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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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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미국 시인 - 빌리 콜린스 댓글:  조회:4497  추천:0  2016-11-28
 Introduction to Poetry  / Billy Collins   I ask them to take a poem and hold it up to the light like a color slide or press an ear against its hive. I say drop a mouse into a poem and watch him probe his way out, or walk inside the poem’s room and feel the walls for a light switch. I want them to water-ski across the surface of a poem waving at the author’s name on the shore. But all they want to do is tie the poem to a chair with rope and torture a confession out of it. They begin beating it with a hose to find out what it really means.  시문학 입문  / 빌리 콜린스 작      나는 그들에게 시 한 편을 집어  컬러 슬라이드처럼  빛을 향해 들고 있든지  아니면 시의 벌통에 귀를 밀착시키라고 한다.  나는 생쥐 한 마리를 시 속에 떨어뜨려  놈이 길을 헤쳐 나오는 것을 관찰하든지,  아니면 시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  벽을 더듬어 전등스위치를 찾으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수상스키를 타고  시의 수면을 가로지르며  해변에 있는 작가의 이름에 손을 흔들기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밧줄로 시를 의자에 동여매고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호스로 시를 후려치기 시작한다.  진짜 뜻이 무엇인지 캐내기 위해.     [작품읽기]     빌리 콜린스의 「시문학입문」은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시의 세계에 입문시키지 못한 문학교수가 결국 시를 쓰게 되는 이야기다. 이 시의 매력은 강의실에서 실패한 듯한 화자가 실은 시에 대해 매우 독특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비범한 선생님이라는 데 있다.   대학의 어떤 입문 과목이든 가르치는 이가 배우는 이들에게 반드시 제공해야 할 공통적인 서비스가 있다. 그것은 "입문"이란 말 앞에 붙는 단어에 대해 명쾌한 정의(定義)를 내려주는 일이다. "철학입문"이면 철학이 무엇인지, "경제학입문"이면 경제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능한 한 똑 부러지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학문이란 궁극적으로 정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콜린스 시의 화자는 시문학입문을 강의하면서 시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학생들에게 일련의 해괴한 주문만을 할 뿐이다.     우선 다짜고짜 시를 슬라이드인양 집어 들어 빛에 비추어 보라고 한다. 황당한 주문이다. 세상에 시를 집어 들라니? 시는 읽는 것이라는 통념을 전복시키는 불량한 명령이다. 그러나 시를 읽으려면 시집을 집어 들어야 하니 수긍이 전혀 가지 않는 명령은 아니다. 정작 난해한 것은 시를 컬러 슬라이드처럼 취급하라는 부분이다. 잘 인화된 벨비아 포지티브 필름을 프레임에 넣어 그 이미지를, 빛상자와 루페없이, 자연광을 통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할 것 같다. 인화된 슬라이드 필름은—특히 풍경 사진일 경우—앞면과 뒷면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손에 잘못 들리면 뒤집힌 사진을 보기 십상이다. 또한 최상의 화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슬라이드 표면에 지문이 묻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슬라이드를 막무가내로 아무 빛에나 들이대서도 안 된다. 빛의 종류와 강도에 따라 슬라이드의 색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눈이 시릴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필름에 맺힌 상을 빛이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시란 그렇게 조심스럽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 요구가 번거롭다 싶으면 시의 벌통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억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소리를 정밀하게 수용하라는 소리다. 내가 조용해야 들리는 소리다. 그 소리는 단일한 윙윙거림이 아니라 윙윙거림 속의 다양함이다. 시란 그렇게 듣는 것이다.     화자는 생쥐를 시 속에 떨어뜨리고 녀석의 탈출을 관찰해 보라고도 한다. 시가 어떻게 생겼길래 거기에 생쥐를 떨어뜨릴 수 있단 말인가? 화자에게 시는 크레타섬의 미궁(迷宮)처럼 이카로스의 날개가 있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물이 아니다. 문자로 짜여진 시의 미로는 생쥐 같은 집요한 성실함이 있으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탐험의 대상인 것이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생쥐기사 리피칩의 모험이 펼쳐지는 곳과 같은, 거칠기는 하지만 용기있는 영혼이 압도되지 않는 곳이 시의 세계다.     생쥐한테 영감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면 시의 방으로 몸소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을 켜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는 일은 학생들의 몫이다. 화자는 이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암흑 속에서 하나의 벽이 아니라 여러 벽을 더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가장 절묘한 부분은 전등스위치가 이 방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귀중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시의 가치란 탐욕스런 자에겐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또 다른 바램은 학생들이 수상스키를 타듯 시의 표면을 날렵하게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얼마나 빠르게 잡아끄는 스키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시인들이 끌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이름은 해변에서 학생들의 손짓을 기다릴 뿐이다. 괴로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 심각한 시가 있는 것은 심각한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읽어서 재미있어야 한다. 왜 재미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아무리 위대한 시와 시인도 내가 읽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시 읽기는 주체적인 영혼의 즐거움을 향한 스릴 넘치는 공간이동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기발한 요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안타깝다. 그들에게 시란 변장과 변신에 능한 흉악범에 불과하다. 그들은 시란 놈이 또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꿔 일을 힘들게 만들기 전에, 놈을 체포하여 고문을 해서라도, 그 진짜 정체를 밝혀내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 시란 흠씩 얻어터져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 질긴 놈이다. 그러나 시가 좀처럼 자백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자기의 정체를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호스를 집어 들어 시를 후려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한때는 착했지만 이젠 사악한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무고한 시민에게 몹쓸 짓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시험 문제로 둔갑할 시를 위해 시어와 시행에 밑줄을 그어가며 그 뜻을 외우라고 강요하는 사악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제넘은 일일까? 누군가 대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 1941~)      뉴욕 태생의 미국시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계관시인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뉴욕시립대학교(CUNY) 레먼 칼리지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9/11사태 희생자들을 추모하여 "이름들"(The Names)이라는 자작시를 계관시인의 자격으로 국회에서 낭송했다. 콜린스는 다양한 여러 인쇄 매체에 자신의 시를 발표해 오고 있으며, 자신의 시집을 낭송한 녹음 CD를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 스티븐 던은 콜린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빌린 콜린스의 시는 우리가 현재 어디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가는 방향을 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도착하는 곳에 나도 도착하고 싶다. 열등한 시인은 그럴지 몰라도, 콜린스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우리가 명료하게 엿듣도록 허락한다."   출처 :우리시회(URISI)    ///@@@@\ 몇 년 전, 시 낭송회를 위해 영국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내가 특별히 전형적인 미국 시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손수 구성한 낭송회 일정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고등학교 교실, 브라이튼에 있는 재즈 클럽, 쉐필드 대학 단과 대, 그리고 요크셔에 있는 조그마한 동네 마을회관에 이르기까지 배경의 폭을 넓혀 보았다. 마지막 장소였던 마을회관에서 낭송을 마치고 질의응답에 들어갔을 때, 농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 시는 ‘전부’ 산문으로 쓰여졌나요?” 사실 청중이나 장소와는 상관없이 매번 낭송을 할 때마다 내 시는 영어가 아니라 미국어로 쓰여졌다는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낭송회마다 “eggs over easy(한 번 뒤집어 노른자만 빼고 양쪽을 익힌 계란)” 또는 “sweat the final(땀이 날 정도로 걱정하다)”처럼 미국에서만 쓰는 표현이 언급될 때면 여지없이 청중이 고개를 갸우뚱 하는 듯 했다. 그리고, 시 내용에 “a state flower(주를 상징하는 꽃)”라는 표현이 나왔을 때 내 발음 때문에 영국인들 귀에는 틀림없이 “estate flower(저택의 꽃)”로 들렸을 것이다. 미국의 관용표현은 독일어나 불어 뿐 아니라 영국 영어로 번역하기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을 떠나보지 않으면 미국인이라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듯, 영국 청중을 몇 번 대면하고 나서야 나의 미국적 목소리, 소위 나의 문어체 억양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유행어 사용이나 동시대 문화 언급을 피하려 애써왔기에 내 시에 얼마나 많은 미국 관용표현이 사용되었는지 알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frequent flyer(항공사 상용고객)”이나 “hatch-back(해치백)”, 또는 “Jello shot(젤로 샷)”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내 시도 금새 구식이 되어버려 소위 유통기한이 짧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유통기한(shelf life)’이라는 표현도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보편적인 어휘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렇다고 “rock(바위)”, “cloud(구름)”, “sky(하늘)”, “tree(나무)”같은 완전 기초 단어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며, 기본 어휘를 사용하는 방향에 무게를 두고 웬만하면 오늘날 언어 소식은 반영하지 않으려 했다. 시는 “언제나 새로운 소식”이라는 에즈라 파운드의 정의가 내가 말하려는 바를 간결하게 대변해준다. 그리고, 시인이 독자나 청중을 고려해 글을 쓸 때는 “지금부터 수 백년 후 머나 먼 나라에 태어난 이방인을 위해 써야 한다”는 메리 올리버의 조언도 깊이 받아들였다. 나는 미래의 이 이방인을 내 독자에 포함하고 싶었고, 이 사람이 “Wonder Bread(원더브레드)”나 “Big Mac(빅맥)”이 무엇인지 몰라 주석을 참고하는 일이 없게 하고싶었다. 물론 미국은 단순한 관용표현의 집합체보다 큰 개념이다. 하지만 국제 무대에서 시인 몇 명을 선정해 이들에게 ‘당신의 시와 당신 국가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모국어를 중심으로 대답 할 것이다. 시인 체스와 미워시(Czeslaw Milosz)는 폴란드어의 폭 넓은 표현 가능성을, 야니스 리초스(Yannis Ritsos)는 현대 그리스어로 시를 쓸 때의 느낌을 논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 시인은 현재 가장 빨리 확장되고 있는 다른 영어 공동체와 언어를 공유하기 때문에 영어를 ‘독점’ 모국어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모국어가 아니라면 작가는 어디서 자신의 국가성을 찾을 수 있을까? D.H.로렌스는 이 질문을 다소 도전적 어조로 던지며 ≪미국 고전문학 연구,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를 시작하고 있다. “진정한 미국성이라. 이 새로운 새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이 새 시대의 난쟁이를 보여달라. 제발, 보여달라. 유럽의 꾸밈없는 눈으로 바라볼 때 미국에는 일종의 유럽 이단아 밖에 보이지 않으니.” 나는 로렌스가 유럽의 눈을 “꾸밈없는(naked)”이라 묘사한 것이 의아하다. 유럽의 눈을 가리고 있는 현학적 렌즈, 현학적 꾸밈에 비교할 때 미국의 눈이 오히려 꾸밈없는 눈이 아닐까? 그리고, 처음으로 그 꾸밈없는 눈으로 미국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 우리 앞에 꾸밈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시인은 월트 휘트먼이었다. 로렌스는 휘트먼을 새로운 미국문학의 선구자로 인정했다. 같은 정도로 휘트먼의 전우주적 몸짓을 조롱하고 연민을 꾸며내고 있다는 비난을 쏟아내지만, 로렌스는 휘트먼이 “가장 위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미국의 교사... 최초의 백인 토착인”이라 쓰고있다. 휘트먼은 벌목꾼, 장관, 에스키모인 모두를 사랑으로 가득찬 소우주에 포용하기 위해, 미국 시인 최초로 자신의 두 팔로 북미대륙 전체를 감싸 안은 시인이 분명하다. 일부 시인과 점점 더 많은 소설가들이 스스로를 지역 작가로 규정하고 있지만, 뉴욕 롱아일랜드 출신인 휘트먼은 이를 거부했다. 무엇보다 휘트먼의 진정한 토착정신은 정통 영시의 운율인 약강격(弱强格)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 ≪풀잎, Leaves of Grass≫은 영국의 약강격이 아니라 성경 운율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장시가 전통 운율과 형식에서 어찌나 급진적으로 탈피했던지 이 작품을 진정 시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의까지 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 논의는 “이 작품이 시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분명 시보다 더 위대한 무엇이다”는 어느 교수의 말과 함께 일찍이 끝났어야 했다. 이상하게도 자유를 표방하는 휘트먼의 선창을 따르는 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로렌스의 말을 인용하면, “휘트먼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시인 이전에는 선구자가 되어 아직 개척되지 않은 삶의 광야로 걸어간 휘트먼이 있다.” 결국 미국 시가 휘트먼을 쫓아오긴 했지만 이미 그의 세기가 다 지난 후의 일이었다. 1920년대 초, 로렌스가 미국 시를 평가할 무렵 오늘날 현대 시로 인정 받는 다수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聯, stanza)이라는 답답한 통에서 뛰어나와 약강격이라는 마구(馬具)를 떨쳐버린 것이 당시 시인들의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물론, 요즘은 “자유시”가 예전처럼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어수선하고 서툰 시에 대한 변명으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많다. 비단 미국 시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휘트먼이 남긴 교훈 중 이보다 강력하고 까다로운, 하지만 사라질 줄 모르는 가르침은 그의 ‘괴이함(outrageousness)’에 있다. “이제 내 자신을 설명해야 할 시간, 우리 모두 일어섭시다”나 “세계의 지붕 위로 내 거친 고함을 던지노라” 같은 휘트먼의 대담한 시구(詩句)가 있었기에 긴즈버그가 “아메리카, 내 괴상한 어깨를 수레바퀴에 넣으리”라 노래하고 프랭크 오하라가 “아 점심! 내가 미쳐가고 있는 듯 하군”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없었던 휘트먼의 대담한 새 목소리가 유럽의 ‘고결함’이라는 유리를 깨트렸고 마침내 후대 미국 시인들이 좀 더 야성적인 어조로 고함칠 수 있는 힘을 실어주었다. 만일 작가가 자신이 받은 영향의 총체라면 내 시는 분명 영국과 미국 시, 그 음과 형식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때로 반어적 효과를 위해 나는 두 어조를 서로 싸움 붙이기도 한다. 내 자신을 ‘미국 시인’이라 생각하고 위험하지만 내 문학을 스스로 비평 해 본다면 내 시 중 상당수가 유럽의 영향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미국 특성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미국 소네트(American Sonnet)”라는 시는 이탈리아와 영국의 소네트 모형을 버리고, 소네트처럼 제한된 공간에 표현해야 하지만 한쪽에는 언어 한쪽에는 사진이 있는 미국의 우편엽서를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미국 시인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우리”라는 독특한 시작을 보이고 있다. 미국 소네트 우리는 페트라르카처럼 말하지 않고 스펜서처럼 모자를 쓰지도 않네 조심스레 일군 밭뙈기 고랑처럼 열 네 줄로 되어있지도 않네. 우리 그림엽서는 휴가에 대한 시 조그마한 방에서 우리 노래를 부르라 하고 계량컵에 우리 감성을 쏟아 부으라 하네. 우리는 폭포나 호수의 등에 글을 쓴다네 엘리자베스 시대 여인네의 태양중심 시야 만큼만 전통적인 짧은 글을 더한다네 우리는 날씨를 표현 할 형용사를 찾고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네 그대가 여기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표현한다네 그리고 우체통에서 돌아오며 그대가 있는 곳에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숨긴다네, 그대는 고개 숙인 채 손에 잡은 얇은 글을 읽겠지 멀리 떨어진 이곳의 한 조각, 백사장 해안의 한 폭 성당 광장이나 뾰족탑은 그대가 있는 친숙한 곳으로 갈 것이라네 그리고 그대는 이 양면의 표현을 테이블 위에 던져 둘 것이네 우리가 배회한 몇 제곱 센티미터를 응축된 우리 감정을 첫 부분에 나오는 문학에 대한 아이러니한 표현은 시가 이어지면서 떨어져 있음, 거리, 갈망의 아기자기한 드라마로 이어진다. 이 시는 아이러니와 감정을 균등하게 혼합하여 완벽하게 모호한 어조를 창출하려 애쓰지만, 물론 실패다. “위안(Consolation)”이라는 시는 전통적인 유럽식 휴일을 보내기보다 미국에 있는 자기 집에서 여름을 보내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탈리아로 여행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로 시작한 시는 “친숙한 이곳 거리 / 모든 도로 표지판과 내 동포의 갑작스러운 손동작 / 모두 내가 아는 것이라네”로 이어진다. 화자는 “얼음이라는 단어를 몰라 카페에 구부리고 앉아있기 보다” “친근하게 돗(Dot)이라 부르는 여종업원이 있는 커피숍”을 선호한다. 이곳에서는 주인의 요청 때문에 굳이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되고 돈을 낼 때 환율을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화자에게는 “마치 영어라는 위대한 / 자신의 차에 다시 올라 / 시끄러운 모국어 경적을 울려대며 / 로마도 볼로냐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을 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시는 월리스 숀이 영화 ≪앙드레와의 저녁식사, My Dinner with Andre≫에서 맡은 인물의 감상적 지역주의를 상기시키는 화자의 취향을 통해, 문학의 유럽 중심주의를 조롱하는 반항이라 할 수 있다. “틴턴사원 삼천 마일 위에서 쓴 시”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워즈워드의 유명한 자전적 시를 화자의 미국 삶, 집에서의 삶에 도입하여 이 “미국화” 과정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나 여기 왔었고 지금 나 여기를 다시 찾았노라는 말은 우리 삶에 비가 오듯 시에 자주 언급되는 말이다. 양이 흰 점을 이루며 서 있는 언덕, 민둥산 꼭대기 키가 큰 한 줄의 나무, 시인은 영국의 경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배낭에 치즈 조각과 동화책을 챙겨 넣고 짙은 바바리아 숲 그림자를 밟으며 우울하게 걸어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느낌은 항상 똑같다. 처음이 더 나았다 예전 같지 않다 그 때만큼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백조, 호수 표면의 반짝임, 작지만 중요한 느낌, 언제나 무엇인가 빠져있다 아니면 훌륭한 특색이 퇴색해 버렸다. 전에는 하늘이 더 깊은, 더 고차원적 파랑이었고 구름은 성당 같았다. 물은 더 큰 희망을 품고 바위 위로 부서졌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조끼를 입은 가여운 작가가 현기증이 날 듯한 유년기의 빙산을 회상하고 정처 없이 잡초의 들판을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오래 전 죽은 시인들이 바다를 향한 절벽에서, 강둑에서, 건초더미 옆에서, 그림자 진 관목 숲에서 스러져가는 자신들 삶을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호스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성냥이 언제나 불에 대한 짧은 연설을 하듯 시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환멸을 들었다. 마침내 우리가 책을 내려 놓고 뒤로 기댄 채 활자 때문에 따끔거리는 눈을 감고 잠의 책갈피를 끼워 넣는다. 저녁 먹기 바로 전 잠에서 깨어나면 주변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그 정도는 배웠으리. 관처럼 생긴, 이 긴 방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으리, 벽과 창은 이제 서로 다른 잿빛 그림자일 뿐. 이가 빠진 테라코타 화병에는 한껏 꾸민 치자꽃이 고개 숙이며 서 있고 마루 바닥에는 신발, 양말, 갈색으로 변한 사과 조각. 몇 시간 전, 낮잠 자기 전의 찬란한 과거, 점심 먹은 직후쯤 막을 내린 그 황금시대, 예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으리. 불평을 늘어놓는 19세기 영국과 독일 시인을 한 덩어리로 처리한 점에서 볼 수 있듯, 수정주의자인 화자는 상실감이라는 낭만주의 시대 주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이 상실감을 처음 집에 접목시킨 부분은 정원의 호스와 성냥 이미지를 사용한 곳이다. 평생을 담은 자전적 시간은 압축되어 점심과 저녁 사이 몇 시간으로 바뀌고, “바다를 향한 절벽”, “건초더미”, “관목 숲” 같은 풍경은 시들어가는 꽃, 신발과 양말이 흩어져 있는 평범한 방으로 압축된다. 낭만주의 시대 고뇌는 독자의 피곤함으로 변형되고, 이른 오후에 이미 황금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 무엇이 시를 미국적으로 만들어주는가? 학교 교과서에서 흔히 말하듯, “구세계” 시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이 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의 시는 그 관용표현, 풍경, 유럽 과거에 대한 불경, 대담한 자만, 반어적 태도, 고정된 운율에 얽매이지 않음,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다양성 때문에 미국의 시가 되는 것이다. 거대한 다양성, 그 민주주의적 확장과 포용성은 루이스 심슨이 쓴 짧은 시에 잘 나타나있다. 그의 시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 해 본다. 미국의 시 그것이 무엇이든, 고무, 석탄, 우라늄, 달과 시를 소화할 수 있는 위가 있어야 하리. 상어처럼 지느러미를 지닌 채 인간의 소리인 듯한 울음을 울며 사막을 가로질러 먼 길을 헤엄쳐 가야 하리 참고: “미국 소네트”와 “위안”은 2001년 랜덤하우스에서 출판한 빌리 콜린스 시집 ≪방에서 홀로 항해하며, Sailing Alone Around the Room≫에 수록되어 있다. “미국의 시”는 ≪트인 길 끝단에서, At The End of The Open Road≫에 수록 되었으며, 저작권자인 루이스 심슨의 승인을 구해 수록했다. [작가소개]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는 2001년 랜덤하우스의 ≪방에서 홀로 항해하며, Sailing Alone Around the Room≫, 1998년 피츠버그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어 패터슨상을 수상한 ≪소풍과 번개, Picnic, Lightning≫, 1988년 아칸사대학 출판부에서 펴 낸 ≪파리를 놀라게 한 사과, The Apple That Astonished Paris≫를 포함해 지금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1991년 윌리엄 모로우가 출판한 ≪천사에 대한 질문, Questions About Angels≫은 에드워드 허쉬가 전국 시 시리즈 경연대회 출품작으로 선정한 작품이다. 시 모음집 ≪아홉 필의 말, Nine Horses≫은 금년 말에 출간 될 예정이다. 콜린스의 시는 명작모음집과 교재 뿐 아니라 포이트리, 아메리칸 포이트리 리뷰, 하퍼, 아틀란틱 먼슬리, 아메리칸 스칼라, 파리 리뷰, 뉴요커 등 다양한 간행물에 수록되었다. 뉴욕예술재단, 국립문예기금,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재단의 지원을 받았으며, 포이트리 잡지가 수여하는 베스호킨상, 프레데릭 도서상, 오스카 블루멘탈상, 우드상, 레빈슨상을 수상했다. 홀리크로스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대학(리버사이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시립대인 리먼대학에서 영문과 명예석학교수, 사라로렌스 대학 방문작가, 콜롬비아대학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2001-2003년 미국 계관시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현재 건축가인 부인 다이앤과 함께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에 살고 있다. ///@@@@\\\...   첫 꿈  / 빌리 콜린스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불어오는 밤 잠의 문전에 기대어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꿈을 꾸었던 사람을, 첫 꿈에서 깨어난 날 아침 그는 얼마나 고요해 보였을까, 자음이 생겨나기도 오래 전 짐승의 표피를 몸에 두른 사람들이 모닥붙 곁에 모여 서서 모음으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아마도 슬며서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깊은 곳을 내려다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가지 않고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단 말인가, 홀로 생각에 잠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돌로 쳐 죽인 뒤에만 만질 수 있었던 짐승의 목에 어떻게 팔을 두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살아 있는 짐승의 숨결을 어찌하여 그리 생생하게 목덜미에 느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 한 여인에게도 첫 꿈은 찾아왔으리라. 그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홀로 있고 싶어 자리를 떠나 호숫가로 갔겠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젊은 어깨의 부드러운 곡선과 가만히 고개를 숙인 모습이 몹시도 외로워 보였을 것이라는 것 뿐, 만일 당신이 거기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녀를 보았더라면 당신도 그 사람처럼 호숫가로 내려갔으리라. 그리하여 타인의 슬픔과 사랑에 빠진 이 세상 첫 남자가 되었으리라. --------------------------------------------------------------------------------------------------------------------------- 우리 각자는 시원의 인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고고학적 발견에 의존하여 과학적 추리를 한 것을 받아들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극히 일부의 면만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인간,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빌리 콜린즈라는 이 미국 시인은 우리의 진부한 상상이나 흔한 추측과는 상당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인류 최초로 꿈을 꾼 남자라는 다소 동화같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의 원시인류관을 피력하는 것이다. 최초로 꿈을 꾸었던 남자와 여자는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사색하며 꿈을 반추하고 있고, 꿈 속에서 짐승의 숨결을 느꼈던 아름다운 순간, 즉 자연과 교감했던 순간에 감탄하며, 또한 집단에서 잠시 물러나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사색하며 외로움을 느끼며 또 서로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인간답고 자연스러운 생활을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의 견해가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얼마나 근거가 있는가에 대해선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마찬가지로 역시나 근거 없는 오늘의 우리의 인류 진보사관에 역시 우리 또한 너무 빠져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작가는 시원의 인류에 대한 작은 추측을 통해 우리의 오만과 진보에 대한 지나친 믿음, 그리고 인류의 과오를 은근히 비판하면서도 또한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를 펼치는 놀라운 글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은 이룩한 것 못지 않게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성, 대자연, 삶의 가치들과 의미들...... 아마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짚어냄으로써 인류 진보의 믿음이라는 허상을 고발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특히 도시의 삶은 정말 가치와 의미를 찾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간직하거나 회복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훌륭한 시인 듯 하다. 스콜라 지식블로그,
1882    詩는 언어로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절규하는것... 댓글:  조회:3877  추천:0  2016-11-28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는 이 녀석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한 커플의 모습과 비교해 보니 그 크기가 더욱 실감...위 거북의 이름은 '장수거북'. 등딱지 길이만 1.2~2.5m이며, 몸무게는 650~800kg로 지구상에 사는 거북류 중 가장 크다고..... /////////////////////////////////생명력있는 시를 쓰려면 (신경림 ,문학 회고록) 4.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먼저 외쳐야 사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25시」를 쓴 게오르규가 한국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1975년도에는 김지하 시인이 사형 언도를 받고 투옥되어 있을 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지하는 꼭 죽인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죽인다고 언명을 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꼭 죽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 때였습니다. 그럴 때 게오르규가 정부 초청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세계적인 명작을 쓴 작가가, 그런 상황 속에서 정부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온 걸 보고 뜻 있는 이들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그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인 시공관에서 '시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잠수함이 바다 밑으로 들어갈 때는 토기를 가지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토끼가 수압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못 견딜 수압이 되면 토끼가 먼저 소리를 지릅니다.' 즉 게오르규는 정치적으로 억압 상황,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등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못 살겠다고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곧 시인이라고 은연중에 말했습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은 얘기하지 않고 말한 겁니다. 비록 정부의 초청으로 왔지만 마음먹고 한 마디 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어느 일본 시인은 '시에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못 살게 되었을 때, 환경이 나빠졌을 때, 도덕적 타락 현상이 만연되었을 때 못살겠다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 시인이라는 건데, 그때 저는 크게 공감했습니다. 절규성이 있음으로 해서 그 시는 역동성을 띠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가지 도덕성의 경우에는 곧이곧대로 오늘의 잣대만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스웨덴 같은 데서는 호적제도가 크게 바뀌어 아이들의 반수 이상이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누군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가족제도가 바뀌어 가는 추세 속에서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야지, 틀에 박힌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라는 것은 남에게 하는 대화이되, 그것이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역시 언어라는 것은 남하고 함께 사는 데서 생긴 만큼, 시는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중요시되지 않으면 시는 난쟁이처럼 작아진다. 세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소재로 하는 만큼 말이 주는 즐거움을 소홀히 해서는 좋은 시를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그 시는 생명력을 갖기 어렸습니다. 이런 것들이 시를 쓰는 저의 몇 가지 중요한 태도입니다.-끝-   =================================================================     개여울 ― 김소월(1902∼1934)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소월 김정식이 암만 뛰어난 시인이라고 해도 설마 짐작이야 했을까.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앞으로 한 100년쯤 후에 그의 나라에 몹시 슬픈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모르고서도 저렇게 슬프게 썼는데, 행여 미리 알았더라면 너무 슬퍼 아무 말도 못 했으리라. 암튼 소월은 제 마음 슬픈 줄만 알고 저 시를 썼는데, 4월 16일을 앞둔 지금 그의 시는 소월만의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의 마음으로 읽힌다. 꼭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옮겨다 놓은 것만 같다. 둘 다 사랑을 잃은 사랑의 마음이라는 큰 공통점이 있고, 구체적인 장소가 다르다는 작은 차이점이 있다. 시에서는 ‘개여울’이라고 했는데 재작년 4월 16일부터 힘들었던 이들은 팽목항에 앉아 있을 것이다. 소월처럼 주저앉아 있을 것이고, 파릇한 풀포기나 봄바람에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잊으라고 말하는데 마음으로는 영 가버린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역시 잊을 수 없구나 생각하며 다시 앉아 있을 것이다. 너무 슬픈 이들의 시계는 그날 와장창 깨진 이후로 전혀 가지를 않고 있다. 시간은 흘러 2017년도 오겠지만 멈춰진 마음의 시계는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깨진 마음의 시계는 유가족만의 것이 아니고 유가족만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 마음이 누구만의 것이 아니기에 소월은 아직도 읽힐 수 있다. 이미 100년 전에, ‘잊지 말라’는 부탁이 있었다. ‘잊지 말라’는 부탁. 내일은 그리움의 날이다.
1881    시인, 시, 그리고 미술... 댓글:  조회:3998  추천:0  2016-11-27
/ 이재관 한국 한비문학 작가협회 상임이사 숭실대 명예교수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27세에 소용돌이라는 미술 유파를 태동시켰고 유럽의 화가, 조각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다. 거칠고 난해한 그의 시를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조류를 대입하거나 그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보다 잘 해석하기 위해 미술사를 넘겨볼 필요가 있다. 에즈라 파운드 자신의 평론 또는 그에 관한 전문적 논문들이 매우 다양하고 많지만 미술사와 연관된 부분에 초점을 두어보는 이 글은 나름대로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1. 문학과 미술의 만남 아카데미즘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국박람회나 살롱의 출품작을 심사했던 일종의 국립단체인 아카데미 데 보자르 Academie des Beaux-arts의 전통을 말한다. 이 단체의 회원 화가들은 부자들의 취향에 영합했으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추한 것을 찾아 나설 이유가 없다. 시대와 무관하게 오직 한 가지 회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들을 변명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주로 역사, 신화, 종교, 귀족, 신화의 영웅을 모델로 삼았으나, 개혁적인 화가들은 평민, 상인, 하녀 등 보통사람을 그림의 모델로 등장시켰다. 현대성 및 사실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시대와 함께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로 들어서는 문턱은 높았다. 충동, 본능 등 정신분석학적 개념들과의 갈등이 불거져 미술의 전통적 법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화가들은 기호와 시어詩語를 빌려 본능적 인간을 표현하려 하거나 추상미술 쪽으로 진출했다. 폴 세잔은 회화를 언어나 수학 같은 것, 새 시각을 위한 실험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윤곽선, 명암, 원근법을 무시했으며 뒤이어 나비Nabis파, 야수파, 다리파 등 '색채에 의한 혁명'의 유파들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나비파의 피에르 보나르는 형상의 소실점을 과감히 제거하고 빛은 차가운 색으로, 그늘은 따듯한 색으로, 채색방법을 대담하게 전도시켰으며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다리파(또는 표현주의)는 “인간은 초인과 짐승 사이의 다리”라는 니체의 말에 근거하여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양극화, 경제적 고통, 사회주의 등 혼란기의 독일에서 부르주아적 가치를 혐오하는 화가들이 공동화실을 설치하고 대중에게 다가선 것인데 다리파는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격렬한 색을 사용하지만, 현실 참여적이고 심리적 과장을 한다는 점에서 야수파와 달랐다. 모딜리아니, 샤갈 등 파리에 모여든 화가들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면서 파리파를 형성했고 지중해 연안에서는 우체국 직원, 농사꾼, 인쇄공, 가정부, 세관원 등 평범하지만 재능 있는 화가들이 소박파의 기치를 걸었다. 소박파는 구상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대담한 색채혁명을 시도했으며 소박하지만 꼼꼼하고 세밀했다.   개혁파를 대별하면 ‘색채에 의한 혁명’과 ‘형태에 의한 혁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를 통칭하여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부른다. 아방가르드는 군대 용어였으나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계급투쟁의 선봉을 가리켰고 기존 예술을 뒤엎는 혁명적 예술운동을 또한 아방가르드라 한다. 그 계보는 입체파, 소용돌이파, 미래파,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으로 이어졌다.   소용돌이파Vorticists는 미술의 유파지만 산업사회 및 문학적 배경이 강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 프로이드 심리학, 과학혁명, 전쟁 등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1910년대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는 연간 수십만 대라는 경이적인 대량생산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기계문명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겨주었다. 소용돌이파의 잡지 창간호(1914-15)에 게재된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소용돌이vortex는 최대의 에너지, 최대효율을 내는 지점이다. 최대효율이란 기계공학의 최대효율과 같은 뜻이다. 인간은 방향성을 갖는 지각perception의 운동체인데, 인간은 환경의 장난감일 수도 있고 환경에 대항하는 유체 역학적 통제권자가 될 수도 있다. 소용돌이파는 각자의 물감을 신뢰한다. 개념과 정서는 스스로 구현되는 것이지만 활기찬 양심과 주된 방식에 따른다. 미술은 100편의 시요, 음악은 100편의 그림, 가장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가능한 문장이다. 경험을 소용돌이에 퍼붓는다. 모든 과거, 전환점, 경쟁, 달리던 추억, 평온을 원하는 본능, 에너지가 담기지 않은 미래, 모두를. 인간 소용돌이 속에 벌어지는 미래의 설계. 과거를 미래에 쏟아 붓고 소용돌이에서 잉태시킨다. 바로 지금"   에즈라 파운드는 이 창간호에서 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로 인사말을 대신하고 있다. "타임지의 점잖음을 비웃어주자, 하하/입마개 쓴 평론가들 너무 많다/벌레들이 몸에 우글거릴 때 깨달을까/..."   소용돌이 운동은 3년간(1912~1915) 전개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으나 전후 "X 그룹"이란 명칭으로 계승되었다. 초기 가담자는 화가이며 소설가인 윈덤 루이스, 화가 윌리엄 로버츠, 에드워드 웨즈워드, 프레데릭 이첼스, 조각가 고디에-브르체스 등이다. 로버츠는 소용돌이파 10인의 에펠탑 회동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루이스 Wyndham Lewis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소용돌이 운동은 흔히 영국의 예술혁신운동, 영국의 아방가르드 또는 영국판 큐비즘이라고도 한다.   의식세계는 불완전하다. 환경, 감정, 사회적 요소가 끊임없이 감각과 판단을 왜곡시킨다. 작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독자(또는 관람자)들이 동일한 의미를 느끼도록 하려는 노력 자체가 종종 헛수고로 끝난다. 따라서 화가와 시인들은 추상과 무의식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현실과 의미적 일대일 대응에 지쳐버린 작가들로서는 비로소 진정한 휴식과 자유의 가능성을 전망하게 되었다. 추상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규정하는 부담이 줄어들고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아내는 신선함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는 청색(힘) 또는 노란색(감미로움)의 말을 좋아했고 자신들을 청기사라고 호칭하였다. 피터 몬드리안 등은 수학기호와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구축했다. 1910~1920년에 나타난 다다이즘, 메르츠, 초현실주의는 모두 문학에 기원을 둔 것들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에 많은 시인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본능, 리비도, 충동에 종속된 상상의 세계였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말, 글 또는 다른 모든 방식을 통해 사고의 실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순수한 정신적 자동성"이라고 초현실주의를 정의한다. 조르지오 키리코는 모든 사물의 외양을 "무의식의 거울"이라고 보았다. 의식세계 일변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현실감각을 파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복고주의를 규탄하고 틀에 박힌 언어를 흥분된 의성어로 변형시켰다. 갖가지 조각과 고물을 더덕더덕 붙이는 꼴라주, 아상블라주, 레디메이드가 시도되고, 그라타주(긁어내기), 환각제, 약물 등이 사용되었으며 비참한 사회의 고발에 몰두하였다.   2. 에즈라 파운드의 시 감상 앞에서 고찰한 미술사, 그리고 화가와 시인들의 정신적 교류와 혼신의 몸부림을 생각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읽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소용돌이 운동기에 쓴 시들은 그의 시집 (1917)에 실려 있다. 초기의 비판적인 시를 중심으로 가급적 짧은 작품 5편을 번역하여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서는 미국의 대표적 시인인 휘트먼에 대해 빈정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빈정거림이 아니다. 휘트먼으로 대표되는 시문학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마음과 각오가 서려 있다. 은 문학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전체에 대해 도전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다. 즉, 이 시에서의 비판 대상은 자기 노래(시)라고 볼 수 있다. 는 1920년에 출간된 시집에서 뽑은 장시의 일부분이다.     계약  -A Pact   당신과 계약 한 건 합시다, 월트 휘트먼 씨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혐오했답니다. 당신은 고집쟁이 부친 슬하의 다 큰 아이 같았는데 나는 친구를 사귈 만큼 나이를 먹었어요. 나무를 자른 건 당신이었고 이제 나는 목각을 제작해야 하니 우린 한 뿌리 한 수액을 공유하는 셈입니다. 둘이 거래를 해봅시다. -----------     연극처럼  -Histrion   아직 아무도 이런 걸 감히 쓴 적이 없었지 아직 내가 알기로는, 우리 곁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어찌 그리 위대한 척 했는지 우리 모두 홀딱 빠졌지 반성시켜야 할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러니 나 역시 한 구석에선 단테였고 또 다른 구석에선 발라드의 왕이자 도둑인 프랑소아 빌론이었지 이런 거룩한 자들에 대해 내 이름 때문에 모독적 언행은 못했다네 하지만 순간에 지나가 불길은 꺼졌지   우리 한 복판에서 반투명구체, 용해시킨 황금인 "나"를 자라게 하면서 요상한 프로젝트를 집어넣어 스스로 그리스도 또는 존 또는 위대한 피렌체 가문인 척 했지 그 후 즉시 떠밀려 당대에 해야 할 일을 그만 두었네 정해진 형식이 투명하지 못한 것이었거든 뭐 그렇고 그래서 '영혼의 대가'들이 영원한 거지 -----------     추가적인 주의사항  -Further Instructions   내 노래야 정신 좀 차려 우리의 더 근본적인 열정을 표현해보자 안정된 직장에서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자를 부러워할 건 없다 내 노래야 너는 게을러서 끝이 안 좋을까봐 그게 두렵다 너는 길거리에 나가 모퉁이와 버스정류장을 서성대고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려는 것인가   우리 태생이 고귀한 신분이란 것조차 노래에 담질 않는구나 그러면 끝은 안 좋을 거야   나는 어떠냐구? 반쯤 깨져 못 쓰게 됐어 너를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네게 입이 닳게 말했지 건방진 작은 놈! 뻔뻔스럽기는! 옷이나 걸쳐라!   그러나 너, 많은 중 제일 새로운 노래, 너는 아직 젊다 나쁜 짓을 많이 할 새가 없었지 나는 네게 용이 수놓아진 중국제 초록 코트를 입게 했지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아기 그리스도 상에서 따온 진홍 실크바지를 입혔지 우리가 맛이 갔다거나 천한 신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안 되니까 -----------     새벽의 노래 (알바) -Alba   새벽녘 내 곁에 누워 있는 그녀는 계곡의 백합 젖은 잎처럼 차고 창백했다. -----------     휴 셀윈 마버리 I-2  -Hugh Selwyn Mauberly, Part I-2   시대는 다른 이미지를 요구했다 가속적으로 찌푸려지는 얼굴 같은 것 현대적 무대에 필요하다고들 하는 것 하여튼 희랍식 기품과는 다른 어떤 것 아니, 내면의 애매한 몽상은 분명 아니고 고전 미사여구들 보다는 나은 허위! 시대적 요구란 시간 손실 없이 회반죽 본을 뜨는 일 산문 영화, 아니, 확실히 그건 설화석고 또는 운문의 조각 작품 -----------     3. 아름다운 고발 현대 예술의 주류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다. 사실주의는 폭로 고발하는 것이고 표현주의는 자기 주관을 뿜어내는 과시(또는 자기고발)이다. 그런데 사실주의적 고발이든 표현주의적 자기과시든 자칫 지저분한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궁극적 가치관이 요구된다. 작가들은 처절하게 고발하거나 자기고발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실험에 도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고결한 미에 다가서고자 몸부림친다. 자연, 동식물, 거짓과 폭력의 현장에서 고결한 미를 찾고 작품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무표정하고 허약한 자신, 오염된 자신을 먼저 꾸짖는다.   화가는 빈 공간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추상, 무의식, 초현실성까지 동원한다. 캔버스는 의미들이 와서 형성되거나 부서지는 장소가 된다. 거리 공간은 의미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화가는 점, 선, 색, 도형, 빛들을 의미 있는 조형미로 바꾼다.   시인은 일상 언어를 쪼개고 갈고 붙여서 의미 있는 시어로 바꾼다. 그것은 기술적 실험일 수도 있다.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유희에 빠진다. 반대로 현장고발이나 주관의 표현에만 급급한 경향도 있다. 화가들이 필사적으로 공간과 싸우는 것처럼 시인들은 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처절하게 시어를 만져야 한다.   고발하거나 고발당하는 치열함, 실험에 대한 열정, 고결한 미의 추구는 미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었다. 시는 예술과 문학의 꽃이고 그런 만큼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단지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라면, 19세기 미술사의 아카데미즘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혐오스러운 단어를 써야 진보적이라 할 것인가? 에즈라 파운드의 거친 표현의 시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4행 시 을 음미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보석계단의 불평  -The Jewel Stairs' Grievance   보석 박힌 계단이 이슬에 많이 젖었다, 너무 늦어 나의 외올베 양말이 젖었지 뭐요 그래서 난 크리스털 커튼을 내리고 청명한 가을을 통해 달을 바라봤지요 -----------   원작자가 이백(李白, Rihaku)임을 밝히면서 파운드는 자기가 개작한 시와 그 해설을 발표했다. 고대 라틴 시, 중국 시 등을 왕성한 열정으로 번역한 파운드는 간간히 이와 같은 개작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개작은 파운드의 경우 그의 실험정신의 일단이었다. 사실 시의 번역은 직역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에 대한 파운드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보석이 박힌 계단이라면 아마 왕궁일 것이다. 그 곳에 불평이 있다는 것인데 외올베(가제, 紗) 스타킹은 귀부인이 신는 것이니 불평하는 사람은 귀부인일 것이다. 귀부인은 청소가 늦은 것을 탓하니 너무 일찍 현장에 온 것이다. 날씨는 쾌청하니 날씨 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귀부인은 아무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멋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라는 이유로 이백의 이 시가 좋다고 말한다. 평생 비판적인 시를 썼던 그가. 그 많은 독설과 빈정거림, 비아냥대는 시를 썼던 사람이 재치 있게 하는 해설이니 또 한 방 맞은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본다. 만일 그가 누구를 지목해서 괴롭히려고 그런 시를 쓴 것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사랑이 복받쳐 터져 나온 비판이나 고발이었다면 말이 되지 않을까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                                                                 
1880    시인, 시, 그리고 경제... 댓글:  조회:3448  추천:0  2016-11-27
[시인과 경제학자]에즈라 파운드와 클리포드 더글러스-부의 불평등 주목, ‘올바른 경제학’ 주창       파리 교통공단은 2014년부터 행사를 갖고 있다. 올해에는 8153편의 시를 받았다. 수상작과 후보작들은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과 같이 달리고 있다. 사람, 파리, 지하철, 이 세 조합은 시 한 편을 마음에 불러왔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노래했다. 이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그가 파리에서 지내던 1920년대 지하철에서 본 파리지앵의 인상을 그리고 있다. 각자의 행동을 따로 떼어 묘사하기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느낌을 두 행에 담았다. 이미지주의를 대표하는 시인답게 일상어를 가지고, 조각처럼 명징한 ‘언어경제’를 좇았다. 짧음 사이에 긴 여운이 흐른다. 그러면서도 꽃잎에 대비하며 ‘얼굴들’의 삶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아홉 개 언어를 구사했던 천재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을 파운드의 시대로 부를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교분을 나눈 문학가들로 헤밍웨이, 예이츠, 조이스, 엘리엇을 꼽는다. 그런데 그는 문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 몇 권의 책을 쓰기도 했고, 사회운동에도 깊이 참여했다. 나 같은 글이 이를 잘 드러낸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미 활동의 혐의를 받은 바 있을 정도였다.   (왼쪽)클리포드 더글러스, 에즈라 파운드 / wikipedia   경제 분야에서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영국 경제학자 클리포드 더글러스다. 두 사람은 1918년 런던에서 만났다. 파운드는 그와의 교분을 통해 경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부와 일반 대중이 돈이 돌아가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세계 경제가 왜곡되었다고 생각했다. 1915년부터 쓰기 시작한 장시(長詩), ‘칸토스’에도 이러한 영향이 드러나 있다. 더글러스의 생각과 닿은 파운드는 사회의 핵심은 경제에 있다고 보았다. 또 ‘올바른’ 경제학은 여러 사회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었다.  더글러스는 부적절한 분배로 인해 구매력이 모자라서 불황이 초래된다고 주장한 경제학자이다. 이런 사회신용의 논의에 따라, 요즘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을 고안하였다. 파운드와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 태어나 전쟁을 겪었고, 금융자본의 폭발적 성장을 지켜보았다. 문학계에서 주목받은 파운드와 달리 그는 비주류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케인즈가 그를 인용할 정도였다. 엔지니어로 공장의 회계를 감사하는 일을 맡았고, 노동자들의 생산과 소비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임금총액으로 상품 전체를 구매할 수 없게 된 것을 발견하였고, 기본소득처럼 소득보장을 기초로 한 사회적 분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사회 전체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부(富)가 나누어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토마 피케티가 에서도 논했듯 이들이 조우한 시기는 사실 경제성장률이 비교적 높았다. 다시 말하면 일하던 사람 대부분이 잘 벌었던 때이다. 그럼에도 ‘불평등’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닌, 그래서 그들을 이어주었던 섬세함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경제학은 여전히 철학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윤리학을 천착하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지난 6월에 출판한 논문의 제목이다. 경제학은 결국 사람 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고, 모두 다 잘 살아가기 위한 생각이다. 금융위기로 벌거벗겨진 자본주의 탐욕경제가 여전히 계속되는 지금, 시인의 경제학적 고민과 경제학자의 섬세한 관찰이 고맙게 느껴진다.  < 김연(시인·경제학자)>   ===============================   윤기향 지음 / 김영사 / 596쪽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20세기 이후 세계경제는 꾸준히 성장해왔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두 번의 세계대전, 1970년대 경기 불황,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수많은 고비를 넘었다. 때로는 강물에 급류가 굽이치고 비바람에 배가 요동치듯 경제도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는다.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은 마치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다. 윤기향 미국 플로리다애틀랜틱대 경제학 교수는 《시가 있는 경제학》에서 경제학에 시를 접목해 색다른 프레임으로 경제를 바라본다.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감성의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인간 세상을 풀어나가는 경제학의 열정을 되새기게 한다. 28편의 영미시, 한국시, 중국시, 일본시를 소개하며 경제학을 유쾌한 학문으로 만들려 노력한다. 고전학파, 케인스학파, 신자유주의 등 경제사상사의 굵직한 핵심들을 다룬다. 세계 경제의 흐름과 변화, 소득불균형과 복지 문제 등 다양한 경제학의 기초지식을 쉽게 설명한다.  저자는 “미국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이전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인 양적 완화라는 통화정책을 택했고, 이것이 미국 경제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고 진단한다. 이를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 노래한 것에 비유한다. 새 통화정책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3개의 화살론’도 시를 통해 분석한다. 아베 총리는 일본 경제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무제한 양적 완화, 적극적인 재정 지출, 경제구조 개혁이라는 세 개의 화살을 무기로 꺼내 들었다. 저자는 헨리 롱펠로의 ‘화살과 노래’를 읊조리며 그 효과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공중을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았으나,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화살이 너무 빠르게 날아가서 시선을 따라갈 수 없었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참나무에서 화살을 찾았네. 부러지지 않은 채로….”   /최종석 기자 
1879    시인의 미국 시인 - 에즈라 파운드 댓글:  조회:5193  추천:1  2016-11-27
시인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출생일 1885년 10월 30일 사망일 1972년 11월 01일 국적 미국 대표작 《칸토스》, 《피사 칸토스》 등 이미지즘과 보르티시즘 기법을 도입해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시 분야를 이끌었다. 목차 펼치기 에즈라 파운드 에즈라 파운드는 초기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시인 중 한 사람이다. 20세기 영미 시에 끼친 막강한 영향으로, '시인의 시인'으로도 불린다. 이미지즘(Imagism)과 보티시즘(Vorticism, 소용돌이주의)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시에 도입한 혁신적인 시인이자, 20세기 초 미국 문단에서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서 제임스 조이스와 T. S. 엘리엇, 예이츠, 프루스트 등 많은 작가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소개하여 미국과 영국 문학을 잇는 가교 역할도 했다. 에즈라 웨스턴 루미스 파운드는 1885년 10월 30일 미국 아이다호 헤일리에서 호머 루미스 파운드와 이사벨 웨스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파운드와 웨스턴 집안은 17세기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어린 시절 파운드는 외할머니가 읽어 주는 《가계사》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태디우스 파운드는 철도 건설업자이자 상원의원, 위스콘신 주지사까지 역임한 인물로 상공업계와 정치계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 호머는 조폐국에서 일했다. 에즈라 파운드는 이런 집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랐다. 15세 때 어머니, 이모와 함께 석 달간 유럽을 여행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보고 압도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6세 때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입학했고, 학창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문학, 특히 시 쓰기에 몰두하고, 펜싱, 연극, 고전 영문학 등에 열중해 교수들에게 괴팍한 문제아, 자유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다. 21세 때 로망어로 석사 학위를 받고 대학원 연구원에 임명되었는데, 파운드는 연구원에 임명되어 받은 연구비와 월급을 털어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까지 한다. 1907년 귀국한 후 이로 인해 낙제를 하는 바람에 연구비 지급이 중단되자 그해 여름에 인디애나 주의 워버시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전임 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이듬해 1월 떠돌이 여인을 기숙사에서 재웠다가 스캔들에 휘말려 해고되었고, 아버지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다시 한 번 이탈리아로 떠났다. 파운드는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시를 쓰고 여러 잡지사에 투고했으나 거절당하고, 몇몇 직업을 전전하다가 첫 시집 《꺼진 촛불》을 자비로 출판했다. 그해 말 파운드는 런던으로 옮겨가 런던에서 시인 클럽과 개인 문학 클럽을 드나들면서 많은 시인, 소설가, 비평가 등을 만났다. 그중에는 조지 버나드 쇼와 신문학 운동을 이끌었던 T. E. 흄, 당시 사교계를 풍미했던 올리비아 셰익스피어 부인 등이 있었다. 파운드는 후일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딸 도로시 셰익스피어와 결혼한다. 이듬해 런던의 엘킨 메튜스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시집 《페르소나》를 출판했다. 《페르소나》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파운드는 시인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당시 유력 문학 잡지 〈잉글리시 리뷰〉에 시를 싣게 된다. 또한 T. E. 흄을 비롯한 작가들과 함께 신문학 운동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파운드는 상징주의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싫어했으며, 언어를 조각과 같이 구상적(具象的)으로 구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감각할 수 있는 이미지에 의존하여 대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새로운 시 운동이 이미지즘이다. 파운드는 1911년경부터 〈신세계〉 지에 이런 논지의 논설들을 기고하고, 자신의 이론이 반영된 시들을 발표했다. 1912년에는 미국의 〈포이트리〉 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고, 이 잡지의 편집인, 해외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영국 시인들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1917년 〈포이트리〉 지와 관계를 끊고 나서는 〈리틀 리뷰〉 지, 1920년부터는 〈다이알〉 지와 함께 일했다. 또한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고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파운드는 많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헤밍웨이는 "(파운드는 친구들을) 잡지에 소개해 주고, 감옥에서 꺼내 주고, 돈을 꾸어 주고, 연주회를 알선해 주었다. 병원비를 지불해 주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친구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T. S. 엘리엇과 예이츠일 것이다. 파운드는 이들의 생활비를 지원했으며, 첫 작품집을 낼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시인들의 생활을 지원해 주고, 그들의 예술을 문명 세계로부터 인정받게 하는 안내자'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T. S.엘리엇은 그에 대해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그만큼 친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이츠가 파운드에게 보낸 편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파운드는 당대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현대 문명사회에 비판의식을 가졌고, 이에 대한 생각을 다양한 잡지에 기고하면서 문학적 저널리즘 활동을 활발히 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고대 로마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의 작품을 번안한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에게 바치는 경의》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프로페르티우스와 로마 제국을 통해 1917년의 대영제국을 논평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의도를 알지 못한 많은 비평가들, 특히 고전학자들로부터 오역이라는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그 후 시집 《휴 셀윈 모벌리》를 펴냈는데, 영국 문단 문화를 세밀하게 복원해 놓은 초상이라는 평을 받으며,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들은 파운드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겪은 일들과 심상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파운드의 가장 큰 위업은 1917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평생에 걸쳐 쓴 모더니즘적 심상서사시 《칸토스》이다. 첫 편은 1921년에 발표 되었으며, 죽기 2년 전인 1969년에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이 시편들은 오디세우스, 단테, 공자를 비롯해 미 대통령 존 애덤스, 이탈리아 용병 지기스몬트 말라테스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속한 신화, 역사, 문학, 문화 등을 인유하고 있는 난해한 작품이다. 파운드는 이 작품을 일컬어 '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시'라고 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 기존의 가치와 공동체가 붕괴되고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 가던 혼돈의 세계에서 분열된 삶을 통합시키고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 시도로 여겨진다. 이상적인 공동체의 확립, 그중에서도 진정한 예술이 가능한 사회를 추구한 파운드의 모습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운드는 1922년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친파시즘 라디오 방송을 했다. 그는 미국 은행가들의 탐욕이야말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이유라고 생각했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공연하게 미국을 비방했다. 이 때문에 전후 1946년 전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정신병 판정을 받아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워싱턴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칸토스》의 집필을 계속하여 수감 중이던 1948년 《피사 칸토스》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볼링겐상을 수상하며, 정치적, 문학적 소동을 야기했다. 정신병원에서 파운드는 《피사 칸토스》 집필뿐만 아니라 《중용》, 《대학》, 《시경》, 《소포클레스: 트라키스의 여인들》을 번역했다. 산 미켈레 섬에 있는 파운드 무덤 파운드는 1958년에 방면되었는데, T. 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로버트 프로스트 등 친구들의 탄원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풀려난 뒤에도 파운드는 이탈리아로 가서 "미국은 하나의 정신병원이다."라고 비난했다. 파운드는 이탈리아 알프스 근처에 머무르면서 스위스, 아일랜드, 파리, 뉴욕 등으로 친지들을 방문하며 지냈다. 1969년에는 자신이 선집한 《파운드 칸토스 선집》를 펴냈으며, 〈칸토스 CX-CXVII〉도 발표했다. 1972년 11월 1일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두다.====================================@@시인 멘토 에즈라 파운드는 인류의 반역자? 다른 모든 일처럼 영어공부 역시 하면 할수록 어렵네요. ‘You are in over your head!’는 무슨 뜻일까요? ‘당신이 당신 머리 위에 있다’라니요? ‘당신 능력밖에 있다’는 뜻이라네요. 알듯 말듯한데, 이런 말은 그냥 외우는 수밖에 없겠지요.      1888년 오늘 태어난 미국 출신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이와 관련한 명언 하나를 남겼습니다. ‘If you are not in over your head, how do you know how tall you are?’라는 말입니다. “네가 네 머리 위에 있지 않다면 네가 얼마나 큰지 어떻게 알 수 있나”로 직역되는데, “네가 네 능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네 능력이 얼마 만큼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나”라는 뜻입니다. 의역 역시 어렵죠?      엘리엇 역시 보통 사람처럼 자신의 틀 안에서 살 뻔 했습니다. 그는 16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해서 3년 만에 졸업했고 프랑스의 소르본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 런던의 은행에 취업해서 금융업에 종사합니다.      이때 그동안 여러 문학가를 발굴하고 후원해온, ‘시인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나섭니다. 파운드는 엘리엇이 돈 걱정 없이 시작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자들을 모읍니다. 엘리엇이 문학 계간지를 발행하도록 재력가를 소개해주기도 하는데, 엘리엇은 이 잡지에 유명한 ‘황무지’를 발표합니다.      엘리엇은 수많은 시와 함께 극본도 발표했으며,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지요. 어린이를 위해 지은 우화시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는 나중에 뮤지컬 《캣츠》로 재탄생해서 세계를 들썩거리게 했고요.      문학계에서는 파운드가 없었다면 엘리엇이나 제임스 조이스도 없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파운드는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을 삽니다. 파운드는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반유대주의에 공감합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의 방송에 나가서 친 파시즘, 반유대주의 발언을 했고 이 때문에 종전 후 미국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됩니다. 그는 사형은 면했지만 정신이상 범죄라고 선고받고 워싱턴의 정신병원에 갇힙니다. 미국과 유럽의 시인들이 석방운동 덕분에 10년 뒤 정신병원에서 나와서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눈을 감습니다.      파운드는 역작 《캔토스》를 남겼지만, 그가 후원한 문인들의 작품 역시 그의 시 못지않은 인류의 유산일 겁니다. 그렇다면 반미, 반자본주의를 펼치며 파시즘을 옹호한 과오는 어디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틀의 사고(Frame Thought)’로 보면 용서할 수가 없겠지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람은 능력 밖으로 나가야 자신의 그릇을 볼 수 있지만, 너무 나가면 안 되는 건가요? 인류 역사에서 천재에 대한 후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했지만….   
1878    현대시를 이끈 시대의 대변인 영국시인 - T.S. 엘리엇 댓글:  조회:5100  추천:0  2016-11-27
T.S. 엘리엇의 명언 10개 ○멀리 갈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네가 네 능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네 능력이 얼마 만큼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나? ○유머는 심각한 이야기를 말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탐구의 종착점은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는 것이고 첫 장소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입는 피해의 절반은 자신이 중시되길 원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려고 의도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피해에 관심이 없다. ○규칙을 지키는 법을 알기 전에 규칙을 어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사랑은 침묵이다. 사랑은 말하려는 욕구와 싸우는 것이다. ○걱정은 창조의 하녀다.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 많지만, 확신하는 것은 너무 적다. ○인류는 지나치게 사실에 가까운 것을 감내할 수가 없다.  ================================================== T.S 엘리엇/// "텅빈 사람들" 1. 우리는 텅 빈 사람들  우리는 박제된 사람들 모두 기대고 있으며 머릿속은 짚으로 가득 찼다 슬프다, 우리의 메마른 음성은 우리가 함께 속삭일 때조차 마른 풀잎을 스치는 바람처럼 건조한 지하실 깨진 유리 위를 달리는 쥐들의 발자국처럼 소리도 의미도 없다    형체 없는 모양, 색깔 없는 그림자, 마비된 힘, 움직임 없는 몸짓 죽음의 다른 왕국을 부릅뜬 눈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우리를 기억한다 잃어버린 난폭한 영혼들이 아닌 그저 텅빈 사람들로서  박제된 인간으로서   2. 꿈에서도 감히 마주한 적 없는 눈길들 죽음의 몽유 왕국에서 그들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저기, 그 눈(目)들이 부러진 기둥의 햇살 중에 있고 흔들리는 나무에 있다 그리고 목소리들, 저무는 별빛보다 희미하고 장중한 바람의 노래 속에 깃든 음성들 내가 저 죽음의 꿈 속 왕국으로부터 가까이 있지 않게 하도록 또한 쥐의 겉옷, 까마귀 거죽,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들판의 십자가 말뚝처럼 치밀한 변장을 하도록 더 가까워지지 않기를   황혼의 왕국에서 맞는 마지막 대면은 아니길     3. 이곳은 죽음의 땅 선인장의 땅 여기서 돌의 형상들이 일어나 희미해지는 별의 명멸 아래 죽은 이들의 손에서 탄원을 받는다   이곳은 죽음의 다른 왕국과 같은 곳인가 홀로 일어나 우리가 자비로움에 떨고 있을 시간 입맞춤하는 입술은 기도자를 부서진 돌로 바꾼다     4. 눈(目)들이 부재하는 곳 이곳엔 눈들이 없다 여기 죽어가는 별들의 계곡 이 텅 빈 계곡에 우리의 잃어버린 왕국들의 부서진 턱뼈   이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듬어 찾고 그러면서도 애써 말은 피한다. 부어오른 강가에 모여서 볼 수 없으나 눈들은 다시 나타난다 영속하는 별처럼 사멸의 황혼 왕국에 피는 다엽 장미처럼 텅 빈 인간들의 유일한 희망     5. 여기서 우린 선인장 주위를 맴돈다 가시로 덮인 선인장 아침 다섯 시면 우리는 선인장 주위를 돈다 이상과 현실 사이 동작과 행동 사이에 그늘이 드리운다   왕국은 그대들의 것   관념과 창조 사이 감정과 반응 사이에 그림자가 진다   인생은 길다 욕망과 충동 사이 발생능(發生能)과 존재 사이 본질과 그에서 파생된 것들 사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왕국은 그대들의 것 그대의 삶은 그대의 것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가 아닌 훌적임과 함께   ==================================== @@///현대시를 이끈 시대의 대변인 T. S. 엘리엇   출생일 1888년 09월 26일 사망일 1965년 01월 04일 대표작 〈황무지〉, 〈사중주〉, 〈칵테일 파티〉 등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으로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방식의 시적 기교로 독창적인 시 세계를 펼쳐 나갔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목차 펼치기 T. S. 엘리엇 T. S. 엘리엇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20세기 시와 비평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1922년 그의 시 〈황무지〉가 출판되었을 때, 이 작품은 '새로운 시'의 동의어로 여겨졌고, 그 '새로운 시'의 의미가 '모더니즘'을 지칭하게 되었을 때는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현대시를 지배했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웨어 엘리엇은 사업가였으며,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스는 시인이었다. 엘리엇이 태어났을 때 부부는 40대였고, 엘리엇 위로 4명의 누나가 있었다. 시인이었던 어머니가 아이들 양육보다 문학이나 자선 활동과 같은 사회 활동에 열정적이었던 탓에 늦둥이였던 토마스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 토마스가 자라면서 조숙하고 남다른 지적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어린 아들에게 역사와 문학, 철학 등의 책을 읽히고 시를 쓰도록 독려했다. 모자는 문학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었고, 토마스는 평생 어머니와 편지를 나누고, 어머니에게 시를 바치는 등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는 인정받지 못한 시인이었던 어머니의 시극 《사보나롤라》에 서문을 붙여 출간해 주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는 세인트 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와 뉴잉글랜드의 밀턴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906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불문학을 전공했다. 4년의 학부 과정을 3년에 마쳤으며, 이때 프랑스 상징주의, 특히 라포르그각주1) 에 심취했다. 졸업 후 1년 만에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에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 독일의 마르부르크필리프스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프랑스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인도 철학, 독일 철학, 그리스 철학 등을 공부했으며, 아르튀르 랭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15년,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의 추천으로 〈포이트리〉 지에 〈앨프리드 프루프록의 연가〉(이후 〈프루프록의 연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는 노년의 화자 프루프록의 내적 독백을 통해 현대 문명의 잔인성과 메마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자아의 상실과 회복을 위한 자아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엘리엇은 비평가로서 '객관적 상관물'의 개념을 공식화시켰는데, 객관적 상관물이란 '어떤 특정한 정서를 나타낼 때 공식이 되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이런 시적 방법론과 시인으로서의 주요 관심사와 정서는 초기 시인 〈프루프록의 연가〉에서부터 이후의 시들에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엘리엇은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으며, 런던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서평을 잠시 쓰다가 이듬해 로이드 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약 9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쓰고, 〈에고이스트〉 지의 부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를 보고 '최초의 현대적 작품'이라고 일컬었던 에즈라 파운드는 엘리엇이 시에만 몰두하기를 바랐고, 그를 후원하는 인물들을 모아 생활을 후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은행 일과 시작(詩作)을 병행하는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해했다. 내성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에 신경쇠약 증상까지 있던 엘리엇에게 이 두 생활을 양립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현실 생활과 문학 생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1922년 10월 엘리엇은 계간지 〈크라이테리언〉을 창간하고 편집을 담당했으며, 이 잡지에 〈황무지〉를 발표했다. 433행의 이 장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황무지로 상징화한 것으로, 라틴어, 희랍어, 산스크리트어 등 6개 언어를 사용하고, 셰익스피어, 단테, 보들레르 등 고전 시구에 대한 암시와 인용을 비롯해 J. S.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J. L. 웨스턴의 《제의에서 로망스까지》 등에서 나타나는 제의, 성배 전설 및 신화와 종교적 관점, 성경 등을 토대로 한 수많은 상징으로 뒤덮여 있다. 역사와 문명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화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로 재편성하는 엘리엇의 작품 세계가 확립된 작품이다. 또한 엘리엇은 낭만성을 제거하고 철저하게, 병적일 만큼의 정확성과 논리성, 지적인 태도를 지니고 언어와 다양한 자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시를 썼는데, 이는 그의 비평론적 태도이기도 하며, 이후의 소설, 희곡, 예술 비평의 주요 방식이 된다. 〈황무지〉가 발표되었을 당시 평론가들은 시의 난해함과 새로움에 당혹해 마지않았으나, 젊은이들은 오히려 엘리엇의 시에 담긴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시적 기교에 열광했으며, 현대의 정신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을 '시대의 대변인'으로 추앙했다. 1925년에 엘리엇은 로이드 은행을 그만두고, 파버 앤드 파버 출판사의 이사로 일했다. 1927년에는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고 영국으로 귀화했다. 그리고 영국 국교도로서의 종교적 시각을 투영한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재의 수요일〉(1930), 〈사중주〉(1943) 등이 그것이다. 또한 엘리엇은 이 시기부터 무대 상연을 고려한 시극각주2) 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시들은 시극으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가 된다. 〈바위〉(1934), 〈대성당의 살인〉(1935), 〈칵테일 파티〉(1950) 등이 대표적이며, 이 작품들은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비평 분야에서도 엘리엇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문학적 취향을 재규정했다. 예술에 있어 낭만성을 배제하고 고도의 지적 사유를 좇으며, 존 던과 같은 형이상학파 시인들을 칭송한 그의 비평론은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 문학의 모호성과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대 고전주의의 비평 체계를 수립했다. 비평집으로는 《단테론》(1929),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1933), 《고금 평론집》(1936) 등이 대표적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리엇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당시 그는 시극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시극 〈가족의 재회〉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고, 전쟁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전후의 혼란스런 상황, 정신질환 성향이 있던 아내와 불화 끝에 결별을 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30년 전부터 지녀온 유럽 문명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염세적인 관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계속 시를 써 나갔고, 말년의 걸작 〈사중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전쟁 후 그는 엄청난 명성을 누리며 행복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1950년 영국에서 발행된 〈칵테일 파티〉 초판 표지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영국의 문화훈장인 메리트 훈장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의 시극들은 계속 무대에 올려졌고, 특히 말년의 대표작 〈칵테일 파티〉가 브로드웨이에서 200회 이상 공연 기록을 세우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1947년 아내 비비언이 세상을 떠난 뒤, 1957년에는 8년간 비서로 일하던 29세의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했다. 1965년 1월 4일,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고향 이스트 코커의 성 마이클 교회에 안장되었다. 2년 후 영국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구역에 엘리엇의 기념석을 놓았다.
