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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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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    詩의 세계속에는 지상과 천상이 한 울타리에 있다... 댓글:  조회:3909  추천:0  2016-10-20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시집「겨울날」(창작과비평사刊·1975년) /       ■ 핵심 정리 ✴지은이 : 김광섭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서정적, 관조적, 사색적, 미래지향적, 명상적 ✴어조 :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사색적 어조 ✴제재 : 별 ✴구성 : 선경후정의 방식(1,2연에서 별의 모습을, 3연에서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 1연 : 별과 나와의 친밀한 교감 2연 : 친밀한 관계의 소멸과 인간의 고독 3연 :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 ✴주제 :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성찰, 친밀한 인간 관계에 대한 소망,              생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생의 의미의 새로운 발견 ✴표현 : 대응 구조(별 하나 - 나, 밝음 - 어둠, 천상 - 지상) ✴출전 : '겨울날'(창작과비평사刊·1975년)     ■ 내용 정리 저렇게('저렇게'라는 원칭을 써서 '별'과 '나'가 떨어져 있는 거리감을 말함)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주체와 객체의 전도 → 별 하나와 '나'의 관계는 선택적임)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별'과 '나'의 특별한 관계로 서로 의미 있는 존재로 변함) 1연 : 저녁의 하늘에서 빛나는 '별'과 인간인 '내'가 서로 만나 교감하는 모습을 ‘내려다본다’와 ‘쳐다본다’라는 대구적 표현으로 제시 → 이러한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는, 자신들에게 소중한 존재를 서로 위로하고 이끌어 주면서 삶을 계속해서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인간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밤(평화와 외로움)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새벽에 별이 흐려지는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친밀한 관계가 소멸됨을 의미한다) 나는 어둠 속(삶의 역경과 시련 )에 사라진다.(늙고 죽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으로, 인간의 숙명적 비극성을 표출하고 있다) 2연 : 밤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존재인 별은 날이 밝으면 사라지고, 인간은 '어둠 속'이라는 시어가 보여 주듯이 삶의 역경과 시련 속에서 늙고 죽는 숙명적인 고독을 지니고 살다가 사라진다는 의미임 → 대구, 대조법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3연 : 시적 화자는 정다운 별과 나의 인연이 이어져 다시만나게 되기를 기대, 희망하고 있다. → 둘 사이에 영원한 거리가 개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분명 존재의 고절함을 환기시키지만 나를 내려다 보는 ‘별 하나’와 그 별을 하나를 쳐다 보는 ‘나’의 지향에 의해 둘은 하나로 묶인다. 그리하여 밝음과 어둠의 양극단이 화해와 결속감으로 유지되어, 마침내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까지 만날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불교 인연설의 윤회사상에 바탕을 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작품의 이해와 감상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은 오염되어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저녁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별을 바라다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 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로 시작되는 그 詩題가「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저녁에」의 시를 이끌어가는 언술은「별」(천상)도「나」(지상)도 아니다.「별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나」가 아니라「별」이다. 나는「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내려다 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저녁에」의 경우도「별」이「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행의 경우 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이」,「그」,「저」의 지시 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저렇게(별)」보다「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저렇게 많은 별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면「이렇게 정다운 별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저녁에」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 제목처럼「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하나와 나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異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연의 시구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하나 나하나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였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타자(他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있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주보듯이 박모(薄暮)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해도 우리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정다운 너하나 나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따의 몇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 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 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 시간적 배경의 상징적 의미 '밤'은 고단한 일상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안식과 평안함을 주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고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밤'을 대표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빛나는 별과 이와 대조되는 인간의 현실적 고독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위안을 삼고, 그 위안 속에서 새로운 삶을 계속해 나가는 인간사의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 '저녁에'에 나타난 '저녁'의 이미지 저녁이라는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 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二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에서 얻은 모티브를 바탕으로 1970년에 제작한 점화로, 그 해 한국 일보에서 주최한 제 1회 한국 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붙인 그의 작품은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오묘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향과 친구를 생각하는 매우 동양적인 사고와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국내 미술인들의 놀라움과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이 시처럼 별을 제재로 한 다름 작품을 찾아보고, 시인의 '별'을 노래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김광섭의 '저녁에'처럼 윤동주의 '별 헤는 밤'도 '별'을 통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환기하고 있는 시이다. '저녁에'의 화자는 '별'과의 교감을 통해 고독하고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길 기원하고 있다. 한편 '별을 헤는 밤'의 화자는 '별' 하나 하나에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새겨 넣으면서 자신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어린 시절처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동심으로 돌아가 아름다웠던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순수한 이상 세계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외롭고 괴로운 세계로 변해 버린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언덕 위에 쓴 이름자를 흙으로 덮어 버린다.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   --- (전략)  김광섭의 이 시엔 별과 내가 교통하는 시적 공간이 있다. 그 시적 공간은 한없이 밝으면서 또 한없이 어두운 그런 공간이다. 모든 인공적인 문명은 사라지고, 시간도 사라진, 그러나 깊디깊은, 맑은 샘물이 출렁이는 그런 원초적 공간이다. 우리는 순간 상상력이 된다. 온몸이 귀가 되어 소리들을 듣는다. 아니 온몸이 눈이 되어 형상들을 본다. 별의 눈썹들과 교통하는  상상력이 된다. 모은 공간이 상상력이 된 당신들은 풍선처럼 떠오른다. 둥실 떠오른 당신들은 만난다. 잘디잘게 짓뭉개진 정신에 스스로 정신이 깨끗해지는 '시치료'를 하면서 말이다. 시적 공간은 시적 인식을 하게 하는 순간의 공간이다. 시적 인식의 순간, 공간은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특별하게 보게 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특별하게 보게 한다. 시적 인식의 순간, 공간은 당신에게 집히며 순간, 시간과 시간 사이의  하늘에 둥그러니 걸린다. 그순간 우리는  특별한 자신의 모습과 특별한 너의 모습과 특별한 추억의 모습, 그리고 특별한 자기 미래의 모습도 본다.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산다. 그 순간 때문에 산다. 모든, 먹이를 먹는 다른 동물들과 우리를 다르게 하는 바로 그 어떤 것 - 인식의 순간의 공간이다. 시적 인식의 순간의 공간,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가득 별로 차는 것을  본다. 당신은 결코 사라지는 별이 아니다. 다시 뜨는 저 구름 뒤에 있는 별이다. 부재하므로 존재하는 얼굴들. 시에는 분명 '그런 것'이 있다. 그런 상상의 내밀한 커튼이. 그 커튼이 있으므로 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략) [출처 :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        
1682    詩란 삶이 이승사자를 찾아가는 과정속의 울음이다... 댓글:  조회:3794  추천:0  2016-10-20
나의 시가 걸어온 길                       / 고 은(시인) 저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때때로 세상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또 아주 멍청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용솟음 같은 게 차오르곤 하죠. 시를 쓴 뒤에는 뭔가 멍해져서, 마음 속의 지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외국에 머무는 동안 너무 많은 이론의 숲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이라든지, 또 이후 정립되어 온 '시론(詩論)'이나 시에 대한 구구한 해석들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1930년대쯤 아득하고 가난한 식민지 시대의 두메 마을 삼거리 주막의 늙은 주모가 역마살 탓에 기약 없이 출분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들려주는 하소연 같은 걸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요즈음 지식인이라든지 인문이라든지 사회라든지 하는 것 아닌, 온 몸으로 순박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가 제 가슴에 크게 울려오는 걸 느낍니다. 우리는 오늘날 시는 물론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너무 많은 이론의 밀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그런 이론을 필요로 합니다. 좀더 올바른 길을 가고 올바른 시야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론에서 여러 가지를 얻어 와야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이나 문화, 혹은 시에서, 이론은 모종의 장애가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시와 이야기하고 시와 더불어서 세상을 좀더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무쪼록 이론보다는 여러분 가슴속의 시의 친구, 시의 연인, 시와 함께 오래 있어온 동행자들을 불러내 보기를 권합니다. 겉핥기식 이론이 아닌 가슴의 소리를 저는 미국으로 초빙받아가 동부의 하버드 대와 서부의 버클리 대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저는 '시는 책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이론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시는 여러분의 가슴속에 들어 있다. 나와 여러분이 만나는 시간은 가슴속에 들어있는 시를 꺼내서 시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애타는 황홀한 그리움의 시간이다'라고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론의 습관에 오래 젖어온 학생들은 '어, 저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 눈알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더군요. 그래서 첫 시간은 그렇게 낯설게 지내지만, 차츰 내 심장이 그들의 심장에 닿고, 내 넋이 그들의 넋과 얽히면서 강의실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가더군요. 학기말에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기념 촬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학문적인 것 혹은 과학적인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만,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울음이 속 깊게 들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고 하지 않고, '새가 운다'고 하지요. 돼지도 꿀꿀꿀 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봄밤의 소쩍새, 여름날의 뻐꾸기, 겨울날 기러기  들이 지나가면서 저 하늘 높이 떨어뜨리는 것, 우리는 그것을 '노래한다'든지 '소리를 낸다'고 표현하지 않고 '운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두고 1950년대의 전후 모더니스트들은 한국말은 왜 노래한다 하지 않고 왜 운다고 하느냐면서 문제를 제기했지요. 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모국어의 이런 표현 형식은 엉터리이고 진부했겠지요. 3년 전에 불란서에 가서 시 낭송을 할 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노래한다는 말 대신 운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운다. 따라서 나도 울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내 시도 울음이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그 말을 들은 청중들이 뭔가 무중력 상태로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더군요. 특히 불란서 시인들은 그 말에 미쳐서 한국에서는 '운다고 하느냐. 운다고 하느냐'면서 크게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모두 잘 알다시피 불란서 시인 하면 폴 발레리 등 아주 지적인 시를 쓰는 사람들인데, 운다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한자에도 울 명(鳴)자가 있습니다. 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기가 배고플 때 운다든지, 첫사랑에 좌절을 맛보고 김소월의 시 세계처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하고 통곡하는 등 여러 가지 울음이 있습니다. 후르시초프 회상록에 보면, 독재자인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적인 독재자의 딸이 슬퍼하고 연민하는 걸 후르시초프가 건사하곤 했지요. 저는 그 회상록을 읽으면서 흐루시초프가 연민해 하면서 '숲 속에 가서 실컷 울고 오면 훨씬 나을 텐데, 울어야 할 숲조차 없구나' 하는 데서 크게 공감했습니다. 울음은 이처럼 인간의 맺히고 흐트러진 삶을 정화시켜 줍니다. 서양말로 한다면 '카타르시스'가 되겠지만, 우리 나라는 울음이 참 강한 민족입니다. 실컷 울고 나면 그 때 비로소 신세계가 만들어지지요. 피붙이 가운데 누가 원통하게 죽었거나, 찢어지는 아픔으로서의 사랑의 실패를 경험했거나 험악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비애를 겪었을 때 사람들은 많이 웁니다. 서양인들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그냥 울어 버립니다. 이런 정서는 우리가 그 동안 시를 쓰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대단히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울음이라고 하는 일종의 삶의 형식, 어떤 수행 방식 울음도 수행입니다. 공부입니다. 무슨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 절간에 가서 참선을 하는 것, 이런 것만이 수행이 아닙니다. 일상 생활을 해나가는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울음 자체가 아주 기가 막힌 우리 삶을 정화시키는 수행 행위입니다. 그렇게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이 가능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서 '아! 이 일상을 다시 가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울음에 대한 이런 근원적인 의미 부여와는 상관없이 나도 옛날에는 눈물이 쓸데없이 많았습니다. 5월인가 6월쯤 등꽃이 필 무렵 문학을 하는 친구의 하숙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등꽃이 흐드러지게 마당에 피어 있고 확 달빛이 쏟아졌습니다. 그 달빛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울었어요. 그 때는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일찍 들어가 친구 집에서 술을 마셨지요. 처음에는 이 사람도 내 울음에 동조를 해서 '니가 우니까 나도 참 슬프다'면서 훌쩍거리기도 하고 술도 함께 마셨지요. 그런데 내가 폭포라도 쏟아져 나오듯 미치게 우니까, 나중에는 나에게 귀신들린 새끼라며 증오와 저주를 퍼붓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나는 미쳐서 막 울었지요. 새벽 3시 반 정도까지 울고 나니까 울음이 다 말라 버리더군요.  '클레오파트라 시대에는 로마에는 눈물단지가 있었다더라. 눈물을 흘릴 때면 다이아몬드나 보석처럼 흘려서, 우리도 눈물단지나 하나씩 만들자'며 마구 울었지요. 새벽 4시쯤 부우 하고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우리 방에 귀신이 들어서 안 된다'고 추방해서 그 친구하고 10년 동안 절교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울음이 나한테는 오랫동안 있었어요. 지금도 조금씩은 있지만 울음이 10년씩 가다가 그 다음에는 불면증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껄껄걸 웃으면서 얘기하곤 하는데, 전에는 전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했어요. 웃음은 위선자 아니면 생을 거짓으로 살고 있는 자들의 소유물이고,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웃고 하는 것은 속물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여겨져 이해를 안 했어요. 불면증이 10년이나 갔어요. 잠이 안 오니까 밤 12시쯤 되면 막소주를 김치를 안주 삼아 마시곤 했지요. 그 때 술이 취해 있으면 이 세상에 내가 최고의 시를 쓴 것 같았는데, 다음날 낮 2시쯤 깨어서 보면 가장 졸렬한 시였어요. 밤에 술에 취해서 과장이 되었다가, 다음날 낮이 되어 과장이 다 꺼지고 나면 처참한 패잔병처럼 남아 있는 게 내 작품인 걸 많이 겪었죠.  한 노동자의 의로운 죽음 앞에서 이렇게 10년쯤의 세월을 보내다가 1970년의 어느 날 한 노동자의 죽음을 신문 기사에서 봤어요. 지금은 서울 무교동 골목의 낙지집들이 거의 없어졌지만, 그 때는 시뻘건 낙지에 곁들인 소주, 아주 맵고 짜고 독하고 이런 것만이 위안이 됐을 때지요. 통행 금지가 있을 때니까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 탁자에서 자다가, 떨어지면 시멘트 바닥에 뻗어서 자곤 했습니다. 나중에 70년대, 8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으로 조사 받으러 다니고 잡혀가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재우고 할 때 그런 데서 훈련받은 게 도움이 되었어요. 좋은 침대에서만 잤더라면 7, 80년대를 겪어내는 데 좀 힘들었을 거에요. 그런 데서 인생을 막 굴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요.  70년대 한 노동자가 청계천에서 '일꾼들도 사람이다'는 말을 하면서 기름을 붓고 태워서 죽었는데, 그 때 나는 늘 내 죽음만 생각했어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나 같은 게 이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났나, 나는 빨리 이 세상에서 끝나야 할 존재다'라는 둥 늘 죽음을 생각하고 실천하다가 실패하곤 했었죠. 그랬는데 그 때 이 노동자의 죽음이 신문에 났어요. 이 자가 죽었는데 뭐냐 하며, 내 죽음하고 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슬슬 그 사람의 죽음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죽음의 환경이 되어 있는 우리 현실이 확 나한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불면증이 없어졌어요. 잘 자고 코도 잘 골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는 등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6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3년을 산 적이 있는데, 원래 그 때는 살러 간 게 아니고 제주도 바다에 빠져죽으러 갔다가 너무 취해서 죽는 걸 잊어 버렸어요. 가방 속의 큰돌에 로프를 묶어가지고 내 허리에 묶어서 저 깊이 심해로 들어가, 안 떠오르도록 하려 마음먹었지요. 제주해협이 그때처럼 호수처럼 거울처럼 된 적이 없었습니다. 파도가 부드러워진 걸 젠틀 웨이브(신사 파도)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거울 같았습니다. 때마침 달은 비치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배 안의 매점에서 파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아무 명징한 이성만이 발달했습니다. 내가 죽음의 앞에 있으니까 술조차도 거절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바다의 공기가 좋아서 그렇게 취하지 않았다더군요. 계속 마셔댔는데 취하지 않고 결국 쓰러져 버렸지요. 부우 하는 뱃고동 소리에 깨어나 보니까 항구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매고 죽는 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며 제주에 살게 되었지요.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다음에 읽어드릴 시의 배경의 일단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70년대를 지나면서 옛날의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해 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90년대에 들어서 그 두 가지 다른 방법을 종합해서 다른 시세계를 지향하려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세상을 다니기도 하고 여러 유혹도 있었습니다만, 나는 내 조국의 기호로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모국어는 참으로 심란스러운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주장에 이어, 심지어는 우리말을 없애 버리고 영어만을 쓰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저러면 저런 주장들이 나왔겠는가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가 열려진 상태일수록 우리 민족의 실체를 유지해준 우리 모국어는 꼭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우리 모국어를 지키는 한 전사가 될 생각입니다. 우리말 없이는 세상과 만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결코 단일한 구조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은 여러 민족, 다른 성, 다른 얼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多)'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다문화 정책을 쓰지 않습니까. 이런 때 우리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민족 이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맙니다. 미국의 동부, 혹은 뉴욕에서 한국 사람이 한국 문화를 그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포들이 어려운 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해서 의사도 많이 배출하고 부자들도 많이 나왔습니다만, 이 점에서는 철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중국인, 일본인들은 우리와 달리 그들의 문화를 서구 사회에서 드높이 펼쳐 나갑니다. 문화 없이는 넓은 세상에 나가서 행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도구로서도 우리의 모국어와 문화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큰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시는 현실과 허구의 직조로 졸시 '폐결핵'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화가 친구에게 준 것입니다. 이십대에 이미 조선일보사의 현대작가 초대전에도 초대받은 친군데, 그가 막 출범한 현대시인협회에 보낸 것입니다.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짓드 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번의 긴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버린다. 오늘 하루의 이 오후에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긴 기도와 소름 끼는 아래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언제나 실크빛 연애나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 누님이 보고 있다 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 화장(化粧)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이 시는 현실과 허구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현실과 허구가 서로 섞여 버린 것이죠.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화가 저도 모르게 역사로 돌아오고 역사인가 하면 다시 신화의 세계로 가는 걸 봅니다. 다른 나라의 상고사를 보면 어느 날은 전설이었다가, 다시 역사로 오고 하는 걸 봅니다. 현실과 허구가 분화되지 않은 어떤 미칠 듯한 애매몽롱한 아주 불확실한 상태죠. 우리가 세상살이를 해나갈 때는 대체로 이분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허구는 따로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지금 진행되고 있고 이렇죠.  이 시는 허구이자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저는 폐결핵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60년대까지만 해도 폐결핵이라면 민법상 장가 가고 시집갈 자격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민법상의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기침하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평론가들 사이에 '고은의 누이 콤플렉스'라는 말이 오갔습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십이 넘어서 건강 진단을 해보았는데, 그때 비로소 한쪽 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떠돌고 술만 먹고 하는 사이에 폐결핵이 찾아왔다가 떠나 버린 거지요. 그런 걸 보면 내가 염원하던 허구, 그것이 나중에 현실로 된 것입니다. 한 시인의 꿈이 냉엄한 현실로 진행된 거지요. 이것이 곧 문학을 이해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제주도 시대의 '묘지송(墓地頌)'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참 무덤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곳이든 가면 그곳의 무덤을 세어 보곤 합니다. 이것은 제주도 사라봉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씌어진 시입니다. 중앙의 잡지에 발표되면 그것으로 한 달을 위안을 받고 살던 시절, 시인 김수영이 좋다고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지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 자손은 차례차례로 오리라. 지난 밤 모든 벌레 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 가을 아침 재보(財寶)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 햇빛이 더 멀리서 내려와 잔디 끝은 희게 바래고 올 이른 봄 할미꽃 자리 가까이 며칠 만의 산국화가 모여 피어 있구나. 그대들이 지켰던 것은 비슷비슷하게 사라지고 몇 군데의 묘비(墓碑)는 놀라면서 산다. 그대들이 살았던 이 세상에는 그대의 뼈가 까마귀 깃처럼 운다 하더라도 이 가을 진정한 슬픈 일은 아니리라. 오직 살아 있는 남자에게만 가을은 집 없는 산길을 헤매이게 한다 그대들은 이 세상을 마치고 작은 제일(祭日) 하나를 남겼을 뿐 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옛날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잘못인지 노랑나비가 낮게 날아가며 이 가을 한 무덤 위에서 자꾸만 저 하늘에 뒤가 있다고 일러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들은 이 무덤에 있을 뿐 그대 자손은 곧 오리라 인생 자체가 돌아보면 어리석고 유치합니다. 그러나 또 돌아오면 치졸하고 졸렬했다고 생각하면서 후회 몇 번 하면 끝나 버리기 십상이죠. 제주도에 가서 뭔가 획 트이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걸 개안(開眼)이라고 하죠. 그 개안이 좀 있었는데, 지금 보면 졸렬합니다. 그게 내 시로서는 한 단계를 올라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여러분 앞에서 시에 대해 진지하고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제 개인을 통해서 어떻게 굴절하고 어떻게 변모되고 이끌어져 왔는가를 얘기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시의 구체성이 다가가기 바랍니다. 제가 아까 이론을 거부한 이유가 이것이죠. 그때 죽으러 제주도에 갔는데, 구 죽음이 새로 삶을 살게 해준 은총을 받았죠. 그래서 「해변의 운문집」과 「제주가집」이라는 두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쓴 '내 아내의 농업(農業)'이라는 시입니다. 이미 날이 저문다. 시장기 든 해거름의 일꾼들이 돌아온다. 어떤 장님도 눈을 뜨게 한다. 풀밭에서 온 이웃집 목우(牧牛)는 긴 입안이 가득하게 헛새김질을 한다. 제 주인의 잘못을 오래오래 걱정할 때도 있다. 청과물 장에 짐을 부리고 온 내 만혼(晩婚)의 처음, 아직 아내는 들에서 오지 않았다. 나는 미농(美濃) 무우로 담근 깍두기와 찬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홍차를 마실 것이다. 첫딸의 이름은 아내의 허리에 달아두려 한다. 러시아의 부칭(父稱)을 넣지 않으련다. 이제 바다는 만조일 것이다. 아내의 수건 벗은 새벽머리로부터 이 세계는 어두워 온다. 이윽고 그녀가 먼 들길을 건너올 때, 우리 나라의 별똥이 그 위에 흐른다. 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망을 뒤늦게 표현한다. 아내의 손발이 얼마나 텄을까. 오늘 장에서 신(神) 같은 크리임을 사왔다. 이제 내가 찾을 아내 의 가슴은 죄송한 내실(內室)에 있다. 오직 입을 다물고 해산을 기다릴 뿐, 아내의 농업은 어디로 떠날 수 없도록 교목(喬木)을 섬긴다. 저 멀리 미혼(未婚)의 기적 소리가 들린다. 이제 아내는 한   쪽 귀를 떨며 작은 문을 연다. 그네의 모습은 내가 끝없이 반기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바다는 만조(滿潮)일 것이다 그리고 3년 살고 서울에 왔습니다. 제주도 체험을 통해서 언어를 희화화시켜 보곤 했습니다. 우리가 천천히 살아가면서 변화시켜온 언어라는 습관 자체가 우리를 얼마나 살려주고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언어와 그 후의 언어는 크게 다릅니다. 지극히 부드러웠던 언어가 임진왜란이라는 격렬한 전쟁을 치름으로 인해서, 언어가 아주 세게 바꿔집니다. 백년 후의 언어는 분명히 오늘과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현대문학 초창기의 현진건, 나도향 등의 언어는 지금 읽어보면 지루하기마저 하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언어의 맛이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서울로 와서 새로 지은 시 '종로'는 이렇습니다. 나 여기 한동안 어이할 수 없이 서 있노라 모든 지나가는 것들아 비탄 한 꾸러미씩 매판 한 꾸러미씩 사가지고 가는 것들아 현실 궤멸하라 현길 궤멸하라 나 여기 한동안 서 있노라 모든 딱한 것들아 내 가슴에 한국 청산가리를 칠하고 펄쩍펄쩍 날뛰는 아픔으로  백년 이래의 온갖 한을 불태우노라 나 여기 한동안 어이할 수 없이 서 있노라 다 지나가 버리고 문짝들이 저마다 사리사욕 닫혀 버리고 마도의 향불 내오나 내오나 이윽고 너도 꺼지고  내 빈 대머리로 종로 인경을 치노라 밤새도록 점잖은 것들아 무지몽매야 전압 덩어리 서해 복판 이르기까지 울부짖는 인경 밑에 내 흰 뇌수를 뿌리노라 꽂히노라 현실 궤멸하라 현실 궤멸하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해방이 되면 모든 것을 종로 인경에 부딪치겠다'는 이미지가 여기에 담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라가 '시와 정치'라는 책을 통해 알렸지요. 나는 종로에 와서 현실을 감당할 수 없고, 뭔가 고쳐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니힐'(허무)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제 경우는 전쟁 세대로 절반밖에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원죄의식이 있지요. 친구들의 죽음 덕분에 살아남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저는 돌아보면 폐허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존적인 허무가 좋아서 60년대적인 허무를 간직하고 살다가 70년 벽두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것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70년대에 쓴 '문의마을에 가서'를 읽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이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번씩 귀를 닦고 길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섦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 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그 무엇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너의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   임창현「할아버지 그리고 우리들을 위한 시」부분   새 해가 되었다고 새 사람 되어지는 것도 아니지. 새해란 한 발 더 죽을 준비를 해야 하는 때, 여보게 친구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서둘러 준비해야지 살아있는 동안 친구야, 남는 건 친구와 아내라더라 올해는 죽마고우 관포지교 찾아보며 살아보세나 기름만 넣고나면 떠나가는 친구, 주유소 친구 그런 친구 말고 걸어가도 좋으니 같이 갈 그런 친구 되어주며 살아보세나 올해는 그런 맘으로 그렇게 살아보세나    임창현  (1938 - )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들을 위한 시」부분 죽마고우, 관포지교를 얘기하다 갑자기 현대로 뛰어넘어 주유소 친구라니 어리둥절하다. 조금 더 읽어보면 아하 주유소 친구란 기름만 넣고 떠나가는 친구, 자기 실속만 챙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였구나 하고 웃게 된다. 시인은 새해엔 죽을 준비를 하라고 한다. 그 준비란 주유소 친구가 아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또 그런 친구를 만드는 거란다. 시인이 시로 들려주는 설날 덕담이다.    
1681    "말똥가리" 스웨덴 시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댓글:  조회:4581  추천:0  2016-10-20
출생일 1931년 4월 15일 사망일 2015년 3월 26일 국적 스웨덴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수상 2011년 노벨문학상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詩賞), 노이슈타트 국제 문학상 등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출신의 시인이다.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psychologist)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에서부터 70대에 이른 현재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한마디로 ‘홀로 깊어 열리는 시’ 혹은 ‘심연으로 치솟기’의 시이다. 또는 ‘세상 뒤집어 보기’의 시이다. 그의 수많은 ‘눈들’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시 한편 한편이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하다.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지만, 처녀작에서는 잠 깨어남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전도되어 있다. 초기 시에서 깨어남의 과정이 상승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 낙하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하강의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綠陰)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 스웨덴 자연시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 후 더 개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해졌다. 그리고 세상을 높은 곳에서 신비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연 세계를 세밀하고 예리한 초점으로 묘사하는 그를 스웨덴에서는 '말똥가리 시인'이라고 부른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서구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연 스웨덴의 국민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는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 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북구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냈다.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이러한 시작(詩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보여준 일관된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결코 서두름 없이, 또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고요한 깊이의 시 혹은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2015년 3월 26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90년대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다 끝내 2011년 수상의 영예를 안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1996년 폴란드의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이후 15년 만에 탄생한 시인 수상자였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시작 활동과 더불어 심리학자로서 약물 중독자들을 상대로 한 사회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트란스트뢰메르가 보는 이 세상은 ‘미완의 천국’이다. 낙원을 만드는 것은 결국 시인과 독자들, 자연과 문명, 그리고 모든 이분법적 대립구조들 사이의 화해와 조화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벨상 수상후보이자 스웨덴을 대표하는 트란스트뢰메르 시집의 국내 출간은 경하할 만한 일이다. 이 세상의 끝, 등 푸른 물고기들이 뛰노는 베링 해협이 산출한 시를 통해 한국 독자들은 미지의 세계로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꿈꾸는 방랑자들이기에. -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순간에 대한 강렬한 집중을 통하여 신비와 경이의 시적 공간을 구축하면서 우리들의 비루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의 시는 말똥가리처럼 세상을 높은 지점에서 일종의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되, 지상의 자연세계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춘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인생의 빛나는 종합을 성취하였으며 자연과 초월과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작품에서 사용하는 은유는 다른 대상을 빌려서 표현하는 것이 아닌, 표현하려는 대상 자체를 언어적으로 변형한 것에 가깝다.   문학계의 초현실주의 작풍과 연결되어 있는 그의 시는 일견 이해할 것 같으면서 동시에 불가사의한 면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버지는 언론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외가에서 살게 되었다. 청년 시절 당시 스웨덴의 병역의무에 따라 군대를 다녀왔다. 최초의 시 모음집 〈17편의 시 17 dikter〉(1954)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절제된 언어와 놀라운 형상화를 보여주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56년 스톡홀름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심리학자이자 사회복지사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어진 그의 시집들, 곧 〈여정의 비밀 Hemligheter påvgen〉(1958), 〈미완의 천국 Den halvfärdiga himlen〉(1962), 〈반향과 흔적 Klanger och spår〉(1966)들은 화법이 좀 더 분명해지고 작가적 시각도 뚜렸해졌다. 이러한 시집들과 후기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시적 관찰은 극도의 간결함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의미적으로도 풍부함을 더했다. 한 비평가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들은 음향적으로 완벽한 실내악이다. 그 안에서 모든 모순된 떨림들을 긴장감 없이 들을 수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신세대 시인들과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시에 정치적 메시지가 결여되어 있다며 그를 비난했다. 1960년대 그는 미국 시인 로버트 블라이와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고, 이후 블라이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앞장섰다. 블라이가 처음으로 전권을 번역한 시집 〈어둠 속에서 보기 Mörkerseende〉(1970, 영문판 제목은 Night Vision)는 , 트란스트뢰메르가 스웨덴의 시인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보낼 당시에 쓰여진 시들이었다. 그가 1973년에 펴낸 〈작은 길 Stigar〉에는 블라이의 작품 몇 개가 스웨덴 어로 번역되어 함께 실렸다. 소년 시절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발트 해안은 〈발틱스 Östersjöar〉(1974)라는 시집의 배경이 되고 있다. 후기 작품으로 〈진실의 장벽 Sanningsbarriären〉(1978), 〈와일드 마켓플레이스 Det vilda torget〉(1983),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För levande och döda〉(1989) 등이 있다. 1990년 트란스트뢰메르는 노이스타드 국제문학상을 수상했으나 같은 해 뇌졸중에 걸려서 말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건강 상태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회고록 〈기억이 나를 본다 Minnena ser mig〉(1993), 2권의 시집 〈슬픔의 곤돌라 Sorgegondolen〉(1996)와 〈거대한 수수께끼 Den stora gåtan〉(2004, 모음집)를 출판했다. 〈곤돌라의 슬픔〉은 프란츠 리스트의 〈슬픔의 곤돌라 La lugubre gondola〉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2011년에는 〈시와 산문 1954~2004 Dikter och prosa 1954~2004〉을 발간했다. 직접적인 언어와 강력한 이미지로 만들어진 그의 시작품은 그를 20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번역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시인으로 만들었다. 블라이가 번역하여 세상에 나온 트란스트뢰메르의 모음집들에는 〈친구여, 어둠을 마셨는가 : 3인의 스웨덴 시인들, 하리 마르틴손, 군나르 에켈뢰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Friends, You Drank Some Darkness: Three Swedish Poets, Harry Martinson, Gunnar Ekelöf, and Tomas Tranströmer〉(1975),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1954~86년의 시선집 Tomas Tranströmer: Selected Poems 1954~86〉(1987, 다른 번역자들과 공동번역), 〈미완의 천국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명시 The Half-Finished Heaven: The Best Poems of Tomas Tranströmer〉(2001)가 포함되어 있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다른 많은 언어로 번역되였다. ================================= 후주곡(後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움켜잡는 갈고리처럼 세상의 바닥을 질질 끌며 걷는다. 내게 필요 없는 모든 것들이 걸린다. 피로한 분개, 타오르는 체념. 사형집행관들이 돌을 준비하고, 신이 모래 속에 글을 쓴다. 조용한 방. 달빛 속에 가구들이 날아갈 듯 서 있다. 천천히 나 자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텅 빈 갑옷의 숲을 통하여.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서곡(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깨어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샹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정오의 해빙/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아침 공기가 타오르는 우표를 붙인 자기 편지를 배달했다. 눈(雪)이 빛났고, 모든 집들이 가벼웠졌다. 일 킬로그램은 칠백그램 밖에 나가지 않았다. 태양이 빙판 위로 높이 솟아, 따뜻하면서도 추운 지점을 배회했다. 마치 유모차를 밀듯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나왔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왔고, 수세기 만에 처음인 듯 탁 트인 하늘을 보았다. 우리는 마음을 아주 사로잡는 이야기의 첫 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꿀벌 위의 꽃가루처럼 모피모자마다 햇살이 달라붙었고, 햇살은 겨울이라는 이름에 달라붙어, 겨울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 위의 통나무 정물화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물었다. '내 유년시절까지 따라올래?' 통나무들이 대답했다. '응' 잡목 덤불 속에는 새로운 언어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있었다. 모음은 푸른 하늘, 자음은 검은 잔가지들, 그리고 건네는 말들은 눈 위에 부드러웠다. 하지만 소음의 스커트 자락으로 예(禮)를 갖춰 인사하는 제트기가 땅 위의 정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未完의 천국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켠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 이경수 번역  에필로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십이월. 스웨덴은 해변에 정박한 삭구(索具)를 뗀 배. 황혼의 하늘을 배경으로 돛대가 날카롭다. 황혼이 낮보다 오래 지속되고, 이곳의 길은 돌투성이. 정오가 지나야 빛이 도착하고, 겨울의 콜로세움이 비현실적인 구름의 빛을 받아 솟아오른다. 즉각 흰 연기가 마을에서 구불구불 치솟는다. 구름이 높고 또 높다. 바다는 다른 무엇에 귀 기울이는 듯 흐트러진 모습으로, 하늘나무의 뿌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영혼의 어두운 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들어, 잠든 자들을 울음으로 깨운다. 굴절 만원경이 몸을 돌려, 다른 시간을 불러들인다. 때는 여름이다. 산들이 빛으로 부풀어 포효하고, 시냇물이 투명한 손으로 태양의 광휘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영사기의 필름이 다 돌아갔을 때처럼.) 저녁별이 구름 사이로 불탄다. 집들, 나무들, 울타리들이 어둠의 소리없는 눈사태 속에 확대된다. 별 아래 또 다른 숨겨진 풍경이 자꾸자꾸 모습을 드러낸다. 밤의 엑스선에 비친 등고선의 삶을 사는 비밀의 풍경들, 그림자 하나가 집들 사이로 썰매를 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 여섯시, 바람이 일단의 기병대처럼 어둠 속 마음의 길거리를 따라 천둥처럼 질주한다. 검은 소동이 어찌나 반향하고 메아리치는지! 집들이 꿈속의 소동처럼 부동(不動)의 춤을 추며 덫에 걸려 있다. 강풍 위에 강풍이 만(灣) 위를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머리를 까딱거리는 난바다 쪽으로 빠져나간다. 우주공간에서 별들이 필사적인 신호를 보낸다. 별들은 영혼 속을 배회하는 과거의 구름들처럼, 자신이 빛을 가릴 때에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곤두박이 구름들에 의해 명멸한다. 마구간 벽을 지나면서 나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병든 말이 안에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폭풍이 자리를 뜬다. 부서진 대문이 쾅쾅 소리를 내고, 램프가 손에서 대롱거리고, 산 위의 짐승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다.폭풍이 퇴각하면서 외양간 지붕 위에 천둥이 구르고, 전화선들이 포효하고, 지붕 위의 타일들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나무들이 속절없이 머리를 까딱거린다.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파이프 소리가 길을 걷는다! 해방자들의 행렬! 숲의 행진! 활 같은 파도가 들끓고, 어둠이 꿈틀대고, 수륙(水陸)이 움직인다. 갑판 밑으로 사라져 죽은 자들, 그들이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다. 항해는, 야성의 돌진이 아니고 고요한 안전을 가져다주는 여행. 세계가 끊임없이 텐트를 새롭게 친다. 어느 여름날 바람이 상수리 나무 장비를 움켜잡고, 지구를 앞으로 민다. 백합이 연못의 포옹 속에서, 날아가는 연못의 포옹 속에서 감추어진 물갈퀴로 헤엄친다. 표석(漂石)이 우주의 홀에서 굴러내린다. 여름날 황혼에 섬들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다. 옛 마을들이 길을 간다. 까치소리 내는 계절의 바퀴를 타고 숲 속 깊숙한 곳으로 퇴각한다. 한 해가 자기 부츠를 벗어던지고 태양이 높이 솟아오를 때, 나무들은 잎사귀로 피어나 바람을 받고 자유의 항해를 떠난다. 산 아래 솔숲 파도가 부서지지만, 여름의 깊고 따뜻한 큰 파도가 오고, 큰 파도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들 사이를 흐르고, 일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라앉는다. 남는 건 잎사귀 없는 해안뿐. 결국, 성령(聖靈)은 나일강 같은 것, 여러 시대의 텍스트들이 궁리한 리듬에 따라 넘치고 가라앉는다. 하지만 신(神)은 또한 불변의 존재이고, 따라서 이곳에선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다. 신은 옆구리로부터 행렬의 진로를 가로지른다. 기선(氣船)이 안개 속을 통과할 때 안개가 알아채지 못하듯. 정적. 등불의 희미한 깜빡거림이 그 신호. 답장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책상 맨 밑바닥 서랍에서 26년 전에 처음 도착한 편지를 만난다. 겁에 질린 편지, 편지는 두 번째 도착한 지금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 집에 다섯 개의 창이 있다 창을 통하여 낮이 청명하고 고요하게 빛 난다. 다섯 번째 창은 검은 하늘, 천둥 그리고 구름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다섯번 째 창에 선다. 편지. 때로는 화요일 수요일 사이에 심연이 열리기도 하지만, 26년은 한순 간에 지나갈 수도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더 미로 같은 것이어서, 만일 적절한 곳에서 벽에 바짝 붙어선다면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저 반대편에서 자기 자신이 걸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편지에 답장을 보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 전 일이었다. 헤 아릴 수 없는 바다의 문지방들이 이동을 계속했다. 팔월 젖은 풀 속의 두 꺼비처럼 심장이 순간순간 고동치기를 계속했다. 답장 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나쁜 날씨를 약속하는 솜털 구름처럼 쌓여 간다. 편지들이 햇빛의 광택을 잃게 한다. 어느 날 답장을 보내리라. 어느 날 내가 죽어 마침내 집중할 수 있을 때 혹은 적어도 나 자신을 다 시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대도시의 125번 가에 갓 도착하여, 바람 속에 춤추는 쓰레기들의 거리를 내가 다시 걸 을 때, 가던 길을 벗어나 군중 속으로 사라지기를 사랑하는 나, 끝없는 텍스트 대중 속의 하나의 대문자 T. 사물의 맥락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돌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우리가 던진 돌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희박한 대기 속에서 입을 다문 돌들이 산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제비처럽 미끄러져, 마침내 존재의 변경지대 머나먼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동요받은 명상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밤의 어둠 속, 아무것도 갈지 않으면서 폭풍이 풍차의 날개를 사납게 돌린다. 동일한 법칙에 따라 그대는 잠깨어 있다. 회색의 상어 배가 그대의 가냘픈 램프. 형체없는 기억들이 바다 바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낯선 조상으로 굳어진다. 해조가 들러붙어 그대의 노걸이는 녹색. 바다로 가는 자가 돌이 되어 돌아온다.  
1680    폴란드 녀류시인 -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댓글:  조회:4577  추천:0  2016-10-20
폴란드의 여성 시인 비수아바 심보르스카(Wis awa Szymborska)는 1996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될 때까지 국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폴란드에서 시집 7권을 발표한 이 은둔자는 기법의 미묘함 때문에 번역하기 어려운 시인이라고 알려져왔으나, 그녀의 시집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영어판 시집으로는 〈소리, 느낌, 생각 Sounds, Feelings, Thoughts〉(1981), 〈다리 위의 사람들 People on a Bridge〉(1990), 〈모래알이 있는 풍경 View with a Grain of Sand〉(1995) 등이 출간되었다. 198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계 미국 시인 체슬라프 미워시 같은 논평자들은 심보르스카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온 폴란드 시의 탁월함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논평했다. 심보르스카는 동료 시인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및 타데우슈 로제비치와 함께 현대 폴란드의 투쟁, 즉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소련 점령,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스탈린주의, 계엄령, 민주화 등을 증언했다. 그러나 심보르스카는 고도의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욕망과 강렬한 휴머니즘으로 이것을 부드럽게 조율했다. 심보르스카는 개인적인 문제에 보편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폴란드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된다. 그녀의 시에서는 일상적인 것들이 더 넓은 배경 속에서 철저히 재검토된다. 섬세한 그녀의 문체는 재치와 깊이와 초연함에서는 고전적이지만, 아이러니와 냉담함에서는 현대적이다. 또한 꾸밈없는 언어가 곁가지를 모두 제거하고 대상을 향해 곧장 나아가는데, 이것은 1950년대 중엽에 동유럽 시문학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어조는 잔뜩 비꼬는 대화체인 경우가 많다.   그녀의 진솔한 언어는 구성과 내용 속에 복잡한 생각을 숨기고 있다. 〈가장 야릇한 세 낱말 The Three Oddest Words〉(1996)은 이 숨겨진 심오함을 예증하고 있다.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첫 음절은 이미 과거에 속해 있다./내가 '침묵'이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나는 그것을 깨뜨린다./내가 '무(無)'라는 낱말을 발음할 때/나는 비존재가 결코 지닐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심보르스카는 1923년 7월 2일 폴란드 서부의 포즈나인 근처에 있는 브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1년부터 크라쿠프에 살았고, 1945~48년에는 크라쿠프의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녀의 시는 1945년에 잡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1952년에 첫 시집이 나온 데 이어 1954년에 2번째 시집이 나왔지만, 심보르스카는 이 두 시집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맹목적으로 헌신했다는 이유로 이 시집들을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줄곧 제외시켜왔다. 소련이 검열을 완화한 뒤에 처음 출간된 시집 〈예티에게 외치다 Wo anie do Yeti〉(1957)는 표제 인물인 설인(雪人) 예티를 통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후에 나온 시집으로는 〈소금 Sól〉(1962)과 〈끝없는 재미 Sto pociech〉(1967) 등이 있다. 〈아마 Wszelki Wypadek〉(1972)의 표제작은 그가 자주 다루는 주제인 우연을 검토하고 있으며 후기 시집으로 〈큰 수(數) Wielka liczba〉(1977), 〈끝과 시작 Koniec i pocz tek〉(1993) 등이 있다.   1953~81년 심보르스카는 주간지 〈문학생활 Zycie literackie〉에 〈과외 독서 Lektury nadobowiazkowe〉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 글들은 1973, 1981, 1992년에 책으로 묶여 나왔다. 1980년대에 심보르스카는 〈아르카 Arka〉와 〈쿨투라 Kultura〉라는 잡지에 기고했는데, 〈쿨투라〉는 프랑스 파리에서 발간되는 폴란드 망명 문학 잡지였다. 심보르스카는 16,17세기의 프랑스 시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저명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쉼보르스카, 시를 쓰는 이유 그리고 우리, 사는 이유   이미 오래전부터 던져진 수 많은 질문. 나는 누구이며, 왜 이 곳에 있는지, 수 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을 잡을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믿고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그런데 왜 살아야하는 건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는, 너무 오래되어 꼬깃꼬깃 해진 질문 쪽지들은 마음의 상자 속에 넘쳐난다. 터질 것 같은 질문 상자는 현실과 게으름과 회의라는 이름의 끈으로 꽁꽁 싸매진다. 질문상자는 질긴 끈 무더기로 완전히 덮혀진것 같다. 하지만 불완전한 끈은 가끔 끊어지기도 한다. 그건 인생의 몇 번의 기회. 우리가 끊어진 끈만을 보며 당황하고 있을때, 질문상자 틈으로 삐져나온, 우리의 탓으로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진 질문 쪽지. 우리는 거기에 쓰여진 질문을, 질문의 의미를 읽어야한다. 그리고 상자 안에 있는 모든 질문 쪽지를 끄집어 내야한다. 그리하여 상자를 꽁꽁 싸매고 있던 끈을 허물어 뜨려야한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한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운 물음표 가운데 단 하나의 마침표가 있다. "나는 모르겠어." 그것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   시 - 시란 이런 것. 이미 떨어진 질문에 대한 불확실한 많은 대답. 몰라, 정말 모르겠어. 이 생각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명을 지켜주는 난간인 양. (시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   그는 "나는 모르겠어."라는 징표를 가지고 정답이 없는 수많은 질문들과 대면하며 답하기를 시도한다. '혼자 자신의 방에서, 자신으로부터의 그 모든 망또와 야한 것들과 다른 시적인 액세서리들을 내 던지고, 침묵 속에 서서' 그는 시를 쓴다.   Non omnis moriar - 시기상조의 고통 내가 완전하게 사는지, 그게 충분한지. 그 어느 때도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 더욱, 버리면서 고른다,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는 어느 때보다도 버리는 것이 더 많고, 더 빽빽하고, 더 성가시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의 대가로 - 짧은 시, 한숨. (큰 수)   (Non omnis moriar- '나는 완전히 죽지는 않을 거다'라는 뜻)   침묵 속, 아무것도 씌여있지 않은 종이 쪽지에 숲이 만들어지고, 눈이 내리고, 나비가 날고, 이내 사라진다. 짧고 긴 순간동안, 한 장면은 살아나기도 했다가 모조리 지워지고, 운이 좋은 어떤 것은 살아남기도 한다. 그 시간, 연필을 쥔 그의 손이 신이다.  재료는 오직 하나, 단어. 그의 단어들은 수 많은 생각 끝에 아무것도 씌여있지 않던 종이에 '무엇'을 만들어낸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지 않는 일상적인 말에선, 모두 이런 표현을 씁니다 : "평범한 세상" "평범한 인생" "평범한 물건의 계열" ......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재는 시어에서는 그 어느 것도 보통이고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돌도, 그 위의 어느 구름도, 어느 낮도 그리고 어느 그 다음 밤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의 어떤 누구의 존재도. (시인과 세계 -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비록 일상에선 평범한 단어라도 그의 시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시어가 되듯이, 일상의 모든 것들 -  구름, 고양이, 모래 알갱이들, 감정들 - 모두 특별하다. '만일 우리가 놀랄 시간만 있다면!' 세상의 놀라움에 숨이 막힐걸. 그는 '나는 모르겠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한꺼풀 벗겨진 밝은 눈으로 세계를 본다.  세상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그러나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있는 '세상의 정다운 무관심'을, 세상이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모래위 손톱자국'같은 인간의 생을, 그 잠깐의 생 한가운데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을,  우리는 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름이 없이 만족스럽다. 보편적인, 특별한, 스쳐 지나가는, 오래 남는, 잘못된 것이든, 적당한 것이든.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그들의 고유성이란 모양, 색의 농담, 자세, 배열을  결국 되풀이 하지 않는 것. (구름)   그래서 넌 - 흘러가야만 해 흘러간 것은 - 아름다우니까 (두 번이란 없다)   얼마나 많은 별들 아래서 사람이 태어나는지, 얼마나 많은 별들 아래서 짧은 순간 후에 죽어 가는지. (과잉)   서로 거짓말하지 말자.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다고. (증오)   미소하며, 포옹하며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방울의 영롱한 물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두 번이란 없다)   새벽 네시에는 누구도 기분이 좋지 않다. 만약 새벽 네시에 개미들이 기분이 좋다면 - 우리는 개미들을 축하해 주자. 우리가 계속 살려면 다섯시를 오도록 하라. (새벽 네시)   존재가 자신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그 가능성조차 고려하는 것을 좋아한다. (선택의 가능성)   그는 자신의 시 '다리위의 사람들' 에서 '시간에 굴복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그림 - 색깔도 모양도 변하지 않는 구름과 더이상 내리지 않는 빗줄기 속 다리 위에 멈춰서 있는 사람들 - 을 보며 '영원'에 대해 논한다.    여기 와서는 점잖게 이 그림을 높이 평가하며, 그것에 감탄하고 대대손손 감동한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겐 빗소리도 들리고 목덜미와 등에 물방울의 냉기를 느끼며, 다리 위의 사람들을 쳐다본다. 자기 자신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달림 속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끝이 없는 길, 영원히 가야 할 길. 그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그들은 오만하게 믿는다. (다리위의 사람들)   그러므로 위대한 시인 쉼보르스카는, 그들의 그림을 보는 방식처럼,  내가 그의 시를 과장되게 반응하고 분석하고 평가내리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쉼보르스카의 시라도, 더이상 건드리지 말고 그의 페이지를 나는 미련 없이 덮어야한다. 그리고 미루고 미뤄왔던 일, 나의 페이지를 펼쳐야한다. 한 밤의 침묵 속에 자신을 내던져야한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쓰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나를 깨운 건, 어느 비 내리는 새벽,  낑낑거리는 개의 울음소리와 신문 배달부의 기척이었다.   아하, "그림을 보는 사람들!  시선을 조금만 돌려 창밖을 보세요.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안 보이나요?'     [출처] [본문스크랩] [가을에 읽는 시] 쉼보르스카,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작성자 하늘정원     두 번이란 없다 / 비수아바 쉼보르스카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인생의 학교에서는  꼴찌를 하더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같은 공부는 할 수 없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 밤도 없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하나 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  어제, 누군가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겐 열린 창으로  던져진 장미처럼 느껴졌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난 얼굴을 벽 쪽으로 돌려버렸네  장미? 장미는 어떻게 보이지?  꽃인가? 혹 돌은 아닐까?  악의에 찬 시간 너는 왜  쓸데없는 불안에 휩싸이니?  그래서 넌······흘러가야만 해  흘러간 것은······아름다우니까  미소하며, 포옹하며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방울의  영롱한 물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1679    고대 그리스 녀류시인 ㅡ 사포 댓글:  조회:4627  추천:0  2016-10-20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국적 그리스 요약 사포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추앙받고 있다. 독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그리스 문학사상 아르킬로코스와 알카이오스를 빼고는 어느 시인보다도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대부분 문어가 아닌 일상 속어로 작품을 썼으며, 간결하고 직선적이며 사실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시의 주된 주제는 애정, 질투, 증오 등이었으며, 그녀의 시가 생전에 그리고 그 뒤 3, 4세기 동안 어떻게 발간되고 유포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활동하던 시기에 남아 있던 그녀의 작품은 서정시 9권과 비가 1권의 표준판으로 엮어져 나왔으나, 이 판은 중세 초기에 소실되었다.  AD 8, 9세기 무렵에는 다른 작가의 인용문을 통해서만 작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28행으로 된 시 한 편만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그다음으로 긴 것이 16행이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추앙받고 있다. 독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그리스 문학사상 아르킬로코스와 알카이오스를 빼고는 어느 시인보다도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대부분 문어가 아닌 일상 속어로 작품을 썼으며, 간결하고 직선적이며 사실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자신의 환희와 고통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비교적 냉정하게 표현됨에도 불구하고 힘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안드로스 섬 출신의 부자인 케르콜라스와 결혼했다고 전해지며, 다른 귀족들과 함께 추방되어 한동안 시칠리아에 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아마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에서 살았다. 그녀의 주제는 항상 개인적인 것으로, 카락소스에 대해 쓴 시도 몇 편 있지만, 주로 다른 여성들과의 우정이나 반목을 다룬 것이었다. 동시대의 알카이오스의 시에 그처럼 자주 나온 당시의 정치적 소요에 대해 분명하게 시사하는 귀절이 들어 있는 그녀의 시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레스보스에는 양가집 여성이 격식을 따지지 않는 사교모임을 갖고 한가하게 우아한 오락을 즐기는, 특히 시를 짓고 읊으면서 소일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사교모임 가운데 하나를 이끌던 사포 주위에는 많은 숭배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먼 곳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의 시의 주된 주제는 그러한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무르익던 애정·질투·증오 등이다.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모임들을 경멸조로 또는 맹렬히 공격하기도 했다. 대개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다른 여성들을 대상으로, 그녀는 온화한 애정에서부터 열렬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많은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고대 작가들은 그녀가 동성연애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시들은 그녀가 다른 여성들에 대해 단순한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시 가운데 그녀나 그녀와 어울린 여성들이 동성연애자였다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그녀의 시가 생전에 그리고 그뒤 3, 4세기 동안 어떻게 발간되고 유포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활동하던 시기(특히 BC 3세기와 2세기)에 남아 있던 그녀의 작품은 서정시 9권과 비가 1권의 표준판으로 엮어져 나왔으나, 이 판은 중세 초기에 소실되었다. AD 8, 9세기 무렵에는 다른 작가의 인용문을 통해서만 작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28행으로 된 시 한 편만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그다음으로 긴 것은 16행짜리였다. 1898년 이후 파피루스가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단편의 수는 크게 늘어났지만, 한 편도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지는 못했으며, 인용문으로 남아 있는 단편 가운데 28행과 16행짜리만큼 높은 수준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   δέδυκε μὲν ἀ σελάννα καὶ Πληΐαδες, μέσαι δὲ νύκτες, παρὰ δ' ἔρχετ' ὤρα, ἔγω δὲ μόνα κατεύδω.  달은 사라지고 / 플레이아데스도 떠나, 밤의 한가운데, 시간은 흐르고, / 그리고 나는 홀로 잠드네. Σαπφώ, Sappho 고대 그리스의 여류시인. 레즈보스 섬 출신이다. 페온이라는 어부에게 반했다가 상사병으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설이 분분해서 늙어가는 자신을 슬퍼해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하여튼 정설은 없다.  알려져있는 가장 오래된 여류시인. 하지만 그녀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적은데다가 그녀의 시도 대부분은 파손돼서 일부 조각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동성인 여성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때문에 그녀가 태어난 레스보스 섬에서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나왔다.그런데 사실 학계에선 이걸로 의견이 분분하다. 동성애자라고도 하지만 여자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이란 설도 있고, 아예 동성애는 관련없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학설들이 죄다 문제가 되는 게... 우선 결혼했다는 남자는 안드로스 섬의 케르킬라스(Kerkylas)라는데 이건 그리스어로 남자섬의 검열삭제남[1]이란 뜻이다. 이런 이름이면 그의 진실성부터 의심이 가게 된다. 하지만 딸의 이름은 클레이스(Kleis)로 정상적. 선생이란 설도 문제가 되는게, 당시 그리스에서 그런 식으로 여자들을 가르치는 학교란 게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고, 또 사포의 시에서 교육적인 부분이 무엇이 있느냐도 문제. 사포의 시에선 다른 여자(혹은 남자. 이게 동성애자 설에 대한 반박중 하나)에 대한 갈망을 얘기하는데 이를 두고 여자들로 하여금 결혼 준비를 하는(예쁘게 보이고 유혹적이로 보이게) 것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 여자는 창녀가 아닌한 유혹적으로 보이려는 성향은 없었다. 그리고 이 설은 빅토리아 시대에 대두된 설이라 빅토리아 시대 남자들의 환상에 바탕된 설이라는 비평도 존재한다. 사포가 논란이 되는 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가진 역사상의 여인이다보니 페미니스트 등이 사포를 시인으로 보는 대신 '상징'으로 보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포의 시는고대 그리스어로 쓰여졌다보니 대부분의 대중은 자신의 시각을 가진 학자들이 번역한 것을 읽게 되니 학자들의 입김도 많이 닿게 된다. 사실 설의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라는 식이다. 어쨌든 재능은 확실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많은 시를 썼지만 온전하게 남은 것은 1편뿐이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인용되거나 해서 파편만 남은 것이 약 700편 정도 된다고 한다. 플라톤이 그녀를 '열 번째 뮤즈'라고 했을 정도였다.   
1678    고대 그리스 맹인 음유시인 - 호메로스 댓글:  조회:5286  추천:0  2016-10-20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국적 그리스 대표작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등 유럽 문학의 효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가로 여겨지나, 그의 실존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호메로스 호메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으로, 유럽 최고(最古)의 문학 작품이자 유럽 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작품은 서구에서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문학 작품이자, 그리스 문화의 원형이며 서양 정신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호메로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실존 여부조차도 확증이 없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개 그의 시에서 스스로를 언급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 단서들을 통해 유추한 것들이다. 예컨대 오늘날 그에 대해 알려진 것 중 가장 유명한 이미지는 맹인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오디세이아》에서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음유시인 데모도코스가 눈먼 시인으로 묘사된 데서 비롯한 것이다. 호메로스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 여기에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작품의 내적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 썼다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 두 작품의 작가가 동일인인지조차 의문시하는 입장도 있다. 따라서 호메로스는 한 명이 아니라 당시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들을 통칭하여 부른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다. 호메로스의 출신지로 추정되는 곳 역시 일곱 군데나 된다. 이런 호메로스 논쟁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만족스럽게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오늘날에는 호메로스라는 한 명의 시인이 그때까지 구전되던 서사시들을 이어 붙여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라는 하나의 서사시로 완성시켰다는 시각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호메로스에 대한 기록은 고대부터 몇 편이 전해진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499∼기원전 479)의 기록으로, 그는 호메로스가 자신보다 약 400년 전인 기원전 850년경 살았다고 한다. 시를 짓고 낭송하며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고독한 음유시인의 이미지 또한 헤로도토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일리아스》가 기원전 8세기 중반, 《오디세이아》가 그로부터 약 반 세기 후쯤 완성되었다고 추정되면서, 호메로스는 대략 기원전 8세기경에 활동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런 한편 올림피아 유적, 일리온 유적 등을 발굴한 빌헬름 되르펠트는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 전후인 기원전 1200년경의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 6세기 초 그리스에서 발행된 《일리아스》의 한 페이지 호메로스의 출신지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두 서사시가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인 점으로 미루어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지역은 밝혀지지 않았다. 실존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해도, 호메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시인의 대명사로 여겨지면서 'The Poet'으로 불렸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은 서양 문학사를 통틀어 최고의 자리에 놓여 있으며, 그의 두 작품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양 문학의 효시로 여겨진다. 이 두 작품이 비록 호메로스의 창작이 아니라고 해도 호메로스의 위상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소재에 있어서는 구전되던 서사시들이었다 할지라도, 호메로스가 이들을 통합하고 다룬 솜씨, 이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플롯, 은유법, 시적 감수성, 수사학적인 연설 등은 왜 그를 서양 문학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일리아스》는 흔히 우리가 '트로이 전쟁'이라고 일컫는 10년간의 전쟁 중 마지막 51일 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노래한 영웅서사시이다. 일리아스는 '일리온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며, 일리온은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를 가리킨다. 무려 1만 5,693행, 24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트로이 전쟁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유혹해 데리고 가면서 촉발된 사건이다. 신화에서는 아테나, 헤라,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미(美)의 경쟁을 벌일 때 파리스를 심판관으로 삼았고, 파리스는 자신에게 절세미녀인 헬레네를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파리스의 심판' 일화이다. 이에 분노한 메넬라오스가 왕비를 되찾고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고자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그리스군을 편성하여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전쟁은 10년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진다. 10년째 되던 해 아가멤논이 아폴론 신의 사제 크리세스의 딸 크리세이스에게 반해 그녀를 데려오면서 아폴론 신의 재앙이 내린다. 이에 그리스의 장군 아킬레우스가 크리세이스를 떠나보내는 방책을 강구하자, 아가멤논은 그 보복으로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던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이 전쟁에 더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트로이 전쟁에 있어 앞선 9년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신화와 '트로이 목마' 공방전으로 알려진 마지막 50여 일간의 이야기가 이 오랜 전쟁의 거의 유일한 이야깃거리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축약된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본성과 감정에 대한 전무후무한 통찰력을 드러내며, 어떻게 해야 독자들의 감동을 이끌어 내고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지 알았던 최초의 작가였다. 그는 전쟁이라는 소재를 통해 다양한 인간성을 묘사했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와 관련된 여러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아킬레우스 한 사람의 고통과 분노에 이야기를 집중시켰다. 이로써 다양하고 방대한 일화들이 아킬레우스의 고뇌라는 장치를 통해 산만하지 않게 결합되었다. 아킬레우스가 전쟁에 다시 개입하는 이유 역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살해된 것을 알고 분노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이 영웅의 활약상과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지극히 인간적인 영웅과 전쟁에 개입된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장대하고 비장하게, 시적 비유로 묘사한 《일리아스》는 인간의 운명에 내포된 비극을 표현한다. 또한 그리스인의 이상을 나타낸 상징 그 자체로, 유럽인의 정신적, 사상적 원류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신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사건을 묘사하고 진행시킨다는 데서 인간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추악함과 이기적인 속성마저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하여, 플라톤은 청소년들이 읽어서는 안 될 작품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트로이를 함락한 후 그리스 장수들은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다양한 고난을 겪는다. 그중 오디세우스가 10여 년에 걸쳐 겪은 험난한 귀향담을 다룬 것이 《오디세이아》이다. 역시 1만 2,110행에 달하는 방대한 양으로,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일리아스》에 비해 서사 구조가 복잡하며,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를 떠난 동안 그의 아내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에게 시달리는 이야기, 전쟁을 마치고 이타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오디세우스가 겪는 험난한 모험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온 후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현실 세계와 모험의 세계가 교차하며, 다양한 신화와 전설 속 인물이 등장하는 이 매혹적인 작품은 그리스의 국민 서사시가 되었다. 또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라는 의미의 '오디세이아'는 오늘날까지도 모험이나 표류, 길고도 어려운 여정을 비유하는 대명사로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일화가 담긴 항아리 기원전 48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영박물관 소장. 이 두 작품은 서구 서사시의 원형이자 그 내용이 지닌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학적으로도 많은 공훈을 세웠는데,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두 작품에 등장한 많은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확신한다. 《일리아스》에 경도된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이 두 작품, 특히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지명들은 실제로 그 장소가 확인되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아가멤논이 기원전 2000년에 세운 미케네 궁성도 발굴되었으며,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저승 세계의 입구로 들어가는 일화에 묘사된 장소 역시 실제로 발견되었다. 메넬라오스,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텔레마코스 등 두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 역시 단순히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미케네 궁성 유적   저작자 호메로스(Homeros) 요약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수많은 영웅서사시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자랑하는 호메로스의 작품이다. 그 무렵은 물론, 근세에까지 문학 · 교육 · 사상 등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목차 접기 『일리아스』 그리스 제일의 두 영웅 『오디세이아』 지혜로운 오디세우스를 묘사 작품 속의 명문장 『일리아스』 시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이 작품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얼마 뒤면 트로이 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지 10년째를 맞이하게 되는 9년째 끝 무렵에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총애하는 첩 크리세이스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킬레우스의 첩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싸움터에 나가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그의 어머니인 바다의 님프 테티스는 자기 아들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고 제우스에게 애원하고, 아킬레우스의 승리를 위해 그리스군에게 불리한 전황이 되도록 획책한다. 곤경에 처한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화해를 청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이를 거부한다. 전황이 더욱 심각해지자 아킬레우스의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아킬레우스의 무기를 빌려 그 대신 싸움터로 나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결국 트로이의 으뜸가는 용장인 헥토르에게 살해되고 무기도 빼앗긴다. 이렇게 되자 아킬레우스도 자기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 것이 친구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후회하며 아가멤논과 화해한 뒤 어머니의 배려로 새로 준비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싸움터로 나가 헥토르를 죽여 친구의 원수를 갚는다. 헥토르를 잃은 트로이의 운명은 완전히 기운다. 트로이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진영을 찾아와 아들의 시신을 인수하고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그 장례식 장면으로 『일리아스』는 끝난다.1) 그리스 제일의 두 영웅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아킬레우스인데, 그리스 제일의 영웅이라고는 하나 아직 소년다운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다감한 청년으로 그려져 있다. 친구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깊은 우정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굴욕과 공포를 견디면서도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온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에게서 자신의 나이 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하는 순진한 젊은이다운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아킬레우스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이다. 그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으며 더구나 인정까지 넘치는 이상적인 영웅이다.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헬레네에 대한 배려도 각별했지만,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보인 헥토르의 깊은 애정은 제6권의 후반에 나타나는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티아낙스와 이별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부분이 예부터 즐겨 암송되는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오디세이아』 트로이를 함락한 뒤 고국으로 돌아간 그리스의 여러 장수들은 각기 다양한 고난을 겪는데, 그 가운데 오디세우스의 운명이 가장 가혹해 귀국할 때까지 10년간에 걸쳐 각지를 떠돌아다닌다. 이야기는 오디세우스가 그런 방랑을 끝낼 무렵에 님프 칼립소의 섬에 체류하고 있던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리아스』는 이야기가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데 비해 『오디세이아』는 두 가지 상황이 복선 구조로 병행해서 진행된다. 곧, 오디세우스의 표류와 함께 고국 이타카에서 끈질긴 구혼자들에게 시달리는 그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의 고난이 이어지다가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귀환하면서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져 부자가 힘을 합해 악인들을 무찌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아버지의 소식을 묻는 텔레마코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술로 한 덩어리를 이루고, 제9권에서 제12권까지는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에서 오디세우스 자신이 이야기하는 다양한 모험들로 이루어진 환상적인 설화들이 가득하다. 지혜로운 오디세우스를 묘사 『오디세이아』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한다. 격정에 사로잡히기 쉬운 순수한 청년 아킬레우스에 비해 이미 중년인 그는 침착하고 사려가 깊어 어떠한 위기와 고난도 능히 헤쳐나가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 역시 아킬레우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인물이다. 특히 고국 이타카로 귀환한 뒤 그가 아들 텔레마코스와 2명의 충실한 하인들만 데리고 아내에게도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어떤 식으로 흉악한 악인들을 무찌르는가와 그의 특성인 지혜와 용기가 어떤 형태로 발휘되는가가 『오디세이아』의 후반을 이끌어 가는 초점이라 할 수 있다. 텔레마코스도 복선으로 진행되는 전반부에서 아버지와 함께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아버지의 귀국을 앞두고 그때까지 거의 무력한 소년이었던 그가 급속도로 성장해 어머니를 감싸면서 기특하게도 악인들의 음모에 맞선다. 이윽고 귀국한 아버지와 힘을 합해 악인들을 징벌하게 되는데, 그의 인간적인 성장도 『오디세이아』의 주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비극 등에서는 오히려 간계가 뛰어난 사람처럼 다루어지는 일이 많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에서 음모를 꾀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작품 속의 명문장 “이윽고 언젠가는 성스러운 일리오스(트로이)가 멸망하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 『일리아스』 제4권 164, 제6권 448 제4권에서는 아가멤논의 말로 나오고, 제6권에서는 헥토르의 말로 나타나는데, 헥토르의 입에서 나왔다는 쪽이 비극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이 밖에 이 문구에 얽힌 일화로는 나중에 로마 장군 소(小)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폐허를 앞에 두고 깊은 감회에 젖어 로마에도 언젠가는 이런 운명의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호메로스(Homeros)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Homeros, ?~?)의 실존에 대한 확증은 없다. 게다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동일한 작가의 작품인지도 알 수가 없다. 오늘날에는 두 작품의 작가가 서로 다른 사람이며 『일리아스』는 기원전 8세기 중반, 『오디세이아』는 그로부터 반세기 정도 지난 뒤에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유력한데, 이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스 영웅서사시의 원형이 이미 미케네 시대(BC 1600~BC 1200 무렵, 이른바 ‘영웅 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것이 몇 세기에 걸쳐 전승되고 있는 사이에 작시 기법이 차츰 세련되고 시의 규모도 커졌다. 전승을 주로 이어 온 사람들은 아오이도스라고 불리는 음유 시인들로, 단순히 완성된 시를 낭송하는 것이 아니라 낭송할 때마다 자기 나름대로 더하고 빼면서 일종의 창작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기원전 8세기에 『일리아스』 또는 『오디세이아』를 거의 오늘날 우리가 읽는 형태로 완성시킨 사람이 호메로스라고 불리는 천재 시인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호메로스의 전기라고 불리는 것이 고대로부터 몇 편 전해지고 있는데, 물론 역사적 인물의 전기와는 양상이 다르다. 그 가운데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이 가장 긴 장편으로, 이것도 호메로스를 주인공으로 한 민화식의 설화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지은 시를 낭송해 근근이 먹고사는 고독한 음유 시인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고대의 아오이도스의 실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그 밖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경쟁’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가 미상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고대 서사시의 양대 유파 가운데 대표적인 시인인 두 사람이 노래를 겨루어 헤시오도스가 승리를 한다는 줄거리로, 이 또한 고대 음유 시인들이 살아가던 생활의 단편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1) 호메로스 1)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이 계속된 10년이라는 세월 가운데 겨우 51일간의 일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고, 『오디세이아』도 역시 10년이라는 긴 세월의 표류와 귀국 전후의 마지막 41일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다.
1677    神들은 문학과 취미의 부문에 속하다... 댓글:  조회:4760  추천:0  2016-10-20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는 소멸되었다. 이른바 올림포스의 신들을 믿는 사람은 현대인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신들은 지금은 신학의 부문에 속하지 않고 문학과 취미의 부문에 속한다. 이 부문에 있어서는 그들은 아직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 나갈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금의 시와 회화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러한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고대인으로부터 우리에게 구전되고, 현대의 시인 ,비평가, 강연자들이 널리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이제까지의 상상에 의한 창작물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자기 시대의 기품 있는 문학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필요하고도 중요한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우선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 구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왜냐하면 로마인은 이 그리스인으로부터, 그 밖의 국민은 로마인으로부터 그들의 과학과 종교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신들     그리스인들은 지구는 둥글고 평평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나라는 그 중앙에 있고 그 중심점을 이루는 것이 신들의 주거지인 올림포스 산, 혹은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의 성지라고 믿고 있었다. 이 원반과 같은 세계는 동서로 길다란 바다에 의해서 두 개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 바다를 지중해, 그것으로부터 이어지는 바다를 에욱세이노스(흑해)라 불렀다.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는 바다는 이 두 개뿐이었다.             지구의 주위에는 '대양하(大洋河-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흐르는 방향은 지구의 서편에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동편에서는 그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흐름은 변함없이 항시 한결같았고, 어떠한 폭풍우가 몰아쳐도 범람하는 일이 없었다. 바다와 지구상의 모든 강은 그곳으로부터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구의 북쪽 일부에는 히페르보레오스라 부르는 행복한 민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민족은 높은 산맥 너머에서 영원한 기쁨과 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산에 있는 커다란 동굴로부터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폭풍이 몰려와서, 헬라스(그리스)의 사람들을 추위에 얼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육로나 해로 그 어느 것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나라 사람들은 질병이나 노쇠 또는 노고나 전쟁을 모르고 살았다.      지구의 남쪽에는 대양하 가까이에 히페르보레오스와 비슷한 정도로 행복하고 유덕(有感 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에티오피아인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신들은 그 민족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올림포스의 거처를 떠나서 그들과 향연을 함께 하는 일이 있었다.      지구의 서쪽에는 '엘킬시온의 들'. 죽음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고 가는 곳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이 행복한 토지를 '행운의 들' 또는 '축복된 사람들의 섬'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인은 자기 나라의 동방과 남방의 민족, 혹은 지중해 연안 근처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민족도 존재하는 줄을 거의 몰랐다, 그래서 그리스인의 상상력은 지중해의 서쪽 땅에 거인 -괴물-마녀들이 사는 것으로, 그리 넓은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원반과 같은 세계의 주변에 신들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민족이 행복과 장수를 누리며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여명과 해, 그리고 달은 대양하에서 떠올라 신들과 인간들에게 빛을 주면서 공중을 달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북두칠성, 즉 큰곰자리 및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별들을 제외한 모든 별들도 대양하에서 떠오르고 또 그 속으로 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태양신은 날개가 달린 배를 탄다. 그러면 지구의 북쪽을 돌아 다시 동방, 즉 떠오른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들의 거처는 테살리아에 있는 올림포스 산꼭대기에 있었다, 그곳에는 '계절' 이라고 불리는 여신들이 지키는 구름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문은 천상의 신들이 지상에 내려갈 때나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때 열렸다. 신들은 각기 자기 궁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신(主神) 제우스의 소집이 있으면 모두 제우스의 델포이 신전에 모였다. 지상이나 수중 또는 지하에 살고 있는 신들까지도 모여들었다. 이 올림포스의 주신이 사는 궁전의 큰 홀에서는 또한 많은 신들이 그들의 음식과 음료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먹고 마시며 매일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신 헤베가 넥타르잔을 날랐다, 이 연회석상에서 신들은 천상과 지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넥타르를 마시고 있을 때면 음악의 신 아폴론이 리라(고대 그리스의 일곱 줄로 된 악기)를 타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뮤즈 여신들은 이것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해가 지면 신들은 각자 자기 거처로 돌아가 잠을 잤다. 여신들이 입은 성의와 그 밖의 옷은 아테나(미네르바)와 미(美)의 세 여신들이 짰는데, 좀 단단한 것들은 여러 가지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헤파이스토스는 건축기사에다 대장장이, 갑옷 제조자, 이륜전차 제조자, 그 밖에도 올림포스에서는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는 명공(名工)이었다. 그는 놋쇠로 신들의 집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황금으로 신들의 구두를 만들어 주었다. 신들은 그 구두를 신고 공중이나 물위를 걷고, 바람과 같은 빠른 속도로 혹은 또 마음 내키는 대로 이곳 저곳으로 이동했다. 헤파이스토스는 또 천마의 다리에 편자를 박았다. 그러자 그 말은 신들의 이륜전차를 끌고 공중과 해상을 질주했다. 그는 자기가 만든 물건에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삼각가(의자와 테이블을 겸한 물건)는 궁전의 흘을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었다. 그는 황금으로 만든 시녀들에게 지력(知力)을 부여하여 부리기까지 했다.     제우스는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제우스 자신에게도 양친은 있었다. 크로노스(사투르누스) 가 그 아버지요, 레아(옵스)가 어머니였다. 크로노스와 레아는 티탄 신족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이 신족의 양친은 하늘과 땅으로부터 태어났고, 하늘과 땅은 또 카오스(혼돈)로부터 태어났다. 이 카오스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또 하나의 다른 '코스모고니', 즉 우주창조설이 있었는데, 이 설에 의하면 최초에 가이아(대지의 신)와 우라노스(천공의 신)의 사랑이 있었다. 카오스 위에 떠 있던 닉스(밤)의 알에서 에로스(사랑)가 태어났으며, 이 에로스가 가지고 있던 화살과 횃불로 모든 사물을 찌르거나 사물에 생기를 주어 생명파 환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크로노스와 레아만이 유일한 티탄족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신족에는 같은 남신들과 테이아, 포이베, 테티스, 테미스, 므네모시네와 같은 여신들이 있었다. 이 신들은 연로한 신들이라 일컬어져서, 그들의 지배권은 그 후에 다른 신들에게 넘어갔다. 크로노스는 제우스에게, 오케아노스는 포세이돈체게, 히페리온은 아폴론(아폴로)에게 각각 지배권을 넘겨 주었다.    히페리온은 태양과 달과 여명의 아버지였다. 그러므로 그는 최초의 태양신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광휘와 미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는 데, 그것도 후에는 아폴론에게 주게 된다. 크로노스에 대해서는 책에 따라 그 묘사가 아주 다르다. 어떤 책에는 그의 치세(性理)는 결백과 순결의 황금시대였다고 묘사되어 있는 반면에, 다른 책에는 자기의 아들을 마구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씌어져 있다. 후자의 책에 따르면, 제우스가 아버지에게 먹히는 운명을 간신히 면하고 성장하여, 메티스(세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시아버지인 크로노스에게 어떤 약을 마시게 하여 먹은 아이들을 다 토하게 했다고 한다. 그 후 제우스는 그의 형제 자매와 더불어 그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그의 형제인 티탄 신족들에 대해 폭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들을 정복하자 그 중의 어떤 자는 타타로스(지옥)에 가두고 또 다른 자들에게는 다른 형벌을 가했다. 그리고 아틀라스라는 신은 어깨로 하늘을 떠메고 있으라는 선고를 받았다.     크로노스를 폐위시킨 제우스는 그의 동생들인 포세이돈(넵투누스)과 하이데스(플루톤) 와 더불어 크로노스의 영토를 분할하였다. 제우스는 하늘을, 포세이돈은 바다를 그리고 하이데스는 죽은 사람들의 나라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지구와 올림포스는 세 사람의 공유 재산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제우스는 신과 인간들의 왕이 되었다. 천둥이 그의 주된 무기였고 아이기스라는 방패도 가지고 있었다. 헤파이스토스가 그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제우스가 총애한 새는 독수리였는데, 이 새가 제우스의 번개를 지니고 있었다.      헤라(유노)는 제우스의 아내였고, 신들의 여왕이었다. 또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는 헤라의 시녀이며 사자(使者)였다. 그리고 여왕이 총애하는 새는 공작이었다. 천상의 명공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그 추한 꼴을 매우 싫어하여 그를 천상에서 내쫓았다. 일설에 의하면 제우스와 헤라가 부부싸움을 했을 때, 헤파이스토스가 그의 어머니 편을 들었으므로 화가 난 제우스가 그를 차버렸고, 이에 천상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추락하다가 마침내 렘노스 섬에 떨어졌고, 그 후 이 섬은 헤파이스토스 성지가 되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마르스)도 제우스와 혜라의 아들이었다. 궁술(弓術)과 예언과 음악의 신 아폴론(포이보스)은 제우스와 레토(라토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리고 그는 아르테미스(디아나)의 오빠이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 아르테미스가 달의 여신인 것처럼 아폴론은태양의 신이었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베누스)는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일설에 의하면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거품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녀가 서풍에 떠밀려 물결을 따라 키프로스 섬에 도착하자 계절의 여신들은 그녀를 영접하고, 이윽고 고운 옷을 입혀 신들이 모인 궁전으로 인도했다,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신들은 모두 그녀를 아내로 삼기를 원했다.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가 번개를 잘 단련한 데 대한 답례로써 그녀를 그에게 주었다. 그래서 여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남신(男神) 중에서 가장 못생긴 신의 아내가 된 셈이다.     아프로디테는 케스토스라고 하는 자수를 놓은 띠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띠는 사랑을 일으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총애한 새는 백조와 비둘기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장미와 도금양(料金鐘). 사랑의 신인 에로스(큐피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었고, 그는 어머니와 항상 붙어 다녔다. 그리고 그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어서. 신과 인간의 가슴속에 사랑의 화살을 쏘아 넣었다.     또 안테로스라 부르는 신도 있었는데, 이 신은 때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복수자로도 표현되고, 때로는 상호간의 사랑의 상징으로도 표현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아프로디테가 정의(正義)의 신인 테미스를 붙잡고 늘 어린애 상태에 머물러 자라지 않는 에로스에 대해 걱정을 하였더니, 테미스가 그것은 에로스가 독자이기 때문이라며 동생이 생기면 바로 자라게 되리라고 말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안테로스가 탄생하자, 그 즉시 에로스는 날로 커졌고 힘도 세어졌다고 한다.            지혜의 여신으로서 팔라스라고 불리는 아테나는 제우스의 딸이었다. 그러나 이 여신에겐 어머니가 없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히 무장한 모습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녀가 총애한 새는 올빼미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올리브였다.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는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고, 그가 주재(主宰)한 부문은 상업, 레슬링(격투) 및 그 밖의 경기, 나아가서는 도둑질에까지 미쳤으며, 요컨대 숙련과 기민을 요하는 일체의 것에 미쳤다. 그는 아버지 제우스의 사자(使者)로서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또 두 마리의 뱀이 몸을 감고 있는 케리케이온(카두케우스) 이라는 지팡이를 손에 지니고 다녔다. 또한 헤르메스는 리라를 발명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그는 한 마리의 거북을 발견하고서 그 갑골의 양끝에 구멍을 뚫고 리텐 실을 구멍에 꿰어 이 악기를 완성했다. 현(弦)의 수는 아홉 명의 뮤즈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아흡 개였다. 헤르메스는 이 리라를 아폴론에게 주고 그 답례로 제리케이온 지팡이를 받았다.     데메테르(케레스)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페르세포네(프로세르피네)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은 후에 하데스의 아내가 되어 사자들의 나라(저승,지하세계) 여왕이 되었다. 데메테르는 농업을 주재했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바쿠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는 술에 취하게 하는 힘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술의 사회적인 좋은 영향력도 상징하고 있으므로, 문명의 촉진자 , 입법자, 또 평화의 애호자로 생각되고 있다.     뮤즈의 여신들은 제우스와 므네모시네 (기억의 여신) 사이에 태어난 딸들이었다. 이 딸들은 노래를 주재하고 기억을 촉진시켰다. 이들 뮤즈의 여신은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각기 문학, 예술, 과학 등의 부문을 분담하여 주재했다. 즉 칼리오페는 서사시를 주재했고, 클레이오는 역사를, 에우테르페는 서정시를, 멜포메네는 비극을, 테르프시코레는 합창단의 춤과 노래를, 에라토는 연애시를, 폴리힘니아는 찬가를, 우라니아는 천문학을, 탈레이아는 희극을 각기 주재했다.     미의 여신들이 주재하는 것들은 향연과 무용, 게다가 모든 사교적인 환락과 기품 있는 예술이었다. 이 여신은 세 명이었는데, 그 이름은 에우프로시네, 아글라이아, 탈레이아였다.     운명의 여신도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등 세 명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인간 운명의 실을 짜는 것이었다. 또 그들은 큰 가위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때고 마음만 내키면 가위로 실을 끊기도 하였다. 이 여신들은 테미스의 딸로, 모친은 제우스 옥좌 곁에 앉아서 그의 상담역을 맡고 있었다.      복수의 여신들(에리니에스 혹은 푸리아)은 정의의 재판을 피하거나 경멸하는 자들의 범죄를 눈에 보이지 않게 벌하는 세 명의 여신이었다. 이 복수의 여신들의 머리카락은 뱀으로 되어 있고, 전신이 무섭고 소름끼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알렉토, 티시포네, 메가에라였다. 그녀들은 또한 에우메니테스(착한 마음의 여신) 라고도 불렀다.     네메시스도 복수(보복)의 여신이었다. 오케아노스 혹은 제우스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그녀는 에레보스와 닉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닉스만의 딸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녀는 신들의 의분-특히 인간들의 거만, 우쭐대는 행위에 대한 신의 보복을 의인화 한다. 그녀는 한 손에 사과나무 가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물레바퀴를 든 모습, 또는 괴수(怪獸)가 끄는 전차(戰車)를 탄 모습으로 표현된다.      판은 가축과 목자의 신이었다. 그가 즐겨 사는 곳은 아르카디아의 들이었다. 사티로스는 숲과 들의 신들이었다. 그들은 온몸에 딱딱한 털이 있었고 머리에는 짧은 뿔이 돋아 있었으며, 다리는 산양과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모모스는 비웃음(불평과 비난)의 신이었고, 플루토스는 부(富)를 주재하는 신이었다.   로마의 신들      이제까지 이야기해 온 신들은 로마인들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모두그리스의 신들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신들은 로마 신화의 고유한 신들이다. 사투르누스는 고대 이탈리아인의 신이었다. 이 신은 그리스의 신 크로노스와 동일시되고, 전설에 의하면 아들 유피테르(제우스)에 의하여 폐위되자 이탈리아로 도망하여 세칭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에 그곳에서 재위하였다고 한다. 그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겨울에 사투르날리아라는 제전이 거행되었는데, 그때에는 모든 공무가 정지되고 선전 포고나 형벌의 집행도 연기되었으며 친구들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였고 노예들에게도 자유가 최대한으로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잔치가 벌어지고 그 석상에서는 주인이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그것은 사투르누스의 치세에 있어서는 인간이 본래 평등하다는 것과 만물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투르누스의 손자인 파우누스(파우나, 즉 보나데아=좋은 여신의 뜻으로 부르는 여신도 있다)는 들과 목자의 신으로서 숭배되었고, 예언의 신으로서도 숭배를 받았다. 그의 이름의 복수형 (複數形)인 파우니는 그리스의 사티로스(半身半獸,상체는 사람 하체는 염소의 모습)와 같이 익살스런 신들의 한 무리를 의미했다.               * 이탈리아 판테온 신전        키리누스는 전쟁의 신이었는데, 이 신은 로마의 창건자였고, 사후(死後)에 신의 지위에 오르게 된 로물루스 자신이었다. 벨로나는 전쟁의 여신이다. 테르미누스는 토지 경계의 신이다. 그의 상(像)은 거친 돌이나 기등으로써 들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지상에 세워져 있었다, 팔레스는 가축과 목장을 주재하는 여신이다. 포모나는 과수(果樹)를 주재했다.      플로라는 꽃을 주재하는 여신이다. 루키나는 출산의 여신이다. 베스타(그리스의 헤스티아)는 국가의 솥과 가정의 솥을 주재하는 여신이었다. 베스타의 신전에선 베스탈이라고 하는 여섯 명의 처녀 제사가 수호하고 있는 성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로마인 신앙에 의하면 국가의 안녕은 이 성화의 보존과 관계가 있으므로 처녀 제사의 태만 때문에 그것이 꺼지는 일이 있을 때에는 그녀들은 엄벌을 받았고, 꺼진 불은 태양광선에 의하여 다시 점화되었다.       리베르는 바쿠스(디오니소스)의 라틴 이름이며, 물키베르는 불괴누스의 라틴 이름이다.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로서 새해를 열기 때문에 1년의 최초의 달(야누아리우스, January를 가리킴)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그는 문의 수호신이요 모든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으므로, 그는 보통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로마에는 야누스의 신전이 무수히 많았다. 전쟁 때에는 주요한 신전의 문은 언제나 열렸고, 평화로을 때에는 닫혀 있었다. 그러나 누마와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동안에는 문이 오직 한 번 닫혔을 뿐이었다.      페나테스는 가족의 행복과 번영을 지켜 주는 신들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찬장이 이 신들의 성소로 되어 있어 한 가정의 주인은 모두 자기 집의 페나테스의 제사였다. 라레스. 즉 라르들도 또한 가정을 지키는 신들이었다. 그러나 페나테스와 달리 이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신이 되었다고 생각되었으며, 가정의 라레스는 자손들을 감독하고 보호하는 영혼으로 생각되었다. 레무레스와 라르바아라는 말은 영어의 고스트(유령) 라는 말과 거의 같다.      로마인들이 믿은 바에 의하면 남자는 누구든지 자기의 수호신 게니우스를, 여자는 자기의 수호신인 유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 신이 자기들에게 삶을 주었다고 생각했고, 평생 자기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생일에는 남자는 자기의 수호신인 게니우스에게 선물을 바쳤고, 여자는 자기의 수호신인 유노에게 선물을 바쳤다.       터키의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 있는 트로이 목마 모형
1676    최초로 음악가가 "노벨문학상"을 걸머쥐다... 댓글:  조회:5136  추천:0  2016-10-19
  출생일 1941. 5. 24,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1960~70년대 정치적이면서도 시적인 가사와 포크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포크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이자,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목차 접기 개요 초기 생애 작품활동 ┗ 음악 ┗ 그 외 활동 수상경력 개요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 화가이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Zimmerman)’이다.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60년대 그의 노래들은 정치적인 주제를 담은 시적인 가사와 간결한 포크 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대표적인 저항 음악으로 사랑받았다. 1962년부터 2016년까지 30개 이상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으며 지금까지도 미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초기 생애 밥 딜런은 미네소타 주의 덜루스와 철광 도시인 히빙 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살 때부터 시를 썼으며 십 대 시절 음악에 심취하여 밴드를 결성하고 기타를 치면서 로큰롤을 불렀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포크 음악에 빠져들었으며 자신을 ‘밥 딜런’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60년 대학을 중퇴한 그는 자신의 음악적 우상인 포크송 가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196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공연하는 밥 딜런 작품활동 음악 밥 딜런은 뉴욕 시 그리니치빌리지의 여러 커피하우스에서 우디 거스리의 우울한 발라드풍의 노래와 자작곡들을 부르면서 직업적인 공연을 시작했다. 1962~64년에 잇달아 나온 음반으로 일약 유명해졌고, 그의 두 노래 〈블로윈 인 더 윈드 Blowin' in the Wind〉·〈더 타임스 데이 알 어 체인지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흑인 민권운동의 주제가가 되었다. 전통적인 포크 음악에 기반을 두면서 특히 단순한 멜로디를 사용한 딜런의 노래들은 이전의 미국 포크 음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적인 예술성과 상상력이 엿보이는 은유적이며 우화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다. 1965년 딜런은 전기 앰프가 없는 어쿠스틱 악기를 쓰며 사회성이 짙은 노래를 부르던 과거의 경향을 탈피해서 전자악기와 로큰롤 리듬을 채택했다. 이 획기적인 변화 이후에 나온 음반들이 〈하이웨이 식스티원 리비지티드 Highway 61 Revisited〉(1965)와 〈블론드 온 블론드 Blonde On Blonde〉(1966)인데, 이 음반들은 자기성찰적이고 애조 띤 가사와 블루스에서 따온 리듬 때문에 딜런을 단번에 록 음악계의 일인자로 인기절정에 오르게 만들었다. 1980년 토론토 공연 모습 1966년 오토바이 사고를 겪고 은둔생활을 한 딜런은 또 하나의 음악적 변신을 거쳐 유명한 〈내슈빌 스카이라인 Nashville Skyline〉(1969)을 비롯한 음반들을 내놓았는데, 여기에서 컨트리 앤드 웨스턴(country-and-western) 음악 요소를 가미하여 또다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1970~80년대에도 딜런은 연주활동과 영향력 있는 음반을 내놓았는데, 그 중 〈블러드 온 더 트랙스 Blood on the Tracks〉(1975)·〈디자이어 Desire〉(1975)·〈인피덜스 Infidels〉(1983)가 특히 유명하다. 2016년까지 30장 이상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2006년 발매한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로 빌보드 1위에 올랐으며 2009년 〈투게더 스루 라이프 Together Through Life〉로 영국(UK) 앨범 차트와 빌보드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가장 최근에 나온 앨범은 2016년 발매한 〈폴른 엔젤스 Fallen Angels〉다. 그 외 활동 밥 딜런은 1994년 이후 드로잉과 회화를 담은 6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1970년대 발매한 〈자화상 Self-Portrait〉과 〈행성 파도 Planet Waves〉의 앨범 커버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다. 1994년 작업한 그림을 담은 책을 처음 출판했으며 2007년에는 첫 공개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작업한 그림 중 일부는 덴마크 국립 미술관을 포함한 몇몇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2010년에는 자서전 〈Chronicles〉를 출간했으며 한국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71년에는 시와 소설을 결합한 실험적인 작품인 〈타란툴라 Tarantula〉를 발표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자서전 〈Chronicles〉를 출간했으며 한국에서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수상경력 데뷔 후 2016년까지 그래미상을 총 11번 수상했다. 1963년 이후 노미네이트 된 것만 40여 차례다.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0년에는 스웨덴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폴라음악상을 받았다. 같은 해 영화 〈원더 보이스〉의 OST인 〈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상(주제가상)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선정했다.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공로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2016년 음악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 팝 문화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675    <밥> 시모음 댓글:  조회:3720  추천:0  2016-10-19
      + 푸른 우주 밥 먹으며 쌀알 하나에 스민 햇살 잘게 씹는다. 콩알 하나에 배인 흙내음 낯익은 발자국, 바람결 되씹는다. 내 속으로 펼쳐지는 푸른 우주를 본다. (이응인·교사 시인, 1962-) + 새벽밥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김승희·시인, 1952-) + 밥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천양희·시인, 1942-) + 밥도 가지가지 논에서는 쌀밥 밭에서는 보리밥 고들고들 고두밥 아슬아슬 고봉밥 이에 물렁 무밥 혀에 찰싹 찰밥 달달 볶아 볶음밥 싹싹 비벼 비빔밥 함께 하면 한솥밥 따돌리면 찬밥 (안도현·시인, 1961-) + 꽃밥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엄재국·시인, 경북 문경 출생) + 밥값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정호승·시인, 1950-) + 밥심 가을 들녘, 추수를 마친 논도 있고  아직 볕을 더 쬐고 있는 벼들도 보인다.  누런 벼들만 봐도 마음은 풍요롭고  햅쌀로 지은 밥을 눈앞에 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햇것이라는 싱싱하고 찰진 느낌에다가  밥심으로 산다는 어른들의 말을 반찬으로 얹어  한술 뜨는 가을이 맛있다. 밥심으로 산다.  그 말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야 한다.  지금은 굳이 밥이 아니더라도 빵이나 기타 음식으로  배를 채울 것이 많다.  하지만 뱃고래가 든든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밥에 기대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쌀이 어떻게 해서 집까지 오는지  얼마나 많은 땀을 쏟아야 하는지 듣기는 하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잘 모르는 자녀들도 많다.  가을들녘을 지나갈 경우 꼭 한번은 일러주시라.  쌀의 힘, 그리고 밥심에 대해서.  (최선옥·시인) + 밥상 산 자(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상 위에 놓이는 수저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는가 아침마다 사람들은 문 밖에서 깨어나  풀잎들에게 맡겨둔 햇볕을 되찾아 오지만  이미 초록이 마셔버린 오전의 햇살을 빼앗을 수 없어  아낙들은 끼니마다 도마 위에 풀뿌리를 자른다 청과(靑果) 시장에 쏟아진 여름이 다발로 묶여와  풋나물 무치는 주부들의 손에서 베어지는 여름  채근(採根)의 저 아름다운 殺生으로 사람들은 오늘도  저녁으로 걸어가고  푸른 시금치 몇 잎으로 싱싱해진 밤을  아이들 이름 불러 처마 아래 눕힌다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 全身을 내려놓은 빗방울처럼  주홍빛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는 未完이 슬픔이 될 순 없다 산 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솥에 물 끓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 또 있겠는가  (이기철·시인, 1943-) + 밥 먹자 밥 먹자  이 방에 대고 저 방에 대고  아내가 소리치니  바깥에 어스름이 내렸다 밥 먹자  어머니도 그랬다  밥 먹자, 모든 하루는 끝났지만  밥 먹자, 모든 하루가 시작되었다  밥상에 올릴 배추 무 고추 정구지  남새밭에서 온종일 앉은 걸음으로 풀 매고 들어와서  마당에 대고 뒤란에 대고  저녁밥 먹자  어머니가 소리치니  닭들이 횃대로 올라가고  감나무가 그늘을 끌어들였고  아침밥 먹자  어머니가 소리치니  볕이 처마 아래로 들어오고  연기가 굴뚝을 떠났다  숟가락질하다가 이따금 곁눈질하면  아내가 되어 있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되어 있는 아내를  비로소 보게 되는 시간 아들딸이 밥투정을 하고  내가 반찬투정을 해도  아내는 말없이 매매 씹어 먹으니  애늙은 남편이 어린 자식이 되고  어린 자식이 애늙은 남편이 되도록  집안으로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하종오·시인, 1954-) + 식탁의 즐거움 식탁을 보라  죽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식탁 위에 오른 푸성귀랑  고등어자반은 얼마나 즐거워하는가  남의 입에 들어가기 직전인데도  그들은 생글생글 웃고 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밭이랑 똥거름 빨며 파릇했던  파도보다 먼저 물굽이 헤치며  한때 바다의 자식으로 뛰놀던 그들은  데쳐지고 지져지고 튀겨져 식탁에 올라와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펄떡이고 출렁이고 싶다  그들은 죽어서 남의 밥이 되고 싶다  풋고추 몇 개는 식탁에 올라와서도  누가 꽉 깨물 때까지 쉬지 않고 누런 씨앗을 영글고 있다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터지는 식탁의 즐거움  아, 난 누군가의 밥이 되었으면 좋겠네  (정철훈·시인, 1959-) + 밥 초파일, 작은 절집, 공양간  그 어귀에 긴 행렬 늘어섰네, 밥 한 그릇 먹을 행렬,  그러나 밥은 동났네, 이것 참 큰일 났네  목말라 기절한 꽃 조리개로 물을 주면 생기가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지듯이  밥 먹고 못 먹고 따라 그 얼굴이 천양이라  먹으면 부처님도 못 먹으면 중생이니, 부처가 별게 아니라 밥이 바로 부처인데,  그 밥이 한 그릇 없어 부처 되지 못하네  듣자 하니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식당과 화장실이 동쪽에 있기 때문,  부처-ㄴ들 어쩌겠는가, 동쪽으로 와야지 뭐.  (이종문·시인)
1674    詩를 쓸 때 꼭 지켜야 할것들아... 댓글:  조회:4002  추천:0  2016-10-19
  ▲로댕     [출처] [Opinion] 배움의 진실, "불편": 희랍적 사고에 관한 설명을 중심으로 [문화전반]|작성자 해서ly 이성복 시론  ..   글쓰기에 대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다만 글쓰기를 통해서 스스로 익혀야 한다  내가 쓴 글 속에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라. 재능은 필요치 않다. 남들보다 잘 쓰려 하지 마라. 다만 자기 보다 잘 쓰려 하라.  < 시를 꼭 쓸때 지켜야 할 것들>  1. 구어를 사용하라  --->구어는 죽지 않는 살아 있는 입말이다.그래야만 리얼리티가 살아난다. 그것에 리듬이 있다.  2. 시간, 장소, 사건을 일치시키라  --->이것을 일치시키면 한가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끝까지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오락가락  3,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 들려 주듯  --->그러나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차분하게  4. 대상, 사물, 사건에 대해 내 생각의 촛점을 맞추지 말고  --->대상이 주가 되게 쓰라.사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 내는 것이 시인의 몫이다.  5. 머리속에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말라.  --->한마디 말은 던지면 말이 연상의 꼬리를 물고 날으는 상상력속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6. 가장시적인 비유는 시 자체로 이미 비유이므로 비유가 없어도 시는 시다.  --->모든 사물 속에는 시가 들어 있다. 그것을 떠 오르게 하라  7. 제재 자체가 이미 비유인 글감...그것이 바로 시  8. 한가지 이야기를 끝까지 하라  --->불필요한 설명이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시가 아니라 수필이다.  9. 상식을 뒤엎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라  --->참신하지 못한 비유, 관념의 나열은 독자가 따라 가면 읽을 이유가 없다.  10. 아름답고 예술적인 것을 지양하고 관념적이지 않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그것은 구어로 시작된다. 쉽게 와 닿는 것 쉽게 전해진다.  < 직업시인과 아마추어시인의 차이 >  ..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방송국으로부터 보내오는 전파를 잡기 위해 라디오 세트가 필요하듯이, 시인은 영감의 메시지를 잡기 위해 자기 몸 안에 장치된 일종의 예민한 기계 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 장치가 곧 시적 상상력이다.  누구나 다소간의 시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몇 가지 특수한 방법으로 발전된다. 마치 운동으로 근육을 발달시키듯이, 시인은 연습에 의해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시를 쓰는 것이다. 시를 쓰는 습관이야말로 직업적인 시인과 이따금 심심풀이로 시를 쓰는 사람을 구별하는 차이점이다. 또한 시인은 마치 마술사가 무의식적으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오른손을 가만히 두지 않듯이, 늘 단어들을 만지작거림으로써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특히 중요한 점은 시인은 응시를 통해 시적 능력을 발달시킨다는 점이다. 즉 그는 자기 밖에 있는 세계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감각을 이용해 인생의 불가사의와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끊임없이 인생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신비적인 바탕 무늬를 잡아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시인이 아무리 자기 직무에 충실하더라도, 아무리 연습과 응시의 노력을 쌓더라도, 그리하여 아무리 교묘한 말의 장인이 된다 하더라도, 결코 영감을 자기 힘으로 좌우할 수는 없다. 영감은 몇 달이나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지 알 수 없다. 몇 년 동안이나 그를 팽개쳐 둘지 모르며,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셀리 : “창조하는 정신은 꺼져하는 석탄 불꽃과 같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힘이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불꽃을 불어 순간적인 밝음을 보여준다.”  - 이성복 편, ‘예술의 거울’ 보유편 중 ‘세셀 데어 루이스’를 재인용.  < 시에 대한 몇가지 편견>  *  우리는 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손이 분명히 해보다 작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으므로 ‘해보다 손이 크다’라는 착각을 한다. 시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 중에 하나가 비유가 많으면 시적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영화 "LONG SHIP"에서 잃어버린 황금종을 찾아 3년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종이 있다고 하는 하얀 섬에 도달했을 때, 결국 거기서 발견한 것은 그 "섬 전체가 종"이란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시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비유의 비유, 시 자체가 비유인 경우다. 김소월의 시에 무슨 비유가 있는가. 하지만 소월의 시는 한 편의 시 자체가 곧 비유이다. 씨리한(?) 비유를 쓸 바엔 쓰지 말아야 한다. 현실 자체가 황금종이며 이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곧 예술가이다. 시적인 수필을 쓰지 마라.  *  또 ‘체험을 많이 하면 좋은 시를 쓸 것이다, 감정이 풍부하면 더 좋은 시를 쓸 것이다’ 라는 편견이 있다. 시의 3요소는 작가, 대상, 언어인데 시가 시를 쓰는 사람 아래 있다는 착각을 갖는다. 말하자면 시인의 체험과 감정에 의해 좋은 시가 탄생한다는 것. 착각이다. 그러면 대상이 우위인가? 대나무를 바라보다 병이 났다는 왕양명의 "格物致知" 일화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곧 좋은 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시는 절대적으로 말에 있다. 말라르메도 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말’이라고 했다. 말에는 온갖 현실의 오물이 묻어있다. 그러므로 말을 제대로 따라가면 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말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말은 내시경이다. 이를 통해 ‘緣起’를 따라 간다. 말을 통한 발견이 필요하다. 시에서 웅변은 가장 저급한 것이다. 눌변이 좋다. 시에서는 말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곧 말장난이다. 그러나 많이 드러난 말장난은 안 좋다. 말장난이긴 하지만 의미 있는 말장난이 되어야 한다.  *  세 번째, 시보다는 시작 노트가 더 좋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작 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시를 쓴다는 의식 아래 시를 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좋은 시를 쓸 수가 없다. 녹차는 첫물을 걸러 내고난 뒤 두 번째가 가장 맛있다. 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가 된다. 골프는 ‘힘 빼는데 3년’이라고 한다. 테니스도 어깨와 손목에 힘을 빼야 원샷을 할 수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말이 움직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시작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실제로 김종삼 시인의 라는 시는 그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가장 아름답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사물을 묘사할 때는 명함판 사진을 그리려 하지 말고 스냅사진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 스냅 사진이야 말로 한 순간 속에 "영원"이 들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명함판으로 봐서야 무슨 애틋한 느낌이 들겠나. 명함판 사진은 공적인 차원의 사회적 가면이다. 명함판이 가장 비시적이다. 로댕은 손의 표정을 기막히게 표현해내는 조각가인데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가 그런 작업을 한 것은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만 손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외국 명문 극단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연습을 하는 것은 손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그런 차원에서 글을 쓸 때 문어로 쓰지 말고 구어를 써라. 밥해놓고 3일 지난 게 문어다. 구어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언어의 생생한 리듬이 있다. (베토벤의 일화; ‘내가 돈이 어디 있나, 이 사람아~ (♩♬♩)’ 이 가락이 유명한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시 쓸 때 말을 혀로 굴려볼 필요가 있다. ‘얼굴’이라는 말보다는 ‘상판떼기’가 훨씬 실감나지 않는가. 비어, 속어, 사투리, 은어는 시어의 보고이며, 구어는 곧 활어이다.  자신이 지금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라. 피아노 소리는 피아니스트의 어깨를 보면 알 수 있다. 완전히 풀려야 한다. 힘을 빼려고 하면 더 힘이 들어간다. 잡생각을 지우려면 다른 걸 채워야 한다.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비우려면 채워야 한다. 자신에게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에게 하듯이, 기도하듯이 말을 하라. 결국 머리가 몸을 뻣뻣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들은 모든 예술에 통한다. 예술에 통하는 것은 곧 스포츠에 통한다. 곧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대로 끝장났다 아직은 말하지 마라 대가리에서 지느러미, 또 탱탱 알 밴 창자까지 한 소절 제주사투리, 그마저 삭았다 해도. 자리라면 보목리 자리, 한 일년 푹 절여도 바다의 야성 같은 왕가시는 살아 있다. 딱 한 번 내뱉지 않고는 통째로는 못 삼킨다. 그렇다. 자리가 녹아 물이 되지 못하고  온 몸을 그냥 그대로 온전히 내놓는 것은 아직은 그리운 이름 못 빼냈기 때문이다.                오승철 (1957 - )「자리젓」전문 오승철 시인은 제주에서 낳고 자라서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제주도 토박이다.  그는 제주도에 오름이 몇 개 있고 어느 동굴에 4.3의 한이 서늘하게 남아 맴돌고 있는 지를 낱낱이 알고 있다. 파도 소리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숨비소리와 이어도 노래에 이 섬의 여인네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기억해낸다.  아가미와 지느러미 같은 곳에 삭지 않고 뱉어내야하는 단단한 가시를 갖고 있는 자리젓을 먹으며 제주도를 소개해주던 오시인의 구수한 목소리가 들린다. 자리젓의 가시는 아직은 그리운 이름을 못 빼냈기 때문이란다. 삭지 않은 그리운 이름들이 오승철 시인의 시가 되어 우리들 가슴을 찔러댄다.     버린 것들이 돌아와   -  이응인   이 가을 결명자 씨를 받는다. 활처럼 휘어진 꼬투리 톡 당기면 한 번에 서른 알씩 쪼르르 쏟아지는 갈색 그 야무진 열매.   지난 봄 곰팡이 슬어 심지도 못하고 밭둑에다 내버렸는데 버려진 고놈들이 대를 밀어올려 연둣빛 보드란 잎을 펼치고 노랗고 순한 꽃을 보이더니 손가락보다 긴  꼬투리 조롱조롱 내달았다.   가을 깊어 그새 잊고 있었는데 배추밭 지나가면 제 몸 촐촐촐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결명자.   이내 어둑발 들어 주전자에 물 올려 차를 끓인다. 내다 버린 것들이 돌아와 버린 자의 눈을 맑혀주는 밤.   나는 얼마나 더 남루해져야 버린 것들의 맑은 눈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나로 돌아와 결명(決明)에 이를까.         그냥 휘파람새   - 이응인      일요일 나무 심는 날 아침, 전봇대 맨 위 전깃줄에서 목청 좋게 노래하던 새, 내 발자국 낌새 알고 옆집 전봇 대로 휘익 날아간다.  아침마다 찾아와 노래를 불러대 는 저 손님은 누굴까?  이튼날 아침에도 살포시 문 열고 노래를 엿듣는데 어찌 알고는 도망간다.  대체 누굴까? 며칠 인터넷을 뒤진다.  한국의 새. 멀리서 봐 놓으니 생 긴 건 분명치 않아, 휘-익, 휘파람새, 아내한테 자랑을 했 더니,  미숙이가 휘파람새라 그러대요.  나무 심는 날 다 녀간 후배다.  어떻게 알았대?  그냥 들어보니 휘파람을 불더래요.                - 조호진   빛나고 반듯한 것들은  모두 팔려가고  상처 난 것들만 남아 뒹구는  파장 난 시장 귀퉁이 과일 좌판  못다 판 것들 한 움큼 쌓아놓고  짓물러진 과일처럼 웅크린 노점상  잔업에 지쳐 늦은 밤차 타고 귀가하다  추위에 지친 늙은 노점상을 만났네.  상한 것들이 상한 것들을 만나면  정겹기도 하고 속이 상하는 것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떨이로 몽땅 가져가시오!"  떨이로 한 움큼 싸준 과일들  남 같지 않은 것들 안고 돌아와  짓물러져 상한 몸 도려내니  과즙 흘리며 흩뿌리는 진한 향기  꼭 내 같아서 식구들 같아서  한 입 베어 물다 울컥거렸네.      ​        - 조호진   목숨보다 더 뜨거울 것처럼 길길이 뛰다  비루먹은 개처럼 꽁무니 빼는 詩  원숭이 똥구멍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詩  비겁과 거짓으로 뻔뻔해진 詩  도마에 올려 진 동태 대가리 날리듯  한 칼로 쳐 날려 끊지 못하네.  저자바닥에 다라니 양은그릇  손톱 갈라진 돌산 할매 꼬막 바지락 까듯  갈치 몸뚱이 토막 내는 동산동 어멈처럼  아침 해장술에 불콰해진 장바닥 술꾼처럼  서른여덟의 좌판에 놓인 시를 까발려 보고  토막도 내어보고 헝클어도 봤지만  어, 어, 없네 삶도 목숨도 없네  머리 숲 젖가슴까지 비린내에 절어버린  흥정 끝에 이년 저년 머리칼 잡고 뒹구는  그네들의 밥과 눈물과 술이 없고  잔재주에 어설픈 객기만 나뒹구네.  장바닥 어슬렁거리며 자릿세 뜯는 건달처럼  그네들의 삶을 이리 저리 뜯어 부쳐서  슬픔의 분을 바르고 거짓 눈물을 흘렸구나.  만선은커녕 흉어기로 텅 비어버린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던  서른여덟의 파시된 항구여.   
