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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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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3    멕시코 시인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5297  추천:0  2017-02-20
옥타비오 파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옥타비오 파스 직업 작가, 시인, 외교관 국적 멕시코 활동기간 1931년-1965년 사조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수상내역 노벨 문학상 (1990년) 영향 받은 분야·인물[보이기] 영향을 준 분야·인물[보이기]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숨기기]  1주요 작품 1.1시집 1.2수필집 2외부 연결   주요 작품[편집] 시집[편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 《하양 (Blanco)》 (1968년 작)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 수필집[편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 출생일 1914년 3월 31일 사망일 1998년 4월 19일 국적 멕시코 대표작 활과 리라, 흙의 자식들 외, 우리집에 온 파도, 멕시코의 세 얼굴 수상 1990년 노벨문학상 옥타비오 파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을 주제로 다수의 시와 수필을 남겼다. 평론가로서 문학 평론지를 창간·편집하고 시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의 시인ㆍ작가ㆍ외교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가족이 멕시코 내란으로 파산했기 때문에 궁핍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이 높았고, 로마 가톨릭계 학교와 멕시코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글쓰기에 몰두했다. 19세 때인 1933년 첫 시집 『숲속의 달 Luna silvestre』을 출간했다.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에 스페인을 방문하여 공화주의자들의 대의명분에 강한 공감을 느끼고, 1937년에 스페인에서 출판된 〈그대의 뚜렷한 그림자 밑에서 외(外) Bajo tu clara sombra y otros poemas』에서 당시 경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로 인정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이때 접한 초현실주의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멕시코로 돌아온 후에는 〈탈레르 Taller〉(1939)와 〈엘 이호 프로디고 El hijo prodigo〉(1943)를 비롯한 여러 권의 중요한 문학 평론지를 창간ㆍ편집했으며, 1970년대에는 또 다른 문학 정치 평론지인 〈플루랄 Plural〉을 편집했다. 파스는 마르크스주의ㆍ초현실주의ㆍ실존주의ㆍ불교ㆍ힌두교에서 차례로 영향을 받았고, 원숙기의 시에서는 풍부한 초현실주의적 형상으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이었다. 1963년 ‘벨기에 국제 시 대상’, 1981년 ‘세르반테스상’, 199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시집으로 『통과 금지! No pasaran!』(1937),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1949), 『독수리냐 태양이냐? Aguila o sol?』(1951), 『태양의 돌 Piedra de sol』(1957)이 있다. 같은 시기에 수필과 문학 평론을 모은 산문집도 출판했는데, 영향력 있는 수필집 『고독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1950)는 멕시코의 특성과 역사, 문화를 분석한 책이다. 『활과 금조 El arco y la lira』(1956)와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는 동시대의 스페인계 중앙 아메리카의 시를 연구한 문학 평론집이다. 1990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옥타비오 파스' 옥타비오 파스는 1946년에 멕시코 외교관으로 들어가 1962~1968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재임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에 항의하여 1968년 인도대사직을 사임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1962년 이후에 출간한 시집으로 『백색 Blanco』(1968), 『동쪽 비탈 Ladera este』(1971),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 등이 있으며, 수필집 『접합과 이합 Conjunciones y disyunciones』(1970),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atico』(1974) 등을 발표했다.  대표작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고 성실성과 진정성으로 천착한 끝에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활과 리라』에 담았다. 잡지 「탕자」에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글을 발전시킨 것으로, 자신이 청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탐구해온 질문들이 실려 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은 아닌지,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쓰이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지,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한지 등에 대한 고민들이 드러나는 것. 그러나 시론서 『활과 리라』는 단순한 시 해설서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어보는 안목을 열어주는 길잡이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 파스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격동의 대륙 중남미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흙의 자식들 외  『활과 리라』에서 시작된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낭만주의에서부터 전위주의에까지 이르는 서양문학사를 일괄하여 시와 역사의 관계를 탐색한 그는 『흙의 자식들』을 거쳐, 세기말의 시의 위상을 점검한 『타자의 목소리』에 이르러 자신의 시론을 완결시켰다. 『흙의 자식들 외』는 낭만주의에서 전위주의에 이르는 서양문학사를 점검한 작가의 두 번째의 시론집이다. 우리집에 온 파도  원작 소설 『My Life with the Wave』를 그림책으로 구성한 『우리집에 온 파도』는 바닷가에서 만난 파도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소년의 이야기다. 가족들과 바다 여행을 처음 갔던 소년이 파도를 보고 마음이 끌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소년에게 바다를 떠난 한 파도가 다가온다. 소년은 파도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다. 야생의 바다를 떠나 문명의 도시에 온 파도는 소년과 즐거운 한 때를 함께 보내지만 파도를 길들이는 문제는 인간에게 아무래도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가족들은 파도를 바다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는다. 어린이와 가족들이 낯선 손님 파도를 맞아 어떻게 소통하는지 표현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긴박하고 흥미로운 스토리에 잘 녹여 놓았다. 흥미진진하고 기상천외한 줄거리 못지않게, 그림 작가 마크 뷰너의 역동적이고 밝은 그림은 웃음과 장난이 넘쳐난다.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환상적인 이야기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잘 살린 작품이다. 멕시코의 세 얼굴  멕시코인과 그들의 사회, 국가를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이다. 『멕시코의 세 얼굴』에서 파스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멕시코의 어제와 오늘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정히 그려낸다. 출간 후 멕시코에서만 1백만 권 이상 팔릴 정도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동시에 상당수의 멕시코인들로부터 비판적인 시선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가는 멕시코인과 라틴아메리카인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밝히는데, 책의 가장 근원적 주제인 고독과 인간 상호 간의 교감, 구원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 문제이기도 하다. 즉, 파스는 이 작품을 통해 영원히 남을 화두를 독자들에게 던진 셈이다. 또한 책에는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역사, 국가발전,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들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멕시코의 세 얼굴』은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좋은 디딤돌이 되어준다. ============================= Diez años sin Paz (옥타비오 파스가 떠난 10년) Los jóvenes escritores mexicanos analizan la figura del escritor a diez años de su muerte (멕시코 젊은 작가들이 옥타비오 파스 1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의 삶을 재조명하였다) LUIS PABLO BEAUREGARD - Madrid - 19/04/2008   Se cumple una década de la muerte del poeta y Premio Nobel de literatura, Octavio Paz. Los jóvenes escritores mexicanos hablan sobre este caudillo cultural. (노벨 문학상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죽은지 10년이 지났다. 멕시코 젊은 작가들이 이 문화의 거장에 대해 이야기 한다) El poeta en una fotografía de su juventud. (젊은 시절 시인의 모습) GOYENCHEA - 2008-04-18   El escritor ingresó al Servicio Exterior mexicano después de la Segunda Guerra Mundial. Tras una breve estancia en Nueva York, Paz fue destacado en París en 1945. Allí escribió 'El Laberinto de la Soledad', una de sus obras más importantes.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인은 멕시코 해외공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뉴욕에 잠시 머문 뒤, 파스는 1945년 파리에서 명성을 날렸다. 거기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고독의 미로'를 썼다). ANTONIO GÁLVEZ - 2008-04-18   Eterno polemista (영원한 논객) De izquierda a derecha, el Premio Nobel de literatura, Gabriel García Márquez, el artista José Luis Cuevas y Octavio Paz. El intelectual mexicano mantuvo diversas polémicas ideológicas con escritores y pensadores de su generación. (왼쪽부터 오른 쪽으로, 노벨 문학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화가 호세 루이스 쿠에바스 그리고 옥타비오 파스. 멕시코 지성인은 당대의 작가들과 사상가들과 함께  수많은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였다). DAISY ASCHER - 2008-04-18   Premio Nobel de Literatura, 1990 (1990년 노벨 문학상) El jurado del galardón destacó la versatilidad de la obra de Paz. En su discurso de presentación, su poema 'Piedra de Sol' fue citado como una "magnífica" pieza surrealista. Los temas de su poesía transitaron por el budismo, el arte moderno, el erotismo y la naturaleza. (스웨덴 한림원은 파스 작품의 다양성을 높이 평가했다. 수여식 연설에서 그의 시 '태양의 돌'이 "위대한"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인용되었다. 그의 시는 불교, 현대 예술, 에로티즘과 자연 등 다양한 테마를 아우르고 있다. EFE - 2008-04-18   Pensamiento escrito (사상) Uno de sus ensayos más celebrados es 'Las Trampas de la Fe', una biografía crítica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 una monja mexicana del siglo XVII, además de escritora y poeta. (그의 수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인 '믿음의 덫'은 17세기 멕시코 수녀이자 작가, 시인으로도  작품활동을 했던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의 자서전이다). 2008-04-18   19 de abril de 1998 (1998년 4월 19일) El anuncio de su muerte, hecho por el presidente Ernesto Zedillo, conmocionó a México. Se declaró un luto nacional y el Palacio de Bellas Artes, en el centro de la Ciudad de México, fue el lugar donde se instaló la capilla ardiente del poeta.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이 그의 죽음을 공포하자 멕시코는 슬픔에 잠겼다. 장례식은 멕시코 시티 시내에 중심부에 있는   베야스 아르테스 궁전에서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2013년 대산문화 겨울호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 된다.” - 옥타비오 파스와의 만남       글 / 구광렬_시인, 소설가, 울산대학교 교수. 1956년생 시집 『슬프다 할 뻔했다』 『불맛』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밥벌레가 쓴 시』 『자해하는 원숭이』『텅 빈 거울』, 『하늘보다 높은 땅』『팽팽한 줄 위를 걷기』등, 장편소설『세뇨르 뭄』 『가위주먹』등, 기타저서『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체의 녹색노트』『바람의 아르테미시아』 등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_멕시코 시인. 1914~1998년 시집『언어 아래의 자유』『독수리인가? 태양인가?』『격렬한 계절』『태양의 돌』『불도마뱀』『『백지』『동쪽 저편』『허공의 아들들』『나무 속으로』등, 산문집 『고독의 미로』『활과 리라』『비평적 열정』『너릅나무에 열린 배』『원숭이 문법학자』『결합과 해체』등           구광렬: 1989년 7월 말경이었으니, 근 25만에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하는 셈입니다. 그것도 돌아가신 후에 말입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기억납니다. 나에 관해 박사논문을 쓴 양반이지요? 내 친구 마르킷 프랑크(Margit Frank)가 지도교수라 했고요.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인터뷰 했었죠?     구광렬: 당시 선생께서는 유력한 노벨문학상후보로 거론 되고 있었으며 제가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던 한국의 서울대학교에서 저에게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의뢰했었죠. 애석하게도 그 해 노벨상을 수상 못하셨지만 말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그 이듬해인 1990년 수상했지요. 기억나요. 두 권의 책을 나에게 준 것. 그중 한 권이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에 관한 책이었지요?     구광렬: 네, 맞습니다. 저의 은사이신 김현창 교수의 저서지요. 또 다른 책은 라는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저의 박사논문이었구요. 답례로 선생께서는 ‘라 부엘타(La Vuelta)' 잡지 두 권에다 친필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 시절이 좋았어요. ‘라 부엘타’ 잡지사를 운영하던 시절. 내 인생의, 내 시세계의 절정기였지요. 노벨상 수상 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시를 쓰질 못했어요. 저서도 겨우 에세이 집 두 서권 냈을 뿐이고…… 나이 탓(당시 76세)도 있었겠지만, 노벨상을 타고 보니 이래저래 바빠졌어요.     구광렬: 저 역시 ‘라 부엘타’ 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렙니다. 저의 풋풋했던 학창시절이 떠올라서이지요. 잡지사는 제가 살고 있던 ‘산헤로니모’ 거리와 불과 2km 정도 떨어져 있었거든요. 학교(멕시코국립대학교)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거의 매일 그곳을 지나야만 했어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비록 가상의 것이긴 하지만 지난 번 채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뭇 기대가 큽니다. 무엇보다 선생께서 이 세상 분이 아니시기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질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사실 1989년 당시에는 대시인 앞에서 주눅이 들어, 묻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묻지 못했거든요.     옥타비오 파스: 아이쿠, 이거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는걸요. 아주 날카롭게 나오실 것 같은데…….(웃음)     구광렬: 그렇게 말씀하시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정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데요.(웃음)   농담입니다. 부드럽게 나가겠습니다. 저도 부드러운 남자이고 싶거든요, 선생님처럼.     옥타비오 파스: 제가 부드러운 남자였던가요?(웃음)     구광렬: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저의 외숙부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저의 외숙부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부드러운 어른이셨구요.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의 비서였던 파띠(Patricia)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분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망설이지 않고 답하더군요. ‘simpatico’(정이 많은) 분이시라고.   자, 그럼 부드럽게 시작하겠습니다. 아주 여리고도 어린 옥타비오 파스로부터 시작할게요. 선생께서는 1914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조부께선 신문기자이자 정치가이셨고, 부친께선 변호사였으나 멕시코혁명 당시 싸파타(E. Zapata) 혁명군 축에 가담했었지요. 1920년 멕시코 정부가 싸파타와 그의 추종자들을 몰살시키려들자, 가족 분들 모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요. 그곳이 로스엔젤래스였던가요?     옥타비오 파스: 맞습니다. 로스엔젤래스……. 그 시절 에피소드 하나 말씀 드리죠. 여섯 살이 채 못 됐어요. 유치원 다닐 때였습니다. 점심시간이었지요. 숟가락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한 선생님이 지켜봤나 봐요. 왜 밥을 먹지 않나 하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스페인어로 숟가락(cuchara)을 외쳐댔죠. 그것도 큰 소리로…… 그 소리가 아마 미국 애들 귀에 거슬렸나 봅니다. 꽤 오랜 시간 싸웠어요. 그 뒤에도 사건 아닌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지요. 조국 멕시코에 관한 내 글들은 대부분 보호받지 못했던 미국 유년 시절과 관계가 있어요.     구광렬: 산문집인 도 그러합니까?     옥타비오 파스: 그 부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죠. 그 후 다시 멕시코로 왔지만 오히려 더 왕따를 당했습니다. 피부는 희고 눈은 파랗고 영어 악센트로 스페인어를 하니, 양놈이라 놀려대는 겁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이 마냥 괴롭고, 고독하지만은 않았어요.     구광렬: 내친김에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 문화, 문학에 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집안 친척, 특히 고모의 영향이 컸어요. 고모는 프랑스 매니아였지오. 그녀는 집에서 스페인어 대신 프랑스어를 했어요. 우리 집 서재에는 프랑스에 관한 책들로 가득 했고요. 프랑스어의 부드러운 연음과 굴절은 마치 음악을 듣는 양 착각에 빠져들게 했어요.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요. 그 후 프랑스어를 전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습니다. 특히 프랑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프랑스 유학시절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조안 니로(Joan Niro) 등 그쪽 젊은 예술가들과 파리 시내 카페에서 잘 어울렸어요. 하지만 초현실주의 시는 믿지 않았어요. 특히 자동기술법은 더욱 그랬고요. 단지 시적 혁명을 갈구했죠. 자유에 관한 사상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윤리나 정치 등의 자유가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자유…….     구광렬: 청년시절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생활에 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난 미국 생활을 꽤 오래 했어요. 1944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버몬트에 있는 Middlebury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틈틈이 그 고장 신문사에서 일했죠. 신문은 고속(高速)의 문학이라 할 수 있잖아요? 신문사 일은 시인인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줬어요. 또 다른 경험은 뉴욕에 있는 MGM사에서 영화 더빙을 하는 일이었어요. 영어를 스페인어로 말입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배우들의 입술 움직임을 파악해 스페인어 문장을 리드미컬하게 재생해내는 일. 정말 시인으로서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었어요. 전쟁이 막 끝난 후(2차 세계대전)였었기에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쳤어요. 물론 인종차별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선 박력이 있었어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시대였습니다. 그곳에서 미국 멋쟁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구요. 그들은 무척 개방적이었으며 정직했습니다.     구광렬: 그들 중, 한 사람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옥타비오 파스: 현대문명에 관한 한, 엘리엇(T.S. Eliot)은 젊은 시절의 나였습니다. 하지만 엄청 보수적이었던 그와는 달리 당시의 난 상당히 좌익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간화, 영혼의 황폐화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은 나를 매료시키고도 남았어요. 아시다시피 엘리엇은 역사를 시에 도입한 사람이잖아요. 그의 시들은 극히 주관적인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교육을 받은 나에게 청량제로 다가왔어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나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근사했습니다. 미국 시인들은 주관적인 것뿐만 아니라 범 우주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입체파 화가들이 말하는 입체적 영감 같은 엘리엇의 기술법 또한 흥미로운 것이었구요. 그는 현대 도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습니다. 1969년부터 1976년 사이에 써진 나의 연작시 에 엘리엇의 메아리에 관한 것이 들어있어요.     걷고 있건만 나아가지 않는다 이 도시에 둘러싸인 난 공기가 부족하다 몸뚱어리가 부족하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 회전(Vuelta) 중에서       구광렬: 이제부터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 노벨상 수상소감에서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해 언급하시던 도중에 ‘언어는 항상 작가의 의도보다 멀리 간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누구나 글을 쓸 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잘 파악하지 못 합니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가나 사회학자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죠. 저는 사실 언어통제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산문집 ‘고독의 미로’도 정말 고독한 시절에 썼지만 고독을 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요. 모두 저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환경 때문이었지요. 저에게 시는 항상 환경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시는 과학적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알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시 또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숨을 죽이고 정지한 부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기호입니다. 저는 이것을 회전하는 기호(signos en rotación)라고 부릅니다. 주체인 ‘我’와 객체인 ‘他’는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되고, 예술의 원초적 힘이 가해지는 순간 모든 타자성은 상실되고 맙니다.     구광렬: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한, 비트겐슈타인만큼이나 고뇌했던 시인이셨습니다. 적잖은 평자들이 선생을 가리켜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위의 시인이었노라 평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말씀 해주시죠.     옥타비오 파스: 젊은 시절 앙드레 브레통과의 만남 뒤 초현실주의에 빠지게 된 연유 역시 이러한 언어가 갖는 원초적 모호성을 극복하고자하는 저의 염원과 무관치 않습니다. 저의 시에서의 은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산치 않습니다. 오히려 의미의 해체와 가까우며, 침묵으로 인도하는 부호들의 만남에 불과합니다. 그 침묵 속에는 또 다른 낱말이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마저 변별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부호 또는 기호일 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저는 흔히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초현실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극도의 현실주의자내지 극사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가 소위 초현실주의자들이 애용한 자동기술법을 거부한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앙드레 브레통 등 저의 친구들이 현대의 이성주의내지 현실주의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노래하기를 주창하는 동안, 저는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책임 없는 현실도피라고 일축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특히 동양과의 해후 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 후(1960년 이후) 저는 지나친 이성주의와 현실주의에 의해 일그러진 서구문화를 강하게 비판해왔으며, 데카르트 이후 과학적 이성주의에만 기대온 서양의 현대문명에 대응해 강한 안티테제를 제시해왔습니다.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 한 생을 바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실재가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 말의 시초를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찾으려 했고요. 그것과 관련된 선생의 시 한 편을 낭송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그것을 꿈꿔야 한다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       피의 바다, 땅과 몸이 말해주는 걸 기억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도 아닌 교차로   모든 길들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빛은 물로 노래하고   물은 나무의 소리들로 노래하고   새벽에는 온갖 과실들이 하늘에 열리고   낮과 밤이 화해한 뒤   다시 잔잔한 강물이 되어   연인들처럼 애무하고 포옹하는……       세월을 담은 도도한 강물처럼   인간의 계절은 또 그렇게 흘러가야만 한다   태초부터 영위해온 삶의 한 가운데로   시작과 그 끝 너머 저 심오한 그곳으로       (옥타비오 파스의 시, 깨어진 항아리 중에서)           옥타비오 파스: 저에게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됩니다. 독자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났을 때, 두 개체는 하나가 되고 제 3의 부호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시의 부호인 이미지 역시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것들과의 대립변증을 거쳐 새로운 합(synthese)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의 것도 독자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 일 수도 있고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단초를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구하고자 했구요.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의 특히 1960년 이후 작품들은 불교 등 동양의 종교, 철학, 사상 등을 상당부분 논하거나 설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도나 일본 등 동양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시면서 그곳의 문화나 역사 등을 연구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 외,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옥타비오 파스: 20세기 초 멕시코에 호세 후안 타블라다(José Juan Tablada)란 아주 특별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소위 멕시코 초기 모더니스트 작가로, 일본의 하이쿠나 연가를 멕시코 및 중남미에 제일 먼저 소개했지요. 젊은 시절 난 그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신선함 그 자체였어요. 사실 외교관이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습니다. 외교관이 되자마자 부임지로 신청한 나라들이 일본과 인도였으니까요. 바쇼의 선시나 다이세츄 스즈키의 선불교론 등은 나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구광렬: 그러나 선생의 작품에는 중국, 인도, 일본 등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한국은 그 삼국 사이에서 문화연결을 위한 가교역할을 한 아주 중요한 나라입니다. 특히 고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 문화,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 사상을 담고 있는 선생의 대표적인 산문집들 , , , 등에는 한국에 관한 내용이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옥타비오 파스: 생전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저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올림픽이 열렸다는 것과 분단국가란 것, 그리고 중남미국가들처럼 정치가 불안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한국문화가 서양세계에 소개되어 있질 않았어요. 특히 문학작품은 더욱 그랬습니다. 의도적으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한국에 관한 읽을거리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런가요?     구광렬: 작금은 선생의 생전시절과는 많이 다릅니다.     옥타비오 파스: 하긴, 내가 죽은 지 15년이 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저쪽 세상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구광렬: 맞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을 모르는 중남미 사람들은 없습니다. 자동차, 핸드폰, 텔레비전 등 중남미제국 도처에 한국산 물건들이 깔려있습니다. 대중문화면에서도 K. Pop을 비롯해 한류열풍이 불고 있구요. 하지만 문학작품 부문에서만은 여전합니다. 그만큼 번역이 안 되고 있는 탓이겠지요.     옥타비오 파스: 맞아요. 번역이 중요해요. 번역이 안 된 경우엔 그 나라 말을 공부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데,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구광렬: 멕시코유학시절 저는 멕시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소위 이민 백이라 불리는 가방에다 불교, 유교 등 동양의 철학 종교 사상에 관한 책들을 가득 싣고 와야만 했습니다. 선생의 시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서였지요. 신랄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서양시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뒤늦게 동양철학사상 책들을 뒤적이는, 그것도 서양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동양철학에 관한 공부를 제법 할 수 있었어요. 그 후 다시 선생의 시편들을 곰곰이 살펴봤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선생의 시에서 그리 심도 있는 동양 사상에 대한 사유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주역이라 하면 그래도 공자가 대나무 쪽을 엮어 만든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책이 아닙니까. 그 만큼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만큼 내용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하지만 주역을 응용해 썼다는 선생의 시편 를 들여다보면 음양에 해당하는 낱말들을 그저 좌우 양편에 늘어놓기만 한 느낌입니다. 1989년 출간하신 에 실린 ‘Ejemplo(본보기)’라는 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장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한 두 줄 베낀 정도에 불과해보입니다. 단지 장소적 배경이 뉴욕이라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동양철학이나 사상 종교에 지식이 짧은 서양독자들에게는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동양인 독자들에게는 그 시편들은 그저 무책임한 복사내지 표절작으로만 보입니다. 그 밖에도 선생의 여러 작품에서 그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특히 을 비롯한 1960년 이후 작품집에서 말이지요. 물론 선생의 시편들을 헤아려보는 혜안이 저에게 없거나, 아주 어두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옥타비오 파스: 부드러운 질문만 하시기로 했잖습니까? 결국 마각을 드러내시는군요.(웃음)     구광렬: (따라 웃으며) 이게 사후 인터뷰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사실 생전 인터뷰 때 시간이 없어서 질문을 못 드린 것 중 하나입니다. 한국독자 분들을 위해 허심탄회하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옥타비오 파스: (정색을 하며) 동양사상이 옷의 물감처럼 밴 저의 시편들 속에는 중국, 인도의 호방함과 일본의 예리함이 들어있지만, 왠지 그 셋을 어우를 원만성은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근데 사후에 알았어요. 이곳 저승에서………. 특히 생전에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일본의 Zen(禪)이 한국의 임제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아무튼 한국을 알지 못했던 게 크게 후회됩니다. 서양인이 동양, 특히 사상과 철학 책들을 섭렵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 면을 고려해서 내 졸작들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광렬: 역시 선생께서는 대인배이시며, 대시인이십니다. 그런 질문으로 난처하게 해드린 이 소인배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한국의 고故 김남주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들을 원서로 읽기 위해 옥중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습니다. 근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던 선생께서 한국에 관해, 한국 시인들에 관해, 김남주 선생의 네루다에 관한 열정의 반의 반 정도만 있었더라면, 아마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지도 모르지요.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신다면 한국어를 공부해보기를 추천해드립니다. 선생께서 전생을 통해 고민하셨던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문제의 해답을 한국어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국어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이니까요. 선생님, 잠시라도 천국에서의 평화스러운 심기를 흩으려 놓은 듯해 죄송합니다. 사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Daum백과] 옥타비오 파스 – 북 어워드 사전, 예스 24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시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태양의 돌   -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도리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출처] 옥타비오 빠스  |작성자 툭툭       "태양의 돌"- 옥타비오 파스지음/ 청하 간         이 책은 일전에 읽었던 시선집《활과 리라》와 《멕시코의 세 얼굴》의 저자 옥타비오 파스의 시선집이다. 참으로 어렵게 구했다. 그 만큼 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많은 시 애독자들이 옥타비오 파스를 찾는 결과이리라. 나는 저자의 도서들을 어렵게 구해서 읽은 만큼 많은 생각들로 뒤범벅이 되어 시를 읽고 쓰고 사유의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고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마다 나라가 안고 가는 시 세계와 취향 그리고 패턴의 방향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 것은 자신의 모국어로 씌어진 작품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민족어로 씌어지거나 번역 된 것들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흘륭한 문학작품을 감상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본의 유입으로 인하여 두 가지의 변수가 작용하게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첫째는 자본의 본산 서구나 유럽의 풍을 모방하여 나의 것 혹은 우리의 것을 무가치하게 여겨 버린다는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의 논란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예술 공간에서 호흡하며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충분히 문제가 있다. 두 번째로는 역시 인간성 상실의 경험이다. 이는 감정, 감동 그리고 이성이 종합적인 패턴을 그리면서 인간의 참된 행복이나 의미, 가치를 드러내야 마땅할 그 본분을 망각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의 선상에서 옥타비오 파스를 읽어나가면 가장 훌륭한 독서방법이자 시를 감상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역시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옥타비오 파스를 읽었다. 그 결과 한국의 시가 가장 맛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므로 인해서 깨닫게 된 참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다양한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적인 시어의 혁명에서 그 기원을 살펴야 한다. 신낭만파주의와 앙가쥬망 사이에서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문제에 천착, 형이상학적인 작품세계에 몰두하였던 그는 쉬르레알리즘과의 접촉 이후 언어의 해방에 주목하며, 비논리성이 지닌 시적인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옥타비오 파스에게 있어 시는 아담과 이브 이전의 말을 곧 창생하며 사물이었던 시절로 되돌려주는 작업이었다. 에덴동산의 전락 이후 말이 지칭하는 사물과 실제 사물과의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고 보는 그는 시작업이란 바로 이 간격을 메꾸기 위한 안타까운 노력이라고 본다. 이 노력 중의 하나로 그의 시어가 지향하는 것은 침묵이며, 침묵이 곧 실체가 된다는 시론을 유도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상상의 존재이며, 인간이 지닌 이성이라는 것도 상상의 형태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는 우리에게 문화적 혁명이 요청된다면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궤도 수정의 차원을 넘어서 상상력으로의 회귀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폭 넓은 관심과 실험 정신은 여러가지 형식의 판독을 가능하게 하며, 독자가 작품 구성이나 창작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한 시작시를 개발, 시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에 기여하며, 동양시의 이미지 사용법을 서구적인 것으로 비약, 환치시킨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한다."   1   새가 노래한다,노래한다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울대뿐.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이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일 뿐.     3     투명한 수정의 맑음은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의 전문       차갑고 날쌘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껍질을 벗긴다.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 생생한 상처⑴의 한가운데     -의 전문     ⑴ 이유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나의 실체, 나의 아픔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빛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 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것,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 있는 거짓⑴ 이숭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전문   ⑴사위어 갈 목숨이 활기 찬 과일로 거짓처럼 황홀하다.     이처럼 우리는 아시아존 그리고 서구의 작품 외에는 다른 비 서구권의 작품들을 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타국의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의 작품의 우수성과 순수성 그리고 적합성을 발견해는 훈련은 잊지 않아야 충분조건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옥타비오 파스의 작품을 대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좋았다라고 거듭 고백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선택이며 동시에 타자의 선택으로부터 것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글사랑 이충재
2042    레바논-미국적 시인 - 칼릴 지브란 댓글:  조회:4911  추천:0  2017-02-19
칼릴 지브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칼릴 지브란 1913년 4월, 칼릴 지브란 출생 1883년 1월 6일 오토만 시리아, 브샤리(Bsharri) 사망 1931년 4월 10일 (48세) 미국, 뉴욕 직업 시인, 화가, 조각가, 작가, 철학자, 신학자, 시각 예술가 국적 레바논-미국 장르 시, 비유, 단편 산문 사조 뉴욕 펜 클럽 대표작 예언자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본명 지브란 카릴 지브란 빈 미카일 빈 사드, ‏아랍어: جبران خليل جبران بن ميخائيل بن سعد‏‎, 1883년 1월 6일 ~ 1931년 4월 10일)은 레바논계 미국인으로 예술가이며, 시인, 작가이었다. 그 당시 오토만 시리아의 영토이었던 근대 레바논의 브샤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미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1923년작 예언자는 영어 산문체로 쓴 철학적 에세이 연작 중 하나이다. 영감이 넘치는 창작의 초기 사례에 해당하는 이 책은, 냉담한 비평적 평판을 받았지만, 잘 팔렸고, 1960년대 반(反) 문화의 창작물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되었다.[1]   목차   [숨기기]  1유년 시절 1.1레바논에서 1.2미국에서 2예술과 시 3죽음과 유산 4기념물 5작품 6각주 7바깥 고리   유년 시절[편집] 레바논에서[편집] 지브란은 오늘날 레바논의 북부에 위치한, 기독교 분파인 마론 교회의 신자들이 모여 사는 브샤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마론파 가톨릭 성직자이었다.[2] 그의 어머니 카밀라는 서른 살에 지브란을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칼릴이었고, 어머니에게는 세 번째 남편이었다.[3] 가정이 가난했기 때문에, 지브란은 어린 시절에 어떠한 정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정기적으로 그의 집을 찾아와 그에게 아랍어와 시리아 언어로 기록된 성서를 가르쳐 주었다. 지브란의 아버지는 약국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도박으로 진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오토만 정부에서 임명한 지방의 관리[4] 또는 장군으로 일하게 되었다.[5] 그의 통치에 대해 화가 난 백성들의 불만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행정관은 지브란의 아버지를 1891년 경에 관직에서 쫓아냈다.[6]. 지브란의 아버지는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갔고,[1] 오토만 황제의 관리들은 그의 가족이 지닌 재산을 몰수하였다. 머무를 집조차 없는 상황에서, 지브란의 어머니는 그녀의 친척을 뒤따라 미국으로 이민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브란의 아버지는 1894년에 감옥에서 풀려 났지만, 카밀라 지브란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아들 칼릴과 칼릴의 어린 여동생들인 마리아나와 술타나, 그리고 칼릴의 이복 형제인 피터를 데리고 1895년 6월 25일 뉴욕으로 향했다.[4] 미국에서[편집]   프레드 홀랜드 데이가 찍은 칼릴 지브란 사진, 1898년 지브란은 보스턴의 사우스 엔드에 정착했다. 그 당시 그 곳에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시리아/레바논계 미국인 공동체가 있었다.[7] 그의 어머니는 여자 재봉사로 일하기 시작했다.[6] 그의 어머니는 레이스 장식이 달린 옷과 아마포로 만든 옷을 팔려고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녔다. 지브란은 1895년 9월 30일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 당국은 이민자를 위한 영어 학습 과정에 그를 배정하였다. 지브란은 정착촌 주변에 있던 예술학교에도 등록하였다. 그 학교의 교사를 통해서 그는, 아방가르드 보스턴 예술가이자 사진사이며 출판업자이었던, 프레드 홀랜드 데이를 소개 받았다.[1] 프레드는 지브란의 창작 노력을 격려하고 후원했다. 1898년 한 출판업자가 지브란의 그림 중 일부를 책표지로 사용했다. 지브란의 어머니는 지브란의 형인 피터와 뜻을 같이하여, 지브란이 그가 당시에 매력을 느끼던 서구의 심미적인 문화보다 태어난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에 더 많이 동화되길 원했다.[6] 15세에 지브란은 베이루트에 있는 고등교육 기관과 마론교회가 운영하는 입시 준비 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레바논으로 돌아갔다. 그는 학생 문학 잡지를 동급생과 함께 만들기 시작했고, "학교 시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몇 년간 레바논에 머물던 그는 1902년 5월 10일에 엘리스 섬을 통해 보스턴으로 돌아왔다.[8] 그가 돌아오기 2주 전에, 그의 여동생 술타나가 결핵으로 1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에는 그의 형제인 브후트로스가 같은 결핵으로 숨졌고, 그의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또다른 여동생 마리아나는 자신이 여성복 양장점에서 일하면서, 지브란을 뒷바라지하였다.[1] 예술과 시[편집] 지브란은 그의 첫 번째 그림 전시회를 1904년 보스턴에 있는 데이의 스튜디오에서 열었다.[1] 전시회를 여는 동안에, 지브란은 훌륭한 여교장으로 그보다 10년 연상인 메리 엘리자베스 해스켈을 만났다. 해스켈과의 중요한 우정은 지브란의 나머지 생애동안 지속되었다. 해스켈은 지브란의 개인적인 삶과 그의 창작 활동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 지브란은 1908년에 파리에 가서 아우구스테 로딘과 함께 2년동안 예술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평생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이었던 유세프 호와예크(Youssef Howayek)를 만났다. 그는 이후에 보스턴에서 예술을 공부했다. 지브란과 알고 지낸 사람이었던 줄리엣 톰슨은, 지브란의 여러 일화를 기록했다.[9] 그녀는 지브란이 바하이 신앙의 리더로서 대략 1911년[4]에서 1912년 경에 미국을 방문한[9] 압둘-바하를 만났다고 적었다. 지브란의 초기 작품은 거의 대부분 아랍어로 기록되었고, 1918년 이후에 출간된 그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기록되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은 알프레드 노프 회사에서 1918년에 "미친 사람"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두께가 얇은 그 책은 성서적 운율을 따른 경구와 비유를 담고 있으며, 시와 산문의 중간 쯤에 해당하는 문체를 지니고 있었다. 지브란은 또한 뉴욕 펜 연맹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민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레바논계 미국인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지브란은 작품에서 기독교를 많이 다루었는데, 특히 영적인 사랑의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그의 시는 영감이 충만한 말로 삶의 화두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고, 그뿐 아니라 형식적인 언어의 사용으로도 주목받았다. 지브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예언자"는, 스물 여섯 편의 시적인 산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죽음과 유산[편집]   워싱턴 D.C.의 칼릴 지브란 기념물 파일:Gibran Museum.jpg 지브란 박물관과 지브란의 무덤, 레바논 브샤리에 있다. 지브란은 뉴욕에서 1931년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의 원인은 간경변과 폐결핵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그 소원은 1932년에 이루어졌다. 메리 해스켈과 그의 언니 마리아나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을 구입했고, 그 곳에 지브란을 묻고, 지브란 박물관을 세웠던 것이다. 기념물[편집] 레바논 우편 통신부가 1971년에 기념 우표 발행 레바논 브샤리에 있는 지브란 박물관 지브란 칼릴 지브란 정원, 레바논, 베이루트 칼릴 지브란 거리, 캐나다, 퀘벡 2008년 9월 27일 지브란 탄생 125주년을 기념해 만듦 지브란 칼릴 지브란 스키 피스트(활강 코스), 레바논, 케다르 스키 리조트 칼릴 지브란 기념 공원, 워싱턴 D.C.[10] 1990년에 기증됨[11] 작품[편집] 아랍어: 누브사흐 피 판 알무지카 (1905) 아라이스 알무루즈 (골짜기의 요정, 1906) 알아르와 알무타마르리다 (반항하는 영혼, 1908) 알아즈니하 알무타카스시라 (부러진 날개, 1912) 다마 와 이브티사마 (눈물 한 방울과 웃음 한 조각, 1914) 알마와키브 (행렬, 1919) 알하와시프 (폭풍우, 1920) 알바다이 와알타라이프 (새롭고도 놀라운,1923) 영어: 미친 사람 (1918)  스무개의 그림 (1919) 선구자 (1920) 예언자 (1923) 모래와 거품 (1926) 상상의 왕국 (1927) 예수, 사람의 아들 (1928) 지구 신 (1931) 사후 출간, 영어: 방랑자 (1932) 예언자의 정원(1933) 나사로 그의 사랑 받은 자 (1933) 산문과 시 (1934) 자화상 (1959) ===============================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절반만 친구인 사람을 접대하지 말라... 절반만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지 말라 절반의 인생을 살지 말고, 절반의 죽음을 죽지 말라 침묵을 선택했다면 온전히 침묵하고 말을 할 때는 온전히 말하라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침묵하지 말고 침묵하면서 말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면 솔직하게 표현하라 감추지 말라 그리고 거절한다면 분명히 하라 불분명한 거절은 나약한 받아들임일 뿐이므로 절반의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말고 절반의 진실을 믿지 말라 절반의 꿈을 꾸지 말고 절반의 희망에 환상을 갖지 말라 절반의 물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 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채우지 못한다 절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 절반의 구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그대의 다른 절반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그대 그대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 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 그대가 뒤로 미룬 웃음이며 그대가 하지 않은 사랑이고 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 도달했지만 도착하지 않은 것이고 일했지만 일하지 않은 것이고 참석했지만 결국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대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을 그대에게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절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그대는 할 수 있다 그대는 절반의 존재가 아니므로 그대는 절반의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하는 온전한 존재이므로 - 칼릴 지브란 (류시화 옮김)   가장 나쁜 사랑은 절반만 사랑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사랑은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무의미한 명상은 절반의 마음만 앉아 있고 절반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지루한 삶은 마음 밑바닥에서 잠든 채 반쯤 깨어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반의 의욕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의 시인 칼릴 지브란(1883~1931)이 쓴 시다. 레바논 베샤레 마을의 삼나무 계곡에서 태어나 뉴욕 맨해튼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독신으로 생을 마쳤지만, 그의 정신은 일생 동안 삶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다.  우리의 삶은 지금 이 순간과의 결혼이다.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고 온전히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킨다. 세계적인 작문 지도 교수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고 말했다. 그것은 모든 일에 해당된다. 뼛속까지 느끼고, 뼛속까지 사랑하고, 뼛속까지 경험하는 것.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간들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부재하는 이 삶을 견디고 있는가. 이 지상에서 무엇인가에 온전히 마음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마음을 쏟아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 존재에 대해 갖는 기쁨이다.   /////////////////////////////////////////////////////    칼릴 지브란의 편지 - 살아남아 고뇌하는 이를 위하여 1. 술이야 언젠들 못 마시겠나 취하지 않았다고 못 견딜 것도 없는데 술로 무너지려는 건 무슨 까닭인가 미소 뒤에 감추어진 조소를 보았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분노 때문인가 그러나 설혹 그대가 아무리 부유해져도 하루엔 세 번의 식사만 허용될 뿐이네 술인들 안 그런가, 가난한 시인과 마시든 부자이든 야누스 같은 정치인이든 취하긴 마찬가지인데 살아 남은 사람들은 술에조차 계급을 만들지 2. 세상살이 누구에게 탓하지 말게 바람처럼 허허롭게 가게나 그대가 삶의 깊이를 말하려 하면 누가 인생을 아는 척하려 하면 나는 그저 웃는다네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죄나 선행은 물론 밤마다 바꾸어 꾸는 꿈조차 누구나 비슷하다는 걸 바람도 이미 잘 알고 있다네 3. 사람들은 또 너무 말을 많이 하고 산다네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나는 괜찮은데 남들이 무어라 하겠나" 그윽한 목소리로 질타를 시작한다네 그러나 보게나, 조금은 빠르게 아니면 조금은 늦겠지만 삶에 대하여 모두들 잘 알고 있는 데도 세상에는 벙어리나 부러워할 수다쟁이와 시인 성직자 그리고 교수가 넘친다네 4.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스치며 울고 웃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가 이제 남아서 내게 미소를 보내겠나 그대의 삶이 아무리 엄청나 보여도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그대가 나와 함께 누우면 너만이라든가 너만을 위해서라는 언약이나 속삭임도 바람처럼 흩어지고 세월은 또 가고 어제처럼 새들이 울고 꽃이 피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또 서로의 매듭을 만들고 5. 그리고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들지 재물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누군가를 그러나 진실로 무엇인가 소유하고 싶으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네 설혹 무엇인가 소유했을지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대가 내 곁으로 올 때는 그와 잡았던 손을 놓아야만 한다네 사람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 모두에게 자유를 주고 모두로부터 자유로울 때 진정 살아 행복할 수 있다네 6. 살아 숨쉬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길가의 들꽃인들 마구 딸 수 있겠는가 아름답다 느끼는 건 그대의 마음 보듬고 싶다는 건 그대의 욕심 꺾이는 순간이 뜰꽃에겐 종말이라네 낚시에 걸려드는 고기를 생각해 보았나 한끼의 식사를 취하려다 매달리는 물고기를 그 또한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 함께 사는 네 이웃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 그대에게 환희가 있다는 말에 예수나 석가의 이름을 빌려야 하나 그들인들 그대를 대신해 살아 주겠나 7. 태양을 보게나 살아 남아 있는 동안 얼마나 태양을 보며 푸른 하늘과 숨을 쉬겠나 등을 돌리면 보이는 건 그림자뿐 아무리 그대가 삶을 버리고 싶을 만큼 지쳐 있다 해도 나는 부러워하지 그대의 한숨이나 눈물도 무덤 속보다는 행복하지 않은가 비록 여기는 죄인도 판사도 없고 그 누구에게 지배받지도 않지만 모차르트도 연주를 멈추었고 고호도 붓을 놓았다네 8. 때때로 임종을 연습을 해두게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해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고 나면 슬픈 기색을 보이던 이웃도 이내 평온을 찾는다네 떠나고 나면 그 뿐 그림자만 남는 빈 자리엔 타다 남은 불티들이 내리고 그대가 남긴 작은 공간마저도 누군가가 채워 줄 것이네 먼지 속에 흩날릴 몇장의 사진 읽혀지지 않던 몇 줄의 시가 누군가의 가슴에 살아 남은 들 떠난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9. 그대 무엇을 잡고 연연하며 무엇 때문에 서러워하나 그저 하늘이나 보게. ---------------- 칼릴 지브란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1883.12.6 ~ 1931.4.10) 철학자· 화가· 소설가· 시인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한 레바논의 대표작가. [국적] 레바논 [활동분야] 문학, 미술, 철학 [출생지] 레바논 북부 베샤르(베챠리) [주요작품]《예언자》《모래·물거품》《방랑자》《부러진 날개》等 ===================    예언자   칼릴 지브란   그러나 그대들이 같이 있음에 공간이 있게 하라.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로 춤출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의 구속을 만들지 말라.   그대들 영혼의 해변에 일렁이는 바다가 있게 하라.   상대방의 잔을 채워주되 한 잔으로 마시지 말라. 당신의 빵을 상대방에게 주되 같은 빵을 서로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즐거워하라. 그러나 각자는 혼자 있도록 하라.   마치 거문고의 줄이  같은 음악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혼자 있은 것과 같이.   너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주되, 상대방이 소유하지 않게 하라. 생명의 손만이 너의 마음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느니라.   같이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지 마라.   성전의 두 기둥은 서로 떨어져 있으며 참나무와 사이프러스나무는 상대방의 그늘에서 자랄 수 없다.     .
