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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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제64장 대사하전투와 한총령전투 댓글:  조회:1997  추천:0  2014-02-19
대사하전적지기념비. “워성타원” 전술로 적을 꾀여들인후 악질적인 미야모또 “토벌대"를 섬멸 제3방면군의 설립 1939년 3월 11일, 류하부근의 밀영에서 한달나마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을 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경위려와 소년철혈퇀, 2방면군 일부 및 제2군 제4사는 총사령원 양정우와 중공동남만특위서기이며 부총사령원 위증민의 인솔하에 화전현 북쪽에 있는 목기하림장을 들이친후 돈화, 화전, 안도, 무송 등 4개 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중요한 교통요충지 따푸차이허로 진군해갔다. 일제는 항일련군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야전군무기창고를 세우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있었다. 이 무기창고를 위만군 1개 영과 위만경찰 20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적들은 부락주위에는 토성물 쌓고 그밖에다 또 높은 나무울바자를 세웠다. 어찌나 경계가 삼엄한지 부락사람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따푸차이허에 항일련군과 련계를 맺고있는 장영춘이라고 하는 무장자위단원이 있었다. 아군은 장영춘을 통해 따푸차이허에 주둔하고 있는 주력부대가 외지로 “토벌”을 나가고 성안에는 지금 적들이 얼마 없다는것을 알아내냈다. 이에 양정우와 위증민은 따푸차이허를 들이칠 것을 결정했다. 4월 7일 저녁 7시 30분, 제2군 4사는 산발을 타고 내려와 은밀히 서대문쪽에 접근하여 은페했다. 부대가 매복한지 얼마 안되여 서대문밖에 있던 위만군 몇이 말을 끌고 성안으로 들어오려고 성문밖에서 대문을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대문을 열려던 적 보초가 어망결에 항일련군이 성문밖에 매복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산군이 왔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뜻밖의 사태에 직면한 아군은 잠시라도 지체할수 없었다.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아군의 총탄이 서대문을 향해 비발치듯 날아갔다. 아군의 드센 공격에 배겨내지 못한 적들은 서대문을 버리고 시가로 물러났다. 서대문으로 돌입해 들어간 아군은 서쪽구역을 완전히 통제했다. 이때 경위려와 소년철혈퇀도 각각 동대문과 남대문을 들부시고 시가로 맹돌입해 들어갔다. 지방경찰대실, 경찰서, 일본군변영은 삽시에 아군의 손에 들어왔다. 전투에서 아군은 위만경찰부대 200여명과 일본경위 후지다 이찌후도와 만석척식출장소 주임 가이데 이이찌 등 일본인 20여명을 섬멸하였다. 이어 진한장이 인솔하는 2군 5사와 5군 2사 5퇀은 련합하여 연길현을 거쳐 돈화 삼도구로 진군하다가 석두하자부근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맞다들어 격전을 벌려 일만군 32명을 격살하였다. 4월말, 부대는 안도현 청구자 “집단부락”을 들이쳐 적 6명을 격살하고 보총 30여자루와 탄알 1500여발을 로획했다. 6월 5일에는 항일련군 2군 4사 1퇀이 안도현 성북, 한총구를 습격, 일본교도관을 비롯한 위만군 2개 련 100여명을 전부 포로하고 경기관총, 보총, 권총 등을 로회했다. 그날 2군 5사는 오상현 랍림하삼림경찰대를 야습하여 100여명 로동자를 해방시키고 량식 등을 로획했다. 제1로군 총사령부를 찾고있던 2방면군 한부대는 안도현 미혼진에서 5사 진한장부대와 만난후 한양구에 있는 위증민의 주둔지로 왔다. 이렇게 모인 부대가 바로 천보산전투를 벌렸던 것이다. 7월말, 제2군 4사, 5사는 안도현 한양구에서 위증민의 사회하에 부대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개편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제13퇀, 제14퇀, 제15퇀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이였다. 3방면군이 설립된후 위증민과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안도, 돈화지구에서 련속하여 일만군을 격파했다. 그중에서도 제3방면군, 제2방면군 9퇀, 제5군 도정비부대 등 500여명 병력이 련합하여 대사하를 중심으로 하여 벌린 전투는 동만의 유격전쟁에서 전례없는 대작전이였으며 제3방면군의 전투기세를 떨친 싸움이였다. 대사하에서의 격전 대사하는 한요구동북쪽 안도현 소재지의 서북쪽의 위치해있는 규모가 큰 집단부락이였다. 부락은 토성으로 둘러쌓여있고 부락안에 있는 경찰서울안에는 높은 포대가 있었는데 적들은 거기에다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방을 감시하고있었다. 부락에는 경찰 30여명과 무장자위단 수십명밖에 없었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안도(송강)와 명월구의 적들이 인차 도착할수 있어 서뿔리 공격하기엔 쉽잖은 곳이였다. 이에 아군은 “위성타원(圍城打援)전술”, 다시말하면 성을 포위하고 그 속에 든 적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원군을 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즉 안도와 명월구의 적을 대사하에 끌어들여 소멸한다는것이였다. 8월 23일, 위증민은 13퇀, 15퇀과 2방면군 9퇀의 일부 부대 300여명 병력을 인솔하여 사가점 큰길옆 서쪽 도랑홈에 약 2.5킬로메터의 폭을 두고 매복해있다가 명월구방면으로 오는 적의 증원병을 치기로 하고 진한장이 인솔하는 14퇀과 경위련 200여명을 대사하집단부락을 친 다음 대사하 남쪽에 매복하여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오는 증원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대사하를 공격할 임무를 맡은 부대는 대사하부락 토성밖에 매복해있었다. 아군의 계획에 의하면 0시에 보초가 교대하는 틈을 타 성안에 있는 지하일군 리홍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날이 훤히 밝고있는데도 리홍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리홍산은 뜻밖에도 전날밤에 양초구에 일이 있어 불리워갔던 것이다. 아군은 하는수없이 날이 밝아 사람들이 물길러 나오는 기회에 공격하기로 했다. 성안에 우물이 없기에 날이 밝으면 적들은 보초를 철수하고 물 길러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드디어 날이 환히 밝았다. 아군은 대문이 열리고 주민들이 물 길러 나오기를 도정신해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일이 또 벌어지고말았다. 그번 전투에 직접 참가한적 있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속에서》에서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난데없는 일본경찰 한놈이 대문밖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가 채소밭에 매복해있는 것을 보고 픽 돌아서더니 부락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섯” 토성에 붙어섰던 한 전사가 소리쳤다. 그때 나도 토성에 붙어서있었다. 뛰던 놈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또 경찰서쪽으로 곧추 달려가며 “공산당이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성문북쪽에 숨었던 전사가 그놈을 당장에서 쏴죽였다. 이 바람에 마을안에선 호각소리가 “호르륵, 호르륵”하며 련이어 나더니 집안에 있던 놈들이 북달질하며 포대안에 들어가 총질하였다. 진한장은 전투명령을 내리고 각 련의 주공방향을 제시하였다. 토성밖에 매복해있던 전사들은 마을안으로 물밑듯 들어가는데 경찰서뜨락의 포대에서 기관총이 미친 듯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탄알은 눈앞에 와 우박처럼 떨어져다. 우리는 담벽에 다가붙어 경찰서쪽으로 돌진해들어가다가 큰길을 건너지 못하고 사격선을 피하여 부근의 민가에 흩어져들어갔다. 이곳 집들은 기차굴처럼 길게 지은 줄집인데 아래웃집사이에는 간벽이 있었다. 적든 계속 총질하였다. 우리는 민가의 벽을 뚫고 나가 포대에 대고 사격하였다. 그런데 탄알은 포대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왔다. 적아의 교전은 치렬하였다. 적진을 노리고 있던 김수학패장이 한손에 수류탄을 쥐고 배밀이해 나갔다. 한 전사가 또 김패장의 뒤를 어어갔는데 그의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포대높이는 5메터가량 되었다. 두 용사는 포대벽에 가붙어서 수류탄을 올리뿌렸다. 헌데 수류탄은 화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총질했다. 두 용사는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쥐여 다시 올리뿌리려다가 그만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의 기관총수가 요란한 폭파소리에 놀라 대가리를 움츠리고 앉았다가 다시 쳐드는 순간 이여다. 1선에 매복해있던 동무들이 포대화구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누구의 탄알이 명중했는지 적의 기관총수가 맞아서 화력이 멎었다. 이 순간 우리는 경찰서의 토담을 넘어들어가 포대안에 수류탄을 밀어넣고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뒤미처 대부대가 들어와 경찰과 자위단놈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사하를 점령하였다... 전반전투는 원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다.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은 부지휘 후국충에게 14퇀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송강방면으로 달려가 적의 증원부대를 저격할 것을 명령했다. 저격부대는 전속력으로 소사하남쪽 산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군이 소사하 고개길에 거의 닿고있을 때 대사하로부터 급보를 받은 안도현성의 일본군은 9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아군이 매복하려던 고개를 넘어오고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적들은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여였다. 적탄이 비발치듯 날아왔으나 전사들은 노도와 같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언덕진 고개우로 돌진해 나가다가 후국충부지휘와 14퇀 허자장, 정위 양형우(조선족)가 희생되였다. 지휘관을 잃은 전사들은 눈에 달이 올라 죽음을 겁내지 않고 일격에 돌진해들어갔다. 아군은 드디여 소사하언덕을 점령하였으며 왜놈지휘관놈들과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뱀을 굴에서 끌어내다 대사하를 치면 명월구에서 인차 오리라고 예견했던 적증원부대는 이날 낮에 오지 않아 류수촌 남구에 매복한 부대들은 하루종일 허탕을 치고말았다. 해가 진 다음 각 부대들은 류수촌집단부락을 중심으로 린근의 집단부락들을 분공하여 진공한후 하루밤을 류숙키로 하였다. 안길, 전동규부대들이 류수촌부락을 들이칠 때 적들의 저항은 드셌다. 50여명 경찰과 자위단은 맞불질 하면서 완강히 버티였으나 불과 5분도 채 안되여 아군은 적들을 무찌르고 부락을 점령했다. 최현부대는 동량툰을 점령했다. 최현퇀장은 적의 경비전화를 리용하여 뱀을 굴에서 끌어내기로 했다. 하여 안도현소재지, 명월구 등 각처의 경찰서와 주재소들에 전화를 쳐 “우리 항일련군은 이미 대사하와 대장강, 동양툰을 점령하였다. 용기가 있으면 싸우러 오라!”고 위협조로 통고했다. 자정이 되자 과연 증원병을 태운 적 트럭 6대가 동양툰에 들어섰다. 보초선에 있던 전사들이 적들을 발견하고 반격했다. 녀기관총사수 허성숙은 한 대원에게 빨리 지휘부에 가 알리라고 말하고 혼자서 기관총을 휘둘렀다. 이 전투에서 부대의 녀장군으로 불리우면서 사랑받던 허성숙은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증원부대는 아군이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는지라 부랴부랴 송강쪽으로 내뺐다. 이튿날 아군은 또다시 전날에 포치하였던 매복지점에와 매복하였다. 송강에서 명월구로 가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에 되돌아가는 적들은 반드시 이 길로 지날것이였다.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본군과 조선인 “특설부대”, 그리고 일본군가족 수명을 태운 대형 군용트럭 7대가 안도현성족으로부터 아군의 포치선으로 질주해왔다. 그중 한 대의 트럭에 앉은 적들은 대사하전투에서 요행 살아남은 적들이였다. 트럭은 아군 매복선남쪽 하단을 거쳐 2.5킬로메터쯤 질주하여 오다가 선두의 트럭이 정지하자 그 뒤로부터 따라오던 트럭이 전부 한곳에 집결되였다. 아군의 기관총, 보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어떤 놈은 자동차우에서 죽고 어떤 놈은 뛰여내리다 맞아죽었다. 불과 몇십분 사이에 적주력은 소멸되였으며 살아남은 적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남은 적도 도로서쪽 홈에 매복한 아군의 집중사격에 의하여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었다. 뒤이어 아군의 돌격신호가 울리였다. 전투가 끝난 다음 너저분하게 널린 적군의 시체를 세여보니 100여구나 되었다. 미야모도는 운전실에서 나오지도 못한채 죽었다. 이틀동안의 전투에서 제3방면군은 적 25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7정의 경기관총과 700여자루의 보총, 권총 및 여러문의 적탄통과 대량의 군수물품들을 로획하였다. 한총령매복전 대사하전투후 제3방면군은 부대의 식량과 기타 군수품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총령에서 적들을 매복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보화기를 통하여 9월 25일에 일본군 마쯔시마부대가 돈화로부터 대포시하로 “추기토벌”을 나온다는 정보를 도청한후 제3방면군의 주력부와 제5군 제2사 정치부 주임인 도정비부대 도합 500여명은 9월 24일(음력 8월 12일) 한총령 남쪽비탈의 고해루에서 매복전을 펼치기로 작전,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과 참모장 박득범의 령솔하에 목적지를 향해 강행군했다. 이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였는데 간혹 안개까지 끼여 동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적들은 도로 량켠 200메터안의 초목들을 몽땅 베여버리고 번번한 개활지대를 만들어버렸는데 그 거리가 약 50킬로메터나 되었다. 뿐만아니라 한총령과 그 길가의 고지마다에는 높은 포대까지 쌓아놓고 주둔하면서 밤낮으로 아군의 행동을 경계하고있었다. 부대는 가을비와 안개를 리용하여 한총령의 요차즈에서 북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한총령남쪽기슭의 좁고도 긴산골짜기인 고해루부근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산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꽉 우거져 매복전을 펼치기에 제격인곳이였다. 돈화에서 따푸차이허로 통하는 도로는 바로 이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뻗어있었다. 진한장은 한 개 패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작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25일 점심때쯤 드디여 놈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군소장 마쯔시마가 령솔하는 “토벌대”였다. 놈들은 12대의 트럭에 앉아오고있었다. 그속에는 50여면 위만경찰들을 실은 2대의 트럭도 있었다. 놈들의 자동차가 아군의 매복권내에 완전히 들어섰다. “땅!” 사격명령을 알리는 신호총소리가 산곡간에 울려퍼졌다. 전사들은 놈들을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전사들이 던진 수류탄은 호선을 그으면서 날아가 놈들의 머리우에서 련속 터졌다. 적자동차들은 하나하나 불길속에 휩싸이고말았다. 그러나 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력량을 조직하여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군은 화력을 몇 대의 자동차에만 집중한후 마쯔시마 소장을 쏴죽였다. 마쯔시마소장은 아직 자동차에서 내리지도 못한채 총알받이로 되고말았다. 놈들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살아남은 놈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놈들의 트럭도 머리를 돌려 오던길로 내뺐다.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아군은 혼란에 바진 적진으로 맹호마냥 돌진해들어갔다. 맹렬한 격전을 통해 아군은 적의 주력을 기본상 소멸해버렸다. 살아남은 적들은 꼬리빳빳이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마쯔시마소장을 비롯한 일본군 100여명을 격사하고 자동차 1대를 불살라버렸으며 기관총 4점, 보총 100여자루, 탄알 70여상자를 로획했다.(계속)  
569    제63장 올기강전투와 천보산전투 댓글:  조회:2151  추천:0  2014-02-19
유서깊은 력사의 강 올기강. 제2방면군 두만강 넘나들며 일본군 짓부시고 연변인민 고향에 돌아온 자제병 열렬히 환영 올기강전투 1939년 4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장백현 북대정자회의후 조선의 무산지구로 진격, 대홍단전투 등을 벌리고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넜다.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오중흡의 제7퇀을 올기강서쪽지대에 배치하고 자신은 제8퇀과 경위련을 이끌고 두만강줄기를 따라 동쪽의 옥동골, 휘풍동일대로 진격해 들어갔다. 부대가 휘풍동에 도착하자 집단부락 경찰대는 접전도 하지 않고 꼬리를 빼버려 아군은 손쉽게 집단부락을 점령했다. 아군은 화룡현 광평 등지를 휩쓸면서 10여개의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일만군경을 거듭 격파, 수많은 적을 소멸했다. 아군은 간 곳마다에서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일군중들은 자신들의 자제병이 고향에 온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각처에서 얻어맞은 일본군은 대부분를 움직여 검질기게 항일련군의 뒤를 쫓았다. 아군은 추격해오는 적을 페문툰부근에서 일망타진하기로 작전을 짠후 두만강상류의 동경평, 대동, 원봉 등지에서 활동하고있는 제7퇀마저 불러들여 백리평북쪽의 동수골막바지에 집결시켜놓았다. 그때 백리평에는 가장 악질적인 토벌대 “정안군” 1개 련이 주둔하고있었다. 적들은 항일련군부대가 휘풍동에서 군중정치공작을 하다가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한후 매일 페문툰어구의 사금구다리에 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40명씩 두 교대로 나뉘여 다리목을 지키고있었다. 뿐만아니라 놈들은 화룡현일대의 도로와 마을마다에 삼엄한 경계망을 늘여놓고있었다. 그때 화북전선에서 특출한 군공을 세워 천황의 표창까지 받았다는 다이노라는 자가 “토벌대장”을 맡고있었다. 이자는 가슴팍에 아수라를 입묵해가지고 다니면서 “아수라”로 자칭하기도 하는 악착하기 그지없는자였다. 6월 10일 새벽 3시경, 동수골을 떠난 아군 300여명은 백일평 올기강기슭에 이르러 적들을 유인하고저 금점굴주위의 돌들을 짓밟아 놓은 다음 부근에 매복하였다. 올기강기슭 큰길을 사이두고 서편언덕 북쪽과 약 500메터 거리를 상거한 지점에 8퇀 정위 박덕산(김일)이 책임진 기관총소대와 8퇀을 일렬횡대로 매복시키고 맞은편 밀림지대에 오중흡의 7퇀과 경위련을 매복시켰다. 금전굴은 올기강으로부터 약 200메터 떨어진 길가에 있었다. 올기강은 청산리골짜기에 있는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서쪽 영액령에서 동남으로 흘러나오는 강이다. 해란강은 베개봉서북쪽의 로리커호가 그 발원지대인데 올기강발원지의 북쪽 약 3킬로메터의 산너머에 있다. 올기강은 베개봉서쪽에서 흘러나와 약 25킬로메터 흘러 소마록하와 합수된후 홍기하로 이름을 바뀌여진다 올기강량쪽기슭은 갈숲으로 우거져있고 자동차길이 그 한옆으로 뻗어있었다. 길 오른쪽에는 산들이 남북으로 가로놓여있었다. 매복전을 펼치기에는 제격인 지형이였다. 게다가 전사들이 모두 풀로 위장하고있었기에 가까이에서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안개가 서서히 거치기 시작하는 늦은 아침, 만단의 준비가 다 되자 2명의 전사가 백일평쪽으로 내려가다가 총을 쏘았다. 드디여 백일평쪽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다이노가 거느린 정안군 한 개 련이 여러 정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기세사납게 나타났다. 때는 오전 8시경이였다. 올기강을 건넌 놈들은 길어구에서 머뭇거리며 주위지형과 동정을 살피더니 큰길을 따라 올라왔다. 그때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7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적의 대오가 우리의 매복권에 모조리 들어섰을 때 긴 칼을 찬 일본장교가 웬일인지 물도랑옆에 와서 걸음을 멈추더니 수상한 흔적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 우리 동무들중 누구인가 거기에 발자국을 냈던 모양입니다. 싸움을 끝내고 전장을 수색할 때 전사한 일본장교들의 가슴을 헤쳐보았는데 물도랑옆에서 우리의 흔적을 맨처음으로 발견한 긴 칼을 찬 그 장교가 바로 “아수라”로 자처하는 “토벌대”대장이였습니다.  “아수라”가 물도랑옆에서 일어서는 순간에 나는 사격명령을 내리였습니다. 우리는 잠간사이에 200여명의 적을 살상포로하였습니다. “아수라”는 칼집에서 군도를 절반도 뽑지 못한채 물도랑옆에 쓰러졌습니다...  올기강기슭은 순식간에 일본군시체로 너저분해졌다. 첫방에 얻어맞은 다이노대장은 살겠다고 금전굴로 기여들어갔다가 그곳에 매복해있던 아군 전사들에 의해 처단되였다. 이어 돌격나팔소리가 울렸다. 항일련군 전사들은 기세 드높게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몇놈이 내뛰다가 우리 전사들에게 붙잡혔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도관 이하 50여명을 소멸하고 대부분을 포로했다. 전리품은 기관총 4정, 보총 100여자루였으며 아군은 1명의 손실도 보지 않았다. 올기강전투의 승리는 연변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항일군중들은 전투의 승리를 열렬히 환호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련군에 참가하려고 서둘러 부대를 찾아왔다.  천보산전투  6월 29일, 제2방면군 제9퇀은 제2군 4사, 5사의 부분적 부대와 함께 천보산을 습격할 목적으로 300여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박덕범(4사 참모장), 최현(4사 1퇀 퇀장), 마덕전(제2방면군 9퇀 퇀장)은 부대를 이끌고 30일 저녁 삼면으로 천보산을 포위했다. “9.18”사변후 천보산광산은 일본침략자들의 연변의 지하자원을 략탈하는 주요한 기지였다. 이리하여 놈들은 이곳에다 일본수비대와 위만군, 경찰부대 및 위만무장자위단을 주둔시켜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부대를 항일련군“토벌”을 위해 우심산으로 출동시키다나니 광산에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니 네귀에 탐조등이 환히 켜져있어 어둠속에서 광산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정문으로 밤대거리 로동자들이 나가고있었다. 부대는 두패로 갈라져 한패는 천보산부락을 들이치고 다른 한패는 광산을 들이치기로 했다. 4사 1퇀 전사들은 출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광산에 이르러 보초병을 해제낀후 순식간에 광산구역으로 돌입해들어갔다. 눈깜빡할새에 광산에 있는 경찰들은 몽땅 생포하고 일본군수비대와 맞불질했다. 놈들의 저항을 완강했다. 전반 전투계획에 영행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소수의 전사들을 남겨 놈들과 계속하여 맞불질하게 하고 대부분 전사들은 광산의 설비들을 파괴하고 광산사무소를 습격하게 했다. 광산사무소를 점령한 전사들은 도끼로 금고자물쇠를 마스고 대량의 위만화페를 찾아내 마대에 담아 메고 나온 후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다른 한패의 전사들은 퇴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천보산마을로 내려와 일본자본가들이 경영하는 상점, 량식점, 약방 등을 습격하여 대량의 량식, 천, 약품, 신 등을 로획했다. 경찰서를 들이친 전사들은 류치장문을 짓부시고 갇혀있던 로동자들을 구해냈다. 아군은 전투에서 광산보위단 단장 요시다를 포함한 15명의 일본놈들을 소멸하고 20여 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전투가 끝난 후 아군은 광산에 불을 지르고 로동자들의 협조로 로획품을 운반하는데 그중 50여 명이 자진하여 항일련군에 가입했다. 임동자에 도착한후 생포한 놈들중 악질분자 다섯놈을 그 자리에서 처단해버리고 일부분 전리품을 당지 백성들과 짐을 지고온 로동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천보산전투에서 아군은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바 적의 통계에 의하면 이번 전투에서 그들이 입은 손실은 80여만원이상에 달하였다. 그후 천보산광산은 또 1년동안이나 생산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튿날 임동자수림속에서 행군할 차비를 하고있는데 보초선에서 련락병이 달려와 적정을 알렸다. 천보산골짜기를 향해 로투구쪽에서 200여명의 일본군이 몰려온다는것이였다. 쳐들어오는 적들은 관동군정예부대인데 최신무기로 장비하고있었다. 아군은 휴식을 포기하고 인차 철수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적들은 화룡현 십리평으로 철퇴하는 아군을 계속하여 추격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들은 산골짜기와 강가에 숙영지를 정하고 여기저기 우등불을 피웠다. 아군은 먼저 소수의 대원들로 밤에 적들의 숙영지를 습격한 다음 진펄로 끌어내여 골탕을 먹이기로 작전했다. 어두운 밤, 10여명 전사들이 여러 패의 습격조로 나뉘여 적진에 돌입해들어가 보초병을 제껴치우고 천막에 접근하여 기관총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에서 적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적들은 대오를 수습한후 산에 올라붙어 총질했으나 습격대원들은 이미 적의 사격권내에서 벗어나 귀로에 오르고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뜰무렵이였다. 적들은 다시 산정으로 돌격해왔다. 그러나 이 산정에는 적을 유인할 소분대만 있을뿐 대부대는 수림을 지나 진펄을 건너고 없었다. 소분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기동령활하게 진펄쪽으로 철퇴했다. 앞에 죽음의 진펄이 펼쳐져있는줄을 감감 모르고있는 적들은 “도쯔께끼!”를 부르면서 미친 듯이 추격해왔다. 그러나 진펄에 들어선 왜놈들은 덫에 갖힌 신세가 되어버렸다. 정강이까지 쑥쑥 빠지는 진펄에서 허우적거릴뿐 용빼는 수가 없었다. 갑자기 진펄 저쪽에서 6정의 기관총이 복수의 불을 내뿜었다. 진펄에 갖힌 왜놈들은 어쩌지 못하고 총알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한놈까지 까눕힌후 아군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면서 유유히 삼림속으로 사라졌다. (계속)  
568    제62장 고난의 행군 댓글:  조회:2028  추천:0  2014-02-19
