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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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제4장 벼꽃향기 댓글:  조회:1847  추천:0  2014-02-04
수전농사를 하고있는 1920년대의 북간도 조선인농민들. 거치른 벌판에 벼꽃향기 싱그럽고 조선족농민들 “어곡전”까지 다뤄 첫 수리공사 “연변의 벼농사는 우리 조선족에 의해 시작되였습니다. 력사적으로 보면 고구려나 발해시기에 이곳의 벼농사는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는 이야기는 발해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이란 지금의 개산툰진 광개일대를 말합니다. 발해가 926년에 멸망한후 동북의 벼농사는 없어지고말았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교수는 자그마한 연변지도를 펼쳐보이면서 두만강기슭을 가리킨다. 보풀이 일 정도로 낡은 지도는 1920년대초 일제가 만든 지도라고 한다. “연변에서의 초기수전개발”(일목)이라는 글에서도 이렇게 설명되고있다. “ ‘만주경제 연구보’에 의하면 1868년좌우 두만강연안에서 제일 처음 수전농사를 지었다고 하였고 또 전하는데 의하면 1895년 두만강연안의 종성위자에서 수전농사가 시작되였다고도 한다.” 봉금제도가 엄했던 그 시기 범월잠입한 조선족농민들은 청나라관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두만강북안의 산골짜기의 자연수를 리용하여 처음에는 아마 뙈기수전을 부쳤을 것이다. 그후 1900년 해란강연안의 세전벌인 동성용에서 수전경작이 시작되였다. 1906년 룡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연도인 대교동에서 수전을 개발하였다. 이로부터 벼농사는 연변각지에 파급되였다. 버드나무가 제법 파랗게 물이 오르고 종달이가 하늘 높이 떠서 지종대던 1906년 6월, 한무리의 흰옷입은 사람들이 곡괭이가 자갈에 부딪치면 불꽃이 튕기는 강바닥을 파헤치느라 비지땀을 쏟는다. 1,308메터의 물도랑을 째느라고 떨쳐나선 대교동의 조선주민 14명이였다. 이들은 륙도하물을 끌어들여 33상의 논을 풀었다. 이것은 연변에서의 최초의 수리공사이다. 박창욱선생은 낡은 지도우에 확대경을 대고 끝내 대교동을 찾아낸후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그뒤를 이어 룡정의 수남촌, 반석촌, 화룡현의 수신향(두도구일대), 평강 등지의 조선이주민들도 해란강물을 끌여들여 논농사를 짓기 시작했지요.” 강이 많은 연변은 논농사하기가 제격이다. 두만강 북쪽기슭과 해란강기슭의 평강벌, 서전벌 및 부르하통하, 가야하 하류의 넓은 들, 훈춘하연안과 밀강류역이 바야흐로 논벌로 변했다. 조선족개간민들이 무상기가 짧고 기온이 낮은 동북의 불리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고 벼농사에 성공한것은 연변농업에서의 일대 비약이였다. 이로부터 밭농사만 짓고 남방에서 입쌀을 날라다 먹던 력사를 종말짓게 되었던것이다. 대지에 풍기는 벼꽃향기 쪽박차고 괴나리보짐 등에 지고 처음 왔을 때 조선족농민들의 눈앞에 펼쳐진것은 거치른 벌판뿐이였다. 깊이 잠든 산기슭과 들판으로 야수들이 들락거렸으며 찢어진 옷자락으로는 살을 에이는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얀 복장에 하얗게 회칠한 집에서 살면서 하얀 이밥을 먹는 민족이 조선족이다. 그래서 백의민족이라 했던가.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민족이라 했던가. 아무튼 벼지푸라기 하나 없던 이 땅에 논이 펼쳐졌고 밥상우에 이밥그릇이 놓이게 되었다. 고난에 허덕이던 민족에게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데 있겠는가. 조선족농민들의 벼농사에 대해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1918년에 이르러 연변의 벼가 대외로 수출되게 되었지요. 이는 대단한 일입니다. 력사적으로 벼를 수입해오던 연변에서 벼를 수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변화가 관청을 놀래웠지요. 이리하여 1919년 4월에 연길현공서는 ‘연길현벼농사잠행규정’을 내놓았지요.” 벼농사를 하려면 수리건설을 해야 하고 수리건설을 하려면 밭을 점하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밖에 땅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행규정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사람이든지 벼농사를 하는 농민의 정당한 리익을 침범하지 못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규정은 당시 우리 조선족농민들의 합법적리익을 보호하는데 매우 유리했다. 1921년 12월 3일, 길림성 성장 홍렬신이 연길현공서에 “수전농사를 잘 하여 농사를 진흥시키라” 는 훈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적지 않는 한족들도 벼농사대오에 가입하였다. “연변에서의 초기수전개발”(일목) 일문에서 20세기초 연변 조선족농민들이 온갖 곤난을 극복하면서 수전을 개발한 면적을 연대별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06년 12.6정보 1912년 185.0정보 1917년 764.0정보 1918년 1,458,0정보 1919년 3,608.7정보 1922년 6,605.8정보 그후 수전농사는 멀리 길림, 장춘에 까지 파급되였고 나아가서 흑룡강성의 동경성, 목릉, 밀산, 녕안, 해림, 지어 동부몽골지구에까지 파급되였다. “내몽골의 수전개발”(리성도 손만수) 일문에서 내몽골에서의 조선족농민들의 수전개발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17년 람루한 홑저고리를 걸친 한패거리의 조선족농민들이 백설로 뒤덮힌 저리무맹대초원의 바얀탈르에 왔다. 이들 15호 74명은 김일선의 인솔하에 매서운 찬바람속에서 물길을 째고 천년묵은 초원을 수전전으로 개간하였다. 수개월동안 악전고투하여 이듬해 봄에 50여상의 수전을 개발하고 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여태규가 거느린 16호 69명의 조선족농민들이 락봉보에서 50여상의 수전을 개발하고 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4월 김지휘 등 2호 14명이 청하하류에서 동서 150리, 남북 30여리의 평탄하고 비옥한 땅을 발견하고 수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족농민들은 동북수전농사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세웠다. “어곡전” 화룡현 동성향 비암촌과 룡정시 개산툰진 광종촌 하천평에 위만주국괴뢰황제 강덕의 “어곡전”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광종촌의 “어곡전”을 말하려 한다. 1917년 2월 18일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채여난 최학출이 광종촌의 “어곡전”을 다루었다. 원 룡정시문련 주석이였던 저명한 민간문학가 김재권선생은 최학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최학출은 1935년에 하천평에 이사와서 지주의 땅을 부치였는데 1941년 봄에 소출을 높이려고 간이창문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해빛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었습니다. 하여 남들보다 한절기 앞서 벼모를 한데서 소출도 많이 났거니와 입쌀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아 천하진미로 평가되였지요.” 그후 최학출의 온상육모법이 광범하게 보급되였다. 