2041    아랍 "망명시인" - 니자르 카바니 댓글:  조회:4882  추천:0  2017-02-19
저항의 로맨티시즘  아랍의 '망명시인'으로 유명한 니자르 카바니는 1923년 3월 21일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났다. 스물한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다마스커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45년 외교관의 길에 들어섰지만, 시에 대한 열정 때문에 후일 그만뒀다.  카바니는 관능적이고 로맨틱한 산문들을 써서 아랍의 다양한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카바니가 아랍어 신문인 Al Hayat에 실었던 기사와 시들은 12권짜리 묶음으로 나와있다). 반면 그의 시들은 일상언어로 구성돼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집트의 소설가 겸 주간 '문학뉴스' 편집장인 가말 엘 기탄티는 "엘리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시를 향유할 수 있도록 했다"고 카바니의 업적을 평가한다. 또다른 이집트 소설가 모나 헬미는 "카바니의 위대함은 남녀 사이의 로맨스 뿐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 압제자와 피압제자의 관계를 묘사할 때에도 아름다운 시어들을 구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평했다.  첫 번째 시집 The Brunette had Told Me (1944)에는 고향인 다마스커스가 강력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The Jasmine Scent of Damascus"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카바니의 시는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쪽으로 향하게 된다.  아랍세계 전역에서 애송됐던 2행시 "O Sultan, my master, if my clothes are ripped and torn it is because your dogs with claws are allowed to tear me"에는 독재 혹은 공포정치에 대한 저항정신, 그리고 아랍인들이 공유했던 좌절감 따위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2행시 연작 형식으로 돼 있는 이 싯구는 '패배의 書' Hawamish 'ala Dartar al-Naksah 의 일부분이다).  아마도 카바니가 '술탄'이라 부르며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시리아의 독재자 하페즈 알 아사드였을 것이다(아사드는 2000년에 죽었고 지금은 그의 아들 바샤르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어쨌든 이 시를 발표한 뒤 카바니는 시리아 뿐 아니라 아랍 전역에서 숭배의 대상이 됐다. 시리아든 이집트든 상황은 비슷했을테니까.  당신의 미친 개가 내 옷을 짖어버렸소  카바니의 시에서 아랍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이스라엘과의 '6일 전쟁'에서 아랍권이 대패한 뒤부터다. '패배의 서'에 딸린 노트에는 카바니의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카바니는 연애담 대신 아랍-이스라엘 분쟁과 같은 정치적인 주제 쪽으로 시각을 돌리게 됐다. 그는 이 치욕적인 패배의 탓을 아랍의 무능한 지도자들에게 돌렸다. 아랍인들은 자기 생각을 말할 자유도,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민사회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들고나온 카바니의 시는 아랍 문학계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비평가들은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시, 사랑 얘기 따위나 써온 작자가 국가적인 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고 비아냥거렸고, 어떤 이들은 이슬람 세계의 '점잖은 기풍'에 맞지 않게 관능적이고 감각적이었던 그의 시가 청소년의 도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고리타분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또다른 사람들은 카바니가 패배의 상처에 괴로워하는 아랍인들에게 손가락질이나 해대는 사디스트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다. 즉 그는 '아랍 군대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리는 이적분자'라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작가들은 카바니를 비난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카바니는 가말 압둘 나세르 이집트대통령에게 위협에서 보호해주도록 청원하는 편지를 써야했을 정도였다.  적은 우리의 나약함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카바니가 아랍인들의 사랑을 받은 동시에 지탄을 받았던 것은, 그가 패전의 원인으로 아랍 내부의 문제를 들고나왔기 때문이었다. '패배의 서'에서 카바니는 말한다.  The Jews did not come across our borders,  but they crept in like ants through our defects.  우리의 적은 우리의 국경선을 넘지 않았다  적들은 개미처럼 우리의 나약함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상실(이스라엘 건국)과 1967년 전쟁의 패배라는 두 가지 치명적인 패배에 대해 카바니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충격과 상실감이었지만, 그는 곧 미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찾는 의지력을 회복한다.  O (our) children  rain of the spring, buds of hopes!  you are fertile seeds in our barren life;  you are the generation that will vanquish the defeat.  어린이들은 봄비, 희망의 싹들  너희들은 불모의 삶에 풍요로운 씨앗을 내려  패배의 그늘을 가시게 해줄 세대  (Palestine and Modern Arab Poetry 수록)  카바니가 눈에 띄는 또하나의 지점은 여성을 보는 그의 시각이다. 팔레스타인 작가 Salma Khadra Jayyusi의 말을 들어보자.  "보수적인 교육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던 카바니는 여성문제를 한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구적인 여성관(女性觀)을 갖고 있던 그는 아랍권에 페미니즘이 유행하기도 전에 자신만의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그가 쓴 에로틱한 산문들에는 그가 생각했던 '자유' 개념이 드러나 있다. 자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총체'로서의 자유를 추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여성의 몸과 영혼을 해방시켜라  정치적 자유를 논했던 시인은 카바니 이전에도 아랍세계에 많이 있었다. 정치적 자유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투사들만이 시인으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아랍에는 출신국 정부의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망명한 시인과 작가들이 넘쳐났다. 망명시인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카바니가 거둔 성과는 두드러진다. 이는 그가 정치적 억압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랍 문화의 금기들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관능'이었다.  그는 수세기동안 이어져 내려온 억압적인 규율로부터 육체와 영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특히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와 신체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사회의 금기로부터 여성들을 빼내어 여성들로 하여금 잔인한 성적 차별을 자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외쳤다.  한번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더 이상 기만은 있을 수 없다. 광신도들의 역습이 종교, 명예라는 이름 아래 시작됐지만 보수파들의 반격이 카바니의 언어를 왜곡할 수는 있을지언정 이미 자각되기 시작한 것을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었다. 카바니가 외쳤던 것들은 미약한 형태로나마 지금까지도 아랍인들의 정신 속에 살아 있다. 그의 시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혼의 나팔소리다. /번역/정리 딸기. Nizar's Life March 23 1923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출생 Dec 28 1941 시리아 독립 1944 첫 시집 "The Brunette Told Me" 발표 1945 다마스커스대학 법학과 졸업, 외교부 근무 시작 1947 첫번째 엔솔로지 Childhood of a Breast 발표 1947-49 팔레스타인 전쟁, 이스라엘 시나이반도, 서안, 예루살렘 점령 May 15, 1948이스라엘 건국 1954 Bread, Hashish and Moonlight 발표 1956 수에즈 전쟁 1957 Poems For Nizar Qabbani 출간 1961 My Beloved Published 발표 1963 Poetry is a Green Lamp 발표 1965 스페인어로 된 Five Letters to My Mother 발표 1966 외교관직 사직, 런던 이주. Drawing in Words 출간 1967 6일전쟁. 이스라엘, 골란고원 점령. '패배의 서' 초안 작성 1968 The Diary of a Blase Woman, Palestine Liberation Movement, Poets of the Occupied Land 발표 1970 The Book of Love, Commando Graffiti on the Walls of Israel 발표 1972 A Hundred Letters, Outlawed Poems 발표 1973 Balquis al Rawi 와 결혼, 맏아들 사망. 4차 중동 전쟁 발발 1976 시리아군, 레바논 북부 점령 1979 미-이스라엘 평화조약 체결, 이란에서 호메이니 집권 1981 부인 Balquis, 친이란계 게릴라 공습으로 사망 1982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 1987 Modern Arabic Poetry An Anthology 발표 1990 Abu Jahl buys Fleet Street 퇴고 1998 On Entering the Sea: The Erotic and Other Poetry of Nizar Qabbani 발표 1998.5.1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언어로 세상을 정복하는 시인   니자르 카바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아랍세계에서는 한때 식자층 사이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고, 또 유명한 '이집트의 여가수' 움 칼툼이 그의 시를 노래로도 불렀다고 한다. 움 칼툼의 입을 통해 가락을 얻었던 카바니의 시는 2차대전 뒤 '절망의 시대'를 살아갔던 아랍인들에게는 분노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며 동시에 마음을 달래주는 벗이었을 것이다. 타리크 알리의 '근본주의의 충돌'에는 카바니의 역작 '패배의 서'가 나온다. 그 시를 읽고난 뒤 카바니에 대한 자료를 좀 찾아보았다. 아랍어로 된 그의 시를 원작 그대로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게 안타까웠다. 그의 시에서 줄기를 이루는 관능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그 관능성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카바니의 싯귀 몇마디에 가슴이 저렸고, 민족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도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시 속에 담긴 통한을 얼핏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카바니는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드문 시인이라고 했다. 형식에 얽매여 있던 아랍의 시를 해방시킨 해방자이자, 선구적으로 여성의 해방 그리고 '몸의 해방'을 외치며 이슬람 근본주의에 도전한 사람이기도 했다. 카바니라는 인물과, 시 몇편을 소개한다.   Hawamish 'ala Dartar al-Naksah (패배의 書) 1.  낡은 단어는 죽었다.  낡은 책들도 죽었다. 닳아빠진 신발처럼 구멍난 우리의 언어는 죽었다.  우리를 패배로 이끈 정신도 죽었다. 2.  우리의 시에서는 신내가 난다. 여자들의 머리, 밤, 커튼, 소파들에서도 신내가 나고 있다. 모든 것에서 신내가 났다. 3.  슬픔에 잠긴 내 조국, 섬광 속에서 사랑의 시를 써왔던 나를 변화시켰구나. 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 4. 언어는 우리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구나. 우리는 우리의 시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5.  동양적 호언장담에 휩싸여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과장된 오만함으로, 깡깡이와 북을 든 채 우리는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패배했다. 6. 우리의 외침은 우리의 행동보다 더 크구나. 우리의 칼은 우리의 키보다 더 크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7. 요컨대 우리는 문명의 망토를 입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석기시대에 살고 있다. 8. 피리나 플루트로는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9. 우리의 조급함 때문에 5만 개의 새로운 난민텐트가 지어졌다. 10. 하늘을 저주하지 말지어다 만약 하늘이 너를 저버렸을지라도 환경을 탓하지 마라. 신은 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승리를 준다. 신은 칼을 두드리는 대장장이가 아니다. 11. 아침에 뉴스를 듣는 것은 고통스럽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 것도 고통스럽다. 12. 우리의 적은 우리의 국경선을 넘지 않았다. 적들은 개미처럼 우리의 나약함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13. 오천년 동안 우리는 동굴 속에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우리의 문화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의 눈은 파리들의 안식처일 뿐이다. 친구여, 문을 부숴라, 머리를 감아라, 옷을 빨아라, 친구여, 책을 읽어라, 책을 써라, 언어와 석류나무와 포도를 길러라, 안개와 눈의 나라로 항해하라. 너희가 동굴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너희를 혼혈아의 피로 간주한다. 14. 우리는 영혼이 텅 빈 채로  두껍게 살이 올라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마법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고, 체스를 두거나 잠을 잔다. 우리가 과연 '신이 인류를 위해 내린 축복 받은 민족'이란 말인가. 15. 우리의 사막에 있는 기름은 화염과 불의 劍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숭고한 조상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기름을 창녀의 발가락 사이로 흘려 버리고 있다. 16.  우리는 거리로 미친 듯이 뛰었다. 밧줄로 사람들을 끌며 창문과 자물쇠를 때려부수며 우리는 개구리처럼 칭찬하고 개구리처럼 맹세하며 소년을 영웅으로 만든다. 그러면 그 영웅은 곧 불량배가 되고 만다. 우리는 멈춰 서서 생각하지 않는다. 사원에서 멍하니 몸을 웅크리고서 시를 쓰고 잠언을 외우면서 신에게 구걸한다. 적을 이기게 해달라고. 17. 만일 내 안전을 약속받고서 술탄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술탄이여, 당신의 미친 개가 내 옷을 짖어버렸소. 당신의 염탐꾼이 나를, 그 눈이 나를, 그 코가 나를, 그 발자국이 나를 못살게 했소이다. 운명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내 아내를 욕보이고 친구들의 이름을 욕되게 했소이다. 술탄이여 내가 당신의 벽에 가까이 다가서서 내 고통에 대해 말했을 때 당신의 군인들은 내게 발길질을 했고  신발을 핥도록 강요했소이다. 술탄이여 당신은 두 번이나 전쟁에 패했소이다 술탄이여 우리 국민의 절반은 혀를 가지고 있지 않소 혀가 없는 사람들을 어디에 쓸수 있겠소? 우리 국민의 절반은 개미나 쥐새끼처럼 갇혀 있구려. 벽과 벽 사이에."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술탄에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은 두 번이나 전쟁에서 패배했소. 당신의 자식들을 보살피지 못했단 말이오." 18. 만약 우리가 단결을 땅 속에 묻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만일 우리가 총검으로 단결의 어린 싹을 짖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단결이 우리의 눈망울 속에 머물러 있었다면, 개들이 우리의 살결을 물어뜯지는 못했을텐데. 19. 우리는 성난 세대를 원한다 하늘을 개척하고 역사를 날려버리며 우리의 생각을 날려버리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세대를 원한다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허리를 굽히지 않는. 우리는 거인의 세대를 원한다. 20. 아랍의 어린이들아. 오, 미래의 씨앗들, 우리의 사슬을 깨뜨려다오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아편을 죽이고 망상을 없애 다오. 아랍의 어린이들아, 질식할듯한 우리 세대를 따르지 마라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수박껍질만큼 가치가 없다. 우리를 따르지 마라. 우리를 닮지 마라. 우리를 받아들이지 마라. 우리의 생각도 받아들이지 마라. 우리는 사기꾼과 도둑의 민족이다. 아랍의 어린이들아,  오, 봄비여, 미래의 씨앗들이여, 너희는 패배를 극복할 바로 그 세대다. /타리크 알리, 에서  ===============================   그림을 그리며 얻은 교훈                          - 니자르 카바니 아들이 물감통을 내 앞에 내밀면서 새를 그려 달라 한다 나는 붓에 회색 물감을 떨구어 빗장과 자물쇠로 막힌 사각형을 그린다 놀란 눈으로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 이건 감옥이잖아요 모르세요, 새를 어떻게 그리는지?" 나는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용서해다오 나는 새를 그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들은 스케치북을 내 앞에 놓고 밀을 그려 달라 한다 나는 펜을 쥐고 총을 그렸다 아들이 무식한 아비를 타박하며 말한다. "아버지, 밀과 총의 차이도 모르세요?" 나는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한때 나도 밀 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빵이 어떻게 생겼는지, 장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는 숲 속의 나무들도 시민군이 되고 장미도 방탄복을 입는단다 무장한 밀의 시대엔 새들도 무장을 하고 문화도 무장을 하고 종교도 무장을 한단다 숨겨진 총을 찾아내지 못하고서는 빵 한 덩어리 살 수 없단다 얼굴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서는 들판의 장미를 꺾을 수 없단다 손마디가 폭탄에 날아가지 않고서는 책 한 권 살 수 없단다" 아들이 내 침대맡에 앉아 시를 들려 달라 한다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베개를 적신다 아들이 놀라 눈물을 닦으며 묻는다 "아버지, 이건 시가 아니라 눈물이잖아요" 나는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네가 자라서 아랍의 시를 읽게 되면 말과 눈물은 쌍둥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랍의 시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눈물이라는 걸 알게 될 거란다" 아들이 펜을 내 앞에 놓인 필통 안에 내려놓고는 고향을 그려 달라 한다 붓을 쥔 손이 떨려  나는 주저앉아 울고야 만다.   ===========////////////////////////////////============== 그림에서 얻는 교훈                                      니자르 카바니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는 숲 속의 나무들도 시민군이 되고 장미도 방탄복을 입는단다. 무장한 밀의 시대엔 새들도 무장을 하고 문화도 무장을 하고 종교도 무장을 한단다. 숨겨진 총을 찾아내지 못하고서는 빵 한 덩어리 살 수 없단다. 얼굴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서는 들판의 장미를 꺾을 수 없단다. 손마디가 폭탄에 날아가지 않고서는 책 한 권 살 수 없단다. 아들아 네가 자라서 아랍의 시를 읽게 되면 말과 눈물은 쌍둥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랍의 시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눈물이라는 걸 알게 될 거란다.     팔레스타인 예술가 부슈라 샤난이 2014년 8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때 찍힌 사진을 합성해 만든 작품. /사진 인터넷 캡처 [출처] 그림에서 얻는 교훈 -니자르 카바니|작성자 알렉산드리아   빵, 해시시, 그리고 달   Nizar Qabbani   동쪽에서 달이 태어날 때 흰 지붕들 위로 잠든채 표류해갈 때 높이 떠오른 빛덩이 아래로 사람들이 가게 문을 닫고 떼지어 행진해간다 달을 만나러 빵과 라디오를 들고 산꼭대기로 환각제를 들고서 거기서 사람들은 마약을 사고판다 그리고 이미지들, 달이 생명을 얻을 때 사람들은 죽어간다 저 빛나는 원반이 내 고향의 무엇이런가 예언자의 땅, 검소한 사람들의 땅 담배를 씹고 마약을 팔아대는 사람들의 땅 달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이 무어가 있나 용기를 탕진하면서 천국을 구걸하는 우리들에게 게으르고 나약한 이들에게 천국이 무슨 필요가 있나 달이 생명을 얻을 적에 사람들은 시체로 변해간다 그리고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면서 밥과 아이들을 내놓으라 한다 세련되고 우아한 깔개를 펼치고서 '운명' 혹은 '숙명' 이라는 이름의 마약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 조국, 달빛이 내리꽂힐 때  나약함과 부패가 사람들을 붙들어매는 땅 깔개들, 수천개의 바구니들, 찻잔들, 그리고 언덕 위에서 맹세한 어린아이들 어리석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빛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내 조국 모두가 장님으로 살아가고 기도하고  간음하고 체념한 채 살아가는 곳 그들에겐 언제나 초승달 뿐이다 "오 초승달이여! 기적의 신이 기다리고 계시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당신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동녘에 계시네 감각을 잃은 군중을 위한  다이아몬드 한 무더기" 달이 저물어가는 동쪽의 밤 동녘은 명예와 활력을 모두 빼앗겨 버리다 네 명의 아내를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심판의 날을 믿는  맨발의 군중들 꿈속에서만 빵을 먹을 수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 집안에서 기침으로 밤을 새던 사람들 약이라고는 구경 한번 못 해보고 불빛 아래 시체처럼 쓰러지는 사람들 어리석은 울음소리 죽어가는 흐느낌만이 있는 내 조국 초승달이 뜰 때마다 눈물이 늘어나고 형편없는 류트 혹은 '밤'의 노래곡조에 감동하는 곳 내 조국,  검소한 사람들의 땅, 끝없는 노래를 길게 늘여 불러 동녘을 소비하고 파괴하는 곳 동녘은 역사를 씹어대고  무기력한 꿈과 공허한 전설을 씹어대면서 아부 자이드 알 힐랄리의 피카레스크에서 영웅주의의 총합을 본다 1954 /번역; 딸기   ===============//////////////////////////////============ The face of Qana 카나의 얼굴 1 카나의 얼굴 예수의 얼굴처럼 4월의 바닷바람처럼, 창백한. 빗물처럼 흐르는 피, 그리고 눈물. 2 숯덩이가 된 우리 몸을 짓밟고 그들이 카나로 들어왔다 이 남쪽땅에 나치의 깃발을 올리며 폭풍의 한 장을 열어젖힌다 히틀러는 가스실에서 그들을 불태웠고 이제 그들은 히틀러의 뒤를 이어 우리를 불태운다 히틀러는 그들을 동유럽에서 내쫓았고 이제 그들은 우리를 우리 땅에서 내쫓는다 3 그들이 카나에 들어왔다 굶주린 늑대처럼 메시아의 집을 불태우고 후세인의 옷과 남쪽 땅을 짓밟는다 4  폭격을 맞은 밀밭과 올리브나무, 담배밭, 그리고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 폭격을 맞은 카드모스 폭격을 맞은 바다와 갈매기들 폭격을 맞은 병원들, 아이를 돌보던 어머니들, 학생들 폭격을 맞은 남쪽지방의 아름다운 여인들 달콤한 눈 속엔 짓밟힌 정원들 5  우리는 알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걸 보았고 피묻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 속에 기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6  누가 카나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이 곳은 두 번째 카르발라였다고 양피지에 새겨줄 수 있을까 7  카나는 숨겨져 있던 것의 베일을 벗겼다 우리는 아메리카를 보았다 유대 랍비의 오래된 옷을 입고 학살을 이끌며 이유 없이 우리 아이들을 폭격하고 이유 없이 우리 아내들을 폭격하고 이유 없이 우리 나무를 폭격하고 이유 없이 우리의 생각을 폭격하는 아메리카, 세계의 여왕 그들은 헤브루에서 아랍을 깔아뭉개라는 포고령을 내린 것일까 8  아메리카의 지배자는 매번 우리를 죽이기 위해 대권을 얻는 것인가 우리, 아랍을 죽이기 위해 9  우리는 하나의 아랍이 나타나 우리 목을 찌르는 가시덩쿨을 빼내주기를 기다렸다 한 명의 영적인 지도자, 한 명의 왕, 한 명의 돈키호테, 한 명의 영웅이 나타나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할리드, 타리크 혹은 안타라를 기다리면서 허튼 수다만 늘어놓고 있었다 학살이 끝나고 나서 그들은 팩스 한 장을 보냈다 기도를 마친 우리는 그것을 읽었다 10  우리의 절규에 이스라엘이 무슨 두려움을 느끼랴? 우리가 팩스를 보내면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랴 팩스의 지하드는 성전 중에서도 가장 나약한 성전이다 우리가 쓴 단 하나의 텍스트는 우리를 떠나간 순교자들, 그리고 우리에게 올 모든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11  알 무카파, 자리르, 그리고 파라즈다크. 이스라엘이 그들의 무엇을 두려워하랴 무덤 입구에서 시를 집어던지는 칸사. 타이어를 불태우고 코뮤니케에 서명하고 상점을 부수면 그녀가 두려워할까 우리에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왕이 없다는 걸, 우리에게 있는 것은 수다장이들 뿐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는데 12  북을 친다고 해서, 옷을 찢고 뺨을 긁어댄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아드와 타무드의 이야기를 듣는다 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13  우리 민족 모두가 코마상태에 빠져 있다 정복의 시대 이래로 우리는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 14  우리는 덜 익은 밀가루반죽 같은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학살과 테러를 계속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게을러지고 냉담해져간다 15  질식할 것 같은 점령 점점 추해져가는 사투리 격리돼 가는 녹색 땅들 메말라가는 여름의 나무들 그리고, 변덕스럽게 이전의 경계선들을 잡아먹어가는 경계선들. 16  이스라엘이 우리를 모두 학살할거야. 못할 까닭이 없지. 이스라엘은 히샴, 지야드, 알라시드를 죽일거야. 못 그럴 이유가 없지. 왜 아니겠어? 바누 타흘라브를 죽이고 그들의 아내를 빼앗을거야. 왜 아니겠어? 바누 마젠을 죽이고 그들의 자식들을 빼앗아가고. 왜 아니겠어? 바누 아드난의 바지를 무릎으로 끌어내리고 입술과 목을 갈망할지도! 17  이스라엘이 무엇때문에 아랍세계를 두려워하겠어 그들이 예후다가 되었는데 1996  /번역; 딸기 ++ 카나 대학살: 1996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카나(Qana)에 있는 UN 캠프를 폭격, 107명을 학살한 사건.
2040    러시아 시인 - 발라쇼브 에두아르드 댓글:  조회:3215  추천:0  2017-02-19
+(플러스) - 발라쇼브 에두아르드(Balashov Eduard)         눈바람 춤이 끝났고, 회오리 춤 윤무 따라 지나갔다. 땅이 노래하는 것을 겨우겨우 들었다.   봄은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 너 저기로 가 즐거운 사람들의 말, 더 깨끗한 맑은 하늘.   달은 습관이듯 낮으로 나가고, 어두움을 떨쳐버린다 가는 손가락으로 들어올리는, 성냥의 빛처럼   마음은 더욱 따뜻함을 원한다 남은 일을 미룰 힘이 없다.   흰 종이 가벼운 손 아, 첫 줄을 쓰는 것 어떻게나 좋은지!         발라쇼브 에두아르드(Balashov Eduard) 1938년 출생. 1962년 바우마모스끄바국립기술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고리끼문학대학을 졸업하다. 1967년에 연간 1회 발행되는 '시인의 날'잡지로 데뷔했다. 2004년 Intermational Award(국제상)가 수상하는 금깃털 상을 수상하였다. 1977년부터 고리끼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72년 첫번째 시집 '정보전달자' 간행 후 '빵의 바람' '추적자' '제철'등 열권의 시집을 출판하였으며, 최근의 시집으로는 2004년에 발행한 '꿈의 꽃'이 있다.  
2039    몽골 시인 - 롭상도르징 을찌터그스 댓글:  조회:3358  추천:0  2017-02-19
무제          - 롭상도르징 을찌터그스(Luvsandorjiin Ulziitugs)         ***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그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느낀다는 것은 끝없이 불안한 일이다 사랑이란 황홀한 두려움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뾰족한 가위로 제 눈을 찌르는 일이다 그러고서 더듬더듬하며 희망을 붙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꿈을 지어내고 죽도록 그것을 믿어주는 것이다 제 심장을 자신이 쥐락펴락하며 피를 부드럽게 움켜쥐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끝없이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제 몸이 산산조각 부서진다는 것을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올라가는 용기다 열쇠는 아주 많이 있지만 굳게 잠겨 있는 인생에 단 한번, 그러나 언제라도 열린 수 있는 문이다 그것은 한번 들어간 사람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깊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어디선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고통스런 웃음이다   *** 나의 마음은 메말랐고 나의 눈은 흠뻑 젖어 있고 나의 심장은 적막하고 나의 살갗, 머리카락, 손, 발, 입술, 혀는 이미 생명이 끊어졌는데도 아아, 이 돌, 잠자리, 작은 새, 영겁을 버텨온 산들 손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무수한 나무의 그림자들 내가 이리도 마음 아파하는 줄 알면서도 아무 말 없는 하늘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단 한사람도 걸어오지 않는 저 길.... 아아, 이 모든 것들이 무엇에 비할 수 없이 고요하니 무슨 연유일까?   *** 벗어서 의자에 걸쳐놓은 드레스 자락이 갑작스런 바람에 휙 들춰졌다 아무렇게나 꾸겨서 던져놓은 스타킹이 가지런히 펴졌다 무슨 일일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사내의 억센 팔이 뒤에서 나를 꽉 껴안는다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이 밀착되었고 거칠고 긴 숨결이 나의 목덜미를 점령했다 빨간 손을 내 상반신으로 뻗어 여태껏 한번도 배반해본 적 없는 나의 심장을 아프게 움켜잡고 어루만졌다 얼굴을 가렸던 커튼이 본능적으로 창문을 차단하자 나는 눈을 감고 "안돼요"하고 나지막히 외쳤다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 엄마의 자장가가 들린다 문이 갑자기 흐느껴 운다 벽들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삐걱대던 마룻바닥이 순식간 조용해졌다   *** 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날 나는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하늘의 신들에게 들렸다 그 울리는 메아리가 하늘에 도달해서야 멈췄다 어디선가, 어느 어두운 별 근처에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듣고, 또 듣고, 또 들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나는 동이 틀 때까지 그렇게 아파했지만 너는 대문을 다시 노크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를 떠나보내는 건지 분명히 알았지만 너는 지금 누구를 잃은 건지 전혀 몰랐다 벽과 문에 걸려 있는 거울들에 비치는 어두운 표정의 삶의 목전에서 내 어린 가슴에 감내하기 힘겨운 순진한 사랑을 집어넣어 잠그고는 그 열쇠를 눈물로 부러뜨려버렸다               롭상도르징 을찌터그스(Luvsandorjiin Ulziitugs)  1972년 다르항 시에서 태어났다. 몽골지식정보대학과 국립사범대학을 졸업했으며 몽골작가협회 회원이다. 시집으로는  '제 일 장' '하늘에서 자라는 나무' '나의 외로움의 역사'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안경에 남은 영상'이 있다.       '귀고리'에서 너의 이름이 맑게 울릴 때           롭상도르징 을찌터그스(Luvsandorjiin Ulziitugs) 1972년 다르항(Darkhan) 시에서 태어났다. 몽골지식정보대학, 국립사범대학을 졸업했으며, 몽골작가협회 회원이다. 시집으로는 『제 일 장』『하늘에서 자라는 나무』『나의 외로움의 역사』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안경에 남은 영상』이 있다. 2007년 아시아 시낭송 속초대회에 초청되어 몽골의 노래와 시를 낭송했다.     아시아 시인 서면 인터뷰                        아시아 시낭송 속초대회: 을찌터그스 시낭송 모습                                 타이안 편집위원 옌아이린 계간 시평 주간 고형렬 시인 몽골 편집위원 럽상도르징 을찌터그스         몽골이란 끝없이 펼쳐진 초원, 새파란 하늘, 낙타, 고비 사막, 민요를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노인,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 말을 타고 달리는 다섯 살 난 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혹독한 경울, 봄네 부는 거친 모래바람 그리고 초원의 평온함, 이 모든 것들이 저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어요.(중략)   여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이를 낳지요. 무수한 나날의 기다림 후에…… 기다림이란 끝없는 믿음, 거짓없는 순수한 마음, 인내심, 역경을 헤치고 나가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중략)   매일 , 매순간 나는 그 어떤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지요. 지금 이 순간 제가 기다리는 것은 몽골 사회에 밝고 환한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중략)   시는 그 자체가 자유라는 거예요. 우리는 시를 통해 어디든지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요. 시의 언어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그 세상에서 언제가지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요. 이것이 자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인간의고귀한 소원이라면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기다림이라고 생각해요.                                                                                                                                        ― 시평 2009년 가을호 아시아 시인 서면 인터뷰 중에서     기다림 - 롭상도르징 을찌터그스         밖에 서 있고만 싶다.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고만 싶다.   나무처럼 함박눈에 폭 파묻혀 서 있고만 싶다.   나의 얼굴에 시간의 형상이 아로새겨질 때까지 서 있고만 싶다   빨강 스카프가 하얗게 바랠 때까지 서 있고만 싶다   흘러서 흘러서 사라질 때까지 비를 맞으며 서 있고만 싶다   너의 향기를 싣고 간 바람이 나에게 되돌려줄 때까지 서 있고만 싶다   나의 귀고리에서 너의 이름이 맑게 울릴 때까지 서 있고만 서 있고만 싶다.   오지 않겠다던 네 말이 부끄러워 숨어버릴 때까지 서 있고만 싶다.   네가 오는 길을 부드럽게 하는 고운 모래가 될 때까지 서 있고만 서 있고만 싶다.              
2038    일본 시인 - 미야자와 겐지 댓글:  조회:5435  추천:0  2017-02-19
미야자와 겐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야자와 겐지 미야자와 겐지(일본어: 宮沢賢治, 1896년 8월 27일- 1933년 9월 21일)는 이와테 현 출신의 일본의 문인이자 교육자, 에스페란티스토이다. 향토애가 짙은 서정적인 필치의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작품 중에 다수 등장하는 이상향을 고향인 이와테의 에스페란토식 발음인 ihatovo라고 명명하였다. 지주들의 수탈로 가난에 허덕이던 농촌의 비참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인 《은하철도의 밤》을 짓는 등의 문학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사후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점점 높아져 국민작가의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다. 저서[원본 편집] 쥐돌이 쳇 주문 많은 음식점 바람의 마타사부로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은하철도의 밤 첼로 켜는 고슈 카이로 단장 미디어[원본 편집]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은하철도의 밤 (304회) EBS 《지식채널 e》 은하철도의 밤 ==========================================   출생일 1896. 8. 27, 일본 이와테 현[岩手縣] 하나마키[花卷] 사망일 1933. 9. 21, 하나마키 국적 일본 요약 일본의 시인·동화작가.   일본문학사상 중앙문단과 거의 관계가 없었던 이색적인 작가로, 시·동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1918년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지질 토양비료 연구에 종사했다. 특히 히에누키 군[稗貫郡]의 토성(土性) 조사는 뒤에 그의 활동에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한편 생가는 열렬한 정토진종(淨土眞宗) 집안으로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불교 경전을 접해왔는데, 중학시절 법화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1920년 니치렌종[日蓮宗]의 신앙단체로서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가 주재하는 고쿠추카이[國柱會]에 가입했다. 종교의 차이로 부모와의 대립은 깊어만 갔으며 1921년 무단 상경해 문필이나 교정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그는 농림학교 재학시절부터 단카[短歌]를 짓고 산문 습작을 하기도 했으며, 졸업 후에는 동화도 몇 편 썼다. 1921년 12월 히에누키 농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이듬해 11월 사랑하는 여동생 도시의 죽음을 겪었으며, 1926년 3월까지 계속 이 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반기는 그의 문학이 화려한 꽃을 피운 시기였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시집 〈봄과 수라 春と修羅〉(1924)와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리집 注文の多い料理店〉(1924)에 실린 작품들이다. 농학교 교사시절 후반부터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에 직면하게 된 그는 1926년 3월 하나마키로 돌아갔다. 거기서 젊은 농민들에게 농학이나 예술론을 강의하는 한편, 벼농사 지도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그러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자신의 농업기술로는 농민들을 가난에서 구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절망, 농민들의 도회지인에 대한 반감 등에 부딪혀 좌절감은 더욱 깊어만 갔다. 1933년 급성폐렴으로 37세에 요절했다. 만년에 나온 동화로는 걸작 〈은하철도의 밤 銀河鐵道の夜〉·〈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グスコ-ブドリの 傳記〉 등이 있다. [Daum백과] 미야자와 겐지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눈으로 말하다 / 미야자와 겐지 안 되겠지요 멈추지 않는군요 샘솟듯이 가래가 끓어올라 저녁부터 불면과 객혈로 주위는 푸르고 조용하고 아무래도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상쾌한 바람인가 이제 청명도 멀지 않아서 푸른 하늘에서 솟는 듯이 상쾌한 바람이 부는군요 단풍나무의 새싹과 털 같은 꽃은 가을 풀처럼 출렁이고 불탄 자리가 있는 등심초 멍석도 푸릅니다 당신은 협회에 다녀오시는지 검은 프록 코트를 입으시고 이렇게 열성껏 치료도 해 주시니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한이 없습니다 피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태평하고 괴롭지 않은 것은 혼이 반쯤 빠져 나간 때문인지요 그저 피가 많이 나서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이 가혹합니다 당신이 보면 매우 참담한 풍경이겠지만 나에게 보이는 것은 역시 아름다운 푸른 하늘과 맑고 투명한 바람뿐입니다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번역 :  권정생)   짧은 생애, 그렇지만 굵은 족적을 남긴 미야자와 겐지... ///////////////////////////////////////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2037    일본 시인 - 스즈키 히사오 댓글:  조회:3671  추천:0  2017-02-19
하나마키(花券).도요사와가와(豊澤川)를 건너 - 스즈키 히사오         아침 안개 속 하나마키 역부터 한 시간 걸어서 그리운 도요사와 다리를 넘어 나스지인협회가 있었던 곳에 '비에도 견디어내며'의 비(碑)를 향한다   밝아오는 주홍색 하늘에 어렴풋이 빛이 산란하며 남색 비구름이 흘러간다   하늘에서 빛 알이 되어 내려오는 아침 안개와 강수면에서 오르는 김이 섞여서 도요사와가와 부근은 새하얀 서운의 한복판이다   피안의 꽃과 보라빛 클로버들은 적색, 적자색에 물들어 75년 전에 이 다리를 건너간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 나는 시모네코 부근까지 걸어왔으나 이곳에서 솔밭을 볼 수 있을까   2 솔밭 오솔길을 빠져나가면 화톳불을 피었던 광장이 나온다 비석은 아침 안개에 젖어 서 있다 그 밑에 갠지의 분골과 전집이 놓여 있다   이틀 전에 있었던 갠지제의 기억이 되살아나 화톳불이 타는 붉은 빛깔이 어둠속에서 무수히 서로 다른 붉은 빛들을 잇달아 낳고 있다 나는 그 불 숙에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솔밭이 바람에 흔들려 새들이 요란스로워져 잘못 분 피아니카처럼 젖어지면서 '아래 밭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마침 들려와 솔밭 속에 빠져 내려갔다   3 노란 이삭 논이 보인다 냉해에도 견디어내는 리크우 132호 비료를 설계한 사람은 이삭 꺾는 끝을 보면서 어디서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백성으로서는 못 먹어 가뭄에 눈물을 흘리던 사람은 날품팔이로 전락해가는 백성들을 이곳에서 어떤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었을까   논 근처의 들판에는 열매를 많이 단 사과나무가 있었다 사과식중독으로 죽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유니크한 시인의 밭이란 여기였을까 땅위에 떨어진 사과 두개를 주워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나는 타듯이 목이 말라 사과 배탈이 나더라도 괜찮아 걸어가면서 싹까지 다 먹었다   그 사람의 뒷모습은 어느새에 논의 노란 이삭 끝에서 떨어져 오륜 고개를 넘어 이와태산 쪽으로 사라졌다         스즈키 히사오  1954년 도교에서 출생. 시집으로 '불의 기억'등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시적 반복력' '시가 쏟아지는 곳'들이 있음. 현재 도쿄에서 시와 시론 전문지 '콜삭'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 온 편지  ‘원고향(原故鄕)’을 찾아가는 길 -「시평」 창간 10주년 축하 편지 스즈키 히사오(鈴木比佐雄) 한성례 옮김                                        1    한강 물은 여전히 도도하게 흐르고 있겠지요. 지금 3월의 강변에는 봄의 야생초가 싹을 틔우고 있겠지요. 2003년 가을에 본 한강이 떠오릅니다. 강물 가까이까지 내려가 보았는데, 바로 앞에는 갯강아지풀, 왕고들빼기, 개망초 등의 야생초가 나 있었습니다. 그 풍경이 왠지 낯익었고, 언젠가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는 것처럼 아련하고 신기한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백제 멸망 시의 도읍인 부여는 아니지만 백제의 첫 수도가 서울(漢山)이었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어쩐지 제가 고구려와 신라의 군세에 쫓겨, 천 몇 백년 전의 한반도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백제의 한 청년으로서 일본을 향했을 것 같은 환상입니다. 저는 들꽃을 바라보면서 산책하기를 좋아하는데, 한반도에서 산과 들에서 즐기던 가무가 제 몸속에 흐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99년 도쿄에서 있은 행사에서 혼다 히사시(本多 壽) 시인의 소개로 고형렬 시인을 만났는데, 그 후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시아 편집기획 여러분들이 일본, 중국, 베트남, 몽고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를 10년간이나 지속적으로 소개해올 수 있었던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10년 전 도쿄에서 시인으로두터 아시아 시인들에 대한 시야를 넓힐 시문학지를 구상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 스케일에 놀랐고,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저는 장시 『리틀보이』를 제가 만들고 있는 시문학지 『콜삭』에 소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7년간이나 한성례(韓成禮) 시인의 번역으로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 8월에 혼다 히사시 시인의 도움을 받아 콜삭사에서 『리틀보이』간행을 계기로 콜삭사를 출판사로 만들어 본격적인 출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많은 책을 냈습니다.   2006년 8월에 시인을 히로시마에 초청해서 원폭 돔과 작품 배경지를 안내했고, 일본 전국에서 축하하러온 시인들과 원폭 기원일 전날에 출판기념회를 열어 우정을 키운 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2007년에는 10년 이상 준비해온 『원폭시 181인집』(일본어판, 영문판)을, 2009년에는 『대공습 310인 시집』을 간행해서, 국가는 달라도 시운동을 공유할 수 있었고, 고형렬 시인의 작품을 수록할 수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2    올해 2010년은 한일합방에서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일합방 1년 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안중근은 “한국, 일본, 청나라가 힘을 합하면, 구미 열강의 힘을 배제하고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는 세계 시민적인 발상을 가진 사상가”라고 현재는 일본학자들로부터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100년 중에서 전반기 50년은 한일에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특히 아시아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8월6일의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의해 피폭 당한 35~40만 명중, 한반도 사람이 5~7만 명이었고, 그 중 약 3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당시 약 2만 명이 한국의 합천 등지로 귀국했는데, 친일파라고 낙인이 찍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생했다는 것을 관계자의 증언으로 들었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서 왜 한반도 사람들이 가장 비참해야 했는지 진심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보이』는 한·미·일의 20세기 역사를 토대로 해서, 합천 출신 일가족의 피폭 피해를 장대한 8천행 서사시를 썼다는 것에 일본인들은 높이 평가하고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 후에도 한국전쟁이 있었고, 약4백~5백 만 명에 달하는 한국, 북한, 중국, 미국 등 유엔군과 민중이 사망하였으며, 천만 명에 달하는 이산가족이 생긴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냉전이 초래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인 사망자는 310만 명으로 일컬어지는데 500만 명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특수에 의해 일본은 패전 후 경제에 가속도가 붙었고 경제대국이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런 불행한 반세기 속에서도 한일의 본원적인 관계, 본연의 모습을 실천하려 한 일본인도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사는 치바현 카시와(千葉県 柏市)시에는 데가누마(手賀沼)라는 주위 20 km의 길다란 늪이 있는데, 그 가까이의 아비코시(我孫子市)에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라는 종교철학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영국 낭만주의의 신비적 종교시인 윌리엄 브레이크의 영시 등을 통해 종교철학을 연구해서 대학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차츰 동양의 노장사상이나 대승불교에도 눈뜨게 되었고, 종교적 진리와 예술적인 미의 공통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우들과 동인잡지「시라카바파(白樺派)」를 만들었고, 일상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민예품의 미를 발견해서 민예운동을 제창하고 실천했습니다. 아비코시의 그의 자택 주변에는 도예가 버나드 리치라든가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也) 등도 옮겨와, 예술가 마을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야나기 무네요시는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형제에게서 감화를 받아. 조선 공예의 탁월함을 발견했고, 수많은 서적을 집필, 기획, 출판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1919년에 ‘3·1 독립운동’을 위해 서울 파고다공원에 모인 30만 명을 탄압한 조선총독부를 비판하면서 “반항하는 그들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다”라고 발언했습니다. 그 사건에 호응하듯이 중국에서도 ‘5·4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야나기 무네요시는 같은 해 5월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요미우리신문에 발표했습니다.  “일본은 불행하게도 칼날을 휘둘렀고, 모욕을 가했다. 이것이 과연 상호이해와 협력으로서 결합을 완성하는 길인가. 아니다. 조선의 전 인민이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한없는 원한, 반항, 증오이다.” 이처럼 한반도 민중의 입장에 섰던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양식 있는 문화인들이 그 외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군부는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을 그만두지 않았고, 아시아 민중을 비극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일본이 범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침략 행위를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일본의 국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양식 있는 일본인들이 평화국가의 길을 모색하며 분투하고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 후에도 일본의 조선정책을 계속 비판하면서 1924년에는 뜻을 같이 하는 아사카와 노리타카,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와 함께 ‘조선민족 미술관’을 개설해서 조선인들의 미의식을 높이 평가하고 경애했습니다. 그들은 조선공예의 미의 독자성에서 배워, 일본공예의 미를 보다 깊게 발견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원폭시인 181인집』의 서문을 쓴 일본의 현역시인이며 의사인 미쇼 히로미(御庄博実) 씨도 의로운 일본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히로시마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에 피폭이 있었으나, 자택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약혼자라든가 은사, 친구들을 찾아다녔기 때문에 방사성 노출로 인해 피폭당한 것과 같은 증상으로 고생했습니다. 그 후 의사가 되어 피폭 의료에 종사했고, 지금도 히로시마 병원의 명예회장으로서 후진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피폭자의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한국인 피폭자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쓰라고 권해서 피폭 체험을 후세에 남기게 했습니다. 미쇼 씨는 최초로 『원폭 시집』을 간행한 도우게 산키치(峠三吉)와 함께 피폭 관련 동인지를 내기도 했습니다.                                          3    기억하건대 제가 처음으로 부산을 방문한 것은 2005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의 소개로 저는 제4회 이수현(李秀賢) 추모회에 초청되었습니다. 온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없어지지 않는 한, 자신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실천과 문학 활동을 실행한 일본의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처럼 이수현 씨는 똑같이 살신성인의 정신을 가진 인물입니다. 저는 마음속에 고향과 타향의 근저에는 훨씬 광대한 ‘원고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수현 씨의 살신성인의 정신에 대해 몇 차례 진혼시를 썼습니다. 그를 진혼하는 시에서 한일의 근저에 흐르는 인류적인  ‘원고향’의 정신이 많은 분들의 마음에 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2010년 8월에 천 수백년 전의 일본 진혼시에서부터 제가 존경하는 신동엽 시인의 한국전쟁 진혼시 「진달래 산천」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진혼시(鎭魂詩) 400인집』을 간행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양국간의 문학적 교류가 올해를 기점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도록 함께 기획하고 노력하도록 합시다.  저는 2007년 「사자(死者)가 살아 있는 곳, 히로시마」(『시평』 2007년 겨울호)를 쓰면서 시인을 생각했습니다. 고형렬 시인, 우리는 들판에 핀 꽃처럼 미약한 존재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한, 시와 평론 그리고 출판을 통해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의 ‘원고향’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시평』 10주년을 축하드리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스즈키 히사오(鈴木比佐雄) 1954년 도쿄에서 출생. 시인, 평론가. 1987년부터 시전문지 『COAL SACK』(石炭袋, 현재 66호) 창간 편집인. 시집 『바람의 기도』 등 다수.    봄 하늘                                                                                                                                - 스즈키 히사오       안녕하십니까? 저는 우주의 먼지입니다. 옛날 제 이름은 캄파넬라 였답니다. 어서오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전철에 깔려서 숨진 학생입니다. 李秀賢(이수현) 이라고 합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지구의 봄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여기서 내리면 됩니까?   예, 여기서 내리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물에  빠지고 나서 아주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랜만에 봄의 들판에서 꽃을 보고 싶답니다. 옛날에 할미꽃이랑 개나리가 피어 있던 그 봄의 들판으로 같이 가지 않으시렵니까?   아닙니다.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우주로 가야 한답니다.   은하철도의 역은 조금 더 위에 있습니다. 다음엔 함께 들판으로 놀러 갑시. 어서 가십시오. 안녕히 가세요.   꼭 돌아오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봄 하늘’ 시평   2001년 1월 26일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취객이 선로에 떨어졌고, 반대편에 있던 한 청년은 망설임 없이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로 뛰어들었다. 그 청년은 바로 故 이수현 씨다. 이 일은 가깝지만 항상 서로를 편견으로 바라보고 거리를 두던 한국 · 일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인의 의로운 죽음은 ‘봄 하늘’이라는 시로서 표현됐다. 이 시의 특징 중 하나는 대화체의 문장을 일본인 작가가 직접 한국어를 배워서 썼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이 우주 혹은 봄의 들판이라는 이정표로 떠나는 모습에서 한국인들이 보기에 약간은 어색해 보이는 표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서툰 표현이 고인과 캄파넬라와의 대화를 직설적이고 자신감 있어 보이게 한다. 그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에서 캄파넬라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캄파넬라는 『은하철도의 밤』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친구를 구하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은 의로운 인물이다.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희생을 한 고인도 캄파넬라처럼 큰 우주의 주인공이 되길 바랬을 것임을 작가가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시를 읽으며 느낀점은 시 속에서 고인과 캄파넬라의 짧은 대화가 고인의 용기가 큰 의미를 가진 것이며, 일본인들에게 한 청년의 살신성인의 자세를 일깨워줬다고 생각한다. 또 그가 철로로 뛰어든 잠깐의 시간이 그에게 아름다운 영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0년 전의 이야기지만 다시 들어도 고인의 희생정신과 용기에 대해서 다시 되새기게 된다. 그의 선행은 일본과 한국 양국의 관계를 다시 한번 환기 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그의 희생이 절대 헛된 것이 아니며 이러한 시를 통하여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돼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의 의로운 희생을 떠올리며 ‘나에게도 고인이 겪은 상황이 닥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처럼 할 수 있을까?      