  1939년 여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조선인장병들. 추위 기아 병마 일만군의 포위공격 이겨내면서 새로운 유격근거지개척 위해 고난의 행군 강행 일제의 “3성련합토벌” 1937년 7월부터 시작한 “3년숙정계획”에 근거하여 일제는 5만여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3강지구에 대한 1년반 동안의 “대토벌”을 감행한후 “치안숙정”의 중점을 동남만지구에 돌리였다. 하여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의 1년반 동안의 “3성련합토벌”을 감행했다. 이번 “대토벌”의 주공목표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이며 주요한 토벌구역은 간도성과 통화성 전체, 길림성 동부인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지와 목단강성의 녕안현이였다. 이번 “대토벌”에 참가한 일만군경은 도합 6만명, 그중 일본군으로는 관동군독립수비대 제5, 제9, 제21, 제7, 제8, 제4 등 6개 대대(후에 제19, 제20대대를 증가)였다. 그외에 각 대대에 20개의 무선전분대와 헌병을 배비, 총 6400여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위만군은 제2군관구보병 제2려, 기병 제2려, 제2교도대, 제8군관구 제1, 제2, 제3혼성려, 제8교도대, 제6군관구 1개 려, 제7군관구 1개려, 제1군관구 보병 제5퇀 및 통신부대와 자동차대 등 도합 2만 5000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경찰대로는 통화성경찰대(10개 대대), 간도성경찰대(5개“토벌”대), 길림성경찰대(14개“토벌”대), 목단강성경찰대, 간도특설부대, 통화성의 9개 현, 간도성의 5개 현, 길림성의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 현과 목단강성의 녕안현 경찰대, 통화, 간도, 길림 3성 및 소속 각 현의 경찰조직과 특별순찰반, 동변도지구의 각 위만삼림경찰대, 위만신경경찰학교 학병대, 위만영구해상 경찰대의 비행기 2대, 및 금주, 봉천, 빈강 등 성의 경찰증원대 도합 3만여명이였다. 일제는 “3성련합대토벌”을 대체상 3개 단계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 4월까지 제1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통화성 각현과 길림성 화전현에 두고 제1로군 총사령부와 경위려 및 제1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1940년 4월부터 9월까지 제2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 안도, 화룡, 왕청, 목단강성의 녕안, 동녕, 길림성의 서란, 빈강성의 오상 등지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2방면군,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1940년 9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제3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 특히는 목단강, 간도, 길림3성 변경지구와 왕청, 훈춘, 동녕, 앵목 4개 현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일제는 미친듯한 군사 “토벌”과 함께 “토벌”구역에서 반동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항일련군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 항일부대에 량식한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통화, 간도, 길림 3성에 예비도로 20여갈래를 새롭게 건설했고 100킬로메터의 전화선을 새롭게 가설했다. “토벌”기간에 일제는 도로와 철도 량켠에 농작물을 심지 못하게 했고 산비탈에 밭을 일구지 못하게 했다. 철도와 도로 량켠에 50메터내의 나무를 모조리 베여버리게 하고 철도와 도로연선에 경위대를 배치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제는 항일련군밀영 2085개를 훼멸해버렸다. 일제는 군사 “토벌”과 함께 “사상토벌”, “문화토벌”도 감행했는데 “토벌”지구에 대량의 “선무”인원을 파견하여 “선무활동”을 하게 했다. 동시에 “토벌”지구에 반공삐리와 색정적인 사진, 음란한 서적과 간행물을 살포하여 항일련군의 사상을 부식시키고 정신을 유혹시키려 했다. 항일련군내부를 분화시킬 목적으로 일제는 항일련군 고급장령을 잡거나 죽이면 상금을 준다고 결정했다. 군급간부의 경우 1만원, 사급간부의 경우 5000원, 퇀장, 참모장의 경우 2000원, 기타 장령은 1000원으로 상금을 정했다. 일제의 발광적인 “토벌”은 항일련군에 참중한 타격을 주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만군에게 도살된 항일군민은 1170여명이 되었고 포로된 사람은 900여명이 되었다. 일제의 “다니전술 ” 1938년 11월 25일,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는 몽강의 남패자에서 제2군 제6사와 회사한후 2군 6사를 정식으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하였다. 김일성이 지휘로 임명되고 려백기가 정위로 림수산이 참모장으로 필수문이 부관으로 림춘추가 의관으로 임명되였다. 직속경위련 련장에 오백룡, 제7퇀 퇀장에 오중흡, 정위에 주재일, 제8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박덕산,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제10퇀 퇀장에 서영이 임명되였다. 병력은 총 500여명이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수많은 지하조직이 파과되였기에 1938년 장백지구의 반일혁명운동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에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산구에 새로운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기 위하여 몽강현 남패자를 떠나 장백현 북대정자로 진격하는 행군을 시작했다. 이번 행군은 적들의 추격과 함께 엄혹한 자연, 극심한 식량난, 무서운 병마가 한데 뒤엉킨 시련과 난관으로 일관된 고난의 행군이였다. 그해따라 추석전에 첫 서리가 내렸고 추석후엔 인차 큰 눈이 퍼부어 초겨울부터 박달나무 얼어터지는 강추위가 들이닥쳤다. 부대는 출발하자부터 적들의 추격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병마와 식량난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 도보로 대엿새면 가닿을수 있는 거리였지만 아군은 무려 110여일의 엄창난 품을 들여서야 행군을 완성할수 있었으니 그 간고성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말치 않아도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행군은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속에서 진행되였는데 적들은 통신수단으로 비행기까지 날리면서 싸움에 열을 올렸다. 적들은 처음부터 검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못살게 구는 “다니전술”(진드기를 일어로 “다니”라고함)을 썼다. “다니전술”은 “토벌대”를 요소마다에 미리 배치해놓았다가 항일련군이 나타나면 치고 또 일단 발견한 항일련군에 대해서는 꼬리를 물고 끝까지 따라가며 소멸한다는 전술이였다. 그 전술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게 하면서 줄창 쫓겨다니며 얻어맞다가 기진맥진해서 녹아가게 하는 악착한 전술이기도 했다. 적들은 서로 교대하면서 아군을 공격했다. 이러한 함정속에 빠진 아군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질줄 모르는 적들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무턱대고 추격만 당하면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자멸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갈지자전법”이였다. “갈지자전법”이란 행군로를 갈지자모양으로 잡아나가는것이였는데 굽인돌이마다에서 되돌아아 앉아 지키고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전술이였다. “갈지자전법”은 눈이 몇갈씩 쌓인 산지에서 뒤따라오는 적들을 무찌르는데 가장 적합한 전법이였다. 그해 겨울따라 눈이 어찌도 많이 내렸는지 앞사람이 눈을 다지며 길을 내야만 행군할수 있었다. 아무리 건강한 대원도 50~60메터만 걸으면 맥이 진해 주저앉군 했다. 어떤 곳은 눈이 너무 깊어 몸을 굴려 다져가며 길을 내야 했고 어떤 곳은 눈굴을 파고 지나가야 했다. 적들은 어차피 아군이 낸 갈지자길을 졸졸 따라오는수밖에 없었다. 아군의 “갈지자전법” 7퇀 퇀장 오중흡은 행군종대의 맨 뒤에서 갈지자모양으로 길이 꺾이는 대목마다 기관총을 휴대한 전투소조를 배치시켰다가 적들이 다가붙으면 사격하게 했다. 적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사이에 매복타격조를 이동시켰다가는 적들이 다시 다가오면 또 답새기군 했다. 적들은 아군이 낸 외통길을 따라오기 때문에 매번 얻어맞는 신세가 돼버렸다. 아군은 드디여 주동권을 쥐고 적을 타격할수 잇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군은 림강현 요구집단부락습격전, 마의하부근전투, 왕가점습격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투를 벌리면서 1939년 정초에 장백현 7도구에 이르렀다. 적들은 갈수록 더 많은 “토벌”대를 내몰아왔다. 적기가 아군의 행방을 찾느라고 자주 돌아치기 때문에 우등불초자 맘대로 피울수 없어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끊임없는 행군이 이어지다보니 걸으면서 잠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군의 행방을 탐지한 적기가 지상부대에 련락을 주어 “토벌대”를 행군종대에 벌떼처럼 달려들게 하였다. 앞에도 적이요 뒤에도 적이요 하늘에도 적이였다. 급박한 관두에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앞에서 달려드는 적은 기관총소대가 무찌르고 뒤로 달려드는 적은 7퇀이 막고 나머지 대원들은 측명돌파로 포위속에서 빠져나가게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위험한 고비는 요행 모면했지만 노상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였다. 이에 큰 병력의 집단행군이 여러모로 불편함을 간파한 부대는 분산행동으로 넘어갈 것을 결정했다. 부대는 세 개의 방향으로 분산하기로 했다. 지휘 김일성이 경위련과 기관총소대를 이끌고 청봉밀영을 거쳐 가재수방향으로 나가고 오중흡의 7퇀이 장백현 상강구일대로, 8퇀과 기타부대가 무송현 동강일대에로 나가기로 했다. 부대가 분산되자 집중타격의 성화는 덜 받게 되었으나 식량난만은 어쩔수 없었다. 김일성은 부대를 이끌고 굶으면서 청봉방향으로 행군했다. 먹을것이 없어 전부대가 아사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봉부근에서 난데없는 가을하지 않은채로 남아있는 조밭을 발견하게 되었다. 눈속에 파묻혀있는 조이삭을 보고 대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형을 살펴보니 봄에 부대가 신태자밀영으로 가면서 씨붙임을 한 조밭이였다. 지난봄, 부대전사들이 여기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을 보고 봄씨붙임을 하느라고 밭에서 일하던 농민들이 허둥지둥 어디론지 달아나버렸다. 아마 항일련군을 일본군“토벌”로 생각하고 도망친 것 같았다. 밭임자가 가을에 와서 곡식을 거두어가게 하자고 조를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 밭의 조가 가을을 하지 않은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눈무지속에서 한이삭두이삭 힘들게 따낸 조이삭을 찧어 죽을 쒀먹었다. 그러나 그 좁쌀마저 인차 거덜이 났다. 이제 식량을 구할수 있는 방도는 청봉밀영에 가서 감자를 한배낭씩 얻어가지고 가는 것뿐이였다. 그러나 적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감자밭에 이르러보니 감자는 이미 다 파가고 없었다. “토벌대”는 어느새 뒤에까지 따라와서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부대는 골짜기를 버리고 벌판쪽으로 내려간후 날이 저문 틈을 타서 강행군으로 멀리 빠져나갔다. 강행군 도중 삼림부대병영을 만나 돌격해들어가보니 놈들은 이미 다 도망쳐버리고 금방까지 음식을 먹던 자리가 그대로 있었다. 대원들은 식탁우에 푸짐히 차례져있는 음식을 배낭에 챙겨넣은후 뒤쫓아오는 적들을 따돌리고 부후물등판으로 피해버렸으나 또다시 추격에 들고 말았다. 적들은 건빵 한 개 먹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달라붙었다. 대낮에 버젓이 들판 지나 지휘 김일성은 부대로 하여금 추격해오는 적을 뒤꼬리에 단채로 한바퀴 돌자면 하루걸음이 잘되는 부후물등판두리를 빙빙 돌게 하였다. 한 두어비퀴 돌았을 때 새로운 “토벌대”가 나타나 아군과 뒤따르던 본래의 짝패들 짬에 끼여들었다. 서로 련계가 없는 두 무리의 적이 겹쳐서 추격하는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를 타 부대원들은 흰천으로 몸을 감싸면서 감쪽같이 옆으로 빠진후 숲속에 숨어버렸다. 맨 뒤에서 추격해오던 적들은 앞의 대오가 항일련군인줄 알고 사격을 가했다. 이에 적들은 저들끼지 숱한 주검을 내면서 생사결단하고 맞붙고말았다. 이번엔 적들이 심산에만 주의를 돌리는 틈을 타서 아군은 적들의 눈길이 덜 쏠리는 야산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행군이 간고할수록 도주자가 생겨나는 것이 막심한 문제였다. 도주자들은 인차 적에게 투항한후 항일련군의 종적을 일러바쳐 다시 추격, 혹은 포위속에 빠져들게 했다. 심산을 버리고 가재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은 헌헌한 벌판이였다. 그러나 적들은 포대에서 아군을 빤히 내려다보면서도 건드리지 못했다. 주력이 산에 가 있다보니 부락에는 력량이 얼마 없는데다가 아군의 기세가 하도 당당해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아군은 대낮에 벌판을 버젓이 지나 수림지대로 들어가 밥도 해먹고 휴식도 할수 있었다. 수림지대를 벗어나 다시 행군하고있을 때 적들이 뒤에서 추격해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후 척후병들이 앞에도 적이 있다고 알려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일본군이고 앞에서 마주오는 것은 만주국부대였다. 아군은 적은 병력으로 뒤를 견제하게 한후 아무멋도 모르고 마주오고있는 위만군부대를 무찌르면서 포위를 돌파하려고 작전을 짠후 전투에 달라붙었다. 경위련장 오백룡이 맨 앞장에 서서 부대를 이끌고 마주오는 적들을 향해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만주국부대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자 굉장한 부대와 맞붙은 줄 알고 배낭이며 짐짝들을 다 내던지고 꼬리빳빳이 퇴각했다. 아군은 적들이 던진 배낭들에서 먹을 것을 걷어서 걸머지고 꿰진 신발까지 갈아신고 대통로있는데까지 맹추격했다. 드디여 분산행군하던 각 부대가 3개월남아되는 간고한 행군을 거쳐 북대정자에서 회사하게 되었다. 북대정자는 온통 축제마당으로 되었다. 100여일동안이나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난대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고 뒹굴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1939년 4월, 김일성의 주최하에 장백현 북대정자에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반년래의 유격활동의 경험교훈을 총결하고 금후의 활동방향을 연구, 필요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타격하기로 결정했다.(계속)  
567    제61장“로령회의”와 “혜산사건” 댓글:  조회:2248  추천:0  2014-02-18
출전을 앞둔 항일련군 장병들. 타락분자 비겁분자들 적에게 투항하고 반일조직  항일련군 엄중한 파괴  당해 “제1차로령회의” “로구교사변”후 항일련군 제1로군은 영용히 싸워 일제의 부단한 “토벌”을 분쇄했지만 항일유격근거지도 크게 파괴되였으며 항일련군도 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항일련군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인 위증민은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후의 국내외형세와 동북항전의 새로운 형세를 연구한후 1로군의 투쟁방침과 임무를 확정하려고 총사령원 양정우와 회합할 것을 기획했다. 이에 양전우는 제1군 군부 및 직속부대를 이끌고 환인에서 북상하여 집안에 이르고 위증민은 제2군 주력부대를 이끌어 남하하여 집안의 로령에서 만나기로 했다. 1938년 5월 상순, 위증민부대와 양정우가 거느린 제1군 군부가 집안의 로령산구에서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오도구밀영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군정간부회의가 소집되였다. 이번 회의를 세칭 “제1차로령회의”라고 한다. 회의에는 양정우, 위증민, 양준항, 한인화, 황해봉, 진수명, 서철, 려백기, 이준산, 송무선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전국과 동남만의 투쟁형세를 분석하고 항일유격전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였으며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들의 전면적인 진공을 분쇄” 할 방침과 책략을 채택, 금후의 유격운동의 방향문제를 토의하기도 했다. 회의에서 양정우가 관내의 팔로군과 련계할 문제와 동북항일련군 각 부대의 배합작전문제를 제의했다. 양정우의 제의에 따라 중공중앙과 팔로군과의 련계를 계속하여 추진하기 위해 다시 서정하기로 결정, 제1군 제3사가 서정을 선행하기로 했다. 그뒤를 이어 제1군 제1, 제2사가 따르기로 했다. 각 항일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위해 제2군 제4사, 제6사는 계속하여 통화지구에서 유격활동을 벌리기로 하고 제5사는 의연히 수녕지구에서 활동하면서 길동, 북만지구 항일련군들과 련락공작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제1로군 개편 로령회의의 정신에 좇아 제1로군 각 부대는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양정우가 이끄는 서부원정부대는 움직이자마자 적의 대포위에 들어 말할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제1군 제1사 사장 정빈이 적에게 투항했다. 원래 양정우가 제1군 군부와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환인을 떠난후 본계, 환인, 관전, 봉성일대의 투쟁형세는 급격히 악회되였던 것이다. 적들의 군사“토벌”, 경제봉쇄, 정치유항(诱降)의 지독한 정책에 의해 항일대오중의 견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동요해버리고말았던 것이다. 1938년 2월 13일, 일제의 “장도공작반”과 “흑기유격대”가 갑작스레 환인현 우모구 서차밀영을 습격했다. 남만성위 선전부 인쇄주임 반제(원명 김영호) 등 5명이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제1군 참모장 안광훈이 체포된후 별절해버렸다. 안광훈은 변절한후 적들에게 제1군의 중요한 기밀을 제공했다. 안광훈의 공술에 의해 적들은 2월 25일, 환인현 쭈무타이즈에서 제1군 정치부 선전과장 겸 남만성위 비서처 편집주임 박세창을 체포했다. 3월 6일에는 환인현 우모대산에서 남만성위 청년부장이며 항일구국청년단 남만총회 서기인 류좌건을 살해했다. “장도공작반”은 교란을 목적으로 변절자 안광훈, 후국신 등더러 여러차례 제1사 사장 정빈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한편 “흑기유격대”는 군사적진공을 가해왔다. 적들은 6월 8일, 제1사 근거지의 포석하에까지 진공해왔다. 정빈은 부대를 거느리고 관전, 환인, 본계로 이동하면서 여러 차례 적들의 타격을 받았다. 6월 29일, 정빈은 본계에서 “장도공작반”의 투항서를 접수한후 투항을 견결히 반대한 1사 6퇀 정위 리철수, 1사 정치부 보안련 정위 김종한 등 지휘원들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수하 29명과 함께 적들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제1군에는 심각한 난국이 조성되고말았다. 제1군은 물론 전반 항일련군 제1로군의 군부서, 부대건제(建制), 지휘원들의 활동경로와 부대의 활동구역, 전략전술, 군수물자원천, 소속부대의 번호, 밀영설치의 비밀 등을 잘 알고있는 정빈의 변절은 1군에 있어서는 참으로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정빈은 투항후 두말할 것 없이 이 모든 것을 적들에게 일일이 교대했다. 정빈의 투항으로 하여 1군의 서부원정계획은 더구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정빈의 투항으로 엄중한 손실을 받은 중공남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1938년 7월중순, 양정우, 위증민, 방진성, 이준산, 서철, 한인화, 황해동, 양준항, 려백기, 손무선, 리흥소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재차 집안의 로령에서 긴급회의를 개최, 정빈이 변절한후 정세에 좇아 1로군의 전반 항일투쟁에 대해 다시 연구했다. 회의에서는 일부대오를 남겨 로령산구에서 계속 유격전을 견지하게 하고 주력부대는 룡강산맥의 하리와 화전, 몽강 등 산악지대로 이동하면서 서부원정계획을 취소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제1로군의 군과 사의 체제를 취소하고 총사령부의 통일적인 령도하에 한 개 경위려와 3개 방면군으로 재편성, 각 부대의 작전지역을 새로 획분할데 관한 중요한 결정을 짓기도 했다. 1938년 7월말, 원 제 1, 2군 교도퇀과 2군 독립려를 합병하여 사령부경위려로 편성, 양정우의 직속령도를 받게 했다. 려장에 방진성이 맡고 정위에 한인화가 맡았다. 독립려의 병력은 도합 500여명이였는데 주요하게 금천, 몽강, 집안일대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동년 8월 50여명으로 된 소년철혈대를 무어 총사령부의 활동에 밀접히 배합하게 했다. 8월, 제1군 2사와 2군의 부분적 병력으로 금천현 곰골에서 제1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에 조아범, 정치부 주임에 이준산, 참모장에 윤하태가 맡고 아래에 한 개 퇀과 한 개 기관총반을 두었다. 병력은 약 250명, 집안, 림강, 통화, 금천, 휘남, 몽강 등지에서 활동했다. 11월, 몽강현 남패지에서 원 제2군 6사로 제2방면군을 편성하였다. 지휘에 김일성, 정치부 주임에 려백기, 참모장에 림수산이 맡았다. 아래에 2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50여명, 장백, 무송, 몽강, 림강, 화룡, 안도, 연길, 훈춘, 왕청 등지에서 활동했다. 1939년 7월말 돈화현 한양구(지금의 안도현경내)에서 원 제2군 4, 5사가 합병하에 제3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에 박덕범이 맡았다. 아래에 3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 연길, 왕청, 훈춘, 돈화, 액목, 교하, 녕안, 오상, 서란 등지에서 활동했다. “혜산사건” 중공당원인 권영벽은 1935년 조국광복회가 설립된후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30여명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장백현에 파견되여 장백현조국광복회를 조직했으며 조국광복회의 우수한 회원들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여 당조직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드디여 1937년 중공장백현위를 건설, 제1임 현위서기를 맡았다. 7월, 장백현 17도구에서 제1차 중공장백현위원회를 소집, 군중을 발동하고 항일련군의 항일투쟁에 배합하여 일만군의 병툰계획을 파괴하는 등 투쟁방향을 명확히 했다. 간고한 나날 중공장백현위는 전 현 각급 공산당조직과 당의 외각조직, 광범한 인민군중을 조직, 령도하여 항일을 선전하고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발리였다. 중공장백현위의 이러한 반일활동은 적들에게 큰 위협이 아닐수 없었다. 적들은 “장백특무공작대대”를 무어 사처에 특무를 파견하여 정보를 탐지했다. 적들에게 걸려든 김태국은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 몇 대를 맞고는 권영벽이 17도구에 있다는 것을 인차 고스란히 섬겨바쳤다. 9월의 어느 깊은 밤 조선 혜산의 일본경찰들은 감쪽같이 17도구에 기여들어 권영벽과 서응진을 체포했다. “혜산사건”은 이렇게 막을 열게 되었다. 김태국의 고발에 의해 벌써 권영벽, 리제순, 박인진 서응진, 박록금 등 수많은 핵심인물들이 검거되게 되었다. 제1차 검거를 통하여 적들은 장백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가두고 수사의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건너 갑산일대에까지 마수를 뻗치였다. 하여 중공장백현위와 장백현조국광복회는 마비되거나 해체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마동희와 장증렬이 체포되였는데 마동희는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스스로 끊으면서 투쟁을 견지한 반면 장증렬은 곤장맛을 몇 개 보기 바쁘게 인차 자기가 아는 밀영들과 지하조직들을 다 불었다. 그는 자기가 관여한 조직들을 다 공개하였고 장백현의 상강구와 중강구 관하에서 자기와 련계를 맺고있던 반일혁명조직의 지도핵심성원들을 다 불었으며 항일부대와 밀영의 위치까지도 아는것대로 대주었다. 그리고 경찰들을 데리고 19도구 아지트에까지 와서 지태환과 조개구를 체포하게 하였다. 조개구도 장증렬처럼 변절하고 말았다. 조개구는 재봉대가 자리잡고있는 간판하자밀영에 경찰들을 안내하여 재봉대원들 전원이 희생되게 했다. 이번 사건에서 수많은 중공당원, 조국광복회 회원, 반일인사들이 체포되였는데 일제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만 하여도 167명이나 된다. 일제는 이들의 “죄”를 158페지의 판결서로 렬거, 전원이 “치안유지법위반”이고 그 외에 주택침입, 강도, 살인, 살인미수, 방화, 공문서웨손, 우편법위반, 전신법위반, 총포화약류취체위반, 출판법위반, 륙군형법위반, 군기보관법위반, 법인을 감추고 비호한 죄 등 되도록 중하게 하기 위하여 갖은 죄명을 다 들씌웠다. 이번 사건을 통하여 적들에게 압수된것으로는 기관지 “火田民” 제1호로부터 7호까지, 비밀출판물 “朝鮮共産主義者의 任務”, “同志여 團結하라!”, “日中戰爭과 朝鮮靑年의 任務”, “國際뉴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 10여종, 무기로서는 권총, 탄약, 단도 등이였다. 이러한 죄목으로 일제는 1941년 8월 28일, 167명에 대해 판결했는데 권영벽 등 6명을 사형에, 박금철 등 4명을 무기징역에 처했다. 그 외에 15년징역에 4명, 13년징역에 6명, 12년징역에 9명, 10년징역에 18명, 8년징역에 14명, 7년징역에 7명, 6년징역에 4명, 5년징역에 8명, 4년징역에 10명, 3년 6개월 징역에 7명, 3년징역에 48명, 2년 6개월 징역에 5명, 2년징역에 16명이 언도되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결국 중공장백현위와 조국광복회의 지도기관은 철저한 파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금후 항일련군의 군사활동에 엄중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계속)  
566    제60장 피눈물의 이민생활 댓글:  조회:2534  추천:0  2014-02-16
  1941년 연길현(지금의 안도현) 명월구 도안촌의 개척민부락. 속임수에 걸려들어 강제이주되여온 조선 이주민들 “출하”  임무 완수 못하면 근로봉사에  끌려가기도 일제의 강제이민 “조선인의 동북에로의 대량적인 이주는 1931년 ‘9.18’사변이후로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14년간인데 이 시기를 개괄하여 강제이민시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14년을 또 3개 시기로 세분할수 있는데 1931년부터 1936년까지는 ‘통제이민’시기이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집단이민’시기이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개척이민’시기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일제의 강제이민에 대한 분석이였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의 통제이민시기에 일제는 동북에서의 저들의 식민통치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자 동북의 농업자원을 더 략탈하기 위하여 조선의 파산농민들을 대량적으로 동북에 이주시켰다. 1936년 8월, 일본관동군은 괴뢰만주국정부를 사촉하여 이른바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제정했다. 이 요강에 의하면 조선으로부터 해마다 1만세대 5만여명의 조선파산농민을 동북에 이주시키며 조선인 이민의 이주구역을 간도 및 동변도의 23개 현(1938년에는 19개 현을 더 확대하여 39개 현)으로 제한하며 중쏘변경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인농민을 강압적으로 지정한 구역에 이주시키는것이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의 서울에 조선이민경영기구인 “석만척식회사”를 세우고 괴뢰만주국의 신경(장춘)에 그의 집행회사인 “만석척식유한주식회사”를 세운후 새 이주민과 기주민들에 대한 통제와 집결, 그들에 대한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했다. 1937년 3월부터 만석척식회사는 연변지구의 왕청, 연길, 안도 그리고 료녕성 영구지구에 2339호, 1만 2149명의 이민을 수용하여 35개의 집단부락을 세웠다. 그리고 북만, 특히 중쏘국경지대에 산재하고있거나 류랑하고있는 조선인들을 “국방과 치안의 수요”라면서 영구, 류하, 환적, 왕야묘, 대함창 등 5개 지구에 집중시킨후 1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1016호의 4338명을 수용하였다. 1937년 일제는 수전경작을 위주로 하고있는 조선남부의 경기도 외 6개 도에서 2500호의 농호를 이민으로 선정하고 간도성과 봉천성 연구현구역에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1938년 7월에는 남만과 북만에 16개 이민현을 더 증가하였다. 1939년 12월에는 39개 현에만 이주하게 하던 규정을 철수하고 전 동북을 다 이민지점으로 확정하였다. 1940년 8월까지 만선척식회사에서는 1만 3897호의 6만 1421명의 “집단, 집합이민”을 받아들여 동북 각지에 23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였다. 조선이주민은 1940년부터 북만을 중심으로 6450호, 1941년에는 2725호, 1942년에는 3462호 이주하여왔는데 1942년 12월말까지 동북의 조선인 인구는 151만 6000명, 1943년 6월에는 163만 3220명, 1944년 4월에는 165만 8572명, 동년 9월에는 175만 492명, 1945년 광복까지 약 210만명으로 증가되였다. 1940년 6월 일본인 이민경영을 담당하던 만주척식회사와 만석척식회사를 합병하여 “만주척식공사”로 개편하고 동북경내의 이주민과 이주사업을 통일적으로 관리하였다. 특히 1941년부터는 나날이 확대되는 저들의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농지조성계획”, “긴급농지조성계획”을 세우고 동료하, 제2송화강지구를 위주로 하는 동북 간지의 대소가경지를 개간하기에 광분했다. 조선이주민이 증가함에 따라 동북지구의 수전경작도 신속하게 확대회였는데 1935년 전 동북의 수전면적은 3만 5353헥타르에 벼산량은 8만 3517톤이던데로부터 1940년에는 수전면적이 8만 9134헥타르, 벼산량은 16만 5589톤, 1944년엔 수전면적이 다소 축소되여 8만 1108헥타르였으나 벼산량은 19만 124톤으로 증가되였다.   야만적인 “량곡출하제”   일본으로 략탈해가는 동북의 특산물. 일제는 “만주농업이민 100만호계획”을 조작하고 20년동안에 일본인 100만호, 500만명을 동북에 이민시키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일제통치자들은 이주조선인을 통제하고 집결시키고 조선농민을 강제로 동북지방에 이주시키는 외에 위만정부와 결탁하여 조선농민들이 일군 토지를 함부로 략탈하여 일본개척단에게 주었다. 1936년 8월부터 1941년 3월까지 괴뢰만주국정부와 “만척”에서 략탈한 토지면적은 연변에서 1207.6헥타르, 목단강성에서 17만 3850헥타르, 안동성에서 2102헥타르나 되었다. 인구가 적은 개척단이 많은 토지를 점하고있어 부분적토지를 조선인농호와 한족농호에 소작주기도 했다. 하여 조선인농민과 기타 여러 민족 농민들은 일본개척단의 소작농으로 전락되기도 했다. 특히 “7.7”사변후 일제는 농민들에 대한 고리대착취를 다그쳤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은 대부금과 변돈을 갚을수가 없어서 자작농으로부터 일제식민지회사의 소작농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는 이른바 “략곡출하제”와 “식량배급제”로 동북의 여러 민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량곡출하”란 농민들이 일년내내 뼈빠지게 가꾸어 타작한 알곡을 최대한으로 략탈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거두어들이는것인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후에는 “결전징수방책”을 실시하여 동북의 량곡을 철저히 징수하려들었다. 지어는 무력적으로 농민들을 강박하여 량곡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는 이른바 “보은출하”로 량곡을 더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수전을 경작하는 조선인들은 벼를 몽땅 바친후 잡곡을 사서 먹게 했다. 일제는 최고한도로 생산량을 내오고 최저한도로 백성들의 배급을 줄이면서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려 미쳐 날뛰였다. 위만관리들과 경찰들은 출하기간이면 농호에 뛰여들어 온 집안을 휘딱 뒤지면서 어디에다 량식을 감추지 않았는가 수색하기가 일쑤였다. 촌공서의 관리나 경찰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쌀뒤주를 들추고 심지어 작대기에 색대를 맞추어 짚가리, 나무가리, 구들고래안, 지붕과 변소까지 들추었는데 일단 량식을 감춘 것이 드러나는 날이면 마구 때리고 붙잡아갔다. 연길현 구수하 영창동골안에서 산 박로인의 일제출하에 대한 구술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구수하 영창동에는 33호가 살고있었는데 말짱 길주, 성진, 명천 사람들이였다. 바심이 끝나면 촌공서와 분주소의 순사들이 나와 출하량을 매호에 정해주고는 아무 때까지 바치라고 하였다. 굶어죽어도 완수해야 했는데 완수하지 못하면 감옥에 붙잡혀갈판이였다. 대동아전쟁이 폭발한 뒤 더 혹심해졌는데 한번 바치고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있는대로 바쳐야 했다. 순사들이 다 긁어가면 끼니거리가 떨어지니깐 동네사람들은 순사들이 눈을 피해 골안에 찾아가 김치움처럼 굴을 파고 쌀독을 거기에 넣어두었다. 쌀독에 조, 옥수수, 콩, 보리, 수수 따위의 걷곡을 채워넣고 뚜껑을 잘 덮고는 흙으로 묻어버린 뒤 나무검불로 눈가림을 해놓았는데 그렇게 하고서야 분주소의 순사나 총공서의 관리들의 수색을 요행 피면해서 그걸고 겨울을 나고 밭갈이철에 씨종자로 할수 있었다. 그런데 출하를 완수하지 못해서 매맞고 구류당한 사람이 있었다. 반작을 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로 공출하는 출하는 고사하고 처음 출하도 완수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 동네에 전조감이라는 량반이 있었는데 이미 일흔고개를 넘기고있었다. 어느해인가 그 량반댁에서 출하를 완수하지 못하자 분주소의 왜놈순사가 그 량반을 차렷을 시켜놓고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면상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출하를 완수못하였거나 량식을 감춘 것이 발각되여 얻어맞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축이였고 그보다 무서운 것은 근로봉사에 끌려가는것이였다. 놈들은 출하를 완수하지 못한 사람과 량식을 감춘 사람들을 근로봉사에 보냈는데 촌공서의 사무원이 분대장으로 되어 사람들을 끌고 갔다. 근로봉사에 끌려간 사람들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근로봉사에 나가서 죽은 사람이 하도 많았기에 근로봉사에 나갈 때면 모두들 죽는다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1941년부터 주민들의 식량표준을 최대한 제한하는 “배급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농민들은 피땀으로 벼농사를 지었지만 쌀은 한알도 입에 대보지 못하고 털어바치였으며 그대신 보리, 감자, 옥수수 같은 잡곡을 타다가 끼니를 에워야 했다. 