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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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    [동시]나무의 등(추필숙) 댓글:  조회:2144  추천:0  2015-03-10
동시 나무의 등   추필숙   나무는 등이 없다지만   등 뒤에 숨길 것도 없다지만   아이들은 알지 숨바꼭질해 보면 알지   나무가 내민 등 그 뒤에 숨어보면 알지
689    [동시]빨간 신호등이 한 알(추필숙) 댓글:  조회:2088  추천:0  2015-03-10
동시 빨간 신호등이 한 일   추필숙   뚝,   길을 끊었다   뚝,   길을 붙였다   그 애가 건너편에 서 있다
688    [동시]나뭇가지(추필숙) 댓글:  조회:2315  추천:0  2015-03-10
동시 나뭇가지   추필숙   길 잃어버릴까, 걱정 없는 골목길이지.   애벌레한테는…   꽃 피고 잎 지는 산책길이지   애벌레한테는…
687    [동시]환한 집(신복순) 댓글:  조회:2024  추천:0  2015-03-10
동시 환한 집   신복순   이빠진 그릇에 흙을 담고 채송화를 심었다.   반찬만 담던 오목한 그릇이   꽃이 사는 집이 되었다.   어느 날 그 집에서   귀여운 씨앗이 새로 태어났다
686    제89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1 댓글:  조회:2291  추천:1  2015-03-01
  \ 광복을 맞아 새 학교에 등교하는 연길시의 조선족학생들. 낡은 교육제도 개혁 민족언어문자로 교수 중국조선민족의 최고학부 연변대학 창설 “8.15”해방은 연변조선민족앞에 일제침략자에게 빼앗겼던 자기의 말과 글로써 교육을 발전시킬 광활한 전망을 펼쳐주었다. 예로부터 자식공부를 위해서는 소까지 팔아 뒤를 대준다는 우리 민족이였다. 일제에게 글과 말을 빼앗기고 황민교육을 접수하지 않으면 안되였을 때 민족의 지성인들은 얼마나 가슴치며 통탄했던가. 그러나 이젠 글과 말을 되찾게 되였다. 민족의 유지인사들은 인차 손을 쓰기 시작했다. 유지인사들의 노력과 알선으로 교원들을 모셔오고 교사를 마련하여 소학교, 중학교를 세웠다. 이런 거동은 타성적이며 자발적인 상태에 머물러있었지만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만은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 1946년9월, 동북행정위원회에서는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은 전개할데 관한 지시”에서 동북해방구 교육사업의 총적인 방침은 “일제강점시기의 노예교육과 장개석의 봉건적, 파쑈적 교육의 여독과 영향을 일층 숙청하며 민족적이고 민주적이며 대중적이고 과학적인 신민주주의교육을 확립하여 교육으로 하여금 신민주주의 정치적투쟁을 위하여 복무하게 해야 하며 동북인민들의 평화민주건설을 위하여 복무하게 해야 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동북지구에서의 우리민족 교육사업의 방향을 명시하였다. 그후 동북정무위원회에서는 건국전야에 이르기까지 4차에 걸쳐 동북해방구교육사업회의를 소집했고 “사립학교잠정방법”, ”중등교육에 대한 지시” 등 문건을 발부하였다. 하여 우리 민족의 교육사업은 생기있고 건전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민족언어문자로 교수하는 제도 확립 1945년 9월, 최문호, 김유훈 등이 주최하는 “교육동맹”이 연길에서 결성되였다. 이들은 일제시기에 학교를 접수하고 원래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초빙하여 연길시사법학교, 연길중학교, 공업학교, 광성중학교, 고려녀자중학교와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룡정에서는 장남섭, 주채와, 림룡호 등이 주최하는 “교육동맹”이 조직되였는데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영신중학교, 은진중학교, 근화녀자중학교, 명신녀자중학교 등 중학교 및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도문에서는 심인갑, 강상락 등 지식인들이 주최하는 “교육조사회”가 조직되였는데 이들은 괴뢰만주시기의 학교를 접수하고 중소학교를 운영하였다. 조양천에서도 민주대동맹이 주최하는 “교육후원회”가 조직되였는데 이들에 의하여 중소학교가 운영되였다. 해방전쟁시기의 해방구교육은 신민주주의 교육으로서 신민주주의 정치와 경제를 위하여 복무하였으며 해방전쟁과 해방구경제건설이 수요하는 혁명간부를 양성하고 인민군중의 계급각성과 문화수준을 제고하는것을 자체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부교육은 군중교육보다 더 중요하며 성인교육은 아동교육보다 더 중요하다”, ”중등교육의 비중은 마땅히 사범교육을 제1위에 놓고 직업교육을 제2위에 놓으며 보통중학교 교육을 그 다음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학교운영방침을 제기하여 여러 류형의 간부학교와 단기강습반을 많이 운영하였다. 이것은 해방전쟁, 토지개혁, 정권건설에 시급히 수요되는 간부를 많이 양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정책이였다. 해방전쟁시기에 물력, 인력의 제한으로 정부에서는 많은 학교를 건립하고 운영할수 없어 “인민들이 동원되여 자체로 학교를 운영하며 정부에서 방조”하는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학교교육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확한 시책이였다. 그리고 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의 실제적인 수요에 적응하기 위하여 학제, 과정 및 운영방법에서 여러가지 형식을 취하였다. 해방후 조선민족은 자기의 언어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과 권리를 가지게 되였다. 이에 따라 연변에서는 자기 민족의 언어문자로 교수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것은 민족언어문자사용에서의 평등을 보장하는 공산당의 정책이 학교교육에서의 구현으로서 조선민족의 문화교육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여주었다. 1945년 11월 1일, 간도림시정부에서는 일제강점시기의 간도사범학교를 접수하고 개조하여 연길사범학교로 고쳤다. 1946년 8월 26일, 길림성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사범학교는 길림성민주학원 교육학부로 되였다가 1948년 3월 급속히 발전하는 학교교육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연변고급사범학교로 고쳐졌다. 