2036    시인 김파 "흑색 태양" 대하서사소설 출판하다... 댓글:  조회:4187  추천:0  2017-02-18
100년 가족사 『흑색 태양』 출간한 김파 시인 (ZOGLO) 2017년2월16일    ▲ 최근 대하소설 『흑색 태양』을 출간한 중국 조선족 김파 시인과 7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조천현]   “하루는  안중근이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1994년도 동학당 기의(起義) 연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사이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했다.” 중국 조선족 시인 중 첫 손에 꼽히는 김파(75) 시인은 최근 한국에서 출판한 대하소설 『흑색 태양』(전 3권, 도서출판 백암)에 대해 이같이 소개하고 “중국 조선족 소설의 특징과 기법, 수법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김파 시인은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중국과 한국에서 개인 시집을 여러 권 냈고, 특히 ‘조선족 백년문학사에 유일한 개인 명시집’인 『김파의 명시집』이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됐다. 또한 그의 대표작 ‘돌의 음악’ 시비가 2014년 도문시 두만강광장에 세워졌고, 지난해 11월에는 제3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4개 이상의 주제 사상을 보여주는 다원적 ‘입체시’ 이론을 정립했고, 이번 대하소설 역시 ‘입체소설’로 썼으며,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2010년)과 장편대하사시 『천년 고국 고구려(상,중,하)』(2006년)는 뜻깊은 역작이다. 김 시인이 이번에 세상에 내놓은 대하소설 『흑색 태양』은 외할아버지부터 자신까지 3대에 걸친 그의 가정사를 담았지만, ‘특수한 가족 경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한의사 유승렬 의원이 안중근 의사와 교분이 깊었고, 유승렬 의원의 아들이자 그의 외삼촌이 되는 유동하 선생이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시절 어머니가 생존할 때 우리 가족 이야기를 쭉 하면서 “너 밤낮 글쓴다고 하는데, 이걸 꼭 글 써라” 하고 그냥 말씀했다”며 “어머니와 형제들의 촉탁에 의해 쓰려고 결심했고 우리 가정 경력이 대단히 특수해 특수성에 힘을 입었다”고 밝혔다. 중국 조선족 최삼룡 문학평론가는 ‘추천의 글’에서 “전반 인류 역사의 100여 년 사이의 창상지변을 보여준 기적적이고 경이적이며, 미증유적이며 돌파적인 종래 없던 대형 거대서사”라며 “은 해체된 사회주의와 그 창시자와 추종자를 상징”했다고 평가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연해주와 만주를 떠돌며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우고, 해방 후에는 중국에 남겨져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에서 ‘청산 대상’이 돼 수난을 겪는 과정, 그리고 개혁개방을 맞아 변화된 세태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생한 역사는 우리 민족 수난사의 한 켠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시인이 되거나 혹은 작가가 되려면 인격적으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를 좌우명으로 삼고 “앞으로 남은 여생을, 생명을 연소시켜 계속 작품을 쓰겠다”고 여전히 시혼을 불태웠다. 또한 아직 출판하지 못한 시집만도 10권이 넘는다며 “전집 좋은 것만 골라서 딱 10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지금 형편에서 경제가 따라 못 가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남북이 쌍방에서 남북평화통일촉진회를 내와 가지고 그 기초 상에서 이제 남북이 서로 토론해 가지고 통일했으면 좋겠다”며 3.8선에 △경제발전 공동시범구역 △자유 거주지 △남북평화통일학원을 세우고 “북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은 외군을 철수시키고 이래서 유엔에서 동의하는 지구상에서 그 어디에도 참가하지 않는 국가가 돼서 세계의 평화성지로서 만들자”고 제안했다. 안중근 의사와의 특별한 인연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 특히 한중 수교과정 등 그의 가족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 바다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다음은 지난 7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김파 시인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가급적 그의 입말을 살려 정리했지만 두음법칙 등은 맞춤법에 따랐다.   “100년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     ▲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서 첫 손에 꼽히는 김파 시인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함께 한 유동하 선생의 외조카이다. [사진 - 조천현] □ 통일뉴스 : 유명한 시인인데, 첫 대하소설인 『흑색태양』을 한국에서 출판했다. 주로 중국 연변지역에서 활동했는데 한국에서 출판한 이유는? ■ 김파 시인 : 『흑색태양』은 한국 백암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이 소설을 출판하려고 마음 먹었댔다. 그런데 중국에서 출판 못하겠다고 하더라. 왜냐하면 중국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킨다. 내용을 보면 1994년도 동학당 기의(起義) 연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사이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했다. 여기에는 그 100년 사이의 우리 인류역사 전반 내용이 다 여기 담겨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레닌이 창시한 사회주의 실패, 그 다음에 중국의 사회주의 실패와 개혁개방 전반 내용이 다 있다. 중국에서 출판하기 곤란하다. 미루다가 3년 전인가 써서 완성했다. 그런데 여태까지 출판 못하고 있다가 할 수 없이 한국에 나와 이번에 출판하게 됐다. □ 연변문학과 한국문학이 어투나 표현 방식 등이 다를 것 같은데, 한국 출간에 어려움이 없었나? ■ 있었다. “이걸 한국에서 출판하자면, 한국 식의 소설 수법으로서 고치면 어떻겠는가?” 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다. 내용은 그대로, 소설 기교나 수법을 다 그대로 출판하면서 어법과 철자법은 여기대로 고쳐도 좋겠다고 내 그랬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 그러더라. 왜서 그런가 하면, 그대로 출판해야 중국 조선족 소설의 특징과 기법, 수법이 그대로 드러나지 여기대로 다 고치면 한국 소설이지 중국 조선족 소설이 안 된다. 이색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다. 그래서 동의해서 출판하게 됐다. 출판사에서 여기 어법과 맞춤법 대로 다 고쳤다. □ 책이 나왔는데 출판 기념회 계획은? ■ 원래는 해야 되는데, 지금 상황에서 뭐 출판기념회를 내가 하긴 곤란하고, 그래서 지금 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상황 보면서 며칠 지난 다음에,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면 하려고 한다. □ 시를 주로 쓰다 장편소설을 썼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 어려움이 있었지 왜 없었겠나. 근데 장편소설 쓰기 전에 연습하느라 단편소설들 너댓편 써봤다. 발표는 안하고. 그 다음부터 시작했다. 쓰기는 반년에 세 권 다 썼다. 왜 그런가 하니까, 사실 너무 듣고 너무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에 다 익어버렸다. 우리 어머니랑 부탁하고 말한 지는 대단히 오래다. □ 어머니 부탁도 있었는데 왜 좀더 일찍 쓰지 않았나? ■ 이짝에 시들을 쓰느라고. 장편서사시 ‘천년 고국 고구려’ 그때 머리 다 빠졌다. 그런데 ‘천년 고국 고구려’가 3권인데 천여 페이지 넘는다. 28대 왕조를 썼다. 처음에는 중국 출판사에서 출판하겠다 하더니 못하겠다고 해서 5,6년 넘어 묵었다. 그래서 여기서 출판했다. 중국 집안현에서 2004년 7월 1일에 호태왕비를 유네스코에 문물로 등재했다. 그러면서 중앙에서 문건으로 지시가 내려왔는데 ‘고구려에 대해서 한 페이지만 논해도 그 책은 못 찍는다. 만약 어느 사장이 고구려에 대해서 출판했다면 철직한다’. 그래 놓으니까 몽땅 얼어붙은 거다. 그전에는 교과서에도 고구려란이 나왔고 우리 역사를 논했다. 그러다가 그 후에 논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교과서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없애버렸다. □ ‘흑색 태양’도 역사적인 이야기가 많다 보니까 역사적 사실 고증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사료들을 많이 공부했을 것 같다. ■ 어려움이 많았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그저 망탕 쓰면 안 돼 거든. 자료들을 다 맞춰보고 썼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마음대로 쓰겠나. 아마 좀 틀린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루는 안중근이 우리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 김파 시인은 외할아버지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가족사를 작고한 어머니의 구술을 토대로 대하소설로 형상화 했다. [사진 - 조천현] □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참여한 유동하 선생의 후손으로 안다. 100년의 역사를 3대에 걸친 가문사로 썼는데, 유동하 선생과 이 소설의 관계는? ■ 유동하는 우리 어머니 오빠다. 소설에도 나오는데, 유동하 부친 유승렬은 1898년에 러시아로 이주해갔다. 아주 유명한 중의(中醫)였다. 그때 해삼위, 지금 블라디보스톡에는 우리민족들이 집중돼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요청해서(받아서) 거기를 가서 의사 노릇하게 됐다. 그런데 하루는 안중근이 우리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유세하면서 시베리아 일대를 돌면서 감기 걸려 왔다. 우리 외할아버지네 집에 눌러 있으면서 한쪽으로 약을 달여 마시면서 한쪽으로 나라 형세 이야기를 했다. 그때 우리 어머니가 아마 한 여섯살 쯤 됐을 거다. 그런데 앞에서 먹을 갈아주면 안중근 의사가 붓글씨도 쓰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귀엽다고 하면서 각전을 주니까 우리 어머니가 밖에 나가서 눈깔사탕을 싸(사)다가 입에다 하나씩 다 넣어주고 웃고, 앞에서 노래하라고 해서 독립 노래 부르고, 아주 귀엽다고 그랬다. 유동하는 수분하 쪽에서 러시아 철도고등중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유동하가 러시아의 철로보(철로신문)을 가져왔다. 이등박문(伊籐博文), 이또 히로부미가 어느날 할빈(하얼빈)역에 도착해서 러시아 대신과 담판하러 온다는 소식이 거기에 간단하게 실렸거든...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말 아는 사람을 하나 구해야겠다” 해서 우리 외할아버지 집에 들렸다. 그래서 “야를 데려가라”. 그래서 우리 유동하 삼촌이 따라 나선 거다. □ 유승렬 의원 등은 모두 본명을 쓴 건가? ■ 다 원명 그대로다. 그런데 우리 외할아버지 유승렬이 쌍둥이다. 형님은 유태렬이고. ‘묘금두 류(劉)’, 유소기(劉少奇) 유자다. 우리는 거기(연변)서는 류라고 한다. 여기서는 유라고 하더라. □ 선생은 직접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안중근 의사와 유동하 의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나? ■ 다 어머니 말씀이다. 90년도에 교통사고로 사망됐다. 늘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 이걸 썼다. □ 가족은? ■ 5남매인데, 내가 가운데 남자 하나다. 원래 맨 위 맏이가 남자 있었는데, 광복 전에 조선으로 나왔다. 어느 군관학교인가 거기 댕긴다 하더니 후에 종무소식이다. 지금은 전혀 모르고,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그저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다. □ 안중근 의사와 유승렬 의원과의 관계로 시작돼 유동하 선생으로 이어진 인연인데, 이번 대하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 이걸 왜 쓰게 됐냐면, 기본 동기가 지난 시절 어머니가 생존할 때 우리 가족 이야기를 쭉 하면서 “너 밤낮 글쓴다고 하는데, 이걸 꼭 글 써라” 하고 그냥 말씀했다. 우리 어머니가 참 이야기 잘 한다. 그러나 후에 쓰겠다고만 했다. 후에는 우리 형제들도 “너 밤낮 글쓴다면서 이런 가정소설도 안 쓰고 뭘 하는가?” 촉탁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촉탁에 의해 쓰려고 결심했고 우리 가정 경력이 대단히 특수해 특수성에 힘을 입었다. 이건 소설재료인데 꼭 써야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거다. 우리 가정이 6국에 흩어져 살았다.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 폴란드, 사방데 흩어져 살면서 100년 동안의 역사를 전부 경과한 거다. “모 주석이 지금 천안문에서 우리를 향해 손 젓는 게 보인다”     ▲ 2016년 11월 13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개원호텔에서 한국윤동주기념사업회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가 주최한 제3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서 김파시인이 '다이아몬드 게임'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제공 - 길림신문] □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됐나? ■ 시를 쓴 지가 오래다. 왜서 시를 썼는가 하면, 내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중국에서 토지개혁 혁명 때 청산 맞았다. 청산이란 게, 재산을 다 몰수해 가고, 그리고 군중 앞에서 막 때리면서 이랬다. 그래 가지고 부상당해 돌아온 다음에 전염병에 걸렸다. 아마 한 두어달 앓다가 사망됐다. 그래서 겨울에 사망됐는데, 관도 짤 것도 못 되고 관 비슷하게 아무 널이나 갖다 만들어서 우차에 싣고 어머니하고 내가 묘지로 갔다. 그런데 (땅을) 파려고 드니까 팔 수가 없다. 흑룡강성은 3월달이 대단히 추울 때다. 그래서 그대로 놓고 그 위에다 눈 덮어놓고 이듬해 봄에 가서 그걸 다시 파서 묘를 세웠다. 돌아오면서 강변에서 땔감으로 쑥대를 베고 이러는데 그때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는데 기러기들이랑 와서 강변에서 놀더라. 그걸 보고 왔는데 학교에 가니까 작문시간에 ‘새봄’이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지라하더라고. 그래서 내 강변에서 본 사실을 죽 작문 지었다. 그런데 그게 모범작문이 돼서 학교 벽보란에 떡 붙었다. 그기에 힘을 입어 가지고 ‘아 이거 되는 모양이다’. 그래 후에는 계속 책 보고 작문짓는 연습했다. 작문시간에 내놓으면 내건 잘 썼다고 늘 붙여줘 힘 입었다. 그러다가 초중(중학) 2학년 땐가 중국에서 대약진이 있고 막 이러면서 학교에서도 코크스를 굽는다고 석탄을 가득 재놓고 전 운동마당을 반마다 나눠줬다. 거기다가 석탄을 재놓고 불을 땐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 타면 물을 부어 코크스를 만든다. 그래 그 코스크 만든 것을 강철공장에 보낸다. 강철 뽑아낸다고. 그게 그때 대약진이었다. 학교에서 그때는 공부도 안 하고 전부 그랬다. 우리 반에서 만든 코크스를 산더미처럼 재놓았는데, 내가 받아서 그 위에다 쏟아놓고 받아서 쏟아놓고서, “다 쌓았다!” 하더라고. 갑자기 시가 생각나더라. 코크스 산에 올라서니까 산 너머 구름 저편에 모(택동) 주석이 지금 천안문에서 우리를 향해 손 젓는 게 보인다. 에 보내 이튿날 떡 나갔다. 아 그게 났다고 모두 야단이더라. □ 중국에서 개인시집 발간은 쉽지 않다고 하는데 개인 명의로 시집이 발간된 배경은? ■ 맨 처음 82년에 한꺼번에 시집이 쏟아져 나왔다. 서정시집 ‘흰돛’이 나오고 아이들 시집이 한 해에 두 개 나왔다. 하나는 ‘해순이와 달남이’, 그 다음에 ‘신기한 피리’, 이게 출판되었다. 모두 깜짝 놀라서 “야, 저놈이 뭐 한다” 야단났다. 그게 떡 출판되면서 힘 얻었다. 그 다음에 이걸 후에 여기 한국에서도 다 재판했다. □ 중국에서 개인시집 발간이 드문 일인가? ■ 아주 힘들다. 그때 아마 하나는 그 사람 시 능력도 보고 두 번째는 경제 문제다. 중국에서 그때만 해도 시인이 출판비를 내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시가 좋으면 시집을 묶어서 출판해줬다. 그러니까 돈을 국가에서 부담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히 좋은 시와 어지간한 사람은 내 안 준다. □ 2014년에 도문에 ‘돌의 음악’ 시비를 제막했고, 2016년 윤동주상을 수상했는데, 최삼룡, 최룡관 선생 성함이 많이 나오더라. ■ 최삼룡 선생은 내가 시를 쓰면서부터 나를 중시했다. 자주 얘기도 하고, 나의 시에 대해서 그 다음부터 전문 연구했다. 그리고 내 시집 내면 거기다 서언 쓰고 시집 평론하고 계속 이렇게 한 40년동안 같이 지냈다. 이러다가 그거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니까 이렇게 두꺼운 원고가 됐는 모양이다. 그래서 몇 년전에 ‘김파론’이라고 이렇게 두껍게 냈다. 역시 한국에서 백암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최용관 선생은 자기 시에서 자기주장이 대단히 억센 사람이다. 꺾지 않는다. 현대시에 대해서 주장하면서 막 이끌면서 나왔다. 그래서 수태 보수파한테 욕먹고 비평맞고 몇 번 눈물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꺾지 않았다. 요즘은 신문사 퇴직했는데, 문학하는 시인들을 데려다 놓고는 이론 강의해주고 시인들 많이 배양해냈다. 하이퍼시를 쓰는 사람을 많이 배양했다. 이번에 하이퍼시로 중국 소수민족 문학창작 준마상을 탔다. 상금도 대단하다. 최룡관씨가 나하고 왜 맞냐면, 나는 전위성, 개척성, 창조성이 있는 게 시라는 거다. 언제나 새롭게 쓰고 부정이 부정으로 계속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답보하게 되면 시가 낡아서 발전 못한다. 그래서 그분하고 나하고 관점이 맞다. □ 전업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80년대 초반에 비하면 지금은 한중관계가 밀접해졌다. 한국에 진출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달라. ■ 내가 처음 잡지에다 “유동하와 그 동료들” 제목으로 안중근과 유동하 같이 할빈역에서 이등방문을 저격하는 전반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그대로다.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온 한국교수가 이 잡지를 보다 이걸 발견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집까지 찾아왔다. 우리 어머니 전반 이야기 다 듣더니 대단히 감동하더라.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하고 직접 연관돼 살아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우리 어머니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때 돌아가면 한국 유씨 종친회 회장을 만나서 우리 어머니를 한국에 초청해서 역사이야기를 나누게끔 연결해 줄테니까 기다리라 하더라. 정말 얼마 안 있어서 요청장 보내왔다. 그래서 86년도 봄에 처음으로 우리 어머니 모시고 내하고 둘이 왔다. 유창순 전 총리와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숱한 기자들이 막 사진찍고, 그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 보고 “그때 그 과정을 좀 이야기해 달라”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강연대에서 아마 한 한시간동안 이야기했을 거다. 어머니가 원래 이야기 잘 한다. 후에 텔레비전으로 10여분 되게 내보냈다. 그런데 나를 자꾸 데려다가 강연시키더라.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 자꾸 그런다. “아무렇게나 이야기했다가는 돌아가서 정치범으로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 이야기 못하겠다”고 했는데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에서 강연을 2시간 쯤 했고, 그게 소식이 퍼져서 사방에서 요구해서 돌아다니면서 강연하고 그랬다. □ 당시 한국에서 유동하 선생이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 내 생각나는 게 있어서 어머니하고 토론했는데, 유동하는 러시아에서 희생됐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열사증 탈 수 없고, 한국에서도 주겠는지 안 주겠는지 모르겠다고 그랬다.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가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 써서 보내봐라. 혹시 줄런지 어떻게 아냐?”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를 썼다. 유동하에 대한 사실 쭉 쓰고 “훈장 못 주겠는가?” 그랬더니 며칠 후에 대답이 내려왔는데 대통령께서 지령내렸는데, “해외교포지만 주라”. 그게 계기가 돼서 그 후부터 해외교포 다 주게 됐다. 상장은 규정된 날이 있다더라. “2년마다 한 번씩 주는데 명년에 주니까 그때 어머니 모시고 나와서 타라.” 보훈처의 총 책임자가 찾아와서 쭉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그 후에 폴란드에 있는 유동하 동생 유동주가 그걸 타가지고 갔다. “‘중국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현대화’ 이게 무슨 뜻인가?”     ▲ 김파 시인의 가족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청산 대상인 ‘신빈농’ 계급으로 겪어내야 했다. [사진 - 조천현]   □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도 겪고 개혁개방 등 중국 현대사를 겪었는데, 일련의 흐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모 주석이 건국한 다음에 1958년부터 농촌집단화로 인민공사를 꾸리고 성시(省市)에서는 공장들을 국영화하고, 이러면서 대약진을 막 일으켰다. 대약진이 실패했다. 그게 어떻게 되나? 아니, 풍년 농사짓게 한다고 학생들 다 동원해서 공부 안 시키면서 심경전(深耕田) 한다고 땅을 1미터 파서 생땅에 씨를 심으니까 노랗게 말라서 안 되는 거다. 흉년이 몇 해 들었다. 그래서 굶어죽은, 기사(飢死)로 죽은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학생들까지 학과를 정지시키고 동원해서 코크스를 구워서 강철을 만들어낸다고 하면서 10년 이내에 영국을 따라잡는다고 이랬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떡 실패되니까 당내에서 이견이 대단히 분분했다. 모 주석이 할 수 없어서 원래 당 주석 겸 국가 주석이었는데 국가 주석 자리를 유소기한테 내줬다. 유소기가 지금으로 말하게 되면 경제부흥을 위해서 ‘3자 1포 4대 자유’를 내놨다. 개혁개방처럼 토지랑 도거리제로 다 나눠줬다. 이렇게 되니까 유소기 위신이 점점 올라가고 모 주석 위신이 하락했다. 그래서 다음번 당내 공산당 주석을 선거하게 되면 자기가 떨어지게 됐다. 가만 보니 안 되겠다. 결국 상해에 가서 자기를 따르는 일파들을 묶어서 일으킨 게 맨 처음에는 반우파투쟁으로 해서 이러다가 그 다음에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자기의 적수 유소기를 때려부수고, 그 다음에 등소평도 개혁개방을 주장해 그 사람도 때려부수고 그랬다. 그래서 결국은 문화대혁명으로 모 주석이 이겼다. 문화대혁명 말기에 모 주석이 사망되기 전에 화국봉 불러다가 자기말 잘 들으니까 “나를 계승해서 국가를 영도해 나가라. 반드시 내가 규정해놓은 방침대로 이끌고 나가라” 이래서 화국봉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모 주석도 76년도 사망됐다. 화국봉이 턱 올라왔는데, 이 기회를 타서 화국봉이 다시 등소평이랑 다 올려와서 쓰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그 다음에 개혁개방이다 하고 화국봉이 자리에서 내떨어졌다. 그래서 등소평이 그때 중앙의 권위로 올라왔는데 그분이 개혁개방을 제창했다. 중국 개혁개방한다. 뭐라고 했냐면, ‘중국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현대화’, 이게 무슨 뜻인가? 공산당이 자본주의 두들겨 엎고 혁명한다 했는데 안 되는 거다. 중국이 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 뛰어 넘었거든, 어간에 자본주의를 안 거쳤거든. 중국도 경제의 자본주의화를 하기 위해서는 요걸 어떻게 대명사를 꾸며내야겠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각 대학 유명교수들 모아놓고 토론시켰다. 한 북경대학의 교수가 뭐라 했냐면, “이거 자본주의라 하지 말고 ‘중국 특색’이라고 하자.” 이걸 등소평이 채용한 거다. 사회주의 모자 쓰면 공산당이 자본주의 경제를 영도하면서 나라를 부강시킬 수 있다. 이래서 뒤에다는 ‘사회주의 현대화’를 썼다. 이것을 ‘신형사회발전론’이라고 한다. 완전히 자본주의도 아니고 완전히 사회주의도 아니고 중간 길로 가고 있다. 중용지도다. 시진핑도 한 말이 있다. 전번에 당 중앙소조회의에서 “우리 중국이 국가 신앙이 없다”. 그전에는 “사회주의 하면서 공산주의를 향해 전진하자”, 공산주의가 국가신앙이었는데 지금은 자본주의도 아니요 사회주의도 아니어서 고민하고 있다. 국가 신앙이 없으니까 앞길이 안개가 껴서 잘 보이지 않는다. 30년동안 개방해서 중국 경제가 중국 5천년 역사이래 현대 물질문명으로 처음으로 아주 고도로 발전시켜서 백성들에게 물질문명을 만족시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이건 정말 거대한 성과다. 외부평론가들은 ‘혼합실용주의 중용지도’, 자기한테 이로우니까 공산주의고 자본주의고 할 것 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엮어서 만든 노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곤란에 부딪치고 점점 잘 안 된다. 지금 중국이 실제로 놓고 말하면 허장성세다. 앞으로 세계 패권 절대 쥘 수 없다. 시진핑도 이미 당 회의에서 백성들에게 공개했는데 두 개 백년(200년) 분투해야 중국의 경제수평이 지금 구라파의 발전된 나라 영국, 독일, 이태리, 프랑스 이런 나라를 따라잡을 수 있다. 구라파는 또 앞으로 전진하지, 영원히 안 된다는 말이다. □ 외부에서는 중국이 공산당이 정권을 쥐고 있지만 사회는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평가하는데 어떻게 보나? ■ 나는 그렇게 안 본다. 체제규정 자체가 왜서 다르다고 보느냐면, 돈 버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방식으로 벌어들인다. 그렇지만 돈을 관리하는 것은 번 사람이 자기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중국은 모든 공사가 몽땅 국가로 돼 있다. 개인으로 된 것은 극히 드물다. 영도는 일당제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당이 아무 사람이나 잡아서 뒤 훑으면 다 탐오했고 부패온상이 됐다. 이 체제 자체가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 잘했든 못했든 공산당이 혼자 하니까 감시 감독을 할 수가 없는 거다. 돈 관리는 집체주의 국가경제, 그래서 그 돈 번 것 가지고 군함을 만든다, 포탄을 만든다, 무인비행기를 만든다, 군사무기를 강화하는데다 퍼붓고 백성들에게는 자본주의 국가 같으면 30년 넘어 개방했으면, 평균수입이 적어도 2만달러 이상은 돼야겠는데 그게 4분의 1도 안 된다.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     ▲ 2014년 4월 1일 중국 길림성 도문시 두만강광장에 김파 시인의 '돌의 음악' 시비가 세워졌다. 답사하고 있는 김파 시인. 《돌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돌은 부서진 소리가/ 뭉쳐진 덩어리다//바이올린 선률도/ 피아노의 절주도/돌의 부서진 소리를 체로 쳐/ 빚어서 발효시킨 술/ 마시면/ 취한다.》[사진제공 - 길림신문]     ▲ 김파시비 제막식은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이 주최했고, 도문시당위와 도문시정부가 후원했다. [사진제공 - 길림신문] □ 이후에 글을 쓰거나 책을 내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 지금 내 요걸 말하고 싶다. 내 평생 문학창작에 종사했는데, 좌우명이 하나 있다. 뭐인가 하면 ‘시인이 되거나 혹은 작가가 되려면 인격적으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래야 좋은 작품, 그 사람이 쓴 걸 독자들이 믿어준다는 거다. 창작에서 좌우명은 이때까지 시를 많이 썼는데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 이거다. □ 본인의 명시 한 수를 꼽는다면? ■ ‘돌의 음악’이다. 내 명시집도 출판했다. 그것도 중국에서 유일하게 내 하나가 선정돼서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조선족 문학 100년사에서 유일하게 나 하나가 명시집을 냈다. 거의 10여년 돼 간다. 작가로서 인생관은 시인이나 작가에게는 인생이 두 번 있다. 왜 두 번 있는가? 하나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육체적 인생이고 그 다음 하나는 영혼적 인생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혼적 인생이다. 그 작가는 이미 죽어서 저승으로 갔지만 그 사람이 남겨 논 작품은 그 사람 영혼인데, 그 사람의 영혼 작품이 후세에 남아서 후세들의 거울이 돼 훈시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책 자신이 작가의 영혼적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남은 여생을, 생명을 연소시켜 계속 작품을 쓰겠다. 사실은 지금 출판비 때문에 그렇지 출판하지 못한 시집만 해도 10여권이 있다. 한 권에 다 200수 이상씩 된다. □ 한꺼번에 전집으로 내야겠다. ■ 지금 단시집도 못내는 주제에 뭐 전집을 어떻게 내겠나. 안 된다. 지금 책보는 사람 어디 있나. 책이 안 팔리니까 출판하려 해도 곤란하다는 거다. 전집 좋은 것만 골라서 딱 10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지금 형편에서 경제가 따라 못 가니까. □ 한국에 언제까지 머물 계획이고, 이후 계획은? ■ 이번에 한국 온 것은 이 책 출판하려는 것이었다. 3월 달에 아마 대련 집에 가야 한다. □ 지금 중국 대련에 가족들이 살고 있나? ■ 대련에서 지금 영감 노친이 살고, 큰 딸 아이는 청도에 있고, 두 번째 딸아이는 일본 동경에 있다. 다 시집갔다. 그리고 막내 아들이 지금 청도에 있다. □ 생활에 지장은 없나? ■ 별 지장 없다. 둘 다 로임(연금)이 있어 생활은 근심 없는데, 책을 출판하자면 그건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어렵다. /통일뉴스 =================//////////////////////////////===================   김파시인 안중근의 려순감옥생활 책으로 펴내려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을 펴냈던 김파시인이 올해 안중근 의거 100주년과 래년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관련 연구서적을 출간할 예정이다.   김시인은 당시 려순감옥에서 직원을 지냈던 한 중국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안중근의사의 려순감옥 144일 생활상을 기록한 연구저서를 래년초 출판할 예정이다. 책에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사진들과 새로 발견된 유묵도 곁들이게 된다.   책에서 안중근의사의 옥사직전의 감동적인 일화도 공개된다. 안중근의사가 순국하기 며칠전 감옥장이 안의사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안의사는 당당하게 술을 마시며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라고 “장부가”를 불렀다. 감옥장이 며칠뒤면 극형을 받을텐데 두렵지 않느냐고 묻자 안의사는 “민족을 위한 거사를 이루었기에 그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한다.   현재 대련시에 거주해 있는 김파시인은 1942년 흑룡강성 해림현 신안진에서 출생, 연변에서 교원, 문화관 창작조 직원을 지냈다. 소학시절부터 시작품을 창작하면서 문학적 기량을 보였던 김파시인은 1986년 처녀시집 “흰 돛”을 출간한이래 꾸준히 창작에 정진하여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 ”겨울나비”, “하얀 메아리 새”, “보라 빛 리유”, “태양의 종소리”, “프리즈속에 비낀 풍경”, 장막가극 “자명고 사랑”, 동화시집 “해순이와 달순이”, 평론저서”립체시론”, 등 10여부의 저서를 펴냈다.   김파시인이 안중근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작품을 써온데는 운명적인 연고가 있다. 안중근의사가 거사를 결심하고 할빈에 도착했을때 그의 로씨야어 통역을 맡았던 18세의 류동하, 그는 안중근의사와 함께 붙잡혀 려순감옥에 갇혀 1년3개월의 수감생활을 해야했다. 출옥후 로씨야를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 1918년 로씨야 경찰들에 붙잡혀 옥사했다. 김파시인은 바로 류동하의 외조카였다. 김파 시인의 외할아버지 류승렬은 한의사였고 안중근의사와 의형제를 맺을만큼 절친한 사이였다고한다. 김파시인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안중근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회상을 토대로 김파시인은 안의사에 대한 회고록도 펴냈고 1999년에는 장편 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을 료녕민족출판사로분터 출간했다. 이 장편서사시의 창출은 “조선족시단의 제재령역을 넓혔으며 시문학의 공간을 확장하고 조선족시인들의 시적인 저력을 과시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문단은 평하고있다.   현재 김파시인은 국제안중근기념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출처] 김파시인 안중근의 려순감옥생활 책으로 펴내려 |작성자 김 혁   장편 서사시로 되살아난 안중근 천심을 재워들었는가 신령의 총탄인가 벼르고 벼르던 복수의 순간 정중에 겨누어 당기는 방아쇠 “땅, 땅, 땅-“ 할빈 역두에 울리는 총성 동방의 암야를 찢는다… 장편 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이 한국 백암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은 지난세기 초, 할빈역두에서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항일구국과 민족독립운동의 선구자인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장편 서사시로 시인 김파는 스케일이 큰 서사시를 통해 시인은 영웅 안중근의 삶을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시집은 마치도 백두산 상상봉에서 동방대지를 굽어보며 흘러간 력사의 비운을 시줄에 감아쥐고 자유자재로 풀었다 감았다 터쳤다하듯 서정을 펴간다. 현재 대련시에 거주해 있는 김파시인은 1942년 흑룡강성 해림현 신안진에서 출생, 연변에서 교원, 문화관 창작조 직원을 지냈다. 소학시절부터 시작품을 창작하면서 문학적 기량을 보였던 김파시인은 1986년 처녀시집 “흰 돛”을 출간,  시집 ”겨울나비”, “하얀 메아리 새”,  “태양의 종소리”,  장막가극 “자명고 사랑”, 동화시집 “해순이와 달순이”, 평론저서”립체시론”, 등 10여부의 저서를 펴냈다.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으로 꾸준한 활동을 펼쳐왔다.  평론가들은 “이 서사시에 펼쳐진 화폭에는 20세기 초 동양 즉 중국, 일본, 로씨야 원동지구를 망라한 아세아 동방의 모습이 사실주의적인 펼치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평화의 발전이 시대의 주류로 거세차고 흐르고있는 현시대에 력사의 교훈을 명기시키고 오늘을 재 확인하는 자세를 보이게끔 하는데서 이 장편서사시는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평했다. 김파시인은 또한 국제안중근기념협회 상무부회장으로서 다년래 안중근의사에 대한 연구론문들을 대량 집필, 올해에도 안중근 서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관련 연구서 “백년의 얼- 충혼 안중근”을 출간했다. 장편 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은 1999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로분터 출간된바 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11-01  [비평]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 비교   2009-09-07                                                       /김 관 웅  김파는 자기의 이른바 《립체시》와 《립체시론》을 모더니즘시문학보다 한수 우위에 있는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그러면 김파의 이 고무풍선 같이 부풀려진 자아감각이 객관적 사실에 부합되는 것인가를 프랑스 립체파 시인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 비교를 통해 보기로 하자.  첫째, 인류 시문학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립체시를 창작하고 립체시론을 제제기한 사람은 아폴리네르이지 결코 김파가 아니다. 프랑스시인 기욤·아폴리네르(Guillau Apollinaire, 1880〜1918)는 립체시의 창시자로서 프랑스 모더니즘문학의 선구자중의 한 사람이다. 김파의 립체시나 립체시론보다는 거의 100년 앞서 이미 립체시를 주창(主唱)하였고 또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립체시를 창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립체시론을 정립하였다.  아폴리네르는 처음에는 상징주의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피카소와 친구로 사귀게 되면서 립체파미술에서 많은 힌트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아폴리네르는 1910년에 미술평론집 《큐비즘의 화가들》을 출간하기에 이르고 1913년에는 큐비즘(즉 립체주의)에 립각한 시집 《알콜》을 출간하여 현실아주 새로운 각도에서 보고 큐비즘 화가들이 현실을 제구성하려고 시도한 수법에 따라 사물을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큐비즘의 화가들》에서 아폴리네르는 예술가들은 반드시 새로운 미감을 가져야 한다고 대성질호하면서 그런 새로운 미감에 좇아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자기의 시 창작에 옮겨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이를테면 표점부호를 취소하고, 시 자체의 리듬과 억양을 충분히 리용하여 음악성을 살리고 또 시, 회화, 음악 이 삼자를 결합시키려고시도했다.  그의 시집 《칼리그람》은 시, 회화, 음악 이 삼자를 결합시키려는 그의 주장을 볼 수 있는데, 《비》,《마음》, 《거울》등 시들에서는 대상의 형상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근대의 인쇄술을 리용하여(주로는 활자의 배렬을 통해) 전반 시를 그 대상의 형상과 비슷하게 문자부호를 배렬함으로써 시각적으로 그림 같은 효과를 나타내려고 시도했다. 이 밖에도 시행 배렬과 조직에서 그는 계단식 시가의 격식을 창조했는데 이는 후에 쏘련의 마야꼽스끼에 의해 한걸음 더 발전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이다. 아폴리네르는 큐비즘미술에서 단일 시점을 전제로 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후의 투시도법에 따른 공간표현을 변혁해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한수의 시에서 음악, 회화 그림을 결합시킴으로써 립체적 미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시속에 그림이 있고 동시에 시속에 음악이 있어서 감상자들이 립체적이고 복합적인 미감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의 본질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아폴리네르의 립체시는 립체파미술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 이 점은 김파의 경우가 아주 비슷한바 김파도 립체파 미술작품에서 립체시의 첫 발상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 하나는 1980년 기차 안에서 본 립체파 그림 - 잡지의 삽화이고 하나는 두 번째는 조선에서 들어온 립체사진이고,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을 통해 얻어들은 유럽의 현대미술의 한 류파인 립체파미술에 관한 상식이 김파가 립체시를 쓰게 된 가장 큰 계기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립체사진이 제일 큰 충격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립체사진이 커다란 충격을 주어 나로 하여금 립체시를 고안하게 끔 계발을 주었다. 그리하여 실험적으로 립체시를 쓰면서〈립체시〉라는 이름을 고안했고, 그에 따라 시적결구와 구조, 시적수사법, 시창작방법 등 여러 면에서 그것들의 규률성, 외적현상과 내적본질들을 탐구, 모색하기에 이른것이였다. 그리하여 〈립체시〉란 명제는 피카소의 립체화와 립체사진에서 계발되여 명명하게 되였고 시의 구조특징, 수사법적구조특징, 형상의 구조특징, 언어구조의 특징에 따라 그 명제 자체를 각각 립체구조, 립체주제, 립체형상, 립체어, 립체수사법 등으로 명명하게 되였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3쪽을 참조하라.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의 발상 계기가 어쩌면 이렇게도 류사한지 참으로 놀랍다. 필자는 이와 같은 류사한 발상 계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즉 하나는 거의 백년의 시간차이가 있는 우연한 일치이고 다른 하나는 후자가 전자의 발상계기에서 힌트를 받고 자기도 피카소 등의 립체파 그림에서 힌트를 받고 립체시와 립체시론을 만들어내게 되였다고 이른바 립체시 발상계기를 꾸며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아폴리네르와 김파의 립체시의 내함에 대한 비교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아폴리네르는 큐비즘미술에서 단일 시점을 전제로 하는 르네상스시대 이후의 투시도법에 따른 공간표현을 변혁해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한수의 시에서 음악, 회화 그림을 결합시킴으로써 립체적 미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시속에 그림이 있고 동시에 시속에 음악이 있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립체적이고 복합적인 미감을 느낄 수 있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의 본질이다. 아폴리네르의 립체시는 적어도 대단한 실험성을 띠고 있으며 근 백년 동안 마야꼽스끼를 포함한 수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어왔다. 그 영향의 여파는 아폴리네르가 립체시를 쓴지 백년이 가까워오는 몇 년 전에 김학철 옹의 서거를 추모하여 쓴 최룡관의 시 《산》에서도 보여 지지 않던가.  그러면 김파의 립체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김파의 립체시는 결코 아폴리네르의 립체시처럼 부동한 예술형식의 시에서의 결합과 통일을 이룩하게 함으로써 립체적인 미감을 느낄 수 있게 하려는 시도는 하나도 없다. 김파는 이른바 자기의 립체시에 대해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립체시를 어떻게 정의할 것 인가. 립체시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외적 내적구조에 상응된 다주제를 갖고 있는 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김파도 이른바《립체구조, 립체주제, 립체형상, 립체어, 립체수사법》를 운운했지만 그 핵심은《다주제》이다. 김파의 정의에 따르면 다주제, 즉 두개 혹은 두개 이상의 주제를 가진 시는 모두 립체시이다. 김파의 이런 립체시, 립체시론의 창립은 중국의 헐후어(歇後語)를 빌린다면 그야말로 《바지를 벗고 방귀를 꾸는 것과 같이 아무런 쓸모없는 짓거리이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의 함축미가 있고 여운이 있는 시들치고 어느 것이 다주제가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시가 가지고 있는 다주제성에 대해 어찌 김파가 처음으로 말한 것이겠는가? 이는 자고이래 시인묵객들치고 누구도 다 아는 상식이다.  《암탉이 알을 낳는다》는 것은 분명히 진리이지만 이제는 상식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 백치가 나서서 《암탉은 암캐처럼 새끼를 낳은 것이 아니라 알을 낳습니다.》라고 세인들을 향해 선포한다면 그 누구도 그 선언을 틀렸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다들 포복절도하면서 배꼽을 잡을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 [비평] 김파의 《립체시론》에 대한 생각 2009-09-15                                                              /김관웅 우리 문단의 일부 문우들이 김파의 《립체시론》을 한번 읽어보라고 자꾸만 권하기에 바쁜중에서도 한번 대충 읽어보았다. 김파씨 본인의 말에 의하면 김파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로부터 립체시 창작을 시도했고 그 기초 우에서 이른바 《립체시론》은 적어도 80년대 중반으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여 금년에 《립체시론》이 소책자로 출판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하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20년 동안 《립체시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로고는 필자도 충분히 긍정하고 싶다.그리고 과감하게 자신의 리론체계를 건립하려는 저서립설(著書立說)의 용기도 충분히 긍정한다.  김파씨는《립체시론》에서 이른바 립체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 시주제의 다면성, 시결구의 다각성, 시형상의 양성, 시어의 다의성과 수사법의 복합성과 변이와 전환 등이 망라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구조가 외적 및 내적으로 구성된 통일체로서의 립체구조, 립체형상구조, 립체수사구조, 립체어의 구조 등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호상 련관, 호상침투, 호상 배척되는 대립물의 통일체로 구성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립체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립체시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외적 및 내적구조에 상응된 다주제를 갖고 있는 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5〜16쪽.  김파는 자기와 다른 사람의 립체시는 모더니즘시들과는 대동소이하나 《모더니즘시에서는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점의 복수성, 다시 말하면 주제의 복수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시속에 또는 시창작과정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현되는가 하는 그 규률성이 결여되여 있다.》면서 자기의 립체시나 자기가 인정하는 립체시들이 모더니즘시들보다는 한 수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립체시에 대해 김파씨가 숱한 말을 했으나 그 요점은《다주제》라는데 귀결된다.그런데 묻노니, 여운이 있는 좋은 시들 치고, 특히 고대 동서고금의 영물시(詠物詩)들이나 현대의 상징파들의 시들치고 어느 것이 다주제가 아닌 것이 있는가? 황진이의 시조 한 수를 례로 들어 보자.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렵거늘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 간들 어떠하리  이 시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뜻(혹은 주제라고도 할 수 있음), 즉 자면의(字面義)와 암시의(暗示義)를 가지고 있다. 자면의(字面義)를 분석해볼 것 같으면 서정적 자아는 의인화된 청산속에서 흐르는 물과 대화하면서 한번 바다에 흘러 들어가면 다시 거슬러 올라 올수 없으니 밝은 달이 있는데서 한번 놀다가 가라고 권하는 것이다. 암시의(暗示義)을 분석해볼 것 같으면 벽계수(碧溪水)는 사실 벽계수(碧溪守)라는 호를 가진 멋쟁이 선비를 암시하는 것이고 명월(明月)은 황진이 자신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풍류기생 황진이가 벽계수라는 멋쟁이선비더러 자기와 더불어 놀고 가라고 넌지시 암시하기 위해 쓴 시이다. 이밖에도 이 시조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하는 식의 급시향락(及時享樂)-제 때에 향락을 누려야 한다는 주제가 내포되여 있다고 해도 별로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녀석의 눈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쇠창살에 칭칭 감겨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었다.  녀석에게는 오로지 천 갈래의 쇠창살만 보였고  그 천 갈래의 쇠창살 뒤에는 우주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강인한 네 발로 유연한 걸음새를 보인다만  그 걸음새는 자그마한 쇠살창 안에서 맴돌기만 할뿐,  마치도 힘의 춤사위가 하나의 중심을 에돌기만 하는 듯  바로 중심에서 위대한 의지는 현기증에 걸렸도다.  다만 이따금 눈까풀을 소리 없이 걷어 올리니  한 폭의 그림이 침입해 들어오지만  사지가 긴장한 적막을 통과하고 나니  마음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는구나.  -릴케 《표범- -빠리 동물원에서》  상징주의 대표적인 시인 릴케의 이 시에서의 자면의는 이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과 같이 빠리동물원의 살 창속에 갇혀 달출을 시도하느라고 쉴새없이 맴을 돌다가 맥없이 주저앉아버린 한 마리의 표범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표범은 단순한 인간의 상징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릴케 자신과 릴케 같은 젊은 세대의 상징이다. 표범은 “천갈래의 쇠창살”속에 갇혀 쉴새 없이 맴을 도는데, 이는 바로 인간의 방향상실과 곤혹 그리고 방황을 상징한다. “위대한 의지가 현기중에 걸렸다”거나 전반 “우주”의 상실은 마치도 표범의 감각 같아 보이지만 실제상에서는 인간의 감각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표범의 권태,고민, 곤혹과 방황은 바로 인간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인 것이다.  시인은 로댕한테서객관적이고 랭정하고 정확한 조각수법을 배워 추상적인 관념(힘, 의지 등)을 표범의 각종 이미지(“강인한 네발”, “피곤한”, “눈길”, “맴을 돈다”, “현기증”, “춤사위”등)속에 내재화시켰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하여 발레리가 언급했던 이른바 “추상적 육감”과 엘리어트가 제창했던 “사상의 지각화”의 효과를 획득했던 것이다. 이 시는 시종 인생의 의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시인의 곤혹, 방황과 고민의 주관적 정서를 상징하고 있다. 모택동의 시(詩)나 사(詞)들에도 다주제를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짙은 시들이 많고도 많으니 김파의 말을 빈다면 립체파 시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바람은 봄을 보내고  흩날리는 눈꽃 봄을 맞네.  아직 벼랑에 고드름이 백장인데  꽃가지는 예쁘네.  예뻐도 봄빛을 다투지 않고  다만 봄소식 전할뿐.  산에 뭇 꽃들이 만발할 때에  그 속에 웃으리.  - 모택동《복산자 · 매화를 읊노라》  중국시론의 말을 빌린다면 모택동의 이 사는 그야말로 《말은 끝났으나 그 뜻은 무궁하다(言有盡而意無窮)》, 즉 그 주제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하다고 할 수 있으니 역시 김파 주장대로 라면 다주제의 립체시다.  시의 상징성과 그에 따르는 암시성, 다의성의 특점에 대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론가들이 이미 수많은 견해를 발표하여 와서 이미 그것이 몇 년 동안 시인묵객들의 입에서 수없이 오르고 내려 이미 상식으로 된지 오래다. 특히 중국고대 시론에서의 《신운(神韻)설》은 전문 이 점을 연구대상으로 한 시론범주로서 중국전통시론범주에서의 핵심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중국시론중의 《의경(意境)설》이나 《언의상(言意象)론》이나 서양시론중의 《층차론(層次論)》이나 모두 정도부동하게 시가 갖고 있는 다차원의 의미구조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였다.  공자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김파씨는 모른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오히려 아는 체 했으니 결국은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드러냈을 뿐이다. 중국 당송 산문팔대가 중의 한 분인 류종원(柳宗元)의 우화 《귀주 땅의 당나귀(黔之驢)》에서 나오는 당나귀가 괴상한 소리로 영각을 안 하고 뒷발질만 안하고 가만히 있었더라도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잘 모르는경우에는 가만이 입 다물고 있으면 면무식(免無識)은 하고 망신은 당하지 않는 법이다. 시론체계는 아무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빨이 없는 갓난 애기가 콩밥을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리치이다.  김파씨의 《립체시론》을 본 후의 총적인 인상을 소견다괴(少見多怪)라는 성구나 혹은 《무지하면 용감하다》는 말로 개괄할 수밖에는 없다.                                           ===========================================         [서울=동북아신문]중국 연변의 저명한 시인이며 여러 쟝르에 걸쳐 다산작을 쏟아낸 김파 시인이 최근 가정의 역사를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 '흑색의 태양(3부작)'을 한국에서 출판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조선족 평론가 최삼룡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를 하였다.   '흑색의 태양'은 우선 소설의 텍스트가 남달리 독특하고 기발하여 광도와 심도가 있어 반도 남북을 위주로 한 전례에 없는 희귀 사실로서 우리 민족의 문학사와 동방문학사, 나아가는 세계문학사에도 없는 근대로부터 오늘의 후기 현대에 이르는 전반 인류 역사의 100여 년 사이에 창상지변을 보여준 기적적이고 경이적이며 미증유적이며 돌파적인, 전예가 없던 대형 거대 서사로서 현시되고 있다.   소설은 외할아버지 유승렬, 어머니 유동선, 아들 석숭이에 이르기까지 3대를 거치면 조선, 일본, 중국, 러시아, 폴란드 등 나라를 경유하며 겪어온 가정 및 주인들의 전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횡적으로 가정 백년사가 관통된 사건으로 이국타향에 살고 있는 조선이민들의 생활상, 구국독립을 위한 항일투쟁,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2월 자산계급혁명 및 10월 사회주의 혁명, 소련 홍군과 조선독립군합병에서 불협화음으로 산생된 자유시 참변과 실망, 제2차 세계대전과 광복, 중국 토지혁명과 가정의 수난, 중국 무산계급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 소련의 사회주의 연맹공화국의 해체와 오늘의 세계화에 이르기까지의 전반 인류사 100년 풍운변화와 창상지변을 보여주고 있다.   최삼룡 평론가는 "소설의 제목을 '흑색의 태양'으로 단 것은 해체된 사회주의와 그 창시자 및 추종자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 이 글의 특색은 종적으로 가정소설이며 매개 주인공들의 자서전적 소설이고, 횡적으로는 민족수난의 소설이면서 사회소설로서 주체사상이 4개 이상이 되는 입체소설 텍스트로 현시되고 있다"고 자평했다.       ▲ 김파 시인/소설가 김파 프로필     중국 흑룡강성 해림현 출생.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 한국 국제펜클럽 회원 주요 작품으로 '흰돛', '대륙에 뭍혀 있는 섬', 서정시집 '사랑의 별' 등 8부가 있고, 서정서사사집으로 '사랑의 별', 장편서시로 '천추의 충혼 안중근', 장편대하시집 '천년 고국 고구려(상, 중, 하)'가 있으며 시집론으로 '입체시론'이 있다.  이외 장막가극, 동화시집 등 다수가 있다. 1997년 중국조선족 백년문학사에서 유일하게 개인 명시집 '김파의 명시집'을 출판, 2014년 4월에 김파시비를 건립하였다. 주, 성, 전국 및 해외에서 10여 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35    폴란드 시인 -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댓글:  조회:3375  추천:0  2017-02-14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Zbigniew Herbert) 1924년 10월 29일,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는 르부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1939년,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폴란드를 침공·점령하자 지하조직이 만든 교육기관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헤르베르트는 역시 지하 교육기관이었던 얀 카르미에시 대학에 진학해 폴란드 문학을 공부했다.  1944년 봄 르부프를 떠나 크라쿠프로 이주하고 난 뒤, 르부프의 폴란드 사람들은 쫓겨나고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로 편입되었다. 이때의 고향 상실, 뿌리 뽑힘은 후일 헤르베르트 작품의 주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헤르베르트는 이후 크라쿠프 대학에서 경제학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시, 음악 비평, 연극 비평 등을 발표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스타일을 따르지 않고 정치 선전물을 쓰지 않았기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 결과 변변치 않은 일자리들을 전전해야만 했다.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헤르베르트는 1956년 폴란드가 스탈린 체제에서 벗어나고 문학의 유일 양식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폐기되자, 정식으로 시단에 나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첫 시집을 펴내고 주로 해외에서 지내던 중 1968년 3월 29일 카타지나 지에두쥬카와 프랑스의 폴란드 영사관에서 결혼했다. 그해 『헤르베르트 시 선집』이 영어로 번역·출간되었고, 영미권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번역된 폴란드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첫 시집 『빛의 심금』(1956)을 시작으로 『헤르메스, 개와 별』(1957), 『사물 연구』(1961), 『명銘』(1969), 『코기토 씨』(1974), 『포위 공격받는 도시에서 온 소식』(1983), 『떠나보낸 비가』(1990), 『로비고 지방』(1992), 『폭풍의 에필로그』(1998) 등 다수의 시집을 펴냈다. 나치와 스탈린 체제의 폭정과 검열에 항거해 작품을 쓰지 않거나 발표하지 않았던 기간이 길었음에도, 그는 생전에 시집과 함께 희곡집 『철학자들의 동굴』(1956), 에세이집 『정원 속의 야만인』(1962) 등 이십여 권의 작품을 펴냈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희곡작가, 모럴리스트였던 그는 코시젤스키 재단 문학상(1963), 레나우 문학상(1965), 헤르더 문학상(1973), 페트라르카-프레이스 문학상(1979), 브루노 슐츠 문학상(1988), 예루살렘 문학상(1991)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34    폴란드 시인 - 심보르스카 댓글:  조회:3350  추천:0  2017-02-14
  출생일 1923. 7. 2, 폴란드 포즈나인 브닌 국적 폴란드 요약 폴란드의 시인. 199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동료 시인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및 타데우슈 로제비치와 함께 현대 폴란드의 투쟁, 즉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소련 점령,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스탈린주의, 계엄령, 민주화 등을 증언했다. 고도의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욕망과 강렬한 휴머니즘으로 이것을 부드럽게 조율했으며, 199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심보르스카는 1945~48년 크라쿠프의 야기엘로니안대학교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녀의 시는 1945년에 잡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1952년에 첫 시집이 나온 데 이어 1954년에 2번째 시집이 나왔지만, 심보르스카는 이 두 시집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맹목적으로 헌신했다는 이유로 이 시집들을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줄곧 제외해왔다. 소련이 검열을 완화한 뒤에 처음 출간된 시집 〈예티에게 외치다 Wo anie do Yeti〉(1957)는 표제 인물인 설인(雪人) 예티를 통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 후에 나온 시집으로는 〈소금 Sol〉(1962)과 〈끝없는 재미 Sto pociech〉(1967) 등이 있다. 〈아마 Wszelki Wypadek〉(1972)의 표제작은 그가 자주 다루는 주제인 우연을 검토하고 있으며 후기 시집으로 〈큰 수(數) Wielka liczba〉(1977), 〈끝과 시작 Koniec i pocz tek〉(1993) 등이 있다. 1953~81년 그녀는 주간지 〈문학생활 Zycie literackie〉에 〈과외 독서 Lektury nadobowiazkowe〉라는 칼럼을 기고했으며, 1980년대에는 〈아르카 Arka〉와 〈쿨투라 Kultura〉라는 잡지에 기고했는데, 〈쿨투라〉는 프랑스 파리에서 발간되는 폴란드 망명 문학 잡지였다. 심보르스카는 16, 17세기의 프랑스 시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저명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심보르스카는 개인적인 문제에 보편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폴란드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된다. 그녀의 시에서는 일상적인 것들이 더 넓은 배경 속에서 철저히 재검토된다. 섬세한 문체는 재치와 깊이와 초연함에서는 고전적이지만, 아이러니와 냉담함에서는 현대적이다. 또한 꾸밈없는 언어가 곁가지를 모두 제거하고 대상을 향해 곧장 나아가는데, 이것은 1950년대 중엽에 동유럽 시문학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법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어조는 잔뜩 비꼬는 대화체인 경우가 많다. 지난 30년 동안 폴란드에서 시집 7권을 발표한 이 은둔자는 기법의 미묘함 때문에 번역하기 어려운 시인이라고 알려져왔으나, 그녀의 시집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영어판 시집으로는 〈소리, 느낌, 생각 Sounds, Feelings, Thoughts〉(1981), 〈다리 위의 사람들 People on a Bridge〉(1990), 〈모래알이 있는 풍경 View with a Grain of Sand〉(1995) 등이 출간되었다.
2033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시인 - 시욤 아폴리네르 댓글:  조회:4995  추천:0  2017-02-14
  출생일 1880년 08월 26일 사망일 1918년 11월 09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 〈미라보 다리〉, 《알코올》 등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20세기 초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기욤 아폴리네르 아폴리네르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로, 현대시의 두 주류인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초의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예술가로 일컬어진다. 시인으로서는 현대시의 모든 개념과 방법, 형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며, 미술 평론가로서도 입체파, 아프리카 미술, 초현실주의 등 20세기 초 모든 전위 미술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프랑스 문단 및 예술계에서 모더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며, 초현실주의라는 말 역시 1917년 아폴리네르가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욤 알버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르 아폴리네르 드 코스트로비츠키는 1880년 8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폴란드인 귀족인 안젤리카 드 코스트로비츠키로, 16세 때 그를 사생아로 낳았다. 아폴리네르의 동생 알베르는 그녀가 24세 때 태어났는데, 알베르의 아버지 역시 밝혀져 있지 않다. 아폴리네르의 아버지가 이탈리아인 장교라는 설과 이탈리아 교황청 고위 성직자라는 설 등이 있으나 밝혀진 바는 없다. 유년 시절을 니스와 모나코에서 보냈으며, 7세 때 모나코에서 가톨릭 교단이 운영하는 생 샤를르 학교를 다니다 니스에서 중등학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모범생은 아니었다. 호탕하고 정열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술과 도박, 친구들과 함께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문학을 좋아했는데, 특히 고전보다는 현대 작품들을 좋아했으며, 이 시기부터 기욤 마카브르 혹은 기욤 아폴리네르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세 때 시인이 되기로 하고 파리로 갔다고 하는데, 재혼과 이혼을 거듭하던 어머니 안젤리카가 아들들을 데리고 모나코에서 파리로 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안젤리카는 기욤이 어린 시절에도 두 아들을 팽개쳐 두고 유럽 여행을 다니거나 도박을 하려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또한 이혼 후에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워 파리에서 궁핍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활발했던 두 아들은 각자 나름대로 재미있게 지내다가 어머니와 합류하곤 했다. 파리에서 아폴리네르는 생계를 위해 공무원이나 은행원이 되고자 했으나 외국인에 학력도 부족해 여의치 않자 소설 대필, 막노농꾼, 개인금융금고 사무원 등의 일을 전전했다. 그런 한편 계속해서 여자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연시와 소설을 썼으며,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를 들락거렸다. 22세 무렵부터는 계속해서 문예 비평문을 잡지에 기고했으며, 이듬해 문예지 〈펜〉에 시 두 편이 게재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아폴리네르는 활동 초기부터 많은 시들을 쓰고 발표했으나 처음에는 시인보다 미술 비평가로서 더욱 두드러지는 활동을 했다. 그는 피카소, 브라크, 앙리 루소 등이 시도하는 새로운 미술 경향을 알아보고, 아프리카 조각을 소개하고 입체파 회화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견하는 등 미술계 전반의 전위운동을 주도했다. 아폴리네르는 27세 때인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을 만나는데, 그녀는 아폴리네르의 개인적, 예술적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전에도 영국 여인 애니에게 결혼해 주지 않으면 납치하겠다고 협박하는 소동을 벌일 정도로 열정적인 성격이었던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에게도 한눈에 반해 "그녀 이상으로 사랑할 여인은 없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녀에 대한 연심으로 시적 재능도 개화하여 1913년 시인으로서 문명(文名)을 알리게 될 시집 《알코올》의 기반이 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앙리 루소가 그린 아폴리네르와 로랑생 1909년, 소설집 《타락한 마술사》를 앙드레 드랭의 목판화를 삽입해 펴냈으며, 1910년에는 소설집 《이교도 회사》를, 1911년에는 《동물 시집》을 펴냈다. 그런 한편 미술 평론가 및 문학 평론가로서 다양한 잡지에 평론을 발표했으며, 필명으로 가십 기사와 에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또한 그의 편집에 비평이 덧붙여진 《사드 후작 작품집》이 출간되면서 사드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난다.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폴리네르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던 제리 피에레라는 친구가 자신이 모나리자를 절도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쳐온 다른 몇 가지 소장품들을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 두고 있다는 글을 발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폴리네르는 사건 직후 자신의 집에 숨겨져 있던 미술품들을 루브르 측에 돌려주었으나 결국 모나리자 절도 혐의 및 장물 소지죄로 상테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주일 만에 예술가 친구들의 탄원으로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그는 계속 외설 작가, 불법 체류자(죽기 2년 전에야 프랑스인으로 귀화할 수 있었다)라는 언론의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리 로랑생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그녀와 이별하면서 쓴 시가 한국인에게 친숙한 〈미라보 다리〉이다. 센 강 미라보 다리에 걸린 현판 〈미라보 다리〉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1913년 4월, 입체파 이론의 기반이 되는 미술 비평서 《입체파 화가들》을 펴냈으며, 〈미래주의의 반전통-종합선언〉이라는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입체파 미술 및 미래주의 미술의 근본 원리를 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대화 형식, 동시성 구현, 구두점 삭제 등 다양한 시적 표현 형식을 실험한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 현대 도시 문명의 삶을 입체파,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실험한 시집 《알코올》이 탄생했다. 대담한 분석과 구성, 대상을 사실주의적 질서에서 해방시킨 새롭고 참신한 조형(造形), 그만의 독특한 도회적인 서정을 담은 이 시집은 전위 예술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20세기 새로운 시형의 포문을 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폴리네르는 총동원령에 따라 12월 5일 군에 입대했다. 전쟁 기간에도 아폴리네르의 창작열은 불타올랐는데, 여기에는 두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그는 입대하기 몇 달 전 한 화가의 집에서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옹[루(Lou)로 알려져 있다]이라는 부인을 만나 또다시 첫눈에 반했고, 정열적인 연시와 편지를 수백 통 썼다(연애 관계가 끝난 후에도 아폴리네르는 그녀와 계속 서신을 교류하고 시를 지어 바쳤다). 이 시들은 1918년 출간된 《상형시집(칼리그람)》에 일부 수록되었으며, 아폴리네르 사후 《루에게 바치는 시》로 편찬되었다. 또 편지들은 《아폴리네르 서간문》으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루와의 관계는 1914년 연말 무렵 허무하게 끝난다. 다음으로 1915년 1월, 아폴리네르는 휴가를 맞아 잠시 귀환하던 중 기차에서 만난 마들렌 파제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급속도로 가까워져 약혼까지 했으며, 역시 마들렌느에게도 수십 편의 시와 편지를 바친다. 현재 마들렌에게 바친 시 23편이 전한다. 《상형시집》에 수록된 형태 시 일부분 글자들이 크기와 형태를 달리하여 도형화되었다. 1916년 3월 17일 아폴리네르는 전투에서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고 수술하기에 이른다. 이 부상으로 그는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상징주의적 소설집 《살해된 시인》을 발표했으며,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을 상연했다. 아폴리네르는 이 희곡을 일컬어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했는데, 초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새로운 정신과 시인들〉이라는 강연을 통해 랭보, 막스 자코브, 상드라르 등의 시인을 소개하고 모더니즘 시 이론의 초석을 놓는다. 1918년 4월, 아폴리네르는 주제에 따라 글꼴이나 문장 모양, 행간 등을 시각적으로 조절하여 문장을 도형화하면서 시 형식의 혁신을 시도한 《상형시집》을 발표했다. 그해 5월에는 〈아름다운 빨강머리 여인〉을 쓰게 한 자클린 콜브와 결혼했으며, 11월 9일 사망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폐충혈이 사인이었으나 포탄 파편에 맞은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것도 큰 원인으로 꼽힌다. 시신은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혔다.
2032    영국 시인 - 윌리엄 골딩 댓글:  조회:3921  추천:0  2017-02-14
  출생일 1911년 09월 19일 사망일 1993년 06월 19일 국적 영국 대표작 《파리 대왕》, 《첨탑》 등 시인이자 소설가로 참혹한 전장의 모습을 목격하고 인간의 본성을 통찰했다. 198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윌리엄 골딩 윌리엄 골딩은 영국의 소설가로, 문명과 관습의 겉껍질을 벗겨 낸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행동 변화를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본성, 특히 인간 야만성의 일면을 통찰하여 198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윌리엄 골딩은 1911년 9월 19일 영국 콘월의 항구도시 뉴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 골딩은 중등학교 과학 교사였으며, 어머니 밀드레드는 여성 참정권운동을 지지하는 진보적 여성이었다. 급진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과학적 세계관을 추구하던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과학자를 꿈꾸었다. 형과 함께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하던 말보로 문법학교를 다녔고, 19세 때 옥스퍼드 대학 브레이스노스 칼리지에 입학해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2년 후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에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었다. 졸업 후에 대학 재학 중 쓴 시 29편을 묶은 첫 시집 《시집》을 출간했지만, 이후로 오랫동안 교사 생활을 하느라 본격적인 작가 생활은 한참 후에야 시작되었다. 이 시집에 대해 골딩은 자신은 출간할 생각이 없었으며 친구가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 출간되었는데, 독자나 비평가 누구에게서도 어떤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24세 때부터 솔즈베리의 비숍 워즈워스 학교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가르쳤으며, 28세 때 화학자 앤 브룩필드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골딩은 영국 해군에 입대해 비스마르크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교편을 잡은 한편,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골딩은 과학을, 특히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신봉했으나,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과 인간의 비합리성을 목격하고 자신의 이상적인 신념들을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골딩이 43세 때인 1954년, 수십 곳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끝에 파버 앤드 파버 사에서 《파리 대왕》이 출간되었다. 파리 대왕은 히브리어 '바알세불(Beelzebub)'을 영역한 것으로, '곤충의 왕'을 의미하며, 부패, 타락, 공포를 상징한다. 비행기 추락으로 외딴 섬에 고립된 소년들이 극한 상황에서 문명의 관습에서 벗어나 원시적인 야만 상태로 퇴행해 가는 모습을 묘사한 《파리 대왕》은 강렬한 설정과 이야기, 풍부한 상상력으로 순식간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에서 골딩은 인간의 야만적 본능이 선한 의지를 넘어서는 모습을 묘사하고 인간 문명에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이런 주제 의식은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1954년 영국에서 발행된 《파리 대왕》의 초판 표지 골딩은 당대 대부분의 작가들과 달리 당면한 현실의 문제보다는 인간 본질, 실존주의적 문제에 천착했다. 인간은 문명과 사회라는 가면 아래 선천적인 잔인함과 이기심을 감추고 있으며, 소설가는 보이지 않는 신체적 질병을 겉으로 드러내 진단하고 각성시킴으로써 그것을 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가 '벌이 꿀을 만들어 내듯이 인간이 악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류의 진보에 큰 결함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독자들에게 각성시키고 교화하는 것이 소설의 목적이라고 여겼다. 연이어 《후계자들》, 《핀처 마틴》, 《자유낙하》 등을 발표했다. 《후계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의 눈으로 인류의 탄생을 추적하는 형식으로, 네안데르탈인이 현생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폭력적으로 멸망당하는 모습을 그린다. 《핀처 마틴》은 전함이 폭격당해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무인도에 표류한 해군 장교가 익사 상태에서 보이는 인간의 극한 생존 욕망을 그리고 있으며, 《자유낙하》에서는 한 화가가 순수한 소년으로서의 자신이 (죄를 지은) 성인으로서의 자신에 이르기까지를 회고하는 형식을 통해 인간 이성의 한계, 자유의지의 한계를 탐구한다. 198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윌리엄 골딩 골딩의 작품들은 대체로 장편소설치고는 짧은 길이지만, 그 속에 담긴 상징과 우의, 밀도 있는 문체 탓에 읽기가 쉽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때문인지 《파리 대왕》 이후의 작품들은 대중으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얻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청년층으로부터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작가로서 입지가 굳어지자 1961년 골딩은 학교를 그만두고 작가로 전업했다. 그해 미국 버지니아 주 홀린스 칼리지의 초청으로 약 1년간 방문 작가로 보내며 집필에 전념했다. 1년 후 아내와 함께 솔즈베리로 돌아와 정착했으며, 1964년에 《첨탑》을 발표했다. 《첨탑》은 중세 시대 대성당 첨탑 건설에 있어 한 고위 성직자의 이기심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작품으로, 골딩은 이 작품에서도 역시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하다는 전제 아래 극한 상황 속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환상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묘사했다. 1967년에는 1920년대 가상의 소읍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을 통해 계급의 문제,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다룬 자전적 소설 《피라미드》를 발표했다. 1980년대에 걸쳐 골딩은 '땅 끝까지' 3부작 《통과 제의》, 《밀집 지대》,《심층의 불》을 펴냈으며, 《움직이는 표적》, 《종이인간》 두 편의 수필집을 발표했다. 특히 《종이인간》은 노벨 문학상 수상 전에 쓰여 수상 이듬해인 1984년에 출간되었는데, 유명인사와 도덕적 진공 상태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 담긴 작품으로 골딩의 문학계에 대한 환멸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1983년에 '사실적이고 명쾌한 설화 예술과 다양하고도 보편적인 사회 통념을 통해 오늘날의 인간 조건을 조명한'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88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말년에도 활발하게 집필 활동을 했으며, 마지막 장편소설 《이중의 혀》는 미완성으로 남겨졌다가 사후 3년이 지난 뒤에 발표되었다. 1993년 6월 19일,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2031    스웨덴 국민시인 - 토마스 트란스트 뢰메르 댓글:  조회:3588  추천:0  2017-02-14
    출생일 1931년 4월 15일 사망일 2015년 3월 26일 국적 스웨덴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수상 2011년 노벨문학상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詩賞), 노이슈타트 국제 문학상 등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출신의 시인이다.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psychologist)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에서부터 70대에 이른 현재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한마디로 ‘홀로 깊어 열리는 시’ 혹은 ‘심연으로 치솟기’의 시이다. 또는 ‘세상 뒤집어 보기’의 시이다. 그의 수많은 ‘눈들’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시 한편 한편이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하다.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지만, 처녀작에서는 잠 깨어남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전도되어 있다. 초기 시에서 깨어남의 과정이 상승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 낙하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하강의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綠陰)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 스웨덴 자연시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 후 더 개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해졌다. 그리고 세상을 높은 곳에서 신비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연 세계를 세밀하고 예리한 초점으로 묘사하는 그를 스웨덴에서는 '말똥가리 시인'이라고 부른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서구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연 스웨덴의 국민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는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 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북구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냈다.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이러한 시작(詩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보여준 일관된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결코 서두름 없이, 또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고요한 깊이의 시 혹은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2015년 3월 26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90년대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다 끝내 2011년 수상의 영예를 안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1996년 폴란드의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이후 15년 만에 탄생한 시인 수상자였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시작 활동과 더불어 심리학자로서 약물 중독자들을 상대로 한 사회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트란스트뢰메르가 보는 이 세상은 ‘미완의 천국’이다. 낙원을 만드는 것은 결국 시인과 독자들, 자연과 문명, 그리고 모든 이분법적 대립구조들 사이의 화해와 조화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벨상 수상후보이자 스웨덴을 대표하는 트란스트뢰메르 시집의 국내 출간은 경하할 만한 일이다. 이 세상의 끝, 등 푸른 물고기들이 뛰노는 베링 해협이 산출한 시를 통해 한국 독자들은 미지의 세계로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꿈꾸는 방랑자들이기에. -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순간에 대한 강렬한 집중을 통하여 신비와 경이의 시적 공간을 구축하면서 우리들의 비루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의 시는 말똥가리처럼 세상을 높은 지점에서 일종의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되, 지상의 자연세계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춘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인생의 빛나는 종합을 성취하였으며 자연과 초월과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Tomas Tranströmer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2008년) 국적 스웨덴 수상내역 노벨 문학상(2011)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Tomas Tranströmer, 1931년 4월 15일~2015년 3월 26일)은 스웨덴의 작가, 시인, 번역가이다. 201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 〈정오의 해빙〉, 〈사물의 맥락〉, 〈몇 분간〉, 〈비가〉 등이 있다.  
