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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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2015년 <도라지> 제4기에 발표된 시8수 댓글:  조회:1702  추천:2  2015-09-18
고궁(외7수) 김철호   해시계의 음특한 그림자가 몸을 뻗어 담장에 기여오른다 굵고 주름 깊은 고목이  나이테에 묶여 숨을 헐떡인다 개미떼들이 백두봉을 지고왔다 개미떼들이 고비사막 날라왔다 붉은 물결 붉은 구호 발자국에 고인 붉은 구토물의 납함(吶喊) 천년을 살아 피를 먹은 거인 쿵쿵쿵 쿵쿵쿵 걷는다   광장엔 황금의 금자탑이 있다   걷는다 쿵쿵쿵 쿵쿵쿵 만년후에도 살질 거인 ...    설레임.1   18층 빌딩에서 커다란 새 한마리가 뛰여내린다 콩크리트바닥과 만나 춤추는 피아노파편들   명예란 공중루각이라고 소리친다   자판기 우에서 혈흔들이 날뛴다 불바람이 어슬렁거린다 스마폰이 사람들 얼굴을 뭉청뭉청 뜯어먹는다 머리없는 그림자들이 활처럼 휘여져있다   검은 새, 흰 새들이 서로를 찾아 부르짖고 암수들이 부둥켜 안는다   콩크리바닥에서 피아노가 환생했다   피아니스트는 칠십년 묵은 할망구다 흰 머리카락들이 강선(鋼線)이 되여 땡땡 소리친다 음악이 나봐라 얼굴 내밀었다가 너 죽는다 주먹질이다   석간신문이 벽돌장이 되여 웃는 얼굴에 날아가 박힌다   독자는 한명도 없다   설레임.2   산은 파도를 멈추었다 산은 출렁이기를 그만두었다   황혼이 아닌데 벌써 어둠이 태머리를 땋고있다   찢어진 기와 물구나무선 미소 만족한 빛 도망친 숨…   산위에 산이요 산밑에 산이다 야ㅡ호!   백두의 큰 잔으로 동해물 푹 떠 음부(音符)에 뿌렸다   먼지 낀 먼지가 빛속으로 사라지다 우주를 삼킨 우주가 점속으로 들어가다     바다   붉은 재채기 슬프다 말라버린 숨 하늘에 어둡고 덮쳐오는 고함 검푸르다 길고 긴 그림자 물에 꽂혀서 뿔뿔히 도망치는 비늘을 꿰인다 일몰은 죽음이 아니다 서서히 오는 탄생은 어둠 새로운 생명이 숨어있다          뇌출혈.1   기적소리 들린다 환승(換乘) 탈선한 렬차 시골에서 불던 바람 도시로 왔다 눈빛이 깊다 투명해진 사유는 더 려과될것 없다 파도의 섬모(纖毛) 두꺼운 기억 길 잃은 날개 각도가 삐뚤어진 명(明) 새로운 바다 ㅡ바람아, 미안하다 먼 곳에서 걸어오는 목소리 시간의 멀미가 멈추려나봐 탄생은 아픈것이다   뇌출혈.2   이 한수의 시를 위해 태풍은 먼 바다서 찾아왔다   살점을 뜯는 바람   밤바다는 더욱 크게 운다 돌아갈 길 필요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 수평선 너머에 있고 시는 덜미를 쥔채 쓰러져 운다 웃는다   설(雪) ㅡ시라는 괴물   은혜같던 초설(初雪) 뼈다귀가 생기고 살이 붙고 피가 돌고 하더니   나무가지 꺾는다 길을 막는다 지붕을 허문다 바람과 동무해 하늘을 끌어내린다   입김으로 씻은 창 안의 순한 눈(眼)들 폭력에 놀라 잃은 평화…     일기   숨소리는 속으로 흐른다 생명은 공간에서 만나 서로를 끌어안는다   “불타는 어제가 되돌아온대도 력사는 다시 쓸수 없다네 승자가 없는 영광 부끄럽다네” 맹인가수가 노래한다   한자 깊이의 땅속에서  녹쓴 철갑모들이 해볕보기 싫다면서 삽질을 멈추라고 눈짓한다        
709    [시]무舞를 위한 고요/김철호 댓글:  조회:1992  추천:1  2015-08-25
舞를 위한 고요 김철호 솔풍 즐거운 향기 엇다 두고 바람 눈 감은 마른 초草더미에 와 나래 접었나   파도 클 세상 향해 꿈 그릴 태고의 센 숨 터질 무대 하늘 찢어밟으면서 뜨겁게 뜨겁게 뿜어올릴 오름의 소리 내림의 소리 불깃 펼칠 극락의 광환狂歡 불러오리니 태워, 다 태워 하얀 노을 날리게 하라! 2015년 3월호
708    [시]도벌盜伐(김철호) 댓글:  조회:1726  추천:1  2015-08-25
盜伐 김철호 잉어 배를 딴다 우르르 진주가 쏟아져나온다 잉어 배를 딴다 쪼르르 꽃정들이 달려나온다 감지 못한 눈들이 칠흑같은 허공에 동공만 남기고 푸들푸들 떨다가 사라진다 피물이 칼에 옮아 웃는다 피물이 손에 옮아 춤 춘다 아낙네를 잡아 그녀 허벅지로 친구의 꿂주림 달래줬다는 무치한 옛말이 우습지만 않다 산그늘 너울거리는 산곡(山谷) 내장이 텅 빈 잉어... 하늘은 눈 뜨고 보고있다 2015년 5월호
707    [시]11월(김철호) 댓글:  조회:1660  추천:2  2015-08-25
11월 김철호 대립자(大砬子)는 봄이 싫다 대립자는 더는 봄이기를 원치 않는다 도꼬마리 도깨비바늘 둥근달속으로 들어가는 홍두깨 진달래꽃이 아궁이 가득 탁탁 불꽃 튕긴다 석퇴(石堆)가 빌고있다 전에는 사람이 석퇴에게 빌었는데... 12월, 1월, 2월을 삭제해버린 계절이 문턱을 척 넘어서 들어왔다 연기 덮인 도시우로 강이 흘러서 지나간다 "사랑"을 클릭하세요 당신의 메시지가 새가 되여 날아갈거예요 그러나 발등에 떨어진 돌 돌이 아파서 웁니다 무슨 소린지... 2015년 5월호
706    [시]무霧(김철호) 댓글:  조회:1458  추천:2  2015-08-25
霧 김철호 타닥타닥 타닥타닥... 자판기 때리는 소리가 하얀 망사를 짠다 나쁜 소문만 있는것이 아니다 노래가 있고 시가 있고 춤이 있고 인간세상의 모든것이 다 있다 눈을 감아라 눈 뜨면 보이지 않는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낡은 세상 같은 새 세상 어제 그제 같은 오늘 네가 휘저으면 헝클어질줄 아니?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존재라고 무게가 없을줄 알았니? 다리미 없이도 주름이 쭉 펴지고 덩치 큰 놈도 덜미 눌려 찍소리 못한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자판기가 하얀 씨실 잽싸게 나른다 세상을 덮는 망사가 짜진다 2015년 5월호
705    [시]茶(김철호) 댓글:  조회:1466  추천:2  2015-08-25
茶 김철호 자기야, 마음을 그렇게 옹그리면 그 속 어떻게 알겠어 새를 품은듯 팔딱 뛰는 심장 달을 안은듯 풍덩 빠지는 늪... 한여름 땡볕에 익고 한가을 바람에 여물어 그것도 모자라겠지 따가운 솥에 볶이여 옹그릴대로 꼬옹 옹그라져 숨조차 못 쉬였겠지 아참, 그럼 내속 보여드리죠 봄이 옷고름 풀고 여름이 치마자락 내리고 가을이 속곳까지 벗으니 작고 고요한 호수에 노랗게 피여나는 빛 불길로 풍겨오는 향기 지금 날 가지쇼, 당신의 숨으로 살터이니까요 2015년 5월호
704    [시]꽃잎 뜯기(김철호) 댓글:  조회:1779  추천:2  2015-08-25
꽃잎 뜯기 김철호 그것이 자신의 생명념주인줄 모른다 손끝에서 뜯기운다 발걸음에서 뜯기운다 숨소리에서 뜯기운다 눈빛의 이동에서 뜯기운다 봉오리였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만개되여 가장 어여쁠 때부터 아침해살에 뜯기운다 저녁 별빛에 뜯기운다 커피향에 뜯기운다 오르가슴에 뜯기운다 머리카락 한올 뽑히는 아픔은 알면서도 생명을 뜯기우는 아픔을 모른다 생명이 줄어드는 무서움을 모른다 때문에 오늘도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뜯는것이다 2015년 5월호
703    제94장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성립 댓글:  조회:4341  추천:3  2015-08-25
제94장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성립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성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해주었다. 동북인민정부에서는 조선족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지었다.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연변대학교 부교장 림민호를 단장으로, 항일렬사자가족 김신숙을 단원으로, 연길한어전문학교 교도주임 반룡해를 수원으로 한 대표단을 구성했다. 예술축전에 참가할 배우들은 새로 창작한 가무종목을 다그쳐 련습하였다. 9월 22일, 대표단일행은 연길역을 떠나 23일 심약역에 도착했다. 심약역에는 동북인민정부 지도일군들과 각계 대표들이 나와 대표단일행을 환영하여주었다. 9월 27일, 대표단일행은 북소리와 환호성속에서 북경역에 도착하였다. 수십만의 각계 대표들이 역에 나와 대표단을 맞아주었다. 9월 28일, 대표단일행은 로동인민문화궁에서 주은래총리의 국제국내정세에 대한 보고를 들었고 29일에는 주은래총리의 초청을 받고 북경호텔에 가서 만찬회에 참석하였다. 9월 30일, 마침내 모택동주석의 초청을 받고 북경호텔을 향하게 되였다. 모택동, 류소기, 주덕, 송경령, 장란, 리제심 등 공화국의 주석, 부주석들과 정무원총리 주은래가 연회대청앞에서 대표들을 맞아주었다. 400여명 대표와 배우들은 지구별로 줄을 지어 령도자들의 앞을 지나가면서 악수하고 인사를 올렸다. 접견이 끝난후 대표들은 연회에 참가하였다. 술과 음료수가 한쪽에 놓여있고 연회상에는 여러 가지 푸짐한 료리들이 갖추어져있었다. 의자가 없이 서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연회여서 자못 경쾌했다. 한동안 지난후 진운, 팽진, 리유한, 우란후, 류춘 등 령도자들이 제가끔 잔을 들고 조선족대표단이 서있는쪽으로 다가왔다. 대표들은 열렬한 박수로 그들을 맞았다. “동지들은 조선족대표들이죠?” 진운은 이렇게 물은후 말을 이었다. “나는 동북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조선족을 잘 리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족은 정말 믿음직한 민족입니다. 동북해방전쟁때 조선족인민들은 용감하게 잘 싸웠습니다. 동북해방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놀았지요. 우리는 조선족인민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뒤이어 팽진이 말했다. “나는 조선족에 대해 깊은 정을 가지고있습니다.” 동북국과 제4야전군사령부에서는 적지 않은 조선족경위원들을 두어 기관과 사령부안전을 담보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조선족에 대한 극히 큰 신임이였다. 특히 팽진의 처제 장수암은 조선족정치활동가인 리철부의 안해였기에 팽진은 조선족에 대한 리해가 남달리 깊었던 것이다. 10월 1일, 북경성은 새벽부터 징소리, 북소리, 폭죽소리속에 들끓었다. 림민호, 김신숙, 반룡해는 청첩장을 받고 천안문서쪽 관례대에 오르고 배우들은 북경시민들과 함께 시위행진에 참가하였다. 남자들은 흰 광목바지저고리를 입고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성들은 환한 색깔의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그들은 괭과리, 북, 새납을 행진용악기로 삼았다.