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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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    [시]바다.5(김철호) 댓글:  조회:1512  추천:2  2014-03-26
바다.5 김철호 이제는 녀자가 없는 그, 바다로 간다 바다로 가는 걸음을 마구 밟는다 바다가 저렇게 높다, 뭍보다 높다 수평선을 베고 누워있는 붉은 녀인 흰 비둘기떼가 달려온다 초록 언덕에 떼소리가 요란하다 바람 없을 때의 사막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다 자연외의것을 다 버린 녀인이 누워있다 황금의 라신! 금빛찬란한 세상! 바람이 눈을 뜬다 파도가 잠을 깬다 나무의 몸 떠는 소리가 거칠다 아주 먼 옛날 바다에 혼을 심은 한 녀인 그 사막에 가서 신기루로 살았다 변화무쌍한 사막의 해질녘을 수놓았다 미역 썩는 야릇한 향기에 취해 휘청거렸다 실개천이였을 때 뿌리를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녀자보다 높은 바다가 있다 그는, 바다는 실패를 모를것이라고 생각했다 2014년 제2기
589    [시]수음秀吟(김철호) 댓글:  조회:1755  추천:1  2014-03-26
秀吟 ㅡ훔쳐본 그녀의 일기 김철호 정글엔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발을 내디뎠다 독사의 꼬리가 방울소리를 낸다 여우의 신음이 비단을 찢는다 해볕 한올 없는 숲은 길을 내줄 마음 없어하지만 밑둥 굵은 나무등걸에 앉은 원숭이 눈속에 해살이 담겨 반짝인다 눈먼 부엉이가 푸등 날아 저쪽 나무 가지에 날아가 앉고 놀란 말벌떼가 아우성치며 몰려왔다 몰려간다 저 먼 곳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은 사자의 포효일가 범의 발광일가 정글엔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길을 만들었다 질펀한 풀밭을 딛고 지나간 자리에 한줄기 가느다란 길 해살 없이도 눈을 부시게 하는 빛 지나간 자리 정글에 그녀의 길이 생겼다 2014년 제2호  
588    [시]별들의 원무(김철호) 댓글:  조회:1317  추천:0  2014-03-26
별들의 원무 김철호 너는 왜 하늘 향해 누워있니 너는 왜 땅을 보며 누워있니 하늘엔 뭐가 있니? 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하나 있다 그럼 땅엔 뭐가 있니? 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은근한 별 하나 있다 하늘의 별과 땅의 별 만나려고 무지개 통로로 마주 달려간다 너무 빨리 달리다보니 그만 서로 부딪쳐 산산조각난다 별의 파편 수많은 별이 되여 흩날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은하수가 펼쳐진다 별들의 원무가 시작된다 2014년 제2호
587    [시]댓글(김철호) 댓글:  조회:1103  추천:0  2014-03-26
댓글 김철호 벽에 기대여 앉았는데 벽이 무너진다 벽체에 깔려 납죽해진 그를 잡아당긴다 납죽한 다리가 뽑혀나오고 납죽한 팔이 뽑혀나오고 납죽한 가슴, 배, 머리는 그냥 벽체밑에 깔려있다 두렵지도 않은가보다 누군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누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누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무너진 벽체에 그가 깔려있다 잊어졌던 그가 있다 나도 있다 납죽 깔려 납죽해져있다 2014년 제2호
586    [시]고스트(ghost)현상.1(김철호) 댓글:  조회:1179  추천:1  2014-03-26
고스트(ghost)현상.1 김철호 그건 흠결이 아니였다 이중노출도 아니였다 틀림없는 유령의 그림자였다 물앉는다 요즘 그녀는 자주 물앉는다 복도에서도 거리에서도 벌렁 벌렁 물앉는다 회사청사를 어깨에 메였다 19층 청사가 여린 어깨를 누룬다 벌렁 물앉는다 8촌 사진은 하나의 세상이다 그 속에 19층 청사, 그녀의 어깨... 그녀는 어떤 유령에게 업혀있었다 그녀가 어떤 유령을 업고있다 이승 너머에 숨은 삶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는 문이 보였다 새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죽는다고 했다 2014년 제2호
585    [시]바다.3(김철호) 댓글:  조회:1395  추천:0  2014-03-26
바다.3 김철호  바다.3 김철호 네명 악사들의 현악합주가 들린다. 부자며 가난뱅이를 하나의 바줄에 묶어놓은 공동운명의 선률이 쏟아지는 별들과 동무하였다. 이날에는 다이야몬드목걸이도 하나의 돌맹이에 불과했다. 야크의 마른 똥으로 맛갈스러운 차를 달여 청장고원의 수천년력사를 만든 민족은 넋빠진 육신을 베여 독수리의 배를 채워주었다. 부처님 말씀은 하늘이였다. 그 민족은 바다였다. 자신을 낮추는 일에 혼신을 쏟은 민족은 바다였다. 불의 민족, 물의 민족, 모래의 민족, 나무의 민족, 고원의 민족, 초원의 민족... 망망한 바다는 술렁거린다. 피가 모여 먹물이 된 바다! 백두의 비단으로 짠 흰옷의 결백은 변치 않았다. 사나이의 어깨에 놓인 멜대 량끝에 매달린 광주리에 동해와 황해가 담겨있다. 두 바다를 메고 걷는 발걸음소리 요란쿠나. 부처님세상도 아니요, 예수님세상도 아니요, 알라의 세상도 아니다. 파도의 키가 아무리 높아도 뭍보다는 낮다. 자신을 가장 낮춘 무리들이 모여 가장 큰 힘 만든다. 영원한 생명되였다. 2013년 제6호
584    [시]바다.2(김철호) 댓글:  조회:1204  추천:0  2014-03-26
바다.2 김철호 녀인이 다가서자 바다가 찢어지면서 혈흔을 보인다. 파도가 묻어 싱그러운 향기! 녀인은 손을 뻗쳐 바다자락을 잡아당긴다. 더 크게 펼쳐지는 푸른 바다의 갈기가 눕는다. 엊저녁 노을이 그랬던것처럼 아침의 노을도 파도속에서 떤다. 갈매기가 배전을 맴돌고 통통 소리지르는 어부의 목청 닮아 괴로운 우짓음 뿜는 파도의 붉은 목청. 해돋이, 붉은 피가 넘쳐 흘러오는 저 육박! 아직도 잠자고있는 너의 꿈속도 피로 흥건하리! 스마트폰속에 스며드는 적색의 풍경 너에게로 가서 색갈의 조화 맛보게 하리. 잡아당겨라, 녀인아, 꽉 쥐고 놓지 말어라. 바다에 앉아가는 사나이 붙잡고 머리채 휘날리며 혈의 세계로 가야지. 지치지 않는 갈매기의 나래에 묻은 피 바다에 떨어진다. 미운 우짖음 바다에 떨어진다.    2013 년 제6호   
583    제77장 장춘해방전역에서의 “조선퇀” 댓글:  조회:3483  추천:0  2014-03-25
   위기일발의 시각 적을 막아나선 “조선퇀” 170여명 장병 목숨바쳐 적진에 붉은기를 격변시대 1946년 새해 첫날, 연변행정독찰전원공사 전원 관선정은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관선정은 신년사에서 “인민정권의 령도하에 광범한 군중을 단합시켜 신생의 정권을 보위하고 공고히 하여야 한다. 일만잔여세력을 소멸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면서 연변을 건설하는 것이 당면의 급선무이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중한(中韓)민족의 단결이 우선 필요하다. 중한민족의 단결이 없다면 새로운 연변건설은 불가능하다. 신생의 민주정권은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게 해야 하며 민족의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모두 존중을 받게 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새해 첫날, 연변군분구 사령원 강신태도 “우리가 건설하는 군대는 인민의 자제병이다”는 제하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강신태는 연변군분구의 모든 장령들은 전심전력으로 인민의 리익을 위해 복무해야 하며 적대세력을 소멸하고 인민의 정권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인민은 자신의 자제병을 옹호하고 인민의 자제병들은 인민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하여 지적했다. 1945년 10월 30일에 설립되였던 동북인민자치군은 이해 1월 4일, 중공중앙의 지시에 좇아 동북민주련군(총사령 림표, 정위 팽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월 21일부터 23일까지 길림성공작위원회는 해룡에서 당, 정, 군 주요책임자회의를 소집,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를 중공료길성위로 할데 관한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정신을 전달했다. 료길성위아래에 길림, 길동, 통화, 료북 등 4개의 분성위를 두었다. 2월 27일 중공길료성위에서는 당천제를 연변에 파견하여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중공길동분성위로 개칭할데 관한 동북국의 지시정신을 전달, 당천제가 분성위 서기를 맡고 옹문도가 부서기를 맡았다. 분성위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돈화, 액목, 안도, 교하 등 8개 현의 당의 사업을 관할했다. 이에 따라 길림군구도 길료군구로 개칭(사령원 주보중)하게 되었고 연변군분구도 동북민주련군 길동군부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강신태가 의연히 사령원을 맡고 당천제가 정위(겸)를 맡았다. 군분구산하에 두 개 려를 두었는데 1려 려장은 강신태(겸), 정위는 당천제(겸)가 맡았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다. 1퇀 퇀장에 남창수였다. 병력은 3000여명 되었다. 2려 려장은 등극명, 정위는 애극복이였다. 4퇀 퇀장은 증도, 5퇀 퇀장은 최희봉, 6퇀 퇀장은 김동파, 포퇀 퇀장은 김철이였다. 병력 역시 3000여명이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박일우가 지대장을 맡고 아래에 제1총대, 제2총대, 왕청지대, 화룡지대를 두었다. 1월 10일, 중공대표와 국민당대표는 “정전협정”을 정식 달성하고 동시에 정전명령을 내려 13일 밤부터 군사행동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정전협정에 “동북을 제외”한다는 것을 견지했다. 아울러 미국의 의도에 따라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군대를 동북에 이동하여 전략요지를 점령하게 했다. 이에 중공중앙에서는 국민당이 동북문제에 관한 단판을 거절하는것과 관련하여 림표, 팽진에게 “국민당이 의연히 우리와 동북문제에 관한 단판을 거절하며 동북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승인하지 않을 경우 무력적인 해결방침을 포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동북국에서는 즉시 적들이 진공할 경우 견결히 격파할 조치를 취했다. 연변림시참의회에서는 모택동, 장개석 및 전국정치협상회의 원칙에 좇아 평화적으로 동북문제를 해결하며 동북에서의 군사충돌을 정지하며 내전과 독재를 반대하고 인민들로 하여금 평화적인 환경속에서 새 동북을 건설하게 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3월중순, 박락권은 명령에 의해 연변경비 1려 1퇀을 이끌고 장춘지구로 들어가 부대를 동북민주련군 동남종대 제75퇀으로 개편하고 장춘해방전역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  박락권과 “조선퇀” 1946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장춘해방전투는 항일전쟁승리후 아군이 처음으로 대도시를 공격점령한 전투로서 동북해방전쟁사에서 빛나는 한페지를 엮어놓았다. 바로 이 전투에서 박락권퇀장, 고생호퇀장을 비롯한 용감한 조선인전사들이 슬기롭게 싸워 기개를 떨쳤다. 동남종대 24려 려장이였던 하경적은 “제1차 장춘해방전투에서의 ‘조선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동남종대는 24려 70퇀, 25려 75퇀으로 구성되였는데 그가운데서 75퇀은 전부 조선인으로 조직되였다. 하기에 그때 우리는 이 퇀을 습관적으로 ‘조선퇀’이라고 불렀다. 박락권퇀장은 동북항일련군에서 주보중사령원 부관으로 있었고 그후에는 쏘련 원동방면군 보병 제88려 4영 7련에서 중위소대장으로 있었으며 1945년 9월에 항일련군선견대의 일원으로 연길에 이르러 ‘조선퇀’을 조직하였다는것이다. 28살인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동그스름했는데 퍼그나 다부져 보였다. 그의 한어가 류창했다. 결혼한지 몇 달 밖에 안되지만 안해와 갈라져 부대를 거느리고 이번 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나와 곁의 전우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조선퇀”은 갓 성립되였기에 신병들이 많았다. 그러나 참군한후 정치교육을 잘 받았기에 사기가 충청해 있었다. 4월 14일 날밝을 무렵, 각 종대는 장춘교외의 적군을 향해 진공을 개시했다. 오전에 국민당은 쏘련군대로부터 정식으로 장춘을 넘겨받았다. 점심때 쏘련군대를 태운 마지막 렬차가 장춘을 떠났다. 오후 2시, 괴뢰길림성 대리주석 왕빈화와 제4종대 사령 겸 장춘위수 사령인 진가정을 우두머리로 한 국민당군정요인들이 시교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포성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있을 때 아군전사들은 파죽지세로 시주변의 적군들을 섬멸하고있었다. “조선퇀”은 남령의 초가와붕일대에서 출발하여 조가산, 정수(淨水)공장에 있는 적들을 공격했다. 적들은 아군의 공격에 겁을 집어먹고 눈먼 총 몇방을 쏘아대고는 시내로 도망쳤다. 동남종대는 다른 종대와 함께 시구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퇀”과 71퇀은 몇시간동안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오전 10시좌우에 선후로 공업학교, 농학원, 리과원을 점령했다. 그런데 “조선퇀”은 쓰딸린거리를 따라 북쪽을 향해 진군하다가 대륙과학원(지금의 장춘응용과학연구소)을 지키고있는 적들의 완강한 저격을 받게 되었다. 쓰딸린거리는 남쪽의 남령으로부터 북쪽의 역전까지 남북으로 시내중심을 꿰뚫은 큰 거리로서 길이가 5킬로메터나 되고 길량켠에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적군은 건물마다에 숱한 또치까를 구축하고 거리에 장애물을 겹겹이 설치해놓았다. 대륙과학원은 쓰딸린거리 남단 서쪽켠에 있었다. 반지하실까지 하여 6층으로 된 이 청사는 모두 화강암으로 지은것으로서 적들이 장춘을 고수하는 남단의 가장 주요한 방어거점이였다. 적들은 증원된 한 개 련을 주둔시키고 정문과 지붕에 모래마대로 퇴적식방어진지를 만들고 창문마다에 각종 화력을 배치해놓았다. 청사앞에는 록시를 박고 철조망을 늘여놓았다. 화력을 집중하여 적들을 압도한후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였다. 박락권은 이 임무를 1영에 맡겼다. 오후 2시, 1영 영장 김윤배는 기관총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적들의 화점에 집중사격을 퍼붓게 했다. 적들도 완강히 반격했다. 쌍방은 몇분동안 불질을 하였지만 아군은 높은 위치를 차지한 적들의 화력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 폭파조 전사들은 기관총과 수류탄의 엄호를 받으며 청사를 향해 포복전진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도 맹렬하여 어떤 전사들은 길에 쓰러지고 어떤 전사들은 록시뒤에 몸을 숨기고 머리도 들지 못하다가 그대로 되돌아오고말았다. 사령부에서는 몇문의 포를 대륙과학원에 돌렸다. 청사지붕과 청사앞 장애물들은 아군의 포성에 의해 마구 짓부셔졌다. 때를 같이하여 기관총도 분노의 불길을 토했다. 아군의 드센 화력에 적들의 화점은 하나하나 벙어리로 되어갔다. 이윽하여 “꽝” 하는 폭음과 함께 대륙과학원청사에 불이 달렸다. 시기가 되었음을 직감한 박락권은 “돌격!”하고 큰소리로 웨치면서 전사들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한 전사가 뒹굴기도 하고 기기도 하며 청사앞의 또치까에 접근하여 폭파약꾸레미의 도와선에 불을 달아놓고 다시 뒹굴어 돌아왔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또치까가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전사들은 폭파소리와 함께 맹호마냥 청사앞 또치까를 뛰여넘은후 쏜살같이 청사안으로 돌격해들어갔다. 청사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라 적들은 부득불 아래층으로 몰려들었다. 청사에 들어간 1영 전사들은 도망치려는 적들과 맞다들어 치렬한 육박전을 벌렸다. 살아남은 적들은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진작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총을 내던지고 투항했다. 몇놈이 뒤울안으로 해서 도망친외 나머지는 전부 포로되였다. 1영이 대류과학원을 공격하고있을 때 2영 영장 전룡화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대륙과학원 맞은켠에 있는 법정대학청사를 공격하고있었다. 한시간 남짓한 치렬한 전투를 한 개 련의 적들을 전부 섬멸하였다. 전투는 끝났으나 전사들은 또 다른 전투 “불끄기전투”에 투신했다. 한편으로는 널려있는 귀중한 의기와 자료를 그리고 진렬되여있는 범, 곰, 꽃사슴, 고래 등 진귀한 동물표본들을 날라내느라고 야단법석을 치고있었다. 불길이 더 세차게 타올라 천장에서 큰 불꽃들이 사정없이 쏟아져내렸다. 그러나 전사들은 계속하여 귀중품을 끄집어냈다.  170여명 조선인장병 장렬히 희생 연길현 인민들이 전선에 보내는 군용신. 16일, 날이 밝기전에 종대의 각 퇀은 벌써 전투구역에 들어섰다. “조선퇀”은 계속하여 쓰딸린거리를 따라 시 중심으로 진공하라는 전투명령을 받았다. “조선퇀”은 두시간의 격전을 거쳐 의과대학청사를 점령하고 점심에 홍인광장(지금의 해방광장) 남쪽까지 쳐들어갔다. 홍인광장은 쓰딸린거리와 옹인대로(지금의 해방대로)의 교차점에 위치하고있는데 장춘시구역의 한 개 중요한 교통요지였다. 광장 서북쪽에 3층으로 된 “만자회”청사가 솟아있는데 이는 괴로만주국시기 종교적색채를 띤 자선기구였다. 3층으로 된 견고한 청사는 퐁격이 독특했고 거리를 향한 쪽으로 든든한 담장이 둘러있었다. 청사안에서도 각 통로들을 제압할수 있었기에 적들은 여기를 한 개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던것이다. 아군은 먼저 광장 남측의 건축물들을 점령하여 반달형으로 “만자회”를 포위한 다음 야음을 타 쳐들어가기로 작전을 짰다. 전사들은 피로를 잊고 마른 음식에 랭수 몇모금 마시고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광장의 서남측과 동남측 층집들이 인차 아군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때라고 생각한 박락권퇀장은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불벼락이 삽시에 “만자희”에 쏟아졌다. 폭파조의 전사들은 지형을 교모하게 리용하면서 때로는 기여서 때로는 달려서 재빨리 광장을 꿰뚫고 청사앞 담장에 접근해갔다. 폭파소리가 몇 번 나더니 담장이 날아나고 대문안의 화구가 벙어리로 되었다. 잇달아 박퇀장은 친히 돌격조를 지휘하여 청사로 돌격해들어갔다. 교활한 적 지휘관은 부하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집안의 책상, 걸상들을 몽땅 층계입구에 쌓아놓았다. 그것은 아군의 진공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박퇀장은 즉시 일부 전사들에게 밖에 나가 위층에 올라가서 적을 족치라고 명령했다. 진퇴량난에 빠진 적들은 고스란히 두손을 들고 투항하고말았다. 대동광장(지금의 인민광장)은 장춘시 중심이였다. 거기엔 괴뢰 시정부, 경찰국, 방송국, 은행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광장서북쪽에 자리잡은 중앙은행청사가 제일 웅위로왔는데 회색화강암벽에 철문이 달려있었다. 보기에도 견고한 건물이였다. 그 안엔 4000여명 적군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군구사령부에서는 협동작전하여 먼저 시정부, 경찰국, 방송국을 탈취한 다음 은행을 고립시키고 나중에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4월 18일 낡밝을 무렵, 돌연 신호탄이 날아오르면서 회색하늘을 갈라놓았다. 삽시에 귀를 째는 듯한 총포소리가 려명의 적막을 깨뜨렸다. 맹렬한 포화는 층집들에 집중되였다. 동남종대는 쓰딸린거리, 민강로, 장춘거리에서 동시에 진공을 발동하였다. “조선퇀”은 종대의 주공부대로서 괴뢰시정부청사를 공격하는 중임을 맡았다. 점심때쯤 되어 “조선퇀”은 시정부청사에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전사들은 비발같이 쏟아지는 적탄을 무릅쓰고 돌격하였다. 맹렬한 포화에 시정부청사에는 불이 달렸다. 바람이 불자 불은 갈수록 세차게 타올라 적들은 부득불 청사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후 2시좌우에 “조선퇀”은 괴뢰시정부청사를 탈취하였다. 오후 4시, 세 개 종대는 이미 중앙은행을 물샘틈없이 포위하였다. 적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고말았다. 5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세 개 종대의 포화는 사정없이 은행청사지붕과 청사앞 방어선에 쏟아져내렸다. 적들은 미친듯이 반격을 시작하였다. 탄알이 아군이 점령한 집벽에 폭우처럼 쏟아졌고 폭파에 날아간 유리쪼각들이 전사들의 몸에 마구 들씌워졌다. 벽은 벌둥지마냥 구멍이 펑펑 뚫렸다. 아군 돌격대가 돌격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도 거세여 광장을 지나갈수가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군은 포병위치를 옮겨 단거리포격을 들이댔다. 포탄이 청사에 어김없이 날아들자 적들은 갈팡질팡하였다. 몇발의 포알이 창문으로 날아들어갔다. 온 청사에 불이 달리자 적들은 당황해서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기회를 타서 세 개 종대는 새로운 공격을 들이댔다. “조선퇀”이 청사와의 거리가 20~30메터되는 곳까지 전진했을 때였다. 갑자기 은행의 몇 개 철문이 열리더니 천여명 되는 적이 물밀 듯 몰려나와 동남방향으로 몰려갔다. 사태는 매우 위급했다. 만약 적들을 막지 못하면 후방에 있는 천명이나 되는 포로들과 산처럼 무져놓은 탄알이 반격의 력량으로 될터인즉 그 후과는 상상할수조차 없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무리져나오는 적들 앞을 용감한 “조선퇀”장병들이 막아나섰다. 앞장에 선 퇀장 박락권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날창을 적의 가슴에 박았다. 치렬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기회에 서남종대, 동북종대, 동남종대의 70퇀은 각각 서, 북, 동 3면으로부터 포위를 돌파하려는 적들에게 측면공격을 들이대여 적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앞의 적들은 아군에 포위되고 뒤의 적들은 은행청사에 도로 기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행안의 독전대에게 가로막혀 진퇴량난에 빠졌다. 이에 아군은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고 포로를 우대한다!”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어떤 적들은 무기를 놓고 아군켠으로 달려왔다. 적들은 투항을 알리는 백기를 흔들고야말았다. 퇀장 박락권은 놈들의 투항을 접수하려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교활한 적 한놈이 날창으로 박락권퇀장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박락권은 28세였다. 이번 전투에서 부퇀장 고생호도 적의 날창에 배를 찔리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앙은행청사우에 드디여 붉은기가 꽂혔다. 아군에 의해 은행이 점령된것이다. 이번 장춘해방전역에서 아군은 적 2500여명을 살상하고 1만 4000여명을 포로했다. 그만큼 대가도 컸다. “조선퇀”은 장병 170여명을 잃었다. 전역이 끝난후 75퇀은 구태시에서 잠시 휴식정돈하고 연변으로 개선했다.(계속)  
582    제76장 동만에서의 토비숙청투쟁 댓글:  조회:3225  추천:0  2014-03-21
  로흑산일대의 토비숙청을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 동북근거지창설의 크나큰 장애와 우환 제거 4000여명 토비 숙청  대량의 군수물자 로획   우환을 없애기 위해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의 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국민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빼앗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하에 륙, 해, 공 3로로 동북에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일본군과 괴로군 패잔병, 경찰, 헌병, 특무, 일제의 앞잡이들과 토비들을 규합하여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진공하는 이른바 “지하군”, “선견군”, “정진군”을 편성하였다. 동북경내에는 갈래가 복잡한 정치토비가 무려 9만여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동북에서의 국민당의 사회적기초가 되어 국민당의 조종밑에 도처에서 살판치면서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뒤엎고 교통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재물을 로략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민주정권을 적대시하면서 때만 오기를 기다리는 일만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해버리지 않는다면 농민대중을 폭넓게 발동할수 없을 것이고 근거지의 안정이 있을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 국민당이 대거 진공해오면 정면과 배후의 량면협공을 받는 위험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것이였다. 때문에 일만잔여세력과 정치토비는 튼튼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하는데 있어서 크나큰 장애와 우환이였다. 이리하여 동북에서는 “근거지를 건설하며 토비숙청을 다그치자”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1945년 겨울부터 기세드높은 토비숙청투쟁을 벌리였다. 연변에서의 토비숙청은 전 동북적으로 제일 먼저 시작되였다. 중공연변지방위원회와 연변군분구에서는 동북국의 지시와 “군대를 건설하는 한편 토비를 숙청하자”는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의 지시정신에 쫓아 군분구 사령원 강신태와 정치위원 옹문도가 몸소 책임지고 토비를 숙청하기로 결정하였다. 토비숙청에 동원된 병력은 군분구의 경비부대와 각 현 보안퇀 및 조선의용군 제5지대였는데 병력은 1만1천여명, 절대다수가 조선인들이였다. 삼도만을 두 번 치다   연길시 서광장서 열린 참군대회. 1941년 가을, 연길현 삼도만 평강촌에는 지방인민정권수립을 반대하는 한무리의 토비들이 있었다. 위만퇴역기병소좌 진보흥을 두목으로 하는 토비들이였다. 이자들은 지방인민정권을 반대하면서 백성들을 략탈하고 유린했다. 전보흥은 위만 군사부 삼도만 평강촌림대 부대장이였는데 해방후에도 계속 반동립장을 견지하면서 원 촌림대의 무기와 병마를 그러모아 토비대를 세웠다. 전호흥은 인민정권이 나날이 발번공고화되는것을 보고 한때 명월구경비퇀의 개편을 접수하였으나 다시 배반을 시도하였다. 하여 경비퇀 영장 손장상이 가서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외면하면서 같이 간 30여명의 무장인원을 억류하였고 두 번째로 권유하러 간 팔도구민주대동맹 위원장 최학성 등도 억류하였다. 경비퇀에서는 몇 번이나 서신으로 억류된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전보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완강하게 대항할 주비를 하였다. 이에 경비퇀 퇀장 남창수가 2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평강촌을 포위하였다. 토비들은 통제고지를 차지하고 포대에 숨었거나 토성화구에 매복하면서 아군의 진공에 맞섰다. 아군은 진지를 리용하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서 전투를 벌리였다. 결과 2시간 남짓 격전을 벌리였지만 적을 무찌를수가 없었다. 도리여 40여명 전사자를 냈을뿐이였다. 이렇게 하여 제1차 평강촌포위토벌은 실패하고말았다. 1946년 1월, 연변경비 1퇀과 3퇀이 련합하여 두 번째로 삼도만토비를 포위토벌하였다. 1퇀은 직접 삼도만을 공격하고 3퇀은 삼도만 서북쪽에 있는 인삼장부근에서 퇴로를 막았다. 1월 27일 새벽, 드디여 전투가 벌어졌다. 자지러진 총소리속에서 아군의 땅크가 토성대문을 들이밀자 부서져버렸다. 이에 당황망조한 토비들은 북산길로 하여 평강으로 도망쳤다. 토비두목 전보흥과 오건은 도망직전에 억류하고있던 팔도구인민민주동맹 위원장 최성학, 명월구수비영 영장 손장상 등 9명을 삼도만 평강촌 북쪽 오품엽자 골짜기에서 살해하는 “오품엽자구참안”을 빚어냈다. 곽영춘토비무리를 격멸   토비숙청을 위해 참군하는 청년들. 송하평탄광을 일명 “만탄”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화룡시가지에서 2.5킬로메터가량 되는 곳에 있다. “9.18”사변후 일본이 “만주탄광주식회사”를 운영하였는데 수천명의 중국인탄부들이 이곳에서 잔혹한 압박과 착취를 당했으며 무고하게 목숨을 앗기였다. 곽영춘은 탄광의 경찰이였는데 후에는 로동자들을 때려죽이고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는 4대십장의 하나로 되었다. 1945년 9월, 송하평탄광 “보안대” 두목자리를 차지한 곽영춘은 인차 안도의 선병균, 오도양차의 단수림과 결탁하였다. 그는 100여명의 병사에 100여자루 보총, 2정의 기관총을 가지고있었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이 대오를 개조해보려고 했다. 현당위 서기 운청, 현보안퇀 부정위 장보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송하평에 가 귀순할 것을 권고하였다. 2개월 남짓이 공작한 결과 곽영춘은 자신의 대오를 동북인민자치군 화룡보안퇀 독립영으로 재편성하고 영장이 되는것을 조건으로 귀순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군대가 기세사납게 장춘과 길림을 공략하자 그는 선병균, 단수림과 반변을 밀모하면서 공산당을 반대하고 장개석을 옹호해나섰다. 곽영춘은 사람을 보내여 길림에 가서 국민당의 위임장을 얻어온후에는 위장을 벗어버리고 공공연히 공산당을 원쑤로 대했다. 그는 무장대오를 거느리로 화룡시가지에까지 와서 시위하였고 기관총을 가지고 현정부에 들어가 식량과 돈을 내라고 강박하였다. 그는 또 퇀광주위에 방어공사를 설치하고 초소를 증설하면서 “화룡거리를 밀어버리고 공산당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떠들어댔다. 1945년 12월 24일, 룡정의 보안 4퇀과 쏘련홍군 20여명이 지원하러 왔다. 25일, 화룡의 보안6퇀에서는 날자를 정하고 곽영춘에게 련장이상간부를 데리고 회의하러 오라고 명령했다. 곽영춘이 정한 날자에 오지 않으니 4퇀과 6퇀은 쏘련군과 함께 탄광으로 출발하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곽영춘은 한창 술판을 버리고 질탕 먹고 마시고있었다. 아군이 초소를 지나 곧바로 영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자 곽영춘 등은 술좌석에서 뛰여나와 저항하였다. 총소리는 송하평하늘가에 자지러지게 울려퍼졌다. 적들이 저항은 완강하여 좀체로 누구러들려 하지 않았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전투는 2시간 남아 끌어 3시경에야 끝났는데 적 43명이 격살되고 48명이 생포되였다. 곽영춘과 나머지 놈들은 포위를 돌파하고 안도로 도망쳤다. 아군은 곽영춘의 집에서 국민당 퇀장위임장을 사출해냈다. 1952년 곽영춘은 화전현에서 체포된후 처형되였다.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격멸 오도양차는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었다. 1945년 8월 하순, 위만경찰 경위 로진이 여기에 “보안대”를 세웠다. 그해 11월초에 “보안대”를 “안도현공안대대 고동하3중대”로 고치고 단수림이 중대장으로 되었는데 ㄹ병력은 100명좌우였다. 단수림은 안도현 반동두목 선병균의 문객이였다. 단수림은 화룡현을 누비면서 살인, 략탈, 강간을 일삼았으며 때로는 교통을 차단하고 우리 군을 매복습격하였다. 곽영춘이 무리가 소멸된후 단수림은 더욱 기고만장해 미쳐날뛰였다. 1946년 음력설직전에 화룡현보안 6퇀 퇀장 박근식은 일부분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오도양차에 둥지를 틀고있는 있는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공격했으나 2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적 11명을 소멸했을뿐 토비소굴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에 3월 15일, 연변군분구 부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6퇀과 8퇀을 거느리고 가 공격하였다. 