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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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동시]할아버지의 시간(이타쿠라 사치코) 댓글:  조회:1815  추천:0  2014-10-15
동시 할아버지의 시간 이타쿠라 사치코[일본] 우리 할아버지는 아흔두 살 요즘 들어 잘 걷지를 못해요 대개 방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어요 지금이 봄인지 가을인지 오늘이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 아침인지 밤인지도 몰라요 “좋은 아침, 나 배고파요” 할아버지 배도 밥 먹은 걸 금방 잊어버리나 봐요 “방금 저녁 드셨잖아요” 엄마한테 야단맞아요 “사탕 먹어요” 내가 입에 넣어 주면 코끼리처럼 샹냥한 눈을 하고 언제까지나 빨아먹고 있어요 공기까지 느긋해져요 할아버지  시계도 달력도 필요 없죠? 지금이 언제인지 그런 거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은 언제나 지금이니까
649    [동시]딱지(마나카 케이코) 댓글:  조회:1570  추천:1  2014-10-15
동시 딱지 마나카 케이코[일본] 아빠의 긁힌 상처 빨리 딱지가 앉았으면 좋겠어 오늘  약간 노랗게 변했어 내일은 까매져서 점점 두툼해져서 전병 과자처럼 딱딱해져서 파삭 하고 기분 좋게 떨어질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릴 거야 그러니까 부탁할게요 내가 딱지를 벗기게 해 주세요
648    [동시]둥근 돌(사토 준코) 댓글:  조회:1647  추천:0  2014-10-15
동시 둥근 돌 사토 준코[일본] “아빠의 전근으로 이사 가게 됐다”고 카즈 군이 작별을 하러 왔다 갑작스런 일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즈 군은 호주머니에서 종이로 꼭꼭 싼 무언가를  나의 손에 건네주고 가 버렸다 “잘 지내”라고 말했는데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린 카즈 군 손바닥에 남기고 간 카즈 군을 들여다보았다 작고 둥근 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647    [동시]한가운데?(호사카 도시코) 댓글:  조회:1252  추천:0  2014-10-15
동시 한가운데? 호사카 도시코[일본] 서커스 서커스 피에로가 공 위에 서면 빙글빙글 공이 돕니다 ㅡ공의 한가운데 찾아보렴 피에로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ㅡ한가운데에 다리를 올려 보렴 생긋 가르쳐 주었습니다 공의 한가운데 어디입니까? 어디를 가리켜도 한가운데라서 한가운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ㅡ내가 서는 곳이 한가운데로 어디에 서도 마찬가지 서기만 하면 어디든지 한가운데지
646    [동시]풀(하타치 요시코) 댓글:  조회:1432  추천:0  2014-10-15
동시 풀 하타치 요시코[일본] 풀의 등을 보았다 바람에  격렬하게 흔들려 쓰러져도 쓰러져도 일어서려고 하는 풀의 등을 보았다 장마 후의 눈부신 여름 하늘의 날에
645    제85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2 댓글:  조회:2278  추천:1  2014-10-09
  156사 남창보위임무 완수 족친부락무장 해제 422퇀 장강 뛰여넘어 중경해방전투서 용맹을 강서땅에서 1949년 6월하순, 강서일대는 장마비로 뒤덮였다. 강서성의 여섯갈래 큰강이 몰려드는 파양호의 수위는 3메터나 껑충 높아졌다. 호수주변의 수많은 촌락들과 논밭이 큰물에 잠겼고 교통이 단절되였다. 이런 기회를 리용하여 각지의 토비들은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 강서성의 경비사로 남아 도시질서를 유지하고 공업생산을 회복시키는 일에 바삐 돌아치고있는 156사는 미처 농촌을 돌보지 못하고있었다. 하여 강남의 특징인 족친부락무장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 무장은 말이 족친부락무장이지 실지는 지주들의 무장으로 지주들의 리익을 보호하고있었다. 그런데 몇십년간 계속되여내려오는 족친부락간의 싸움은 그 뿌리가 깊어 빈곤한 농민들은 족친부락무장을 자신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담보로 알고있었다. 156사가 경비부대로 남창시에 들어간 것은 6월 2일이였다. 급선무는 발전소, 식량창고, 수도국과 기타 설비와 물자들이 특무와 패잔병들의 파괴를 받지 않도록 보위하며 공장들에서 생산을 회복하도록 동원조직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등 사업을 전개하는것이였다. 하지만 농촌의 형세가 긴장하게 되자 부득불 경비사의 대부분이 농촌으로 파견되지 않을수 없었다. 156사는 남창시에서 약 100킬로메터 떨어져 주위에 빙 둘러있는 정안, 여간, 청강, 무주 등 지역들에 네 개의 조선족영을 파견하였다. 후에는 또 466퇀, 467퇀 퇀부와 그 직속부대들까지 진출시키다보니 조선족 지휘원과 전투원들이 약 3000명이나 농촌을 완전히 해방하는 간고한 사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3영은 남창시에서 동남으로 약 100킬로메터 떨어져잇는 진현, 여간 두 현을 포함한 파양호남단과 륙지가 잇닿아있는 농촌으로 가게 되었다. 농촌에 내려온 3영은 전투대의 임무와의 선전대와 공작대의 임무까지 맡아야 했다. 그런데 가장 큰 애로는 언어문제였다. 북방한어를 대충 아는 조선족장병들은 남방사투리가 심한 이곳에서 거의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식사도 큰 문제거리였다. 주식은 입쌀과 밀가루였는데 부식물은 물고기와 고구마뿐이였다. 매일 물고기를 먹자니 습관에 맞지 않았고 화식비도 초과되였다. 이런 특수정황을 분석하고 해결대책을 연구하였다. 우선 각 련을 애민공작대, 부업대, 전투대로 나누었다. 한어수준이 좀 높거나 문화수준이 높은 약 60%의 인원을 애민공작대로 무었다. 이들의 임무는 빈곤한 농민들의 농사일과 살림일을 방조하면서 그들의 지방사투리를 배워내는것이였다. 그 과정에서 군중과 밀접한 관계가 맺어지면 앞으로 진행할 선전대, 공작대의 사업에 효과가 클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약 10%의 인원으로 조직된 부업대에서는 물고기잡이, 석재캐기 부업을 하여 화식비초과문제를 해결하였다. 나머지 인원들로 전투대를 무어 담당구역에서 야간감시보초와 주간이동보초를 서면서 부락무장이 외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전사들이 농사일을 비롯한 모든 일을 방조해주면서도 밥 한끼 먹지 않고 엄격히 군중규률을 준수하자 한달도 못되여 농민들은 마음의 탕개를 풀어주었다. 언어도 차츰 익숙해져 군중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농민들은 주동적으로 지주, 부농들의 동태를 보고하기도 했다. 부락의 빈곤한 농민들이 발동되자 부대에서는 인차 농회와 부녀회를 조직하고 기층정권을 건립할 준비로서 우선 감조감식을 실시하고 농촌의 계급을 획분하였다. 이렇게 되니 은페되여있던 계급모순이 포면화되면서 족친부락지간의 모순은 완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족장병들의 끈질긴 노력과 뜨거운 애정에 감화된 군중들은 감추어두고있는 족친무장을 적발하기 시작했다. 하여 족친무장은 해제하게 되었고 토비들도 꼬리를 감추게 되었으며 족친지간의 장벽도 차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강서지방은 드디여 우리 조선족장병들에 의해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되었다. “멀지 않은 10월 1일에 새 중국이 창건되게 된다!” 이 소식은 156사 장병들에게 환희를 불러왔다. 9련의 영웅모범강연대회에서 시를 즐기는 지도원 최학송은 시적인 언어로 개막사를 올리기도 했다. “심심산골 내고향 북간도를 떠나 넓고넓은 료서평원을 지나 천하 제일강산 만리장성을 넘어 40일간 광활한 대지를 씩씩하게 전진하였노라. 노호하는 장강을 건너 승승장구하여 우리 군대의 창건지인 이곳 남창에 조선족의 젊은이들이 찾아왔노라. 씩씩하게 발맞추어 이땅의 한식솔로 태연히 나타났더라. 이제 곧 새 중국이 탄생된다. 이것은 우리 조선족용사들의 오랜 념원이였노라. 우리 모두 새 중국의 탄생을 환호하자. 우리 모두 새 중국을 끝까지 지키기로 맹세하자!” 1949년 10월 1일, 남창시방송국은 거리에 확성기를 가설해놓고 남창시군정위원회, 정부, 각계, 각층에서는 “8.1”봉기를 일으켰던 광장(지금의 8.1광장)에 식장을 가설하고 새중국탄생기념활동을 하였다. 156사에서도 대표들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나머지 대부분 전사들은 대회장을 보위하기 위해 남창시의 주요거리와 강가를 경비하였다. 확성기에서 “동방홍”노래소리가 오래동안 울렸다. 뒤이어 새 중국 국가로 된 “의용군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렸다. 음악이 끝나자 모택동주석이 우렁찬 목소리로 “중국인민은 일떠섰다!”라고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장엄하게 선고하였다. 확성기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나올 때 남창의 거리거리와 강가에서 경비를 서고있던 조선족전사들도, 남창광장에서 경축대회에 참가한 조선족전사들도 모두 가슴이 희열로 벅차올랐다. 환승환은 남창봉기광장상공에서 휘날리는 오성붉은기를 바라보면서 호매롭게 말했다. “저 오성붉은기에는 우리 조선족전사들의 피도 슴배여있소! 우리 156사 조선족용사들의 피도 섞여있소!” 중경해방전투 절대다수가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 141사 422퇀(원 연변의 길동1퇀의 후신)은 1949년 7월 20일에 장강도하작전에 참가하여 장강천험을 뛰여넘은후 호남성 부정현일대에서 국민당패잔병들을 숙청하고 사천쪽으로 진격하여 나갔다. 그러나 8월에 잡아들자 열대지방의 기후에 적응되지 않아 90%의 전사들이 학질과 리질로 앓아누었다. 지어 생명을 잃은 전사들마저 생겼다. 하지만 고추와 마늘을 즐겨먹는 관계로 조선족전사들은 저항력이 강했다. 병에 걸리지 않은 “행운아”들은 앞뒤로 뛰여다니면서 량식을 구해다가 죽을 쑤어주면서 환자들을 간호하였으며 하루에 몇 번씩 보초를 서군 하였다. 당지 백성들의 말에 의하면 항일전쟁시기 왜놈들은 의창을 강점한 뒤 학질과 리질에 걸려 무리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들로 다수를 이룬 422퇀 전사들은 둬달 병마와 싸운후 거뜬히 일어섰다. 