1877    "부부 시인"의 비극과 또 하나의 그림자 댓글:  조회:5488  추천:1  2016-11-26
휴즈(Hughes)가 3남매. 왼쪽부터 장남 제럴드, 올윈, 막내 테드. 올윈은 테드를 위해 자기 삶을 기꺼이 희생했고, 동생의 명예에 걸림돌이 되는 거라면 어떤 일이든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의 거울 속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부활하는 올케 실비아 플라스가 있었다. Ted Hughes Estate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의 생애는 그의 문학보다 유명하다.   그의 삶이, 죽음이 그만큼 극적이었다. 빼어난 문재로 주목 받다가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30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후에야 그의 문학이 인정 받게 된 사연이 그러했다. 그가 숨진 1963년은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가 출간된 해였다. 남편은 당시 이미 영미 문단의 스타였던 테드 휴즈(Ted Hughes, 1930~1998)였다. 플라스는 휴즈의 시를 미국 문단에 알려 첫 시집(‘빗속의 매’)이 나오게 했고, 휴즈는 단숨에 유명해졌다. 남편이 시작(詩作)과 강연 등으로 바쁘게 활동하는 동안 플라스는 모교인 스미스 칼리지에서 강의하며 돈을 벌었고, 두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가사를 도맡았다. 잦은 다툼 끝에 둘은 62년 10월부터 별거했고, 석 달 뒤 플라스는 잠든 두 아이의 간식을 챙겨놓곤 부엌 문을 테이프로 밀봉한 채 오븐 가스밸브를 열었다. 그 시각 정부(情婦)가 아닌 또 다른 여인과 동침하고 있던 휴즈를 플라스의 팬들은, 페미니스트 진영은 ‘살인자’라 불렀다. 휴즈를 역성드는 이들은 물론 달리 말했다. 플라스는 결혼 전 두 차례(41년, 53년)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 결혼 전후 그의 글쓰기도 지지부진했다. 기대와 야심이 컸던 만큼 좌절도 자괴도 컸다. 남편에 대한 부정(不貞)망상(물론 휴즈 입장이다)은 병적인 히스테리로 폭발하기 일쑤였다. 그 끝이 별거였다. 56년 결혼한 둘의 관계가 58년 무렵서부터 삐걱거렸으니 휴즈로서도 행복했을 리 없다. 플라스가 그렇게 떠난 뒤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훗날 영국의 계관시인이 됐고, 재혼한 아내 외에도 적잖은 여인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도, 그(와 주변)는 플라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 못지않게, 어쩌면 더 불행하고 공허한 삶을 산 이는 휴즈의 누나이자 플라스의 시누이 올윈 휴즈(Olwyn Hughes)였다. 산 올케와 불화했던 그는 동생의 명예를 지키느라 죽은 올케와 싸우며 한 생을 보냈다. 둘의 저작권 대리인이 된 올윈은 플라스가 동생의 짐이 되지 않도록 인터뷰 등 대외 활동 일체를 통제ㆍ관리했고, 둘의 평전은 물론이고 누가 플라스의 글 일부를 인용하려 할 때도 문맥을 살핀 뒤에야 허락하곤 했다. 그는 사나운 검열자였고, 고집 센 협상가였다. 휴즈의‘케르베루스(Cerberus, 지옥 문을 지키는 개)’라 불리기도 했던 올윈 휴즈가 1월 3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결혼 직후 가족 모임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플라스와 올윈은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품는다. 올윈은 플라스가 “뭔가에 속박된 듯 꽁한”인상이었다고 했고, 플라스는 “(올윈이) 아주 미인이지만(…) 허영기 많고 이기적인 사람 같았다”고 일기에 썼다. 60년 크리스마스 가족모임에서 둘은 격하게 다퉜고, 그게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자넷 말콤이 쓴 실비아 플라스 평전 ‘침묵하는 여인 The Silent Woman’에는 그 다툼 직후 플라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테드와 올윈의 미심쩍은, 근친상간을 의심케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썼다고 한다.(Telegraph, 2016.01.08) 동생을 향한 올윈의 애정이 그만큼 특별했다. 휴즈 남매는 영국 웨스트요크셔 미슬롬로이드에서 목수였던 윌리엄 휴즈와 에디스의 둘째와 셋째로 태어났다.(장남 제럴드는 2차대전 종전 직후 호주로 이민) 두 살 터울인 남매는 어려서부터 단짝처럼 지냈다. 올윈이 10살이던 38년 가족은 사우스요크셔의 탄광마을 멕스버러로 이사했고, 부모는 신문과 담배를 파는 잡화점을 열었다. 올윈은 사춘기의 우울을 독서로 풀곤 했다고 한다. 50년 퀸 메리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비서양성 과정을 이수, 52년 파리 주재 영국대사관에 취직했다. 그 취업은 ‘인디펜던트’가 “요크셔의 서민계층 여성으로선 다소 놀라운 일”이라고 썼을 만큼 성공적인 거였다. 그 무렵에도 그는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익스피어와 초서의 책들을 추천하곤 했다. 플라스가 숨질 무렵 올윈은 영화ㆍ연극 대본 에이전시겸 출판사 마톤플레이(Martonplay)의 비서 겸 번역가였다. 그 해 말 올윈은 직장에 사표 내고 데본시 노스토턴(Devon NorthTawton) 휴즈의 집으로 이사해 조카 프리다(당시 3살)와 니콜러스(1살)를 키우며 살림을 챙겼고, 휴즈의 문학 에이전시 역할도 맡는다. 법적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에 유서도 없이 숨진 올케의 시집 ‘거상들(Collosus)’과 죽기 한 달 전 출간한 소설 ‘벨자(The Bell Jar)’, 그리고 유고 시 원고(‘에어리얼 Ariel’, 65년 출간)와 일기(82년 미국서 출간) 저작권도 당연히 테드의 몫이었고, 올윈의 일거리였다. 그 상황을 두고 플라스의 팬들과 페미니스트 진영은 휴즈 남매의 ‘파렴치’를 성토했다. 텔레그래프는 “(올윈과 플라스의 관계 등 제반 상황을 보건대) 휴즈는 플라스의 저작권을 올윈이 아닌 독립적인 제3자에게 위임하는 것이 옳았다”고 썼다. 올윈은 동생에게 비우호적인(실은 중립적인) 비평가가 플라스의 평전을 쓰려 할 경우 취재에 불응했고, 작품 인용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선 천재적 문학 재능을 지닌 착하고 성실하고 잘 생긴 동생이 이상한 여자, 즉 재능보단 질투심이 더 많고 분열증과 우울증을 앓는 여자를 만나 고생만 하다가 욕까지 먹게 된 현실이 못마땅했고, 그 ‘진실’을 외면하는 페미니스트들과 평론가들에겐 화가 나 있었다. 그는 구미에 안 맞는 평전들을 싸잡아 ‘흡혈귀 전기(vampire biographies)’라고 불렀다. 올윈이 호평한 앤 스티븐슨(Anne Stevenson)의 플라스 평전 ‘씁쓸한 명성 Bitter Fame’(1989)에는 ‘극도의 악의(enormous hostility)’‘자기중심적 몽상(egotistic fantasizing)’ ‘정신적 맹목(psychological blindness)’같은 플라스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들이 적지 않았다. 그 책을 두고 어떤 이는 “올윈과의 사실상의 공저”라고도 했고, 혹자는 “테드와 올윈의 (플라스에 대한) 쓰디쓴 복수극”이라 비판하기도 했다. 스티븐슨은 사실과 확정적 근거에 기초해 쓴 책이라고 항변하면서도 휴즈 남매의 간섭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휴즈의 파경 책임을 밝히는 부분은 남매의 요구로 삭제해야 했고, 책의 상당 부분은 다시 써야 했고, 플라스의 시와 일기를 허락 없이 인용할 수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Telegraph, 위 기사) BBC 프로덕션이 2003년 제작한, 귀네스 펠트로 주연 영화 ‘실비아’의 휴즈(대니얼 크레이그 분)가 알던 것보다 훨씬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로 묘사된 데도 저런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56년 파리에서의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 둘은 불 같은 연애 끝에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스미스대학 도서관 소피아스미스컬렉션. 2003년 영화 '실비아'의 한 장면. 실비아 플라스 역은 귀네스 펠트로가, 테드 휴즈 역은 대니얼 크레이그가 맡았다. 지난 해 출간된 조너슨 베이트(Jonathan Bate)의 평전 ‘테드 휴즈: 승인되지 않은 삶 Unauthorized Life’은, 올윈에 따르면 “쓰레기더미에 얹힌 또 한 권의 쓰레기”였다. 베이트는 지난 해 4월 자기 책이 휴즈 일가에 의해 어떻게 달라지게 됐는지 밝히는 장문의 글을 가디언에 실었다. 휴즈의 ‘문학적 삶(literary life)’을 쓰기로 하고 휴즈의 아내였던 저작권자 캐롤 휴즈(Carol Hughes)의 승인을 받은 일, 4년여에 걸쳐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해준 일, 막판에 휴즈의 사생활- 주로 여성 편력- 을 수록하는 문제 때문에 협력관계가 어그러진 사연…. 그는 결국 작품 인용구 대부분을 지워야 했다고 썼다. 앞서 98년 캐롤 휴즈는 남편의 자필 원고(일기 제외)등을 미국 에모리 대학에 팔았다. 영국국립도서관은 2010년 50만 파운드에 그 원고를 되 샀고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했다. 베이트는 “하지만 저작권은 여전히 캐롤에게 있고, ‘10% 인용 허용’이라는 저작권법 조항은 너무 모호해서 저작권자가 소송을 걸면 판결로 적법 여부를 가려야 한다”고 썼다. 베이트는 ‘문학적 삶’을 평전이라 여겼고, 캐롤과 올윈은 문학비평으로 이해했던 거였다. 베이트의 원고에는 파경의 주된 원인 중 하나였던 휴즈의 연인 아씨아 베빌(Assia Wewill, 1927~1969)은 물론 그 밖의 여러 가명ㆍ익명의 여인들이 등장했다. 올윈에게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왜곡’이거나 ‘허구’였다. 플라스가 숨질 당시 휴즈의 아이를 임신(유산)하고 있었고, 숨진 뒤 5년간 동거하며 딸을 낳은 베빌을 두고도 올윈은 “테드는 아씨아에게 가려고 집을 나간 게 아니었다. 그는 잠시 혼자 머물기 위해 런던의 친구 집에 있었을 뿐, 결코 아씨아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고 말했다.(가디언, 2013.1.18) 베빌 역시 69년 테드와의 불화 끝에 4살 딸을 수면제로 재운 뒤 나란히 누워 플라스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등졌다. 올윈은 70년대 말 잘생긴 아일랜드 출신 남자(Richard Thomas)와 연애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베이트에 따르면 그 남자는 알코올 중독자로 병원을 들락거린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남자였지만 “테드를 쏙 빼닮은”미남이었다. 둘은 79년 6월 결혼한 뒤 1년도 안 돼 이혼했고, 이후 올윈은 독신으로 지냈다. 올윈은 친자식처럼 아끼던 조카 니콜라스가 2009년 알래스카에서 자살로 숨졌을 때에야 플라스가 앓던 우울증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수긍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3년 인터뷰에서도 그는 플라스를 두고 “끔찍한(nasty)” “트라우마 덩어리(whole trauma)”이고, “사악하고(vicious) 살짝 미친(a bit crazy)”같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테드 휴즈는 98년 1월 플라스와의 만남과 결혼, 여행, 사별의 사연과 기억들을 88편의 시로 엮은 ‘생일편지 Birthday Letters’를 펴냈다. 그 시집의 해설서인 ‘실비아 플라스의 영혼을 찾아서’(박종성 저, 동인출판사)의 저자는 “그(휴즈)는 실비아 플라스의 영혼을 찾아서 35년 동안 내면으로의 긴 여행을 해온 셈이며 그 결과가 시집의 출간”이라고 썼다. 플라스가 숨진 뒤 35년 동안, 휴즈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험담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어떠한 말도 글도 세상에 내놓은 적 없었다. 충실한 대변자 올윈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김선형 옮김, 문예출판사) 서문에 썼듯이 “망각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플라스의 일기 상당량을 누락시켰고, 59년 후반부터 자살 3일 전까지의 기록을 아예 폐기해 거센 비난을 샀는데, 그는 “아이들이 읽는 일이 없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시집을 내고 9개월 뒤 휴즈는 별세했고, 시집은 이듬해 휘트브레드 문학상을 탔다. 어쨌건 그는 그 시집으로 플라스를 향한 ‘변함 없는’ 애정과 경의를 표함으로써 자신을 영리하게 변호했다. 반면 독립적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부부의 비극 속 조연으로, 악역으로 살았던 올윈은 숨질 때까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자기 그림자와 싸우듯 그는 평생을 자신의 ‘입’과 싸웠고, 그걸 사랑이라 여겼다. ==============@@======================   이름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출생 1932년 10월 27일, 미국 사망 1963년 2월 11일 데뷔 1960년 시집 학력 스미스 여자대학 영문학 수상내역 1982년 퓰리쳐상 가족 남편-테드 휴즈 작품성향 고백시       1. 작가의 생애 1.1. 연보1.2. 초기 생애1.3. 대학생활1.4. 테드 휴즈와의 결혼과 작품 활동1.5. 자살1.6. 사후 2. 작품 2.1. 작품 활동2.2. 작품 경향 2.2.1. 초기 작품 경향 2.2.2. 중기 작품 경향2.2.3. 후기 작품 경향2.2.4. 고백시(confessional poet) 형식 3. 관련 작품 3.1. 영화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당대 최고의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진 미국의 작가이다.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였던 아버지 오토 플라스와 어머니 아우렐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래 영국에서 출생했지만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온다. 7세 때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늘 자살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죽음은 실비아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당대 최고의 시인인 테드 휴즈와 결혼하였지만 휴즈의 여성편력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휴즈와 이별한 후, 작품에 몰두하다가 결국 31세 나이로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은 채 자살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1] 1. 작가의 생애[편집] 1.1. 연보[2][편집] 1932 1932년 10월 27일 Boston에서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인 Otto Plath와 Aurelia Schober 사이에서 출생 1940 아버지 Otto Plath의 사망 1953 첫 자살시도. 이로 인해 정신병원 입원 1955 케임브리지 대학 입학 1956 테드 휴즈(Ted Hughes)와 결혼 1957 미국으로 이주. 스미스 여자대학에서 영문학 강사로 활동 1960 생애 첫 시집 를 출판&딸 프리다(Frieda) 출산 1961 둘째 아이 유산 1961 아들 니콜라스(Nicholas) 출산&남편의 외도 1962 자전적 소설를 가명으로 출판 1963 자살 1965 유고시집 출판 1982 퓰리쳐 상 수상   1.2. 초기 생애[3][편집]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 10월 27일 미국 보스턴 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였던 독일 그나보프(Grabow) 출신의 아버지 오토 플라스(Otto Plath)와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인 어머니 아우렐리아 쇼보 플라스(Aurelia Schober Plath)의 딸로 태어났다. 1934년 그녀의 동생 워렌 플라스(Warren Plath)가 태어난 뒤 메사추세츠 윈스럽(Winthrop)에서 자랐다. 실비아 플라스는 8살 때 처음 Boston Herald에 시를 발표하였고, The Scholastic Art & Writing Awards에서 상을 받으면서 뛰어난 문학·예술적 재능으로 주목 받았다. 1940년에 아버지가 당뇨와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 1942년 보스턴 서쪽 교외의 메사추세츠 웰즐리(Wellesley)로 이사했다.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에게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주었고, 이는 그녀의 삶과 예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플라스는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9살 때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1.3. 대학생활[편집] 1950년 장학금을 받으며 스미스 여자대학(Smith College)에 입학한 실비아는 이미 400편이 넘는 시를 썼으며, 1952년 8월 마드모아젤(Madmoiselle) 공모전에 단편 「민튼 씨네 집에서 보낸 일요일」이 입상하면서 마드모아젤의 인턴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녀는 하버드 여름학교의 프랭크 오코너 창작수업을 신청했으나 입교를 거절당하고, 학위 논문에서의 부진은 물론 학업에서의 연이은 실패가 계속된다. 이는 그녀를 극단적인 초조함과 불안으로 몰고가 결국 1953년 8월 대학 3학년 때 지하실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이틀 뒤 의식을 회복한 직후에 가족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1963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The Bell Jar(『종 항아리』)에 묘사되어 있다. 가까스로 살아난 후,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음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 후 1955년부터 2년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의 뉸햄 칼리지(Newnham College)에서 공부했다. 1.4. 테드 휴즈와의 결혼과 작품 활동[편집]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실비아휴즈.jpg' width='200' data-filesize='44310' src='//cdn.namuwikiusercontent.com/98/9893b01a0fde73458510b9257adb9af03fd53ea0057129451c33687aa5a0df48.jpg?e=1482808680&amp;k=zLzWj6Jnd3dRwmqlckYuPw'> 1956년 영국 시인 테드 휴즈(Ted Hughes)를 만나게 되는데,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6월에 결혼했다. 플라스가 유학과정을 마친 뒤 두 사람은 미국으로 갔으며, 모교인 스미스 여대에서 1957년 9월부터 이듬해 5월 말까지 강의를 하였다. 남편 휴즈는 인근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교수직업이 창작 생활에 부담이 된다 느끼고 보스톤으로 옮겨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플라스는 보스톤에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이 시기에 보스턴 대학교에서 시인 로버트 로월(Robert Lowell)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의 기간은 플라스가 가장 활성하게 시를 썼던 시기이며, 두 자녀도 이때 낳았다. 1960년 영국으로 돌아가, 첫딸 프리다(Frieda)를 출산하였으며, 임신 중 출판계약을 체결하고 1960년 10월 자신의 첫 번째 시집 를 출판한다. 1962년 아들 니콜라스(Nicholas)가 출생하지만, 그 해 7월 휴즈가 애시어 웨빌(Assia Wevill)과 내연의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실비아와 휴즈는 이혼하게 된다. 아이들을 데리고 런던에 돌아온 플라스는 그해 말까지 잘 알려진 시 와 등 많은 시를 썼다. 1963년 1월 14일,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 는 호평을 받았다. 1.5. 자살[4][편집] 1963년 2월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추운 날씨가 닥쳐왔다. 별거로 인한 스트레스에 추위, 독감과 생계 문제까지 겹쳐 실비아 플라스는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혼의 후유증과 사랑의 실패에 대한 좌절로 끊임없는 괴로움에 1963년 2월 11일 자살을 결심하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살했다. 이 때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는 가스가 스며들지 않도록 테이프로 치밀하게 막아두었고, 집주인에겐 의사를 불러달라는 노트를 남겨두었으며, 자살 시각을 오 페어(Au Pair)가 오기로 한 시각에 맞춘 것으로 보아 정말로 목숨을 끊을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가스가 새어나가는 바람에 아래층의 집주인은 의식을 잃어버렸고, 집 밖에서 기다리던 오 페어가 뒤늦게야 집으로 들어갔을 때 실비아 플라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녀는 영국 웨스트 요크셔에 묻혔다. 1.6. 사후[편집] 실비아 플라스의 사후, 그녀의 글을 모아 출판하는 일은 테드 휴스에게 맡겨졌다. 천하의 개쌍놈이자 인간말종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실비아 플라스가 결혼생활 마지막 몇달동안 쓴 일기를 없앴다. 시집 《아리엘(Ariel)》를 편집하면서, 순서를 밝고 경쾌한 내용의 시로 시작하여 점차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의 시로 가도록 고의적으로 배열해 비판을 받았다. 실비아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 휴스(Olwyn Hughes)가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테드 휴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글의 출판을 결사적으로 막기도 했다. 테드 휴스에 대한 반감이 늘어갔고, 밤 사이 사람들이 실비아 플라스의 묘비에 새겨진 정식 이름, “실비아 플라스 휴스”에서 “휴스”를 지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9년, 테드 휴스는 다시 외도를 시작했고, 아씨아 웨빌은 테드 휴스와 사이에 태어난 딸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동반자살했다. 6년 전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했을 때 썼던 방법이었다. 2. 작품[편집] 2.1. 작품 활동[편집]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거상.jpg' data-filesize='8267' src='//cdn.namuwikiusercontent.com/e8/e8edf7f5d1634e3c865502a4a363555c17064d43c805d2212c4c90509dd01e5e.jpg?e=1483568018&amp;k=NyGt_Wlf_6ee0VfdeDvZJg'> -생애 첫 시집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벨자.jpg' data-filesize='5558' src='//cdn.namuwikiusercontent.com/ee/eee3a26bdb6d81371a7ba0401215d17de01f6ff1bb4d9ac2cfabc060fbbd4ac4.jpg?e=1487008305&amp;k=BS2r-e0zyILaDJwxHx7gvQ'> -플라스가 남긴 유일한 소설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아리엘.jpg' data-filesize='9714' src='//cdn.namuwikiusercontent.com/1c/1cc59ceea42bf5227f75f22e1e1114e2cb6f6f421f33c2ca71267168ca6ac168.jpg?e=1485607448&amp;k=-0-jjlN8cya7J6lO5LdpmQ'> -유고시집이 담긴 책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일기.jpg' data-filesize='7234' src='//cdn.namuwikiusercontent.com/21/2146e8f66edab8084d69c7dc050c04cd233831590ca4bae19e37edf1b7d2805b.jpg?e=1486384449&amp;k=hjqoJ2snXCs3arAMMW1ktQ'> 2.2. 작품 경향[편집] 2.2.1. 초기 작품 경향 [5][편집] ,등의 시편들을 통하여 당대의 여성 시인이 직면해야만 했던 자아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아버지로 나타나는 거대한 힘으로부터 소외와 억압을 느끼고 분노하면서도 그 힘에 대한 경외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여성들이다. 플라스는 이 화자들을 통해 남성 중심의 문화에 갇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의 상실, 자기 분열적인 분로를 표현했다. 2.2.2. 중기 작품 경향[편집] 가부장저 질서가 지배하는 문화에서 한편으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로서 성을 초월하여 창조력을 표출해야 하는 여성 시인의 이중성을 보여주었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 대한 시인의 이중적 태도는 그녀에게 혼란을 안겨 주었고, 이러한 혼란과 갈등의 양상은 ,,등을 통해 여성적 특성을 드러낸 여성적 글쓰기로 나타나고 있다.예술가로서의 이상과 전형적인 여성 역할로서의 현실 사이에서 곡예를 벌이던 팔라스의 내부는 마침내 자기 분열 상태에 이르게 된다. 2.2.3. 후기 작품 경향[편집] , 등의 작품들을 통해 남성 중심적 사회 속에서 생성된 거짓된 자아를 버리고 새롭게 정화된 여성 시인으로서의 창조력을 되찾기 위해 능동적 죽음을 선택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서 플라스는 반복되는 자살의 시도와 부활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에 저하하는 한편 스스로 정화되어 새롭게 탄생된 자아와 자신만의 언어를 찾고자하는 갈망을 표출한다. 그녀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찾아 시작된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시적 과정이다. 2.2.4. 고백시(confessional poet) 형식[편집] 고백시는 시인 자신의 내밀한 사적 경험을 소재로 하는 서술적인 서정시로,시인이 자기 자신에 관한 충격적이거나 임상적인 세부사항들을 부끄러움 없이 솔직 담백하게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 낭만시와 구분된다.[6] 고백시는 로벗 로웰의 시에서 나온 용어임에 틀림 없지만 플라스의 시와 그의 시는 차이를 보인다. 로웰은 역사와 사회속에서 시적 자아를 보이지만 플라스의 자아는 역사적, 사회적이기 보다는 개인적 성향을 보이면서 자신의 삶과 정서에 더 많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플라스의 고백시는 개인적인 경험을 다룸과 동시에 위협받는 한 자아가 자신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면서 스스로를 재현하는 극적 접근 때문에 의의를 갖게 된다.,동아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학위 논문,2005,p1">[7] 3. 관련 작품[편집] 3.1. 영화 [편집]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영화.jpg' width='200' data-filesize='18186' src='//cdn.namuwikiusercontent.com/57/576193313acd27041b69874bcae152ca028358a3a75eb22a07ddb4d50cffc312.jpg?e=1480718359&amp;k=tTdnuGTljLevJoZvjKKnmg'> 개봉 2005.04.15 감독 크리스틴 제프스 출연 기네스 펠트로(실비아), 대니얼 크레이그(테드) 줄거리 사랑, 그 하나만 간직했던 찬란한 생애 | 불꽃 같은 시(詩)를 닮은 그녀 1956년 이른 봄 영국. 한 파티장에서 케임브리지로 유학을 온 미국 학생 실비아는 장래가 촉망되는 문인이자 평론가로 활동 중이던 테드 휴즈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사랑을 느낀다. 테드 역시 실비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끌림을 느끼고 결국 둘은 결혼까지 이르게 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행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비아의 병적일 정도로 집요한 사랑에 대한 집착과 테드의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 때문에 점점 어긋난다. 결국 둘은 자꾸만 빗나가는 사랑으로 갈등을 반복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관계를 유지해 간다. 실비아는 대학 강의와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역량 있는 여류 시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고, 테드 또한 시인으로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만큼 불안하기만 했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테드의 외도로 결국 파경에 이르게 된다. 이혼 후,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과 이별의 아픔으로 힘겨워 하던 실비아는 마치 광기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 더욱 창작 활동에 매진하여 다작의 시와 소설을 완성하지만 결국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데...[8] [1] "실비아 플라스",『해외저자사전』[2] 김선형,『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문예출판사, 2004, p707-709[3] "실비아 플래스",『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Sylvia Plath",『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4] 권태기,"실비아…’ ‘치사한 욕망’과 ‘불멸의 문학’ 사이",『동아일보,2004.03.20[5] 송순임,「실비아 플라스: 여성 정체성 추구의 시 = Sylvia Plath: Poetry for the Pursuit of Female Identity」,전남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학위 논문,2010.2,PP.1-2[6] "고백시",『두산백과』[7] 곽미경,「실비아 플라스의 시에 나타난 가족과 자아」>,동아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학위 논문,2005,p1[8] "실비아",『네이버 영화매거진』,2003  
1876    미국 시인 - 실비아 플라스 댓글:  조회:5023  추천:0  2016-11-26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년 10월 27일 - 1963년 2월 11일)는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소설작가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으며, 시와 함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인 《벨 자(The Bell Jar)》로 명성을 얻었다.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스과 결혼했고, 사후 컬트적인 명성을 얻었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2 사후 3 작품 4 참고문헌   생애[편집]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 보스턴에서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아우렐리아 쇼버 플라스(Aurelia Schober Plath)와 보스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독일 그나보프출신의 오토 에밀레 플라스(Otto Emile Plath)에서 태어났다. 2년 후 부부는 1934년 아들 워렌(Warren)을 낳았다. 1940년 11월, 아버지 오토 플라스가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는다. 당시 당뇨병은 충분히 치료 가능한 질병이었으나, 자신의 병이 말기 폐암이라고 착각한 오토 플라스는 끝까지 치료를 거부했다. 이듬해, 아직 9세였던 실비아는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8세에 이미 보스턴 헤럴드지에 시를 발표한 실비아 플라스는 적극적이고, 성적이 우수하며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으로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스미스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3학년 여름, 여성지 마드모아젤의 인턴으로 뽑혀 뉴욕시에서 지내던 중 우울증이 급격하게 심해졌다. 실비아는 인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수면제를 먹고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가까스로 살아난 후, 실비아 플라스는 정신병원에 잠시 입원해 당시 정신치료에 효과적이라 여겨졌던 전기충격치료를 받았다. 훗날 실비아 플라스는 이 때의 악몽같은 경험을 되살려 《벨 자(The Bell Jar)》를 썼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뉸햄 칼리지(Newnham College)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95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이던 테드 휴스를 만나 그해 6월 결혼했다. 부부는 잠시 미국으로 터전을 옮겼고, 실비아 플라스는 모교 스미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1960년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가 큰딸 프리다(Frieda)를 낳았고, 실비아는 첫 시집 《콜로서스(The Colossus and Other Poems)》를 출판했다. 1962년에는 아들 니콜라스(Nicholas)가 태어났다. 같은 해 10월, 실비아 플라스는 남편 테드 휴스가 아씨아 웨빌(Assia Wevill)과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부는 싸움 끝에 공식적인 별거를 선언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런던에 돌아온 플라스는 그해 말까지 잘 알려진 시 《아빠(Daddy)》와 《레이디 라자러스(Lady Lazarus)》등 많은 시를 썼다. 1963년 1월 14일,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 《벨 자》는 호평을 받았다. 1963년 2월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추운 날씨가 닥쳐왔다. 별거로 인한 스트레스에 추위, 독감과 생계 문제까지 겹쳐 실비아 플라스는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다. 11일 아침, 실비아 플라스는 가스를 틀어둔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 일부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는 가스가 스며들지 않도록 테이프로 치밀하게 막아두었고, 집주인에겐 의사를 불러달라는 노트를 남겨둔데다 자살 시각을 오 페어(Au Pair)가 오기로 한 시각에 맞춘 것으로 보아 정말로 목숨을 끊을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가스가 새어나가는 바람에 아래층의 집주인은 의식을 잃어버렸고, 집 밖에서 기다리던 오 페어가 뒤늦게야 집으로 들어갔을 때 실비아 플라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녀는 영국 웨스트 요크셔에 묻혔다. 사후[편집] 실비아 플라스의 사후, 그녀의 글을 모아 출판하는 일은 테드 휴스에게 맡겨졌다.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실비아 플라스가 결혼생활 마지막 몇달동안 쓴 일기를 없앴다. 시집 《아리엘(Ariel)》를 편집하면서, 순서를 밝고 경쾌한 내용의 시로 시작하여 점차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의 시로 가도록 고의적으로 배열해 비판을 받았다. 실비아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 휴스(Olwyn Hughes)가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테드 휴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글의 출판을 결사적으로 막기도 했다. 테드 휴스에 대한 반감이 늘어갔고, 밤 사이 사람들이 실비아 플라스의 묘비에 새겨진 정식 이름, “실비아 플라스 휴스”에서 “휴스”를 지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9년, 테드 휴스는 다시 외도를 시작했고, 아씨아 웨빌은 테드 휴스와 사이에 태어난 딸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동반자살했다. 6년 전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했을 때 썼던 방법이었다. 작품[편집] 《콜로서스(Colossus and Other Poems)》 (1965) - 생전 출판된 유일한 시집. 《벨 자(The Bell Jar)》(1963) - 소설. 《아리엘(Ariel)》 (1965) - 시집.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완전판(The Unabridged Journals of Sylvia Plath)》(2000) - 캐런 K. 쿠킬(Karen K. Kukil) 편집. 《체리 부인의 부엌(Mrs.Cherry's Kitchen)》(2001) - 어린이책. 참고문헌[편집]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완전판(The Unabridged Journals of Sylvia Plath)》(2000)@@============================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년 10월 27일 - 1963년 2월 11일)는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소설작가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으며, 시와 함께 자전적 성격의 소설인 《벨 자(The Bell Jar)》로 명성을 얻었다.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스과 결혼했고, 사후 컬트적인 명성을 얻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 보스턴에서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아우렐리아 쇼버 플라스(Aurelia Schober Plath)와 보스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독일 그나보프출신의 오토 에밀레 플라스(Otto Emile Plath)에서 태어났다. 2년 후 부부는 1934년 아들 워렌(Warren)을 낳았다.   1940년 11월, 아버지 오토 플라스가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는다. 당시 당뇨병은 충분히 치료 가능한 질병이었으나, 자신의 병이 말기 폐암이라고 착각한 오토 플라스는 끝까지 치료를 거부했다. 이듬해, 아직 9세였던 실비아는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8세에 이미 보스턴 헤럴드지에 시를 발표한 실비아 플라스는 적극적이고, 성적이 우수하며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으로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스미스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3학년 여름, 여성지 마드모아젤의 인턴으로 뽑혀 뉴욕시에서 지내던 중 우울증이 급격하게 심해졌다. 실비아는 인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수면제를 먹고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가까스로 살아난 후, 실비아 플라스는 정신병원에 잠시 입원해 당시 정신치료에 효과적이라 여겨졌던 전기충격치료 받았다. 훗날 실비아 플라스는 이 때의 악몽같은 경험을 되살려 《벨 자(The Bell Jar)》를 썼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뉸햄 칼리지(Newnham College)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95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이던 테드 휴스를 만나 그해 6월 결혼했다. 부부는 잠시 미국으로 터전을 옮겼고, 실비아 플라스는 모교 스미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1960년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가 큰딸 프리다(Frieda)를 낳았고, 실비아는 첫 시집 《콜로서스(The Colossus and Other Poems)》를 출판했다. 1962년에는 아들 니콜라스(Nicholas)가 태어났다. 같은 해 10월, 실비아 플라스는 남편 테드 휴스가 아씨아 웨빌(Assia Wevill)과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부는 싸움 끝에 공식적인 별거를 선언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런던에 돌아온 플라스는 그해 말까지 잘 알려진 시 《아빠(Daddy)》와 《레이디 라자러스(Lady Lazarus)》등 많은 시를 썼다. 1963년 1월 14일,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 《벨 자》는 호평을 받았다. 1963년 2월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추운 날씨가 닥쳐왔다. 별거로 인한 스트레스에 추위, 독감과 생계 문제까지 겹쳐 실비아 플라스는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다. 11일 아침, 실비아 플라스는 가스를 틀어둔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했다.   일부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는 가스가 스며들지 않도록 테이프로 치밀하게 막아두었고, 집주인에겐 의사를 불러달라는 노트를 남겨둔데다 자살 시각을 오 페어(Au Pair)가 오기로 한 시각에 맞춘 것으로 보아 정말로 목숨을 끊을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가스가 새어나가는 바람에 아래층의 집주인은 의식을 잃어버렸고, 집 밖에서 기다리던 오 페어가 뒤늦게야 집으로 들어갔을 때 실비아 플라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녀는 영국 웨스트 요크셔에 묻혔다. 사후실비아 플라스의 사후, 그녀의 글을 모아 출판하는 일은 테드 휴스에게 맡겨졌다.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실비아 플라스가 결혼생활 마지막 몇달동안 쓴 일기를 없앴다. 시집 《아리엘(Ariel)》를 편집하면서, 순서를 밝고 경쾌한 내용의 시로 시작하여 점차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의 시로 가도록 고의적으로 배열해 비판을 받았다.   실비아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 휴스(Olwyn Hughes)가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테드 휴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글의 출판을 결사적으로 막기도 했다. 테드 휴스에 대한 반감이 늘어갔고, 밤 사이 사람들이 실비아 플라스의 묘비에 새겨진 정식 이름, “실비아 플라스 휴스”에서 “휴스”를 지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9년, 테드 휴스는 다시 외도를 시작했고, 아씨아 웨빌은 테드 휴스와 사이에 태어난 딸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동반자살했다. 6년 전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했을 때 썼던 방법이었다.   작품《콜로서스(Colossus and Other Poems)》 (1965) - 생전 출판된 유일한 시집. 《벨 자(The Bell Jar)》(1963) - 소설. 《아리엘(Ariel)》 (1965) - 시집.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완전판(The Unabridged Journals of Sylvia Plath)》(2000) - 캐런 K. 쿠킬(Karen K. Kukil) 편집. 《체리 부인의 부엌(Mrs.Cherry's Kitchen)》(2001) - 어린이책.   Daddy by Sylvia Plath You do not do, you do not do Any more, black shoe In which I have lived like a foot For thirty years, poor and white, Barely daring to breathe or Achoo. Daddy, I have had to kill you. You died before I had time-- Marble-heavy, a bag full of God, Ghastly statue with one gray toe Big as a Frisco seal And a head in the freakish Atlantic Where it pours bean green over blue In the waters off beautiful Nauset. I used to pray to recover you. Ach, du. In the German tongue, in the Polish town Scraped flat by the roller Of wars, wars, wars. But the name of the town is common. My Polack friend Says there are a dozen or two. So I never could tell where you Put your foot, your root, I never could talk to you. The tongue stuck in my jaw. It stuck in a barb wire snare. Ich, ich, ich, ich, I could hardly speak. I thought every German was you. And the language obscene An engine, an engine Chuffing me off like a Jew. A Jew to Dachau, Auschwitz, Belsen. I began to talk like a Jew. I think I may well be a Jew. The snows of the Tyrol, the clear beer of Vienna Are not very pure or true. With my gipsy ancestress and my weird luck And my Taroc pack and my Taroc pack I may be a bit of a Jew. I have always been scared of you, With your Luftwaffe, your gobbledygoo. And your neat mustache And your Aryan eye, bright blue. Panzer-man, panzer-man, O You-- Not God but a swastika So black no sky could squeak through. Every woman adores a Fascist, The boot in the face, the brute Brute heart of a brute like you. You stand at the blackboard, daddy, In the picture I have of you, A cleft in your chin instead of your foot But no less a devil for that, no not Any less the black man who Bit my pretty red heart in two. I was ten when they buried you. At twenty I tried to die And get back, back, back to you. I thought even the bones would do. But they pulled me out of the sack, And they stuck me together with glue. And then I knew what to do. I made a model of you, A man in black with a Meinkampf look And a love of the rack and the screw. And I said I do, I do. So daddy, I'm finally through. The black telephone's off at the root, The voices just can't worm through. If I've killed one man, I've killed two-- The vampire who said he was you And drank my blood for a year, Seven years, if you want to know. Daddy, you can lie back now. There's a stake in your fat black heart And the villagers never liked you. They are dancing and stamping on you. They always knew it was you. Daddy, daddy, you bastard, I'm through. 아빠                이젠 안돼요, 더 이상은 안될 거예요. 검은 구두 전 그걸 삼십 년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어요.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 한 번 쉬지도 재채기조차 못하며. 아빠, 전 아빠를 죽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래볼 새도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요- 대리석처럼 무겁고, 神으로 가득찬 푸대자루, 샌프란시스코의 물개와 아름다운 노오쎄트 앞바다로 강낭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는 변덕스러운 대서양의 갑처럼 커다란 잿빛 발가락을 하나 가진 무시무시한 조상. 전 아빠를 되찾으려고 기도드리곤 했답니다. 아, 아빠. 전쟁, 전쟁, 전쟁의 롤러로 납작하게 밀린 폴란드의 도시에서, 독일어로. 하지만 그런 이름의 도시는 흔하더군요. 제 폴란드 친구는 그런 도시가 일이십 개는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전 아빠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뿌리를 내렸는지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결코 아빠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혀가 턱에 붙어 버렸거든요.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전, 전, 전, 전, 전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독일 사람은 죄다 아빤 줄 알았어요. 그리고 독일어를 음탕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유태인처럼 칙칙폭폭 실어가는 기관차, 기관차. 유태인처럼 다카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전 유태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전 유태인인지도 모르겠어요. 티롤의 눈, 비엔나의 맑은 맥주는 아주 순수한 것도, 진짜도 아니에요. 제 집시系의 선조 할머니와 저의 섬뜩한 운명 그리고 저의 타로 카드 한 벌, 타로 카드 한 벌로 봐서 전 조금은 유태인일 거예요. 전 언제나 아빠를 두려워했어요 아빠의 독일 空軍, 아빠의 딱딱한 말투, 그리고 아빠의 말쑥한 콧수염 또 아리안족의 밝은 하늘색 눈, 기갑부대원, 기갑부대원, 아, 아빠- 神이 아니라, 너무 검은색이어서 어떤 하늘도 비걱거리며 뚫고 들어올 수 없는 十字章 어떤 여자든 파시스트를 숭배한답니다. 얼굴을 짓밟은 장화, 이 짐승 아빠 같은 짐승의 야수 같은 마음을. 아빠, 제가 가진 사진 속에선 黑板 앞에 서 계시는군요. 발 대신 턱이 갈라져 있지만 그렇다고 악마가 아닌 건 아니에요, 아니, 내 예쁜 빠알간 심장을 둘로 쪼개버린 새까만 남자가 아닌 건 아니에요. 그들이 아빠를 묻었을 때 전 열 살이었어요. 스무 살 땐 죽어서 아빠께 돌아가려고, 돌아가려고, 돌아가 보려고 했어요. 전 뼈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침낭에서 끌어내 떨어지지 않게 아교로 붙여버렸어요. 그리고 나니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어요. 전 아빠를 본받기 시작했어요. 고문대와 나사못을 사랑하고 '나의 투쟁'의 표정을 지닌 검은 곳의 남자를. 그리고 저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래서, 아빠, 이제 겨우 끝났어요. 검은 전화기가 뿌리째 뽑혀져 목소리가 기어나오질 못하는군요.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전 둘을 죽인 셈이에요. 자기가 아빠라고 하며, 내 피를 일년 동안 빨아마신 흡혈귀. 아니, 사실은 칠년만이지만요. 아빠, 이젠 누우셔도 돼요.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       @@=///실비아 플라스의 오븐=@@   오븐 속에는 마지막 사랑이 부풀고 있었지   죽도록 사랑했던 유명인의 아이들에게 엄마가 마지막으로 굽는 빵   시인의 창고를 유린하는 젊은 고독은 사랑과 배반의 열기로, 언제나 유혹의 불길을 당기는 삶    어둠을 깨물고 살았어도 사랑하였으므로 너무나 아름다운 시절 노을보다 행복한 잿빛 시를 산란하던 아침   어제처럼 강물은 흘러 푸른 영원을 꿈꾸던 세기의 詩 안개 속 차가운 겨울 묻고 떠나네   온몸에 퍼져 있는 미완의 시, 들이 타들어가는 마지막 유산   식탁 위   부풀어 있는 침묵 두 조각 그리고 밀크   *습작노트: Sylvia Plath (1932 -1963)그녀의 인생은 독특했다. 그녀는 나이 32세에 가스 오븐 렌지에 머리를 넣어 자살했다. 처음 자살을 시도한 것은 9살 때였다. 그녀는 비범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미스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대학우등생회인 파이베타카파의 회원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때에 신경쇠약에 걸려 지하실에 들어가 쉰 알의 수면제를 삼킨 경험이 있다.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에 공부하다가 테드 휴즈(Ted Hughes.현대 영국 3대 시인의 한 명)를 만나 1956년에 결혼했다. 부부가 도미하여 1년 이상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실비어는 모교 스미스대학에서 가르쳤다. 다시 영국에 돌아온 후 런던을 거쳐 데번에 정착했다가, 남편과 불화가 있어 1962년 혼자 런던에 와서 집을 빌린 후 두 애를 데려왔다. 다음해 2월, 어느 추운 겨울 날 아침, 가스 오븐 속에 머리를 넣고 자살했다. 그녀는 시체 애호증에 가까울 만큼 죽음을 탐닉했고, 스스로도 자살이라는 방식을 택해 죽음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죽음은 진지한 장난이었다. ''자살의 연구''에서 알바레즈는 서문에 그녀의 예를 자세히 들며 자살이 하나의 장난이나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결국 그것이 성공함으로써 결코 자살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 스스로가 죽게 되면서 느꼈을 것이라는 인상기를 담고 있다. 딸 프리다 휴즈(Frieda Hughes)도 유명한 여류시인이다.///////////////////////////////////////////////////@@ "도대체 시가 뭐야?"   [오마이뉴스 이종찬 기자] 말해 줘, 거기 있는 당신들,도대체 시가 뭐야?시를 조금도 품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혹시 있어?-5쪽, 마크 스트랜드 '위대한 시인 돌아오다' 몇 토막 시란 놈은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물음표뿐이다       ▲ 재미시인 임혜신의   ⓒ2006 바보새 도대체 시란 무엇일까? 발행인이자 문학평론가 김종철(59)은 "시인은 도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시는 곧 도(道)가 아니겠는가. 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국어사전을 펴면 도는 '1.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2. 종교상으로 근본이 되는 뜻 또는 깊이 깨달은 경지'라고 나와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란 과연 무엇일까? 종교의 뿌리가 되는 깊은 뜻은 어떤 것일까? 깊이 깨달은 경지는 또 무엇을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도리나 종교의 뿌리가 되는 깊은 뜻이나 깊이 깨달은 경지나 이 모두 삶의 보석처럼 빛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살이 속에만 그 진리란 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에 진리란 게 숨어 있는 것일까. 내가 여행길에서 우연찮게 만난 어느 노스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도이자 진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묘한 웃음을 바람처럼 남긴 채 어둑한 산길로 허위적 허위적 올라갔다. 참으로 어렵다. 도이자 진리인 시란 놈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물음표뿐이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초현실주의 시인 마크 스트랜드는 "도대체 시가 뭐야?"라며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시를 품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 혹시 있어?"라며 선승처럼 다시 되묻는다. 그래. 그야말로 분명 시가 무엇인지 도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시인이자 도인임에 틀림없다. "나의 미국 시 읽기는 생의 노랫소리를 듣는 일" "이 책에 실린 스물다섯 명의 미국 시인들도 모두 향기와 빛이 다른 마술사들입니다... 이들 시인들을 통 털어 미국 시인이라 부르지만 각각 팔레스타인계, 독일계, 유태인, 캐나다인, 흑인, 백인, 여성 시인, 젊은 시인, 원로 시인 등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책머리에' 몇 토막 20여 년 동안 미국 플로리다에서 살고 있는 재미 시인 임혜신씨가 미국 현대시인 25명의 시와 시세계를 꼼꼼하게 풀어낸 시평집 (바보새)를 펴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 알렌 긴즈버그를 비롯해 베스트셀러 시인 빌리 콜린즈, 동양정신을 시로 드러낸 로버트 하스 등 수많은 시인들의 시세계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빌리 콜린즈, 제임스 메릴, 로버트 블라이, 마크 스트랜드, 샤론 올즈, 제임스 테잇, 차일스 브꼬브스키, 토리 덴트, 토이 데리코테, 알렌 긴즈버그, 마아가렛 앳우드, 로버트 해스, 갤웨이 킨넬, 스탠리 쿠니쯔, 데이비드 레만, 필립 르바인, 나오미 녜, 로버트 핀스키, 실비아 플라스, 밥 홀만, 차알스 시믹, 토니 토스트, 카렌 포크만, 폴 짐머, 메리 올리버가 그 시인들. 시인 임혜신은 책머리에서 "이 책에 실린 스물네 편의 글은 한국의 월간 에 실었던 글이며, 다른 한 편은 미국에서 나오는 한민족문학지 에 실었던 글"이라고 말한다. 이어 "내가 읽어내고자 했던 것은 서로 다른 역사와 생활환경에서 오는 경향적 다름이라든지 이국정취라든지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라고 되뇐다. 임혜신은 "나의 미국 시 읽기는 생의 노랫소리를 듣는 일"이었다고 귀띔한다. 즉, 그의 미국 시 읽기는 "척박하고도 풍요하며 답답한 듯 광활한 이 세상을 나와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 이웃들의 삶의 맛을 읽어내는 일"이었으며, "소박한 마음으로 그들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노래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생명의 생생한 리듬들이 만져지곤 했다"는 것. 소유 대가 지불의 끝없는 악순환 속에 살아가는 미국 사람들 나무들로 둘러싸인 축사 안에검게 빛나는 발굽을 가까이 맞대고 서 있는 햄프셔 암양들은갚아야 했다. 양털로, 자궁으로,먹음으로써, 그리고 양치기 개에 대한 두려움으로.동물들은 모두 갚아야 했다. 말은 하루 종일 갚았다,돌처럼 무거운 배들을 끌었고 땅은 그들이 끌어올린 것을 다시 끌어내렸다.돼지들? 그들은 칼이 목으로 들어올 때 꽥꽥 소리치는 것과이어서 흘러내리는 피로갚았다. 피, 그 뜨겁고 개인적인 것으로, 그리고도 남은 부채는 내장들이 갚았다."이렇게 사는 게 나야."라고 돼지들은 말 할 줄 모른다.여자들은 머리를 숙여서 갚았고, 그리고남자들은내 아버지처럼 술을 마셔서 갚았다.악마는 소리쳤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갚아라!" 나는나의 빚을 다른 식으로 갚았다. 이들처럼농장의 방식으로 갚을 수 없었으므로, 오늘 이 시를 쓴다.-48~9쪽, '동물들이 치룬 댓가' 모두 이 시는 시인이자 번역가인 로버트 블라이가 칠순의 나이에 펴낸 명상시집 에 실려 있는 시다. 언뜻 읽으면 참으로 재미있는 시다. 하지만 속내를 꼼꼼히 되짚어보면 섬뜩할 정도로 가슴 쓰린 시다. 아니, 이 시는 무언가 얻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나라, 자본주의의 황제국인 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픈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시는 아주 고급의 연금술입니다"     재미 시인 임혜신은 누구인가?       ▲시인 임혜신 ⓒ바보새 "혹자는 말하더군요. '시는 병이며 시인은 패자다'라고. 그러나 혹시 병적이거나 패배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고 인생인 것이겠지요. 시는 인생의 병과 패배 속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난 마술이며 사랑이며 자비이며 그래서 또한 유희인 것이구요." -'책머리에' 몇 토막시인 임혜신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1995년 , 1997년〈미주 한국일보>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2001)이 있으며, 지금〈미주문인협회〉회원과 Global Network of Poets〈빈터〉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지금 미국 플로리다에서 살고 있는 시인은 "시는 아주 고급의 연금술"이며, "납에서 금을, 개천에서 용을, 늪에서 연꽃을 키워낼 뿐 아니라, 금을 납이 되게 하여 그 깊이와 무게를 배우게 하고 개천으로 하여 거대한 용을 품는 법을 알게 하고 한 송이 연꽃으로 하여 검게 썩은 연못의 평화를 깨치게 하는 쌍방통행의 자유자재한 마술"이라고 믿고 있다. / 이종찬 기자     시인 임혜신은 이 시 읽기에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든 것에는 지당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어 소유와 욕망의 불균형 속에 살아가는 미국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융자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되뇐다. 또한 "그것을 갚는데 15년에서 20년이 걸린다"라며, 미국 사람들은 소유와 대가 지불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고 못 박는다. 글쓴이는 '만일 삶이 이 시인의 말대로 부채상환의 작업"이라면 "이 시야말로 이 모든 부채로부터의 자유로워지는 단 하나의 길을 알려주고 있다"라고 곱씹는다. 즉, "이 시인이 동양 정신에 몰입한 것을 감안하며 해석한다면 그것은 전생일 수도 있겠고 그 어떤 업보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장의 편에 서서 심장의 삶을 노래하는 시인 나는 원해, 나는 원해,나는 원해, 나는 원해라고 대부분의심장들은 말하지만 나의 심장은 좀 불온해,한때 의심했던 쌍둥이 심장 같은 것도 아니고내 심장은 나는 원해, 나는 원하지 않아, 나는원해, 그러다가 잠시 멈추기도 하지.그리고는 내게 귀 기울이라 해,-176쪽, '불온한 심장을 지니고는 살 수 없는 여자' 몇 토막 이 시를 쓴 마아가렛 앳우드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과 영국, 이태리, 프랑스, 독일 등에서 2~3년씩 산 것을 빼고 나면 캐나다에서만 살아온 캐나다의 시인이자 소설가다. 하지만 마아가렛 앳우드는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타임상과 캐나다의 트릴리움상, 영국의 부커상을 받을 만큼 아메리카 대륙이 낸 국제적인 시인이며 작가이다. 위 시는 마아가렛 앳우드가 1976년부터 1986년까지 10년 동안 낸 시집에서 가려 뽑은 시들을 묶은 두 번째 시선집에 실려 있는 시다. 이 시는 심장의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즉, "심장은 신선한 피를 공급한다는 물질적이며 기계적인 일차적 기능 면에서, 또 감정을 탄생시키고 받아들이고 씻어내는 재생의 장소"라는 것이다. 시인 임혜신은 마아가렛 앳우드의 시편들에는 "심장을 통해 심정을 토로하는 시"가 참 많지만 스스로 "심장이 되어 심장의 편에서 심장의 삶을 노래한 시는 쉽게 만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어 "이 시는 심장을 하나의 독자적인 존재로 형상화"하여, 심장이 그저 "오장육부 중 하나가 아니라 한 생명의 무게를 온전히, 절실하게 떠맡고 있는 독립된 존재"라고 곱씹는다. 글쓴이는 "'원해, 원하지 않아'를 반복하는 심장의 이원구조는 생태적으로 건강한 일종의 균형 견제 제도 일 뿐"이라고 간추린다. 그리고 "'원해, 원하지 않아'를 반복하는 이 심장의 작업은 결국 합을 위한 정이며 반인 것"이라고 못 박는다. 왜냐하면 마아가렛 앳우드는 그 누구보다도 정반합의 뜻을 잘 아는 시인이므로. 서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비아 플라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시간나는 산파의 추출기를 돌리고 있었다,내게도 꿀은 있다자그마치 여섯 병이나 있다.여섯이나 되는 고양이의 눈이 포도주를 넣어두는 지하실에 있다.창문도 하나 없는 집이 깊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겨울을 난다.전에 살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썩은 잼들공허한 광채를 담은 병들......그 누구의 것이라도 좋을 술병들과 함께이런 방은 처음이다.차마 숨쉴 수조차 없는 방그 안에 박쥐처럼 웅크린 한 덩이 어둠,빛은 없고호롱불과 그 불빛 아래-292~3쪽, '겨울나기' 몇 토막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여성 시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동요적인 리듬에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시 '아빠'로 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시인은 왜 꽃다운 나이에 이 세상을 헌신짝 내던지듯이 버리고 말았을까. 죽기에 앞서 문단에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킨 시집 이란 제목과 시를 쓴 날짜, 41개의 차례까지 정리해놓고 한 점 먼지로 사라져버린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여덟 살 때 미국의 유명 문학지 에 시가 실릴 정도로 타고난 시인이었다. 스미스 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니던 실비아 플라스는 여러 잡지에 글을 실었고, 수많은 상까지 휩쓸었으나 그 무렵에 첫 자살을 시도한다. 그 뒤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영국의 풀브라이트로 유학을 떠난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곳에서 뒤에 영국의 계관시인이 되는 테드 휴스와 결혼한다. 그때 실비아 플라스는 남편과의 만남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만났어. 그의 목소리는 천둥과 같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혼생활 동안 남편은 그의 보조를 받으며 뛰어난 시인이 되어가지만 그는 가정을 돌보는 일에만 매달린다. 물론 틈틈이 시를 써서 신문과 방송 잡지에 발표했고, 첫 시집도 묶어냈다. 하지만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6년 만에 끝이 난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실비이 플라스는 가스 밸브를 열어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죽기 앞까지 그는 세 살 난 딸과 갓난 아들을 키우면서 주로 새벽 시간에 글을 썼다고 한다. 는 20여 년 동안 미국에서 살고 있는 재미 시인 임혜신이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미국 현대시의 속내를 차분하게 더듬은 미국 현대시 해설집이다. 글쓴이는 이 책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25명의 시인을 가려 뽑은 뒤 영문시 한 편과 그 시를 우리말로 옮긴 시를 싣고, 그 시에 대한 꼼꼼한 해설과 시인의 삶을 하나 둘 파헤친다. 이 책의 특징은 이미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시인들도 더러 있으나 대부분의 시인들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한 편의 대표 시와 그 시인의 삶을 통해 인종문제와 반전, 현대문명 속에 날로 상실되어가는 인간성 회복은 물론 시인 개개인의 사랑과 욕망, 행복의 척도까지 가늠하고 있다. /이종찬 기자 =  ///@@@...                                                          미국 여성문학을 얘기할 때 꼭 한번 짚고 가야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실비아 플라스입니다. 2005년 기네스 팰트로 주연의 "실비아"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하면서 이제는 일반인들에게도 제법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그러나 실비아 플라스가 일반인들에게 회자되고 소모된 방식은 문제가 많습니다. 영국에서 시인으로 활동 중인 그녀의 딸 프리다 휴즈는 사람들이 어머니를 "자살인형"으로 왜곡시켰다고 비난합니다. BBC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자, 프리다는 아래와 같이 분노의 심경을 시로 토로하기도 했죠. 이제 그들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상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땅콩을 주워 먹으면서 내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즐긴 사람들은 그녀의 추억을 각자 하나씩 들고 집으로 가겠지 생명이 없는, 기념품을 그들이 만들어낸 괴물의 주둥아리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자살인형 실비아라는 괴물 - 프리다 휴즈 실비아 플라스는 31살이라는 나이에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질식사했는데요. 그녀가 선택한 자살의 방식이 일반적인 자살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살인형"이라는 왜곡된 이해는 영미문학사에 있어서 그녀의 중요성을 간과, 폄하하는 것입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1950년대 영미문학계를 대표하는 "고백파 시인 (confessional poets)" 중에 한 명이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순수한 문학에 대한 애정으로 혼신을 다해 시작(詩作)활동을 했습니다. 비록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좌절 등에 부딪쳐 자살을 택했고 생전에 제대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사후에 발표한 시집, "에리얼(Ariel)"을 통해서 재조명되었습니다. "에리얼"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사회를 강렬하게 비판하고 여성이라는 타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섬뜩하고도 거침없이 드러낸 수작으로 문단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운동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책이 되고 영화가 된... 한편의 드라마 같던 삶 실비아 플라스의 인생은 불같은 사랑, 살의에 가까운 증오, 반복된 자살시도 라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의 삶, 특히 대학시절 자살시도와 정신병원에서의 치료과정을 기록한 자전적인 소설인 " 벨자(Bell Jar, 종모양의 유리그릇)"를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벨자"는 그녀의 시 속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주제인 숨막히는 감금 과 억압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은 데서 온 상실이든, 남편의 외도에서 온 절망이든, 여성시인으로서 느낀 사회적인 한계에서 오는 것이든,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자아에서 온 스스로에 대한 불안과 실망에서 오는 것이든 간에 실비아는 자신의 삶을 "벨자"에 갇힌 삶으로 인식했고 탈출을 위한 노력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실비아는 어린 시절부터 단연 문학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습니다. 미국의 명문 스미스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했고 여러 문학대회에서 수상했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영국의 캠브리지에서 공부했죠. 그리고 유학시절 한 문예지 창간파티에서 훗날 영국을 대표하는 계관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테드 휴즈를 만납니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4개월 만에 소박한 결혼식을 치르고 이어 딸 하나 아들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실비아는 양육과 가사라는 짐을 떠맡으면서도 남편인 테드 휴즈의 글을 출판사에 보내며 기꺼이 남편을 위한 매니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실비아는 남편을 천재시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남편의 문학적인 성공이 자신의 성공보다 더 기쁘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를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테드가 먼저라서 정말 기쁘다. (중략) 그이의 원고가 퇴짜를 맞으면 내 슬픔은 두 배도 넘거니와 그이의 시가 수락되면 내 시가 선택된 것보다 더 기쁘니까 그이는 꼭 내 자아에 대한 완벽한 남성적 대응물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스로 믿는 삶이 이어져 확장되도록 덧붙여준다. 일상적이고 안정적인 직업이나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끊임없이 글을 쓰고 숨구멍을 마지막 하나까지 열고 이 지상을 거닐며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참으로 귀감이 되는 삶이 아닌가?"(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중에서) 그런데 이렇게 존경하고 믿었던 남편 테드 휴즈가 자신들 소유의 런던 아파트에 세들어 온 유부녀, 아씨아 웨빌과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1962년 7년간의 결혼생활은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1963년 2월. 런던의 혹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오븐에 가스를 틀고 머리를 박고 자살합니다. 사인은 산소가 모자라서 발생한 질식사.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에는 가스가 새지 않도록 물에 젖은 옷가지로 문틈을 완전히 봉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런 충격적인 자살은 가부장제 사회의 폐단이 불러온 한 재능 있는 여성작가의 희생으로 해석되면서 1960년대 초 꿈틀되기 시작하던 미국의 여성주의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사실 실비아의 자살 뒤에도 드라마는 끝나지 않습니다. 테드 휴즈의 내연녀인 아씨아웨빌은 둘 사이에서 난 딸과 같이 실비아가 자살한지 6년 뒤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고, 이후 테드 휴즈는 간호사와 결혼했지만 1998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외도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왜 실비아 플라스가 여성주의자들에게 숭고한 희생양으로 추대 받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또 올해 초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생물학자로 활동하던 그녀의 아들 니콜라스 휴즈가 47세의 나이로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딸 프리다 휴즈는 유력언론에 작품을 기고하는 등 영국에서 시인으로 멋지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못다 이룬 꿈을 펼치고 있는 셈이죠. 결국 이 질곡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을 맺었다고 믿어봅니다.   에리얼(Ariel), 해방과 부활을 위한 노래 실비아 플라스는 이혼 후 아픔을 잊기 위해 창작활동에 몰입합니다. 이 기간에 한 달 동안 무려 30여편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 작품들은 그녀의 사후에 테드 휴즈에 의해 유고시집으로 발표됩니다. 실비아의 자살을 촉발시킨 인물이 그녀의 유작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이 시집에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으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서는 대표작인 "지원자(The Applicant)", "라자로 부인(Lady Lazarus)", "에리얼(Ariel)", "아빠(Daddy)"의 하이라이트만 같이 감상해보죠. ◎ 지원자(The Applicant) 제가 이 시집에서 가장 먼저 읽은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혼제도의 허구성을 비꼰 "지원자(The Applicant)"인데요. 낭만주의로 포장된 결혼이라는 제도의 실체와 그 속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실비아의 날카로운 혀와 관찰력에 고개가 끄덕여졌죠. (중략) 여기 손이 있다 빈손을 채워지고 기꺼이 찻잔을 날라주며 두통을 깨끗이 몰아내고 또 당신이 말하는 것이면 다 들어줄 이것과 결혼할래요? 보증컨대 이 손은 마지막엔 당신의 눈을 엄지로 감겨주고 슬픔을 녹여줄 거에요. (중략) 종이처럼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지만 25년이 지나면 그녀는 은이 되고 50년이 지나면 금이 된답니다. 어디를 보든지 살아있는 인형, 그 인형은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하고 말, 말,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지원자(The Applicant) 중에서 ◎ 에리얼(Ariel) 이 시집은 무엇보다도 숨 막히는 억압과 구속에서 해방되어 건강하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하기를 꿈꾸는 작가의 염원이 잘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자로 부인(Lady Lazarus)", "에리얼(Ariel)", "아빠(Daddy)" 등으로 대변되는 대표작들은 이런 작가의 염원을 섬뜩한 강렬함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에리얼(Ariel)에서 작가는 구속된 자아가 어둠 속에서 말을 타고 달려 나와 이슬이 되고 태양 속으로 돌진하는 과정, 즉 자아 해방의 순간을 속도감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공기 속으로 나를 끌고 간다 넓적 다리들, 털. 내 뒷발굽에서 떨어지는 박편들 (중략) 시벌건 눈 아침의 큰 솥 속으로 자살하듯 돌진해 들어가는 이슬이다. -에리얼(Ariel) 중에서 ◎ 라자로 부인(Lady Lazarus) 라자로 부인(Lady Lazarus)의 마지막 연에서 작가는 전설의 불사조와 같이 재로부터 부활하는 해방된 자아를 그립니다. 이 시에서 죽음은 하나의 예술이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중략) 재로부터 붉은 머리칼을 날리며 나는 일어선다. 그리고 공기처럼 사람을 먹는다. - 라자로 부인(Lady Lazarus) 중에서 ◎ 아빠(Daddy)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아빠(Daddy)는 아버지, 남편이라는 두 가지 장애물을 극복하고 강인한 자아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강한 의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던 두 남자로부터 쓰디쓴 배신을 겪은 작가는 이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하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작가는 그들의 심장에 말뚝을 박고 그것도 모자라 마을 사람들과 같이 시신을 짓밟으며 "이 개자식, 이젠 정말 안녕이다!"라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합니다. (중략) 만일 내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나는 둘을 죽인 거예요 바로 당신이라고 말하며 일년동안 내피를 빨아먹은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7년 동안을. 아빠, 당신은 이제 누울 수 있어요. 당신의 기름진 검은 심장엔 말뚝이 박혔고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며 당신을 짓밟아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죠.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아빠(Daddy) 중에서///@@@@@@\... '천재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쓴 동화 | 2016/04,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1932~1963)는 작품 이전에 극적인 삶으로 더 유명한 작가다.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의 부인이기도 했던 그는 뛰어난 문학성으로 주목받았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휴즈는 플라스가 죽은 뒤 그의 시를 묶은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을 펴냈고, 시집은 퓰리처상을 받는다. 플라스가 펴낸 소설 '벨 자'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라스가 자신의 두 아이를 위해 지은 동화들을 담은 '실비아 플라스 동화집'이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출간됐다. 플라스는 천재 시인이기 이전에 딸 프리다와 아들 니콜라스의 엄마였다. 그는 프리다를 낳기 전 "태어날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며 동화 3편을 썼다. 자신만의 옷이 갖고 싶은 일곱 형제의 막내 맥스 닉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옷만 입을 거야', 부엌에 사는 두 요정이 전자제품들의 기능을 바꾸는 '체리 아줌마의 부엌', 재미있는 침대여행을 그린 '침대 이야기' 등이 책에 실렸다. 데이비드 로버츠의 따뜻한 그림이 플라스의 시적인 언어와 잘 어우러진다. 동화는 실비아 플라스 문학을 이해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출판사 마음산책 측은 설명했다. 추천사를 쓴 소설가 정이현은 "실비아 플라스가 누구인지 알 턱 없는 일곱 살 딸 아이가 탄성을 지르더니 책을 읽어 내려간다. 푹 빠져 읽는 표정이 변화무쌍하다"며 "좋은 동화는 좋은 문학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했다. ///@@@\\\...   실비아 플래스-테드 휴즈 아들 자살 (런던 AFP=연합뉴스) 미국의 천재 여류 시인 실비아 플래스와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의 아들 니컬러스 휴즈가 47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2009년 03 23일 보도했다.    그의 누나 프리다는 "동생은 지난 16일 미국 알래스카 주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 숨졌다"면서 그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다고 전했다.      휴즈는 알래스카 주립대에서 수산 및 해양과학 교수로 재직하다 최근 그만둔 뒤 집에 도자기 공방을 차렸으며 미혼으로 자녀는 없었다.    그의 어머니 실비아 플래스는 1963년 2월 자신의 집 부엌에서 오븐을 열고 가스를 들이마셔 자살했으며 아버지 테드 휴즈는 외도로 부인을 자살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받아왔으며 1998년 사망했다.   
