989년, 한국나들이를 하고 돌아온 후부터 탐석에 흥취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의 수석생활이 맘에 들어서였지요. 그러니 본격적으로 돌을 줏기 시작한 것은 1990년부터입니다. 마수걸이가 참 좋았던 같아요. 이 돌은 시작해서 얼마 안되여 주은 돌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군침을 흘립니다. 이만큼한 돌은 아마 흔치 않을 겁니다.” 김대현씨는 돌자랑을 자식자랑처럼 늘여놓았다. 그날은 김부식 등 한국애석가들과 함께 탐석길에 올랐다고 한다. 가야하와 부르하통하 함수목이 탐석장이였다. 홍수뒤끝이라 강변은 스산하기 그지없었지만 탐석자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유별나게 눈길을 빼앗는 까만 점에 흡인되여 무릎을 꿇게 되였는데 살살 파헤치며 보니 오석이였다. 가뿐 들리는 까만 돌을 강물에 씻으며 보니 밑바닥이 칼로 벤듯 반듯했다. “명석을 주었다!” 산천이 떠나라 소리를 지르니 저쪽으로부터 두 친구가 천방지축 달려왔다. “연변에 이런 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 욕심나 죽겠네요.” 돌을 받아쥐고 이리 훑고 저리 훑던 한국친구들도 감탄의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일생 일석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이 돌 하나 있는걸로 자부심을 느낌니다. 어디 내놓아도 나무랄데 없는 명석이지요.” 김대현씨의 돌줏기이야기는 몇날 며칠을 들어도 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야하반의 만천성에서 50킬로그람 되는 커다란 돌을 주은 후 길까지 200메터 나무숲을 헤치며 메여내온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금도 김대현씨 저택에 곰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다가가 들어보니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 무거운걸 어떻게 길까지 메여왔을가. “수석에 미치면 그렇게 됩니다. 이건 ‘첩첩련봉’, 이건 ‘오리석’, 이건 ‘초모자’, 이건 ‘원숭이’…” 김대현씨는 소장하고 있는 수석들을 하나하나 내보이면서 설명해주었다. 보니 과연 “원숭이”는 원숭이요, “오리”는 오리였다. 또 산세의 굴곡과 변화를 보여주는 “산”들은 꿈틀대는듯 생동하고 우뚝우뚝하여 기백이 넘치는 것이 한폭의 산수화 같기도 했다. 산이나 계곡, 강가에 가면 흔한 것이 돌이다. 그러나 수석은 평범한 돌이 아니다. 김대현씨의 말을 빈다면 “돌은 돌이로되 수천수만개의 돌 중에 하나가 있으나마나 한 희귀하기 그지없는 돌이다.” 때문에 수석은 인공으로는 도저히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수석에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수석을 감상하느라면 마음이 취한듯 황홀해지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한껏 느끼며 상상과 사색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집안에 앉아서도 나는 항상 자연 속에서 살고 있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독서도 하고 글도 쓰고 있습니다. 더 좋은건 자연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고향과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수석이 바로 이런 것이기에 김대현씨는 15성상 휴식일이면 배낭을 등에 지고 탐석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멀리 두만강기슭과 가야하기슭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수석을 찾아다닌 길 얼마였고 해란강, 구수하, 봉밀하, 부라하통하, 륙도하 기슭을 누비면서 자갈밭을 뚜진 것 또 얼마였으랴. 어떤 때는 석우(石友)들과 함께 흥흥 코노래를 부르며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록수청산에 한몸을 맡기고 탐석의 즐거움을 맛보느라면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 줄도 모른다고 한다. 공기좋고 경치좋은 대자연 속에서 만사를 잊고 마음을 비우채 오로지 탐석에만 열중하는 그 즐거움이란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없노란다.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면 가지고 간 도시락을 펼쳐놓고 술 한잔 넘기며 층암절벽에 뿌리 박고 너울너울 셀레이는 소나무숲을 쳐다보노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면서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일소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와중에 멋진 돌 하나 줏기까지 한다면 그날은 명절이나 다를바 없어지는 것이다. “돌 하나에서 아름다움과 그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이야말로 ‘발견의 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탐석은 다름아닌 자연미의 발견이고 천연예술품의 발견입니다. 수석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가장 가까이 할 수 있게 하고 자연과 인간을 적절히 조화시켜주는 대자연의 걸작이자 연분을 맺어주는 ‘오작교’이지요.” 그러나 연변에 수석을 사랑하고 탐석의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너무 적어 섭섭하다는 것이 김대현씨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제 돌아오는 9월 연변박물관에서 연변백두산수석학회 회원들의 작품을 위주로 수석전람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김대현씨는 그때에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들어 안계를 넓힐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제 파묻혀있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찾는 대오가 형성되여 고향의 강과 계곡을 누빌것입니다. 저도 그 속의 일원으로 죽을 때까지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겠지요.” (2006년 4월 7일 연변일보)
729    [시] 흑백사진(외 8수)-김철호 댓글:  조회:1325  추천:0  2019-07-12
김철호   흑백사진(외 8수)   과거로 가는 길은 색갈을 지우는 일이다     분홍립스틱 지우고   금빛 머리카락 지우면   검은 것과 흰 것만 남는다   50년 전, 100년 전이 탄생한다     두가지 색갈만 있었던 세월   눈 감으면 검고 눈 뜨면 하얗던 세월   밤은 검기만 하고    낮은 하얗기만 하던 세월   흰 것과 검은 것 외엔    다른 색갈이 필요 없었던 세월…     희고 먼 하늘   검은 이파리의 떡갈나무   검은 눈동자엔 흰 눈빛이 반짝인다   흰 미소가 입가에 매달려있고   검은 분노가 가슴에 엉켜있다…     그러나 눈 감고 색갈들을 살살 지우면   찬란히 환생하는 흑백의 세계   거기서 우리의 과거가 웃고 있다   그 어떤 칼라로도 가리울 수 없는    우리의 과거가   검은 파도 흰 파도로 출렁인다     같은  맛     바다의 맛과 눈물의 맛은 같다 그러니   눈물을 흘릴 때 바다가 흐르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아픔이래도   보잘 것 없는 슬픔이래도   바다다     눈물의 맛과 바다의 맛은 같다 그러니   바다가 출렁거릴 때    눈물이 출렁거리는 것이다   그것이 큰 파도래도   하늘 같은 통곡이래도   눈물이다     저고리     잔디를 다 덮고   하늘을 다 감싸   뿌리 깊은 나무 숨겨주고도   남는 품     욕심 많은 저 작은 가슴에서   뜬 별 얼마일가   새버린 해 달 얼마일가     노을 물 묻혀 쓴   천년의 리력서에는 꽃씨의 숨     고름줄을 쥐고 주춤거리는 짐승을 밀쳐라   흰 달덩이는 하늘의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이 죽음 보고 말한다     넌 왜 이렇게 곁에 딱 붙어서서 떠날 념 안하는 거니? 조금만 한눈 팔면 앞에 나서려 하니 괘씸하구나     죽음이 대답한다     참 답답하다 우린 쌍둥이로 태여난 친형제란다 네가 딱 막아서서 앞에 나서지 못하지만 암 때건 너를 젖혀버릴 것이다     삶이 다시 말한다     우리를 쌍둥이로 낳은 하느님이 원통하구나 난 니가 정말 질색이다 싫어 못살겠다 너를 피하느라 갖은 고생이다만 세월 갈수록 네 힘에 밀리우는구나     죽음이 다시 말한다     네가 앞에 있대서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구 내가 앞선대서 니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니가 있다     삶이 돌아서며 죽음의 어깨를 잡자   죽음도 삶의 어깨를 잡으며 웃는다     그래, 우리는 친형제지!   그렇다, 우리는 한몸이다!     해골     눈동자가 없는   빈 눈집   코마루가 없는   빈 코집     아―사람의 입은   아궁이였구나     입술로 겉치레만 안했더면   한솥의 밥 단숨에 들어갈   굴 같은 아궁이였구나     섬     나비야, 넌   파란 하늘 작은 뭍   가닿을 수 없는 먼 눈빛   놓쳐버린 예쁜 자리     못난이는 자신의 둥지   항상 스스로 빼앗긴다     날아가는 나비를   쫓지 말라   나비는   바람 따라가는 숨 아니다     나무     나무는 참으로 먼곳에서 오래 온 것 같다   한번 쉬기 시작하니 떠날 생각을 안한다   밟아본 기분인 듯 늘 하늘 한자락 쓰고 있다   아무리 가는 바람이래도 나무에게 들키면   꼼짝 못하고 예쁜 심음(心音)을 보인다   동서남북 상하를 향한 푸른 입들은 늘 벌려져있고   별이며 달이며 구름이며 태양이며 이슬이며를 끝없이 탐식한다   하나의 커다란 날개를 만드느라   서서히 오래오래 머물며 꿈을 익히는 망,   자취 없는 나래질 소리를 념(念)하는 깊은 숨을 아무도 모른다   푸득! 나무는 오늘도 나래의 힘을 가늠해본다     뿌리     갈퀴손이   땅을 꽉 붙잡고 있다     날개 굳은 커다란 새   날기 위해 키워온 힘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날가 말가, 날가 말가   퍼덕인다     오늘도 동이 트는 하늘   빨간 불덩이 향해 윽벼르더니   어둠의 그물에 걸려   어깨 내린 새     태공을 날 꿈 잊지 않고   백년을 버티는 억센 갈퀴손   땅에 꽉 박고 떤다     차(茶)   ―물의 고백     당신을 맘껏 피워주기 위해   나 한껏 끓으리     당신의 몸에서 노란 향기 우러나   내 속에서 춤 출 때   한모금 꿈으로 설레리     끓어, 팔팔 끓어   내가 통째로 당신으로 꽉 찰제   당신은 온통 나로 넘실거리려니   당신과 나는 드디여 한몸 되여   하늘에 가 구름과 비의 만남을 보리     새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숨 속에 들어있는   당신은 차(茶)   나는 물!
728    [단편] 검은빛 댓글:  조회:913  추천:0  2019-07-09
검은빛 김철호   1. 외가마을에 이상한 녀인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녀를 ‘영자아지미’라고 불렀다. 영자아지미는 철길 너머(사람들은 철길 너머 마을을 ‘철북’이라 불렀고 이쪽을 ‘철남’이라 불렀다.) 강이네 륙간초가집 외양간을 수리해 온돌을 놓은 곁칸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방학이 되여 놀러 갈 때마다 우린 그녀를 가끔 만나군 했는데 외할머니가 ‘영자아지미’라고 부르라 해서 그냥 그렇게 불렀다.  영자아지미는 어쩌다 외할머니네 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다. 인기척도 없이 문을 밀고 들어와서는 아래목에 꼬부리고 누워있는 외할머니 곁에 우두커니 앉아있다가는 들어올 때처럼 그렇게 살그머니 일어나서 가버리는 것이 고작이였다. 그래서 우린 그녀가 언제 들어왔는지 또 언제 돌아갔는지 모를 때도 있었다. 외할머니도 그녀가 들어올 때에도 그랬거니와 나갈 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오면 오고 가면 가고 그저 맘대로 하라는 눈치였다.  그녀의 거동을 조금 더 자세하게 묘사하면 이렇다.  그녀가 집(외할머니네 집)에 들어설 때면 우에서 말했듯이 소리없이 문이 열린다. 빠끔 열린 문으로 먼저 커다란 검은 수건뭉치가 쑤욱 들어온다. 검은 수건뭉치는 신발 벗는 곳을 살핀다. 신발들 속에 외할머니 신발이 있기만 하면(외할머니 신발이 없으면 검은 수건뭉치는 도로 밖으로 나가버리고 문이 소리없이 닫긴다.) 어깨가 들어오고 한손이 따라 들어온다. 거의 동시에 한쪽 발이 들어오는데 그 손과 발은 마치 뒤따라 들어오는 다른 손과 발을 이끌어들이는듯해보인다. 두 손, 두 발이 다 들어서면 꺼부정한 작은 몸집이 끌려들어와 더듬더듬 기여서 외할머니 곁에 간다. 신발은 너무 컸기에 벗을 필요 없이 저절로 벗겨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검은색의 커다란 헝겊수건(할머니는 그 수건을 ‘숄’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무슬람 녀성들이 머리를 가리기 위해 쓰는 ‘히잡’이라고 부르는 머리수건 같았다.)을 푹 쓰고 있었는데 얼굴 전체를 수건으로 완전히 가리고 있어 얼굴은 말 그대로 수건뭉치였다. 말할 때면 수건이 겹쳐진 곳을 빠끔 열고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우린 그 말을 통 알아듣지 못했다. 외할머니만은 그래도 항상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중얼거림이 끝나면 수건은 감옥문처럼 다시 철커덕 닫혀버렸다. 수건이 겹쳐진 곳을 좀 트인 것은 말이 새나오라고 그러는 것이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거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닌 것 같았다. 때문에 수건 속에 감춰진 입, 코, 눈,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냘픈 목은 그 무거운 머리통을 지탱해줄 힘을 잃은 모양이였다. 어깨 중간에 겨우겨우 붙어있는 머리통은 늘 바닥을 향해 꺾여있었다.  그래서 우린 그녀가 없을 때에는 그녀가 곰보여서 그런다는 둥,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어서 그런다는 둥, 코가 삐뚤어졌거나 외눈박이거나 아니면 귀가 떨어져서 그런다는 둥 하면서 킬킬거렸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고 핀잔주었다. 외할머니의 두둔이래야 기껏 ‘불쌍한 녀자’라는 한마디 뿐이였다.  우린 그 ‘불쌍한 녀자’가 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몇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인상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란리’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우린 별의별 추측을 다해보았지만 끝끝내 그녀의 얼굴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축 처져보이는 치마저고리는 몹시 낡은 것이였는데 몇군데 기운 자리가 있었다. 흰바탕이였을 치마저고리는 꺼무룩한 색갈로 변해있었고 신고 있는 것은 남자용 검은 고무신이였다. 그녀는 커다란 검정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 더욱 이상한 것은 빛에 대한 그녀의 강력한 민감성이였다. 그녀는 그 어떤 빛에도 기겁을 했다. 빛은 그녀에게 공포의 대상인 것이 분명했던 것 같다. 동생 태식이가 금방 소학교 1학년 두번째 학기 공부를 마친 뒤였으니 아마 1960년 아니면 1961년 쯤일 것이다. 여름방학이였다. 친척이 없었던 우리는 방학이 되자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살던 시내에서 8리 남짓 떨어져있는 절골의 외가집으로 뛰여갔다.  그러나 신나던 방학, 동년의 꿈을 익혀주던 그 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우린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여름방학에 발단이 된 일이 겨울방학에 터져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리고 그 후 다시는 외가마을로 놀러 가지 않았다. 아니 놀러 가지 못했다.    2. 그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였다. 그 우연 때문에 우리는 그녀가 더 신비해보였고 우스워보였고 멍청해보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우리는 그녀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 부렸고 결국엔 그녀를 기로에로 밀어넣고야 말았다.  그 때 민가에서 사용하던 전등스위치는 거의 다 끈으로 당겨 켰다 껐다 하는 것이였다. 외가집 정주와 웃방 문틀 모서리에 끈을 드리운 감자알 만큼한 까만 스위치가 달려있었다. 끈은 벽을 따라 구들 언저리까지 내려와있었다. 잠잘 때 손으로 그것을 잡아당기면 전등이 꺼지게 되는데 쓰기가 아주 편리했다. 잡아당기면 ‘딸깍!’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아주 재밌고 귀여웠다. 그 소리와 함께 방안이 환해지고 그 소리와 함께 방안이 캄캄해진다. 그래서 장난꾸러기였던 태식이는 쩍하면 그 끈을 ‘딸깍! 딸깍!’ 잡아당기군 했다. 태식이의 그 같은 소행을 미리 대처하기 위해 외할아버지는 낮이면 스위치 끈을 아예 옷걸이로 박아놓은 못에 높이 걸어놓군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의 첫 사건이 생기게 된 바로 그 날이였다.  우리 형제는 밖에 나가 실컷 놀다가 해거름 때가 되여 돌아왔다.  영자아지미가 와있었다. 외할머니는 아래목에 꼬부리고 누워있었다. 솥에서 뭔가 끓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냉이가 솥에서 한창 삶기고 있었던 것이다.   태식이와 나는 맥없이 벽에 기대여 앉아 강냉이 익기만을 고대 기다렸다. 묵직한 엉뎅이가 벽에 의탁되여있는 몸뚱이를 아래로 자꾸 잡아당겼다.  일은 그 스위치끈 때문이였다. 무슨 영문인지 그 날 스위치끈이 못에 걸려있지 않고 벽에 축 드리워있었다. 적중히 말하면 스위치끈이 태식이의 등에 눌려있는 상태가 되여있었다. 태식이와 나는 가지런히 벽에 기대여 앉아있었다. 태식이가 맥없이 벽에 기대일수록 엉뎅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몸뚱이는 자꾸 아래로 흘러 등뒤에 눌리우고 있는 스위치끈을 고도로 팽팽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고 영자아지미는 돌아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자아지미를 할머니가 만류하고 있었다. 아마 강냉이가 익으면 먹고 가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영자아지미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얼굴을 푹 가리운 수건을 조금 드티면서 할머니와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장난기가 도진 나는 발로 태식이를 툭 건드려버렸다. 아래로 흘러버리려고 엉뎅이에 몰려있던 태식이의 몸이 나의 발길질에 쭉 미끄러져 구들 우에 벌렁 쓰러졌다. 결과적으로 벽에 붙어있던 태식의 잔등이 스위치끈을 잡아당기는 역할을 해주었다.  딸깍!  야무진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어둑어둑하던 집안이 대뜸 환해졌다.  갑자기 새된 비명소리가 집안의 공기를 마구 찢었다. 그 비명은 괴물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고 멱 따이는 짐승의 발악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머리가 곤두서는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태식이는 어느새 일어났는지 구들 중간에 장대처럼 서서 가느다란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비명의 주인은 영자아지미였다. 뒹굴듯이 구들에 쓰러지면서 푹 눌러쓰고 있는 수건 우에다 저고리까지 마구 뒤집어쓴다.  너무도 순간적이고 돌발적이였다.  -불(전등)을 죽여라! 불을 죽여라!  외할머니가 소리쳤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던 우리 형제는 마구 뒤척이면서 욱욱거리는 영자아지미를 놀란 눈길로 바라볼 뿐이였다. 그 모습에 처음에는 두려웠고 다음에는 당황했다. 그러나 몇초 사이에 우리의 감정은 대뜸 변해버렸다. 영자아지미가 하는 꼬락서니가 너무 재미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영자아지미가 왜 저런다니 하는 의구심으로 똘똘 뭉친 눈길을 주고 받으면서 그 해괴한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맥없이 아래목에 꼬부리고 누워 까딱하기를 싫어하던 외할머니가 잽싸게 일어나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스위치끈을 잡아당겼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집안은 대뜸 캄캄해져버렸고 신비하게도 구들 우에서 욱욱거리며 죽는 시늉을 하던 영자아지미가 허리를 쭉 펴면서 아무 일 없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에 내려섰다. 손더듬이로 신발을 찾아 신은 영자아지미는 문을 열고 구렁이처럼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3. 며칠 후였다. 우리 형제는 일밭에 간 할머니를 기다리면서 돌담 밑에서 유리알 치기를 놀고 있었다.  -영자아지미다!  태식이가 낮게 부르짖었다. 머리를 쳐드는 순간 나는 그저께의 흥분이 살아나면서 검은 그림자에 눈길을 박았다. 어슬녘인지라 작은 몸뚱이에 매달린 그녀의 길고 검은 그림자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얼굴 전체를 수건으로 둘둘 감싸고 어적어적 걷는 모습이 병든 닭 같아보였다. 몹시 꾸부정한 허리는 거의 곱사등이였다. 그래서 더욱 움푹해보이는 가슴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검은 고무신이 난쟁이 작은 키를 만드는 다리와 다리를 움직여주는 발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은 마치 그 고무신이 끌어주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누가 신던 고무신인지는 몰라도 허우대 큰 사나이의 신이였음은 틀림없어보인다. 움직일 때마다 헐렁한 속에 담겨져있는 맨발이 금방 밖으로 빠져나올 것 같았지만 용케도 발끝을 고무신 앞코숭이에 갖다 넣었다.  신 끌리는 소리가 질질 나는 가운데서 그녀는 어디론지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그녀의 뒤모습을 우리 둘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량손에 유리알을 그득그득 쥔 채 얼이 빠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담모퉁이에서 사라지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이 쪼르르 달려가서 그녀의 그림자를 뒤쫓았다. 그녀의 그림자는 마을 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발볌발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낮은 돌각담으로 경계를 해놓은 뙉밭이 펼쳐진 산기슭에까지 간 그녀는 우리가 한눈 팔 새에 어디론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하얀 꽃이 한창 피여있는 감자밭과 그 뒤로 펼쳐진 강냉이밭이며 콩밭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보았다. 거뭇한 산그림자에 덮인 밭들은 무시무시해보였다.  금방 앞에서 서럭서럭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키를 살짝 낮추었다. 검은 그림자가 감자밭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앉은 채 그림자 가까이에 가려고 오리걸음을 했다.  감자밭에서 검은 그림자가 계속하여 움직이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서럭서럭하는 흙 긁는 소리가 계속하여 들렸다.  이젠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코앞에서 났다. 우리는 앉은 걸음으로 살살 감자포기새로 스며들었다. 우리가 머리를 빠금히 내밀면서 그녀의 짓거리를 바라보려고 하는 찰나 우쭐 하고 검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태식이와 나는 죽은듯이 감자밭 속에 잠겨버렸다. 겁에 질린 태식이는 쌕쌕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딱 감고 있었다.  그녀가 끙 하고 움직이자 뭔가가 담긴 검은 자루가 가냘픈 어깨 우에 얹어졌다. 감자포기를 헤치면서 그녀가 밭에서 나갔다. 우리는 몸을 옹송그리고 죽은듯이 가만있었다.  그녀가 지나쳐갔다. 머리를 감싼 검은 수건 속에서 할할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마을 쪽 깊숙이 걸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우리 둘은 간신히 허리를 펴면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찰병처럼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그녀의 뒤를 쫓아 다시 마을을 향해 반달음쳤다.  그녀는 우리 집(외가집) 문 앞에서 꾸물거리다가 다시 허리를 펴면서 검은 주머니를 어깨에 멨다.  담모퉁이에 몸을 숨긴 우리는 그녀의 짓거리를 계속하여 추적해볼 마음으로 숨 죽이고 있었다. 집마당에서 나온 그녀는 반대방향인 좁은 마을길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철길이 있었다. 외가집 동네는 철길로 두동강 나있었는데 앞에서 이미 말했다 싶이 그녀의 집은 철북에 있었다. 