도시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이 이밥을 먹다가 밀정이나 주구에게 발각되면 “경제범”으로 몰려 징벌을 받았다. 기짓말에 속히워 온 이민들 ㅡ만주는 땅이 흔하고 농사가 잘된다. ㅡ로자는 물론 첫해의 량식, 종자 등을 선대해준다. ㅡ소, 수레, 농기구도 선대해준다. ㅡ몇해만 부지런히 일하면 자작농으로 될 수 있다. ㅡ지금 거처할 집까지 지어놓고 당신들을 기다린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을 듣고 조선의 파산농민들은 땅이 흔하고 기름지다는 만주에 가 팔자를 고쳐보자고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지정해준 목적지에 도착해보면 집까지 지어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새빨간 것짓말이였다. “놈들에게 속았구나!” 격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어디 가서 해볼데도 없었다. 하여 울며겨자먹기로 눌러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득불 한족농민들 집에 얹혀살거나 거의 찌그러가는 방앗간, 고간 같은 데를 빌어 대수 손질하고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고향을 떠날 때만 하여도 만주의 허허벌판 어디엔가에서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지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다수 농민들이 정작 도착한곳은 지세가 높은 산골같은데였다. 만선척삭회사에서 첫해에 종자와 식량, 농쟁기를 살돈을 선대해주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로 종자값과 선대한 돈 그리고 거기에 붙은 리자까지 갚아주어야 했다.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이민들은 봄갈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집단이민에 대한 다큐멘터리사진촬영을 목적으로 5년간 심층조사를 벌려온 촬영가 리광평씨가 처음으로 발견한데 의하면 만선척식회사에서는 1935년 음력 3월 연길현 6구 대말리구 남하마탕에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200세대 농민들을 사기수단으로 끌어들여 시험적으로 조선인집단이민부락을 세웠다고 한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에 넘어간 조선인농민들이 어찌 이들뿐이겟는가. 1937년 봄부터 경상북도의 문경, 상주, 봉화, 안동, 려천 등지에서만도 400~500호가 왕청현 동신향 전각류, 태양촌 등지에 이민으로 왔고 라자구에는 1937년 가을부터 1938년 봄까지 600호, 1940년에 100호가 거짓말에 속아 들어왔다. 지금 연길에 살고있는 금년(2005년)에 83세의 채도식씨의 고향은 경상북도 산양면 현리 문경군에 있었는데 고향에 일가친척이 70여호나 있었다. 조실부모한 채도식씨는 백부님과 함께 고농살이를 하다가 팔자를 고쳐보려고 1938년 2월 27일 아침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기차역까지 배웅나오섰던 백부님이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통곡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기차에는 채도식씨처럼 고향을 등진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기차가 떠나자 렬차안은 울음바다로 되고말았다. 눈물과 한숨을 가득 실은 기차는 추풍령을 넘어 근 50시간을 달려 3월 1일 아침에야 도문에 들어섰다. 거기서 좀 멈춰섰던 기차는 다시 떠나 아침 9시경에 대흥구에 도착하였다. 대흥구에서 하루 쉬고 3월 2일 이른아침에 트럭을 타고 눈이 하얗게 깔린 산골을 100여킬로메터나 달려, 그것도 50킬로메터나 되는 무인지경을 경과하여 목적지인 사도하자 집단부락에 도착하였다. 집단부락주위에는 높다란 흙담을 쌓았는데 담밖에는 한길 넘는 해자를 파놓았고 동서남북 네곳에 대문을 달고 경찰의 감시밑에서 자위단원들이 보초를 서고있었다. 라자구에 이민으로 온 집들은 1937년 가을에는 150호, 1938년 3월에는 450호였는데 모두 6개 집단부락에 나뉘여 살았다고 한다. 집단부락과 집단부락들사이는 3~5킬로메터 되었는데 후에는 이민들이 너무 많아 한족부락에 나뉘여 살게 되었다. 채도식씨 일가는 한족집 곁방에 거처했었는데 6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방에 여섯 식솔이 들었다. 좁은 방에 크고 작은 가장집물을 놓고나니 발펼 자리도 없었다. 급선무는 봄갈이전에 집을 짓는것이였다. 3월말부터 언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4월초가 되어도 땅이 녹지 않아서 벽을 쌓을 수가 없었다. 토피를 만들자면 밭갈이전에 집을 못다 지을 것 같아서 큼직큼직한 흙덩이를 떠다가 개암나무로 엮어가며 벽을 쌓았다. 4~5일사이에 전부락에 흙집들이 세워졌다. 이런 집에 구들을 놓고 거적으로 문을 달고 이사를 했다. 이사온 첫날밤에야 여섯 식솔이 오래만에 다리를 펼고 쉴수 있었다. 구들이 뜨뜻했지만 갓지은 흙집이라 누기가 몹시 찼고 초벽을 못한 병에는 구멍이 숭숭하여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 봄눈이 내리면서 바람이 불었다. 방안으로 눈이 날아들어와 덮은 이불이 축축이 젖었다. 그래도 이게 내집이라 생각하니 추운줄 몰랐다. 봄갈이가 시작되였다. 만선척식회사에서 봄갈이전에 매호에 소 한 마리씩 대부해주기로 했는데 소들을 미처 사들이지 못하였다. 요행 사온 소들가운데는 너무 어려서 아직 쟁기를 메울수 없는 소들도 있었다. 하는수 없이 네댓집에서 겨리를 무어 한전 씨붙임을 하는 한편 논을 풀었다. 보를 막고 물길을 째고 논에 물을 대였다. 채도식씨네 집에는 땅이 두쌍 차례졌는데 씨붙임을 제때에 할 것 같지 못해 온 식솔이 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오곡과 남새를 심었다. 그야말로 별을 이고 나가 달을 이고 들어오면서 죽을둥살둥 일에 달라붙었다. 일이 고되고 수토가 맞지 않아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애벌김이 끝난 7월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질에 걸려 고생하였다. 그때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름에 보리를 조금 거두었다. 가을에는 벼, 조, 옥수수, 기장, 콩, 감자 등도 거두어들였다. 1941년부터 생활이 다소 안정되였으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게 되자 통제는 더욱 심해졌다. “출하”제가 실시된후부터는 왜놈들이 입쌀을 몽땅 빼앗아가는바람에 명절때나 잔치와 같은 경사에도 입쌀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래도 집짐승들을 길러 팔아서 아이들 월사금을 물고 비누, 소금 같은 것을 살수 있었으나 이젠 먹이가 없어서 짐승을 기를수도 없게 되었다. 1943년 여름에는 황충이 성해서 곡식잎들이 황충에게 다 갉아먹히워 버렸다. 산전에 심은 곡식들은 곰과 메돼지들이 덮쳐들어 모조리 절단내는 바람에 그해 농사는 거의 페농이 되다싶이 되었다. 그래서 그해의 “출하”임무를 완수할수 없었다. 그러자 놈들은 경찰을 풀어 집집을 수색하여 낟알을 몽땅 략탈해갔다. 이밥을 먹거자 입쌀을 감추어 두었다 들키는 날이면 경찰서에 끌려가 물매를 맞기가 일쑤였다. 마을에 김영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밥을 먹다가 경찰놈들에게 들켜 석달동안이나 류치장신세를 졌다. “출하”를 바치면 돈을 주기는 했으나 그 돈으로 빚을 갚고나면 옷감이나 신을 살 돈도 없었다. 그리고 “출하”량에 따라 천을 주기로 되었는데 그것마저 관리놈들이 잘라먹다보니 실지 농민들에게는 별로 차례지지가 않았다. 1944년에 들어서서는 입을 옷이 없어서 이불을 뜯어 옷을 해입었고 이불솜으로 무명천을 짜서 여름철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떤 집에서는 여자들이 밖에 입고 나갈 치마가 없어서 치마 하나를 번갈아입었다. 그해 겨울에 권도찬이라는 27살나는 청년이 홀옷바람에 나무하러 갔다가 그만 얼어죽고말았다. 채도식씨가 겪고 본 이민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은 그때 가는곳마다에서 펼쳐졌다.(계속)  
565    제59장 일제의 황민화정책.2 댓글:  조회:2250  추천:0  2014-02-16
일본경찰서의 조사를 받고있는 조선인젊은이들. “황국신민의 선서” 외치면서 천황에게 충성맹세 “창씨변경세칙”  강요로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 “황국신민의 선서” 1940년 5월, 부의는 두 번째로 도꾜에 불리워가 일본천황을 배일한 다음 천황이 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를 신경(장춘)에 세운 건국신묘에 가져다가 “건국신”으로 모시게 했다. 하여 동북지방을 완전히 일본 판도에 그어넣고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철저히 일본신민으로 전락시키려고 광분했다. 매일 아침조회시간이면 교직원과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일본 황궁과 만주국 제궁에 요배하며 일장기를 띄우고 “황국신민선서” 혹은 “국민훈”을 암송하는 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정오에는 장소와 교수시간에 관계없이 일본천황과 만주국황제의 안녕을 빌면서 일제침략자들의 “승전” 및 죽은자들의 “명복”을 비는 “정오묵도”를 하게 했다. 학생들은 신사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모자를 벗고 절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하기만 하면 마구 때리고 가장 품행이 나쁜 학생으로 치부하여 낙제 혹은 퇴학까지 시켰다. 때론 경찰이나 헌병에게 고발하여 체포하고 유치장에 집어넣기도 했다. “당시 나는 길림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강요에 진절머리가 났더랬습니다. 방학이 되어 연변에 와보니 여기는 길림보다 엄청 더 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연변은 완전히 일제의 황민화정책의 그늘에서 시달리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벌어지고있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학교마다에서는 첫 상학종이 울리면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킨후 “규죠요하이(官城遥拜)”를 해야 했다. 선생이 “덴노헤이까니 다이시데 사이게례(천황페하에게 최경례)”하고 웨치면 학생들은 동쪽을 향해 “사이게례”를 한다. 그다음 “고데이헤이까니 다이시데 시이게례(황제페하에게 최경례)”하면 서쪽 신경을 향해 90도 경례를 한다. 구죠하이가 끝나 선생이 “고고구신미노지까이(황국신민의 선서)”라고 하면 학생들은 목청을 높여 일제히 “황국신민의 맹세”를 외운다. 중학생이면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워야 한다. “황국신민의 선서”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쳐서 천황페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의 서사” 성인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겠다. 2.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겠다. 3.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겠다. “황국민의 맹세(서사)”가 끝나면 아메데라스 오미가미를 향해 묵도하면서 “대동아전쟁에서 어서 승리하여주옵소서”라고 빈다. 아침조회가 끝나 교실에 들어가서 급장이 “일만기를 향해 경례!”하고 소리치면 학생들은 일만국기에 15도경례를 한다. 그제야 제자리에 앉아 하루수업을 시작할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을 때면 밥곽을 책상우에 놓은후 급장이 “하시오도례” 하고 길게 빼면 저가락을 두 엄지손가락과 식지사이에 끼워들고 “저가락 들면 천지의 은혜와 부모와 시조의 은덕을 새기며 먹겠습니다”라고 외우고나서 밥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 급장이 다시 “하시오도례”라고 하면 저가락을 두엄지와 식지에 끼워들고 “고찌소사마”를 외운다. 일본말사용과 이런한 “맹세”같은 것을 도시주민과 농촌농민들에게도 강요하였다. “황국신민의 서사”같은 것은 50세이하의 사람이면 왕왕 외워야 했는데 아니면 거리에 나설 궁리를 말아야 했다. 일본경찰은 길가는 청장년을 세워놓고 “오마에고, 고꾸신민노지까이오요메!(너 황국신민의 맹세를 읽어봐!)”라고 명령하는데 조금이라도 꺽꺽거리거나 외우지 못할 경우 “바가야로, 우찌니가에레!”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서 귀쌈을 후려갈긴후 집으로 되쫓아보내여 다시 외우게 했다. 불복하면 신분증을 빼앗는데 이것은 매맞는 일보다 더 무서웠다. 신분증이 없으면 외출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자칫하면 “공산비적”이로 몰리기 때문이다. 또 빼앗긴 신분증을 빼앗은 순사를 찾아가서 손이야발이야 빌고서야 겨우 찾을수 있었다. 하여 학교문턱을 가로타보지도 못한 일자무식의 농민들도 생계를 위해 일본말을 배우고 “맹세”를 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족농민들의 황민화를 단속하기 위하여 일제는 시가지로 드나드는 어구를 지키기도 했다. 연길현 조양천에는 고바리소좌가 거느리는 261부대가 있었는데 이자들은 늘 조양천으로 드나드는 큰길어구를 지켰다. 삼봉동농민들은 조양천으로 일보러 들어갈 때면 일본병사들의 총칼에 가로막히군 했다. 왜놈들은 총창을 농민들의 가슴에 대고 상투적인 수법으로 “고고꾸신민노지까이”를 외우라고 으르렁거렸다. 물론 외우지 못하면 젊은이건 늙은이건 귀쌈을 얻어맞는건 물론 시가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며 집으로 쫓아보내 다시 외워가지고 와야 시가지로 들어가게 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대량의 조선청년들은 징병자, 징용자, 보국대로 뽑혀 끌려갔는데 일본말을 모르면 안되기에 일본어강습소, 조선청년특별훈련소를 세워 일본말을 억지로 배우게 했다. “일제는 동북3성 조선인집거구에서 제일 지식이 있고 신체가 좋은 사람을 뽑아(자기가 먹을 쌀을 지고 가서) 서란현 막석에 꾸려놓은 훈련소에 보내여 훈련시켜 교관으로 양성한후 그 사람들을 다시 동북 각지 농촌에 보내여 훈련소를 꾸리게 하였는데 농민들은 1개월동안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훈련한후 징병 등에 뽑혀 나가야 했습니다.” 박창욱선생은 자신이 보고 겪은 사실을 피력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후 일제는 이러한 망발을 더욱 다그쳤다. 간도성만 하더라도 1944년 일본어강습소가 452개에 학생 2만 54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943년부터는 조선인청년들에 대해 이른바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높이고 징병제도실시의 기초를 닦는다는 명목으로 일본말학습을 주로 하는 훈련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시켰다. 전기에는 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거나 국민학교를 다녀본 청년들을 각 현 훈련소에에 보내여 3개월동안 합숙시키고 1년동안은 사숙시키면서 내무, 훈육, 학교교련 등을 진행하였다. 후기에는 서란현 국립중앙청년특별훈련소에 보내여 몇 달동안 강제훈련시켰다. 이런 훈련은 완전히 군사파쑈적이며 폭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였다. 훈련이 끝나면 물론 강제징병을 당해야 했다.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야   에 끌려간 조선인백성들. 일제치하에서 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지금도 “다이꼬빈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이꼬빈따란 일종의 독특한 체벌이였다. 이것은 학생 한사람이 잘못하면 그 학생이 소속된 학급전체에 강행하는 체벌인데 학생들을 두줄로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치게 하는것이였다. 체조때 간혹 늦게 나오거나 암송하라는 과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조심하지 않아 조선말을 했다거나 하면 다 이런 체벌을 받아야 했는데 학생들은 두줄로 마주서서 대방을 사정없이 때려야 했다. 느슨히 때리거나 하는 기미만 보이면 교원은 옆에서 사정없이 질책하여 세게 때리게 했는데 일단 맞고보면 대방에 대해 역시 힘껏 때리게 되는데 이렇게 교원이 성차할 때까지 때리면 다들 얼굴이 퉁퉁 붓기가 일쑤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일본인교원들은 학생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때리였다. “갔다와라”하면서 때리고 갔다오면 “갔다왔느냐?” 하면서 때렸다고 한다. “이른바 ‘건국정신’이라는 과를 세우고 천조대신은 나라를 만든 신이라고 고취했으며 군인칙서, 교육칙서, 시국조서, 건국10년조서 등을 외우면서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도록 조선인학생들을 핍박했습니다. 중학교는 철저히 일어화, 황민화, 병영화, 직업화시키기에 노력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다. 이렇게 조선인에 대해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도록 강요, 일본인으로 철저히 동화시키려 들었다. 1943년 태평양전쟁에서 련이어 패하게 되자 일제는 조선인들을 저들의 침략전쟁에 내몰기 위하여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재학중인 조선인학생들을 전쟁마당에 내몰았다. 1944년 8월 23일에는 “녀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하여 만 12세이상 40세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인녀인들을 징용하여 일본본토와 그 외 전쟁마당으로 내몰았다. 일제는 단발령을 내려 남학생의 경우 머리를 빡빡 깎게 했고 녀학생은 단발머리를 하게 했다. 중학생들은 일본군복식으로 국방색통일교복에 전투모를 착용하게 했으며 다리에 각반을 치고 가슴에는 이름표를 달게 했다. 중학교에 일본군 현역장교를, 소학교에는 재향군인을 배치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그리고 학생근로봉사라는 명의로 륜번으로 학생들을 강제로동에 내몰았으며 녀학생들과 처녀들을 꾀여 “위안대”로 전락시켰다. 교관들은 맘대로 학생들을 구타하고 벌을 주면서 정신훈련과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학생들을 다 “협화청년단”이거나 “재향군인”에 가입시켰고 팔에는 완장을 끼고 다니게 했다. 일제는 조선이란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조선사람의 이름마저 빼앗는 광란을 서슴지 않았다. 1939년 11월 10일, 일제는 “제령”으로써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사람의 성명제를 페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으며 12월 26일에는 “창씨변경세칙”을 공포하여 이를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이 법에 의하면 조선사람은 “김(김해), 박(밀양), 최(수원), 리(한산)” 등의 전통적인 성을 버리고 그대신 “가네우미, 아라이, 미즈하라, 마끼야마” 같은 일본식 성씨를 붙이며 조선사람의 이름을 버리고 “겐이찌, 이찌로, 하루꼬, 아끼꼬” 같은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무릇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학교입학, 전학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런 학생에 대해 맘대로 구타하게 했다. 관청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문서를 처리해주지 않았으며 기차역이거나 우편국에서는 화물을 취급해주지 않았다. 지어는 “불온선인”이라고 루명을 씌워 체포하거나 혹형을 가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제도는 조선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그 대가는 형별과 옥살이뿐이였다. 개보다 못한 신세를 탓해 어떤 사람들은 우정 “개새끼”라는 의미로 “이누노고”라고 성을 고친 사람들도 있었는데 호적계로부터 수속거절을 당한건 물론 요구대로 성과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고 얻어맞을뿐이였다. 창씨개명마저도 일본놈들의 돈벌이구멍수가 되었다. 이름을 고칠만큼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경찰서에 수속비 4원을 내고 이름을 고치게 했다. 생활형편이 괜찮은 사람은 돈을 내고 무난히 이름을 고칠수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낼 돈이 없어 두 손바닥만 싹싹 비빌뿐이였다. 그때 돈 20전이면 입쌀 한말을 살수 있었고 명태, 이면수, 청어 같은 것은 두두름을 살수 있었다. 그러니 4원이란 가난한 조선인들에게는 생계를 거는 거금이나 다를바 없었다. 할수 없이 경찰서에서 찾아오기전에 먼저 성과 이름을 고친 동본인 친척을 찾아가서 그 사라들이 고친 성과 이름을 알아두었다가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본적을 알려준후 “미리 알아두었던 일본성을 댄다. 경찰이 “오마에노나마에와나니까?(너의 이름은 뭐라 부르지?)” 하고 다시 물으면 역시 미리 준비해두었던 이름을 대고 재난을 모면하였다. “정치적권리는 두말할 것 없고 최소한의 생존조건마저 빼앗는 이같은 잔악하기 그지없는 황민화책동을 일제는 저들이 패망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간악한 수단은 중일, 한일간의 민족모순을 격화시키면서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원한과 반항을 불러일으킬 뿐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의 력설이다.(계속)  
564    제58장 일제의 황민화정책.1 댓글:  조회:1897  추천:0  2014-02-16
  일제 로구교 점령 북경 포위 전면적침략 감행 동북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파쏘통치를  강화 로구교사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군사연습중에 있던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것을 구실로 왕평현성에 대한 수색을 무리하게 요구해나섰다. 이것을 발단으로 하여 충돌이 야기되였는데 일본군은 송철원의 29군이 저항해나서자 로구교를 점령하고 북경을 포위하였다. 이것은 자그마한 우발적인 충돌이였던것만큼 얼마든지 현지교섭으로 해결할수 있었으나 일제는 구실을 찾고있던참이라 생트집으로 중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 것이다. 일제는 로구교사변에 앞서 1933년 1월의 산해관공략으로부터 시작하여 화북지구의 침입, 열하작전에 의한 성소재지 승덕의 점령, 진황도 상륙, 하북성 동부지구에로의 진격 등 군사작전을 벌리면서 미구에 감행하게 될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준비해왔다. 장개석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후 침략의 마수를 관내로 뻗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반대하고 로농홍군을 “토벌”하는데 혈안이 되어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세우지 않고있었다. 오히려 방대한 군사력량을 동원하여 서금에 있는 중공중앙쏘베트를 없애버리려고 무려 5차례에 걸쳐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로구교사변후 군부의 압력에 의해 일본 고노에내각을 각의에서 결정, 8월 13일 상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중일간의 큰 전쟁이 터지게 된 것이다. 로구교에서 울린 총성은 결국 근 3000일동안이나 중국을 피바다에 잠그고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속에 휘몰아넣는 전주곡이 되고말았다. 이로부터 일제는 광활한 중국땅에서 남경대학살을 비롯한 중국인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곳곳에서 감행,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르면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지배와 아세아의 맹주로 될 야수의 꿈을 무르익히려 했다.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마자 중국공산당은 “평진이 위급하다! 중화민족이 위급하다!”고 대성질호하면서 한결같이 떨쳐나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나라를 구하는 길만이 중화민족의 생존의 길이기에 “민족통일전선의 튼튼한 장성을 쌓아 왜놈들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전국에 호소했다. 7월 15일에는 “국공합작의 선언”을 국민당중앙에 보냈다. 서안사변을 계기로 려산에서 진행된 장개석과 주은래의 담판은 마침내 결실을 얻게 되어 국민당도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의 선언에 대한 담화”를 발표, 국공합작을 기초로 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정식으로 형성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전민족적인 항전의 새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의 폭발은 동북항일투쟁의 전략적임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중국내지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발동하면서 이미 침략한 동북을 저들의 중요한 후방기지로 삼으려 했다. 이리하여 관내는 항일전쟁의 주요전장으로 변해버렸다. 5년 남아 독립적으로 진행된 동북의 항일투쟁은 전국 항일전쟁의 한부분으로 변하여 동북의 일본군을 견제하고 관내의 주요전장에 대해 배합하고 지지하는 작전으로 되었다.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무하에 동북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했으며 각지 항일련군들도 새로운 항일투쟁의 고조를 형성하여 일제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동북항일련군은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조에 발맞추어 일본군에 대해 타격을 가했는데 이는 동북에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엄중한 위협을 주었습니다. 동북항일련군에 의해 일본제국주의가 신속하게 동북을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꿈이 파탄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하면서 1936년 3월에 제정한 일제의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을 설명해주었다. 이 숙정대강에 따르면 일제는 동북을 점령한후 동북을 침략을 확대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첫해(1936년 4월-1937년 3월)의 “숙정”중점지구는 빈강, 길림, 간도, 삼강(합강) 등 성이며 두 번째해(1937년 4월-1938년 3월)는 첫해의 “숙정”성과를 진일보로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한편 전 동북에 대한 “숙정” 공작을 확대하는것이며 세 번째해(1938년 4월-1939년 3월)에는 특수지구에 대한 “철저한 숙정”이였다. 적들은 “집단부락”을 건설해 무인구역을 만들며 경제봉쇄를 실시해 항일련군과 군중들의 련계를 단절시키는 한편 경찰, 특무 조직을 강화하여 항일무장을 고립시켜 적화사상의 뿌리를 빼버리려 했다. 로구교사변후 일제는 “숙정계획”에 대한 전략적인 변경을 했는데 그해 제2기 “치안숙정공작요강”에 “치안숙정의 주요지구를 만주국동부지구, 특히 동변도 및 동부삼각지대-장백산지구로 한다.”고 명확히 해놓았다. 이로써 적들은 항일련군 제1로군을 주요목표로 정한후 병력을 집중하여 “3강성(길림, 통화, 간도)토벌”등을 감행해 반일무장을 완전히 소멸해버리려 시도했다. 일제는 항일련군과 인민대중과의 혈연적관계를 절단하기 위해 1936년에 이르러 동북지구에 이미 1만 3451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으며 보갑련좌법을 실시했다. 1938년의 통계에 의하면 일제가 동북에 경찰서 1233개소, 경찰분주소 3651개소, 파출소 1630개소나 설치하였으며 경찰은 10만명에 달했다. 연변지구에는 32개의 경찰서와 153개의 분주소, 55개의 파출소, 10개의 삼림경찰소를 설치하였는데 경찰총수는 4230여명에 달했다. 1940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에 319개의 자위단이 있었는데 자위단원이 1만 8131명이 있었다. 경찰과 자위단은 “경제범”, “형사범”, “사상범”, “국사범” 등 죄목을 씌워 무고한 인민을 마구 체포하고 형벌을 가했으며 도형에 언도하거나 학살했다. 일제의 문화 파쑈적통치   에 잡혀가는 조선인들. 일제는 정치경제면에서뿐만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파쑈적인 노예화교육과 민족동화정책을 감행했다. 로구교사변후 일제는 각종 수단을 리용하여 “일만일체”, “공존공영”, “천황지상”, “왕도락토” 등 반동사상을 고취했다. 1938년 1월 1일 위만주국은 이른바 “신학제”를 실행하면서 일어를 “국어”자리에 놓고 민족노화교육을 강압하기에 이르게 된다. 조선민족에 대한 일제의 정치적압박 역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자들은 조선인들에게 이른바 “황민화운동”을 진행하게 하면서 어떠한 장소에서도 본민족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강박적인 수단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조선인들이 본민족 성명을 가질 권리마저 박탈했다. 도처에 “신사”(일본황실의 조상이나 신대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를 세우고 조선인을 일본의 “선족(鲜族)”이라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박, 조선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없애고 조선민족을 저들이 마음대로 혹사하고 유린하는 “망국노”로 만들려 했다. 일제의 이러한 의도는 교육에서 돌출하게 나타났다.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여 이른바 “일시동인”, “내선일체”, “내선공학”이라고 조선인을 기만했다. 일제는 “문화통치”의 허울밑에 조선말과 조선력사를 말살하고 일본어와 일본력사에 대한 교육을 더욱 강화했다. 또 일본문화와 생활양식을 조선인청년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조선민족의 전통 문화와 교육을 파괴하고 민족의식을 없애며 나아가서는 조선민족을 철저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망발했다. 일제는 “국민된 성격의 함양”을 위하여,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숙달시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강박함과 아울러 교과서를 통해 일본의 인물, 시가, 풍속, 지방특성을 알리고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로 일관된 내용을 불어넣었다. 일제가 조작한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우리 나라는 아세아주의 동북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렬도와 조선반도로 이루어진다. 그밖에 만주국에서 빌린 관동주와 렬국(列国)에서 맡긴 남양제도가 있다... 우리 나라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 그가운데에도 후지산, 금강산, 세도내해는 널리 알려져있다. 9천만 국민이 우로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들면서 각자 그 업에 매진한다. 세계에 나라가 많지만 우리 나라만한 곳이 다시 없다. 조선어 또는 “조선어 및 한문”과목의 교수방법은 일본어교수에 준하거나 일본어와 련계시켰고 경우에 따라서 일본어로 가르치게 하였다. 교과서내용도 되도록 간단하고 쉬운 것을 골라넣었으며 그마저도 일본문화와 신민지정책이 가득 들어찬것이였다. 조선의 인문, 시가, 문학작품, 풍속, 지방특색 등 사항은 거의 찾아볼수 없었다. 교과서에는 대개 이런 내용의 글들이 실리였다. 一植木 福童이는 四月四日아침에 學校뒤집 老人을 만나서 인사를 엿주엇소. 老人 “어제 너의들은 무슨 일로 그러케 일즉이 學校에 모엿느냐.” 福童 “어제는 神武天皇祭日이올시다. 저의들은 일즉이 모여서 선생님을 따라 學校林에 갓다왓습니다.” 老人 “그러면 植木을 하러 갓드냐.” 福童 “네 學校에서는 神武天皇祭日植木日로 定하고 해마다 그날을 學校林에 가서 나무를 심습니다.” 老人 “그것은 참 조흔 일이다. 죠션은 어듸든지 붉은 山이 만타.”... 력사와 지리교육도 조선력사와 조선지리과목을 각급 학교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대신 보통학교 고급학년에 일본력사와 일본지리를 설치하여 가르치고 중등학교들에 “력사지리”과목을 설치하여 가르침으로써 조선청소년들의 력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 교과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기도 했다. ...이 무렵 조선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이 있어서 이를 3한이라고 했다. 그가운데서도 신라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웠고 세력 또한 강했다. 황후는 먼저 신라를 복종시킨다면 구마소는 스스로 평정될것이라고 생각하여 다께우찌노 스꾸네와 함께 계략을 꾸미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토벌했다. 때는 기원 860년이였다... 황후는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에 건너가 그곳에서부터 신라로 쳐들어갔다. 군선이 바다에 가득하여 그 형세가 매우 성하매 신라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동방에 일본이라는 신국이 있고 천황이라는 훌륭한 군주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 오는 것은 바로 일본의 신병일 것이다. 어떻게 방어할수 있을가” 하더니 즉각 흰기를 들고 항복하여 황후의 앞에서 맹세하기를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일은 있을지언정 매년 공물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을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윽고 황후는 개선하였는데 그후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도 또한 우리 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선은 천황의 덕에 이끌려 따르게 되고 구마소도 스스로 평정되였다... 이와같이 외곡된 터무니없는 “건국설화”를 꾸며대면서 조선이 예로부터 일본의 종속국이였던것처럼 날조함으로써 조선청년들에게 렬등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그외에도 ‘임진왜란’의 원인을 조선에 들씌워 사실을 외곡했는가 하면 ‘강화도사건’도 조선이 도발했으며 중일갑오전쟁마저도 청나라가 도발한 것으로 외곡함으로써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등 력사외곡의 글로 교과서를 일색화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계속)  