2030    명문 옥스퍼드大 "시 교수"속에 시지기-竹林 있다?...없다?... 댓글:  조회:4020  추천:0  2017-02-13
'옥스퍼드 시(詩)교수 파문'으로 본 대(大)시인들의 사생활 딜런 토머스는 도벽 엘리엇은 인종차별 소지 상당수 도덕적으로 결함 ... 영국 명문 옥스퍼드대에서 300년 전통의 명예교수직인 '시 교수'(Professor of Poetry)로 선출됐던 루스 퍼델(Padel·여·53)은 자진 사퇴해야 했다. 그녀가 시 교수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경쟁자였던 시인 데릭 월컷(Walcott·79)의 성추행 전력을 언론에 투서했던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집중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대 시 교수직은 영국 문학계의 최고 명예직으로 꼽히기 때문에, 여론은 퍼델의 행위에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다. 하지만 존경받는 문인이 되려면 반드시 도덕적인 자질을 갖춰야 할까? 최근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문학사(史)에서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 중 상당수가 도덕적 측면에서 큰 결함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죄와 구원, 창조와 소멸 등의 주제를 몽환적으로 노래해 밥 딜런을 비롯한 20세기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딜런 토머스(Thomas·1914~1953년)는 술고래였고 친구들의 돈을 훔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이정표로 평가받는 시집 '황무지'의 작가이자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T S 엘리엇(Eliot·1888~1965년)은 인종차별주의나 반(反)유대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시를 썼다. 하지만 1950년대 영국 시단을 대표하는 필립 라킨(Larkin·1922~1985년)이 사적인 편지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엘리엇은 양호한 편이다. 영국 낭만주의시대를 이끌었던 조지 고든 바이런(Byron·1788~1824년)은 난잡한 여성관계로 유명했고, 또 다른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1795~1821년)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 소설 '검은 고양이'와 시 '애너벨 리'로 유명한 에드거 앨런 포(Poe·1809~1849년)는 27세 때 13세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텔레그래프는 만약 이들이 오늘날 활동했다면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결코 옥스퍼드 시 교수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2029    영국 시인 - 필립 라킨 댓글:  조회:4278  추천:0  2017-02-13
  출생일 1922. 8. 9, 잉글랜드 워릭셔 코벤트리 사망일 1985. 12. 2, 험버사이드 킹스턴어폰헐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시인.   1950년대 영국 시에 지배적이던 간결하고 반낭만적인 정서에 표현력을 불어넣은 시인으로 높이 평가된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첫 소설 〈질 Jill〉(1946, 개정판 1964)의 소재가 되었다. 이에 앞서 1945년에는 자비로 첫 시집 〈북선 The North Ship〉을 출판했다. 뒤이어 소설 〈겨울 소녀 A Girl in Winter〉가 1947년에 발표되었다. 그는 〈덜 속은 사람들 The Less Deceived〉(1955)로 유명해졌는데, 이 시집의 제목에서 라킨이나 당시 주목을 받았던 킹슬리 에이미스, 존 웨인 등과 같은 영국 작가들이 1930년대의 정치에 대한 열광이나 1940년대의 지나치게 감정적인 시에 대해 보인 반응을 엿볼 수 있다. 라킨의 시에는 감정적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절제된 표현의 경향을 띤다. 그는 1955년 요크셔에 있는 헐대학의 사서가 되었고 1961~71년에는 〈데일리 텔레그라프 The Daily Telegraph〉지의 재즈 비평가로 일하기도 했다. 〈재즈의 모든 것 : 기록일지 1961~68 All What Jazz : A Record Diary 1961~68〉(1970)에 수록된 수필들은 이 일을 하면서 모은 자료들에서 나온 것이다. 후기 시집으로 〈성령강림절의 결혼 The Whitsun Weddings〉(1964)·〈높은 창문들 High Windows〉(1974)이 있다. 〈옥스퍼드판 20세기 영국시 Oxford Book of Twentieth-Century English Verse〉(1973)를 편집하기도 했다. 수필집 〈청탁받은 글 Required Writing〉(1982)이 있다. ========================== 필립 라킨은 198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몇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으며, 임종 때까지 30년을 헐(Hull) 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그의 작품은 생시에 출간한 두 권의 산문집을 제외하면 두 권의 소설과 네 권의 시집이 전부이다. 그는 과작(寡作)인 시인으로 사후에 그의 작품 의로인인 앤서니 스웨이트(Anthony Thwaite)가 1988년에 출간한 『시 전집』(Collected Poems)에는 단지 17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킨의 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와 중산층 영국인들의 경험과 영국 사회를 잘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아 왔다. 또 그는 50년대에 영국 시단을 주도했던 "운동"(The Movement)이라는 일군의 시인들을 대표하는 주요 시인으로 평가 받아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작품이 단순, 간결해 보이지만 빼어난 기교로써 복잡한 경험과 감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 논문에서는 라킨의 시 작품 중에서 사랑에 관한 작품의 주제를 그의 시론에 입각하여 분석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결혼, 이별, 사랑의 기만, 부부관계와 같은 연인들의 인간관계를 다룬 작품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연구??초점은 라킨이 이러한 소재를 어떻게 다루고 있고, 그의 사랑 시의 특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에 두어져 있다. 이러한 접근이 라킨 연구에 있어서 최초로 시도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연구되어 온 것을 시인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조망한 것에 그 의미가 있다. 라킨은 자신의 시 창작 원칙을 1956년에 있었던 한 회견에서 밝힌 바 있는데, 이 회견에서 자신은 자기가 보고, 생각하고, 느낀 바를 자신의 시작에 있어서 최우선적인 의무는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는 데에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그의 시 창작 원칙은 근본적으로는 영국 철학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경험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즉 라킨의 창작원리는 이론이나 추상적 사상에 기초를 둔 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되 자신의 상상력을 첨가하여 보통의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것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로 그의 시는 흔히 일반적인 통념으로 영원, 행복, 슬픔을 대변하는 사랑, 결혼, 이별 등이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러하듯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 자체가 영구한 것이 아니라 유한적인 시간에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종교적 가치를 상실한 현대인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인간의 삶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영원을 전제로 한 사랑, 결혼 등의 남녀 관계도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킨의 시의 특질은 낭만적인 시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이고 영원 불변하는 세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 현실 세계와 보통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경험적인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환상이 없는 인간 삶의 또 다른 실재를 제시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라킨 /김정환 옮김   나란히, 얼굴들 뭉개져, 백작과 백작 부인 돌로 누워 있다, 그들 고유의 복장 막연하게 전시되었다 관절 마디 갑옷, 뻣뻣해진 주름으로, 그리고 그 희미한 부조리 암시- 그들 발아래 몸집 작은 개들로,   바로크 이전의 이런 평이(平易) 눈길 끌기 힘들다, 그 눈에 그의 왼쪽 갑옷 장갑, 여전히 비어 다른 것에 움켜쥐여진 그것 띄기 전에는; 그리고 우리는 본다. 예리하게 연한 충격으로, 물러난 그의 손, 그녀 손 쥐고 있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오래 누워 있을 거라 생각 안했을 것. 이런 석상 충실은 그냥 친구들 보라는 상술(詳述)이었을 터; 임명 조각가는 멋진 우아 떨쳐버렸으니, 기단을 둘러 라틴어 이름 늘이는 거 돕느라 말이지.   그들은 짐작 안 했을 것 자기들의 반듯이 누운 고정의 여행 중 얼마나 일찌감치 공기가 소리 없는 손상으로 변할지, 그 오랜 임차를 퇴짜 놓을지; 얼마나 곧 뒤를 잇는 눈들이 시작할지 보기를, 읽지는 않고, 엄격하게 그들   존속했다, 연결되어, 길이와 너비 들, 시간의 그것들로 말이지. 눈 내렸다, 날짜 미상, 빛이 여름마다 모여들었다 그 유리에, 새가 짝을 부르는 빛나는 소리들의 쓰레기 한 더미 흩뿌려졌다 그 똑같은 뼈로 구멍 숭숭 뚫린 땅에. 그리고 통행로 위로 끝없는 바뀐 사람들 왔다.   그들의 정체로 목욕을 하며, 이제, 문장(紋章) 없는 시대의 움푹 꺼진 곳에 실타래 연기의 그것, 그들의 역사 스크랩 위에 하릴없이, 단지 하나의 자세만 남는다:   시간이 그들을 변형시켰다 비(非)진실로, 그들이 별로 의도하지 않았던 그 돌 정절이 이르렀다 그들의 최종 문장(紋章) 되기에, 그리고 증명하기에 우리의 거의 본능인 것이 가장 진실되다는 것을 말이지: 우리 중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다.   두꺼비 / 필립 라킨       왜 나는 두꺼비가 내 인생에 작동하고 웅크리게 해야 하지? 내 재치를 갈퀴처럼 써서 그 짐승을 쫒아낼 수 없을까.   일주에 엿새를 두꺼비는 그 구역질나는 독으로 얼룩진다. 무슨 셈을 치르는 걸까! 어째튼 격에 맞지 않는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들의 재치로 산다. 강연강사도 말더듬이도 깡패도 군의관조수도 시골뜨기도- 그들은 극빈자로 끝나지는 않는다.   많은 그들은 불난리를 한아름 안고 뒷골목에 사는데 뜻밖의 횡재나 깡통 정어리를 먹고 그것을 그들은 좋아해 보인다.   애들은 그저 벗은 발이고 그들의 말 못할 아내들은 경주용 강아지처럼 말랐지만 아무도 실제로는 굶지 않는다.   아이참! 그까짓 年金 따위 내게 이렇게 외칠 용기 있다면 그러나 누가 아니라나 바로 그것에 우리 꿈들이 생겨나는 걸.   하기는 두꺼비와 매양 닮은 것이 내 안에도 웅크리고 있으니까. 그 궁둥이가 액운처럼 무겁고 눈처럼 차겁고 나아가서   명예와 아가씨 그리고 돈줄을 모두 한자리에 내가 낚는 방법을 감언으로 얻어낼 엄두도 못내게 한다.   나는 말을 않는다. 어느 한 면이 다른 면의 정신의 진실을 나타낸다고. 다시 말해 우리가 둘을 다 지녔는데 어느 한쪽만을 버리기는 힘들다.       필립 라킨 Philip Larkin   1922~1985    2차대전, 즉 1945년 이후 영국시단이 낳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영국 모던과는 완전히 결별하므로써 그의 시의 새로움을 추구했고 시적 감동면에서도 성공했다. 그는 대체로 앞선 세대들이 이룩한 것을 추종하지 않는 생리를 지녔다. 평민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영국의 새로운 어감과 리듬을 찾기에 이른다.오든에서 자주 보이는 주지주의 관점도 보류했다. 그는 새로운 감동 면에서 예리했고 많지 않은 시집 등이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는 그 전후 세대의 가장 특성 있는 목소리였다. 물론 앞서의 오든이 5대륙에 이름을 떨친 것과는 의미가 다르지만. 그러나 그는 웨스트민스터사원의 계관시인 묘소에 묻히는 영광을 얻었다. 박태진                    잔디 깎는 기계                      / 필립 라킨   잔디 깎는 기계가 멈추었다, 두 번째다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니, 칼날 사이에 고슴도치가 끼어  죽어 있다, 긴 풀 속에 있었던 것이다 전에 이 녀석을 본 적이 있고, 한 번은  먹을 걸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눈에 띄지 않는 그 세계를  내가 망가뜨린 것이다 수리할 수도 없이 땅에 묻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어났지만 고슴도치는 그러지 못했다 하나의 죽음 다음의 첫날, 새로운 부재는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친절해야 한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2028    아일랜드 시인 - 셰이머스 히니 댓글:  조회:4805  추천:0  2017-02-12
셰이머스 히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셰이머스 히니 셰이머스 히니 (2009년) 직업 시인 활동기간 1966년–2013년 수상내역 노벨 문학상 (1995년) T. S. 엘리엇 상 (2006년)       셰이머스 히니 (1970년 촬영)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 1939년 4월 13일 ~ 2013년 8월 30일)는 아일랜드의 시인, 작가 겸 교수이다. 그는 1939년에 북아일랜드의 농가에서 아홉 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95년에 노벨 문학상, 2006년에 T. S. 엘리엇 상을 수상했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 시집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Death of a Naturalist)》(1966년 작)이 있다.   위키미디어    출생일 1939. 4. 13,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런던데리 국적 아일랜드 요약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 이래 가장 위대한 아일랜드 시인으로 평가받는 히니는 199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예이츠와 히니는 성장배경이나 시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르지만, 서양의 고전문학과 아일랜드의 신화 및 역사에 깊이 뿌리 박힌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두 사람의 작품은 아일랜드어 특유의 독특한 가락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일상어와 전원의 이미지를 이용해 보편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히니는 종종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나 영국 작가 토머스 하디와 비교되기도 한다. 히니는 화목한 가톨릭교 가정의 9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이 집안의 농장은 개신교도의 넓은 토지와 맞닿아 있어서, 그는 어릴 적부터 서로 충돌하는 두 문화 사이에 '상징적으로 끼여 있는' 기분을 느꼈다. 히니는 벨파스트의 퀸스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이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최초의 주요 시집인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Death of a Naturalist〉(1966)에서 그는 아일랜드 땅과 문학의 영토에 이중으로 뿌리를 내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채굴 Digging〉이라는 시에서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던 토탄 채굴에 우주적 풍요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이 작업을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비유로 삼았다. 1972년에 아일랜드로 이주한 히니는 더블린과 옥스퍼드대학교 및 하버드대학교를 오가며 지냈는데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1989~94년 시를 가르쳤고, 하버드대학교에서는 1985년부터 보일스턴 석좌교수로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아일랜드로 이주한 뒤에 발표한 시들은,〈북쪽 North〉(1975)과 〈현장조사 Field Work〉(1979) 같은 시집이 보여주듯 대부분 정치적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의 삶의 투쟁을 표현하고 있다. 결코 목청을 높이지 않고 설교하지도 않는 히니의 언어가 갖는 힘은 그 섬세함에 있으며 그의 이미지가 갖는 힘은 그 친숙함에 있다. 히니는 〈길 잃은 스위니 Sweeney Astray〉(1983)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의 저주를 받아 몸의 절반이 날짐승으로 변한 채 정처없이 대지를 떠돌아다니는 전설상의 아일랜드 왕에 관한 고대의 시를 현대적인 주제로 재해석했으며, 〈스테이션 섬 Station Island〉(1984)의 표제시에는 단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서술형식을 이용해 북아일랜드의 고통스러운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여행을 떠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한 교수로서 시의 역할에 대해 탐구한 그는 〈문학작품의 역할 The Place of Writing〉(1989)·〈시의 교정 The Redress of Poetry〉(1995) 등 자신의 강의내용을 모은 책에서 창작의 자유에서부터 창작의 구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건에서의 글쓰기를 검토했다. 그의 작품이 지닌 서정성에는 편협한 정치철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시의 존재 이유라는 강한 지적 믿음이 깔려 있다. /////////////////////////////////     Digging           땅파기                                                                          Seamus Heaney                                           셰이머스 히니     Between my finger and my thumb 나의 손가락과 나의 엄지 사이에 The squat pen rests, ;as snug as a gun 몽땅한 펜이 쉬고 있다 ; 마치 권총처럼 편안하게     Under my window, a clean rasping sound 나의 창문 아래에서 , 맑으면서도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When the spade sinks into gravelly ground : 삽이 자갈투성이의 땅으로 뚫고 들어 갈 때 My father , digging . I look down 아버지는, 땅을 파고 , 나는 내려다보았다.     Till his straining rump among the flowerbeds 화단에서 아버지는 엉덩이를 팽팽하게 하며 Bend low, come up twenty year away 낮게 구부렸다, 폈다한 20년 흘러 아버지 Stooping in rhythm through potato drills 감자 파종하며 리듬에 맞춰 허리를 구부렸다 Where he was digging . 아버지가 땅을 파던  곳       The coarse boot nestled on the lug , the shaft 거친 장화가 삽에 편하게 앉히고 , Against the inside knee was levered firmly. 무릎 안에 삽자루가 지렛대로 굳게 놓았다. He rooted out tall tops, burried the bright edge deep 그는 웃자란 것을 뽑아내고 , 빛나는 삽날로 깊게 묻어 To scatter new potatoes that we picked 우리가 뽑았던 새 감자를 흩트린다. Loving their cool hardness in our hands. 우리는 손에 감자들의  차가움과 딱딱함을 대견해하며 주웠다.          By God , the old man could handle a spade, 맹세코, 그 노인은 삽을 다룰 수 있었다. Just like his old man 그의 할아버지처럼     My grandfather cut more turf in a day 나의 할아버지는 하루에 더 많은 토탄을 캘 수 있었다. Than any other man on Toner's bog. 토너씨의 습지에 있는 누구보다도 Once I carried him milk in a bottle 한번은 내가 그에게 우유 한 병을 드렸다. Corked sloppily with paper. He strainghtened up 종이로 적당히 막아놓은 그걸. 그가 똑 바로 섰다.        To drink it, then fell to right away  우유를 마셔, 바로 목으로 흘려보냈다.  Nicking and slicing neastly,heaving sods  홈을 파고 거칠게 잘라내고 , 잔디를 들어올렸다  Over his shoulder , digging down and down  그의 어깨너머로, 파고 내려가고 내려갔다.  For the good turf, Digging  더 좋은 토탄을 얻기 위해 , 파내려갔다.       The cold smell of potato mold , the squelch and slap  감자 밭의 쿨한 냄새, 질퍽거림과 철썩거림 Of soggy peat , the curt cut of an edge 축축한 토탄의 싱싱한 뿌리를 끊는 삽날의 싹뚝 자르는 Through living roots awaken in my head . 감촉이 내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But I've no spade to follow men like them  하지만 나에겐 그의 뒤를 이을 삽이 없다.       Between my finger and my thumb 나의 손가락과 엄지사이에는 The squat pen rests .  몽땅한 펜이 쉬고 있다. I'll dig with it . 나는 그것으로 파내겠다.   셰이머스 히니  (1939∼ 2013) 아일랜드의 시인, 수필가, 번역가. 이 시에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농사꾼으로서 아일랜드의 땅을 팠다면 자신은 시인으로 펜으로  아름다운  시를 파겠다고 했다1995년 히니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서정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시라고 했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며, 음악적이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기쁨을 주는 시라고 극찬했다.              -----------------------------------------------------------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 1939년~ 2013)                       아일랜드의 시인, 작가 겸 교수그는 1939년에 북아일랜드의                        농가에서 아홉 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95년에                        노벨 문학상, 2006년에 T. S. 엘리엇 상을 수상했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 시집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Death of a Naturalist)》(1966년 작)이 있다.    ▣1995년 노벨상을 수상한 시인 셰이머스 히니 대표작이다.     북아일랜드 시골에서 성장한 시인에게 아버지의 삽질은 숭고한 작업이었다. 대를 이어     내려온 단순하면서도 경외스러운 반복적인 행위였다. 무엇이든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도가 트이는 법. 시인은 석탄의 일종인 토탄(土炭)을 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의 노동을 지켜보며 어떤 경지를 느낀다.    하지만 도시로 나와 공부를 한 시인은 아버지의 노동을 이어받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시를 쓰는 것으로 아버지의 노동을 증거한다. 아버지에게 `삽`이 있었다면 시인에게는    '몽당연필`이 있다. 아버지가 아래로 아래로 토탄을 찾아 내려갔듯 시인은 몽당연필을     들고 언어를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감동적인 시다.                                                [허연 문화부장(시인)]                                              
2027    아랍 시리아 "모더니스트 혁명" 시인 - 아도니스 댓글:  조회:3889  추천:0  2017-02-12
노벨문학상 후보자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 ◇'아랍의 T.S. 엘리엇' 아도니스의 '모더니즘'(현대성) '나는 물 위에 글을 쓰겠다 맹세했다 나는 시지프스와 함께 거대한 바위를 옮기겠다 맹세했다 나는 열병과 불꽃에 복종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석장에서 마지막 깃털을 찾는다' ㅡ(아도니스의 시 '시지프스에게' 중에서) 아도니스(86)는 아랍의 시를 현대화하고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20세기 후반 아랍문학의 '모더니스트 혁명'을 이끌었고 영국시인 T.S. 엘리엇에 비견되는 자주 비교되는 그의 시세계는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이슬람 전통을 거부한다.    시리아 문단의 '극단적 변혁주의자'로 분류되는 소위 '거부의 시인들'을 이끌며 아도니스는 '예수' '불사조' '아도니스' '탐무즈' 등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를 가진 신화 속 인물들을 새로운 문학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이들은 '죽음과 부활'을 문명의 위기와 연결시켜 현대적이고 파격적인 시 형식에 담은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아도니스는 특히 조국 시리아를 등지고 타향 레바논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인 '시지프스'에 자주 비유했다.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는 "죽음과 부활을 내용으로 한 '현대성'(모더니즘)이 특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아랍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인 아도니스는 그간 자주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1~5위의 선두그룹에는 속하지 못해왔다. 최근까지도 래드브록스의 선두그룹은 일본의 하루키,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 미국의 필립 로스, 미국의 조이스 캐롤 오츠,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 등이었다.  본명이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인 아도니스는 1930년 시리아 북부에서 태어나 다마스쿠스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시리아 국민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약 1년간 정치범으로 투옥되었고, 그 후 베이루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현재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 1973년 미국에서 '세계시인협회상'을, 1996년 '국제 시축제'에서 수여하는 '세계시인상'을 수상했다.  아도니스는 지난 5년 간 3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시리아 내전 사태에서 서방의 역할에 대해서 통렬하게 비판해왔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미국은 일관된 비전을 갖고 있지 않다. 자국 이익에 매몰돼 있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아랍세계는 (석유가 매장된) 부(富)의 지역이며, 아랍 민족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자신은) 시에서 희망을 보고, 구원을 찾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의 작품은 시집 '바람 속의 잎새들'(화남)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2016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 도서전에 전시된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의 작품 [AFP=연합뉴스] 시리아 출신의 저명한 시인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아도니스(86)가 종교적 광신주의(fanaticism)가 "아랍세계의 심장을 파괴하고 있다"며 자신은 시(詩)에서 구원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아도니스는 지난 5년 간 3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시리아 사태에서 서방의 역할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아도니스는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서적박람회장에서 지난 2016년 9월 23일 AF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해법을 찾지 않고 있다. 이들은 문제를 좇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은 일관된 비전을 갖고 있지 않다. 자국 이익에 매몰돼 있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아랍세계는 (원유로 인한) 부(富)의 지역이며, 아랍 민족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고 덧붙였다.  이슬람교 시아파의 소수 종파 알라위에 속하는 아도니스는 2011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앞으로 민주화를 촉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아사드 대통령 역시 알라위에 속한다.  본명이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인 아도니스는 자신은 시에서 희망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는 어린이의 목을 베지도 사람을 죽이지도 않는다. 박물관도 파괴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도니스는 신정 분리는 촉구하면서, 시는 이를 가져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알 아마드 사이드가 본명인 아도니스는 현재 아랍권 시인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시인으로 꼽힌다. 아방가르드 시 전문지 ‘시’와 ‘상황들’의 발간을 주도하는 등 시의 안팎으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온 그는 정부 당국과 학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가하면 그의 책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26    터키 인민의 시인 - 히크메트 댓글:  조회:3865  추천:0  2017-02-09
  출생일 1902, 오스만 제국 살로니카 사망일 1963. 6. 2, 모스크바 국적 터키 요약 히크메트는 20세기 터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며 인민의 시인이자 터키 진보세력의 혁명적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1924년 터키 공화국이 세워진 뒤 마르크스주의자로 여러 잡지사를 거치면서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했다. 1951년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과격한 활동으로 장기간 투옥되었다가 영구히 터키를 떠났다. 그때부터 줄곧 그는 러시아와 동유럽을 돌아다니며 세계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생애를 바쳤다. 그는 탁월한 언어구사, 자유시의 도입, 광범위한 주제선택으로 1930년대 후반의 터키 문학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15세기 아나톨리아의 한 혁명적 종교 지도자를 소재로 한 (1936)와 2만 행에 이르는 서사시 을 출간했다. 1963년 그가 죽은 뒤 그의 모든 작품이 출간되어 광범위하게 읽혔다.   20세기 터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오스만 정부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아나톨리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터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그만두고 모스크바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1924년 새로운 터키 공화국이 등장한 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고국에 돌아온 그는 여러 잡지사를 거치면서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했다. 1951년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과격한 활동으로 장기간 투옥되었던 그는 영구히 터키를 떠났다. 그때부터 줄곧 그는 러시아와 동유럽을 돌아다니며 계속해서 세계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생애를 바쳤다. 그는 탁월한 언어구사, 자유시의 도입, 광범위한 주제선택으로 1930년대 후반의 터키 문학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일찍이 음절에 따른 운율을 이용한 애국시로 주목을 받은 그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적인 시형(詩形)을 포기하고 과장된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면서 파격적인 연상을 통해 시의 '탈시화'(脫詩化)를 시도했다. 후기에 그의 시풍은 정적인 느낌을 주조로 하게 되었고, 그러한 바탕에서 그는 15세기 아나톨리아의 한 혁명적 종교 지도자를 소재로 한 〈셰이크 베드레딘의 서사시 Leyh Bedreddin destani〉(1936)와 2만 행에 이르는 서사시 〈나의 조국 출신 인민들의 초상 Memleketimden insan manzaralari〉을 출간했다. 1963년 그가 죽은 뒤 검열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출간되어 광범위하게 읽혔고, 그는 인민의 시인이며 터키 진보세력의 혁명적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많은 작품들이 영역되었으며, 그중에서 〈대표시선 Selected Poems〉(1967)·〈모스크바 교향악 The Moscow Symphony〉(1970)·〈내일 이전의 오늘 The Day Before Tomorrow〉(1972)·〈나도 모르게 사랑했던 것들 Things I Didn't Know I Loved〉(1975)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희곡작가로도 유명한 그의 희곡은 열정적인 산문으로 씌어졌으며 주로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 나짐 히크메트     神이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인터뷰 하고 싶다고 했느냐?" 저는 대답했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神이 미소지었습니다. "나의 시간은 영원이니라. 무슨 질문을 품고 있느냐?" "사람들을 보실 때 어떤 것이 가장 신기하신지요?"   神이 대답했습니다. "어린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神이 나의 손을 잡았고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난 질문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어떤 교훈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 받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과 너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배우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기에는 단지 몇 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리다는 것을.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도 너희를 진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보고서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도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겸손히 말했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또 있나요?"   神이 미소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늘 기억하거라. 내가 항상 이곳에 있음을. 언제나. 모든 곳에." ==============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_ 나짐 히크메트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출처]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_ 나짐 히크메트|작성자 새피리    
2025    중국 최초 신시 문학가 - 沈尹(君)默 댓글:  조회:3670  추천:0  2017-02-05
月 夜  沈尹默  霜風呼呼的吹着,  月光明明的照着.  我和一株頂高的樹幷排立着,   沒有 着.  제4권 제1호(1918)에서  三 弦  中午時候,火一樣的太陽,沒法去遮,讓他直着長街上.  靜少人行路;只有悠悠風來,吹動路旁楊樹.  誰家破大門里,半院子綠茸茸細草,都浮着閃閃的金光.  旁邊有一段低低土牆,住了個彈三弦的人,不能隔斷那三弦鼓蕩的聲浪.  門外坐着一個穿破衣裳的老年人,雙手抱着頭,他不聲不響.  제5권 제2호(1918)에서  【작가소개】  심윤묵(沈尹默, 1883∼1971)은 시인이자 법학자이다. 본명은 심군묵(沈君默), 자는 추명(秋明) 호과(瓠瓜)이며 절강성 오흥(吳興)사람이다.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경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북경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18년에는 의 편집 작업에 참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 중앙문사관 부관장, 상해시 중국서법전각연구회 주임 등을 역임했다. 5 4시기에는 신문화운동에 참가하여 호적(胡適) 유반농(劉半農)과 더불어 최초로 신시를 지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작품감상】  겨울밤에 북풍이 불고, 차가운 서리가 짙고, 밝은 달이 높이서 비추고, 냉기가 사람을 에워싼다. 이처럼 고독하고 음산한 화자의 주변 환경은 바로 5 4운동을 전후한 반봉건적인 중국 사회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환경에 처하여 독립적인 강인한 성격과 분투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즉, 시인은 "키 큰 나무와 나란히 서있지만, 기대지는 않았네"라는 표현처럼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개성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인격의 독립, 사상의 자유, 개성의 해방을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바로 시인이 을 쓰게 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은 시의 구성상 3절로 나뉜다. 이 3절의 시는 원경(遠景)에서 중경(中景)으로, 다시 중경에서 근경(近景)으로 시선을 이동시키고 있다. 원경에서는 "정오! 불길 같은 태양"과 "인적이 끊긴 거리"라는 표현을 통해 시인의 독특한 감정을 드러낸다. 화면은 다시 중경으로 옮아가 침묵의 거리에서는 오직 삼현금의 멜로디만 "가장 자리로 빙 돌려있는 흙담"을 넘어 적막한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킨다. 마지막 근경에서는 "문밖 해진 옷자락의 영감"이 삼현금의 멜로디에 매료되고, 그 멜로디는 바로 가난뱅이 영감의 고독하고 침통한 내면적인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산문체로 쓴 이 시는 비록 신시이지만 구체시사의 표현 방식을 사용하여 쌍성과 첩운을 맞추고 있다.    
2024    중국 현대시인 - 北島 댓글:  조회:3796  추천:0  2017-02-05
뻬이따오:   뻬이따오(北島, 1949∼)를 만나는 건 문화대혁명(1966∼1976) 10년간 철저히 억압되었던 중국 현대시의 시적 자아의 부활과 그 미완의 초상의 확인이다. 그리고 그의 시를 읽는 것은 역사와 문학의 쉼없는 조우 속에서 빚어지는 시적 철학적 경구(警句)와 냉정한 서정을 음미하는 과정이다.  본명이 자오전카이(趙振開)인 뻬이따오는 공교롭게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연도인 1949년에 뻬이징의 상류가정에서 나서 중국 제일의 명문인 뻬이징 제4중학교에 다니던 중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지식의 획득보다 노동자, 농민의 계급의식 획득이, 합리적 의사소통보다 운동적 성격의 정치의식화가 우선시되었던 그 시대에, 뻬이따오는 잠시 홍위병(紅衛兵)에 참가했지만 곧 흥미를 잃고 노동자가 된다. 그래서 허뻬이성(河北省)의 어느 농촌에서 건축일에 종사하였고 나중에 뻬이징에 돌아와 일반기업에 입사한다. 혹독한 정치운동에 휘말려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당시의 모든 지식청년들처럼 그 역시 정규교육과정을 거치지 못한 셈이다.  뻬이따오가 시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1970년 말이었지만 연대 확인이 가능한 작품은 1972년의 것이 최초이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인 시 창작을 드러내고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은 계기는 역시 지하간행물 {오늘(今天)}의 창간(1978)이었다. 하지만 고작 9호를 발행하고 폐간당한 {오늘}의 동인들 중 뻬이따오를 비롯한 꾸청(顧城), 망커(芒克), 수팅(舒 ) 등의 시인들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작품을 필사본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유통시켰으며 1976년의 제1차 천안문사건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였다. 그 사건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백만 군중들이 벌인 민주화 투쟁이었으며 그들은 기존 권력층을 비판하고 새로운 역사를 고취하는 격문과 시를 광장 곳곳에 게시하였다. 그 글들은 곧바로 사람들에게 필사되어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공개된 시들은 자그만치 만여 수에 달했으며 그 중에서 1500편을 엄선하여 엮은 {천안문시초(天安門詩抄)}가 1978년에 발행되기도 했다. 비록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뻬이따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래의 시도 천안문사건에 참여하면서 씌어졌다.  [회답]  비열함은 비열한 자의 통행증이며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지명이다.  보라, 저 도금된 하늘에  사자(死者)의 일그러진 그림자가 가득 비쳐 날린다.  빙하기는 벌써 갔건만  왜 곳곳이 다 얼음투성이인가?  희망봉이 발견됐건만  왜 죽음의 바다에서 온갖 배가 앞을 다투는가?  이 세계에 내가 온 것은  오직 종이와 밧줄, 그림자를 가져와  심판에 앞서  그 판결의 목소리를 선언하기 위한 것.  네게 말해주마, 세계여  나는 --- 믿지 --- 않는다!  네 발 밑에 천 명의 도전자가 있다면  날 천 한 번째 도전자로 세어다오.  난 하늘이 푸르다고 믿지 않으며  난 천둥의 메아리를 믿지 않는다.  난 꿈이 거짓이라 믿지 않으며  난 죽음에 대가가 없음을 믿지 않는다.  바다는 제방을 무너뜨릴 것이니  온갖 쓴 물이 내 가슴에 스며들게 하고  육지는 솟아오를 것이니  인류가 다시 생존의 봉우리를 선택케 하리라  새로운 계기와 반짝이는 별들이  거침없는 하늘을 메우고 있다.  그것은 오천 년의 상형문자이며  그것은 미래 세대의 응시하는 눈동자이다.  [回答]  卑鄙是卑鄙者的通行證  高尙是高尙者的墓志銘,  看 ,, 在那鍍金的天空中,  飄滿了死者彎曲的倒影.   川紀已過去了,  爲什 到處都是 凌?  好望角發見了,  爲什 死海里千帆相競?  我來到這個世界上,  只帶着紙, 繩索和身影,  爲了在審判前,  宣讀那些被判決的聲音.  告訴  , 世界  我 - 不 - 相 - 信!  縱使 脚下有一千名挑戰者,  那就把我算作第一千零一名.  我不相信天是藍的,  我不相信雷的回聲,  我不相信夢是假的,  我不相信死无報應.  如果海洋注定要決堤,  就讓所有的苦水都注入我心中,  如果陸地注定要上升,  就讓人類重新選擇生存的峰頂.  新的轉机和閃閃星斗,  正在綴滿沒有遮 的天空.  那是五千年的象形文字,  那是未來人們凝視的眼睛.  치졸한 권력투쟁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된 역사적 유토피아를 강요해 온 '세계'에게 시인은 "나는 --- 믿지 --- 않는다!"고 결연한 '회답'을 보낸다. 아무리 당연시되어 온 담론이라도, 혹시 그것이 "하늘이 푸르다"는 절대진리의 외표를 뒤집어 쓰고 있다 해도, '빙하기'가 지난 대지에 '얼음'을 깃들게 하고 "온갖 배가 앞을 다투는" '죽음의 바다'를 만든 담론이므로 '나'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천한 번째 도전자'가 되어 싸우리라 맹세하고 결국 새로운 '생존의 봉우리'로 인류를 이끌 '미래 세대의 응시하는 눈동자', 그 냉철한 인류정신의 잠재력을 믿는다.  역사의 전환을 바라는 뻬이따오의 외침은 실제로 실현되는 듯했다. 문화대혁명의 실세였던 이른바 사인방(四人幇)이 축출되고 떵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의 중심부에 복귀하여 개혁개방의 노선을 고취했으며, 1978년 12월에 공산당이 발표한 '사상해방'의 원칙에 힘입어 문예계에도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화를 외치던 웨이징성 등의 지식인들이 체포, 투옥되는 등 "바다가 제방을 무너뜨리는" 국면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뻬이따오가 1975년에 초고를 완성한 이 시를 뒤늦게 이 시기에 발표한 것은 아직도 '시대와의 불화'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고 - 위루어커 열사에게]  최후의 시각이 와도  유언은 남기지 않겠다  오직 어머님께 말씀 전하련다  저는 결코 영웅이 아니에요.  영웅 없는 시대에  그저 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요  고요한 지평선  산 자와 죽은 자의 줄을 가른다  난 하늘을 택할 수 있을 뿐  결코 땅에 꿇어앉아  자유의 바람을 막으려는  사형집행인을 커 보이게 하지 않겠다  별 모양의 총알구멍에서  핏빛의 여명이 흘러나오리  [宣告 - 獻給遇羅克]  也許最后的時刻到了  我沒有留下遺囑  只留下筆, 給我的母親  我 不是英雄  在沒有英雄的年代里,  我只想做一個人.  寧靜的地平線  分開了生者和死者的行列  我只能選擇天空  決不 在地上  以顯出 子手們的高大  好阻 自由的風  從星星的彈空里  將流出血紅的黎明  한 열사의 죽음에 대한 비장한 회고이면서 강렬한 이미지로 그의 미래지향적 신념을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위루어커는 1970년 '반혁명분자'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그의 친우이자 민주청년이었다. "별 모양의 총알구멍에서 / 핏빛의 여명이 흘러나오리"라는 시적 화자의 선언도 의미심장하지만, "영웅 없는 시대에 / 그저 한 인간이 되고 싶었어요"라는 시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알려진 대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중국은 노동자와 전사인 '영웅'이 횡행하는 시대였다. 공산당은 철저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영웅'을 전형화하고 이에 맞는 인물들을 모범적 영웅으로 찬미함으로써 대중의 의식개조에 활용하였다. 하지만 시인에게 그 시대는 '영웅 없는 시대', 게다가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시대로 인식된다. 즉 모든 개인들이 고유의 이성과 감성을 포기하고 '계급'의 그것으로 자리를 채워야 했으며 철저히 집단의 한 원자로만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제 '영웅'을 거절하고 '한 인간'이 되는 것이 '진정한 영웅'이 되는 길임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선언인 동시에 현대시사의 차원에서는 간접적으로 '시적 자아'의 복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1949년부터 문화대혁명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중국 시단의 지배적 조류는 '송가(頌歌)'와 '전가(戰歌)' 두 양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정치사회적 장에서의 지배담론이 고스란히 문학예술의 장에 이식되어 자아의 표현과 개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순수지향적 현대시의 최초의 물결이었던 '몽롱시(朦朧詩)'의 대표주자이기도 했던 뻬이따오는 이 시를 통해 '한 인간'의 고귀한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은유적으로 중국 현대시에서의 시적 자아의 회귀를 암시하였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뻬이따오의 시는 주지시의 성향을 띠기 시작한다. 철학적 성찰과 시적 상상력이 대등하게 교차되면서 독특한 알레고리의 시세계가 구축된다. 먼저 [태양도시의 메모]라는 시를 살펴보자.  [태양도시의 메모]  생명  태양도 떠오른다  사랑  고요하고, 기러기떼 날아간다  거칠은 처녀지를  자유  흩날린다  갈기갈기 찢긴 종이조각이  자손  바다 전부를 담은 그림이  접혀 한 마리 백학이 되었다  아가씨  아른대는 무지개는  나는 새들의 화려한 깃털을 모았다  청춘  붉은 파도가  외로운 노에 스민다  예술  억만 개의 빛나는 태양이  흩어진 거울조각 위에 빛난다  인민  달은 찢겨 빛나는 밀알이 되어  성실한 하늘과 대지에 뿌려졌다  노동  손,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운명  아이는 멋대로 난간을 두드리고  난간은 멋대로 밤을 두드린다  믿음  푸른 분지에 양떼 넘쳐 흐르고  목동은 단조(單調)로 피리를 분다  평화  제왕이 죽어간 곳에  저 낡은 창이 가지 쳐지고, 싹을 틔워  불구자의 지팡이가 되었다  조국  그녀는 청동의 방패 위에 주조되어  박물관의 검은 벽에 기대어 있다  생활  그물  太陽城札記  生命  太陽也上升  愛情  恬靜, 雁群飛過  荒蕪的處女地  自由  飄   碎的紙屑  孫子  容納整個海洋的圖畵  疊成了一隻白鶴  姑娘  顫動的虹  採集飛鳥的花翎  靑春  紅波浪  浸透孤獨的   藝術  億萬個輝煌的太陽  顯現在打碎的鏡子上  人民  月亮被 成閃光的麥粒  播在誠實的天空和土地  勞動  手, 圍擾地球  命運  孩子隨意敲打着欄杆  欄杆隨意敲打着夜晩  信仰  羊群溢出綠色的 地  牧童吹起單調的朴笛  和平  在帝王死去的地方  那支老槍抽枝, 發芽  成了殘廢者的拐杖  祖國   被鑄在靑銅的盾牌上   着博物館黑色的板墻  生活  網  이 시의 각 연의 소제목을 이루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현대사의 각 단계마다 다양한 의미작용을 가졌으며 그만큼 현대인의 고뇌와 성찰을 요구했던 시대적 표제어들이다. 뻬이따오는 시라는 문학양식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무모하리만큼 과감하게 그 표제어들을 나열하고 그것들마다 형상화된 해석을 부여한다. 이 해석은 물론 시인의 철학적 성찰을 토대로 하고 있는 만큼, 모든 시니피앙들은 알레고리로서 독자의 눈에 다가온다. 하지만 그 시니피앙들은 본래 대상으로서의 물질성을 송두리째 박탈당하지 않았다. 각각의 시어들은 추상적 관념의 시적 발현인 동시에 뻬이따오 자신의 서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푸른 분지에 양떼 넘쳐 흐르고 / 목동은 단조(單調)로 피리를 부는" 세계는 평화로움을 꿈꾸는 그의 '믿음'이면서 '믿음'의 시화(詩化)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평론가들은 그의 시의 특징을 '차가운 서정'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 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술'과 '생활'이다. 예술을 "억만 개의 빛나는 태양이 / 흩어진 거울조각 위에 빛난다"고 해석한 그의 시선이 생활로 옮겨져 그것이 '그물'이라고 끝을 맺는 방식은 향후의 그의 시적 노선을 가늠케 한다. 부연하자면, 숱한 거울파편마다 태양이 되어 빛나는 예술은 단순히 다원화된 현대적 예술의 본질에 대한 찬미나 기대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적 주체의 달라진 실존적 조건, 즉 정치영역과 일상영역이 거의 일치되었던 과거의 조건과는 사뭇 달라진, 각종 사회적 역할과 지향이 중첩되고 파편화된 현대적 주체의 조건을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생활은 '그물'이다. 각 주체들은 독립된 공간을 전유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공간들은 복잡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이 네트워크는 원활한 상호소통의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권력담론의 미시적 전파와 지배기능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시적 주체는 곧 생활의 주체인만큼, 그리고 시 텍스트는 생활이란 텍스트 위에 건축되는 만큼, 달라진 중국 현대의 조건은 민감한 뻬이따오로 하여금 새로운 철학적 성찰을 시도하게 하였다.  우화  그는 자기 우화 속에 산다  그는 더는 우언의 주인이 아니다  이 우언은 벌써 되팔리어  또 다른 살찐 손에 넘어갔다  그는 살찐 손에서 산다  카나리아는 그의 영혼  그의 목구멍은 장신구점에 있고  주위는 유리로 된 새장  그는 유리새장에 산다  모자와 구두 사이에서  저 사계절의 호주머니에  열두 개의 얼굴이 꽉 찼다  그는 열두 개의 얼굴 속에 산다  그가 배반한 저 강물이  바짝 그의 뒤를 쫓는다  개의 눈을 연상시키며  그는 개의 눈 속에 산다  온 세계의 굶주림과  한 사람의 풍요로움을 봤다  그는 자기 우화의 주인이다  寓言  他活在他的寓言里  他不再是寓言的主人  這寓言已被轉賣到   一隻肥 的手中  他活在肥 的手中  金絲雀是他的靈魂  他的喉 在首飾店里  周圍是 璃的牢籠  他活在 璃的牢籠中  在帽子與皮鞋之間  那四個季節的口袋  裝滿了十二張面孔  他活在十二張面孔中  他背叛的那條河流  却緊緊地追隨着他  使人想起狗的眼睛  他活在狗的眼睛中  看到全世界的饑餓  和一個人的富足  他是他的寓言的主人  [백일몽·6]  나는 광장이 필요하다  넓고 텅 빈 광장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  연 하나 외로운 그림자 놓을  광장을 차지한 자가 말한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새장 속의 새는 산보가 필요하다  몽유병자는 빈혈의 햇빛이 필요하다  길들이 서로 부닥치려면  평등한 대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충동은 압축되어  우라늄으로, 안전한 곳에 숨겨졌다  조그만 가게에서  지폐 한 장, 면도날 한 개  독한 살충제 한 봉  탄생했다  [白日夢·6]  我需要廣場  一片空廣的廣場  放置一個碗,一把小匙  一隻風箏孤單的影子  占据廣場的人說  這不可能  籠中的鳥需要散步  夢游者需要貧血的陽光  道路撞擊在一起  需要平等的對話  人的衝動壓縮成   , 存放在可 的地方  在一家小店鋪  一張紙幣, 一片剃刀  一包劇毒的殺蟲劑  誕生了  위의 두 시는 모두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씌어졌다. 신랄하면서도 해독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조합, 행과 행 사이에 조성된 넓은 의미론적 간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전의 비장하고 의지적인 색채를 찾아보기 힘든, 건조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눈에 띈다. 하지만 이런 시적 전환은 뻬이따오의 본래의 형식관에 비추어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1981년에 {상하이문학(上海文學)}이란 잡지에서, "나는 영화의 몽타쥬 수법을 나의 시에 응용해서 이미지의 충돌과 빠른 전환을 꾀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미지의 충돌'과 '빠른 전환'이라는 극도의 도약이 낳은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워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벌써 시적 낯설게하기의 독자수용적 측면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그의 시들은 여전히 '시대성'이라는 코드를 떠나서는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위 시들은 분명 달라진 시대를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름'은 개인에 대한 시대의 억압과 이에 대한 항변을 책임지는 그의 시적 사명과는 무관한 '다름'이다. 오히려 달라진 시대는 더욱 그의 시선을 냉철하게 하고 세밀한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80년대 중반 이후의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현대화된 중국에서 인간은 비로소 독립된 공간을 획득했지만, 그 공간은 '우화'였기 때문이다. 우화는 그것 바깥에서 관조하는 인간에게만 우화일 뿐, 그것 안에 존재하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활'이자 '삶' 그 자체이다. 강제된 관념으로 획분되고 경계지어진 우화의 공간 안에서 사는 인간은 그 우화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주인'이 아니다. 관조하는 인간(시인)은 본다. 그가 '유리새장' 혹은 '살찐 손' 안에서 살고 있음을. 그래서 시인은 [백일몽·6](장편인 이 시의 23편의 단시들 중 하나)에서 우화를 벗어나 '광장'을 요구하는, 아직 무엇으로도 점유되거나 질서화되지 않은 '광장'에 자신만의 원초적인 삶(숟가락, 그릇)과 도약(연)을 이루려는 '나'를 상정한다. 하지만 광장을 차지한 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그 광장에서 '평등한 대화'를 나눠야할 개인들의 충동은 '우라늄'처럼 알지 못할 곳에 보관된다.  뻬이따오의 한층 깊어진 성찰의 시들은 1989년 6월 제2차 천안문사건 전후에 더욱 강화된 권력의 폭력성을 견뎌내지 못했다. 급진적 민주화세력의 주도자로 지목된 그는 결국 1989년 4월에 해외로 망명을 떠난다. 망명자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를 전전하다 1993년에 비로소 미국에 정착하였다. 다음 작품은 그 망명과정에서 창작되었다.  밤샘  달빛이 희미하게 잠을 비추고  강물이 우리 방을 뚫고 흐른다  가구는 어느 기슭에 닿으려는가  연대기만은 아닌  비겁함까지 깃든 기후 속에서  공인된 한편이  비오는 숲으로 우릴 몰았다  흐느끼는 방어선으로  유리 문진(文鎭)이 읽는다  문자들의 이야기 속의 상처를  얼마나 많은 산이 막아섰던가  1949년을  이름 없는 노래의 끝에서  꽃은 주먹을 쥐고 부르짖는다  守 夜  月光小于睡眠  河水穿過我們的房間  家具在 兒 岸  不僅是編年史  也包括非法的氣候中  公認的一面  使我們接近雨林   哭泣的防線   璃鎭紙讀出  文字述述中的傷口  多少黑山 住了  1949年  在无名小調的盡頭  花握握拳頭叫喊  뻬이따오는 1987년 한 스웨덴잡지의 방문기에서 다음과 같이 조국과 자신의 관계를 토로하였다: "나는 중국으로부터 떠날 수 없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하려 해도 중국은 멘탈리티, 언어, 역사, 그리고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바꿀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떠날 수 없도록 정해져" 있는데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타국 땅을 헤매며 시를 쓰면서도 조국에 두고 온 자신의 뿌리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실세계가 어떻게 추락해서 사라지더라도 시의 사명은 영원히 숭고한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이 더더욱 조국의 현실을 잊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나 많은 산이 막아섰던가 / 1949년을"!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름 없는 노래의 끝에서' 주먹을 불끈 쥔다. '꽃'이 되어, 뿌리없는 꽃이 되어 가련하게 부르짖고 있다.  중국 현대시의 시적 자아를 복권하고 이른바 차가운 서정으로 시대적 메시지를 전했던 시인 뻬이따오는 현재 중국 현지에서는 과거의 인물이다. 망명 이후 4권의 시집을 타이완과 서구 각국에서 출간하였지만 중국에서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가 처음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문예지 {오늘}은 폐간되었고, 현재의 중국 시문학사는 그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라는 당국의 요구에 따르고 있다. 그는 단지 {오늘}과 몽롱시파의 한 구성원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차원에서 그는 여전히 '오늘'의 인물이다. 스웨덴, 미국의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매년 노벨문학상의 후보로도 거명되고 있다. 지금은 뉴욕주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1990년에는 망명한 친구들과 함께 미국 현지에서 {오늘}을 복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활발한 그의 창작과 사회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뿌리 뽑힌' 시인일 수밖에 없다. 조국을 사랑하지만 조국에게서 버림받은 그의 삶이, 그의 시가 언제 "어느 기슭에 닿아" 쉴 수 있을지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출처 :수요시울 /글쓴이 : 바보천사  
2023    중국 페미니스트 녀류시인 - 伊雷(孫桂珍) 댓글:  조회:3818  추천:0  2017-02-05