하여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장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고 강덕황제의 “어곡전” 은 다룰 사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최학출은 1943년 봄에는 “농업사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가서 온상육모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해부터 “어곡전”을 다루게 되었다. 농민시인 심정호선생은 “강덕황제의 어곡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매지게 자라서 일매지게 머리를 수그리고 일매지게 설레이며 사근대는 이삭들의 소리가 마음에 감미롭다. 논두렁을 밟으며 벼들의 속삭임을 듣노라니 ‘어곡전’을 다루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곡전으로 짐승들이 나들지 말라고 뼝끼칠을 한 울바자를 둘렀다. 모철이면 하얀 버선을 신은 꽃같은 처녀들이 유리판처럼 써레질을 해놓은 논판에 들어서서 물차는 제비처럼 찰랑찰랑 모를 심는다. 가을도 가관이다. 새하얀 수갑을 낀 손들이 사락사락 한포기 한포기씩 벼를 베여 정성들여 묶은 다음 마당에 곱게곱게 낟가리를 앉힌다. 탈곡하면 앞목으로 마대에 넣었다가 쌀을 찧어낸다. 쌀은 마을의 고운 아가씨들이 모여들어 뉘와 귀떨어진 쌀알들을 골라내고 눈귀도 상하지 않은 통통한 쌀만 모아서 눈덩이같이 하얀 옥약목주머니에 넣어 절복한다. 그것도 검사에 통과하여야 강덕황제의 어곡합격증을 받는다.” 최학출이 다룬 “어곡전”면적은 천평이였는데 봄에 논갈이 할 때만 소의 힘을 빌고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고 한다. 논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고 버선을 신어야 했으며 거름은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벼가을과 탈곡을 할 때면 해당 관원들의 감시하에 했고 정미한 입쌀을 처녀들이 유리판우에 올려놓고 한알씩 골랐다고 한다. 색깔과 빛이 다르거나 쌀알의 귀가 덜어져도 안되였다고 한다. 어곡을 생산할 정도로 조선족농민들의 벼농사가 소문을 놓았으니 실로 자랑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쌀을 짓는 농민도 허리띠를 졸여야 하는 세월에 어곡을 다듬어 강덕에게 바친다는것은 농민들로 놓고 말하면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계속)
509    [시]무霧(김철호) 댓글:  조회:1121  추천:2  2014-02-04
무霧 김철호 몸 한번 뒤척이니 푸른 향기 춤을 춘다 밝아오는 동녘을 베고 곱게 머리들어 미풍의 숨결 품는다 너무 깊고 너무 짙었던 지난 밤 꿈자락 당기며 파도 높았던 환희(歡喜)를 동경한다 라신(裸身) 감춰주던 흰 잠옷 바람의 손에 스르르 벗겨지니 빛부신 하나의 녀인 고요히 수집어한다, 2014년 제1기
508    [시]깃발(김철호) 댓글:  조회:1538  추천:2  2014-02-03
깃발 김철호 긴 세월, 찢긴 복부에서 흘러나온 창자들이 나뭇가지에 걸려 말라버렸다 가볍게 가볍게 말라버렸다 긴 세월, 양수 흘러내린 계곡에서 아기의 울음소리 요란하고 생명은 생명을 딛고 일어섰다 가볍게 가볍게 일어섰다 바위에 별이 새겨지고 별을 바라보며 바람이 쏟아진다 과거가 삼켜지는 광음 속에서 별이 웃는다 긴 세월, 바람이 바람에 흩날린다 바람이 바람에 흩날리다 서버렸다 침묵의 흩날림 긴 세월...   2013년 제5기
507    [평론]김철호, 시의 새 지평에 서다(최삼룡) 댓글:  조회:1454  추천:5  2014-02-03
평론   김철호, 시의 새 지평에 서다 ㅡ“김철호미시시집”에 붙여   최삼룡   아동문학가인줄로만 알었던 김철호가 성인시의 새 지평선에 우뚝 선것은 참으로 예측밖이다. 근년에 그의 시는 눈부신 빛과 즐거운 소리와 독창적인 발상과 새로운 이미지로 시의 지평선을 달리며 우리 앞으로 떠오르고있으니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김철호미니시집”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그런데 “김철호미니시집”의 시 6수는 모두 비교적 난해하다고 할수 있다. 필자에게 있어서는 난해하다는것이 결코 부정적인 결론이 아니다. 명확하고 명백하고 명랑한 시로 길들여졌으니까 아직도 우리들중에는 난해한 시를 일률적으로 부정하는 독자가 있을뿐더러 편집인, 시인, 시평가, 교수들도 있다. 그러므로 김철호의 이 6수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오해를 피하고 불의를 덜 일으키기 위해 되도록이면 상세한 해석을 시도했지만 또 편폭이 제한되여있으니 제대로 되겠는지 모르겠다. 1. 시 6수를 차례로 읽어보자. 첫전째 시 “룰”,  “룰”이란 영어에서 “법칙”이란 뜻의 명사다. 이 시의 첫련 “작은 생명이래도/그건 하늘보다 더 큰 숨”은 난해하지 않게 이 시의 주제를 제시하고있다. 그것은 즉 작은 생명이래도 하늘과 평등하다는것이다. 시에서는 작은 생명은 하늘보다 더 큰 숨이라고 과장하였다. 아래에서 시골 어느 이름없는 나무끝에 매달린 재난이라 해도 “스나미”로 일어선다고 한발자국 더 내디디였다. 그런데 제목은 어떻게 되여 “룰”인가? 잘 생각해보면 여기서 말하려는것은 하늘은 작은 생명과 같이 놀아야 하며 일단 같이 놀자면 공정한 유희규칙이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하늘”이란 동양에서는 지고무상의 존재, 세상만물의 창조신인데 서양에서는 “하느님”, “조물주” 상제로 통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에서는 생명의 절대적가치를 강조하였다. 두번째 시 “희나리”, “희나리”란 “채 마르지 아니한 장작”이라는 뜻의 우리 말이다. 인생의 중년에 들어선 시적화자는 깊은 성적고민에 빠졌다. 즉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던것이 희나리처럼 되여버린것이다. 희한한 놀음에 들떠있던 소년으로부터 어느새 중년이 되여버린것이다. 총적으로 이 시에는 인생의 중대한 고민에 처한 시적화자의 성적고민과 더불어 생명재생의 꿈이 담겨져있다. 세번째 시 “희담(戱談)”, “희담”에서 시인은 감히 생명의 결과이며 생명의 연장인 죽음과 희담을 하고있다. 누군가 스위치를 눌러 빛이 다 꺼져저린 곳이다. 시적화자는 허공을 딛고 허공에 걸리고 우아래가 없는 세상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만나고 동네 아이들도 만난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것은 시적화자가 있는 곳이 구경 천당인지 지옥인지 분명하지 않는것이며 심지어는 이승의 생활인지 저승의 생활인지도 분명하지 않다는것이다. 총적으로 이 시에서 시인은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진행하면서 죽음과 희언(戱言)을 벌리고있다. 네번째 시 “12월 맨 마지막 날 일기”, 제목이 직접 알려주는바 섣달그믐날 밤 송구영신의 심정을 시화하고있다. 세말의 정서를 “생리가 끝났다/붉은 피가 멈췄다”라고 내성적으로 표현하고 그 아래에서 그믐밤의 정경으로 세말의 분위기를 나타낸후 마지막에는 다시 “생리가 시작되였다/붉은 피줄 일어선다”라는 시구로 일출의 새해아침을 그리고있다. 총적으로 이 시에서 송구영신, 신진대사 혹은 광명과 암흑의 교체는 대자연의 법칙임을 확신하면서 광명한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을 특색있게 읊조리였다. 다섯번째 시 “개미의 꿈”은 정말 난해한 시이다. 개미들이 감히 인간의 얼굴에 있는 일곱개의 구멍(눈 둘, 귀 둘, 코구멍 둘, 입 하나)을 탐사하고 천착하려는 꿈을 꾸고있으며 그 꿈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하고있다. 1련, 천착을 시작하기 전의 일곱 동굴에 대한 정보분석, 2련, 일곱 동굴을 천착하는 로동현장, 3련, 일곱개의 동굴에 가득 차있는것들, 그 중에는 “꿀”과 “금괴”같은 욕심을 불러일으키는것들도 있으며 “우수((雨水) ”, “바람”, “귀지”같은 장애를 조성하는것도 있다. 나중에 화자는 개미가 “바다를 품었다”, “하늘을 안았다”고 하면서 “개미”의 생각을 직토하는 시구 “씨ㅡ꿈이야 못 꾸겠니”로 시를 끝냈다. 