1673    詩란 백지위에서 나를 찾아가는 려행이다... 댓글:  조회:3906  추천:0  2016-10-18
[ 2016년 10월 18일 03시 33분 ]     영국 세인트앤드루스(圣安德鲁斯)대학은 스코틀랜드(苏格兰)에서 제일 오래 된 대학으로 무려 600여년동안의 력사를 갖고있다. 정영숙/ 백지 위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행 시를 쓸 때 나는 신체리듬을 중시한다. 신체리듬에 따라 글이 잘 씌어지기도 하고 전혀 씌어지지 않기도 한다. 리듬이 맞지 않는 사람과 만나게 될 때 트러블이 생기거나 어느 장소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 흐르는 리듬이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람의 리듬은 우주의 리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주행성인 지구의 위치에 따라 즉, 사계절 변화하는 리듬에 따라 우리의 신체가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며 또한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생기는 밤과 낮에 따라 개개인의 신체리듬도 달라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시는 개개인의 독창적인 리듬으로 인해 태어나는 그 시인만이 지닐 수 있는 개성적인 어떤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詩는 존재로 돌아가기이다. 리듬이고 이미지인 句를 통하여 인간은 존재한다.’라는 옥타비오 빠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의 시는 내 생활의 리듬에 따라 몸이 열리고 닫히고 하면서 이루어진다. 어느 순간 방황하던 나의 사유는 신체의 리듬에 의해 이미지와 의미를 가지고 시로 씌어진다. 언제나 첫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써 내려가는 시간은 짧다. 이성적인 의식 없이 마지막 행까지 막히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는 의미의 통일성을 가지나 쓰다가 막히는 시는 나중에 다시 쓰기는 어렵다. 또한 나의 시는 충만되지 않는 결핍된 상태에서 씌어진다. 무엇인가 목마르게 갈구하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내 영혼을 불러 펜대를 쥐어 준다. 그 순간 백지 위에 태어나는 나를 보게 된다. 마치 무당이 신이 내려 칼날 위에서 맨발로 춤을 추듯이 나의 혼은 백지 위에서 춤을 춘다. 아래 시는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단숨에 써 내려간 것이다. 조수아, 나의 나무 아침의 바둑판을 펼치면① 나무를 향해 달려오는 코뿔소를 본다② 사막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거대한 힘③ 수직의 뿔 끝에 뭉쳐진다④ 시퍼런 뿔에 받쳐⑤ 모래불 속으로 선인장 노란 꽃이 떨어진다⑥* 순식간에 바둑판 위에서 길을 잃는다⑦ 코뿔소의 뜨거운 입김에 선들이 지워진다⑧ 게임의 규칙도 사라진다⑨*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된다⑩* 여기에 길은 없다⑪ 모래 바람 태양 불 속에 수십 년 가꾸어 온⑫ 나의 조수아⑬ 하늘로 뻗었던 가지가 꺾이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다⑭ 벌떡 일어나 흩어진 바둑알을 주워 바둑판 위에 올린다⑮ 그리고 열심으로 가지를 뻗어 꽃을 생각한다?* 이제 막 아침을 밝히는 노란 꽃 한송이 피워 올린다? 시를 다 쓰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던 나는 사라지고 만다. 시를 쓰기 전의 방황하던 마음, 갈등,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되려던 세계의 혼란, 욕망, 분노, 희망 등은 펜을 놓는 순간 사라진다. 백지 위에는 언어만 댕그마니 남는다. 처음 보는 순간 낯선 얼굴을 한 언어 앞에서 나는 당황하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잠시 후 거기서 나 자신과 다시 만나게 된다. 시를 쓰고 나서 바로 고치는 일은 거의 없다. 시를 쓰는 시간은 짧지만 거기에 소모되는 에너지는 아마 1000m 수영을 한 만큼의 에너지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덮어 두었다가 시간이 얼마 경과한 후에 다시 읽어보면 거기에서 어떤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시행과 시행 사이, 연과 연 사이의 의미구조가 맞지 않거나 청각적으로 귀에 거슬리는 리듬,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 행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두음과 휴지, 같은 의미와 소리의 반복은 리듬 있는 시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어와는 달리 우리 말에는 강세와 고저, 장단, 각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5행의 ‘시퍼런 뿔’과 6행의 ‘선인장 노란꽃’의 두음을 맞추기 위해 6행의 앞뒤 말을 바꾸었다. 그러고나니 우연히도 3,4,5,6,7행까지 두음의 ‘人’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읽어 보았더니 전보다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생기게 되었다. 9,10행은 시의 흐름에 거슬리며 구체적 사실 묘사뿐 각 행에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것 같다. 한 시행 안에는 리듬과 이미지, 의미가 함께 공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1연의 ‘아침의 바둑판’이 2연의 ‘길’의 이미지로 확장됨에 따라 흰색과 검정색의 바둑알은 빛과 어둠의 이미지로 더 크게 증폭시켰다. 또한 16행에서 ‘그리고’는 시에서 필요없는 접속사이므로 삭제하고 명사 ‘꽃’을 강조하기 위해 ‘열심으로’ 부사를 꽃 앞으로 옮겼다. 아침의 바둑판을 펼치면 나무를 향해 달려오는 코뿔소를 본다 사막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거대한 힘 수직의 뿔 끝에 뭉쳐진다 시퍼런 뿔에 받쳐 선인장 노란 꽃이 모래불 속으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바둑판 위에서 길을 잃는다 코뿔소의 뜨거운 입김에 선들이 지워진다 뿔뿔이 흩어지는 아침의 알갱이들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되는, 어둠이 빛이 되고 빛이 어둠이 된다 여기에 길은 없다 모래 바람 태양 불 속에 수십 년 가꾸어 온 나의 조수아 하늘로 뻗었던 가지가 꺾이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나 흩어진 바둑알을 주워 바둑판 위에 올린다 가지를 뻗고 열심히 꽃을 생각한다 이제 막 아침을 밝히는 노란 꽃 한송이 피워 올린다 그러고나니 바둑판과 코뿔소라는 두 명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바둑판은 코뿔소에 비해 너무 작은 명사이지만 지금껏 바둑판에 대신할 명사, 코뿔소에 대신할 다른 명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 단어가 가진 상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바둑판이 상징하는 것은 바둑판에 그려진 직선에서 느끼는 것처럼 잘 짜여진 규범과 틀, 질서, 그리고 도덕적인 정신세계이며 코뿔소가 상징하는 것은 에너지나 규제되지 않는 본능의 힘, 무의식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나는 무의식적인 본능의 힘을 느끼고 거기에 맞서는 태양을 상징하는 노란 꽃을 정신세계에서의 승리로 피워 올리게 된다. 노란꽃을 詩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내가 써 놓은 시를 보면서 시편 속에 나오는 단어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나면 왜 내가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의 당위성을 알게 된다. 나의 시는 내 몸의 리듬이며 욕망의 목소리이며 내 존재 찾기이며 끝없이 나를 찾아가는 행위로서의 여행이다. 나는 오늘도 나를 찾아 백지 위에서 긴 여행을 떠난다.◑ ◇정영숙 서울 교육 대학, 한국 방송통신대 영문학과 졸업. 92년 『문예사조』로 등단.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 『지상의 한 잎 사랑』   ====================================================================================    내 마음 속의 시                   너를 본 순간   이승훈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튀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시커먼 밤이었고   너는 하이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져린 외롬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찾아온 건   하이얀 피   쏟아지는 태양   어려운 아름다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요한 공기   피로의 물거품을 뚫고   솟아 오르던   빛으로 가득한 빵   너를 본 순간   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   태양의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싸였다   너를 본 순간   허나 너는 이미   거기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승훈 시인처럼 고독한 표정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를 처음 본 것은 1988년 여름이었다. 한양대로 옮긴 김시태 선생께서 하시던 '문학과 비평' 문학 강연회 자리에서였다. 강연회 후 제주 서부두 횟집 즐비한 방파제로 가서 소주를 마셨는데 가까운 자리에서 본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외롭게 보였다. 저녁이었고 수평선엔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그는 소주를 별로 안 했다. 이 사람은 분명 무슨 깊은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구나, 생각되었다   방파제에 앉아 수평선의 노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쓸쓸한 보헤미안 같았다. 그는 별 말이 없었다. 강연에서는 그렇게 차분하게 잘 하던 그가 이 저녁의 바닷가에서는 말이 없었다. 그 가는 몸피, 검으스레한 얼굴, 반 곱슬의 머리. 매력 있었다. 시인 같았다.   그는 가방에서 꺼내 내게 '내가 뽑은 나의 시, 너를 본 순간'(문학사상사)를 주었다. 파란 볼펜으로 '나기철 선생 88.7 이승훈'이라고 작게 썼는데 달필이 아니었다. 거기 저녁 노을이 묻어났다. 무엇인가와 화해하지 못하는 의식의 날카로운 촉수가 드러났다. 허나 그의 표정은 온유했다. 착했다. 어둠이 짙어가자 그는 "김형, 이제 그만 갑시다"하고 재촉했다.   그 후 시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발표하는 시와 산문들을 읽었다. 그가 쓴 '시작법'은 내 중요한 시의 지침서가 됐다. 2001년 여름, 남제주 분재예술원에서 열린 '다층'이 주관한 '한일 시인 100인 시집' 모임에서 그를 두 번째로 만났다. 그는 어느덧 60이 되었고 단정했다. 흰 머리카락도 많이 보였다. 나를 알아보고 먼저 말했다. 뷔페 음식을 기다리며 몇 마디 나눈 후 다시 떨어졌다. 나는 계속 그를 바라봤다.    어느 글에서 그가 두통 때문에 매일 학교 앞에서 박카스 두 병을 사서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마신다던가, 늘 우울하다던가, 해 질 무렵에 맥주 한 병을 마시며 시를 쓴다는 걸 읽고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글을 쓰고, 교수 생활을 잘 할까 의아하게 여겨졌다.    우리는 누구나 다 '너를 본 순간'이 있다. 이 시처럼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튀고, 장미가 피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술을 마셨고, 태양이 쏟아졌고, 그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쌓였'던 것이다.   그랬다. 너를 본 순간에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이게 시의 경이고 아름다움이다. 너를 본 순간을 시가 아니면 이렇게 나타낼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너를 생각하며 너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린다. 너를 만나는 때는 언제나 이처럼 마냥 새롭다. 너는 한 '운명'처럼 내게 왔다. *이승훈(1942-) 1942년 춘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문학박사).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현 한양대 국문과 교수. 시집 '사물A', '환상의 다리', 당신의 방' '너라는 환상', '밝은 방', '나는 사랑한다', '너라는 햇빛', '인생' 등. 시론집 '시론', '비대상', '모더니즘 시론', '포스트모더니즘시사' 등.  
1672    락서도 문학적 가치를 획득할 때... 댓글:  조회:4468  추천:0  2016-10-17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짧은 생각                모두 놀랐겠지만,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수가 어찌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제일 먼저 들었고, 곧 이어 ‘아하, 싱어송라이터이니 가사로 수상한 것이구나!’ 하였다. 그래도, 의구심이 솟아 Wikipedia에 들어가서 혹시 내가 모르는 밥 딜런의 저작이 있나 살펴보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그의 유일한 소설인 ‘Tarantula’와 자서전 ‘Chronicles’ 외에는 가사모음집들이 전부였다. 정말로 그가 평생토록 불렀던 노래가사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것이다.       충격과 당혹감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곧이어 떠오른 감정은 통쾌함이었다.지금 우리나라의 고지식한 영문학 학자님들께서 19세기 케케묵은 서가를 박차고 나와 밥 딜런의 가사를 연구하러 뛰쳐나갈 것을 상상하니 어쩐지 흐뭇했다.아니, 그들은 서가를 박차고 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곰팡내 나는 소파에 머리를 처박고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댈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러한 상상들은 평생 동안 우리나라 영문학의 고루함을 증오했던 내게 짜릿한 전율을 안겨주었다. 세계의 언론들은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라고 야단이지만, 우리나라 문학가들이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이었다면 지구가 두 쪽이 나도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은가. 누가 감히 권위 있는 한국 문학상에 김광석, 김창완, 타블로를 거론하겠는가?(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른 가수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통쾌함이 사라진 자리에 이상스런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스멀거리는 호러 무비의 한 장면처럼, 2016년도 노벨상 위원회의 파격을 에워싸는 음습한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좋으나,왜 하필 노래가사인가?       물론,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강의에서 배웠던 것처럼, ‘문학’의 의미를 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노래가사 역시 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주변문학으로 간주하는 것들, 일기라거나 편지글, 쪽지, 심지어 낙서까지도 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면 ‘문학’인 것이다. 특히 노랫말은 태고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입과 입으로 전해지던 음유와 서사의 기원을 지니고 있으므로, 밥 딜런을 ‘시인’이라 부르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밥 딜런의 노랫말이 ‘가치 있는’ 노랫말인가?               어떤 일에건 의문이 들면 관련주제의 책을 뒤져보는 습관이 있으므로, 서가에서 뽑혀 나온 책은 다름 아닌 Terry Eagleton의 ‘Literary Theory’였는데, 내가 색연필로 밑줄 그은 부분은 문학의 가치가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그 감동적인 구절이다. Terry Eagleton에 따르면 결국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벨상 위원회가 파격적으로 제시하는 가치는 어쩌면 주류문학계가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21세기적 가치인지도 모르겠다. 종이 위에 깨알처럼 박혀있는 은유와 상징의 현학적 잔치들만이 문학이 아니라 기타 들고 노래하는 한 음유시인의 이야기 또한 위대한 문학이라는 주장... 혹은 생트집.       그래서, 노벨상 위원회가 21세기 초엽에 혁명적인 반기를 뒤흔든 것인가?글쎄...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문학의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가수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는 데 있지 아니하고, 문학 내부의 계급적 인식을 전복시키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스티븐 킹에게 노벨문학상을 줄 수는 없는 것인가? 그 수많은 위대한 아동 문학가들과 그림책 작가들과 청소년 소설가들과 천재적인 SF 작가들... 그들에게도 밥 딜런과 같은 기회가 오기는 올 것인지? 올해 노벨문학상의 파격이 정녕 문학적 가치의 지축을 흔든 것이 맞다면, 이제는 장르의 경계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일단 그가 직접 쓴 소설을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어 ‘Tarantula’를 대출 신청하였다. 그의 자서전 ‘Chronicles’는소장하고 싶어져서 주문을 하였다. 그런 뒤 지난 밤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그의 노래가사를 그림동화책으로 만든 두 권의 그림동화를 읽었다. ‘Blowin’ in The Wind’와 ‘Man Gave Names to All the Animals.’ 그가 미국인이고 남자이고 백인이기에 한 비평가는 노벨상 위원회의 놀라운 시도가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고 일침을 놓았지만, ‘Blowin’ in The Wind’에 깃든 아름다운 의미는 밥 딜런의 외양을 잊게 할 만큼 강렬하였다. 부디, 세상에 도사리는 검은 파워가 한 가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를...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에는 천만가지가 있는 것이니, 이제 문학은 시선을 조용히 안으로 향하고 내부의 균열을 들여다 볼 일이다. ///개똥철학.      [ 2016년 10월 18일 08시 50분 ]     정주(鄭州)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ㅡ   ==============================================     ▲ 이병철    시인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 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한 대목이다. 나는 이 노랫말만큼 근사한 시가 또 없다고 생각한다. 이 노래를 들으면 태어나 처음 자기존재의 근원과 죽음이라는 한계에 대해 본능적으로 감각한 한 소년의 두려움과 고독이 느껴진다. 노래에서부터 문학적, 철학적 사유가 촉발된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라고 노래한 이문세의 `옛사랑`도 그렇다. 이영훈이 쓴 노랫말은 한 편의 시다. 가사가 환기시키는 보편 정서와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같은 감각적 이미지는 좋은 시가 가져야 할 미덕으로 충분하다. 이런 경우 시와 노래 사이에는 종이에 인쇄되느냐 아니면 가수 목소리에 실려 나오느냐의 차이만 있게 된다.  한 문학평론가는 조용필 노래가 지닌 문학성에 대한 고찰과 그의 전기를 담은 `조용필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영훈의 `광화문 연가`와 루시드폴의 `물고기 마음`은 노랫말을 책으로 엮은 가사집인데 이미 7년 전에 출간된 바 있다. 류근 시인의 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김광석이 부른 것이나 김남주의 시를 안치환이 노래한 것은 무척 잘 알려져 있다. 우리 시에 현대음악을 입혀 랩과 보컬, 댄스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트루베르`의 음악을 나는 좋아한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 듀엣의 유사품이든 아니든 간에 박인수, 이동원이 부른 `향수`는 아름답다.  시와 노래, 문학과 음악은 경계를 넘나들며 상호 보완한다. 노래의 통속성이 인쇄문자의 엄숙함을 입어 정형 미학을 얻기도 하고, 문학의 경직감이 노래를 통해 한결 가볍고 편해지기도 한다. 나는 노래 부르는 것만큼이나 시 암송하는 걸 좋아하는데 차를 타고 가면서 서정주의 `화사`나 `자화상`, 이성복의 `연애에 대하여`, 정지용의 `유리창1`, 전윤호의 `늦은 인사` 같은 시를 외우다 보면 목소리의 떨림과 굵기, 고저장단, 박자, `꺾기`가 신경 쓰인다. 시를 마치 노래처럼 대하는 것이다. 꼭 노래 부르는 기분이 든다. 기독교에서는 찬송을 `곡조 있는 기도`라고 표현한다. 문학적 수사와 철학을 담고 있는 노래를 곡조 있는 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와 음악은 하나였고 중세시대 음유시인은 곧 가수였다. 조동진, 김민기, 정태춘 등 문학가들이 유독 좋아하는 가수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문학가들도 `노래하는 시인`이라든가 `시 쓰는 가객` 등 시인의 칭호와 대우를 쉽게 허락한다.   그런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받은 건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의 노랫말이 시적이지 않아서, 문학적으로 뛰어나지 않아서 비판하는 건 수긍해도 대중음악가가, 가수가 어떻게 노벨상을 받느냐고 따지는 꼬장꼬장한 태도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동일성의 원리로 타자성을 배격하는 폭력은 나치나 IS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순혈주의, 정통주의 역시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번 노벨문학상을 두고 문학의 굴욕이니 조롱이니 하며 탄식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수도사가 언뜻 보인다.   노벨문학상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누가 받으면 또 어떤가. 상이 문학과 예술,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이 인간에게 정신의 풍요 또는 궁핍을 준다면 밥 딜런의 노랫말은 충분히 문학적 기능을 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의 노벨문학상 장사익 `찔레꽃`을 들으면서 가을처럼 깊어지는 중이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아, 울고 싶다. 나는 이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없을 것만 같다.
1671    詩란 낡아가는 돌문을 천만년 들부쉬는 작업이다... 댓글:  조회:4188  추천:0  2016-10-17
  석문(石門)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虛空) 중천(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 해설>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서 전설을 소재로 하여 이루어진 작품이다. 임에게 버림 받은 여인의 하소연을 통해 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기다림이 임에 대한 원한으로 확대되며 그 기다림의 한이 극대화되어 가는 모습이 돌문의 모습으로 선명히 형상화되고 있다. < 핵심 정리> 형식 : 자유시, 서정시, 산문시 운율 : 내재율 주제 : 버림 받은 여인의 기다림과 하소연 성격 : 고백적, 상징적, 낭만적 어조 : 하소연의 어조 제재 : 버림받은 신부(新婦)의 하소연(경북 영양 지방의 전설) 출전 : 시집 '풀잎 단장', 1952 구성 : 제1연 : 돌문의 존재와 현재의 기다림             제2연 : 슬픈 영혼의 모습             제3연 : 자신의 처지 하소연- 눈물과 한숨 속의 기다림             제4연 : 해후의 모습 - 한 줌 티끌로 사라짐             제5연 : 현재의 모습 - 원한에 사무친 기다림 ⊙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 임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열 수 없는 돌문  ⊙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 오랫동안 당신이 찾지 않았음  ⊙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 ⇒ 임을 향한 사랑의 마음 ⊙ 천 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 사무친 원한의 표현 ⊙ 한숨에 입술이 푸르러감 ⇒ 지극한 슬픔의 표현 ⊙ 당신의 따슨 손길이 ~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 절개를 지키겠다는 매운 의지 ⊙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 세월의 풍파를 겪고 있는   이 시는 산문시라는 형식상의 특징과 함께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시라는 점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내용적으로는 설화의 세계에서 뛰쳐 나와 시적 화자로 변용된 여인의 하소연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시적 화자인 여인은 1연에서 자신의 모습을 열리지 않는 돌문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 돌문은 검푸른 이끼가 않았다고 했으므로 오랜 세월을 임과 이별한 상태임을 알 수 있고, 2연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표상되는 촛불 한 자루를 간직하였다고 했으므로 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속에 낡아 가는 돌문이다. 또 3연에서는 눈물과 한숨에 입술이 푸르러 간다고 했으므로 오지 않는 임에 대한 슬픔과 원망에 사무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4연에서는 당신의 따슨 손길이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다고 했으므로 매운 정절 속에서 기다림의 한을 삼키고 있는 돌문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그러한 원한과 정성과 슬픔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요약하면 여인은 떠난 임을 사랑과 그리움 속에서 정절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으나 이제는 가슴 속에 사무치는 원한이 되어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자는 설화의 세계로부터 한 여인의 모습을 시로 끌어들여 섬칫할 정도의 사랑과 그리움의 세계를 급기야는 원한으로까지 치닫는 지극한 한의 세계를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시인 연구> - 아래의 성명을 누르세요.   조지훈 전설의 내용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마을의 두 총각 중에서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신혼 첫날 밤 자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신방 문에 칼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신랑은 자신의 연적(戀敵)이 자기를 죽이려고 숨어 있는 것으로 알고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그 칼 그림자는 다름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가 문에 비친 것인데 어리석은 신랑이 오해를 한 것이다.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원삼과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썩지 않고 첫날밤 그대로 있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서 의미상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앞 단락은 1∼3연으로 풍상에 시달려온 돌문의 모습을 통해 천년의 한을 간직한 신부의 서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뒷 단락은 4∼5연으로 미래에 있을지 모를 '당신'과의 해후(邂逅)를 그리고 있다.    1연에서는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돌문'이 제시되고 있다. 검푸른 이끼가 내려앉도록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로지 '당신'의 따스한 손끝만을 기다리고 있는 돌문에게서 신부인 화자의 지극한 사랑과 간절한 기다림을 엿볼 수 있다. 2연에서는 '꺼지지 않을 촛불'을 통해 '천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신부의 슬픈 영혼을 보여 주고 있다. 3연에서는 '눈물과 한숨'으로 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문의 애틋한 모습을 '어찌합니까?'라는 체념 섞인 어조로 나타내고 있다. 4연에서는 지금까지의 격앙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강한 어조로 절개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당신'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순간에야 한 줌 티끌로 사라질 것이라는 서러운 비원을 말하는 한편, 그렇게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눈물 없이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라며 '당신'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5연에서는 또다시 천 년을 비바람에 낡아가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돌문을 통해 원한이 사무친 신부의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1연에서의 돌문이 '기다림의 문'이라면, 5연에서의 돌문은 '원한의 문'으로 신부의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열리지 않는 돌문으로 비유한 것이다. 설화를 바탕으로 한 시들    조지훈, '석문', 김소월, '접동새', 서정주, '신부', 김영랑, '두견' < 생각해 볼 문제> (1) 이 시에 나타난 '석문'의 이미지에 대해 설명하시오. 답 : 첫 행에서 사용된 돌문은 '기다림'의 문이고, 마지막 행에서 사용된 돌문은 '원한'의 문이다.  (2) '석문'에서 간곡한 하소연의 부분을 찾아보자. 답 : 이 작품은 일종의 담화 행위가 베풀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시적 자아의 목소리를 더 빨리 듣고 느낄 수 있다. 즉, '당신'으로 시작되는 시어의 전개를 시적 자아가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랬을 때 1연은 장차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돌문'의 존재와 현재의 모습을 담담하게 제시해 보이고 있다. 2연은 그에 머무는 영혼의 사연을 서술하고 있다. 3연에서는 직접 독자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으며, 4연에서는 원하던 상대가 와서 자신의 원한이 풀렸을 때가 어떠할까를 그려 보인다. 이 중에서 우리는 가장 간절한 목소리가 배어 있는 부분으로 3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2연까지의 시상 전개는 3연에 이르러 원망을 담은 현재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푸념어린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시상을 '현재화'하여 더욱 생생한 느낌을 갖도록 하는 동시에 질문 자체가 이면에 가슴의 울림을 체험하도록 이끌고 있다. 따라서, 이 시 전체를 푸념으로 보았을 때, 가장 간곡한 하소연의 부분은 3연이다. ============================================================================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 부시지 않아 좋다 (중략)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김현승 (1913 - 1975)「창」부분 김현승 시인은 기독교적 주지주의 시인이라고 불려진다. 「가을의 기도」나「눈물」 과 같이 기도문의 형식으로 된 시들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의 대부분의 시들이 담고있는 밝고 미래지향적인 느낌 때문이리라.  '부처'나 '자비'같은 단어가 한 마디 없어도 불심이 느껴지는 많은 선시에서처럼 위 시는 '주님'이나 '기도'와 같은 말을 쓰지 않았지만 돈독한 기독교적 신앙심을 행간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좋은 시인이란 해를 사랑한다는 눈부신 표현 대신에 창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창을 열심히 닦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고로 아래에 전문을 붙입니다. [시]           창                     김현승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1670    모든 문학예술은 련속성안에 있다... 댓글:  조회:4035  추천:0  2016-10-17
구조주의와 기호학 테렌스 호옥스   서울시신아사, 1984년   비꼬(vico)는 이탈리아의 법률가인데 (1725년) 그 당시에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기념비적작품. 비꼬의 연구는 … 영원히 계속되는 구조화의 과정이 인간정신에 대해서 지니는 마취적인 속박을 풀어버리는 최초의 근대적 시도의 하나로 손꼽힌다.17   진정 변별적이고 영원한 인간특성은, 라는 능력안에서 식별해 볼수 있는데 , 그것은 신화를 창조하며 또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필요성인것으로 나타난다… 시적예지라는 재능은 그러니까 구조주의 재능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에 성격을 부여하는 원리이기에, 인간이다 라는것은 구조주의자이다 라는것과 같다는 주장이다.17   삐아제(piaget) 삐아재는 구조를 전체성의 개념, 변환의 개념, 자기조적의 개념 등 세가지 개념으로 생각했다. 전체적이라는것은 내적인 결합체를 의미한다. 변환적이라는것은 정적이 아니다. … 구조는 변환의 절차를 행할수 있어야 한다. … 언어는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구조 로서, 갖가지의 기본문장을 광범위하게 다양한 새로운 발화로  변환시킬수 있는터이나, 한편으로는 그 변환을 언어자신의 고유한 구조안에 머물러있게 한다. 자기조절적이란 변환수단을 유효한것이 되게 하기위하여 제자신을 넘어서는것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변환은 그 변환을 수행하는 고유의 법칙을 유지하고 보장하도록 작용하며 다른 체계가 련관되지 않게 그 체계를 봉인하도록 작용한다. 개라는 낱말은 언어구조안에 존재하여 기능하고 있으며, 네개의 발을 가진 짖는 피조물이 실재한다 는것과는 관계가 없다.19   구조주의-세계에 대한 하나의 사고방식   사물의 참된 본성은 사물 그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하고 그리고 지각하는 사물들 간에서의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것이다. 20   구조주의자의 생각의 궁극적인 원천은, 항구적인 구조, 즉 개개인의 행위, 지각, 자세가 그 안에서 조화되고 그것들의 최종적인 성질이 그로부터 이끌어내지는 구조라고 할수 있겠다… 인간본성의 그 측면에 , 즉 언어에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여 있다.21   언어학과 인류학 – 소쉬르( Saussure) 스위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이다.22   두개의 기본적차원에서… 즉 랑그라는 측면과 빠롤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24   빠롤은 물우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다.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 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자체는 모순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것이다.25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있는 물리적인 나무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 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 현실에의 보증할만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 나무라는 낱말이 땅우에서 자라고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물체를 의미하는것은, 그 언어의 구조가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이미지시키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31   레비스트로스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언어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며, 언어에 대해서 말하는것은 사회에 대하여 말하는것이다.42   어떠한 경우에서든 , 어떤 현상을 결정하는것은 그 현상자체의 어떠한 본래적인 양상도 아니고, 현상들간에서의 관계이다 라는것이 , 구조주의 (그리고 음운론)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44   문학에 관해서 말하면, 이것은 먼저 단순한 내용을 넘어서서, 우리가 막연한 형식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는것을 의미한다.79   러시아 포르마리즘.(formalism)1920- 1930.Boris  Eichenbum, Vtor Shklobisky, Roman Yakobson,  Bris Tomasjevsky, Juri Tynyanov언어학자나 문학사가들. 모스크바언어학회와 뻬드로그라드 시적언어연구회.   초기의 포르마리즘(1920-30년대 쏘련형식주의)은 상징주의 및 실용될수 있는 코무니 케이션의 도구로서의 형식에 대한 상징주의자적 관심을 기본원리로 해서 구축되였었다. 즉 자립적이고 자기표현적이며, 언어외적 리듬, 연상, 암시를 리용해서 언어를 보통의 일상적인 의미 영력을 넘어서까지, 늘려나갈수 있는것으로 생각해서이다. 이러한 관심에서, 비평의 경우에도 문학적인 언어를 작동시키는 기술에 열심히 주목하게 되고, 또 이 기술들을 일상적인 언어의 양식mode과 구별해서, 그 특성을 규정하려는 관심이 생겨났었다.81   Shkrovsky는 ‘예술은 언재나 인생으로부터는 자유이고, 그것의 색갈은 도시의 성책위에 펄럭이는 깃발의 색갈을 결코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일 예술이, 특히 문학이,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있다면, 문학의 학술적연구나 비평은 마땅히 애매함이 없이 분명하게 확정된 고유의 자동영력을 가지고 있는 통일된 지적활동이라야 할것이다. ‘예술형식은 , 예술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 skrovsky의 분명히 구조주의적인 일반원칙에 따른다면, 위에 말한 그 령역은,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문학인가라는것에, 즉 언어예술전반에서의 특유한 성질에 밀접하게 연관되여 있다. 스크로브스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이란, 작품을 될수있는대로 예술적인것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 따라 특수한 기법으로 창작되여진 작품을 말한다.를 용인하는것은 야콥슨의 결론인’문학연구의 대상은 , 문학의 총체가 아니고, 문학성, 즉 작품을  문학작품이 되게 하는 그것이다’를 역시 용인하는것이 된다…. 작가의 내부에서가 아니고 작품자체의 내부에서, 즉 시인에서가 아니고  시의 내부에서 발견될수 있다는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거기에 사용된 언어의 독특한 용법에 깃들어있어야 한다83….   포르마리스트들은 전의적, 언어, 은유, 상징. 시각의 영상 등은 시의 필요조건인것이 아니라 일상언어의 특징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문학분석에서의 그들의 흥미는 이미지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고 이미지가 적용되는 용법에 있는것이리라.84   일탈은 포르마리즘의 중심적관심사…일상의 언어와 비교해 볼때, 문학언어는 일탈을 발생시킬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탈이기 때문이다… 장치, 기법은 문학예술의 근간이 되며, 문학의 모든 요소가 그곳으로 향해서 조직되고있는 기본적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 요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기도 하다.85 시적술화는 … 단순한 실용성이나 지식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정보의 전달이나 언어를 넘어서 저쪽에 있는 지식의 체계화에도 관여하지 아니 한다. 시적언어는 용이주도하리만큼 자기의식 적이며 자기각성적이다. 그것은 자체내에 포함되여 있는 메시지이기를 떠나서, 두드러지게 매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특색을 지니고있으며, 또 제자신의 언어적특질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고있다. 그 결과 시에 사용 되는 낱말들은 , 단순히 사상전달의 신분을 지니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율적인 구체적 실체 인것이다.86   시는 낱말과 의미를 분리시키기보다는 , 오히러 –놀라운 일이 겠으나- 낱말이 취하게 되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런 점에서 시는 또 다시 보통의 언어활동의 정도를 한층 더 높인다… 낱말의 시적용법에 의하여 애매성은 낱말의 운용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이렇게 됨으로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옮겨가는 낱말이 낱말의 구조사의 역활이 전환되 여진다.87   예술작품은 모방(내용을 지니고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형식의 완전한 우월이라는 관념을 대치시키는 일이기때문이다. 이렇게 생각되여지는 문학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문학다운 것이다. 즉 다른 실체를 지각해볼수 있는 창문이 아니라, 자기 충족적인 실체인것이다. 내용이란 문학형식의 한 기능에 불과하며, 형식을 넘어서서 혹은 형식을 통해서 감지될수 있거나 , 형식과 분리될수 있는 그 무엇은 아니다. 실은 작품이 내용을 포함하고있는것처럼 보일뿐인 것이다. 사실인즉 작품은 스스로의 발생, 스스로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고있을 따름이다.91   예술이라는 과정의 생명력은 , 행동안에서 볼수있는 그것의 수법에 의존한다는것이 포르마리즘의 중심명제이다. 그리고 장치를 노출시킴으로써, 자신이 집필할 때 의지하고있는 비친숙화의 기법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문학예술가는 모든 장치들중에서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장치에 접근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예술을 작동케 하는 과정에 은밀히 통해있는 일탈감각인것이다.95   변혁은 사회변화에 대한 반응이기거나 혹은 그 부산물로서가 아니고, 내적요구에 의하여 재촉되고 추진되여서, 자기개성 적이고 자기 페쇄적인 문체나 장르의 연속을 펼치는 일이라고 볼수있는것이다. … 참신한 형식이나 문체는 낡은것에 반역하 는데서 출현하는것이기는 하나 그것들의 반대명제로가 아니고, 영속성이 있는 요소들을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 한에서이다. 이것 역시 일탈과정의 일부분이다. 기의한것이 일상적인것이 되면 다른것으로 바뀌여질 필요가 생긴다.98   패로디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왜냐하면 패로디는 언제나 다른 문학작품을 배경으로 삼고, 그것의 수법을 폭로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떠나기때문이다….페물이 되여버린 수법은, 내버려지는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아니 하는 새로운 문맥에서 반복되여… 재차지각이 가능해진다.98   문학은 자신을 개신시키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의 경계선을 다시 긋곤한다…. 모든 예술은 연속성안에 있다는것, 고등예술은 자신을 갱신키 위하여 그 연속성의 범위내에서 경계선을 정기 적으로 옮기고 있다는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유일하게 불변인것은 문학 항시 나타내어야 하는 문학다움의 감각이라는것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든 문학을 규정하고있는것은 그것의 구조적역활 즉 그 시대의 비문학과의 대립인것이다. 99   유럽의 구조언어학   언어가 정보전달에 사용될 경우에는 인식적 혹은 지시적 기능에서 작동하고, 말하는 자나 글쓴 자의 기분이나 태도를 나타내기에 사용될 때는 표현적 혹은 정감적 기능을 볼수있고… 언어가 …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으로 혹은 미적으로 사용되여진다   …체코의 언어학자 얀 무카로브스끼가 말하는것처럼, 이러한 전경화 현실화라는 행위는 중요하다. 시적언어는 코뮤니게이션을 위해서 사용하는것이 아니고, 표현행위 즉 언어행위 그자체를 전면에 내놓기위해서 사용 되고있다.103   야콥슨jakobson    은유—어떤유사점, 상합적, 공시적, 수직적, 직유. 초현실주의 , 능기생성, 시전경화,  해석불가 환유—인접성, 련합적, 통시적, 수평적, 제유, 입체파. 능기결합, 산문전경화,  해석거부   은유와 환유는 의 비유인것이다. ‘그차는 딱정벌레처럼 전진해 갔다’와 같은 은유에서는 ,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자동차의 그것에 등가인것으로서 제시되여있고, ‘백악관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한다’ 라는 환유에서는 , 어떤 특정의 건물이 합중국의 대통령에게 등가인것으로 제시되여있다.105   소쉬르의 개념을 적용하면 은유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질상 상합적이여서 언어의 수직관계가 리용되는데 , 환유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성질상 연합적이여서 언어의 수평의 관계가 리용된다. 106   인접성위에 유사성이 들게 놓이므로서, 시는 완전히 상징적이고 다양하고 다의적인 본질을 부여받게 된다. 108   시는 보통언어를 그냥 장식하는것이 아니고 , 별개종류의 언어를 구축하는것임을 의미한다. 시적이라는것은 수사상의 장식으로 술화를 보완하는것이 아니고 , 술화와 그 구성요소 모두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하는 일이다…. 시적이라는것이 경합해서 존재하는 다른 어떠한 기능들보다도 더 높은 차원으로 높아졌을 때, 시가 생기게 되는것뿐이다… 그래서 시적기능은 언어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고 다만 그중에서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기능인것뿐이다. 112   사실주의시는 해석되기를 거부하고 현대시는 해석을 요구하면서 해석불가능에 있다고 하겠다. (나의 말)   의미는 그 특징상 전의할뿐만 아니라 , 전의될수가 있고 또 전의되여야 한다.116   만일 코뮤니케이션이 메시지 그자체에게로 지향하고 있다면, 이 때는 시적 혹은 미적기능이 우세해진다고 말할수 있다… 언어의 시적기능은 … 기호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촉진시킨다. 그 결과 능기와 소기, 기호와 대상간에서의 어떠한 관계라도 자연스럽다 거나 분명하다고보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부숴뜨리리게 된다.118   양식은 자기 지지적이며, 그 양식이 바로 주제인것이다. … 문학예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형식과 내용을 재통합하는데 소용되며, 또 본성을 유효토록 하기위해서 작품을 메시지의 용기가 아니라, 그 본성을 유효하도록 하기위해서 자신의 령역을 넘어서는 지시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생성적이고, 자기조절적이고, 결국에는 자기존중적인  본질적통일체로 제시 하는데 소용되는것이다. 결국 작품은 Piaget의  말을 빌면, 하나의 구조인것이다.119   구조주의는 그자체가 언어학적 모델에서 발전했었는데 언어로 이루어진 작품인 문학에서 그 모델과의 유사성 이상의것을 가진 대상을 발견하고 있다. 양자는 동질이다라는것이다.120   그레마스 A.J.Greimas   우리는 차이를 지각하고 , 그지각의 덕택으로 , 세상은 우리앞에 서 우리의 목적에 맞도록 형상을 취하게 된다121   행위의 내용은 노상 변하고 , 행위자도 바뀐다. 그러나 언술광경은 항상 동일하다. 121   또도로프TzvetanT0d0rop   문법이 어째서 보편적이냐 하면, 그것이 우주에 관한 정보를 모든 언어들에게 알려주고 있기때문이기도 하지마는, 그것이 우주자체의 구조와 일치하기때문이기도 하다.132   대담한 개인적창의력이라는 이름에서 낡은 체계를 파괴한다는 의미일것이다. 136   구조주의의 최대의 특색은, 바로 형식을 내용이 되게 하는 일종의 변환작업에 있는것 같다… 즉 문학작품은 언어에 관한것이며 , 언어사용 그자체의 과정을 가장 본질적인 주제로 삼고 있는것이다.137   형식이 곧 내용이다라는것을 자명한것으로 보고 있기때문에, 형식과 내용을 같다고 보는 낭만파후기의 생각을 시인하 는것이다. 141   문학은 언어의 내부에서 모든 언어에 생래적으로 깃들여있는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그것이다. 문학의 술화의 본질은 언어를 넘어서가는 일이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문학의 존재이유는 없을것이다.) 문학이란, 언어가 자살을 기도할 때 사용하는 흉기와 같은것이다.147   바르트   인간은 자신이 살고있는 세계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어져있는것을 변경하고 재구축하는것이다. 148   글쓰기는 결코 코뮤니케이션의 도구도 아니고 , 말할 의도만이 통해가는 열려있는 통로도 아니다. 정밀이니 명료니 하는것과 같은 초역사적인 보편적문체의 양식이나 조건도, 이데올로 기적으로 무구명료함이이란 순수하게 수사학상의 속성이지, 일반적으로 어떠한 시대 어떠한 장소에서도 가능한 언어특성은 아니다. … 부르조아지는 자신이 분류해내지 못하는것은 인정하지 아니하려고 하며, 일체의 인간경험을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과 합치되도록 고쳐서 그것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것으로 승격시켜 나간다.151   이들 꼬드는 --우리가 인정하든말든—의미를 변경시키기도 하며, 더욱 중요하게는 생성하는 작용을 하는데 , 그 방법은 무구하다 거나 자유롭다고 하는것과는 거리가 멀고, 바깥 어디엔가에 있는 객관적인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그것에, 언어자체가 제자신의 중개적이며 형성적인 패턴을 부과할 때의 복잡한 방법에 많이 닮아있다. 그 결과, 적절히 분석되였을 경우의 텍스트가 드러내게 되는것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토도로브가 말하는 뚜렷한 일종의 다양성이다.153   다수성과 애매성은 문학의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라고 보는 생각이라든가, 의미들 상호간에서 신중히 유발되여진 긴장에서 언어의 본성에 관한 많은것이 밝혀질수 있다.155   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가공하고 창조하기위해서 고안해낸 여러꼬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문학이란 , 어느 의미에서는, 꼬드를 창출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는 꼬드의 중류장치일런지도 모든다. 문학은 독자에게 꼬드를 상기시키고, 그 꼬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그에게 보여준다. 문학의 언어비평성은 이러한 점에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 무슨 도구인양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를 전달해주는 차량, 행동의 수단, 언어의 의복인양으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156   저작자의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능기에 주목해야 한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능기를 넘어서서 능기가 암시하는 소기에게로 옮겨가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굴복해서는 안될것이다.158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우리로 하여금 텍스트를 통해서 예정된 현실세계를 바라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 언어자체의 본성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작가스러운 텍스트는,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저작자와 더불어 자신의 현재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위험은 있으나 상쾌한 작업에 독자를 끌어 넣는가… 독자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행진하는데 작가스러운 텍스트에서는 능기가 춤을 춘다.160    향락의 텍스트는 결락감(缺落感) 을 안겨주는것인데, 독자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심리적가정과 그의 취미, 가치관, 기억 등의 일관성을 (어쩌면 따분하리만큼) 불쾌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독자와 언어와의 곤계에 위기를 가져온다.162   능기를 분석하는 꼬드   1.     해석학적꼬드; 설화적인 꼬드, 수수께끼를 구성해 풀어가는 꼬드. 2.     의미소 또는 능기의 꼬드; 의미의 깜박임 반시적꼬드-伴示 3.     상징적꼬드; 群化나 윤곽구축, 대조(2,3은 분별이 불투명) 4.     행동꼬드(프로아이젝트); 연속적사실. 5.     문화적꼬드(대상지시적꼬드); 격언적, 집합적.   예술은 다같이 주어진 자료, 주어진 능기 (즉 텍스트, 화음의 연계)에서 파생된다고는 해도, 그것들에서 주어져있지 않는 새로운 현실, 새로운 능기를 창조하고, 또 창의와 미라는 량면에서 본래의것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예술은, 소기의 예술이 아니고 능기의 예술이겠는데 진실로 현대적 이라고 말할수 있다. 170   관계 그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것이지, 관계를 넘어서서 지향되고 있는 어떠한 현실의 세계도 있을수 없다. 그러기에 의미의 작용은 언어의 어떤 레벨에서 딴 레벨로의 , 한 언어에서 딴 언어로의 이동에 불과하며, 또 의미란것도 그러한 꼬드전환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171   장미다발은 능기이고 정열은 소기이다. 183   대시작용이라는것은 보통으로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말해지고 있는것을 의미하는 일이고, 반시(伴示)작용은 말해지고 있는 것이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다. 선행되고있는 능기— 소기의 관계에서 생기는 기호가 , 더높은 단계의 기호의 능기로 되는경우에, 반시작용이 생겨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첫째 세계는 대시작용의 차원이고 둘째는 … 반시작용의 차원이 되는것이다. 187-188   청각적기호는… 시간을 리용하고 …공간적기호는 공간을 점하고... 청각적이고 시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상 상징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기호는 그 성격에 있어서 도상(图象)적인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능기는 고도의 다양성을, 말하자면 애매성을 나타내고있다. … 기호론적으로 말하면 애매성은 꼬드의 규칙을 어기는 양식이 라고 규정되여야 한다… 시는 일상적인 말씨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다 라는 야콤슨말에…200   파괴성은 –Umberto Eco (a) 상이한 레벨의 많은 메시들은 애매성을 지니고 조직화 된다  (b) 애매성은 정확한 설계에 따른다  (c) 어떠한 메시지에 있어서도 , 거기에 들어있는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은 다같이, 다른 모든 메시지에서의 정상적인 수법과 애매한 수법에 대하여 맥락상의 압력을 느낀다 (d) 한체계의 규칙이 한 메시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있는 방식은 다른 체계의 규칙이 자신의 메시지에 의하여 깨뜨려지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 생겨나온것은 미적개인 예술작품에 독특한 특수 언어인데, 이것은 독자들에게 그 대시를 새로운 반시로 부단히 전화시키고 있는 우주적 질서—즉 확립되는 순간에 자기 확립된 의미의 레벨을 넘어서 끝없이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미적메시지가 의미작용을 부단히 행하는 다차원의 체계이기에 , 의미작용이 한레벨에서 다른 레벨로 이행하고 있어서 그것의 대시가 일종의 무한 급수적인 양상에서 반시로 된다는것인 듯하다. 그 결과로서, 미적메시지에 대한 최종적인 꼬드풀이나 글읽기에는 켤코 도달하지 못하는 터이다. 왜냐하면 애매성의 하나하나가, 다른 레벨들에서  더욱 많은 같은 계통의 규칙위 반을 생성시키고 , 또 예술작품이 어떤 점에서든 말하고있다고 생각되는것을 벗겨버리거나 다시 조립하거나 하도록 노상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이다.200-201   다양성- 애매성-규칙위반-장식바꾸기-다차원-다의미   독자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글쓰기나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다르게 세계를 보게 되고 또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예술도 현실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처하며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방법인것이다.202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술작품이란 세계를 내다보는 창문이란 견해다. 이러한 예술가는 , 말과 이미지를 통해서 말과 이미지의 건너편에 있는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류형의 예술가는 번역가라고 불리워질만 하다. 또 하나의 태도는, 예술이란 독립해서 존재하고있는것들로 성립되는 세계이다하는 견해다. 말, 그리고 말들과의 관계, 사고, 그리고  사고들의 비꼬임, 그것 들의 분산, 이러한것들이 예술의 내용인것이다. 예술이란것은 , 창문에 비해질수 있다손치더라도 .대강 그려진 창문에 불과 하다.204   책이라는것이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반영하는것으로 보이는것은 , 현실의 물리적세계가 아니고 , 다른 차원으로 환원된 세계이다. 205    
1669    죽음은 려행이며 려행은 곧 죽음인것이다... 댓글:  조회:3892  추천:0  2016-10-17
 (문예 출판사)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   우리의 정신이 갖는 상상적힘은 매우 다른 두개의 축위에서 전개된다. 그 하나는 새로움앞에서 비약을 찾는, 즉 회화적인것이나 다양함, 예기치 않은 사건을 즐기는것이다. … 또 하나의 상상적힘은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것과 영원적인것을 동시에 존재속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8   작품의 언어의 다양성과 변화하는 빛의 생명을 지니기 위해서는 감상적 요인이나 심정적요인이 형식적요인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의 이미지가 형식, 즉 소멸하기 쉬운 형식, 공허한 이미지, 변화하는 표면에서 멀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본질과 내면의 깊은 곳에서 꿈을 꾼다. 그것은 무게를 가지며 핵심을 갖게 되는것이다. 9   우선 파괴적인 철학자들만이 미에서 모든 접미사를 떼여내고, 나타나있는 이미지뒤에 숨어있는 이미지를 찾아내기위해 전력을 다하며, 상상하는 기능의 뿌리자체에 이르는 이 막중한 일에 손을 댈수 있는것이다. 물질의 근원에는 어두운 하나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물질의 밤에는 검은 꽃들이 피여있다. 꽃들은 이미 벨벳의 꽃잎과 향기의 방식을 갖고있다. 10(벨벳;털이보시시한천)   시적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을 갖는것이다. 12   우리는 상상력의 령역에 있어서 불, 공기, 물, 흙의 어느것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질적상상력을 분류하는, 4원소의 법칙을 규정하는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12   담즙질 인간의 몽상은 불과 화재와 전쟁과 교살이며, 우울질인간의 몽상은 매장과 분묘와 유령과 도망과 무덤, 즉 음산한 모든것들이며, 점액질인간의 몽상은 호수와 강물의 범람과 난파이며, 다혈질인간의 몽상은 새의 비상과 경쟁과 향연과 음악회, 그리고 사람이 차마 이름 붙이기를 꺼리는것과 같은 사물들이다. 13-14   꿈의 우주론에서 물질적원소는 근본적원소 그대로이다. 14   몽환적인 풍격은 여러인상으로 가득 차있는 하나의 액자가 아니고, 부풀어오르는 하나의 물질인것이다. 15   존재란 무엇보다 먼저 각성이며, 더욱이 이상한 인상의 의식속에서 눈을 뜨기때문이다. 20   고향이라는것은 공간의 넓이라기보다는 물질이다. 즉 화강암 이나 흙, 바람이나 건조함, 물이나 빛인것이다. 21   심리적대립감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물질은 끊임없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분신을 찾을수 없다. 28   에드거포의 말 ‘만일 가능한 론리와 과학을 비주체화해야 한다면,  반대로 어휘와 통사론을 비객체화하는것도 그에 못지 않게 불가결 한것이다.’ 라고 말하고있다. 대상의 이러한 비객체화가 없다면, 또 대상밑에 우리가 물질을 볼수있게 하는 형식의 변형이 없다면, 잡다한 사물들로 움직이지 않고 생기없는 고체나 우리들 자신들과 무관한것으로, 세계는 흩어져버릴 것이다. 29   실체가 없는 작품은 생명력이 없다35   상상력은 그 어원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 아니고, 현실을 넘어서 현실을 노래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초인간성 능력이다…. 상상력은 사물과 드라마이상으로 창조하는것이며, 새로운 생명과 정신을 창조하고, 여러가지 새로운 타입을 지니는 비전의 눈을 뜨게 하는것이다. 36   참다운 포에지(시, 시작법, 시학…)라고 하는것은 눈을 뜨게 하는 기능을 말한다. 37   상상할수 있는 세계의 지도(그림)는 꿈속에서밖에는 그릴수 없다. 감각할수 있는 세계는 무한히 적다! 몽상과 꿈은 어떤 혼(사람)에게는 미의 재료가 되는것이다. 38   신이나서 그린 환상은 행동하기를 멈추는 환상이다. 여러가지 물질원소에는 힘을 지니고있는 환상이 호응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물질에 충실한 한도내에서이며, 또한 거의 같은것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원초적꿈에 충실한 한도에서이다. 39   콤플렉스는라는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에너지를 변형시키는것이다. 문화의 콤플렉스는 이러한 변형을 계속한다…만약 승화작용이 개념에 관한 단순한 일이라면, 이미지가 개념론적 도식속에 갇히게 되자마자 곧 그 작용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색갈은 넘쳐흐르고, 물질은 부풀어오르고, 이미지는 스스로를 교화한다. 40   한편의 시를 낳는 꿈의 이러한 항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실적이미지이상의것을 눈앞에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속에서 태어나 우리의 꿈속에서 사는 이 이미지, 물질적 상상력을 위해 무궁무진한 양식인 풍부하고 농밀한 꿈의 물질로 가득찬 이 이미지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42   피상적인 포에지와 같은 포에지를 구별하는 이러한 밀도를 사람들은 ‘감성적가치’ 에서 ‘감각적가치’ 로 이행시킴으로써 맛보게 될것이다. ‘감각적가치’ 와의 관계에서 바르게 분류할수 있을 때에만 상상력의 교의가 밝혀지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단지 감각적가치만이 ‘만물조응’ 을 부여하는것이다. 감성적 가치는 번역밖에는 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적이란 의미는 감각과 지각의 수용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것이고, 감각적이라 함은 지각하고 감각하는 능력을 가리키는것이라 할수있다. 주해에서.) 46   인생은 자라나고, 존재를 변형시키고 순결함을 취하여 꽃을 피게 하며 상상력은 가장 먼 은유로 열려 갖가지 꽃의 삶에 참가하는것이다. 51   백조는 문학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대용물이다. 73   무의식에서 움직이는 모든 이미지와 같이, 백조의 이미지는 남녀양성인것이다. 백조는 빛나는 물의 응시에 있어서는 여성이며, 행동에 있어서는 남성이다. 무의식에 있어서 활동은 행위이다. 무의식에 있어서는 ‘어떤 현실적행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행위를 암시하는 이미지는, 무의식계에 있어 여성에서 남성에로 발전하는것이다. 76   석양의 수평선 깊숙이 붉은 백조는 변함없이 영원한 도전을 펼치고있다. … 그는 공간의 왕이며, 빛나는 왕관의 발밑에 있는 노예처럼 바다는 창백해있다. 87   상상력은 그 어원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 아니고, 현실을 넘어서 현실을 노래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초인간성 능력이다…. 상상력은 사물과 드라마이상으로 창조하는것이며, 새로운 생명과 정신을 창조하고, 여러가지 새로운 타입을 지니는 비전의 눈을 뜨게 하는것이다. 36   몽상은 때때로 무한한 반영과 수정을 닮은 음악으로 소리를 내는 맑은 물앞에서 시작된다. 95   만약 독자가 시인의 모든 이미지를 현실로 인정하고 자신의 리얼리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는 여행에의 유혹을 겪게 될것이며, 이윽고 그자신도 ‘이상함의 미묘한 감정에 감싸일’것이다. “자연의 관념은 아직 존재하고있으나 이미 변질되여, 그 성격에 있어 흥미깊은 수정을 받고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의 신비하고 장엄한 균형이며, 감동적인 균일성, 마법적인 정정인것이다. ” …환영이 현실을 정정 하는것이다. 환영은 현실로부터 이음매나 비참함을 떨쳐버리는것이다. 98-99   물질화하는 몽상-물질을 꿈꾸는 저 몽상- 은 형식의 저쪽에 있는것이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물질은 형식의 무의식이라는것이 이해될것이다. 그것은 덩어리속의 물 그자체이다. … 다만 물질만이 복잡한 인상과 감정의 무게를 받아들일수 있는것이다. 물질은 감정의 재산이다. 101   물의 요정, 즉 환영의 수호자는, 하늘의 모든 새들을 자기손으로 붙잡고있는것이다. 물웅덩이는 우주를 내포하고있다. 꿈의 한순간은 홈 전체를 내포하고 있는것이다. 101   물은 일종의 우주적 고향이 되여, 하늘에 고기를 번식시 키는것이다. 고생하는 이미지가 깊은 물에 새를, 그리고 하늘에 물고기를 주는것이다. 별-섬이라는 무력하고 양의적인 개념으로 나타낸 도치가 여기서는 새-물고기라는 살아있는 양의적 개념으로 표현되여있다. 이러한 양의적개념을 상상력속에서 구성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이미지가 갑자기 얻게 되는 매혹적인 애매성을 맛보게 될것이다. 103   죽어가는 어머니의 추억은 에드거포의 작품에서는 독창적으로 두드러진것이다. 그는 동화의 힘과 괴상한 표현의 힘을 지니고있다. 그러나 그토록 다양한 이미지가 어떤 무의식의 추억에 강하게 덧붙혀있는것은 이미 그 이미지들이 미래의 긴밀함을 서로들 사이에 지니고있기때문인것이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체이다. 물론 이러한 긴밀성은 논리적인것이 아니다. 또 직접적으로 현실적이지도 않다. 현실속에서 나무그늘이 물결에 빨아들여지는것을 보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상상력은 이미지와 몽상의 이러한 긴밀성을 정당화 하는것이다…. 이미지의 측면 그자체, 표현수단의 단계 그자체에 따라 발전시키는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거듭 되풀이 되여 말하지만, 우리의 현재의 연구가 바쳐지는것은, 이미지에 대한 보다 표면적인 삼리학에 대해서인것이다. 112   새로운 분석방법에 따라서 책을 읽게 되자마자 멀리 떨어져있는 이미지를 받아들여, 다양한 길로 상상력을 자유로이 비약시키는, 매우 변화 많은 승화작용에 참가하게 되는것이다. 고전적인 문학비평은 이러한 다양한 비약을 구속한다.114   끊임없이 다시 상상하고 있을 때만이 시적기능이 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는것임을 비평은 쉽사리 잊어버리고있는것이다. 114   몽상가는 이제 더 이상 이미지를 꿈꾸지 않고, 물질을 꿈꾼다. 124   우리는 상상력이 그 창조적형식에 있어서, 창조하는 모두에 생성을 강요하고 있음을 믿고(있다) 130   참으로 강력한 리익이란 공상적인것이다. 즉 그것은 꿈꾸는 리익이지 계산하는 리익이 아니다. 가공적리익인것이다. 바다의 영웅은 죽음의 영웅이다. 최초의 수부는 사자(死者)와 마찬가지로 용감했던 최초의 생자를 말하는것이다. 141   죽음은 여행이며 여행은 죽음인것이다 142   나는 그대가 출발한 오솔길을 보았다! 잠과 죽음은 우리를 더 오랫동안 때어놓지 않으리라… 들어보라! 환영같은 급류가 와글거림을 멀리서 음악으로 가득찬 숲의 속삭이는 미풍에 뒤섞고있다. (셸리의 시) 145   이미지의 자연스런 싹, 물질적원소의 힘에 의해서 길러진 싹에 의해서만 이미지는 번식되고 모아지는것이다. 161   아침의 조용한 물소리 장미처럼, 일몰의 사자는 거슬러 오리라. 은빛종소리는 헤염치리라, 얼마나 상냥한 바다인가… 아! 내방의 갈대는 얼마나 울부짖고 있는것일가(정채로운 이미지) 165   천개의 고원명구 l     내 털구멍 하나하나속에 아기가 자라고있다66 l     나는 털구멍이 아니라 정맥속에  작은 쇠막대기가 엄청나게 있어66 l     장뇌로 빚은 술 말고는 아무것도 주사하지 말아줘, 그렇지 않으면 내 털구멍 하나하나마다 젖가슴이 자라나와66 l     이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위로 뛰여든다.67 l     벌떼는 줄무늬셔츠를 입은 축구선수들의 난투, 또는 투아레그족 무리로 바뀐다.68 l     질베르트를 발음할 때면 나는 내 입안에 그녀를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머금고있다는 인상을 가졌다.80 l     낙타가 하늘에서 키득거리는 천마리 낙타가 되는 사막의 시간, 지표면위에 천개의 구멍이 생겨나는 저녁시간80     시의 기능을 지니는 모든 위대한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오필리아의 콤플렉스도 우주적 단계에까지 올라갈수가 있다. 그때 오필리아의 콤플렉스는 달과 물결의 일치를 상징화 한다. 165   이미지가 갖는 특징이 전혀 현실주의적인 기원을 갖지 않는다는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가? 그것들의 특징은 꿈꾸는 존재의 투영에 의해서 생기는것이다. 물에 비친 달속에서 다시 오필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하기에는 강한 시적교양이 필요한것이다. 167   다양한 이미지를 동일한 주제아래 모을수는 없는것이다 169   닫힌 물속을 흘러가는 배와 같아 죽은자처럼 단 하나의 원소를 지니고있었을뿐173   형식이란 상상력에는 ‘구성’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물질적상상력은 ‘결합’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176   몽상의 이미지는 일원적이거나 아니면 이원적이다. 그런 이미지들은 실체의 단조로움속에서 꿈꿀수 있다. 만약 그런 이미지들이 결합을 원한다면, 그것은 두 원소의 결합인것이다… 물질적상상력의 지배속에서 모든 결합은 결혼이며, 삼자사이의 결혼이란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181   돌발적인 은유, 놀라운 대담성, 전격적인 아름다움이 독창적인 이미지의 힘을 증명할수 있다…. ‘물은 불타는 물체이다’ ‘물은 젖은 불꽃이다’ 라고 말하는 노발리스의 수수께끼같은 완벽한 말도 똑같은 말이다. 183-184   본질적인 몽상은, 그야말로 반대물들의 결혼인것이다. 185   상상력은 작은것을 커다란것에, 그리고 커다란것을 작은것에 번갈아 투영하는것이다. 만약 태양이 바다의 영광스러운 남편이라면, 리바송의 차원에서 물은 불에 몸을 바치는것이 필요하며, 불은 물을 지니는것이 필요하리라. 불은 자신의 어머니를 낳는것이지만, 이것이 바로 연금술사들이 리그베다를 모르는채 싫증날만큼 사용하는 공식인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몽상의 근원적인 이미지이다. 187   ‘구리빛’의 독특한 똑같은 구름이 나타난다. 192   상상할수 있는것을 뛰여넘어보라. 그러면 당신들은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족할만큼 강력한  현실을 갖게 되리라. 193   밤의 꿀은 천천히 소모된다. 태양의 냄새는 너무나 강해서 햇볕을 쬔 물은 자신의 향기를 우리에게 줄수가 없다. 밤이 너무나 고요하여 내게는 그것이 짜디짜게  생각될 정도이다. 밤은 때때로 가까이에서부터 우리를 감싸며 입술을 차갑게 하려고 다가오는 아주 가벼운 물과 같다. 우리는 자신속에 있는 수분에 의해서 밤을 빨아들이는것이다. 196   반죽의 꿈(흙과 물의 어울림)에 속하는 이와 같은 꿈은, 창조하고, 형성하고, 변형하고, 반죽하기위한 투쟁 또는 패배의 교차인것이다. 200   사랑과 공감의 감정이 은유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원적 감정속에서 힘을 길어올리러갈 필요가 점점 더 많아질것이다. 218   물질적몽상은 조각하는것이다. 조각하는것은 언제나 몽상이다. 213   형식은 완성된다. 그러나 물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물질이란 끝없는 몽상의 도식인것이다. 213   사랑과 공감의 감정이 은유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원적 감정속에서 힘을 길어올리러갈 필요가 점점 더 많아질것이다. 218   마음을 다 바쳐 어떤 현실을 사랑하자마자 그것은 벌써 혼이 되고 추억이 되는것이다. 219   상상력의 령역에서 사람들이 흰색에 대해 기분을 맞추기는 어렵지 않을것이다. 달의 금빛 어린 빛이 내물위에 덧붙혀질 때… 227   우리의 모든 문학교육은, 형식에 관한 상상력과 명확한 상상력을 기르는데 만족하고있다. 244   모든 이미지는 부재이며, 하늘은 텅 비여있으나, 운동은 생생하고 원만하게, 또 리듬을 지닌채 거기에 있다. 247   물질적상상력만이 끊임없이 전통적이미지를 활기차게 하며, 몇몇 오래된 신화적형식을 부단히 소생시키는것이다. 물질적 상상력은 형식을 변형시킴으로써 형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형식이 변형하는것은 스스로의 존재양식에 반대되는것이다. 254   순수성을 몽상할수 없이는 순수성을 알수 없는것이다. 255   사라져버린 문명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특별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은 이러한 ‘몽상’인것이다. 단지 사실의 무게를 잴뿐만 아니라 꿈의 무게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왜내하면 문학의 세계에서는 아주 단순한 묘사라 할지라도 모든것은 보여지기전에 꿈꾸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56   물질적상상력은 근원적법칙의 한 례가 있다. 즉 물질적 상상력 에 있어서 가치부여된 실체는, 미소한 량이라도, 다른 실체를 매우 큰 덩어리에 작용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힘의 몽상의 법칙 그자체. 즉 손바닥속의 작은 량으로 우주적지배의 수단을 지니는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형태로서는 열쇠가 되는 말이나 조그만  말이 아주 깊숙이 숨겨진 비밀도 드러나게  할수있다는 리상이기도 하다. 모든것은 물질적상상력으로 선택된 행동의 윤리적의미에 달린것으로서, 만약 그것이 악을 꿈꾼다면, 불순성을 전파하여 악마적싹을 개화시킬것이고, 만약 선을 꿈꾼다면 순수한 실체의 한방울을 신뢰하여 자비로운 순수성을 빛나게 할것이다. 실체의 행동은 스스로의 내면성에서  원했던 실체적생성으로서 꿈꾸어진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인격의 생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행동은 모든 상황을 뒤엎고 모든 장해를 뛰여넘으며, 모든 경계를 부숴버릴수 있는것이다. 사악한 물은 음흉하나, 순수한 물은 예민하다. 두가지 의미에서 물은 의지가 된다. 모든 일상적성질이나 표면적가치는 부차적 특성의 한단계로 옮겨진다. 명령하는것이 바로 내면인것이다. 실체적행동이 빛을 발하는것은, 중심적인 점이나 응집된 의지로부터인것이다. 269   물질적상상력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됐을 때, 스스로의 원소적 힘속에서 꿈꾸어진 물질은 정신이나 의지가 되기까지 앙양되는것이다. 272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의미사이에 ‘교감’이 있다고 할 때, 그러한 비유의 심리학은 만들어진것이 아니고-속임수로 감추어진것이다. 그때의 교감은 련상일뿐이리라. 사실 교감은 감성적인 여러 인상의 살아있는 통합인것이다. 참으로 물질적인 상상력의 진전을 사는(生) 자에게 비유적의미는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비유적의미는 감성의 일정한 무게, 즉 일정한 감성적물질을 유지하고있는것이다. 모든것은 이러한 영속적인 감성적물질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 273   상상력의… 직접적인 행동이 명백하게 되는것은, 문체의 신선함이 가장 어려운 성질에 속하는 문학적상상력을 물로 할 때이다. 그것은 작가에 달린것이지 취급된 주제에 달린것은 아니다. 183   물질적상상력은 세계를 깊이에서 연극화한다. 물질적상상력은 인간의 내면적삶의 모든 상징을 여러 실체들의 깊이속에서 찾아내는것이다. 280   선천적으로 위대한 시인은, 깊은 삶속에 자신의 자연스런 자리를 갖고있는 여러가치를 상상하는것이다. 281   바람을 일으키는 영웅은 “나는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는 갈대의 금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다리는것, 힘앞에서 자신을 구부리는것을 권하는 ‘수동적인 금언’에 다름 아니기때문이다. 그것은 걷는 사람의 능동적금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굴’의 보행자는 바람을 마주하고, 또 바람에 대항해서, ‘전진하면서’ 스스로를 굽히기 때문이다. 그의 지팡이는 폭풍을 똟고 대지에 구명을 내며, 질풍을 검으로 자른다. 역동적관점에서 본다면, 바람속의 보행자는 갈대의 반대인것이다. 303   폭풍속에 둘러싸인 보행자는 얼마나 쉽게 사모트라케의 승리를 상징하고있는가! 그는 곧 작은 깃발이고, 국기이며, 군기인것이다. 그는 용기의 표시이고, 힘의 증거이며, 토지의 점령인것이다. 폭풍에 펄럭이는 외투는 그러므로 바람의 영웅에 내재하는 일종의 깃발, 빼앗을수 없는 깃발인것이다.304   특수화된 콤플렉스는 원초적콤플렉스의 산물이기는 하나, 회화적특징으로 스스로를 덮고, 객관적 아름다움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면서 우주적 경험속에서 스스로를 특징화할 때에만 미적기능을 갖기에 이르는것이다. 315   상상된 사실은 ‘현실적사실’보다 더 중요한것이다. 330     현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리학적으로 광기어린 은유는, 그러나 시적진실인것이다. 그것은 은유가 시적인 혼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현상이며, 우주적자연위에 던져진 인간적자연의 투영이기도 한것이다. 343   눈을 깜박거리는것의 행위는 현실적인 어떠한 소리도 내지않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다른 행위는 그것이 수반하는 소리에 의해서 그 말의 뿌리역할을 하는 음향을 아주 잘 상기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듣기 위해서  ‘생산하며’ ‘투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대표적의성어, 즉 떨어지는 눈꺼플에 소리를 주는 일종의 추상적의성어가 존재하는것이다. 폭풍이 지나간위에 나뭇잎에서 떨어지면서 이상에서 말한바와 같이 눈을 깜박거리며 빛과 물의 거울을 떨게 하는 물방울이 있다. 그것을 ‘바라볼’ 때, 떠는것이 ‘들리는’ 것이다. 353   ㅁ 물은 가장 충실한  ‘목소리의 거울’ ㅁ싸락눈은 타닥타닥 튀고 ㅁ바다는 번쩍이는 등뼈, 벌겋게 달군 쇠로 낙인을 찍히는 얼빠진 암소와 같다. ㅁ 나는 흐름을 바이올린처럼 지닌다 ㅁ물에 대한 말라르메의 노래   오! 거울이여   권태로 인해 너의 테두리속에 얼어붙은 차디찬 물 몇번인가, 그리고 몇시간 동안인가, 가지가지의 꿈으로 비탄에 잠기며 깊은 구덩이의 네 얼음밑에 나뭇잎같은 내 추억을 찾아헤매며, 아득한 그림자처럼 나는 네속에 나타났다. 하지만 두렵구나! 저녁이면 네 엄숙한 샘물속에 어수선한 내 꿈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는 알았다49  
1668    시인으로서 살것인가 아니면 살인자로서 살것인가... 댓글:  조회:4545  추천:0  2016-10-16
천개의 고원 (새물결)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명사해석 이것임-주체없는 객체화 무의식- 무의식은 극장이 아니라 공장처럼 기능한다. (따라서 재현이 아니라 생산이 문제이다) 리좀ㅡ 리좀은 계층도 중심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대립이나 대칭적인 규칙도 없으며, 단지 끝없이 련결되고 도약하여 일탈하는 요소의 련쇄이다.981 카오스ㅡ 카오스는 무질서982 고원- 표면적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 부른다. 집단적행위-다양체 고른판=리좀증식. 은 리좀499 입자-기호들-미립자들 지층은 사슬이며 집게이다305 CsO는 이행의 성분인것이다. 303 고른판은 기관없는 몸체이다.512                          리좀 다양체는 현실이며, 어떠한 통일도 전제하지 않으며, 결코 총체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 주체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는 다양체속에서 생산되고 출현하는 과정들일뿐이다. 다양체들의 주요 특징은 독자성이라는 다양체의 요소들, 되기의 방식인 다양체의 관계들, (즉 주체 없는 개체화)이라는 다양체의 사건들, 매끈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다양체의 시-공간, 다양체의 현실화 모델인(나무형모델과 반대 되는) 리좀, 고원들을 형성하는 다양체의 조성판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대들), 그리고 고원을 가로 지르고 영토들과 탈영토화의 단계들을 형성하는 벡터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5   문학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이데올로기는 있지도 않고 있어본적도 없다.14   책의 첫번째 유형은 뿌리-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수 없거나 더 이상할수 없게 된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14-15   우리가 말하는건 다름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류형들, 기관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단위들이다. 지층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단위들, 수렴의 CsO단위들- 이것들은 글을 량화할뿐만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것의 척도로 정의한다.14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다양체를 구조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相杀시키고만다. 17   리좀- 땅밑줄기인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18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수 있는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양체의 본성이 변할 때 증가할수 있다.21   도주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다양체가 실제로 채우고있는 유한한 차원들의 수가 실재한다. 둘째, 다양체가 이 선에 따라 변형되지 않는다면 그어떤 보완적인 차원도 존재불가능하다. 세째, 이 차원들이 어떤 차원이건간에 이 모든 다양체들은 단일한 고른판 또는 외부서의 판위에서 판판하게 만들수 있고 또 만들어야 한다… n차원에 있는 판판한 다양체들은 탈기표작용적이며 탈주체적이다22-23   ‘변용’은 변용된 몸체의 상태를 가리키며 변용시키는 몸체의 존재도 함축하는 반면, ‘변용태’는 변용을 주고 받는 몸체들의 상호 변이를 고려하기 때문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의 몸체의 이행을 기리킨다                   클라이스트 23(주해에서.)   원리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이것은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 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곳에서는 끊어지거나 깨질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개미떼를 죽여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놈들이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더라도 끊임없이 복구될수 있는 동물리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24   리좀은 하나의 반계보이다…항상 단절을 통해 리좀을 따라가라, 도주선을 늘이고 연장시키고 연계하라. 그것을 변주시켜라. n(하나가 아니라 여러개)차원에서 방향이 꺾인, 아마도 가장 추상적이면서 가장 꼬여있는 선을 생산할 때까지. 탈영토화된 흐름들을 결합시켜라… 글을 써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여 고른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27-28   리좀은 …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낸다. 지도는 장场들의 련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없는 몸체들의 봉쇄- 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위로 최대한 열어놓는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안에서 연결접속될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수 있고, 뒤집을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수 있다. 지도는 찢을수 있고, 뒤집을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구성체에 의해 작성될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수도 있고, 예술작품처럼 착상해낼수도 있으며, 정치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일것이다.30   짧은 기억은,,, 항상 불연속성, 단절, 다양체를 전제한다.36   문제는 무의식을 생산하는 일이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언표, 다른 욕망을 생산하는 일이다. 리좀은 이러한 무의식의 생산 그자체이다41   중요한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끈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46   리좀의 주요한 특성: 리좀의 특질들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접속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체제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여럿으로도 환원될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는 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세, 넷, 다섯등이 되는 도 아니다. 리좀은 로부터 파생되여 나오는 여럿도 아니고 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지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위에서 펼쳐질수 있는 선형线型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있다. 반대로 구조나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사이의 이항관계들과 이 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선들, 심층작용의 선들이 여러차원을 이루고있을뿐만 아니라 최고 차원인 도주선 또는 탈영토와선도 있다. 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이선을 따라가며 본성이 변하면서 변신한다.47   기억이 아니라 망각, 발전을 향한 진보가 아니라 저개발, 정주성이 아니라 유목, 사본이 아니라 지도로, 즉 리좀학-대중분석이다. … 기표작용을 하는 절단이 아니라, 지각할수 없는 단절을 행하라. 53   n에서, n-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뿌리지 말고 꺾어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여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것이다! 빨리 빨리, 비록 제자리에서라도!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 가져라!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53-54 강물은 감자를 심지 않네/목화도 심지 않네/심는 사람은 잊혀지지만/ 유장한 강물은 유유히 흘러갈뿐.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54   늑대는 한마리인가 여러마리인가(늑대는 프로이드한테서 치료를 받은 돈많은 로씨야 인)   대체물을 선택하는 기준은 지칭된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언어표현의 동일성이다. 이처럼 사물속에는 동일성이 없지만 적어도 단어속에는 통일성과 동일성이 존재한다….프로이드에게는 사물이 폭발하여 동일성을 잃어버려도 단어는 여전히 사물의 동일성을 복원해주 거나 새로운 동일성을 만들어준다.62   l     내 털구멍 하나하나속에 아기가 자라고있다66 l     나는 털구멍이 아니라 정맥속에  작은 쇠막대기가 엄청나게 있어66 l     장뇌로 빚은 술 말고는 아무것도 주사하지 말아줘, 그렇지 않으면 내 털구멍 하나하나마다 젖가슴이 자라나와66 l     이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위로 뛰여든다.67 l     벌떼는 줄무늬셔츠를 입은 축구선수들의 난투, 또는 투아레그족 무리로 바뀐다.68 l     질베르트를 발음할 때면 나는 내 입안에 그녀를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머금고있다는 인상을 가졌다.80 l     낙타가 하늘에서 키득거리는 천마리 낙타가 되는 사막의 시간, 지표면위에 천개의 구멍이 생겨나는 저녁시간80 l     늑대인간말-예일곱마리 늑대가 있어. 프로이트대답-뭐라고 아기염소들이라고? 거참 흥미롭군.아기염소들은 빼도록하지. 이제 늑대 한마리만 남지. 그러니까 그건 네 아빠야   기관없는 몸체는 기관들이 제거 된 텅빈 몸체가 아니다. 기관없는 몸체위에서 기관들 노릇을 하는것들(늑대, 늑대눈. 늑대턱?)은 무리 현상에 따라 브라운운동을 하면서 분자적다양체의 형태로 분배된다. 사막은 무언가 우글거리고있다. 따라서 기관없는 몸체는 기관들에 대립한다기보다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하에 대립한다. 기관없는 몸체는 죽은 몸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몸체이며,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생동하고 북적댄다. 이(虱)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위로 뛰여든다.67   다양체들과 그 요소들의 본성이 나온다. 즉 리좀. 다양체의 꿈이 갖는 그 본질적 특성중의 하나는 그 각각의 요소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다른 요소들과의 거리를 변경시킨다는것이다. … 그 요소들은 본성이 바뀌게 된다. 벌떼는 줄무늬셔츠를 입은 축구선수의 난투.68   늑대들 그것은 강렬함이요 속도이며 온도이고 분해될수 없으나 끊임없이 변하는 거리이다. 그것은 득실거림이요 북적거림이다.   다양체는 나누어질 때마다 본성이 바뀌는 립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변할 때마다 다른 다양체속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거리들로 이루어져있다. 문턱에서 또는 문턱저편에서 또는 문턱 이편에서 소통하고 넘나들며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거리들로 이 후자의 다양체의 요소들은 입자이며 그것의 관계는 거리이고, 그것의 운동은 브라운 운동이며 그것의 량은 강렬함들, 강렬함의 차이들이다. 72   정신분석은 모든것을, 즉 군중과 무리를, 그램분자적기계와 분자적기계를, 모든 종류의 다양체를 으깨여 납작하게 만든다.75   모든 언표는 기계적배치물, 다시 말해 언표행위를 하는 집단적행위자의 산물이다(집단적행위자란 말은 사람들이나 사회가 아니라 다양체를 이미한다.) 고유명은 개인을 지칭하지 않는다… 고유명은 다양체에 대한 순간의 파악이다.80   도덕의 지질학 (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성층작용의 표면은 두층사이에 있는 보다 밀집된 고른판이다. 층들이 바로 그 지층 그자체이다….. 사실상 기관 없는 몸체자체가 고른판을 형성하며, 고른판은 지층들이 형성되는 층위에서 밀집되거나 조밀해진다. 86   ‘불안정한 입자-흐름’은 딱히 입자나 파동이라고 할수 없는, 세계를 이루는 기초인데 그것의 다른 이름이 질료 또는 물질이다. 실체는 질료로 형성(=형식화)된, 다시 말해 질료와 형상이 결합되여 이루어진 거의 안정적인 단위들이다. 형상 또는 형식은 실체에 부과되어있는 질서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기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여기서 대응한다. “기계는 절단의 체계로 정의 된다… 모든 기계는 무엇보다도 연속된 물질적흐름(질료)과 관계된다… 연합된 각각의 흐름은 관념적인 (형상적인)것으로 여겨져야 한다….사실상 질료는 물질이 관념안에 소유하고 있는 순수연속성을 가리킨다… 절단은 연속성에 대립되기는커녕 연속성의 조건이 되며, 그것이 절단하는것을 관념적연속성으로서 내포하거나 규정하고있다 ”87   실체는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이외에 다른것이 아니다. 형식은 코드 및 코드화양식과 탈코드화양식을 내포한다.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인 실체는 영토성 및 영토화의 정도와 탈영토화의 정도에 관련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각각의 분절마다 코드와 영토성이 둘 다 있으며 그 각각의 분절나름대로  형식과 실체를 갖고있다. 지금 우리가 말할수 있는것은 각각의 분절에 상이한 유형의 절편성이나 다양체가 대응한다는 점뿐이다.88   질료라고  불리는것은 고른판 또는 이다. 즉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았으며 지층화되지 않은 또는 탈지층화된 몸체이다. 또한 그런 몸체위를 흘러가는 모든것, 다시 말해서 분자나 원자아래의 입자들, 순수한 강렬함들, 물리학과 생물학의 대상이 되기이전의 자유로운 독자성들이다. 내용이라고 불리는것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이다. 92   실체는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이기때문에 형식없이는 실체를 지각할수 없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실체없이 형식을 지각하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말이다. … 사실상 모든 분절은 이중적이기때문에 내용의 분절과 표현의 분절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내용의 분절은 내용안에서 그것의 상관물인 표현을 구성하기때문에 그자체로 이중적이며, 표현의 분절은 표현안에서 그것의 상관물인 내용을  구성하기때문에 그자체로 이중적이다. 이런 리유로 내용과 표현사이, 표현과 내용사이에는 매개상태들, 층위들, 평행상태들, 교환들이 존재하며 지층화된 체계는 이것들을 통과해 간다.94    하나의 지층에는 도처에 이중구조, 이중구속, 가재가 있으며 도처에 모든 방향에 때로는 표현을 가로지르고 때로는 내용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이중분절이 있다. … 한지층안에서 분자들은 동일하지 않더라도 밑지층에서  차용한 분자적재료는 동일할수 있다. 모든 지층에 걸쳐 실체는 동일하지 않더라도 실체의 요소들은 동일할수 있다. 형식들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형식적관계들 또는 연결들은 동일할수 있다 95   충전과정을 통해 비슷한 입자들이 모여 원자나 분자가 되고 비슷한 분자들이 모여 더큰 분자가 되며 가장 큰 분자들이 모여 그램분자적 집합체가 된다. 이는 이중집게 또는 이중분절로서의 “유유상종의 인력”이다.96   중심고리는 주변과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 주변은 새로운 중심을 형성하고, 원래의 중심은 위에서 반응하다가는 불연속적 겉지층으로 옮겨간다. 105   련합된 환경 또는 합병된 환경106   지층의 중심띠와 관련해서 매개환경들이나 매개 상태들은 서로 “겉지층”을 이루고, 새로운 주변들에 대해 새로운 중심들을 형성한다. 이 또 다른 방식, 즉 중심띠가 파편화되는 방식, 이쪽저쪽 지엽말단까지 환원불가능한 형식들 및 그 형식들에 연합된 환경으로 부서져나가는 이 방식을 “겉지층”이라고 부르도록 하자.107   도주는 또한 정복적이고 창조이다. 따라서 도주선들은 영토성안에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운동들이 현존함을 증언 해주면서 영토성을 완전히 가로질러간다.113   표현과 내용 각각이 자신의 형식을 갖고있을 뿐만아니라 매개 상태들이 고유한 표현의 형식들을 내용에 도입하고 고유한 내용의 형식들을 표현에 도입하기때문이다.118   표현은 그자체로 독립적, 다시 말해 자율적인것이 된다.119   챌린저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각각 나름의 형식과 실체를 갖고있는 내용과 표현의 새로운 조직화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기술이라는 내용과 기호 또는 상징이라는 표현이다. 내용은 손과 도구일뿐만 아니라 이것들에 앞서서 존재하며 힘의 상태들이나 권력구성체를 이루는 기술적-사회적 기계이기도 하다. 표현은 안면과 언어, 그리고 언어들일뿐만 아니라 이것들에 앞서서 존재하며 기호체제를 이루는 기호적-집단적 기계이기도 하다. 권력구성에는 도구이상의 그 무엇이며, 기호체제는 언어이상의 그 무엇이다. 오히려 권력구성체와 기호체제는 도구와 언어를 사용하도록, 그것들 상호간 또는 각각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도록,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도록 결정하고 선별하는 자로서 작용한다. 이 세번째지층과 함께, 이 지층에 완전히 속해있으면서도 동시에 몸을 세워올려 자신의 집게발을 다른 모든 지층들을 향해 모든 방향으로 뻗는 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추상적인 기계의 두상태사이에 있는 매개상태와 같은것이 아닐까?127   표현의 형식이 기표가 아닌것과 마찬가지로 내용의 형식은 기의가 아니다. 이 점은 언어가 개입하는 지층들을 포함한 모든 지층들에서 진실이다.131=132   그어떤 경우에도 내용과 표현은 결코 기의-기표로 환원될수 없다. (여기에 두번째 문제가 있는데) 내용과 표현은 하부구조-상부구조로 환원될수 없다. 더이상 우리는 표현이 기표작용적이기때문에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수도 없고, 내용이 결정하는 작용을 하기때문에 더우위에 있다고 주장할수도 없다. 표현에는 어느정도 독립성과 어느정도 반작용가능성을 허용해 준다고 할지라도 표현이 내용을 반영하는 형식이 될수는 없다.133   기호체제는 정확히 말해 권력조직들 또는 배치물들을 표현하는 것이지, 내용의 표현이라고 가정되는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모든 사회적기계들을 감추는 가장 고약한 개념이다.)136`          고른판은 모든 은유를 페기한다. 고르게 함께 있는 모든것은 (질재란 자크 라캉이 말하는 부재)이다. 그것들은 몸소 나타난 전자들이고 진짜 검은 구멍들과 실제 세포소기관 들이고 진정한 기호들의 시퀀스(하나의 에피소드단위)들 이다. 그것들은 다만 자신의 지층에서 뽑혀나와 있고 탈지층화, 탈코드화, 탈영토화 되여 있는것일 뿐이다. 고른판위에서 자신들을 인접화시키고 상호침투를 허용하는것이다. 말없는 춤, 고른판은 층위의 차이, 크기의 차원, 거리를 모른다. 고른판은 형식과 형식을 부여받은 실체의 구분도 모르고 내용과 표현의 구분도 모른다. 이것들은 지층들을 통해서만, 지층들과 관련해서만 존재하기때문이다.138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지층들과 지층에서 리탈한 고른판사이에 이원론이나 피상적대립을 설정하는것만으로는 만족할수 없다. 지층들자체가 상대적탈령토화의 속도에 의하여 활성화되고 정의되기때문이다. 더군다나 절대적탈령토화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으며, 지층들은 어디에나 현존하고 가장  일차적이고 언제나 내재하는 고른판위에서 이루어진 부산물이자 집약이다. 또한 고른판은 에 의해 점령되고 그려진다. 추상적기계는 자신이 그리는 탈지층화된 판위에 펼쳐져있다. 또는 그와 동시에 조성의 동일성을 정의하면서 각 지층안에 감싸인채로도 있고, 또 심지어는 포착의 형식을 정의하면서  어떤 지층들안에 반쯤 선채로 존재하기도 한다. 따라서 고른판위에서 풀려가거나 춤추는것은 제 지층의 분위기, 파동, 회상, 또는 긴장을 담고있다. 고른판은 지층들을 알맞게 보유하고있어서, 고른판안에서 자기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지층들로부터 변수들을 추출해낼수 있다. 고른판 또는 평면에는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질료들의 무차별적 집합이 아니라 이런저런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의 카오스도 아니다. 정말이지 고른판위에서는 더 이상 형식도 실체도 없으며, 내용도 표현도 없고 상대적 탈령토화도 각각의 탈영토화도 없다. 하지만 지층들의 형식과 실체아래에서 고른판(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강렬함의 연속체들을 구성한다. 고른판은 서로 다른 형식들과 실체들로부터 추출해낸 강렬함들을 위해서 연속성을 창조한다. 내용과 표현아래에서 고른판(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기표작용과 아무런 관계없는 기호들을 가장 탈영토화된 입자들안에서 기능하게 하는 입자 –기호들(미립자들)을 방출하고 조합한다. 고른판 (또는 추상적인 기계)은 상대적 운동들 아래에서 각각의 지표들을 절대적가치로 변형시키는 탈영토화의 흐름들을 집합접속시킨다. 지층들은 형식들과 실체들안에서 취한 불연속적인 강렬함들만을 인식한다. 또한 지층들은 내용의 립자들과 표현의 항목들 안에 있는 나누어진 미립자만을 인식한다. 또한 지층들은 탈령토화된 흐름가운데서도 분리접속되고 재영토화된 흐름들만을 인식한다. 반면 강렬함의 련속체,  미립자들 또는 기호립자들로 조합된 방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집합접속같은것들은 고른판에 고유한 세요소이며,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작동하고 탈지층화를 구성한다. 이 모든것중 어떤것도 카오스적인 하얀 밤이 아니고 무차별적인  검은 밤도 아니다. 규칙들, 즉 판짜기규칙들, 도표를 만드는 규칙들이 있다. 139   지층들의 체계는…강열한 련속체안에서 지층들은 형식을 재단하고 질료를 실체로 형성한다. 조합된 방출작용안에서 지층들은 표현과 내용을, 표현의 통일성과 내용의 통일성을, 예컨대 기호들과 립자들을 구분한다. 접합접속안에서 지층들은 흐름들을 분리해내고 그 흐름들에 상대적운동과 다양한 영토성, 상대적탈영토화와 보충적재영토화를 할당한다. 이렇게 지층들은 운동에 의해 활성화된 이중분절을 도처에 설치한다. 즉, 내용의 형식과 내용의 실체, 표현의 형식에서 절편적 다양체를 구성한다. 이것들은 지층들이였다. 각각의 지층들은 내용과 표현의 이중분절이었다. 내용과 표현은 실재적으로 구분되고 상호 전제상태에 있으며 서로 뒤섞인다. 내용과 표현과 함께 가는 머리 둘달린 기계적배치물들은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있다. 한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가면서 변이되는것은 내용과 표현사이의 실재적구분이 지닌 본성이며,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인 실체의 본성이며, 상대적운동의 본성이다. 우리는 실재적구분의 세가지 커다란 유형을 요약하여 구분할수 있었다. 첫째, 형식적-실재적구분. 이것은 표현의 공명이 설립되는 크기의 질서들을 구분하기위한것이다. (유도) 둘째. 실재적-실재적구분. 이것은 표현의 선형성이 설립되는 상이한 주체들을 구분하기위한것이다(변환) 세째. 본질적-실재적구분. 이것은 표현의 초선형성이 설립되는 상이한 속성들 또는 범주들을 구분하기위한것이다. (번역)142   언어학의 기본전제들   은유와 환유는 단지 결과일뿐이며, 이미 간접화법을 가정하고 있는 경우에만 언어에 속한다.150   화행론은 언어정치학이다.161   형식을 부여받은 내용이라면 모두가 몸체이다… 표현의 형식은 표현된것이라는 날실을 통해 구성되며 내용의 형식은 물체들이라는 씨실을 통해 구성된다. 칼이 살에 박힐 때, 양분이나 독이 몸에 퍼져갈 때, 포도주방울이 물에 떨어질 때에는 몸체들의 혼합이 있다. 하지만 칼이 살을 벤다. 나는 먹는다 물이 붉어진다라는 언표는 이와는 본성상 아주 다른 비물체적변형(사건)을 표현한다…순간적변형이라는 날실은 늘 연속적변양이라는 씨실속으로 끼워넣어진다(스토아학파)169   내용과 표현은 서로 결합되고 연계되고 서로 촉진되기도 하고 반대로 재영토화하며 안정화되기도 한다.171   배치물의 본성은… 첫번째축인 수평축에 따르면 배치물은 두개의 절편을 포함하는데, 그 하나는 내용의 절편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의 절편이다. 배치물은 능동작용이자 수용작용인 몸체들이라는 기계적배치물이며, 서로 반응하는 몸체들의 혼합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배치물은 행위들이자 언표들인 언표행위라는 집단적배치물이며, 몸체들이 귀속되는  비물체적변형들이다. 하지만 수직방향의 축에 따르면, 배치물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안정화시키는 영토화의 측면들 또는 재영토화된 측면들을 갖고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실어나르는 탈영토화의 첨점들을 갖고있다.172   내용이 인과작용에 의해 표현을 결정한다고 믿는것은 오류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표현이 내용을 반영하는 힘뿐만 아니라 내용에 능동적으로 반응할수 있는 힘을 갖는다해도 말이다.173   모든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것들이 섞여있는 실재이다. (촘쓰키)180   형식-질료라는 쌍은 힘들 –재료라는 짝짓기로 대체된다.185   우리는 비정형적인 표현이 옳바른 형식들을 거쳐서 생산된다고 믿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비정형적인 표현자체가 옳바른 형식들의 변주를 생산하고 형식들이 상수가 되지 못하게 한다. 비정형적표현은 랑그가 탈령토화되는 정점을 이루며, 텐서의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랑그를 랑그의 요소들, 형식들, 개념들의 극한으로 향하게 하며 랑그의 이편 또는 저편을 향하게 한다. 텐서는 말하자면 문장을 타동사구문으로 만들며, 뒤의 항이 앞의 향에 거꾸로 힘을 미치게 하며 사슬전체를 거슬러 올라간다. 텐서는 언어를 강렬하게 그리고 반음계적으로 취급할수 있게 해준다. 라는 단순한 표현도 언어전체를 가로지르는 텐서의 역활을 할수 있다. 그러나 그리고는 하나의 접속사라기보다는 자신의 연속적으로 변주시키는 모든 가능한 접속사들의 비정형적 표현이다. 또한 텐서는 상수로도 변수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매번 상수의 값을 뺌으로써 (n-1)변수의 변주를 보장해준다. 텐서는 그어떤 언학적 범주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텐서는 간접화법에 대해서든 언표행위라는 배치물에 대해서든 본질적으로 화행론적인 값이다.192-193   텐서 텐서(Tensor). 변환 형식과 관련된 것으로 행렬로 표현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텐서의 정의는 '좌표변환 하에서 특정한 변환법칙(transformation law)를 따르는 양'이다. 물론 수학적으로 들어가면 쌍대공간( 텐서[tensor] 뜻 삼차원 공간에 있어서 9개의 성분을 가지며, 좌표 변환에 의해 좌표 성분의 곱과 같은 형의 변환을 받는 양  더보   언어는 다질적인 가변적실재… 한 랑그의 통일성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뿐이다.195   각자는 소수어, 방언, 또는 나만의 말을 발견해야만 하며, 거기에서 출발해야 자기자신의 다수어를 소수어로 만들수 있다. 이것이 소수파라 불리는 작가들의 힘이며 이들이야 말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하게 위대한 작가들이다.203   연속적변주는 만인의 소수파되기를 구성하며, 의 다수적 과 대립된다. 의식의 보편적형상으로서의 소수파되기는 자율이라고 불린다. 확실히 방언같은 소수어를 사용하거나 게토나 지역주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혁명적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소수적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다수파양식(长调)과 소수파양식短调은 언어를 다루는 두가지 양식인데, 전자는 언어에서 상수들을 뽑아내는 방식이고 후자는 언어를 련속적변주로 만드는 방식이다. 205-206   실체들은 변형되고 형체들은 와해된다.210   몇가지 기호체제에 대하여   기호의 기표작용적체제(기표작용적기호)의 공식은 아주 일반적 인것이다. 즉 기호는 다른 기호를 지시하고 또한 다른 기호만을 지시하며 이런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중요한것은 무정형의 대기(大氣)연속체에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물망을 형성하기 위해서 기호가 어떤 다른 기호들을 참조하는지, 어떤 다른 기호들이 그 기호에 덧붙여지는지를 아는 일이다. 바로 이 무정형의 연속체가 일단은 ‘기의’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무정형의 연속체는 기표아래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기표의 매체 또는 벽노릇을 할뿐이다. 모든 내용은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기의속에 용해시키게 된다. 내용의 대기화 또는 세속화. 그리하여 사람들은 내용을 추상화한다.218-219   탈령토화된 기호의 자기 잉여로서의 기표여, 장례식장같은 공포 가득한 세계여. 220   정확히 말해서 기표의 이런 순수형식적잉여는 특별한 표현의 실체 없이는 생각될수조차 없다.(기표가 기표를 참조한다)우리는 이 표현의 실체에 얼굴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얼굴은 기표작용적체제에 고유한 이며, 체계내부에서 일어나는 재영토화이다. 기표는 얼굴위에서 재영토화 된다. 기표에 실체를 부여하는것은 바로 얼굴이다. 해석할 거리를 제공하는것은 바로 얼굴이다. … 기표는 항상 얼굴화된다.213-214(표현실체=얼굴)   기호의 기표작용적체제는 8개의 양상 또는 원리로 정의된다. 1,기호는 다른 기호를 제시한다. 그것도 무한히(기호를 탈영토화하는 의미생성의 무제한성) 2. 기호는 다른 기호에 의해 돌려보내지며 끊임없이 회귀한다(탈영토화된 기호의 순환성) 3. 기호는 한원에서 다른 원으로 건너뛰며, 끊임없이 중심에 의존하는 동시에 중심을 바꾸어놓는다(기호들의 은유 또는 기호들의 히스테리) 4. 원들의 확장은 기의를 주고는 다시 기표를 주는 해석들에 의해 항상 보충된다(시제의 해석병) 5.  기호들의 무한한 집합은 하나의 주요 기표를 가리키고있는데, 이 기표는 과잉인 동시에  결핍으로 나타난다.(전제군주적기표, 체계의 탈영토화의 극한) 6. 기표의 형식은 실체를 갖는다. 또는 기표는 얼굴이라는 몸체를 갖는다(재령토화를 구성하는 얼굴성의 특질들이라는 원리) 7. 체계의 도주선은 부정적가치를 부여받으며, 기표작용적체제 의 탈영토화역량을 넘어선다고 비난받는다 (희생양의 원리) 8. 그것은 보편적기만의 체제이다. 이 체제는 도약들속에, 규제된 원들속에, 점쟁이의 해석에 대한 규제들속에, 얼굴화된 중심의 광고속에, 도주선을 다루는 태도속에 동시에 들어있다.227   전-기표작용적요소(원시적기호계, 절편성은 계통들의 법칙)들은 항상 기표작용적체제안에서 작용하며, 반-기표작용적요소 (유목민들 기호계, 절편성이 아니라 산수와 숫자읽기) 들은 항상 기표작용적  체제안에서 작동하고 또 현존하며, 후-기표작용적요소(의미생산에 대립되고 주체화라는 특별한 기법을 통해 정의된다)들은 이미 기표작용적체제안에서 존재한다. 231   전기표적기호계. 여기서는 언어의 특권을 나타내는 “덧코드 화”가 널리 진행된다. 여기서 언표행위는 집단적이고, 언표들자체는 다의적이며, 표현의 실체는 다양하다.  또한 여기서 상대적탈영토화는 국가장치를 막아내는 절편적계통들과 영토성들이 대면함으로써 결정된다. 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 덧코드화는 기표와 기표를 방출하는 국가장치에 의해 완벽하게 수행된다. 순환성의 체제안에서 언표행위는 획일화되고, 표현의 실체는 통일화되고, 언표들은 통제된다. 여기서 상대적탈영토화는 기호들 간의 영속적이고 잉여적인 지시에 의해 최고지점에 이르게 된다. 반-기표작용적기호계.여기서 덧코드화는 표현의 형식 또는 언표행위의 형식으로서 에 의해 확보되고 또 그것이 의존하는 에 의해 확보된다. 또한 탈영토화는 능동적인 파괴선 또는 소멸의 선을 따른다.  후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 덧코드화는 의식의 잉여에 의해 확보된다. 비록 여전히 부정적인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권력을 내재적으로 조직화하고 탈영토화를 절대적인것으로 끌어올리는 정념적선위에서 언표행위의 주체화가 산출된다.260   우리는 의미생성의 리상적체제. 즉 해석적-편집증적체제와 의미생성의 주체적체제, 즉 후-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를 대립시킬것이다. 첫번째 체제는 기만적인 시작에 의해, 하나의  관념주위에서 조직되는 내생적인 힘들을 증언하는 숨은 중심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그것은 무형의 련속체에 의해, 가장 작은 사건일지라도 포착되는 미끄러지는 대기위에서 그물망모양의 전개에 의해 규정된다. 또 그것은 원형으로 반사되는 조직화에 의해, 원형방사를 통한 모든 방향으로의 팽창에 의해 규정된다. 여기에서 개인은 한점에서 다른점으로, 한원에서 다른 원으로 건너뛰고, 중심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며, 예견하고 회고하는 것이다.232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그물망으로부터 하나의 기호나 기호다발이 떨어져 나온다. 이 기호는 스스로 작동하며, 마치 좁게 트인 길을 따라가듯 직선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미 기표작 용적 체계에는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이 그어져있고 이 선은 탈영토화된 기호들의 고유한 지표를 넘어서있다. 235   신은 살해를 행하는 동물대신 살해된 동물이 되였다.237   예언자의 망상은 관념이나 상상의 망상이기보다 행동의 망상이다. 241   언표행위의 주체는 언표의 주체로 밀려난다. 언표의 주체가 자기 차례가 오면 다른 과정을 위해 언표행위의 주체를 공급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언표의 주체는 언표행위의 주체의 응답자가 되였다.251   주체화는 도주선에 긍정적기호를 강요하며, 탈영토화를 절대에까지 가져가며, 강렬함을 가장 높은 정도까지 가져가고, 잉여를 재귀적형식으로까지 가져간다. 257-258   코키토는 항상 다시 시작하며, 정념 또는 불평은 항상 되풀이 된다. 모든 의식은 제 나름의 죽음을 추구하고, 모든 열정-사랑은 제나름의 끝을 추구한다. 이것들은 검은 구멍에 끌려가며, 모든 검은 구멍들은 함께 공명한다. 이를 통해 주체화는 도주선에 끊임없이 그선을 부인하는 절편성을 강요하며, 절대적 탈영토화에 끊임없이 그것을 가로막고 우회시키는 소멸의 점을 강요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표현의 형식들 또는 기호체제들은 여전히 지층이기때문인것이다.258 ·                  데카르트 코키토에서 랑그언어학, 구조주의까지 2012.07.22 된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데카르트에 이르러 인간 중심적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코키토 에르고 숨'이라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방법적 회의에 기반한 인간 중심의 주체... nermic.tistory.com/204   ★ image or real ·                  라캉의 코키토 전복 2014.11.25 공간이라고도 볼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철학적 사유는 사유대상과 사유하는 주체와의 일치성들을 전제(코키토)로 하고 개념들이 이런 것들을 설명해주는데 비해 라캉의 진리가 드러나는 곳은 일치가 아닌 분열자체에서.     탈지층화해라, 새로운 기능위에, 도표적인 기능위에 자신을 개방시켜라.258   한 추상적인 기호계가 다른 기호계로 변형된다는 점이다. (비록 이 변형이 그자체로는 추상적이지 않다하더라도, 다시 말해 변형이 실체로 일어나며 순수한 학자로서의 “번역자”에 의해 수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전-기표작용적 체제안에서 어떤 기호계를 생겨나게 하는 모든 변형을 유비적변형이라고 부를수 있다. 기표작용적체제안에서는 상징적변형. 반-기표작용적체제안에서는 논쟁적변형 또는 전략적변형, 후-기표작용적체제안에서는 의식적변형 또는 모방적변형이라고 각각 부를수 있다. 끝으로 도표적변형이 있는데 그것은 기호계들이나 기호체제들을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고른판위에서 산산 조각내는 변형이다. 변형은 순수 기호계의 언표와 혼동되지 않는다. 또 한 변형은 자신이 어떤 기호계에 속하는지 알기위해 화행론적 분석을 해야만 하는 애매한 언표와도 혼동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혼합된 기호계에 속하는 언표와도 혼동되지 않는다(설사 변형이 그런 결과를 초래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변형적언표는 하나의 기호계가 다른데서 온 언표들을 자기자신을 위해 번역하는 방식을 표시해준다. 또한 그럼으로써 변형적언표는 언표들의 방향을 바꾸고 언표들의 변형불가능한 잔여물들은 남겨두며, 역변형에 능동적으로 저항한다. 더구나 변형들의 목록은 앞서 열거한것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기호계가 창조 되는것은 항상 변형을 통해서이다. 번역은 창조적일수 있다. 새로운 순수 기호체제들은 변형과 번역을 통해 만들어진다. 거기서도 일반 기호론은 없다. 오히려 기호계변환이 있을따름이다 262-263   화행론은 이미 두개의 성분을 제시한다. 첫번째것을 발생적 성분이라고 부를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추상 적체제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혼합된 기호계들을 형성하는지, 어떤 변이를 갖는지, 그 체제들이 어떻게 조합되는지, 그리고 어떤 체제가 지배적인지를 보여주기때문이다, 두번째것은 변형적성분이다. 그것은 이 기호체제들이 어떻게 서로 번역되는지, 그리고 특히 그것들이 새롭게 창조되는지를 보여준다. 발생적화행론은 혼합된 기호를 본뜨는 반면, 변형적화행론은  변형의 지도를 만든다… 두번째 성분은 가장 심오하며. 첫번째 성분의 요소들을 측정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267   추상적인 기계자체는 물리학적이거나 물체적이지도 않고 기호적 이지도 않다. 그것은 도표적이다(그것은 인공과 자연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추상적인 기계는 실체가 아니라 질료에 의해 작동하며, 형식이 아니라 기능에 의해 작동한다. 실체들과 형식들은 표현 “또는” 내용과 관련된다. 하지만 기능들은 아직 “기호계적으로” 형식화되여 있지않으며, 질료들은 아직 “물리학적으로” 형식화되여 있지않다. 추상적인 기계는 순수한 -, 즉 도표이며, 이 도표가 분배할 형식들과 실체들, 표현들과 내용들과 독립해 있다… 결과적으로 도표는 실체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며, 내용도 아니고 표현도 아니다.271   화행론은 …[1] 발생적성분안에서 혼합된 기호계들의 사본만들기.