   이레이 시인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               __ 중국의 페미니스트 여류시인, 이레이의 고독__                                                                                                                          김금용 시인     "이레이는 여성주의 시편을 쓰는 여시인 중 최고의 시인"이라고 중국의 시평론가들은 평한다. 시단엔 늦게 발을 들여놓았지만,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 를 각 시 말미에 붙여 87년 시집《独身女人的卧室독신녀의 침실》을 출판으로 발표했을 때, 중국 시단 안팎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 시집으로 그녀만의 확실한 기명성記名性(브랜드化)을 획득했음은 물론, 미래지향적 여성시라는 독특한 한 장르를 새로 열어놓았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선도적 시가 여전히 공존하던 상황 아래서 가부장적인 남성위주의 사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을 보인 것은 물론, 억압된 여성의 잠재된 자유와 대등하게 분출되어야 하는 자기가치의 발현을 그대로 여과 없이 진솔하고 날카롭게 표현한 여시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 이전의 독립된 한 개체로서의 당당한 삶의 욕망을, 그 열정을 그려냄으로써 진정한 순수의미의 여성시를 보여준 대표 페미니스트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레이伊蕾를 따라 여성주의를 표명하고 나온 자이용밍翟永明、탕아핑唐亚平 두 시인을 합쳐 시단의 "삼검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레이伊蕾의 본명은 쑨꾸이전 孫桂珍으로 1951年 8月 30日 북경의 북쪽 천진시에서 태어났다. 문화혁명으로 1969년 허베이성(河北省) 하이싱(海兴)현 산촌으로 하방(下放,노동)되어 1971년 한단(邯鄲)강철공장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던 중, 철강 선전부 홍보 및 TV 방송원, 신문 간사로 일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티엔진문학天津文学》편집인과 《티엔진시인보天津诗人报》주간으로 활동하다가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 때 모스코바로 건너가 살기도 했는데, 다년간 중.러 민간문화교류에도 힘을 쏟던 중에 수장한 러시아회화들을 갖고 돌아와 후에 천진시에 카츄사미술관을 열어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었다. 그녀가 시를 전적으로 쓰기 시작한 햇수는 그리 길지 않다. 문혁이 끝난 뒤에서야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 1982년에 허베이성 랑팡(廊坊) 지구의 문인연합회에 가입하면서 1984년부터 본격적인 작가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국작가협회 문학 강습소인 노신문학원에 합격, 1986년까지 북경대학 작가반에서 틈틈이 수업을 계속 받았다. 출판된 시집으로는 1987년 공동출판된 《사랑의 불길(愛的火焰)》《사랑의 방식(愛的方式)》과 센세이션을 일으킨《독신여인의 침실(獨身女人的臥室)》,《이레이 애정시선伊蕾愛情詩選》에 이어 《반역의 손(叛逆的手)》、《여성의 나이 (女性年龄)》등이 있다. 이 중 《독신녀의 침실(獨身女人的臥室)》은 80년대 시단에 큰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후에《백년 중국문학경전百年中国文学经典》에 대표작으로 수록되었다. 이레이의 상당수 시들은 영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중국 여성시의 분수령을 구축한 이레이     현 중국 여성주의의 대표이론가로 미국 오리건주 대학에서 여성학 연구 석, 박사 학위를 받은 深睿선루이*가 쓴《中国当代学人自述 중국 현대 학자들의 자술서》에는 이레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란 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1995년 여름, 미국에서 잠시 귀국했을 때, 이레이 역시 러시아에서 돌아와 내 집엘 왔다. 당시 한 신문에선 그녀가 사업에만 몰두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 소문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왜냐면 그녀는 당연히 스스로 생활을 책임지는 독신녀였으므로,,.. 그녀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내 손을 잡고 말했다 : "넌 계속 공부해야 해.  네가 배울 수 있도록 돈을 벌어줄께. 선루이, 넌 우리를 위해 공부해야 한다“  내 두 손을 꽉 잡은 그녀의 압력에서 난 그 마음을 느꼈다." 그 후 선루이가 오리건 대학에서 여성학 학위 증서를 받던 날, 이레이가 바로 그 앞에 서있는 환각을 느꼈다고 한다. 그만큼 이레이는 선루이가 여권주의자로 성장하는 데에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 선 루이深睿: 비교 문학과 중국 문화의 교수로 재직 중인 패미니스트. 최근《假装浪漫 (가짜 낭만주의)》와 2011年7月10日에 발간하여 베이징 서점계를 휩쓴 《荒原上的芭蕾 황무지 위의 발레》로 그녀의 명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선루이는 깨끗하고도 신선한 이미지로 상상력을 동원, 간단한 문체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레이가 직접 분류한 시의 형태는 "서정형, 비극형, 미래형"으로 그녀는 그 중 미래형의 시를 쓴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어쩜 선진형이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다. 그녀가 시를 발표하던 1980년대 말은 여전히 전통적 현대시와 몽롱시가 서로 마찰하던 전환기였으므로 여성주의 시로 홀로 우뚝 서서 문화적, 심리적 준비가 결핍된 시단에 대하여, 또한 구태의연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이감, 생소함을 주었으니 말이다. 여시인들의 우아함이나 적막, 부드러움이나 원망에 심취하거나 그 해석에 익숙해있던 독자들로서는 상당한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몽롱시의 대표 여류시인인 수팅 등을 포함해서 대체적으로 한 개체와 사회, 정신과 시대의 관계 속에 유지, 진행되어왔기 때문에 미래형을 지향한 이레이의 시는 놀랄만한 여성시의 분수령을 구축하였다고 본다. 여성시 쓰기의 모티브로서 여성시의 일종의 수사학적 표현이 되어온 신체에 대한 표현은 사실 가부장 사회의 역사에 갇혀온 여성 신체의 피압박감을 드러낸 것으로 그 너머엔 정신적, 생명적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심오한 인간본연의 존재와 포괄적 인간애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여성주의의 시는 그녀로부터 사회적 정감의 차원을 넘어 인성 본체의 차원으로 들어갔다고 본다.      이레이는 중국의 실비아 플라스* 였다    2001년 1월, 이레이는 2000년대의 시를 정리하는 뜻으로《이레이시선집伊蕾诗选》을 百花文艺出版社백화문예출판사에서 출판했다. 그러나 에 실린 그 시집에 대한 비평은 다소 날카로웠다. 왜냐면, 여성주의 시인으로서 중국사회에 충격과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시집《独身女人的卧室 독신녀의 침실》에 비하면 20여 년이 지난 작금에 와서 많이 퇴색한 것이 아닌가 해서이다. 사실 90년 대 이래 시단의 경향은 흡사 무법지대 같았다. 발표와 함께 순식간에 그 찬란함은 사라져서 다시 읽지 않는 뉴스 같았다. 신세기에 접어든 십 년간 연륜 높은 시인들의 작품은 아주 드물어졌고 그 중 짧은 오행시정도만 연명되었다. 그녀의 시어 역시 단순하고 부드러움만 넘쳐 20년 전의 장시나 조시组诗처럼 폭격투하 하듯 쏟아내는 장렬함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레이시선伊蕾诗选》의 출판이 시인의 시작생애에 한 마침표가 되는 게 아닌가, 이 비평을 쓴 황꾸에이위엔黄桂元은 의심하면서도 평 말미엔 그녀의 시사적 업적을 분명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이레이 본인은"시 곡선"에서 "고대 철학자는 철학적 작품을 썼다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산 사람"이라는 엘 더의 《内部堡垒내부 요새》를 인용, 시인 역시 "삶 그 자체가 시적"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녀는 본질상 "시인으로 생활하는 사람"이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시인으로서 장스산张石山이 말하듯이 20세기 최후의 낭만주의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레이는 당대시사에 대한 담론에서 비켜갈 수 없는 존재이자 화제이며, 그녀의 몇몇 장시, 단가가 가진 개척적 의미와 클래식한 요소를 고려할 때, 그녀를 "우담바라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비현실적 인물이라고 보아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시 편년사에서든 여성주의 시의 성장사에서든 간에 《独身女人的卧室독신녀의 침실》、《黄果树大瀑布황과수폭포》、《流浪的恒星유랑의 별》、《被围困者포위된 자》등이 들어가지 않고는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현재 많은 신예 여시인들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모두 이레이의 어깨 넘어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초창기 시들은 시인 푸쉬킨, 하이네의 영향을 주로 받은 것으로 휘트먼의 시적 영향 또한 크다. 따라서 작품마다 격렬한 자유와 낭만정신이 가득하다. 반면 후반에 쓴 작품들은 미국의 자유파 여시인 실비아 플라스* 의 영향을 받아 억압된 자신의 경험과 생명체험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되 여성의 해방, 민중 구원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대변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 실비아 플라스(Sylivia Plath) : 1932년 미국 보스톤 출생. 65년 영국계관시인인 테드 휴즈의 외도로 자살한 뒤, 82년 노벨퓰리처상을 수상함. )   "탈출"과 "고독"의 두 특성     이레이는 6권의 시집을 출판했는데, 위에 열거한 외국시인들의 영향으로 자연히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하나는  "탈출"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이다. 현실 삶에 대한 족쇄로부터의 탈출을 그 주제로 한 시집으로《黄果树大瀑布황과수폭포》、《蓝色血푸른 피》、《野芭蕉야생바나나》、《南十字座남십자성》이 있으며,후자로는 《独身女人的卧室독신녀의 침실》、《流浪的恒星유랑의 별》、《被围困者포위된 자》、《情舞러브댄스》등등이 있다. "나는 포기했다 일체의 구차한 계획을 / 삶이 제멋대로 가도록 방치한 채 / 폭우로 생물의 시계는 잠시 멈춰버렸고 / 아, 잠시 멈춰진 저 끝없는 쾌락의 깊이, / 잠깐 멈춰요 / 난 차라리 거꾸로 박혀 죽을래요 “ 에서도 보듯이 대담하면서도 반역을 서슴지 않는 자백적 호소, 이런 그녀의 시는 이 시대의 모든 독서 취향을 전복시킴과 동시에 이레이도 진정으로 울프가 말한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된다. 선루이가 쓴 글에서도 나오지만, 이레이 역시 어떤 소녀와 문제를 일으킨 남자친구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의 대가를 치룬 바 있어 그녀에게 있어 시는 생존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며, 영혼의 정결함과 존엄을 유지하는 삶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또한 후기의 시 “유랑의 별”에선 "쾌락은 마치 머리 위로 날아간 새 울음소리처럼 멈추었고 / 슬픔은 천년 묵은 큰 나무처럼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네 / 나는 말할 수 없다네 / 어떤 느낌은 심지어 언어로 바꿔지지 않고/ 어떤 말은 사상을 만나면 미친 자처럼 도망쳐 버린다네 / ... 친구여, 이웃들이여 /  그대들이 나를 이해한다면, 난 말 할 필요가 없네 / 만약 날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 “ 혼란한 중에도 아름다운 생명의 밤하늘을 더 밝게 비추려는 시도를 통해 그녀는 더 당당하게 현실과 부딪쳐나갔는지 모른다. 이 장시는 후기의 많은 작품들과 같이 영탄과 지적 요소가 서로 융합된 "고독" 중에도 시몬느 보부아르가 말한 '무의식의 장면에서 유의식의 장면에 이른다” 는 오묘한 경계를 찾아내고 있다. 이러한 경계는 여성주의라는 타이틀 말고도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어떠한 생존의 경우에 처하여도 잘 헤쳐 나갈 것이라는 걸 믿게 한다. 실제로 그녀는 1992년 9월, 고향인 천진시를 출발, 러시아에 도착했고, 당시 러시아에 가는 많은 이들처럼 이레이 역시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예품 무역을 몇 차례 한 후에는 러시아 유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 중국과 러시아간의 민간 문화예술 교류에 한동안 힘을 쏟았다. 결국 1999년 6월 6일, 시인 푸시킨 탄생 200주년 기념일에 맞춰 그녀는 중국 음악가左贞观쭤정관과 함께 쓴 《푸쉬킨의 사랑 普希金的爱情世界 》을 경쟁적으로 구매하는 독자층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했다. 시작생활이 아닌 외도에 대해 비난성 보도 또한 많았지만, 그녀는 생활인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진 것이고 시는 시 그대로 여전히 그녀를 이끄는 미래이며 삶 그 자체로 꾸준히 그녀 곁을 지켜나가리라 본다.     -------------------------------------------------------------------     터키탕                                    이 작은 방엔 나체 스케치가 너무 많아 한 남자친구가 우연히 문을 열고는 “이거 터키탕이잖아” 고함을 질렀어요 그는 몰랐던 거죠 내가 한 여름 내내 방문을 잠그고 지냈다는 걸 고독하고 실의에 젖어서 ____ 나는 이 욕실의 명실상부한 고객이에요 사지가 아주 긴, 날씬한 몸매와 탱탱한 엉덩이, 사선으로 깎인 어깨 가볍게 떨리는 사발형 유방 하나하나 근육마다 격정으로 넘쳐나는 나는 내 자신의 모델이죠 난 예술을 창조했고, 예술은 날 창조했어요 침대 위엔  그림책이 가득 쌓여있고 양말과 팬티는 탁자위에 벗어 놓고 유리병 속엔 개나리꽃이 시들어 버렸어요 바닥에는 색 바랜 황금빛 매트와 등받이가 어디에나 널려있어요 어느 구석에서든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죠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土耳其浴室         這小屋裸休的素描太多 / 一个男同胞偶然推門 / 高叫“土耳其浴室” / 他不知道在夏天我緊鎖房門 / 我是這浴室名副其實的顧客 / 顧影自怜________ / 四肢很長, 身材窈窕 / 臀部緊湊, 肩膀斜削 / 碗狀的乳房輕輕顫動 / 一塊肌肉都充滿激情 / 我是我自己的模特 / 我創造了藝術,藝術創造了我 / 床上堆滿了畵冊 / 袜子和短褲在卓子上 / 玻璃甁里迎春花枯萎了 / 地上亂開着暗淡的金黃 / 軟墊和靠背四面都是 / 每个角落都可以安然入睡 // 你不來與我同居                           (選自, 載1987年1,2合期)   ** 작품 읽기: 그녀의 작은 방은 사실 며칠째 청소를 하지 않아 온통 벗어놓은 잡동사니로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하나 없다. 오죽하면, 우연히 들른 남자친구가 대경실색, “터키탕”이냐고 고함을 질렀을까.  여름 내내 외부와의 소통 없이 그녀만의 세계 안에서, 여기저기 어지러이 늘어놓은 책들, 그리고 벗어놓은 속옷들,..!  그녀 스스로도 이 어수선하게 펼쳐진 방안이 민망하기 짝이 없지만, 남자친구가 던진 농담 섞인 탄성에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아니 끝 행의 ” 그대, 이리 와서 나와 동거하지 않겠어요“를 통해 기존상식선에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친구에게 용감하게 대시를 해보기까지 하는 것이다. 반면, 적어도 그녀의 방에선, 가식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수치심 없이 당당하게 한 개체로서의 삶에 집중하는 모습을 그녀는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도 당당하게 자신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세상에게 누구의 여자가 아닌, 한 독립된 자아로서의 여자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연이자 행인 ” 그대, 이리 와서 나와 동거하지 않겠어요“를 통해 내재된 고독과 욕망을 여과 없이 표현할 뿐만 아니라, 현실로부터의 압박이나 제약, 그 충돌을 주저하지 않고 보여준다.       커튼의 비밀     한낮에 난 항시 커튼을 내려요 그래서 밝은 햇살 아래의 죄악을 상상하거나 때론 감정의 왕국으로 빠져 들어가요 마음이 전에 없이 편안하고 마음이 전에 없이 자유로워요 그리곤 유령 같은 영감이 하나씩 바구니에서 빠져 나오고 나는 그들과 교제하며 쾌감이 절정에 달해요 신생아가 바로 태어나요 머리가 전에 없이 좋아져요 행복이 필요할 때 나는 커튼을 걷어 올려요 쓰라린 고통이 바로 즐거움으로 변하니깐 자살하고 싶을 때 나는 커튼을 걷어 올려요 생존욕망이 저절로 생겨나게 커튼을 걷어 올리고 교향곡 한 단락을 들으면 사랑이 구석구석에 가득 넘쳐나요,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窓簾的秘密   白天我總是拉着窓簾 / 以使想象陽光下的罪惡 / 或者進入感情王國 / 心理空前安全 / 心理空前自由 / 然後幽靈一樣的靈感紛紛出籠 / 我結交他們達到快感高潮 / 新生兒立卽出世 / 智力空前良好 / 如果需要幸福我就拉上窓簾 / 痛苦立卽變成享受 / 如果我想自殺我就拉上窓簾 / 生存欲望油然而生 / 拉上窓簾廳一段交響曲 / 愛情就充滿各个角落 //  你不來與我同居                            -選自『獨身女人的臥室』 裁 「人民文學」1987年 1,2 合期-   ** 작·품·읽·기: 이 시는 처음부터 역설적이다. 우리나라에선 얼마 전까지도 햇살정책이 있었지만, 어떻게 태양 아래 드러나는 게 죄악이란 말인가. 태양이 주는 그 많은 거창하고 아름다운 수식어를 과감히 이 시인은 깨고 있다. 이 아이러니 땜에 난 라저창리엔拉着窓簾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다. 라저拉着는 분명 “끌어당기다”의 뜻으로 커튼을 “열어젖힌다”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튼을 “여는 게 아니라 닫는다” 임을 전체 시를 읽어 내려가며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양은 남성을 상징하고 그 아래 온갖 죄와 악이 공존되어왔음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그녀는 간파하고 있었으니!,.... 햇살 아래 드러나는 외부세계는 그녀를, 여성들을 불편하게 한다. 남성 위주의 규범과 규제 속에서 여성들은 사실상 손과 발이 묶였으며 그 정신적 두려움과 압박감을 커튼을 침으로써 일시나마 자유로워지고 안전해지는 걸 이 시에선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어둔 커튼 뒷면에서 환상의 자유로운 오르가슴을 느끼기까지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마술 거울   내가 누굴 알고 있는지 아세요? 그녀는 한 명이기도 하고 여러 명이기도 하죠 여기저기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그러다 홀연히 사라지죠 그녀는 눈앞의 것만 똑바로 바라봐요 행복한 느낌은 찾아 볼 수 없죠 그녀는 중얼거릴 뿐 소리가 없고 그녀는 아름다운 근육을 가졌지만, 열기는 없어요 그녀는 입체이면서, 또 평면이기도 하죠 그녀가 그대에게 무얼 주더라도 그대는 받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누구에게도 속 할 수 없기 때문이죠 _______ 그녀는 바로 거울 속의 나예요 온 세계를 둘로 나누면 남는 건 하나의 단수, 자유운동을 하는 독립된 단자이고 창조력을 가진 정신적 실체죠 _______ 그녀가 바로 거울 속의 나예요 나의 나무틀 거울은 침대머리맡에 있어 하루에도 백 번씩 이런 마술을 부리죠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鏡子的魔術    你猜我認識的是誰 / 她是一个, 又是許多个 / 在各個方向突然出現 / 又瞬間消失 / 她目光直視 沒有幸福的痕迹 / 她自言自語, 沒有聲音 / 她筋肉健美, 沒有熱氣 / 她是立體, 又是平面 / 她給你什麽你也無法接受 / 她不能屬于任何人 / ____她就是鏡子中的我 / 整个世界除以二 / 剩下的一个單數 / 一个自由運動的獨立的單子 / 一个具有創造力的精神實體 / ____ 她就是鏡子中的我 / 我的木櫃鏡子就在床頭 / 它一天做一百次這樣的魔術 //  你不來與我同居      ** 작품읽기 : 우리나라에서도 ‘거울’을 대상으로 시를 쓴 시인으로 이상李箱을 위시해서 많이 있지만, 윗 시에서처럼 “행복한 느낌은 찾아 볼 수 없어요 /…중략…/ 아름다운 근육을 가졌지만, 열기는 없” 는 ‘그녀’가 ‘나’ 인 이유는 사랑 때문도 아니고 혹은 생활고 때문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우울한 삶, 혹은 실존 자체에 대한 회의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녀는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는 독립적 자아를 갖은 한 여성임에도 그것이 인식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유 때문임을 시를 통해 표현하고 요구한 시는 많지 않다. “온 세계를 둘로 나누면 / 남는 건 하나의 단수, / 자유운동을 하는 독립된 단자이고 / 창조력을 가진 정신적 실체” 인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한 개체로서의 자주의지, 의식의 자유 항변 같은 울림의 소리가  정치선동적인 시편에 익숙해 있던 ‘87년 당시, 중국 시단은 물론 사회 전반에 얼마나 대단한 충격을 주었을까 싶다. 또한 세 편의 시가 공통적으로 마지막 연이자 행을 똑같이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로 마무리 한 것에도 그녀다운 독특한 방식임을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다. 같은 주제로 일관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토론     나는 유물주의 철학을 낭독한다 물질 제일이라고 나는 어떤 물질도 창조하지 못했다 이 세계 누구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아이를 낳지 못한다 인류 최고의 기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쓰다 망쳐 버려놓은 원고지 곁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철학을 토론하고 첫째는 실존주의 둘째는 다다이즘 셋째는 실증주의 넷째는 초현실주의 그러다 마침내 인류의 비밀을 발견하였다. 살기 위해 산다면 사는 것에 의의가 있다는 것인가 무엇이 최고의 의의인가 나는 쓸모없는 쓰임(无用之用)을 가지고 있다 나의 숨소리는 못 가는 곳이 없다 나는 의미 없는 결혼을 하려고 결심한다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哲学讨论     我朗读唯物主义哲学-- / 物质第一 / 我不创造任何物质 / 这个世界谁需要我 / 我甚至不生孩子 / 不承担人类最基本的责任 / 在一堆破烂的稿纸旁 / 讨论艺术讨论哲学 / 第一,存在主义   第二,达达主义 / 第三,实证主义 / 第四,超现实主义 / 终于发现了人类的秘密 / 为活着而活着 / 活着有没有意义 / 什么是最高意义 / 我有无用之用 / 我的气息无所不在 / 我决心进行无意义结婚 // 你不来与我同居   ** 작품읽기 : 그녀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유물주의 사상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산촌으로 하방(下放)되어 노동자로 근무할 때, 정치선전용 홍보 편집 등을 하게 되면서 시를 접하게 되었고 유심론에도 눈 뜨게 되어 온갖 문예사조나 철학에 빠져들었다.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스폰지처럼,..! 하지만 외도한 남편과 헤어지면서 홀로 생활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 되었을 때, 유물론은 다시 그녀를 조롱한다. 돈과 아이도 낳지 못하는 세상에서 자신은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그럼에도 철학토론의 결과 숨쉬는 것만으로도 사는 이유가 된다고, 긍정적으로 수용할 방법을 찾으라고 권한다. 그 방법은? 결혼이다. 그래서 아직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배우자에게 외친다."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일요일엔 독창을 한다     일요일엔 나랑 놀러가 줄 사람이 없다 공원은 제일 두려운 곳, 난 물건 값조차 묻지 못한다 난 집에 있는 노래책을 전부 들추면서 터키탕 안을 떠돈다 아침식사로부터 해질 때까지 노래부른다 머리카락 노래 하나 눈동자 노래 둘 귀 노래 셋 코 노래 넷 얼굴 노래 다섯 입술 노래 여섯 온 몸 위아래로 노래 일곱 사촌오빠의 방언 만세... 노래는 영혼의 신음소리 음악은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 고독은 위대해 (나는 위대함이 필요없지만) 피로한 눈이 사방 벽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두발은 지붕 아래서 검은 박쥐처럼 난다   그대 나랑 동거하지 않을래요?     星期日独唱      星期日没有人陪我去野游 / 公园最可怕,我不敢问津 / 我翻出现存的全体歌本 /在土耳其浴室里流浪 / 从早饭后唱到黄昏 /头发唱成1 / 眼睛唱成2 /耳朵唱成3 / 鼻子唱成4 / 脸蛋唱成5  / 嘴巴唱成6 / 全身上下唱成7 / 表哥的名言万岁-- / 歌声是心灵的呻吟 / 音乐使痛苦可以忍受 / 孤独是伟大的 /(我不需要伟大)/疲乏的眼睛憩息在四壁 /头发在屋顶下飞像黑色蝙蝠  /你不来与我同居     ** 작.품.읽.기 : 이레이 시군의 두 가지 특징 중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제목에서부터 예감하듯 "고독'이다. 혼자 사는 이들의 몇 가지 불편한 것 중 '휴일 보내기'도 때론 끔찍함을 이 시를 통해 새삼 공감하게 된다. 오죽하면 숫자를 세가며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노래하며 놀까. 철창에 갇힌 한 마리 동물처럼 지쳐서 눈이 감길 때까지 노래하는 그녀의 신음소리가 그대로 전달된다. 위대한 고독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 하나 갖기를 바라는 그녀의 내면의 자백이 터키탕 같이 어질러진 그녀 방을 맴돈다. 숫자와 신체 부분을 열거함으로써 점층적으로 주제를 강조해주는 모더니즘적, 사실주의적 표현법이 신선하다.       *참고문헌 : 1. 의 쭤샤오밍左晓明 기자 / 2001年06月18日第八版   2. 《中国当代学人自述》중에서 2009年07月16日    3.  에 실린 《伊蕾:绚烂已逝,诗册犹存이레이, 찬란함은 사라져도 시집은 남는다 》황꾸에이위엔 黄桂元 비평                                                                                                                        2011. 여름호 에 게재      
2022    중국 현대 산문가 시인 - 朱自淸 댓글:  조회:3926  추천:0  2017-02-05
朱自淸은 중국 현대문학의 발전에 대하여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산문 창작 방면에서 이룬 업적은 남다른 바 있다. 진실 되고 자연스러우며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언어로 짜여진 그의 산문은 독자들에게 무한한 감동과 기쁨을 준다. 이처럼 모든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산문이 진지하고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솔직 담백한 예술적 풍격을 갖추고 있어 무한한 생명력과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시대 사조나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사상적 기복을 그의 산문 속에 그려 놓았다. 그의 산문 내용은 대단히 풍부하다. 수려한 자연 풍경을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이나 친구에 대한 우정을 묘사했고, 조국의 전도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였으며, 국내외 문화에 대하여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표현 형식으로는 산수를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그린 서정산문(抒情散文)이있는가 하면, 인물이나 사건을 기술한 서사산문(敍事散文)이 있고, 명승고적지나 명산대첩을 그린 유현기(遊賢記)가 있다. 또한 세태를 평하여 시폐를 질타하고 시대적 자각을 일깨우는 이성산문(理性散文)이 있으며, 산문형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서문이나 서평 그리고 평론을 쓴 것이 있다.      @===덤으로 더 보기+++@   격동의 20세기를 이겨낸 중국 현대시         _ 문화혁명 이전의 여러 유파를 중심으로 -                 김 금용 시인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외세침입에 의한 봉건주의 붕괴와 함께 서구 세계의 문예사조가 일시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신시와 근대시, 그리고 현대시의 시대 구분이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중국문단에서는 1917년에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탈바꿈한 白話운동을 포함한 신 문학운동을 기점으로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를 현대시의 발생기로 본다. 즉, 백화운동으로 중국문자혁명이 일어난 1910년대부터 개인과 문학이 말살된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까지를 통틀어 현대시라고 부르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중국문단의 통설에 따라 1907년 루쉰魯迅이 서구의 셀리, 바이런, 키이츠, 푸슈킨 등의 시들을 白話로 소개함으로써 시작된 중국의 신시와 문화혁명 이전까지를 ‘현대시’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7,80년대 이후의 시를 중국문단에서는 ‘당대시當代詩’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필자는 중국 당대시를 크게는 현대시의 범주에 넣어서, 각 시대별 유파들의 특성과 그 시정신을 짚어보려 한다     “白話”를 매개로 한 신문학운동   본격적인 신시운동은후스胡適(1891~1962)가 1917년《신청년》 2월호에서 “한정된 형식에는 무한한 내용을 담을 수 없다”며, 시의 형식 타파를 주창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전통적 정형시 형식으로부터 이론적 탈바꿈만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현대시의 특징이 되는 낭만성, 상징성, 산문성 및 사회성을 도입함으로써 일약 시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후스胡適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할 때 접하게 된 서구 문예사조는 후스 뿐만 아니라 중국 신지식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으며 그들은 앞다퉈 전문 시지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시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활발한 시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국,공 내란의 정치적 압박과 항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20,30년대는 중국 시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롭고도 치열한 심도의 시 전성기를 이뤘다고 할 것이다.   까마귀                후스*   나는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사람들 지붕 모서리에 서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네 사람들은 내가 불길하다고 미워하네 나는 그네들 사랑 받자고 재잘거릴 줄 모르네 몹시 춥고 바람센 날에도 돌아가 쉴 곳이 없네 …후략… 『상시집嘗試集』에 수록   老鴉                                  胡適 我大清站在人家屋角上啞啞的啼/人家討嫌我,說我不吉利;--/我不能呢呢喃喃 寒風緊,無枝可棲。/我整日裏飛去飛回,整日裏又寒又飢。---/                                                              윗 시는 후스가 1924년(32세)에 발표한 시이다. 까마귀는 시인 자신을 비유하는 한편, 당시 중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봉건왕조가 붕괴된 새 체제의 불안 속에서 자신이 품고있는 이상과 현실의 갭을 잘 투사하고 있다. 시인은 항상 군중 " 群" 과 나 자신 "己" 속에서 갈등하면서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려 한다. 첫 행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홀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이며, 또한 깨어나 먼저 나라의 앞날을 짊어진 젊은이의 고뇌의 모습이기도 하다. 4.5행의 "無枝可棲""又寒又飢" 역시 춥고 배고파도 돌아가 쉴, 혹은 머물 나뭇가지 하나 없는 자신의 선구자적 존재의 고뇌와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백화문으로 쓰여지고, 격률시의 정형성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20년대 초기 작품이지만, 상징과 은유, 역설적 표현이 잘 드러난 최근 현대시로도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등과 함께 의 대표적인 시인인 원이둬聞一多는 시“여신의 地方色彩”에서 음악미와 건축미를 내세우며 현대시 리듬을 주창했으며, 리진파李金髮 는 프랑스의 상징시에 영향을 받아 를 이끌었다. 중국인들이 오늘날도 애송하는 국민시인 궈뭐루어郭沫若 역시 이 시인으로 를 통해 유미서정 경향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 가 루쉰魯迅과 빙신氷心, 주즈칭朱自淸, 조우줘런周作人 등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을 수용, 비약을 시작했다.     상징파 시의 출현   상징은 현대시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중국 고대 시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 창작법이나, 5.4운동 당시 『소년중국』『소년월보』『신청년』『창조주보創造週報』『어사語絲』등을 통해 소개된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상징시가 소개된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어사語絲』에 상징주의 수법의 시를 처음 소개, 가장 왕성한 상징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5년부터 27년까지 3년간 《이슬비微雨》,《행복을 위한 노래爲幸福而歌》, 《식객과 흉년食客與凶年》등 세 권의 시집에 총 450 여편을 발표했다.      버림받은 여인                            李金髮리진파   긴 머리칼이 내 눈앞을 가리자 일체의 부끄러운 질시와 붉은 피의 급류, 앙상한 뼈다귀의 깊은 잠과 단절되었다. 칠흑의 밤이 모기떼를 몰고 천천히 다가와 낮은 담 모서리를 넘어와 결백한 내 귀에 대고 울부짖는다 황야를 휘돌며 노호하는 광풍이 무수한 목자들을 전율케 하듯   棄婦 長髮披遍我眼之前/ 遂隔斷了一切羞惡之疾視/ 與鮮血之急流, 枯骨之沉/黑夜與蚊蟲聯步徐來 /越此短墻之角/ 狂呼在我淸白之耳後,/如荒野狂風怒號./戰慓了無數遊牧   윗 시는 《이슬비微雨》에 수록된 대표시 중 하나로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거주한 스무 살의 리진파의 문화적 충격과 이방인으로서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 ‘棄婦’는 삶의 고달픈 숙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실 리진파 자신이 유학 중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외로움, 조국에 대한 고뇌, 방황, 절망에 이르는 비극성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당시 프랑스에서 팽배하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와 퇴폐성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시 전반에는 현실에 대한 허무, 비애, 무능, 권태 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모기떼를 몰고 오는 칠흑 같은 밤은 무고한 그의 귀에 와서 울부짖으며 그를 괴롭힌다. 외우내환으로 들끓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자화상을 호소력 있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詩怪’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그가 외교관 등의 직업을 갖고 부유한 생활을 했음에도 시에선 상당한 퇴폐성과 삶의 절망 등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新詩운동을 전개시키며 서구의 문예사조를 재빨리 흡수, 바로 현대시로 발전시킨 당대 시인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이 구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라는 점이다. 상징파 대표시인인 리진파는 홍콩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후에 외교관이 되어 미국에도 건너갔다가 뉴욕에서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대 상징파시인의 하나라고 불리던 왕두칭王獨淸 일본과 프랑스에서, 무무티엔穆木天은 일본 동경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펑나이차오馮乃超 역시 동경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자연스레 외국문물을 접했던 시인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순수시를 표방하고 신비주의, 유미주의 경향을 나타냈는데, 리진파는 베를렌을, 무무티엔穆木天은 라파르그(Lafargue)를, 다이왕수戴望舒는 야메스(Jammes)를, 스민石民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음을 모두 인정하였다. 이들의 시에선 공통적으로 상징수법의 하나인 강렬한 암시와 음감과 색감을 동시에 결합시킨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특히 왕두칭王獨淸(정+힘) + (음 + 색)=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라마틴(Lamartin)으로부터 情을, 베를렌에게선 音을, 랭보(Arthur Rlmbaud)에게선 色을, 라파르그(Lafargue)에게선 ‘힘’을 전승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의 대두   중국인민들이 지금까지 애송하는 국민시인,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모두 신월파 동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색은 대체적으로 마르크스시즘에 대항하며 우파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국민당의 독재와 부정부패에는 저항하였다. 때문에 한때 국민당의 사찰을 받기도 했지만, 중국전국이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바뀌자 5,60년대 중국학자들로부터는 ‘매판자본주의 문학단체’ 혹은 ‘반동적집단’이라고 비판을 받다가, 80년대 이후에서야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는 사실 인도의 타고르의 시집『초승달』(중국어로 新月)이란 이름에 매료되어 滿月이 되자고 1923년 북경에서 쉬즈뭐徐志摩가 발기한 사교 모임이었다.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는 해외유학파였으므로 여러 계층의 신사들을 모아 자유롭게 연극을 감상하고 문학을 품평하다가 사회개혁을 시도하자는 뜻으로 동인들의 자본을 모아 1924년 12월에 『현대평론』을 창간하였다. 1927년, 북벌군에 쫓겨 상해로 온 시인들과 남경이나 해외에서 들어온 전국시인들이 모여    후스胡適를 세워 도 열고 19세기 말 영국의 문예지 『Yellow Book』을 닮은 정사각형 종합지도 발간했다. 의 공동신념은 자유주의, 인도주의, 개성해방이었으며 격율시를 제창했다. ‘격율시’란 시행의 장단이나 시의 韻의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시의 균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전통시가 무너지면서 실험시가 넘쳐 만 여 편 이상이 발표되었으며, 방만한 낭만주의나 산문시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혼란상을 극복하고 전통시의 절구시나 율시의 형식을 일부 이식, 조화롭게 정리, 발전시킨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시어의 음악화, 방언의 시어화를 시도했다. 원이둬聞一多는 특히 음악미, 회화미, 형식상 균형을 지키자는 건축미를 주창했다. 일부는 를 ‘말린두부시(豆腐乾詩)’‘모꼴시(方塊詩)’ 라고 비아냥을 하기도 하였으나, 인권, 자유, 민주, 법치 등을 강조하는 서구 영향 아래 ‘中體西用’을 실험적으로 응용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혁명문학의 팽배와 항일운동의 봉기, 후에 좌익작가연맹으로 조직화된 사회주의 문학의 등장으로 이들이 이끌던 『현대평론』은 1928년 정간이 되었다. 다시 쉬즈뭐徐志摩가 『詩刊』을 매주 한 번씩 발간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요절함으로써, 동년 6월, 11호로 정간되고 말아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고요한 밤                             원이둬    이 등불, 등불은 사방의 벽을 하얗게 씻어내고 점잖게 놓인 탁자와 의자는 친구처럼 친밀하다 고서의 종이 향내가 간간이 밀려오는데 소중한 찻잔들은 정숙한 여인처럼 청결하다 젖먹이는 엄마 품에서 홀짝홀짝 젖을 빨고 큰아이는 건강하다고 알리는 듯 코를 곤다   這燈光, 這燈光漂白了的四壁 / 這賢良的卓椅, 朋友似的親密, / 這古書的紙香, 一陣陣的襲來/   要好的茶杯, 貞女一般的潔白,/ 受哺的小兒, 接呷在母親懷裏/鼾聲報導我大兒健康的消息...//                                             聞一多 中 一部   윗 시에선 그의 주장대로 각 행 머리를 ‘這’로 시작하였으며 행의 중간마다 ‘的’을 넣어줌으로써 ‘節의 균형’과 ‘句의 규제’가 반복적으로 쓰여 리듬과 일정한 건축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격율’이란 단순한 음률상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 회화적, 건축적인 복합 차원의 형식의 규제이다. 따라서 자연대로의 수용이 아닌, 예술의 구성을 통한 唯美性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와 를 수용한   1930년대 대표적인 유파는 현대파이다. 는 본질적으로 를 계승, 발전했다. 두 파간의 상호 인적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시의 생명을 표현에 두고 시의 궁극목표를 순수시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는 1932년 5월, 의 출자와 시저춘施蟄存. 두헝杜衡의 편집으로 간행된 종합문예지 《현대》에서 시작되어 다이왕수戴望舒가 본격적으로 현대주의의 기치를 들고 『新詩』를 창간하면서부터 전 중국시단을 휩쓸게 된다. 와 의 쇠퇴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종전의 인물이었던 다이왕수戴望舒가 를 접수하고 여기저기에서 현대파 경향의 신 잡지들이 탄생하게 된다. 36년부터 37년까지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전 시단이 항전체제로 전환되기까지 는 최고의 성숙기를 맞아 다이왕수戴望舒는 비엔즈린卞之琳, 펑즈馮至, 쑨다이위孫大雨, 등과 공동편집으로 현대시의 조류를 강렬하게 펼침으로써 5.4운동 이래 중국 시 최고의 황금시기를 맞았다. 가 궁극에 둔 것은 순수시였다.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중국전역이 의 낭만과 신비로움, 난해한 시가 넘쳐 난데 대한 반발로 ‘자각적인 상징파’*3로 불리던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즉, 밖으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의 암시법과 상징법, 의 낭만성과 격율시 등을 조화시켜 몽롱미와 복합적 이미지의 조합을 이뤘다. 또한 순수시정, 시의 산문미의 특성을 갖춤으로써 를 수정, 계승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파는 상징파보다 훨씬 화해적이고 통일적이며 주지적이고 의 지나친 암시와 상징으로 인한 난해함을 벗어나 좀더 직관적이고도 단순적 이미지로 시의 영역을 훨씬 명랑하고 격율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당시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비관적 서정풍과 이미지 조합에 실험성을 가미한 심상풍, 직설이나 격정을 유보하면서도 현실비판에 맘을 둔 사실풍, 초현실적인 수법으로 첨예화된 현대의식을 표현하려던 회화풍 등 여러 가지 경향들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현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서정적 낭만과 격율적 형식을 배제하지 못했으며 고전적 이성으로 현대적 상징과 심상의 융합을 꾀하는 시인들도 많았다.  이런 의미에선 는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는 영미계 현대주의와는 그 특징을 조금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비 내리는 골목                                 다이왕수戴望舒   종이우산을 받들고, 혼자 길고 긴, 텅 빈 비 내리는 골목을 방황하면서 나는 희망한다 라일락처럼 근심과 원한을 맺은 소녀와 만나게 되기를   撑着油紙傘, 獨自 / 彷徨在悠長, 悠長 / 叉寂寥的雨巷,我喜望逢着 / 一個丁香一樣地 / 結着愁怨的姑娘//                                               中 一章   윗 시는 다이왕수가1927년 4.12사태에 연루되어 스저춘施蟄存 시인의 집에 숨어 지낼 때, 프랑스 시인 베를렌에 도취되어 쓴 시로 이 시는 1928년 《소설월보》에 발표되면서 일약 유명해진 작품이다. 베르렌의 와 견주어지곤 하는데, 슬픈 리듬이 노래처럼 강물처럼 흐느끼는 걸 느끼게 한다. 종이우산이나 긴 방황이 끝나지 않는 골목, 빗속에 남보라 빛 그늘을 드리우는 라일락, 그 라일락처럼 향과 슬픔을 함께 지닌 소녀와의 마주침 등이 ‘이슬비’ 속에 연결되어 창으로 번지는 빗물같이 물안개같이 읽는 독자들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인식이나 설명이 없이도 응축된 서정이 흐르며 시어가 절제되어 해이하지 않고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대파의 특성 중, 애원적 정서를 바탕으로 고독과 우울을 서정풍이면서 삽화풍으로 그려낸 초창기 다이왕수의 대표시이다.     단장                                   비엔즈린   그대는 다리에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각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밝은 달은 그대의 창을 장식하고 그대는 다른 사람의 꿈을 장식한다   断章                              卞之琳 你在桥上看风景/看风景的人在樓上看你/ 明月装饰了你的窗子/ 你装饰了别人的梦.   1935년 10월에 발표된 이 시는 장시의 한 부분으로 후에 독립시켜 《断章》 제목을 달았는데, 중국 현대문학사상  짧으면서도 내포한 함의가 풍부한 명시라 할 수 있다. 이 시가 품고 있는 철학은,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도 "나의 의도는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중시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시는 응축과 절제가 잘 이뤄진 현대파의 대표적인 시이다.    의 출현   시의 열풍이 강해질수록 독자들과는 소원해지는 당시 중국 상황은 일부 시인들이 복잡다단한 외세와 내부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성과 우울한 정서에만 치중한 데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괴리가 한창 심각해질 때, 마침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체가 항일전쟁 수행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그 바람에 상징파, 신월파, 현대파 시인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유파와 관계없이 항일을 위한 민족적 위기감으로 그들은 뭉쳐서 시 낭송회와 좌담으로 민심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정권의 "외세를 축출하기 전에 먼저 국내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반공 주장 때문에, 그들은 반공 열기 속에서 항일전쟁보다는 국.공 대립에 밀려 좌.우익으로 갈리고, 갈등과 분쟁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문예를 위한 문예가 아니라’ ‘붓을 무기로 삼아’ ‘거리로, 시골로 뻗치는’ 가두시나 선동적 낭송시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8년간(1937, 7월- 1945.8월)이나 계속된 항전은 급기야 시의 변화를 가져왔다. 낭송시의 단소화, 민족형식의 장편서사화, 정치시의 대중화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이 때부터 낭송시, 가두시, 전단시라는 단어가 생겼으며 1938년엔 ‘가두시가운동선언’까지 나왔다. 이렇게 왜곡되기 시작한 항전문학도 1942년 공산화가 자리 잡히고, 모택동이 ‘연안 문예좌담회에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문예정책’은 모든 인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시여야 하고 정치노선을 찬양하며 정치보다 더 우위에 설 수는 없다’고 연설하면서는 사실상 모든 예술은 파괴되었다.   시인들은 외국의 침략과 좌파와의 충돌이란 두 가지 짐을 져야 했다. 한창 누렸던 민주화 물결 속의 개인의 사상이나 사고, 자유의지 등은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호응을 받기 시작한 공산주의 운동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며 대중화되고 통속적, 산문적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항전시기의 시는 20여 년의 신문학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좌익 정치노선의 구호에 내밀리며 대중화 시가 되었으며 민족화의 요구로 인한 개념화, 공식화의 현상을 가져와 예술성의 조잡함과 과도한 사상의 노출 등 결함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항전초기엔 애국애족의 민족사상과 함께 불붙어 모든 시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즉,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국민과 위기의 조국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단합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모두 대외투쟁에 나서자’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된 뒤, 시인들 중에는 항일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일으키는 시를 쓴 아이칭艾靑 같은, 후세까지 존경받는 시인이 있었으며, 다이왕수戴望舒와 비엔즈린卞之琳, 허치방何其芳, 무무티엔,穆木天, 좡커자臧克家, 루이스路易士, 루위엔綠原, 무단穆旦, 신디辛笛, 자오링이趙令儀 시인들도 시의 형상화, 심오한 경지화, 내성적인 시를 씀으로써 끝까지 순수시를 지켜내려 노력했다. 국가의 위기는 시인들을 더 많이 고무시키고 단합하게 만들어 한편에선 항전과 무관한 순수예술이 계속 발표되었다.   나는 이 대지를 사랑한다  아이 칭 내가 만일 한 마리 새라면 나는 응당 목이 쉬도록 노래할 것이다 저 거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 저 우리들의 비분이 영원히 용솟음치는 강줄기, 저 멈추지 않고 불어대는 격노한 바람, 그리고 숲 사이로 다가오는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여명,..... _____ 그 후에야 난 죽을 것이다 깃털조차 토지 속으로 썩어 들 것이다   왜 나의 눈엔 항상 눈물이 고이는 걸까 내가 이 대지를 그토록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까,......   我爱这土地                               艾 青 仮如我是一只鸟, / 我也应该用嘶哑的喉咙歌唱:/ 这被暴风雨所打击着的土地 / 这永远汹涌着我们的悲愤的河流 / 这无止息地吹刮着的激怒的风, /和那来自林间的无比温柔的黎明..... /___然後我死了,/ 连羽毛也腐烂在土地里面 // 为什麽我的眼里常含泪水? /因为我对这土地爱得深沈........   아이칭의 이 시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전국이 항일전쟁의 기치 하에 뭉쳤던 1938년 작으로서 절절히 표현된 조국애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중국인민들이 사랑하는 애송시이기도 하다. 이 시 외에 라는 시에서도 절절하게 애국애민의 순애보를 느낄 수 있다. 아이칭은 원래는 프랑스 미술유학생이었으나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연루, 좌익으로 몰려 투옥되면서, 이 때부터 시를 전념했다. 그런 만큼 정치적 갈등과 그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중국인민들을 위한 열렬한 시를 발표했다. 아이칭은 국민당이 몰려난 즉 후에 다시 우익으로 몰려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 절필선언을 했다. 장장 10여 년의 문혁이 끝난 뒤에야 신분회복이 이뤄져 북경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생활을 한 민족시인이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정치 대립 사이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민족을 위해 한 줄의 시로 목쉬도록 아침을 깨우는 새 한 마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음을 이 시는 절규하고 있다.    시의 암흑기: " 정치는 모든 예술에 앞선다"   일찍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부정부패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중국 공산주의는 한창 서구 문예사조를 일시에 섭렵한 시인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즉, 시인들에게 정치 노선에 봉사하는 찬양 선동적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즉,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1942년 5월) 발표와 함께 시는 “정치적 표준이 예술적 표준에 앞선다”는 강령 아래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나 의지, 남.녀간의 사랑표현 등, 시인의 개성과 인성을 중시하는 표현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시 정신이나 시인의 지위는 왜곡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1949년 공산주의 신중국이 성립되고 곧 이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정치와 군사가 압도하면서 중국 시단은 함께 선동의 깃발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특히 이상적 공산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정권 탈취와 연장을 위해 1966년부터 10여 년간 실시된 문화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극치를 보여줬으며 모든 예술의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정치선전을 위한 목적시가 우선되면서 진정한 시 정신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대시의 경계를 다시 문혁 그 이후로 잡아야 하느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화남호랑이(华南虎)                           뉴 한牛 汉*⁴ 너의 건장한 다리는 꼿꼿이 서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네 내가 보는 너의 발가락은 하나하나가 모두 깨지고 망가져 짙고 짙은 선혈이 응고되어 있네 너의 발가락은 사람들에게 묶여서생으로 잘려나갔는가 아니면 비통한 분노 때문에 그 부숴진 이빨로 뜨거운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것인가   나는 철창우리를 바라보네 회색 시멘트 담장 위 한 길 한 길 피 묻힌 도랑이 있어 섬광처럼 현란하게 눈 찌르는 것을   마침내 알았네,..... 부끄러운 마음으로 동물원을 떠날 때 갑자기 외치는 한 소리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외침, 속박할 수 없는 영혼이 내 정수리를 내리치고 허공으로 사라지네 나는 보았네, 불타오를 듯한 무늬와 불 타오르는 눈동자를 1976년 6월, 1982년2월호에 실림    你的健壮的腿/ 直挺挺地向四方伸开 / 我看见 的每 趾瓜 / 全都是破碎的,/ 凝结着浓浓的鲜血! / 你的趾瓜 / 是被人綑綁着 / 活活地鉸掉的 ? /还是由于悲愤/ 用同样破碎的牙齿/ 把他们和着热血咬碎的.....//     我看见铁籠里 / 灰灰的水泥墙壁上/ 有一道一道的血淋淋的溝壑 / 像闪电电那般耀眼刺目! //       我终于明白....../ 我羞愧地離开了动物园, / 恍惚之中听见一声 / 石破天驚的咆哮 /有一不羁的灵魂//      掠过我的斗顶/ 腾空而去, / 我看见了火焰似的斑纹 / 火焰似的眼睛!//               윗 시를 쓴 뉴한牛汉이 를 통해서 밝힌 시정신은 아래와 같다. " 나는 신장이 190센티로 우리 고향의 고량 나무 만큼이나 키가 크다. 그만큼 나의 뼈가 나를 가련히 여기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수 천 개의 크고 작은 뼈마디들이 이를 악 물고 나를 액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소리를 들었다.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나의 뼈에 감사하고, 나의 시에 감사할 일이다. 노동을 많이 해서 손바닥에는 딱딱한 못이 적지 않게 박혀 있고, 깊고 가벼운 상처들도 많다. 수십 년 동안 나는 아픈 손으로  시를 써 왔고, 시 한 줄, 글자 하나 쓰는 것이 모두 아픔이었다....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뼈마디, 그리고 외관과 영혼 속의 상흔이다." 윗 시는 물론 汗血马(피땀 흘리는 말), 悼念一棵樹(한 그루 단풍나무를 애도함),半棵树(반쪽나무) 같은 시들은 오랜 전쟁과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혁명까지 닥치면서 휘돌아 치는 격랑에 지치고 다친 중국인민들의 상흔을 그리고 있다. 이 시도 뉴한이 감옥에서 나와 노동개조소에 오래 노동을 하다가1976년, 문혁이 끝나는 시점에서야 쓰여진 것으로 6년 뒤에야 발표를 했다는 데서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가 빠지고 발톱이 생으로 빠져나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구경꾼들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외마디 포효를 함으로써 불 타오르는 그의 눈빛과 분노를 통한 그 절절한 삶에의 의지와 지켜내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인성의 말살을 실험하였던 문혁기간 중에도 견뎌낸 그의 시정신도 바로 이 화남호랑이 같았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70년대 文革 기간 중 감옥이나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도 문학은 지하에서도 지속되어, 중국 현대시사는 결코 정치로 인해 중단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면, 70년대까지 이어진 정치서정시는 가송시, 생산시를 낳았지만, 예술성의 실험은 버리지 않고 지켜내어 80년 이후 다양한 새 영역으로 중국 현대시의 명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시인의 정신은 더욱 단단히 단련되는 것일까, 노동개조소나 감옥에 수감되었던 시인들에 의해, 문혁 이후에는 새로 탄생된 젊은 시인들에 의해, 고매한 시 정신과 시의 예술성, 순수성이 지켜져 오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치 홍보용 꼭두각시가 아닌 ‘현대시’가 새로운 시각으로 발표되었다. 거기에 실험성도 가미되면서 현재 중국시는 보다 자유로운 풍토에서 2,30년대를 방불케하는 시적 열기가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존엄한 인성을 찾는 발걸음도 늦추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                                                     ** 참조, 1) : 후스: 1891년 상해 따칭大清태어나 시인으로 학자로 철학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5.4 운동의 중심인물로서 제일 먼저 백화문으로 신시를 썼으며 모택동에게 제안하여 湖南自修대학을 설립하게 했다. 후엔 《자유중국》잡지의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민주사상을 흠모, 언론의 자유가 있는 대만에서 살다가 1962년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2) 李金髮(1900年11月21日-1976年12月25日) 현대상징주의 시인으로 조각가이며 교수,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그 역시 1919년에 프랑스에서  조각과 유화를 배웠다. 1920년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받아들여 시를 쓰기 시작, 중국상징주의 대표시인이 되었다. 1925년 귀국, 항주국립미술원, 중산대학미대교수로 있다가 1932년《현대》잡지를 통해 현대파 시인이 되었다. 1941년 항일문예운동에 뛰어들어 《문단文坛》창간을 도왔으나 그 해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관으로 나가면서 후엔 아예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서 76세에 생을 마감했다. 3) 盧斯飛, 劉會文 《馮至戴望舒的詩歌創作》 廣西敎育出版, 南寧,1989, 6月   이 책에서 인용함. 서구문화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중국 전통에서부터 이어져 온 상징수법을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창안했다는 뜻. 4) 뉴 한 (1923- ) : 원명은 史 成汉 山西省 定襄에서 태어남. 몽고족으로 1980년대 "칠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아이 칭(艾 青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복귀하자 "귀래(归来"파에 흡수되어 8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시의 주류가 되었다. 그도 우파로 몰려 1955년에서 57년까지 감옥생활을 했으므로 발표나 시집 출판이 한동안 금지되었다.   ** 참고문헌 :   1, 『中國現代文學史』 上,下 冊 : 朱棟 丁 帆 朱曉進 主編  《高等敎育》出版 2000년 6월 2, 『20世紀 漢語 詩選 』: 康 耕玉 選編  上海敎育出版社 1999. 12월  3.『중국현대시 연구』,허세욱, 1992년 6월 《명문당》 4.『중국 현대문학사_ 혁명과 문학운동_ 』 菊地三郞 저, 정유중, 이유여 옮김, 1986년, 《동녘》출판사  3. 『문혁이 낳은 중국 현대시』 김금용, 2006.4월, 《찾기》츨판사 4. 『中国现代诗歌史』 维基百科 自由的百科全书중에서                                                               2011. 겨울호에 발표
2021    중국 시대별 대표적인 녀류시인들 댓글:  조회:3977  추천:0  2017-02-05
  역대  중국의  여류  문인들       중국의 시대별 대표적인 여류 시인들 1.당대    1.1 화예부인(花蘂夫人)(약 883-926)    1.2 어현기(魚玄機)(약 844- 약 871)    1.3 설도(薛濤)(768-831)    1.4 이야(李冶)(? -784)  2. 송대    2.1 이청조(李淸照) (1084-약1151)    2.2 주숙진(朱淑眞)(약 1131년 전후)  3. 현대    3.1 추근(秋瑾)(1875-1907)    3.2 서정(舒諪) 시(詩)의 십자가 위에  - 북방의 어머니께 -  저는 제 시의 십자가 위에  못박였습니다  한 편의 우언을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의 이상에 복종하기 위하여  하늘, 강 그리고 산줄기가  저를 선택하여, 제가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떠맡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전 제 마음을  손에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고통과 행복으로  수백 번 구멍 뚫린 그 마음을 말입니다  분노와 갈망으로  한없이 늘어났다 줄어든 그 마음을 말입니다  자유와 오만으로  홍보석처럼 투명하게 갈린 그 마음을 말입니다  저의 마음은  여러 각도에서 투사되는 눈길 아래서  무지개 같은 빛을 발할 겁니다  하지만 전 지쳤어요, 어머니  당신의 손을  제 뜨거운 이마 위에 얹어 주세요  비록 경멸 당하고, 한 조각 진흙탕으로 짓밟혔을지라도  제 상처받은 꽃송이를  바치겠습니다  비록 모욕당하고, 회의의 어둔 구름에 덮여 있을지라도  제 최초의 천진함을  바치겠습니다  순결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두 손을 내밀어  떠나간 모든 사람들이  발길을 돌려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제 연약함을 감추지 않겠습니다  제 검은 머리칼의 흔들림조차도  세계의 한 부분이니까요  붉은 집, 오래된 보리수, 해만(海灣)의 어등(漁燈)이  제 눈동자 속에서 문자가 되고  문자는 소리를 만들어  아직 감동해 보지 못한 심령들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파도처럼 사방을 향해 쏟아져 갑니다  하지만 전 지쳤어요, 어머니  당신의 손을  제 뜨거운 이마 위에 얹어 주세요  햇볕은 절 애무하며  제 수척한 어깨를 흘러내리고  비바람은 절 깎아 내어  제 치졸한 생김새를 바꿔 놓습니다  저는 제 시의 십자가 위에  못박였습니다  합창 같은 환호가  별비처럼 제 주위로 떨어지고  하늘이 내려보낸 듯한 신의 매(鷹)가  날마다 제 오장을 쪼아먹습니다  전 제게 속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 우언  그 이상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전 화석이 될 겁니다  제 노랫소리에 축복 받은 생명이  굳게 닫혀 있던 백엽창(百葉窓)을 하나 하나 활짝 열 겁니다  담쟁이넝쿨도 계속 담을 기어올라  꽃을 피울 겁니다  제가 지쳤더라도, 어머니  전선의 최전방에 설 수 있도록  절 도와주세요  (1980年 10月)  * 중국 현대시의 혁명을 일으킨 거장 베이따오, 뚜어뚜어 뒤를 잇는 대표적인 중국 현대 여성시인 수팅이 1980년에 집필된 이 시는 역사와 삶에 지친 한 중국 여성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 정치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럽던 암울한 시절이었습니다. 수팅은 전구공으로도 일했고, 염색공장에서도 일했습니다. 이렇게 강한 결의가 여성 시에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는 경의롭고 우리 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결기입니다. 여성 속에 이렇게 질긴, 꽃을 피우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것을 꼭 피우고야 말겠다는, 그래야만 하겠다는 마음, 그것을 이루도록 북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힘을 달라는, 이 마지막 같은 기도가 그대로 먼곳에 있는 저에게 전달됩니다. 하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도 젊었을 때, 전쟁 때, 살리 어려운 60년대에 우리를 낳고 업고 먹이며 가르치며 살기를 이 시처럼 파랗고 강했다는 것을. 여성은 강한 존재입니다. 그 강함이 비칠 때 여자는 더 아름답습니다.          3.3 빙심(氷心)   중국 고대사회는 남자중심의 사회였고, 여성은 종속적인 지위에 처해 있었다. 기괴한 것은 국가 정 국에 커다란 변고가  발생할 때마다  항상  여성을 끌어내어  주요한  책임을 지웠는데,  역사에서는 “여화(女禍)”라고 불렀다.  즉, 남성들이  일으킨 화를  여성을  끌어다가  속죄하였던 것이다. “공은 천자에게  돌리고,  죄는  부녀자에게  돌리는 (功歸主上, 罪歸婦下)” 는  말이  여기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중국 고대문학 중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당했다.  많은 걸출한  여류작가의  재주가 흘러넘쳐 남자에 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 속 여성의 형상도 빛나고 눈부셔  남자를 압도할 만하다. 주대(周代)에 펴낸 중국  최초의  시가총집 3백편은 바로 “요조숙녀(窈窕淑女)”(關雎)로 시 작하고 있고,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열 수 중에  아홉 수는  여성과 술을  말했다 (十首九首說婦 人與酒)”라는,  여성이 그의   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지적한  왕안석의  비방을  받기도  했으며, 송사(宋詞)  중에는  여성을  제재로  삼은  작품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편,  여류 사인(詞人) 이청조(李淸照)는 뛰어난 재주로  사단(詞壇)의 종주로 존숭받고 있고, 추근 (秋瑾)은 “몸은 남아의 대열에 끼일 수 없으나,  마음은 도리어 남아보다 피끓는다 (身不得, 男兒列; 心却比, 男兒列)”고  하며  누가 감히 문단에서  남존여비를  말할 수 있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조설근은 제1회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평생 세속에 쫓기며  분주히  지냈건만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다. 문득  지난날  함께  노닐던  아녀자들에게  생각이 미쳐  그들을 하나하나  따져 보니 그들의  언행이나  식견이 모두 나보다 월등하지 않은가? 나는 당당한 남아로 태어나 어찌하여 치마 두른 아녀자들만 못했단 말인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중국의 이름난 여류시인들의 대표시 감상.     ▶  1.당대   1 화예부인(花蕊夫人)(약 883-926)   화예부인. 화예부인(花蘂夫人)은 혜비(慧妃) 서씨(徐氏)를 일컷는다.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후촉(後蜀)의 왕 맹창(孟昶)의 처가 바로 화예부인이다. 시사에 정통하였고 재모겸비하여 화예부인(花?夫人)이라 불렀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충무절도사(忠武節度使) 왕전빈(王全斌)으로 하여금 군사 6만을 이끌고 촉으로 진공하도록 명령하였다. 14만이나 되는 군대를 지닌 촉이었지만 맥없이 지고 만다. 이에 맹창은 사십년을 풍족하게 병사를 길러왔지만  일단 적을 만나니 동쪽을 향해 화살 한 발 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맹창이 죽자 송태조는 화예부인이 사작(詞作)에 능함을 전해 들었기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망국의 한을 다음과 같이 읋었다.   君王城上樹降旗(군왕성상수항기)-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妾在深宮那得知(첩재심궁나득지)-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十四萬人齊解甲(십사만군재해갑)-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寧無一個是男兒(영무일개시남아)-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오히려 굳은 충정에 크게 감명한 송태조는 그녀를 비로 삼았는데 후에 그녀는 조광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실패하자 스스로 자진하였다고 한다   ○  화예부인의 신분에 관하여 두 가지 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다.   1.  후촉 맹창의 비가 화예부인인데, 송태조 조광윤에게 맹창이 항복할 때 그녀가 사를 지었다고 한다. 송나라가 들어선 후 후궁이 되어 송태조의 사랑을 받았다. 세상에 전해진 화예부인 궁사는 이전에는 대부분 그녀의 작품으로 여겼으나 근인의 고증에 따르면 실제로는 전촉 왕건의 비라고 적혀있다.   2. 오대의 여류시인,성은 서이고 이름자 출생은 자세하지 않다. 전촉 왕건(王建)의 비로서 소서비(小徐妃)라고 불렀으며 호가 화예부인이다. 후주 왕연(王衍)을 낳았으며 왕연이 즉위한뒤 순성태후로 봉해졌다. 그녀는 간신들고 결탁하여 조정을 휘어 잡았으며 벼슬을 팔아 방탕하고 시치스런 생활을 하였다. 同光 3년(925) 후당의 장종(莊宗)이 촉을 멸하자 그녀는 왕연과 함께 당에 투항하여 이듬해 처형되었다. 현재 화예부인궁사(花?夫人宮詞) 150여사가 전해진다. 근인의 고증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이 확실한 것은 90 여수라 한다. 궁사는 모두 7언 절구이며, 주로 전촉의 선화궁(宣華宮)에서 즐긴 일을 묘사하였는데 전촉 군주의 황음방탕한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 과장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2 어현기(魚玄機)(약 844- 약 871)   ○ 贈隣女 이웃집 아가씨에게 시를 지어주다. 羞日遮罗袖,햇님 보기  부끄러워  비단 소매로 얼굴 가리고 愁春懒起妆;봄이 서러워 일어나 화장도 하기 귀찮아라 易求无价宝,값비싼  보석은 얻기 쉬워도 难得有情郎。사랑하는 낭군 마음은 얻기 어렵구나. 枕上潜垂泪,베갯머리에서  홀로 눈물 뚝뚝 흘리고  花间暗断肠;꽃숲에서 남몰래 가슴 아파하였었지. 自能窥宋玉,송옥처럼 멋진 남자 새로 사귀었으니 何必恨王昌   이제는 떠나버린 왕창 원망하지 않으리.      风流道姑鱼玄机 어현기는 당나라 기생이자 여류시인. 원명은 유미(幼薇), 자는 혜란(蕙蘭).아버지는 불우한 룸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생계가 곤란해지자엄마가  기방을 출입하면서 기생들의  옷을 가져다가 세탁도 해주고 수선도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시짓는 법을 배웠고 총명한 그녀는 일찍부터  시명을 떨쳤다. 만당시대 시인 온정균이 그녀의 재주를 높이 사서 그녀에게 문학 수업을 시켰으며  남몰래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유미는 그런 온정균을 사모하였지만 못생기기로 소문난 온정균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  대신  잘생기고 부유한 친구 이억(李億)을 그녀에게 소개해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이억은 마침내 그녀를 첩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억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으며 유미를 집안에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매우 가혹하게 학대하였다. 이억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도교 사원의 도사로 만들어 그곳에서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꽃다운 나이에 그녀는 수도자가 되었으며  법명을  현기라고 하였다. 삼년 세월을 그리움을 안고 기다렸지만 이억은 끝내 오지 않았다. 버림받은 것이다.한없이 울던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작정한다.그 맹세를 위의 시로 읊었던 것이다.떠나간 남자에게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후 그녀는 도관에서 나와 기생이 되었다.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에 안겨 환락을 즐겼다. 그러던 중 용모가 준수한 악사 정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어현기의 몸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와 또 관계를 맺는다.이 사실을 알게 된 어현기는 이성을 잃고  독하게 몸종을 매질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살인을 한 그녀, 결국은 관아에 끌려가 참수를 당한다. 그때 나이 스물여섯 .그녀는 그렇게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어현기, 그녀는 과연 사랑때문에 살인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질투와 원한이 그녀를 죽인 것입니다..  ...      