이 시를 접할 때 “개미”를 “인간”으로 바꾸어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이채로운 해독이 나올수도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가질수도 있잖을가 사료된다. 여섯번째 시 “장고지몽(長鼓之夢)”에서 시인은 장고소리를 들으면서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시로 정리하고있다. 처음에는 장고를 치는 녀인의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성스러움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고 확인하였으며 그 아래에서는 시원스러운 장고소리를 칼에 비기면서 비단을 베인다고, 간드러진 소리에 맺혔던 매듭이 풀린다고, 말의 효용소리, 소의 영각소리를 낸다고 상상한다. 제5련 “아리아리 아라리요 둥둥둥/아리아리 아라리요 둥둥둥”은 장고소리에서 힘차게 울려오는 백의민족의 심성을 돌출하게 부각하고 마지막 련에서는 첫련과 호응하면서 녀인의 가슴으로부터 울리기 시작한 선률이 아득한 강에 빠져 익사하는것으로 태양을 떠올렸다고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여기에서 태양은 태양계의 알로서의 해가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에 떠오르는 희망과 광명의 상징으로서의 태양이다. 총적으로 이 시에서는 장고의 꿈을 통하여 장고를 대표하는 모든 민족음악, 나아가서 모든 민족문예의 소리와 빛과 향기와 힘, 감화력과 매력을 독창적으로 노래하였다. 2. 시 6수에서 낯설게 하기와 상관물창조. 이상 분석에서 보았지만 김철호의 6수의 시는 주제파악이 쉽지 않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그 해답을 한마디로 말하면 김철호의 시는 방법과 수법 및 기교상에서 모더니즘시와 포스트모더니즘시의 영향을 많이 받고있기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이것들에 대해여 리론적으로 해명할수 없으므로 김철호 시 6수와 련계시켜 몇마디 더 하려고 한다. 서양시학에 데뻬이즈망(Depaysent)이라는 개념이 있다. 전혀 이질적인것들이 모여 새로운 창조적인것으로 재탄생되는것, 혹은 기존의 의미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어는 변화를 시도하는것을 가리킨다. 시창작에서 낯설게 하기, 소외기법, 몽따쥬, 콜라쥬, 자동기술법, 병치조각내기, 폭력조합 등등 시적기교의 목적 혹은 결과는 결국 모두 시의 데뻬이즈망에 귀속된다고 할수 있다. “김철호미니시집”에서 우리는 데뻬이즈망수법과 기교를 많이 찾아볼수 있는데 여기서는 먼저 낯설게 하기를 보자. 낯설게 하기란 로씨야 형식주의의 핵심개념의 하나인데 스콜로프스키(shklovsky)가 처음으로 제기한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지각이 인습화된 틀속에서 영위되는 일상의 삶은 본래의 의미를 잃기 쉬운데 예술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는것으로 사물의 본래 모습을 회복심키려는것이다. 스콜로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을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대로 그에 감각을 부여하는것이다. 예술의 여러가지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이를 지각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한다. 지각과정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리목적으로 가능한 연장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낯설게 하기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 위하여 일상화되여 친숙하거나 반복되여 참신하지 않는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생소하게 하여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하는 수법이다. 이제 김철호 시 6수에서 낯설게 하기의 례를 몇개 들어본다. 첫번째 시(“룰”) 2련의 “은빛 향기로운 세상”을 보면 시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과 후각으로 감지하는 감각을 련계시킴으로서 공감각에 의한 낯설게 하기를 하였다. 4련의 “넓고 깊은 그물”은 문법을 고의적으로 파괴한 폭력조합으로 낯설게 하기를 하였다. 그물은 넓을수 있어도 깊을수는 없다. 문법적규칙대로 하면 “넓은 그물을 깊이 던져”로 되여야 할것인데 시인은 고의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것이다. 두번째 시(“희나리”) 3련에서 “고독이 떨고있다”는 시구도 “고독”이라는 단어와 “떨고있다”는 단어는 주술관계가 형성될수 없는것인데 폭력조합으로 낯설게 하기를 하고있다. 다섯번째 시(“개미의 꿈”)에서 “개미가 바다를 품었다/개미가 하늘을 안았다” 이것은 수사법으로 과장에 속하지만 바다와 개미의 비교, 하늘과 개미의 비교속에서 보면 이 시구는 절대적인 불가능을 시인의 상상으로 낯설게 하기를 한것이다. 여섯번째 시(“장고지몽”)에서 “살에 배인 색”, “소리보다 더 선들선들한 칼”, “비단 베이는 섹시한 가락”, “음(音)의 향기 깃을 꼬며 눕는다”, “매듭이 스르르 맥을 놓는다”, “아득한 강에 빠진 선률”, “즐거운 익사로 붉은 태양 받쳐든다” 등등 시구는 모두 언어의 폭력조합, 혹은 이미지의 폭력조합을 시도한 낯설게 하기이다. 이밖에도 6수의 시에는 현실과 상상을 뒤집고 시간의 전과 후를 전도시키고 원인과 결과를 혼돈시키고 천당과 지옥, 이승과 저승을 섞어놓는 수법으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 곳이 많다. 다음 6수의 시에서의 상관물창조에 대하여 살펴보자. 객관적상관물창조의 개념은 엘리어트가 제일 처음 제기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을 발견하고 창조하는것이다. 문학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수 없다. 어떤 사물, 정황 또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그것을 표현하여야 한다. 일상생활중의 개인감정은 시작품에 그대로 로출되는것이 아니라 시문과 관계있는 어떤 심상, 상징, 사건을 통하여 구현된다는것이다. 이제 이 6수의 시를 보면 김철호시인의 상관물창조에서의 뛰여난 시재를 보아낼수 있다. 우선 시의 제목들이 창조주체의 감정이나 가치관을 나타낼수 있는 상관물로 창조되였다. 례를 들면 중년남자의 성고민과 더불어 생명재생의 꿈을 나타내기 위하여 “희나리”라는 객관적상관물을 창조하였으며 소인, 범인, 속인의 소망을 나타내기 위하여 “개미의 꿈”이라는 객관적상관물을 창조하였으며 문학예술작품의 매력과 가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장고지몽”이라는 객관적상관물을 창조하였다. 6수의 시문중에는 객관적상관물이 아주 많다. 례를 들면 “희나리”에서의  “녹쓴 수도꼭지”, “웅크린 힘”, “젖은 팬티속에 무서운 힘”, “자음과 모음이 섞여야 완정한 글자”, “희한한 놀음”, “갑자기 사라지는 우주”, “시작만 있을뿐인 추락”, “개미의 꿈”에서의 “일곱개의 동굴”, “장고지몽”에서의 “높고 가까운 두 언덕” 등등인데 창조된 객관적상관물들의 시적내포에 대하여서는 독자들이 하나하나 음미해보기를 바란다. 3. 시의 새 지평에 선 김철호에게 박수. 낯설게 하기와 상관물창조외에 6수의 시에는 시적인 아이러니와 역설 그리고 해학 등 수법이 필자의 눈길을 끌고 태양, 하늘, 꿈, 바람, 숨 등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입맛을 당기지만 편폭관계로 더 펼치지 않기로 한다. 총적으로 이 6수의 시는 난해하지만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은 시에 그래도 선명한 가치추구가 있기때문이다. 