563    제57장 로진창전투와 보천보전투 댓글:  조회:2254  추천:0  2014-02-16
불타고있는 보천보의 일제기관들. 로진창에서 악질주구 리도선부대를 괴멸시키고 압록강 건너 보천보에서 일제  통치기관 들부셔 1937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4사 제1퇀, 제3퇀, 6사 제9퇀, 제10퇀은 무송현 동강양무띵즈밀영에서 회사한후 령도간부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1936년 가을부터 진행된 반“토벌”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1937년 상반년의 활동방향과 병력배비문제를 토의했다. 적아의 태세를 분석한후 부대를 나누어 유격활동을 진행하면서 적들의 분할포위를 돌파하기로 방침을 제정, 4사주력은 연변지구인 안도, 화룡으로 진군하여 유격활동을 하다가 다시 장백현으로 돌아오며 6사주력은 무송에서 장백현으로 곧바로 나아가 장백산구에서의 유격전을 견지하면서 적들의 1937년 춘기대“토벌”을 분쇄하기로 했다. 리도선부대를 괴멸시키다 동강회의후 두만강연안을 거쳐 조선의 무산지구로 진출할 임무를 맡은 4사 1퇀, 3퇀과 사부소속부대 및 6사 9퇀의 300여명 병력은 4사 정위 주수동, 1퇀 최현 등의 인솔하에 며칠동안 급행군하여 돈화현 목단령에 다달았다. 4월초 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북쪽도로에서 군수물자를 만재한 군용마차 20여대를 습격하여 많은 식량과 피륙을 로획하여 결핍하던 군복과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4월 23일 안도현 승평령동남쪽에서 일본군과 맞다들어 격전을 벌린후 적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안도현 로진창부근에 이르렀다. 4사 1퇀 퇀장 최현은 부대의 행동을 보장하기 위해 5명으로 구성된 정찰조를 파견하여 사위의 정형을 정찰하게 했는데 정찰조원들은 적의부대가 지나간 것 같은 많은 발자국이 나있는데 그 발자국에 고인물이 아직 흐린대로 있더라고 보고했다. 이에 최현은 3련을 파견하여 로진창동북쪽 묘령의 경계에 배치하고 주력부대는 수림에서 나와 계곡을 따라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가지 않아 대사하에 이르렀다. 대사하는 워낙 물살이 세고 차거웠다. 게다가 봄물이 져서 부대가 건너려면 다리를 놓아야 했다. 최현은 한 개 련을 파견하여 강에 다리를 놓게 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강가의 금전굴곁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몹시 지친 전사들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코를 골면서 굳잠에 빠져들고말았다. 이때 황구령에서 항일련군에게 군수물자를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리도선은 200여명 병력을 거느리고 은밀히 아군의 뒤를 밟으면서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떠날 때 리도선은 상전앞에서 “이번 길에 공비들은 모조리 소멸하겠다. 만약 한놈이라도 놓친다면 황군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것이다”고 큰소리쳤다. 토비출신인 리도선은 한때 항일대오속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9.18”사변후 혁명을 배반하고 왜놈의 개다리로 되였다. 총질을 특별히 잘하는 명사수였던 이자는 주구의 자식들이 아니면 반역자거나 명포수들을 모아 부대를 묶어 우두머리질을 했다. 불악귀같은 놈들은 동만일대에서 수천명의 혁명투사와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그 대가로 왜놈에게서 훈장까지 탔으며 안도현치안대 사령의 보좌에까지 올랐다. 이자의 수하 중대장, 소대장은 거의다 왜놈들이였다. 리도선부대는 일본군과 배합하여 항일련군 “토벌”에 나서서 나쁜짓이란 나쁜짓을 다 저질렀다. 이자는 마안산밀영을 포위하고 항일련군 2군 정치부 주임 리학충과 부상병들을 살해했고 처창즈, 황니거우, 석문자, 호로계자, 투도구 홍륭 등지를 여러번 “토벌”하면서 무고한 백성과 항일투사들을 무수히 살해했다. 리도선부대가 지나가는 마을들에서는 무고한 백성들이 무리죽음을 당하게 되기에 안도지방사람들은 리도선을 “저승에서 보낸 악귀”라고 저주했다. 왜놈들의 특수훈련을 받은 이자들은 항일련군의 유격전술에 대해 익숙히 알고있었고 안도일대의 지형, 산세, 인심을 파악하고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계획하고 아군이 휴식하고있는 근처에까지 배밀이로 접근해온 적들은 30~40메터 사이두고 우리의 보초병에 의해 발견되였다. 보초병은 “적이다!”하고 큰소리로 웨치는 한편 방아쇠를 당겼다. 놈들은 아군에게 손쓸 틈을 주지 않으려고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전사들은 재빨리 무기를 찾아들고 적들을 향해 맞불질을 했다. 정위 주수동이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사태는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항일련군의 유명한 기관총수 리경달이 벌떡 일어나 적들을 향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뜻하지 않은 불벼락을 얻어맞은 놈들은 잠시 대가리를 땅에 틀어박고 전진을 멈추었다. 하여 아군은 어려운 순간에 귀중한 시간을 얻을수 있게 되었다. 그때를 최현은 회상기 《혁명의 한길에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대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주위에 널려있는 금점구뎅이와 버럭더미로 분산하여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면서 맹렬한 반격을 가하였다. 쳐들어오던 적들은 적지 않은 시체를 남기고 얼마쯤 물러섰으나 더 물러설곳이 없는 것을 알자 결사적으로 대들었다. 적아간의 화력전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강안이 금시에 포연으로 자욱해졌다. 아군부대들은 버럭들과 구뎅이들을 리용하여 계속 사격하였다. 그리하여 적대렬에는 혼란이 조성되였다. “2중대는 좌측으로. 1중대는 우측으로!” 이것은 불리하게 널려있는 안군진지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구령에 의하여 부대성원들은 적탄이 우박치는 속에서도 대렬을 재정돈하게 되었다. 나는 계속 금점구뎅이에서 허리를 솟구쳤다. 낮추었다 하며 전투를 지휘하고있었다. 그런데 적 두놈이 내앞에 나타나 나를 쏘려고 겨누었다. 순간 나는 허리를 굽혔으나 적탄은 나의 어깨를 때렸다. 나는 부상을 당했지만 전투를 계속 지휘하였다. 전투개시후 거의 반시간이 지나갔다... 아군의 완강한 방어와 명중사격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바득바득 기여들었다. 그때까지만도 적들은 벌써 수십명이나 꺼꾸러졌지만 아군의 턱밑으로 배밀이를 하며 기여드는것이였다. 놈들도 퇴각을 하기만 하면 전멸당한다는 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적아간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이제는 20~30메터 지어는 약 10메터까지 된곳도 있었다. 그런데 놈들은 아직도 공세를 취하고 우리는 수세에 처하여있었다. 피동적인 수세에 오래 머물게 되면 필연코 아군부대에 만회할수 없는 불리한 정세가 닥쳐올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놈들에게 반공세를 취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벌써 놈들도 구뎅이와 버럭밑으로 기여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투는 사실상 고착되고말았다. 놈들은 버럭을 몸가림삼고 혹은 구뎅이속에 대가리를 틀어박고 지구전을 시도하였다. 이제는 적들도 우리를 사격하기에 불리했고 우리도 역시 곤난하였다. 그런데 적들의 응원부대가 올 위험성이 있었다. 나는 이때 놈들에게 수류탄을 던질 것을 명령하였다. 우리의 수류탄들이 일제히 눈앞에 널려있는 적들의 음페지를 향해 날아갔다... 연거푸 안겨지는 수류탄불벼락을 받고 수많은 놈들이 비명을 울리며 쓰러지게 되자 남은 놈들이 뿔뿔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돌격명령을 하였다. 우리 용사들은 도망치는 적들을 향하여 성난 사자와도 같이 함성을 울리며 돌격해나갔다... 아군은 혼비백산한 적들을 총창으로 찌르고 총탄으로 쓰러뜨리면서 5킬로메터나 추격, 일망타진해버렸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전사들은 “신선대”라고 불리우는 리도선의 악질부대와 싸운줄을 모르고있었다. 적들에게 짐군을 강제로 잡혀온 농민들의 말을 듣고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전장을 수색할 때 한 농민이 시체사이게 끼여있는 한 군관을 가리켰다. 놈은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으면서도 짐짓 숨진체 가장하고있었다. 농민은 저놈이 리도선이라고 손짓과 눈짓으로 전사들에게 알려주었다. 누군가 달려가 발로 몇 번 차도 놈은 죽은체 꼼짝하지 않았다. 수색해보니 목에는 항상 걸고 다니는 금인형이 걸려있고 호주머니에는 도장이 들어있었다. 틀림없는 리도선이였다. 놈은 총알에 넓적다리를 맞아 도망칠래야 도망칠수 없게 되자 시체더미속에 죽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을 발견했던 농민은 꽁무니에 차고있던 도끼를 빼들었다. “윽”하는 소리와 함께 악질주구의 대가리가 땅우에서 딩굴었다. 짐군들은 모여들어 몽둥이와 돌로 그놈의 시체를 죽탕을 만들어놓았다. 그때 현소재지까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쳐간 놈이 네놈인데 그놈들도 어떻게나 혼쌀이 났던지 당도하자마자 두놈은 그 자리에서 죽어자빠지고 한놈은 입원치료를 받다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리도선부대에서 살아남은 놈은 단 한놈뿐인 것이다. 로진창전투는 리도선부대를 완전히 소멸해버림으로써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거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화광에 휩싸인 보천보 보천보 경찰관주재소의 포대. 천상수와 소덕수를 거쳐 5월중순경 지양개등판에 이른 6사는 압록강을 건너가서 적을 무찌르기 위해 대오정비와 여러 가지 선동사업을 벌리였다. 대원들에게는 승마복형태의 새 여름군복을 지급하였다. 새 군복차림으로 일신한 6사 장병들은 1937년 6월초,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구시산이 지척에 바라보이곳에 와닿았다. 앞쪽의 등판이 제비등판이였는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곤장덕과 마주서있었다. 부대는 구시산마을에서 얼마간 머루르다가 제비등판에 올랐다. 6월 3일 새벽이였다. 조선의 높고낮은 산봉우리들이 키돋움을 하면서 6사전사들을 반기였다. 망국의 설음을 안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총잡고 항일련군에 참가한 조선인전사들은 조선땅을 바라보면서 설레이는 가슴을 달랠수 없었다. 그날 부대는 제비등판에서 로독을 풀었다. 선발대원들은 구시물동에 가서 떼목다리를 마련하였다. 6월 3일 밤, 부대는 압록강을 건넜다. 적들이 몇겹으로 경계진을 치고있다는 삼엄하고 조밀한 국경경비선을 감쪽같이 건넜던 것이다. 구시물동은 소연한 물소리로 부대의 도하를 감싸주었다. 부대는 지체없이 곤장덕에 올랐다. 곤장덕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있는 평평한 야산이였다. 여기서 부대는 보초를 세우고 하루밤을 숙영하였다. 다음날은 이른아침부터 곤장덕숲속에서 전투준비를 하였다. 포고, 삐라, 격문도 준비하고 지도부회의도 소집했다. 정찰원들을 농민으로 가장시켜 시내동정을 면밀히 정찰하게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곤장덕을 내리여 곧바로 보천보시가지에 들어선 부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여 소정된 위치를 차지했다. 부대가 어찌도 엄밀히 행동했는지 지휘처로 정한 근처의 농가앞마당에서 흥이 도도해 장기를 두고있던 농민들도 사정을 깜빡 모르고있었다. “땅!” 정각 10시, 김일성은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보천보의 밤하늘에 쏘아올렸다. 신호총소리와 함께 전사들은 맹렬한 사격으로 적기관들을 들수시였다. 먼저 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주되는 타격이 안기여졌다. 삼림호구에 적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있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부대는 거기에도 드센 공격을 들이댔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발칵 뒤집혔다. 얼마후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래쳐오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우편국, 삼림보호구, 소방회관을 비롯한 여거래의 적통치기관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거리 전체가 여러개의 대형조명등을 설치한 무대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전투는 순식간에 승리로 끝났다.(계속)
562    제56장 장백산기슭에서의 전투 댓글:  조회:2093  추천:0  2014-02-16
서간도 밀강 5도구밀영지에서 6사 장병들과 함께 있는 김일성장군(중간에 앉은이) 용감무쌍한 6사 전사들 림기응변 신출귀몰하면서 곰골  홍두산전투 벌려 일제의“동기대토벌” 분쇄 일제는 림강, 장백현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의 련속되는 타격을 받게 되자 창황히 병력을 집중하여 “동기토벌”을 감행, 장백현에서 활동하고있는 제2군 제6사를 포위섬멸하려고 망상했다. 이것을 간파한 아군은 대부대활동과 소부대활동을 적절히 백합하면서 유인매복전과 불의의 습격전, 철벽의 방어전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대오를 토막내여 소멸하는 전법 등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전술을 활용하여 적들을 반격했다. 적들이 “토벌”을 강화하면 할수록 아군은 밀림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면서 적들을 골탕먹였다. 그중에서도 곰골전투는 밀영에 대한 적들의 기습소탕전을 앞질러 좌절시킨 방어전투의 전범이였다. 곰골에서의 격전 적들의 “동기토벌”이 시작되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은 부대의 주력을 거느리고 주로 곰골밀영쪽에서 활약했다. 그러던 어느날 밀영을 탐지하고있는 농민옷차림의 밀정 두놈을 붙잡았다. 밀정들은 아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후 산밑 “토벌대”에 신호를 보낼 임무를 맡고있었다. 밀정의 진술에 의하면 적들은 일만합동 “토벌대”를 편성하고있었는데 그중 한 부대는 이도강을 떠나 곧바로 곰골로 밀려오고있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16도구의 마가자 서북쪽을 거쳐 밀영으로 접근하고있는데 자기들이 약속된 신호를 보내면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였다. 이 “토벌”를 위해 회령에 있는 비행기까지 동원하기로 되어있었다. 형세는 급박했으나 적들의 포위환은 아직 완전히 형성되여있지 않고있었다. 아군은 적들이 수색을 벌리면서 밀영으로 조여들고있는 형편에서 밀영근처의 유리한 지대에서 적을 친후 슬쩍 빠져나갔다가 되돌아가는 적을 삼개골지대에서 밤을 리용하여 한번 더 때리기로 작전을 짰다. 곰골의 남쪽은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있었다. 적의 주력이 들어오게 되어있는 골에는 잘룩한 병모가지처럼 묘하게 생긴곳이 있었다. 이 골의 량쪽비탈은 날렵한 산짐승들조차도 발붙이기 힘든 벼랑이였다. 적들을 좁은 홈통속에 몰아넣고 족치기에는 둘도 없는 유리한 지형이였다. 사장 김일성은 2련과 4련을 동북쪽고지에 매복시키고 골안 깊은 곳에 허위진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몇 명의 대원들을 거기에 배치하여 마치 주력이 그곳에 있는것처럼 불도 피우고 소리도 내게 했다. 배치가 완료되자 이번에는 유인조를 파견하여 적진에 들어가 밤새껏 소란을 피우다가 날이 밝으면 대부대가 움직인것처럼 흔적을 내면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 유인조는 적진으로 들어갔다. 유인조는 적들을 아군의 주력이 배치되여있는곳으로 끌어오려고 골바닥에 대부대가 지나간 듯이 무질서한 발자국을 내면서 허위진지쪽으로 올라갔다. 잠시후에 그쪽 산비탈에서는 여러개의 우등불연기가 솟구쳐오르고 떠들썩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유인조의 꼬리를 물고 골안에 들어선 적들은 우등불을 피워놓고 법석대는 허위진지쪽에 신경을 모으면서 공격대기를 했다. 적의 척후대는 기마대렬이였다. 잠시 한자리에 몰켜서 골안쪽의 허위진지를 살펴보며 쑥덕거리던 기마척후대의 일행중에서 기병 3명이 골짜기 아래쪽으로 내달려갔다. 반시간쯤 지나 기마척후대는 보병종대를 뱀꼬리처럼 기다랗게 달고 다시 골안에 나타났다. 그들이 바로 조선주둔군 함흥 20사단의 패거리들이였다. 정안군장교들은 말을 얻어타지 못한채 졸개들과 함께 도보로 오고있었다. 적부대의 뒤꼬리에는 박격포를 분해하여 기르마에 얹은 대오가 뒤따랐다. 다른 골짜기로도 적들이 기여들었다. 포위환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뻔했다. 아군은 100여명뿐인데 비해 적은 500명도 더 되었다. “땅!” 공격의 신호총소리가 터지자 포위해있던 아군은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공격개시신호를 기다리던 적들은 순식간에 풍지박산이 되고말았다. 적들의 포는 폭탄을 장탄한채 전장에 나딩굴었다. 한바탕 타격을 가한후 아군은 어둠을 타서 슬쩍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아군의 공격, 눈코뜰새 없는 추격, 사나운 추위 등으로 시달릴대로 시달린 적들은 날밝기를 기다리기 위해 으슥한곳에다 숙영지를 마련했다. 이것을 정찰해낸 아군은 적숙영지야습을 주도했다. 야습에는 많은 병력이 필요없었다. 한 개 패의 병력으로 무어진 습격조가 어둠을 타 적의 숙영지로 은밀히 접근해갔다. 습격조는 보초병을 사로잡아 숙영지내막을 알아냈다. 일본군대가 숙영지복판을 차지하고 위만군이 그 두리에 잠자리를 잡고있었으며 짐군으로 끌려간 백성들이 맨 바깥쪽에 총알받이로 배치되여있었다. 습격대원들은 적순찰병으로 가장하고 3명씩 나누어 조를 형성한후 미리 알아낸 군호로 적들을 기만하면서 보초선을 무사히 통과하여 숙영지 한복판까지 들어갔다. 일본군들은 천막안에서 젖은 신발들을 우등불가에 걸어놓고 혼곤히 잠자고있었다. 눈앞의 적들을 향해 습격조원들은 맘놓고 사격을 들이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적들은 신발도 찾아 신을새 없이 허덤벼쳤다. 적아를 가리지 못한 적들은 제놈들끼리 향방없이 마구 쏴갈기기도 하였다. 숙영지는 벌둥지를 쑤셔놓은것처럼 발칵 뒤집히였다. 혼란한 틈을 타 습격조원들은 감쪽같이 빠져나왔다. 적들은 저들끼리 밤새껏 총격전을 벌려 무리죽음을 냈다. 어떤 놈들은 신발도 외투도 찾아신지 못하고 간신히 도망치긴 했지만 동북림해의 11월의 강추위에 거의다 얼어죽고말았다. 홍두산전투와 도천리전투 횡산에서 1937년의 음력설을 보낸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은 일부 장병들을 거느리고 홍두산밀영으로 돌아왔다. 아직 행장도 풀지 않고있는판인데 망원초쪽에서 갑작스럽게 총성이 울려왔다. 적들이 쳐들어오고있었던 것이다. 정황은 아주 긴박했고 형세는 아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아군의 병력이란 기관총반과 리두수네 련의 대원 몇 명뿐이였다. 반면 적의 병력은 아군의 몇배나 더 되었다. 그런데다가 망원초에서 적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적들이 이미 망원초고지에 거의다 접근하고있을 때였다. 아군은 완전히 적들의 제압군내에 들어버리고 말았다.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전투원들은 재빨리 남쪽릉선을 차지했다. 김일성은 리두수련장에게 지시하여 망원초의 대원들을 철수시키고 적들에게 길을 열어주도록 했다. 그리고 철수하는 망원초의 대원들로 하여금 반드시 적들이 눈에 뜨이게 칼릉선을 타고 내려오게 하였다. 망원초로 통하는 칼릉선은 한발자국이라도 헛디디면 깊은 골짜기의 눈속에 굴러떨어져 파묻힐수 있는 외통길이였다. 망원초의 전사들은 과연 적들을 칼릉선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적들은 자석을 따르는 쇠붙이처럼 망원초의 아군전사들의 뒤를 꼭 물고 칼릉선에 올라섰다. 홍두산 남쪽릉선에 매복하고있던 아군은 기다싶이하면서 가파른 릉선에 매달려있는 적들을 손금보듯 내려다보면서 경기관총을 휘둘렀다. 불의의 사격을 받은 적들은 퇴각한다는 것이 릉선아래 골바닥에 갇혀버렸다. 골짜기에 갇힌 적들은 이번엔 남쪽릉선을 오르려 했으나 남쪽릉선 비탈은 얼음강판이였기에 아군의 진지로 근본 접근할수 없었다.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번 전투에서 적들은 거의 전멸되다싶이했지만 아군은 단 한명의 부상자를 냈을뿐이였다. 홍두산전투후 6사 주력은 장백현 하강구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적들은 다시 대병력을 긁어모아 항일련군을 찾아 대대적인 수색전을 펼치고있었다. 아군의 주력부대가 하강구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적들의 력량을 분산시켜놓고 혼란을 조성한 다음 적의 “동기토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겨우내 항일련군을 뒤쫓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허탕만 치던 적들도 6사 주력부대를 찾아 헤매이다가 지금 도천리부근에 주둔하고있었다. 요방자에서 도천리나 최령감골로 가려면 봇나무, 자작나무, 가시나무와 키가 넘는 갈대며 새초풀들이 얼기설기 뒤엉킨 무연한 15킬로메터의 소로길을 지나야 하였다. 만약 이 길로 적들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적들은 외줄로 행군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아군은 진대통이 가로놓인 요소요소에 매복해있다가 손쉽게 적들을 토막쳐 족칠수 있을것이였다. 유인조는 적들이 나타나자 그 선두대렬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한후 재빨리 몸을 피하여 가시덤불 등판으로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복병이 있는줄도 모르고 적들은 아군의 그림자를 뒤쫓아 무작정 가시덤불밭으로 뛰여들었다. 적들에게 있어서 가시덤불은 가시철조망과 다를바 없는 장애물이 아닐수 없었다. 가시덤불의 성화 때문에 적들의 대오는 토막토막 끊어지였다. 숨어있던 매복조성원들은 토막난 적대렬을 향해 사정없는 사격을 안겨주었다. 수백명의 적들은 아군의 토막치기전술에 걸려들어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갈팡질팡할뿐 어쩌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진맥진한 적들은 공포를 꺼안은채 도천리마을로 철퇴하고 말았다. 도천리마을의 항일련군 지하조직에서는 “공비군”을 소멸하러 온 장병들을 위로한다면서 닭도 잡고 쌀도 찧어 떡을 만들면서 우정 저녁식사를 늦잡아놓았다. 결국 패배의 수치도 모르고 만포식한 적들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마을앞 큰길 좌우에는 언녕부터 항일련군 전사들이 매복해 있었다. 이런줄도 모르고 늑장으로 부리면서 지나가던 적들은 갑자기 터지는 수류탄과 씽씽 날아드는 총알의 세례를 톡톡히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매복전에 걸려든 적들은 완전히 괴멸되고말았다. 새초가 깔린 등판에 적의 주검이 한 벌 널려있었다. 아군은 시체들에서 총만 벗겨가지고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 시체들을 실어나르느라고 적들은 24대의 소발구를 동원했다고 한다. 그 소발구 하나에 주검 9구씩 싣고 13도구까지 날라갔다고 하니 이날 황천객이 된 적들은 200명도 더 될것이였다. 적들의 “동기토벌”에 맞서 아군은 몇백차의 전투를 벌리면서 끝내 “토벌”을 분쇄했다. 항일련군의 련전련승으로 하여 장백땅은 완전히 항일련군의 세상이 되고말았다. (계속)  
561    제55장 장백유격근거지의 개척 댓글:  조회:2454  추천:0  2014-02-14
  장백밀림속의 곰골밀영. 장백림해에 대량의 밀영을 건설해 유격활동에 돌입 낮이면 적의 세상이다가도   밤이면 우리 세상 되여 림해에 세워진 밀영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적들의 “토벌”에 주동적으로 반격하면서 정치적영향력을 확대, 1936년말에 이르러서는 장백일대의 광활한 지역이 공산당과 항일련군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장백산지구는 서간도와 조선, 북간도를 련결하는 삼각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거점이기에 이 일대를 통제하는 것은 자못 중요했다. 이런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2군 주력은 장백산지구에 대량의 밀영을 건설하여 유격활동에 돌입하였다. 그때로부터 장백일대는 일제와의 교전회수가 가장 많고 총포성이 가장 높은 전장으로 되었다. 밀영건설은 대부분 소분대의 몫이였다. 소분대는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파견되여 가서 지점을 선택한후 밀영을 건설했다. 이런 밀영은 키가 낮은 온돌식영방이였는데 일반적으로 나무가 밀집해있는 높은 산의 복부에 건설했다. 밀영은 목제형과 석제형이였다. 목제형은 통나무로 짓는 귀틀집이였는데 바닥을 몇자 파들어갔기에 밖에서 보기에는 키가 낮아보아나 집안은 높았다. 지붕은 나뭇가지나 풀로 덮어 위장하고 주위에 나무와 풀을 옮겨심어 외부의 시야를 가리였다. 실내는 구둘로 덥히였는데 연기는 밖에다 낸 고랑을 따라 2~3리 상거한곳에 가 피여오른다. 이런 고랑도 초목으로 가리워놓아 얼핏 발견할수 없게 했다. 석제형은 산기슭을 리용하여 건설했는데 산세를 따라 몇메터 파들어간후 돌을 쌓아 만든다. 산굴식의 집이여서 보온성이 강해 좋았다. 이런 밀영은 물론 수원이 충족한곳에다 지였다. 1936년 봄 항일련군 2군이 안도현과 무송현 경내에서 활동할 때 이미 이런 밀영을 리용한적 있는바 미혼진밀영, 로투띵즈밀영, 마안산밀영 등이 그것이였다. 이번에 장백, 무송일대에 대량적으로 밀영을 건설했는데 무송, 장백, 안도, 금천, 관전, 류하, 몽강 등지에 건설한 밀영들로는 곰골밀영, 홍두산밀영, 양무띵즈밀영, 나얼훙밀영, 띠수이라즈밀영, 청봉밀영 등이다. 조선쪽에도 밀영을 건설했는데 사자봉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 소연지봉밀영 등이다. 2군에서 건설한 밀영은 건축방식이 령활하고 다양했으며 전용성이 강했는바 영방, 지휘부, 통신처, 정훈부, 수리소, 인쇄공장, 학교, 간부훈련소, 량식창고 등 다종다양했다. 밀영마다 용도와 크기가 달랐다. 2군 6사에서 장백에다 건설한 곰골밀영은 비교적 규모가 큰 밀영이였는데 밀영은 장백현소재지에서 90킬로메터, 이도강에서 40킬로메터 떨어진 백두산동남부 90킬로메터 지점의 심산밀림에 자리잡고있었다. 곰골밀영은 남으로 19도하가 막아서 있고 서로 홍두산맥이 둘레를 쳐주고있어 천연적인 유격근거지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6사는 여기에다 부대병영, 련락처, 병기공장, 병원, 수군학교 등을 세웠다. 어떤 밀영은 길이 30메터, 너비 8메터, 높이 2.6메터로서 비교적 규모가 컸는데 한꺼번에 200여명을 용납할수도 있었다. 이러한 밀영을 리용하여 항일련군은 숙영문제를 해결했을뿐만아니라 자신을 엄호했으며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군중과 련계, 신출귀몰하면서 유격전을 벌려나갔다. 낮이면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남만에 온후 유격근거지를 개척함과 동시에 유능한 간부와 공산당원들을 인민군중속에 파견하여 선전고동활동을 벌리였다. 그들은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조국광복회, 청년동맹, 반일회, 부녀회, 반일소년단 등 군중적인 혁명단체를 결성했다. 1936년말부터 1937년 2월, 장백현 20도구에 조국광복회장백현공작위원회를 건립, 산하에 수십개의 기층조직을 세웠다. 이시기 장백현 19도구에 권영벽을 서기로 하는 중공장백현위원회를 건립하고 아래에 3개 특별지부와 10여개 직속 지부를 두었다. 적들의 통치지구에 건립된 군중단체들은 중공장백현위의 령도아래에서 군중을 발동하고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이런 군중단체들은 또 량식과 병력을 보충하는 큰 뒤심이기도 했다. 이 시기 300여명 청년이 항일련군 제2군에 참가했다. 반일단체에서는 당조직의 령도하에 청년들을 골간으로 하는 “생산유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유격대는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반군사조직이였는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생산로동에 참가하여 량식을 생산해 항일련군에 지원하고 한편으로는 적정을 정찰하거나 보초를 섰으며 유사시에는 항일련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장백항일유격근거지는 연변의 항일유격근거지때와 같지 않았다. 연변의 유격구는 해방지구의 유격구였는데 유격구에서는 적구의 군중들을 쓴외보듯 했으며 지어 적통치지구의 인민들에 대해 “백색군중”이라고 하면서 적대시하였고 중간지대의 군중들에 대해서 “량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경원시하였다. 그러나 장백에서는 군중을 “적”, “백”으로 갈라놓는 실책을 피해 적점령구 깊이에까지 들어가 군중공작을 하여 항일하려는 모든 군중을 단결, 투쟁에로 불러들였다. 