사람들은 저쪽으로 굽이돌아있는 달구지길로 다니지 않고 금을 그어놓은 것 같은 오붓한 오솔길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녀도 지금 그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철북은 철남보다 조금 둔덕진 곳에 있기에 올리막길이였다. 하얀 올리막 오솔길이 동서로 뻗은 철길을 뚝 끊어놓으면서 철남과 철북을 이어놓는다. 낮이면 그 길로 기차를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말을 무시한 조무래기들이 정신없이 건너가고 건너오고 한다.  그 올리막 오솔길에서 그녀는 지금 네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기다 싶이 걷고 있는 것이였다. 낡을 대로 낡아버린 꺼무룩한 저고리에 꺼무룩한 치마, 거기에다 검은 수건으로 머리까지 온통 감싸고 있었기에 그녀는 하나의 자그마한 검은 괴물로 보일 뿐이였다.  -뿡!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괴함이 울렸다. 대가리가 시커먼 기차가 구불구불한 검은 연기를 토해내면서 박두하고 있었다. 그녀가 철길에 금방 들어서고 있는 때였다.  우리는 저쪽으로 달려오는 기차와 이쪽의 영자아지미를 번갈아보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우람찬 동음을 울리면서 기차가 휙휙 지나쳤다. 쿵쿵 하는 기차바퀴소리가 우리들의 가슴을 밟으면서 정신을 태쳐놓고 있었다. 기차는 철북과 철남을 사정없이 절단해버리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지나가는 기차이고 그럴 때마다 기차를 향해 환성을 올리군 했지만 지금은 속이 한줌 만해서 지축을 울리는 육중한 괴물을 눈이 휘둥그래 바라볼 뿐이였다.  드디여 기차는 괴함소리를 싣고 서쪽으로 멀리 사라져버렸다. 맥이 끊겼던 하얀 오솔길이 이어졌다.  -영자아지미는?  -글쎄, 어디 갔지?  우리는 오솔길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둘의 눈길은 허둥대면서 그녀의 그림자를 찾아 헤매였다. 기차길을 건너간 오솔길, 그 오솔길로 사라진 그녀의 그림자가 끝내 우리들의 시야에 잡혀왔다. 자루를 멘 그녀는 기차길에서 2메터 쯤 떨어진 길가에 처박혀있는 바위 우에 댕그랗게 앉아있었다. 짐처럼 놓여져있었다.  사람들이 그 곳에 짐을 놓고 잠시 쉬곤 하는 것을 여러번 본 일이 있는 자그마한 바위였다.    4.  외할머니가 소리치고 있었다. 동네가 떠나라고 소리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금이 선 놋그릇을 잡아두드리는 것 같았다.  아마 저녁 먹을 시간이 된 모양이였다.  -이 강개(감자) 어데서 난 거냐? 다리갱이 분질러놓기 전에 제대로 대라!  외할머니는 아까 영자아지미가 갖다놓고 간 대여섯알 되는 감자를 손가락질하면서 얼굴이 감자가 되여 소리쳤다.  우리의 사정얘기를 듣고서야 후- 한숨을 몰아쉬더니  -흑, 주제에…  하면서 감자를 키에 와락와락 담는다.  -영자아지미가 남의 밭에 것을 훔친 거 아니예요?  -아니다!  밥상에 마주앉은 후에도 외할머니의 금이 선 놋그릇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밥에 정신이 팔린 우리는 외할머니의 말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영자아지미가 전등불빛이거나 강한 해볕 같은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전등불빛 같은 데에 관심이 없고 주린 배를 채울 일이 급하기만 한지라 우리는 머리를 수굿하고 우적우적 씹기만 할 뿐이였다.  그 후 꽤 오래동안 영자아지미가 외할머니를 찾아오지 않은 것 같다.  개학이 되여 래일이면 집에 돌아가야 했다. 그 날 영자아지미가 외할머니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 장소에 우리는 없었다. 외삼촌과 함께 꼴 베러 앞산에 갔던 것이다. 꼴단을 소잔등에 싣고 돌아오는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저렇게 우리를 지나쳐가는 것을 보았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 수건, 질질 끌리는 검은 고무신… 비루먹은 같은 그녀의 모습은 더럽고 불쌍하기만 했다.  -빛을 겁나하는 아지미다!  태식이가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뒤모습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히히 웃었다.  -그럼 못써!  외삼촌이 태식이의 입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핀잔을 줬다. -아지미는 아픈 사람이다. 그래서 빛을 싫어한단다.  -아픈데 왜 해빛을 싫어하나?  -그건 니들 알 것 없고… -그럼 해빛도 싫어하나?  -응, 그래서 흐린 날이거나 새벽 아니면 저녁때에만 밖에 나오는 거란다.  -야, 우습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해가 저렇게 밝은데… -글쎄 말이다. 이런 날이면 얼굴을 마구 감싸! 봐, 저렇게!  -와, 그런데 용케 걷네.  -길을 어떻게 알가?  집에 도착해서야 그녀가 해가 바짝 난 날인데도 왜 밖에 나왔는지를 알게 되였다. 우리가 래일 돌아간다고 복숭아 한바구니를 갖다놓고 간 것이였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 뒤울안에 류달리 크고 달콤한 복숭아가 달리는 복숭아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나와 태식이는 달려들어 정신없이 복숭아를 먹어댔다. 복숭아털에 찔려 볼타구니가 얼얼해났지만 시원하고 새콤한 맛에 취해 바구니를 놓을 생각을 안했다.    5. 앞에서 말한 큰일은 그 해 겨울방학에 생겼다.  친척이 별로 없는 우리는 방학만 되면 외할머니네 집으로 출동했다. 우리가 도착하기만 하면 외할머니는 깨진 놋그릇 두드리는 소리로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욕설을 퍼부으면서 닦아세우기도 하는 외할머니를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외할머니는 겉으로 그랬지만 속으론 우리를 무척 사랑했다.) 태식이는 그 깨진 놋그릇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기만 하면 기가 죽어 나의 등뒤에 몸을 숨기곤 했다.  외할아버지는 겨울만 되면 집에만 박혀있었다. 여름방학 때에는 솔직히 외할아버지를 몇번 보지 못했다. 우리가 잠에서 깨여나면 벌써 밭에 나가고 없었으며 우리가 잠든 뒤에야 들어오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높은 목침을 베고 누워 항상 무슨 책을 느긋이 읽고 계셨다.  외삼촌은 겨울에도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가 어디에 가있다가 한해 겨울이 다 지난 다음에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지를 몰랐다. 우린 그것이 더 좋았다. 쩍하면 벌을 세우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외삼촌의 부재는 우리에게 넘치는 해방감을 안겨줬다. 빛을 싫어하는 영자아지미의 일을 우린 잊은 지 오래다. 하얀 눈과 얼음, 메주콩얼군 것과 이따금 어디에서 꺼내다가 녹여주는 얼군 과일이 겨울 간식거리로 우리의 마음을 다 빼앗았을 뿐이였다.  우리는 마당의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커다란 눈무지 속을 파 ‘집’을 만들기도 했다. 그 ‘집’은 너무도 아늑했다. ‘집’ 안에 제법 깔개까지 펴놓고 살림을 꾸리기까지 했다. 우리 또래로는 철북에 강이, 철남에 순이가 있었다. 이들은 가끔 우리 눈집에 마실 와 한가정이 되여 놀다 가군 했다. 순이가 제 집 바둑이까지 끼여주어 그 재미가 알콩달콩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집’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빛을 겁나하는 아지미다!  태식이가 지난 여름방학 때 일을 기억해낸 모양이였다.  영자아지미는 검은 솜옷을 입고 있었다. 발등까지 덮고 있는 큰 솜옷이였다. 신은 검은 ‘왕바신’(검은 천 밑에 솜을 넣어 지은 솜신)을 신고 있었다. 역시 누가 신던 것을 물려받은 같은 커다란 신이였다. 붕대처럼 머리를 감싼 검은 수건의 끝자락이 왼손에 감싸쥐여있었고 꾸부렁한 나무지팽이가 오른손에 쥐여져있었다. 그녀가 우리들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눈 밟는 소리가 뿌드득뿌드득 났다.  순이네 바둑이가 달려나가면서 콩콩 짖어대더니 그녀의 솜옷을 물어뜯었다. 그녀는 끙끙 소리를 내면서 나무지팽이로 바둑이를 쿡쿡 찔렀다.  -개새끼, 이리 와!  순이의 목소리에 바둑이는 ‘집’ 안으로 뛰여들어오고 그녀는 간신히 ‘집’ 앞을 지나 외가집 문고리를 잡았다.  -나 알거든. 저 아지미 빛을 무서워하는걸.  -알어. 누구나 다 아는데 뭐.  -그래? 그런데 왜 빛을 무서워한대?  -몰라!  -이상하지 않니?  -이상하긴 뭐?  순이와 태식이가 재밌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놀고 있었다.  걸음 빠른 겨울해는 어느새 서산에 잠겨버리고 집집의 창가에 반디불 같은 전등불이 반짝거렸다. 허지만 외할머니네 창문만은 거무죽죽했다. 영자아지미가 아직도 집안에 있는 모양이다.  강이가 눈집에서 나와 영자아지미를 불렀다. 함께 철길을 넘어가려고 그러는 것 같다. 강이의 부름소리에 대답은 없고 이윽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검은 그림자가 집안에서 새여나왔다. 순이는 바둑이가 콩콩대면서 뛰쳐나가려고 하는 것을 소리쳐서 저지시켰다. 영자아지미만 보면 바둑이가 저렇게 란리라는 것이다.  강이가 앞에서 걷고 영자아지미가 강이의 발자국소리를 쫓으면서 뒤를 따랐다.  철북과 철남 사이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바로 오솔길 옆에 파여있다. 그 골짜기에 샘줄기가 있는지 봄가을이면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어른들은 그 물을 ‘쇠오줌물’이라고 했다.) 겨울에는 건물이 얼어붙어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어준다. 이제 강이는 영자아지미와 함께 그 얼음판 우를 지나 철길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강이가 영자아지미와 함께 가려고 한 것이다.    6. 일은 그 얼음강판 우에서 벌어졌다.  외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가 얼음판 우에서 은을 냈다. 나무토막 밑에 쇠줄을 둘러만든 썰매는 나와 태식을 태우고 쏜살같이 질주한다. 귀뿌리를 때리는 바람결은 아찔하기만 했고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던 썰매가 꼰지면서 눈 속에 뒹구는 재미 또한 짜릿하기만 했다.  우리는 썰매를 끌고 철길 밑까지 올라간다. 거기서부터 얼음강판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얀 얼음판이 마을어구까지 쭉 뻗었다. 애들은 철길가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한 애가 타고 내려가면 잠간 뜸을 들였다가 다음 애가 뒤따른다.  우리 둘은 썰매가 하나이기에 내가 탄 후 끌고 올라오면 태식이가 타고 태식이가 끌고 오면 내가 타고 그랬다.  그 날은 겨울해가 차겁게 반짝거리는 오전이였다.  쏜살같이 아래까지 내려온 후 우를 바라보니 아까부터 나무꼬챙이를 갖고 놀고 있던 태식이가 그 꼬챙이로 순이의 엉뎅이를 찔러대면서 장난치고 있었다. 순이는(순이는 썰매가 없었기에 태식이와 내가 양보하여 태워보이군 했다.) 강아지를 안고 돌면서 태식이를 피하고 있었다. 때론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들렸다. 꼬챙이에 이상한 곳을 또 찔린 모양이다.  내가 썰매를 끌고 중간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철길 우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영자아지미였다. 쨍한 대낮에 영자아지미가 나타난 것이 이상했다. (그가 그 시각에 왜 나타났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영자아지미는 태식이와 순이가 쫓거니 쫓기거니 하면서 장난치고 있는 곳에 다가서고 있었다. 얼굴을 둘둘 감싼 검은 수건과 발등까지 덮은 검은 솜옷, 영자아지미는 한눈에 검은 표가 난 사람이였다.  오솔길은 태식이와 순이가 장난치는 바로 옆으로 뻗어있었다. 얼음판이 오솔길을 범하고 있는지라 누군가 재를 퍼다가 오솔길에 펴놓아 다니기 편하게 했다. 재가 덮인 그 길 우로 영자아지미의 커다란 ‘왕바신’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아지미, 빛을 두려워해!  태식의 놀림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마!  순이가 옆에서 못마땅한 소리로 태식이를 저지시키고 있었다.  -저 아지미, 빛을 두려워해! 겁쟁이야!  태식이는 신나는 모양이였다. 나무꼬챙이를 높이 치켜들고 차겁게 떠있는 태양을 가리키면서 캘캘 웃는다.  -겁쟁이야, 겁쟁이야! 빛을 두려워한대, 겁쟁이야!  순이가 말릴수록 태식이는 더 우쭐해서 야단이였다. 나무꼬챙이는 흔들흔들 춤췄다.  그녀가 순이와 태식의 옆을 스쳐지나갈 때였다. 하늘하늘 춤춰대던 태식이의 나무꼬챙이가 그녀의 머리수건에 걸려버렸다. 거의 동시에 재를 펴놓은 길에 있던 그녀의 한쪽 ‘왕바신’이 얼음판을 밟고 있었다. 그녀는 휘청했다. 머리를 감싼 수건자락을 쥐고 있던 두 손이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렸다.  태식이는 나무꼬챙이를 힘껏 잡아챘다. 길고 더러운 검은 수건이 나무꼬챙이에 걸려 그녀의 얼굴에서 벗겨져버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 비명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금수의 비명보다 더 싫은 비명소리였다. 아마 빛을 막으려는 발악이였을 것이다. 그녀의 절망에 젖은 울부짖음은 순간 커다란 공포가 되여 나의 가슴을 긁었다. 나는 솜옷 속의 피부가 토돌토돌 닭살이 되는 것을 느끼면서 목을 잔뜩 움츠렸다. 태식이의 나무꼬챙이에 걸려버린 그녀의 검은 수건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기발처럼 펄럭거리고 있는데 검은 기발을 추켜든 태식이 역시 그녀의 비명에 놀라 멍해있었다. 놀라움에 크게 확장된 태식의 눈은 금방 툭 튕겨나올 것만 같아보였다. 공포의 그림자가 꺼멓게 물든 태식이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비명보다도 백일하에 드러난 그녀의 흉상에 아마 더 놀랐을 것이다. 태식이의 나무꼬챙이에 의해 말끔히 벗겨져버린 그녀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였다. 머리카락 한올 없는 그녀의 머리통은 회칠한 것 같은 호박대가리였다. 때문에 움푹 들어간 눈확이 더 검어보였는지 모르겠다.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유리알 만큼한 검은 구멍이 펑 뚫려있었고 코는 뭉그러져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입이였다. 비명이 흘러나오는 입에는 입술이 없었다. 휘딱 뒤번져진 살 사이에 먹이에 달려드는 짐승 것 같은 이발이 이몸과 함께 로출되여있었다. 틀림없는 마귀의 얼굴이였다.  태식이는 그 무서운 얼굴 앞에서 기가 죽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면서 평형을 잡으려고 애쓰던 그녀의 ‘왕바신’ 두짝은 그만 얼음판을 밟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얼음판 우에 나동그라졌다. 우리가 썰매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던 그 얼음판 우에 쓰러진 그녀는 썰매처럼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발에 신겨져있던 ‘왕바신’은 어느새 벗겨졌는지 그녀는 맨발바람이 되여있었다. 다리부터 미끄러져 내려오던 몸뚱이가 휘익 돌면서 머리가 앞서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거꾸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는 판이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머리를 감싸려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불쌍하고 가련하게도 그녀는 머리를 도무지 감싸지 못하고 있었다.  썰매를 안고 있는 나의 옆을 쏜살처럼 미끄러져 지나치는 그녀는 계속하여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아래까지 미끄러져간 그녀는 그래도 간신히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녀는 얼음판의 미끈거림에 애써 저항하다가 휘청거리면서 허공을 향해 얼마간 허우적거리더니 끝내 얼음판 우로 사지를 뻗었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비명이던 그녀도 강판 우에 쓰러진 채 잠잠해졌고 소란을 피우던 애들도 고정된듯 제자리에 못박혀버렸다.    7.  -죽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던 강이가 고함을 쳤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태식이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순이는 쏜살같이 마을로 뛰여갔다.  애들은 슬몃슬몃 쓰러져있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자취만 있어도 대뜸 도망쳐버릴 준비를 잔뜩 한 채 목을 쑥 빼들고 그녀한테로 다가섰다. 난생처음 보는 그녀의 얼굴이다. 무드러지고 이그러진 그녀의 얼굴은 지옥문을 열고 간신히 기여나온 악귀의 얼굴이였다. 그 얼굴을 누구도 감히 찬찬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그 얼굴을 누가 감히 바라볼 수 있겠는가.  태식이는 아까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 앉은 채 계속하여 흐느꼈다. 겁에 잔뜩 질린 울음소리였다. 마을로부터 어른 몇이 뛰여왔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그 속에 끼여있었다.  순이는 약삭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수건을 찾아왔다.  외할아버지가 그녀을 둘쳐업자 외할머니가 순이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쥐더니 그녀의 얼굴에 마구 휘감았다. 순식간에 그녀는 다시 지옥문 안에 갇혔다. 어른들은 그녀를 업고 부축하면서 철길을 넘어갔다.  애들은 얼음강판에 남아서 저렇게 멀어져가는 어른들의 무리를 바라보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점이 되여 서있었다. 태식이는 계속하여 왕왕 울고 있었다.   8.  그 날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태식이가 자주 악몽에 놀라 깨여서는 킥킥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조른 원인도 있었지만 눈만 감으면 그 악마 같은 얼굴이 덮쳐와서 도무지 잠을 청할 엄두를 못 냈다.  아직 하늘에 별이 총총한 새벽인 데도 태식이는 책가방을 챙겨 갖고는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챘다.  그 때까지도 외할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신문종이에 담배를 굵직이 말아서 뻑뻑 피웠다. 독한 담배연기가 코를 찔렀으나 집에 가야 한다는 급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겨울바람에 외양칸 문이 삐꺽해도 회칠한 듯한 영자아지미의 호박대가리의 롱간이 아닌가 싶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밖에서 자박자박 눈 밟히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문이 삐꺽 열렸다.  이슬이 도롱도롱 맺힌 태식이의 까만 눈동자가 겁에 질려 문을 쏘아보았다.  태식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도 겁에 질린 채 열리는 문에 살며시 눈길을 박았다.  기운을 너무 많이 소진한 탓에 허리가 더 꾸부정해진 외할머니가 들어서면서 캑캑하고 잔기침을 한다. 태식이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고 나도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외할머니는 눈이 파릿파릿해있는 우리들을 한번 눈빗질하고는 그대로 부엌에 내려앉는다.   나무가지 꺾는 소리가 뚝뚝 났다. 아침밥 지을 모양이다.  -어찌됐는가? 하는 외할아버지의 물음에 외할머니는 강이 에미가 지키고 있다고 외마디 대답을할 뿐 다시 말이 없다.  아침밥을 대충 먹은 우리는(태식이는 아예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모는 달구지를 타고 외가마을을 떠났다. 태식이는 솜뭉치 같은 외삼촌의 ‘따창’(북방의 한족들이 입는 긴 솜외투)과 개털모자 속에 파묻혀 달구지에 실려있었다.  암소가 끄는 달구지는 소리만 덜컹덜컹 클 뿐 너무 느리고 더디여서 빨리 집에 돌아가려는 우리들의 마음을 도무지 알아주지 않았다.  철길을 건넌 후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달구지는 느릿느릿 재에 올랐다.  -태식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였어요.   -알고 있다.  -영자아지민 너무 무서웠어요.  -무섭다, 무섭다!  태식이는 또 무엇을 떠올렸는지 기겁을 하며 무섭다를 련발했다. -나도 처음 봤다.  -안 무서웠어요? -허허…  마침 일요일이여서 집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 있었다.  태식이가 달구지에서 놀란 토끼처럼 뛰여내려 어머니 품에 안기면서 와- 운다. 따창과 개털모자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태식이와 나의 책가방을 들고 죄진 놈처럼 머리를 푹 떨군 채 달구지에서 내렸다.  무슨 못된 짓을 하고 외할머니께 쫓겨난 게 틀림없다고 하면서 사나운 눈길로 쏘아보는 아버지에게 외할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녀자 얼굴 왜 그렇게 망가졌답니까? -글쎄 난들 어떻게 알겠나.  -애들 무척 놀랐겠어요. 그 녀자 마을에 온 지도 10년 넘었다면서요? -원자탄이 터져서 숱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난 해에 왔으니까 45년 광복되는 해일 거다.  -그럼 15년 쯤 됐겠습니다. 그런데 여태 그런 몰골인 걸 다들 몰랐단 말입니까? -자네 가시에민(장모) 안 것 같네만… -엄마는 알고 있었단 말이예요.  -그 녀자 참 이상합니다. 어데서 온 녀자랍니까?  -글쎄, 알 턱 있나. 마을에 와서 장일민이라는 사람을 찾기만 하다가 없으니 어데 갈 데 없다면서 눌러앉은 게 여태… -장일민이라고 누굴가요?  -그 마을에 장씨 성 많잖습니까?  -많지. 그런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혹시 부대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장일룡이 아닐가요. 그 렬사증이 내려온 장철순의 큰아버지…  -그 사람은 43년도에 죽었다고 그러더라. 소부대가 연변에 들어올 때 따라들어왔다가 저 매지허리(산이름)에서 일본놈들과 싸우다가 총에 맞아…  -옛날 혁명자들이야 가명을 많이 썼다고 그러던데…  -그 녀자가 찾는 사람이 장일룡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합니다. 그 녀자가 하필 혁명자를 왜 찾을가요.  -혹, 그 영화에서 나오는 지하당… 가명으로만 련락이 가능했던 지하당이 아니였을가요?  -단선련락이 끊기자 더는 자신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게 되여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안타까운 그런 사람 말이요?  -글쎄 말임다. 그러다가 포로되여 731부대에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했거나 일본에 끌려갔다가 불행하게도 원자탄이 쾅 하는 바람에… -니들 소설을 쓰는구나. 소설을…  이것은 그 날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외할아버지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얘기들이다.    9.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후론 우린 다시는 외가집으로 가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서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 해 겨울방학 외가집에서 일을 저지르고 온 며칠 후 영자아지미가 죽었다고 한다. 그 소식도 퍽 후에야 알았다. 그런데 그 죽음 역시 신비하기만 했다. 영자아지미의 시신이 마을 밖에 세워져있는 혁명렬사비 앞에서 발견된 것이다. 쓰러져서 육신을 까딱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그녀가 어떻게 그 먼 렬사비 있는 데까지 갔댔는지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였다. 그 렬사비는 외가마을의 혁명렬사들을 기념하여 세운 것인데 비문에는 장일룡을 비롯한 몇몇 장씨 성의 렬사들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찾으려고 하는 장일민을 발견하고저 한 것이였을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나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흉물스러운 얼굴, 그 악마의 부르짖음, 그 귀신의 허우적거림… 꿈결에도 소스라쳐 깨여나게 하는 그 무섭고 흉한 꼴, 그것은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되여 여태껏 나를 따라왔다. 그 검은 그림자는 또 갈퀴 같은 물음표가 되여 나의 상상력을 불러주기도 했다.  그녀가 찾는 장일민은 누구일가? 그녀는 과연 누구일가? 외가마을 공동묘지의 잡초 속에 파묻혀있는 그녀는 내 가슴 속에 이상한 빛이 되여 지금도 새하얀 공간에서 까맣게 반짝이고 있다.  그건 검은빛이다.  등불과 해빛을 질색해하는, 아니 그것에 공포를 느끼는 검은빛이다. 