난해한것은 시의 창작방법과 기교에서 우리가 습관된 직토, 직설법이 아니라 낯설게 하기와 객관적상관물창조, 아이러니, 역설 등 현대적인 수법과 기교를 많이 쓰기때문이다. 이러한 수법과 기교는 결코 김철호의 발명이 아니며 이러한 수법과 기법에 대한 실험은 우리 시단의 많은 시인들이 견지하고있다. 단지 김철호의 작품활동을 회고해보면 최근의 시창작이 새로운 지평선에로 올라선 느낌을 준다는것이다. 김철호의 생활에 대한 심도파악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감이 넘치고 자아에 대한 투시는 여유로우면서도 진솔하다. 김철호의 현대시에 대한 공부는 시 “개미의 꿈”의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끈질기다. 이제 김철호의 시도 “장고지몽”의 그 장고소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의 하늘에 붉은 태양을 받쳐올리려는지, 기대해본다. 시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시창조의 새로운 지평선에 우뚝 선 김철호에게 박수를 보낸다.   2013넌 6월 10일 대련 소평도 림해원에서 2013년 제4기                            
506    [시]장고지몽長鼓之夢(김철호) 댓글:  조회:1324  추천:2  2014-02-03
장고지몽長鼓之夢 김철호 살에 배인 색을 잃을리 없겠지만 그녀의 빛은 먼 우주에서 온 숨 세상에 소리*보다 더 선들선들한 칼 있을소냐 비단 베이는 섹시한 가락 시작되자 음(音)의 향기 깃을 꼬며 눕는다 풀리것 같지 않던 매듭들이 스르르 맥 놓으니 푸른 혀들이 어느새 이슬 빨며 신음한다 가늘고 짤룩한 허리 붉은 줄에 얽히여 말의 효용(驍勇) 소의 영각 뽐낸다 아리아리 아라리요 둥둥둥... 아리아리 아라리요 둥둥둥... 달이 걸린 높고 가까운 두 언덕 내려 아득한 강에 빠진 선률(旋律) 즐거운 익사로 붉은 태양 받쳐든다 *소리:장고에 맞추어 부를수 있는 판소리, 잡가, 민요 등과 같은 민족성악곡. 2013년 제4기
505    [시]개미의 꿈.1(김철호) 댓글:  조회:1322  추천:2  2014-02-03
개미의 꿈.1 김철호 일곱개의 동굴*은 어둑컴컴하다 그속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속을 알수 없다 여기저기 뚫린 굴이지만 속은 통일되여있다 한곳만 잘 탐사하면 나머지 여섯곳을 알수 있을가 암석이 뚫린다 굴착기가 돌아간다 돌물이 질질 흘러나온다 풀쩍, 풀쩍... 소리가 야하네 너는 지금 구멍을 뚫고있구나 일곱개의 동굴이 얼굴 내밀거다 첫째 동굴에는 소금이 가득 차있다 둘째 동굴에는 우수(雨水)가 넘쳐나 있다 셋째 동굴에는 꿀이 가득 차있다 넷째 동굴에는 바람이 가득 차있다 다섯째 동굴에는 금괴(金塊)가 가득 차있다 여섯째 동굴에는 귀지가 가득 차있다 일곱째 동굴은 비여있다 아니, 일곱째 동굴은 닫혔다 열렸다 하면서 뭘 기다리고있다 나는 민속원 정문앞에서 동굴들을 들여다보면서 웃었다 우리들은 다 일곱개의 동굴을 들여다 보면서 떠든다 동굴들이 동굴들을 바라본다 동굴들이 동굴들을 좋아 한다, 싫어한다, 미워한다... 일곱개의 동굴속을 아무도 모른다 개미가 바다를 품었다 개미가 하늘을 안았다 씨ㅡ꿈이야 못 꾸겠니. *강영은 시인은 '얼굴에 뚫린 일곱개의 동굴마다 파도 음을 펴내니...'(시 '혼돈에 대하여'에서)라고 했다. 2013년 제4기
504    [시]희담 戱談(김철호) 댓글:  조회:1237  추천:0  2014-02-03
희담戱談 김철호 할아버지가 걸어오시고있었다 그 옆에 목청 높은 할머니가 하얗게 서계신다 아버지는 높다란 장작무지에 눌려 헐떡이고 어머니는 인 물동이에서 흘러내린 찬물에 저고리 적신다 꽃밭에서 즐거운 누이가 웃는다 하늘길에서 동네 아이들이 구름 타고 달린다 예쁜 사슴의 무리뒤에 멋쟁이 호랑이가 누워있다 벼랑에 걸려있는 오솔길에 보라빛 점이 움직인다 가느다란 가람가에 쪽배 한척 바람 센 물우에서 흔들린다 누가 스위치를 눌러버렸는가 세상의 빛 다 꺼져버린다 향기만 그윽히 풍겨올뿐 우주가 갑자기 사라진다 허공을 딛는 발걸음 허공에 걸린 몸뚱이 우 아래 옆이 상실된 세상에 서있는 넋 무한한 추락이 시작된것이다 시작만 있을뿐인 추락! 2013년 제4기
503    [시]희나리(김철호) 댓글:  조회:1042  추천:0  2014-02-03
희나리 김철호 시들면 더 질기다 했더냐 녹쓴 수도꼭지속에서 아직도 생수가 빠져나오려고 눈치보고있다 웅크린 힘 닫힌 성문 열려고 흘끔거리지만 밤 12시, 깊은 잠은 애타다 수자를 처음 알았을 때,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초견(初見)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의 경이로움의 소년, 젖은 팬티속에 무서운 힘이 숨어있다는것을 발견했을 때, 자음과 모음이 섞이여야 완정한 글자가 된다는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희한한 놀음에 들떠있던 소년은 어데 가고 네가 그 자리에 서있느냐? 영원한 발자국을 새겨놓을 봄을 개처럼 바라보며 고독이 떨고있다 웅크린 힘, 닫힌 문 열려고 흘끔거리지만 벌써 밤 12시, 깊은 잠이 와있었다. 2013년 제4기
502    [시]바다.1(김철호) 댓글:  조회:1173  추천:0  2014-02-03
바다.1 김철호 고속도로에서 핸들을 잡아보면 파도 타는 같아, 심한 장난 같아 차를 하늘로 몰고 올라 보아라 심한 장난이지 칭키스칸 룡차가 초원과 사막을 누빌제 먼지와 누리떼들이 구름처럼 따랐지 금사강을 먹으며 사는 대불(大佛)은 때투성이야 수수백년 때 한번 씻지 않았으니 와우, 냄새가 지독하구나 북경역 대합실과 역광장은 발해 황해 남해의 파도가 어울려 출렁거려 산동말 광동말 동북말들이 팥죽처럼 끓고있어서 뜨거워 뜨거워 일어 영어 몽고어 프랑스어 조선어들이 비빔밥처럼 뒤섞여있어서 구수해 구수해 감숙의 막고에 가면 안돼, 거기엔  큰 바다가 있거든 눈깔을 찔러대는 누런 파도는 페를 싹 좀먹이고있어 류방이 대부대를 이끌고 지나가고있어 황우가 바다를 파놓고있는줄도 모르고 헐레헐레 숨찬 부대 그런데 항우는 자신의 바다에 빠져 익사했어 맑스가 태운 담배연기는 해변의 안개와 자웅을 겨루고있어 하루밤에 1억차례 정사가 벌어지고있다는구나 인간들이 나누는 악랄한 사정은 내를 이룰거야 출렁이는 잠꼬대는 해일처럼 밀려와 운두루한 사막에 남아있는 비행기 잔해들을 들춰내고있어. 2013년 제5호
501    제3장 고난의 조선인 간민(墾民) 댓글:  조회:1892  추천:0  2014-02-01
조선인 농민들의 벼모내기. 문전옥답 치발역복하지 않았다고  정부에 빼앗기고 사지안에 들었다고 영문 모른채 점산호에 빼앗기고 조선간민구 1881년, 청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초간총국을 설치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황무지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훈춘녕고탑초간(招墾)장정”을 반포,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은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60문(文)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후에 갚게 하며 그 나머지는 한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밖에 간민들에게 부림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빚을 갚게 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했다.   1885년에 와서 간민전문개간국을 설정하기에 이르는데 그 의의에 대하여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 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토지를 개간할수 있는 합법적권리를 얻은것입니다. 많은 조선족들이 연변땅에 들어왔기에 그후 민족공동체형성에 중요한 조건을 마련해주기도 했지요.” 