[2] 체계가 번역되고 창조될 가능성 및 사본들위로 발아할 가능성과 더불어 체계의 변형적 지도 만들기. [3] 각 경우에 잠재적 또는 결과적도출로서 작동하고있는 추상적기계들의 도표만들기. [4] 집합을 나누고 운동(운동의 선택, 도약, 변이와 더불어)을 순환시키는 배치물들의 프로그럼 만들기.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배치물들은 결코 같은 류형의 기관없는 몸체를 갖고있지 않다. 내재성의 장 또는 고른판은 한조각한조각 구성되며, 다양한 장소, 조건, 기술등은 서로에게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 조각들이 서로 이어질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어떤대가를 지불해야하는가를 아는것이다. 어쩔수 없이 괴물같은 잡종들이 나타나게 될것이다. 고른판은 모든 CsO들의 집합, 내재성의 순수한 다양체로서… 고른판은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속에 있다. 302 자신을 정점을 향해 가게 하지도 않고 외적인 종결에 의해 중단되게 하지도 않는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역들을 베이트슨은 고원이라고 부른다. … CsO는 이행의 성분인것이다. 303   CsO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바로 유기체가 적인것이다. CsO는 기관들과 대립하는것이 아니라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 들의 이같은 조직화와 대립한다. …몸체는 몸체이다 몸체는 혼자이다. 또한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만 않는다. 몸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몸체의 적이다.304-305 유기체[有機體] 뜻 유기물로 이루어진, 생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조직체   CsO를 너무 결렬한 동작으로 해방하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지층들을 건너뛰면 판을 그려내기는커녕 당신자신을 죽이게 되고 검은 구멍에 빠지고 심지어 파국에 이르게 되는것이다. 308   련결접속하고 집합접속하고 연속시켜라… CsO는 바로 이런식으로만 욕망들의 연결접속, 흐름들의 집합접속, 강렬함들의 연속체로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것이다. 309   얼굴성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여난다. 이 기계는 기표에 흰벽을 주고 주체화에 검은 구멍을 주는것과 동시에 얼굴들을 생산한다. 검은 구멍-흰 벽의 체계는 따라서 이미 얼굴이 아니라 톱니바퀴의 변형가능한 조합들에 따라 얼굴을 생산하는 추상적인 기계이다. 추상적인 기계가 그것이 생산하는것, 그것이 생산할것과 닮았으리라고 기대하지 말자.323   얼굴의 문헌에서 시선에 대한 싸르트의 텍스트와 거울에 대한 라캉의 텍스트는 현상학의 장에서 반성되거나 구조주의의 장에서 균열된 주체성인간성의 형식을 지시한다는 오류를 지니고있다. 그러나 시선은 시선없는 눈, 얼굴성의 검은 구멍에 비하면 이차적인것에 불과하다. 거울은 얼굴성의 흰 벽에 비하면 이차적인것에 불과하다.328   탈영토화의 정리들 또는 기계적명제들334   제1정리: 혼자서는 결코 탈영토화될수 없다. 적어도 두개의 항, 손-사용대상, 입-가슴, 얼굴-풍경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개의 항들 각각은 다른 항위에서 재영토화된다. 따라서 재영토화와 초기의 더욱 이전의 영토성으로의 회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제2정리: 탈영토화의 두요소나 운동에서 가장 빠른것이 반드시 가장 강렬하거나 가장 탈영토화되여있는것은 아니다. 탈영토화의 강렬함은 운동이나 전개속도와 혼동되여서는 안된다. 따라서 가장 빠른것은 자신의 강렬함을 가장 느린것의 강렬함과 연결접속시키고, 강렬함으로서의 이 가장 느린것은 가장 빠른것을 뒤따라가는것이 아니라 다른 지층이나 다른 판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입-가슴의 관계는 이미 얼굴성의 판위로 인도된다. 제3정리: 가장 탈영토화되지 않은것은 가장 탈영토화된것위에서 재영토화된다고 결론을 내릴수 있다. 여기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수직적인 재영토화의 두번째체가 나타난다. 입뿐 아니라 가슴. 손 온몸, 도구자체도 “얼굴화”된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제4정리: 추상적인 기계는 그것이 생산하는 얼굴뿐만 아니라 몸체의 부분들, 그것이 (유사성이 조직화가 아니라)리성의 질서에 따라 얼굴화하는 대상들 안에서 다양한 정도로 실행된다.334-335 검은구멍-흰벽으로 구성되여있는 얼굴성이라는 추상적기계가 기능하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당위나 요소들과 관계되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의 선택과 관계된다.338   모든 번역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단하나의 표현의 실체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기호론적스크린과 그 요소들을 보호하는 벽을 이용한다는 조건아래에서만 이산적이고 디지털화되고 탈영토화된 요소들을 통해 진행되는 기표작용적사슬들을 구성하고있다. 우리는 오직 외부의 그어떤 폭풍도 사슬들과 주체들을 끊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아래에만 두개의 사슬들 사이에서 또는 한사슬의 각점에서 주체적선택들을 이루고있다. 우리는 오직 중심의 눈을, 다시 말해 지배적인 기표작용들 못지 않게 지정된 변용태들을 초과하고 변형시키는 모든것을 포획하는 검은 구멍을 소유하는 한에서만 주체성들의 씨실을 형성할수 있다. 게다가 어떤 언어가 언어로서 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다고 믿는것은 부조리하다. 특정언어는 언제나 자신의 언표들을 고지하며 유통중인 기표들이 해당주체들과 관련해서 언표들을 가득 채우는 얼굴들안에 사로잡혀있다. 선택들이 인도되고 요소들이 조직되는것은 바로 얼굴들 위에서 이다.342   자신의 표현된 형식으로서 의미생성과 주체화를 강요하는것은 아주 특별한 권력배치물들이다. 독재적배치물이 없는 의미생성은 없고, 권위적배치물이 없는 주체화도 없으며, 정확히 기표들에 의해 작용하며 영혼들 또는 주체들에게 행사되는 권력배치물들이 없는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혼합도 없다.345   주체성의 씨앗을 포함하고있지 않은 의미생성은 없다. 기표의 잔재들을 끌고 다니지 않는 주체화는 없다. 기표가 먼저 벽위에 튀여오른다 할지라도, 주체성이 먼저 구멍쪽으로 뻗어나간다 할지라도 기표의 벽은 이미 검은 구멍들을 포함하고 있고 주체성의 검은 구멍은 여전히 벽의 잔해들을 가지고 간다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혼합체는 검은 구멍-흰 벽이라는 분리불가능한 기계에 기반하고있고, 이 두기호 계들은 마치 ‘히브리인과 파라오’사이에서처럼 교차, 재절단, 가지치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 뒤섞인다.347   프랑스소설은 선들, 능동적도주선이나 긍정적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기보다는 점을 찍느라 시간을 보낸다. 영미 소설은 전혀 다르다, 떠나라, 떠나라, 나가라!...... 지평선을 가로 질러라…분리선을 찾고 그것을 따라가거나 창조하라, 그것을 배반하는 지점까지.355   예술은 목적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을 그리기위한 도구일 뿐이다.357   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자연스럽게도 얼굴은 모공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   미시정치와 절편성   우리는 모든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된다. 인간은 절편적 동물이다 절편성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지층들에 속해있다. 거주하고, 왕래하기. 노동하기, 놀이하기 등 체험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절편화된다. 집은 방의 용도에 따라 절편화된다. 거리는 마을의 질서에 따라 절편화된다. 공장은 노동의 작업의 본성에 따라 절편화된다. 우리는 사회와 계급,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거대한 이원적대립에 따라 이항적으로 절편화된다.397   이질적인 사회적절편들사이에는 커다란 소통가능성이 있어서, 한절편과 다른 절편이 이어짐이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질수 있을것이다.398   중앙의 뇌 그자체는 뇌의 모든 대체기능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대체가능성이 있기때문에 다른것들보다 더 절편화된 하나의 벌레이다.399   절편성과 중앙집중을 대립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절편성의 두류형을 구분해야만 할것이다. 하나는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적이고 견고한 절편성이 다.400   절편들 각각은 나름의 측정당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절편들 사이에는 단위들이 등가성과 번역가능성이 있다. 중앙의 눈은 그것이 자리바꿈을 하는 공간을 상관물로 갖고있으며, 이 자리바꿈과 관련해서는 그자체로 불변항으로 남아있다.403   견고한 양태아래에서 이항적절편성은 그자체로 유효하며, 직접적이항화의 거대기계들에 의존하는 반면, 유연한 양태 아래에서 이항성들은 “n차원을 가진 다양체들”의 결과로부터 생긴다.404   그램분자적인것과 분자적인것은 크기, 단계, 자원뿐만 아니라 고려되는 좌표계의 본성에 의해서도 구분되느냐하는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절편이라는 말은 그램분자적 조직을 위해 놔두고, 분자적조성에 대해서는 적합한 다른 말을 따로 찾아야만 할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잘 규정된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을 정할수있을 때면 항상 우리는 그 선이 다른 형식하에서 량자들로 이루어진 흐름으로 연장된다는것을 보아왔다.413   항상 무엇인가가 도주하고있다.414 운동들은 모순들이 아니라 도주들이다.418   모방이란 흐름의 파급이다. 대립이란 흐름의 이항화, 이항구조 이다. 발명이란 다양한 흐름의 결합 또는 연결접속이다.414   력사가의 의무는 이 두가지운동 (한편으로는 탈코드화- 탈영토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덧코드화-재령토화)이 공존하거나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기간”을 정하는 일이다.420   국가장치란 특정한 한계와 특정한 조건속에서 덧코드화의 기계를 실행하는 재영토화의 배치물이다.424   국가는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의 공명상자이다.426   파시즘국가는 전체주의적이라기보다는 자살적이다. 파시즘에는 실현된 허무주의가 있다. 모든 가능한 도주선들을 봉쇄하려하는 전체주의국가와는 달리 파시즘은 강렬한 도주선위에서 구성되며, 이러한 도주선들은 순수한 파괴와 소멸의 선으로 변형시킨다.437   강렬하게 =  되기, 동물되기, 지각불가능하게 – 되기   상징에서의 지성은 비률에 기반한 류비를 비율관계에 기반한 유비로, 한 유사성들의 계렬화를 차이들의 구조화로, 항들의 동일화를 관계들의 동등성으로, 상대적변신을 개념내부에 서의 은유로, 자연문화의 거대한 연속성을 자연과 문화간에 유사성없는 대응관계를 배분하는 깊은 단층으로, 나아가 기원적모델의 모방을 모델없는 최초의 미메시스 그자체로 대신한다… 구조주의는 커다란 혁명이였다.450 미메시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모방'('복제'라기보다는 '재현'의 뜻)이라는 뜻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자연의 재현이라고 말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예술적 창조는 미메시스의 형태이다.   되기(=생성)는 결코 상호간의 대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452 결국 되기는 진화, 적어도 혈통이나 계통에 의한 진화는 아니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453   운동은 오직 또는 주로 계통적생산을 통해 일어나는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개체군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되기는 리좀이지 결코 분류용 수형도나 계통수가 아니다. 되기는 결코 모방하기도 동일화하기도 아니다. 454   어느 마법사의 회상-454   작가가 마법사라면, 그것은 글쓰기가 하나의 되기이기때문이며, 글쓰기가 작가-되기가 아닌 쥐-되기, 곤충-되기, 늑대-되기 등 이상한 되기에 의해 횡단되기 때문이다.456   인간패거리이건 동물패거리이건 하여간 패거리들은 모두 전염, 전염병, 전쟁터, 파국과 더불어 증식한다.459   다양체는 그것이 차원수에 의해 규정되는것이다. 다양체는 본성이 변하지 않고서는 나누어지지도 않고, 자원을 잃거나 얻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양체의 차원들의 변화는 다양체에 내재하기때문에, 이것은 결국 각각의 다양체는 이미 공생하고 있는 다질적인 항들로 조성되여있으며, 또는 각각의 다양체는 그것의 문턱들과 문들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다른 다양체들로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다.473-474   그 선이 고름을 갖는지, 다시 말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생의 다양체속에서 실제로 기능하는지, 또 다양체들이 실제로 이행의 생성으로 변형되는지는 각각의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 이야기해야 할것이다. 476   고른판은 다양체의 차원수를 둘로(=이차원으로) 축소시키 기는커녕 판판한 다양체들- 이들이 몇차원을 지녔건- 을 공존시키기위해 그것들 모두를 재단하고 교차시킨다. 고른판은 모든 구체적행태들의 교차이다. 따라서 모든 생성은 마법사의 그림처럼 이 고른판위에 기록된다. 이 고른판은 모든생성이 자신의 출구를 찾게 되는 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생성이 난관에 봉착하고 무로 빠져드는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기준인것이다.477   고른판에서는 모든것이 지각불가능하게 되고, 모든것은 지각불가능하게 되기이다.478   은 시작도 끝도 기원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들은 점들이 아니라 선들로 이어져있다. 그것은 리좀인것이다499   는 기초적인 표현의 사슬을 구성하며, 가장 덜 형식화된 내용들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499 . 고유명사가 하나의 주체를 가리키는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하나의명사(=이름)가 고유명사의 가치를 띠게 되는것은 형식이나 종과 관계관련해서가 아니다.. 고유명사는 우선 사건, 생성 또는 의 질서에 속하는 무엇인가를 지칭한다, 그리고 고유명사의비밀을 쥐고있는것은 바로 군인과 기상학자로, 이들은 전략작전이나 태풍에 고유명을 부여하는것이다. 고유명사는 시간의 주체가 아니라 부정법의 인자이다. 고유명사는 경도와 위도를 명시한다. ,, 등의 진정한 고유명을 갖는것은 이들의 성격을 특징짓는 유과속의 명명때문이 아니라 이들을 조성하는 속도들과 이들을 채우는 변용태들 때문이다. 즉 그것은 꼬마한스의 말-되기, 늑대인간의 늑대-되기, 스토아주의자의 진드기-되기(이것들 또한 고유명사이다) 등 스스로 그리고 여러 배치물들안에 존재하는 사건때문인것이다.500   판은 숨겨진 원리일수 있다….판은 본성상 숨겨져있다.503   판은 목적론전 판이자 하나의 구상정신적 원리이다. 그것은 초월성의 판이다. 그것은 유비의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로는 전개에 있어 탁월한 향을 지정하며, 때로는 구조라는 비율적관게들을 설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정신속에 있을수도 있으며, 생명,영혼, 언어 등의 무의식속에 있을수도 있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고유한 결과들로부터만 귀결된다. 그것은 항상 추론에 의해 이끌어내진다. 설사 내재적이라고 얘기된다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부재에 의해서만, 유비적으로 (은유적으로, 환유적 으로 )만 내재적일뿐이다.504   예술작품은 몇초, 십분의 일초, 백분의 일초를 표시해야만 한다.506   사실 하나의 아포리즘이 주어지면 그것의 배치를 진정으로 바꾸고,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도약하게 하는 빠름과 느림의 새로운 관게들을 그것의 요소들 사이에 도입하는것이 가능하며, 심지어 필수적이다.510   사람들은 하나의 판위에 다른 판을 끊임없이 재구축하거나 하나의 판에서 다른 판을 끊임없이 추출해낸다. 례컨대 떠다니는 내재성의 판을 표면에서 자유롭게  노닐게 내버려주는대신 의 깊숙한 곳에 처박아넣고 묻어버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판은 다른쪽으로 옮겨가, 조직의 관점에서 보면 유비의 원리일수밖에 없으며 전개의 관점에서 보면 연속의 법칙일수밖에 없는 토대의 역할을 한다.511    고른 판은 기관없는 몸체이다. … 항상 도주선들을 봉쇄하려하고, 탈영토화의 운동들을 저지하고 차단하려하며, 그 운동들을 무겁게, 재지층화하고, 깊이에서 형식들과 주체들을 재건하려한다. 그리고 역으로, 고른판은 끊임없이 조직의 판을 빠져나가고, 입자들을 지층밖으로 풀려나가게 하고, 빠름과 느림을 이용해 형식들을 교란 시키고, 배치물들, 미시-배치물들의 힘을 이용해 기능들을 부순다.512   모든 생성은 이미 분자적이다.513   의문의 여지없이 지각할수 없는것-되기이다. 지각할수 없는것은 생성의 내재적 끝이며 생성의 우주적정식이다.529 (세상사물의 공분모가 있다. 그 공분모는 지구이다. 천체사물의 공분모는 우주이다)   문인화가는 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선과 운동만을 지니고 있다가 뽑아낸다. 이어지거나 겹쳐진 ‘’선’’만을  가지고 진행하는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세상 모든 사람되기, 세계를 생성으로 만들기란 곧 세계만들기, 하나의 세계또는 여러 세계를 만들기이며, 다시 말해 자신의 근방역과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찾기이다. 추상적인 기계의 ,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배치물인 각각의 세계. 다른 선들과 연속되고 결합되는 하나나 여러개의 추상적인 선으로 환원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무매개적으로, 직접하나의 세계를 생산하기. 이 세계에서는 세계 그자체가 생성되고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된다531   지각은 사물들 사이에, 자신의 고유한 근방의 집합안에, 어떤 안에 있는 다른 어떤 , 또는 이다. 전통적으로 대략 세가지 지층이 구분된다. 물리-화학적 지층, 유기체적지층, 인간형태(또는 “이형조성적 [异性造成 的]“) 의 지층이 그것이다. 각각의 지층 또는 분절은 코드화된 환경, 형식화된 실체로 구성된다. 형식과 실체 코드화 환경은 실재적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다. 이것 들은 모든 분절의 추상적성분들이다. 하나의 지층은 확실히 아주 다양한 형식과 실체, 다양한 코드와 환경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지층은 다양한 형식의 조직화 과 다양한 실체의 전개 를 갖고있으며 그 결과 지층은 곁지층과 겉지층으로 나뉜다. 가령 유기체지층이 그렇게 나뉜다. 지층의 세부구분인 겉지층과 곁지층 역시도 지층으로 볼수 있다. (따라서 목록은 결코 완결될수 없다) 아무리 다양한 조직과 전개를 갖고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지층은 조성의 통일성을 갖고있다. 이러한 조성의 통일성은 하나의 지층이 모든 형식이나 코드에  공통된 형식적특질과 관련되여있으며, 지층의 모든 실체나 환경에 있는 실체적요소 또는 공통된 재료와도 관련되 여있다. 지층들에는 커다란 운동성이 있다. 하나의 지층은 항상 다른 지층의 밑지층역할을 하거나 다른 층과 충돌할수 있으며. 진화적질서와는 무관하다. 또한 특히 두지층사이에 또는 지층들이 둘로 나뉠 때 사이지층현상들이, 즉 코드변환, 환경의 변화, 혼합 등이 나타난다. 리듬은 이 사이지층 운동과 관계가 있는데, 이 운동는 성층작용의 활동이기도 하다. 성층작용은 카오스로부터 세계를 창조하는곳과 같으며, 이 창조는 연속적으로 갱신되는 창조이다. 그리고 지층들은 을 구성한다. 고전적 예술가는 신과 같아 형식들과 실체들, 코드들과 환경들, 그리고 리듬들을 조직해 세계를 만든다. 하나의 층을 구성하는 분절은 항상 이중분절이다. (이중-집게) 실로 그것은 하나의 내용과 하나의 표현을 분절한다. 그리고 형식과 실체는 실재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 내용과 표현은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지층들은 옐름슬로우의 격자판에 부합된다. 내용의 분절과 표현의 분절, 내용과 표현은 각각 나름의 형식과 실체를 갖고있다. 이 둘사이 내용과 표현사이에는 일치관계도, 원인-결과 관계도, 기표-기의 관계도 없다. 실재적인 구분, 상호전제, 동형성이 있을뿐이다. 그러나 각각의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이 구분되더라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세가지 커다란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은 동일한 방식으로 배분되는것이 아니다(가령 유기체지층에서는 표현의 선형화가 있지만, 인간형태의 지층에서는 초선형 성이 있다). 이런 리유로 인해 그램분자적인것과 분자적인것은 해당지층에 따라 아주 상이한 조합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운동, 어떠한 도약이 층들밖으로 (웃지층) 우리를 끌어내는가? 분명 물리-화학적 지층이 물질을 전부 망라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형식화되지 않는, 분자보다 작은 도 있는것이다. 마찬가지로 유기체지 층이 을 전부 망라하는것도 아니다. 유기체는 오히려 생명이 스스로를 제한하기 위해 자기와 대립시키는 존재이 며, 생명은 비유기를 재한하기 위해 자기와 대립시키는 존재이며, 생명은 유기적일 때 더욱 강력하고  더 강력한 법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형태의 지층을 사방으로 넘쳐나는 인간의 비인간적 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판도에 도달할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판을 구성할수 있을까? 또는 우리를 그리로 이끄는 “선” 을 어떻게 하면 그릴수 있을까? 왜냐하면 지층들바깥에서는 또는 지층들이 없이는 우리는 더이상 형식과 실체도, 조직과 발전도, 내용과 표현도 가질수 없기때문이다. 우리는 탈구되며, 심지어 더이상 리듬에 의해 유지될수도 없는 것같다. 어떻게 하면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 비유기체적생명, 비인간적 생성이 그저 순수하고 단순한 카오스와는 다른것 이 될수 있을까? 따라서 모든 탈지층화의 시도(가령 유기체를 넘어서기, 생성에 몸을 던지기)는 우선 아주 신중한 구체적규칙들을 따라야만 한다. 너무 갑작스런 탈지층화는 자살적인것이나 암적인것이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즉 카오스, 공허, 파괴에 빠지든지 아니면 점점 더 강하게 경화되여가는 지층에 다시 갇혀 일정한 다양성, 분화, 유동성마저 잃어버리고 마는것이다.                                                           A                                                   배치물960   배치물들은 이미 지층과는 완전히 다른것이다. 물론 배치물들은 지층들속에서 만들어지지만, 배치물들은 환경이라는 탈코드화지대에서 작동한다. 배치물은 우선 환경에서 하나의 영토를  솎아낸다. 모든 배치물은 일단 영토적이다. 배치물의 첫번째 구체적규칙은 배치물들이 감싸고있는 영토 성을 발견한는것이다. 항상 그런 영토성이 하나 있기때 문이다. 예컨대 베케트의 등장인물들은 쓰레기통이나 벤치에서 하나의 영토를 만들어낸다. 이간이든 동물이든,  누군가의 영토적배치물을, 즉 “안식처”를 찾아내라. 영토는 온갖 종류의 탈코드화된 단편들로 만들어진다. 이 단편들은 환경에서 차용한것들이지만, 또한 “고유성( =재산)”의 가치를 갖는다. 여기서는 리듬들조차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리토르넬로) 영토는 배치물을 만든다. 영토는 유기체와 환경을 한꺼번에 초과하며, 이 둘간의 관계를 초과한다. 그렇기때문에 배치물은 단순한 “행동양식”도 넘어선다. (따라서 영토적동물과 환경적동물 간의 상대적구별이 중요해진다.) 960 영토적인것의 한 배치물은 아직 지층에 속해있다. 적어도 배치물의 한 측면은 지층에 면해있다. 그리고 바로 이 측면에서 볼때 모든 배치물에서 내용과 표현이 구분된다. 각각의 배치물에서 내용과 표현을 찾아내고, 그것들간의 실제적구분, 상호 전제, 약간의 상호 개입을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배치물이 지층들로 환원되지 않는것은, 거기에서 표현은 기호체제, 기호체제가 되고, 내용은 실천체제, 능동작용과 수동작용이 되기때문이다. 그것은 얼굴-손, 몸체-말이라는 이중분절이며, 이 둘간의 상호전제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배치물의 일차적 분할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즉 모든 배치물은 한편으로는 기계적 배치물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언표행위하는 배치물로서, 서로 분리될수 없다. 따라서 매 경우마다 무엇을 행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는지 둘 다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둘사이, 내용과 표현사이에는 아직 지층들에는 속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가 설립된다. 즉 언표나 표현은 몸체나 내용에 그런것(성질)으로서 귀속되는 비물체적변형을 표현 해준다. 지층에서 표현은 아직 기호를 형성하지 않았으며, 내용도 아직 실천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표현에 의해 표현되고 내용에 구속되는 비물체적변형이 이런 자율적인 지대는 아직 실천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표현에 의해 표현되고 내용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의 이런 자율적인 지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기호체제는 이형조성 적지층이나 인간형태의 지층(여기엔 영토화된 동물도 포함 된다)에 전개된다. 하지만 기호체제는 모든 지층을 가로지 르고 또 넘어간다. 내용과 표현의 구분에 종속되여있는 한 배치물은 여전히 지층에 속한다. 그리고 기호체제와 실천체 제는 앞에서 살펴본것과 같은 넓은 의미에서 나름대로 지층을 구성한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내용-표현의 구분은 새로운 모습을 띠기때문에,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지층의 요소와는 다른 요소에 직면하게 된다. 961 그러나 배치물은 또 다른 축에 의해서도 나뉜다. 배치물의 영토성(내용과 표현을 포함하는)은 첫번째 측면에 지나지 않으며, 또다른 측면은 바로 이 배치물을 가로지르고 탈취하는 탈영토화의 선들로 구성된다. 이 선들은 실로 다양하며, 일부 선들은 영토적배치물을 다른 배치물들을 향해 개방하거나 그리고 이행시킨다(가령 동물의 령토적 리토르넬로는 궁정이나 집단…의 리토르넬로가 된다), 또 다른 선들은직접 배치물의 영토성에 작용해, 중심을 벗어난 태고적 또는 미래의 땅위로 배치물을 개방한다.(가령 가곡에서 또는 더 일반적으로 낭만주의 예술가에서의 영토와 땅의 놀이). 또다른 선들은배치물들이 작동시키는 우주적이고 추상적인 기계위로 이 배치물들을 개방한다. 그리고 배치물의 영토성은 환경에 대한 특정한 탈코드화에서 기원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필연적으로 이 탈영토화와 선들로 연장된다. 코드가 탈코드화와 분리될수 없듯이 영토는 탈영화와 분리될수 없다. 나아가 바로 이 선들을 따라 배치물은 이제 서로 구분되는 내용과 표현이 아니라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 탈지층화된 힘들과 기능들을 보여준다. 따라서 배치물의 구체적규칙들은 다음 두축에 따라 작동한다. 한편으로 어떤것이 배치물의 영토성이며, 어떤것이 기호체제와 실천체계인가? 다른 한편 어떤것이 탈영토화의 첨점들이며, 어떤것이 이것들이 작동 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인가? 배치물에는 네개의 값이 있다. 1)내용과 표현 2)영토성과 탈영토화. 가령 카프카의 배치물과 같은 특권적인 례에서는 이 네가지 측면이 드러난다.                                                            R                                                         리좀962   지층뿐 아니라 배치물들도 선들의 복합체이다. 선의 첫번째 사태, 첫번째종류는 다음과 같이 정해질수 있다. 선은 점에, 사선은 수평성과 수직선에 종속되여있다. 선을 구체적이건 아니건 윤곽을 만든다. 선이 그리는 공간은 홈이 패인 공간이다. 선이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체는 언제나 우월하거나 보충적인 차원에서 에 종속되여있다. 이런 유형의 선들은 그램분자적이며, 나무형태의, 이항적, 원형적, 절편적체계를 형성한다. 선의 두번째종류는 이와 전혀 다른것으로, 분자적이며 “리좀”류형을 하고있다. 사선은 해방되거나 끊어지거나 비틀린다. 이 선은 이제 윤곽을 만들지 않으며, 대신 사물들 사이를, 점들 사이를 지나간다. 이 선은 매끈한 공간에 속해있다. 이 선은 자신이 주파하는 차원만을 갖는 하나의 판(=면)을 그린다. 따라서 이 선이 구성하는 다양체도 이제 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자체로 고름을 획득한다. 이것은 계급들의 다양체가 아니라 군중이나 무리의  다양체이다. 그것은 유목적이고 특이한 다양체이지 정상적 이거나 합법적인 다양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다양체 또는 변형되는 다양체이지 요소들을 셀수 있고 관계들이 질서잡힌 다양체가 아니며, 퍼지집합이지 정확한 집합이 아니다… 파토스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정신병, 특히 분열증에 의해 표현된다. 실천의 관점에서 이 다양체들은 마법에서 이용된다. 이론의 관점에서 다양체들의 지위는 공간의 지위와 상호 관련되여 있으며, 그역도 마찬가지이다. 사막이나 초원이나 바다유혀을 한 매끈한 공간에는 서식자가 없거나 근절되지 않으며, 오히러 두번째종류의 다양체가 서식한다(수학과 음악은 이러한 다양체리론을 정교하게 만드는 일에서 아주 멀리 나아갔다) 그렇다고 해도 와 여럿의 대립을 다양체의 여러 유형간의 구분으루 대치시키는 것으로는충분하지 않다. 이 두유형을 구분한다고 해도 이둘은 서로 내재적이며,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상대방으로부터 “나오기”때문이다. 나무형태의 다양체와 그렇지 않은 다양체가 있다기보다는 다양체의 나무화가 있다. 하나의 리좀안에 분배되여있는 검은 구멍들이 함께 공명하기 시작할 때 또는 줄기들이 공간을 사방으로 홈을 파서 이공간을 비교 가능하고 분할 가능하며 동질적인것으로 만들 때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특히 의경우에서 이를 잘 볼수 있다). 또 “군중”의 운동들, 분자적흐름들이 축적점이나 응고점에서 집합접속되여 이 점들을 절편화하고 정정할 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리좀의 줄기들은 나무에서 멈추지 않고 빠져나오며, 군중과 흐름은 끊임없이 벗어나고, 나무에서 나무로 도약하며 뿌리에서 벗어난 연결접속들을 끊임없이 발명해낸다. 공간은 온통 매끈해져서 이번엔 홈이 패인 공간에 다시 작용하는것이다. 심지어 영토조차, 아니 특히 영토야말로 이 깊은 운동들의 작용을 받는다. 또는 언어에 관해 말하면, 언어의 나무들은 발아와 리좀에 의해 동요된다. 이런 식으로 리좀의 선들은 사실상 이 선들을 절편화하고 심지어 지층화하는 나무의 선들과 이 선들을 탈취하는 도주선이나 단절선 사이에서 오간다. 따라서 우리는 세가지 선으로 만들어지지만 각각의 선은 나름의 위험을 갖고있다. 우리를 절단하고, 우리에게 동질적인 공간의 홈파기를 강요하는 절편적인 성이 있으며, 또 이미 자신의 미세한 검은 구멍들을 운반하는 분자적인 선들이 있고, 끝으로 자신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의 선으로 돌변해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돌아설 위험을 항상 간직하고있는 도주선들 그자체가 있다.   고른판, 기관 없는 몸체965 고른판 또는 조성의 판(평면대)은 조직의 판 또는 전개의 판과 대립된다. 조직과 전개는 형식 및 실체와 연관되여 있다. 즉 그것은 형식의 전개와 동시에 실체 또는 주체의 형성과 관련되여있는것이다. 그러나 고른판은 실체나 형식을 알지 못한다. 이 판위에 새겨지는 들은 정확히 말해 형식이나 주체에 의해 진행되지 않는 개체화의 양태들이다. 이 판은 형식화하지 않는 요소들간의 빠름과 느림의 관계속에,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강렬한 변용태들의 조성속에 추상적이지만 실재적으로 존재한다 (이판의 경도와 위도). 둘째로, 고름은 이질적인것들, 이산적 인것들을 구체적으로 고르게 재결합한다. 그것은 퍼지집합들, 다시 말해 리좀유형의 다양체들의 다짐을 확보 해준다. 결국 이러한 다짐에 따라 이루어진 고름은 필연적으로  중간에서, 중간을 통해 작용하며, 모든 원리 의 판이나 합목적성의 판과 대립된다. 스피노자, 훨덜린, 클라이스트, 니체는 그러한 고른판의 측량사이다. 결코 통일화, 총체화가 아니라 고름이나 다짐을 측량하는. 고른판에 새겨지는것에는 , 사건, 그자체로 파악되 는 비물체적변형 등이 있다. 또한 모호하지만 엄밀한 유목적본질이, 그리고 강렬함의 연속체 또는 상수와 변수들 모두 넘어선 연속적변주도 거기에 새겨진다. 또 항도 주체도 없지만 서로를 근방역이나 비결정성의 지대로 끌고 들어가는 생성들이 거기에 새겨진다. 그리고 홈이 패인 공간을 가로질러 구성되는 매끈한 공간이 거기에 새겨진다. 매번 우리는 기관 없는 몸체가, 기관 없는 몸체들(고원들)이 작동하고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에 이한 개체화, 영도(零度)에서 출발하는 강렬함이 생산변주의 질료, 생성이나 변형의 매체, 공간의 매끈하게 되기 등을 위해서 말이다. 지층들을 벗어나는 강력한 비유기적생명은 배치물들을 가로지르고, 윤곽없는 추상적인 선, 유목민예술 의 선, 이동하는 야금술의 선을 그린다. 966 고른판이 기관없는 몸체들을 구성하는것이일까. 아니면 기관없는 몸체들이 이 판을 조성하는것일까? 와 은 동일한것일까? 어쨌든 조성하는것과 조성된것은 같은 역량을 갖고있다. 선은 점보다 높은 차원을 갖고있지 않으며, 면은 선보다 높은 차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입체는 표면보다 높은 차원을 갖고있지 않다. 오히려 항상 분수차원의 수는 비정확하며, 부분들과 함께 끊임없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선= 점=면) 판은 가변적인 차원을 가진 다양체들을 선별해낸다. 따라서 문체는 판의 다양한 부분이 연결접속되는 양태이다. 기관 없는 몸체들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함께 조성되는 것일까? 강렬함의 연속체들은 어떻게 연장되는것일까? 변형들의 계열은 어떤 질서에 따라 만들어지는가? 항상 중간에서 만들어지며,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분수차원에 따라 조각조각 판을 구성하게 하는 이 비논리적연쇄들은 무엇인가?  이 판은 일렬로 늘어서있는 문들과 같다.  그리고 이 판을 구성하는 구체적규칙들은 선별적역할을  수행할 때만 유효하다. 실제로 바로 이 판이, 즉 연결접속양태가 기관없는 몸체에 필적하는 텅 비고 암적인 몸체를 제거할 수단을 제공해준다. 또 그것은 매끈한 공간을 뒤덮고있는 등질적인 표면을 처치할 수단을 도주선의 길을 바꾸는 죽음과 파괴의 선을 중성화할 수단을 제공한다. 나눔이나 조성의 각 층위에서, 따라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질서차원속에서 연결접속의 수를 증대시켜주 는것(나뉠 때마다 본성을 바꾸는것, 조성될 때마다 비교기준을 바꾸는것…)만이 유지되고 보존되고 따라서 창조되고 존속되는것이다.967   D 탈영토화967   탈영토화의 기능. D는 “누군가” 영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도주선의 작동이다. 그러나 실로 다양한 경우가 제시된다. D는 그것을 상쇄하는 재영토화를 통해 회수되여, 도주선이 차단될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D는 부정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어떤것이라도 재영토화의 역할을 할수있다. 즉 잃어버린 영토를 “대신할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존재, 하나의 대상, 한권의 책, 하나의 장치나 체계… 위에서 재영토화될수 있다. 예컨대 국가장치가 영토적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국가 장치치도 D를 행하지만 이것은 즉각 소유, 로동, 화페위에서 재영토화를 통해 회수된다.(공적소유건 사적소유건 토지소유가 영토적인것이 아니라 재영토화하는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기호체제들둥에서도 기표작용적체제가 분명 높은 층위의 D에 이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의위에서, 기표 그자체위에서 재영토화의 체계전체를 작동시키기때문에 도주선을 봉쇄하며 부정적D만을 존속시키는것이다. 한편 D가 긍정적이 되고 다시 말해 그저 이차적역할을 할뿐인 재영토화를 가로 질러 자신을 긍정하고, 그러면서도 상대적인것으로 머물 때 사정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러한 D가 그리는 도주선은 절편화되고, 잇단 “과정들”로 나뉘며, 검은 구멍들속으로 빠지거나 심지어 일반화된 검은구멍(파국)으로 종결되기때문이다. 정념적이고 의식적인 D를 동반하는 주체적기호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것은 긍정적이지만 오직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여기서 이러한 D의 두가지 주요형태는 단순히 진화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수 있겠다. 두번째 형태가 첫번전째 형태에서 나올수도 있고, 첫번째형태로 갈수도 있는것이다.(특히 경합을 벌이는 도주선들의 절편화가 전체의 재영토화를 야기할 때 또는 절편들 중 하나에 유리하도록 도주선의 운동이 저지되는 경우에 그렇다는것을 알수 있다) D의 아주 다양한 형태에서 빌려온 온갖 종류의 혼합된 모습들이 있는것이다.968  절대적D가 있을까? 그리고 이 절대적이라는것은 무슨 뜻일 까 ? 먼저 D, 영토, 재영토화, 대지사이의 관계를 더 잘 이해래야 할것이다. 우선 영토자체는 내부에서 탈영토화를 작동시키는 탈영토화의 백들과 분리될수 없다. 이는 영토성이 유연하고 “여분적”이기때문에, 다시 말해 순회적이기때문이거 나 아니면 영토적배치물자체가 자신을 둘러싼 다른 유형의 배치물들위로 열려있기때문이다. 둘째로 D는 자신과 상관관계에 있는 재영토화들과 분리될수 없다. D는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다양하며 합성되여있다. D가 다양한 형태들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특정한 순간에 “탈영토화된것” “탈영토화하는것”을 지정해주는 상이한 속도들과 운동들을 D가 한데 교차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원적작용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는것이 아니라 자체에 내재하는 이러한 미분적관계들, 도주선에 내재하는 이러한 다양체를 표현한다(D의 정리들을 참조하라) 끝으로 대지는 결코 D의 반대가 아니다. “타고난것”의 신비와 관련해 이미 이 점을 보았다. 거기서 중심을 벗어난것이건 강렬한것이건 타오르는 화로인 대지는 영토바깥에 있으며, 오직 D의 운동안에만 존재한다. 게다가 대지야 말로, 빙원이야말로 우주에 속해 있으며, 인간이 우주의 힘들을 포획할수 있도록 해주는 재료로 제시된다. 탈영토화된것으로서의  대지는 그 자체로 D의 엄밀한 상관물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D는 대지의 창조자라고까지 말할수 있을 정도이다. 단지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대지, 하나의 우주의 창조자라고. 따라서 “절대”라는것은 다음과 같은것을 의미한다. 절대란 결코 초월적인것이나 미분화된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 절대는 주어진 (상대적인) 모든 양을 넘어선 하나의 양을 표현하는것도 아니다. 절대는 오직 상대적운동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운동유형을 표현할뿐이다. 어떤 운동이 절대적인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양하다고 여져진 “하나의” 몸체를 매끈한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을 소용돌이치는 방식으로 차지한다. 어떤 운동이 절대적인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로 여겨진 몸체를 홈이 패인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안에서 자리를 바꾸고, 또 적어도 잠재적인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직선에 따라 이 공간을 측정한다. D가 이 두번째 경우처럼 작동할 때마다, 즉 도주선들을 차단하는 일차적인 재영토화를 통해 작동하거나 아니면 도주선들을 절편화하고  좌절시키려하는 이차적 재영토 화와 함께 작동할 때마다 D는 부정적이거나 상대적(이미 효과를 발휘하고 있더라도)이다. 첫번째경우에  따라 D가 새로 운 대지를 창조할 때마다, 즉 도주선들을 연결접속하고, 도주선들을 추상적인 생명선의 역량으로 데려가거나 아니면 고른판을 그릴 때마다 D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모든것을 복잡하게 만드는것은, 이 절대적D가  반드시 상대적 D를 통과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절대적D는 초월적이지 않기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상대적 또는 부정적 D 는 자신도 작동하려면 절대적D를 필요로 한다. 상대적 또는 부정적D는 절대적D를 “총괄적인” D, 총체화하는D로 만드는것이다. 그런데 이런것들은 대지를 덧코드화하며, 그리하여 도주선들을 연결접속시켜 뭔가를 창조해내는 대신 도주선들을 결합시켜 이것들을 정지시키고 파괴한다(이제까지 우리는 결합과 연결 접속을 종종 아주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동의어로 취급 했지만,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들을 대립시킨다). 따라서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또는 심지어 상대적인 D들안에 이미 끼여들어있는 제한적인 절대가 있는것이다. 그리고 특히 절대의 바로  이 전환점에서 도주선들은 차단되거나 절편화될뿐만 아니라 파괴선이나 죽음의 선으로 전환된다. 이리하여 절대안에서는 부정과 긍정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사방에서 대지를 에워싸는 장례와 자살적조직의 대상처럼 띠를 두르고, 총괄되고, 덧코드화되고, 결합된 대지냐 아니면 수많은 생성으로서 대지를 가로지르는 창조의 선들을 따라 공고화되고, 에 연결접속되고, 안에 놓이게 되는 대지냐 (니체의 말대로 “대지는 다시 가볍게 되였다…”).따라서 적어도 D의 네가지 형태가 서로 대적하고 조합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규칙들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970네가지; 내용과 표현 령토성과 탈영토화   M 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971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같은 초월적이며 보편적이고 영원한 추상적인 기계 또는 추상적인 기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구체적배치물들 속에서 작동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배치물들의 네번째 측면, 즉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점들에 의해 정의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이 첨점들을 그린다. 또한 추상적인 기계들은 영토적배치물을 다른 사물위에, 다른유형의 배치물들위에, 분자적인것위에, 우주적인것위에 열어놓으며, 생성들을 구성한다. 따라서 추상적인 기계들은 항상 독자적이며 내재적이다. 지층들에서, 그리고 다른 측면하에서 고려된 배치물들에서 일어나는것과는 반대로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과 실체들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 점에서 추상적인 기계들은 추상적인데, 또한 이것이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계개념이기도 하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모든 기계론적 기계장치를 초과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통상적인 의미의 추상적인것과도 대립한다. 추상적인 기계들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형식적이지 않은 기능들로 이루어져있다.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질료-기능들의 다져진 집합(계통과 문)이다. 기술의 “판”에서 이것을 잘 볼수 있다. 기술의 판은 형식화된 실체들(가령 알루미늄, 플라스틱, 전선 등)이나 조직하는 형식들(가령 프로그램, 모델 등)로만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강렬함의 정도들(저항, 전도성, 가열,  연장, 가속 또는 지연, 유도, 형질도입…)만을 나타낼뿐인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들과 비분방정식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텐서”만을 나타낼뿐인 도표적함수들의 집합으로 만들어진다. 분명 배치물의 여러차원안에서 추상적인 기계 또는 추상적인 기계들은 다양한 자유상태를 갖는 여러 형식들과 실체들속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동시에 추상적인 기계는 자신을 조성하고 고른판을 조성해야만 했다. 추상적이며, 독자적이고 창조적임, 지금 여기에 있음,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실재적임,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임, 추상적인 기계들에 날자와 이름이 붙어있는것은 이때문이다(아인슈타인-추상적인 기계, 베베른-추 상적인 기계, 나아가 갈릴레오, 바흐. 베토벤 등-추상 적인 기계). 이는 추상적인 기계가 인물이나 실현하는 순간을 가리키기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이름과 날자야말로 기계의 독자성과 그것의 실현됨을 가리키기때문이다.972 그러나 추상적인 기계들이 형식과 실체를 알지 못한다면 지층도 또는 나아가 배치물들의 또 다른 규정인 내용과 표현은 어떻게 되는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 구분 역시도 추상적인 기계와의 관계에 의해 적실성을 잃게 된다고 말할수 있다. 다름 아니라 추상적인 기계는 이러한 구분의 조건이 되는 형식과 실체를 더 이상 갖고있지 않기때문이다, 고른판은 하나의 연속적범주의 판이며, 각각의 추상적인 기계는 내용과 표현의 변수들을 연속시켜주는 변주의 “고원”으로 간주될수 있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은 거기에서 각각 가장 높은 상대성에 이르게 되며, “하나의 동일한 함수의 기능소”나 하나의 동일한 질료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 구분은 특질이라는 상태에서 존속하 고, 심지어 재창조된다고 말할수 있다. 내용의 특질들 (형식화 되지 않은 질료들 또는 강렬함들)과 표현의 특질들 (비형식 적기능들 또는 텐서들)이 있다. 여기서 이 구분은 완전히 대체되거나 새롭게 된다. 이제 그러한 구분은 탈영토화의 첨점들과 관련되기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탈영토화는 “탈영토화 하는것”과 ”탈영토화되는것”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하나는 표현에 다른 하나는 내용에 분배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행해지지만 언제나 이 둘사이에는 상대적구분이 이루어 진다. 그래서 연속적변주는 필연적으로 내용과 표현을 모두 변용시키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생성의 요소들로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흐름의 양들로서 두가지 비대칭적역할을 분배한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을 식별불 가능하게 하기위해 이들 둘을 동시에 취할수없을뿐 아니라 식별불가능하게 되는것의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두극을 결정하기 위해 이들 둘가운데 어느 한쪽을 통해 진행할수도 없는 연속적변주는 정의할수가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내용의 특질들 이나 강렬함들, 표현의 특질들이나 텐서들을 동시에 정의해야만 한다.(부정관사, 고유명, 부정사, 날짜) 이것들은 고른판위에서 서로 끌고가면서 교대된다. 요컨대 형식화되지 않는 질료, 즉 문은 결코 죽은, 천연 그대로의, 등질적인 질료가 아니라 독자성들 또는 들, 질들, 그리고 심지어 조작들까지도 포함하는 운동-질료인것이다.(순회하는 기술의 계통), 또한 비형식적기능, 즉 도표는 비표현적이고 통사법을 결여한 메타-언어가 아니라 언제나 자국어내의 외국어, 언어속의 비언적범주들을 포함하고 있는 운동-표현성이다(유목적인 시적 계통). 이리하여 형식화되지 않는 질료라는 실재의 차원에서 글을 쓰면, 이와동시에  이 질료는 비형식적인 언어전체를 가로지르고 긴장시킨다. 카프카의 생쥐, 포프만슈탈의 쥐, 모리츠의 송아지에서와 같은 동물-되기, 혁명적인 기계는 실재적인만큼 더욱더 추상적이다. 그것은 기표에 의해 진행 되는것도 아니고 주체적인것에 의해 진행되는것도 아닌 하나의 체계이다. 974 내재적이며 독자적인 추상적인 기계는 이와같다. 하지만 특정한 추상적인 기계가 매우 특수한 조건에서 초월적인 모델로 기능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것은 아니다. 이 경우 구체적 배치물들은 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과  관련되며, 그것 들이 기계를 실현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들의 잠재성과 창조성을 고려하는 계수들에 의해 변용된다. 배치물들을 ”양화하는” 계수들은 배치물의 가변적성분들(영토, 탈영토화, 재영토화, 대지, )과 관련되여 있으며, 또한 배치물의 “지도”를 구성하는 다양하게 얽힌 선들(그램분자적선, 분자적선, 도주선) 과도 관련되여있고, 나아가 각각의 배치물과 고른판의 상이한 관계들(계통과 문)과 관련되여있다. 예컨대 “풀한포기” 라는 성분은 아주 근방에 있는 종들의 동물적배치물들을 가로질러 계수를 바꿀수도 있다. 일반적인 규칙에 의하면, 하나의 배치 물은 사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윤곽 없는 선들을 더 많이 제시하면 할수록, 또한 기능-질료에 대응하는 변신(변형과 실체변화)의 역량을 더 많이 발휘하면 할수록 추상적인 기계와 더 친화적이게 된다. 예컨대 < 파도>기계가 있다.974 우리는 특히 이형조성적이고 인간형태의 두가지 거대한 배치물인 전쟁기계와 국가장치를 살펴보았다. 본성상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특정한” 추상적인 기계와 관련해서도 서로 다르게 양화된다는 점에서 이 둘배치물은 문제적이다. 이 둘은 문 및 도표와도 동일한 관계를 맺고있지 않으며, 또한 동일한 선들, 동일한 성분들을 갖고있지도 않다. 이 두배치물과 그것들의 계수들을 분석해보면 전쟁기계자체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국가장치에  의해 전유될 때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또한 바로 정확히 이 지점에서 도주선 그리고 이 선이 실현시키는 추상적인 생명선은 죽음과 파괴의 선으로 전환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그것의 변신역 량을 잃게 만드는 국가장치보다는 추상적인 기계에 더 가까이 있다.(여기에서 전쟁”기계”라는 이름이 나왔다). 글과 음악은 전쟁기계일수 있다. 배치물들은 연결접속들을 더 많이 열어놓고 배가시킬수록, 또 강렬함들과 다짐을 양화하는 장치들을 가지고 고른판을 더 많이 그릴수록 그만큼 더 살아있는 추상적인 기계 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배치물이 창조적인 연결접속들을, 블록화를 만들어내는 접합접속들(공리계들),  지층을 만들어내는 조직들(지층측정기들), 검은구멍을 만들어내는 재영토화들 (절편 측정기들), 죽음의 선들로의 전환들(파괴측정기들)로 대신할수록 그것은 추상적인 기계에서 멀어진다. 이처럼 연결접속을 증대시 키도록 고른판을 그리는 능력에 따라 배치물들의  선별이 실행된다. 분열분석은 배치물과 관련한 추상적인 기계들에 대한 질적분석임뿐만 아니라 순수하다고 상정되는 추상적인 기계와 관련한 배치물들에 대한 양적분석이기도 하다.973   아직 마지막관점, 즉 유형하적분석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기계들의 일반적인 유형들이 있기때문이다. 고른판의 특정한 추상적인 기계들은 지층들, 나아가 배치물들을 구성하는 조작들 전체를 소진시키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층들은 고른판 그 자체에 “달라붙어서”, 거기에서 다른 판의 축들 (형식-실체, 표현-내용)에 따라 조직되고 전개될 조밀화, 응결, 대(带)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각각의 지층은 고름의 통일성 또는 조성의 통일성을 갖고있는데, 이 통일성은 우선 실제적 요소들 및 형식적특질들과 관련되며, 이 다른 판을 주재하는 전적으로 지층적인 추상적인 기계를 증언한다. 그리고 세번째 유형이 있다.  즉 탈영토화를 재영토화로, 그리고 특히 탈코드화 를 덧코드화의 등가물로 상쇄해주는 추상적인 기계들의 배치물 특유의 이형조성적지층들위에 세워지는것이다. 특히 우리는 추상적인 기계들은 배치물들을 닫아버리기도 한다는것을 보았다. 명령어 기계는 언어를 덧코드화하고, 얼굴성기계는 몸체와 심지어 머리를 덧코드화하며, 노예화기계는 대지를 덧코드화 하거나 공리화한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기계적효과들이다. 이때 우리는, 배치물들이 고른판의 추상적인 기계와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지를 양적인 눈금에 따라 측정할수는 없다. 서로 끊임없이 작용하고 또 배치물들에 질을 부여하는 추상적인 기계들의 여러 유형이 있다. 가령 독자적이고 변이를 만들어내며, 다양한 연결접속들을 가진 고름의 추상적인 기계들, 고른판을 다른 판으로 둘러싸는 성층작용의 추상적인 기계들, 총체화, 등질화, 페쇄적접합적속에 의해 진행하는 공리계 또는 덧코드화의 추상적인 기계들과 연관되어있다. 추상적인 기계들이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예술적, 물리적, 기호적이기때문만이 아니라 서로 경합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상이한 유형들을 교차시키기 때문이다. 기계권.976          
1667    한춘시인이여!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댓글:  조회:3846  추천:0  2016-10-16
한춘시평 한춘시의 사물에 대한 리해 ㅡ의 소평               최흔   한춘시인은 개혁개방후에 는 기발을 들고 우리 시단의 앞장에서 현대시의 혈로를 줄기차게 달려온 선두주자다. 그는 열렬한 현대시의 창작자였고 열렬한 현장평론가였다.(아래는 까치둥지로 략함)는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시집이다.   . 1.   한춘시의 기둥수법   애기의 첫울음처럼 요란하게 터지던 꽃망울 한로의 음절너머 바줄을 놓쳐버린 코스모스 숨차게 달려온 그 길에 눈부시게 세워놓은 기발 그아래에서 외우던 영어단어 한나절 나비 되였는데 돛배우에 기발이 되였는데 서리우에 달빛이 비끼는 밤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간다.   이 시는 세한도(2)에 실린 2010년 9월 16일 작이다.시속에서 사물들이 강렬하게 태여나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애기, 꽃망울, 바줄, 코스모스, 길, 기발, 영어단어, 나비, 돛배, 서리, 달빛, 밤, 기러기 등 시각적인 사물이 있는가 하면, 첫울음,  음절 등 청각적인 사물도 있다. 시는 한행이 길어서344음보로 된 11행이다.(한춘시는 대부분 이런 시행이다) 이 짧은 시에 행마다에 새로운 사물들이 태여나고있으며 태여난 사물들은 변형으로 이루어지고있다. 한춘의 시는 거이다가 이런 시기교로 씌여진 시들이다. 세상은 물질로 구성되고 물질이 없는 세상은 없다. 시속에서의 물질은 바로 이미지인것이다. 시인의 상상속에서는 이 이 되고, 놓친이되고, 이 되고, 길에는  이 세워져있고,    는 >, .  이러한 되기는 한사물이 그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물로의 이동이며 한물질이 그와 성질이 다른 물질로 되기이며,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도주한 행선지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두 사물들은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시의 핵심적인 수법인 변형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라고 하겠다. 엘리어트는 이렇게 짝을 짓는것을 시적상관물이라고 하면서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되기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라는 저서 112쪽에서 지적한것처럼 한춘시인은 자기의 시를 이라고 하면서 (세한도1)고 하였다. 시인의 는 는 한수의 시에 속하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해야 할 말이 또 있다. 왜 이렇게 맘대로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의 상상은 자유로운 상상이다. 자유로운 상상은 외계의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시인만의 상상인것이다. 기성론리도, 도덕도, 그어떤 진리의 한계와는 관계없이 시인은 생각하고 상상할 권한이 있는것이다. 그 상상은 한계가 없으며 한계를 가질 필요도 없는것이다. 아무리 변형시켜 보았자 지구우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기이며 우주속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기일뿐이다. 지구나 우주가 사물들이 변할수 있는 공분모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렇게 변하는가 하는 물음은 임신한 녀자가 왜 아이를 낳는가고 묻는것처럼 소용없는 일이라겠다. 물질과 물질의 변형은 한춘의 시기법의 기둥수법이라고 할것 같다. 한춘은 이런 기법으로 자신이 개척한 현대시의 길을 총화하고있는 하고있는것 같다. 시인이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변형시키는것은 한사물의 리면에 있는 새로운 사물을 찾아서 보여주는것으로써 원초적인 사물을 들여다 보기라고 할수 있다. 인류는 원초적인것을 숭상한다. 시인도 원초적인것에 접근하려고 시를 쓰는것이다. 때묻지 않는 그 원초적인 순수를 시인이 꿈꾸고있는것은 거기에 유토피아가 있기때문일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시들   에는 좋은 시들이 많은데 필자가 특별히 즐기는 시는 과 이다. 이 두편의 시들은 언어가 새롭고 의미가 깊어 흔상할 가치가 많은 시들이다. 그중 (아래는 3으로 략칭)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은 마른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망가진 용드레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시인은 천둥소리를 기다린다   주추돌에 깨여지는 비방울 두손으로 받아들고 지난겨울 찬 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또다시 꼼꼼히 검색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었다 2010.9.16.   우선 내용이 제목과 이질적이여서 좋다. 세한도란 추운겨울 지도라고 말할수 있는데 시인은 추운 겨울철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물을 긷는것을 말하고 있다. 시는 항상 제목과 내용이 분리되거나 내용이 제목에서 일탈되는것이 좋다. 시는 어디까지나 상징이기에. 물이란 무엇인가? 물이란 시다. 물도 마르고 룡드레도 망가졌으니 물을 길을수 없는것이다. 시인은 시를 떠나면 물을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는것이다. 달가닥거리는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물은 한방울도 길어올릴수 없는 답답함과 근심걱정이 속을 다 말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소나기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소나기 오면 우물에 물을 길어올릴수 있는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천둥소리는 령혼에 갑자기 솟구치는 령감이며 시인것이다. 는 시를 짓는 시인의 욕망이 좌절되는것을 표현한 언어로서 가히 언어속에 새로운 언어가 있음을 암시하는것이라겠다. 이것이 3의 내용인것 같아서 음미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3의 2련은 가련한 시인이 시를 찾는 과정을 묘사한 단락이다. 고대하던 비는 내리지만 시인한테는 비방울도 차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부서진 비방울을 손에 받아들었다. 시인은 그 부서진 비방울속에서 지난 겨울에 찬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꼼꼼히 검색한다. 절창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이미지를 떠올린것이다. 한사물에서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사물을 떠올리는것이 시가 아닌가. 부서진 비방울이 잣나무의 노래로 둔갑된다는것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상할수 없는것이다. 시는 직선적으로 씌여지는것이 아니라 직선을 떠나서 씌여지는것으로서 탈직선화라고 말할수 있다. 진짜 .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27페지)라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창출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련도 이채롭다. 우의 내용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새로운 이미지로 표현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려있다.   물과도,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비와도, 잣나무노래와도 관계없는 하늘로 비껴가는 새, 부리에 화석 한점이 물려있는새, 와>의 출현은 불연속이며 원인과 결과와는 관계없는것이다.  새는 시인이 추구하는 상징물로서 시라고 말해도 되고 희망이라고 말해도 된다. 그런데 은 또 무엇인가? 화석이란 단단한 돌이다. 이 돌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음미의 가치가 있는 사물로서 각자나름의 판단을 허용하는 화석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화석은 의미를 직설적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의미를 감춤이며 에둘러 말하는것으로써 1500년전에 류협이 >에서 말하듯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사물에 의탁하고있다고 하겠다. 한춘시인의 이 시는 그저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말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기습적으로 돌발적으로 아무런 련계도 없이 집성되고 있다. 이 시의 구성은 재래의 현대시구성을 넘어서는 신선한 구성이다. 이 시는 조지p 란도가 말하는 하이퍼텍스트에 속하는 시라고 할수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이며 다양체이다.  련과 련사이의 이미지들은 물론 2련의 과 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상호련결인것이 아니라 분리이며 성질이 다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되여있다고 하겠다. 이미지들은 서로 인과관계인것이 아니라 대등한 독립성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물론 한춘시인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가 있었던 시인이였다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에는 이런 시들이 여러수 있다.    3.언어의 특성   까치는 나무가지를 물어다 집을 만들고 한춘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를 만들었다. 에는 여러가지 언어표현수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아래와 같은 두가지 방면으로 살펴보고저한다.   1)    낯선 언어 만들기   낯설기란 말은 지난 세기20-30년대에 쏘련의 포르마리즘에서 나온 말이다. 낯설기란 언어자체의 의미 그대로 보지 않았던 생소한, 처음으로 보는 언어를 말하는것이다. 한춘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여 낯설기를 하고있다.  (3쪽), (17쪽), (20쪽),(24쪽) (28쪽)…. 앞머리만 대충 훑어보아도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모두 말이 되는 말인것이 아니라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런 언어들의 조합을 폭력적조합 혹은 강압적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시가 이렇게 말을 조작할수 있는것은 시어는 언어의 기능에 기대여 조합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능이란 우리 조선어로 말할 때 자음과 모음이 자유로이 어울려 글자를 만들고 단어를 만드는 일면도 있지만 또 중요한것은 시속의 사물은 상상속의 사물이지 현실속의 사물이 아니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는 영상을 떠올릴뿐이지 어느한 사물이 되는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사물과 언어는 별개의 존재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실질이며 본능이다.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조합의 궤도를 벗어나서 생산될 때야라만이 시적언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작 83쪽)   2)    언어의 몽롱성;   는 몽롱한 언어들이 이곳저곳에 많이도 산재하여 있다. 필자가 좋다고 말한  의 제1련을 아래에 적어본다.   지난 모든 일들을 작두날로 다 잘라버리고 모든 소란스런 말들을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리고 모든  내던진 돌맹이를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이고   3개의 짝이 있는데 현실과 초월이 결합된 시행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다 이런 의문들을 제기할수 있다. 작두날이란 무엇을 지칭하며 작두날로 잘라버렸다는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렸다는 소란스런 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인 돌맹이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이 돌맹이를 거둬들일수 있기나 하는가…제2련도 1년처럼 모를 말들이다.   그래도 적들은 쳐들어온다 모든 벽을 다 허물고 모든 괴물을 다 격파하고 모든 기관을 다 폭파가하고 손녀가 가지고 놀던 사기인형은 다 깨지고   여기서 말하는 적들이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벽, 괴물, 기관, 사기인형이란 무엇을 표현한것인가… 적들이란 잠이 들지 못하게 하는 엉킨 삼오리뭉치같은 잡념이고, 벽이요 괴물이요 기관이요 사기인형이요 하는것들은 잠을 잘 오게 하는 환경물인것 같다.  필자도 이런 언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는 모른다. 시는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는 심리를 쓰고있다. 잠은 밥과 함께 인간의 일상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욕망이다.시인은 잠이라는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는 애모쁨을 쓰고있는것이다. 최저의 욕망도 실현하기 어렵게 살아가는것이 인간이 아닐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는 특성이 있다. 시인의 상상을 밑바닥까지 알이는 아무도 없을것이다. 시인은 왜 맞지도 않는 이런 말,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여기에 시의 본색이 있는것이다. 시는 몽롱해야 하는것이다. 몽롱한것은 아름다움이며 예술이다. 흘러가는 내물처럼 밑바닥 모래알이 다보이는 시가 아니라 강이깊숙하여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 그래서 시는 음미하게 된다. 시는 의사를 전달하는 산문이 아니라 시인의 창조한 새로운 세계를 물질로 즉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시는 리성을 중시하는것이 아니라 감각을 중시하게 된다. 종래로 리해하기 어려운 시들이 많았다. 밀턴과 단테는 과 을 쓴다음에 자신들의 시는 100년후에야 알아볼것이라고 하였고, 1500년전의 류협은 지인은 천년에 한번 통한다고 하였으리라. 좋은 시는 독해를 요구하지만 독해되기를 거부하는것이다. 그 거부로 인해서 시는  매혹을 잃지 않게 되며 독자나름의 해석을 요청한다. 우리가 지금도 리상의 시를 각자가 나름대로 리해하는것도 이때문이다 .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 이미지가 련속적으로 그것도 아주 빠르게 번쩍번쩍 령혼속으로 온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고려할사이가 없이 시를 써내려가게 된다. 한수의 단시를 쓰는 시간은 10분이면 족하다. 쓴 다음 두었다가 언어를 다듬어 놓으면 된다.  1996년의 노벨문학상수상자 비스가와 쉼보르스카는  (450쪽) 라고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개혁개방초기에 한춘시인은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현대시를 위하여 몸을 던진 시인이였다. 는 그의 시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작품집이라도 할수 있다. 시행이 344조 한격식이여서 딱딱한 감도 없지 않지만 는 우리 시단에서 현대시의 한 본보기로 되기에는 손색이 없다. 한춘시인이여!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1666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댓글:  조회:3788  추천:0  2016-10-16
《하이퍼텍스트3.0>> (커무니케이선북스)      조지p 란도   하이퍼텍스트와 문학리론에 관한 글을 쓴 [자크데리다. 롤랑 바르트, 데오도오 넬슨 안드리에스 반담을 가리킴.] 많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 네명은 중심, 주변, 위계구조와 선형성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둔 개념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중선형성, 노드, 링크, 네트워크중의 하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고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런 패러다임이다[2쪽](노드;사이트를 구성하는 기본단위. 책에선 페지와 같음)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리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많은 네트워크가 상호작용 하며 그중 하나가 다른것보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이 텍스트는 기의의 축조물이 아니라 기표의 은하계이다. 이것은 시작이 없으며 되돌아갈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출입구를 통해 이 텍스트에 접근할수 있으며, 그 경로중 어떤것도 주된 출입구라고 강변할수 없다.[3쪽]   하이퍼텍스트[넬슨이 1960년도에 만들어낸 말]라고 할때 나는 비연속적인 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 있어서 독자가 선택할수 있도록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련결된 일군의 텍스트덩어리이다. [4쪽]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적, 아니 좀더 적절하게는, 다중선형적 혹은 다중순차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상]   사람의 마음은 … 련상에 따라 움직인다. 한가지 생각을 부여잡게 되면 련상을 통해 제시되는 다음 생각을 바로 붙잡게 된다. 이때 뇌세포가 수행한 흔적들의 복잡한 거미줄구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16쪽]   하이퍼텍스트는 현대문학과 기호학리론의 일부 주요 론점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있다. 특히 탈중심성에 대한 데리다의 강조, 읽기텍스트와 쓰기텍스트라는 바르트의 개념이 특히 그렇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는 바르트와 데리다의 두 개념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문학적형상들을 창조해냈다. 그리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낸 문학적 형상물은 그 개념들, 통찰과 력사적관련[혹은 새겨넣기]의 흥미로운 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0쪽]   하이퍼텍스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용과 분리가능성에 대한 암시는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추가할 때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어진 문맥과의 관계를 끊을수 있으며, 전적으로 제한이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맥을 무한대로 만들어낼수 있다[82쪽]   바흐친은 다의적문학에 대해 ”한가지 감각으로 구성한뒤 다른 감각을 객체로 끼워넣는 방식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여러감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 감각들중 어떤것들도 다른 감각의 객체가 되는 일은 없다.” [86쪽]   하이퍼텍스트는 무제한으로 재중심화할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에서 일시적인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는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조직의 중심축이 따로 없이 링크로 련결된 텍스트 몸체들로 구성되여 있다는 점이다. [87쪽]   데리다는  “민족학은 탈중심이 생기는 순간에만 과학으로 탄생할수 있다” [89쪽]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련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91쪽]   하이퍼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하나는 –인쇄본이 보관된 도서관을 탐구하는 것처럼- 아무곳에서나 시작해 서로 련결할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처럼 “각 고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어도 상관 없으며, 이들은 다른 고원들과 서로 련결되여 있다.” 이런 특징적인 조직 [혹은 그것의 결여]은 리좀이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와 반대되는 특징, 즉 들뢰즈와 가타르가 나무에서 발견했던 구조적형태로부터 유래된것이다.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련계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특질들과 련계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다른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상태를 작동시킨다.” [92쪽]   하이퍼텍스트는 위계보다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어떤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는 가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결합하며, 또 가끔은 우리가 독립된 인쇄텍스트와 장르, 형태라고 리해하고있는것을 위반하면서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과 련결한다” … 다의성은 리좀적이며, 그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수목적인 사이비다의성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주측역활을 하거나, 주체를 나눌수 있는 독립성은 없다”하는 들뢰즈, 가타리의 론점에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려되는 하이퍼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리좀은 어떤 구조적 혹은 발생적모델에 순종적이지 않다. 계보학축이나 심층구조라는 생각에는 낯선 존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설명하듯이 리좀은 “지도(地图)적이지 사본이 아니다” 【94쪽】   리좀을 담론의 한 모델로 묘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이 없는 단절의 원리 즉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불련속적인 경향을 불러온다….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은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성장하고 넘친다” [95-96쪽]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는 동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은 “찬양받을 론쟁”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시적인 그리고 외견상으로 모순된 의견이 상호작용할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일반적인 시스템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논쟁이나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지식의 력사성을 떠맡도록하는 조건을 규정하는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99쪽]   전자컴퓨팅,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과거 30,40년의 문학리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힐리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관계는… 다중적이며, 비선형적, 비인과적, 비 변증법적이고 몹시 과잉결정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 분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다”[101쪽]   하이퍼텍스트는 두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조각내고, 흩어놓고 원자화한다. 첫째, 인쇄물의 선형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별구절을 단일한 순서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칙-즉 련속성-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를 혼란상태로 바꿔놓는것이다. 둘째,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단일한 텍스트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조각은 첫번째 형태를 만들어내는  부품과 관련하여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며, 변형적읽기와의 련관성상에서 그것을 고려하게 되는것이다. [152쪽]   텍스트를 설정하는 방식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167쪽]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그리고 경험]은 선형성을 암시한다. 선형성의 주된 지배를 받지 않는 텍스트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퍼텍스트성에는 선형성과 련속성이란것이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중련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엔 여러개의 시작과 끝을 갖고있다는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 한가지 대답이 될것이다.[169쪽]   간단하게 말해서 시작은 일반적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의도라는 의미를 포함하는것이다. [171쪽]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마지막판본, 마지막 생각도 없다. 항상 새로운 관념과 아이디어, 재해석이 있다. … 바흐친에게 전체는 종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관계이다. 따라서 전체는 종결지을수도 무시할수도 없다. 전체가 실현될 때 개념상으로는 벌써 변화를 면할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용어들로 규정하고 묘사하기 어렵다. [172-173쪽]   글쓰기는 결코 존재하기를 멈춰서서는 안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의 부속물, 사건, 그리고 잉여로 말이다. …. 우리는 플라톤적인 텍스트, 즉 그자체로 닫혀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갖고있는 완성된 테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텍스트라고 불리곤 했던것, 한때 이 단어가 동일시한다고 생각했던것-즉 작품의 시작과 끝, 한가지 총체의 통일성, 제목, 여백, 쪽지표시, 기본구성의 바깥에 있는 참고문헌령역 등- 의 지속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모든 한계를 무력화 한다.[174-175쪽]   중심성이란것은 오로지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189쪽]   하이퍼텍스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자를 재구성-재작성-한다 [190쪽]   상징으로서의 유추는 그것이 뛰여넘는 경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경계가 없다면 링크에 의해 만들어진 링크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것이다. … 내가 빈약하거나 비효률적이라고 한것은 그것들이 명백하게 선형적인 텍스트에 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308쪽]   (소설에서) 개별 렉시아((돌진, 급격한 증가)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부가적인 링크들을 따라가길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하이퍼텍스트는 여전히 텍스트이며, 글쓰기이다. 우리는 좋은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과 링크가 있는 글쓰기를 구분한는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말로 하면 뛰여난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다. 링크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가 또한 문제로 된다. 왜냐하면 개별 렉시아안의 글쓰기와 이미지의 품질이 하이퍼텍스트의 품질에 핵심적인 역활을 하기때문이다. 특정 렉시아의 콘텐츠(내용, 목록)에 만족한 독자가 그 렉시아에서 다른 렉시아로 향하는 링크를 따라가고싶어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작가든, 아니면 단순한 텍스트 작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계속 읽게 만들것이냐로 요약할수 있다.[309쪽]   하이퍼텍스트시를 써왔던 월리엄 디키는 다음과 같은것들이 하이퍼텍스트시의 훌륭한, 혹은 유용한 특징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그것의 부분, 연, 이미지 중 어떤것으로부터 시작한 뒤 시의 다른 부분이 그것을 이어갈수 있을것이다. 이런 조직체계는 어떤 한 카드에 기술되는 시의 부분은 그 시에 포함된 다른 어떤 진술의 뒤나 앞에 나올 때도 시적의미를 생성할수 있도록 충분히 독립적인 진술이 되여야 한다 ” [340쪽]   시의 목적은 텍스트의 조건을 보여주는것이다. 시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텍스트적활동을 자신의 기본주제로 삼는것이다. …시는 또한 하이퍼텍스트 웹내에서 가장 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399-400쪽]   아래에 에서 인용한 하이퍼시 한수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바이나모이넨; 영원한 현자라는 뜻, 칼레라바의 주인공 요우카하이넨;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겐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고 그의 녀동생이 자살을 택하자 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못함 ”
1665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댓글:  조회:3785  추천:0  2016-10-16
글쓰기의 0도 (동문선)             /롤랑 바르트   사유는 어떤 무속에서 말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솟아오르는것 같았는데, 이런 무로부터 출발한 글쓰기는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했다. 그 다음으로 그 만듬의 대상, 끝으로 파괴의 대상이였던 글쓰기는 오늘날 마지막 변신인 부재에 도달하고있는것이다. 10   언어체는 한시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적인 규정들 및 습관들의 조직체이다... 언어체가 작가의 파롤에 어떤 형태를 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자양을 주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들의 추상적인 원과 같은것이며, 이원을 벗어날 때 비로소 밀도있는 고독한 언어가 쌓여지기때문이다. 15   글쓰기는 언어를 넘어선 지점에서 언제나 뿌리내리고 있으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싹처럼 전개되고, 어떤 본질을 나타낸다. 어떤 비밀의 위협인 그것은 반소통이며 위압갑을 준다 23   지식인의 이런 글쓰기들은 불안정하며 여전히 문학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무력하게 참여에 대한 강박에 의해서만 정치적이 기때문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여전히 윤리적 글쓰기들이며, 그속 에서 필자(우리는 더이상 감히 작가라고 말할수 없다)의 의식은 집단적구원의 안심시키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30   중국전통을 보면 예술은 현실의 모방에 있는 완벽에 다름 아니다… 례컨대 나무로 만든 이 호두는 그것을 탄생시킨 예술을 나에게 환기시키겠다는 의도를 어떤 호두의 이미지와 함께 전달해서는 안된다. 소설적글쓰기가 수행하는것은 그 반대이다. 35   언어는 당연히 그자체의 파괴를 향하고있기때문이다. 38   모든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그 방식이 어떠하든지 본질의 상태로, 힘의 상태로 존재하고있는 잠재적산문의  장식적, 암시적, 혹은 과장된 방정식에 불과하다(42)… 시적언어와 산문적 언어는 그것들의 타자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자체가 필요없을만큼 충분히 분리되여있다… 고전주의사유는 지속이 없으며 고전주의적시는 자신의 기교적배치에 필요한 사유만을 지닌다. 그 반대로 근대적시학에서... 낱말들은 일종의 형식적연속체를 생산하며 이 연속체로부터 낱말들 없이는 불가능한 지적 혹은 감정적밀도가 조금씩 비롯된다. 따라서 말은 보다 정신적인 배태의 빽빽한 시간이며, 이 배태속에서 ‘사유’가 준비되고 낱말들의 우연을 통해서 조금씩 자리잡힌다. 따라서 의미작용의 무르익은 열매를 떨어뜨리게 되는 이와같은 언어적기회는 시적시간을 상정하는데, 이 시간은 더 이상 제작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기호와 어떤 의도의 만남이라는 가능한 모험의 시간이다. 근대적시는 언어의 모든 구조를 포착하는 차이를 통해서 고전주의적예술과 대립되며, 이 두사이에는 동일한 사회학적의도이외에는 다른 공통점을 남기지 않는다. 43   고전주의적연속체는 밀도가 동등한 요소들의 연속인데, 이 요소 들은 차안된것같은 개인적의미작용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제거하고 동일한 감각적압력을 받지 않을수가 없다. 시적어휘 자체는 창안이 아니라 관례의 어휘이다. 그속에서 이미지들은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을 통해 고립되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특수하다. … 고전주의적인 기교적수식은 낱말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기교적수식이다. 그것은 창작의 기교가 아니라 표현의 기교이다. 44   낱말은 무한한 자유로 빛을 발하며 불확실하고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향하여 빛날준비를 하고있다. 고정된 관계가 무너짐으로써 낱말은 어떤 수직적인 기회만을 지닌다. 그것은 의미들, 반사들, 잔상들로 이루어진 어떤 총체속에 잠기는 덩어리이고 기둥이다. 요컨대 그것은 서있는 기로이다. 여기서 시적인 낱말은 직접적인 과거가 없는 행위이고, 그것에 결부된 모든 기원들의 반사들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림자만을 제안하는 주변없는 행위이다… 각각의 시적인 낱말들은 예기치 않은 대상이고, 언어의 모든 잠재적가능성들이  날아오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별한 호기심, 일종의 신성한 식도락을 가지고 생산되고 소비된다. 대문자 낱말의 이와같은 절대적갈망은 모든 근대적시에 공통적인데, 시적인 말을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말로 만든다. 그것은 구멍들과 빛들이 가득하고, 지나치게 풍부함을 주는 기호들과 부재들로 가득한 담화를 확립하지만. 이 담화는 의도의 예상도 연속성도 없으며 따라서 언어의 사회적기능에 매우 대립되기때문에 어떤 불연속적인 말에 단순히 의존하기만 해도 모든 고유한 초자연들의 길이 열리게 된다. 46-47   근대적시는 언어의 관계를 파괴했고, 담화를 낱말들의 정거장으 로 규결시켰다. 이런 현상은 대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전복을 함축한다. 새로운 시적언어의 불연속체는 덩어리들로서만 드러나는 어떤 불연속적 대자연을 확립한다. 기능들의 후퇴가 세계의 관계들에 대해 어둠을 드리우는 바로 그 시점에서 대상은 담화에서 높아진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근대적시는 객관적시가 된다. 그속에서 대자연은 고독하고 끔직한 대상들의 불연속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잠재적관계들만 있기때 문이다. 아무도 그것들을 위해 어떤 특권적의미나 사용 혹은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들에 어떤 계층체계를 감지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들을 정신적행동이나 의도의 의미, 작용, 다시말해 요컨대 어떤 애정의 의미작용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언어의 파렬은 절대적대상을 성립시킨다. 대자연은 수직들의 련속이 되고 대상은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로 채워진채 갑자기 일어선다. 그것은 메워지지 않는 따라서 끔직한 하나의 세계를 구획할뿐이다. 낱말들 대상들은 관계가 없으며 그것들이 파렬하는 모든 폭력으로 치장되고 이 폭ㄹㅕㄱㅇㅣ 순전히 기계적인 떨림은 다음 낱말에 기이하게 충격을 주지만 곧바로 소멸한다. 이런이 시점에서 시적인 글쓰기에 대해 나갈수 있다는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중요성을 파괴해버리는 자률의 폭력을 지닌 언어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어적몸짓은 대자연을 수정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와 같다. 그것은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최소한 근대적시인들, 자신들의 의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그 시인들의 언어이다. 그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령혼의 상태 혹은 립장의 계시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인들에게는 시적감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것 역시 쓸데 없다. 48-49   고전주의 작가들 역시 형태의 문제를 알고있었겠지만, 론쟁은 글쓰기들의 다양성 및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언어의 구조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설득목적에 따라 생각된 담화의 질서만이 문제가 되였다. 따라서 부르죠아적글쓰기의 특이성이 대응하는것은 수사학의 다양성이였다. 54   모파상, 졸라, 도데의 그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적기호들 (단순 과거, 간접화법, 씌여지는 리듬)과 사실주의의   역시 형식적인 기호들(민중언어의 덧붙혀진 조각들, 거친 말, 방언 등)의 결합체이다. 62   공산주의작가들은 부르주아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단죄했던 부르주아적 글쓰기를 요지부동으로 지지하는 유일한 자들이 된다.67   언어의 어떤 질서에의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 백색의 글쓰기를 창도하는것이다. 70   의식적인 작가는 이제 조상 전래의 전능한 기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78   근대적예술전체가 그렇듯이, 문학적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여넘고자하는 노력자체이다. 그것은 그것자체의 고독에 대해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음에도, 여전히 낱말들의 행복에 탐식하는 상상력이며, 어떤 꿈꾸어진 언어를 향해 달려간다. 언어가 더이상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아담적인 세계의 완벽함을 일종의 리상적인 예견을 통해서 나타내는 신선함을 지닌 그런 언어를 향해. 글쓰기들의 다양화는 새로운 문학을 확립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문학은 오로지 하나의 기획이 되기 위해서만 자신의 언어를 창안한다는 점때문이다. 이 기획은 문학이 언어의 유토피아가 되는것이다. 79   작품의 불연속성과 무질서가 낳는 열매자체는 각각의 잠언이 이를테면 모든 잠언들의 원형이라는것이다. 유일하면서도 변주되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 성찰들은 담론의 단상들이고, 구조와 광경이 없는 텍스트들이다. 84   잠언은 개별적인 덩어리들로 구성된 전체적인 불덩어리이다. 뼈대는 뚜렷한 모습이상으로 광경적이며- 그리고 뼈들은 단단한것들이다. 잠언의 모든 구조는 그것이 고정되여있지 않다는 바로 그점에서 가시적이다. 85   수직성을 통해서만 질서가 잡히는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셈이다. 미덕들, 다시말해 외관들의 유일한 수준에서는 그 어떠한 구조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조는 바로 명백한것과 감추어진것 사이의 진실관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97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98   지극히 뛰여난 명철성에 지극히 대단한 비현실성이 흔히 대응한다. 100   이미지들은 텍스트와 분리시킴으로써 는 대상의 하나의 자율적인 도상학에 진입하고 있었다. … 의 도판들은 대상을 제시하고 이 제시는 예시의 교육적목표에 보다 무상한 미학적 혹은 모상적 정당화를 덧붙이고 있다. 105   일반적으로 대상의 생산은 이미지를 거의 신성하다할 단순성으로 이끈다… 창조의 간결한 엄격성, 거래의 화려함, 이것이 백과전서적대상의 이중적체제이다. 109   기계의 도판, 곧 이미지는 … 우선 대상 혹은 작업의 분산된 요소들을 분석하고 열거하며, 그것들을 독자의 눈앞에 테이블위에 던지듯 던지고, 이어서 마무리하기 위해 생활장면, 다시 말해 삶의 두께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 116   당신이 재현하는것은 분석적정신의 여정이다. 세계는  당신에게 통상적인것, 분명한것(이것은 생활의 장면이다)을 제시한다. 백과전서파와 함께 당신은 점진적으로 원인들, 물질들, 원요소들로 내려가며, 체험적인것으로부터 인과적인것으로 가고, 대상을 지적으로 만든다. 일직선적인 글쓰기와 이 점에서 반대되는 이미지의 특권은 그 어떠한 독서의 미로도 강제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론리적인 백커가 언제나 결핍되여있기때문이다.117   특이한 떨림은 무엇보다도 놀라움이다.118   백과전서적인 시적세계는 언제나 어떤 비현실주의로 규정된다. 따라서 객관성(‘현실’)의 엄격한 요구에 토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타자는 모든 신비의 기호이다)이 끊임없이 현실을 넘어서는 시적작품이 되는것이 의 계획이다. 121   객관적으로 이야기된 단순한 대상의 은유자체는 무한히 떨리는 대상이 된다. 122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는 대상을 재구성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첫번째 자연이 일단 분해되고 나면 첫번째것처럼 형성된 또 다른 자연이 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를 부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영원히 차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선- 우리 시선- 이면 족하다  123   자신(을 쓴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그림속에 그 최상의 신비한 불완전성을 담아놓은 푸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불완전성은 완성된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데, 시간의 떨림 이다. 추억은 글쓰기의 시작이고 차례로 글쓰기는 죽음의 시작인 것이다.(그것이 아무리 젊은때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128   은유      사실 파격구문은 거리의 시학으로 이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적노력이 친화성들, 상응들, 유사성들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작가의 기능이 자연과 인간을 단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는것이라 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감각적인 기능이라고 부를 수있는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근본적인 문채인 은유 역시 분리의 강력한 도구로서 리해될수 있다. 특히 은유는 샤토브리앙의 경우 풍부한데, 두성분뿐 아니라 비소통을 우리에게 표상한다. 마치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문자적요소들, 다시 말해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갑자기 덥석 물리고, 쳐들려지며, 떼어내지고, 분리된 뒤후 일화의 자연스러움에 내맡겨지는 문자적요소들을 제공한다. (그것은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준비도 없이 폭력적인 파격구문에 따라 억지로 도입된 새로운 말은 환원불가능한 어떤 다른 곳과 갑작스럽게  이 요소들을 대면시킨다. 샤토부리앙은 죽어가는 어떤 젊은 수도사의 미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캐시미르계곡에서 여행자를 위로하는 그 이름모를 새소리를 듣고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대목도 있다.“이곳에서 누가 태여났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울었는가? 저 하늘 높이 있는 새들은 다른 고장들을 향해서 날아간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에서 은유는 사물들을 접근시키는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세계들을 분리시킨다. 기교적으로 말하며 (왜냐하면 기교나 형의상학을 말하는것은 같은것이기때문이다), 오늘날 은유는 (시적자유에서와는 달리) 단 하나의 기표에만 관련되는게 아니라, 담화의 커다란 단위들에 확장되여 연사莲词 생명력자체에 참여하는것 같다. 언어학자들은 연사가 언제나 말과 가깝다고 말한다. 샤토브리앙의 커다란 은유는 사물들을 분활하는 여신인데, 언제나 향수적이다. 그것은 반향을 증식시키는것처럼 나타나면서도 인간을 자연속에 불투명한것처럼 남겨두고있고 그에게 결국 직접적인 진정성의 기만을 면제해 준다. 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 133-134   대립들이 엄격하도록하기 위해 그것들을 두개이상의 상이한 풍경이 아래로 쫙 펼쳐지는 산정상의 능선처럼 얇고 날카로우며 결정적인 일회식사건을 통해 분리시켜야 한다.   문학은 우연적인 진실을 영원한 개연성(필연성)으로 대체 한다135   근대의 작가는 아브라함이면서 아브라함이 아니다. 그는 도덕을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언어속에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그는 환원불가능한것을 가지고 일반적인것을 만들어야 하고, 언어의 도덕적인 일반성을 통해서 자기존재의 부도덕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이라는것은 이와같은 위험을 감수한 통과이다. 138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의 모든 특징들을 부여받고있지만 모든 투사적법칙을 넘어서 존재하고 기능할수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유명사를 근거지로 하는 하이퍼의미성현상의 대가 –혹은 날쁜점-이다. 이 현상이 고유명사를 시적인 낱말과 매우 유사하게 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146   사실 고유명사는 촉매작용을 할수있다. 우리는 그것을 채울수 있고, 확장할수 있으며, 그것의 의소적골격이 지닌 사이들을 무한한 추가물들로 메울수 있다. 고유명사의 이와같은 의소적 확장은 다음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우선 불연속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출현하는 여러장면들을 포함하지만, 이것들은 련합하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되기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야기하는것은 일정수의 충만한 단위들을 환유적방식을 통해 련결시키는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8   고유명사는 흉내이고, 아니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환영이다. (이것은 의구심이 들지만 맞다)150                         프로베르보다 훨씬 전에 작가는 문체의 혹독한 작업, 끊임없는 수정의 피곤함, 미미한 수확을 얻기위한 과도한 시간의 슬픈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표현했다… 플로베르에게는 문체는 절대적인 아픔이고, 무한한 아픔이며, 불필요한 아픔이다. 집필은 터무니없게 완만하다(‘일주일에 네페지’ ’한페지를 쓰는데 닷새’ ’두줄을 쓰는데 이틀’) 그것은 “삶과의 돌이킬수 없는 고별” 무자비한 자기 감금을 요구한다.157   수직적축에는 대체 낱말들이(이것들은 정정들이나 낱말들이다) 기입된다. 수평적축에는 통합체들의 삭제들이나 첨가들 (이것 들은 개정들)이 기입된다.160
1664    동시 창작론 / 유경환 댓글:  조회:3877  추천:0  2016-10-16