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천안문성루에 오르자 시위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시위행진대오를 따라 관례대앞을 지날 때 조선족배우들은 격동에 넘쳐 “모주석만세!”, “중국공산당만세!”, “중화인민공화국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배우 김성민은 괭과리를 맡았는데 한동안 지나니 괭과리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괭과리채가 꺾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10월 3일 밤,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예술축전활동이 있었다. 주은래총리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이미 자리에 착석하고 있었다. 7시 10분, 회인당강당 동쪽켠에서 갑자기 박수소리가 터졌다. 모택동주석이 대청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고있었던것이였다. 이어 선물증정의식이 있었다. 각 민족 대표들은 순서대로 각기 주석대에 올라가 가지고온 선물을 모택동주석께 드리였다. 조선민족대표단은 세 번째로 주석대에 올랐다. 림민호가 먼저 연변인민들이 국경첫돐을 경축하는 서명부 한책을 모주석께 올렸다. 다음 김신숙이 조선족저고리와 조끼, 바지 한벌을 드렸다. 그다음 반룡해가 옥석으로 만든 벼루를 드렸다. 또 그 다음 예술단 단장 김동구가 조선족 회색두루마기를 모택동주석께 입혀드렸는데 두루마기의 길이와 품은 웅장한 모택동주석의 몸매에 딱 맞았다. 모택동주석은 두루마기를 훑어보면서 사의를 표하였다. 대청에선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렸다. 마지막으로 배우 정영숙이 남색비단에 원앙새를 수놓은 방석을 드렸다. 선물증정이 끝난후 예술축전이 있었다. 연변문공단, 내몽골문공단, 신강문공단, 사천성의 장족, 묘족들의 가무종목은 명절의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었다. 연변문공단의 5개 종목은 그날 밤 문예축전의 4분의 1을 차지하였다. 먼저 대합창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났다”를 공연하였다.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부른 노래소리는 회인당에 메아리쳤고 중남해의 정원을 넘어 수도인민들의 흉금을 울려주었다. 김혜련의 “지게춤”, 리인숙 등의 4인무 “절구춤”은 관람자들의 흥미를 자아냈다. 김인숙의 노래 “민가련창”과 방초선의 독창 “베짜기노래”도 절찬을 받았다. 각 민족대표들은 “조선족의 예술은 기교가 높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축전에서 조선족대표단은 모두 10차례나 단독으로 공연하였는데 공연때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때로부터 조선족예술은 북경인민들과 전국인민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이날 밤 모택동주석은 조선족문공단을 포함한 소수민족문공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완계사” 한수를 지어 류아자선생에게 화답하였다.   지루한 밤 지샐줄 모르던 이 적현에 백년동안 마귀떼 우줄우줄 춤추어 오억인민 단란히 모일수 없었네   수탉이 홰를 치자 천하는 밝아 여러 민족 주악속에 위텐곡도 울리니 시인의 흥취 비길바 없구나!   중앙방문단 연변방문   1952년 7월 24일, 팽택민을 단장으로 하고 싸쿵료를 부단장으로 하는 중앙대표단 일행 50여명이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 서원천의 안내하에 렬차로 연길에 도착하였다. 주덕해, 동옥곤, 최채 등 연변의 당정지도자들이 연길역에 나가 중앙대표단을 맞아주었다. 이날 연길시 6만5000여명 인구중 3만여명이 연도환영을 나왔다. 환영군중들의 울긋불긋한 꽃초롱불은 방문단이 지나가는 앞길을 가로등처럼 비추어주었다. 중앙에서는 이번에 도합 4개방문단을 서남, 서북, 중남, 동북, 내몽골과 수원 등지에 파견하여 소수민족을 위문하며 중앙인민정부에 대한 여러 소수민족인민들의 희망과 요구를 료해하게 하였다. 연변으로 나온 중앙방문단은 바로 그 4개 방문단중의 하나였다. 팽택민을 단장으로 싸쿵료(몽골족), 핑스크(몽골족), 아에사이(위글족)를 부단장으로 하여 동북으로 나온 중앙방문단은 7월 9일 북경을 떠나 수원을 거쳐 15일 심양에 도착한후 두 개 조로 나뉘여 한조는 료서로 가고 다른 한조는 연변으로 나온 것이다. 7월 27일, 연길시 3만여명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인민체육장에서 중앙방문단을 환영하는 성대한 모임을 가졌다. 환영대회에서 주덕해의 열정에 넘치는 환영사와 팽택민의 답사가 있은 뒤 모택동주석께서 중공연변지위, 연변전원공서에 보내는 금기가 전달하였다.《중화인민공화국 여러 민족은 단결하라!》는 모택동주석의 친필제사가 금기에 새겨져있었다. 이어 중앙방문단의 선물증송의식이 있었다. 선물로는 수령의 초상화 190폭, 모택동, 주덕, 주은래의 친필제사 500매, 기념메달 6500개, 환등기 2대, 도서 25종에 1392책, 약 25종에 15상자, 현미경 한 대를 포함한 26종의 의약기자재, 의학서적 303책이였다. 28일, 중앙방문단을 환영하는 운동대회가 있었다. 연길, 룡정 3개 시의 1900여명 선수들이 조선족 씨름, 그네, 널뛰기 시합에 참가하였다. 29일 오후부터 30일 오전까지 중앙방문단은 각족 각계 대표 50여명과 좌담을 가졌다. 좌담에서 사람들은 생산건설, 전선지원, 민족단결 등 면에서 얻은 보귀한 경험을 소개하였다. 중앙방문단은 연변에 체류하는 기간에 선후하여 중공연변지위, 연변전원공서, 연변대학, 동북조선인민보사, 인쇄공장, 연변교육출판사, 연변문공단, 룡정시, 로두구고무공장, 최죽송농업생산합작사와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 등을 방문하였으며 기타 소수민족들인 회족, 만족들도 찾아보았고 일부 렬사유가족, 군인가족들도 위문하였다. 중앙방문단은 연변에서 9일간의 방문활동을 끝마치고 8월 2일 저녁차로 연길을 떠났다.   조선족 구역자치의 선포   1952년 8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구역자치실시요강》이 발표된 12일후인 8월 21일, 연변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주비위원희의가 연길에서 열리였다. 회의에서 주비위원회의상무위원회를 산생, 대표회의의 임무, 대표자격 등 문제를 토론, 결정했다.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드디어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기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가 연길시인민극장에서 소집되였다. 300여명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였다. 동북인민정부대표 왕일부, 중공길림성위서기 리몽령, 길림성인민정부 주석 률우문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동옥곤이 회의에서 “길림성인민정부 연변전원공서 서업보고”를 진술하고 주덕해가 “길림성연변조선민족자치구시정건설에 관한 보고”를 진술했다. 보고에서 주덕해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부분이며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는 1급지방정권기관으로서 공동강령과 상급인민정부의 결의, 지시, 법령에 근거하고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의 규정에 따라 자치구내에서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공작을 진행한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인민대표대회와 곧 창립될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의 임무는 민족특징을 돌보며 민족형식을 통하여 민족평등정책을 관철하며 여러 민족 인민을 단합시켜 체계적으로 절차를 밟아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을 진행하는것이다”고 지적하였다. 대회에서 정식으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를 성립하고 “자치구인민정부조직조례”와 “민족단결에 관한 결의”를 통과한후 제1기 인민정부주석, 부주석, 비서장 등을 선거하였다. 주덕해가 제1기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부주석으로는 동옥곤(董玉昆), 최채(崔采)가 당선되고 비서장으로는 곽명광(霍明光), 부비서장으로는 박창무(朴昌武), 장국근(張國勤)이 당선되였다. 전인영(田仁永), 요흔(姚昕) 등 32명이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대회에서는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기념일로 규정하였다. 자치구산하에는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안도현이 포괄되여 있었는데 인구는 도합 85만4000여명이였다. 그중 조선족이 53만명으로서 62%를 차지하였다. 9월 3일, 연변 각계 각족 인민 3만여명이 연길시 서광장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모임을 성황리에 가졌다. 중앙과 동북국, 길림성에서 파견되여 온 당정 지도자들이 회의에 출석하였다. 자치구인민정부 주석 주덕해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창립을 장엄하게 선포하자 대회장은 환호의 열도가니로 끓어번지였다.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소망이였던가. 이것은 지난날 항일전쟁시기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제출되였던 동북에서의 조선인민족구역자치의 완전한 실현이며 자산계급 민주주의를 구유한 애국지사가 신해혁명직후에 국회에 제출한 민족자치방안의 더욱 높은 단계의 실현이였다. 조선족은 마침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조선족은 소수민족신분으로 세계인구 4분의 1을 차지하는 새중국의 광활한 땅에서 마음껏 활보할수 있게 되었다. 