727    [시]노을 증후군(症候群)(외7수)/김철호 댓글:  조회:1547  추천:1  2019-06-12
노을 증후군(症候群)(외7수)   김철호   치장, 과장, 화장이 이젠 정말 필요없다. 저절로 익어 빨갛고 노란 저 이파리들을 뚫고 일몰의 숨이 세게 뿜어져 온다. 가난한 아저씨는 오늘도 산 속 오솔길을 밟으며 뭔가 들어있는 무거운 멜가방을 자꾸 추썩거린다. 발에 밟히는 피그림자가 철벅거린다   시인이였던 그녀는 별로 그렇다할 시를 남기지 못하고 저녀노을 저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페가 부석부석 석회화 되는 괴이한 병이 시심(詩心)을 멈추게 한 것이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아련하기만 한데, 남자는 어떤 파티에서 물러나 그녀와 강변길 함께 걸은 적 있었다고 한다. 살그머니 손이 잡혀졌고 어느 순간 그녀의 차가운 갈쿠리가 남자의 목덜미에 감겼다. 역시나 랭랭한 입술이 포개져왔다... 그후 다시 그런 일 없었고 그녀는 죽었다. 그녀의 유상에는 입술만 있었다. 분홍립스틱의 부자연스러운 입술이 너무도 힘 있게 꽊 다물려있었다. 차갑기를 잘 했지! 남자는 속으로 외웠다. 그런데 부드럽기는 했었다는 느낌이였다. 부드러운 차가움이였다.   태일이가 갑자기 생각난다. 간암말기를 늦게 발견하고 병원침대에 구겨져있던 그가 나의 방문에 눈이 아가리 되여 소리쳤다. “니도 술 많이 퍼마시는데 왜 나만 감암이야, 왜?!” 하면서도 웃었다. 눈알에 노을이 꽉 차있었다. 헤여질 때 하던 그 한마디는 20년 지난 지금도 귀지로 되여있다. “잘 살아라, 영별이다!” 나는 그 자식보다 20년이나 더 살아있다. 노을이 어지럽다.     새   이제 너는 날 것이다 겨드랑이에서 돋는 날개를 쭉 펴고 저 고옥(古屋)의 숲을 향해!   아침이슬에 미끄러운 기와장 딛고 무릎에 파묻은 눈깔을 열면서 주저없이 죽으러 갈 것이다   화살이 되여 과녁에 가 꽂힐 때 숨 멎은 너는 옛성터의 눈동자 될터이니   오래오래 보리라, 날아온 한 갈래 길이 하늘에 하얗게 금 그어져 있는 것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금!     꽃   빛이 오기 전에 향기가 온다 색갈을 담은 향기가 온다   구태여 눈 뜰 필요가 없다   아름다움은 눈 멀어도 찬란하거늘!     나   내 속에서 내가 일어선다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떠난다   그래도 묻어 따라오는 내가 있어서 툭툭 털어버리면   나의 팔이였던 팔이 떨어지고 나의 머리였던 머리가 떨어지고 나의 생각이였던 생각이 떨어진다   내가 다 없어질 때까지 내 속에서 내가 자꾸 떨어진다   저렇게 걷고 있는 나는 나를 다 버린 나다   나에게 내가 없다 내가 없는 내가 걷는다   살(肉)은 살(肉)의 무덤이다     “3.8”선은 좋아 한다   “3.8”선은 좋아 한다. 비무장지대라서 좋아 한다. 가끔은 총성, 칼부림 있었댔지만 그래도 좋아 한다. 8리나 되는 넓은 띠를 두르고 70년 살아왔지만 “3.8”선은 좋아 한다. 비무장지대라서 좋아 한다. 활주로가 없어서 좋아 한다. 자동차가 없어서 좋아 한다. 공장이 없어서 좋아 한다. 농경지가 없어서 좋아 한다. 사냥군이 없어서 좋아 한다. “3.8”선은 무장지대가 아닌 것에 다행스러워 한다. 무장지대였더면 대포, 미사일, 사드, 권총, 기관총, 도끼, 군도, 군화, 미친 오토바이의 소음, 둔중한 땅크바퀴의 주름, 퀴퀴한 군인들의 썩는 살 냄새, 쫓기는 짐승들의 불쌍한 울부짖음, 똥이 차고 넘치는 뒤간이 되였을 거다. 그러니 비무장지대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그래서 ”3.8”선은 좋아 한다. 뭍(“3.8”선도 뭍이긴 하지만)에는 없는 조류, 짐승, 꽃, 나무들이 “3.8”선엔 다 있어 좋아 한다. 뭍에 있는 소음, 연기, 지랄들이 “3.8선”에는 없어 좋아 한다. 그래서 “3.8”선은 자신이 장수하길 바란다. 100살은 금방이고 이제 백살만 더, 아니 또 오백살만 더 살아 오래오래 “3.8”선이기를 바란다. 남쪽도 북쪽도 다 “3.8”선이기를 바란다. 8리 너비가 800리로, 아니 그보다 더, 더 늘어나 두만강, 압록강까지 부산, 제주도까지 늘어나서 반도땅이 몽땅 “3.8”선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금은 욕심을 내려놓고 요만큼에 만족하며선 “3.8”선은 너털웃음을 웃는다. 요즘 “3.8”선은 “3.8”선을 늘굴 궁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체 한다. “3.8”선이 “3,8”섬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래도 유정(有情)   아버지, 바람소리가 들리시나요? 우린 어머니가 했던 바람의 이야기를 다 알거든요   나무잎 떨어지는 소리 보여요 눈 꼭 감고 있어도 보여요   아버지, 형체도 없는 당신이 바람 속에 섞여 있는 것이 보여요   어머니가 힘차게 풍구를 돌리시고 있어요 휘날리는 머리채에 하늘이 시커매져요   바람이 지나가니 어머니도 가버렸어요 잘 찾아보세요, 아버지 구름무지를 헤집고 별무리를 뚜져보세요   이제는 바람소리가 보이시나요? 바람에 담겨있는 그 많은 이야기가 보이시나요?   날숨만 있던 하늘에 들숨도 생겼어요     갈대의 뼈   갈대의 뼈는 유연하다 휘게 되여있다 휘였다가도 펴이게 되여있다   센 바람에 누울듯 휘였다가도 해볕 고우면 창대처럼 일어선다   갈대의 뼈는 강하다 유연하게 강하다 아무리 휘여져도 끊어지지 않게 강하다   갈대가 흐느적이는 것은 뼈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뼈가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뼈가 있기 때문이다     독주(獨奏)   시링크스는 목신(牧神)* 판에게 쫓겼다 짐승도 아니요 사람도 아닌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판의 사랑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시링크스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이제 더는 도망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갈대로 변해버렸다   갈대가 시링크스라는 걸 알고 있는 판은 갈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사랑을 념원하는 피리소리가 판의 입김을 통해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판은 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판은 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판은 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해 뜨고 해 지고 별 솟고 별 사라질 때까지 뾰족한 새싹이 돋아 나무로 커서 활짝 잎 피울 때까지 요람 속의 알에서 새새끼가 태여나 파닥 날개짓 할 때가지 피리소리는 끝이지 않고 울려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음악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신의 입술을 거쳐 대지에 차고 넘치였다 하늘에 차고 넘치였다   판의 마음 시링크스의 몸을 통해 음악으로 탄생하였지만 시링크스는 다시 시링크스로 변하지 않았다   *시링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르카디아지방의 님프(精靈)이고 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목신(牧神)이다. 판은 시링크스의 미모에 반하여 음심을 먹고 범하려 하지만 순결을 상징하는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본받으려 한 시링크스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도망치다가 라돈강가에 이르러 갈대로 변한다.   2019년 제3기
726    [시]어미 닭(외5수)/김철호 댓글:  조회:973  추천:0  2019-04-19
어미 닭(외5수) 김철호   그날 아침, 엄마가 쓰러졌다   공장에서 나무껍질 벗기는 고된 밤일 마치고 새벽에 퇴근해 눈 좀 부쳤다가 아버지의 아침 출근 위해 부엌에서 서성이던 엄마가 챵! 졸도해 쓰러졌다, 이남박이 나동그라지고 노란 강냉이 쌀이 금알처럼 부엌 한가득 널렸다 가마 덮개에 맞은 이마에 닭알 하나 생겼다 애들은 놀란 병아리 되여 파닥거렸고 엄마는 인차 눈을 떴다 이마를 만져보더니 닭알 하나 생겼네… 히히… 아파? 아파? 죽지마! 죽지마! 안 아파, 안 죽어! 닭알까지 생겼는데 왜 죽어… 히히… 눈물 범벅이 된 다섯 오누이들을 한품에 안는다 요 닭알에서 이제 병아리가 까날꺼야 잘 키워 큰 닭 되면 알 많이 낳을걸 니들 닭알 좋아히니 많이 먹이고 남는거 부화시켜 또 병아리 깨워 닭무리 만들걸 앞마당 뒤마당 꼬꼬댁 꼬꼬댁 구구구 구구구… 우리 집 닭공장 되겠다…히히… 하하하… 호호호…킥킥킥… 닭공장 꿈 꾸며 맛있게 아침 밥 먹던 그날 같은 아침 몇 백, 몇 천 개 흘러 지나가고 큰 닭이 되여 푸닥푸닥 날아가 버린 자식들 기다리다 구름 된 엄마, 엄마… 엄마 된 구름, 구름…   섣달 하늘이 병아리떼 가득 품고 있다     집   여자는 자신이 한 줄기 샘인줄 알고 있었다. 별들도 내려와 놀다가 너무 맑아 놀라워 하는 티없는 샘인줄 알고 있었다. 샘이라면 솟자마자 몸을 낮춰 자신을 숨기겠는데  결 고운 소리에 깜짝깜짝 정신 잃으면서 솟대가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운 마음에 어깨를 내렸다   여자는 빛으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너무 빛부셔 누구도 쳐다보지 못하는줄 알고 있었다. 거미줄에 얽힌 이슬 속에 담긴 빛들이 뛰쳐나와 팍팍 터질 때 누리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걸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여자는 어둠 속에 갖혀 이 세상에 없는 문자를 만들고 있었다. 자신도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숨이 되여 할딱거렸다. 숨은 면도날처럼 아찔했고 송곳처럼 예리하기도 했다. 베여지고 찔리운 자리에서 돋은 혈은 생리의 강이 되여 흘렀다.   여자는 자신이 눈물이라는 것을 드디여 알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 없는 하나의 숨에 밀리여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는 자신을 알게 되였다.     꽃.1   나는 프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굉음과 함께 차창에 날아든 것은 진붉은 한 송이 꽃이였다 활짝 터뜨러진 붉은 숨은 만개(滿開)의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눈을 꽉 감아버렸으나 화향(花香)은 마냥 눈에, 아니 뇌에 보였다 모년 모월 모시에 이 세상에 생겨날 때 뉘나 다 하나의 피덩이였다 봉오리를 터뜨리지 않은 피덩이였다 뼈와 살의 부름을 받은 피덩이였다 꽃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은 언제나 순간인 것이다 365일 중 한 댓새를 위해 봄부릠치는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차창의 꽃을 만졌다 뜨거운 기가 손가락으로부터 쭈우욱 흘러온다 활짝 폈던 꽃이 쭈르륵 운다 붉은 눈물이 줄줄줄 흘러 지도를 그린다 이 세상에 없는 행정구역이 생긴다 어느 별의 거리일 수도 있다 이제 한 20년, 50년, 100년 후이면 드라이브 할 수도 있을 우주의 어느 한 모퉁이! 벌써 나는 거기에 와 있다 이 한순간을 위해 내 앞을 막아선 그 한 그루의 꽃나무, 꽃나무가 만들어준 한 개의 눈 나를 저토록 진지하게 쏘아보는 피발이 선 한 개의 눈 붉은 눈물을 흘리는 한 개의 눈! 울 필요가 없다, 우리는 늬나 다 한 송이의 슬픈 꽃이다 눈(眼)같은 꽃이다!     꽃.2   봄이건만 꽃은 없다   봄이 아니여도 꽃은 꽃으로 울긋불긋 잘도 피여나던 그 시절 샛바람에 실려오는 숫 냄새 한 올에도 온 마을이 꽃동네 되였는데…   축 처진 이파리들의 나무만이 꽃 없이 시들어 늘어진 마을 길 암캐라도 지나가길 바라던 꽃맛 못 본 총각의 빈 눈에 씹욕이 사라진지 오라다   그러니, 이제 꽃이 꽉 찬들, 꽃이 질질 애액 쏟은들 무슨 흥취랴   꽃이건만 봄이 없다     바다   이슬도 하나의 바다라는걸 나는 아는가? 이슬도 바다의 노릇 다 할줄 안다는걸 나는 아는가?   이슬 속에 바다보다 큰 하늘이 담겨있는걸 그만 두고라도 수천수만개의 별들의 잔치 벌어지고있다는걸 나는 아는가?   바다도 할줄 모르는것을 이슬이 할줄 안다는걸 나는 아는가?   이슬이 굴러떨어지는건 넘 많은걸 담아서 그 무게 못이겨서가 아니라 땅에 자신의 정보를 전해주는 행위라는걸 나는 아는가?   이슬로 떠지는 눈, 그 눈에 보이는 모든것이 이슬 속에 다 있다는걸 나는 아는가?   사실 바다는 커다란 한알의 이슬이라는걸 나는 아는가?     세월   뒤 사람은 앞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걸었다 우린 다 장님이였으니깐 눈을 펀히 뜬 장님이였으니깐   가시에 찔리고 물에 빠지고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면서도 말없는 대오는 흘러갔다 장님의 부대는 흘러갔다   심청이를 만나야 밝음을 알텐데 세상에 무슨 심청이가 그렇게도 많겠는가   장님이 되기란 쉬운 노릇이다 제가 제 갈 길 모르면 다 장님이 되니깐 남의 옷자락만 잡으면 다 장님이 되니깐   옷자락 놓는 순간 눈이 번쩍 띄일텐데 여태 그것을 모르고 산 일 괴이하다   억만의 장님부대에 비하면 제 눈 뽐고 속죄한 오이디푸스*가 오히려 지혜로웠다 동서남북으로 비틀거리는 이 무방비의 무리 장님의 두목도 장님이였으니…   *오이디푸스ㅡ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베테의 왕. 신의 저주를 받고 태여나 이 저주를 피하려고 애썼으나 신의 부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안해로 취함. 뒤에 그 죄를 깨달아 스스로 눈알을 빼고 딸 안티고네와 외국을 방랑했음. 2019년 제2기
725    [시]바자(외7수)/김철호 댓글:  조회:890  추천:0  2019-03-16
바자(외7수) 김철호   키 낮은 바자라 하여도 슬쩍 건너갈 수 있는 바자라 하여도 바자 앞에서는 걸음을 멈춘다 더는 못간다, 아니 안간다   앵두나무에 열꽃이 다닥다닥 피여있었다 빨간 빛들이 향기로 풍겨왔다   그냥 다리를 높이 들어 바자를 건넜다 두 손에 가득 담긴 붉은 이슬은 터져 피가 되여 손가락 새로 줄줄 흐른다   키 낮은 바자라 하여도 바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바자는 관념의 경계가 된다   다리가 가위되여 테이프를 베이니 앵두나무는 수천수만개의 하트를 바친다      단풍.1   붉은 물을 밟으면서 걷고 있다 튕겨오르는 붉은 빛 슬프게 울고 있다 바람이 숨어 꾸미는 음모는 이 물결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소슬한 어둠이 기여오고 먼 승냥이의 허파소리 죽어있다   누군들 입가에 피 묻히고 울던 날 없었으랴! 누군들 하늘 찢고 태양 훔친 적 없었으랴!   드디여 바람이 불어친다 락엽들의 울음소리 아름답다 빛들이 숨어버린 어둠 속 어데선가 반짝이는 흐느낌 향기롭다 날 밝으면 하얀 도화지 우로 붓 되여 걸어오는 사람 있을 것이다   이제 더욱 찬란한 슬픔이 되여 바스락 댈 저 붉은 숨, 지금 계절은 피를 밟으며 걷고 있다     단풍.2   왜 이리되었는가 물으니 부끄러워서라고 한다 봄이 지난지 오라고 뜨겁던 여름도 보냈는데 문득 작은 욕망 하나 생긴 것이 못내 부끄러워서라고 한다   한발작만 더 내디디면 계절의 끝인데, 이젠 하얀 백지를 바쳐야 할터인데, 아직도 눌러 아픈 혈 있다는 일 참으로 가슴 꿈틀하게 놀랍단다   그러면 저 하늘은…   해종일 태양 하나만을 감싸고 놀면서 가질 건 다 가지더니 마지막 손마저 놓아주지 않는다 당기거니 늦추거니 실랑이다가 떨어져 날아간 붉은 이파리 하나 서녘 하늘 되였다   적신(赤身), 숨이 큰 나의 생리!       선인장꽃                                                                            노란 숨 한 모금 소리없이 눈 뜨더니 어느새 또 감는다   오래 둘 수 없는 향기이기에 벌써 저만치에 가 없는 듯 사라진다   눈에 뿌리한 그녀의 숨비소리 계절 끝까지 품고가리     공(空) 어느 여름날 지구에 별이 날아들어 부딪쳤다 지구는 하나의 불덩이로 되였다 지구의 모든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모든 생명이... 어느 여름날 떨어진 별 때문에 그렇게 란리법석이던 핵문제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통령선거도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였다 환경도 없어졌다 어느 여름날 괴성은 간사하고 음험하고 욕심쟁이의 뇌를 소멸해버렸다 타버리는데 억년 식는데 억년 텅 빈 땅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말썽도 없이 이웃 별에 피신간 생명의 눈동자에 파란 별로 반짝이고있었다     영정사진 1 저승의 창문으로 이승을 내다보고있다 누가 왔나 하나하나 체크한다 누가 오지 않았나 하나하나 찾는다 나 왔네, 하고 저승의 창문 저쪽에 있는 눈길을 바라보며 문상객들은 신고한다 아마 가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창문 이쪽으로 흘러오는 눈빛이 슬프다 이승을 기웃거리는 눈길이 안타깝다 2 눈동자만 있고 그외의 것은 다 사라졌다 허공에 동그랗게 떠있는 두개의 작은 구(球) 돌돌 굴려지는 구속에 비끼여있는 이승의 얼굴들 동그란 구가 동동 떠서 움직인다 동그란 구가 가까이 왔다 멀어졌다 한다 그외의 것은 다 없고 동동 떠다는 구만 있다     바다에게   바다, 네가 물일 수 없다. 천만갈래 강 다 품어주고 때론 뭍에 넘쳐나는 누런 홍수도 지체없이 받아주는 네가 어찌 물이랴!   마도로스의 슬픈 노래를 파도의 갈기마다에 새겼고 적아가 하나의 색갈로 흐르는 명랑 앞바다의 피빛 노을까지도 꺼안은 너를 그냥 물이라 하면 안되지!   타이타닉호의 현악4중주와 함께 갈앉은 1514개의 심장은 어쩌고, 아직 피지 못한 꽃들과 함께 잠긴 진도바다의 혼들은 어쩌고, 칼레, 살라미스, 오카나와, 솔로몬, 트라팔가, 유틀란드… 그 많은 해전으로 감춰버린 수천수만의 눈빛은 또 어쩌고, 너를 막 물이라고 할 수 있겠니!   너에게서 만들어진 이야기만 건져 올려도 하늘같을텐데, 너의 품에 잠긴 사연만 모아놓아도 태산보다 더 높을텐데, 너를 어떻게 그냥 물이라고 하랴!   그러나 이 세상은 물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나니, 8천8백 고도의 쵸몰랑마봉도 물 다 걸러내면 먼지로 흩어지고 엠파이어스테이빌딩도 100% 건조시키면 폴싹 물앉을거고, 무액(無液)으로는 하루밤 정사도 성사시킬 수 없겠거늘, 물ㅡ너는 뭐니?   물은 바다다! 아무리 작은 물이래도 물은 바다다! 바다는 물이다! 아무리 큰 바다래도 바다는 물이다!   그러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이 선 바다, 너를 어찌 물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바다, 너는 물이다!     폭염 ㅡ오규원의 을 들고 더위 피하다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음악소리도 땀을 뚝뚝 떨구는가, 헐떡거린다 거기에 풀벌레소리가 양념이 되여 맛을 낸다 구름은 부글부글 괴고 있겠지만 풀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랭기가 싹 빠진 바람이 눈치껏 힐끔거린다 불 붙은 꺼먼 왕파리 두 마리가 쫓고 쫓긴다 쫓는 쪽은 사내고 쫓기는 쪽은 늘 계집이였는데… 오규원이 무릎 위에서 시적표현의 리해를 열심히 력설한다 손톱으로 제자의 손바닥에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글귀가 폴싹폴싹 뜀질한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지금 딱 그만큼한 때이다, 한적한 오후다 파란 순을 가득 단 물푸레나무가 반짝반짝 바라본다 침엽수들은 바늘을 다 거둬들였다 참말로 더는 잃을 것 없는 오후다     “도라지” 2019년 제1기.
724    [비평]시와 인간의 바른 삶과의 조망/권혁률 댓글:  조회:1030  추천:0  2018-08-30
