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http://www.zoglo.net/blog/jinzhehu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730 ]

530    제24장 “제1차간도공산당사건” 댓글:  조회:2894  추천:0  2014-02-07
    1927년 10월 에서 체포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 조직부장 최원택(앞줄 오른쪽),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안기성(앞줄 가운데), 위원 리주화(뒤줄 왼쪽), 김지종(뒤쪽 오른쪽), 김소민(앞줄 왼쪽). 동만구역국 주요한 간부들 일거에 체포되고 혁명적청년학생들 일제와 맞서 용감히 시위 동만구역국 성립 1925년 4월 27일 조선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창립대회가 비밀리에 거행되였다. 이튿날인 4월 28일, 서울에서 고려공산청년회도 창건되였다.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는 해외에 있는 조선인들의 혁명투쟁을 구체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해외부, 만주부, 일본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상해에 있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의 조봉암 등을 동북에 파견하여 만주총국의 설립사업을 하게 하였다. 1926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 화요파대표 조봉암, 최원택, 상해파대표 윤자영, 김하구, 이르크쯔파대표 김철훈 등은 흑룡강성 주하현(상지현) 일면파의 하동에 있는 김철훈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총국기관을 흑룡강성 녕안현 녕교탑에 두고 그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구역국을 내오기로 결정지었다. 고려공청회에서도 만주총국을 세웠다. 만주총국에서는 동만구역국을 설립하기 위하여 한응갑과 전룡락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두 사람은 1926년 10월 28일 밤 룡정시교 삼리촌(三里村)에서 리주화, 김소연, 림계학, 채세진, 박두환, 리순, 김인국, 림민호 등과 만나서 협의한 끝에 룡정촌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을 성립할것을 결의했다. 구역국산하에 비서, 선전, 조직, 검열 등 부를 설치하고 집행위원들을 선거하였다. 집행위원으로는 전룡락, 김인국, 리순, 리주화, 림민호, 채세진, 김소연, 림계학과 후에 총국에서 한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여 도합 9명이였다. 전룡락이 책임비서를 맡고 김인국이 조직부장, 리순이 선전부장, 표면부(表面部)원에 김소연, 검열부원에 채세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자에 림민호가 선거되였다. 동만국역국이 조직된후 그들은 연변의 여려 계렬의 조직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룡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명월구, 왕청, 라자구, 훈춘 등 지역에 17개의 세포조직을 내왔다. 1927년이 통계에 의하면 동만에는 19개 기층당조직과 116개 외각단체가 있었는데 혁명단체의 성원들은 9766명에 달했다. “만주총국은 성립된 그날부터 조선공산당의 방침, 로선에 근거하여 사업을 벌려나갔는데 사실은 연변의 실정과 조선의 실정은 같지 않았습니다. ‘조선연장론’은 연변실정에 부합되지 않는데도 조선공산당정강을 연변에 결부시키려 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낳았지요. 그러나 맑스주의 전파, 일제에 대한 타격, 혁명군중조직의 단합, 당기층조직의 확대, 허다한 우수한 당간부양성 등 면에서 걸출한 역할을 한것만은 사실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의 설립은 금후 연변에서의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고 피력, 반면 여러 공산주의단체들간의 파쟁이 심했기에 단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연변에서의 공산당 4개파 “연변에는 ‘화요파’, ‘서울파’, ‘엠엘파’, ‘상해파’ 등 4개파가 있었습니다.1920년대초에 쏘련이 이르꾸쯔크파와 리동휘가 조직한 고려공산당 ‘상해파’간의 모순을 조절하기 위하여 쏘련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두 파는 극동조직국을 세워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순이 계속 존재하고 악화되여 극동조직이 실패하자 극동조직국에서는 비밀리에 정재달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 진주에서 강영달과 련합하여 1923년 7월에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북풍회’파와 련합하여 1924년 11월 ‘화요회’를 건립하였습니다. ‘화요회’란 공산주의자들이 화요일날 한번씩 회의를 하기에 그렇게 부른것이였고 또 맑스의 탄생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 조직을 ‘화요파’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째 단체로는 ‘서울파’입니다. 당시 조선경내의 청년운동은 매우 활약적이혔는데 그 지휘권은 장덕수, 리광수 등 자산계급우파들이 장악했습니다. ‘서울파’단체내부에는 ‘좌’파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인물이 김사국입였습니다. 후에 투쟁을 거쳐 ‘좌’파세력들이 우파세력을 물리치고 령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세력들이 1925년 4월 ‘고려공산주의동맹’과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을 건립했습니다. 력사에서 이들을 ‘서울파’라고 합니다. 세 번째단체로는 ‘엠엘파’입니다. 1920년대초에 ‘엠엘파’는 ‘상해파’와 많은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청단성원들인 박윤서, 김월선, 한빈 등 청년들이 ‘우리는 파벌투쟁을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원 ‘엠엘파’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엠엘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1924년 룡정에 들어와 고려공산주의청년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또 남만의 반석현을 중심으로 기반을 닦아나갔는데 이들을 력사에서 ‘엠엘파’라고 합니다. 네 번째단체로는 ‘상해파’입니다. 1919년 8월에 리동휘가 쏘련에서 상해로 들어가 1921년 5월에 고려공산당을 건립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담임하였습니다. 상해에서 건립되였다 하여 ‘상해파’라고 하였습니다. ‘상해파’는 1921년말에 중앙위원 김하구를 돈화에 파견하여 서상파의 중영총감부를 돈화에 세우고 국민회 회원들을 장악하여 ‘상해파’에 가담시켰는데 이를 력사에서 ‘상해파’ 또는 ‘서상파’라고 부릅니다.” 박창욱교수는 1927년 10월부터 1928년말까지 각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파쟁을 벌리고 의견상이가 있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여 분쟁만을 끊임없이 벌린 것은 아니였다고 하면서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노력을 경주했다고 피력하면서 “동만구역국에서는 광범한 대중들에게 맑스-레닌주의리론과 사회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조선인가운데서의 선진분자들을 묶어세워 혁명투쟁을 이끌어나갔습니다. 그들은 청년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동만조선족로동총동맹, 녀성단체인 근북회(槿北會) 등 단체들도 내왔습니다. 1927년 12월에는 각 민중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의 조직인 ‘전간도조선인단체협의회(全間島朝鮮人團體協議會)’를 결성하고 혁명투쟁을 활발히 밀고나갔습니다.” “제1차간도공산당사건” 1925년 11월 22일 조선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당시 전 조선국내적으로 공산주의비밀결사에 대한 대검거선풍이 일어났다. 그번 검거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을 비롯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 및 성원들이 대량적으로 체포되였다. 그후 1926년 6월에 있은 조선“6.10”만세사건으로 인하여 발생된 제2차조선공산당사건에서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였던 강영달을 비롯한 100여명의 당간부와 관계자들이 대거 체포되였다. 두차례에 걸쳐 체포된 조선공산당 당간들에 대하여 1927년 10월에 일제는 공판대회를 열고 심판하였다. 만주총국은 일본공산당 후꾸모도주의의 “방향전환론”의 영향밑에 사상전파운동에서 정치투쟁에로 전활할데 관한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군중을 발동하여 련속적인 반일시위를 단행했다. 1927년 5월 1일, 연변지구의 조선인들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의 구체적인 지도밑에 룡정, 두도구 일대에서 “5.1”국제로동절기념시위행진을 성대하게 진행하고 일제의 침략과 조선인들에 대한 파쑈적만행을 규탄하였다. 이번 시위운동은 별다른 저애없이 순조롭게 거행되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동만구역국에서는 10월 2일, 조선공산당사건에서 체포된 동지들의 공판대회를 반대함과 아울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일체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보다 큰 반일시위를 단행키로 결정지었다. 10월 2일, 룡정에는 큰 비가 억수로 내렸다. 하여 시위운동을 부득불 이튿날로 미루게 되었다. 이날 만주총국 책임대리비서이며 조직부장이였던 최원택, 동만구역국 책임비서인 안기성 등은 동만구역국간부들과 함께 안기성의 집에 모여 이튿날의 투쟁계획을 연구하게 되었다. 사전에 이런 상황을 탐지한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경찰을 파견하여 안기성네 집을 포위하고 최원택, 안기성, 현칠종, 리주화, 김소연, 림계학, 박재하, 김규국 등 구역국간부들을 체포하였다. 10월 3일,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청년학생들은 손에 붉은기를 들고 거리에 떨쳐나와 삐라를 뿌리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시위대오는 거리를 지나 일본총령사관 문앞에 가서 체포된 간부들을 석방하라고 하면서 강렬한 항의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일제침략을 반대하자!”, “일제백색테로 반대!”, “일체 정치범 석방하라!”, “무고한 교원들을 석방하라!”는 등등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를 단행하였다. 이번 사건에서 29명의 주요한 간부가 체포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100여명의 간부와 민중을 체포, 구금하였다. 그중 29명의 주요한 간부를 서울에 압송하여 징역에 언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계속)  
529    제23장 학교가 공산주의사상의 온상으로 댓글:  조회:2587  추천:0  2014-02-07
  조기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던 룡정대성중학교. 학교마다에 맑스주의 연구회 세워지고 청년학생들 민중속에서 반일사상 선전 실오리같은 비가 차분히 내리는 7월 11일(2004년), 룡정제1중학교 교정은 관광객들로 붐비였다. 다들 대성중학교옛터를 참관하러 온 관광객들이였다. 회색벽돌로 건축한 교사는 원래의 교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다 똑같은 모양으로 복원하여놓은것이라고 한다. 교사는 중간이 3층현관으로 돌출되여있는 2층건물이였다. 현관 1, 2층 사이에 "私立 大成中學校"라는 글이 옥칠로 새겨져있었다. 교사는 동서의 길이가 36.5메터이고 남북 너비는 8메터였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이 교사는 학교의 교무실로 사용되였댔는데 허물고 다시 지은후 지금은 학교력사전시실로 되어 많은 손님들을 끌고있다. 전시실에는 룡정을 빛낸 력사인물들과 대성중학교를 비롯한 룡정의 은진, 동흥, 영신 등 학교의 력사를 반영한 사진과 도편이 전시되여있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관객들 앞에서 예쁜 녀학생해설원이 한창 청아한 목소리로 해설하고있었다. 관객들은 녀학생의 해설사를 들으면서 력사의 현장을 재현한 도편과 사진앞에서 자주 발걸음을 멈추군했다. 비장한 력사의 시각을 실감하게 되니 떠나올 때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이 하던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조기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된 맑스주의의 보급운동은 청년들속에서 세찬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룡정의 여러 학교는 혁명적청년을 양성하는 중심지로 되었는데 맑스주의연구소조 등이 많은 학교에 세워졌습니다. 특히 룡정의 대성, 동흥, 등 학교들은 ‘공산주의온상’이라고 불리우기까지 했습니다.” 해설원 녀학생은 “대성중학교는 혁명적청년세대를 양성하는 중심지가 되어 맑스주의전파활동을 각지 조선족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있었다. 대성중학교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에 의하여 1921년에 창립되였다. 창립초기에는 7명의 교원과 160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교원들이 공교회의 유지인사들이였기에 교수는 자연 공자의 사상으로 지도되였으며 “사서(四書)”, “오경(五經)”, “명심보감(明心寶鑒)” 등을 주요 학과목으로 삼았다. 공자의 봉건륜리도덕을 교수의 기본내용으로 하였다. 교사 현관 웃쪽 지붕우에 덧얹은 다락층에는 “공자위패”를 걸어놓고 매달 초하루날 아침마다 전교 사생들이 모여 “존공의식”을 진행하였는데 향불을 피우고 “공자제”를 지냈다고 한다. 대성중학교에는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가운데는 맑스주의사상을 접수한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에 의해 많은 조선문으로 된 맑스주의간행물들이 학교에 전파되여 들어왔는데 맑스주의사상은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전파되였다. 1922년 조기공산주의자들인 리주화(李周和), 리린구(李麟求)의 지도밑에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조직, 10명의 소조원들이 포섭되였다. 소조원들은 저녁마다 리주화네 집에 모여 동흥중학교의 교원 정중섭(鄭重涉)에게서 “과학적사회주의리론”과 “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혁명사상”에 대한 강좌를 들었다. 미구하여 동흥, 은진 등 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이 찾아와서 광명회에 가담하게 되여 연구소조는 소조원이 30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광명회의 활동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였는데 하학후와 일요일에 학교의 교실을 리용했다. 방학이되면 학생들은 농촌마을에 내려가서 “동학(冬學)”반이나 야학반을 꾸려 문맹퇴치사업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농민들을 모아놓고 문화오락활동을 전개하는 기회에 맑스주의의 리론과 사회혁명사상을 열정적으로 선전했고 대중속에 반일투쟁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광명회의 많은 학생들은 학습을 통하여 차츰 로씨야10월혁명의 승리를 지지했고 중국의 “5.4”운동의 영향으로 반제반봉건적인 신문화운동을 제창해나섰다. 소조원들은 학교내에서 봉건미신을 타파하고 “공맹지도”를 페지하는 한편 민주와 과학을 제창할것을 주장하면서 투쟁의 예봉을 공교회에 돌리였다. 룡정은진중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기념사진(1927년 4월 4일) 1922년 4월 1일 아침, 학교의 규례대로 공자제를 지낼 때였다. 광명회의 진보적인 학생들의 선동을 받은 전교학생들은 누구도 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대표를 파견하여 학교를 개혁할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대표들은 만약 학교당국에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끝까지 동맹휴학을 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에 답복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교사지붕의 다락에 올라가 “공자위패”를 뜯어버리고 전교학생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따라 학우회에서 학교를 인수, 관리한다고 선포했다. 학생들은 공교회인사이며 보수적인 교무주이인 림봉규를 몰아내고 수학교원인 현기형을 교무주임으로 추대했다. 학우회에서는 교원들과 협상하여 학교운영방안과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사회과교수를 위주로 하고 자연과와 외국어(영어, 일어), 한어를 적당히 교수하고 예능과에는 습자, 수공, 도화, 음악, 체조 등 과목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각종 종교의식을 무조건 페지한다고 선포하였다. 동맹휴학한 4일만에 학생들은 학교교육을 종교와 철저히 분리시키고 복학하였다. 1923년 3월, 초기공산주의자인 김사국(金思國)이 로씨야 연해주에서 룡정으로 왔다. 그는 방한민(方漢民), 김정기(金正琪), 리명희(李明熙) 등 인사들과 힘을 합쳐 대성중학교의 부설학교로 “동양학원(東洋學院)”을 꾸리고 교사 아래층 2칸을 내여 대성중학교 제1회 졸업생들을 위주로 70여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동양학원에서는 공산주의선전부와 특별부를 설치하여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리론을 기본교수내용으로 삼고 청년들을 양성하였다. 동양학원은 연변의 첫 무산계급민주주의교육을 창시한 학교로 되었다. 하여 동양학원은 일제의 눈에든 가시로 되었다. 일본총령사관에서는 동양학원을 큰 화근으로 여기고 없애버리려고 했다. 1923년 8월 일제는 저들의 주구들를 사촉하여 야밤에 학교마당에다 작탄을 매설하여놓고는 령사관경찰들을 출동시켜 사출해낸후 50여명의 사생들을 체포하는 “작탄매설사건”을 조작, 끝내 동양학원을 페교해버렸다. 체포된 대부분 학생들은 인차 석방되였으나 김정기 등은 조선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 갔다. 김사국과 리명희 등은 로씨야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여 공산주의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대성중학교는 한때 저조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926년 가을, 공산주의자 박재하(朴載夏) 등이 대성중학교의 복교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연길의 공교회학교 대동중학교와 련합하여 대성중학교 옛터에다 대성중학교를 복교하고 교장을 맡았다. 1928년 여름 중공동만구역위원회 서기 주동교가 대성중학교에 파견되여 중어를 가르치는 한편 맑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사”를 가르쳤고 새로운 맑스주의대오를 건설했다. 1930년 10월, 대성중학교에는 중공지하당지부가 건립되였다. 1934년 일제는 대성중학교 3층지붕이 고려시대의 건축특색을 띠고있다는 트집을 잡고 방학동안 학생들이 없는 틈을 타서 허물어버렸다. 그리고 일본교원 가쯔다와 사도오를 박아넣었다. 또 교원과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학교동쪽문밖에 접수실같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총령사관의의 분주소를 앉혔다. 이를 반대하여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에 악이 오른 일제는 대성중학교를 “공산당을 길러내는 소굴이다”라고 비방했다. 동흥중학교 룡정동흥중학교 옛 모습 룡문교를 건너 서쪽으로 얼마만큼 가면 "룡정제3중학교"라는 간판을 건 학교가 있다. 피혁공장과 담장 하나를 사이두고있는 이 학교가 바로 동흥중학교 옛터이다. 얼마전까지도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댔는데 지금은 “룡정제3중학교”라는 간판으로 바뀌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여름비를 맞으면서 학생들은 예쁜 우산들을 바쳐들고 재밌게 등교하고있는데 얼굴들에는 생기가 넘쳐나고있었다. 갖가지 화초로 교정은 잘 가꾸어져있었으나 옛날의 동흥중학교의 흔적이라든가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같은것을 얼핏 찾을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보통 학교의 모습이였다. 대성중학교와는 조금 대비가 되었다. “동흥중학교도 대성중학교처럼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 전파와 혁명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학교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림민호같은 많은 우수한 혁명인재를 키워냈지요.” 동흥중학교에 대한 박창욱선생 소개였다. “동흥중학교는 조선민족종교인 천도교(天道敎)에서 꾸린 학교이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동흥중학교는 천도교신도이며 한시기 연변의 반일투쟁에서 이름높던 간도국민회 사법부장을 맡고있다가 국민회군 안무장군의 부관으로 활약하던 최익룡(崔翼龍)과 공산주의자 박재하, 김소연 등에 의하여 1921년 10월 1일 창립, 최익룡이 교장으로 추대되였다. 학생들은 당지와 연변 각지에서 온 천도교신도들의 자제들이 위주였고 로씨야 연해주와 조선, 남만, 북만 등 각지에서 온 청소년들도 있었다. 수업과목은 조선어, 대수, 산수, 물리, 화학, 영어, 생리, 지리, 력사, 한문, 도화, 작문 등이였고 천도교에 대한 강의도 했다. 이 학교에서는 1925년 12월부터 신학제를 채용하여 남녀공학을 실시하였고 사회주의에 배치되는 학과목을 페지하고 학교내에서 “혁명가”도 불렀다. 동흥중학교는 창립초기부터 맑스주의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온 진보적인 학생들은 맑스주의단체들에서 발간한 “새벽종” 등 간행물과 맑스-레닌주의와 사회혁명사상을 선전하는 출판물을 들여다 학습하였다. 1923년, 로씨야 연해주로부터 온 공산주의자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靑松)의 지도하에 “사회과학연구회”, “학생친목회” 등 맑스-레닌주의연구단체가 결성되였고 같은해 상해로부터 온 림호(林虎) 등이 학교내에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투쟁을 발동하였다. 이미 사회주의사상을 접수한 교직원과 학생들은 종교미신과 봉건가부장제사상을 타파하고 과학과 민주를 제창하는것을 지지하면서 “교육종교분리”를 주장, 학교가 종교에 예속되는것을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 벌리였다. 1925년 4월에는 교원 김성호의 지도밑에 맑스-레닌주의연구단체인 “독서회”가 산생되였다. 동흥중학교 사생들도 대성중학교 사생들과 마찬가지고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한후 대중속에 들어가 선전활동을 벌리였다. 학생들은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농촌에 내려가서 야학을 꾸리고 어린이들과 실학청년 및 녀성과 장년들에게 조선글을 가르쳤고 “혁명가곡”을 배워주었으며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리고 강연회, 변론회 등을 통하여 청장년과 녀성들에게 맑스-레닌주의를 체득시켰으며 그들을 반일민족해방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림민호, 김세광 등은 고향인 장흥동(화룡시 동성향 태흥촌)에서 “동구청년회(東求靑年會)”를 조직하고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대중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체활동을 벌리는 형식으로 청년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면서 투쟁의 불길을 지폈다. 로창률(盧昌律)은 소오도구(화룡시 동성향 흥영촌)에 내려가서 “청년회관”을 꾸리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6년 10월, 룡정에서 성립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은 산하에 4개 지부를 두었는데 지부성원 거의다 룡정의 각 중학교 교원들이였다. 그들중 박재하, 김소연 등은 동흥중학교 교원들이였다. 학교운영권을 둘러싸고 교내에서 치렬한 투쟁이 벌어졌는데 조선총독부의 심복들은 조선총독부와 타협할것을 주장했으며 박재하, 김소연, 전룡학 등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있는 교원들은 총독부에 맞서 견결히 투쟁했다. 결과 일제순사들의 감시밑에 박재하, 조병삼 등은 교사직에서 해임되고 14명의 학우회 대표들은 학적을 취소당했을뿐만아니라 체포, 구금되였다. 1926년 11월 29일, 일제의 간섭과 타협파들의 매국적행위에 격분한 동흥중학교 137명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집단적으로 대성중학교로 전학해갔다. 이번 투쟁은 거의 1년간 진행되였는데 이듬해 2월 25일에 또다시 제2차동맹휴학을 선포하고 많은 학생들이 대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0년 10월 동흥중학교에 중공지하당지부가 성립되였다. “9.18”사변후 일본문부성과 조선총독부에서 심사비준했거나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으나 교원과 학생들은 일치단결하여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을 반대하여 조선어사용을 견지하였고 조선어로 편찬한 국어, 조선력사와 조선지리를 가르쳤다.(계속)  
528    제22장 연변에서 공산주의운동 흥기 댓글:  조회:1909  추천:0  2014-02-07
  1920년대 연변에 전파된 맑스주의 서적들.  맑스주의사상 연변대지에 뿌리내리고 조선인들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궐기 아세아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1917년 11월 7일(로씨야력으로는 10월 25일) 로씨야 무산계급은 레닌의 령도하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게린스끼의 자산계급림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인 쏘베트정권을 성립하였다. 10월혁명의 승리는 동방 약소국 인민들에게 민족해방과 독립의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연변지구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반일무장투쟁을 벌려오던 무장단체들과 반일조직의 간부들은 일제의 야만적인 “경신년대토벌”로 연변을 떠나 조선인이 많이 살고있는 쏘련 극동지방으로 넘어갔다. 진보적청년들은 빨찌산을 무어 쏘련 붉은군대와 배합하여 청소한 쏘베트정권보위전에 참가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사회주의10월혁명을 믿게 되었다. 중국에서 구민주주의의 쓴맛을 볼대로 본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지난시기 민족해방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점차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되였으며 맑스주의리론의 지도밑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로씨야 연해주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선인농민들의 실태를 조사하던 리동휘는 게린스끼림시정부의 헌병 구석성에게 “독일특무”라는 혐의로 체포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리동휘는 감옥에서 쏘련 볼쉐비크들과 사귀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게 되었고 10월혁명을 인식하게 되었다. 감옥밖에서는 김립, 리한영, 김하구 등도 10월혁명을 지지하고 볼쉐비크에 의거하여 리동휘를 감옥에서 구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리동휘의 사상은 진일보 전변되여 로농혁명을 주도하는 볼쉐비크와 쏘베트정권을 옹호하게 되었다. 리동휘는 쏘련공산당 하바롭스크당부의 비서이며 원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인 조선인 알렉싼드라 뻬뜨로브나 김의 도움으로 진일보 사회주의혁명에 전심하게 되었다. 1918년 6월 리동휘는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로씨야볼쉐비크당원들의 방조밑에 아세아지구에서의 첫 맑스-레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한인사회당은 리동휘의 지도하에 쏘베트정권옹호, 외국무력간섭격퇴, 토지개혁실시, 세계무산계급과 약소민족해방진영과의 련대성 등 정강을 공포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그 약법 제3조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강령을 내세웠다. 1) 사회주의국가를 조직한다. 2) 일체 계급을 타파한다. 3)토지 및 일체의 생산업을 공유한다. 1920년 리동휘는 국제공산당제2차대표대회에 출석한 박진순 등과 함께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창시자인 리대소, 진독수, 일본의 사회혁명가들을 만나 동방 각국에서의 공산주의사상의 전파를 토론했다. 아울러 리동휘는 관내에 있는 조선청년들에게 10월사회주의혁명정황, 국제공산당에서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성원한 사례와 맑스주의와 로농혁명사상을 통속적으로 소개했다. 리동휘 등의 영향하에 일부분 조선인들은 중국의 사회주의신앙자들과 함께 “중한로농동맹련합회”를 성립, 두나라 로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하면서 어깨곁고 공동의 적과 투쟁할것을 결의하였다. 공산주의사상의 전파 공산주의운동의 선각자 리동휘선생. 리동휘 등은 조선인청년사회주의신앙분자들을 자신들의 주위에 굳게 뭉치게 한후 사회주의연구회, 조선인사회과학연구회 등 맑스주의연구소조를 성립하였다. 특히 북경의 조선인학생들은 맑스주의연구소조를 결성한후 맑스주의사상을 학습연구하는 한편 경상적으로 리대소 등 중국공산당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1921년, 상해에서 활동하던 리동휘 등은 국제공산당 원동부의 지원으로 조선문인쇄소를 세우고 《공산당선언》번역본을 비롯한 맑스주의서적을 출판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은 사회주의기치하에 로농혁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것을 선전하였다. 그해 1월 리동휘, 김립 등은 상해에서 한인사회당대표회의를 소집한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5월 23일부터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당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강령에는 장차 조선에서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하며 현단계에는 민족독립을 실현한다고 했으며 “조국광복은 본 당인 공산 및 로농집정의 전제”라고 천명했다. 회의에서 리동휘가 당위원장에 당선되고 김립이 비서장으로 선거되였다. 고려공상당중앙총감부는 상해에 있었는데 1921년 중앙위원 김하구가 돈화에 와서 원 국민회의 구춘선, 강구우, 마진 등을 회견하고 국민회성원들을 고려공산당에 흡수,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총감부를 건립하였다. 총감부에서는 안무와 최량을 쏘련에 보내여 국민회 전체 성원들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다는것을 동양비서부에 회보하고 1922년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할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만주총감부는 돈화를 중심으로 간도, 열하 등지에 공산당조직을 확대하였다. 1920년 7월 로씨야에 거주하고있던 김철훈 등 조선인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국제공산당 동양부대표의 지지밑에 “전로한인공산당”을 창립하였다. 1922년 11월에 이 조직에 가입한 인수는 4433명에 달아였으며 중앙본부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모스크바, 찌따, 하바롭스크, 니꼴라스크, 우라지워스또크, 대흑하, 할빈, 액목, 상해, 북경, 장춘, 평양 등지의 련락소를 통해 “붉은기” 등 신문, 잡지를 발행하여 10월사회주의혁명의 경험을 소개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윤복송, 정치운, 리주화, 우룡선 등은 조선과 로씨야로부터 연변에 들어와 룡정과 화룡에서 김홍선, 로창률, 리영규, 류태순, 장시우 등과 련계하여 조기공산주의단체인 간도공산당을 성립하였다. 후에 그들은 이르쿠츠파와 련합하여 화요파로 형성되였다. 중로변경인 이만,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던 리중집, 남공선, 최경천 등은 당지에서 공산주의단체를 성립한후 림산, 동녕, 녕안고 훈춘에 공산주의 기구와 청년회조직을 세우고 활동했다. 1921년 니고리스크와 녕고탑에 총리부를 세운 한족공산당은 녕안, 돈화, 국자가, 투도구, 동녕, 훈춘, 대황구 등지에 많은 인원을 파견하여 공산당조직과 련락소를 세우고 사회주의간행물을 산포, 공산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연변에 들어온 맑스주의 서적들 공산주의단체에서 산포한 서적과 간행물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과 동북의 여러곳들에 퍼져나갔다. 일본간도총령사관에서 초보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쏘련과 상해, 천진, 북경 등지에서 연변에로 전파되여온 신문, 서적과 간행물들은 매우 많았는바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 몰수한 수자만 하더라도 아래와 같았다. 1922년 122종 4208건 1924년 164종 3450건 1925년 201종 4408건 1926년 259종 3606건 주요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자유보”, “새세계”, “로농세계”, “붉은별”, “붉은기”, “뭇별”, “로동신문”, “동아공산신문”, “투쟁보”, “대중시보”, “정보”, “화요”, “민언”, “경종”, “일세보”, “농민익보”, “로동보”, “농보” 등이 있었으며 잡지들로는 “서광”, “새사회 이르면”, “공산”, “효종”, “선구”, “광명”, “동우”, “홰불”, “붉은기 아래서”, “불꽃”, “로동자의 길” 등이 있었고 소책자로서는 《공산당선언》, 《로동조합이야기》, 《우리 무산계급이 나갈 길》, 《칼 맑스》, 《로씨야공산당 정치강령》, 《녀자해방》, 《로농! 공산당》 등 수십종에 달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상해, 북경 등지에서 출판된 “신청년”이나 “매주평론”과 같은 한문으로 된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들도 한족공산주의분자들의 손을 거쳐 길림, 연길 등지의 한족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조선인학생들속에 퍼졌다. 리봉, 관준언 등 한족지식인들은 연길에서 “신문서사”를 꾸려 학용품을 경영한다는 명의로 많은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구입하여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런 간행물들과 서적들을 통해 맑스주의 사상은 신속하게 연변조선인들에게 침투되였다. 이에 연변에 파견된 간도련락장교는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서 “적색의 거센 물결이 간단없이 간도를 적시고 있다. 심지어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에 경향하고있다”고 당황해했다.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통해 연변조선인들은 점차적으로 로씨야혁명길만이 살길이며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사회주의의 새국가를 창건하여 전세계인민들과 함께 영원토록 자유와 평등,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구미자본주의렬강들의 “공리는 강권을 이긴다”, “정의, 인도”, “민족자결” 등은 허위라고 인식하게 된다. 연변에 전파되여 온 로씨야에서의 새로운 제도탄생의 소식과 더불어 전인류에게 새로운 인식을 안겨준 맑스-레닌주의사상은 일제와 봉건군벌의 야만적인 업압과 수탈로 허덕이던 연변조선인들에게는 해동을 약속하는 해볕과 같이 느껴졌다. 맑스주의전파와 더불어 조선족인들의 혁명투쟁도 구민주주의혁명시기로부터 신민주주의혁명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맑스-레닌주의를 행동지침으로 삼게 된 조선인들은 조기공산주의단체의 령도밑에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기 궐기하게 된다. (계속)  