단수림이 거점을 잡고있는 마을은 2메터 높이의 담장과 화점으로 둘러쌓여있었고 경비가 삼엄하였다. 마을뒤의 산에는 또치까까지 높이 솟아있었고 마을안에는 적들이 우글거리고있었다. 주밀한 정찰을 거친후 구회괴는 8퇀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마을을 진격해들어가고 6퇀은 서북산의 또치까를 치고 포병련은 마을 동남에 있는 산의 진지를 차지하고 기회를 엿보아 싸움을 돕기로 하였다. 전투는 아침 7시경에 시작되였다. 적들은 마을안팍의 방어공사에 의지하여 밀집화력으로 아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면적인 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아주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후 3시까지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이때 6퇀은 서북산 또치까에서 가까운 고지를 점령하고 적의 또치까에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들은 차츰 기가 죽기 시작했다. 이윽고 또치까가 파괴되고 적의 화력이 갑자기 즘즉해졌다. 구회괴는 단신으로 동남쪽담벽을 넘어들어갔다. 전사들도 잇따라 구회괴의 뒤를 따라 담을 넘어들어가 단숨에 전 촌의 적을 제압할수 있는 또치까를 탈취하였다. 마을의 적들은 배겨내지 못하고 서북쪽으로 빠져나가 안도방향으로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80여명을 소멸하고 총 40여자루 로획했다. 필서문의 끝장 필서문은 두 번 혁명대오에 기여들었다가 두 번 변절하여 적에게 항복한자이다. 필서문은 하북성사람으로서 안도현 처창즈에 와서 토비질하다가 1932년 항일대오에 기여들어 구입원, 유격대 중대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2퇀 퇀장, 군부 부관장 등 직무를 맡았다. 후에 일본헌병대 나가지마공작반에 투항하여 대전자특수반에 편입되였고 항일군민을 해치였다. 항일전쟁은 승리하였으나 안도현소재지가 아직 해방되지 못하고있을 때 필서문은 선병균도당에 빌붙어 치안유지회의 반동무장공안대를 조직하고 제4중대 중대장을 담당하였으며 우리 경비부대가 안도를 해방하는것을 여러번 저애했다. 1946년 3월, 연변경비부대가 선병균비적을 치고 안도를 해방할 때 필서문은 대오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4중대는 길동군구보안3퇀 1영 4련으로 재편성되였다. 필서문은 또다시 혁명대오에 기여들어온후 적극성을 보이면서 공산당을 옹호한다고 표시하였다. 필서문은 1946년 4월에 현대대장이 되기까지 했다. 대대장이 된후 반동본성이 재발한 필서문은 반란을 일으킬 꿍꿍이를 하였다. 5월 19일, 1영 4련이 명령을 받고 훈춘으로 갔을 때 필서문은 심복을 보내여 4련의 사무장 조개선, 패장 곡화림 등과 반란을 밀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 련의 많은 사병들이 6월 13일 밤에 도망쳐버렸다. 필서문은 또 여러번 사람을 림강, 돈화 등지에 보내여 토비들을 그러모으고 무기를 수집하게 하였다. 중공안도현위 서기 겸 현대대 정위 박덕흠은 필서문의 음모활동을 료해한후 길동군구에 보고하였다. 군구에서는 보안3퇀이 1련의 무기를 해제하도록 결정하였다. 1련은 지도원을 내놓고는 다 필서문의 심복들이며 반란의 주력이였다. 군구에서 파견한 선견부대 리자상영장이 거느린는 2영이 6월 29일, 안도에 도착하였다. 현위에서는 즉시 전화로 대전자에 있는 필서문에게 현에 돌아와 회의에 참가하라고 통지하였다. 교활한 필서문은 요긴한 일이 있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에 문득 현에 와서 방정위를 찾았다. 그는 낌새를 노리다가 현장의 첩이 죽어서 조문을 간다면서 자리를 떠버렸다. 간부들이 현대대부에서 행동계획을 짜고있는데 필서문이 또 대대부에 갑자기 뛰여들었다. 이때 리자상이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하였다. 그를 1련에 압송하여 심복들더러 무장을 내놓도록 명령하게 했으나 심복들의 완고한 저항을 받아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에서 필서문은 다리를 상했으나 혼란한 틈을 타서 담을 넘은후 도망치고 그 외의 비적들은 격살되였거나 포로되였다. 장백산밀림으로 달아난 필서문은 다시 120여명의 비적을 그러모아가지고 9월에 길림에 가서 장백군에 투항하여 제1퇀 3영 소좌 영장으로 되었다. 1948년 해방군이 길림을 포위하였다. 길림성군구 사령원 주보중, 길림시경비구 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쓴 명령을 필서문에게 보내여 투항할것을 권고했으나 필서문은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방군에 포로되였고 1949년 3월 안도현에서 처단되였다. 토비를 치고 안도를 해방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후 연변의 대부분 지구는 해방되였으나 안도현에서는 1945년 8월 20일, “림시유지회”를 내오고 후에는 또 괴뢰림시현정부를 내왔다. 대악질지주 선변균 삼형제가 조직한 무장은 이 정권의 기둥이였다. 그들은 이도백하, 송강, 량강구, 만보 등 교통요지를 지키면서 우리 군의 안도해방을 극력 저지하려 시도하면서 국민당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946년 3월, 동북민주련군은 안도현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한갈래는 남만의 양정우지대 즉 료남독립 2사 3퇀과 1퇀(1개영) 그리고 리홍광지대 한 개 패로서 이도백하를 치기로 하였으며 다른 한갈래는 길동군분구 부사령 구회괴가 길동군분구 경비려 2개 퇀을 거느리고 화룡을 거쳐 오도양차와 대전자를 치기로 하였다. 오도양차에는 토비 한 개 대대의 병력이 지키고있었다. 3월 6일 오전 7시부터 시작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리하여 안도를 해방하는 돌파구가 생기게 되었다. 3월 8일 밤. 부대는 대전자에서 15킬로메터가량 떨어진 십기가 서남툰일대에 주둔하면서 적정을 분석한후 투항을 권고하기로 하였다. 이튿날 구회괴부사령원이 직접 적의 주둔지에 가서 담판했다. 적들은 하는수 없이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총 한방 쏘지 않고 대전자를 해방했다. 이도백하에서는 선병의의 한 개 중대가 지키고있었다. 대장 강승무는 완고분자로서 투항을 거부하였다. 남만부대와 동만부대는 이도백하에 집결하여 남북에서 협공할 태세를 취하였다. 3월 16일 점심때 공세를 발동하여 12시간의 격전을 벌려 비적을 전부 섬멸하고 그길로 안도현소재지 송강진을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선가의 지주무장을 전부 소멸하고 림시현정부도 뒤엎어졌다. 3월 18일, 제1임 현장 주유숭이 해방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안도현인민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마희산비적집단의 괴멸 1945년 9월, 마희산은 왕충림, 대청해, 마희귀, 리금희 등과 함께 마을과 삼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왕청현 춘양향 우권구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400여명의 대오를 확대하였다. 이때 마희산은 국간경과 단신민을 국민당목단강시당부 훈련과의 과장인 강학용한테 파견하였다. 강학용은 치안대를 받아들이고 당장에서 마희산을 대장으로, 왕충림을 부대장으로, 국간경을 참모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1945년 12월, 국민당동북정진군 사령 정운봉은 또 마희산대오를 국민당동북정진군 제1련로 개편하였다. 마희산은 자칭 사령이 되고 국간경은 참모장이 되었으며 그 아래에 3개 퇀, 8개 처, 2개 독립영, 1개 특종련, 1개 박격포련, 1개 철도공병기관차대를 두었는데 병력 도합 1000여명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녕안, 왕청, 해림 일대의 크고 작은 토비무리들을 모두 마희산의 수하에 귀속되였는데 5000여명이나 되었다. 마희산비적단은 구성된 그날부터 제멋대로 날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감행했다. 마희산은 총과 탄알을 얻기 위해 장사인을 데리고 석두하자에 가서 송촌장을 쏴죽이고 권총 1자루와 보총 8자루를 탈취해갔다. 1946년 1월, 마희산비적단은 기타 비적단과 결탁하여 아미달에서 우리 군 부상병 20명을 수색해냈다. 그중 군관 2명이 있다는걸 안 마희산은 국간경과 공모한 끝에 사령부에 압송한다는 구실을 대고 도중에 2명 군관을 총살하게 하였다. 그해 3월에 마희산비적단은 라자구에서 신화촌에 도망쳐와서 깊이 잠든 조경묵이네 한집식구 세사람을 쏴죽였으며 그 이튿날 철퇴할 때 소와 말 84필과 짐마차 30여대를 략탈하고 50여명 군중을 붙잡아갔다. 마희산은 569명 군민을 죽였으며 현금 1억여원(당시 화페), 입쌀 16만3500킬로그람, 소와 말 312필, 닭 1800여 마리, 이주자리와 옷 등속 1380여벌을 략탈해 갔다. 1946년 2월, 연변경비부대와 왕청보안퇀에서는 목단강군구 산하의 대부분 부대의 배합하에 마희산비적단에 대한 공격을 들이댔다. 2월 15일 밤, 아군주력부대는 쥐도새도 모르게 마희산의 사령부가 있는 록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1000여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동녘이 밝아질 때를 기다린 아군부대는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20분간의 격전을 벌린 끝에 비적들의 병영을 점령하였으며 전투중에 정진군 총사령 정운봉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군은 마희산비적단의 군수창고가 있는 로묘를 포위하고 리금희, 대청해를 두목으로 한 비적 200여명을 생포하였다. 뒤를 이어 비적단이 차지하고있던 춘양, 락타산, 천교령 등지도 점령하였다. 마희산은 묘령이 함락되자 패잔병 500여명을 이끌고 라자구일대로 창황히 꽁무니를 빼다가 쌍마가, 서란, 천강 등지를 거쳐 길림에 도망쳐가서는 국민당에 의지해버렸다. 그후 그자는 아군에 의해 포로되였다가 1951년 2월 20일, 녕안에서 총살당했다. 왕경운비적단의 괴멸 1945년 9월, 왕청현 대흥구에서 위만경찰이였던 왕경운과 지주 왕극귀 등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락후한 군중 40여명을 롱락하여 보안대를 조직하고 왕경운이 대장이 되었다. 대부는 대흥구에 두었다. 그해 10월 15일, 일본특무 요옥령, 왕귀, 상유신 등이 암암리에 국민당지하건군조직의 사촉을 받고 일제와 위만주국을 위해 복무하던자들을 그러모으고 청년들을 롱락하여 보안대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천교령에 1퇀, 묘령에 2퇀, 대흥구에 3퇀을 두었다. 하마탕, 계관라즈, 묘령 등지의 토비대오가 600여명의 확대되자 “동북 제2정진군 대흥구사령부”를 세우고 대흥구 하북툰(후에 하남으로 옮김)에 사령부를 두었다. 요옥령이 사령으로 되고 아래에 8개 처, 1개 퇀을 두었다. 참모처장에 왕귀, 군수처장에 우도일, 집사처장에 왕흥주, 부관처자엥 관춘양이였고 퇀장에 왕경운, 부퇀장에 왕선주, 부관에 정계림이였다. 아래에 3개 영을 두고 영아래에 11개 련을 두었다. 퇀부는 대흥구에 설치하고 1영은 묘령에 2영은 계관라즈에, 3영은 하마탕에 주둔시키고 련은 여러 촌에 널려있었다. 무기는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중기관총 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있었다. 1948년 8월, 토비부련장 마규 등 10여명이 동양에 가서 백성들의 집을 탹탈하다가 김태길일가 4명을 죽였고 9월에 류록, 염청산이 서양툰에 가서 최창익을 보고 식량을 내라고 하였으나 내지 않으니 당장에서 죽여버렸다. 10월에 토비영장 류록이 13명을 데리고 아미달에 가서 생아편을 략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1946년 1월 13일, 보안대가 영벽, 묘령에서 토비들과 전투하였는데 46명이 전사하였고 2월에 토비들은 친척방문을 온 군중을 팔로군의 밀정이라고 총살하였으며 8월에 후하 상촌에서 툰장 김명창을 붙잡아다 일본군도로 찍어죽였다. 이에 왕청보안퇀에서는 대흥구를 공격하였다. 왕경운과 그의 비적단의 1, 2영은 연변경비부대에 귀순하여 재편성되고 3영은 마희상에게 붙었고 일부분은 길림으로 가 국민당에 붙었다. 요옥령은 우라가전투에서 아군에 포로되여 처형당했다. 안진유토비대의 괴멸 1945년 9월 안진유는 특무 장성기, 우현주 위만촌장 류방무와 결탁하여 지방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0 라자구일대에서 600여명을 그러모아 자위대를 조직한후 대대장이 되고 장성기가 부대대장이 되었다. 대대 아래에 3개 중대를 두었다. 얼마후 또 준아신을 우두머리로 한 장가점의 토비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1946년 10월, 목단강에 있는 국민당건군조직에서 련락원 진만기, 주학무를 라자구에 파견하여 “자위대”를 받아들이고 “국민당동북정진군 제6사 제16지대 제2려 제5퇀”으로 편성하였으며 안진유를 퇀장으로 우헌주를 부퇀장으로, 류방무를 부퇀장 겸 구장으로 위임하였다. 이 대오는 700여명으로서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중기관총 2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있엇다.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이 토비들을 소멸하는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1946년 3월 3일, 보안퇀을 라자구에 보내여 토비들이 미처 손쓸새 없이 족쳤다. 영장 김문우가 120여명을 데리고 화전현으로 도망친외에 나머지들은 전부 항복하였다. 안진유는 대세가 기울어진것을 보고 황급히 류방무 등 비적을 데리고 로흑산으로 도망쳐 오삼호토비대에 가담했다. 1946년 4월 7일 이른 새벽, 아군이 자는 틈을 타서 안진유는 오삼호의 500명 병력과 7문 대포의 배합하에 라자구를 돌연 습격하였다. 우리 보안퇀 1영은 미처 막을사이 없이 흩어지고말았고 소영장은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대부분은 전사하였거나 포로되였다. 토비들은 마을에 들어가 제멋대로 조선인군중을 죽였고 조선인여성을 강간하였으며 조선인의 재산을 략탈하였다. 이날 오전에만도 64명 조선인을 죽였다. 그리고 조선인 200여명을 붙잡아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족백성들이 거듭 사정을 해서야 전부 내놓았다. 그해 4월 14일, 보안퇀은 안진유토비무리에 맹렬한 진공을 들이대여 라자구를 점령하였다. 기지를 잃어버린 안진유는 일부 토비들을 거느리고 다시 호흑산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안진유는 또 오삼호와 결탁하여 라자구를 진공하였다. 아군은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라자구에서 물러나왔다가 다시 우세한 병력으로 라자구의 적을 포위공격했다. 안진유와 잔여토비들은 또 로흑산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군은 바싹 추격하여 5월 5일, 3호비행장에서 오삼호를 쏴죽이고 로흑산에서 안진유를 격상(후에 병원에서 죽음)시켰다. 부퇀장 류방무는 토지개혁때 붙잡혀 총살당했다. 돈화의 토비숙청투쟁 일본이 무조건투항한후 쏘련군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제때에 일본군을 집중시키지 앟아 흩어진 패잔병들이 돈화의 산야에 숨어 늘 부근의 마을을 습격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무기를 들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한달 남짓한 사이에 이런 대오가 각지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 때 지주, 위만관리와 경찰, 자위단 및 오랜 비적들은 갖은 애를 써서 이런 대오의 령도권을 탈취하였다. 그들로는 앵목의 리충옥, 성서의 당옥, 대석두의 리옥보, 대포시하의 장영춘, 관지의 장진호, 태평령의 등진상, 삽어하의 주흥복, 남항니어의 왕대법사 등이였다. 이자들은 오로지 국민당을 동경하고있었고 무장을 쥐자 극력 세력을 늘이였다. 1945년 8월 19일, 동북항일련군 소분대 리문장 등이 쏘련군과 함께 돈화에 왔고 얼마후에 또 류건평이 왔다. 9월초, 류건평을 사령으로 하는 돈화현보안사령부가 건립되자 자연발생적인 무장대오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1월, 양상규 등 연안간부들이 와서 중공돈화현위와 현림시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공산당원이 현장이 되는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위만군 소좌군의 출신인 류화일이 현장으로 되었다. 그는 국민당돈화현당부의 려명과 언녕부터 배짝이 맞아 들락날락 하는자였다. 그는 수하에 수백명의 공안대를 두고 보안대와 엇섰다. 보안사령부는 먼저 교도대를 조직하고 4개 향의 8개 대대를 받아들여 재편성, 간부를 파견하였다. 국민당은 각종 수단으로 이런 지방무장을 끌어당겼으며 보안사령부에서 재편성하여 임명한 대대장을 국민당의 상좌퇀장으로 위임하였다. 11월 하순부터 류화일은 공개적으로 국민당간판을 내걸었고 향의 대대들을 국민당에 기울어지게 하였으며 항일련군간부였던 리문장을 대포시하에서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양상규는 미리 기미를 알고 관지를 떠났기에 살해당하지 않았다. 돈화주둔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중공돈화현위에 즉시 현소재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전을 담보할수 없다고 통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현위는 교도대대와 함께 현소재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는데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겨우 륙과송까지 왔다. 때마침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연길방면으로 가는 도중에 돈화를 지나다가 양상규를 만나 돈화의 정황을 듣고 그들을 반격하기로 하였다. 하여 교도대대와 부근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두 개 중대가 합쳐 800여명이 쏘련홍군과 련계짓고 돈화로 쳐들어갔다. 5지대의 지원을 받아 요충지를 점령한 리공발이 류화일을 사로잡고 무장해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길가에서 류화일이 마차를 타고 온다는 정보를 장악한 리공발은 마차를 가로막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류화일의 호위병 서규영 등이 무장해제를 거절하면서 보안사령부 전사 2명을 쏘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리공발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반격하면서 마차에 뛰여올라 류화일을 끌어내리고 호위병들의 무기를 해제하였다. 보안사령부에서는 뒤이어 쏘련홍군의 지지하에 류화일이 통제한 공안대대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돈화림시정부의 대권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4개 향은 여전히 토비가 통제하고있었다. 1946년 2월, 동북민주련군에서 파견한 득극명려가 돈화경에 왔다. 부대의 선견대가 서관툰 가까이에 왔을 때 갑자기 토비의 습격을 받았다. 격전 끝에 토비를 물리치고 진지를 점령하였다. 나흘후 대황툰에서 토비를 타승하고 말을을 점령하였다. 아군은 정치적공세를 들이대여 대포시하의 장영춘, 혹석의 석덕진 등을 항복시켰다. 기타 토비들은 혼란에 빠져 장춘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후에 장춘에서 전부 소멸되고 돈화의 잔여비적들은 산속으로 도망쳤으나 선전교양을 거쳐 대부분이 항복하였고 완고분자들만이 포로되였거나 진압당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겨울부터 시작한 토비숙청투쟁은 1946년 7월에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이번 투쟁을 통하여 동만근거지건설의 우환을 제거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보호하였다. 이번 토비숙청에서 아군은 4000여명 토비들을 소멸하고 각종 포 24문, 중경기관총 76정을 포함한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로획했다. (계속)  
581    제75장 조선의용군 제5지대 댓글:  조회:5240  추천:1  2014-03-07
  연변에 진출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1945년 12월. 연길.) 조선의용군 여러 갈래 지대 편성해 남만 북만 동만서 국민당반동무장 섬멸 전국해방전투서 혁혁한 전공을 조선의용군 “7.7”사변전후 많은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이 연안에 가서 중공중앙당교 아니면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거나 공부하였다. “7.7”사변이 일어나자 무정장군과 중앙당교의 진광화 등 많은 조선인혁명자들은 항일 최전선에 나아가 피어린 싸움을 하였으며 그중 적지 않은 동지들은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에 배치되여 공작하였다. 일찍부터 중국 관내 각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각 반일민족주의정당, 단체들은 각지에 간부학교, 군사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7.7”사변후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실현되고 전 중국인민들이 일제와의 성전에 떨쳐나서자 이에 고무된 조선인 각 정당, 단체들은 분산된 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38년 5월 김규식, 김약산이 령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발기에 의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이 련합하여 조선민족해방전선련맹을 결성하였고 1940년 5월에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동립당이 련합하여 김구를 위수로 한 한국독립당을 건립하였다. 이 두 조직은 서로 손잡고 중국항일력량과 련합하여 항일의 길에 떨쳐나섰다. 관내에서 맨처음 항전에 나선것은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등 청년들이였다. 그들은 1938년 7월에 조선청년전지복무단을 조직하여 중화민족해방선봉대와 함께 무한보위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후 그들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과 련합하여 “조선민족전선련맹”을 결성하고 국민정부군사위원회의 정치부의 지도하에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김약산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군사학교출신이 대다수를 점한 이 의용대는 무한보위전의 포성속에서 태여났고 후에 3개 지대로 나뉘여 항일 제1선으로 달려나가 일본침략군과 싸우는 한편 적병사들에 대한 선전, 고동 공작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림으로써 중국정부와 인민들의 찬양을 받았다. 다른 한편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한국림시정부에서도 건군공작을 다그쳐 1940년 9월 17일에 중경에서 광복군총사령부를 세우고 간부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그들은 3개지대의 군사인원들을 중경, 서안 등지에 파견하여 중국군의 적군공작을 돕는 한편 앞으로의 대부대건설계획을 세우고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중일전쟁이 대치단계에 이르자 국민당정부는 소극적으로 항전하고 적극적으로 공산당을 반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2년남짓이 국민당군대와 련합하여 간고한 투쟁을 벌려오던 조선의용대는 당시 화북지대의 20여만이나 되는 조선인들을 항일에로 불러일으키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는 팔로군과 손잡고 항일투쟁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기 위하여 중경, 호북, 광서 일대로부터 북상하여 끝내 팔로군총부의 소재지인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이르렀다. 그후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은 중국관내의 조선인항일력량을 통일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중국정부의 지지와 협조를 받고 1942년 5월에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총사령에 리청천, 부사령에 김약산을 추대한 광복군은 원 의용대를 제1지대로 편성하고 김약산이 지대장을 겸하였으며 원 광복군 제2지대로 편성하고 림범석을 지대장으로 임명했다.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온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하에 팔로군내의 조선동지들과 화북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청년조직과 련합하여 조선의용대를 화북조선의용군으로 재편성하였다. 2만5천리장정에 참가했던 무정장군을 사령원으로 박일우를 정치위원으로, 박효삼을 참모장으로 한 조선의용군은 전투력이 강한 항일무장대오였다. 항일근거지의 가렬처절한 반“소탕”전투에서 의용군은 헌신적으로 싸웠다. 진광화, 석정 등 의용군지휘자들은 성스러운 항일구국공작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였다. 그들의 영웅적업적은 전 중국인민들로부터 찬양을 받았고 항일근거지학교의 교과서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그후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1942년 7월에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재조직되였고 연안에 들어가서는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최창익과 한빈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많은 일을 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화북조선의용군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성립한후 무정을 교장으로 임명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를 받으면서 많은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들은 또 화북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태항, 태악, 기로예, 진찰기 등지에 독립동맹분맹을 내오고 북평, 천진, 신향, 개봉, 석가장, 승덕 등지의 조선인 농민, 지식인, 중소상인들 속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동북과 조선에 공작원을 파견하였으며 할빈일대에는 독립동맹 제12지부를 내왔으며 평양과 서울에서도 동지들을 쟁취하는 공작을 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화북에서 싸우던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은 팔로군과 어깨겯고 동북에 진출하여 일제의 잔여세력을 숙청하는 새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들중의 일부는 조선북반부로 나가고 중경에 있던 한국림시정부 요인들과 중경, 서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군은 “개인의 신분”으로 조선남반부로 돌아갔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   심양에 집결한 조선의용군(1945년 11월 7일.) 1945년 8월 8일, 쏘련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뒤인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제6호 명령에서 우리 나라 관내에서 항일투쟁을 진행하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하여 적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을 조직하여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후 조선의용군은 무정사령원의 인솔하에 관내에서 나와 도보로 동북으로 진군, 11월 4일 심양에 도착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지도기관은 심양에서 회의를 열고 변화된 형세에 대처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때 조선북반부에 진주한 쏘련군은 중국에서 나가는 조선의용군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의용군은 조선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의용군은 림기응변하여 부대를 1, 3, 5 지대로 편성한후 조선인이 모여사는 남만, 북만, 동만으로 나가서 중공중앙동북국의 통일적인 지도하에 먼저 동북근거지를 건설하는 투쟁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제1지대의 지도성원들로는 지대장에 김웅, 정치위원에 방호산, 참모장에 안빈, 정치부주임에 주연이였다. 한청, 주연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선경종대를 기초로 한 1600여명의 병력과 연안ㅡ조선혁명군정학교 졸업생, 각 항일근거지에서 북상한 청년군관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제1지대는 보병 9개, 기관총중대, 경위중대 등 11개 중대를 두었다. 제1지대는 그후 리홍광지대로 발전하였으며 1946년 12월에는 동북민주련군 독립 제4사로, 1948년 11월 심양이 해방된후 독립 제4사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개편되였으며 이미 1만2천여명 병력을 가진 정규군 사단으로 발전성장되였다. 1945년 11월 25일, 북만으로 진군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재편성한다고 선포하였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부지대장에 리덕산, 정치처주이에 리근산, 참모장에 김연이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아군 359려와 송강군구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목란, 통하, 방정, 연수, 상지 등 현성을 해방하는 전투와 토비숙청에 참가하면서 2000여명으로 병력을 늘였다. 3지대가 할빈으로 들어왔을 때는 병력이 3000명으로 늘어났다. 할빈시의 위수임무를 맡은 3지대는 부대를 파견하여 동북국을 비롯한 성, 시의 주요한 당정기관을 보위하였으며 송화강대철교, 발전소 등 큰 곳을 수비하였다. 그리로 일부 병력을 시교농촌에 파견하여 토지개혁의 순조로운 진전을 보장하게 하였다. 1948년 1월, 동북민주련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였다. 그해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명령를 받고 할빈을 떠나 길림성 연통산일대에 가서 길동경비사령부의 조선인부대와 목단강에서 온 조선인전사들로 무어진 목단강군구 제14퇀과 함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로 편성되였다. 그해 10월, 3지대는 장춘포위전에 참가했다. 장춘이 해방된후 3지대는 장춘시 위수임무를 맡았다. 1949년 3월, 동북인민해방군이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후 3지대는 제4야전군 독립 164사 491퇀에 편입되여 료심전역에 참가했다. 1945년 11월 21일, 길림시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소부분인원을 남겨 길림시에서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11월 29일, 화전현소재지에 주둔한 길림성보안총대 제7대대는 상부의 명령과 조선의용군 심양회의정신에 따라 12월말에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되였다. 