이 학교에는 중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고급사범학급이 설치되여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창건전까지 1230면(중학교 교원 330여명, 소학교 교원 900명)에 달하는 교원을 양성하여 자기 민족 교원대오를 형성시켜주었다. 낡은 교육사상을 개조 학교의 학생성분도 큰 변화가 생겼는바 80%이상 학생이 로동자, 농민 가정출신이였는데 사범학교 학생과 농민간부반의 학생은 국가의 경비로 학습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빈부의 차이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육불평등의 력사를 종말짓기 되였다. 반면 지식인들에게 존재하는 노예사상, 봉건사상, 전통적관념은 신민주주의교육의 발전을 엄중히 저애하고있었다. 하여 당과 정부에서는 그들의 낡은 교육사상을 개조하고 로농병과 결합하고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도록 이끌어주었다. 한편 학생들에게도 정치사상교양을 적극 진행하였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7월까지 연변지구에서는 중학교지도일군과 골간교원강습반을 설치하고 “신민주주의론”, “형세와 임무”, “중국근대사”,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 “로해방구교육”,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을 전개할데 관한 동북행정위원회의 지시” 등의 모택동저작과 교육문건을 학습하면서 사상개조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번 운동을 통하여 교원들은 정치인식을 통일하고 토지개혁을 옹호하며 로농병속에 들어가 로농병을 위해 복무한다는 사상과 관점을 수립하게 되였다. 1946년 9월, 중소학교교과서를 편집하고 심사하는 연변교육연구회가 결성되였다. 10월 13일에는 연길시 각 문학단체대표 40여명이 모여 “연길한글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1월 26일에는 “연길조선문교재편집위원회”가 창립되였는데 주임에 리호원, 부주임에 림민호가 당선되였다. 1947년 3월 드디여 교육출판사가 창립되여 조선문교과서를 정식 출판할수있게 되였다. 해방초기에 교과서는 연변 각 학교에서 자체로 편찬하다보니 통일된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토지개혁과 계급투쟁을 반영한 글들을 많이 선택한 교과서가 처음으로 출판되자 각 학교에서는 그것을 통일적인 교과서로 사용하였으며 조선의 박상중이 쓴 초급중학교용 “조선어문법”을 보충교과서로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소학교의 한글, 상식, 산수, 자연 등 교과서와 중학교의 한글교과서가 출판되였다. 이해에 50만책의 교과서를 출판하여 남만을 제외한 전 동북 조선인 중소학교에 공급하였다. 1948년 6월 12일, 길림성교육청에서는 학교교육에서 문화지식과목을 위주로 가르쳐야 한다는 방침을 제기하였다. 고급인재 양성 위해 1949년 4월 1일에 창립된 연변대학. 연변에 공립중학교가 9개소, 민영중학교가 19개소(그중 고중학급을 설립한 학교가 3개소, 고중을 증설한 학교가 2개소)가 있었는데 교원은 409명, 학생은 1만813명이나 되였다. 학생들의 사상의식은 뚜렷이 높았으나 문화지식수준은 매우 낮았다. 하여 학생들에 대한 정치사상교육을 강화하면서 문화지식전수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과업을 제기하엿다. 학교들에서는 이 과업을 실현하기 새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동북국에서 배치한 일반중학교의 각 과목이 차지하는 비례는 문화지식과목 90%, 정치과목 10%, 사범학교는 문화지식과목 70~75%, 정치과목 10%, 실무과목 15~20%였다. 학과목의 성격과 목적에 대해 처음으로 통일적인 요구를 제기한것이였다. 조선인중학생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주는것이 또 하나의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1948년 3월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의 소학생은 도합 18만 7236명이였고 졸업생은 3638명이였으며 다음해에는 졸업생이 5645명으로 늘어나게 될 형편이였다. 그러나 연변적으로 고중생을 400명좌우 밖에 모집하지 않았다. 이러한 형편에서 1950년 3월, 룡정에 연변고급중학교를 설립하고 각 현 중학교의 고중학급을 연변고급중학교에 귀속시켰다. 연변의 749개 농촌마을에 13만 700여호 농가가 있었는데 매개 마을에 중학생이 평균 15명있었다. 이것은 매12호에 1명 중학생이 있은셈이다. 연변 80만 인구가운데서 학생이 1.4%를 차지하였다. 일제 강점시기에 비하면 학교는 150개소, 학급은 660개, 학생은 1만500명, 교원과 직원은 761명이 더 늘어났다. 길림성에 중학교가 도합 41개소가 있었는데 연변에 26개소가 있었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민족 앞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부문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되는 전문인재, 고급인재들을 양성하여야 할 력사적과업이 나섰다. 1945년 9월, 룡정에 룡정의과대학이 창립되엿고 1945년말에는 길동군정대학이 창설되였다. 1946년 9월에는 연길에 길림성립민주학원이 건립되였고 1948년 4월에는 연변정치간부학교가 건립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길에 드디여 우리 나라에서 첫 소수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창립되였다.(계속)
685    제88장 농민들 호조합작의 길로 댓글:  조회:2467  추천:0  2015-02-10