1875    독일 시인 - 롤프 디터 브링크만 댓글:  조회:3959  추천:0  2016-11-26
롤프 디터 브링크만(Rolf Dieter Brinkman) 롤프 디터 브링크만(1940~75)은 독일 베흐타 출생으로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학교 공부를 중단하였다. 세무서 관리와 서점 점원의 견습생활을 했던 그는, 1962년 쾰른으로 가 교육대학에 입학한다. 이후 자유문필가로 활동하며 詩作활동과 함께 영화와 사진 작업을 병행한다. 국내외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어렵게 생활을 유지했던 그는,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지를 돌며 방랑 생활을 하던 중 런던에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사후 페트라르카 상을 수상한다. 번역된 시집으로는 『빨랫줄 위의 비애』(고려원, 1995)가 있다. 롤프 디터 브링크만의 세세계 ··· 이유선 1945년 패전 이후 정치적, 물질적, 정신적 폐허 속에서 독일시는 그동안 함께 한 역사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숙고와 반성보다는,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기 때문에 오히려 일종의 도피로써 자연시나 비정치적인 절대적 가치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잠정적인 방황 뒤에 독일시는 전쟁으로 단절된 20세기 초기의 전동을 다시 이어받으면서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50년대 벤이 재평가되면서 그의 절대시를 추종하는 바흐만과 첼란의 밀폐시류, 60년대 브레히트의 영향 아래에서 비판적 역사, 사회의식을 시로 표현하려 했던 엔젠스베르거, 비어만의 정치시류 그리고 언어자료적 측면을 극단화시킨 곰링어, 하이센뷔텔 등의 구체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모두 전통적 시 미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즉, 절대시와 밀폐시의 부정성, 인공적 언어, 점진적으로 침묵으로 이어진 독자와의 단절 : 시를 통한 정치 사회변혁을 꾀하려 한 문학의 정치화 : 그리고 실험을 통한 언어 매체에 대한 반성 등 모두 시가 사회 현실을 인식하고 반성하는 탁월한 수단으로 보았다. 시인은 보통 사람의 무리 중에서 출중하여 그들 위에서 일종의 현실인식의 모델을 제시해야만 하는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문학관은 새로운 역사적 현실 앞에서 좌절하며, 문학은 더 이상 그 예의 진리제시적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 문학은 얼마든지 다르게 읽혀질 수 있으며, 작가가 지정한 진리를 찾으러 나서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내놓고 있는 것과 독자 자신의 경험이 만나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독서가 되는 독자 중심의 수용 미학으로 대체된다. 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등단한 브링크만은 전통적 시관을 배격하면서, 밀폐시류의 추상성, 부정성은 진정한 현실 경험을 가로막고 있는 문학의 신비화라고 비판한다. 문학의 정치 도구화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시를 읽고 사용하면서 인습적 경험과 생각 틀의 한계를 벗어나는 데에 그 정치적 기능이 있다고 역설한다. 즉 지각, 경험구조의 변혁이야말로 정치적 변혁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지금까지 시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의 그 내용적, 형식적 기준이라는 시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 위해 노력하며, 유럽 문화를 실제 세상을 둘러보고 경험하기보다는 고답적인 죽은 교양언어만을 지껄이고 있는, 살아 있는 죽은 자들의 문화라고 도전적으로 진단한다. 그래서 더 이상 현실체험을 매개할 수 없는 언어에 회의하며 언어의 무용성을 시화한다. () 에 나오는 은유법에 대한 공박에서 보여 주듯 전통적인 시에서의 절대적인 기법인 상징, 은유로서의 언어기호는 이제 브링크만에게서는 그 기의적 의미를 상실하며 다만 그 기표적 기능만이 강조된다. 언어는 그의 시에 있어서 단지 하나의 단상적 영상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도해적 도구가 될 뿐이다. 그는 언어가 아니라 영상으로 사고하며, 우리의 모든 삶을 자료로 해서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시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언젠가 그는 시는 ‘단어로 된 영화’라고까지 말했다. 시내를 배회하고, 신문을 읽고, 극장에 가고, 성교하고, 콧구멍을 후비고, 레코드 판을 듣고, 사람들과 엉터리 소리나 지껄이는 등의 우리의 삶 모두가 시라 될 수 있으며 시를 쓰는 것 또한 이런 보통 행위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시는 자동적으로 잡혀진 사건, 움직임, 순간적으로 명백해지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스냅사진처럼 짧게 잡아내는 가장 적합한 형식이다”라는 그의 시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등이 있다. 특히 그러한 표본적 시로 자주 인용되는 에서도 브링크만은 어떤 행위에 내재한 의미보다는 다만 표피에 머물면서 한 처녀가 걸어 올라와 다시 가는 그 움직임을 그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으로 끝난다. 일상생활의 아름다운 단장, 짜릿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일상의 잔인함 역시 시 속에 등장한다. 등이 그렇다. 그의 단시들은 등 이후에 점점 더 짧아지고, 그 정확도를 더해간다. 브링크만이 지향하는 민주적인 시와 시인관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귀착된다. 이들은 합리죽의적인 실증주의에 반대하며 반이성, 반논리를 앞세우며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세계도 포괄한 인간의 총체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현실이 환상이 되며 환상이 곧 현실이 되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이상으로 삼았다. 예술가는 더 이상 천부적 능력을 부여받은 창조자가 아니며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침잠하여 귀기울이는 자는 모두가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때 지난 신문지의 활자를 잘라 넣은 주머니에서 뽑은 순서대로 나열한 것도 시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꿈과 행위의, 그리고 문학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졌다. 「수술대 위에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로트레아몽의 구절은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나타내는 고전적 명구가 되었으며, 몽타주, 콜라주 등의 아무런 연관 없는 것들의 결합 속에서 새로운 충격적 경험이 생성되게 하는 우연의 미학, 무의미의 미학인 것이다. 그러나 이간의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심연을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인간 생활의 가장 표피적이고, 사소하고 진부한 것에 매달리게 되는 모순과 작위적인 기법적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도 많았다. 브링크만은 이러한 20세기 초의 전위적 예술관을 이어받으면서 이러한 전통을 이어나갈 당대의 모범을 산송장 같은 유럽 문화가 아닌 싱싱하고 미국의 반예술(하위문화)적은 팝아트, 프랭크 오하라 등의 시에서 찾는다. 더욱이 인간의 경험과 지각구조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언어적 기법에만 국한하지 않고, 회화, 사진, 영화, 특히 전자음악 등 모든 예술적 기법을 도입하는 열려진 공간으로서의 시를 추구한다. 특히 수용자에게 그 자신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록음악이 그 표본이 되었으며, 시 역시 추상적인 것이 아닌 「열아홉 살 난 처녀의 젖꼭지」같은 감각적 매력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문학의 감각적 체험이 브링크만의 의도였다. 일본 공포영화에 나오는 바다괴물의 이름을 딴 「고드질라」에서 그는 반라의 수영복 차림의 여자의 부위적 사진의 배경 위에 음담패설에 가까운 노골적인 내용의 시를 조합시키면서 그때까지 금기시되었던 성적 소재를 대담하게 도입한다. (그 중 가장 점잖은 것으로 「C&A백화점의」「성적인 빨간모자」「무엇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가」「비행기조종사」「풀」등의 시집은 모두 미국시와 팝아트의 영향 아래에서 쓰여진 것이다. 특히 브링크만은 시집 「비행조종사」를 “우리가 보고, 종사하는 것들은 정확하게 보고 아주 그대로 직접적으로 재현된다”면 모두가 시가 될 수 있다는 프랭크 오하라와 비록 싸구려 극장에서나마 언제나 새로운 세게의 경험으로의 채비를 차리는 모든 「조종사」들에게 헌정한다. 여기서 브링크만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언제나 부딪치는 사물들을 시화할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적 산물의 파편들, 즉 영화세계(「타잔」, 「채플린」, 「리즈 테일러」, 「보니와 클라이더」), 만화인물 (「배트맨」), 광고표지, 상표(「배달차 따위의 시」「치키타 바나나」「그 해 마지막 날에 페르질」등), 로큰롤 가수 등에서 표현된 공통적 표상 내용을 연상의 밑받침으로 사용한다. 사소한 것들 하다못해 토마토 케첩, 케이크 밑바닥, 단추 등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이런 것들을 시로 기입하는 데에 주저할 필요가 없이 예술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리고 「그저 시작하자!」고 말한다. 이러한 민주적 일상시와 더불어 「한번 더」「짧은 노래」「그저 태양」그리고 매일 지나다니는 길 판자울타리의 광고 표지의 반라의 여성을 보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전혀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역설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가볍게 살짝 건드리는 「오늘」의 재치와 경쾌함은, 브링크만을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한 박상배선생이 지적했듯이 휠더린이나 릴케, 트라클이나 벤, 바흐만이나 첼란의 작품에서 답답한 우울증을, 정치시인들의 작품에서 심한 자폐증을 느껴왔던 독자에게 시원한 청량제가 되고도 남을 「열린시」임을 잘 보여준다. 60년대 중반부터 젊은 세대의 새로운 생활 감정을 색채 화려하고 비감상적인 팝아트적인 일상시로 대변하면서 낡은 귀족적 서정시를 대체했던 브링크만은 그의 도적적인 시관만큼이나 “위협적이며, 정상적인 사람들과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불안을 과장하여 남을 공격하고 상처를 입힌다”는 등의 반감적인 비판을 받는다. 그의 시는 팝시, 섹스시 등의 저급문화적 소산으로 평가 절하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의거한 독일, 유럽의 낡은 문화에 대한 반격으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봉기하는 학생들과 항시 논쟁하고 좌파적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는 탈이데올로기자였다(「이데올로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60년대의 반전통, 반문화의 개혁적 열기도 식어가고 브링크만도 잊혀져 간다. 쾰른에서 부인, 장애자인 아들 로버르트와의 가정생활은 출판사와의 결별 뒤에 경제적 궁핍으로 생존적 위기에까지 이르렀으며, 친구, 동료와의 불화는 정신적 고독감을 더해 주었다. 타협할 줄 모르며, 생존 경쟁에서 숙련되지 못해 살아가는 데에 무능했던 그는 언제나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며, 정신적인 방치 속에서 불안과 고독으로 괴로워했다. 이 모든 자신의 창조적이며 인간적인 삶을 저해하고 있는 자신의 주위 환경에 대한 반항적 자세가 그의 공격성을 더했을는지도 모른다. 이후 예술가에게 주는 장학금으로 생활을 근근히 꾸려 나간다. 즉, 그는 살기 위해서 런던, 이태리, 미국 등으로 방랑 생활을 하게 된다. 1975년 런던에서 한 레스토랑의 간판을 보면서 건너가던 중에 그는 자동차에 치어 35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1974년 12월에 내놓은 시집 《서쪽으로 가는 1&2》에서는 그 이전의 단시류보다는 장시류의 시들이 많이 실려 있으며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도 이전의 시와 차별된다. 서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모든 외부 세계가 전과 다름없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타자기 앞에 앉아서 종이 위에 낱말을 때리며 함께 가고 있는 나날 중에 볼현듯 뜻밖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제 자기 자신을 기억해 내고, 자신의 개인적 역사를 더듬으면서 자신의 아픈 상흔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이다. 전쟁으로 잃어버린 유년기의 기억은 자신의 고향인 베흐타를 모든 생명이 질식하는 구멍의 세계, 「베흐타 현장에서」가 되게 하며, 「추운 시골의 추운 농부의 노래」에서와 같이 어린아이의 고립감은 이해돌 수 없는 주위 환경에서 생성된 것으로, 계속해서 시행을 이끌어 가는 「오로지」의 반로, 계속해서 시행을 이끌어 가는 「오로지」의 반복으로 강조된다. 전쟁으로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기억들, 궁핍과 고독의 방랑 속에서 체험되는 현실의 파편들, 텅 빈 거리를 지나가는 자전거의 찌르릉 소리 외에 어디에서도 짜릿함을 느낄 수 없는 처절한 그의 삶의 기록을 「자거라, 마그리떼」에서 볼 수 있다. 그가 60년대에 권장했었던 단순하고 깜찍한 영상적 시들(「오렌지 주스 기계는」「저 고전적인」「평화로운 정오」「빨랫줄 위의 비애」등)은 그의 암울한 고통의 폭발적인 토로와도 같은 장시들 사이의 오아시스적인 휴식과 평화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서쪽으로」를 위시한 대부분의 시에서는 「죽음의 영토, 독일」에 대한 분노, 역겨움, 증오를, 체험된 현실의 파편을 통해 서술한다. 그러나 절망적인 국가현실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아픔의 근거를 알고 싶어했으며, 일만의 희망이라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 여전히 자료를 모으고 시를 썼던 것이다. 제목 「서쪽으로」가 암시하듯 움직임은 계속되며, 어떤 정지상태도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가 60년대 미국의 반문화적 새로운 삶의 형태에서 희망했던 다른 삶 역시 발견할 수 없었던 미국으로부터, 즉 미국 문화로부터의 귀향을 암시하기도 한다. 반문화적인 미국화라는 그의 옛 꿈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반유럽, 반문화적인 태도는 여전히 그의 반시 「하나의 시」의 자유분방하면서도 호흡이 긴 부정의 넋두리 속에도 잘 나타난다. 더욱이 형식면에서도 해체시적 형태를 띠며, 행 도약, 연 도약 등 도약 형태가 더욱 빈번해졌고, 찢겨진 현실 체험의 단상들도 시의 인쇄된 지면 위에 찢겨진 채 하나의 시행, 하나의 연 등으로 공간을 뛰어넘으며 서로 엇갈려 자리한다. 이러한 형식적 실험은 언어에 대한 그의 철저한 불신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가상적 명증성만을 가지며, 경제, 정치, 대중매체 등등의 사회 체제가 개인을 구속하고 그들의 법칙 안에 가둘 목적으로 추상화된 언어는 인간의 꿈을 파괴하고, 감정을 말살한다(「서쪽으로 2」)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언어의 분절화, 단편주의로 명명되는 위의 실험을 통해서 기존의 단어, 문장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연결되지 않는 표상의 자유를 얻고자 했으며, 기존의 틈새, 사고의 비약을 통해서 화석화된 언어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비약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시의 침묵 속에서 시어의 혁신적 사용을 포기한다. “시는 무언성으로 해체된다”는 그의 「통제되지 않은 후기」에서의 발언처럼 순수 경험의 보다 직접적인 매개를 위한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갖는다. 《서쪽으로 1&2》시집 앞뒤 수페이지에 달하는 무제의 사진들이 이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저 노래처럼 단순히 시를 썼으면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기타를 칠 줄 모른다. 다만 타자기만을 칠 줄 안다, 그것도 두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며. 하지만 아마도 내가 마치 노래를 부르듯, 문을 열 듯, 언어와 확정들로부터 벗어나면서 시를 그저 많이 쓸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라는 그의 시쓰기 열망은 절망 속에서의 그의 자기 존재 확인과 방어를 표현하는 듯하다. 시는 그에게 있어서 아무도 아닌 나라로 가는 경계(「주제 없는 변주」)로서 현실로부터 구출되는 유토피아적 선취이며, 미지의 세계와 인식의 세계로의 관문이고, 또한 하나의 환상으로, 시를 쓰고 있는 동안만은 현실에서 벗어나 소외되지 않은 자기 존재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말했을까, 그런 것이 삶 이라고? 나는 하나의 다른 푸름 속으로 들어간다. -「시」 -롤프 디터 브링크만 시집『빨랫줄 위의 비애』(고려원, 1995)에서
1874    권총으로 자살한 구쏘련 시인 - 마야꼬프스끼 댓글:  조회:4257  추천:0  2016-11-26
마야꼬프스끼의 삶과 죽음과 시 블라지미르 블라지미로비치 마야꼬프스끼 Vladmir Vladimirovich Maiakovskii는 1893년 7월 19일, 그루지야 R따이스 근처의 바그다지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아버지 블라지미르 꼰스딴찌노비치와 어머니 알렉산드라 알렉세예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산림관이었으며 어머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의 여성으로 어린 블라지미르와 두 손위 누이들의 양육에 전념했다. 마야꼬프스끼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에게서 읽고 쓰기를 배웠다. 1902년 가을에는 중등학교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꾸따이스로 갔으며, 2년 뒤에 꾸따이스 중학교 예비반에 입학했다.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독서에 남다른 취미를 나타내었다고 전재힌다. 쥘 베른 류의 환상소설, 『돈 키호테』등은 그가 당시 애독한 소설이었다. 이 무렵엔 또한 그림에 대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한 가족의 친지가 미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어느 날 모스끄바에서 공부하고 있던 누이가 몇 편의 혁명시를 가져와 그에게 읽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당시 러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던 혁명의 물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5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학업에만 전념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 시위에 가담하였다. 고작 12세에 불과했던 그는 사회주의 문학을 학습하는 마르크스주의 서클에도 참여하였다. 1906년 2월 19일, 부친이 패혈증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마야꼬프스끼 가(家)는 가산을 정리하여 머스끄바로 이주했다. 그는 모스끄바 중학교의 제4학년으로 편입했다. 어머니가 받는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온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마야꼬프스끼는 그림을 그리거나 부활절 달걀에 색칠을 하거나 목공예품에 무늬를 새기거나 함으로써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1908년 초에 그는 직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스뜨로가노프 상업 미술 학교 예비반에 입학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 볼셰비끼 파에 가담했다. 얼마 후 그는 당의 비밀 인쇄소에서 체포되었으나 단기 구류를 거친 뒤 풀려났다. 1909년 초에 그는 다시 체포되고 가택 수색을 당했으나 이번에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해 7월에 세 번째로 체포되었을 때는 부뜨이르스까야 형무소 독방에 수 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마야꼬프스끼의 생애 중 이 대목이야말로 소비에뜨 전기 작가들이 거의 언제나 열광적으로 강조해 온 부분이다. 즉 은 모든 마야꼬프스끼 전기에서 핵심적인 대목으로 등장한다. 사실, 아직 미성년자이던 시기에 이나 체포되었다는 사실보다 시인의 생애를 더 웅변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체포가 갖는 정작 중요한 의의는 다른 데 있다. 대부분의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의 경우처럼(도스또예프스끼를 상기해 보라!) 마야꼬프스끼에게도 감옥은 인생 행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바이런, 셰익스피어, 똘스또이 등을 탐독했으며 시를 창작하고 싶다는 의욕을 체험했다. 그가 정치 활동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느낀 것도 또한 감옥에서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이때 자신의 재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의 결여를 불안하게 의식하였다. 책에서 배운 이데올로기를 전단에 박아 뿌리고 다니는 일보다 좀더 창의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그는 정치 활동은 일단 접어두고 정식으로 예술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이러한 회심의 상태에서 감방 문을 나선 마야꼬프스끼는 당대의 저명한 화가 쥬꼬프스끼 Zukovskii에게서 미술 수업을 받고 께린 Kelin의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준비 단계를 거친 후 1911년 9월, 빠스쩨르나끄 B. Pasternak의 아버지가 강의를 하고 있던 모스끄바 회화 조각 건축 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1914년에 퇴교당할 때까지 거기서 회화 수업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아방 가르드 예술가 다비드 부를류끄 David Burliuk와 침교를 맺었다. 부를류끄와의 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마야꼬프스끼의 장래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란 이름의 혁신적인 화가와 시인들의 그룹을 조직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예술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1912년, 마야꼬프스끼는 훗날 자전적 수기에서 이라 부르게 될 부를류끄에게 자신이 쓴 두 편의 시를 읽어 주었다. 친구의 반응이 두려웠던 그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거라고 말했지만 친구는 즉시 저자가 마야꼬프스끼임을 간파했고, 라고 탄성을 질렀다. 마야꼬프스끼의 말을 빌면 고 한다. 부를류끄와의 우정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1920년에 그가 러시아를 떠남으로써 중단되었다. 부를류끄는 나중에 뉴욕에 정착하였다. 부를류끄에게 시를 읽어주었던 1912년 마야꼬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최초로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으며 또 유명한 카페 는 아흐마또바 A. Akhmatova, 블록 A. blok 등 당대의 문인, 예술가들의 집결지이자 일종의 사교장이었던 카페로 당시 이곳에 등장했음은 예술계에 데뷔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마야꼬프스끼가 화가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하던 1910년대 초엽은 러시아 예술계에 미래주의 futurizm가 뿌리내리던 시기였다. 흔히 문학사가들은 1910년을 러시아 시사(詩史)의 한 전환기로 간주한다. 그 해를 기점으로 그때까지 지배적인 사조였던 상징주의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대신 아끄메이즘 akmizm과 미래주의가 반(反)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신예 사조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2년 뒤 러시아 시는 이미 그 두 파벌 간의 대립이라는 국면에 도달해 있었다. 아끄메이즘이 상징주의 시의 철학성, 종교성, 그리고 무절제한 음악성 대신 언어와 사상의 균형, 절제, 조화를 추구했다면 미래주의는 훨씬 호전적으로 상징주의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상징주의뿐 아니라 기존의 러시아 문학 전체를 낡은 소시민 근성에 젖은 문학이라 일괄 부정하고 시어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혁신을 주창했다. 부를류끄, 마야꼬프스끼, 끄루초느이흐 A. Kruchonykh, 흘레브니꼬프 V. Khlebnikov 등이 서명한 미래주의 선언문 「대중적 취향에 따귀를 Poshchechinu obshchestvennomu vkusu」(1912)은 제목에 버금하는 과격한 어조로 라고 외침으로써 즉각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동명의 연감에는 마야꼬프스끼의 첫 번째 시 두 편 「아침Utro」과 「밤Noch」이 실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마야꼬프스끼는 미래주의의 주요 시인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미래주의 동지들과 더불어 러시아 곳곳을 순회하며 마치 광대패처럼 기괴한 옷차림과 기이한 행동으로 . 마야꼬프스끼가 당시 즐겨 입었던 샛노란 재킷은 미래주의 의상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태로 말미암아 그는 부를류끄와 함께 회화 조각 건축 전문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에 대한 시인의 염원은 이렇게 하여 다시 좌절되었다. 그러면 미래주의자들이 기존의 문학을 부정하고 새로 제시하려 했던 문학은 어떤 것이었나. 러시아 미래주의는 흔히 이탈리아 미래주의와 비교되곤 한다. 후자가 주로 마리네티 F. Marinetti의 을 모토로 현대성modernity 즉, 자동차와 도시와 기계 문명을 내용의 차원에서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면 전자는 근본적으로 형식의 혁신성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엇보다도 시어(詩語)의 개편을 자신들의 주된 임무로 삼았다. 그들에 의하면 종래의 시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에 편향되었으므로 시어의 소리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소리야말로 시의 유일한 재료이며 동시에 시의 테마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를 그 자체로서 실재적이고 순수한 시로 체험되어야 하는 독자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명제하에 흘레브니꼬프는 란 뜻의 을 발명하고 또 자움에 입각한 시를 썼다. 끄루초느이흐 또한 거기에 합세하여다. 은 그야말로 아무 뜻도 없는, 순수하게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신정 언어이며 흘레브니꼬프는 그것을 자체적인 구조를 가지며 소리 연상에 의해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이라 명했다. 그리고 1913년에 끄루초느이흐와 공동으로 발표한 선언문 「말 그 자체 Slovo kak takovoe」에서 라고 선언했다. 말에 대한 미래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회화 영역의 큐비즘과 일맥 상통한다. 큐비스트들이 객관적인 현상의 모사를 거부하고 사물들의 내적인 관계를 캔버스에 표현하려 했던 것처럼, 그리고 선과 면과 패턴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형식의 미를 창조하려 했던 것처럼 미래주의자들은 사상을 전달하는 말 혹은 이미지로서의 말이 아닌 순수하게 소리로만 이루어진 말을 통해 리얼리티를 재구성하려 하였다. 이렇게 기본적인 미학적 입장뿐 아니라 실질적인 시어의 실현 양상에서도 큐비스트와 미래주의자들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큐비스트들의 캔버스에 나타나는 해체된 오브제처럼 미래주의자들의 시적 캔버스에 등장하는 단어와 시행과 연(聯)은 해체되고 분할되고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말의 소리는 선과 색채와 기하학적 도형에 상응하였다. 미래주의와 큐비즘의 관계는 사실 미래주의 시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대 회화와 관련을 맺었으며 또한 혁명 전 한동안 자신들을 라 부른 사실, 마야꼬프스끼를 비롯한 그들의 대부분이 혁명 후에도 그래픽 아트에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사실 등에서도 명백해진다. 그러나 마야꼬프스끼는 흘레브니꼬프가 창시한 에는 거의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시어의 창조적 잠재력에 대해 광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시에서는 소리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를 완전히 초월한 순수하게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시어는 그에게 관심 밖이었다. 그가 창조하려 했던 것은 새로운 의미로 충만된 말이었지 아예 의미를 결여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 보다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큐비즘의 미학이었다. 그는 초기 시에서 큐비스트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의 기법을 언어적 장치를 통해 시적 공간에 수용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러한 작품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후기의 정치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시어를 과거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자 한 미래주의자들의 의도는 그들이 선택한 어휘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그들은 고의로 천박하고 저속한 언어, 그때까지는 고상한 장르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비어(非語)를 도입하였다. 시의 형식이 해체되고 굴절되어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지듯이 시의 의미론도 의 개념에서 벗어나 반대쪽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를 놀려주기 위해 몸에 걸친 외설스러운 의상처럼 그들의 언어 또한 조야하고 야비하고 외설스러웠다. 그것은 거리의 언어였고, 공장의 언어였으며, 노동자와 매춘부와 상인들의 언어였다. 그것은 또한 먼 산간 벽지의 사투리였고, 사투리와 을 결합한 신조어였다. 미래주의 시학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익명성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명예는 다른 모든 구습처럼 부르주아의 유산이므로 폐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저자를 명시하는 것은 개인의 명예를 추구하는 소치이므로 예술가는 절대로 작품의 저자를 명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미래주의자들이 익명으로, 혹은 집단의 이름으로 출간한 작품에서 개인으로서의 시인은 설 자리를 잃고 개인으로서의 시인의 감정, 시인의 전기적 삶 등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주의 시의 저자는 인 것이다. 그러나 마야꼬프스끼의 경우는 나중에 다시 논하겠지만 거의 언제나 를 중심으로 하며, 이 점에서 그의 시학과 미래주의 시학은 뚜렷이 구분된다. 미래주의의 이러한 특징들, 즉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한 거부감, 시어의 하양적 재창조, 집단 창작의 개념 등은 당시 러시아를 휩쓸고 있던 혁명의 열기와 맞물리면서 점차 문단을 주도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물론 미래주의와 볼셰비끼는 각기 다른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표면상 양자가 주장하는 슬로건의 유사성 때문에, 1910년대의 러시아 미래주의는 자칭 타칭 혁명의 예술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미래주의의 중심 시인이었던 마야꼬프스끼는 당연히 혁명의 시인이 되었다. 그가 소시적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이 열광적인 혁명 시인에게 빛나는 훈장처럼 붙어다녔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다시 마야꼬프스끼의 초기 창작 활동으로 돌아가자. 마야꼬프스끼는 「대중적 휘향에 따귀를」에 두 편의 시를 선보인 뒤 계속해서 다른 연감에 몇 편씩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1913년에는 그의 최초의 시집 『나 la』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말이 시집이지 사실 그것은 석판으로 인쇄된 팜플렛 두께의 인쇄물로 거기에는 네 편의 시가 본문과는 관계없는 체끄르인 V. Chekryin의 그림과 함께 연작 형태로 실린 것이 고작이다. 이 시집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그 제목에 있다. 시인은 첫 시집에 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시적 우주에서 중앙에 자리잡을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임을,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쓰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임을 직관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첫시집의 예언대로 마야꼬프스끼의 거의 모든 시는 혁명을 다룬 시건, 레닌의 생애를 묘사한 시건, 언제나 마야꼬프스끼 개인의 사랑과 고독과 절망을 주선율로 삼는다. 시집 『나』에서 마야꼬프스끼가 그리고 있는 자아는 그것은 과 동일시된다. 시인의 고독과 역사 속에서 겪게 될 수난은 이때부터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해에 마야꼬프스끼는 를 토대로 운문 드라마를 한 편 썼는데 그것은 첫시집보다도 더 마야꼬프스끼의 자아 중심 성향을 강조하는 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시인 자신이며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세계를 향한 시인의 상실감과 분노와 고독이다. 거리가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도시를 배경으로 온갖 불구자와 기형아들이 주인공 에게 자기의 눈물을 바치고 시인은 자진해서 그들의 눈물을 모은다는 내용의 이 드라마에서 마야꼬프스끼는 세상의 고뇌를 한몸에 지닌 비극적 영웅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마야꼬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의 루나 빠르끄 극장 무대에 이 드라마를 올렸다. 주인공 역은 자기 자신이 맡아 했다. 그는 로마 시대의 흰색 의상과 월계관을 쓰고 등장하여 우렁찬 목소리로 연기했다. 드라마는 대체로 차원에서 받아들여졌지만 일부 관객은 주인공 역을 맡은 마야꼬프스끼의 강렬한 이미지에 깊이 감동했다. 상징주의의 거두 알렉산드르 블록 A. Block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1914년 초터 마야꼬프스끼는 혁명 전 시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지를 입은 구름」의 집필에 착수했다. 서정성과 서사성을 겸비한 장시(러시아 문학에서는 흔히 포에마란 장르의 이름으로 불린다)인 이 작품의 주제는 사랑과 혁명과 종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시의 주인공 는 마야꼬프스끼 자신과 동일시되는데 그는 진부한 세계와 무정한 연인에게 버림받은 천재 시인으로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모티프-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와 사회적 모티프-혁명-가 지그재그로 얽혀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청년 마야꼬프스끼의 와 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다가올 혁명의 를 앞질러 선포하는 이며 를 순회하며 시를 낭송하다 구세주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존재이며 이며 이다. 예측 밖의 비유로 가득찬 이 시에서 마야꼬프스끼가 그리는 시적 자아의 이율배반적 모습은 인간 마야꼬프스끼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야꼬프스끼는 후리후리한 키에 운동 선수 같은 체격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눈빛과 비극에 출연한 배우 같은 우렁하고도 꾸민 듯한 목소리에는 상대방을 사로잡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병적일 정도의 민감함과 다치기 쉬운 연약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당시 모스끄바의 카페에서 마야꼬프스끼와 숙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빠스쩨르나끄는 이 악명 높은 러시아 시단의 의 강렬하고 현란한 외모의 껍질 속에 숨겨진 불안과 자기 불신과 면역 안 된 슬픔의 정서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자신만만함은 극도의 수줍음을 감추려는 일종의 위장이었다. 그는 어쩌면 시의 제목처럼 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야꼬프스끼는 계속해서 세 편의 장시를 썼다. 사랑의 광기와 고통을 주제로 한 「등골의 플루트 Fleita-pozvonochnik」, 제1차 대전을 소재로 미래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그린 「전쟁과 세계 Voina I mir」, 그리고 시인의 죽음과 영원한 사랑의 주제를 결합시킨 장시 「인간 chelovek」은 모두 수작들로 간주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은 혁명 전 시기를 마무리짓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마야꼬프스끼는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과 죽음을 구성적 모델로 삼는다. , , , 등등의 소제목에 의해 세분화되는 이 시는 승천한 시인의 천국 생활과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지상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질투의 현세와 고통 없는 유토피아인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자아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 자아는 을 절그렁거리며 비극적인 전설의 인물로 묘사된다. 혁명 전 시기의 마야꼬프스끼의 생애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은 시학자 브릭 O. Brik 부부와의 만남이다. 브릭은 큐보 미래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마야꼬프스끼의 「바지를 입은 구름」과 「등골의 플루트」를 개인적으로 출판하여 그의 재능을 인정받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평생 동안 계속된 두 사람의 우정은 또한 러시아 형식주의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1916년에 결성된 「시어 연구회 Opoiaz」는 모스끄바 언어학회와 더불어 형식주의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했는데 마야꼬프스끼는 브릭의 집에서 열리는 오뽀야즈 회합에 종종 참가하여 시 형식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브릭의 부인 릴리 또한 마야꼬프스끼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코코 샤넬을 연상시키는 이 미모의, 그리고 예술적 감각과 지성을 겸비한 여성은 마야꼬프스끼가 일생을 두고 사랑한 여인이었다. 나중에는 으로 훨씬 더 유명해진 릴리를 마야꼬프스끼는 언제나 로 대했다. 릴리와 알게 된 후에도 마야꼬프스끼가 다른 여성에게 연정을 느낀 적은 몇 번 더 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만큼 강렬하고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그의 시에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격렬하고 슬픈 사랑은 그녀를 향해 외치는 시인의 회한에 찬 고백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이 시기에 장래의 유명한 시(詩) 로만 야꼽슨 Roman Iakobson과도 알게 되었다. 야꼽슨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계기로 마야꼬프스끼는 「모스끄바 언어학회」에 가담하였다. 1915년 몇 명의 모스끄바 대학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언어학회는 형식주의의 산실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학술적으로는 전문가라 할 수 없었지만 언어학회 모임에 자주 출연하여 야꼽슨 등이 발표하는 최근의 시 이론, 평론 등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였다. 시인과 시학자의 우정은 러시아 미래주의와 형식주의의 나란한 발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마야꼬프스끼는 혁명을 고대하였다. 그는 혁명이 과거의 모든 오물을 깨끗이 청소해 주리라 믿었다. 그가 경멸했던 진부한 문화의 찌꺼기는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제거될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그는 혁명이 일어나자 아무런 회의도 의심도 없이 자신을 혁명의 품에 던졌다. 사실, 혁명과 내란의 그 돌풍 같은 시절에 마야꼬프스끼와 소요로 들끓는 거리는 일심 동체인 듯 여겨졌다. 문단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혁명이라고 하는 대변동으로 인해 다소 그 모습이 변해 있었다. 대부분의 혁명 전 작가들은 망명하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냉담했으며, 신인들은 아직 배출이 안 된 상태였다. 이러한 공백을 메워준 것은 몇 명의 혁신적 문인들이었고 그들의 지도자는 단연 마야꼬프스끼였다. 혁명 이전의 큐보 미래주의자들은 이제 그 이름을 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신 정부의 문화 및 교육 부문에서 요직을 차지하였다. 더욱이 초대 교육 인민 위원히 의장이었던 루나차르스끼가 정책적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었기 때문에 혁명 직후의 몇 년간은 그야말로 미래주의의 천국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꼬뮨 예술 Iskusstvo kommuny』을 창간했고 정부는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아방 가르드 예술과 마야꼬프스끼의 시, 형식주의 연구 논문 등이 『꼬뮨 예술』의 지면을 장식했다. 창간호에서 브릭은 라고 선언했으며 필진은 그러한 선언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호전적인 예술의 이론과 실천을 꾀하는 데 주력했다. 경제 정치 영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발맞추어 예술 영역에서 미래주의 독재가 선포되었던 것이다. 이제 미래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동의어처럼 되었다. 이 시기의 마야꼬프스끼는 창작과 노동은 결국 같은 것이며 예술은 인민 대중에 대한 봉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예술 좌익 전선 LEF』(1923)을 창간했다. 대부분의 큐보 미래주의자들과 빠스쩨르나끄, 바벨 I. Babel 같은 소설가, 형식주의 비평가, 브릭, 또마셰프스끼 B. Tomaschvskii, 띠냐노프 Iu. Tynianiv, 에이헨바움 B. Eikhenbaum, 영화감독 에이젠쉬쩨인 S. Eisenstein 및 여러 아방 가르드 화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통일되어 있진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과거 문화의 청산, 새로운 혁명적 현실을 위한 새로운 예술의 창조, 형식의 추구 등을 골자로 했다. 마야꼬프스끼를 비롯한 레프 동인들은 새로운 형식이 곧 부르주아의 잔재를 말소하고 새로운 지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에게 봉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마야꼬프스끼는 레프를 통해 활동하는 한편 혁명의 이데올로기에 헌신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업에 기꺼이 자신을 던졌다. 그는 자랑스럽게 . 이런 식의 대조적 비유는 또한 비정상적으로 장황한 메타포로 이어진다. 결코 단순한 적이 없는 기이한 메타포는 독자의 기대치를 완전히 무산시키면서 그의 시에 그로테스크한 정서를 더해준다. 태양의 둘레를 도는 지구는 이고 평평한 길은 이다. 저녁 노을은 시는 시인이 이다. 마야꼬프스끼의 이러한 형식적 혁신성은 그의 저항적 메시지와 직결된다. 그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지속적인 테마는 단연 일상성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일상의 벽을 . 그의 시를 이루는 두 개의 세력을 공식화시키면 그것은 시인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끼 자신 즉 와 나를 제외한 세계, 일상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세계가 된다. 이러한 공식은 때로 와 , 일억오천만의 과 와 등으로 변조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양극성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러시아 어로 라 부르는 일상성은 시인이 무너뜨려야 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며 그에 대한 적의가 고조될수록 시인의 자기 확인도 고조디다. 마야꼬프스끼의 모든 시에 등장하는 확대되고 증폭된 자아의 이미지는 이렇게 일상성과의 투쟁이란 배경에 투사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일상성은 낡고 진부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가 종교를 모독할 때 모독의 대상은 종교의 일상성이며 사랑을 모독할 때 모독의 대상은 사랑의 일상성이다. 그가 전 세대의 문학을 쓸어버리자고 할 때 그것은 전 세대 문학의 일상성이다. 일상성은 불변하는 세계의 질서이며 한정된 공간이며 정체된 현재이다. 그는 예술의 의미 전체를 이러한 일상성의 감옥을 파괴하는 데 두었고 시인은 그 파괴의 수행자로 간주했다. 사실 그의 모든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자아의 모습은 일상성 파괴자라고 하는 단일한 이미지에 수렴된다. 그는 일상적 인간에게 둘러싸인 한 마리의 고독한 곰이다. 그는 을 증오하지만 결국 일상성과의 투쟁에서 패배하며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으로 묘사한다. 그가 마지막 시에서 말했듯이
1873    20세기 러시아 최대 서정시인 - 안나 아흐마또바 댓글:  조회:3460  추천:0  2016-11-26
시인의 운명과 작품 세계 1 20세기 러시아의 최대 서정 시인으로 평가받는 안나 아흐마또바 Anna Axmatova(본래의 성은 고껜꼬Gorenko)는 1889년 6월 11일 오뎃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뻬쩨르부르그 근교의 ‘황제 마을’에서 보냈다. 이 마을은 그녀의 소중한 추억이 묻힌 고양으로서 시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1907년 끼예프에서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끼예프 여자대학 법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였다. 열한 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던 아흐마또바는 1910년 시인 니꼴라이 구밀료프(1886~1921)와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그녀에게 운명적 불행의 씨앗이었다. 결혼 초부터 남편이 그녀를 피해 해외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안나는 혼자 살아야만 했다. 불행한 결혼으로 인하여 고독했던 그녀는 시를 쓰며 자신의 외로움을 달랬다. 1912년 아흐마또바는 첫 시집 『저녁』을 발표하여 독자와 평론가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녀의 시는 상징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기에 상징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시인들은 새로운 경향에 합류하였다. 시인 흘레브니꼬프와 마야꼬프스끼는 미래주의에 합류했고, 구밀료프, 만젤쉬땀, 젠께비치와 고로젯스끼는 아끄메이즘에 참여했다. 아흐마또는 ‘시인조합’에 가담하여 만젤쉬땀과 함께 아끄메이즘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아끄메이즘은 그리스 어 에서 유래된 말로 종종 아담이즘Adamism(삶에 대한 남성답고 명백한 견해를 보여 준다는 의미)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아끄메이스뜨들은 상징주의에 반기를 들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했다. 그들은 상징주의 시 속에 나타난 애매모호한 시어, 막연한 암시, 의미의 비약, 알 수 없는 절대성의 표현을 거부했다. 아끄메이즘은 상징주의의 ‘상징의 숲’ 속에 가려진 시어의 해방 운동이다. 아끄메이스뜨들은 시어와 메타포의 정확성, 예술의 구체성을 좋아하고, 상징주의자들의 낭만적 추상적 종교적 세계관에 반발하고, 일상 생활에서 나온 감정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시의 음악성보다 회화성을 중시했으며 명료한 색채를 사용하여 대상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예술 자체 안에서 감촉될 수 있는 현실을 받아들였으며, 시적 영감보다는 장인 정신을 중시했다. 아흐마또바의 첫 시집 『저녁』은 아끄메이즘의 시적 특성인 명료성, 간결성, 압축된 스타일과 치밀한 세부 묘사를 보여 주며, 삶과 사랑과 슬픔에 대한 젊은 여인의 자각을 그리고 있다. 아흐마또바는 1914년에 두 번째 시집 『묵주』를 발표했다. 전쟁과 사회적 변혁기에도 불구하고, 『묵주』는 1922년까지 매년 재출판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 시집에서 그녀는 구밀료프와의 불행한 결혼에 대한 시련을 암시하고 있으며, 외로움 · 고뇌 · 체념 · 죄의식과 내적 자유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랑의 배신에 대한 세심한 암시에서부터 세속적인 여자의 운명과 연결된 사랑에 대한 환멸을 나타낸다. 그녀의 서정시에는 여성의 침묵과 한이 스며 있다. 세 번째 시집 『하얀 무리』(1917)에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슬픈 가락의 시들이 많다. 여기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예언을 즐기는 무당의 소리를 낸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은 늘 슬픔으로 끝나는 사랑과 감정을 불태우는 일이다. 이 시기부터 그녀의 간결한 서정시에 서사적 목소리가 반향되어 나타나기 시작하며, 테마의 범위가 넓어진다. 그녀는 역사에 대한 시적 전망을 발전시켜 나가며 시인의 소명 의식을 갖게 된다. 기아와 파괴가 현실이었던 이 시대의 상황과 시인의 역사 의식은 훗날 발표된 서사시 「진혼곡」과 「주인공 없는 서사시」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1918년 아흐마또바는 구밀료프와 이혼하고 학자 쉴레이꼬Sileiko와 재혼했으나 이 결혼 역시 치명적인 불행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극심한 구박과 시를 쓰지 말라는 협박을 받으며 살았다. 이러한 개인적 불행과 혁명의 회오리 속에서도 그녀는 꾸준히 글을 썼다. 1920년부터 뿌쉬낀 연구에 몰두하여 세 편의 논문을 썼으며, 시집 『질경이』(1921)와 『서력 기원 1921년』(1922)를 차례로 출판했다. 특히 시집 『서기』에서는 종교 테마에 강한 관심을 나타낸다. 방황하던 시인의 목소리가 점점 강해져 가고 독자적인 길을 찾는다. 이러한 시집들을 통해 그녀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고 널리 읽히는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아흐마또바가 당으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녀는 시대의 폭정과 억압 속에서 남다른 슬픔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녀의 전남편 구밀료프는 반혁명분자로 1921년 처형당했고, 그녀와 아들 레프Lev는 볼셰비즘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1923년부터 1940년까지 18년 동안 아흐마또바의 책은 소련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강요된 침묵과 빈곤, 좌절과 체념을 맛보아야 했다. 그녀는 쉴레이꼬와 이혼하고 예술 비평가 뿌닌Punin과 재혼했다. 창작의 공백기였던 이 시기에 그녀는 번역 일로써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그녀는 한국, 인도, 중국, 이집트, 이탈리아, 폴란드 시를 러시아 어로 번역하였다. 그녀는 특히 한국의 시조 시인들 이현보, 이관 등의 작품을 러시아 어로 번역 소개했다. 아흐마또바는 창작의 공백기를 깨고 1940년에 시집 『갈대』를 출판했다. 그녀 특유의 내적 감정이 압축된 서정시와 전쟁의 비극과 레닌그라드에 대한 깊은 정을 나타내는 시가 여기에 나온다.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에 타쉬껜뜨로 피난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온 아흐마또바는 새로운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6년 쥐다노프Zhdanov는 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풍자 작가 조쉔꼬Zoshchenko와 아흐마또바를 탄핵의 본보기로 삼아 공공연한 공격을 가했다. 그는 아흐마또바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라고 비난했다. 그녀는 신비주의의 에로티시즘에 물든 시로 젊은이들의 정서에 해악을 끼치므로 작가 동맹에서 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비난의 요지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작가 동맹에서 제명되었고, 작품 출판이 금지되었으며, 다시 침묵을 강요받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아들 레프는 1949년에 강제 수용소에 보내져 7년간 고통을 받아야 했으며, 세 번째 남편 뿌닌도 스탈린 숙청의 제물이 되어 투옥과 유형 후 1953년에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은 후 1956년에 레프는 석방되었고, 해빙기와 더불어 아흐마또바의 시가 잡지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8년에는 「주인공 없는 서사시」의 일부와 『시간의 질주』가 출판되었고, 다시 작가동맹 회원으로 복권되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흐마또바는 불행한 운명과 역경 속에서도 일곱 편의 시집을 발표했으며, 그녀의 많은 시가 외국어로 번역되어 인기를 얻었다. 1964년 그녀는 이탈리아 시칠리에서 상을 받았고, 1965년 봄에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그녀는 모스끄바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2 아흐마또바의 시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다룬, 자전적 요소가 짙게 풍기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초기 시와 후기 시로 분류되어 언급된다. 아흐마또바의 초기 시는 사랑과 기독교 사상에 침윤되어 있는 서정시가 많다. 와도 같은 그녀의 초기 시에는 사랑, 이별, 고통, 고독, 체념과 신앙심이 서정성 짙고 밀도 있는 어휘로 표현된다. 블록은 그녀의 시가 기도문과 사랑의 노래가 혼합되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라고 불렀다. 죄 많은 인간, 원죄의 업을 지고 태어난 인간,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인 인간의 내적 경험이 한 여인의 인생 고백으로 나타난다. 순간순간의 기쁨과 슬픔, 고독의 아픔이 시적 페르소나를 통해 아무런 과장 없이 솔직하게 고백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시는 더욱 감동을 준다. 인간은 누구나 순수와 신선한 공기를 갈망하고 무엇인가를 통해 위안을 찾고자 한다. 아흐마또바는 개인적 불행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녀의 시에는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 고독, 체념, 슬픔이 묻어 있으며, 애정을 갈망하는 여인의 정열과 금욕적 열망, 죄와 속죄의 혼합으로 나타나는 강한 종교적 속성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만이 아는 감정이나 관념의 유희에 몰입하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잔잔한 마음의 술렁임을 억제된 시 형식과 일상의 단순한 어휘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아흐마또바 초기 시의 지배적인 테마이다. 그녀의 시 속에 사랑과 이별은 아름다움의 창조로까지 이어진다. 사랑은 늘 고통과 이별을 동반하며, 근의 사랑시는 강조되는 감정과 묘사되는 배경 사이에 긴장을 야기시킨다. 그녀의 시에서 사랑은 행복을 나르는 큐피드의 화살이 아니라 고독과 이별, 기만과 배신, 방황과 후회의 감정을 나르는 비극의 화살이요, 가슴속에 박힌 날카로운 비늘이요, 말벌의 침이다. 그녀는 사랑을 통해 체념의 지혜를 배운다. 만남과 입ㄹ의 모티프는 아흐마도바 시의 골격을 결정함, 이런 모트피들의 예술적 표현은 민속적 냄새가 풍기는 이미지를-편지, 눈물, 징조, 반지의 이미지- 기초로 하고 있다. 당시 비평가들에게 아흐마또바의 시는 로 평가되고, 그 시대의 일상 생활에서 취재한 의 시학과 비교된다. 아흐마또바의 후기 시에도 초기 시와 마찬가지로 전기적 요소를 주요 모트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 시에서는 초기 시에서 볼 수 없었던 형식과 테마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먼저 형식에 있어서 초기의 짧은 서정시에서 서사시로 시 형식이 확장되고, 시어는 점점 상싱성을 띠게 되고, 다양한 메타포와 아이러니를 동반한다. 후기 시에서는 테마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 시대 의식, 예술, 존재와 죽음 등으로 테마가 다양화되고 있다. 아끄메이즘의 여사제 아흐마또바는 시대의 폭정과 고난을 통해서 새로운 빛과 계시를 받는다. 그녀는 동포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시인의 소명 의식을 느낀다. 기구한 운명의 이 시인은 시대와 조국의 운명에 눈을 돌렸다. 아흐마또바는 시인의 소명 의식을 갖고 쓴 두 편의 서사시 『진혼곡』과 『주인공 없는 서사시』에서 최고의 미적 완전성과 감동을 보여 준다. 『진혼곡』(1935~1940)은 아흐마또바의 개인 생활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 『진혼곡』은 스탈린의 숙청으로 생겨난 러시아 민족의 비극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죄 없는 아들의 부당하고 잔인한 투옥 기간에 한 여인의 절망을 노래한 어머니의 노래이다. 이 시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여인은 처형당한 남편의 아내요, 감옥에 있는 아들의 어머니요, 예술의 어머니요, 막달라 마리아요, 뾰뜨르 대제에 의해 처형당한 친위대의 아내요, 소련의 암흑 시대를 시로서 증명하는 시인이다. 여기서 개인의 슬픔은 그 시대의 억압에 고통받는 여인들의 공통된 슬픔이었다. 개인의 불행과 역사의 비극을 누구나의 고통으로 치밀하게 엮어 가는 시인은 민속적 슬픔의 전통적 여성의 이미지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에서 부각되는 이미지는 기나긴 고통을 인고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종교적인 러시아 여성의 이미지다. 이 여성은 다양한 역사적, 개인적 환경에 직면한다 해도 체념과 인내로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전통적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다른 어떤 시인도 그런 가혹한 운명적 여성의 이미지를 애정어린 눈으로 통찰력 있게 그려 내지 못하고 있다. 시인은 아무리 암담한 삶이라도 그것은 발전하는 역사의 한 현장임을 믿고 있다. 『주인공 없는 서사시』는 아흐마또바의 삶과 시를 종합한 걸작으로 역사에 대한 서사시오, 시대의 상황시이며 인간 운명에 대한 슬픈 고백이며 사색이다. 사랑과 죽음과 공포를 융합하여 역사에서 빚어진 애사를 시대의 사색과 통찰로 기록한 이 서사시는 시적 공상의 완전한 창조이다. 로 불리는 이 서사시는 복잡한 형식과 난해한 내용 때문에 합리적인 해석이 어려운 작품이다. 이 시의 신비스럽고 난해한 시구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때때로 보이지 않는 잉크를 사용하고, 오직 거울 안에서만 읽혀질 수 있는 시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쓸 수가 없다. 나는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시는 제목 그대로 한 명의 주인공도 없으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많은 등장인물을 출연시킨다. 블록, 여배우 올가 수제이낀나(그녀는 솔롬비에, 인형, 프시케, 금발이며, 멍청한 마법사로 변장하여 나타난다), 그녀의 집 현관에서 자살한 젊은 시인 브세볼로드 끄냐제프와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바이런, 키츠 등 수많은 서구 작가들과 성서와 역사상의 인물들이 나타난다. 이 시에서 아흐마또바는 자신이 역사라고 인식한 시대의 개념을 예술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주인공 없는 서사시』는 3부작으로 되어 있으며, 제1부는 1913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삼각 관계의 연애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전개된다. 유아론적이고 자기 방종의 문학 예술 속에 젖어 있던 이 시기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어리석고 분별없는 술 잔치가 환상적 가면 무도회를 통해 나타난다. 여기서 자정의 카바레는 대격변이 일어나기 바로 전시대의 경솔과 우매함을 미묘하게 상징하고 있다. 제2부튼 내적 독백의 형식을 통해 이 시 전체에 숨어 있는 경향을 폭로하고, 혁명 전의 러시아와 러시아 문학을 그리스 로마와 유럽 문명에 연관을 지어 설명하고 있으며, 작가의 예술적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3부의 에필로그에는 1942년 소련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나와 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예술 작품의 영원불멸의 가치를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슬픈 운명의 여인 아흐마또바의 시는 서정시나 서사시 모두 한 많은 여인의 침묵의 노래이며, 인간의 고독과 존재의 문제에 대한 고백이며, 삶의 아픔을 사랑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녀는 자신의 시를 통해서 공간과 시간을 극복했다. -안나 아흐마또바 시선집 『자살하고픈 슬픔』(열린책들, 1996)에서 옮긴이 조주관의 해설
1872    20세기 러시아 최대의 시인 - 오시쁘 만젤쉬땀 댓글:  조회:3730  추천:1  2016-11-26
오시쁘 만젤쉬땀의 생애와 시 세계 1. 생애 오시쁘 만젤쉬땀Osip Emilievich Mandelshtam(1891~1938)은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20세기 러시아 최대의 시인이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들은 제정 러시아의 수도 뻬쩨르부르그로 이사갔으며, 거기가 거의 고향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에밀 만젤쉬땀Emil Veniaminovich Mandelshtam은 피혁 상인이었고, 어머니 플로라 오시뽀브나 베르블로프스까야Flora Osipovna Verblovskaia는 재능 있는 피아노 선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문학사가의 벤 게로프Vengerov의 친척으로서 자신의 좋은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였다. 만젤쉬땀은 뻬쩨르부르그의 전형적인 러시아 문화 풍토 속에서 두 형제와 함께 자라났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자전적 작품인 『시간의 소음』에 기록된 것 이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유명한 쩨니쉐프 상업 학교에 다녔다. 1907년 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 외국으로 나가 프랑스의 빠리(1907~1908)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1909~1910)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다시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와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신과 시적 세계관이 유사한 뱌체슬라프 이바노프의 문학 그룹인 에서 두 젊은 시인 안나 아흐마또바와 그녀의 남편 니꼴라이 구밀료프를 만났으며, 세 사람이 뜻을 모아 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스스로 라고 불렀다(이 말은 정상, 정점, 극치, 전성기, 꽃의 만개를 의미하는 그리스 어 Akme에서 나왔다). 아끄메이스뜨로서 활동하던 시인 만젤쉬땀의 운명은 어둠을 향해 갈 뿐이었다. 그는 혁명의 회오리와 문학 논쟁의와중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의 말년에 대한 이야기는 미망인 나제쥐다 만젤쉬땀의 용기 있는 회고록 덕분에 잘 알려지게 된다. 1934년에 그는 자신의 시 「스탈린 에피그램」에서 스탈린을 조롱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었다. 누군가의 밀고로 감옥에 들어간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그는 동료들의 중재와 도움으로 가혹한 형벌에서 면제되어 우랄 산맥에 있는 조그만 도시로 추방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신경쇠약 증세로 고통을 받던 중, 병원의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후에 그는 모스끄바에서 약 9백 베르스따 떨어진 작은 지방 도시 보로네쥬에서 거주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의 경제 사정은 절망적이었으며,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해 나갈 정도였다. 1937년 만젤쉬땀 부부는 모스끄바로 돌아왔으나, 다음해인 1938년 5월 요양중이던 병원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의 죄목으로 5년간의 중징역 선고를 받은 후, 감옥에서 몇 개월 지냈으며, 12월에 죄수 호송차에 실려 블라지보스또끄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만젤쉬땀은 피해망상증으로 고통받다가 반미치광이가 되어 굶주림과 과로로 죽었다. 1938년 12월 27일 그는 1142번 공동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것이 그의 사망 증서에 나타난 공식 날짜이다. 스탈린이 죽은 후 1956년 8월에 그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1957년에 작가 동맹은 시인의 유해를 확인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며했다. 이 위원들 중에는 시인의 미망인 나제쥐다 만젤쉬땀, 그녀의 남동생 예브게니 야꼬블레비치 하진, 안나 아흐마또바 그리고 일리야 에렌브르그가 있었다. 그러나 1973년까지도 만젤쉬땀의 시 모음집은 소련 시인 도서 목록에서 빠져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와 서구에서 만젤쉬땀의 시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활발하다. 그는 러시아의 예이츠Yeats와 릴케Rilke라고 불리운다. 지금도 그의 시는 인기가 좋으며,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요시프 브로드스끼Iosif Brodskij(1949~1996)는 그의 시를 특히 좋아했으며, 지금도 만젤쉬땀의 시는 인기가 있다. 2. 시 세계 1) 아끄메이즘의 세계 만젤쉬땀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는 정치적 동요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흥분과 열정의 시기였으며, 문학사가들은 이 시기를 (1895~1915)라 부른다. 각종 유파의 예술과 문학이 이 은시대를 장식한다. 시인들은 스스로 일정한 동아리나 학파를 조성하고 성명서뿐만 아니라 철학과 이론을 내놓았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시 예술의 경향은 상징주의, 아끄메이즘과 미래주의였다. 알렉산드르 블로끄, 꼰쓰딴찐 발몬뜨, 안드레이 벨르이, 발레리 브류소프, 뱌체슬라프 이바노프는 상징주의자로, 마야꼬프스끼와 흘레브니꼬프는 미래주의자로 활동하였으며, 예세닌은 동아리에서 활동하였다. 만젤쉬땀은 한동안 상징주의 시인들인 브류소프와 이바노프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러나 에서 구밀료프와 아흐마또바를 만난 후 만젤쉬땀은 아끄메이즘을 결성하여 열성적으로 일하였다. 이들은 구미료프의 에 모여서 상징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아끄메이스뜨들은 당시 예술 경향의 주류인 상징주의가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와 영적 교류를 한다는 상징주의자들의 모호하고 알 수 없는 시저 표현에서 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아끄메이스뜨들은 상징주의자들의 상응(교감)이론(A≠A), 특히 이바노프의 슬로건인 에 대응하여 (A=A)을 가장 아름다운 시 법칙이라 주장했다. 그들은 상징주의 시 속에 나타난 음악성 우선주의, 모호한 어휘, 막연한 암시, 알 수 없는 절대성의 표현을 거부했으며, 구체적 이미지, 말과 메타포의 정확성, 예술의 구체성, 표현의 명료성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표현의 대상과 감정을 일상 생활에서 찾았으며, 분명하지 않은 뉘앙스보다는 정확한 의미, 명료한 색채, 조형적 명암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을 중시했다. 그들은 장미가 순결의 상징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미의 모양과 색채가 아름답기 때문에 장미를 보고 감탄하고 노래하였다. 만젤쉬땀 역시 상징의 숲속에서 시어의 해방을 주장하는 열성적인 아끄메이스뜨였다. 2) 돌과 건축의 미 1913년 만젤쉬땀은 첫 시집 『돌Kamen'』을 출판했다. 이 시집의 출판과 더불어 만젤쉬땀은 러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시인을 인정되었다. 사물에 대한 독창적인 인식과 놀랄 만한 세부 묘사로 가득 찬 우아한 시들이 이 시집에 나온다. 만젤쉬땀은 건축에 필요한 돌을 세심하게 고르는 건축가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첫 시집의 제목 은 만젤쉬땀의 시적 원천을 암시한다. 이 시집이 출판되기 전에 그가 생각해 낸 제목은 였다. 그의 시에서 조가비는 진주 없는 조가비를 말한다. 만젤쉬땀의 돌은 아무데서나 발견되는 평범한 돌이나, 집 지을 때 쓸 수 있는 돌을 말한다. 이 제목은 역시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철학 시인 쮸체프의 시를 생각나게 한다. 만젤쉬땀은 장인 정신이 투철하고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쭈체프를 존경했으며, 자신의 시 속에서 종종 쮸체프의 시를 인용한다. 만젤쉬땀은 1833년 1월에 쓰여진 쮸체프의 시 속에서 제목 을 발견한다. 산 아래로 떨어져 골짜기에 드러누운 돌. 어떻게 떨어졌을까? 아무도 모르게- 정상에서 혼자 떨쳐 달아난 돌일까? 누군가 아래로 던진 걸까? 만젤쉬땀의 시는 돌의 노래이다. 그의 시 속에서 돌은 이다. 돌이 건물의 기초 재료이듯이 말(단어) 역시 시를 위한 기초 재료다. 그는 자신을 창조자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로 생각한다. 건물이 돌로 지어지듯 시는 아이디어나 테마가 아니라 말로써 만들어진다. 시나 건축은 둘 다 인간 영혼의 힘을 전달해 준다. 시는 새로운 존재 양식이며, 침묵과 무(無)의 공허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말(언어)은 시에 참여하고자 갈망한다. 돌 역시 있는 그대로 다른 유형의 존재를 원한다. 돌은 그 자체에 잠재력과 역동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있는 그대로 다른 돌들과 서로 의존하여 아치를 이룬다. 돌은 탑이나 둥근 천장을 지탱시켜 주는 토대가 되고자 하며, 텅 빈 공간이 있는 건물을 창조하고자 한다. 만젤쉬땀은 자신의 시 속에서 이러한 돌의 갈망을 읽고 있다. 돌아, 거미집이 되어 레이스로 있으라. 하늘의 텅 빈 가슴에 가는 바늘로 상처내라. 만젤쉬땀의 말대로 건축한다는 것은 공허와 싸우는 것이요, 공간에 최면을 거는 것이다. 시를 건축에 비유하기를 좋아하는 만젤쉬땀은 실제로 건축물을 대상으로 많은 시를 썼다. 「해군성 건물」, 「노트르담」, 「성 소피아 사원」등이 있으며, 이러한 시들은 돌과 건물으 상호 관계와 단어와 시와의 관계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두 번째 시집 『뜨리스찌야』(1922)에도 다양한 건축물이 소개된다. 이들 시집에서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사실적 초상화가 아니다.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나 복사를 원하지 않는 만젤쉬땀은 오직 예술 그 자체 안에서 느낄 수 있는 현실만을 받아들였다. 구체성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그는 인간의 내적 영감과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일생 동안 일관된 미적 원칙을 가지고 살았다. 그의 시학 속에서 논리와 합리성은 오직 단어의 일면뿐이며, 단어는 문맥과 운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소리, 이미지, 숨은 의미)을 갖는다. 단어의 진실을 믿는 시인 만젤쉬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무 단어도 아직 쓰여지지 않았으나 시는 이미 소리를 가지며, 단어의 내적 이미지는 살아서 시인의 귀에 들린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만젤쉬땀의 초기 시들은 서정의 윤기랄까, 시의 아름다움이라까, 촉촉이 젖어 오는 감동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의 시는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돌』을 처음 읽을 때 거의 조각을 한 듯한 리듬과 운율의 완전성과 구체적으로 지각되는 시행의 특성에 매료된다. 그러나 1920년대의 시들은 의미의 강도와 형식과 테마에 있어 초기 서정시와는 다르다. 시적 영감이 더 인간적이며, 더 명상적이고, 형이상적이며, 시간과 시인에 대한 테마가 지배적이다. 이 시기에는 강한 힘과 나약함을 대조시키는 모티프가 자주 나타나고 역사, 양심, 죽음 등 시대의 어둠에 대한 이미지와 테마들이 자주 등장한다. 만젤쉬땀의 시는 시어와 은유에 있어 독창적이고, 소리와 이미지, 그리고 사상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그는 공허, 공간, 침묵을 묘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의 시인이었으며, 날카로운 시대 감각과 역사 감각을 지녔다. 만젤쉬땀은 시간의 소리, 공허의 소리, 침묵의 소리를 그림처럼 그려 내는 시인이었다. 3) 시간의 노래 철학 시인으로서 만젤쉬땀의 시는 제르좌빈(1743~1816)과 쮸체프(1803~1873)의 철학시적 특성과 전통 속에서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인들은 모두 의식적이고 장엄한 시풍에 절묘한 말의 힘을 조화시킨 철학시를 쓴다. 그들의 시 속에서 단어의 중요성과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살아난다. 추상명사가 구체적인 이미지를 띠면서 우아한 심상과 어우러져 삶과 죽음에 대한 테마를 강도 있게 발전시켜 나간다. 만젤쉬땀의 시는 시간의 노래다. 그의 시 속에서 시간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띠고 나타나며, 다른 모든 요소를 결합시켜 주는 주도자적 개념이 된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느껴진 시간의 파괴적인 이미지를 시 속에서 발전시킨다. 그의 시 속에서 시간은 삶의 은유이며 직유이다. 그의 비극적 삶은 개인 의식을 파괴시켜 나가는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의 다양한 이미지 속에서 특히 만젤쉬땀은 시간의 파괴성을 본다. 말젤쉬땀의 시간 의식은 제르좌빈의 시간 의식과 비슷하다. 시간 속에서 삶의 덧없음을 노래한 제르좌빈의 마지막 시 「무상」(1816)은 만젤쉬땀에게 시적 명상을 제공한다. 시간의 강은 흘러 인간의 모든 것을 가져 간다. 인간도 왕궁도 왕도 망각의 심연 속에 빠진다.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리라의 소리도 나팔소리도 영원의 입 속에 삼켜질 테고 똑같은 운명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제르좌빈이 석판 위에 써놓은 이 시구를 본 만젤쉬땀은 「석판 위의 송시」(1923)라는 제목으로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만젤쉬땀의 시에서 제르좌빈의 시는 문학적 연상의 우수리와 메아리로 나타난다. 벼랑에 그들의 설교가 있고 물 속에 교훈이 있으며 시간이 그들을 갉아먹는다. 제르좌빈의 시 속에서 시간은 거대한 괴물의 이미지로서 나타나는 반면, 만젤쉬땀의 시 속에서 시간은 작은 동물의 이미지로서 구체화된다. 보이지 않는 괴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귀뚜라미나 쥐의 이미지로서 나타난다. 귀뚜라미 시계가 노래하고 오한이 속삭이며 건조한 뻬치까가 바스락거린다 이것은 불타는 붉은 비단. 쥐들이 이빨을 가는 삶의 얇은 바닥. 만젤쉬땀의 많은 시 속에서 시간은 소리 없는 흐름으로 시인의 마음을 할퀴어 상처를 낸다. 시인은 장미 속에서, 돌 속에서, 공기 속에서 시간의 숨결을 느낀다. 부드러움과 무거움-누이여 한결같은 당신의 인상. 벌들이 탐스러운 장미를 빨고 있다. 인간으 죽어 가고 뜨거웠던 모래는 식으며 어제의 태양이 검은 들것을 타고 간다. 아, 무거운 벌집과 부드러운 망사, 당신의 이름을 반복하느니 돌을 드는 것이 더 쉽다! 이 세상에서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시간의 짐을 벗을까. 시간의 짐을 벗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인의 마음은 가련하다. 만젤쉬땀의 비극적 삶 속에 드리워진 시간의 그림자는 그가 본 시간의 얼굴이다. 시인은 시간의 빛과 그림자를 자신의 시 속에서 표현하고자 한다. 빛과 그림자의 순교자 렘브란트처럼 나는 벙어리가 된 시간 속에 깊이 빠져 버린다. 만젤쉬땀의 시 속에서 시간의 이미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 , 등.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 속에서도 시간의 언어를 읽고 있는 시인은 모든 것에서 삶의 아픔을 느낀다. 그의 삶의 아픔은 인간 사랑으로 승화된다. 꿈같은 삶 속에 잔인한 고통을 즐기는 나, 모든 사람을 은근히 질투하며, 그들을 남모르게 사랑한다. 만젤쉬땀의 시 속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많은 시들이 시간의 구체적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시간에 대한 시인의 계속적인 의식과 강조는 그의 시적 세계 속에 하나의 철학으로 굳어진다. 시간 철학은 삶과 죽음의 테마를 이루는 만젤쉬땀의 시 정신에 기본이 되고 있다. * 작가 연보 1891년 바르샤바에서 출생. 아버지는 피혁 상인, 어머니는 음악 교사. 1891~1907년 뻬쩨르부르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러시아에서 평판이 가장 좋은 쩨니쉐프Tenishev 학교(1899~1907)을 다님.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목격. 1907~1910년 외국 여행을 하다가 파리에서 수학(1907~1908)하고, 하이델베르그(1909~1910),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잠시 방문. 1910년 뻬쩨르부르그 문학 간행물 『아폴론Apollon』에 첫 시 작품을 출판. 1911~1916년 뻬쩨르부르그 대학에서 그리tm 어를 공부했으나 학위를 받지 못함. 1911년 아끄메이스뜨 시인 아흐마또바와 구밀료프를 만남. 1913년 첫시집인 『돌』을 출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에서 일함. 1915년 시인 마리나 쯔베따예바의 일에 연루됨. 1917년 10월 혁명시 교육 인민 위원회에 가담. 1918~1922년 시민 혁명시 러시아 각 지방을 여행. 크리시아에 있는 랭겔Wrangel 장군의 반볼셰비끼 백군에 의해 감옥에 갇힘. 1919년 끼예프에서 나제쥐다 하진Nadezhda Xazin을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 1923년 두 번째 시 모음집 『뜨리스지아Tristia』를 출판. 『시간의 소리』를 씀. 1926~1930년 시를 쓰지 않고 레닌그라드와 모스끄바 사이에서 방랑 생활. 1928년 표절 문제로 부당하게 기소됨. 「시들 : 시에 대하여」(수필)와 「이집트 우표」를 출판. 1929년 「제4의 산문」을 쓰기 시작. 1930년 8개월 동안 아르메니아에 여행. 1932년 「단테에 대한 담화」(산문비평)를 씀. 1933년 끄리미아의 고대 수도 와 꼭쩨벨Kokebel에서 휴일을 보냄. 『아르메니아의 여행』을 출판. 1933년 「스탈린에 대한 에피그람(No. 286)」을 작곡. 1934년 처음으로 체포당함. 1934년 우랄 산맥에 있는 체르드인Cherdyn'으로 추방당하고 거기서 미쳐 버림. 1934년 남부 러시아에 있는 보로네쥐Voronezh로 옮겨 감. 1935~1936년 몰수된 시를 기억으로 재조립. 「무명 용사에 대한 시」를 쓰고 「스탈린에게 바치는 송시」를 시도. 1937년 추방에서 해방. 1937~1938년 모스끄바 외곽에서 강제 거주. 이 기간 동안에는 어떤 시도 살아 남지 못함. 1938년 다시 체포되어 의 죄로 5년간 중노동 선고를 받음. 1938년 12월 27일 극동에 있는 블라지보스또끄 근처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 -오시쁘 만젤쉬땀 시선집 『오늘은 불쾌한 날이다』열린책들, 1996 에서 옮긴이 조주관의 해설