하여 집단부락의 경비를 맡은 자위단원들속에도 우리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적들의 기층정권기관에도 공산당에서 파견한 공작인원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대부분의 구장, 촌장, 툰장자리도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일본군경들과 만주국관원들의 심부름을 해주는척하다가도 밤이 되면 회의도 하고 야학도 꾸리고 항일군에 보낼 후방물자수집도 하고 원호미도 찧으면서 바쁘게 돌아쳤다. 하여 낮이면 적의 세상이지만 밤만 되면 우리들의 세상이였다. “언제인가 우리는 팔도강이라는 집단부락에 식량공작을 간 일이 있었다. 팔도강의 자위단에는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이 있었다. 우리 소분대는 이 공작원의 련락을 받고 혁명가요를 부르며 곤두총을 쏘면서 마을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자위단의 무장은 해제하지 않고 공작원이 미리 마련해놓은 식랑만 가지고 돌아왔다. 유격대가 철수한 다음 공작원은 일본인경찰을 찾아가 유격대가 마을을 들이치고 식량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포대만 점령하지 못하였다. 포대 때문에 자위단이 살아났다고 하면서 놈들을 속여넘기였다.”(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광활한 심산밀림속에서 유격활동을 벌렸을뿐만아니라 적점령구의 반일단체와 인민군중들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받으면서 부대를 장대시켰다. 반"토벌"전투 장백지구에서의 항일련군의 맹활약은 일제를 당황하게 했다. 이에 관동군은 동변도를 포함한 만주일대에 항구적인 치안대책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을 만들기에 이르게 되었고 만주국정부는 “3개년치안숙정계획요강”을 내놓았다. 가장 중심적인 특별공작대상자로 정한 것이 바로 북부동변도 즉 장백, 림강, 무송, 동강, 휘남, 금천, 류하, 통하, 집안 등지였다. 위만주국은 중앙에 “동변도부흥위원회”를, 통화에 “동변도부흥판사처”와 “동변도특별치안유지회”를 설치하는 한편 만주국군부 최고고문인 사사끼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화토벌사령부”를 내오고 북부동변도의 치안확보를 겨냥하는 “동기대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의 동기토벌을 대비해 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2사와 제2군4사, 6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이며 제2군 군장인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의 령도하에 장백, 무송, 몽강, 안도 등 현에다 많은 밀영을 건설하고 대량의 량식과 군수물자를 축적, 반“토벌”전을 준비했다. 반면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국경일대에는 각양각색의 “토벌”부대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였다. 남부조선의 경찰부대도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치치할에 있던 광동군부대들도 장백산쪽으로 남하기기 시작했다.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 산하 부대들도 압록강을 건너왔다. 일만경찰부대들과 위만군“토벌대”들도 항일련군을 향해 몰려들었다. 압록강연안에는 경찰관주재소들이 부쩍 늘어났다. 곳곳에 단속초소들이 생겨났으며 강우로는 전화선들이 줄줄이 늘어졌다. 바로 이 무렵부터 적들은 경찰관의 아내들까지 사격훈련을 시키였다. 달구지나 발구, 말파리 같은 것이나 겨우 드나들던 백두산일대 두메산골 오솔길들로는 대표바퀴와 치중마차들이 굴러다니게 되었고 밀림속 곳곳에 군마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지기 시작했다. 장백산지대는 “토벌대”들로 쫙 덮혔다. 적들은 “이번 토벌을 최종적인 것으로 하여 치안을 결정적으로 확립한다”고 하면서 장백산일대를 참빗질하였다. 그러나 항일련군의 기동령활한 유격전앞에서 적들은 간곳마다에서 골탕을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10월 10일, 2군 4사와 6사의 400여명 전사는 안도현남부의 동청구부근에서 위만군 제7려 14퇀을 습격 일본군 대좌와 중좌를 비롯한 10여명을 격살했다. 이에 적들은 5000여명 병력을 긁어모아 4사와 6사를 포위추격해왔다.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 등은 부대를 이끌고 무송, 림강, 몽강 등지의 림해설원으로 적들을 끌고다녔다.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갑자기 사라지면서 이곳에서 한바탕 두둘기고 저곳에서 뒤통을 답새기면서 적들의 추격을 파괴해버렸다. 11월 4일,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는 대양차위만군주둔지를 물샐틈없이 포위한후 맹렬한 공격하는 한편 정치공세를 들이대 10여분만에 적들이 두손들고 투항하게 했다. 하여 아군은 기관총 2정, 보총 150여자루, 탄알 15상자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으며 적들의 장백산지구로 들어오는 목이나 다를바 없는 군사요충지를 회멸해버림으로서 장백산지구 각 현 항일유격선로를 개통해놓았다. 11월하순, 2군에서는 무송현 소탕하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정보를 알아낸 적들은 600여명 병력을 동원해 소탕하를 향해 진군해들어왔다. 소탕하서북측의 고지를 점령한 적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아군의 주둔지를 향해 돌연적으로 습격해왔다. 왕덕태는 1개 패를 파견하여 군중을 엄호하면서 후퇴하게 하고 군부 교도퇀 1개 련을 적들의 등뒤로 빠져나가게 하여 앞뒤로 적을 포위해버리려 했다. 적들의 공격을 점점 거세져 전투는 갈수록 가렬해졌다. 아군의 희생자도 점점 많아졌다. 긴요한 관두에 아군의 기관총수가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적들은 머리를 쳐들고 미친개마냥 달려들었다. 이때 6사 8퇀 정위 김산호가 비발치는 총탄을 맞아 받아 달려나가 쓰러진 전우의 손에서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돌격해오던 적들을 기관총사격에 폭폭 쓰러졌다. 그러나 그마저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눈앞에서 두 전사가 쓰러지는 것을 본 왕덕태는 벌떡 일어나 전우의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다. 은밀히 파견되였던 교도퇀은 끝내 적들의 뒤등으로 공격해왔다. 최현퇀장이 인솔하는 4사 1퇀도 정면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넘어서야 부대는 적들의 포위를 완전히 뚫고 나올수 있었다. 그런데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이며 제2군 군장인 왕덕태가 불행히도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왕덕태는 겨우 28살이였다. 왕덕태가 희생된후 제2군의 모든 령도중임을 위증민이 맡게 되었다. 위증민은 2군 4사, 6사와 1군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다시 림강으로 전이했다. 12월 2군의 4사와 6사의 200여명 병력은 림강의 5도구에서 위만군과 격전을 벌려 20여명을 격살하고 30여명을 포로했다. 1937년 양력설, 500여명의 일만군이 6사의 홍두산밀영을 습격해왔다.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림강일대에서 활동하고있어 밀영에는 30여명의 전사들이 남아있을뿐이였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접한 전사들은 주동적으로 밀영을 비워놓은후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련속하여 적들을 볶아댔다. 이곳저곳에서 얻어맞은 적들은 100여구의 시체를 남긴채 창황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계속)  
560    제54장 장백으로의 진격 댓글:  조회:2232  추천:0  2014-02-14
  무송현전투때의 소남문포대. 무송에서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해 적을 호되게 타격 대덕수 소덕수 반절구 전투에서 항일련군 위망 떨쳐 무송현소재지전투 1936년 8월, 쟝쟈탕즈밀영에서 제2군 제4, 제6사, 제1군 제2사의 주요한 간부들과 장백산지대에서 활동하고있는 의용군 두령들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병력을 집중, 련합작전하여 무송의 중요한 진들을 습격하기로 작전방침을 정했다. 8월중순, 제2군의 1500여명 주력부대와 항일구국군 리홍빈부대, 항일의용군 구참, 만순, 만군부대의 600여명은 쟝쟈탕즈회의 부서에 좇아 무송현 서북부에 집결하였다. 군중을 발동, 단결하고 항일련군의 영향면을 확대하기 위해 제2군 군부는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하여 무송현소재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무송은 통화지구 일만군의 큰 거점이였다. 일제는 무송을 “동변도치안숙정”의 중점거접으로 삼고 실전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다까하시 한 개 중대의 일본군 정예부대와 위만군 한 개 영, 위만경찰 한 개 대대 도합 1000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있었다. 무기장비가 좋고 탄알도 충족했으며 견고한 토성과 포대로 둘러싸여 있어 일제는 무송을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라고 자부하고있었다. 그런만큼 무송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것은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있어서 아주 의의가 컸다. 무송현소재지공격은 장백산서북부일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국면을 열어놓는 전투로 될것이였다. 제2군 6사 사장 김일성은 한때 무송에서 지낸적있기에 시가지를 손금보듯 알고있었고 항일부대의 영향하에 있는 위만군 한 개 중대가 서문보초를 서고있어서 작전에 퍽 유리했다. 위만군 왕부중대장은 아군이 성시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는 시간에 성문을 일시에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8월 16일, 6사의 한갈래 부대가 돌연히 무송현소재지부근의 송수진을 습격하여 적들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다른 한갈래 부대는 김일성의 포치에 따라 안도, 몽강, 림강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했다. 전투개시시간을 17일 새벽 1시로 정하고 부대가 급보로 행군하여 성문앞에 다달았으나 위만군 반일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준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교대시간이 되어 다른 병사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때문이였다. 위만군 반일병사들은 기관총의 기관실에 모래를 쓸어넣고 초소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성문을 은밀히 열고 성안에 돌입하여 적들을 일격에 섬멸하려던 작전계획은 일단 뒤틀려졌다. 그렇다고 하여 전투를 정지할 수는 없었다. 8월 17일 새벽 3시, 드디여 무송현소재지를 공격하는 아군의 총소리가 울리였다. 주공임무를 맡은 6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동산포대를 점령하고 대남문, 소남문 방향으로 공격하여 성안의 적을 소멸하기로 되어있었다. 반일부대는 동문과 북문 방향을 담당하기로 되었다. 공격명령을 내리기 바쁘게 동산포대를 점령한 김일성부대는 소남문방향을 향해 돌진해갔다. 반일부대 병사들도 북문과 동문쪽으로 진공하였다. 소남문앞거리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성문으로 육박하는 아군을 향해 포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적들이 짖어대는 기관총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그러나 아군은 기관총중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성문을 까부시고 시내로 돌입해들어갔다. 그런데 6사 전사들이 육탄으로 돌파구를 열어놓은 그 시각에 북문을 공격하던 만순부대가 적의 포성에 질겁하여 퇴각한다는 련락이 날아왔다. 조금후 동문을 담당했던 리홍빈의 부하들이 반격해오는 적을 막지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한탓으로 동문을 나선 적들이 모조리 소남문쪽으로 밀려오고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광이 책임진 소부대가 만량하습격전투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보고까지 날아들었다. 만순부대의 공격서렬이 수라장으로 되자 그 여파가 익측에까지 미쳐 리홍빈부대도 풍지박산이 되었다. 전국을 미처 수습하지도 못하였는데 벌써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정황은 아군에게 시시각각으로 불리해지고있었다. 아군은 예상외로 적의 병력이 증가된 상황에서 적을 밖으로 끌어내다 족치려 했다. 그때를 김일성회억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앞에는 날이 완전히 밝기전에 전장에서 철수하든가, 아니면 정면돌격의 방법으로 결사전을 벌리든가 하는 두갈래의 길이 놓여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인전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품은 다음에도 인명피해가 두려워 퇴각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늘이 우리를 돕는 기적이 생기였다. 현성과 그 주변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서리면서 한치앞도 가려볼수 없는 천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각 부대들에 흩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동산과 소마록구 릉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적들은 퇴각하는 아군을 미친 듯이 따라왔다. ...7련대 주력은 자욱한 안개를 리용하여 동산남쪽고지에 긴 매복진을 쳤다. 반일부대들도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맞은켠 릉선을 차지하였다. 그때에야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던 중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안개 낀 골짜기로 깊숙이 철수하였다. 그들도 나중에는 골짜기 막바지에 있는 산등성이에 올라 감쪽같이 매복하였다. 시참으로 악명을 떨친 다까하시부대는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죽음의 함정속으로 모조리 끌려들어왔다. 승패는 이미 결정된셈이였다. 우리는 산에서 내리쏘고 적들은 골짜기에서 올리쏘는 화력전이 얼마동안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다까하시는 사병들은 만순이 용맹의 전범이라고 말하던 그런 악독한 전술로 파장식돌격을 들이댔으나 매번 주검만 남기고 물러서군하였다. 돌격이 은을 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총질을 멈추고 산기슭에 붙어 증원부대가 오기를 기다리였다. 나는 반돌격명령을 내리였다. 류창한 나팔소리와 함께 매복진에서 뛰쳐일어난 아군용사들은 적들을 닥치는대로 쓸어눕히였다. 백병전의 선두에는 “연길감옥”이란 별명을 가진 7련대의 분대장 김명주가 서있었다. ...김명주가 연길감옥에서 탈옥투쟁을 할 때 그를 희생적으로 도와준 8련대의 중대장 려영준도 이 전투에서 “칠성자” 못지 않게 잘 싸웠다... 유격대의 “녀장군” 김확실은 시종 두눈을 부릅뜨고 기관총을 쏘았다. ...김정숙이 량손에 싸창 한자루씩 거머잡고 기관총으로 련발사격을 하듯이 불질을 하여 10여명의 적을 쓸어눕혔다는 일화도 무송현성 전투가 빚어낸것이였다. ...다까하시의 “정예부대”는 동산골짜기에서 전멸을 면할수 없었다. 이 비극적인 사태는 그날 오전중으로 관동군사령부에 보고되였다. 훗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보고 알게 된데 의하면 그때 신경비행장에서는 무송주둔군을 지원하려고 폭탄과 탄알을 만재한 군용기들이 떠올랐고 통화, 환인, 사평가 등지에서는 증원부대가 긴급히 출동하였다. 중강진수부대도 무송으로 급파되였다... 다까하시를 구원하기 위한 적의 병력은 림강, 장백, 몽강을 비롯한 린접 현들에서도 홍수처럼 밀려오고있었다. 그러나 비상한 속도로 추진된 이 발광적인 수습책도 다까하사를 함정에서 건져내지는 못하였다. 8월 17일 오후 일부증원부대들이 무송에 들이닥쳤을 때는 벌써 승패가 결정된 뒤였다. 아군이 진지수색을 끝마치고 깊은 수림속으로 승리적으로 철수해가고있을 때에야 신경에서 날아온 적기들이 공중에서 우릉거리기 시작했다. 적기들은 아군에 의해 파괴된 동산포대와 현소재지 부근의 주민가옥들에 눈먼 폭탄들을 마구 내리던지였다. 무송공격전에서는 아군은 비록 현소재지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항일련군의 위망과 정치적영향력을 크게 과시했다. 장백에서 벌린 전투 무송현소재지공격전을 끝낸 항일련군 제2군 제6사는 되골령을 넘어 장백현으로 진출한후 대덕수전투, 소덕수전투, 발전구전투, 이도구전투 등 비교적 규모가 크고 치렬한 전투를 벌리였다. 1936년 9월 1일, 김일성의 령솔하에 이도강서남의 대덕수촌에 이르러 항일선전을 위한 연극공연을 펼쳐보이려고 금방 무대가설을 끝냈는데 200여명 일본군 “토벌”대가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부딪친 6사 전사들은 사장 김일성의 지휘하에 군중들의 지지성원을 받으면서 교묘한 매복전을 벌리였다. 부대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리게 되었다. 적들이 보리밭 맞은편에서 고랑을 따라 접근해왔다. 적들이 보리밭을 거의다 벗어져나오기를 기다려 아군의 사격신호가 울리였다. 항일련군이 매복해있을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적들은 어쩔새 없이 호되게 얻어맞았다. 대패한 적들은 이동강쪽으로 도망쳤다. 그날 아군은 적 40여명을 소멸하고 기관총 1정, 보총 40여자루 로획했다. 전투의 승리를 경축해 대덕수마을 군중들은 감자떡을 치고 농마국수를 눌러 전사들을 위로했다. 전사들은 간단한 공연과 항일선전으로 답례한후 마을을 철퇴했다. 대덕수를 떠난 부대는 소덕수등판에서 숙영한후 마등창수림속에 이동하여 휴식했다. 어떤 전사들은 한창 굳잠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적들의 총소리가 울렸다. 15도구방향과 이도구방향에서 밀려온 적들이 남북량쪽에서 거의 동시에 달려들고있었던 것이다. 무성한 숲은 적아를 구분하기 어렵게 했다. 아군이 감쪽같이 빠져나가면 적들은 저들끼리 맞붙을 가능성이 충분한 기회였다. 이에 사장 김일성은 마등창수림에서 슬쩍 빠져서 15도구등판으로 철수하라고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아닌게 아니라 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맞다들어 쏘아대는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아군은 등판에서 저들끼리 싸우는 꼴을 실컷 구경할수 있었다. 적들은 좋이 서너시간을 싸웠는데 이동강쪽패가 정 못견디겠던지 먼저 퇴각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소리를 듣고서야 15도구패들도 제편끼리 싸운줄 알았는지 사격을 중지했다. 그날 전투에서 일본군수비대 70여명을 포함하여 적 150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날 적들은 담가가 모자라 신창동의 집집마다에서 문짝이라는 문짝은 다 뜯어다가 저들의 시체를 거두어가지고 황황히 꽁무니를 뺐다. 대덕수, 소덕수전투의 승리는 광범한 인민대중을 크게 고무했는바 젊은이들은 용약 항일부대를 찾아와 참군할 것을 지원했다. 9월 12일, 6사는 다시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반절구에 대한 야간습격전을 벌리였다. 반절구는 장백현에서는 비교적 큰 촌락이였고 적들의 군사요충지였다. 적들은 부락에다 적지 않은 일본경찰과 위만군을 주둔시키고있었다. 6사는 3시간여의 치렬한 전투를 벌려 반절구를 점령, 경찰서를 까부시고 위만군거점을 뿌리뽑아버렸다. 10월 19일부터 24일까지 6사는 련속하여 이도강, 이십도구에서 많은 일만군 유생력량을 소멸했다. 하리회의후 장백현일대로 진격한 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는 일만군을 호되게 타격해 항일련군의 성망을 높였으며 남만인민들의 반일정신을 크게 고무격려했다. 또 항일련군부대가 장백현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훌륭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계속)  
559    제53장 동북항일련군제1로군건립 댓글:  조회:2286  추천:0  2014-02-14
김일성의 친필원고. 하리회의서 조선인공작회복할데 관한 결의 채택 중국혁명에 참가하고있는 조선인 이중사명 제시 조국광복회 결성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김일성회고록(제4권)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4월말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창립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이 그럭저럭 거의다 모여왔으나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까지 보내왔던 남만의 전광(오성륜)이 대회가 끝나도록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오지 못하였다. 국내대표로는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농민대표가 왔고 온성지구의 당조직을 타고 교원대표와 로동자대표 각각 한사람씩 왔다. 력사적인 조국광복창립대회는 5월 초하루날부터 시작되였다. 꽃은 만발하지 못하였지만 만산에는 봄빛이 짙었다. 회합을 앞두고 대표들은 모두다 격정과 흥분으로 설레이였다. 통칭하여 동강회의라고 부르는 그 회의는 15일간이나 진행되였다... 창립대회에서 김일성이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힘있게 전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진술한후 “조국광복회10대강령”(김일성 작성)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김일성 작성)을 대회심의에 붙였다. 대표들은 심중한 토론을 건친후 강령과 선언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2. 재만 조선인들은 조중민족의 친밀한 련합으로써 일본 및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령토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자치를 실현할 것. 3. 일본 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써울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장해없이 발전시킬 것. 6.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실현과 봉건사상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발할 것. 7. 량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벌없는 인륜적평등과 부녀의 사회상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할 것. 8. 노예로동과 노예교육의 철페, 강제적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 것. 9. 8시간로공제실시, 로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로동범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로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있는 근로대중을 구제할 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련합하여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친선을 유지할 것. 5일동안의 토의를 거친후 김동명(김일성), 리동백, 려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이 채택되였다.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리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이 탄생하게 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여 보다 조직성있고 체계성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력량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반일회, 농민협회, 부녀회 등 각종 반일단체의 조선인들을 조국광복회두리에 묶어세워 반일에 총궐기시키게 했다. 강령에는 중조민족과 일본제국주의자와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으로 된 정황하에 신변에 쌍중임무를 걸머진 동북조선인들이 반드시 해결하고 리행해햐 할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대외정책 등 제 방면의 문제가 명백히 제시되였으며 한 방면으로는 중국혁명에 참가해야 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는 중조공동항일무장투쟁의 정책도 구현되여있었다. “조국광복회는 민족주의세력을 비롯한 모든 반일력량은 한데 뭉치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였습니다. 과거의 계급투쟁을 버리고 평화, 민주주의기치하에 일체 항일력량을 포섭, 전민족이 항전에 떨쳐나서기 위해서였습니다. 중국인들은 구국회두리에 뭉쳐 항일에 떨쳐나섰습니다.”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된후 김일성은 권영벽 등 30여명의 정치공작원을 장백산일대의 농촌에 파견하여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하여 7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결성, 리제순이 회장을, 장증렬, 황금옥이 각기 청년부장, 부녀부장을 맡았다. 1937년초 장백현조국광복회는 산하에 상강구위와 하강구위를 두었다. 상강구위산하에는 신흥촌, 행산, 19도구, 주경동, 대사동, 평강동, 왕가동, 치부동 등 9개 지회를 두었고 하강구위산하에는 도천리, 요방자, 14도구, 신방자, 탕성리, 태호산, 팔도구, 구도구 등 8개 지회를 두었다. 지회산하에는 49개 분회를 두었고 회원은 수천명에 달하였다. 금천하리회의 4개월 남짓 되는 간고한 려정을 거쳐 동북항일련군 제2군 주력부대인 제1사와 제3사는 안도, 돈화, 무송, 림강, 몽강 등지를 전전하다가 1936년 6월 드디여 남만의 금천현 하리항일유격근거지에 다달았다. 7월 4일, 중공남만특위에서는 금천하리의 후방기지인 혜가구밀영에서 50여명 대표가 참가한 제2차 당대표대회를 거행했다. 중공동만특위서기이며 제2군 정위인 위증민이 한 개 련의 병력을 이끌고 때마침 하리에 도착하여 회의에 렬석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남만공산당조직과 제1군에 공산국제 제7차 대표대회정신과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을 전달하려던 위증민은 직접 대회에서 상기의 정신을 보고하게 되었다. 대표대회에서 제1군 군장 양전우가 군사보고를, 중공남만특위서기 리동광(조선인)이 당의 지방사업보고를 진술했다. 대회에서는 중공남만특위 제1차 대표대회이래의 경험과 교훈을 총화하고 금후의 사업방침과 책략을 제정, 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고 당조직과 항일련군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킬 문제를 토의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또 조선인공작을 회복할데 관한 결의가 채택되였으며 조선인은 일제를 타도한후 자원의 기초에서 동북에 남아 자치를 실현할수도 있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에 몸바칠수도 있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중공남만당대표대회가 페회된 며칠후인 7월 7일, 위증민과 양정우는 금천하리에 있는 항일련군 제1군 밀영에서 중공동남만특위 및 제1, 제2군 주요한 령도간부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는 양정우, 위증민, 리동광, 류좌건, 왕인재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 위증민이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의 정신과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중공만주성위를 철회하고 동만, 남만, 길동, 송강 4개 성위를 조직하며 항일련군을 “로군”으로 편성할데 대한 지시정신을 전달했다. 회의에서 양정우가 동북항일투쟁의 새로운 형세를 분석하고 동북지구의 중공당과 항일련군부대의 목전의 전투임무를 제시했다. 회의에서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연변지구와 동변도지구에서 활동하고있는 제1군과 제2군을 합병하여 동북항일련군 1로군으로 재편성할 문제와 두 지구의 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동남만성위를 건립할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했다. 연변지구의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미 적들에 의해 파괴되였고 제2군의 주력도 이미 남만으로 전이해온 상황이다. 이것은 1,2군의 배합작전과 공산당의 통일령도에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하여 회의에서는 중공동남만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남만성위 혹은 중공남만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남만성위로 재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위증민이 중공남만성위서기로 선거되였다. 위증민, 양정우, 왕덕태, 리동광, 리학충, 조아범, 김일성, 이준산, 안이화, 주수동, 진한장, 왕윤성, 송철암, 려백기, 전광, 왕인재 등 16명이 중공남만성위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회의에서는 제1, 제2군을 련합하여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편성하고 통일적인 군사지휘기관인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를 조직했다. 총사령 겸 정위를 양정우가 맡고 부총사령을 왕덕태, 총정치부 주임을 위증민이 맡았다. 제1로군산하에 제1, 제2군을 두고 6개 사를 배치했다. 원래의 제1군의 1, 2, 3사는 그대로 편제를 두고 제2군의 3개 사를 4, 5, 6사로 개칭했다. 제1군 군장과 정위를 양정우가 겸직하고 정치부 주임을 송철암, 참모장을 안광훈이 맡았다. 제1사 사장에 정빈, 정치부 주임에 호국산, 참모장에 리민환, 제2사 사장 겸 정위에 조국안, 참모장에 리희민, 제3사 사장에 왕인재, 정위에 주건화, 참모장에 양준항이 임명되였다. 제2군 군장을 왕덕태, 정위를 위증민, 정치부 주임을 리학충, 참모장을 류한흥이 맡았다. 제4사 사장에 안봉학, 정위에 주수동,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 제3퇀 퇀장에 랑화가, 정위에 주수동이 임명되였다. 제4사 사장에 사충항, 정위에 왕윤성, 참모장에 진한장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윤성, 제5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왕송백이 임명되였다. 제6퇀은 퇀장, 정위를 정하지 않고 사부에서 직접 령도하기로 했다. 제6사 사장에 김일성, 정위에 조아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4개 퇀을 두었는데 제7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김재범, 제8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왕진아,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정위에 김산호, 제10퇀 퇀장에 서학충이 임명되였다. 2군 병력은 근 3000여명 되었는데 조선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있었다. 하리회의에서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유격활동방침과 임무를 확정하고 제1, 제2군과 각 사의 활동구역을 획분했다. 제1군 군부와 제1, 제3사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렬하, 수원으로 서정하여 관내 홍군들의 동정과 배합하라는 지시에 좇아 료남, 료서로 진군, 광활한 지역에서 군중을 발동하여 유격전쟁을 벌리기로 하고 제2군 군부와 제2, 제6사는 무송, 몽강, 통화, 장백, 림강 등 로유격구에서 투쟁을 견지하면서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로 했다. 제5사는 동만, 수녕 지구에 남아 제5군과 배합하여 유격활동을 벌림과 동시에 제1로군과 남만성위, 제3, 제5군 및 북만, 길동 당조직과의 련계를 확보하기로 했다. (계속)  