         리옥금 국빈회에서 "도라지" 부르고 김시룡 세전벌서 "호조조" 성공시켜 리옥금과 "품앗이조" 토지개혁이후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조선족농민들은 당과 인민정부의 호소를 적극 받들고 호조합작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렬사가족, 군인가족들이 농업전선에서 앞장서 나섰다. 혁명렬사가족 리옥금이 조직한 품앗이조와 호조조가 그 일례라고 할수 있다. 리옥금은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태생(1922)이다. 8살때부터 지주집에서 일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 리옥금은 15살 때 조선 함경북도 덕산지역에서 오빠를 도와 유격대에 정보를 나르고 밥도 지어날랐다. 그러던 어느날 큰할아버지의 밀고로 탄로가 나 더는 유격대를 도와 일할수 없게 되자 조선을 떠나 연길현 조양천 태평구에 있는 오빠네 집으로 왔다. 그후 얼마 안되여 리옥금은 림지룡에게 시집을 갔다. 1942년 ?졈鳧?연길시 흥안향 소대려촌에 이사해왔다. 1945년 9월, 리옥금은 농회부주임으로 되었다. 남편을 입대시킨 리옥금은 어린 시동생, 시누이 넷을 보살피면서 가사와 농사일, 사회사업에 바삐 보냈다. 리옥금의 모범적행동에 영향을 받아온 마을의 청장년중 80%가 참군하였다. 끌끌한 남자들이 다 참군하다보니 늙은이와 어린이들밖에 남지 않아 이듬해 밭갈이를 할 사람이 적었다. 그때 리옥금은 호리를 세 번이나 마스면서도 끝내 밭갈이재간을 익혔고 자기 집은 논 3무 2푼을 갈아번진외에 십여호 군인가족녀성들을 조직하여 품앗이조를 무어 밭을 갈아번지였다. 연변에서는 “호조합작”문제를 비교적 일찍 제기하였다. 1946년 2월중순, 연변전원공서 부전원이였던 동곤일은 각 현의 현장, 건설과장 회의를 열고 “연변농업생산의 총화”라는 보고를 통하여 “호조조”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보고에서 생산호조조를 통하여 소농경제의 약점을 극복할수 있으므로 그 조직구성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자원적결합”과 “등가교환”의 원칙을 잘 관철한다면 그렇게 어려운것도 아니라고 제기했다. 조선족들은 과거 공동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두레”를 무은적이 있었다. 이런 옛 생산형식은 “호조조”를 꾸리기 위한 좋은 바탕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리옥금은 품앗이조를 무어 일하던데로부터 앞장서 호조조를 조직해 그해 농사를 녀성의 힘으로 지었고 잘 여문 낟알을 나라에 바쳐 전선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리옥금은 연길시로력모범대회에 참가하여 표창을 받았다. 1947년 리옥금은 생산, 전선지원렬사가족모범으로 선거되여 길림성로력모범회의에 참가하였고 1948년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옥금이 조직한 호조조의 영향을 받고 전현의 호조조도 매우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1948년 10월, 지구로력모범대회에서 리옥금은 암소 한 마리를 상으로 받았다. 그해 겨울 리옥금은 영광스럽게 전국 제1차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 1월에는 아세아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때를 리옥금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조선족을 대표하여 전국 제1차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갔습니다. 당시 당중앙은 서백파에서 북경으로 오고있는중이였지요. 저는 영광스럽게 모주석의 마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멎자 중앙지도자 8명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주석께서도 내리시였지요. 어찌나 격동되였는지 감히 주석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석께서 저의 앞을 지나간후에야 뒤모습을 보았는데 팔각모자를 쓰셨더군요. 그렇게 웅장하셨습니다. 제가 회의에 올 때 동네분들이 환송하며 모주석의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하던 부탁이 떠오르자 정말 속상했습니다. 그날 저녁 북경에 돌아온후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모주석을 다 뵈였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이틀이 지난후 전체회의가 시작되였는데 저는 주석단성원으로 되었지요. 회의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주석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주석께서는 회의장에 오시여 저의 앞줄 오른켠에 앉아계셨지요. 당시 그이의 뒤모습만 봤을뿐입니다. 후에 만찬회가 있었는데 주석께서 또 오시였지요. 저는 모주석과 한좌석에 배치되였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모주석의 얼굴을 보았으며 격동된 나머지 그이의 허리를 꼭 그러안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만찬이 끝나고 오락회가 시작되였지요. 주석께서는 저더러 노래를 부르라는것이였지요. 제가 금방 배운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는 노래를 부르자 주석께서는 저를 보고 ‘도라지’를 부르라는것이였습니다. 뒤이어 저는 노래도 부르고 조선춤도 추었습니다.(서봉학, 리광수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에서) 1949년부터 각급 당조직에서는 호조합작운동을 당의 중심사업으로 삼고 “생산대에 참가하여 생산을 지도”할 것을 전체 당원들에게 호소하였으며 자원적이며 쌍방이 다 리로와야 한다는 원칙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해 봄에 연변지구에는 2만 3799개 호조조가 조직되였는데 80%의 로력과 축력이 호조조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매기철에 먼저 매고 후에 매는 모순 때문에 53%를 차지하는 1만 2593개 호조조가 무너졌다. 