1871    상상하라, 당신의 심원한 일부와 함께 비상하라... 댓글:  조회:3147  추천:0  2016-11-26
      언젠간 읽고말거야, 테드 휴즈의 시작법   테드 휴즈의 시작법, (시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詩를 作하는 法이다. 연애를 시작하는 법, 뭐 이런 거 아니다.) 한번 읽어봐야 할...   시인 지망생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읽고 나서 보니, 꼭 읽어볼만한 책이 맞다. 꼭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시적 감수성이나 글쓰기, 생각하기 등 여러모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다. 학생들을 위해서 쓴 책인데, 실제로 학생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이다. 문제는 학생들은 이런 책 읽을 여유가 없다는 거.   어줍잖은 방법론이 아닌 근본적 접근   책 구성도 상당히 흥미롭다. 시를 쓰는 법 혹은 글쓰기에 대한 방법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동물과 시, 바람과 기후, 사람들에 관한 글쓰기, 생각하는 법, 풍경에 대한 시 쓰기, 산문 쓰는 법, 주변 인물에 관한 글쓰기, 달에 사는 (환상 속의) 생물에 대하여 등 글쓰기를 위한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부분들을 다룬다. 이 흥미진진한 주제들에 대해 장황하지 않게 엑기스만 전해준다. 그렇다고 쪽집게 과외는 아니다.   백 가지 설명보다 시 한 편으로 주제를 전달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핵심과 뼈대 위주로 전달하고는 바로 시를 소개한다. 해당 주제에 관해 생각해볼만한 시를 선별해서 수록했다. 시에 대한 구차한 설명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제를 알려줬으니 한번 음미해보라는 식이다. 시를 이해하는 법은 시를 그대로 호흡하는 것이고, 한번 읽어서 잘 모르겠으면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느껴질 때까지 다시 호흡하는 것이다. 라고 테드 휴즈가 말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한번 해본 말이다. 말하자면, 돌팔이 처방.   원서보다 번역본이 더 좋은 점   원서는 Poetry in the Making인데, 영어로 시를 쓸 계획이 아니라면 굳이 원서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난 안 읽어봐서 모른다. (영어를 못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겐 번역본이 원서보다 좋은 점이 있는데, 역자인 한기찬 시인이 주제에 부합하는 비교 한국시들을 각 장마다 몇 편씩 수록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오소리, 파리, 모기, (에프킬라..는 아니고..) 당나귀, 나의 고양이 죠프리, 알프레드 코닝 클라크 등 도무지 와닿지 않는 번역시들만 있는 것보다는, 화사, 풀, 풀잎, 남사당, 성북동 비둘기, 해, 별 헤는 밤 등의 주옥같은 시들을 비롯한 잘 와닿는 우리 시들이 더 반갑다. 각 장의 주제와 비교적 가까운 시들이 수록되어 한번 음미해볼 만하다.   상상하라, 나의 심원한 일부와 함께 침잠하라   "이제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라는 순 뻥에 가까운 홍보문구가 뒤표지엔 적혀 있지만, 테드 휴즈가 본문에서 실제 숙제로 내는 건 소설 쓰기다. 생각하고 표현해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해보는 것과 글로 옮겨보는 것은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생각도 그냥 해선 안된다. 낚시할 때 추를 뚫어지게 보면서 그것과 연결된 물 속 세상 전체를 머리 속에 생생하게 그려보듯이, 에너지를 모아서 쏟아부으면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동물도 풍경도 바람까지 깊이 느끼고 생각해서 표현해보도록 가이드한다. 텅 빈 사고가 아닌 생명으로 가득찬 사고를 해야 하고, 흩어지려는 사유를 붙들어 움켜쥐고 깊숙이 침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시작법이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나는 내가 동물들의 삶을 휘저은 데 대해 나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동물을 동물들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리고 거의 그와 같은 시기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p.23)   낱말이 생명적이며 시적인 것은 바로 낱말 속에 있는 이 작은 마귀 때문이며 시인이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바로 이 작은 마귀인 것이다. (p.25)   당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보라. 마치 마음으로 산수셈이라도 하듯 그것을 힘들여 생각하지는 말라.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기울여 보고, 스스로 그것의 속으로 침잠하라. (p.25)   시는 사상이나 일시적인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찰나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간에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변화케 하는 경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p.45)   글쓰기의 전기술은 당신의 독자의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일인 것이다. (p.67)   어떤 것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상상력으로 움켜쥐고는 그것의 모든 조각조각을 조사할 때까지 놓아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남아 있어서 존속하려고 들지 않는다. (p.90)   삶조차도 더욱 흥미로운 것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글쓰기가 우리 대부분에게 가르쳐 주는 한 가지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사물들을 밀접하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필요한 만큼 그것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p.142)   (어떻게 해야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진실로 여러분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재미있게 쓰면 된다는 것이다. (p.153)   이런 참된 관심들, 즉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진정한 개인적 감정과 진정한 경험을 갖게 되는 것들은 여러분이 쓸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 그래서 글을 쓸 때 여러분은, 단순히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지난 주에 들었거나 어제 읽은 것-과 여러분의 삶에 있어 심원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따라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있어서도 오로지 생명력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p.157)  ==================테즈 휴즈  ========= 제 1장 동물과 시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물들을 잡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차 이러한 열정이 식어가기 시작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동물을 잡는 일과 시를 쓰는 일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내게 이 두 가지 일에 대한 관심은 동일한 것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어릴 때 볏가리에서 짚단을 들어낼 때마다 그 밑에서 생쥐를 잡아 서른 마리나 마흔 마리가 내 코트 안감 속을 기어다닐 때까지 주머니 속에 집어놓곤 했던 쥐사냥과 현재의 내 시쓰기는 내게 마치 같은 정열의 다른 단계인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면에 있어 나는 시를 일종의 동물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시는 동물과도 같이 생명을 지닌다. 이 말은 시가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심지어 그 시를 쓴 시인에게서도 완전히 독립해 있어 그 시에 다른 것을 첨가하면 상처를 입거나 나아가서는 죽어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또 시에는 지혜도 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것…우리가 매우 알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내 관심은 어떤 특정 동물을 잡거나 특정 시를 쓰는 데 있지 않고 단지 나의 외부에서 그것 나름의 생생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을 잡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중략) 나는 광부나 철도직원의 아들 같은 도시아이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또 하나의 생활을 영위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전원에서 나 자신의 생활을 누리며 보냈다. 한두번의 불운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이 두개의 생은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당시에 썼던 일기장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는 사냥 이야기만 적혀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15세가 되자 내 생활은 더욱 복잡해졌고 동물들에 대한 나의 태도도 변했다. 나는 내가 동물들의 삶을 휘저은 데 대해 나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동물을 동물들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그와 같은 시기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쓴 것은 동물시가 아니었다. 동물시라 불릴 만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고 시쓰기가 어렸을 때의 동물 사냥의 부분적인 연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보다 더 더 나중의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마음 속에 새로운 시 한편을 움트게 하는 특이한 흥분, 가볍게 도취된 채 아주 무심결에 이루게 되는 집중, 그런 다음엔 윤곽, 부피와 색채와 깨끗이 마무리된 형태, 평범한 무생명체의 한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실체, 이 모두는 너무도 친숙해서 오인할 여지도 없는 것들이다. 이것이 사냥이며, 시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 여러분 자신의 생명 외부에 있는 생명을 지닌 새로운 종인 것이다. 지금 나는 시쓰기에 있어 내 관심의 근원과 성숙이라고 믿는 바를 간략히 말했다. 당신은 몇 가지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어떻게 비 속의 산책에 대해 쓴 시가 동물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일까? 글쎄 아마 그건 기린이나 낙지, 그밖에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어떤 동물과도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것을 하나의 정신이 움직이게 만드는, 살아 있는 부분들의 총합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 살아있는 부분들이란 낱말이며, 이미지며 리듬이다. 정신은 그 부분들 모두가 함께 움직일 때 그 속에 거주하는 생명인 것이다. 부분과 총체인 정신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 오는지를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부분들이 모두 죽었다면..당신이 그 작품을 읽을 때 낱말이나 이미지나 리듬들이 뛰어올라 살지 못한다면..그 생명체는 상한 것이고 그 정신은 병든 것이다. 그래서 시인으로서 당신은, 당신이 관할하는 모든 부분들, 낱말과 리듬과 이미지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난점이 시작된다. 우선 최초의 규칙들은 상당히 단순하다. 살아있는 낱말들이란,째깍이나 낄낄처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 주근깨나 엽맥처럼 볼 수 있는 것, 식초나 설탕처럼 맛볼수 있는 것, 가시나 기름처럼 만질 수 있는 것, 타아르나 양파처럼 냄새맡을 수 있는 것 따위다. 즉 직접적으로 우리의 오감 중 어느 하나의 감각에 속할 수 있는 낱말들인 것이다. 아니면 나 처럼 움직이고 근육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낱말들이 살아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은 소리만을 줄 뿐만이 아니라 혀로 이라고 발음할 때와 같은…날카로운 동작에 대한 개념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 낱말은 또 딱 소리를 내는 나뭇가지처럼 가볍고도 부서지기 쉬운 물체에 대한 느낌도 준다. 무거운것도, 부드럽고 구부러지기 쉬운 것도 째깍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같은 식으로 타아르는 코를 찌르는 냄새만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텁고 빽빽하며 끈끈해서 만지기에 끈적끈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 그것은 부드러울 때에는 검은 뱀처럼 움직이며 아름답고도 검은 광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 낱말은 다른 많은 낱말들과 연관된다. 마치 각각이 눈과 귀와 혀를, 혹은 귀와 손가락과 움직일 수 있는 몸체를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여러 개의 감각에 속하는 것이다. 낱말이 생명적이며 시적인 것은 바로 그 속에 있는 이 작은 마귀 때문이며 시인은 바로 이 작은 마귀를 다뤄야 한다. (중략) 좋지 않은 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일이, 말들이 서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한 가지만 해낼 수 있다면 그런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 한가지란 당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보라. 마치 마음으로 산수셈이라도 하듯 힘들여 생각하지는 말고, 그것을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기울여 보고, 그 속으로 침잠하라. 이 일을 해내면 말은 마술처럼 스스로를 보살피게 된다. 이때 당신은 쉼표라든가 종지부, 또는 그런 류의 것 때문에 고심할 필요는 없다. 낱말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다. 오직 당신의 눈, 귀, 코, 미각, 촉각, 전존재를 당신이 침잠하고 있는 사물을 향해 계속 나아가게 하라. (중략)또 그 낱말이 아무리 낡았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 낱말을 쓰는 그 순간 올바르게 여겨졌다면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다. 자기가 써놓은 것을 죽 다시 읽고 나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의 영혼, 하나의 생물을 잡았을 것이므로.     이제 몇 가지 실례를 제시하겠다. 내가 산채로 잡지 못했던 짐승 중에 여우가 있다. 두번을 실패했는데, 한번은 내가 잡은 여우새끼를 가지러 가기 전에 농부가 그것을 죽여버려서, 그리고 또 한번은…(중략) 몇 년뒤 나는 런던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눈오는 밤 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일년 동안이나 아무것도 쓰지 못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어떤 것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불과 몇 분만에 다음의 시를 썼다. 이는 내가 처음으로 쓴 동물시이다. 나는 상상한다, 이 한밤의 순간의 숲을. 무엇인가가 살아있다 시계의 고독 곁에서 그리고 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이 텅 빈 백지 곁에서. 창 밖에는 어떠한 별도 보이지 ㅇ낳는다 한결 가까운 무엇인가가 어둠 속 더욱 깊은 곳에서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차갑게, 어둠 속의 눈발처럼 섬세하게, 여우의 코가 스친다, 가지를, 잎새를, 두 눈이 하나의 동작을 돕는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나무사이 눈 속에 깨끗한 자국을 찍으며. 그리고 조심스레 개간지를 대담하게 가로질러 온 절름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 곁에 움푹 들어간 곳에서 꾸물거린다. 하나의 눈 넓어지며 깊어지는 녹색, 번쩍거리며, 집중하여,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며 그때, 갑작스레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고 여우는 머리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들어온다. 창에는 여전히 별이 없다, 시계가 째깍거린다, 백지는 채워졌다. -생각속의 여우 이 작품은 의미라고 쉽사리 불릴 만한 것이 없다. 이 시는 확실하게 여우에 대한 시지만, 그 여우는 여우인 동시에 여우가 아니다. 대체 어떤 여우가 개들이 짖어도 미소지으며 내 머리 속으로 걸어들어올 수 있을까…추측컨대 아직도 그 여우는 내 머리속에 앉아 있으리라. 그것은 여우이기도 하고 영혼이기도 하다. 그것이 진정한 여우인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을 때 난 여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여우가 발자국을 찍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림자가 눈의 고르지 못한 표면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본다. 낱말들이 이 모든 것을 보여주며 여우에게로 가깝게 나를 데려간다. 그 여우는 매우 사실적으로 여겨진다. 언어는 여우에게 육신과 그것이 걸어다닐만한 장소를 부여한 것이다. (중략)내가 언어 속에서 진정한 여우를 사로잡지 못했다면 나는 이 작품을 남겨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략)실제로는 그 시를 읽을 때마다 여우는 어둠 속에서 다시 나와 내 머리 속으로 걸어들어 오곤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고난 뒤 오랜 뒤에도 그 시의 사본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 그 작품을 읽을 때마다 여우가 어둠의 어느 곳으로부터에선가 일어나 그에게로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여우는 몇 가지 면에서 평범한 여우보다 좋다. 영원히 살아갈 것이며 굶주림이나 사냥개 때문에 고통받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여우를 내가 가는 곳 어디든지 데리고 다닌다. 나는 여우를 만든 것이다. 아주 선명하게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살아 있는 언어를 찾아냄으로서. (중략) 나는 어린 시절 아주 작은 호수, 실제로는 커다란 연못에서 주로 낚시를 했다. 이 연못은 한군데 아주 깊은 데가 있었다. 때때로 무더운 날에는 수면 가까이 철로 침목처럼 생긴 것이 떠 있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거대한 창꼬치였다. (중략) 최근에 나는 창꼬치 낚시를 하고 싶었지만 갈 형편이 아니었는데, 며칠이 지나 그 낚시의 형언키 어려운 즐거움을 상기하고 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중략) 나는 바로 창꼬치를 사로잡은 것이 아니고 내가 낚아 본 일조차 없는 그 괴물이 살고 잇는 연못 전부를 사로잡았다. 여기 내가 창꼬치라고 제목을 붙인 시가 있다. 삼 인치의 가시, 모든 부위가 완전한 가시, 금빛이 얼룩진 녹색. 나면서부터 살인자, 짖궂은 늙은 미소. 파리 떼 사이로 수면 위에서 춤춘다. 혹은 움직인다, 자신의 위엄으로 겁주며, 에메랄드빛 연못 바닥 위, 잠수함의 우아하고도 소름끼치는 그림자 던지며. 백 피이트의 그 세계 속을. 연못 속, 더위 먹은 수련 잎사귀 아래- 움직이지 않는 어둑한 그림자. 지난 해의 검은 잎새 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혹은 잡초 사이 호박색 구멍 속에 떠 있다. 턱에는 갈고리 모양의 집게와 엄니 지금도 변치 않았던 것이다. 도구에 지배된 삶. 아가미는 조용히 반죽한다, 그리고 가슴 지느러미도. 먹이로 유리병 속에 삼인치, 사인치, 사인치 반짜리 유어들을 넣어 수초 속에 묻어놓자마자- 삽시간에 두 마리가 나타났다. 마지막 한 놈은 늘어진 복부와 타고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정말 그놈들은 아무에게도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2피이트가 넘는, 각각 6파운드 짜리 두마리, 분홍바늘꽃 사이에서 의기양양하며 인정머리 없고 죽은 듯한- 한 놈이 아가미로 다른 놈의 목덜미를 밀어붙인다. 튀어나온 눈알이 응시한다, 죔자물쇠처럼- 눈알 속에도 예의 그 쇠붙이가 있지만 그 막은 죽음 앞에서 오무라든다. 내가 낚시질한 연못은 지름이 50야드, 그 속의 수련과 활기찬 잉어들은 그것을 길러준 수도원의 눈에 보이는 어떤 묘비보다도 오래 살아남았던 것이다- 전설의 깊이에 멈춰서서. 그것은 영국 만큼이나 깊다. 그것은 움직이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또 너무 거대하고 늙어서 땅거미 지면 감히 낚시줄 던질 수 없는 창꼬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낚시를 던졌다 무엇이 움직일지 어떤 눈이 바라볼지 두려워 머리가 오싹해져서. 정적이 어두운 연못 위에서 튄다, 밤의 어둠 아래의 어둠이 풀어놓은 꿈보다도 내 귓전에 부서지기 쉬운 부초를 침묵케 하는 부엉이들, 그런데 그것은 천천히 치솟아 내게로 다가왔다, 응시하며. ==========풍경에 대한 시쓰기(2)================== 그러면 사람들이 바다에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선박이 아니다. 물론 선박이 연기를 뿜으며 수평선을 따라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열심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 모두를 휩쓸어갈 해일을 찾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찾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거대한 자석과 핀처럼 해변에 빨려들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그 일을 좋아할 뿐이며 또 그 일은 즐겁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크게 펼쳐져 있는 어떠한 풍경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곳 어디엔가에 물이 있다면 더욱 좋지만 실제로는 그것에 마음을 두는 것도 아니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차를 타고 가다가 심하게 굴곡진 길이나 갑작스럽게 트인 시야에 계곡과 강이 눈에 들어오거나 깎아지른 듯한 산의 뚜렷한 모습을 본 경험이 있다. (중략)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왜 우리가 그림이나 글에서 표현된 그와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는 그토록 여러 번 즐거워하는가에 대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식물에게 있어 물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건강에 중요한 감정들을 우리 내부에 부활시킨다. 다음은 시인인 에드워드 토마스가 쓴 글로, 내가 뜻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는 시도, 최소한 운문도 아니다. 바다에 대한 묘사인데, 그는 이른 아침 바다와 마주쳤을 때 방금 언급한 그런 감정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이, 그 가장 특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는 바다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반응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는....육지처럼 변하지도 움츠러들지도 성장하지도 않았다. 또 태양열로 더워지지도 않았다. 바다는 인간과 동물들을 현재의 그 모습으로 바꿔온 시간의 문 밖에서 잠자고 신음하며 시간에 의해 흔들리지 않은 채로 누워 있는 괴물이다.(중략) 지금의 바다는 바로 산과 숲과 늪이 태연한 적(敵)이었을 그때의 바다이어서, 그것을 바라보면 그 옛날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복원이 완벽했던 한 새벽을 기억한다. 아직 어두웠고 바람은 낮은 잿빛 하늘 아래를 솟구쳐 오르며 질주했고 종다리 한 마리가 가시금작화 덤불의 신음소리와 문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만조의 깊게 들여 쉰 숨소리 한가운데에서 노래하고 있을 때였다. (중략) 그것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곤두선 바다, 그리고 색채도 없는 새벽 속에서 어둡고 차갑게 곤두선 바다, 어둡고 차갑고 거대한 바다였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서 육지는 날아오르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와 최고 금빛인 작은 꽃들의 아름다움을 그 우상들에게 바치며 무릎을 끓었다.그것들은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바다는 더 무서웠다. 이 인용문이 지닌 효과를 정말로 힘차게 해 주는 것은  적어도 내게 있었서는 종다리와 문과 배와 갈매기와 작은 꽃들-거대하고 죽은 듯이 어두운 바다에 정반대되는 작고도 생기에 찬 사물들-을 뒤덮고 있는 바다에 대한 그 섬뜩한 설명인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풍경을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단지 그 속에 있는 요소들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그 요소를 이루는 사물과 생명체, 즉 아마도 인간 사이의 만남을 부여하는 데 있어서. 진술한 바대로 이것이 우리가 풍경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의 표출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넓은 호수와 멀리는 칠턴스가 보이며 유원지와 해안림이 섞인 천 오백에이커의 땅. 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다. 꼭 초라한 광고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면적의 땅이 영국 화가인 터너의 그림 속에 나타나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된다. 그는 그것을 힘차고 풍부한 감정의 렌즈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풍경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아주 어렵다. 작은 범위에서조차, 물감으로 아주 신속히 해치울 수 있는 완벽함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언어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을 보면 얼마나 생생한 영상을 그릴 수 있는가. 이 시의 제목은 '버지니아주'이며 T.S.엘리엇의 작품이다. 붉은 강, 붉은 강, 천천히 흐르는 더위는 고요하다 어떠한 의지도 고요한 강물처럼 고요하지 않다. 더위는 언젠가 들었던 입내새를 통해서만 움직일까? 아마도 언덕들은 기다린다, 문들이 기다린다. 자주색 나무도, 흰 나무도 기다린다, 기다린다, 유예를, 부패를, 결코 움직이지 않는 삶, 삶, 한번은 움직이는 냉혹한 생각들이 내게 떠올랐지, 그리고 지금은 나와 함께 가고 있다. 붉은 강, 강물, 강물이. (중략) 여러분은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다고 느끼리라. 그런데 이 시는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흰 나무들 곁의 자줏빛 나무들일까? 그 문들이란 정원의 문일까 아니면 들판의 문일까? 그 문은 나무 곁에 있을까 아니면 강가에 있을까?(중략)  이 시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그토록 힘찬 연상을 창조한 것인가? 좀전의 인용문처럼 이 시도 강렬하고 생생한 감정을 창조함으로서 생생한 영상을 창조하고 있다. 이 시가 묘사하는 것은 천둥과 번개로 변하게 될 어느 뜨거운 오후, 버려진 서남부의 어느 느른한 대낮처럼, 짓누르는 위기감이 낮게 깔려 있는, 열기와 건조함과 피로, 정지된 시간, 널리 퍼지고 있는 정적과 더불은 완만함의 감정인 것이다. 모든 것은 천천히 감겨들고 있는 제국면의 진행 속에 놓여있다. 아마도 이 작품을 파악하는 그럴 듯한 방법은 이 더위로 망연해진 땅 밑으로 가라앉아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강물에 대한 표현으로 이 작품을 생각해보는 것이리라. 언덕들, 물들, 흰 나무들, 자주빛 나무들 모두가, 강이 천천히 여행을 하고 있는 그 위 지표면에 반사된 것들처럼 움직이면서도 정지한 채 뒤집혀 있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시의 가치는 몇 가지 점에서 실제 풍경보다도 우수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장소에 있을 때 받는 혼란스럽고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감정들이 이러한 시 속에서는 집중되고 순화되며 강렬하게 된다. (중략) 풍경과 더불어 이 일을 해 내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풍경은 너무도 많은 세부를 수반하고 너무도 많은 징후를 제시해서 우리가 압도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전부는 다만 우리의 인간적인 흥분, 그 장소에 대한 아주 깊은 감정을 개진해 주는 약간의 실마리뿐이다.우리는 사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들어맞는 음악이 수반된 감광막을 원하는 것이며, 그 음악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후략)  
1870    세계문학상에서 가장 짧은 형태의 시 - "하이쿠" 댓글:  조회:3949  추천:0  2016-11-26
'5·7·5' 3행의 17자로만 구성돼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 불리는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   단지 열일곱 자로 이루어진 하이쿠는 세계 문학에서 가장 짧은 형태의 시다. 4백 년 전 일본에서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세계의 많은 시인이 하이쿠를 쓰고 있고, 서양에는 하이쿠 시인으로 활동하는 문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짧은 시가 가진 함축미와 선명한 이미지는 일찍이 에즈라 파운드에게 영향을 미쳐 20세기 영미시를 주도한 이미지즘 운동을 촉발시켰으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월레이스 스티븐스, 릴케 등도 이 시 형식에 자극을 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이쿠는 정통파 시인뿐 아니라 앨런 긴즈버그, 게리스나이더, 잭 케루악 같은 비트 계열의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이들은 영어로 된 하이쿠를 썼으며 이는 동양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번개처럼, 우리들 생애 파고드는 침묵의 언어들!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 바쇼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 타다토모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도 나비가 못 되었구나 - 바쇼 벼룩, 너에게도 밤은 길겠지, 밤은 분명 외로울 거야 - 이싸 봄에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 오토쿠니   하이쿠는 우리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로 데려간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삶 속에 깊숙이 내려놓는다. 하이쿠는 하나의 신비, 단지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로버트 스파이스(미국의 하이쿠 잡지의 편집자)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남는 것이다 저 하늘까지도 (쉰 살 생일을 맞아 - 이싸)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 (이싸)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것 (소세키)     거지가 걸어가고 그 뒤에 나란히 나비가 따라 간다 (세이 세이)     걱정하지 말게, 거미여 나는 게을러서 집안청소를 잘 안 하니까 (이싸)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 하지만, 하지만...... - 어린 두 딸을 잃고 아들마저 죽은 뒤 쓴 시 (이싸)     이 덧없는 세상에서 저 작은 새조차도 집을 짓는구나 (이싸)     몹시 춥겠지만 불가에서 몸을 녹이지는 말게 눈부처여! (소칸)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소칸)      저 나비, 무슨 꿈을 꾸길래 날개를 파닥거릴까? (치요)     꺽어도 후회가 되고 꺾지 않아도 후회가 되는 제비꽃 (나오조)     내 귓가의 모기는 내가 귀머거리인줄 아는 걸까? (이싸)     달팽이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너도 부처를 닮았구나 (이싸)     '여름이라서 마른 거야'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이내 눈물을 떨군다 (키킨)     장마비 내리자 물가에 서 있는 물새의 다리가 짧아지네 (바쇼)     한낮의 정적 매미 소리가 바위를 뚫는다 (바쇼)     흰 이슬이여 감자밭 이랑마다 뻗은 은하수 (부손)     저 뻐꾸기는 여름동안 한 곡조의 노래만 부르기로 결정했구나 (료타)       이상하다 꽃그늘 아래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이싸)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이싸)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 이 꽃의 따스함이여 (이젠)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료타)      생선 가게 좌판에 놓인 도미 잇몸이 시려 보인다 (바쇼)     밥을 지어라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올해의 쌀로 (에자키 요시히토)     모두 거짓말이었다며 봄은 달아나 버렸다 (산토카)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바쇼)      하루 종일 부처 앞에 기도하며 모기를 죽이다 (이싸)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 (사초)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 (료칸)     내가 경전을 읽는 사이 나팔꽃은 최선을 다해 피었구나 (쿄로쿠)       이 첫눈 위에 오줌을 눈자는 대체 누구인가? (기가쿠)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있네... (이싸)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다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     나는 떠나고 그대는 남으니 두 번의 가을이 찾아오네 (부손1716~1827)     한밤중에 잠이 깨니 물항아리 얼면서 금 가는 소리 (바쇼)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이싸)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도둑이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료칸)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 (초수이)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말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년 후를 생각하네 (시키)      내 집 천장에서 지금 자벌레 한 마리가 대들보 길이를 재고 있다 (이싸)      저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줄 미처 몰랐네... - 죽음을 맞이하며 (하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산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기가쿠)       내 전 생애가 오늘 아침은 저 나팔꽃 같구나... -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모리다케 )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눈사람에 대해 나눈 말 눈사람과 함께 사라지네 (시키)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닭들이 서로 다투니 (이싸)     오래된 연못 개구리 풍덩! (바쇼)      우리가 기르던 개를 묻은 뜰 한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눈 내린 아침!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소에는 미움받는 까마귀조차도 (바쇼)     겨울비 속의 저 돌부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싸)       한 번의 날카로운 울음으로 꿩은 넓은 들판을 다 삼켜 버렸다 (이메이)       나무 그늘 아래 나비와 함께 앉아 있다 이것도 전생의 인연 (이싸)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친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바쇼)       너무 오래 살아 나 역시 춥구나 겨울 파리여! - 인생의 마지막 시 (타요조)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 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 버렸네... (시메이)       사립문에 자물쇠 대신 달팽이를 얹어 놓았다 (이싸)       은하계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의 떠돌이 별은... (이싸)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본초)     물고기는 무엇을 느끼고 새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바쇼)     대문 앞에 난 단정한 노란 구멍, 누가 눈 위에 오줌을 누었지? (이싸)     모든 종교와 말들을 다 떠나니 거기 자두꽃과 벗꽃이 피었구나... (난후꼬)       태어나서 목욕하고 죽어서 목욕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 임종때 남긴 시 (이싸)       절에 가니 파리가 사람들을 따라 합장을 하네... (바쇼)       너의 본래 면목은 무엇이니, 눈사람아...... (소세키)     매미 한 마리 우는데 다른 매미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 늦은 가을... (이싸)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 - 정치인의 초대를 받고서 답장으로 쓴 시 (쇼세키)       그녀가 젊었을 때는 벼룩에 물린 자리조차도 예뻤다네... (이싸)     작년에 우리 둘이 바라보던 그 눈은 올해도 내렸는가...... (바쇼)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る 哉 ‘모든 사물의 끝은 허공인데 그 끝이 허공이 아닌 것이 꽃’ 이라고 서정주 시인은 썼다. 여행 중인 자신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향 친구와 19년 만에 재회했을 때 지은 하이쿠이다. 이전의 벚꽃을 함께 본 사람을 다시 그 나무 아래서 만난 감회, 먼 날의 추억과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음의 경이를 읊고 있다. 더불어 두 사람이 같은 미의식을 공유하는 정신적 기쁨까지 담겨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바쇼의 대표작중 하나이다. 원문의 ‘이키타루(生きたる)’는 단순히 ‘살아 있는’ 이 아니라 재회의 기쁨에 잠긴 두 사람의 눈으로 올려다보니 ‘더욱 눈부시고 생생하게 피어 있는’ 꽃의 의미이다. ‘두 개의 생’ 사이에 그 둘을 이어 주는 또 하나의 생을 가진 벚나무의 꽃이 만발해 있다. 우리가 이곳에 부재해도 꽃은 변함없이 필 것이다. ( '바쇼' 중에서/ p.10)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釣鐘に止まりて眠る胡蝶かな 언제 누가 종을 칠지 모르는 상황, 나비의 평화로운 잠과 예고된 결말의 대비가 강렬하다. 독일어로는 ‘절의 종에 / 나비가 앉아 있다 / 그 종을 칠 때까지는’으로 번역되었다. 전쟁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마지막 장면을 대포 포신에 앉은 나비로 끝맺었다.  이 하이쿠는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쓰가 영문판 [선과 일본 문화]에 소개해 서구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이세쓰는 "우리는 나비에게 인간의 판단을 적용하려고 하지만, 우주적 무의식의 생명을 상징하는 나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심을 버리고 걱정과 번민과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절대 믿음과 두려움 없는 생을 누리고 있다."라고 해석한다. 근대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는 고서점에서 우연히 부손의 시집을 발견해 읽고는 ‘바쇼 이후 최고의 시인’이라고 확신했다. ( '부손' 중에서/ p.15)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蛙まけるな一茶是に有り 여름은 개구리의 번식기, 암컷을 두고 수컷들이 사투를 벌이는 계절이다. 잇사는 힘없는 마른 개구리를 응원한다. 힘내라고, 여기 너처럼 말랐지만 널 응원하는 잇사가 있다고. 강자를 선호하는 사회에 허약한 잇사의 개구리가 맞서고 있다. 파리, 벼룩, 개구리처럼 약하고 천대받는 존재를 향한 동정심과 연대감이 잇사 하이쿠의 강점이다. 그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약자에게 친밀감을 갖는다.   이 하이쿠는 일본과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여윈 개구리’는 잇사 자신이면서 병약하게 태어난 자신의 첫아들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옥타비오 파스 는 말한다. "잇사는 인간과 벌레와 동물과 별들의 운명 사이에 존재하는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관계를 발견한다. 그의 시에는 고통을 나누는 우주적 형제애, 인간이든 곤충이든 세계 속에 사는 유한한 생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담겨 있다." ( '잇사' 중에서/ p.21) 몇 번씩이나 내린 눈의 깊이를 물어보았네 いくたびも雪の深さを尋ねけり 밖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고 시인은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묻는다.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병이 깊기 때문이다. 눈은 내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한겨울 고독이 깊다. 눈 내리는 풍경을 내다볼 수 있게 제자가 장지문을 유리문으로 바꿔 주었으나 시키는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하이카이로 불리던 것을 ‘하이쿠’라는 명칭으로 확립시킨 마사오카 시키는 스물세 살에 폐결핵에 걸려 서른다섯에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잊혀져 가는 하이쿠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혼과 열정을 바쳤다. ( '시키' 중에서/ p.25)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落花枝に と見れば胡蝶かな 원문을 직역하면 ‘떨어진 꽃잎 가지로 돌아가길래 보니 나비여라’이다 . 허공에 날리며 지는 꽃잎들 중 하나가 다시 나뭇가지로 돌아간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나비이다! 그 순간 허무가 생명으로 도약한다. 에즈라 파운드는 이 하이쿠를 영역 소개하며 말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시인은 말해야 할 것을 12행으로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하이쿠는 더 짧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리타케의 이미지 중첩 기법을 이용해  ‘군중 속 얼굴들의 혼령 / 젖은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이라는 2행시를 썼다. 그리고 긴 시보다 선명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이미지즘 운동을 일으켰다. ( '모리타케' 중에서/ p.34) 손바닥에서 슬프게도 불 꺼진 반딧불이여 手の上に悲しく消ゆるか 슬픈 일은 어떤 존재가 내 손에 앉아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꺼지는 일이다. 그 한 가지 슬픔이 천 가지 기쁨을 사라지게 만든다. 교라이에게는 지네조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교양 있는 집안에서 자란 지네조는 재주 많은 여성이었으며 하이쿠에도 뛰어 났다. 교라이는 여동생을 무척 아꼈지만, 그녀는 불행히도 결혼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 하이쿠 속 반딧불이는 그 여동생 지네조이다. 지네조는 세상과 하직하며 다음의 하이쿠를 썼다. 쉽게 빛나고/ 또 쉽게 불 꺼지는/반딧불이여 もえ易く又消え易きか ( '교라이' 중에서/ p.140)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うづみ火や我かくれ家も雪の中 불은 화로의 재 속에 있고, 화로는 나의 오두막 안에, 오두막은 눈 내리는 밤의 어두운 세상안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앉아 있다. 눈에 파묻힌 오두막은 재 속 숯불처럼 따뜻하다. 커다란 차가움과 작은 따뜻함, 큰 어둠과 작은 불빛이 공존한다.   비교문학자 히라카와 스케히로는 이렇게 묘사했다. "한 곳에 불씨가 있고, 그것을 덮은 재가 있으며, 그 위를 덮듯이 화로에 붙어 앉은 주인이 있고, 그 작은 방을 에워 싼 작은 집이 있다. 그리고 그 집을 덮은 눈이 있다. 오두막 지붕 위에는 눈 내리는 밤하늘의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따뜻함을 간직한 재 속의 불씨를 중심으로 한 줄의 시가 동심원을 그리며 우주를 향해 뻗어나간다." ( '부손' 중에서/ p.160) 다음 생에는 제비꽃처럼 작게 태어나기를 菫ほどな小さき人に生まれたし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인생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는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죽음이라는 경지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것을 삶보다는 더 편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때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상태라고 여길 때조차 있다. " (김정숙역, 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일본 근대 소설의 최고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뒤 도쿄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문학 동료 시키를 만났다. 졸업할 즈음 가족들의 잇단 죽음을 겪으며 폐결핵과 고질적인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심한 염세주의에 빠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 '소세키' 중에서/ p.360) 불을 켜는 손가락 사이 봄밤의 어둠 をとも 指の間の春の闇 누구나 자기만의 불을 켜고 있고, 손가락 사이의 어둠을 가지고 있다. 달 없는 봄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무언가 있는 것도 같은 어렴풋한 어둠을 응시하는 일도 삶의 한 부분이다. 방 밖의 어둠을 말하는 것이 보통인 ‘봄밤의 어둠’을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가져온 감각이 섬세하다.     눈을 감으면 / 젊은 내가 있어라 / 봄날 저녁 眼つむれば若き我あり春の宵 그 청춘의 날들, 반짝이던 봄날의 감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는 날들만 남아 있을지도. 다른 계절도 아닌 봄밤의 언저리,어슴푸레한 어둠속에 젊은 날의 내가 서 있다. ( '교시' 중에서/ p.387) 비처럼 쏟아지는 매미 소리 아이는 구급차를 못 쫓아오고 時雨子は 送車に追ひつけず ‘세미시구레(?時雨)’는 비처럼 한바탕 쏟아지는 매미 소리를 일컫는 말로 ‘눈물을 쏟는다’의 은유적 의미도 있다. 요란한 매미 울음 속에 윙윙거리며 달리는 구급차를 아이가 쫓아온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된 채. 결국 아이는 엄마가 탄 차를 따라잡지 못하고 애타게 멀어진다. 이시바시 히데노는 교시 문하의 대표 여성 시인이었으나 전쟁 중에 폐결핵을 앓아 서른아홉에 세상을 떴다. 환자 수송 침대에 누워 운반되는 자신과 쫓아오다 뒤처진 외동딸, 그리고 슬픔을 열창하는 매미들.   봄날 새벽 / 내가 토해 낸 것의 / 빛 투명하다 春の我が吐く のの光り澄む ( '히데노' 중에서/ p.502) 힘주고 또 힘주어 힘이라고 쓴다 つぎつぎに力をこめて力と書く 산토카와 문학적 교류를 했으며 훗날 [산토카의 생애]를 쓴 하이쿠 시인 오야마 스미타(大山澄太)가 산토카의 오두막을 찾았을 때였다. 산토카는 스미타에게 점심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먹지 않았다고 하자 산토카는 쇠로 된 밥그릇에 잡곡밥을 담아 고추 하나와 함께 내놓았다. 고추가 너무 매워 스미타가 눈물을 흘리며 먹는 동안 산토카는 앞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왜 당신은 먹지 않는가?" 하고 묻자, 산토카는 "밥그릇이 하나뿐."이라고 대답했다. 스미타가 다 먹자 산토카는 그 그릇에 다시 밥을 담아 스미타가 먹다 남긴 고추와 함께 먹었다. 그리고 쌀 씻은 물에 밥그릇을 씻은 다음 그 물을 텃밭에 부었다. 산토카의 바람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갈 힘, 시를 쓸 힘을 얻는 방식이었다. ( '산토카' 중에서/ p.541)         
1869    詩의 탄생 = 人의 출생 댓글:  조회:3379  추천:0  2016-11-26
詩의 탄생은 사람의 출생과 참 많이 닮았다.                                         /유용선 1. 잉 태 먼저 못견디게 쓰고 싶어진다. 배설과 비슷하다. 쓰지 못하면 고통스럽다. 증상만으로 보면 성욕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성적 에너지를 작품에 쏟는다.'는 말이 있나 보다. 그 마음이 충분히 고여 있으면 고여 있을수록 건강한 유전인자를 건네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쓰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쓰기에 착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은 대체로 시작메모에 충실하고 조급하지 않다. 2. 자궁 속에서 시심(詩心)은 창조적 인식으로 인해 깊어진다. 피상적 인식에 머물면 시는 변명이나 넋두리가 되어 정신의 자궁 속에서 계류 유산이 된다. 죽은 시를 시라고 우기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다. 어쨌든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 시는 그 내용에 가장 걸맞는 형식을 만날 때 가장 아름다워진다. 자유시는 정형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유시를 형식 자체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라 오해한다. 아니다. 자유시란 시의 형식을 그 내용과 서로 잘 어울리도록 자유롭게 창조해나가는 시를 뜻한다. 방종의 길로 가버린 시는 대중과 고급독자 양쪽 모두로부터 버림 받는다. 시가 기형아(畸形兒)가 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건강한 시인이 건강한 시를 낳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건강한 시인도 때로 기형아를 낳는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훌륭한 기형아가 태어나기도 한다. 외국의 경우엔 포우와 보들레르와 오스카 와일드와 휘트먼과 알렌 긴즈버그가 그랬고 우리나라에선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 최승호, 장정일 등이 그랬다. 일부러 그들을 본받으려 하다가 낳지 않아도 될 기형아를 낳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으니 유의하여야 한다. 3. 출산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시쓰기 작업은 사실 본질적으로 퇴고(推敲)이다. 겉보기와 달리 무지 힘들다.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앞서 말한 자궁 속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을 경우엔 더욱 힘들다. 조산(早産)에는 제왕절개나 인큐베이터 신세와 같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출산 경험이 많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좋다. 시가 태어난다. 그러나, 맙소사, 아직도 완성이 아니기 일쑤이다. 4. 출산후 낳느라 무척 큰 고생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 시에 대해 간섭을 하거나 악평을 할 때 무척 감정이 상한다. 그러나 귀담아 들어둘 필요는 분명히 있다. 물론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라가다간 건강한 아기를 병약하고 소심하고 융통성 없게 키울 위험이 있다.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평생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 자기 자식에게 회초리를 댈 줄 모르는 부모는 나중에 그 자식에게 채찍을 맞는 법이다. 5. 주의할 점 내 눈에는 착하고 이뻐 보이는 자식도 남의 눈에는 불량하고 못난 놈으로 보일 수 있다. 발표된 시는 독자들 속에서 왜곡을 당하기도 하고 과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홀대를 당할 수도 있다.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발표된 작품에 대해선 시인 자신이 남 못지 않게 냉정해지는 편이 낫다. 자기가 지은 시에 자아도취(自我陶醉)된 시인은 어쩐지 추해 보인다.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은 대체로 시를 쓰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기 자식 귀한 줄만 알고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남의 시를 읽을 때는 먼저 그것을 쓴 사람의 시심과 인식을 따뜻한 시선으로 들여다 보고 알아채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따뜻한 시읽기를 잘하시던 분들로는 돌아가신 분들 가운데는 김현 선생과 구상 선생이, 활동하고 계신 분 가운데는 유종호, 김종해, 도종일 등의 이름이 선뜻 떠오른다. 내가 과문한 탓에 많은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나 더 많을 것이다. 그릇된 시읽기와 시쓰기는 시인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음을 이 글의 끝에 경고해 둔다. 그 책임은 본인 자신에게 있고 그 피해를 보상하는 보험이나 처방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시를 읽거나 씀으로써 시를 읽지 않고 쓰지 않는 사람보다 감동의 경험을 자주 하게 되기를 바란다. 아마도 이 글은 시 외의 문학장르에 적용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다른 예술에도...  
1868    실험적 詩는 아직도 어둠의 아방궁전에서 자라고 있다... 댓글:  조회:3741  추천:0  2016-11-26
(21세기 영미 실험시 산책)     영미 실험시 배경과 경향         1. 글을 들어가며     어는 고드름은 시간과 함께 남모르게 더욱 굵어지며 자란다. 녹는 고드름은 뜨거움과 함께 더욱 가늘어지며 사라진다. 동굴의 석순(石筍)은 세월과 함께 어둠 속에서 말없이 자란다. 석순을 형성하는 동굴 속 물 흐름은 보이지 않아도, 시야에 드러나지 않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의 멋진 아방궁을 퇴적시킨다. 어느 날 먼지 빛으로 공개되는 동굴 궁전은 너무 신비로워 그리스 강장제에 도취된 눈동자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실험시는 결빙되는 고드름처럼 속으로 얼고, 초봄에 전통시가 녹아 내리기를 기다린다. 실험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둠의 궁전에서 석순으로 자라며, 우연한 조명으로 세상의 눈길 받기를 기다린다. 실험시는 고드름처럼 머리 위에서 찌르며 자라고, 석순의 뿌리처럼 어둠에서 단단히 생장한다. 하나의 물방울로 시작된 결집(結集)이 더욱 성장하며 화려한 새로운 시 세계를 이룬다. 더 이상 숨으며 팽창될 시공간이 부족할 때, 실험시의 고드름이나 석순은 깨어지고 세상에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실험시는 새로운 시 쓰기다. 밑으로만 늘어지는 고드름의 흔적이 싫어서 옆으로 위로 성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결정체다. 새로운 형상과 무늬로 퍼지기를 욕망하는 새로 형성되는 석순의 속살 아픔이다. 한 시대의 퇴적된 정신 층을 쓸어버리려는 바람(慾, 風)의 모임이다. 그 작은 모임은 홀로 서는 외로운 학 다리가 두려워 새로운 실험성을 공유하는 집단의 나눔이 되려한다. 나눔의 장(場)이 모여서 새로운 물줄기를 모아내고, 노란 사막에 한밤의 비내림으로 새로운 빗자욱을 남긴다.   20C를 갓 넘긴 새 천년 시대에도 실험시가 생장하는 시 동굴에 지난밤부터 내린 새로운 빗자욱이 엿보인다. 겉으로 바로 드러나지 않고, 아직 수로를 형성하여 도도히 흐르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물줄기의 자욱이 드러난다. 20C를 투영하는 지하수가 모래 속의 거울이 되어 분명한 잔상(殘像)으로 반영하는 한 세기의 흔적이 있다. 20세기말의 정신적 흐느낌과 새로운 시 쓰기의 물줄기가 실험시의 수맥을 찾는 대나무 가지에 살풋이 느껴진다.   흔히들 20 세기말의 새로운 시대의 감성과 몸짓을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용어로 대변한다. 어두운 세기말적인 정감과 새로운 기대에 대한 상반된 감성을 표현 투영하는 모든 급진적 정신 활동을 실험적(Experimental)이라고 한다. 이러한 새로움의 모색과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를 쫓는 새로운 형태/내용의 시를 실험시라고 정의한다. 실험시는 영어로 “experimental poetry, " "avant garde poetry," "innovative poetry" 등으로 불리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새로움을 향한 강렬한 정신적 발돋음, 실험성이 된다. 시 쓰기의 새로운 방향성 추구, 새로운 표현과 의미의 모색이 실험시의 목적이며 생명이다.   모든 시(어)에는 사라지는 지점이 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는 과거가 스러지고 새로움이 들어서는 교체의 시기가 있다. 너무 익숙한 편안함이 싫어서 새로운 낯설음을 찾아 나서는 정신적 여정이 있다. 낯설음에 매료되는 탐험성이 실험을 추구하게 한다. 실험시는 이렇게 상실되는 시어의 의미, 놓친 조각을 새롭게 되살리는 작업이다. 기존에 포착된 지점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상실된 부분을 더욱 탐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움의 탐구가 모든 실험시의 맥박이며 핏줄이다. 실험시는 전통을 버리려 하면서도, 고아로서 떨어지지 않는 지혜가 있다. 멀리 떠나려는 설레임을 항상 새로 각색하는 용기와 의지를 드러낸다.   특히 미국 실험시는 유럽의 시 경향과 비평이론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렬하게 새로워 지려한다. 유럽의 모태를 벗어나 신세계의 자유와 자본주의의 팽배를 더욱 즐기며 새로운 실험시를 시도한다. 현대의 모든 문화의 집산지로서 최고의 실험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미국 실험 시인들은 학제간 상호 교류를 통한 문화적 융합접을 더욱 천착한다. 시와 영적 감각성이 높은 서구 화단의 영향도 수용한다. 특히 유럽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화풍을 통한 시적 감수성을 더욱 새롭게 개발한다. 특히 큐비스트(cubist)나 다다이스트(dadaist)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은 실험적 영감을 얻고 있다. 또한 언어학적 비평이론과 해체이론, 프랑스 철학 비평이론 등의 영향으로 미국 대학 내의 비평문학이 새롭게 발전되면서, 시에서도 새로운 성향이 발전하게 된다.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따른 마르크스(Marx) 이론이나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이론 등도 실험시의 노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미국의 정치적 패권주의와 문화적 제국주의가 더욱 왕성해지면서, 실험성 높은 시적 경향이 자연스레 강화된다. 평안과 풍요의 정신성 속에서 정신세계와 지적 만족을 위한 새로운 시 경향을 추구하는 것은 가히 본능적이라 하겠다. 현대 문화의 다양성만큼 시 경향도 다양하게 추구하게 된다. 시의 실험성은 자연, 풍토, 문화적 환경, 인간적 기질 등의 제반 요소에 따라서 급변하고 요구되는 것이므로, 문화제국으로서 군림하는 미국의 실험시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성을 표출하고 있다. 전 지구적인 위기와 변화의 물결을 대변하는 정신성을 프론티어(frontier) 정신으로 맞서나간다. 그들의 전방위(前方位)를 겨냥하는 총구는 대열을 이루어 정확히 발사되고 있다.   이러한 영미 시단에 나타나는 실험시 경향을 4회에 걸쳐 탐방해본다. 우선 미국 실험시의 성장 배경과 일반 특성을 먼저 접근해본다.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각 시인과 실험시 집단별로 구체적 시를 감상하면서 변화와 실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영미 시단의 실험시 추세와 내용을 이해함으로서 토착적 국내시에 새로운 시적 감성과 실험시 추구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앙망한다.               2. 실험시의 형성 과정         i) 새로운 유행   최근 10-20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지성인 사회(특히 대학 사회)나 대중사회에서 시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각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시 창작 워크샵, 일반 시 낭송회에서 새로운 시 발표가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시 형식, 내용, 틀을 벗어난 자유를 향유한다. 신선한 표현 매체와 실험시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어찌 보면 쓸데없는 짓거리처럼 느껴지는 시내용이 진지하게 논의되며, 새로운 매체를 통한 새로운 창작법이 진지하게 모색된다. 모더니스트 시인(W. C. Williams, Gertrude Stein 등)을 비롯해서 비트 세대 시인(Allen Ginsberg, Lawrence Ferlinghetti 등), 뉴욕 시인(Ashbery 등), 고백시인(Sylvia Plath, Robert Lowell, Anne Sexton 등), 구체주의자(E. E. Cummings 등), 이미지스트(Robert Bly, James Wright 등), 더 나아가서 이러한 2차세계대전 전후 세대들의 시를 전통시라고 반발하는 새로운 실험주의자들의 낯선 이름이 광고문구처럼 논의된다. 90년대의 실험시 연구자들은 현 시대의 사회 정치 현상과 문화성에 대해 더욱 심각한 탐구를 시도한다. 이들이 연구하는 실험시적 내용은 너무나 다양하여서 쉽게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실험시 연구 자체가 신조류의 문학형태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처럼 미국사회, 특히 대학사회에서는 각종 실험시가 출현 연구되고 있다. 이 현상은 새로운 시의 문예부흥 시대의 다가옴을 예고하는 듯하다. 시문학사에는 항상 이중적 대립성이 편재한다. 전통적 소네트, 서사시, 하이꾸 등의 전통시를 새롭게 도입하려는 성향과 다른 한 편으로는 전통을 거부하는 듯한 실험시가 강하게 대비된다. 전통시의 새로운 모색이든, 이탈된 실험시의 추구이든지 간에, 모든 실험시 경향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정치성과 다양한 포스트모던 성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복잡한 개성과 색다른 삶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일례로 시 낭송과 토론이 왕성한 대학 구내의 커피샵에서는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영상시, 시인지 음악인지 구분이 어려운 소리시, 연극인지 시인지 경계가 모호한 행위시 등이 망설임 없이 발표된다.   이러한 현대의 실험시 경향은 과거의 시 역사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새로움이란 과거의 궤적(軌跡) 위에서 새롭게 비트는 표현 작업이다. 이러한 새로움의 변화를 간단히 더듬어 본다.   우선 실험시는 1950-60 연대의 비트 세대의 시 현상에서부터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비트세대(Beat Generation) 시인들은 탈정치적, 반지성적, 낭만적 염세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 경향을 시도하였다. 그 후 베트남 전쟁 여파로 퇴폐적이고 반동적인 사회현상이 새로운 히피 문화로 반영되었다. 그 후 히피 문화성이 쇠퇴하면서 시도 전체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한다. 특히 전통시, 운율과 각운을 맞춘 정형시나 자유시 등이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대학의 시 교육에서도 시보다는 다른 장르 문학이 선호되는 듯했다. 무용이나 대중 예술, 행위예술에 비교해서, 언어 예술인 시가 급진적인 사회변화에 만족스럽지 못한 표현수단이나 예술행위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는 단순히 상아탑 속의 학자들의 얘기이며, 아직 정신적 세례를 받지 못한 대중들과는 요원한 고상한 취미일 뿐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시란 마치 깊은 내적 고민을 토로하는 정신적 표현물, 지적 산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80년대부터 탈냉전 사태를 통해 미국적 패권주의가 더욱 강화되면서, 새로운 사회 정치적 요구, 지적 변화에 부응하여 새로운 시 쓰기 경향이 나타난다. 각 대학의 문창과에서 대학교수보다는 현장 시인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기존의 전통적 시 쓰기에 대한 담론보다는 실험성이 강한 시 쓰기가 시도되었다. 시는 더 이상 상아탑 속의 죽은 대상이 아니라, 현대 사회 속에서 동참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되었다.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간결하고 강렬한 시가 새로 조명 받게 된다. 전통 시적 표준을 거부하고 새로이 변화하는 시대성에 발맞추려는 시도가 진행된다. 잘 포장된 상품 같은 획일적인 현대 사회성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감성과 사유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매체로서 시를 선호하게 된다. 시는 산문과 달리 자유로운 감성과 미래성을 보장하는 듯한 표현력을 갖는다. 새로운 감성, 흥미로운 생각을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가 지성인과 대중의 환영을 받게 된다. 모든 형태의 시가 수용 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통시의 찬반(贊反), 사유시의 강조, 무의미 시 선호, 정치적 성향 시, 일반 대중적 세속시, 등의 다양한 취미와 내용이 시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시는 복잡한 현대 생활에서 새로운 일탈(逸脫) 방법으로 점점 선호되었다. 단순한 오락으로 자리매김 하기보다는 지적 쾌감이나 여유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시를 선택하였다. 대중은 산문과 달리 간단하고 짧은 공간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시적 특질에 매료되었다. 시가 여가거리로 격상되었다. 문화 생활의 충족조건으로 시가 필요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게는 전통적 진부한 시 표현이나 정치적 슬로건, 광고 문구 등에 식상하고, 일상적 언어 표현이 너무 진부하고 재미가 없어서,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서 시적 감성과 통찰력, 재치, 폐부에 와닿는 표현 등을 모색하게 된다. 그 새로운 모색의 결과가 언어 장난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삼행시나 광고문구를 넘어서는 시적 표현으로 발전하게 된다. 시는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의미나 감성 전달이 확 달라지는 표현수단이므로, 새로움 선호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시가 자연히 새로운 감성 표현수단으로 선호되었다.   이 결과로 1990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세기말적인 현상에 맞는 새로운 표현력을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보다 영적(靈的)이고 감성 표현적이며 현실 반동적이고, 폭팔적 표현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세기말적 현상은 어느 시대에서나 발견되나, 21C의 새로운 천년(millenium)을 앞둔 시대에서는 그 느낌이 더욱 강화되었다. 일례로 선(善)을 발견하는 수단으로서 시를 찾기보다는 인간적 악(惡)의 내면성을 보기 위해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선호하기도 한다. 시는 다른 어떤 문학적 표현수단보다도 즉각적이며 표현 강도가 높다. 현 시대의 사회적 악, 세기말 사상을 표출하는 시적 감성은 자연스레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구원과 깨달음의 방편으로 새로운 유형의 시는 새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새로움의 추구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실험적 표현 양식이 나타난다. 우선적으로 서구 정신사를 대변하는 전통적 사상시(Dante, Louise, Keats, Milton, Christina, Urure등)를 새롭게 읽는 노력이 나타난다. 전통 속의 실험적 시를 통한 명상 작업을 시도하고, 새로운 미학으로 현세상을 읽기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시도한다. 이러한 전통의 새로 읽기는 다양한 비평 조류에서 정전(正典)을 다시 읽기 현상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비평의 일상화에 의해서 일반 시민들도 시인이 세상을 보듯이 일상적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와 깊은 생의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다. 종래에는 기존 시인들만이 향유하던 자연과 사물에 대한 생의 음미법을 일반 대중들도 같이 공유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시의 저변 확대가 더욱 강화되고, 시의 대중화에 따른 새로운 변화가 더욱 가속화된다. 실험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자연히 형성된다.         ii)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전통         실험시의 전통은 멀리 정원 끝의 조망으로 보면 모더니즘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가까운 조망으로는 비트세대의 시인에서부터 연관을 짓는다. 이 시인 집단은 1955-60년대 사이에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던 서정시 시인들로서, 탈정치적, 반지성적, 낭만적 염세주의 시 성향을 보여주는 시인들이다. “짓밟힌,” “얻어터진,” “축복에 겨운(beatific)”처럼 모순적인 극단의 반대 의미를 가진 비트(Beat) 의미에서 이들의 사회적 태도와 시적 성향을 암시 받는다. 이들은 스타일이나 주제, 형식적 표현의 통일성 요소보다는 새로운 표현법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인으로는 휘트만(Whitman)적인 강렬한 자유를 구가하는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b),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자동 암시적으로 시를 쓰는 잭 케루악(Jack Kerouac), 신중하면서도 다다이스트(Dadaist)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시의 대장장이 로렌스 펠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 등이 있다.   이들은 모더니스트와 유럽 시 경향을 총망라하여서 사실주의, 마르크스주의 성향, 감성 및 초감각적 엑스타시(황홀경), 언어의 실험 성향 등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로 이들의 시는 재즈처럼 자유분방하고 영감적이며, 황홀 상태에서 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은 종교적 감정과 감수성을 보이는 신비주의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신비주의 성향이 미국적 풍토와 문화성과 어울려서 새로운 시적 감성을 잉태하게 한다. 이러한 비트 시인들의 일반 성향은 미국이 더욱 강대해지면서 새로운 실험시의 표본으로 자리잡게된다.   일례로, 실험시의 전통은 언어의 청각성(aurality)에서 추적할 수 있다. 미국시단에서는 1930년대와 1950년대에 두 차례 좌파 성향이 나타나는데, 전자를 구 좌파시인이라 하고 후자를 신좌파 시인이라고 한다. 이 때 “new left"라는 칭호는 당시의 정치 성향이외에도 새로운 시적 특질을 암시해준다. 이 새로운 시 경향은 바로 시의 음악성, 청각성이다. 비트 세대에서는 노래나 주문(chant) 같은 반전시(反戰詩)를 행위예술 하듯이 낭송하였다. 대표적으로 Ginsberg는 노래부르는 가수처럼 시를 표현하였다. Ginsberg 시 "Kaddish"는 미친 공산주의자 Naomi 어미를 위한 유대교의 망가(death-epic)다. 비트 세대 시인인 Kerouac 시는 jazz 처럼 들린다.         (삽화 시)   Kaddish의 마지막 5절은 공동묘지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처럼 울려나온다.         주여 주여 하늘의 울림소리 남루한 나뭇잎 사이로 바람 기억의 함성 까악까악 일생 나의   탄생 꿈 까악 까악 뉴욕 버스 깨어진 구두 거대한 고등학교 까악 까악 모든 주님의 환상들   주여 주여 주여 까악 까악 까악 주여 주여 주여 까악 까악 까악 주여         여기서부터 과거와 달리 시가 대중가요처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구어체 사용을 통해 대중에게 읽히고 노래처럼 부르는 시를 쓰게 된다. Wilbur 의 “두꺼비" 같은 시 성향이 쉽게 대중에게 접근되어 간다. 최근의 이러한 구어체 시 운동은 MTV 출연으로 유명한 Maggie Estep을 통해서 시가 대중시, 상업시로 근접하는 계기를 맞게된다. 또 Edwin Torres는 구어체 시 운동에서 보다 심각하게 시를 표출하고 있다. 최근 시인의 구어체 시어법은 비트 세태의 전통을 계승하고, 모더니즘, 더 거슬러 올라가서 Whitman의 시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를 대중주의(popularism)로 발전시키고 있다.   시의 대중성은 자연히 정치적 참여성으로 발전한다. 1차 세계대전후 세대인 1930년대 좌파 시인들(Edwin Rolfe, Ruth Lechlitner 등)이나 2차 세계대전후 비트 세대는 모두 동일하게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된다. 국회의원이 단순히 소방전 같다는 시 표현에서 세태의 풍자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정치적 급진주의(political radicalism)성향은 시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러한 정치성은 실험시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현대인은 오락산업화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현대 실험시는 정치적 요소를 많이 표출한다.   물론 비트 세대 시는 전 세대(모더니스트)와 30여년의 세월의 차이에 의해서 30년대의 시 성향과는 사뭇 다른 시 형태를 보여준다. 비트 세대는 심각하고 전통적 가치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캐쥬얼한 시를 선택한다. 벽난로에 앞에 앉아서 편안히 졸고 있는 강아지처럼 자기 사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일상적 사물(슈퍼마켓, 거리, 경찰, 거리의 물웅덩이 등)을 노래한다. 당시의 메카시 선풍에 휩쓸리지 않고, 좌익사상에 실망한 상태로 자기 나름대로 미국 가치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본연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시인으로서 자유로운 형식과 언어, 정신을 구가하였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시 대상에 조율하듯이 명상해나간다. 자기 스스로 새로운 도구가 되어서 새로운 표현매체를 창조한다. 스스로 자기 인식의 관찰자가 되는 동시에 해설자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시적 리듬은 생체리듬과 닮아 있다. 이러한 자연스런 호흡이 바로 자연스런 시쓰기를 의도한다. 가장 자연스런 마음이나 표현은 곧 자연스런 파괴가 가능한 새로운 시 쓰기를 강요한다.   이러한 감성의 자연 발생적인 성격(spontaneity)이 새로운 시 사조로 자리잡게 된다. 실험시는 땀 흘리며 애쓰는 작업을 거부한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듯이 편안한 표현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발레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도의 기술을 자연스레 땀 흘리지 않고 연기하듯이, 아무리 어려운 시적 상황이나 사상도 자연스레 토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추는 춤은 예술이라 하지 않고 중노동이라 한다. 의도적이고 애간장을 태우는 시 쓰기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고생이 된다. 실험시는 지적 노동이나 의도적 고생이 아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새로운 성향이 되어야 한다.   자연스러움은 수많은 훈련과 반복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스런 실험시 쓰기는 원숙한 기존의 시 쓰기를 전제한다. 기존의 시 쓰기의 틀을 완성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실험시가 탄생 가능하다. 자연스러움은 완전한 통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인의 새로운 시적 감성은 다양한 경험과 대체 감성 표현이 가능할 때 자연스럽다. 실험시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기존의 완성미를 대변한다. 자연스러운 발레 동작이 완전한 균형과 고난도의 기술을 마스터 할 때 가능하듯이, 시의 자연스러움 즉 새로운 시 쓰기도 기존의 시를 완성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시에서의 자연스러움은 시 쓰기의 기본 3 과정인 착상, 시작(詩作), 대중 전달에서 나타난다. 독특한 시상(詩想), 비의도적이고 검열하지 않는 듯한 시 쓰기, 자연스런 전달력 등에서 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실험시는 이렇게 자연스런 시 쓰기에 의해 자연스레 태어난다. 시를 새롭게 쓰려는 의도와 생각, 표현법, 전달 과정에서 새롭고도 자연스런 실험시가 탄생한다.   이런 자연스런 시쓰기는 의도적으로 반복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시 쓰기가 곧 퍼포먼스처럼 일회성으로 순간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기 쉽다. 영감처럼 일어나고 스러지는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즉각성(immediacy)이나 즉흥성(improvisation)은 이미 고도의 절제와 완성, 훈련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아무리 순간적으로 변화를 주더라도, 그 근본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실험시는 이러한 수준의 완결도를 기본으로 하여 형성된다. 