527    제21장 피로물든 장암동 댓글:  조회:1977  추천:0  2014-02-07
  장암동마을 앞장대에 세워진 유적비(2004년 취재시 사진) 하루 아침사이에 마을은 불바다로 변하고 무고한 조선인백성 무참히 두벌죽음 당해 평화로운 노루바위골 잡풀이 뒤덮힌 산자락에 소수레길이 가리마처럼 뻗어있었다. 내려다보니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이 한눈에 안겨온다. 작은 개울이 흐르는 모습이 번득번득 눈에 비쳐오는데 어데선가 들려오는 뻐꾹새의 울음소리가 귀맛 당긴다. “통통통...” 마을에서 울려오는 뜨락또르의 동음에 섞여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가 작은 합창을 이룬다. 정오의 햇볕을 이고 농부들이 쟁기를 들고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이 멀리서 동화처럼 읽혀진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장암동의 풍경이다. 오면서 여러 마을에 들려 “장암동”이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사람마다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말로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댔다고 하던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말이 생각나서 “노루바위골”이 어디인가고 물으니 사람마다 안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세전벌 동남쪽 뉘연한 한전밭 중간에 난 수레길을 따라 들어가니 우리가 애타게 찾던 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이였다. 다시 골연을 파면서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노루바위골 즉 장암동이라고 했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노루는 보이지 않고 꿩우는 소리가 이 골 저 숲에서 다정스럽게 들려올뿐이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가 바라보니 산자락에 큼직한 석비가 세워져있었다. 자연석으로 세운 장암동유적비였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 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 에 용납 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 6月 30日 산새들이 지저귀고 풀벌레가 울어대는 인적없는 산길을 얼마간 더 접어가니 길옆에 금방 본 유적비보다 작은 석비가 자리하고있었는데 쑥대에 묻혀 얼핏 알리지 않았다. 석비정면에는 “一九二0年 十月 三十日 日軍의 間獐巖慘殺事件犧牲者三十人追念碑”라고 새겨져있었다. 왼쪽 면에는 “一九九四年 七月”이라는 석비를 세운 년월이, 오른쪽 면에는 “犧牲者遺家族代表 故 金京三의 子 金基柱建”이라는 세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니 묵은 뙈기밭 한자리가 있었다. 농부의 손길이 닫지 않은 밭에서 잡풀이 곡식을 대신하고있었다. 어찌보면 집앞 뙈개밭으로 보이기도 하는 아담한 밭이였다. 아마 여기가 1909년에 조선족농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원 장암동마을 옛터자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작은 개울과 나란히 뻗은 수레길을 따라가며 보니 마을이 들어앉았음직한 곳이 여러곳 있었다. 1920년 참안당시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였으며 이들 다수가 반일운동에 적극 투신하는 열성자들이였다고 한다. 린근에서 장암동마을을 “예수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永信)이라는 이름을 붙인 학교가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반일교육의 요람으로 소문난 명동학교가 있었다. “3.13”운동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직원들은 반일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1920년 10월에는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여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였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동부지방 총회장 량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련계를 갖고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악마들의 살인현장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일본국학자료원에서 출판한 두툼한 “현대사자료”집에서 장암동사건에 관련된 페지를 찾아 펼친후 그대로 번역하면서 읽어내려갔다. “보병장교 스스끼대위 이하 72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은 후방련락선을 확보하기 위해 장암령부근의 불령단을 소탕할 임무를 맡고 30일 0시 룡정촌 병찬부에 집합하여 29일에 억류된 5명의 조선인을 안내자로 장암촌으로 향했는데 이들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도망을 기도했기에 죽여버린후 남양평을 향해 진군했다. 남양평에서 조선사람 1명을 안내자로 세우고 장암동에 도착하여 오전 6시30분부터 포위토벌을 시작했는데 우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적 30여명이 동산촌방향으로 종대를 지어 퇴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사격을 명령했는데 11명의 살상을 냈다...” 1920년 10월 30일 새벽 0시 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하고 마을주민들을 강박하여 교회당마당에 집결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을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불속에 던져넣군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룡정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 말틴은 자기의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있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룡정촌에서도 보였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녀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여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심여추는 “연변조사실록”에서 장암동참안을 이렇게 쓰고있다. 일본군은 10여리에 산재해있는 장암동마을을 단꺼번에 불태워 페허로 만들었는데 마우계견(馬牛鷄犬)같은 짐승도 한 마리 남지 않았다. 가슴치며 통곡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가슴에서 아직도 피눈물이 흐르고있는데 악마같은 일본군은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간악한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했다.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이 토벌에서 간도국민회 동부총회 회장이며 반일련합부대의 군무청장인 량도헌이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의 시체인지 알수 없어 유골들을 한데 모아놓고 합장하였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집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고 제좋은 소리를 줴치면서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장암동참살사건은 일본군이 감행한 ‘경신년대학살사건’ 가운데서 저지른 수많은 사건중 한 토막의 만행에 불과합니다. 일본군 기무라대장은 자기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 ‘무릇 경유하는 부락마다에서 불령단같은자나 도망치는자를 보기만 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총살하였다’고 썼습니다. 일본침략자는 가는곳마다에서 야만적인 파쏘본질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무고한 백성을 마음대로 학살하여 연변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력사를 잊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박창욱교수의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계속)  
526    제20장 경신년대학살사건 댓글:  조회:3573  추천:0  2014-02-06
  연변에서 반일지사들을 학살하는 일제침략군. 잔악한 일본강도 연변땅 피로 물들이고 조선인 백성 친인 잃고 삶의 터전 잃어 무고한 백성들을 “토벌” “일본침략군은 중국땅에 들어온 그날부터 반일부대는 물론 무고한 백성들까지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군은 보복을 무고한 백성에게 감행했는데 그 잔인성과 참혹성은 인류력사상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경신년대토벌”은 사실상 “경신년대학살사건”이라고 피력했다. 청산리전역후 반일부대가 안전하게 로령일대로 전이한후 일제는 약 8개월간 중국의 조선인사회를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조선인학교와 교회당 심지어 식량, 가옥마저 무차별 소각하는 천인공노할 참변을 빚어냈다. “일본군은 10월 26일 간도총령사관에서 작성한 ‘배일부락 및 학교조사표’에 근거하여 연길현내에서는 동불사, 태평구,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학교, 영신학교, 명신학교 등 18개 학교, 화룡현내에서는 상광포, 어랑촌, 류동, 청산리, 청파호, 장재촌, 걸만동 등을 비롯한 12개 마을과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동학교, 정동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내에서는 류수하, 대감자,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 등을 비롯한 11개 마을과 명동소학교, 원동소학교 등 5개 학교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소탕’과 학살을 감행하였다.”(김춘선 “경신참변연구”) 중국지방관원 장순사(張巡師)와 포대사(鮑大師) 등이 1920년 11월 5일 외교총장에게 한 보고에서는 “간민들이 모여사는 부락을 한당들의 근거지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불살라버렸으며 조선인농민들 대부분을 살해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마을을 골라서 몇집 또는 몇십집씩 불살랐고 몇명 또는 몇십명씩 죽여버렸는데 가는곳마다 불타버린 집과 시체가 있었다. 이들 태반이 밭가는 농민들이였지 결코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무리가 아니였다. 이렇게 마음대로 참살하는것은 실로 인간성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일이다”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피로 물든 연변땅 “경신년대학살사건 하면 흔히 ‘장암동(獐岩洞)참안’을 전형으로 렬거하고있는데 그것은 당시 가나다 목사들이 조사한 자료를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하였고 지금도 그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변에는 ‘장암동참안’같은 사건이 아주 많습니다. 의란구는 여러차례 토벌을 당했는데 구룡평, 고성촌, 류채촌, 태양촌, 련화촌은 일제의 살인현장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일제가 마수를 뻗치지 않은 곳이 연변 어디에도 없을것이라고 한다. 구룡평은 의란구의 중심지이고 고성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15.5키로메터 떨어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분지에 자리잡고있으며 류채촌은 구룡평에서 동북쪽 3.5키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있다. 태양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5키로메터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고 남동이라고도 불리우는 련화촌은 구룡평에서 15.3키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있다. 의란구에는 당시 간도국민회와 의군부가 있었는데 방초령에다 국민회군의 사관훈련소까지 설치하고있었다. 의군부가 고성촌, 련화촌 등지에 자리잡고있어 의란구는 반일부대의 탄탄한 후방기지이기도 했다. 1920년 10월부터 일본군은 의란구일대를 여러차례 “토벌”하였다. 1920년 10월 20일 일본군 제19사단 이시쯔가대대는 의란구“토벌”을 감행하여 리동근, 리종옹, 김득산, 윤남극, 강경성, 김해룡, 김순지, 김락세, 리붕재 등을 살해하였다. 며칠후인 24일에는 일본군 74련대가 의란구를 토벌, 양만홍, 리태미, 리근치, 리렬 등 10여명을 살해하고 학교 1채와 민가 5채를 소각해버렸다. 11월 3일에는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반일부대의 군자금모집과 정보수송을 하였다는 리유로 일본군 76련대가 재차 의란구를 토벌하여 리국화, 리일재, 김렬, 리명초, 리진철, 리창옥, 김성운, 리종란, 리종눌, 리여익, 리여영, 리병재, 허익, 최병조 등 16명을 살해하였다. 11월 3일, 5일 일본군 76련대는 불령선인가족이라는 리유로 북의란구에서 김창홍, 로우선, 김렬의집을 비롯한 31채의 민가를 불살라버렸으며 3일과 4일에는 태양촌에서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는 리유로 교원 리우선 등 2명과 농민 리주향, 리수악 등 13명을 살해하였다. 11월 5일 의군부 총무 리우익, 서무부장,리을, 홍정필을 비롯한 10여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였다. 당시 연변에 파견되여 현지조사를 한 “대한신보” 기자는 “독립신문”(1920년 12월 19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의란구 남쪽은 전부 30여호 되는 리성(李姓)촌인데 3명이 근히 성명을 변하여 해탈되고 그 여의 전수가 학살되였으며 모씨의 4형제는 소화(燒火)되는 가옥중에 던져넣어 분살(焚殺)하였다 합니다. 그외에 수 3명, 혹은 10여명의 학살은 없는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 당시 연변주재 림시정부 통신원이 “독립신문”(1920년 12월 8일)에 투고한 조사자료에 의하면 26,265명이 학살되고 71명이 강간당했으며 3,208채의 민가, 39개의 학교, 15개소의 교회당, 53,265섬의 곡식이 소각되였다.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19일자 보도에 상기 조사통계의 추가조사에서 연변지구에서 146명이 더 학살되고 민가 78채와 학교 2개소, 교회당 4개소가 더 소각되였다고 했다. 침략자의 야수적 만행   일제의 총칼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조선인 여인들. 당시 룡정에 거주하고있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의사인 말틴이 쓴 연변참안 “견문기”가 서방 각 나라 신문에 보도되여 세계를 들썽해놓았다. 하여 일본침략자의 야수적죄행이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견문기”에는 이런 대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10월 31일 일요일, 북경식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했다. 10월 30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채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이나 사격하후에도 불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자가 있게 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마을 성년남자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부녀자들을 강박하여 끝까지 서있게 하였다. 그런후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天長節)을 경축하였다. 나는 19채의 집이 불에 탄것을 사진 찍고 총살당한 시체도 사진 찍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난후였다. 나는 학살되고 방화당한 32개 촌의 마을 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되였다. 30명이상 살해된 마을이 많다. 서구동에서는 14명을 한줄로 세워놓고 총살한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 일본군사령관은 외국인에 대한 인신안전을 보장하여 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려행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살인수단은 극히 잔인하였는데 연길현 와룡동의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은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우고 두눈을 도리운채 처형당했다. 어떤자들은 총창에 찔려 아우성치는 참상을 보고 미친 듯이 웃으면서 기뻐했으며 2-3세 되는 어린이를 총창에 찔러들고 어린아이가 아우성치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투도구에서는 전선을 절단하였다는 혐의로 12살나는 조선아이를 붙잡은후 아무런 조사도 없이 목을 잘라 전선줄에 꿰여 효시했다. 연길현 춘양향(왕청현 하마탕) 일대에서는 무고한 조선인 3명을 붙잡아 쇠못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후 쇠줄로 손과 코를 꿰여 10여리를 끌고다니다가 총살하였다. 연길현 제3구의 남녀로소는 아무런 리유도 없이 사살당하였고 의란구의 12명 조선인들은 부근의 산고개에서 기무라지대의 토벌대에게 생매장당했는데 이듬해 봄에 마을사람들이 시체를 찾아보니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토벌도중 야수같은 일본군은 소영자에서 25명 부녀를 강간하였으며 이도구에서도 20여명 부녀를 강간하였다. 간악한 일본놈들은 소녀를 붙잡기만 하면 꼭 강간한 다음 학살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간도학살사건을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불쌍한 간도동포들 3천명이나 죽고 수십년 피땀 흘려 지은 집 벌어들인 량식도 다 잃어버렸다 척설이 쌓인 이 겨울에 어떻게 살아들 가나 뻔히 보고도 도와줄 힘이 없어 속절없이 가슴만 아프도다 나라 잃고 기름진 복지를 떠나 삭북의 살길을 그 동지조차 잃어버렸구나 오늘 밤 강남도 추운데 장백의 모진 바람 오죽이나 추우랴 아, 생가키우는 간도의 동포들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에 전국인민들이 분노하여 일어났다. 북경, 심양, 장춘, 길림 등지의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강연회, 집회를 열어 일본침략자의 침략죄행을 성토하였으며 북경정부와 봉천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권을 보호할것을 청원하였으며 일본침략자가 연변에서 즉각 철거할것을 요구하였다. 날로 앙양되여가는 연변지구의 여러 민족들의 반일투쟁과 전국인민들의 강력한 항의밑에 일본침략자들은 1921년 5월 할수 없이 철퇴하였다. (계속)
525    제19장 동부전선 댓글:  조회:1903  추천:0  2014-02-06
용감한 독립군 장병들. 주동적으로 타격하면서 토벌계획 혼란시켜 서부전선 전투부담 경감 아군의 철수 엄호 동부전선의 반일부대 “경신년반‘토벌’전은 동부와 서부 두 전선으로 진행되였습니다. 그런데 사학계에서는 서부전선인 청산리전역만 말하는 페단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벌에 의해 반일부대주력은 연길현과 화룡현의 서쪽으로 기타 부대는 훈춘현과 왕청현 동북부로 이동했습니다. 일제는 동부의 반일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투입시켰으며 반일부대도 유력한 저항으로 일제의 ‘토벌’에 맞섰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동서 두 전선에 배치되였던 반일부대의 정황을 설명했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란 주로 홍범도부대,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및 기타 부대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주력군을 말한다. 동부전선인 훈춘과 왕청현 일대에는 훈춘한민회와 신민단군이 중로변경에서 활동하고있었으며 원 기지에서는 북로군정서의 잔류부대와 각 단체 간부들이 잠복하여 활동하였고 왕청현 라자구와 로흑산 일대에는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라자구의사부 등에 소속된 약 850명 가량의 부대원이 있었다. 김철수선생은 저서 《연변항일사적지연구》에서 홍범도련합부대와 북로군정서부대가 서진한후 훈춘, 왕청, 연길현북부지대에서의 반일부대의 활동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훈춘한민회 군사부의 일부는 홍범도를 따라 서진하고 리명순과 최경천이 거느린 150여명의 부대는 훈춘현 동북부의 오도구, 륙도구, 초모정자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2)신민단의 일부는 중로변경과 훈춘동북지대에서 활동하고 김준극이 거느린 200여명 주력부대는 연길현 하마탕(지금은 왕청현 소속), 석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3)연길현 의란구에서 활동하던 의군부는 왕청현 배초구를 거쳐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4)왕청현 대감자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단 300여명은 리범윤과 김성극의 령솔밑에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후에 주력부대는 김성극의 인솔밑에 연길현 이도구일대(지금의 화룡시 서성진부근)로 이동하였다. (5)최명록이 거느린 독군부 300여명 대오는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6)북로군정서 주력부대가 서진한후 서일 등은 부분적 군관양성소의 졸업생을 골간으로 부근에서 조선인청장년을 모집한후 300여명의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서대파와 하마탕일대에서 활동하였다. (7)로씨야경내에서 온 동도파견군 300여명은 서상렬의 인솔밑에 하마탕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라자구와 동녕일대로 이동하였다. (8)엄준이 거느린 공의단은 줄곧 왕청 소황구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성원은 600명좌우였다. 그러나 강한 무력은 아니였다. (9)라자구의사부 170여명의 무장인원은 라자구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0)국민회 중북부총회의 간부와 구춘선, 강구우 등은 의란구에서 활동하다가 하마탕일대에 옮긴후에 다시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박창욱선생은 동부전선이 전략상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피력했다. 동부전선은 반일부대들의 원래의 근거지였기에 그곳 민중들은 반일정서가 높고 또 조직화되여있었다. 동부전선은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이므로 반일단체들의 왕래가 쉬웠다. 당시 반일단체의 지도자들은 로씨야혁명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인반일무장대는 로씨야혁명파의 세력범위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수 있었으며 그들과 배합작전하면서 일본군 및 백파와 싸우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일부대는 일본군“토벌”이 심할 때에는 능히 로령으로 이동할수 있었다. 동부전선은 또 반일부대들이 로령과 련계하여 무기를 구입할수 있는 후방기지였다. 그러므로 일본침략군은 반일부대의 주력이 서부지구로 이동하였다는것을 알면서도 동부전선에 수많은 부대를 투입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하고 반일기지를 소각, 파괴하며 로령혁명파와 연변반일부대와의 련계를 단절시키는데 심혈을 기울렸다. 일제의 대량 투병 김좌진장군. 1920년 10월 3일 훈춘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우선 온성에 주둔하고있는 73련대의 아베소좌가 지휘하는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를 훈춘에 침입시킨후 얼마후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와 박격포 2문을 배속시켜 다시 침입시켰다. 이어서 19사단 38려단장 이소바야시소장이 지휘하는 75련대 제1, 3대대의 4개 중대, 2개 기관총소대, 특종포병대, 통신반, 위생반 그리고 제20사단 39려단 78련대 우에사까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통신반, 위생반을 침입시킨후 다시 기병27련대 제3중대, 야포병 제25련대의 2개 중대, 공병19대대의 1개 중대 등을 련이어 훈춘에 파견하여 이소바야시지대를 편성하였다. 1920년 10월 20일에는 기무라대좌가 지휘하는 제76련대의 제1, 3대대 4개 중대와 2개 기관총소대 특종병대, 기병27련대의 1개 소대, 거기에다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양수천자로부터 직접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에 침입하였다. 얼마전인 10월 14일에는 반일부대의 북만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북만파견군 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1개 기병소대를 해림일대에 배치하였다. 일제는 또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에서 활동하는 반일부대를 토벌하며 반일부대와 로씨야혁명파간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3사단의 하네이리대좌가 지휘하는 58련대의 1개 대대, 기병17련대의 주력 1개 산포병중대, 1개 공병중대를 동녕현 삼차구의 대안에 집결시켰다가 10월 21일 국경을 넘어 로흑산 라자구방면으로 남하하게 하였으며 10월 19일에는 제11사단의 히데시마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 기병1개 소대, 공병2개 소대를 로령의 바라바시로부터 훈춘현 토문자로 파견하여 훈춘과 왕청현 동북변경을 “토벌”하게 하였다. 일제는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4사단 28려단 주력(4,000명)을 보세트에 상륙시켜 연해주의 연추로부터 훈춘에 보내 양수천자, 국자가, 룡정, 회령 등지를 경과하는 “”위협행군을 진행하면서 “토벌”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8일 28려단 15련대의 제2대대는 훈춘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제3대대의 2개 중대는 룡정에서 경비를, 3대대의 1개 중대는 회령의 19사단 사령부의 경비를 각기 담당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일제는 각 지대에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일본군의 토벌을 협조하게 하였고 따라서 경원수비대병력과 헌병, 경찰을 포함한 50여명을 출동시켜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동부전선에 1만여명의 침략군을 투입시켜 훈춘과 왕청을 4면으로 포위하고 “토벌”을 감행하였다. 동부전선에서의 반토벌전 반일의병들. 동부전선에서 일본침략군은 만단의 준비를 갖춘후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했다.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이소바야시려단장의 지휘하에 아베, 마끼, 쥬지 등 3개 토벌대는 훈춘현성의 동북쪽에 있는 훈춘하상류, 서북쪽에 있는 대황구를 중심으로 한 밀강상류를 대거 “토벌”하였다. 10월 22일부터 11월 초순까지 상기 3개 “토벌대”는 11사단의 히데시마지대와 함께 훈춘현과 왕청현변경으로 북상하고 양수천자에서 도강한 기무라지대는 직접 서대파, 십리평, 대감자 등지를 “토벌”한 기초우에서 백초구로부터 북상하는 이와바시대대와 함께 대왕청, 소왕청 등지를 “토벌”하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간의 련계를 차단, 동녕현 삼차구로부터 남하하는 13사단 하네이리지대와 호응하여 로흑산 라자구일대를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11월 초순부터 1921년 봄까지 일본군은 훈춘과 왕청 등 현의 중요지점에 분산배치되여 부근 일대의 반일단체와 반일기지를 “토벌”, 파괴하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부대들은 이미 기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철퇴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주로 반일기지의 파괴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것을 일삼았다. 전투는 다만 반일부대의 이동과정에 진행, 잔류 소부대간의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인것이였다. 대규모적인 일본침략군의 포위“토벌”의 상황에서 반일단체들은 10월 17일부터 13일 사이에 단독 혹은 단체대표들의 련속회의를 소집, 반“토벌”전에 대응한 전략방침을 토의결정하였다. 우선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형세하에서 맹동, 급진 정서를 극복하고 은인자중하며 분산, 은페의 방법으로 전투를 피하면서 반일력량을 보존하며 만약 적을 공격하려면 심산속에 유인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으로 돌연습격하고 신속히 은페하기로 했다. 이들은 또 반일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될수 있는한 적들의 포위권에서 탈출하며 근거지의 백성과 간부, 일체 물자, 무기탄약 둥을 잘 피난시키거나 깊이 감추어 놓아 반일기지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경감시킬 방침을 결정하였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보다 력량이 박약한 동부전선의 각 부대들은 일본침략군의 “토벌” 제1계단때 이미 왕청현 라자구, 동녕현 로흑산 또는 훈춘현 동북부로 대부분 철수하였다. 제2계단에 들어서도 일본군이 라자구를 중점 “토벌”하자 반일부대는 동녕현 이북으로 철수하였거나 일본군의 후방에 분산은페하여 있다가 이들을 습격하였다. 1919년ㅡ1920년대 연변지역 항일단체 독립군에서 사용하던 인감. 10월 23일 북로군정서 잔류부대는 십리평에서 일본군 이소바야시지대로부터 기무라지대에 편입된 아시다, 다까다 두 중위가 인솔하는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날 일본군은 반일군철퇴를 막을 타산으로 금화골 산중에서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다. 매복해있던 반일군은 적들이 가까이 오자 맹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제의 기록으로는 저들의 군대가 1명 죽고 2명 부상 입은것으로 되어있다. 10월 27일 라자구의사부군의 150여명 장병들은 로무주하골에서 다요기병소대, 아베대대의 1개 소대, 히데시마대대의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 등과 약 2시간가량 격렬한 전투를 벌렸다. 이날 오후 3시, 소바야시지대소속 아베대대의 다시로기병소위가 거느린 일본군 소부대 30여명은 로무주하골 어구부근에서 라자구의사회의 최정국이 거느린 150여명의 반일전사들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아베대대주력은 라자구 태평구에서 “토벌”하고있었다. 어베는 부하가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1개 소대의 병력을 파견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금방 라자구에 도착한 일본군 제13사단의 하네이리지대 산하의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가 전투에 참가하여 약 2시간동안의 격렬한 전투를 거쳐 소부대를 소멸하려던 반일부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북으로 철퇴하였다. 10월 28일 일본군 76련대 이와오소소좌가 지휘하는 부대가 라자구에서 대황구로 돌아오는것을 발견한 반일소부대는 왕청현 장가구에서 련속 2차례나 습격했다. 11월 4일 훈춘한민회군 30여명이 훈춘현 삼도구 북쪽 39리 상거한 지점에서 일본군 제78련대 우에사까대대를 습격, 전투는 약 1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본군 이다소위 이하 5명을 살상하였다. 11월 9일 훈춘한민회의 김운서가 지휘하는 30명의 결사대는 일본군 제75련대 쥬지중좌가 지휘하는 2개 중대를 훈춘현 우두산 남쪽에서 습격, 1시간가량의 교전을 벌리였다. 12월 5일 일본군 시마다소위가 지휘하는 30여명은 하마탕 서북쪽산곡에 있는 반일부대의 숙소를 포위공격함으로써 쌍방이 교전하였다. “보시다싶이 10월 5일 전투 이외에는 모두다 분산은페하였다가 주동적으로 적을 공격한 전투였습니다. 반일부대는 기동령활한 전법으로 적을 타격하면서 “토벌”계획을 혼란시켰습니다. 일본군들이 동부전선에서 비록 반일기지를 파괴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수많이 학살하였으나 반일부대를 소탕하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여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아 한시도 안심할수 없어 항상 비상사태를 취했습니다. 동부전선의 의의는 아주 큰바 적의 병력을 견제하여 반일부대들의 철수와 간부들의 잠복을 엄호하였으며 서부전선 반일부대들의 전투부담을 경감시켜주었습니다. 일본군은 동부전선의 소부대들의 빈번한 습격전 때문에 북상하는 반일부대들을 추격할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부전선 주력부대가 밀산 등지로 철수하는것을 엄호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동부전선이 갖고있는 의의를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계속)