년말까지 남아있는 년간호조조가 1만 490개로서 32%를 차지했다. 실패한 영성촌의 "대형호조조" “호조조”를 조직하라는 소식은 세전이벌에 자리잡고있는 연길현 동성용향 영성촌에도 전하여왔다. 이 마을에서는 처음에는 두서넛집씩 모여 소겨리조, 품앗이조 등 계절호조조를 조직하여 농사를 지었다. 영성촌에서 “호조조”를 정식으로 꾸린 것은 1947년 여름이였다. 그때 이곳에서는 토지를 분여하면서 전 마을을 한데 합하여 한 개 “호조조”를 무었다. 호조합작의 경험이 없는 형편에서 대번에 큰 조를 뭇고보니 모순이 련속부절하게 나타났다. 로력랑비가 많았고 아무 때나 일밭으로 나가기만 하면 한 개 공씩 적어넣었다. 뿐만아니라 로력공수평가가 합리하지 않고 과학적이 못되여 생산적극성이 영향을 주었으며 생산력발전에 커다란 장애로 되었다. 게다가 토지개혁의 대중적운동의 거센 조류속에서 조직하다보니 적지 않은 농민들이 “호조조”에 들지 않으면 법을 위반하는것이라고 여기기까지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비판이거나 투쟁을 받을가 겁나 억지로 참가하였다. 그해 가을 중농이상 농호 일곱집이 먼저 “호조조”에서 물러나가자 억지로 참가하여던 농민들과 로력, 부림짐승이 넉넉한 집들은 슬금슬금 “호조조”에서 나갔다. 영성에서 처음 조직한 “호조조”는 이렇게 유아무야해지고 말았다. “호조조”가 건립될 때 선참 참가하였던 김시룡은 당의 호소대로 끝까지 합작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으나 “호조조”가 무너지고보니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당은 가난한 농민에게 땅을 주었다. 김시룡은 당의 은혜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생활의 체험에서 당의 말을 들으면 틀림없다는 신념을 지녔다. 그는 호조합작을 실시하라는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불바다라도 뛰여들어가려는 심정이였으나 랭혹한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도에 밀린 모래처럼 산산이 흩어진 “호조조”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난 김시룡은 그 일로 고민에 빠지기까지 했다. 1948년 봄, “대형호조조”를 강제적으로 조직하여 실패한 경험교훈을 찾고 이번에는 자원호혜의 원칙을 관철하여 “소형호조조”를 조직하였다. 영성에서는 서로 뜻이 맞고 감정이 맞는 농민들이 네댓 혹은 대여섯씩 한 개 조를 무어 전촌을 여섯 개 “호조조”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촌농회의 간부들은 회의가 많아 밭일에 참가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으므로 농민들은 간부들과 함께 조직하기를 싫어했다.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자원호혜의 원칙에 좇아 “간부조”라는 특별한 “호조조”를 따로 내왔다. 여섯 개 “호조조”가운데서 갑자기 김장룡호조조가 조원 한사람이 병사하는바람에 로력이 결핍하여 흩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김시룡은 자원적으로 “김장룡호조조”로 넘어갔다. 김시룡은 조장을 도와 “호조조”를 잘 꾸려나갔다. 김시룡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로력이 늘 딸린다던 이 “호조조”는 개체농호보다 1주일 앞당겨 타작을 끝마쳤다. 성공한 "김시룡호조조" 1949년 봄, 영성의 여섯 개 소형호조조는 또 다시 대형호조조로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감농군이고 살림꾼이며 진국인 김시룡을 조장으로 선거하였다. 큰살림을 한몸에 떠멘 김시룡은 조원들의 앞장에 서서 밭일에 참가하였으며 제일 일찍 밭에 나갔다가 제일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김시룡은 경영관리사업에 힘을 기울여 존재한 모순을 찾았다. 군중들은 시끄러운 밭머리평공, 비오기전후의 김매기, 후치질에서의 로동차이, 로동강도, 불합리한 등가교환 등 18가지 모순을 폭로하였다. 이에 김시룡은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책을 창조적으로 제기하였다. 우선 표준공을 정하였다. 토질이 좋은가 나쁜가, 어떤 곡식을 심는가, 마을에서 밭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등을 고려하여 조원들의 민주적인 평의를 거쳐 봄부터 가을까지 소요되는 총공수를 정하였는데 이것을 표준공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한 현상이 시정될수 있었다. 다음 합작자금을 설치하였다. 담배농사, 양기르기 등 비교적 많은 로력과 자금이 소요되는 농업과 부업은 개인으로 경영하기 힘들었다. “호조조”에는 로력은 남아있으나 자금이 없었다. 이런 실정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부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조원들에게서 받아들인 자금을 합작자금이라고 하였다. 분배때에는 합작자금 역시 로력과 같은 역할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로력기준량을 정하였다. 조원들의 숙련정도, 신체상황, 같지 않은 로동에 따라 로력기준량을 정하였다. 세전이벌은 본디 땅이 기름졌다. 그런데 해방전에는 지주의 착취로 말미암아 땅을 잘 가꾸지 않아 한전의 평균수확고는 겨우 쌍당 1000킬로그람좌우였고 수전은 2150킬로그람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김시룡호조조”는 가난한 조선족농민 23세대로 조직되였는데 총인구 117명 가운데서 남자로력 20명, 녀성로동력 26명이였다. 가축으로는 소 16마리에 소수레 12대였으며 그 외에 말 한 마리와 노새 한 마리는 호조조의 연자방아간에 두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토지는 한전 26헥타르 6무 5푼, 수전 13헥타르 9무 6푼인데 합치면 40헥타르 6무 1푼이였다. 그러니 인당 3무 3푼 돌아가는셈이였다. 기시룡은 춘경때 남아돌아가는 로동력을 조직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한전 1쌍과 수전 8무를 확대하였다. 