558    제52장 남북만으로의 전이 댓글:  조회:2440  추천:0  2014-02-14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조선인장병들. 제2군 남북만에서 일만군 호되게 족치고 동광서 재만조선인광복회 조직문제 토의 따푸차이허전투 동북항일련군 제2군 각 사는 제2군, 제5군 당위특별회의에서 결정한 “남만의 1군과 길동의 5군과 협동작전하면서 광대한 유격구를 개척한다”는 전략방침에 좇아 부대를 나누어 활동을 개시했다. 제1군과 함께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해 제1, 제3사는 군장 왕덕태, 정위 위증민의 인솔하에 돈화, 화전, 무송, 몽강, 림강, 장백 등지로 진군해들어갔다. 제5군과 배합작전하면서 수녕항일유격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제2사는 진한장, 왕윤성의 령솔하에 녕안, 목릉, 동녕 일대로 진격해들어갔다. 제2군 군장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이 이끄는 제1사 주력부대는 서진박차를 가하면서 전투기회를 노리다가 4월초, 돈화, 화전 경내로 들어가 따푸차이허전투를 진행했다. 이번 전투는 제2군이 창립된후 그 주력부대가 남만으로 향하는 도중 연변경내에서 벌린 가장 큰 전투였다. 따푸차이허는 장광재령산맥인 부얼령 동북쪽, 한총령과 목단령의 서남쪽에 위치하고있는데 장광재령을 계선으로 길림지구인 화전현과 잇닿아있고 동남으로는 안도현과 통화지대의 무송현과 이웃하고 있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따푸차이허에는 인가가 몇호 되지 않았다. 1936년 일제는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면서 부근의 석인구, 경구, 류수하자 등지의 산재호들을 집중시켜 마을을 만든후 위만경찰서까지 설치하여 경비를 강화하였다. 따푸차이허는 일본군이 돈화 남부지대를 통제하는 중요한 거점이였다. 이곳에서 능히 안도, 돈화, 화전 3개 현의 접경지대를 통제할수 있어 항일련군 제2군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는데 매우 큰 장애로 되었다. 따푸차이허는 돈화현소재지와 60킬로메터 떨어져있기에 일단 일이 나면 증원부대가 금방 닿을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군사적위치를 가지고있는 따푸차이허를 진공하기 위하여 군장 왕덕태, 정위 위증민은 제1사 사장 안봉학 등과 면밀한 전투방안을 세웠다. 1936년 4월 6일, 제2군의 소분대는 따푸차이허를 포위, 공격하는것처럼 꾸미고 주력부대는 밤도와 돈화와 따푸차이허 중간에 있는 한총령으로 강행군해갔다. 이튿날 동틀 무렵 한총령에 이른 부대는 길 량쪽산의 수림속과 골어구에 매복했다. 4월 7일, 돈화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은 따푸차이허가 항일군의 공격에 림하고있다는 정황을 접한후 즉각 500여명의 일본군과 250여명의 위만경찰을 출동시켜 급급히 따푸차이허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튿날 오전 9시, 적들의 선견부대 60~70명이 아군의 포위망속으로 먼저 들어섰다. 선견부대가 지나간 뒤를 이어 대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섰다. 점심때쯤 하여 일만군 대부대는 제1사의 매복권안에 완전히 잡히고말았다. “땅, 땅!” 공격명령을 알리는 신호총소리와 함께 길량켠 매복하고있던 항일련군 전사들은 일만군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수류탄과 작탄이 적중으로 날아들어가 굉음을 울리면서 적들의 대갈통을 박살내고 살점을 뜯어 하늘로 날려보냈다. 사기충천한 항일련군 전사들의 공격앞에서 묵사발이 되어 쩔쩔매기만 하던 적들은 드디여 창황히 퇴각했다. 항일련군은 몇시간동안의 치렬한 전투를 벌려 대량의 적들을 섬멸하고 많은 중형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전장을 수습한 아군은 따푸차이허를 습격하기 위해 인차 되돌아섰다. 10일 새벽 아군의 주력부대는 따푸차이허 동쪽어구에 바싹 접근하여 적의 포대를 점령하고 다른 한 부대는 서북쪽에 있는 적의 포대를 까부시였다. 위만군 대대장은 두 개 중대를 거느리고 부얼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그곳에 매복하고있던 아군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았다. 대대장이 졸개 몇을 데리고 도망친외에 두 개 중대가 전부 아군에 의해 포로되고말았다. 따푸차이허를 점령한 항일련군은 군중대회를 열고 중국공산당의 항일구국정책을 선전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당장에서 항일련군에 가입하겠다고 나섰다. 따푸차이허전투후 1사 주력은 남하하여 무송, 몽강 일대로 진격, 유격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동강회의 항일련군 제2군 제3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안도를 출발하여 무송경내로 직접 진격해들어가 몇차례의 전투를 벌렸다. 3사의 주력부대는 4월, 만강을 습격하여 주둔하고있는 적들에게 회멸성타격을 가했고 5월초 동강부근에 이르러 동강툰위만군병영을 습격, 침중한 타격을 줌과 아울러 적의 거점을 제거해버렸다. 5월초, 제2군 군장 왕덕태는 1사를 거느리고 동강에 도착하여 김일성의 3사와 회사한후 손가봉교(孫家峰窖)밀영에서 군, 사급 간부회의를 소집, 1사와 3사의 금후 행동계획을 연구했다. 회의에서 3사는 무송, 안도, 장백, 림강 등에서 활동하면서 장백산을 중심으로 하는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무송과 안도경내에는 항일의용군소분대와 항일산림대가 많이 활동하고있었다. 회의에서는 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을 쟁취하여 항일련군에 가입시켜 제9퇀과 제10퇀을 새롭게 편성, 제3사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제10퇀 퇀장에 서괴무를 임명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왕진아를 제8퇀 정위로, 손장상을 제3사 참모로 임명했다. 동강회의에서는 또 항일유격구의 군중공작을 강화하고 광범한 항일군중을 동원하여 항일구국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아울러 “일본의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과 련합하여 한인(韓人)내부 반일련합전선을 건설하라”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조선인군중들로 결성된 통일전선조직-“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를 조직할 문제를 토의, 조국광복회는 모든 반일력량과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남북만에서의 전투 동강회의후 왕덕태는 제3사 8퇀을 이끌고 무송현 북강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김일성은 3사 7퇀, 9퇀을 이끌고 무송현 서강과 림강현 변경에서 활동했다. 리학충은 군부소년영을 이끌어 마안산밀영일대에서 활동했고 제3사 10퇀은 무송현소재지 남쪽에 있는 송강일대에서 활동했다. 5월 8일, 제3사 10퇀은 삼도묘령에서 무송현위만경찰대대의 수십명 병력과 맞다들어 격전을 벌렸는데 싸움에서 대대장 왕영성을 비롯한 많은 적들을 격살하였다. 5월중순 제3사 7퇀은 탕하구부근에서 무송의 위만군 모부 기병 3련과 조우, 격전을 벌려 20여명을 섬멸하고 무기와 탄약을 로획했다. 동강회의가 있은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 제3사 사부에서는 일만군 한 개 대대 병력이 무송으로부터 림강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에 7퇀, 9퇀의 일부 병력과 경위련 도합 200여명이 산발을 타고 급행군하여 림강과 무송 가운데 있는 로령에 음밀히 매복해있다가 적선견부대가 포위권안에 들자 맹렬히 사격, 1시간여의 격전을 벌려 적 30여명을 소멸하고 각종 무기 30여자루와 탄알 2000여발을 로획했다. 전투가 끝난후 7퇀의 한 소부대는 농민복장을 한후 당지 군중들속에 섞여 서강툰으로 잠입, 위만군병영을 습격하여 40여명 위만군을 살상하거나 포로했다. 본부대가 서강에 진주한후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전투후 서강의 40여명 젊은이가 항일련군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6월 6일에도 3사의 100여명으로 조직된 한 부대는 김일성의 인솔하에 림강현 서남차의 적거점을 지혜롭게 탈취하였다. 농민복장을 한 전사들이 깜쪽같이 적보초병에게 슬슬 다가선후 맹호마냥 달려들어 총을 빼앗은후 쓰러눕혔다. 이어 부대가 번개같이 경찰분소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아군은 적 18명을 격살하고 총 18자루를 로획, 경찰분소를 불살라버리고 포대를 폭파해버렸다. 서남차전투후 3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서강과 동강에서 련이어 전투를 벌려 적들을 타격했다. 7퇀, 8퇀, 경위련은 무송의 서강툰에 이른후 어둠을 타서 서강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을 습격, 10여명을 격살하고 10여명을 포로하고 100여자루의 무기를 로획했다. 다른 한 부대는 동강위만병영을 들이쳐 중대장 이하 100여명을 포로하고 10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1, 제3사의 장백산지구에서의 유격전쟁과 반일통일전선의 부단한 확대는 제2군의 위망을 높여주었으며 당지 여러 민족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한편 새롭게 편성된 제2군 제2사는 녕안, 왕청, 동녕 등지에서 적들과 전투를 벌리였다. 2사 4퇀 4련, 7련은 녕안현 퇀싼즈에서 100여명 일만군과 교전, 40여명을 소멸하였고 위자구에서는 포위를 돌파하면서 40여명을 소멸했다. 1936년 3월 23일, 2사 5퇀의 한 개 부대는 도-녕(도문-녕안)철도의 삼차구역에서 왕청현 락타산으로 들어가는 일군을 공격했다. 5월 18일에는 2사 4퇀과 5군 1사 3퇀이 녕안현 경박호남쪽에서 련합작전을 펼쳐 일본군 10여명을 격살했다. 5월 27일, 제2사 일부 부대와 제5사 일부 부대는 녕안현 연통구의 위만경찰대를 습격하여 3명을 격살하고 나머지 30여명을 전부 포로했다. 후국충이 인솔하는 2사 4퇀 한 부대와 5군 부군장 시세영이 인솔하는 부대는 녕안현 사도하자에서 위만삼림경찰대를 습격, 60여명을 포로했다. 이도하자에서는 하루동안의 격전을 벌려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고 10여차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6월초, 2군 2사 4퇀 주력부대는 녕안현 예허난거우에서 위만살림경찰대를 습격, 1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6월 23일, 2군 2사 5퇀은 돈화현 소황구에서 위만군과 교전하여 10여명을 소멸했다. 7월, 2군 2사 한 부대는 동경성에서 남호두로 가는 도로에서 일본군용자동차운수대를 습격하여 차에 타고있던 적들을 소멸하고 차량 3대를 소각, 대량의 무기와 물자를 로획했다. 이 시기 2군 2사 6퇀은 2군의 참모장 류한흥 등의 인솔하에 동녕, 왕청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벌려 부단히 적들을 타격하였다. 총적으로 항일련군 제2군 2사는 1936년 봄과 여름 사이에 치빙과 수녕지구에서 제5군과 밀접히 배합, 협동작전하면서 크게 발전장대해졌다.(계속)
557    제51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건립 댓글:  조회:1950  추천:0  2014-02-14
  미혼진밀영에서의 항일련군 제6사 조선인장병들. 조선인항일무장력 조선혁명력량 및 중국항일무장력량 이중사명 확인 김일성 등 조선공산주의자들 중한인의  통일된 무장대오건립을 주장 용맹한 서부파견대 1935년 9월, 일본군은 전면적인 추기“토벌”을 발동했다. 서부파견대는 액목에 온후 일만군과 여러차례의 전투를 벌리였다. 9월중순, 서부파견대는 액모현 청구자, 6호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려 적들을 소멸했다. 9월26일, 돈화현 관지서남에서 일만군을 매복습격하여 위만군 제11련대장 진옥청을 비롯한 일만군 10여명을 격살하고 군수물품을 로획했다. 10월에는 액목현 만리구, 삼도구에서 위만군과 두차례 교전하여 적들을 살상, 포로했다. 11월3일, 서부파견대는 액목현 청구자부근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전부 소멸하고 경기관총 1정, 보총 10자루, 권총 2자루, 탄알 600발을 로획했다. 청구자전투에서 서부파견대는 자신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해 적들로 하여금 크나큰 위협을 느끼게 했다. 특히 전투중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왜놈만 죽인다!” 등 구호들을 은을 내여 많은 위만군 병사들이 인민혁명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지어 인민혁명군을 가만히 방조해주기가지 했다. 어떤 위만군 장령들은 “당신네 부대를 만나면 공중에 대고 총을 셋방 쏘겠으니 그럴 때에는 우리 부대인줄 알고 못 본척해달라”고까지 하면서 일부러 교전을 피하기도 했다. 일본군과 위만군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식의 하나기 철갑모였다. 철갑모를 쓰면 일본군이고 안 쓰면 위만군이였다. 인민혁명군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철갑모를 쓴 일본군만을 골라서 갈기군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위만군까지 철갑모를 쓰고 전투장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래서 인민혁명군은 위만군에 향해 인민혁명군과 싸우지 않으려거든 철갑모를 벗으라고 련락했다. 그런 경고를 받은 다음부터 위만군은 인면혁명군한테 접근하면 철갑모를 벗어 자기네가 만주군이라는 것을 알리였다. 이런 상황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빨찌산이 철갑모를 쓴자들이 대렬앞에 있으면 앞을 치고 뒤에 있으면 뒤를 치군 하였다. 일본군은 “빨찌산이 신통히도 우리들만 골라친다”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위만군이 “토벌”에 나올 때 오발 등의 방법으로 빨찌산들에게 신호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이 약속도 곧잘 지키였다. 오발도 못할 때에는 수십명씩, 수백명씩 한데모여서서 “지지가가”, “지지가가”하고 떠들어대는 방법으로 자기네 위치를 알려주군 하였다. 위만군들은 편지 한 장만 내도 무기, 탄약, 식량을 실어다주었고 전투마당에서 “요창 부요밍(총만 요구할뿐 생명은 요구하지 않는다)”하고 입대포만 놓아도 총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적“토벌대”들은 우리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지만 우리는 적군을 포로하면 위만군이건 일본군이건 차별하지 않고 인도주의적으로 잘 대우하고 친절히 교양하여 려비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이렇게 하니 심지어 우리 부대에 총을 메고 7차례나 포로되여온 위만군 병사까지 있었다. 우리가 그 병사에게 롱조로 “이 친구 또 왔구려” 하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혁명군에 총바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군 하였다... 서부파견대는 11월 5일, 앵목현 로투구부근에서 일본군 11명과 자위단 몇놈을 죽였다. 또 액목현성에 쳐들어가 일만군 20여명을 소멸하고 많은 총과 탄알을 로획했다. 12월6일, 서부파견대는 돈화 관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유격활동을 범위를 더한층 확대하기로 결정, 리형박, 김일성이 제5군 제1사 제1퇀 제1련과 제2군 제3퇀 제4련, 제4퇀 제2련의 110여명으로 분견대를 조직, 이끌고 서남으로 진격하여 황니허, 교하지구에서 길돈철도를 습격하면서 아군의 정치영향력을 확대하고 나머지 부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유격전을 벌리기로 했다. 이 부서에 따라 서부파견대 분견대는 12월 7일, 먼저 관지를 공격, 일본교관의 지휘하에 있는 위만경찰중대와 1시간남짓 격전을 벌리여 일본군교관 3명을 비롯한 30여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위만경찰들이 분분히 총을 놓고 투항해 아군은 관지거리를 손쉽게 점령하게 되었다. 통구강자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은 소식을 듣고 즉시 증원병 200여명을 관지에 파견했다. 아군은 적들이 경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통구강자 동북부의 길 량켠에 매복해있다가 적들이 포위권안에 들어서자 맹렬히 사격, 대부분의 적들을 섬멸하였다. 이와 동시에 적들의 본영이 비여있는 틈을 타서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뒤돌아가 통구강자본부를 점령하게 했다. 관지와 통구강자를 점령한 아군은 3일동안 남아있으면서 군중대회를 열고 일제주구를 청산, 적들의 창고를 헤쳐 식량과 물자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돈화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련대는 관지와 통구강자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한후 즉각 대량의 일만군과 위만경찰을 출병시켜 돈화 동부와 서부의 관지, 통구강자, 흑석, 맹목에 쳐들어왔다. 1936년 1월 7일, 아군은 흑석진을 공격, 3시간 남짓되는 격전을 벌려 적들의 방선을 철저히 쳐부수고 흑석진을 완전히 공략했다. 1월 8일 흑석진에서 철퇴한 아군은 이튿날(1월 9일) 앵목진을 진공, 2시간여의 격전을 벌려 액목진을 장악했다.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휘관 1명, 교관 2명 헌병 6명을 격살하고 위만군 50여명을 살상, 대량의 탄약과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부대는 군중대회를 열고 로획한 군수물자 일부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5년 11월부터 1936년 1월말까지 두달남짓되는 사이에 서부파견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수차의 전투를 벌려 적들의 “토벌”활동에 충격을 주면서 일부분의 유생력량을 훼멸, 이 지구에서의 일만군통치에 타격을 주었다. 동시에 광범한 군중들에게 항일구국 선전, 조직 공작을 펼쳐 2군과 5군의 정치적력량면을 확대, 군중들의 항일열정을 고무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인민혁명군에 가입하여 부대의 력량을 장대시켰다. 2군 4퇀 2련의 서부원정을 시작할 때에는 일색으로 조선인전사들이였지만 이때에 와서는 많은 중국인전사들이 편입되여 보충되였다. 미혼진회의 1936년 2월 10일, 국제공산당주재 중국공산당대표단은 “8.1선언”의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여러 반일의용군은 함께 전 중국적으로 통일된 항일련군을 조직하자”는 정신에 따라 “전 동북의 항일련군총사령부를 건립하기 위한 결의초안”을 제출하고 반일통일전선의 수요에 적응하여 전 동북의 항일군대의 명칭을 동북인민혁명군으로부터 통일적인 “동북항일련군”으로 고칠 것을 결정하였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국공산당 국제대표단에 사업회보를 갔던 중공동만특위서기 위증민은 1936년 2월 5일, 흑룡강성 녕안현 경박호 북호두에 있는 제5군 군부에 도착하여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을 전달, 주보중 등과 함께 항일련군편성을 비롯한 일련의 문제를 토의연구한후 5군 군부를 떠나 동만으로 오는 도중 경박호 남호두에서 녕안에서 회사한 제2군과 제5군의 지도자들을 만나 제2군, 제5군 주요령도간부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대표단의 만주성위를 철회하고 유격구에 따라 남만, 동만, 길동, 송강 등 4개 성위를 건립할데 관한 지시정신과 동북항일투쟁에 관계되는 일련의 정신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중공대표단의 “중한(中韩)민족은 련합하여 공동항일함으로써 중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조선인문제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기본주장과 중공동만당조직에서는 한인“민생단”책략을 개변하여 망군노를 원치 않는 모든 사람들을 흡인하여 광범위한 항일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민생단”문제에 대한 지시정신도 전달했다. 회의후 위증민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왕덕태, 리학충, 김일성 등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유격구의 미혼진에 이르렀다. 미혼진에 다달은 제2군의 주요한 간부들은 위증민의 사회하에 중공동만특위와 제2군 군, 사, 퇀급 간부들이 참석한 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전영림 등이 참석하였다.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동만인민혁명군을 중한(中韩)항일련군으로 편성할 건의”를 전달한후 제2군 평선문제를 상세하게 토의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이 광범위하게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 적응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인민혁명군을 항일련군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일치하게 결의했다. 동시에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공산당주의자들은 항일련군 가운데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를 각기 건립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고 마땅히 항일련군의 이름으로 무장투쟁을 함께 조직하고 벌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8.1선언”과 “동북항일련군통일군대건제선언”을 충분히 토론한 기초에서 회의참가자들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편성할 것을 결정했다. 왕덕태가 군장으로 임명되고 위증민, 리학충, 류한흥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사와 군부직속교련퇀, 소년영을 두었다. 제1사는 원래의 제1퇀에 일부의 반일삼림대를 흡수하여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안봉학이 임명되고 주수동, 려백기, 박덕범 등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으며 아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겸)가 임명되였다. 제3사는 원래의 정2퇀과 제3퇀의 일부 및 전영림이 이끌던 항일의용군 6개 중대를 합쳐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김일성, 정위에 조아범이 임명되고 산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7퇀 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마덕전이 임명되였다. 3월 20일, 사충항이 부대를 이끌고 항일련군 제2군에 가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여 제4, 제5, 제6퇀이 인차 편성되였다. 사충항이 사장으로 임명되고 왕윤성, 진한장이 정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자균, 정치부주임에 왕송백, 제6퇀은 사부직속지휘에 두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은 전원이 2000여명이였는데 그중 조선인이 절반을 차지했다. 군당위원회는 군정위, 군장, 군정치부주임 및 세 개 사의 정위, 사장 등 9명으로 조직되였는데 그들로는 위증민, 왕덕태,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왕윤성, 사충항, 김일성, 조아범 등이다. 위증민이 서기로 당선되였다. (계속)  
556    제50장 로흑산전투 댓글:  조회:2070  추천:0  2014-02-13
  주보중(바이족)장군의 일기장에 씌여진 동북항일련군 여러 민족 지휘관들의 명단, 조선인지휘관들의 명단이 뚜렷하다. 정안군 사도하자를 피로 물들이고 인민혁명군 지혜롭게 정안군 괴멸 피로 물든 사도하자 라자구와 동녕현부근의 흑산은 지형이 복잡하여 우리 군이 활동을 활발히 벌리는데 매우 유리한 지구였다. 곡창지대인 로흑산부근은 또 아군의 식량기지이기도 했다. 일제는 항일군의 식량공급을 단절시키고 유격활동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일찍 1934년말에 정안군을 로흑산에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정안군은 악패지주와 한간주구들의 자제들을 긁어모아 조직한 부대였는데 일본군지휘관이 직접 지휘하고있었다. 정안군은 무기장비가 월등했는바 스스로 황군의 “철군”이라고 자칭했다. 정안군은 백성들에게 못된짓이란 못된짓은 다하는 비적무리였다. 놈들은 쩍하면 행패를 부리면서 백성들이 소, 돼지, 닭을 닥치는대로 략탈하여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악질적으로 항일부대를 추격, “토벌”했는바 반동기염은 실로 하늘을 찔렀다. 팔소매에 “정안군”이라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린다고 하여 백성들은 이자들을 “훙수톨(紅袖頭)”이라고 불렀다. 어디에 “홍수톨”이 나타나면 그곳 백성들의 머리우에는 재난이 날아들었다. 라자구에서 서쪽으로 7.5킬로메터쯤 들어가면 28호 농가가 오붓이 모여사는 사도하자라는 마을이 있다. 시도하자에서 5킬로메터 더 들어가면 사간방이라는 곳인데 동북인민군 제3퇀의 밀영경계소였다. 이 경계소에서 15킬로메터 들어가면 투로퍼띵즈인데 바로 3퇀의 밀영지가 있었다. 사도하자에는 세칸짜리 큰 기와집 한 채가 있었는데 혁명군은 사도하자에 올 때마다 그 집에서 회의를 하고 혁명가곡을 배워주면서 항일선전을 하였다. 주보중, 김일성, 시세영 등 항일면장들이 자주 나든다고 하여 사람들은 사도하자를 “공산당사령부”라고 불렀다. 음력 12월, 일본놈 절름발이퇀장이 령솔하는 정안군이 동녕으로부터 5갑(라자구 下河)에 와서 음력설을 쇨 때였다. 개다리본성을 고치지 못하고있던 주구 서일남이 절름발이퇀장을 찾아와서 “사도하자는 공산당의 둥지이다. 몽땅 공산당이다.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고자질했다. 보고를 접한 절름발이의 얼굴엔 지독한 랭기가 감돌았다. 1935년 음력 정월보름날 밤, 시도하자 주민들이 깊이 잠들어있을 때 절름발이 일본놈은 대포와 중기등으로 무장한 백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사도하자를 포위해왔다. 날이 밝을 무렵이였다. “쿵쾅!” “뚜루룩...” 난데없이 날아들어와 터지는 포탄소리와 자지러진 기관총소리에 마을의 새벽정적은 산산쪼각이 났다. 마을은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포연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아츠럽게 울려나왔다. 한시간만에 마을은 잿더미로 되고 말았다. 한창 포격을 하고 기관총사격을 퍼부은후 놈들은 마을로 돌격해들어와 살아남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대학살은 마을동족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오우준, 김군삼 등 몇집 식구들이 제일 먼저 살해당했다. 봉사였던 총수산의 어머니는 날창에 찔려 밸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미 숨진 두 손자의 손목을 꼭 잡고 피못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녀의 셋째아들(19세)은 차몰이군 주로인과 한데 묶이여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물가에서 참살당했다. 머리에 총알을 여러발 맞아 대뇌가 랑자하게 터져나와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홀아비 은령감은 물만두를 삶다가 놈들이 총창에 찔려 가마목에 쓰러져 숨졌다. 잔인무도한 놈들은 살아남은 마을주민들을 밀짚가리곁에 몰아다 세우고 기관총을 휘둘렀다. 그 속엔 외지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삼도하자의 오명학로인은 산에 가 올무를 놓다가 놈들에게 살해당했고 훈춘현의 지하공작원인 리영실과 그의 딸은 김군삼네 집에 왔다가 참살당했다. 놈들은 도합 57명을 참살했는데 그중 16명이 총창에 찔려 죽었다. 이번 참살에서 마을서쪽에 살고있던 세집식구들이 요행 죽음을 면했다. 총소리에 깨여나 밖에 나온 리용덕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을이 삽시에 포화에 휩싸이고있었던 것이다. 혁명군이 마을을 향해 포와 기관총을 쏠수는 없었다. 적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이 틀림없다. 리로인은 가까이의 설씨, 정씨네 집을 향해 소리쳤다. “놈들이요! 빨리 강쪽으로 뒤오!” 리로인의 웨침소리에 정신차린 세집 식구는 강쪽으로 달음쳐가 버들숲속에 숨었다. 하여 세집의 12식구가 요행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놈들은 돌아갈 때 주령감네 말 두필을 몰고갔다. 날이 희붐히 밝자 린근마을이 주민들이 사도하자에 달려왔다. 사람들은 밀짚가리앞에 쓰러진 시체속에서 요행 살아있는 조선인어린애 8명을 찾아냈다. 김룡운이 8명 여자애 중 하나를 자기가 키우기로 하고 나머지 7명은 안아다 한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척이 있는 집에서는 그래도 대강 짠 관에라도 시체를 넣어 묻을수 있었으나 친척이 없는 주검은 움 속에 묻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혜로 정안군을 소멸 한족청년 총수산과 조선족청년 리씨는 식구들의 주검을 묻고나니 혈혈단신이 되었다. 비분에 찬 그들은 그날로 3퇀 밀영으로 찾아갔다. 정위 김일성이 그들을 만나주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을의 참살정황을 낱낱이 보고했다. “우리를 혁명군에 받아주십시오, 우리는 꼭 원쑤를 갚고야말겠습니다.” 김일성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은후 즉시로 한 개 반 전사들을 현지에 보내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과연 모든 것이 사실이였다. 사도하자 참변소식을 접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퇀과 제4퇀은 어찌해서나 이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김일성, 후국충 등 지휘관들은 정안군을 소멸하기 위해 정찰병들을 파견, 적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장악했다. 1935년 6월, 라자구에서 단오명절을 쇤 인민혁명군부대는 라자구 석두하자에서 떠나 로흑산방면으로 향발, 황혼 무렵 동남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을 통하여 정안군이 겨울에만 “토벌”을 하고 여름에는 될 수록 항일군과 교전을 피하면서 산림대나 토비 같은 것만 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이에 적들을 끌어내여 매복소멸하기로 작전을 짰다. 3, 4퇀 주력부대는 적들이 보는데서 일부러 대낮에 부대를 라자구로 철수시켰다가 그날 밤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로흑산에서 서쪽으로 10킬로메터 떨어진 투도구를 돌아왔다. 부대는 골짜기 심처의 남북 량측 산에 은밀히 매복했다. 아군은 높이 약 200~300메터되는 좌우 산릉선과 골짜기 가까이의 산기슭을 따라 전호를 파고 기여드는 적을 기다리기로 했다. 연후에 한 개 소분대를 출동시켜 적들을 꿰여오게 했다. 소분대는 중국말을 잘하는 대원들로 구성됐다. 전사들은 산림대로 가장하고 왕보만으로 내려갔다. 마을에 내겨간 소분대는 산림대행세를 부리면서 백성들의 소를 빼앗기도 하고 가재도구를 차서 굴리기도 하고 남새밭의 바자를 뽑아버리기도 하면서 한바탕 야료를 부리는척하다가 부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떻게 된판인지 정안군은 아군의 유인에 걸려들지 않았다. 아군은 매복지점에서 하루밤을 무료하게 보내야 했다. 다음날에도 소분대는 마을에 내려가 산림대행세를 하고 식량을 가득 실은 소수레를 몰고 오면서 산림대만이 통용하는 용어로 떠들어 댔다. 적들은 끝내 낚시찌를 물고야 말았다. 아침 8시쯤 되어 소분대를 산림대인줄로 안 적들은 소분대의 발자취를 물고 골짜기로 졸졸 따라 들어왔다. 100여명이나 되는 적들은 소분대를 놓칠세라 바싹 뒤쫓았다. 척후를 앞세운 적들은 인민혁명군이 감쪽같이 매복해있는줄도 모르고 기름냄새를 맡은 고양이마냥 포위권안으로 들어섰다. 놈들의 발걸음소리마저 금방 귀가에 들려왔다. 놈들이 지나가는 어떤 곳은 가까이 10메터가량 되기도 했다. 드디여 적들의 전 부대가 사격권안에 들어섰다. “땅!” 사격을 알리는 총소리가 야무지게 골짜기의 고요를 터뜨렸다. 아군의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였다. 이와 동시에 골짜기를 들었다놓는 혁명군전사들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무장을 요구하지 목숨을 요구하지 않는다!” “너의들은 누구를 위해 일본놈의 총마개로 되어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인민혁명군전사들은 맹호마냥 적들을 향해 돌격해 내려갔다. 비발치듯 퍼붓는 혁명군의 총탄에 적들은 삼대마냥 쓰러졌다. 전투는 30분만에 아군의 철저한 승리로 끝났다. 전투에는 인민혁명군은 일본지휘관을 비롯한 적 100여명을 완전히 섬멸하고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문, 경기관총 1정, 보총 80여자루, 목갑총 7자루, 박격포탄을을 비롯한 각종 탄환과 군수품을 로획했다. “철군”이라 자랑하던 일제의 정안군은 이렇게 괴멸되고 말았다. 로흑산전투의 승리는 인면혁명군의 북만원정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준비를 더 잘하게 하였다. 북만원정 로흑산전투후 인민혁명군 제3퇀, 제4퇀은 왕청현 수분대전자에 돌아와 휴식정돈하면서 녕안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유격구에 3퇀의 제1, 제2, 제3련, 4퇀의 제4련 등 3분의 1병력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대는 제3퇀 퇀장 방진성, 정위 김일성, 제4퇀 퇀장 후국충 등이 인솔하는 북만원정대를 구성, 6월말에 녕안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 원정의 목적은 유격구를 확대시켜 길동유격구와 이어놓고 길동지구에서 활동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5군과 련계를 맺으며 배합작전하려는데 있었다. 부대는 서북령, 로야령 등 고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산악행군을 해야 했다. 살을 지지는 것 같은 뙤약볕과 모기떼의 성화를 받으면서 로야령을 넘기란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부대는 무수한 곤난을 극복하면서 7월에 승리적으로 녕안현 로청구의 산동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사는 산동툰에 이르렀다.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은 동만원정대와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 회사를 막기 위해 목단강, 녕안, 동경성 등지로부터 800여명 병력을 모아가지고 산동툰을 향해 진격해왔다. 적들의 진공은 아군의 드센 반격을 받았다. 반나절의 전투 끝에 적들은 끝내 물러가고야말았다. 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주보중이 인솔하는 제5군과 회사했다. 두 부대의 지휘원들은 녕안현 이도하자에서 제2군, 제5군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제2군 3퇀 4련, 4퇀 2련과 청년의용군, 제5군, 1,2,4퇀으로 서부파견대를 무어 2군 3퇀 정위 김일성, 5군의 시세영, 리형박 등의 인솔하에 앵목, 돈화일대로 나가 활동하면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하고 류한흥, 후국충 등이 지휘하는 2군 3퇀 5련, 4퇀 3련, 5련은 녕안에 남아 5군과 함께 활동하며 왕윤성이 이끄는 2군 4퇀 1련, 6련, 7련은 왕청, 훈춘에 돌아가 남아있는 부대와 함께 유격전을 견지하기로 결의했다.(계속)