이 부대는 화북에서 온 의용군을 골간으로 하고 7대대를 주력으로 화전현, 서란현, 교하현 등지의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여 조직한 무장대오로서 지대의 지대의 지휘부는 괴뢰만주국 화전현공서 울안에 설치되여있었다. 박훈일(朴勳一)이 지대장 겸 정치위원을 맡고 최명이 부지대장 겸 부정치위원, 김극이 참모장을 맡았다. 지대부아래에는 6개 중대가 소속되있었다. 1946년 3월, 7지대는 화전현 보안퇀으로 개편되였다. 양상곤이 퇀장으로 임명되고 현위서기 왕소천이 정치위원을 겸임했으며 송무선이 부퇀장으로 임명되였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창건된 뒤 길림지구에서 반혁명적무장을 짓부시는 투쟁에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돈화역에서의 풍파   1946년초 룡정에 꾸려 많은 군정간부를 양성해낸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1945년 11월 9일,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동만을 향해 진군하였다. 5지대는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간부와 학생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대오였다. 조선의용군 부사령이며 정치위원인 박일우가 제5지대의 정치위원을 겸했고 리익성이 지대장을, 전우와 리권무가 참모장을, 주혁이 정치부주임을 맡았다. 지대는 9개 중대로 구성되였는데 정찰, 경위, 무전, 통신, 악대 등 지대직속까지 합하여 대원이 900여명 되었다. 지대에는 참모부, 정치부, 공급부가 설치되여 있었다. 정치위원 박일우는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교장 김두봉)이였다. 박일우는 화룡현사람으로서 일찍 30년대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였다. 1945년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고 대회에서 재중조선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상활에 관한 보고를 하여 대표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지대장 리익성도 일찍 항일투쟁에 참가한 투사였다. 심양을 떠난 부대는 연도에서 조선부락 동포들의 환영을 수없이 받으면서 행군했다. 새하얀 조선옷을 떨쳐입은 부락민들은 동구밖에까지 나와 부대를 맞아주었고 마을에 들어가서는 맛나는 음식을 대접하군 했다. 의용군전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눈물겨운 전투담을 들려주었고 조선의용군행진곡 등 항일혁명가요를 배워주었다. 행군도중 리익성지대장은 행군속도를 다그쳐 동만에 진출하라 조선의용군사령부의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도보로 행군해서는 그 명령에 지정된 시간내에 동만에 도착할수 없다고 생각한 리익성지대장은 한 참모일군에게 청원역에 가서 기차를 구해보라고 지시했다. 역에 갔다온 참모일군은 기관차와 차량 10바곤은 구했으나 기관사가 없다고 했다. 기관사가 없어 골치를 앓고있는데 때마침 한 중대에 참군하기전에 기관사조수로 일한적있는 한 전사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기차를 타면 길림까지 헐히 갈수 있다는 생각에 전사들을 기뻐날뛰였다. 의용군전사들을 꽉 박아실은 기차는 악대가 연주하는 “조선의용군행진곡”의 장엄한 군악소리속에서 서서히 반석역에 들어섰다. 플래트홈은 마중나온 수백명 조선인군중들의의 환호성, 만세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워낙 반석역에 잠간 멈춰 점심을 먹으려고 기차를 세웠으나 환영나온 군중들의 성의와 열성에 감동된 의용군전사들은 차에서 뛰여내려 환영군중들과 한덩어리로 엉켜 부등켜안고 돌았다. 남녀로소할것 없이 의용군전사들을 부등켜안고 “우리 군대, 우리 군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일우정치위원이 플래트홈에서 군중들을 향해 격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박일우는 제5지대를 대표하여 반석지구 조선인군중들에게 인사를 드리고나서 국제국내형세,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정책, 동북조선인들의 당면한 과업에 대하여 말했다. 박일우의 연설은 무시로 일어나는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조선인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 “조선의용군만세!”를 웨치면서 호응했다. 박일우는 반석지구 조선인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박정덕, 장천립, 채동성,차진 등10여명을 남긴다고 선포했다. 반석에 남은 이들은 그후 반석지구에 조직된 조선족자위무장대오를 기초로 하여 2개 중대의 조선인무장력량을 조직함으로써 반석지구의 인민민주정권을 보위하고 사회질서를 확보하는데서 큰 기여를 하였다. 길림에 이른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전원이 기차를 타고 갈수 없는 형편에서 먼저 2개 중대로 선발대를 무어 전우의 인솔하에 화물차를 타고 연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선발대를 태운 화물차가 돈화역에 멈춰섰을 때였다. 사면팔방에서 총성이 요란히 울리고 “네놈들은 포위됐다!”, “손들고 차에서 내리면 살려준다!”는 중국말로 웨치는 고함소리가 어지러히 들려왔다. 그 웨침소리속에는 로어로 뭐라고 꽥꽥거리는 고함소리도 섞어있었다. 사태의 위급성을 파악한 전우는 당황해하는 전사들을 눅작혔다.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누구도 절대 총을 쏘아서는 안됩니다. 진상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그렇다쳐도 쏘련붉은군대까지 가담했길래 충돌이 생기면 후과는 상상하기 어렵게 될것입니다. 쏘련붉은군대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 지고무상의 권력을 갖고있으므로 절대 맹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째야 한단말입니까” “먼저 쏘련군대를 설복해야지요. 진상이 밝혀지면 문제가 해결될수 있습니다. 자, 모두들 무기를 놓고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립시다.!” 결국 선발대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돈화시내로 압송되고말았다. 참모장 전우는 우선 붉은군대사령원을 만날것을 요구했다. 쏘련공산주의대학의 졸업생인 전우는 류창하게 로어를 구사할수 있었다. 그는 자신은 쏘련에 있을 때 또꼬브라는 이름을 썼으며 지금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이라고 소개한후 연변으로 나가는 목적을 설명했다. 그러나 붉은군대사령원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선발대가 돈화에서 국민당계통의 지방무장에 의해 억류되였다는것을 알게 된 제5지대 대부에서는 상황을 즉시 조선의용군사령부에 무전으로 알렸다. 이에 조선의용군사령부에서는 이미 연길쏘련군사령부에 정황을 알렸다는 답전이 왔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교하현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0여킬로메터 상거한 조선인부락에서 출발하여 돈화를 향해 강행군을 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연길쏘련군사령부의 강신태대위는 돈화사건에 대한 조선의용군사령부의 급전을 받고 즉시 돈화에 가서 쏘련군사령부와 교섭하였다. 전우와 강신태의 인내성있는 해석과 설복 끝에 자기들이 돈화보안사령부 류화일의 꾀임에 들었다는것을 알게 된 돈화쏘련군사령부에서는 5지대 선발대전원과 몰수했던 무기를 내놓았다. 위만군의 상위로 일한적 있는 국민당원 류화일은 돈화지구의 혼란한 틈을 리용하여 치안유지회를 조직했고 돈화현 현장자리에까지 기여 올랐다. 현장이 된후 이자는 돈화보안사령부를 조직했다. 류화일은 국민당특무들과 공공연히 결탁하여 돈화에 건립된 인민민주정권을 뒤엎고 돈화국민당당부까지 세웠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가 돈화를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류화일은 일본군패잔병부대가 비밀리에 돈화를 거쳐 연변쪽으로 도망간다고 쏘련군사령부에 거짓보고를 했다. 류화일의 말을 믿은 쏘련군은 군대까지 파견하여 류화일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제5지대 지대부가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돈화남쪽의 림강툰에 이르렀을 때 돈화사건이 금방 해결되였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돈화지구에 인민민주정권을 세워주고 앞으로 동만지구의 혁명형세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계획의 첫단계로 돈화의 반동무장을 소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돈화에는 8개 보안대대가 있었는데 7개 대대가 변절하여 류화일을 괴수로 하는 국민당측에 넘어가 있고 유독 1개 조선인대대만이 마호에 철퇴하여 투쟁을 견지하고있었다. 제5지대는 조선인대대와 손잡은후 주밀히 정찰하고 세밀하게 전투를 포치하여 12월 중순의 어느날 반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류화일의 반동무장을 일거에 섬멸해치웠다. 제5지대의 재편성   1946년 연길에 설립된 민주학원에서 원장 주보중과(앞줄 왼쪽 다섯번째)과 교직원들. 1945년 12월 8일 밤에 문정일이 조선의용군선견대를 거느리고 먼저 연길에 도착하였다.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전원 관선정과 연변교육계의 박재하가 마중나갔다. 연길에는 조선의용군판사처가 설립되였고 문정일이 주임을 맡았다. 12월 31일, 박일우, 리익성이 조선의용군 제5지대 400여명 장병을 거느리고 연길에 도착하였다. 1946년 1월초순, 5지대는 연변경비 1퇀, 2퇀과 합병하여 조선의용군 15, 16퇀을 편성하고 조양천에 교도대를 세웠으며 훈춘에 1개 중대를 파견하여 건군사업을 벌렸고 포병부대의 건립에 착수했다. 15퇀은 5지대의 절반 력량과 경비 2퇀이 합병한 부대였다. 1946년 3월, 15퇀은 길동경비 2려의 1개 퇀으로 되었고 그후에는 길림군구 독립 3퇀으로 개칭되였다. 1948년 1월에는 동북군구 독립 6사에 편입되여 16퇀으로 되었다가 1948년 11월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6사 466퇀으로 개칭되였다. 부대가 자주 재편성되는 과정에 한족(漢族) 1개 영이 편입되기는 했지만 기본상에서 조선인퇀의 본색을 확보하고있었는바 2영과 3영, 퇀직속의 대부분은 조선인들로 구성되였다. 이 퇀은 라자구일대에서의 토비숙청, 하발령방어축성물로동, 동만철도경비, 길림외곽지구에서의 운동전, 장춘포위전 등에서 견강한 집단으로 장성했다. 관내로 진군한후 이 퇀의 2영7련 즉 “김성범련”은 이름을 떨친 영웅련대, 모범련대였고 3영9련은 장강도하작전의 서막인 단풍전투에서 전투련으로 되어 대담하고 용감하고 신속하고 령활하게 전투를 하여 2분만에 1호부루를 폭파하고 6분만에 부두를 점령함으로써 전반 전투의 승리를 담보하였다. 1949년 11월에 열린 156사 제1차 영웅모범대회에서 리순임, 정형련이 1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고 19명이 각기 2, 3, 4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였으며 김성범, 주광문, 박문수 등 13명의 렬사가 인민영웅으로 추인되였다. 16퇀은 1946년 3월에 동북민주련군 길동 경비 1려 1퇀으로 되었고 그후 동북군구 독립 1사 1퇀으로 개칭되였으며 1947년 8월에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30사 89퇀으로 개칭되였다. 이 퇀은 1946년 1월중순부터 삼도만, 대흥구, 묘령, 천교령 일대를 주름잡으면서 토비를 숙청했고 1946년 4월에 장춘 제1차 해방전투에서 “조선퇀”의 영예를 떨쳤다. 그후 화전, 로야령에서 운동전을 벌렸고 덕혜전투, 진단목전투, 법고추격전, 개원전투에서 다시 한번 “조선퇀”의 이름을 날렸다. 1948년 4월 25일, 10종대 30사는 개원에서 공로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89퇀의 박국제(특등공), 조영희(대공 2차)를 비롯한 103명이 대공수훈자로 표창받았다. 료심전역의 마지막단계인 흑산-대호산 저격전에서 89퇀 1영은 101고지를 쟁탈하는 관건적인 전투에서 아군 28사의 전우들과 함께 끝끝내 고지를 쟁탈하고 지켜냄으로써 흑산저격전에서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흑산저격전이 끝난후 89퇀은 제4야전군 47군 141사 422퇀으로 개칭되였고 관내로 진출하여 평진전역에 참가하고 장강을 뛰여넘어 곧추 중경까지 쳐들어갔고 그후 호남서부의 산악지대를 주름잡으며 “동북범”의 본때를 보여주면서 토비를 족쳤다. 훈춘에 파견된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1개 중대는 1개 퇀으로 편제를 확대발전시켰다. 그리고 5지대의 성원들은 골간으로 조직된 포병대대도 그후 포병퇀으로 확대되여 제4야전군 포병부대의 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계속)  
580    제74장 연변인민민주정권의 건립 댓글:  조회:3056  추천:0  2014-03-02
처음으로 연변인민대표대회 거행 민주정권 건립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결성  10대시정방침 반포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쏘련홍군이 연변에 진주한 후 얼마 안되어 ‘간도림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주석은 괴뢰만주국간도성 부성장이였던자이고 정부의 직원이란 모두 괴뢰만주국 간도성공서에서 일하던자들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매국적, 주국, 간첩, 경찰 등 잔여세력들이 재생의 희망을 품고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중공연변위원회는 지희겸과 강동주에게 만주대동맹조직준비사업을 맡겼습니다. 1945년 10월 27일,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 3차위원회확대회의가 열리였습니다. 회의에서는 총동맹을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재조직하였으며 지희겸을 위원장으로 하고 전상근 등 27명을 위원으로 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건립에 대한 연변대학 최홍빈교수의 력설이다.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가 해체된후 붉은군대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그해 8월 24일, 지희겸, 강동주, 박동운 등이 룡정, 연길, 조양천 등지에서 선후하여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녀성동맹을 결성하였다. 혁명적군중단체를 더욱 단결시키고 통일하기 위하여 9월초에 여러 지방 군중단체대표 20여명이 룡정에 모여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을 결성할 것을 협상, 토의하고 지희겸, 박근식, 남창수 등으로 총동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사업에 착수하였다. 연변림시참의회 대회장. 9월 19일, 연길에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대표대회가 열렸다. 연길과 화룡 두 개 현의 대표만 하여도 600여명이나 되었다. 회의에서는 지희겸, 박근식, 유일환, 강동주, 남창수, 전상근 등 30명의 위원을 선거하고 강동주를 위원장으로 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0월20일, 중공동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동북항일련군 연변분견대의 강신태를 서기(군사부장 겸직)로, 강동주(조직위원 겸직), 지희겸(선전위원 겸직), 전윤필, 박근식 등을 위원으로 한 중공연변위원회가 건립되였다. 동북위원회는 민주대동맹을 동북에서 군중을 조직, 동원하는 주요한 형식으로 삼으라고 연변위원회에 지시, 연변위원회에서는 민주대동맹이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보다 더욱 광범위한 군중성을 띄였다고 인정하였다. 동시에 연변위원회 선전위원 지희겸에게 민주대동맹조직준비사업을 맡겼다. 10월27일,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 제3차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을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재조직하고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에 따라 지희겸을 위원장으로 선거하고 전상근 등 27명을 위원으로 하는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회의에서는 민주대동맹선언과 강령을 토론, 채택했다. 강령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 전국의 통일과 단결, 평화, 민주 및 진보를 수호한다. 2. 광범위한 민주의 토대우에서 국민대회를 소집하고 민주련합정부를 건립하기 위하여 분투한다. 3. 일치 단결하고 호상 협력하여 국제 평화와 안전을 조장하자는 유엔의 주장을 옹호한다. 4. 중쏘우의와 련맹을 공고히 한다. 5. 일본군국주의와 파쑈주의를 숙청하며 중국을 침략한 일제의 장여분자를 숙청한다. 6. 신민주주의적삼민주의를 옹호한다. 7.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및 남녀평등과 인권을 보장한다. 8. 각 시, 현 국민회의에서 민주선거로 민주자치정권을 건립한다. 9. 간첩과 매국적을 인민재판에 넘겨 처리하며 그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인민에게 분여한다. 10. 중국을 침략하고 략탈한 일제의 재산, 토지, 건물을 몰수한다. 11. “밭가는자에게 밭을 준다”는 구호밑에 농촌의 합작조직을 발전시킨다. 12. 감조감식을 실시하며 가렴잡세와 부역을 페지한다. 13. 교육을 보급시키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킨다. 14. 빈고농민과 리재민을 구제하며 로동자의 생활을 개선시킨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이 건립된 뒤를 이어 각 현에서는 민주대동맹본부를 설립하고 구와 촌에는 민주대동맹 지부와 소조를 두었다. 연변철도조합도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총부에 귀속되였다. 1946년 2월까지 각급 민주대동맹조직건설사업이 끝났는데 맹원 총수는 14만 5000명에 달하였다. 그중 조선족이 94%남짓이 차지했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건립된 이래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자기의 정치적주장과 투쟁강령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동맹은 중국공산당의 정치주장과 방침정책을 적극 선전했으며 인민의 자위무장대오를 건립하여 일제와 괴로만주국 잔여세력과 토비를 숙청하는 투쟁가운데서 적극적인 력활을 했다. 그리고 연변경내의 철도운수를 회복하고 관리하였으며 민주적으로 구, 촌의 림시정권을 세우고 매국적주구청산투쟁을 벌렸다. 중국공산당의 기층조직과 기층민주정권이 정식으로 건립되기전에 현, 구, 촌의 민주대동맹은 민주정권의 역할을 하였다. 민정을 관리하고 생산을 조직하여 교육사업을 강화하고 리재민을 구제하는 등 사업을 하였으며 군중을 발동하여 죄악이 극히 큰 매국적주구들에 대한 청산투쟁을 진행하였다. 화룡현 두도구민주대동맹에서는 만인대회를 열고 괴로만주국경찰서장 등 우두머리들을 공개재판하고 즉시 총살하였다. 룡정에서는 매국적을 정산하는 대회를 열고 정사빈, 리금석, 리수수 등 주구, 특ㅁ를 공개재판하고 총살하였다. 1946년 7월, 중공동북국의 결의정신에 따라 민주대동맹의 간부와 골간들은 농촌의 토지개혁 공작대와 민운공작대에 참가하였다. 도시와 농촌의 민주정권이 보편적으로 건립되자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자기의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1946년 8월 해체되였다. 민주정권 건립   연변림시참의회 청사. 1945년 11월, 중공중앙동북국과 길림성공작위원에서는 연안간부 옹문도 등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이때로부터 연변의 민주정권건설이 실제적으로 전개되였다. 1월 15일, 동북국과 길림성공작위원회의 지시정신에 쫓아 중공연변위원회를 중공연변지방위원회로 바꾸었다. 연변지방위원회위원은 옹도문(雍文濤), 강신태(姜信泰), 박일우(朴一禹), 진탄(陳坦), 운청(雲靑), 구회괴(邱會魁) 등 7명이였고 옹문도가 서기를 맡았다. 지방위원회는 연길, 화룡, 훈춘, 왕청, 안도 등 5개 현을 관할했다. 지방위원회에서는 간부를 각 현에 파견하여 현당위와 인민정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5일, 중공연길현위원회와 연길현인민정부가 설립되였는데 옹문도가 서기를 겸하고 왕품일(王品一)이 현장을 맡았다. 역시 11월 15일, 연안간부 진탄, 주개문(周介文), 소춘선 등이 왕청에 파견되여 가 중공왕청현위원회를 새롭게 조직, 진탄이 서기를 맡았다. 이날 왕청인민민주대동맹대표대회를 열고 왕청현림시정부를 철소, 새롭게 왕청현정부를 건립, 주개문이 왕청현 현장으로 추천되였다. 역시 11월 15일, 연안간부, 운청, 진홍조 등이 화룡에 가 중공화룡현위원회를 설립, 운청이 서기를 맡았다. 11월 19일 첫 화룡현정무회의를 개최, 화룡현림시정부를 철소하고 새로운 화룡현정부를 성립했다. 김정계를 새로운 현장으로 추천했다. 11월 20일, 연변지방위원회의 령도아래 연변인민대표대회를 열고 민주정권건설사업의 첫 발걸음을 내디디였다. 대회에서 지희겸이 대회준비경과보고를 하였으며 무기명투표방식으로 연변정무위원회 위원, 정무위원들로 구성된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를 결성했다. 정무원 위원으로 관선정(서버족), 동곤일 등 3명이 선거되였는데 그중 강신태, 림계학, 지희겸, 박근식, 강동주 등이 조선인이였다. 관선정이 전원으로 동곤일이 부전원으로 선거되였다. 연변정무위원회에서는 간도림시정부를 철소했다. 대회에서는 일본인처리문제, 간도시 개칭문제, 왕청현 반동분자에 관한 문제와 괴뢰만주국시기에 건립한 충혼비, 기념비파괴문제 등 9개 의안을 채택했다. 대회에서는 또 “중한민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전체 동포들이여! 이 위대한 명절을 기념하는 나날에 우리들은 쏘련홍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 자유와 행복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목전 중국의 정세를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목전 중국의 앞에는 두가지 전도가 놓여있다. 그 한가지는 국민당의 일당통치을 견지하며 민주개혁을 허락하지 않으며 중국으로 하여금 비독립, 비자유, 비통일, 비부강의 고통스럽고 암흑한 중국으로 나아가게 하는것이며 다른 한가지는 곤난을 극복하고 전국인민을 해방하며 일치단결하여 독재통치를 페기하고 민주개혁을 실행하며 민주력량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여를 철저히 숙청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독립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통일되고 부강하며 광명한 새중국으로 나아가게 하는것이다. 전 중국의 4억5000만 인민대중의 수백만 산업로동자, 수천만 수공업로동자, 3억6000만 농민 및 기타 광범한 자산계급, 게명신사, 애국인사들은 모두 두 번째 전도를 옹호하고있다. 중국공산당은 이 두 번째 전도를 위하여 옹근 24년을 분투하였다. 특히 항일전쟁에서 중국공산당 및 그가 령도하는 팔로군, 신사군은 9500만 인구를 해방하였고 강적의 압박과 국민당군대의 봉쇄하에서도 거연히 투쟁전렬에 서서 해방구를 발전장대시켰으며 적점령구를 축소시키고 해방구를 확대하고 민주개혁을 철저히 실행하였다. 중한민중들, 전국적범위에서의 민주개혁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른바 국민당독재란 그 실질은 국민당의 반인민적집단의 독재이다. 그들은 중국민중 대단결의 파괴자이며 중국인민이 민주개혁을 실행하는데서의 장애물이다. 국민다으이 일당통치를 철저히 페기하고 민주련합정부를 세워야 한다. 11월21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제1차정무위원회의가 열리였다. 동곤일, 류팽령, 림계학, 지희겸, 박근식, 강동주, 한운승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정무위원회회의에서는 “10대시정방침”을 채택, 공보했다. “10대시정방침”은 다음과 같다. 1. 지방자치안을 확보하며 훌률한 사회질서를 건립한다. 일본 잔여병과 토비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무기를 몰수한다. 2. 죄악이 극히 큰 밀정, 한간을 제외한 위만주국정부, 군대에서 일하던자로서 새정부를 향해 진정으로 뉘우치면서 새사람이 되려하는자에 대해서는 더는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 3. 극소수의 일본전쟁범을 제외한 일본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4. 민주정치를 실시하며 인권, 재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5. 공업, 농업, 상업을 부흥시키며 생산을 발전시킨다. 가렴잡세를 면제하며 인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 6. 민생을 개선하기 위해 감조감식하며 승낙한 말을 실천한다. 7. 로동자들의 임금을 높혀줌과 동시에 기업주의 합리한 리윤을 보장한다. 8. 신민주주의문화를 실행하고 노화교육을 배척한다. 교학을 진행하며 교원들에 대한 대우와 지위를 높혀준다. 실학청년을 구제하며 문화사업과 문화단체를 방조하여 건립, 발전시킨다. 9. 생활을 영위할수 없는 실업로동자, 중한피난민, 로인, 어린이, 불구자를 구제한다. 10. 민족단결과 민족평등을 실시하며 중한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평등을 보장한다. 이 시정방침은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포고(延邊行政督察專員公署布告)” 제1호 문건으로 작성되여 당날로 사회에 공포되였다. 11월 22일, 연변민보(延邊民報)에 전원공서의 성립을 열렬히 옹호하고 시정방침을 참답게 관철하여 연변을 훌륭하게 건설하자는 내용의 “위대한 발단”이라는 사설이 발표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연변지위와 각 현 당정지도기관들에서는 촌급선거공작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연변전원공서와 각 현 정부에서는 층층이 선거공작간부양성반을 꾸리고 촌급선거공작간부 2878명을 양성하였다. 선거공작대는 먼저 4개 가두, 89개 촌에 내려가 촌급선거공작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한시기 지나 경험을 얻은 뒤 보편적인 촌급선거와 민주정권건설공작을 진행하였다. 하여 1949년 3월에 전 연변의 촌급선거, 민주정권건설공작이 거의 끝나게 되었다. 뒤이어 각 현에서 구급, 현급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구, 현 인민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현, 구, 촌 3급 인민정권건설공작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연변군분구를 설립, 강신태가 사령원을 맡고 옹문도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아래에 4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은 박락권, 제2퇀은 박근식이 맡았다.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하는 조선의용군 교도대가 연변에 도착한후 연변군분구는 6개퇀으로 확대되였다. 병력은 1만 2000여명에 달했다. 12월 1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는 연변공안국을 설립할 것을 결정, 증흥무(曾興茂)를 국장으로 임명했다. 12월 5일, 강신태는 길동보안군사령원의 신분으로 훈춘에 내려가 훈춘현 현장 한석도(韓石濤)와 함께 위만경찰을 골간으로 조직되여있는 현공안국무장을 철소하고 길동보안군 훈춘경비대대를 세웠다. 리림수가 대대장을 맡고 한석도가 정위를 맡았다. 아래에 8개 중대를 두었는데 800여명 대원을 갖고있었다.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하는 조선의용군 선견부대 30여명이 연길에 도착했다. 선견부대는 관선정 등 전원공서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연길에 조선의용군판사처가 설립되였고 문정일이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2월 12일,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박일우가 인솔하는 수백명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돈화를 거쳐 연길에 도착했다. (계속)  
579    제73장 민족운명의 갈림길에서 댓글:  조회:3505  추천:2  2014-02-25