하지만 농토는 적고 로력과 축력이 남아돌아가는 모순을 의연히 해결되지 않았다. 김시룡은 세심히 따져보았다. 아무리 심경세작하더라도 한 개 로력이 한전 2.5헥타르거나 혹은 수전 1.5헥타르를 다룰수 있으니 수, 한전을 평균 잡으면 한로력이 2헥타르를 다룰수 있다. 그렇다면 40헥타르의 땅을 다루는데 남자로력 20명이면 족하다. 한 마리 소로 평균 3.5헥타르의 땅을 개간할수 있으니 12마리면 넉넉하다. 그러니 소 4마리나 남는셈이다. 남아돌아가는 로력과 축력을 합리하게 리용하여야 했다. 한해 농사를 지으면 인당 알곡 465킬로그람밖에 안돌아간다. 이것으로 공량을 20%로 바치고 식량, 종자, 사료를 남겨놓는다면 의복을 지어입을 돈이 생길 구멍이 없다. 그러니 알곡생산만으로는 살림 펴일수 없었다. 이에 김시룡은 우선 땅을 잘 가꾸었다. 농토의 시비면적을 80%로 증가하고 40%의 밭을 네벌 김매고 네 번 후치였으며 그 외 밭은 세벌 김매고 세 번 후치였다. 하여 헥타르당 수확고를 2612.5킬로그람으로 올려 전해보다 64%로 증산하였으며 개체호보다 헥타르당 105킬로그람 증산하였다. 1헥타르 8무의 개간지에서도 적지 않은 수확고를 높이였으며 1헥타르 1무의 한전을 수전으로 개답하여 수확고를 높이기도 했다. 그밖에 담배농사를 하여 수입을 올렸다. 김시룡은 또 조원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여유로력을 조직하여 닭, 오리, 돼지, 양 등을 사양하였으며 여자들을 조직하여 약재를 캐게 하였는데 부업으로 업은 수입은 5만여킬로그람의 식량가치에 해당되였다. 농업과 부업으로 얻은 수입으로 의식의 해결이 문제없이 되었으며 생활을 일정한 정도로 개선할수 있었다. 김시룡은 공부하지 못하여 일자무식이였으나 늘 목책을 챙겨갖고 다녔는데 목책에 여러 가지 부로들이 가득 적혀있었다. 누구나 그 기호를 알아볼수 없었으나 김시룡은 그 목책을 펼쳐보기만 하면 “호조조”의 실정을 손금보듯 환히 꿰뚫고있었다. 개체로 경작할 때보다 수입이 증가되니 “호조조”내부에서 동요하던 조원들은 장기타산을 갖게 되었으며 “호조합작”이라면 외면하던 개체호들은 호조조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은 연길현의 계선을 넘어 전 연변에 소개되였다. 경영관리사업이 따라가지 못하여 해산될 위험이 있던 적지 않은 “호조조”들은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을 학습하고 새로운 기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49년, “김시룡호조조”는 연길현로력모범대회에서 1등“모범호조조”로 당선되였다. 1950년, 김시룡은 길림성특등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의 영예를 지니고 북경에 가 국경 첫돌기념모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모스크바를 방문, 쓰딸린의 접견을 받았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제1기로부터 제3기에 이르는 기간 줄곧 대표로 당선되였고 또한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김시룡은 1951년에 연변농학원과 손잡고 새벽농업대학을 창설하여 농업로동에 참가하고있는 농민들로 하여금 농업과학기술을 습득케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첫 초급농업사 1951년 3월,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근거하여 토지출자를 특점으로한 초급농업사를 시험적으로 건립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전국로력모범 김시룡호조조에 공작조를 파견하여 경험적으로 해보게 하였다. 여러차례의 토론 끝에 22호 조원중 6호는 계속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에 남아있고 부유농민 송병관은 아예 혼자하겠다면서 나가고 15호가 초급농업사에 가입하였다.이것은 연변지구에서 건립된 첫 초급농업사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는 건립한 첫해에 증산하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의 수전 헥타르당 수확고가 3865킬로그람인데 비하여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의 수확고는 3800킬로그람이였고 혼자한 송병관의 수확고는 3234.5킬로그람이였다. 혼자하는 것이 호조조보다 못하고 호조조는 농업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준셈이였다. 1952년 1월초, 동북인민정부 판공청 주임 왕광위는 공작조를 데리고와서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조사한후 보고를 썼다. 당시 동북인민정부 주석이던 고강은 이 보고를 비준, 이첩하면서 각급 지도간부들에게 김시룡농업사의 경험을 연구하라고 호소함과 동시에 동북3성의 성보는 이 보고를 실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로부터 농업생산합작사란 이 새사물이 농촌경제생활의 중심으로 되었다.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94개의 초급농업사를 세울 것을 계획했다. 그런데 이해 봄에 각지에서는 자발적으로 농업사를 세우는 고조가 일어나 190개의 초급사가 새로 건립되였다. 왕청현에서는 민족련합사도 건립되였다. 농업사가 급격히 증가된 새로운 정세에 비추어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농업생산호조합작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의”(초안)를 진지하게 관철하였다. 특히 이 “결의”에 명사된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온당하게 전진”하는 방침을 진지하게 관철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중견력량, 호조경험, 대중토대 등 조건에 근거하여 농업사를 정돈 공고히 할 것을 제시하였다. 연변지구에는 비준을 거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농업사가 60개나 되었다. 현에서 그들더러 호조조로 고치라고 해도 그들은 듣지 않고 그냥 농업사를 꾸려나갔다. 당시 이런 농업사를 “검은 사”라고 하였다. 이런 “검은 사”도 후에는 다 자기궤도에 올라 공고히 되었다.  