이들은 11월 7일부터 12월 2일까지 근 한달동안에 련속작전을 하여 백계장, 아봉관 전투에 참가하여 적군 63명을 살상하고 3913명을 포로하였으며 말 17필, 척탄통 13정, 60미리포 18문, 박격포 3문을 로획했다. 422퇀은 영순지구에 들어간후 제2야전군 제3병퇀 제139사와 협동작전하여 국민당의 마지작 소굴인 중경을 해방하는 간고한 전투를 벌리였다. 422퇀은 상, 악, 천 전역에서 처음부터 국민당 제15군 군장 송희렴의 부대를 추격하면서 험산준령을 넘었다. 비를 무릅쓰고 조두채에서 출발한 422퇀은 하루 낮과 밤을 험악한 산길을 톺게 되었다. 오르내리는 거리가 35킬로메터되는 백운산의 좁고 가파로운 길을 넘기란 여간 조련치 않았다. 경사가 17도나 되는 산길에 비까지 줄창 내리여 미끄럽기가 그지 없었다. 낮에는 지팽이를 짚고 밤에는 홰불을 들고 무인지경을 줄여나가야 했다.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등에 멘 짐이 비에 젖어 점점 무거워나고 짚신은 이미 닳아 떨어져 어떤 전사들은 언녕 맨발로 걷고있었다. 어떤 전사들은 걸을 수 없으니 아예 엎드려 기였다. 그러다보니 5킬로메터가량 되는 루인파의 내리막길을 4시간이나 걸었다. 행군도중 몇몇 전사들이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져 희생되기도 했다. 험한 산을 넘고나니 이번엔 강을 건널 일이 큰 문제였다. 세수하를 건널 때였다. 골물사태에 다리가 밀려가서 세수하를 건너려면 다리를 놓아야 했다. 그런데 갖은 고생을 다해 다리를 놓았으나 번마다 기세사나운 물에 밀려가군 하였다. 마지막에 림시다리를 가설하고 쪽배도 몇척 얻어왔다. 부대는 림시다리와 배를 리용하여 한번에 몇사람씩 강을 건너야 했는데 전 사가 세수하를 건너는데 이틀밤 이틀낮이나 걸렸다. 이렇게 갖은 애로를 전승하면서 38갈래나 되는 세수하를 건넜다. 부대는 팽주로부터 백마에 이르러 적과 싸운후 중취쪽으로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중취에서 국민당 15군 제64사 제191퇀과 치렬한 싸움을 벌려 일부 적들을 소멸하였다. 그런데 중경을 해방하는 길을 열려면 반드시 중취를 점령해야 했다. 11월 21일 오후 4시, 제3영 부영장 정용은 앞장에 서서 지휘하면서 비발치는 적탄을 뚫고 돌격하여 재빨리 중취를 점령하였다. 중취를 앗긴 적들은 중취서산으로 기여올라가 3영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영부에서는 서산의 적 화점을 까부시라는 나팔신호를 울렸다. 정용부영장은 계속 9련을 지휘하여 적화점을 향해 번개같이 돌격해올라갔다. 몇몇 전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정용부영장은 기포련에 신호를 보내 모든 60미리포, 박격포, 기관총으로 적 화점을 사격하라고 알렸다. 돌격나팔소리가 창공에 울려퍼지고 집중사격이 시작되였다. 9련전사들은 정용의 지휘하에 맹호같이 돌격해나가면서 적을 무찔렀다. 3시간 남짓이 진행된 전투에서 아군은 적 200여명을 살상하고 200여명을 포로했다. 그러나 조선의용군출신인 정용부영장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422퇀은 무사히 오강을 건너 계속 전진하였다. 그들은 우로구에 쳐들어가 적 일부를 포로하고 적정을 탐지하여 적들이 열래장에 주둔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75킬로메터를 강행군하여 열래장을 불의에 기습하였다. 제1영 제2련에서는 감쪽같이 적 보초병을 요정내고 병영속에 뛰여들어 총 한방 쏘지 않고 달콤한 꿈나라에서 헤매이던 적 신편 제1군 제2사 부사장 이하 1000여명을 포로하였다. 422퇀은 계속 행군하여 중경에 도착한후 형제부대와 함께 중경시가지를 해방하는 전투에 뛰여들었다. 10여일간의 치렬한 시가전에서 422퇀의 조선족장병들은 무비의 용감성으로 영용히 싸워 11월 30일, 끝내 중경을 해방하였다. 중경해방전투에서 422퇀은 국민당군 7483명을 살상, 포로하였는데 그중 퇀급이상 군관이 19명이나 되었다.  
644    제84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1 댓글:  조회:2493  추천:0  2014-09-22
연변의 건아들 호성하 피로 물들이며 배다리 놓고 단풍전투 지혜롭게 벌려 장강도하작전 서막 열어 "다리부설영웅 6련" 동북해방전쟁이 끝난후 조선족장병들은 제4야전군으로 재편성된 동북의 각 부대를 따라 산해관을 넘어 화북으로 진군, 평진전역에 참가하여 당고전투와 천진시가전에서 용맹을 펼쳤다. 당시 천진에는 국민당군대 13만명이 견고한 방어시설을 가지고 웅거해있었다. 천진을 해방하는 것은 곧 국민당의 숨통을 끊고 북평을 고립무원한 처지에 빠뜨리는것이였으며 전 화북을 해방하는 관건적인 고리였다. 1949년 1월 1일, 산해관의 한 회족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즐겁게 설을 쇠고있던 제4야전군 특종부대 공병퇀 2영 6련 전사들은 평진전역에 참가하라는 긴급명령을 받았다. 공병 6련은 치치할공병학교를 졸업한 제3기 졸업생들로 무어진 련인데 련장 왕충발과 1패 패장, 사무장 등 3명을 제외한 138명이 모두 조선족열혈청년들로 무어진 부대였다. 이들은 1947년 7월 연변지구의 중학교학생들가운데서 모집되여 1년간의 학습과 실습을 거쳐 다리부설, 嬖? 지뢰해제, 갱도수축 등 기술을 장악하였고 이미 료심전역에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쌓기도 했었다. 6련의 임무는 천진시 동북쪽 소서영문앞 넓고 깊은 해자 호성하에 다리를 놓아 38군의 포와 전차가 안전하게 건너도록 담보하는것이였다. 6련은 밤에 다리를 놓을 철선을 리가분까지 운반해놓고 명령을 기다렸다. 1월 4일 오전 9시, 아군의 수백문의 포가 천진시에 구축한 적의 방어시설을 포격, 방어선을 산산이 부셔놓았다. 11시, 아군 보병의 총공격이 개시되였다. 명령을 받은 6련 전사들은 호성하게 배다리를 놓는 전투에 돌입했다. 철선을 끝고 앞장에 서서 나가던 2패 패장 송천화가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이밖에 김영도 등 여섯명 전사도 부상을 입었다. 이에 전사들은 철선을 엄페물로 삼아 얼음우로 철선을 밀며 앞으로 전진하였다. 그런데 적의 포격에 얼음이 꺼지는 바람에 얼음을 리용할수 없게 되었다. 지도원 김창룡이 앞장서 가슴치는 물속에 뛰여들자 전사들도 주저없이 물속에 뛰여들었다. 뼈를 에이는듯한 차디찬 물속에서 전사들의 손발이 인차 꽛꽛이 얼어 마비되였다. 라영필패장은 적탄에 손가락 세 개가 뭉텅 끊어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손을 대충 싸매고는 계속하여 전사들과 함께 철선을 한데 무어 배다리를 놓았다. 그들의 손에 이해 끝내 호성하에 배다리가 놓여졌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한줄기라고 하던 호성하가 한줄기인 것이 아니라 두줄기눼?것이다. 그러니 다리 하나를 더 놓아야 했다. 그런데 다리 하나를 놓기 위해 마련한 기재를 이미 다 써버렸다. 어떻게 할것인가? 지도원 김창룡은 과단성있게 부련장 윤성기에게 38군 공병영과 련계하여 다리 놓을 기자재들을 가져오도록 하는 한편 호성하를 건너 적의 손에서 기자재를 빼앗아올 것을 3패 패장 라영필에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적또치까에서 퍼붓는 미친듯한 기관총사격에 돌격하던 전사들은 음페물에 의거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전사 김운송이 희생되였다. 이에 지도원 김창룡은 엄호사격으로 적의 화력을 압도하여 전사들의 전진로를 열어주었다. 부패장 황충경이 인솔하는 돌격조가 번개같이 적또치까에 접근하여 적화구에 수류탄묶음을 던져넣었다. “꽝!”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또치까가 산산이 부셔졌다. 이 기회에 돌격해들어간 전사들은 철근과 목재를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두 번째 호성하에도 7메터 길이의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김창룡지도원이 신호탄 세발을 쏘아 다리부설이 성공되였다고 군부에 알리였다. 그러자 중무기들을 실은 아군의 자동차와 전차들이 기세드높이 다리를 건너 천진시내로 진입하였다. 6련 전사들은 목숨바쳐 놓은 다리우로 지나가는 기계화부대를 보면서 “만세!”, “만세!”하고 격동되여 웨치고 또 웨쳤다. 15일 오후 4시, 천진시는 해방군에 의해 끝내 해방되였다. 하지만 6련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다른 공병부대와 함께 국민당군이 사방에 매설해놓은 지뢰를 해제하는 전투에 뛰여들어야 했던 것이다. 6련은 반을 단위로 지뢰를 제거하는 경쟁을 벌리였다. 제1반에서는 시간당 170개의 지뢰를 제거하여 최고기록을 따냈다. 6련은 형제부대 전사들과 함께 한달동안의 간고한 싸움 끝에 천진시교에 매설해놓은 40여만개나 되는 지뢰를 죄다 해제해버렸다. 지뢰해제전투에서 6련은 조선족전사 김사련 등 3명이 희생되였다. 2월, 사령부에서는 표창대회를 열고 6련에 “다리부설영웅련”이라는 축기를, 2패 5반에는 “기률을 잘 지키는 반”이라는 축기를 수여하였다. 이외에 전 련이 집체대공을 세웠고 지도원 김창룡을 비롯하여 송천화, 라영필, 김영도 등 18명에게 대공을, 23명에게 소공을 기입해주었다. 장강도하작전에서 1949년 4월, 제4야전군의 조선족장병들은 다시 부대를 따라 중남의 6개 성을 해방할 임무를 맡고 남진의 길에 올랐다. 조선족장병들은 간고한 행군에서 애민모범, 규률준수의 모범으로 되었고 수많은 련과  영이 모범 련, 영으로 되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병퇀은 70일간의 행군을 거쳐 5월 7일, 장강이북에 도착했다. 장강첨험을 뛰여넘어 전국을 해방하는 전투에서 많은 조선족장병들의 서막인 단풍진전투에서 연변의 원 길동부대에 속했있던 제156사 466퇀은 주력부대의 순조로운 도하작전을 위해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단풍진은 무한에서 약 50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위치해있는데 제4야전군이 장강을 강행도할 지점의 하나였다. 단풍진에는 국민당군 백승희의 126군 304사 912퇀 제3영과 황안보안퇀 일부분이 주둔하고 있다. 남하선봉 15병퇀은 백숭희부대에 장강방어선을 강화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야전군주력이 장강이북에 집결되기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즉시 단풍-무혈간의 약 100킬로메터 전선에서 강행도하작전을 벌리였다. 이에 앞서 4월 28일, 백숭희는 장강방어선을 강화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열고 장강북안에 배치했던 26군을 장강남안으로 철거시키고 강북에 8개 영만 남겨두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장강이북에 남아있는 적들은 아군의 도하작전의와 동정을 정찰하는 한편 북안의 배들을 랍치하여 남안에 끌어감으로써 아군의 도하작전을 파탄시키려 시도하였다. 