2020    중국 당나라 녀류시인 - 薛濤(설도) 댓글:  조회:3514  추천:0  2017-02-05
‘마음을 함께 한 님과는 맺어지지 못한 채, 공연히 풀매듭만 짓고 있네요(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설도(薛濤)의 『봄날의 소망(春望詞)』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부르는 가곡 중 ‘동심초(同心草)’라는 노래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가사는 다음과 같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 안서 김억의 동심초 가사 번역, 1200년 전 중국 설도 작품  그동안 믿고 마음을 주고받은 임과 일이 잘 안 풀릴 때 혼자만 애타하면서 그 마음을 주변의 소소한 사물에 의탁하여 푸는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가곡은 당나라 때 지금의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에 살던 여류시인 설도(薛濤)가 지은 5언 절구 『봄날의 소망(春望詞)』 제3수를 현대시인인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번역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노래다. 우선 시 4수 전체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봄날의 소망(春望詞)  花開不同賞, 꽃이 피어도 같이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 묻고 싶어라. 그리운 님 계신 곳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지는 시절에.  攬草結同心, 풀 뜯어 같은 마음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 임에게 보내려 마음먹다가  春愁正斷絶, 사무친 그리움 잦아들 때에  春鳥復哀吟. 봄새들이 다시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꽃잎은 바람에 나날이 시들어 가고  佳期猶渺渺. 만날 기약 아직 아득하기만 한데  不結同心人, 마음을 함께 한 님과는 맺어지지 못한 채  空結同心草. 공연히 풀매듭만 짓고 있네요.  那堪花滿枝, 어찌하나, 가지가지 피어난 저 꽃  翻作兩相思. 괴로워라, 서로 서로 그리움 되어  玉箸垂朝鏡, 아침 거울에 눈물이 떨어지는데  春風知不知. 봄바람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석] ▶欲問, 묻고자 하다, 알고 싶다.  ▶相思, 그리워하다. 그리운 님, 相思處는 그리운 님이 계신 곳.  ▶攬, 잡아매다, 손에 쥐다.  ▶將以, 장차 그로써.  ▶遺, 주다, 보내다.  ▶春愁, 봄의 근심, 이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佳期, 좋은 기약, 만날 날.  ▶結同心人, 마음을 함께한 님과 맺어지다.  ▶堪, 할 만하다. 견디다, 감당하다.  ▶玉箸, 옥으로 만든 젓가락처럼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  청두(成都) 왕장러우(望江樓) 공원에 있는 설도 좌상(坐像) 이 시를 지은 설도(768-832)는 자가 홍도(洪度)로 본래 지금의 시안(西安)에 해당하는 장안(長安) 사람이다. 아버지 설운(薛鄖)은 조정의 관료로 있었는데 학식이 연박(淵博·넓고 깊음)하여 어렸을 때부터 설도에게 글을 읽히고 시문을 짓게 하였다. 설도의 미래 운명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즉 부녀가 집 정원에 앉아 오동나무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버지가 먼저 한 구 읊었다.  ‘마당에 있는 오랜 오동나무 한 그루, 줄기가 구름 속까지 치솟았구나(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그러자 설도가 대구를 달았는데 이러하였다.  ‘가지는 남과 북에서 오는 새를 맞고, 잎은 오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부친은 이 대구를 듣고 그 재주를 기뻐하면서도 이 시구가 딸의 ‘동서남북으로 오가는 손님들을 맞고 보내는’ 운명이 예견되는 것 같아서 걱정을 했다고 한다.  ◆부친 폄적 뒤 별세…악기(樂妓)의 운명으로  얼마 후 부친이 권력자의 비위를 거슬러 쓰촨 청두로 폄적(貶謫·벼슬을 떨어뜨리고 귀양 보냄)하게 되자 온 가족이 함께 이사를 왔는데 또 몇 년 되지 않아 설도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풍토병에 걸려 죽게 된다. 16세 되던 해 모친을 봉양하고 가사를 꾸리기 위해 음률을 잘 이해하고 언사(言辭)를 지혜롭게 풀며, 시부(詩賦)에 뛰어난 능력으로 인하여 예견된 운명처럼 설도는 결국 악기(樂妓: 노래를 부르는 고급 기생, 수청은 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로 적(籍)을 올리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의 뛰어난 시적 재능은 785년 사천절도사로 온 위고(韋臯)의 눈에 들어 공문을 작성하고 장서를 관장하는 교서(校書)라는 벼슬자리를 추천받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중시를 받게 된다. 그는 평생 위고 이래 총 11명의 절도사로부터 불려 다니며 많은 시문을 짓게 된다. 설도는 곧 시단에 널리 이름이 나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稹), 두목(杜牧) 등 당시 명망 있던 시인들과 많은 시적 교류를 했다. 현재도 원진 및 백거이와 주고받은 많은 창화시(唱和詩)가 남아 있다. 설도는 느낀 바 있어 나중에 돈을 내고 악기의 적에서 탈퇴하여 자유롭게 살게 된다.  ◆ 백거이 원진 두목 등 당대 최고 시인들과 교류  설도 41세 때 시작된 10세 이상 아래인 원진과의 늦사랑이 천고에 전해지고 있다. 원진은 설도와 많은 연정의 시를 주고받는데, 그녀를 한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짝을 이룬 탁문군(卓文君)에 비유하기도 했다.  (좌) 원진이 설도에게 써준 연애 시와 설도가 시를 쓰고 있는 모습. (우) 설도가 설도전(薛濤箋·시를 적는 붉은색 종이)을 만드는 모습. ◆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별난 사랑  만년에 설도는 청두 서쪽 완화계(浣花溪) 시냇가에 살며 음시루(吟詩樓)를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당시 쓰촨 지방에는 종이문화가 발전하였는데, 설도는 시를 운치 있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소나무 꽃무늬를 새겨 넣은 붉고 고운 색종이를 직접 제작하여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니 그것이 당시 유명해져 ‘설도전(薛濤箋)’으로 불리웠다. 원진은 쓰촨으로 발령이 났을 때, 한때 설도와 깊은 정을 나누었지만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자 떠나가고 만다. 원진의 여성 편력과 풍류 끼에 대해 소문을 듣지만, 설도는 일편단심 원진을 기다리니 헤어진 지 10년이 지나서도 원진을 사모하는 시를 남길 정도였다. 결국 맺지 못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년에는 대나무밭 속에서 검은 색 여도사복을 입고 수도하는 자세로 살다가 세상을 뜬다.    출처 :한국예술가곡연주회 / 글쓴이 : 임 종식
2019    중국 현대시단 시인 - 艾靑 댓글:  조회:4073  추천:0  2017-02-05
  大堰河 (我的褓姆)                                            艾 靑   大堰河, 是我的褓姆. 她的名字就是生她的村莊的名字, 她是童養媳, 大堰河, 是我的褓姆. 我是地主的兒子; 也是吃了大堰河的奶而長大了的 大堰河的兒子. 大堰河以養育我而養育她的家, 而我, 是吃了你的奶而被養育了的, 大堰河啊, 我的褓姆. 大堰河, 今天我看到雪使我想起了你: 你的被雪壓着的草蓋的墳墓, 你的關閉了的故居簷頭的枯死的瓦菲, 你的被典押了的一丈平方的園地, 你的門前的長了靑苔的石椅, 大堰河, 今天我看到雪使我想起了你. 你用你厚大的手掌把我抱在懷裏, 撫摸我; 在你搭好了竈火之後, 在你拍去了圍裙上的炭灰之後, 在你嘗到飯已煮熟了之後, 在你把烏黑的醬盌放到烏黑的桌子上之後, 在你補好了兒子們的, 爲山腰的荊棘扯破的衣服之後, 在你把小兒被柴刀砍傷了的手包好之後, 在你把夫兒們的襯衣上的虱子一顆顆的搯死之後, 在你拿起了今天的第一顆鷄蛋之後, 你用你厚大的手掌把我抱在懷裏, 撫摸我. 我是地主的兒子, 在我吃光了你大堰河的奶之後, 我被生我的父母領回到自己的家裏, 啊, 大堰河,你爲什麽要哭? 我做了生我的父母家裏的新客了! 我摸着紅漆雕花的家具, 我摸着父母的睡床上金色的花紋, 我呆呆的看簷頭的寫着我不認識得的[天倫叙樂]的扁, 我摸着新換上的衣服的絲和貝殼的鈕扣, 我看着母親懷裏的不熟識的妹妹, 我坐着油漆過的安了火鉢的坑凳, 我吃着硏了三番的白米的飯, 但, 我是這般忸怩不安! 因爲我 我做了生我的父母家裏的新客了. 大堰河. 爲了生活, 在她流盡了她的乳液之後, 她就開始用抱過我的兩臂勞働了; 她含着笑, 洗着我們的衣服, 她含着笑, 提着菜籃到村邊的結氷的池塘去, 她含着笑, 切着氷屑悉索的蘿蔔, 她含着笑, 用手掏着猪吃的麥糟, 她含着笑, 扇着燉肉的爐子的火, 她含着笑, 背了團箕到廣場上巨 曬好那些大荳和小麥, 大堰河, 爲了生活, 在她流盡了她的乳液之後, 她就用抱過我的兩臂勞働了. 大堰河, 深愛着她的乳兒; 在年節裏, 爲了她, 忙着切那冬米的糖. 爲了他, 常悄悄的走到村邊的她的家裏去, 爲了他, 走到她的身邊叫一聲 ‘媽’, 大堰河, 把他畵的大紅大綠的關雲長 貼在竈邊的牆上, 大堰河, 會對她的隣居誇口讚美她的乳兒, 大堰河曾做了一個不能對人說的夢 : 在夢裏, 她吃着她的乳兒的婚酒, 坐在輝煌的結綵的堂上, 而她的嬌美的媳婦親切的叫她 ‘婆婆’ ```````````` 大堰河, 深愛她的乳兒! 大堰河, 在她的夢沒有做醒的時候已死了. 她死時, 乳兒不在她的旁側, 她死時, 平時打罵她的丈夫也爲她流淚, 五個兒子, 個個哭得很悲, 她死時, 輕輕的呼着她的乳兒的名字, 大堰河, 已死了, 她死時, 乳兒不在她的旁側, 大堰河, 含淚的去了! 同着四十幾年的人世生活的凌侮, 同着數不盡的奴隸的悽苦, 同着四塊錢的棺材和幾束稻草, 同着幾尺長方的埋棺材的土地, 同着一手把的紙錢的灰, 大堰河, 她含淚的去了. 這是大堰河所不知道的 : 她的醉酒的丈夫已死去, 大兒做了土匪, 第二個死在炮火的烟裏, 第三, 第四, 第吳 在師傅和地主的叱罵聲裏過着日子. 而我, 我是在寫着給予這不公道的世界的咒語. 當我經了長長的飄泊回到故土時, 在山腰裏, 田野上, 兄弟們拼見時, 是比六七年前更要親密! 這, 這是爲你, 靜靜的睡着的大堰河 所不知道的啊! 大堰河, 今天, 你的乳兒是在獄裏, 寫着一首呈給你的讚美詩, 呈給你黃土下紫色的靈魂, 呈給你擁抱過我的直伸着的手, 呈給你們過我的脣, 呈給你泥黑的溫柔的臉顔, 呈給你養育了我的乳房, 呈給你的兒子們, 我的兄弟們, 呈給大地上一切的, 我的大堰河般的褓姆和她們的兒子, 呈給愛我如愛她自己的兒子般的大堰河. 大堰河, 我是吃了你的奶而長大了的 你的兒子, 我敬你 愛你! (1933年 1月 14日 雪朝)   다옌허(大堰河), 그녀는 나의 유모                                아이칭(艾 靑 )   다옌허, 그녀는 나의 유모입니다. 그녀가 자라난 동네 이름이 바로 그녀의 이름입니다. 그녀는 민며느리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지주의 아들이었지만, 다옌허의 젖을 빨면서 자라났으니, 다옌허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다옌허는 나를 키워주는 대가로 그녀의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나는 그녀의 젖을 빨면서 자라났습니다.   다옌허는 나의 유모입니다. 다옌허, 밖에 내린 눈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잡초로 뒤덮인 당신의 무덤이 눈에 짓눌려 있습니다. 당신이 살던 옛날 집은 문이 굳게 닫혀있고 처마 끝 기와지붕에는 말라죽은 순무줄기들이 서있습니다. 손바닥만한 당신의 텃밭은 저당 잡혀 있고, 문 앞에 있던 당신의 돌의자에는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습니다.   다옌허, 밖에 내린 눈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당신을 생각합니다.   언제나 나를 품에 안으시고, 당신의 거칠고 넓적한 손으로 나를 안아주셨지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치마폭에 날린 재를 털어낸 뒤에도.. 음식을 만들고 맛을 보고 나서, 밥상 위에 까만 간장 종지를 올려놓은 뒤에도.. 산을 쏘다니다 돌아온 아이들의 찢어진 옷을 다 기우고, 낫 장난을 치다 베인 아이의 손을 감싸준 뒤에도,, 큰 아이들의 속옷에서 이를 떼어내어 꼭꼭 눌러 죽이고, 그 날 하루의 첫 번째 낳은 계란을 꺼내고 난 뒤에도.. 언제나 나를 품에 안으시고, 거칠고 넓적한 손으로 나를 어루만지셨습니다.   나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 당신 다옌허의 젖을 모조리 빨아먹고 났을 때, 나의 부모들은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 다옌허, 그 때 당신은 왜 울려고 하였나요?   나는 나를 낳아준 부모님 집에선 새로운 손님이 되었습니다. 붉은 칠에 꽃무늬를 한 가구들을 어루만지며, 부모님의 황금색 침대를 어루만지며, 처마 끝에 ‘天倫敍樂’이라 써진 편액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새로 갈아입은 옷에 달린 자개 장식의 단추를 어루만지며.. 어머님 품에 안긴 낯선 내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기름칠한 흔들의자에 앉아서.. 세 번 방아 찐 기름진 밥을 먹었지만.. 그 무엇도 나를 편안하게 해주지는 못했으니! 그건, 내가 나를 낳아준 부모님 집에선 언제나 새 손님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옌허, 살아가기 위해서.. 당신은 내게 젖을 다 빨리고 난 뒤에, 나를 안았던 두 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웃음을 띠고, 우리들의 옷을 빨았고, 소쿠리를 들고 마을 저편 얼어붙은 연못가로 가서,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무를 씻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웃음을 띠고, 돼지에게 먹일 보릿겨를 퍼내셨지요. 화롯불을 부채질하여 된장찌개를 끓였고, 마당에 멍석을 펼쳐놓고, 콩과 밀을 말렸습니다.   다옌허, 살아가기 위해서.. 당신은 내게 젖을 다 빨리고 난 뒤에, 나를 안았던 두 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옌허,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지요. 설날이 되면, 나를 위해 열심히 엿을 자르셨지요. 나를 위해, 언제나 조용조용히 집으로 달려오셨습니다. 다옌허, 내가 그린 울긋불긋한 관운장 그림을 부엌 벽에다 부쳐두고 보셨지요. 다옌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언제나 나를 자랑하고 다니셨지요.   다옌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꿈 애기를 언젠가 내게 들려주셨지요. 꿈속에서, 당신은 결혼식장의 휘황한 폐백실에 앉아서 양아들의 폐백 잔을 받으면서.. 그리고 예쁜 새 며느리로부터 “어머님, 절 올리겠습니다.”하는 상냥한 말을 들으셨다고요.  다옌허, 당신은 양아들을 그 토록이나 사랑하셨지요. 다옌허, 당신의 꿈이 깨어나기도 전에 당신은 이미 떠나셨습니다. 당신의 임종 때에 저는 곁에 없었습니다. 언제나 당신을 구박만 하던 당신의 남편마저 당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고, 당신이 남기신 오남매들도 모두 슬피 울었답니다. 당신은 죽어가면서도 양아들의 이름을 불렀다지요?   다옌허는 죽었습니다. 당신의 임종 때에, 양아들인 저는 곁에 없었습니다. 다옌허, 당신은 눈물을 머금고 가셨습니다. 40여 년의 능욕 속의 인생을 걸머쥐고, 헤아릴 수 없이 비참한 노예의 고통을 안고, 4원짜리 나무 관과 몇 단의 볏짚과, 관을 묻을 여섯 자 땅과 함께, 종이돈을 태운 한 줌의 재와 함께.. 다옌허, 당신은 눈물을 머금고 갔습니다.   다옌허, 지금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당신의 주정뱅이 남편도 이미 죽었습니다. 큰 아들은 도적떼가 되었고, 둘째는 전쟁의 포연 속에 사라졌습니다. 셋째, 넷 째, 다섯째는 나으리와 지주들의 학대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또 어떻습니까? 불공평한 이 사회를 저주하고 비판하는 글이나 쓰고 있습니다.   제가 오랜 방황과 표류를 거쳐 옛 고향 땅으로 돌아왔을 때, 산모퉁이에서, 논과 밭 사이에서,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6,7 년 전에 헤어질 때보다 더욱 반가웠습니다. 이는 당신 때문입니다.   아무 말이 없이 조용히 잠드신 다옌허.. 당신은 모르시지요! 다옌허, 지금 당신의 양아들은 감옥 속에 있습니다. 당신을 찬미하는 글을 쓰면서..   황토 속에 묻히신 빨간 영혼에게 바칩니다. 나를 안으려고 벌리셨던 당신의 두 팔에 바칩니다. 나에게 입 맞추셨던 당신의 입술에 바칩니다. 검게 그을린 당신의 얼굴에 바칩니다. 나를 젖 먹여 기르셨던 당신의 가슴에 바칩니다. 대지 위의 사랑하는 모두에게 바칩니다. 나의 다옌허와 같은, 모든 유모와 그들의 아이들에게 바칩니다. 나를 친자식처럼 사랑하신 다옌허..   다옌허, 나는 당신의 젖을 먹고 자라났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번역 이 성 모 1996.08.14        작품해설 이 시는 아이칭의 데뷔작이면서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1933년 1월 눈 오는 어느 날 아침 옥중에서 단숨에 완성한 것이다. 자전적인 성격을 띤 이 장편 서정시에서 작가는 유모 다옌허의 비참한 내력을 유감없이 서술하고 있다. 평범하고 가난한 농촌 아낙네에 대한 회고와 사색을 통해 그녀가 갖추고 있는 순박함과 근면하고 선량한 성품을 찬미하였고, 자신을 길러준 유모 다옌허에 대한 추모의 감격을 마음껏 토로하고 있다. 이 시는 변호사가 감옥소에 면회 갔다가 지니고 나와 아이칭의 친구에게 보낸 것을 친구가 다시 잡지에 투고하였으나, 杜衡 등이 좀 기다렸다가 편집하겠다는 이유로 한쪽에 방치해 두었었다. 그러다가 1934년 5월 1일 잡지에 실리게 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이 담고 있는 주제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태어날 때 난산인데다가 그의 목숨이 부모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점쟁이의 말에 부모는 그에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대신에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다옌허라고 불리는 한 가난한 농촌 아낙의 집에서 5세까지 자라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랐던 작가는 유모 다옌허에 대한 진지한 감정을 통해 격동의 시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중국 대중의 운명, 불합리한 봉건사회의 수탈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옌허는 근면하고 자애로우며 순박하고 평범한 농촌 여인의 전형적인 형상이다. 그녀는 남편과 다섯 아들을 위해 힘겹게 일하면서 자기의 젖을 지주의 갓난아이에게 물리며 따스한 사랑을 베푼다. ‘살아가기 위해서 젖을 다 짜낸 뒤에’ ‘나를 안았던 두 팔로 노동을 시작한다.’ ‘그녀는 지주를 위해 빨래하고 돼지를 치며 곡식을 말린다.’ ‘얼어붙은 연못’에 가서 채소를 씻고 ‘꽁꽁 얼어붙은 무를 썬다.’ 선량한 다옌허는 가련한 희망 속에 아름다운 꿈을 꾼다. 그러나 ‘꿈이 깨기도 전에’ ‘40여년 세상살이 수모와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소작인의 슬픔, 고초와 함께, 4원 짜리 관과 볏짚 몇 단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갔다!’ 그리고 아들들은 ‘전쟁에서 죽거나’ 혹은 ‘나으리와 지주의 질책 속에서 나날을 보낸다.’ 시인은 이것을 비통해 한다. 다옌허와 그녀의 자녀를 깊이 사랑하며 ‘이 불공평한 세상에’ 항거하려는 한 편의 시로써 그녀를 추모하는 것이다. 시인은 ‘나는 중국의 농촌에서 자란’‘언제나 광야의 아들’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新詩 60년 詩史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본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난한 촌부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깊은 정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가장 친근한 인물을 예술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시인과 시에 묘사된 인물이 공동의 운명을 겪으며
2018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 中 시인 - 徐志摩 댓글:  조회:7078  추천:0  2017-02-05
         我是天空裡的一片雲 나는 하늘의 한 조각 구름              偶爾投影在爾的波心 어쩌다 그대 물결치는 가슴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라도 爾不必訝異  그대 놀라지 마오    更無須歡喜  기뻐할 필요는 더욱 없소  在轉瞬間消滅了종(足+從)影 눈 깜짝할 새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테니       爾我相逢在黑夜的海上 그대와 나 어두운 밤바다에서 만나 爾有爾的 我有我的 方向 그대는 그대의, 나는 나의 갈길이 있소     爾記得也好  기억해도 상관없겠지만 最好爾忘掉  가장 좋은 건 잊는 것이라오 在這交會時互放的光亮 우리 지금 만나 서로에게 주었던 빛줄기들을...     이 시는 쉬즈모 [徐志摩(서지마), 1896~1931]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노래는 One Summer Night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여가수 천추샤(陳秋霞)가 부른 곡입니다. 쉬즈모는 사랑과 자유,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을 융합해 불 같은 짧은 생을 살다간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입니다.  1897년 1월 15일 그는 저장(浙江) 하이닝(海寧) 제일의 부호인 쉬선루(徐申如)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저우제일중학을 졸업하고 상하이 후장(水+扈江)대학, 톈진의 베이양(北洋)대학, 베이징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22살이던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가 은행학을 공부하다 21년 러셀에 푹 빠져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합니다. 캠브리지에서 그는 구미의 낭만주의 유미(惟美)파 시인의 영향을 받아 시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22년 고국에 돌아온 그는 이후 정렬적인 창작 활동을 펼칩니다. 23년 신월사를 만들고, 24년에는 후스(胡適)과 ‘현대시평’이라는 주간지를 펴냅니다. 그 해 베이징대학에 임용되어 인도의 시성 타고르를 초대해 통역을 맡습니다. 25년에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소련,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여행합니다.  26년에는 신월파의 양대 시인으로 활동한 원이둬(聞一多)와 ‘시전’이라는 잡지를 펴 현대시의 율격운동을 펼칩니다. 27년에는 신월서점이라는 출판사를 만들고 28년 ‘신월’을 창간합니다. 더불어 영국, 미국, 일본, 인도 여행을 다녀옵니다. 31년 ‘시간(詩刊)’이란 계간지를 창간하고 국제 펜클럽 중국 분과 이사직을 맡습니다. 그해 11월 19일 그는 난징(南京)에서 비행기로 베이핑(北平)으로 가던 도중 산둥(山東)성 지난(濟南) 부근에서 추락해 마치 영화같은 짧은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상이 간단한 그의 인생 이력입니다.  그가 죽은 지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드라마로 노래로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주옥같은 작품의 영향이 크지만 그의 여러 여인들과의 남다른 애정행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첫번째 등장하는 쉬즈모의 여인은 장유이(張幼儀)입니다. 집안에서 맺어준 첫 부인이었습니다. 장유이는 신유학의 거두로 유명한 장쥔리(張君勵·1887-1968)의 여동생입니다. 귀한 집안의 여인이었으나 쉬즈모의 마음을 조금도 차지하지 못하죠. 전통적이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결혼 7년 후 임신한 상태에서 이혼당하고 맙니다. 쉬즈모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옛 연애관념에서 벗어나야 함을 외치는 이혼선언을 문장으로 발표,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집안에서 맺어준 부인과 결혼생활을 끝까지 지킨 후스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행동이죠. 훗날 장유이는 88년 미국 뉴욕에서 죽습니다. 죽기 전 여동생의 손녀 장팡메이(張邦梅)에게 쉬즈모와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96년 9월 영문으로 출판됐습니다. 이 책에는 장유이에게 비정하리만큼 차가웠던 쉬즈모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쉬즈모가 첫 부인대신 평생 마음속에 품었던 여인은 청순하고 순진한 린후이인(林薇因·아래 사진)이었습니다. 그녀는 영국 유학 시절 함께 건축학을 전공한 중국 현대 사상사의 거두 량치차오(梁啓超)의 아들인 량쓰청(梁思成)과 사랑하여 결혼을 합니다. 량스청은 중앙일보에 유광종기자가 쓴 현대 중국 건축에 관한 기사(링크)에 실렸듯이 베이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붕에 중국식 기와를 올려 어깨에 힘을 줘 “민족의 품격이 담긴 건물을 만들자”고 외쳤던 중국식 현대 건축 공법의 창시자입니다. 훗날 천시퉁(陳希同) 베이징 시장에 의해 곳곳에 그의 꿈이 실현됩니다. 낙심한 쉬즈모는 요염하고 정렬적인 여인 루샤오만(陸小曼)을 만나 재혼을 합니다. 루샤오만은 쉬즈모 친구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쉬즈모와의 결혼을 위해 이혼까지 합니다. 쉬즈모가 비행기 사고로 죽기 바로 전날에도 불 같은 성격의 루샤오만이 그를 담뱃대로 때리며 화를 내자 상하이의 집을 나와 난징을 거쳐 베이핑으로 가다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2000년 대만에서 TV드라마로 상영된 ‘인간사월천(人間四月天)’은 그와 세 여인들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입니다. '인간사월천'은 린후이인이 지은 시의 제목입니다. “나는 당신이 4월의 하늘 같은 인간이라 말했죠…”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는 마치 린후이인이 쉬즈모를 추모하며 지은 시로 보이지만 실은 린후이인이 자신의 아들을 그린 시라고 합니다. 爾是人間的四月天         一句愛的贊頌                                                林徽因 我說爾是人間的四月天;  笑響點亮了四面風;輕靈  在春的光艶中交舞著變。  爾是四月早天裏的雲煙,  黃昏吹著風的軟,星子在  無意中閃,細雨點灑在花前。  那輕,那빙(장가들빙)정(예쁠정)爾是,鮮姸  百花的冠冕爾戴著,爾是  天眞,莊嚴,爾是夜夜的月圓。  雪化後那篇鵝黃,爾象;新鮮  初放芽的綠,爾是;柔嫩喜悅  水光浮動著爾夢期待中白蓮。  爾是一樹一樹的花開,是燕  在梁間니(口+尼)남(口+南),爾是愛,是暖,  是希望,爾是人間的四月天! 린후이인   린후이인(오른쪽 첫번째)   루샤오만  
2017    중국 현대의 시인 - 何其芳 댓글:  조회:3897  추천:0  2017-02-05
허치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허치팡(何其芳, 1912∼1977)은 중국 현대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생애[편집] 쓰촨 성(四川省) 완셴(萬縣)의 어느 보수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중국 현대문학의 1세대 작가로, 원래 이름은 허융팡(何永芳)이다. 또 필명으로 허즈(禾止), 디디(荻荻), 추러(秋若), 라오바이싱(勞百行), 양잉레이(楊應雷), 푸루빙(傅履冰), 허치팡(何啓放) 등이 있다. 어려서부터 중국 고대 시가와 소설을 좋아했으며, 1929년 상하이의 중국공학예과(中國公學豫科)에서 공부를 하면서 중국 신문학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많은 신시(新詩)들을 접했는데, 특히 빙신(氷心)의 시가와 산문을 대단히 좋아했다. 1930년에 그는 칭화 대학 외국어과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이듬해에 다시 베이징 대학 철학과에 들어가 공부했다. 재학 중 프랑스 시의 영향을 받아 시작(詩作)을 시작했다. 1936년 산문시집 《화몽록(畵夢錄)》으로 대공보(大公報) 제1회 문학상을 받았고, 이듬해 처녀시집 《예언(預言)》을 내놓았다.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옌안으로 가서 루쉰예술학원 문학계 주임으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집 《야가(夜歌)》를 출간했다. 또한 문예평론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중국 정권 성립 후 과학원문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1966년 이후 문화 대혁명 중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문학 세계[편집] 베이징대학 재학 중에 그의 시는 진솔하고 섬세한 감정을 정미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제재는 주로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환상과 감각, 정감을 노래하는 시가 주를 이루었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 허치팡의 시야는 넓어진다. 산둥 지방 농민들의 고생과 어려움을 목도하면서 사상과 감정에 큰 변화가 생겼다. 물론 이는 그의 시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이후 그가 삶의 터전을 옮겨가며 사회 현실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된 그는 이전의 경향에서 벗어나 민중의 생활과 투쟁을 위한 시를 쓰고자 하여 시상의 변화를 보인다. 초기의“민감하고 다정하며” “배회적이고 또 함축적”이었던 시를 주로 썼던 허치팡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항상 변화를 꾀했다. 그는 중국 고전 시가와 민가(民歌) 및 신시의 형식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나아가 현대 중국어의 객관적인 규율에 근거해 현대 격률시를 주장하고 이를 직접 자신의 시가 창작에 적용해 시가 형식의 변화를 추구했다. 시가 형식에 대해서 대담한 탐색을 계속하는 중에도 자신의 결점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이를 냉정하게 비평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 갔다.