동시 창작론 ① 직접 표현은 피해야 유경환(시인,동시인)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이 석 줄 한 연(聯)으로 씌어진 글을 한 편의 동시로 보아야 할 것인가.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이렇게 이어붙여 보면, 틀림없는 산문이다. 주어, 동사가 뚜렷하고 주어와 동사의 서술 관계가 분명하다.   그러니 한 줄의 완벽한 산문이다. 하건만 위에 인용했듯 석 줄로 바꿔 놓고서 동시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즉 운문이라고 여긴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만 운문일 뿐, 그러니까 형식으로 운문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운문이 아니다. 다른 말로 동시라고 하기가 어렵다.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위의 글이 작품이 되려면, 적어도 '아름답게'라는 부사어는 다른 표현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름답게'라는 형용사적 부사어를 직접 표현으로 구사하면, '아름답게'라는 표현의 분위기가 사전적 의미에 갇히고 만다. 따라서 쓴 사람이 지녔던 느낌이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기 어렵다.   읽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동이 오지 않는다. '아름답게'라는 표현은 시어(詩語)가 되기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미 일상어로 때묻어 있어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정서 이동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감정을 전달하는 정서 이동, 이것이 쓴 사람에게서 읽는 사람에게 옮겨지려면, '아름답게'라는 표현 대신 다른 표현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냥 쉬운 표현으로 '아름답게'가 아니라, 쓴 사람만의 새로운 표현 기법이 요구된다.   쓴 사람이 생각해 낸 새로운 표현 방법, 없던 것을 있도록 하는 표현 방법 찾기가 곧 창작인 것이다. 창작을 크리에이션(Creation)이라 한다.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되풀이 사용하면 되풀이의 Re가 붙어서 리크레이션(Recreation)이 된다. 오락이다. 이미 있는 표현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유행가의 노랫말이다. 동시는 창작이어야 한다.   '산길에'는 어디라는 것을 나타내는 부사적 조건이다. '풀꽃이'는 주격으로 상징적 존재일 수 있다. 주어인 풀꽃이 다른 의미의 해석을 가능케 구사되었다. 그러기에 이 석 줄에서 시적 분위기를 조성할 요체는 '아름답게 피었어요'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일상적 대화에서 하듯 그냥 '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하면 읽는 사람이 쓴 사람의 내면에 접근할 수가 없다. 쓴 사람이 어떻게 아름답게 보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감동을 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쓴 사람이 이 석 줄을 쓸 때 지닌 내적 정서, 이것을 읽는 사람이 짚어낼 수 없다. 쓴 사람이 지녔던 내적 체험이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하면, 어떤 감응도 생기지 않는다. 곧 감동이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서 이동이 안 된다.   정서 이동의 불가능은, 한마디로 감동의 차단이다. 그런데도 적잖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소정의 절차를 밟아 등용의 관문을 통과한 동시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산길에/풀꽃이/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써놓고,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했는데…… 어째서 작품이 덜 되었다고 평가하느냐'고 불만스러워한다. 쓴 사람은, 풀꽃이 핀 산길의 정경을 잘 옮겨 놓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항변하는 것이다.   이런 불평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설명해야 '발효되지 아니한 표현'인 것을 깨닫도록 할 수 있을까. 어떤 방법으로 일러줘야 숙성한 감정이 바탕하고 있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산길에 풀꽃이 수를 놓듯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나서 '산길에/풀꽃이/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쓰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생도 가능한 것이다.   소정의 등단 절차를 거쳤다면 한 20년은 살았을 것이다.그런데 7살이면 써낼 정도의 표현 기교밖에 못 지니는가? 20년, 30년, 40년, 심지어 60년을 살아보고도 나이에 걸맞는 삶의 체험을 겪어내고도, 초등학교 1학년생이 표출하는 정서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살아낸 세월만큼 나무의 나이테처럼 자기 내면에 축적한 것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경험일 수 있고, 생각 깊은 체험일 수 있으며 또 아픔을 이겨낸 쓰라림일 수도 있겠다. 이것을 눈에 안 띄게 대입할 경우, 의인화의 풀이나 이중 해석이나 상징 분석이 가능해진다.   필자는 '생각의 우물'이라는 표현을 오래 전부터 써 왔다. 얼마나 깊게 생각의 우물을 파 왔으며, 얼마나 오래 사색에 젖어 왔으며, 얼마나 깊은 고뇌에 빠져 보았느냐에 따라 동원 선택하는 시어(詩語)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산길에 풀꽃이 예쁘게 핀 것을 보나, 아… 아름답구나… 이런 분위기를 글로 옮겨서 남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라는 충동에 따라 위의 인용처럼 썼다면, 이 사람 나이가 60대일지라도 정서 연령은 10대일 수밖에 없다. 만약 유치원에 다니는 원아나 초등학생이 이렇게 썼다면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인생을 겪어본 사람의 안목으로 이렇게 썼다면 돌아서서 한숨을 뿜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산길에   풀꽃이   ○○○○○○…피었어요.   위에 ○○○○○○… 남겨진 자리를 자기 체험처럼 자기 사상에 바탕한 자기만의 표현으로 채우려 애쓰고 고민할 때, 비로소 생각이 숙성되고 발효하여 자기다운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동시 창작을 위한 표현 기교에서 기법이라는 것은 가장 적절한 한마디를 찾아내는 데 있다. 이것이 표현 기법의 개발이다. 윗줄과 아랫줄 그리고 앞과 뒤, 그 사이에 들어서서 전체 분위기를 살려내는데 걸맞는 한마디를 만들어 내는 일, 이 일은 어렵고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사물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리 보인다. 슬픈 심정으로 달을 쳐다보면 달이 슬퍼 보이고 즐거운 감정으로 쳐다보면 달이 웃는 것으로 보인다. 보이는 대상은, 보는 사람의 심상(心象)에 걸맞게 보인다. 더 쉽게 말하면 볼록렌즈로 보느냐 오목렌즈로 보느냐와 같다. 곤충의 모듬눈[複合眼]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 영상을 곤충이 인식하도록 작용한다. 보이는 대상이 보는 사람의 눈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하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내면화하는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 보는 풀꽃과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 보는 풀꽃이 같지 않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깊은 고뇌에 갈등하는 시인의 눈을 통해 내면화한 풀꽃의 이미지가 어찌 '아름답게'라는 단어로 표출될 수 있겠는가.   부모와 헤어져 살고 있는 초등학생이 보았다면 '산길에/풀꽃이/어우러져 피었어요'라고 쓸 것이고, 서로 싸우고 돌아선 사람이 보았다면 '산길에/풀꽃이/서로 외면한 채 피었어요'라고 쓸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산길에/풀꽃이/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로 속삭이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길이 외로울까 봐 피었어요' '산길에/풀꽃이/어머니 발자국으로 피었어요' '산길에/풀꽃이/햇볕을 붙잡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볕을 기다리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달빛 마시려 목을 쳐들고 있어요'…….   얼마든지 '아름답게'라는 형용사적 부사어를 대신하여 시적 요건을 보태줄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어떤 표현이 '아름답게'라는 것 대신 시적 요건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 그것은 이 석 줄의 위와 아래에 올 다른 연(聯)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직접 표현은 되도록 피해야 은유라고 하는 비유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직접 표현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산문에서 운문으로 형식을 바꾸기 위한 조건으로 ①명사 뒤에 붙는 토씨(조사)를 가능한 떼어버리고, ②문법적 어문 구조를 해체하는 손질이 필요하다. 토씨를 생략하고 산문 구조를 해체해야만, 그만큼 빈 자리가 생긴다. 이런 빈 자리가 만드는 공백이 있어야, 읽는 사람의 상상이나 폭 넓은 해석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감정의 여운에서 다양한 해석이 증폭되며 확대 해석이 가능해진다. 쓴 사람이 생각 못했던 비유나 상징까지, 읽는 사람에 의해 지적되면, 동시의 감상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곧 독자에 의해 상징 의미가 발견되는 셈이다. 고속도로에 제한 속도를 60 Km라고 표시해 놓으면 60 Km로 달려야 하는 규제를 당한다. 그 이상의 속력을 내면서 느끼는 쾌감이나 그 이하의 속력을 내면서 풍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박탈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라고 써 놓으면, '아름답게'라는 직접 표현이 지닌 사전적 의미 또는 일상의 어의(語意)에 구속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멋을 읽는 사람이 느낄 수 없게 된다. 시는 산문과 다르다. 상상을 제약하거나 해석을 제한하는 언어의 구속, 이런 구속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또는 문법 구조의 해체를 시도하는 작업에서 오히려 매력을 얻는다.   (2003년 봄 『한국동시문학』창간호)   동시 창작론 ② 「생략」으로 빛나는 동시 유경환(시인, 동시인)   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이 제품을 만들 때 갈고 닦고 하는 모습을 보면 장인(匠人) 정신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동시를 쓰는 일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산문 형태에서 운문 구조로 바꾸는 1차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지워 버리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 생략 작업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는 나무의 가지치기와 다름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보기로 하자.   좋은 산문은 한 가지 뜻만 드러나되 그 뜻이 분명해야 한다. 이런 뜻인지 저런 뜻인지 헷갈리는 산문은 좋은 산문이 못 된다. 운문은 이와 반대이다.   운문은 여러 가지 뜻을 품을 수 있어야 매력 있는 운문이 된다. 좋은 운문은 여러 가지 뜻을 담을 수 있으므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이 운문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산문과 운문의 차이는 이렇게 확실하다. 산문과 운문에는 겹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2002. 12∼2003. 2) 잡지에 실린 '동시'라는 글을 보니, 산문과 운문의 구별이 안 되는 것을 '동시'라고 발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동시를 쓰는 아동문학가'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회원의 글이면 다 실어주는 협회지(協會誌)에 발표하고 싶어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쓰는 글을 어떻게 동시 작품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아마도 어떤 등단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소정의 절차를 밟는 동안, 자기 글도 동시 작품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혹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이 있었다면 그들의 안목에 책임이 귀착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동시' 수준에 오르지 못한 글을 (어떤 생각에서인지) '인정'하여 준 그 대가(代價), 그 대가의 결과로 오늘날 아동문학 풍토엔 잡초가 무성하게 휘날리게 된 것이 아니랴.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바로 이 점에 운문의 멋과 맛이 있다. 시는 동시를 포함하여 운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물론, 동시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인은 첫 번째로 산문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문장을 해체하고, 두 번째로 복합 의미를 지닌 상징 언어를 시어로 선택한다.   문장을 해체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①주어 동사 따위의 문법 구조를 일부러 무너뜨리거나 ②주어 동사 따위의 문법적 배열을 의도적으로 뒤바꾼다거나 ③명사 뒤에 붙는 토씨 따위를 잘라버리는 생략 기법을 쓰거나 ④명사 앞에 오는 형용사 부사 따위를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기법(技法)이다.   독자가 작품을 한 번 읽어서 어떤 느낌(feeling)은 알아낼 수 있으되 그러나 어떤 말(message)을 담고 있다고 대번에 짚어내기엔 애매하도록 시인은 모호한 시어를 선택 구사하기 일쑤다. 여기서 모호한 시어란, 다중(多重) 의미를 지닌 어휘를 가리킨다. 어떤 연유에서 시를 읽을 때 두 번 세 번 읽도록 유도하는 술책으로 상징 단어를 시어(詩語)로 동원하는 것이 예사(例事)이다.   왜 두 번 세 번 읽도록 유도하는 술책을 쓰는가? 되풀이 읽어내면서 글 속에 시인이 숨겨 놓은 뜻을 찾아내 감지(感知)하도록, 곧 독자를 시 속에 끌어들이는 술책이다. 달리 쉽게 말하면 '간단히 직설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을 철사를 구부리듯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복잡 구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방법이 시의 작법일 수 있다.   왜 이렇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것일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작업은, 마치 반도체의 집적(集積) 회로처럼 다양한 의미를 글 속에 축적하는 작업이다. 한눈에 대번에 읽어내는 글은, 글이 지닌 밑바닥 내용이 금세 드러나므로, 액면가가 곧 실제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어야 비로소 글의 밑바닥 사상이 드러나는 시는, 독자의 정서 상태와 독자의 체험의 폭과 그리고 독자가 살아온 삶의 농도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독자에게 안겨주게 한다. 여기서 시작품이 '시로서 읽히는' 매력이 발견되는 것이다. 같은 동시를 읽더라도 읽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가 지닌 메시지와 독자의 수용 태도가 서로 상관 관계(相關關係)를 이루는데, 독자는 이를 잘 모르거나 간과한다.   이쯤에서 이 창작론의 본론으로 들어가자.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가슴에 스며오는 정감(情感)이 괸다면 ①우선 그 정서를 줄글(산문)로 쓰기 시작하라. 바로 적어두어야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정감이 흩어지거나 엷어져서 정서를 포착하기 어렵다. ②그 다음 해야 할 일은, 생선을 토막 내듯이 이 줄글(산문)을 토막토막 잘라서 두 줄이나 석 줄이나 넉 줄, 다섯 줄……로 나누어 배열하고 되풀이 읽어보라.(대부분의 발표 '동시'는 이 단계에서 작업이 중단된 것들이다.) ③적잖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작업 과정이 이 세 번째 단계의 작업이다. 여기서는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명사 뒤에 붙어다니는 토씨를 떼어내고, 가급적 형용사 부사 따위 수식어를 지워버려야 한다. 이 생략 기법의 활용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기 글을 자기가 자른다는 행위는, 고도의 장인 기술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흔히 '열 손가락 안 아픈 것 없다'고 말하지 않은가? ④끝으로 글의 기본 문법인 주어 동사 따위 배열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바꿔 도치법(倒置法)을 활용해 효과를 높이는 효과 측정을 해야 한다.   이런 네 단계 작업을 마친 뒤에 다시 읽어보면서 '속으로 느껴지는 논리' 곧 내면으로 수긍할 수 있는 논리(정서 논리)가 통하고 있다고 여기면, 산문에서 운문으로의 변이(變移)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시는 먼저 마음 속에 산문으로 오게 마련이며, 그 다음 다듬는 과정에서 운문 형식으로 탈바꿈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동시 쓰기에서도 마찬가지 일반 순서이다. 박목월도 그랬을 것이고 박두진도 그랬을 것이다. 이분들이 남긴 동시를 읽어보면 일반 순서에 따라 지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대가(大家)가 되면 산문에서 운문으로 전이(轉移)하는 과정을 안 거치고 바로 운문 형태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는 산문적 기초에서 출발하여 운문적 구조로 이월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번에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로 하자. 아름다운 경치를 눈 앞에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 참으로 멋진 풍경이다.…… 이 경관을 오늘 여기에 함께 자리하지 아니한 뉘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혼자 보기엔 너무 고운, 아까운 경치야…….' 이렇게 감탄할 만한 풍경 앞에 서 있다고 치자.   어떤 이는 카메라를 꺼내 찰칵 찍을 것이다. 사진에 그대로 담길 것이다. 어떤 이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화가가 하는 작업이다. 사진 작가의 작업과 화가의 작업은 모두 그 풍경을 재현하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작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는 생략이라는 작법 곧 생략 기법인 것이다. 사진에는 생략 없이 모든 것이 담긴다. 그러나 그림에는 화가의 선택대로 생략된 나머지만 담긴다.   정밀 사진기로 감탄 대상을 정확히 담아낸 사진 작품과 그리고 무디지만 감성적인 선택으로 그려낸 미술 작품을 비교해 보자. 화가의 정서가 이입(移入)된 (화가가 붓으로 표현하되 물감의 농도로 강조된) 주관적 선택이 더 황홀한 감정을 현장 부재자에게 전달할 수 있잖은가? 밴 고흐가 남긴 작품이 그 시대의 사진 작품보다 더 선호되는 이유와 같다.   시와 동시가 애매 모호한 문장 구조를 지니도록 하는 것은, 한마디로 작품에 시인의 의도가 숨겨지도록 하는 작법이다. 시인이 그 작품을 쓸 때 (안 보이도록) 작품 행간 속에 깔아놓은 정서, 이것을 비슷한 체험을 지닌 독자가 읽어낼 수 있도록 '숨겨 놓는' 것이 시인이 즐겨 택하는 시작법이다. '나만큼 고민한 사람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큼 관찰한 사람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큼 생각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런 부담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지극히 당연시되는 요구이며 또 아울러 독자에겐 최소한의 의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를 읽고 감상하는 행위는, 누워서 TV 연속극을 보거나 TV 가요를 듣는 것과 같을 수 없는 최소한의 부담을 지불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부담'을 지불하지 않고 읽고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 수준에서 '동시'를 써내거나 발표하는 글이 바로 '시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시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그런 '동시'들인 것이다. 흔한 말로 수준 미달의 것을 이른바 '동시'라고 발표하면서, '어째서, 왜 내 동시에 대해선 혹평을 일삼느냐?'고 항변하기 일쑤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있다. '목마른' 경험이 없다면 이 속담의 진의를 알기 어렵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먼저 목마른 경험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목말랐던 경험 없이 물맛이 어떻다고 불만 불평을 쏟아놓는 데 문제가 있다.   동시를 그냥 언어의 유희라고만 여기면 유리알 굴리듯 예쁜 낱말 고운 낱말을 추려서 이리저리 맞추는 작업에 그치고 만다. 이런 이들에겐 문학적 고민이나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의 앙금 같은 것들이 과연 필요한 것일 수 있을까? 동시는 어린이나 또 피곤한 어른에게 삶을 따뜻이 품어안도록 위안을 주며, 그런 위안을 안겨주는 일(몫)도 아울러 해내는 문학 작품으로의 값을 지닌다. 동시는 어린이나 어른에게(특히 생각이 달리는 어른에게) 주는 정서 영양일 수 있다. 그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샘과 다르지 않다.   이 글의 결론을 위해 긴 말을 짧게 줄여 보자.   동시를 쓰겠다는 사람은, 첫 번째 단계로 쓰고 싶은 내용을 우선 산문으로 써 놓고 나서 줄일 수 있는 것을 모두 잘라내 길이를 줄여 운문 형태로 바꿔 놓은 뒤에, 두 번째 단계로 반드시 숨겨져 있어야 할 음률과 운치 곧 내재율과 율동성을 속으로 외워 맞춰야 한다. 세 번째 단계로 은유적으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낱말, 곧 비유가 가능한 시어(詩語)로 자기가 사용한 낱말을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감한 생략 기법이다. 이준관의 동시를 읽어보면, 긴 산문체에서 퇴고 과정을 거치는 동안 몇 줄씩 지워버렸거나 아주 잘라버린 흔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준관 시인은 시와 동시를 함께 쓰는, 시를 아는 동시인이기 때문에 좋은 동시도 잘 써내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여름 『한국동시문학』 제2호)   동시 창작론 ③ 형상화란 무엇인가? ―간결하게 소재를 선택하면 형상화의 어려움 덜 수 있다 유 경 환   동시 쓰기에서 세 번째로 다뤄야 할 것은, 형상화(形象化)의 문제라고 여겨 왔다. 형상화라는 말은 창작 기법 이론서에 자주 나오는 어휘이다. 그러나 쉽게 풀이하여 놓은 것을 보지 못했다. 이 기회에 형상화에 대하여 진지하게 다가서 보고자 한다.   형상화라는 말이 한자로 되어 있어서 우리말로 바꿔볼 수 없을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쉽사리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모양 만들기'라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한마디가 못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양 만들기에 가깝거나, 비슷하다고 할 만하다.   어쨌거나 창작이라는 작업에서는, 형상화가 창작인의 가슴에 먼저 밑그림으로 들어서야 하느니만큼, 문학에서는 물론 미술 조각 따위에서도 한결같이 형상화가 중요한 일몫을 한다.   창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기에, 창작이 예술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 목수는 통나무를 가지고 온갖 도구를 사용하여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것의 모양을 나무 속에서 찾아 뽑아낸다. 이 때 '만들고자 하는' 것의 밑그림이 곧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조각가의 경우, 조각을 빚는 과정에서 자기 예술 속의 것을 모양이 있는 것으로 빚어내는 일에 따라다니는 생각이 곧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경우, 시인의 가슴 속에 괸 정서를 가슴 밖으로 꺼내어 모양이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때, 글자들이 갖추는 모양이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형상화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이 아닌 것(모양이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때, 만들고 싶어하는 모양으로 옮겨진 심상의 변화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형상화가 어째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형상화 작업이 아니면 어떤 느낌이나 감동이나 떠오른 상(像)이 예술가의 가슴 속에 한동안 담겨 있다가 그냥 스러지고 만다. 때문에 예술가의 가슴에만 담겨 있게 하지 말고, 가슴 밖에 존재하도록 모양을 갖춰 입혀야 하는 작업이 중요한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 가슴에 괴어 있던 생각이, 그들 가슴 밖에 존재하도록 창작되지 않고, 예술가와 함께 사라진 에는 부지기수다. 예술가의 가슴 밖에 있을 때에는 구상이나 예감이나 상상일 수도 있고, 예술가의 가슴 밖에 있을 때엔 창작물이 되는 것이다.   가슴 안과 밖의 차이는, 가슴살 한 겹의 차이가 아니라, 무(無)와 존재의 차이다. 아무리 좋은 착상을 가지고 있다 한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노래할 수 있게,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창작품으로 바꿔 놓지 못하면 그것은 여전히 무인 것이다. 인간의 육신 속의 영혼은 육신과 헤어져 따로 서야만 존속될 수 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분리가 중요하다.   예술가의 심상 속에 깃든 영혼은 만인의 영혼으로 바뀌어야, 그 값을 빛처럼 발휘할 수 있다. 예술가의 심상 속의 영혼은 고독한 영혼이되, 예술가의 심상 밖으로 나온 영혼은 만인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기능으로 값지게 된다. 죽은 육신에서 영혼이 나올 수는 없다.   동시 작가의 동시 쓰기에서도 위에 말한 일반론이 그대로 적용된다. 동시 작가의 가슴에 스며든 시정(詩情)이, 가슴 밖으로 나와 글자라는 수단에 힘입어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되면, 이 때 비로소 동시 작가의 정서가 형상화하고 이 형상화에 담긴 작가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된다.   동시 작가가 동시를 쓰기 전 또는 쓰는 동안, 어떤 작가 의도를 형상화시키려 했던지, 그것은 동시 작가의 기량에 달린 문제다.   여기서는 만질 수 없고 느낄 수만 있는 마음, 곧 작가 의도를 내가 아닌 남이 만지거나, 읽거나, 듣거나, 보거나 할 수 있도록 모양을 갖춰 '독립적 존재'로 바꿔 놓는 작업이 중요하며, 이 작업 과정에서 형상화는 다양한 모양 가운데 한 가지 형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조각가가 창작한 조각, 미술가가 그려낸 미술 작품, 음악가가 창작한 작곡, 시인이 쓴 시 작품…… 모두 마음을 영원히 존재하도록 변형시킨 결과물이다. 이 창작물이 예술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대변하므로 창작인의 창작 의도를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도예가가 빚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도에가가 흙을 빚을 때 담아 넣으려던 마음을, 우리는 자기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이 아름다운 곡선 허리의 자기를 감상하면서, 도예가의 작가 의도를 유추 해석한다면, 애초에 도예가가 형상화하려던 그 마음까지 짚어볼 수 있다.   이 말은 그대로 동시를 놓고 되풀이할 수 있다. 뜻을 지닌 낱말들을 골라 적당한 위치로(속으로 정서 논리가 통하도록) 배열해 놓으면, 글자들의 논리에 따라 머리에 그릴 수 있는 추상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바로 이것이 동시 쓰기에 잇어서 형상화 작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글자의 논리라는 것은, 문법이라든가, 어법이라든가, 어감(語感)이라든가, 또는 복합 의미(複合 意味), 이중 해석(二重 解釋) 따위가 어우러져 만드는 질서이다. 우리 말과 글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과 그리고 우리 말과 글을 외국어로 쓰는 사람의 차이는, 이 「글자의 논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느냐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물며 정서 논리에 있어서는, (아무리 우리 말과 글을 잘 한다 하더라도) 외국인인 경우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 우리 나라 사람을 따르지 못한다.   동시 쓰기에서, 이 글자 논리와 질서 논리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형상화를 쉽지 않은 작업으로 보는 것이다.   한 줌의 찰흙을 쥐어 주면서 잔을 형상화하라고 이르면, 한국인은 소주를 마시는 술잔 모양으로 빚어내는데, 아랍인은 아랍식 다기 모양으로 빚어낸다. 이 차이를 흔히 문화의 차이라고 이야기하려 든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 본다면, 정서 논리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정서 논리는 이렇듯, '마음을 굳혀서' 존재로 변형시키는데 변수(變數) 같은 기능을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형상화라는 것을, '마음 빚기'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형태가 없는 마음 곧 예술가의 심상을, 형태가 있는 것으로 바꿔 놓기라고, 위에서 길게 늘어놓았다.   형상화의 대상은 마음이다. 가슴 속의 마음을, '가슴 밖에 존재하는 마음'으로 남기기 위해, 모양을 갖추게 하는 작업이 형상화 작업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마음 빚기가 된다. 작곡가는 오선지 위에 음표로 마음을 빚어 나타내며, 시인은 원고지 위에 글자로 마음을 빚어 나타낸다.   변형된 마음, 곧 빚어진 마음은 예술가가 지구에서 사라져도 계속 존속한다. 그래서 창작품은 예술가의 분신(分身)이라고 일컫는다. 예술가의 분신은, 영혼을 얼마만큼 형상 속에 지닌다.   이렇게 거꾸로 소급하여 생각해 보면, 동시를 쓸 때 동시 작가의 의도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알 수 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경건하고 가장 진지한 마음, 이것을 바꿔 담을 만한 글자의 그릇을 찾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글자로 빚어진 그릇, 마음 빚기로 만든 마음 덩어리를 그대로 폭 빠뜨려 담아낼 수 있는 그릇, 이런 글자로 된 그릇이 쉽게 찾아지는가.   길을 가다가도 문득 걸음을 멈추고 펜을 꺼내 끄적이고, 뭘 먹다가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앉아 펜을 꺼내 끄적이고, 잠을 자려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떠오른 것을 적어 놓는 작업이 모두 마음 빚기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도공은 빚은 마음을 1600도의 고열 가마에 넣고 구워서 형상이 유지되도록 하나, 시인은 빚은 마음을 흙가마가 아닌 고뇌의 가마에 넣고 구워내야 한다. 이런 고뇌가 몇 도인지 사람들이 알겠는가?   정작 형상화 작업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을 이제 하겠다.   시인이 성인을 위한 시를 쓰는 작업에서는 1600도를 넘는 고뇌의 과정을 앓아야 하겠지만, '동시를 쓰는 과정에서도 그런 과정이 필요하겠는가'라며 지껄이는 말을 들을 땐 참으로 기가 막힌다.   동시 쓰기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위해, 낱말 고르기에 하루가 아닌 한 달을 고심하거나, 썼다 지웠다를 열 번 스무 번이나 되풀이하거나, 윗줄과 아랫줄을 붙였다 떼었다 줄였다 늘였다를 수없이 실험하는, 이런 '목마르는 체험'을 못해본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지만…….   끝으로 형상화 작업에서 형상화하고자 하는 대상의 선택, 이 선택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사진기로 찍어내는 대상은 렌즈의 기능에 따라 담길 수 있는 영역 전부가 축소되어 재현된다. 그러나 화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시선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가 선택하는 것만 골라 옮겨 그린다. 이 때 선택은, 화가의 의도에 따라 선별된 선택이다.   화가는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옮겨 그리지 않고, 그리고 싶은 몇 가지만 소재로 삼아 캔버스에 옮겨 그리면서 자기 감정도 그림 속에 집어 넣는다. 결국 사진 예술 작품과 화가의 미술 작품과의 차이는, 인간의 정서가 선별적으로 선택한 조재의 강조에서 나타나게 마련이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도 소재의 선택에서, '얼마나 생략하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차이가 나타난다. 선택의 차이가 아주 극명한 경우를 우리는 화가와 그리고 판화가의 눈으로 선택한 최소한의 선택만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동시 쓰기에서도, '선택'은 판화가의 선별 선택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몫이다. 꼭 선택해야 하는 것만 선택한 경우, 형상화 작업에서 어려움을 덜 겪게 된다. 그러나 이것 저것 선택하는 욕심을 부릴 경우, 형상화 작업에서 매우 어려운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동시 쓰기에서 최소한의 것만 선택한 간결한 소재는, 형상화 작업에서 겪는 어려움을 덜어주는 몫을 해준다.   흙에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는, 자라는 데 십년 이십년이 걸린다. 그러나 마음에 씨앗을 심어 키우는 형상화는, 하루에도 가능하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아니하다. 마음에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는 예술이다. 형상화는, 십년 자란 나무를 하루에 키우는 신비를 지닌다. 형상화는 창작을 위한 밑그림이요, 아울러 예술 전단계의 필수 작업이다.      (2003-여름 한국동시문학 3호)   동시 창작론 ④ 이미지의 연결 유 경 환(동시인/시인)     이번에는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미지를 우리말로 어떻게 써야 하며, 어떤 표현법이 서양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것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냥 이미지라는 외국어를 그대로 차용한다.   이미지란, 이야기로 쓰기가 아주 예민한 낱말이므로, 여지껏 미뤄온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이미지'가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적기부터 하는 것이 현명하다.   떠오르는 그대로, 조각 조각이어도 좋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이미지를 놓치면 다시 불러오기 어렵다. 이것이 이미지의 속성이다. 사람의 가슴이나 머리는, 이런 이미지를 차근히 붙잡아둘 능력에서, 아직 덜 개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란 과연 어떤 것인가?   간단히 말해, '구름이 한 마리 양으로 보였다면' 이 때에 양은 이미지다. 상상 속에 떠올라 겹쳐지는 생각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대상을 보는 순간, 또는 어떤 생각이 가슴에 차오르는 순간에, 매우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직관(直觀)이므로, 이를 재빠르게 잡아야 한다. 이런 이미지는 떠오르는 대로, 스며오는 대로 그대로 기록하여,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그것들을 연결시키려고 애를 쓴다면, 그 동안에 뒤미쳐오는 다른 이미지를 놓쳐버리기 쉽다.   이미지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느닷없이 오기도 하고, 산책을 하거나 산엘 오르거나 잠에서 깨어나면서 시나브로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갑작스레'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머리 속에 또는 가슴 속에 늘 담아 왔기에 그것이 넘쳐 나오듯 다가오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은유(메타포어 metaphor)란 언어로 이루어지는, 언어로 비유되는 어떤 상(像)이지만 이미지란 언어 이전의 상(像)이므로 그냥 서양말 이미지를 빌어쓰기가 오히려 편하다. 그래도 설명이 구태어 있어야 하겠다면 '어떤 것을 보고 다른 무엇을 생각나도록 하는, 이런 연상 작용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지는 시를 신선하게 표현하는데 아주 좋은 일몫을 한다.시가 참신하다는 평을 듣는 데는, 동원된 이미지가 아주 새롭거나 또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 구해왔다는 이유가 잠재한다.   남들이 여러 번 동원한 이미지를 다시 쓰면, 되풀이된 만큼 신선한 감각을 잃게 되어, 구태의연한 표현 기법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따라서 이미지를 옮겨 놓는 기법에서, 낡은 단어나 식상한 낱말은 피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남들이 이미 사용한 이미지 구사법은 피해야 한다는 결론과 만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배의 작품을 되도록 많이 읽는 것이 상책이다. 앞서 발표된 작품이나 작품집을 읽는 길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언젠가 '병아리들이 흙담 밑의 봄볕을 쫑쫑 물고 간다'는 이미지 표현이 활자화되었는데, '병아리', '노란 주둥이' 그리고 '햇볕' 이렇게 세 가지를 연결시킨 표현이 잇달아 작품으로 발표되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봄을 눈앞에 둔 절기)에 비슷한 생각(유사한 동질 상황 속에서)을, 따로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쓴 사람은 '모방이 아니고 표절은 더구나 아니'라고펄쩍 뛸 노릇이다. 하지만 같은 이미지가 포개진다면, 결과적으로 부분 모방 또는 부분 표절로 몰릴 수밖에 없다. 말은 안 해도 독자는 속마음으로 그렇게 간주할 것이다. 속마음(내심)으로 굳히는 판단이니, 따라다니며 변명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이미지라는 것은, 시 작품 속에 전개된 내용에서 앞과 뒤, 그리고 위와 아래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서로 잘 어울려야, 이미지의 기능을 제대로 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서술된 표현 속에 이미지는 마치 천조각들로 이어 맞춰진 조각보처럼, 아우러진 조화와 균형 이것들을 생명으로 기능한다.   한 편의 시 작품 속에서 이미지가 조화스럽고 균형되게 아우러졋다면, 이를 놓고 문학 이론서에선 '정서 논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일반 논리(一般論理)가 아닌 정서 논리다. 큰 기게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듯, 또는 손목시계 속에서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듯, 정서적으로 척척 맞아떨어지는 경우라야 독자에게 상상 연상 또는 환상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이런 황홀한 세계를 독자가 만나야, 시인의 내면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잇으며 실제 이상의 세게로 들어갈 수 있다. 이미지는 생각의 조각에다, 천사의 날개 같은 날개를 달아주는, 멋진 기능을 시 속에서 하는 것이다.   또 이미지는, 다른 한편, 낡은 시형식이나 오래 전부터 자주 동원된 시어를 물갈이하는 방법으로 채택된다.   시에 동원되는 단어들이 새로운 단어로 바뀌는 것은, 시인이 시를 창작할 때 전에 한번도 쓰이지 아니한 새 이미지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요즘 새로 등단하는 신인들의 작품을 읽으면, 그들이 사물을 보고그 사물에게서 뽑아낸 이미지가 얼마나 새로운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곧 이미지의 표출 방식이 그 전 세대와 달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의 진화(進化)는 새로운 이미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시적 대상에서 시적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하여 새로운 감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참신한 이미지의 표출을 위해 전연 새로운 발상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꿈을 꾸고 이를 표현할 언어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로 말미암아, 전세대의 수용 감각과 신세대의 수용 감각에 차이가 나고,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의 진화는 이루어지고, 수용 감각의 차이로 시를 대하는 감각이 달라지며, 마침내 이미지를 표출하는 능력까지 '같지 않게' 되고 만다. 같은 재료를 쓰면서 다른 차원의 형상을 빚는 감각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미지의 처리에서도 또한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옛 사람들의 정서 작품인 시조(時調)를 보면, 꽃의 이미지로 여인을 글 속에 숨겼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활용 기법은, 생존하는 시인 김춘수의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기까지……'라는 작품 '꽃'에까지 지속되어 왔다.   '호박꽃도 꽃이냐?'라고 한다면 이 경우 호박꽃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활용된 것이지만, '수더분한 누나가 생겨날 때면 호박꽃을 보러 울타리로 간다'고 했다면 호박꽃의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렇듯 이미지의 활용은 시인의 잠재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이미지의 활용은 결정적 일몫을 한다. 이미지의 활용을 천박하게 하면, 시가 아닌 '유행가'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시 작품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내적 잠재의식이 고상해야 할 것은 당연지사이다. 오늘날 어린이도 읽을 만한 시, 곧 동시 속에 시인들이 어떤 이미지를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나라 동시의 미래와 직결되는 과제가 된다.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라고 해서, 유치한 이미지 활용을 생각없이 일삼는다면, 동시가 천한 것이 될 것은 확실하다.   요즘 동화의 소재로 '똥'이 자주 채택되는데, 이는 일부 사실주의 작가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철학이 빈곤한 작가들의 짓거리일 수도 있다.   어린이에게 권할 만한 시, 곧 동시에도 이런 경향이 옮겨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시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언어의 조각이고 정서의 보석이다. 시에는 조각 같고 보석 같은 영혼이 담겨야 시로서 존재할 수 있다.   아이들이 글짓기 시간에 써내듯, 아동문학가로 등단한 시인이 한두 시간 안에 동시라고 써내는 글을 보면,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이미지의 연결에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꽃밭에 가장 큰 해바라기꽃은 우리 아버지……' 이것은 초등학생의 글인가, 아동문학가의 글인가? 초등학생이 능히 써 낼 수 있는 글을 아동문학가의 작품이라고 발표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의 위치를 초등학생 수준으로 퇴장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시를 쓴다고 하는 아동문학가들이여, 발표하기 전에 한 주일에 한 번씩 한 달쯤, 두고두고 퇴고하길 바란다. 서로 상충되는 이미지는, 원고지만 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문학의 얼굴까지 구겨 놓기 때문이다.  (2003-겨울 『한국동시문학』 제4호에서)   동시 창작론 ⑤ 상징(象徵)의 활용(活用) 유경환(시인, 동시인)     동시를 쓰는데 상징(symbol)을 왜 알아야 할까?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자. 이론은 들어본 적이 없어도 훌륭한 동시 작품을 써낼 수 있다. 이론 공부 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하고 문예지의 추천으로 등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론 공부를 구태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창작 행위에 있어서 이론이란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을 알아 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론 공부는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거름주기'와 같다.   한두 번 동시를 써본다거나, 아니면 몇 편 써낸 동시 가운데 잘 된 것으로 한 편이 뽑히거나 가려진 경우엔 '이론 없이도 된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수준의 동시 작품을 계속해서 생산하려면, 이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함을 동시 작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문학은 원래 혼자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 창작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아심이 자기 속에서 떠오를 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이론서를 꺼내 뒤적여야만 한다.   마치 '저쪽이 내가 가려는 남쪽'이라 믿고 배를 몰고 나가다 한참 뒤에 동서남북을 가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나침반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훌륭한 동시를 써내겠다면 상징의 활용이 어떤 효과를 작품에 얹는지 알아야 한다. 동시 창작에 있어서 상징의 활용은 필요 조건이 아닌 충분 조건이다. 쉬운 말로 한다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있으면 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을 알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을 더 얻는 셈이다.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상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존의 이론서처럼 하자면 제1장 제1과 이렇게 나눠 놓고 상징의 의미, 상징의 구사, 상징의 효과……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도 좀 바꿔 보자. 다른 나라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식으로 우리도 부드럽게 이야기식으로 풀어가 보자.   교과서에 나온 동학혁명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을 때 그 시절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노래를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이 노래 속의 녹두는 곡식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을 상징하였다. 녹두장군이란 말도 있었다.   아침에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해서 까치는 반가운 새로 여겼으며, 그와 반대로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여겼다.(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까마귀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유치환 시인의 알려진 시 작품에서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 곧 생명의 몸부림을 상징하는 시어로 씌였다.   이육사 시인의 알려진 시 작품에서 '광야'는, 광막한 현실, 곧 일제 시대의 우리 나라 형편을 상징하는 시어로 구사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알려진 시작품 가운데 '꽃'은 어떤 상징으로 동원되었는지는 이미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다.   태극기는 우리 나라의 상징이고 푸른색 한반도는 통일된 나라의 상징이다. 태극무늬, 장고도 상징으로 씌이는 경우가 있다. 시야를 넓히면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며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지구본은 유엔의 상징이다. 학교마다 교기가 있고 모표나 배지가 있다. 이만하면 상징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쯤에서 어려운 말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징은, 복합적 의미들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를 대신하도록 특별한 의미를 확대한 표상(表象)이다. 그래서 문예 이론서에서는 상징주의를 표상주의라고도 부른다.   동시 작품을 쓰는데 상징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직접 표현은 미뤄 놓고 간접 표현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더 깊고 더 넓은 뜻을 생각하도록 새로운 해석에 이끌어 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일종의 유도 기법이다.   동시 작가들이 동시를 창작하는데 무덤가에 핀 할미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도록, 하늘에 일찍 뜬 이른 별은 하늘에 올라간 언니나 동생을 생각하도록 , 또 안 보이는 곳에서 울어대는 산새는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도록, 상징법을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할미꽃, 별, 산새…… 따위들은 이미 상징 시어로서 생명을 잃은 낱말이 되었다. 더 이상 상징 시어로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닳고 때묻은 낱말이 되었기에, 이런 상징 시어는 독자에게 참신하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지속적으로 동시를 써내야 하는 동시 작가라면 상징 시어로서 새로운 낱말을 찾아내고 골라내야만 하는 부담을 그래서 안게 된다.   말을 뒤집어 하면, 참신한 동시 작품을 쓰고자 한다면 먼저 참신한 상징시어를 찾아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요즘 박두순, 이준관, 윤삼현, 이상문, 이정석, 한명순, 신형건(무순) 시인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까닭은 상징의 활용에서 남다른 기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그 앞 세대가 구사하던 상징 기법과 아주 다른 상징 기법을 스스로 개척하여 활용하는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상징 활용과 상징 기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동시가 너무 어려워…… 난해한 것을 써놓고 저희들끼리만 좋다고 하는, 저들끼리만의 잔치'라고.   직접 표현의 낱말만 가지고 동시를 써온 세대가 있었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읽고 들으면 금세 알아듣는 직접 표현의 낱말만 시어로 선택하였던 세대가 오늘날 70대 후반과 80대에 이른 원로 세대이다.   그러나 직접 표현의 낱말을 시어로 써온 80년 동안, 그런 낱말들은 '반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에서 반달이나 앵두처럼, 상징의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퇴색하고 말았다.   그래서 6.25전쟁 직후부터 새로운 세대의 동시 작가들이 직접 표현 대신에 간접 표현의 시어를 도입 구사하는 방법으로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기치를 올렸던 것이다. 이 기치는 필자가 맨 먼저 들었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말의 뜻은, 동시는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라는 것이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발맞춰 가며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 같은, 틀에 맞춘 동요― 틀에 맞도록 한 가지 이야기를 줄 바꿔가며 짧게 줄인 노랫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벗어나기 위해 간접 표현을 중시했고 상징 활용을 은유적으로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간접 표현 중시와 상징 활용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일부 동시인들이(일부 비평가와 함께) 입을 맞춰 '난해하다'는 불평을 터뜨렸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계속 할미꽃, 별, 산새, 반달, 앵두…… 이런 정도의 낱말만 상징 용어로 쓰이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야기 한 토막을 몇 줄로 줄 바꿔가며 나열하는 것이 쉬운 동시라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유아 동요나 유년 동시에는 상징을 활용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사실이다. '짝자꿍' 같은 유아 동요나 유치원 원아들 수준에 맞는 유년 동시에서 상징을 구사하면 오히려 혼란이 온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의 '새 나라', '어린이'는 그냥 직접 표현으로 충분하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서의 '나팔꽃'이나 또는 '과꽃'도 직접 표현으로 충분하다. 이런 동시는 한 줄의 이야기를 내재율이나 외재율에 맞도록 줄을 바꿔 쓴 '이야기'이므로(이야기 속에 모든 것이 이미 들어가 있으며) 한 번 읽어서 대번에 들어있는 뜻을 알 수 있으므로 구태어 상징을 동원할 필요도 구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동시가 언제까지나 이런 노랫말에 맞는 동시 수준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정서면에서 지체 또는 장애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나라 어린이들 그리고 청소년(teen-ager)들이 어떤 시를 읽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를 권한다. 모르면 배워서라도 바로 알아야 할 일이다. 우물 속에 들어가 앉아 하늘 둘레가 지금 몇 미터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아니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100년 전도 아닌 오늘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실이다.   영국의 어린이들이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여기면서 읽고 외우는 까닭을 모르면,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보들레르의 시를 초등학교 과정에서 외우는 까닭을 모르면, '동시에 왜 상징이 필요하냐?'고 반문할 것이 뻔한 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동시에서 상징을 활용하면 동시가 지니고 있는 함의(함축된 의미)를 확대시킨다. 물 위에 뜬 얼음만 읽어도 물 속에 잠긴 빙산의 규모까지 해석할 수 있도록 상징 기법을 쓰는 것이다. 물 위에 뜬 글자만 읽어도 물 속에 잠긴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물 위의 글자를 직접 표현으로 하지 않고 간접 표현으로 쓰는 것이 최종적 대답이다.   좋은 동시로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산을 다룬 좋은 동시는 산을 주제로한 동시로도 읽히면서 아울러 덕스러운 할아버지의 상징성을 풍기기도 한다. 강을 다룬 좋은 동시는 강을 주제로 한 동시로 읽히면서 오랜 역사나 전통의 상징성을 독자에게 넌즈시 던져주기도 한다. 나무를 다룬 좋은 동시는 그냥 나무의 시로 읽히기도 하지만 아울러 인격이 높은 사람으로 읽히기도 한다.   문제는, 좋은 동시가 품고 있는 그 내면의 이중성을 독자가 감지하지 못하거나 찾아내지 못할 경우, 좋은 동시를 '난해하다'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에 있다. 백두산을 다룬 동시에서 '백두산'이 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리면서 다른 동시가 속깊이 품고 있는 상징성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 독자의 능력과 수준의 문제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좋은 동시를 읽고 '난해하다'고 하는 사람은 좋은 동시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를 식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좋은 동시가 못 되는 작품(?)을 놓고 '난해하다'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좋은 동시와 난해한 동시의 상관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핳 수 있다.   ① 좋은 동시는 난해한 시가 아니다.   ② 난해한 시는 좋은 동시가 될 수 없다.   ③ 난해한 것은 좋은 동시가 못 된다.   ④ 좋은 동시는 난해하지 않다.   되풀이하자면, 좋은 동시인데도 난해하다고 우긴다면 그 상징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거나 그럴 만한 독해력을 갖추지 못한 독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반 독자도 아닌 비평가라는 사람이 좋은 동시를 놓고 난해하다고 앞장선다면 우리는 이 비평가라는 사람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2004년 봄 『한국동시문학』 제5호)   동시창작론 ⑥ 비유의 정체와 기능 ―비유를 모르면 시를 못 쓰는가? 유 경 환   '비유컨대, 한용운의 시에서 님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한다. 비유라는 낱말이 문장에 등장한 경우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김동명의 시에서는 호수가 마음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성서는 비유로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의 양, '나의 목자시니'의 목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의 포도나무는 모두 비유이다. 불교의 법구경도 비유로 말한 경구들의 모음이다.   윌리암 워드워즈는 무지개를 이상에 비유했다. '용비어천가'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비유의 시다. 월인천강은 '1천 개의 강줄기에 달이 빠져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1천 개의 강줄기는 수많은 강의 과장 표현이다. '임금이 어질면 그 은총이 어디에나 고루 퍼진다.' 이런 해석이 위의 한자 넉 자에서 나올 수 있다. 달은 군주의 비유로 쓰였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라는 강소천의 '닭'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이상을 쳐다보는 인생을 비유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동요 '병아리떼 종종종'의 병아리도 귀여운 어린이의 비유일 수 있다.   자, 이 정도의 예문을 읽어보면 비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떤 관념이나 사물을 그와 비슷한 것을 끌어대어 설명하는 일'이 사전적 비유의 뜻이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정의를 읽으면 알 듯한 뜻이 더 알쏭달쏭하게 안개 속에 숨겨진다.   비유란 쉬운 말로 빗대어 하는 말이다. 빗댄다는 말이 흔히 나쁜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개념의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빗댄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는 이미지를 끌어오기 위해 빗댄다고 여기면 된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설명하는, 간접적 묘사의 방법이라고 받아들이면 비유의 개념은 단순해진다.   그러면 왜 다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려는 방법을 쓰는가? 비유의 방법을 쓰면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다.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일몫이 바로 비유의 기능인 까닭이다.   독자는 독자 나름으로 제각기 체험(내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독자 체험과 쉽게 연결시켜주는 일몫이 비유의 효과에 들어 있다. 그래서 비유의 기법은 독자의 체험과 서로 관계가 있는 상관 관계라고 말한다.   강소천의 작품 '닭'에서 닭을 그냥 마당가에 이리저리 다니는 닭으로 읽는 독자는 어린 독자이고, 닭 이상의 것으로 읽는 독자는 그만큼 성숙한 독자이다. 한 군주가 어질면 만 백성이 편하게 산다는 해석을 하는 이는, 월인천강의 달을 임금으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비유의 기법을 써서 다른 사물의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면 그만큼 해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체험을 지닌 폭 넓은 독자층에겐 전달 의지가 쉽게 수용될 수 있다. 독자는, 성숙한 독자일수록 다양한 체험을 축적하고 있으므로, 그만큼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비유와 체험 사이를 말하는 상관 관계의 참뜻인 것이다.   비유는 영어로 메타포어(metaphor)이다. 비유는 직유(直喩)와 은유(隱喩)로 갈라볼 수 있다. 직유는 한자 그대로 직접적인 비유를, 은유는 한자 글자대로 은근한 비유를 가리킨다. 시에서는 직유보다 은유가 더 쓰인다. 영어에서 a heart of stone 이라고 쓰면 비유가 되는데, a heart like stone 으로 쓰면 직유가 된다. 직유의 예문으로 꿀벌처럼 부지런하다를 as busy as a bee 라고 쓰면 꿀벌은 직유인 것이다. 비유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영문으로 예문을 들었지만 이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에서 영어를 공부할 때 한번씩 짚고 넘어갔던 것이기에, 비유가 문장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확실하게 밝혀보기 위해 재인용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비유를 시 쓰는 작업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기로 하자. '이런 비유를 왜 알아야 하는가'로 줄여서 말할 수도 있다. 몰라도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서를 하다보면, 한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다량의 책을 읽다보면, 문장의 파악에서 저절로 비유의 일몫을 일깨우게 된다. 문법상 비유의 기능은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a heart of stone 이라고 할 때에, '돌 속에 들어 있는 마음'으로 읽는 이는 아주 적을 것이다. 돌 같은 마음(a heart like stone)으로 읽고 감상할 것이다. 그러나 문장으로서는 a heart of stone 이 더 멋지다. 왜 더 멋질까? 비유가 시에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시적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데 비유를 모르면, 낱말의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것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뒤집어 말하면, 비유가 없는 문장에선 사전적 의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비유가 시에서는 중요한 시적 요소가 된다.   한 문장에서 또는 글에서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감상밖에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문장이 되겠는가. 뼈가시만 남은 물고기를 뱃전에 잡아매고 돌아온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의 그 '앙상한' 해석만 가능할 것이 아닌가. 이쯤에서 비유의 개념과 기능을 더 분명하게 짚어보자. 비유는, '시에 함축된 의미를 독자의 체험만큼 확대시켜주는 효소'라고 할 만하다. 시어로 동원된 언어의 뜻을 기량껏 더 깊고 더 높게 확대시키는 마술적 기능을 비유가 한다. '기량껏'이라는 것은 독자가 지닌 '체험의 질(質)과 수준에 따라서'라는 말이다. 언어의 요술사가 바로 이 비유인 것이다.   복사꽃이 이울게 되어 바람에 날릴 때, 시인이 '꽃비'가 온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꽃잎이 눈 내리는 것보다 더 자욱하게 날리는 것을 보지 못한 독자는 (이런 체험의 결여 때문에) '꽃비'라는 비유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독자는, '꽃비'라는 비유를 바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처럼 꽃잎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체험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내면적으로 생각해 본 독자는, 1차 비유인 꽃잎을 넘어서 2차 비유로 '목숨이 진 낙화'로 '꽃비'를 확대 해석한다.   이렇듯, 시어의 함의(함축된 의미)를 한 겹만이 아닌 두 겹 세 겹까지 벗겨내는 해석, 이것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기능이 비유의 숨겨진 기능인 셈이다.   사람이 그 주변 분위기나 환경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비유는 시를 이루는 글의 옷을 맞춰 입히는 일몫을 한다. '가을이 오자 나무도 나뭇잎을 떨군다"는 글은 산문이고, '노란 빨간 옷 / 벗는 나무'의 두 마디는 운문이다. 같은 독자가 위의 산문과 운문을 읽었을 때,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글은 어떤 것인가. 뒤의 것이다. 사막에선 / 바람이/ 줄무늬 만들고 // 가슴에선 / 그리움이 / 줄무늬 만든다.// 그리운 이름 하나 / 가슴에 묻고 / 살지 않으면 / 어이 가슴에 / 줄무늬 일겠는가.// (졸작 '사막' 전문)   이 시에서는 사막도 줄무늬도 모두 비유다. 내셔날 지오그래픽 쏘사이어티가 보여주는 사막의 필름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장면의 모래줄무늬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 모래사막을 자신의 가슴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위의 필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아예 달라진다.)   사막을 자신의 가슴에다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움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 본 사람이다. 그리움, 이 때문에 잠을 제 때에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속앓이를 해 본 사람만이 사막의 줄무늬와 자신의 내면에 그어진 줄무늬를 연결시킬 수 있다. 가슴앓이라는 체험이 이 시에 구사된 비유를 직감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므로 비유는 '체험을 매개로 하여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윤석중이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자선한 동시 '꽃밭'은 아기가 넘어져 한참 울다가 보니 정강이에 피가 아니고 꽃잎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윤석중은 새빨간 피와 새빨간 꽃잎을 비유로 쓰지 않았다. '새빨간 피가 아닌 것을 자세히 보니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피와 꽃잎은 몇 번을 읽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피와 꽃잎일 뿐이다. 절대로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시 '꽃밭'이라는 동시의 감상은 이렇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피가 아닌 꽃잎'이라는 설명을 시 속에 넣지 않고 생략했더라면, 감상의 폭은 더 넓게 확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비유가 시의 함의와 그 해석을 확대시킴으로써 시의 멋과 격(格)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지난 날, '동시에도 비유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때엔, 동시 창작에 비유가 거론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동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수용하는 오늘날에는, 비유에 대한 공부가 당연히 있어야 하겠다. 다만 유치원 원아들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읽을 만한 동시 창작에는, 비유의 활용과 기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 실정법상 미성년자는 모두 어린이이면서 아울러 청소년이다. 이 애매한 지칭 때문에 '어린이'라는 말의 개념 범주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우린…… 동시는 유치해서 안 읽어요'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현실에서, 동시를 계속 유치원 원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계층에 걸맞도록 창작할 것인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나라 현재의 동시는,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접근을 막거나 배척하는 그런 수준의 동시인 것이 분명하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힐 것을 바라며 동시를 쓰는 시인들은, 심각하게 들어야 하고 냉철하게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유아 동시 유년 동시에서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로 위상을 바꾸려면, 동시 창작에서 비유의 기법을 충분히 활용하는데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비유는 시의 발효를 돕는 효소, 꼭 있어야 할 효소이다.   (2004년 여름 『한국동시문학』 제6호)   동시 창작론 ⑦ 고쳐쓰기 유경환(동시인/시인)   옛날에 쓰던 교과서엔 '고쳐쓰기'를 퇴고라고 하였다. '퇴고'라고 한자로는 '堆敲'라고 쓴다. '시문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일'이, 사전에 나와 있는 풀이다. 한자 때문에 한때엔 '추고'라고도 했다. 어떻게 일컫든, 고쳐쓴다는 뜻은 같다. 그러기에 '고쳐쓰기'로 한다.   글을 쓰는 일에서 고쳐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것은 글을 쓰는 경력과 관계가 있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나이에선 고쳐쓰기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잘 쓰면 되지, 왜 쓰고 나서 또 고치고 고치고 해야 돼?' 이런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이런 의문을 지닌 사람에겐 '그래, 네 말도 맞다.'라고 하는 것이 상책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사람에겐 아무리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설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쓸 만한 속담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었다. 그러나 차차 글쓰기가 쉽지 아니한 일임을 알아차리게 되고 글쓰기가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되자, 비로소 고쳐쓰기가 왜 필요한지를 납득하게 되었다.   고쳐쓰기는 단순히 고쳐 쓴다는 것으로 여길 일이 아니다. 고쳐쓰기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내는 기회와 만남이기도 하다. 고쳐쓰기는 '생각의 우물'을 더 깊이 파고드는 기회가 된다는 말이다. 고쳐쓰기는 그냥 이미 써놓은 것을 되짚어 보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쳐쓰기는 반드시 거쳐야 할 창작의 과정이다. 건너뛸 수 없는 글쓰기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흔히 고쳐쓰기를 '써놓은 것을 다듬는 일'로 여기기 쉽다. 이런 것으로 여기면 건너뛸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왜? 사람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좁은 병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듯이, 글을 쓸 때 생각도 손을 기다려주지 않고 앞질러 나오려 하는 것을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이런 경우, 생각이 국수 기계에서 국수발이 가지런히 나오지 못하고 뭉개지듯 또는 실타래에서 할머니들이 실을 풀어낼 때 실이 엉키는 일과 비슷하게 된다. 글을 쓸 때 손을 통해 펼쳐지는 생각도 이와 같다. 가슴속의 생각과 그리고 손끝의 생각이 뒤엉키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면 '생각'이 차분하게 순서에 맞게 서술되지 못하거나 서술이 뒤바뀌는 결과가 된다.   이렇기 때문에 글은 (운문이거나 산문이거나) 반드시 고쳐쓰기 과정에서 고쳐져야 옳다. 만일 고쳐지지 아니하면,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혼란을 주거나 또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치 못하게 되므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고쳐쓰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① 틀린 곳을 바로잡는다.   ② 문법과 어법에 맞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③ 빠뜨린 것을 알게 되어 보태어 넣는다.   ④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뒤늦게 집어넣는다.   ⑤ 더 깊은 뜻을 스스로 깨닫고, 새로운 의미를 글에 덧붙인다.   여러 번 (다른 글에서도 이미 이야기했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셈이지만, 나의 경우 작품 한 편을 완성시키는데 평균 다섯 번 원고지에 옮겨 쓴다.   지겹고 귀찮은 작업이다. 하지만 활자로 찍혀나간 뒤에는 고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기에 미흡한 글인 경우, 굴곡 왜곡 또는 와전될 가능성이 크기에 안타깝다.   그래서 지겹고 귀찮아도 옮겨 쓰고 또 옮겨 쓴다. 다시 옮겨 쓰면서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발견'하며 위안을 얻으면서 보람을 느낀다.   고쳐쓰기가 지니는 또다른 의미는 '객관적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객관적 시각이란, 글을 읽는 냉정한 눈길을 말한다. 흥분된 나의 눈이 아니라 냉정한 남의 눈인 셈이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을 쓸 때에는 누구나 그 나름의 흥분을 지니게 된다. 이런 내적인 긴장 상태는 글을 계속 써 나가도록 밀어주는 힘, 곧 추진력을 팔과 손에 실어주지만 그 대신 '신나는' 흥분을 느끼게 한다.   이 흥분은 글을 쓰는 이로 하여금 객관적 시각을 잃게 하거나 또는 주관적 판단을 우선시키도록 유도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잘 씌어진다' 또는 '잘 나간다'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게 한다. 이런 함정에서 헤어나오는 기회가 바로 고쳐쓰기의 기회다. 고쳐쓰기는 나의 눈이면서 동시에 남의 눈인 '객관적 시각'으로 다시 훑어보게 하는 기회를 안겨준다. 남에게 읽어보도록 하고 나서 틀린 곳 고칠 곳을 지적받는 작업에 버금가는 기회인 셈이다.   나의 눈과 남의 눈은 같지 않다. 틀리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글에 대한 나의 주장보다 독자의 주장을 고맙게 여겨야 글이 늘 수 있다. 일단 발표되고 나면 독자의 평가에 변명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발표되기 전에 (고칠 수 있을 때에) 고쳐쓰기를 통해서 고쳐 쓰는 것이 바른 작법이다.    또 고백하자면 초기에는 마침표를 찍자마자 청탁된 주소로 보내었다. 마음에 드는 글을 마쳤다는 기쁨이 나를 서둘러 우체통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밥을 지을 때 불을 끄고도 한참 동안 뜸을 들이듯 글에서도 뜸을 들인다. 뜸 들이는 시간에 고쳐쓰기를 되풀이한다. '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전에 못햇었지?' 아니면 '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빠뜨리고 그냥 넘어갔지? 하면서 원고지를 더럽힌다.    원래 원고지라는 인쇄된 용지는 고쳐쓰기를 하기 쉽도록 고안된 용지다.  줄을 그어 글의 순서를 바꾸거나 옮기고 또 덧붙인 글을 줄로 끌어들이며 중복된 부분을 지우게 한다. 예전에 고쳐쓰기를 할 때 빨간 색 잉크나 볼펜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쳐쓰기를 끝낸 원고지를 인쇄소 사람들이 '빨간 종이'라고 불렀었다.   사람의 생각은 끊이지 않고 나오는 법이 없다. 논리적인 서술인 경우 더 그렇다. 토막토막 끊긴 사유의 결과를 한 줄의 글로 이어맞춰 나가려면,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고 가다듬은 생각을 순서대로 줄 세워 체계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줄 세운 생각을 이어가면서 써나간다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유도 어렵지만 사유의 결과를 쓰는 작업도 힘드는 일이다.   이런 순서, 곧 배열과 전개의 서술은 운문에서 더욱 어렵고 힘드는 일이다. 이렇게도 놓아보고 저렇게도 놓아보면서 몇 번이나 다른 시도를 실험한다. 이 또한 고쳐쓰기에서 가능한 작업이다.   작품을 쓰고 나서 고쳐쓰기를 서둘지 않는다. 일부러 간격을 둔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안목으로 평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읽되 남이 보듯 다시 읽는 데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대강 한 주일쯤 뒤에 다시 본다. 작품을 쓸 때에 만나게 되는 내적 긴장, 이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다음에라야 자기 흥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흥분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남의 눈으로 읽게 된다. 이렇게 해야 '고쳐야 할 곳'이 제대로 눈에 띈다. '다섯 손가락 안 아픈 데 없다'는 속담은 자기가 써놓은 글, 곧 작품에도 그대로 적중한다. 애써 힘들여 써놓은 글일수록 어느 부분을 쉽게 잘라버리기가 아주 어렵다.   이렇게 한 주일만에 한 번 고쳐쓰기를 하고 또 미뤄 두었다가 다시 며칠 뒤에 다시 고쳐쓰기를 하고…… 몇 번 되풀이하면 그 과정을 다 거치는 동안에 '더 손 댈 데 없는 듯한' 결과로 낙찰된다. 손목이 저리고 눈이 아픈 경우가 왜 없으랴. 헌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써왔다면 이런 태도는 올바른 창작 태도라 할 수 없다.   글쓰기는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묻는 일과 다름없다. 길 없는 곳에서 누구에게 길을 물을 수 있는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자신에게 묻는 것과 똑같은 일을 고독하게 해내야 한다. 이런 일의 한 가지로 고쳐쓰기도 자신에게 길을 묻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고쳐쓰기 또한 고독한 작업이다. 혼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내는 작업.   한번 지나간 길을 되짚어 다시 오고 가듯 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치고 하는 되풀이는 지루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처음에 썼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되기 십상이다. 나의 경우 끝부분이 크게 달라지곤 한다. 이런 결과를 놓고 '괜찮은 일인가? 하고 자문하거나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흔하다. 처음에 생각하였던 것과 아주 달라진 끝부분이 되어도 전연 개의치 않는다.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뜻에서 첫 생각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처음 생각에 미련을 가지고 집착하다 보면 완성도를 높이는데 지장이 온다. 자꾸 되풀이하며 읽다가 문득 멋진 생각이 떠올라 비로소 마음에 드는 맨 끝줄 한 줄과 만나기도 한다. 혼자서 무릎을 치게도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크게 보아 '고쳐쓰기'의 범주에 드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덧붙이는데 그것은 외국에서 하는 글짓기 방법이다.   밖에 나가 공부하는 동안 방학을 맞아 일리노이 스프링필드라는 곳에 가서 '시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가'를 살펴본 적이 있다. 본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칠판에 휫트먼의 작품 '풀잎'을 써 놓으면서 선생은 일부러 단어를 빈칸으로 남긴다. 그리고는 학생으로 하여금 빈 칸에 가장 적당하다고 여기는 단어를 시어(試語)로 선택하여서 메꾸도록 한다. (벽돌 담에서 갈라진 벽돌을 깨뜨려 버리고 새 것으로 채우게 하는 것과 같다.) 대강 한 반에 12명 정도인데 앞의 학생이 선택한 단어와 같은 것을 뒤의 학생이 택하여도 괜찮다. 12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선택한 시어가 같은 것이라면 가장 알맞는 시어라고 우선 1차로 판정한다.   선생은 원작자인 휫트먼보다 더 나은 예비 시인을 기다리는 것이다. 시적 감각이 예민한 학생은 휫트먼이 생각지 못했던 시어의 구사 능력을 보인다. 휫트먼을 능가하는 새 시인을 이런 식으로 키우는 이다. (후배에 의해 교실에서 시가 고쳐지는 셈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를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있다. 선생은 이 시(시조)를 가르치는데, 작자인 남구만(南九萬)이 어떤 사람이고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따위…… 작품 외적인 것만 들려 주었다. 원문에서 한두 자를 바꿔 읽었다가는 큰일이 나는 것처럼 우리는 공부하였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물론 원문을 훼손하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원작보다 더 나은 작품을 기대하는 방법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교실에서의 수업 방법이다.   이름난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면 가봉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아주 꿰매기 전에 한번 입혀보고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마무리 작업이다. 그러나 큰 백화점 같은 곳에서 파는 기성복을 사 입는 경우, 이 가봉이라는 절차는 있을 수 없다. 맞춤양복이 몸에 맞는 것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글쓰기에서 고쳐쓰기란 바로 이 마지막 과정이라 여기는 것이 좋겠다.  (2004년 가을『한국동시문학』제7호)   *동시 창작론 ⑧ 감동, 체험의 일치에서 오는 감동 유 경 환   1   창작론에서 아직까지(7회에 걸쳐) 다루어 온 것은 외적인 틀(하드웨어)에 관한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알맹이에 해당하는(소프트웨어) 내적인 질(質)에 관하여 다루겠다.   2   시의 알맹이는 감동(感動)이다. 시에는 감동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줄여서 말하면, 시는 곧 감동이다. 감동을 줄 수 없는 시는, 쓴 사람이 혼자 즐기는 시다. 그러므로 시라고 일반화하기 어렵다. 흔히 시의 생명은 감동이라고 말한다. 읽는이에게 감동을 전해주므로, 시는 널리 읽힌다. 이렇게 감동이 시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그러나 대부분 감동적 요소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경우엔,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시에 감동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모르게 된다. 시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비롯된다.   동시도 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1950년대 말에 외친 사람은 필자다.) 동시도 시이므로 또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를 여기서 왜 다시 해야 하는가. 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부정적으로 쓰는 부사다) 많다. 더구나 아동문학인 가운데,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동시」작품이라고 발표되는 글의 질적 수준이 매우 유치하다. 동시라는 명사의 첫 글자 아이동(童) 한 자로 말미암아, 어린이의 입재롱감으로 동시를 인식하는 현실이 확대된다.   「동시」라는 일컬음이, 문학으로서의 동시의 본질을 왜곡시켰고, 그 원인은 1920∼1960년까지 우리 나라 문학에 대해 제대로 눈을 뜰 겨를이 없었다는 공백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잘못된 인식이 그 동안 화석(化石)처럼 굳어 대물림되었다.   잘못된 인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동시이므로 시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된다.' 둘째, '동시이므로 시의 차원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왜 자꾸 대물림되는 것인가. 서울의 신춘문예나 또는 권위 있는 문학 전문지에 여러 번 응모하였어도 등단에 실패하는 경우, '시는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동시나 해봐야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는 인사들(?)에 의해서 퍼진다.   왜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에서 번번이 실패하는가? 그것은 시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오류에 기반하는 것이기에 시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시는 서두에 말했듯이 감동을 내포하고 있는 운문이다. 감동, 그렇다. 이것이 들어 있어야 시의 기능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3   동시도 시이므로 당연히 시적(詩的) 요건(要件)을 갖추어야 한다. (이 한마디는 좀 번거로우므로, 이하 시적 요건을 그냥 시라고 말하겠다.) 동시와 그리고 일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를 돕게 하자면, 지름의 길이가 다른 동심원(同心圓)을 그려서 설명할 수 있다.   일반 성인시는 지름이 길다. 그러나 동시는 성인시에 비해 지름의 길이가 짧은 편이다. 이해와 감상의 폭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주된 독자라고 여기는, 이러한 대상을 의식하면서 쓴 시다.   지난 날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하여 쓴 시라고 하였으나 이는 편협된 견해이다. 이런 견해가 한동안 지배적이었던 것이 바로 1920∼1960년까지의 공백 상황인 것이다. 오늘날 동시의 독자는 어린이에 한하지 않는다. 어린이에 한정한다는 생각은 폐쇄적 사고의 소산이다. '아동문학은 3대(代)에 걸쳐 효용을 발휘하는 문학'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영국의 이름난 시인들의 '어린이를 위한 시' 작품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을 읽고 그 효과를 수용하는 계층은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른다. 우리 나라의 문단이 1920∼1960년까지 지극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우물 속에 들어가 앉아 하늘의 넓이를 재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에게 읽히는 문학 작품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더 많은 독자로 여기는) 대상을 위하여 문인이 써내는 시 작품이다. 그러므로 아동이 써내는「아동시」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아동시」와「동시」의 질적인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인사(?)들로 말미암아 혼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기가 찰 일은, 적잖은 아동문학인들까지 어린이가 써내는 아동시 수준의 것을 자신의 문학 작품으로 읽어달라며 발표하고 있는 현상이다.   아동시와 동시의 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짧게 이야기하자면, 아동시에는 (위에 여러 번 강조한 그대로)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시가 들어가 있지 아니하다는 말의 뜻은, 체험의 일치를 유발할 내용(또는 철학)이 들어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경륜이 짧으면 체험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체험의 깊이가 얕으면, 감동시킬 핵(核)이 엷거나 약하거나 또는 없을 수밖에 없다. (이 핵은 바로 시적 요건이다.)   4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글을 동시라고 하면서 발표하는 것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귀여움을 나타내고자, 예쁜 생각을 꾸려서, 어린이들이 늘 쓰는 낱말을 동원하여, 줄을 끊어서 몇 줄로 써내는 형식.'   이런 형식에 그친 것이 대부분이다.   시는 글자로 형상화된다. 글자로 형상화되므로, 글자가 수단이자 재료이다. 이런 기능을 지닌 글자를 배열하는 데엔, 눈에 잘 안 띄는 기술이 요구된다. 글자를 배열하는 주체(사람 = 어른 = 문인)는 글자들이 이루는 줄 사이 어딘가에 자기 체험을 깔아서 직접 나타나지 않는 어떤 생각(체험의 연장)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을 숨겨 넣어야 한다. (이런 기술 숨겨넣기가 쉬운 것이 아니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동시에도 이런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푸념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벽돌 쌓기처럼 고운 말을 쌓아 연결시키면, 재미있다고 어린이가 손뼉을 친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 아닌 항의에 맞서서 대답을 하면, 곧이어 나오는 한마디가 '그건 어린이에게 난해하다'이다. 이런 사람에겐 당분간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받아들일 수준이 못 되기에 그렇다. 좀더 문학을 알게 되고 좋은 동시 작품을 읽게 되고, 그래서 혼자서라도 좋은 동시에서 오는 잔잔한 감동을 느껴보게 된다면, 그 때 비로소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하게 되리라.   교직자로 일생을 보내다 퇴직한 교감, 교장 출신 아동문학인이 발표하는 작품을 보면 대부분 대칭 기법을 쓰고 있다. 대칭 기법이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 연에서 '맑은 하늘'을 쓰면 두 번째 연에선 '푸른 바다'를 쓴다. 첫 연에서 '푸른 산'을 쓰면 다음 연에선 '깊은 강'을 쓴다.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은 동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동시를 뜯어맞추는 것이다.   1920년대 창가(唱歌)라는 것이 있었다. 창이니 타령이니 하는 악보 없는 노랫가락만 전수하다가 악보가 있는 노래가 처음 보급되던 그 시기에 불리던 노래다. 오늘날 70대 할아버지 세대가 부르는 학도가(學徒歌)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학교의 교가도 그 즈음에 제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의 가사(歌辭)에는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전형적인 틀에 맞추어 찍어내는 붕어빵식이니 시가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 영향을 아직 못 벗어난 교직자 출신 아동문학인들, 그들은 어린이의 글짓기 경험만 가지고 동시를 쓴다고 나선다. 시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자신」을 모를 수밖에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짜맞추기씩「동시」의 본보기를, 그래서 써내게 되는 것이다.   5   조선 시대의 시조 틀에서 최남선에 의해 자유로워진 것이 1920년대 1차 시의 해체이다. 그리고 신체시라는 이름으로 자유시가 씌어지고 퍼지고 한 것이 지난 30년간이다. 이 30년 동안에 윤석중이 정형율(3,4조, 4,4조, 7,5조 등)에 맞게 동요와 동시를 개발하고 보급시켰다. 정형율에 맞도록 써냈기 때문에, 작곡가들이 곡을 붙이기에 아주 수월하였다. 그래서 동요는 부르는 노래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 혼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윤석중은 우리 나라 최초의 동시집을 내면서 동시의 문학사적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요즘 신현득이 새로 쓰는 '한국 동시사' 연재에서 밝혔듯이, 우리 나라 자유 동시는 1950년대 말에 2차 시의 해체가 시도된다. 신현득은 '유경환. 조유로, 박경용, 신현득'에 의해서 주창되었다고 썼다. 가장 정확한 기술이다. 어떤 아동문학사(史)의 기술에는 이와 다르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저자가 ○○지방 아동문학사의 기본 자료를 가지고 ○○대신 한국을 붙여 개작하였기 때문에 생긴 오류인 듯하다.   유경환이 1950년대 말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기치를 들었을 적에, 지면을 내준 곳은 배영사와 그리고 교육자료사였다. 이 기치에 때맞춰 이론으로 걸맞게 옹호하고 나선이가 박경용이고, 조유로는 그 때까지 중앙에는 낯선 이름이었으며 2년 뒤에 신현득이 작품으로 동참하였다.   필자가 1950년대 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외쳤을 적에, 당시 아동문학계는 건방지다는 투의 시선을 보냈다. 다만 이원수만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그런 말을 하려면 우선 작품으로 보여줘야지… 나는 유군이 동화를 쓸 줄 알았는데….' 라고 하였다. 이원수는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내게 제1회「소년세계문학상」을 준 분이다. (당선작은 동화 '오누이 가게', 상으로 받은 금 5돈·메달 형식을 팔아서 1953년 고등학교 입학 등록금으로 요긴하게 쓴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 있다.)   1957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없는 가작, '아이와 우체통')를 선고(選考)한 윤석중, 어효선(그 뒤 50년간 줄곧 가까이 찾아뵙곤 하였지만)은 필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번 더 응모하여 당선작을 내놓으라'는 충고를 따르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 (1957년 11월호 지에 박두진에 의해 초회시 추천이 이루어졌고, 1958년 4월호로 추천 완료 등단하였기에) 그러나 신현득은 2년 뒤에 가작 그리고 당선의 절차를 밟아 마친다.   이런 상황과 분위기에서 '동시도 먼저 시이어야 한다'는 외침은, 저항이나 거역으로 비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다행이도 박경용이, 필자와 사전 의논이라도 한 듯, 같은 주장을 펴준 덕택에 기진할 일이었으나 문단에서의 외로움을 참고 견뎌낼 수 있었다. 필자는 이원수의 '작품으로 해야지…'하는 말에 걸려서 서둘러 첫 동시집 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책방 겸 출판사인 숭문사에서 낸다.(1966) 이 때 숭문사에서 함께 나온 황영애의 동화집, 최효섭의 동화집을 기억한다.   6   동시도 시이므로, 시적 수준에 이른 것만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에 맞대고 나온 것이 동시의 난해성이라고 앞서 말했다. 난해성을 들고 나오면서 방어 태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강 다음과 같은 보충 설명을 붙인다.   '동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글이기 때문에 쉬워야 하며 또 재미있어야 한다. 동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우선적 조건이다.'   이 말은 반만 맞고 반은 맞지 않는다. 우선적 조건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우선적 조건은 '우선 시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가 안 되어 있는데 쉽고 재미있으면 시인가? 그런데 적잖은 아동문학인들이 '쉽고 재미있는 운문이면 되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운문에서 시는 왜 찾아?' 라고 아전인수격의 주장을 편다. '쉽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갖추어야 할 시적 요건은 슬며시 흘려버리는 태도다.   색깔 있는 나무토막이나 장난감 레고같이, 낱말을 짜맞추어 읽기 쉽고 보기 좋게 틀을 짜놓고서, 이를 동시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겐 동시의 감동이 중요할 수가 없다. 동시를 어린이의 입재롱 놀이감쯤으로 여기는 태도이기에 그렇다.   시의 감동, 이는 시를 살리는 요체다. 동시에서도 똑같다. 동시를 읽고난 뒤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더 이상 읽겠는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될 경우 한 번 더 읽을 수 있겠다. 그래도 감상이 안 되면 체험의 일치를 위한 바탕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겉만 동시 형식이지 속이 없는 박제된 새, 곧 표본실의 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2004년 겨울『한국동시문학』8호)   동시 창작론 ⑨ 생각의 우물 파기 유 경 환   1.   필자는 오래 전부터 '생각의 우물파기'라는 말을 써왔다. 한데 이 말에 낯설어 하는 독자가 있다면, 아마 동시에 대해 그 동안 피력해 온 필자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퍼낼수록 맑은 샘이면 좋은 샘이듯이, 파내려 갈수록 생각의 우물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사유(思惟)를 우물에 비유하면 납득이 쉬워진다.   달리는 차를 타고 보게 되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서 동시의 소재를 얻기보다는, 깊은 연못처럼 폭 넓은 사색과 깊이 있는 사유에서 동시의 소재를 찾아내기가 바람직스럽다.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의 우물파기로 얻어낸 시상(詩想)을, 먼저 문삼석의 작품에서 엿보기로 하자. 숲 속의 풀들은 모두 풀빛인데요. 어쩌다 풀빛이 아닌 풀들이 섞여 있더라도 모두들 조금씩 제 빛들을 풀어내어 다 같은 풀빛이 되게 합니다. 숲 속의 나무들은 모두 나무빛인데요. 어쩌다 나무빛이 아닌 나무들이 섞여 있더라도 모두들 조금씩 제 빛들을 풀어내어 다 같은 나무빛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된 풀빛과 나무빛들 쌓이고 쌓여 숲빛이 됩니다. 깊은 빛이 됩니다.              ―문삼석 '숲빛' 전문   작품 '숲빛'은 눈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씌어진 시다. 필자만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든 한 번만 읽어보면, 생각 깊은 사색으로 발견해 낸 시의 세계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사유가 없다면 이런 작품을 써낼 수가 없다. 생각의 우물을 파는 작업 끝에 얻어낸, 하나의 시상인 것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생각이 없다면 시도 없다'는 한마디 말을 할 수 있는, 증언 같은 것이 바로 '숲빛'이다. 문삼석의 깊은 사유가 이 작품에다 시를 흥건히 담아준 것이다.   다른 보기를 들겠다.   생각의 우물파기로 얻어낸 시상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을, 이준관이 '길을 가다'로 제시한다.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든 걸어보고 싶다. 걸어보고 싶다.           ―이준관 '길을 가다' 전문   이준관은 길을 가다가 작은 새 한 마리를 보고, 아니 작은 새가 눈에 띄자, 그 때부터 계속 새에 대해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생각의 우물파기를 하면서 상당 기간 머리 속에 작은 새를 품었을 것이다. 이준관의 가슴이 곧 새장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아기새'로 가슴속의 새가 '형상화'되어, 이준관의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마음의 동무로.   자기 어깨 높이로 새의 어깨를 크게 치켜올려, 나란히 함께 걷는(노는) 동무로 여겼을 것이다. 생각이 작은 새를 이준관의 동무로 만든다. 이런 새의 변신(變身)이 가능한 것이 사유 세계이다.   세 번째 보기를 들겠다.   이창건의 작품이다. 시인의 생각이 바로 작품이 된다는 보기다. 시인의 가슴이 곧 작품의 터요. 아울러 작품이 담기는 그릇이 된다. 나는 구석이 좋다. 햇살이 때때로 들지 않아 자주 그늘 지는 곳 그래서 겨울에 내린 눈이 쉽게 녹지 않는 곳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들이 구르다가 찾아드는 곳 구겨진 휴지들이 모여드는 곳 어쩌면 그 자리는 하느님이 만든 것인지도 모르지. 그 곳이 없으면 나뭇잎들 굴러다님이 언제 멈출 수 있을까.          ―이창건 '구석' 전문   목숨 있는 것 가운데 생각이 깊은 사람들만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시가 생각의 우물에서 길어올려지는 사색의 앙금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시를 만든다는 말은, 생각이 시의 재료라는 말로 다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사물을 보든 그 사물을 놓고 생각의 깊은 우물을 파내려 가지 않는 한, 눈앞의 사물은 그냥 사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사물을 놓고 생각의 우물을 깊이 파내려가 보면, 사물은 슬거머니 변신하게 마련이며 '형상화'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이 진행되게 마련이다.   2.   동시를 쓴다면서(시를 짓는다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슴에 시가 담길 그릇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결코 동시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옮겨 적는 일로는 씌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시인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시인의 생각으로 다시 빚고 시인의 바람대로 태어나도록 새로운 모양을 지니게 형상화(形象化)시켜야 비로소 '창작'이 된다. '형상화'라는 말은 표의문자의 원래 지닌 뜻대로 '상징적 모양을 갖추도록 한다'는 것인데, 한번 더 굴려서 말하자면 사물이 본래 지니고 있는 모양과는 달리 지니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형상화 작업은 겉모양만 바꿔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 있는 본질적 내용까지 바꿔 지니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상화 작업은 시를 창작하는 알파요 아울러 오메가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인 김춘수는 작품 '꽃'에서 꽃을 꽃이 아닌 다른 것으로까지 바꿔 놓지 아니했던가.   이쯤에서 뒤집어서(연역적으로) 설명하여 보자. 만약 생각의 우물파기를 하지 아니하고 '동시'라는 것을 써본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될 것인가 살펴보자.   첫 번째,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이는 상태 그대로 묘사한다면, 산문이 될 것이다. 이 산문을 운문 형식으로 바꾸기 위해,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몇 줄씩의 행(行)으로 나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줄 바꿔 쓴 산문, 곧 '산문의 줄 바꿔 쓰기'에 지나지 않는 글이다. 이런 까닭에 ①동시의 요건인 '시가 들어 있음'에서 벗어난 글이 되며, ②동시의 요체인 감동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두 번째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이는 현상 그대로 묘사한다면 의미가 삽입될 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글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색깔 있는 단어를 동원한다든가 또는 대칭 단어를 짜집기 식으로 구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억지로 꾸며 쓴 글에 그치고 만다. 흔히 보아온 종이접기식이나 장난감인 나무벽돌 맞추기 같은 '짜맞춘 글'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시가 어떤 것인지, 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일부 아동문학인(?)들이 지면에 발표하는 것들 가운데 '산문의 줄 바꿔 쓰기'나 '짜맞춘 글'이 많은 까닭은 이렇게 해명된다. 이들에겐 '동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동시는 이런 것이다'라는 말을 먼저 들려주어야 옳은 순서이다.   그러나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아니, 여지껏 미뤄온 셈이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일깨워 줄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여 왔다. 누구든 동시를 제대로 공부하려거든, 먼저 동시집을 3백 권쯤 읽으라고. 3백 권이면 이 가운데 동시집다운 작품집이 3분의 1쯤 될까 말까 할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3백 권쯤 읽어내면,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것은 동시이고 또 어떤 것은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 형식인지를 스스로 식별할 능력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 형식'에 질리게 된다면, 모름지기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거부 반응을 감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닫게 되는 이 방법론은 뉘의 자존심도 건드리지 않는 자기 수련이 될 것이다. 문학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 선인들이 일찍부터 말해 오지 않았던가.   3.   생각의 우물파기라는 사유 세계의 확장과 심화(深化)는, 돌을 던져서 물주름을 퍼뜨리는 연못의 크기와 깊이에 비유할 수 있고 또 나무의 내면에 감기는 나이테에 비유할 수도 있다.   작은 연못에 돌을 던져 물주름을 만들 때, 퍼져나가는 파문의 크기는 연못의 크기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깊고 큰 연못에서는 연못 둘레만큼 큰 파문을 기대할 수 있다. 생각의 우물파기에서도 깊이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여야만 큰 감동을 작품 안에 담아 낼 수 있다.   동시 작품에 담기는 시적 요건과 시적 요체에서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동시 작품의 질(質)과 격(格)에 있어서도, 깊이 생각한 결과와 넓게 생각한 결과로만 비로소 좋은 작품을 얻게 된다. 깊이 생각하고 넓게 생각하고 얻은 작품의 소재와 내용은, 깊은 의미와 감동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 대신 톡톡 튀는 듯한 가벼운 의미와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재치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이바지 못한다.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충족시키는 질과 격에서 이미 처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들의 말을 통한 놀이감으로서 유희성에 이바지할 뿐이다.   나무가 자라면서 내면에 감게 되는 나이테. 이 나이테와 생각의 우물파기를 연결시켜 보자. 가늘고 작은 어린 나무에 들어 있는 나이테는 가는 몇 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고목에 감겨 있는 나이테는 그 연륜만큼 겹겹이 감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동들이 써내는 '아동시'에는 과연 몇 줄의 체험적 사유가 감겨 있을 것인가. 인생을 체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아동문학인, 이들이 창작하는 동시에는 작가로서 살아온 연륜만큼 축적된 체험적 사유 세계가 감겨 있을 법하다. 분명한 것은 체험적 사유 세계의 넓이다.   때로 아이들이 써내는 '아동시'에서 재미를 느끼는 재치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동문학인이 창작한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견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사유 세계의 넓이나 깊이에서 견줄 만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 재치는 그것으로 끝날 뿐이지 결코 문학적 감동에 앞서지 못하는 것이다.   재미로 읽는 동시가 있고, 감동 때문에 읽는 동시가 있다. 재미로 읽는 동시는 한두 번 읽는 것으로 끝나나 감동을 느껴 읽는 동시는 오래 계속 읽힌다. 감동을 주는 동시가 문학 작품으로서 생명이 긴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진정한 동시 작가라면 어떤 동시를 쓰고자 할 것인가.   4.   생각은 열쇠다.   생각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어떤 사유 세계로도 들어갈 수가 없다. 깊은 사유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의미 깊은 작품을 써낼 수가 없다. 아니 구상(構想)조차 불가능하다.   발목이나 차는 냇물에 들어가 놀면서, 깊은 의미가 담긴 시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린 묘목 한 그루를 심어 놓고, 겹겹이 감긴 연륜의 나이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의 우물파기는 자기 가슴에 깊고 깊은 사유의 우물을 파라는 말이다. 깊이 가라앉은 사유의 결과를 퍼올릴 수 있으려면, 체험의 깊이만큼 해석의 깊이도 깊어야만 한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해석은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형상을 찾아내거나 남들이 꿈도 못 꾸는 상징을 발견해 낸다. 이 체험이라는 것, 그리고 이 체험의 해석이라는 것, 그 다음에 오는 형상화를 위한 상징의 발견이라는 것이, 사물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길에서 차례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시가 창작되는 과정이다. 동시 또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창작된다.   리차드 바크는 '높이 나르는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광산은 깊이 파야 광물을 얻는다는 개념을 뒤집었으나 그 본질에서는 반대가 아니다.   진정한 아동문학인이면 교실 복도나 운동장에 뛰노는 어린이에게 집착하는 대신, 벌판을 달리는 어린이에게도 눈길을 돌릴 만하다. 어린이에게도 어린이가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인생을 일깨워 줄 수가 있고, 삶과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하도록 암시해 줄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자라지 않는 어린이'가 아니라 매일매일 성장하는 어린이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작품성은 인간 삶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위안한다. 삶의 고달픔은 어린이의 어려운 삶에도 있다. 동시의 작품성은 어린이에게도 필요하다. 아니,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도 필요하다. 동시의 기능과 효용은 이렇게 확대된다.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동시는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두에게 읽힐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우물을 더 깊이 팔 필요가 있다.   생각의 우물파기에는 아무런 연장이 없다. 있다면 짧은 관념의 호미가 우리들 마음 속에 있을 뿐이다. (2005년 봄『한국동시문학』제9호)   동시 창작론 ⑩ 묘사―외다리 걷기식 묘사법 유 경 환   1.   동시 쓰기에서 묘사 기법을 나는 '외다리 걷기'에 비유해 왔다. 외다리 걷기에는 (줄타기 놀이에서 보듯) 균형이 아주 중요하다. 균형을 못 잡거나 잃으면 떨어지고 말 듯이, 동시 쓰기에도 균형을 못 잡거나 잃으면 바로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외다리 걷기식이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으라는 것이다. 이 중심 잡기를 구체적으로 다음 3가지 기법으로 설명한다.   그 첫째는 짧게 쓰기다.   그 둘째는 간결하게 쓰기다.   그 셋째는 순수하게 쓰기다.   위의 3가지는 동시 쓰기의 묘사 기법에 기본이다. 이것들을 기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기본에서 이탈할 때 산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동시는 운문이다. 그래서 운문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문이 될 소지를 배제해야만 한다.   짧게 쓰고, 간결하게 쓰고 그리고 순수하게 쓰라는 것은, (같은 말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운문의 형식을 지키라는 것이다. 아주 쉬운 말로 다시 말하면, 형용사나 부사를 되도록 쓰지 아니하는 것이 위의 3가지를 이행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산문에서는 (더구나 소설 문장에서는) 형용사나 부사를 작가의 의도대로 중복하거나 또는 강조하는 뜻에서 겹쳐 쓰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 쓰기에서는 이와 다르다. 기둥과 가지만 남긴 채 겨울을 난 과수원 과수에 봄이 오면 잎이 돋아 나듯이, 기둥과 가지만 갖춰 주는 것이 시인의 몫이고 잎을 다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동시 쓰기의 묘사 기법에서 형용사나 부사를 덜 쓰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법의학자들이 아주 오래된 두개골을 발견하여 그 구조적 특징을 살펴서 인체 공학적으로 생전의 모습을 재현해 내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정서의 기본 뼈대만 갖춰 제시하면, 독자가 읽으면서 상상의 살을 붙여가며 감상하는 것이 제대로 동시를 읽는 법이다.   동시 읽기의 재미는 어디까지나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정서의 뼈대에 기본이 되는 짧고 간결하고 순수함의 3가지만 요구된다. 쓰지 않아야 할 형용사나 부사를 묘사를 위해 썼다면,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독자의 상상인 독자의 재미를 앗아버리는 것이 된다. 물론 꼭 필요하거나 있어야 할 형용사 부사까지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급적 덜 쓰는 것이 가장 쉬운 기법이다.   2.   동시를 쓰는 묘사 기법에서 두 번째로 마음에 두어야 할 점은, 시인의 의도를 (버선목 뒤집어 보여주듯이) 다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흔히 동시를 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은 독자가 이런 뜻을 짚어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워서 쓰는 의도를 밝히려고 한다.   이렇게 '이 글은 이런 의도로 썼다'고 밝혀 놓는다면, 그 글의 성격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동시의 매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듣는 목적시들, 예를 들면 '어린이날 노래'라든가 '한글날 노래'라든가 '개천절 노래'들은 아무리 숭고한 뜻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날 하루만 불리는 노래일 뿐이다.   그러므로 동시를 쓰는 묘사 기법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독자의 눈에 쉽사리 드러나지 아니하도록 이중 해석이 가능한 낱말을 골라 시어로 쓰는 그 '어떻게'에 있다.   필자가 여기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 해석이 가능하지 않는 낱말로는 동시가 되지 않느냐?'고. 이런 질문엔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중 해석이 어려운 낱말의 모음만으로는 유치원 원아들이 부르는 노래 수준의 작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유치원 원아들이 즐겨 부르는 수준의 작품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문학 작품으로 남기는 어렵다.   이름난 시인 정지용이 남긴 어린이를 위한 시 가운데 '해바라기씨'라는 것이 있다. 여기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해바라기씨를 심자. 담모퉁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고양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나면 이슬이 내려와 같이 가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햇빛이 입맞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새악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꽥!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구리 고놈이다.                 ―정지용 '해바라기씨' 전문   여기서 '해바라기씨'는 그냥 해바라기씨일 수도 있으며 아울러 다른 뜻을 상징하거나 비유할 수도 있는 그런 씨다. 이 시가 씌어진 일제 시대에 일본 경찰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참새'라는 은어로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나 알아 낸다면 이중 해석은 그만큼 쉬워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 해석'이란 꼭 두 가지 해석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라는 뜻을 다중(多重) 해석으로 풀이하여도 좋다.   이 이중 해석은 읽는 독자의 체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체험 수준은 거의 나이에 따라 그 폭과 수준이 비례하므로, 이중 해석은 흔히 나이에 따라 나타난다고도 말한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할 때에 유치원 원아에겐 그냥 소의 새끼인 작고 귀여운 송아지의 이미지가 전달되겠지만, 그러나 세상을 살 만큼 살아본 어른에게는 그냥 송아지가 아닌 것이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3형제……'에서도 별은 그냥 별로 듣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별에서 다른 뜻을 찾아 내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쓴 사람의 의도가 다 드러나는 글이 산문에선 환영받으나 운문에서는 그렇지 않다.   3.   동시 쓰기에서 묘사 기법은 그 말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감(語感)이나 율동감(律動感)에 의해 제약된다.   영국 동요집 (1760)를 읽어보면 음악적인 율동감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원래 영국에서 전래되어온 (입으로 전해진) 노래 같은 동요를 모은 모음집이기 때문에 율동감이 쉽게 감지된다.   영국에서 이름을 떨친 A.A.밀느(Alan Alexander Milne 1882∼1956)의 동시집 속 작품들도 귀에 들려오는 사운드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면서 쓴 작품들이다. 흔히 아기곰 푸우푸우를 쓴 동시인으로 그를 알고 있다.   동시. 이를 읽을 때에 힘을 들이거나 힘을 빼는 발음의 강약(强弱)이라든가, 낱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음량(사운드)을 참고하여서 동시를 쓸 때 낱말의 순서를 바꾸거나 또는 도치법(倒置法)으로 앞뒤와 위아래를 뒤섞거나 할 필요가 있으면, 문법대로 쓰지 않으며 또 줄을 바꿔서 새로운 줄을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장가라도 들어보면 일정한 율동감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것이다. 이렇게 일정한 율동의 감각이 되풀이 되도록 운(韻)을 맞춰 쓰는 것이 초기 영국 동시의 틀이었다.   우리 나라 아동문학의 개척자인 윤석중도,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영국의 운문 형식의 영향을 아니 받은 것이 아니어서, 우리 말의 율동과 장단 그리고 숨결 이 3가지를 고르고 다듬어 가며 윤석중 동시의 틀을 짰다. 이런 까닭에 작곡가에 의해 쉽게 멜로디가 붙을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 된 것이다.   어쨌거나 동시 속에는, 안으로 접어 넣은 율동이 일정한 박자처럼 감각으로 살아나도록 스며 있으며, 또 멀리 퍼져 나가는 종소리처럼 은은한 여운이 스며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동시 쓰기 묘사 기법은 이런 감각적인 제약을 수용하며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런 제약 속에서도 멋진 동시를 써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 목수일을 해온 목수가 자 없이도 척척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동시 쓰기를 할 때, 낱말의 순서를 왜 바꾸며 그리고 언제 어느 때 줄을 바꿔 써야 하는지를 자신있게 알려면 노련한 목수처럼 충분한 체험을 쌓아야 한다. 동시 쓰기는 결코 수학 문제를 풀 듯이 공식에 대입하거나 법칙을 응용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동의 감각적 제약을 수용하는 능력 또한 목수의 수련과 마찬가지이다.   4.   동시 쓰기 묘사 기법에서 '묘사를 위한 감정 절제'가 필수적임을 말할 차례다.   시어(詩語)로서 '상큼한'이라는 형용사와 그리고 '봄'이라는 명사가 만나면, '상큼한 봄'이라는 한 구절이 성립된다. 그런데 상큼한 봄이라는 4글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실로 다양한 것이다. 이런 이미지의 분위기는 들판을 가득 덮을 수도 있고 골짜기를 메울 수도 있는 그런 색깔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동시에 재래시장 한 구석 장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이든 아줌마의 봄나물 한 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를 다 늘어놓는다면, 이것은 시가 아닌 산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에는 절제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필수 사항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오래 전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라는 영상이 소개된 적이 있다. 마리 이야기는 하얀 털옷을 입은 마리가 2시간 동안에 보여주는 영상 스토리다. 그런데 관객은 이 영상을 보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만일 관객이 눈으로 보면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가슴으로 상상하지 못한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그냥 아이들의 장난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수준 이상으로 평가되었다.   시에서도, 시를 이루는 몇 줄은 독자의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아픔 비슷한) 정서를 찌르는, 그런 힘을 지녀야 한다. 그 힘이 곧 시의 매력이다. 이 매력은 단 한 줄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시가 몇 줄로 씌어졌는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거나 나이들었거나 상관없이 사람의 가슴 속 어느 한 구석에 담겨 있는 마음을 건드려 줄 수 있는 한마디! 이런 숨겨진 메시지가 시를 시답게 만드는 요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한 2년 전부터 김용택이나 안도현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 우리들 마음을 보자기로 싸담듯이 다잡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아동문학가로 불리지 않으며 동시인이나 동시작가라는 바이라인을 달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이 써내는 작품들이 기성 아동문학인들이 차지하던 자리에 밀물처럼 침식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나라 아동문학과 관계 있는 잡지에 발표되는 동시의 성격과 형식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보아 왔다. 왜일까? 한마디로 그들의 작품에는 절제된 시가 들어 있으되 아주 쉬운 그리고 자연스러운 묘사 기법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제. 감정의 절제는 물론이거니와 묘사에서도 절제는 당연한 것이다. 그냥 늘어놓으면 시가 안 되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냥 늘어놓는다'는 말에는 절제없이 형용사나 부사를 자꾸 붙인다는 뜻도 들어 있다. 다 자라 옥수수대에 붙어 있는 옥수수잎보다 적은 단어 몇 개로 김시인이나 안시인은 그들의 속내를 그럴 듯하게 형상화하고 있지 않은가?   5.   동심이라고 일컬어 온 '어린이 마음'은 간결하고 짧고 순수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3가지를 합쳐서 말하면 시에는 군더더기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어린이 마음으로 동시를 쓴다면, 간결하고 짧고 순수한 낱말을 시어로 선택하여야 어린 독자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구태어 논리라는 어려운 말을 빌려올 것 없이, 동시에 구사하는 시어는 겉으로 투명하되 해석에선 두 겹일 수 있는 그런 단어이어야 하겠다. 여리고 고운 마음을 담아내는 글(자)그릇은 거기 담아내는 마음 그대로 덧칠 안 된 단어일 때에 독자 가슴에 밀착될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빼앗긴'은 얼마나 큰 뜻으로 씌인 단순한 시어인가? (2005년 여름『한국동시문학』10호)   동시 창작론 ⑪ 쉽게 쓰기 유경환(동시인/시인)   읽기는 쉬워도 실제로 쓰기에는 쉽지 아니한 것이 바로 '쉽게 쓰기'이다. '동시는 쉽게 써야 한다'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알면서도 어렵게 쓰는 버릇을 못 고치는 편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쓰는 것이 쉽게 쓰는 것이고 그리고 어떻게 쓰는 것이 어렵게 쓰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된 적이 없기에, 막연히 모호하고 포괄적인 기준만 내세워 '쉽게 쓰자' 또는 '어렵게 쓰지 말자'고 말해온 탓이다.   1. 관념어(觀念語)는 피해야   먼저 필자는 쉽게 쓰기를 위한 실제 방안으로 관념어는 피하자고 말한다. 관념어라는 것은 한자가 표의(表意)하는 그대로 관념을 나타내는 낱말이다. 예를 들면 '역사'라든가 '사상'이라든가 또는 태고(太古)라든가 하는 낱말들이다.   우리들의 사유 세계에만 존재할 뿐이고, 실제로 접근하여 만나거나 만져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낱말이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보거나 접촉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인 까닭에, 어린이나 청소년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는 이런 정서 작업에 동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어린이나 청소년도 독자 대상에 포함하는 동시에, 관념어를 동원 구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히길 바라는 시를 쓰면서 그들에게 낯선 낱말을 선택하는 이런 실제의 경우를 필자는 요즘에도 적지 않게 보고 있다. 더 실증적으로 밝히자면, 교육 기관에서 퇴직한 교직자들 가운데 특히 교감 교장 같은 고위직 경력자들이 발표한 이른바 '동시'라는 글에서 다반사로 관념어를 만난다.   왜 그럴까? 동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오랜 교직 경력을 쌓았음에도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못 가졌을까? 기회를 못 가진 것이 아니라, 동시를 문학 작품으로 수용할 기회를 못 가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지적한다면 동시를 얕보아온 탓이다. 어린이가 써내는 '아동시'와 그리고 문학 수업을 거친 문학인이 창작한 '동시'와의 차이를 모르는 그 개념 혼돈에서, 자신을 구출해 내지 못한 채 고위 교직에 오른 탓이다. 그러므로 동시도 아동시처럼 쉽게 씌어진다고 여기는 것이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 이것이 인정되는 동시는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는다. 어렵게, 참으로 어렵게 창작된다. '쉬운 표현을 위해 쉬운 낱말을 선택하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이다.   여기서 동시 '쉽게 쓰기'는 '쉬운 낱말로 쓰도록 하는 노력'이라는 것으로 결론된다. 쉬운 낱말로 동시 쓰기는(모순 같지만) 사실상 어렵게 쓰기와 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동시를 쓰고자 하면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일 뿐이다.   2. 쉽게 쓰기와 유치하게 쓰기   쉽게 쓰기. 이는 읽기에 쉽도록 또는 감상하기에 쉽도록 쓰자는 것이지, 결코 유치하게 쓰자는 것이 아니다.(이런 말을 이 창작 강좌에서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요즘 어떤 종합 문예지에 활자화되는 것을 읽어보면 그래도 '해야 하겠다'고 작심하게 된다.   어른이 쓴 글인데 어째서 유치한 글이 되는 것일까?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서(동심으로) 써야 한다'는, 이런 일부 평자들의 말을 마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처럼 듣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쓰라는 이런 주장은 ①때묻지 아니한 마음으로 ②순수한 감정으로 ③또는 투명한 심사로 소재를 해석하라는 주장일 뿐이고, 쓰는 사람이 갑자기 어린이의 정서 수준으로 내려가서 쓰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적잖은 발달 장애 현상을 보고 있다. 키가 한창 클 시기에 어떤 원인 작용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결국 평균 신장에 못 미치는 키를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서가 한창 발달할 시기에 어떤 원인 변수가 개입하여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면, 몸과 나이에 걸맞도록 제대로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정서 지체에 걸리게 된다.   그런데,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동시를 쓰란다고 마치 정서 지체자처럼 어린이의 사유 능력과 어린이의 사유 세계 안에서 뒹구는 모습을 글로 보이고 있다. 