43군 사령부에서는 15병퇀 사령부의 통일적인 도하작전방안에 따라 단풍진에서의 강행도하임무를 156사에 맡기였다. 이제 156사는 단풍진의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불의의 공격을 들이대 적들의 통제하에 있는 배를 몽땅 빼앗은후 그 배를 타고 장강을 도하하여 돌파구를개척해야 했으며 제2제대의 퇀들로 돌파력량을 확대하여 적들의 반격을 물리침으로써 무한을 포위공격할 후속부대들의 도하를 보장해야 했다. 주공임무가 466퇀 3영에 떨어졌다. 적의 방선은 일직선으로 된 장강을 등지고 북을 향해 반원형으로 포진되고있었다. 아군은 동쪽거점을 1호목표, 북쪽거점을 2호목표, 서쪽거점을 3호목표, 선박이 집중되여있는 부두를 4호목표라 략칭했다. 3영은 퇀의 경위련까지 배속받아 5개 련의 병력으로 1,2,4호 목표를 공격하며 1영은 3영과 협동하여 3호목표를 공격하기로 했다. 2영은 퇀의 예비대로 배치되였다. 5월 13일 저녁 19시 정각, 여느때 같으면 잠자리를 찾을 전사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예정된 지점에 재빨리 집합하였다. 156사 각 퇀은 지정된 로선으로 각기 전진했다. 466퇀은 신주-단풍간도로를 따라 단숨에 15~20킬로메터 달려 공격출발점인 반석교에 도착, 때는 정각 22시 30분이였다. 반석교앞 언덕에 설치된 466퇀 지휘부에서 동숭빈퇀장이 전투명령을 내렸다. “단풍전투는 원 계획에 변동이 없다. 극히 은밀히 행동하여 24시간전에 적진부근에 접근한다. 2,3로선 부대들은 1로선에서 나는 총소리를 공격개시신호로 삼는다. 1,4호목표를 공격하는 제1로선 련대들은 적에게 발각되기전까지는 은페하여 적진으로 돌진한다. 그 행동개시시간은 24시 정각이다. 지금 22시 55분이다. 각 영은 곧 전투행동을 개시하라!” 자기들이 나갈 로선에 들어선 1,3영은 즉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음력 16일이여서 달빛에 단풍진륜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3영은 두 개 로선으로 나뉘여 1호와 2호 목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두 개 중기패를 배속받은 9련은 1,4호 목표를 공격하는 돌격련이였고 10련은 그 예비대였다. 한 개 중기패를 배속받은 경위련은 2호목표를 공격하는 돌격련이였고 8련은 그 예비대였다. 23시 20분에 제1로선 선봉패인 1패를 령솔하여 전진하던 9련 부련장 김범도는 전화로 영지휘부의 허락을 받은후 장강북측 전진로선을 버리고 뚝남측 강변으로 전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뚝에 딱 붙어 강변으로 전진하는 것이 더욱 유리했던 것이다. 적진 전면에 접근하여 경중기의 엄호화력을 배치하면서 돌격시간을 기다리고있던 제3로선 방향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1영이 1호목표의 적에게 발각된것이였다. 3영 영장 원성은 곧 9련과 경위련에 돌격개시명령을 내렸다. 수십정의 경, 중 기관총이 1호와 2호 목표에 몰사격을 퍼부었다. 엄호화력에 적들의 화력이 압도된 순간을 리용하여 9련 1패 패장은 1반을 지휘하여 적진의 장애물을 폭파하고 적의 화점에 달려들었다. 1반 반장 림수현이 제일 앞에서 적의 화점에 수류탄을 던졌다. 이때 좌측으로 접근한 3반 전사 오창근도 1호 화점에 수류탄을 던졌다. 이리하여 1호거점에서 도망치는 일부 적들은 3반에서 추격하고 1반은 1호화점을 점령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2반은 부련장 김범도의 지휘하에 맹호마냥 내달려 부두를 점령했다. 전투가 시작되여 2분만에 1호거점을 돌파하고 8분만에 부두를 점령했다는 김범도부련장의 전화보고를 받은 3영 영장 원성은 예비대인 10련을 전투에 투입시켜 종심으로 공격함으로써 2호, 3호 거점을 측면으로 위협하라고 명령했다. 경위련은 수심이 1메터 넘는 늪을 건너 적의 화점으로부터 10여메터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 2,3패와 중기패의 화력으로 적의 화력을 압제하게 한후 선봉패인 1패로 하여금 적의 화점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해 15분만에 2호방선을 돌파, 2련과 함께 종심으로 돌입하여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1호목표를 공격하는 선봉패인 1패를 엄호하기 위하여 2,3패와 중기패를 지휘하던 9련 련장 차춘모는 복부에 중상을 입고도 계속 지휘를 견지하였다. 련락병 최장근이 달려가 업으려 할때 그는 자기는 관계하지 말고 빨리 부두로 돌격하라는 말만 남기도 눈을 감았다. 련장이 희생되자 지도원 김성희가 2,3패와 중기패를 지휘하여 드센 화력으로 1패를 엄호하였다. 1호거점을 돌파하고 10련이 전투에 투입한후 9련은 곧 부두에 집결하여 선박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시간 남짓한 전투로 단풍작전의 기본임무를 완수하였다. 다만 1영이 공격하던 3호거점의 화점에 몰려든 적들이 계속 대항하고있을뿐이였다. 이 보고를 받은 동승빈퇀장은 산포 1문을 갖고 3영에 와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10여정의 경, 중 기관총의 적의 화점을 봉쇄하고 산포가 직사하자 적들은 환기를 내두르면서 투항을 알려왔다. 싸움이 5월 14일 4시 30분에 결속되였으니 전투는 약 5시간 걸림셈이였다. 이번 작전에서 아군은 적 487명을 소멸하고 경, 중 기관총 18정, 보총 430자루, 선박 69척을 로획했다. 반면 9련 련장 차춘모, 경위련 지도원 박량호 등 9명의 조선족장병을 비롯한 43명 아군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단풍전투에서 로획한 배를 타고 아군은 5월 14일부터 장강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466퇀 2영을 주공대로, 3영을 제2제대로 하여 도하에 성공한후 또 장강남안에서 적의 배 300척을 로획하여 제4야전군 후속부대들의 신속하고 순조로운 도하를 보장하였다. 장강을 건너 466퇀은 형제부대들과 함께 강을 거슬러올라가면서 의창, 의당, 삼두평에서 적 6000여명을 섬멸하였다
643    제83장 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2 댓글:  조회:2400  추천:0  2014-09-13
  로심전역에서 이름을 떨친 인민해방군 제156사 제446퇀 제2영 “김상범련”의 부분적 조선인장병들. 조선인장병들 전투마다 대공세우고 수많은 전투영웅 배출 동북해방전투서 3550명 희생  목숨으로 동북의 새날 맞아 "영용완강한 7련" 중국인민해방군 제43군 156사 466퇀 3영 7련은 해방전쟁에서 크고작은 전투에 30여차나 참가하여 수많은 공훈을 세워 “영용완강한 7련”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7련의 전신은 돈화현의 림민호, 차성진 등 조선인청년들이 식칼로 일제패잔병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조직한 유격대였다. 이 유격대는 후에 돈화현 보안퇀 3련으로 편성되였다가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합세, 1945년 5월 길동경비 2려 5퇀 4련으로 되었다. 그해 7월 다시 2려 6퇀 3영 7련으로 편성되였다. 1946년 11월, 7련 소속부대는 신개령을 지키는 한편 견고한 방어시설을 수축하게 되었다. 1947년 10월 25일 7련은 길림시 교외 402고지를 탈취하라는 전투임무를 맡고 출발하였다. 402고지에는 적 한 개 련이 몇 개의 또치까에 둥지를 틀고있으면서 아군이 길림으로 진격하는 요도를 막고있었다. 다른 련에서 몇차례의 진공을 시도했지만 사상자만 냈을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있었다. 전투명령이 떨어지자 1패와 3패의 엄호를 받으면서 2패의 조성학반이 눔깜작할새에 적진앞 50메터되는곳까지 돌격해 들어갔다. “장개석군 형제들, 총을 바쳐라! 해방군은 포로를 너그럽게 대한다! 빨리 투항하라!” 조성학반장의 담찬 웨침소리였다. 그제야 적들은 아군 돌격소조를 발견하고 발악적으로 사격해왔다. 이에 격분한 조성학은 전사들에게 “돌격!”하고 소리치면서 맨 앞장에서 돌진해들어갔다. 적진에 뛰여든 전사들은 시퍼런 날창으로 적들을 마구 찔러 쓰러뜨렸다. 전투소조 6명 전사는 인당 6명의 적을 쓰러눕혔다. 이에 적들은 질겁해 도망치는 놈으로 아우성치는 놈으로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이때 7련이 고지로 돌격하였다. 한시간의 치렬한 전투 끝에 7련은 402고지에 붉은기를 꽂았다. 이번 전투후 7련의 조성학반은 대공 1차를 기록받고 “조성학전투영웅소조”칭호를 수여받았다. 1947년 10월말, 7련은 길림교외의 룡담산주봉의 하나인 철가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철가산에는 한 개 련의 150여명의 적이 절벽에 콩크리트또치까와 포대를 쌓아놓고 길림으로 통하는 요도를 지키고있었다. 놈들은 아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주봉밑부터 50메터사이의 나무를 몽땅 베버린후 물을 쳐서 얼음강판을 만들어놓고 1개 퇀 병력이라 해도 얼마든지 막아낼수 있다고 장담하고있었다. 7련에 주공임무가 떨어졌는데 7련은 3패에 진로를 돌파할 것을 명령했다. 전사들은 짚신바닥에 쇠줄을 동여맨후 칼로 얼음을 찍어 얼음층계를 만들면서 산으로 한발자국 한발자국 톺아올랐다. 3패의 전사들이 적진에서 50메터 떨어진 곳에까지 갔을 때 은페할 나무가 없어서 적들에게 발견되였다. 적들은 수류탄을 마구 내리뿌렸다. 붉은 피가 삽시에 얼음판을 붉게 물들였다. 3패 8반 김윤식이 전사 3명을 거느리고 돌격해올라가겠다고 패장에게 청원했다. 이에 패장 최응남은 적고지에 맹렬한 사격을 퍼부어 김윤식네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김윤식은 3명 전사를 거느리고 비발치듯하는 적탄을 무릅쓰고 적진 밑에까지 접근했다. 그때 2명의 조원은 희생되고 김윤식도 어께에 부상을 입어 피못이 되었다. 그러나 김윤식은 모진 동통을 참으면서 적 또치까 뒤문으로 뛰여들어가 살아남은 적 경기사수놈에게 덮쳐들었다. 억대우같은 적 사수놈은 18살 밖에 안되는 부상입은 김윤식을 깔아눕혔다. 이때 김윤식은 그놈의 두귀를 잡아당겼다. 놈이 “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김윤식은 몸을 일으켜 그놈의 대갈통을 경기관총에 대고 마구 짓쪼아놓았다. 놈을 쓰러눕힌 김윤식은 겅기관총으로 다른 또치까의 적들에게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뒤따라온 최응남패장은 련속 5개의 적 거점을 까부시고 15명을 포로했다. 