과경조선인은 문헌상에서와 민간속에서 개간민, 조선인, 한국인, 고려인, 심지어 삼한인(三韓人) 등으로 불리면서 고정된 족명조차 없는 망국노 류랑민의 생활을 영위해와야 했다. 그러나 이젠 조선족이라는 정치개념의 확립과 더불어 이런 력사현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었다. 쪽지게를 지고 오랑캐령을 넘어온 족속, 쪽배를 타고 선구나루터를 건너온 족속, 그 족속들이 뼈를 심고 살을 파묻어 걸군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다. 토지혁명과 전쟁의 불길이 흩날리던 항일전쟁, 해방전쟁의 나날에 조국강산에 진붉은 피를 휘뿌리며 영웅적기개를 보여주던 그 민족이 이 땅의 당당한 주인이 되었다. 이날 연길시거리는 수천수만의 환호의 인파로 출렁이였다. 골목과 거리마다엔 민족복장을 떨쳐입은 주민들이 북장고를 울리며 덩실덩실 춤판을 벌리면서 자치구성립의 날을 경축하고있었다. 이 인파속에는 나젊은 작곡가 김성민도 섞어있었다. 그는 차창준이 금방 써준《자치구창립의 노래》가사를 손에 쥐고 주민들과 함께 춤노래판에 한도가니로 휩쓸렸다. 덩실덩실 춤추던 김성민은 불현듯 주선률이 떠올라 무릎을 꿇고앉아 기보하기 시작했다.   에루화 저절시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화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구 세웠네...   자리를 차고 일어난 김성민은 금방 작곡한 노래를 소리높이 불렀다. 주위의 사람들은 김성민의 노래에 맞추어 북장고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노래소리는 조선족의 숙망을 담고 멀리멀리 울려갔다.(끝)   참고서적   1.《日本帝國主義侵華檔案資料選編-東北經濟掠守》 中華書局 2.《金日成將軍凱旋記》韓裁德 著 民主朝鮮社(1945년 발행) 3.《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8권) 4.《김일성회억록 》(1-7권) 5.《中國共産黨延邊歷史大事記》民族出版社 6.《中國朝鮮族歷史硏究》朴昌昱 著 延邊大學出版社 7.《조국광복회운동사》조선로동당출판사 8.《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 金昌順 共著 9.《용정반일운동》연변인민출판사 10.《延邊大事記》延邊大學出版社 11.《연변조선족역사화책》연변인민출판사 12.《혈연의 강들》류연산 저 연변인민출판사 13.《1930年代延邊民生團事件硏究》金成鎬 著 한국 백산자료원 14.《연변항일혁명사적지》박청산 저 연변인민출판사 15.《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 저 연변인민출판사 16.《中共延吉党史資料》吉林文史出版社 17.《중국조선족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18.《중국抗日戰爭과 조선민족》-1910-1952년 조선민족통사 고영 일 주필 도서출판 백암 19.《中朝韓日關係史硏究論叢》延邊大學出版社 20.《東北抗日聯軍》(上, 下券) 21.《僞滿憲警統治》中華書局 22.《嚴峻的考驗》呂永俊 口述 韓泰岳 整理 23.《延邊人民抗日鬪爭史》延邊大學出版社 24.《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 연변인민출판사 25.《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 저 민족출판사  
702    제93장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댓글:  조회:1818  추천:0  2015-08-25
 제93장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주덕해 조선민족 대표해 천안문에 오르고 연변인민 떨쳐나와 공화국의 탄생을 환호   개국성전   1949년 10월 1일. 이날은 중국인민에게 있어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더없이 감격스로운 날이였다. 수도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경축하는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날 중앙인민정부위원회의에서는 제1차회의를 열고 국가주석, 부주석의 명단을 선포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며 주은래를 정무원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모택동을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주덕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으로, 심균유를 최고인민법원 원장으로, 라영환을 최고인민검찰서 검찰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을 “중앙인민정부의 시정강령”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오후 3시, 수도 북경의 30만 인민대중은 천안문광장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경축하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속에서는 무시로 우뢰와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천안문성루에는 모택동을 비롯한 중앙정부의 요인들이 올랐고 관례대에는 여러 민족 대표들이 올라섰다.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대포한 주덕해도 있었다. 국가의 주악속에 모택동은 국기게양대의 스위치를 눌렀다. 오성붉은기가 10월의 상공에 나붓겼다. 뒤이어 모택동의 우렁찬 목소리가 천안문광장에 울려퍼졌다. “중앙인민정부는 성립되였다!” “중국인민을 일떠섰다!” 격동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중국대지를 진감하였으며 전 세계에 울려퍼졌다. 중국인민은 피어린 투쟁을 거쳐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모택동의 장엄한 선포는 낡은 중국에 대한 결속의 선고였으며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통치의 붕괴에 대한 선고였으며 백여년동안의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결말에 대한 선고였다. 새중국을 창건하기 위해 중국의 조선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일제와 싸웠으며 국민당반동파와 싸웠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조선인들은 피를 흘렸고 수많은 생명을 바쳤다. 때문에 오늘 조선인은 중화의 떳떳한 주인으로 되어 자신들의 대표를 당당하게 천안문성루에 세울수 있게 되었다. 이어 주덕총사령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지휘원과 전투원들에게 중앙인민정부 및 모택동동지의 명령을 견결히 집행하며 재빨리 국민당군대의 잔여부대를 숙청하여 아직 해방되지 못한 국토를 해방하라는 중국인민해방군 총부의 명령을 반포하였다. 이어 륙해공군의 렬병식이 있었다. 보무당당한 인민해방군 3군전사들은 름름한 모습으로 천안문광장을 주름잡았다. 이날 연길시 2만여명 군중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경축모임을 가지고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중국공산당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집회에서 연변의 당정지도일군들은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으며 모택동주석과 주덕총사령에게 보내는 축전을 채택하기도 했다. “오늘 우리 연길시 5만명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승리적페막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탄생을 열렬히 경축하고있습니다. 갖은 고통과 압박을 받은 우리 중국사람들이 오늘부터 새로운 새대ㅡ인민민주독재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중국인민은 더는 제국주의와 반동파의 통치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 모주석, 주총사령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령도밑에 단결하여 생산계획을 견결히 완수 또는 초과완수함으로써 전국인민해방전쟁을 계속 지원하며 반동세력을 소멸하고 전 중국을 완전히 해방하기 위하여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및 부강한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보문은 그날로 전파를 타고 북경에 전하여졌다.   “나라가 섰다!”   아래에 저명한 민간문학가 리룡득선생의 “나라가 섰다!”는 제목의 글을 소개한다. 리룡득선생이 직접 겪은 일을 서술하고있는 이 글은 당시의 연변인민들의 뜨거운 정서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내가 열살되던 해였다. 나는 편벽한 산골학교인 안도현 량병향 보광촌소학교 4학년생이였다. 10월 3일,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 앞뜨락에서 한창 놀고있는데 사무실쪽으로부터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신문 한 장을 들고 다그쳐 오시며 소리쳤다. “동무들! 우리 나라가 섰습니다!” “뭐, 우리 나라가 섰다구요?” 나와 반 친구들은 일시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벙벙해 서있기만 했다. “우리의 새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되였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어데요? 좀 보자요!” 나는 다른 애들을 제체놓고 선참으로 선생님한테로 달려갔다. 그리고 선생님 손에 쥐여져있는 동북조선인민보(10월 2일부 신문)를 빼앗다싶이 받아쥐였다. “중화인민공화국만세!”라는 대형 활자체와 그 아래에 모신 모주석의 초상화가 첫눈에 안겨왔다. 오른쪽 톱에 “중국인민정협 원만 성공리에 페막,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고, 모택동 중앙정부 주석에 당선”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찍혀있었다. “애들아! 