524    제18장 청산리대첩.3 댓글:  조회:1957  추천:0  2014-02-06
청산리마을에 세워진 청산리대첩기념비. 고동하강반에서 일본군 또다시 녹아나고 반일부대 반“토벌”전서 위대한 승리 거둬 백성들의 일편단성 “청산리전역을 비롯한 모든 반일무장투쟁은 연변인민들의 생산존망을 위한 일이였습니다. 일제가 연변에 침입하여 ‘토벌’을 감행한것은 반일무장부대만을 진압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전반 조선인에 대해 탄압하고 조선인들을 저들의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한것이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조선인들은 사명감을 안고 저들의 아들들을 반일무장부대에 보냈으며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각적인 행위였습니다. 일본침략자를 반대하는것은 또 조선인만의 리익을 위한것이 아니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한족들도 청산리전역때 생명을 무릅쓰고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청산리 베개봉.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청산리전역시 한족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들이 반일부장부대를 위해 군자금과 식량공급을 부담했으며 정보도 제공하고 길안내도 나서주었다고 말하면서 “특히 조선인녀성들이 어랑촌전투때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총알이 귀전을 스치는 최전연진지에까지 음식을 날라다 준 사적은 무척 감동적입니다. 그녀들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음식먹을 시간적여유가 없는 투사들의 입에 밥을 떠넣어주면서 격려했지요. 실로 눈물없이는 들을수 없는 사연입니다”고 하면서 격동을 금치못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형을 당시의 《독립신문》은 “녀자의 일편단성(一片丹誠)”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이 지방에 있는 부인들은 애국하는 일편의 적성(赤誠)으로써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위험을 모(冒)하고 탄우가 분분(紛紛)한 전선에 용진(勇進)하야 전투에 피로한 군인들을 공상(供償)하며 위로하였다. 어떤 군인들은 분전망식(奔戰亡食)하야 진작 응식(應食)치 않을 시(時)에는 부인들이 울며 권하기를 제씨(諸氏)가 만일 차(此)를 식(食)치 않으면 우리는 사(死)로써 귀(歸)치 않겠노라 하야 기어이 취식(就食)하도록 하야 일반군인으로 하여금 큰 위안을 받게 하였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리범석도 부녀들의 이런 헌신적인 지원에 대해 자신의 회상기 “우등불”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계속되였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가지고 빗발치는 총알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덩이 두덩이 동지들이 입에 넣어주었다. ...어린이를 기르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로... 그 얼마나 성스러운 사랑이며 고귀한 선물이랴! 그 사랑 갚으리, 이 목숨 다하도록! 우리는 이 산과 저 산으로 모든것을 잊은채 뛰고 달렸다. 맹개골전투 독립군의 행장. 어랑촌전투를 끝낸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는 50명씩 소부대를 지어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10월 23일. 아침부터 이동하기 시작한 북로군정서 소부대는 오후 3시경에 맹개골(孟家溝)삼림속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반일부대는 일본군 기병 30여명이 이 골짜기의 길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삼림의 변두리에 매복했다가 접근해오자 일제히 사격하여 적 기병 10여명을 사살하였다. 북로군정서 부대는 말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 기타 피복, 장구(裝具) 등 다수를 로획했다. 만기구전투 맹개골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 부대는 맹개골로부터 맹산하를 따라 서쪽으로 약 10킬로메터 행군하여 만기구(萬麒溝)의 후방삼림속에서 휴식하고있었다. 이때 일본군 보병 100여명이 행군해오고 있었다. 북로군정서부대는 행군해오고있는 부대가 반일부대인지 일본군인지를 판별하지 못하고 “우리 군인가?”고 소리쳐 물었다. 이에 일본군은 반일부대인줄 알고 즉각 전투태세를 취하였다. 그제야 그것이 일본군이줄을 안 반일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들은 3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패주해 도망쳤다. 망개골 시거우전투 만기구전투에서 적 30여명을 살상한 북로군정서군은 행군도중 200여명 일본군을 발견했으나 전투를 피하여 황구령방면으로 행군하다가 10월 23일 밤 삼림속에서 숙영하였다. 24일 맹가골 시거우(西溝)로 행군하던 50여명 북로군정서부대는 일본군 100여명이 포 6문을 끌고 행군해오는 것을 발견, 즉각 공격을 개시하여 강타를 안긴후 민첩하게 후퇴했다. 이때 일본군기병 1개 소대가 삼림죄편으로부터 나타나 삼림쪽으로 올라왔다. 이에 북로군정서부대는 20분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기병대 1개 소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삼림속으로 숨어버렸다. 천보산전투 어랑촌전투를 끝내고 이동하던 리범석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 소부대는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에 은동재부근에서 천보산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고있던 일본수비대 한 개 중대를 두 번이나 습격하였다. 25일 새벽에는 홍범도련합부대가 식량조달을 위하여 이곳을 습격하여 일본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긴급증원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1개 대대의 병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동하전투 “고동하전투는 전반 청산리전역의 마지막 전투입니다. 1920년 10월 25일 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진행된 이 전투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 이이노추격대의 야습을 다시 반격한 반야습전인데 많은 일본군을 섬멸했습니다. 이번 전투는 토벌군의 총사령인 일본군 19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줴친 ‘홍범도, 김좌진 등 불령선인단을 근절’히겠다고 한 호언장담이 무너지고 토벌계획이 파탄되는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고동하전투는 간고한 전투였지만 적을 통쾌히 무찌른 전투였다고 박창욱교수는 말한다. 홍범도, 김좌진 부대를 단숨에 섬멸하려 했지만 처처마다에서 골탕을 먹은 일본군은 고동하방면으로 퇴각한 반일부대의 뒤를 미친개마냥 쫓아왔다. 그러나 봉밀골안을 50시간동안이나 헤매이면서 골골마다 샅샅이 들췄지만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이에 악에 바친 일본군은 혈안이 되어 고동하기슭을 훑기 시작했다. 고동하는 로령동남측에서 발원하여 화룡경내의 와룡을 거쳐 안도경내로 흘러들어가는데 송화강수계에 속한다. 고동하가 화룡경내로 흐르는 길이는 53.5킬로메터, 만족어로 물결이 사품친다는 뜻이라고 한다. 홍범도부대를 찾아헤매이던 일본군 이이노소좌가 인솔하는 추격대는 10월 25일 밤 10시에 고동하곡(오도양차 남쪽, 지금의 고동하림장 남쪽) 10킬로메터 부근에서 우등불을 피워놓고 숙영하고있는 홍범도부대를 발견하게 되였다. 홍범도부대(북로군정서부대의 50여명을 포함) 350여명은 고동하기슭에서 일본군이 포위하여 오는줄도 모르고 고즈넉하게 숙영하고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가에 모여 휴식하고있는 반일전사들의 모습이 우등불화강으로 하여 어두운 곳에서는 너무 뚜럿히 알렸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인차 부대를 전투태세로 정돈하여가지고 2개소대를 돌격대로 홍범도부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하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소식을 실은 상해 . 10시 30분 일본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환한 화강속에서 아무런 준비없었던 홍범도부대는 적들의 맹공격에 엄중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전장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대원들을 재빨리 고동하기슭에 솟아있는 절벽가로 철퇴하라고 명령했다. 전사들은 비호마냥 날래게 절벽을 타고 올랐다. 반일부대가 차지한 절벽은 량쪽으로 고동하가 사품치며 흐르는 깎아찌른듯한 절벽이였다. 나무까지 빼곡히 솟아있는 절벽에서 내려다보니 금방까지 차지하고있던 우등불가가 환히 바라보였다. 일본군은 우등불가를 점령한후 대승이나 거둔듯 주위 산을 향해 헛총질을 하면서 우줄렁거렸다. 일본군의 일거일동이 한눈에 안겨오는 절벽가에 몸을 숨긴 반일부대 장병들은 홍범도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잽쌉게 총을 휘둘러 우등불가에서 우줄렁거리는 일본군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반습격을 당한 일본군은 우등불가에 척척 나가 쓰러졌다. 그때를 홍범도장군은 이렇게 회억했다. 처음 일본군은 마적들을 길안내로 반일부대를 찾아 우등불을 쬐이는 곳을 향하여 속사포를 발사했다. 이에 불을 쬐이던 많은 병사들이 회생되였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부대는 날새도 얼씬 못할 바위에 올라가 날 밝기를 기다리면서 우등불을 놓은 곳을 내려다보니 적들이 나다니는것이 보였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우리들이 우등불가를 차지한 적들을 향해 총질하니 누렇게 쓰러졌다. 놈들이 아군이 있는 곳으로 기여드는것을 겨냥하여 총탄을 퍼부으니 쓰러지는 놈들이 수십명이 되었다. 기병이 달려올라오는 것을 또 쏘아눕히니 한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주동을 차지했던 일본군은 삽시에 피동에 빠지면서 무리죽음을 당했다. 당황해난 적들은 공격을 멈춘후 부근의 1143고지에 올라가 있다가 날이 밝게 되여서야 이젠 살았다고 안도감으로 낯에 희열을 나타냈다. 그러나 다시 공격하려고 보니 홍범도부대는 벌써 감쪽같이 철퇴한후였다. 고동하전투를 마지막으로 홍범도련합부대와 김좌진 북로군정서부대는 26일 낮부터 일본군추격대의 “포위토벌”을 완전히 벗어나면서 토벌계획을 철저히 파탄시켰다. 결국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걸쳐 진행된 청산리전역은 10여차의 전투를 반복하면서 반일부대의 “반토벌”대승리로 끝났다. “청산리전역의 승리는 조선인뿐만아니라 중국인민들의 반일의식을 고무시켰습니다. 중국 각지의 신문들은 련속하여 청산리전역의 소식을 보도하여 민중들의 사기를 고무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대한 민중들의 반일의분을 격발시켰는데 특히 각지의 청년 학생들은 집회와 시위운동을 조직하고 일제의 침략을 성토하면서 일본침략군으로 하여금 하루속히 중국에서 철수할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나섰습니다. 연길, 훈춘, 화룡, 왕청, 동녕 등 연변의 5개현 대표들은 외교관계를 통하여 일제를 중국경내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강력히 제기했으며 안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고 3번이나 외교부에 청원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일제의 만행을 저지시키지 못했고 결국 반일부대에 대한 ‘토벌’이 조선민중에 대한 대참안으로 이어지는것을 눈을 펀이 뜨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박창욱선생의 개탄의 목소리였다.(계속)  
523    제17장 청산리대첩.2 댓글:  조회:2174  추천:0  2014-02-06
  청산리전투에서 무리죽음을 당한 일본군이 시체를 메고 철퇴하는 랑패상. 신기한 전술에 속은 침략군 저들끼리 싸우고 홍범도 김좌진 배합작전해 우세한 적 물리쳐 완류구전투 어랑촌부근에 집결되여 있던 홍범도련합부대는 천리봉을 중심으로 각 곳에 배치되여있으면서 군사훈련, 군인모집, 량식, 복장준비 등을 다그쳤다. 당시 홍범도부대 전사들은 누른색군복을 입고 붉은 줄을 띄운 두리모자를 썼는데 완류구골짜기에서 일본놈모형을 만들어놓고 “쏴총”구령을 부르면서 기세당당하게 사격훈련을 했다. 홍범도부대가 어랑촌부근에 있다는 정보를 수집한 아즈마지대는 이도구로부터 곧추 어랑촌에 추격해온후 어랑촌부근에다 본부를 설치했다. “아즈마는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21일 진공을 발동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천리봉에 은페시켰습니다. 홍범도장군의 일지에 의하면 21일에는 전투가 없었습니다. 22일 아즈마는 부대를 이끌고 남완류구로 들어갔고 천보산에 있던 이이노부대는 우회하여 홍범도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량쪽으로 협공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천보산을 떠난후 길을 잃은 이이노부대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22일 새벽에야 북완류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남북 두갈래로 덮쳐드는 일본군‘토벌대’를 주동적을 공격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완류구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홍범도장군은 앞뒤로 포위하려는 적들의 시도를 미리 알아차리고 부대를 남완류구와 북완류구간의 량쪽 등마루에 배치하고 기다렸다. 이런줄도 모르고 일본군 아즈마지대의 예비대는 남완류구를 따라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찾아 골짜기로 올라왔다. 같은 시각 이이노부대는 남양촌숙영지를 떠나 이른 아침에 강을 건너 북완류구를 따라 들어왔다. 적들이 다가오자 홍범도장군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령마루 량측 산허리에 매복해있던 련합부대의 장병들은 두갈래로 덮쳐드는 적들을 향해 동시에 불벼락을 안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미친듯이 반격했다. 이렇게 아침 7시 20분에 시작된 전투는 11시까지 4시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싸움이 한창 격렬해질 때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지휘하여 교묘하게 진지에서 살짝 빠져나와 아즈마지대 예비대의 측면에 피해서게 했다. 고지에 먼저 오른 적 예비대는 돌연히 북완류구쪽으로 올라오는 이이노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이이노부대는 예비대를 홍범도부대인줄로 착각했던것이다. 이이노부대의 공격을 받은 예비대는 이이노부대를 도리여 홍범도부대인줄 알고 맹렬히 반격을 가했다. 이리하여 적들은 저들끼리 맞붙어서 죽을둥살둥 모를고 쏘아댔다. 한 독립군의 모습과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들. 저들끼리 한창 싸우는 것을 구경하던 홍범도부대는 적 예비대의 뒤통수를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적 예비대는 홍범도부대와 이이노부대의 “협공”속에서 거의 전멸되여버리고말았다. 홍범도부대는 적들이 미처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을 때 전투에서 물러나 봉밀구방향으로 철퇴했다. “완류구전투에서 홍범도련합부대는 7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고 적들은 400여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최홍빈) 400여명의 적을 소멸한 홍범도부대는 천수평방향으로 퇴각하다가 김좌진부대가 싸우는 곳에 이르게 된다. 한편 완류구에서 저들끼리 물고뜯고 하던 일본군은 드디여 홍범도부대를 추격하다가 12시 30분에 어랑촌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어랑촌전투 백운평전투에서 승리한 김좌진장군은 북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밤도와 강행군하여 원 계획대로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와룡구 갑산촌에 도착, 이른 아침밥을 지어먹었다. 여기에서 김좌진장군은 일본군 한개 기병소대 40여명(리범석의 회억에는 한 개 중대 116명이라고 함)이 천수평에 주둔하고있다는 정보를 당지 주민들로부터 제공받은후 인차 천수평전투를 조직했다. 북로군정서군 려행단(제2제대) 80여명은 갑산촌에서 떠나 산발을 타고 천수동 남산에 이른후 적의 동정을 살폈다. 때는 아침 5시경, 적들은 반일부대가 포위해 들어오는것을 조금도 모른채 깊은 잠에 곤드라져있었다. 부대가 적을 포위하고 습격하려고 할 때 아군의 후방에서 누군가 부주의로 오발을 하였다. 총성은 적들을 깊은 잠에서 깨여나게 했다. 지체할수 없었던 려행단 전사들을 맹호마냥 마을을 습격했다.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적들은 하나, 둘 반일부대전사들의 총탄에 맞아 나뒹굴었다. 이번 습격전에서 적 4명이 본부가 있는 어랑촌으로 도망친외에 전부 소멸되였다. 국민회군의 사령 안무장군. 안무장군은 청살리전역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도망쳐간 적 4명이 본부에 가서 보고하면 대부대가 인차 공격해올것이라고 예측한 김좌진장군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 된다고 판단하고 일부 부대를 서남쪽 3리남짓 되는 산고지에 파견하여 우선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하고 주력부대는 야계골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행동을 개시했다. 아니나 다를가 얼마후 적군 제27기병련대 주력과 일부 보병들은 산포까지 동원해 가지고 가노대좌의 지휘하에 천수동골짜기 어귀에 나타났다. 반일부대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대량 섬멸했다. 그러나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미친듯이 반일부대의 고지를 향해 진공했다.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하는 한편 본부가 있는 야계골로 퇴각하였다. 9시부터 진행된 전투는 반일부대와 일본군과의 고지쟁탈전이였다. 먼저 고지를 차지한 반일부대는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의 공격을 한차례 또 한차례 물리쳤다. 몇차례의 진공에서 실패한 적들은 일부 기병대로서 반일군의 진지를 우회하여 반일부대의 우측을 공격하려 시도하였으나 그것마저도 려행대의 집중사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전투는 계속되였고 점차 가렬한 백병전으로 번져나갔다. 아즈마소장은 기병 제27련대와 야포병 제25련대 제1대대의 병력까지 출동시켜 보병부대와 배합하여 작전하면서 발광했다. 전투는 점차 수량상, 장비상 절대적으로 적들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반일부대는 비전투원까지 동원되여 최후의 결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전투는 오전 11시를 이어 계속되였다. 12시 30분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따라 추격하던 이이노대대가 이 전투를 당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전투에 투입한 일본군은 기병대 약 250명, 예비대 약 600명, 이이노대대 약 100명 합계 1000명좌우였다.”(최홍빈) 반일부대전사들은 목숨을 내걸고 결사적으로 항격했으나 어쩔수 없이 점점 밀리우게 되었고 희생자도 늘어났다. 바로 이때 우측 산마루로부터 콩볶듯한 총소리가 울려왔다. 미친듯이 달려들던 적들이 갑자기 쑥대넘어지듯 마구 쓰러졌다. 순식간에 적아간의 격전사태가 급변했다.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이 바라보니 홍범도장군이 거느린 련합부대 장병들이 적들을 향해 사격하고있었다. 완류구전투에서 승리하고 주동적으로 철퇴한 련합부대는 봉밀구방향으로 이동하던중 북로군정서군이 전투하는 야계골로 들어섰던것이다. 홍범도부대는 완류구전투에서 큰손실을 보지 않았기에 원래의 병력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었다. 홍범도부대는 야계골에 들어서자 김좌진부대가 차지한 고지 옆 그보다 좀 더 높은 산고지를 점령하고 김좌진장군을 향해 진공하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던것이다. 북로군정서군의 장병들을 눈물겹도록 반가와 환성을 울리면서 적들을 무찔렀다. 홍범도부대의 참전은 김좌진부대에 대한 적들의 진공에 막대한 곤난을 주었다. 적들은 방법없이 부대를 분산하여 홍범도와 김좌진부대를 진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투는 저녁 7시반까지 계속 되였다. 전투장에 어둠이 깃들자 적들의 진공이 즘즘해졌다. 이 기회를 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의 련합군이 점령한 고지에 옮겨간후 어둠을 타 부대를 나누어 감쪽같이 퇴각했다. “어랑촌전투는 청산리전역에서 가장 큰 전투입니다. 백운평전투를 서부전선의 첫 시작이라고 한다면 어랑촌전투는 대회전입니다. 보시다싶이 홍범도, 김좌진 등 반일부대의 주력과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들간의 대접전이였으니깐요. 그뒤를 이어 천보산전투, 만기구전투, 맹가골 서고전투, 고동하전투 등 여러차례 전투가 있었는데 이 모든 전투는 다 아군이 철퇴중의 전투였습니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계속)  
522    제16장 청산리대첩.1 댓글:  조회:1685  추천:0  2014-02-06
청산리마을 전경   독안에 든 침략군 삼단처럼 쓰러지고 반일무장부대 백운평서 첫 승리 맞아  결전전야 화룡시 부흥향 청산리마을에서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일명 증봉산)이 커다란 베개마냥 뭇산의 두령으로 덩그렇게 누워있는것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마을어구의 작은 산언덕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기념비는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60메터의 굉장한 화강석으로 다듬어 세웠다. 보기만해도 기분이 장쾌했다. 석비앞면에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조한문자로 새겨져있었고 밑면에는 일제와 격전을 벌리고있는 반일무장전사들의 군상이 조각되여있다. 청산리마을에서 해란강상류를 향해 4-5리쯤 올라가면 유명한 백운평참안지가 나타난다. 찬찬히 살펴보면 불에 그을린 기초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은 황페한 쑥밭으로 되어버렸고 벌목공들이 거처하는 귀틀집이 있을뿐이지만 당년에는 몇십호가 오붓하게 모여살던 조선인마을이였다. 가리마처럼 뻗은 산길을 따라 산을 계속 오르노라면 청고운 개울물소리가 귀맛 당기는데 고요한 산곡간이여서 그 물소리가 더욱 청괘한것 같다. 이렇게 6-7리 더 올라가면 발밑 낭떠러지 아래에 맑은 개울이 여울치며 흐르는 작은 소를 발견할수 있다.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흐르던 개울물이 락차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소를 이루었다고 하여 직소택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소이다. 물론 봉오동전투에서 혼쌀이 난 일제 륙군소좌 야스가와가 지휘하는 제73련대 선봉부대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에 의해 전멸되다싶이 한 곳이여서 더 이름을 떨친곳이기도 하다.   북로군정서의 무장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던 반일무장부대들은 일제의 ‘토벌’에 대비하여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의 반일무장부대의 이동정황을 설명해주었다. 봉오동전투후 명월구(묘구)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안도현 백두산록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 21일경에는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의란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있던 안무가 인솔하는 국민회군은 8월 31일 안도현방면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말경에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군부는 초모정자와 탁반구를 거쳐 9월말경 왕청현 라자구에 도착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은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월 12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도착하였다. 10월 2일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10월 14일 간도침략을 선언하고 16일에는 연길도윤에게 17일 0시를 기하여 간도에서 반일부대“토벌”의 군사행동을 시작함을 통고하였다. 룡정, 국자가, 투도구 방면의 “토벌”을 책임진 아즈마지대는 10월 17일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가 어랑촌, 청산리부근에 주둔하고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월 18일에 부대를 나누어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와룡구 어랑촌에부근에 있는 홍범도부대를 “토벌”할 목적을 부대를 움직였다. 이렇게 되어 일본침략군과 반일부대의 청산리전역은 불가피하게 된였다. “전투를 앞둔 10월 19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 수뇌자들은 묘령에서 일본침략군의 ‘토벌’에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하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주전파와 피전파간에 론쟁이 붙었는데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이 력량을 보존하려면 절대 일본주력부대와 결전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피전책을 취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하여 북로군정서군은 왕팔어구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저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청산리쪽으로 철퇴하게 되었습니다. 부대는 이튿날 백운평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설명이다. 10월 17일 아즈마지대장의 작전명령을 받은 야마다련대는 좌우종대로 나누어 좌종대는 야마다대좌가 직접 거느리고 팔가자, 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에 청산리에 도착하였으며 우종대는 나까무라대대장이 인솔하고 이도구를 거쳐 봉밀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군의 북쪽 퇴로를 차단하고 좌우종대와 책응하여 북로군정서군을 포위하려 시도하였다. 백운평전투 백운평전적지 직소 동쪽구간.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장 리범석은 김좌진장군의 지령에 쫓아 직소부근에 부대를 배치,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적을 제어하면서 본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려 했다. 하여 교성대 200여명을 직소택 량면에 매복시키고 림범석은 정면에서 전반 전투를 지휘하게 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이 포치한 매복진은 좌우 량켠에 톺아오르기 힘든 산이 있고 그 사이에 끼인 골짜기는 20-30메터 되나마나 하고 넓은 곳이라야 40-50메터밖에 안되는 매복전에 더없이 리상적인 장소였다. 때는 상강절기를 앞둔 마가을,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은 한기가 뼈속을 파고드는 추위속에서 밤을 패야 했지만 래일의 격전을 생각하면서 긴장한 마음을 도사려야 했다. 드디여 동녘이 푸름이 밝아오기 시작하더니 금빛 해살이 나무가지사이로 창살마냥 비끼여 들었다. 몸에 락옆을 뒤집어쓰고 지루한 밤을 보낸 전사들은 긴장한 마음으로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협곡 량켠 산기슭에 반일부대 용사들이 매복해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한 침략군은 흔들먹거리면서 좁은 산길을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월강추격대”를 거느리고 들어왔다가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야스가와소좌가 이번에도 선발부대 한개 중대 90여명을 거느리고 죽음의 포위망속으로 기여들고있었다. 이들은 서쪽 2키로메터 지점인 공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이 밤에 숙영했던 곳과 60여개의 불무지흔적을 발견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한줄로 쭉 늘어서서 북로군정서군의 행적을 따라 올라오고있었다. 청산리직소택 “땅!” 연성대장 리범석의 공격을 알리는 첫 총소리가 산곡간을 찢으면서 맵짜게 울렸다. 앞 뒤 산마루에 매복해있던 200여개의 총구에서 삽시에 불벼락이 터졌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돌연적인 습격에 당황해난 적들은 사면으로 날아드는 총탄을 피하느라 갈팡질팡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적들은 대응사격으로 발악도 해보았지만 반일부대의 매복지점을 판단할수 없어 헛총질만 할뿐이였다. 코앞에다 적을 둔 반일부대는 복수의 총탄을 여지없이 내뿜었다. 전투는 속결전으로 끝났는데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다. 전투에서 적군 90여명이 거의 소멸되다싶이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이 제1제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동하면서 제2제대에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할것과 다음날 새벽 2시전에 봉밀구 갑산촌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쫓아 제2제대는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한근원중대를 후위로 안도 로령으로 철퇴하는것처럼 하다가 급전환하여 밀림을 혜치고 북상하여 밤도와 갑산촌으로 철수했다. 청산리대참안 백운평전투에서 참패를 본 일본침략군 야마다련대는 반일부대가 안도현쪽으로 후퇴한줄 알고 추격하다가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자 오후 2시에 추격을 중지하고 되돌아와서 그 분풀이로 무고한 백운평백성들에게 “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은 모든 집을 불살라버렸고 보이는 사람마다 죽이였으며 지어 어린애마저 생매장하거나 총으로 쏘아죽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날 외지로 친척방문갔던 두 사람이 살아남고는 다 살해되였다고 한다.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60세대가 살고있었다고 한다. 한세대당 평균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찬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인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뿐만아니라 그 일 때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사람을 만나면 모조리 죽였다. “목격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백운평에서 사흘동안 연기가 피여올랐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적들은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사용하여 수많은 조선인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무고한 백성을 죽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에 차 하는 말이다.(계속)  