   *비평*   시와 인간의 바른 삶과의 조망   권혁률(문학박사, 길림대 외국어학원 교수)   1.   문학은 인간의 삶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환언한다면 문학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춘추시대의 공자는 흥관군원(興觀郡怨)()으로 문학이 우리에게 미적 감상뿐만 아니라 사상을 풍부히 하고 바른 삶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데서 가지는 의의를 천명했다. 문학과 인간의 삶에 관하여 한 나라의 왕충(王充)은 보다 선명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던 바 즉, "위세용자, 백편무해; 부위용자, 일장무보(爲世用者, 百篇無害; 不爲用者, 一章無補)"(라고 했다. 근대에 이르러 백화문으로 문학혁명을 주장하고 나섰던 신문학의 선구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열띤 관심을 보였다. 1917년 호적(胡適)은 에서 문학개량을 "8사(八事)"로부터 착수할 것을 주장했는데, 거기에 "언지유물(言之有物)"과 함께 "무병신음(無病呻吟)"에 대한 거절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문학이 인간과 그들의 삶에 본령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고금중외 문학에 관한 이론들을 일별하여 본다면 예외 없이 문학은 반드시 인간과 그들의 삶과 연관을 맺어야 비로소 존재의 가치와 생명력을 확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시의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시 역시 '인간을 모방'한 창작이라고 했을 때 서사시는 인류발전사의 한 기록이 될 것이고, 서정시의 경우 인간 정서의 한 표현형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문학은 어떠한 시각에서든지 인간의 삶과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때로는 적극적인 역할을, 때로는 소극적인 심지어 부정적인 역할을 일으키기도 하게 된다. 다시 말한다면 문학은 창작자에 따라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 작용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다.  문학과 인간의 삶에 관한 이러한 연원들을 살펴보는 것은 시인 김철호의 작품세계를 조명해보기 위한 예비 작업이 된다. 소설로 문단에 발들 들여놓고, 다시 시 창작으로 전환한 시인 김철호는 좀 특이한 케이스라고 해야겠다. 문인들 중 시로 등단하여 소설로 자신 창작세계의 최고 경지를 개척한 사례는 적지 않지만 시인 김철호는 그 정반대의 향방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에 대한 관심 또는 호기심의 기인(起因)은 자연 시인의 창작물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진단에서 찾아야 할 터이다.   2.   시인 김철호의 시작(詩作)은 겸손의 자세를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 이는 시인 작품집의 이름이 와 같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진정 작품이 자연스럽게 풍기고 있는 뉘앙스이다. 이는 동시에 정을 붙였던 시인에게 나타난  고유한 특성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인의 동시마저도 단지 동시로만 취급하기 어려운 점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어의 사용과 같은 형식문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동시에서도 어느 정도의 사회적 관심, 즉 인간의 삶에 대한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 가능하다.   1) "작아도/저놈이 엄마새란다"() 2)"해종일 똑딱똑딱/구술땀 똑똑… 와ㅡ 돌속에/멋진 소년이/있었댔구나"() 3)"구름이며/바람이며/다 가졌던 하늘/눈이며/비며/다 차지했던 하늘…다ㅡ버리고/가장    높은 하늘 되였다.() 4) 이 나무의 이슬…/이 산의 이슬을…/이 세상의 이슬…/다-아 모아보면/호수만한/큰 이슬 될거야!()   위의 몇 편의 동시는 동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단지 동시에만 그치지 않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의 경우 소꿉놀이 장면을 상기시키는 시구인데 "엄마 새"가 "애기 새"를 먹여주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책임을 맡은 바이라면 모름지기 책임과 역할에 최선으로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2)의 경우는 "고생 끝에 낙"이라는 민족의 속담을 떠올리는 시구로서 오로지 진지한 노력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해독이 가능할 것이다. 3)의 경우 공리적인 욕심을 버리기만 하면 최고의 성공을 이룩할 수 있음을 예시하는 시구이다. 4)는 역시 또 하나의 속담 즉 "티끌모아 태산"과 연관을 지을 수 있는 시구로서, 어느 때나 전통적인 미덕의 하나인 절약정신 또는 단결정신에 대한 시인의 동시적 해석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입수한 시인의 동시작품의 양적 제한으로 그 전모를 살펴볼 수는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위의 동시의 편린들에 흐르고 있는 시인의 깊은 시적 고민은 여전히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동시의 형식에 기대고 있지만 그것은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의 즐겨 읽을 수 있는 시어, 문구라는 의미 외에도, 성인들에게까지 일정한 삶에 관한 계시를 전달해주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더구나 개미조차 "그 하늘에선 하나의 태양이다"()는 1)의 "엄마새"와, "자신을 가장 낮춘 무리들이 모여서 가장 큰 힘 만든다"()는 모든 소유욕을 버리는 3)의 경우와 일맥상통하는 시인의 시적 상상의 세계로 귀납시켜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시인은 창작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었던 동시에서 이미 보다 넓고 깊은 시적 상상의 세계에 대한 지향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환언한다면 동시의 세계가 시인 창작의 초심을 이끌어낸 수석(秀石)이고 창작세계의 터를 마련하는 주춧돌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시인의 성숙된 주옥의 작품세계를 조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3.   전술했던 바와 같이 시인의 작품에 대한 양적 입수의 제한 때문에 부과된 본고의 작업에는 일정한 애로가 없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감히 일엽지추(一葉知秋)의 판단이라도 서슴치 않으려는 본고는 진정 시인의 한정된 작품에 그만큼 깊은 감동을 얻었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둔다. 김철호 작품에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경외심이 유난히 돋보이고 있다. 앞에서 시인의 시작(詩作)은 겸손의 자세를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고 했던 바인데, 바로 동일한 맥락의 이해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세상이 얼마나 큰지 모르기에 무지막지한 떠벌이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겸손은 타자의 존경심을 자아내고, 경외는 타자의 존경심을 불러온다. 시인 김철호는 이 두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생명의 모든 것을 존경시하면서 경외의 마음으로 생명의 모든 현상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시인의 초심이라고 할 정도이다.   작은 생명이래도 그건 하늘보다 더 큰 숨 …(중략) 저기 기여가는 개미도 그 하늘아래선 하나의 태양이다 -의 일부분   저 큰 하늘보다 더 크게 눈빛 빼앗아 가는 노란 숨! -의 일부분    "개미"와 "나비"는 미물임에 틀림없다. 미물이지만 하나의 생명임에도 틀림없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미물적인 존재도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점에서 배려하고 존경심을 인색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미 역시 "바다를 품"을 수 있고, "하늘을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이 모두 "숨"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우리 하나의 숨으로/살고 있다는 걸" 과연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로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다. 미물조차도 생명체로서 주목하고 배려하는 시인의 초심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존경과 경외심이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지옥의 덮개인 흰구름 딛고 두개의 태양이 떴다   피안(彼岸)을 향한 걸음은 언제나 시작 설마 천당을 고별한다 할지라도 태양은 구을러간다   우리 이렇게 걸어왔다 우리 이렇게 하늘 떴다   저기 기여가는 개미도 그 하늘에선 하나의 태양이다 - 전문   "저기 기여가는 개미도/그 하늘에선 하나의 태양이다", 이 시구는 시인의 두 작품에서 그대로 두 번 반복 사용되고 있다. 시인은 바로 자연계의 미물인 '개미'를 앞세우는 수법으로 실제로 만물의 주재자로 군림하다시피 한 인류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미물에 월등한 인간의 생명은 "자음과 모음이 섞이여야" 비로소 완정한 "삶"이 되는 바, 그 '무서운 힘'은 '남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황홀한 궁전'에서 '대문을 닫아걸고' 은둔자로서 남자와 '힘과 힘의 만남 숨과 숨의 겨룸'() 속에서 온양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력에 대한 시적 탐구라고할 수 있는 시인의 발상인데, 시인의 특유의 수사법에 의해 은유적이지만 과감하고 기발하며 참신한 시인의 작품세계에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다. 생명의 존엄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은 시인으로 하여금 모든 시적 상상력을 인간의 생명체 또는 삶과 연관을 짓고 있다.   수자를 처음 알았을 때,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초견()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의 경이로움의 소년, 전은 팬티속에 무서운 힘이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의 일부분   위의 인용에서처럼 시인은 생명체의 원초적인 힘에 주목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니다, 생리가 시작되었다/붉은 피줄 일어선다"(); "바람이 눈을 뜬다/파도가 잠을 깬다"(); "일몰은 죽음이 아니다/서서히 오는 탄생은 어둠/새로운 생명이 숨어있다"() 등 삶의 현장의 특징적인 생명현상들에 대한 집요한 주목으로써 생명에 대한 더 없는 경외의 마음을 보이고 있다. 이 밖에도 시인의 작품세계에 흔하게 보이는 의인화 수법의 인용 역시 인간의 삶에 대한 시인의 배려와 경외심, 그리고 모든 것들을 인간의 삶과 적극 연관시키려는 시적 상상력을 함께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4.   생명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시인이었기에 그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었다. 시인 미당(未堂)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생명의 원동력을 일컬어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라고 했다. 시인 김철호는 또 과연 생명에 대한 얼마나 커다란 고민을 갖고 있었기에 이토록 인간의 삶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삶에 대한 시인의 집착과 관심은 삶을 옹위하는 환경과 그 배경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진다. 자연의 상관물에서 일부 미물들에 대한 시인의 주목이 인간이란 지존의 생명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시적 상상의 전략이었다면, 생명체 삶의 환경에 관련된 자연 상관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불(大佛)은 때투성이야 수수백년 때 한번 씻지 않았으니 와우, 냄새가 지독하구나 (중략)   눈을 찔러대는 누런 파도는 페를 싹 좀먹이고 있어 -의 일부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바다, 인파로 넘실거리는 사람의 바다, 인간 생존환경 일각의 모습이다. 인정으로 넘친다고 할 수는 있어도 아직 현대문명 또는 현대지성이 닿지 못하는 황막한 곳이다. 유구한 역사적 자산일지라도 인간의 현실적 삶에 기여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지독한 냄새'만 풍겨 오염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으며, 현대적 문명이 미치지 못하는 사막은 그대로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삶의 환경일지라도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과 욕망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시에 보는 것은 "손을 뻗쳐 바다자락"을 잡아당기는 여인, 그러한 바다와 결투에서 결국 "바다가 찢어지면서 혈흔을"을 드러내도록 강인한 인간의 모습이다.   네명 악사들의 현악합주가 들린다… 이날에는 다이야몬드목걸이도 하나의 돌맹이에 불과했다… 그 민족은 바다였다. …피가 모여 먹물이 된 바다… 자신을 가장 낮춘 무리들이 모여 가장 큰 힘 만든다. 영원한 생명되였다. -   영화 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한 장면이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며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악사들, 인간의 생명 앞에서는 하나의 돌맹이에 지나지 않는 다이야몬드, 바로 이러한 생명지존, 생명의 가치를 최상의 재부로 삼고 있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기에, 바다는 "자연외의 것을 다 버린"() "금빛 찬란한 세상"을 지향하고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그래서 가장 순수미를 지닌 '민족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냄새가 섞인 바다/그래서 바다의 냄새를 냄새라고만 할수 없다", 그것은 정녕 "서서히 오는 탄생", "새로운 생명이 숨어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며 희망의 소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의 현장으로서의 현실은 상처투성이고 괴로움 투성이다. "탈선한 렬차", "각도가 비뚤어진 명(明), "살점을 뜯는 바람", 이는 모두 "탄생은 아픈것이다"()는 진리를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따라서 시인은 "시는 덜미를 쥔채 쓰러져 운다/웃는다"고 부르짖는다. 희비가 엇가리는 삶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덜미를 잡힌 시, 그래서 그 시는 정녕 "쉽게 씌어지는 시"(윤동주)가 아닌 것이다. "내장이 텅 빈 잉어"()를 만들어내는 이 현실 속에서 시인은 자신 나름의 끈질긴 노력으로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를 견인불발하게 써 나가고 있다. 왜냐, 바로 "하늘은 눈 뜨고 보고 있다"는 굳은 신념이 있기에,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의 가치, 시의 생명력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작품은 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참된 삶과 시적 조망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5.   문단에서 바야흐로 활약상을 보이는 중견 작가에 대한 평가는 신중을 기한다. 그것도 한정된 시편에, 공감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부과된 소임을 행해야 하는 본고는 그야말로 누란(累卵)의 위기를 찾아가고 있는 작업인 듯하다. 텍스트에 대한 해독은 여러 가지 이론, 방법이 동원될 수 있다. 본고는 한 독자의 나름대로의 일가견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무병신음'을 멀리하고 '언지유물'을 위해 대담한 판단을 하는 것으로서 맡은 바의 소임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자는 목적을 이루었다. 시인 김철호는 인간의 삶에 입각한 시적 상상력에 근거한 견인불발한 창작을 멈추지 않고 있다. 소설의 내면화에 보다 더 필요한 시간적 요소 때문에 시 창작에 임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시종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에 주목하고, 인간의 삶에 관한 시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동원하고 있다. 원초적인 생명력의 시화(詩化), 삶에 대한 반동적인 요소들에 대한 비판에 더 비중을 증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시인은 삶의 과정을 시의 창작으로 간주하는 정도의 집념을 보이고 있다는 판단도 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쉽게 씌어지지 않는 시"임에 틀림없으니, 보다 확장되고 여유 있는 시공간의 확보에 기대를 걸어야 할 터이다. 시인의 새로운 정진과 건투를 빌면서 맺음말을 대신한다.   (“도라지” 2018년 제2기)  
723    [시]흑백사진(외8수) 댓글:  조회:1112  추천:0  2018-08-30