광복을 맞은 연길시민들 거리에 나가 환호. 연변인민 쏘련홍군을 열렬히 환영 중공연변위원회 설립 당조직 공개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 1945년 8월 10일 밤, 룡정대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박근식은 몰래 모스크바한어말방송을 듣고있었다. 낮게 띄워놓았으나 너무나도 똑똑히 들려오는 벽력같은 뉴스였다. 쏘련정부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것이였다. 박근식은 강동주, 김승호, 유일환 등 친구들을 리상욱네 집에 모여놓고 격동에 넘쳐 뉴스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쏘련홍군이 연변으로 곧 진격해들어올것이라고 판단하고 이튿날인 8월 11일,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제1차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거리에 내다붙일 선전문이 채택되였다. 13일과 14일 밤, 위원회 성원들은 다시 리상욱네 집에 모여 제2차회의와 제3차회의를 열었다. 토의 끝에 전윤필, 림정호, 윤철환, 김동우 등을 위원회에 더 받아들이고 강동주와 박근식에게 쏘련홍군을 환영하는 환영사를 쓸 임무를 주었다. 다른 성원들은 군중속에 들어가 선전고동공작을 하도록 하였다. 8월 15일 정오, 일본천황의 무조건투항조서가 방송되였다. 이에 비밀리에 행동하던 위원회는 반공개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날 밤, 위원회에서는 제4차회의를 열고 쏘련홍군환영대회를 소집할 문제, 시위행진로선 등을 토의결정했다. 8월 10일, 훈춘이 해방되고 15일, 왕청이 해방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룡정시민들은 박근식과 유일환의 인솔하에 17일, 모아산을 향해 떠났으나 쏘련홍군이 연길에 진주하지 못해 되돌아오고말았다. 결국 18일에야 쏘련홍군이 연길에 진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룡정시민들은 8월 18일 아침 8시, 환영위원회의 지휘하에 동흥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간단한 동원대회를 가진후 대렬을 지어 룡문교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띠를 두르고 군마를 탄 전윤필과 유철환이 대렬선두에 섰다. 쏘련홍군은 이날 아침에 벌써 룡정교외에 진주하고있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심상소학교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있었다. 룡문교를 지난 행진대렬은 도중에 쏘련홍군을 만났다. 홍군전사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는 선전차를 앞세우고 천천히 룡정시내로 들어서고있었다. 행진대렬속에서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나왔다. “우라!” “만세!” 환영대렬은 “3.1”소학교 운동장으로 움직여갔다. 여기에서 전윤필의 사회하에 2만여명이 참가한 쏘련홍군을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박근식이 쏘련홍군의 승리적인 룡정진주를 환영하는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대회의 결정에 의해 박근식이 축기와 “환영사”를 지니고 연길쏘련홍군사령부를 찾아갔다. 박근식으로부터 “붉은군대승리”란 글이 수놓아진 축기와 대회에서 채택된 “환영사”를 받은 연길쏘련홍군경비사령부에서는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에 여섯가지 지시를 내렸다. 룡정에 돌아온 박근식은 환영위원회 제5차회의를 소집, 사령부의 지시를 전달했다. 회의에서 강동주가 위원회창립이래의 8일간 공작을 총화한후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가 자기의 력사사명을 완수하였다고 선포했다. 회의후 환영위원회의 9명 성원은 쏘련홍군경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각 계층 군중속에 들어가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녀성동맹 등 인민단체의 조직사업을 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광복을 경축하는 연길시민들의 서광장대회장. 8월 18일, 위만주국황제 부의는 길림성 룡화에서 “퇴위”, 일본으로 도망치려다가 심양비행장에서 체포되였다. 8월 20일, 연길쏘련홍군경비사령부는 간도성림시정부를 설립하고 원 위만간도성 성장 윤태동을 림시주석으로 한다는 제1호 명령을 반포했다. 그후 쏘련홍군의 허락으로 연길현림시정부가 설립되고 원 위만현장이였던 애영균이 현장을 맡았다. 얼마후 애영균은 연길현치안유지회(延吉縣治安維持會)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 유지회는 국민당길림성판사처의 조종을 받고있었는데 대다수 성원들은 위만주국잔여세력들이였다. 이자들은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반혁명활동을 진행했는바 10월에 연길현민주대동맹이 성립되자 핍박하여 해산하게 했다. 8월 26일, 박근식, 전윤필 등은 룡정에서 인민무장조직인 룡정별동대를 조직했고 화룡현 평강구 장인강농민들도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패잔병들의 총 20여자루를 빼앗은후 인민무장조직인 장인강자위대를 설립했다. 연길, 룡정, 조양천 등지에서 선후로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혁명군중단체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였다. 반동세력들도 가만있으려 안했다. 위간도성군정기관이 와해되자 일부 반동세력들은 국민당특무의 조종하에 연길, 룡정 등지에 “국민당길림성연변판사처”, “국민당연길현당부” 등 간판을 걸고 일만군잔여세력과 토비 등을 끍어모아 “별동대”, “자위군”, “치안유지회” 등 반동조직을 묶었다. 일만군잔여세력인 왕대정, 안병일 등은 고동하지방유회를, 화룡현송하편탄광의 토비괴수 곽영춘은 200여명을 긁어모아 반공(反共) “보안대”를 결성, 100여자루의 무기를 갖고잇었다. 왕청현 천교령에서도 국민당특무의 조종하에 일만군잔여세력 500여명을 긁어모아 토비무장대를 세웠다. 라자구에도 토비무장이 세워졌다. 9월 2일, 일본정부가 무조건투항서에 서명, 이로써 중국인민의 위대한 항일전쟁은 승리적으로 결속되게 되었다. “그러나 항일전쟁승리의 기쁨도 잠간이였습니다. 국민당반동파들이 항일전쟁승리의 과실을 빼앗으려 반인민적이며 반력사적인 역행을 시도했던것입니다. 이러한 력사적인 시기에 중국에 거주하고있던 216만 우리 민족은 평화와 민주를 쟁취하고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국민당과 날카롭게 맞서 싸우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반동파사이의 사활적인 투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어느 켠에 서는가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정세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견해였다.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 자기 희생과 보신을 가르는 착잡한 분해과정이 “8.15”의 포성과 함께 민족내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였다. 각자는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양극에도 붙고 음극에도 가 붙었다. “8.15”해방은 민족의 각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하나의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을 하였다. 어디로 갈것인가? 중국의 대다수 조선인은 민족의 운명과 전도에 관계되는 력사적선택 앞에서 단연히 공산당켠에 서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원 연변력사연구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근 반세기 벌어진 피어린 반일투쟁속에서 조선족인민들은 공산당을 믿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주체민족인 한족인민들과 어깨겯고 싸워온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이러한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는데서 결정적역활을 일으킬수 있는 민족의 기둥과 중견들을 갖고있었습니다. 둘째로, 동북경내에 살고있는 조선민족은 국민당에 대해 감정이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항일전쟁시기 공산당은 영향력을 끝없이 확대해왔었고 조선민족과 두터운 감정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셋째로, 공산당이 동북에서 실시한 로선, 방침, 정책이 조선민족인민의 념원과 리익을 구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절대 다수의 조선족들은 중국국적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국적이 없으면 토지를 분여받을수 없고 토지개혁에 참가할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족의 이중적인 국적을 승인하고 중국공민이 가져야 할 권리를 주었던것입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조선족인민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공산당은 일본침략자가 빚은 조, 한 두 민족간의 대립과 반목의 력사적악과를 가시고 동북의 정세를 안정시키는데서 결정적역활을 놀았습니다.” 반동세력에 맞서 1945년 가을 룡정에 세운 1945년 9월 15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중공중앙동북을 설립할 경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팽진을 서기로 하는 동북국이 산생되였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쫓아 13만 인민군대와 2만의 간부가 동북에 파견되여왔고 9월 18일, 팽진 등은 심양에 도착하여 사업을 개시했다. 당시 조선족집거구에 들어온 혁명력량은 두 갈래였다. 한 갈래는 팔로군총사령 주덕의 명령을 받고 동북에 진출한 조선의용군이였다. 그들은 동북경내에서 조선의용군 제1지대(남만), 제3지대(북만), 제5지대(동만), 제7지대(길림지구)를 세웠다. 다른 한 갈래는 쏘련홍군과 함께 온 동북항일련군선견대로서 그들은 연변과 목단강에 주둔하여 연변경비1려와 목단강군구 14퇀 13영, 15퇀 3영을 조직했다. 일본이 무조건투항하자 국민당은 동북을 접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이에 중공동북위원회(서기 최석천 즉 최용건)는 “동북항일련군이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의 전략요지를 먼저 점령한다”는 방침에 따라 동북에 온후 장춘, 심양, 할빈, 가목사, 목단강 등지로 간부들을 전격 파견했다. 다른 한 갈래는 김일성의 령솔하에 조선으로 진출했다. 항일련군부대의 전략요지는 도합 12개의 중심도시로서 장춘(주보중이 책임), 할빈(장수전 즉 리조린이 책임), 연길(강신태가 책임), 치치하르(왕명귀가 책임), 북안(왕균이 책임), 해륜(장광적이 책임), 수하(진뢰가 책임), 가목사(팽시로가 책임), 목단강(김광협이 책임), 대련(원래는 동승빈이 7명을 거느리고 갔으나 이미 쏘련군이 접관하였기에 장춘으로 철퇴) 등지였다. 이밖에 매개 큰 전략요지아래에 또 각기 약간한 작은 전략점을 두었는데 50개에 가까웠다. 항일련군이 각 전략요지에 분포된후 중국공산당조직을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여 인민정권을 세우는 등 사업들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14년간 일제가 통치하던 동북에다 진정으로 인민이 주인된 새로운 사회환경을 마련하기에 노력했다. 9월 18일,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에 있던 연변분견대는 강신태의 인솔하에 목단강을 거쳐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분견대의 성원들로는 강신태, 최시영, 전운화, 김만익, 림춘추, 류진봉, 조희림, 류상전, 류희문, 김창봉, 박락권, 최명석, 정경숙(녀), 김옥순(녀), 석동수, 강위룡, 김명주, 박춘일, 오죽훈, 김룡근, 홍태학, 려영준, 려련생, 오량본, 상유선, 선포천, 맹도길, 염하동, 임철, 손장상 등이였다. 강신태가 간도주둔쏘련홍군경비사령부 부사령으로 임명되였다. 돈화에 진주한 분견대성원들로는 류건평, 구회괴, 리문장, 박영선(녀), 심봉산, 류보평, 류복해, 주복창, 사옥곤 등이였다. 이 두 분견대는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만 각지에 주둔하고있는 항일련군 선견대와 함게 군중을 발동하고 인민무장을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괴뢰만주국의 잔여세력을 숙청하고 국민당과 토비세력을 타격함으로써 혁명력량을 발전시켜 해방초기의 연변의 사업을 개척했다. 9월 19일, 연길에서 3만여명 회원을 대표한 600명이 참가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 동맹위원회대표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 “연변로농청부총동맹(延邊勞農靑婦總同盟)”(10월에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명)이 설립되였다. 9월 20일, 간도성림시정부는 화룡현림시정부를 설립, 원 위만현장이였던 진앙근을 현장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9월 30일에는 쏘련홍군경비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왕청현림시정부를 설립, 소립동을 현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돈화에서는 위만현장 대광원이 쏘련홍군에 체포, 쏘련군의 지지하에 돈화현림시정부를 설립, 류화일을 부현장으로 임명했다. 류화일은 암암리에서 국민당특무와 결탁하여 돈화현공안대를 설립했다. 10월 5일, 주보중은 연변지구공작에 대한 지시편지를 강신태에게 보냈다. 주보중은 국민당군정이 동북에 진입해들어오는 긴급정황을 강조하면서 빨리 정권건립과 인민무장부대건립을 다그치라고 지시했다. 10월 20일, 동북위원회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중공연변지구공작위원회는 강신태의 령도하에 1개월간의 준비공작을 맞힌후 중공연변위원회를 설립, 당조직을 공개했다. 강신태가 서기 겸 군사부장으로 강동주가 조직위원, 지희겸이 선전위원, 전윤필, 박근식이 위원으로 되었다. 중공연변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임무를 제정했다. 첫째, 군중을 발동하여 혁명군중조직을 건립하며 일제와 위만주국 자산을 몰수하고 생산을 회복한다. 둘째, 원 동북항일련군간부들을 골간으로 연변경비사령부를 건립하며 각 현에 경비퇀을 건립한다. 이런 무장은 토비와 일만군잔여세력을 숙청하고 지방치안을 유지하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이로써 쏘련야영에서 건립된 중공연변지구공작위원회는 력사적사명을 완수, 공작을 정지하게 된다. 10월 20일, 주보중은 원 중공동북위원회 서기 최석천(최용건)과 함께 심양에 도착, 중공동북국에 동북항일련군 14년간의 투쟁려정과 중공동북당조직정황, 및 쏘련홍군을 협조하여 동북에 들어온후 전략요지를 점령한 정황 등을 상세히 회보했다. 팽진, 진운 등은 동북항일련군의 투쟁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동북국에서는 원 동북 각지 당조직관계를 접수하기로 결정했다. 쏘련홍군속에 있는 항일련군 대원들을 잠시 철수하지 않기로 결정, 쏘련홍군이라는 편리한 신분으로 계속하여 당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주보중과 최석천은 중공중앙동북국에 동북당의 일체 조직관계를 인계했다. 이로써 중공동북위원회의 력사적사명을 완수, 공작을 정지하게 되였다. 1945년 10월, 동북항일련군은 동북인민자위군(東北人民自衛軍)으로 재편성되고 11월 3일에는 동북인민자위군과 관내에서 온 팔로군, 신사군부대와 함께 동북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으로 편성된다. 1946년 1월, 자치군을 동북민주련군으로 고쳤다. 그리하여 가렬처절한 나날에 동북대지를 넘나들며 싸우던 항일련군은 자기의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새로운 군대로 장성발전하였다. 당시 연변의 항일련군 분견대는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별동대, 자위대, 보안대 등 무장대오를 받아들이고 분견대를 골간으로 한 경비사령부를 세웠으며 강신태가 사령원을 맡았다. 그리고 산하에 경비 1,2,3퇀을 두었다. 이 부대는 그후 동북인민자위군에 편입되였고 11월에는 동북인민자치군 간도(연길)분구 사령부로 되었는데 사령원은 그냥 강신태가 맡았다. 산하에 6개의 경비퇀을 두었는데 병력이 1만 1000여명이였다.(계속)  
578    제72장 쏘련홍군 동북진격과 일제의 패망 댓글:  조회:2680  추천:0  2014-02-23
투항의 상징으로 흰완장을 두룬 일본관동군 제3군 사령관 등이 연길부근(의란구)에서 쏘련홍군사령관 치스챠크프에게 투항하는 장명. 백만 쏘련홍군 파죽지세로 동북전장 휩쓸자 일제침략군들 가는 곳마다에서 날벼락 맞아 승리의 전야 1945년 상방년, 세계반파쑈전쟁은 거듭되는 승리를 거두었다. 5월 2일, 쏘련홍군은 베를린을 공격, 점령하자 일주일도 안된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투항을 선포했다. 이딸리아, 독일의 패전은 일제를 고립무원하게 만들어버렸다. 미국과 영국 등 반파쑈전렬에 나선 나라의 군대는 태평양전쟁에서 계속 진공을 발동하여 몇 달사이에 련이어 일본의 쇼다찌히라군도와 오까나와도를 점령하면서 일제의 해군, 공군을 여지없이 괴멸시켰다. 중국전장에서도 1944년부터 국부적인 반공을 시작하여 1945년 봄과 여름에 이르러서는 화북, 화중, 화남의 각 해방구에서 일본침략자에 대한 거대한 공세를 발동하여 련속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쏘련에서 야영훈련을 하고있던 항일련군 교도려는 대반공의 준비로 사상정치사업을 강화하는 동시에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야영지휘부에서는 쏘련측과 협상하여 쏘련출병과 함께 배합작전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정, 우선 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부대는 계속하여 적들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지정한 곳에서 적후유격전을 벌리기로 했다. 다음 항일련군 락하산부대를 적후에 파견하여 전술적인 정찰임무를 집행하면서 쏘련홍군과 배합작전하도록 했다. 아울러 항일련군 주력부대는 아무 때건 쏘련 극동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기로 하였다. 6월 2일, 야영훈련소에서 중공동북당조직특별지부와 항일련군 교도려 려부의 주최하에 동북반공에 대한 동원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는 전체 장병들에게 총반공전투에 투입할 준비를 갖출 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동북당조직과 항일련군은 반드시 중국공산당정치로선의 지도하에 이번 전투에 림하여 항일련군을 확대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을 이룩하면서 동북항일구국회조직과 항일련군당조직을 회복하여 각지 당조직을 령도한다는 행동강령을 확정했다. 7월 26일, 중국, 영국, 미국은 “포쯔담선언”을 발표, 일본군국주의를 영원히 제거하고 일본군대를 영원히 해체해버리며 일본의 전쟁범죄자들을 엄정히 징벌, 일본은 반드시 빼앗은 조선, 중국의 만주, 대만, 팽호렬도 등 령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투항하는 일본관동군. 7월 29일, 일본군국주의정부는 “포쯔담선언”을 거절했다. 7월말,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와 중공동북당조직특별지부는 전체회의를 열고 개편을 진행, 원유의 대원들을 두 개조로 나누어 일부는 김일성의 인솔하에 조선으로 반격해들어가고 일부는 주보중의 인솔하에 동북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중공동북위원회(중공료길흑림시위원회라고도 함)를 설립하였다. 주보중이 서기로, 풍중운, 장수전, 로동생, 강신태, 김광협, 왕효명, 팽시로, 왕명귀, 왕일지, 류안래, 왕균이 위원으로 되었다. 동북위원회기관은 장춘에 세우고 동북 각지의 당조직을 지도하며 위원회산하에 장춘, 할빈, 심양, 연변 등 12개 지구위원회를 두었다.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위원은 강신태, 박락권, 최명석이며 강신태가 서기를 맡았다. 7월,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의 쏘련 극동홍기군 독립보병 88려번호는 쏘련 극동군 제2방면군에 편입되였다. 1945년 8월 8일, 쏘련정부는 드디여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튿날인 8월 9일, 중공중앙 주석 모택동은 연안에서 쏘련의 대일선전포고에 대해 환영을 표하고 “일본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일전”이란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주덕총사령은 8월 10일부터 련속하여 7차나 대반공의 명령을 발송하였다. 8월 9일 0시10분, 쏘련 극동지대의 홍군 3개 방면군 150만 대군은 진공을 발동하였다. 동북항일련군의 각 부대들은 통일작전계획에 따라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진격해들어왔다. 그중 일부는 선견부대로 뽑혀 락하산부대에 편입되거나 길안내로 나섰다. 그리고 동북 각지에서 유격전을 하면서 정찰임무를 집행하던 소부대들은 적후에서 교란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는 한편 쏘련홍군의 폭격기에 배합하여 적의 위치와 폭격지점을 무선전으로 지시하여 폭격의 정확성을 확보하여주었다. 적후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항일련군장병들도 분분히 일떠나 대중을 조직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하여 쏘련홍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동북을 해방할수 있었다. 침략자의 정수리에 날벼락을 동북에 진격한 쏘련홍군. “7월의 어느날, 사령부에서 나와 전문욱 그리고 오른죤청년인 와샤 이렇게 세사람을 갑자기 불렀습니다. 우리는 선발대로 뽑히게 된것이라고 생각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달려갔지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그때의 통쾌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즐겁게 이야기했다. “이번에 목단강일대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간후 먼저 정찰하고있다가 전쟁이 시작되면 적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무전으로 적의 이동방향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령부의 명령이였다. 세 정찰병은 군례를 올린후 사령부를 나와 곧바로 적후로 들어갔다. 전쟁직전의 목단강시내는 밤낮 계엄상태에 처해있었다. 세 정찰병은 적들의 병영과 비행장을 정찰하고 적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지휘부에 보고했다. 그때 휴대했던 무전기는 간편하면서도 출력이 커 송수신이 잘되였다. “나는 전보를 치거나 받지 않을 때에는 방송에 주의를 돌렸습니다. 전쟁판에서 무전수의 우월한 점이란 남들보다 소식을 항상 먼저 아는것이지요. 방송을 통해 쏘련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식을 알게 된 우리들은 더없이 격동되였댔습니다. 쏘련홍군이 드디여 국경을 넘어섰지요. 우린 통쾌하게 왜놈들을 까부셔보자고 다지고 또 다졌지요.” 목단강일대에 도사리고있던 왜놈들은 단솥두껑에 기여오른 개미새기마냥 바글거리면서 황망히 남산에 올라붙었다. 세 정찰병은 적들과 500메터 상거한 지점에서 전선사령부에 무전을 치고는 제꺽 다른 지점으로 옮겨갔다. 산마루의 나무밑에 모여앉은 셋은 흥분된 심정으로 손목시계를 초조히 들여다보았다. 적정신호를 발사한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2시간 50분이 지나자 하늘이 무너져내려앉는듯한 동음이 들려왔다. 쏘련쪽 하늘로부터 전투기와 폭격기가 편대를 지어 날아오고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장쾌한 장면인가. 손채양을 한 세사람은 흐뭇한 심정으로 하늘의 은제비들을 바라보았다. 비행기들은 그들의 군사지도를 보고 암호로 알려준 목단강남산을 한번 선회하더니 기수를 숙이면서 가차없이 기총사격을 들이대고 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는 다시 기수를 쳐들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것이였다. “꽝!” “뚜루룩-뚜루룩...” “꽝! 꽝!...” 왜놈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는 남산은 삽시에 화염으로 휩싸이는 아비규환으로 되었다. 총탄과 포탄이 철천지원쑤 일본침략자들의 정수리에 사정없이 쏟아진것이였다. 적들은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폭탄에 맞아 무리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멀리서 만원경으로 이러한 장면을 내려다보는 정찰병들의 가슴은 통쾌하고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남산에서 살아남은 적들과 목단강시내에 남아있던 적들은 혼란상태에 빠져 갈팡질팡하다가 이번에는 해림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은 무전기를 지고 쫓아가면서 수시로 변화되는 적정을 사령부에 보고하였다. 적들은 자동차를 타고 도망치고있었다. 이에 정찰병들은 산길을 질러 내달렸다. 손등과 낯이 나뭇가지에 찔리고 긁혀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이들은 아픈줄을 몰랐다. 아니 아플수가 없었다. 코앞에서 도망치는 원쑤놈들을 모조리 소멸해야 하니깐. 그러다가 려영준이 벼랑을 내려타면서 그만 바위에 무릎마디를 부딪쳤다. 눈앞이 아찔해났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벼랑을 내렸다. 발을 내디디기 힘겹게 통증이 왔다. 그러나 그는 절룩거리면서 계속하여 앞으로 닫기만 했다. 놈들을 쫓아가 또다시 정수리에 폭탄날벼락을 안겨줘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 곧 우리가 승리한다는 생각이 앞서니 아픔이 아니라 죽는다 해도 통쾌할것만 같았다. 셋은 또 높은 산마루를 톺아올랐다. 산정에 다 오른후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에다 안테나를 건너 매고 우묵진 곳에 무전기를 장치했다. 와샤가 풀속에 엎디여 보초를 서고 전문욱과 려영준은 무전기 앞에 엇갈아 들어앉아 적정을 회보하는 한편 사령부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다. “일본제국주의 무조건 투항. 각 소분대는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패잔병을 추격할 것.” 려영준은 귀에 썼던 레시바를 벗어던지면서 소리쳤다. “문욱이, 왜놈들이 투항했다오! 와샤,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했소!” “뭐,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니까!” 전문욱과 와샤는 귀를 의심하면서 려영준쪽으로 마구 달려와 전보지를 나꿔챘다. 두 사람은 전보지를 눈박아 보고 또 보더니 환성을 터치면서 펄쩍 뛰였다. 셋은 산마루에서 얼싸안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목놓아 웨치기도 했다. “항일전쟁승리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쏘련홍군 만세!” 로획한 일본군 땅크. 눈으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날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경을 헤쳐왔으며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전사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목이 메고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아 셋은 한없이 웨치고 뛰기만 할뿐이였다. 정신을 차린 세 정찰병은 드디여 무전기를 걷어가지고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10일후에 전선사령부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세 정찰병은 산에서 내려와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부대로 돌아갔다. 일본의 무조건투항   일본천황의 무조건투항성명에 관한 라지오방송을 들으면서 괴로워 하는 일본인들(1945년 8월 15일)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후 일본군은 8월 10일, 제1방면군 사령부를 목단강으로부터 돈화에 옮겨오고 제3군과 제5군의 24만 병력을 가목사, 동녕으로부터 훈춘변경 및 연변 각 현의 요해지에 배치, 끝까지 저항하려고 시도하였다. 쏘련 극동군은 동북항일련군의 배합하에 두 갈래로 연변에 진격해들어와 연변 각지의 일본군을 진공했다. 한갈래는 쏘련 극동군 제25집단군으로서 훈춘의 춘화, 장령자, 경신으로부터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한후 10일에 훈춘현소재지를 점령하고 11일에 대팔령에 다달았다. 일본관동군 112사단는 대팔령의 험요한 지세를 리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해나섰다. 쏘련홍군은 이틀동안에 100대의 땅크를 소실보면서 격전을 벌렸지만 대팔령을 돌파하지 못했다. 8월 12일, 쏘련홍군은 6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일본군진지를 향해 훼멸적인 폭격을 들이댔다. 이에 일본수비군은 흰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대팔령을 돌파한 쏘련홍군은 드디여 도문방향으로 진공할수 있었다. 도문 후안산에서 또다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은 쏘련홍군은 이틀간의 맹공격을 펼쳐 끝내 일본군을 쳐부수고 8월 17일 도문을 해방했다. 일제의 투항을 알리는 신문기사들. 다른 한 갈래는 쏘련 극동군 제5집단군으로서 8월 10일, 동녕, 수분하 등 국경지대의 중요도시를 함락한후 왕청현 라자구방향으로 진군, 11일부터 14일까지 라자구경내에서 동다라즈, 석두하자, 태평령 등 전투를 펼쳐 일본군을 격파하고 라자구를 점령한후 돈화, 연길 방향으로 진격해들어갔다. 동다라자전투는 아주 격렬했다.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쏘련홍군은 이틀동안이나 격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번 전투에서 쏘련홍군은 일본군 소장이하 1000여명을 죽이거나 포로했다. 다른 한 갈래의 진공부대인 366사와 187사는 협동작전하여 일본관동군 한 개 대대를 소멸한후 석두하자방어공사를 점령, 14일, 직격을 멈추지 않고 태평령에 다달아 반날동안의 격전을 벌려 관동군 128사단의 사단장이하 600여명을 격살하고 2000여명을 포로했다. 1945년 8월 15일, 력사의 시각은 드디여 오고야말았다. 일본천황은 라지오를 통해 “정전조서(停戰詔書)”를 선독, 일본의 무조건투항을 선포했다. 그러나 관동군중의 완고파들은 이에 불복, 투항하지 않을뿐더러 각지에서 완강히 저항해나섰다. 15일, 쏘련군 싸브친꼬브소장이 지휘하는 기계화부대 제10군의 선견대와 보병 39군, 땅크부대 359려 등은 협동작전하여 왕청현소재지를 점령한후 일본군 제127사단의 길청령방어선을 돌파, 8월 18일에 연길이 드디여 해방되였다. 8월 19일에는 룡정과 돈화, 8월 20일에는 화룡이 해방되였다. 쏘련홍군은 연변에서 7차례의 큰 전투를 벌리는 가운데서 중대한 대가를 내면서 일본군과 위만군을 4만여명 소멸하고 3만여명을 포로했다. 쏘련홍군의 연변을 포함한 동북지대로의 출전은 동북에서 14년간 식민통치를 하여온 일제에 해하여 훼멸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계속)  
577    제71장 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성 윤동주 댓글:  조회:5378  추천:12  2014-02-20