우리 새 나라가 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였다!” 친구들은 나를 빼곡히 에워쌌다. “얘들아! 우리도 인젠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날 오후 상과는 예상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나라 창립의 크나큰 기쁨에 휩싸인 선생님이나 우리의 심정은 모두 이 일 외의 다른 생각을 할수 없었던것이다. 하여 학교에서는 인차 전교사생(전교사생이라야 겨우 100여명)이 참가한 경축모임을 가졌다. 교장선생님은 격앙된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창건소식을 알리고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우리는 인젠 어엿한 자기 나라가 있는 학생으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꼭 새 나라 어린이답게 학습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뒤이어 교무주임선생님께서 장엄하게 신문독보를 하시였다. “...부주석들로는 주덕, 류소기, 송경령, 리제심, 고강, 장란...” 이날 오후 산간벽지의 자그마한 운동장에선 오래도록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 집으로 뛰여간 나는 집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와 어머니(당시 우리 집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세동생이 살았다.)를 보고 소리부터 쳐댔다. “할매, 멈마! 우리도 인젠 내 나라가 있게 되었어요!” “아니 내 나라가 있게되다니?” 할머니와 어머니는 중뿔난 나의 말에 잠시 일손을 멈추시고 쳐다보셨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자초지종 얘기했다. “응, 그런 일이였구나.” 주름투성이 할머니얼굴은 대뜸 환해지시였다. “그래요. 우린 비록 이 몇 년간 자유해방속에 살았다지만 여태까지 나라라곤 없었지요. 그런데 인젠 당당한 내 나라가 있게 되어단 말이예요!” 나는 선생님한테서 들은 도리를 제법 내리 풀었다. “참으로 기쁜일이로구나!” 어머니도 환성을 올리셨다. 뒤미처 동생들이 들어왔다. “얘들아! 우리들에게도 인젠 나라가 있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나는 동생들에게 오성붉은기를 그려보이면서 내 아는대로 제법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때였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이댔다. “할매, 엄마, 돈 좀 줘요.” “아니, 밤중에 갑자기 돈을 해선 뭘하니?” “나라가 선 기쁨을 경축해야지 겠않어요?” “참, 얘두, 우리끼리 어떻게 경축한단말이냐?” “아니, 꼭 할수 있어요. 빨리, 응!” 나의 성화에 어머니는 200원(동북화페)을 고스란히 내주었다. 나는 공소사로 펄쩍 달려가 과자 두근을 얼른 사왔다. “자, 이 한근은 우리 몫이고 이 한근은 동생들 몫, 우리 이 과자를 먹으며 새 나라 창건을 경축하자요!” 1950년 3월 20일, 동북조선인민보 제2면에는 우리 나라 국가가 실렸고 뒤미쳐 우리 학교에서는 국가를 배워주게 되었다.   일어나라 노예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 쌓자...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돌아오자마자 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국가를 배워드렸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은 중국력사에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으며 우리 조선민족동포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앞길을 틔워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중국공산당은 민족압박제도를 철저히 페지하고 민족평등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조선민족인민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정의 한 성원으로서 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다른 여러 민족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조선민족인민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자기들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오매에도 그리던 나라의 주인이 되어 국가대사와 지방사무관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지 1년도 채 안되던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불길은 압록강과 두만강가에까지 퍼져왔다. 이웃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위기에 처하여있었고 우리 나라의 안전이 엄중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정부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구호를 내걸고 그해 10월 25일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선전선에 파견, 조선인민군과 배합작전하여 북진하고있는 미군을 3.8선부근에까지 밀고나갔다. 이때 인민일보는 동북거류조선인이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보위전쟁에 참가하라는 보도를 계제하면서 조선인들의 참군열조를 불러일으켰다.   北京에 거주하는 조선 교민은 집회를 열어 미제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고, 이승만의 내전 발동을 질책하여 중국에 거류하는 우리는 반드시 힘을 다해 우리 조국의 동포의 인민해방전쟁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지원할것이다.(인민일보 1951년 7월 12일 제1판 기록에서 인용)   동년 10월 17일, 동북조선인민보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延邊大學 林民鎬副校長은 동북조선민족대표의 신분으로 중앙인민방송국의 초청을 받고 10월 14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 인민은 모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인민들의 해방전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외교부 발언인의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들은 돌아가 조국을 보위할 권리가 있다는 광명하고 정대한 성명을 열렬히 옹호한다.”   이 담화발표는 중국조선인들에게 보낸 동원의 호소였다. 조선인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참군열조를 일으켰다. 부모가 자식을 전선에 보내고 새색시가 남편을 전선에 내보냈으며 학교학생들과 기관일군들이 전선으로 나가겠다고 탄원했다. 도문철도국에서는 선후로 500여명의 종업원들이 기관차를 몰고 조선전선에 나가 철도운수사업에 참가하였고 연변전원공서에서는 1000여명의 녀간호원을 양성하여 전선에 파견하였다. 항미원조총회에서는 전선을 지원하기 위하여 비행기와 대포를 헌납하라고 호소하였다. 각지의 조선인들은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애국헌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연변지구에서는 97억여원(낡은 화페)이나 헌납하였는데 이 돈으로 비행기 7대반을 살수 있었다. 항미원조전쟁중에서 “근근히 연변지구에서만 6만여명이 조선전쟁에 참군했으며 8천여명이 희생되였다.”(《중국항일전쟁과 조선족》고영일주필 도서출판 백암)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인민군과의 2년 9개월의 협동작전 끝에 드디여 미군과 함께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되였다.(계속)  
701    제92장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댓글:  조회:1756  추천:0  2015-07-27
제92장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조선민족지도자들 연변의 정권건설 주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서 구역자치 주장 주덕해와 민족사무처   동북행정위원회는 1948년 4월 민족위원회에 민족사무처를 신설, 주덕해를 처장으로 임명했다. 민족사무처는 할빈시 남강 마가구에 자리잡고있었다. 민족사무처의 주요임무는 조선인들을 공산당의 주위에 묶어세운후 여러 민족과 단결하여 생산을 회복, 발전시키며 전선을 지원하는것이였다. 이 중대한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민족사무처에서는 조선인간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간부양성에 힘을 몰부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또 문공대를 세우고 자체신문인 “민주일보”를 간행하기도 했다. 1948년 7월 20일에 거행된 조선인간부학교 개학식에서 교장 주덕해는 동북 각지에서 선발되여 온 150명 학생들에게 학습을 잘 하여 인민의 훌륭한 근무원이 되여달라는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다. 주덕해는“당의 건설”,“민족정책” 등 과목을 직접 강의하였다. 1949년 1월 학생들이 졸업하고 돌아갔다. 그때 학습을 마치고 돌아간 학생들은 북만 각지의 토지개혁과 지방사업에서 골간으로 되었다. 1949년 2월 10일, 민족사무처는 9개월 동안의 사명을 완수하고 해산되였다. 그날 주덕해는 민족사무처의 전체 일군들은 이제 곧 연변에 가서 연변의 당정부문에 배치될것이라고 선포했다. 