521    제15장 “훈춘사건” 댓글:  조회:2382  추천:1  2014-02-05
당시의 훈춘성루 출병구실 만들기 위해 조작한 가짜사건 세인을 놀래운 경신년 대참안의 도화선 음험한 획책 “일제는 연변반일무장대오가 저들 정규군을 참패시킬만큼한 력량인줄 몰랐지요. 봉오동전투후 일제는 깜짝 놀랐지요. 반일무장대오를 업수보고 제멋대로 봉오동골로 진격했다가 호된 참패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날로 장대해지는 반일무장대오를 소멸하기 위하여 일제는 대량의 정규군을 연변에 파견하여 항일무장대오를 소멸할 획책을 꾸미게 됩니다. ‘훈춘사건’도 그중 하나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가 조작한 “훈춘사건”을 설명하면서 “훈춘사건”은 오래전부터 꾸며온 음모였다고 말한다. “3.13”운동후 조선인지구에 건립된 수많은 반일무장단체와 그들이 진행한 반일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5월 상순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 장작림과 일중공동“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과 간도일대의 조선인반일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수사반”은 남만의 안동, 환인, 관전, 집안, 무순, 류하 등지에서 수백명의 반일무장대원을 체포, 총살하였다. 그러나 길림성 성장 서정림의 강경한 반대로 연변지역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못하고있었다. 이에 간도방면의 수사지휘을 맡은 일군 마찌노중좌는 “중국측의 취체가 철저하지 못하고 간도의 불령선인의 정황이 날따라 악화되면 우리측에서 철저한 토벌을 실시한다”고 큰소리 치기도 했다. 1920년 7월 16일 봉천총령사관 아까쯔까총령사는 작작림과 교섭하여 “중국측 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고문 사이또가 동행하며 중국군대가 토벌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도 참가할수 있게 할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토벌”을 2개월로 하고 출동할 병력은 1개련대로 하며 “토벌”지역을 간도와 훈춘, 동녕현 일대로 할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길림성당국은 일본군이 출병은 주권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로 인정하고 단연히 거절하였으며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일본군의 출병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였다. 중국군은 출병하여 토벌을 개시할적마다 사전에 “토벌정보”를 루설하여 조선족반일부대들로 하여금 미연에 삼림지대로 피신하게 하여 피해를 입지 않게 하였다. 이는 오래전부터 출병을 획책해오던 일제에게 큰 불만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근본적인 토벌을 가하려면 일본군을 주체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직접출병의 계기를 마련하는 음모를 꾸미였다. 일제는 씨비리를 포함한 연변 4개현과 동녕현일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 로씨야 3국 접경지대인 훈춘을 출병지점으로 선택한후 출병구실을 찾으려 했다. 조선주둔군 사령부에서는 급급히 “토벌계획서”작성에 착수하면서 1920년 8월에는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사령부와 련락하여 파견군의 일부를 토문자(土門子), 초모정자, 삼차구, 위자구 방면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의 작전에 배합할것을 요구하였으며 륙군성과 참모본부에 28만원의 경비를 신청하였다. 1920년 8월말에 이르러서는 조선주둔군사령부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 전부 작성되였다. 병력은 제19사단의 보병 76련대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25련대의 일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경원부근에 집결시킨 다음 훈춘-초모정자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보병 제75련대와 기병 제27련대일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온성일대에 대기하고있다가 서대파-하마탕-백초구지방을 진격하도록 하였다. 보병 제75련대의 일부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25련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회령부근에 대기하였다가 룡정촌-국자가일대를 진공하게 하였으며 보병 제73, 제74련대, 기병 제27련대의 주력,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서강부근에 대기하고있다가 황포-투도구일대를 진공하게 하였다. 이와같이 일제는 연변일대에 대한 대규모의 “토벌”을 획책하는 한편 북만주파견군에도 불령선인토벌계획에 따라 보병 2개중대는 해림, 녕고탑, 이구방면에 출동할것을 명령하였다. 한편 제19사단장에게는 필요시에는 조선주둔군 사령관의 명령이 없이도 출병할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렇게 일제는 모든 만단의 준비를 완료시킨후 출병하여도 중국정부에서 어쩌지 못하는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훈춘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음모였다고 까밝혔다.  피로 물든 훈춘성   연변의 반일인사들을 학살하는 일제침략군. 1920년 9월 12일 아침 5시경 갑작스러운 총소리가 고요한 훈춘성의 정적을 깨뜨렸다.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지대에 둥지를 틀고있던 진동(鎭東), 만순(萬順)을 두목으로 하는 300-400명의 마적들이 동, 남, 북 3개 방면으로 훈춘현성에 쳐들어왔다. 마적두목 만순은 친일비적 코산의 영향밑에서 활동하고있으면서 코산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는자이다. 만순은 코산의 말이라면 뭐나 다 들었다. 코산은 일본군 간첩인 야마모도 기꾸꼬를 애첩으로 데리고 살고있었다. 야마모도 기꾸꼬는 일찍 일로전쟁시 어릴 때부터 일군의 스파이노릇을 하였는데 이무렵에는 흑룡강류역의 부라고베시첸스크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 제12사단(지휘 오오이중장)의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코산이 경영하는 술집에서 접대부로 위장하고있었다. 이날 동북쪽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경찰서를 진공했고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륙군병영과 헌병병영을 진공, 현공서를 포격했다. 소규모의 마적들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민간에 덮쳐들어 살인, 방화, 략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마적들은 가는곳마다에 불을 놓아 훈춘시가지는 삽시에 화광이 충천하고 자지러진 총소리로 아비귀환이 되고말았다. 당시 훈춘시내에는 관병 270여명이 있었으나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지라 간신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졸히 응전할뿐이였다. 길림륙군 공병영 영장 정기창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상부지로 달려가 일본령사관과 외국인상점을 보호했고 륙군 제2려 제2퇀 제2영 영장 오은성은 대오를 두갈래로 나누어 서쪽성문과 북쪽성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세 번이나 진격했지만 마적들의 맹렬한 사격으로 후퇴하고말았다. 전투가 2시간남짓 진행된다음 마침내 마적들은 대오를 거두어가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길장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일본경찰서, 령사관은 아무런 손실도 없었다. 랍치된자는 화인 80여명, 한인(韓人) 6명이며 200여간의 가옥이 불타버렸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훈춘사건”이다. “일제가 요구하는것은 단순한 훈춘습격이 아니였습니다. 출병구실을 만들자는것이였지요. 그런데 마적들은 일본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으니 일본놈들은 안달아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 다시 훈춘을 습격하게 하였습니다. 제1차 ‘훈춘사건’이 일어난지 20일밖에 안되는 10월 2일 새벽 4시경 만순을 괴수로 하는 마적무리들은 진동패거리와 합세하여 400여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훈춘을 대거 진공했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2차 “훈춘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기관총 1정과 산포 1문을 가지고있는 마적들은 동서 두갈래로 나뉘여 성문에 기관총사격을 들이대면서 성안을 마구 포격했다. 서대문으로 들어온 토비들은 시킨듯이 곧바로 일본령사관에 달려들었다. 비록 중국경찰들이 령사관을 호위하고있었지만 마적들의 기관총과 양총의 화력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담장을 폭파한 마적들은 물밀듯 쓸어들어 령사관에 불을 질렀다. 동대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관병들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상부지에 돌입하여 사람만 보면 죽이고 닥치는대로 빼앗고 불을 질렀다. 4시간남아 발광하다가 100여명의 사람을 랍치하여 가지고 로흑산방향으로 퇴각했다. 이날 마적들은 일본령사관 경찰서장과 조선인 순사 1명, 재향군인 1명을 죽인외에 일본인 남녀 10여명을 살해했다. “경신년대학살”의 도화선 “제1차 ‘훈춘사건’이 있은지 20여일만에 제2차 ‘훈춘사건’이 일어났다는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고 또 제2차 ‘훈춘사건’에서 아무런 ‘경제적’의의도 없는 일본령사관을 들이쳤다는것은 그 어떤 ‘정치적’목적을 당성하기 위한 음모라는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닐수 없다”.(심영숙 “훈춘사건”) “훈춘사건”후 만순은 코산에 의해 처단되고 코산도 또한 자기 애첩에게 암해된다. 일제는 이번 사건을 저지른 비적들속에 로씨야홍군, 중국군대, 불령선인들이 있었다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여러방면으로 출병구실을 조작하였다. 일제가 이렇게 주장하는것은 로씨야인들이 무력으로 일본에 대해 위협을 주고있으며 조선인반일단체에 대한 “토벌”을 중국군대에 의거할수 없으며 “독립운동”이 위험분자들이 훈춘사건과 같이 저들에게 큰 위험을 가져다주는 화근이기에 훈춘사건은 단순한 마적들의 행위가 아니라 딴 정치적목적을 가진 행동이기에 군대를 출동시켜야 한다는 구실을 더욱 합법화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이며 랍치되였다가 풀려나온 일본상인은 토비들중에는 “조선사람 혹은 불령한당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훈춘사건”은 구실에 불과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조선 라남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19사단 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명령을 내려 온성부근에 주둔하고있는 아베대대를 경원군 훈융에 대기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베가 거느린 보병 한 개 중대와 기관총 한 개 소대가 제일 먼저 두만강을 건너 훈춘으로 출동하였다. 뒤이어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제38려단장 이소바야시가 령솔하는 이소바야시지대, 보병 제76련대장 가무라가 령솔한 가무라지대, 제37려단장 아즈마가 령솔하는 아즈마지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훈춘, 왕청, 룡정으로 진격하였다. 10월 9일 일본 륙군대신은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사령관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게 간도출병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훈춘사건”은 마침내 “경신년대토벌”의 도화선이 되였다. 일본군은 반일단체들이 북만에로의 탈출을 견제하기 위해 할빈에 주둔하고있는 관동군 제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거느리는 야스니시지대를 파견하여 해림을 중심으로 한 중동철도연선에서 북을 철퇴하는 반일부대들을 막게 하였다. 일본군은 또 로씨야 씨비리에 출병하였던 제11사단의 보병 한 개 대대, 기관총대, 기병 1개 소대, 공병 반개중대의 병력으로 투문자지대를 구성하고 훈춘동부의 중로변계에서 반일무장부대가 로씨야 연해주일대로 이동하는 것을 제지할 임무를 맡기고 10월 19일 국경을 넘어 훈춘 춘화지구의 초모정자, 토문자 등지에 진격하게 하였다. 일본군 제13사단은 하네이리대좌의 지휘밑에 보병1개 대대, 기병 1개 련대, 포병 1개 중대로 하네이리지대를 구성한후 10월 19일과 20일에 국경을 통과한후 로흑산부근으로 진격했다. 이밖에 연해주에서 철퇴하는 제14사단 제28려단 4000여명 이리본군은 로씨야 포세이트에 등륙, 빈해성을 거쳐 훈춘에 침입하여 제15련대를 훈춘과 룡정에 남겨 “토벌”대를 강화하게 하고 나머지는 국자가, 룡정과 조선 회령을 거쳐 라남으로 돌아갔다. 10월 13일 제19사단 제73련대의 2개 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반일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국내외를 진감시킨 “경신년대토벌”이 시작되였다.(계속)  
520    제14장 봉오동전투 댓글:  조회:3428  추천:0  2014-02-05
봉오동전투사적지의 하나. 최명록의 집 옛터에서 본 하촌 옛터. 지금은 저수지로 되여버렸다. 일본침략군과 진행한 첫 련합작전 반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첫 승리 봉오동전투의 도화선 도문 일광산(해발 390.7메터)은 아름다운 산이다. 깍아지른듯한 괴암절벽으로 병풍쳐져있는 일광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진 한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일광산을 휘여잡고 흐르는 두만강은 산과 조화를 이루고있어 신비한 운치를 돋쳐준다. 일광산 턱밑에 있는 마을이 유명한 산툰자(三屯子 지금의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 제7촌민소조)마을이다. 간평, 혹은 새불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마을은 1920년 당시에는 화룡현 월신사(月新社)에 귀속되여있었다. 일광산에서 내려다보면 간평대안의 자그마한 마을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원래는 종성군에 소속) 강양동철도역과 마을이다. 돌아서서 바라보면 도문과 조선 남양이 지척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밑으로 범진령고개길이 뉘연히 누워있다. 1920년 6월 4일 아침 5시, 신민단소속 박승길부대 30여명이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도강한후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 일본군헌병 군조 후꾸에 산다로이하 4-6명을 감쪽같이 섬멸하고 강을 건너 돌아왔다. 강양동습격전은 당시 연변의 각 반일단체들에서 진행하고있은 조선국내진입작전의 일환이였다.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일본군경주둔지거나 경찰서를 습격하는 일이 련속 일어났는데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습격사건은 1650여차나 되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고 한다. 그날 박승길부대는 돌아가고 걸만동방면으로부터 다른 한갈래의 반일부대가 강양동습격을 목표로 삼툰자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두만강 남안 종성수비대 순라병들이 강양동방면으로 향하다가 두만강북안의 항일군을 발견하고 총질, 이에 반일부대도 맞불질을 하여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강양동초소가 습격당하고 삼툰자마을에서 일본군종성수비대와 항일군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총격전을 벌리였다는 급보를 접한 남양수비대의 아라요시중위는 6월 6일 오전 11시 자기소대와 야마모도헌병오장이 거느린 헌병을 포함한 17명을 거느리고 삼툰자에서 7-8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경내로 기여든후 범진령을 에돌아 삼툰자서쪽 작은 골짜기로 내려와 마을 뒤산을 점령하고 반일부대를 일거에 소멸할 목적으로 삼툰자마을을 습격하였으나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되자 악에 받쳐 마을의 무고한 백성들에게 분풀이하고는 범진령을 넘어 반일부대 종적을 따라 계속 추격하다가 일광산기슭에서 숙영하하면서 대안의 후원을 바라고있었다. 밤 10시, 수십명의 무장한 반일부대는 삼툰자서북쪽고지에 이르러 숙영하고있는 일군의 보초선을 습격하고 안산방면으로 톼각, 쌍방의 손실은 별반 없었다. 6월 5일, 일본군 야스가와소좌는 조선주재 제19사단의 명령을 받고 보병 제73련대(라남)소속 기관총 1소대와 보병 제75련대(회령)소속 보병 1개 중대로 이른 바 “월경추격대대”를 편성하여 가지고 6월 6일 저녁 9시부터 해란강과 두만강합수목에서 10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도강을 시작하였다. 한편 일광산에서 숙영하고있던 아라요시부대는 안산방면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야하를 건너 곧추 안산방면으로 하여 후안산부근에서 야스가와부대와 회합하여 봉오동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이번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보병 약 200명, 헌병 8명, 경찰 10명 합계 220여명이였다.”(최홍빈 “봉오동전투에 관한 몇 개 문제”) 봉오동을 진군하기 위하여 일본군추격대는 길안내를 찾으려고 정찰병을 후안산마을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에 가서 모금하고 돌아온 최명국 등 13명 모금대가 전안산 최명국네 집에서 저녁을 먹은후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 와서 등불을 밝혀놓고 금후 행동방안을 상의하고있었다. 일본군정찰병들이 후안산에 들어서서 살펴보니 한집에 불이 켜져있는지라 누구의 집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문을 떼고 들어섰다. 갑자기 뛰여든 일본군정찰병을 향해 최명국 등 반일전사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쏴눕히고 집을 뛰쳐나와 북쪽 고려령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여 오는 일본군에게 불질하였다. 일본군은 항일군의 꼬리를 물고 계속 추격해왔다. 전투는 2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캄캄한 밤중에 진행된 준비없는 싸움이였던지라 쌍방은 그다지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일본군 1명이 죽고 독립군 1명과 최진삼의 처가 희생되였으며 마을사람 5명이 체포되였다. 야스가와의 “월강추격대”가 봉오동을 향해 진군할무렵 봉오동에 주둔하고있던 홍범도련합부대 300여명은 이미 전투배치를 끝낸 상태였다. 사령관 홍범도가 거느린 부대와 지휘부는 상촌 서산에, 최명록부대는 북동과 남동 동산에, 신민단부대는 남산에 배치하여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하였다. 리천오의 제1중대는 상촌서북단에, 강산모의 제2중대는 동산에, 강시범의 제3중대는 북산에, 조권식의 제4중대는 서산남단에 각기 매복하였다. 백성들은 홍범도의 명령으로 모두 피신되여있었다. 일본군을 매복권내에 끌여들이기 위하여 리화일분대를 고려령북측 1200메터 지점과 그 동북촌락에 매복시켜놓고있었다.  홍범도장군 홍범도장군이 1922년 러시아 불라고베시첸스끄에서 지낼 때 현지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홍범도(洪範圖)는 1868년 8월 27일 조선 평양시 서문안 문렬사부근의 한 가난한 농부가정에서 태여났다. 집이 함경남도 갑산으로 이사한후 젊은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갑산은 험준한 산골이였다. 그는 그곳에서 사냥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신묘한 검술과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가진 그는 직업포수들의 단체인 안산사 “포수계”에 가입하였고 포연대장으로 추대되여 직업포수계의 두령으로 되었다. 그는 인품이 당당했고 정신이 꿋꿋했으며 장대한 체구와 불의에 굽힐줄 모르는 의협심이 있는 사람으로 린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가난했기에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천성이 름름한 쾌남이였다. 홍범도가 갑산지대에서 “척왜(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집하여 기의한것은 륭희원년(1907년)도 저물어가던 때였다. 그해 9월 7일에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했다. 민간에 있는 무기, 화승총을 회수하기 위하여 일제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이것은 산간지방에서 수렵을 주업으로 삼고 근근득식 하는 산포수들에게는 청천벽력이였다. 이 법령은 쌍이고 쌓인 반일감정에 불을 지핀거나 다를바 없었다. 홍범도를 위수로 하는 삼수, 갑산 등지의 포수들은 의거하여 일떠났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는 의병을 지휘하여 총기를 회수하려 온 회수군을 한놈도 남기지 않고 몽땅 죽여버렸다. 이튿날에는 북청수비대소속 1대가 호위하는 우편마차를 중도에서 습격하였다. 1907년 8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홍범도를 비롯한 반일의병들의 무장투쟁의 봉화는 조선 방방곳곳에서 드세차게 타올랐다. 이에 안달아난 왜적들은 의병대에 대한 참혹한 “토벌”을 감해하는 한편 반일력량을 분화, 와해시키려고 회유책을 썼다. 일제침략자들의 갖은 음모를 분쇄하고 시련을 이겨낸 홍범도와 그의 이병대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반일기치를 추켜들고 무장투쟁을 견지해나갔다. 1909년 겨울, 홍범도의병대에서는 다수의 의병들이 해산하여 돌아가고 모든 군사물자가 단절되였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 홍범도는 소수의 정예대오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 십칠도구 왕가구로 전략이동했다. 여기서 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사냥하여 의식문제를 해결했다. 한편 의병대본영을 건설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탄약을 제작하기도 했다. 1911년 3월 홍범도는 압록강을 건너가서 함경북도 경원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장백현 왕가구 둔전지에서 3년세월을 보낸 홍범도는 자그마한 의병대를 거느리고 로씨야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궂은 일, 고된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장장 6년이란 세월을 두고 일했다. 부두에서, 금전판에서, 어선에서, 경작지에서 피땀흘려 번돈 3050루블로 오련발초 17자루와 탄약을 사가지고 중국 밀산 김형무농장에 와서 농사하였다. 3년 농사하며 사냥하여 얻은 귀중한 약재를 팔아 무기와 탄약을 더 샀다. 홍범도는 드디여 106명을 무장시키게 되었다. 홍범도는 안도현 명월구에서 이전의 의병과 포수들을 단합해서 “대한독립군”을 결성, 사령으로 추대받았다. 독립군은 400여명 병력을 가지고있었다. 1919년 8월 홍범도는 200명 대원을 거느리고 야밤에 조선 혜산을 맹렬히 공격, 수십명의 적군을 소멸하고 병영에 불을 질러놓고 무기, 탄약, 군수품을 로획했다. 그해 10월에는 만포진을 습격, 1920년 2월, 독립군군련합부대는 불의에 회령의 왜군을 기습하였다. 3월에는 로씨야 연해주로부터 많은 무기를 들여온후 근거지를 왕청으로 옮겼다. 4월에는 연해주로부터 700여자루의 보총을 반입하여 독립군부대를 무장시켰다. 새장비로 무장한 독립군은 빈번히 일제침략자들을 타격하였다. 조선통독부의 보수적인 통계에 의하더라도 1월부터 6월까지사이에 전후 32차나 되는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련합부대가 홍범도장군의 지휘밑에 연변땅에서 벌린 첫 저격전이였다. 봉오동전투후 홍범도는 또 김좌진장군 등과 함께 청산리대첩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청산리전투가 끝난후 홍범도장군은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에서 출발하여 호림현 호두에서 우쑤리강을 건너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했다. 1921년 1월 로씨야에 철퇴한 반일부대들은 이르꾸쯔크공산당이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싸할린부대를 위수로한 대한의용군의 파벌투쟁으로 하여 발생된 “자유시참변”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두파의 렵합을 주장하고 분렬을 반대하였다. 그후 그는 동양비서부가 지도하는 고려군정청의 징집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부대는 쏘련붉은군대 제5군단에 배속되였고 그는 조선인려단 제2련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여 백파군을 섬멸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21년 러시야 크레믈리궁앞에 선 홍범도장군.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공산주의혁명조직 제1차대회”에 52명 조선인대표의 한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레닌을 만나보았다. 이는 홍범도가 구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하는 계기로 되었다. 홍범도는 백파군을 소멸하는데 공을 세웠다. 붉은군대의 군인들을 제대시켜 인력을 경제건설에 투입하였는데 조선인려단도 해산되고 고령인 홍범도는 군인생활을 끝마치고 제대하여 전사들을 거느리고 연해주에서 조선동포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조직, 농촌건설에 힘썼고 1929년에는 쏘련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러시아 우즈베크공화국 알마타에 있는 홍범도장군의 묘지. 1929년부터 년로한 홍범도는 년금생활로 만년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피쥘오르다시에서 별세하였다. 연변에서의 일제와의 첫 겨룸 봉오동 중촌 옛터. 물파란 호면에 주변의 산자락이 곱게 비껴있는 봉오동저수지, 멀리 초모정자산의 번듯한 이마가 보기 좋게 안겨온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기만하다.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이 곳이 연변땅에서 대일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곳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가. 그번 전투는 전 중국에서 일제와 격돌한 첫 전투였다. 저수지둑아래에 있는 봉오동반일전적지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장으로 한 조선족독립운동대한북로독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동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소속부대, 아라요시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반일독립군은 빈틈없이 매복진을 쳐놓고있다가 오후 1시경 일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1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변반인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붇돋아주었다. 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중공도문시위통전부 도문시 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  1993년 6월 7일 유적비밑면은 벽돌로 쌍았는데 아직 콩크리트를 바르지 않은 비완성상태였다. 기념비 왼켠에 름름한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있는데 하늘을 날아오를 기상이여서 그젠날 영웅들의 정신이 살아숨쉬는것 같아 보였다. 한아름으로는 안을수 없는 보기에 끼끗한 소나무였다. 1920년 6월 7일 아침 4시 45분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후안산에서 최명국일행과 교전하다가 계속 추격하여 왔는데 전위중대가 드디여 리화일부대의 매복권에 들어서게 되었다. 리화일부대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긴후 쏜살같이 고려툰 뒤산 산등성이를 넘어 북봉오동쪽을 후퇴해버렸다. 돌연습격을 받은 일제는 잠시 후퇴했다가 다시 대오를 정배해가지고 리화일부대가 후퇴한 방향으로 추격하여 8시 30분경에 하촌마을에 들어섰으나 이미 온 마을이 텅 비여있을 때였다. 헛물을 켠 일본군은 골짜기를 따라 중촌으로 진격했다. 중촌에서 늦은 아침을 지어먹은 일본군은 계속하여 상촌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마구 총탄을 퍼부어 많은 살상자를 냈으며 한 농민의 수레를 빼앗아 기관총을 싣고 그 농민을 길잡이로 상촌을 향해 진격했다. 낮 12시경 일본군 척후병들이 반일부대의 매복권내에 들어섰고 오후 1시경에 일군 추격대 전부가 드디여 매복권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상촌에서 일본군은 북동과 남동을 수색했으나 마을은 텅 비여 사람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그제야 독립군의 매복전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남동 앞골짜기로 하여 비파동으로 퇴각하려 시도하였다. “땅!” 산골짜기를 찢는 맵짠 총소리와 함께 일본군 지휘관 한놈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총소리는 홍범도장군이 총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산과 동산에서 분노의 총탄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일본군은 두정의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산을 향해 돌격했다. 이때 서산지휘소에서 작은 붉은 수기를 흔드니 골짜기 홈채기에 매복했던 허형근소대가 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두갈래로 나뉘여 한갈래는 허형근소대의 매복지점으로 돌격하고 다른 한갈래는 서산으로 계속하여 돌격해갔다. 이에 허형근소대는 접근하는 적들을 대응하는 한편 서산을 향해 돌격하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드디여 적들은 주력부대를 동원하여 허형근소대를 덮쳤다. 이번에는 동산에 매복해있던 최명록부대가 허형근소대에 덮쳐드는 일본군주력부대를 향해 맹사격을 했다. 동서로 되는 교차사격권에 든 일본군은 황급히 퇴각하려 했다. 이때 남산에 매복해있던 신민단부대가 적을 향해 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동서남 삼면의 교차사격을 받게 되었고 남쪽의 퇴로까지 차단되였다. 일본군은 쩔쩔매다가 병력을 집중하여 동쪽방향으로 퇴각로를 개척하려 시도했다. 때는 오후 4시 20분경이였다. 하늘에서 시커먼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굵다란 우박이 폭풍과 함께 마구 쏟아져내려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겹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빌어 흩어진 부대를 긁어보아가지고 비파동으로 줄해랑을 놓았다. 반일부대도 억수로 퍼붓는 우박과 비 그리고 전투에서 지쳤는지라 더는 추격하지 않고 싸움터를 수숩한후 왕청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봉오동전투의 첩보를 보도한 상해의 봉오동전투는 반일련합군의 대승로 끝났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부대들이 계획적으로 매복전을 진행하여 일본침략자를 격파시킨 항일군의 첫 전투였고 첫 승리로서 중국의 반일무장투쟁이 첫 발단을 열어놓았다. 봉오동전투는 또 연변의 반일무장부대들의 첫 련합작전이였다. 1920년 3월 홍범도는 조선국내에 대한 진공작전을 효과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대한의군단의 본영을 명멸구로부터 왕청현 대감자로 옮기고 당시 연변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켰던 반일단체인 간도국민회와 손잡고 군무위원 안무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회군과 련합하여 정일 제1사령부를 설립하였고 후에는 최진동과의 련합을 도모했다. 봉오동전투 직전인 5월 11일 홍범도, 최진동 등 북로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도합 4개 무장단체의 지도자들은 봉오동에서 회의를 열고 련합작전에 관한 합의를 보았다. 5월 28일에는 대한의군단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가 련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북로독군부를 조직하고 사령부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두었으며 병력을 집결하여 강력한 조선국내진격을 계획하고 중요간부와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광범한 대중들에게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무장을 들고 굳게 뭉치기만 하면 그 어떤 침략자라도 격파할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계속)