한편 지방관청의 관리들과 지주, 토호렬신들은 정부에서 관황(官荒, 관청의 황무지)을 조사하여 풀어놓은 기회에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을뿐만아니라 5년내에 조세를 받지않으며 집, 식량, 씨앗, 부림소 및 일부 농사금을 선대해준다는 좋은 조건으로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거나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런 좋은 조건은 조선농민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어 수많은 조선농민들로 하여금 두만강연안의 4개보, 39개 사로부터 해란강이북과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쪽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괴나리보짐을 풀고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 2백리 땅이 조선농민들에 의해 전부 개간되였을뿐만아니라 해란강이북지역과 가야하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초강국설치시의 조사에 의하면 당지에 숙지가 적잖았는데 훈춘지방에 5620헥타르, 남강지방에 3073헥타르, 흑정자지방에 144헥타르가 있었다. 훈춘변황후선지부 리금용의 조사에 의하면 가야하로부터 고려진북안에 이르는 구간에는 이미 8곳이나 개간되였는데 그 면적은 2000여헥타르에 달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야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지방에 쳐들어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실색한 연변지방 관리들과 군경들은 길림으로 꼬리를 사렸다. 그 기회에 조선간민들은 연변지구에 더 많이 이주하였는데 1909년에 이르러서는 3만4133세대에 18만4867명으로 늘어났다.   치발역복 귀화입적 1891년, 청정부에서는 화룡 월간국과 통상국을 무간국으로 고치고 이듬해에는 무강총국을 국자가에 옮겼으며 조선족의 호적을 조사하여 4개보, 39개 사에 편입시키고 조선족을 청나라신민으로 인정하였다. 당시의 정세를 류병호선생은 “조선족에 대한 청나라의 ‘편적위민’과 ‘치발역복’정책”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족간민에 대한 청나라조정의 편적위민은 민족동화를 목적으로 한 치발역복을 기초로 하였다. 근대적국법을 아직 수립하지 못한 청나라조정은 입관시에 관내지역의 한족인민들에게 강요하였던 치발역복정책을 200년후 조선으로부터 이주하여온 조선족간민들에게도 강요하고 이를 토지소유권을 부여하는 전제로 삼았다.”   청나라조정은 조선족간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는 것은 령토주권을 버리는것과 같으므로 치발역복하여 만족으로 동화된 조선족간민만이 청나라의 신민으로서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물론 이런 정책을 조선족간민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백의흑관은 조선민족의 상징이요, 상투와 머리태는 남서의 성가여부를 상징하는 표징이였다. 장기간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상하간의 례의와 타문화에 대한 배타주의사상을 길러온 조선민족은 조상이 물려준 백의흑관을 버리고 호북(만족복장)을 갈아입고 부모가 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는 것을 조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참으로 머리위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닐수 없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피땀으로 걸구어온 옥답을 빼앗기고 지어 가장집물까지 털린후 강건너 설음의 고향땅으로 쫓겨갈판이였다. 그렇다고 만주호적에 든다는것도 조상들에게 죄스러운 일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굶어죽으면 죽었지 “치발역복, 귀하입적”하지 않는다면서 문전옥답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관부에서 순찰할 때만 호북에다 머리를 풀어 땋고 평소에는 여전히 한복차림을 했다. 그러다가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난후 짜리로씨야가 연변을 침략하자 연변지방의 관리들이 길림으로 도망치는통에 치발역복바람이 즘즘해졌다. 하여 치발역복하였던 많은 조선족들은 다시 민족복장을 입었다.   점산호와 조선인 지주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지방관리와 군벌, 대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권세를 등지고 청장(淸丈, 토지를 재주는 일따위)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부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꽂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어떤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하였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상인들을 가리켜 “점산호”라고 하였다. 그때의 정경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점산호들이 차지한 토지면적은 토지증명서에 ‘동쪽은 수림이고 서쪽은 강이며 남쪽은 수림이고 북쪽은 개울’이라고 써넣고 이것을 ‘사지(四至)집조’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주먹구구로 사지를 정해놓으니 개간민의 토지도 사지안에 들어갔다. 관청에서 비록 경작지를 다시 측량하고 등록된 면적을 초과했을 때는 ‘부다지(浮多地)’로 처리하여 땅세를 받아들였으나 그것 역시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아 조사해내지 못한 토지가 많고 또 조사해냈다 해도 우선권이 점산호들에게 있어서 땅세를 바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개간민들은 웬 영문인지 모른채 피땀으로 일군 문전옥토를 점산호들에게 점령당하고 빈주먹으로 나앉게 되었다.”   거기에다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하지 않은 개간민들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관청에서는 치발령을 어긴자에게 기한을 정해 토지를 한족지주나 한족주민에게 넘겨주도록 강요하고 기한내에 넘겨주지 않으면 강건저 조선땅에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조선개간민들은 자기 손으로 가꾼 토지를 점산호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나 고농으로 전락되였다.   조선이주민속에도 대지주가 나타났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두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한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관청과 점산호들에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의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든 덕에 점산호들로부터 몇백헥타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지주가 된 것이다. “변발호복”하여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리를 받아들이며 그가운데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관부와 결탁하여 기타 귀화입적하지 않은 간민들을 고용하여 황지를 개척한 뒤 자기이름으로 령조납세(領照納稅) 함으로써 일약 수십상의 토지를 점유한 지주로 되었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의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끌리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솔가이주하여 일약 수십상의 황무지를 소유한 지주로 되었다.(계속)