시인 윤동주묘소에서의 가족들. 묘비 오른쪽 녀성 윤혜원녀사.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 가면서 절대적량심에 가닿으려고 끝임없이 분투한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유명한 “서시”이다. 이 시로하여, 아니 이 시와 견줄만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유명한 시로 하여 윤동주는 이미 조선문자를 알고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시인으로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가 윤동주에게 눈길을 쏟고 있다.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교의 교수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감동할만큼 탁월하다. 쉬운 표현, 잘리해할수 있는 시어의 구사, 동요와 동시적인데다가 문학적향기가 짙은 그의 시속에는 그의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들고 스며들어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서시”, “자화상”, “별헤는 밤”같은 시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나는 본다. 7월 6일(2005년), 기자가 윤동주선양사업일환으로 연길에 와 잠시 거주하고있는 윤동주의 친녀동생 윤혜원(尹惠媛)녀사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윤여사의 부군 오형범(오스트리아에 적을 두고있음)선생은 수두룩한 자료들을 내여보이는 가운데 윤동주가 9개월간 다닌적있는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세운 “윤동주시비” 제막식자료를 손짚어주었다. 사진으로 보는것이였지만 비문에 새겨진 글들이 환히 알렸다. 비문정면에는 윤동주의 친필 서시와 일어로 번역된것이 세겨져있고 뒷면에는 오오무라교수의 비문이 씌여져있었다. 尹東柱詩碑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났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것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재학중인 1931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에 손을 댄 것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회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부터이다. 연회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도일하여 도시샤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있었다는 리유로 독립운동의 협의를 입어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그는 치안유치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시샤교우회 코리아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었다. 한글로 된 서시는 그의 친필원고 그대로이며 일본어번역은 이부키고씨의것이다. 학교범인도시샤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 가면서 절대적량심에 가닿으려고 끝임없이 채찍을 들던 윤동주, 그를 죽음에로 몰아넣은 일본에서까지 그 시비가 세워지게 된것이다. 이러한 윤동주는 바로 연변이 낳은 아들이다. 연변의 아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7일), 위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尹永錫)씨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金躍淵)선생의 누이 김룡(金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때 명동촌은 김약연 등 선각자들에 의해 이미 민족의 혼을 깨우쳐주는 교육운동의 보금자리로 되고있었다. 1925년에 윤동주는 그 유명한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10세까지 해환이라 불리웠으며 그 밑이 달환이고 그 밑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 이름이 별환이였다. 해, 달, 별을 뜻하고있는 이들의 이름에서 윤동주가 많은 시작을 창출했다고 어떤 학자들은 력설하기도 한다. 《윤동주평전》의 작가 송우혜(한국)선생은 윤동주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윤동주가 두 살이던 1919년에 그 땅에서 독립운동의 거대한 봉화가 타올라 독립만세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이 진행되였고 1920년에는 우리 민족의 대일무력항전사에서 빛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그 땅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집요하고 거세게 지속되였다. 그가 15세의 소년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1년에 일본은 드디여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손에 넣었고 이듬해인 1932년에 그 땅에 “만주국”이란 이름의 괴뢰국을 세워 사실상 만주전체를 일본판도에 넣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때로부터 만주국의 국민이 되었다. 윤혜원녀사의 회억에 따르면 소년시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인 인상이였지만 의연함과 씩씩함을 지닌 젊은이였다. “오빠는 참 멋쟁이였습니다. 교복이 노란색이였는데 맞지 않으면 재봉틀로 스스로 고쳐입었습니다. 그보다도 항상 책속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더 멋있었습니다. 오빠의 방 책상엔 언제나 아주 많은 책이 꽂혀있었는데 벌써부터 창작을 한거지요. 항상 등사기로 뭔가를 등사했는데 난 멋모르고 옆에서 등사되여나오는 종이를 받아주군 했습니다.” 윤혜원녀사는 연변억양이 다분한 말씨로 이렇게 말하면서 윤동주와 함께 지냈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우린 여섯 살 터울이였는데 지금도 잠자리랑 잡아주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동생들을 특별히 사랑했던 윤동주는 항상 동생들을 앞에 세워놓고 노래를 배워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기도 했다면서 윤녀사는 말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후 윤동주는 5킬로메터 동쪽에 있는 대립자(지신)의 한족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더 다니다 졸업했다. 그의 시 “별헤는 밤”에서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소녀들의 이름은 아마 이때의 만남이였을것이다. 대립자소학교를 맞힌 윤동주는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룡정에 가게 되자 일가는 아예 룡정으로 이사해버린다. 룡정에 자리잡은 곳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그때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적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2학년때에는 웅변대회에서 1등한적도 있다. 그는 수학도 잘했으며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다. 동급생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에 가자 윤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겨앉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자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된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비자루”, “거짓부리” 등 동요동시를 발표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시절    중학시절의 윤동주와 친구들. 이 사진은 윤동주(왼쪽)가 광명중학교 5학년, 송몽규(오른쪽)가 대성중학교 4학년에 재학할 당시 룡정에서 찍은것이다.(1937년으로 추정) 중학교졸업반이 되자 윤동주는 진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가 의과대학지망을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문학에의 굳은 신념을 지녀버린 윤동주는 자기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내는 단식투쟁까지 벌리는 극한 대립을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손주를 보다못해 할아버지가 나서서 윤동주의 편을 들어주었고 외삼촌인 김약연선생까지도 도와주어서야 윤동주의 뜻은 펴질수 있었다. 하여 1938년 4월 9일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청운의 뜻을 품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서면서 3년간의 서울학창생활이 시작된다. 고향인 연변을 떠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윤동주는 세계문학과 접하게 되며 훌륭한 스승들에 의한 학문의 세계 그리고 민족의식의 드높은 고취를 받아안게 된다. 윤동주는 저녁밥을 먹고나면 교내 잔디우를 뒹굴고 친구들과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론 밤을 새우면서 별을 세기도 하였다. 맑은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을 동무삼아 끝없는 이야기를 펼치는것이였다. 윤동주의 관심분야는 력사, 문화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에 걸쳐 다방면적이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모든 상황이 바뀌여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고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의 손길이 사처에 뻗치면서 연희전문학교도 영향을 피치못했다. 졸업이 코앞에 다닿자 윤동주의 생각은 무척 복잡해졌다. 진학, 시국에 대한 불안 등은 윤동주를 무척 괴롭혔다. 윤동주의 년보를 보면 1941년 5월이후 대표작이라 할 많은 작품들이 씌여져있다. “새벽이 올 때까지”는 5월에, “십자가”,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눈 감고 간다” 등은 5월 31일에, “돌아와 보는 밤”, “바람이 불어”는 6월에, “또 다른 고향”, “길”은 9월에, “별 혜는 밤”, “서시”, “간(肝)” 등은 11월에 창작되고있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퍽 신중하고 과묵한 성품으로 독서에만 몰두하였으며 국내외 많은 문인들에 심취해있었다. 그런 사람들로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리상, 서정주, 발레리, 앙드레 지드, 보들레르, 프랑시스 쟘, 라언 마리아 릴케, 장 콕토 등이였다. 본격적인 문학수업이 닦아지면서 터쳐버린 독서열은 막을수 없었다. 독서와 더불어 그는 창작의 붓을 시들게 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시상을 며칠 몇주일씩 묵혀가면서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필을 들어 써내려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시 손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무언가 뜻깊은 것을 만들어 자신의 졸업을 기념하려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자필시집이였다. 그것은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것이였다. 이 시집은 19편으로 묶어졌는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있었고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있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3부로 만든후 연희전문 영문과 교수였던 리영하선생과 후배였던 정병욱군 그리고 자신이 나누어가졌다. 시집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된 비교적 긴 제목이였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정병옥에게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서시’가 되기전에는 시집이름을 ‘병원’이라고 볼일가 했네.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 아닌가?” 그러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주었다. 이 시집을 받아본 리영하교수는 “슬픈 족속”, “십자가” 등 작품이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터이니 출판을 보류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충고를 주었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후에 윤동주자신이 가졌던것과 리영하교수가 가졌던 시집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정병욱이 가졌던 시집이 어머니 장롱속에 깊숙이 감춰졌다가 결국 광복후 한국의 정음사에 의해 볕을 보게 된것이다. 윤동주가 검거된 반년후 나는 소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피차에 생사를 알수 없게 된 마당에 이르러 나는 윤동주의 시고를 나의 어머님께 맡기며 나나 윤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여 주십사하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윤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회전문학교로 보내여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윤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셨다. 《윤동주》(이건청 저, 건국대학교출판사)에 수록된 정병욱의 회고록이다.   후꾸오까형무소의 이슬 되었어도 윤동주가 옥사한 일본 후쿠오가형무소. 1942년 26세의 윤동주는 드디여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릿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인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에 건너가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고통이였으며 끝없는 자책과 죄스러운 마음에 시달리는 일상이였다. 그러한 일상속에서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았는바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이때에 창작되였다. 아울러 일제가 지펴놓은 태평양전쟁의 불길은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한층 격화되였고 부상자와 주검이 실린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일본으로 들이닥치는통에 일본판도는 온통 불안속에 잠기였다. 다급해난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징병제도와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40여만명 조선청년들을 전쟁의 희생물로 내몰았다. 그 광란적인 시국에 시작된 윤동주의 류학생활은 자연 고독과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여름, 연변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터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시대적상황을 절박하게 느꼈는데 결과적으로는 윤동주의 예언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디케다 아파트에 하숙을 정했다.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하면서 시창작을 정진시켰다. 륙첩다다미방에서 밤가는줄 모르고 추위를 이겨내면서 시를 쓰는 일이 그때의 윤동주의 일상이였다. 윤동주는 1942년 겨울방학에 집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3년 7월 14일, 도시샤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떠나기 직전 “교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구룹사건”에 련루되여 갑자기 체포되였다. 뒤늦게 공개된 일본경찰의 사상범을 다룬 극비문서 “특별월보”에 따르면 일본경찰의 윤동주에 대한 조사기록은 “요시찰인물”로 주목받고있던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이고 윤동주는 그에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결국 두사람은 12월 6일 검사국에 넘겨졌고 해를 넘겨 1944년 2월 22일에 기소되였다. 재판은 분리 진행되였으며 3월 4일,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일본경도재판소에서 윤동주에게 내려진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판결 본적: 조선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 76번지 주소: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번지 무전아파트 내 사립 동지사대학 문학부 선과 학생 윤동주 1917년(대정 7년) 12월 30일 생 우자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강도 효(江島 孝)관여로 심리를 마치고 판결함이 아래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판결 구류일수 중 120일을 우 본형에 삽입한다. 리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는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서 태여나 그곳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회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소화 17년) 3월 내지에 도래한 후 한때 동경 릿교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하였으나 동년 10월 이후 경도 동지사대 문학부 선과에 옮겨 현재에 이른 자로서 어릴 때부터 민족적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적 등을 탐독함과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하여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있었는데 성장하여 내선간의 소위 차별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차(怨嗟)의 마음을 품는 한편 아 조선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느것리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밖에 없으며, 이를 위하여서는 조선민족의 현시에 있어서의 실력 또는 과거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에 열세한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타고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수 있으리라고 망신하여 더욱 더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달성을 위하여 동지사대학에 전학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있던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송몽규와 자주 회합하여 상호 독립의식의 앙양을 꾀한 외에 선인 학생 송원휘중(松原揮忠), 장성언(張聖彦)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여왔는데 그 중에서도...(이하 략) 우의 재판기록에 서술된 소위 윤동주의 범법행위란 피식민상태의 량심있는 젊은이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기 위한 당연한 자기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는 막연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법에 의해 처벌된 것이다. 결국 윤동주는 후꾸오까형무소에 송치되여 비인간적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의 날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인(死因)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 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고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일본으로 건너간후 후꾸오까에 도착하자 우선 송몽규부터 면회하였는데 송몽규는 주사를 맞는 행렬에 섰다가 나와서 눈물을 흘렸고 일본인 간수가 “윤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전해주었다. 한줌의 재로 변하여 윤동주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그의 혈육들은 두만강변 조선의 상삼봉(개산툰 대안)역까지 마중을 갔다. 장례는 3월초순,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에 치러졌다. 집앞 뜰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졸업 무렵 교내잡지 “문우”에 발표되였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장지는 룡정동산이였다. 연변은 4월초에나 겨우 해토되는 까닭에 5월의 따스한 날을 기다려 가족들은 윤동주의 묘에 떼를 입히고 꽃을 심었다. 단오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둘러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목비를 해세웠다. 김관석씨가 한문(漢文)으로 비문을 작성하여 비의 뒤면에 새겨넣었는데 조선문식으로 훈독하면 아래와 같다. 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때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룡정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에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면서 1년을 보냈다. 다시 룡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공부 이미 이루었어도 그뜻 오히려 남아서 다음해 4월에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 변하여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만 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만했는데 춘풍이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을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연장로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긴데다 신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이렇게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에게 가족들이 처음으로 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이다. 불멸의 시인   윤동주의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여나온 것은 1948년이다. 애초에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것이 7년이나 지나 비로소 해빛을 본 것이다. 이 시집의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정지용이 쓴 서문의 일부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시집을 출판하련다는 소식과 함께 있는 시고들을 다 가지고 오라는 기별이 윤일주로부터 전해오자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씨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하교에 다닐 때 집에 가져다 두었던 세권의 습작노트와 수많은 스크랩과 사진을 챙겨갖고 서울을 바라고 떠났다. 때는 남북대결이 첨예한 시기라 시국이 몹시 험악했다. 렬차에서는 사람마다 샅샅이 검사하면서 의심스럽기만 하면 잡아가두거나 물건들을 마구 압수 하였다. 윤혜원부부는 룡정을 떠날 때 짐군을 삭내여 스크랩과 사진이 든 보따리를 맡겼다. 그때를 오형범선생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런데 그 짐군이 차칸수색이 시작되자 겁을 잔뜩 집어먹고 화장실에 피신해 들어갔다가 아예 창문으로 스크랩과 사진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밖으로 던져버리고말았잖고 뭡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였어요. 지금 윤동주의 사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것은 이러한 원인에서입니다. 노트 세권만은 그래도 우리의 짐속에 있어서 다해이였습니다.” 윤혜원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청진에 이른 우리는 교회당에서 우연히 박춘해(朴春海)라고 부르는 예쁜 처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눈에 너무도 익숙한 처녀였지요. 생각을 굴려서야 전에 사진으로 많이 보아오던 처녀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오빠는 동주와 동창이고 딱친구였습니다. 동주오빠가 그녀의 사진을 집에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랑 아버지랑한테 보였고 나한테도 보이면서 ‘혜원아, 어떠냐? 이쁘지? 마음에 들어?’ 하고 물으면서 싱글벙글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주오빠가 그녀를 몹시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가능하게 그녀와 련애를 했을수도 있고 어쩌면 결혼을 약속했는지도 모를 일이였지요.” 3.8선을 넘을 때 또 한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함께 3.8선을 넘던 어떤 사람의 보짐에다 윤동주의 노트를 간수했는데 그 사람이 너무 당황한김에 그만 짐을 떨구고 온것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그때 전 속이 타서 재가 되는것 같더군요. 그걸 지니고 어떻게 3.8선까지 왔다고 그럽니까. 우린 생명을 무릅쓰고 되돌아섰지요. 오던 길을 샅샅이 뒤지다가 요행 풀밭에서 그 짐을 찾았을 때 얼마나 격동되고 떨리던지 눈물이 마구 쏟아졌어요.” 윤혜원녀사는 눈물이 핑 돌아 말했다. 이렇게 습작노트만을 겨우 보전하여 가지고 12월 22일 겨우 서울에 도탁하였다. 하여 이듬해인 1948년 1월 30일, 정병욱이 보관하고있던 자선시집의 19수의 시와 윤혜원녀사네가 갖고간 노트속에서 고른 12수를 합친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디여 출간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서문, “서시”를 비롯한 31편의 유고작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시인 유영의 추도시와 강처중의 발문이 순서대로 수록되였다. 그후 1955년 2월, 윤동주사망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다시 간행되였다. 1968년에 간행된 증보판 시집은 5부로 나뉘여져 있는데 1부엔 윤동주가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대로 실었고 2부는 도코시절에 쓴 시 5편, 3부엔 습작기의 작품들을, 4부엔 동요, 5부엔 산문인 “트루게네프의 언덕”, “달을 쏘다” 등 5편이 실리였다. 사실 윤동주가 사망하기까지 활자화되여 발표한 작품은 고작 6편의 동시와 3편의 시, 그리고 한편의 산문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도 본격 문단활동과는 거리가 먼 《카톨릭 소년》 등 아동잡지와 조선일보 학생란 “활천”, “문우” 등이 전부였다. 윤동주의 시작품으로 우리가 접할수 있는 것은 모두 117편이다. 그 중에서 동시가 35편 정도이다. 시인으로서의 활동이 거의 없었으니 초판과 여러차례 걸친 증보판 출판의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연변에서는 감감 모르고있다가 1984년 연변에 다녀온 미중한인우호협회 회장 현봉학씨로부터 처음 시인의 신상이 연변에 전격 소개되게 되었습니다.” 오형범씨는 윤동주를 처음으로 연변에 알려준 사람이 일본학자 오오무라씨가 아니라 현봉학씨였다고 딱 짚어 말했다. 오형범씨의 증언은 현봉학선생이 쓴 《윤동주의 유적지를 찾아서》에서도 명확히 서술되고 있다. 이 글에서 현봉학선생은 이렇게 쓰고있다. 1984년 봄 어느날, 서재필기념재단(필라델피아시소재)리사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태민씨(언론인, 전 경향신문사 부사장)댁에 잠간 들렸다. 우연히 그 댁에서 발견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1. 30 초판)에 매력을 느껴 빌려본것이 나의 일생에 그렇게도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47년부터 “6.25”전쟁 3년을 빼고는 줄곧 미국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윤동주 하면 일제말기에 옥사를 치른 애국시인이였고, 그의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라는 서시가 아름다웠다는 희미한 기억밖에 남은것이 없었다. 그러나 락서로 오염되였고 찢어진 이 낡은 시집을 다시 읽었을 때 한구절 한구절 흐르는 그 시에 나는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나는 남은 생을 좀 더 아름답고 순박하게 살고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는 장한 정의감으로 싸울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윤동주의 몸은 비록 흙으로 돌아갔어도 그의 얼, 그의 정신은 그의 시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확실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해 8월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처음으로 중국방문을 하게 된 나는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애국시인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고 또 아무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위대한 애국시인이였음을 역설하고 래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할터이니 꼭 우리 일행이 그 유적을 찾을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해두었다. 그 다음해인 1985년 7월, 제2차 단체중국방문을 했을 때 나는 오로지 윤동주의 묘소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룡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리사장, 룡정중학교 유기천교장 그리고 연변농학원 김동식교수 제씨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오시면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밤새 억수로 쏟아진 비 때문에 우리가 탄 버스는 동산묘지 언덕으로 올라가지를 못했다. 진흙땅에 묻힌 버스 뒤바퀴를 십여명의 힘으로 겨우 밀어내긴 했지만 비로 인한 험한 길을 자동차는 물론 걸어서도 더 이상 올라갈수가 없어서 우리 일해의 묘소참배는 묘소를 눈앞에 두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문인으로 알려진 내 동생 피터 현을 포함한 우리 일행의 실망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그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나큰 감동을 받었다는 일본의 와세다대학 교수 오오무라선생이 도꼬 히비야의 한 다방에서 윤일주씨를 만나 룡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가 있는 곳의 략도를 그려받게 된다. 윤동주묘소와 그가 살고있던 고향을 찾고저하는 강렬한 충동으로 하여 1985년 오오무라부부(부인 조선인)는 연변으로 오게 되며 연변대학 권철, 리해산 등 교수와 향토력사에 밝은 한생철선생과 함께 윤동주묘소를 찾게 된다. 그때 장면을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옛 동산교회묘지로 올라가는 흙길, 승용차로는 도저히 올라갈수 없는 구릉의 급경사지에 밭과 어설픈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조선의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지나가고 그 좌측에 멀리 바라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구릉의 여기저기에 흙둔덕과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산밑쪽의 묘비들은 넘어지고 부서진게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윤동주의 묘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고생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랴. 앞에서 걸어가던 리해산교수가 큼직한 비석을 찾아가 정면을 보니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글이 보인다. 끝내 찾아낸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산기슭에서 찦차로 10ㅡ15분 올라가서 비탈길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있었다... 이때로부터 불멸의 시인 윤동주가 완정한 모습으로 연변에 나타나게 되었다. 고향은 윤동주로 하여 진동을 받았다. 연변이 낳은 윤동주가 세계적인 시인인줄을 깜박 몰랐으니 그럴만도 했다. 1980년대중엽부터 윤동주는 해마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시인”, “좋아하는 시인”의 으뜸으로 뽑히고있고 그 기세는 세계에로 물결쳐 나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은 해마다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되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시를 연구하여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이미 30~40명 된다고 한다. “정본 윤동주전집”의 저자 홍장학씨는 “윤동주는 변절과 배신으로 신음해온 우리 현대정신사의 중심에서 민족적량심과 긍지를 상징해온 그리 많지 않은 인물중의 한사람이다”고 하고 있다. 연변대학 권철교수는 “윤동주의 시는 바로 겨레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정을 담은 노래이다”고 했고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그의 시는 자아성찰과 뉘우침을 통해 부단히 진실로 복귀하여 그 존재론적고뇌를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의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올림으로써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일깨워준데 그 감동의 비밀이 있다... 문익환목사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를 회상하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진다. 또 그의 노래는 백의동포의 수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바가 되었다. 아무튼 연변땅에 시심(詩心)의 뿌리를 박고 자신의 결백하고 희생적인 자아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것들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제단(祭壇)에 자기의 젊은 몸을 조용히 바친 그 아름다운 시편들은 한줄기 밝은 별빛이요, 우리 청소년들이 삶의 거울이 될 것이다.”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 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리는 연변사람입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 윤혜원녀사의 말이다. 그렇다.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ㅡ조선민족의 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시인으로 세인들앞에 나섰다. 윤동주로 하여 연변과 우리 겨레는 이제 더 큰 긍지를 느끼며 자랑을 느낄 것이다. (계속)  