이런 글인 경우 정상적 기준으로 보면 유치한 글로 읽혀질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쉽게 쓰기는 유치하게 쓰기와 같을 수 없다. 이의 차이나 간격을 식별하지 못하고 동일시(同一視)한다면, 정서 발달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사실의 인지(認知)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쉽게 쓰기와 그리고 유치하게 쓰기. 이것들이 분명히 다르다는 차이점은, 첫째 낱말의 선택에서 찾아야 할 일이고, 둘째 낱말의 배열인 전개 방법에서도 찾아야 할 일이며, 셋째 낱말들의 서술에서 기술적으로(또는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그 기교에서까지 찾아야 할 일이다. 위에 열거한 3가지는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만큼 표현 기교는 예민하고 까다롭고 또 델리케이트한 처리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다.   3. 정서의 집적회로(集積回路)   '동시도 시(詩)이어야 한다'는 말을 필자는 1950년대 말에 시작하였다. 이것은 '우선 시가 되어 있어야 동시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의 이런 주장에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일부 평자들은 참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했는지 또는 이해 수용에 오해가 끼었는지 아니면 정서 지체가 있었는지, 하여간 동시의 난해성(難解性)을 제기하면서 '유 아무개가 한 말 때문에 동시가 갑자기 어려워지고 독자를 잃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고 난해성에 결부시켰다.   1970년대 동시가 일부 독자층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하는 말은, 1970년대 아동문학 독자의 주계층이 분화(分化) 분류되는 현상을 오해한데 기인한 말이다.   1920년대부터 50년간 지속된 동요의 흐름에서 시(詩)다운 동시의 새 흐름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그 즈음이다.   유치원 시설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유아 교육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던 시절, 유아들의 정서 생활에 걸맞는 운문이 정서 교육의 교재용으로 요청되는, 이런 시대적 수요에 따라 동시의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50년간 지속된 동요의 형식에서 동시의 형식으로 외적 변형을 이루자, 음악동요에 필요한 노랫말 즉 음률적으로 내재율이 뚜렷한 노랫말이 귀해져서, 새로운 노랫말 틀에 맞는 운문의 수요가 교육 현장에 급증하였기에, 동시의 분화가 곁들여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가 열리면서 다원화(多元化)로 개방되는 기회를 통하여, 해외의 아동문학이 소개되고 그 가운데 선진국의 동시와 청소년시에 노출되는 기회가 늘면서, 우리 나라의 동시도 그 격과 위상을 높이자는 의식과 함께 '동시는 어른도 독자일 수 있다'는 해석이 짙어졌다.(이런 자극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글에서 앞섰다)   위에 분석한 3가지 상황과 현상을 간과한 일부 평자들은 '시가 되어가는 동시'를 놓고, 계속 종래의 동요 가사의 기준에서 바라보면서, 자기네 기대를 넘었다며 '난해하다'고 한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모두가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의 격(格)과 난해성과의 상관 관계에는 상관성이 지극히 약한 사실을 살펴야 오해를 벗어날 수 있다.   ①1920년대의 신체시와 그리고 창가(唱歌)의 가사, ②1930∼50년대의 동와 동요 가사, ③1960∼70년대 동시와 동요 노랫말. 이렇게 3단계로 발전한 발전 과정을 살피면, 동시가 시로서의 위상을 차지할 충분한 이유가 나타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누어 살펴야 마땅할 상황과 현상을 한데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아니한 발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부 평자들이 자기 평가의 기준을 계속 그 전 시대에 맞추어 놓은 채, 197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다운 동시'를 난해한 동시로 규정하는 일은, 앞으로 동시를 공부하여 창작 생활에 들어갈 아동문학 지망생에게 적당치 못한 견해를 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4. 동시의 원리(原理) 알아야   두루 알고 있다시피 컴퓨터 작동 원리인 디지털 능력은 0과 1,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만드는 순열조합의 집합체에서 나온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동시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여온 낱말이지만, 이 가운데 시어로 쓸 만한 낱말들만 동원하여, 그것들을 이어 놓거나 나눠 놓거나 또는 줄바꿔 놓거나 하는 배열 형식을 통해 일상적으로 통하던 감정 이상의 정서 곧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를 담아내는 것이 시의 창작이다.   그런데 동원된 낱말들이 엮는 정서회로, 이것이 전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능력에 못 미치는 사람이 평자로 등장하는 경우, 난해시와 그리고 난해시가 아닌 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평하기 일쑤다. 정말 어려운 낱말을 구사하여 독자가 수용하기 어렵도록 쓴 난해시와 '시다운 동시'까지 한데 뭉뚱그려 '난해하다'고 치부하는 결과를 내놓는다.   시에는 누가 봐도 난해한 난해시가 있다. 열 사람이 읽고 나서 모두 난해하다고 한다면, 결국 쓴 사람 혼자만 아는 난해시일 수밖에 없다. 문예 사조사(史)에 보면, 실험적으로 시도된 첨단적 성격의 작품들이 거의 난해시의 대접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경우와 달리 '시다운 동시'가 품고 있는 고도의 기교적 완성도, 이것이 만드는 정서회로의 효과를 추적해 낼 능력이 부족하면 작품 속에 숨겨진 작품성의 가치를 발견 못하게 된다.   결국, 시어로 선택된 낱말들이 시인의 의도에 따라 이어졌을 때 구축되는 정서회로의 효과, 즉 시적 분위기의 느낌을 감지해내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서회로가 내뿜는 효과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모자라서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참 많다. 이를 놓고 필자는 '적절하지 못한 치부'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쉽게 쓰기.   이는 시다운 동시를 쓰려고 노력을 하되,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친숙한 낱말을 시어로 구사해야, 어린이나 청소년이 자기들 나름의 시적 상상을 충분히 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관념어는 쇠에 녹이 슬 듯 때가 낀 낱말과 같아서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시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거나 시적 자극을 주기에 적합하지 아니한 낱말이다.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거나 느낌을 전달하고자 하는 동시 쓰기에서, 기능적으로 이미 녹슨 관념어를 계속 고집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2005년 가을『한국동시문학』제11호)   동시 창작론 ⑫ 내면화(內面化) 들여다보기 유경환(동시인/시인)   1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를 설명한, 재미있는 한마디 이야기가 있다.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사람도 거울을 보고 원숭이도 거울을 본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원숭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보나, 사람은 거울에 안 비치는 내면(內面)까지 본다.'   필자는 내면(內面)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한마디를 주석을 달지 않은 채 인용하였다. 이 한마디가 나온 지는 퍽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동문학가들에게는 아직 낯선 편이겠다.   내면(內面)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마술 같은 일몫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겠다. 시어들이 나란히 조합되어 시인의 생각을 형상화시킬 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담아내는 일몫이 있다는 것을, 시인이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내면의 문제다.   이런 까닭에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동시라고 작품을 써낼 때, 물 밑으로 담기는 뜻을 아예 처음부터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를 통해 글자들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그려보려 하지만, 그와 아울러 물 밑으로 담겨지는 뜻은 생각지도 못한다. 잘 씌어진 동시와 그렇지 못한 동시와의 차이는 여기서 벌어진다. 이 차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퍽 많이도 동시인으로 등단하였으니까 말이다.   2   동시를 발표하면서 만약 어린이들이 감상하는 작품이기에, 선택한 시어들 밑에 다른 뜻을 깔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어린이들에게 일회용 읽거리의 작품성 때문에, 두고두고 펼쳐볼 읽거리가 못되고 만다. 적잖은 동시인들이 기성 문단에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일회용 대접밖에 못 받는 데 있다. 하지만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간과하고 있다.   동시집 출판은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판된 동시집을 읽어보면, 아깝게도 수록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일회용품이라는데 혀를 차게 된다. 이런 일회용 수준의 작품을 써내면서,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때로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닌가 싶게 안타깝기도 하다)   '주된 독자층이 어린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편견인 줄 모르고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독자층을 얕보는 태도에서 한번 읽으면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써내는 사람들이, '나도 동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셈이다.   시 앞에다 아이 동(童)자를 붙인 동시라고 하여도, 첫 번째 독자인 어린이가 성장 과정을 통해 계속 자라면서 다시 읽고 또 읽고픈, 이런 작품을 내놔야 비로소 기억되는 시인이 되는 것 아닌가. 동시도 시이어야 계속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생각 없이 '어린이'가 되어 갑자기 어린이가 된 그런 눈으로, 깊은 고민의 흔적도 없이 옛날을 되돌이켜 보고 자시의 어린 시절 회상기를 동시라고 써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창작 태도이고 보면, 시로서 갖춰야 할 시적 요건이 들어갈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어린이 글, 곧 아동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길고 길게 설명을 하였지만, 요체는 내면화(內面化)이다. 내면화가 안 된 것은, 속이 빈 허물과 다르지 않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다.   내면화는 동시를 시의 지위에 올리는 격(格)이다. 내면화는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겉으로 읽히는 것과 다른 뜻을 시가 그 물 밑에 지니게 하는 묘한 일을 한다. 내면화는 그래서 시의 매력이고 신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내면화는 오직 느낌(feeling))으로만 감지되고 느낌으로만 전달된다.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정서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은 이론이 아닌 느낌에서 터득된다.   3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고민하는 사람이고 늘 고뇌에 차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이런 고뇌 없이 '어린이가 되어' 맑은눈으로 순수한 것만 골라 '생각의 난쟁이'처럼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글자로 짚어내, 틀에 맞게 써 내면 이 글이 곧 동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동시라고 할지라도, 한 편의 동시 작품 안에 시가 들어가 제자리를 잡고 있지 아니하면, 글자 맞춤의 형식에 지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 이런 것을 줄맞춰 나타낸다 하여도, 이런 것을 어린이눈으로 그려낸다 하여도 결코 동시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동시에도 사람의 사람다운 마음이 들어가 내재(內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사람다운 마음'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따위 온갖 정서가 다 녹아들 수 있는 마음이다. 동시의 일차적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슬픔이나 괴로움의 정서를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 여러 번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였지만, 동시는 더 이상 어린이만을 주독자층으로 삼지 아니한다. 어린이를 주독자층으로 설정한 범주 규정은, 우리 나라 1930년대 사회 문화 구조와 상관관계가 있다. 당시 민족의 희망을 어린이에게 걸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서, 동시의 범주를 좁혀 감상과 보급의 농도를 어린이에게 집중시키고자 한 의도가 그런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는 인간의 온 생애에 걸쳐 위안과 위로를 안겨 주는 문학 형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이 세계 보편적 현상이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좋아하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즐겨 듣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인생을 담아낼 그릇의 효용이 인정되는 시가 동시인 것이다.   그러니, 동시라고 하여 더 이상 그 격을 낮추지 말 일이다. 동시인 스스로 동시의 격을 낮추면 그것을 생산하는 동시인도 사회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4   햇살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분해하면 일곱 가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빛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적외선이 있고 자외선이 있다.   만약 이를 볼 수 없기에 적외선이나 자외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리학 공부를 더 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동시, 동시다운 동시 한 편에서는 읽을 땐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속마음에 전달되어 오는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마음에 전달되는 깊은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작품을 쓰는데 왜 어째서 좋은 동시로 쳐주지 않는가' 하고, 기회 있을 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을 일삼는다. 문제는 나열된 글자들이 형상화해 낸 이미지 밑에서(물 밑으로) 전달되고 있는 뜻의 기능을 감지할 만큼, 충분히 삶이나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뇌에 빠지지 않았다는 생활 자세 또는 생활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각 없이 씌어지는 시가 없고, 생각 없이 씌어지는 동시 또한 없다. 이 말은 고민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고, 고뇌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민 없이, 고뇌 없이 어린이가 써 내는 것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그냥 '어린이가 되어'서는 결코 진솔한 어린이의 흉내도 낼 수 없다. 어린 사람에게도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으며 그 나름의 고뇌가 있다고 말하니까, 작품에다 고민이니 고뇌니 하는 한자(漢字)를 그대로 써넣는 동시인(?)도 있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실정이라 아니 하겠는가.   좀더 추적해 보면, 여러 잡지나 기관이 신인을 등단시키는데, 그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 가운데 동시를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위원'이 끼어 있어서,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신인을 등단시키고 있다. 이것이 동시의 내면화를 모르는 일부 위원들의 심사나 추천의 결과이다.   5   한 채의 집을 아담하게 잘 지으면 투시도만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고 좋아하게 된다. 한 편의 동시다운 동시를 읽게 되면, 글자의 조합이 풍기는 것 이상의 느낌과,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속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내면화는 동시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다 고스란히 옮겨 줄 수 있는 글자 밑의 얽힘이다.   반도체 칩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전달하듯이, 사전에 나와 있는 글자들이 얽혀서 사전에 나와 있지 아니한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내면화가 해 낸다.   사람의 마음은 반도체 칩이 아니므로 일정한 형식으로 내몀화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마다 다른 체험 곧 내적인 체험에 따라 다른 뜻을 전달한다. 여기 감상의 묘미가 있고, 그래서 해석의 폭이 넓어진다.   윤석중은 기찻길 옆에서도 잠을 잘 자는 아기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사회를 기찻길로 해석될 수 있게 썼다. 박목월은 엄마소도 얼룩소에서 창씨개명을 부추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썼다.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면화된 세계는, 작품의 작품성을 높이고 완성도를 결속시킨다.   동시의 창작에서 내면을 중시하고 내면화의 세계를 천착하는 것은,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어떤 모양을 파내 다면체(多面體)적인 해석을 끌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표본실에 진열되어 있는 박제된 동물에는 내면이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는 동시라고 할 수가 없다. 내면은 분해된 기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내면은 전체로서 생리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내면화는 전체로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다른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감당한다. (2005년 겨울『한국동시문학』12호)   동시 창작론 ⑫ 내면화(內面化) 들여다보기 유경환(동시인/시인)   1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를 설명한, 재미있는 한마디 이야기가 있다.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사람도 거울을 보고 원숭이도 거울을 본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원숭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보나, 사람은 거울에 안 비치는 내면(內面)까지 본다.'   필자는 내면(內面)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한마디를 주석을 달지 않은 채 인용하였다. 이 한마디가 나온 지는 퍽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동문학가들에게는 아직 낯선 편이겠다.   내면(內面)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마술 같은 일몫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겠다. 시어들이 나란히 조합되어 시인의 생각을 형상화시킬 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담아내는 일몫이 있다는 것을, 시인이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내면의 문제다.   이런 까닭에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동시라고 작품을 써낼 때, 물 밑으로 담기는 뜻을 아예 처음부터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를 통해 글자들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그려보려 하지만, 그와 아울러 물 밑으로 담겨지는 뜻은 생각지도 못한다. 잘 씌어진 동시와 그렇지 못한 동시와의 차이는 여기서 벌어진다. 이 차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퍽 많이도 동시인으로 등단하였으니까 말이다.   2   동시를 발표하면서 만약 어린이들이 감상하는 작품이기에, 선택한 시어들 밑에 다른 뜻을 깔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어린이들에게 일회용 읽거리의 작품성 때문에, 두고두고 펼쳐볼 읽거리가 못되고 만다. 적잖은 동시인들이 기성 문단에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일회용 대접밖에 못 받는 데 있다. 하지만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간과하고 있다.   동시집 출판은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판된 동시집을 읽어보면, 아깝게도 수록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일회용품이라는데 혀를 차게 된다. 이런 일회용 수준의 작품을 써내면서,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때로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닌가 싶게 안타깝기도 하다)   '주된 독자층이 어린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편견인 줄 모르고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독자층을 얕보는 태도에서 한번 읽으면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써내는 사람들이, '나도 동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셈이다.   시 앞에다 아이 동(童)자를 붙인 동시라고 하여도, 첫 번째 독자인 어린이가 성장 과정을 통해 계속 자라면서 다시 읽고 또 읽고픈, 이런 작품을 내놔야 비로소 기억되는 시인이 되는 것 아닌가. 동시도 시이어야 계속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생각 없이 '어린이'가 되어 갑자기 어린이가 된 그런 눈으로, 깊은 고민의 흔적도 없이 옛날을 되돌이켜 보고 자시의 어린 시절 회상기를 동시라고 써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창작 태도이고 보면, 시로서 갖춰야 할 시적 요건이 들어갈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어린이 글, 곧 아동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길고 길게 설명을 하였지만, 요체는 내면화(內面化)이다. 내면화가 안 된 것은, 속이 빈 허물과 다르지 않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다.   내면화는 동시를 시의 지위에 올리는 격(格)이다. 내면화는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겉으로 읽히는 것과 다른 뜻을 시가 그 물 밑에 지니게 하는 묘한 일을 한다. 내면화는 그래서 시의 매력이고 신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내면화는 오직 느낌(feeling))으로만 감지되고 느낌으로만 전달된다.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정서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은 이론이 아닌 느낌에서 터득된다.   3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고민하는 사람이고 늘 고뇌에 차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이런 고뇌 없이 '어린이가 되어' 맑은눈으로 순수한 것만 골라 '생각의 난쟁이'처럼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글자로 짚어내, 틀에 맞게 써 내면 이 글이 곧 동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동시라고 할지라도, 한 편의 동시 작품 안에 시가 들어가 제자리를 잡고 있지 아니하면, 글자 맞춤의 형식에 지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 이런 것을 줄맞춰 나타낸다 하여도, 이런 것을 어린이눈으로 그려낸다 하여도 결코 동시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동시에도 사람의 사람다운 마음이 들어가 내재(內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사람다운 마음'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따위 온갖 정서가 다 녹아들 수 있는 마음이다. 동시의 일차적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슬픔이나 괴로움의 정서를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 여러 번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였지만, 동시는 더 이상 어린이만을 주독자층으로 삼지 아니한다. 어린이를 주독자층으로 설정한 범주 규정은, 우리 나라 1930년대 사회 문화 구조와 상관관계가 있다. 당시 민족의 희망을 어린이에게 걸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서, 동시의 범주를 좁혀 감상과 보급의 농도를 어린이에게 집중시키고자 한 의도가 그런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는 인간의 온 생애에 걸쳐 위안과 위로를 안겨 주는 문학 형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이 세계 보편적 현상이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좋아하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즐겨 듣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인생을 담아낼 그릇의 효용이 인정되는 시가 동시인 것이다.   그러니, 동시라고 하여 더 이상 그 격을 낮추지 말 일이다. 동시인 스스로 동시의 격을 낮추면 그것을 생산하는 동시인도 사회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4   햇살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분해하면 일곱 가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빛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적외선이 있고 자외선이 있다.   만약 이를 볼 수 없기에 적외선이나 자외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리학 공부를 더 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동시, 동시다운 동시 한 편에서는 읽을 땐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속마음에 전달되어 오는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마음에 전달되는 깊은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작품을 쓰는데 왜 어째서 좋은 동시로 쳐주지 않는가' 하고, 기회 있을 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을 일삼는다. 문제는 나열된 글자들이 형상화해 낸 이미지 밑에서(물 밑으로) 전달되고 있는 뜻의 기능을 감지할 만큼, 충분히 삶이나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뇌에 빠지지 않았다는 생활 자세 또는 생활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각 없이 씌어지는 시가 없고, 생각 없이 씌어지는 동시 또한 없다. 이 말은 고민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고, 고뇌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민 없이, 고뇌 없이 어린이가 써 내는 것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그냥 '어린이가 되어'서는 결코 진솔한 어린이의 흉내도 낼 수 없다. 어린 사람에게도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으며 그 나름의 고뇌가 있다고 말하니까, 작품에다 고민이니 고뇌니 하는 한자(漢字)를 그대로 써넣는 동시인(?)도 있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실정이라 아니 하겠는가.   좀더 추적해 보면, 여러 잡지나 기관이 신인을 등단시키는데, 그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 가운데 동시를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위원'이 끼어 있어서,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신인을 등단시키고 있다. 이것이 동시의 내면화를 모르는 일부 위원들의 심사나 추천의 결과이다.   5   한 채의 집을 아담하게 잘 지으면 투시도만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고 좋아하게 된다. 한 편의 동시다운 동시를 읽게 되면, 글자의 조합이 풍기는 것 이상의 느낌과,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속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내면화는 동시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다 고스란히 옮겨 줄 수 있는 글자 밑의 얽힘이다.   반도체 칩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전달하듯이, 사전에 나와 있는 글자들이 얽혀서 사전에 나와 있지 아니한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내면화가 해 낸다.   사람의 마음은 반도체 칩이 아니므로 일정한 형식으로 내몀화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마다 다른 체험 곧 내적인 체험에 따라 다른 뜻을 전달한다. 여기 감상의 묘미가 있고, 그래서 해석의 폭이 넓어진다.   윤석중은 기찻길 옆에서도 잠을 잘 자는 아기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사회를 기찻길로 해석될 수 있게 썼다. 박목월은 엄마소도 얼룩소에서 창씨개명을 부추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썼다.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면화된 세계는, 작품의 작품성을 높이고 완성도를 결속시킨다.   동시의 창작에서 내면을 중시하고 내면화의 세계를 천착하는 것은,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어떤 모양을 파내 다면체(多面體)적인 해석을 끌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표본실에 진열되어 있는 박제된 동물에는 내면이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는 동시라고 할 수가 없다. 내면은 분해된 기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내면은 전체로서 생리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내면화는 전체로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다른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감당한다. (2005년 겨울『한국동시문학』12호)   동시 창작론 ⑭ 감동을 담아내기 유 경 환   1   산의 높이는 해발 3백 미터니 3천 미터니 한다. 바다가 기준이다. 지도에는 등온선이 그려진다. 시에서도 이처럼 수치로 급수를 매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때 '좋은 시'라는 느낌이 오게 된다. 이런 좋은 시에도 여러 층이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좋은 시는 읽는이에게 감동을 주는 시다. 분명한 것은, 읽는 뉘에게나 감동을 전달하는 작품은 좋은 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몇몇 지면에 발표되는 동시라는 것을 보면, 좋은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와는 거리가 먼 '맹물' 같은 것들이 놀랍게도 참 많다. 어째서 이런 형편에 이르렀을까.   시인의 내면에 내재하는 감동적 요소를 작품에 옮기는 표현 기법, 이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겠다. '이 정도면 내가 옮겨 놓고자 한 대로 독자가 감동을 받겠지…'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 대신 맹물이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시인은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표현 기법 찾기에 참으로 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주된 독자가 어린이일 뿐'이라는 잘못된 지식(1930·40년대 우리나라에선 그랬다) 탓에 '아이들이 읽어서 알 수 있는 표현 기법'만 내세워, 아무런 고민 없이 쉽게 표현하려고만 하였다. 그래서 의도와 전달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2   무엇보다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쉬운 시(동시)와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동시)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쉬운 시와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는 다르다. 달라도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다. 이 차이를 모르거나 지나치므로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된다.   좋은 시는 쉬운 시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시가 쉽게 씌어지기는 어렵다. 이런 개념 혼동으로 말미암아 쉽게 씌어진 것을 발표하는 사례가 흔하게 되었다.   윤석중, 강소천, 박목월이 표현 기법이 쉬운 시를 보여 주지만, 결코 쉽게 씌어진 작품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오랜 동안에 걸쳐 깊은 사유 끝에 어렵게 씌어진 작품들이다. '기찻길 옆에서 잘도 자는 아이'나,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닭'이나, '얼룩송아지'가 쉽게 창작된 것이라 본다면 이는 잘못된 감상이다.   아이들 가슴은 유리병처럼 투명한가? 아니다. 그것은 인형이나 유리 모형에서나 그렇다. 아이들 가슴에도 가늘고 여린 심상이 차 있고, 때로는 그것이 얽히기도 한다. 이것이 그들의 고민이다.   우리가 숨 쉬는데 필요한 공기는,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똑같은 신선한 공기이다. 이와 다르지 않게,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나이에 따른 고민이 다 있게 마련이다. 그렇건만, 아이에겐 고민이 없고 있다면 장난스러운 생각만 있으리라는 일방 통행적인 사고 방식, 이런 사고 방식의 소유자들 안목 탓에 동시가 혼란에 빠진다.   '아이에겐 고민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런 것을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을 작품에 담을 필요가 없으니, 아이들 생각 그대로를 옮겨 쓰면 된다.' 이런 안목에서 아이들 입에 붙은 표현으로 어렵지 않게 옮겨지는데, 다시 말하면 쉽게 씌어지게 된다.   '어린이가 읽는 시에 왜 그리고 어째서 표현 기교를 도입하라는 것이냐'가 쉽게 써내는 사람들의 항변이다. 고민 없이 자란 사람만이 (자신의 유년기나 청소년기를 준거하여) 이런 항변을 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메마른 (유년기·청소년기를 거친) 정서 결핍의 성장 과정을 지닌 사람, 이들이 문단 등단 절차를 쉽게 마치면 아이동(童) 글자 '동'자에 집착하여 쉽게 써내는 버릇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소급하여 따지면, 동시라는 어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동(童)자를 시 앞에다 접두어(接頭語)로 붙인 것이 원죄가 되는 것이다.   3   사람에겐 대체로 12∼15살이 빠른 성장기다. 이는 눈에 보이므로 이런 의학 상식을 수긍한다. 그런데 심성 발달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빠른 성숙 시기가 있다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므로) 수긍하려 하지 않는 편이다.   정서 발달 기간에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문인으로 양산(量産)되면, 그 원천적 정서 결핍 때문에 작품에 담아내야 할 내면 정서에 약하거나,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표현 기법에 서툴 수밖에 없다.   육체의 성장기에 필요 영양이 충분치 못하여 체격이 작게 굳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성의 성숙기에 감성 훈련이 충분치 못했다면 자신의 정서 결핍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 표현 기법에 서툴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시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해야 마땅하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도 불덩어리 무쇠 두드리는 연마를 어깨 팔뚝이 부풀도록 거쳐야 쟁이가 된다. 그런데 '아이들 생각'을 단순하게 글자로 바꿔 놓으면 동시가 되는 줄 알고, 붕어빵 찍어내듯 아이들 생각을 찍어내는 형편이니,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읽는이에게 감동을 주겠는가.   시 공부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등단 절차를 마친 사람들 가운데, 교직자 출신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매우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그들에겐 오랜 동안 아이들의 글짓기 지도를 해온 경험이 있는데, 이 지도 경험을 시 공부라고 착각한다. 아이들이 써내는 '아동시'와 그리고 시인이 창작하는 '동시'에는, 인생을 살아본 만큼의 차이가 있다. 아동시와 그리고 동시와의 차이를 식별 못하고, 글쓰기 지도의 '실제 경험'만으로 등단 절차를 마쳤기에, 표현 기법의 기교를 모르는 것이다. 기교는 기술의 문제이다. 모자라면 연마해야 한다.   4   시는 고민이 익히는 열매다. 동시도 시이므로 다르지 않다. 햇살 없이 익는 열매 없고 고민 않고 완성되는 작품 없다. '아이들이 읽는 것인데 왜 고민해?' 이런 사고 방식이 바로 맹물 같은 작품들 생산의 주범이다. 동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말은 자기 옹호이거나 변명이다.   아동문학은 인간학(人間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기초 인간학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주장한 바 있다. 필자의 주장이다. '아이들이 읽는 글을 쓰는데 왜 고민을 해야만 하느냐? 이런 편견이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위상을 높이지 못하고 지금의 수준에 붙잡아 매놓고 있는 첫째 원인이다.   아동문학가라는 명함을 내밀고 인사를 나눠 보라.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가. 이것이 우리가 받고 있는 사회 대접이 아닌가. 아동문학가의 의식에서 하루빨리 아이동(童)자를 지워야 옳다. 그래야 작품에 인간의 문제가 담길 수 있고, 아이동(童)자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작품성 높고 완성도 치밀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초롱에 든 새는 날지 못하며, 의식에 구애된 사고는 장애를 못 벗는다.   어린이가 읽어서 감동할 작품 수준이면 할아버지·할머니가 읽어도 감동한다. 역(逆)도 진(眞)이라는 말은 수학에서만 통하는 한마디가 아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읽어서 감동할 작품이면 어린이가 읽어도 당연히 감동한다.   어른이 읽어서 맹물로 치면, 어린이에게도 맹물이고, 어른이 읽어서 유치하면 어린이에게도 유치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 아는 프랑스의 단편 '별'이나 '곡예사', 쌩키비치의 '등대지기', 황순원의 '소나기'는 어른이나 어린이에게나 똑같은 감동을 안겨 주는 작품의 예이다. 감동을 전달하는 정서 매체는 같아서 시, 동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문학은 혼자 하는 작업이다. 시에 대한 공부도 혼자 하는 일이다. 좋은 동시 곧 감동을 주는 동시도 혼자 쓰는 것이다. 혼자 하되, 앞서 살다간 국내외의 문인들 작품을 읽으면서 '뒤따르지 말아야 할 점을 밝혀가며 읽는' 이런 독서가 핑요하다.   시에 대한 공부를 하여도 인접 학문 분야에까지 폭넓게 읽어야 사고의 바탕이 넓어지고 보편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 밑줄 쳐 놓았다가 자신을 위해서 해 둔 한마디처럼 인용하는, 주(註)도 달지 않고 슬쩍 옮겨 쓰는, 그런 독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인격을 해치는 결과만 얻는다.   만일 독해력(讀解力)의 문제에 걸려서 그것이 안 된다면, 차라리 수도승이나 수도사처럼 벽을 보고 앉아 묵상하는 것이 훨씬 나은 시 공부가 되리라. 왜냐하면 문학은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서 결국엔 인간학에 귀결되듯, 동시 공부 역시 기초 인간학의 탐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장난감인 색색의 레고를 맞추듯이 써내는 동시는 말장난이므로 어린이에게 재미는 줄 수 있으되 그러나 감동은 주지 못한다. 어린이가 자라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감동, 이는 자라는 가슴에 심겨진 보석과 같다. 그래서 오래 간직될 수 있다.   말장난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허황된 것일 뿐, 결코 가치 있는 꿈일 수 없다. 감동을 읽는이 가슴에 옮겨 주는 표현 기법은, 말장난처럼 뜯어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심겨지는 씨앗처럼 자리하는 것이다.   씨앗처럼 자리하는 것은, 생각이 담긴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는 것이다. 이는 넓은 사고 깊은 사유의 어망(漁網)으로만 건져 올려지는, 비늘이 번쩍이는 싱싱한 물고기와 다름없는 메시지다. 그런데 떨어진 비늘 조각을 모아 붙여 펄펄 뛰는 물고기를 만들 수 있는가.   감동을 주는 작품은, 인간의 문제나 어린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서 노인에게까지 감동을 전한다. 그러하건만 '어린이가 읽는 글에 왜 고민이 필요해?' 라고 말하는 이가 아직도 많다. (2006년 가을『오늘의 동시문학』제15호)   동시 창작론 ⑮ 童詩의 形式 유 경 환     1. 압축의 묘미   아동문학 이론서의 '동시'편에 보면 동시의 형식이 맨 앞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의도적으로 이 글의 마지막 편으로 미루어 왔다. 왜냐하면, 동시 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론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수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을 하지 않는 이론가들은, 동시의 형식을 맨 먼저 다루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창작을 하는 나는, 동시의 형식은 맨 뒤에 마무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동시가 어떤 운문인가를 알고 나면, 그 형식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 수밖에 없다.   2. 의미의 압축   줄글(산문)을 엿가락 자르듯 뚝 뚝 끊어서 서너 줄로 나눠 놓으면, 과연 동시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라고 누구나 대답할 것이다. 줄글을 뚝 뚝 잘라놓아도 동시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줄글과 동시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줄글과 동시, 이것은 산문과 운문이라는 형식에서만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동시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생각을 거꾸로 돌려보자.   우리는 한 편의 동시를 가지고 원고지 20장이나 30장 정도의 긴 줄글을 만들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암시하는 말일까. 동시는 줄글을 줄여서 만들 수 있다는, 그런 말이다.   기나긴 강물처럼 구비구비 긴 줄글을 단 몇 줄의 짧은 글로 줄여 놓은 것이 동시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시는 압축의 묘미를 지닌다. 줄이고 또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의미를 구겨넣는, 그 결과 깊은 뜻을 숨겨 지니게 되는, 그런 압축의 기술을 요구한다.   의미의 묘미를 얻으려 하는 압축에는, 단순한 길이의 압축만이 아니라 내용의 압축까지 들어간다. (이것을 흔히 양(量)의 압축과 질(質)의 압축이라고 말한다.) 줄이고 또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구겨넣은 의미를 놓고 우리는 함축된 의미라고 말한다.   함축된 의미를 풍기려면, 한 가지 뜻만 지닌 낱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복합적으로 지닌 낱말을 골라 써야 한다. 여러 가지 뜻을 이중 삼중적으로 지닌 낱말은, 흔히 비유나 상징에서 선택되는 낱말들이다. 비유나 상징을 써서 뜻을 압축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곧 질의 압축이 되는 것이다.   '동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이름난 시인이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의 이름을 오래 전에 읽어서 잊엇기에 못 밝히는 것임) 동시에서는 일반시에 비해 비유나 상징을 덜 쓰는 편이거나, 쓴다 하여도 그 농도가 엷은 비유나 상징을 쓰는 편이므로 '말하는 그림'이라는 한마디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동시를 쓰고자 할 때, 사물의 모양이 비슷한 것들이나 또는 성질이 비슷한 것들을 비교해 가면서 간접적 비유를 통해 두 가지를 한 가지로 묘사하는 것이 곧 시 쓰기의 기술이다. 이 기술을 드러내지 않고자 토막 토막 끊어서 배열하거나 또는 장작을 포개 쌓듯이 짧게 포개는 것이다.   3. 「말의 그릇」 빚기   원래 낱말은 한 개의 사물을 대신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에 시어로 쓰일 경우엔 달라진다. 시어로 선택되어 시 속에 쓰여지면, 낱말은 기호 이상의 뜻을 스스로 품게 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뜻까지 얹어 지니게 된다. 이런 신비스러운 일이 시를 쓰는 일에선 일어난다.   시에 쓰이는 하나의 낱말은, 그 다음에 오는 낱말과의 만남을 통해 낱말이 본래 지니고 있던 뜻과는 다른 뜻을 새롭게 풍기게 된다. 이것이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그 원리(原理)이다.   누구나 다 쓰는 말을 가지고 시인은 좀 유별난 뜻이 담기는 말의 그릇을 빚어낸다. 이 한마디 말에서 시의 본질(本質)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쓰는 말로 엮어지되, 누구나 쉽게 짐작하는 것과는 다른, 별난 의도를 담아내는 「말의 그릇」이 곧 시요 동시인 것이다.   시인은 「말의 그릇」을 빚기 위해서 낱말을 가지고 말의 순서인 어순(語順)을 바꿔놓거나 뒤집어 놓거나, 또는 비유되는 낱말을 대입(代入)하는 그런 기교를 부려서 말의 그릇을 빚어내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냥 줄글이 아닌 토막난 글의 형식이 나타나게 된다.   시인은 또 말의 그릇을 빚기 위해서 줄글에서와는 달리, 일반 문장의 서술법을 무시하기 일쑤이다. 일반 문장에서의 서술법대로 쓰지 아니하고, 주어와 동사의 자리를 바꾸는 도치법(倒置法) 따위의 여러 기교를 부려 형식의 묘미를 얻어내는가 하면, 아예 있어야 할 주어나 동사 따위를 아주 생략해버리는 기교를 다반사(茶飯事)로 즐겨 쓴다.   그런데 동시도 시인 만큼, 시에서처럼 동시에서도 율(律)과 운(韻)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런 까닭에 길이를 압축하여 의미를 함축시키되, 율과 운이 어긋나지 않고 서로 아물려지도록 '말의 정서적 기능'을 살려내는 작업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말로 빚는 그릇이라고 앞서 말하였다. 사발엔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고 접시엔 무엇인가를 얹어 놓을 수만 있다. 접시엔 담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깊이가 없어 주르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국물은 흘러내려 건더기만 얹을 수 있는 접시와, 그리고 옴폭한 깊이가 있어 국물까지 담을 수 있는 사발, 이것은 동시의 형식에서도 좋은 비유일 수 있다.   접시 모양의 동시에선 이야기만 얹을 수 있으나 시상(詩想)까지 고이게 하지 못한다. 요즘 엿가락처럼 재미있게 늘여가다 뚝 뚝 끊어내는 동시의 형식은, 접시 모양일까 사발 모양일까? 참신한 소재를 발견하여 그것을 이야기식으로 길게 전개한다지만, 시상이 결여되면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말은 본래부터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뜻과, 그리고 함께 스스로 지니고 있는 음향적 리듬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 뒷것을 일컬어 말의 정서적 기능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말의 정서적 기능을 아주 잘 활용하여 시를 쓴 시인으로 김소월을 들 수 있다. 또 윤동주도 들 수 있으되, 정서적 기능에 가장 먼저 눈길을 둔 이는 역시 김소월이다.   이런 까닭으로 위의 두 시인은 오래도록 독자들 입술에 오르내리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율과 운을 잘 살려가며 작품을 쓴 시인들이라 하겠다. 이렇듯, 동시의 형식에는 율과 운을 잘 살려내는 특별한 관심까지 요구된다.   동시 쓰기는 또 말의 의미적 기능과 그리고 정서적 기능, 이 두 가지를 읽기 좋게 배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읽기 좋게, 보기 좋게 배열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힘들고 괴로운 작업이다.   4. 마음눈이 읽어내는 시심   시인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작품을 이루는 몇 줄의 글 속에다 감추어 놓고, 시어로 선택한 낱말들이 은근히 그 속뜻을 겉으로 드러내도록, 그렇게 시치미 떼고 유도하는 일을 저지르기 일쑤이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아주 고약한(?) 짓이지만, 시를 읽히도록 어떤 형식의 틀 안에 집어넣기 위한 전략에서는, 매우 묘한 술책으로 볼 수도 있다.   나뭇잎들이 서로 좁건 넓건 거리를 두고 어울려야 비로소 한 그루의 나무로 보인다. 나무라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무로 인식하는데, 나뭇잎들의 어울림은 대단히 중요한 일몫을 하는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낱말들이 서로 상관(相關)된 거리를 나눠 갖고 만나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틀지어진다. 여기에 거리를 두고 어울리는 상관된 거리가 충분히 갖춰진, 그런 결과로 시의 형식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얼굴눈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음눈으로 살피면 어느 정도 본질 테두리를 알아 볼 수 있다. 동시도 마음눈으로 사물을 살필 때에 시심을 찾아낼 수 있으며, 마음눈으로 읽어야 그 시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아주 좋은 시는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언어라고 하겠다.' 이는 에즈라 파운드(1885~1972)라는 시인이 남긴 말이다. 좋은 동시 또한 최대한의 의미를 함축한 작품일 때에 무한한 암시력을 풍길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말을 놓고 재해석하자면, 좋은 동시는 극한적으로 압축되고 생략되어 더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여졌으나, 그 대신 지니는 속뜻은 최대한으로 늘일 수 있는 그런 시 작품이다.   모르는 사람 없을 만큼 알려진 영국 시인 엘리옷은 이런 말을 남겼다.   '시에 대한 정의(定義)의 역사는 곧 오류의 역사이다.' 시를 놓고 여러 사람들이 내린 온갖 정의를 다 모으면 모을수록 잘못의 길이만 길게 늘어날 뿐이라는 말이다. '시란 …… 무엇이다.'라고 정의한 것을 모두 다 모아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시의 본질을 완벽하게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시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은 필요 없는 것이다. 시는 그냥 시일 뿐이다. 우리 나라 어느 스님의 말(법어)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다를 것이 없다.   아주 넓게 보면, 어떤 형식이든  시라고 써내는 것들은 모두 시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외우고 싶을 만큼 좋은 시나 좋은 동시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요즘 한 방송사의 지구 탐험대가 찍어오는 필름을 보면, 아랫입술을 뚫어 작은 접시 모양의 물건을 끼워넣어야 미녀라 여기는, 그런 검은 색 피부의 여인들이 오늘날에도 살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구태여 우리가 바꿔 주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동시의 형식, 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보고자 한다. 다만, 요즘 동시의 형식을 길게 늘이는 그들의 그 인식에 대해, 그들 스스로 신중하게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일깨월 줄 수 있을지 문제라 여긴다.   아름다움 또는 미(美)에 대한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므로 누가 상관할 일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도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보는 것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5. 유치원 원아에 들려줄 동화처럼?   하루살이가 내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흔히 말해 왔다. 매미들이 다음해 여름을 어떻게 알겠느냐고도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의 가설(假說)일 뿐이다. 유충으로 있을 동안 '선택적 입력'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사람의 판단과는 달리, 땅 속에 7년 있는 동안, 7년 전의 정보가 계속 보전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이 정도가 아니도록 경이롭다. 그 놀라움의 두 가지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1백살 정도밖에 못 사는 사람이, 빛이 1년 동안 달리는 거리를 생각하여 '1광년'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그 후손에게 3천억 광년 밖에 있는 은하계를 그려볼 수 있게 머리를 물려 주고 있다.   그뿐이랴. 몸 안에 퍼져 있는 핏줄 속으로 달리는 마이크로 로봇을 만들고 렌즈를 달아 몸 속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를 찾아내는 진단을 하고 있다. 우주의 넓이와 크기를 알아내는 머리와 그리고 핏줄 속의 로봇을 만드는 나노기술의 머리가 오늘날 사람의 두뇌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이런 두뇌만이 꼭 있어야 할 것들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또 있어야 할 두뇌도 있다. 그것은 어떤 두뇌인가?   봄 여름 가을, 세 철을 알아낸 나뭇잎 그 맨 밑에 달리는 아침이슬에 찬란히 첫 햇살이 닿을 때의 순간적인 눈부심을, 동시로 표현하는 동시 쓰기의 능력 또한 위에 두 가지 어느 것 못지 않게 가치 있는 두뇌가 아닌가? 카메라 렌즈가 잡아내는 모습,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 주는 한 편의 동시를 창작하는데, 여기 무슨 형식이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창작(創作, Creation)이다. 이미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하는 것을 되풀이하면 그것은 창작이 아니고 다만 오락(Re+cre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예술의 장르에서도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이며, 문학 장르 안에서 동시 쓰기에서도 또한 같다. 동시 쓰기에서의 창작은, 소재의 발견이나 소재의 선택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의 개발에서도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동시의 형식도 그 전과 같지 않고 달라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줄글을 엿가락 뚝 뚝 잘라 적당한 길이로 장작 포개 쌓듯 배열하는, 요즘의 그 길어진 형식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자. 산문시(散文詩)도 아니고, 산문시의 형식을 따라 (요즘 일반적으로 성인시가 길어졌듯이) 길게 늘여가며 율도 운도 무시한 채, (마치 유치원 원아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처럼) 적당히 끊어서 줄 바꿔 쓰는 요즘 동시의 형식은 ① 그래야만 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으로서의 까닭을 그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② (독자들에게) 설명할 정서 논리를 그렇게 쓰는 까닭이 지니고 있는 것일까 ③ 과연 독자들은 그런 작품에서 어느 정도 「감동」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도움이 되는 글을 누군가에게서 받고 싶다.  출처  ㅡ 허동인 동시감상교실 
1663    동시 창작론 / 신현득 댓글:  조회:4093  추천:0  2016-10-16
동시 창작법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동시가 어떻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사범학교 출신이지만 그 때 어느 곳에서나 다 그랬듯이 아동문학이란 말은 조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졸업했다. 간혹 동화란 말은 들었지만 동시란 말은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학장 시절 나도 남만 못지 않은 문학 지망생이었다. 시(詩)도 쓰고 소설도 습작을 했다. 이 중 소설은 그 뒤 지방의 작은 규모의 현상 모집에서 뽑히기까지 했으니 약간은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것을 씁네 하고 제법 우쭐거리기도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곧 교사로 부임을 하게 됐는데 마침 도내(道內)의 무슨 글짓기 행사가 있어 글짓기 지도를 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목은 동요·동시·산문이었다. 나는 이 때 처음 동시라는 말을 들었다. 동요는 알고 있었지만, 동시란 말을 처음 들은 나는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봤다.   「동요가 4·4조 7·5조 등의 정형시이니 동시는 아마 어린이들이 읽을 자유시를 말할 것이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내 생각대로 아이들을 지도해 간 것이 도내 행사에서 3등이란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뒤 그 때 씌어진 아동작품이 모두 지상에 발표되었는데 아이들이 쓴 글은 동요는 없고 모두 동시뿐이었다. 그러자 동시 동요의 구별없이 통틀어 상을 주고 만 것이다.   그 때부터 아동들의 운문은 동시가 되었고 동요는 이들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단계가 되었다. 이것이 1955∼6년 때의 일이다.   동요가 아이들의 글짓기에서 사라지게 되기까지는 이상의 과정들을 겪었다. 아마 아동들에게는 자유스런 표현이 가능한 동시보다는 동요가 더 구속적이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을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아직도 신춘문예는 동요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요를 응모하는 사람이 없어서 뽑히는 것은 모두 동시뿐이었다. 동요 모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동시를 당선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신춘문예에서도 동시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이것이 60년대의 초기다. 이런 모든 것이 동요와 동시의 미분화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이상의 이야기에서처럼 동시는 동요에 맞서는 아동문학의 장르로 동요가 정형시인데 반해 동시는 자유시의 한 형태이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나라에서 동시만을 전공하는 사람이 백 명이 넘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해도 동시는 개척 단계여서 지금 손꼽을 수 있는 아동문학의 대가급 외엔 없었다.   물론 아동문학과 글짓기 지도는 별개의 것이며, 전자가 창작 행위인데 비해 후자는 하나의 교육 활동이지만, 어쨌든 나는 나의 아동문학에 접한 코오스가 아동작문이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동들을 지도하면서 나도 아이들처럼 이런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지도하는 일은 되는데 내가 글을 쓰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던 것을 지금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습작기에서 애를 태우고 있는 아동문학 지망생들을 선험자(先驗者)로서 동정을 하면서 격려하고 싶다.   나는 하루종일 작품을 생각하다가 지쳐서 저녁이면 술을 들이키곤 했다. 괴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빠꼼 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스무 글자가 되지 않는 이 작품은 이런 피나는 작업 긑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69년도 조선일보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그와 같은 힘을 들였던가 싶은 마음뿐이다. 이 작품의 짜임새나 깊이가 뭐 대단하지 못한데도 실망이 되지만 지금 같으면 단 몇 시간만에 써버릴 것을 몇 달을 두고 머리를 짜내던 일이 우습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 때 나에게는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창호지로 바른 문을 뚫는 것이다. 어느 아이나 그런 버릇이 있다. 곧잘 손가락을 내밀어 구멍을 뚫는다.   아이가 있는 집이면 으레 문구멍이 있다. 문구멍이 없는 집처럼 서글픈 집은 없다. 자식이 흔하지 않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문구멍을 뚫을 때마다 아이에게 야단을 쳤다. 셋방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구멍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문구멍의 높이와 아이의 키와의 관계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상당히 긴 시를 썼다고 기억이 된다. 그러다가 그것을 줄이고 줄인 끝에 남은 것이 이 열여덟 개의 글자였다.   나는 이 열여덟 자의 동시를 완성하고   「길이가 너무 짧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내는 작품 가운데 별반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끼워 넣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것이 가작에 뽑힌 것이다. 이리하여 내 이름 석 자가 신문에 발표되었다.   작품을 써 놓고   「왜 이렇게도 뭇난이 작품을 썼을까?」   「참 할 수 없어.」 하고 부족을 느끼는 이들은 이제 안심해도 될 것이다.   나는 1961년 첫 동시집 을 냈다. 7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4·6판의 작은 책이다. 내가 고백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집의 체재가 못되고 책이 얇다는 말이 아니다. 못난이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뽕잎이 핍니다. 뽕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아까시아 잎이 핍니다. 아까시아 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이라는 작품이다. 어떤 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사 이 작품이 객관성이 없는 표현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었다. 내딴은 뽕잎이 피면서 누에의 입맛을 생각하고 아까시아가 피면서 아까시아를 가장 즐기는 토끼의 입맛을 생각하는 내용을 그려낸다고 쓴 작품이다. 그런데 그 표현 수법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밖에도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읽어봐도 괜찮다 느껴지는 것도 더러 있다. 까만 아기 눈 속 샘 그림자. 조그만 샘 속에 엄마 그림자. 그림자 덮고 잠이 들면 그림자 살아서 꿈이 되지요. 꿈 속에서 엄마와 뛰어다니면 찰방찰방 잔물결이 일어나지요.   이 작품은 제법 시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역시 표현들이 분명하지 못하다. 그것은 끝연에 가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이 변변치 못한 작품을 쓰기 위해 땀을 흘렸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기의 눈 속에 내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 그림자를 엄마 그림자로 바꾸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기눈의 그림자가 어쩌면 옹달샘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는 데서 이런 시를 잡은 것이다.   어쨌든 힘드는 작업이었다.   「작품이 잘 씌어지지 않는다. 왜 이렇게도 잘 되지 않는가」 하고 자신을 투덜대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안심해도 될 것이다. 아가씨가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뒷밭에 목화씨가 베짜는 장단에 싹이 틉니다. 한 눈. 한 눈. 또 한 눈……. 뒷밭에는 하룻밤 사이에 목화꽃이 소복이 나왔습니다. 목화싹은 베짜는 장단에 쑤욱쑤욱 키가 컸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잎이 돋고 가지가 나고, 베짜는 장단에 꽃망아리를 맺고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아름다운 꽃밭이 되었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뚝뚝 꽃이 지고 베짜는 장단에 복숭아 같은 다래가 열고 다래가 벌어 목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하얀 솜밭이 되었습니다.   의 전문이다.   산문시 목화밭을 쓰기 위해서도 힘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첫째는 베틀 소리에 맞추어 목화싹이 트고 목화꽃이 피고 목화송이가 피도록 하는 일이었고, 그보다도 힘이 든 것은 목화밭을 베틀 가까이로 끌어들이는 작업이었다. 두 번째의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이 산문시는 절반의 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실 목화밭을 들판 가운데 두고서는 이 시의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목화밭을 집뒤로 끌어온 것이다. 이것이 아직 그 당시의 내 사고력으로서는 큰 작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목화밭을 집뒤에 두고 나니 베짜는 소리에 목화가 크도록 하는 일은 쉽게 진행되었고 베틀 소리에 싹이 트는 일, 꽃 피는 일 등을 적당한 대구(對句)로 만들어 행(行)을 잡음으로써 시각적(視覺的) 효과도 노릴 수가 있었다. (1978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9호)   동시 창작법 ②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가 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이 노래의 「땡땡 친다」는 어법에 맞지 않다 해서 지금은 「땡땡땡」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첫 행에서 「땡땡」을 빼버리면 「학교 종이 친다」가 된다. 「종이 친다」는 「글씨가 쓴다」「옷이 입는다」「공이 친다」와 마찬가지로 문법적인 모순이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동시가 얼마든지 있다. 이 동요를 지은이도 처음 그 문장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글이 되었고 그것이 작곡되어 상당히 오랜 동안 어린이들 입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시처럼 어법을 따지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동시는 더욱이 그렇게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되는 것이다.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라는 이 동요는 교육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권한다면 도의 교육이 어떻게 되겠는가? 어른을, 특히 나이 많은 할아버지를 놀리는 것이 되고 만다.   도의를 범하는 것이 아동문학일 수는 없다. 아동문학은 교육과 문학의 중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교육이 되지 않는 문학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따위의 글은 동요뿐만 아니라 어느 노래의 가사로도 좋은 것이 아니다.   섹스를 동원할 수 없는 게 아동문학이라고 한다. 섹스가 꼭 비도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린이들은 아직 섹스가 그들의 생활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아동문학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   이런 도덕 문제나 섹스 문제를 생각지 않고 씌어진 아동문학 작품이 눈에 띄기도 하는 것이다. 땅 속엔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손가락으로 쏘옥 올려미나 봐 쏘옥 모란꽃 새싹이 나온다.   이 아동시는 조금 전까지도 교과서에 실려 전국 어린이들의 본보기 글이 되어 주었다. 땅속에다 손가락을 두고 봄날 돋아나는 새싹의 광경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모순이 있다. 모란싹은 땅 속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모란의 가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모순을 처음 발견해낸 사람은 시인 박목월씨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아무리 착상을 잘 잡은 글이라해도 내용에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는 작품이 되지 않는다.   이런 보기는 얼마든지 있다.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병아리가 놀던 곳은 무논 가운데가 아니다. 그런데 미나리는 미나리논 같은 물이 고인 데서 싹을 틔운다. 물론 마른 땅에서 미나리가 돋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보편성이 없다. 보편성이 없는 경우는 작품에서 피하는 것이 좋다.   언젠가 나는 백두산 천지에 대해서 재미나는 걸 생각햇다. 천지의 물이 그 넓은 호수에 하나 가득 괴자면 얼마나 깊은 땅밑에서부터 많은 물이 솟았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백두산의 뿌리쯤 되는 깊이에서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퍽 재미가 있었다.   이 물이 백두산에 고여 있다가 압록강 두만강이 돼 흐르는 것이다. 이 때 호수의 물은 절반씩 나뉘어서 서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얘, 너는 압록강물 되어라. 나는 두만강물 될께.」   「그래 그래 지금부터 작별이야. 그렇지만 바다에서 만나게 될걸.」   나는 이렇게 천지의 물이 압록강 두만강의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는 장면을 생각했다.   나는 이런 착상이 좋은 시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며칠 밤이나 시를 낳느라 끙끙거렸다. 하나의 물줄기로 같이 솟아서 너는 압록강 나는 두만강 나뉘어져 흐르는데 손 흔들며 헤어지지만 너른 바다에서는 다시 하나가 돼 만날 걸.   나는 며칠만에 이런 낱귀절 몇을 생각하고 더 다듬어 보면 대작이 되리라는 기대를 해봤다.   그렇지만 확인을 해야 한다. 정말 압록강 두만강이 천지에서 흐르는가? 그 때 어느 교과서에 그렇게 배운 듯하고 학교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확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온갖 서적을 다 뒤진 결과 천지에서 흐르는 것은 엉뚱하게도 송화강(松花江) 하나뿐이었다. 백두산에 오른 등정기(登頂記)를 읽어봐도 역시 그러했다.   실망은 컸지만 다행이었다. 이것을 잘못 알고 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나중에 얼마나 웃음거리가 됐을까?   결국 이렇게 해서 이 엉터리 작품은 폐기가 되고 말았다. 비가 돼 내리면서 내려다봤네. 하나의 반도가 젖고 있네. 산맥이 젖고 있네. 총부리가 젖네. 나의 한 끝은 벌써 강을 이루며 긴 구비를 돌아 바다로 흐르고 있네. 저쪽 영상강으로도 흐르고 있네. 도롱이를 쓴 농부들이 논둑을 걷고 있네. 틀림없는 같은 나라 사람이 걷고 있네. 시들었던 땅이 푸르게 일어서네. 백두산 천지가, 작은 그릇이 나를 받아 모으네. 송화강으로 나를 쏟아 보내고 있네. 저쪽에서도 한라산이 백록담이란 그릇을 들고 방울방울 나를 받아 모으네.   이 시는 동시라는 이름으로 지난 여름 『소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은 였다.   이 시의 내용에서 는 구름이다. 구름인 가 비가 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표현으로 봐서는 구름이 백두산 한라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이에 떠 있다. 이것은 인공위성 정도의 높이에 있어야 한다. 도대체 그런 소나기 구름이 있을 수 있는가? 사실은 한 고장을 내려다볼 만한 높이의 구름도 잘 있을 것 같지 않다.   시는 허풍이며 거짓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치에 맞는 거짓말이어야 한다. 그런 점으로 봐서 이 시는 단단히 얻어맞아야 하고 그 책임은 지은이인 필자가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이 엉터리 글을 발표한 것은 이 시를 낳기까지의 수고와 이 시에 담긴 나의 염원 같은 것이 아까워서였던 것이다. (1978. 10. 『아동문학평론』 제10호)   동시 창작법 ③ 철저히 의인(擬人)을 하라 신 현 득   ―연필이 말을 한다   거짓말이다.   ―이슬비가 속삭인다   거짓말이다.   ―나무가 생각한다   거짓말이다.   연필이 말을 한다든가, 이슬비가 속삭인다든가, 나무가 생각한다든가, 모두가 거짓말이다. 그러나 시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느껴지기를 바라다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 해도 느껴지는 것이다. 이 때 온 세상 자연과 자연스런 대화가 될 때, 참 편안하게 앉아서 쉽게 시를 쓸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 좋다.   ―사람만이 생각한다.   ―사람만이 말을 한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는 생각이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생각인 동시에 차별하는 생각이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저런 나무보다는 낫다. 훌륭하다.    ―그러니 저까짓 나뭇가지 하나쯤 꺾으면 어떠랴.   이런 생각이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생각이요 차별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발전하면「나만 제일이다」하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이웃과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나만 편하고 배 부르고 잘 견디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이런 생각이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   ―남도 나와 똑같으리라.   이것이 시를 낳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남도 나와 같이 배고프리라. 남도 나와 같이 괴롭고 아프리라.   이런 생각을 하고 보면 세상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나와 같이 생각한다. 나와 같이 말을 하리라. 나와 같이 그도 나를 사랑하리라.   이런 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생각이다. 모든 것은 나와 똑같다. 모든 것은 나와 평등하다는 생각이다.   ―연필이 말을 한다.   이 생각은 바로 연필이 나와 똑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필이 나와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 연필이 말을 한다는 건 거짓으로 들리게 된다.   ―이슬비가 속삭인다.   이런 생각도 그렇다. 이슬비가 나와 똑같은 생각과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모든 걸 하나로 본 것이다.   ―나무가 생각한다.   역시 그렇다. 나무와 나를 하나로 생각지 않고는 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든 걸 하나로 보는 눈」   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하나로 생각하자. 나무에는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무의 팔이다.   하나로 생각하자. 나무의 가지에는 꽃이 피어 있다. 그것은 나무의 팔에 달린 꽃이다. 꽃은 자라서 열매가 된다. 그것은 나무의 팔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나무가 과일을 들고 있다고 표현한다.   ―나무는 들고 있네     조롱조롱 열린 과일   그렇게 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나무는 그 많은 과일을 들고, 낑낑거리네.   이렇게 생각해 봐도 재미있다.   어쨌든 가지가 나무의 팔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손에 과일을 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나무는 과일을 많이 익혀서 들었을 때 어떻게 할까?   『얘, 이거 하나 먹어 봐.』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동무의 손에 과일 하나쯤을 던져 줄 것이다. 나무도 그럴까? 그렇고 말고. 여기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을에 빨간 감을 많이 익혔다. 여기 또 사과나무가 있다. 가지에 사과가 잘 익은 사과가 달려 있다. 어떻게 할까?   돌각담 너머로   감나무 긴 팔이   감 한 개 들고   아가 손에 와 닿는다.   ―이거 내가 익힌 거야   맛 좀 봐.   탱자 울타리 밖으로   사과나무도   아기 손에   사과 한 개 놓아주면서   ―이거 내가 익힌 거야   맛 좀 봐 줘.   이건「가을」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이다. 재미있다.   가을이다. 가을에 감나무도 사과나무도 열매를 익혔다. 익혀서 그냥 떨어뜨리고 마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 줄까? 같은 값이면 예쁘고 착한 아이에게 더 많이 줘야지.」   이런 생각에서 과일나무들은 과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참 재미있고 평화스러운 광경이다.     대추나무   돌각담 위에   가지를 얹고   마당 끝에 서서   대추나무가   오롱조롱   가지에   대추를 달고   꼬마들이 모이기를   기다립니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주면   마당 끝에 서서   대추나무가   빨간 대추   하나 둘   던져 주면서   어서어서 주워 가라   손짓합니다.   이 글은「대추나무」라는 동요다. 여기서도 나무의 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린다. 소리를 내면서 흔들린다. 그런데 정말 흔들리는 걸까? 모든 건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만 생각하자. 바람이 분다고 흔들려본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았을 테지. 그러니까 그건 대번에 알 수 있다.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몸을 흔드는 거로군.   그런데 자기 몸을 자기가 흔들 때는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틀림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나 보다.   시인이면 누구나 나무가 흔드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재미있다. 다음의 시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자.     몸짓   말로는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어요   몸짓을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아   그 많은 잎을 흔들어 댈까요?   나무는   가지마다 꽃을 단 날은   얼마나 자랑이 하고 싶을까요?   몸이라도 흔들어   보여야지요.   나무를 관찰하는 김에 다시 나무의 가지를 바라보자. 나뭇가지에는 새가 집을 짓는다. 새둥지 안에는 새새끼가 자란다. 이 때 나무가 흔들리는 건 바로 새새끼를 잠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시인은 쉽게 알아낸다.   엄마 까치   아빠 까치   일터에 가고   둥지 속 새끼 까치   누가 봐 주나?   나무가   흔들흔들   흔들어 주어   둥지 속 새끼 까치   낮잠 들었다.   이 글은「까치 둥지」라는 동요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까치 새끼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뜻에서 씌어진 글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을 보거든 우선 이런 생각을 하자.   ―내가 이 나무라면?   ―내가 이 꽃이라면?   ―내가 이 방아깨비라면?   ―내가 이 돌멩이라면?   이렇게 해서 습관이 되면 무엇을 보든지 우선 이런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꽃송이가 돼 나뭇가지에 열려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아주 꽃송이로 나무에 열렸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꽃송이가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예쁘다고 모두 쳐다보는군.   ―벌과 나비가 나를 향해 모여드는군.   벌써 시가 되었다.     꽃송이   지나는 사람마다   쳐다보네.   벌과 나비가   모여드는군.   다음은 방아개비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아주 작은 방아개비가 된 것이다.   돌멩이가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자. 아주 돌멩이가 되었을 때의 광경을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국사의 층계다리   누구의 발이나   한 번은   불국사 올라가는   층계 위에 놓인다.   층계는   여러 개 돌이 누워   눈을 감고서도   제 위에   그 여럿 발자국이 생기는 걸   느낀다.   발자국 위에 놓이는 신발   신발 속에 담긴   사랑의 무게.   옛날의 왕에서   옷차림과 말씨는 변했어도   그만한 사람의   무게는 같다.   발자국 위에   발자국이 놓여 지워지듯   옛 기억은   오늘의 일로 희미해지지만   온 신라를 살다 간 사람의   몸 무게를   제 안에 새겨 둔 층계는   그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돌이기 때문에 참는다.   이 시는 불국사 자하문을 올라가는 층층대인 청운교, 백운교를 놓고 지은 시이다. 물론 자기가 층층대가 되었다는 가정에서 씌어진 글이다. 층층대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누구나 불국사의 자하문 올라가는 층층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작품을 지은 동기를 말하고 있다.      (1979년 봄『아동문학평론』제11호)   동시 창작법 ④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서 들어야 신 현 득   자연의 어느 것도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자연의 어느 것도 음성(언어)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정말이다.   그래서 냇물이 속삭인다고 한다. 그래서 산들바람이 속삭인다는 말을 한다. 이슬비가 속삭인다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제대로의 음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말로 속삭여 주지 않는 것으로 들린다. 냇물은 냇물의 소리만 낸다. 산들바람은 산들바람의 소리만 낸다. 이슬비는 이슬비의 음성으로만 말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그래도 시인은 그 음성을 알아 듣는다. 이것이 시인의 특기다. 아프리카 사람의 말은 우리말로 번역해야 알아 듣는 것처럼 냇물의 말이나 산들바람의 말이나 이슬비의 말이나 모두 우리들 사람의 말로 번역을 해야 한다. 번역을 하는 것이 시인의 기술이다. 사물의 음성을 번역하는 것은 시인만이 할 수가 있다.   번역을 잘해야 한다.   엉터리 번역은 번역을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럼 냇물의 소리를 들어보자.   ―졸졸졸 졸졸졸, 졸졸졸…….   아무리 들어도 졸졸졸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번역해서 들어야 한다.   ―졸졸졸……   그 물 소리 속에는「달이 밝구나」하는 음성이 있다. 그 물소리 속에「오늘은 물레방아를 돌렸지. 참 재미있던데」하는 말이 들어 있다.「자, 우리 모두 모여서 바다로 가는 거야」하는 뜻이 들어 있다.   산들바람 소리 속에도 그렇다. 번역을 잘해야 한다.   ―귀를 간지려 줄까?   ―머리칼을 날려 줄까?   ―나뭇잎을 흔들어 보자.   ―잔디를 쓰다듬어 보자.   ―…….   이렇게 무수한 언어가 있다. 이 산들바람의 음성을 잘 번역해 들어야 한다.   이슬비의 음성도 그런 것이다.   ―박꽃에 사뿐이 앉을까?   ―아니야, 연못물에 앉아 동그라미 그려 보는 게 재미있어.   ―…….   이런 무수한 음성이다.   이런 음성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이야 참 바보같이만 느껴진다. 그런데 시인만이 이 말은 알아듣는다. 그러니, 시인만이 바보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시란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 듣는 그것이다.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 듣는 그것.   그렇다. 시는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강소천은 이슬비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 동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 이 동요의 제목을 이라 했다.   이와 같이 냇물이나 산들바람이나 이슬비는 소리를 스스로 내기 때문에 번역이 쉽다. 사람의 목소리로 번역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물소리가 나는구나」「바람 소리가 나는구나」「이슬비 내리는 소리가 나네」정도는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말 없는 돌멩이나 마른 나무 막대기 같은 것, 빈 병 같은 것, 축구공 같은 것도 음성이 있을까?   음성이 있다. 그들 나름대로 음성이 있다. 그들 나름의 말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가 실험을 해 보자. 돌멩이의 언어를 들어보기로 하자.   냇가에 가서 두 개의 자갈돌을 마주 들고 두드려 보자.   ―딱 딱!   분명히 말을 한다. 돌에게도 언어가 있다. 제대로의 음성이 있는 것이다.   ―딱 딱…….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한다. 번역을 해서 우리들 말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돌을 마주 두드려 보자.   ―딱 딱!   (나는 돌멩이다.)   ―딱 딱 딱!   (꼬마들과 공기놀이라도 하고 싶어.)   ―딱 딱 딱 딱!   (냇물에 뛰어들어 수제비라도 뜨고 싶구나.)   ―딱딱 딱딱!   (깊은 물에 퐁당 빠지고 싶어.)   돌멩이에게 계속 말을 시켜 보자. 그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를 써 보자. 그 목소리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온갖 부딪히는 소리를 다 알아듣게 된다. 까마귀 까치가 우짖는 소리쯤이야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물소리나 바람소리나 비소리나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어떤 음성으로든지 소리를 내어 주어야 그 말을 알아듣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말 남의 뜻을 잘 살피는 사람은 사람의 눈빛만 보고도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안다. 표정만 보고도 그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알아낸다.   마찬가지다.   정말 시인은 사물이 놓여 있는 모습만 보고도 그 음성을 알아듣는다.   몽당연필을 보면 몽당연필의 하소연이 들린다.   지우개 조각을 보고 지우개 조각의 하소연을 듣는다.   나팔꽃을 보고 그 꽃 속에서 쏟아지는 노래를 듣는다.     빈 화분·빈 병   화분이 빈 그릇으로   교실 구석에 놓여 있게 되자   『국화 한 포기만 심어 주셔요.』   사정을 한다.   국화는 선생님 손으로 심겨진다.   국화가 화분 속에 들어 앉자   물주개가 가랑비를 뿌려 준다.   병이 빈 병으로 굴러 다니며   『내 안에 물이라도 채워 줘.』한다.   물을 채워 주니   『꽃 한 포기만 꽂아 다오.』한다.   꽃은 우리 손으로 꽂혀진다.   화분과 꽃병은   양지바른 창 밑에 놓여   마주보고 웃는다.   이 시에 대하여 지은이는 시를 지을 때까지의 일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이었어요. 교실의 대청소를 하고 있었지요.   교실 뒤의 급식대를 들어내고 교실 바닥을 닦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숨겨둔 화분이 있었어요. 정말 지난 초겨울에 담고 있던 꽃부리를 비우고 여태까지 교실 구석에 박혀 있었지요.   화분은 참 심심하고 답답하게 겨울을 난 거예요. 누구도 화분의 마음을 알아주지는 못했을 거여요.   화분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화분은 무엇인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요.   그 커다랗게 벌린 입의 모습에서 나는 대번에 그걸 알아차렸지요.   참 그래요.   「화분이 얼마나 말을 하고 싶을까?」   내 생각은 틀림이 없었지요. 곧 그 화분의 커다란 입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요.   ―무엇이나 심어 줘. 국화 한 포기라도 심어 줘. 제발 그렇게 해 줘.   화분의 하소연이었어요. 참 가여운 화분이었어요.   나는 곧 그 화분을 들고 꽃밭에 나갔지요. 국화 모 한 포기를 떠서 그 화분에 심어 주었어요. 보드라운 흙에 부엽토를 섞어 넣었지요. 그리고   ―잘 자라라.   속으로 말을 하면서 국화의 뿌리를 다져 줬지요. 그러자 화분이 그냥 있는 게 아니었어요.   ―고마워요, 선생님.   나는 그 화분으로부터 분명히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분명히 그런 소리가 났던 거지요.   ―그것 참 희한한 일이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할 테지요. 그렇지만 나의 귀에는 그 말이 틀림없이 들렸던 것이었어요.   나는 국화가 심겨진 화분에 물을 뿌려 주었어요. 가랑비를 뿌려 주었지요. 화분이나 화분에 심겨진 국화 모는 참 기쁜 모습을 하는 것이었어요.   화분을 교실의 창가에 갖다 두고 다시 청소를 계속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교실 구석에 빈 유리병 하나가 굴러 다니는 것이었어요.   나는 생각했지요.   「이 병은 또 얼마나 심심할까?」   그런데 정말 빈 병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어요.   ―심심하고 말고요. 내 안에 물이라도 채워 주십시오. 제발 제발 제발…….   이것은 빈 유리병이 사정을 하는 목소리였지요.   「가엾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곧 이 유리병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을 시켜 수도에 가서 물을 채워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물을 채워 넣고 보니 병은 다시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선생님. 이왕 수고하시는 김에 나에게 꽃 한 송이 만 꽂아 주셔요.   나는 참 그렇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빈 병에 물을 채워 넣었으니 꽃을 꽂아야지요.   꽃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리병은 반드시 사이다나 쥬우스만 담아야 하는 것이 아니어요. 꽃을 꽂으면 꽃병이 되는 것입니다.   꽃은 곧 아이들 손으로 꽂혀졌어요.   나는 화분이 놓인 양지바른 창가에 병을 갖다 놓았지요. 꽃병과 화분, 꽃병의 꽃과 화분의 국화 모가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었어요. 그 웃음 소리도 분명히 들리는 것이었지요.   ―히히히히…….   나는 분명히 그 웃음 소리를 들었어요.   이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자연에서 호소해 오는 많고 많은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숲에서도 그렇다.   나무와 나무끼리는 저들끼리의 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소리를 못 들으면 시인이 아니다.   나무들 끼리는 서로가 남이 아니다.   도토리 열매를 여는 떡갈나무를 보기로 들자.   떡갈나무 그 옆에 있는 나무는 남이 아니다. 서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 있는 나무가 있다. 할아버지와 손주가 되는 나무도 있다. 이들은 같은 골짜기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에 살면서 서로 바라보면서 모른 척할까?   그렇지 않다.   ―어머니 어머니!   ―그래 그래 너는 내 씨앗에서 태어난 나무로구나.   ―그럼요 어머니.   산에 가 보면 분명히 이런 말소리가 들린다.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누구의 귀에도 들리는 목소리다.   ―우리는 형제다. 같은 나무 같은 가지에서 정답게 씨앗으로 익었댔지.   ―그럼 그럼 우린 형제야.   이런 말도 들려 온다. 사람이었다면 서로 손을 잡아보고 끌어안기도 할 것이다. 이런 나무의 심정을 아는 이가 시인이다.     나무끼리   산에 가면   나무끼리   주고 받는 말이 들리네.   ―잎을      내 놔 봐라.   ―꽃을     피워 보자.   잎이 같을 때   나무끼리 반갑네.   꽃이 같을 때   더욱 반갑네.   나무는   같은 나무 아니면   꽃가루를 나누지 않네.   같은 나무끼리는   멀리서도   잎을 흔들어 서로 반기네.   한 날 한 모양의 열매를 다네.   ―너는 형제다.     너는 내 형제.   추운 겨울을 눈 속에 떨면서도   같은 나무는   그 나무끼리   서로 생각하네.   목이 메이네.   이 시는 산에 가서 나무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시로 옮긴 것이다.     첨성대   눈을 감으면   들리는 듯하네.이 돌을 다듬을 때   울리던 정 소리.   이 돌을 쌓을 때   메기던 노래들이.   신라의 옷을 입은   그 때 아이들이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겠지.   이 돌을 다듬고 쌓는 것을.   이 돌이 쌓여지던 날   어여쁜 그 때의 여왕님이   금관을 쓰고   비단 수레를 타고 와   첨으로 불러 줬겠지   첨성대란 이름을.   그 날부터 점잖은 학자님들이   여기서 밤마다 별을 바라보고   저 많은 별의 이름을 지었겠지.   저 별을 바라보고   별자리를 그렸겠지.   그리고   그 넓은 우주 안의   작은 자기를 생각했겠지.   거기 비하면   이 서울도   신라도   얼마나 작은 겔까 생각했겠지.   이 시는 지은이가 첨성대를 바라보고 지난 날을 미루어 생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 첨성대에게 물어보아 첨성대가 대답하는 것을 적은 것이다.   경주에 가는 길이 있으면 누구든지 첨성대 앞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으면 이런 소리가 들린다.   ―나는 첨성대이다.   ―내 몸뚱이의 돌은 정으로 다듬었지. 옛날 신라의 석수장이들이 말이야.   ―그것을 쌓으면서 메기던 노래들이 아직도 들려.   ―내 이름은 선덕여왕이 지어 주셨지. 그 날 비단 수레를 타고 오셔 처음「첨성대다!」하고 내 이름을 부르셨어.   이렇게 첨성대가 시인의 귀에 일러 주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 이 작품이다. (1979년 여름『아동문학평론』제12호)   동시 창작법 ⑤ 손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신 현 득   사람의 손이 작용을 해 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수레는 밀어주어야 움직인다. 사람의 손이 미는 것이다. 더구나 자동차는 운전기사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   양말은 손이 있어야 신을 수 있다. 양말 스스로 발에 와 신겨지는 법은 잘 있지 않다.   청소할 때의 빗자루 역시 그렇다. 손이 들어야 비로소 방의 먼지를 쓸어낸다. 의사의 주사기도 그렇다. 의사의 손이 있어야 주사약을 혈관에 넣어 사람을 치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팽이도 그렇다. 팽이채를 쥔 손이 있어야 팽이가 맴을 돌 수 있다.   바느질할 때의 바늘도 그렇다.    밥 먹을 때의 숟가락도 그렇다.   가위도 그렇다. 송곳도 그렇고 책상의 빼닫이도 그렇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모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손 이상 가는 보배가 없다고 한다.   인류는 손이 있음으로써 지구를 지배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 때 손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 세상의 움직임에서 세상을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동차는 이름 그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 즉 「자동차」가 된다. 운전기사의 손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양말은 스스로 발에 와 신겨지는 것이 된다. 빗자루는 혼자 걸어다니게 된다. 팽이는 혼자서 맴을 돌게 된다.   바늘은 혼자서 바느질을 하게 된다. 숟가락은 혼자서 밥을 뜨게 되고 송곳은 혼자서 구멍을 뚫게 되고 빼닫이는 저절로 열리고 저절로 닫긴다.   그것뿐인가? 컵은 사람에게 물을 마셔주고 귀비개 혼자서 귀를 후벼주고 호미는 혼자서 밭을 맨다.   만일 이런 세상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재미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시를 쓸 때 특히 동시를 쓸 때 이 사람의 손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건은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여진다.   ―그런데 그 손의 동작을 꼭 그대로 표현하는가?   가령 여기 감나무가 있다고 하자. 감나무는 가을에 많은 감을 열었다. 빨갛고 탐스러운 감이다.   감을 따고 싶다. 그런데 감이 스스로 움직여 줄 리 없다.   「감아 내려오너라. 가지에서 내려오너라.」   이렇게 말해봐야 감이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제 스스로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는 가지에 매달려 있다. 사람이 말한다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없이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딴다. 감을 따는 「감집게」라는 것이 있다. 긴 대나무장대 끝에 작은 그물을 달아 감이 떨어져 깨어지는 걸 막는다. 그래 이 감집게로 감을 하나씩 담아 가지를 비틀어 꺾어 내린다.   감을 따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이 과정을 시로 표현해 보자.       나무에 올라가        빨간 감을 따        광주리에 담고        ……………….   이런 시의 구절이 된다.   그런데 이 때 손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의 손을 생각지 않고 장대 끝에 달린 감집게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감은 제 스스로 나무에서 내려와 광주리에 담긴 것이 된다.   이 때의 시구절을 생각해 보자.       빨간 감이        나무에서 내려와        광주리에 쌓이고….   아무래도 감이 제 스스로 내려왔다는 표현에 맘이 끌린다.   이 경우에서는 손을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말이 된다.       소 등을 타고 오든지       지게 위에 놓여 오든지       시월에        대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봄에 나갔던 씨앗이        몇 백 배의 열매를 거느리고       들어와 이엉을 쓰고 쌓이고       산에서 여문 도토리도        멍석에 널리고       가을 씨앗이 대신 나가       이랑에 묻히고 나면       텅 비어버린 들판.   10월을 노래한 시의 구절이다. 10월이 마당이다. 추수를 해들이는 광경이다. 어느 것이나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다. 실어 들이는 것도 져 들이는 것도 그렇다. 가을 씨앗을 묻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곡식이 소 등이나 기게 위에 놓여 스스로 들어와 마당에 쌓이는 것처럼 표현하고 보니 가을 마당이 더 실감되는 것 같다.   ―연필이   공책 위를 걷는다.   이런 시의 구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다. 논리만을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연필이 어떻게 걸어다녀? 사람의 손이 잡아주는 거지.』   이렇게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엉터리요 억지라고 우길 수도 있다.   ―지우개가   글씨를 지우다.   이런 시의 구절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된다.   『지우개가 어떻게 글씨를 지워? 사람이 손으로 지우개를 잡아주는 거지.』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시는 과학이나 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과학이나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산 것, 산 것이 아닌 것, 숨쉬는 것, 숨 쉬지 않는 것, 생각을 가진 것,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 말을 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생각지 않는다.   또한 모두가 생명있는 것이며, 숨쉬는 것이며, 같이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연필이 공책 위를 걷기도 하는 것이다. 지우개가 스스로 글씨를 지우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입장에 눈의 위치를 두어야 한다.       학교는 제 시간에       품을 연다.       교문이 문짝 두 개를        열어젖혔다.       학교 이름을       커다랗게 가슴에 달고       교문은 아침마다       교장 선생님이 된 기분이다.       교장 선생님의 눈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마음 속을 읽는다.       첫 번째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       완장을 팔에 감은       선도 반장.       그러다가 학교 앞에       줄이 이어진다.       집에서 밭갈이를       거들던 아이       그 아이는        손마디가 텄다.       저녁 썰물에       조개를 캐던 아이       그 아이 손에는        개흙이 묻었다.       그러나 더러는       숙제를 잊은 아이       그렇지만 그 아이도       들여보내고       집은 가까워도        정해 논 지각생       그렇지만        그 아이도 들여보내고       학교의 품은 크다.       참새가 우짖고       아침해가        산 위에 한 뼘.       그래도 오는 아이가 없나?       살피며        교문은        두 개 문짝을 닫는다.   이야기가 담긴 이런 시를 읽고도   『뭐가 이래? 교문이 문짝을 열어젖혔다니?』   이런 말을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도 사람을 손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 되어 있다. 교문이 스스로 열리는 것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훨씬 더 시다운 표현이 되었다는 결론이다. 시를 이해하는 어린이라면 여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침에 교실에서       철수가 책보를 푼다.       같이 쌓여 온       풀 냄새가 한 보자기.       영희가 보자기를 풀었다.        들에서 같이 쌓여온 새 소리       ―찌찌꼴 찌찌꼴 찌찌꼬르르르…       교실이 새소리로 찬다.       드르륵―       문을 열고 꽃다발이 들어온다.       학교 길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       하품만 하고 있다가       꽃병이 입을 벌려 받는다.       (하략)   5월의 교실을 노래한 이 시에서 「문을 열고 꽃다발이 들어온다」 「꽃병이 입을 벌려 받는다」의 두 구절을 두고 생각해도 그렇다.   전혀 사람의 손을 생각지 않는 데서 실감을 더 느끼게 한다.       골목에 아침에       대문이 열리며       아이 하나를 내보낸다.       저 집서도 대문이 열리며       아이를 내보낸다.       책가방을 맨 아이.       ―학교 가자.       ―안녕!       아이들은 골목을 나간다.       골목이 아이들을 내보낸다.       저 골목서도       아이들을 내보낸다.       책가방을 맨 아이들       참새 짹짹        우짖는 아침에       학교를 향하는       길다란 행렬.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있는 골목의 광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손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손을 생각지 않을 때 대문이 아이를 내보내는 것이 된다. 작은 골목은 큰 골목으로 아이를 내보내는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세상은 하나의 요술나라 같기도 하다.    신은 사람의 발에 신겨 사람을 따라 다니게 된다. 신이 사람의 몸뚱이를 담고 다니는 것이다.   괭이는 제 혼자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의 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괭이가 제 스스로 흙을 파고 논밭을 가꾸게 된다.   크레용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는 스스로 곡을 연주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실에서 손이라는 관념을 지워버리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시를 짓는 한 방법일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재나 표현하는 각도에서 따라 이런 표현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손을 생각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손을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과는 다르다.   즉 사람의 손이 작용하는 소재가 아닐 때는 이런 입장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거울 속에        우리 한 식구       정답게 살고 있어요.       새벽이면       거울 속에 불이 켜지고       엄마가 아침 쌀을 갖고 나가고       밥상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요.       거울 속에서        문이 열리고        아빠가 장난감 사가지고       들어오셔요.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거울에서 내다보는       내가 보여요.       거울 속에 내다보며       이쪽을 거울 속이라 생각겠지요.       우리를        그림자라 생각겠지요.   이 시는 거울 속의 세상을 두고 생각한 내용이다. 즉 이 소재에는 사람의 손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손이 있고  없고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1979. 겨울.  13호에서     동시 창작법 ⑥ 모든 것을 하나로만 본다 신 현 득     시를 쓰는데 있어서 비인격물을 인격화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을 하나로 보는 작업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이 된 것이다.   비인격물의 인격화뿐만 아니라 인격체인 사람을 딴 것에 비유하는 것도 같은 작업이 된다.   내 한 몸뚱이가 사람이지만 나무일 수도 있고 돌일 수도 있고 흐르는 물일 수도 있고 햇볕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무가 곧 돌일 수도 있고 돌이 나무일 수도 그것이 곧 내 몸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나와 남을 하나로 보는 작업이다.   비유라는 것이 또한 그렇다. ㄱ이 ㄴ에 비유된다는 것은 ㄱ과 ㄴ에서 같은 속성을 찾는 것이요 ㄱ과 ㄴ을 동일화시키는 작업일 수 있다.   역설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ㄱ을 지칭하기 위해 그와 반대가 되는 ㄴ을 가르치는 것은 ㄱ과 ㄴ을 같은 입장에서 하나로 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매우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밉다고 한다. 낮은 것을 오히려 높다고 한다. 흐르는 것을 멈추어 있다고 한다.   이 때 사랑과 미움은 같은 것이며 높은 것과 낮은 것은 같은 것이며 흐르는 것과 멈춤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원수와 친구가 따로 없고 나쁜 것 좋은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들어가고 나감이 없이 쪽 골라 보인다.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눈이다.   이런 눈으로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보자. 교장실의 시계 속 아득한 시간을 감은 태엽이 퇴근 시간을 치는 시간에 상당히 먼 옛날일 텐데 쉽게 와서 페스탈로찌 선생이 축하의 손을 잡았어요. ―중략― 벙글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거느리고 교문을 나오셨을 때 기다리던 안데르센 할아버지가 불쑥 손을 잡았어요.   이 시는 유여촌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는 시의 몇 구절이다. 유 선생은 교단에서 회갑을 맞으셨다. 동화 작가다. 그러므로 페스탈로찌나 안데르센과 관계를 가진다. 그런데 페스탈로찌와 안데르센은 생존자가 아니다. 그러나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한자리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생사를 하나로 보았을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곧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꿰뚫어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고향 마을로 드는 오솔길에서 발가숭이 적 나를 만났네. 내 옛날을 만났네. 발가숭이 적 나와 손을 잡았네. 나와 같이 크던 산짐승 그들은 층바위에서 그대로 메아리를 부르며 살고 있었네.   고향에 돌아와서 옛일을 회상하는 장면을 노래했다.   "아, 옛날이 그립구나!"   이렇게 회고의 탄식을 하는 일은 너무도 바보스런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 30·40년 전의 일을 바로 오늘 이 시간 안에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과거와 현재는 바로 하나다. 그 때 그 옛날의 나와도 만날 수 있다.   이런 눈으로 먼 데 가까운 데를 하나로 보고자 아주 거리 감각을 없애는 것이 좋다. 선생님이 걷는 길은 교실과 교실 사이 쪽지 한 장을 들고 산을 넘는다. 한 교실 두고 온 아이들이 되돌아보며 울며 울며 걷는 걸음도 새 소리 솔바람이 길을 이끌어 쉽게 쉽게 발이 놓인다. ―중략― 산꿩이 우는 골을 내려다보니 학교 두 교실이 가지 끝에 와 보이고 산토끼들이 모이라는 듯 ―땡 땡 땡. 학교 종이 울린다.   발령장을 들고 먼 산골로 전근가는 교사의 심정을 노래했다. 여기서 교사가 걷는 길을 교실과 교실 사이라 했다. 이것은 전에까지 근무했던 교실과 이동해서 근무해야 할 교실의 사이다. 사실 교실과 교실 사이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먼 것 가까운 것을 하나로 보지 않았을 때는 이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엄마는 가지 많은 나무 오빠의 일선 고지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어머니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 이 시에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가지에 단다는 구절을 음미해 보자. 일선 고지와 나무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멀리에 있는 소총을 끌어 오는데 있어 마치 옆에 있는 물건을 거머쥐는 듯이 표현했다. 거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많고 적은 것이 하나로 보인다. 전체와 부분이 하나로 보인다. 전체는 부분인 동시에 또한 전체다. 1은 10과도 같지만 또한 1이 된다. 수에 대한 관념을 아주 없애는 것도 좋다. 나의 하나는 바다로 보내고 나의 그 하나는 산으로 보내고 나의 또 하나는 오지 않는 내일에도 보내어 두고 나는 누워서 그들을 보네. ―중략― 그러나 바다에서 가지고 온 것 그러나 산에서 가지고 온 것 내일에서 가지고 온 것을 틀리지 않게 내 안에 쌓아 두네. 그것들이 작게 나를 이루네.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자라고 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외부에서 받아들여진 것이 쌓여서 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 나는 하나이지만 사실 열도 되고 백도 된다. 그것이 모두 또한 나다. 그 많은 나가 하나인 나 안에서 나타나 외부와 작용을 하고 있다.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를 쏘다닌다.   하나인 나는 누워서 여럿인 나를 본다. 이것들은 내가 생각을 거두었을 때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보면 나는 하나라고 우길 수가 없다. 어째서 내가 하나뿐이란 말인가?   이런 눈으로 형체가 있는 것 없는 것을 하나로 보자. 아기 울음이 바위에 스며들어 다져집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차례로 스며들어 다져집니다. 바위도 내일부터 입을 다물면 박혁거세가 날 때까지 견뎌냅니다.   석기시대의 어느 날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기 울음과 이야기다. 울음은 형체가 없다. 이야기도 형체가 없다. 그러나 어떤 액체의 형태가 되어 바위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계절은 오다가 강가에 머물러 남몰래 배에 실려 건너옵니다. 남쪽 나라 건너 북쪽 나라로 살구꽃이 차례로 꽃잎을 엽니다. ―중략― 저녁 해에 돌아오는 시골 장꾼의 시끄런 사투리도 한 배 가득 건넙니다. 산 넘어 사라지는 해그림자도 강가에 머물러 배를 탑니다.   