684    제87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전장으로.4 댓글:  조회:3133  추천:0  2014-12-31
해남도전역에 참가하러 떠나는 40군 포병영의 조선인전사들(1950년 4월 16일 뢰주반도에서) 해남도서 대나무배로 미국현대화군함 격퇴 정주서 조선인으로 무어진 독립 15사 편성 조선인포병영 1949년 12월, 광동성과 광서성이 해방되자 대륙은 기본적으로 해방되였다. 광동성과 광서성의 국민당잔여부대는 꼬리빳빳이 해남도로 도망쳐갔다. 장개석은 설악을 해남도방위총사령으로 임명하고 해남도에 19개 보병사, 핸군 제3함대 50여척의 군함, 공군 4개 대대에 30여대의 비행기까지 배치해 “해, 륙, 공 립체방어체계”를 형성, 총병력은 10만명이였다. 국민당군은 매일같이 비행기와 군함으로 연해도시를 포격하였으며 해남도에 있는 경애종대에 대하여 토벌을 감행하면서 해남도는 “깨뜨릴수 없는 성새”라고 떠들어댔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사령부는 제40군과 제43군에 해남도공격을 명령했다. 40군에는 소문난 조선인포병영이 있었는데 이번에 명령을 받고 사단직속포병영으로 재편성되였다. 그들은 몇문의 포를 가지고 료심전역, 평진전역으로부터 조국의 서남 계림과 남녕에 이르기까지 수십차의 전투를 거쳤다. 차츰 전투에서 로획한 “5.7식야포”, “3.8식야포”, “14련식야포” 등 현대화무기로 자신을 장비하면서 300여명의 병력을 가진 영으로 장성하였다. 영장은 김영만이고 교도원은 장범이였다. 이번에 포병영이 맡은 주요한 임무는 목선을 타고 적의 비행기와 군함을 대적하면서 보병을 안전하게 도해(渡海)할수 있도록 호위하는 “항행호위영”역할을 하는것이였다. 부대는 인차 수상훈련에 달라붙었다. 조선인전사들은 연변의 산골에서 살다보니 대부분이 바다를 처음 보았고 헤염칠줄도 몰랐다. 배에 오르기만 하면 배멀미를 하는 등 곤난이 막심했다. 설상가상으로 남방의 무더운 날씨 때문에 쩍하면 학질 아니면 리질에 걸렸다. 그러나 전사들은 하루도 훈련을 드틸수 없었다. 해뜨기전부터 밤 늦게까지 그네뛰기, 풍랑속에서 노젓기, 다리건너기, 헤염치기 등 훈련에 이악스럽게 달라붙었다. 하여 3개월간의 간고한 훈련을 거쳐 끝내 해상작전을 할수 있는 “해군전사”로 련마되였다. “항행호위영”전사들은 당지의 경험많은 배사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참대를 베여다가 배를 뭇고 돛을 달고 포를 설치하였다. 돛 네폭을 달고 자동차발동기를 설치한 대나무배는 전투원 34명이 탈수 있었는데 배에다는 또 산포, “5.7”, “3.8”식야포 각각 한문, 고사기관총 2정, 수압식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3정을 배치했다. 포판은 이불솜을 물에 적셔 감싸놓아 진동되지 않도록 했다. 배에 물이 새여들지 못하게 돌을 가루내여 기름반죽을 해서 틈을 발랐으며 물뽐프는 참대나무로 만들었다. 해상실전련습까지 성공적으로 끝낸 조선인전사들은 자랑스럽게 “우리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제1대의 해군”이라고 말하였다. “항행호위영”의 전사들은 나무배로 현대화한 미국제 군함과 싸워 이길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고 해남도해방에서 한몫을 톡톡히 담당하겠다고 “혈서”를 써서 상급에 맹세하였다. 영용한 “항행호위영” 1950년 4월 16일, 출정을 앞두고 사령부에서는 서문시 앞바다에서 도해부대를 환송하는 대회를 가졌다. 주덕총사령, 제4야전군에서 보내온 축하신 및 뢰주반도인민들로부터 보내온 한폭의 붉은기가 “항행호위영”에 증송되였다. 기발에는 “풍랑을 헤가르며 승리적으로 전진하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영장 김영만은 기발을 받아 제2련 련장 김두만에게 넘겨주었다. 군악대의 주악에 맞추어 자동차에 앉은 “항행호위영” 전사들은 군중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부두에 이르렀다. 500여척의 대나무배에 벌써 한 개 사의 병력이 올라있었고 그들이 탄 배의 좌우 량켠에는 우리 조선인 “항행호위병” 배 12척이 쭉 늘어서있었다. 저녁 6시 30분, 출발을 알리는 신호총이 울리자 배는 종대군악대의 주악과 끊임없는 구호소리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개 사의 병력을 호위하여 거침없이 순풍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는 “항행호위영” 조선인장병들의 마음은 더없이 설레이였다. 약 15킬로메터를 항행했을 때였다. 문뜩 공중에 조명탄이 떠오르더니 해상은 대뜸 대낮처럼 환히 밝아졌다. 이어 앞으로는 적 군함이 함포사격하면서 다가왔고 하늘로는 적기가 으르렁거리면서 날아와 포탄을 투하하였다. 포탄의 폭풍에 아군의 배들은 마구 뒤흔들렸고 어떤 배에는 벌써 물이 새여들었다. 조선인포병영 전사들은 포를 장치한 대나무배를 총출동시켰다. 대나무배들은 영장 김영만의 명령에 따라 적함을 향해 접근해갔다. 아군의 배는 배후로 에돌아가서 적함에 불벼락을 안기였다. 이 돌연적인 습격에 당황해난 적함은 배머리를 돌리더니 정신없이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 군함이 도망친 뒤 아군의 배는 어둠을 헤치며 순풍을 따라 거침없이 해남도방향으로 내달렸다. 한 전사가 어둠속에서 해남도가 보인다고 소리높이 웨치자 모두가 흥분에 겨워 야단법석이였다. 이때 하늘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뒤덮이면서 바람이 일었다. 배가 파도에 밀리워 갈지자로 달아나는통에 앞으로 저어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50여세 되는 경험 많은 배사공은 조금도 두려움없이 힘껏 노를 저어 나갔다. 해남도 해안을 지키던 적함이 아군을 발견하고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항행호위영” 12척 배에 건 모든 포가 일제히 맞불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군의 포사격에 적의 방어시설이 하나 하나 무너졌다. 