2016    중국 현대시인 시작품선(1) 댓글:  조회:4007  추천:0  2017-02-05
  [특집 : 중국 현대시인 10인의 작품 국역] -동방문학 통권 제71호     [역자의 변] 중국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프로에 나가 중국 인기 시인들을 소개하면서 많은 중국의 시인, 특히는 아주 젊디젊은 중국의 인기 시인들의 자료를 찾아보았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360만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중국땅이기에 다양한 류파의 시인 군체[단체]들이 구름처럼 여기저기 뭉쳐있는데 그런 군체들마다 각기 부동한 측면과 맛으로 유구한 중국의 문화를 다루고 있음이 참 거창하고도 부러움을 자아냈습니다. 특히, 대서남지구와 대서북지구의 시들은 그 무게가 한량없음을 아주 놀라웁게 들여다보게 되였습니다. 나 혼자만의 감동을 여러 시인님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겨우 번역해 서울의 이시환 시인님께 보냈는데 이 시인님께서 선뜻 소개해주시겠다니 더없이 기쁜 심정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수준 제한으로 번역이 거치른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은 그리 편안하지 못함도 고백하는 바입니다. 이에 여러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2013. 11. 늦가을에 역자 림금산   [역자 약력] 중국 조선족시인, 1960년도 도문시에서 출생. 중국 연변대학 졸업,1982년부터 시창작 시작. 선후로 교원, 기자, 문학편집사업. 중국 연변작가협회 이사, 시가창작위원회 부위원장, 연변시가학회 부회장. 현재 길림성 연길시에 거주. 기자부 부장. 시집: (1990년대)- 정지용문학상 수상시집, 동시집: (1987년), (1988년) -백두아동문학상 수상시집, (2013년) -윤정석문학상 수상시집. 연변인민방송국 작가초대석 프로에서 연속 3년간 초대되어 시창작과 시인소개 강좌를 하고 있음.       [소개되는 작품과 시인명]   黑磨窑/高凯  母亲攒了一些绳子/ 高健刚  我和,你/谷禾  贺兰岩画/古马  身世-嘎代才让 /韩作荣  草木之心/韩玉光   云雀/韩文戈   草可以走失,亦可以回来/猴头L   比石头更坚硬的……/何若渔     석마간 고개   어느 집에 아직도 한 오리의 열기가 남았다면 콧구멍만한 석마간의 구멍으로 오리오리의 혼 같은 연기라도 뿜어내련만 보릿고개엔 어쩔 수가 없다 세월이 갈수록 석마마다 이를 옥물 수밖에 없다 일단 땅에서 한줌의 낟알만 나온다면 굶주린 나귀는 천쪼박으로 입을 막고 두 눈도 막으리라 그렇게 사람과 나귀는 늙을 때까지 하나의 석마틀에 매인 짐승 시종 한 갈래의 검은 길에서 본의 아니게 돌고 돌아야 한다 또한 서로서로 상대방이 전생에는 굶어죽은 귀신같아 보인다 오직 하나의 입과 한 가정 식솔들을 위해 그들은 또 불시에 얼굴을 찢으며 어느 날인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갈 것이오니 사람은 나귀한테 한입의 겨만 빚지고 나귀는 사람한테 채찍 하나 빚질 뿐       黑磨窑 高凯        如果哪一家人还有一口热气 窑洞的鼻孔就会挣扎冒出一丝丝 魂一样的炊烟 青黄不接了 每一个石头磨子年头岁尾 都必须咬紧牙关 一旦从土里抠出来一把粮食 饥肠辘辘的驴不但会被捂住嘴巴 还会被蒙住双眼 在一起磨合 人和驴 到老都是绑在一根磨棍上的牲口 始终在一条黑道上不由自主地打转转 而且谁瞅谁前世都像个饿死鬼 为了一张嘴一家子人 经常会突然撕破一张脸 不论谁个哪天一命呜呼 人欠驴的一口麸皮 驴欠人的一根鞭杆   --------------------- 고개 (필명:량자) 남, 1963년에 중국 감숙성에서 출생. 199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 국가1급작가, 현재 중국 감숙성 문학원 원장, 감숙성당대문학연구회 부회장, 중국시가학회 이사, 시집: , , 산문집: 등 8권, 편집하여 만든 책 18권, 1983년 문학상, 감숙성 제3기 문학상, 제4기 문학상 등. 감숙성 정부의 문학특수공헌상, 중국 국무원 특수수상금 획득자.         어머님이 모은 실 고건강     어머님은 늙으셨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집안에서 책걸상은 이젠 모두 그이의 지팡이가 되었다 어머님은 자주 개탄한다, 이젠 얼마 살지 못한다고. 어머님은 나한테 집조를 보이고 저금통장을 보이고 돈가방을 열어 보이고 농짝 열쇠 둔 곳을 알려 준다 또 보자기에 싸놓은 홍십자를 새긴 수의도 보여주면서 자식들더러 새 옷을 이젠 사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젠 더 입을 날이 없을 거라고 버리게 될 거라고 그이는 묘지도 만들지 말란다 골회도 싫단다 모두 다 바다에 뿌리란다 그이는 서랍에서 빨갛고 노랗고 연록색인 실토리를 꺼낸다 그건 우리가 어렸을 때 쓰던 장갑이나 양말에서 풀어낸 색실이란다 어머님은 그걸 나더러 가져가란다 당신은 이젠 쓸모가 없단다 집에는 실오리가 없으면 안 된단다   만약 어머님이 없다면 실오리가 있어도 우리한텐 필요없다 그건 그저 상상중의 일일뿐 실오리에는 우리들 동년의 적삼이 비껴있다 나는 알았다, 죽음이 곧 집에 가는 것임을.       母亲攒了一些绳子  高健刚   母亲老了 做不了事情 桌椅成了她安排好的夫手 经常感叹活不久了 给我看房产证,存折,钱包,厨柜钥匙 存放的位置 还有包袱里秀着红十字的寿衣 不让儿女买新衣裳 怕来不及穿 被冷掉 他说,不要墓地 骨灰 撒海里就行 她从抽泄里 拿出几个红黄的线球---- 那是我门儿时的手套,袜子,线衣折的线绳 她说,她用不着了 让我带回家 家里不能没有绳   如果没有了母亲 绳还有什么用呢 它将横在冥冥之中 绳上景晒着我们儿时的衣衫 让我懂得,死亡即是回家   -------------------- 고건강  남, 시인, 1960년대에 중국산동성 청도에서 출생. 현임 청도시문련창작련락실에서 전직작가 겸 청도문학잡지사 편집. 80년대로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여 주로 시, 소설, 극본을 창작. 사의 우수작품상, , 조우희극문학상 등 수상. 시집: 등         나와 너 곡화     우리는 살아 있을 때를 말하자 사랑에 대해선 아직 논하지 말자 살자, 도시와 요원한 산속에 세상은 거리 때문에 그렇게 구불어든 호선을 긋는 게 아닐 것이다 영화관에는 이젠 사람들이 아주 희소하다만 그래도 우리는 목소리를 죽이고 귓속말로 속삭여야 한다 저들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젠 얼마나 낯설은가 그들은 연이어 한명씩 죽어간다 절망으로 또는 평탄하게 또는 그런대로 죽어간다 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죽어가는가 그들은 홀연 마음속의 초불을 꺼버렸다 목숨은 결국 초개같다 그들은 육체를 그곳으로 돌려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어데다 둘 곳 없는 고독은 온 몸에 넘쳐 흐른다 나와 너 우리는 암흑 속을 걸어나온 애들 같다 우리는 그저 자아의 빛발 속에, 그리고 잘라내고 이어놓은 편집된 필름 속에서 벌거벗은 진실을 읽을 뿐이다 --네가 커서 성인이 될 때면 나는 늙을 것을 거리로 뛰쳐나갈 순간 우리는 더는 털끝하나 휘뿌리지 않을 것이다 바람은 너의 치맛자락을 날릴 것이고 그러면 날린 치마폭은 풀밭에 내려앉은 구름 같을 것이다 우리는 야색 속에 뜰 것이고 우리는 계속하여 살아있음을 논할 것이다 절대로 사랑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사랑에 대해서는 더구나 논하지 않을 것이다—       我和,你 谷禾   我们谈谈活着吧,而不谈论爱 活着,在都市 或遥远的山里,世界并不因为距离 而弯出漫长的圆弧 放映厅里观众稀少,我们仍把声音压到了私语 那些活着的人,多么陌生 继而一个个死去。死于绝望,平淡,或木然 死于不能再活下去 突然熄灭了心中的微暗之火 命如草芥,他们把肉体归还了 而我们活着——无处安放的孤单 充溢而满盈 我和你,仿佛黑暗的孩子,沉在自我的光芒里 剪接的胶片,让我们看清了赤裸的真 却不能解散羁绊的心 ——你长大了,也许我就老了 走上街头的瞬间,我们没有挥洒羽毛 风把你的裙子吹了起来,仿佛落草的云 我们浮在夜色里 继续谈论活着,而不谈论爱 也不谈论最爱——   ----------------------- 곡화 (본명:주련국),남, 1967년 단오절에 중국 하남성 농촌에서 출생. 시집: “눈날리는 빛”, “기사시”, “바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집: “끝까지 사랑할테야” 등 여러 권 있음. 기획출판물: “중국시사전”, “새세기중국시사전”  등 “인민문학상”. “2011년 화문(华文)청년시인상”, “ 2011년도 최우수시인상”, “제3기 전국신문간행물최우수시편집상” 현재 베이징출판집단 잡지사 편집. 중국작가협회 회원.       ‘하란’암각화 고마     5필의 말과 둥근 태양이 손뿌리 주위에서 맴돈다   사람의 손이 어찌 태양만 못하랴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스하기만 하다   5필의 말도 자기가 뛰고 싶은 곳으로 맘껏 뛰는 사람의 손을 당할까   추풍보다도 더 큰 돌덩이 태양보다도 더 뜨거운 젖가슴 사람의 손은 만지고 싶은 만큼 맘껏 만진다 얼마나 희소하고 얼마나 진귀한가       贺兰岩画 古马   五匹马 和一轮太阳 在一只手周   人的手 何如太阳 从早到晚暖和   何如五匹马 去任何想去的地方 就快去了   比秋风硕大的石头 比太阳烫手的乳房 人的手   想摸再摸的东西 多么稀少多么珍贵   ------------------- 고마 원명은 채강, 1966년 5월 중국 감숙성 무위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탠진시에 있는 남개대학 경제관리전업을 졸업. 지금은 정부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사업. 1986년부터 작품활동 시작. 선후로 《시간》、《인민문학》、《별시간》등 간행물에 대량의 시를 발표。1996년에 시간사의 제14회 청춘시회에 참가, 그의 작품은 《중국20세기 90년대시선집》、《중국별시간40년시선》、《99중국최우수시가> 등에 수록. 시집:《소뿔연지》、《서풍고마》,《락일요》등이 있고 기획하고 만든 책으로는 시집:《세기말의 명단》、《10년 등불》등이 있다.       신세 가대채랑     “자정의 망령이 한 주머니의 저주를 가루내면 달빛이 꺼질 무렵 누구의 생에 한 방울 눈물이 사라질까?”   요원함은 사람들을 비애롭게 만든다— 사랑의 젖으로 말미암아 신사들은 밤중에 도취되나니 저 무한한 강역, 피 묻은 경전이여. 옳거니, 손톱이 닳아 문드러지매 바람의 빛을 드러내누나.   고독한 역사는 하늘에 식입한다. 사랑과 한의 거리를 보존할 수 있을까?   매의 게으름은 함묵의 품성을 만든다. 하늘엔 냉정함이 많아지는데   한 송이 구름의 상처를 타끓는 태양한테 돌려주라. 높은 언덕의 드넓음에 돌려주라. 마치도 내가 염주 외우듯 “절을 날아넘어 신령더러 살아 움직이게 하라……” 한생의 영욕을 저 무수한 무릎꿇음 앞에 위탁한다.   초췌한 화염은 얼굴에 피어나고 황색의 전경통은 마치도 한 송이의 들꽃 같나니 검은 구름에 가리운지 오래다. 여명의 시각 얼굴이 남루한 노인은 말한다.   인류의 비애는 여기서 탄생하나니 보라—     “서장대지에 전 세계의 색채들이 가득 넘치누나……”       身世 嘎代才让     午夜的亡灵打磨一截咒语,当月光熄灭的一刻,   将谁的生平中修出一滴难以遏制的泪?”   遥远使人悲伤——   由于爱情的哺乳,信使在深夜致醉,无限的疆域   自坠于一册带血的经卷。   是的,盔甲毁于锈迹,露出了风的光泽。   寂寞的历史植入天庭,   保持爱与恨的距离吗?   鹰的倦怠,成就了缄默的品性。天空多些镇静   让一朵云的伤痕还给烈日   还给高地的辽阔。犹如我的念唱:   “驰越了寺院,显身了神灵……”,一生的荣辱   就托付于无数的跪拜。   憔悴的火焰,点燃脸庞。黄色的转经筒,   像一朵含泪的野花,被乌云遮掩很久。黎明时刻,   面目腐朽的老人说:   人类的悲伤由此诞生,你看——   “西藏大地,沾满了全世界的颜料……”      ------------------------ 가대재랑 남자, 티베트족. 20세기 80년대 출생. 티베트어와 한어로 창작. , , , , 등에 많은 시를 발표. 그의 시는 선후로 , , , , , ,등에 수록됨. 으로 당선, “2005년도 중국년도선봉시가상”, “제4기화문(华文)청년시인상” 등 수상.         온정 -아내에게   한작영     생활은, 바로 매일아침 당신이 나한테 가져다주는 이 한 컵의 끓인 물과도 같다 마춤한 온도의 물   당신이 매양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나더러 밥을 들라고 부를 때에야 나는 나의 몸에 붙은 위를 생각한다 그 완고한 내 집의 요리는 모든 산해진미의 맛을 다 쓰러버린다   우리는 저마다 바쁘다 아들애는 인터넷에만 매달려 있고 나는 서재에서 책을 보고 글을 짓고 당신만이 TV에서 새“요리만들기”를 시청하면서 한 가지씩 새로운 요리만들기 비결을 베껴낸다 그리고 병 요양의 상식을 익히고 양생의 경혈위치를 배워낸다 그러다 때론 깊은 사색에 잠긴 나를 불러내서는 형광막 앞으로 끌고가 아픈 몸에 금해야 할 것과 치료법을 보여준다   한쪽다리가 때때로 아프면서도 당신은 계속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끝없는 가사에 다망하다 나를 동무하여 연 띄우는 걸 구경시키고 산보하고 공간이 있으면 제기도 차고   길에서 당신은 또 때론 조금씩 감개하기도 한다 날마다 한판씩 탁구치기도 배우잔다 그러면 나는 가끔씩 따르기도 한다 나는 배우는 척하면서 당신 비위를 맞춰준다 건장한 고동색 어깨들의 수림 속에서 당신은 나더러 많이 서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기진맥진이다   그래, 우린 이제 모두 늙었다 자주 피로를 느낀다 당신의 물감들인 머리에서 흰빛이 번떡이면 나는 서리 내린 인생의 추위를 개탄한다 젊은 한때 지펴놓은 불길은 밝게 타오르다 점차 사그라져가 하얀 재로 된다   인젠 아껴 입고 아껴 먹을 때가 아니다 그래 이제 우리 멋진 옷이랑 어데 가서 입을까 시체옷을 입고 빨래를 하거나 밥 지을 수는 없는 것 치아가 좋을 때 우리에겐 먹을 것이 모자랐다 이제 뭐나 다 있을 때 우리에겐 치아가 없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 격정도 잃었다 지어 서로에게 향한 열정마저 식었다 하지만 우린 이젠 더는 서로를 떠날 수가 없다 건늠길만 있으면 우리는 무조건반사로 곁의 손을 더듬어 잡고는 서로 의지하여 도심 속에서 안전한 틈서리만 찾는다   구들위에 누우면 우리는 때론 한담도 한다 네 한마디 내 한마디 끝도 없다 하지만 밤중까지 말했어도 뭘 말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많은 경우 내가 먼저 잠든다 하지만 그것도 옅은 잠이 조금 들 뿐 당신이야말로 잠의 주인이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당신이 자리에 들었음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시름 놓고 코를 곤다….         身世 -嘎代才让  韩作荣     生活,如同每天早晨你端来的这杯水 灼热子后沉静的水 有着恰到好处的温度   当你从厨房探出头来 喊我吃饭 我才想起自己的东北胃 顽固的家常菜嗜好 让一切山珍海味都失去了兹味   我们各自忙着 儿子盯着电脑 我在书房里翻书,写作 你则守着电脑机里的“食全食美” 记下一道新菜的秘诀 辨识疗病养生的穴位 偶尔把我从沉思中揪出来 去看荧光屏里病疼的禁忌和医治 一条腿不时疼痛,你仍在奔走 忙碌着,做没完没了的家务 陪着我看风筝,散步 在空地踢一会毽子   在路上发一点儿感慨 学着没天打一场乒乓球 偶尔遵嘱 我试学着为你刮痧 面对一片黑紫的脊背 你嫌我笨拙,可我已筋疲力尽   是啊,我们都老啦,常感老累 看到你染过的头发生出白茬 概叹人生落雪的寒凉 年轻时点燃的火 是明亮的燃烧 也是渐渐熄灭的灰烬   已经不必节衣缩食了 你説:好衣服到哪儿去穿呀 总不能穿着时装洗衣做饭 有牙齿的时候我们缺少食物 什么都有的时候我们却没了牙齿   就这样过着平平淡淡的日子 没有激情,甚至忘记了亲热 可两个人已难分披此 只有过马路的时候 总下意识地牵住身旁的手 拉扯着,在都市里寻找安全的缝隙   躺在床上,偶尔也有闲聊的时候 东一句,西一句 没完没了,可说了半夜 却记不住都说了些什么 更多的时候,是我先睡 可那只是半个人浅浅的睡眠 你是个压床的人,迷蒙中 你刚躺下 我立刻会打起放心的鼾声…      ------------------- 한작영  시인, 선후로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사업, 그 후 참군하여 전사, 패장으로 발탁되다가 모부대 정치간사, 편집부 편집,“인민문학”편집, 주임, 현임 “인민문학”주필, 시집: “만산에 나팔소리 울리네”, “북방서정시”, “고요한 봇나무숲”, “사랑의 꽃다발”, “눈꽃계절의 사랑노래”, “라체”, “유리꽃병”, “순간의 들국화”, “한작영자선시”, “6각형의 눈꽃” 수필집: “원의 유혹” 시론집: “감각. 지혜와 시”등. 첫기의 로신문학상(시가상) 획득.         초목지심 한옥광     가을이 깊었다 나는 홀로 초목 속에 앉는다 멀리로는 자색의 천아산이 보이고 가까이로는 날따라 여위여가는 후타하가 흐른다, 하늘에는   희미하게 둥근 저녁해가 걸리고, 한 마리의 백조가 멀리서부터 날아왔다 날아간다 이젠 여러 해가 흘렀지만 나는 시종 믿는다 이런 산수초목은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 지금 내 주위에 둘러앉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골격과 혈육 사이에 나는 늘 혼자 앉아있다 황혼으로부터 저물녘까지, 또 별들이 솟아오를 때까지 그때면 만가의 등불이 반짝이고 가을벌레들의 합창소리 들판에 쏟아진다 이럴 때면 나는 더욱 믿는다 내가 진짜로 이 산수의 아이임을   초목의 아이인 나는 진심으로 원한다 이 초목과 마음을 함께하여 암흑 속에서 갈망하리라 어떤 손이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을 그것은 바람이 비를 이끌어오고 길이 발걸음을 이끌어내듯 할 것이오니 나는 그를 아버지라 부를 것이요 어머니라 부를 것이다 또한 그를 대지라 부를 것이요 하늘이라 부를 것이다.     草木之心 韩玉光     秋深了, 一个人 坐在草木之中 远处是紫色的天涯山, 近处 流动着日渐消瘦的滹沱河, 天上   挂着浑圆的落日,一只白天鹅 从远方来, 又往远方去 很多年了, 我始终相信 这些山水草木 有着与我相似的灵魂, 它们 环坐在我的周围 仿佛一颗心   在骨骼和血肉的中间,我常常 一个人 从黄昏坐到暮晚, 直到 月亮独自升起来 那时候, 万家灯火忽隐忽现 秋虫的唱和之声 星散于野, 这 更加让我相信, 我 真的是这些山水的孩子   草木的孩子, 我真的愿意 与它们共用着一颗心 在黑暗中, 渴望 有一只手牵着我们 仿佛风牵着雨, 路牵着脚 我可以叫他父亲, 或母亲 也可以叫她大地, 或天空     ------------------------ 한옥광 남, 1970년도에 중국 산서성 원평시에서 출생, 80년대후기부터 시창작시작, 필명은 한광, 중국 유명잡지들인 , , , , 등 잡지와 신문들에 300여수의 시를 발표. 시간사에서 꾸리는 제24기 에 참가. 2008년중국년도10대시인으로 선정되였었음. 시집: 등       종다리 한문고     종다리는 울면서 창공을 파고든다 마치도 노래할 줄 아는 쇠못을 구름송이가 빨아들이는 듯싶다. 바람은 종다리를 높여주어 구름 속에 걸어준다. 종다리는 높이 걸려 움직이지 않지만 구성진 노래는 즐거이 쏟아낸다. 그 빙설이 반짝이는 겨울 속에. 나도 종다리가 방금 날아오른 풀밭 황야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의혹스런 눈길로 종다리를 바라볼 제 나만은 그것이 한 마리의 새가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종다리 우로 천당이 없음을 나만은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발밑에도 지옥은 없다는 것을 나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자기의 밀어가 있다. 서로 얘기하고 울고 몸부림 치고 꽉 닫쳐진 문을 자꾸 두드리고.       云雀 韩文戈   云雀一边叫着,一边飞向苍空,仿佛一枚会唱歌的钉子 被云朵吸去。 然后风托举它,悬在云中,一动不动。 但它唱着嘹亮的歌 在冰雪闪烁的冬天。 我在它刚刚离去的短草荒原上,也一动不动 很多人疑惑着仰望它时,只有我知道那是一只鸟在歌唱 只有我知道,云雀的上边没有天堂,众人的脚下也不会有地狱 我们却有自己的密语:交谈,嚎哭,挣脱 敲着锁闭的门。     ---------------------- 한문고  남자, 1964년 11월생, 중국 하북성 봉윤 사람. 지금 하남성 석가장에 거주. 1982년부터 시 창작을 시작하여 선후로 신문간행물편집, 기자, 국가공무원 등 사업에 종사. 시집: “복된 마을”, 시문집: “옛날로 가는 길”,  시선집: “맑은 하늘아래” 등       풀은 잃어질 수 있지만 또한 돌아오리라 호두L     풀이 지하에 있을 땐 돌과 흙과 이웃하여 어둠을 헤치며 걸었다. 많은 풀들은 너무 작아 마치도 없는 듯했다 풀과 풀은 맞띠우면 산마루에 기댄다 그 한 마리 영양 --영양은 풀을 먹으려 한다 영양들은 하늘공중에서 무리로 줄을 쳐 물결쳐온다 그들은 대지로 덮친다 대지에선 일시에 파도가 인다 바다가 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삼킨 후 풀들은 서로서로 이끌면서 영양의 입속으로 서서히 들어간다   이때에 내가 나선다 나는 한 개의 아주 주관적인 현상이다 --나는 풀 옆의 흙이다. 하지만 나는 풀의 내심에 들어갈 수 있다 나는 풀이 언제 잃어질지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언제 돌아올지도 알고 있다 영양이 풀을 먹어치울 때 나는 영양의 이빨을 부러뜨리는 돌멩이다 나는 풀의 믿음직한 이웃이다. 나의 의미는 바로 내가 있길래 풀이 있다는 그것이다   참, 내가 왜서 이렇게 수다떨지! 너무 많이 말한 것 같다 일망무제한 초원답지 않은가? 누가 감히 그 속에서 한 오리의 풀을 알아낼 수 있담 그것이 잃어졌던 풀이고 행복했던 풀이고 큰물에 밀려간 풀인 것을 또 그것이 하나의 아픔이었고 한 번의 큰 가려움이었던 것을 이때에 풀은 이미 내마음속에서 부풀린다 내가 흙이든 돌멩이든 영양이든 나는 앉으나 누우나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자기의 몸체에서 뛰쳐나오려 한다       草可以走失,亦可以回来 猴头L     草在地下的时候,与石头、泥土为邻 草摸黑走路。很多草小得像没有草一样 草与草碰面仰仗于山头,那只羚羊 ——羚羊要吃草 羚羊在天空成群结队地奔涌着,扑向大地 大地上平地起海。海高过一个婴儿 的哭泣后 草便挽着手,走进羚羊的口中   这个时候,我会出现 我是一个很主观的现象 ——我是草嘴边的泥土。我可以进入草的内心 理解草为什么走失,知道草什么时候回来 羚羊吃草的时候 我是硌掉羚羊牙齿的石头 我是草的高邻。我的意义在于:因为有我 草才是草   看,我多么饶舌!说这么多话 像不像一望无际的草原?——谁能从中拔出一根 认出,那是走失的草,是曾经的幸福 是随大水退去的,一阵痛,或者一生的痒 草此刻在我心中疯长 不管我是泥土、石头,还是羚羊,我都坐卧不安 想从自己的体内跑出来 跑到地下,抱着细小的草。——没有人能看见 亦无人知我   --------------------- 호두L(원명:리충건)  남, 작가, 시인, 극작가. 중국 하남성 신양 사람. 1968년 6월 출생. 지금 중국 하남성 정주시 거주. 16세에 해방군에 입대하여 부대의 신문간행물편집, 당대중국걸출한 청년시인, 중국문련음향출판사 주 하남성 판사처 주임. 영화 극본작가의 한 사람, 극조의 대외연락부 주임.       돌보다 더 강한 것 하약어     꼭 뭔가가 있다 돌덩이를 부셔 부드러운 가루로 만들고 압출하고 충격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는 조용히 소리를 내는 것 꼭 뭔가가 더 있다 비할 바 없이 강한 금강석 송곳 같은 것 곧추 들어가 그 인적 없고 고독한 막끝의 수원을 찾아 깊이깊이 더 깊이 탐험하는 것 그래서 그 유곡이 불같이 샘물을 터쳐내는 것 그래서 파도로 맹수를 피곤케 하는 것 종내는 엎어진 선박들과 펼쳐진 모래밭 이는 절대로 세월속의 한차례 가설이 아니다 그들은 조용히 고요히 태초의 아름다운 곡선을 지켜가고 있다       比石头更坚硬的…… 何若渔   一定有些什么 将石头蹍成柔软的粉,挤压,撞击 并轻轻叫出声来 一定还有些什么 如无坚不摧的金刚钻,一路挺进 深深,深深地勘探着 幽僻孤寂的源头 当空谷暴烈泉涌,当波浪疲惫猛兽 倒扣的船舶,与沙滩 这绝非时光中的一场虚拟 他们静静,静静地保留了 最初优没曲线   ---------------------- 하약어  여, 시인, 70년대 출생, 현재 중국 복건성 복주에 거주. 필명은 . 그의 시작품은 , , , , , 등 각종 신문간행물에 수록되었음.     [출처] [특집 : 중국 현대시인 10인의 작품 국역] -동방문학 통권 제71호|작성자 사막의 수도사
2015    영국 계관시인 - 앨프리드 테니슨 댓글:  조회:4626  추천:0  2017-02-05
앨프리드 테니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앨프리드 테니슨 1st Baron Tennyson 앨프리드 테니슨 출생 1809년 8월 6일 링컨셔 주 서머스비 사망 1892년 10월 6일 (83세)  영국 서레이 해슬미어 필명 Alfred Tennyson 직업 월계시인 국적  영국 사조 시 대표작 Crossing the Bar, Tears, Idle Tears 영향 받은 분야·인물[보이기] 제1대 테니슨 남작 앨프리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st Baron Tennyson, 1809년 8월 6일 - 1892년 10월 6일)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의 계관 시인이다. 계관 시인의 작위를 받은 초대 테니슨 남작으로 아름다운 조사와 운율로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애송되었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작품       생애[편집] 링컨셔 주 서머스비에서 목사의 아들로, 12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에드워드 3세 왕의 후손이었고, 그의 아버지 조지 클레이튼(1778–1831)은 서머스비 교구의 목사였다. 테니슨은 신설된 4년 째인 로스 그래머 스쿨(Louth Grammar School)에서 1816년에서 1820년까지 공부를 했고, 그 다음에는 스카이트클리프 스쿨(Scaitcliffe School)과 로스에 있는 Englefield Green and King Edward VI Grammar School에 입학을 했다. 1827년 케임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케임브리지 사도들〉이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을 했다. 테니슨은 케임브리지에서 오서 헨리 핼럼을 만났고, 그는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은 모음집이었는데, 1827년 형 찰스와 함께 시집 《Poems by Two Brothers》를 간행하였고, 1830년 홀로 발간한 시집 《Poems Chiefly Lyrical》에서는 존 키츠의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이어 1833년 《샬롯의 숙녀》 (The Lady of Shalott)를 발표했다가 혹독한 비평을 받고, 10년간 침묵한다. 1832년에 오서 헨리 핼럼(Arthur Henry Hallam)과 대륙을 여행하였지만, 그 이듬해 핼럼이 급사하자, 강한 충격을 받고 그를 애도한 시 《인 메모리엄 AHH》(In Memoriam AHH)을 쓰기 시작하여, 1849년 완성했다. 친구의 죽음과 진화론에 흔들리는 믿음을 담은 시집이며 서시에는 "하느님의 아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찬미 275번에 수록되어 있다. 1842년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Poems by Alfred Tennyson)에서 작위없이 1845년 연금을 받게 되었다. 1847년 서사시 《공주》(The Princess)를 발표하고,1850년 윌리엄 워즈워스의 후임으로 계관 시인이 되었다. 이 나이에 결혼했다. 1855년 《모드》 (Maud), 1859년 ~ 1864년에 걸쳐 아서 왕 전설을 탐구한 《왕의 목가》와 불쌍한 뱃사람의 서사시 《이노크 아든》(Enoch Arden)(1864년), 《60년 후 락슬리 홀》(Locksley Hall Sixty Years After)(1886년)을 발표하고 1884년에는 테니슨 남작에 서임되었다. 1889년의 단편 시 《모래톱을 넘어》 (Crossing the Bar)는 그의 대표적인 시로 사랑을 받았다. 1892년에 사망하였고,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애창하는 찬미 "거룩하고 거룩하시다"를 불렀다. 차남 핼럼(후에 제 2대 호주 총독)이 작위를 계승했다. 현재 테니슨 남작 작위는 6 대째 데이비드 테니슨(1960년생)가 상속하고 있다. 작품[편집] Poems, Chiefly Lyrical (1830): 죽어가는 백조 (The Dying Swan) 크라켄 (The Kraken) 마리아나 (Mariana) 《시집》 Poems (1832): 락슬리 홀 (Locksley Hall) 티토너스 (Tithonus) 죄악의 환영(Vision of Sin) 두 목소리 (The Two Voices) (1834) 율리시즈("Ulysses") (1833) 《공주》 The Princess (1847)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 (Tears, Idle Tears) 《인 메모리엄AHH》 In Memoriam A.H.H. (1849) 《종을 크게 울려라》 (Ring Out, Wild Bells) (1850) 《독수리》 The Eagle (1851) 《누이의 부끄러움》 The Sister’s Shame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테니슨이 이것을 읽은 초기 기록이 존재한다. 《모드》 Maud (1855/1856) 《이노크 아든》 Enoch Arden (1862/1864) 《갈라진 벽에 핀 꽃》 Flower in the crannied wall (1869) 《창》 The Window - 아서 설리빈이 노래로 만듦 (1871) 《해롤드》 Harold (1876) - 해롤드 왕의 부활에 관심을 두기 시작 Idylls of the King (composed 1833-1874) 《락슬리 홀 60년 후》 Locksley Hall Sixty Years After (1886) 《모래톱을 넘어서》 Crossing the Bar (1889) 《숲지기》 The Foresters - 오서 설리번(Arthur Sullivan)이 1891년 음악을 담당한 연극 Now Sleeps the Crimson Petal - 영화 허영의 도시(Vanity Fair) 서 마이클 다나(Mychael Danna)가 편곡한 노래로 나온다. 《카피올라니》 Kapiolani (그의 사후 핼럼 테니슨에 의해 출간) =======================   *♤우렁찬 종소리여 울려 퍼져라♤* /앨프레드 테니슨 울려 퍼져라 우렁찬 종쇠,거친 창공에 저 흐르는 구름,차가운 빛에 울려 퍼져라, 이 해는 오늘 밤 사라져 간다. 울려 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이 해를 보내라 낡은 것 울려 보내고 새로운 것을 울려 맞아라. 부자와 빈자의 반목을 울려 보내고 만민을 위한 구제책을 울려 맞아라. 울려 보내라,서서히 죽어가는 명분을 그리고 케케묵은 당파 싸움을. 울려 보내라,결핍과 근심과 죄악을 이 시대의 불신과 냉혹함을. 울려 맞아라,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울려 맞아라,다 함께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2014    고대 로마 서정 풍자시인 - 호라티우스 댓글:  조회:5391  추천:0  2017-02-05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탈리아 남부 베노사(Venosa)에 있는 호라티우스의 동상.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Quintus Horatius Flaccus, 기원전 65년 12월 8일 - 기원전 8년 11월 27일), 고대 로마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이다. 생애[편집] 호라티우스의 출신 가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신분(libertinus)으로서 로마 자유시민권을 가진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라티우스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으며, 기원전 45년에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인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유학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다. 이 시기에 그는 역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친교를 맺게되어 그를 따라 소아시아 지방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기원전 약 40년을 전후로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젊은 문학자와 사귀면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주선으로 당시의 로마의 문학 애호가이자 부호인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Maecenas)에게 소개된다. 이 만남은 호라티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깊은 우정관계로 발전한다. 특히 마이케나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기원전 32년 사비나 농장을 선물함으로써,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시 창작에 열중하게 된다.   출생일 BC 65. 12, 이탈리아 베누시아 사망일 BC 8. 11. 27, 로마 국적 로마 요약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에서 활동한 뛰어난 서정 시인이자 풍자작가이다. 브루투스 진영에서 군대 호민관으로 활동하다가 패한 뒤 이탈리아로 도주한 호라티우스는 이후 금고 서기직을 맡아 일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즈음 문인 마이케나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통해 옥타비우누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무렵 호라티우스는 제1권과 17편의 를 쓰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뒤에는 와 제2권을 발표했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지위를 굳히자 로 방향을 바꿔 88편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아우구스투스가 ‘100년제’라고 부르는 고대 축제를 되살리자, 를 지었다. BC 8년 아우구스투스를 상속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송가 Odes〉와 운문 〈서간집 Epistles〉에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는 사랑과 우정, 철학 및 시론이다(아우구스투스 시대). 호라티우스는 아마 이탈리아 중부 산악지방에 사는 사벨리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노예였지만, 호라티우스가 태어나기 전에 자유를 얻어 경매인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토지를 조금 갖고 있었고, 아들을 로마로 데려가 같은 사벨리인인 유명한 오르빌리우스(호라티우스의 말에 따르면 체벌의 신봉자)의 학교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할 만한 여유도 있었다. BC 46년경 호라티우스는 아테네로 가서,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는 강연을 들었다. BC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된 뒤, 아테네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지역은 일시적으로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카이사르의 동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젊은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외종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개인 상속자로 지명했다. 호라티우스는 브루투스의 군대에 들어가 '군대 호민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의 아들에게는 이례적인 명예였다. BC 42년 11월 필리피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한 전투가 2차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호라티우스와 그의 동료 호민관들은 계급이 그들보다 높은 장교가 없었기 때문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연합 군단 가운데 하나를 맡아 지휘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참패를 당하고 전사한 뒤, 호라티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지배하는 이탈리아로 달아났지만, 베누시아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은 제대 군인들에게 정착지를 제공하기 위해 몰수된 상태였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가서, BC 39년에 일반 사면령이 내리기 전후에 금고 서기 자리를 얻었다. 36명의 금고 서기는 비록 하급직이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BC 38년초 그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를 소개받았는데, 마이케나스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문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라티우스를 그와 친한 작가들의 명단에 올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호라티우스는 마이케나스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풍자시 Satires〉 제1권을 쓰고 있었다. 6보격의 운문으로 씌어진 이 10편의 시는 BC 35년에 발표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풍자시〉에서, 호라티우스는 공직생활을 단호히 거부하고 평온함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는 여기서 윤리 문제(재산과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 극단적 행위의 어리석음, 서로 관용을 베푸는 것의 바람직함, 야망의 해악)를 논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편의 〈서정시 Epodes〉도 쓰고 있었다. 이 작품은 격한 어조의 조롱을 보여주며, 예로부터 인신 공격과 조롱에 사용된 운율을 채택했지만, 호라티우스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악습을 공격하고 있다. 이 시의 어투는 필리피 전투 이후 그가 느끼고 있던 불안한 기분을 반영한다. BC 30년대 중엽에 그는 마이케나스에게서 사비니 구릉지대에 있는 안락한 집과 농장(로마에서 북동쪽으로 35㎞ 떨어진 리첸차에 있는 언덕일 가능성이 많음)을 받았다. 이것이 선물인지 빌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집과 농장은 평생 동안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북서쪽의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뒤(BC 31), BC 30~29년에 호라티우스는 〈서정시〉와 8편의 시로 이루어진 〈풍자시〉 제2권을 발표했다. BC 27년에 승리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확고한 지위를 굳히자, 호라티우스는 〈송가〉로 방향을 바꾸어 BC 23년에 88편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활발하게 시를 쓴 시기는 이때였다. 호라티우스는 〈송가〉에서 그리스 초기 서정 시인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지만, 낱말을 섬세하고 절제 있게 구사하는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랑과 포도주, 자연(거의 낭만적으로), 친구와 중용(그가 좋아하는 주제였음)을 노래했다. 〈송가〉의 일부는 마이케나스나 아우구스투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던 고대 로마의 미덕을 찬양했지만, 그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그 자신이었고, 송가를 하나의 주제나 분위기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개인비서 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거절을 괘씸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처음 3권의 〈송가〉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호라티우스가 그런 시를 더이상 쓰지 않을 작정이었음을 암시한다(그는 BC 23년에 시를 발표한 뒤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했을 것임). 그의 서간체 시집(BC 20~19년에 발표한 제2권으로 〈풍자시〉를 좀더 성숙하고 심오하게 변형한 문학적 '편지들')에 실린 마지막 시는 '천박한' 서정시를 버리고 좀더 교훈적인 종류의 운문을 택하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 직후에 그는 3편의 서간체 시(첫번째 책에 실린 어떤 서간체 시보다 훨씬 긴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창작 활동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모든 풍자적 요소를 버리고 부드럽게 비꼬면서도 분별 있는 태도를 취했지만, 중용을 찬양하는 진부한 말도 그의 손이 닿으면 결코 따분하지 않다. 그중 2편은 2번째 책으로 묶여 나왔고, 3번째 서간시인 〈피소 삼부자에게 보내는 편지 Epistles to the Pisos〉에는 후세 사람들이 〈시론 Ars poetica〉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마지막 3편의 서간시는 느슨하고 대화적인 형식 속에 문학비평을 싣고 있는데, 특히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서간체 시집 제2권 제2편)는 호라티우스가 왜 서정시를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는가를 설명해준다. 훌륭한 시는 즐거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호라티우스는 생각했다. 좋은 글의 비밀은 지혜('미덕'이라는 뜻을 함축)이다. 시인은 자신의 가장 좋은 점을 아낌 없이 주기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BC 19년에, 〈시론〉(이 책은 젊은 시인들에게 지침이 될 30여 개의 격언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BC 19~18년경에, 제1권의 마지막 서간체 시는 BC 17~15년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이 마지막 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호라티우스에게 보낸 편지도 오늘날 남아 있는데, 여기서 황제는 그때까지 그런 헌정을 받지 못했음을 탄식하고 있다. 이 마지막 서간체 시에서 호라티우스는 로마 초기의 문학적 배경에 비추어 당시의 시가 가진 장점을 역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호라티우스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한 것이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사실상 계관시인의 지위에 올라 있었고, BC 1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정권과 지난해에 주창한 도덕 개혁을 종교적으로 엄숙하게 승인할 목적으로 '100년제'(Secular Games)라고 부르는 고대 축제를 되살리자, 호라티우스는 이 축제를 위해 〈세기의 찬가 Carmen saeculare〉를 지었다. 이무렵 호라티우스는 서정시 형식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찬가는 서정시 운율로 씌어졌다. 이어서 그는 15편의 송가로 이루어진 4번째 〈송가집〉을 완성했는데, 이 시들은 대부분 이전의 송가들보다 진지한(그리고 정치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이 시들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BC 13년에 씌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참모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마이케나스가 BC 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저를 기억하시듯 호라티우스를 기억해주십시오"였다. 그러나 그후 1~2개월 뒤 호라티우스도 아우구스투스를 상속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에스퀼리누스 언덕에 있는 마이케나스의 무덤 근처에 묻혔다. 인생의 후반기에 호라티우스는 늘 로마에서 봄을 보냈고 다른 때도 잠깐씩 로마에 와서 지내기도 했는데, 그는 로마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따금 남쪽 바닷가에서 겨울을 보냈고, 여름과 가을에는 대부분 사비니의 농장에서 보냈지만, 때로는 로마 동쪽에 있는 티부르(티볼리)나 프라이네스테(팔레스트리나)에서 지내기도 했다. 짧은 〈호라티우스 전기〉(이 전기의 내용으로 보면 분명 2세기에 활동한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감)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보낸 익살스러운 편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편지를 보면 시인은 키가 작고 뚱뚱했던 것 같다. 호라티우스 자신도 키가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44세 때 자신을 묘사한 것에 따르면, 그는 일찍 백발이 되었고, 햇빛을 좋아했으며 성미가 급해서 걸핏하면 화를 내지만 금방 화를 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영향력과 성격 근대 독자들이 호라티우스를 읽을 때 부딪치는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로마의 선조들과 특히 그리스의 선조들을 끊임없이 모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방은 결코 맹목적이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결코 그의 독창성을 훼손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호라티우스의 풍자시 1편을 보면, 처음에는 BC 37년에 가진 브룬디시움(이탈리아의 남쪽 끝에 있는 브린디시) 여행을 사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대 그리스 문학). 그러나 여행중의 2가지 사건은 로마의 풍자작가 루킬리우스의 여행기에서 표절하고 교묘하게 각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호라티우스가 무엇을 모방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옛날 그의 독자들은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모방한 작품들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근대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모델로 삼은 인물이나 작품에 대한 호라티우스 자신의 언급이다. 그는 고대나 고전시대 이전 또는 고전시대(BC 8~5세기)의 몇몇 그리스의 작가들(특히 알카이오스·아르킬로쿠스·핀다로스)을 본보기로 거론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의 작품을 라틴어로 각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문체는 헬레니즘 시대나 알렉산드리아 시대(BC 3~2세기)의 좀더 '근대적'이고 학구적이며 세련된 그리스 작가들의 문체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나 그가 일부 중요한 로마 선배뿐만 아니라 이들의 작품도 모방했다고 보는 의견은 적당하지 않다. 노골적인 표현을 방해하는 요소들, 즉 당시의 독재정치와 호라티우스 자신의 초연하고 회피적인 성격 등과 더불어 그가 이처럼 문학 전통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시를 보고 그의 삶을 추론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시에 나타나 있는 인물은 친절하고 너그러우며 온화하지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항상 인간미가 있고 현실적이며 엄격하고 초연한 그는 남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부드럽지만 끈기있게 조롱한다. 사랑에 대한 그의 태도는 대체로 경박하다. 그는 자신의 애정생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적절한 문학적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는 자신을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로마의 유부녀나 처녀가 아니라, 정조관념이 희박한 그리스 이름을 가진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사실도 덧붙여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는 남자 친구들(〈송가〉에서 대화 상대로 삼고 있는 남자들)에게는 애정이 깊고 성실하다. 그런 친구들은 아마 그의 생활을 떠받쳐주는 중요한 지주였을 것이다. 그는 신을 자주 입에 올렸지만 당시의 정서를 무시하고 내세를 단호히 부인했다. 따라서 "장미꽃을 딸 수 있을 때 따라"는 것은 그의 시에 되풀이해 등장하는 주제지만, 호라티우스는 지나친 무절제를 한탄하고 거부와 비난과 충고를 끊임없이 거듭하면서 온건과 절제라는 '황금의 중용'을 강조한다. 그를 숭배하는 근대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를 인생의 밝은 측면을 노래한 시인으로 여기고, 또다른 사람들은 그를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의 시인으로 간주한다. 이 2가지 견해는 똑같이 옳다. 이런 균형과 다양성은 그의 시가 가진 성격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번째 역할은 근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딱딱하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시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은 서양에서는 인기가 없고, 호라티우스처럼 독재 정권에 봉사하는 것은 훨씬 더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독재정권에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본질적인 독립성을 확고하고도 재치 있게 주장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비서가 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적절하지 못하다고 간청해 아우구스투스의 장군 아그리파의 승리를 찬양하는 따위의 공식적이고 거드름 피우는 임무를 우아하게 회피했다. 그리고 그는 젊은시절에 브루투스의 군대에 들어가, 필리피에서 미래의 아우구스투스인 옥타비아누스와 싸웠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그는 방패를 내던지고 달아났다고 하는데, 호라티우스다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 그리스 시인(실제로는 두 사람 이상의 시인)의 말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점도 거기에 못지않게 호라티우스답다.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라, 시인(그리고 호라티우스)은 전쟁에 걸맞지 않다는 전통적인 표현이다. 이 시는 호라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와 맺고 있던 관계 때문에 공화제를 지지하는 친구들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게 해준다. 호라티우스의 지성은 아우구스투스 정권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그에게 많은 실제적 이익을 준 아우구스투스를 충심으로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아우구스투스를 깊이 존경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을 끝냈기 때문이었다. 이 업적이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호라티우스는 새로운 정권이 드러낼 수도 있는 미숙함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는 사람들이 자유보다는 질서를 원했던 시대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대다수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하고 공화제의 겉모습을 충분히 갖추면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는 또한 신전을 복구했고, 종교적 전통과 의식을 되살렸다. 호라티우스는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신들을 믿지는 않았겠지만, 로마 국가의 종교적 전통과 의식은 로마의 위대함에 없어서는 안 될 신성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사회적 법률을 제정해 개인의 윤리를 순화하고 로마의 가문들을 보호하고 되살리고자 한 것은 좀더 미묘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호색적인 방탕함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다. 이것은 아마 그가 금욕적이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비니인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세기의 찬가〉는 시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개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찬가를 짓기 전에 호라티우스는 이미 웅장한 〈로마 송가 Roman Odes〉를 썼다. 제3권의 1~6편을 이루고 있는 이 송가는 아우구스투스의 최고 권력에 바친 위대한 찬사로서, 그가 쓴 정치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송가〉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로마의 풍부한 신화를 비롯해 그밖에도 수많은 소재가 뒤얽혀 촘촘하고 화려하며 꽉 짜인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 시는 자신을 진지한 음유 시인으로 생각한 시인의 작품이다. 호라티우스는 자신을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인 테베의 핀다로스(BC 518~438)가 환생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호라티우스는 4번째이자 마지막 책에 실린 공식 송가에서 빈번히 핀다로스를 본보기로 삼았다. 〈세기의 찬가〉 이후 교육받은 로마인들은 모두 호라티우스의 작품을 읽고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호라티우스가 죽었을 때, 그의 〈송가〉는 이미 그가 그렇게도 거부했던 운명의 길을 걸어 학교 교과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는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 작가들(암브로시우스·프루덴티우스·파울리누스)이 비록 시에 담긴 정신은 다르지만 호라티우스의 형식을 이따금 흉내낼 때까지 그의 뒤를 이을 고대 서정시인은 거의 없었다. 그후 중세에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심과 거리가 먼 그의 〈송가〉는 거의 쓸모가 없었지만, 그의 〈풍자시〉와 〈서간집〉은 교훈적인 색채 때문에 널리 읽혔다. 〈송가〉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합당한 명성을 다시 얻게 되었고, 〈시론〉과 함께 19세기 전반에 걸쳐 서양 시문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의 시인 앨프레드 테니슨은 〈송가〉를 "5개 낱말로 이루어진 보석/모든 시대의 한껏 뻗은 집게손가락 위에서/그것은 영원히 빛나리"라고 찬양했다. 수많은 면을 가진 이 '보석'의 복잡함은 수세기 동안 번역가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것은 완전히 정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송가는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이나 번역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새로운 번역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매우 훌륭하다. ============================호라티우스의 시학= 문예미학에 대한 성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글 관련 사색이나 작법은 역사 이래 철학자들의 최대 관심거리 중의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학자마다 시작(詩作)에 관한 나름의 생각들을 풀어놓기를 즐겼다. 당시는 연극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그 중에서도 비극은 문학의 최고 형식이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각 철학자들의 `시론`은 대개 비극에 관한 사유와 작법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딱히 비극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문예 전반에 관한 사유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근대 이후의 문학인들이나 철학자들이 지녔음직한 고뇌들이 그때 이미 넘쳐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신기하다. 내게 있는 `시학` 관련 책은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호라티우스 그리고 롱기누스 등의 것이 같이 실려 있는데, 호라티우스 편의 글쓰기 기술에 관한 부분은 글로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뜨끔하면서도 웃음이 난다.  호라티우스의 말을 맥락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내 식으로 편집해보았다. `쓰는 자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속아 넘어간다. 간결하게 쓰려고 애쓰다가 모호하게 쓰고, 섬세하게 쓰려다가 맥없고 힘없는 글을 선보이고 만다. 장엄하게 쓰려다 보면 부자연스러워지고, 감정의 비약을 피하려다 보면 소심하게도 땅바닥을 기는 꼴이 되고 만다. 단일한 소재에다 대담한 변화를 꾀해 생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더니 숲에다 돌고래를 그려 넣고 파도에다 멧돼지를 그려 넣는다. 기술이 없으면 잘못을 피하려다 또 다른 실수를 한다.`  맞는 말만 하는 호라티우스. 그의 지적 앞에서 다시 반성문이다. 써놓고 보면 모호하고, 고치고 보면 맥없고, 다시 보면 부자연스럽고, 완성이다 싶어도 땅바닥을 기는 글을 생산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퇴고할 때마다 멧돼지가 있어야 할 곳에 돌고래가 날뛰고, 돌고래가 있어야 할 곳에 멧돼지가 튀어나오는 경우는 쓰는 한에서는 평생 지속되리라. 디테일한 호라티우스의 짧은 시론에 깜짝 매력을 느낀 한나절이었다.   /김살로메 ========================   퀸투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의 명언 ​   ☆ [지혜롭게 결단]하고 - 하라!   ☆ 일의 [쾌감]은 .   ☆ 인생은 수고가 없는 자에게 -  축복을 베풀지 않는다.   ☆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매지만 - 정작 [행복]은 에 머물러 있다.  즉, 먼저 [마음 속]에서 을 구하지 못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질투심 많은 사람은 - 이웃 사람들이 살이 찔 때 마르게 된다.   ☆ [행복] 하고 싶다면, 일단 부터 해야한다.   ☆ [참된 삶]이란 - 이웃과 이다.   ☆ [분노]는 순간적인 다. 분노를 다스려라. 그렇지 않으면, 광기가 너를 지배라리라.   ☆ 사랑과 웃음이 없으면 즐거움이 없다. [사랑]과 [웃음] 속에서 살자.   ☆ [악을 피하는 것]이 이다. 마찬가지로 [지혜의 시작]은 - 이다.   ☆ 하루하루를 - 그대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기대하지 않았던 내일이 온 것을 -  기쁨으로써 맞이하라. ->Carpe diem : 현재를 즐겨라!           ☆ 미래가 무엇을 줄 지 묻지말고 -  오늘이 주는 것은 모두 선물로 받아라.   ☆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 이다.   ☆ [비장한 말]은 - 로, [위협적인 말]은 - 로, [변덕스러운 말]은 - 로, [진지한 말]은 - 로.   ☆ [자기자신을 신뢰]하는 자는 - 한다.   ☆ 종종 [농담]은 진지함보다도 - 더욱 효과적이고 만족스럽게 중요한 한다.   ☆ 진주로도, 값진 염료로도, 황금으로도 - 평화와 행복을 살 수는 없는 일! 황제의 부도, 제후의 권세도, 황금으로 치장한 지붕도, 마음속의 혼란과 근심을 떼어낼 수 없구나! 그는 가난하면서도 행복하고, 식탁 위에는 물려받은 소금 항아리가 빛나니, 분잡한 걱정과 욕심도, 그로부터는 고요한 단잠을 빼앗지 못하는구나.   ☆ 부자가 곧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 [문학]은 도 하다.   ☆ [시인의 소망]은 -  , 또는 , 그리고 이 둘을 겸하는 일.   ☆ 실천되지 않는 덕은 -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내일이면 늦으리니 - 오늘을 붙잡도록!   ☆ 미소는 미소를 부르고 - 슬픔은 슬픔을 부른다.   ☆ 넘치는 순잔 그것이 - 누구를 웅변가로 만들지 못하겠는가.   ☆ 로마는 - 게르만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 때문에 무너지리라.   ☆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가? 주인공만 바꾸면 그 우화는 - 바로 당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 현명한 사람은 - 평화로울 때 전쟁을 대비한다.   ☆ 너의 이웃집이 불타면 - 너 자신의 안전도 위태롭다.   ☆ 이 세상의 어떤 부나 권력도, 결코 이겨내지 못하는 한계 -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 [가장 큰 축복]은 이다.   ☆ 사회에서 떨어져 사는 것 - 이 얼마나 행복한가!   ☆ [시골]은 - 철학자의 이자 이다. 그것은 그의 이자 이며, 그에게 지식과 깨달음을 준다. 번잡함과 소음을 벗어난 이 [아름다운 자연]은 - 그에게 를 허락하며, 그를 위한 를 제공한다.   ☆ 새벽이 주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는 오늘을 바라 보십시오.오늘은 삶이요, 삶 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존재의 진실성과 실재성, 그리고 성장의 기쁨과 영광스러움, 장엄함 아름다움이 모두 오늘 하루의 짧은 여정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 사람도 신도 사원의 기둥도 -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 우리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 심술굳은 시간은 달아날 것이다.   ☆ 자연은 웅장한 집 보다는 편리한 집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 장소로 시골을 택할 것이다.   ☆ 중간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  오히려 그리스가 미개한 정복자를 지배했다.   ☆ 기쁨은 부자들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다.   ☆ 그림은 말없는 시 -  시는 노래하는 그림.   ☆ 시를 그림처럼.   ☆ 현명해지는 것이 - 좋은 글을 쓰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좋은 글을 썼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 도덕을 사랑함에 있어서 - [절도를 잃으면], 현자는 로, 정의로운 자는 로 불릴 수 있다.   ☆ 소금과 빵은 - 기아를 정복하고 뺨의 색깔을 붉게 한다.   ☆ 말할 때는 신중하라! 놓아 버린 말은 -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어떤 충고를 하건 - 결코 말이 길어서는 안 된다.   ☆ 아무리 올바르게 말하고 행할지라도 - 그것으로 말미암아 친구의 감정을 손상시켜,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꿈에 목표를 설정해 두고 - 욕구에는 고삐를 매고, 분노는 길들이도록 하라.   ☆일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현자들에게 물으라. 경박한 네가, 어떻게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좋을지를! 그리하여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욕망과, 두려움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에 대한 염원도 사라질 수 있도록!   ☆ [자신만]의 하라. 어떠한 기술이라도 [타고난 재능] 없이는 획득될 수 없으며, 타고난 재능도 전문적인 [훈련]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돕고 보태어져 하나가 되어 나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 때,그대는 비로소 을 맛보게 될 것이다.       ​ ​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정작 행복은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 ​ ​부자가 곧 행복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 ​절개를 황금보다 소중히 여기고 분수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화려한 궁전 생활도 부럽지 않다. ​ ​이웃집이 불타면 당신의 안전도 위태롭다. ​ ​믿음직스럽지 못한 친구의 그늘은 빛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 ​사랑에 능숙한 사람은 정열을 지배할 줄 알지만 ​사랑에 무능한 사람은 사랑의 정열에 사로잡힌다. ​ ​지금도 심술궂은 시간은 달아나고 있다. ​ ​어떤 충고이건 간에 말이 길어서는 안 된다. ​ ​★입을 떠난 말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말을 할 때는 늘 신중하도록 하라. ​ ​구두쇠는 항상 가난하다. ​ ​때때로 농담은 진지함보다 더욱 효과적이다. ​ ​아무리 정의와 진실이 중요하다고 해도 ​소중한 사람의 감정까지 손상시키는 것은 어리석다! ​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하라. ​그릇이 맑지 않으면 무엇을 넣어도 더러워지는 법이다. ​ ​자신의 어깨가 무엇을 짊어지려고 하는지 ​또한 무엇을 거절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 ​욕구에 고삐를 매고 꿈에는 목표를 매달아라. ​ ​인생은 고생하지 않는 자에게 축복을 주지 않는다. ​ ​항상 동일한 악기로 연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지 않는다. ​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그래도 화가 나면 백까지 세도록 하라. ​ ​현명해지는 것이야말로 좋은 글을 쓰는 비결이다. ​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 ​ ​그림은 말 없는 시, 시는 노래하는 그림이다. ​ ​시인의 역할은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교훈과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 ​ ​ ​   Tip​​:퀸투스 호라티우스(BC. 65 ~ BC. 8)는 고대 로마의 ​시인으로서 카르페디엠(Carpe diem)이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아테네로 유학하여 철학과 문학을 배웠고 장군으로도 ​활약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었지만 공직자로 ​활동하기보다는 시 창작에 전념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호라티우스는 ​풍자적이거나 교훈적인 시를 많이 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송가​』​와 ​『풍자시​』​, 『서정시』 등이 있다. ​ ​ ​​ ​ ​ ​ ​ ​ ​ ​               [출처] 퀸투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의 명언|작성자 필로소피아 출처/wikimedia.org   호라티우스 / Quintus Horatius Flaccus 근면하지 않으면, 인생은 우리와 같은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Life grants nothing to us mortals without hard work.      