아울러 문공대는 연변문공대와 합치게 되고 “민주일보”는 “연변일보”, 남만의 “단결일보”와 합쳐 “동북조선인민보”로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조선인간부학교도 연변에 나가 조선민족간부양성사업을 계속 하게 될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어 민족사무처 간부들은 연변에 나와 연변의 당정 중임을 지니게 되였다.   3급 인민정권 전면 수립   1948년 3월부터 조선인 림춘추(1948년 3월 27일 임명), 문정일(1949년 3월 7일 임명), 주덕해(1949년 3월 20일 임명. 연변지위서기 겸.)가 선후로 연변전원공서 전원직무를 맡고 연변에서의 정권건설사업을 주도하였다. 1948년 11월 15일, 동북일보는 “민주정권건설사업을 다그쳐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 동북행정위원회 제2차 행정회의의 결정을 전달하고 1949년 춘경전에 본지구에서 현, 구, 촌 3급인민대표대회와 정부위원회의 선거를 끝낼것을 요구하였다. 사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각급 당조직은 반드시 민주운동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고 전당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민주운동에 참가하는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11월 중순부터 중공연변지위와 각 현 당정지도기관들에서는 동북국과 동북행정위원회의 지시에 쫓아 촌급선거사업을 시험적으로 진행하기 시작였다. 연변전원공서와 각 현 정부에서는 층층이 선거사업간부양성반을 꾸려 2878명의 선거사업간부를 양성, 그중 구급조리원이상간부 1049명, 행정간부 858명이였다. 그들로 조직된 선거공작대는 4개 가두 89개 촌에 내려가 촌급선거사업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시험공작에서 경험을 얻은후 촌급정권을 세우는 공작을 보편적으로 진행하였다. 하여 1949년 3월까지 연변의 촌급선거, 민주정권건설사업이 기본상 끝났는바 왕청현의 7개 촌을 제외한 57개 가두, 548개 촌에 비교적 완정한 촌급인민정부가 세워졌다. 촌급선거공작에서 촌급정권이 기본군중의 수중에 장악되도록 보증하였으며 불순분자가 혼입하지 못하게 하였고 민족, 성별 비례에도 중시를 돌렸다. 하여 촌급정권의 대표성과 대표의 광범성을 보장하였다. 선거공작을 통하여 가일층 군중을 교양하였고 정치에 참여하는 군중의 자각성과 적극성을 더욱 높였다. 인민군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높였고 각 민족의 단결을 강화하였으며 생산을 발전시키려는 인민군중의 의욕을 북돋우었다. 촌급정권이 보편적으로 건립된후 각 현에서 륙속 구급, 현급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구, 현 인민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현, 구, 촌 3급 인민정권건설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길림성민족사업회의   1949년초, 길림성위에서는 연변의 주요한 책임자들에게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내였다. 통지를 받은후 림춘추, 주덕해, 김세균, 리욱, 오훈 등은 인차 회의에 참가할 준비에 달라붙어 연변의 력사발전, 토지개혁정황, 혁명투쟁력사 등 방면의 자료를 수집하고 문건을 작성하였다. 연변인민들의 크나큰 기대를 안고 떠난 대표들은 1949년 1월 19일 아침차로 길림에 도착하였다. 성위일군들이 자동차를 타고나와 역광장에서 연변대표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이것은 연변의 최고급 책임자들에게 있어서는 최고급 대우였다. 연변에서 자동차를 타보지 못한 그들은 자기들이 타던 마차보다 자동차가 훨씬 빠르다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성초대소에 도착하자 대표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이부자리를 펴놓고 가져온 자료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월 21일, 길림성민족사업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대표들은 근 40명 되었는데 대부분이 조선인이였다. 진정인이 회의를 사회하고 주보중, 주덕해, 림춘추 등 많은 사람들이 연변의 건설문제에 대해 연설하였다. 주보중은 회의에서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후 조선인민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압박을 받았고 중국에 와서 또 중국착취계급의 착취를 받았기에 혁명성이 특별히 강하다는 것, 조선인민들은 중국의 항일투쟁가운데서 중국인민과 피로써 우의를 맺었다는 것, 자기의 피땀으로 연변을 개척한 연변조선인들은 반드시 연변을 잘 건설해야 하며 중국의 각 민족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연변대표들은 항일투쟁과 해방전쟁가운데서 세운 연변조선인들의 력사적공훈에 대해서 한결같이 긍정하고 연변의 전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전망에 대해 구김없이 토론하였다. 회의는 특히 연변에 건립될 정부의 규모에 대해 열렬한 토론은 진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인들이 중국 땅에 와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비장한 사실과 쏘련의 국가조직형식 등 실례를 들어가면서 연변을 가맹공화국형식으로 만들어 완전히 조선인에게 맡길 것을 요구하였다. 주덕해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우리 조선인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면서 놈들과 싸워온 것은 누구나 다 승인하는 사실이며 우리의 빛나는 력사인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명기해야 할바는 우리가 혁명에 참가한 목적이다. 우리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고 혁명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압박과 착취를 없애고 로고대중의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해 혁명에 참가했다. 그리고 우리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 역시 손님으로, 지원병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인민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력사가 부여한 의무를 다한 것이다. 피를 흘리는 싸움에서 이러하였다면 이후 건설가운데서도 마땅히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으로서 자기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특점에 따라 민족자치권을 향수할 수는 있지만 자기의 독립왕국을 꾸리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대표들은 드디여 연변조선족자치정부를 창립하여 중국공산당과 중앙인민정부의 령도밑에 충분한 민족자치권리를 향수하면서 연변을 보다 아름답게 건설하기로 의견을 통일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연변에서의 교육발전사업에 대해 토론하고 연변조선민족자신의 최고학부인 연변대학의 창건문제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고 우리 조선민족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발양하여 후대들의 교육사업에 큰 중시를 돌리기로 의견일치를 가져왔다. 회의기간 대표들이 장춘을 방문하는 기회에 림민호는 건국대학에 들려 많은 책을 구입하여 연변대학도서관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희의는 2월 4일에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1949년 8월, 주보중은 운남성으로 전근되여가기 전에 중공중앙 모택동주석에게 편지를 보내여 “먼저 연길지구에서 민족자치를 실현” 할 것을 건의하였다.(1989년 길림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回憶周保中》의 p.268에서)   주덕해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출석   1949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북경의 중남해에서 모택동의 사회하에 신정치협상회의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에는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각계, 민주인사, 소수민족, 해외화교 등 23개 단위의 대표 134명이 참가했는데 소수민족대표로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주덕해가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조직조례”,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할 단위 및 대표인원수에 대한 규정” 등 문건을 채택했다. 9월 17일, 신정치협상회의준비위원회 제2차회의가 소집되였는데 회의에서 정치협상회의조직법초안, 공동강령초안, 정부조직초안 등이 기본적으로 채택되였다. 이 회의에서 신정치협상회의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라고 고쳤다. 주은래는 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가 열리기전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대한 몇가지 문제”라는 보고를 하였다. 보고에서 주은래는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한족이 4억 이상으로 그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몽골족, 회족, 장족, 위글족, 묘족, 이족, 조선족, 고산족 등 소수민족은 전국인구의 10%도 안된다. 