배가 해안에 거의 닿게 되자 보병들은 배에서 첨벙첨벙 뛰여내리더니 헤염쳐 륙지에 올랐다. 500여척의 배에 앉은 보병이 승리적으로 해안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적을 무찌르며 돌진해나갔다. “항행호위영”은 승리적으로 임무를 수행한후 대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임무를 접수하라는 상급의 명령을 받고 배머리를 돌렸다. 약 15마일가량 왔을 때 날의 희붐히 밝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벽빛 속에 내다보니 동쪽 앞바다에 적의 군함이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항행호위영”쪽으로 접근해오는 것이 보였다. 아군을 발견한 4척의 군함은 량켠으로 갈라져서 포위해오고 있었다. 사태는 아주 위험했다. “전투준비!” 김영만영장은 과단성있게 전투명령을 내렸다. “1, 2련은 각기 량컨으로 갈라져 적함을 공격할 것!” 명령이 떨어지자 김두만련장은 2련의 배 여섯척을 왼쪽으로 몰고나갔다. “동지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최후의 희생을 각오합시다!” 김두만련장은 소리높이 웨치면서 전사들을 지휘하여 적함을 향해 돌진해나갓다. 적함과 아군배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있었다. 1000메터, 500메터, 400메터... “쏘앗!” 사격명령이 내리자 제2련 3패 7반 반장인 조창수가 맨 앞에서 다가오는 적함을 겨냥해 전방포를 갈겼다. 명중이였다. 적함에서는 불기둥과 함께 삼단같은 연기가 치솟아올랐다. 다른 배에서도 동시에 포를 쏘았다. 불의의 습격에 겁을 먹은 적함은 배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함에 명중탄을 안긴 조찬수와 부사수 김동무가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다른 곳에서 싸우던 제1련에서도 적함과 맞다들어 용감히 싸웠다. 놈들은 우리의 포화에 질겁한 나머지 뿔뿔이 도망쳤다. “항행호위영”은 승전고를 울리면서 대륙으로 돌아왔다. 그때로부터 해방군에서와 인민들속에서 대나무배로 미국제 현대화군함을 격퇴시켰다는 미담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50년 5월, 해남도가 해방된후 40군 군부에서는 해항시에서 공신표창대회를 열고 사직속포병영 제2련 3패 7반 반장이며 세1포수인 조찬수를 군의 전투영웅으로 추인하고 그가 생전에 탔던 배를 “조찬수호”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조찬수의 시체를 서문시 남산에 모시고 “전투영웅 조찬수지묘”라고 새겨진 묘비를 세웠다. 독립 15사의 탄생 1950년 1월말, 중공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각 군과 특종병부대에 소속되여있는 조선인 장병들에게 즉시 하남성 정주시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특수한 전투과업을 수행하는 일부 부대 조선인 장병들을 제외한 제4야전군내의 전체 조선인장병들은 3월초순까지 륙속 정주시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항일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 8.15해방직후부터 해방전쟁의 성스러운 싸움터에서 세련된 강철의 전사들이였다. 3월중순의 어느날, 중앙군위의 명령에 의한 독립 15사의 편성의식이 거행되였다. 독립 15사, 이는 사장으로부터 보통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선인으로 무어진 조선인부대였다. 전 사에는 4개 보병퇀, 1개 포병퇀, 공병영, 통신영, 반땅크영, 경위중대, 야전병원이 있었고 사급기관으로는 정치부, 참모부, 공급부가 있었다. 사장에 전우, 참모장에 지병학, 정치부 주임에 양근, 공급부 주임에 김윤식, 작전과장에 최봉준, 간부과장에 리용근, 대렬과장에 윤제학이 임명되였다. 퇀급이상 간부도 제4야전군 사령부와 정치부에서 임명하였는데 그들로는 제1퇀에 최학훈, 계중수, 리모출, 제2퇀에 리원성, 리성진, 김철, 제3퇀에 황동화, 김하석, 장중, 제4퇀에 장교덕, 황병태, 송덕만이였다. 포병퇀은 사참모장 지병학이 퇀장을 겸하고 최희택, 손흥산 등이 퇀의 지휘원으로 임명되였다. 편성의식대회는 정주시 광장에서 거행되였는데 110폭의 축기가 봄바람을 타고 나붓기였다. 이 축기들은 지방의 토비숙청으로부터 3하강남, 길림외각지대에서의 운동전, 장춘포위전, 료심전역, 평진전역, 장강도하전투와 중남, 서남지구 여러 전투와 전역에서 조선인 장병들이 수여받은것들이였다. 대회에서 제4야전군 정치부 주임 등자희가 야전군사령부와 정치부를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그는 조선인 장병들이 전국해방전장에서 이룩한 공훈을 높이 평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인 장병들은 3년 반의 해방전쟁가운데서 간고분투하고 영용히 싸운 모범이였고 옹정애민의 모범이였으며 3대규률 8항주의를 준수한 모범이였습니다. 조선민족의 아들딸들인 그대들은 조선민족의 자랑이며 또한 우리 중화민족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천만 지당한 말이였다. 독립 15사의 장병들가운데는 대공이상을 세운 사람만 해도 2000여명이 되었고 그중 영웅칭호를 수여받은 사람만도 100여명이였으며 85%이상이 중국공산당 당원이였으니말이다. 지휘원들의 연설이 있은후 성대한 사열식이 있었다. 구호를 웨치며 정보로 사열대앞을 지나가는 1만8000여명의 강철의 행진대오, 지축을 울리는 씩씩하고 호매로운 발걸음소리! 장병들 얼굴마다에는 승리의 희열이 비끼여있었다. 장백산기슭에서, 송화강반에서 자위에 떨쳐나섰을 때 일본패잔병들이 버리고간 보잘 것 없는 무기로 장비되였고 복장마저 통일되지 못했던 대오가 지금은 국민당군에게서 빼앗은 땅크, 대포와 보총,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중국인민해방군의 통일복장을 떨쳐입은 정규화한 부대로 자라났다. 두 손에 총을 받쳐들고 보무당당히 사열대 앞을 지나가는 민족의 건아들과 사열대우에서 손을 젓는 지휘원들의 얼굴에는 드높은 긍지의 빛이 력력히 흐르고있었다. (계속)
683    [동시]나팔꽃이(이오자) 댓글:  조회:2106  추천:0  2014-12-31
동시 나팔꽃이   이오자   새빨간 접시꽃을 예쁘다! 했더니   나팔꽃이 끙차끙차 접시꽃을 감고 올라 얼굴 슬쩍 대고 있네   귀여워!