519    제13장 15만 탈취사건 댓글:  조회:2409  추천:0  2014-02-05
  1920년 1월 4일 저녁, 용정남쪽 동량어구에서 있은 의 영웅들. 림국정, 최봉설, 윤준희, 박웅세, 김준(상하좌우로부터). 날랜 용사들 적들의 수송대 엄습 변절자에  의해 거사 물거품으로 원쑤를 갚자면 손에 무장을 연분홍진달래가 곱게 핀 나즈막한 언덕아래에 15만원 탈취 거사석비가 세워져있었다. 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동량리어구이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륙도하가 눈앞에서 흐르는데 강물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미츨한 백양나무에 돋은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은 봄바람에 귀옆게 한들거린다. 연변의 여느 고장과 별다른데가 없는 곳이지만 바로 여기에서 세상을 놀래운 15만원 탈취사건이 벌어진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백양나무가 서있지만 옛날에는 버들방천이였지요. 바로 저기에 동량마을이 있었고 마을에는 제법 주막집까지 있었습니다. 마을은 후에 저기 보이는 승지촌에 소속되여 갔습니다.” 룡정“3.13”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마을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페촌되여버린 마을자리에는 나무와 잡초가 무성할뿐 그 옛날 사람살았던 흔적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있었다. “‘3.13’운동에서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낀 철혈광복단성원들은 자나깨나 무기를 갖춰야 하겠다는 생각이였지요.” 철혈광복단 단원인 최봉설, 한상오는 무기를 갖추기 위해 로씨야에 건너가려고 작심했다. 이에 그들의 부친들은 자래우던 송아지를 팔아 려비를 마련해주면서 어떻게하나 총을 구해가지고 오라고 고무해주기도 했다. 로씨야에 건너간 두 사람은 막로동판에 뛰여들어 돈을 벌었다. 돈이 되는 일이기만 하면 무슨 일이나 마다하지 않았다. 무기를 사기 위해 아글타글 돈을 모으면서 죽을 고생을 격었다. 돈이 모아지자 그들은 권총 4자루, 보초 2자루, 수류탄 몇 개를 사가지고 귀향했다. “3.13”운동이후 연변각지에서는 반일무장단체가 우후죽순마냥 건립되였다. 그들은 무장근거지를 건립하고 군사훈련소, 사관양성소같은 것을 대량 설립하여 군사인재들을 양성하는 한편 민간에 있는 렵총과 재래식총을 거두어들여 재빨리 자신을 무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반일단체들에서는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거나 일제주구들의 집을 들이쳐서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한 이러한 방법으로는 급속히 발전장대해지는 반일대원들의 무기수요를 만족시킬수가 없었다. 대량의 무기를 구입해다 반일무장대원들을 무장시키자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금활동으로만으로는 대량의 무기를 구입할 돈을 모을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씨비리에서 쏘련사회주의혁명을 무력으로 간섭하려고 쳐들어왔던 체코군단이 패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보총 한자루와 탄약 100발을 일본돈 30원에 마구 팔아버리고있었다. 이것은 군자금만 손에 쥐면 맘대로 무기를 구입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수 없었다. 1919년 여름, 연변지역의 유지인사들은 군자금을 모아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에게 주어 무기를 구입해줄것을 부탁했다. 하여 2000여자루의 총과 수십만발의 탄알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운수도중 무기를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나 침몰되는 바람에 아까운 무기를 몽땅 바다에 던지고말았다. 이러한 후과를 책임져야 했던 김하석은 연길현 와룡동에 있는 철혈광복단 단원 최봉설에게 빠른 시일내에 군자금을 마련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철혈광복단 단원들인 최봉설, 윤준희, 림국정 등은 빠른 기일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면 금융기관에 있는 조선인들과 줄을 달아야 했다. 그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국민회 회원인 전홍섭(全洪燮)이 조선은행룡정출장소 서기로 일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윤희준은 전홍섭에게 룡정촌 예수교병원뒤쪽 공동묘지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띄웠다. 약속한 시간에 윤준희은 림국정과 함께 전홍섭을 만나서 상급의 지시와 금자금 모금정황을 소개한후 “일본놈들이 회령에서 룡정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 구체적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아주 손쉽게 해결할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전홍섭은 자기도 놈들의 은행권수송에 몇번 참가한적 있다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련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윤준희 등 기타 대원들은 그 동안 은행궈탈취에 수요되는 준비사업을 하기로 하고 혜여졌다. 그러던 1919년 12월 그믐날 전홍섭은 끝내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룡정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가 다게다 지로우와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15만원의 현금을 수송해오게 된다는것이였다. 전홍섭은 즉각 최이봉의 장인인 김하규를 통해 최이봉에게 비밀통지를 전달했다. 1920년 1월 1일, 전홍섭의 비밀통지를 받은 최이붕은 즉시로 윤준희를 찾아갔다.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수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는 내용의 글이 씌여져있는 쪽지는 너무도 돌발적이고 격동적이였다. 윤준희와 최이붕은 단숨에 와룡동에 있는 김하석집으로 뛰여갔다. 전홍섭의 쪽지를 받은 김하석은 윤준희와 최이붕더러 인차 명동에 있는 김계하의 집에 찾아가서 거기에 대기하고있는 박웅세와 김준을 만나 행동계획을 면밀히 짜라고 지시했다. 1월 3일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이붕,한상호, 림국정 등 6명은 교동에 있는 김계하네 집에 집결하여 습격계획을 짰다. 습격지점을 동량어구로 정하고 행동편리를 위하여 여섯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었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비장한 격전 15만탈취사건의 참가자 최계림(앉은 사람)과 림국정. 1919년 반일운동이후 림국정과 최계림이 러시아에서 무기를 가지고 나올 때 찍은 기념사신. 1920년 1월 4일, 집집의 굴뚝마다에서 늦은 아침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이따금 개짓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오는 동량마을은 오늘따라 느닷없이 한가로워 보인다. 눈덮인 사자산은 흰사자가 허리를 꼬며 휘우듬이 돌아앉아 있는듯 사뭇 웅위롭기까지 했다. 하늘향해 머리를 건뜻 쳐든 선바위는 위풍도 당당했다.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명동촌을 떠나면서 여섯은 사자산과 선바위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거사가 성공되리라로 굳게 믿었다. 일행은 유익하의 집에 들려 점심을 먹은후 숨도 돌릴새없이 길을 다그쳤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삼림속으로 목적지까지 가야 했는데 많이 내린 눈으로 하여 발이 눈속에 푹푹 빠지기도 했지만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어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족 류충괴, 리수옥이 경영하는 주막에 들여 식하한후 두 개조로 나뉘여 큰길옆 버들방천에 숨어 송금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겨울바람은 사정없이 휘몰아와서 용사들의 얼굴을 핥아놓았다. 움직여도 모르겠는데 꼼작안고 숨어있자니 그 추위가 더욱 가심했지만 이들은 입을 앙당그려물고 추위을 참았다. 1시간이 지났는데도 은행권수송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지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4일 아니면 5일이라 했으니 혹 래일 오는 것이 아닐가. 래일 다시 와서 기다려야 하는걸가. 대원들은 추위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서성이기만 했다. 윤준희는 최이붕더러 한 개 소조를 데리고 계속 버들방천에서 기다리게 하고 박웅세, 김준과 함께 회령방향으로 정찰을 떠났다. 반시간후에 윤준희일행은 짐실은 말을 앞세운 적들의 수송대를 발견했다. “수송대가 틀림없소! 김준형, 어서 최이붕소조에 소식을 알리오!” 윤준희는 간단히 명령하고 박웅세와 함께 길옆에 매복했다. 김준에게서 소식을 받은 최이붕일행은 인차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들이 오는 방향을 향해 줄달음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적들의 수송대는 거들먹거리면서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가 점점 똑똑히 알렸다. 은행권을 실은 말이 앞서서 오고 그 뒤로 우편물을 실은 마차가 따르고있었다. 일행은 도합 6명, 룡정에서 파견한 은행원 하루구찌, 회령은행출장소 서기 김용억, 일본순사 나가도모, 박연흡, 상인 진길풍 그외에 우편원 하라가시이였다. 우편물을 실은 마바리와 은행권을 실은 마바리를 앞세우고 그 뒤로 진길풍과 나가도모순사가 말을 타고 따르고있었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루구찌은행원과 박순사 맨뒤로 가시하라가 따라오고있었다. “땅! 땅!”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맵짠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던 것이다. 대원들은 일제히 일본놈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와 상인 진길풍이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세웠다. 말에서 떨어진 일본순사 나가도모가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박웅세와 김준의 철봉에 맞아 당장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기타 수송대원들은 겁에 질려 사시나무떨 듯 와들와들 떨기만했다. 그런데 총소리에 놀란 말이 내처 앞으로 내달렸다. “빨리 말을 잡아타오!” 윤준희는 소리치면서 은행권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최이붕이도 달려와 우편물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윤준희와 최이붕은 15리 떨어진 팔포강 산중턱에서 말을 멈춰세웠다. 조금후 한상호가 달려왔다. 마바리에 실은 흑색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셋은 환성을 터치였다. 10워짜리 지페 5만원, 5원짜리 지페 10만원 도합 15만원의 새돈이 꽉 차있었던 것이다. 셋은 돈을 나누어가지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할 작정이였다. 한편 박웅세와 김준은 습격지점에서 자기들의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우편물을 실은 말을 몰고 윤준희일행이 떠난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밤새 지치고 아침까지 굶다나니 맥이 없어 쓰러지군 했답니다. 윤준희가 급한 김에 권총을 빼드로 ‘빨리 걸어라! 안 걸으면 죽여버리겠다. 이러다간 붙잡히고만다’ 라고 하자 최봉설이 권총을 맞대며 ‘왜 동지를 죽이려 하느냐, 네가 쏘면 나도 쏜다. 그것도 말이라고 하느냐. 어떻게 하나 같이 가야지’ 라고 맞대들었답니다. 그러자 쓰러졌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또다시 간고한 급행군을 했답니다. 동성에서 해란강을 건느는데 신을 벗고 맨발바람으로 성에장이 뜨는 물을 건너 강기슭에 올라 땅을 디디니 자갈돌이 발에 척척 붙어나더랍니다. 부르하통하를 건널 때도 마찬가지였답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최봉설의 아들 최동현씨의 진술이다. 일행은 간고한 급행군을 하여 새벽 3시경에야 와룡동에 다달았다. 그들은 최이붕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늘어지게 잔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김하석이 있는 의란구 류채구로 출발했다. 의란구에서 모든 준비를 갖춘 윤준희, 최이붕, 한상호, 림국정 등 4명은 김하석과 함께 1월 10일 돈을 휴대한후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15일에 로씨야 모구위에 도착, 거기에서 약 1주일간 기다렸다가 22일에 배를 타고 울지보스또크를 향발, 23일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여 당지의 반일지사이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기자에게 에 대해 설명해주고있는 룡정사업위원회  최근갑회장.(2004년 4월말.) 최후의 순간 사건이 발생한후 일제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1월 5일 룡정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도난사건을 사출해내려고 수백명의 중일경찰들을 평강일대에 파견하여 조선인들은 검거체포했다. 1월 6일 일제는 일본경찰 36명과 지방순경 57명을 동원하여 와룡동을 수색하면서 도난사건의 실머리를 잡게 되었다. 하여 최이붕의 종적을 찾아 사처에 수색망을 펼쳤지만 최이붕일행은 이미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난후였다. 일제가 윤준희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악에 바쳐 발광하고있을 때 이들은 신한촌에 머물러 있으면서 최의수란 소개자를 앞세워 일본돈으로 루블을 바꾸는 한편 무기상들과 련계를 맺기 시작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척되기만 하면 갖고온 돈으로 3만여자루의 총을 살수있는데 연변에 있는 반일단체는 물론 울라지보스또크의 500여명 조선족반일투사들까지도 완전히 무장시킬수 있었다. 무기구입을 책임진 림국정이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론한 것이 끝내 화근으로 되고말았다.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울라지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 숨어들어 일제의 졸개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엄인섭은 곁으로는 무기를 사는 일을 근심말라고 호언장담하면서 감쪽같이 우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상황을 밀고해버렸다. 일본정부는 헌병대의 정보를 제공받은후 즉각 조선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을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하였다. 조선인반일투사들을 일망타진할 주밀한 계획을 세운 일제는 1월 31일 밤 신한촌을 대검거하기 시작했다. 윤준희 등이 무기교섭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즐겁게 술을 마셨는지라 눕자마자 꿈나라에 떨어지고말았다. 한밤중 개들이 자즈러지게 짖어대는 통에 잠을 털고 일어난 일행은 왁작대는 바깥동정에 정신을 차리고 준비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있었던 것이다.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갑자기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셋은 어쩔새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뒤방문곁에서 자고있던 최이붕이 사태의 엄중성을 파악하고 문을 박차고나가면서 앞에 서있는 일본군을 발길로 걷어찬후 나는 듯이 달려가면서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일본군헌병들이 최이붕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은 취이붕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한손으로 감싸면서 맨발로 계속 앞으로 내처 뛰였다. 얼마 안가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상처를 입었다. 몇번이나 눈앞이 캄캄해나는 것을 참으면서 뛰고 또 뛰였다. 최이붕은 반일비밀공작원인 채성하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번 사건으로 하여 현장에 있던 일본돈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으며 울라지보스또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고말았다. 울라지보스또크의 일본헌병대는 윤준희일행을 체포한후 조선인반일무장단체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갖은 고문을 다 들이댔지만 “15만원 탈취사건”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1920년 2월초 일본놈들은 윤준희일행 3명을 청진감옥에 압송하였다. 얼마후에는 또 서울서대문감옥에 압송하여 갔다. 거기에서 이른바 “15만원도나사건”에 해한 공개재판을 열었다. 재판석에서 윤준희를 비롯한 반일투사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행동은 정의적인 거사로서 무죄하다고 절규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이야말로 죄악적이라고 규탄했다. 1921년 8월 25일, 일제는 서울감옥에서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을 사형에 언도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때 윤준희는 30세, 한상호는 23세, 림국정은 27세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이붕은 그후 “적기단”을 결성한후 단장직무를 맡고 쏘련과 연변에서 무장투쟁을 벌린 한편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518    제12장 “3.13”후의 반일무장단체들 댓글:  조회:1991  추천:0  2014-02-05
1920년 9월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왕청현 서대파에 모인 북로군정서 장병들. 앞줄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장군.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무장단체들 료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무장투쟁 노도 무장한 적들과는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3.13”운동의 경험교훈이였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데 있어서 “외교독립론”이거나 중국정부의 힘을 빈다는것은 닿지도 않는 일이라는것을 피의 교훈으로 느낀 각계 반일단체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더욱 강력한 무장투쟁을 벌리기 위하여 무장단체의 결성과 무기구입, 군자금모집 및 반일기지건설의 방침을 제정하고 힘차게 밀고나가는것만이 생로라는 것을 알고 즉각 대오를 무장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내세우게 되었다. 간도국민회 간도국민회는 “3.13”반일운동후 연변에서 그 영향력이 가장 크고 세력범위가 가장 넓은 반일무장집단이였다. “3.13”반일운동이 일어난 이틀후인 1919년 3월 15일부터 21일까지 연변의 반일의사들은 연길현 지인향 솔완자(지금의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에 모여 “3.13”학살사건의 경험교운을 총화한 뒤 “한족독립기성총회”(회장 구춘선)를 건립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각지 반일운동을 지지 지도하고 민중을 조직, 동원하면서 반일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을 악질 친일분자들을 체포, 처단했으며 운동자금을 모연하기도 했다. 3월 21일 로씨야에 파견되였던 김약연, 정재면이 돌아온후 이들은 민족독립은 남에게 의거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반일무장단체를 결성할것을 결정하였다. 하여 “한족독립기성총회”를 “간도국민회”(회장 구춘선)로 개편하였다. 소재지는 하마탕(후에는 의란구 구룡평에 옮겼음)에 두었다. “간도국민회”는 중앙총회아래에 다섯개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소재지와 탄탄한 간부진용을 갖고있었다. 촌지회도 100여개가 있었다. 1920년 봄부터 “간도국민회”에서는 경호대와 국민회군 등 군사조직을 내왔다. 경호대 총사령은 리용(李鏞), 국민회군 사령은 안무(安武)가 맡았다. 이들은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지회에 교관을 파견, 청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진행, 군대에 편입시켰다. 1920년 8월의 총병력수는 450명,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이들은 또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속에 사관훈련소를 세우기도 했다. 1920년 5월 국민회군은 홍범도의 독립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신민단의 부대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간도국민회”는 전 동북에서 규모가 가장 큰 반일단체였는데 회원이 8000여명이나 되었다. “간도국민회”는 반일단체들의 통합에 힘쓰면서 반일무장투쟁에서 련합을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금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취득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1920년 “경신년대토벌”후 국민회군은 기타 반일부대들과 함께 북만의 밀산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고 홍범도를 사령으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로씨야로 이동하였다. 주요간부들은 국민회의 회복건설에 힘썼고 1921년말에는 리동휘가 지도하는 고려공산당(상해파)에 참가하여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중앙총회를 건립하고 민족해방투쟁을 견지하였다.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대종교동도본사의 주관 서일이 지난날의 반일의병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중광단”이 발전되여 세워진 반일무장단체이다. 1919년 5월, 서일은 유교계인물들과 함께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개편하고 10월에는 정의단을 반일무장조직인 “대한군정서”로 개편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병사모집과 군사훈련, 무기구입 등에 힘을 모으면서 반일무장조직을 확대했다. 북로군정서는 정치행정사무, 군자금모연, 군인모집, 지방통신련락, 교제, 경비 등 사무를 담당하는 총재부와 군사훈련을 위한 무력강화사업을 담당하는 군사령부 두 조직체가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부는 왕청현 덕원리에 있었는데 서일이 총재를 담당하고 수하에 부총재, 비서장, 비서, 서무부장, 재무부장, 인사국장, 경리국장, 계사국장, 탁지국장, 모연국장, 징모국장, 경신국장 등을 두고있었다. 군사령부의 소재지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두고있었다.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리장녕이였다. 수하에 참모부장, 려단장, 련대장, 참모, 련성대장, 군기국장, 군범국장, 군계보관, 정탐대장, 참모, 군의정, 부관 등을 두었다. 총재부산하에는 지방경신국과 경비대가 있었는데 35개 경신분국, 200여명 경비대원이 있었다. 군사령부산하에는 400여명 학생을 수용한 사관훈련소가 있었는데 김좌진이 소장을 맡았다. 1920년 9월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은 1600명, 동년 화룡현 청산리로 진출한 병력은 600명이였다. 무기장비는 보총 1300자루, 기관총 7정, 권총 150자루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끝내고 북만의 밀산으로 철퇴한 북로군정서는 연변으로부터 철퇴한 각 반일부대들과 련합하여 서일을 총재로하는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그후 그들은 로씨야에 철퇴하였는데 그때 서일은 밀산현 담벽진에 남아서 군정서군대들을 규합하여 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로씨야에 철퇴한 부대들은 “자유시(즉 스보보드니시)참변”으로 하여 좌절되였고 같은해 8월 17일에는 친일토비 고산의 습격으로 하여 하루밤사이에 담벽진의 기지는 파괴되고 무장을 탈취당하였으며 수십명의 장병들이 살해되였다. 크게 타격을 받은 서일은 8월 27일 담벽진 뒤산에 올라가서 돌을 베고 누워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였는데 당년 41세였다.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은 이름난 의병장 홍범도가 1919년 “3.1”운동후 원래의 옛부하들을 토대로 세운 순수한 반일무장단체였다. 홍범도는 10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919년 9월 연변에 왔다. 그후 인차 다른 부대와 합쳐 400명의 병력으로 늘었다. 홍범도의 리상은 조선국내진입작전이였다. 《연변항일사적지 연구》(김철수)에 따르면 “당시 중국관방의 자료에도 일단 빠리강화회의에서의 교섭이 실패하면 전대(결사대)는 백산의병대장 홍범도대장의 인솔밑에 의기를 들고 혈전하려는 계획이라고 기록하고 일제의 1919년 10월 9일 첩보자료에도 ‘홍범도는 결사대 2500명을 인솔하고 조선내지에 침입하려고 기도하고있다’고 기록되고있는 정황과 1919년 12월 13일의 조선함경남도 지사의 보고요지의 ‘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불령선인들의 수령 홍범도수하에 약 2천여명의 부하들이 있는데 독립운동의 준비로 부하들을 날마다 훈련시키고있으며... 그 근거지를 내두산에 설치하고 음력 11월기간에 조선내지로 침입하여 일본관현과 교전할 계획을 하고있다’는 등 자료들을 놓고볼 때 홍범도는 확실히 일제와의 싸움을 첫 자리에 놓는 주목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대한독립군은 후에 국민회와 합하여 국민회산하에 귀속, 국민회의 근거지를 자신의 기지로 삼고 전문 전투에 뛰여들었다. 홍범도부대는 다른 무장단체들과는 달리 “3.1”운동후에 무장투쟁을 준비한것이 아니라 이미 기성된 부대로써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려나갔다는 특점이 있다. 홍범도는 특히 반일무장단체들의 련합을 선도해 나섰다. 국민회와의 련합을 실현한후 련속하여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를 열어 통일과 련합문제을 토의하였다. 잠시 통일은 가져오지 못했지만 련합전선을 결성할데 대한 협의를 맺기도 했다. 1920년 대한독립군은 군무도독부와 통합, 대한북로독군부를 조직한후 근거지를 왕청현 봉오동(지금 도문시)에 옮기였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는 정일(征日)제1군사령원의 신분으로 봉오동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후 각 무장단체들에서는 련합전선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면서 통합을 찬성하는 서명운동을 진행, 동도독군부로 통합(북로군정서를 제외)되였다. 홍범도가 사령관을 맡고 근거지는 연길현 의란구 구단구 산속에 두었다. 사령부 산하에 4개대대를 두었다. 1920년 8월중순 홍범도부대는 일제침략군을 부단히 타격하기 위하여 근거지를 떠나 이도구일대로 이동, 반일기지를 세우고 유격전을 벌리였다. 국민회군, 의민단, 북로군정서 등 반일부대들도 이도구와 삼도구일대로 이동하여 홍범도부대와 함께 이름난 청산리전역을 벌려 일본침략군을 호되게 족쳤다. 기타 반일무장단체들 리명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한민회는 로씨야에서 성립된 “대한국민의회”의 지부로서 1919년 4월 14일경에 성립되였다. 훈춘한민회군사부 부장은 황병길(후에 김정)이였다. 1919년 7월 한병길은 결사대를 보집하여 “급진단”을 건립한후 연통라자 서골에 땅 40상을 사서 귀틀집 7채를 짓고 대오를 4개중대로 편성한후 군사훈련을 시켰다. 후에 “의사단”, “포수단”과 합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로 정식 편성되였다. 1920년 새롭게 군사부를 편성 최경천이 군무부장을 맡았다. 새로 구성된 군사부는 군내에 엄격한 군사규률을 세우고 간부선거 등은 민주적으로 진행했다. 군사부에서는 조선진입전투를 벌리면서 일제침략군을 타격했다. 방우룡을 단장으로 하는 의민단은 연길현 숭례향 차조구(현재 안도현) 천주교 교회당에서 천주교신자들을 위주로 하여 세운 반일단체다. 본부는 차조구 천주교 교회당에 두었다가 후에 명월구 묘구로 옮겼다. 의민단무장력은 200여명, 1920년 5월 국민회군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에 편입되였다. 최명록을 총재로 하는 도독부는 “3.13”운동후 봉오동에서 자위대형식의 반일무장조직을 건립한 기초우에서 결성한 단체이다. 병력은 2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지반이 든든하고 식량공급이 충족했다. 1920년 3월과 5월 도독부는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 결정에 의해 국민회, 훈춘한민회, 홍범도군 및 기타 반일단체들과 함께 북로독군부를 편성, 홍범도를 정일(征日)제1군 사령으로 6월에 봉오동전투를 벌리였다. 그후 령도권문제로 홍범도와 모순이 발생하여 7월에 홍범도군은 명월구를 거쳐 화룡현으로 이동하고 최명록군은 라자구를 거쳐 동녕으로 이동했다. 최명록을 부장으로 하는 북로독군부는 1920년 5월 27일 봉오동에서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도독부군, 홍범도군이 련합하여 결성하였는데 후에 의군부, 의민다과 신민단도 련합여 들어왔다. 병력은 600여명, 기관총 2정, 5련발보총 355자루, 38식보총 13자루, 30식보총 28자루, 구식보총 4자루 합계 보총 400자루가 있었고 이밖에 각종 권총 18자루, 수류탄 다수가 있었으며 식량이 충족했다. 리범윤을 명예단장으로 김성극을 단장으로 하는 광복단은 의병장 리범윤이 로씨야에 갔다가 “3.13”후에 돌아와서 반일의병을 규합하여 결성한 단체인데 반일단체이면서도 또한 리조왕권의 광복을 꾀하는 조직이였다. 병력은 150명이고 본부는 왕청현 대감자이북의 곰골에 있었다. 1920년 10월 22일 어랑촌에 갔다가 동녕으로 철퇴, 다른 부대들과 함께 대한총군부를 건립하고 리범윤을 사령을 추대했다. 리범윤을 총재로 하는 의군부는 “3.13”후 공교파들이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병력은 200여명, 10월초 홍범도군과 함께 와룡동에 갔다가 다시 라자구를 거쳐 동년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김종식을 의사부장으로 하는 라자구의사부는 “3.13”후 라자구에서 조직되였다. 처음엔 대장에 리춘범, 최정국이였다. 10월경에는 개선을 거쳐 김리근이 의사부장으로 활약했다. 병력은 200여명이였다. 그외에도 림창세를 총재로 하는 야단, 김중건을 단장으로 하는 대진단, 리백성 등이 조직한 의형제단, 리춘정이 성립한 구제단 등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궐기해 나섰다. (계속)  
517    제11장 룡정“3.13”반일운동 댓글:  조회:2446  추천:0  2014-02-05