물론 인구의 다소를 막론하고 다 평등하다, 우선 한족은 다른 민족의 종교, 언어, 풍속, 습관을 존중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자치를 목표로 하는가, 아니면 자치범위를 초월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 민족정책의 한낱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우리는 민족자치를 주장한다. ...우리는 련방을 실시하지 않지만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여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하도록 한다.”고 강력히 지적했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에는 각 당파, 인민단체, 각계, 각 민족 대표 662명이 참가했다. 조선족을 대표하여 주덕해가 이 회의에 참가했다. 9월 29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이 채택되였다. 공동강령에는 “각 소수민족의 집거지구에서는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바 민족집거구에서의 인구의 다소와 구역의 대소에 따라 각각 민족자치기관을 건립한다”고 명확히 규정되여 있었다. 공동강령을 토론할 때 주덕해는 중국에서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다고 표시하였다. 주덕해는 중국의 소수민족은 과거에 독립적민족이 아니였기에 쏘련의 민족문제와는 그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다고 천명했다. 회의기간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현상황을 소개함과 동시에 장래 민족문제에서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하여서도 제기하였다. 주덕해는 민족간부를 양성할 문제, 민족지구의 민족관계문제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주덕해는 또 연변은 력사적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떤 지방의 한족(漢族)의 교육은 뒤떨어지고있으므로 소수민족도 한족(漢族)을 도와주어야 할 문제가 나선다고 제기하였다. 주덕해는 또 각 민족의 발전과 단결문제도 언급하였다. 각 민족이 단결하여야만 경제상에서도 공동히 발전하게 될것이며 경제가 발전되면 국가건설에 대하여서도 공헌이 클수 있다고 하였다. 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선거하였으며 모택동이 초안을 작성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선언”을 일치하게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나라의 명칭, 수도, 국기, 국장, 국가(國歌) 등도 결정하였다. 이러한 국가대사를 토론할적마다 주덕해는 조선민족인민을 대표하여 자신의 민주권리를 충분하게 행사하였다. (계속)  
700    [동시]아기 빗방울(김신희) 댓글:  조회:2188  추천:0  2015-07-27
동시 아기 빗방울 김신희 방울방울 아기 방울이 조롱조롱 조로롱 우산 끝에서 대롱대롱 귀엽게 웃으며 노래합니다 장마라서 우기라서 찌푸린 얼굴 펴 주려고 아기 빗방울이 노래합니다 또롱또롱 또로롱 노래합니다
699    [동시]해 파는 가게(이연승) 댓글:  조회:1738  추천:0  2015-07-27
동시 해 파는 가게 이연승 거울 가게에는 거울의 수만큼 하늘이 있습니다 날마다 하늘을 파랗게 닦아놓고 해를 팝니다 손님들은 하늘 속에 비친 얼굴을 보고 해가 담긴 거울을 사 가지고 갑니다
698    [동시]춘곤(최선옥) 댓글:  조회:1625  추천:0  2015-07-27
동시 춘곤 최선옥 비빔밥을 먹을까 아침에 남은 찬밥 한 덩이에 새순과 햇살 넣으면 파랗고 노란색이 어우러지고 말간 하늘 쪼르르 부으면 음, 고소한 냄새 개나리와 목련을 프라이해 살짝 얹고 산들바람 한 숟갈 떠 쓱쓱 비비면 절로 군침 넘어가는 소리 졸졸 시냇물 한잔 곁들여 맛있게 떠먹는 봄 는꺼풀 스르르 내려앉는다
697    [동시]그늘(우경주) 댓글:  조회:1770  추천:0  2015-07-27
동시 그늘 우경주 달팽이가 뜨개질을 한다 이쪽 하늘과 저쪽 하늘을 끌고와 벽을 엮는다 푸른 이파리끼리 서로 손을 잡고 허공에다 척척 고리를 건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뜨개질을 하는 저 달팽이들 한 코도 빠뜨리지 않고 한 계절을 열심히 짜고 있다 한낮의 달아오른 담장들 그들의 체온을 식혀주는 것은 달팽이덩굴이다 회색 시멘트 담벼락, 초록옷 입고 있다
696    [동시]오선지(최민경) 댓글:  조회:1505  추천:0  2015-07-27
동시 오선지 최민경 오선지를 돌아다니는 음표들 우리도 오선지속으로 들어가자 오선지를 발랄하게 거니는 음표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음표를 찾자 사랑하는 사람들로 한줄 채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줄 채우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한줄 채우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한줄 채우고 남은 한줄 읽는 당신이 오늘하루동안 꼭 채워서 우리도 오선지속 발랄한 음표가 되자
695    제91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 3 댓글:  조회:2023  추천:0  2015-05-19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당의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1주년에 모주석 모시고 북경서 공연 도서간행물출판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이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밑에서 해방되였다.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유구한 력사를 가진 조선족중의 많은 선진인물과 지식인들은 해방을 맞은 그날부터 신문을 창간하고 출판물을 간행하여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중국공산당의 로선, 방침, 정책을 선전하였다. 1945년 11월, “길동활혈문헌사”에서 “위대한 사회주의10월혁명”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1946년에 들어서서는 연변등사사, 조선의용군 제5지대 정치부, 룡정청년회, 도문중쏘문화협회 출판부, 연변사범학교, 길림성 조선인민주련맹, 연변문화사, 청구재출판사, 연변출판사, 길동출판사 등 많은 기관, 단체들에서 “쏘련집단농장의 이야기”, “쏘베트공청의 생활” 등 과 같은 세계의 첫 사회주의국가를 소개하는 도서와 “공산주의원리”, “가치 가격과 리윤”,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등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도서 그리고 “팔로군”, “국민당과 공산당”, “련합정부를 론함”등과 같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을 소개하는 도서들을 출판하였다. 1947년 3월, 전문편집출판기구인 연변교육출판사가 창립되였으나 출판사는 조선족중소학교 교과서를 주로 출판하는 기구였기에 화룡중쏘문화협회, 연길중쏘우호협회, 룡정중학교 생산합작출판부, 룡정인민학원 인쇄부, 청년문고출판사, 연길시한글학회, 왕청인민민주대동맹, 소식보사, 시사순보사, 길동군구정치부 인쇄공장, 민주출판사, 대중출판사, 인민일보사, 길림일보사, 연변일보사, 동북조선인민보사 등 많은 기관, 단체들에서 계속 일반도서를 출판하였다. 이때 출판된 서적들로는 “사회주의발전사”, “새 인생관”, “사회과학개론”, “공상으로부터 과학에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공산당선언”, “중국공산당간사”, “삼풍”, “사상지남”, “대중철학”, “쏘련공산당력사 간략독본”, “쓰딸린략전”과 같은 사회과학서적과 “대중가요집”, “현대소설의 구성”, “태풍”, “북륙의 서정”과 같은 문예서적들 그리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조선어문법”과 같은 어학서적들이 있었다. 1945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될 때까지 연변에서 조선말도서를 무려 173종을 출판하였다. 동북조선인민보사는 일반도서를 전문 출판하는 편집기구인 출판과와 인쇄기구인 동북조선인민보 제2인쇄공장, 도서발행기구인 동북조선인민서점을 가지고 있다. 잡지출판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였다. 1945년말, 연길시청년회에서 월간잡지 “이스크라”를 간행하였고 뒤이어 또 번역문을 주로 싣는 종합성간행물 “신건설”을 출판하였다. 1947년에는 길림성조선인민주련맹에서 대형종합잡지 “민주”를 간행하였고 1948년에 토지개혁이 일단락 끝난 뒤 대중잡지사에서 월간잡지 “대중”을 간행하였다. 1949년에는 동북조선인민보사에서 선후하여 종합잡지 “문화”, 농민잡지 “농민의 기쁨”, 소년잡지 “소년아동”을 간행하였고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교육잡지“교육통신”을 간행하였다. 종합잡지 “문화”는 일정한 편폭으로 문학작품을 실었는데 이 잡지의 주요책임자는 리성휘이며 후에 리홍규가 주필을 맡았다. 이 잡지는 지금의 “연변문학”의 전신이다. 연변교육출판사 창립 1948년 2월 8일부터 12일까지 길림성교육청 청장 려량의 사회하에 연길시1중에서 길림성해방구중한교육회가 열리였다. 뒤이어 2월 13일, 리호원, 박근식, 황범식, 박재한, 로승균, 강근모 등의 발기로 조선족중학교의 대표 20여명이 연길시2중에 모여 조선문교재편찬문제를 둘러싸고 좌담하였다. 이 모임에서 길림성 민주련맹 책임자 량환준에게 교육출판사 창립준비사업을 위임하였다. 단시간의 준비를 거쳐 1947년 3월 24일, 전국에서 첫 번째 민족출판사인 연변교육출판사가 창립되여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출판사의 취지를 “동북조선족의 문화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선문 교재, 잡지와 기타 도서를 출판하는것”이였다. 연변교육출판사는 초기에 길림성교육청의 지도를 받았고 출판사내에 관리위원회를 두었는데 량환준이 총책임을 맡고 안변기가 경리를 맡았다. 