실험시의 자연스러움은 고도의 건축적 완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비트 세대 시인의 전통은 90년대에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자연스런 언어의 흐름대로 시를 표현하고, 감성과 황홀경을 신비하게 표현하고, 현시대적 감수성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고, 표현 도구로서 소리와 행위를 동원하고, 현실 염세적인 비판적 시성을 보여주는 실험시는 이미 비트세대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다. 이들의 뿌리 위에서 사유시, 소리시, 행위시, 전자시, 무의미시, 매체시 등의 다양한 실험적 시가 탄생된다.         3. 실험시란 무엇인가?     i) 실험시의 일반 특성   실험시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시다. 현시대에 맞는 시적 의사소통 방법의 결과로 나타나는 시가 실험시다. 현대 인간의 의식 속에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되는 것이 안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으로 헛갈릴 때가 많다. 이러한 의식 현상이 시에서는 모순과 조화의 수사법으로 나타난다. 동질성과 비동질성의 병치법(juxtapositions of association and dissociation)이 된다. 최근까지도 현대인간은 꿩 잡는 자가 대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삶이 보다 풍요해질수록 결과보다는 삶의 질, 살아가는 과정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시에서도 시대성이 그대로 반영된다. 포스트모던 실험 시인들은 시 쓰기 과정을 중시하지, 시어가 의미하는 직접적인 내용을 그리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형식과 내용보다는 시를 쓰는 그 과정 자체를 더욱 중시한다. 시를 쓰는 그 자체로 만족한다. 그들의 목적은 시와 시어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기존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 추구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렇게 시는 시대성을 벗어날 수 없는 정신활동이다.   이러한 시대성과 실험성의 상관관계에서 시는 현실을 주도하려는 욕망을 가진 시인들에 의해 창조되어진다. 따라서 실험시는 새로움의 변화 추구에서 일단 전위성을 갖게 된다. 전위성은 독특함(uniqueness), 미완성, 이탈, 비타협성, 초월성 등을 의미한다. 실험시의 전위성은 우선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새로운 시도로 인식된다. 목표를 향한 과정성의 중시, 변화 자체를 향유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실험시는 기존시의 틀을 의도적으로 벗어나려 한다. 새로운 의미를 증명하기보다는 무의미성이라도 일단 행하고(쓰고) 보는 진취력이 있다. 실험시는 새로운 시도의 성공 여부를 개의치 않는다. 실험적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시적 생명력을 탐구하는 데에 스스로 만족한다. 실험시는 항상 굴러가는 돌이기를 원하지, 일정한 구멍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기존시와 실험시는 안주와 거부의 차이일 뿐이다. 실험시가 안주하면 다시 기존시가 되며, 기존시가 안정을 거부할 때 실험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감성적, 형식적, 언어적, 의식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 실험시는 시 의미가 너무 깊어서 무질서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시 주제가 너무 일상적이라서 약간 평범한 기분을 줄 수 있다. 그렇잖으면 일상적 시제나 내용을 벗어나서 너무 특이한 시를 쓰려고 한다. 현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한계치를 시로 표현하려고 한다. 개성을 강조하는 최고 끝자락을 표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해를 거부하는 듯한 난해성 속에서도, 시 자체로는 그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시가 낯설고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 톡톡 튀는 지적 자극을 준다. 현대 실험시는 지루한 표현을 용납하지 않으며, 신선한 자극(지적 및 감성적 자극)을 중시한다.   이러한 일반 특성 이외에 주요 특성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미국 예일대 교수인 Elizabeth Alexander는 "훌륭한 시는 적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미는 적확한 언어 구사, 특정 시 상황에 맞는 정확한 시적 감성의 표현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연히 감성의 분출보다는 냉철한 지적인 시적 표현을 중시한다. 감성적으로 엄격하고 정확하게 구사되는 시 표현을 말한다. 실험시는 전통적 서정시의 감성 표현을 거부하고 기계적, 금속적, 객관적 감수성을 중시한다. 낭만주의적인 풀어짐보다는 어찌 보면 고전주의적인 차가운 이성, 절제된 감성, 단아한 형식, 풀어지면서도 가볍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내면이 무거운 듯한 표현을 선호한다. 실험시는 언어 구사의 적확성을 가장 강조한다.   실험시에는 언어시적인 요소가 많다. 문장간의 연결성이 별로 없는 듯한 파편적인 문장(“new sentence," Ron Silliman이 그의 산문시 ”Albany"에서 사용한 용어)을 많이 사용한다. 시행 길이는 기능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한다. 파편적 언어의 의미는 전체 맥락에서 구성력을 갖는다. 개별적 문장이나 어휘는 즉각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험시의 언어적 요소는 접속사 없이 단어/구/절을 자유롭게 연결하는 구문(parataxis)을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시어의 위치를 변경하고, 의도적으로 시어를 생략하고, 언어장난하듯이 사념을 표현하고, 고정된 그림을 거역하듯이 이미지를 그려나가고, 의도적으로 소리 유희하듯이 시어를 선택하고, 화자 및 주어를 감추면서 전통적 표현법을 회피한다.   실험시는 시적 표현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가 많다. 이것이 실험시의 미결정성, 과정성이다. 구체적으로 지시되지 않고 항상 열려있다. 무한한 지시성은 구체적 상징이나 지시어로 존재하지 않고 은유나 환유로 무한히 열려있다.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지시의 무한성은 시 의미와 비유의 무한성으로 연결된다. 실험시는 한정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실험시는 불명확성 속에서 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불명확성 속에서 실험시의 변화로운 시공간이 형성된다. 부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시 의미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되도록 수수께끼처럼 그대로 남겨두고 시가 진행된다. 실험시는 신비적 요소와 일상적 요소를 동시에 담는다. 난해한 신비성이 불명확한 은유와 비유를 제공하고, 일상적 편안함이 읽기 쉽고 재미있는 재치를 제공한다. 실험시에는 시를 위한 시처럼 시작법(詩作法)을 위한 메타포이트리(metapoetry) 요소가 있다. 시 쓰는 방법론이 곧 인생의 방법론처럼 인식되는 시가 많다. 실험시는 대개 작가의 개성이 간섭하듯이 드러나는 작가적 지배력을 거부한다. 시를 독자에게 열어놓는다. 시인은 독자가 읽고 싶은 대로 시를 던져놓는다. 시인은 상호 모순되는 듯한 언어, 소리, 언어 구조(색채)를 상호 교차하듯이 정교하게 써놓는다.   이러한 실험시의 특성을 보여주는 시인을 가볍게 언급해본다.   미국의 저명한 실험시 작가인 Fanny Howe는 의미의 아이러니를 더욱 밀고 나아가서 미국시의 기교의 경계선을 허물정도로 새로운 시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시의 질료인 언어 자체에 대해 회의한다. 언어성에 회의하면서도 그는 새로운 시적 의미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 현대 사회의 인간성, 정치성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심각하거나 우울한 색감보다는 민감한 유머를 즐겨 사용한다. 대체적으로 그의 시는 소리를 중시하고, 전체적인 시 의미나 시적 무드를 선호한다. 그의 시는 실험적 탐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연작시(sequence)를 많이 쓴다.   Carol Snow 같은 시인은 “어휘 문장”(Vocabulary Sentences)이라는 연작시에서 언어시적 요소를 많이 추구한다. 가벼운 듯하나 내면적으로 울림소리가 커다란 시를 즐겨 쓴다. 언어시적 예를 들어보면, “Are" 제목의 시에서 ”누구는 구제 받고/ 누구는 빠진다,“ "During"에서는 ”그 동안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 "만족”에서는 ”25년간의 결혼 후에야, 그녀의 호기심이 만족되었다.“ 이처럼 그는 간결한 경귀 같은 실험시를 많이 쓰고 있다.   실험시 시인의 공통적 특징은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성이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곧 사물이며, 사상이 된다. 이러한 언어가 곧 사상이라는 견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회자되어 있다. 미국 모더니스트 시에서는 이러한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테니스 코트 맹세”(The Tennis Court Oath, 1962) 작가인 비트 세대 시인 Ginsberg는 “언어가 사상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시어는 의미 구분과 단락 설정이 어려운 상태를 보여준다. 머잇 속의 생각처럼 언어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의 “수많은 의존심”이라는 시는 “나는 의존한다 의존하고 있다 나를 보라 깊은 어둔 밤 속으로 의존하는 그 의존에서부터 나는 아침에 의존하며 나타난다 노래하는 나는 의존한다 노래는 의존하는 나에게 의존한다.” 이것은 내면의 마음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고 경쾌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자아의식이 흐르는 대로 마음이 팽창하는 느낌을 제공한다. 이러한 시 의식은 세잔느(Cezanne)의 화법(畵法)과 별 다름이 없다. 동양의 호흡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더니스트들의 숨쉬고 확장하는 과정이 새로운 형식주의자(New Formalists)들을 자연히 탄생시킨다.   이러한 실험시의 기본은 이미 비트 세대 시인에서부터 발견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 실험시의 산실 역할을 한 비트 시인들의 시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로렌스 펠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의 시 “개(Dog)"를 살펴본다. 그의 시 의식은 생각(비교, 의식)과 경험이 일치되는 듯한 시 경험을 제공해준다. 그는 직접 개의 실존을 경험하듯이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감성을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지성으로 고도의 인간 마음과 강아지의 정신세계를 혼연일체 시키고 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생각이 추상적 세계(abstraction)가 되고,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적 의구심과 마음이 근본적인 사상과 존재의 문제를 의문하고 있다.   그 시의 일부분을 번역해본다.         강아지가 거리에서 자유롭게 뛰어간다   그는 강아지 삶을 살아간다   스스로 생각할   스스로 사유할   모든 것을 만지고 냄새맡고 실험하며   모든 걸 조사한다   위증죄의 은혜도 없이   진정한 사실주의   진정으로 말할 이야기가 있는   진정으로 같이 말할 꼬리가 있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컹컹 짖는   민주적인 강아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기상(氣像)에 종사하는   존재론에 대해   무언가 말할 게 있는   실재에 대해   무언가 말할 게 있는   그걸 어떻게 보는지   그걸 어떻게 듣는지   머리를 갸우뚱 옆으로 틀고서   거리 한 모퉁이에서   마치 승자의 레코드판   겉 사진   마악 찍으려는 듯이   주인의 목소리   들으면서   바라보면서   살아있는 의문부호처럼   거대한 축음기   속으로   혼란스런 존재의   경이로운 텅 빈 뿔을 가진   항상 모든 것에   승리의 해답을   마악 토해내려는 듯이   보이는               ii) 실험시의 기본 원리 및 개념         실험시를 이해하기 위해 기본 원리나 개념을 먼저 정리해본다.   우선 실험시는 시의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한다. 시 쓰기는 결국 서로 표절하고 상호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독립된 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는 본래부터 타인이나 전통에서 새롭게 각색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 쓰기는 전통이나 타인에서 새로 빌려오는 것뿐이다. 모든 시는 상호 영향성을 준다. 이러한 언어의 근본성, 시어의 차용성이 실험시의 근본 출발점이다. 타인의 시를 새로 각색하고 패러디하고, 변형하여 표현하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이나 실험시란 근본적으로 표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실험시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한 베르나데트 메이어(Bernadette Mayer)의 실험시 쓰기 연습법을 살펴본다. 실험시 쓰기 연습에서 실험시의 속성을 암시 받는다.   첫째, 쓰여지지 않은 것을 써야 한다. 실험시는 지수나 디지털로 될 수 있다.   둘째,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주제, 마음상태, 내용을 시로 써야한다.   셋째, 빈 종이에 쓰지 말고, 이미 적혀있는 종이에다가 시를 써본다. 기존의 활자와 어울려서 새로운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   넷째, 졸작의 시를 찾아서, 잘 연구한 뒤에 그에 어울리는 졸작을 써보도록 한다. 졸작을 쓰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섯째, 거울 속의 자아상을 바라보면서 “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시를 써본다. 자아가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부정하는 시를 쓸 때에 새로운 시 쓰기가 가능하다.   여섯째, 산문을 시로 개작(改作)하는 작업을 해본다. 일례로 산문의 첫 단어와 끝 단어만을 발췌하여 시 형식으로 다시 써보면, 색다른 시를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애국가를 가지고 개작해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민국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것을 이렇게 새로운 시 형태로 개작할 수 있다.   동해물 닳도록   하느님 만세   무궁화 강산   대한민국 보전하세   일곱째, 언어를 의도적으로 체계적으로 변형시켜본다. 일례로 각 품사별로만 시를 써본다. 동사면 동사, 명사면 명사로만 시를 써본다.   여덟째,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여러 개의 시를 써본다.   이렇듯, 실험시는 문창과의 워크샵 시 쓰기 연습 시간에 시도되는 실험성처럼 느껴진다. 대개는 시의 고유한 표현력을 유지하면서도, 시적 형식이나 표현 방법을 새롭게 변화하는 방법론을 실험성이라고 한다. 언어의 변화성을 일차적으로 실험시의 가치로 본다. 현대 실험시의 특징은 시어의 기본 단위를 문장(sentence)보다는 시행(line)이라고 한다. 완전한 문장을 통한 의미 전달보다는 불완전하지만 새로운 탈격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수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형식과 의미 단위의 변화는 W. C. 윌리암스의 모더니즘 성향에서부터 비롯되어서 Robert Creeley가 적극 주장하는 시형식의 파괴성에서부터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성향이 현대 아방가르드 시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 표현 단위의 변화는 자연히 구두점(punctuation) 사라짐, 완전한 문장 부정, 단어 및 단어의 연결, 등과 같은 실험적 변화성으로 나타난다. 완전히 통일된 (어느 면에서는 고정된) 의미 전달보다는 항상 열려진 의미 해석, 보다 풍부한 의미의 개방을 위하여 시행의 변화를 추구한다.   또 실험시는 시각(視覺)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거울 앞에 서서 자아상을 바라보는 일차적 평면성보다는 거울 뒤에 나타나는 자아상을 보려한다. 자아를 입체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보려한다. 시인이 스스로 시에 드러나면서 실체를 보이려 하지 않고, 시인 스스로가 다른 시각으로 꺽어진 곳에 숨어있는 자신을 훔쳐보는 듯한 시야를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변화성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실험시는 시의 초점, 의식의 주체, 시각의 각도가 어디에서부터 쏘아지는지 분명하지 않다. 잉크제트에서 분출되는 간헐천의 용솟음처럼 예기치 못한 의식의 구멍에서 시가 튀어나온다. 이러한 시각의 사각지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때, 실험시는 마냥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성과 시각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실험시는 이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예술이론에서 근원이 발견된다. 그는 조각가, 화가, 시인으로서 새로운 시론을 강조한다. 시인의 창조행위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한다. 시인은 단순한 중간자(mediumistic being)로서 예술적 계수(係數)로만 작용할 뿐이라고 한다. 이 말은 시인이 표현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표현이 우연히 발생되는 것이 시라고 한다. 이러한 포스모던한 예술이론에서 현대 실험시의 경향이 예측된다. 시인은 체스플레이어, 창문 닦는 사람, 치즈 나르는 사람, 숨쉬는 사람에 불과하기에, 우연히 발견되는 언어에 우연히 미쳐서 환호하는 예술가일 뿐이다. 실험시는 우연히 발견되는 치즈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언어적 우연성, 예술적 행위성, 영화 같은 극성(劇性), 그림 같은 회화성에서 실험시는 항상 새롭게 변화를 추구한다.   이 외에도 실험시는 항상 전통시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발전한다. 모더니스트 중에서 실험적 성향을 보인 거르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실험적 언어 시, 윌리암스(W. C. Williams)의 이미지 시(Kora in Hell, 1918), 애쉬베리(Ashbery)의 “테니스 코트의 맹세”(1962) 등을 기초로 해서 발전한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시에서 언어의 리듬과 변화를 통해 소리시(sound poetry)가 탄생된다. 이외에도 실험시의 보편 성향인 사유시(Meditation poetry), 행위시(Action poetry), 언어시(Language poetry), 전자시(Electric poetry) 등으로 변모한다.   현대 미국 실험시의 대표 시인으로는 론 실리만(Ron Silliman), 찰스 번스타인(Charles Bernstein), 앨런 대이비스(Alan Davies), 린 헤지니안(Lyn Hejinian), 수전 하우(Susan Howe), 부루스 앤드류(Bruce Andrew), 훼니호우(Fanny Howe), 마크 레빈(Mark Levine), 캐롤 스노우(Carol Snow) 등이 있다.         4. 실험시의 구체적 공통성         실험시의 본능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 발전을 모색한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기본 공통적 성향을 안고있다. 그 기본 특성을 몇 가지만 추려본다.     1) 사실주의 성향         현대 실험시는 다양한 형태 속에서도, 대개는 사실주의 성향을 보여준다. 낭만주의의 감성이나 눈물, 서정보다는 현실의 실재적 사실(facts)을 구성적으로 표현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실험적인 포스트모던한 시를 병행하고 있다. 사실적 측면과 실험적 측면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듯한데도, 현실 사회의 현실성을 실험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현대 실험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시 표현 기법은 “사실 그대로"인데, 이 말은 사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레 표현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낯선 실험적 기교라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대로 표현한다. 5개 단어의 미완성 문장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 그냥 자연스레 흘러나오듯이 시를 쓴다. 인간의 보편 감성(죽음, 사랑, 등)에 대해서도 감성적으로 토로하듯이, 추상적 지식을 장식하듯이 표현하지 않고, 모든 감성을 억제하고 사실 그대로 싸늘하게 객관적으로 표현한다. 실험시는 기계적 차가움, 지성적 냉혹함, 노년의 달관성 비슷한 감성의 형태를 보인다. 이것이 실험시의 특징인 객관적 태도, 탈자아적 성향, 원거리 시야 등을 암시한다.   이러한 현대판 사실주의 성향은 자극적이거나, 인상주의적 감흥이나, 수사학적 화려함을 배제한다. 즉 비현실적인 것(irreality)을 배제한다. 시인이 직접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으며, 시인의 표현능력 범위 내에서 가능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언어적 기교를 이용하여 새롭게 시를 쓰면서도 현실적 문제를 사실 그대로 표현한다. 추상적, 형이상학적, 관념론적인 표현을 싫어한다. 시는 살아있는 현실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인의 개인적 경험과 상상력을 직접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면에서 전통적 사실주의와 별다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실험시의 사실주의 성향은 기존 사실주의와는 시 형태나 표현성에서 다른 점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실험시적 사실주의는 사실성을 다섯 개 시어(詩語) 정도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기존 사실주의처럼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어휘를 동원하지 않고, 일정한 어휘 내에서 사실주의 성향을 표현한다. 즉 각 시행이나 일부 문장이 사실주의 성향을 보여주지, 전체 문장이나 시 전체적으로 사실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실험시는 현재성, 현실적 긴박감, 강한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실주의 성향을 도입할 뿐이지, 전체적으로 사실주의를 목표로 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 다만 도구로서 이용할 뿐이지 목표로 차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실험적 사실주의는 기존 사실주의와 성질상으로 차이가 난다. 여기서 성질적, 기질적 차이점은 언어의 변화성, 의도적인 언어의 비틀어쓰기 성향을 말한다. 실험시는 시 자료(내용)의 사실적 표현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언어를 의도적으로 색다르게 표현하려 한다. 전치사로만 시를 쓰던가, 시 구문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내용의 사실적 표현과는 달리 언어적, 구문적 실험 행위가 돋보인다. 실험적 사실주의는 외부 사물을 사실적 묘사보다는 인식과정의 사실적 표현을 말한다. 즉 주제가 되는 사물에 대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예술적 표현수단으로서의 사실주의가 된다.               II. 언어적 요소   사실주의 성향과 동시에 실험시는 언어의 새로운 특성을 추구하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실험성은 모더니스트 시에서부터 뿌리가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언어적 형식 면에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거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 윌리암스(William Carlos Williams), 루이스 주코프스키(Louis Zukofsky), 존 애쉬베리(John Ashbery)의 맥락을 유지해나간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이 강한 시를 언어시라고 부른다.         a) 언어시   대개 멋진 시적 형식과 내용을 갖춘 시보다는 언어적 변형을 시도하는 실험시를 언어시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시는 시적 문맥(context)을 탈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면에서 언어라는 한계성에 내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언어의 변형은 시사(詩史)에서 끊임없이 추구해온 노력이다. 모든 시는 언어구조물이다. 언어 구조적 건설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성을 표출하려는 노력은 항상 존재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언어시는 대개 정치에 대한 표현을 많이 한다. 정치가 갖는 인간 지배력을 생각하면, 언어시가 풍자적으로 해체하는 대상이 자연히 정치가 된다. 언어시는 결국 언어로서 현시대의 상황적 의미와 내용을 표출하는 정신작업이 된다. 다만 그 표현 양식이 새로운 언어로 언어학적 변형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성을 드러내는 형태를 취할 뿐이다.   이렇게 세상사에 목소리를 내는 시는 결국 “목소리 시(voice poem)로 발전한다. 이 유형의 시는 독자와 시인의 쌍방간의 의사전달을 중시하는 시다. 자아 주체적인 시인이 또 다른 자아로서의 독자에게 독특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념이 강한 시다. 즉 양자 간의 도전적인 의사통신을 목적으로 중간 색의 언어와 투명하면서도 자연스런 언어를 이용하여서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시를 말한다. 이 때 시인은 자신의 경험이나 감성을 자신의 메시지로 전달하려고 한다.   언어시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주로 1940-1950 연대에 태어난 시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Toothpick, Lisbon & the Orcas Islands (1973); Alcheringa (1975); Open Letter (1977); Hills (1980); Ironwood (1982); Paris Review (1982); The L=A=N=G=U=A=G=E Book (1984); Change (1985); Writing/Talks (1985); boundary 2 (1986); In the American Tree (1986); "Language" Poetries (1987) 같은 시 전문지에서 시를 발표하였다. 언어시 계통의 시인들은 아직 다양하게 분산된 상태로 각자 시작 발표를 하고 있지만, 현대시 잡지, 비평서 등에서 언급되는 시인은 80 여명 정도가 된다. 최근에는 This, Tottel's, Roof Hills, Miam, Qu, L=A=N=G=U=A=G=E, The Difficulties, A Hundred Posters, Sulfur, Temblor, Sink, and Tramen 같은 시지에서 언어시가 자주 발표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 시인들을 일부 기술해본다. Bruce Andrews, Rae Armantrout, Steve Benson, Charles Bernstein, David Bromige, Clark Coolidge, Alan Davies, Ray DiPalma, Robert Grenier, Carla Harryman, Lyn Hejinian, Susan Howe, Steve McCaffery, Michael Palmer, Bob Perelman, Kit Robinson, Peter Seaton, James Sherry, Ron Silliman, Diane Ward, Barrett Watten, Hannah Weiner 등이 중요시되는 시인들이다. 이들은 후에 언급될 실험시에도 중복되어 활동한다.   이들은 1970년대 이후로 소규모의 언론 및 대담 활동을 통해서 전통적 학문적 비평과는 약간 다른 사회적 홍보 활동, 시 표현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화활동의 과정으로서 시를 전도하는 입장에서 보다 왕성하게 네트워크를 형성하듯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실험시 작가들의 통합된 활동은 1933년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활동하던 실험시인 모임인 흑산파(Black Mountain school) 시인들(Charles Olson, Robert Duncan, Denise Levertov, Jonathan Williams, Robert Creeley) 이래로 가장 정교한 시학파를 형성하는 듯하다. 이러한 활동이 현대 실험시를 급속히 새로운 유형의 시로 정착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스타인(G. Stein)의 영향으로 세상은 정의하기보다는 규정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냥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에서 명사와 같은 고정된 운명론, 결정론대로 시를 쓰지 않고, 인생의 연(緣)의 한 과정으로 시를 쓰려고 한다. 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과정론으로 애쉬베리의 시 "나무들(Some Trees)"을 즐겨 인용한다. 이 시를 평하면서, 시인 부루스 앤드류(Bruce Andrew)는 언어와 의미를 포기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내면에 숨어있는 인위적이고 필요한 선택을 자의식적으로 인식해내는 시 쓰기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전통 언어를 해체하기 위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성향에서 윌리암스의 시성을 답습하고 있다. 언어시를 통해 시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의 투쟁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언어시 시인들은 어느 실험 시인보다도 언어에 대한 실험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실험시 특성을 가장 먼저 시도한 시인 그룹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들의 언어적 시 표현의 특성, 불명확성, 난해성, 혁신성 등은 기타 실험시 작가 군에게 공통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영향성이 언어시를 대표적 정치 표현시로 규정하는 듯하다. 어느 시대이든지 시대성에 반대하는 정치 성향의 시가 존재하는데, 현대에는 언어시가 그러한 정치비판성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언어시는 여권운동, 동성애 운동 시처럼 정치 지향적 시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언어시의 사회성을 너무 일방적으로 정치성향 시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일례로 번스타인의 시 "쟁기보습판을 들여올려라"를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시로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긁기 위해, 생략하라,   노(시간)를 치워라.   흉악한 침수가 모든 최상의   배를 공격한다. 손, 심장은   미끄러지지 않는다, 견고하게   (애처롭게) 떠나간다.         이러한 언어시는 자본주의 정시성에 대한 비평보다는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이해하면 보다 쉽다. 언어시라고 할 때, 대개는 언어에 대한 특별한 태도를 의미한다. 스티브 맥캐퍼리(Steve McCaffery)는 1976년에 “주제의 죽음”이라는 에세이에서 언어시는 특별한 스타일이나 관행이 아니고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중시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언어적 관심은 언어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시 쓰기를 총칭한다. 이러한 언어적 관심에서 언어시인들은 시인마다 서로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몇 가지 정리해본다.   첫째, 언어적 무의미를 통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언어적 의미 조건을 개발하는 실험성이 있다.   둘째, 언어적 의미는 세상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속내용이라고 인식한다.   셋째, 소쉬르(Saussure)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하여 언어 특성을 시에 적용해본다.   넷째, 시어의 고정된 의미에 묶이지 않고, 항상 언어의 상관관계를 새로 적용하려 한다.   다섯째, 언어의 물질적 측면(소리, 리듬, 구문 등)을 강조한다. 인식과정에서 형식적 유관성, 의식의 투명한 장소에서 퍼져나오는 의미와 인식력을 표출하려 한다.         그러면 1회분을 마감하면서 언어시를 몇 개 읽어본다. 실험시의 특성처럼 마감되지 않은 새로운 글쓰기의 여운을 다음 호로 넘겨버리면서 새로운 기대와 쾌감을 남겨놓는다.         서론(序論)에서 멀지 않는         엄격한 아름다움 --   개혁 그리고 말살   양자(兩者)를 위한 공간   동시에 하진 않지만   낡음 밑에 지어 논 새로움(Kenning 詩誌, 3권, 1호 발췌)           사례 모음집         1 1 1   2 2 2   3 2 1         분류학의 발명과   제시 -- 좌에서 우로   읽기, 그 순서를 강요하며   남는 것으로 부터               얘기하는 것으로는 시를 얻지 못한다         로저, 네 차례야. 세상은 바보가 아냐!   너가 네 눈을 얻자 광대함은   끈적이는 담요의 벽돌 밑으로 사라진다,   바보들만이 회계과를 감히 쳐들어가지   못한다. 생명보험 계리사의 기와 무늬   (권고하는 비애감)처럼 동작을 취하고,   풍선 같이 부푸는 전구처럼. ... (찰스 번스타인)    
1867    詩가 무엇이길래 예전에도 지금도 실험에 또 실험이냐... 댓글:  조회:4389  추천:0  2016-11-26
리얼리즘과 실험적인 시 /김영교 실험적인 시 1950년대에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작된 실험주의는 로웰의 후반기 시와 동시대 대부분의 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험주의 시인들은 도널드 앨런이 최초로 비평가 집단이나 대학에서 외면당했던 과거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선집 《새로운 미국 시(The New American Poetry)》(1960)에서 분류한 대로 대략 5개의 학파로 나눌 수 있다. 재즈와 추상 표현주의 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실험주의 작가들 대부분은 로웰보다 한 세대 정도 어린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분방하며 반문화적인 지식인들로 대학이나 ‘부르주아적인’ 미국 시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시는 과감하고 독창적이며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한 그들의 시는 신화, 전설, 인디언과 같은 전통 사회 등 오래된 세계를 선호했다. 형식은 자유롭고 즉각적이며 유기적이었다. 시의 형식은 주제, 시를 쓸 당시 시인의 감정, 구어체적인 자연적 호흡 등에서 우러나왔다. 앨런 긴즈버그가 에서 지적했듯이 “첫 번째 떠오르는 생각이 최고의 생각”으로 여겨졌다. 블랙 마운틴 시파 블랙 마운틴 시파는 찰스 올슨, 로버트 덩컨, 로버트 크릴리 등이 1950년대 초반에 교편을 잡았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애쉬빌의 실험적이고 자유분방한 예술대학인 블랙 마운틴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에드 돈, 조엘 오펜하이머, 조나단 윌리엄스 등이 그 대학에 다녔으며, 폴 블랙번, 래리 에그너, 드니즈 레버토프는 대학의 잡지 《오리진(Origin)》과 《블랙 마운틴 리뷰(Black Mountain Review)》에 자신들의 작품을 실었다. 블랙 마운틴 시파는 찰스 올슨의 ‘투사시(projective verse)’ 이론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 휴지기와 타이핑에서의 줄바꾸기에 기초한 열린 형식을 옹호하고 있다. 짧은 스타일의 시를 쓴 로버트 크릴리(1926~ )는 대표적인 블랙 마운틴 시인이다. 크릴리는 (1955)라는 시에서 격렬한 동시에 사랑스러운 장면을 창조해내고 있다. 사랑을 위해 -- 나는 머리를 가르고 눈 뒤쪽에 초를 넣을 것이다 우리가 부적과 일순간의 놀람의 미덕을 잊는다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죽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시파 일반적으로 서부 연안의 시 대부분을 포함하는 샌프란시스코 시파의 작품들은 동양 철학과 종교, 일본 및 중국 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양이 미국 서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비추어볼 때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들쭉날쭉한 해안선 등 샌프란시스코 주변 지역은 아름답고 장엄하여 그 지역 시인들은 자연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시 중 다수는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나 배낭여행 중 생긴 일을 다루고 있다. 시인들은 시적 영감을 얻기 위해 문학적 전통이 아닌 자연으로 시선을 돌렸다. 샌프란시스코 시인들은 잭 스파이서, 로렌스 펄링게티, 로버트 덩컨, 필 웰른, 류 웰치, 개리 스나이더, 케네스 렉스로스, 조앤 카이거, 다이앤 디프리마 등이 있다. 이들은 자신과 노동자를 동일시했다. 그들의 시는 단순하고 쉽게 읽히며 낙관적이다. 개리 스나이더(1930~ )의 작품에서처럼 샌프란시스코 시파의 시들은 개인과 우주의 미묘한 균형을 표현하고 있다. 스나이더는 (1955)라는 작품에서 산을 따라 길을 내다가 이미 사라진 인디언 부족들이 남긴 흑요석 화살촉 파편들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묘사했다. 여름만 빼고 내내 눈이 오는 언덕에서 살진 여름 사슴의 땅에서 그들은 캠핑을 하게 됐다. 그들 자신만의 길에서. 나는 여기 내 자신만의 길을 따라왔다. 차가운 드릴과 곡괭이, 썰매, 다이너마이트 자루를 들고. 1만 년.   비트 시인들 샌프란시스코 시파는 1950년대에 등장한 ‘비트’ 시인 집단과 합쳐진다. 중요한 비트 작가들 대부분은 동부 연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사람들이며, 캘리포니아 주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처음으로 얻게 된 이들이다. 주요 비트 작가들은 앨런 긴즈버그, 그레고리 코르소,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 등이다. 비트 시는 지하 클럽에서 행해진 시 낭송 공연에서 발전되었기에 구어체적이고 반복적이며, 읽을 때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일부 사람들은 비트 시가 1990년대에 널리 퍼진 랩 음악의 증조부쯤 된다고 보기도 한다. 비트 시는 미국 문학의 기존 형태를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충격적인 언어들 밑에는 미국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었다. 비트 시는 미국이 순수함을 상실했다는 점과 미국의 인적, 물적 자원이 비극적으로 낭비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고통과 분노에 찬 울부짖음이다. 긴즈버그의 《울부짖음》(1956) 같은 시들은 전통적인 시에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내 세대의 최고 정신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굶주리고, 히스테리를 부리며, 벌거벗은 채, 독한 마약을 찾아 새벽 흑인들의 거리를 몸을 질질 끌며, 천사머리를 한 비트 족들, 밤의 기계장치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발전기와 아주 오래된 천상의 교류를 찾아 타오르는... 뉴욕 시파 비트 및 샌프란시스코 시인들과는 달리 뉴욕 시파의 시인들은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 또한 회피했다. 그들은 어느 시파보다 공식적인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시인들이다. 뉴욕 시파의 주요 인물인 존 애쉬버리, 프랭크 오하라, 케네스 코치는 하버드 대학교 재학 중일 때 만났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도시적이고 냉담하며, 비종교적이고 위트와 날카로운 섬세함을 겸비하고 있다. 그들의 시는 속도감이 있으며 도시적인 묘사와 부조화로 가득하다. 뉴욕은 미국의 예술 중심지이며 추상 표현주의의 탄생지로, 뉴욕 시파의 시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 시인들은 예술 비평가나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거나 화가들과 협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구상적인 모양이나 명백한 의미를 믿지 않는 추상 미술에 대한 선호 때문에 이들 시인들의 작품은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존 애쉬베리(1927~ )의 후기 작품들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애쉬베리의 흐르는 듯 부드러운 시들은 직접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빠르게 마음 위로 움직이는 사고와 감정을 기록하고 있다. 주요 문학상 3개를 수상한 그의 심오한 장시長詩 《볼록거울에 비친 자화상(Self-Portrait in a Convex Mirror)》(1975)은 여러 생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가끔 자기반영적인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배 하나가 알 수 없는 색깔을 날리며 항구로 돌아왔다. 당신은 이질적인 물질들이 당신의 하루를 분쇄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도널드 앨런은 새로운 시파를 정의하는 시선집에서 확실한 지리적 기반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정의하기 힘든 이들을 다섯 번째 집단에 포함시켰다. 이 규정하기 모호한 집단에는 최근의 시 동향과 실험적인 경향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시는 생생한 꿈과 같은 이미지를 통해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는 초현실주의 시와 최근에 급성장한 여성 및 소수민족 작가들의 작품이다. 피상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초현실주의자, 페미니스트, 소수민족 작가들은 주류인 백인 남성 문학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T. S. 엘리엇, 월러스 스티븐스, 에즈라 파운드가 1920년대 미국 시에 상징주의적 기법을 도입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이후 유럽 시와 사상에서 주요한 추세였던 초현실주의는 미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초현실주의가 실존주의와 함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압박감 속에서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1960년대 W. S. 머윈, 로버트 블라이, 찰스 시믹, 찰스 라이트, 마크 스트랜드를 비롯한 많은 미국 작가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에 눈을 돌려 순수한 감정, 원형적인 이미지, 비이성적이고 실존적인 불안감 등의 특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머윈과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다음 시 구절에서 보이듯이 경구적인 시구詩句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신들은 우리가 되지 못했던 이들이다/자신이 더 이상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원을 넓혀라.” 블라이는 정치적인 초현실주의 시를 통해 베트남 전 당시 미국의 가치 기준과 외교 정책에 대해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는 시 에 잘 나타난다. 벼가 자라는 논에 폭탄 구멍이 있는 것은 우리가 새로 포장된 훈제 굴을 먹고 있기 때문이야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더욱 커질수록 초현실주의 시들은 더욱 조용하고 사변적으로 되어갔는데, 찰스 라이트의 시 (1973)에 이런 특징이 엿보인다. 그것은 우리의 슬픔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아이들을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마크 스트랜드의 초현실주의 시들은 모빈의 시처럼 음산하다. 스트랜드의 시는 극단적인 상실감을 담고 있다. 전통, 가치, 믿음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스트랜드에게는 동굴 같은 캄캄한 영혼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열쇠가 있다 그래서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어둡고 나는 들어간다 더욱 어두워지는데 나는 들어간다 여성과 다민족 시인들 여성 문학은 소수민족 문학과 초현실주의처럼 1960년대 후반에 처음으로 미국 문학의 주요한 동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성 문학은 당시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꽃을 피웠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그렇듯 미국 문학 역시 오랫동안 여성의 공헌을 간과하는 남성적 기준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뛰어난 여성 시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페미니스트인 것도, 그들이 다룬 주제가 반드시 여성의 관심사를 일률적으로 대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휴머니스트인 경우가 많았다. 지역적, 정치적, 인종적 차이가 그들의 작품을 형성했으며, 그들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다. 뛰어난 여성 시인들에는 에이미 클램피트, 리타 도브, 루이즈 글뤽, 조리 그래엄, 캐롤린 카이저, 맥신 쿠민, 드니즈 레버토프, 오드리 로드, 거트루드 슈나켄버그, 메이 스웬슨, 모나 반 듀인 등이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다민족 문학이 부흥했다. 미국의 다민족 작가들은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흑인의 주도하에 대중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민족 연구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에는 여러 민족들을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학술지, 전문 조직, 문학잡지 등이 생겨났다. 1990년대 즈음에는 특정한 민족 문학 연구를 위한 학술회의가 시작되었고, 작품 선집이나 대학 과정 독서 목록에서 ‘고전 작품’이라는 정전正典에 민족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중요한 논쟁거리는 인종 대 민족, 민족우월주의 대 다중심주의, 단일언어 사용주의 대 이중언어 사용주의, 그리고 접합 대 주변화 등이다. 문학 텍스트뿐만 아니라 정치학 텍스트에도 적용되는 탈구조주의 혹은 해체주의는 당연시되던 것들에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소수민족의 시는 여성의 시가 담고 있는 다양성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 최근에 꽃피운 소수민족 시인들로는 게리 소토, 알베르토 리오스, 로나 디 세르반테스 등의 히스패닉 계 미국인들과 레슬리 마몬 실코, 시몬 오티즈, 루이즈 에드리치 등의 인디언들, 아미리 바라카 혹은 르로이 존스, 마이클 하퍼, 리타 도브, 마야 앤젤루, 니키 지오바니 등의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 그리고 캐시 송, 로슨 이나다, 재니스 미리키타니 등 아시아 계 미국인들이 있다. 치카노/히스패닉/라티노의 시 스페인 어에 영향을 받은 시들은 다양한 그룹의 작품들을 망라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1950년대부터 치카노(Chicano)라고 알려진 멕시코 계 미국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1848년에 끝난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얻어낸 남서부 주들에 몇 세대 동안 살았던 사람들이다. 스페인 계 카리브 연안 사람들 중에는 쿠바 계 미국인들과 푸에르토리코 계 사람들이 활동적이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문학 전통을 뚜렷이 유지해왔다. 예를 들어 쿠바 계 미국인들의 뛰어난 희극은 루돌포 아나야 같은 치카노 작가들의 구슬픈 서정시와는 구별된다.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들 또한 이러한 다민족 문학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치카노 혹은 멕시코 계 미국인들은 멕시코 민요인 코리도(corrido) 형태의 구비문학 전통을 시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작품들은 멕시코 인 사회의 전통적인 강인함과 그들이 백인들과 같이 있을 때 맞닥뜨리는 차별을 강조하고 있다. 치카노 시인들은 때로 알루리스타와 글로리아 안잘두아처럼 스페인 어와 영어 단어를 시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그들의 시는 구전 전통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며 큰 소리로 읽힐 때 그 힘을 발휘한다. 일부 시인들은 대체로 스페인 어로 글을 썼는데, 이런 스페인 어 시 전통은 뉴멕시코 주 아코마에서 침략자인 스페인 사람들과 푸에블로 인디언과의 1598년 전투를 기념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서 쓰인 최초의 서사시인 가스파르 페레즈 데 빌라그라의 《뉴멕시코의 역사(Historia de la Nueva Mexico)》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최근 치카노 시의 중심에 서 있는 시인 로돌포 곤잘레스(1928~ )의 《나는 와퀸이다(I Am Joaquin)》(1972)는 치카노들의 고된 상황을 애달파하는 작품이다. 혼돈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미국인 사회의 소용돌이에 갇혀 규칙들에 혼란을 느끼며 태도에 조롱을 받으며 교묘한 조종에 억압을 느끼며 현대 사회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치카노 작가들은 자신들의 멕시코적인 뿌리에서 생명력을 찾고 있다. 로르나 디 세르반테스(1954~ )는 고대 멕시코의 웅장함을 그리며 전통적인 ‘서사적 코리도’ 형식으로 시를 쓰고 있으며, 루이스 오마르 살리나스(1937~ )는 자신을 ‘아즈텍 천사’라고 부르고 있다. 치카노 시의 다수는 매우 개인적이며 가족이나 사회 구성원들의 감정을 다루고 있다. 개리 소토(1952~ )는 주로 세상을 뜬 조상들을 경배하는 고대 전통을 살려 시를 썼지만, 1981년에 쓴 다음과 같은 시구에서는 오늘날 모든 미국인들에게 닥친 다문화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촛불은 죽은 자들을 위해 밝혀졌다 우리 앞에 있는 두 개의 세계 인디언 시 인디언들은 훌륭한 시를 창작했는데, 이는 샤머니즘적인 노래 전통이 그들의 문화유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작품은 자연을 생생하고 생동감 있게 그리며, 때로는 신비주의적으로 흐르기도 한다. 또한 인디언 시인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유산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되는 것에 대한 비극적인 감정을 글로 옮겼다. 아코마 지역 인디언 사이먼 오티즈(1941~ )는 역사에 기초하여 미국에서 인디언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순을 탐색한다. 그의 시는 종종 백인 독자들에게 한때 자신들이 인디언들에게 가한 부정행위와 폭력을 상기시키면서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상호간의 깊은 이해를 통한 인종적 조화를 꿈꾼다. 오네이다 부족의 일원인 로버타 힐 화이트맨(1947~ )은 시 에서 “별 이불, 새벽빛으로 짠”과 같이 다문화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있으며, 라구나 푸에블로 인디언의 피를 어느 정도 이어받은 레슬리 마몬 실코(1948~ )는 아름다운 서정시에 구어체와 전통적인 설화를 담았다. 실코는 (1981)에서 일본 하이쿠와 유사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두꺼운 얼음 하늘에서 재빠르게 달리며 쿵쾅거리며 나무 꼭대기 위에 소용돌이치며 눈같이 하얀 고라니가 온다 조금씩 움직이며 하얀 노래 나뭇가지에 이는 폭풍 실코처럼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즈 에드리치(1954~ )는 드라마를 응축해놓은 듯한 인상적인 극적 독백을 창조했다. 에드리치의 시는 치페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알코올 중독, 실업, 가난과 싸우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시 (1984)에서는, 항상 술에 취해 있으며 학대를 일삼던 레이 삼촌이 도시에서 몇 년 만에 돌아온다. 레이 삼촌은 심장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시의 화자이자 삼촌으로부터 학대받은 적이 있는 여자 조카는, 레이 삼촌이 오래전 큰 거북이의 뱃속에 폭죽을 넣어 죽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에 화자는 삼촌과 그가 죽인 거북이를 연결시키고 있다. 어떻게든 우린 돌아갈 길을 찾게 된다네, 레이 삼촌은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그를 고향으로 불러온 그 몸뚱이에 대고. 그의 손이 되어버린 회색 지느러미는 파도막이판에 뼈를 고정시키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좋지 않은 상처를 항상 그냥 내버려두는 소년이나 오랫동안 바다 밑에서 살아온 짐승의 이상하고 조용한 인내심이 고여 있다. 그리고 천사들은 밧줄을 들고 들것을 낮추며 오고 있다. 아프리카 계 미국인의 시 현대의 미국 흑인들은 아름답고 주제나 음색 면에서 상당히 다양한 시들을 창작했다. 흑인들의 시는 미국에서 가장 발전한 민족 문학이며 매우 다양하다. 아프리카 계 미국인 시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시인 아미리 바라카(1934~ )는 희곡도 집필했으며 정치에도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마야 앤젤루(1928~ )는 희곡을 비롯하여 유명한 회고록인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1970), 시집 《내가 죽기 전에 차가운 물 한 잔만 주오(Just Give Me a Cool Drink of Water ?ore I Diiie)》(1971)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앤젤루는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을 기리는 시를 집필하기도 했다. 최근에 존경받고 있는 아프리카 계 미국인 시인 리타 도브(1952~ )는 1993년에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명명되었다. 소설가 및 희곡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1987년에 시집 《토머스와 뷸라(Thomas and Beulah)》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에서 그녀는 일련의 서정시를 통해 자신의 조부모를 찬양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의 풍요로운 내면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도브와 비슷하게 마이클 하퍼(1938~ )도 인종 차별과 폭력 앞에 노출된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의 복잡한 생활을 드러냈다. 그의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시는 종종 전쟁이나 도시생활 등 사람들로 북적대는 장면을 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시들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의학적 이미지들을 활용하고 있다. 그의 (1971)은 “고기들을 체액으로 잇대고”에서 보이듯이 요리와 의료 수술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우리는 뷔페에서 기웠던 인생을/중환자실에서 재구성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 시는 병원의 이미지, 초기 미국 영화인 에 나타난 인종 차별, KKK단, 필름 편집, X-레이 기술 등을 서로 연결시키며 마무리된다. 우리는 카메라처럼 우리의 뇌를 재장전한다 X-레이 광선에 과다 노출된 필름 이중 문에 갇힌 노출계:인종과 성 취미 삼아 필름처럼 감기고 울려 퍼졌던; 우리는 우리의 짐을 꾸려 집으로 간다 역사, 재즈, 대중문화 등은 대학 교수인 하퍼로부터 서부 연안의 출판가이자 시인인 이슈마엘 리드(1938~ )에 이르기까지 많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리드는 이전 콜럼버스 재단과 《야드버드(Yardbird)》, 《퀼트(Quilt)》, 《콘치(Konch)》 등의 잡지를 통해 다문화적 문학에 앞장선 인물로 유명하다. 오드리 로드(1934~1992) 등의 흑인 시인들은 아프리카를 고대로부터 문명의 중심지로 보는 아프리카 중심주의에서 정신적인 힘을 얻었다. 로드는 라는 감각적인 시에서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따뜻하게 만들고” “이미 죽은 것”만을 “소비하는” 고대 다호메이 왕국(현재 아프리카 서부 나이지리아의 베냉 남부에서 15~19세기에 번영했던 왕국-옮긴이)의 여전사를 화자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아시아 계 미국인의 시 아시아 계 미국인의 시 또한 치카노와 히스패닉 작가들의 시와 같이 매우 다양하다. 일본, 중국, 필리핀 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7세대 동안 살았으며 한국, 태국, 베트남 계 미국인들은 비교적 최근에 이민을 왔다. 각 그룹은 서로 다른 언어적,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아시아 계 미국인 문학의 최근 전개 상황은 환태평양 지역 연구 및 여성 문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시아 계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이국적’이고 ‘착한’ 소수민족으로 동양인을 구별하는 정형성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미학자들은 도道와 로고스의 개념을 비교하는 등 아시아와 서양의 문학 전통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아시아 계 미국인 시인들은 중국 경극에서 일본의 선불교까지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왔으며, 아시아의 문학 전통, 특히 선불교와 연결된 전통은 수없이 많은, 아시아 출신이 아닌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1991년에 출간된 선집 《하나의 달 아래:현대 미국시의 불교(Beneath a Single Moon:Buddhism in Contemporary American Poetry)》에서 파악할 수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 시인들의 작품 세계는 매우 다양해, 《아이이이이이이이이!(Aiiieeeee!)》(초기 아시아 계 미국인 문학 선집)의 공동 편집자인 프랭크 친은 파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유명한 소설가 맥신 홍 킹스턴(1940~ )과 같은 작가들은 전통을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다. 일본계 미국인 3세대인 재니스 미리키타미는 일본-미국의 역사를 다루면서 《제3세계 여성》, 《타임 투 그리즈(Time to Greez)》, 《아유미:미국에서의 일본인 4세대(Ayumi:Four Generations of Japanese in America)》 등 몇 권의 선집을 편집했다. 중국계 미국인인 캐시 송(1955~ )은 서정적인 시집 《사진 신부(Picture Bride)》(1983)에서 자신의 가족을 통해 역사를 극화하고 있다. 많은 아시아 계 미국인 시인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탐색하고 있다. 캐시 송이 시 (1988)에서 묘사한 소가 어슬렁거리는 광장, 중국 식당, 비딱하게 걸린 코카콜라 현수막 등이 있는 초라한 마을은 뿌리 없는 다문화적인 동시대의 삶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런 삶은 예술을 통해, 특히 이 시의 경우에는 카세트에 담긴 오페라를 통해 참을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친숙한 아리아가 달처럼 떠올라 당신을 몸에서 들어올려 다른 나라로 데려다주면 그곳에서 당신은 잠시 동안 가볍게 여행을 한다. 새로운 경향 미국 시의 최근 경향은 잡지 《템블러(Temblor)》와 관련이 있는 ‘언어 시인들(language poets)’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브루스 앤드루스, 린 헤지니언, 《‘언어’ 시:선집(?anguage?Poetries:An Anthology)》(1987)을 편집한 더글러스 메설리, 밥 페럴맨, 수필집 《완전 통사론(Total Syntax)》(1985)의 저자 바레트 와튼 등이 있다. 그들은 언어가 모호성, 단편성, 혼돈 속에서의 자기주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언어를 확장한다. 반어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그들은 이데올로기, 교리, 관습 등 ‘거대담론(metanarratives)’을 거부하고 초월적인 존재의 실재를 의심한다. 마이클 파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기가 천국이다, 집안에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곰팡이 핀 책 밥 페럴맨의 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 하나의 사실은 질료이다 열한 개 글자만 말할 수 있다 한밤에 검은 하늘, 적당하게. 나는, 비이성적인 잔재이다... 그들은 예술과 문학비평이 내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판단하고 모더니즘의 닫힌 형식, 위계질서, 공현과 초월의 개념, 장르와 정전正典 텍스트(문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은 문학 작품)의 범주에 반대한다. 대신 그들은 열린 형식과 다문화적인 텍스트를 제시한다. 그들은 대중문화, 미디어, 패션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이를 재구성한다. 퍼포먼스 시처럼 언어 시는 종종 해석이 불가능하며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작곡가 존 케이지의 음악 같은 즉흥 연주와 연결된 퍼포먼스 중심의 시, 재즈 즉흥 연주, 혼합 매체 작품, 유럽 초현실주의는 많은 미국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잘 알려진 인물로는 필름, 비디오, 음향과 음악, 안무, 최신 기술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미합중국》(1984)의 저자 로리 앤더슨을 들 수 있다. 음성과 악기를 강조한 ‘음성시(sound poetry)’의 작가로는 즉흥 공연을 하는 데이비드 앤틴을 비롯하여 뉴욕 출신 출판인 조지 퀘이샤, 아먼드 슈워너, 잭슨 매클로 등이 있다. 매클로는 시각적인 혹은 구상적인 시를 공연하기도 했는데, 이는 문자 배열과 문장 배치를 통해 시각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기법이다. 민족 단체의 공연 시 또한 랩 음악과 함께 문화의 주류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대안 미술관이나 문학 서점 등에서 개최되는 공개 시 낭송회 ‘포이트리 슬램(poetry slam)’은 미국 전역에서 정신을 고양시키는 참여 오락 행사가 되었다.   문학 이론 면에서 이런 경향에 반대하는 시인들이 있다. 이들은 자칭 ‘신형식주의자(New Formalist)’로서 전통적인 형식, 각운, 보격 등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형식주의자들은 현재 상태에 대한 중산층적 안일함, 꼼꼼한 그러나 지나치게 장식적인 소리, 시 워크숍에서 생산된 작품, 개인적인 서정시에 대한 지나친 강조 등의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신형식주의자들은 스토리라인 출판사와 관련이 있는데, 주요 시인으로는 사업가 시인인 다나 지오이아, 시인이면서 《강력한 조치:전통 형식을 이용한 현대 미국시(Strong Measures:Contemporary American Poetry in Traditional Forms)》(1986)의 공동 편집자인 필립 데이시와 데이비드 자우스, 브래드 라이트하우저, 거트루드 슈나켄버그 등이 있다. 로버트 리치먼의 《시의 경향:1977년 이후 영어로 된 운율 및 보격을 맞춘 시(The Direction of Poetry:Rhymed and Metered Verse Written in English Since 1977)》는 최근에 출판된 선집이다. 이 시인들은 비록 19세기 주제로 퇴보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는 하지만 음악적 언어와 전통적인 닫힌 형식에 보편적인 마음 자세와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CHAPTER _ 8 1945년 이후 미국 산문 : 리얼리즘과 실험주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산문 문학은 일반화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다. 전자 매체로 인해 지구촌 시대가 열린 가운데, 산문 문학은 유럽 실존주의 및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 등 국제적인 조류로 인해 활기를 띠게 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구어체가 구비문학 전통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문학은 미디어, 대중문화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과거에는 대중문화가 엘리트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현재 미국에서는 오히려 엘리트 문화가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토머스 핀천, 조이스 캐롤 오츠, 커트 보니거트 주니어, 앨리스 워커, E. L. 닥터로 등의 진지한 작가들은 만화, 영화, 패션, 대중음악, 구전 역사를 이용해 글을 쓰거나 이것들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최근 문학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이 질문들 다수는 형이상학적이다. 최근 작가들은 매우 실험적이며 자기의식적 혹은 자기반영적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기법들이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더욱 다양한 재료를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최근 몇십 년 동안 미국 작가들은 ‘포스트모던적인 감수성’을 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모더니즘처럼 관점을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관점을 담을 새로운 내용이 필요했다.  
1866    詩는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댓글:  조회:3207  추천:0  2016-11-26
생명력 있는 시를 쓰려면 (신경림 ,문학 회고록) 3. 시는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사실 시라는 건 뭡니까? 예술 아닙니까? 말이라는 것을 소재로 한 것, 그림이라는 것이 색하고 선을 제재로 한다면 음악이라는 것이 음하고 리듬이라는 것을 율하고 격을 제재로 한다면, 문학이라는 건 말을 제재로 하고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일단 첫번째로 읽는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읽는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고 있어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괜찮다는 얘기지요.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한테 즐거움을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에 걸쳐 풍미한 프롤레타리아 시가 있지 않습니까. 프로문학파 시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참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시인들처럼 민족 해방에 대해서 그렇게 치열하고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들 가운데서 많지 않습니다. 당시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에 앞서서 독립을 쟁취하고 평등을 이룩할 수 있는 수단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프롤레타리아 시, 즉 카프 시들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가 읽을 만한 게 몇 편이나 됩니까. 실제로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마 「현해탄」「3월이 온다」를 쓴 임화, 권환, 월북하여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이찬, 김상훈, 박세영 등 몇몇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시는 말로 된 예술이라는 인식이 모자라지 않았던가 생각합니다. 시는 예술이니까 예술이 갖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어야지, 그것이 없으면,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옳은 것, 이것을 나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시가 되고, 누군가 언젠가는 다 읽어줄 것이다.' 따위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말에 대한 인식이 좀 모자랐다는 거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사람에 대한 시가 기억되지 않는 대신, 오늘날까지 그 행적을 두고 말이 많은 서정주의 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습니까.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 전문 이 시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 시를 읽으면 뭔가 와 닿는 것이 있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그맨이 떠들어서 주는 즐거움하고 예술로서의 시가 주는 즐거움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탓으로 카프 시 가운데 오늘날 지금 문학사에 남은 시가 많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7, 80년대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7, 80년대 민중시 중에는 좋은 시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예술 인식,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코 좋은 시로 남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을 시로써 잘하는 사람이 좋은 시인이라고 했던 워드워즈의 말처럼, 말을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시를 판가름한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다루는 사람입니다. 렝보, 말라르메와 함께 20세기 초에 프랑스 상징주의를 주도한 바 있는 드가의 에피소드를 빌리죠. "내 머리 속에는 시가 가득한데 왜 시가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 하고 드가가 묻자, 말라르메가 말하기를 "시는 언어를 가지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는 성적순이 아니며,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잘 쓰는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라서, 이삼십 년대 프로문학이 우리 문학사에서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게 되었고, 7, 80년대의 민중시에도 일부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저도 민중시 계열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 내용의 시를 썼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로써 좋은 시가 되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이상 힘있고 좋은 살아 있는 말을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죽 시를 써왔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신조 중의 으뜸은 '말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바로 시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므로, 생명력 있는 말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어 쓰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생활 체험도 말에 의해서 다시 체험될 때에만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원칙하에서 시를 써왔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사유가 아니라 직관에서 쓴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 전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칸트의 얘기를 빌어 '개념은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되어 있더군요. 이것은 칸트가 예술 이야기를 하면서 한 얘기죠. 예술이라는 것은 사유나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에 의해서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념 즉, 이데올로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지요. 이 말처럼 시에서는 직관이 아주 중요하지만, 직관의 배경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와 다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다른 말로 옮기면 '시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 생각하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적 지향이 없을 때에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유치환의 '낮달'이 있습니다. 유치환은 여느 시인들과는 달리 위선이 없는 연애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숨어 있는 낮달을 애인과 헤어진 뒤에 가슴 속에 남은 상처에 견주어 쓴 시입니다. '쉬 잊으리라 그러나 잊히지 않으리라/가다 오다 돌아보는 어깨 너머로/그날 밤 보다 남은 연민의 조각/지워도 지지 않는 마음의 여로' 아주 짧지만 감동적인 연애시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데올로기는 없습니다. 이런 시도 좋지만, 이데올로기가 있는 시가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란 메타포 즉 은유(隱喩)입니다. 좋은 시라는 건 결국 비유를 잘한 시입니다.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젊은 우체부가 찾아와 '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네루다는 '시란 메타포다.'라고 대답하지요. 두 사람이 바닷가를 걷는데, 파도가 밀려오는 걸 보고 젊은 우체부가 '파도가 걸어옵니다'하고 말하자, 네루다는 '이 순간부터 너는 시인이다. 바로 비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다'라고 말하지요.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을 들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라는 거죠. 제 생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좋은 시인은 비유를 잘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비유를 썩 잘 할수록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철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삽살개 앞세운 정 좀 쓸쓸하다만/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나는 가련다'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잘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나막신'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이지만 사람살이가 은유로 잘 배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은유가 있다고 느꼈고, 아직도 독자들에게 읽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메타포가 있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시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그 '존재'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시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메타포를 가졌을 때, 뛰어난 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이병철의 시는 우리 문학사에서 기억되지 않으면 안될 훌륭한 시인 것입니다 ==================================================================================     소스라치다 ― 함민복(1962∼ )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도시에 살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사람들인 것만 같다. 물론 살아 있고 움직이는 존재 중에는 반려동물도, 비둘기도, 곤충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도시의 주인은 딱 셋이다. 사람, 영상, 자동차. 이 상태는 편리하지만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그 이유가 함민복 시인의 시에 잘 나와 있다. 시인은 단순하고 소박한 시를 쓴다. 어렵게 말하지도, 멋지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즉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힘을 쏟지 않아도 되기에 깊게 읽힐 수 있고, 오래 기억될 수도 있다. 이런 시는 참 좋다.   어느 날 시인은 뱀을 보았고 그 뱀을 죽였다고 한다. 뱀은 무섭고 싫으니까 얼른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뱀을 죽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뱀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더 생각해보니, 내가 뱀을 무서워했던 것보다 뱀이 훨씬 더 많이 나를 무서워했을 것 같다. 결국 무서운 데다가 나쁜 존재는, 뱀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 생각이 확장되니 시인은 몹시 미안해졌다. 뱀만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생명체, 그뿐만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것들도 사람이 무섭다. 손만 대면 캐가고, 쓰고, 없애고, 먹는 사람들이 참 많이 무섭다. 예전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서양 사람들이 와서 땅을 팔라고 했을 때 인디언들은 그 제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공기와 대지와 시냇물과 햇빛을 우리가 소유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라고 대답했다. 함민복 시인의 시는 인디언의 지혜가 먼 나라 역사나 영화 속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누가 누구의 주인이고, 누구 하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서로,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너무 함부로 하지 말 일이다.