555    제49장 동만유격근거지의 포기 댓글:  조회:1870  추천:0  2014-02-13
안도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주동적으로 유격근거지 포기 수부원정길에서 항일련군 제1로군 창건의 토대 닦아 처창즈근거지의 포기 1935년 8월 30일, 일본관동군사령부는 이른바 “소화 10년 관동군추기치안숙정만주국방면협력요망”을 제정하고 항일무장“토벌”의 중점을 빈강, 길림, 간도, 봉천, 안동 등 5개 성에 두었다. 이 “숙청계획”에 따라 일제와 위만국은 장춘, 열하일대에서 대량의 군대를 움직여 동만, 수녕에 투입, 3개월내에 반일무장력을 철저히 소멸한다고 장담했다. 1935년 9월중순, 일만군은 추기“대토벌”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 제2퇀은 부대를 여러갈래 소분대로 편성한후 안도, 돈화, 몽강 일대에서 기동령활한 유격전으로 적들을 대처했다. 1935년 10월, 적들은 수백명의 일만군을 동원하여 처창즈유격근거지를 포위공격하였다. 토벌군은 오동양차, 송강, 쓰치개 방면으로부터 포위망을 조이며 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제2군 군장 왕덕태의 지휘하에 직사포, 박격포, 경기, 중기 등 중무기로 무장한 우세한 적들과 련속 며칠동안 접전하였다. 그러나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한 정황에서 근거지를 끝까지 보위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아군은 주력부대를 내두산쪽으로 이동시키고 반일자위대는 근거지군중들을 데리고 서남차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서남차에서 두달 남아 머물러있던 반일자위대와 근거지군중들은 근거지인민들을 해산시키고 반일자위대도 유격전으로 넘아가라는 동만특위와 군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근거지군중들을 놓고 말하면 이것은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물과 고기처럼 생사를 같이하던 부대를 떠나 보내고 근거지마저 버린후 적구로 내려가야 하니 앞이 캄캄해날 수밖에 없었다. 대회를 열고 근거지해산의 절박성과 정당성을 인내성있게 해설하여 군중들은 어렵지 않게 리치를 깨닫기는 했으나 정작 해산을 집행하는 실무적단계에 들어가서는 적구로 내려갈수 없다고 나누웠다. 군중들은 풀을 뜯어먹고 짐승가죽을 우려먹어도 좋으니 여기서 죽든살든 하겠다면서 야단을 쳤다. 적구로 갈바에는 차라리 유격구에서 굶어죽겠다면서 떠들어댔다. 어떻게 적구에 내려가 왜놈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살겠는가! 안될 일이다! 일부 군중들은 적구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참군을 요청하였다. 입대적령기에 들어서지 않은 아동들과 소선대원들도 혁명군을 따라가겠다고 성화를 부리였다. 어떤 아동단원은 데려가기 싫으면 차라리 총으로 쏘아달라고 하면서 매달려 강짜를 부리기도 했다. 유격구의 해산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전에는 인민들은 식량을 군대에 공급하여 전투를 견지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군대가 인민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적들과 싸워 량식을 빼앗아다가 인민들에게 공급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혁명군에게 있어서 커다란 보따리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개월이나 존속하였던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적아력량대비의 현저한 차이로 말미암아 1935년 11월에 해산되였다. 처창즈에 있던 제2군 군부와 일부분 부대 그리고 병기공장, 옷공장, 병원 등 후방기관들이 모두 내두산으로 옮겨갔다. 내두산은 마을서쪽에 두 개의 젖꼭지모양의 산이 있는 것으로 하여 생긴 이름인데 태고연한 심산밀림속에 자리잡은 이 부락을 중심으로 송강과 천지에 이르는 주위 100여킬로메터 구간은 무인지경이였다. 그래서 망망한 림해속에 숨어있는 이 마을을 하늘아래 첫동네라 하였다. 내두산에 진주한 인민혁명군은 로천무대를 가설하고 무기탈취투쟁, 녀성해방 등 내용을 담은 작품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작품을 공연하였다. 한편 정치공작원들은 주민들에게 일제를 쳐부셔야 한다는 도리를 선전하였다. 중공안도구위행동위원회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낡은 구장제를 페지하고 정권의 성격을 띤 농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서부원정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1935년 후반기부터 남북만에로의 간고한 원정을 시작했다. 1935년 8월, 인민혁명군 제2군 정치부 주임 리학충은 제2퇀의 2련과 3련의 150여명으로 서부원정대를 조직하고 처창즈를 떠나 무송을 지나 몽강지구로 나갔다. 서부원정의 목적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를 맺은후 동남만유격구를 한데 련결시켜 료녕, 길림 두 성 변계지대에 유격근거지를 건립, 련합작전을 벌리려는데 있었다. 8월말, 서부원정대는 제1군의 강남유격구에 도착, 먼저 1군 제8퇀과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리동광 등 제1군 관병들과 유격구군중들은 제2군 서부원정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월 4일, 몽강현 나이굉부근에서 제1군과 제2군 간부련석회의를 거행했다. 회의에서 쌍방은 자기군의 활동지구와 항일투쟁정황을 소개하면서 투쟁경험을 교류했다. 아울러 련합작전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중심으로 길료변경유격구를 개척할문제와 전 동북항일정부 및 항일련군총사령부건립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상응한 결의를 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제2군의 회사로 하여 동만항일유격구를 분할하고 포위하려던 적들의 음모는 철저히 실패하고말았다. 두 군의 회사는 또 동만과 남만의 두 유격구를 하나로 이어 놓아 유격전쟁가운데서 밀접히 배합하면서 협동작전하는데 유리하게 했으며 항일련군 제1로군의 창건을 훌륭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동시에 북만지구의 제3, 제4, 제5, 제6군 및 기타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제2군은 서부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임무를 완수한후 몽강을 떠나 1935년 11월 내두산유격근거지로 돌아왔다. 내두산보위전 내두산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은 1935년 겨울, 안도현으로부터 악명이 자자한 리선도“토벌대”와 안도현소재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박격포부대, 위만경찰, 위만군 등 800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내두산을 향해 쳐들어왔다. 그때 제2군주력은 적후에 들어가 유격활동을 벌리고있는 상황이여서 내두산근거지에는 두 개 련 병력과 후근기관일군들뿐이였다. 적아간의 력량대비가 비록 현저했으나 절대 물러설수는 없었다. 군장 왕덕태는 견정하게 최전선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완강하게 적과 맞서 싸웠다. 적들은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전사들은 목숨으로 진지를 사수하면서 한차례 또 한차례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첫날 전투에서 적들은 10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이튿날 적들은 또다시 삼면으로 포위공격해왔다. 군장 왕덕태는 좌우부대에 적들의 공격을 끝까지 버텨내라고 명령한후 한 개 부대를 인솔하여 정면으로 반격해나갔다. 아군의 드센 반격에 적들은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고말았다. 전투가 치렬해지면서 우리 군은 병력이 부족하여 아동단, 녀전사, 부상병까지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밥과 물, 탄약을 최전선에까지 날라왔다. 적들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왕덕태는 소분대습격전을 벌리였다. 소분대는 사면으로 적들을 들이쳐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날이 갈수록 적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아군은 투자가 앙양되였다. 시기가 성숙되였음을 간파한 왕덕태는 전방위적인 공격을 명령, 맨앞장에 서서 전사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해들어가 백병전을 벌리였다. 한창 격투를 벌리고있을 때 아군 소분대는 민첩하게 적들의 등뒤로 달라붙어 번개마냥 습격전을 벌리였다. 하여 적들은 앞뒤로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어쩔수 없었던 적들은 부랴부랴 산아래로 철퇴해버리고말았다. 내두산을 한입에 삼켜버리려고 기염을 토하던 적들은 패배의 쓴맛을 보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제일 추운 겨울이라 엄한 추위까지 덮쳐들어 더는 견딜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로획했으며 승리적으로 내두산유격근거지를 보위했다.왕덕태주력부대가 녕안으로 전이해간후 적들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가지고 다시 내두산을 진공해왔다. 1936년 1월 일만군 “토벌대”는 미친 듯이 쳐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적들의 두차례 진공을 필사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군사력의 뚜렷한 차이로 하여 적들의 진공을 더는 격퇴할수 없게 되었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군민들은 주동적으로 근거지를 버리고 무송방면으로 전이했다. (계속)  
554    제48장 경도선렬차습격전 댓글:  조회:1925  추천:0  2014-02-13
  1935년 5월 2일, 연길현 조선족청년들로 구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제5련은 련장 김철진의 지휘하에 반일의용군과 련합해 하발령에서 202호 국제렬차를 습격, 일본군 30여명을 격사하고 일제 및 만주국 고급관원 17명을 체포하였다. 하발령 대서서 일본군 렬차 전복 군수품 로획 일본군 장군도 체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창립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창립된후 비록 많은 좌절을 당했지만 유격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확대하는 가운데서 부단히 장대해져 1200여명의 병력을 가지게 되었다. 1935년 5월 30일, 중공동만특위와 독립사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부를 정식으로 창립할데 대한 선언”을 발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 창립되였음을 세상에 선포했다. “선언”은 제2군의 성질과 임무를 이렇게 지적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중국인, 조선인 등 여러 민족 인민과 애국지사들의 무장력량이다. 혁명군은 동만에서 일만군과의 장기적인 류혈투쟁속에서 영용무쌍하다는 위망을 얻게 되었다. 혁명군의 위대한 임무는 군중을 조직하고 무장시켜 일본강도의 일체 세력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빼앗긴 동북령토를 되찾아 중국의 령토완정을 회복한후 동북에 인민의 깨끗한 정권을 세워 중화민족의 독립해방과 자유를 취득하는 것이다. 제2군의 병력배치에 대하여 연변대학 최홍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2군의 총병력은 1200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조선인이 3분의 2를 차지하였습니다. 조건의 제한으로 군밑에 사를 세우지 않고 의연히 4개 퇀과 유격대대를 증설하여 활동하고록 결정지었습니다.” 군장에 왕덕태, 정위에 위증민, 정치부주임에 리학충, 참모장에 유한흥이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안태학, 정위에 주수동, 제2퇀 퇀장에 장천옥, 정위에 조아범,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윤성, 유격대대장에 전영림, 정위에 김산호가 임명되였다. 그외 군부밑에 직속경위련과 교도대를 두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중공만주성위의 “2군은 서쪽과 북쪽으로 주동적으로 출격하라”는 지시정신과 용영구회의에서 구상한 전략적결책에 따라 부대를 두갈래로 나누어 유격활동범위를 늘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1퇀과 제2퇀은 돈화, 화전과 녕안, 동녕, 액목방향으로 나아가 유격활동범위를 늘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1퇀과 제2퇀은 돈화, 액목을 향해 정진, 제3퇀과 제4퇀은 녕안지구를 전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과 배합작전하기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경도선렬차습격전을 벌려 국내외를 진동시킨 제1퇀의 영용무쌍한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미담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하발령렬차습격전 퇀장 안봉학의 령솔하에 제1퇀은 명령에 좇아 처창즈유격근거지를 떠나 경도선(신경-도문)의 길림-돈화 구간을 따라 돈화, 액목, 교하, 서란 등지로 진군하면서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개척, 제3군과 련락을 맺어야 했다. 경도선은 일제가 동북자원을 강탈해가는 주요한 동맥이였다. 일제는 군사, 경제 면에서 이 철도선에 매우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있었다. 제2군 지휘부에서는 적의 기염을 꺾어 놓고 근거지군민들의 필수품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1퇀더러 경도선렬차를 습격할 것을 명령했다. 제1퇀은 행군도중 련속하여 적들을 매복습격하였는데 1935년 5월 2일, 하발령에서의 일만군렬차습격전이 가장 유명한 전투의 하나이다. 5월 1일 저녁, 제1퇀 5련은 임무를 접수한후 주동적으로 항일의용군인 평일군, 천량군과 련합하여 대석두와 하발령 철도구간의 예정된 지점에 도착하였다. 아군의 병력은 200명이였다. 기차를 정복할 지점은 깎아지른듯한 가파로운 산굽인돌이였다. 아군은 안도와 대석두쪽에 각각 방어조를 배치하고 기관총로획조, 습격조, 파괴조를 철도량켠에 대기시켰다. 기관총로획조에는 렬차 앞뒤에 달린 장갑차의 탈취할 임무가 주어졌다. 5월 2일 새벽 1시경이였다. 안도쪽 2.5킬로메터 지점에 배치되여있던 신호병으로부터 장갑차가 온다는 신호가 왔다. 김철진련장이 인솔하는 5명의 파괴조는 재빨리 철길에 뛰여들어 지레대, 스파나, 못뽑이 등으로 레루의 치목에서 못을 반쯤 뽑아놓았다. 놈들은 기차와 안전통행을 위해 선로검사차를 앞세우고 뒤에는 포를 건 장갑차에 호송대원을 앉혀 후위를 서게 하였다. 얼 마 안가서 적의 선로감시용장갑차가 나타났다. 장갑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 지나갔다. 파괴조성원들은 다시 날쌔게 뛰여내려가 침묵에 반쯤 박혀있는 못을 전부 뽑아버리고 레루를 들어 한쪽으로 약간 드티여놓았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진행되였다. 긴장한 순간이 한초한초 흘러갔다. 얼마후 놈들이 렬차가 온다는 신호가 전해져왔다. 습격조는 총가목을 틀어쥐고 기차가 나타날 산굽인돌이만을 주시하며 기다렸다. 레루장이 울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더니 기관차의 전조등이 어둠을 쫙 가르면서 비쳐왔다. 이것은 조선 라진으로부터 신경(장춘)으로 가는 202호 “국제렬차”였다. 기차가 매복권내에 들어서자 습격조는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사격소리와 함께 요란한 폭음소리가 나더니 기관차가 탈선되였다. 기관차는 연통을 땅에 들이박은채 15메터나 앞으로 달려갔다. 탈선된 차량들이 서로 요란하게 충돌하더니 마치 큰 바위라도 굴러떨어지듯이 기관차가 궤도옆으로 나딩굴었다. 순간 화통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확 피여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기관차뒤에 달렸던 7개의 차량도 련달아 쓰러졌다. 쓰러진 차량들에서 놈들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가 단발마적으로 들려나왔다. 호송대원들이 앉은 맨뒤의 장갑차만이 번져지 않고 그 자리에서 씩씩거리고있었다. 습격조와 기관총로획조는 쓰러진 렬차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 수류탄을 던지면서 비호마냥 돌진해나갔다. 한동안 지나서야 장갑차안의 적들이 정신을 차리고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군의 수류탄공세와 집중사격으로 장갑차안의 적들은 인차 소멸되였다. 습격조는 쓰러진 렬차를 수색하고 살아남은 적들을 생포했다. 전투는 한시간만에 결속되였다. 이번 습격에서 아군은 적 30여명을 소멸하고 군정요인 17명을 포로하였는데 그가운데는 일본황족 한사람과 일본군 장군 한사람이 있었다. 그밖에 대량의 군수물자와 만주국화페 20여만원을 로획했다. 대서렬차습격전 하발령기차습격이 있은후 제1퇀은 안도현 경내에서 유격전을 벌리다가 처창즈유격근거지로 돌아와 잠시 휴식정돈했다. 충분히 휴식한 부대는 8월 19일 경도선 량병태와 남구구간의 대서에서 또 놈들의 군용화물차를 습격하였다. 퇀장 안봉학은 제2련의 패장들인 주춘일 등을 철도선에 파견하여 그곳 형편을 알아오게 하였다. 백성으로 가장한 그들은 철도연선에 내려가 며칠동안의 정찰을 거쳐 8월 19일 새벽에 신경으로부터 조선으로 나가는 제291호 군용화물차가 량병태역을 지난다는 정보를 탐지하였다. 8월 18일 저녁, 제1퇀의 주력과 반일의용군 해룡부대 도합 200여명은 량병태서쪽의 대서부근에 도착하였다. 대서는 지금의 안도현 량병태에서 서쪽으로 약 5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있다. 대서촌서쪽에는 가파로운 산이 서북쪽으로 뻗었는데 북쪽의 가파로운 산밑으로 경도선철길이 동서로 뻗었고 철길북쪽으로는 개활지가 펼쳐져있었다. 부대는 재빨리 산굽이의 지정된곳에 매복하였다. 4명으로 구성된 파괴조는 날렵하게 철길에 뛰여올라 스파나, 지레대 등으로 레루장을 련결한 못을 반쯤 뽑아놓았다. 8월 19일 새벽, 남구쪽에 있던 정찰병으로부터 선로감시용장갑차가 온다는 전지불신호가 왔다. 이윽하여 선로감시용장갑차가 전조등을 환하게 켜고 달려오더니 량병태쪽으로 사라졌다. 파괴조는 철길에 다시 뛰여올라 날랜 솜씨로 반쯤 뽑아놓았던 못을 마저 뽑아버린후 한쪽 레루를 안으로 굽혀 다른 한쪽 레루와 어긋나게 해놓고 번개마냥 사라졌다. 파괴조성원들이 어둠속으로 사라진지 1분도 채 못되였을 때였다. 귀청을 찢는듯한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숱한 차량을 단 조선행 제291호 화물차가 쏜살같이 내달아왔다. “꽈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폭음이 산곡간을 들었다놓았다. 기차는 레루장을 똬리처럼 틀면서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나가다가 왼쪽의 개활지로 곤두박혀 굴러내려갔던 것이다. 10여개의 차바곤도 뒤따라 깊이 3메터나 되는 진펄속에 곤두박혔다. 맨뒤의 장갑차도 어쩔새없이 굴러떨어지고말았다. 기관차의 증기가마가 폭발되여 세찬 불길과 증기를 내뿜었다.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전사들은 총창을 비껴들고 전복된 기차를 향해 돌진해갔다. 제5련 련장 김철진은 전사들을 지휘해 장갑차에 삐죽이 나온 기관총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기관총은 이내 벙어리로 되고말았다. 장갑차에 앉았던 일본군은 한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격사되였다. 차량의 문을 열러제끼고 보니 천, 쌀, 사탕가루, 담배 등이 가득하였다. 전사들은 조선인 기관사와 화부는 적에게 피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량해를 구하고 포승으로 묶어놓은후 제가끔 물자들을 잔뜩 짊어지고 인차 퇴각해버렸다. 이때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대가 금방 떠나자 놈들이 잇달아 추격해왔다. 아군은 뒤따르는 적들을 물리친후 사흘동안 강행군하여 안전하게 처창즈에 도착하였다. 이번 기차습격전에서 아군은 1명의 손길도 없이 적 10여명을 소멸하고 400여필의 천과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이번 기차전복전투에서 대하여 《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는 일제의 자료(“8월 19일 량병태와 남구간에서의 렬차습격전”, “현대사자료”(30), “조선”(6), 제245페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8월 19일 길림발 도문행 291호 화물렬차(기관차 1, 화물차 21, 호위차 1 도합 23바곤)는 같은 날 오후 9시 15분 정각에 남구역에서 발차하여 경도선 남구아래 3000메터(신경에서 390킬로메터)지점을 지날 때 오후 9시 30분경에 공비 약 130명의 습격을 받아 기관차가 탈선되여 전복되면서 기관차에 련결된 화물차 6바곤도 탈선되여 전복되였다. 적은 차장 조선인 장진석을 총살하고(기관사 및 화부 1명은 무사하고 화부 2명은 행방불명) 화물이 있는 각 차량에 휘발유를 치고 불을 달아 13바곤의 화물이 몽땅 소각되여 그 손실은 수만엔에 달하였다. 그해 9월 23일, 제1퇀은 교하현경내의 이도하자와 황송전의 철도구간에서 또 한차례의 기차습격전을 벌리였다. 이번에 전복된 기차도 신경으로부터 조선 청진으로 가는 국제렬차였다.(계속)  
553    제47장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 개척 댓글:  조회:2386  추천:0  2014-02-13
1935년 남만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에서 작성한 일본어로 된 선전문.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군민이 혼연일체 되어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일제의 봉쇄 분쇄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 1935년 1월, 중공만주성위는 위증민을 동만에 파견하였다. 위증민은 연길현 삼도만에서 얼마동안 조사한후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 왕청현 대황외에서 동만공산당, 공청단 특위 제1차련석회의를 소집(세칭 “대황구회의”)하였다. 이번 회의에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왕중산, 종자운, 주수동, 장창수, 리학충, 조아범, 리실일, 림수산, 최봉문, 강창연, 리동규, 김희문, 왕윤성 등 26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위증민의 사회하에 진행되였는데 주요하게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사업보고를 청취하고 지난 1년간 중공중앙과 중공성위의 공작방침정책을 집행할 정황을 조사한후 동만당단과 군대의 공작방향과 긴급임무를 제정, 당단특위령도기구를 개조했다.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를 철소하고 위증민, 리학충, 리광림, 왕윤성, 왕정렬, 왕중산, 마진금 등으로 특위를 조직한후 위증민이 특위서기를 담당했다. 공청단특위서기는 주수동이 맡았다. 인민혁명군건설공작을 강화할데 대한 중공만주성위의 2월 1일 지시에 근거하여 1935년 3월 21일, 왕청현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련석회의(세칭 “요영구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는 독립사 정위 왕덕태와 특위 서기 위증민의 사회하에 진행되였다. 회의에는 독립사의 지도자들과 제 1, 2, 3, 4퇀의 정위, 공청단만주성위 특파원 종자운 및 공청단동만특위책임자 도합 11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오는 4월에 동만항일련합군총지휘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으며 “인민혁명군정치사업조례”, “인민혁명군전사대우조례”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제2군 독립사의 활동방향을 확정하였는데 원래의 항일근거지를 고수하는 동시에 수분대전자(왕청현 라자구지대)와 안도현 처창즈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여 이를 거점으로 군중기초가 두터우나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교통이 불편한 돈화, 화전, 동녕, 녕안, 목릉 방면에서 유격활동을 폭넓게 벌릴 것을 결정하였다. 회의에서는 독립사 지도부와 각 퇀 간부들을 조절하였다. 왕덕태가 사장으로, 리학충이 정치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리승규,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장봉운,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하덕윤, 정위에 왕윤성이 임명되였다. 회의후 동만특위는 수분대전자로 이동하고 독립사본부는 처창즈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왕청과 훈춘의 근거지군민들은 수분대전자에 집결하고 연길현과 화룡현의 유격근거지 항일기관과 군민들은 처창즈로 이동하였다.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부터 시작하여 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에서 범한 “좌”경착오가 점차 시정되기 시작했으며 진일보로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관철되게 되었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1939년 동북항일련군 에 나선 만주국 . 동만특위의 파견을 받은 화룡현위 서기 김일환과 박덕산(김일)은 1933년 11월 처창즈에 가 유격구개척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그들은 처창즈에 온후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군중을 조직하여 반일회, 농민협회 등 반일혁명단체를 묶어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하여 산림대를 쟁취하여 그들로부터 식량, 군복,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받아 처창즈유격근거지개척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1935년 1월, 연길현, 화룡현, 안도현 각 근거지의 군민 1000여명이 처창즈에 집중되여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정식 건립하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잡았으며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공산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 근거지군민들은 나무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귀틀집을 지었고 정부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적점령구의 인민들을 통해 종자와 부림소를 얻어왔다. 한편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여 오동앙파, 쓰치개, 송강 등 방면으로 쳐들어올 적들을 밤낮으로 경계했다. 근거지에서는 또 서남차의 고동하지류 량안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앉히기도 했다. 