3만여명 조선인동포들이 참가한 1919년 룡정 반일집회. 노호하는 3만 조선족군중 부패군벌과 맞서고 한족 반일군중들도 조선족과 어깨 곁고 싸워 “3.13”반일의사릉 반형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3.13”반일의사릉은 멀리에서도 유표하게 알린다. 하얀 비석이며 잘 정리되여 있는 묘들을 가쯘하게 가공된 석재로 둘레를 쌓아올려 보기에도 한결같이 정연했다. 앞줄에 모셔진 묘소가 9자리이고 뒤줄에 모셔진 묘소가 4자리였다. 기념석비정면에는 한자로 “3.13반일의사릉”이라고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난 반일시위는 연변지구의 조선족인민군중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정책에 저항하여 일떠나 민족독립을 재취하기 위하여 벌린 군중성적혁명투쟁이다. 동월 17일 룡정합성리공동묘지에서 순난렬사들을 안장하는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지방당국의 잔폭한 죄행에 항의하였다”는 비문과 19명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들로는 채창현(蔡昌鉉 충렬대 지휘자), 공덕흡(孔德洽 출렬대 기수), 박문호(朴文鎬), 김흥식(金興植), 정시익(鄭時益), 현봉률(玄鳳律), 김승록(金承록), 김태균(金泰均), 장학관(張學觀), 김종묵(金종默), 허준언(許俊彦), 김병영(金炳榮), 박상진(朴尙鎭), 최익선(崔益善), 현상로(玄相魯), 리유주(李裕周), 차정룡(車正龍), 원인선(元仁先), 리균섭(李均燮) 등이다. 룡정“3.13”반일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화강암으로 다듬어만든 석비를 어르쓸면서 입을 열었다. “1989년 한국 동아일보 문화부 부장 리영철씨가 ‘3.13’반일운동좌담회에 참가하고저 왔을 때 이 묘소에 대해 물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하반년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수십차의 답사를 거쳐 합성리의 방청화(당시 81세)로인에게서 우연히 ‘만세묘지’가 있었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묻은 묘소라는것이였습니다.” 그 로인을 앞세우고 고증한 결과 바로 최근갑선생이 애써 찾던 묘소였다. 하여 1990년 4월 10일에 확정하고 5월 19일에 연변 각지의 유지인사들이 모여 추모회를 열었다. “당시 주당위 장진발부서기가 힘되는 말씀을 하셨는데 잊어지지 않습니다. 장진발부서기는 ‘항일하다 사망된 사람은 민족을 불문하고 기념할수 있는바 이는 력사유물주의에 부합된다’고 지시했지요.” 이 자리에 안치된 렬사들은 모두 14명이였는데 후에 한분을 친척들이 딴곳으로 이장하여 가서 지금 13자리이고 5명은 그 당시 제마끔 안치했다고 한다. 3월 17일까지 5일장을 보았는데 4000여명 군중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길손들이 다니면서 추모하라고 이곳에 모신것 같습니다. 후에 추모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았으나 일제가 공공연히 간섭하고 제지시키는 바람에 오는 사람이 뜸해졌지요. 렬사들은 70여년간 이 황페한 곳에서 쓸쓸히 지냈지요. 가슴아픈 일입니다. 우리들이 묘소를 파헤쳐보니 관에다 안장한것이 아니라 봇나무껍질에 감아서 모셨더군요.” 최근갑선생은 “3.13”반일운동은 물론 조선의 “3.1”반일봉기를 지지성원하는 연변인민들의 대규모적군중운동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떠올리였다. 제1차세계대전중인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자극받아 1919년 손병희 등 33인이 민족자결주의의 사조에 따라 일본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고자 그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일으키여 온겨레가 민족해방을 위해서 일본관헌과 싸웠다. 물론 일본군대의 출동으로 탄압받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에서 210개 지방의 1500여개 단체들이 일떠났는바 동원된 인원은 200여만명이였다. 사망자는 7500여명, 부상자는 1만6천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7천여명이였다. 연변에서도 “3.1”운동전부터 울라지보스또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련계하여 운동준비를 공동으로 추진하고있었다. 하여 김약연과 정재면을 연해주에 파견하고 강봉우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연해주에 파견된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한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하던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연변에 들어왔다. 하여 반일운동자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3월 13일 룡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결정, 대회장에 김명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고 준비에 서둘렀다. “‘3.13’운동은 사실상 1905년부터 온양되였는데 특히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된후 그 정서가 앙양되였지요. 각 학교에서 반일교육과 민족교육을 진행하면서 인재를 양성했고 이제 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가 나오면 조선, 로씨야, 연변에서 함께 일어나자고 기다리고있었는데 조선에서 먼저 터졌지요. 이에 연변의 학생들은 궐기해일어나 동맹휴학을 하면서 투쟁을 선도하자 기다리지말고 싸우자고 나섰습니다. 10여년간 준비해온 화산이 단꺼번에터진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말이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의사부에서는 3월 11일 일본총령사관에 통지를 내여 일본령사관이나 일본인들을 해치지 않고 우리끼리 시위를 한다는 내용을 전달하였으며 12일에는 길림성성장과 북경 외교부에 전보로 소식을 알렸다. 또 연길도윤공서나 맹부덕퇀에서도 성에 “조선인들이 반일집회를 가지려는데 어떻게 대처할것이가”하는 청시를 올렸다. 당시 길림성성장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표시했다. “좋은 말로 권해서 시위를 하지 말도록 하게 하라” 이밖애 연길도윤서와 맹부덕부대는 각지에 명령을 내려 “상부지외에서 벌리는 조선족의 모든 반일활동에 대해서는 우리는 방관한다, 상부지내로 들어오는것을 견결히 막아야 한다”는 방침을 제정했다. 3월 13일의 폭풍 1919년 3월 13일 17명 이름으로 룡정반일집회에서 반포한 . 기원 1919년 3월 13일이 밝아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지면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굵은 모래알까지 날려보내는 광란의 궂은 날씨는 대체 무었을 예고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룡정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녀인들, 지어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합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개산툰지방의 민중들은 자동의 정동학교 교원, 학생들과 함께 3월 12일 밤부터 주먹밥을 싸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민중들은 새벽에 떠나 명동학교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명동학교 학생들과 함께 나팔과 북을 울리면서 룡정을 향해 떠났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로두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렬을 지어 룡정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곳이 1919년 3월 13일 반일집회가 열렸던 곳입니다.” 최근갑선생은 룡정시중심유치원마당에 들어서면서 한구석에 세워져있는 기념석비를 가리켰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석비 정면에는 한자로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새겨져있었다. 석비뒤면에는 “1919년 3월 13일 연변인민 3만여명이 이곳에서 회집(會集)하여 반일대회를 거행하였다. 1995년 4월 15일 룡정3,13기념사업회”라는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저기가 천주교회당이 있던 자리인데 교회당 종소리가 울리면 대회를 거행하기로 했지요. 룡정빈관으로부터 룡정중학교(대성중학교)까지 가로 길이 빠었댔는데 길 남쪽은 치외법권내에 들어있는 상부지이고 치외법권내에 들지 않은 북쪽은 상부지외여서 대회를 상부지외에서 하기로 했지요.” 3월 13일의 반일집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일본총령사는 연길도윤에게 “만일 중국측에서 탄압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의 군경을 동원하여 탄압하겠다”고 통첩을 전했다. 이것을 알게된 장작림은 일본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발생될가봐 루차 길림독군과 성장에게 조선사람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것을 지시하였다. 연길도윤은 맹부덕군에 지시하여 령사관을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거사를 저지시키라고 하였다. 맹부덕은 13일 새벽부터 룡정거리에 보초를 세우고 순라대를 출동시켜 집집마다에 걸어놓은 태극기를 뽑아버리고 행인을 수색하였으며 룡정으로 들어가는 네갈래 통로른 전부 차단했다. 그러나 반일의 노한 물길을 막을수 없었다. 군중들은 총칼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룡정으로 모여들었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2만여명의 군중들이 집결했다. 그중에서 명동학교,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을 중심으로 320명의 “충렬대”가 조직되였다. 또 국자가 도립중학교의 조선인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자위단원 1000여명, 훈춘과 안도지방에서 하루 앞당겨온 용사들도 있었다. 독립선언축하회는 원래 정오 12시에 룡정천주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하기로 되었느나 지방군경들이 교회당의 대문을 닫고 종을 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당시 15살에 나는 림민호동지가 면바로 시위대오를 구경하느라고 교회당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림민호는 종옆에서 구경하고있었다. 대회측에서 대회를 선포하자 밑에 있던 사람이 “얘, 빨리 그 종을 쳐라”고 웨쳐서 얼결에 종을 힘차게 쳤는데 그것이 대회를 알리는 종소리로 되었다. 종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온 민중들이 태극기를 손에들고 대회장에 모여들는데 그 광경은 거세찬 폭풍우였다. 광야에서 열리는 집회였기에 군중들은 륜형을 짓고 그 중앙에 “정의인도>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오장기를 세웠다. 국자가 예수교목사이며 대회 회장인 김영학이 대회를 사회했다. 그는 우선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으로 된 “독립선언포고문”과 “고약3장”을 선독했다. 아(我)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4천년 력사의 방국(邦國)이요 우리는 2천만 신성한 민족이였노라. 그런데 아 력사를 시멸(示滅)하고 아 민족을 타파하여 기반하에 신음케 하며 롱락중에 고통케 함이 어언 십개 성상을 개력(開力)하였도다. 자(兹)에 아의 수부되는 경서에서 독립기를 선거(先擧)함이 사방이 파동하여 반도강산은 초목금수가 모두 향응하여 굉명(轟鳴)함일세. 우리 간도거류 80만 민족도 혈맥을 련속하며 성기(聲氣)를 상토하여 황천의 명소(明召)에 감열하여 인류의 계급에 동등하는바이다. 4352년(1919) 3월 13일 간도거류민일동 “독립선언포고문”랑독이 끝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어 류례균, 배형식, 황지영 3인의 독립주창연설이 계속되였다. 이에 군중들은 흐느껴 울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환호성을 터치였다. 천지를 진감하는 만세소리에 일본령사관에서 관리하는 간도보통학교의 학생들까지 뛰쳐나와 시위행진에 합류되였다. 이무렵 룡정시내 800호 조선족가옥마다에 태극기가 게양되여 모래를 날리는 광풍폭우속에서 힘차게 펄럭이였다. 대회가 끝나자 군중들은 일본총령사관을 향해 시위행진을 벌리였다. 철혈광복단 성원들이 맨앞장에 섰다. 기수 공덕흡이 “정의인도”라는 글자가 씌여진 오장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씨엉씨엉 걸었다. 그뒤로 명동중학교의 대오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기세 드높이 전진하였다. 군중들도 자발적으로 대오를 묶어가지고 뒤를 따랐다. 이때 맹부덕은 일본총령사의 사촉하에 졸개들을 거느리고 시위대오가 경과할 상부지계선거리에 총칼을 꼬나들고 대기하고있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군중시위대오를 막아선 맹부덕군대는 시위대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공덕흡의 기발을 빼앗았다. 이에 격노한 공덕흡은 수차 격투 끝에 기발을 탈환하여 가지고 정성스레 두손으로 받쳐들고 무정한 탄환에 선혈이 랑자하여 가지고도 계속 전진했다. 격분한 군중들이 군경들을 향해 돌맹이를 던지면서 방선을 돌파하려 할 때 반동군경들은 적수공권의 군중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수십명 군중들이 쓰러졌는데 공덕흡을 비롯한 10명이 당장에서 즉살하고 40여명이 부상당했다. 제창병원에 호송되여가 치료받던 도중 4명이 죽고(5명은 그후에 사망) 300여명이 체포되였다. 1919년 3월 17일, 1500여명 조선인동포들이 반일시위에서 순직한 14명 렬사를 합성리묘지에 모시고 추도식을 거행하는 장명. 대회조직자들은 즉시 시위대중을 해산시키고 구춘선 등 5명대표를 연길도윤공서에 파견하여 중국군대가 시위군중을 사격한 사건에 대하여 엄정히 항의하면서 수난가족들을 무휼하며 일체 손실을 배상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후 3월 17일 연변 각계층 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고 4천명이 룡정에 모이였다. 그들은 “조선독립순직자”라고 쓴 만장을 들고 희생된 14명의 령구를 메고 룡정 동남교외의 합성리공동묘지에가서 렬사들을 안장하고 “충렬자제공지묘”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3.13”반일운동에 참가한 한족들 “한족들도 ‘’3.13>반일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1919년 3월 13일의 정경을 설명했다. 앞장에 선 충혈대에는 동산소학교(한족학교)의 조선인학생과 한족학생들이 끼여들어 용감하게 전진했다. 조선인학생과 한족학생들은 어깨를 곁고 구령을 부르면서 나가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고 름름했다. 군경들이 막아서자 한족학생들이 새된 한족말로 질책했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는가! 부끄럽지도 않는가. 량심이 있는가!” “우리와 한편이 되어 나쁜 일본놈을 쳐야지 않는가. 총부리를 돌려라!” 한족학생들의 박력있는 질책에 군경들은 학생들 가슴에 견줬던 총을 내리면서 기죽기도 했다. 길회철도부설반대운동을 선도했던 관준언도 “3.13”반일운동을 지지했댔는데 그는 연길 북산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보호하기도 했다. 화룡현 소동구에 사는 안시영은 조선족뿐만아니라 한족군중들과도 단결하고 그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여 그들을 반일운동에 궐기시켰다. 마을의 한족 조옥재, 조옥귀, 조옥부 등 삼형제는 평시 일제와 경찰들에게 피해를 당해 적대감정을 가지고있었으며 정의감이 강한 지주였다. 안시영의 반일사상을 받아들인후 그의 령솔하에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3.13”의 연장으로 각지에서 반일시위가 련달아 일어났다. 1919년 3월 16일 두도구에서 1000명 반일집회가 있었고 이튿날인 17일에 이도구에서 4000명 집회가 있었댔는데 조옥재는 소동구부근의 한족들을 추동하여 이 집회에 참가하게 했는데 무려 100여명의 한족들이 반일집회에 참가했다. 3월 20일 안시영 등이 주도하에 전개된 룡두산 500명 반일집회에도 조옥재를 위수로한 한족민중들이 조선인민중들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조옥재 등은 반일무장단체를 성원하여 군수물자를 운송하여 주었고 또 반일무장집단을 위하여 주동적으로 군수물과 군자금을 헌납하기도 했다. 1920년 9월 국민회군이 이도구일때로 전이하여 왔을 때 한족들은 옥수수가루 200여근, 울로초신 100컬레, 무우 두마대, 조옥재집에서 자래운 200여근짜리 돼지 1마리, 현금 75원을 안시영이 준비해놓은 군수물자와 함께 조옥재가 친히 마차에 실어서 국민회군에 수송해주었다. 청산리전투때에도 조옥재는 마차로 부상자를 양개골에 세운 병원에 실어오기도 했다. 1924년 11월 국민회군이 북만으로 철회하기 위하여 과동준비가 수요될 때 소동구의 조옥재 등은 또 군수품을 직접 자기 마차에 실어서 이도구 자피거우에 운송하였는데 운송한 군수품으로는 동복 240벌, 보손 150컬레, 토시 100개, 피나무초신 250컬레, 초신 250컬레, 현금 250원이였다. 국민회군의 안무장군이 일본경찰에게 참살된후 유해를 룡정 동산에 안치하였다. 수많은 반일청년들이 안무장군의 묘소에 와서 참배는바람에 일이 잘못 뒤틀릴 것 같아 묘소를 옮기려고 할 때에도 조옥재가 나서서 집접 마차로 유해를 소동구의 내풍동에 실어왔다. 반일에 떨쳐나선 한족들을 어찌 조옥재형제들뿐이겠는가. 수많은 한족들도 항일에 떨쳐나섰으며 공훈을 세운 것이다. “3.13”운동은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3.13”은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있게 추동했을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족들을 반일에로 궐기시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여러 민족이 공동전선을 이루어야 하며 반드시 무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경험과 교훈을 얻게 되었다.“3.13”반일운동은 연변의 반일운동을 반일무장투쟁으로 전환시켰다.
516    제10장 명동과 명동학교 댓글:  조회:2781  추천:0  2014-02-04
1930년 12월 명동학교 졸업사진. 중국조선인근대문화의 발상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 명동의 5대가족 선바위는 장려한 바위산이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董閑)이가 이곳 땅을 차지하고있을 때만 하여도 선바위를 비둘기바위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깎아지른 층암절벽사이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였던것이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 등 회령과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높던 4대가족 142명이 하루사이에 여기에 이사왔다. 그때부터 비둘기바위를 선바위로 이름을 고쳤는데 아마 민족의 강한 절개와 굳은 신념의 표현이였을것이다. 선바위에 오르면 오랑캐령에서 발원하는 륙도하 량켠의 마을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장재촌, 동거우, 룡암촌(지금의 명동촌), 중영촌, 성교촌, 퐁락촌, 수남촌...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것은 김약연을 위수로 한 5대가족인데 이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립하고 반일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선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왔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을 바라보노라니 떠날 때 들려주던 연변대학 력사교수 박창욱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박교수는 5대가족에 대하여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남종구는 종성5현의 한분인 남명학의 손자인데 이주시엔 환갑이 넘은 로인이였다. 그는 7명의 가족을 거느리고 제자인 김약연을 따라 명동지구로 이사해온것이다. 김약연은 일족 31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 처음에는 경제형편이 너무도 빈궁하여 땅도 없었으나 동생 유연이와 함께 7도구의 산골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거기에서 얻은 수확고로 동한지주의 집과 림야를 사서 1901년 규암재를 꾸렸다. 김하규는 일가족 63명과 함께 명동에 이주, 명동마을 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문병규는 일가족 40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하여 왔다. 로동력이 많고 재력이 있어서 4대가족중 제일 부유했는바 룡암촌과 중앙촌에 이르는 넓은 벌을 가지고있었고 대사동에도 밭과 가산이 있었다. 윤하현은 1900년에 명동으로 이사하여왔으니 4대가족 집단이주에는 속하지 않는다. 부친 윤재옥의 인솔하에 1886년 종성에서 광개향 자동에 이주하여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돈을 모았다. 후에 일가족 18명을 거느리고 명동으로 이사와서 룡암촌에 정착, 토지와 재산이 꽤 되었다. “명동에 집단이주한 5대가족은 북부조선에서 빈궁하여 살길을 찾아온 기타 류랑민과는 달리 세대로 내려오면서 관북에서 변경방술에 종사하던 무반출신의 후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종성5현의 후예들이거나 문하사람으로서 학식이 있고 다소나마 재력도 있는 유학자들이였지요. 그들이 집단이주한 목적은 척박하고도 값이 비싼 조선의 땅을 팔고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서 개간하여 잘살아보자는것이였고 썩어빠진 조선에서는 어찌할수 없으니 중국의 연변땅에 가서 조선민족의 ‘밝은 사회’를 건설하고 새 살림을 하자는것이였지요.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구국구민(救國救民)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습니다.” 이들의 이주목적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동학교 선바위에서 내려 륙도하를 거슬러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니 장재촌이다. 장재촌마을 뒤산기슭에 멀리서도 유표한 보이는 봉분 세 개가 있다. 김약연과 부인 안연, 장자 김정근의 묘소이다. 1901년 김약연은 자기 동생과 함께 장재촌에 있는 80평방 되는 한족집을 사서 “규암재”란 서재를 꾸린 다음 2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인 뒤를 이어 대사동에서는 김하규가 “소암재”, 중영촌에서는 남위원이 “함한서재” 등을 세웠다. 그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자체로 학전(學田)을 개간하였으며 학전에서 나는 소출로 서재를 꾸려나갔다. 1908년 명동에서는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려고 규암재, 소암재, 중영촌 함한서재를 합쳐서 명동서숙을 세웠는데 룡정의 서전서숙의 근대지향인 반일민족교육방침을 계승했다. 세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이때로부터 주위의 마을을 망라하여 명동이라 통칭했는데 “밝은 조선민족의 새 민족공동체라는 뜻”(박창욱)이다. 1909년 북간도교육단 단장 정재면이 명동에 왔다. 그의 영향하에 김약연 등은 근대화한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라고 개칭하였으며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최봉기를 서기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으며 유가사상을 버리고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1910년 3월에는 연변에서의 첫 민족중학교를 병설하여으며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성환, 김승근, 박경철, 김순문, 김치관 등 학식이 연박한 반일지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다. 1911년에는 또 리희순, 정신태, 조선에서의 첫 녀기자인 우봉운 등을 초빙하여 연변에서의 첫 녀자민족학교를 병설했다. 그리고 마을에는 야학부를 꾸려 어른들의 문맹을 퇴치해주었다. 장재촌을 지나 계속 걸으면 길옆에 “윤동주생가”라고 새긴 자연석으로 된 석비가 한눈에 안겨오는데 길아래마을이 바로 명동촌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커다란 기와집이 한눈에 안겨온다. 새로 복원된 명동교회당이다. 교회종각이나 십자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옛날의 종교적분위기가 다분이 안겨오는 교회당이다. 마당 한쪽의 기와비각속에 김약연공덕비가 모셔져있었는데 공덕비는 모진 세월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고있었다. 웃모서리가 사정없이 끊기여버린것이다. 교회당옆에 마을의 정미소가 있고 정미소 왼켠에 난 길에 들어서면 금방 윤동주생가에 닿을수 있다. 8간기와집으로 된 윤동주생가 마당은 언제보나 깨끗하다. 몇 년전에 찾아왔을 때만 하여도 물을 기러 마셨댔는데 우물은 작년 장마에 꺼져버려 볼품없이 되어있었다. 명동학교자리는 마을의 중심지에 위치해있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밭으로 쓰고있었다. 룡정시문화유물조사자료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원래 4채의 단층건물로 되어있었다. 학교본부가 차지한 집은 길이 33메터, 너비 6.5메터였는데 서남향으로 앉은 단층벽돌집이였다. 이 건물 서북쪽 50여메터되는 곳에 동남향에 길이 24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남자중학부였고 본부 동쪽 150메터되는 곳에 서남향으로 길이 26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녀자중학부였다고 한다. 학교의 운동장은 본부의 동북쪽에 있었다.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의 검)이 깃 치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쓸쓸한 터밭을 향해 서있을라니 “명동학교교가”를 부르면서 발걸음도 씩씩히 군사훈련을 하던 열혈청년들의 기세 드높은 목소리가 귀전에 울리는것 같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하고있었다. 조선어문에 있어서 민족 글과 말을 알게 하는 것은 민족문화의 향상과 보급의 기초이며 문화 향상과 보급은 민족생존과 실력양성의 첩경이라고 인정되였다. 력사교육에서는 1915년 조선에서 편찬한 금서로 된 “유년필독”, “오수불망”, “대한사략”과 연변에서 계봉우가 편찬한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 등을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애민의 가치관, 침략자에 대한 반항정신을 불어넣었다. 력사학교수 황의돈, 리기창은 력사과작문에서 학생들의 작문이 아무리 좋아도 “반일”과 “민족독립”이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는데 이는 교장 김약연을 위수로 한 학교의 전통으로 되었다. 창가 역시 명동에서는 조선어문과와 마찬가지로 중시되였는데 창가는 민족의 존엄성과 적에 대한 저항정신을 제고시키는데 작용이 켰다. 체조는 병식체조를 말하는데 앞으로의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로 되었고 학생들을 일정한 군사기초지식이 있는 반일무장투쟁의 결사대, 전위대로 육성하기 위한것이였다. 민족의식에 대한 제고는 일제에 대한 증오에서 깊이 표현되였다. 교장은 “日本”을 “曰本”으로 또는 “倭놈”으로 불렀고 학생들도 따라했다. 후에 중국의 비행사로 된 서일포는 자기의 이름자에 있는 日자를 曰자로 고쳐 서왈포로 고쳤다. 학교의 명절에 사용하는 만국기에는 태극기는 있으나 일장기는 없었고 지리부도에도 조선을 독립국가로 여기면서 일본본토와 색깔을 달리 색칠했다. 명희선교원은 가끔 옷을 거꾸로 입고 다녔는데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는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서였다. 1910년부터 1925년에 명동중학교가 페쇠되기까지 15년간 명동학교에서는 12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그들중에서 저명한 반일인사와 교육자, 수많은 반일무장투쟁이 투사들이 나타났다.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의 지도자들인 마진, 남세극, 최기학, 마룡하, 박창익, 윤영식, 김석관, 김정규 “3.13”반일시위운동에서 희생된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많은 결사대원들, 경신년대토벌에 학살당한 김순문을 위수로 하는 의사들 그리고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한 송산우, 연화혁명위원회 군사부장 마천룡, “8.1”길동폭동의 지도자 마천목 등은 다 이 학교의 종업생들이다. 20년대후에도 많은 인재들이 나타났는데 조선영화의 창시자 라운규, 비행사 서왈보, 시인 윤동주, 송몽규, 작가 김창걸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서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리자 북만과 로령의 연해주와 씨비리야, 조선국내에서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류학을 왔다. 행동이 곧 나의 유서 “김약연목사님은 언제나 조용하신분이였습니다. 천둥이 쳐도 끄떡하지 않을 그런 분이시였어요. 언제나 한복차림을 정히 하고 넙적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구변과 웅변에 능하셨고 사리가 밝고 인정스러운 분이시였답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는데요 목사님이 나를 업어주었어요. 목사님은 남을 욕하는 법이란 없었답니다. 그분이 교장으로 계실 때 강의하시다가도 누구든지 강의에 집중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고 자기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데요. 학생을 책망할 대신 자기가 강의를 잘못했기때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했다는겁니다.” 명동학교 교장으로 일하다 퇴직한 김재현씨의 말이다. 유가(儒家)사상을 숭배하던 김약연은 신앙마저 바꾸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그들의 영향으로 하여 유교만 고집하던 민중들은 신문화를 접수하면서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는바 1913년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와 학교가 병립된것이 36개소, 그 영향으로 세워진 사립학교가 62개소나 되었다. 김약연이 쓴 “동만료회 30년력사”라는 글에는 “3국전도회의 본부가 명동에 있다보니 각 교회와 학교의 임무가 거의 전부가 명동학교 출신으로 충당였다”고 씌여있다. 이런것을 미루어보아 연변에서의 기독교문화의 전파, 기독교를 통한 사립학교와 신문화의 발전은 명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다. 김약연은 서양문화인 기독교를 접수하면서도 민족의 리념, 사상과 의지만은 잊지 않았으며 민족정신을 언제나 주되는 위치에 놓았다. “명동이 중국조선민족문화의 중심지로 되게 된 것은 김약연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창욱교수는 김약연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무진장했던 김약연은 무슨 일에나 앞장섰다고 한다. 나무를 메여도 세사람몫을 담당했고 기와나 벽돌을 구울 때에도 힘든 일을 남먼저 하면서 기술을 제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배워주었다. 후학들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자신들의 토지가운데서 10/1의 제일 좋은 토지를 학전(學田)으로 바쳐 공동소유로 하게 하였는데 1930년대에는 8만평으로 증가되였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거의 전부 공동체에 바쳤다. 반일의사 안중근, 구춘선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구국의 방도를 토의하기도 하고 독립의 꿈도 무르익히기도 하였다. 일제가 명동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명동을 “불령선인의 소굴”로 간주하고 감시와 취제를 늦추지 않던 1919년 3월 21일, 김약연이 간도대표로 로씨야의 니꼬리스크에 파견되였다가 돌아와보니 일본경찰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그러나 청나라에 입적한 김약연은 청나라 당국에 의해 2년동안 연금되여 일제의 체포망을 피할수 있었다. 1922년 연금에서 벗어난 그는 어느덧 55세의 나이가 되었다. 반일민족운동은 일제의 미친듯한 토벌로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사회주의사조가 바야흐로 일고있었다. 1924년에는 자연재해로 하여 경제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룡정이 새로운 문화도시로 된 형편에서 그는 마을사람들과 상론하여 중학교를 은진중학교에 넘기기로 하고 소학교만 명동에 남겨두었다. 김약연은 2년동안 정재면, 구춘선, 마진 등과 련계를 맺어 간도국민회를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실패하고말았다. 1929년 61세의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간 수학하고 목사로 된다음 명동으로 돌아와서 명동책임목사로 되어 기독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자 1937년 룡정으로 이사와서 은진중학교와 명신녀자학교의 리사, 리사장으로 있다가 1942년 광복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였다. 김약연의 제자 림재준은 스승을 이렇게 찬송했다. “규암선생의 일생은 맹자가 수양했던것과 가까운바 담담하나 싫지 않고 간단하나 고상하며 온화하면서도 리지적이였습니다. 선생의 일생에서 먼것은 가까운데서 비롯됨을 알수 있고 그 행동에서 결백함을 알수 있으며 사소한것에서 현명함을 알수 있습니다.”(계속)  
515    제9장 서전서숙 댓글:  조회:2133  추천:0  2014-02-04