흑백사진(외8수) 김철호   과거로 가는 길은 색갈을 지우는 일이다   분홍립스틱을 지우고 금빛 머리카락 지우면 검은 것과 흰 것만 남는다 50년 전, 100년 전이 탄생한다   두 가지 새갈만 있었던 세월 눈 감으면 검고 눈 뜨면 하얗던 세월 밤은 검기만 하고 낮은 하얗기만 하던 세월 흰 것과 검은 것 외엔 다른 색갈이 필요없었던 세월…   희고 먼 하늘, 검은 이파리의 떡갈나무, 검은 눈동자엔 흰 눈빛이 반짝인다 흰 미소가 입가에 배달려있고 검은 분노가 가슴에 엉켜있다…   그러나 눈 감고 색갈들을 살살 지우면 찬란히 환생하는 흑백의 세계, 거기서 우리의 과거가 웃고 있다 그 어떤 칼라로도 가리울 수 없는 우리의 과거가 검은 파도 흰 파도로 출렁인다     같은 맛   바다의 맛과 눈물의 맛은 같다 그러니 눈물을 흘릴 때 바다가 흐르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아픔이래도 보잘 것 없는 슬픔이래도 바다다   눈물의 맛과 바다의 맛은 같다 그러니 바다가 출렁거릴 때 눈물이 출렁거리는 것이다 그것이 큰 파도래도 하늘 같은 통곡이래도 눈물이다     저고리   잔디를 다 덮고 하늘을 다 감싸 뿌리 깊은 나무 숨겨주고도 남는 품   욕심 많은 저 작은 가슴에서 뜬 별 얼마일가 새버린 해 달 얼마일가   노을 물 묻혀 쓴 천년의 이력서에는 꽃씨의 숨   고름줄을 쥐고 주춤거리는 짐승을 밀쳐라 흰 달덩이는 하늘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이 죽음 보고 말한다   넌 왜 이렇게 곁에 딱 붙어서서 떠날념 안하는거니? 조금만 한눈 팔면 앞에 나서려 하니 괘씸하구나   죽음이 대답한다   참 답답하다 우린 쌍둥이로 태여난 친형제란다 네가 딱 막아서서 앞에 나서지 못하지만 암 때건 너를 져쳐버릴 것이다   삶이 다시 말한다   우리를 쌍둥이로 낳은 하느님이 원통하구나 난 니가 정말 질색이다 싫어 못 살겠다 너를 피하느라 갖은 고생이다만 세월 갈 수록 네 힘에 밀리우는구나   죽음이 다시 말한다   네가 앞에 있대서 내가 없어지는게 아니구 내가 앞선대서 니가 없어지는게 아니다 니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니가 있다   삶이 돌아서며 죽음의 어깨를 잡자 죽음도 삶의 어깨를 잡으며 웃는다   그래, 우리는 친형제지! 그렇다, 우리는 한몸이다!     해골   눈동자가 없는 빈 눈집 코바루가 없는 빈 코집   아ㅡ사람의 입은 아궁이였구나   입술로 곁치례만 안했더면 한솥의 밥 단숨에 들어갈 굴 같은 아궁이였구나     섬   나비야, 넌 파란 하늘 작은 뭍 가닿을 수 없는 먼 눈빛 놓쳐버린 예쁜 자리   못난이는 자신의 둥지 항상 스스로 빼앗긴다   날아가는 나비를 쫓지 말어라 나비는 바람 따라 가는 숨 아니다   나무   나무는 참으로 먼 곳에서 오래 온 것 같다 한번 쉬기 시작하니 떠날 생각을 안한다 밟아본 기분인 듯 늘 하늘 한 자락 쓰고 있다 아무리 가는 바람이래도 나무에게 들키면 꼼짝 못하고 예쁜 심음(心音)을 보인다 동서남북상하를 향한 푸른 입들은 늘 벌려져 있고 별이며 달이며 구름이며 태양이며 이슬이며를 끝없이 탐식한다 하나의 커다란 날개를 만드느라 서서히 오래오래 머물며 꿈을 익히는 망(网), 자취 없는 나래질 소리를 념(念)하는 깊은 숨을 아무도 모른다   푸득! 나무는 오늘도 나래의 힘을 가늠해본다     뿌리   칼퀴손이 땅을 꽉 붙잡고 있다   날개 굳은 커다란 새 날기 위해 키워온 힘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날가말가, 날가말가 퍼덕인다   오늘도 동이 트는 하늘 빨간 불덩이 향해 윽벼르더니 어둠의 그물에 걸려 어깨 내린 새   태공을 날 꿈 잊지 않고 백년을 버티는 억센 갈퀴손 땅에 꽉 박고 떤다     차(茶) ㅡ물의 고백   당신을 맘껏 피워주기 위해 나 한껏 끓으리   당신의 몸에서 노란 향기 우러나 내 속에서 춤 출 때 한 모금 꿈으로 설레리   끓어, 팔팔 끓어 내가 통째로 당신으로 꽉 찰제 당신은 온통 나로 넘실거리려니 당신과 나는 드디어 한 몸 되여 하늘에 가 구름과 비의 만남을 보리   새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숨 속에 들어있는 당신은 차(茶), 나는 물!   (2018년 "도라지" 제2기)
722    [시]하늘에 박힌 가시(외8수) 댓글:  조회:940  추천:0  2018-08-30
하늘에 박힌 가시(외8수)   김철호   내가 아이 때 엄마는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이 “니 애빈 승얘(승냥이)네라, 승얘네라!” 친구들 모아놓고 북 대신 미닫이문 밀고당기면서 타닥탁탁… 둥둥둥둥… 달 떨어지는줄 해 돋아나는줄 모르고 술 마셔대고 담배 피워대며 애들 반찬까지 말끔히 먹어버리는 아버지가 승냥이같기도 하였겠지만 봉금날이면 과자봉지 사탕봉지 안고오는 아버지가 아버진 아버지여서 우린 많이 따랐는데 엄마 보다 애들을 더 고와하는 아버지가 엄마 눈에는 왜 승냥이로 보였을가? 때때로 방에서 흘러나오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임에도 엄마는 아버지가 승냥이라고 하는 일 무척 궁금하고 야릇했지만 바스락소리 하나 없이 귀 열고 잤었다 “니 애빈 승얘네라, 승얘네라!” 엄마에겐 아버지가 승냥이가 맞긴 맞길래 죽을 때 마지막 하는 말이 “절대 그것(아버지) 곁에 안 갈테니 그냥 태워서 날려보내달라” 했겠지! 그래서 그렇게 했다! 꺼먼 연기가 검은 가시처럼 하늘에 박히는 화장터의 굴뚝 바라보며 어떤 한이 있었길래 죽어 만나지 않겠다고 악을 쓰셨을가? 그런 한으로 우리 다섯 남매를 어떻게 배고 낳았을가? 엄마의 승냥이 울음소리는 진짜 승냥이 울음소리였단 말인가? 하늘에 박힌 저 가시가 과연 무얼가? 아아… 회석된 검은 연기처럼 이젠 영원히 알수 없는 하늘의 저 숨!     구절초   열여덟살, 입술로 뜯은 꽃이파리 그것이 왜 그렇게 따가왔을가 물리운 듯, 덴 듯 왜 또 아프기도 했을가   지금도 나를 흔들어주는 것이 나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바람이라면 나 바람되여 달려가련만…   열여덟살, 그때 나를 흔들어준 바람은 톡 터지면 볼 빨간 봉선화도 아니였다 먼 바자굽서 수줍어 하던 철모를기꽃도 아니였다 시선을 잡고 놓지 않는 백일홍도 아니였다…   너무 흔해빠지고 향기롭지도 않아 귀한줄 몰랐던 아픈 꽃의 숨 한 모금 나의 년륜에 찍힌 고마운 흰 점 하나!     바위   바위를 옮겨다 시(詩)를 새기니 시비(詩碑)가 되였다 시비(詩碑)가 된 바위는 자기가 바위였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도고해졌다 새겨진 시(詩) 때문에 옷자락 여미는줄도 모르고 자기 앞에서 경건해지는 사람들 눈길을 업신 여기였다   어느날 시비(詩碑)앞에서 시비(是非)가 붙었다 시(詩)가 나쁜 시(詩)이니 지워야 한다느니 까부셔야 한다느니 시(詩)가 좋은 시(詩)이니 다치지 말아야 한다느니 영구보존해야 한다느니…   시비(是非) 끝에 시비(詩碑)를 잠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가슴이 철렁해난 바위는 식은땀을 한바탕 흘렸다 흉터가 나는 건 둘째치구 하마트면 풍지박살날번 했잖았구 뭔가!   무섭구나! 무섭구나!   바위는 자기 몸에 새겨진 시(詩)가 어떤 시(詩)인지 무척 알고 싶었지만 스스로를 볼 수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였다   시비(是非)가 있는 시비(詩碑) 시비(詩)碑에 있는 시비(是非)   바위는 산에 돌아가 친구 바위들과 어울리는 그냥 바위이고 싶었다     운명   쥔 것이 가시나무 가지일지라도 놓지 말아라 힘 줄 수록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더라도 놓지 말아라 놓는 순간, 순간을 잃어버릴 것이다 피로 꽃을 피워주는 가시, 가시 끝에 맺힌 꽃의 숨, 피는 물이 아니다! 찔림을 두려워 하고 아픔을 못 참으면서 뭘 얻으려고 말아라 널 깊이 찔러 네 피의 온기를 안 다음 영원한 한 몸으로 될 꿈 주는 아픈 사랑만이 사랑인줄을 찔려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랴! 찔리여라, 힘 꽉 줘라! 쿡쿡쿡… 한 손아귀에 가득 필 예쁜 피의 꽃을 위하여…     들국화   서리 내린 풀숲 네가 앉았던 자리 아침 볕 빨간 이슬이 맺혔다   너는 없고 갈꽃만 흔들먼들… 마가을 솔숲 청설모 약빠른 길 우에 숨어버린 예쁜 숨   어데 있나? 어데 있나? 눈 씻어도 없다   우연히 바라본 하늘 아ㅡ하 니들 모두가 하늘에 올라 있었구나     뿌리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밝고 예리한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마음 찌르는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빛을 이기는 눈이 있다, 뿌리에게는…   그래서 어둠을 모르고 그래서 멈춤을 모르고 그래서 광음을 모른다   수십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수백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미로의 암흑속에서 숨을 찾아 뻗고 또 뻗는   뿌리에게는 피를 거르는 염통이 있다!     오늘   오늘, 오늘도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당신은 죽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오늘도 계속하여 오늘인 당신은 영원히 영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오늘의 숨이 오늘을 받쳐주어 한 그루의 나무로 한 송이의 구름으로 하나의 하늘로 별로 달로 태양으로 흙으로 돌로 이슬로 뿌리로 이파리로… 오늘을 만들어주고 있나니   오늘, 오늘이 있는 당신은 영원을 산겁니다 불사(不死)의 오늘에 안겨 당신 곁의 눈빛을 응시하면서 명암(明暗)을 나누는 이가 있기에 오늘도 오늘이 당신의 것 되였습니다   오늘, 오늘이 있는한 사랑하세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님을, 그러면 래일도 모레도 글피도 오늘이 될겁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별이 자는 밤, 손을 뻗어 허공을 만진다 검은 종이쪼각 빨깍빨깍 소리난다 한가닥 빛같은 오솔길로 예까지 걸어왔지 따라온 눈물자국들 새가 되여 날아갔지   나혼자, 나혼자, 나혼자… 남은 건 나혼자뿐, 내가 살아야 할 리유는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밤을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낮은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술을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너를 사랑한다, 나를 위하여   이 세상 출발점과 종점은 나다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에게서 끝난다 내가 태양이다. 내가 우주이고 세상이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다 행성에 불과하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 지구의 핵이 없어지고 우주의 중심이 허물어질 것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나를 사랑한다     동그라미   엄지와 식지를 동그랗게 만든 후 나머지 손가락을 펴보이면 OK라는 뜻이 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동그란 눈동자로 보이는 이 세상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둥근 지구가 우주를 굴러갈 때 둥근 달은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지구를 에돌면서 달리고, 메추리새끼가 동그란 알 속에서 부리로 딴딴한 껍질을 쪼을 때 생명의 진동소리는 우주를 흔든다. 정자가 동그란 란자를 만나는 순간 동그란 어머니 자궁은 생명의 집이 되여 우주를 낳을 준비를 한다. 흐르는 강, 넘쳐나는 바다, 쏟아지는 비, 수억의 물방울이 모여 이루어진 저 물의 세계를 찬찬히 보라, 파도 되여 반공중에 뜰제 방울방울의 찬란한 동그라미들은 태여날 때의 모습으로 웃음 짓는다. 내가 쓰는 이 시에도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춤추고 있다. 가장 많은 동그러미, 그러나 똑똑히 그릴수 없는 동그라미를 동그랗게 그릴줄 알게 되는 그때 우리는 동그라미의 참뜻을 알 것이다. 동그라미가 동그랗기 때문에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가면 도망칠 수가 없다. 도망칠 틈이 막혔기 때문이다. 당신의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당신도 나의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우리는 다 서로의 동그라미에 갇힌 동그라미가 될 것이다. 오늘도 당신을 향해 엄지와 식지를 꼭 붙인다. 좋아요! OK!   2018년 제6기.  
721    [평론] 랑송동시에 대한 소견 (김철호) 댓글:  조회:969  추천:0  2018-06-25
랑송동시에 대한 소견 ㅡ최문섭 랑송동시와 한국 랑송동시 비교로부터 본 “랑송시”   김철호    1.랑송시에 대하여   사전(조선의 6권 ”조선말 사전”, 한국 “새 우리말 큰 사전”, “엣센스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는데 “랑송”은 있었지만 “랑송시”라는 단어는 없었다.    6권사전에서는 “랑송”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1. (시를)음률적으로 류창하게 감정을 표현하면서 소리 내여 읽거나 외거나 함. 2.글을 류창하게 소리내여 욈. “새 우리말 큰 사전”에서도 대체적으로 해석이 같았다. 반면 “엣센스 국어사전”에서는 “랑송”을 “소리 내여 글을 읽음” 하나로 해석하고 있다.    “랑송시”는 “서정시”같은 시처럼 제이름을 가지고 명사화되여 사전에 오른 시가 아니였다.   그렇다면 “랑송시”가 없는가? 아니다. “랑송시”는 있다. 모든 시는 다 랑송 가능하며 랑송할 수 있는 시는 다 “랑송시”다. 난해한 시, 몽롱한 시는 랑송할 수 없는가? 얼마든지 랑송할 수 있다. 난해한 음악, 난해한 미술 작품(요즘엔 난해한 무용까지 나타나고 있다)에 대한 리해가 어려운 것처럼 청취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년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쁜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몰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 보았다   ㅡ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여 갔다 (“에피소드/조향)   이 시는 초현실주의적인 시인데 작품의 특징은 돌발적인 이미지의 결합에 있다고 “한국명시”라는 책에서 해석하고 있다. 주제는 “잠재의식 속에 느끼는 아름다운 에피소드”라고 한다. 랑송은 가능하다. 시에 대한 해득은 각자 소양에 따를 수 밖에 없다. 이 시를 이미 읽었거나 잘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랑송을 통해 미적인 향수까지 느낄 수 있을 거고 처음 접촉하면서 시에 대한 깊은 훈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뚱맞은 소리로 지어 미친 소리로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호화가 많이 된 같은 시는 랑송불가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례컨대 나의 동시 “메아리”가 그렇다.   이쪽에서 파도가 밀려가면   (((((((   저쪽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   때론  중도에서 만나기도 하고   ((((( )))))   또 서로 등지기도 하고   ))))) (((((   왔다갔다 만났다 헤여졌다 변덕도 많구나 (“메아리” 전문. 동시집 “하얀 심장”)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의 초기단계에 먼저 나타난 것이 음악이였다고 한다. 소리로만 초기 예술적감정을 표현했다는 말이다. 그 다음 그 소리에 말을 삽입하여 소리의 뜻을 더 명확하고 감명 깊게 나타내게 하였는데 그 말이 초기의 시(사)이다. 시가 소리(음악)와 떨어져나와 독립적인 장르로 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그때의 시는 무조건 랑송을 위한 글이였다. 즉 시 자체가 바로 랑송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시면 랑송하는 글이고 랑송하는 것은 바로 시라는 것이다. 따로 “랑송시”라고 구별화되여 있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태여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뉘여지는 걸로 배웠다. 그 하나는 서정시이고 다른 하나는 서사시이다. 두 형태를 합한 시가 서정서사시이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를 문학공부를 좀 한 사람이면 다 알것이다. 유럽문학의 최대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이다. 소설같은 신화이야기를 시화한 것이다.    조기천의 유명한 “백두산”은 장편서정서사시이다.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 없는 웃으에도 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 천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루돌삼아 곰팡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 듯 고루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백두산" 첫부분)   그외의 시는 대개 거의 다 서정시에 속한다.   시가 랑송을 위해 태여났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시를 “운문(韻文)”이라고 한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운문이란 일정한 규율과 압축, 음악성이 있게 지어진 글을 말한다. 즉, 시는 화성과 률동의 본능에서 발생한 사물이다. 그럼 시는 왜 이렇게 지어지는가? 바로 랑송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시는 랑송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여났으며 그 대부분 시는 영원히 랑송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랑송 외의 목적도 있지만 그것은 본고의 주제를 위해 생략하겠다.)   세계에는 수백 만, 수천 만 수의 시가 있고 매일 같이 수천, 수만의 시가 새롭게 창작되고 있지만 그 시에다 “랑송시”라고 따로 규명해 내놓은 시는 별로 없다. 시는 원래부터 랑송을 위해 태여난 글이기에 하필이면 “랑송시”라고 규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2.우리가 말하는 “랑송시”란 어떤 시인가?   이렇게 랑송시란 따로 없고 모든 시는 다 랑송 가능하며 랑송 가능하면 랑송시인데 우리는 왜 “랑송시”를 따로 말하려 하며 우리가 말하는 랑송시란 과연 무엇인가?   이 문제를 풀려면 나의 체험으로부터 “랑송시”에 대한 인식을 피력할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겪어본 사람라면 랑송시를 가장 많이 체험했을 것이라고 본다. 저 유명한 대형 혁명서사극 “동방홍”의 해설은 시로 엮어지였고 많은 사람들의 신금을 울려주었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대약진, 인민공사, 반우파투쟁… 많은 력사적인 사변 속에서 “랑송시”라는 형식의 시가 그때의 형세를 위해 역활을 하였다. 그때는 문학예술이 독립성적(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큰 기계의 하나의 부속품 내지 라사못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선전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문학이 그러한 역활을 담당함은 자명한 일이였다.   새가 군살을 많이 달면 높이 날지 못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이라는 원형의 살 외의 살은 덜어내야 문학으로서의 나래를 활짝 펼수 있고 높이 날수 있다. 이러한 여건이 개혁개방과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났다. 중국에서의 문학예술은 차츰 제 궤도에 들어서게 되였으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봉오리를 찾게 되였다. 그러나 “좌”적 사상의 여독은 문학의 피속에 섞여 지금까지 문학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때론 그것을 잊고 그것에 수긍한다. “랑송시”가 바로 그렇다.   3.최문섭의 랑송시로부터 본 현상     최문섭선생은 중국조선족동시단에서 성과작이 수두룩할뿐만 아니라 인격적 품위 또한  높은 동시인이다. 동시집 “물노래 돌노래”(연변인민출판사 2011년)는 그의 생전의 마지막 작품집일 것이다. 최문섭선생이 여러가지 형식의 동시탐구에 힘을 기울려 성과를 따냈다는 것이 이 동시집에서 표현되고 있다. 이 동시집은 “동시편”, 동요편”, “동시조편”, “랑송동시편”으로 묶어졌는데 우수한 동시가 아주 많다.   최문섭선생 작고 1주년 세미나에서 나는 이 동시집을 평한 “어린이의 본능적 특징으로부터 본 최문섭 동시ㅡ최문섭동시집 《물노래 돌노래》심독(心讀)”이라는 제하의 글을 발표했다. 그 평론이 그후 최문섭기념동시선집 “콩나물”에 실렸는데 무슨 원인에서인지 랑송시를 평한 부문이 삭제되여 있었다. 그 부문의 일부를 복원해 본다.   최문섭동시집《물노래 돌노래》에는 동요편, 랑송시편, 동시조편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비해 이런 형식의 시는 그 표현력이 강력하지 못하고 낯설지가 않다. 특히 동요들은 형식의 새로운 추구거나 내용의 파격적인 돌파가 없었다. 눈에 확 띄이지 않았고 너무 평범하고 수수해 보였다.(중략)  우에서 살펴본 최문섭시인의 동시들로부터 우리들은 최시인이 퍽 자유로운 사유를 바탕으로 동시를 다루었다는것을 느꼈다. 그러나 랑송시에 와서는 그 자유로움이 스톱되는 느낌이다. 어딘가 얽매인 매듭을 풀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 엿보였다.   “소년아동창간 60돐에 드림”이라고 소제목을 달고 쓴 랑송시 “꽃대궐”, “북경올림픽길상물을 노래하여”라고 소제목을 달고 쓴 “다섯 복동이”, “고 김례삼선생님 령전에 드림”이라고 소제목을 달고 쓴 “고개길 넘어가신 할아버지”, “중국조선족소년보창간 60돐을 맞으며”라고 소제목을 달고 쓴 “하얀 축복 드린다” 이러한 랑송시에서 동시인은 자유분방한 개성을 꺾으면서 정해진 주제를 위해 필을 날릴수 밖에 없었기에 시적인 표현이 예술화되지 못하고 “위하다”에 목매일 수밖에 없었다.