병기공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처창즈유격근거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여 적들의 “토벌”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2퇀 전사들은 근거지인민들의 지지속에서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어놓으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근거지에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봉쇄로 말미암아 초봄부터 기아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의 정경을 《준엄한 시련속에서》(려영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하여 송피를 벗겨먹고 우묵우묵 패인 물구뎅이에 가서 개구리알까지 떠다가 삶아먹으며 일하였다. 햇풀이 땅우로 봉긋이 솟아오르면서부터 남녀로소가 산과 들에 널려서 숨위나물, 삽지, 고사리, 기름고비, 물고비, 더덕, 도라지, 참나물, 절나무, 개암나무, 한충, 메마늘, 세투리, 메뿌리, 씀바귀, 냉이, 산미나리, 산시금치, 참나리, 개나리 등 먹을수 있는 풀은 죄다 캐들였다. 이런 산나물은 송피보다 먹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산나물을 먹을 때 기름 한방울 놓지 못하였다. 간장, 된장, 소금마저 없어서 맹물에 삶아먹거나 생나물을 그대로 씹어먹다보니 나중엔 사람의 몸에 풀독이 오르고 병이 나서 선후 100여명 군중이 사망되였다...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도 그때의 간고했던 상황을 쓰고 있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매운 재불에 송기를 넣고 3시간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 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후 돌우에다 놓고 망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넣어 죽을 쓰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장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뱀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쥐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씨붙임을 할 때 신고 일하던 도로기도 작식가마에 들어갔다. 도로기를 우린 즙쯔레한 물을 한공기씩 마시고 병사들이 포복전진을 하듯 매밀이를 해가며 봄파종을 하였다. 오늘 씨를 뿌리고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기도전에 그 씨를 파먹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대중단체들에서는 씨붙임이 끝난 밭들에 보초를 세우고 종자를 파먹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보초들마저도 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씨앗을 파먹었다... 이런 기아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지라지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두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은 남자들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임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차례졌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을 관도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흩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기아와 공포는 무서웠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기아보다 더 무서운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반“민생단”투쟁이였다. 기아마저도 꺼꾸러뜨리지 못했던 투사들은 반“민생단”투쟁으로 쓰러졌다. 김일환, 주도산, 석봉세 등 근거지의 지도자들은 이번 투쟁으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살해되였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이빨을 악물고 무서운 공포를 이겨냈을뿐만아니라 그해 가을에는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그것은 어찌 그저 곡식이라고 할수 있으랴. 그것은 인민들의 피이며 골수이며 반일정신이며 혁명의지였다. 부대에서는 인민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식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여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식량들을 도로 인민들에게 보내주었다. 이렇듯 인민혁명군과 근거지인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공고히 하였다.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 일제 가 항일근거지 에 사용한 비행기.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의해 1935년 3월, 중공동만특위기관은 라자구의 사도하자로 전이해 간후 원유의 혁명적군중에 의거하고 여러갈래의 항일력량과 련합하면서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 확대했다. 2600여호 거주민들이 살고있는 라자구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보위하기 좋은 훌륭한 전략기지였다. 일찍 1930년 9월,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공작일군을 파견하여 라자구에 공산당조직을 건립, 중공라자구구위를 설립하였다. 구위의 령도아래 삼도하자, 하동, 태평구, 신춘자, 로무주거우 등지에 7개의 기층 중공당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청년단, 부녀회 등 반일혁명군중조직이 결성되였다. 1934년 독립사가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사충항의 항일구국군 등 기타 항일부대와 손잡고 라자구전투를 벌린후부터 라자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구로 되었다. 하여 독립사 제3퇀, 제4퇀 장병들과 반일혁명적군중들은 요영구, 탕수허즈, 금창 등지로부터 라자구에 모여 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공동만특위서기 위증민은 라자구의 사도하자에 온후 원래 있던 공산당조직을 기초로 하여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를 건립, 중공동만특위의 령도아해에 두고 종자운을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5년 봄, 특위교통처가 설립되여 라자구항일투쟁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중공동만특위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지도기구가 정식으로 건립되게 되었다. 근거지내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농민위원회를 설립한후 춘경생산을 내밀도록 군중들을 동원했다. 독립사 제3퇀, 제4퇀 일부 병력은 라자구를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면서 적군에 대한 와해공작도 벌리였다. 큰 전투는 별반 없었고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을뿐이였기에 인민혁명군은 휴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부대는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에서 700여명 군중을 발동하여 진행한 “분량투쟁”과 “집단부락”건설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일본군의 “집단부락”건설계획이 1935년말까지 한발자국도 진척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근거지에 대해 경제적봉쇄를 하려는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버렸다. (계속)  
552    제46장 독립사의 출격 댓글:  조회:2173  추천:0  2014-02-13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의 조선인장병들. 뒤줄 중간에 선 사람 김일성.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건립 일만군 “토벌” 분쇄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승리적으로 항일무장력량 보전 능지영회의 두차례의 일본군“토벌”을 이겨낸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더한층 발전장대해져 1934년 봄 동만의 유격대는 900여명으로 발전하였으며 적위대 등 군중성 자위무장도 1000여명 되었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이러한 항일무장대오는 이미 동만지구의 항일무장의 골간력량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1934년 3월말 중공동만특위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유격대는 중공중앙의 “1.26”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동만의 4개 현 유격대를 토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건립”하라는 지시정신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항일유격근거지에서 중공동만특위와 4개현 유격대책임자들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동만항일유격투쟁 력사상 한차례의 중요한 회의였다.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 연길현유격대 대대장 주진, 정위 왕덕태 등 15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독립사 사장에 주진, 정위에 왕덕태가 선발되였다. 독립사는 4개 퇀으로 편성, 제1퇀은 원 연길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고, 제2퇀은 원 화룡현유격대로서 아래에 5개 련을 두고, 제4퇀은 원 훈춘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기로 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지휘부는 잠시 삼도만 동구에 앉히였다. 회의에서는 반일부대와의 통일전선을 강화하고 항일유격구를 확대시키며 항일유격전쟁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길동반일련합군과 남만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하여 동만과 길동에 분산되여 있는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할 방침을 확정했다. 주동적으로 적을 타격 독립사가 건립된후 일제의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단부락”건설을 더욱 다그쳤다. 때문에 로항일근거지에서의 독립사의 활동은 날따라 곤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독립사는 “한곳을 고수하면서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진공책략을 취하라”는 중공만주성위의 유격전술을 채택, 죽도록 산골을 사수하면서 적들과 소모전만을 펼치던 국면을 타개하고 적극적으로 적점령구에 진격해들어가 활동하기로 했다. 4월 1일, 동북인민군 제2군 독립사의 일부는 항일의용군과 련합하여 연길현 팔도구금광을 습격, 일만군과 3시간동안의 접전을 하였다. 4월 7일, 독립사 일부는 왕청현 배초구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일만군경찰들을 습격, “집단부락”수건작업을 파괴했다. 4월 18일, 독립사 제1퇀 30여명은 왕청현 배초구 신안툰의 자위단을 습격, 총 20여자루 로획했다. 4월 22일, 독립사 일부는 연길현 차조구를 습격한후 명월구로부터 증원오는 일만군 한 개 부대를 소멸했다. 4월 23일, 독립사 제3퇀은 “집단부락”을 한창 수건하고있는 화룡현 우심촌을 습격하였다. 5월 2일, 독립사 제3퇀은 안도현에서 련속 4일간의 격전을 벌려 안도 대전자를 점령, 일만군 30여명을 격살했다. 5월 9일 독립사 제1퇀은 산림부대와 련합하여 연길현 사도만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위만군을 습격 17명을 투항시키고 총 11자루를 로획했다. 7월에는 독립사 제2퇀 일부가 산림부대와 련합하여 300여명 병력으로 안도 대전자를 밤낮 11일동안 포위공격하였다. 8월상순, 독립사 제2퇀과 항일의용군은 안도현 대사하를 진공, 위만군 30여명을 소멸, 70여명을 포로했으며 100여자루 총을 로획했다. 8월중순, 독립사 제2퇀은 기타 반일부대와 련합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점령, 위만군 300여명을 기의하게 하였고 그 일부를 인민혁명군에 참가시켰다. 안도현에서 독립사는 10개 반일무장부대와 련합작전하면서 왕덕태를 총지휘로 하는 항일련합지휘부를 건립하였는데 그 병력이 1000여명이 되었다. 련합부대는 련속적인 승리를 하면서 처장즈, 대전자, 태평구 등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3퇀과 제4퇀 주력도 왕청현, 동녕현, 녕하현 일대에서 유격전쟁을 주동적을 벌리였다. 왕청의 각 근거지는 적들의 장기적인 “포위토벌”로 하여 크게 파괴되였다. 하여 제3퇀은 적들의 주력부대를 피해 왕청과 녕안변계일대로 전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4년 5월 7일, 독립사 제3퇀은 구국군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위만군부대를 진공하여 많은 총과 탄약을 로획했다. 제3퇀은 또 소왕청 마촌등지에서 일만군과 전투를 벌려 일만군 25명을 소멸했다. 독립사 제4퇀은 훈춘으로부터 왕청, 동녕변계로 전이해와 활동을 벌리였는데 그 일부는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동녕현 이도하구의 위만군 장정단을 진공, 100여명을 포로하고 보총 30여자루를 로획했다. 6월 23일에는 라자구공격전을 벌리였다. 적들의 기재에 따르면 1934년 4월부터 10월 사이에 동만항일련합부대가 일만군을 103차나 주동적으로 습격하였는데 참전 련인수는 3537명이였다. 그중 2군 독립사가 53차 단독 출격, 참전 련인수는 1350명이였다고 한다. 제3차 반"토벌"투쟁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동만항일부대의 중견력량으로 장대해졌다. 독립사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에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지휘부를 건립하고 대일작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반일무장련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와 맞섰다. 일제는 반일력량이 장대해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1934년 가을, 일제는 3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제3차 “대토벌”을 감행했다. 일제는 중국공농홍군을 “포위토벌”한 장개석이 경험을 리용하여 중요한 부대를 중요한 도시와 교통요도에 배치하여 사수하게 하는 한편 정예부대를 집결시켜 “보보위영(步步爲營)”작전방침을 펼치였다. 적들은 항일근거지를 포위한후 “추격하면서 토벌”하거나 습격하는 등 전술로 독립사의 주력을 소멸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잔혹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여 인민군중과 항일부대와의 련계를 끊어놓아 항일부대가 기아와 추위속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게 하려고 시도했다. 1934년 9월, 히로세사단장을 총지휘로 하는 일본군정예부대와 위만군경비려, 정안군 등 “토벌대”는 비행기와 대포의 배합과 엄호하에 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와 각 유격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준엄한 형세에 직면한 독립사는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을 타격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이미 파괴된 유격근거지를 버리고 새롭게 개척한 근거지로 전이했다. 제1퇀은 연길현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 등 근거지에서 철퇴하여 안도현 경내와 남호두 등지로 전이하고 제2퇀은 화룡현 어랑촌에서 물러나와 안도현 처창즈로 옮겨갔다. 제3퇀은 왕청현 대황외, 대왕청, 소왕청에서 퇴각하여 요영구로 전이하고 제4퇀은 훈춘현 하남, 하북, 반가채에서 빠져나와 금창, 화소포일대로 옮겨갔다. 독립사 각 퇀은 적들과 조우전, 습격전을 벌리면서 전이했다. 10월 8일, 독립사 300여명은 왕청현 대황외에서 이께다의 일본군 “토벌”대와 맞띠웠다. 독립사의 맹공격에 일본군은 격퇴당하고말았다. 독립사 제1퇀은 연길현 의란구 신흥동에서 일본군 무라다부대를 격퇴한후 주동적으로 기와바야시 “토벌대”를 습격하여 놈들을 섬멸했다. 11월, 독립사 제3퇀은 왕청현 삼차구와 대황외에서 일본 노구찌부대와 교전을 벌리였다. 이와 동시에 제2퇀의 130여명 전사들은 적들의 등뒤를 돌아 위자구위만경찰서를 습격했다. 12월초 독립사 제3퇀 제4련, 제4퇀 제5련 파견대 150여명은 녕안현 석두하자에서 위만군과 맞띠워 격전을 벌려 적 30여명을 소멸했다. 1935년 1월, 독립사는 성공적으로 대전이하였다. 하여 독립사 각 퇀은 전투에서 주동이 되어 반“토벌”투쟁에 림할수 있게 되었다. 1934년 4월, 독립사 제2퇀은 동만특위와 사부의 통일적 포치에 따라 안도현 처창즈방면으로 진군했다. 4월부터 8월사이에 제2퇀은 독립퇀과 함께 대전자를 두차례나 포위공격하고 반일부대와 공동으로 대사하부락을 습격하고 안도현소재지를 공격하는 등 일련의 전투를 진행하여 처창즈, 대전자, 태평구 일대를 통제, 유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있는 처창즈에 유격근거지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1934년말부터 1935년초까지 삼도만근거지에서 기아와 엄한을 이겨낸 삼도만, 왕우구, 팔도구 유격근거지의 군민들이 안도현 신선동을 거쳐 처창즈에 들어갔고 화룡현 천수동과 머구령에 있던 어랑촌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처창즈로 들어갔다. 1935년 1월, 일제는 여러갈래로 처창즈를 향해 진공해왔다. 아군은 도로를 파괴하고 적들의 통신력량을 끊어놓아 일군과 위만군이 련합작전을 못하도록 하였다. 하여 처창즈유격구보위전에서 적 40여명을 격살, 총 20여자루를 로획한 반면 아군은 몇 명의 사망자를 냈을뿐이였다. 제1퇀과 제2퇀은 처창즈를 근거지로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벌려 1935년 1월부터 5월사이 30여차례 전투를 벌렸는데 적 600여명을 살상하고 360여자루의 총과 각종 군사물자를 로획했다. 1935년 3월 21일, 독립사 제4퇀은 훈춘 금창으로부터 왕청경내로 진군하던 도중 전쟁이 싫어 한 개 련의 위만군병사들이 대황구에 피해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4퇀 전사들은 인차 대황구 위만군병영을 포위한후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강렬한 정치공세하에 위만군 련장은 82명 병사를 거느리고 인민혁명군에 참가했다. 정돈과 교양을 거쳐 새롭게 3개 련을 편성, 훈춘퇀은 도합 7개 련으로 늘어났다. 1935년 4월말, 독립사 제1퇀, 제2퇀은 안도현경내에서 위만군 1개 경비영을 매복습격하여 련장 2명을 포함한 50여명을 살상하고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제3차 반“토벌”투쟁에서 동만의 각지 근거지는 엄중한 파괴를 당했으나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함으로써 승리적으로 항일무장력량을 보전하고 적들의 “토벌”를 타개했다. (계속)  
551    제45장 일제의 집중영 “집단부락” 댓글:  조회:1753  추천:0  2014-02-12
  집단부락을 통제하고있는 무장자위단들. 부락주위에 높은 담벽 쌓고 깊은 도랑 파 밤낮 주민 감시 한사람 걸리면 10호 련좌 일제의 "채무농노"로 “일제는 정치면에서는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탄압하고 조선인들과 항일부대와의 혈연적인 련계를 단절, 유격구를 고립시켰으며 경제면에서는 조선인들을 ‘안무’한다는 미명하에 ‘반일적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집단부락정책’이거나 ‘안전농촌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의 이런 정책은 조선인들을 일본독점자본에 예속시키는 “통제-안정방침”을 관찰하는 구체적인 통치정책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1931년 “9.18”사변이후 일제의 침략전쟁과 항일무장조직에 대한 “토벌”로 하여 수많은 조선인농민들은 집이 소각당하는 등 전쟁재앙을 입어 도처로 류랑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동북 각지에 피난민이 생겼는데 위만주국민정부척정사 제10과의 “간도집단부락건설개술”(1935년 12월 25일)에 따르면 연변 4개 현의 피난민은 1611호에 8387명에 달했다. 일제는 피난민을 “구제안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총독부와 망철회사가 공동으로 투자, 동아권업회사가 경영하기로 하고 1932년부터 우선 남북만의 피난민을 안치하기 위하여 료녕성 철령현 락석산, 1933년에는 료녕성 영구현 전장대, 흑룡강성 주하현(현재 상지현) 하동촌, 1934년에는 흑룡강성 수화현 현성부근, 1935년에는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에 각기 “안전농촌”을 건설하고 피난민과 류랑민을 수용하였다. 일제는 “안전농촌”을 경영하면서 “단순한 구제에 머물러있지 않고 진일보 저극적인 지도하에 조선인의 모범촌을 건립한다”고 하면서 1938년부터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하였다. 자작농창정계획이란 일제의 투자하에 토지, 부락건설비, 가옥건축비, 농업경영비 등을 농민들에게 대여준후 8푼의 리자를 가첨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매년 분년정기상환으로 10~15년간에 빚을 전부 상환하면 토지와 가옥 등이 개인소유로 되어 자작농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보기에는 농민의 경제적지위를 향상시키는듯한 정책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농민들을 채무농노로 전락시켜 동아권업회사의 토지에 속박되게 하여 자유로 이주하지 못하게 하며 농촌내에는 경찰분서와 자위단을 건립하고 농민들을 감시함으로써 항일부대와 민중간의 련계를 단절시키자는 정책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안전농촌의 농민들은 해마다 빚을 상환하기는 하나 이듬해 봄이 되면 생활이 곤난하게 되어 또 회사 돈을 꿔 그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나 이듬해 또 빚을 더 지게 되는 처지에 빠지는 악선순환을 거듭해야 했다. “자작농창정” 대상으로 된 조선인농민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다. 그들은 일본식민회사에 빚과 리자를 상환해야 할뿐만아니라 여러 가지 가렴잡세도 납부해야 했다. 만약 제때에 규정된 금액을 납부하지 못하면 이른바 “연장세”와 “예약위반금액”과 같은 추가금액을 내야 했다. 이렇게 되어 농민들의 빚은 해마다 늘어나 일본회사의 영원한 빚진 노예로 되어야했다. 1935년 연길현 동성용촌에는 “자작농창정”대상으로 된 집이 42세대있었는데 그들은 360정보의 토지를 부치고있었다. 그 토지값은 도합 3만5500엔이였다. 1945년에 이르러 이곳 농민들은 이미 각종 세금 5만7300여엔을 납부하였으나 일본식민지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후 4년동안에 1만6700엔을 더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일제의 “자작농창정계획”은 일본식민주의자들이 략탈한 토지를 고가로 파는 고리대금형식의 매우 간편한 방식에 의거하여 최대액수의 리익을 빨아내는 착취수단이였다. "보갑제도" 실시   목도구(지금의 안도현 복흥향에 속함)의 동포이민집단부락. “1933년부터 일제는 연변지구에 이른바 ‘피난민과 빈곤호구제’의 명의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처음에는 원지방으로 돌아갈수 없는 피난민을 상대로 상부지부근 또는 기타 ‘안전한 지대’에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안치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1차로는 북하마탕, 이란구 태양 등지에 9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했는데 855호에 4470명이 수용되여있었고 1934년에 제2차로 연길현 금불사, 삼명월구 등지에 15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는데 수용되여있은 농호는 478호, 인구는 2557명이였다고 한다. 일제는 집단부락정책을 치안특별공작의 일환으로 삼았다. 항일유격구 및 항일근거지를 “토벌”, 소각한후 근거지의 민중과 그 부근의 산재호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집단부락을 건립했다. 집단부락을 민중을 감시하고 항일유격대 및 기타 항일군과의 련계를 차단하는 즉 “비민분리”의 “치안숙정” 목적을 위하여 리용하였다. 일제의 1935년 12월 통계에 의하면 연변에 건설한 “집단부락”은 121개이며 1만2362호, 8만1955명을 수용하였다. 1936년 8월, 일제와 괴뢰만주국정부는 “재만조선인지도강요”를 제정하고 연변 5개 현과 동변도의 18개 현을 조선인집거구로 지정, 중쏘, 중몽 변계지구와 기타 산재지구의 조선인을 강박적으로 일제가 지정한 곳에 가서 집중하게 하였다. 일제는 “집단부락”건설을 위하여 농촌에 산재해있는 집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주민들을 강제로 한데 모아 저들의 통제와 감시밑에 몰아넣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집단부락”의 구조는 1개 촌을 100호를 기준으로 하고 부락 4변 주위에는 2.5메터의 담벽을 쌓고 담벽 4각에 포대를 설치하였으며 대문은 한 개만 내였다. 항일부대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담벽밖에는 또 너비 3메터, 깊이 2메터의 깊은 도랑을 팠다. 부락 중앙에는 경찰분서 파출소와 자위단을 설치하고 부락 통용문은 자위단이 밤낮으로 보초를 섰는데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는 대문을 닫는다. 부락주민들에게는 “량민증”을 발급하여 “량민증”이 없는자는 “반일분자” 또는 “통비”혐의로 체포하였다. 일제는 이른바 “5가작통”, “10가련좌법” 등으로 불리우는 “보갑제도”를 실시하여 10호를 한패로 하고 촌 또는 이에 준할수 있는 구역내의 패로 1갑을, 경찰서 관할구역내의 갑들로 1보를 조작하고 주민들 호상간에 서로 감시, 통제하게 하였다. 한 사람이 “통비”혐의에 걸리면 본인은 물론 5호나 10호가 “련좌”되여 함께 처벌을 받는 것으로 부락민 호상간에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 1936년 3월말, 일제가 동만지방에서 “보갑제도”를 실시한 정황은 이렇다. 연길경찰청, 보 2개, 갑 44개, 패 429개,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화룡현, 안도현 등 다섯 개 현에다 보 116개, 갑 523개, 패 7278개를 조작했다. 가혹한 수용소   연길현 고려촌 집단부락에서 조선인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있는 일제경찰과 그 앞잡이들. 차조구 중평촌의 “집단부락”은 1934년 4월 22일부터 5월 1일까지 11일동안에 건설되였다. 이 “집단부락”은 연변에서 두 번째로 건설한 36개소의 “집단부락”가운데의 하나로서 당국에서 조작한 “방어를 위한 집단부락”규격에 의해 건설되였다. 부락의 형태는 정방형이였는데 포대, 토성, 전호, 전기철조망 등의 방어설비를 갖추었다. 포대는 진흙을 이겨서 쌓거나 토피로 쌓았고 포대와 포대사이의 거리는 100메터이고 포대안에는 방한설비로 온돌을 놓았다. 흙토성높이는 3.33메터이고 밑너비는 1.98메터, 웃너비는 0.82메터이고 토성우에는 14호철사로 전기철조망이거나 가시철조망을 늘이였다. 전호의 표준은 웃너비 4.62메터, 밑너비 0.99메터이고 길이는 3.33메터이상이였고 문안팎에 약 2.62메터 높이의 철조망을 둘렀다. “집단부락”건설에 수요되는 설비는 비용만도 당시 시가로 약 11만4060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 “집단부락”건설에 동원된 로동력은 연인수로 3300명이였는데 그것은 호당에 풍기면 연인수로 28.6명이나 되었다. 공공시설비용과 영농자금, 가옥건축비는 호당 6250원에 달하였다. 농민들이 부담한 이 금액은 새로 지은 자기의 가옥을 저당잡히고 4년을 환납기한으로 하고 현에서 대여받은것인데 절대부분 농호들은 그 돈을 환납할 능력이 없었다. 이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집단부락”에 들어선 첫날부터 채무자로 전락되였다. 중평촌의 “집단부락”에는 105호의 조선인과 5호의 중국농민이 수용되였는데 그들은 원래 241쌍의 경작지를 가지고있었다. 호당 2.34쌍이였다. 그러나 “집단부락”에 수용된후 경작지면적은 크게 감소되였다. 경작지를 1.7쌍이하 갖고있는 농호가 이사하기전의 12%로부터 32%로 늘어났다. 자작농은 27.6%로부터 15.6로 감소되였고 소작농은 51.7%로부터 59.3%로 증가되였다. 부락과 멀리 떨어진곳에 가서 밭을 부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먼곳의 밭들은 죄다 황무지로 변했다. 식량이 모자라는 농민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끼니를 에웠다. 그들이 들어있는 집은 헐망하기짝이 없었다. 굶주림과 추워에 견디지 못하여 많은 농민들이 앓아죽고 얼어죽고 굶어죽었다. 집단부락에서는 공무인원과 불구자를 제외하고 18세부터 40세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자위단에 참가해야 했다. 부락내에 자위단시설이 설치되고 몇자루의 총과 탄알이 배치되였으며 단원들은 륜번으로 순라를 돌았다. 매호에서는 자위단비와 보갑비 등 경비를 정기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집단부락”의 경비는 일본헌병대의 지휘밑에 위만군과 경찰 그리고 매 “집단부락”에 조직된 약 50~100명에 달하는 일반자위단 혹은 무장자위단이 담당하였다. 1935년 연변유격근거지주변에 조직된 자위단은 241개였는데 그 대원은 7146명이였다. 1936년에는 319개로 1만8131명으로 증가되였다. 이가운데 직업무장자위단이 11개로서 141명이였다. “집단부락”에는 부락장과 부부락장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락장은 “보갑련좌법”에 의해 갑장을 겸하고 부부락장은 자위단장을 겸하였는데 만주국현장이 그들을 임명하였다. 부락장은 현의 일반행정보조사무를 겸하고 부락민에 대한 감독을 담당하였으며 부부락장은 부락의 경비를 책임지고 자위단에 대한 지도와 감독을 담당하였다. 부락민은 외출시 규정된 분량이상의 량식과 물자를 가지고 다닐수 없었으며 반드시 부락장 또는 경찰서의 허가가 있어야 휴대할수 있었다. 이것은 민중이 항일부대에 물자, 량식을 공급하는 것을 엄금하기 위해서였다. “실제상 ‘집단부락’은 ‘집중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집단부락’의 전략적인 성적을 보고 이 정책을 1936년부터 전 동북에 보급하였습니다. 항일부대가 활약하고있는곳이기만 하면 강제로 ‘보급’하였는데 어떤곳에서는 단독으로 ‘집단부락’을 건설하였고 어떤곳에서는 ‘집가병촌(集家幷村)’으로 산재호를 모조리 불사르고 강제로 ‘치안이 확보된’ 부락에 집결시켰는바 ‘병촌’부락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한 부락에 수용하고 유격근거지나 유격구는 전부 소각 또는 파괴하여 ‘무인지경’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집단부락”정책은 중세기적인 야만적이고 가혹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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