교과서는 연길시 중앙소학교와 2중 교원들이 보수도 없이 편찬하였고 인쇄는 연길, 룡정, 도문, 왕청 등지의 작은 인쇄소에 맡겼으며 자금은 여러 학교로부터 1263만원(동북화페)의 류통권을 얻었고 그후 1948년에 길림성교육청으로부터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물가가 날마다 올라가는바람에 초봄에 받은 교과서예약금으로 종이를 사서 교과서를 출파하고나면 적지 않은 결손을 보는 문제가 나타났다. 교과서주문부수가 늘어날수록 결손이 그만큼 증가되였다. 하여 출판사에서는 연변전원공서의 동의를 얻고 학부모들에게 예약금 대신 예약미를 받기로 하였다. 그후부터 조선족이 살고있는 부근의 기차역마다에는 교육출판사로 보내오는 쌀이 산더미를 이루게 되었다. 이 쌀로 종이공장과 종이를 바꿀 타산이였기에 교육출판사지도부에서는 연변전원공서를 거쳐 동북국 선전부에 가 정황을 회보한후 소개신을 석현종이공장에 떼줄 것을 요구하였다. 석현종이공장에서는 쌀보다 광목을 수요된다고 하였다. 하여 출판사에서는 동북림시행정위원회상업국을 찾아가 쌀만큼 광목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 광목으로 종이문제를 해결했으며 그해 동북페 160여억원을 수입을 얻어 재정토대를 닦아놓았다. 1948년 7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출판사종업원대회에서 연변전원공서 문교과장이였던 량정봉을 연변교육출판사 겸임주임으로, 량환준을 실무부주임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하였다. 1948년 4월 1일부터 1년사이에 편집출판인원이 60여명으로 늘어났다. 1948년 6월부터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자기의 직속인쇄공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서점을 넘겨받고 발행사업을 하게 되었다. 하여 출판, 인쇄, 발행 등 부문을 초보적으로 갖춘 기업체로 되었으며 1947년말부터는 종업원이 162명에 달하는 지방국영단위로 되었다. 사내에는 사부, 편집부, 경리부(서점 포함), 공무부를 두고있었다. 1947년에는 학교교원을 조직하여 소학교와 초중의 한글, 정치상식, 력사(조선력사) 교과서를 편찬출판하였는데 그쳤으나 1948년부터는 소학교의 산수, 자연, 지리(조선지리, 동북지리) 교과서를 더 편찬출판하였으며 1949년에는 초중의 중어, 대수, 기하, 물리, 화학, 식물, 동물, 생리, 광물 교과서까지 편찬출판하여 조선족소학교와 초중 각 과목의 교과서를 거의 다 편찬출판하였으며 7개 과목의 고중교과서도 편찬출판하였다. 이런 교과서들은 1948년부터 동북 각 해방구 조선족중학교에 공급되였다. 연변가무단 창립 연변가무단의 전신은 1944년 6월 진찰기변구에서 건립된 화북조선의용군과 정치간부학교구락부다. 이 구락부를 1945년초에 조선의용군화북지대 선전대라고 이름을 고쳤다. 1945년 가을, 료녕성 대석교에서 부대를 재편성할 때 선전대의 골간들을 제5지대 선전대에 편입시켰다. 1946년 8월, 제5지대 선전대는 지방의 “이스크라”극단, 룡정예술단의 부분적배우들과 합병하여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예공작대라고 하였으며 1946년 9월에는 연길에 온 길림군구 선전대(한족)와 합하여 길림군구 정치부 문공단 제2대대로 편성되였다. 1947년 2월, 길림군구 정치부 문공단 제2대대는 룡정에서 안도의 “5.1”선전대와 합병하여 길동군분구 정치부 선전대라고 하였다. 1947년 12월, 선전대는 연변전원공서로 넘어와 단기간의 준비사업을 거쳐 1948년 3월 16일, 연변지구 전원공서 민족사무처 문공단을 건립하고 연변문공단이라고 략칭하였다. 1949년 2월, 흑룡강성 할빈동북민족사무처문공단의 부분적배우들을 받아들인후 연변문예공작단이라고 하였고 1950년 1월, 정식 연변가무단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때 인원은 97명이였다. 연변가무단은 몇 명의 한족을 제외하고는 거의다 조선족으로 구성되였다. 연변가무단은 건립초기에는 경기병이 되어 연변지구에서 선전활동을 벌렸으며 1950년, 국경 1주년에는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공연하여 모주석과 당중앙 지도자들의 절찬을 받기고 했다. 모주석은 연변가무단을 비롯한 소수민족예술인들의 공연을 보고 유명한 완계사 “류아자선생에게 회답함”이란 사를 짓기도 했다. 음악창작에서는 해방직후 허세록, 박우, 동희철 등 작곡가들이 “새 아리랑”, “베짜기노런, “주구청산기” 등 대중적가요를 창작하였고 1947년에 연변교육출판사에서 38수를 묶어 처음 “대중가요집”을 출판했다. 건국후 “중화인민공화국경축의 노런, “대생산의 노런 등을 창작공연하였고 1950년 건국 1주년에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선보인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섰다”, “새 아리랑”, “베짜기노런 등은 중앙지도자들이 관람하였고 또한 중앙신문영화촬영소에서 기록영화로 찍어 전국에 방송하였다. 저명한 작곡가 허세록은 40여년동안 “베짜기노런, “고향생각” 등 150여수의 가곡에 30여부의 기악곡을 창작한 음악가로서 특히 대중가요창작에 성과가 크다. 김성민은 연변가무단에서 배우, 작곡, 부단장 등으로 있으면서 40여년동안 400여수이 가곡, 무용곡, 기악곡을 창작하였다. 그는 민족적감정이 짙은 조선족신민가의 창작에 정력을 몰부어왔다. 그가 창작한 “자치주창립경축의 노런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관악 “축첩행진곡”은 1947년 허세록이 작곡한것인데 당시 길림성의 관현악대에서는 서로 다투어 연주하였다. 연변가무단에서는 가극, 신창극 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8년 차창준, 홍성도 등이 가극 “승리에로 전진”을 창작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우순, 김인해가 2막 2장의 가극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를 창작하였다. 1951년부터 연변가무단에서는 창작일군들을 각 현에 내려보내여 민족민간무용을 발굴하고 계승하기 시작하였다. 가무단에서는 연길현의 민간예술인 양창윤을 요청하여 “농악무”와 “부채춤”을 배웠다. 가무단에서는 민간예술을 발굴하고 수집하여 “농악무”, “승무”, “사모무”, “활춤”, “칼춤” 등 몇십종을 정리하였는데 그중 “농악무”와 “장고춤”이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농악무”는 1951년 8월 15일에 연변중쏘우호협회구락부에서 첫 공연을 하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고 “농악무”를 전수한 하태일은 우수배우상을 받았다.
694    제90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2 댓글:  조회:2447  추천:0  2015-03-30
창립초기 연변대학은 사범, 의학, 농학 3개 부가 있었다. 사진은 연변대학 농학부 제1기 학생들. 조선민족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조선인들은 자기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에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을 세울 구상을 내놓아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호응을 얻었으며 인차 중공길림성위의 동의를 거쳐 중공중앙 동북국의 비준을 받았다. 연변에 돌아온 림춘추는 연변대학창립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림민호, 김유훈, 박규찬 등과 함께 구체임무를 맡고 밤에 낮을 이어 동분서주하였다. 대학이 창립되기전에 “태아”의 이름을 “동북조선인민대학”이라고 지어두었다가 창립시에는 “연길대학”이라는 “아명”을 달았고 그후 “연변대학”이라고 정식 명명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길시 쓰달린극장에서 성대한 개학식이 열리였다. 사회자 최채가 준비위원회를 대표하여 연변대학의 창립을 정중하게 선포하였다. 림춘추는 대회에서 “연변대학의 창립은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나는 체현”이라고 강조하고 나서 “대학의 전체 성원들은 공산당의 지도하에 한결같이 뭉쳐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라”고 호소하였다. 교원과 학생대표들은 한결같이 학교를 제집처럼 잘 꾸리겠다고 굳게 다졌다. 연변 각계 인사와 동북 각지에서 온 래빈들이 자기 가정의 경사처럼 기뻐하며 축사를 드렸다. 그 후 개교기념일을 4월 1일로 정하였다. 드디여 중국조선족최고학부 연변대학은 목청높이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여났다. 오래전부터 연변대학의 창건을 관심하여왔던 길림성정부 주석 주보중은 트럭, 피아노, 주단 등을 보내주었고 연변대학 창설에 가정 큰 공헌을 한 림춘추는 조선으로 나간후에도 늘 잊지 않고 재정면에서 도와주었으며 도서자료를 해결하여주었다. 동북 각지에 있는 조선인들은 구차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물심량면으로 성심성의로 지원하였다. 제1대 교장 주덕해, 부교장 림민호는 조선민족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다. 연변대학의 취지는 조선민족의 건설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학교로 하여금 점차 우리 나라의 조선민족건설인재를 육성하고 조선민족과학문화교육을 발전시키는 기지로 되게 하는것이였다. 창립당시에는 문학부, 리공학부, 의학부와 농업전문을 설치하였으나 1950년에는 원 문학부와 리공학부를 합병하여 사범학원으로, 의학부를 의학원으로 고쳤다. 1956년에 또 통신학부를 증설하였고 1957년에 원 농업전문을 농학원으로 고쳤다. 1958년 7월, 연변대학의 의학원과 농학원은 연변의학원과 연변농학원으로 분립되였다. 연변대학은 원 사범대학원을 기초로 조절하고 출실히 하여 조선인의 중등교육교원, 민족간부, 과학기술인재를 육성하는 종합적인 대학으로 되었다. 창립시기로부터 1958년 7월까지 연변대학은 줄곧 조선인학생만 모집하는 단일적인 민족대학이였으나 변강지구의 한족간부, 교원, 과학기술인재가 부족하고 또 원천이 없는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9년부터 부분적으로 한족과 기타 민족 학생도 모집하였다. 이리하여 연변대학은 조선민족의 건설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고 기타 민족인재의 육성을 돌보는 여러 민족이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대학으로 되었다. 