드디여 진격로가 열렸다. 이때 7련이 돌격해 올라왔다. 3영과 2영도 돌격해 올라와서 적들을 일망타진하고 철가산을 점령했다. 전투후 김윤식은 대공3차를 기록받고 “대담한 단신영웅”칭호를 수여받았으며 호신용 모젤권총 한자루를 장려받았다. 그후 김윤식은 전오가자전투에서 부대의 퇴각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국 해방후 그를 렬사인민영웅으로 추모하였다. 1948년 1월, 7련은 독립6사 17퇀 3영 7련으로 개편되였다. 3월 9일, 길림의 적들이 장춘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튿날 7련은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25킬로메터 강행군하여 길림시 서쪽 양가교 대통로 길북쪽 200메터 되는 초가집들에 숨어 건량을 눈에 섞어 요기하면서 적들을 매복습격하려고 기다렸다. 오전 11시, 적들의 선발대가 지나갔다. 돌격신호총소리에 뒤이어 나팔소리가 울렸다. 7련은 쏜살같이 적들에게 덮쳐들었다.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맹호같이 뛰여나가면서 총 두방을 쏘아 적 두놈을 쓰러눕혔다. 질겁한 적들은 사처로 흩어졌다. 한철혁은 수류탄 두 개를 련속 뿌리고나서 기관총을 하늘에 대고 쏘며 소리쳤다. “손들엇!” 한철혁의 고함소리에 질겁한 적들이 눈우에 총을 던지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발 살려주시오” 하면서 애걸했다. 적지휘관의 마누라들도 손목시계, 금반지, 귀걸이, 목걸이를 떨리는 손으로 내들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한철혁은 단신으로 포로한 100여명 적과 가족을 뒤따르던 전사에게 맡기고는 계속하여 앞으로 돌진해나갔다. 한철혁은 다시 60밀리포를 멘 적을 쏴눕히고 포를 빼앗았다. 뒤이어 초가집을 한집한집 수색하여 적 소장이하 200여명을 포로하고 기관단총 한자루, 경기관총 1정, 보총 150자루를 로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공 1차를 세웠다. 양가교전투에서 7련은 적 700여명을 포로하고 포 4문과 수많은 총을 로획하였다. 장춘시 이도하자전투에서 7련은 박지현련장의 지휘밑에 어두운 밤을 타서 측면으로 적들의 뒤를 뚫고들어갔다.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한 개 투탄조를 거느리고 적 화점 3개를 요정내고 적 련장이하 7명을 사로잡았으며 경기관총 3정, 보총 60자루를 로획하여 특공(대공 3차)을 세웠다. 그번 전투에서 7련은 적또치까 7개를 까부셨고 80여명의 적을 포로하고 중기관총 7정, 경기관총 3정, 군마 30필을 로획했다. 하여 7련은 집체대공 1차를 기록받았다. 금주전투와 흑산저격전 1948년 9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동북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대한 료심전역이 전개되였다. 로심전역은 료녕성 서부 및 심양, 장춘 지역에서 진행한 거대한 전역으로서 해방전쟁에서 결정적의의를 가지는 3대 전역중 하나이다. 이 전역에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 47만명을 섬멸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역에서 조선인으로 편성된 많은 부대들이 금주를 공략하고 흑산, 대호산에서 영용히 작전하여 동북해방의 승리를 안아왔다. 료심전역의 첫 전투는 금주전투였다. 1948년 10월 14일, 절대다수가 조선인인 동북야전군 제3종대 제7사 산포영은 맹렬한 포사격으로 적들의 방어공사를 까부시고 보병들과 협동작전하여 적들이 “금성철벽”이라 자랑하던 배수지를 점령, 주력부대의 진공에 길을 틔워주었다. 특히 산포영부패장인 리영철은 전사들과 함께 교통호를 적 또치까부근까지 파고들어가 포탄 한발에 적또치까를 날려보냈다. 치렬한 전투에서 그가 거느린 포병반은 사상자가 많았지만 계속 전투를 견지하면서 적의 화점을 까부셨다. 제119사 359퇀 5련은 조선인 련이였다. 이 련의 2패 패장인 김력준은 의현과 금주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령활하고 과단성있게 부대를 지휘하여 적 두 개 련을 섬멸하고 100여명을 포로하였다. 1련의 조선인간호원인 정화주는 금주전투에서 적의 포화속을 뚫고 뛰여다니면서 많은 부상병을 구해내 “구호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금주전투가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국민당군 료요상병퇀 10만대군이 금주를 지원하러 달려왔다. 그러나 적들은 흑산, 대호산에서 해방군의 저격으로 발목을 잡히게 되었다. 저격진지에는 인민해방군 제10종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아군은 보총, 수류탄, 기관총, 산포로 비행기, 땅크, 대포 등 미국제중무기로 무장된 국민당의 5개 군과 12개 사의 병력과 맞섰다. 적아간의 군력차이는 현저했지만 아군은 끄떡 않고 적을 맞아 싸웠다. 10종대 28사 83퇀 3영은 대부분 조선인들로 구성되여있었다. 특히 3영 8련은 연변과 흑룡강성의 조선인전사들로 묶어져있었다. 이들은 흑산현북쪽의 대백태자툰을 고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10월 23일 아침, 료요상병퇀은 미친 듯이 아군에게 덮쳐들었다. 25일 아침, 적들은 3영이 대기하고있는 대백태자를 향해 돌격해왔다. 8련은 국민당군 제71군의 18개 련의 대부대와 맞다들어 싸우게 되었는데 용사들은 6차례나 적들의 미친 듯한 돌격을 격파해버렸다. 1패 3반 전사인 최성걸은 적의 포탄에 다리뼈가 절골되여 행동하기 불편하자 날창으로 절골된 다리를 찍어 끊어버린후 상반신에 힘을 모아 적들에게 기관단총불벼락을 안기면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영용히 희생되였다. 한편 흑산 101고지에서도 치렬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10종대 제30사 89퇀은 연변의 길동1퇀이 재편성된 부대인데 대부분이 조선인전사들이였다. 고지를 지키던 28사부대가 치렬한 전투에서 크게 손실을 입으면서 적들에게 고지를 점령당하였다. 1영 2련 련장 김인석은 전 영과 함께 28사부대를 증원하여 고지를 쟁탈할 임무를 맡았다. 25일 밤, 아군은 일거에 고지를 점령했다. 뒤이어 2련과 28사의 한 개 련만 남아 고지를 사수하고 그 외의 부대는 전부 철수하게 되었다. 날이 밝으면 기필코 적들의 맹렬한 공격이 있게 될것이였다. 10여일동안 바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 지칠대로 지친 전사들은 전투만 그치면 총을 안고 코를 드렁드렁 골기가 일쑤였지만 이번만은 김인석련장의 명령에 따라 전호를 파지 않으면 안되였다. 포격속에서 낮아진 전호를 전사들은 삽으로, 날창으로 파고 팠다. 몇시간동안의 악전고투를 거쳐 겨우 몸을 가릴만큼 파지였다. 날이 밝아지자 과연 적들의 맹렬한 포사격이 시작되였다. 포격으로 생긴 진동과 폭풍은 전사들을 허공 들어다놓았고 돌과 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화약냄새와 연기에 숨막힐 지경이였다. 약 30분동안 계속되던 맹렬한 포격이 멎자 국민당군은 중기, 경기 등 화력의 엄호밑에 아군진지를 향해 까맣게 기여올랐다. 정면에 배치된 2련의 기관총 2정이 적을 향해 불을 뿜었다. 적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그러나 화력과 병력의 절대적으로 우세인 적들에게 101고지 일면을 점령당하고말았다. 형세는 매우 위급했다. 이때 갑자기 28사가 총출동하여 노도와도같이 반격해왔다. 그런데 101고지로 오르던 국민당군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분분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금주전투에 참가했던 아군주력부대들이 흑산-대호산일선에 이르러 료요상부대를 포위하고 전면적인 진공을 들이댔던 것이다. 2련은 40여명 사망자를 묻은후 101고지를 떠나 이미 출격한 본 부대를 따라 돌격해나갔다. 11월 2일, 료심전역이 승리적으로 끝나고 전 동북이 해방되였다. 연변의 아들딸들은 쉴 사이도 없이 만리장성을 넘어 평진전역에 뛰여들었고 소속부대를 따라 남진의 길에 올랐다. 지난 3년간 진행된 동북해방전쟁에서 3550여명의 조선인전사가 희생되였다. 동북조선인들은 자신의 피와 목숨으로 끝내 동북의 새날을 안아왔다. (계속)
642    제82장.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1 댓글:  조회:2946  추천:0  2014-07-14
중국인민해방군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에로 조선인장병들 동북해방전장에서 진붉은 피 휘뿌려 "3기공세"에서의 조선인장병들 1946년, 동북민주련군의 통일적인 편제에 든 조선인무장대오는 장춘제1차해방전투, 사평보위전과 라법-신참 저격전 등 전투에 참가하였다. 길동경비1려는 주력부대와 협동작전하여 라법-신참 계선에서 국민당군의 진공을 막음으로써 그들의 기염을 꺾어놓았으며 북만과 동만의 련계를 차단하려는 국민당의 음모를 짓부시고 연길-라법, 라법-할빈간의 철도운수선을 보장, 아군의 대후방인 동만과 북만근거지를 보위하였다.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의 “3하강남”, “4보림강”전역에서 주력부대에 참가한 조선인전사들은 엄한을 무릅쓰고 송화강을 세차례나 건너 1월에는 치따무전투, 2월에는 성자가전투, 3월에는 덕혜와 농안간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동만독립사와 길동경비 2려 등 조선인부대는 한편으로는 길해선, 라기선 이남으로 출격하여 쌍하진, 쌍양 등 지구의 적거점을 공격함으로써 길림과 장춘의 적군이 남만근거지를 침공하지 못하게 제어하였고 또 길림동쪽으로 침공해오는 적군을 로야령일선에서 견제하였다. 다른 한편 화수림자, 부가툰, 려대방자 등 10여개의 적의 거점을 공격하고 130여개 촌을 해방, 그후 동만근거지와 남만근거지를 련결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1947년 5월, 해방전쟁은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으로 진입하였다.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전략적반공에 진입한 동북민주련군은 1947년 5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사이에 하기, 추기, 동기 세 번에 걸쳐 동북의 국민당군에 향해 전략적인 공세를 발동, 30여만의 적을 섬멸하고 적들을 장춘, 심양, 금주 등 몇 개의 거점에 몰아넣고 고립시켰다. 