500    [시]룰(김철호) 댓글:  조회:1344  추천:1  2014-01-27
룰 김철호 작은 생명이래도 그건 하늘보다 더 큰 숨 찬란한 은빛 세상 해살 건너간 망사를 어여쁨으로 감싸안는 은빛 향기로운 세상... 바다와 천리 떨어진 시골길 나무 끝자락에 매달린 재난이래도 그건 스나미로 일어선다 하늘이 넓고 깊은 그물 던져 눈 멀구어주는 그 길 따라가라 살아있다는 감동은 죽음을 스쳐간 사람만이 안다 2013년 제4기
499    제2장 간도(間島, 사이섬) 댓글:  조회:2696  추천:3  2014-01-20
두만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이민초기의 어부들. 월강죄 두려워한 거짓말 "간도농사" 향연이 짙은 력사의 지명ㅡ"간도"로    조선 하산봉 농사군 리영수형제 강너머 땅이 얼마가 기름졌으며 버들이 우거지고 풀들이 키를 넘을가. 대한재로 하여 말라빠진 자신들의 밭을 바라보면서 조선의 리재민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이렇게 탄식했으리라. 그리고 고양이 기름종지 노리듯 북안기슭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섰을 것이다.    19세기 60년대, 조선 종성군 하산봉에 사는 농사군 리영수형제가 끝내 죽음을 자초하는 기아와 맞서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떼목을 타고 용감히 강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찍어내고 풀을 베여내여 밭을 일구었다. 그때를 선구촌 제1촌민소조의 농민시인 심정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로인들한테서 들은 얘긴데 130년전에 종성 하산봉의 리영수형제가 떼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 이 천평벌에 첫 괭이를 박았다고 그럽니다. 그 먼저 종성사람들은 저 뚝너머사이섬에서 농사질을 했다는군요. 리영수형제는 월강죄가 무서워 사이섬에 가 농사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다음부터 저기 산너머 마늘골이랑, 애끼골이랑에 가 밭을 일구었고 석정골이며 연집골까지 들어가 화전을 일구면서도 사이섬에 가 농사짓는다고 거짓말을 하잖으면 안됐다더군요."    선구촌 제6촌민소조 마을앞 두만강뚝에 올라서면 심정호씨가 말하는 사이섬이 한눈에 활餠쨈? 마을사람들은 이 섬을 "미소(尾島)"혹은 정답게 "꼬리섬"이라고 부른다. 얼마전까지도 사이섬에는 조선농민들의 농막이 있었으며 조선농민들이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런 섬이 두만강에는 아주 많았는데 "꼬리섬"은 그중 큰 섬이였다. 조선농민들은 감히 륙지를 범하지는 못하고 그저 이런 섬들을 개간하여왔댔는데 이번에 리영수형제가 담도 크게 이 벌에 첫 괭이를 박은 것이다. 물론 가을이면 곡식을 떼목에 싣고 돌아가서는 정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유작작 사이섬 즉 "간도(間島)"에 가 농사를 지어왔다고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후 농사군들은 절골(애민촌), 애끼골(제동), 자동, 후동 등 광제욕지역은 물론 석정과 연집 등지에까지 파고 들어와 화전을 일구어가면서도 "간도"에 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간도"란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면서 아예 강너머 땅을 "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간도(間島)"와 "간토(墾土)" 란 명칭의 발원지로 알려지고있는 유서깊은 . 1878년 좌우에 개간되면서부터 이곳은 조선인동포들이 로 이주해오는 주요한 길목이였다. 1883년, 청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변계가 "김림조선상민무역지방장정"에 의해 개방되고 연변지구에 대한 봉금령이 페제되면서 월간국이 설치되게 되었다. 하여 많은 조선농민들이 연변땅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게 되었다. 땅을 개간한다고 하여 연변지구를 "간토(墾土)"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말이 "간(墾)"자와 "간(間)"자가 같은 음이고 "도(島)"자와 "토(土)"는 근사한 음이여서 민간에서는 구별없이 "간도"라고 불렀다. "중조 량국간에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시비가 생긴 것은 1903년 로 임명된 리범윤이 중국측 월간국에 는 라고 주장하며서부터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란 낱말이 외교에서 사용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에 기재된 자신의 글 "의 발생과 일제의 "라는 제목의 글을 상기시킨다. 그 글에서 박교수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두만강류역에는 크고작은 허다한 들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을 라 하였다 이나 의 기재에 의하면 는 원래 이 아니다.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의 선구, 광소촌과 조선 종성 사이로 흐르는 두만강의 중국 측 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이 있었는데 그 복새험은 광제욕(光霽 )에 잇대여 있는 륙지였다. 이 이 어느때부터 개간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1881년 연변지구의 봉금제가 페지되자 월경한 조선족간민들이 광제욕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뺀후부터 은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인 으로 되었다. 당시 한족들은 이 을 도는 이라고 불렀고 조선족간민들은 또는 라고부럴ㅆ다. 이로부터 조선족간민들에게서 란 칭호가 나왔다. 땅은 주로 조선의 종성농민들이란 칭호가 나왔다. 땅은 주로 조선의 종성농민들이 중국의 월간국에 조세를 바치면서 경작하였는데 매년의 조세총액은 800여냥에 달하였고 월간국에서는 조세를 받아 월간사무비로 사용하였다."    일제가 조작한 "간도문제" 두만강 남쪽에 자리잡은 선구나루터 옛터.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천순만의 조선인들이 터진 홍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었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 1883년에는 청나라 조정에서는 화룡욕(지금의 룡정시 지신향소재지)에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이북 길이 700여리, 너비 50여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간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청나라는 변방보위수요로부터 출발하여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기구인 월강국을 세우고 전문 조선족의 개간사무를 맡아보았습니다 .연변을 조선족의 전문개간구로 확정한 이것은 우리 연변력사와 조선족의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1905년,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을뿐만아니라 저들의 기정된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침략을 정식으로 확정하였다. 