(중략)    이 평론에서 나는 최문섭 랑송시의 편폭에 대해 파악하기도 했다.   편폭: “봄맞이가자” 54행, “꽃대궐” 32행, “다섯 복동이” 46행, “꽃명절” 40행, “10월의 하늘 아래” 37행, “고개길 넘어가신 할아버지” 42행, “하얀 축복 드린다” 55행   그 편폭이 일반 동시에 비해 다 길다. 그 중 가장 짧은 랑송시 “꽃대궐”도  32행이나된다. 그럼 “꽃대궐”을 보자.   꽃대궐 ㅡ”소년아동”창간 60돐에 드림   봄바람 살랑살랑 세월의 언덕 넘어 불어오고 뾰족뾰족 연푸른 싹 새봄 맞아 이슬비에 돋아난다 울긋불긋 칠색으로 단장한 꽃대궐ㅡ “소년아동”잡지 창간 60돐 프랑카드 명절의 춤사위에 받들려 눈부시다   오너라, 아이들아 꽃다발 흔들며 채색풍선 날리며 노래하자! “소년아동”이 걸어온 발자취를 경축하자! 우리들의 즐거운 생일을 중국조선족 첫 어린이잡지 영원한 아이로 거듭나는 “거인” 지금 활개치며 힘차게 걸오온다   “소년아동”은 우리네 꽃동산 일년 열두달 꿀샘 솟는 여기에 지식의 바다가 출렁이고 과학의 궁전이 눈비시다   “소년아동”은 우리네 길동무 이곳엔 흰옷의 전설이 숨쉬고 미래의 훌륭한 꿈이 어려있다   아이들아, 오너라! 깔끔한 새옷 입은 “소년아동”이 우리를 손짓한다 신기루같은 찬란한 래일을 창창한 하늘가에 걸어놓고 우리를 꼬드긴다 새 희망 안고 훨훨 우주의 한끝까지 날아가라고!    보는바와 같이 이 랑송시는 그 어떤 예술을 위한 추구가 아니라 하나의 아동잡지를 위한 가송이다. 모든 가송이 다 그러하듯 이 가송도 부풀리고 춰주는 것으로 일관되여 있다. 이런 랑송시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위한 시상(詩想)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송가이다. 동시라는 순수한 장르를 빌어서 어른의 욕구를 발설하는 행위인 것이다.    개혁개방 이전,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선전을 위해 시가 많이 전락되여 문학적인 색갈을 잃고 말았는데 랑송시라는 것이 둔갑하면서 그 갑질이 더 심했다. 그런데 최문섭선생은 개혁개방이 많이 진행되였고 문학이 본연에로 많이 복귀하고 있었던 상태에서 이같은 랑송시를 창작한 것이다. 정치가 문학에 준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반증이다. 이런 시를 랑송하라고 하면 자각적으로 랑송할 어린이가 한명이라도 있을가?    주지하다 싶이 랑송시는 ‘랑송시”라는 초유의 이름을 갖고 등장해서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되였고 지어 무대에까지 올라서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그 영향력이 아주 강해서 오늘날 어떤 사람들에 의해  “랑송시”라는 하나의 독립적인 풍격의 시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였다.     4.한국의 랑송시     과연 랑송시라는 독특한 형식의 시가 있어야 하는가? 랑송시가 과연 우리가 념두에 두고 있는 그런 형태의 시인가?    연변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성인시의 경우 랑송시를 따로 말하는사람이 거의 없다. 랑송시가 고갈되였다거나 랑송할 시가 없다고 대성질호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한국에 가서 여러번 전국시랑송대회를 관람한 적이 있다. 그런 시랑송대회에서 랑송시를 따로 지어서 시를 랑송하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본적 없었다. 대개는 기성시인들이 창작한 우수한 시였다. 가장 많이 랑송된 시는 윤동주의 “별 혜는 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유치환의 “행복”, 서정주의 “국화 앞에서”, 한룡운의 “님의 침묵”, 마종기의 “우화의 강”… 그 외에도 노천명, 신동엽, 황금찬, 박제천, 정호승, 이외수, 김광섭… 지어는 소설가 박경리의 시까지 랑송되였다. 이들 시는 이른바 “랑송시”라는 얼굴로 창작된 시들이 아니라 읽히고 사랑받는 가운데서 무대에 오른 시들이였다.   연변에서도 지금 시랑송대회 같은 것이 보급되여 많은 시들이 랑송되고 있는데 내가 알기에 랑송시라고 따로 창작한 시들이 한 수도 없다. 다 랑송자가 자신이 랑송하기에 합당한 그냥 시를 골라서 랑송하는 것이다.   시가 랑송자를 통하여 청중과 만날 때 완벽한 커무리키이션(즉 출연자의 동작, 음성기호)이 이루어져 소통되여야 하는데 극 소부분 시를 제외한 대부분 시들이 이런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 표현자의 연기가 줄충하기만 하면 지어 어려운 시도 청중에 가 닿을 수 있다.     5.한국의 랑송동시     그럼 동시에서는 꼭 랑송동시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가? 랑송동시가 없어서 애들이 랑송동시 가뭄에 들어 허덕이는가? 랑송동시를 두고 나는 여러 해를 고민하였다. 여러 사람과 토론도 해보았다. 한국에 갈 때마다 서점을 돌면서 혹시 랑송동시집 같은 것이 없을가 찾아 보기도 했다. 금년 1월, 아들집 가까이의 이름 없는 서점에서 우연찮게 랑송동시집을 발견하게 되였다. 물론 보배가 따로 없었다. 랑송동시집을 사갖고 집에 온 나는 단숨에 시집을 다 읽었다.    이 “랑송동시집”(전 3권, 1, 2학년 편, 2, 3학년 편, 5, 6학년 편)에는 전래동요 1수 외에 92명 동시인이 지은 동시 157수가 올라있었는데 놀랍게도 많이 류전되고 사랑받던 한국의 동시들이 거의 다 올라있었다. 한국의 저명한 동시인 김종상의 동시가 도합 6수가 올라있고 두번째로 문삼석동시인의 동시가 5수, 제해만 동시인의 동시가 4수 올라있었다. 엄기원, 손동연, 유경환, 이준관, 하청호, 손세광, 최계락, 오순택, 권영상, 박두순… 등 많은 동시인의 작품들이 두 세수 씩 올라 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내가 “동시야 놀자”문학췬에다 한국의 동시 600수를 골라 올렸는데 이번에 구입한 한국 “랑송동시집”에 그 시들이 거의 다 있었다. 우리의 눈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랑송시”라는 초유의 시를 발명한 사람들의 눈으로는 도무지 통하지 않는 그런 동시들이 다 랑송동시였다.   랑송동시집의 첫페지를 장식한 동시는 문삼석동시인의 “이른 봄 들에서”였다.   사르륵 사르륵   “여보세요, 계세요?”   속삭이는 봄비.   소로록 소로록   “누구세요? 나가요.”   내다보는  새싹. (“이른 봄 들에서” 전문)   이 랑송동시집에 실린 문삼석동시인의 다른 한 동시를 보자.   누가 뿌렸나? 그 많은 씨앗.   하늘 밭 가득 촘촘한 씨앗. (문삼석 “별” 전문)   도합 20자밖에 안되는 이미지 단시이다. 이 “랑송동시집”에 실린 많은 동시가 “이른 봄 들에서”와 같은 이미지동시였다.    꽃/이봉춘   꽃은 손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꽃은  발도 없다   그러나  산을 넘어 먼곳까지 잘도 간다   돌다리/하청호   깡충 깡충 별들이 건너뛰다가   퐁당 퐁당 물 속에 빠져 버렸다   반짝 반짝 냇물 속에 빠진 수, 수만의 별 별들   꽃씨/최계락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지시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시에 새로운 이미지가 없고 새로운 시적 발견이 없다면 훌륭한 시가 될수 없다고 본다. 엄격히 말하면 새로운 이미지는 훌륭한 시를 싹트게 하는 종자라고 할수도 있다.    이미지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미지란 시에서 표현되는 원관념의 다른 한 형상이다. 어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그 시 밖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 그림이 바로 이미지이다. 시를 읽는데 머리 속에 그림이 생기는 것이다. 그 그림이 이미지이다.    랑송동시집에 이런 동시가 있다.   산 위에서 보면 학교가 나뭇가지에 달렸어요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 쏙 얼굴을 내밀지요   장난감 같은 교문으로 재조잘 재조잘 떠밀며 날아 나오지요 (김종상 “산 위에서 보면” 전문)    이 시를 보고 머리 속에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는 학교가 하나의 새장으로 떠오르고 그 새장 속의 아이들이 새가 되여 날으는 장면. 나뭇가지 사이로 본 학교가 하나의 새장이라는 시적 발견은 아이들을 새라는 이미지로 둔갑시켜 아름다운 화폭을 안겨준다. 독자의 머리속에는 동화같은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 그림이 바로 이미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는 이미지 만들기이며 이미지가 없으면 시가 될 수 없다고까지 말하는데 과한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직설적인 표현, 현실주의적 표현이였다. 현대시에 접어들면서 이미지창조가 필수로 되였다. 시에서 이미지창조는 지금까지는 최고의 표현수법이다.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 창조를 한 시에서 여러번 나타내고 있다.    주제를 떠난 이야기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많은 동시가 이미지동시이고 이런 동시를 랑송하는 것이 실제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감이 옳다고 본다.   이처럼 한국의 “랑송동시집”에는 우리가 평소에 말하던 그런 보통 동시로 일색되여 있었다. 1, 2학년, 3, 4학년, 5,6학년 별로 묶어졌고 심도가 차츰 깊고 편폭이 길어지는 것 빼고는 다 보통시였다. 특별히 랑송을 위해 창작한 그런 시들이 아니였다는 말이다.   편폭이 좀 긴 5, 6학년편에 실린 동시 한편을 살펴보자.   꽃길   유경환   순한 짐승들 지나다닌 길목에   사슴 발자국대로 사슴꽃 피고 노루 발자국대로 노루꽃 피고 토끼 발자국대로 토끼꽃 피고   이름 없는 짐승이면 이름없는 꽃 피고   재주 한번 넘어 사슴 되고 재주 한번 넘어 노루 되고 재주 한번 넘어 토끼 되고   심심할 땐 혼자서 이름 없는 짐승   꽃길 속에 그 누구 들어올 때까지 나는 재주 잘 넘는 왕자이고 싶다   사슴꽃이 어떤 꽃인가를 노루꽃이 어떤 꽃인가를 토끼꽃이 어떤 꽃인가를   심심할 땐 혼자서 그리며 생각한다 (“낭송동시집” 5, 6학년 편 86페지)   산짐승이 지나간 발자국이 꽃이 된다는 아름다운 이미지의 동시이다. 사슴 발자국은 사슴꽃, 토끼 발자국은 또끼꽃이라는 발상은 동화적이다. 이 동시에 대한 랑송법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랑송법   1연은 자연스럽게 읽고, 2연은 한 행씩 또박또박 읽어 갑니다. 그래서 3연에 이르러 더우 또렷하게 낭송해 줍니다. 4연도 2연처럼 읽습니다. 그리고 5연도 3연처럼 또렷이 읽어 의미를 강조해 줍니다. 6연은 동화 구연하듯, 상상의 세계로 안내해 줍니다. 7연에서는 설명하듯 한 행씩 분명한 어조로 낭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끝 연은 조용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천천히 읽습니다. 시 낭송의 끝은 항상 끝나는 느김이 충분히 나도록 읽어 주어야 됩니다.    동시는 문학이며, 최고의 문학이다. 우리는 문화대혁명같은 시절에 문학으로 정치를 하던 그런 작법을 답보해서는 안된다. 누군가 정치는 협치 내지 타협이지만 문학은 협치가 되거나 타협의 상대로 되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문학은 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며 예술적인 창조다. 랑송시라고 해서 “아, 오…”를 련달아 외치거나 없는 감정을 토해내면서 그 무엇에 아첨하는 따위 짓거리를 이젠 영영 버려야 한다.     6.어린이가 읊기 좋아하는 시가 바로 랑송동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최문섭선생이 쓴 그런 동시는 어른의 강요가 아니면 어린이들은 절대 랑송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몇년전 도문에 가서 어린이들의 시랑송경연을 본적 있다. 어린이들이 랑송하는 동시는 거의 다가 연변 동시인들의 동시였다. 소개에 따르면 어린이들의 자각적인 선택과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가 배분되였다. 그런데 한 동시를 두 아이가 랑송했다. 그 동시가 바로 나의 동시였다. 대표작도 아니고 스스로 잘 썼다고 생각하는 동시도 아니였다. 곁에 있는 허송절선생에게 저 동시는 왜 두 아이가 랑송하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두 아이가 다 저 동시를 선택해서 한 아이에게는 다른 동시를 랑송시키려고 했는데 두 아이가 다 기어이 저 동시를 랑송하겠다고 해서 이렇게 되였다고 했다. 두 아이가  자각적으로 선택했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였다. 그 동시를 보자.    꽃은 왜 웃나/김철호   꽃이 왜 웃냐 하면 꽃이 왜 웃냐 하면   바람이 살랑살랑 간지럽혀서 해죽해죽   꽃이 왜 웃냐 하면 꽃이 왜 웃냐 하면   해살이 살랑살랑 간지럽혀서 해죽해죽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이 읽고 싶어 하는 동시가 있다. 강요는 금물이다. 우리가 랑송시랍시고 아무리 멋지게 지어서 준다고 해도 그것이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으면 어른의 넉두리를 아이의 입으로 하는 꼴 이상이 될수 없다.    아이들에게 좋은 시를 읽게 하고 랑송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이 그 시와 접하면서 상상력을 꽃피우고 아름답고 멋진 시상 속에서 건강하게 크라는 것이 목적이 되여야 하지 어른의 그 어떤 선전이거나 선동, 속풀이가 목적이 되여서는 절대 안된다고  본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우리의 동시인들이 창작한 거의 모든 동시가 다 랑송 가능하며  랑송할 동시가 없어 아이들이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문학이 아닌 그늘에서 습관화된 그런 의식을 버리고 문학의 본연에서 창작을 정진하게 하는 것이 오늘 날의 우리의 자세가 되여야 한다고 본다.    이른바 “랑송시”는 없다. 시가 있을 뿐이다. 모든 시는 거의 다 랑송 가능하며 시는 처음부터 랑송을 목적으로 창작되였다. 이이들의 가슴에 가 닿는 아름답고 멋진 시를  창작하여 많이 읽히고 랑송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일뿐이다. 아이들에겐 있지도 않는 어른의 서정을 갑자르면서 어린이화하여 내 쏜들 그것을 아이들이 받아줄리가 없다. 동심에 잘 기대여 우리가 창작한 동시가 바로 “랑송동시”이다.   7.글을 마무리하면서   “랑송동시집” 서문의 한 단락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을가 한다.   시는 우리가 본디부터 타고 난 귀한 사랑의 마음을 제일 고운 언어로 다듬어 낸 가장 자랑스러운 사랑의 노래입니다. 옛날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가 “시란 정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라고 한 것도 이 점을 지적한 말입니다.   ㅡ미안해 넘어뜨리려고 그런게 아니야   새싹은  봄이면 돋아 나지만 내가 요만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기까지엔 봄날이 수없이 지나가야만 했어   파란 하늘을 본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누구든 붙잡고 이야기 하고 싶었어 달라진 세상,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  그렇지만 기쁨은 잠깐, 사람들은 날 피해 다녔어 난 쓸쓸했지   그 때, 네가 가까이 온 거야 너무 반가워 덥석  네 발을 잡았지   너와  친구하고 싶었어 (“돌부리” 이혜영)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나뒹굴어져 발목을 삐거나 팔꿈치가 벗겨질 수도 있고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아찔한 순간입니다. 그런데도 돌부리를  미워하거나 원만하지 않습니다. 내 발을 걸어 넘어뜨린 돌부리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봅니다.   돌 한 덩이가 길바닥을 뚫고 숫아나 돌부리로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깜깜한 땅 속에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밝은 햇볕 아래서 푸른 하늘을 보는 순간은  너무나 큰 감격입니다. 누구든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친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발을 잡은 것이지 넘어뜨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부리의 마음이 눈물겹습니다.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는 미움보다 뜨거운 정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노래인 시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시를 많이 외고 감상하면 가슴 속에서 저절로 사랑이 자라나고 마음과 말씨도 고와집니다. 마음과 말씨가 고와지면 행동이 착해지고 행동이 착하면 생활이 건강해져서 사회가 정의롭고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는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의 노래인 것입니다. 2018년 아동문학세미나에서 발표  
720    [심사평]뛰어난 감각으로 건져올린 환상적인 세계(문삼석) 댓글:  조회:1399  추천:0  2016-08-03
제8회 세계동시문학상 심사평 뛰어난 감각으로 건져올린 환상적인 세계 문삼석(한국의 저명한 동시인, 한국아동문예가협회 이사장) 세계동시문학 해외부문 수상작으로 김철호시인의 "추운 날이면"외 4편 "포도", "보름달", "얼룩말", "코딱지 땜에"를 선정한다. 김철호의 동시들은 매우 감각적이다. 그의 삐여난 감각은  평범한 대상을 정감 넘치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예컨대, 그의 시선으로 포착된 포도밭은 그냥 예사로운 포도밭이 아니다. 포도알 한알한알은 온통 까만 눈뿐인 까만 아이들로 바꾸어 독자들을  똘망똘망 바라보게 하고, 얼룩말은 하얗고 까만 줄들이 한없이 풀려나가는 신비한 동물로 다가서고 있다. 경비아저씨가 비추는 손전등은 어떠한가? 신비로운 하늘길을 더듬으면서 번쩍번쩍 구름사이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별아기들의 숨쉬는 하늘세상을 슬쩍슬쩍 비춰보기도 한다. 추운 날이면 입김도 수건 쓰고 나온다 호ㅡ호ㅡ 후ㅡ후ㅡ 하얀 수건 날리며 나불 바불 어디로 떠나간다 독자들로 하여금 어디론가 떠나가는 입김을 따라 한없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만드는 솜씨가 일품이다. 남다른 감각으로 대상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린이들에게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시인의 역량은 높이 상찬되어야 할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축하와 함께 앞날의 대성을 기원한다. 2016년 6월 30일. 수상작품 추운 날이면 추운 날이면 입김도 하얀 수건 쓰고 나온다 호ㅡ호ㅡ 후ㅡ후ㅡ 하얀 수건 날리며 나불 나불 어디로 떠나간다 포도 눈, 까만 눈 또릿또릿 바라보는 숱한 눈 까만 눈뿐인 까만 아이 보름달 누가 커다란 손전들 들고 하늘길로 걸어간다 구름 사이 비춰보고 별무리 비춰보고 마을도 비춰보고 우리 학교도 비춰보고... 흔들흔들 번쩍번쩍 남 다 자는 밤 손전등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분 하하하... 경비원 아저씨구나! 코딱지 땜에 다투다가 보니 철구 볼에 코딱지가 붙어 있었다 웃으면 안되는데 웃으면 절대 안되는데 씩씩거리는 철구 볼에서 코딱지도 씩씩거렸다 더는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철구도 씨익 웃었다 얼룩말 흰줄 풀어놓으면 대단히 길거야! 검은 줄도 그만큼 길겠지 뭐!