이 세 번의 공세에서 조선인장병들은 영용히 싸워 큰 공훈을 세웠다. 1947년 5월부터 7월 1일까지 아군은 50일간의 하기공세를 펼쳐 적 8만여명을 소멸하고 42개 도시를 해방하였다. 이 공세에서 동만의 조선인장병들은 길동지구의 부대들과 함께 선후하여 화전, 연통산, 반석, 이통, 쌍양, 로아령, 천강, 강밀봉, 대툰 등지에서 수십차의 전투를 진행하여 길해철도 이남과 길돈철도 이동의 대부분 지역들을 해방하고 남만과 동만근거지를 하나로 이어놓았다. 쌍하진전투에서 독립사 제4퇀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치로하에서 적 120여명을 소멸하였다. 특히 로야령에서 독립사는 장개석의 제1강군이라고 불리우는 신1군과 10여일동안 치렬한 전투를 벌려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하기공세에서 동만독립사 제4퇀 6련같은 전투모범련과 오룡진 등 100여명의 전투영웅과 모범들이 나타났다. 독립4사(리홍광지대)는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매하구일대의 국민당군 제60군 제184사를 전멸시키는 전투를 벌려 승리를 거둔후 5월 14일, 형제부대와 함께 공업도시 료원을 해방하였다. 1947년 9월 14일부터 11월 5일까지 아군은 50일간의 추기공세를 발동, 적 6만 5000여명을 섬멸하고 17개 도시를 해방하였다. 추기공세에서 동북야전군은 전쟁형세의 발전에 적응하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지방부대로부터 보충받았다. 연변, 목단강, 송강, 통화지구의 지방부대에서 싸우던 조선인장병 2만여명이 이때 야전군 각 종대에 편입되였다. 동만 독립사는 동북군구독립1사, 3사와 합쳐 10종대로, 리홍광지대는 동북군구 독립4사(후에 166사)로, 원 길동군구 독립 3퇀, 6퇀과 길남군분구 71퇀은 동북군구 독립6사(후에 156사)로, 송강군구 8퇀과 길남군분구 72퇀, 74퇀은 동북군구 동립11사(후에 164사)로 각기 편성되였다. 주력부대로 된 여러 조선인부대들은 주기공세에서 길림과 장춘 주변의 적 주력을 유인하여 운동전가운데서 섬멸하였다. 10종대 29사와 독립6사는 아군부대와 배합작전하여 길림주변의 강밀봉, 기반가, 우라가, 룡담산, 환희산, 단산자 등 지점을 공격하여 적을 길림시안에 몰아넣고 30사는 장춘주변의 덕혜진에 신속히 출격하여 아군부대와 함께 덕혜를 해방하고 다시 장춘이남에 진출하여 28사와 함께 중고, 철령, 장당 일대에서 장춘과 심양에서 쓸어나오는 적을 저격하였다. 특히 덕혜현소재지를 점령하는 전투에서 제30사 6퇀 2영 영장 박종수 등 수많은 조선인전투영웅들이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1947년 12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이미 동북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고친 아군은 동기공세를 발동, 적 15만 6000여명을 섬멸하고 18개 도시와 600만 인구를 해방하였다. 3개월간의 동기공세에서 제10종대의 조선인장병들은 형제민족장병들과 어깨곁고 엄한을 무릅쓰고 남하하여 법고, 참무 등 현소재지를 포위하고 적 75사 만여명을 섬멸하는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심양으로부터 공주툰의 적을 지원하러 오는 적 신1군, 신6군을 견제하는 전투에서 4000여명의 적을 섬멸함으로써 형제부대가 공주툰에서 국민당 신5군을 전멸하도록 조건을 창조하여 주었다. 2월 19일, 10종대는 개원현 경운보에서 신6군 62사를 추격하여 7200여명을 섬멸하였으며 뒤이어 개원을 해방하고 적 3400여명을 섬멸하였다. 화룡현청년들로 조직된 제30사 99퇀 3영은 황화산에서 적 59사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고지쟁탈전을 벌려 끝내 142고지를 탈환함으로써 형제부대의 적 62사를 섬멸하는 전투를 보장해주었다. 전투에서 교도원 김성룡과 8련 련장 김수억 등 수많은 조선인장병들이 희생되였다. 리홍광지대도 심양, 철령 일대에서 운동전을 벌려 공주툰섬멸전과 사평해방전투를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왕청현 조선인농민들로 조직된 독립6사 7련은 인민영웅 김상범의 이름으로 명명된 모범전투련이다. 12월에 장춘동역의 적 또치까를 8분간에 까부시고 역을 점령하여 “전투모범련”칭호를 수여받았고 이듬해 1월 21일, 오마툰전투에서 일거에 적 한 개 영을 섬멸하여 집체대공1차를 세워 “맹타격, 맹추격의 용감한 부대”라는 축기를 수여받았다. 2월, “김상범련이 소속된 독립6사는 호가툰, 고점자 일선에서 길림으로부터 장춘으로 철퇴하는 적 60군의 주력을 맞받아 자기보다 몇 배나 더 되는 적들과 영용히 싸웠다. “김상범련”의 기관총사수 정형련은 중상을 입고서도 화선을 떠나지 않고 단신으로 기관총을 휘둘러 적의 5차례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50여명을 섬멸하였다. 인민영웅 주광문은 적들과의 백병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번 전투에서 독립6사는 적 2000여명을 섬멸했다. 첫 붉은기를 사평성루에 아군의 “3기공세”에 기가 눌리운 국민당군은 몇 개 도시를 거점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사평에는 2만여명 적이 지키고있었는데 국민당군은 새로운 방어시설을 구축한후 증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리고있었다. 1948년 3월 21일 새벽 3시, 사평을 수복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해방군의 대포는 국민당군의 방어선과 또치까를 짓부셔버렸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1종대 제2사 4퇀 1영의 제2련은 철도동쪽으로부터 성을 향해 공격하였다. 그들은 세겹이나 되는 철조망과 함정, 지뢰매장구역을 지난후 7메터 깊이의 해자를 넘어 적의 또치까를 폭파하면서 전진하였다. 전투에서 앞장선 폭파조 전사 9명이 모두 희생되였다. 뒤이어 제1반 반장 김동원이 거느린 두 번째 폭파조가 내달아 적들과 백병전을 벌리면서 돌격하여 제일 먼저 사평성루에 붉은기를 꽂고 부대의 돌파구를 열었다. 2련은 재빨리 돌파구를 통해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이때 기차역부근의 다리밑에 수축한 국민당군의 비밀또치까에서 맹렬한 사격이 터져나와 2련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김동원은 적의 또치까에 수류탄을 뿌리고 수류탄이 터지며 생긴 연막을 리용하여 적의 또치까에 접근한후 폭파약꾸레미를 또치까안에 밀어넣었다. 폭파소리와 함께 적의 비밀또치까는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2련은 적을 무찌르며 돌격하였다. 전투에서 2련은 100여명 적을 섬멸하고 400여명 포로하였으며 20여정의 기관총을 포함한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그러나 2련은 김동원을 비롯하여 거지반 희생되여 3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인민해방군은 드디여 사평을 수복, 전투에서 적군 1만 9000여명을 소멸했다. 전투후 2련은 “돌격련”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김동원은 특등전투영웅으로 추천되고 “모택동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김동원이 거느린 1반은 “김동원영웅반”으로 명명되였다. 제2차 장춘해방전투 제2차 장춘해방전투는 아군이 전략적후퇴를 하였다가 1948년 4월에 다시 시작한 포위전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장춘포위전에 참가한 부대들로는 동북인민해방군 제1종대와 제12종대의 주력부대들이였다. 동만의 독립6사도 이 포위전에 참가하였는데 이 사의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독립6사 17퇀 3영은 장춘교외전투에서 이도하자, 잎담배공장, 양가점 일대에서 쌍양보안퇀의 400여명 적을 소멸하였고 대방신비행장을 점령하였다. 17퇀 포위권정면에는 건국대학, 건국묘, 조가산남령의 적수비군이 있었다. 17퇀은 그놈들을 상대로 소가보자로부터 수의대학이 위치해있는 탕도구에 이르는 구간의 포위경계임무를 맡았다. 17퇀 2영과 3영은 몽땅 조선인전사들로 무어졌는데 그들은 여러차례 적들의 포위돌파시도를 깨뜨렸다. 아군의 포위로 말미암아 독안에 든 쥐로 된 장춘시내의 국만당군대는 먹을것이 떨어져 사경에 이르렀다. 놈들은 포위를 뚫고 심양으로 도망칠 예산으로 여러차례나 대포사격의 엄호밑에 포위를 돌파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번마다 아군에게 제지당하였다. 7월 6일 새벽 3시경, 한 개 사단이상의 적들이 자욱한 안개가 낀 기회를 빌어 대포사격의 엄호밑에 아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였다. 독립 6사 17퇀 2영과 3영 7련 진지에만 하여도 두 개 영의 적들이 덮쳐왔다. 7련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7련 주력이 아직 전투에 뛰여들지 못한 정황하에서 전반 전사들을 인솔하여 적들과 근거리전투를 하였다. 적들이 30메터 가까이까지 덮쳐왔을 때 전사 엄도영은 쏜살같이 뛰여나가 적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사격하였다. 엄도영은 적 12명을 포로하여 진지에 넘겨주고는 계속 적진에 돌입하여 물중기 2정과 기관총 1정을 로획하였다. 한철혁반장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돌격해나가 맞은켠쪽의 적의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위로부터 “강철8반”이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고 엄도영은 “강철용사”칭호를 받았다. 8반만 하여도 34명의 적을 소멸하고 23명을 포로하였을뿐만아니라 중기관총, 경기관총 4정, 보총 20자루, 수류탄 25개, 탄약 6000발을 로획하였다. 8반이 용감하게 싸울 때 7련도 전투에 뛰여들었다. 7련은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힌후까지 10여시간 싸워 적 한 개 영 이상의 병력으로 조직된 진공을 3차례나 물리쳤다. 적들은 포위를 돌파할 가망이 없게 되자 시내로 뒤꽁무니를 뺐다. 적정을 주시하던 3영 최봉준영장은 반돌격명령을 내렸다. 7련은 박지현련장의 지휘밑에 적들을 추격하였다. 8반의 전사들은 10명중 7명이나 부상당하였지만 계속 적을 추격하였다. 8련과 9련에서도 예비병력까지 몽땅 동원하여 적들을 추격하여 쓸어눕혔다. 적들은 또 포위되였다. 17퇀 2영과 3영의 조선인전사들은 적들의 여러차례 포위돌파를 짓부시고 적 424명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보총 34자루, 경기와 중기 6정, 척탄통 5개, 탄약 만여발을 로획하였다. 장춘포위전에서 17퇀에서만 해도 53명의 조선인용사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1948년 10월 17일 밤 12시, 국민당군 제60군의 증택성군장은 장춘동쪽 방어구역에서 철거하고 아군에게 투항하였으며 동반부 방어구역을 아군 독립6사와 8시에 넘겨주었으며 10월 19일에는 동북행정 부사령이며 제1병퇀 사령 정동국, 참모장 룡군진, 제1병퇀 참모장 양우매도 신7군과 함께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장춘은 드디여 해방을 맞게 되였다. (계속)  