1906년 룡정에서 설립된 서전서숙 룡정에  뿌리  내린  반일교육의 불씨 일제의 문화침략을 반대하는 불길로 서전서숙옛터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쪽 구석에 두아름되는 비술나무 한그루가 름름히 서있다. 비술나무에는 “서전서숙기념나무”라는 패쪽이 걸려있는데 패쪽에는 이런 패문이 쓰여져 있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재래의 구학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학교교육에로 첫 걸음을 떼였는바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조선족신학교육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 뿌리내린 이 나무는 력사의 견증으로 리상설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해가고있다. 기념나무 곧바로 뒤에 정자가 있는데 정면 웃모서리에 “리상설정(李相卨亭)”이라는 네글자가 새겨져있다. 정자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 “쏘련홍군동북해방기념탑”과 “심련수시비”가 세워져있고 그 중간에 바로 자연석으로 다듬은 “서전서숙”옛터 유적지기념석비가 세워져있다. 석비 정면에 “서전서숙”이라라는 네글자가 한자(漢字)로새겨져있고 반듯이 놓여진 다른 돌에 아래와 같은 비문에 새겨져있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요 민족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開塾 하였다. 1995년 4월 15일 룡정3.13기념사업회 4월 4일9(2004년). 일요일이면서 청명날이여서 그런지 교정은 유난히 조용했다. 조무래기 몇이 운동장 저쪽에서 무슨 장난에 심취되여 있는지 쪼크리고 앉아 재잘거릴뿐이였다. 정자의 콩크리트바닥에 아무렇게나 터버리고 앉은 전임 룡정시문련 주석 김재권선생은 고즈넉한 교정을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다가 자신이 펴낸 룡정시관광지점안내서 제1권 《유서깊은 해란강반》을 펼치더니 당시의 서전서숙을 찍은 사진을 가리킨다. 깔끔한 초가 앞마당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총총히 걸어 나오는데 포도넝쿨로 보이는 바자기둥에 “瑞甸書塾”이라고 새긴 간판이 보기 좋게 걸려있는 사진이였다. “서전서숙은 중국 조선인지역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신학사립학교인데 비문과 패문에 새겨진바와 같이 1906년 ‘헤그밀사사건’때 ‘돌아오지 않은 밀사’로 이름을 떨친 저명한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선생과 갈라놓고 말할수 없지요. 리상설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조선 충천북도 진천고을 덕산에서 태여났는데 조선왕조의 부승지(副承旨)로 리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적 있는 리룡우의 양자로 들어가 리희영, 리시영, 려조현 등과 리제촌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후에는 류린석에게서도 학문을 배웠습니다.” 김재권선생은 박밀듯 리상설지사에 대해 이야기 했다. 반일지사 리상설 서전서숙에 대해 설명하고있는 원 룡정시문련 주석이며 저명한 민간문학가인 김재권선생. 리상설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1905년 “을사매국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때 리조 의정부의 참찬이였다. 그는 고종(高宗)의 고문인 헐버트박사와 사귀면서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고 구미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지식도 습숙(習熟)했으며 천주교, 불교, 유교 등 종교철학과 천문학, 지리, 고등수학, 법학 등도 습득하여 당시 학계의 권위자로 되었다. “20세때에 벌써 비범한 재주를 보여주어 ‘문행남하위관(文行南下蔚官)’이라는 찬송까지 듣게 되었다. 그후 그는 승정원 비서감, 비서랑, 성균관 교수, 성균관 관장, 탁지부 재무관 등 관직을 지냈다. 그는 고종에게 일제의 침략을 배척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였다. 그래서 당시 ‘광무가지(光武嘉之)’라는 말까지 세상에 전해여진 반일의사였다.”(일목 “조선족지구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반일학교 서전서숙”) 1904년 6월 리상설은 동지들과 함께 “대한협동회”를 조직, 회장직무를 맡았다. “대한협동회”의 회장단은 탄탄한 독립의사들로 무어졌는데 부회장은 “헤그밀사사건”때 화란 헤그에서 일제의 작간으로 제2차만국평화회의참가를 거절당한후 이에 격분하여 자결(화병으로 사망했다는 일설도 있다)한 리준이였다. 총무에 정운복, 평의장에 리상재, 서무부장에 리동휘, 편집부장에 리승만, 지방장에 량기탁, 재무부장에 허위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박하여 을 체결하던 1905년 11월에 리상설선생은 의정부 참찬으로 발탹되였는데 곧바로 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옥에 갖히기도 했지요. 일제는 이등박문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통감부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이 망국의 위기를 만회할수 없다고 생각한 리상설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만회해보려고 민족독립의사들을 서울에 모이게 한후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김재권선생은 정자의 천정에 그려져있는 리상설선생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말끈을 계속하여 풀었다. 그번 모임에서 민족독립의사들은 해외에다 민족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할 것을 결정, 구체지방을 북간도 룡정촌으로 하기로 했다. 룡정은 조선인들이 집결된 곳이기에 반일교육을 진행하기 편리할뿐만아니라 북으로는 로씨야와 가까이 있어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편리했고 조선과는 두만강 하나를 사이두고있어 조선과 래왕하기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리상설 등을 선봉으로 해외로 나가기로 했다. 1906년 4월 18일(음력) 리상설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가산을 처리하고 리동녕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청도에 도착, 그 길로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리상설과 리동녕은 정순만(즉 왕창동), 황달영(즉 전공달), 김우용(즉 김동환), 려조현(즉 려준), 박정서(즉 박무림), 홍창섭 등을 만나서 연변에 나가 교육진흥사업을 밀고나가기로 협상했다. 그들은 그해 10월에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나 룡정촌에 와서 자리잡은후 리상설의 자금으로 룡정기독교회장 최병익의 새로 지은 8간집을 사서 “서전서숙”을 창립하게 되였다. 반일민족교육의 요람 학교경비의 대부분은 리상설선생이 개인재산을 털어 해결하였다고 한다. 초대숙장은 리상설이 맡고 교원으로는 리상설, 려조현, 김우용, 황달영이 맡았으며 정순만, 리동녕 등이 구체운영을 맡았는데 제일 처음 학생 22명을 받아들이고 반일을 취지로 한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숙에서는 학생을 갑, 을 두반으로 나누었는데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급반이였다.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들로는 력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등이였다. 리상설은 직접 “산술신서” 상, 하권을 편집하여 갑반학생들에게 교수하였고 황달영은 력사와 지리과를, 김우용은 초급반의 산술과를, 려준은 한문, 정치학, 법학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다 열렬한 반일민족운동가들이였기에 모든 수업에서 반일애국사상을 관철하는 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서전서숙의 교육이 일제에 대한 비할바 없는 증오로 충만되였음을 1907년 9월 16일 통감부간도파출소 소장 사이또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있다. “한국황제가 양위하였다는 소식이 이곳(연변)에 전하여오자 교직원들과 년령이 많은 학생들은 모두 슬피 울었다. 그중 왕창동(정순만교원)이 더욱 심하였는데 그는 옷을 찢고 모자를 땅에 팽개치면서 분개해 하였다.” “간도서전서숙와산실록”에도 이렇게 기록되여 있다. “헤그만국회의에 조선대표들을 참가시키지 않기로 하였다는 비보가 우리 학교(서전서숙)에 전하여오자 전교의 교직원, 학생들은 대성통곡하였다.” 현규환선생은 자신의 저서 《한국류이민사》에서 서전서숙의 교육정신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동척간행 ‘간도사정(間島事情)’ 기사중에 당시 통감부는 한국정부와 협동하여 간도한인보호책을 내정하고 1907년 봄에 륙군중좌 사이또 스에지로와 사무관 시노다 지사꾸 등을 밀행케 하여 간도파출소의 예정지 및 기타의 정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행은 룡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의 주도자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리상설은 산책을 하려고 문을 나서려 하다가 이자들의 온뜻을 묻게 되었는바 일행은 상업시찰도중에 들렸다고 하였다. 때는 점심시간이였으므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더운물과 그릇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교위원들은 빌려줄수 없다 하여 랭랭히 이를 거절하고 리상설의 경위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일행은 할수 없이 강역에 가서 강물로 목을 추겨가며 식사를 끝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하였는가는 알수 없는 일이다” “간도문제의 회고”를 쓴 사이또의 수행 사무관 시노다 지사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청사를 앉힐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하여 한 학교에 들렸는데 교장으로 보이는 조선인신사가 불손한 태도로 우리 일행이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후에 알고보니 불손한 태도를 취하뎐 신사가 바로 우리 나라를 놀래우고 또한 리태왕의 퇴위를 반대하던 리상설임이 판정되였다.” 1907년 4월 고종왕의 밀서를 갖고 리상설의 동생 리상익과 리준이 리상설을 찾아왔다. 밀서의 내용은 5월에 열리게 되는 화란의 수도 헤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리준, 리위종(로씨야주재 공사 리범진의 아들)과 함께 수석특사로 참가하라는것이였는데 고종의 친필밀서였다. 리상설은 리준, 리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로씨야에 가서 로씨야주재 한국공사 리범진과 상의한 끝에 로씨야의 니꼴라이황제와 련계하여 로씨야대표의 알선으로 만국회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헤그에 이른 이들은 일제의 작간으로 회의참가를 거절당했다. 이에 격분한 리준은 자결로 반항했다. “리상설은 그 길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각국을 역방하다 다시 울라지보스또크로 돌아가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습니다. 1910년 권업회를 설립하여 사업진흥에 애쓰면서 하바롭쓰크로 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여 사무쳐오는 통분으로 침식을 잃고 지친 끝에 병든 몸을 코디스크로 옮겨 심음하다가 1917년 음력 2월 9일 눈을 못감고 천추의 원혼이 되고말았습니다.” 김재권선생의 비통에 찬 목소리다. 리상설은 서전서숙을 떠나면서 숙장을 려준에게 맡겼다. 려준은 김우용, 황달영, 박정서 등과 함께 계속하여 서숙을 운영해나갔다. 그해 8월 통감부간도파출소가 룡정에 세워졌다. 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는곳마다에서 간섭, 저애했다. 지어는 회유정책으로 보조금을 지불하겠으니 합작하여 운영하자고 하기도 했다. 이에 서전서숙에서는 단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연이어 들이닥치는 경제난과 일제의 부단한 간섭으로 1907년 9월경 페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로씨야로 갈 목적으로 룡정을 떠나 훈춘현의 탑도구(塔道溝)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에서 1년간의 수업을 끝맺고 비장한 졸업식을 올린후 3개반 74명을 졸업시켰다. 각지의 반일학교들 서전서숙 운영자들은 합작하여 학교를 운영하자는 사이또의 제의를 단연 거절하고 학교교사를 팔아버렸다. 1908년 사이또는 방매한 서전서숙을 사들여 친일학교인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후 서전서숙의 졸업생과 일부 교원들은 연변 각지에 흩어져 근대과학문화와 반일민족사상을 전수하는 사립학교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친일교육을 반대하고 수구적인 구학서당을 개혁하면서 일제의 문화침략에 대항해나섰다. 1908년 서전서숙 교원 박정서와 졸업생 김학연, 최기학 등은 명동에 가서 김약연 등을 설복하여 구학서숙인 규암재(圭岩齋)를 개혁하고 명동서숙을 설립하였으며 국자가 서쪽 와룡동에서는 서전서숙출신인 리병휘 등이 교편을 잡으면서 창동서숙을 창동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리동춘, 김하석, 김립, 윤해, 구춘선, 계봉우, 장기영 등에 의하여 소영자에 길동기독학당이 설립되였다. 길동학당은 원래 반일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정법과와 중학부 그리고 부속소하교와 녀자야학부를 설치하였는데 학생은 모두 100여명이였고 합숙제를 실시하였다. 나중에 경제난으로 정법과와 중학부를 페지하고 속성사범과로 개편하였다. 길동학당은 그후 1914년에 광성학교로 개칭되였다. 1907년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리진호, 김리택, 송창회, 서성권, 문경 등은 창동학교를 설립하였다. 연길시 소영향 민흥촌 와룡동에는 1935년에 창동학교를 기념하여 세워진 “사은기념비”가 지금도 건재해 있다. 1912년 화룡현 삼개사(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후저동에서 김성래, 김윤승에 의해 사립정동중학교가 설립되였다. 1912년 전후 북간도지방에서는 사립청파학교(화룡현 호천포), 사립덕흥학교(지신사 영암촌), 사립장동학교(덕신사 장동촌), 사립영신학교(룡정촌) 등 반일사립학교가 우후죽순마냥 설립되였다. 1916년 일본측 조사에 따르면 그 시기 조선인학교수는 182개였고 총학생수는 3,836명이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928년에 북간도지방에는 사립학교가 211개나 있었는데 은진중학교(1917년 7월에 설립되고 1920년후에 중학부를 증설), 명신녀자중학교(1920년 6월), 일광학교(1920년 8월), 동흥학교, 동흥중학교(1921년 4월), 영신중학교(1921년 6월), 해성소학교(1921년 8월), 대상중학교(1921년 10월) 등 이름난 학교들도 이 시기에 설립되였다. “서전서숙은 페교되였지만 서전서숙에서 배양해낸 한점의 불꽃들은 그후 연변 각지에 흩어져 이같이 반일민족하교를 설립하면서 연변의 광범한 청소년들에게 근대과학지식과 반일민족사상을 전파하는 중견인물로 되었지요.” 김재권선생은 서전서숙기념석비와 서전서숙기념나무를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 말한다.(계속)
514    제8장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댓글:  조회:2073  추천:0  2014-02-04
조선인사회의 지도자 김약연선생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단체들 조선인  사회의  건설을  위해 몸부림 1910년대의 반일단체들 “간도협약”이 체결되자 연변의 조선인들은 한결같이 일떠나 룡정에다 간도총령사관을 설치하고 조선인에 대하여 “치의법권”하는것을 반대해나섰다. “간도협약”이 맺어지자 일제는 상부지내에서 “령사재판권”을 실시했고 잡거구의 조선인에 대해서는 “지조권(知照權)”, “청심권(聽審權)”, “복심신청권(復審申請權)”을 실시하려고 책동했다. 이에 각지 진보적인사들은 반일단체를 묶어 저항해나섰다. 이런 단체들가운데는 반일보황주의를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었고 자산계급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었으며 러시아와 중국의 급진파들과 련합전선을 결성할것을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었다. 물론 조선인반일민족전선은 신구사상의 교체시기에 처해있어 일정한 경향성은 있었으나 료원의 불길같은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해 그 누구도 막을수 없었다. 1910년 훈춘현성에서 리종호 등을 주요간부로 한 해도회(海島會)가 성립되였다. 연해주와 간도에서 한글자씩 따내 이름한 이 단체에서는 러시아와 연해주, 훈춘, 간도의 반일지사들간의 련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각지와의 통신련락에 전력하면서 일제의 동태를 정찰했다. 1911년 왕청현 덕원리에서 대종교수령 서일이 중관단(重光團)을 묶고 단군숭배를 반일민족사상으로 고취, 반일인재양성에 힘쓰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서일은 후에 자신이 건립한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 총재를 맡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무력강화사업을 밀고나갔다. 북로군정서 산하에는 총재부와 군사령부가 있었는데 김좌진장군이 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북간도 룡정거리. 1912년 왕청현 백초구에서 조상갑을 단장으로 하는 급당(急黨)이 성립, 중국신해혁명에 편승하여 민중을 폭동에로 궐기시켜 민족독립을 실현하려 하였다. 1912년 훈춘현성에서 김학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상무회(商務會)가 성립, 훈춘시의 시민과 상인을 반일민족운동에 궐기시켰다. 1912년 화룡현 덕신사에서 김태일을 단장으로 하는 민권당(民權黨)이 성립되였다. 종지는 급당과 동일했다. 1912년 왕청현 라자구에서 김천보를 회장으로 하는 농상회가 성립되였다. 농상회는 농업과 상업을 추진하는 단체로 표방했으나 실지로는 “반일흥한(反日興韓)”을 주장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하여 산업을 진흥시키려 했다. 1913년 훈춘현성에서 황병길을 회장으로 하는 기독교교우회가 성립되였다. 기독교교우회에서는 기독교신자들을 반일민족운동에 궐기시키기에 힘썼다. 1913년 훈춘현에서 박상규를 총리로 하는 둔전영(屯田營)이 성립되였다. 이 조직에서는 중한반일인사들을 련합하여 반일공동전선을 결성할것을 주장했다. 1914년 연길현 의란구에서 황성현을 회장으로 하는 친목회가 성립되였다. 이 단체에서는 일제의 통감정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호상협력할것을 주장했다. 그외에도 연길현 동성용에서 성립한 사우계(士友契), 룡정에서 성립한 청년친목회, 국자가에서 성립한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 등 수많은 반일단체들이 있었는데 이런 반일단체들에서는 일제의 중국침략과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인에 대해 식민통치를 유지하는것을 반대해 나섰다. 그중에서도 1913년 5월에 민국정부의 인정을 받으면서 성립된 “간민회(墾民會)”가 영향력이 큰 반일단체이다. 간민회는 후에 반일보수단체인 “농무회”와 첨예하게 대립된다. 조선인사회 건립 위하여 “간도협약”이 체결된 1개월후인 1909년 10월, 화룡현의 진보적인사들인 박무림, 김약연 등 30여명은 일제의 “치외법권”을 반대하기 위하여 “한민자치회”를 결성하고 민중을 동원, 일제와 그 주구단체인 “일진회”의 죄악을 폭로단죄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들은 연변에서 “민족자치”를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듬해 1월 연길부청에 인가신청을 제기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족들이 일본과 청나라를 반대하여 “독립하려 한다”고 날조하면서 청나라에 “한민자치회”를 해산시킬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연길부윤 도빈(陶彬)은 “귀화입적”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청나라통치를 탈리하여 “조선인자치”를 실시하는것을 허락할수 없다고 했다. 청나라 역시 조선인들이 청나라통치를 벗어나는것을 두려워했던것이다. 1910년 3월 조선인종교계인사 40여명이 조선인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국자가에 “간민교육회”를 설립하려고 연길부윤 도빈에게 인가신청을 하였다. 도빈은 조선인교육에서 “중국어를 주요과목”으로 가르치고 교수법과 기타 교과서 등도 “청나라의 지도에 의거”할것을 전제조건으로 “간민교육회”를 인정하여 허락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귀화입적한후에는 중국경찰학당까지 졸업한 중국어에 능통한 반일친중국파이며 조선족교육가인 리동춘(1873년생)이 “간민교육회” 회장으로 임명되였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로임까지 지불했으며 수하에 서기 몇사람을 두고 일하게 했다. “간민교육회”는 지회를 각 현에 건립하였는데 1911년의 통계에 의하면 회원이 13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간민교육회”는 저명한 반일운동가인 리동휘, 김립 등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받기도 했다. 특히 소영자 길동학당에는 “간민교육회”의 중견인물들이 운집하여 있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간민교육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간민교육회에서는 ‘조선이 망했으니 조선에다 국적을 둘 필요가 없다. 조선에 국적을 둔다는것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겠다는 말과 같다. 국적을 중국에다 옮기자’는 반일친중국사상을 선전하면서 ‘신학’을 제창하고 ‘구학’을 개량하기에 힘썼습니다. 청나라조정은 조선인들의 이러한 활동을 환영하였습니다.” “연길부윤 도빈은 간민교육회내부에 ‘간민교육연구회’를 비밀리에 설치하게 하고 그 회원들에게 조선인을 통치함에 있어서 나타난 문제들을 조사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의견들을 제출할 임무를 주었다.”(전신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동맹회”는 만청봉건통치를 뒤엎고 중화민국을 창건하였다. 중화민국림시정부에서는 “련성자치제(聯省自治制”)를 주장했다. 이것은 “간민교육회”의 대단한 활력소였다. “간민교육회”에서는 리동춘 등 4명의 대표를 북경에 파견하여 려홍원(黎元洪)부대통령을 만나 연변지구 조선인사회상황을 보고한후 “간민자치회”의 성립을 허락해줄것을 바랐다. 려원홍은 찬성을 표시하면서도 “자치”란 두 글자를 취소할것을 지시하였다. 1913년 5월 “간민교육회”는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고 국자가에서 총회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간민회장정”을 정식으로 통과한후 간부들을 선거,임명하고 동남로관찰사서(東南路觀察使署)의 인가를 받았다. 저명한 반일활동가인 김약연이 회장으로 당선되였다. “간민회”는 자기의 종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간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에 이주한지 40여년이 되고 간민인구도 수십만에 달하나 식견이 어둡고 종래로 흩어져 거주하기 때문에 통일된 규범도 없다. 이에 간민회를 조직하여 민중지간의 감정을 소통하고 중국의 법률을 연구하여 민중들을 민국의 법률에 복종하게 하며 공화정부의 보호에 의거하여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언어, 풍속의 통일을 기하여 노력할것이다.” “간민회에서는 망국노를 원치 않는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반에서 벗어나 중국국적에 가입하고 중국정부에 의거하여 중국법률의 보호하에서 자치를 실시하며 나아가서는 연변을 반일민족운동의 기지로 건설하려고 하였다.” (전신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마침 민국정부에서도 1912년 국적법을 제정, 반포, 조선인들에게 귀화입적하여 일제의 통치기반에서 벗어날것을 요구했다. 민국정부에서는 연변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인들이 일제의 통치기반에서 벗어나 중국의 통치를 받기만 하면 연변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령토주권을 수호할수 있다고 인정하였던것이다. 간민회에서는 지체없이 “입적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민회에서는 또 구학을 반대하고 신학을 제창하며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봉건가부장제와 봉건미신활동을 반대하는 “사숙개량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들의 개화를 추동하였다. 각지에 야학교와 식자반을 꾸려 문맹퇴치사업도 전개했고 농민들로 하여금 생업을 개발하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기 위해 “식산흥업(殖産興業)”운동도 벌렸으며 조혼을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간민회에서는 러시아의 “권업회”와도 밀접한 련계를 가졌고 미국과 러시아에 건립된 “국민회”와도 련계를 가지면서 비밀리에 반일민족활동을 전개하였다. 간민회에서는 간민교육회를 계승하여 연변에서의 반일문화계몽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펼쳐나가면서 조선인자치운동을 전개했다. 간민회의 활동을 상해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1920년 1월)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간민회의 조직과 활동은 간도조선인사회의 새기원을 열어놓았다.”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 간민회의 활동은 연변에 살던 유림(儒林)들의 강력한 반발을 자아냈다. “그것은 간민회가 주장하는 민주공화정치와 신문화교육운동은 공매지도를 ‘중화(中華)’사상으로 이어가려는 유림들의 주장과는 어긋났고 또 그들의 사회기반이였던 서당교육을 궁지에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김춘선 “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 이에 유림들은 사회단체로서의 “농무계(農務契)”를 조직하여 간민회와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공교회(孔敎會)를 건립하여 신앙활동으로 대중적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1913년 6월 29일,간민회가 성립된지 몇 달 안되여 연변의 유림들은 연길현 지신향 솔완자에 모여 농무계를 출범시켰다. 최남기가 총회장에 당선되였다. 그해 11월에 200여명 유림들이 모여 “공교회연길지회”를 정식으로 창립하고 공자묘까지 세웠다. “농무회와 공교회에서는 조선인들의 입적을 반대했으며 입적한다는것은 민족과 조상을 배반하는것으로 여겼습니다. 또 신학을 반대했는데 신학에는 인류교육의 최고의 도덕이 없다는것이였습니다. 1912년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된 원세개는 공맹지도를 국교로 삼는다고 공포했습니다. 때문에 공교회를 믿어도 중국정부에서는 어쩌지 못했지요. 유림들은 간민회에서 회비를 강제징수한 문제, 농민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안긴 문제, 일부 향약이나 렬신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리용하여 간민회를 극력 반대했습니다. 간민회에 대한 유림들의 조직적인 반발은 간민회의 활동에 상당한 곤난을 조성하여 주었습니다.” 박창욱선생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면서 모순의 실질은 신구문화사상간의 투쟁이였고 초점은 입적여부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한편 간민회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중화민국 2년 12월 2일 김약연은 동남로관찰사서에 “보고”를 올려 “공교회”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자들은 공교의 세력에 등대고 첫째는 유신교육을 훼방하고 둘째는 간민회를 반대합니다. 무릇 어떤 종교든지 그 성격을 보면 도덕을 양성하는것인데 간민구학구(舊學究)들이 조직한 공교회는 절대로 선한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그자들의 행실을 따져보면 형식은 공교의 이름을 띠고있지만 내용은 농무계와 한동아리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앞날에 지방행정에 실제 위험으로 되는 문제입니다.” 중화민국 3년 6월 1일자 동남로관찰사서 “연길현공서보고 제154호”에서 연길현지사 관운종은 이렇게 피력하고있다. “대체로 간민회는 적극적인 주의를 가지고 한민교민을 간민회에 받아들이였고 귀화민을 입적시키고 치발역복을 하게 하고 공화민권을 신장하여 일한합병‘’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농무계사람들은 모두가 중국에 거주한지 오래된 초간, 월간 한족(韓族)들로서 전답과 재산을 가지고있으므로 망국에 대한 사상이 약했다. 비록 곁으로는 입적하지 않았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동화되여 가고있었으며 복장과 풍속은 여전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수구파의 표현이였다. 그들은 유신파들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것을 보면 저항하고 격렬한 수단으로 무리를 지어 공격했다. 이것이 간민회와 농무계의 의견상이이다.” 정부에서는 농무계와 간민회의 상호비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화해시켰으나 치렬한 대립은 계속되였다. 그러다가 1913년 11월 3일 공교회 회원 정안립이 길신녀학교에서 공교회년례를 치르던중 간민회회원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이에 농무계에서는 관찰사서에 상소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앉아버티기를 하려고 하였다. 조선인의 두 단체는 다 반일친중국견해이면서도 이렇게 법정에서도 민간에서도 계속 첨예화되였다. 한편 관찰사서에서는 간민회와 농무회간의 대립의 첨예화가 일제에게 중국내정에 간섭할수 있는 언턱거리를 줄수 있다고 보고 곁으로는 간민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지지하는척 하면서도 실지로는 감독, 간섭, 단속하였다. 1914년 3월 원세개는 지방련성자치기관을 철페할데 관한 명령을 하달, 이에 근거하여 길림동남관철사서에서도 포고 11호를 반포하여 “간민회와 농무계가 모두 자치성격을 띤 조직이므로 즉시 해산”할 것을 선포하였다. 연변조선인의 반일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놀던 간민회는 이렇게 력사의 무대에서 정치적 막을 내리게 되였다. (계속)  
513    제7장 간도일본총령사관 댓글:  조회:1910  추천:0  2014-02-04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투쟁을 진압한 소굴 연변의 풍부한 물질자원을 수탈한 수뇌부 죄악의 붉은 담장 네귀에 삼엄한 또치까를 앉힌 우중충한 붉은 벽돌담장, 2메터도 넘는 그 붉은 담장에 옹위되여 있는 미색의 건축물-룡정시 륙도하로 869번지. 룡정시인민정부사무청사로 사용되고있는 이 건축물이 바로 악명이 자자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이다. 지금은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애국주의 교양의 터전으로 각광받고있지만 일제치하에 시달리던 그때 누가 감히 이 건축물을 바라볼수 있었으랴. 악마의 아구리인양 쩍 벌리고있는 그 시커먼 철대문으로는 누런 군복의 일본경찰들이 밤낮으로 반일지사들을 붙잡아 들이느라 혈안이 되어 실북처럼 드나들었으리. 1909년 9월 4일 청나라를 강요하여 “간도협정”을 체결한 일제는 길림으로부터 조선 회령에 이르는 길회철도수축권을 얻었으며 국자가, 백초구, 두도구, 룡정 등을 일본에 개방하는 상업도시로 정하고 연변에서의 령사재판권을 얻었다. “간도협약” 제2조,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해 11월 1일, 일제는 룡정에 설치하였던 “한국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침략활동을 감행하게 된다. 3월 13일(2004년), 기자가 “룡정‘3.13’반일운동85주년기념대회”보도를 위해 찾아갔을 때 으리으리한 이 철대문앞에서 전임 룡정시문련주석이며 저명한 민간이야기수집가인 김재권선생을 만나 간도일본령사관 정황을 묻게 되었다. “지금 보고있는 이 청사는 1922년 11월에 불탄후 1924년에 착공하여 1926년에 준공된것입니다. 건축면적은 2,503평방메터인데 담장에 싸여있는 울안은 42,944평방메터나 됩니다. 령사관은 지하 한층까지 합해 3층으로 되었는데 중간 남쪽이 보는것처럼 5층로 돌출되여 있습니다. 바같벽은 미황색타일을 붙였고 지붕은 저렇게 록색뼁끼칠을 한 양철지붕입니다. 청사뒤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있는데 반일투사들을 취조하는 감옥이였지요. 지금은 룡정혁명력사전람관입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건립된 그날부터 연변지구에서 하늘에 사무친 죄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여 항일애국지사들에 의하여 두 번이나 불에 타 잿더미로 되었습니다.” 김재권선생은 깨끗하게 정리되여 있는 정원길로 천천히 걸으면서 간도일본총령사관을 소개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건립초기에는 대리총령사와 부관 1명, 서리생 2명, 경찰서장 1명과 16명의 경찰뿐이였다. 그러나 1920년에 한국통감부로부터 300명의 경찰을 끌어왔으며 총령사관에 경찰부를 두었다. 동시에 10여곳에 경찰서를 설치, 1928년 10월 2일에는 일본으로부터 100여명의 경찰을 끌어왔으며 1931년 11월에는 총령사관 경찰부에 “특수수사반”을 두고 지하당의 정보를 수집하고 혁명력량을 파괴하는 죄악적활동을 감행하였다. “1930년 11월의 조사에 의하면 총령사관 경찰부의 관할밑에 룡정촌, 국자가, 두도구, 동불사, 로두구, 팔도구, 천보산, 의란구, 대립자, 걸만동, 팔도하자, 백초구, 량수천자, 훈춘, 흑정자, 훈춘두도구 등 18개곳에 경찰서 혹은 경찰분서를 증설하였습니다. 1935년 5월의 통계에 의하면 경관은 646명이였습니다.” 1937년 11월 5일, 일본과 괴뢰만주국이 체결한 “만주국의 체외법권을 철회하고 남만철도부속지행정권을 양도할데 관한 조약”에 의하여 그해 12월에 “간도일본총령사관”과 5개 령사분관 및 경찰서를 철회하였다. 그후 룡정 총령사관자리에는 “개척병원”이 들어앉았다. 령사관의 관리들은 전부 일본관동군과 그 소속하의 특무기관에 넘어가고 경찰들은 다 괴로만주국경찰기구에 들어갔다. “특수수사반”은 “간도특별공작반”으로 개칭하고 계속 죄악적활동을 감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소굴 당시의 룡정거리. 청사 뒤의 지하실문을 여니 좁은 복도가 나진다. 몇메터 들어가니 가로 빠진 복도가 다시 보였다. 복도 량켠에는 작은 방들이 있었는데 간방과 고문실이였다고 한다. 첫칸부터 다섯 번째칸까지는 혁명렬사박물관을 설치해놓을 예정이였고 이미 3칸을 꾸려놓고있었다. 간소하지만 일제의 죄악이 한눈에 안겨오게 꾸며져있었다. 정부울안을 정비하면서 발굴했다는 일제가 사용하던 총칼이며 취조시 사용했던 도구들이 진렬되여있는 세 번째칸에 들어서니 저도 몰래 긴장되고 불안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달틀”은 시커먼 녹이 쓸어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얼마나 많은 반일투사들의 손목이며 발목이 거기에 결박되였댔을가. 얼마나 많은 혁명자들이 이 형틀의 이슬로 사라졌을가. 땅바닥에 놓여있는 한틀의 작두!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진렬장에 놓여있는 녹쓴 창칼, 녹쓴 탄알... 반일혁명가들의 가슴터치는 고함소리가 금방 귀전을 두드리는듯 하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16년동안 간도총령사관 소속 경찰서에서 조선족반일투사들을 28,245명을 체포했는데 그중 녀자가 1121명이였습니다. 각종 형벌을 받은 사람은 16,949명이나 됩니다. ‘9.18’사변 이후인 1934년 한해의 례만 들어도 대단합니다. 한해동안에 3,635명이 체포되였는데 그때 연변에 조선족들이 426,000여명이였으니 인구비례를 따지면 170명당 1명이 체포된셈이지요. 총령사관에서 여북했으면 보이라실까지 감옥으로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였겠습니까? 보이라실로도 모자라자 이번엔 청진감옥으로 압송했습니다. 