1865    詩를 더불어 사는 삶쪽에 력점을 두고 써라... 댓글:  조회:3346  추천:0  2016-11-26
2. 시를 던지고 10년 동안 시골에 박혀 지내다 제가 문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사실 단순합니다. 그 동안 저하고 함께 책을 읽던 선배가 진보당 사건으로 잡혀 들어갔어요. 죽산 조봉암 선생은 5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남북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북진통일을 주장했었습니다. 그 때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지금 관계에서 한 자리씩을 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총칼로 다 뒤집어엎고 평양까지 가서 북한에 있는 사람 다 때려 죽여야지 통일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정서였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조봉암 선생만이 "그래서는 안 된다. 북한도 같은 동포인데 싸우면 되느냐?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 평화적으로 하지 않고 전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이건 백년 천년이 가도 절대 통일이 안 된다. 소련이라는 나라도 약하지 않고 미국도 약하지 않은데 누가 양보하겠느냐?"고 주장했습니다. 참 합리적인 소린데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때 일인데, 그 사건에 선배가 끌려 들어갔어요. 저는 겁이 많은데다 당장 맨 날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도망을 갔지요. 시골로 도망갔다고 못 잡으러 올 리는 없지만, 일단 시골로 가면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까? 박혀 살다 보니까 점점 문학에 대한 정열도 식고, 문학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도 생겼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여러 가지 고생도 해봤습니다. 광산에서 일도 해보고, 노동판에도 가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과연 문학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위의 갖가지 회의가 일었습니다. "일단 문학을 관둬 버리자. 무얼 할 것인가는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관둬 버리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의 10년을 시골에 박혀서 살았습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지금도 그것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물론 사람은 개인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결국은 마지막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코 남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이라는 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지요.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산다. 말이 이상한 얘기지만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 남과 더불어 살지만 결국 혼자 책임지니까 혼자 산다. 그러나 이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제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은 앞으로 시를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는 이제 나 혼자만 사는 것, 나 혼자만의 생각, 혼자만의 뜻, 이런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더불어 사는 정서, 더불어 사는 어떤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의미들을 시로써 표현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아니고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다시 저한테 글을 쓸 기회가 온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골서 영원히 떠돌다가 끝나겠지." "어쩌다 시 한두 편 써 놓으면 누군가가 앤솔로지 따위에 발표 해주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예컨대 「해바라기의 비명」을 쓴 함형수가 있지 않습니까? 한 편밖에 남긴 것이 없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나온 사화집(詞華集) 가운데서 「해바라기의 비명」을 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화집에라도 다 들어가 있지요. 수만 편의 시를 쓰고서도 한 편도 건질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형수처럼 한 편을 쓰고서도 우리 문학사에 남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러다가 제가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시인 김관식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가 술김에 "야, 서울에 올라가자." 하고 잡아끄는 통에 둘이서 서울에 올라옴으로 해서였습니다. 김관식의 집은 홍은동에 있었습니다. 산중턱에 무허가로 집을 크게 짓고 살았습니다. 자기 마누라도 있고 애들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 한 칸을 무조건 비워 주었습니다. "이 방은 앞으로 신경림이가 쓸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하며, 공짜로 방을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술김에 올라와서 같이 술먹고 놀았지만, 그 때 제가 결혼한 몸이어서 혼자 살 수는 없었습니다. 시골 가서 색시를 불러서 같이 왔지요. 그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한심한 거죠. 김관식이 우선 쌀을 다섯 말을 주고 김치도 주고 해서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래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를 한 10여 년 안 썼다고 하지만 무척 시를 쓰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속에서 뭔가 북받쳐 올라 시를 안 쓰면 못 견딜 때가 있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돈벌이가 없으니까 양귀비를 재배했습니다. 그걸 집에서 조금씩 만들면 상당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그걸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의 길 안내를 맡은 일이 있습니다. 길 안내를 해주면 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원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성미인데다, 공짜로 먹고 돈까지 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주막에 들르면 일단 술 먼저 먹는 걸 생애 제일의 뜻으로 삼고 있을 때여서 잔뜩 취해서 잤습니다. 눈이 며칠 동안 퍼부어 길을 다닐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한 주막에서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집 주인이라는 사람은 남로당이라고 총 맞아 죽었고, 여자가 혼자 술집을 하는데 농담을 잘하고 걸직한 소리를 잘했습니다. 매일같이 동무해서 술 먹고 그랬는데,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눈이 다 그쳤어요. 울타리가 없는 시골 뒷간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 주먹만한 별들이 달려 있고 머리 위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밑에는 공사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공사장에서 불빛이 비쳐요. 그래서 마음이 얼마나 슬픈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때는 필기도구를 안 가지고 다녔으니까 일단 속으로 시를 썼지요. 그것을 나중에 조금 정리해서 발표한 게 「눈길」이라는 시입니다. 말하자면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10년 동안에 쓴 시가 그거하고 「그날」이라는 시입니다. 「그날」은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절망적인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집 「농무」 속의 작품들은 거의 서울에서 썼지만 머리 속에는 메모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메모가 되어 있던 것을 서울에 와서 옮겨놨을 뿐이지요. 「농무」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농민의 저항 의식 등을 쓴 거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아니고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이 갖는 어떤 농촌적인 정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삶, 남과 함께 하는 삶… 이런 것들을 시로써 한번 표현해 보고자 했습니다. 제가 첫번째 얘기한 것은 시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하는 대화라는 겁니다. 따라서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과 두번째, 삶이라는 건 혼자 꾸려가는 건 있을 수 없고 더불어 사는 삶, 이것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요. 결국 책임은 자기한테 있는 거니까. 혼자 생각하는만큼 혼자 책임지는 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나 혼자의 생각만 시로 다 표현한다면 시가 너무 왜소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그 때 했던 것 같습니다. 또 앞으로 내가 시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더불어 사는 삶 쪽에 역점을 두는 시를 쓰겠다고 하는 생각도 그 때 했던 것 같습니다. =======================================================================================      어머니의 휴가 ― 정채봉(1946∼2001)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만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봄이 되면 꽃구경을 간다. 좋은 사람과, 좋은 곳을 골라서 신나게 간다. 휴가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 따르면 내가 누려야 할 좋은 휴가보다 더 소중한 휴가가 있다고 한다. 평생 받을 수 있는 내 모든 월차와 휴가와 병가를 다 반납해도 아깝지 않을 휴가가 있다고 한다. 그건 바로, 하늘나라 어머니가 받으셨으면 하는 휴가다. 정채봉 시인은 시인이기 전에 유명한 동화작가다. 그의 동화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어머니가 너무나 필요하고 그립고 좋다. 이유가 있어서 그립겠는가. 그냥 그립다. 자고 나도 그립고, 잊어버렸다가도 그립고, 힘이 들면 더 그립고, 힘이 들지 않아도 그립다. 그런 어머니가 곁에 있으면 참 좋겠는데 저 먼 하늘나라로 이사를 가셨다. 그러니 딱 하루만, 아니 딱 5분만이라도 어머니가 휴가를 얻어 나를 보러 오시면 참말로 좋겠다.   시인이 어머니를 만나서 하고 싶은 일은 몹시 단순하다.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를 쳐다보고 싶다. 엄마한테 살을 비비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엄마’라고 부르고 억울했던 일을 일러바치고 싶다. 다 큰 남자 어른이 엄마가 오시면 엉엉 울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가슴에 콱 하고 박힌다. 이 말은 곧,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들어 늙어가도 마음속의 어린아이는 그대로 남아 있는 법이다. 시인이 유난해서가 아니다. 덜 성숙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곧 돌아올 5월 어린이날이 되면, 내 안의 어린아이 얼굴도 한번 어루만져 줄 일이다. 어린아이를 만들어 준 엄마의 얼굴도 한번 떠올려 볼 일이다. 아주 슬프고 불가능한 휴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1864    詩人은 명확하고 힘있게 말하는 사람... 댓글:  조회:3456  추천:0  2016-11-26
생명력있는 시를 쓰려면 (신경림 ,문학 회고록) 1.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말하는 사람 영국의 계관시인 워드워즈가 친구인 코울리지와 함께 서정시집을 냈습니다. 18세기 초에 나온 초판에서는 이런 말을 안했고, 재판을 내면서 그 서문(序文)에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시란 결국 남에게 하는 얘기다. 다만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하고 보통 사람하고 다른 점이라면, 보통 사람은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없지만, 시인은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확하다'는 말에는 '간단하고 짧게'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또 '힘있게'라는 말에는 감동을 준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죠. 분명하고 짧게, 그렇지만 남한테 힘있고 감동적으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그 결집체가 곧 시라는 말이 되겠는데, 제가 처음에 시를 쓰기 시작한 때를 생각해 봐도 이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고 싶어서 시를 읽기 시작했고, 또 힘있고 명확하게 하는 얘기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은 워드워즈를 읽기 전이었지만, 막연하게나마 남에게 명확하고 힘있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젊을 때 시를 쓰고 늙으면 시를 못 쓴다는 말은 워드워즈 때문에 생겼습니다. 워드워즈는 젊을 때에는 굉장히 좋은 시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업혁명기에 시의 언어를 새롭게 발견한 시인이었습니다. 이른바 '민중 언어'를 발견한 사람이지요. 그 이전에는 모두 문어(文語) 즉, 상류층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로 시를 썼는데 워드워즈부터 비로소 평민들이 쓰는 구어(口語)로 시가 씌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세계시사에서 아주 혁명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시력(詩歷)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젊은 날에는 근사한 시를 쓰고 생각도 진보적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집안의 유산을 챙기고 나서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젊었을 때 쓴 시는 민중 언어로써 참 훌륭하게 씌어진 것들이 적지 않은데, 나이 들어서 쓴 시들은 이른바 쓰레기가 된 것이 많습니다. 이를 두고 가리켜서 로버트 브라우닝 같은 사람은 "워드워즈는 39세까지만 살다가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년은 봄/봄은 아침/아침은 7시/하늘엔 종달새가 날고'(The year's at the spring,/And day's at the morn;/Morning's at seven;/The hill-side's dew-pearl'd;/The lark's on the wing;/the snail's on the thorn;/God's in His heaven--/All's right with the world!) 하는 「비파의 노래(Pippa's Song)」라는 시를 쓴 사람이지요. 그는 자기 시보다도 워드워즈를 욕해서 더 유명해질 정도였습니다. '워드워즈는 30세까지만 살았어야 된다. 괜히 팔십 넘게 살아서 시인 모두를 망신시켰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나온 소리입니다. 사실 외국에는 나이 들어서도 좋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도 워드워즈를 닮은 시인들이 적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저는 이렇듯 처음에는 남과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도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분명하고 힘있게 들려주는 시들이었습니다. 그 때 좋아했던 시인 가운데 하나가 해방 후 월북을 해서 한동안 잊혀졌던 이용악입니다. 그의 시를 읽었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몇 달씩 고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읽어도 아무 일 없습니다. 민주화가 된 덕분에 다시 우리 문학사 속에서 복권된 아주 훌륭한 시인이지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시 중에 그의 「북쪽」이 있습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제가 이것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2, 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슴 속으로 찡하는 울림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 때는 이용악 시인이 월북을 했는지조차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그분의 시집을 구해, 시집 맨 앞에 실려 있던 이 시를 읽고서 큰 감동을 받았지요. 이걸 읽으면서 저는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인이 팔려가고, 외국한테도 쩔쩔매고, 가난하게 살고…. 이런 것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된 바로 이용악의 「북쪽」이었습니다. 얼마 뒤 대학교 2학년이 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갈대」라는 시로 「문학예술」지의 추천을 받아서입니다. 제가 문단에 나와서 굉장히 실망한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나 동료 시인들을 만나서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모두들 당대의 시만 읽을 뿐 10년이나 15년 전의 시조차 잘 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문예지에 발표되어 여러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들만 읽고서, 마치 그것이 문학의 전부인 것처럼 얘기를 해요.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한 분 만났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시간에 제가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묻곤 할 때마다, 당시에는 그것이 금기시 될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이용악 시인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러이러한 시도 있으니까 그것들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 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좋은 시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읽을 수 없는 시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연세대 교수이자 문학 평론가인 유종호씨의 아버지인데, 저는 그런 면에서 참 행운아였지요. 그런데 서울에 와서 동료 문인들이나 선배들을 만나 이용악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벌써 옛날 시인이고 지금은 그 사람의 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석의 시도 좋아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홍명희의 「임꺽정」 얘기를 하면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하고 술자리에서 얘기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사이가 작고한 천상병과 유종호였습니다. 저하고 천상병과는 여섯 살쯤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상병이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고 상대를 잘 안해 주려고 하다가, 내가 현덕의 소설을 읽었다는 소리를 하니까 그제서야 이 사람이 술을 먹다가 깜짝 놀라 바라보았습니다. "야! 임마 니가 어떻게 현덕을 읽었어?" 하는 천상병의 말에, 저는 "내가 왜 못 읽어!" 하면서 현덕의 소설 한 대목을 암송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진짜로구나!" 하면서 백석 시 이야기로 번지고 하면서 친해졌지요. 인사동에 나오면 르네상스 다방을 찾아 천상병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천상병은 원래 돈이 없는 사람이니까 술 얻어먹을 희망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제가 그를 찾아가는 것은 옛날 소설을 읽은 동지로서 유일하게 인정해줬기 때문입니다. 한때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 때 실망한 것과 관계가 있는 거지요. 시를 쓸 마음도 안 생기고,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만나면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1956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길거리에 팔다리 없는 상이군인이 허다하고, 버스를 타면 옆에 와서 껌 사달라고 생떼 쓰는 상이군인들 때문에 불편할 정도였지요. 그냥은 못 갔습니다. 수없이 사줘야 되고, 돈 없으면 욕도 먹어야 했고, 거리마다 무너진 집, 폭탄 맞아서 쓰러진 집들이 복구되지 못한 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당시에 시인들이 쓰는 시라는 것은 신이 어떠니, 까뮈가 어떠니 사르트르가 어떠니 하는 관념적인 소리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옛날식으로 꽃이 어떻고 님이 어떻고 고향이 어떻고 하는 타령들뿐이었습니다. 저는 자연히 시를 쓰는 데 흥미를 잃었지만 그것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친구들 중에 우연히 사회과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수요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지고 수요일마다 모여서 술도 먹고 했는데, 그런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제가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날 만나면 일주일 동안 읽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일주일 동안 무엇에 대해서 읽었는지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 병신이 되니까 얘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헌책방 찾아다니면서 책을 한 권씩 구해 읽었습니다. 남들이 거의 안 읽었을 책을 구해 읽은 다음 모임에 나가 감동적으로 발표를 하면, 그날의 대장이 됩니다. 돈을 추렴해서 술값을 내는데, 그 사람은 술값을 안 내도 됩니다. 3차 4차를 가도 그냥 먹는 거지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다가 영문판 「공산당 선언」을 구했습니다. 그것 참 신기하대요. 그 책 자체가 신기한데다가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처음 읽어보는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이틀 밤을 새워서 앞에서 4페이지나 5페이지 정도를 사전을 다 찾아가면서 열심히 읽었지요. 전부 읽을 힘도 없고 영어 실력도 부족했지만, 4, 5페이지는 거의 다 외울 정도가 되었어요. 술 먹는 날 다른 사람들이 다 한 마디씩 얘기를 할 때 가소롭다는 듯이 뒷짐 진 채 웃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내가 이런 얘기를 하겠다고 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영문으로 한 10분쯤 외우니까 사람들이 기가 안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세 번쯤을 술값을 안내고 거저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서 제가 얻은 것도 참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사귀고 배웠습니다. 우스운 얘기를 하면, 그 때 사귄 사람 중의 하나가 무슨 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죽었습니다. 1980년에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잠깐 감옥에 들어갔을 때 옆방에 젊은 사람이 있었어요. 재판을 같이 받게 되었는데 그 젊은 사람이 나한테 "혹시 신 누구 아니시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이름을 대며 정 아무개를 아느냐고 그래요.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고 했더니, "옛날에 충무로에서 학생 때 함께 공부했던 키가 꽤 크고 안경 쓴 사람이 생각이 안 나느냐?" 묻더군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충남 예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람은 왜 묻느냐?" 했더니 "사실은 제가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더군요. 옛날 친구의 아들하고 같이 감옥을 산 거지요. 세상은 그런 겁니다. =============================================================================     수라(修羅) ― 백석(1912∼1996)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이 시는 실화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거미 한 마리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밤, 시인이 앉아 있는 자리에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 시인은 무심코 그것을 문 밖으로 내던진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다른 거미, 그것도 큰 거미가 나타났다. 이때부터 시인은 마음이 찌릿해진다. 큰 거미는 어미 거미겠지. 아까 그 작은 거미를 찾으러 왔겠지. 이런 생각에 시인은 몹시 미안하다. 그래서 큰 거미를 작은 거미 버린 곳으로 보내 준다. 이러고 말았으면 실화는 시가 못되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정말 작은 새끼 거미가 등장했다. 그 새끼는 얼마나 작은지, 집중해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발이 보일 정도로 작다. 그 거미를 보고 시인은 가슴이 메어온다. 너는 분명 아까 그 작은 거미의 동생이고 아까 그 큰 거미의 아가구나 싶다. 졸지에 형도 없어지고, 어미도 없어졌으니 이 작은 것은 어찌 살까. 형도 어미도 멀리 내던진 시인은 미안한 마음에 쩔쩔맨다. 가족은 함께 사는 것이다. 어미 거미가 작은 거미를 찾으러 나오는 것처럼, 아가 거미가 “엄마 어디 있어” 울며 따라오는 것처럼 줄줄이 서로 연결되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큰 손이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았다. 과연 저 어미는 아들을 찾았을까. 아가는 엄마에게 안겼을까. 이런저런 걱정으로 시인은 잠을 못 잤을 터. 5월에는, 가족의 달 5월에는 이렇게 수라 같은, 지옥 같은 가족이 없었으면 좋겠다.
소시민의 일상과 현실 풍자 (김영남 시인 작품론) 고명수(시인, 동원대 교수) 1. 유니크한 시인의 등장 : 새로운 시학과 전향적인 태도 시가 난해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독자로 하여금 시 읽기의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이 때에 발랄한 유머와 역설의 언어를 구사하며 가볍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를 쓰는 한 시인이 등장했다. 시를 마치 대중과의 소통을 배제한 채 자아의 성에 갇혀 암호로 가득한 유아론적 에세이를 양산하면 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시단의 풍조를 생각할 때, 즐겁게 읽히면서도 탄탄한 구조를 갖춘 이 시인의 등장은 우리 시단으로 볼 때 분명 새로운 피의 수혈이라 할 것이다. 특히 혼자서만 입안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주관적인 언어가 난무하는 현상이 투명한 보편의 언어에 이르지 못하는 데서 초래된 것이라 본다면, 이 시인의 등장은 우리 시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돌파구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란 새로운 언어의 창조를 통하여 현실을 재구성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일이라 할 때, 이 시인의 미덕은 오랜 기간의 습작으로 인해 기본기가 탄탄한 편이며, 동시에 치열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시적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도인 이 시인은 우선 시를 하나의 상품으로 생각한다. 즉 그의 시 쓰기는 ‘차별화된 인식, 효과적인 표현, 효율적인 구성’이라는 공정을 거쳐 ‘고객감동을 지향’하는 하나의 문화상품의 생산라인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그의 시 생산원칙은 다음의 시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반성하라! 경영, 경제학을 모르는 자. 효율, 효과를 모르는 자. 떠나라! 需要를 무시하는 자. 供給 위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자. 공부도 하지 않고 시위 현장에 따라나온 나는 아예 자폭하라! 그러나 벽, 인식의 벽, 고정관념의 벽…… 그 벽들을 올라타는 재미를 아는 또 다른 나는 살아라! 그 모든 학문에서, 아 답답한 이 詩의 현장에서…… ―「그 시위 현장이 나를 성토하고 있다」 전문 그는 소통이 안 되는 암호 같은 시를 배제한다. 표현의 효율과 효과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는 정통파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공부가 중요하다.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의 시단이 ‘답답’하다고 보고 있다. 이 답답한 한국 시의 현장을 벗어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인 듯하다. 이러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복의 정신이다. ‘인식의 벽’과 ‘고정관념의 벽들’을 올라타는 재미, 그것은 상상력에서 온다. 전복의 상상력, 이것이 그의 시적 전략인 동시에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그러면 상상력에 의해 독자들의 인식과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기 위한 그의 전략계획서를 잠깐 훔쳐보자. 그에게는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몇 개의 ‘스위치’가 있다. 사물에 대한 관점을 역으로 바꾸어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과 다양한 이미지의 열거에 의한 풍요로운 역동적 상상, 고정관념을 지속적으로 전복시키려는 주도적 상상력, 그리고 다양한 이미지의 편린들을 하나의 체계를 이루도록 모으는 조직적 상상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상의 벡터는 일관되게 일상의 진부한 고정관념들을 부수며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지향한다. 「누워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시는 김영남 시의 상상력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가보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가서/ 한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고 하는 앞부분을 읽으면 독자들은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마련이지만, 이 시의 뒷부분에 가면 그러한 상상은 전복되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라는 새로운 의장에 이르게 된다.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번 올라타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이처럼 그의 시법은 매우 기발하고 발랄하며 첨단적이고 현대적인 상상력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주로 쓰는 재료, 즉 내용물은 매우 평범하고 토속적인 다음과 같은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뚱뚱한 여자, 주근깨, 토종개, 달빛, 누룩, 청포도, 홍시, 장작불, 개오동 열매 잠시 경험, 지식, 정보의 작업라인이 분주히 움직이더니 창조적 접근만 허용하는 관리체계의 결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품질 좋은 사고가 제조되었다. < 토종개 한 마리, 검정깨 네 홉, 청포도 3kg, 누룩 두 되 가웃, 대추 한 사발을 달빛에 발효시켜 家釀酒를 양조하겠다>는 개오동 열매 같은 詩, 허약체질과 발기부전에 특효인. ―「변환 스위치가 필요하다」 부분 전라도 장흥, 바다가 가까운 시골에서 자라 서울로 올라온 촌놈인 탓인지 그의 시적 소재는 대체적으로 일상적·서민적이면서도 소박하고 향토적인 건강성을 지닌 것들이 많다. 그리하여 그는 ‘허약체질과 발기부전에 특효인’ 건강한 시, “
1862    캐나다계 미국 시인 - 마크 스트랜드 댓글:  조회:4981  추천:0  2016-11-22
헤켓 만(灣)의 밤들 / 마크 스트랜드(1934-2014) 달, 그리고 구름의 원광이 비추던 곳 부서진 부두의 굽은 등걸은 허공에 떠 있고 바다는 얼룩진 은빛 외투를 입고 있었지 고요한 검은 소나무들, 썰물이면 부두 아래로 썩어가는 생선 냄새를 실어오던 싸늘한 공기, 달빛이 습지와 고사리 덤불 위로 은빛 옷들을 벗어던지던 그런 밤이면 나는 달빛의 청청한 눈빛 아래 옹기종기 모인 작은 오두막에서 물가를 따라 난 작은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지. 그때 나는 진정 알지 못했네. 너무 늦어 돌이킬 수 없게 된 어느 날 아프도록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리라는 것을 삶의 어떤 순간들은 아마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지 모른다. 썩어가는 생선냄새와 달무리가 초현실적으로 어우러져있던 어느 포구에서의 밤들을 기억하는 시인. 그때 그는 아마 모든 청년들처럼 미래를 향한 불안과 열망, 설렘과 자만으로 가득해 있었으리라. 시간은 흘렀고 그는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슬픈 한탄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이 시간들을 통해 시인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생의 아픔이 아니라 아름다움인 것이다. 뼈아픈 그리움 속에 숨어 빛나는 생의 찬가, 바로 그것이 이 시의 메시지인 것이다.                                                         ===■ 영미시 산책 / 백정국===   The New Poetry Handbook / Mark Strand   1 If a man understands a poem, he shall have troubles.   2 If a man lives with a poem, he shall die lonely.   3 If a man lives with two poems, he shall be unfaithful to one.   4 If a man conceives of a poem, he shall have one less child.   5 If a man conceives of two poems, he shall have two children less.   6 If a man wears a crown on his head as he writes, he shall be found out.   7 If a man wears no crown on his head as he writes, he shall deceive no one but himself.   8 If a man gets angry at a poem, he shall be scorned by men.   9 If a man continues to be angry at a poem, he shall be scorned by women.   10 If a man publicly denounces poetry, his shoes will fill with urine.   11 If a man gives up poetry for power, he shall have lots of power.   12 If a man brags about his poems, he shall be loved by fools.   13 If a man brags about his poems and loves fools, he shall write no more.   14 If a man craves attention because of his poems, he shall be like a jackass in moonlight.   15 If a man writes a poem and praises the poem of a fellow, he shall have a beautiful mistress.   16 If a man writes a poem and praises the poem of a fellow overly, he shall drive his mistress away.   17 If a man claims the poem of another, his heart shall double in size.   18 If a man lets his poems go naked, he shall fear death.   19 If a man fears death, he shall be saved by his poems.   20 If a man does not fear death, he may or may not be saved by his poems.   21 If a man finishes a poem, he shall bathe in the blank wake of his passion and be kissed by white paper.     신 시작詩作 지침서 / 마크 스트랜드     1 시 한 편을 이해하면 골칫거리가 생길 것임.   2 시 한 편을 데리고 살면 고독하게 죽게 될 것임.   3 시 두 편을 데리고 살면 한 쪽에 부정不貞을 저지르게 될 것임.   4 시 한 편을 품으면 아이 하나를 덜 낳게 될 것임.   5 시 두 편을 품으면 아이 둘을 덜 낳게 될 것임.   6 왕관을 쓴 채 시를 쓰면 발각되고 말 것임.   7 왕관을 쓰지 않고 시를 쓰면 자기 말고는 속이지 못할 것임.   8 어떤 시에 성을 내면 남자들의 조롱을 받게 될 것임.   9 어떤 시에 계속 성을 내면 여자들의 조롱을 받게 될 것임.   10 대놓고 시를 매도하면 신발에 오줌이 가득 찰 것임.   11 권력을 위해 시를 포기하면 많은 권력을 얻게 될 것임.   12 자기 시에 대해 떠벌리면 바보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임.   13 자기 시에 대해 떠벌리고 바보들을 좋아하면 시를 더는 못 쓰게 될 것임.   14 자기 시를 갖고 인기를 끌려고 안달하면 달빛 아래 수탕나귀 신세가 될 것임.   15 시 한 편을 쓴 후 동료의 시를 칭찬하면 아리따운 연인을 얻게 될 것임.   16 시 한 편을 쓴 후 동료의 시를 지나치게 칭찬하면 연인이 도망치고 말 것임.   17 남의 시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면 심장이 두 배로 커질 것임.   18 자기 시를 나체로 쏘다니게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임.   19 죽음을 두려워하면 자신의 시로 구원받게 될 것임.   20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자신의 시로 구원을 받을 수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임.   21 시 한 편을 탈고하면 열정의 텅 빈 항적航跡에 휩싸여 백지의 입맞춤을 받게 될 것임.     작품 읽기     시인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자의식이 유별난 듯하다. 그들은 시를 쓰는 순간 자신들이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의식한다. 서양의 서사시들이 대개 시신詩神인 뮤즈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고전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물론 문학사가들은 이 현상을 시의 제의적 기원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려들겠지만, 시를 쓰는 사람의 눈으로 단순하게 보면 이것은 자신이 시를 쓰고 있다는 진행형의 흔적을 시에 노골적으로 남기는 행위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시인들은 시를 쓰는 순간뿐만 아니라 시라는 예술 자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매우 자의식적이라는 점이다. 허술한 관찰일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고 가로질러 만났던 시인들의 상당수는 잊지 않고 시에 관한 시를 썼다. 시를 정의하는 시, 시를 칭송하는 시, 시를 쓰는 사람에 관한 시, 시를 읽는 사람에 관한 시,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한 시 등등, 수도 수지만 그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시인들은 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예술 장르와 견주어 보면 이것이 결코 예술의 보편적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쉽다. 과연 우리의 기억 속에 음악에 관한 음악 또는 음악가에 관한 음악이 얼마나 존재하는가? 시각예술은 청각예술보다는 그래도 형편이 좀 나은 편이다. 화가들은 종종 자화상을 그린다. 렘브란트, 르누아르, 반 고흐, 뭉크, 피카소, 샤갈 등 유명하다 싶은 화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화상을 그렸다. 마치 자화상을 그리지 않으면 화가가 아닌 것처럼. 그런데 좀 까다롭게 따져보면 그들이 그린 것은 화가가 아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모델로 한 인간을 것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나 지식 없이 그들의 초상화만 보고 그 그림의 주인공이 화가라는 것을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림에 관한 그림을 떠올리려 하면 난감함은 더욱 커진다. 물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같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벨라스케스가 예외적으로 특별했던 것으로 그의 경우가 모든 화가에게 적용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자는 시인의 시에 대한 독특한 자의식을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 언어예술의 특징에서 찾으려 들지 모른다. 사실 시인에 비해 그 빈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시인의 팔촌격인 소설가들 중에는 자의식적인 작품을 쓴 이들이 더러 있다. 소설에 관한 소설인 『소설』을 썼던 제임스 미치너를 비롯하여 소위 메타픽션이라고 알려진 작품을 쓴 일군의 현대작가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대개 한때의 유행이라고 판단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시인들의 거의 본능에 가까운 시에 대한 집착과는 적잖은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남은 해법은 무엇일까? 시 자체에서 길을 찾아보는 것이다. 마크 스트랜드의 시는 이런 시도에 얼마간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신 시작詩作 지침서」는 제목이 무색하게 시를 쓰는 방법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방법이 아니라 태도가 시의 주된 관심사다. 표면상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스물한 가지의 지침들을 꿰뚫는 공통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시란 시인에게 삶 그 자체 그리고 그 삶의 프리즘이 펼쳐내는 다양한 빛깔이라는 것이다. 시는 두통이고, 고독이고, 결혼이고, 출산이고, 자신감이고, 겸손이고, 평화이고, 저항이고, 유혹이고, 중매쟁이고, 배움이고, 구원이고, 실존이고, 보답이다. 스트랜드가 제시하고 있는 지침들을 통해 시의 자기 회귀적 성격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시’라는 낱말을 모두 ‘인생’이란 낱말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시의 흐름을 전혀 해치지 않고 완벽하게 의미를 소통시킨다.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인에게 시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었다.   스트랜드가 나열하고 있는 이 지침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을 하나 고르라면 목록의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11번을 꼽고 싶다. “권력을 위해 시를 포기하면 많은 권력을 얻게 될 것임.” 시는 결코 권력의 편, 권력의 수단일 수 없으며, 시가 권력의 편, 권력의 수단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은 어떤 모습으로 포장되든 그 속성상 배타적인 힘의 집중을 추구한다. 권력자는 절대 나누는 법이 없다. 기껏해야 나누는 시늉만 할 뿐이다. 독재자들이 시인을 미워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권력을 위해 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스트랜드의 주문은 시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독자들에게도 똑같은 강도로 적용될 수 있다. 권력의 편에 선 시가 시가 아닌 것처럼 권력의 편에 선 인생은 진정한 인생이 아닌 것이다. 시를 쓰고 읽는다는 것은 움켜짐을 유혹하는 세상에서 내려놓고 나누는 지혜와 용기를 배우는 것이다.   ■작가 소개 마크 스트랜드(Mark Strand, 1934~) :캐나다 태생의 미국시인. 번역가, 산문작가, 편집자로도 유명하다. 안티옥 칼리지와 예일대학에서 수학했다. 거의 40년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1990년에 미국의 계관시인이 되었으며, 퓰리처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했다. 평범하면서도 정밀한 언어, 노스탤지어가 물씬 풍기는 어조, 초자연적인 이미저리의 사용 등이 그의 시의 주된 특징을 이룬다.   ///백정국 : 고려대 영어교육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에서 미국문학 석사. Rutgers University - Camden에서 영문학 석사, University of California - Davis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 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현재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부 교수.      ===마크 스트랜드의 위대한 시인 돌아오다                                                                      /임혜신 위대한 시인 돌아오다 마크 스트랜드 구름을 뚫고 빛이 세상으로 쏟아져 내릴 때 우리는 알았지, 위대한 시인이 등장하리란 것을. 그래. 그랬어. 그가 도착했어.   흰 바퀴가 달리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창을 장식한 리무진에서 내려 그는 침착하고 고요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성큼 성큼 홀 안으로 걸어들어 왔지. 사람들은 숨을 죽였어. 그의 날개는 커다랗고 넥타이 넓이나 양복의 스타일등, 차림새는 유행에 뒤져있었어. 그가 말을 하면 상상의 울음으로 하여 허공이 하얗게 변하는 듯 했고 욕망의 벌레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났고 눈엔 눈물이 고였지. 그 위대한 사람은 정말 멋졌으니까. "서둘 필요가 없답니다." 낭송을 마치며 그는 말했어. "세상의 끝은 그저 세상의 끝일뿐이지요. 당신들이 이미 알듯이."   아, 얼마나 그다운 말이던가, 그렇게 그는 떠났어. 세상은 텅 비고 공기는 차갑게 식어버리고 바람조차도 멈추었지. 말해 줘, 거기 있는 당신들, 도대체 시가 뭐야?   시를 조금도 품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사람, 혹시 있어? 시인을 만나면 우리는 묻는다, 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왜 시를 쓰는가? 라고. 그 누구는 시를 영혼의 역사라고 대답한다. 그 누구는 시는 아름다운 것에의 찬가라 한다. 그 누구는 시가 전체를 향한 개인의 저항이라 하며 그 누구는 시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누구는 시는 사람을 타락케 한다고 한다. 그 누구는 죽을 때까지 시를 쓰겠다고 하고 그 누구는 시를 버리겠다고 한다. 삶의 양태 만큼이다 다양한 대답 중 마땅한 정답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 질문은 시가 있는 어디서나 되풀이되어왔다. 왜 시를 쓰는가, 한 잔의 마실 수 있는 물도 되지 못하는 시, 한 장의 따뜻이 덮을 수 있는 담요도 되지 못하는 시, 한 알의 감기약도 못되는 시, 상처를 깨우고 아픔을 되살리는 시를 왜, 무엇을 위하여 쓰는가에 관해 고뇌하지 않을 수 있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시를 쓰는 누구나 품고 있는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함정 같은 것이기도 하다. 시의 가치는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시인과 시인 아닌 모두에게 시비 거리였으며 늘 존재의 위기에 있어왔다. 그러나 요즘보다 더 심각하게 그 위기가 논해지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급격한 과학문명의 발전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드디어 이 세상의 마지막 세대로 밀어내고 있다. 나날이 진보하는 정보통신기술은 점점 더 개인의 자유공간을 허락하지 않으며 유전공학은 이미 인간의 고뇌를 병으로 간주하고 평범의 범주를 벗어나는 상상력을 과도한 두뇌활동으로 해석한다. 과학이 병이라 부르는 사람 혹은 사회의 이러한 구조적 맹점을 치료하기 위해 과학기술은 촌음을 다툰다. 고뇌 없는 세상, 건강하고 흠 없는 세상을 향해 가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머지않아 기계와 사람은 부작용 없이 몸을 섞을 것이며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감정들과 정보들을 담은 살처럼 부드러운 미세한 컴퓨터를 머리 속에 넣을 수 있을 거라 한다. 우리는 감정인간에서 두려움 없는 기능인간으로 바뀔 것이라 한다. 그 때가 되면 고통은 선택의 문제가 될지언정 운명은 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 때가 되면 '지금의 우리의 시'는 없을 것이며 '불치병과도 같은 예술'도 없을 것이라 한다. 예술은 '유희적 경험'으로서만 존재하게 될지 모른다한다.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없을 것이며 나누어 질 수 없는 짐도 없을 것이며 밤을 새우게 하는 연민도 그리움 없을 것이며 채워 질 수 없는 욕망도 없을 것이라 한다. 그것들이 다 지금까지 이 지상에 살아온 우리들의 고통받지 않으려는 본능이 불러낸 우리들의 자신의 산물이라 한다. 때로는 명백했고 또 은근했던 그 탈출과 치유에의 노력의 결과라 한다. 아침마다 햇살과 푸른 초원대?신문이나 뉴스 속의 두려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우리들은 아닌게 아니라 위기의 세대다. 그렇다, 우리는 위기를 낳아 키우고 있는 이들이며, 위기와 더불어 여전히 시를  쓰고 시의 가치에 고뇌하는 바로 그 위기의 어머니가 아닌가. 마크 스트랜드가 1998년 퓰리쳐상을 받은 시집 '눈보라'에서 발췌한 시 '위대한 시인 돌아오다'를 소개하면서 먼저 시의 가치와 위기를 얘기하는 이유는 이 시 전체가 시란 무엇인가? 왜 시를 쓰는가? 에 대한 물음이며 답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시가 무엇이라고 직접 말하는 대신 위대한 시인과 청중이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속의 화자는 위대한 시인이 연사로 나오는 모임에 나간다. 그 시인은 마치 선지자처럼 등장한다.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하늘에 구멍이 열리고 강렬하고도 온화한 햇살이 내리비친다. 그런 신화적 징조 뒤에 구식 옷차림을 한 신과 같은 위엄과 고귀함과 평안함을 지닌 위대한 시인이 등장한다. 그는 시를 읽고 시에 대해 말해주러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나타난다. 교회의 창처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검은 리무진에서 내려 거침없이 실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그, 그 위대한 시인은 마치 사제처럼 단 위에 서서 시를 읽고 시를 이야기한다. 그가 어떤 시를 읽었는지 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화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 그 내용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시인의 만나기 위해 모여 기다렸던 청중들이 감동했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시인이 그 무엇으로인지 세상을 상상의 울음으로 가득 찬 환각의 장소로 변화시켰으며 사람들의 가슴속에 다시금 뜨거운 욕망이라는 벌레가 자라게 했는지, 왜 울었는지, 어떤 욕망이 생겨났는지도 문제가 아니다. 청중들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는, 바로 그 '감동'이 바로 마크 스트랜드가 정의하는 시이다. 시속의 정보가 무엇이었던 간에 그 시인의 말을 통해 '위대한 시인'이라는 관념적 존재를 사랑하고 경외하게 되는 바로 그 행위가 이 시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시의 가치이다. 우리의 몸 속에 그리움과 열망과 아픔의 거대한 꽃을 피고지게 하는  매혹적인 교감, 더 이상 무슨 구차한 설명이 필요할까. 이렇게 놀라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위대한 시인은 결국 청중을 떠나간다. 서둘지 말라고, 이 세상의 끝은 이 세상의 끝일뿐이며 다른 많은 세상들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 세상의 끝에 관해 괴로워하지 말라고 타이르며 죽음과 상실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에게 그 것의 다른 의미를 쥐어주고 떠나는 시인.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것처럼 그 위대한 시인도 떠나간다. 순간일 수밖에 없는 시적 감동도 그때 사라진다. 남는 것은 길고 긴 일상의 공허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시인을 만났던 자들은 감동의 전율이 사라진 후, 더욱 깊어진 슬픔을 경험한다. 세상은 텅 비어지고 공기는 차겁게 식고 바람도 움직이지 않는다. 의문과 불안과 고독이 넘치는 현실만 남는다. 위대한 자도 위대한 말도 다 사라졌다. 이 즈음에서 그 누군가는 시와 시인의 무력함을 탓하고 그들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의 일시성, 과장, 환각, 어쩌면 중독성을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속의 화자는 깨질 듯이 검은 정적의 긴장을 놓치지 않고 묻는다. 얼어붙은 정적의 고독 속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묻는다. 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 있느냐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시인은 다시 묻는다. 그럼 시를 전혀 품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 달리 말해 시적인 아픔과 고뇌와 열망과 사랑과 후회 없이 살다가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역시 없다. 그러나 답 없는 두 질문이 바로 깊은 감동을 준 위대한 시인과 시와 청중이라는 우리들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재확인시켜준다. 시의 향기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것, 순간적이든 영원하든 실재이던 환각이던 그 모든 것 이전에 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그의 시는 말해준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이 비록 위협받는 행위이더라고 당당한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 위기에 처했건 위기로부터 멀리 있건 시는 우리 삶 속에서 자라나 우리와 함께 살고 고뇌하고 기뻐하고 눈물 흘리는 우리들 삶의 속성이다. 시가 탄생하게 되는 그 가장 깊은 곳의 욕망, 그 곳의 염원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것을 바로 시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시의 '위대한 시인'은 '성공한 세상'의 시인이라기보다 '시' 라는 우주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를 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감동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울게 하고 후회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열망하게 하고 의문하게 하고 꿈꾸게 하고 즐거워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는 그 어떤 우주적 힘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날마다 우리가 겪는 일상적인 일들의 깊은 내면공간이며 잠재력이며 그 공간의 넘치는 에너지이다. 이 활달하고 거침없는 힘이 어느 날 구름을 뚫고 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이 세상에 나타나 시를 보여주고 세상의 잠재력을 깨워 함께 교류한다. 그리고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넘나드는 이 위대한 시인은 다시 평화롭게 빛이 쏟아지는 어느 곳으로 천사처럼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떠나간다. 우리는 다시 홀로 남는다. 그러나 둘러보니 모든 이들 속에 시의 흔적, 감동의 흔적, 그 마력의 조각들이 묻어있지 않은가,   시의 보편성을 멋지게 시화한 그의 시를 읽으며 나 또한 이렇게 감동한다. 그가 거침없이 외쳐대는 '위대한 시인'이란 말과 '욕망의 벌레'란 말과 '자유로움'이란 말과 '상상의 울음'이란 말과 '세상의 끝'이라는 말과 '시를 조금도 품지 않고 살다 죽을 수 있느냐?' 는 질문을 따라가 이 시속의 청중들처럼 웅장하고 비극적이며 당당한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시를 읽는 나의 행위를 당위시키는 이 시의 당당함이 든든하다. 존재론적 만족을 준다. 우리들은 우리가 헛되이 연연하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그러면서 수없이 후회하고 의문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기의 어머니인 우리세대의 불안은 그래서 더욱 깊어간다. 그런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이런 당당함을 필요로 한다. 사색과 고뇌가 깊을 대로 깊어진 시인, 저 높은 곳에 선 시인, 마크 스트랜드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당신들이 감동하거든 감동하게 내버려두라고. 당신들이 잠시 시의 환각에 빠지거든 빠지게 두라고, 당신들이 고뇌하거든 고뇌하게 두라고, 당신들이 위기를 걱정하게 되거든 걱정하게 두라고, 당신들이 한 잔의 물도 한 장의 담요도 한 알의 감기약도 못되는 시를 쓰고 읽거든 쓰고 읽게 내버려두라고, 위기의 시인을 위기의 시인이게 내버려두라고. 왜냐하면 시도 시의 위기도 아직 우리에게는  병이 아니라 사랑이므로. 시 원문 The Great Poet Returns When the light poured down through a hole in the clouds, We knew the great poet was going to show. And he did. A limousine with all white tires and stained-glass windows Dropped him off. And then, with a clear and soundless fluency, He strode into the hall. There was a hush. His wings were big. The cut of his suit, the width if his tie, were out of date. When he spoke, the air seemed whitened by imagined cries. The worm of desire bore into the heart of everyone there. There were tears in their eyes. The great one was better than ever. "No need to rush," he said at the close of the reading, " the end Of the world is only the end of the world as you know it." How like him, everyone thought. Then he was gone, And the world was a blank. It was cold and the air was still. Tell me, you people out there, what is poetry anyway?        Can anyone die without even a little?   신간 '빈방의 빛:시인이 말하는 호퍼' '빈방의 빛: 시인이 말하는 호퍼'는 시인 마크 스트랜드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30점에 대해 쓴 글이다. 때론 에세이처럼 때론 미학 비평처럼 써내려간 이 글들은 모두 시인의 글이라는 점에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호퍼의 그림은 사회상의 기록도, 불행에 대한 은유도 아니다. 또한 미국인의 심리적 기질 같은 어떤 조건들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부정확하기는 마찬가지다.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_ 13~14쪽   미국의 현대미술 작가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작가를 꼽으라면 많은 이가 주저 없이 호퍼를 꼽는다. 특히 그의 그림 「나이트호크」는 현대 미국인의 일상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이해되었고, 그런 이유로 광고나 영화 같은 많은 대중문화 양식이 '호퍼 스타일'을 차용했다. 호퍼 스타일은 팝아트처럼 일상적인 오브제가 뿜어내는 기이한 거리감과 고독감 그리고 독특한 빛 표현에서 비롯되는데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호퍼 스타일의 활용 예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인기몰이를 한 인터넷 쇼핑몰의 TV 광고가 대표적이다.   특별한 소재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일상의 한 장면을 멈춰 세운 듯한 호퍼 스타일에 왜 우리는 빠져드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그의 그림은 20세기 초 미국인의 삶의 변화에서 온 만족감과 불안감을 보여준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빈방의 빛'의 작가 스트랜드는 이런 평가에 불만을 표한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왜 그토록 다양한 "관객이 그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스트랜드가 보기에 호퍼는 일상을 그려냄으로써 일상의 이면을 끄집어낸 화가다. 그 이면을 마주해 관객이 느끼는 건 고독이라기보다는 낯섦이다. 호퍼를 '사실주의 화가'라 부른다면 이때 '사실'은 낯선 "가상 공간"에 자리한다. '평이한 일상'이라는 주제가 우리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보면 볼수록 낯설어 결국에는 완전히 생경한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심란할 정도로 조용하고, 방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끝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다." _ 113쪽 호퍼의 그림이 지니는 이러한 역설적인 측면, 함께 있으면서도 등을 돌리고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면서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즉 "떠남과 머무름의 역설"이라는 자못 시적인 매력을 스트랜드는 읽어낸다. 이것이 바로 어느 미술비평가도 찾아내지 못한, 그가 시인이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호퍼 스타일의 숨은 매력이다. 떠남과 머무름의 역설은 그림의 기하학적 구성과 서사적 장치의 상호작용으로 더욱 강렬해진다. 예를 들어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다리꼴 구성은 소실점을 캔버스 밖에 머물게 함으로써 미지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창문의 열린 틈에 칠해진 아주 어두운 색은 알 수 없는 깊이감을 만든다. 이 '알 수 없는 장치'들에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 관객들은 낯익은 풍경이 갑자기 낯선 풍경으로 변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호퍼의 빛 처리는 이러한 효과에 힘을 더한다. 그가 그린 빛은 "이상하게도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벽이나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이 달라붙는 강도가 상당해서 어느 물체(형태)에 빛이 드리워진 게 아니라 빛이 곧 물체(형태)를 가장하며 양감(量感)을 뿜어내는 듯하다. 모네의 빛이 사방으로 부서지고 흐른다면 호퍼의 빛은 단단하고 정지되어 있다. 빛의 정지는 궁극의 정지다. 호퍼의 그림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단절된 "가상 세계"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빛의 이러한 성격은 호퍼가 그린 공간의 성격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는데 당연히 기억에 남지 않은 것들은 축소하거나 삭제했다. 텅 빈 공간에 남은 것이라곤 과감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빛뿐이다.   "1963년에 그려진 호퍼의 마지막 걸작인 이 그림은 우리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단순히 우리를 제외한 공간이 아닌, 우리를 비워낸 공간이다. 세피아색 벽에 떨어진 바랜 노란빛은 그 순간성의 마지막 장면을 상연하는 듯하니, 그만의 완벽한 서사도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_ 103쪽   스트랜드는 평이하고 절제된 언어가 빚어내는 기이한 초현실적 이미지의 시를 쓰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시는 종종 호퍼의 그림과 비교된다. 오랫동안 스트랜드의 시를 읽어온 옮긴이 박상미는 『빈방의 빛』이 스트랜드라는 시인의 특별한 시각을 담은 책이라는 점을 유념하며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그의 시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그 모습은 어쩔 수 없이 호퍼를 닮았다고 말이다. 스트랜드는 이 책에서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그림의 분위기뿐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 그리고 그림의 초월적인 깊이까지도 섬세하게 압축해낸다. 그가 호퍼의 공간을 시간적인 은유로 표현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호퍼의 작품을 이해하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다고 말해준다." _ 114~115쪽 스트랜드의 이와 같은 지적은 지금까지 우리가 호퍼를 감상해온 방식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스트랜드식으로 호퍼를 읽어봄으로써 호퍼의 그림을 감상하는 다른 차원을 경험할 뿐 아니라 예술을 보는 전반적인 시각까지 변하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림을 볼 때 필요한 건 미술사적인 지식과 비평적 관찰뿐만이 아니다. 스트랜드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시각, 명철한 시정(詩情)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_ 115쪽   결국 이 책은 그 끝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독자를 호퍼의 그림 앞에 앉힌다. 이번에는 각자의 ‘스타일’대로 호퍼 스타일과 마주해보라는 요구다.  마크 스트랜드 지음 |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 최근에 작고한 시인의 작품을 꺼내 보련다. 미국의 계관시인(미국은 의회도서관이 해마다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을 지명한다)이었던 마크 스트랜드(1934~2014)가 1978년에 발표한 ‘나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비가(悲歌)’(Elegy for My Father)라는 아주 긴 시인데, 일부만 여기 옮긴다.  ▲ 길종만 기자 1. 빈 육체  손은 당신의 손이고, 팔도 당신의 팔인데,  당신은 거기에 없었다.    당신의 눈이지만, 닫혀서 눈이 떠지지 않았지.  …(중략)…  2. 대답들  당신은 왜 여행을 하셨나요?  집이 추웠기 때문이지.  당신은 왜 여행을 하셨나요?  하루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기까지 내가 언제나 해온 일이었으니까. 당신은 어떤 옷을 입었나요?  남색 양복, 하얀 셔츠, 노란색 타이, 그리고 노란색 양말. 당신은 어떤 옷을 입었나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어. 고통의 스카프가 나를 따뜻하게 해줬지. 누구랑 잤나요?  매일 밤 다른 여자와 잤지.  누구랑 잤나요?  나 혼자 잤어. 난 언제나 혼자 잤지.  왜 내게 거짓말을 했나요?  난 내가 항상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했어.  왜 내게 거짓말을 했나요?  진실도 아무렇지도 않게 속일 때가 있으니까 그런데 난 진실을 사랑해. 왜 떠나려고 해요?  이제는 어떤 것도 내게 그다지 의미가 없으니까. 왜 떠나려고 해요?  나도 모르겠어. 왜 가려는지 나도 알지 못했지.  얼마나 오래 제가 당신을 기다려야 하나요?  나를 기다리지 마라. 피곤해서 그만 눕고 싶구나. 피곤해서 쉬고 싶은가요?  그래, 난 지쳤어 그래서 쉬고 싶어.  …(후략)  1. THE EMPTY BODY  The hands were yours, the arms were yours,  But you were not there.  The eyes were yours, but they were closed and would not open. ……  2. ANSWERS  Why did you travel?  Because the house was cold.  Why did you travel?  Because it is what I have always done between sunset and sunrise. What did you wear?  I wore a blue suit, a white shirt, yellow tie, and yellow socks. What did you wear?  I wore nothing. A scarf of pain kept me warm.  Who did you sleep with?  I slept with a different woman each night.  Who did you sleep with?  I slept alone. I have always slept alone.  Why did you lie to me?  I always thought I told the truth.  Why did you lie to me?  Because the truth lies like nothing else and I love the truth. Why are you going?  Because nothing means much to me anymore.  Why are you going?  I don‘t know. I have never known.  How long shall I wait for you?  Do not wait for me. I am tired and I want to lie down. Are you tired and do you want to lie down?  Yes, I am tired and I want to lie down.  *    ▲ 최영미 시인///=== 몸은 당신의 몸인데,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없었다. 입관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본 당신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내가 재작년에 아버지를 여의지 않았다면, 이 시에 지금처럼 공감하지 못했으리라. 당신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을 나는 지켜보지 못했다. 그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다면, 나도 내 아버지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이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입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 마크 스트랜드의 시를 읽으며 감정이입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처럼 평생 돌아다니셨다. ‘집이 추워서’ 여행을 떠났다니. 당신을 비난한 내가 부끄럽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자란 마크 스트랜드는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다. 예일대에서 당대의 일류화가 알베르에게서 회화를 배우다 그만 그림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단다. 화가를 꿈꾸었던 시인의 작품답게 이미지가 예사스럽지 않다.  ‘고통의 스카프가 나를 따뜻하게 해줬지.’ 고통을 목에 둘러 늘 따뜻했지. 따뜻한 스카프의 이미지와, 고통이라는 어두운 단어가 결합해 인생의 깊이를 담은 시구가 탄생했다. 개인적인 고통일 수도 있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다. 시대적인 고초도 섞였을 게다.    시인이 아버지를 애도하는 자전적인 시인데, 대화체로 돼 있어 박진감이 넘친다.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는데, 처음엔 비교적 쉬운 (직접적인) 대답을, 나중엔 어려운 대답을 배치했다. 두 대답이 연결돼 있고, 서로 대치하는 듯하지만 실은 같은 말이다. 매일 밤 다른 여자와 자는 남자는 사실 ‘혼자’ 자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 시가 이해 안 된다면, 당신은 행운아이며 축복받은 인생을 산 사람이다. 당신을 낳아준 부모님에게 감사하기를….  아들과 아버지가 실제 나눈 대화를 옮긴 것 같지는 않다. 이승에서는 주고받지 못한,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의문들. 그가 듣고 싶었던 (혹은 듣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대답들로 시를 만들었다. 뒤는 좀 산문적이다. 지루하지 않은 앞부분만 한글로 옮겼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위한 대답이 되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출처: 서울신문]
1861    미국 시인 - 시어도어 로스케 댓글:  조회:6098  추천:1  2016-11-22
===@@===   지나치게 왕성한 생각은 사고가 아니다. - 시어도어 로스케 A mind too active is no mind at all. - Theodore Roethke 등산 명언 10개 ①최고 높이의 산을 오를 때에도 한 번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바바라 월터스 ②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에드먼드 힐러리 ③계곡에서는 안 보일지라도, 모든 산에는 길이 있다. -시어도어 로스케 ④나는 국가의 위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등반할 뿐이다. -주스트 제르바수티 ⑤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다. 산행의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앨버트 머메리 ⑥등산은 인내의 예술이다. - 보이테크 쿠르티카 ⑦굳이 정상에 오를 필요는 없다 –보이테크 쿠르티카, 히말라야 가셔브롬 Ⅳ의 위험한 서벽을 오르고 눈앞의 평탄한 정상을 오르지 않고 하산하며 ⑧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알랑 드 샤뗄리우스 ⑨등산가는 산의 법칙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며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헤르만 후버 ⑩그것이 거기 있기에 –조지 말로리, “왜 에러베스트 산에 오르냐”는 물음에 대답하며  
1860    러시아계 미국 시인 - 조지프 브로드스키 댓글:  조회:4381  추천:0  2016-11-22
    조지프 브로드스키     조지프 브로드스키 (1988)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 1940년 5월 24일 ~ 1996년 1월 28일)는 러시아계 미국인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이다. 원래 이름은 이오시프 알렉산드로비치 브로드스키(러시아어: Ио́сиф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ро́дский)이다. 198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 6월 4일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되어 1977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출생일 1940. 5. 24, 소련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일 1996. 1. 28, 미국 뉴욕 뉴욕시티 국적 소련/미국 요약 러시아 태생의 시인. 본명은 Iosip Aleksandrovich Brodsky. 목차 1987년 중요한 서정적 비가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않은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964년 5년간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비중 있는 작가들이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덕택에 1965년 사면받았다. 1972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고 1977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72∼80년에는 중간중간 미시간대학교와 앤아버대학교의 거주시인으로 있었고 그밖의 다른 학교에서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 주제들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강렬하고 사색적인 필치로 다루고 있다. 러시아어로 쓰인 초기작품 가운데는 〈운문과 시 Stikhotvoreniya i poemy〉(1965)·〈황야의 정거장 Ostanovka v pustyne〉(1970)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이 조지 L. 클라인에 의해 영역되어 〈시선집 Selected Poems〉(1973)으로 나왔는데, 특히 유명한 〈존 던을 위한 비가 Elegy for John Donne〉도 실려 있다. 러시아어와 영어로 쓰인 중요한 작품으로 시선집 〈연설의 일부 A Part of Speech〉(1980)·〈20세기의 역사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1986)·〈우라니아에게 To Urania〉(1988)와 산문모음집인 〈1보다도 작은 Less than One〉(1986)·〈슬픔과 이성에 대해 On Grief and Reason〉(1995)를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와 자신의 인연을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문체로 다룬 산문인 〈Fondamenta degli Incurabili〉(1991)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 사테 페케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5세 때 학교교육을 중단하고 독학으로 철학, 종교사, 폴란드어, 영어 등을 공부한 능력자이시자 1956년 헝가리 사태 이후론 반체저 성향으로 인해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강제추방되어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198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마무시한 경력을 자랑하는 시인이십니다... ^^   1 January 1965 The Wise Men will unlearn your name. Above your head no star will flame. One weary sound will be the same— the hoarse roar of the gale. The shadows fall from your tired eyes as your lone bedside candle dies, for here the calendar breeds nights till stores of candles fail. What prompts this melancholy key? A long familiar melody. It sounds again. So let it be. Let it sound from this night. Let it sound in my hour of death— as gratefulness of eyes and lips for that which sometimes makes us lift our gaze to the far sky. You glare in silence at the wall. Your stocking gapes: no gifts at all. It's clear that you are now too old to trust in good Saint Nick; that it's too late for miracles. —But suddenly, lifting your eyes to heaven's light, you realize: your life is a sheer gift. Constancy Constancy is an evolution of one’s living quarters into a thought: a continuation of a parallelogram or a rectangle by means—as Clausewitz would have put it— of the voice and, ultimately, the gray matter. Ah, shrunken to the size of a brain-cell parlor with a lampshade, an armoire in the “Slavic Glory” fashion, four studded chairs, a sofa, a bed, a bedside table with little medicine bottles left there standing like a kremlin or, better yet, manhattan. To die, to abandon a family, to go away for good, to change hemispheres, to let new ovals be painted into the square—the more volubly will the gray cell insist on its actual measurements, demanding daily sacrifice from the new locale, from the furniture, from the silhouette in a yellow dress; in the end—from your very self. A spider revels in shading especially the fifth corner. Evolution is not a species’ adjustment to a new environment but one’s memories’ triumph over reality, the ichthyosaurus pining for the amoeba, the slack vertebrae of a train thundering in the darkness, past the mussel shells, tightly shut for the night, with their spineless, soggy, pearl-shrouding contents.   참고로 그의 시는 번역본 구하기가 쉽지 않아  영어 원문으로 공유합니다...ㅜㅜ [출처] 조지프 브로드스키 Joseph Brodsky|\\\///===\\\///겨울 물고기 / 조지프 브로드스키 물고기는 겨울에도 산다. 물고기는 산소를 마신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눈으로 얼음장을 헤치며 저기 더 깊은 곳 바다처럼 깊은 곳으로.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물고기는 떠오르고 싶어 한다. 물고기는 빛 없이도 헤엄을 친다. 겨울의 불안한 태양 밑에서. 물고기는 죽지 않으려고 헤엄을 친다. 영원히 같은 물고기의 방식으로.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빙괴 속에 머리를 기대고 차디찬 물속에서 얼어붙는다. 싸늘한 두 눈의 물고기들이. 물고기는 언제나 말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고기에 대한 시도 물고기처럼 목구멍에 걸려 얼어붙는다.  
1859    詩란 마음 비우기로 언어 세우기이다... 댓글:  조회:3730  추천:0  2016-11-22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건축물, 400년간 절벽 지켜 [ 2016년 11월 21일 08시 40분  ]   [인민망 한국어판 ] =탑운산(塔雲山) 도관은 중국 산서(陜西)성 진안(鎭安)현에 위치하고 있다. 해당 건축물은 약 1,665.8m 절벽 위에 지어져 있고 현재까지 400년의 역사를 가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건축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탑운산은 전통적으로 도교 신자들의 명산으로 유명하다. 보탑이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고 고풍스럽고 깔끔한 1개의 관(館), 1개의 탑, 1개의 사찰, 1개의 사당, 9개의 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정관음전(金頂觀音殿)은 탑운산 정상에 지어져 있으며 3면이 절벽에 임하는 위험한 구조를 띄고 있다. 해당 건축물은 청(淸)대 건륭(乾隆) 황제 때부터 5차례를 거쳐 보수작업을 해왔고 올해로 50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2011년도 중국의 가장 아름답고 잠재력 있는 관광지 선발 행사에서 탑운산 관광지는 가장 잠재력 있는 10대 도교 명산으로 선정된 바 있다.    원문 출처: 신화망(新華網)////////////////////////////////////////////////////////////////////// 언어 비우기와 마음 세우기 홍 희 표 (시인·목원대 교수) 2. 시정신의 연원 흔히 임강빈의 시와 삶을 평할 때, 논자들은 그의 선비정신과 중용정신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듯 그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의 풍모를 지닌다. 그의 시에서 전통적인 조선조 선비의 풍모를 논급함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주는 인상이 작용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임강빈에 대한 인상은 필자의 스케치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충청도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80년대에 박용래도 가고, 그 위를 이어 둑길을 맴돌던 한성기도 가고, 그 빈자리 위에 [冬木]의 임강빈이 홀로 우뚝하게 서 있다. 그는 "공명으로써가 아니라 작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겸허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안정된 자세다. 지친 빛이 없다. 시인 임강빈을 마지막 남은 충청도 선비시인이라 한다. 선비의 덕목은 중용―언젠가 70년대 그의 시화전이 다방에서 끝나고, 목척교 뒷골목 선술집에서 우리는 맛있게 막걸리를 마셨다. 그때 마른 입술에서 떨어지는 그의 중용의 뜨겁고 차거움을 몰래 훔쳐보았다. 이러한 임강빈의 인간적 인상은 우리가 그의 시를 말하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점검하고자 할 때, 그 출발점에 놓인다. 왜냐하면 이는 그의 시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표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도 조급함이 없는 여유, 절제된 말과 행동, 그리고 그윽히 풍기는 풍란과 같은 음향, 늘 중심을 지키면서 변화하는 삶에 근본을 일깨워주는 경건한 자세, 이는 시인 임강빈을 이르러 충청도의 전형적인 선비시인이라 이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유이다. 이를 필자는 [문단별곡]에서 임강빈 시인을 "마지막 남은 충청도의 선비시인"이라 지칭한 바 있거니와 그가 지닌 범상치 아니한 침묵과 여백은 그에 대한 이러한 호칭을 더욱 굳어지게 한다. 그러면 선비정신이란 무엇인가. 사대부란 따로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했으니, 백성 중에 덕이 있으면 선비라 하여 벼슬을 시키고, 벼슬하지 못한 사람은 농사를 짓기도, 장인이 되기도, 그리고 장사를 하기도 했으니, 선비, 즉 사민(士民)은 백성의 귀감이 되는 위치로 이들이 곧 선비이다. 선비는 도덕과 학문을 익혀서 예의와 염치를 알고, 항시 언행을 바르게 하여, 불의한 방법으로 영화와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또한 선비는 안빈낙도로 처신하며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으며, 시작이나 서예에 힘써야 한다. 선비는 향촌에서는 행실을 바로 하여 덕행을 몸소 실천하며, 국가의 정치가 잘못되었을 때는 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언하며,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버리고 나설 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본능의 욕구를 억제하고 양심을 키우며 고귀한 정신의 높이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적(私的) 인간이기 이전에 공적(公的) 인간이기를 소망하는 정신이다. 진정한 선비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어려운 자가 수련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니, 선비란 칭호가 아무에게나 섣부르게 불리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임강빈을 선비시인이라 부르고자 함은 그의 인간적 풍모가 바로 그 그윽한 조선 선비의 그것에 닮았음에서다. 그가 40여 년의 문단 경력에 여섯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이는 틀림없는 과작의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과작의 요인은 중용을 바탕으로 한 그의 철저한 시적 절제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공명으로서가 아니라 작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겸허한 입장을 꿋꿋하게 지켜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안정된 자세이며 지친 빛이 없다. 바로 그의 문학적 족적을 지켜온 이 중용이야말로 선비가 지녀야 할 제일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임강빈의 정신적 면모는 그 가계에서 유래되었음을 그는 시를 통해서 고백한다. 먼저 그의 내면을 검열하는 엄격한 기준이 된 자신의 부친을 형성한 부분이다. 조용히 먹을 가신다. 안으로 괸 앙금이랑 섞어 먹을 가신다 연적의 물을 盆에서 자란 느티나무 뿌리에 조금씩 부으시며 다시 먹을 가신다. 붓끝에서만 풀리는 당신의 매듭 한 획 한 字 내려가는 아버지의 隸書 풀리지 않는 매듭이나 풀어가듯 나도 조용히 무릎 꿇는다. 그 行間에 비치는 가랑잎 소리. ― [매듭을 풀며] 전문 먹을 가는 것으로 낙을 삼고 살아오신 아버지 봄바람에 묵향이 일다. 하얀 벽을 응시하다가 옛 한 자를 쓰고 계시다 아직 찍지 않은 낙관 그것에 또한 마음쓰시다. ― [62병동]에서 그것을 부정하고 살아가든 긍정하고 살아가든, 한 인간의 근원은 아버지다. 아버지는 우리의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권위적 존재이다. 더욱이 전통 양반의 가부장적 가계에 있어 아버지의 위상은 거의 초월적으로 자리한다. 우리는 임강빈의 위의 시적 단상을 통해서 그의 부친이 전통적인 유교적 삶의 질서를 규율해 온 어른임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아버지는 객관적 상관물로 전통사회의 선비정신을 표상한다. 이미 과거의 가치관도, 삶의 목적도 무너져 버린 시대에 지난 시대를 떠받들던 지고했던 삶의 양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얼핏 느끼는 것은 근접하기 어려운 경외감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낡은 방식이라 폄하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 시대를 지배한 양반문화이며, 그 속에 어우러져 있는 고고한 기품인 선비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에만 그랬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흉내내고 싶은 품격을 지닌 삶인 것이다. 임강빈의 부친은 바로 그러한 삶의 한 자락을 지키며 살아오신 분임을 위의 시구는 말해준다. 그는 전통적인 유교적 집안의 가통을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었던 인물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임강빈이 그러한 부친의 삶의 모습을 향수와 연민으로 반추하는 음영에서, 그가 그러한 가풍을 이어받았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隸書]는 그 한 편린이다. 거기에는 조선조 지배 계급이 지녔던 기품이 어려 있다. 이 시에 머무는 정점에서 우리는 그 무엇의 숭고한 의미를 체득한다. 거기 소란스러움이 끼어들면, 그윽한 품격의 삶의 양식은 깨어지고 만다. 임강빈의 부친은 바로 그러한 문화를 지키고 살아오신 분이다. 시집의 표제가 『매듭을 풀며』이었거니와 자신의 부친은 바로 "붓끝에서만 풀리는/ 당신의 매듭"을 지니고 살아오신 것이다. 이는 무엇을 표현코자 한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유교적 교양과 예절에 강박된 한 사람을 본다. 그가 삭여야 했을 분노, 그가 목도하여야만 했을 상실감, 그러면서도 그가 자신의 그 삶의 자세를 지녀야 했기에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을 인내, 우리는 우연히 그런 모습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그렇듯 침묵하고 글씨를 쓰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슴에, 그리고 인생에, 더 나가서 세계에 얽힌 매듭을 푸는 것이다. 임강빈 시인은 그런 부친의 삶을 "나도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로 표현했듯 순연히 받아들인다. 그런 가계의 내력이 그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유교적인 사고방식, 생활방식이 체질화되도록 작용했으리라. 임강빈에게서 전통적인 선비정신을 찾고자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계의 또 다른 분위기 속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외할머니 외동딸 하나 어머니는 나 하나 두고 먼저 가셨다 여름에도 버선을 벗은 적이 없던 외할머니 투정을 웃음으로 받아주시던 외할머니 장죽 물고 먼산을 바라보시던 그 마음을 읽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 [외할머니 생각]에서 절도 있는 생활 자세란 자신을 흐트러짐으로부터 단속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자신이 강요하는 것이기에 쉽사리 무너져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심코 넘어가고 말아도 그만인 생활의 규범을 지켜야 하는 것은 체통 있는 사람의 도리였다. 더욱이 여자에게 그것은 더욱 엄숙히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임강빈은 그러한 반듯한 가문에서 아녀자가 지켜야 할 법도를 따른 외조모를 추억한다. 과거란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존재의 시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되짚은 그 과거에로의 시간이란 더욱 분명히 그 시인의 현재에 늘 머물면서 사유와 행동을 규정짓는 엄격한 검열관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이렇듯 그의 외조모를 떠올리는 단상에서도 그의 시적 세계를 이루는 뿌리를 선비정신과 연관지움을 이해하게 된다. 한 시인의 정신세계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인식하고 방향 짓고자 하는 세계와는 다를 수도 있는 그를 둘러싼 외적 조건에 무의식적으로 강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내 딸에는/ 말씀을 헤프게/ 살아온 것 같은데/ 입을 다물고 있다 한다"고 임강빈은 토로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인식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강박하여 주어진 것이다. 임강빈 시인의 선비정신은 그렇듯 그의 가계가 지닌 엄숙한 품격이 자연스럽게 삼투된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무의식적으로 베어든 절도 있는 삶의 자세는 그의 시쓰기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가 순수서정의 시심을 지키면서 간결하고도 세련된 언어를 구사함은 그에서 기인한 바라 할 것이다.   =====================================================================================    그랬다지요 ― 김용택(1948∼ )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봄은 왔다가 간다. 행복한 사람에게도, 불행한 사람에게도 봄은 왔다가 간다. 지금은 봄과 여름 사이, 봄을 바라기엔 늦었고 여름을 만끽하기엔 조금 이르다. 김용택 시인의 ‘그랬다지요’는 이런 때에 읽는 시다. 봄이 왔고, 봄이 가는 이야기. 이 시는 딱 지금 계절을 담고 있다. 시의 중심에는 “사는 게 이게 아닌데”라는 탄식이 있다. 바라는 삶을 그림처럼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게 아닌데’ 하면서 아침을 맞고, ‘내가 바라던 삶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 탄식이란 무척 지겹고 답답한 표현인 셈이다.   그런데 시인은 탄식을 못났다고 타박하지 않고 마치 봄날의 꽃잎처럼 흩날리는 것으로 그렸다. ‘이게 아닌데’ 흔들리는 사이에 인생의 봄날은 왔고, ‘이게 아닌데’ 좌절하는 사이에 인생의 봄날은 갔다. 나만 그랬을까. 우리도 그랬다. 우리만 그랬을까. 그들도 그랬다. 탄식이 꽃잎처럼 쌓이면서 시간은 지나가고 인생은 만들어졌다. 산 사람의 하루는 소중한 것이지만, 매일이 의미로 채워지기는 어렵다. 사람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지만, 그 인생이 온통 반짝이기는 힘들다. 반짝이지 않는다고 해서 삶은 가치 없을까. 이 시는 ‘이게 아닌데’의 삶을 두둔한다. 그 이유는 완벽하지 못한 삶, 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삶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그 마음 또한 소중하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진심으로 나만 미워하는 것 같을 때, 이 시를 읽자. 내 인생은 어쩜 이렇게도 가여울까 싶을 때, 남들만 행복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는 대신 가는 봄날을 바라보자. ‘이게 아닌데’를 말한다고 해서 내 인생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봄은 왔다가 간다. 그리고 간 봄은 다시 올 것이다.