하여 리범윤이 제기해오던 "간도"가 조선땅이라는 넉두리를 되풀이하면서 조선보호국으로 자처, 조선을 대신하여 간도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압록강, 송화강과 두만강 등 3개 강의 발원지일대에는 이 엄연하게 존재하며 이를 라고 부르는데""는 동서 760리, 남북350리나 되며 모아산(帽兒山), 김림성 림강현소속)을 따라 흐르는 휘발하(輝發河)로부터 송화강 이남일대의 지역까지 모두 지역에 속하는바 그 광활함은 우리나라 (일본)의 규슈(九州)지방에 해당된다. 이렇게 넓은 지역이 도대체 중국에 속하느냐 아니면 조선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단정하기 어렵다"는 망설까지 해댔다.    그후 일제는 자의로 간도를 북도소, 회령간도, 종성간도와 무산간도로 행정구역을 획분하고 4개 구역에는 "도사장"을 임명하고 그 관할하에 41개 사, 290개 촌을 두고 사장, 촌장을 임명하였으며 신흥평, 국자가 등 14개소에는 일본헌병대분견소를 설치하고 헌병과 조선경찰을 배치하였다. 결국 일제는 력사문헌과 실지조사를 통하여 "간도는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두만강변계문제를 리용하여 저들의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들어온 일제는 그후 조선족들을 탄압하고 략탈하는 야수의 무리로 되었다. (계속) 
498    제1장 월강곡(越江曲) 댓글:  조회:3358  추천:1  2014-01-17
  이 땅에 정착하게 되는 민족의 전주곡 애달픔이 맺혀있는 겨레의  슬픈 노래   1 겨울 두만강은 꽁꽁 얼어붙어있다. 눈보라가 아츠란 비명을 지르면서 눈덮인 강우에서 란무한다. 두만강언제에서 바라보는 사이섬은 무척 황페해 보인다. 뒤 돌아보니 멀리 룡정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의 굴뚝이며 천평벌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촌락들의 하얀 지붕이 바라보인다. 자그마한 호수를 지척에 두고있는 선구촌 제6촌민소조가 바로 턱밑이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이 언제에 서서 사이섬이며 촌락들을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월강곡"이다. 애처로운 "월강곡"노래소리가 눈보라에 실려와 귀전을 울려주는것만 같다. "월강곡"은 이 땅에 정착하게 되는 우리 민족의 전주곡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북쪽을 우러러 탄식하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던가. 항간에서는 게걸스레 먹는 아이를 보면 "기사년에 난 애같다"고들 한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의 11년간 조선 북부에서는 대한재와 대충재가 련이어 들었다. 특히 1869년 기사년(己巳年)에 함경도의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겪어보지 못해던 특대한재였다. 해동머리부터 가물이 시작되였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비 한방울 오지 않았으니 전대미문의 왕가물이 아닐수 없었다.    조선 리조왕조의 부패한 관리배들의 학정으로 풍년이 들었다 해도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백성들이였는데 왕가물까지 겹쳤으니 살길이 꽉 막혀버리고만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을 캐먹었고 산열매를 따먹었다. 나무도 열매도 없어지자 그들은 풀뿌리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었다. 집집에 굶어죽고 얼어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길가에는 임자없는 시체가 나뒹굴기도 했다. 어떤 부락에서는 배고픈걸 견디다못해 등에 업었던 자식을 잡아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때의 참상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일서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굶어죽었으면 이 해를 라고 까지 불렀겠는가."    사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의 유일한 삶의 길이 되고말았다. 그러나 이 길마저 순순히 열리는 것은 아니였다. 조선 리조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우고 월강을 엄금시켰으며 월강하다 잡힌자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버렸다. 2    한편 청나라 통치자들은 도읍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긴후 장백산이북의 천리땅을 "룡흥지지" 즉 만족의 발상지로 만들고 엄한 봉금을 실시하면서 이민들의 이주를 일률로 금지했다. 이것이 바로 력사에서 말하는 "봉금령"이다. "봉금령"이 내려진후 만주땅은 천부지토(天府之土: 생산물이 풍부한 땅)로 되고말았다. 무연한 황무지, 끝없는 살림, 무진장한 자연자원이 깊이 잠들고있었다. 연변땅은 청나라 팔기병들의 훈련장소로 인삼과 진주를 캐고 사슴과 수달피 등 진귀동물을 잡아 청나라 통치자들에게 바치는 수렵장소로 되고말았다. 만족을 내놓고 이 민족이 들어오는 경우 추방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잘못 걸리면 목을 잘리웠다.    장백산지구는 이렇게 인가가 없는 황량한곳으로 200여년 비여있게 되였다. 무성한 삼림, 비옥한 땅은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너무나 충분하였다. "앉아서 굶어죽으면 어떻고 월강하다 잡혀 죽으면 어떠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판인데 강을 건너고 보자. 혹 성공하면 살수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비밀리에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허봉학, 리광수 저)의 독백장면이다.    처음에는 일귀경작(日歸耕作)하는걸로 그쳤다. 야밤에 두만강을 건너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는 아침이면 돌아갔다. 후에는 며칠씩 북박혀 있으면서 농사짓기도 했다. 청나라 관청의 령이 엄하면 돌아오고 뜸해지면 또 들어가는 방법으로 두만강연안 순라선에서 좀 멀직이 떨어진 산골짜기에 숨어 곡식을 심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봄에 월강하여 깊숙이 들어와서는 농사를 짓고는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주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리는 사람들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목숨을 내건 일들이였다. 그러다가 잡히면 엄벌을 받는데 두만강기슭에서 사람을 죽여 목을 걸어놓고 효시하는 장면을 언제든지 볼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고향에 남아있는 안해들은 남편들 때문에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른다. 어느날 불현 듯 두만강가의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남편의 머리를 발견하고 기절하여 쓰러진 녀인들이 얼마였으랴. "월강곡"에는 이러한 애달픈 심정이 련련히 맺혀있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류연산의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재되여있다. 1883년 서북경락사 어윤중(西北經略使 魚允中)은 함경북도를 순찰하던 도중 종성의 수향루에 올라 두만강대안을 바라보다가 산발에 오불꼬불 뻗어있는 오솔길을 발견하고 "저건 무슨 길인고?"