연변일보 창간 1945년 8월 18일, 연길에서 민영조선문신문 “한민일보”가 창간되였다. 한민일보는 8절지에 2개 면의 일간지였다. 창시인은 광복전 조선의 “매일신문” 간도지시장이였던 최무였다. 그들은 괴뢰만주국 동만신문인쇄소와 연길천주교인쇄소를 합병하여 신문인쇄공장으로 삼고 대유학자로 불리우던 개산툰 서단훈장 한석기를 사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뚜렷한 정치적경향성을 띠고있지 못하고 자연주의적 색채들이 담겨져있었다. 한민일보는 보도에서 일본을 제한외에는 거의다 선전하였다. 이를테면 “한국림시정부 수령 김구씨 귀국전 장개석을 회견” 등 기사를 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급이란 무엇인가?”, “맑스주의 자본론입문”, “10월혁명략전” 등 글을 싣고 중, 쏘, 한(조선)의 친선, 감조감식 등 글을 제창하였다. 1945년 11월 5일,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한민일보”를 접수한후 “연변민보”로 개칭, 재조직하여 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만들었다. “연변민보”는 창간호로부터 모택동의 “련합정부를 론합”이라는 글을 련재하면서 신문의 정치경향성을 보여주었다. 신문은 국내외 시사를 보도해주고 정치리론을 풀이해주기도 하였다. 1946년 1월 23일,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연길에 길동분성위, 길동전원공서, 길동군분구를 두기로 하였다. 하여 “연변민보”는 전원공서의 기관지로 되었다. 연변민보는 연변전원공서의 창립을 경축하여 “호외”를 내놓았고 1946년 4월 24일에는 동북에서의 쏘련붉은군대의 철퇴를 위하여 붉은 색으로 칠한 “붉은군대환송”특집을 내놓았다. 1946년 5월 1일, 길동군구 정치부에서 “연변민보”를 접수하여 “길돈일보”(조선문판)로 개칭, 길동군부구 정치부기관지로 만들고 유명선을 주필로 임명하였다. 이때로부터 신문은 신화통신을 싣기 시작하고 국민당을 질책하는 여론을 일으켰다. 1946년 9월, 중공길림성위기관이 연길로 옮겨옴에 따라 “길동일보”는 성당위의 기관지 “인민일보”와 합병되고 “인민일보”(조선문판)로 개칭되였다. 하여 길림성당위는 조한문기관지를 두게 되었다. “인민일보”(1947년 3월10일 “길림일보”로 개칭됨) 사장은 소림, 부사장은 손평, 주필은 장흔이였으며 부주필로는 석과, 림민호, 김평 등이였다. 림민호와 김평은 부사장을 겸하고 조선문판을 주관하였다. “인민일보”(조선문판)는 민족성을 많이 띠고 조선반도에 대한 보도비중을 늘였다. 1946년 9월 9일은 “훈민정음”발표 500돐 기념일이였다. 연길에서 개최된 이 기념행사를 길림성민주련맹에서 주최하고 “인민일보”(조선문판)에서 후원하였다. 이 기념행사보도에서 기자는 “정음반포 5세기동안 봉건통치계급의 한글천시와 일제의 잔혹한 문화유린으로 하여 조선사람이면서도 저마다 제 말과 글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제말과 글을 찾게 된 이 기쁨 조선 겨레치고 그 누구에겐들 없으랴!”고 토로하기도 했다. 또 전선에서 보내온 자료로 “장관구(蔣管區)에서 울고 있는 조선민족동포”란 글을 련재함에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 3월 11일, 길림이 해방되자 성당위기관은 길림으로 옮겨갔다. 하여 연길에는 중공연변지위가 또다시 건립되였다. 연변지위는 4월 1일, 지위기관지 “연변일보”를 창간하기로 하였는데 그 편집원과 인쇄설비 및 인쇄공은 기본적으로 원 성당위기관지 “길림일보”(조선문판)의 설비와 인원들이였다. 중공연변지위 선전부장 최채가 사장을 겸임하고 석과가 부사장을 맡았다. 주필은 “길림일보”때 부주필이였던 림만호가 맡았다. “연변일보”는 공산당의 주장과 정책을 적극 선전하고 해방전쟁정세를 선전하며 연변 각지 인민들의 투쟁정황을 반영함으로써 공산당의 중요한 여론도구로 되었다. 신문사는 군사화하였다. 전방에서 하기공세와 추기공세가 발동되면 신문사도 거기에 발맞추어 립공운동을 벌리면서 신문간행을 다그쳤다. 편집, 기자와 인쇄공들은 “분초를 다투어가며 신문을 내놓는 것이 곧 국민당반동파의 가슴팍에 총칼을 찌르는 것이다”, “일체는 전선의 승리를 위하여!”란 구호를 내걸고 일하였다. 기자들은 이불짐을 메고 수십리길을 도보로 취재하러 다녔고 편집들은 합숙에서 쪽잠을 자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평판기를 돌리다가도 정전만 되면 기계바퀴에 바줄을 매고 인력으로 돌리면서 신문인쇄만은 절대적으로 보장하였다. 중요한 전파를 알리는 신화사전문이 급작스레 들어오면 인쇄에 교부했던 판면일지라도 새로 판을 조절하여 새 기사를 바꾸어넣어야 하였다. 이렇게 매일이다 싶이 신문판면을 뜯어고치며 밤과 낮이 따로없이 신고스레 일해도 낯을 찡그리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당시 연변일보의 발행부수는 8000여부에 달하였다. 1949년 4월 1일, 중공중앙 동북국의 비준을 거쳐 “연변일보”, 북만(할빈)의 “민주일보”, 남만(통화)의 “단결일보”등 세 개의 조선문신문을 합병하여 “동북조선인민보”로 개칭, 연길에서 발간식을 하였다. 신문은 중공연변지위의 기관지였지만 전 동북경내의 조선인을 독자대상으로 삼았다. 사장은 최채였고, 부사장은 리욱성이였다. 할빈에서 온 김동구와 통화에서 온 백남표가 주필, 부주필을 맡았다. 동북조선인민보사에서는 남만과 북만에 주재기자를 파견하고 조선인집거구에 자체의 통신보도망을 두었다. 신문은 자기의 사설에서 종합성, 민족성, 지방성, 대중성을 신문의 특성으로 한다고 하였다. 신문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조선문신문이였다. 3개 신문사일군들이 한곳에 모이니 종업원총수는 177명, 그 가운데는 편집과 기자들이 84명이였다. 신문발행부수는 1만5400부에 달하였다. 그후 “동북조선인민보”는 또 “연변일보”로 개칭되였다. 연변인민방송국 창설 연변의 방송사업은 비교적 일찍 발전하였다. 1937년 4월, 괴뢰만주국은 연길에 방송국을 세웠다. 이 방송국은 1945년 해방될 때 쏘련홍군과 당지인민들의 보호가 있었기에 비교적 원상태를 보전하고있었다. 1946년 8월 17일, 중공길림성위와 길림성정부가 연길에 옮겨오면서 이 방송국을 회복시키고 성당위에서 직접 령도하였다. 방송국명칭은 “연길신화방송국”이였다. 이 방송국은 “연안신화방송국” 후에 해방구에 비교적 일찍 세워진 방송국의 하나였다. 방송국은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과 배합하여 방송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는데 대내로는 전력을 다하여 전선을 지원하도록 민중들을 동원고무하였고 대외로는 적을 폭로하고 와해시키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8년 3월 10일, 중공길림성위와 성정부가 길림시로 옮겨간후 연길신화방국을 기초로 하여 11일 1일, 연길인민방송국이 세워졌다. 연변지위 선전부 부장 최채가 국장을 겸임하고 얼마후에는 류수림이 부국장으로 임명되였다. 연길인민방송국은 중앙방송국 전국중계종목 외의 6시간을 완전히 조선어로 시사종목과 지방종목을 방송하였다. 송신공률은 1킬로와트였는데 모든 록음, 중음, 송신 등 방송설비는 일제가 남기고 간것들이였다. 청취범위는 연길, 룡정, 도문 일대였다. 방송국에는 편집조, 방송조, 기무조 등 세 개의 정식기구가 있는 외에 전문일군 1명이 서무를 맡아보았다. 방송국 전체 종업원은 15~20명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연길인민방송국의 조선말방송은 중국에서의 우리 겨레의 유일한 조선말방송이였으며 중국에서 유일한 소수민족방송이였다. 연길인민방송국의 사업방침은 “지방성, 민족성을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조선민족을 주요대상으로 하여 여러 계층을 돌보는것”이였다. 그러다가 1951년 4월 연길인민방송국을 “연변인민방송국”으로 고쳤다. 연변인민방송국은 상기의 사업방침의 지도하에 5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국내외뉴스”, “지방소식”, “시사해설”, “음악방송”, “소설련속랑독” 등 방송종목을 이어왔으며 대상성방송종목들로는 “종업원방송”, “청년학생방송”, “부녀방송”, “소년아동방송”같은것이였다. 초창기이지만 방송프로가 비교적 소박하면서도 다양하게 꾸려졌었다. 또한 급변하는 정치정세에 발맞추어 여러차례의 전역성보도를 조직함으로써 방송의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민족인민들에게 계속 줄기차게 혁명하며 끝까지 혁명하여야 한다는 사상의식을 부어넣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나라에서 국내해방전쟁이 계속되던 나날에 나어린 연변인민방송국은 장강남북에서 벌어지고있는 전쟁형세와 중국인민해방군의 승리의 소식을 제때에 널리 보도하여 연변청중들에게 승리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동시에 전선지원소식도 제때에 보도하여 연변청중들의 전선지원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연변인민방송국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전 세계에 장엄하게 선포하는 실황을 실패없이 중계하여 연변청중들이 모택동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게 하였고 개국축전의 성대한 실황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계속)  
693    [동시]하나로 걸어간다(최진) 댓글:  조회:2032  추천:0  2015-03-19
동시 하나로 걸어간다   최진   두 사람이 걸어간다.   소나기가 쏟아지자   한 우산 아래 모이는 둘   빗길을 종종종 하나가 걸어간다.   1로 걸어간다.
692    [동시]나무는 새것을 좋아해(신복순) 댓글:  조회:1957  추천:1  2015-03-19
동시 나무는 새것을 좋아해   신복순   나무는 새것을 좋아한다.   새 잎 새 꽃 새 열매   해마다 싹 바꾼다   싹 바꾸면서 저도 바뀌어져   점점 큰 나무가 되어 간다.
691    [동시]2월과 3월(신복순) 댓글:  조회:2140  추천:0  2015-03-19
동시 2월과 3월   신복순   봄을 빨리 맞으라고 2월은 숫자 몇 개를 슬쩍 뺐다   봄꽃이 더 많이 피라고 3월은 숫자를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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