1858    자연속의 삶을 노래한 미국 시인 - 로버트 프로스트 댓글:  조회:6243  추천:0  2016-11-21
자연 속의 삶을 노래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Robert Lee Frost     출생일 1874년 03월 26일 사망일 1963년 01월 29일 국적 미국 대표작 《뉴햄프셔》, 《서쪽으로 흐르는 강》, 《저 너머 산맥》, 《표지목》, 《개척지에서》 등 전원 생활의 경험을 살려 단순한 문장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박한 삶을 담아냈다. 목차 로버트 프로스트 프로스트는 휘트먼과 함께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일상적 언어와 리듬으로 한가하고 평범한 일상의 풍물을 담담하게 묘사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시를 썼다. 뉴햄프셔의 농장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아름다운 자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으며, 깊은 성찰을 통해 평범하고 단순한 문장과 일상적인 소재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4차례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았고, 1961년 J.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 시인으로 시를 낭송하면서 전 국민에게 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미국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았다. 로버트 리 프로스트는 1874년 3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프레스콧 프로스트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남북전쟁 때 남군에 복무한 인물로,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 이사벨 무디 프로스트는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교사였다. 프로스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0세 때 음주와 도박에 빠졌던 아버지가 매사추세츠 주에서 폐결핵으로 객사했는데,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가져오고자 어머니와 함께 매사추세츠에 갔다가 돈이 떨어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성실하고 강인한 의지를 지녔으며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어머니는 교사로 일하면서 프로스트와 여동생을 키웠다. 프로스트에게 문학적으로나 인생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프로스트는 어린 시절 독서나 학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야구와 축구 등의 활동적인 일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아이들이 학업을 끝마칠 수 있게 노력한 어머니 덕분에 뉴햄프셔 세일럼 문법학교를 졸업했다. 프로스트는 로렌스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학업에 진지하게 열중해서 우등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다트머스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방황을 계속하다가 한 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고, 학교 교사, 방적공, 신문기자 등의 일을 전전했다. 21세 때에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 함께 졸업생 대표를 했던 엘리너 화이트와 결혼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사립학교에서 아내와 함께 일을 맡아 보았다. 그런 한편 틈틈이 시를 써서 잡지에 투고했다. 23세 때 프로스트는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결핵으로 의심되는 병을 얻은 데다 아내와 어머니마저 건강이 좋지 않아 2년 만에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받은 뉴햄프셔 지역의 농장에 정착하고 생활 습관을 바꾸었다. 그는 농사, 양계 등을 했으나 처음 해 보는 농부 생활은 쉽지 않았고, 결국 5년여 만에 지역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농부로서의 자질은 없었지만 프로스트는 스스로를 농부로 소개하곤 했고, 특히 식물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아마 농사보다는 식물을 관찰하면서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농사일에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때로는 혼자서 산책 나가기를 즐겼고, 이웃 농장까지 걸어서 놀러다니곤 했다. 그리고 산책길에서 마주친 식물들과 풍경들을 꾸준히 시로 노래했다. 그의 걸작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였으나, 당시에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1912년, 프로스트는 농장을 팔고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런던 외곽의 시골집을 임대한 뒤 그곳에서 그동안 썼던 시들을 정리해 런던의 데이비드 너트 출판사에 보냈고, 이듬해 첫 시집 《소년의 의지》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이 호평을 받으면서 그다음 해에 두 번째 시집 《보스턴의 북쪽》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이 두 시집에는 대표작인 〈풀베기〉, 〈담장 고치기〉, 〈고용인의 죽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프로스트는 에즈라 파운드를 알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많은 작가,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예이츠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가했다. 이때 친분을 나누었던 시인 W. W. 깁슨과 L. 애버크롬비의 권유로 전원생활을 하며 시를 쓰고자 글로스터셔의 시골 마을로 이주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이 무렵 영국에서의 호평을 토대로 미국에서도 《소년의 의지》가 출간되어 시인으로서 제법 이름을 얻게 되었다. 샤프츠베리에 있는 프로스트의 집 미국에서는 먼저 뉴햄프셔 지역 프랭코니아에 작은 농장을 사서 농사를 짓다가 2년 후 앰허스트 대학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했다. 이후 프로스트는 죽을 때까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미시간 대학, 하버드 대학, 다트머스 대학, 앰허스트 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또한 농사일을 직접 하지는 못했으나 농장을 구입하고 시간이 날 때면 그곳에서 지냈다. 그의 시들은 스스로를 농부로 여기고 싶은 욕망과 농장에서 지낸 시간들에 기반을 둔 것이다. 1923년에는 《시선집》과 《뉴햄프셔》,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이듬해 《뉴햄프셔》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28년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 1930년에는 《시선집》을 출간하고, 이듬해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4번이나 퓰리처상을 수상한 기록을 세웠는데, 1937년 《저 너머 산맥》으로 세 번째 퓰리처상을, 1942년 《표지목》으로 네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이 외에도 신과 대결하는 인간의 고뇌를 그린 시극 《이성의 가면》, 현대를 배경으로 성서의 인물을 등장시킨 시극 《자비의 가면》을 펴내기도 했다. 1950년대에 프로스트는 미국의 국민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점하였으며, 75세와 85세 생일에는 미 상원이 생일 축사를 보내기로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말년에는 하버드 대학 명예 문학박사, 앰허스트 대학 문학박사, 다트머스 대학 법학박사, 영국 옥스퍼드 및 케임브리지 대학과 아일랜드 국립대학에서도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영국을 방문했다. 또한 1948년에는 T. S. 엘리엇, 헤밍웨이 등과 함께 1946년 전범으로 지목된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1961년 J.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서 〈아낌없는 선물〉을 낭송하는 등 강연과 외부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버몬트 베닝턴에 있는 프로스트 무덤 1962년에 마지막 시집 《개척지에서》를 펴냈으며, 그해 케네디 대통령 문화 특사로 모스크바를 방문,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와 회담했다. 1963년에는 볼링겐 시학상을 받았다. 그해 1월 29일 폐색전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버몬트 베닝턴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로버트 프로스트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미국) 로버트 프로스트 시 모음 로버트 프로스트   1874~1963   미국의 시인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교사, 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1912년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토마스·브룩 등 영국의 시인과 사귈 기회를 얻었으며 그들의 추천으로 첫 시집 《소년의 의지》가 런던에서 출판되었고, 이어 《보스턴의 북쪽》이 출간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소박한 농민과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현대 미국 시인 중에서 가장 순수한 고전적 시인으로 꼽힌다. 일상적인 언어와 익숙한 리듬, 평범한 생활에서 취한 상징을 사용하여 뉴잉글랜드 지방 생활의 평온함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의 시집으로는 《산의 골짜기》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 《표지의 나무》 등이 있다.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고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자작나무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 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있는 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 딸그락거리고 그 얼음 에나멜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 오색 찬란하게 빛난다   어느새 따뜻한 햇빛은 그것들을 녹여 굳어진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한다   그 부서진 유리더미를 쓸어 치운다면 당신은 하늘 속 천정이 허물어져 버렸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얼음 무게에 못 이겨 말라붙은 고사리에 끝이 닿도록 휘어지지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비록 한 번 휜 채 오래 있으면 다시 꼿꼿이 서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세월이 지나면 머리 감은 아가씨가 햇빛에 머리를 말리려고   무릎꿇고 엎드려 머리를 풀어던지듯 잎을 땅에 끌며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음 사태가 나무를 휘게 했다는 사실로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소를 데리러 나왔던 아이가 나무들을 휘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시골 구석에 살기 때문에 야구도 못 배우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휠 때까지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 오르내리며 정복하는 소년 그리하여 그는 나무에 성급히 기어오르지 않는 법을   그래서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나무 꼭대기로 기어 오를 자세를 취하고   우리가 잔을 찰찰 넘치게 채울 때 그렇듯 조심스럽게 기어 오른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발이 먼저 닿도록 하면서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 내린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도 돌아가고 싶어한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주면서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 가고 싶다 하늘을 향해, 설백의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에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 끝을 늘어뜨려 다시 땅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 흔드는 이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         창가의 나무   내 창가에 서 잇는 나무, 창가의 나무여 밤이 오면 창틀은 내리게 마련이지만   나와 나 사이의 커튼은 결코 치지 않으련다.     대지에서 치솟은 몽롱한 꿈의 머리 구름에 이어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   네가 소리내어 말하는 가벼운 말이 모두 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나무여, 바람에 흔들리는 네 모습을 보았다. 만일 너도 잠든 내 모습을 보았다면   내가 자유를 잃고 밀려 흘러가 거의 절망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리라.     운명의 여신이 우리 머리를 마주 보게 한 그 날 그녀의 그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네 머리는 바깥 날씨에 많이 관련되고 내 머리는 마음 속 날씨에 관련되어 있으니.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이것이 누구의 숲인지 나는 알겠다 물론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재가 여기 서서 눈이 가득 쌓이는 자기 숲을 보고 있음을 못 볼 것이다.     내 작은 말은, 근처에 농가도 없고 숲이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한 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에 서 있음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내 작은 말은 방울을 흔들어 무슨 잘못이라도 있느냐고 묻는다   다른 소리라고는 다만 스쳐가는 조용한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뿐,     아름답고 어둡고 아늑한 숲 속.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밤에 익숙해지며     나는 어느새 밤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빗속을 홀로 거닐다 빗속에 되돌아왔다. 거리 끝 불빛 없는 곳까지 거닐다 왔다.   쓸쓸한 느낌이 드는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저녁 순시를 하는 경관이 곁을 스쳐 지나쳐도 얼굴을 숙이고 모르는 채 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발소리를 죽이고 멀리서부터 들려와 다른 길거리를 통해 집들을 건너서 그 어떤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나를 부르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이별을 알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멀리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높다란 곳에 빛나는 큰 시계가 하늘에 걸려 있어     지금 시대가 나쁘지도 또 좋지도 않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밤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불과 얼음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 끝날 거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내가 맛 본 욕망에 비춰 보면 나는 불로 끝난다는 사람들 편을 들고 싶다.   그러나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파괴하는 데는 얼음도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할 만큼 나는 증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걸로 충분하다 ============================================================ 이라는 시로 널리 알려진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명언. 자연과 전원생활을 예찬하고,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면서 뒷심있는 울림을 준 시인이다 시 속에 담긴 서정적으로 그려낸 인생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 Spring Pools   Robert Frost(1875-1963)   These pools that, though in forests, still reflect The total sky almost without defect, And like the flowers beside them, chill and shiver, Will like the flowers beside them soon be gone, And yet not out by any brook or river, But up by roots to bring dark foliage on.   The trees that have it in their pent-up buds To darken nature and be summer woods⎯ Let them think twice before they use their powers To blot out and drink up and sweep away These flowery waters and these watery flowers From snow that melted only yesterday.     봄의 물웅덩이들   로버트 프로스트(1875-1963) 김철 역   숲속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온 하늘을 거의 완벽하게 비춰 주며 그들 옆의 꽃들처럼 추워서 떠는 이 물구덩이들은 곧 그들 옆의 꽃들처럼 사라지리라. 구것도 시내나 강을 통해 밖으로가 아니라 뿌리를 통해 검푸른 잎들을 태어나게 하면서.   자연을 검푸르게 하고 여름 숲이 될 그 무엇이 그들의 갇힌 봉오리마다 들어 있는 나무들. 나무들이 그들의 힘을 발휘하여, 겨우 어제서야 녹은 눈에서생겨 난 이 꽃 같은 물과 물 같은 꽃들을 지워 없애 버리고, 빨아 마셔 버리고, 휩쓸어 버리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생각을 깊이 하도록 하라.   역자 해설: 1875년 3월 26일 미국 샌 프랜시스코에서 태어나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뉴 햄프셔주의 로렌스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스무 살에 결혼하여 시작생활을 하던 그는 1911년 아내와 네 아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1914년 『보스튼의 북쪽(North of Boston)』d이라는 시집으로 문명을 떨쳤다. 1915년 미국으로 돌아와 미시간대학, 하버드대학 등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미국에서 유일하게 4회(1924년, 1931년, 1937년, 1942년)에 걸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농장 생활을 바탕으로 일상 풍물을 담담하게 표현하면서 신비감이 깃든 서정성을 보여 주는 지성적인 시를 주로 쓴 시극도 2편[「이성의 가면극(A Masque of Reason)」, 「자비의 가면극(A Masque of Mercy)」] 쓴 바 있는 그는 그의 시집 『시 모음집(Collected Poems)』에 실린, 한국과 일본 인터넷 그 어느 구석에서도 번역을 찾아볼 수 없는, 시론(詩論) 「The Figure a Poem Makes(시의 특질(特質)-필자 역)」에서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미국에서도 아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는 이 문장의 뜻은, , 즉 라고 할 수 있다. 실험적 신시 운동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던 그는 현재 미국 시인 중 최장로(最長老) 대우를 받고 있다. 1954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약 1년 간 영문학을 연구하던 피천득(皮千得, 1910-2007) 교수는,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하버드대학교 영문학과의 하워드 존스(Howard Mumford Jones, 1892-1980) 교수의 자택에서 로버트 프로스트 시인을 만나 셋이서 밤늦도록 담소를 나누면서 우의를 다진 일이 있다고 했다.   여기 소개하는 「봄의 물웅덩이들(Spring Pools)」은 우리나라 번역가들이 일본 번역 「春の池(はるのいけ)」를 그대로 따 와 「봄의 연못, 봄의 연못들」이라고 번역들 하고 있으나, 크기로 보면 , , 의 순이니 은 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미답(未踏)의 길(The Road Not Taken)」, 「자작나무숲(Birches)」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애송되고 있는 「봉의 웅덩이들(Spring Pools)」는 다음에 소개하고자 하는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내가 부스러뜨리는 이 빵(This Bread I Break)」처럼 자연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로서 요즘 유행하는 시처럼 자의적이고 현학적이며 요설적인 요소가 일절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시의 중심에는 언제나 지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끝)                                                                      명언;= 숲을 걸었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나는 인적이 드문 길을 택했다..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 Robert Frost - === 로버트 프로스트 I     당신은 내가 당신의 시를 읽고 짐작하고 있던 것같이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래 되어서 헐었으나, 아직도 튼튼하게 보이는 당신의 혁대는 당신이 허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거친 당신의 손은 농부의 손이었습니다. 당신은 이상스러운 이론을 갖지 않고 지성을 뽐내지도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오래 전에 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컨데 나는 평범한 사람이요. 나는 나의 학교를 좋아하고 나는 나의 농장을 좋아하고 나는 나의 국민을 좋아하오. 그저 평범하오.'   그리고 시인은 정직하여야 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생각하기를 시인은 자기 멋대로 악한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시도 악하여야 될 것이다. 나는 성실치 않은 것을 싫어한다.'   당신은 고루하지 아니하고 편벽되지 않고, 당신의 인간성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당신에게도 가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누른 숲속에 길이 둘로 갈려 있다.'   또 '한때는 꽃잎을 사모도 했었으나 잎들이 내 마음에 더 짙게 사무친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고,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가는 것도 좋고 갔다가 돌아오는 것도 좋다.'   한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당신은 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철학자의 탈은 언제나 그들의 인생을 한 곬으로 규정지으려는 데 있다.'   당신은 사실 하나하나를 그것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탄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일라 부룩"이라는 시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존재 그대로를 사랑한다.'   당신은 시인이기 전에 농부입니다.   "풀베기", "사과 딴 뒤에", "머슴의 죽음", "목장" 등 여러 시들은 농부인 당신이 아니면 못할 말들입니다.   당신의 시골은 돌이 많고 눈이 많이 내리는 미국 동북방 뉴잉글랜드의 농촌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가리켜 '뉴잉글랜드 시인'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시의 배경이 이 지역에 놓여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시가 곧 이 지방의 사람들의 생활인 까닭입니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자연 시인입니다.   당신의 시 중에는 동양 묵화와 같은 경지를 가진 것들이 있고, 한시의 품격을 지닌 것들이 많습니다. '프로스트는 프로스트(frost, 서리)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의 시는 화려하지 않고 그윽하며 어슴프레한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는 고요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유머와 위트와 예지가 무늬를 놓고 있습니다.   '시는 기쁨으로 시작하여 예지로 끝난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 예지는 냉철하고 현명한 예지가 아니라, 인생의 슬픈 음악을 들어온 인정 있고 이해성 있는 예지인 것입니다.   당신은 애인과 같이 인생을 사랑했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이 길 없는 숲속과 같아서 거미줄이 얼굴에 엉키고 나뭇가지에 눈이 찔려 눈물이 날 때, 현실을 떠나가고 싶어하다가도 당신은 얼마 아니 있다가 현실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세상과 말다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싸움입니다. 당신의 시에서는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대치되는 것 같으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은 시의 내용과 같이 소박하고 평이합니다. 이십세기 다른 시인과 같이 병적으로 괴상하고 난해하지 아니합니다. 당신은 휘트맨 이래 미국의 가장 위대한 민주적인 시인입니다.   당신의 시는 뉴잉글랜드 과수원에 사과가 열리고, 겨울이면 그 산과 들에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이 영원한 것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 II     미국 현대의 최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는 1874년 생이다. 그러니까 금년이 1백년이 되는 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54 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하버드 대학 하워드 존스 교수가 프로스트와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다. 그날 밤 늦도록 우리 세 사람은 문학 이야기를 하였다.   프로스트의 거친 손은 그가 농부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래 띠어서 헐어졌으나 아직도 튼튼하게 보이는 그의 혁대는 그가 소박하고 허식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는 이상스러운 철학을 갖지 않고 지성을 뽐내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자기의 농장을 좋아하고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인은 누구보다도 정직한 사람이라야 한다고 하였다. 프로스트는 자연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다만 자연을 감상하는 시인은 아니다.   시인이 되기 전에 그는 농부였다. 그는 촌사람과 같이 살아왔다. 그의 시골은 미국 동북방 뉴잉글랜드다. 그의 자연은 아름답고 온화한 것이 아니고 땅이 기름지지 않고 돌이 많은 차고 황량한 자연이다.   이 자연을 읊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고요한 목소리다. 그의 자연은 묵화로 그린 겨울 풍경과도 같다.   그는 자연의 시인인 동시에 그 자연 속에서 사는 인간의 시인이다. 인생의 슬픈 일을 많이 본 눈으로 그는 애정을 가지고 세상을 대한다.   프로스트는 땅에다 뿌리를 박고 가지에다 꽃을 피게 하였다. 때로는 리얼한 낭만이 숨바꼭질을 하며 때로는 갈등도 있으나 그는 이 두 갈래를 원만히 융화시킨다.   프로스트는 순진하고 소박한 시인이다. 그의 말은 쉬운 동사를 쓰며 형용사를 많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바를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자기와 같이 진리의 기쁨을 나누자고 친절한 초대를 한다. 그의 시를 읽을 때면 마음이 놓이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나도 한때는 백화나무를 타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꿈꿀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심려에 지쳤을 때   그리고 인생이 길 없는 숲속과 너무나 같을 때 얼굴이   달고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간지러울 때 내 눈 하나가   작은 나무 가지에 스쳐 눈물이 흐를 때   나는 잠시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새 시작을   하고 싶습니다.   운명이 나를 잘못 이해하고   반만 내 원을 들어주어   나를 데려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자작나무)에서     그를 마지막, 지금 생각하면 영영 마지막 만난 것은 내가 보스톤을 떠나던 날 오후였다. 전화를 걸었더니 곧 오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 집 문 앞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우정에 대한 몇마디 말과 서명을 한 시집을 나에게 주고 나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나를 껴안고 오래 놓지 않았다.                     
1857    풍자시란 삶의 그라프를 조각하여 통쾌함을 나타내는 시... 댓글:  조회:3644  추천:0  2016-11-21
    11월 21일' 북경에 첫눈이...@@]   안휘성 황산풍경유람구(安徽黄山风景区), 11월 22일 저녁, 첫눈이...@@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낙서 오 봉 옥 16 시인은 응당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갈 때 보게 되는 비디오의 삼류영화를 보고도 울 줄 알아야 하고 저 숱한 뽕짝을 듣다가도 평펑 울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에도 웃음을 풍기는 사람이 시인이다. 가족과 주위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즐거움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진짜 시인이다. 결국 시인은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인 것이다. 17 대학을 가보면 가끔씩 벽시가 눈에 띈다.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심이라도 가져줄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당면 투쟁의 의미를 정서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벽에 붙이는 것이다. 그런 벽시는 대부분의 경우 문예일꾼들이 조직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꽤나 세련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못쓴 시라 하더라도 일반 학우들이 써서 붙인 것을 보고 싶다. 자신들이 그것을 즐기면서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문학예술의 주체와 향유자는 결국 민중 일반이니까. 18 왜 서정시는 길이가 짧은가, 여운을 주기 위해서이다. 생활의 작은 세부를 통하여 전체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은 사실로 많은 것을 연상시켜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읽어볼수록 새로운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것이랄까. 그래서 그 감동적 충격을 오래오래 기억되게 만드는 것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요즘 시들을 보면 너무나도 길기만 함을 느낀다. 산만함이 감동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19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이야기 시’를 많이 쓰고 있다. ‘이야기 시’란 하나의 사건적인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적 주인공의 정서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빌려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야기 시에 등장한 인물은 시인이 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빌려온 인물일 뿐이다. 20 선동시라는 게 있다.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혀 주면서 사람들을 고무․추동해내는 시 말이다. 그런데 선동시라고 쓰여진 시들을 보면 하나같이 개념이 남발한다는 점이다. 개념이 남발하는 곳에 감동은 없는 법이다. 감동이 없는데 선동이 될 까닭이 없다. 문제는 생활정서를 얼마나 잘 선동적으로 보여주는가에 선동시의 특성이 있다. 21 집회장에서 낭송시를 들으면 흔히 느끼는 일이다. 비교적 형상화가 잘된 시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가 있고 시적 형상화에 서툰 그 어떤 시가 오히려 대중의 심장을 흔들어 놓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은 시적 호흡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호흡률을 가져야 대중은 꿈틀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적 소리의 문제이다.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서적 시어를 가져야 호소력을 얻게 된다. 우리의 시단도 낭송시의 영역을 개척해야 될 때가 온 듯싶다. 22 발표된 시들을 보면 객관적 실재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시인 자신의 정서적 토로와 객관적 실재의 묘사를 결합시켜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는 말이다. 이것도 시를 쓰는 한 방법이겠다. 23 분신 현장을 목격했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해야 했다. 호흡은 호흡대로 가빠져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손을 심장 위에 올려놓고 길게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며 시를 쓴다면 나는 필시 짧게 끊어치며 넘어가는 반복적 형식으로 시를 쓸 것이다. 그 상황을 옳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될 것 같다. 24 생활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시들이 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그려내는 것도 있고 반대로 두리뭉실하게 굵게 그려낸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시적 대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내는 장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시가 생활의 한 단면을 정서적으로 느껴서 그것을 안으로 삭인 결과로 일반화시켜내며 또 그 결과로 정서적 토로를 하게 되는 것이 서정시의 근본특성이라면 위와 같은 방식은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말해 생활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내지만 서정시라는 근본특성은 잘 살려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함께 든다. 그림 같은 시 중에서도 감동을 주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서정의 특성을 비교적 잘 살렸기 때문이며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25 시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배우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민중들의 요구와 지향을 내용으로 배우고 민중들의 호흡법․말법을 그 형식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시적인 기교를 연마할 수 있어야 한다. 시적인 기교를 말하고 싶은 바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 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만의 시적 재부로 내려오고 있는 바를 습득해내야 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일종의 그런 것들이다. 26 풍자시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형태이다. 포악한 자에게 비웃음을, 간사한 자에게는 야유와 멸시를, 누리는 자에게는 통렬한 조소를 보내기 위한, 그래서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한 것이다. 최근 어느 한 시인의 풍자시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통쾌함은 느껴지는데, 왜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남는 걸까.” 새로운 실험적 형식으로 쓰여진 그 풍자시는 다름아닌 서정성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7 돌아보면 80년대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래서일까. 80년대 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전투적 서정시가 많이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내용만을 보아도 그렇다.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과학성을 앞세운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이제 90년대이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의 시단은 80년대의 관념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서정시의 본령을 찾아나가자는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서정을 제대로 찾아나가는 것이 아닌 본 뜻도 없는 잘못된 서정으로, 정서적 표현으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정서적으로 표현되어야 서정인 것이지 요즘의 풍토처럼 그럴싸한 미사여구식의 시가 남발하는 것은 서정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28 외국에서 교포가 왔다. 그가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우리 문학을 일어로, 영어로 번역해 많이 많이 소개하겠습니다. 밖에 있는 우리가 할 일이 그런 것인 거 같아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몰라도 시는 전문성을 요구할 듯합니다. 우리의 시어를 외국어로 옮기기가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아요.” 정말이다. 우리 말처럼 표현이 풍부한 말도 드물다. 더구나 시란 게 백 마디의 말을 한 마디로 줄이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이고 그 한 마디의 표현일지라도 그 표현에만 맞는 고유한 색깔이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표현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이를테면 운율을 살려내기 위한 ‘줄임말’은 얼마나 많으며 반대로 ‘늘임말’은 얼마나 많은가. 표준어와 사투리의 다른 맛은 어떻게 할 것이며 현재 쓰는 말과 옛말의 다른 맛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9 오늘 나는 결혼식장에서 축시를 읽었다. 그런데 풍자적 요소를 도입한 축시였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축시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신랑․신부에게 미안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축시는 응당 묵직하고 밝은 것이어야 한다. 순결성과 숭엄성이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30 우리는 흔히 시인이 말하고 싶은 바를 정서적으로 토로한 시들을 접하게 된다. 호수가의 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쓴 것도 있고 태풍을 동반한 바닷물처럼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식으로 쓴 것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러한 것들을 적절히 결합하여 굴곡을 이루는 방식으로 쓴 시들도 많다. 서정시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려내는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31 내가 좋아하는 한 선생이 말하기를 “평론에 그만 관심 쏟고 창작에 더욱 더 매진하시지요. 창작자가 갖는 고집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내가 그 선생에게 대답하기를 “어디 우리 풍토가 그러나요. 비평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엿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맞는 말이에요. 창작자가 가져야 할 창작적 고집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겠지요. 비평을 엿보다 보면 작품을 관념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나 그런 것 같아요.” 비평을 엿보면 엿볼수록 관념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넌센스이다. 우리 시대의 넌센스.   =============================================================================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1949∼ )   골목에서 아이들 옹기종기 땅따먹기하고 있다 배고픈 것도 잊고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영수야, 부르는 소리에 한 아이 흙 묻은 손 털며 일어난다 애써 따놓은 많은 땅 아쉬워 뒤돌아보며 아이는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 다시 둘러앉아 왁자지껄 논다 땅거미의 푸른 손바닥이 골목을 온통 덮을 즈음 아이들은 하나둘 부르는 소리 따라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 맞대고 놀고   부르시면, 어느 날 나도 가야 하리 아쉬워 뒤돌아보리   동네 아이들이 모여 땅따먹기를 하고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손에 흙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가 고픈 것도 잊었다. 모두 쪼그리고 앉아 돌로 자기 땅을 넓히는 데 열중해 있다. 참 정겨워 보인다. 정겨울 뿐만 아니라 참 그립기까지 하다면 나이를 먹었다는 이야기이다. 땅따먹기가 보편적인 놀이였던 때는 이미 꽤 과거의 일이다. 동네 아이들이 너나없이 모여서 밥 먹기 직전까지 놀던 것도 꽤 지난 일이다. 이 시의 아이들이 아이들이었던 시절에는 차가 별로 없었고, 흙이 보이는 땅이 많았다. 땅따먹기는 그래야 가능한 놀이다. 그런데, 이 시의 진짜 목적은 추억이 아니다. 과거가 더 좋았다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 더 크고 운명적인 것, 이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들이 모여 땅따먹기 하는 일은 지상에서의 삶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 제각기가 자기 몫을 가지고자 애를 쓰며 살아간다. 그 모습을 더 멀리에서 바라본다면 열심히 땅따먹기 하는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한창 놀다가도 엄마가 ‘영수야, 밥 먹어라’ 부르면 일어나야 한다. 승자였든 패자였든 돌아가야 한다. 영수만 돌아갈까. 모여 앉은 모든 아이들은 다 돌아가야 한다. 삶을 사는 우리들의 인생도 이와 같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다. 권지숙 시인은 1975년에 등단하고도 시집을 내지 않았다. 35년 만에 첫 시집을 냈는데 이 시는 그 시집 안에 들어 있다. 그는 35년을 어떻게 살았을까. 시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짐작하게 된다. 떠날 때가 오면 후회하지 않고, 아쉬운 듯 돌아보며 떠나겠다고 했다. 덤덤한 미소가 가능한 것은 아마 35년, 잘 꾸려온 시간 덕분일 것이다.    
1856    미국 재즈 시의 초기 혁신자 中 시인 - 랭스턴 휴스 댓글:  조회:4955  추천:0  2016-11-20
랭스턴 휴스     랭스턴 휴스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 1902년 2월 1일 ~ 1967년 5월 22일)는 미국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다.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시를 많이 썼다. 그는 새로운 문학 예술 형식 재즈 시의 초기 혁신자 중 한 명이었다. 휴즈는 할렘 르네상스 동안 그의 작품으로 가장 잘 알려진 상태이다. 목차 1 생애 1.1 어린시절 1.2 아버지와의 관계와 컬럼비아 1.3 성인기 1.4 죽음 2 각주 생애[원본 편집] 어린시절[원본 편집]   1902년에 랭스턴 휴즈 랭스턴 휴즈는 학교 선생님 캐리 (캐롤라인) 머서 랭스턴과 그녀의 남편 제임스 나다니엘 휴즈 (1871년 ~ 1934년)의 둘째 아이로, 미주리 주 조플린에서 태어났다. 두 부모들은 혼혈이었으며 랭스턴 휴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럽계 미국인, 미국내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이었다. 그는 빈민가에서 성장했다.[1] 그의 아버지의 할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백인이었다: 스코틀랜드인 한 명과 유대인 혈통 한 명[2] 휴즈는 그의 아버지와 1888년 버지니아 출신으로 미국 의회에 선출된 최초의 흑인이 되었던 그의 큰 삼촌 존 머서 랭스턴 둘 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휴즈의 외할머니 메리 패터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프랑스, 영국과 원주민 혈통이었다. 오베를린 컬리지에 출석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역시 혼혈이었던 르위스 셰리단 레어리와 첫째로 결혼하였다. 그는 1859년 하퍼스 페리호에 존 브라운의 습격에 참가했으며 부상으로 사망했다. 1869년 메리 패터슨 레어리는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랭스턴 가와 다시 결혼하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아프리카계미국인, 원주민, 유럽계 미국인 가계였던 찰스 헨리 랭스턴이었다.[3] [4] 그와 그의 남동생 존 머서 랭스턴은 노예제도 폐지주의자로 일했으며 1858년 오하이오 반노예 사회를 인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찰스 랭스턴은 후에 그가 교육자와 투표를 위한 행동주의자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민권으로서 활동했던 캔자스 주로 이사왔다.[3] 찰스와 메리의 딸 캐롤라인 머서 랭스턴은 랭스턴 휴즈의 어머니였다.[5] 휴즈의 아버지는 그의 가족을 떠나서 후에 캐리와 이혼했다. 그는 쿠바에 갔고 그 후 멕시코에서 미국에서 지탱중인 인종주의 정책을 탈출하는 방법을 찾게된다.[6] 그의 부모님의 별거 후, 그의 어머니가 일자리를 찾는 여행을 하는 동안, 젊은 랭스턴은 캔자스 주에서 주로 그의 외할머니 메리 패터슨 랭스턴에 의해 길러졌다. 그 흑인 미국인 구전을 통하여 그녀 세대의 행동주의자 경험을 끄집어 내어, 메리 랭스턴은 그 젋은 랭스턴 휴즈에게 항구적인 인종 자신감을 스며들게했다.[7][8][9]그는 캔자스 주, 랭스턴에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의 할머니의 죽음 뒤, 그는 가족 친구들, 제임스와 메리 리드와 2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 불안정한 초기 삶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전체적으로 행복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가 될 시인에 막대하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었다. 후에, 휴즈는 다시 일리노이 주, 링컨에서 그의 어머니 캐리와 함께 살았으며 그가 아직 청춘기였을 때 재결혼했으며, 마침내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일리노이 주, 링컨에 있는 문법 학교에 있는 동안, 휴즈는 고전 시인으로 선출되었다. 휴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정형 때문에 그것을 숙고했다고 회상 속에 진술했다. [10] "나는 정형의 희생자였다. 전체 수업에서 흑인 아이들은 우리 중 오직 두명이었으며 우리 영언 선생님은 항상 시속에 리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모든 흑인들이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고전 시인으로서 당선케했다."[11]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학교 신문을 썼으며 연보를 편집했으며 그의 최초의 단편 소설, 시, 연극을 쓰기 시작했다. 재즈 시의 그의 최초의 단편, "When Sue Wears Red"는 그가 고등학교에 있는 동안 쓰여졌다. 그것은 그가 연애 서적을 발견했었던 시간 동안이었다. 그의 삶에 있어 이 초기 시절부터, 휴즈는 아프리카계 시인들 폴 로렌스 둔바와 칼 샌드버그를 그의 시에 영향으로서 인용하곤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와 컬럼비아[원본 편집] 휴즈는 1919년 잠깐의 시기 동안 멕시코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살았었다. 1920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휴즈는 그의 아버지와 살기 위해 돌아왔고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닐 돈을 제공해주도록 그를 설득하길 희망한다. 휴즈는 다시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말했다: “ 나는 나의 아버지와 그의 이상한 자신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에 대해 생각중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흑인들을 매우 많이 좋아했다.[12][13][14] ” 처음부터, 그의 아버지는 휴즈가 해외의 대학에 다니고 기술자로 출세 하기 위해 공부하길 희망했다. 이것들에 기초하면, 그는 그의 아들에게 기꺼 재정적인 도움을 주려고 했었다. 제임스 휴즈는 작가가 되려는 그의 아들의 욕구에 지원을 하지 않았었다. 결국, 랭스턴과 그의 아버지는 타협을 했다. 그가 컬럼비아에 출석할 수 있는 한, 랭스턴은 공학을 공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수업료가 제공되었고, 휴즈는 그와 함께 한 산 1년 이상 그의 아버지를 떠났다. 1921년에 컬럼비아에 있는 동안, 휴즈는 평균 B+ 성적을 유지하였다. 그는 그 학회 안의 인종 차별 때문에 1922년 떠났고 그의 관심은 그가 비록 시 쓰는 것을 지속했을지라도, 그의 공부보다 주위의 할렘 이웃을 더 선회했다.[15] 성인기[원본 편집] 1923년에 S.S 말론에 승선하는 승무원으로서 간단한 신분 보장을 대접받기 전에, 휴즈는 여러가지의 이상한 직업으로 일을했고, 서아프리카와 유럽까지 6개월을 여행하는 데에 보낸다.[16] 유럽에서 휴즈는 파리에서 잠시 체류를 위하여 S.S 말론을 떠났다. 1920년대 초 파리에서 시간 동안, 휴즈는 흑인 국외추방자 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1924년 11월, 휴즈는 워싱턴 D.C.에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미국에 돌아왔다. 휴즈는 다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과 역사의 연구를 위한 협회에서 역사가 카터 G. 우드손의 개인 조수로서 1925년 화이트 칼라 직업을 얻기 전에 여러가지 이상한 일을 하는 직업을 찾아다녔었다. 그 일의 요구와 그의 글쓰기를 제한하는 그것의 시간 압박에 만족하지 못한, 휴즈는 호텔에 있는 버스보이로서 일을 하기 위해 그만 둔다. 휴즈가 시인 바첼 린지를 만나곤 했던 것은 버스보이로서 일하는 동안이었다. 휴즈가 그에게 보여준 시들에 감동 받은, 리드세이는 그의 새로운 흑인 시인의 발견을 공표하였다. 이 당시, 휴즈의 초기 작품은 이미 잡지에 출판된 상태였고 그의 최초의 시집속으로 수집되려는 참이었다. 다음 해, 휴즈는 펜실베이니아, 체스터 군에 있는 역사적인 흑인 대학교인 링컨 대학교에 등록을 했다. 거기서 그는 오메가 프시 파이 남학생과 여학생 사교 클럽(Franternities and sororities)의 구성원이 되었고, 역사적인 흑인 컬리지와 대학교에서 최초의 흑인 친목 기구가 설립되었다.[17][18] 나중에 미국 대법원 판사가 되었던 서굿 마샬 (Thurgood Marshall)은 동창생이자 링컨 대학교에서 그의 대학 공부 동안 랭스턴 휴즈의 급우였다. 휴즈는 1929년 링컨 대학교로부터 예술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 후 뉴욕에 갔다. 카리브해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들에 여행을 제외하고, 휴즈는 그의 주요한 집으로서 그의 삶의 나머지를 할렘에서 살았다. 대학 교수와 전기 작가들은 오늘날 휴즈가 동성애자 였으며 휴즈가 그의 시에 또다른 영향력으로서 인용했던 작품의 작가 월트 휘트먼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의 시의 대다수에 동성애적 코드를 포함시켰다고 믿는다. 휴즈의 소설 "Blessed Assurance"는 한 아버지의 노여움과 함께 전면에 그의 아들의 나약함과 기묘함을 다룬다.[19][20][21][22][23][24][25][26]그 경의를 유지하고 흑인 교회와 기구들의 지원하며 악화된 그의 불확실한 재정 상황을 피하기위해, 휴즈는 몰래하는 (closeted) 상태로 남는다. [27] 휴즈의 주요한 전기 작가 아놀드 램퍼새드 (Arnold Rampersad)는 휴즈가 그의 작품과 삶에 있어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편애를 나타냈다는 사실에 결연했다.[28] 이 흑인 남자의 사랑은 흑인 남성 연인을 위한 보고된 출판되지않은 시들의 수로 증명이 된 상태이다.[29] 죽음[원본 편집] 1967년 5월 22일, 랭스턴 휴즈는 65세의 나이로 전립선암에 관련된, 복부 수술 후 여병으로부터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할렘에 있는 흑인 문화 연구를 위한 아서 스컴버그 센터 안에 그를 위하여 이름 지어진 강당에 주요한 로비의 중앙에 있는 바닥의 대형 메달의 바로 밑에 매장된 상태이다.[30] 그의 화장된 유해를 덮는 그 바닥의 디자인은 Rivers라 제목이 붙은 아프리카의 코스모그램이다. 그 제목은 휴즈의 시 The Negro Speaks of Rivers로부터 획득되었다. 그 코스모그램의 중앙의 내부와 정확하게 휴즈의 유해 위쪽에는 My soul has grown deep like the rivers라는 문장이다. 각주[원본 편집] ↑ “African-Native American Scholars”. African-Native American Scholars. 2008. 2008년 7월 30일에 확인함. ↑ Faith Berry, Langston Hughes, Before and Beyond Harlem, Westport, CT: Lawrence Hill & Co., 1983; reprint, Citadel Press, 1992, p.1 ↑ 가 나 Richard B. Sheridan, "Charles Henry Langston and the African American Struggle in Kansas", Kansas State History, Winter 1999, accessed 15 Dec 2008 ↑ Laurie F. Leach, Langston Hughes: A Biography,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4, pp.2-4 ↑ William and Aimee Lee Cheek, "John Mercer Langston: Principle and Politics", in Leon F. Litwack and August Meier, eds., Black Leaders of the Nineteenth Century,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1, pp. 106-111 ↑ West, Encyclopedia of the Harlem Renaissance, 2003, p.160 ↑ Hughes recalled his maternal grandmother’s stories: "Through my grandmother’s stories life always moved, moved heroically toward an end. Nobody ever cried in my grandmother’s stories. They worked, schemed, or fought. But no crying." Rampesad, Arnold & Roessel, David (2002). The Collected Poems of Langston Hughes, p.620 ↑ The poem Aunt Sues’s Stories (1921) is an oblique tribute to his grandmother and his loving Auntie Mary Reed. Rampersad.vol.1, 1986, p.43 ↑ Imbued by his grandmother with a duty to help his race, Langston Hughes identified with neglected and downtrodden blacks all his life, and glorified them in his work. Brooks, Gwendolyn, (Oct. 12, 1986). "The Darker Brother". The New York Times ↑ Langston Hughes Reads his poetry with commentary, audiotape from Caedmon Audio ↑ Langston Hughes, Writer, 65, Dead. (May 23, 1967). The New York Times ↑ Langston Hughes, The Big Sea (1940), pp.54-56 ↑ James Hughes, a wealthy lawyer and landowner and himself a black man, hated both the racism of the North and Negroes, whom he portrayed in crude racial caricature. Smith, Dinitia (Nov. 26, 1997). Child’s Tale About Race Has a Tale of Its Own. The New York Times ↑ And the father, Hughes said, "hated Negroes. I think he hated himself, too, for being a Negro. He disliked all of his family because they were Negroes." James Hughes was tightfisted, uncharitable, cold. Brooks, Gwendolyn, (Oct. 12, 1986). The Darker Brother. The New York Times ↑ Rampersad.vol.1, 1986, p.56 ↑ Poem or To. F.S. first appeared in The Crisis in May 1925, and was reprinted in The Weary Blues' and The Dream Keeper. Hughes never publicly identified F.S., but it is conjectured he was Ferdinand Smith, a merchant seaman whom the poet first met in New York in the early 1920s. Nine years older than Hughes, Smith first influenced the poet to go to sea. Born in Jamaica in 1893, Smith spent most of his life as a ship steward and political activist at sea--and later in New York as a resident of Harlem. Smith was deported back to Jamaica for alleged Communist activities and illegal alien status in 1951. Hughes corresponded with Smith up until 1961, when Smith died. Berry, p.347 ↑ 1926년 휴즈의 후원자, 에이미 스핀간 (Amy Spingarn), 조엘 엘리어스 스핀간의 부인은 그가 링컨 대학교에 출석하도록 그를 위해 300 달러 기금을 제공해주었다.vol.1, 1986,p.122-23 ↑ 1927년 11월, 샬로트 오스굿 메이슨, (그녀는 “대모”로서 불리길 좋아했음)은 휴즈의 주요한 후원자가 되었다.Rampersad. vol.1,1986,p.156 ↑ Nero, Charles I. (1997). "Queer Representations: Reading Lives, Reading Cultures." In Martin Duberman (Ed.), Re/Membering Langston, p.192. New York University Press ↑ Nero, p.161. ↑ Yale Symposium, Was Langston Gay? commemorating the 100th birthday of Hughes in 2002 ↑ Schwarz, pp.68-88 ↑ Although Hughes was extremely closeted, some of his poems hint at his homosexuality. These include: Joy, Desire, Cafe: 3 A.M., Waterfront Streets, Young Sailor, Trumpet Player, Tell Me, F.S. and some poems in Montage of a Dream Deferred. Langston Hughes page[1] Retrieved January 10, 2007 ↑ ...Cafe 3 A.M. was against gay bashing by police, and Poem for F.S. which was about his friend Ferdinand Smith. Nero, Charles I. (1999), p.500 ↑ Jean Blackwell Hutson, former chief of the Schomburg Center for Research in Black Culture, said, “He was always eluding marriage. He said marriage and career didn’t work.....It wasn’t until his later years that I became convinced he was homosexual.” Hutson & Nelson. Essence magazine, February 1992. p.96 ↑ "Though there were infrequent and half-hearted affairs with women, most people considered Hughes asexual, insistent on a skittish, carefree 'innocence.' In fact, he was a closeted homosexual...." McClatchy, J.D. (2002).Langston Hughes: Voice of the Poet. New York: Random House Audio, p.12 ↑ Aldrich, (2001), p.200 ↑ "Referring to men of African descent, Rampersad writes "...Hughes found some young men, especially dark-skinned men, appealing and sexually fascinating. (Both in his various artistic representations, in fiction especially, and in his life, he appears to have found young white men of little sexual appeal.) Virile young men of very dark complexion fascinated him. Rampersad, vol.2,1988,p.336 ↑ Sandra West explicitly states: Hughes' "apparent love for black men as evidenced through a series of unpublished poems he wrote to a black male lover named 'Beauty'." West,2003. p.162 ↑ Whitaker, Charles.Ebony magazine In Langston Hughes:100th birthday celebration of the poet of Black America. April 2002.
1855    락서는 詩作의 始初에도 못미치는 망동... 댓글:  조회:3411  추천:0  2016-11-19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낙서(락서) 오 봉 옥 1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 술 마시고 싶을 때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아라.” 노래를 듣다가 문득 생각한다. 시야말로 목숨을 걸고 써야 한다는 것을. 한편의 시가 죽어가는 이를 살려낸다고 한다. 죽어가는 이를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이 없어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이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시 초겨울 바람에 부르르 떨고 보니 시 쓰고 싶다 그 옛날 콜레라에 걸린 아이처럼 덕석말이로 마당 한가운데 누워 피가 질질 흐르도록 덕석만 할퀴다가 제 몸 위를 소가 쿵쿵 뛰어다니는 소리에 다시 놀라 까무러치기도 하다가 끝내는 온통 땀에 젖은 작은 몸으로 그 무서운 병을 툴툴 털고 일어나 히히 웃는 마치 그런. 2 서정의 특성은 개성적이라는 데에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도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게 나타난다. 노동자로서 보는 달과 자본가로서 보는 달은 느낌이 다른 법이다. 또한 같은 노동자라 할지라도 내성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과 외향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특성이 개성적인 것만큼 모든 인간이 느끼는 감정도 다르다는 것이다. 통일에 관한 시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통일을 생각하는 느낌이 그렇게나 비슷한지. 진달래가 어떻고 백두와 한라가 어떻고 등등. 자신의 생활 속에서 깊이 있게 통일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서정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시를 관성적으로 쓰는 탓이다. 3 흔히 시평을 읽으면 ‘사상성’이라는 개념이 눈에 띈다. 시에서 ‘사상성’이란 무엇일까? 노동자의 생활을 다루면 사상성이 충실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상성이 불투명한 것인가? 사상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문제는 생활 속에 담긴 사상에 있다. 다시 말해 생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을 어떻게 하면 올곧게 끄집어내어 정서적으로 잘 표현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가 ‘사상성’ 운운으로 되어야 한다. 4 시에 있어서 상징어는 생동감을 보장하기 위하여, 비유는 말하고 싶은 바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내기 위하여, 그리고 반복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시각․청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내 독자를 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좋은 시일수록 이러한 시적 장치가 잘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5 시적 정서란 무엇일까? 시인이 생활 속에서 한 계기를 만났다 치자. 그래서 충동을 느꼈다 치자. 외치고 싶은 충동을, 춤이라도 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치자. 그럼 그 정서적으로 느낀 충동이 시적 정서일까? 맞는 말이다. 반쯤은 맞는 말이다. 반쯤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충동의 삭이는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삭인다는 것은 그 충동을 자기의 것으로 되게 하는 것이며 모두의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삭임이 끝난 그 어떤 정서적 표현이어야 비로소 ‘시적 정서’가 아니겠는가. 6 시에서 생활 반영의 진실성은 어떻게 구현될까.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듯이 옮겨놓으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시인 자신이 내화시켜낼 수 있어야 그것은 가능하다. 내화시킨 뒤의 정서적 토로라야 생활 반영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7 우리가 흔히 현실을 왜곡시켰다고 하는 것은 현실을 잘못 그렸다는 것만은 아니다. 넓게는 생활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했다거나 생활의 본질이 아닌 이러저러한 현상만을 나열하는 식으로 그린 것은 물론 현실을 과장되게 묘사하는 것까지를 일컫는다. 그러한 것은 모두 사람의 요구와 지향을 묵살하는 데 공통점이 있다. 우리 현실 속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은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현실을 폭로하는 데 있어서도 ‘대안없는 폭로’를 우려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8 시의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일차적으로 형상화의 높이를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내용과 형식의 대중적 성격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의 평가는 사상의 관점이나 주제의 방향이 얼마만큼 서정 속에 적절히 녹아들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시 속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9 시들을 보면 종종 생각한다. 어떤 시는 절실한 문제를 형상적 비유에 의해 더욱더 선명하고 절실하게 문제를 전해주는 데 반해 또 어떤 시는 절실한 문제를 형상적 비유의 실패로 인해 더욱더 불투명하고 왜곡되게 문제를 전해주고 만다는 점이다. 왜일까? 창작적 사색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사상학습이 부족한 결과로 자신 스스로가 생활과 사상의 연결 끈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 탓일 터이다. 10 담시와 서사시는 어떻게 다를까. 서사시가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면 담시는 이야기의 핵심적인 부분만을 잘라내 보여준다는 데 그 차이점이 있다. 또한 서사시보다는 보다 더 서정적 측면을 담시는 가지고 있다. 시인의 정서가 보다 더 직설적으로 관통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뛰어난 담시 하나 보고 싶다. 11 시에서 서정을 느끼는 주체가 독자임은 당연한 사실이겠다. 때문에 독자가 요구하는 정서에 깊이 파고드는가의 문제는 서정시에 있어서 관건이 된다. 독자의 구미를 파고들지 못한 시는 제 아무리 보기 좋은 시라 하더라도 실패작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그럼 독자 즉, 다수 민중의 구미에 맞는 내용이란? 다수 대중의 구미에 맞는 형식이란? 창작자의 고민은 한사코 거기에 있다. 12 시는 생활의 한 단면을 충격적으로 보고 느낄 때 쓰는 것이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세상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느낄 그 충동이 시를 쓰게 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언정 종착점까지를 보장해 주진 못한다. 문제는 충동을 주는 그 대상의 구체적인 내면 세계까지를 정서적으로 충분히 공감했을 때 비로소 감동을 주는 시가 쓰여지는 것이다. 13 노래 같은 시들이 있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흥얼거리고 싶은 시 말이다. 그것은 일정한 흐름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느껴진 것이다. 깊은 뜻을 아우르고 있으면서도 쉽고 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터이다. 어느 한 시가 박자를 머리 속에 그려지게 만든다면 그 시는 명시가 아닐 수 없다. 14 정서적으로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얼마 전에 가뭄이 극성을 떤 적이 있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농부들은 일손을 놓고 한숨만을 내쉬기에 바빴었다. 그런데 비가 왔다. 그때 TV에 비친 농부들은 비를 손바닥에 받으며 “아, 쌀이 옵니다”, “이것이 돈입니다. 지금 수천만 원이 내리고 있어요”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러한 농부들의 표현이야말로 정서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아, 지금 태양의 복사열을 받아 증발된 수증기가 구름을 이루어 떠돌다가 높은 곳에서 찬 기운을 만나 중력의 가속도로 인하여 물방울이 되어 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치자. 물론 농부라면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 때의 표현은 생활정서로부터 벗어난 논리적 느낌․표현이 된다. 정서적으로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런 것이다.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15 음악을 모르고서 시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시를 모르고서 음악을 안다고도 할 수 없다. 시와 음악은 쌍둥이와 같은 존재이다. ========================================================================     목련꽃 ― 김달진(1907∼1989) 봄이 깊었구나 창밖에 밤비 소리 잦아지고 나는 언제부터선가 잠 못 자는 병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난밤 목련꽃 세 송이 중 한 송이 떨어졌다. 이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구나.   올해 봄은 유난히 아쉽다. 더위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고, 대기가 맑지 못했던 탓에 봄을 즐길 시간도 적었다. 해님 아래 앉아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온 세상의 꽃과 새싹이 용기를 주는 계절인데, 이렇게 보내자니 억울하기까지 하다. 아쉬운 탓에 깊은 봄을 읊은 시를 하나 꺼내어 본다. 이 시를 읽는 동안에는 우리 마음에 고운 봄이 돌아오려나. 김달진 시인의 ‘목련꽃’에는 시와 잘 어울리는 몇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우선 바탕이 되는 계절이 봄이다. 부드럽고 향긋한 느낌이 신선해서 시인의 감각은 더욱 활발해진다. 게다가 밤이다. 밤은 일상의 일이 정리되어 자신의 맨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하기 적절한 시간이다. 봄이고 밤인 것도 시 쓰기에 적절한 조건인데 여기에 비까지 더해져 있다. 봄비가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밤에 괜히 싱숭생숭해서 시인지 일기인지 모를 글들을 써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을 붉히며 지우더라도, 봄과 비가 함께하는 밤은 잠 못 들게 한다.   깊은 봄의 유정한 마음이 1연의 주제라면, 2연은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간밤에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일어나 보니, 그새 아주 큰일이 벌어져 있었다. 겨우 피었던 목련꽃 세 송이 중에서 한 송이가 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큰일일까. 큰일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이 시의 마음이고 고운 마음이다. 언젠가는 떨어질 꽃 한 송이가 생각보다 일찍 진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은 심지어, 우주적 손실이다. 그러고 보니, 꽃나무가 겨우내 지키고 밀어올린 저 꽃이 보물이 아닐 리 없다. 열심히 피었던 꽃이 일찍 져버렸다는 사실이 애석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 시를 읽으면 우리가 슬퍼해도 되는 이유를 찾게 된다. 구의역 어린 노동자를 애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적혀 있다. ‘이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구나.’ 우주는 그만큼 어두워졌을 것이다.
1854    인기나 명성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의 색갈을 고집한 예술가 댓글:  조회:4998  추천:0  2016-11-18
Leonard Cohen 레너드 코언(영어: Leonard Cohen, CC, GOQ, 1934년 9월 21일~)은 캐나다의 시인이자 소설가, 싱어송라이터이다. 퀘벡 주 몬트리올의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Suzanne〉, 〈I'm your man〉, 〈Hallelujah〉, 〈Famous blue raincoat〉 등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으며, 〈Bird on a wire〉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Dance me to the end of love〉가 번안되기도 했다. 200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201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03년 캐나다 훈장 컴패니언(CC) * 2008년 퀘벡 주 훈장 그랜드 오피서(GOQ) I'm Your Man - Leonard Cohen If you want a lover 만약에 당신이 연인을 원하시면 I'll do anything you ask me to 나는 당신이 바라는건 뭐든 다 하겠어요 And if you want another kind of love 그리고 만약에 당신이 또 다른 방식의 사랑을 원하시면 I'll wear a mask for you 나는 당신을 위해서 가면이라도 쓸 수 있어요 If you want a partner take my hand or 만약에 당신이 파트너를 원하시면 내 손을 잡아요 If you want to strike me down in anger 만약에 당신이 화가나서 날 때려눕히고 싶다면 Here I stand I'm your man 내가 여기 서 있잖아요 난 당신의 남자니까요 If you want a boxer 만약에 당신이 권투선수를 원하시면 I will step into the ring for you 난 당신을 위해서 링위에 서겠어요 And if you want a doctor 그리고 만약에 당신이 의사를 원하시면 I'll examine every inch of you 내가 당신의 몸 구석구석까지 검사해 드릴께요 If you want a driver climb inside or 만약에 당신이 운전기사를 원하시면 안쪽으로 타세요 If you want to take me for a ride 만약에 당신이 차타고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면 You know you can I'm your man 그렇게 할수있는거 알잖아요 난 당신의 남자니까요 Ah, the moon's too bright the chain's too tight 아, 달빛은 참 밝은데 날 묶고있는 사슬이 너무 갑갑하네요 The beast won't go to sleep 잠이 안올것 같아요 I've been running through these promises to you 그 동안 난 당신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을 해왔어요 That I made and I could not keep 그리곤 방황하며 헤매고 다니고 있죠 Ah, but a man never got a woman back 아,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다시 찾을순 없겠죠 Not by begging on his knees or 무릎을 꿇고 빌지 않고서는 말이에요 I'd crawl to you baby and I'd fall at your feet 난 당신에게 기어갈수도 있고 발밑에 엎드릴수도 있어요 And I'd howl at your beauty like a dog in heat 난 불에 데인 개처럼 당신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있어요 And I'd claw at your heart and I'd tear at your sheet 난 당신의 마음을 긁어 놓을수도 있고 시트를 찢어 놓을수도 있어요 I'd say please I'm your man 제발요. 난 당신의 남자니까요 And if you've got to sleep a moment on the road 만약에 당신이 길을가다 잠이 온다면 I will steer for you 내가 대신 운전을 하겠어요 And if you want to work the street alone 그리고 만약에 당신이 거리를 홀로 걷고 싶다면 I'll disappear for you 난 당신을 위해 사라져 주겠어요 If you want a father for your child or 만약에 당신의 아이를 위해 아버지를 원하시거나 Only want to walk with me a while across the sand 단지 그냥 나와 잠시 모래밭을 따라 걷고 싶은거라면 해드릴께요 I'm your man 난 당신의 남자니까요     60년대 후반의 가장 성공한 싱어송라이터인 [Leonard Cohen(레오나드 코헨)]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뮤지션으로서의 본격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한 늦깍이 아티스트이다. 이미 소설 [The Favourite Game], [Beautiful Losers]를 비롯한 일련의 저서를 통해 뛰어난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던 그는 문학적인 감각과 재능이 표출된 가사로 당대 라이벌이었던 [Bob Dylan(밥 딜런)]을 능가했으나 다소 단조로운 모노톤의 목소리를 가진 그로서는 독특한 가창력을 지닌 [Bob Dylan]에게 우위를 빼앗기기도 했다. 13살 때부터 기타를 배우고 작곡을 했지만 본격적인 [Leonard Cohen]의 음악 활동은 60년대 중반 최고의 포크 가수로 인기를 끌던 [Judy Collins(주디 콜린스)]가 그의 [Suzanne]를 부르면서 부터 시작된다.       1967년 [Newport Folk Festival]에서 공식적으로 데뷔한 [Leonard Cohen]은 1968년에 콜롬비아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그의 첫 앨범인 [The Songs of Leonard Cohen]을 발표한다. 우울하고 구슬픈 주제로 일관된 이 앨범은 포크계의 새로운 전형으로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대학 동창생들 도움으로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다음해 그는 전작과 비슷한 패턴의 앨범인 [Songs From A Room]을 발표하였고 [The Story Of Issac]과 [Bird On A Wire]등 [Suzanne]에 필적 할 만한 수작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세번째 앨범 [Songs Of Love And Hate(71)]를 끝으로 사그러들었고 [Famous Blue Raincoat], [Joan Of Arc] 같은 뛰어난 곡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Leonard Cohen]은 자신의 음악 세계에 회의를 품고 음악계를 떠나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74년 약 3년의 공백 기간동안 애타게 [Leonard Cohen]을 기다린 팬들에게 다시 믿음을 심어준 [New Skin for Old Ceremony]는 비록 멜로디 그 자체는 암울하고 황량하기 그지 없었지만 경이로운 언어 구사가 드러나는 가사들은 실로 [Leonard Cohen]을 음악계 최고의 문학가로 꼽게 만들었다. 1977년 수수께끼같은 제작자 [Phil Spector(필 스펙터)]와 [Death Of A Ladies' Man]을 발표한 그는 지나치게 농후하고 자성적인 사운드와 모노톤의 음색이 가져다주는 한계로 혹평을 받는다. 그러나 인기나 명성에 연연해하지 않은 [Leonard Cohen]은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며 고집스런 음악 작업을 계속하였고 [Recent Songs(79)]과 그리고 1985년에 [Various Positions]를 발표하게 된다.       이 같은 노력은 [Jennifer Warnes(제니퍼 원즈)]의 [Famous Blue Raincoat]에서 [Leonard Cohen]의 작품들이 [Jennifer Warnes]의 매력적인 목소리에 의해 다시 빛을 발하게 되면서 1988년 그의 앨범 [I'm Your Man]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다른 앨범과 마찬가지로 그의 염세주의와 시적인 공상이 혼재된 블랙 유머가 특징을 이룬 앨범 [I'm Your Man]은 [Leonard Cohen]에게 최고의 상업적인 성공을 안겨주었고 그의 인기도를 확인시켜주었다. 90년대에도 그의 자신감 넘치는 사운드와 독특한 가사들은 [The Future(92)]와 라이브 앨범인 [Live(94)]와 그리고 신곡과 히트곡, 라이브 곡들을 모두 모아서 편집한 앨범인 [More Best Of(97)]에서 여실히 드러나고있다. 비록 팝 차트를 누비고 MTV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들은 아니지만 [Leonard Cohen]의 음악은 그의 깊은 연륜 만큼이나 성숙함을 더해가고 있으며 전세계 곳곳에서 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에 빠져있는 마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Leonard Cohen Bird On The Wire (1979) 전선 위의 새 Leonard Cohen – Bird On The Wire Lyrics Like a bird on the wire, Like a drunk in a midnight choir I have tried in my way to be free. Like a worm on a hook, Like a knight from some old fashioned book I have saved all my ribbons for thee. If I, if I have been unkind, I hope that you can just let it go by. If I, if I have been untrue I hope you know it was never to you. Like a baby, stillborn, Like a beast with his horn I have torn everyone who reached out for me. But I swear by this song And by all that I have done wrong I will make it all up to thee. I saw a beggar leaning on his wooden crutch, He said to me, "You must not ask for so much." And a pretty woman leaning in her darkened door, She cried to me, "Hey, why not ask for more?" Oh like a bird on the wire, Like a drunk in a midnight choir have tried in my way to be free. 전선 위의 새처럼 한밤에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자유로워지려고 했죠 낚시 바늘에 끼인 벌레처럼 오래된 책에 나오는 기사처럼 당신을 위해 사랑을 아껴두었죠 그리고 내가 만약 친절하지 않다면 그냥 지나쳐 가도 되요 내가 만약 진실되지 않았다 해도 당신에게만은 그렇지 않았음을 알아줘요 이미 죽은 사산아처럼 뿔이 있는 야수처럼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상처 줬죠 하지만 이 노래에 맹세해요 내가 한 모든 잘못을 걸고 당신에게만은 잘 할게요 나무 지팡이에 기대 구걸하는 거지를 봤죠 그는 내게 ‘너무 많은 걸 구하지 마라’고 했죠 그리고 한 예쁜 여자는 어두운 방에 기대어 내게 ‘왜 더 요구하지 않냐’고 소리를 질렀죠 전선 위의 새처럼 밤에 취한 주정뱅이처럼 자유로워지려 노력했죠 ///   Hallelujah     Now I've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 비밀스런 현악기 소리를 들었어요 That David played, and it pleased the Lord / 다윗이 연주한 그 소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렸죠 But you don't really care for music, do you? / 하지만 당신은 사실 음악엔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그렇죠? Well it goes like this / 그 음은 이렇게 연주된다고 해요  The fourth, the fifth / 네번째, 다섯번째, The minor fall, the major lift / 단조로 떨어뜨렸다가 장조로 올리며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 좌절한 왕은 '할렐루야'를 작곡했답니다.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 그대의 신앙은 강했으나 증거를 원했지요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 그대는 그녀가 지붕위에서 목욕하는 것을 보았어요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ou / 그녀의 아름다움과 그녀를 통해 흐른 달빛이 그대를 비추었어요 She tied you To a kitchen chair / 그녀는 부엌 의자에다 그대를 묶고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 그대의 왕좌를 부숴버린 뒤 그대의 머리칼을 잘랐죠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 그대의 입술로부터 그녀는 '할렐루야'라는 말을 빨아들였어요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Baby I have been here before / 사랑이여, 나는 예전에도 여기 있었어요 I know this room, I've walked this floor / 이 방을 보았고 이 바닥을 걸었고 I used to live alone before I knew you. / 그대를 알기 전까지 난 혼자 살아가고 있었죠 I've seen your flag on the marble arch / 대리석 아치에 그대의 깃발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어요 But love is not a victory march / 그러나 사랑은 전승기념 시가행진 같은게 아니랍니다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 그것은 차갑게 깨어진 '할렐루야' 일 뿐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There was a time when you let me know / 그대가 나로 하여금, 저 아래에서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What's really going on below / 알게해준 그런 시간이 있었죠 But now you never show it to me, do you?  / 이제 더 이상은 내게 보여주지 않아요, 그렇죠? But remember when I moved in you / 하지만 기억해요, 내가 그대에게 갔을 땐  And the holy dove was moving too / 성령의 비둘기도 함께 갔으니 And every breath we drew was Hallelujah / 우리가 쉬었던 모든 숨결은 '할렐루야'였어요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Well, maybe there's a God abvoe / 글세, 아마도 저 위에 신이 계실지도 모르죠 But all i've ever learned from love / 그러나 내가 사랑으로부터 배운 모든것은 was how to shoot somebody who outdrew ya / 그대의 이야기를 끌어낸 자를 쏴버리는 방법뿐이었어요 It's not a cry that you hear at night / 당신.. 밤중에 듣는 소리는 울음소리가 아니에요 It's not somebody who's seen the light / 빛을 보고 있는 사람의 것도 아니에요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 그것은 차갑게 깨어진 '할렐루야' 일 뿐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You say I took the name in vain I don't even know the name But if I did, well really, what's it to you? There's a blaze of light In every word It doesn't matter which you heard The holy or the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I did my best, it wasn't much I couldn't feel, so I tried to touch I've told the truth, I didn't come to fool you And even though It all went wrong I'll stand before the Lord of Song With nothing on my tongue but Hallelujah   "모든일이 무위로 돌아간다 하더라고, 부질없는 것이라해도 나는 그저 노래의 신 앞에서 섰을 때 할렐루야 - 찬양의 말만 남길 뿐이리"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 Leonard Cohen   엄청나게 긴 가사, 그러고 전체를 일관하여 흐르는 철학적 의미.   레너의 코헨의 는 서사적인 시다.   그의 할렐루야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향한 찬미인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의 할렐루야는 그저 가늠할 수 없는 절대자를 일컫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레너드 코헨(정확한 발음은 코언에 가깝겠다)의 는 결국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고백일 것이다.   할렐루야는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다. 라틴어로는 알렐루야가 된다. 그러나 성서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이게 기독교에 국한될 서사인가에는 개인적으로 의문을 갖곤한다. 그냥 세상의 누구에게나 통할 질문을 레너드 코헨은 던지는 것이 아닐까. 당신이 찬양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다윗은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아름다운 유부녀를 엿보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차지하게 위해 그 남편을 전장터에 보내 죽게만든다.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불의를 서슴치 않았던자의 할렐루야는 무엇이었나.     의 가사는 다윗의 이 저열한 행동을 수면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무엇을 찬양하고 있나 한번 들여다 보라 말한다. 하지만 그 찬양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정할 생각이 그에게는 없다.     "모든일이 무위로 돌아간다 하더라고, 부질없는 것이라해도 나는 그저 노래의 신 앞에서 섰을 때 할렐루야 - 찬양의 말만 남길 뿐이리" 그게 코헨의 마지막 가사다. 그것은 정말로 '망가진 할렐루야'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 Well I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글쎄요, 난 비밀의 코드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That David played and it pleased the Lord 다윗왕이 (그 코드를) 연주하여 신을 만족시켰다고 하더군요    But you don’t really care for music, do you? 하지만 당신은 실제로 음악에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그렇죠?   Well it goes like this: 아무튼, 그 코드는 이렇게 진행이 돼요:   The fourth, the fifth 4도에서 5도로 (갔다가)   The minor fall and the major lift 단조에서 장조로 변해요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그 실패한 왕이 만든 할렐루야...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당신의 믿음은 견고했지만 증명이 필요했었지요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당신은 지붕위를 거닐다가 그녀가 목욕하는 걸 봤죠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ou 그녀의 아름다움과 달빛은 당신을 무너뜨렸어요    She tied you to her kitchen chair 그녀는 당신을 부엌의자에 묶고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왕좌를 부수고, 당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당신의 입에서 할렐루야란 말이 나오 게했죠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Baby I’ve been here before 이봐요 난 여기 온 적이 있어요    I’ve seen this room and I’ve walked this floor (You know) 이 방을 본 적이 있고, 이 바닥을 걸어다녔었죠    I used to live alone before I knew you 난 당신을 알기 전에 혼자서 살았고    And I’ve seen your flag on the marble arch 대리석 아치 위에서 휘날리던 당신의 깃발을 본적도 있어요    And love is not a victory march 그치만 사랑은 승리의 행진곡이 아니에요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그건 차갑게 부서져버린 할렐루야 같은 것이에요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There was a time when you let me know 당싱이 언젠가 내가 알려준 적이 있었죠.    What’s really going on below 아래에서 실제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이에요    But now you never show that to me, do you? 하지만 이제는 내게 알려 주진 못해요. 그렇지 않나요?   But remember when I moved in you 하지만 기억하세요 내가 당신께 갔을 때    And the holy dove was moving too 신성한 비둘기도 또한 함께 였다는 걸    And every breath we drew was hallelujah 우리가 내쉬는 모든 호흡 들이 할렐루야 였다는 걸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Maybe there’s a God above 신이 저위에 계실지도 모르지만    But all I’ve ever learned from love 내가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은    Was how to shoot somebody who outdrew you 당신을 겨누고 있는 누군가를 쏘는 게 전부였어요.   And it’s not a cry that you hear at night 그건 당신이 밤중에 듣는 울음소리가 아니에요    It’s not somebody who’s seen the light 그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빛도 아니에요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그건 차갑게 부서져버린 할렐루야 같은 것이에요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녀 가버린 지금 누구의 눈을 아침 태양과 견주리      For Anne                                                             Leonard Cohen     With Annie gone   Whose eyes to compare   With the morning sun?   Not that I did compare   But I do compare   Now that she's gone.    앤에게                                                              레너드 코언     애니 가버린 지금   누구의 눈을   아침 태양과 견주리   전엔 미처 몰랐다가   그녀 가고 나니   이제야 태양과 견주네   "나는 당신의 남자"      If you want a lover 애인이 필요한가요 I'll do anything you ask me to 시키는 것은 뭐든지 해 드리겠어요 And if you want another kind of love 뭔가 다른 사랑을 원하시나요 I'll wear a mask for you 당신을 위해 탈을 써 드리겠어요 If you want a partner 파트너를 원하시나요 Take my hand 내 손을 잡아요 Or if you want to strike me down in anger 화가 나서 나를 때려주고 싶으신가요 Here I stand 여기 고분고분 내가 서 있어요 I'm your man 나는 당신의 남자 If you want a boxer 복싱선수를 원한다면  I will step into the ring for you 그대 위에 제가 링에 올라가겠어요  And if you want a doctor 의사를 원한다면 I'll examine every inch of you 빈틈없이 당신을 진단해 드리지요 If you want a driver 운전수가 필요하신가요 Climb inside 자, 차 안에 오르시지요 Or if you want to take me for a ride 그냥 데리고 놀고 싶다구요 You know you can 맘대로 해도 되는줄 아시죠 I'm your man 나는 당신의 남자예요. Ah, the moon's too bright The chain's too tight 아, 달이 너무 밝아요 사슬이 너무 꼭 조여요  The beast won't go to sleep 괴수는 잠들지 않아요  I've been running through these promises to you That I made and I could not keep 당신에게 말만 하고 지키지도 못한 약속과 약속 사이를 저는 헤매고만 있었어요. Ah but a man never got a woman back Not by begging on his knees 아, 그러나 무릎꿇고 빌어서는 사랑을 되 찾지 못했네요. 절대로. Or I'd crawl to you baby And I'd fall at your feet And I'd howl at your beauty Like a dog in heat 아니면, 내 사랑, 당신에게 기어가서 당신의 발 아래 쓰러져 당신의 아름다움에  마치 발정한 개처럼 소리를 질렀을텐데. And I'd claw at your heart And I'd tear at your sheet I'd say please, please I'm your man 당신의 가슴을 할키고 시트를 찢고 말했을텐데 제발 제발이라고. 나는 당신의 남자랍니다. And if you've got to sleep A moment on the road I will steer for you 길위에서 잠시 잠을 자야겠으면 내가 자동차를 대신 몰아드리지요 And if you want to work the street alone I'll disappear for you 길위에서 혼자 일하고 싶다면 당신을 위해 사라져 드리지요 If you want a father for your child Or only want to walk with me a while Across the sand I'm your man 아이 아빠가 필요하다거나 나하고 그냥 잠시 모래위를 걷고 싶다면 여기, 당신의 남자가 있어요. If you want a lover I'll do anything you ask me to And if you want another kind of love I'll wear a mask for you 애인이 필요하세요 말만 하면 뭐든지 해 드리겠어요. 뭔가 다른 사랑을 원하시나요 당신을 위해 탈을 써 드리지요.    