719    [심사평]새로운 시적이미지 창조(한석윤) 댓글:  조회:1843  추천:1  2016-01-21
새로운 시적이미지창조에 성공한 동시집 제1회 단군문학상 아동문학수상작품 《작은 하늘》심사평 한석윤 좋은 동시작품을 쓴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동시작품에는 동심과 시심이 고루 담겨있어야 하기때문이다. 아무리 동심이 찰랑거려도 시심이 담겨있지 못하면 시가 되지 못하고 아무리 시적향기가 차넘쳐도 동심을 떠나면 동시로 될수 없다. 김철호의 《작은 하늘》은 이 면에서 성공을 거둔 동시집으로, 당전 조선족동시단의 수준을 대표한다고 말할수 있다. 그의 동시들은 우선 시적소재나 시각이 동심적이다. 동심적시각에서 사물을 관찰하기에 그의 시적소재는 항상 엉뚱하고 앙증맞고 천진하고 순수한것들이여서 부담없이 따스하게 독자들한테 다가선다. 다음으로 그의 동시들은 시적발상이 단순하고 시적구성이 간결하고 시적정서가 명쾌하다. 단순성, 간결성, 명쾌성은 성인시와는 다른 동시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의 동시들은 이런 특점을 구비하고있기에 어린 독자들한테 빨리 다가갈수 있다. 그 다음으로 그의 동시들은 시적인 상징과 비유가 신선하고 앙증맞다. 시인은 어린이들의 리해능력과 류추능력을 떠나지 않는 전제하에 현대시의 유용한 수법들을 대담하게 도입하므로써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까지 공감할수 있는 새로운 시적이미지를 창조하는데 성공하고있다.
718    [평론]시적상상ㅡ존재와 부재 사이에서(최삼룡) 댓글:  조회:1751  추천:2  2016-01-20
시적상상ㅡ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ㅡ김철호의 근작시 6수를 놓고 최 삼 룡 김철호의 근작시 6수는 시인의 상상력이라는 이 시미학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개념상에서 우리에게 계시해주는바가 많다. 주지하다시피 시적인 상상력은 시인의 시창조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조력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건적인 요소이다. 시창작이란 언어의 부호로서 예술적인 시형상을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 과정에 무수한 존재와 부재의 변증관계가 번복되며 시적상상력은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관건적인 작용을 논다. 다시 말하면 시적상상력은 창조주체의 시적창조력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할수 있다. 김철호의 근작시 6수 가운데네 바다를 시적대상으로 삼은 시가 가장 돋보인다. 바다란 지구우의 륙지를 둘러싼, 짠물이 괴여있는 크나큰 부분으로서 고금중외의 시에서 녀성, 혹은 미지의 상징으로도 되고, 광활함과 적막함을 표출하는 공간의 배경이 되기도 하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이승과 저승이 하나가 되는 신화의 공간으로 상징되기도 하고, 거대하고 력동적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물로서 가변성과 생기 넘침, 싱싱한 활동력으로 이미지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바다앞에서 인간은 왕왕 자신의 왜소함과 본연적인 물음, 심연의 고독과 마주하게도 되고 또한 삶의 의지와 인고를 배우는 깨달음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금중외에는 바다를 읊은 시가 많은데 바다를 자유의 원소라고 노래한 뿌쉬낀의 “바다에”와 바다를 뿔뿔이 달아나려는 도마뱀에 비유한 정지용의 시”바다·2” 그리고 바다를 푸른 띠를 두른 세계주의자라고 지칭한 조병화의 시 “바다”  등은 너무도 유명하여 필자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시이미지로 살아있다. 키(箕)가 용납할수 없는것이 있었다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 이것은 시 “바다”의 첫 두 시구인데 여기서 시인은 바다를 키(箕)라고 하면서 그 키가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다와키(箕)라는 어떤 공동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두가지 사물을 만나게 된다. 그아래에서 물결로 결어 만든 커다란 키가 까불린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들이 뭍으로 밀려나온다고 하였고 또 그아래에서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을 더러운 색, 찌꺼기라고 하였으며 나중에 제일 마지막 시구에서는 이렇게 바다는 “다른 세상이다” 라고 읊고있다. 이제 이 시에 그려진 바다를 우리가 다시 정리해보면 더러운 색깔이 없고 찌꺼기가 없는 파란 색깔만 있고 찌꺼기가 없고 알맹이만 있는 바다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바다는 세상에서 더러운 색깔과 오물과 찌꺼기를 까불여내는 키로 창조되였다. 여기서 필자가 힘주어 내세우고싶은것이 바로 존재와 부재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창조주체 즉 시인의 시적상상력이다. 편폭이 3천자로 제한된 이 단문에서 깊이 전개할수는 없지만 여기서 몇 마디 더 하고싶다. 상식적으로 바다는 객관적인 대자연으로서의 존재이고 키는 인간의 작은 로동도구로서의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바다에는 키가 부재하며 키에는 바다가 부재한다. 그러나 분명히 김철호의 시 “바다”에서 바다는 더러운 색과 찌꺼기를 까불이는 키로서 창조되였다. 다시말하면 바다에 부재하는 키에 바다가 존재하는 시적형상이 창조된것이다. 이 시적형상은 창조주체의 주관적인 창조물이면서 또 백지흑자로 그 탄생의 고고성을 울리면서 세상에 나타난후에는 완전히 독창적이고 완전히 신선하고 완전히 예술적이며 아울러 세상에 전대미문의 유일무이한 개관적인 존재로 된다. 이렇게 존재와 부재 사이를 넘나들면서 부재에서 존재를 찾아내고 존재에서 부재를 찾아내며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서 어떤 공동성을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창조주체의 상상력이다. 이 시에서 김철호씨는 바로 뭍으로 찌꺼기를 밀어내면서 끝없이 격랑을 일으키는 바다에서 곡식따위를 까불어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키를 련상하면서 량자의 어떤 공동성을 찾아냈던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더러운 색이 없고 파란색만 있고 쭉정이가 없고 알맹이만 있는 순수하고 풍만한 인간세상에 대한 상상을 펼치고있다. 이제 이 6수의 시를 잘 읽어보면 우리는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시”파도”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파도에서 곡절많은 인생과 굴함없는 생명의지를 찾아냈으며 시 “세월”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바다에서 인생의 미미함과 허무함을 찾아냈으며 시 “빛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물푸레나무에서 인간의 처절한 생존경쟁을 찾아냈고 “칼과 물”에서 시적상상력은 칼과 물의 싸움에서 인간실존의 내적강인성을 찾아냈다. 물론 시인의 상상력에 천성적인 일면이 있다는것을 부인할수 없지만 그 천성적인 상상력은 시인의 부단한 감촉, 감지, 표상, 감각의 기초위에서 생성되고 성숙되는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특히 뿌쉬낀의 시적상상에 대한 명언 한마디가 련상되는데 그는”진정한 상상은 천재적인 지식을 요청한다”라고 하였다. 이 졸문에서 필자는 김철호의 시에서 시적발견을 놓고 담론하였는데 그밖에도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력은 창작활동의 전부의 과정, 다시 말하면 시인이 생활과 인간에 대한 인식, 매 한수 시의 구상, 시적형상을 창조하는 매 하나의 작업과정에 관통관통되고있다는 점을 망각하여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석은 더 많은 편폭을 수요하므로 여기서 졸문을 이만 줄인다. 2016년 《장백산》 제1기    
717    2016년 장백산 제1기에 발표된 시와 시평 댓글:  조회:2232  추천:1  2016-01-20
바다(외5수)   김철호   키(箕)가 용납할수 없는것이 있었다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   물결로 결어 만든 커다란 키가 이런 색갈을 까불이면 색갈들이 철썩 철썩 붙으로 밀려나온다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예민한 색각(色覺)으로 고르고 골라 이 더러운 색깔들을 뭍으로 밀어내버린다   철썩 철썩 철썩... 신나는 키질에 기슭으로 밀려나오는 찌꺼기들이 노랗게 하얗게 빨갛게 뒹군다   물론 다른 세상이다   파도   넘어지는것이다 일어나는것이다 넘어졌다 일어나는것이다 일어났다 넘어지는것이다 넘어져도 나아가는것이다 일어나도 나아가는것이다 나아가도 넘어지는것이다 나아가도 일어나는것이다 일어났다 넘어졌다 넘어졌다 일어났다 쉴틈을 주지 않는것이다 넘어지지 않으면 죽는것이다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것이다   세월   배가 지나간 자리에 커다란 물갈기 큰길처럼 서고 멀리 사라진 뒤엔 아무 일 없었던듯이 웃는 물밭 이 엄청난 바다위로 배들은 끝없이 지나가건만 흔적은 하나도 남은것 없다 삼키워버린 수억의 그림자 어데가서 찾을수 있으랴 그 누가 찾자고 하랴 석양이 가라앉은 고요에 짓눌려 붉은 피 하늘 향해 흐른다 새벽, 아기 울음소리 길손의 가벼운 발걸음들   빛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피줄이 얽힌 검은 손이 있었다   분 발린 문푸레나무 하얀 몸을 만지면 분말들은 향기가 되여 뛰여다녔다   그윽한 오솔길가에는 화초가 만발했고 물이 흐르고 개구리가 울고있었다   빛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빛과 흰빛이 부딪힌것일가 빛의 소리가 황금고리가 되여 물푸레나무를 읽고있었다 싱싱한 빛과 비릿한 빛이 만나는것일가 빛들은 만나자마자 한덩이가 되였다   물에 기름이 떨어지자 동그란 우주가 생겼다 그 동그라미 속에 별이 가득 담겨있었다 굶주린 메새가 어미의 부리에 물려있는 먹이를 보고 다급히 울어댔다   물푸레나무의 웃음이 파랗다는걸 아는이가 없다   칼과 물   베이고 베이고 또 베여도 내리치고 내리치고 또 내려쳐도 한 몸을 나누지 않는다 무너지는것은 칼이다 무디는것은 칼이다 죽는것은 칼이다   부드럽고 저항없는 슬프고도 아련한 물에 칼은 항상 진다   기도   검은고양이의 눈을 멀게 하소서 흰 고양이의 눈도 멀게 하소서 고양이가 없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고양이는 고양이질만 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고양이가 호랑이 되는 세상을 막아주소서 쥐들도 살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시적상상ㅡ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ㅡ김철호의 근작시 6수를 놓고   최 삼 룡   김철호의 근작시 6수는 시인의 상상력이라는 이 시미학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개념상에서 우리에게 계시해주는바가 많다. 주지하다시피 시적인 상상력은 시인의 시창조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조력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건적인 요소이다. 시창작이란 언어의 부호로서 예술적인 시형상을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 과정에 무수한 존재와 부재의 변증관계가 번복되며 시적상상력은 바로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관건적인 작용을 논다. 다시 말하면 시적상상력은 창조주체의 시적창조력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할수 있다. 김철호의 근작시 6수 가운데네 바다를 시적대상으로 삼은 시가 가장 돋보인다. 바다란 지구우의 륙지를 둘러싼, 짠물이 괴여있는 크나큰 부분으로서 고금중외의 시에서 녀성, 혹은 미지의 상징으로도 되고, 광활함과 적막함을 표출하는 공간의 배경이 되기도 하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이승과 저승이 하나가 되는 신화의 공간으로 상징되기도 하고, 거대하고 력동적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물로서 가변성과 생기 넘침, 싱싱한 활동력으로 이미지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바다앞에서 인간은 왕왕 자신의 왜소함과 본연적인 물음, 심연의 고독과 마주하게도 되고 또한 삶의 의지와 인고를 배우는 깨달음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금중외에는 바다를 읊은 시가 많은데 바다를 자유의 원소라고 노래한 뿌쉬낀의 “바다에”와 바다를 뿔뿔이 달아나려는 도마뱀에 비유한 정지용의 시”바다·2” 그리고 바다를 푸른 띠를 두른 세계주의자라고 지칭한 조병화의 시 “바다”  등은 너무도 유명하여 필자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시이미지로 살아있다.   키(箕)가 용납할수 없는것이 있었다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   이것은 시 “바다”의 첫 두 시구인데 여기서 시인은 바다를 키(箕)라고 하면서 그 키가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다와키(箕)라는 어떤 공동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두가지 사물을 만나게 된다. 그아래에서 물결로 결어 만든 커다란 키가 까불린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들이 뭍으로 밀려나온다고 하였고 또 그아래에서 붉은색, 하얀색, 노란색을 더러운 색, 찌꺼기라고 하였으며 나중에 제일 마지막 시구에서는 이렇게 바다는 “다른 세상이다” 라고 읊고있다. 이제 이 시에 그려진 바다를 우리가 다시 정리해보면 더러운 색깔이 없고 찌꺼기가 없는 파란 색깔만 있고 찌꺼기가 없고 알맹이만 있는 바다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바다는 세상에서 더러운 색깔과 오물과 찌꺼기를 까불여내는 키로 창조되였다. 여기서 필자가 힘주어 내세우고싶은것이 바로 존재와 부재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창조주체 즉 시인의 시적상상력이다. 편폭이 3천자로 제한된 이 단문에서 깊이 전개할수는 없지만 여기서 몇 마디 더 하고싶다. 상식적으로 바다는 객관적인 대자연으로서의 존재이고 키는 인간의 작은 로동도구로서의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바다에는 키가 부재하며 키에는 바다가 부재한다. 그러나 분명히 김철호의 시 “바다”에서 바다는 더러운 색과 찌꺼기를 까불이는 키로서 창조되였다. 다시말하면 바다에 부재하는 키에 바다가 존재하는 시적형상이 창조된것이다. 이 시적형상은 창조주체의 주관적인 창조물이면서 또 백지흑자로 그 탄생의 고고성을 울리면서 세상에 나타난후에는 완전히 독창적이고 완전히 신선하고 완전히 예술적이며 아울러 세상에 전대미문의 유일무이한 개관적인 존재로 된다. 이렇게 존재와 부재 사이를 넘나들면서 부재에서 존재를 찾아내고 존재에서 부재를 찾아내며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서 어떤 공동성을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창조주체의 상상력이다. 이 시에서 김철호씨는 바로 뭍으로 찌꺼기를 밀어내면서 끝없이 격랑을 일으키는 바다에서 곡식따위를 까불어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키를 련상하면서 량자의 어떤 공동성을 찾아냈던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더러운 색이 없고 파란색만 있고 쭉정이가 없고 알맹이만 있는 순수하고 풍만한 인간세상에 대한 상상을 펼치고있다. 이제 이 6수의 시를 잘 읽어보면 우리는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시”파도”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파도에서 곡절많은 인생과 굴함없는 생명의지를 찾아냈으며 시 “세월”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바다에서 인생의 미미함과 허무함을 찾아냈으며 시 “빛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물푸레나무에서 인간의 처절한 생존경쟁을 찾아냈고 “칼과 물”에서 시적상상력은 칼과 물의 싸움에서 인간실존의 내적강인성을 찾아냈다. 물론 시인의 상상력에 천성적인 일면이 있다는것을 부인할수 없지만 그 천성적인 상상력은 시인의 부단한 감촉, 감지, 표상, 감각의 기초위에서 생성되고 성숙되는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특히 뿌쉬낀의 시적상상에 대한 명언 한마디가 련상되는데 그는”진정한 상상은 천재적인 지식을 요청한다”라고 하였다. 이 졸문에서 필자는 김철호의 시에서 시적발견을 놓고 담론하였는데 그밖에도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력은 창작활동의 전부의 과정, 다시 말하면 시인이 생활과 인간에 대한 인식, 매 한수 시의 구상, 시적형상을 창조하는 매 하나의 작업과정에 관통관통되고있다는 점을 망각하여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석은 더 많은 편폭을 수요하므로 여기서 졸문을 이만 줄인다.        
716    [시]산(김철호) 댓글:  조회:1891  추천:1  2015-12-20
산   김철호   너를 만나면 온몸이 너로 가득해진다   눈속에 네가 가득 찬다 가슴속에 네가 가득 찬다 내 몸속에 네가 가득 찬다   네가 쥐고싶은것을 내 손이 쥔다 네가 가고싶은 곳을 내 발이 간다 네 숨을 내 페로 숨쉬며 네 느낌을 내 심장으로 뜨거워한다   너를 만나면 세포마다에서 네가 감뛴다 나는 다 녹아 네가 되고 너도 다 녹아 내가 된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   연변일보 2015년 12월 4일.
715    [시]봇나무(김철호) 댓글:  조회:1527  추천:0  2015-12-20
봇나무   김철호   눈을 감게 된다 죽어서도 눈이 된 너의 눈 보며는 하얀 눈물 소금으로 돋혀 숨이 된 너의 눈 감을줄 모르는 천고의 그 눈 마주볼수 없어서 눈을 감게 된다 죽어서도 눈이 된 너의 눈 보며는.   연변일보 2015년 12월 4일.
714    [시]초불(김철호) 댓글:  조회:1402  추천:1  2015-12-20
초불 ㅡ윤동주, 사라진 빛 70년   김철호   움 텄다 밝은 움 맑은 세상을 낳은 움   나무로 컸다   수많은 가지 뻗고 푸른 이파리 춤으로 셀레여 흙에 늙지 않는 그림 그려주었다   움 텄다 맑은 움 밝은 얼로 빛난 움   나무로 컸다   맺힌 빛 별로 무성하고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초불 됐다!   연변일보 2015년 12월 4일.