576    제70장 적들의 심장속에 들어가.2 댓글:  조회:2391  추천:0  2014-02-20
동녕 및 연변일대 소부대활동에서 특수한 공을 세운 려영준에게 1944년에 수여한 영예증서. 일본군차림으로  적구와 적 병영을 들락들락 놈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도 사경을 피해  풀속에 엎디여 21시간 “1943년, 나는 또다시 새로운 임무를 맡고 로흑산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보중이 전문욱을 보내여 나와 함께 활동하도록 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적들의 무력배치정황을 정찰하고 군사시설을 촬영해야 했습니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그때의 정경이 눈에 환히 떠오르는 모양이였다. 창가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로안이 유난히 빛났다. 려영준과 전문욱은 먼저 곰골비행장을 정찰했다. 산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활주로 옆에 비행기 6대가 있었다. 방수포를 씌워놓았기에 무슨 비행기인지 알수 없었다. 사면에 고정보초를 세워놓고 순라병이 몇분 간격으로 왔다갔다 하였기에 낮에는 근본 비행기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밤에 손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밤장막이 드리우기를 숨어서 기다리면서 적들의 동정을 살폈다. 순라병들은 창을 맞춘 총을 받들어 쥐고 규칙적으로 일정한 구간까지 왔다가는 돌아서군 했다. 돌아서서 가는 틈을 리용하면 될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두 사람은 살금살금 비행장에 접근했다. 적순찰병이 이쪽 비행기있는데까지 왔다가 저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두사람은 다람쥐마냥 날렵하게 방수포를 씌워놓은 비행기밑으로 숨어들었다. 비행기를 손으로 만져보니 그것은 나무로 만든 가짜비행기였다. 다음 비행기로 옮겨갔다. 이렇게 6대의 비행기를 다 손으로 만져보았다. 4대가 나무로 만든 가짜비행기였다. 마지막 비행기까지 다 정찰하고 방수포밑에서 나오려고 할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얼뜰하고 나타났다. 적순라병이였다. 걸리기만 하면 물론 빠져나갈수 없는것이였다. 순발적으로 두사람은 잽싸게 방수포기슭으로 몸을 감싸면서 엎드렸다. 어찌도 민첩하게 행동했는지 바스락소리조차 없었다. 순찰병놈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손전지로 방수포주위를 휙휙 비쳐보면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러대는것이였다. 순찰병의 발길밑에 엎디여 있는 두사람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채 숨을 딱 끊고있었다. 아무일 없자 순찰병은 저쪽으로 털썩털썩 걸아갔다. 놈의 뒤등을 바라보면서 두사람은 방수포를 살그머니 들고 다람쥐처럼 쏙 빠져나와 산길에 들어섰다. 지하아지트로 사용하고있는 범의 굴까지 오니 벌써 날이 환히 밝고있었다. 새벽이슬에 속옷까지 폭 젖어 물주머니가 된 두 사람은 부랴부랴 마른 옷을 갈아입고 새초를 깐 포근한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나니 벌써 한낮이였다. 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게 개여있다. “래일 날씨 어떨가?” “오늘보다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오늘밤에 적병영에 들어가 숨었다가 래일 낮에 사진을 찍을가?” “거 좋겠군.” 두 사람은 이렇게 계획을 짠후 어슬녘에 사진기를 챙겨가지고 길을 떠났다. 일본군병영은 범의 굴에서 15킬로메터 떨어진 산간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가실철조망으로 둘레를 치고있었다. 철조망 안은 잡초가 무성했다. 철조망 밑으로 기여들어 간 두 사람은 병실정면 풀발속에 엎디였다. 모기떠들이 살판을 만났다고 마구 매달려 기승을 부렸다. 삽시에 얼굴이며 손발이 모기에게 물리여 투둘투둘해졌다. 벌레까지 기여들어 물어뜯는 통에 참아내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움직이면 안되기에 입을 꽉 깨물고 모기와 벌레의 세례를 받아내야 했다. 그런데 모기나 벌레에게 물어뜯기우기보다 더 힘겨운 것이 갑자기 터져나오려 하는 기침이였다. 목이 간질간질해나면서 금방 “칵!”하고 소리가 나갈 것 같아 식은땀이 다 송골송골 돋았다. 이럴 때면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약담배를 약간 뜯어 입에 넣어야 했다. 그러면 기침은 신기하게도 목구멍에서 삭아버리는것이였다. 날이 홰창 밝았다. 호각소리가 귀청을 두드렸다. 병실에서 몰켜나오는 놈들의 구두징소리, 꽥꽤거리는 장교놈들의 돼지멕따는듯한 고함소리가 귀전에서 들렸다. 두 사람은 적들과 불과 100여메터 거리를 두고있었다. 풀 한 대만 흔들해도 놈들에게 들킬수도 있었다. 한낮이 되자 풀모자를 쓴 두 사람은 살며시 앉은 키는 늘구면서 사진기를 적병영, 군수품창고, 병원 등을 겨냥하고 사타를 찰칵찰칵 눌렀다. 원만히 사진을 찍은후 두 사람은 다시 풀속에 엎디였다. 이제부터는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야했다. 그것은 지루하기 그지없는 기다림이였다. 풀숲은 바람 한점 안주고 하늘은 사정없이 볕을 쏟아대기만 했다. 찌는 시루안에 들어앉은 듯 열기가 확확 안겨와 인차 땀벌창이 되고말았다. 게다가 벌레들이 갉아대고 파리들이 달려들어 일신은 마비상태에 빠지고말았다. 하루종일 물한모금 먹지 못하다나니 나중에 혀끝마저 바싹 말라 입을 제대로 벌릴수조차 없었다. 이런 속에서 꼬박 21시간 참아내야 했다. 드디여 날이 어두워졌다. 병영앞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보초서던 놈들도 진해빠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무토막처럼 둔해진 다리를 끌면서 무사히 귀로에 올랐다. 적들과 함께 밤을 새워 “1945년 5월, 나와 전문욱은 도문일대를 정찰하라는 임무를 맡고 또다시 국경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대황구 고개를 넘어 량수촌으로 간다는 것이 그만 길을 잘못들어 왕청의 십리평 뒤산에 떨어지고말았습니다.” 쏘련의 바르꼬브니짜에서 국경을 넘은 두 사람은 삼차하치기로 빠려들어갔다. 반령, 로야령 밑림속을 꿰고나가 대황구고개를 넘은후 곧추 량수로 떨어지려는 타산에서였다. 그런데 로야령(해발 1477메터)에서 그만 산발을 잘못 타는 통에 왕창같은 곳에 가서 떨어졌다. 살펴보니 십리평 뒤산이였다. 두 사람이 어처구니없이 마주보고있는데 어데선가 인기척소리가 와작와작 났다. 허리를 날렵하게 낮추면서 바라보니 십리평골안을 누렇게 덮으면서 일본군들이 들어오고있었다. 왕청에 대한 정찰임무를 맡지는 않았지만 정찰병으로서 적들의 군사적움직임을 보고 피해서는 안되였다. “우린 적들의 무력배치와 방어진지를 정찰할 행동계획을 짠후 십리평골안을 참빗질하면서 일본군방어진지를 정찰하고 왕청시가지에 내려가 시내전경까지 사진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신흥쪽으로 빠져서 삼도구남쪽 장골에 들어섰습니다. 장골은 석현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지요.” 로항일전사 려영준은 시간, 지점 등을 아주 정확히 지적했다. 장골은 석현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다. 철길을 따라 나가자면 가야하를 네 번이나 건너야 하는데 철교외에는 다리가 없어서 수레나 자동차는 다닐수 없었다. 그래서 놈들은 1943년부터 장골에다 방어진지를 건설하고 백성들이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본군복차림이였기에 보초선을 넘어 10여킬로메터 되는 방어선을 무난히 통과할수 있었다. 놈들은 제편인가 하여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방어선을 넓게 치고 한바탕 해볼듯했지만 기실 속은 텅 비여있었다. 골짜기어구의 포진지에는 쇠붙이대포라곤 한문도 없었으며 모두가 장대기에 방수포를 씌운 가짜들이였다. 까울령에 다달은 두 사람은 모닥불을 지펴놓고 젖은 옷을 벗어 말리우면서 싸늘한 5월의 산속에서 하루 밤을 새웠다. 날이 희슥히 밝은후 옆을 둘어본 두사람은 초풍할 듯이 놀랐다. 게딱지같이 쳐놓은 일본군풍막이 여기저기 널려있지 않는가. 그제야 두사람은 적들의 “보호”속에서 하루밤을 새웠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안개가 산기슭에까지 내리덮혀있어 적들이 아직 기미를 차리지 못하고있었다. 안개속에을 헤치면서 두 정찰병은 번개마냥 산마루를 넘어섰다. “그때 우린 매일 낮 12시면 꼭꼭 본부에 무전으로 련락했습니다. 무슨 군대이며 병력은 얼마이며 번호는 어떤가 하는 것을 잘 포착해야 했지요. 때론 한창 전보를 치느라 여념이 없는데 왜놈들이 달려들어 부랴부랴 안테나를 걷어갖고 도망치기도 했지요. 또 차림새가 일본사람같아서 백성들의 오해를 받을 때도 있었는데 백성들은 ‘요 일본놈들이 어느새 마우재(로씨야)말을 다 배웠네’하면서 증오의 눈길을 쏘기도 했지요. 아무튼 그날 우린 신기동뒤산까지 무사히 왔었죠.” 려영준은 이전에 도문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신기동 뒤산 바위있는데까지 내려갔다. 이 바위는 앞면은 절벽이고 뒷면은 까울령산줄기에 이어져있는 아주 기묘한 바위였다. 주봉뒤에 우묵한곳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앉으면 누구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두사람은 그 웅뎅이에 은신하여 밤을 지어먹으면서 낮에는 주봉에 올라가 숨어 망원경으로 도문시내를 내려다보았다. “10여년전에 삯나무군으로 가장하고 수레에 앉아 길가에 삐라를 늘이면서 지나가던 거리며 엿장사로 변장하고 현병대앞으로 지나가던 골목들을 손쉽게 찾아볼수가 있었습니다. 눈에 익은 거리였고 애수가 남아있는 시가지였지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책상우에 놓여져있는 망원경을 들어 보이면서 감개무량해 말했다. “그때 5년동안의 정찰활동을 하면서 처음 창조해낸 방법 하나 있었습니다. 망원경을 사진기렌즈 앞에 고무줄로 동여매가지고 원거리목표를 눈앞에 당겨다 찍은 방법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도문 일대의 전경을 여러번 찍었습니다. 도문일대의 지형도도 완성했구요. 이런것들은 그후 쏘련홍군의 연변해방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지요.” 두 정찰병은 도문에 대한 지형정찰을 맞힌 후 날이 어두워지자 량수촌 뒤산을 넘어서 대황구쪽으로 갔다. 한번도 다녀본적 없는 익숙치 못한 곳인지라 밤길을 걷다가 길에서 좀 떨어진 수풀속에 들어가 잔다는 것이 그만 60여호 되는 집단부락앞에서 잤다. 날이 푸름해서야 상황을 안 두사람은 부랴부랴 산으로 올라갔으나 어느새 자위단놈들과 경찰대놈들의 추격에 들고말았다. 놈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서지 않으면 쏜다고 야단이였다. 두 정찰병은 산등으로 올라가다가 나무가 꽉 들어선곳에서 옆으로 비껴나갔다. 그런줄도 모르고 적들은 산마루로 곧추 올라갔다. 이렇게 하여 또 한번 위험한 고비를 넘기였다. 시퍼런 도끼 다섯 자루 두 정찰병은 하루종일 가다가 해질무렵에 좁은 골짜기에 들어섰다. 멏굽이 돌아서 골짜기막차기까지 올라가보니 산비탈에 귀틀집 한 채가 있어다. 나지막한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몰몰 피여오르고있었다. 두 사람은 숲속에 숨어서 한창 동정을 살폈다. 집안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두리벙두리벙 사방을 살펴본후 땔나무를 안고 들어갔다. 해도 이미 서산에 곤드라진 뒤라 이 집에서 하루밤 묵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두 정찰병은 숲속에서 나와 주인장을 부르면서 문을 뚝 떼고 들어갔다. 집안은 단칸이였는데 아까 땔나무를 안고들어간 늙은이는 부엌바닥에 터버티고 앉아 새로판 함지안을 유리쪼각으로 다스리고있던참이였다. 늙은이는 흘끔거리면서 불청객들을 눈빗질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집안을 쓸어보았다. 시렁우에 대두병이 놓여있는데 그 속에 든 것이 아무래도 술인 듯 싶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 다섯자루가 늙은이가 앉아있는 벽뒤에 가지런히 세워져있었다. 혼자인가도 물으니 또 한사람이 있다고 했다. 량식가지러 마을로 내려갔는데 아마 래일 아침에나 올것이라고 했다. 하루밤 묵자고 하니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늙은이는 주인이 시키는대로 산속에 들어와 함지를 파면서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왔다. “그런데 저 병에것은 무었입니까?” “주인이 치성을 하라고 떠보낸 술이지유.” 늙은이는 술병을 슬쩍 쳐다보고나서 너스레를 떨었다. 저 술 한모금만 마시면 꿀잠을 잘것같았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불행은 항상 눈썹에서 떨어질수 있는것이니깐. 두 사람은 다시는 술병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루한 밤을 엇갈아 자면서 새웠다. 아침이 되자 다른 늙은이가 왔다. 그는 두 정찰병과 술병을 번갈아보더니 여기서 잔 손님들인가고 의아쩍게 물어왔다. 그렇다고 하니 머리를 살래살래 젖는것이였다. 원래 있던 늙은이가 기여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지하공작원들 같은데 저 술 안 마시길 잘했수다. 사람잡는 술입죠. 저 령감쟁이는 놈들의 분부를 받고 여기 와서 함지를 파는체하면서 전문 사람잡이를 일삼습지유. 지하공작원들이 혹시 저 술을 마시고 취하면 저 도끼로 목을 칩니다유. 당신들 어제 밤에 술 마시기만 했더면 영락없이 도끼날밑의 귀신이 될번했슈다.” 두 사람은 등골이 서늘해났다. 늙다리는 악착한 특무였던 것이다. “나에게도 젊은이들같은 아들이 있었는데 유격대에 간후 종무소식이외다. 놈들은 아들을 만나거든 귀순시키라고 여기에 보냈수다. 젊은이들을 보니 아들 본 것 같구만요. 그래 왜놈들 망하기는 망할란가우?” “왜놈들이 오래잖으면 망합니다. 안쪽에서 모주석이 령도하는 팔로군이 나오고 뒤에서 쓰딸린이 령도하는 쏘련홍군이 나오면 왜놈들 꼼짝달싹 못하고 망할겁니다.”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그나저나 저 늙다리가 일러바치러 간 것 같은데 빨리 자리를 뜨시우.” 두 정찰병은 로인님에게 허리굽혀 정중히 인사올린후 마굴을 벗어나 부랴부랴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꼬박 닷새동안 산길을 걸어서 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고 무사히 본부로 돌아갔다.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정찰하여 바친 정확한 정보가 있었기에 그후 대일전쟁에서 쏘련홍군은 손쉽게 왜놈들을 쳐부실수 있었지요.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채 산속 풀밭의 원혼이 되었는지 알수 없지요. 소분대활동은 동북전선에서 탁월한 역할을 했습니다. 소분대 대원들은 정말 광복을 위해 생명을 바쳐 세웠습니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의 자랑스러운 말이다.(계속)
575    제69장 적들의 심장속에 들어가.1 댓글:  조회:2130  추천:0  2014-02-20
로항일전사 려영준(오른쪽)씨와 김세균씨의 당년의 모습. 려영준 범의 굴 지하아지트로 리용 적 심장 파고들어가 군사정보 정찰 정찰병으로 “소부대에 편입된후 나는 무선전송수신, 촬영, 제도기술, 정찰기술 등을 배웠습니다. 레시바를 쓰고 대방에서 보내는 전파의 음향을 골라들으며 수자를 쓰는 련습도 하고 세손가락으로 전건을 쥐고 손목을 까딱까딱 놀리며 발신련습도 하였는데 퍽 흥미로왔습니다.” 6월 14일(2005년), 기자가 소부대활동을 취재하러 연변일보사 로기자 한태악선생과 함께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를 찾아갈을 때 아직 병환을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했음에도 그이는 그때의 상황을 금방 벌어진 일인 듯이 얘기해주었다. 90세인 로항일전사의 기억력은 아주 비상했다. 당시의 상황과 전우들 이름, 날자까지도 낱낱이 기억해내면서 이야기를 펼치는데 무척 생동했고 비장했다. “한창 혈기가 왕성하고 기억력이 좋았던 때라 몇 달동안의 훈련을 거쳐 무선전기술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분동안에 60자의 속도로 송수신할수 있었습니다. 촬영기술도 괜찮게 장악했는데 원거리 단거리 임의대로 찍을수 있었지요.” 병환으로 몸동작이 조금 불편해보였으나 정찰계기들을 다루는 동작을 손짓으로 형용까지 하는 려옹의 얼굴은 무척 흥분되여있었다. 드디여 상급의 명령을 받고 1941년 3월, 려영준은 박장춘과 함께 일본군군사기지정찰을 목적으로 중쏘국경을 넘게 되었다. 이번 임무는 로흑산일대의 일본군군사시설에 대한 정찰이였다. 키넘는 갈대밭을 헤치면서 국경선에 다달으니 산중턱에 구름이 감도는 해발 1000메터되는 중국의 산이 앞을 척 막아섰다. 두 정찰병은 갈밭에 몸을 숨긴후 망원경으로 적정을 탐지하면서 넘어갈 길을 찾았다. 백설이 덮인 국경선에 어둠의 장막이 드리웠다. 두 정찰병은 흰천으로 전신을 위장한 후 쥐도새도 모르게 수분하 하류를 건넌 후 가파로운 산비탈에 달라붙었다. 어찌나 험한지 두발자국 올리디디면 한발자국씩 미끄러져 내려오는 통에 이들은 밤새껏 톺아서야 겨우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벌써 먼동이 훤히 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등뒤엔 적의 망원초, 산아래엔 적의 보초막이 있지 않는가. 지금 이들은 적들의 턱밑에서 서성이고있는것이였다. 이미 날이 밝았으니 더는 움직일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두사람은 방법없이 가랑잎을 뒤집어쓰고 계곡에 숨어 하루해가 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드디여 해가 지고 어둠의 장막이 산을 덮었다. 가랑잎속에서 살금살금 기여나온 두사람은 발자취를 죽이면서 로흑산을 바라고 갈길을 좁혔다. 로흑산은 산속분지였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부락은 북산기슭에 자리잡고있었고 정거장과 일본군병영은 남산기슭에 들어앉아있었다. 두사람은 일본군영뒤산에까지 바싹 기여들어가 매복했다. 놈들이 조기체조를 할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가 들리였다. 로흑산의 아침이 밝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병영으로부터 놈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오더니 병영장에 줄을 서서 조기체조를 하느라고 야단이였다. 이렇게 련속 이틀이나 적병영 앞산에 매복해있으면서 적의 동정을 살폈다. 매일 아침 조기체조를 나오는 놈들은 150여명뿐이였다. 병종은 기병과 보병이였다. 경찰서는 부락안에 있었는데 순사놈들은 밤낮없이 쏘다녔다. 두 정찰병은 낮에는 산에 매복해있으면서 로흑산일대의 지형도를 그리고 밤에는 산을 내려 철교와 신작로다리의 길이, 너비, 높이, 교각둘레와 교각간의 거리를 쟀다. 나흩동안 로흑산일대를 까근히 참빗질한 두사람은 정찰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고 기지로 돌아가 로흑산의 모형까지 만들어 바쳤다. 적들의 턱밑에서 허름한 자택에서 기자에게 소분대활동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로항일전사 려영준.(2004년) 한달남짓 지난 4월, 새로운 임무가 또 하달되였다. 동녕에 가 적의 또치가내부구조를 정찰해오라는것이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적의 심장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아오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지휘관은 떠나기전에 동녕은 왜놈들의 주요한 군사기지이기에 이번 정찰은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귀띔해준후 모형도를 보여주면서 주공방향까지 제시해주었다. “또치까안으로 들어가자면 우선 일곱갈래의 방어선을 뚫어야 하오. 지금까지 동녕남북산에다 왜놈들이 또치까를 구축했다는것만을 알지 그 내부구조를 정찰해온 사람은 하나도 없소.” “나와 장춘이는 쏘련홍군이 장고봉사건때 로획한 일본군군복을 갈아입었습니다. 나는 대위 견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장춘이는 중위견장을 단 군복을 입었습니다. 센또보시(일본군 전투모)까지 꾹 눌러쓰고 반들반들한 가죽집에 넣은 권총까지 척 차니 제법 일본놈으로 변해버리더군요. 좀 격에 맞지 않은 것은 발자취를 감추기 위해 군화 대신 지하족을 신은것이였지만 각반까지 다리에 감고보니 과연 그럴듯했습니다.” 동녕에 도착한후 처음 부딪친 방어선은 여섯층 높이로 늘인 가시철조망이였다. 박장춘이 가시쇠줄을 한손으로 쥐여들자 려영준은 그밑으로 기여들어가 박장춘이의 손에서 가시쇠줄을 받아쥐였다. 두 번째 방어선은 반땅크호였다. 두사람은 얼마나 깊은지 가늠하지도 않고 풍덩풍덩 뛰여내려갔다. 너비는 5메터가량 되었다. 박장춘이가 맞은켠 흙벽에 몸을 딱 붙이고 손으로 어깨를 툭툭쳤다. 려영준은 훈련장에서 하던대로 박장춘의 어깨를 날념하게 밟으면서 번개같이 우로 올라가 배를 땅에 딱 붙이고 엎드린후 두팔을 내리드리워 장춘이를 끌어당겼다. 세 번째 방어선은 여섯층으로 된 가시철조망에다 빈 통졸임통을 주렁주렁 달아맨 방어선이였다. 자칫하면 놈들의 신경을 건드리는판이였다. 두사람은 좌우측 말뚝중간으로 기여갔다. 려영준이가 먼저 한손으로 가시쇠줄을 살짝 올리들었다. 통졸임통이 덜렁거리지 않았다. 가시쇠줄이 들린 밑으로 박장춘이 배를 땅에 붙이고 살살 기여들어 간후 려영준의 손에서 가시쇠줄을 받아쥐였다. 이렇게 세 번째 방어선을 넘어서니 이번엔 땅에 촘촘히 늘여놓은 쇠줄옹노가 기다리고있었다. 그야말로 물샘틈없는 방선이였다. 두사람은 발자국을 늘게 떼면서 옹노사이를 요리조리 더듬어 들어갔다. 다섯 번째 방어선인 철조망까지 넘어들어가니 또치까로 통하는 교통호였다. 밤은 괴괴하고 사위는 무시무시하였다. 중심또치까에서 쏘아올리는 신호탄이 이따금 밤하늘에서 번쩍번쩍 했다. 아직 놈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 같았다. 두사람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교통호를 따라서 또치까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서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났다. 놈들이 일어나면 반격해야 하기에 려영준은 비수를 빼들고 만단의 준비를 하고 박장춘은 호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여 또치까의 내경과 화구규격, 포신구경, 출입구규격, 천장두께 등을 잰후 얼마간의 콩크리트쪽각을 떼여 챙긴후 려영준을 슬쩍 건드렸다. 볼일을 다 봤다는 신호였다. 북산또치까정찰을 맞힌 두 사람은 이번에 남산또치까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앞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적병이였다. 생사판결할 때라고 생각한 두사람은 권총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교통호 한쪽 벽에 납죽 붙었다. 까딱하면 결사전을 펼친판이였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어둠속에서 바라보니 총을 멘 두 그림자가 점점 앞으로 흔들흔들 다가오고있었다. 신경은 칼날처럼 번득거렸다. 그런데 놈들은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이였다. 손을 뻗치면 잡힐만큼한 거리에서 슬쩍 스치고 지나쳐버리는것이였다. 얼마나 아짜아짜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의 이마로는 식은땀이 흔건히 배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앞의 방법대로 남산또치까로 들어가 내부구조를 정찰해가지고 국경선을 무사히 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놈들이 쏘련을 진공하자 왜놈들도 쏘련을 침공할 목적으로 쏘만국경지대에 많은 군대를 이동시켰다. 지휘부에서는 급변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각 소분대에 새로운 전투임무를 하달했다. “그때 나와 박장춘은 무전기를 가지고 로흑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적정을 무전으로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이들은 일본군 1000여명이 자동차에서 내려 병영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니 병력이 1000여명 증가되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무리 산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아도 병력이 증가된 것이 알리지 않았다. 1000여명 불었으니 원래 병력과 합치면 2000여명 되어야 할텐데 의연히 1000여명뿐이였다. 무슨 도깨비감투인가. 적군의 똑똑한 수자를 정확하게 장악하기 위해 두 사람은 일본군으로 변장한후 밤에 적병영에 접근했다. 두 사람은 정거장쪽으로 움직이는 적들의 긴 대렬을 목격하게 되었다. 정거장에 도착한 적들은 군용화물차바곤에 기여오르는것이였다. 일본군을 만재한 군용차는 금창쪽으로 나가고있었다. (왜 갑자기 밤에 이동하는걸가?) 두 정찰병은 의문을 가득 품은채 산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아침이였다. 부릉부릉 하는 군용자동차의 엥징소리에 정신을 차린 두 정찰병은 망원경으로 적병영을 주시해보았다. 이게 웬 일인가. 1000여명의 병력을 실은 군용차가 또 도착한것이였다. 어제 저녁처럼 1000여명 적군은 정거장에 나가서 군용화물차에 오르는것이였다. “우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병영에 접근하고 지어 정가장홈에까지 들어가면서 끝내 놈들의 군사비밀을 알아내고말았습니다. 그건 사실 놈들의 잔꾀였습니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호방한 웃음을 날리면서 그때의 정경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이런 식으로 병력이 증가되면 로흑산은 일본놈천지로 되고말겠지요. 그러나 일본놈 병력은 조금도 늘지를 않고있었습니다. 그것은 며칠동안 아침마다 1000여명씩 들어오는 일본놈들은 저녁에 실어내갔던 놈들이였기 때문입니다. 놈들은 남들 다 자는 저녁에 눈을 속여 병력을 실어내갔다가는 낮이면 버젓이 끌어들이는데 기실 당지의 백성을 속이기 위한 허장성세였던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황을 무선전으로 상급에 보고한후 계속 로흑산에 있으면서 동녕에서부터 훈춘현 춘화까지 새로 닦은 군용도로의 너비를 재기도 하고 비행장과 포진지에 들어가 정찰하기도 하면서 활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범의 굴 지하아지트로 그런데 박장춘이 갑자기 앓아눕게 되어 정찰황동을 계속할수 없게 되었다. 려영준은 박장춘을 야영훈련소에 호송해간후 혼자서 로흑산으로 돌아와 정찰활동을 계속 견지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다닐 때에는 서로 의지하고 말도 주고받을수 있어 외롭지 않았댔는데 혼자이니 무척 고독하기만 했다. 또 두 사람이면 적들의 눈을 쉽게 속여넘길수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여서 여간만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혼자서 일본군군복을 입고다니자니 위험한 때가 많았다. “범의 굴을 지하아지트로 사용한 이야기가 참 생동하던데요.” 범의 굴 이야기가 나오자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깊은 감회에 잠기는것이였다. “그 범의 굴은 참 우연히 발견했댔지요.” 하루는 놈들의 전호를 정찰하고 산을 넘어오다 아침밥을 지어먹으려고 릉선의 움푹한 곳에 삭정이를 모아놓고 불을 피우고있는데 건너산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건너다보니 왜놈순라기병들이였다. 려영준은 삭정이에 달린 불을 밟아 끈후 부리나케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말잔등에 앉아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던 놈들은 무슨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려영준이가 불을 피우던곳으로 내려왔다. (발견되였구나!) 목표가 드런날줄 생각한 려영준은 단숨에 10여킬로메터를 냅다 뛰였다. 어디로 어떻게 뛰여왔는지 모른다. 머리를 쳐들고 바라보니 더는 빠져나갈수 없는 험산이 앞을 막고있었다. 깊은 골짜기의 막치기였던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온밤 정찰하느라고 배가 몹시 고팠댔지만 지금은 배고픈줄도 모르겠다. 그저 바위틈에라도 숨어야 한다는 일념에 이곳저곳 살폈다. 마침 커다란 바위기슭에 동굴 하나가 있었다. 들여다보니 굴어구에 범 한 마리가 죽어서 해골이 된 것이 있었다. (아, 범의 굴이구나!) 순간 온 몸이 으쓱해나면서 머리가 쭈볏이 일어서는것만 같았다. 굴안에서 당장이라도 “따웅”하고 범이 아가리를 짝 벌리면서 뛰쳐나올것만 같았다. 권총을 뽑아든 려영준은 탄알을 절컥 재워가지고 굴어구에 비켜섰다. 한창 있어도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이번엔 돌맹이 한 개를 굴안에 들이뜨리고 귀를 강구었다. 역시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추격해오는 놈들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들어가보자. 려영준은 발끝걸음으로 살금살금 범의 굴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3메터 들어가니 굴은 2층으로 되어있었다. 빙 둘어보니 30명은 실히 들어가 숨을수 있는 굴이였다. 금방까지의 무시무시한 생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어쩐지 아늑하게까지 느껴졌다. 갑자기 배어서 “꾸르룩”하고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배가 아플 정도로 허기가 밀려왔다는것을 느꼈다. 삭정이를 한아름 주어가지고 위층에 올라간 려영준은 밥을 끓여먹으면서 밖을 주시했다. 혹 밖에 나갔던 범이 돌아오지나 않을가, 추격해오던 적들이 쳐들어 오지나 않을가 하여 장탄한채로 총을 곁에 바싹 놓고 신경을 도사리였다. 하루가 지났다. 범도 오지 않고 왜놈들도 오지 않았다. 지형을 살펴보니 이 굴은 로흑산에서 20여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그런데 죽은 범뼈가 그냥 있는 것으로 보아 당지사람들이 이런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그후 그 범의 굴을 지하아지트로 리용하여 포탄골 장동무랑 태평골 송로인과랑 련계하면서 왜놈들의 군사정보를 수집하여 본부에 보고했지요. 하지만 누구도 내가 범굴에 거처하고 있는줄을 모르고있었습니다. 정찰하러 나갈때에 꼭 밤에 나가고 정찰을 마치고 들어올 때에도 밤을 리용해 돌아오면서 감쪽같이 행동했기때문이지요. 전보를 칠 때에는 밖에다 안테나를 매고 줄을 끌어들여다가 무전기에 련결하였으며 송신이 끝난후에는 인차 안테나를 걷어들이였습니다.” 이렇게 몇 달동안 혼자서 정찰임무를 완수한 려영준은 겨울이 되어서야 본부로 돌아갔다.(계속)
574    제68장 연변에서의 소부대활동 댓글:  조회:2535  추천:0  2014-02-20