하고 물었다. "백성들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나이다." 종성부사이 대답이였다. "저승길이라니?" "이곳 날농사군들이 강을 건너서 골짜기에 들어가 부대를 일구면서부터 난 길이옵니다. 월강죄는 목을 친다고 했으니 저승길이 아니겠나이까?" 종성부사의 이실직고였다.    크게 깨달은 어윤중은 월강금지령을 페지하고 "월강죄인불가진살(越江罪人不可塵殺)"이라고 하면서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어 강북으로의 이주를 승인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길림장군 명안과 오대징은 연변지방에서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족을 출국시킬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수도 없다면서 집조를 발급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청나라 조정에서는 로씨야의 침략 등 국내외 복잡한 정세속에서 조선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1885년에 봉금령을 페지하였다. 이로부터 변강주민들은 더는 "월강곡"을 애타게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3 월강무죄의 령이 각 부락에 제때에 전해지지 못해 월강죄로 아쉽게 죽어간 마지막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무산의 사포수였다. 그때의 장면을 작가 류연산씨는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월강사냥을 한 사실이 탄로가 나서 관가에 잡힌 사포수는 달구지에 앉아 두만강변사형장으로 떠났다. 국경한계가 없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짐승이야 국적이 있으랴만 사람이 강을 건넜다는 리유 하나로도 당시엔 사형판결이 쉽게 떨어질수 있었으리. 수인차를 끄는 둥글소는 울퉁불퉁한 길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암소처럼 대소변 때문에 멈추는 시간랑비도 없이 슬슬 잘도 끌고간다. 강변사형장의 단두대 량옆엔 벌써 명을 받고 온 도부수들이 름름히 대기하고있었다. 도부수들이 손에 들린 선들선들한 큰 칼을 보자 사포수는 진작 혼백이 구중천으로 날아올랐다. 수인차가 사형장에 이르기 바쁘게 사령들은 결박한 사형수를 끄집어내려 꿇어앉히고 단두대에 머리를 얹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고을쪽으로부터 말 한필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말등에 앉은 파발군은 손을 휘저으며 뭐라고 소리를 쳤는데 거리가 멀어서 무슨 소리인지 가려 들을수가 없었다. 판결문을 읽고나자 도부수들은 칼을 허공에들었다가 힘껏 내리찍었다. 목이 두동강이 나면서 뻘건 피가 분수처럼 쏴 - 솟아 사방에 휘뿌려졌다. 목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와 싸늘히 식어가는 몸둥이는 마치도 커다란 웨침표마냥 모래사장에 뉘여졌다. 그것은 월강죄에 대한 종지부였다.(계속)  
497    [시]가야금 (외2수) 댓글:  조회:1815  추천:2  2013-12-26
가야금(외2수) 김철호   가람 가람 가람 푸른 가람 가람 가람 가람 맑은 가람 두만가람 압록가람 노들가람 박달골 째고 웃으며 온 가람 열두골 합수머리서 만난 가람 가람 가람 가람 가람이 온다 우리 사는 골골에서 오는 가람엔 구름밖서 지저귀는 뻐꾸기 소리 쟁기 끌던 얼룩배기 기인 영각소리 바위 하나 굴러도 고아(高雅)해지는 소리 먼 산 솔의 숨소리 귀 막아도 들리는 홰치는 소리 눈감아도 들리는 개짖는 소리 가람 가람 가람 붉은 댕기 가람 가람 가람 하얀 댕기 가람 가람 가람 푸른 댕기 가람 가람 가람 노란 댕기 가람 가람 가람 검은 댕기 장고허리 동이려나 긴 상모 깃 오색기발 날리려나 넓은 치마폭 우리 가락 어여뻐 싣고온 가람 우리 사위 멋스러워 품고온 가람 금수강산 한데 모인 해달 밝은 가람 바다  바다에서 푸른 냄새가 난다 때론 흰 냄새가 난다 검은 냄새, 붉은 냄새도 난다  바다만큼 죽은 넋 묻힌 곳 없으리 바다만큼 죽은 시간 갈앉은 곳 없으리 바다에서 이 세상 모든 냄새가 풍긴다 비명이 무너지는 냄새 천둥이 겁질린 냄새 력사의 시체들이 흔들리는 냄새 금수와 인간의 함몰이 뒤섞이는 냄새 삶과 죽음이 비벼대는 검은 률(律)의 냄새  바다의 냄새는 쓰고 떫다 바다의 냄새는 쓰리고 아프다 수많은 어선을 씻은 바다라서 어부들의 땀썩은 살냄새도 있고 달님과 해님을 헹군 바다라서 차고 따가운 냄새도 있고 파란 하늘 통째로 내려와 넓고 푸짐한 별들의 맛 보태준 바다라서 고색이 찬연한 냄새도 있고...  쓰고 덟고 시고 아픈 밝고 맑고 빛나고 신나는  이 세상 모든 냄새가 섞인 바다 그래서 바다의 냄새를 냄새라고만 할수 없다  깊은 저 먹물의 향! 한글 불씨! 사람 하나를 다 태울수 있는, 사람을 한 자루의 홰불로 타게 할수 있는 불씨!  백두의 족혈 몸에서 흐르는 숨 마른 나무에 스며든 기름 쌓아놓은 장작더미 28개의 별  한줄기 산맥이 탄다. 한자락 강물이 탄다, 한 민족이 탄다, 570년을 타고 타커다란 불덩이 되였다! 만년 앞길 비출 커다란 불덩이 되였다!  불덩이 하늘에 떴다 그 빛 막을수 없는 태양으로!   연변일보 2013년 12월 26일
496    [시]12월 맨마지막 날의 일기(김철호) 댓글:  조회:1396  추천:2  2013-11-14
12월 맨 마지막 날의 일기 김철호 생리가 끝났다 붉은 피가 멈췄다 릉선우로 걸어가다 꼬꾸라진 태양은 초불 하나 켤수 없는 죽은 불의 씨앗 누이야, 이 가냘픔을 보아라 바람조차 숨 죽이고 벌판을 내놓았다 검은 뿌리ㅡ힘줄 같던 강도 맥을 버렸다 아니다, 생리가 시작되였다붉은 피줄 일어선다 2013년 제4기
495    [시] 진달래(김철호) 댓글:  조회:1411  추천:1  2013-10-18
진달래 김철호 소녀였던 어머니 맨발로 산자락을 밟았다 허벅지 따라 줄줄 흘러내리는 4월의 향기 어쩌다 남아있는 흰눈 우에 빨간 자국을 남겼다 너무도 신비한 비밀의 세상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림을 아프게 느끼며 소녀였던 어머니 자신의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물감의 조화를 밟으며 걸었다   지나는 자욱마다에 돋는 붉은 이슬의 숨 봄싹처럼 힘을 내고 봄물처럼 용을 써 처녀를 갖고 녀인을 갖고 한송이 커다란 웃음으로 서있었다   소녀였던 어머니 향기가 가지에 묻어 가지를 물들이고 뿌리에 내려 뿌리를 물들이고 능선을 따라 가며 흘러져 능선을 뜨겁게 태웠다   그건 첫 달거리였다 녀자되는 날이였다 4월의 하늘 그 피빛 하늘을 날은 날이였다 우리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나이였다 또 하나의 계절의 무늬가 새겨진 날이였다
494    [동시]오솔길(김철호) 댓글:  조회:2132  추천:0  2013-08-27
동시 오솔길 김철호 산으로 올라 갈 때 보니 오솔길은 마을로 내려 오고있었다 멀리 동구밖 언덕을 넘어 달음질쳐 마을로 내려 오고있었다 마을로 돌아올 때 보니 오솔길은 산으로 돌아 가고있었다 과수원에 돌아 징검다리 건너 파란 제 집으로 돌아 가고있었다
493    [동시]산골물(김철호) 댓글:  조회:2130  추천:0  2013-08-27
동시 산골물 김철호 솔밭을 지날 때면 파랗게 파랗게 진달래 산 지날 때면 빨갛게 빨갛게 마을 앞 지날 때면 하얗게 하얗게
492    [동시]연(김철호) 댓글:  조회:1999  추천:1  2013-08-27
동시 연 김철호 애들이 하늘에 낚시줄 늘인다 해님을 낚자고 낚시줄 늘인다 어느 낚시에 물릴가 어느 애한테 잡힐가 아득히 보이는 낚시찌는 가물가물 까만 눈동자들은 반짝반짝
491    [동시]살구나무(김철호) 댓글:  조회:2041  추천:0  2013-08-27
동시 살구나무 김철호 필가 말가 필가 말가 강아지야 짖지 말아 필가 말가 필가 말가 꼬꼬댁아 깝치지 말아 아침에 깨여나 보니 대궐 하나 지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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