713    [평론]경이로운 반전 그 여운에 젖어(심숙) 댓글:  조회:1645  추천:0  2015-12-15
촌평   경이로운 반전 그 여운에 젖어 -김철호시인 근작시 3수를 읽고 심숙 드라마는 반전으로 살아난다. 소설에서도 반전은 매우 중요하다. 시에서는 반전이 필요할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필요하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짧은 서정단시에서 반전이 가능할가? 역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는것이다. 이제 김철호시인의 근작시 3수를 같이 읽으며 서정단시에서 반전의 매력에 심취되여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시에서 반전은 사유의 비약이라고들 말한다. 폭포가 쏟아지는 장면을 은하수가 쏟아진다고 과장적으로 표현하는것 역시 이 사유의 비약에 다름아니다. 시 “바다”에서 시인은 바다를 푸른 잔디가 깔린 매립장으로 보고있다. 온갖 오물, 쓰레기들 절대대부분을 바다에 처넣는 인간들의 말세적행위를 고발하고있는것이다. 그 푸른 아우성속에서 새의 몸부림은 처절하면서도 비장하다. 그리고 그 새는 수많은 칼들에 난도질을 당하며 깃털을 수없이 날리고있다. 정의의 화신이라고 해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새는 반대세력의 포위속에서도 퍼덕임을 계속한다. 비장하다못해 장엄하다. 여기까지 보면 이 시는 인간에 의해 오염되여가는 바다 및 자연생태를 지켜주자는 호소로 볼수 있겠다. 그러나 시인은 거침없는 사유의 비약으로 통념을 시원히 깨는 반전을 보여준다. “저 푸른 천을 장대에 매달면 푸른 기발이 될것이다/ 누가 저 기발을 들고 달리려는가” 푸른 바다를 푸른 천으로 보고 그것을 장대에 달아서 푸른 기발을 휘두르며 미래에로 달려간다는 이 시구는 독자들의 상상을 뛰여넘는 반전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있다. 이제껏 시인들이 온갖 사물들을 라렬하는식으로 쓴 시들은 결코 한두수에 그치지 않는다. 시 “우리들의 리력서” 역시 비금한 범주에 속하는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자체의 반전매력으로 다른 여타의 시들과 차별된다. 별, 별찌, 먼지, 물, 강, 바다, 태양, 돼지, 풀 등등등등 수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이 시는 자칫 장난처럼 보여질지도 모르지만 “사람”이라는 이미지에서 반전이 생긴다. 자연생태속의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 박혀있는 사람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또 유별난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연계를 좋게도 나쁘게도 변하게 만들수 있는 변수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리력서”는 결국 자연의 한 존재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넌짓한 어드바이스라 할수 있겠다. 자연속에 자연스레 박혀있을 때는 인간도 자연이지만 주변 자연을 깎고 떼고 뭉개고 파괴할 때는 반자연적인 존재인것이 바로 인간인것이다. 시 “페허를 향하여”에서는 흰, 검은, 얼룩, 누런, 갈색 등 색색의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밝은 눈의 이 고양이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있지만 쥐를 잡아야 하는 고양이들이 닭을 노리고있는것이 이 시의 반전이라 할수 있겠다. “닭 한마리/ 커다란 고양이로 변한 닭 한마리/ 볏이 빨개 야옹 한다/ 튀해 고아먹을…// ㅋㅋㅋ/ ㅎㅎㅎ…” 아이러니하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고, 개가 집을 지키지 않고, 양이 풀을 뜯지 않고, 소가 일을 하지 않고, 당나귀가 석마를 찧지 않는 등 이런 현상들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지속됨에 따라 세상은 페허를 향하게 되고 우리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그런 변이된 세상을 떠안을수 밖에 없는것이다. 이 역시 우리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과보응이라 할수 있다. 모두어보면 김철호시인은 근작시에서 거침없는 반전으로 생태를 파괴하고 자연을 짓밟는 인간들을 고발하고있으며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면서 보다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어가자는 호소를 담고있다. 중국조선족시단에 한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생태시를 다시 화두로 떠올려준 김시인의 시적행보를 다같이 지켜볼 일이다.   흑룡강신문 2015년 11월 20일 제2면
712    흑룡강신문에 발표된 시 3수와 심숙의 촌평 댓글:  조회:1639  추천:0  2015-12-15
바다(외 2수) 김철호   매립장(埋立場)은 푸른 잔디에 덮혀 묻힌 죽음의 력사를 망각했다 숨이 묻혀 불이 묻혀 숨 쉬는 불 불 센 숨 푸른 아우성은 무덤에서 나오는 새의 퍼덕임 하얗게 날이 선 칼들이 수천만개의 손을 쳐들었다 짐승은 사나운 이발로 자신을 널고있다 물어뜯어 삼키고 삼킨것을 뱉는다 깃털이 하늘 가득 흩날린다 저 푸른 천을 장대에 매달면 푸른 기발이 될것이다 누가 저 기발을 들고 달리려는가 우리들의 리력서 별이다가 별찌 먼지다가 물 공기 나무다가 강 바다 태양 돼지다가 풀 잉어 감자 벼 사람이다가 꽃 연기 구름 바람 별… 페허를 향하여 검은 고양이의 눈이 밝다 흰 고양이의 눈도 밝다 얼룩 고양이의 눈도 밝다 누런 고양이의 눈도 밝다 갈색 고양이의 눈도 밝다 검은 고양이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웠다 흰 고양이는 날쌘 점프를 위해 한발 물러섰다 얼룩 고양이는 마구 덤벼친다 누런 고양이는 주눅들어있다 갈색 고양이는 좌우를 살핀다 닭 한마리 커다란 고양이로 변한 닭 한마리 볏이 빨개 야옹 한다 튀해 고아먹을… ㅋㅋㅋ ㅎㅎㅎ… ****************************************************************************************************************** 촌평   경이로운 반전 그 여운에 젖어 -김철호시인 근작시 3수를 읽고 심숙 드라마는 반전으로 살아난다. 소설에서도 반전은 매우 중요하다. 시에서는 반전이 필요할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필요하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짧은 서정단시에서 반전이 가능할가? 역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는것이다. 이제 김철호시인의 근작시 3수를 같이 읽으며 서정단시에서 반전의 매력에 심취되여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시에서 반전은 사유의 비약이라고들 말한다. 폭포가 쏟아지는 장면을 은하수가 쏟아진다고 과장적으로 표현하는것 역시 이 사유의 비약에 다름아니다. 시 “바다”에서 시인은 바다를 푸른 잔디가 깔린 매립장으로 보고있다. 온갖 오물, 쓰레기들 절대대부분을 바다에 처넣는 인간들의 말세적행위를 고발하고있는것이다. 그 푸른 아우성속에서 새의 몸부림은 처절하면서도 비장하다. 그리고 그 새는 수많은 칼들에 난도질을 당하며 깃털을 수없이 날리고있다. 정의의 화신이라고 해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새는 반대세력의 포위속에서도 퍼덕임을 계속한다. 비장하다못해 장엄하다. 여기까지 보면 이 시는 인간에 의해 오염되여가는 바다 및 자연생태를 지켜주자는 호소로 볼수 있겠다. 그러나 시인은 거침없는 사유의 비약으로 통념을 시원히 깨는 반전을 보여준다. “저 푸른 천을 장대에 매달면 푸른 기발이 될것이다/ 누가 저 기발을 들고 달리려는가” 푸른 바다를 푸른 천으로 보고 그것을 장대에 달아서 푸른 기발을 휘두르며 미래에로 달려간다는 이 시구는 독자들의 상상을 뛰여넘는 반전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있다. 이제껏 시인들이 온갖 사물들을 라렬하는식으로 쓴 시들은 결코 한두수에 그치지 않는다. 시 “우리들의 리력서” 역시 비금한 범주에 속하는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자체의 반전매력으로 다른 여타의 시들과 차별된다. 별, 별찌, 먼지, 물, 강, 바다, 태양, 돼지, 풀 등등등등 수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이 시는 자칫 장난처럼 보여질지도 모르지만 “사람”이라는 이미지에서 반전이 생긴다. 자연생태속의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 박혀있는 사람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또 유별난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연계를 좋게도 나쁘게도 변하게 만들수 있는 변수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리력서”는 결국 자연의 한 존재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넌짓한 어드바이스라 할수 있겠다. 자연속에 자연스레 박혀있을 때는 인간도 자연이지만 주변 자연을 깎고 떼고 뭉개고 파괴할 때는 반자연적인 존재인것이 바로 인간인것이다. 시 “페허를 향하여”에서는 흰, 검은, 얼룩, 누런, 갈색 등 색색의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밝은 눈의 이 고양이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있지만 쥐를 잡아야 하는 고양이들이 닭을 노리고있는것이 이 시의 반전이라 할수 있겠다. “닭 한마리/ 커다란 고양이로 변한 닭 한마리/ 볏이 빨개 야옹 한다/ 튀해 고아먹을…// ㅋㅋㅋ/ ㅎㅎㅎ…” 아이러니하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고, 개가 집을 지키지 않고, 양이 풀을 뜯지 않고, 소가 일을 하지 않고, 당나귀가 석마를 찧지 않는 등 이런 현상들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지속됨에 따라 세상은 페허를 향하게 되고 우리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그런 변이된 세상을 떠안을수 밖에 없는것이다. 이 역시 우리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인과보응이라 할수 있다. 모두어보면 김철호시인은 근작시에서 거침없는 반전으로 생태를 파괴하고 자연을 짓밟는 인간들을 고발하고있으며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면서 보다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어가자는 호소를 담고있다. 중국조선족시단에 한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생태시를 다시 화두로 떠올려준 김시인의 시적행보를 다같이 지켜볼 일이다.   흑룡강신문 2015년 11월 20일 제2면  
비평/허인   사상과 령혼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리고 점점 무르익어가는 김철호주의   시가 아프다. 우리 시대의 시가 이래저래 여러모로 너무나도 아프다. 그런데 이러한 병페적인 시들의 치유를 목적으로 근근히 짧디짧은 몇년사이 파격적인 화려한 변신을 륙속 꿈꿔왔고 또한 근래에 보기 드문 성과를 이룩한 시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철호시인님이시다. 또한 김철호시인만큼 적극적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해왔고 또한 그 거창한 행로에 걸맞게 주렁주렁한 성과를 이룩한 시인은 극히 드문줄로 안다. 시에서의 화려한 변신이나 파격적인 변화를 두고서 평론가들은 한단계 더 높여 흔히 도약, 혹은 비약이 크다거나 의경(意境)이 새롭다고 표현한다. 필자가 보건대 시의 핵심은 이제 더는 조촐한 이미지와 이미지즘의 강박적인 조합, 구조주의적인 서두, 발전, 내용, 결과 등 그 따분한 의경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폭넓게 령혼과 사상, 더 나아가서는 확고한 리념과 개인주의(主義)적인 품격과 풍격, 관용과 포용에 있는듯 하다. 시체에 아무리 좋은 수의를 입혀봐야 결국 시체이듯이 시에서의 시인의 언행은 곧바로 그 시인의 풍격이 되기도 한다. 겉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사상이 없는 시들은 결국 시체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김철호시인님의 주옥같은 근작시 8수를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 경향의 한 특징   지금까지 우리의 시들은 단일성, 동일성의 원리에만 의존하여 구성되여 왔다. 현재의 시들도 대부분이 그러하다. 이를테면 꽃이면 꽃, 들이면 들, 별이면 별, 즉 대상, 주제, 내용, 정서 등등 모두가 동일성 원리에 의거하여 발상되여 왔었고 효과면에서도 지나치게 단일성을 강조해온것이다. 헌데 여기서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 경향의 한 특징과 불쑥 맞닥뜨리게 되며 킨넬이 말했듯이 “계속해서 깊이깊이 파고들어가노라면 너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하나의 동물일것이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더욱 깊이있게 파고 들어가노라면 너는 아예 풀잎이거나 한그루의 나무일수도 있을것이다…”와 같이 심상(心相)시에서의 의식과 무의식을 훌쩍 뛰여넘어 너무나도 자연스레 자연과 결부시켜 새롭게 령혼과 사상을 탄생시키려 하는 하나의 개인주의 표현방식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렇다고 인간적인것을 굳이 무너뜨리려는것이 아니다. “해시계의 음특한 그림자가/몸을 뻗어 담장에 기여오른다”에서 쉽게 살펴볼수 있는것이 곧바로 한점의 오차도 용허치 않는 해시계의 작용이다. 시제가 “고궁”이고 보니 눈앞에 자연스레 펼쳐지는 첫번째 그림이 곧바로 이제는 해 질 무렵 높다란 담장을 슬금슬금 기여오르려고 아득바득 몸부림치는, 아직은 가물가물한 어느 조그마한 그늘의 작은 모습이다. 그 그늘이 있었기에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고궁의 모습은 더욱 고색찬연한것이 아닐가싶다. 다음 “굵고 주름 깊은 고목이 나이테에 묶여 숨을 헐떡인다”에서 어느사이 “담장”에서 “고목”으로 모습이 뒤바뀐 고궁의 모습은 이제 아름찬 나이테에 저절로 숨이 차 헐떡이기도 한다. 허나 그 모습은 비참한 결과가 아니라 어딘가 긍지에 찬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듯 거창하고 주렁진 성과들은 어디에서 오게 됐을가? “개미떼들이 백두봉을 지고왔다/개미떼들이 고비사막 날라왔다”에서와 “붉은 물결/붉은 구호”에서 눈여겨 살펴볼수 있다싶이 이 세상 한낱 미물인 개미떼들마저 어기영차 어김없이 이곳으로 지고온 그 백두봉과 고비사막에서 현란하게 눈이 부신 력사의 한 장면을 백문의 불여일견이라고 피부로 직접 부딪치고 엿볼수 있도록 시인은 배려심으로 설정해놓은듯 싶다. 이러한 배려심이  있었기에 “발자국에 고인 붉은 구토물의 납함/천년을 살아 피를 먹은 거인”에서 발자국에 고인 력사는 구토물마저 결국 붉은색일수밖에 없으며 또한 아우성도 아닌 이 세상의 납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더욱 뚜렷하게 상징시킨듯싶다. 그렇게 오랜 세월 밝고 조금 어눌한 그늘속에서 싱싱한 피를 꿀꺽꿀꺽 삼켜가며 배불리 먹고 천년을 살아온 “거인”이였기에 “쿵쿵쿵/쿵쿵쿵/걷는다//광장엔 황금의 금자탑이 있다//걷는다/쿵쿵쿵/쿵쿵쿵/만년후에도 살질 거인”이며, 또한 여기에서는 다선을 목적으로 단순한 한두개의 이미지나 이미지즘의 라렬이 아니라 특정된 한 사물에 공간과 시공(時空)을 아예 훌쩍 뛰여넘으려는 풍격, 품격, 인격, 그리고 사상, 력사, 언행, 령혼을 시인이 재치있는 솜씨로 아낌없이 투영시켜놓은듯싶다. 이 시는 사상과 령혼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리고 점차 무르익어가는 김철호주의가 뚜렷이 한눈에 잘 엿보여 마치 한편의 방대한 시리즈를 읽는듯하여 저도 몰래 감탄을 련발하게 된다. 포스트모던시 가운데서 가장 많은 론의가 이루어졌던것이 곧바로 고백시이다. 뢰트기, 로월, 프라스, 섹스톤, 베리만 등이 모더니즘의 전통을 무너뜨렸던것은 브레슬린이 지적한대로 “예술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의 상징적, 신화적, 추상적인 질서들을 추구하는 미학을 버려야 했기때문이다.” 김철호시인의 시는 자기 패러디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라는 점에서 상징주의 시와는 확연히 중요한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 아래에서 감성과 리성, 의식과 무의식중의 발로에서 김철호시인은 어느 곳에 더욱 비중을 두었는지 우리 다 함께 “바다”, “설(雪)”, “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들의 공통점은 시인 자체의 적극적인 참여의식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더욱 세심한 관찰을 통하여 조준이 된 랭철한 사유 끝에 명중이 된 가장 인간적인 즉 인격적인 근로한 사상을 부여시켜 그 공명감이 더욱 큰듯싶다. “바다”의 경우 “일몰은 죽음이 아니다/서서히 오는 탄생은 어둠/새로운 생명이 숨어있다”에서 시인은 어쩌면 예언에 가까운 미래 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인간의 지혜로운 자세로 포용의 자세를 멋진 모습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설”의 경우 “은혜같았던 초설(初雪) /뼈다귀가 생기고/살이 붙고/피가 돌고/하더니”에서도 슬그머니 인격화를 완성시켜 놓았으며 “일기”의 경우 “한자깊이의 땅속에서/녹쓴 철갑모들이/해볕 보기 싫다면서/삽질을 멈추라고 눈짓한다”로 인간 대 인간, 인격 대 인격이라는 사상으로 소통을 시도하려고 하는 지혜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 시들은 한수한수가 모두 걸작이며 또한 이 세상 그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한점의 부끄럼없는 훌륭한 우수작품이 틀림없다.   삶 자체에 대한 우울한 반항과 기술복제적 인간에 대한 자각   이번에 발표된 김철호시인의 대부분 시들은 시에서의 새로운 문법을 라침판처럼 뚜렷하게 보여주는듯싶다. 여기서 필자는 간단히 문법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히 문법의 범주로만 끝나는것이 아니다. 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찬연한 그 세계,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전통적인 시문법을 사정없이 파괴함으로써 시인이 노리는것은 과연 무엇일가? 시인은 시의 화자의 피줄에 와닿는 초감각적인 리성적인 세계에 의식과 무의식으로 피와 살, 령혼을 불어넣고 지혜롭게 노래하고있는듯싶다. 그러한 시니피앙들은 읽는이들 마음속의 커다란 흔들림과 함께, 어쩌면 뼈속까지 오싹오싹해날 정도의 크나큰 공명감과 함께 공감속의 그 짜릿짜릿한 전률들을 독자들에게 핫이슈로 선물하고있는듯싶다. 시니피앙이란 무엇인가? 소쉬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언어기호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즉 흔히 말하는 소리심상이나 기표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개념, 혹은 기의)는 마치 동전의 앞뒤 관계처럼 짝을 이루면서 존재하는것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시인의 사상의식은 항상 미래지향적이였으며 드레시(漂亮, 幽雅)한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들을 창출, 랜덤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부묘사에서 드라이브코스(自駕游線路)를 스스로 구축해왔다. 더우기 새로운 언어조합속에서의 자률은 지극히 러브시(示好)한 이률배반속에서도 걸작(杰作)과 함께 항상 개혁이 동일시되여 왔었다는것을 누구나 쉬베 알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미래지향적인 행보는 오늘도 조심스러울수밖에 없으며 또한 과감한 개혁의 리론과 그 기능을 불러오는 중요한 단서가 곧바로 시인의 더없이 정확한 의사전달로서 맨트(話語, 臺詞)가 필요없는 기획적인 자아도전과 저돌적인 돌파, 즉 새로운 시어창출과 함께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모로 독자들앞에서 검증받아야 하는 그런 데스트가 아닐가. 어쩌면 련작시의 서두이고 시작일지도 모르는 “설레임 1, 2”를 읽고나면 하이퍼시의 방향인 현실과 초월을 불쑥 머리속에 떠올리게 되며 데리다의 해체개념 가운데서 “모든 언어기호는 공간적대립과 시간적지연이라는 특성을 나타내기때문에 결국 현존이 아니라 흔적으로만 인식된다”는 그 말이 떠오른다. “설레임 1”의 “18층 빌딩에서/커다란 새 한마리가 뛰여내린다/콩크리트바닥과 만나 춤추는 피아노파편들” 중에서 “새”와 “피아노파편들”은 언어기호학적인 척도에서 살펴보면 마음의 흔적들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18층 빌딩”이라는 특정된 장소와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인격화를 완성하여 “명예란 공중루각이라고 소리친다”로 그 사상을 납함할수 있었던것 같다. 다음 “자판기우에서 혈흔들이 날뛴다/불바람이 어슬렁거린다/스마트폰이 사람들 얼굴을/뭉청뭉청 뜯어먹는다/머리 없는 그림자들이 활처럼 휘여졌다”에서 볼수 있는것은 그 어떤 외계인이나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곧바로 과거와 현실을 외계인이나 괴물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실제 모습들이며 결국 삶의 울타리는 너무 좁아 “검은 새, 흰새들이 서로를 찾아 부르짖고”로 부딪치고 부대끼며 가끔 아우성치더라도 흩어지면 죽고 모여야만 살수 있음을 설파한듯 하다. “설레임 2” 역시 같은 도리로 “찢어진 기와”를 “물구나무 선 미소”로 인격화하면서 진보적인 사상, 즉 “만족한 빛/도망친 숨…”으로부터 민족적인 색채가 다분한 “백두의 큰 잔으로/동해물 푹 떠 음부(音符)에 뿌렸다”를 견인해내였으며 “먼지 낀 먼지가 빛속으로 사라지다/우주를 삼킨 우주가 점속으로 들어가다”로 세상사는 새옹지마와 같은것이며 우주마저도 작다면 결국 한개 점에 불과한것이다는 시인의 높은 경지를 종교도 철학도 아닌 사상과 령혼으로 지혜롭게 드러낸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정석으로, 또한 기초로 하여 단단히 밟고 더욱 높이 올라서려고 하는 기획적인 발전이지 결코 지극히 이률배반적이지는 않다는것이다. 그럼 우리 함께 김철호시인은 링크와 내트워크구축으로 어떻게 이미지즘을 완성해 가고있는가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뇌출혈 1”의 경우 “기적소리 들린다”는 환각장애인들의 병적인 심호흡을 간결함의 극치, 즉 기적소리로 표현하여 그 묘미를 더해주고있으며 “환승/탈선한 렬차/시골에서 불던 바람 도시로 왔다”로 더이상 안전지대가 없음을 하이브리드로 집결시킨듯 하다. “눈빛이 깊다/투명한 사유는 더 려과될것 없다”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삶의 우수(優愁)이다. “뇌출현 2” 역시 기적소리가 한수의 시로 바뀌였을뿐 의식과 무의식만이 아닌 감각, 초감각적으로 령혼이 부르는대로 따라 읽노라면 리해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을줄로 알고있다. 한수의 시로부터 시작하여 바람, 바다, 암수, 콩크리트, 피아노, 할망구, “흰머리카락들이 강선이 되여/땡땡 소리친다/음악이 나봐라 얼굴 내밀었다가/너 죽는다 주먹질이다”, “석간신문이 벽돌장이 되여/웃는 얼굴에 가 박힌다” 등은 기막힌 표현들이며 결구에서 “독자는 한명도 없다” 역시 시제 뇌출혈과 미묘한 입맞춤을 하면서 싱싱한 사람이라면 마주서기가 아연해지도록 머쓱하게 하였다. 시행은 박자와 강약의 음절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숨결로 이루어진다. 즉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가 구분이 없는 세계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무리하면서   이상으로 살펴본 김철호시인의 근작시 8수에서는 포스트모더니스트다운 시인의 더욱 적극적이고 더욱 화고해진 창작자세와 점점 맑은 령혼속에서 사상으로 무르익어가는 시인의 새로운 풍격, 품격, 그리고 아주 깔끔하게 새롭게 완성이 된 김철호주의의 피와 살, 얼과 넋이 하아얀 뼈짬으로 시퍼런 소금처럼 뚜렷이 보여줘 읽는이들로 하여금 더욱 감탄을 련발켜 하는듯싶다. 포스트모도니즘은 모더니즘을 부정하는것도 그렇다고 계승하는것도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한다는 모순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끝으로 김철호시인은 새로운 한해 더욱 큰 정진이 있으시길 기대해본다.   《도라지》2015년 제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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