여기서 「계절」이란 말을 두고 생각하자. 계절은 물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배를 탄다는 것이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다.   사투리도 부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다는 것이 어색하기는 커녕 아름답고 재미있게만 들린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는 걸 쌓아도 부피와 무게가 된다. 나무― 그 많은 잎에는 종일 햇살이 와서 만져집니다. 송아지 우는 소리 학교의 종소리가 와서 만져집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것뿐인 그것이 나무에게는 가지 끝에 무게가 되어 달립니다. 가슴 둘레가 커집니다.   이 시는 햇살이나 송아지 울음, 학교의 종소리 같은 것이 쌓여 무게를 갖는 과정을 노래했다. 재미있는 생각이라 느껴지는 것이다. 햇볕은 물 위에 쌓인다. 따뜻하다. 햇볕은 피라미 새끼의 체온이 된다. 햇볕은 붕어 새끼의 체온이 된다. 따뜻하다. ―중략― 바람 소리 새 소리가 물 밑에 쌓인다. 물 소리가 커진다.   봄 개울을 노래한 것이다. 형체가 없는 햇볕이나 바람 소리·새 소리가 물밑에 쌓이면서 부피를 느끼게 한다. 그 부피는 커지는 물 소리에서도 나타나 있다. 도라지 뿌리가 기지개 켜는 소리도 모이면 커다란 메아리가 됩니다. 소나무 큰 뿌리에 물 오르는 소리도 모이면 커다란 메아리가 됩니다. ―중략― 새 움의 입김이 모여 하얀 안개가 산을 감고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봄 산의 광경이다. 도라지가 기지개 켜는 소리, 소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들이 모인다. 메아리가 커졌다는 데서 그 부피를 느끼게 한다. 새 움의 작은 입김들이 모여 산을 감을 수 있는 커다란 안개를 이룬다. 입김의 부피가 쌓인 것이다.   액체는 그 온도에 따라 기체가 되든지 고체가 된다. 그래서 물은 얼어서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증기가 되고 구름이 된다. 바위는 부서지면 돌이 되고 돌은 모래가 되고 다시 부서져 흙이 된다. 그러나 세상을 하나로 보면 변화가 일정하지 않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같은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물은 같은 것이어서 서로 변하면서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키가 되어 크는가? 길가에 우는 아기를 달래어 준 일. 아, 그런 것이 조그맣게 내 위에 와서 쌓이네. 자는 사이 밤 사이에   이 시에서는 착한 일 한 것이 쌓여 키가 되고 있다. 키 크는 원인이 착한 일 한 것에 있는 것이다. 영양분이 쌓여서 키를 이룬다는 생각이 아니지만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일 뻐꾸기 수다스런 울음이 한 개씩 머루 알이 돼 열리고, 종일 푸르른 산의 색깔이 바위 틈 물소리로 돼 들리고,   여름 산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뻐꾸기 울음이 머루 알이 되고 산의 빛깔이 물 소리가 된다.   이런 눈으로 주위를 살피면 도대체 불가능이란 것이 없다. 온갖 조화를 다 가지게 되는 것이어서 홍길동이라도 된 기분이다.      (1980년 봄 『아동문학평론』 제14호)   동시 창작법 ⑦ 의인(擬人)에는 난이도(難易度)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 현 득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해를 그리기 좋아한다. 그리고 해에다 눈이나 귀·코·입들을 그려 넣는다.   이것은 해에게 사람의 모습을 주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미분화된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나 자기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즉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생각하고, 말하고, 웃고, 동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에게도 얼굴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특히 나이 어린 아이일수록 그들은 철저히 의인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해 시를 쓸 때 철저히 의인을 하라는 말은 이런 어린이의 심리를 이용하자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의인화된 것일수록 거기서 재미와 친밀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동물을 좋아하지만 사납고, 불결하고, 잔인한 동물의 그 성질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동물에게 사고력·웃는 모습 등 사람이 가진 능력을 모두 주어 놓고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사고에서 느껴지는 동물은 언제나 어느 정도 의인이 된 동물이다.   이와 같은 어린이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 동물 만화다. 그러므로 동물 만화는 문장상의 의인법을 그림에 적용시킨 것이다. 즉 동물 만화는 의인된 그림인 것이다.   세계 어린이들이 모두 좋아한다는 미키마우스는 손과 발을 가지고 있고 아래 윗도리 옷을 차려 입은 새양쥐다. 이 의인된 동물은 말도 잘하고 영리하며 비상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만화가가 미키마우스에게 손과 발과 옷과 판단력을 주었으므로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동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키마우스는 하수구에 버리는 음식찌꺼기나 찾아다니는 불결하고 연약한 새양쥐가 아니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동물에게만 의인법을 쓰는 것이 아니다. 연필이나 돌멩이·나무, 심지어는 물방울에까지 의인법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이 때는 대개 연필이나 돌멩이·나무·물방울에게 눈·코·입 등을 곁들여서 얼굴을 만들어 주고 때에 따라서는 팔과 다리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동물의 경우에서처럼 실감이나 친근감이 덜하다.   왜 그럴까?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속성이 사람과 닮아 있는 것일수록 의인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인형이 웃는다.   ―나무가 웃는다.   ―돌멩이가 웃는다.   ―물방울이 웃는다.   위의 네 가지 표현을 읽어보면 의인에도 어렵고 쉬운 정도, 즉 난이도(難易度)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네 가지의 표현 가운데 에 가장 공감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 공감을 주기까지는 거기에 상당한 상황 설명이 따라야 한다. 그래도 그것이 실감있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철저히 의인을 하라는 말과는 상대적으로 덮어놓고 의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 비가 온다. 마당이 운다. 빗방울을 맞아 마당이 운다. 빗방울을 빗방울을 자꾸 맞으며 「앙 앙!」운다. 비가 개었다. 울던 마당이 이제 살았다고 활짝 웃었다.   이 시는 놀랍지도 못한 글이지만 마당을 의인한데서 더욱 어색한 느낌을 갖게 한다.   마당은 입체가 아니다. 사람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격을 주어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어 생각하는데 저항을 느낀다. 따라서 마당이 운다는 표현이나 웃는다는 말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감 감나무 빨간 감은 여러 형제다. 형아, 아우야, 부르며 익는다…….   감나무에 달린 감은 의인화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감이 가지고 있는 모양과 몸빛깔에서 사람과 닮은 요소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아주 닮아버린 인형에서 더욱 실감과 재미를 느낀다.   인형 내 다리로 달리게 해 주세요. 내 팔을 움직이게 해 주세요. 정말이어요. 나를 예쁘다 칭찬만 하지 말고 나를 걷게 해 주세요. 영이를 따라 학교에도 가고 싶어요.   이 인형의 호소는 실감나게 들린다. 그것은 인형이 아주 어린 아이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을 하는데서는 이 세 가지 소재의 경우서만 보아도 「마당 < 감 < 인형」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종이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연기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배추잎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비닐끈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그런데 연상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사람과 닮은 데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하면 이런 것은 거의 의인이 되지 않는다.   ―도토리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돌멩이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연필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공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그래도 앞의 네 가지 경우보다 연상이 잘 된다. 의인이 쉬운 것은 어느 정도 입체물이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체물이라 해서 사람의 성질을 다 가진 것이 아니다. 모든 각도로 다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말이다.   ―돌멩이가 운다.   ―돌멩이가 웃는다.   ―돌멩이가 노래한다.   ―돌멩이가 성낸다.   ―돌멩이는 야물다.   ―돌멩이는 구른다.   ―돌멩이는 달린다.   ―돌멩이는 부딪힌다.   위의 는 모두 사람의 성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돌멩이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 등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돌멩이는 야물다. 그리고 동글동글하다. 그리고 잘 구른다. 구르다 보면 다른 물건들과 부딪히길 잘 한다.   그러므로 돌멩이를 의인할 경우 이런 돌멩이의 성질에 맞추어야 한다.   돌멩이 ① 돌멩이가 굴렀다. 산위에서 굴렀다. 냇물에 퐁당 빠졌다. 고기들이 깜짝 놀랐다.   돌멩이 ② 돌멩이가 말했다. 항아리가 말했다. 돌멩이가 대들었다. 커다란 항아리가 빌었다.   이상의 작품은 돌멩이의 성질을 잘 알아서 의인했기 때문에 실감과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돌멩이가 갖는 성질과 맞지 않을 때는 저항을 느끼게 된다.   돌멩이 ③ 냇가에 돌멩이가 뙤약볕을 쬐었다. 몸뚱이가 뜨끈뜨끈 달아 올랐다. 소나기 한 줄기가 지나갔다. ―시원해요, 시원해요.   아이고 시원해. 돌멩이가 좋아서 노래를 불렀다.   여기서 돌멩이가 노래를 불렀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노래라는 것이 돌멩이의 특성에는 맞지 않아서이다.   어떤 사물이나 소재가 사람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물은 사람과 같은 성격을 몇 가지는 지니고 있으므로 그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가령 라는 소재가 있다면,   ○ 무게가 있다.   ○ 입을 다물고 있다.   ○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 간사한 말로 꾀어봐야 잘 넘어가지 않는다.   ○ 많은 일을 참는다.   ○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 오랜 세월 견뎌낸다. 와 같은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의 방향으로 의인화해서는 바위의 이미지를 살릴 수 없다.   「꽃이 웃는다」는 것은 꽃의 빛깔의 밝기와 꽃의 모양과 사람의 웃는 모습과 사람의 입모양이 연관되므로 이루어진 표현이다. 세상의 꽃이 모두 어두운 검정색이었다면 꽃이 웃는다는 표현이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꽃의 모양이 꽃잎을 벌린 모양이 아니고 태초부터 주먹이나 공과 같은 모양이었다면 꽃이 웃는다는 말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같은 밝은 빛깔을 띤 전깃불이나 초롱불을 보고 「전깃불이 웃는다」「초롱불이 웃는다」라고 말하고 보면 어색하게 들리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양이야 어떻게 생겼든, 또는 형체가 없는 추상물일지라도 그 소재가 사람을 닮은 성질이 강하면 그 성질의 방향으로 의인이 쉽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질이 강할 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천둥 소리」나「바람」은 형체를 따질 수 없지만 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의인이 되고 또한 실감을 느낄 수 있다.   천둥이라면,   ○ 고함 소리   ○ 무서운 목소리   ○ 성낸 목소리 등으로 의인이 쉽게 된다. 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하여 씌어진 작품을 살펴보자.   천둥 누군가 하늘에서 소낙비 오는 날 성이 났다. 먹구름 속에서 소리를 친다. 겁먹은 나무들이 비를 맞는다.   바람의 경우에도 그렇다.   ○ 나뭇가지를 흔든다.   ○ 세상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 아무것이나 만져보고 쓰다듬는다.   ○ 물위를 걸어다닌다.   등이 바람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바람 ① 감나무 잎을 흔들어 보다가 잘못해 「톡!」 풋감 한 개 떨어뜨리고, 개암나무 가지를 흔들다가 잘못해 「톡!」 개암 한 알 떨어뜨리고.   바람 ② 바람이 물 위로 걸어간다. 물 위로 발을 끌며 걸어간다. 바람의 발끝에 걸려 물결이 사르르 일어난다.   바람 ①에서는 바람의 손을 생각했고, ②에서는 바람의 발과 발끝을 생각했으나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럴 만한 조건만 있다면 어느 소재를 어느 경우에서나 의인화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기도 한다. 이것은 돌멩이가 웃는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라면 돌멩이가 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보기를 들어보자.   ―나무가 소리를 듣는다.   이 한 구절의 표현으로는 약간 어색하게 들리는 싯구도 여기에 그럴 만한 분위기, 즉 그럴 만한 이유를 설정해 줌으로써 어색하게 들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작품을 한 편 살펴보자.   달밤의 나무 달이 뜨면서 나무의 영혼이 가지 끝에 나와 반짝이게 되면서 나무는 귀가 열린다. 개울가 물소리를 알아듣는다.   이 시에서 나무가 물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달이 떴다는 사실 때문이다. 달이 뜸으로써 나무의 영혼이 가지 끝에 나와 달빛에 반짝이게 되고 영혼의 문이 열리면서 나무는 귀로써 개울물 소리를 듣게 된다. 이렇게 그럴사한 분위기를 설정해 놓고 보니 나무가 소리를 듣는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되돌아 생각해 봐야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의인에 난이도(難易度)가 있다는 말이 모두 거짓으로 느껴진다.   이것은 결국 시에는 방법이 많으면서 별다른 방법이 따로 없다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1980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15호)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그것 참 그렇겠다!   ―참 재미있네!   ―나는 미처 생각지 못 했더니!   이렇게 감탄사를 내면 이는 독자가 작자의 작품에 동조하는 이상의 것이 되지만 아무 저항 없이 읽고 작가의 뜻이 전달되기만 해도 이것으로 공감이 된 것이다.   작가의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 독자는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시원치 못한 글 같다.   ―어색하다.   이렇게 느낀다. 이 때 작가가 옆에 있다면 그 작가의 체면을 위해 그 말을 직접 표현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내심으로는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작품은 성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독자도 그 계층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독자, 아동문학 작품을 꼭 읽어야 할 독자를 상대했을 경우를 뜻한다.   대체로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는 표현에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작품이 주관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남이 정말 내 생각에 동조할까? 공감해 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독자에만 영합해서 글 아닌 글을 써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습작기의 경우 이것이 참으로 힘드는 과정이 된다.   습작기의 경우 대개 그 작품이 자기 위주의 주관이 되기 쉽다. 자기만 아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물론 표현의 미숙에서 온다. 그래서 남이 읽어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작기를 벗어났다 해서 반드시 객관성이 있는 글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관과 객관을 어느 정도 일치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 관점의 일치가 이루어질수록 그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공감을 하게 되고 공유의 것이 된다.   여기에 남의 예를 들 것이 아니라 내 습작기의 노우트를 뒤져 한 작품을 꺼내어 보자.   박덩굴 박덩굴이 지붕에 올라갔다. 높은 지붕 마루에 올라갔다. 어떻게 어떻게 올라갔나? 사다리를 놓아주어 올라갔다.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자들은 문면에 나타난 대로 사람이 정말 사다리를 놓아주어 박덩굴이 며칠 동안 쉬엄쉬엄 지붕까지 기어올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표현한 의도는 그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박은 대개 뒤안에 심어 지붕으로 올린다. 박이 자라서 덩굴손을 휘두르게 되면 지붕까지 올라가는 덕을 만들어 준다. 나뭇가지나 막대기 또는 못쓰는 장대 같은 것으로 덩굴손을 이끌어 지붕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때 지붕에 걸쳐준 그 나무막대기는 바로 박덩굴의 사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주관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의 문면에 그것을 깨우치거나 힌트를 줄 만한 낱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나는 작품이 일단 완성되면 여태 나를 휩쓸던 영감이나 환상 같은 것을 완전히 가라앉혀 놓고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내 작품을 바라보고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작자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내 작품을 바라볼 때 내 작품은 모순투성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꽃나무 가지 꽃나무가 흔들리네. 꽃가지가 흔들리네. 바람이 살짝 밀어주네. 꽃냄새가 풍겨오네. 꽃가지를 뛰어오네. 바람이 살짝 날라다주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하는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꽃향기가 꽃가지에서 나의 코에 와 닿는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누가 이 문맥을 그렇게 인정해 주겠는가. 나 혼자 도취되어 지껄인 나 혼자만 아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지만 우선 내 작품의 두 가지 예를 들어둔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습작기의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이 많지만 습작기의 사람이 아닌 누구의 작품에도 이런 면이 더러는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요즘 동시가 난해하다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미숙한 표현, 즉 객관성이 없는 표현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가 되지 않아 독자에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무슨 뜻인지 모르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체의 독자가 시에 소양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즉 작품이 되었느니 어떠니 하고 따질 능력이 없어 털어놓고 어렵다 모르겠다고만 하는 것이다.   응모되어 오는 작품을 살펴보면 객관성이 없는 표현인 경우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낱말이 제자리를 찾아앉지 못한 것이다. 낱말이 뜻하는 의미, 낱말에서 풍기는 분위기, 이미지 등을 깊이 생각지 않았을 때다. 시에서 비슷한 말은 안 된다. 비슷한 말은 같은 말이 아니며 같은 말이란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 맞는 하나뿐인 낱말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지나친 과장이다. …… 등은 주위의 분위기를 여간 잘 끌어가지 않고는 과장된 것으로 읽혀지게 된다.   다음은 몇 구절의 표현은 좋으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는 시의 중간에 빈 곳이 생기는 수가 있거나 동강이가 나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표현에 통일성이 없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직관적이다가 엉뚱한 데 하나가 추상물이 돼버리는 경우다. 어느 부분은 시가 돼 있고 어느 부분은 산문이 돼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표현에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나팔꽃이 위로만 감아 올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래로 감아 내려가는 것을 하나 보았다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예와 같은 것이다.   다음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 밤 하늘에 은하수가 떴다든가(새벽이 되면 뜰 때도 있지만) 압록강이 천지에서 흐른다든가 하는 표현은 모두 관찰 부족·조사 부족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어떤 씨앗이 언제 싹트며 어느 나무는 언제 꽃이 피는가를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도덕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웃집의 감을 따먹는다든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심한 장난을 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   다음은 아동 심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럴 때는 아예 아동문학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하며 동시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초심자에게 우리는   ―알맞은 낱말을 찾아라.   ―알맞은 표현을 찾아라.   ―지나친 과장을 삼가라.   ―부분을 두고 전체를 생각하라.   ―표현에 통일성을 두라.   ―표현은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라.   ―도덕성에 위배돼서는 안 된다.   ―아동 심리에 근거를 두라. 하고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말은 표현에 객관성을 두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라는 말이 된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독자의 눈으로 작품을 써라는 말이 된다.   겨울의 노래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수정보다 맑은 한얼음 유리판 위로 식식식 달리며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 눈이 오면 눈싸움 편을 갈라서…… 눈싸움에 지치면 썰매를 탄다. 야호야호 달리는 썰매. 바람이 부는 날은 연을 날린다. 팽팽한 연줄을 감을 때마다 연도 즐거워 붕붕거리며 하늘 복판에서 노랠 부른다. 팽이도 쳐야지 양지바른 골목에 함께 모여서 윙윙 우는 팽이의 노래 윙윙 우는 겨울의 노래. 처마마다 기다란 수정 고드름 한 개씩 꺾어내어 골목마다 전쟁놀이도 신나지.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아동문학 세미나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말이 나와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예문으로 든 것이다.   이 시의 의 부분이 모호한 것이다.   얼음판 위에 무지개를 그려 본다는 이 대목을 두고 교사들의 생각이 구구한 것이다.   어떤 교사는 이 무지개라는 표현이 스케이트의 자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스케이트의 빙 돌아가는 자국이 마치 무지개의 곡선과 같지 않느냐고 한다.   그럼 「오색」이란 수식어를 왜 끼웠느냐는 말에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으니 무지개 같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참고서에는 이 오색 무지개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스케이트를 타게 될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해석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때 얼음가루가 해에 비쳐져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시는 이런 입장에서 표현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표현은 보편성을 잃었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프리즘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린이에게 스케이트를 지도하던 교사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잘 모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하나의 구절 때문에 야단이다. 표현이 전혀 객관화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로부터 공감이 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라 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라 했다. 팽이 우는 소리를 정작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해도 그것을 노래에 비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얼음판 위에서 돌리는 팽이라 해도 팽이가 노래로 흥겹게 들릴 만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윙―」 소리를 몇 초 동안 내고 만다. 이것을 겨울의 노래라 표현한 것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어색한 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로 비유한다면 선풍기 도는 소리·기계 소리·비행기 소리를 모두 노래로 보아야 한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분위기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표현만으로도 동시가 되지 않는다. 하는 주장은 모두 객관성이 있는 문장이 되게 하자 그 소리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그것 참 그렇겠다!   ―참 재미있네!   ―나는 미처 생각지 못 했더니!   이렇게 감탄사를 내면 이는 독자가 작자의 작품에 동조하는 이상의 것이 되지만 아무 저항 없이 읽고 작가의 뜻이 전달되기만 해도 이것으로 공감이 된 것이다.   작가의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 독자는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시원치 못한 글 같다.   ―어색하다.   이렇게 느낀다. 이 때 작가가 옆에 있다면 그 작가의 체면을 위해 그 말을 직접 표현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내심으로는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작품은 성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독자도 그 계층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독자, 아동문학 작품을 꼭 읽어야 할 독자를 상대했을 경우를 뜻한다.   대체로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는 표현에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작품이 주관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남이 정말 내 생각에 동조할까? 공감해 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독자에만 영합해서 글 아닌 글을 써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습작기의 경우 이것이 참으로 힘드는 과정이 된다.   습작기의 경우 대개 그 작품이 자기 위주의 주관이 되기 쉽다. 자기만 아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물론 표현의 미숙에서 온다. 그래서 남이 읽어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작기를 벗어났다 해서 반드시 객관성이 있는 글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관과 객관을 어느 정도 일치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 관점의 일치가 이루어질수록 그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공감을 하게 되고 공유의 것이 된다.   여기에 남의 예를 들 것이 아니라 내 습작기의 노우트를 뒤져 한 작품을 꺼내어 보자.   박덩굴 박덩굴이 지붕에 올라갔다. 높은 지붕 마루에 올라갔다. 어떻게 어떻게 올라갔나? 사다리를 놓아주어 올라갔다.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자들은 문면에 나타난 대로 사람이 정말 사다리를 놓아주어 박덩굴이 며칠 동안 쉬엄쉬엄 지붕까지 기어올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표현한 의도는 그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박은 대개 뒤안에 심어 지붕으로 올린다. 박이 자라서 덩굴손을 휘두르게 되면 지붕까지 올라가는 덕을 만들어 준다. 나뭇가지나 막대기 또는 못쓰는 장대 같은 것으로 덩굴손을 이끌어 지붕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때 지붕에 걸쳐준 그 나무막대기는 바로 박덩굴의 사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주관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의 문면에 그것을 깨우치거나 힌트를 줄 만한 낱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나는 작품이 일단 완성되면 여태 나를 휩쓸던 영감이나 환상 같은 것을 완전히 가라앉혀 놓고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내 작품을 바라보고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작자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내 작품을 바라볼 때 내 작품은 모순투성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꽃나무 가지 꽃나무가 흔들리네. 꽃가지가 흔들리네. 바람이 살짝 밀어주네. 꽃냄새가 풍겨오네. 꽃가지를 뛰어오네. 바람이 살짝 날라다주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하는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꽃향기가 꽃가지에서 나의 코에 와 닿는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누가 이 문맥을 그렇게 인정해 주겠는가. 나 혼자 도취되어 지껄인 나 혼자만 아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지만 우선 내 작품의 두 가지 예를 들어둔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습작기의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이 많지만 습작기의 사람이 아닌 누구의 작품에도 이런 면이 더러는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요즘 동시가 난해하다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미숙한 표현, 즉 객관성이 없는 표현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가 되지 않아 독자에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무슨 뜻인지 모르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체의 독자가 시에 소양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즉 작품이 되었느니 어떠니 하고 따질 능력이 없어 털어놓고 어렵다 모르겠다고만 하는 것이다.   응모되어 오는 작품을 살펴보면 객관성이 없는 표현인 경우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낱말이 제자리를 찾아앉지 못한 것이다. 낱말이 뜻하는 의미, 낱말에서 풍기는 분위기, 이미지 등을 깊이 생각지 않았을 때다. 시에서 비슷한 말은 안 된다. 비슷한 말은 같은 말이 아니며 같은 말이란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 맞는 하나뿐인 낱말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지나친 과장이다. …… 등은 주위의 분위기를 여간 잘 끌어가지 않고는 과장된 것으로 읽혀지게 된다.   다음은 몇 구절의 표현은 좋으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는 시의 중간에 빈 곳이 생기는 수가 있거나 동강이가 나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표현에 통일성이 없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직관적이다가 엉뚱한 데 하나가 추상물이 돼버리는 경우다. 어느 부분은 시가 돼 있고 어느 부분은 산문이 돼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표현에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나팔꽃이 위로만 감아 올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래로 감아 내려가는 것을 하나 보았다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예와 같은 것이다.   다음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 밤 하늘에 은하수가 떴다든가(새벽이 되면 뜰 때도 있지만) 압록강이 천지에서 흐른다든가 하는 표현은 모두 관찰 부족·조사 부족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어떤 씨앗이 언제 싹트며 어느 나무는 언제 꽃이 피는가를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도덕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웃집의 감을 따먹는다든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심한 장난을 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   다음은 아동 심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럴 때는 아예 아동문학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하며 동시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초심자에게 우리는   ―알맞은 낱말을 찾아라.   ―알맞은 표현을 찾아라.   ―지나친 과장을 삼가라.   ―부분을 두고 전체를 생각하라.   ―표현에 통일성을 두라.   ―표현은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라.   ―도덕성에 위배돼서는 안 된다.   ―아동 심리에 근거를 두라. 하고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말은 표현에 객관성을 두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라는 말이 된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독자의 눈으로 작품을 써라는 말이 된다.   겨울의 노래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수정보다 맑은 한얼음 유리판 위로 식식식 달리며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 눈이 오면 눈싸움 편을 갈라서…… 눈싸움에 지치면 썰매를 탄다. 야호야호 달리는 썰매. 바람이 부는 날은 연을 날린다. 팽팽한 연줄을 감을 때마다 연도 즐거워 붕붕거리며 하늘 복판에서 노랠 부른다. 팽이도 쳐야지 양지바른 골목에 함께 모여서 윙윙 우는 팽이의 노래 윙윙 우는 겨울의 노래. 처마마다 기다란 수정 고드름 한 개씩 꺾어내어 골목마다 전쟁놀이도 신나지.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아동문학 세미나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말이 나와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예문으로 든 것이다.   이 시의 의 부분이 모호한 것이다.   얼음판 위에 무지개를 그려 본다는 이 대목을 두고 교사들의 생각이 구구한 것이다.   어떤 교사는 이 무지개라는 표현이 스케이트의 자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스케이트의 빙 돌아가는 자국이 마치 무지개의 곡선과 같지 않느냐고 한다.   그럼 「오색」이란 수식어를 왜 끼웠느냐는 말에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으니 무지개 같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참고서에는 이 오색 무지개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스케이트를 타게 될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해석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때 얼음가루가 해에 비쳐져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시는 이런 입장에서 표현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표현은 보편성을 잃었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프리즘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린이에게 스케이트를 지도하던 교사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잘 모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하나의 구절 때문에 야단이다. 표현이 전혀 객관화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로부터 공감이 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라 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라 했다. 팽이 우는 소리를 정작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해도 그것을 노래에 비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얼음판 위에서 돌리는 팽이라 해도 팽이가 노래로 흥겹게 들릴 만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윙―」 소리를 몇 초 동안 내고 만다. 이것을 겨울의 노래라 표현한 것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어색한 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로 비유한다면 선풍기 도는 소리·기계 소리·비행기 소리를 모두 노래로 보아야 한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분위기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표현만으로도 동시가 되지 않는다. 하는 주장은 모두 객관성이 있는 문장이 되게 하자 그 소리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동시 창작법 ⑩ 동시(童詩)는 동화적(童話的)인 시(詩)다 신 현 득              바다 속                                                      강소천       조개들의 조그만 단간 집들이      올망졸망 둘러앉은 동구 밖엔       사철 산호꽃이 만발하고      조용히 흔들리는 미역 숲에선      하루 종일 아기 고기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푸른 바다를      멋지게 날아다니는       가지가지 고기들      등대에 배들에 불이 켜지면,       "별 하나 나 하나…."      등불을 세고.    지난 날 초등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됐던 이 동시(童詩)에 대해 지은이 소천(小泉)은 어느 교육지(敎育誌)에 그 해설을 곁들이면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즉 처음에 이 작품은 동화(童話)로 구상을 했다는 것이다. 동화로 쓸려던 것이 그 결과(結果)에서 동시(童詩)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교과서에 본보기글로 수록될 만큼 수작이다. 훌륭한 동시(童詩)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동화가 되게 할 수가 있다는 것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다.    결국 소천의 말은 헛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을 소재로 해서 동화를 썼다면 역시 수작의 동화를 뽑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말은 동시 동화의 거리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일반 쟝르에서는 소설의 소재로 희곡을 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로 시를 쓴다는 말은 잘 듣지 못한다. 시의 소재로 시조를 쓴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그것은 자유시와 정형시의 차이밖에는 없는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소설(小說)을 무대에 올렸을 때는 희곡이 된다는 것도 같은 이야기를 곁들일 수 있는 산문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관계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말을 동시와 동화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동문학(兒童文學)의 작가(作家)들 사이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런 것을 느껴왔지만 아직 이론적(理論的)인 전개(展開)를 한 사람은 없다.   여기서 동화(童話)란 사실적(寫實的)인 문장(文章)으로 된 소년소설(少年小說)이나 생활동화(生活童話)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팬터지로써 씌어진 본격동화(本格童話)를 말한다.    이런 환상동화(幻想童話)와 동시(童詩)의 관계를 먼저 그 문장수사(文章修辭)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환상동화의 경우 동물(動物)이나 사물에 인격(人格)을 주어 사람차럼 사고(思考)와 언어(言語)를 갖게하는 의유(擬喩)가 쓰인다. 이것은 시(詩)의 수사(修辭)에 쓰이는 한 방법(方法)이다. 동시(童詩)의 수사(修辭)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냇물이 지껄인다.   ―나무가 춤을 춘다.   이렇게 간단한 동시(童詩)의 구절(句節)도 냇물과 나무를 하나의 인격체(人格體)로 보고 있는 데서 시작된 표현이다.   이런 동시(童詩)의 의유법(擬喩法)을 동화(童話)가 공유(共有)하고 있는 것이다. 전래동화(傳來童話) 창작동화(創作童話)를 막론하고 의인적(擬人的)인 전개(展開)가 많은 양(量)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 호랑이 한 마리가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하는 구전(口傳)의 이야기나    "돌멩이는 생각했지요. '산꼭대기에서 내리굴렀으면 재미있겠는데' 하고…"   이런 창작동화(創作童話)의 한 대목도 모두 그렇다.   그러므로 철저히 의인(擬人)된 문장(文章)이라는 데서 동시(童詩) 동화(童話)는 가깝다. 환상(幻想)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동심(童心)을 담은 같은 그릇이라는 점, 재미성을 지녀야 할 수밖에 없는 문장(文章)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동화(童話)는 산문(散文) 가운데서 동시(童詩)에 가까운 것이며 동시(童詩)는 운문(韻文) 가운데서 동화(童話)에 가까운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김요섭씨는 동시(童詩) 동화(童話)가 하나의 포에지(poesy), 즉 이 포에지라는 시(詩)의 광석(鑛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광석의 제련술(製鍊術)에 따라 동시(童詩)로도 동화(童話)로도 결정이 되는데 그 바탕인 광석(鑛石)은 같은 것이라는 풀이가 된다. 이 제련술(製鍊術)이라는 것은 바로 형식(形式)이요 모티브이다.   그래서 김요섭씨는 동화(童話)야말로 시인(詩人)이 써야할 쟝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시(詩)의 소양 없이는 환상동화(幻想童話)를 쓰기 어렵다는 말로도 느껴진다.   요즈음 동시(童詩)작가들이 동화((童話)를 많이 쓰고 있고 사실 이 두 가지 쟝르를 겸하는 작가들이 대단히 많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으나 원체 가까운 문장(文章)에 가까운 발상(發想)의 것이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동시로 씌어져야 할 소재로 동화를 썼다는 말은 조유로씨도 말한 바가 있고 필자도 이런 경험이 더러 있다.    이것을 다시 동시(童詩)의 입장에서 보면 동시(童詩)는 동화적이어야 된다는 말로 해석이 된다. 이것은 동시(童詩)가 산문(散文)이 되라는 말과는 다르다.   그 문장(文章)의 전달면(傳達面)이나 문장난해도(文章難解度)에 있어 동시(童詩)는 동화(童話)를 본받아야 된다는 말이 된다. 곧 동시(童詩)는 동화(童話)의 문장(文章) 이상으로 난해해서는 전달(傳達)에 지장이 된다는 것이다. 동화(童話)의 문장(文章)을 하나의 자로 삼아야 된다는말이다.   되풀이 말했듯이 동시(童詩)는 그 개념이 지닌 그대로 구속성(拘束性)을 갖고 있다 . 이 구속(拘束)을 벗어버리면 이것은 일반 자유시(自由詩)가 된다. 동시(童詩)의 기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성(拘束性)이 있으므로 동시(童詩)인 것이다.   여기서 백번 양보를 해도 동시(童詩)는 시(詩)의 모더니즘을 따라갈 수도 없고 그런 방법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모호(模糊)한 표현이 오히려 시(詩)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어(言語)의 건축(建築)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들 표현(表現)을 위해 암시(暗示)와 상징(象徵)과 은유(隱喩)의 방법(方法)을 동원한다. 이것이 현대시(現代詩)의 수사(修辭)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동시(童詩)의 방법(方法)이 될 수 없다.    동시(童詩)에서 모호(模糊)한 표현은 지탄이 돼야하며 은유(隱喩)나 암시(暗示)는 독자인 어린이에게 거리를 두게 한다.   같은 포에지에서 출발된 동시(童詩), 동화(童話)는 근본 문장(文章) 수사(修辭)에서도 같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시(童詩)는 난해(難解)한 현대시(現代詩)보다 동화(童話)쪽에 가까운 문장(文章)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시(童詩)는 동화적(童話的)인 시(詩)요, 동화(童話)는 동시적(童詩的)인 산문(散文)이다.    여기에 그 예문(例文)을 들어 이를 실증(實證)할 수도 있다.           엄마 심부름                                                      윤석중       아기가 반찬 가게로      엄마 심부름을 갑니다.      조그만 소쿠리를 옆에끼고      아장아장 콩나물을 사러 갑니다.      콩나물을 담아 놓은 치룽이 너무 높아서      아기는 못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자꾸자꾸 걸어갑니다.      집이 점점 멀어집니다.      집을 잃어버리고 우는 아기를      엄마가 달려가서      넬름 업어 왔습니다.    이 '엄마 심부름'은 1961년에 출판된 윤석중 동요집 중의 한 편이다. 이 시는 저학년 어린이의 감각을 잘 살린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 말고라도 윤석중씨의 작품만큼 어린이들과 친밀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동시에서 동화적인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이런 소재라면 좋은 유년동화 감이다. 동화로 썼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1981. 봄.  제18호에서     동시 창작법 ⑪ 자연(自然)에게 물어보라.  가르쳐 줄 것이다. 신 현 득     자연(自然)의 음성(音聲)을 듣는 것만으로는 시(詩)가 씌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때는 자연물(自然物)에게 대화(對話)를 거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연(自然)은 나름의 음성(音聲)으로 대답해 줄 것이다.   ―내가 짤깍짤깍 소리내면 동네 꼬마들이 모여들지.   이것은 엿장수 가위의 대답이다.   ―나는 방망이로 얻어맞기만 해.   이것은 빨랫터의 빨랫돌의 대답이다.   ―네가 꼬마였을 땐 이랬단 말이야.   이것은 내 돌사진이 하는 말이다.   어느 것이나 몇 마디의 대답은 하여 준다.   ―나는 뱃속에서 종소리를 낼 수도 있다.   괘종시계의 말이다.   ―꽃밭에 이슬비를 오게 해 주는 굉장한 재주가 있지.   이것은 물뿌리개의 말이다.   그런데 이 때는 가장 깊이있게 대답해 줄 만한 놈에게 가서 수작을 거는 것이 한 가지 요령이다. 시는 있을 만한 곳에 있으니까.   도랑물에게 가서 물어보자.   "도랑물아 어디로 가니? 어디를 거쳐서 가니? 무슨 일을 하면서 가니?"   이렇게 물어 놓고 기다리자. 대답이 없거든 하루종일이라도 도랑가에 앉아서 대답을 기다리자. 그러면 도랑물은 대답할 것이다.   "바다까지의 긴 여행이다. 우리는 여행을 하다가 쉬는 일이 없단다."   "밤낮 쉬지 않고 흘러 가지. 밤에는 달그림자를 띄우고 낮에는 산그림자를 띄우고 흘러 가지."   "긴 여행에 지치지 않게 노래를 부르며 흐르지."   "종이배도 띄우고, 나룻배도 띄우게 될 걸."   "마을 앞을 지나다가 물레방앗간에 들르게 될 거야. 쿵덕쿵덕 물레방아를 올려 봐야지."   자연(自然)의 대답은 모두가 시(詩)다 . 이것을 그대로 정리해 보자.           달그림자를 띄우고            산그림자를 띄우고           마을 앞을 지나다가           물레방아를 돌린다.           -쿵덕 쿵덕 쿵덕!   다시 더 깊은 이야기를 해 줄 것과 대화를 나누어 보자. 우리에게는 두 개의 손이 있다. 내 가장 가까운 손에게 물어 보자.   "손아 내 손아 네가 하는 일은?"   ―공을 치는 일이지. 그렇지만 커서는 큰일을 하게 될 걸. 나는 (손은) 자라고 있어.   "할머니 손이 하는 일은?"   ―아기 궁둥이를 닦아 주는 일.   "엄마손이 하는 일은?"   ―쌀단지를 긁어 퍼내는 일이지.   "오빠의 손은?"   ―구두닦는 일(마침 이 때는 6.25전쟁 때였다)   손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충분히 시가 될 수 있다.                손           할머니가            아기 둥둥이르 닦아 주고 있다.           엄마가            쌀 단지를 긁어 퍼낸다.           오빠는 구두닦이에서 돌아왔다.           할머니 손에           아기 똥이 묻지 않았나 보셔요.           오빠 손에는            거멓게 구두약이 묻었다.           죽 한 그릇씩을 먹고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           자 이리로            손을 모아 보셔요.           아기 손부터           차례로 놓아 보셔요.           작은 손들이 어떻게 커서           어른이 되는가를 알게.           내 손이 커서           오빠 손만해지고           오빠 손이            엄마손보다 커졌을 때           우리집은 아무도           쌀단지를 긁어내지 않아도 된다.           아기가 커서            오빠만 해졌을 때는           아기 손에            구두약이 묻지 않아도 된다.   자연에 물어보니 자연은 무엇이나 가르쳐 주고 있다.   어느 때 시골 학교에 가서 자취를 하며 1년 3개월을 지낸 일이 있다. 학교서 자취방까지에는 과수원이 있었고 과수원을 둘러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한적한 시골이라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 외에는 자연을 만나는 일밖에는 없었다. 나는 탱자꽃이 피는 봄부터 여기를 지나다니며 과일나무보다는 탱자울타리가 재미있는 소재(素材)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시(詩)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하루는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탱자나무에게 물어보면 될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탱자나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탱자나무다.   "미처 몰랐구나!"   나는 아침마다 이 탱자나무 울타리르 지나며 조용히 대화를 걸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야!"   "응"   대답을 해 줄 때도 있었고 대답이 없을 때도 있었다. 며칠인가 지났을 때다.    "우리는 여럿이 어깨동무를 하여 울을 만들고 있단다."   울타리는 재미있는 대답을 해 주었다. 역시 탱자나무에 대해서는 탱자나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는 이런 대답을 얻어내었다.   "우리에겐 가시가 있어. 문을 지키는 이는 무기가 있어야 되거든 우리는 이 뾰족한 무기를 이파리 밑에 숨겨두고 있단다. 누구든지 과일밭에 들어오기만 해 봐."   가을 날이 되고부터 과일밭의 사과가 빨갛게 익어 있었고 과일밭을 지키는 탱자나무도 노란 구슬로 된 자기 열매를 들고 익히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다가 보니 탱자나무 울타리 한 곳이 해쳐져 있었다.   '간밤 도적이 들었구나!'   그러면서 탱자나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탱자나무의 말을 들으면 어제 저녁 밤중에 과일밭의 사과를 탐내는 사람이 들어오다가 가시에 찔려 달아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 탱자나무들이 그 밤도적을 물리치기 위해 어떻게 힘을 합쳐 싸웠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참으로 기특한 탱자나무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한 편의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탱자나무           같은 나무이지만           착한 탱자나무는           과일나무 울이 돼 준다.           여럿이 어깨동무하고           울이 되어 서서           봄 사월           날이 선 가시 위에            잎과 꽃을 단다.           잎은 자라           가시를 덮는다.           가시는 움츠리고           이파리 밑에 숨는다.           과일밭의 과일이 익을 무렵에           탱자꽃은 커서           향기를 가득 담고           구슬이 돼 다시 열린다.           그러나 어둡고 무서운 밤에           가슴이 떨리도록 무서운 밤에           발자국 소리 여럿이 몰려 온다.           검은 그림자가 손을 내민다.           ―과일을 탐내는 놈이냐?           ―내 열매를 탐내는 놈이냐?           숨었던 가시가 나와           마구 찌른다.           ―아야 아얏!           ―아야 아얏!           자국 소리도 그림자도           달아나고           여러 개 구슬을 가지고 놀면서           탱자나무는            한가을까지 즐겁다.           과일밭을 지키면서            즐겁다.    의 한 작품도 자연과의 대화에서 씌어졌다. 처음에는 흙과의 대화였다.   "나는 세상의 어머니다."   이것이 흙의 대답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흙을 의지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풀과 나무가 나를(흙을) 의지해 살고 있지. 이 풀을 먹고 나무의 과일을 먹고 온갖 동물이 자라고 있지. 내가 없다면 누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겠니. 나비도 잠자리도 살 수 없다."   이것도 들판을 덮고 있는 흙의 말이었다.   "나는 젖을 주고 있다. 배나무가 뿌리를 뻗어 오면 배맛이 나는 열매가 되도록 젖을 주지. 복숭아나무에게도 살구나무에게도…."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내가 나무의 뿌리를 잘 잡아 두니까 나무가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나무뿐 아니지. 모든 풀뿌리도 내가 잡아 주고 있다."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나무끝 새집에서 새새끼가 잘 크는 것도 내가 잘 흔들어 주기 때문이야."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다음에는 나무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흙을 엄마라 생각하니?"   "그럼, 흙은 우리 엄마다. 지평선 끝으로 아침해를 띄우는 것도 모두 흙엄마가 하는 일이야. 그리고 내가 익힌 씨앗이 가서 묻히는 것도 흙엄마다. 내가 넘어져 묻힐 곳도 흙엄마야."   흙의 말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흙과 나무끼리 대화하는 소리까지 엿듣게 됐다. 분명히 저희끼리도 엄마와 자식 사이처럼 다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흙과 엄마           "나는엄마다."           흙은 그런 생각으로           하늘을 마주 보고 누워 있어요.           배나무가 뿌리를 뻗어 오면            배맛 될 것만 골라           젖을 주어요.           미루나무 키다리를           젖으로 키워요.           흙은 넘어지지 않게           뿌리를 잡고           그 줄기 끝에다 새집을 달고           새집을 흔들어 새끼새를 키우며           그 위로            구름이 흐르게 해요.           아침에 태양이 지평선에 떠서            나무꼭지서            열두시를 만나게 해요.           "엄마야!"           "나다 나다."           "엄마야!"           나다.           흙과 나무는            불러주고 대답해요.           "엄마야            내 씨가 떨어지면           어디로 가노?"           "그야 엄마한테로 오지."           "엄마야           내가 넘어지면           어디로 가노?"           "그 때도           엄마께로 와 묻힌다."  1981.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20호에서     동시 창작법 ⑫ 동요운동(童謠運動)에 붙여 신 현 득   동요(童謠)를 쓰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근 30년 동안 자유동시(自由童詩), 즉 동시(童詩) 일변도가 되어온 아동문학의 시분야(詩分野)가 동요도 아동문학의 책임영역이라는 자기 반성을 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동요의 학술용어(學術用語)는 「정형동시(定型童詩)」다. 그러므로 동시의 한 갈래로 정의(定義)가 된다. 다만 오랫동안 「동요」라는 용어를 써온 습관상 이 학술용어를 취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냥 「동요」라고만 할 때는 시(詩)로서의 의미와 곡(曲)으로서의 의미를 같이 지니고 있어서, 낱말 구성의 분위기를 따지지 않으면 구별이 되지 않는 수도 있다.   즉 「동요를 쓴다」와 「동요를 작곡한다」「동요를 부른다」에서 씌어지는 동요라는 의미는 각각 다른 것이다. 동요를 정형동시로 불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동요는 정형시(定型詩)이지만 시조( 時調)·경기체가(景幾體歌)·가사(歌辭)나 한시(漢詩)의 칠언절구(七言絶句)·오언시(五言詩)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외형률(外形律)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4·4조나 7·5조가 반드시 동요의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요는 어느 정형시보다 그 표현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면서 동요는 정형시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그 작품 나름의 리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 연(聯)과 연 또는 절(節)과 절 사이의 대칭관계(對稱關係), 즉 대구(對句)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 모든 동요는 그 첫 연이 기준이 된다. 그 다음의 연이 여기에 맞추어져 대칭을 유지함으로써 정형시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대칭관계의 맞서는 자리에 같은 자수(字數)의 시어(詩語)를 두되 서로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이나 대구가 될 수 있는 낱말을 두어 전체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봄비                       김종상 보슬보슬 봄비야 잔디밭에 내려라. 마른 잔디 속잎을 파릇파릇 피워라. 산과 들을 파랗게 융단으로 덮어라. 보슬보슬 봄비야 꽃나무에 내려라. 가지마다 꽃잎을 곱게곱게 달아라. 산과 들을 예쁘게 꽃밭으로 꾸며라.   위의 동요의 경우를 두고 보자. 첫 연과 둘째 연을 볼 때 「보슬보슬 봄비야」로 시작이 되고 있다. 「잔디밭에 내려라」와 「꽃나무에 내려라」의 대구다. 행을 살펴보면 「파릇파릇 피워라」와 「곱게곱게 달아라」의 대구다. 끝맺음을 「융단으로 덮어라」와 「꽃밭으로 꾸며라」의 대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 형식을 따져 보면 맞서는 자리에 같거나 비슷한 내용의 시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문장의 종지를 「내려라」「피워라」「덮어라」 등 「라」로 끝나는 낱말을 받혀 전체의 조화를 이룬 것도 이 동요의 재미있는 구성이다.   이와는 반대로 맞서는 자리에 전혀 반대가 되는 낱말을 놓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높다」와 「낮다」,「길다」와 「짧다」,「검다」와 「희다」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마방진(魔方陣)처럼 낱말이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동요는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다. 쓰기에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동요는 이런 구속에서조차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반드시 연을 가지지 않아도 동요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연이 없는 단련동요(短聯童謠)는 특히 구전동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민요는 4·4조를 기본 외형률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동요의 경우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성인(成人)의 작의(作意)가 작용하지 않는 것일수록 그 표현이 아주 자유롭다. 황새야 덕새야 네 모가지 짜르고(짧고) 내 모가지 길―고   이것은 황새를 보고 부르는 구전동요이지만 4·4조도 7·5조도 아니다. 별 하나 똑 따서 행주 닦아 망태에 담아서 동문에 걸―고 별 둘 똑 따서 행주 닦아 망태에 담아서 서문에 걸―고…….   별을 세는 이 구전동요(口傳童謠)도 4·4조와는 멀다. 이것만 보아도 동요는 그 리듬이 퍽 다채로우면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련의 동요가 지어지고부터 표현이 자유스러워진 반면 자유시와의 한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시조는 글자가 한정돼 단수에서도 시조의 성격을 지닌다. 가사는 정해진 음률이 있어서 길이에 관계 없이 그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   자수의 제한도 정해진 음률도 없는 동요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때의 척도를 문장의 리듬과 담긴 내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창작동요(創作童謠)가 씌어진 것은 1908년 육당에 의해서였다. 이후 20년대부터 동요는 아동문학의 주류로서 그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룬다. 그러나 이 당시의 동요는 현재의 동시적인 성격의 것도 있었다. 즉 현재의 동시와 동요의 기능을 다 맡고 있었다. 동시·동요의 미분화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형시인 동요를 써도 노래가 될 수 있는 것과 노래가 되기에 용이했던 것과 노래가 붙여질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형시라 해서 다 노래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현대의 자유동시를 동요의 틀에 잡아 넣었다 해서 반드시 노래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요는 오히려 외형적인 것보다 그 내용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된다. 즉 시의 내용에서 악상(樂想)이 풍겨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동시를 함축미(含蓄美)의 시라고 한다면 동요는 밖으로 발산되는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푸른 물 출렁출렁 어디로 가나?」   이 시구(詩句)는 1행(行)만으로도 동시의 문장과는 구별이 되고 있다. 악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의성어나 의태어가 악상을 잡아 주는데 역할을 한다고 믿어 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요는 경쾌하고 발랄하면서 재미있고 흥겨운 표현이 되어야 한다.   동시를 쓴다 해서 동요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동요를 쓸 때 동시와는 전혀 다른 표현 방법을 가지고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이 동요에 실패하는 원인은 동시에서 배배 꼬인 비유들을 동요의 틀에 잡아 넣기 때문이다. 문장에다 의미를 강조해 두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딱딱하고 뻣뻣한 것이 돼버린다. 이런 것은 노래가 될 수 없다. 동요의 문장은 부드러워야 한다. 따라서 시의 소재에서도 동시보다 제약을 받아야 한다. 충분히 노래가 담길 만한 소재여야 하는 것이다.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이 있는 것이 좋다.     이슬 눈 방울 눈                     유경환 풀잎 끝에 마알간 이슬 눈 한 개. 풀잎 끝에 은빛의 방울 눈 한 개. 눈빛을 반짝이는 풀잎들이 세상은 파랗다 생각할 거야.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눈 한 개 풀잎 끝에 또로록 방울 눈 굴러 해님을 쳐다보다 잠이 들면 풀잎은 눈 감고 꿈나라 간다.   이 동요는 소재를 잘 택한 보기가 된다. 「이슬 눈 방울 눈」이라는 제목에서 벌써 노래가 연상돼 온다. 좋은 동요가 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요를 쓰고자 할 때 소재의 발견이 큰 열쇠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주제가 정해졌을 때 거기에서 재미나는 몇 개의 사실을 골라 알맞게 배치해 놓고 그것을 전체의 뼈대로 삼는 것이다.   2연이나 3연의 노래를 지을 경우 이 뼈대 위에 대구가 될 만한 시어들을 배치한 다음 문장을 다듬어 간다.   그러나 동요는 어디까지나 문학인 만큼 문학적인 조화가 어느 정도인가에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때 동요가 아동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만큼 동요에는 훌륭한 문학을 담을 수 있다.         겨울 밤                         김재원 나무 속에 하늘이 들어와 있다. 가지마다 매달린 수많은 별들 나무들은 별을 세며 추위를 잊고 별들은 가지에서 겨울을 난다. 나무들아 춥거든 별을 보아라. 반짝반짝 눈부시게 살아있잖니? 별들아 춥거든 나무를 보렴. 찬 바람 이겨내고 살아있잖니?   이 작품에서 느끼는 것은 강한 문학성(文學性)이다. 그러므로 이만한 작품을 쓰기가 쉽지 않다. 각고(刻苦) 끝에 낳아진 작품이다.   동요가 아동문학의 책임 분야라는 것을 새삼스레 강조해야겠다. 만일 아동문학인이 동요를 써 주지 않을 경우 어린이들은 첫째 노래에서 굶주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요의 기능은 그것뿐이 아니다. 어린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전달이 쉬운 시를 제공해 주게 된다.   그러나 동요운동이 자유시로서의 동시가 발전하는데 지장을 주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편 동요운동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살펴볼 때 우리의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육당(六堂)은 창작동요를 처음 쓰면서 『흥부전』 『나무꾼과 선녀』 『별주부전』 같은 옛 얘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 노래를 창작했다. 7、5조 4행을 1연으로 하는 이들 이야기 노래는 현재의 동화시(童話詩)와는 다르다. 동화시는 자유시인데 반해 이 이야기 노래는 철저한 7、5조의 정형시다.   이러한 작품은 처음부터 노래를 위해서라기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주기 위한 수법으로 보인다. 그 길이가 엄청나게 길기 때문이다.   별주부전을 주제로 한 을 예로 들면 56행의 정형시다. 또한 이보다 긴 작품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작품은 7·5조로 된 가사(歌辭)로 보아도 될 만하다.   만일 이와 같은 작업이 현대에 와서 이루어질 때 우리의 고전 이야기는 물론 지리적인 기행문, 물건의 생산 과정, 유통 과정(流通過程)을 모두 노래에 담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작품을 시도한다고 할 때 현대적인 감각에서 씌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고전동요인 구비전래동요(口碑傳來童謠)를 현대동요에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의 문제다.   구전동요(口傳童謠) 중에는 녹두새요(謠)처럼 현대적인 가락에서 곡이 지어진 것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이 많은 노래의 소재(素材)들이 방치되고 있는 상태다.   구전동요가 현대적인 노래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시어들이 낡고, 길이가 너무 길고, 표현이 모호하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동요에서 구전동요를 받아들인다면 그 전체가 아니고 소재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약간의 수정으로 현대적인 노래가 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임동권 교수의 한국민요분류표(韓國民謠分類表)에 의하면 우리 나라 민요 362형 중에서 동요가 절반이 넘는 197형이다. 이들 전래동요는 동물요, 어류요, 식물요, 채약요(採藥謠), 수무자장요(受撫자장謠), 정서요, 자연요, 풍소요(諷笑謠), 어희요(語戱謠), 수요(數謠), 유희요(遊戱謠) 등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이것이 모두 현대동요의 자산(資産)이다.   동화의 경우 우리의 동화는 전래동화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요 또한 전래의 것에 뿌리를 두어야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맡겨진 자산을 어떻게 키워가야 할까?   이렇게 생각할 때 동요운동에서 지워진 일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1982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23호)  출처 ㅡ 허동인의 동시교실
1662    미국 최후의 음유시인 - 월트 휘트먼 댓글:  조회:5652  추천:0  2016-10-16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전환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     출생일 1819년 05월 31일 사망일 1892년 03월 26일 국적 미국 대표작 《풀잎》, 《북소리》 등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낙관적 인간관과 생명력을 다루었다.   월트 휘트먼 월트 휘트먼은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며,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대표적 작가이다. 민주주의를 미국의 중심 원리로 꼽고, 낙관적 인간관 및 모든 생명의 존재와 그 안에 내재된 생명력을 찬미했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토로한 논문 〈민주주의의 전망〉은 미국 민주주의의 3대 논문으로 꼽힌다. 월트 휘트먼은 1819년 5월 31일 미국 롱아일랜드 헌팅턴타운 근교 웨스트힐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월터 휘트먼은 농부이자 목수로, 토마스 페인의 인권 사상에 심취한 혁명적 사고방식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월트는 9남매 중 둘째였는데,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의 이름을 앤드루 잭슨,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으로 지을 정도였다. 어머니 루이자 판 펠서 휘트먼은 영적인 삶을 중시하는 신실한 퀘이커 교도였다. 4세 때 아버지가 사업 투자에 실패하여 가족이 브루클린으로 이사했고, 6세 때 브루클린의 공립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1세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변호사 사무실 사환, 인쇄소 견습공, 인쇄 조판사 등으로 일했다. 연극과 문학을 좋아해 독학했으며, 특히 영국 낭만주의 소설과 시, 성경에 심취했다. 16세 때 조판사로 일하면서 주간지 〈뉴욕 미러〉에 익명으로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으며, 17세 때는 고향 롱아일랜드로 돌아와 마을 학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세 때 주간지 〈롱 아일랜더〉를 창간하고 편집부터 신문 배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했고(10개월 만에 팔았다), 다시 인쇄 식자공, 교사 등을 전전하면서 시와 소설을 써 나가는 한편, 이를 신문에 투고했다. 21세 때는 마틴 밴 뷰런의 대통령 선거운동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시티홀 파크에서 열린 민주당 집회에서 연설하는 등 일찍부터 민주당 지지자로 활동했다. 23세 때부터 6년여간 뉴욕과 브루클린 등지에서 일간지 〈뉴욕 오로라〉, 〈이브닝 태틀러〉, 〈데모크라트〉, 〈미러〉, 〈브루클린 이브닝 스타〉,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 등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시와 소설을 꾸준히 발표했다. 29세 때 민주당 지지 활동 때문에 보수 신문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을 그만두게 되자 〈브루클린 위클리 프리먼〉을 창간하고 이 신문이 팔리기 전까지 1년여간 노예제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휘트먼이 일했던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 본사 이후로도 인쇄소 직원, 목수, 건설 노동자 등의 일을 전전하다가 36세 때인 1855년, 12편의 시와 서문이 담긴 시집 《풀잎》을 자비 출판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영시의 형식과 운율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산문 문장을 열거해 놓은 듯한 자유시의 형식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었으며, 내용 면에서는 남성, 여성, 백인, 흑인, 정치가, 노동자 그리고 풀잎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존재와 그에 내재된 생명력을 찬미하며, 미국 주류 사회의 통념과 믿음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동자로 온갖 직업을 전전했으며, 퀘이커 교도의 신실함과 민주주의적, 혁명적 성향을 지닌 부모 아래서 자라면서 깨우친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성욕을 강하게 표현한 〈나는 몸의 흥분을 노래하네〉 같은 작품들은 당시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도 매우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60년 미국에서 발행된 《풀잎》 속표지 당대 명망 높은 시인이자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풀잎》에 대해 '재치와 지혜가 있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놀라운 작품'이라고 평하며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 편지를 보냈으며, 휘트먼을 가리켜 '새로운 인간'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휘트먼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모두 영시의 전통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평을 받았고, 일부 시가 외설스럽다, 저속하다 등의 말을 듣자 다소 침체되어 있었으나 에머슨의 편지들로 용기를 되찾았다. 이듬해 에머슨의 편지들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을 추가하고 초판의 시 중 일부를 수정해 《풀잎》 2판을 냈으며, 죽을 때까지 수정, 증보를 거듭해 9판을 내놓는다. 2판에서 그는 자신을 '미국 최후의 음유시인',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라고 칭하며, 자신의 시는 육체와 성,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고 밝혔다. 《풀잎》을 발간했으나 전업 시인으로서 생계를 꾸려 나가기는 어려워 휘트먼은 브루클린의 〈데일리 타임스〉에서 약 3년간 편집 일을 하면서 시를 썼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 휘트먼은 시적 영감이 고갈되자 스스로 '난폭하고 세속적이고 관능적이며 먹고 마시고 여자들과 놀아난다'라고 하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오히려 감정적 소모를 불러일으켜 시인의 힘을 고갈시켰다고도 썼다. 이 시기 그가 느꼈던 감정들은 〈아담의 아이들〉, 〈창포〉 등에 내재되어 있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휘트먼은 북부를 지지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시 〈울려라 북소리!〉를 발표했다. 또한 북군으로 참전한 동생 조지가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부상을 당하자 동생을 만나러 버지니아군 야영소에 갔다가 부상병들을 보고 간호병으로 자원했다. 이듬해 워싱턴으로 가서 군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한편, 육군 회계관 사무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휘트먼은 〈병자들의 위대한 군대〉 등 남북전쟁에 대한 시들을 쓴다. 1864년은 휘트먼 개인에게 큰 시련의 시기였다. 동생 조지가 남부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동생 앤드루 잭슨이 결핵과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으며, 형 제시가 정신이상으로 킹스 카운티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비극이 연달아 이어졌다. 1865년, 휘트먼은 에머슨의 지인을 통해 내무부에 자리를 얻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외설적이고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시집) 《풀잎》의 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내무장관 제임스 할란에 의해 해고되었다. 그러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자이자 시인인 윌리엄 오코너가 부당 해고를 항의하는 등 여러모로 노력하여 휘트먼은 법무부에 자리를 얻어 군인들을 인터뷰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남북전쟁에 관한 시들과 그해 4월에 암살된 링컨을 추모하는 시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을 수록한 시집 《북소리》를 발표했다.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과 함께 오코너가 쓴 휘트먼에 대한 전기 글 《선량한 회색 시인》으로 휘트먼은 '애국자 시인'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이듬해에는 수필집 《민주주의의 전망》의 토대가 되는 산문들을 발표하면서 전쟁에 대한 견해, 미국의 민주주의를 일으키고 국민의 사기를 드높일 방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청년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문학과 예술로 민주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1860년대 후반부터 휘트먼은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먼저 크게 인정을 받으면서 미국 비평가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이 시기부터 우울증이 시작되었으며, 1873년에는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마비 증세를 겪었다. 그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글을 계속 써 나가 1876년에는 《풀잎》 증보판과 시집 《두 시냇물》, 산문집 《남북전쟁에 대한 기록》을 펴냈다. 또한 미국 내외의 정치 문제에 대한 발언과 강연도 계속했으며, 죽을 때까지 《풀잎》의 부도덕성 문제에 대한 논란에 시달렸다. 1890년, 71세의 휘트먼은 이미 두 차례의 뇌졸중 발작을 겪으며 거동이 불편했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둔 상태였다. 휘트먼은 정식으로 결혼한 적이 없는데, 그해에 자신이 일평생 여섯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자신이 살고 있던 캠던 시의 할리 묘원에 4천 달러 상당의 묘소를 구입하고 직접 디자인했다. 이후 1892년 3월 26일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휘트먼 시 전집》의 출간을 준비하고, 시집 《환상이여 안녕》, 《풀잎》의 최종판을 출간하는 등 말년에도 시인으로서 끊임없이 작업을 계속했다. ============================================== 월트 휘트먼 고백    ‘동물’에 대한 묵상록= ‘나는 모습을 바꾸어 동물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평온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그들은 땀 흘려 손에 넣으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환경에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 늦도록 잠 못 이루지도 않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불만족해 하는 자도 없고 소유욕에 눈이 먼 자도 없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잘 난체 하거나 불행해 하는 자도 없다.’          월트 휘트먼     1819~1892   미국의 시인, 수필가, 저널리스트. 19세기 미국 문학사에서 포우, 디킨슨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이사해 공립학교를 나온 뒤 인쇄소 사환을 거쳐 식자공일을 했다. 한때 교사직을 갖기도 했지만 1838년 이후에는 주로 브루클린 지역의 많은 신문들을 편집하였다.     1855년에 출판사와 작가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표지에 자신의 초상만을 실은 초판을 발행하였다.   형식과 내용이 혁신적인 시집이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영혼과 육체에 대한 동등한 존중, 열린 정신, 정치적 자유의 향유를 촉구한다.   형식은 정형을 타파한 자유 형식이었다. 이 작품으로 휘트먼은 자유시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면서 미국 문학사에서 혁명적인 인물로   등장하였다. 그는 유례없이 한 개인으로서의 를 대담하게 찬양할 뿐 아니라, 육체와 성욕까지도 강렬하게 표현했다.   이 시집을 읽은 에머슨은 당장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재치와 지혜가 넘치는 비범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보낸 편지를   쓴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1855년 시집 《풀잎》을 자기 돈으로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노래한 것이었다.   논문에서도 미국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를 비판하였다.   1865년 남북 전쟁을 소재로 한를 출 판하고, 이듬해 그가 존경하던 링컨 대통령에 대한 추도시를 발표하였다.       오! 선장, 나의 선장     오오 선장, 나의 선장이여!   무서운 항해는 끝났다.   배는 온갖 난관을 뚫고   추구했던 목표를 획득하였다.   항구는 가깝고,   종소리와 사람들의 환성이 들린다.   바라보면 우람한 용골돌기,   엄숙하고 웅장한 배.   그러나 오오 심장이여! 심장이여! 심장이여!   오오 뚝뚝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이여,   싸늘하게 죽어 누워있는   우리 선장이 쓰러진 갑판 위.   오오 선장, 나의 선장이여!   일어나 종소리 들으오, 일어나시라-   깃발은 당신 위해 펄럭이고-   나팔은 당신 위해 울리고 있다.   꽃다발과 리본으로 장식한 화환도   당신을 위함이요-   당신 위해 해안에 모여든 무리.   그들은 당신을 부르며,   동요하는 무리의 진지한 얼굴과 얼굴.   자, 선장이여! 사랑하는 아버지여!   내 팔을 당신의 머리 아래 놓으오.   이것은 꿈이리라.   갑판 위에 당신이 싸늘하게 죽어 쓰러지시다니.   우리 선장은 대답이 없고,   그 입술은 창백하여 닫힌 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는 내 팔을 느끼지 못하고,   맥박도 뛰지 않고 의지도 없으시다.   배는 안전하게 단단히 닻을 내렸고,   항해는 끝났다.   무서운 항해에서 승리의 배는   쟁취한 전리품을 싣고 돌아온다.         열린 길의 노래     두 발로 마음 가벼이 나는 열린 길로 나선다. 건강하고 자유롭게, 세상을 앞에 두니 어딜 가든 긴 갈색 길이 내 앞에 뻗어 있다.     더 이상 난 행운을 찾지 않으리. 내 자신이 행운이므로. 더 이상 우는소리를 내지 않고, 미루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방안의 불평도, 도서관도, 시비조의 비평도 집어치우련다. 기운차고 만족스레 나는 열린 길로 여행한다.     대지, 그것이면 족하다. 별자리가 더 가까울 필요도 없다.   다들 제 자리에 잘 있으리라. 그것들은 원하는 사람들에게 소용되면 그뿐 아니랴.     (하지만 난 즐거운 내 옛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 난 그들을 지고 간다, 남자와 여자를, 그들을 어딜 가든 지고 간다.   그 짐들을 벗어버릴 수는 없으리. 나는 그들로 채워져 있기에. 하지만 나도 그들을 채운다)       강 건너는 기병대     초록색 섬 사이를 누비며 가는 긴 대열, 뱀같이 꾸불꾸불하게 가고 있다.   해빛에 무기가 번쩍인다- 들으라 음악같은 울림소리,   보라, 은빛 강물, 그 물 첨벙거리며 건너다 목을 축이는 말들, 보라, 갈색 얼굴의 병사들, 각각의 무리들과 사람들 그림을,   말 안장에 앉아 방심한 듯 쉬고 있고, 한편으로는 건너편 뚝에 올라가고 있는 병사들, 지금 강물에 들어가는 병사들,   홍, 청, 순백, 삼색기가 선명하게 바람에 펄럭인다.     낯 모르는 사람에게   저기 가는 낯 모르는 사람이여! 내 이토록 그립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은 내가 찾고 있던 그이, 혹은 내가 찾고 있던 그 여인,(꿈결에서처럼 그렇게만 생각 됩니다.)     나는 그 어디선가 분명히 당신과 함께 희열에 찬 삶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유연하고, 정이 넘치고, 정숙하고, 성숙 해서 서로를 스치고 지날 때 모든 것이 회상됩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자랐고, 같은 또래의 소년이었고, 같은 또래의 소녀였답니다.   나는 당신과 침식을 같이했고, 당신의 몸은 당신의 것만이 아닌 것이 되고, 내 몸 또한 그러 했습니다.     당신은 지나가면서 당신의 눈, 얼굴, 고운 살의 기쁨을 내게 주었고,   당신은 그 대신 나의 턱수염, 나의 가슴, 나의 두손에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나 홀로 앉아 있거나 혹은 외로이 잠 못 이루 는 밤에 당신 생각을 해야합니다.   나는 기다려야 합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어마지 않습니다.   당신을 잃지 않도록 유의 하겠습니다.     짐승   나는 모습을 바꾸어 짐승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평온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나는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땀흘려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환경을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 늦도록 잠 못 이루지도 않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 따위를 토론하느라 나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불만족해 하는 자도 없고, 소유욕에 눈이 먼 자도 없다.   다른 자에게, 또는 수천년 전에 살았던 동료에게 무릎 끓는 자도 없으며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잘난 체하거나 불행해 하는 자도 없다.       시집 '풀잎' 서문에 쓴 시     땅과 태양과 동물들을 사랑하라. 부를 경멸하라. 필요한 모든 이에에 자선을 베풀라.   어리석거나 제 정신이 아닌 일이면 맞서라. 당신의 수입과 노동을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 돌려라.   신에 대해 논쟁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참고 너그럽게 대하라.   당신이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 또는 사람 수가 많든 적든 그들에게 머리를 숙여라.   아는 것은 적어도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들. 젊은이들, 가족의 어머니들과 함께 가라.   자유롭게 살면서 당신 생애의 모든 해, 모든 계절, 산과 들에 있는 이 나뭇잎들을 음미하라.   학교, 교회, 책에서 배운 모든 것을 의심하라. 당신의 영혼을 모욕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하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   시집 서문에서   월트 휘트먼 땅과 태양과 동물들을 사랑하라.  부를 경멸하라.  원하는 모든 일에게 자선을 베풀라.  어리석고 제정신이 아닌 일에 맞서라. 당신의 수입과 노동을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 돌려라.  신에 대하여 논쟁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참고 너그럽게 대하라.     당신이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 또는 사람 수가 많든 적든 그들에게 머리를 숙여라.  지식은 갖추지 못했으나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들.  젊은이들, 가족의 어머니들과 함께 가라.     자유롭게 살면서 당신 생애의 모든 해, 모든 계절, 산과 들에 있는 이 나뭇잎들을 음미하라.  학교, 교회, 책에서 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 당신의 영혼을 모욕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하라. 당신의 몸이 장엄한 시가 되게 하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인생은 당신이 배우는 대로 형성되는 학교이다  당신의 현재 생활은 책 속의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지나간 장들을 썼고, 뒤의 장들은 써나갈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저자이다. 사람이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왜 국경에서 멈추는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당신의 사상을 하늘 위에 불로 새겨놓은 것처럼 그렇게 사고하라.  진실로 그렇게 하라.  온 세상이 단 하나의 귀만으로 당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듯이  그렇게 말하라.  진실로 그렇게 하라.  당신의 모든 행위가 당신의 머리 위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행동하라.  진실로 그렇게 하라.  당신의 신이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당신을 필요로 하듯이 살아라.  진실로 그렇게 하라.   풀잎 / 휘트먼       /////////////////////////////////////////////////   첫 민 들 레     겨울이 끝난 자리에서 소박하고 신선하게 아름다이 솟아나서,   유행, 사업, 정치 이 모든 인공품일랑 일찍이 없었든 양, 아랑곳 없이,   수플 소북히 가린 양지 바른 모서리에 피어나 통트는 새벽처럼 순진하게, 금빛으로, 고요히,   새봄의 첫 민들레는 이제 믿음직한 그 얼굴을 선보인다.       나 여기 앉아 바라보노라     나는 앉은 채로 세상의 모든 슬픔을 두루 본다 온갖 고난과 치욕을 바라본다   나는 스스로의 행위가 부끄러워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가슴에서 복받치는 아련한 흐느낌을 듣는다   나는 어미가 짓눌린 삶 속에서 아이들에게 시달려 주저앉고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죽어감을 본다   나는 아내가 지아비에게 학대받는 모습을 본다 나는 젊은 아낙네를 꾀어내는 배신자를 본다   나는 숨기려해도 고개를 내미는 시새움과 보람없는 사랑의 뭉클거림을 느끼며, 그것들의 모습을 땅위에서 본다   나는 전쟁, 질병, 압제가 멋대로 벌이는 꼴을 본다 순교자와 죄수를 본다   뱃꾼들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일에 목숨을 걸고 나설 차례를 정하려고 주사위를 굴리는 모습을 본다   나는 오만한 인간이 노동자와 빈민과 흑인에게 던지는 경멸과 모욕을 본다   이 모든 끝없는 비천과 아픔을 나는 앉은 채로 바라본다 보고, 듣고, 침묵한다   나 자신의 노래  [나 자신의 노래 1]  나는 나를 예찬하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 그리고 내 것은 네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내게 속하는 일체의 원자는  마찬가지로 네게도 속하는 것이다. 나는 빈둥빈둥 시간 보내며, 나의 영혼을 초대한다. 나는 마음 편히 몸을 기대고,  빈둥대며 여름 풀의 싹을 응시한다. 나의 혀, 내 피 속의 일체의 원자는  이 땅에서, 이 대기에서 만들어진 것, 나는 여기에서 내 양친에게서 생겼고,  양친은 또 그 양친에게서, 또 그들은 양친에게서, 나는 지금 37세의 완전한 건강체로 시작한다. 죽을 때까지 중단 없기를 바라면서. 종파나 학파는 잠시 두어 두고, 그것이 어떻든 지금 상태로 족하니, 잠시 거기에서 물러나,  그러나 결코 잊진 않고 나는 선악을 다 용납하고 만난을 무릅쓰고 마음껏 말하련다, 본유의 정력으로 거리낌 없이 자연을, 나의 천성을 [나 자신의 노래 2] 집이란 집, 방이란 방은 모두 향기로 가득 차고,  선반도 모두 향기에 차 있다. 나는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그것을 분간하고 그것을 좋아한다. 그 향기를 증류하면 그것이 날 취하게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진 않겠지. 대기는 향료가 아니다,  그것은 증류수 같아서 맛도 향기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내 입에 맞아서 나는 그것에 심취한다. 나는 숲가의 둑으로 가서, 순수하게 벌거숭이가 되리라. 나는 나에게 와 닿는 것을 미친 듯이 갈망한다. 내 숨결의 연기, 메아리, 잔물결, 은밀한 속삭임, 사랑뿌리, 비단실, 나무 아귀와 덩굴, 나의 내뱉는 숨결과 들이마시는 숨결,  내 심장의 고동, 내 폐부를 드나드는 피와 공기, 푸른 잎과 마른 잎의 냄새,  바닷가와 거무스레한 바닷돌의 냄새, 창고의 건초 냄새, 선풍의 소용돌이 속에 풀리는 내 목소리의 토해내는 언어의 음향, 몇 번의 가벼운 키스, 몇 번의 포옹, 허리를 감싸는 팔, 연한 가지가 흔들림에 따라 나무 위에 춤추는 빛과 그늘, 혼자 있든 아니면 거리의 혼잡 속이든  들판이나 언덕 기슭 따라 갈 때의 기쁨, 건강체의 감촉, 대낮의 떨리는 소리,  침상에서 일어나 태양을 맞이하는 내 노래. 너는 천 에이커의 땅을 크다고 생각하는가.  이 지구를 굉장하다고 생각했는가. 너는 읽기를 배우는 데 그렇게 오래 연습했는가. 너는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오늘 하룻밤 하룻밤,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모든 시의 근본을 파악한다. 너는 이 지구와 태양의 정수도 파악한다 (기타 천만의 태양이 있다), 너는 이제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통하여 물건을 받아선 안 된다.  그리고 죽은이의 눈을 통하여 보든지,  책 속 도깨비에게서 밥을 얻어 먹어선 안 된다, 너는 이 내 눈을 통하여 보아서도 안 된다,  내게서 무엇을 얻어도 안 된다, 너는 널리 귀를 기울여야 하고, 네 자신의 체로 걸러내야 한다.               [나 자신의 노래 6] 한 아이가 두 손에 가득 풀을 가져오며  “풀은 무엇입니까” 라고 내게 묻는다. 내가 어떻게 그 아이에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나도 그 애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그것이 필연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나의 천성의 깃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니면, 그것은 주님의 손수건이거나, 신이 일부러 떨어뜨린 향기나는 기념의 선물일 것이고, 소유주의 이름이 구석 어딘가에 들어 있어서  우리가 보고서 ‘누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추측한다,  풀은 그 자체가 어린아이, 식물에서 나온 어린아이일 것이라고. 혹은 그것은 모양이 한결같은 상형문자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넓은 지역에서도 좁은 지역에서도 싹트고, 검둥이 사이에서도, 흰둥이 사이에서도 자라며 태나다인, 버지니아인, 국회의원, 니그로,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주고, 그들에게서 그것을 받는다. 또한 그것은 무덤에 난 깎지 않은 아름다운 머리털이라고 생각한다. 너 부드러운 풀이여, 나는 너를 고이 다룬다. 너는 젊은이들의 가슴에서 싹트는지도 모르겠고, 만일 내가 그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그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마 너는 노인들,  혹은 생후 곧 어머니들의 무릎에서 떼낸 갓난아이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 여기에 그 어머니의 무릎이 있다. 이 풀은 늙은 어머니들의 흰머리에서 나온 것으로선 너무 검다, 노인의 색바랜 수염보다도 검고, 엷게 붉은 입천장 밑에서 나온 것으로서도 너무 검다. 아, 나는 결국 그 숱한 발언들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발언이 아무 의미 없이  입천장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젊어서 죽은 남녀에 관한 암시를 풀어낼 수 있었으면 싶다, 또한 노인들과 어머니들,  그리고 그들의 무릎에서 떼낸 갓난아이들에 관한 암시도. 너는 그 젊은이와 늙은이가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는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됐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어딘가에서 살아서 잘 지내고 있다, 아무리 작은 싹이라도 그것은 진정 죽음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생을 추진하는 것이고,  종점에서 기다렸다가 생을 잡는 것은 아니다. 만물은 전진하고 밖으로 진전할 뿐  죽는 것은 하나도 없다, 죽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며,  훨씬 행복한 것이다. [나 자신의 노래 7] 태어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 자가 있는가. 나는 당장 그나 그녀에게  태어나는 것은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행복하다고 이르리라,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임종하는 자와 더불어 죽음의 문을,  산욕하는 갓난아이와 더불어 생의 문을 통고한다,  나는 자기 모자와 신발 사이에 한정된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사상을 음미한다,  한 가지도 같은 것은 없고 모두가 선하다. 지구도 좋고 별도 좋다,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것들도 모두 선하다. 나는 지구도 아니고, 지구의 부속물도 아니다, 나는 민중의 벗이고, 반려자다,  그들은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멸이며, 무한히 깊다, (그들은 어떻게 불멸인가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세상 만물은 동류끼리 모인다,  나에겐, 나의 남자와 여자, 나에겐, 일찍이 청춘이었던 자들과 여자를 사랑한 일이 있는 자들, 나에겐, 연인과 노처녀를, 나에겐, 모친을, 그리고 모친의 모친을, 나에겐 미소 지은 일이 있는 입술을, 눈물 흘린 일이 있는 눈을, 나에겐, 아이들을, 그리고 아이를 낳는 사람들을. 옷을 벗어 던져라.  너희들 누구나 나에게 죄가 없다,  재미 없는 자도 배척받은 자도 아니다, 나는 검은 나사천이건, 목면이건 그 옷을 통하여  너희들의 인물을 투시한다, 나는 근처에 있어, 끈질기게 추구하고,  권태를 모르고 흔들려 떨어져 버리지 않는다. [나 자신의 노래 9] 농가의 곡간의 대문은 열려서 준비가 돼 있다, 수확철의 건초가 천천히 끌리는 마차에 높이 실리고, 밝은 햇빛이 그 황갈색과 녹색이 교차하는 짐 위에서 넘실거린다, 쌓인 건초의 느슨한 곳에 한 아름이 더 채워진다. 나도 거기에 있어 돕는다,  나는 건초 짐 위에 사지를 펼치고 돌아온다, 한쪽 도리를 다른 쪽에 포개고서 나는 마차의 가벼운 동요를 느낀다, 나는 외양간 가로대에서 뛰어내려 클로버와 큰조아재비풀을 움켜쥔다, 그리고 거꾸러져 머리가 건초를 뒤집어쓰고 헝클어진다. [나 자신의 노래 10]  홀로, 멀리 황야로, 산으로  나는 사냥간다, 자신의 경쾌함과 쾌활함에 경탄하며 방황한다, 해질 무렵이면 밤을 보낼 안전한 곳을 찾고, 불을 피워서 갓 잡은 사냥감을 굽고, 엽총을 옆에 놓고 끌어 모은 낙엽을 깔고 사냥개와 함께 잠이 든다. 양키 쾌속정이 돛을 하늘에 닿게 달고  번쩍이는 파도와 물안개를 뚫고 달린다, 내 눈은 육지를 응시하고  뱃전에 걸터앉거나 갑판에서 환희의 소리를 지른다. 가공과 조개 파는 이가 일찍 일어나 나를 찾아왔다, 나는 바지 끝을 장화 속에 구겨넣고서  가서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너도 그 날 우리와 함께 있어 조개 남비 주변에 모였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먼 서부의 야외에서 벌어진  한 덮엽사의 결혼식을 보았다.  신부는 미국 토인의 아가씨였다, 신부의 아버지와 그 친구들은  가까이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모두 사슴가죽의 신을 신고  어깨엔 큰 두꺼운 모포를 걸치고 있었다. 거의 가죽옷으로 차림하고서,  멋진 수염과 곱슬머리가 목을 덮고 있는 덮엽사는  신부의 손을 잡고 둑 위에 쉬고 있었다, 신부는 긴 속눈썹에다, 머리엔 아무 장식도 없고,  빳빳한 머리털은 그녀의 풍만한 팔다리에 처져 발까지 닿았다. 도망친 노예가 내 집에 와서 문밖에 멎었다. 그가 움직여서 쌓아놓은 땔나무에서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열린 반쪽 부엌문으로,  나는 지쳐서 다리를 저는 그를 보았다, 나는 그가 통나무 위에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안심시켰다, 그의 땀에 젖은 몸과 상처난 발을 씻도록  통에 물을 가득 퍼주었다, 그리고 내 방으로 통하는 방 하나를 그에게 주고서  거친 감의 깨끗한 옷가지를 내주었다, 그때 그가 눈을 휘둥글게 뜨고서 주저주저하던 것이 잘 기억난다, 또한 그의 목과 발꿈치의 상처에  고약을 붙여 주었던 것도 기억한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서 북으로 달아날 때까지  일주간 내게 머물렀다. 나는 식탁에서 그를 내 곁에 앉히고,  방 구석에는 화승총을 세워 두었다. [나 자신의 노래 11] 28인의 젊은이가 해변에서 멱감는다, 28인의 젊은이가 모두 사이가 좋다, 28년간의 여자의 생애는 모두 고독하다, 그녀는 강둑 고지에 좋은 집을 소유하고 있다, 그녀는 곱게 화려하게 차려입고 창문 발 뒤에 숨는다. 그녀는 젊은이들 중 누구를 제일 좋아하는가. 아, 그 중에서 제일 못난 남자가 그녀에겐 아름답다. 부인, 어디로 가시나요. 내겐 당신이 보입니다, 당신은 거기 물 속에서 물을 튕기며,  그러나 당신은 자기 방에서 꼼짝 않고 있다. 해변을 따라 춤추며 웃으며 29세의 여자 수영객이 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안 보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보고 그들을 좋아했다. 젊은이들의 수염이 물 묻어 번쩍였고,  물이 긴 머리에서 흘렀다, 작은 물줄기가 그들의 전신을 흘러내렸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 손이 관자놀이에서 가슴으로 떨리면서 내렸다. 젊은이들이 자빠져서 둥실 떠 있고,  그들의 흰 복부가 해를 향하여 부풀어 있다,  그들은 누가 그것을 꽉 잡아 주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몸을 늘어뜨리고 구부려서  훅훅 불거나 가라앉는가를 모른다, 그들은 누구에게 물을 끼얹는가를 모른다. [나 자신의 노래 15]  아름다운 콘트랄토이 가수가 오르간 놓인 단상에서 노래한다. 목수는 재목을 손질하고,  그의 대패날이 사납게 밀어올리는 마찰음을 울린다. 기혼의 또는 미혼의 자녀들이  감사절 만찬에 참석하려고 마차로 귀향한다, 키잡이가 키바퀴를 잡고서  힘센 팔로 배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운전사는 포경선에 긴장해서 서서,  창과 작살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사냥꾼은 발자국 소리 안 나게  조심껏 몸을 뻗치고 걷는다, 집사는 제단 앞에서 십자를 그으며 임명을 받고 있다, 실 뽑는 여공은 큰 물레바퀴의 소리에 맞추어 일진일퇴한다, 농부는 일요일 산보에 목책 옆에 서서  연맥과 호맥의 작황을 본다, 광인은 증세가 확인되어 드디어 수용소로 운반된다, (그는 지금까지처럼, 어머니 침실의 침대에서 다시는 자지 못하리라) 머리가 하얗고 턱뼈가 앙상한 견습 인쇄공은  활자 케이스 옆에서 일한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원고를 보면서 씹는 담배를 입안에서 돌린다, 기형의 수족이 수술대에 결박되어 있고, 제거된 것이 흉하게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다. 흑백 혼혈녀가 경매대에서 팔리고,  주정뱅이가 술집 난로가에서 졸고 있다, 기계공은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경관은 자기 순찰구역을 순찰하고,  문지기는 통행인을 주목한다. 젊은 녀석이 화물운반차를 몰고 (그를 모르지만 나는 그가 좋다) 혼혈아가 경주에 나가기 위하여  운동화의 끈을 조른다, 서부지방에서의 칠면조 사냥에는  늙은이 젊은이가 모인다,  어떤 이는 엽총에 기대고,  어떤 이는 통나무에 걸터앉았다, 군중 사이에서 명사수 하나가 걸어나와서,  자세를 취하고 총을 겨눈다. 새로 온 이민의 무리가 선창과 부두를 뒤덮는다, 사탕수수밭에선 양털머리의 흑인노예가 풀을 뽑고,  감독은 그것을 말타고 지켜본다. 무도장에서 나팔소리가 울리자  신사들이 파트너 쪽으로 달려가고,  춤추는 짝들이 서로 인사를 한다, 삼나무 판장의 지붕밑 방에서  젊은이가 눈뜨고 드러누워서  음조 고운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휴론호로 흘러드는 지류에서  미시간주의 어부가 덫을 장치한다, 노란 테를 두른 옷을 입은 여자가  사슴가죽 구두와 구슬백을 팔고 있다, 미술 감정사는 몸을 옆으로 구부리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전시장을 보며 돌아다닌다, 갑판에서 일하는 선원이 배를 묶어매는 동안  널판이 다리 놓여져서 상륙개을 건너게 한다. 누이동생이 실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있고,  언니는 그것을 실패에 감으며,  때때로 실이 얽히면 손을 쉰다. 결혼 후 일 년의 아내는 일 주 전에 첫애를 낳고  건강이 회복되면서 행복하다. 두 발이 깨끗한 양키 소녀는 재봉틀에서,  혹은 작업장이나, 공장에서 일한다, 포도공사의 인부는 손잡이가 둘 달린 메에 기대고 있고,  기자의 연필은 수첩 위를 빨리빨리 움직이고,  간판장이는 푸른색과 금색의 글씨를 써간다. 운하공은 뱃길을 총총걸음으로 걷고,  부기사는 책상에서 계산하고 구두공은 실에 초칠을 한다, 지휘자는 악대를 지휘하고 연주원들 모두 그를 따른다, 유아는 세례를 받고,  개종자는 그의 최초의 신앙을 고백한다,  범주경기가 만 위에서 전개되어 경주가 시작됐다 (번쩍이는 흰 돛!) 가축 몰이꾼은 우리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놈에게  큰소리를 지른다, 행상인은 등에 진 짐으로 땀을 흘리고,  (고객은 한 푼 두 푼을 깎는다) 신부는 흰 드레스의 주름을 펴고,  시계의 초침이 더디기만 하다, 아편 흡연자는 굳어진 머리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서 몸을 기울인다, 창녀는 숄을 질질 끌고,  그녀의 모자는 흔들흔들하는 여드름 투성이의 목 위에 매달려 있다. 군중이 그녀의 욕지거리를 비웃고,  사내놈들은 조롱하며 서로 눈짓한다, (가엾은! 나는 너의 욕을 비웃거나 조소하지 않는다) 각의를 열고 있는 대통령은 훌륭한 장관들에 에워싸여 있다, 광장에는 부인 셋이 팔짱을 끼고  으스대며 다정하게 걷고 있다, 어선의 선원들이 선창에 넙치를 채곡채곡 쌓아올린다, 미주리주이 남자는 상품과 소떼를 끌고서 평야를 건너간다, 차삯을 거두는 차장은 열차 안을 통과할 때  거스름돈을 달랑거리며 주의를 끈다, 마루를 까는 목수는 마루를 깔고,  양철공은 지붕에 양철을 씌우고,  석공은 모르타르를 가져오라고 소리친다, 노동자들의 일단이 일렬로  각자 어깨에 벽돌상자를 지고서 나아간다, 계절은 계절을 쫓아가고,  말할 수 없이 많은 군중이 군집했다,  오늘 7월 4일, 도립기념일 (대포, 소포의 예포소리!) 계절은 계절을 쫓아가고,  농부는 밭을 갈고,  풀 베는 이는 풀을 베고,  겨울 씨앗은 땅에 떨어진다. 호수 안창에서 열기잡이가  얼은 수면에 뚫은 구멍 옆에서 지켜보며 기다린다, 그루터기가 개간지 주변에 빽빽이 서 있고,  벌목꾼은 도끼를 깊이 찍는다, 평저선 선원들이 저녁 무렵,  사시나무나 호두나무 근처로 배를 몬다, 곰 사냥꾼은 레드강 유역에,  또는 테네시강이나 아칸서스강이 흐르는 유역을 찾아다닌다, 차타후치강, 혹은 알타마호강에 깔린 어둠 속에 횃불은 타고, 늙은 노인들은 자식, 손자, 증손을 거느리고 저녁식탁에 앉아 있다, 어도우비 벽돌 담 안이나 캔버스 천막 안에,  사냥꾼과 덫꾼들이 그날의 사냥을 끝내고 쉬고 있다, 도시도 쉬고 시골도 쉰다, 산 자는 주어진 자기 시간을 자고,  죽은 자도 주어진 자기 시간을 잔다, 늙은 남편은 아내 곁에서 자고,  젊은 남편도 아내 곁에서 잔다, 그리고 그것들은 안으로 향하여 내게 오고,  나는 밖으로 향하여 그들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러하듯이, 그런 것들은 많건 적건 나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가져와서 나는 내 노래를 짠다. [나 자신의 노래 24]  훨트 휘트먼, 나는 하나의 우주,  맨해턴 태생의 한 사나이, 성미가 거칠고, 살집 좋고, 욕정이 넘치고,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생산하고, 감상주의자는 아니고,  남의 위에 서 있는 자 아니고,  그러나 그들과 유리된 자 아니다, 방종하지도 않고, 그렇대서 도학자도 아니다. 문이란 문에서 자물쇠를 떼어 버려라! 옆기둥에서 문 그 자체를 떼어 버려라! 누구나 다른 사람을 내리깎는 사람을 나는 내리깎는다, 무엇이고 동작이 가고 말이 가면 그것은 결국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통하여 영감의 물결은 오고 가고 나를 통하여 흐르는 조류와 지표. 나는 원시적인 암호말을 하고, 데모크라시의 신호를 보낸다, 단호히!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조건으로  그들의 분신적 상대물을 취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련다. 나를 통하여 오랫돋안 입다물던 목소리들이 들린다, 무수한 세대에 걸치는 죄수와 노예들의 목소리, 병자와, 절망자와, 도둑과 난장이의 목소리, 중비와 증대의 순환의 목소리, 그리고 별들을 연결하는 맥락의 목소리, 자궁과 정자의 목소리, 다른 이들에게 짓밟혀지는 자들의 군리의 목소리, 불구자와 쓸모없는 자와 평범한 자와 어리석은 자와 경멸받는 자의 목소리, 대기 속의 안개, 변 덩어리를 굴리는 풍뎅이의 목소리. 나를 통하여 나가는 금지된 목소리, 성과 욕정의 목소리, 베일을 쓴 목소리, 나는 그 베일을 제거한다, 점잖지 못한 목소리,  그 말은 나로 말미암아 명백해지고 훌륭해진다. 나는 손가락으로 입을 막지 않는다, 나는 두뇌와 심장에 대하여 하듯이, 창자 둘레를 곱게 보살핀다, 성교는 내게 죽음이나 다름없이 추악하지 않다. 나는 성욕과 식욕을 다 인정한다,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모두 기적이다,  그리고 나의 어느 부분이나 내 옷자락 하나도 모두 기적이다. 나는 내부 외부 할 것 없이 신성하다, 나는 내가 손대는 것,  내게 닿는 것을 무엇이고 신성하게 한다,  이 겨드랑이에서의 냄새는 기도보다도 훌륭한 방향이다, 이 머리는 교회보다도, 성경보다도, 그리고 어느 신조보다도 그 이상이다. 만일 내가 어느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숭배한다면,  그것은 내 자신의 육체의 전부이거나 그 일부일 것이다. 반투명의 나의 모형, 정액 그것은 너다! 그늘에 있는 선반과 휴식처, 그것은 너다! 탄탄한 남성의 보습날, 그것은 너다! 나의 생식충동을 이루는 것은 무엇이고, 너다! 너, 나의 짙은 혈액이며,  너의 젖 같은 흐름은 나의 생명의 창백한 긴 가닥이다! 남의 젖가슴에 몸을 부벼대는 젖가슴, 그것은 너다, 나의 두뇌, 그것은 너의 유현한 뇌의 회전이다, 씻긴 창포 뿌리여! 비겁한 연못 도요새여!  잘 지켜진 한 쌍의 달걀이 들어 있는 둥우리여! 그것은 너다! 헝클어진 건초 같은 머리칼, 수염, 근육, 그것은 너다! 자비로운 태양, 그것은 너다! 내 얼굴에 명암을 던지는 공중의 수증기, 그것은 너다! 땀흘리는 개울과 이슬, 그것은 너다! 부드럽게 간질이는 음부로 내 얼굴을 문질러 주는 바람이여, 그것은 너다! 넓은 광대한 들판, 떡갈나무 가지,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가는 어여쁜 산책자,  그것은 너다! 내가 쥔 손, 내가 키스한 일이 있는 얼굴,  내가 일찍이 접촉한 일이 있는 인간,  그것은 너다. 나는 내 자신을 뜨겁게 사랑한다,  거기에 풍부한 나 자신이 있고, 모두 감미롭다, 하나하나의 순간도,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든,  나는 기뻐서 몸을 떤다, 나는 나의 발꿈치의 굴절을 설명할 수 없고,  나의 가냘픈 소망의 원인을 말할 수 없다, 또한 내가 발산하는 우애의 원인도,  그리고 내가 다시 받아들이는 우애의 근원도  설명할 수 없다. 집의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발을 멈추고  이것이 과연 내 집인가를 생각해 본다. 내 창 앞에 핀 나팔꽃이 책 속에 쓰인 형이상학 이상으로 만족을 준다. 동트는 하늘을 바라본다! 희미한 빛이 무한한 투명한 음영을 지워 간다, 대기는 내 미각에 상쾌하나다. 천진난만하게 뛰놀며 회전하는 세계의 중량이 조용히 올라오고,  신선하게 발산하고, 높고 낮게 비스듬히 달린다. 내게는 안 보이는 무엇인가가 그 음탕한 뾰족끝을 위로 내민다, 찬란한 액체의 바다가 하늘에 충만하다. 대지는 하늘 가에서 그 밤을 유숙했던 것이다,  양자가 매일 회합한 결과, 그 순간 내 머리 위에서, 동쪽에서 솟아오른 도전, 조롱조의 말, “그렇다면 네가 천지의 지배자가 될 것인가, 아닌가!” [나 자신의 노래 31] 나는 믿는다, 풀잎 하나가 별의 운행에 못지 않다고. 그리고 개미도 역시 완전하고, 모래알 하나, 굴뚝새의 알 하나도 그렇다, 그리고 청개구리는 최고의 걸작품이다. 그리고 땅에 뻗은 딸기 덩굴은 천국의 객실을 장식할 만하다. 그리고, 머리를 푹 숙이고 풀을 뜯는 소는 어떤 조각보다도 낫다. 그리고 한 마리 생쥐는 몇 억조의 불신의 무리들을 아연하게 할 만한 기적이다. 나는 자기가 편마암이나, 석탄, 길게 이어진 이끼,  과일, 곡식용 풀뿌리와 일체가 되고, 또한 나는 전신이 네 발 짐승과 조류의 색과 모양이 된다, 내 뒤에 있는 것은 충분한 이유에서 멀리멀리 뒤쳐져 있지만,  내가 필요할 때엔, 무엇이고 다시 불러오게 할 수 있다. 속력을 내는 것이나 주저하는 것이나 헛된 일이다, 나의 접근에 대하여, 화성암이 그 옛날의 열기를 방출해도 헛된 일이다, 역사 이전의 거상이 가루가 된 자신의 백골 밑으로 물러가도 헛된 일이다, 물체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하고,  각양각색의 형상을 취하는 일도 헛된 일이다, 대양이 지구의 텅빈 곳에 자리잡고,  큰 괴물들이 해저 깊이 누워 있어도 헛된 일이다, 말똥가리 매가 몸으로써 하늘에 집을 친들 헛된 일이다, 배암이 담장이나 통나무 사이를 미끄러져 가도 헛된 일이다, 큰 사슴이 숲속의 뒤안길로 달려가도 헛된 일이다, 부리가 예리한 바다오리가 멀리 라브라도르의 북쪽으로 날아간들 헛된 일이다, 나는 재빨리 뒤쫓아, 벼랑의 틈새에 지은 둥지로 올라간다. [나 자신의 노래 32] 나는 몸을 바꾸어 동물과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아주 태평하고 자족하다, 나는 서서 그들을 오래 바라본다. 그들은 애쓰지 않고, 저희들의 상황에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둠 속에 깨어 일어나, 저희 죄 때문에 울지 않는다, 그들은 신에 대한 의무를 논하여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한 놈도 불만인 놈은 없고,  한 놈도 소유욕으로 미쳐 있지 않다, 한 놈도 다른 놈에 대하여, 또는 수천 년 전에 산 동류에 대하여  무릎을 꿇지 않는다, 온 세상에서 한 놈도 존경할 만하거나, 부지런한 놈은 없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들과 나와의 관계를 밝히고,  나는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내 자신의 흔적을 내게로 가져와서,  그것이 그들의 소유인 것을 분명히 표시한다. 그들은 어디에서 그런 흔적을 입수했을까, 그 방면을 내가 먼 옛날에 통고하여,  무심코 그것을 떨어뜨렸던 것이 아닐까. 나 자신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영원히 전진한다, 항상 더욱 많이 모으고 드러내 보이며, 속력 있게,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재창조된다.  내 노래하는 것이 그 속에 들어 있고, 나의 기념물에 가까이 오는 자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려내어,  그와 형제간처럼 사이좋게 가련다. 내 애무에 응하는 한 마리 새뜻하게 아름다운 종마의 거대한 아름다움, 앞 이마 훤칠한 머리, 귀와 귀 사이가 넓고, 사지는 번들번들 유연하고, 꽁지는 질질 땅에 닿고, 눈은 반짝반짝 악의가 가득하고, 귀는 잘 서서 부드럽게 움직인다. 내가 발꿈치로 동체를 껴안으니, 두 콧구멍이 부푼다, 내가 일주하여 돌아오니, 그 잘 발달된 사지가 기쁘게 떨린다, 나의 종마여, 나는 다만 잠깐 너를 탈 뿐이니, 그리고선 놓아주마, 내 자신이 너를 앞질러 달릴 수 있는데, 왜 너를 탈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서 있건 앉아 있건, 너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 [나 자신의 노래 35] 너에게 옛날의 해전 이야기를 들려 줄까 달과 별빛 아래에서 누가 이겼는가를 알고 싶은가. 선원이었던 나의 조모의 부친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들어 봐라. 자기들의 적이 배 속에 숨는 비겁자는 아니었다(고, 그는 얘기하기 시작했다,) 적은 무서운 영국혼을 가진 놈이었다,  이보다 강인하고 진실한 놈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결코 없을 것이다, 저녁 무렵에, 적은 맹렬한 사격을 가해 왔다. 우리는 바싹 접근하여, 돛대가 서로 얼키고, 대포가 맞붙었다,  저희들의 선장은 손수 배를 적선에 꽉 묶어맸다. 자기들은 배 밑으로 약 18파운드의 탄환의 발사를 받았다, 아래 갑판의 포대에는, 두 대의 큰 포가 첫 발 쏠 때에 파괴되어  주변의 병사를 다수 살해하고, 천정까지도 폭파하였다. 해질녘의 전투, 암야의 전투, 밤 열 시, 만월이 중천에 올라왔을 때,  침수는 늘어나, 5피트라고 보고되었다, 위병하사관은 뒤 선실에 감금된 포로들을 풀어 주어,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찾도록 했다. 화약고의 통로는 이제 보초에 의하여 차단되고, 낯선 얼굴이 하도 많아서 누가 아군인지, 전연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들의 군함에 불이 붙었다, 누군가는 살려 달라고 해 봤으면 하기도 했다. 자진해서 깃발을 내리고 항복하면 어떨까 하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크게 웃었다,  나의 그 작은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는 태연하게 외쳤다  “우리는 패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전쟁을 막 시작한 것이다.” 불과 세 기의 대포가 사용 가능하였다, 하나는 선장이 손수 적의 중심 돛대를 향하여 쏘았다, 적의 갑판을 일소했다. 이 작은 포대를 원조하는 것은, 장루, 특히 주잘우뿐이었다, 그들은 전투 중 시종 용감하게 견뎌냈다. 전투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침수는 증가하여 펌프로는 되지 않았다, 불은 화약고 쪽으로 타들어 갔다. 펌프 하나가 탄환에 날아가 버렸다,  모두 이제는 침몰한다고 생각했다. 작은 선장은 태연하게 서 있다, 서둘지 않고,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전함의 등불보다 더 형형한 불빛을 우리에게 비추었다, 자정 가까이, 달빛 휘황한 속에서 적은 우리에게 항복해 왔다. [나 자신의 노래 36]  한밤중이 긴장 속에 고요하다. 두 개의 큰 선체가 어둠의 한복판에 꼼짝 않고 있다, 그 중의 한 척 자기들의 것은,  관통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노획한 군함으로 옮겨 탈 준비, 홑이불처럼 창백한 얼굴의 선장이  뒷 갑판에서 냉정하게 명령을 내린다, 근처에 사관실에서 일하던 소년의 시체가 눈에 뜨이고, 긴 백발에 곱게 손질한 구레나룻을 가진  늙은 해병의 얼굴도 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염이 배의 아래 위로 퍼진다, 아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2, 3명의 사곤의 목쉰 소리, 사지가 없는 시체, 또는 시체 그대로인 것,  돛대나 돛 가로대에 붙은 살조각들, 밧줄의 단편, 매달려 있는 색구,  고요한 파도에서 오는 가벼운 충격, 머리 위에서 말없이 슬프게 비치는 큰 별, 해풍의 미묘한 소리, 바닷가 갈대풀과 들판의 냄새,  생존자에게 남겨진 유언들, 외과의의 메스 휘드는 소리,  그의 수술용 톱의 쓸어 들어가는 톱니, 힘든 호흡, 울음 소리, 떨어지는 핏방울의 튀김,  짧고 거친 비명, 길게 둔하게,  점차 날카로와지는 신음 소리, 이런 것들,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이런 것들. [나 자신의 노래 44] 이제 나 자신을 설명할 때다- 자, 우리 모두 일어서자. 이미 아려진 일체의 것을 내던지고서, 나는 모든 남녀와 더불어 미지의 세계로 돌진한다, 시계는 이 순간을 가리킨다 - 그러나 영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들은 지금까지 수억조의 겨울과 여름을 겪어 왔다, 앞으로도 수억조의 세월이 있고, 그 앞에도 수억 조가 있다. 탄생은 우리에게 풍요와 다양을 가져왔다, 그리고 또 다른 탄생이 우리에게 풍요와 다양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어느 하나를 더 크다고,  그리고 다른 것은 더 적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시간과 장소를 점유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동등하다. 나의 형제여, 자매여,  인류는 너희에게 잔혹하거나 시기스러웠던가. 그렇다면, 안됐구나,  그들은 나에게는 잔혹하거나 시기스럽지 않았다. 모두가 나에게는 친절했다,  나는 슬픔을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슬픔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완성된 사물의 극치이고,  일어날 일체의 것을 포괄하는 자이다. 나의 발은 계단의 정점의 다시 그 정점을 밟는다, 층마다에 시대의 다발, 그리고 그 층과 층 사이에 더 큰 다발이 있다, 발 아래의 것은 모두 내가 걸어온 자국, 나는 다시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고 오르는 데 따라서, 뒤에는 지난 날의 환영들이 고개 숙이고 있다, 멀리 밑으로 나는 거대한 태초의 無를 본다, 거기에도 내가 있었음을 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상태로 언제나 기다렸다,  그리고 혼수상태의 안개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를 기다렸고, 악취를 내는 탄소의 해를 받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꼭 껴안았다 - 오래 오랫동안. 나를 위한 준비는 엄청난 것이었다. 나를 도운 팔은 성실하고 친절했다. 시간의 회전은 쾌활한 뱃사람 모양 노젓고 노저어  나의 요람을 실어 보냈다,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별들은 저희 궤도를 벗어나 운행했다, 그들은 나를 떠받칠 것을 지켜 주기 위하여 온갖 힘을 보내 주었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탄생하기 전에, 여러 세대가 나를 인도했고, 나의 태아는 언제나 생동했고, 어떤 것도 그것을 압도할 수 없었다. 나의 태아를 위하여 이 한 구체에 집중했고, 태아를 그 위에 앉히기 위하여 오랜 완만한 지층이 쌓였다, 풍요한 식물이 거기에 양분을 주고, 거대한 도마뱀이 그것을 입으로 운반하여, 조심껏 땅에 내려 놓았다, 온갖 힘이 나를 완성하고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부단히 쓰였다.  그리하여, 이제 이 자리에 나는 튼튼한 영혼을 갖고 서 있다.   - 월터 휘트만(Walter Whitman 1819-1892)이란 사람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에서 서민들의 희망과 자유를 진실하게 노래합니다. 휘트만의 작품은 모든 인류가 하나임과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큰가를 노래하는 것이 주내용입니다.  이 시인은 말년에 여러 가지 질병으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의사가 하는 말을 듣고 그가 노래한 인간의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의사가 된지 어언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처방을 해 왔습니다만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처벙 약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휘트만은 크게 공감하면서  "그러면 사랑이란 약이 듣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지요?" 라고 의사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그땐 처방약을 두 배로 늘리게 되지요" 하고 말했답니다.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생.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T.페인(1737∼1809)의 인권사상 등에 심취하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이민 출신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풍을 지녔다. 4세 때 브루클린으로 이주, 가정사정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여 인쇄소 직공으로 있으면서 독학으로 교양을 쌓았다. 1835년 고향에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 신문 편집 등에 종사하였다. 그 후 뉴욕으로 옮겨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846년에는 브루클린의 미국 민주당계 일간지 《이글 Eagle》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러나 1848년 ‘프리 소일(free soil) 운동’을 지지하는 그의 논설이 민주당 보수파의 분노를 사게 되어 사임, 전부터의 염원이던 프리 소일파의 주간신문 《자유민 Freeman》을 창간하여 그 주필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민주당 보수파의 공격을 받고 겨우 1년 만에 사임하였다.  1850년대에 들어서자, 그는 합승마차의 마부석 옆에 앉거나 나룻배에 타거나 하여 민중의 생태를 관찰하고, 또는 아버지의 목수일을 도우며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냈다. 이 내부침잠(內部沈潛)의 시기를 거쳐서 그의 시인으로의 전신(轉身)이 이루어졌다. 1855년 시집 《풀잎 Leaves of Grass》을 자비출판하였는데, 이것은 종래의 전통적 시형(詩型)을 크게 벗어나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찬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3판(1860)에 이르자, 새로 수록된 《카라마스》 등의 시군(詩群)을 통해서 사랑과 연대(連帶)라고 하는 일정한 주장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예언자 시인’으로의 변모를 드러냈다. 논문 《민주주의의 미래상 Democratic Vistas》(1871)에서도 미국사회의 물질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하고, ‘인격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862년 겨울, 남북전쟁에 종군 중이던 동생 조지가 부상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1863년 이후는 관청에 근무하면서 워싱턴의 병원에서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였다. 어떻든 남북전쟁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으며,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견디는 젊은 병사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미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1865년, 남북전쟁을 소재로 하는 72페이지의 작은 시집 《북소리 Drum-Taps》를 출판하고, 이듬해 링컨 대통령에 대한 추도시(追悼詩) 《앞뜰에 라일락이 피었을 때 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d》를 포함한 24페이지의 《속편(續編)》을 출판해서 곧 《풀잎》(4판, 1867)에 재록(再錄)하였다.  1873년에 중풍의 발작이 있었으나 요양에 전념, 1879년에는 서부 여행, 1880년에는 캐나다 여행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1882년에는 산문집 《자선일기(自選日記) 기타》를 출판, 문명(文名)도 높아졌다. 1884년에는 《풀잎》의 인세(印稅)로 세운 뉴저지주 캠던의 미클가(街) 자택에는 내외의 방문자가 빈번히 드나들었다. 그러나 체력도 약해졌지만 그 자신은 점차 염세주의로 기울었으며, 1888년 재차 중풍이 발작한 후, 1892년 폐렴(肺炎)으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발췌)     -        