641    제81장.자위전쟁으로 승리전취물 보위 댓글:  조회:2489  추천:2  2014-05-23
신세 고친 조선족 향토 보위하기 위해 앞다투어 전선으로 장개석 전면내전 발동 항일전쟁이 승리한 그 시기 동북에는 국민당군대가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지지와 원조밑에 동북을 독점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부터 대량의 군대를 파견, 1946년 6월에 이르러 장춘-심양 철도연선의 심양, 사평, 장춘, 길림 등 중요한 도시들을 련이어 점령했다. 동북을 지키고있던 동북민주련군은 “북쪽으로 발전하고 남쪽으로 방어한다”는 전략방침에 좇아 심양 등 큰 도시에서 주동적으로 철거하여 동만, 서만, 북만에 분산되여 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동만근거지는 1945년부터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장개석은 160만 군대를 동원하여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진공을 발동하였다. 군민당 제71군은 교하일대까지 쳐들어온후 “일주일내에 도문강반까지 쳐들어가 전 동북을 수복하겠다”고 떠버리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중공길림성위, 성정부, 성군구 지도기관은 길림시에서 철거하여 8월 17일 연길로 이동하였다. 당시 돈화와 연변지구만이 안정하고 믿음직한 해방구였다. 연변인구의 80%를 차지한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을 견결히 옹호했으며 시련을 거친 상당한 수효의 간부들을 가지고 있었다. 연길에 옮겨온 성당위, 성정부, 성군구는 길동분성위, 연변지위와 함께 사무를 보았다. 이렇게 옮겨온 성위, 성정부, 성군구 지도기관은 1948년 3월 9일, 길림이 해방될 때까지 연길에 있다가 3월 10일, 연길을 떠나 길림으로 돌아갔다. 참군참전 열조 1946년 6월, 국민당군대는 로야령을 넘어 교통요지인 신참과 랍법에 침입해 들어왔다. 연변인민들은 국민당의 진공앞에서 나약함을 보이지 않고 “자위전쟁으로 장개석의 진공을 분쇄하자!”는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참군고조를 일으키는 한편 연변경비려를 교하-랍법-신참 일선에 파견하여 적을 막아 완강하게 전투를 벌리게 했다. 1946년 5월 17일부터 6월 8일까지 연변에서는 3659명이 참군하였는데 화룡 한 개 현에서만 하여도 1536명이 참군하였다. 연길현 흥안촌 녀성 리옥금은 남편 림지용의 참군을 지지하였으며 미구에 또 세 시동생의 참군을 지지하고 가기가 집안팍의 일들을 도맡아하였다. 리옥금의 남편과 마을의 적잖은 청년들이 희생되자 젊은녀성들은 자기 남편을 참군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을 본 리옥금은 부녀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우리 가난한 농민들은 남의 하늘아래 남의 땅에서 허리도 못펴고 살았어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어요. 우리가 이 땅을 보위하지 않고 누가 보위하겠어요. 참군하는 것은 반동파를 때려업고 나라와 가정을 지켜 좋은 나날을 보내기 위한것이지요.” “참군하면 영광스럽다!” 이는 당시 조선족들 가운데서의 사회적기풍으로 되었다. 연길현 세린하구 동불사에 살고있는 박씨성을 가진 한 할머니는 딸을 군대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세 아들을 전선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지금 나의 가장 사랑하는 딸을 부대에 보냅니다. 나에게는 ?18살나는 아들이 있습니다. 만약 전방에서 사람을 수요하면 이 아들까지 전선에 보내겠습니다.” 화룡현 숭선촌의 송씨댁 늙은 어머니는 아들 송기섭을 떠나보낼 때 아들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국민당반동파를 때려부시지 않고서는 우리 가난한 백성들은 편안히 살수 없다. 너는 나의 아들이자 또한 공산당과 인민의 아들이다. 용감히 싸워 적을 많이 소멸하거라!” 왕청현의 금방 결혼한 한쌍의 부부는 서로 고무격려하면서 참군하였고 훈춘현 삼가자에 사는 60여세의 서군산부부는 외동아들을 군대에 보냈으며 훈춘현 밀강향에 사는 강병식, 강병국 형제는 서로 자기가 참군하겠다고 다투다 못해 나중에는 마을사람들 “재판”에 의해 형님인 강병식이 참군하였다. 농촌에서의 참군고조는 도시청년들과 학생들속에도 재빨리 파급되였다. 1947년 6월 4일, 연길시제2중학교에서는 131명의 남녀학생들이 참군할 것을 탄원하였고 민족간부양성을 위해 세워진 연변민주학원에서는 51명이 한꺼번에 참군하였다. 같은 해에 연길, 룡정, 도문 등지의 수천명 중학생 졸업생들이 앞을 다투어 전선으로 나갔다. 길림성군구의 1946년부터 1948년까지의 참군정황통계자료에 의하면 전 성 참군자총수는 18만 9455명인데 그 가운데서 연변참군총수가 5만 2051명으로서 27.5%를 차지하였다. 당시 연변인구는 88만 9455명이였는데 참군자총수는 연변인구의 5.88%를 차지하였다. 이밖에 약 10만여명이 공인부대, 기간대, 무장민병 등 지방무장조직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참군한 조선족자제병들은 대부분이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의 제28, 29, 30사와 조선족이 위주가 된 동북군구 소속 독립 제4, 6, 11 사에 편입되여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부대로 되어 동북해방전쟁과 전국의 해방하는 성스러운 싸움에서 영용히 싸웠다. 모든것은 전선을 위하여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하여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하여!” 이는 연변인민들의 장엄한 구호였다. 이 구호의 고무하에 연변인민들은 전선지원을 위한 총력전을 벌리면서 해방전쟁에 떨쳐나섰다. 전선지원의 중요한 내용은 담가대나 운수대 또는 민부로 전선에 나가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부대를 따라 부상병을 구하거나 량식, 탄약을 나르고 철도나 도로를 수리하며 방어공사를 쌓는 등 일들에 직접 참가하여 전쟁을 위해 복무하는것이였다. 해방전쟁시기 연변에서 전쟁을 위해 근무한 연인원수는 30만 2300명에 달하며 동원된 차량수는 2만 9200대에 담가대는 군대식으로 편성되였다. 담가 한 대에 대원 여섯명씩 배치되였고 담가 세대가 한 개 중대로, 세 개 중대가 한 개 대대로 편성되였다. 담가대원들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해방군전사들을 따라 화선을 넘나들면서 부상병을 구원하였다. 지어 화선 20메터 가까이까지 들어가서 부상병을 업어내왔다. 조선족담가대원들은 대부분 한어를 몰랐으나 부상병을 친절히 간호하여 상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담가대원들은 자기 돈으로 닭알과 과일을 사서 부상병들을 대접했으며 부상병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부상병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려 애썼다. 그들은 적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늘 담가를 나무로 위장하고 적기의 공습을 받을 때엔 자기의 몸으로 부상병을 엄호하였다. 연변담가대원들은 1948년 반년사이만 하더라도 화선에서 1600여명의 부상병을 구했다. 전선근무대에서 운수대의 공훈도 매우 컸다. 운수대는 기차, 자동차, 마차, 우차들을 망라한 운수기재들을 동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조선족으로 조직된 담가대, 운수대 등 전선근무대들은 전 동북이 해방된 뒤 산해관을 넘어 평진전역에 참가하였다. 후방인민들은 각종 형식으로 전선원호사업에 떨쳐나섰다. 연변의 각 현에서는 수혈대를 조직하여 자기의 피를 부상병에게 바쳤다. 조선족인민들은 수없이 많은 위문품과 수만통의 위문편지를 전선에 보내여 전사들을 고무격려하였다. 연변문공단은 전선부대의 전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제1선에 나가 로천공연을 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들의 투지를 북돋우어주었다. 전쟁근무에 동원되고 참전임무를 집행하는 가운데서 각지에는 숱한 영웅과 모범이 나타났는바 립공수상자는 2700여명에 달하였다. 후방에서는 대생산운동을 전개하여 량식과 군수물자를 많이 생산하여 전선을 지원하였다. 청장년 대부분이 참군참전하다보니 후방보위와 생산은 녀성들과 로인들이 많이 하였다. 농촌녀성들은 “남성들은 군대로, 녀성들은 밭으로!”라는 호매로운 구호를 내걸고 농업생산의 주력군으로 되었으며 걷우어 들인 량곡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 전선에 보냈다. 연변은 당시 대후방이였다. 훈춘, 도문 등지에 세운 제혁공장, 신공장, 방직공장, 염색공장, 옷공장 등의 군수품공장에서는 군수물자를 끊임없이 생산하여 전선에 보냈다. 또 광범한 녀성들은 천짜기와 형겊신만들기 운동을 벌려 전선의 수요을 충족시켰다. 1946년 6월, 중공동북국의 지시에 의해 훈춘에 병기공장이 세워졌다. 1947년 여름부터 동북야전군은 전략적후퇴로부터 전략적진공에 넘어갈 준비를 하였다. 부대가 끊임없이 확대되는바람에 무기장비의 수요량도 급증했다. 군사공업부의 지시에 의해 훈춘병기공장에서는 자체로 82밀리박격포를 연구제작하였다. 1948년까지 훈춘병기공장에서는 100여문의 박격포를 생산해냈다. 1948년말에 훈춘철길옆에 번져져있는 세 개의 차량을 뜯어다 녹이여 철판을 만들어 원재료로 삼고 시험제작에 성공하였다. 이밖에 훈춘병기공장에서는 1946년 8월부터 1947년 7월까지 1년동안에 82밀리박격포 포탄 5만 5000여발, 탄알 220여만개를 생산해냈다.