소부대가 사용하던 개산툰 연두봉 지하아지트. 당조직 반일단체 새롭게 회복 일제 군사시설 파괴 친일 한간, 주구 청산  항일련군 새로운 투쟁 선고 대량의 소부대 동북에로 파견 “소부대활동은 1941년부터 시작되였는데 남영에 있던 제1로군에서만도 연변에 7개의 소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소부대의 주요한 활동내용은 첫째로는 이미 파괴된 공산당조직과 반일조직을 회복하는것이며 둘째로는 쏘련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부대를 찾는것이며 셋째로는 일본군의 초소를 습격하고 군사시설을 파괴하여 적들의 후방을 교란하는것이며 넷째로는 민중들에게 항일련군이 살아있다는 것을 선고하려는것이였습니다. 김일성이 지휘한 소부대는 왕청 쟈피거우로 나온후 다시 몇 개 소부대로 나뉘여 각지로 진출하였습니다. 김일, 림춘추 등은 왕청지대와 천보산지대로, 전문섭과 김홍수는 안도 처창즈부근으로, 한창봉과 한태룡은 장백현지대로, 류경수 등은 화전방향으로 각각 진출하여 활동을 벌렸습니다. 려영준, 박장춘은 동녕현 로흑산지대에서 활동하고 박락권 등은 녕안현 목단강지대에서 활동하였으며 김명주, 김병수 등은 훈춘일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군사정보수집은 매우 간고하였습니다. 례를 들면 1943년, 로흑산으로 진출한 려영준, 박장춘 등은 일본의 방어전선을 정찰하고저 직접 변복하고 일본비행장에까지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여 쏘련으로 전송하였습니다. 그외에도 그들은 동녕일대에서 적의 방어공사를 정찰하는 과정에 방어공사에 세워놓은 대포들이 모두 가짜라는 것을 알아내고 정보를 제때에 아군의 지휘부에 전송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내린후 그들은 목단강까지 나가 쏘련홍군의 진군로선을 무선전으로 지휘하였으며 일본군의 후퇴로선을 제때에 무선전으로 아군지휘부에 알려 쏘련비행기가 직접 일본군을 소멸하도록 담보하여 주었습니다. 김명주도 1941년에 김병수와 함께 흑룡강성의 우쑤리강변의 호림일대로 소분대활동을 하러나갔다가 1943년과 1944년 두차례에 걸쳐 차조구일대에 들어와 장기적으로 거주하고있으면서 정찰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8월에는 마적달로 나가 쏘련홍군의 진공로선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리하여 려영준, 김명주 등은 쏘련원동군사령부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소부대활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면서 “소부대활동은 특정한 력사조건하에서의 일정한 구역과 규정된 시간내에서 동북항일전쟁을 끝까지 진행하기 위한 유격투쟁의 한 형식이다. 소부대활동은 일제를 철저히 소멸하는데 있어서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고 피력했다. 동북항일련군은 쏘련경내에서 야영정치군사훈련을 벌리는 한편 동남만지역에서 광범한 소부대활동을 벌려 각지에 흩어져있는 항일련군부대를 회복정돈하며 동남만과 조선북부지역 인민군중들의 항일기세를 붇돋우어줌으로써 항일의 승리를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닦기 위해 1941년 3월 20일부터 5갈래의 소부대를 동북 각지에 파견했다. 그중 가장 일찍 동북에 파견된 소부대는 김일성이 이끈 제1소부대와 안길이 이끈 제2소부대였다. “우린 김일성부대다!” 김일성은 29명으로 조직된 제1소부대를 이끌고 4월 9일, 야영훈련소를 떠난후 쥐도새도 모르게 훈춘 중쏘변경을 넘어 백두산지대를 향해 전진했다. 이번 걸음에 중공동남성위 서기이며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인 위증민을 찾거나 그 소식을 알아오는 것이 소부대의 주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한달전인 3월 8일, 화전현 쟈피거우 목단령 이도하자밀영에서 장백산을 주름잡으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동북항일련군의 우수한 지휘원 위증민이 32세의 아까운 나이로 불행하게도 이미 타계했다는 것을 이들은 감감 모르고있었다. 소부대는 적들의 삼엄한 봉쇄선을 피하면서 눈덮힌 산속으로 행군하였다. 그러다보니 행군속도가 빠를리 없었다. 부대가 로흑산을 지나 헤이샤즈거우에 이르렀을 때 김일성은 집단부락을 기습하여 지방에 남아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부대에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리자고 했다. 집단부락 성문보초막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자위단놈은 고래고래 지르는 성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니 웬걸 한무리의 “일본군”이 버티고 서있지 않는가. 성문이 열리자 욱 몰려들어온 “일본군”중 사관복차림을 한이가 보초놈을 모질게 닦아세웠다. “바가야로! 무슨놈의 꼬락서니야! 꾸벅꾸벅 졸면서 보초를 어떻게 서겠다는거야!” “하이, 죽을 죄를...” 자위단보초병은 꺽꺽거리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어서 대장실로 안내했!” “일본군”의 불호령에 시래기가 된 보초놈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자위단실로 안내했다. 자위단놈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의 왕림에 쩔쩔매고있을 때 벽에 걸려있던 총이며 혁띠에 차고있던 총들이 눈깜박할새에 해제당했다. "되질 놈들아! 우린 김일설부대다! 살겠거든 고분고분해라!“ 벼락같은 소리에 자위단놈들은 그저 부들부들 떨뿐이였다. 다 죽었다던 항일련군이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놈들은 얼이 빠져 눈에 화등잔이 되었다. 총 한방 쏘지 않고 집단부락을 점령한 소부대는 군중들을 모아놓고 서전고동사업을 벌리는 한편 남아있던 항일부대들이 소식을 탐지했으나 동정이 없었다. 이에 김일성은 대오를 이끌고 석두하자를 지나 소왕청부근의 쟈피거우에 이르렀다. 무전기까지 휴대한 소부대가 도가선(도문-가목사), 경도선(신경-도문) 철도와 여러 갈래의 큰길곁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였다. 김일성은 박덕산, 김철우 등더러 이곳에 남아있으면서 쟈피거우를 근거지로 소성자, 도문, 동녕, 왕청 일대에서 적정을 조사하며 군중들 속에서 정치조직사업을 벌려 항일련군과 군중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반일혁명의 대중적기반을 튼튼히 다지도록 지시하였다. 그외의 대원들을 거느린 김일성은 5월 12일 도가선을 넘어 왕청현의 삼차구, 다홍왜, 사하장과 돈화현의 황니허즈를 지나 경도철도를 무사히 통과한 다음 다시 돈화현 이도하자, 삼도하자를 거쳐 하발령산줄기를 타고 안도현 한총구일대에 이르렀다. 1년전에 위증민과 헤여진 곳이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5월 20일, 소부대는 다시 세 개 소조로 나누어 위증민과 기타 부대의 종적을 찾기로 했다. 동숭빈(한족)이 책임진 한 개 조는 돈화현소재지부근의 이도하자, 고려모자, 유수천, 삼도황구, 사도황구, 마호, 륙과송 등지에서 위증민과 제1로군의 분산된 부대들의 종적을 찾을 임무를 맡고 류삼손(류경수)이 책임진 한 개 조는 화전현동부의 부루하, 쟈피거우, 로금창, 희춘잔 등지에서 제1로군총부와 기타 부대의 종적을 찾을 임무를 맡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거기에는 전광과 1로군후방부 관부관의 밀영이 있었댔다. 제3조는 김일성이 직접 맡고 안도현 대전자, 대사하, 소사하, 화룡현북부, 무송현동북일대의 넓은 지역을 류동하면서 각 부대와 련락을 취하고 제1로군을 다시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달 남짓이 찾았으나 위증민과 제1로군의 종적을 끝내 발견할수 없었다. 7월 28일, 세갈래의 소조는 왕청현 대두천부근에서 집결, 박덕산소조와 류삼손소조가 남아 도문, 석현, 왕청부근의 적정을 계속 살피기로 하고 김일성은 기타 대원들을 이끌고 정황을 회복하려 야영으로 돌아갔다. 9월 14일, 김일성은 다시 소부대를 이끌고 연변에 들어와 왕청일대에서 활동하는 소분대와 회사한후 활동을 전개하다가 11월 12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소부대활동을 전개하면서 이들은 1로군의 잔여부대에 대한 소식을 많이 수집했으며 적정도 대량 파악했다. 이들은 또 항일단체와 지방당조직도 회복시켰고 한간과 주구들을 투쟁, 처단하여 항일련군의 위신을 높이기도 했다. 신출귀몰 1941년 8월 25일, 안길이 이끄는 제2소부대 일행 17명은 국경을 넘은후 왕청, 도문, 연길, 훈춘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0월 19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동년 7, 8월에는 최현이 이끄는 10여명 소부대가 국경을 넘어 왕청현 로흑산부근에 도착했다. 이들의 임무는 라자구에 건설되여있는 일본군 간이비행장에 관한 시설을 정찰하는것이였다. 그들은 낮이면 산골짜기에 숨어있고 밤이면 정찰활동을 개시했다. 하여 끝내 비행장의 규모, 편대를 정찰해냈다. 이들은 또 군중들의 협조하에 가치가 있는 많은 정보을 수집하기도 했다. 소부대는 로항일근거지의 공청단원 최봉선을 지도하여 라자구에 “경성사진관”을 세워 소부대활동의 련락처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사진관을 통해 1941년부터 1944년사이 일만군의 군사시설, 우두머리들의 활동상황이 담긴 가치가 상당한 사진 300여장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료들은 금후 연변지구를 해방하는 전투에서 중대한 작용을 발휘했다. 소부대는 임무를 완성한후 10월 19일 순리롭게 남야영에 도착했다. 1942년 봄, 남야영총부는 쏘련방면과의 협상에 쫓아 소부대를 중쏘변경에 파견하여 단기적인 정찰임무를 완수하게 했다. 이러한 정찰활동은 금후 대일작전의 수요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3월부터 시작하여 6개의 소부대를 연변에 파견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3월 20일, 도정비를 대장으로 하는 5인소부대가 동북으로 들어와 활동, 8월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도정비와 혁자신이 희생되였다. 리청이 인솔하는 소부대 12명은 중쏘변경을 넘은후 녕안, 동경성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전부 야영으로 돌아갔다. 4월 27일, 최현이 인솔하는 10명 소부대는 야영을 떠난후 왕청, 도문, 연길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만주와 조선의 철로교통도 등을 수집하기도 했고 배초구일대에서 항일선전을 벌리기도 했다. 소부대는 대류수구에서 북하마탕경찰서 특무 4명을 총살하기도 해 당지군중들의 우환을 없애주었다. 소부대는 군중들과의 관계를 밀접히 건립한후 11월 11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5월 13일, 박덕산이 인솔하는 11명 소부대는 무선전발사기를 휴대하고 국경을 넘은후 수분대전자, 왕청, 도문, 목단강, 장춘-도문철도연선에서 활동하면서 적정을 정찰, 6월 24일 천보산에 이르렀다. 6월 25일, 곽지산이 몇몇 대원들을 이끌고 화전현 쟈피거우로 들어가 과동준비를 하고 박덕산, 강위룡, 김홍수, 리두익 등 4명이 개산툰일대에 가 중단되였던 군중관계를 회복하였다. 소부대가 본영으로 돌아간후 강위룡 등은 개산툰일대에 남아 친척관계를 리용하여 계속하여 반일조직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연두봉아지트를 거점으로 조선 회녕의 비행장정황, 비행차수와 규률을 정찰했다. 연두봉은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서남쪽 6킬로메터되는 곳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이 산봉우리 북쪽기슭 길서쪽에는 항일소부대시기에 소부대원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던 비밀아지트의 옛터가 있었다. 이 비밀아지트에 대하여 “룡정현근현대유적지조사표”(1984년 5월, 제72페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비밀아지트는 광개향 자동촌 제2툰 남쪽 8리되는 연두봉 북쪽기슭에 있는 인행도로의 서쪽에 있는데 판전구(板田溝)어구남쪽 1500메터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밀아지트자리가 남아있는 흔적을 보면 남북의 길이가 5메터이고 동서의 너비는 3메터로서 동, 서, 남쪽은 돌로 쌓은 벽이고 북쪽은 흙으로 쌓은 벽이다. 남쪽벽은 제일 높은데 80센치메터밖에 되지 않는다. 이 연두봉 항일아지트는 로전사인 강위룡이 항일련군소부대활동시기에 리용하던 것이다. 1944년후에는 지점산(池占山)이 막을 차지하였고 토지개혁때에는 김기룡(金基龍)이 사용하였다. 1959년 조선항일전적지답사단에서 원래의 집재목들을 가져갔었다. 1960년 6월말에 자동관리구에서 목축장으로 쓰기 위해 이곳을 늘구어 원래의 면모가 없어졌다. 지금은 단지 허물어진 흙벽만 있을 뿐이다. 5월 29일, 안길이 인솔하는 12명 소부대는 국격을 넘은후 왕청현 수분대전자, 라자구 동남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정찰활동을 하는 한편 농민들 속에 심입하여 동북항일련군의 정황, 쏘독전쟁정황 등을 선전하면서 항일전쟁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11월 5일, 소부대는 순리롭게 본영에 도착했다. 7월 17일에는 시세영이 8명 소부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활동하다가 넘어갔고 11월중순에는 김윤호가 5명소부대를 이끌고 넘어와 활동했으며 련이어 안길, 최현 등도 다시 소부대를 이끌고 왕청, 연길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봄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총적으로 이시기 남야영에서 파견한 소부대는 간고한 지하투쟁을 벌리면서 항일련군 잔여부대를 찾고 당조직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왕청현 이란구에 1개 중공구위와 공청단구위를 회복시켰으며 액목현 남대창에 1개 당소조, 녕안현 동부와 개산툰에 반일회 등 조직을 세웠습니다. 소부대는 또 왕청현 라자구, 십리평, 왕청역, 도문 북대동, 명월구 남산툰 등지에 비밀련락원과 련락거점을 두고 일만군의 정치, 경제동태와 군사정보를 수집하게 했으며 적들의 초소를 습격하고 칠일파주구를 숙청하면서 항일련군이 살아있으며 적들과 새로운 투쟁을 벌리고있다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소부대활동에 대한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1943년이후 동북항일련군은 소부대활동을 중지하고 동북에서 활동하고있던 극소수의 항일련군을 제외한 대다수 대원들을 야영에 집결시켜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1941년 6월 22일 파쏘독일은 쏘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찢고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일제는 진주항을 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 몇 년간의 치렬한 박투를 거쳐 제2차세계대전의 동서방전선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쏘련에서의 쓰딸린그라드전역의 승리를 전환점으로 하여 쏘련군은 전략적인 방어로부터 전략적인 진공으로 돌입하였다. 하여 구라파에서의 독일의 패배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에서도 미국은 드센 반격을 보여주면서 일본의 패배를 재촉하고있었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동북항일련군은 대일작전의 준비를 다그치게 된 것이다. (계속)  
573    제67장 쏘련에서의 야영훈련 댓글:  조회:2380  추천:0  2014-02-20
하바롭스크야영훈련소에서의 동북항일련군 장령들. 앞줄 왼쪽 두번째로부터 리조린, 왕일지, 주보중, 김일성.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 설립 항일련군 재편성 야영지에서 폭파 락하산 방화 반땅크 훈련 강행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 설립 우세한 적들과의 끊임없는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항일련군은 무모한 희생을 피면하고 유생력량을 보존하며 정치, 군사적 자질을 높이는 한편 력량을 부단히 장대시켜 항일투쟁을 끝까지 견지하기 위하여 1940년말부터 대부대를 륙속 쏘련경내로 이동시킨후 야영훈련을 조직하였다. 야영훈련에는 동북항일련군 각 군에서 사업하던 김일성, 최용건, 김책, 안길, 강신태 등 많은 조선인 지휘원들과 전투원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다른 항일련군대원과 함께 남북 두 개 야영지에 나뉘여 훈련하면서 수시로 소부대를 동북 각지에 파견하였다. “쏘련으로 들어가 두곳에 야영훈련기지를 설치했는데 한곳은 A영(북영), 다른 한곳은 B영(남영)이라고 불렀습니다. 먼저 들어간 곳이 북영인데 나꼬롭스크의 중간지에 있는 지방이였습니다. A영은 흑룡강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흑룡강을 로어로 아무르강이라고 부르기에 그 첫 자를 따다가 A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는 제2로군의 총부와 제3로군의 총부가 들어와 밀영을 세웠습니다. 제1로군은 쌍성자와 울라지보스또크 중간지대에 있는 곳에 가 밀영을 잡았는데 그곳 이름을 부쉬로부라고 불렀기에 첫 자를 따서 B영이라고 불렀습니다. 군사훈련의 내용은 앞으로의 반공(反攻)을 준비하여 일반군사활동뿐만아니라 공중락하, 무선전 등 선진적인 특수기술도 학습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야영훈련에 대한 소개였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속에서》에서 “그 당시 내가 들은데 의하면 1로군의 500여명과 2로군의 일부를 합하여 700여명이 제1야영훈련소로 가고 2로군의 대부분과 3로군 도합 1000여명이 제2야영훈련소로 갔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야영훈련에 참가한 장병들중 절반이 조선인이였다고 한다. 연변의 아들딸들로 조직된 남야영에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제3방면군, 경위려가 배속되였는데 “실력을 집중시키고 간부를 보존하며 정돈을 진행하고 부대를 분산시켜 활동한다(收縮實力, 保存干部, 進行整頓, 化整爲零, 分散活動)”는 방침을 시달하기 위하여 남야영의 부대를 재편성하고 당조직을 완벽하게 했다. 1941년 3월, 국경을 넘어온 1로군부대를 1로군 제1지대로 개편, 김일성이 김일성이 지대장을 맡고 안길이 참모장을 맡았다. 아래에 두 개 대대를 두었다. 남야영에 함께 주둔하고있던 2로군 5군을 2로군 제5지대로 개편, 시세영에 중공남아영위원회를 건립하고 리청을 서기로, 시세영, 김일성, 박덕산을 위원으로, 최현, 김윤호를 후보위원으로 선거하였다. 북야영에서도 당조직을 새롭게 건설하고 부대를 재편성했다 1941년 4월 13일, 쏘련과 일본은 “쏘일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중국경내로 들어가 활동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쏘련측의 요구에 의해 항일련군은 소부대를 동북에 파견하여 임무를 집행하게 하는 외에 대부대는 남북야영훈련소에 남아 정치, 군사 훈련을 하게 했다. 1942년 8월, 남북야영훈련소와 동북에서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부대를 통일적으로 항일련군교도려로 개편, 명의상에서는 쏘련극동군에 예속시켰다. 정식번호는 쏘련극동홍기군독립88려(蘇聯遠東紅旗軍獨立88旅)였고 대외번호는 8416보병특별려였다 그러나 내부로는 의연히 항일련군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있었다. 주보중이 교도려 려장을 맡고 장수전(리조린)이 정위를 맡았다. 아래에 4개 영과 2개 련을 두었는데 1로군을 기간(基干)으로 제1영을 편성, 김일성이 영장을 맡고 안길이 정위를 맡았다. 2로군 제2지대를 기간으로 제2영을 편성, 왕효명이 영장을 맡고 강신태가 정위를 맡았다. 3로군을 기간으로 제3영을 편성, 허형식이 영장을 맡고 김책이 정위를 맡았다. 제2로군 제5지대를 기간으로 제4영을 편성, 시세영이 영장을 맡고 리청이 정위를 맡았다. 려, 영의 부직(副職)은 쏘련측에서 파견한 인원들이 담임했다. 1942년 9월 13일, 중공동북항일련군전당대회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을 설립하였다. 회의에서 특별지부국 제1기 집행위원과 후보위원을 선거하였다. 주보중, 장수전, 최석천(최용건), 김일성, 김경석, 팽시로, 왕명귀, 김책, 왕효명, 안길, 리청이 집행위원으로 당선되고 왕일지, 심태산이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서기에 최석천, 부서기에 김일성, 김경석이 당선되였다.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은 중공항일교도려위원회와 동북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이였다. 이로부터 동북당조직은 통일령도가 있게 되었고 동북항일련군은 통일적인 지휘가 있게 되었다. 야영정치군사훈련 전투가 빈번하여 여태까지 군사훈련과 정치, 문화 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항일련군 대원들에게 있어서 이번의 야영훈련은 참으로 뜻깊은 나날이 아닐수 없었다. 야영에 참가한 대부분 대원들의 문화수준은 높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는 문맹과 겨우 자기 이름자나 쓸줄 아는 사람이 30%나 되었다. 야영지는 심산밀림속에 건설되여있었다. 전사들은 자기들 손으로 병영을 짓고 훈련장을 닦았으며 량식창고, 피복창고, 병원, 재봉소, 강의실, 병기수리소 등을 꾸려놓았다. 밭을 일구어 남새도 가꾸고 사냥, 고기잡이도 하여 식생활을 개선하였다. 본격적인 야영훈련에 들어서자 전사들은 일과표에 따라 긴장하면서도 유쾌하게 군사훈련과 학습, 문화오락활동을 했다. 정치학습은 대원들의 문화수준에 따라 두 개조로 나누어 했는데 문화수준이 높은 대원들은 자체로 학습하고 토론을 위주로 했으며 문화수준의 낮은 대원들은 위주로 강의를 들었다. 장기간은 유격전쟁가운데서 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라 대원들은 가물에 단비를 만난 듯이 학습에 열성을 올렸다. 주보중, 장수전, 풍중운 등 항일련군 지도자들은 무시로 야영훈련소에 찾아와 보고회를 조직하고 관내에서 싸우고있는 팔로군, 신사군의 전투적위훈을 소개하기도 하고 1941년 1월 7일에 발생한 환남사변의 경과와 환남사변후의 중국공산당의 태도를 상세히 알려주어 대원들의 항일투지를 더욱 북돋우어주기도 했다. 전사들은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원리와 《쏘련공산당(볼쉐위크)력사》, 모택동의 《지구전을 론함》, 《당의 작풍을 바로잡자》, 주은래의 《쏘독전쟁과 반파쑈투쟁을 론함》, 주덕의 《동방민족반파쑈통일전선을 건립하자》 및 1936년의 《쏘련헌법》 등을 체계적으로 학습했으며 “중국민족해방전쟁의 력사적단계 및 승리의 조건”, “전국항일전쟁의 형세”, “동북유격운동의 발전전도” 등 문제를 놓고 열렬한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김일성은 조선인장병들에게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제목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학습을 거쳐 대원들은 맑스-레닌주의리론수준을 높이였으며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정신을 발양하여 반파쑈전쟁의 종국적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몸바쳐 싸워야 한다고 인식했다.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식자반을 꾸려 문맹퇴치를 하는 한편 한어를 잘 모르는 조선인전사들에게 조선말정치과목특별반을 꾸려 조선말로 정치과를 강의하였는데 김일성 등 고위급간부들이 친히 강의했다. 그리고 한어조를 꾸려 한어를 가르쳐주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로어를 배워주기도 하였다. 전사들은 벽보를 꾸리고 강연회를 조직하고 오락만회를 벌리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여 “계급각오”, 문화수준을 높여주었다. 군사과목은 주로 대렬훈련, 사격, 창격술, 정찰, 보초, 전달 등 내용이였다. 부분적대원들은 항공과 무선전 기술을 학습하였으며 락하산, 스키타기, 도강, 폭파 등 훈련도 하였다. 1941년 6월 22일, 파쑈독일은 신의를 저버리고 쏘련을 불의에 진공하였으며 12월 7일에 일본은 진주항을 불의에 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 12월 8일,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월 11일,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제2차세계대전은 더욱더 확대되였으며 선후하여 60여개 나라와 지구, 20억명 이상에 달하는 인구가 이 전쟁의 도가니속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직면한 항일련군장병들은 쏘련홍군과 어깨겯고 독일침략자와 일본침략자를 물리치는 전쟁에 뛰여들것을 강력히 탄원해나섰다. 야영당위원회에서는 “원쑤를 소멸할 기량을 더 잘 닦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하고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그리하여 폭파, 락하산, 방화, 반땅크 등 과목을 더 늘이고 매일 8시간씩 꼬박 훈련에 돌입했다. 교도려에서는 소부대를 무어 동북지방에 계속 대원들을 파견하는 한편 쏘련원동군사령부에서 반포한 “보병훈련대강”에 좇아 전시의 수요와 동북유격전쟁의 실제에 결부시켜 체계적인 현대화군사훈련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으며 일부 특수기술과 기능도 배웠다. 1942년 9월말부터 10월초까지 교도려에서는 항공륙전대훈련을 조직하여 조선인전사들을 망라한 많은 남성대원들과 20여명 녀성대원을 참가시켰는데 특히 녀성대원들이 침착하고 용감하게 훈련에 림해 총교관의 칭찬을 늘 받았다. 주보중려장은 자기의 일기에 이들 녀전사들을 중국항공락하산기술력사의 중요한 한페지에 적힐것이라고 밝히면서 그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기도 했는데 그중에 조선인 녀대원이 10명 있었다. 그녀들로는 김창옥, 리명순, 김옥순, 김백문, 류명옥, 정만금, 김순희, 장경숙, 박경옥, 리영숙 등이였다. 여름철에는 수영도 배우고 도강훈련도 강행했으며 겨울철에는 스키타기를 익혔는데 꾸준히 노력한 보람으로 물에 들어서면 누구나 날래게 헤염을 칠수 있게 되었고 스키를 탈라치면 50킬로메터쯤은 손쉽게 달릴수 있게 되었다. 부대는 100여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정하고 스키를 타고가면서 수색, 매복, 불의의 습격, 부대내부에서의 호상정찰, 실탄사격 같은 종합군사훈련도 늘 했다. 야영정치군사훈련을 거친 동북항일련군의 조선인 지휘원과 전투원들은 그후 항일투쟁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계속)  
572    제66장 엄혹한 시련속에서의 악전고투 댓글:  조회:1985  추천:0  2014-02-20
  두만강을 삼엄하게 지켜선 일본군경. 엄혹한 자연 극심한 식량난 간안한 적들과의 치렬한 공방전이 뒤엉킨 간고한 시련에 맞서 제2방면군 역경을 뚫고 홍기하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2방면군은 이튿날인 1940년 3월 26일, 화룡현 화랜라즈에서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일본군“토벌”대를 공격, 40여명을 소멸한후 적들을 뿌리치고 안도현으로 빠져나갔다. 안도현에 도착한 2방면군은 4월 29일, 련속하여 남도툰, 한가가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자위단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며칠후 제7퇀 오백룡부대는 만보툰의 위만경찰과 자위단을 습격하여 몇놈을 죽이고 무기와 량식을 로획했다. 안도현경내에서 여러차례 타격을 받은 일제는 병력을 집중하여 2방면군의 뒤를 밟았다. 이에 2방면군은 적들의 “토벌”에 대처할 책략을 연구하기 위하여 5월 2일 총지휘 김일성의 주최하에 돈화현 륙과송에서 금후의 전략전술방침을 연구하는 긴급회의를 가졌다. 제2방면군 정치부 주임 려백기, 부관장 필수문 등이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후 려백기는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현 쌍동툰, 대황구, 대마록구 등지의 일만군기지를 련속하여 습격하였다. 대마록구전투에서 려백기는 중상을 입고 이미 변절하여 특설부대의 우두머리로 된 림수산(2월 24일 몽강현 쟈피거우에서 일본군에 투항)에게 체포된후 역시 수치스러운 별절자로 되었다. 이로써 려백기가 인솔하던 부대는 해체되고말았다.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분산적인 전투를 벌렸다. 7월 2일, 돈화현 하발령정거장을 습격, 7월 11일, 제1로군 경위려 려장 박덕범이 경위려와 2방면군 일부 부대를 이끌고 화룡현 와룡툰을 기습, 일군 20여명을 죽이고 군량을 로획했다. 같은날, 2방면군 한 부대는 훈춘현 신안툰, 이도구를 야습하여 량식과 생활용품을 로획했다. 이튿날인 7월 12일, 다른 한갈래 부대는 안도현 신흥부락을 공격, 일본군 20여명을 격살했다. 아군의 이러한 부단한 기습과 공격에 일제는 더욱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이에 2방면군은 8월 10일, 돈화현 하발령에서 회의를 열고 상응한 대책을 강구했다. 계속하여 분산활동을 하는 한편 입동후 부대는 장백산 밀림으로 철퇴해 들어가 한시기 휴정하기로 했다. 이때 제1로군의 파견으로 자방공작에 나섰던 김재범 등 5명이 동불사 평성촌에서 활동하다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 김재범은 변절해버렸다. 경우려 려장 박덕범이 왕청현 삼가구부근에서 체포된후 역시 변절해버렸다. 이시기 위증민은 병이 악화되여 부득불 부대를 떠나 화전현 쟈피거우 이도하자 밀영에서 병치료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1월, 2방면군 7퇀 퇀장 오백룡은 17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쟈피거우에 가 위증민을 만나 과동물자 등을 남긴후 서북차, 따푸차이허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3방면군 피어린 결전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은 제2차 투도류하회의후 화전, 녕안, 연변 일대에서 주요하게 활동하는 한편 교하, 서란, 오상 등지를 넘나들면서 전전했다. 3방면군은 “강적을 피하면서 약한 고리를 공격하고 기회를 엿보아 섬멸성적타격을 가하는” 전술을 리용하여 때론 련합작전으로 때로는 분산출격으로 일본군에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40년 1월, 3방면군 한 부대는 연길현 무학동에서 50여명 위만경찰과 교전하여 10여명을 격살했다. 같은 달 최현이 이끄는 13퇀은 선후로 연길현 사방대, 돈화현 따푸차이허, 관지 등지를 습격하여 일만군에 타격을 주었다. 3방면군 일부 부대와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5군 2사는 3방면군 지휘 진한장과 5군 2사 사장 도정비의 인솔하에 돈화일대에서 활동했다. 1940년 봄, 진한장이 인솔하는 부대는 돈화현 우심정자밀영에서 2000여명 일만군의 포위에 들었다. 적들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진공해들어왔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7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진한장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진한장은 부상당한 몸으로 계속하여 부대를 지휘하여 포위를 돌파한후 사하연일대로 전이하게 했다. 그러나 련이어 우심정자의 여러 밀영이 회멸되였으며 피복공장전사들이 참혹하게 참살당했다. 재봉침, 식량, 남새 등을 모조리 빼앗기면서 후방기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제3방면군 15퇀 퇀장 리운룡이 인솔하는 한갈래 부대는 연길현으로 전이해왔으나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적들의 추격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한 리운룡부대는 부득불 왕청현으로 전이하여 소부대유격활동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1940년 5월, “적들의 ‘토벌’중심지 돈화현을 신속히 떠나라”는 1로군 대리사령 위증민의 명령을 받은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오상방면으로의 원정을 시작했다. 