682    [동시]너라면 신나겠니?(우남희) 댓글:  조회:2012  추천:0  2014-12-31
동시 너라면 신나겠니?   우남희   바람개비라고 바람만 있으면 신이 날 거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   함께 놀 친구들이 없는데 너라면 신나겠니?
681    [동시]물의 집(신이림) 댓글:  조회:1984  추천:1  2014-12-31
동시 물의 집   신이림   돌멩이가 들어갈 때는 찰방!   나무토막이 들어갈 때는 텀벙!   빗방울이 들어갈 때는 토독! 토독!   물의 집 문 열리는 소리.
680    [동시]소풍 가는 날(성환희) 댓글:  조회:2232  추천:0  2014-12-31
동시 소풍 가는 날   성환희   모두가 잠든 시간,   옷들이 옷장 밖으로 나오고.   신발들 신발장 앞에 줄 섰다.   옷이랑 신발도 나처럼 셀레나 보다.
679    [동시]보옹(재산영) 댓글:  조회:2119  추천:0  2014-12-31
동시 보옹   배산영   버스를 기다리는데 방귀가 나올려 해 둘러보니 사람들이 가까이 서있네 슬그머니 자리를 옮, 겼, 어 한 걸음 한 걸음, 구석으로 버스가 왔어 아랫배에 힘을 주었지 버스가 붕 보옹 보옹 소리를 싣고 떠나는 버스
678    [동시]숨바꼭질(박예자) 댓글:  조회:2190  추천:1  2014-12-24
동시 숨바꼭질   박예자   “아빠! 심심해 우리 숨바꼭질 하자” “그래 하자” 아빠가 술래 되었다   우리 아가 영운이, 꼭꼭 숨었네 어디 숨었지?   “나, 아가 아니야 다섯 살인 걸” 식탁 밑에서 큰소리가 났다.
677    [동시]달과 바다(문성란) 댓글:  조회:1901  추천:0  2014-12-24
동시 달과 바다   문성란   나가도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약속한 그곳까지만 가 봐   나가도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약속한 그 시간까지는 돌아 와   달과 한 약속을 바닷물은 오늘도 잊지 않고 지킨다   밀물 썰물
676    [동시]집이라는 열매(문삼석) 댓글:  조회:2011  추천:0  2014-12-24
동시 집이라는 열매   문삼석   길은 나무, 줄기도 있고 가지도 있지.   굵은 줄기 동네 안으로 들어오면   예서제서 죽죽 잔가지가 돋아나지.   동네는 잔가지 무성한 커다란 나무,   그 가지마다 꼭꼭 열매가 열리지.   결코 시들거나 떨어지지 않는   동그랗고 따뜻한 집이라는 열매.
675    [동시]등딱지(김종상) 댓글:  조회:1392  추천:0  2014-12-24
동시 등딱지   김종상   언제나 등딱지를 지고 다니는 거북이   학교 가는 어린이들은 귀여운 거북이다   모두가 등딱지를 지고 다닌다.
674    [동시]이름 바꾸기(김자연) 댓글:  조회:1507  추천:0  2014-12-24
동시 이름 바꾸기   김자연   국어를 불고기라 하고 수학을 떡볶이라 하고 과학을 짜장면이라 하고 미술을 김밥이라 하고 사회를 통닭이라고 하면 공부가 훨씬 잘 될 거야.
673    [동시]켕거루(김성민) 댓글:  조회:1617  추천:1  2014-12-24
동시 캥거루   김성민   캥거루가 강도를 만났어요.   가진 거 다 내놔!   달랑 주머니 하나 주머니 안에는 잠든 새끼 캥거루뿐인데 가진 거 다 내놓으라니요?   이런 날강도 같으니라고 캥거루는 두 발로 강도를 뻥, 찼지요..
672    [동시]1학년(곽해룡) 댓글:  조회:1812  추천:0  2014-12-24
동시 1학년   곽해룡   넘어져선 안 돼   일으켜 주기 전에 엄마가   등짝을 때릴지도 몰라
671    [동시]있다(곽예) 댓글:  조회:1310  추천:0  2014-12-24
동시 있다   곽예   어항에 물고기가 한 마리밖에 없다   좋아하는 과목이 미술밖에 없다   도시락 반찬이 계란밖에 없다   예쁜 데가 눈밖에 없다   나에게 친구가 한병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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