640    제80장 토지개혁운동 댓글:  조회:2801  추천:1  2014-05-13
         망국노 “개간민”이였던 조선인 농민 땅의 주인 되여 중국 력사상 처음 소수민족 신분으로 정치권리 가져  두 차례의 군중공작회의 “중국신민주주의혁명의 근본문제는 농민문제였고 농민문제의 핵심은 토지문제였습니다. 1946년 5월, 중공중앙은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토지정책을 조정하며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할 것을 각 해방구에 요구하였습니다. 7월 7일,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형세와 임무에 관한 결정’을 발표하여 각급 공산당조직에 주구청산, 감조감식, 식량과 토지를 나누는 투쟁에로 농민들을 조직발동함으로써 동북근거지를 창설하고 공고히 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해방전 동북의 토지 대부분은 ‘동양척식회사’, ‘동아권업회사’, ‘만주척식회사’와 같은 일제와 괴뢰만주국의 경제적략탈기구, 친일주구 및 대지주들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척지, 국유지, 군용지와 같은 ‘공유지’가 30%ㅡ60%를 차지하였습니다. 연변지구의 토지개혁운동은 1946년 7월에 시작되여 1948년 4월에 끝났는데 대체로 세 개 단계를 거쳤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토지개혁의 첫단계는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였는데 주요하게는 주구를 반대하고 청산하는 투쟁으로부터 제1차 토지분여까지였다고 한다. 중공길림성위, 길동분성당위, 각 현당위의 800여명(그중 조선인 500여명)토지개혁공작대는 농촌에 깊이 들어가 군중을 선전, 발동하여 먼저 량곡을 대여하고 사출하는 투쟁을 벌렸고 1946년 봄과 여름사이에 토지를 측량하는 방식으로 지주의 남아도는 풋곡식을 빈고농에게 나누어주었다. 60%의 농민들에게 토지, 역축, 량곡, 농기구 등을 나누어주어 그해의 식량곤난을 해결하였고 농민의 계급적각성을 높여 지주와 투쟁할 기초를 닦아놓았다. 9월, 중공길림성위에서는 연길에서 현위서기가 참가하는 제1차 군중공작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군중운동초기의 표면적인 현상과 국부적현상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추측으로 하여 중소지주를 돌봐주고 구별있게 대할 것을 일면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래서 회의후 일부 지구에서 군중이 발동되지 못하고 간부가 도맡아 하며 반동적지주에 대하여 힘있게 타격하지 못하며 중소지주에게 토지를 너무 많이 남겨주는 등 우경편향이 산생하였으며 “밥을 설구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여 11월말, 중공길림성당위에서는 제2차 군중공작회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토지개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군중을 대담히 발동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표현과 결부하여 우경사상 및 간부가 도맡아하는 사업작풍을 비판시정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의 성격과 목적을 명확히 하고 지주와 기타 계급에 대한 정책을 규정하고 지주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였다.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정책의 기본원칙은 대담하게 군중을 발동하여 불온분자를 철저히 적발하고 제거하며 봉건세력을 소멸하고 지주의 통치를 뒤엎고 농민이 진정 나라의 주인으로 되게 하는 목적에 도달하는것이다.” 회의에서는 “견결히 빈고농에 의거하고 중농을 단결하며 지주를 타격하는” 계급로선을 재언명하였으며 각지에서는 “량곡을 대여하고 량곡을 사출하며 풋곡식을 나눈 기초우에서 대담하게 군중을 발동하여 지주의 토지를 분배하여 봉건세력을 철저히 짓부시고 농민의 통치를 수립할것”을 호소하였으며 “토지분배의 령도권을 빈고농의 손에 장악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어떻게 생산을 발전시키며 재정경제의 곤난을 극복하며 전선을 원호하겠는가 하는 문제들을 연구하고 구체적공작을 포치하기도 했다. 회의후 각 현에서는 회의정신에 좇아 빈고농단을 조직하고 그의 령도하에 지주를 투쟁하고 토지를 나누는 투쟁을 전개하였고 악질지주를 체포하여 공개심판하고 징벌하였으며 지주의 토지재산을 몰수하여 빈고농에게 분배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에 제1차로 토지분배투쟁을 기본적으로 끝냈는데 길동지구에서는 53만 7275명의 빈고농들이 22만 8193헥타르의 땅을 분배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연길현의 송영명 훈춘현의 한회삼 드 각지의 악질지구들이 질벌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연길현의 송영명, 훈춘의 한희삼 등 각지의 악질지주들이 징벌 받았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고 일부 지구의 군중이 잘 발동되지 않아 지주에게 좋은 땅을 남겨주고 땅을 많이 남겨주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지주의 위풍을 꺾어놓지 못하였다. "중국토지법대강"반포 토지개혁 두 번째 단계는 1947년 7월부터 10월까지였다. 이 시기 주요한 투쟁은 “큰놈을 치고 감춘 재산을 들춰내는”것이였다. “이 운동에서 수천년동안의 봉건통치지반을 짓부시고 봉건계급의 정치적위풍과 경제적세력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지주계급은 저들의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고 갖은 수단으로 계급적보복을 하였습니다. 특히 국민당이 발동한 전면적내전으로 하여 지주계급들은 역청산을 꿈꾸게 되었는데 군중들은 악질지주들의 이러한 음모를 까밝히고 그들의 위풍을 여지없이 꺽어버렸습니다.” 당시의 형세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분석이였다. 그러던 1947년 10월10일, 중공중앙에서는 “중국토지법대강”을 반포,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라는 토지제도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대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여있었다. “봉건적 및 반봉건적 토지제도를 철페하며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라는 토지제도를 실시하는 원칙밑에 농촌의 기타 모든 토지와 함께 전 촌의 농촌인구에 따라 통일적으로 평균분배하며 토지가 많은데서 떼내여 적은데 보태주며 비옥한 땅에서 떼내여 척박한 땅에 보태줌으로써 전 촌 인민들이 동등한 토지를 소유하게 하며 그것이 개인소유로 돌아가게 하여야 한다.” 연변의 각 현들에서는 성당위의 토지회의정신에 근거하여 보편적으로 빈고농대회를 열고 토지법대강을 학습, 토지를 평균분배할 문제를 연구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1947년 11월 이듬해 4월까지였는데 대폭적인 재검열, 대오정돈, 토지의 평균분배를 하였다. 농촌들에서는 회억대비의 방법으로 낡은 장부를 따지고 농민들의 계급각성을 한걸음 더 제고하며 반동지주에 대한 새로운 투쟁을 벌렸다. 이리하여 반동지주들의 “검은 토지”와 감추어둔 총, 식량과 재산들을 파내여 몰수하였다. 한편 “당내에서 당을 정돈하며 혁명대오에서 대오를 정돈하는 운동”을 벌리였다. 1948년 1월, 1개월 남짓한 시간을 리용하여 토지개혁운동의 철저한 승리를 담보하고 새로운 정치임무를 영접하고저 사상, 립장, 작풍, 생활제도 여하를 검사하고 계급이색분자를 철저히 조사하여 내는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사상상, 조직상, 작풍상으로부터 공산당의 순결성과 통일성을 보장하고 공산당의 전투력을 제고하는것을 목적으로 한 당정돈과 대오정돈을 진행하였다. 연변 각지의 공산당조직들에서는 비판과 자기비판의 정신을 발양하여 우로부터 아래에, 로간부로부터 새로운 간부, 당내로부터 당외에 이르기까지의 적극적이고 민주적인 사상투쟁을 전개, 당내와 간부대오내에 존재하는 평화적향락사상, 관료주의작풍, 자유주의작풍, 유격주의작풍, 무규률현상 등을 치중하여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릇된 현상은 령도면에서는 우경사상을 반대하는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서 표현되였고 조직로선면에서는 빈고농로선과 성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서 나타났으며 령도방법면에서는 “풀어놓는것이 정책”이며 “군중이 정권”이며 “빈고농의 말이면 다다”라고 강조하는데서 표현되였고 뿌리를 찾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상작풍면에서나 생활면에 결함이 있는 동지들에 대하여서는 사실을 밝히고 비판하는 것으로 그들을 교양하였다. 