1661    모더니즘 대표적 영국 시인 - T.S.엘리엇 댓글:  조회:6849  추천:0  2016-10-16
현대시를 이끈 시대의 대변인 T. S.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 |   출생일 1888년 09월 26일 사망일 1965년 01월 04일 대표작 〈황무지〉, 〈사중주〉, 〈칵테일 파티〉 등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으로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방식의 시적 기교로 독창적인 시 세계를 펼쳐 나갔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T. S. 엘리엇 T. S. 엘리엇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20세기 시와 비평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1922년 그의 시 〈황무지〉가 출판되었을 때, 이 작품은 '새로운 시'의 동의어로 여겨졌고, 그 '새로운 시'의 의미가 '모더니즘'을 지칭하게 되었을 때는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현대시를 지배했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웨어 엘리엇은 사업가였으며,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스는 시인이었다. 엘리엇이 태어났을 때 부부는 40대였고, 엘리엇 위로 4명의 누나가 있었다. 시인이었던 어머니가 아이들 양육보다 문학이나 자선 활동과 같은 사회 활동에 열정적이었던 탓에 늦둥이였던 토마스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 토마스가 자라면서 조숙하고 남다른 지적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어린 아들에게 역사와 문학, 철학 등의 책을 읽히고 시를 쓰도록 독려했다. 모자는 문학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었고, 토마스는 평생 어머니와 편지를 나누고, 어머니에게 시를 바치는 등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는 인정받지 못한 시인이었던 어머니의 시극 《사보나롤라》에 서문을 붙여 출간해 주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는 세인트 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와 뉴잉글랜드의 밀턴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906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불문학을 전공했다. 4년의 학부 과정을 3년에 마쳤으며, 이때 프랑스 상징주의, 특히 라포르그1) 에 심취했다. 졸업 후 1년 만에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에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 독일의 마르부르크필리프스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프랑스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인도 철학, 독일 철학, 그리스 철학 등을 공부했으며, 아르튀르 랭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15년,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의 추천으로 〈포이트리〉 지에 〈앨프리드 프루프록의 연가〉(이후 〈프루프록의 연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는 노년의 화자 프루프록의 내적 독백을 통해 현대 문명의 잔인성과 메마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자아의 상실과 회복을 위한 자아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엘리엇은 비평가로서 '객관적 상관물'의 개념을 공식화시켰는데, 객관적 상관물이란 '어떤 특정한 정서를 나타낼 때 공식이 되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이런 시적 방법론과 시인으로서의 주요 관심사와 정서는 초기 시인 〈프루프록의 연가〉에서부터 이후의 시들에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엘리엇은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으며, 런던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서평을 잠시 쓰다가 이듬해 로이드 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약 9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쓰고, 〈에고이스트〉 지의 부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를 보고 '최초의 현대적 작품'이라고 일컬었던 에즈라 파운드는 엘리엇이 시에만 몰두하기를 바랐고, 그를 후원하는 인물들을 모아 생활을 후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은행 일과 시작(詩作)을 병행하는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해했다. 내성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에 신경쇠약 증상까지 있던 엘리엇에게 이 두 생활을 양립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현실 생활과 문학 생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1922년 10월 엘리엇은 계간지 〈크라이테리언〉을 창간하고 편집을 담당했으며, 이 잡지에 〈황무지〉를 발표했다. 433행의 이 장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황무지로 상징화한 것으로, 라틴어, 희랍어, 산스크리트어 등 6개 언어를 사용하고, 셰익스피어, 단테, 보들레르 등 고전 시구에 대한 암시와 인용을 비롯해 J. S.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J. L. 웨스턴의 《제의에서 로망스까지》 등에서 나타나는 제의, 성배 전설 및 신화와 종교적 관점, 성경 등을 토대로 한 수많은 상징으로 뒤덮여 있다. 역사와 문명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화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로 재편성하는 엘리엇의 작품 세계가 확립된 작품이다. 또한 엘리엇은 낭만성을 제거하고 철저하게, 병적일 만큼의 정확성과 논리성, 지적인 태도를 지니고 언어와 다양한 자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시를 썼는데, 이는 그의 비평론적 태도이기도 하며, 이후의 소설, 희곡, 예술 비평의 주요 방식이 된다. 〈황무지〉가 발표되었을 당시 평론가들은 시의 난해함과 새로움에 당혹해 마지않았으나, 젊은이들은 오히려 엘리엇의 시에 담긴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시적 기교에 열광했으며, 현대의 정신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을 '시대의 대변인'으로 추앙했다. 1925년에 엘리엇은 로이드 은행을 그만두고, 파버 앤드 파버 출판사의 이사로 일했다. 1927년에는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고 영국으로 귀화했다. 그리고 영국 국교도로서의 종교적 시각을 투영한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재의 수요일〉(1930), 〈사중주〉(1943) 등이 그것이다. 또한 엘리엇은 이 시기부터 무대 상연을 고려한 시극2) 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시들은 시극으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가 된다. 〈바위〉(1934), 〈대성당의 살인〉(1935), 〈칵테일 파티〉(1950) 등이 대표적이며, 이 작품들은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비평 분야에서도 엘리엇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문학적 취향을 재규정했다. 예술에 있어 낭만성을 배제하고 고도의 지적 사유를 좇으며, 존 던과 같은 형이상학파 시인들을 칭송한 그의 비평론은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 문학의 모호성과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대 고전주의의 비평 체계를 수립했다. 비평집으로는 《단테론》(1929),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1933), 《고금 평론집》(1936) 등이 대표적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리엇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당시 그는 시극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시극 〈가족의 재회〉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고, 전쟁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전후의 혼란스런 상황, 정신질환 성향이 있던 아내와 불화 끝에 결별을 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30년 전부터 지녀온 유럽 문명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염세적인 관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계속 시를 써 나갔고, 말년의 걸작 〈사중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전쟁 후 그는 엄청난 명성을 누리며 행복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1950년 영국에서 발행된 〈칵테일 파티〉 초판 표지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영국의 문화훈장인 메리트 훈장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의 시극들은 계속 무대에 올려졌고, 특히 말년의 대표작 〈칵테일 파티〉가 브로드웨이에서 200회 이상 공연 기록을 세우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1947년 아내 비비언이 세상을 떠난 뒤, 1957년에는 8년간 비서로 일하던 29세의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했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923년) 1965년 1월 4일,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고향 이스트 코커의 성 마이클 교회에 안장되었다. 2년 후 영국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구역에 엘리엇의 기념석을 놓았다. ==================================================       1888년 오늘 태어난 미국 출신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이와 관련한 명언 하나를 남겼습니다. ‘If you are not in over your head, how do you know how tall you are?’라는 말입니다. “네가 네 머리 위에 있지 않다면 네가 얼마나 큰지 어떻게 알 수 있나”로 직역되는데, “ 네가 네 능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네 능력이 얼마 만큼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나”라는 뜻입니다. 의역 역시 어렵죠?      엘리엇 역시 보통 사람처럼 자신의 틀 안에서 살 뻔 했습니다. 그는 16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해서 3년 만에 졸업했고 프랑스의 소르본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 런던의 은행에 취업해서 금융업에 종사합니다.      이때 그동안 여러 문학가를 발굴하고 후원해온, ‘시인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나섭니다. 파운드는 엘리엇이 돈 걱정 없이 시작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자들을 모읍니다. ' 엘리엇이 문학 계간지를 발행하도록 재력가를 소개해주기도 하는데, 엘리엇은 이 잡지에 유명한 ‘황무지’를 발표합니다.      엘리엇은 수많은 시와 함께 극본도 발표했으며,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지요. 어린이를 위해 지은 우화시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는 나중에 뮤지컬 《캣츠》로 재탄생해서 세계를 들썩거리게 했고요.      문학계에서는 파운드가 없었다면 엘리엇이나 제임스 조이스도 없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파운드는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을 삽니다. 파운드는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반유대주의에 공감합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의 방송에 나가서 친 파시즘, 반유대주의 발언을 했고 이 때문에 종전 후 미국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됩니다. 그는 사형은 면했지만 정신이상 범죄라고 선고받고 워싱턴의 정신병원에 갇힙니다. 미국과 유럽의 시인들이 석방운동 덕분에 10년 뒤 정신병원에서 나와서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눈을 감습니다.      파운드는 역작 《캔토스》를 남겼지만, 그가 후원한 문인들의 작품 역시 그의 시 못지않은 인류의 유산일 겁니다. 그렇다면 반미, 반자본주의를 펼치며 파시즘을 옹호한 과오는 어디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틀의 사고(Frame Thought)’로 보면 용서할 수가 없겠지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람은 능력 밖으로 나가야 자신의 그릇을 볼 수 있지만, 너무 나가면 안 되는 건가요? 인류 역사에서 천재에 대한 후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했지만….    T.S. 엘리엇의 명언 10개   ○멀리 갈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네가 네 능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네 능력이 얼마 만큼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나? ○유머는 심각한 이야기를 말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탐구의 종착점은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는 것이고 첫 장소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입는 피해의 절반은 자신이 중시되길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려고 의도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피해에 관심이 없다. ○규칙을 지키는 법을 알기 전에 규칙을 어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사랑은 침묵이다. 사랑은 말하려는 욕구와 싸우는 것이다. ○걱정은 창조의 하녀다.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 많지만, 확신하는 것은 너무 적다. ○인류는 지나치게 사실에 가까운 것을 감내할 수가 없다.     엘리엇의 궁핍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한번은 러셀이 탄약 제조회사의 채권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액면가 3000파운드 짜리 그 채권을 엘리엇에게 주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이 많지는 않은 액수였지만 계속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엘리엇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는 그 채권을 수년간 지니고 있다가 나중에 러셀에게 되돌려 주었다.  엘리엇의 은행에서의 봉급은 연봉 500파운드 정도로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일도 증가하였다.  그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피로와 질병 때문에 1921년 말에 3개월간의 휴가를 얻어 스위스의 로잔으로 요양을 떠나기까지 하였다.  이 요양 중에 『황무지』의 원고가 완성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1925년 11월에 로이드 은행의 식민지 및 외환 관리국을 떠나 훼이버 앤드 가어어 사의 편집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연봉 600파운드 이상의 봉급을 받게 되었다.                                   =========== [출처] T. S. 엘리엇 과 파운드|작성자 코주부  
1660    詩란 언어비틀기가 오로지 아니다... 댓글:  조회:4723  추천:0  2016-10-16
- 리처드 윌버 마음의 가장 순연한 유희는 동굴을 홀로 날아다니며 일종의 무감각한 기능으로 돌벽에 부딪치지 않는 박쥐와 같다. 멈칫하거나 탐색할 필요가 없다. 앞에 있는 장애물을 어렴풋이 알아 칠흑의 공기 속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훨훨 날고 내려가고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더할 나위 없는 것일까? 마음은 박쥐같다. 물론이다. 하나 가장 훌륭한 사고과정에서 우아한 오류는 동굴을 수정할 수도 있는 것. * 리처드 윌버(1921~ )     ========================================================================                        궤도                                                            리처드 윌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인. 그녀가                         어두운 별장 문을 열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 시간의 정점에서,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시간이건 여인이건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말해 무엇하리? 그녀가 장갑을 잡아당기는 순간,                         모든 사랑의 환상 文章이 일제히 창 밖으로                         소리치며, 비틀거리던 태양마저 혼동한 나머지                         자신이 돌던 궤도조차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허나 아직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거기 육신의                         정거장을 하나씩 벗어나 그녀의 완벽한 구둣발이                         또박또박 거리를 걸어갈 때처럼, 단 한번의                         채찍이 바람의 마을을 지도상에 나타내는 것처럼.               *         상상속의 여인이 문을 열고 나오는 시간, 너무도 아름다워 태양도 멀미하는 듯        제 정신이 아니다 결국 생의 모태인 여성을 우주의 창조신으로        다른 시각으로는 신의 딸로 끌어올린 아름다운 시이리라        개인의 관념에 따라서는 "째찍"을 불화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다        각각의 문장들이 시각에 따른 "아름다운" 이 어휘 이외에는 감각적이지 않으면서        상상만으로 그 상상을 문자기호의 정확한 의미를 살려쓴 시다 정확한 말의 의미        이것이 윌버의 매력이다 영문을 우리 한글로 번역한 우리 발음이지만 읽어가는데에        부드러워 리듬감(예를들어 3연 끝행 3.3.3.4.4.3)이 있어 편한데        이것이 음보(띄어쓰기를 바탕으로 자음의 합수로 이루어지는 리듬)이리라        전에 올린" 작자미상"의 노처녀가에서 이상한 음보를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내 음보가 바뀐 것인지 답답한 느낌도 들었지만        백년을 다 살아야(3.1.3)        적막한 빈 방안에(3.1.3)        이럴 줄 알았으면(2.1.4)        어는 듯 봄철이(2.1.3)이 중간에 외자 1인데도 리듬을 탄다        이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는데는 또 하나는 발음인데 자음의 사용이다        끈는 소리(ㄴ)과 혀 구르는 소리(ㄹ)이 얼마나 사용되었냐에 따라        리듬의 효과가 난다 중국 시의 발음을 보면 앵코같은 이 "ㅇ"발음으로 리듬감을        살리는 듯 느껴진다 영어발음은 시가 아니더라도 원래 굉장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는데        우연찮게 영어로 말하는 연인인 듯 보이는 외국인과 택시합승을 한 적이 있는데        뒷좌석에서 여인에게 속삭이 듯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리듬 있는 어떤        감미로운 소리로 들려왔다        감각을 최대한 문자 리듬감을 살려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 써야 한다는 것은 원래 시가        노래였다는 사실이며 모든 시는 이 인체의 다섯 가지 오감과 직결된다 그리고        이 오감이라는 통합적인 감각에서 어떤 느낌 또한 파생된다        감각적이라는 말을 풀면 "감각에 따른"이고 더 풀면 "미각시각 등, 오감에 따른"이다        "말초적 감각" 이라는 말이 있다 말초末梢의 반대어는 根幹근간이다        말초末梢라는 한자어를 우리발음으로" 말초"라 읽으며 발음하지만        우리 자생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한자어가 우리나라로 들어와        원래 우리 토종말로 여길 수 있다        물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란 중국발음(한자발음)과 우리 토종 언어, 영어발음        세 가지 발음인식으로 소통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예를들어        "패러다임의 발상은 우리 기존의 사고를 깨는데 있어 매우 유익한 방법의 하나다"랄지        "오직 인기영합에 목적을 둔 포플리즘 정치가 가지는 한계는 실현 가능하지 않은        거짓 공약만을 보여준다"        "카메라 성능이 뛰어나다"라는 "말"이 있을 때 "패러다임""포플리즘""카메라"는        영어발음에서 온 것이고 "발상" "기존" "사고" "유익" "방법"은 중국발음에서 온 것이고        "매우" "우리" "깨는데" "있어" "하나"는 우리 토종 발음에서 온 것이다        원래 한 나라의 언어 발음 인식은 타국의 발음인식과 공통적인 면도 있지만        어순이 다르듯 엄연히 다르다        말초末梢를 풀면 "나무 몸통이나 뿌리가 아닌 가지 끝"이 늘어지는 말이 우리 토종에서        진화 한 말이다 우리는 "끝" 발음이고 중국은 "말"(본토에서는 어떤 발음인지는        모르지만 편의상 "말"로) 이라고 한다        "끝"이나 "말"이나 발음이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언어란        그 민족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며        언어기호 "말"이란 그 민족의 성격을 미래에도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회가 혼란하고 불신의 시대가 오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언어 임에는 틀림없다        비아냥거림, 강한자음의 사용, 인신공격의 말, 이런 현상은 불합리한        사회가 낳은 하나의 현상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사회를 위한 시위 같기도 하다        국수적인 발상이 아닌, 우리민족이 정의로와서 성깔 있으며 정이 많고 눈물이 많고        편향적이지 않다고 믿는 것, 이것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이리라        소통이 안된다는 것은 각 사람들의 언어이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소통을 위해        언어를 다시 들여다보여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학회니 국립국어연구원이니 하는 단체부터 반성을 해야 한다        언떤 말들을 어렵게 느끼고, 어떻게 말을 설명해야 쉽게 언어를 인식할 수 있는가        여러 언어인지 실험을 통한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40에서 50명의 학자들이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타국의 말이 들어올 때        "자국언어화" 한다고 한다 자국언어화란 우리식으로 한다는 한자어발음이        어느 정도 자국화 되어있으므로 "카메라"를 카메라라 하지 않고        "사진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학교에서 배우는 학습의 스트레스나         학교 밖 과외문제도 언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언어에 관계된 모든 단체들은 이런 것들을 실질적이고 객관적으로 고민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이것이 의무다              2        인터넷상에 시가 미래파니 뭐니 떠돈다 어떤 특정한 언어쓰임을 보고 이름을 "미래"로        지은 것인데 언어란 거북이 배에, 종이 위에 기록되지 못한 발음의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으며 이 고통의 역사는 소통하기 위한 역사가 아닌가        언어란 대다수의 공감이 있어야 생명력을 갖는다        언어공동체에서 합의 되지 못한 언어조합은 그저 조작일 뿐이고 곧 사라진다        이상한 언어 조합이 언어의 한계 언어의 확장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시라는 가면을 쓰고 합당한 것처럼 말하곤 하는데        선대시인들 백석 정지용 김영랑 김소월 서정주 박재삼 신석정 등등 그리고 김수영조차도        혀를 차며 돌아설 문장들이다        그 이유는 이들은 문장을 왜곡하거나 비틀지 않았다.        정지용시인이 요사스러운 문장, 시라고 핀잔을 준 것도 이런 우려가 있었으리라        어떤 하나의 시가 너무 관념적이네 추상적인 것을 떠나        비유와 언어비틀기 왜곡은 엄연히 다르다 소통의 시대에서 언어비틀기 왜곡을        요사스런 문장을 시적 기교로 포장해서는 안된다        언어비틀기 왜곡은 다양함도 아니며        선대들이 말하는 시가 추구해야 하는 정신과도 위배된다             3        시나리오의 한 작가가 죽었다 신문 인터넷 상에 떠도는 원문이 작가의 원래 원문        내용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사실이어야 하는데 포장을 사실처럼 말했으니        작가를 두 번 죽인 꼴이다 진정한 문학이 예술이 국민 정서에 이바지 하는 영향은 실로        금전적으로 환산하지 못할 정도로 큰 소중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문학과 예술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태들이 없어져야 할 때 더 나아가         문학인들이 내부에서부터 시 정치, 구체적으로는 문장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시인들, 시풍이란  원래 사단체이긴 하지만 화합의 모습이 먼저         선행되어야하고 소통의 미덕을 먼저 보여야 한다                 문장이란 문장학을 줄여서 문학이라 한다고 한다          문장이 되어야 하며 깔끔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적인 권위비판 공공을 위한 정치시의 유무를 떠나 당당히 국가에 지원을        지금보다 몇 십배 몇 백 배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있으리라 국가에서도 이러한        문학 예술인들의 요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야        우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 짐승들  -리처드 윌버  그들의 크낙한 자유 속에서 오늘밤  짐승들 평화 속에 잠잔다. 벼랑에 앉은 갈매기도  뱃속 깊숙이 달빛이 튕기는 파도를 내려다보고.  넘치는 돌에 기대어 서정적 물결에  잠재워졌다.  물결 속에 사슴의 깨끗한 발이 즐거운 물장구를 치고. 그 소리에 화답하여  찢긴 생쥐, 부엉이의 발톱에 안전히 잡혀  소리친다. 이곳에는  달이 내려다보는 다른 세상과 같은  어둠과 해함이 없다.  달은 창 유리에 이지러져서 늑대인간의 처절한 변모를 돕는다.  땀에 절은 베개에서 머리를 돌리며  그는 진짜 사람의 기분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그냥 드러눕고 만다.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둔다.  사나운 터럭이 얼굴에 부드럽다.  더 예민해진 귀로 바람의 자극적인 단조와  잎새의 음악, 무거운 냇물의 타락을 들으면서.  한편, 숲과 잡답에서 멀리 떠난 높은 창가에  고고한 이념의 구애자들이 한숨지으며  연구에서 눈을 돌려 다시금 저 괴로운  하늘의 아름다움을, 저 투명한 달과  부활한 사냥꾼을 알아보려고 한다.  또한 인간들을 위해 기이한 꿈을 조성하노니,  만일 속세 사람이 들으면 언제나처럼 낙담하여  도시 가운데에 괴물을, 위인의 동상 위에 까마귀를 불러오며,  고삐 풀린 검은 물 속에서  뱃사람은 무리져 고기밥이 된다.     마음              /리처드 윌버 마음 속 가장 순수한 장난은 마치  홀로 동굴 속을 헤매 다니는 박쥐와 같다.  일종의 썰렁한 유머로 그저 돌벽에나 부딪쳐서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허둥대거나 애써 모험을 걸 필요가 없다;  눈앞에 놓인 장애물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그것은, 어둠 속 완벽한 경로를 따라 좌우로 흔들  리기도 하고, 깊이 잠겼다 솟아오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직유는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일까?  마음은 박쥐와 같다. 확실히 그렇다. 단지  가장 훌륭한 사고과정에서 하나의 우아한  실수가 동굴을 바로잡을 수도 있는 것.  해설) 1921년 뉴욕에서 출생한 리처드 윌버는 미국 월계시인(1987년)으로, 그는 흔히 신비평류의 모더니즘을 철저히 계승한 현대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런 이유로 포스트모던류의 미국 현대시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윌버는 자신의 ‘완벽한 경로’를 고집하며 어둠 속을 날아간다. 그러므로 동굴 속의 박쥐는 날개를 다치지 않는다. 혹시라도 날개를 스치는 순간, 마음속의 동굴은 이미 바로잡혀 있는 것이다.  리처드 윌버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깜깜한 동굴 속을 헤매는 한 마리 ‘박쥐’가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가 장치해 놓은 여러 가지 미적 ‘장애물’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며 나름의 의미 공간을 확보해간다. 그것이 윌버의 시를 읽는 재미이며 또한 난해함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적처럼 그런 식으로 좌충우돌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차라리 무리한 ‘모험’일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만의 ‘완벽한 경로’를 따라 캄캄한 어둠 속을 뚫고 지나가는 박쥐의 ‘직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의 균형 잡힌 대담한 직유는 어느 순간, 우아하고 날렵하게, 동굴을 빠져나가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하나의 ‘실수’이며, 그것만이 동굴을 아니, 동굴 밖의 세상을 바로잡는다.   June Light Your voice, with clear location of June days, Called me outside the window. You were there, Light yet composed, as in the just soft stare Of uncontested summer all things raise Plainly their seeming into seamless air. Then your love looked as simple and entire As that picked pear you tossed me, and your face As legible as pearskin's fleck and trace, Which promise always wine, by mottled fire More fatal fleshed than ever human grace. And your gay gift—Oh when I saw it fall Into my hands, through all that naïve light, It seemed as blessed with truth and new delight As must have been the first great gift of all. 6월의 빛 당신의 목소리가, 6월 날의 맑은 자세로, 창문 밖에서 나를 불렀습니다. 당신은 그곳에 있었지요, 차분하지만 환하게, 마치도 여지없는 여름날의 모든 것이 그 자체를 틈없는 바람 속으로 올릴 때의 부드러운 눈길처럼.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당신이 따서 건네준 배처럼 단순하고 완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은 배 껍질의 주근깨와 흔적처럼 명백히 읽을 수 있었지요, 늘 포도주를 약속하는, 얼룩 어리는 불가에서 인간의 어떤 우아함보다는 오히려 숙명의 육신으로. 그리고 당신의 명쾌한 선물 - 오, 이것이 내 손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 모든 소박한 빛 속으로, 모든 선물 중에 첫 번째 위대한 선물이었듯이 진실과 새로운 기쁨으로 축복받는 것 같았습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제 2번, Andante con moto  - Arthur Grumiaux (violin), Pierre Fournier (cello), & Nikita Magaloff (piano), 1972 Richard Wilbur 리처드 윌버(1921)는 뉴욕시 출신으로 1947년에 시집 "The Beautiful Changes and Other Poems"로 등단 하였다. 1956년에 시집 "Thigs of This World"로 퓰릿쳐상을 받았고 여러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퓰릿쳐상 이외에도 많은 상을 받았으며 미국 계관시인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불란서의 17-18세기 작가들, 몰리에르, 라씬느, 발레리, 빌롱, 보드레르등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1659    詩는 태초부터 노래말, "활자감옥"속에 갇힌 문학 도망치기 댓글:  조회:3679  추천:0  2016-10-16
    사진=연합뉴스     스웨덴 한림원의 파격이 지나쳤던 걸까. 대중가수 밥 딜런(75)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논란이 그의 모국인 미국 내에서도 뜨겁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물론 뉴욕타임스 등 주류 언론들까지 논쟁에 지면을 할애한 가운데 조이스 캐럴 오츠, 살만 루슈디 등 ‘정통 문학’의 노벨상 단골 후보들마저 의견을 표명하는 형국이다.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논란을 전한 미국 언론들.    CNN은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이 격한 소셜 미디어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수상에 대한 트위터상의 찬반 양론을 균형 있게 전했다. 뉴욕타임스의 서평란 편집자 패멀라 폴은 수많은 받을 만한 작가가 제외돼 실망스럽다는 내용의 멘션을 올린 반면 존 스칼지라는 트위터 이용자는 “노래 가사도 글쓰기다. 밥 딜런은 지난 100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하나다. 논리적인 선택”이라고 썼다.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논란을 전한 미국 언론들.    뉴욕타임스는 오피니언 면에 ‘밥 딜런은 왜 노벨상을 받지 말았어야 했나’는 제목의 기고를 게재했고, 베스트셀러 『넛지』의 저자이자 서맨사 파워 유엔 주재 미국대사의 남편인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블룸버그 통신 칼럼에서 밥 딜런이 시집 『풀잎』으로 유명한 미국의 19세기 시인 월트 휘트먼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정작 당사자인 밥 딜런은 13일 오후 8시(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 코스모폴리탄 호텔에서 열린 90분 콘서트에서 청중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환호를 뒤로 한 채 노래에만 집중했다. 이런 가운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밥 딜런을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라고 공언해 그가 시인으로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음을 강조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논쟁은 가벼운 인상 비평에 그치지 않고 밥 딜런 노랫말의 문학성 시비, 그동안 일각에서 제기했던 표절 시비까지 건드리고 있다. 인터넷 잡지 슬레이트의 칼럼니스트 스티븐 맷칼프 는 음악 전문 잡지 빌보드와의 인터뷰에서 시인 리처드 윌버의 시 구절과 밥 딜런의 노래 가사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서 “전자는 시인 반면 후자는 단조롭고, 음악이 없으면 무기력한 산문일 뿐”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살만 루슈디는 “그리스 신화의 음유시인 오르페우스 이후 노래와 시는 밀접했다. 딜런은 그런 음유시인 전통의 훌륭한 계승자”라고 반박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도 딜런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환상적”이라며 편을 들었다.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논란을 전한 미국 언론들.    월스트리트저널은 ‘밥 딜런의 노래 가사가 문학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밥 딜런이 소설가 잭 런던의 작품에서 몇 줄을 가져다 자신의 자서전 『크로니클스』에 사용하는 등 표절 시비가 있어 왔다고 소개했다. 수상자를 발표한 노벨위원회의 사라 다니우스가 밥 딜런을 가리켜 “훌륭한 샘플러(sampler)”라고 표현한 것도 그런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기사는 프린스턴대 미국역사학 교수 숀 빌렌츠 가 그런 표절 시비에 대해 “사람들은 예술과 학기말 리포트를 혼동한다. 예술 작업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보여주는 사례다. 왜 딜런을 문제 삼나. 그는 시인 T. S. 엘리엇 이상으로 표절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이 모든 논란은 그만큼 딜런이 세상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얘기다. 수 년째 그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는 미국의 대학교수가 있는가 하면 방대한 규모의 밥 딜런 아카이브가 내년에 문을 연다. 자연과학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1970년 이후 세계적으로 생물의학 문헌에만 밥 딜런의 노래 가사가 727차례 패러디 형태로 언급됐다는 통계도 있다. ‘천국 문을 두드리다(Knockin’ on Heaven’s Door)’라는 노래 제목에 빗대 논문 제목을 ‘꽃가루 문을 두드리다(Knockin’ on Pollen’s Door)’라고 붙이는 식이다. 그는 국내 대중음악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대수씨는 "한국 포크음악 등장에 하나의 씨앗을 뿌렸다”고 했다. 자신을 포함해 김민기·트윈폴리오(송창식·윤형주)·양희은 등 70년대 한국 포크음악 1세대의 등장을 이끌었다는 얘기다. 트로트나 번안한 팝발라드 일색이던 당대 음악계에 저항적·사색적 가사의 청년 음악을 추가했다. 문단은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문학평론가인 고려대 불문과 조재룡 교수는 “하루키가 받더라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는데 밥 딜런에게 상을 주기로 한 건 기분이 나쁘기까지 하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시인인 문학동네 강태형 전 대표도 “밥 딜런을 좋아한다. 그의 음악과 생애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 밥 딜런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고 썼다. 반면 음악평론가 김작가씨는 “이번 수상으로 21세기의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범문화계에 던져졌다”며 “시는 태초에 노랫말에서 출발했고, 전통적인 문학의 영향력이 약해진 만큼 활자 안에 갇힌 문학의 개념을 확장할 때”라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1658    솔솔 동시향기 흩날리는 동시인 ㅡ 강려 댓글:  조회:3437  추천:0  2016-10-14
솔솔 동시향기 꽃 되여 흩날리네 ―강려가 흔들어주는 동시묶음에 취하여 편집: [ 리영애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2015-06-03  꽃가루에 이슬 섞어 꽃떡 빚으면 이보다 향기로울가 흰구름에 꿀꿈 얹어 희망 싹트면 이보다 아름다울가 요즘 우리 문단에는 그야말로 티없이 맑은 동심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졸졸졸 흐르는 시내물마냥, 돌돌돌 구르는 조약돌마냥 아름다운 동시를 바람결에 흩날려 그 상큼한 향을 솔솔솔 피워올리는 동시인이 있다. 누구보다 어려운 여건임에도 누구보다 맑은 심성으로 동시를 폭폭 퍼올리는이가 바로 강려 동시인이다. 나는 강려를 모른다. 《중국조선족열린문인회》라는 카페에서 카페지기를 맡고있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두루 만나 인사를 나누듯이 그렇게 강려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녀가 큐큐를 추가해와서 그것으로 몇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게 전부다. 그뒤 어느날인가 나는 강려가 보내준 그녀의 처녀동시집 《또르르 뱅뱅》을 받아보게 되였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동시집에 빠져버리고말았다. 이미지시들은, 시라는 렌즈를 통해 시적대상이 독자들의 시망막에 뛰여든다. 좋은 렌즈일수록 투명도가 높아서 시적대상이 눈앞에 보이는듯 생동할것이고 훌륭한 렌즈일수록 시적대상의 다양한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진풍경을 연출해보일것이다. 이때 렌즈(시)는 전혀 시인의 재간에 따라 좋은 렌즈가 될수도 있고 훌륭한 렌즈가 될수도 있는것이다. 강려는 세상 색색의 이미지들을 독자들한테 보다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해 늘 렌즈를 갈고 닦기에 게으르지 않으며 렌즈의 변형(오목렌즈, 볼록렌즈, 프리즘 등)을 통해 평범한 이미지들을 밝고, 맑고, 깨끗하고, 향기나게 독자들앞에 펼쳐보이고있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강려의 렌즈(동시다발)는 과연 어떤 이미지들을 우리앞에 펼쳐보일것인가. 하나씩 만나보기로 하자. 《함박꽃》에서 시인은 함박꽃을 하얀 이남박이라고 이름지어주고는 해님의 노란쌀에 구름의 샘물로 나비가 팔랑팔랑 쌀 인다고 표현하고있다. 너무 아름답다. 한수의 짧은 동시인데 신비한 동화세계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동시속에 온전히 빠진 동시인만이 이런 아름다운 경지에 이를수 있는것이리라. 《별》에서 시인은 하늘을 호수로, 별을 꽃붕어로 보고있다. 아이들의 시각에 알맞는 비유이다. 그런 동시적발견은 달님이 지나가며 하얀 밥알 뿌리고 꽃붕어들이 그걸 받아먹는것으로 승화되고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동시가 이렇게 살아날수도 있다는게 마냥 신기하다. 《달빛1》에서 시인은 달빛살을 창문발로 보고있다. 그걸 귀뚜라미가 자꾸 풀어내리고있다. 달빛 고요로운 밤, 온 대지에 하얗게 실실이 드리우는 달의 빛살들, 그리고 귀뚤귀뚤 울어대는 귀뚜라미소리… 고즈넉한 밤에 연출되는 풍경화이다. 게다가 정적인 사물(달빛)이 동적인 의미(귀뚜라미에 의해 풀리는)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달팽이2》에서 시인은 간결미의 극치를 보여주고있다. 《딱/ 고기 한점 넣은/ 항아리 지고/ 엉금엉금》 자고로 달팽이를 묘사한 시들은 엄청 많다. 그러나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일목료연하게 보여준 시는 흔치 않다. 이는 시인이 평소 많이 관찰하고 많이 사색하면서 시어를 끊임없이 다듬어온 노력의 결정체이리라. 그럼 《얼음장》은 또 어떤가. 나는 겨울이 잉태한 하얀 곰이다. 풀리는 강물에 찰싹찰싹 엉뎅이를 얻어맞는 하얀 곰이다. 그래서 화가 나서 퉁방울눈 부릅뜨고 봄물 쫓아가다가 그만 녹아흐르며 나를 잃고만다. 형상적이면서도 동시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있다. 《진달래1》에서는 진달래가 분홍빛 봄을 토하고있다. 개구장이 구름이 물총을 쏘아대도 꽃잎은 젖지 않고 오히려 은구슬 금구슬을 굴린다. 그 어떤 진달래보다 형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생활의 론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생활에서 껑충 뛰여올라있다. 시인의 눈에 《토끼》는 어느 아이가 굴려놓은 눈덩이다. 그래서 그 눈덩이는 넘넘 부드럽고 살살 녹기도 한다. 그러나 토끼에는 분명 생명이 깃들어있었으니 퐁퐁 뛰기도 한다. 재치의 극치라 해야겠다. 《봄은야1》은 봄을 강물로 보고 거기에서 풀, 꽃, 잎들이 방게가 되여 나오는것으로 묘사되고있다. 봄을 맞아 온통 햇순들이 고개 쏘옥쏘옥 내미는 모습들을 굉장히 멋진 이미지로 형상화하고있다. 《연필》이 이번에는 딱따구리로 변한다. 딱따구리가 되여 글나무를 키운다. 이 정도라 해도 동시로는 훌륭하다. 그러나 시인은 한차례 비약을 더해본다. 그래서 나는 방아공이 되여 콩콩 글콩 찧는다. 콩콩이라는 의성어에 글콩이라는 새뜻한 낱말을 만들어내 조합시킴으로써 시의 형상화가 재미스럽게 된다. 《이슬》에서는 이슬이 은빛공기돌이 된다. 바람이 다가와 통통 튕기며 혼자 놀고있다. 그랬다. 강려는 동시라는 렌즈를 들이대고 시적대상물들을 가지고 놀고있었다. 그 모습은 어린 소녀가 강가에 앉아 혹은 풀 푸르고 꽃 고운 들녘에 앉아 물과 돌과 꽃과 풀과 새와 바람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지극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것으로 덜어도 더해도 안되는, 꼭 알맞는것들이다. 강려의 눈에 비친 시적대상들은 일제히 어린이들의 시각에서 동화적색채가 다분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뒤 우리앞에 나타난다. 강려가 들이댄 렌즈(동시)를 통해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그래서 우리가 평소 쉽게 스쳐버렸던 모든 주변 사물들이 사실은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며 그런 아름다움의 세례를 받고난 뒤 우리는 일상에서 얼룩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풀이 피여나고 꽃이 미소 짓고 나비가 한들거리고 구름이 낮잠 자고 물이 흐르고 달빛이 부서지는 등 이 모든 자연의 이야기들은 강려의 동시를 통해 새록새록 새롭게 되살아나고 살아나서는 신기한 모습으로 우리앞에 다가오며 다가와서는 우리의 얼룩을 닦아준다. 동시를 읽는 대상인 어린이들은 강려의 동시를 보면서 동심을 더욱 보듬게 될것이며 맑은 심성을 키우게 될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열 사람의 어른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강려는 동시 한수로 거뜬히 해내고있다는 말이다. 동시는 환히 피여난 꽃속을 팔랑이는 나비처럼 예쁜 존재이다. 동시는 아슴한 밤하늘 수줍게 미소 짓는 별들처럼 맑은 존재이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것만이 통하는 동심세계, 동심세계에서만이 통하는 동시, 동시는 동심을 보듬어키우는 요람과도 같은 존재이다. 동시는 아이들이 눈물방울을 단채 웃으며 읽을수 있는 문학이다. 동시는 슬프거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엄마와도 같은 존재이다. 동시를 모르고 성장한 아이는 얼마나 슬플가? 그런 동시를 강려는 너무 멋지게 아름답게 펼쳐보이고있는것이다. 어른들이 읽으면 반성을, 아이들이 읽으면 찬탄을 하게 만드는 강려의 동시들은 무궁한 매력으로 우리 조선족동시단에 이채로운 빛을 더해주고있다. 강려의 동시탐구행보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우리 모두 지켜볼 일이다.                                                                                            /해주  
1657    중국조선족 제2세대 대표적 시인 - 리상각 댓글:  조회:4029  추천:0  2016-10-14
《사랑의 서정시》에서 사랑을 풀어내다 편집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들어가면서 인간은,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세계이고 우주이다. 그 우주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포함한 삶에 대한 모든 체험과 느낌이 담겨져있다. 시인의 경우 그것은 더욱 다양하고 복잡한 느낌으로 가득차게 되며 나름대로의 표현에 의해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전해지게 된다. 얼마전에 펴낸 리상각시선집 《리상각 사랑의 서정시》의 권두시 《가슴》은 이러한 점을 시적으로 잘 나타내고있다. 가슴은 나의 하늘/ 해가 뜨면 푸르다// 구름 끼면 어둡고/ 달이 뜨면 그립다// 이따금 우뢰가 울고/ 소나기 쏟아진다 《가슴》에서 《가슴은 나의 하늘》이라고 하면서 그곳에 《해가 뜨면 푸르고》 《구름 끼면 어둡고/ 달이 뜨면 그립다// 이따금 우뢰가 울고/ 소나기 쏟아진다》라고 함으로써 매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임을 잘 드러낸다. 그 가슴이 하늘과 동일한것으로 곧 하늘은 인간세상뿐만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비추고 전해주는 그릇이자 거울의 기능을 동시에 하는 력사적이고도 현실적인 복합물이 된다. 리상각시인은 조선족문학의 흐름에서 해방후 제2세대의 대표적인 시인중 한 사람으로 사랑의 소재뿐만아니라 자연을 비롯한 여러가지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저 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특히 만년에 많은 풍자시를 써 사회비판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고 옳바른 삶의 자세를 더욱 정직하게 다듬고저 한 모대김은 녹쓸지 않은 노익장의 정신과 저력을 과시했다. 이번 시집의 차례와 구체적인 내용을 훑어보면서 대부분의 소재를 《사랑》으로 포장하는듯한 점에는 약간의 이의가 있으나 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의 개념으로 포괄적으로 생각해볼 때 너무 심각하게는 느껴지지 않았고 어딘가 새롭고 재음미할수 있는 점마저 있었음을 미리 말하고싶다. 이 시집을 읽어내려가면서 받았던 이러한 새로움과 의미는 대체로 자연적인 대상을 통한 고향에 대한 사랑과 민족적인 가락에 바탕한 정서의 표현 그리고 사회비판의 풍자시의 속성과 동화적인 세계를 통한 순수성에 대한 추구 등으로 나누어 설명할수 있다. 1. 처녀, 자연과 고향 시집의 첫장에 떠오른 작품은 《빨래하는 처녀》로 1956년에 씌여진 오래된것이지만 지금도 그 방치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는듯하였다. 방치소리 찰딱찰딱/ 산으로 마을로 찰딱찰딱(중략)/ 시원스레 내리치는 방치소리/ 총각의 마음을 건드리는줄 방치소리가 산과 마을에 울리고 총각의 귀에까지 들려 그 마음을 흔들어놓는다는 《방치소리→산, 마을→총각》이라는 소리의 흐름은 방치소리와 그 울림에 의한 인간의 심성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총각의 마음이 그 소리에 제멋대로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소리의 주인공인 처녀에 향해있다는 《총각, 마음→처녀》라는 마음의 움직임의 방향은 그러나 총각 홀로만 애태움으로 처녀에게 방치소리처럼 전달이 불가능하다는데 이 작품의 역설적인 미가 빚어지게 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처녀와 총각 사이에 벌어진 흥미롭고도 아름다운 시골의 사랑의 풍경을 관조하는 재미를 독자들에게 선물하고있다. 처녀가 두들겨내는 방치소리가 산과 마을에 흥겹게 메아리치는데 처녀도 모르는 총각의 마음이 그 소리에 괜히 흔들리고 애가 탄다는 표현은 매우 간접적이면서도 그렇기때문에 그 어느 직접적인 화법보다 더욱 강렬한 사랑의 정감을 흥미롭게 표현할수 있다는 이 점을 보인다. 이러한 수법은 같은 해(1956)에 창작된 《수박밭에서》도 수박만 고르며 수박보다 더 붉게 타번지는 《나》의 마음을 모르는 처녀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있었다. 이처럼 처녀는 시집의 첫번째 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소재로 시인에게 작품에서의 아름다운 화폭이고 멈출줄 모르는 창작의 원천적 샘물이 된다.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운데 하나이지만 이토록 사랑에 대해 절절히 읊조리는 것은 그만큼 사랑의 상대가 너무 소중하고 너무 안타깝고 너무 그리워서이다. 그러한 사랑의 상대는 해와 달, 꽃 등 여러가지 자연물과 한복과 같은 아름다운 의상에 비유될 정도로 아름답게 비유되여있을뿐만아니라 시인의 창작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내용의 노래가락을 이루고있다. 앞에서 보아온 《처녀》처럼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도 중요하지만 자연의 일부로 시인에게 시적인 발상을 자극하고 아름다운 노래가락을 뽑아내도록 유혹하는 대상도 적지 않다. 제2장 《압록강 시초》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요소를 모아보면, 노래방에서도 심심찮게 선곡되는 《두루미》를 비롯하여 《산꽃》과 《쪽배》, 물, 바람, 구름, 물새(《물도 가네 나도 가네》) 등 륙지와 바다에 거쳐 동식물들이 두루 취급이 되며 제3장 《따뜻한 인정의 사랑시》에서는 《초가집》과 《실개울》, 《파란 실버들》, 《봄제비》, 《도라지꽃》, 《민들레꽃》과 같이 실제적인 삶에서 쉽게 경험하거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현장의 한부분으로 되는 대상에 이르고있어 시인의 시선은 매우 많은 대상들을 주시하고 껴안고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러한 자연의 대상은 고향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위치함으로써 고향에 대한 깊은 사랑을 통해 민족적인 삶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남김없이 드러내는데 크게 기여하고있었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사랑이 시적 상상력에 의해 무한히 확장이 될 때 그것은 작은 《조약돌》(《조약돌》)에서 《노을》(《노을에 새겨진 글발》)에 이르기까지 민족 전체의 소원에 대한 간절한 념원으로 비치기도 한다. 울고싶어도 눈물이 없다/ 말하고싶어도 소리가 안 나온다/ 눈물도 슬픔도 다 삼켜버린 나/ 고향의 돌이 된것만도 다행이다// 언제면 나 소생할건가/ 끊어진 길이 다시 이어지는 날/ 고국이여 고향이여 웨치면서 나는/ 조약돌에서 뛰쳐나오련다 ―《조약돌》 마감련 물론 고향에 대한 사랑은 제4장 《향토사랑의 시》에서 나오는 고향의 이모저모에 대한 직접적인 노래에서도 드러나고있다. 《봄이 왔어요》에서 산과 들, 과원, 밭이랑, 그속의 길짱구, 이름 모를 꽃과 나물 캐는 처녀들, 뜨락의 버드나무울바자 등 매우 많은 자연과 인간의 대상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하고있으며, 《소낙비 내린 뒤》에서도 논판, 매지구름, 언덕, 개울, 집오리떼, 실버들, 푸른 산, 하늘, 쌍무지개, 푸른 벼, 초원, 송아지, 제비, 호수, 벼포기, 밭머리, 황금해살 등 자연과 인간의 많은 대상들이 뒤섞여나온다. 자연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고향의 이모저모가 매우 많은 대상들을 거쳐 노래되고있다는것은 시인의 관찰력이 그만큼 폭넓게 진행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 고향의 모든것에 대한 시인의 사랑이 매우 넓은 품속에서 뜨겁게 넘쳐난다는 뜻도 된다. 이처럼 모든것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고향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말그대로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한평생/ 고향을/ 떠나지 못한이는/ 불행하여라// 한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이/ 더욱 불행하여라// 시골도/ 고향은/ 마음의 천국/ 천국, 천국을 돌려주소서 ―《천국》 고향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유년의 순수성과 삶의 안주에 대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데 집중되여왔었다. 하지만 그러한 고향은 자연의 대상으로 보았을 경우,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나아가 치유하는 기능까지 함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청산소곡》과 같은 작품은 특별한 설명이 없이도 자연의 그러한 치유의 효과를 충분히 말하고도 남음이 있는 시들이다. 산의 푸른 빛발에/ 내 눈이 맑아지고// 맑은 물 여울소리에/ 내 귀가 밝아지고// 가벼이 부는 바람에/ 내 가슴이 열리고// 우짖는 새소리에/ 내 마음이 즐겁다// 아, 청산의 품에 안기니/ 온갖 시름이 다 가셔버렸다 ―《청산소곡》 2. 민족적인 가락과 정서의 끈끈함 제5장 《꿈으로 사는 사랑시》에서 금방 만날수 있는 작품으로 《보노라 못 잊어 가다 또 한번》이란 시는 김소월의 《못 잊어》와 《가는 길》이 떠오르고 《가다 또 한번》이나 《즈려밟고》 등의 표현과 함께 즐겨 썼던 7·5조가 기본 률격으로 되여있어서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반갑다 오던 비여 오던 비 끝에/ 황금해살 쏟아져 한결 푸른 산/ 푸른 산에 구으는 진주이슬을/ 즈려밟고 탐사의 길 나는 가노라// 가는 길, 길섶에 물구슬이 돌돌/ 조약돌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길/ 가노라니 우거진 푸른 숲속에/ 곱게도 피였구나 함박꽃송이 특정시기(1979. 4)의 이데올로기적인 사회풍조가 그대로 풍겨오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민족적인 리듬들이 무엇보다 강렬하게 들려오는듯했다. 내용의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민족적인 가락들이 시인의 작품에서 쉽사리 들려오는것임을 돌아보면 역시 민족시인이라는 점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아마 이럴 때에는 형식이 내용보다 우선하는 상황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민족적인 가락에 담은 내용이 민족적인 정서를 자극할 때 그러한 가락은 더욱 빛을 발하기도 한다. 천당같이 부럼 없는 곳에 살아도/ 가난했던 조상의 뿌리는 못 잊어// 슬픔도 아픔도 내게는 모두다/ 금싸락같이 귀중한 그리움의 보배// 울면서도 잊지 못하는 사랑의 물결은/ 바다같이 설레이는 겨레의 정// 하늘하늘 하늘에서 춤추는 두루미야/ 하얀 옷자락에 우리 노래 울린다 ―《혼》 민족에 대한, 그 정신에 대한 사랑과 노래는 김소월의 《초혼》이 내뿜는 격렬함과 처절함에는 못미치지만 평화시기의 민족의 혼에 대한 노래이지만 나름대로 매우 아름답고도 절절하게 들린다.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과 조건에 살아가는 이곳의 상황을 둘러보면 민족의 현실적인 모순이나 아픔에 대한 시인의 아픈 노래는 그 사랑의 깊이를 갈수록 더해가는 힘에 바탕이 되면서 더욱 값지게 들려온다. 그의 시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두루미》의 춤과 노래는 그 희디흰 색갈과 함께 이러한 민족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더욱 절절하고도 의미심장하게 들려주는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민족에 대한 사랑외에 어머니와 같은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의 상징과 같은 존재에 대한 사랑 《알로에》, 《어머님의 손》 등 작품에서 역시 중요한 소재로 노래되고있었다. 특히 어딘가 신비하기까지 한 《어머님》에 대한 노래는 이 작품들외에도 시인에게서 보기 드물게 2행으로만 된 작은 형태의 시로 파악되는 《어머님》이란 제목의 작품에서 보다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어머님, 어머님 떠나가신 방에/ 시계소리 왜 이리 높습니까? 어머니를 떠나보낸 화자의 고독하고 허전한 마음이 가장 절제된 언어들에 의해 표현됨으로써 그 아픔이 더없이 크고도 큰것임을 나타내는 역설적인 구조라 하겠다. 어머니의 목소리나 자취가 사라지고 시계소리가 대신한 방안에서 시간이나 세월을 상징하는 시계소리는 어머니의 부재를 더욱 분명히 귀띔하고 그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는 수록이 되지 않았지만 상기의 작품에 앞서 시조로 발표된 작품들에서 이미 어머니에 대한 그러한 정감은 매우 복합적인것으로 표현된바 있다. 어머님 등에 업혀 만리길 떠나서/ 파란 많은 인생의 가시덤불 헤쳤나니/ 가슴에 노상 울렸네 에밀레종소리// 에밀레종소리 속시원히 들어볼가/ 조약돌 들었다가 슬그머니 놓았어라/ 불쌍한 어머님 생각 눈물눈물 솟아라 ―《에밀레종소리》(1) 에밀레종의 슬픈 사연을 배경으로 고국을 떠나 이국타향에 정착해 살면서 겪었을 온갖 고생을 작은 조약돌로조차도 차마 울리지 못하는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오래되였지만 깊고깊은 상처의 곬을 이룬 아픈 과거에 대한 회억을 잘 살려내고있다. 3. 풍자에 담긴 인생철학 이번 시집의 제11장은 풍자시로 되여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풍자시의 경우에는 풍자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애증을 드러내고 풍자의 효과성을 위한 비교적 용이한 표현을 구사하기때문에 대체로 제목에서 그 내용와 목적성을 짐작할수 있을 정도의 용이한 리해가 가능하다는 특점이 있다. 이 시집에서의 풍자시는 우선 아첨쟁이(《애완견》), 악처(《흡혈귀》), 탐관오리(《독사》), 위선자(《최면술》), 게으름뱅이(《심술돼지》), 가식(《웃음과 울음》, 《오염》), 욕심쟁이(《가재》, 《돼지귀에 경읽기》), 명쟁암투(《뼈다귀》), 벼슬에 눈먼 자(《사모》, 《한자리》) 등 이 사회의 부정적인 현상에 대한 폭넓은 폭로가 이뤄지고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중 몇수만 례로 보기로 한다. 벌지 않고도 고급료리 먹는 행운아/ 곤두박질쳐가며 콩콩 짖어대다/ 송곳이로 손님의 발가락을 문다 ―《애완견》 제1련 남몰래 쓰디쓴 독즙을 심킨데서/ 종양이 든줄 몰랐다 훼멸된 육체/ 관골이 툭 불거진 미인 얼굴에선/ 눈물방울 떨어진다… 때는 이미 늦었다 ―《흡혈귀》 마감련 버려진 뼈다귀를/ 제꺽 물고/ 흘끔거리며 간다// 흘끔거릴수록/ 빼앗자고/ 달려드는자 있다// 고기 한점도 없는데/ 무얼 바라고 이악스레/ 물고뜯을가? ―《뼈다귀》 1~3련 물론 저러루한 부정적인 현상에 대한 폭로만 이뤄진것은 아니다. 이 시집에는 이와 동시에 《저울추》, 《거목의 꿈》, 《물잠자리》, 《지렁이》, 《허수아비》, 《바위》, 《산》 등 작품을 통해 그러한 부정적인 현상과 대조되는 순수하고 정직하고 옳바른 긍정적인 모습들이 노래되고있어서 단순한 폭로나 개탄이 아닌 미래지향적인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보이고있어서 보다 풍성한 풍자시의 내용물을 선사하고있었다는 점이 돋보였다. 특히 그러한 긍정적인 모습들이 우리가 쉽게 볼수 있는 자연의 대상으로 되여있고, 그것도 《지렁이》와 같은 매우 작은것에서 《산》과 같은 거대한것에 이르기까지, 동식물에서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구성되여있다는것이 이색적이다. 그만큼 시인의 관찰력이 매우 넓은 공간에 의해 걸쳐져왔고 이러한것들을 통한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표현이 다각도로 시도되였음을 알수 있게 해준다. 4. 동화에 비낀 순수성의 가치 풍자시에서 보아왔던 어지러운 사회적인 현상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견디기 힘들만큼의 혐오감을 자아내면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추구를 하게끔 역설적으로 자극하기도 한다. 시집의 제6장 《인생철학의 사랑시》에서 시인은 《조금씩 잊으며 살아가는 법/ 더러는 사양하며 살아가는 법》을 익힐것이라고 《살아가는 법》에서 선언함으로써 그러한 삶의 자세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고 다른 한 시 《물빛으로 살고싶다》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해 제시하기도 한다. 열길 물속이 보이는 곳에/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있다/ 춤 추듯 하늘거리며 떠나는 물은/ 흐르면 노래와 같은 맑은 소리// 길은 거치장스러운 길이여도/ 하냥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유로이 에돌고 뛰여넘어가는/ 착하고 어여쁜 너의 몸짓(중략)// 그렇게 가고있는 너처럼/ 내 마음의 밑바닥을/ 누구나 환히 들여다보도록/ 항상 너의 물빛으로 살고싶다 《누구나 환히 들여다보도록/ 항상 너의 물빛으로 살고싶다》고 함은 욕심과 거짓이 란무하는 현실적인 삶에서 량심과 진정성의 소중함에 대한 스스로와 모든이에 대한 일깨움이다. 이러한 순수한 마음가짐에 대한 추구는 티없이 맑은 아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게까지 만들며(《아가야 너의 맑은 세계로》) 생명 존중의 주제를 생각하도록 만든다(《락엽》). 물론 생명에 대한 존중은 생명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생명을 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에서 충분히 보아낼수 있음은 어머니를 소재로 한 앞의 시들에서 이미 보아온바와 같다. 다른 한편 동화적인 세계속에서 어린이의 순수하고 환상적인 시선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빚어내면서 시인에게 중요한 심성의 하나인 유년적인 순수함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작품도 있다. 나는 한마리 사슴/ 그대를 등에 업고 달리고싶다/ 고운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어다오/ 따스한 두팔로/ 내 목을 안아다오 ―《나는 한마리 사슴》 제1련 칠면조아줌마 셋/ 둥기적둥기적 모여와/ 남편의 돈자랑 하네/ 며느리 발뒤꿈치 흉보네(중략)// 이젠 날기도 뛰기도 싫어져/ 뚱기적거리는 발걸음/ 별무늬 그리며/ 알 낳던 빈 궁둥이만 흔드네 ―《칠면조아줌마 셋》 이 작품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것에 대한 시인의 추구를 잘 드러내고있다. 이 점을 가장 잘 설명할수 있는 근거는 의외로 《단마디 시》(2)와 같은 난센스 작품(?)일것이다. 이중 두수만 례로 든다. 비 온 뒤 땅속 기여나와/ 낚시대 보자 반가와 춤 춘다 ―《지렁이》 별을 딴 사람 하도 많아/ 하늘 별밭이 듬성듬성 ―《별밭》 일견 터무니없거나 모순되는 화법이기도 할것 같지만 이 작품들에 내재된것은 그러한 엉뚱한 표현의 뒤에 숨어있는 현실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이나 풍자적인 의미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아동시와 다름없으나 실제로는 특이한 수법의 성인시라고 보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난센스적인 표현은 시적인 구성과 독자들의 시선을 신선하게 만들며 동시에 말하고저 하는 의도를 보다 새롭고도 강렬하게 전달할수 있다는 효과성을 지닌다. 최근 SNS에서 인기 있는 짧은 형태의 시들에서 적지 않은 경우 저러한 수법을 취하고있음은 바로 그러한 효과성을 목적으로 하고있기때문이기도 하다. 나오면서 인간의 마음이나 가슴을 하나의 우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앞의 분석을 통해, 자연의 대상물을 통해 고향과 민족에 대한 리상각시인의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들을수 있었고 그러한 민족적인 가락에 기초한 끈끈한 전통적인 리듬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또 누구보다도 강렬한 사회비판의 풍자적인 날카로움과 동시에 동화적인 세계를 통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평화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소망도 엿볼수 있었다. 특징적인것은 이러한 시적인 표현에서 《처녀》와 《어머니》와 같은 시적인 주인공이 여러가지 동식물과 함께 등장하며 유년적인 시선과 동화적인 공간에 대한 추구에서 드러난 맑고 순수한 심성은 리상각시인이 품고있는 나름대로의 우주를 가득채운 가장 중요한 내용물이란 점이다. 또 인간의 희로애락을 포함한 거의 모든 체험과 느낌은 민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에 이어져있어서 시인으로 하여금 명실공한 해방후 제2세대의 대표적인 조선족 시인중 한 사람이라고 강조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 시인의 작품은 여러 소재뿐만아니라 여러가지 시적인 쟝르에 거쳐 다양한 수법으로 창작되여왔으므로 이후 보다 자세한 론의가 거듭되여야 할것이라고 생각된다. 주해: (1) “중국조선족 시조선집”, 민족출판사, 1994. 5. (2) 제9장 “눈물과 웃음의 사랑시”에 “단마디 시”란 제목하에 4수를 묶어내고있음.                                                                   /김경훈  
1656    詩에게 말을 걸어보다... 댓글:  조회:3879  추천:0  2016-10-14
시에게 말을 걸다 □ 김학송     문학의 중심에 섰던 시가 한쪽으로 밀리우게 된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시 쓰는 사람들의 문제도 적지 않다고 본다. 시를 재미없게 쓰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죄 없는 시는 독자와 멀어진채 쪽방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있는 눈치다. 시는 찰나의 예술이다. 그만큼 직감에 호소하는 성분이 다분하다. 스쳐가는 미인을 되돌아보듯 다시 보고픈 충동이 확연히 생기도록 써야 한다. 시를 접하는 순간부터 선명한 미감으로-낚시군이 월척을 낚듯이- 독자의 마음을 확- 후려채야 할것이다. 독자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고 또 요즘처럼 생활절주가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에는 더구나 그러하다. 찰나에 독자를 매료시키지 못하면 금방 놓쳐버리게 된다. 첫행부터 뚜렷하게 끌리는데가 있어 다 읽고난 다음에도 다시 읽고싶어져야 시가 온전히 제 구실을 하게된다. 여기서 말하는 선명한 미감이란 지극히 아름답거나 지극히 진실하거나 지극히 순수하거나 지극히 재미있거나 지극히 철리적인 경우를 말한다. 난삽하고 딱딱한 시구를 퀴즈풀듯이 기어이 풀어보려고 애쓸 독자는 별로 없다. 시도 음식이다. 정신의 음식이다. 우선 보기 좋고 맛이 좋아야 식(食)자에게 먹히운다. 누군가에게 먹히워야 그 영양가치를 론할수가 있게 되는 법. 먹히지 못하는 음식은 곧 부식되고만다. 시의 뜨락으로 많은 독자를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시인의 겸허한 자세가 각별히 요청된다. 독자가 자기의 귀중한 시간(아주 순간적인 혹은 가장 짧은 시간일수도 있음)을 할애하여 한 시인의 시를 읽어주는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그럼 독자가 가장 짧은 틈을 할애해주는 그 순간적인 시간내에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 잡겠는가? 여기에 깊은 학문이 있지 않겠는가? 몽롱한 언어로 따분한 시를 빚어 놓고 독자가 미처 리해 못하니 독자더러 몇십분씩 혹은 몇시간씩, 심지어 며칠이라는 시간을 할애하여 “내 시를 봐줍소사, 그 뜻을 해독해 주옵소사” 하고 강요할수는 없는 일. 시는 독자와 함께 가야 하고 독자를 왕처럼 모셔야 비로소 그 발전이 가능해진다. 예술은 감동이고 공감이기때문이다. 그 어떤 구실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대중을 떠난 스스로의 선양은 그 얼마나 무의미한가! 나의 시가 나에게만 속해서는 의미가 없다. 나는 나의 시가 나를 벗어나 멀리 흘러가기를 바란다. 내 가슴에서 타인의 가슴으로 옮아가기를 바란다. 호수우에 그려진 파문처럼 넓게, 멀리 번져갈수록 가치가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시를 평가하는 열쇠는 나에게 있지 않고 독자가 쥐고있다. 스스로 좋다고 하는건 무효이고 오직 독자가 좋다고 해야만 그 평가는 효력을 발생한다. 언어의 배면에서 강하게 풍겨오는 미적인 호소력은 체험의 질감과 정비례한다. 진짜 깊은 시는 깊은척을 하지 않는다. 현대시의 지나친 기술주의나 지적인 사치가 병페라고 한다면 소박성의 미에 눈을 뜬, 구체성을 지닌 시구가 무척 아쉬운 시점이다. 깊은 체험을 통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시가 참시이며 좋은 시이다. 좋은 시는 독자의 기억에 남는다. 시의 우렬은 독자의 기억속에 남느냐 남지 않느냐에 달린다. 독자의 기억에서 사라진 시는 별로 좋은 시라고 할수 없다. 시행속에 시인의 절실한 혼이 침투되어 고도의 진정성을 얻을 때만이 시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뼈저린 감수가 선행되여야 생명력이 있는 좋은 시의 생산이 가능해진다. 언어의 리면에 그 언어를 지탱하는 체험적에너지가 결여한것이 문제를 일으킨다. 진정성이 거세되고 어떤 간절함이 없는 시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고금중외의 명시는 례외없이 모두가 공감대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한 작품들이다. 평범함속에 비범함을 감춘 작품들이다. 좋은 시는 맹물에 알콜을 탄것이 아니고 쌀, 누룩, 노하우가 버무러져 오랜 세월이 발효시킨 명품술이다. “명주”를 생산하자면 영감을 삭이고 거를수 있는 정신의 그릇을 만드는 작업이 필수다. 한국의 소설가 이외수씨는 천상병시인을 가리켜 백년에 한번 나올가말가한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천시인은 옹근 마음으로 시를 쓰는, 흔치않은 시인이라고 했다. 기교에 련련하지 않고 깨끗한 심장으로 시를 쓴 천시인은 이 시대의 마지막 순수라고 불리울만큼 솔직하고 심성이 맑은 사람이였다. 그의 대표작 “귀천”은 명시중의 명시로 평가 받고있다. 알기 쉽지만 뜻이 깊고 영혼을 울려준다. 깊은 진실이 독자를 감동시킨다. 시인의 진실이 독자의 진실과 만나 공명의 불꽃을 튕긴다. 좋은 시는 새 독자를 만나 새 감동을 일으킬 때마다 새 생명을 얻게 된다. 감동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좋은 시라고 할수 있다. 이 진실과 저 진실이 만나 열매가 맺힌다. 그 열매가 눈물이며 감동이다. 시에서 중요한것은 드러냄과 감춤의 적절한 배비이다. 너무 드러내면 여운이 없고 너무 감추면 도깨비시가 되고만다. 시도 생명체이다. 하기에 가장 합리한 거리에서 시적대상물의 본질이 형상으로 드러날 때 언어는 생명을 획득하고 한 수의 좋은 시가 태여난다. 시는 시인의 내면에서 흐르는 령혼의 샘물이다. 마음의 박우물에서 찰랑이는 청정수이다. 요란을 떨지 않고 수줍게 조용히 흘러가는데서 생명을 얻는다. 서정성의 기본 특징은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한 자기 내면의 자연스런 표출이다. 그런 표현은 너무 드러내지 않은 함축된것, 절제된것일수록 좋다. 자아성찰과 반성이 없는 서정은 진정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객관적상관물은 흔히 자아를 바라보는 들창이 된다. 반성과 참회의 미학이 침투된 시가 고도의 서정성과 일치되는 경우가 많다. 윤동주의 시가 좋은 보기가 된다. 순정한 마음이 떠올린 참회, 반성, 붐끄러움을 통해 서정성을 일궈낸것이 윤동주 시의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우주자연과 자아를 옳게, 깊이 바라보는 눈이 중요하다. 무한히 화분될수도 있고 무한히 화합할수도 있는 자아를 부단히 정시하고 그런 자아를 바라보는 깊은 눈이 생길 때 시인은 거기에서 좋은 시를 만나게 된다. 시인은 모름지기 아름다움과 인간성과 예술로 독자를 감동키켜야 한다. 이러자면 시인은 우선 겸손해야 하며 독자의 종이 되여 독자를 섬길수 있는 착한 심성을 지녀야 한다. 문학은 모든 욕을 이겨가는 선비의 길이다. 령혼의 순수성이 가장 중요한 시인의 자질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한걸음 물러설줄 알아야 한다. 시는 시로 완성되여야 한다. 역경이나 아픔을 겪고나면 령혼이 성숙되고 시가 깊어진다. 사는만큼의 시이다. 기존가치관이 무너지고 새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무(无)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있다. 흔들리는 삶의 환경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힘은 온당한 내부질서의 건립에 있다. 남을 모방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자기다운 내면의 질서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런 내부질서를 가꾸는 보다 큰 힘이 바로 문학이며 시이다. 본질적으로 시의 위기란 인류생명 자체의 위기이다. 시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진심으로 시에게 사랑을 바치는 일 외에는 달리는 길이 없다. 시인은 뭐니뭐니 해도 시를 잘 써야 한다. 진짜 시비는 독자의 마음속에 세워진다. 시인의 진정한 훈장은 시작품- 그 자체뿐. 좋은 시에는 날개가 있다 깃을 푸득이지 않아도 먼 곳으로 나래치는 날개를 가졌다 이 날개는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시의 날개는 신의 옷자락을 닮았다 고요속에 태여나 소란속에 몸을 감춘다 겸허속에 날개가 펴지고 교만속에 나래가 꺾인다 스스로 만든 날개가 아니라 우주의 령혼으로부터 잠간 빌려온 날개이다 조금이라도 허세를 부리거나 욕심을 부리면 우주는 그 날개를 거둬간다. 도처에 비관론이 머리 들고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근자에 열린 한 문학축제에서 어느 랑송가의 시랑송을 들으며 행복한 전률을 느꼈다. 노래말이 곡상의 등에 업혀 멀리멀리 날아가듯이, 시도 랑송가의 입술에 얹혀 멀리멀리 날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눈을 떠본다. 시는 찰나의 예술이다. 시는 독자와 함께 가야 한다. 우리의 시가 민들레 홀씨처럼 천하만방에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과욕일가? 민족 얼의 대합창 ―시화집 《시와 사진으로 보는 연변》 편집/기자: [ 리영애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7-31 09:30:00 ]  최근 《시와 사진으로 보는 연변》(김학송 시, 최주범 사진, 김창선 번역) 시화집이 출간되여 뭇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있다. 이 시화집은 연변을 포함하여 우리 겨레 모두에게 바치는 귀중한 선물이다. 완성도 높은 시, 시를 예술로 승화시킨 사진, 원작을 깔끔하게 표현한 중문번역, 이 삼자가 3위일체를 이루어 우아하고 유정한 민족 얼의 하모니로 감미롭게 울리는 본서는 가히 조선족시문학의 기념비적대작이라고 하여도 무방할것 같다. 본서는 문화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모두 높은 경지에 이르고있다. 연변대학 전임총장 김병민선생은 본서의 추천사에서 본서가 지니는 문화적가치에 대해 《겨레의 슬기이고 서정이며 장쾌한 풍속도이며 …민족의 혼불을 지필수 있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정신적감로수》라고 평가했고 문학가치에 대해서는 《높은 경지에 오른 시편》이며 《붓이 아닌 령혼으로 쓴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편》이며 《여러 세대를 두루 아우르며 누구에게나 공명을 줄수 있는 전 민족적인 시》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본서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특점을 지니고있다. 첫째, 시로 그린 아름다운 민속도이다. 시인은 하얀 꿈이 솟구치는 민족정서의 옹달샘에서 오래동안 갈고 닦은 시의 바가지로 108수의 시를 퍼내고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숨쉬는 시원하고 달콤한 우리 민족의 민속도이다.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구수한 된장냄새와 얼큰한 막걸리향기와 새콤매콤한 김치냄새, 오는 정 가는 정을 슬슬 돌리던 매돌, 꽃치마를 날리며 하늘에 치솟는 그네, 씨름마당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함성, 천년 메부리에서 울리는 아리랑의 메아리, 저녁연기 꿈인양 피여오르던 초가, 거친 운명 짊어지고 천년 고개 넘던 쪽지게, 가난을 끌고 먼먼 길을 굴러왔던 황소, 하얀 마음 곱게 펴던 다듬이질소리, 빙글빙글 세월을 돌리고 행복을 돌리는 상모, 기쁨과 눈물을 열두가락에 얹어 둥기당 울리는 가야금, 향토의 서정으로 보리밭을 쓰다듬던 구성진 퉁소소리, 만산편야에 하얀 향을 수놓는 사과배, 온 세상을 향해 민족의 정기를 떨치는 천지폭포의 장쾌한 웨침, 민족의 소망을 안고 더 벅찬 래일을 향해 쉼없이 흐르는 두만강, 해란강… 그렇다. 《시와 사진으로 보는 연변》은 소박하고 장엄하게 숨쉬는 한편의 소중한 민속도이다. 둘째, 본서는 시로 그린 민속도일뿐만아니라 민족정신의 대찬가이다. 시인은 소아(小我)가 아닌 대아(大我)의 목소리로 온 령혼을 다해 연변을 노래하고 조선민족을 노래하고 민족공동체를 노래하고있다. 시인은 민족정신의 옹달샘에서 퍼올린 108수의 시로 울긋불긋한 시의 세계를 수놓고있지만 시집 전체에 자아가 극히 적게 얼굴을 내밀고 주로는 민족의 대변인으로 나서서 민족의 어제를 말하고 오늘을 말하고 래일을 예시하고있다. 이리하여 김학송의 시는 《현단계 사라져가는 민족의 혼불을 지필수 있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민족의 정신적 감로수로 우리 민족의 심전에 흘러들게 된다.》(김병민선생의 추천사) 독자들은 본 시집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정수와 그 가치를 되찾고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것이다. 시집에는 《연변찬가》 련작시 9수, 《해란강》 련작시 8수, 《혼의 노래》 련작시 11수가 있는데 모두가 연변을 노래하고 민족공동체를 노래하고있다. 《연변》이나 《해란강》은 이미 지명이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삶의 보금자리로, 민족의 대명사로 되고있다. 시인은 열정적으로 연변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구가하고있다. 《해란강이 하얀 입으로 퉁소를 분다/ 두만강이 파란 손으로 가야금 탄다/ 장백산이 9.3명절 좋아 북장구 친다/ 모아산이 민족자치 좋아/ 어깨춤 춘다》 (《연변찬가》4 ). 시인은 민족자치가 우리 민족이 행복하게 살수 있는 근원이라고 말하고있다. 이런 포근한 삶의 터전이 있기에 《한피줄 동포들이/ 오손도손 정 나누며/ 해와 달을 마시는 곳》(《혼의 노래》 12)으로 된다. 다음으로 시인은 민족 얼의 뿌리가 민족언어와 문자에 있으므로 민족공동체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우리 글과 말을 잘 지켜야 한다고 피력한다. 《자음과 모음은 우리의 혼불이라고/ 꽃이파리 스치는 바람이 말한다/ 벼이삭에 앉은 바람이 말한다》( 《연변찬가》6)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 거대한 기여를 했으며 그 과정에 이 땅의 떳떳한 주인으로 되였고 튼튼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할수 있었다. 《뒤동산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는/ 고향 위해 목숨 바친 지사들의 넋이런가// …마반산, 사방산, 오봉산… 그 어디에나/ 아름다운 항일의 피가 물들어있다》(《혼의 노래》 4) 중국조선족이라는 민족공동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기나긴 수난의 세월속에서 목숨을 바쳐 악착스런 투쟁으로 바꾸어온것이다. 《쪽박 차고 두만강 건너 남부녀대 허위허위/ 이 땅에 정착한 그날부터 / 우리의 선친들은 온몸이 괭이 되여 화전 일구고/ 목숨 바쳐 이 터전을 지켜왔거니/ 장백천리 눈보라는 알고있다/ 만고밀림 산안개는 알고있다/ 이 고장의 래력을/ 뿌리 깊은 세월을》( 《혼의 노래》3). 우리 민족은 지금 돈벌이를 위해 해외로 연해지구로 흘러나가 돈은 벌었으나 그와 함께 민족공동체가 여러가지 위기에 봉착하게 되였다. 시인은 이러한 비극도 놓치지 않고 솔직하게 그려내고있다. 《너와 나 하나하나가/ 고향집 기둥이요 연목가지인데/ 하나 둘 빠져나가면 / 와르르 ―/ 저 하늘이 무너지는데》(《혼의 노래》 7) 《황금에 목 마른 꿈이/ 아이들의 눈물 딛고 행진한다》( 《혼의 노래》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우리 민족의 창창하고 양양한 래일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흰 옷자락 하야니 펼치며/ 하얀 마을 무궁하리라// 살구나무 꽃구름속에》(《연변찬가》9). 시인은 많은 시편들에서 《흰》과 《하얀》을 자주 등장시키면서 민족공동체의 성원들이 백의민족의 후예임을 강조하고있다. 셋째, 본서는 시와 사진, 조중역본이 3위일체를 이룬 고품격을 갖춘 시집이며 여직껏 볼수 없었던 고차원의 연변홍보물이라고 할수 있다. 이 한권의 책으로 우리 민족의 특유의 민속뿐만아니라 우리 민족의 걸어온 력사의 발자취와 오늘의 모습 등을 낱낱이 볼수 있을것이다. 금후 본서가 시집의 가치를 훨씬 뛰여넘어 연변과 조선족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파워를 발휘할것이며 연변경제의 부흥에도 커다란 기여를 할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화집 《시와 사진으로 보는 연변》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획득하고있다. 108수의 시는 대부분 완성도가 높은 서정단시이다. 민족의 모든것을 아우르는 방대한 사시적내용을 서정단시로 담아내자면 고난도의 시수련과 피타는 언어의 련금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시들은 읽기 쉽고 정답고 구수하고 소박하지만 깊은 의미가 다져져있다. 이런 연고로 하여 가독성과 함께 넓은 공명대가 형성되며 광대한 독자층을 확보할수 있을것이다. 《조막손에 꿈 모아 먼 하늘로/ 님 부르면/ 목마른 갈망/ 하야니 입 벌린다/ 오호라, 저어기 계절밖/ 혼떼들의 아우성》(《민들레》). 아주 잘 다듬어진, 아주 형상적인, 살아 움직이는 시다. 《하야니 입 벌린다》와 《혼떼들의 아우성》은 많은 내용이 함축된 시구다. 편폭상 개별적인 시구들만 몇구절 살펴본다. 《겨울은 부서지기 쉬운/ 보송보송한 이야기라네》(《겨울동화》), 《새소리에 튕겨올라/ 종을 치는 풋고사리/ 박우물 초승달 마시고/ 어딜 가나 청노루》(《두메산골》), 《시간이 아름답게 피리 불던 곳/ 내 맘이 오늘도 호박잎 쪽배에 앉아/ 안개속/ 하얀 그리움 노 저어가는 곳》(《고향》). 시집에는 시조도 적지 않아 전통미와 민족성도 살려내고있다. 《눈물의 메부리에/ 한(恨) 걸린 노래가락/ 세월 구름 고개 넘어/ 한복 입은 우리 소리/ 혼으로 뻗어가는 길/ 정(情)이 우는 메아릴세》(《아리랑》). 108수의 소박하고 우아한 시로 장엄한 민족 얼의 대합창을 엮고있는 《시와 사진으로 보는 연변》은 시인 김학송이 우리 연변과 2백여만 조선족민족공동체에 선사하는 귀중한 선물이다.  /김몽   ===================================================== 《탈락된 수상작》을 떠올리며― 《길림신문》 제2회 《두만강》문학면 부분적 작품을 평함 편집/기자: [ 리영애 ]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8-19 13:41:07 ]  지난《길림신문》 제2회 《두만강》문학상 시상식이 성황리에 끝났다. 그런데 심사위원으로서 어쩐지 좀 꺼림직하다. 수상명액의 제한으로 질적으로 훌륭한 작품들이 탈락된 아쉬움이 남았기때문이다. 모든 상이 다 그러하거늘 나는 이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이런 훌륭한 작품들을 《탈락된 수상작》이라 명명해본다. 이런 작품들이 꽤나 된다. 여기서 모두 거론하기에는 아름차다. 그래서 시...를 조명해보겠다.   1. 시   박장길의 시 《서산마루에 해바라기 피였다》, 《낚시줄의 긴 꿈》, 《옷장문》은 시적인 이미지화가 잘되여 현대시의 품격을 갖추었다. 《서산마루에 해바라기 피였다》를 보자. 첫 련에서 일단 해는 《해바라기꽃》으로 이미지화된다. 두번째 련에서 이 《해바라기꽃》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으로 둥글게 타오르》는 이미지로 화한다. 세번째 련에서 해바라기꽃은 다시 《큰 바퀴》로 이미지화된다. 네번째 련에서는 《아버지, 그만 산에서 내려오십시오》로 아버지와 해바라기꽃은 대유적인 클로즈업이 된다. 그다음 나머지 련은 아버지에 대해 못다한 회한의 효심을 톺아내고있다. 보다싶이 이 시는 자연의 해와 해바라기꽃 및 인간의 바퀴와 아버지이미지를 잠입가경으로 하나로 클로즈업시키면서 자연스럽게 효심을 자아내고있다. 심정호의 《어머니 검정고무신》과 《박우물》은 검정고무신과 박우물을 객관상관물로 하여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어머니와 고향을 노래하고있다. 우리의 노스텔지아(①향수 ②회향병 ③그리움)를 자극하면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있다. 《박우물》을 보자. 박우물은 무엇이던가? 그것은 《뼈속까지 파고드는 고향의 정》, 《개구쟁이들 호탕한 웃음소리》, 《어머님의 고운 얼굴》, 《마름 없는 어머님 젖줄기》이다. 박우물의 시적 이미지가 정답다. 김기덕의 식물이미지 시리즈 시―《체리》, 《찹쌀》, 《참외》, 《오디》, 《귤》을 객관상관물로 대상화한 시들은 퍼그나 인상적이다. 이가운데 《찹쌀》은 찹쌀로 우리의 삶을 이미지화한것이 일품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리별이 서러워서 끈적거리며 천지―하늘땅 사랑에 감격해하고 우리 아버지와 동심이 묻어나는 존재임에 다를바 없다. ........................///우상렬
1655    음유시인 전통의 뛰여난 후계자 ㅡ 노벨문학상 주인 되다... 댓글:  조회:4740  추천:0  2016-10-14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에 하루키는 '속으로 울었다' 노벨문학상이 미국의 뮤지션 밥 딜런에게 돌아가자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됐던 작가들의 트윗은 각양각색의 반응으로 눈길을 끌었다. 고배 마신 후보들의 이색 '낙선사례' 하루키는 '초연', 루시디·캐럴 오츠는 '옹호' 어빈 웰시 "음악과 문학 다르다" 맹비난 스웨덴 한림원, '귀를 위한 시' 의미 부여 스웨덴 한림원의 결정에 대해 작가들은 저마다 문학적 소양을 한껏 발휘한 트윗으로 옹호하거나 비난했다. 우선 집필에 몰두하는 동안을 제외하면 끊임없이 트위터로 독자들과 소통하는 '헤비 트위터러', 무라카미 하루키의 반응은 '초연'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됐던 3명의 작가들. 왼쪽부터 무라카미 하루키, 어빈 웰시, 살만 루시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확정된 뒤 하루키가 트윗에 올린 '낙선사례'는 덤덤했다. 그는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고 운을 뗐다. "하나는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이라고 풀었다.     상은 형식일 뿐…똑같은 실패 되풀이하고 싶진 않다" (하루키) 그는 "그 두 가지 확실한 실감만 있다면 작가에게 상이라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이라고 했다. 문학상이란 게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추인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자신이 노벨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노벨상에 대한 욕심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한때 하루키는 노벨상에 대한 은근한 욕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9월 23일의 트윗에서 자신의 성격에 대해 "나는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 영원히 이기기만 할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그와 별개로 똑같은 실패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트윗에선 자기가 노벨상을 받지 못할 것을 예감하는 듯한 암시를 주기도 했다. 수상자 발표가 있기 전인 지난 9일 "돈과 명예와 경의를 동시에 손에 넣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그 가운데에서 두 가지를 손에 넣었다면 이미 만만세가 아닐까?"라는 글을 썼다. 사진 크게보기 올해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뮤지션 밥 딜런. 수많은 베스트셀러로 돈과 명예를 얻었으니 경의의 상징인 노벨상을 못 받더라도 이미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보다 이틀 전에는 그는 "사람은 누구든 영원히 이기기만 할 수 없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서 추월 차선만을 계속해서 달려갈 수는 없다"고 썼다. 하루키의 트윗은 대부분 일상적인 끄적거림이지만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이 하루키만의 감성을 맛볼 수 있는 소고(小考)들이다. 그의 트위터 계정 팔로워는 34만 명을 넘는다. 하루키는 글쓰기를 숙명으로 여기고 앞으로도 계속 매진하겠다는 뜻도 비쳤다. 그는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잃고, 세상에서 끊임없이 미움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나는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가 묘비에 새기고 싶다며 올린 글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숙명이 완성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그가 원하는 묘비명은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이다.     음악과 시는 매우 가까이 연결돼 있다" (살만 루시디) 인도 출신의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밥 딜런을 "음유시인 전통의 뛰어난 후계자"라고 극찬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오르페우스(그리스 신화의 음유시인)부터 파이즈(파키스탄 가수)까지 음악과 시는 매우 가까이 연결돼 있다"며 이렇게 밝혔다. 밥 딜런 음악의 시적 표현(가사)을 문학의 전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1960년대를 풍미한 밥 딜런의 대표 앨범들. 위줄 왼쪽부터 The Freewheelin` (1963), Times They`re A-Changin`(1964) Bringin` All Back Home(1965). 아랫줄 왼쪽부터 Highway 61 Revisited(1965), Blonde on Blonde(1966) , Nashville Skyline (1969).   딜런의 음악은 '문학적'" (조이스 캐럴 오츠) 미국의 여성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생각도 루시디와 다르지 않다. 캐럴 오츠는 수상자 발표 직후 올린 트윗을 통해 "딜런의 음악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문학적'이었다"고 밥 딜런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번 수상 결과를 맹비난한 이도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소설가 어빈 웰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AP통신에 따르면 어빈 웰시는 밥 딜런의 수상 소식에 화를 버럭 내며 비난했다고 한다. 그의 트윗 글은 매우 '문학적'이고 심오하다.     썩은 내 나는 '노스탤지어 상'…사전 펴서 '음악'과 '문학' 비교해 보라" (어빈 웰시) 웰시는 "나는 딜런 팬이지만, 이것은 노쇠하고 영문 모를 말을 지껄이는 히피의 썩은 내 나는 전립선에서 짜낸 노스탤지어 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음악 팬이라면 사전을 펴놓고 '음악'과 '문학'을 차례로 찾아서 비교하고 대조해 보라"고도 했다. 웰시의 서운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구분 지으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어 보인다. 중앙일보
1654    詩란 막다른 골목에서의 정신과의 싸움이다... 댓글:  조회:3687  추천:0  2016-10-14
  막다른 골목에서의 정신과의 싸움/송정란 아마추어 때의 일이었다. 시에 대한 열정은 나날이 깊어가는데, 씌어지는 시는 그 열의에 미치지 못하여 늘 답답하고 아타까움만 일곤 했다. 기성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 보면 나의 시는 무엇인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부분이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낼 수가 없었다. 시의 어디서부터 잘못 풀려나간 것인지, 어느 부분을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막막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하루종일 시를 고치는 작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쓴 시를 모두 꺼내 놓고 밤을 새워가며 들여다보았다. 그 다음날까지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충혈된 눈으로 시를 고치고 또 고치기를 거듭했다. 퇴고에 집착하자 나의 밖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면의 언어들만이 현실 세계인양 착각을 일으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고친 것들이 과연 정확한 수정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매달려 있는 이 모든 작업들이 물거품처럼 소용없는 짓거리란 말인가. 나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어 한동안 자포자기와 같은 심정으로 시를 멀리 했다. 그 뒤 문학사숙에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기에, 다행히도 나는 시의 광신도와 같은 잘못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객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습작기 때에는 누구나 다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자신을 이끌어주는 스승이 없으면 어두운 숲속에서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온 사방을 헤매고 다녀야 한다. 다행히 길을 찾아 나오는 수도 있겠지만, 영영 그 숲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저급한 시의 세계에 머물고 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다시 다듬는 퇴고의 고단함은 아마추어 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스스로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서도 그 성가심은 내내 따라다닌다. 이때의 문제는 또다른 방향에서 제기된다. 어느 부분에 결함이 있는지 눈에 환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교정해야 할 지 막막한 것이다. 아마추어 때의 문제가 시어의 선택이나 통일된 이미지의 구축, 시의 구조 등 주로 표피적인 것이라면, 이제는 주제의 뜻을 더욱 깊게 하고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내용적인 문제에 천착하게 됨으로써, 정신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미흡하다고 느끼는 부분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행보가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지는 막다른 골목이 기다리고 있다. 상상력이나 지적인 바탕이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한쪽으로 밀어놓는 수밖에 없다. 이런 작품 중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시 씌어지는 작품도 있기도 하다. 또 어떤 작품은 욕심이 나 계속 매달려 첨삭을 가하기도 하는데,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읽어보면 원작보다 오히려 못한 경우도 많다.  요 근래에 나는 한 편의 작품을 쉽게 얻었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시가 쑥 빠져나오는 경우는 횡재를 한 것같은 기분이다. 짧은 시이지만 첫연부터 마지막 연까지 단번에 씌어졌고, 약간의 개작을 거쳐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시를 완성할 수 있었다. 퇴고의 과정이 비교적 분명하므로 여기 소개하기로 한다. 철담산 아랫자락 계곡을 타고① 달빛이 흘러내렸습니다 만월의 둥근 沼가 되었습니다 연못 밑에서 유유히 달을 받아먹고 살이 오른 잉어 한 마리 비린 사랑의 지느러미를 놀리며 물의 길을 따라 흘러②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시는 맨처음 ‘연못 밑에서 유유히 달을 받아먹고 살이 오른 잉어 한 마리’로부터 시작되었다. 망망대해와 같은 가슴 밑바닥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문장들, 나는 시란 시인의 마음속에 운명적으로 담겨 있다고 믿는다. 마치 무당들이 계시를 받아 주절주절 풀어내듯, 영감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구절들은, 언젠가는 그 실꾸리가 술술 풀려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슨 뜻인지 모를 ‘잉어 한 마리’를 늘 가슴에 담고 다니던 어느 날 ‘비린 사랑의 지느러미를 놀리며’라는 다음 구절이 떠올랐다. 그때서야 그것이 생명의 탄생을 이르는 것임을 알았다. 우리의 옛설화에 우물물에 비친 달을 두레박으로 떠마시고 아이를 잉태한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달은 또한 오행으로도 陰이 되며 여성을 상징하며, 둥근 보름달은 만삭의 의미를 띠고 있기도 하다.  상징의 의문이 풀리자 ‘철담산’으로 시작되는 첫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한번에 씌어졌다. 철담산은 나의 고향에 있는 산으로, 사실 그곳에는 계곡이 없다. 그러나 생명과 물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계곡이라는 시어를 선택했다. 뒤따라 노자의 ‘곡신(谷神)’이 떠올랐다. 제목으로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오히려 현학을 피해, 자연스럽게 생명을 잉태하는 장소인 「자궁」으로 결정했다. 그러고보니 ‘철담산 아랫자락’이라는 첫행의 이미지가 여인의 몸을 떠올리게 했으며, 계곡은 마치 ‘女根谷’을 연상시켰다. 그러한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하기 위하여 계곡의 ‘허벅다리’라고 덧붙이고 보니, 풍만하고 농염한 여인의 모습과 ‘비린 사랑의 지느러미를 유유히 놀리는 살진 잉어 한 마리’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하나의 낱말만 덧붙여도 이미지가 완연히 바뀌는, 시의 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데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이 모든 것을 든든하게 떠받쳐 주어야 할 결말 부분에 힘이 없었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경이롭고도 역동적인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의 길’은 생명의 줄인 탯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잉어가 물을 차고 바깥으로 튀어오르는 모습에 직접적으로 비유하여 역동적인 생명력을 나타내 보기로 했다. 첫번째 개작된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계곡의 허벅다리를 타고 ② 은빛 물의 탯줄을 휘감은 채  달빛을 따라  튀어오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치고도 ②번은 계속 미진한 상태로 마음에 걸렸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동(動)한 가운데 정(靜)한 것이 아니라, 정(靜)한 가운데 동(動)이 일어난다 하지 않았던가. ‘연못 속에서 유유히’부터 문장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도 리듬감을 해쳤다. 또한 생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달빛 역시 마지막까지 연결고리를 가지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물결과 하나가 되어가는 잉어, 달빛과 하나가 되어버린 물결, 그속에서 생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두번째 개작을 거치자 어느 정도 마음이 흡족했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연을 가르는 것으로, 마지막 마무리 작업을 했다. 자궁  철담산 아랫자락 계곡의 허벅다리를 타고  달빛이 흘러내렸습니다  만월의 둥근 沼가 되었습니다 연못 속에서 유유히 달을 받아먹고 살이 오른 잉어 한 마리 비린 사랑의 지느러미를 놀리며  은빛 물의 결로 흐르고 있습니다 달빛 잔잔한 물의 탯줄을 휘감아 하류로 하류로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송정란) ==========================================================       별을 보며 ―이성선(1941∼2001)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빛나네.”  아이를 앉히고 동요를 불러주면 예쁜 입이 오물오물 따라 부른다. 그렇지만 너무 미안하다.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줄 수는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아서다. 어느 하늘에 별이 있느냐고, 아이는 금방 자라 물어볼 것이다. 도대체 별이 반짝이긴 하느냐고, 응당 아이는 물어볼 자격이 있다. 어른은 대답이 궁색하여 난감하다. 난감할 때는 속으로만, 아이에게 술과 가난을 설명하기란 더 난감하니까 속으로만, 이성선의 이 시를 읊어 보리라. 이성선 시인은 ‘맑음’에 특화된 시인이다. 맑음 중에 으뜸은 ‘별’이니까, 이 시인은 별에 특화된 시인이기도 하다. 높고 맑은 것을 즐겨 노래했던 이 시인을, 세상에서는 ‘설악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설악산 아래에 살았는데, 마치 높은 산이 도시의 욕망 같은 것을 차단해 주는 듯이 시를 쓰고 살았다.     하지만 세상에 돈이 좋고 명예가 좋은 줄 모르고 살았을까. 세속적 욕망이 드세질 때, 시인은 휘청거리며 밤거리를 걷는다고 썼다. 가진 것 없어 세상에서 홀대받을 때, 시인의 마지막 보루는 오직 ‘별빛’뿐이었다. 저 별빛에게 부끄럽지 않는 한, 시인은 아직 진 것이 아니다. 별만큼 깨끗하지는 못해도 지상에서 가장 덜 더러운 사람이 되겠다, 시인은 마음을 표백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윤동주의 시를 제외한다면, 이 작품은 별에 관한 시 중에서 첫손에 꼽힐 만큼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렇게 고결하게만 고결을 노래한 시를 읽으면 초라함은 위로받고 욕망은 추악한 몰골을 드러낸다. 어느 쪽이든, 얼마 남지 않은 여름밤을 지내기에 이 시는 더없이 적절할 것이다.         