원정길에서 3방면군은 도처에서 적들의 포위공격과 추격을 받으면서도 돈화현 쌍하령 동강에서 일본군수비대를 기습하여 30여명을 격살했고 교하현에서 추격해오는 적들을 주동적으로 습격하여 일본군 13명, 위만경관 14명을 살상했다. 6월초, 부대는 드디여 오상현경내에 들어섰다. 6월 5일, 3방면군은 오상현 랍림하삼림벌목경찰대 향수하자분주소를 야습하여 일본군 10명과 위만경찰 4명을 죽이고 로동자 120여명을 해방시켰다. 오상현에 들어선후 3방면군은 류도적자, 석두하자, 신가영자 등 위만군거점을 습격했다. 6월 18일, 오상현 장가만에서 일본군 수비대 60여명, 위만경찰 30여명과 조우전을 벌린 3방면군의 한 부대는 10명의 적들을 죽인후 포위를 돌파했다. 6월 25일에는 오상현 충하진을 기습, 적 30여명을 포로하고 현금 8700여원을 로획했다. 3방면군 15퇀과 2로군 5군 2사는 진한장과 도정비의 지휘하에 돈화, 교하, 오상 등지에서 전투를 벌리면서 원정하는 도중 대오가 1배로 증가했다. 1940년 7월, 진한장은 1로군총부와 분산작전하고있는 3방면군 13퇀과 14퇀 및 대오를 떨어진 전사와 부상병들을 찾기 위해 130명 대오를 이끌고 돈화로 나오는 길에 교하현 평지구, 평창툰 등 집단부락을 공격한후 액목의 목단강삼차구에서 적들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 아군은 결사적으로 항격하여 포위를 돌파하였지만 절반의 병력을 잃고말았다. 이에 돈화에서의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녕안현으로 전이했다. 1940년 10월, 진한장은 나머지 병력 60여명을 이끌고 녕안현 경박호남호부근에까지 갔다. 그곳에는 월래 4개월 남짓이 먹을수 있는 량식이 저비되여있었댔으나 변절자의 밀고로 몽땅 적들에게 소각되여버리고 없었다. 하여 부대는 “안으로는 량식이 떨어졌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진한장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11월말 진한장과 도정비는 행동계획을 짠후 유격전을 벌려 량식을 해결하려 했다. 진한장은 40여명 전사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1940년 12월 3일 밤, 진한장은 녕안현 황가툰 도로건설공사장과 고강자집단부락을 쳐 무기와 량식 및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12월 5일에는 북호두의 일제벌목작업소를 습격, 량식을 로획했다. 그러나 몇차례의 전투에서 아군은 많은 상망자를 냈는바 진한장의 신변에는 겨우 10여명의 전사가 남았을뿐이였다. 이에 진한장은 소만만구밀영으로 돌아가 한시기 휴정하려고 했다. 12월 6일 밤, 밀영으로 돌아오던 중 대오내에 변절자가 생겨 진한장의 신상이 적들에게 밀고되고말았다. 적들은 즉시 부대를 동원해 소만만구밀영을 포위했다. 진한장은 10여명 전사를 이끌고 적들의 포위공격에 대처해나섰다. 죽어도 굴할줄 모르는 아군전사들은 적들과 2시간 남짓한 격전을 벌리여 여러차례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10여명의 적군을 격살했다. 그러는 동안 아군 전사들도 하나하나 쓰러졌다. 적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다. 적들은 공심전을 벌려 진한장을 사로잡으려고 시도했으나 진한장은 남은 몇몇 전사들더러 포위망을 돌파하게 하면서 자신은 맨뒤에서 한편으로 엄호하고 한편으로 철퇴했다. 진한장이 죽어도 굴하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적들은 아군대오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진한장은 오른손과 흉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간신이 일어난 진한장은 커다란 소나무에 의지해 마지막 탄알이 떨어질 때까지 왼손으로 권총을 휘둘렀다. 한무리의 적들이 소나무를 삥 둘러쌌다. 한놈이 진한장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진한장은 분노의 눈길로 적들을 쏘아보면서 된욕을 퍼부었다. 이에 흉악한 왜놈은 달려들어 단도로 진한장이 눈을 도려냈다. 연변출신의 항일명장 진한장은 최후의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고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그이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전략전인 전이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진행된 일제의 대규모적이고 철저한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지 않으면 안되였다. 원유의 항일유격근거지가 몽땅 파괴되고 양정우, 진한장 등 우수한 지휘원과 용감한 전사들이 희생되였다. 3만여명이던 동북항일련군이 1941년에 이르러 2000명도 되나마나하게 남았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1000명도 채 안되였다. 적들은 1로군의 뿌리를 완전히 빼앗기 위해 끊임없은 “대소탕”작전을 벌리였다. 적들은 분산되였거나 흩어져있던 1로군 전사들을 수색체포하기 위하여 1로군 각 부대의 활동구역을 샅샅이 뒤지면서 엄격한 “반문(盤問)”과 “대검거”를 실시했다. 이른바 “반문”이란 행동이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온갖 악형을 다 가하면서 끝까지 따져묻는것이며 “대검거”란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호구와 거민증을 조사하는것인데 일단 조금이라도 거슬리는자를 발견하기만 하면 “불량분자”로 취급하여 체포했다. 1940년 11월, 위만간도성정부는 “동만공산당조직을 복멸”시키기 위해 “특수반”이라는 전문기구를 설립했다. 각 현의 특수반은 각 현의 경방대에서 지휘하고 관리했다. 아울러 정규적인 “토벌”과 배합하여 공산당조직을 파괴했는데 중점을 항일교통원과 지하공작자를 수색체포하는데 두었다. 1941년초에 이르러 형세는 급격히 악화되였다. 항일련군과 지방군중조직의 련계가 기본상 이루어질수 없게 되었으며 각 부대와의 련락도 철저히 두절되여 버려 병력집중 등 군사적행동을 더는 이룰수 없게 되었다. 량식, 복장 및 군수물자를 보충받을 원천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근거지가 없이 산간지대에 분산되여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전사들은 극히 곤난한 처경에 빠지고말았다. 거기에다 일부 나약한자들이 무치하게 변절하여 부대의 종적과 비밀을 적에게 고발하는바람에 항일련군은 더욱 큰 곤경을 당하군 했다. 그 간고성을 위증민이 1940년 11월 당중앙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가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위증민의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키잡이를 잃은 바다속의 작은 배마냥, 두눈을 실명당한 어린이마냥 우리는 어쩌할바를 모르고 동분서주할뿐이다. 동북항일련군의 앞에는 엄혹한 자연과의 투쟁, 무서운 병마와의 투쟁, 극심한 식량난과의 박투, 간악한 적들과의 치렬한 싸움이 하나로 뒤엉킨 모진 시련이 닥쳐왔다. 이러한 정세에서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려면 유격운동의 전략적책략을 개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0년 11월,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적들의 끈질긴 포위“토벌”을 떨쳐버린후 남은 병력을 인솔해 훈춘에서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들어갔다. 1940년 9월 29일, 1로군 경위려 려장 박덕범은 왕청현 천교령에서 일본“토벌”군의 특별공작반에 체포된후 변절, 하여 경위려의 주력이 기본상 와해되였다. 그중 일부가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들어갔다. 제3방면군 13퇀, 14퇀 일부는 최현, 안길의 인솔하에 훈춘, 왕청, 녕안, 동녕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봄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를 거쳐 쏘련국경지대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1941년 봄에 이르러 원 연변의 제2군출신 항일련군 생존부대는 일제의 악착한 “포위토벌”을 헤치고 기본상 쏘련국경지대인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부근에 이르게 되어 전략적인 전이임무를 완성, 항일혁명세력을 보존하게 되었다. 하바롭스크회의 1935년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6.3지시”정신에 의해 1936년 1월 9일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된후 동북에는 여태껏 당의 통일적인 지도기구가 없었다. 공산국제 중공대표단도 모스크바에 주재하고있었는지라 직접적으로 동북의 당조직과 항일무장활동을 령도할수 없었다. 1939년부터 동북항일 유격전쟁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의연히 중공중앙의 통일적인 령도를 받을수 없었다. 이에 위증민, 주보중, 풍중운 등 동북항일련군 지도자들은 편지를 쓰거나 사람을 파견 혹은 직접 쏘련으로 건너가 쏘련방면의 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상황보고를 전달했다. 1939년 9월, 중공북만성위 상무위원 풍중운은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여 쏘련원동 해방부문과 교섭, 쏘련방면의 협조로 북만, 길동 회의를 소집, 길동과 북만의 당조직을 통일하고 2로군, 3로군의 합병과 통일을 꾀하려 했다. 쏘련측에서 풍중운의 건의를 접수하고 정치, 조직, 군사상에서 동북항일련군을 방조하기로 했다. 이에 1940년 1월 24일부터 2월 5일까지 쏘련경내의 하바롭스크에서 중공길동성위와 북만성위대표련석회의가 소집되였다. 이 회의를 세칭 “제1차하바롭스크회의”라고 한다. 회의에는 중공길동성위 책임자이며 동북항련군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 북만성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풍중운, 항일련군 제3군 군장 조상지 등이 참가했다. 회의가 열릴 때 중공동만성위와 제1로군 군부가 이미 파괴되였기에 대표를 파견하지 못했다. 회의에서 동북항일유격전쟁의 겸험교훈을 총화한후 부대편제는 반드시 정세의 발전에 적응하여야 한다는 문제를 토론하고 “실력을 보존하고 점차 편제를 줄이여야 한다”는 회의방침에 근거하여 각 로군을 10개 지대로 줄이기로 하였다. 아울러 중공북만당조직, 중공길동당조직, 동북항일련군의 대표는 쏘련극동군정당국과 국제공산당의 도움밑에 항일련군은 쏘련의 일부 필요한 원조를 받지만 동북항일련군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반드시 견지하며 동북항일련군의 독립성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협의를 달성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의 항일유격운동과 중공당조직을 분리시킬데 관한 제안을 부결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항일구국운동에 관한 새로운 제강초안” 등 문건을 채택하였다. 1940년 여름, 독일이 서구라파를 병탄하자 일본은 아시아주와 태평양지구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급급해했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딸리아, 일본은 “3국동맹조약”을 체결했다. 파쏘들의 결맹은 쏘련으로 하여금 구라파와 원동변계를 수시로 침략당할 위험에 놓이게 했다. 쏘련당국은 원동의 국세에 특수한 관심을 보이면서 1940년 9월말, 동북항일련군 지도자들인 양정우, 위증민, 주보중, 조상지, 왕효명, 장수전, 풍중운, 시세영, 리청 등에게 통지를 발부하여 “금년 12월에 당과 유격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당조직과 목전의 유격운동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했다. 1로군에서는 양정우가 이미 희생되고 위증민이 중병으로 치료중이였기에 2방면군 지휘 김일성, 1로군 총부군의처장 서철, 3방면군 안길 등 3명이 동남만성위와 1로군의 정식대표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여 1940년 12월하순부터 1941년 1월상순까지 두 번째 하바롭스크회의 즉 만주전당대표대회가열리게 되었다. 회의에는 주보중, 최석천(최용건), 리청, 왕효명, 시세영, 김책, 김일성, 서철, 장수전(리조린), 풍중운 등 11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중공중앙의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정황하에서 동북항일련군의 조직편제에 관한 중요한 결의를 지었다. 동북항일투쟁을 통일적으로 령도하기 위하여 회의에서는 동북항일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주보중을 총사령으로, 장수전을 부총사령으로, 위증민을 정치위원으로 추천한다고 지적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주보중, 장수전, 최석천으로 동북당림시지도기구 즉 “3인단”을 조직했다. 이번 회의는 중공중앙과 련계를 맺으려고 하였지만 객관적원인으로 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총사령부를 건립할 문제가 제기되고 결의까지 지었지만 정황의 변화로 하여 그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의 각 항일부대가 쏘련경내로 철퇴해들어온 정황에서 소부대를 동북경내에 파견하여 유격활동을 전개할데 대한 중요한 결책을 내오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전국의 형세를 보다 정확하게 예견하고 장기적으로 투쟁을 벌릴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환경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공산당의 령도하에서 단결하여 항일련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최후의 승리를 안아올 때까지 항일을 견지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계속)
571    제65장 홍기하에서의 대승리 댓글:  조회:2161  추천:0  2014-02-19
홍기하전투유적지기념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일제"포위토벌"로 근거지 상실 제2방명군 홍기하에서 지혜롭게 마에다 부대를 전멸 두도류하회의 1939년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동북에 대량의 부대를 증파하여 잔폭한 “포위토벌”을 감행했다. 련속적이고 전면적인 진공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엄중한 손실을 받게 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악착한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항일련군과 군중들간의 련계가 단절되여 항일련군은 엄중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동남만의 항일투쟁형세는 날따라 악화되기 시작했다. 1939년 9월, 항일련군 제1로군 총부는 료령근거지를 포기하고 북으로 전이, 심산밀림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로써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유격근거지의 상실과 더불어 유격구역도 점차 축소되면서 항일련군 각 부대는 부득불 장백산지구의 높은 밀림지대를 전전하면서 간고한 환경속에서 전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긴급한 정세밑에서 양정우는 화전현 두도류하에 있는 항일련군밀영에서 1939년 10월 1일부터 5일까지 제1로군 주요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양정우, 위증민, 전광, 방진성, 서철, 한인화, 황해봉 등이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토벌”투쟁을 벌릴것인가 하는 책략문제를 놓고 세심히 토의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엄중한 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한후 실력을 보존하고 섬멸적타격을 받지 않기 위해 각 부대들을 소부대로 분산시켜 활동할 방침을 제정했다. 이 방침에 근거하여 각 부대의 반“토벌”활동구역과 전투임무를 획분했는데 제1방면군은 조아범의 지휘하에 몽강, 휘남, 금천, 림강 등 현의 린접지대에서 유격활동을 벌리며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 무송, 화전, 연변 일대에서 활동하고 제3방면군은 두갈래로 나누는데 한갈래는 위증민의 지휘하에 돈화, 화전, 길림지구에서 활동하며 다른 한갈래는 진한장의 지휘하에 녕안, 동녕, 교하, 오상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리면서 북만의 형제부대와 련계를 맺기로 했다. 양전우는 총사령부의 경위려와 1방면군 일부 부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각 부대와 배합작전을 하기로 했다. 제1차 두도류하회의후 각 부대는 기동령활한 소부대활동을 벌려 일제의 거점과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식량 등 긴요한 필수품을 해결했다. 근거지를 상실한 불리한 환경속에서 항일련군은 신출귀몰하면서 적을 주동적으로 타격, 자신의 력량을 지켜나갔다. 적들이 기재한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1939년 하반년에 항일련군 제1로군은 적들과 276차의 싸움을 벌렸는데 아군이 주동적으로 적을 습격한 차수는 177차였다. 양정우가 직접 지휘하는 사령부부대 400여명 전사들이 적들과 여러차례 접전하면서 제1차 두도류하회의정신을 각 부대에 전달하고있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원 양정우가 불행하게 전사한 것이다. 1940년 2월 23일, 35세의 나젊은 항일명장 양정우는 수백명이나 되는 적들과 혼자 남을 때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양정우의 희생은 1로군의 투쟁형세에 급작스러운 역전을 불러왔다. 적들은 “만주치안의 암”을 근치한다고 떠들어대면서 더욱 발광적인 “토벌”을 벌리였던 것이다. 이에 1로군의 중임을 한어깨에 떠메게 된 위증민은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다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주요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위증민, 전광, 서철, 한인화, 박덕범, 리명산, 진수명(사령부비서), 김광학(제1방면군 정치부 주임), 김백산(경위려 제3퇀 퇀장), 황해봉(경위려 제1퇀 정위), 김재범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지방당조직이 엄중히 파괴되고 지방군중사업이 박약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대내의 우수한 간부를 지방에 파견함으로써 각 계층가운데서 군중을 발동하고 반일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으며 련락원을 쏘련에 파견하여 중앙(국제당주재 중공대표)과 련계를 맺기로 하였다. 전광이 지방당사업을 전면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김재범 등 5명으로 구성된 연변지방사업위원회를 구성, 동남지구에 내려가 지방사업을 개척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장백산지구에서 장기적인 “토벌”을 받아 엄중한 손실을 본 정황에서 제1로군 주력부대를 장도선철도이북에로 진군시켜 목릉, 오상, 녕안, 왕청 등지에서 소부대의 분산유격활동을 하도록 결정했다. 그 외에 1로군 지도부를 새롭게 구성했다. 중공동남만성위 서기 위증민이 1로군의 총지휘르 맡았다. 전광이 동남만성위원회 겸 제1로군 지방사업부장, 군수처장을, 한인회가 성위위원 겸 제1로군 군부참모, 경위려 정위를, 서철이 성위 위원 겸 군의처 처장을, 김재범이 성위 후보위원으로 각각 임명되였다. 당시의 형세가 얼마나 참혹하고 위급했는가 하는 것은 위증민이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에 보낸 1940년 4월과 1940년 7월에 보낸 보고서만 보고도 알수 있을 것이다. 1940년 4월의 보고서에서 위증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대해속에서 키잡이를 잃은 작은 배같으며 두눈을 잃은 어린 아이 같다.” 7월 1일 보고에서는 “올해 아군의 식량 및 용품은 아주 결핍하다. 촌락과 작은 도시를 습격해서만 식량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모험을 무릅쓰고 촌락을 치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습격은 항상 예측할수 없는 부상과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 제2차 두도류하회의정신에 근거하여 1로군은 위증민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즉각 분산활동에 들어갔다. 한인회는 경위려를 이끌고 통화, 동만, 길림, 녕안 방면으로 나갔고 전광은 부대를 이끌고 남만으로 이동했다.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 림강, 안도, 화룡, 연길, 돈화 등지를 누볐다. 제3방면군은 진한장의 지휘하에 교하, 서란, 오상, 녕안 일대에서 움직였다. “토벌대”를 유인 올기강전투후 제2방면군은 1939년 11월, 돈화방면으로 원정하여 12월 17일에 마호부근의 륙과송을 습격하여 그곳을 지키고있던 살림경찰대를 소멸하고 부대를 확충하였다. 륙과송전투에서 7퇀 퇀장 오중흡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12월 24일에는 기신자에 가서 그곳 살림대를 들이쳐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1940년초, 제2방면군은 재차 안도현과 화룡현 접견지대로 진출하였는데 적들은 제2방면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화룡현 경찰“토벌”대대 및 마에다중대를 출동하여 추격하게 했다. 3월 11일, 2방면군은 안도현 대마록구 삼림경찰대를 돌연습격하여 적 10여명을 살사하고 현금 1만여원과 많은 총과 탄약, 식량을 로획하였다. 아군은 140여명 목재소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로획물을 메워가지고 감쪽같이 자리를 떠났다. 부대의 행방을 감추기 위해 일부 전사들에게 군수물자를 지고온 로동자들을 도로 데리고 다시 대마록구쪽으로 가면서 눈우에 발자국을 크게 내도록 하고 주력부대는 지나온 발자국을 지우면서 반대방향으로 떠났다. 화라즈에서 2.5킬로메터가량 떨어져있는 홍기하의 서북방향 대마록구상류인 735고지의 한 협곡에 이른 주력부대는 이번 전투의 승리를 경축하면서 충분하게 휴식하였다. 대마록구삼림경찰대가 습격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이 상투밑까지 치민 일제는 삼도구에 가미오까를 위수로 하는 전투사령소를 설치하고 마에다중대, 아까후리부대, 야마네중대 등을 동원하여 제2방면군을 추격하였다. 그런데 항일련군 발자국을 따라가던 토벌대는 발자국이 다시 대마루구쪽으로 간것을 보고 허둥지둥 대마록구로 가보았으나 항일련군은 그림자도 없었다. 련며칠 수색했으나 항일련군은 그림자도 찾지 못하게 되자 아까후리부대와 야마네중대는 돌아가고 마에다중대만이 계속 남아서 산속을 참빗질 했다. 한편 2방면군은 적들을 따돌린후 얼마동안 화라즈밀영에서 휴식하다가 3월 25일 다시 대마록구방향으로 진출하였다. 그때 아군의 숙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적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대마록구방향으로 가자면 그 길을 건너야 했다. 아군은 발자국을 알아볼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 길우에 가로놓여있는 진대나무를 타고 길을 건넌후 눈속을 내처 걸었다. 부대가 지나간 다음 두 전사가 뒤에 떨어져서 눈우에 난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이때 농민차림의 두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알고보니 그들은 일본군에게 붙잡혀갔던 당지농민들이였다. 두 농민은 화라즈골짜기에 적“토벌대”가 170여명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정안군 300여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정보를 접한 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추격해오는 적들을 홍기하골짜기에서 소멸하기로 작전을 짰다. 3월이라 하지만 장백산고산지대는 아직까지도 적설이 허리를 치고있었다. 이는 적아쌍방의 행동에 다 지장을 주었다. 그런데 적들의 행군속도가 아군보다 더 빨랐다. 아군이 앞에서 생눈길을 내면 적들은 그뒤를 졸졸 따라왔기 때문이다 하여 적아의 거리가 5~7.5킬로메터 정도로 좁아졌다. 홍기하상류의 대마록구하는 여러갈래의 골물로 되여있었다. 그 한골에 이르니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을 푹 쉬우지 않고는 싸울수 없다고 생각한 지휘부에서는 목재소로동자들이 사용하다가 버리고간 헌집에 들어가 푹 쉬라고 지시했다. 적들의 코앞에서 시름놓고 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지만 전장에서 단련된 전사들은 배낭을 벗자마자 코를 골았다. 다음날, 행군길에 나선 아군은 소마록구쪽으로 릉선을 타고 나가다가 골짜기로 떨어졌다. 그때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7권)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 골짜기 량옆의 산들이 묘하게 생겼습니다. 상류를 향해서 오른쪽에는 3형제같이 생긴 3개의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매복진지로는 명당자리였습니다. 골짜기왼쪽에도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그 봉우리기슭에 자그마한 수림이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지물이였습니다. 나는 지휘관모임을 열고 간단한 전투조직을 했습니다. 골짜기오른켠에 있는 3개 봉우리에는 기관총소대와 경위중대를 배치하고 왼켠 봉우리의 변두리에는 7련대와 8련대를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되 각 부대들은 일부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고지로 올라오는 발자국을 메우면서 제가끔 지정된 장소에 매복하고 유인대는 발자국을 크게 내면서 계속 골짜기의 첫 고지 북쪽을 차지하고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습니다. 유인대는 골짜기끝에까지 가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갑자기 따스해졌기 때문에 양지쪽에서는 눈이 녹아 길이 질척질척했다. 2방면군 전사들은 눈속에 몸을 숨기고 적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오도 지나고 해가 퍼그나 기울어진 때에야 적이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것은 10명 가까이 되는 적척후병이였다. 놈들은 눈우에 난 발자국을 따라 두리벙기리면서 매복권안으로 기여들기 시작했다. 척후병들의 뒤로는 첨병들이 나타났다. 첨병들이 마지막 고지의 앞을 지나갈 때 군도를 찬 장교가 골짜기에 들어섰다. “토벌”대장 마에다였다. “토벌”대의 앞머리가 매복권안에 깊숙이 들어서고있었다. 마에다는 걸음을 멈추고 눈우에 찍힌 발자국과 골짜기의 묘한 지형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나는 그가 골짜기우에 척후대를 파견하거나 부대를 뒤로 뽑을 궁리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0여일이나 산악지대를 돌아치며 허탕만 치는통에 지칠대로 지친 마에다는 랭철하게 사고하고 판단해야 할 그 운명적인 시각에 탕개를 늦추고 방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에다가 독립수밑에 서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부하장교들이 그 옆에 모여들었습니다. 마에다는 군도를 짚고 서서 그들에게 무슨 지시를 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적의 기본대오는 전부 매복권안에 들어섰습니다.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격신호를 내렸습니다... 김일성회고록에서의 묘사이다. 일제 “귀신 곡할 작간”이라 한탄 김일성의 사격명령과 함께 산천을 들었다놓는 총소리가 산곡간에 울려퍼졌다. 아군은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기관총이 불을 토했고 수류탄이 류성마냥 적들속으로 날아갔다. 마에다는 당장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뻐뜨려졌다. 불의의 날벼락을 맞은 적들은 갈팡질팡 헤매기만 하다가 순식간에 절반의 병력을 잃고말았다. “토벌대”부대장 이즈미는 급급히 대오를 수숩해가지고 북쪽고지에 있는 아군을 향해 돌격하려 하였다. 이때 맞은켠 산밑 수림속에 매복해있던 아군이 놈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다. 맹렬한 교차사격은 놈들 진영을 대뜸 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아남은 놈들은 숨을 곳을 찾느라고 허우적거렸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아군의 돌격나팔소리가 대마록구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아군전사들은 매복지점에서 번개마냥 뛰쳐나와 함성을 지르면서 놈들을 향해 육박해내려갔다.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놈들도 그만 질겁하여 두손을 쳐들고 기여나왔다. 전사들은 항복하는 놈들의 무기를 해제하였다. 전투는 2방면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아군은 마에다중대장이하 100여명을 격사하고 30여명을 포로했다. 그리고 기관총 5정, 보총 87자루, 권총 12자루, 무전기 1대, 탄알 수만발을 로획했다. 이날 3킬로메터쯤 거리를 두고 마에다부대의 뒤를 따라오던 정안군 300여명은 왜놈들이 녹아나는 것을 눈을 펀히 뜨고보면서도 감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눈먼 총질만 해대고있었다. 아군이 로획한 5정의 기관총으로 정안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퍼붓자 놈들은 어둠을 타 내꼴봐라 도망치고 말았다. 홍기하전투를 두고 일제의 경찰잡지는 “어떻게 된노릇인가. 토벌에 있어서는 천군만마의 오랜 강자인 마에다대장, 이러한 술책에 빠져본적이 없는 토벌의 왕자인 마에다대장이 뜻하지 않게도 이런 궁지에 빠져들어간데 대하여 이러저러한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요컨대 흔히 말하는 귀신의 작간이라 할 수밖에 다른 말을 찾아낼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력사학자 김철수씨는 홍기하전투유적지를 답사하던중 1982년 4월, 홍기하전투가 일어난 곳에 일제시대에 세운 돌비석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폭발해버렸다는 것을 한 림산작업일군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하여 폭파해버렸다는 비석파편을 찾으려고 현장에가 풀밭을 샅샅이 뒤져 끝내 비석쪼각 3개를 발견했다. 그것을 맞추어놓으니 한 쪼각이 비록 모자라기는 했지만 새겨진 글은 모두 있었다. 거기에는 “마에다중대격전지지(前田中隊激戰之地)”라고 새겨져있었다. 이전에는 홍기하전투적지를 찾으려면 도보로 갔지만 지금은 차가 통할수 있는 림산도로가 닦아져있다. 또 지난 한시기에는 “마에다중대격전지지”비석을 세웠던 자리에 널판자로 “홍기하전적지”라고 쓰여진 나무패말이 스산하게 세워졌지만 지금은 “홍기하전투유적지”라고 번 듯이 새겨진 대리석비석이 보기 좋게 세워졌다. 비석뒤면에는 이런 글이 조한문자로 새겨져있다. 1940년 3월 25일, 김일성장군은 이곳에서 항일무장부대를 지휘하여 유인매복전으로 일위“마에다경찰토벌대”를 소멸하였다. 화룡현인민정부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세움 홍기하전투에서 승전고를 올린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안도현의 처창즈, 돈화현의 소하발령과 훈춘현경내에 진출하여 계속 적들의 “포위토벌”을 격파함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항일련군의 위력을 과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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