1853    카나다 음유시인 - 레너드 노먼 코언 댓글:  조회:5029  추천:0  2016-11-18
레너드 코언     레너드 코언 Leonard Cohen 레너드 코언 (2008년) 기본 정보 본명 레너드 노먼 코언 Leonard Norman Cohen 출생 1934년 9월 21일(1934-09-21) 캐나다 퀘벡 주 웨스트마운트 사망 2016년 11월 7일 (82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캐나다 직업 음악가, 작가, 배우 장르 민속 음악, 포크 록, 소프트 록, 스포큰 워드 악기 보컬, 기타, 건반 악기 활동 시기 1956년 ~ 2016년 종교 불교 레이블 Columbia 관련 활동 샤론 로빈슨, 제니퍼 원스, 앤자니, 주디 콜린스 웹사이트 leonardcohen.com 레너드 코언(영어: Leonard Cohen, CC, GOQ, 1934년 9월 21일 ~ 2016년 11월 7일[1])은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소설가 겸 영화 배우이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2 평가 3 음반 목록 3.1 정규 4 저서 4.1 시집 4.2 소설 5 서훈 6 각주 7 바깥 고리 생애[편집] 캐나다 퀘벡 주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코언은 영문학을 공부하다 1956년 시인으로 첫 등단하였고, 1963년 소설가로 등단하였다.[2] 1967년 가수 데뷔하였고 1970년 미국 영화 《Dynamite chicken》의 조연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으며 이후 문학가와 대중음악가로 두루 히트하였다. 〈Suzanne〉, 〈I'm Your Man〉, 〈Hallelujah〉, 〈Famous Blue Raincoat〉, 〈Bird On The Wire〉 등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으며,[3] 〈Bird On a Wire〉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Dance Me to the End of Love〉가 번안되기도 했다. 200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01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6년 10월, 새 음반 《You Want It Darker》를 발표했다. 같은해 11월 7일 8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평가[편집]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영향력이 대단한 소수 싱어송라이터 위인에 속한 황혼의 거장이었다. 코언 세대에서 그를 능가하는 존재를 꼽으라면, 밥 딜런 정도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사가로는 폴 사이먼과 캐나다 예술가인 조니 미첼 정도 밖에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은 없다. 기억에 남는 저음의 목소리, 나일론 현을 장착한 클래식 기타, 그리스식 코러스가 보컬을 돋보이게 하는 자극적인 악곡. 그의 노래는 사랑과 증오, 성과 정신, 전쟁과 평화, 황홀과 절망이 넘쳤다. 그의 세대 중에서도 80년대의 예술적 성공을 즐기고 있었던 희귀한 예술가였다.[4] 음반 목록[편집] 정규[편집] 제목 출시일 《Songs of Leonard Cohen》 1967년 12월 27일 《Songs from a Room》 1969년 4월 《Songs of Love and Hate》 1971년 3월 《New Skin for the Old Ceremony》 1974년 8월 《Death of a Ladies' Man》 1977년 11월 《Recent Songs》 1979년 9월 《Various Positions》 1984년 12월 《I'm Your Man》 1988년 2월 《The Future》 1992년 11월 24일 《Ten New Songs》 2001년 10월 9일 《Dear Heather》 2004년 10월 26일 《Old Ideas》 2012년 1월 31일 《Popular Problems》 2014년 9월 23일 《You Want It Darker》 2016년 10월 21일 저서[편집] 시집[편집] 《Let Us Compare Mythologies》, 1956년 《The Spice-Box of Earth》, 1961년 《Flowers for Hitler》, 1964년 《Parasites of Heaven》, 1966년 《Selected Poems 1956–1968》, 1968년 하재봉·양경학 공역, 《수잔과 함께 강가에 앉아》, 둥지, 1989년 《The Energy of Slaves》, 1972년 《Death of a Lady's Man》 (시와 산문), 1978년 《Book of Mercy》 (산문, 시, 찬송) 1984년 《Stranger Music》(시와 노래) 1993년 《Book of Longing》 (시, 산문, 그림) 2006년 소설[편집] 《The Favourite Game》, 1963년 윤은경 역, 《나는 너의 남자》, 푸른숲, 1990년 《Beautiful Losers》, 1966년 서훈[편집] 1991년 캐나다 훈장 오피서(OC)[5] 2002년 캐나다 훈장 컴패니언(CC) 으로 훈위 승급[5] 2008년 퀘벡 주 훈장 그랜드오피서(GOQ) 각주[편집] 이동 ↑ “Leonard Cohen Died on Monday, Sony Confirms” (영어). 빌보드. 2016년 11월 12일에 확인함. 이동 ↑ “'아임 유어 맨' 저음의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 별세”. 《중앙일보》. 2016년 11월 11일. 2016년 11월 11일에 확인함. 이동 ↑ 김, 향미 (2016년 11월 11일). “‘음유시인’ 가수 레너드 코헨 별세”. 《경향신문》. 2016년 11월 11일에 확인함. 이동 ↑ “Leonard Cohen Dead at 82” (영어). 롤링 스톤. 2016년 11월 11일에 확인함. ↑ 이동: 가 나 캐나다 정부 서훈내역, 2015년 7월 30일 확인.//////////////////////////////////=== 40년간 이어온 음악의 혼, 레너드 코언의 /글 이용우     장수하는 가수는 억울하다. ‘짧고 굵게’ 활동하다 간 요절 음악인에 대한 대중의 과도한 추앙을 곁눈질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장수하면서 롱런하는’ 가수가 드문 것도 사실이다. 아니, 드물지는 않더라도 자의 반 타의 반 ‘과거형’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캐나다 출신의 음유시인(bard) 레너드 코언은 ‘롱런하면서 현재형인’ 빛나는 예외에 속하는 가수다. 그는 1960년대에 과 , 1970년대에 , 1980년대에 같은 신곡을 히트시키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라디오에 종종 나오는 제니퍼 원스의 커버곡 (1987)나 윤설하가 노래한 번안곡 (1991)은 1990년을 전후해 레너드 코언을 ‘우회하여’ 접근하게 한 계기였다. 특히 가 인상적으로 나온 영화 (1990)나 (1994)는 지금의 20∼30대에게 그의 음악을 깊이 각인해준 계기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여러 연대에 걸쳐 새로운 팬들을 만들 수 있었다. 레너드 코언은 밥 딜런만큼 화려하지는 않으나(그는 서른 넘은 나이로 가수 데뷔했을 때 ‘뉴 밥 딜런’이란 별칭을 들은 바 있다) 독창적인 음악세계로 보자면 밥 딜런에 뒤질 이유가 없는 포크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이다.   레너드 코언이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는 열한 번째 스튜디오 음반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음반이)다. 이 음반에 담긴 음악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월의 더께가 더 짙어진 ‘예의’ 저음의 보컬, 시적인 가사, ‘뒤에서 혹은 같이’ 노래하는 여성 보컬, 차분한 사운드 등은 여전하다. 단, 이번 음반의 배경을 전체적으로 감싸는 것은 재즈풍의 밴드 연주다. 풍성한 여성 백 코러스와 ‘울어 예는’ 색소폰이 코언의 씁쓸한 보컬과 잘 어울리는 은 바이런(Lord Byron)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며, 는 2001년 뉴욕 9·11 테러에 대한 슬픈 단상을 노래한 것이다. 코언은 에서 1950년대 비트족을 연상케 하는 스포큰 워드로 읊조리지만, 비슷하게 내레이션에 가깝게 읊는 에서는 여성 팬이 끊이지 않았던 일생을 의뭉스런 유머로 갈무리하기도 한다. 이 음반에 담긴 12곡의 신곡과 컨트리 고전 의 라이브 버전 보너스 트랙은 만 70살이 된 이 노장 음악인의 창조적 혼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임 유어 맨' '할렐루야' 등 히트곡…밥 딜런 더불어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 (서울=연합뉴스) 김아람 기자 = '음유시인'으로 불린 캐나다 출신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겸 시인 레너드 코언이 별세했다. 향년 82세. 그의 소속사 소니뮤직 캐나다는 10일(현지시간) 코언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전설적인 시인, 작곡가, 아티스트 레너드 코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한다"고 밝혔다.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레너드 코언[AP=연합뉴스] 낮고 묵직한 음색, 문학적인 가사로 캐나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인 인기를 큰 코언은 히트곡 '아임 유어 맨(I'm Your Man)', '할레루야'(Hallelujah), '버드 온 더 와이어'(Bird On The Wire), '수잔'(Suzanne)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졌다.   코언은 1934년 캐나다 퀘벡 주 웨스트마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소년 시절 기타를 배우고 '벅스킨 보이스'라는 포크 그룹을 결성해 음악 활동을 했다. 캐나다 맥길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서 1956년 시인으로 등단하고 1963년에는 소설가로 등단했다.   그러다 33살이던 1967년 데뷔 앨범 '송스 오브 레너드 코언'(Songs of Leonard Cohen)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가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50여 년간 사랑, 종교, 우울, 자살, 정치, 전쟁 등을 주제로 2천 곡이 넘는 노래를 썼으며 특유의 섬세한 가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코언은 가사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에는 스페인 최고 권위 문학상인 '아스투리아스 왕세자상'을 받기도 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처럼 코언도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다. 2000년대 중반 캐나다에서는 코언에게 노벨문학상을 받게 하자는 캠페인도 있었다. 코언은 82세의 나이에도 현역 싱어송라이터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달 말에는 9곡이 실린 새 앨범 '유 원트 잇 다커'(You Want It Darker)를 발표했다. 장례는 추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치러질 예정이라고 소니뮤직은 전했다. 레너드 코언이 지난달 말 발표한 앨범 '유 원트 잇 다커' 표지[AP=연합뉴스]===     레너드 코언 몬트리올 집 앞 추모 손길들(2016.11.10).                                                              
1852    령혼 + 동료 = ...삶의 그라프 댓글:  조회:3361  추천:0  2016-11-18
                문화시론 / 김혁 2016-5-19 15:36:39      소울메이트는 령혼 (soul)과 동료 (mate)의 합성어로 서로 뜻이 잘 맞는 사이를 지칭한다. 문학,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흔히 도타운 솔메이트의 존재가 있다. 그 일례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괴테와 실러를 들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한 자극과 격려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갔다. 두 예술가의 우정은 베토벤과도 이어졌다. 두 문호를 존경했고 이들의 작품에 큰 령감을 받은 베토벤은 두 사람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소울메이트들끼리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을 유발시킨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또 한쌍의 유명한 소울메이트이다. 동생 테오는 괴퍅한 성격을 가진 형의 재능을 알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형을 위해 생계비를 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흐가 자살한 뒤 애달픈 나머지 테오는 여섯달만에 형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형제의 묘는 함께 나란히 놓여있다.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에게도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바로 송몽규이다. 둘은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 석달을 차이 두고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명동학교도, 룡정의 은진중학교에도 함께 다녔다. 송몽규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자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여 자신의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둘은 또 경성의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했고 학교에서 함께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당시 《문우》에 실었던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그의 룡정자택 장례식에서 랑송되였다. 두 사람은 또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제경찰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가족에서는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송몽규의 시신도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고 “청년문사(文士) 송몽규 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 윤동주의 묘소곁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 잡힐듯한 곳에 둘은 묻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오늘날 윤동주는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되였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오래전에 등단한 문사이자 철저한 반일지사인 송몽규에 대해 아는이는 적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였으니깐. 김혁   
1851    김영건 / 박춘월 댓글:  조회:3235  추천:0  2016-11-18
이미지시가 보여주는 민족정서-김영건의 시 “한복”과 “매돌”을 읽다 □ 박춘월 날짜  2016-11-17 15:18:28      얼마전 김영건시인이 펴낸 시집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를 읽으면서 시의 아름다운 이미지세계에 매료됐다. 오늘 그중에서 주옥같은 시 “한복”과 “매돌”을 골라서 독자들과 함께 읽으면서 시의 깊은 내부에로 려행 가보려고 한다. “노을 끌어다 천을 짜고/ 공작 모셔다 인연 맺고/ 둥근달 낚아 사랑 수놓고/ 록수를 길어다가 어깨를 세웠습니다// 오천년 세월의 응어리/ 녹이고 다려/ 마침내 피워낸/ 찬란한 우리 한복// 순정의 물결 그림 한 폭! -시 ‘한복’ 전문” 시인은 한복을 그림 한폭이고 더우기 순정의 물결이라고 한다. 록수를 길어다가 어깨를 세운 한복이다. 그랬으니 그 어깨선이 얼마나 아름다울가. 어깨선이 물처럼 부드럽고 투명하고 조용하고 도도하고 황홀하다. 어깨가 축 처진 사람은 곧 무너질것 같고 후줄근하다. 한복은 어깨가 처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한복은 노을을 끌어다가 천을 짜고 둥근달을 낚아다가 수를 놓았다. 그래서 한복을 입은 이를 보면 황홀한 노을을 마주하는 기분이고 달을 만져보는 느낌이다. 그 한복을 차려입은 가리마를 반듯하게 낸 우리 민족의 어여쁜 녀인이 보이고 그들이 넋을 담고 추는 춤사위도 보인다. 벼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백의 민족도 보이고 상모춤을 신나게 추는 우리 민족의 나그네도 보인다. 인간의 눈물이 보이고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는 시이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날 맞절하는 신랑신부가 입은 한복과 신부의 유난히 빨간 볼연지가 보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슬그머니 웃는 신랑도 보인다. 마당에서 귀여운 망아지마냥 뛰노는 칠색저고리 받쳐입은 어린 아이들도 보이고 하얀 한복을 정갈하게 처려입은 인자한 할머니와 뒤짐을 진 점잖은 이웃집 할아버지도 볼수 있다. 오천년 세월의 응어리를 녹이고 다린 민족의 이주력사가 영화화면처럼 눈앞에 쭉 펼쳐지게 하는 시가 바로 “한복”이다. 이처럼 “한복”이 지닌 매력은 무수한 이미지를 순간에 밀려오게 만드는것이라 하면 시 “매돌”은 다른 매력을 지닌 시다. “돌밭에서 하얀 세월 기여나왔다”는 창의적인 언어와 내용으로 시 매돌의 첫구절을 연다. 서두부터 색다르고 만만치 않다. 매돌이라는 사물에 시인이 어떤 이미지를 그려넣어가는지 우리 한번 흥미진진하게 들여다 보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월속 눈물의 강물 굽이쳐 가고 엄마의 눈물어린 꿈이 파도쳐 갔고 아이의 눈망울에 붉은 저녁이 익어 슬픈 그림자 흔들며 돌아서고 할아버지 하얀 기침소리 노란 옛말 하얀 모국어로 사립문가 하얀 향기로 피여올랐다…” 아이의 눈망울속 저녁과 할아버지의 기침소리와 옛말과 사립문가 모국어는 시인의 필끝에서 붉은 저녁 하얀 기침소리 노란 옛말로 색상을 머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월속에서 예쁜 장면으로 장식된다. 매돌은 활화산이 설설 끓던 천지주변에 사는 사람들 가슴에서 쇠물로 흐르다가 진붉은 진달래를 피워내고 이내 강물과 조약돌의 쟁쟁한 노래로 살다가 온돌방에 석가래 틀고 앉아 빙빙 돌아가는 향수(乡愁)로 된다. 마지막 련에서 매돌과 함께 바다에서 온것들이 돌아가고 땅에서 생명들이 부활하고 우리가 돌고 베옷과 흰 넋이 돈다. 오천년 화려한 무궁화가 어진이의 하얀 마음과 하얀 평안과 하얀 전설로 빙글빙글 돈다고 하고 찬란한 옛말속에 매돌이 하얗게 앉아 돌아간다고 한다. 하나의 물체 매돌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내용을 담을수 있다는것에 그야말로 감탄을 하지 않을수 없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매돌과 함께 오천년의 우리 민족이 돌고 진달래와 무궁화도 와서 돌고 온돌방의 석가래가 돌고 그리고 바다와 륙지에서 온 생명이 돈다.  매돌은 이제 더는 매돌이 아니고 삶의 축이 되고 생명의 축이 된다. 시인의 상상은 놀라웁게도 오천년의 세월속을 왔다갔다 하고 바다에서 륙지에로 마구 주름 잡았다가 다시  베옷과 흰 넋과 어진이 하얀 마음과 평안과 전설의 중심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단순 두편의 시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김영건의 시들에는 종횡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시인의 무한한 상상이 돋보인다. 작은 물체 매돌이나 한복에서 시인이 말하고저 하는 내용은 깊이는 깊고 넓이는 가없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시인은 “매돌”과 “한복”을 넘어서 하얀 민족과 그 민족의 오천년 력사를 들려주고있고 더 나아가서 생명을 말하고 우주를 보여주고있다. 시인에게 있어 상상력은 생명이다. 한편의 시에 무수한 상상이 깃든 생생한 이미지를 곱게 담을수 있는 시가 가지는 매력 또한 살아숨쉬는 활어의 벅찬 생명력과 비슷하지 않을가? 김영건시인의 더 좋은시를 기대한다.
1850    詩作의 첫번째 비결은 껄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쓰는것... 댓글:  조회:3797  추천:0  2016-11-18
  동화속에서나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샌드맨(모래인간)` 아프리카 지역 한 사막에 출몰.   아프리카 남서브 나미브 사막에 성인 남성 얼굴 옆모습을 띤 모래 언덕 발견. 출처=데일리메일   샌드맨은 오래전부터 유럽 동화에 등장해온 `잠의 요정`. 늦은 밤 잠 안자고 보채는 아이들을 위해 눈에 모래를 뿌려 잠들게 만드는 상상속 인물.//////////////////////////////    1. 표현의 방법에 대하여 서양 문화가 흡수되면서 우리 말글도 어느 새 서양적인 것을 많이 받아들였다. 텔레비전, 컴퓨터 등과 같은 외래어가 그 중 한 예다. 그런가 하면 표현 방법도 영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아무리 …해도 지나침이 없다’ 가 전형적인 외래식 표현임은 영어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누 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표현의 다양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연히 우리의 좋은 표현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남의 틀 을 빌려 쓰려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다. ○ 우리, 단 하나의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세. 번역소설 ‘람세스’에 나오는 문장이다. "단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어법상 틀리지 않지만 왠지 어설프 다. 외국물을 먹지 않은 우리네 토박이들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 이나 "중요한 질문 한 가지’라고 해야 껄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다. 껄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쓰는 것, 그것이 우리 글을 잘 쓰는 첫 번째 비결이다. 아무튼 위의 글은 빙빙 돌려서 썼다. 그래야만 좀더 문아(文雅)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위의 글을 아래처럼 고친들 어색하다고 할 사람은 없다. →우리,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세. →내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겠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 같은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다. 그게 우리식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토종 표현이 더 감칠맛 난다는 신념을 갖고 이제부터는 토종을 사랑하도록 하자. 아래 몇 개의 예문을 보면서……. ○ 네 젊은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 젊은이 네 명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네 명’, ‘네 사람’은 자연스럽지만 ‘네 젊은이’는 어색 하다. ‘한 토끼’만큼이나.) ○ 세 개의 날개가 달린 새를 보았다. ☞ 날개가 셋 달린 새를 보았다. ○ 한 개의 사과, 열 마리의 새 ☞사과 한 개, 새 열 마리 2. 동일, 유사어의 반복에 대하여 한 문장 내에 같은 용어를 반복하거나 비슷한 뜻의 단어를 연이 어 사용할 때가 있다. 불필요하게 반복된 성분은 군더더기처럼 느껴져 글의 흐름을 방 해하고, 심하면 문법까지 어기게 된다. 같은 용어의 반복을 피하는 것도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한가지 비결이다. 물론 반복이 필수적일 때는 할 수 없다. ○ 지금부터 저의 고향 소개를 부분별로 소개하겠습니다.(→고향 을) ○ 좁은 국토를 잠식하는 묘지문제가 날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 두되고 있다. (→묘지가, 혹은 묘지의 증가가) ○ 명예훼손을 당했는데도 미처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소송을 하 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증거 부족으로) ○ 참가 등록은 대표자가 직접 등록하여야 합니다. (→직접 하여 야 합니다) ○ 처음 교육 담당에게서 전화 연락을 받았을 때 떠오른 것이 고 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중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이었다) ○ 선택 전문 과정이라 정말 아무 부담 없이 왔는데 이런 글쓰기 시간은 정말 부담스럽네요.(→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 70세 이상 되는 어르신네도 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고 아주머니, 어린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3. 남용되는 복수표현 우리말은 남의 말에 비해 단수와 복수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영어를 예로 들면 단어 뒤에 ‘s(es)’ 등을 붙여 복수임을 분 명히 밝히지만 우리말은 복수의 개념이라고 해서 반드시 복수형 접미사‘들’을 넣지는 않는다. 예컨대 “꽃이 피었다”고 하면 그 꽃은 한 개일 수도 있고 여 러 개일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언어생활에서 수의 개념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한데, 근래 들어 우리 글에도 복수형 표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는 글쓰는 이들이 영어 등의 번역투 문장에 익숙해져 있기 때 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글은 ‘들’이 여러 번 들어가면 경우에 따라 부자연스럽기 도 하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곳 아니면 ‘들’의 중첩을 피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아래 예문은 어느 책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고침 글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인지는 님들의 판단에 맡긴다. ○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기르는 데 적절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기르는데 적절한 사람이 아니다. ○ 왕실 자녀들을 비롯한, 국가의 중추적인 직위에 접근할 만한 사람들의 자녀들은 그곳에서 엄격하고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왕실 자녀를 비롯한, 국가의 중추적인 직위에 접근할 만한 사람 들의 자녀는 그곳에서 엄격하고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 우리의 동맹국들과 적국들의 언어를 배우고……. ☞우리의 동맹국과 적국의 언어를 배우고……. ○ 그곳에는 수천 마리의 새들과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그곳에는 수천 마리의 새와 물고기가 서식하고……. ○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몇 안 된다. ☞이것을 본 사람은 몇 안 된다. 4. -화하다 와 -화되다 ◇최근에는 컨테이너 박스에 유사휘발유를 싣고 다니는 등 유사 휘발유 제조와 유통이 조직화, 지능화하고 있다. 3월5일자 D일보 "독자의 소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문장의 끝부분"지능화하다"가 어법에 맞을까. 우선 글쓴이가 "-화하다"로 쓴 이유를 훔쳐 헤아려보자. 지금도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이지만,우리말 문법, 특히 어 법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 중 비교적 나이가 든 이는 한자어 "화(化)"라는 단어의 음훈이 "될 화"이므로 "-화되다"라고 표현 하면 "되다"가 겹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화되다"는 "-화하다"로 고쳐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는 논리의 모순이다."화(化)"가 비록 한자어이고, 훈이 "되다"이지만 그것이 접미사"-되다"와 같은 성질이라고 볼 수는 없다. "화"가 "되다" 말고 "변하다","변화하다"라는 훈으로도 쓰인다는 점을 상기하면 좀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더욱이 변화(變化)라는 단어를 보더라도 "변화하다","변화되다" 양쪽 다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실 "-화하다"와 "-화되다"는 어느 한쪽만 택해야 할 성질의 짜 임이 아니다. 글의 구성,즉 결구에 따라 용례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음 예문을 보자. ◇서울시는 그 지역을 공원화했다. ◇그 지역은 서울시에 의해 공원화됐다. ◇회사는 유통망을 조직화했다. ◇회사의 유통망이 조직화됐다. 위의 두 예문에서 보듯,"-화하다"는 "공원,유통망"이라는 명사를 타동사 형태로 바꾸어주고, "화되다"는 피동사 형태로 바꾸어준다. 그러므로 "-화되다"라는 표현이 틀린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맨 위의 예문도 "조직화,지능화되고 있다"고 쓰는 게 맞다. ===========================================================   거미줄 ― 손택수(1970∼ )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들을 만나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아무리 화가 난대도 홧김에 “우리 헤어져!” 이런 말은 하지 말라고. 화가 났다는 표시로 ‘헤어지자’고 한 것뿐인데, 말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이별의 가능성이 끼어들게 된다. 한 번도 이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연인은 이별을 상상해 보게 된다. 말을 하면,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다. 말은 참 힘이 세다. 요즘같이 힘든 시절에는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밥그릇을 놓고 다툰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한다. 부모는 자식이 서운하고, 자식은 부모가 야속하다고 한다. 어딘가에 살고 있는 김모 씨가 자식과 돈 문제로 매일 다툰다고도 한다. 이 말을 들으면 덩달아 다른 부모들의 마음도 팍팍해진다. 다른 자식들의 마음도 답답해진다. 자식은 부모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일까. 말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드니까, 반대로 말을 통해 사랑스러운 사람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 보자. 손택수 시인의 ‘거미줄’에서 시인은 한국에서 멀리, 지구 반대편에 와 있다. 반대편이니까 시인이 있는 곳이 밤이면 한국은 낮일 것이다. 시인은 한참 자고 있었는데 막 일어나신 한국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밤중에 받는 전화는 보통 무섭거나 슬프기 쉽다. 아들은 퍼뜩 놀라서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전화했다고 한다. 어이없을 법도 하지만 아들은 화내지 않았다. 그 대신, 아름다운 시를 썼다. 고마워서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이 시를 썼다. 어머니가 사소한 징조에도 아들을 걱정하는 것은 아들이 보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은 자신을 보물로 보는 어머니를 통해 정말로 보물 같은 사람이 된다.   이런 어머니들은 유명하지 않지만 다행히도 아주 많다. 아주 많은 어머니들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이 말해주지 않으니까 대신 이 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 돈이 아닌 마음과 마음이 끈으로 맺어져 있어서 가족이다.  
1849    詩作할때 "수사법" 자알 잘 리용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4530  추천:1  2016-11-16
[ 2016년 11월 16일 02시 31분  ]   호남성 녕향현 금주진 관산촌(湖南省宁乡县金洲镇关山村) 매일마다 "다이빙" 훈련을 하는 돼지들. =======수사법========= 비유법    강조법    변화법 글쓴이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현의 기교, 크게 보아 세 가지로 구분된다. 비유법 : 표현하려는 대상을 그와 비슷한 사물과 비겨서 표현 강조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변화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적히 주는 방법 1. 비유법 (比喩法): ①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② 비유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 관계가 성립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③ 대개의 경우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며, 일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비유의 효과 사물을 통하여 시인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대상의 새로운 모습이나 의미의 발견을 유도하며,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하거나 가시화함으로써 의미와 정서를 확대하고, 작품 안의 내용과 형식을 긴밀히 연결시켜 작품 전체의 유기성을 강화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 원관념 : 원래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 보조관념 : 빗대어진 사물이나 관념. 비유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성과 차이성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하고, 이질적인 두 사물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으로 결합함. 유사성의 원리 : 비유는 이질적인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원관념은 꽃이고, 보조 관념은 누님으로 유사성은 원숙미] 차이성의 원리 : 비유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직접 관련이 없는 대상의 결합인 경우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는 차이성이 나타난다. 이런 차이성이 클수록 시적 긴장감이 생기고, 표현의 참신성을 획득할 수 있다. 예)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원관념은 바람이고, 보조 관념은 '머리채, 투명한 빨래'로 비가시적인 바람을 가시적인 '머리채', '빨래'에 비유함으로써 참신성을 획득하고 있다. - 김남조 '설일'에서 ] 비유의 유형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 일반적으로 비유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하는 경우가 많음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김남조, '정념의 기') [추상적인 '마음'을 구체적인 '기'에 비유함]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에 비유 :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윤동주, '별 헤는 밤')[구체적인 '풀'을 추상적인 '자랑'에 비유함] ★ 내 마음은 어둠이노라(추상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비유) ★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구체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원관념이 드러난 경우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님의 침묵') 원관념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 : 다른 시어들과의 전후 관계(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에 소리없이 흩날리뇨(김광균의 '설야'에서)[원관념인 '눈'이 드러나지 않음, '흩날리뇨'란 표현에서 원관념이 '눈'임을 알 수 있음]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난 경우 ★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김광섭, '마음'에서)['나의 마음'과 '물결' 사이에 '고요하다'는 유사성이 직접 드러남]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음 ★ 내 마음은 호수여(김동명, '내 마음은')[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추'의 방법으로 유사성을 추리하여 시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활유법, 의성법, 의태법, 풍유법, 대유법, 중의법, 상징법, 우화법 (1) 직유법(直喩法) : 원관념을 보조관념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수사법. 이를 명유(明喩)라고 하는데 '마치', '흡사', '∼같이', '∼처럼', '∼양,' '∼듯' 등의  연결어 사용. ★ 확 트인 벌판에 곡선의 부드러움으로 버섯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있는 미륵산이 앞에 보인다.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꽃의 둘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가 꺼져도···.   ★ 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 ★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2) 은유법(隱喩法) :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 마음은 한 폭의 기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김광균 '데생')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 ★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3) 의인법(擬人法) :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과 같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 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베에    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의인법(personification) - 활유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 '장끼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4) 활유법(活喩法) :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면 활유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면 의인법이다. ★ 안개가 날개를 치면서 산 정산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 청산이 깃을 친다. ★ 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생명의 모태로서의 '어둠'의 긍정적 이미지를 활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5) 의성법(擬聲法) : 어떤 대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 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 실개천은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 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6) 의태법(擬態法) :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내는 기교로써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방법이다. ★ 마당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 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 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7) 풍유법(諷喩法) :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 문장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써,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 핑계 없는 무덤 없다. ★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   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믈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 야, 이눔아,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알아들지 못하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린다는 속담을 통해, 뿌리(근원)없는 삶을 비판하고 있다.] 허지두 말어.(김진경,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8) 대유법(代喩法) :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로써 혹은 그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써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으로써 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 우리 나라 ★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빵 - 음식, 먹거리) ★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빈주먹 - 가난) ★ 은 '들'은 국토의 일부분으로서 조국을 상징하였으므로 제유법이고 ☆은 금수강산이라는 특징으로 우리 나라를 상징하였으므로 환유법이다. ★ 펜은 칼보다 강하다(펜 - 문학의 힘, 칼 - 무력) - 제유법 ★ 금테가 짚신을 깔본다(금테 - 신사, 짚신 - 시골뜨기) - 환유법 (9) 중의법(重義法) : 하나의 말을 가지고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 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 ' 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벽계수는 자연인 '푸른 시냇물'과 '왕족 벽계수를' , '명월'은 자연인 '밝은 달'과 '기생  황진이'를 의미한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관을 아래로 내리는 데 쓰는 줄, 끊을 수 없는 혈육에의 인연과 정의 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작별을 고했다. 흙을 아래로 떨어뜨렸다라는 말로 동생을 잃은 무너질 듯한 슬픔을 의성어로 나타내어 감정을 절제하고 슬픔을 객관화하고 있다.]했다.(박목월, '하관') (10) 상징법(象徵法) : 원관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    머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상징의 종류 ① 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 : 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예)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② 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예)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③ 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예) 해 → 희망, 밤 → 절망 ④ 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예) 빼앗긴 들 → 일제 치하의 조국 ⑤ 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예) 숫자, 문자, 부호, 신호 ⑥ 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예) 날개에서의 『방』→ 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상징과 은유 :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11)우화법(寓話法)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 강조법(强調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과장법, 반복법, 열거법, 점층법, 점강법, 비교법, 대조법, 억양법, 예증법, 미화법, 연쇄법, 영탄법, 현재법 (1) 과장법(誇張法) :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이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 그가 북을 치자,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2) 반복법(反復法) : 같거나 비슷한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의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 꽃이 피네 /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고운 얼굴 해야 솟아라. (3) 열거법(列擧法) :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대체로는 셋 이상을 늘어놓아야 열거법으로 본다. 같은 어구가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라 반복법이다. ★ 우리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    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신석정, '작은 짐승'에서) (4) 점층법(漸層法) :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 올리는 표현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시켜 감동시키는데 효과적이다. ★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 유교의 목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에서) (5) 점강법(漸降法) : 점층법과는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앉게 하는 표현방법이다. ★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 명예를 잃는 것은 모두를 잃는 것이요.     용기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안 잃은 것이다. 점층이나 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점층이나  점강을 아울러 점층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6) 비교법(比較法) :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써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아름답구나.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직유와 비교의 차이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7) 대조법(對照法) :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의미, 단어, 색상, 감각의 대조 등이 있다. ① 단어의 대조 : ★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정한모 '가을에' -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③ 색상의 대조 ★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8) 억양법(抑揚法) :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든지 하는 표현방법. ★ 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 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 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 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9) 예증법(例證法) :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10) 미화법(美化法) :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 집 없는 천사(천사 - 거지)       ★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 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11) 연쇄법(連鎖法) :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으키게 하는 데 있다. ★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12) 영탄법(詠嘆法) : 감탄사나 감탄형 어미 등을 써서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가 없구나!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 소리 / 들으며 여물었나니(열매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화자는 자연의 섭리와 그 위대함을 깨닫는다. 이때의 '기쁨'과 '놀라움'을 영탄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13) 현재법(現在法) :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3. 변화법(變化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절히 주는 방법. 도치법, 대구법, 설의법, 인용법, 반어법, 역설법, 생략법, 문답법, 명령법, 경구법, 돈호법. (1) 도치법(倒置法) :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 + 목적어(보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비애와 탄식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냄]- 유치환 '깃발'-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    니 이 밤을 분쇄할 벽력을. ★  정말 아름다웠다. 눈앞에 펼쳐진 우리 강산이. (2) 대구법(對句法) :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님은 탄식한다/ - 김억'봄은 간다' - (3) 설의법(設疑法) :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표현형식이다. 내용상으로는 의문이 아니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  이 푸르고 아름다운 한국의 가을 하늘을 그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의문문의 형식만 빌려 독자에게 '생명의 기척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함] ★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가난할지라도 사랑은 안다.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4) 인용법(引用法) :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이다. ★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잖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해 봐.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5) 반어법(反語法) :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이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지만 사실은 칭찬하는 방법으로 '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 얘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데요? 얘 뒤에 두 명이나 더 있어요. ★ 아휴~~~ 이 얄미운 내 새끼 ★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자녀를 버린다.)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마음 속으로는 슬프지만 그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겠다'는 말로 '애이불비'의 자세가 나타나 있다. 이는 너무나 슬퍼 울고 싶은 화자의 심리를 반대로 나타냄으로써 의미를 강화한 것이다. 또한 도치법도 사용되었다.) ★ 말없이 함박눈도 잘도 내리느니. - 국권을 상실한 조국에서의 삶이 힘겨워서, 눈 내리는 겨울에 북극으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 '흰 눈'은 축복의 눈이 아닌 앞날의 혹독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잘도 내리느니'는 화자의 내면과는 상반된 표현인 것이다. - (김동환, '눈이 내리느니') 다른 설명 ( 반어 -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에 상반(相反) 관계가 있는 말을 뜻한다. 기교로서는 어떤 말의 뜻과 반대되는 뜻으로 문장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것을 이른다.) (6) 역설법(逆說法 : Paradox, 모순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한용운의 '님의 침묵') ★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서정주 '견우의 노래'에서 긴 이별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사랑이 성숙될 수 있다는 역설적 표현) ★ 외로운 눈부심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른 설명 : 역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모순되고 부조리하지만, 표면적 진술을 떠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근거가 확실하든지,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을 뜻한다. 표면적 역설은 보통 서로 반대 개념을 가진, 또는 적어도 한 문맥 안에서 같이 사용될 수 없는 말들을 결합시키는 '모순 어법'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내면적 역설은 표현에 담긴 내용 자체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특히, 종교적 진술 가운데 만유의 본질이나 우주의 섭리에 관하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시의 문맥에 수용될 때, 내면적 역설로 설명될 수 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가 이에 해당한다. 즉, 이 경우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종교적 역설로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초월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내면적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7) 생략법(省略法) : 글의 간결성, 압축성, 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서 여운을 남기는 기교,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 봉네의 눈동자 속에 푸른 하늘이 부풀어 오른다 하는 순간, 따르르 눈물이 뺨으로 굴렀다. "학이………" 봉네는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8) 문답법(問答法) : 글 속의 어느 일분의 문장을 문답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자답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 아희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 그렇다면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이다. ★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 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9) 명령법(命令法) : 평범한 서술로 해도 된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 빨리 책을 읽도록 하십시오. ★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 보라 : 문어체(文語體), 보아라 : 구어체(口語體) (10) 경구법(警句法) :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 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현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 시간은 금이다. ★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 유비면 무환이다. (11) 돈호법(頓呼法) :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편지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에서 - ========================================================================================     호수― 조병화(1921∼2003) 물이 모여서 이야길 한다 물이 모여서 장을 본다 물이 모여서 길을 묻는다 물이 모여서 떠날 차빌 한다 당일로 떠나는 물이 있다 며칠을 묵는 물이 있다 달폴 두고 빙빙 도는 물이 있다 한여름 길을 찾는 물이 있다 달이 지나고 별이 솟고 풀벌레 찌, 찌, 밤을 새우는 물이 있다 뜬눈으로 주야 도는 물이 있다 구름을 안는 물이 있다 바람을 따라가는 물이 있다 물결에 처지는 물이 있다 수초밭에 혼자 있는 물이 있다. 뜬눈으로 주야 도는 물이 있다 구름을 안는 물이 있다 바람을 따라가는 물이 있다 물결에 처지는 물이 있다 수초밭에 혼자 있는 물이 있다. 호수는 잔잔하다. 아니, 잔잔하다고 여겨진다. 언젠가, 호수의 표면은 거울과 같다고 쓴 시인이 있었다. 땅의 커다란 눈동자가 호수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가득한데도 참 고요하여라. 많은 사람의 가슴에 호수는 이런 이미지로 살아 있다. 그런데 조병화 시인의 호수는 조금 다르다. 호수를 거울이나 눈동자와 같이 어떤 한 개의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호수는 일종의 집합이다. 그것도 아주 여러 의미가 모여 있는 집합이다. 호수를 조금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이야기하는 물과, 장 보는 물과, 길을 묻는 물과, 떠날 차비를 하는 물이 들어 있다. 각자의 사연과 인생을 지닌 물들이 모여 있으니 이런 호수가 잔잔할 리 없다.     사실 시인은 호수가 아니라 사람들의 집합, 다시 말해 우리 사회를 말하고 있다. 이 사회에는 참으로 여러 사람이 있다. 떠나려는 사람들만 해도 그중에는 금방 떠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름 같은 마음을 품는 사람도 있다. 무엇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인 듯 보이는 호수에도 서로 다른 이들이 공존한다는 말, 전체의 세세한 사정을 들여다보는 저 시인의 눈은 참 옳다. 더불어 생각한다. 저 호수에도 그토록 다양한 물이 있다는데, 그중에는 나를 닮은 무엇도 있는 것만 같으니 천지간에 나 혼자는 아니구나. 세상에 빙빙 도는 물은, 물결에 처지는 물은, 혼자 떨궈진 물은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1848    詩人은 "꽃말"의 상징성을 발견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3403  추천:0  2016-11-15
  ‘꽃’의 상징성 결혼식장이나 입학식 졸업식은 물론 장례식장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행사장만이 아니라 옛 건축물이나 조형물에는 연화, 당초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꽃은 이렇듯 우리들의 생활, 역사, 문화 속에 함께 자리잡고 있다. 이런 꽃들은 사실적인 의미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단순화시킨 것이 ‘꽃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꽃말’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를 두고 화신(花信) 문화라 하고 이를 체계화하여 ‘화신학(花信學, selamographie)’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신 문화’라고 하면 으레 서양 문화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서양 문화만의 아닌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강릉 단오제⌋나 ⌈동해안 별신굿⌋ 또는 ⌈오구굿⌋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꽃굿’, ‘꽃맞이굿’, ‘꽃노래’ 등으로 불리고 있는 ⌈꽃노래굿⌋이 있으며, 제주도의 무가에서도 ‘생불꽃’ 등 신화마다 거기에 알맞은 여러 가지 꽃들이 등장한다. 또 자진모리 장단의 신민요로 일컬어지는 ⌈꽃타령⌋도 있고, ⌈꽃노래⌋라는 이름으로 각 지방마다 약간씩 다르게 불려지는 굿거리 장단의 민요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문자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신라 시대의 ⌈도솔가⌋, ⌈헌화가⌋, ⌈화왕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내방가사인 ⌈꽃노래⌋도 있다. 꽃노래굿은 동해안 지역의 굿 가운데 가장 예술성이 돋보인다고 하는데, 한국 토속 신들은 꽃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무당도 꽃필 무렵이 되면 자기네 집의 신단(神檀)에 봉안된 무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의를 올리는 꽃맞이굿을 한다. 또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무대가 되는 평안도 영변에는 풍년을 기약하는 굿으로 ‘꽃요람굿’이 있다. 이 굿은 구경꾼들이 광장에 세워진 그네줄에 꽃으로 요란스럽게 꾸민 화람(花籃)을 달아매면서 절정을 이루는데, 꽃요람에 무녀들이 올라타고 그네줄을 높이 끌어올리면 꽃요람 속에서 무녀들이 춤을 춘다. 꽃요람굿의 상징적인 의미는 생식력을 가진 땅의 표상인 음력(陰力)을 태양 가까이에 접근시킴으로써 가뭄의 원인인 강한 양력(陽力)을 약화시켜 풍년을 기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우리 화신 문화도 서양화되어 버렸다. 서양의 경우 “영화의 30% 가량이 여러 가지 형식으로 꽃의 의미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그 꽃의 의미를 모르고 보면 그 영화에서 맛볼 수 있는 여운의 15%를 맛보지 못한다.”라고 할 정도이다. 이 말은 잉그마르 베이르만이라는 영화감독의 말이지만 … . 영화에서 그러하듯이 서양 사람의 일상에서는 꽃을 주고받는 빈도가 대단히 많다. 이렇게 꽃을 주고받는 빈도가 많아지면서 꽃의 특징과 성질에 따라 그 의미를 부여하여 꽃말로 쓰기도 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꽃말을 ‘우의(寓意)의 꽃다발’, ‘무언(無言)의 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꽃말을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예라고 할 것이다. 이런 꽃말에 따르면 장미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백합은 ‘순결함’을, 제비꽃은 ‘겸손’을, 월계수는 ‘영광’을, 올리브는 ‘평화’를 뜻한다고 한다. 이러한 꽃말은 꽃의 특질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붙인 경우도 있지만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國花)처럼 민족과 국가의 신화나 역사에 따라 상징하는 의미가 다른 경우도 있다. 꽃의 특징에 따른 것으로는, 향기 좋은 꽃의 대명사인 라일락은 ‘젊은 날의 추억’을, 달콤하고 관능적인 향기의 쟈스민은 ‘당신은 나의 것’을, 어버이의 가슴에 달아드리는 빨간색 카네이션은 ‘건강을 비는 사랑’을, 꽃다발을 만드는데 빼놓을 수 없는 안개꽃은 ‘간절한 기쁨’과 ‘밝은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또 계절에 따라 초봄에 피는 꽃에는 ‘희망’이나 ‘행복’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많으며, 가을에 피는 꽃에는 ‘과거의 기쁨’이나 ‘추억’ 등의 의미를 부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늦가을이나 겨울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는 매화나 난초, 국화(菊花)를 비롯하여, 추운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와 소나무 등을 ‘절개’와 ‘지조’가 있는 강인한 성품으로 여겨 그 정신을 숭상하는 뜻에서 선비들이 즐겨 그리기도 하고 완상하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는 우리들의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기면서 꽃을 생활화하여 이를 주고받는다거나 또 사무실이나 거실의 분위기를 위해 장식하기도 한다. 그 좋아하는 꽃으로는 장미가 으뜸이고 다음으로 국화(菊花), 난초, 백합(百合)이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꽃은 우리 생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도 많다. 현대시의 경우만 보더라도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또 김춘수의 ⌈꽃⌋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널리 애송되고 있는 이유는 꽃의 상징성이 바로 우리 생활 정서와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꽃들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 꽃은 생활 속에서 우리들의 정서를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마음에 있는 이성으로부터 꽃다발을 선물 받고 마음이 움직였다면 이는 분명 꽃의 힘일 것이다. 신라시대의 월명사는 꽃을 뿌려 두 개의 해가 뜨는 괴변을 해결하기도 했으며,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꽃을 뿌려 가시는 님과 또다른 정서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또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은 여자는 또다른 기대와 설렘으로 부푼 나날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꽃은 우리들의 정서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꽃문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징적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이러한 꽃의 의미는 ‘생명’과 ‘영원성’에 관련을 둘 때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꽃의 의미도 그렇거니와 죽음을 위로하는 꽃에서도 생명의 또다른 의미인 ‘부활’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은 시들어도 그 열매가 남아서 순환하기 때문일까. 이러한 상징적 의미의 사용이 현대에 이르면서 서양의 경우에 동화되어버리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다. 다음 자진모리장단의 신민요인 ⌈꽃타령⌋을 한 번 감상하면서 꽃의 의미를 새겨 보자. < 후렴> 꽃사시오 꽃을 사시오 꽃을 사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에 꽃이로구나 1절   꽃바구니 울러메고 꽃 팔러 나왔소 붉은 꽃 파란 꽃 노리고도 하얀 꽃 남색 자색에 연분홍 울긋불긋 빛난 꽃 아롱다롱이 고운 꽃 2절   봉울봉울 맺은 꽃 숭얼숭얼 달린 꽃 방실방실 웃는 꽃 활짝 피였네 다 핀 꽃 벌 모아 노래한 꽃나비 앉어 춤춘 꽃 3절   이 송이 저 송이 각 꽃송이 향기가 풍겨 나온다. 이꽃 저꽃 이꽃 해당화 모란화 난초 지초 왼갓 향초 작약목단에 장미화 ==================================================================     등잔 ― 신달자(1943∼ )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많은 사람들이 신달자 시인을 안다. 좋아하는 이도 참 많다. 언젠가 한 지역에서 토크 콘서트를 연 일이 있었는데 그를 보러 몇백 명의 청중이 자리를 채워주셨다. 대중의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알고 ‘등잔’이라는 시를 읽으면 원래 의미를 충분히 알기 어렵다. ‘인사동에서 등잔을 사 왔는데 한동안 방치하다가 나중에 불을 붙여 보았다. 그랬더니 잘 켜지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를 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 시란 남들이 못 보았던 것, 나에게 안 보였던 것을 발견하는 일인데, 이 시도 정말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발견의 대상은 돈 주고 산 ‘등잔’이 아니다.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시인은 어린 나이에 화려하게 등단했고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다. 20년이 넘게 남편의 병간호를 해야 했고, 10년 가까이 아픈 시어머니를 보살펴야 했다. 남편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키워야 했고, 경제적으로 가장의 역할도 해내야 했다. 삶의 모든 책임이 그녀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잊었다. 시의 한 구절처럼 나 자신은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그런데 버린 등잔의 묵은 먼지를 닦고 어여쁘다 만져주는 사이 그 속에 갇혔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느낀 ‘황홀’이란 등잔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가엾고도 어여쁜 나를 향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는 눈부시게 읽는 것이 아니라 목이 메어 읽는 것이 맞다. 나조차 방치했던 나를 다시 찾으니 절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 전에, 나부터 나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유하자면 이 시가 꽃이라면 아마도 이런 메시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소중한 나여, 나를 잊지 마세요.”    
1847    진정한 "시혁명"은 거대한 사조의 동력이 안받침되여야... 댓글:  조회:3354  추천:0  2016-11-15
우리에게도 사조가 받침된 시조가 올가? 2015년 02월 01일 00시 16분                           /작성자: 허동식     중세기 동방한자문화권의 성세를 대당제국문화번영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졌다.그러면서 애들에게 무조건 를 공부시키고 암기시키고…     는 대당문화의 집약반영이라고 말할수도 있겠다. 그런데 를 죽게죽게 공부한 어느 애가 늘여놓는 말이     당시가 중문특세를 이용하여 이미지 시작들을 엄청난 고봉에 끌어올린것은 의심할바가 없지만 우에 곁들인 애의 말처럼 라는 평을 받을수도 있는 일이다. 적어도 현대인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당시의 내용이 전반적으로는 어딘가는 빈약하다는 판단이 될수도 있겠다.    대당문화가 대단하기는 하였지만 필경은 사상문화령역에서 문예부흥과 같은 위대한 업적을 만들지는 못했다.때문에 당시문화는 세계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크게 오돌차지는 못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현재 우리 시단에서 소위 시혁명을 형식적인 면에서만 지꿎게 추구하는 분들이 계시는듯도 하다.그들이 추구하는 시조(詩潮)는 어딘가 빈약하다.    진정한 시조는 거대한 사조가 안받침된다.다만 시형식과 관련된 시혁명이라 할지라도 거대한 사조의 동력이 없이는 거품으로 흘러버릴수가 있겠다.   시가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시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다. 시는 어디까지나 생각할줄을 아는 인간의 시다. 우리는 거대한 사조의 변두리에도 닿지못하고 있고,지어는 아직도 습관된 사유속에 갇혀 있을수도 있으므로 우리의 시조가 행보가 이처럼 힘든것이다.  
1846    고 김정호 / 허동식 댓글:  조회:3431  추천:0  2016-11-15
>에 대한 약간의 설명 2011년 05월 26일 11시 39분                               /작성자: 허동식 장시 에 대한 나름의 설명   ---생명의 각성   김정호시인은 에 속한다. 또는 에 속한다. 그들은  神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실현할수가 없는 화려한 乌托邦리상에 속아넘어갔고 그 과정에 개체생명의 존재의미를 강간당하고 상실하는 경력을 지닌 세대이다. 중국의 시라는것은 사실 애매한 설법이다. 북도를 대표로 하는 시인들은 분명히 기존 사회정치관념에 대한 질의를 품고 생명각성의 내용을 시로 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라는 야릇한 별명을 달아주었다.그들의 시 적 표현이 이미지(의상적)이고 아름다웠고 전투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와 다르다는것을 빗대고 말도 아니되는 별명을 선물한것은 시대적인 제한성과 그 시대 중국문예리론가들의 비겁성과 어용상을 드러낸것이다. 장시 는 1986년 에 중문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실 은 태두시인들의 시작과도 어깨를 겨룰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발표된 시 간이 한족시인들의 시보다는 조금 늦었고 의 사회영향력이 차한 등등의 원인으로  중국시단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한것은 유감으로 남아있다.그러나 시작으 로서의 매력을 지닌 작품이 아닐수가 없다. 알아보지못한다고, 이러한 시풍을 싫어한다고 또는 시인의 사인적인 요인을 곁들 어서 의의를 부인하는것은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다. 취할바가 아니 다. 는 독립적인 사유능력과 생명선택을 갈망하는 생명의식이 각성된 시이다. 비록 맨발로 또는 작은 신발을 신고 헤매여돌지만 필경은 시이다.  
1845    윤청남 / 허동식 댓글:  조회:3391  추천:0  2016-11-15
윤청남 시인의 詩作에서 드러나는 생명의식 또는 종교의식--와 를 들어 /허동식        순수개념이 아닌 宽泛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생명의식과 종교의식은 거의 구별이 없다. 인간의 자아생명에 대한 의식활동들은 종교의식으로도 많이 집중표현되여 왔다. 과거에 종교라는 말만 나오면 미신이라고 뚜드려잡았지만 사실 생명철학과 신학은 同源同根성을 지니고 있으며 시학적인 미학적인 시각으로만 출발한다면 많은 시작들에 드러나는 생명의식이 종교의식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는 종교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수많은 서양시인들의 유명작품들이 그러하다 . 영국시인 앨리트의 이든지 인도시인 타고르의 이든지 앨리트에 의하여 당대의 제일 위대한 시인이라고 불리운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작들에는 생명의식이 종교의식으로 분출되여있다. 韓文시작중에서는 서정주시인과 윤동주시인의 부분적인 시작들이 생명의식을 종교의식 방법으로 다룬 대표적인 시작들이 아닐가고 생각된다.그리고 백석시인의 시작들에도 다소는 무가내적인 숙명적인 종교의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왔다. 중국조선족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왔다. 그러면서 윤청남시인의 시작들에 생명의식이 종교의식으로 집중표출되고 있다고 나름의 생각을 하여본다. 윤청남시인이 어느 종교도 신앙하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일상이 그의 시작에 내재하는 생명의식이 종교의식으로 표출되는것과는 무관하다. 유물론자라고 하여서 의식의 밑바닥에 종교의식적인 경향성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유명한 과학자들도 유명한 시인들도 그러하고 일개 범부들도 마찬가지로서 인간의 숙명이기도 한 생명체험중에 존재하는 종교의식은 문학작품의 심층적인 원인의 하나이다.     윤청남시인의 시집 뒤에 씌여진 시들을 두루 읽어보면 그의 시작들에 전보다도 더욱 유표하게 생명의식이 종교의식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대표작품으로 와 를 좋은 시라고 말하고싶다.   개 화 돌아 못갈 길 걸어와놓고 그렇게 이쁠수 더는 없었다 나를 떠난 모든 꽃들이 그렇게 갔다 자라서 떠난 들꽃같은 꽃 껍질속을 비집고 나온 그대에게 더는 갈 길 없었던가 꽃은 나무밖에 흘러나온 나무의 눈물 아직 봄은 모르리   花开   命里注定不会有一归程 可其影缘何如此地清然 每一朵离我而去的真情 步步播放着无言之永恒 或许实意不过是草木泪 渗出历经风霜的生命时 未曾心存过漫漫之归程   春光施舍给人间是明媚 可她未曾念及过萧瑟意     락 화 언덕 넘는 무거운 그 걸음 젖어 말갛게 소리내여 울어라 살아 뿌리는 죽는 날까지 한자리를 맴돌고 돌아 못올 길 자라서 가는 길 바람은 가다가 돌아서 울어라.   落花   遥远行 一落如万里 伤别离 一默如青玉 在世间 宿命一影地 在彼岸 阔步数天宇   我不知 鹤唳之风 回眸何方      ===================윤청남 시인의 시 에 대한 나름의 시평 2010년 01월 23일 14시 03분                        /작성자: 허동식   좋은 날 산이며 호수며 한없이 다녔다 그대 고운 눈빛 항상 좋더라 혼자가 혼자 아닌만큼 외롭지는 않지만 갈밭머리에 바람이 자면 또다시 달은 떴다 더듬는 봉사의 담백한 느낌으로 걸었던 숲 강뚝 넘어 돌아오는 길은 또 한번 외로웠다.   인간은 고독하지 않을수가 없다.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시인은 고독하지 않을수가 없다. 를 수많은 철학가들과 신학가들이 풀이못한 天問적인 라고 한다면 많은 凡人들도 에 생각이 미치면 인간의 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유한된 생명과 무한된 객관시간과의 차이성이며 인간의 유한된 인식용량과 객관세계 및 주관세계의 무한용량이 모순되는 결과이다. 인간은 세속적인 방법으로  을 떨쳐버릴 때가 있다. 가 바로 인간이 세속적인 방법으로 을 떨쳐버리는 순간이고 장면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세속적인 방법은 인간들더러 을 순간적으로 떨쳐버리게 할수는 있겠지만 종극에는 무효로 되여있다. 라는 객관환경의 변화와 자극은 인간들더러 또다시 >을 지니게 하며 때로는 >는 세속방법보다는 조금은 형이상학적인 이라는 방법과 수단으로 을 떨쳐버리려는 노력을 실행하게 된다. 윤청남 시인에게 있어서는 이라는 조금은 형이상학적인 방법과 수단이 종극에는 무효로 되여버린다. 그러면서 라는 시어로서 을 시미로 표현하고 기록하였다.     一日   一日 登临了一座山峰  流连了一湾湖水 温情脉脉的你之目光 使我拥有了 与孤身之时截然不同的隐悦   风影潜入静静的苇丛 一轮孤月跃升于天幕 我像一位心存平静的盲人 碎步穿过了幽暗的林间   走在银色月光下的河堤上 我却未能抖去了袭来的孤寂之风     =================   2010년 09월 10일 04시 46분  작성자: 허동식 시어적론리(逻辑)가 제작하는 詩境----윤청남의 시 에서        오는 물소리로 흘러 물은 가고 부는 바람에 들은 고요하다 젖은 속눈섭 해살에 깨여나 잠들면 이 골은 안개 순한 전설의 바다 젖은 속눈섭 해살에 깨여나 잠들면 이 골은 안개 순한 전설의 바다 없는 바람에 숲은 흔들렸다 타는 산천의 진한 물감은 이제끔 덮고 숨겨왔던 속이라 흰 버선발 가지끝에 오른 달이 박우물에 철렁 한몸 부실 때     떠는 청솔잎 조는 낭끝 여백을 초저녁 외기러기 비워내고 있었다. 이상은 윤청남의 시 의 전문이다   詩語적 론리는 서술어 론리와 일반적 의미에서의 언어론리와 구별되기도 한다. 서사어 론리로는 일반적 언어론리로는 뜻의 성립이 거의 또는 완전히 불가능한 언어 수법이 詩語적 론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관용적인 어법이나 언어습관이 만드는 어경보다 색다른 語境과 詩境을 전달하여 주기도 한다  . 오는 물소리로 흘러 물은 가고 부는 바람에 들은 고요하다 흘러가는 물소리나 흘러오는 물소리나 별다름이 없지만 시어적 론리식으로 표현되면 남다른 詩意가  물씬하다. 바람이 부니깐 들은 더욱 고요하다는것은 일상적인 청각론리와 反照되는 표현으로서 詩者의 心境의 고요함을 깨끗하게 제시하여준다 젖은 속눈섭 해살에 깨여나 잠들면 이 골은 안개 순한 전설의 바다 해살의 부드러움을 젖은 속눈섭으로 이르는것은 일반화된 언어습관을 벗어난 표현이고 깨여났는데도 잠들었다(모든 주의력이 주위 환경에만 머물렀다는) 역시 일반화된 언어습관을 벗어난 표현이다. 그리고 골에 끼인 안개에 는 인격을 부여함도 조금은 일반화된 언어습관을 벗어난 표현이다. 없는 바람에 숲은 흔들렸다 타는 산천의 진한 물감은 이제끔 덮고 숨겨왔던 속이라 바람이 없는데 숲이 흔들렸다는 力源과 受力體의 내재적인 관계론리를 분리시키는 서술표현이지만 숲의 색상의 변화를 공간이동으로( 설레이는 움직임) 표현하였으므로 색다른 어경과 시경을 제시하여 준다. 흰 버선발 가지끝에 오른 달이 박우물에 철렁 한몸 부실 때     흰 버선발 가지끝이라는 시어는 나무가지의 모양새(이름못할 깨끗한 모습?)와 색상(달빛에 쪼인 흰색)을 집합하여 표현한 시어로서 모양새와 색상이 一體로 집합된 묘사형 표현이다. 모양새와 색상을 복합시켜 一言으로 묘사함은 역시 일상적 인 조목식 언어묘사와 다른 기법이다. 떠는 청솔잎 조는 낭끝 여백을 초저녁 외기러기 비워내고 있었다. 청솔 한그루가 조으는 낭떠러지가 떠인 하늘에서 초저녁 기러기 한마리가 날아들면서 그 餘白을 메우고 있음을 여백을 비워내고 있다는것도 역시 사실론리와 정반대로 모순되는 시어표현이다.  시 은 詩者심경과 가을풍경이 색다름 수법으로 融합되여 시의와 시경이 가 넘치는 좋은 시로서 한폭의 書意식 중국화를 쳐다보는듯도 하다.  
1844    詩를 제발 오독(誤讀)하지 말자... 댓글:  조회:3592  추천:0  2016-11-15
박춘월 시 에 대한 나름의 해석 2009년 06월 23일 15시 04분                     /작성자: 허동식 록 ---박춘월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도포속으로 들어간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詩는 誤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독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에 대한 나름의 평을 시도해본다. 태초 에덴의 잎사귀가 짜낸 도포 몇천년 걸어오며 나붓긴다 그 펄럭임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의 기록으로부터 보면 에덴동산은 열대지역의 오리브나무가 자라는 온화한 지역으로 추정되며 아담과 이브는 추위를 막기 위한  몸 가림은 전혀 없었다. (혹은 태초에 아담과 이브의 몸에 방한용 身毛가 아 주 무성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헌데 그들은 나중에 뱀의 유혹으로 善惡 果를 따먹고 눈을 뜨면서 부끄러움을 타고 올리브 나무잎으로 몸의 부끄 러운 동네를 가리우게 된다.  인류의 인문문명(윤리도덕 종교 그리고 가정 과 사회제도 등)의 발생과 발전은 물질생산과정과 직접적인 연관성 그리고 의존성을 지니고 있지만 또 상대적인 독립적인 성장과정을 보이여 왔다. 또 나날이 양상되는 물질문명과 背道되기도 하면서 인간의 자연속성이 살 해되는 과정을 이루기도 하였다. 시인은  이 련에서 바로 올리브 나무잎으로 부터 연역되는 도포와 도포에서 연역되는인류의 인문문명 상생과 발전과정 을 詩적으로 敍時적으로 표현하였다. 올리브 나무잎이 도포로 변하고 그 도 포가 수천년 나붓기여 인문문명의 하천으로 바다로 됨은 아주 형상적인 간략 적인 시적표현이고 시적판단이다. 강가에서 호수같은 날개옷 주어입고 도포속으로 들어간다     인문문명이 多元化적이면서도 交接적인 크고도 두터운 그물상태을 이룬 오늘날에 있어서 그 누구도 인문문명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생존과 생존보람 을 이룬다. 하지만 소위 자연의 靈物인 인간은 인문문명에 대한 반성과 사색 을 종래로 멈춘적이 없다. 시인은 바로 부처님과 독일철학자 칸트를 대표자로 하는 수많은 인문문명에 대한  회고자 또는 사색자의 한사람으로서 인문의 강 가에서 을 주어입고 라는 인문문명을 자맥질한다. 이 련은 바로 시간중의 逆行이며 자연속성에로의 회귀이며 강가로부터 도포 에로의 상징물의 逆배렬이다. 이 련에서 리해를 진행하기 어려운것은 이다. 언어습관으로 보면 호수는 필경 수액의 집합체로서 무겁 다. 하지만 그 무거운 호수로 가벼운 날개옷을 지어입으려면 누구든지 웬간한 용기와 재간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일이다.   현관에 놓인 풀꽃으로 엮은 신 신는다 도포의 서랍에는 새소리 많아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도포 뒤울안 시원한 그늘 속 무더기로 쌓인 벌레울음 파헤치면 웬 오솔길 입구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시인은 시간과 인문문명을 역행하는 여행에서 끝내 는 첫 목적지에 이르러 일련의 행위를 감행한다. 첫 목적지에서 원초의 때묻지않은 풀꽃으로 신발을 엮어서 신고( 話者의 새로운 여행을 암시한다) 또 저장된 새소리를 몇알 꺼내 호주머니에 넣 고( 생소하면서도 재미있는 시어의 표현으로서 새소리를 아직 부 화되지못한 새알처럼 다투면서 인문문명발전과정에 포기되였거 나 저장만이 된 인문요소거나  인문성과의 부활를 희망하는 암시 이다) 뒤울안의 그늘속 벌레울음을 파헤치고 하나의 오솔길을 발 견한다 (화자가 가고싶은 또는 가야 할 길이지만 오솔길로 적혀있 음은 그 험난을 암시한다). 순간 오솔길 깊이 빠져들어 갈 때가 있다 에덴동산에 들어갈 때가 있다     이 련에서는 강가에서부터 도포속으로의 역행을 이어서 다시 도포속으로부터 에덴동산으로의 역행이 제시되고  진행된다. 하 지만 그 역행은 에 지나지 않는다. 이란 돌연적이 고 짧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그 누구나 자신이 원하든 원 하지않든 현존의 인문문명의 지배를 완전히 떨칠수없음을 암시 하는듯도 하다.        을 읽으면서 우리가 묻혀있는 인문문명이 우리들더러 인간의 천진함과 자연속성을 많이 감추게 하고 잃게 함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인문문명사는 어떻게 보면 인류가 자신의 그 림자를 실체로 만들기 위하여 인류가 지닌 천성적인 그림자를 매장하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난스럽던지 또 그 성과가 얼마나 거대하든지 우리의 그림자는 아직 실체로 변하지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꽁무니를 졸졸 추구한다. 을 읽으면서 위대한 인군은 반듯이 인문반성을 진행하 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영국시인 앨리트의 장편시 과 중국소설가 贾平凹의 소설 < 승냥이가 그립다>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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