1653    詩란 꽃씨앗을 도둑질하는것이다... 댓글:  조회:3668  추천:0  2016-10-14
[ 2016년 10월 14일 08시 13분 ]     서장시 라싸시 교외에 자리잡고있는 드레방사에서ㅡ.   그리려는 시쓰기  강사/윤석산  지난 시간에는 에 대해 알아봤으니, 이번 시간에는 에 대해 함께 알아보기로 할까요? 미국의 신비평가 랜섬(J. C. Ransom)의 분류에 의하면, 말하려는 시는 관념시(platonic poetry), 그리려는 시는 에 해당합니다.  그리려는 시 쓰기에 앞장 선 사람들로는 흄(T. E. Hulme), 파운드(E. Pound), 로우엘(A, Lowel), 두우리틀(H. Doolittle), 알딩턴(R. Aldington) 등이 주축이 된 이미지스트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등 교육이 보편화되고, 독자들의 의식 수준이 시인들과 비슷해짐에 따라 더 이상 시인의 하소연이나 설교를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문학사를 살펴보면 그리려는 시는 이들이 처음 쓴 게 아닙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일찍부터 이런 시를 써왔습니다. 중국의 한문은 상형성(象形性)이 강하고 우리말과 일본어는 감각어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을 주도해온 파운드가 중국의 당시(唐詩)와 일본의 와까(和歌) 하이꾸(俳句) 등을 번역하여 이미지즘 운동의 전범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것은 향가나 우리의 한시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름을)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 싶어라  아으, 잣가지 높아  서리를 모를 화반(화랑장)이여  -충담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전문  ⓑ비 그친 강나루 긴 언덕에 풀빛만 날로 푸르러가는데(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님 보내는 슬픈 노래만 허공 가득 떠도네(送君南浦動悲歌)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보태 푸른 물결 넘실대는데(別淚年年添綠派)  대동강 물 언제 말라 임 만나거 갈꼬(大洞江水何時盡)  -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  이미지를 강화시킨 작품만 골랐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말과 인구어를 비교해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 다는 낱말은 "red"과 "reddish" 두 개밖에 없지만, 우리말에는 "붉다"·"불그스름하다"·"볼그스름하다"·"발그스름하다"·"불긋불긋하다"·"빨긋빨긋하다"·"뿔긋뿔긋하다"·"빨갛다"·"시뻘겋다"·"새빨갛다"·"검붉다"·"불그죽죽하다" 등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는 무엇을 그리려 하느냐에 따라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인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려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의 내부에서 일렁이는 정서, 무의식, 상상의 결과 등을 그리려는 유형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그리려 하느냐에 따라 시를 쓰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그러면 먼저 시인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는 방법부터 살펴보기로 할까요?  외부의 대상을 그리려면 먼저 언어의 속성을 파악해야 한다.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려 할 때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시인은 자기가 거론하는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며 쓰고 있지만, 독자들은 시인이 말한 것의 의미만 받아들이고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하기가 일쑤라는 점입니다. 언어는 사물에 부여한 자의적 명칭으로서, 아래처럼 , 은 직접적인 관계이지만, 은 간접적인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Language)독서의 출발 → (Object)  그러므로, 시인이 말한 대로 독자가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와 의 관계를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언어에 따라 사물의 모습을 환기(喚起))시키는 정도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가령 어떤 시인이 시를 쓸 때, "꽃이 피었다"라고 썼다고 합시다. 그 시인은 그 꽃이 "개나리"인지 "장미"인지 알고 씁니다.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피었는지도 알고 씁니다. 그러나, 그 꽃을 목격하지 않은 독자들은 무슨 꽃인지, 어디에 어떻게 피었는디 모릅니다. 그러므로, 먼저 "장미"라든지 "개나리"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의미의 레벨(meaning level)"을 높혀 써야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종(種)을 이야기하는 정도에서 그 꽃의 모습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같은 장미라고 해도 조세핀도 있고, 에스메랄드도 있고, 빨간 장미도 있고, 노란 장미도 있고, 빨간 색도 새빨간 색도 있고, 불그스름한 색도 있고, 볼그스름한 색도 있고…. 그리고, 언제 어디에 어떻게 피었느냐에 따라서 달리보입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문장을 이루는 각 성분의 의미 등급을 높혀서 표현해야 합니다. 한번 제가 단계별로 높이며 표현해 볼까요?  ①꽃이 피었다. ②장미가 피었다. ③에스메랄다가 피었다. ④붉은 에스메랄다가 피었다. ⑤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피었다. ⑥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열었다. ⑦뜨락 한구석,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열었다. ⑧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뜨락 한구석 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열었다. ⑨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뜨락 한구석 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연 채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⑩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뜨락 한구석 발그스름한 에스메랄다가 반쯤 봉오리를 연 채 하늘하늘 흔들리면서 아찔한 향기를 흩뿌리고 있다.  어떼요? , 그리고, 서술부를 처럼 구체화하니까 직접 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능력은 글을 쓰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에 속합니다. 그리고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빨리 말하지 말고, 차츰차츰 의미를 좁혀가며 말하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리고 문장의 각 성분을 구체화하여 전체 길이가 길어지면 적당한 길이로 잘라 다른 문장으로 만들면 됩니다.  이와 같이 이미지화를 할 때는 두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대상을 정적(靜的)으로 그리기보다 동적(動的)으로 그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것만 그리지 말고,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같은 것들까지 포함하여 공감각적(共感覺的)으로 그리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것은 앞의 예 가운데 정지태(靜止態)로 그린 ⑧ 이전의 것들과 동태(動態)로 그린 ⑨, 그리고 시각에 후각을 첨가시킨 ⑩을 비교해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 활동은 단일한 자극보다 총체적인 자극을 받았을 때 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꽃씨와 도둑 ―피천득(1910∼2007)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피천득은 수필가로 유명하다. 그의 수필집 제목은 ‘인연’인데, 이 책은 수필계의 고전이자 스테디셀러로 알려져 있다. 왜 그렇게 많이들 읽었을까. 피천득의 수필집에는 가난하지만 유복할 수 있는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이란 것이 대단히 거창하지도 않다. 요약하자면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대하는 자세가, 피천득이 강조하는 삶의 비밀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 참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도 피천득의 수필집은 계속 읽힐 것이다.     수필가일 뿐이랴. 수필집을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데, 피천득은 선구적으로 딸 바보 아빠였으며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여기 ‘꽃씨와 도둑’은 시인 피천득의 재능을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오늘의 소득은 수필가 피천득이 시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이 아니다. 수필에서 만난 비밀을 시에서도, 이렇게 다른 듯 같게 읽게 된다는 부분에 방점을 찍자.     자, 시에는 우선 ‘마당’이 있는 집이 있다. 마당에는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다. ‘마당’과 ‘꽃’은 고즈넉한 분위기, 마루에 앉아 보내는 한가로운 시간을 암시해준다. 이제 눈을 돌려 방 안을 보자. 방 안에는 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책들만’ 있다. 책이 있는 방과 ‘책들만’ 있는 방은 몹시 다르다. ‘책들만’ 있다는 말은, 이 집의 주인이 책만 읽으며 살아왔다는 점을 암시한다. 집의 주인은 시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집과 주인은 책과 동행하는 행복한 고독을 알고 있다. 그는 다시 꽃을 바라본다. 곧 씨앗을 받을 계절이 올 것이다. 그때 다시 와서 꽃씨를 받겠다고 다짐한다. 아주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 시는 마당과 책이 있는 삶을 배경에 깔고 있다. 더없이 여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여기 돈 냄새 따위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이런 책과 꽃의 세계는 우리와 매우 멀다. 먼 것을 시가 왜 모를까. 아주 멀기에 ‘가깝고 싶다’고 시가 말한다. 더불어, 시를 읽으며 우리의 마음도 ‘가깝고 싶다’고 말한다.      
1652    난해한 말장난의 詩가 "최고의 현대시"인가?!... 댓글:  조회:3633  추천:0  2016-10-14
[ 2016년 10월 14일 07시 49분 ]     모태진에서-. 난해한 말장난이 현대시란 이름의 최고 시가 되다 -두 ‘미당문학상’ 수상작 두 편의 시를 분석적으로 읽고 난 후 나의 생각 정리하기                                         이시환(시인/문학평론가)     과연, 시(詩)란 무엇일까? 시란 ‘당대인들이 시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궁여지책으로 말하곤 한다. 시의 개념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시의 날개에 해당하는 형식으로부터 알몸에 해당하는 본질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바뀔 수 있음을, 아니 바뀌어 감을 실감한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 정하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맑고 깨끗한 언어를 부리게 되어 있고,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은 복잡한 시를 쓴다는 점이다. 그렇듯, 인간 사회의 불합리나 모순 등 현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으로 즐겨 쓰게 되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경이(驚異)나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으로 즐겨 쓰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그 시인의 바람[願]과 꿈[希望]은 물론이고, 심성(心性)과 관심(關心)과 지력(知力)과 성격(性格)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란 것도 근원적으로는 사람이 서로 공감(共感)・공유(共有)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기에 그 결과인 작품이 가지는 대사회적・대인간적 영향력의 크기에 따라서 작품의 우열(優劣)이나 가치(價値)가 매겨지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무리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지라도 상대적으로 똑똑한 소수의 독자인 평론가들로부터 외면 받으면 호평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다수의 독자들에게서 나오는 인기를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작품과 독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논리(論理)’ 내지는 ‘궤변(詭辯)’으로써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적극 유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광고(廣告)나 기사(記寫)나 문학상(文學賞)이나 먼저 이름을 얻은 유명시인의 찬미(讚美) 문장(文章) 등이 그 평론가의 기능을 일정 부분 대신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넓은 의미의 독자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 노력이 ‘꼼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가 시인의 경험적 자극에 대한 느낌・감정・생각・의식 등을 솔직하게 혹은 가공해서 짧게 표현하기 때문에 그 수단인 언어가 다분히 정서적이고 음악적이고 함축적인 속성을 띠게 되는데, 특히 문체(文體)에 반영되는 수사(修辭)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하지만 시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이 부분적으로 깨어지고[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과 환경이 바뀌어가면서 시에 기대하는 효과나 시가 놓이는 자리 곧 그 위상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요즈음 주체가 다른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두 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상기한 나의 개인적인 시관(詩觀)을 재확인하게 되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솔직히 말해, 나는 시를 시로서 고집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변화가 창조인 양’혹은 시에 대한 이해도 차이로 기존의 틀을 자꾸만 깨기 일쑤이다. 이러한 내가 심사했다면 문학상은커녕 아예 예심에서조차 제외시켰겠지만 역시 심사위원들에겐 변화가 창조적인 발전으로 이해되었는지 거창한 이름의 문학상을 준 것이다.   차제에, 나는 그 두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면밀히 읽으면서 감상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시 읽기를 좋아하는 여러분들도 그 두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나름대로 감상해 보기 바란다. 두 작품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미당문학상’이란 같은 이름의, 수여자(授與者)가 다른 상(賞)을 각각 받은 것들인데, 하나는 김행숙의 「유리의 존재」라는 작품으로 중앙일보 2016년 9월 22일(목) 지면에 소개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라는 작품으로 「미당문학」통권 제2호에 소개된 것이다.   두 수상작을 낸 심사위원들의 명단이나 그들의 심사평이나 수상자의 말[수상소감 내지는 이들 작품과 관련 뒷얘기 등] 따위는 생각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작품의 전문(全文)만을 꼼꼼히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끼어 보기 바라며, 나 역시 그러할 것임을 약속한다.   생각해 보건대, 이런 돌출 제안은, 우리 ‘현대시의 경향’ 내지는 ‘두드러진 특징’을 가늠해 보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만약 여러분이 나의 분석적인 판단에 동의한다면[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는다면]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 주는 시문학 관련 지성인들(?)의 시관(詩觀) 곧 변화 당위에 대한 논리(論理) 내지는 궤변(詭辯)에 대한 분별(分別)이자 재확인(再確認)이 될 줄로 믿는다. 따라서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메이지 말고, 여러분 개인의 독자적인 눈으로써 읽고 마음으로써 먼저 느껴 보기 바란다. 그런 연후에 이들 작품 관련 심사평이나 시인의 말이나 다른 사람들의 촌평 등을 확인해 보시라.   ***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김행숙의 시 작품「유리의 존재」전문으로 중앙일보 2016년 9월 22일(목) 24면에서 가져옴.     위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고 착잡하기까지 하다. 한두 번 읽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문장 해독력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다. 나의 그 착잡한 심정의 직인[直因:직접적인 이유]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여러분 앞에서 작품을 또박또박 다시 읽으며 분석해 보이고자 한다. 여러분들도 시인이 혹은 시적 화자[話者:작품 속에서 말하는 이]가 이 작품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함이 어디에 있는지 그 끈을 놓지 말고, 작품의 주제가 되는 그것[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떠한 장치들이 구축[構築=設備]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의 기능이나 효과에 대해서 따져보듯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관계 곧 양자 사이의 어울림이 기여하는 작품의 완성도를 판단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전문은 외형상 5개의 연(聯)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문장 자체는 산문(散文)이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전체 5개 연 가운데 제1연이다. 화자(話者)의 첫 말로서 최초의 판단이며, 다음 말을 하기 위한 전제(前提)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 첫 말에 동원된 두 개의 문장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표현이 모호해서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판독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짚고 넘어가야할 것들은, 첫 문장의 ‘통과할 수 없는 것’과 두 번째 문장의 ‘보이지 않는 벽’이 무엇이냐이다. 그리고 ‘꿈을 깬다’라는 말이 어떤 뜻으로 쓰였으며, 신경 쓰이는 ‘유리의 계략’이라는 생소한 말의 함의[含意:속뜻]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일 등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조차 쉽지가 않다.   여러 번 읽고 난 후 용기를 내어 유추(類推)해 보건대, ‘통과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유리’인 것 같고, ‘보이지 않는 벽’은 의심이 가나 최종 판단은 역시 ‘유리’ 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리의 투명성’이다. 유리가 통과할 수 없는 벽(壁)임에는 손으로 만져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틀림없지만, 그 유리가 투명하기 때문에 벽으로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이지 않는 벽’이란 표현을 한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그리고 ‘꿈을 깬다’는 의미는, ‘현실 또는 대상을 바르게 본[直視] 결과 바람[願]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알아차림[覺=認知]’일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은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곧, 그 꿈이 나[我]의 꿈인지, 유리(琉璃)의 꿈인지 분명하지 않으며, 또한 그 꿈의 내용이 ‘나[我]의 날고자[飛] 하는 바람[願]’인지 ‘유리의 계략’인지 단정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후자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만약, 나의 이 판단이 옳다면, 그 계략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과연, 화자는 무엇을 두고 ‘유리의 계략’이라는 문제의 말을 했을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라는 제2연의 내용과 연계시켜서 볼 때에 비로소 그 질문에 대한 유추가 가능해진다. 곧, 유리는 나로 하여금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벽으로서 분명하지만 자신의 겉모습[外形]을 숨기기 때문에, 다시 말해, 투명하기 때문에 내가 통과하려다 부딪쳐서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더러 유리나 내가 깨어지고, 그 깨어진 유리파편에 내가 베이어 피가 나는[生] 일을 기도(企圖)하고 의도(意圖)함을 ‘유리의 계략’이자 ‘유리의 꿈’이라고 말이다. 만약, 나의 이런 유추가 사실이라면 표현이 얼마나 부자연스런, 아니, 불완전한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2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2연이다. 이 두 문장에서도 ‘넘어지면’과 ‘안으면’의 주어가 생략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그 생략된 주어가 ‘유리창’이 아니라 화자인 ‘나(내)’라고 생각한다. 곧, 내가 넘어지면 유리가 깨졌던 것이고, 내가 넘어지면서 깨어진 유리를 안으면 내게서 피가 났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유리의 꿈과 유리의 계략을 말한 제1연과 자연스럽게 연계(連繫)되기 때문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5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3연이다. 여기에서도 먼저 해명(解明)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란 무엇이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라는 가벼운 의문이 갖는 함의(含意)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란 유리(창)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유리창 너머 저쪽 ‘바깥세상’이자 동시에 그 유리(창)에 되비추어진 이쪽‘안세상의 형상’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만질 수는 없으나 나의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일이 곧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산 사람이 유리(창) 밖의 만질 수 없는, 그래서 ‘죽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나,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인식했던 것 같고, 바로 그 내용을 ‘커다란’ 혹은 ‘놀란 만한’깨달음인 양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유리는 무표정이며, 유리에 남은 손자국조차도 유리의 것이 아니라’는 화자의 부연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유리는 죽은 사람의 눈[目]과 동일시되고 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5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4연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라는 표현이다. 바로 ‘그런’ 유리라는 존재에 대해 깨달았기에 화자인 나는 이 순간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 정도로 기쁘다[?]는 정서적 반응을 표출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문제의 표현인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에서, ‘껴입고 있는’의 주체와 객체가 무엇인지 모호하여 그 정확한 의미를 판단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항상 껴입고 있다는 주체가 ‘죽음’이자 ‘유리’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은데 ‘껴입었다’라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죽음’과 ‘유리’라는 두 주체가 무엇을 껴입었다는 말인지, 나로서는 해독(解讀) 불가(不可)이다. 유추해보거나 판단할 어떠한 단서(端緖)나 근거(根據)조차 내게는 전혀 인지(認知)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 모르겠다. 책임질 수 없는 직감으로써 유추해 보건대, 생명[사람]이 죽음을 내장하고 있듯이 유리가 벽(壁)으로서의 기능과 벽이 아닌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껴입고 있는’이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정말 그렇다면, 이 작품은 모호성 하나로 평자의 극찬을 이끌어낸, 어처구니없는 경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제5연이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떼는 주체인 ‘나’는 유리를 통과해서 안팎으로 드나들 수 없지만, 햇빛은 ‘믿을 수 없이’놀랍게도 그것을 통과하여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고, 창밖에 서 있었던 ‘네[유리창에 반사된 안쪽의 나]’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는 유리창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 서 있다는 경험적 인식을 드러내 놓고 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지금까지의 유추 내지는 일방적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는 단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유리’라는 벽(壁)과 ‘유리’라는 비벽(非壁)의 이중성을 ‘햇빛’과 ‘사람’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생략과 부적절한 어휘 선택으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문장들 때문에 모호성이 커져 그 내용을 판단하기에 매우 어려운 작품 가운데 한 전형적 표본이다. 이것은 의도되었다기보다는 시인의 문장력이 그러할 뿐이다. 그리고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이 작품에서는 유리(琉璃)가 꿈과 계략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 되겠지만]을 가지고 별 것인 양 모호하게 치장되어 있는, 마치 ‘쓰기 위해서 쓴’ 작품 같은 전형일 뿐이다. 시를 분석적으로 읽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 예컨대, 문학평론가, 시 이론가, 시를 쓰기 위해서 쓰는 사람들 - 은 이런 유형의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여기에도 이유가 있는 법이지만, 나는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이 아주 훌륭한 시라고 한다면, 이미 시의 개념이 수정 재정리되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온갖 궤변들을 늘어놓으며, 시의 외연(外延)을 확대시켜 가고 있지만 읽어서 그 의미가 쉬이 전달되지 않고, 정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한낱 책상 위에서 벌어지는 말장난일 뿐이다. 시라면 여전히 그 문장이 음악적이고, 정서적이며, 함축적인 성격을 띠어야 함을 나는 믿고 싶다. 게다가, 그런 의복을 걸치고 나오는 알몸은 시인의 개인적인 느낌・기분에 기초한 감정과, 지각(知覺)・의식(意識)・판단(判斷)에 기초한 생각이나 그 생각의 체계인 사상(思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정은 선택되는 어휘(語彙)나 문장(文章)의 어조(語調) 등으로 연계되어 문체(文體)로 나타나게 되고, 생각이나 사상은 작품의 구조(構造)로 연계되어 주제(主題)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복잡한 의식・사유세계[이를 ‘정신세계’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를 드러냈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시가 자꾸만 이상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그 변화・변형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할라치면, 시는 흥얼거리는 노래에서 심각한 사유의 편린 내지는 의식의 단면으로, 다시 말해, 입으로 이루어지는 낭송이나 낭독에서 눈으로 읽으며 사유하는 쪽으로 그 모양새가 바뀌어 가고 있고, 형식보다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되어지는 경향이 매우 짙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면, 시의 기능이나 위상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실상 바뀌기를 강요받는 상황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 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평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이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 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전문으로 『미당문학』통권 제2호에서 가져옴.     이 작품은 외형상 4개 연(聯)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역시 산문(散文)이다. 분명한 사실은, 아니, 앞의 작품과 공통점이 있다면, 한두 번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난해성(難解性)’이다. 그 어느 누가 이런 작품을 심사숙고하며 분석적으로 여러 번 읽어 주겠는가마는 다시 한 번 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려보자.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전체 4개 연 가운데 제1연이다. 화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어투(語套)다. 그 내용의 핵심인 즉 ‘용’과 ‘개천’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데 그 능력이 바로 개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천은 용을 배출했지만 그 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미련도 없이 그저 ‘뒤척이고’만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무관심하다는 뜻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느낌과 내용을 전제한다면, 날개 없이 날 수 있는 용의 능력은 의사 결정권이나 권력의 남용처럼 느껴지고, 그런 권한을 부여해 준 개천은 민중 혹은 국민일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여기서‘용’이란 경쟁에서 다른 무리들을 물리치고 이긴 ‘능력자’이고, ‘개천’은 그 무리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거나 그 ‘무리’일 것이라는 통상적인 비유어이다.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제2연이다. ‘화를 내는 사람’과 ‘불을 품는 용’을 대비(對比)시킨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연계(連繫)시켜서 용이 능력자이거나 권력자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용의 역린(逆鱗)을 떠올리며, 빈정거린다. 그 빈정거림은, 범상한 자들은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의 이유와 뜻을 모를 수밖에 없듯이, 용이 아니기에 용의 역린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몰라서 용이 불을 품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체념적인 시각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권력자와 그를 배출한 민중[=국민]이라는 양자 사이에, 다시 말해, 용과 용이 되지 못한 채 개천에 남아 있는 무리들과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 대 놓치고, 그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평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이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제3연이다. 돌연, 내용이 어수선해졌다. 화자인 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혼잣말로써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되, 그 중얼거림의 내용이 너무나 주관적인 소소한 것들이고, 그나마 비약(飛躍)이 심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서 어디선가 버스를 기다리는데, 그것도 버스 한 대를 놓쳤는데 그 다음 버스가 오지 않는 상황에 있다. 자신이 처한 그런 현실적 상황을 두고 세상이 자신을 홀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분명한 피해의식의 발로이자 표현상의 비약이다. 그리고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다가 후회하고, 울컥해지고, 선글라스가 그런 자신의 표정을 가려주었다고 히히거리는 정서적 반응을 보임은 주관적인 소소한, 가벼운 면들이다.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자신의 삶이 세상과 무관한 것처럼 거리를 두는 태도와, 편을 가르는 듯한 세상에 대한 이분법적인 해석 등을 전제로 ‘끼리끼리’의 연대감 내지는 동류의식(同類意識)을 조장・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과거 민중문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개떡은 원래 개떡끼리’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 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제4연이다. 첫 문장 ‘~고 그들은 믿었단다’에서 ‘그들’은 용에 해당하는 의사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들이다. 그런데 화자는 바로 그들의 ‘무능력(無能力)’ 내지는 ‘오판(誤判)’을 비유법으로써 우롱(愚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이 지배하다시피 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은 자신은 화를 낼 자격도 없다면서 자기비하(自己卑下)를 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그 개천에서 용이 되려는 꿈을 꾸는 것은 괜찮은 것이라’고 여긴다. 이 얼마나 황당한 현실 인식이며, 태도이며, 자기모순인가? 혹자는, 이런 자의식적인 중얼거림을 놓고 개인의 솔직한 내면세계 표출이라고 극찬할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저 감상할 가치도 의미도 없는 개떡 같은 사람의 개떡 같은 중얼거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위 두 편의 산문(散文)이 시(詩)라면, 시는 참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어려울까? 시의 난해성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문장(文章)의 결함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문장의 결함이란 문장으로서의 불완전성을 말함인데, 그 불완전성은 시어(詩語)와 문장부호 생략, 부적절한 시어 선택, 부자연스런 어순(語順) 도치(倒置),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는 일방적인 비유법 구사[수사(修辭)의 부적절성] 등 복합적인 인자가 작용한다. 시의 난해성은, 단순한 내용을 가지고 복잡하게 말하는[표현하는] 시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도 있다. 내용이 심오해서라기보다는 상식적인 수준의 단순한 의미를 가지고서도 애써, 에둘러 말하기 때문이다. 에둘러 말한다는 것은, 시가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수사적인 표현이 불가피하다는 고정관념이 작용하여, 직접적으로 말해야 좋을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너스레를 떨며,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지 아니한 채 머물러 있는 미숙한 상태의 내용을 끄집어내어 횡설수설하는 격을 두고 말함이다.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문장과 어색한 작위적(作爲的) 표현은 문장이나 문맥상의 의미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에 독자의 일방적인 판단을 부추기는 셈이고, 또 그럼으로써 표현자의 의도와 다른 임의의 해석들을 낳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심지어는, 시인의 의도(意圖)와 작품의 주제(主題)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솔직히 말해, 이런 경우는, 작품의 내용이 시인에게서 농익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생긴 느낌과 생각과 의도 등을 갖고서 시 문장을 짓는데 그 과정에서 그것들이 자주 수정되다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이 아닌, 그것과 유사하거나 전혀 다른 내용으로 마무리가 되어버리고 마는 상황에서 많이 나타난다. 물론, 예기치 않게 성공작을 거둘 수도 있지만 대개는 내용 전개 과정이 억지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시를 쓰기 위해서 애써 썼기 때문에 그것들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현대시가 어려워지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관심이 ‘우리’에서 ‘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때에는 시라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이나 정서적 반응에 최소한의 객관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면서부터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에서의 파격(破格)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고, 오로지 자신의 느낌・감정・생각・의식 등을 중심으로 기술(記述)하되 정서적이고 함축적이어야 한다는 시어의 기능을 의식하여 비유적인 표현에만 신경을 쓰는 상황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공감하기 어렵고 공유되어지기도 어려운, 극히 주관적인 정서와 개인적인 내용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2016년 올해 서로 다른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두 편의 시작품을 면밀히 읽어 보았지만 무능한 내게는 너무나 어려워 시인의 의도와 작품의 주제조차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문장 하나하나를 수십 번씩 분석적으로 읽으면서 해독하고 나서야 겨우 작품의 주제와 짜임새[構造]를 이해하였고, 시인의 의도 등을 나름대로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판단과 해석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누가 나처럼 시 한 편을 감상하기 위해서 며칠씩이나 골머리를 썩이겠는가?   앞의 작품은 ‘계략(計略)’을 가진 ‘유리(琉璃)’라는 존재를 새삼 알게 됐다는 놀라움이 시상(詩想)을 전개시키는 실질적인 동력이 되었고, 뒤의 작품은 개천을 인간세상으로, 용을 인간세상의 능력자로 각각 빗대어놓고, 그 용에 해당하는 능력자들을 조롱하면서도 그 용을 낳는 개천과, 능력자를 낳는 인간세상의 힘을 긍정하면서도 비하(卑下)하며 거리를 두는 이중적인, 모호한 입장과 태도가 시상을 전개시켜 가는 실질적인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모호한 표현들이 많아서 시인의 의도와 작품의 주제가 부각되지는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미숙한 내용과 표현이 낳는 오독(誤讀)이 개인의 솔직한 의식(意識)이나 깊은 정신세계를 드러낸 것인 양 오해되어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형국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누가 아는가? 유명한 시인이나 문학평론가 나타나 앞의 작품을 두고, 유리가 계략을 부려 사람으로 하여금 넘어지고 피가 나게 하듯이 그런 유리 같은, 사악한 인간 존재나 인간세상을 빗대어 놓은 수작(秀作)이라고 말한다면 적지 아니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듯이, 뒤의 작품을 두고서, 오판(誤判)을 하기도 하지만 용을 탄생시키는 개천의 건강함과 모성(母性)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긍정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또 적지 아니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이다. 나는 이런 귀가 얇은 사람들을 두고, “자신의 눈과 귀를 가지고도 남의 것을 빌려 살거나, 자신의 불완전한 눈과 귀밖에 모르는 이들이다(이시환의 아포리즘・114).”라고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다들 부분(部分)을 가지고서 전체(全體)인 것처럼 말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들인 셈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이며,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일 따름이다.   -2016. 10. 05.     ------------------------------------------------------------------------------------- 보낸사람 : 김현거사  -------------------------------------------------------------------------------------   요즘 시라는 것이 '난해한 말작난'이라는 그 말 참 시원합니다. 공감합니다.   요즘 시인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걸 쓰며 그냥 말장난만 합니다. 독자들은 영리해서 아무도 그런 시를 읽지 않습니다. 독자가 없는 시, 독자에게 처참하게 버림 받은 시가 현재 한국 시의 현주소이지요. 소설 수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전부 자기의 시집 수필집을 자비로 출판해야 합니다. 아무도 돈 주고 그걸 사가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 시집이 시집일까요? 그 결과 문인은 대중가요 작사자, 하다 못해 삼류 코메디안보다 대접받지 못합니다.   좋은 시는 천년 2천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두보나 이태백이 그렇지요. 반성해야 합니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    
1651    숟가락 시모음 댓글:  조회:3925  추천:0  2016-10-12
[ 2016년 10월 13일 08시 31분 ]     부겐빌레아 글라브라 꽃이 만개한 광주 동풍로 한구간, ㅡ ‘꽃의 도시’ 광주에서-.      + 숟가락 곤고했던 한 생애. 마침내 자신의 위대한 소임을 다하고는 반구형(半球型)의 봉긋한 무덤 하나 남기다. (상희구·시인, 1942-) + 숟가락  명태 한 마리  올라온 저녁 밥상은  숟가락으로 붐빕니다  (주근옥·시인, 충남 논산 출생)  + 밥숟가락에 우주가 얹혀있다  그렇다  해의 살점이다  바람의 뼈다  물의 핏덩이다  흙의 기름이다  우주가  꼴깍 넘어가자  밤하늘에 쌀별  반짝반짝 눈뜨고 있다  (김종구·시인, 1957-) + 작은 작품 한 편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 간밤에 애써 잠든  그러나  내 새벽잠을 깨운다  점점 열심히 따스하게 들려오는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옆집 어디선가……  아, 그 소리가 좋아라  (이선관·시인, 1942-2005) + 숟가락 소리  밥사발에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풍경 소리보다 더 맑고 청청하다 저 소리 나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고 기쁨과 슬픔도 다북쑥처럼 엉켜 있다 하루에도 세 번씩 이승 멀리 번져 가는 쾌청한 울림들 목탁 치는 소리가 어찌 절집에만 있으랴 삶은 어지러워도  밥을 먹는 순간만은 사문沙門의 몸짓으로 그저 순하게 하루의 업을 닦는다 아,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밥사발에 숟가락 부딪치는 그 소리 (이진엽·시인, 1956-) *사문沙門 : 불교에서, 출가하여 도를 닦는 사람을 이르는 말. + 은수저 굽은 허리 이제는 펴지 못해 이빨 빠진 내 생애는  돌이킬 수 없어 할머니는 닳은 은수저를 내려놓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네 인생은 구부리지 말고 제대로 살아가 보렴 (최동호·시인, 1948-) + 찻숟갈 손님이 오시면 차를 낸다 찻잔 옆에 따라 나오는 보얗고 쬐그만 귀연 찻숟갈. "손님이 오시면 찻숟갈처럼 얌전하게 내 옆에 앉아 있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 나는 대답도 찻숟갈처럼 얌전하게 했다 보얗고 쬐그만 귀연 찻숟갈. (박목월·시인, 1916-1978) + 그 놋숟가락  그 놋숟가락 잊을 수 없네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던  짚수세미로 기왓가루 문질러 닦아  얼굴도 얼비치던 놋숟가락  사촌누님 시집가기 전 마지막 생일날  갓 벙근 꽃봉오리 같던  단짝친구들 부르고  내가 좋아하던 금례 누님도 왔지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  누님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굽이굽이 오솔길 안내하던 나에게  날다람쥐 같다는 칭찬도 했지  이어서 저녁 먹는 시간  나는 상에 숟가락 젓가락을 놓으며  금례 누님 자리의 숟가락을  몰래 얼른 입속에 넣고는 놓았네  그녀의 이마처럼 웃음소리 환하던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던 금례 누님이  그 숟가락으로 스스럼없이 밥 먹는 것  나는 숨막히게 지켜보았네  지금은 기억의 곳간에 숨겨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놋숟가락  짚수세미로 그리움과 죄의식 문질러 닦아  눈썹의 새치도 비추어보는 놋숟가락.  (최두석·시인, 1955-)  + 숟가락과 삽 나는 한 생애를 숟가락질로 탕진하였다  내 속의 허공을 메우기 위해  아침, 점심, 저녁  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이때껏 작은 고랑 하나도 메우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여전히 배가 고프고  왼손 오른손 다 동원해도  나는 텅텅 울리는 커다란 독이다  채워지지 않는 슬픈 욕망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금속성의 연장은 자란다  조금씩 키가 커지고  쓰면 쓸수록 욕망의 몸집도 불어난다  기진하여 더 이상 생의 도구를 들 수 없을 때  숟가락은 슬슬 떠날 채비를 한다  작고 날렵했던 한 시절을 청산하고  평생 섬겼던 주인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한다  밥 대신 붉은 땅을 파내어 잠자리를 마련하고  주인과 더불어 고단한 생애를 마감한다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숟가락이  터무니없이 크고, 많이 야윈 까닭이다   (홍일표·시인, 1958-) + 숟가락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손에 쥐면서 편안히 길들여지고 정들어 버린 것. 십 년, 이십 년 같이 살아도 싫증나지 않고  고장나는 일도 없는 튼튼한 것. 내 입안으로 들어갈 때보다 이따금 남의 입안에 들이밀 때 한순간 더욱 반짝 빛나는 것.  그것과 헤어지는 날 나의 삶도 종착역에 이르는 것. (정연복·시인, 1957-)
1650    시인들이 이야기하는 詩모음 댓글:  조회:4144  추천:0  2016-10-12
    + 詩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生과 견주어보아도  詩는 삶의 蛇足에 불과하네  허나,  뱀의 발로 사람의 마음을 그리니  詩는 사족인 만큼 아름답네  (함민복·시인, 1962-) + 시의 근육 시의 근육은 먹이를 쫓는 사자의 근육보다는 죽음과 경주하는 사슴의 근육이다. 아니 그보다는 사슴에게 꼼짝없이 먹히지만 어느새 초원을 뒤덮어버리는 풀이 시의 근육이다 (채호기·시인, 1957-) + 벌새가 사는 법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천양희·시인, 1942-) + 불쌍하도다 詩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정현종·시인, 1939-)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정희성·시인, 1945-) + 시(詩)는 이슬이야 시란 하늘과 땅이 뿜어낸 이슬이지 시는 이슬을 먹고  이슬을 말하고 이슬을 숨쉬며 살지 저 수평선에서 이슬을 느낄 때 그건 시를 느끼는 거야 한라산도 시가 되고 외돌개도 시가 되는 것은 그곳에 이슬이 살기 때문이야 별도 이슬이고  달도 이슬이고 달팽이도 이슬이지. 달팽이는 가난해 보여 날 때부터 짊어지고 다니는 가난이 처량해 보여 나도 이슬이 되고 싶어 달팽이처럼 배낭을 메고 다니는 이슬 (이생진·시인, 1929-) + 위안 시를 쓴다는 건 하늘에다 무지개를 그리는 일이다 고단한 일상의 삶에 지쳐 하늘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아직 하늘을 볼 만한 무엇이 있다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너무 많은 욕심으로 무지개마저 차지하려는 이에게 그것이 오히려 허상이라고 지워 버리기도 한다 메마른 사람들의 가슴에 물방울을 뿌려 무지개를 만들어 하늘로 올리는 시 시인은 그런 시를 쓰고 있다 (서정윤·시인, 1957-) + 거룩한 허기  피네스테레*, 세상의 끝에 닿은 순례자들은  바닷가 외진 절벽에 서서  그들이 신고 온 신발을 불태운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청둥오리 떼 날아가는 미촌 못 방죽에서  매캐한 연기에 눈을 붉히며  내가 쓴 시를 불태운다  (전동균·시인, 1962-) * 스페인 서쪽 끝 바닷가 마을 + 시 읽는 시간 시는 녹색 대문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낸다 시는 맑은 영혼을 담은 풀벌레 소리를 낸다 누구의 생인들 한 편의 시 아닌 사람 있으랴 그가 걸어온 길 그가 든 수저소리 그가 열었던 창의 커튼 그가 만졌던 생각들이 실타래 실타래로 모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된다 누가 시를 읽으며 내일을 근심하랴 누가 시를 읽으며 적금통장을 생각하랴 첫 구절에서는 풀피리 소리 둘째 구절에서는 동요 한 구절 마지막 구절에서는 교향곡으로 넘실대는 싯발들 행마다 영혼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 나를 적시고 너를 적시는 초록 위를 뛰어다니는 이슬방울들 (이기철·시인, 1943-)  + 시의 경제학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안 어디 없나요   (정다혜·시인, 1955-) + 가두의 시 길거리 구둣방 손님 없는 틈에 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 사내의 뭉툭한 손을 훔쳐본다 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詩)가 있다 종로5가 봉제골목 헤매다 방 한 칸이 부업방이고 집이고 놀이터인 미싱사 가족의 저녁식사를 넘겨본다 다락에서 내려온 아이가 베어먹는 노란 단무지 조각에 짜디짠 눈물의 시가 있다 해질녘 영등포역 앞 무슨 판촉행사 줄인가 싶어 기웃거린 텐트 안 시루 속  콩나물처럼 선 채로 국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는 노숙인들 긴 행렬 속에 끝내 내가 서보지 못한 직립의 시가 있다 고등어 있어요 싼 고등어 있어요 저물녘 "떨이 떨이"를 외치는 재래시장 골목 간절한 외침 속에 내가 아직 질러보지 못한 절규의 시가 있다 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 (송경동·시인, 1967-) + 착한 詩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정일근·시인, 1958-)
1649    명태 시모음 댓글:  조회:6098  추천:0  2016-10-12
멸치, 명태에 대한 시 모음                  멸치똥 / 복효근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틸 적에 똥마저 버텼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딱히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어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뜯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멸치 / 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멸치 /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멸치 / 조은길     바다를 조립하고 남은 못 부스러기 고래들의 오랜 군것질거리   널 두고 사람들은 뼈골에 좋다며 첨벙첨벙 그물자루를 던지고 무심한 운명론자들은 운이 나쁜 것들 꽃밭의 잡초 같은 것 광야의 하루살이 같은 것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발가벗고 흘레붙는 어미아비를 보지 못했고 제가 찢고 나온 피 묻은 어미자궁을 기억하지 못하니 납득할 만한 과거도 미래도 없다 다만 살고 싶고 천장에 거꾸로 처박혀서라도 살아남고 싶은 엄연한 현재만 존재할 뿐 폭풍이 와장창 부숴놓고 간 바다기둥에 못 꾸러미를 쏟은 듯 촘촘히 밀려와 박히는 멸치들   바다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짱해진다         멸치 - 마트에서 / 허연 언젠가 하얀 눈보라처럼 바닷속을 휘저었을 멸치떼가  말라간다. 영혼은 빠져 나갔는데 하나같이 눈을 뜨고 있다. 죽기 싫었던 멸치가, 사랑의 정점에 있던 멸치가 눈도 못 감은 채 말라 간다.  말라서 누군가에게 국물이 되는 종말. 그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눈 뜬 놈들이 뒤엉켜 말라 가는 홀로 코스트의 현장에서 한 됫박의 미라와 한 됫박의 국물과 눈물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저렇게 단순하게 눈물이 되는 걸.  이제 와서 후회한다 나의 사유가 늘 복잡했던 것을  내 사랑이 모두 음란했던 것을  끔직한 결과들로 뒤덮인 마트를 걸어 나오며 깨달았다. 말라 가는 것이 내가 아는 생(生)의 전부라는 걸.       멸치는 가슴으로 똥을 싼다 / 윤선아    고향에서 올라온 햇멸치  개다리소반에 쏟으니  시월 바다 날 비린내  파란 물결로 퍼진다  혼자 살수록 뼈 부실해질까  검은 똥 빼며 먹어 본다  만만해서 똥이라 부르는  까맣게 말라붙은 내장  머리 향하여 꼬리 말린 모습  배곯다 잠든 새끼 고양이 같다  꼬리에 내장 있었다면  무거워 가라앉아 버렸겠지  근육만으로 물살 지피다 타 버렸다  쓴맛에 죽어서도 버려지는 또 하나의 생이다 흰 접시 위 수북이 똥처럼 쌓인 마른 바다  집 밖 화단 해당화 있던 자리에 묻는다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遊泳하기를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운 것이다     *** 신인의 시에서 이처럼 사려 깊은 시심을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다.  고향에서 올라온 햇멸치를 다듬으며 시인이 느끼는 고향 바다의 푸근함 그것은 날 비린내를 풍기며 파란 물살로 퍼진다. 누가 알았으랴. 멸치가 제 가슴께에 끌어안고 있는 새까만 똥이 실은 그가 한 생을 헤엄치며 살아온 바다가 검게 말라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멸치에게도 생은 가파르고 험한 세파 속을 헤쳐 가는 것이다. 시인이 멸치를 맛보는 일 그것은 고향 바다에 풍덩 빠지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멸치의 배 안에 까맣게 굳어버린 바다를 해당화 진 화단에 깊이 파묻어 준다.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遊泳 하기를” 거기,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워 또 한생을 해당화 꽃으로 피워 올릴 것이다!                                                              / 김완하 시인       멸치론 / 장성호  성난 파도 넘실대는 그 바닷가  성긴 그물코에 걸려든 작은 용떼  은빛 비늘 자랑하자  뜨거운 태양빛에 그을려 천년의 화석이 되었구나  우두머리 없이 몰려다니는 색다른 엔초비떼  애 못나 쫓겨난 여인이 떨리는 두 손으로  네 황홀한 몸 애무한다  바다의 신이여, 자식 하나 점지해 주소서  성질 급한 네 영혼으로 키 작은 그물코에 걸려들자마자  바닷가 하얀 눈으로 염장하여 저 멀리  뭍으로 건너가 불멸의 삶 살게 되리라  네 뼈와 살이 불덩이 같은 물속에서 은빛가루 날리며  산산이 녹아버리지만  푸른 바다 속 네 분신들은 긍정의 용트림 무한히  반복하리라       멸치 / 김주영     사소한 어류인 멸치도 엄연히 척추동물이다  산란으로 번식하지만, 알을 밴 멸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고래가 멸치를 사냥하는데 고래를 만난 멸치 떼는 질주를 멈추고 폭죽처럼 흩어졌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의연히 수중발레를 벌인다 그리고 물결을 이룬다.  목숨이 담보되고 말았는데도 비굴하거나 추악하지 않고 포식자를 향하여 매혹적인 군무를 보여주는 어류는 멸치뿐이다. 물결을 이룬 춤사위에 매료된 고래는 더욱 충동적으로 멸치를 사냥한다. 그러므로 멸치는 고래보다 더욱 크고 의젓하다. 고래는 너무 크고 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강직하고 담대한 어족이다. 그리고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체로 일생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을 감추는 은둔자의 삶이다  너구리는 대식가이면서 잡식성이기 때문에 구린내가 지독하고 해삼크기의 배설물을 내놓는다. 다래나 머루가 풍부한 산기슭이나 강가를 맴돌며 산다. 늪에서 들쥐나 도마뱀 같은 먹이를 포획하였거나 방금 강물에서 헤엄쳐 나온 물고기나 개구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물에 씻어 포식하는 습성 때문에 일생을 마감할 때까지 강가에 은신처를 둔다. 너구리는 의뭉스럽고 음흉하지만 경계심이 부족한 탓에 밀렵꾼의 올무나 덫에 쉽게 희생되기도 한다  종달새(한 여름밤)둥지 사냥  새의 몸통은 허공의 한 지점에 온전하게 머물러 있다. 가녀린 날갯짓 으로 자신의 몸통을 허공에 정지시킬 수 있는 신기의 비밀. 정지라는 접점은 이상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미세한 시간의 첨단과 만나고 있거나, 세상의 어떤 우두머리에 자리잡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       멸치 / 이지담     냉장고에서 꺼낸 멸치를 다듬는다   온몸을 쥐락펴락했을 머리부터 떼어낸다 팔딱이는 바다를 휘저은 지느러미는  물결들에게 두고 왔는지 없구나 상어의 큰 입을 피해 다니며 배든 날렵함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뱃속에는 별똥별을 삼켰던 탓인지  까만 씨앗들이 슬퍼하지 않을 만큼 맺혀 있다 요 작은 몸으로 보시를 결심한 느낌표들! 바다를 놓아주고 열반에 드는가   똥들이 모여 마침표 하나 찍는데 머릴 맞대고 궁리에 골똘해 있는 머리들을 비웃듯 몸뚱이는 몸뚱이끼리 나누어 머리 위쪽에 놓는다 한 몸이었던 내 몸이 부위별로 쑤셔온다   귀가를 서두른 노을과 함께 몸이 프라이팬에서 볶아진다       명태 / 김기택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도 악쓰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명태는 덕대에 걸리고 / 엄기종    허옇게 바랜 눈을 부릅뜬 채  차라리 바람 에는 추위를 반겨라  떼지어 바닷길 몰려 다니듯  꿈꾸는 춤이 한창이다  강릉에서 오는 샛바람아 불어라  칼바람 서북풍도 몰려오고  부대끼는 육신은 싸리광택의 옛날을 그린다  송천에 하루 내 미역 감고  층층이 달린 12자 고랑대 위엔  속 잃은 황태의 허기를 채울 달빛이 찬란하다  영하 20도엔 백태, 얼지 않고 마르면 먹태  바닷가에서 바로 마르면 바닥태  많이 잡힌 날 바다에서 목을 잃은 무두태  20센티 미만 앵태, 소태, 중태, 50센티 이상 왕태  고랑대 네 칸엔 2500마리  한 축 또는 한 급에 20마리  황태 찜, 황태 국밥, 황태 구이  소주잔에 보름달을 띄우고 황태채 씹는  雪國엔 觀海記꽃이 핀다  영혼은 뱃속에서 고향 캄차카로 간다  40년 전에 잃은 한국해역 동해로 가거라.                                               명태 / 양영문    감푸른 바다 바닷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 이영옥 그는 침침한 백열등 밑에서 저녁을 먹는다 굳어버린 혓바닥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밥상이 곤두박질 칠 때 마다 늙은 아내는 깨진 것들을 천천히 쓸어 모았다 그를 지탱하던 의식들은  이빨 나간 그릇처럼 쓰레기 통에 처박히고 치욕은 아내의 손톱 밑에 파고 든 양념찌꺼기 같았다 한바탕 울분 뒤에  몰아쳐 오는 적요는 언제나 쓸쓸하다 그는 잘 씹히지 않는 명태를 우물거리며  바다 속의 깊은 적막을 우려낸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명태 한 마리의 온전한 고독이 필요할테지 관자놀이의 힘줄이 불끈 일어선다 내 영혼은 얼마나 더 능멸당해야 잠들 수 있나  꿈에서 조차 그는 말을 더듬는다 그는 마른 명태처럼 딱딱해진 생각들 탕탕 두둘겨  북북 찢어 놓고 싶었다  환멸에서 생비린내가 났다 백양나무가 바람든 뼈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 왔다 누런 이파리들의 밭은 기침에서 튀어나오는  죽음의 파편들 그는 온몸에 어둠을 퍼담고 고즈넉하게 저물어 간다 처마 밑의 마른 명태는  먼지를 한겹 두른 후 하루 더 희망을 품기로 했다       황태 / 양현근      종묘공원 지하보도 입구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른기침과 함께 장이야, 멍이야 불러내고 있다. 가로 세로로 얽혀 포진하고 있는 그물에 바짝 마른 무료가 굴러 떨어진다. 담쟁이덩굴이 싱싱했던 푸른 날을 살짝 들여다보는데, 여기 저기 속 다 퍼주고 맑은 날 시린 날 견뎌 오며, 남은 건 휜 등뼈 불끈 드러나는 싱거운 몸뚱이 뿐   우리는 너무 건조해졌어. 건조하다는 것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말, 오래 되었다는 말, 가슴과 가슴사이에 더 이상 물기를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지   배식시간을 기다리던 노인들이 무료급식소로 줄지어 몰려간다, 낡은 신발 밑창에서는 평생 질척거리던 길이 조금씩 삐져나오고, 굽은 어깨 위로 간기 빠져 나간 파도소리가 넘실댄다    붉게 끓는 한 낮, 제 몸의 물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잎들은 그늘을 만들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황태처럼 / 은기찬  두 눈 뜨고 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너울거리던 햇살이 울컥 붉어진다  하루의 끝에 매달려 버둥대는 맘 알까  알전구처럼 나는 포장마차 구석에 앉아 있다  바람을 맞으며 세상은 펄럭이고  나는 홀로 여위어가고,  보풀음 잘게 뜯어 속을 채우는 동안에도  떠밀려가는 무리들.  애당초 한 곳만 보며 몰려다닐 팔자였지  줄지어 다니다 줄지어 꿰이는 와중에도  소리소리 질러 봐도  나오는 건 없고 속만 퍽퍽해 지던 기억  나서지 말거라,  아침 햇살에도 눈을 감지 못하던 어머니는  그 말씀이셨다  아무리 파도가 희번뜩여도  생활만큼이야 뼛속을 파고들겠느냐고  뽀얗고 깊은 맛이 어금니께에 고일 즈음  뒤척이던 노을이 소주잔에서 멈춰 선다  속 비우고 산 지 오래  얼었다 녹았다, 얼었다 녹았다 썩을 것도 없지, 이젠  얼부풀어 말라가는 내 뼈를 추려  내일은 누구의 속을 풀어주고  그 다음은 누구의 허한 데를 채워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신물은 터져 나오려는 속을 긁었다  돌아 갈 길을 잃은 사람들 뒤에서  소줏잔을 내려놓는 소리  탁, 바다가 언뜩 비쳤다        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북어 / 박후기    퇴직금으로 구입한 1톤 트럭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비쩍 마른 북어 한 마리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며  강변북로를 빠져나간다  작정이라도 한 듯  꼬인 실타래로 칭칭  트럭 운전대에 제 몸을 묶고  강바람 거슬러  거친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죽어도 눈 감지 않겠노라고,  안구건조증에 걸린  북어 한 마리  희멀건 두 눈 부릅뜨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북한산 명태 / 정호승 하늘은 붉고 날은 흐리다  어머니는 오늘도 겨울산에 올라  북으로 간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너 무슨 그리움의 죄가 그리 많아서  원산 덕장 찬바람 속에 매달려 있었느냐  하늘 향해 겨우내 입을 딱 벌리고  두 눈 부릅뜬 채 기다리고 있었느냐  북으로 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온몸에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대관령 눈보라에 황태가 되어  북녘 하늘 바라보다 온몸이 뜯기나니  네 가슴은 아직도 동해의 푸른 물결  이제는 죽음도 눈물도 아프지 않아  흰 새벽 찬바람에 눈이 시리다           덕장 / 임보      파도를 가르던 푸른 지느러미는 뭍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장식, 대관령의 허공에 걸려 있는 명태는 거센 바람의 물결에 화석처럼 굳어 간다     내장을 통째로 빼앗기고 코가 꿰인 채 일사분란하게 매달려 있는 동태, 등뼈 깊숙이 스민 한 방울의 바닷물까지 햇볕과 달빛으로 번갈아 우려낸다     눈보라에 다 뭉개진 코와 귀는 이제 물결의 냄새와 소리를 까맣게 잃었다 행여 수국의 향수에 젖을까 봐 밤의 꿈마저 빼앗긴 지 오래다     그렇게 면풍괘선(面風掛禪)*으로 득도한 노란 황태, 이놈들이 비싼 값으로 세상에 팔려나간다 요릿집의 북어찜, 제사상의 북어포, 술꾼들의 북어국…     겨울, 서울역 지하도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는 덕장 아래 떨어진 낙태(落太)*들   * 면풍괘선(面風掛禪) :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패러디 함                                                                           
1648    어머니 시모음 댓글:  조회:5259  추천:1  2016-10-12
  ​ [어머니의 시 모음]​     ​     히말라야의 노새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박경리·소설가, 1926-2008) ​ ​ ​ ​ 어머니의 房  어머니의 방은 토굴처럼 어둡다 어머니, 박쥐 떼가 둥우리를 틀겠어요, 해도 희미한 웃음 띤 낯빛으로 괜찮다, 하시고는 으레 불을 켜시지 않는다 오랜 날 동안 어둠에 익숙해지신 어머니의 몸은 심해에 사는 해골을 닮은 물고기처럼 스스로 빛을 뿜는 발광체가 되신 것일까, 흐린 기억의 뻘 속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바지락, 동죽, 가무락조개, 여직 지워지지 않는 괴로움과 마지막 남은 혈기 다해 가슴속에 푸른 해초 섞어 끓이는 바다에서의 半生을 반추하는 데는 차라리 짙은 어둠 속이 낫다는 것일까, 얼굴 가득 덮인 검버섯 무수한 잔주름살 속으로 잦아드는 낯선 운명을 더욱 낯설게 덧칠하는 치렁치렁한 어둠 속, 무엇일까, 옻칠된 검은 장롱에 촘촘히 박힌 자개처럼 빛나는 저것은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 ​ 어머니의 고무신  어머니 밭에서 오시기 전 사립문은 싸르락싸르락 울고  어머니 사립문 열고 들어오실 때는 울지 않아  머릿수건 풀고 허리 펼 사이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면  꿈결인 듯 밥상이 들어오고  마지막 아버지 숭늉까지 만들어야 잠시 방에 앉는 어머니  온종일 품 파느라 호미 들고 앉은뱅이로 뜨거운 밭 오갔을 어머니  고단한 숟가락에 밥보다 졸음이 먼저 올라앉네  시큰한 콧날 괜스레 움켜쥐고  부엌 문지방에 목 늘어뜨리고 밥상을 건너다보는  백구의 엉덩이를 발로 차 내쫓고는  후덥지근 몰려드는 배나무 밭의 더운 바람에 몸을 낮추니  댓돌에 벗어놓은 어머니의 고무신  바닥으로 가득한 흙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두 손으로 어머니의 고무신 털어내니  사립문 덩달아 싸르락싸르락 울고,  (최나혜·시인, 강원도 화천 출생)   ​ ​ 어머니 발자국 걸을 수 없을 만큼 다리가 아파  흉내조차 낼 수 없어  눈물만 쏟아내야 하시는 어머니!  참아낸 가슴에 피를 토해내야 했던  어머니를 헤아리지 못했다.  불효여식은.  비수 같은 언어들을 쏟아내고도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자란 줄 알았던 것은  어머니의 골절 속에 흐르지 않는  血이 될 줄을 몰랐다.  주무시다 몇 번씩 이불을 덮어주시던 것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고.  밥알이 흩어져 떨어지면  주워먹어야 하는 줄 알았고.  생선을 먹으면 자식을 위해 뼈를 발려서  밥숟가락 위에 올려줘야 하는 줄 알았고.  구멍 난 옷을 입어야 어머니인 줄 알았다 .  밤이면 몸뚱이가 아파 앓는 소리가  방안을 휘감아도 그 소리가 관절염 속에  파묻힌 고통인 줄 몰랐다.  걸을 수 없어 질질 끌고 다니시는  다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자나깨나 자식이 우선이었고  앉으나 서나 자식을 걱정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줄 알았다.  아픈 말들을 주름진 골 사이로 뱉어 냈을 때  관절염이 통증을 일으킬 만큼  ˝나 같은 자식 왜! 낳았냐고˝  피를 토하게 했던 가슴 저미는 말들.  너하고 똑같은 자식 낳아봐라  네 자식이 그런 말하면 얼마나 피눈물 나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미웠다.  씻지 못할 철없는 말들을 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어머니 마음을 알려 하지만 전부는 모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뼈가 다 달아서 걸을 수 없어  고통과 사투를 벌이는 어머니!  제 다리라도 드려서 제대로 걸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피가 마른 눈물을 어이 닦아 드려야합니까?  어머니의 발자국을 찾고 싶습니다.  어머니!  (애월 김은영·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   ​ ​ 매듭  택배로 온 상자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단단히 묶인 끈  보다 못한 아이가 칼을 건넨다  늘 지름길을 지향하는 칼  좌석표가 있다는데 일부러 입석표를 끊어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서서 가시며  그 근소한 차액을 남기시던  어머니는 평생 지름길을 모르는 분이었다  상자 속엔 가을걷이한 곡식과 채소가 들어있을 것이다  꾹꾹 눌러도 넘치기만 할 뿐 말끔히 닫히지 않는 상자를  가로 세로 수십 번 이 비닐 끈으로 동여매셨을  어머니의 뭉툭한 손마디가 떠올라  칼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힘이 들수록 오래 기도하시던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상자의 매듭과 대결 한다  이는 어쩌면 굽이진 어머니의 길로 들어가  아득히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 날에는 이해되지 않던 험한 길 굽이마다  붉게 저녁노을로 걸린 어머니의 생애  옹이진 어머니의 매듭 같던 암호는  난해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풀어내고 보니  이음새도 없이 어머니의 길은 길고 부드럽기만 하다  (장흥진·시인)   ​ ​ 거룩한 사랑  성(聖)은 피(血)와 능(能)이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깔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끓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박노해·시인, 1958-)     ​ 연탄 갈아넣기 - 어머니 생각  허리 구부려 연탄아궁이에 연탄 갈아넣기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웬일로 연탄은 꼭 새벽에만 갈아넣게 되었던지 웬일로 그때는 또 그렇게 추웠던지  영하 10도가 넘는 새벽 두 세시 사이에 어머니는 일어나 연탄을 갈러 나가셨다 나는 알면서도 잠자는 척 이불을 덮어썼다  그리고 빈말로 어머니를 속였다 왜 저를 깨우시지 않고 연탄은 또 왜 꼭두새벽에 갈아넣어야 해요 그래, 그래야 불꽃이 좋아 아침밥 짓기가 좋지 어쩌다 내가 연탄을 갈러 나가면  어머니는 질겁해 따라 나오시며 너는 연탄내 쐬면 안돼 또 연탄은 구멍을 잘 맞춰야 하는데 너는 안돼 나를 밀쳐내시고 허리를 구부정, 연탄집게로 더듬더듬 연탄을 가시는데 폭 타버린 밑탄을 들어내고 불꽃이 남은 윗탄을 밑탄으로 앉히고 그 위에 새까만 새탄을 밑탄과 구멍을 맞춰 얹으시고 연탄아궁이 구멍을 확 열어 놓으셨다  활활 불꽃을 타고 올라오는 연탄내 때문인지  연신 쿨럭쿨럭 밭은 기침을 뱉으시며 어머니 용서하세요, 어머니 돌아가신 뒤 기름보일러에서 가스 보일러로 바뀌어 지금은 연탄 갈 일 없어졌어요  (정대구·시인, 1936-) ​ ​  ​ ​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란 말을 나직히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란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이대흠·시인, 1968-)     ​ ​ 사모곡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느님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꼴 저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 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신달자·시인, 1943-) ​   ​ ​ ​어머니의 밥  '얘야 밥 먹어라'  어머니의 성경책  잠언의 몇 절쯤에  혹은 요한계시록 어디쯤에  금빛 실로 수를 놓은  이 말씀이 있을 거다.  '얘야, 밥먹어라  더운 국에 밥 몇 술 뜨고 가거라'  아이 낳고 첫국밥을 먹은 듯,  첫국밥 잡수시고 내게 물리신  당신의 젖을 빨고 나온 듯  기운차게 대문을 나서는 새벽.  맑은 백자 물대접만한  유순한 달이 어머니의 심부름을 따라 나와서  '채할라 물마셔라, 끼니 거르지 말거라'  눈 앞 보얗게 타일러 쌓고  언제부터서인가  시원의 검은 흙바닥에서부턴가  마른 가슴 헐어내는  당신의 근심  평생토록 밥을 먹이는  당신의 사랑.  (이향아·시인, 1938-)     ​ 어머니의 노래                잠을 자다 눈을 뜨니 바지를 꿰매는 어머니 얼굴이 호롱불에 흔들린다 이내 노래를 부르신다   그때 부르시던 어머니 노래가 눈물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치마를 입을 걸 그랬나 봅니다   밭을 매다 말고 낫을 들고 뛰어가시던 어머니 쥐를 때려잡으며 외치신다 " 우리 새끼들 먹을 것도 없다, 이 쥐새끼들아 "   그때 외치시던 어머니 고함이 가마솥이 흘리는 눈물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가마솥에 불을 지피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   이제는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차라리 노래라도 불러 주세요 아니 귀청 터지게 고함이라도 쳐주세요! (박의준)       어머니의 지붕 어머니는 지붕에  호박과 무를 썰어 말렸다 고추와 콩꼬투리를 널어 말렸다 지붕은 태양과 떠도는 바람이 배불리 먹고 가는 밥상이었다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초승달과 서쪽에 뜨는  첫 별이 먹고 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날씨가 맑은 사나흘 태양과 떠도는 바람 초승달과 첫 별을  다 먹이고 나서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 알맞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었다 우리들 생의 반찬으로! (이준관·시인, 1949-)   ​ 어머니        가을 들녘에 내리는 황혼은  내 어머니의 그림자  까마득한 옛날 이미 먼 나라로 가신,  그러나 잠시도 내 곁을 떠난 적 없는  따스한 햇볕처럼  설운 노래처럼  언제나 내 곁을 맴도는  어머니의 그림자  (김동리·소설가이며 시인, 1913-1995) ​ ​ ​ ​ 오늘도 어머니는  오늘도 어머니는  땅이 좋아  땅에 사신다  폭포처럼 굽은 허리  땅에 묻으시고  콩대로 어우러져  고구마 넝쿨로 어우러져  땅이 되셨다가  어머니, 저 왔어요  얼른 알아듣고 일어서는  저 폭포의  빛나는 물살  마침내 무지개로 걸리는  어머니의 땅  (허형만·시인, 1945-)       ​ ​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어머니 그리워지는 나이가 되면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되어 있다. 우리들이 항상 무엇을 없음에 절실할 때에야 그 참모습을 알게 되듯이 어머니가 혼자만 아시던 슬픔 그 무게며 빛깔이며 마음까지 이제 비로소 선연히 가슴에 차오르던 것을 넘쳐서 흐르는 것을 가장 좋은 기쁨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으려는 따신 봄볕 한 오라기, 자기 몸에는 걸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 옛적 마음을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저도 또한 속 깊이 그 어머니를 갖추고 있나니 (이성부·시인, 1942-)   ​ ​ ​ 늘 간절한 어머니 생각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선한 눈빛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사랑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신보다 자식을 더 생각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어머니의 자식도 나이가 들어가며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어머니의 깊은 정을 알 것만 같습니다. 늘 뵙는 어머니지만 뵙고픈 생각이 간절해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도  내 생각을 하고 계셨답니다.  그 무엇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어머니의 사랑 그 사랑을 갚는 길이 없어 늘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     어머니  당신의 이름에선 새색시 웃음 칠한 시골집 안마당의 분꽃 향기가 난다  안으로 주름진 한숨의 세월에도 바다가 넘실대는 남빛 치마폭 사랑  남루한 옷을 걸친 나의 오늘이 그 안에 누워 있다  기워 주신 꽃골무 속에 소복이 담겨 있는 幼年의 추억  당신의 가리마같이 한 갈래로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나의 연두 감사 저고리에 끝동을 다는 다사로운 손길  까만씨알 품은 어머니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이해인)   ​ ​ 어머니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인생살이 같다가도 세상살이가 힘겨워 문득 쓸쓸한 마음이 들 때 나지막이 불러보는 세 글자 어 머 니 당신의 그 여린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지어낸 이 몸 이 소중한 생명이기에 꽃잎 지듯 쉽게 무너질 수는 없어요 ​(정연복)      ​ 어머니의 편지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남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  (문정희·시인, 1947-) ​ ​ ​      ​ 어머니  생의 끝자락에서 고운 자태는 사라지고 이마엔 주름진 모습만 보이시는 어머니 사랑으로 꽃을 피우시고 인내로 열매 맺으신 소중한 내 어머니 건강히 지내시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이성우·시인) ​     ​ 어머니의 섬  늘 잔걱정이 많아  아직도 뭍에서만 서성이는 나를  섬으로 불러주십시오. 어머니  세월과 함께 깊어가는  내 그리움의 바다에  가장 오랜 섬으로 떠 있는  어머니  서른세 살 꿈속에  달과 선녀를 보시고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당신의 그 쓸쓸한 기침소리는  천리 밖에 있어도  가까이 들립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쏟아놓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바람과 파도가 대신해주는  어머니의 섬에선  외로움도 눈부십니다  안으로 흘린 인내의 눈물이 모여  바위가 된 어머니의 섬  하늘이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섬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배우며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란 말을 나직히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란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이대흠·시인, 1968-) + 사모곡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김태준·시인) + 사모곡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꼴 저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 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신달자·시인, 1943-) + 어머니의 밥  '얘야 밥 먹어라'  어머니의 성경책  잠언의 몇 절쯤에  혹은 요한계시록 어디쯤에  금빛 실로 수를 놓은  이 말씀이 있을 거다.  '얘야, 밥먹어라  더운 국에 밥 몇 술 뜨고 가거라'  아이 낳고 첫국밥을 먹은 듯,  첫국밥 잡수시고 내게 물리신  당신의 젖을 빨고 나온 듯  기운차게 대문을 나서는 새벽.  맑은 백자 물대접만한  유순한 달이 어머니의 심부름을 따라 나와서  '채할라 물마셔라, 끼니 거르지 말거라'  눈 앞 보얗게 타일러 쌓고  언제부터서인가  시원의 검은 흙바닥에서부턴가  마른 가슴 헐어내는  당신의 근심  평생토록 밥을 먹이는  당신의 사랑.  (이향아·시인, 1938-) + 어머니의 지붕 어머니는 지붕에  호박과 무를 썰어 말렸다 고추와 콩꼬투리를 널어 말렸다 지붕은 태양과 떠도는 바람이 배불리 먹고 가는 밥상이었다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초승달과 서쪽에 뜨는  첫 별이 먹고 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날씨가 맑은 사나흘 태양과 떠도는 바람 초승달과 첫 별을  다 먹이고 나서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 알맞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었다 우리들 생의 반찬으로! (이준관·시인, 1949-) + 어머니  가을 들녘에 내리는 황혼은  내 어머니의 그림자  까마득한 옛날 이미 먼 나라로 가신,  그러나 잠시도 내 곁을 떠난 적 없는  따스한 햇볕처럼  설운 노래처럼  언제나 내 곁을 맴도는  어머니의 그림자  (김동리·소설가이며 시인, 1913-1995) + 오늘도 어머니는  오늘도 어머니는  땅이 좋아  땅에 사신다  폭포처럼 굽은 허리  땅에 묻으시고  콩대로 어우러져  고구마 넝쿨로 어우러져  땅이 되셨다가  어머니, 저 왔어요  얼른 알아듣고 일어서는  저 폭포의  빛나는 물살  마침내 무지개로 걸리는  어머니의 땅  (허형만·시인, 1945-) + 어머니 생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이시영·시인, 1949-) +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어머니 그리워지는 나이가 되면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되어 있다. 우리들이 항상 무엇을 없음에 절실할 때에야 그 참모습을 알게 되듯이 어머니가 혼자만 아시던 슬픔 그 무게며 빛깔이며 마음까지 이제 비로소 선연히 가슴에 차오르던 것을 넘쳐서 흐르는 것을 가장 좋은 기쁨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으려는 따신 봄볕 한 오라기, 자기 몸에는 걸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 옛적 마음을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저도 또한 속 깊이 그 어머니를 갖추고 있나니 (이성부·시인, 1942-) + 늘 간절한 어머니 생각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선한 눈빛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사랑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신보다 자식을 더 생각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어머니의 자식도 나이가 들어가며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어머니의 깊은 정을 알 것만 같습니다. 늘 뵙는 어머니지만 뵙고픈 생각이 간절해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도  내 생각을 하고 계셨답니다.  그 무엇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어머니의 사랑 그 사랑을 갚는 길이 없어 늘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어머니의 섬  늘 잔걱정이 많아  아직도 뭍에서만 서성이는 나를  섬으로 불러주십시오. 어머니  세월과 함께 깊어가는  내 그리움의 바다에  가장 오랜 섬으로 떠 있는  어머니  서른세 살 꿈속에  달과 선녀를 보시고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당신의 그 쓸쓸한 기침소리는  천리 밖에 있어도  가까이 들립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쏟아놓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바람과 파도가 대신해주는  어머니의 섬에선  외로움도 눈부십니다  안으로 흘린 인내의 눈물이 모여  바위가 된 어머니의 섬  하늘이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섬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배우며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어머니의 향기 어머니에게서는 어린 날 코에 스민 아른한 비누냄새가 난다. 보리대궁이로 비눗방울을 불어 울리던 저녁 노을 냄새가 난다. 여름 아침나절에 햇빛 끓는 향기가 풍긴다. 겨울밤 풍성하게 내리는 눈발 냄새가 난다. 그런 밤에 처마 끝에 조는 종이초롱의 그 서러운 석유냄새 구수하고도 찌릿한 백지 냄새 그리고  그 향긋한 어린 날의 젖내가 풍긴다. (박목월·시인, 1916-1978) + 어머니의 편지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남 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  (문정희·시인, 1947-) + 어머니  생의 끝자락에서 고운 자태는 사라지고 이마엔 주름진 모습만 보이시는 어머니 사랑으로 꽃을 피우시고 인내로 열매 맺으신 소중한 내 어머니 건강히 지내시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이성우·시인) + 어느  어머니의 일기 미안하구나, 아들아.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인데  모진 목숨 병든 몸으로  살아 네게 짐이 되는구나. 여기 사는 것으로도 나는 족하다.  그렇게 일찍 네 애비만 여의지 않았더라도  땅 한평 남겨 줄 형편은 되었을 터인데  못나고 못 배운 주변머리로 짐 같은 가난만 물려주었구나. 내 한입 덜어 네 짐이 가벼울 수 있다면  어지러운 아파트 꼭대기에서  새처럼 갇혀 사느니 친구도 있고  흙도 있는 여기가 그래도 나는 족하다. 내 평생 네 행복 하나만을 바라고 살았거늘  말라비틀어진 젖꼭지 파고들던  손주 녀석 보고픈 것쯤이야 마음 한번 삭혀 참고 말지.  혹여 에미 혼자 버려 두었다고 마음 다치지 마라.  네 녀석 착하디 착한 심사로 에미 걱정에 마음 다칠까 걱정이다. 삼시 세끼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있으니  에미 걱정일랑은 아예 말고 네 몸 건사 잘하거라. 살아 생전에 네가 가난 떨치고  살아 보는 것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  행복하거라, 아들아.  네 곁에 남아서 짐이 되느니  너 하나 행복할 수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라도 나는 족하다. (작자 미상)   [출처] 오늘은 5월 8일 그리운 어머니! & 외할머니!! ~ 어머니의 시 모음|작성자 떼쎄라    
1647    명태여, 이 시만 남았다... 댓글:  조회:4145  추천:0  2016-10-12
  명태여, 이 시만 남았다                      /고형렬     졸짱붕알을 달고 명태들 먼 샛바다 밖으로 휘파람 불며 빠져나간다 덕장 밑 잔설에 새파란 나생이 솟아나올 때 바람 불면 아들이랑 하늘 쳐다보며 황태 두 코다리 잡아당겨 망치로 머리 허연 꼬리 퍽퍽 두드려 울타리 밑에 짚불 놓아 연기 피우며 두 마리 불에 구워 먹던 2월 어느날   개학날도 다가오고 나는 오늘을 안 듯 눈구덩이 설악으로 끌려가는 해를 무연히 바라보다 오만 데 바다로 눈길 준 지 잠시인걸 엊그제 속초 설 쇠고 오다 미시령 삼거리서 사온 누렁이 두 마리 돌로 두드려 혼자 뜯어 먹자니, 내 나이보다 아래가 되신 선친이 불현듯 생각나   아버지가 되려고 아들을 불러 앉히고 그 중태를 죽죽 찢어 입에 넣어주었다 그 황태 쓸개 간 있던 곳에서 눈냄새가 나고 납설수 냄새도 나자 아버지 냄새가 났다 슬프다기보다 50년 신춘에 이렇게 건태 뜯어 먹는 버릇도 아버지를 닮았으니, 아들도 나를 닮을 것이다   명태들이 삭은 이빨로 떠나는 새달, 그렇게 머리를 두드려 구워 먹고 초록의 동북 바다로 겨울을 보내주면, 양력 2월 중순에 정월 대보름은 달려왔고 우리 부자는 친구처럼 건태를 구워 먹고 봄을 맞았다 남은 건 내 몸밖에 없으나 새 2월은 그렇게 왔다 가서 이 시만 이렇게 남았다 ========================     감평   이 시를 접하면 아버지-시인-자식이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손이라는 울타리에서 가정의 평화를 오버랩하게 한다. 덕장에서 아버지와 자식의 사랑을 면면히 이어주는 매개체 황태가 선친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시인도 아버지를 참 그리웠나보다. 황태를 누렁이라고 표현한 시적감각이 참 탁월하고, 부자간의 많은 대화는 없지만 자식의 입으로 넣어주는 중태가 이 세상에서 최상의 음식이 아닐까. 나도 미시령 고개 덕장 아래에서 황태를 즐길 수 있는 사내아이 하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고형렬 195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대청봉 수박밭』『해청』『사진리 대설』『성에꽃 눈부처』『김포 운호가든집에서』, 장시집 『리틀 보이』, 동시집『빵 들고 자는 언니』등이 있다. 2003년 제3회 지훈상을 수상했다. 현재 계간 『시평(詩評)』을 편집하고 있으며 명지전문대 문창과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졸짱붕알을 달고 명태들 먼 샛바다 밖으로 휘파람 불며 빠져나간다 덕장 밑 잔설에 새파란 나생이 솟아나올 때 바람 불면 아들이랑 하늘 쳐다보며 황태 두 코다리 잡아당겨 망치로 머리 허리 꼬리 퍽퍽 두드려 울타리 밑에 짚불 놓아 연기 피우며 두 마리 불에 구워 먹던 2월 어느 날 … 엊그제 속초 설 쇠고 오다 미시령 삼거리서 사온 누렁이 두 마리 두드려 혼자 뜯어 먹자니, 내 나이보다 아래가 되신 선친이 불현듯 생각나   '명태여, 이 시만 남았다' 중에서  ■ 오랜 동안 조기는 서해였고 명태는 동해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 사람들마다 한평생 입 속으로 헤엄쳐들어간 평균 숫자는 몇 마리쯤 될까. 1백 마리는 지져먹고 졸여먹지 않았을까. 명태 1백 마리 지나가는 동안, 인생에 치는 물보라가 왜 없겠으며 가라앉는 기억의 앙금 또한 어찌 없겠는가. 시인은 아버지와 먹던 명태의 기억이 어느덧 아버지 전부가 되어 먹먹한 시간의 살을 씹는 중이다. 명태 알이나 난소는 곤(鯤)이라고 하는데, 이건 장자에서 북해의 명(溟)이라는 곳에 사는 몇 천리나 되는 사이즈의 물고기다. 그러던 명태가 언제 졸짱붕알로 쪼그라 들었는지 모르지만, '애'(간) 주고 '이리'(수컷의 정소) 주고 다 내놓으니 그 육보시 정신만은 통째 하염엾는 바다이다.   명태 구워먹으니 겨울 가고 봄이 왔다... 밤 미시령 고형렬 시집|창비|129쪽|   산 돌을 밟으며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이 화산이었다는 것을 이 돌들이 심장을 단숨에 연소시킨 불이었다는 것을 나무들은 그럼 어디서 왔는가 나는 모르지 그것이 설악의 화두다 알 길 없는 이 물음을 찾아 나는 설악의 돌을 밟고 걷는다 (시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돌’ 부분) 강원도 속초 출신인 고형렬 시인은 설악산에서 화강암 지대의 돌길을 걸으며 명상에 빠진다. 돌의 침묵 속에서 아주 오래된 어떤 소리를 들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 돌들은 아주 오래전 엄청난 불바다 속에서 ‘입이 불에 데어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의 발걸음에 닿는 돌의 존재 그 자체가 마치 타오르는 불처럼 시인의 심장 속에서 뜨거운 비밀을 일깨운다. 불바다가 휩쓰고 간 뒤에 남은 돌은 비록 말을 못하지만, 세월의 풍화를 견디면서 마치 물음표와 같은 기호이거나, 말하는 혀를 연상케한다. 그 형상에서 시인은 정물이면서도 죽은 사물이 아닌 생명체로서 돌의 새 이미지를 빚어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뼈의 나뭇가지들 아래 뒹구는 불타버린 이빨, 등골 자국들 널려있는 설악의 세계, 검은 화강암이 된 죽음의 길바닥을 만든, 울퉁불퉁한 혀들을 밟는다 나는 캄캄한 밤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빛의 영혼들을 본다 머리를 들어, 아 하늘 속에 떠 있는 수많은 돌들을 쳐다본다   예로부터 인간은 죽은 영혼이 밤하늘의 별이 될 거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시인은 그 별들이 하늘에 떠있는 돌 덩어리라고 본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는 무수한 돌들이 깔려있는 산길과 같은 것이 된다. 시인은 설악산의 돌길에서 우주의 별밭을 감지한다. 그는 하나의 돌에 귀를 기울여 오랜 시간 여행 끝에 지구에 당도한 어느 별의 음악 소리를 듣는다.    ▲  고형렬 시인은 작은 생명의 숨결에서 거대한 창조의 손길을 느끼거나, 먼 별의 흔들림에서 깊은 내면의 떨림을 감지한다. 그는 여치를 들여다보면서 하느님이 처음 만들 때 눈빛과 손길이 보인다 고 하고, 저녁별 보고 있으면 나뭇잎들만 눈꺼풀에서 출렁여요 내 가슴속에서 나뭇잎 하나 흔들려요 라고 노래한다. 실제로 고형렬 시인은 여치처럼 연약한 눈웃음을 짓고, 나뭇잎처럼 얇은 음성으로 말한다. 설악과 동해로 표상되는 고향 강원도를 떠나 오랫동안 서울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시인은 고향의 명태를 시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를테면, 속초에서 설을 쇤 뒤 미시령에서 시인은 건태를 불에 구워 아들과 나눠 먹는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어린날의 시인과 그러했듯이. 명태들이 삭은 이빨로 떠나는 새달, 그렇게 머리를 두드려 구워먹고 초록의 동북 바다로 겨울을 보내주면, 양력 2월 중순에 정월 대보름은 달려왔고 우리 부자는 친구처럼 건태를 구워 먹고 봄을 맞았다 남은 건 내 몸밖에 없으나 2월은 그렇게 왔다 가서 이 시만 이렇게 남았다 (시 ‘명태여, 이 시만 남았다’ 부분)***   /// 박해현기자
촌평 물과 용서와 사랑의 시인 - 한영남 박춘월       중국조선족시단에서 자신만의 색갈과 목소리를 가진 몇 안되는 시인가운데 한영남시인이 있다. 소설, 평론, 수필, 실화, 아동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시인은 다산이기도 해서 해마다 그의 필을 통해 쏟아지는 글들은 조선말 신문과 잡지 곳곳에서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다. 그 많은 글들가운데서 오늘은 한시인의 시 3수만 뽑아들고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자.   시    우리는 시의 서두에서 먼저 삶의 현장에서 거센 비바람과 폭염과 엄동을 견디느라 억수로 비뚫어진 나무 하나, 목숨 하나를 만난다. 삶의 매 한굽이를 넘길 때마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으며 몸부림을 쳐왔을가? 꺾이우지 않으려고 지탱하다가 지탱하다가 휘여졌을 그 무릎을 만져주고 그 모습에 왈칵 눈물을 쏟으며 동참을 해주고 인정을 해주는 화자의 따뜻한 가슴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설사 곁에서 비뚤어지게 굴었을지라도 비뚤게 살수 밖에 없었던 삶에 대한 깊은 리해와 용서를 해주는 높은 경지에 서있는 화자를 시 중간부분에서 만날수 있다. 구불거리면서 자라 추한 모습이 된 그 내면에는 숨은 아픔과 상처가 있다. 푸름을 퍼올리는 생명의 싱싱한 노래,그 노래를 부르는 자와 노래를 들을수 있는 귀를 가진 시인의 의사소통이 이뤄진다. 이 아름다운 장면이 독자들을 용서의 세계에로 인도해 준다. 파란만장의 세상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의 가슴속 내밀한 곳에도 상처와 신음소리가 숨겨져 있다.설사 억수로 비뚤어졌다 해도 그것은 엄연히 푸른 생명이고 싱싱한 음악임에 틀림없다. 살아남아 준것에 대해 감사하고 아직도 푸르른 생명의 노래를 불러줄수 있음에 대해 감사하자. 용서는 아름다운것이다. 용서는 더 나아가서 사랑의 경지에 이른다. 그렇다. 화자도 우리 독자도 우리는 어쩌면 누구나 다 저 비뚤게 자란 나무일수 있다. 그리고 그런 비뚤어진 우리 매개인은 다 그 누군가의 따뜻한 리해와 용서를 갈망할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신을 어루쓸어주고 뜨겁게 뜨겁게 사랑해줘야 한다...   시     여기서 우리는 시인 한영남이 얘기하는 물과 그의 상처를 들어보자.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으깨지고 나무를 만나면 베여지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는 물은 어떤가? 으깨질줄을 알고 베여질줄을 알고 에돌아갈줄을 아는 유연한 존재다. 으깨지고 베여졌다가 다시 용케도 원형을 회복하는 물은 말한다. 하고 말이다. 여러 상대들이 와서 희롱하고 칼질하고 찢고 벤다 하더라도 실로 나는 물이란다. 물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이였다면 피투성이가 되고 만신창이가 되였을수도 있는 상황이다. 다행히 물이라서 찢겨졌다가도 다시 합쳐지고 베여졌더라도 또다시 뭉쳐서 흐를수 있다. 이것이 물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지혜이다. 베이지 않은듯 찢기지 않은듯한 여유와 치유력을 지닌것이 또한 물이 아니겠는가? 나는 물이기때문에 내게 상처를 바라지 말라고 한다. 해아래 말리워도 좋고 오물을 퍼부어도 괜찮다고 한다. 물은 전혀 공격하지 않는다. 그대로 받아들일 태세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물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지 다 받아들이고 그러고도 태연한 모습인 물은 사실 속으로 울고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울고있는 물이다. 으깨지고 베여지고 희롱당하고 칼질당하고 말리우고 오물을 뒤집어 썼을 때 물은 자신이 속으로 울고있었다고 고백한다. 아아 그리고 차마 상처도 입지 못한다고 말한다. 물은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치유한다. 이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에게는 공격이 없다. 상처를 입으면 가해자가 불편해할가봐 차마 상처를 입지도 못한다. 상처를 입었어도 보여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물을 많이 닮아있는 시인 한영남과 그가 들고온 시 한수. 우리 물의 여유와 지혜에 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자. 삶 자체는 순탄하지 않다. 거기에는 수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다. 그 아픔은 드러내봤자 별 도움이 없다. 시간이라는 생명의 곬, 그 곬을 따라 우리도 물처럼 흘러가보자...   시    한영남시인의 시는 거창한 시어거나 미사려구가 전혀 없다. 마치 치장 안한 맨 얼굴의 녀인 같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매력이 있다. 꾸미지 않은 소박한 시도  이런 상당한 매력을 가질수 있자면 시인의 느긋하고 여유가 있고 또한 더불어 살줄 아는 삶의 자세가 받침되여야 하지 않겠나 싶다. 화자는 일찍 돌아가신 애비와 그 애비없는 자식을 애잔하게 바라보면서 그들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해준다. 와  누구나 다 마음속 깊이에까지 공감을 할수 있는 감정과 사연을 가지고 우리에게 잔잔하게 다가오는 시인 한영남의 시세계는 읽는 이에게 오래동안의 마음속 파장과 여운을 안겨준다. 읽기 특히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인생의 그 어떤 깊고 깊은 리치를 말하고 싶어하는 시인 한영남과 그의 시는 언제 읽어도 싫지 않다. 거부감이 없이 순하게 읽어내려 갈수 있고 숨겨진 뜻을 알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림에는 추상화와 추상화 아닌것이 있다. 한영남 시인의 시는 추상화가 아닌 그림에 속한다. 편안하고 푸근하고 그러면서도 우리들 삶의 아픔과 막무가내가 묻어나는 그런 그림이다. 가슴이 뭉클해나는 애비와 애비없는 자식의 그림이다. 청명이면 지랄같이 아버지의 무덤가에는 잔디처럼 애비의 시가 돋아나서 호로자식을 희미하게 웃군 한다는 시 는 매 독자들의 평범한 삶과 일상과 끈끈히 련결되여 있다. 애비없는 자와 애비있는 자와 그리고 애비된자 어미된자와 모든 자식들에게 화자는 소박한 얘기로 대화를 한다. 그런 시인 한영남을 어느 독자가 싫어하겠는가? 시인 한영남이 계속 좋은 시를 써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촌평을 줄인다.  
1645    중국 조선족 시단의 기화이석 - 한춘시론 댓글:  조회:3455  추천:0  2016-10-12
우리 시단의 기화이석(奇花異石)-한춘시론 윤윤진(길림대학교수, 문학평론가)
1644    詩의 독해(讀解)는 천파장 만파장이다... 댓글:  조회:3660  추천:0  2016-10-12
나이는 수자에 불과...88세 할머니 사진작가 [ 2016년 10월 11일 03시 24분 ]     일본 구마모토 현(熊本县) 88세 고령 할머니 니시모토 키미코(西本喜美子) 사진작가 어머니, 밥부처와 희생의 아니마              육  근  종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며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자신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할 때 이기주의가 남게 되고 나보다 너를 사랑할 때 이타주의의 헌신적인 사랑이 태어나는 것이다.  김영남의 이 보여주는 극명한 대립과 반전은 어머니의 위상을 돋보이게 만든다.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도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중략) 그런다고 그런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 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으로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그렇게 아버지가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이 세상까지 모두 흡수해버리는 포용력 큰 불발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김영남   2002.3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지만, 그 힘은 날로 증대되어 여성상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변화되었다. 억압되어 있던 불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분출되어 언어능력이 상대적으로 발달된 여성들이 남성의 생각과 행동을 제어하고, 심지어는 이 시에 드러나듯이 가공할 파괴력을 갖고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억압은 댐과 같아서 저장량이 클수록 댐이 무너질 경우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듯이 억압력이 약화될 때에 자신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을 파괴시킨다. 우리의 '아줌마'들이 보여주는 저항력은 남존여비의 풍조가 낳은 부산물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아직도 전통적인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순종과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김영남의 어머니가 드러내는 '포용력'일 것이지만, 이 포용력은 비록 김영남의 어머니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아줌마가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하게 될 때에 보여주는 인내력은 가공할 '파괴력'보다 강한 것은 동서 고금을 떠나서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본성일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 속에든 자신의 밖에든 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어머니의 역할이 배제되거나 포기되었을 경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모자 혹은 모녀 사이에는 심신 양면으로 혼연일체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어머니의 위대성이 살아 숨쉬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즉 어머니가 위대하다는 것은 지적이건 경제적이건 어느 한 측면에서의 능력의 비범함이 아니라, 혼신으로 사랑하는 전인격적 정열의 아름다움을 두고 이르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영남이 노래하는 어머니의 포용력은 그만의 어머니의 인내심이나 관대함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너그러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전근대성을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콤플렉스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배용재는 개체성과 특수성이 사라진 어머니의 모습을 노래한다.  갑자기 엄마가 쓰러지자 지탱하던 풍경들이 무너져 내린다. 정신없이 달려간 응급실에는 착한 고통들만 정직한 목소리로 아우성치고 있을 뿐,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애를 써도 엄마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이 탈지면처럼 하얗게 탈색된다. 수십 년 동안 그냥 엄마였던 엄마, 손발에 못이 박히도록 눌러버렸던 꿈들과 낡은 가죽천막처럼 헐렁한 몸에서 허기진 욕설만 텅텅 울려나올 때까지 숨죽이며 엄마 뒤에 숨어있던 또 다른 이름 하나가 온몸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한겨울 화장품 가방을 메고 수십 리를 돌아와 불쑥 들어오며 야단을 치시던 엄마 (중략) 쓰러지자마자 꿈으로 뒤덮여 버린 엄마 엄마는 까마득한 풍경이 된다 (중략) 두 번 다시 엄마의 이름을 갖지 않으려 자궁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얼음을 채우는지도 몰라 자꾸만 미세해지는 엄마를 가만히 불러본다 고정될수록 경건해지는 꿈의 신전, 낯선 이름의 문패가 선명해진다.        배용재 2002 봄 병원 응급실로 숨가쁘게 달려가게 될 때가 되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이성은 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위급하게 되어 찾아간 응급실의 명패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 아득한 일이 되는 경우도 그런 사정 때문이다. 시인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묻는다.  엄마는 그냥 '엄마'였을  뿐이지 고유명사로 불러보는 김간난이나 오춘자 등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름들은 엄마의 개별성을 지칭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엄마들과의 차별성을 위하여 조작적으로 임시로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엄마라는 이름의 역할과 본성이지 개별자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조작적인 이름이 중요해지는 응급실에 들어서서 잊어버린 이름을 기억해 내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아들의 당황스러움은 다만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이름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대 때문에 어머니라는 역할인격 속에 갇혀 지내야 했던 망각 속의 한 개별자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냥 엄마였던 엄마'라는 이름 속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하여 화장품 가방을 메고 수십 리를 돌아다녀야 하고, 자식들에게 야단을 치기도 해야 하는 희생적인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런 희생은 잘 감내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자궁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얼음을 채우는지도 몰라'라고 노래한다. 자궁을 도려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어머니가 되기를 포기하는 행위인 것이다.  어머니이기를 포기하고서야 진정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내야 했던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남게 되는 어머니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이 한 개인으로서의 어머니일 뿐임을 배용재가 노해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자아성취가 강조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타인과의 관계가 상실된 오롯한 개체만으로서는 의미 있는 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군가와의 관계가 아름답게 이루어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역설 속에서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가 아름답고 진정한 어머니일 수 있는 자리가 이처럼 역설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함을 노래하는 배용재와는 달리 고재종은 어머니가 노래될 수 있는 가능성조차도 의문시 한다. 어머니를 노래할 수 있는가 함박만한 대바구니를 넉 죽씩이나 이고 검정고무신에 감발을 한 채 시오리 오일장마다 눈얼음길을 지치던  그러고도 점심 한 그릇 값이 모자라 탁배기 두어 잔의 요기로 돌아와선 허청허청 마루에 보리쌀 몇 되를 부리던 어머니를 노래할 수 있는가 (중략) 그러나 그 피눈물로도 다 못 씻긴 자식들 남의 집살이로 공돌이로 노가다로 내다 팔곤 뒤란 밤나무에 목을 매다 떨어졌던 어머니의 산발 머리는 여전한데 (중략) 친정아비를 빨갱이로 둔 죄 값으로 땅 한 뙈기 없는 술주정뱅이에게 시집와 머리채 잡히고 등허리 밟혔을 뿐인 어머니의 폭폭한 사랑을 웬수같던 영감은 들어주고 들어주는가 (중략) 시 한 편에 혹은 무고료의 시인이 되어 세상 등쌀에 시달리다가 하루 이틀쯤 곡기를 끊을 뿐인 내가 어머니 이제 절이라도 좀 다니세요, 했다가 밥이 부처여! 빽 고함치는 소리에 그 무정천리 깊어진 죄 많아 팔순 역정의 장편 서사를 도대체 노래하긴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고재종 2002 봄 배용재의 어머니나 고재종의 어머니의 역할이 가난으로 인하여 가장의 역할을 함께 떠맡아야 하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고재종이 노래하는 어머니는 보다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배용재가 노래하는 어머니가 인식론적 태도 속에서 드러나는 반면에 고재종이 노래하는 어머니는 보다 윤리적 태도를 바탕으로 드러난다.  '밥이 부처여!'라고 고함을 지를 수 있는 어머니의 '깊어진 죄'를 화자는 집어내지만, 그것이 과연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은 죄가 될 것이지만, 어찌 그런 이름으로 어머니의 모든 발언이나 행위가 한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시인은 묻는다. '도대체 노래하긴 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노래는 어쩔 수 없이 의미화를 벗어날 수 없고, 의미화를 벗어날 수 없게 되면 삶은 단지 그 형해만을 남길 뿐 오롯이 노래될 수 없는 것임을 고재종은 곰씹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재종이 '어머니를 노래할 수 있는가'라는 전제를 두고 어머니의 삶의 편린들을 바탕으로 하여 내린 결론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노래와 침묵의 관계를 잘 성찰한 뒤의 것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또한 어머니를 노래하면서 우리는 어느 만큼 객관적일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심리학에서 말하는 성숙한 인격이 모성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어머니를 노래하는 시인들 중에 과연 그런 성숙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아마도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성숙한 태도로 노래할 수 있는 이는 신을 제외하고는 없으리라고 본다. 옛 선사가 부처를 '마른 똥막대기'라고 하였다지만, 밥이 부처라고 소리칠 수 있는 어머니야말로 대갈일성의 화두를 내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이렇게 고함을 칠 수 있는 밥부처는 아니겠지만 생존의 진리를 체현한 어머니들이야 우리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만큼 희생적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들의 생활철학이 곧 화두이자 진리에 다가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양애경이 노래하는 어머니의 노기는 겉으로는 사회를 향한 어머니의 권리장전처럼 보인다. 아버지사 가진 것 없는 시골 선비였지만 어머니는 경기도 포천 천석꾼의 막내딸 그럼 뭐하나 외할아버지는 딸들에겐 땅 한 뙈기 나눠주지 않은 걸 기름기 흐르는 경기미 쌀밥과 그 지방에서만 나는 커다란 알밤도 어머니 이야기 속에서만 들은 기억 (중략) 칠순을 넘어선 어머니 집안에선 제일 항렬이 높지만 종중의 산이 관광지 개발로 수용되자  막대한 돈을 남자들끼리 나눠먹으며 시집간 여자는 그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다 아니 시집 안 간 여자까지도 그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다 서얼 자식도 있고 외지에서 들어와 같은 성이라고 하면서 머슴 살던 사람 손주의 손주까지 권리를 찾는데 그 산 사놓으신 내 아버지의 딸인 나는 왜 권리가 없느냐고 어머니 무릎 아파 절뚝거리며 다니시지만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돈 없고 빽 없기는 시 쓰는 나도 마찬가지 가진 것 없이 자존심 강한 것도 대물림일까 노한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나는 속으로 샐쭉 웃는다.        양애경   2002년 봄 이 시가 보여주는 갈등은 성차에서 비롯한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상실된 상속권을 되찾으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법 앞에서 한낱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다 함께 겪어야 하는 남성의 그늘에 가려진 운명을 노래한다.  출가외인이라는 고정관념에 맞서서 상속권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대하는 딸의 태도에서 또 하나의 작은 갈등이 빚어진다. 제도라는 거대한 바위에 홀로 달걀을 던지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한편으로는 위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속으로 샐쭉' 웃는 시인은 어머니를 넘어선 자리에 위치한다.   이 시의 주제가 다소 모호한 울림을 전하는 것은 어머니의 분노를 소시민의 탐욕이 좌절되면서 나타나는 부정적 대응으로 처리하려는 듯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어머니의 아픔을 제도에 의한 상실된 권리에서 찾지 않고 어머니의 분노의 대상인 돈에서 찾으려는 관점이 문제인 듯 싶다.  이 시의 제목이 '내 어머니 파평 윤씨'로 되어 있는 점에서 시인의 태도의 일단이 암시되는 듯 싶기도 하다. 벌열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파평 윤씨가 강조되는 것 자체가 문벌 내의 부조리한 현상으로 못 박아두려는 기도를 숨기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곧 시인은 이 일이 파평 윤문(어머니를 출가외인으로 만든)의 일이며, 어머니의 욕망충족이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어머니일 수 있는 것은 실은 윤씨를 고집할 때가 아니라, 양씨의 보호자로 온전히 설 때라고 한다면 시인의 샐쭉거리는 웃음은 어머니의 모호한 성씨를 즐기려는 아이러니스트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 시인이 어머니의 이름을 갖게 될 때 어떤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인지도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일날 아침 미역다발을 물에 담근다 툭 마른 삶 부러지던 소리 멈추고 녹아 사라질 생의 꿈이 파랗게 부풀어 오른다 (중략) 깨끗이 한 사발 들이키면 몸 속 바닷길을 미끄러져 간다 어머니에게로 간다      김상숙   2002 봄 자신의 생일날 먹는 미역국은 실은 어머니가 먹어야 하는 국이지만, 그것을 기념하여 자신이 먹는다.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먹는 미역국을 해마다 먹는 까닭은 어머니를 잊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의 삶을 내가 살아보기 위해서이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다. 출산과 미역국의 관계는 기능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김상숙은 이런 미역을 싱싱하게 살아 있게 만든다. 불이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반면에 물이 생성과 삶을 상징한다. 물에 담긴 마른 미역은 푸르게 살아나서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가 되어 그것은 생명수인 젖이 되어 우리와 어머니를 하나로 이어준다. =============================================================       소녀상 ―송영택(1933∼) 이 밤은 나뭇잎이 지는 밤이다 생각할수록 다가오는 소리는 네가 오는 소리다 언덕길을 내려오는 소리다 지금은 울어서는 안 된다 다시 가만히 어머니를 생각할 때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듯 내가 별을 마주서면 잎이 진다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서 또 가까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여름이 끝나간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누구든 직감하고 있다. 직감할 뿐만 아니라 기다린다. 가을은 서둘러 와서 우리의 뜨거운 이마를 식혀줄 것이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줄 것이고 차분하고 고독한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송영택 시인의 ‘소녀상’은 그런,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읽기에 더없이 적절한 작품이다.     시를 보자. 낙엽이 지고 있는 것을 보니 가을이 무르익었다. 게다가 가을 더하기 홀로 있는 밤이라니, 이런 시간은 가을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별 아래, 낙엽 아래 누군가가 너를 기다리며 머물러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이 더해져서 고적하기 짝이 없는, 진정한 가을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시를 쓴 송영택 시인은 1930년대에 출생한 시인이다. 그는 가을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한 시인인 릴케의 가장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송 시인은 평생 시를 썼고 단 한 권의 시집만 냈다고 한다. 여러모로 독특한 이력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총 6편의 ‘소녀상’을 썼는데 여기 실린 작품은 그중에서 첫 번째 작품이다. ‘소녀상’을 창작할 때 시인은 가을의 노래가 되라고 만들었을 것이다. 가을의 노래로 썼으니 가을의 노래로 소개했지만, 자꾸만 가을보다는 한 ‘소녀상’의 노래로 읽히는 것은 시인의 탓이 아니라 시대의 탓이다. 울고 싶은데 어머니를 생각하며 참고 있는 어린 소녀의 동상을 우리는 무척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가을에는 그 소녀들을 다시 생각하기를, 이 시는 또 다른 독해를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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