1930년 제4차공산당사건시에는 300여명 혁명자들이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여 가기도 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아직 발표하지 않은 “1907년-1945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하에 연변조선족인민들이 받은 피해정황”이라는 론문원고를 건네여주면서 비분에 차 말했다. 론문원고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45년 사이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조선인반일군민 4만여명을 살해했고 38,000여명을 체포구류했다. 그중 반일인사가 10,165명이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2월말까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연변의 조선인반일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벌린 대토벌을 박교수는 이 론문에서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일제는 침략군 2만여명을 동원하여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했다. 그번 대토벌에서 일본침략자들은 야수성을 남김없이 들어냈는바 간곳마다에서 3광정책을 추행했다. 그번 토벌을 사람들은 ‘간도참안’이라고 한다. 토벌에서 반일군민 2,600여명 살해되였다.”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당지의 군벌과 결탁하여 “3.13”반일시위를 탄압했으며 1930년 5월에는 연변인민들이 발동한 “붉은 5월투쟁”을 탄압했다. 1931년 9월 20일에는 팔도하자 소명당현동에서 기관총으로 12명의 청장년을 살해하고 시체를 집안에 넣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1932년 4월 2일에는 침략군 제19사단이 연변에 기여들어서 “천명을 오살할지언정 공산당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웨치면서 야만적인 대학살을 감행해 4000여명을 살해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감행된 죄행은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수 없다.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룡정에다 황민교육을 선향하는 보통학교를 세운후 국자가, 투도구, 배초구 등지에다 분교를 세웠습니다. 령사관에서는 소비돈, 교과서, 기숙사를 공급해주는 등 수단으로 많은 조선인학생들을 유혹하여 끌어들였습니다. 제1기 졸업생중 40%가 일본순사거나 경찰, 직원으로 된것만 보아도 이런 학교들에서 친일분자양성을 주목적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일제가 간도총령사관을 설치한것은 침략세력을 확대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조선사람을 취죄하기 위한것이였으며 조선의 신민통치를 위협하는 반일기지를 박멸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총적으로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탄압하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수뇌부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분노에 차 말했다.   소가죽 한장의 전설   김재권선생은 간도일본총령사관 터자리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면서 말끈을 푼다. “기유년에 생긴 일이라고 합니다. 일본 놈들은 청정부를 욱박질러 룡정에 총령사관을 세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지을바에는 크게 지어 한치라도 중국 땅을 더 삼키고싶었던 령사놈은 못된 궁리를 꾸며냈지요.” 일본령사는 국자가에 자리잡고있는 청나라 도태부에 있는 윤대인을 만났다. 웃음속에 칼을 품고있는 일본령사는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면서도 곁으로는 웃음을 살살 발라가면서 레절스럽게 말했다. “대인도 알다싶이 우리 두 나라는 자고로 친선적인 이웃이였지요. 내 오늘 대인과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고 나라의 일을 담론하게 되었은즉 그 영광이 하늘에 미치오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소?” “귀정부에서 룡정에 우리 총령사관을 두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령사관원들이 당도하였는데 있을 곳이 없어 걱정이옵니다.” “허허. 나라에서 승낙한 일인데 있을 곳이 없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요. 대체 얼마나 큰 집을 세우려 하시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령사는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으면서도 곁으로는 빌붙는체 했다. “우리는 본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사람들이라 욕심부릴줄 모르웨댜. 그저 령사관을 지을 터자리로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만 떠여주면 족하옵니다.” “뭐라오?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이랬소?” “예.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이랬소이다. 그만큼하면 족하옵지요.” 아무리 큰 소라도 가죽을 벗겨놓으면 큰 구둘에 절반도 펼가말가 하겠는데 령사관을 지을 자리를 소가죽 한장만큼 달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수 없었다. 제 귀를 의심하여 다시 한번 물었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인지라 윤대인은 속으로 소국놈은 소국놈이로구나 하고 비웃으면서도 꼭 간특한 궤교가 있을것 같아 일본령사를 피하라 하고는 관원들을 불러놓고 전후사실을 말했다. “그자들로 하여금 집을 지으라고 하십시오.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에 집을 짓지 않고 좀이라도 우리 땅을 점하는 날엔 혼쌀을 먹여줍시다”. 한 관원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한물곬을 팠다. 일은 쉽게 락착되여 일본령사는 물러갔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놈들이 룡정에다 으리으리한 총령사관을 지었다는 소문이 윤대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윤대인은 노기충천하여 닫는 말에 채찍을 갈기면서 룡정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과연 높다란 담장이 빙 둘러있는 속에 커다란 고층건물이 우뚝 솟아있었다. “이것이 그래 소가죽 한장만한 땅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언약도 없고 국제공약도 없단말인가?” 윤대인의 벼락터지는 소리에 일본령사는 되려 웃으며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린 언약대로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에다 령사관을 지었을뿐이옵니다.” “눈이 먼줄로 아는가? 이렇게 크게 집을 지어놓고도 소가죽 한장만큼이라니!” “룡정시장의 소 한마리를 사다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가지고 재여서 딱 그만한 자리에다 토성을 쌓았습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한번 손수 재여보시지요.” 령사는 미리 준비해놓고있던 소가죽을 가져오라고 하졸을 시켰다. 그런데 그 자가 가지고 나온 소가죽은 통것이 아니라 실오리처럼 가늘게 오리오리 오려낸 소가죽이였다. 령사가 오려낸 소가죽을 붙여놓으라고 하자 졸개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잠간사이에 소가죽을 붙여놓았다. 틀림없는 큰 소가죽 한장이였다. “이 소가죽 한장을 길길이 늘여놓으면 꼭 우리 령사관의 토성둘레와 같사옵니다. 소가죽을 통채로 놔두어도 소가죽 한장이옵고 오리를 낸걸 합쳐도 소가죽 한장이오니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소가죽 한장이야 한장이지 두장이나 백장은 아니잖고 뭡니까?” 간특한 령사놈의 얼굴에 침이라고 뱉어놓고싶었지만 손수 대답한 말이라 윤대인은 입이 막히고말았다. 이렇게 되어 룡정에 으리으리한 일본총령사관이 들어앉게 되었다고 한다.(계속)  
512    제6장 “간도협약” 댓글:  조회:1639  추천:0  2014-02-04
두만강가에서 조선류랑민을 수색하는 일제국경경찰들. 부패무능한 청정부 불평등조약 맺고 고난의 조선인들 이중악박에 모대겨 백두산 “정계비” 청나라 강희황제는 일찍부터 《청일통지(淸一統志)》를 편찬하여 청나라경역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물론 청나라-조선 변계가 두만강, 압록강이라는것은 명확했지만 상류지역은 지형이 복잡한데다가 인가까지 없어 그 분계가 명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두 강 상류에서 조선사람들이 청나라 관군을 살해하는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여 1691년에 대신을 파견하여 두 나라 변계를 재확인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20년후인 1710년 조선의 평안도 위원군에 사는 리만기 등 9명이 밤에 월강하여 산삼을 캐는 청나라 사람 5명을 죽이고 삼과 기타 물건을 로략질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강희황제는 두 강 상류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겠다는것을 확정, 우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압록강, 두만강 상류답사를 지시했다. 1711년 강희황제의 상류답사지시문에는 “...도문강은 장백산의 동쪽으로부터 흘러나와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도문강 서남은 조선경역에 속하고 강 동북은 중국경역에 속한다. 역시 강을 국계로 한다. 이점은 이미 명백한바이다... ”고 상세히 적혀있다. 목극등은 1711년 성지를 받들고 답사길을 떠나려다가 못하고 이듬해인 1712년 2월 17일 쪽배 10척을 만들어 흥경변(興京邊)으로부터 길을 물어 두도구로 나와 압록강을 따라 수륙으로 소행(溯行) 10일만에 조선 후주에 도착, 조선의 접반사 박권 등을 만나 5월 4일 혜산에 도착했다. 목극등은 8일에 곤장덕에 이르렀는데 통역관과 짐군 20명, 조선관원 6명, 길안내 2명과 함께 15일간 먹을 량식을 휴대하고 200여리를 걸어 강원을 규명하고저 11일 백두산산정에 올랐다. 당시상황을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조선문헌에 아래와 같이 서술되여 있다. “11일, 산정에 오르니 해가 서쪽에 기울어지고있었다. ...정상에는 큰 웅덩이와 같은 큰 늪이 있었는데 주위가 20-30리는 되는것 같았다. 늪물 색깔은 검푸르고 깊이는 알수 없었다. 여름이 다 되었으나 빙설이 쌓여있었고 바라보면 넓은 바다와도 같았다. 산모양은 멀리서 보면 흰 독을 엎어높은듯한데 산정에 올라가보니 사위가 솟아있고 독아가리가 우로 놓인듯한데 밖은 흰색이고 안은 고동색이다. 사위벽은 깎아 세운듯한데 금주단병풍을 두든듯 하다.” 수원을 살펴본 목극등은 “북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깎아지른듯 솟아있고 그사이로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루었는데 그것이 바로 송화강원지이고 산마루에서 약 3-4리를 천천히 내려가니 압록강원지가 있었다”고 송화강과 압록강원지를 비교적 정확히 지적하였다. 일행은 동으로 흐르는 두만강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산아래서 동으로 흐르는 시내물을 발견, 그곳이 분수령으로 여겨져 “정계비”를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목극등은 “토문강이 땅속으로 흐른고로 강계가 불명확하니 비석을 경솔히 세울수 없다”고 지적하고 강물을 따라 동류(東流)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수행인원들은 60여리 더 답사한후 저녁켠에야 돌아와서 “물이 과연 동으로 흐른다”고 여쭈었다. 그제야 목극등은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비문은 횡서로 “대청(大淸)”이라 새기고 종서로 “우라총관 목극등이 어명을 받들고 변계를 답사하면서 이곳을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土門)이니 분수령에 돌을 깎아 기록하노라. 강희51년 5월 15일, 필첩식 소이창, 총관 홍이가, 조선군관 리의복, 조대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이라고 새겼다. 이것이 력사에서 말하는 유명한 “정계비”이다. “두만강은 ‘투먼(土門)’으로 기록되였는데 녀진어의 음역으로서 ‘만물의 근원’ 혹은 ‘만수의 회합’으로 전이되여 불려진 명칭이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 그후 두 나라는 두만강, 압록강을 계선으로 량국의 변계를 수호하였으며 1714년 청나라에서는 훈춘협령을 설치, 변경지구의 순찰을 강화하였다. 일제의 연변침입 세월은 흘러 171년이 지났다. 그런데 170년여년후인 1883년에 이 정계비가 말썽을 일으킬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조선에서는 백두산 “정계비” 위치는 두만강강원에 세워진것이 아니라 “흙무덤”에 세워졌기에 비문의 “토문”은 두만강이 아니고 다른 강이라는 이설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170여년이 지난후 발견된 정계비위치가 송화강원류인 이도강강원 우쪽 ‘흙무덤이 문같이 생긴 곳’에 세워져있었겠는가? 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문제이다. 아무튼 중국측은 후세사람들이 정계비를 옮겨놓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강희황제의 지시를 받은 목극등이 압록강, 두만강의 ‘극진처’, 즉 두 강의 강원을 찾아 정계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송화강연안의 우라총관인 목극등이 두만강이 두 나라 변계라는것을 몰라서 송화강원류인 ‘흙무덤’에 정계비를 세울수는 없었던 것이다.”임희준선생은 “장백산 ‘정계비’ ”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흙무덤”에서 흐르는 강이 송화강원지이니 길림 등지를 경유해 흘러 흑룡강에 합류되는 송화강이 국계라면 광활한 지역이 다 조선땅이라는것이다. 1885년 9월에 진행된 제1차변계담판에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를 기준으로 변계를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청나라는 비문에 새겨진 “동쪽은 토문”의 “토문”은 두만강의 동이이자(同音异字)이니 두만강의 강원을 찾아 변계로 확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87년 4월 제2차변계담판에서 조선측은 “토문”이란 “도문”의 동음이자의 동일한 강이라는것을 묵인하였다. 결국 두 나라 대표와 정부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종전처럼 량국의 천연적국계로 하자는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임희준 리춘 “19세기 80년대 중, 조 두 나라간 두차례의 ‘국계담판’ ”) 1897년 조선조정내의 친로파는 조선인민의 반일기운을 리용하여 친일내각을 물리친 뒤 고종을 봉대하고 “광무개혁”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후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였다. 로씨야세력을 등에 업은 친로파들은 지난날 두차례의 변계담판에서 확인한 내용을 모조리 뒤엎고 또다시 “정계비위치”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연변을 탈취하려고 음모했다. 이에 로씨야도 동조, “연변탈취”에 관한 비밀협정까지 맺는다. 1902년 “북변간도시찰특사”로 리범윤이 연변에 파견되여 온다. 연변에 온 리범윤은 조선족간민들의 호적과 토지를 조사하고 스스로 촌의 령장, 참리, 검찰, 감무를 임명하였으며 호구세를 징수하였다. 그는 또 “자위단”을 묶고 “사포대”를 조직하여 무장시켰으며 청나라관원들의 직무수행을 방해하고 청나라 백성들을 살해, 무장폭동까지 준비했다. 리범윤의 음모를 간파한 중국 길강군(吉强軍)은 폭동군을 숙청하기로 결정, 통령 호전갑(胡殿甲)은 1903년 4월 10일부터 16일까지 리범윤폭동군을 토벌하였다. 리범윤은 크게 패하여 도망쳤으며 하는수 없이 1904년 6월 화룡욕에서 “중한변계선후장정”을 체결하고 무력탈취음모를 포기하였다. 로씨야도 1905년 일로전쟁에서 패전, 로씨야세력을 등에 업고 연변을 탈취하려던 친로세력의 음모는 깨여지고말았다. 1905년 일로선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을뿐만아니라 저들의 지정된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침략을 정식으로 획책하였다. 1905년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불평등조약 “을사조약”을 맺는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연변은 전략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일본이 서부일본의 니이가다 등지로부터 한국의 청진 등지의 항구를 개척하고 나아가서 청진-회령-길림을 련결시키는 길회철도를 부설하여 ‘뒤문’으로 동북을 침입하는것은 동부일본의 오사까나 고베로부터 료동반도로 침입하는것보다 더욱 가까운 로정이였으니깐요. 결국 일제는 ‘한국의 보호국’으로 자처하면서 ‘한국을 대신하여 간도소속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연변침략을 획책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서 “대륙침략의 선봉”이라고 할수 있는 구니모도는 “간도탐험기”라는 글에서 “간도란 압록강상류와 백두산구간에 있는데 백여년래 청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립지역이며 지금의 인구 25만중 조선인이 20만을 차지하고 토지도 대부분 조선인이 차지하고있다.” 그러므로 “간도”는 “응당 한국의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등박문은 친일내각 박제순을 사촉하여 한국정부의 명의로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간도한인을 보호해줄것”을 제기하도록 했다. 1907년 8월 일제침략자가 룡정에 설치한 소장 사이또중좌. 일제는 또 로씨야와 “비밀협약”을 맺는 등 교활한 수단을 피우면서 로씨야와 기타 렬강들의 입을 막아놓고는 일본군 중좌 사이또 일행 63명을 룡정에파견, 1907년 8월 23일부터 “조선총감부간도림시파출소”라는 간판을 걸고 이른바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사무를 보게 하였다. 그자들은 한편 “(1) 간도는 한국의 령토이다. (2) 한인들은 청국의 재판에 복종하지 말것. (3) 청국관헌들이 징수하는 일체 조세를 파출소에서는 일률로 승인하지 않는다. (4) 청국관헌들의 일체 법령에 대하여서도 파출소는 승인하지 않는다. (5) 청국관헌이 임명한 도향약, 향약 등을 한인과 마찬가지로 대할것이다”는 훈령까지 내렸다. 일제의 연변침입에 대해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하고있다. “일제는 김해룡 등 일진회회원을 리용하여 조선족간민을 기만 우롱하고 민족모순을 도발하여 조세를 청정부에 납부하지 못하게 하고 청정부의 지령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일본헌병들은 도처에서 중국내정을 간섭하고 사단을 일으켰습니다. 일제는 간도가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변계문제를 리용하여 대륙침략의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에 침입했던것입니다.”   룡정 소장 사이또와 그 일당들. 불평등조약 “간도귀속문제”와 “한인보호문제”를 두고 청일 두 나라에서는 장시기 티격태격하다가 1909년 2월 17일 조회에서 일본이 간도가 중국의 령토가 옳다는 것을 똑똑히 승인한후에야 담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연변의 조선인은 “한국신민”이기에 보호국인 일본이 그에 대한 재판권을 향유한다는것과 중일 쌍방이 길회철도를 공동경영하며 천보산동광을 공동개발할것을 제기했다. 청나라는 일제가 만약 조선인에 대한 치유권을 가지게 되면 연변은 표면상 중국령토이나 실제상 일본의 통치를 받는거나 마찬가지라는것을 간파하고 일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역시 ‘간도귀속문제’를 미끼로 로일전쟁후 동북에서 취득한 리권을 더욱 확대, 공고화하려고 지난날 해결하지 못한 안봉철도의 개축(경편철도를 광궤철도로 개축), 일제가 점령한 만철과 병행하여 청나라가 부설한 신민툰-법고간의 철도페지, 로씨야가 자난날 부설한 영구-대석교간의 철도를 일본에 귀속시킬것, 무순, 연대 탄광의 개발권 등 일련의 문제를 제기하였다.”(임희준 심홍매 “간도협약”) 드디여 1907년 9월 4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슈인과 청국외무대신 량돈언(梁敦彦)이 북경에서 “중한도문강변무조약” 즉 “간도협약”과 “만주5조건”에 관한 조약이 체결된다. “간도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중일량국은 도문강을 중한량국의 국계로 삼으며 그 강원지방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경계로 할것을 성명한다. 제2조: 중국정부는 본 협약을 체결한후 지체없이 아래의 몇 개곳을 개방하여 각국인들이 거주하고 무역하도록 하며 일본국은 그곳에 령사관 혹은 령사분관을 설립한다. 개방날자는 따로 규정한다. 개방할 상부지는 룡정촌, 국자가, 투도구와 배초구이다. 제3조: 중국정부는 한민이 두만강 북쪽 개간지구에 거주하는 것을 비준한다. 그 지역은 따로 도면으로 설명한다. 제4조: 도문강이북지방 잡거구역내에 거주하는 한민은 중국지방관 관할하의 법권에 귀속되여 중국법권에 복종하며 중국관리들은 응당 한민들을 중국인과 동등하게 한다. 한인들의 민사, 형사 등 일체 소송사건에 대해서는 응당 중국관원이 중국법률에 의하여 공평하게 재판하며 일본국의 령사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자유로 재판청에 가서 재판을 들을수 있다. 인명에 관계되는 중대한 사건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사전에 일본국령사관에 조회하여 재판청에 가서 재판을 방청하게 한다. 만약 법률에 의하여 판결하지 않을 때 일본령사관은 신용을 보장하기 위하여 중국의 다른 관원을 파견하여 복심할 것을 신청할수 있다. 제5조: 도문강이북 잡거구역내의 한민들의 모든 토지, 부동산과 재산 등은 중국정부로부터 화민(중국인)의 산업과 마찬가지로 일률로 절실히 보호하며 도문강연안의 적당한 지점에 나루터를 설치하고 량국인민의 자유로운 래왕을 보장한다. 증명과 공문이 없이 무기를 휴대한자는 월경할수 없다. 잡거지역내에서 나는 미곡은 한민들이 판매, 운반할수 있다. 그러나 감산되였을 때에는 금지한다. 곡초나 땔나무도 상기 조례에 의하여 한다. 제6조: 중국정부는 장래 갈장철도를 연길 남부변경까지 연장시켜 한국 회령지방의 한국철도와 련접시킨다. 그 일체 관법은 길장철도와 마찬가지로 한다. 어느 때에 수축하는가 하는 것은 중국정부의 구체상황에 따라 다시 일본정부와 상의, 결정한다. 제7조: 본조약이 체결된이후 규정된 각항을 즉시 실행하며 일본총감부파출소 및 문무인원들은 2개월내에 말끔히 철퇴하며 일본국정부 역시 2개월내에 제2조에 규정된 상부지에 령사관을 설치한다. “ ‘간도협약’을 통해 연변지역은 점차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되였을뿐만아니라 일제에게 연변을 발판으로 동북내지를 점령할수 있는 ‘대문’을 열어주었다.”(임희준 심홍매 “간도협약”)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는 “한일병합(韓日倂병合”을 실시하면서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부패무능한 청정부는 ‘간도협약’을 통해 뒤로 승냥이가 들어오게 문을 열어준것이지요. 비록 령토는 찾았지만 이때로부터 조선족의 이중국적문제가 제기되면서 조선족에 대한 이중적악박이 가중해지게 됩니다. 연변은 실제상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됩니다. 일제가 조선족의 반일민족운동을 탄압하는데 유리했으며 안봉철도개축권, 영대철도관리권, 길회철도부설권, 무순, 연대 탄광채굴권 등에서 리권을 취득하였습니다. 결국 동북은 더더욱 ‘식민지화’ 되었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간도협약”은 “불평등조약”이라고 베여 말했다.(계속)
511    제5장 피눈물의 지팡살이 댓글:  조회:1597  추천:0  2014-02-04
농촌녀인들 함지에 점심밥 담아 밭으로 나르고 귀가길에는 땔나무 이고 돌아온다. 지주 지방관청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에 녹아나는 조선족농민들 포산호의 억울함 태고연한 원시림과 잡목이 우거진 황지에서 흰옷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엄동의 눈보라를 가르며 괭이가 언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츠럽다. 조선족간민들에 의해 황지는 차츰 밭모양을 냈으며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며 감자농사가 제법 잘 되기만 했다. 한창 재밌게 농사를 짓고있을 때 난데없는 (만족식두루마기를 입은 점산호)들이 나타나 남의 땅에서 웬 농사질이냐며 호통친다. 다 된 곡식을 마구 짓밟으며 당장 떠나라고 을러메기도 한다. 주인없는 황지인줄 알고 개간했더니 점산호들의 사지증서안에 든 땅이였던것이다. 어떤 점산호들은 조선족간민들이 자기 땅을 개척하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다가 황지가 옥답으로 변한 다음 불현듯 나타나서 주인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자들은 계속 농사짓겠으면 소작료를 내라고 강요했다. 하여 조선족간민들은 자신이 일군 땅을 떠나거나 아니면 소작농으로 전락되여야 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에 대해 류병호선생은 “점산호와 포산호”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방법을 보면 첫해의 가을 혹은 이듬해의 이른봄에 잡초와 관목들을 베여낸후 괭이와 보습으로 갈아번지고 조를 심는데 첫해에는 밭고랑도 내지 않고 김도 매지 않는다. 이듬해부터 콩, 옥수수, 보리를 심었다. 이렇게 2-3년이 지나면 황지가 점차 옥답으로 되는데 이사이에 겨울이면 도끼로 나무뿌리를 찍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간민들을 당시 지방관청에서는 간민이라고 불렀고 한족과 만족들은 지호(地戶) 혹은 포산호(刨山戶), 즉 산을 뚜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점산호의 소작농으로 전락된 포산호들의 생활이란 중세기 장원주의 농노와 같았다.” 산골짜기에 단풍물 오르고 밭곡식이 여물어서 누렇게 익은 가을, 탈곡장에 높이 쌓은 낟가리를 바라보면서 봄내 여름내 손이 갈라터지게 일한 보람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날아든다. 무장한 졸개들을 거느린 다부살이가 탈곡장에 뛰여들어 마구잡이로 조선족간민들이 지은 곡식을 우마차에 실어간다. 자기들의 요구에 만족되지 않으면 그 집 안해를 빼앗아 가기도 한다.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자식까지 빼앗아간다. 포산호들은 혼히 4상의 토지를 소작맡으면 점산호의 1상의 밭을 무상으로 다루어주어야 했다. 또 해마다 10-20일간 점산호의 일을 무상으로 해주어야 한다. 이외에도 점산호를 위해 잡역을 해주어야 했다. 례컨대 음력설전후이면 점산호의 마소들이 1년간 먹을 사료를 썰어주어야 하며 립추전후이면 땔나무 50단을 하여 바쳐야 한다. 같은 글에서 류병호선생은 포산호들의 억울함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근채구의 점산호 손보산은 포산호들에게 매년 1상의 감자를 심도록 하였는데 꼭 김 세벌을 매게 하고 가을이면 잘된 감자만 골라 자기의 국수방에 가져오게 하였다. 점산호들은 잘 다룬 옥답을 빼앗아 례물을 많이 바치는 다른 간민들에게 소작주고 옥답을 빼앗긴 간민에게는 다른 황지를 개척할 것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빚갚지 못해 처자 빼앗겨 옛날에 연변에서 땅없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소작맡아 부치는것을 지팡살이라고 했다. 지팡이란 한어를 잘 몰랐던 농민들이 지주가 차지하고있는 “地方(띠팡)”을 지팡으로 잘못 부른데서 생겨난 말인데 일부에서는 “地盤爾(띠팔)”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주민들이 입버릇처럼 외운 지팡이란 곧 토지를 비롯한 생산자료가 어느 한 지주에게 들어간 지방을 말한다. 례를 들면 쑹개네지팡(宋家地方), 왕개지팡(王家地方), 조개지팡(趙家地方)같은것들이다.”(박청산 김철수 《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 개간초기 조선족농민들은 쌀도 농구도 없기에 지주에게서 쌀, 농구, 생활비를 빌어 땅을 부치잖으면 안되였다. 이런 것을 방청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쌀, 농구, 부림소, 생활용품을 대주면서 3년동안 소작료를 안받는다 해놓고는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쓸어들고 상품경제가 점차 발전해가자 첫해부터 소작료를 내라고 했다. 첫해에 수확고의 20%, 이듬해에 30%, 그 다음해에 40% 바치는데 거기에다 월리식까지 합하면 수확고의 70-80%를 바치는셈이였다. 네 번째해부터는 종자, 농구, 부림소 등을 자부담하면서 방청을 반작으로 넘어가게 한다. 반작은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치는걸 말한다. 등허리를 내리 쬐는 무서운 땡볕아래에서 잔뼈도 굳지 않은 애숭이 머슴애가 후치를 끈다. 이마로는 비지땀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마구 쏟아진다. 후치대를 잡은 아비의 목에서도 겨불냄새가 난다. 이것은 당시 조선족농민의 풍경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조선족농민들에게 있어서 부림소 한 마리 갖춘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소가 메여야 할 쟁기를 흔히 사람이 메잖으면 안되였다. 뼈가 물러나게, 살이 떨어지게 한해농사를 지어놓았으나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여러 명목의 가렴잡세까지 바치고나면 다시 빈털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만다. 이듬해 봄이 되기도 전에 쌀독이 비게 되어 조선족농민들은 지주에게서 높은 리률로 쌀을 꾸어다 호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곡물반환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봄에 곡물 1되를 꾸어주고 가을에 3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봄이면 지주들은 시장가격보다 비싼 값으로 꾸어준다. 그러나 가을이면 폭락한 값으로 6배에 해당한 곡물을 받아들인다. 례하면 봄에 량식 한되 값이 1원이라면 한되에 1.5원으로 꾸어주는데 가을이면 량식값이 0.5월으로 폭락했으나 의연히 봄의 가격으로 받는다. 그러니 봄에 1되 꾸어온 량식이 가을에 6되 되는 것이다. 이외에 점산호들은 고리대로 지호들의 고혈을 짜냈다. 리자는 보통 5푼이고 높을 때에는 10푼짜리도 있었다. 정한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처자를 빼앗기기도 했다. 빚을 못갚은 농민들의 아들딸들은 지주집에 꼴모슴, 부엌데기로 들어가야 했다. “덕신향 장동촌 하촌의 최대동은 점산호의 고리대를 갚지 못하여 하마터면 고환을 잘리울번하였다.”(김희 “장동촌을 개척한 사람들”) 가렴잡세와 “동양척식회사”의 착취 “조선족농민들은 지방관청으로부터도 온갖 수탈을 당했습니다. 동북의 다른 지방에서는 볼수 없는 괴이한 세금을 바쳤는데 문턱세, 인두세같은것이 그런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조선족농민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 없다고 한다. 조선족농민들은 교육비, 순경비, 보위단비 등 지방세를 바쳐야 하는외에 사묘, 도로, 교량수축비같은 촌세를 바쳤으며 억울하게도 문턱세, 인두세. 고용세, 양우세(養牛稅), 굴뚝세, 입적비 초대비, 땔나무세, 해산세 등을 바쳐야 했다. 문턱세라는 것은 관청에 불리워간 조선족들이 관청의 대문에 들어설 때 바치는 세금이다. 소로 농사를 짓는다고 소세를 바쳐야 했고 지주의 토지를 소작받는다고 고용세를 바쳐야 했다. 이외에도 호세(戶稅)라는것도 있었는데 주둔군의 생활비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량식, 닭, 닭알, 땔나무, 술, 담배, 잡화의 비용을 모두 호세로 각 호에 분담시켰다. 그리고 군대가 촌락을 경유할 때 촌민들이 무상으로 식사와 잡비를 제공하여야 하고 관리와 경찰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쓰는 비용도 촌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가련한 조선족농민들이 당하는 설음은 이것뿐이 아니였다. 그들은 악착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악박과 착취도 받아야 했다. 1918년 일제의 에서는 조선족농민들의 토지계약서를 저당잡히고는 대부하는 방법으로 대를 이어 개척해놓은 땅을 앗아갔으며 그 땅에서 40-50%의 소작료를 받아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의 해설사이다. 이 대형다큐멘터리에서 하마탕주민 오준섭(80세)로인과의 인터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이 수전, 한전 5헥타르 다룬다면 문패에다 한 헥타르당 얼마를 바치라는 것을 써붙여 놓습니다. 세금이 어찌나 높은지 혀를 찰 정도였지요. 세금을 못내는 경우엔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가장집물을 빼앗거나 부셔놓군 하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연변대학 황룡국교수와의 인터뷰도 있다. “연변의 토지를 점하기 위하여 일제는 연변에다 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구제한다는 명의로 농민들에게 대부금을 주었습니다. 그중에는 토지대금, 밭갈이소값, 농기구값, 량식값 등이 망라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농민들은 그 규정에 따라 밭을 사가지고 토지계약서를 동양척식회사에 바쳐야 했습니다. 규정에는 리자와 본전을 다 물면 토지계약서도 돌려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리자가 어찌나 높았던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도 리자를 다 갚은 사람이 없었답니다.” 지주와 지방관청 그리고 일제의 악박착취는 조선족농민들의 명줄을 꽉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았다.(계속)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