당정돈과 대오정돈 가운데서 성분이 좋지 못하고 력사상에 문제가 있는 일부 당원과 간부들에 대해서는 심사하고조 직상상의 결론을 지어주었으며 규률을 위반한자에 대해서는 조직상의 비판과 처분을 주거나 법적제재를 가하였다. 당조직의 심사를 거쳐 연변에서 80명이 당적을 취소당했는데 연길현에서 7명, 훈춘현에서 29명, 화룡현에서 23명, 왕청현에서 21명이 당적을 취소당했다. 당정돈과 대오정돈을 거쳐 광범한 당원간부들은 보편적으로 당성교양과 당의 규률교양을 받아 계급적각성과 정책수준이 높아지고 군중과 실제를 리탈하는 관료주의와 군벌주의 작풍을 개변하고 군중과 밀접히 련계하게 되었으며 당의 규률관념이 강화되여 당의 각항 방침정책을 정확히 관철함에 있어서 량호한 기초를 닦아놓게 되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중에서 나타난 “좌”적편향이 철저히 극복되지 못한 탓으로 당정돈과 대오정돈 가운데서 당내와 간부대오내에 존재한 문제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평가하고 지나치게 투쟁을 강조하며 간부를 너무 엄중하게 처리하여 부분적 당원과 간부들의 적극성에 손상을 준것과 같은 문제들도 나타났다. 조선인농민 땅의 주인으로 1948년 3월부터 연변 가지에서는 공산당의 령도밑에 토지평균분배위원회를 내오고 인구에 따라 토지를 평균분배하기 시작했다. 우선 빈고농들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토지가 평균수보다 적은 중농에 대하여는 그 부족되는 부분을 보태주고 토지가 평균수보다 많은 사람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가만 놔두었다. 지주, 부농들이 로동가운데서 자신을 개조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도 농민들과 같은 수의 토지를 분배하여주었다. 토지분배시에 여러 민족의 생산습관과 특점에 대하여서도 돌보아주었는데 수전의 대부분은 조선인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채소밭과 한전의 대부분은 중국인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시 연변 5개 현에는 도합 15만 4243호에 71만 8886명(그중 조선인 81.9%)의 인구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농호가 11만 6681호에 55만 167명이였는데 이들은 도합 18만 2064헥타르의 토지를 분배받았다. 이는 농촌인구 인당 평균 4.5~7.05무의 토지를 분배받은 것으로 된다. 빈고농들은 또 같지 않은 수의 가옥, 가축, 농기구, 량곡, 의복 등도 분배받았다. 1948년 4월, 각 현에서는 선후하여 토지평균분배사업을 완수하였다. 정부에서는 제때에 땅문서를 발급해주고 농민들의 번신투쟁의 전취물을 보호하는 법령도 선포하여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라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현하였다. 땅은 조선인농민들의 명줄이였다. 연변의 대다수 조선인농민들은 “화전민”의 후대로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그때로부터 피와 땀으로 밭을 일구고 수전을 개간했으나 결국엔 소유권이 없어 세세손손 소작농, 고농 생활을 해왔다. 해방후 연변조선인은 중국공산당이 령도아래 지주를 타도하고 토지를 분배받아 땅의 주인으로 되었다. 이는 조선인농민들이 오매에도 잊지 못할 념원이였고 세세손손 내려오면서 피 땀흘려 싸워온 진귀한 대가였다. 그때 농촌에서는 “토지 얻은 기쁨”(박순연 작사 리경택 작곡)같은 노래가 많이 보급되였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광명한 새 아침 닥쳐왔다네 지주토지 한간토지 우리네 손으로 분배하였다네 에헤라 좋구나 데헤라 좋구좋다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보세 땅을 분여받은 조선인농민들은 밭머리에 처자를 데리고 가 땅없어 받은 설음과 땅의 주인된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영원히 공산당을 따르며 집과 밭을 보위하기 위해 혁명할 것을 다지게 했다. 연길시 전복순네 집은 과거 일곱식구였는데 지주의 땅을 부치면서 겨우 살았다. 1933년 그의 아버지가 항일유격대에 량식과 정보를 날랐다는 죄로 일본놈들에게 하루밤사이에 여섯이 총살당하고 열네살 나던 전복순만이 집에 없었기에 살아남았다. 그녀는 믿을 곳 없이 사처로 돌아다니다가 1936년 남편을 만나 연길시 혜공상에 거주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자 남편은 참군하고 혼자서 세식구를 거느리게 되었다. 너무 가난하여 세식구가 이불 한 채를 덮어야 하는 형편이였다. 1947년 초봄, 전복순은 토지분배위원으로 뽑히웠다. 신이 없어 맨발로 아직 녹지 않은 논밭을 뛰여다니면서 땅을 잰 전복순은 1200평 언덕밭을 분여받았다. 그 기쁨 무슨 말로 다 표현하랴. 전복순은 밭머리에 서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격동되여 웨쳤다. “땅, 얼마나 힘들게 찾아온 땅인가! 내 기어이 옥답으로 만들어 살해된 집식구들을 기념할테다!” 전복순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빈고농단, 농회, 민병, 부녀회의사업에 바삐 돌면서 식전식후의 짬짬 시간을 타서 30여차의 거름을 밭에 이여 날았다. 풍작을 거둔 전복순은 알뜰히 고른 좋은 식량을 전선에 보냈다. 이에 대하여 박창욱교수는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이는 전복순일가의 념원만이 아니였습니다. 토지개혁을 한 결과 농촌에서의 봉건제도, 지주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였고 광범한 농민들은 토지를 분여받고 진정한 땅의 주인으로 되어 신세를 고쳤습니다. 이 승리의 열정으로 연변에서는 해방전쟁을 지원하는 새로운 열조가 일어났습니다. 지난날 망국노, 개간민의 처지에 있던 조선인농민문제가 끝내 해결되였습니다. 민족문제해결의 실질은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문제로서 조선족인구의 절대 다수를 점하는 농민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조선인은 드디여 소수민족의 신분으로 중국력사상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나서게 되었으며 땅의 주인으로서의 정치적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계속)    
639    [동시]온도계(김완성) 댓글:  조회:1574  추천:0  2014-05-01
온도계 김완성 보리밭에 작은 물결이 일면 울타리 기어오르는 호박 덩굴처럼 사알짝 올라가고. 복숭아꽃 필 무렵엔 해바라기 대궁모양 쭈욱쭉 뻗어가고. 햇빛을 가득 담은 석류가 터지던 날 달빛에 메밀꽃 강물 되어 여울질 때 지난해 입었던 아가 옷만큼 줄어들더니, 문풍지가 부엉이 울음을 흉내내고 별들이 유리창에 얼어붙던 밤 몽당연필같이 작아진 빨간 기둥.
638    [동시]나뭇가지 온도계(박소명) 댓글:  조회:1888  추천:0  2014-05-01
나뭇가지 온도계 박소명 나뭇가지가 봄바람 품에 손 넣어 본다. ㅡ딱 좋은 날씨야 나뭇가지가 햇살의 온도를 잰다. ㅡ이만하면 됐어 닫혔던 눈 연다 ㅡ맘 놓고 나가 놀아라 우르르 꽃송이들 내보낸다
637    [동시]가을나무(서정슬) 댓글:  조회:1678  추천:0  2014-05-01
가을나무 서정슬 나 이제 모든 것 다 나눠 주겠어요 나 이제 모든 것 다 벗어 주겠어요 마지막 열매까지 마지막 한 잎까지 하늘이여 땅이여 다 가져 가세요 내게 주신 모든 것 다 거둬 가세요 나 이제 모든 것 다 털어버리고 텅 빈 손으로 기도 하겠어요 텅 빈 마음 되어 기다리겠어요
636    [동시]바람없는 날(서정슬) 댓글:  조회:1697  추천:0  2014-05-01
바람없는 날 서정슬 나무 잎의 소근댐이 그쳤다 꽃들의 노래소리가 그쳤다 살랑대던 바람이 어디 갔을가 햇볕도 갈길을 잊었나보다
635    [동시]봄비(공재동) 댓글:  조회:1790  추천:0  2014-05-01
봄비 공재동 아무리 보아도 고운 실인데 옷부터 촉촉히 젖어든다 아무리 보아도 색깔은 없는데 온 들에 연두빛 물이 든다
634    [동시]석류(공재동) 댓글:  조회:1503  추천:0  2014-05-01
석류 공재동 석류꽃은 빠알가니 그냥 피여있어도 해빛 속에서 바람 속에서 비 속에서 새큼한 신맛을 뽐아 모은다 석류꽃이 채워놓은 작은 항아리 귀여워라 작 익은 식초 항아리
633    [동시]보리밭(박두순) 댓글:  조회:1467  추천:0  2014-05-01
보리밭   박두순 누웠다 일어섰다 종일 바람과 장난을 치는 보리들 누우면서 깔깔깔 일어서면서 깔깔깔 누웠다 일어섰다 종일 보리들과 장난치는 바람 누우면서 깔깔깔 일어서면서 깔깔깔 보리와 바람의 푸른 웃음소리도 종일 누웠다 일어섰다... 농부도 종일 푸른 웃음소리와 함께 허리를 굽혔다 폈다...
632    [동시]송아지 아프면(손동연) 댓글:  조회:1696  추천:1  2014-04-24
송아지 아프면 손동연 송아지가 아프면 온 식구가 다 힘 없제 외양간 등불도 밤새 잠 못 이루제 토끼라도 병나면 온 식구가 다 앓제 순덕이 큰 눈도 토끼처럼 빨개지제.
631    [동시]나무.2(이창규) 댓글:  조회:1688  추천:0  2014-04-24
나무.2 이창규 감나무에 달님이 열려 가지 사이로 얼굴 내밀면 빨간 감은 밤에도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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