2013    영국 "석별의 정" 시인 - 로버트 번스 댓글:  조회:4764  추천:0  2017-02-02
로버트 번스 평등을 꿈꾸는 시인이자 세금 징수원   로버트 번스의 ‘즐거운 음주’   헤어짐이 있는 곳에선 어디서나 불리는 구성진 노래 . 이 시는 스코틀랜드의 민족 시인 로버트 번스의 생애를 그대로 담고 있다. 1 8세기 영국시단은 시어가 정형화되어 대부분의 시가 진부했다. 이때 스코 틀랜드 방언으로 쓴 로버트 번스의 시는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술을 좋아했으며, 위스키를 스코틀랜드의 나라 술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스코틀랜드 각지를 고루 다니면서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그 의 시에는 서민적이고 민속적인 것이 총망라됐다. 어떤 농부의 장날 술주 정 이야기, 부도덕한 목사, 악덕 지주, 시골 처녀 총각의 사랑 등이 사실 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가 표현한 음주의 즐거움은 다음의 시에 나타나 있다. “축복의 한잔이여!/ 활기의 근원이여/ 어떠한 공부보다도/ 위트에 불을 붙이고/ 지혜를 다져주네/ 위스키 한잔이면/ 시름이 오간 데 없네/ 걱정 말게나 만취할 일 없으니/ 우리의 관념을 간지르게나/ 밤이고 낮이고.” 그는 식구가 많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가족 부양에 따른 삶의 뼈 저린 아픔과 몇차례의 실연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낭만과 여유가 있었으니 술은 그의 시름을 승화시키는 활력소였다. “현자여 눈을 감으라/ 철학적 냄새를 거두고/ 위스키의 이름을 그리스어 로 말해 보려마/ ‘생명의 물’이 아니던가/ 스코틀랜드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여/ …/ 자유와 위스키는 함께 하나니/ 꿈을 향해 용솟음칠진저.” 그는 당시 산업혁명으로 사라져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와 설화를 낱낱이 조 사하여 친구와 함께 민요집을 펴내면서, 스코틀랜드인들의 생활에 깊이 박혀 있는 위스키 문화를 찬양했다. 이런 낭만의 시인을 스코틀랜드인들은 애칭으로 로비 번스로 부르면서 잉 글랜드인들이 워즈워드를 기리는 것 이상으로 번스를 사랑하고 있다. 오 늘날에도 해마다 1월15일 밤에는 친지들이 모여 로버트 번스의 생일을 기 린다. 번스 나이트는 스코틀랜드 민속 명절이 됐다. 로버트 번스의 ‘셀 커크 그레이스’를 암송하며 시작하는 이날 밤 행사는 위스키를 건배하고 스코틀랜드의 전통음식인 하기스를 들며, 밤 늦도록 대화와 노래를 한다. 한잔의 위스키를 마시며 인생의 고뇌와 사랑, 낭만과 그리움을 노래한 로 비 번스는 영원히 스코틀랜드인들의 가슴 속에 있다. 이종기/두산씨그램 생산팀장 로버트 번스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영국 시인이다.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졸업식장에서 울리는 '석별의 정'을 작사·편곡한 주인공이니까. 민요 가락에 시어(詩語)를 입힌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음률은 한동안 애국가의 곡조로도 쓰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번스의 위치는 더욱 확고하다. 국민 시인으로서 추앙받는 그의 생일인 1월 25일이면 대규모 축제가 열린다. 잉글랜드풍과 달리 스코틀랜드풍의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노래했기에 문화적 우상(icon)으로도 손꼽힌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배운 것은 없었지만 스스로 전통가요와 시를 익힌 그는 잉글랜드에서도 필명을 날리며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잉글랜드와 합병(1707)에 반대하는 저항이 완전히 실패(1745)한 후 정치적 좌절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쓰인 번스의 시와 노래가 영국 전역에서 불리는 데 문화적 자긍심을 느꼈다. 때문에 번스는 정치 이외의 분야만큼은 잉글랜드를 앞서겠다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 그룹의 일원으로 분류된다. 애덤 스미스 등을 포함한 이들 그룹은 '브리튼(britain)'이라는 기치 아래 잉글랜드 출신보다 대영제국의 발전에 더 기여한 사람들로 꼽힌다. 창작 이외에 짭짤한 수입을 보장하는 간접세 징수원이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도중에 프랑스혁명에 대한 공식 지지를 포기했지만 번스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부르짖은 인도주의자였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번스의 소망이 담긴 시 〈아무리 그래도(A Man's a Man for a' that)〉의 한 구절이 귓가를 맴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날은 다가오네, 아무리 그래 봐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람이/ 아무래도 결국은 형제가 될 날이.' ================================= 로버트 번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버트 번스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년 1월 25일~1796년 7월 21일)는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의 시인이자 서정시인(작사가)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를 읽고 17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786년 자메이카 섬으로 이주하기 위한 뱃삯을 벌기 위해 쓴 시 으로 천재 시인이라 불리고 성공함으로써 이주할 필요가 없어져 시를 짓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혁명 사상의 선구자로서 모순에 찬 당시의 사회·교회·문명 일반을 예리한 필치로 비난하고, 정열적인 향토애로 스코틀랜드 농부와 시민의 소박한 모습을 나타내어 뒤에 작곡가들에 의해 많이 작곡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민 시인으로서 존경받고 있다. 만년에는 술을 많이 하여 건강을 해치고, 경영하던 농장까지 잃게 되어 불우하게 지냈다. 18세기 말기 시풍의 개척자이며, 영국 방언 시인의 제1인자이기도 하다. 대표작에 등이 있다. 그의 시(그리고 노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은 종종 한 해의 마지막 날(12월 31일)에 불린다. =======================     ▲ 스코틀랜드 로버트 번스(왼쪽)와 한국 김소월  스코틀랜드 로버트 번스(왼쪽)와 한국 김소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무엇일까? 의외로 싱겁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란다. 그 다음이 흥미롭다. 바로 ‘올드 랭 자인’이다. '그 오랜 날이 지나면 어린 시절 벗들이 잊혀질까,  그리고 다시는 생각나지 않게 될까'.  연말에, 졸업식에, 장례식 등등에 불리는 노래다. 올드 랭 자인(auld lang syne)은 스코틀랜드 사투리로, 표준어로는 '올드 롱 신스'(old long since)다. 우리말로는 '그리운 옛날'쯤 된다. 이 영어 노래는 우리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애국가가 제 곡조를 못 얻었을 때 이 노래의 곡을 빌려서 한동안 불렸었다. 그래서 좀 처량맞게 들리기도 했다. 나라 잃고 만주와 북간도로 떠돌며 풍찬노숙하면서 독립운동하던 이들이 많이 불렀던 노래라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시이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가 지은 것이다. 물론 온전한 창작이라곤 할 수 없으나, 거의 번스의 손으로 매만져진 거라 세상에서는 번스 작으로 통한다. -뱃삯 벌러 펴낸 시집이 '대박'  우리 눈으로 볼 때 이 번스라는 시인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다.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나 학력이 거의 무학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 한 사람의 노동력을 감당해야 했기에 공부할 여유가 없었을뿐더러 일찍 몸이 망가져 평생 병골로 살았다. 그가 꺼구정한 등으로 평생 살았던 것도 이때의 과도한 노동 탓이었다. 그를 교양인으로 키운 건 전적으로 책읽기였다. 시쓰기는 17살 때부터였다. 이게 그를 일정 부분 구원해주었다. 가난이 지겨워 27살 때 영국 식민지인 자메이카 섬으로 이주하려고 했지만, 뱃삯이 없었다. 궁리 끝에 17살 때부터 써오던 시를 묶어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들’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펴냈다. 그런데 이 시집이 대박이었다. 솔찮은 현찰을 챙겼을 뿐만 아니라, 천재시인의 탄생이라는 평판까지 안겨주었던 것이다. 뱃삯 걱정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주할 필요성 자체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번스는 그후 시짓기에 몰두했다. 스코틀랜드 토속어로 농부와 서민들의 소박한 정서를 담아냈다. 우리가 많이 듣는 ‘붉고 붉은 장미'(A Red, Red Rose)나 ‘밀밭에서'(Coming Thro‘ the Rye) 같은 노래도 그의 시이다. 샐린저의 유명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제목이 이 시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는 소설에서 전하는 바대로다. ‘밀밭에서’ 노래에도 조금 묻어나듯, 번스는 한마디로 연애 박사였다. 바이런처럼 써늘할 정도로 잘생긴 편도 아니었고, 키도 작달막한데다 통통한 몸매였다고 하니, '비주얼'로 여자를 꼬신 게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아마 타고난 감수성과 천진무구한 성품 등이 여자들을 무장해제시킨 게 아닐까 짐작된다.  그를 소개한 글을 읽다가 한 대목에서 빵 터진 적이 있는데 이런 문장이었다. ‘그는 마침내 수많은 사생아 중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바람기는 이 아이의 엄마에 의해 비로소 진압당했던 것이다. 하긴 야무진 여자를 만나면 어떤 남자라도 도리없이 이렇게 될밖엔 없겠지만. 어쨌든 번스를 제압한 그 위대한 여성의 이름은 진 아머로, 번스보다 6살 연하인 21살 아가씨였다. 야무진 것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번스가 비록 시인으로 우뚝 서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의 경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글로 밥 벌어먹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또한 이런 글쟁이가 돈벌이에 쥐뿔도 재주가 없다는 점 역시 매일반이다. 여러 번 농장 경영에 실패하고 나중에는 세금 조사원으로 근근히 입에 풀칠하며 불우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스코틀랜드 민요 채록과 복구, 편집을 의뢰받아 10여 년을 매달려 일했지만 끝내 보수를 거절했다니, 그 또한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번스는 또한 일찍이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자유주의자, 독립주의자로 많은 글들을 썼다. 그래서 당국의 요주의 인물로 찍히기도 했다.      ▲ ‘올드 랭 자인’은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리가 나오는 머린 르로이 감독의 ‘애수’(1940년)에 OST로 삽입되어 더욱 유명세를 탔다. 1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원제는 워털루 다리였다.  영화 애수 한 장면 그가 태어난 고장의 이름을 따서 에어셔의 음유시인으로 불렸던 번스는 결국 서른 일곱에 요절했다. 어렸을 때 겪은 과도한 노동이 그의 건강을 일찌감치 무너뜨렸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번스는 한평생 우울증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번스와 소월,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의 인생역정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민족시인 김소월이다. 둘은 정말 많이도 닮았다. 잉글랜드의 통치 아래 있었던 스코틀랜드나 일본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처지는 도긴개긴이었고, 둘 다 농사꾼 집안 출신이란 점, 또 둘이 구사하는 시어가 토속적이란 점도 닮았다.  소월도 ‘진달래꽃’ '개여울' '부모' 등을 비롯한 그의 토속성 짙은 대표작들을 거의 스물 안 되어 다 썼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심상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후대의 평자들에게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삶 역시 번스만큼이나 고달팠다. 고향에서 신문사 지국을 경영하다 실패한 후 우울증을 앓다가 서른 둘의 나이로 요절했다. 비록 번스와는 달리 아편을 먹고 스스로 택한 죽음이기는 했지만.  두 시인의 가장 큰 공통점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번스는 스코틀랜드 국민 시인이 되었고, 소월은 20세기 한국 시인 중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몇 년 전 한국의 시인, 평론가 100인이 참여한 앙케트에서 그렇게 뽑혔다. 둘 다 가방끈 역시 길지가 않다. 평범한 시인은 만들어져도 위대한 시인은 타고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번스와 소월은 우리에게 그들의 아름다운 시뿐 아니라, 당신이 위대한 시인이나 작가가 못된 것은 전혀 당신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위안’까지 주고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스코틀랜드의 김소월' 로버트 번스, '한국의 번스' 김소월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번스의 '올드 랭 자인'처럼 지나간 옛날의 그리움을 절절하게 안겨주는 노래가 있을까. '그 흘러간 옛날의 그리움'에서 "당신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오늘'을, 지금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을 이와 같이 마땅히 그리워하라"는 번스의 깊은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면, 당신은 번스의 위대함에 온전히 젖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랫 것은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연말에 여야 의원, 의회 직원들이 다 같이 손 잡고 오케스트라에 맞춰 올드 랭 자인을 합창하는 광경이다. 잘 보면 스코틀랜드 출신 영화배우 숀 코네리도 보인다. 우리는 언제쯤 저런 수준의 국회를 가질 수 있을까?  몇 해 전 스코틀랜드 TV에서 전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스코틀랜드인 선정을 투표에 부친 결과 로버트 번즈가 1위에 뽑혔다 한다. 참고로,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기 위해 지난해 실시된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 투표는 부결되었다.  /이광식 통신원     
2012    일본 녀류시인 - 무라사키 시키부 댓글:  조회:4006  추천:0  2017-02-02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973-1016)      헤이안 시대의 여류 시인으로, 궁중 생활에서 얻은 모티프를 토대로 일본 문학사 최고(最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겐지 이야기〉를 집필했다. 11세기에 지어진 이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의 성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정치적 암투까지 담은 작품으로, 세계 최초로 완결된 형식을 갖춘 사실적인 산문 로맨스이다. 이는 서양의 소설 형식보다 8세기나 앞선 것이다. 기존의 매우 단순한 수준의 성격 묘사와 단조로운 이야기 형식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상상력으로 현대적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구 문학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973년경 교토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하급 귀족 후지와라 다메토키의 1남 2녀 중 둘째 딸로, 이름은 후지와라 다카코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라는 이름에서 '무라사키'는 어린 시절의 이름이거나 《겐지 이야기》의 여주인공 중 한 사람인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키부'는 당시 학문을 가르치던 궁중 여관(女房)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무라사키 시키부는 '무라사키라는 이름으로 불린 여관'이라는 의미가 된다.   무라사키의 집안은 대대로 유명한 학자 집안으로, 아버지 후지와라 다메토키는 명망 높은 한학자였다.   무라사키는 이런 집안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한학에 뛰어난 자질을 드러냈다. 당시 한학을 비롯한 학문은 남자들만 배울 수 있었고, 상류 계층의 여자만이 가나(일본 문자) 정도를 간신히 익힐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무라사키는 어린 시절 남동생 노부노리가 《사기》를 배울 때 옆에서 귀동냥을 했는데, 항상 남동생보다 먼저 그 뜻을 해독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녀가 사내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크게 안타까워하면서 그 재능을 아깝게 여겨 한학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높은 학문 수준은 여자로서의 일생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무라사키는 998년 중급 귀족이던 후지와라 노부타카와 결혼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26세였다. 더구나 남편은 45세에 이미 처도 있었다. 이런 남자와 결혼한 것은 그녀의 학식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남성들이 청혼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의 결혼이 무라사키에게도 재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무라사키는 후지와라 노부타카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다. 학자적이고 자존심이 높은 무라사키에게 남편 노부타카가 거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1001년, 결혼한 지 3년 만에 노부타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때 세간에서 '옛날에는 여자들이 경을 읽는 것조차 금했는데, 여자의 몸으로 한학서들을 읽으니 복이 없지'라고 수군거렸다고 무라사키는 일기에 적고 있다.   여성 교육을 환영하지 않았던 당시 그녀의 높은 지적 수준은 사람들과의 교유에도 장애로 작용했던 것이다. 남편과의 사별, 세상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그녀는 집 안에 틀어박혀 홀로 일기를 쓰고 한학서들을 읽으며 고독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1005년 12월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대귀족 후지와라 미치나가가 그녀의 학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여관으로서 궁에 들어와 자신의 딸이자 이치조 천황의 중궁(中宮, 황후와 동격인 천황의 부인)인 쇼시의 문학 선생이 되어 줄 것을 청했다.   무라사키는 궁에 들어간 이듬해 7월 무렵부터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를 쓰며 궁중 생활을 기록했다.   《겐지 이야기》는 후대 작가가 창작한 것이라는 설부터 복수의 작가가 집필한 것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는데, 무라사키 시키부를 저자로 인정하는 것은 이 일기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중궁 쇼시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아껴 주었지만, 정치적이고 화려한 궁정 생활은 무라사키에게 잘 맞지 않았다. 그녀는 궁중 사람들을 "남을 비난하고 자기만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들 앞에서 나중에 시끄러울 것을 생각해 입을 열기도 심란하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적응하지 못했다.   또한 그녀뿐만이 아니라 궁중 사람들 역시 고고한 태도와 높은 자존심을 지닌 무라사키를 꺼렸다. 특히 황후의 여관으로, 후일 그녀와 나란히 헤이안 시대의 문학가로 꼽히게 될 세이 쇼나곤과 사이가 나빴다. 드러내 놓고 서로를 비난할 정도여서, 무라사키는 전형적인 궁중 여관이었던 세이 쇼나곤에 대해  '거만한 얼굴로 잘난 척하는 여성', '혼자 똑똑한 척 한자를 써대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무라사키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이런 궁중 생활은 《겐지 이야기》에 많은 모티프를 제공했다. 친정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궁 쇼시의 부름으로 다시 궁에 들어간 무라사키는 순탄치 않은 궁중에서의 생활을 《겐지 이야기》를 쓰는 데 몰두하면서 이겨 냈다.   이 작품은 무라사키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썼다고도 하는데, 이 작품의 초안을 본 후지와라 미치나가가 그녀의 학문 수준을 높이 사 궁중 여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소설을 지으라는 쇼시의 명으로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 설에 따르면 그녀는 명을 받고 이야기를 구상하기 위해 이시야마데라(石山寺)라는 절에 7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던 무라사키는 달 밝은 밤 호수의 수면에 떠 있는 달빛을 무심히 바라보다 빛과 같은 존재인 히카루라는 귀공자의 이야기를 구상해 냈다. 이 설화를 토대로 이시야마데라에는 그녀가 《겐지 이야기》를 집필했다고 전하는 방도 보존되어 있다.   《겐지 이야기》는 기리쓰보 천황의 둘째 황자인 히카루 겐지의 연애담과 궁중 생활, 겐지 사후 자손들의 이야기를 담은 후일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4대 천황, 7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나는 일로, 일대기적 모노가타리들과 795수의 와카(和歌, 일본의 정형시)로 구성된, 200자 원고지 4천 매가 넘는 세계 최고(最古), 최장(最長)의 작품이다.   인물들이 지닌 욕망과 그들의 세밀한 심리 묘사, 궁정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암투와 사건들이 현대소설만큼이나 짜임새 있고 현실감 넘치게 그려져 있으며, 작품 전반에 인간의 운명과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이 빛난다.   기존의 단순한 설화식 이야기 구조에서 탈피해 견고한 구성을 갖추고 다양한 인간 유형을 그린 최초의 소설 작품으로, 이런 소설적 표현 방식은 후대의 역사소설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미려하고 한시적인 문장들 역시 일본의 서정시인 와카와 렌카(連歌, 와카를 토대로 발전한 시 형식으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창작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등 일본 문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겐지 이야기》를 통해 이룩한 성과는 서양에서는 8세기나 지난 후에야 가능했다.   - 청아출판사(이하닝 글)에서  
2011    "불쌍한 시인", "저주받는 시인", "상인 탐험가 시인" 댓글:  조회:4065  추천:0  2017-02-02
         가을의 노래                                                                                        포올 베를렌느 가을날 비오롱의 긴~오열이 내가슴을 울리고 지나간다.  종 소리가 울리면 숨막히고  먼~날을 추억하며 눈물에 젖는다. 그리하여 나는 간다.  모진 바람이 휘몰아 치는 곳으로  이리 저리 마치 낙엽처럼.  그리운 이에게 낙엽 지는 소리를 들려 주고싶은 시인의 바램으로  메마른 조국의 산하에서 탄압 받는 동포들에게 자유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낙엽 떨어지는 이 가을에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애국동지들께  자유와 정의, 예술이 숨 쉬는 새 조국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베를렌느( Paul Verlaine,1844-1896)   흔히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베를렌느는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와 같은 상징주의 시인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으로서보다, 그의 이름에는 거의 언제나 천재 시인 랭보와의 염문, 그로 인해서 비롯된 방탕한 생활, 감옥 생활, 술과 가난에 찌들어버린 비참한 생활이 따라 다닐 뿐이었다. 그 자신이 말했듯이 한마디로 그는 '저주받은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뽈 베를렌느 Paul Verlaine의 철자를 바꾸어  '불쌍한 렐리양Pauvre Lelian'이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했었다.   그는 그 자신이 의 제목으로 쓴 적이 있는 「오 슬픈, 슬픈 내 영혼」처럼 비극적이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 ///////////////////////////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년 10월 20일 – 1891년 11월 10일 프랑스의 시인이다. 아르덴 주의 샤를빌(지금의 샤를빌메지에르)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보병 대위이고 모친은 지주의 딸이었다. 학창시절에는 뛰어난 모범생이었으나, 차차 반항적으로 되었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방랑도 하게 되어 16세로 학업을 포기한다.   이 전후에 쓴 여러 시에는 그의 그리스도교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과격한 혐오감이 가득 차 있다.   1871년 5월에 유명한 '보는 자(Voyant. 천리안이라는 뜻)의 설(說)'을 을 제창하여 이 새로운 문학적 실험에 들어갔다.   얼마 뒤 《주정선》을 쓰고서는 베를렌느를 만나려고 파리로 나온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아 여러 곳을 방랑하면서 파멸적인 생활을 보냈다.   브뤼셀의 권총 저격사건으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이 2년간의 이상한 체험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훌륭하게 정착되어 있다.   이때부터 그는 문학의 열의가 차츰 식어 실제적인 직업을 구하고자 분주하게 다닌 한편 환상적인 《일루미나 시옹》(1886) 산문은 대부분 이 시기에 썼다고 추정된다.   이 산문 시집은 《지옥의 계절》과 함께 프랑스 산문시의 최고봉을 이룬다고 하지만, 후자는 거친 그림자를 숨기고 그의 상상력에 의하여 해체된 현실이 보다 높은 차원의 시적 현실에 다시 구축되고 있다.   이미지의 풍요로움과 신선함은 다른 시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20세가 넘어서부터는 문학을 단념하여 시를 황금과 상품으로 맞바꾸어 유럽, 근동 아프리카를 무대로 상인 탐험가가 되어 파란 많은 후반생을 보냈다.   조숙한 천재 시인 랭보의 영향은 상징주의와 쉬르레알리즘을 뚫어서 현대시에도 파급하여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감 각 /아르튀르 랭보   여름의 파아란 저녁때면 나는 오솔길을 걸으리. 보리에 찔리며, 잔풀을 짓밟으며,  그 시원함을 발에서 느끼고. 내 맨 머리를 바람에 씻으리.  나는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리, 그래도 사랑이 내 영혼 속에서 끝없이 솟아 오르리, 그리고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자연속을,  마치 여자와 함께 가듯 행복히.         
2010    중국 당나라 "시사(詩史)의 시인 - 두보 댓글:  조회:4621  추천:0  2017-02-02
  출생일 712년 사망일 770년 국적 중국 대표작 〈춘망〉, 〈월야〉, 〈애왕손〉, 〈애강두〉, 〈병거행〉 등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장편 고체시를 확립했으며 그의 시는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의 '시사'라고 불린다.   두보 두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당시(唐詩)는 이후 시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지는 중국 문학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심에 두보가 있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 스티븐 오웬이 두보에 대해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운 시인'이라고 평할 정도로, 두보는 한시의 내용과 형식 양쪽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고체시, 근체시 등 모든 시 형식을 실험했으며, 이를 토대로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을 지닌 율시라는 형식을 창안하고 완성시켰다. 특히 인간의 심리와 자연 만물의 새로운 면을 포착하는 데 탁월했으며, 그런 한편 당대의 사회 모순과 백성들의 고초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7세기 궁중 모임에서 사교술이나 유희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시가 당나라 때 의식 있는 예술 형태로 변모한 것은 두보의 이런 현실 참여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두보의 시와 정신은 중국 시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두보는 민중의 시인으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두보는 712년 중국 하남의 공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다. 진(晉)나라 시대의 장군이자 학자인 두예를 13대 선조로 두고 있으며, 측천무후 시대 명망 높은 시인이자 학자였던 두심언의 손자이기도 하다. 두보는 자신의 집안이 명문이라는 점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조정에 출사해 집안의 명망을 높이겠다는 공명심(功名心)이 남달랐다고 한다. 3세가 되기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이하면서 낙양에 사는 고모가 그를 길렀다. 어린 시절 그는 허약한 체질로 잔병 치레를 많이 해서 집 안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고전을 공부하고 시문을 연습하며 성장했다. 7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9세 때 서예를 했고, 15세 무렵에는 낙양의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교유할 정도로 학문과 시에 자질이 뛰어났다. 이 때문인지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두보는 20세 무렵부터 약 4년간 오월 지방으로 유람을 떠나 명승고적을 둘러보며 시를 짓고 이름을 날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문학 수업을 하고, 시를 지어 곳곳의 명망 높은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들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선비들은 청년이 되면 명승 유람을 다니곤 했다. 두보와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이백 24세 때 낙양으로 돌아와 과거를 치렀으나 낙방했는데, 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달했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다시 그는 황허 하류의 제조 지역으로 유람을 떠났다. 두보는 4년 후에 돌아와 선산이 있는 낙양 외곽의 수양산 기슭에 토굴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서 사농소경이라는 관직에 있던 양이(楊怡)의 딸 양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두보는 열 살 정도 어렸던 아내 양씨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당시 선비들이 흔히 첩을 두던 풍속과 달리 첩도 두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아내를 늘 데리고 다녔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가 담긴 시를 짓곤 했다. 수양산 기슭에서 살면서 그는 낙양으로 와서 관리가 되기 위한 연줄을 찾아다니고, 선비들과 교제하면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낙양에 나온 지 2년, 가는 곳마다 계략과 조작뿐이구나."라고 한탄했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으며, 그마저도 기회가 많지 않아 친척이나 고관들의 줄을 이용해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했던 듯한데, 그런 자신의 처지와 당대 현실에 대한 한탄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 양귀비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쫓겨 온 이백을 만나 교유하고, 이백을 따라 약 1년간 유람길에 올랐다. 35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수도 장안으로 갔으나, 생활은 낙양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보통 선비들이 고향 집에 아내를 두고 홀로 장안에 올라오는 것과 달리 두보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고생이 훨씬 더했다. '아침에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공자들의 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남은 술과 식은 고기를 먹는' 생활을 한 지 10년 만인 751년, 두보는 드디어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당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쳐 칭찬을 받고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로 출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몇 년간 자신에게 보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755년에야 지방 말단 관리인 병조참군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오르기 전까지 곤궁에 시달리며 천거해 달라고 읍소하고, 편지를 쓰는 등 고생이 많았는데, 관직 생활마저 순탄치 않았다. 관직에 제수되자마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해 극심한 기근으로 가족들을 봉선의 친척 집에 맡겨 둔 두보는 관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리러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홀로 장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안이 곧 반란군에 함락되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현종이 양위하여 황태자 숙종이 즉위했다. 두보는 숙종이 있는 닝샤 성으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에서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마음, 망국에 대한 설움과 황실에 대한 충정을 표현한 시를 많이 지었다. 그중 〈춘망(春望)〉, 〈월야(月夜)〉, 〈애왕손(哀王孫)〉, 〈애강두(哀江頭)〉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음중팔선도 두보의 〈음중팔선가〉를 옮긴 그림. 여덟 신선이 술을 마시며 세속의 일을 한탄하며 시를 짓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 한편 장안에서 10년간 살면서, 또 안녹산의 난을 거치면서 두보는 현종과 귀족들이 호의호식하고 지내는 동안 백성은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두보가 남긴 시는 약 1,500수에 이르는데, 34세 이전에 쓴 시 중 약 20여 수가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그 이후에 쓴 것들이다. 이 작품 중 많은 수가 그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질곡과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회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린 것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인 〈병거행(兵車行)〉은 751년 남조, 대식, 거란과의 전쟁으로 농민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무거운 조세에 시달리는 고통을 묘사한 시이다.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는 754년에 일어난 대기근으로 백성은 굶어죽는데, 현종은 양귀비와 고관들을 데리고 온천 등지를 유람하는 것에 탄식하며 쓴 시이다.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이렇듯 사회 비판적인 시와 황실에 대한 충정을 바친 시를 동시에 썼다는 점은 얼핏 보아도 꽤 모순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두보가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관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살았던 당시의 일반적인 사대부였음을 생각하면, 딱히 위선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하기는 어렵다. 위로는 황실에 충성하고, 아래로는 제도적 불합리함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을 제도 개혁을 통해 구제해야겠다는 관료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이런 사회 비판적인 시들이 후대에 관료의 귀감으로 여겨지면서 선비들의 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아이러니해 보일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757년, 반란군에 내분이 일어나 안녹산이 살해되었고, 두보는 장안을 탈출해 숙종에게 갔다. 그 공으로 좌습유에 임명되어, 숙종이 장안을 탈환하고 복귀한 후 잠시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두보는 가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황실에 대한 충성을 그린 〈구성궁(九成宮)〉, 〈옥화궁(玉華宮)〉, 〈행차소릉(行次昭陵)〉, 〈강촌삼수(江村三首)〉, 〈북정(北征)〉 등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그는 곧 조정에 자신의 의견이 개진되지 않고 중앙 관료 생활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사공참군 직책을 받고 화주로 좌천되었다. 759년, 사사명이 이끄는 안녹산 반란군의 잔당이 일어나 다시 전란이 시작되었고, 두보는 관직을 버리고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백성의 고난을 노래한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등을, 쓰촨성 피난길을 그린 기행시들과 동곡에서의 피난 생활을 그린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乾元中遇居同谷縣作歌七首)〉 등을 지었다. 잠시 쓰촨 지방에서 초당을 마련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때는 자연 생활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763년에 난이 완전히 진압되고, 764년 두보는 엄무의 후원으로 절도참모(節度參謀) 겸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변 관료들과 잘 맞지 않았고, 이전부터 앓고 있던 폐병이 악화되어 이듬해 사퇴했다. 몇 달 후 엄무가 사망하자 그 덕분에 기반을 잡았던 쓰촨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두보는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폐병에 중풍까지 들어 한곳에서 몇 달씩 요양을 하다가 떠돌아다니기를 반복했다. 이 시기에 지은 시들에는 공명에 대한 결기로 비장한 어조가 엿보이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늙고 병들어 우수에 젖어 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세상에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시로써 마음을 달래던 두보. 두보는 770년 겨울 탄저우에서 웨양으로 향하던 길에 쓸쓸히 사망했다. 시신은 웨양 지방에 묻혔으나 43년이 지나 손자 두사업에 의해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곁으로 이장되었다. 杜甫 (두보 712-770)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장편 고체시를 확립했으며 그의 시는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의 '시사'라고 불린다.   두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당시(唐詩)는 이후 시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지는 중국 문학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심에 두보가 있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 스티븐 오웬이 두보에 대해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운 시인'이라고 평할 정도로, 두보는 한시의 내용과 형식 양쪽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고체시, 근체시 등 모든 시 형식을 실험했으며, 이를 토대로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을 지닌 율시라는 형식을 창안하고 완성시켰다.   특히 인간의 심리와 자연 만물의 새로운 면을 포착하는 데 탁월했으며, 그런 한편 당대의 사회 모순과 백성들의 고초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7세기 궁중 모임에서 사교술이나 유희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시가 당나라 때 의식 있는 예술 형태로 변모한 것은 두보의 이런 현실 참여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두보의 시와 정신은 중국 시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두보는 민중의 시인으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두보는 712년 중국 하남의 공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다.   진(晉)나라 시대의 장군이자 학자인 두예를 13대 선조로 두고 있으며, 측천무후 시대 명망 높은 시인이자 학자였던 두심언의 손자이기도 하다.   두보는 자신의 집안이 명문이라는 점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조정에 출사해 집안의 명망을 높이겠다는 공명심(功名心)이 남달랐다고 한다.   3세가 되기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이하면서 낙양에 사는 고모가 그를 길렀다.   어린 시절 그는 허약한 체질로 잔병 치레를 많이 해서 집 안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고전을 공부하고 시문을 연습하며 성장했다.   7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9세 때 서예를 했고,   15세 무렵에는 낙양의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교유할 정도로 학문과 시에 자질이 뛰어났다. 이 때문인지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두보는 20세 무렵부터 약 4년간 오월 지방으로 유람을 떠나 명승고적을 둘러보며 시를 짓고 이름을 날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문학 수업을 하고, 시를 지어 곳곳의 명망 높은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들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선비들은 청년이 되면 명승 유람을 다니곤 했다.   24세 때 낙양으로 돌아와 과거를 치렀으나 낙방했는데, 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달했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다시 그는 황허 하류의 제조 지역으로 유람을 떠났다.   두보는 4년 후에 돌아와 선산이 있는 낙양 외곽의 수양산 기슭에 토굴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서 사농소경이라는 관직에 있던 양이(楊怡)의 딸 양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두보는 열 살 정도 어렸던 아내 양씨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당시 선비들이 흔히 첩을 두던 풍속과 달리 첩 도 두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아내를 늘 데리고 다녔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가 담긴 시를 짓곤 했다.   수양산 기슭에서 살면서 그는 낙양으로 와서 관리가 되기 위한 연줄을 찾아다니고, 선비들과 교제하면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낙양에 나온 지 2년, 가는 곳마다 계략과 조작뿐이구나." 라고 한탄했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으며, 그마저도 기회가 많지 않아 친척이나 고관들의 줄을 이용해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했던 듯한데, 그런 자신의 처지와 당대 현실에 대한 한탄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 양귀비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쫓겨 온 이백을 만나 교유하고, 이백을 따라 약 1년간 유람길에 올랐다.   35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수도 장안으로 갔으나, 생활은 낙양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보통 선비들이 고향 집에 아내를 두고 홀로 장안에 올라오는 것과 달리 두보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고생이 훨씬 더했다.    '아침에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공자들의 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남은 술과 식은 고기를 먹는' 생활을 한 지 10년 만인 751년, 두보는 드디어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당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쳐 칭찬을 받고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로 출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몇 년간 자신에게 보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755년에야 지방 말단 관리인 병조참군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오르기 전까지 곤궁에 시달리며 천거해 달라고 읍소하고, 편지를 쓰는 등 고생이 많았는데, 관직 생활마저 순탄치 않았다.   관직에 제수되자마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해 극심한 기근으로 가족들을 봉선의 친척 집에 맡겨 둔 두보는 관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리러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홀로 장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안이 곧 반란군에 함락되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현종이 양위하여 황태자 숙종이 즉위했다.   두보는 숙종이 있는 닝샤 성으로 가다가 반 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에서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마음, 망국에 대한 설움과 황실에 대한 충정을 표현한 시를 많이 지었다.   그중 〈춘망(春望)〉, 〈월야(月夜)〉,
2009    "영문학의 아버지" 영국 시인 - 초서 댓글:  조회:4653  추천:1  2017-02-02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     프랑스 시의 작시법을 영어에 적용한 최초의 작가로 영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해학적인 필치가 특징이다.    초서는 영국의 시인으로, 근대 영시의 창시자이자 영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런던 지방 방언으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한 최초의 작가로, 앵글로 색슨의 문화적 바탕 위에 유럽의 문학 양식을 접목시켜 영시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프랑스 시의 작시법을 영어에 적용함으로써 영어를 보다 세련된 문학어로 만들고, 각지의 방언이 난립하던 중세 후기에 문학적 표준이 되는 영어의 기초를 세우면서 영문학의 초석을 놓았다. 이후 영문학은 유럽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프리 초서는 1340년대 초 영국 런던에서 대대로 포도주 도매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라틴어와 프랑스어, 자연과학, 고전 등 고급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17세 무렵에는 에드워드 3세의 차남 라이오넬의 아내인 얼스터 백작부인의 수행원으로 일했다. 당시 상인이나 지식인 계층에서는 자녀들을 귀족 가문에 수행원으로 들여보내 왕실의 고급 교육을 받게 하고 후일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인맥을 맺게 하는 일이 많았다. 초서는 백작부인의 수행원으로 활동하며 영향력 있는 귀족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서 시를 짓고 고전을 낭독하면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초서는 궁중에서 유행하던 프랑스 시 〈장미 이야기〉를 영역하기도 하고, 기사도와 궁정 연애를 주제로 한 〈공작부인의 책〉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공작부인의 책〉은 1369년 후원자였던 랭커스터 공작부인 블랑슈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쓴 장시이다. 프랑스 문학 양식이 엿보이고 묘사 방식이 인습적이지만, 초서 작품의 특징이라 할 만한 해학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필치, 인물의 개성 어린 묘사 등이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이다. 그는 이 무렵 이미 프랑스 시의 형식을 영어에 접목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359년, 당시는 백년전쟁(프랑스와 영국 간에 벌어진 왕위 쟁탈 전쟁)의 초기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고자 영국 해협을 건넜다. 초서는 랭스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프랑스군에 포로로 사로잡혀 몸값을 주고 풀려났다. 그리고 얼마 후 프랑스와 영국의 평화협정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 시기부터 초서는 고위 공직 생활을 영위한다. 어린 시절부터 궁중 생활을 해서 궁정 문화에 정통한 데다 뛰어난 지력과 활동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왕비의 수행원이었던 아내가 왕실의 신임을 받은 덕분이기도 했다.   초서는 1360년대 중반 에스파냐, 플랑드르, 프랑스 등지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으며, 1374년에는 런던 항구의 세관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그를 신임했던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를 이은 다음에도 웨스트민스터, 런던 탑 등 국가적 공사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치안판사직도 역임했다.   리처드 2세를 퇴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헨리 4세 시절에도 직위와 연금을 보장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평민으로서 웨스트민스터에 묻힌 인물은 초서가 최초였다.   초서는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작품을 쓰고, 유럽의 고전 및 문학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했다.   대표적으로 〈영예의 궁전〉, 〈새들의 의회〉, 〈트로일루스와 크리세이드〉 등의 시집이 있으며, 고대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등을 번역했다.   작품 생활 초기에는 당시 영국 궁중에서 유행하던 프랑스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후일 이탈리아에 외교 사절로 갔다가 보카치오와 단테의 작품을 접하면서 이탈리아 문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초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서사 방식과 구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초서는 보카치오의 〈테세이드〉를 요약하여 중세의 로맨스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후일 〈캔터베리 이야기〉 속에 '기사 이야기'로 삽입되기도 한다.   또한 보카치오의 〈일 필로스트라토〉를 번안하여 중세 로맨스로 재탄생시켰는데, 이 작품이 〈트로일루스와 크리세이드〉이다. 이들 작품에서도 초서 특유의 인간미와 유머 감각, 해학적인 필치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강렬하고 입체적이어서 원작과는 그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때문에 단순한 모방을 뛰어넘은 역작으로 평가된다.   초서의 대표작이자 영문학의 고전인 《캔터베리 이야기》는 1387년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당초 120편으로 구상했으나 초서의 죽음으로 총 24편만이 쓰여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이 작품은 후일 중세 유럽 문학의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배경이 된 캔터베리 대성당 어느 해 봄, 순교자 토마스 베케트의 묘소가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참배하러 떠난 사람들이 런던 남부 서더크에 있는 한 여관에 묵게 된다. 여관 주인을 포함해 총 31명의 순례자들이 한 명씩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중세 사회의 최상위 계층인 기사부터 수녀원장, 수도사, 상인, 대학생, 변호사, 의사, 농부, 방앗간 주인, 면죄부 판매인, 최하층인 거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성격과 삶의 방식에 따라 교훈적인 이야기부터 음담패설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를 쏟아낸다. 각 이야기들은 일견 두서없어 보이지만, 작품 전체적으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인물 하나하나는 외모, 성격, 말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영국의 신비주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초서의 인물들은 수세대에 걸쳐 살아 있다. 우리는 모두 캔터베리로의 순례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캔터베리 이야기》 속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설화 문학의 모든 장르가 집약된 작품으로, 종교, 가치관, 풍속, 사회제도, 문화 등 당대 영국의 사회상을 통찰력 있게 조망하여 '중세의 파노라마'라고도 불린다.   또한 초서는 무엇보다 해학적인 필치로 인간과 인생에 내포된 희비극과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탁월했는데, 《캔터베리 이야기》를 계기로 문학은 그때까지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진 지식인의 언어로 쓰이던 데서 탈피해 일상 언어로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초서는 이 작품을 통해 모국어인 영어의 문학적 표현력을 확장시켰으며, 문학의 표현 방식, 즉 문학의 기준을 재규정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의 교량이자 현대 서사시의 초석으로 평가받는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  
2008    "시인 중의 시인" 독일 시인 - 프리드리히 휠덜린 댓글:  조회:4846  추천:0  2017-02-02
  Friedrich Hölderlin (프리드리히 휠덜린 1770-1843)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의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   휠덜린은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를 '가장 독일적인 시인',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했다.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상생하던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삼아 시를 쓴 대표적인 고전주의자로, 단순히 그리스 고전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평생을 정신질환자로 보낸 불우하고 광기에 찬 천재로도 유명하다.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1770년 3월 20일 독일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에 있는 라우펜 암 네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수도원 관리인으로, 그가 2세 때 돌연사했다. 4세 때 어머니가 라우펜의 서기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와 재혼했고, 고크는 그로부터 2년 후 뉘르팅겐의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크마저도 3년 후 피로와 폐렴으로 사망했다. 횔덜린의 형제로는 친여동생 하인리케와 이복동생 카를 크리스토프 고크가 있었다.   횔덜린은 6세 때 뉘르팅겐의 라틴어 학교에서 교양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14세 때 덴켄도르프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가 아들이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16세 때에는 마울브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헤르만 헤세가 14세 때 입학하여 7개월 만에 자퇴한 곳으로도,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하는 수도원 학교로도 유명하다.   18세 때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훗날 19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는 헤겔, 셸링 등과 교유했다. 또한 시인 동맹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히페리온》을 구상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횔덜린은 혁명이 부르짖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심취하였다. 여기에는 '경건한 자코뱅당원'으로 불리던 헤겔의 영향도 있었다. 두 사람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사건을 논평하는 정치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지만,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 이후 유혈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면서 혁명에 회의를 느꼈다. 또한 이 시기 루소, 칸트, 스피노자 등의 사상을 접하면서 점차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 졸업시험을 보고 나서 약 10년간 가정교사를 전전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횔덜린 자필 방명록 1794년 6월, 대학 졸업시험을 치른 뒤 횔덜린은 12월부터 1년간 발터스하우젠의 샤를로테 폰 칼프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곤타르트의 아내인 주제테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주제테는 이후 《히페리온》을 비롯해 횔덜린의 많은 작품에 '디오티마'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디오티마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794년에 횔덜린은 실러에게 〈히페리온 단편〉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낸 적이 있는데, 주제테를 만난 뒤 그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797년 《히페리온》 1부가 출간되었다.    '그리스의 은둔자'라는 부제가 붙은 《히페리온》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 철학, 정신을 비롯해 국가와 투쟁 문제, 사랑, 선(善), 미(美), 민중, 신(神)적인 것에 대한 전 방위적인 통찰이 담긴 작품으로, 그리스적인 형식미와 독일적인 사상이 융화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풍부한 리듬감, 운율법으로 소설의 형식미를 뛰어넘은, 장편소설의 관례를 따르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스 독립전쟁 전야에 히페리온이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형식의 글로, 자아와 세계 속에서 여러 모순을 경험하고 신적인 것과의 일체감 속에서 구원을 찾아가는 청년의 내면적 발전이 주요 제제이다. 이 작품에서 디오티마는 히페리온에게서 시인과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의 내적 여정을 이끄는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1799년에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와 《히페리온》 2부를 발표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5세기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로 에트나 산의 화구에 투신자살한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와 시인이 세계에서 경험한 신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여 쓴 단편비극이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다. 이는 군주제 아래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되고, 민중은 지배층에 대한 예속과 그로부터의 탄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대를 말한다. 이에 신성(神聖)보다 권력을, 정신보다는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시인이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자라고 여겼으며, 인간, 자연, 신이 조화를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사고에 의해 쓰인 대표적인 작품이 《히페리온》과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다.   1843년 6월 7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튀빙겐 묘지에 안장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 릴케, 첼란 등에 의해 재발견되어 선구적인 시인으로 여겨지면서 독일의 위대한 현대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 =======================   삶의 절반 /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담백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빵과 포도주] 박설호 옮김, 민음사, 1997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횔덜린이 생전에 쓴 시 ‘운명’의 일부분인 이 시구는 횔덜린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이 짧은 시구는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횔덜린의 일생을 요약적으로 보여 준다. 시인이라는 소명을 투철하게 살다 간 시인 횔덜린. 젊은 시절 횔덜린의 둘레를 둘러싼 것은 고독과 좌절이었고, 반생(半生)을 산 이후 횔덜린을 포박한 것은 정신 질환이었다. 1770년 네카어 강변의 라우펜(Lauffen)에서 출생한 그는 1806년부터 정신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그를 최후까지 돌본 이는 횔덜린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튀빙겐의 목수 에른스트 치머(Ernst Zimmer)였다. 횔덜린은1843년 타계할 때까지 반구형의 옥탑방에서 치머 일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유폐 생활을 하면서도, 의식장애의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 시간관념을 잃고 지내면서도 방문객들에게 짧은 시를 지어 헌정하는 등 시인의 직업을 끝까지 천직으로 알고 시의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이야말로 "시인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다. 횔덜린이 보여 준 시 쓰기에서의 엄밀성(한 평자는 "횔덜린의 시에는 '법칙적 계산'이 깔려 있고, 그에게 시는 공예와 같았으며, 매우 정밀한 구성을 자랑한다."라고 말했다.)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지만 시인의 직분과 소명에 대해 횔덜린만큼 절박하게 고민한 시인은 일찍이 없었다는 찬사라 할 것이다. 가령, 횔덜린이 "나는 모르겠노라.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빵과 포도주’ 제7편)라고 썼을 때 이 질문에는 18세기 말 전제정치하에 놓여 있던 독일의 현실 사회를 매섭게 비판하는 시인의 절규, 그리고 그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인의 사명감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횔덜린은 물신주의와 속물 의식을 내몰고, "축복의 요람" 그리스의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주의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구현하고자 "종종 울면서 분노"했다. 그것은 고귀하고 "다정한 정신"이며, "사악한 혼란의 죄를 다시금 씻어 주"는 "사랑스럽고 해맑은 평화"였다. 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신성(神性)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그의 조국을 향해 부르짖듯이 열렬히 노래했다. "어리석은 아이가 목마를 타고 앉아,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아이를 비웃지 말라,/ 오 너희 선한 사람들이여! 또한 우리들 역시/ 행위는 부족하고, 사고는 풍부하구나!"('독일 사람들에게')라고.       횔덜린이 스케치로 그려낸 자화상(1842)   이 시는 1803년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압도하는 정서는 비감(悲感)이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는 횔덜린이 고결하게 사랑했던 여인, 주제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의 죽음이 놓여 있다. 횔덜린은 주제테 곤타르트를 '디오티마(Diotima)'라고 불렀다. '디오티마'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대의 노랫가락이/ 나의 감각을 점점 맑게 씻어 주어/ 내 음울한 꿈들은 달아나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라고 썼다. 이런 대목은 횔덜린이 주제테 곤타르트에게서 그리스적인 아름다움과 이상을 발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에게 "아름다운 태양"이었으며 "찬란한 빛"이었던 이 여인이 이제 지상에 없다. 1연이 사랑의 시간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2연은 실연의 시간, 사지(死地)에 해당한다. 사랑의 화신, 사랑의 여사제의 죽음은 시적 화자에게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연시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는 생성과 소멸, 행복과 불행, 지상적 삶과 천상적 삶이 대비되어 있으며, 그 양쪽의 차가운 경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일생의 후반부를 살아가야 할 시적 화자가 천상적인 존재 혹은 신성,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지상적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받으려는 간절한 기도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횔덜린의 작품들은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했다. 그에게 자연은 신화화된 자연이었으며,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대상이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을 향해 "만약 대가가 너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면, /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젊은 시인들에게')라고 권장했으며, "친밀한 정경이여! 복판으로/길이 평평하게 꿰뚫어 가고/ 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곳에/ 저녁 바람이 불어오며/자연은 간결하게 서 있고/ 산들이 숭고하게 서 있는 곳에/ 나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네"('즐거운 삶')라고 노래했다. 자연의 광휘를 찬탄했으며 자연과 인간이"하나의 무한한 전체"로 결합되는 것을 소원한 이가 바로 "시인의 시인" 횔덜린이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3.20~1843.6.7) 1770년 슈바벤의 네카어강변 라우펜(Lauffen am Neckar)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덴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 학교, 마울브론 수도원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작(詩作),헤겔, 셸링등의 학우들과의 교류에 열중하였다. 1789년 시인 슈토이들린, 슈바르트등과 사귀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졸업 후 프리드리히 실러의 소개로 가정교사가 되었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부인 주제테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및 그 밖의 많은 시편에 등장하였다. 3년 후 이별을 하고 함부르크, 고향, 슈투트가르트, 보르도 등지를 방랑하였는데, 이 시기 맹렬한 창작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시들이 쓰였다. 1802년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고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디오티마],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귀향], [라인강], [유일자], [파트모스] 등의 걸작이 있다.       /글 문태준 |  
2007    영국 랑만주의 시인 - 윌리엄 블레이크 댓글:  조회:6986  추천:0  2017-02-02
윌리엄 블레이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윌리엄 블레이크 출생 1757년 11월 28일 영국, 런던 사망 1827년 8월 12일 (69세) 직업 시인, 화가, 판화 제작자, 편집장 장르 환상적, Poetry 사조 낭만주의 대표작 《순수와 경험의 노래》(Songs of Innocence and of Experience),《천국과 지옥의 결혼》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네 조아들》(Vala, or The Four Zoas),《예루살렘》 (Jerusalem: The Emanation of the Giant Albion), 《밀턴》 (Milton a Poem), 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 Poetical Sketches, The French Reuolution , The Book of Los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년 11월 28일 - 1827년 8월 12일)는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이다. 신비와 공상으로 얽힌 화가로서 시작(詩作)과 회화를 발표했다. 블레이크는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자연의 외관만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다. 또 일반으로 보는 무감동한 작품을 부정하여, 대개 이론을 벗어나서 묵상 중에 상상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그린다. 런던의 양말 공장 직공의 아들로 교육도 거의 독학으로 이루었다. 14세 때에 판화가의 제자가 되어 고찰(古刹)의 조각이나 중세의 사본을 만들어, 그것이 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25세 때에 결혼했고 회화에서는 유화를 꺼리고 수채화야말로 최고의 표현이라 생각하여 시화집을 만들어 간행했으며, 페이지마다 그림을 넣어 판각만의 자력만으로 창조한 색채 인쇄까지 했다. 런던에서 생애를 보냈고 그 시화집에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0), 《경험의 노래》(1794) 등이 있으며, 기독교 성경 내용에 신비한 사색을 곁들인 《욥기》(1825)가 유명하다. 블레이크는 만년에 다시 단테의 《신곡》에 100매의 삽화를 기도했으나 미완성으로 그쳤다. 이 밖에 프레스코라고 자칭한, 실은 템페라의 회화가 있으나 삽화를 다른 회화와 나란히 견줄 만큼 인식시킨 것은 블레이크이다. 그의 순정을 담은 시작은 청순을 나타내지만, 그밖의 시화에서는 괴이한 신비가 나타나고 상식에 기초한 기법이 아니므로 그 선묘(線描)나 음영에서 생생히 호소하는 설득력을 나타내어,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감각에 연결된다. ======================== 요약 1757. 11. 28 런던~ 1827. 8. 12 런던. 영국의 시인·화가·판화가·신비주의자.   서유럽 문화전통에서 매우 독창적·독자적인 작품〈순수의 노래 Songs of Innocence〉(1789)·〈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1794)를 필두로 삽화를 그려넣은 일련의 서정시와 서사시를 남겼다. 오늘날에는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회화에서는 블레이크는 색보다 선을 강조해서 '딱딱한 느낌의 곧은 선'을 즐겨 썼다. 뛰어난 직관력으로 궁극적으로는 상상하여 창조한 미술작품이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했다. 판화·수채화·템페라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결 모양의 윤곽에서 느껴지는 율동적인 생동감, 위풍당당한 단순함을 지닌 특이한 형상, 극적인 효과와 독창성을 지닌 몸짓으로 유명하다. ///////////////////////////////////////////////////       윌리엄 블레이크 초상화. 뛰어난 예술성을 가지고 당시 상식으로 통용되던 과학만능주의에 반기를 들어 신비주의와 낭만주의를 위해 매진했지만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동시대인으로부터 외면당한 불운한 아티스트였다.     반전의 예술사 - 윌리엄 블레이크   유한과 무한의 문틈 사이에서 질식사한 시대착오적 천재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비록 그 모습이 외부에서 찾아온 듯 보이지만 실은 내면에서, 당신의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유한한 세상은 단지 그것을 비추는 그림자일 뿐. -윌리엄 블레이크   얼마 전 작고한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열혈 추종자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이나 화집을 펼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윌리엄 블레이크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이렇게 대놓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팬” 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았다. 잡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던 이 천재를 그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미치광이’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욥과 그의 가족     신전 앞의 사탄.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읽어주는 성경을 주된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던 블레이크는 끊임없이 성경의 세계를 묘사했다. 그러나 원근법이라든가 과학적인 세부묘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칭 모드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상징들을 구도에 적용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했다.     가장 더러운 곳에서 태어난 가장 순수한 소망 윌리엄 블레이크는 1757년 태어나 1827년 사망했다. 인류의 운명에 극적인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그가 살아있던 시기에 한꺼번에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낭만주의가 전 유럽을 뒤덮었으며, 윌리엄 블레이크가 살던 런던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소수의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 산업화는 기계화를 이룬 공장이 가내수공업을 대신하며 겉으로 보기에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든 듯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이 시기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실상은 겉보기와 달랐다. 다수의 민중의 삶은 오히려 산업화 이전보다 훨씬 더 곤궁해졌던 것이다. 농촌의 농부들은 소유주로부터 내쫓겨 도시로 찾아와 빈민층 노동자로 전락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영국의 수도 런던의 뒷골목은 거지와 병자, 창녀들로 북적거렸다.   블레이크는 이러한 런던의 한가운데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양말 장수였고, 일곱 명의 아이들 중 셋째로 태어났지만 그중 두 명은 병으로 어릴 때 사망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 비범한 영적 능력을 소유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창가에서 천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 언덕에 올라가 하늘을 손으로 직접 만진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가 처한 우울한 현실세계에 대한 지독한 거부 반응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어쨌거나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을 초월한 지고한 존재를 만나는 이러한 환상 체험은 훗날 그의 예술세계의 모태가 되지만, 반대로 왜 그가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빈민층 자식들이 흔히 그러하듯, 윌리엄 또한 온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쓰기와 읽기를 배운 것이 전부였으며, 그나마도 학교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이루어졌다. 독실한 신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성경을 열성적으로 읽어줬는데, 윌리엄은 어머니가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묘사하곤 했다. 미술을 따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 윌리엄의 그림은 이미 그의 천재성을 드러냈다. 결국 신동 화가 의 소문은 빈민가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런던 시내를 뒤덮었고, 열네살이 되던 해 그는 당대 판화가 제임스 바자이어의 제자로 입문하게 된다. 바자이어의 밑에서 지내는 7년 동안 윌리엄은 건축, 조각을 위한 스케치와 판화 기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윌리엄의 도제 기간은 그의 스승에게는 실로 인내의 시간이었다. 윌리엄은 그다지 고분고분하거나 차분한 성격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분출하는 성마른 젊은이였다. 게다가 바자이어의 판화는 솔직히 말해 유행에 뒤진 고루한 스타일이었고, 제자는 자신이 느낀 감상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어 스승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그럼에도 바자이어가 윌리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었다. 도제 말년에 바자이어는 런던에 있는 고딕 양식의 교회들을 습작하도록 했다. 여러 교회 중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윌리엄에게 결정적인 감흥과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   스승의 추천으로 1778년 윌리엄 블레이크는 로열 아카데미 미술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정통 엘리트 교육을 지향하는 왕립 미술원의 교육은 그러나 어린 시절 빈민촌의 경험이나 교회로부터 받은 영감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6년의 교육을 마치고 졸업한 뒤 윌리엄 블레이크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던 바로 그해, 1789년 ‘순수의 노래(Song of Innocence)’ 를 발간하며 예술계에 데뷔했다. 워낙 글과 그림 양쪽 모두에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의 첫 작품은 자신이 직접 지은 시집에 직접 삽화를 그려 넣은 것이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순간을 통해 영원을 보라. -‘순수의 전조’     세상의 모든 순수와 사랑을 있는 대로 다 담을 듯이 순결하고 아름답게 시작되는 이 시는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천상에서 내려와 블레이크가 경험한 삶의 어두운 면을 가감 없이 고발하다가 마침내는 “거리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짜리라” 라는 비장한 예언으로 끝난다.   이후에 발표된 모든 시집은 이러한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비판적이고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그저 부강한 환상만을 품고, 그보다 더 큰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영국 사교계는 블레이크의 시집에 크게 동요했다. 이런 동요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블레이크 자신의 그림이었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과학적인 원근법과 사실 묘사가 중시되던 당시 회화계의 풍토에 정면으로 반발하며, 블레이크는 그림 속에서 원근법을 아예 무시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환상세계를 거칠게 표현했다. 로열 아카데미에서 그를 가르쳤던 스승들은 거품을 물었다. 블레이크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징들을 그리며 사실 묘사를 넘어선 인간의 원초적 체험을 구현하고 싶어 했다. 이런 영적 환상세계를 뒷받침하 기 위해, 그는 밀턴의 ‘실낙원’ 이라든가 ‘욥기’ 등과 같은 종교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태고에. God as an Architect, 혼자서 왼손에 컴퍼스를 들고 우주를 창조 중인 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무심한 신의 모습은 이성에 경도되어 감정과 상상력을 상실한 삭막한 세계를 암시한다. Blake's Ancient of Days. The "Ancient of Days" is described in Chapter 7 of the Book of Daniel. This image depicts Copy D of the illustration currently held at the British Museum.[91     블레이크의 강렬한 동판화와 현실 고발의 시들은 상류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경제적 후원은 끊어져버렸다. 그의 재능을 아끼던 일부 친구들은 블레이크에게 표현의 강도를 조금만 낮추라고 조언했다. 이에 블레이크는 이렇게 화답했다.   “ 나의 편이 아닌 사람은 나의 적이다. 중간이나 중용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그는 극단적인 성격으로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 보다 낫다” 라고 여기는, 중용의 덕에서 한참 어긋난 인간이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 신사의 예절이라고 여겼던 런던 사교계에 블레이크는 처음부터 그리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블레이크를 “천사를 실제로 보았다” 라는 둥 헛소리를 하는 광인으로 몰아붙였다. 극소수의 지인들이 소개해주는 일감과 후원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수중의 마지막 동전으로 연필을 사가지고 단테의‘신곡’ 동판화 시리즈를 완성하다가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아담과 이브.     Blake's Newton (1795) demonstrates his opposition to the "single-vision" of scientific materialism: Newton fixes his eye on a compass (recalling Proverbs 8:27, an important passage for Milton)[98] to write upon a scroll that seems to project from his own head. 뉴턴. ‘신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한겹의 눈과 뉴턴의 몽매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윌리엄 블레이크가 친구 토마스 버츠에게 보낸 편지에 쓴 시. 여기서 한 겹의 눈은 세계를 오직 하나의 논리로만 보는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편협함을 의미한다. 블레이크는 동시대인이었던 뉴턴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자로, 이 그림에서도 신의 모습으로 천체 관측에 매진하는 뉴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비판적 의도와는 달리 오늘날 이 그림은 뉴턴으로 대표되는 과학주의의 훌륭한 상징으로 통용되어 영국 대영도서관 앞에는 이 그림을 본뜬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중용은 없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그림들은 보수적인 영국 문화 속에 거의 1세기에 가깝도록 사장되어 있다가, 20세기 중반에 다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발굴한 주체는 영국인이 아니라 신대륙 미국의 히피 세대였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 베트남 전쟁, 인종 차별, 페미니즘을 한꺼번에 겪으면서 이데올로기 변화와 사회혁명을 극한으로 경험한 젊은이들은 보수적인 기성세대에 환멸을 느꼈다. 기득권의 문화와 전통이란 명분 아래 유지되던 각종 편견과 차별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자유로운 이상을 꿈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술은 이들에게 작게는 숨을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적극적으로는 그들이 표방하는 이념적 상징이 되어주었다.           Joan_Baez_Bob_Dylan. (상)도어스(The Doors), (하)밥 딜런(Bob Dylan).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20세기 히피세대로 대표되는 반전 아티스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밥 딜런은 그의 시를 응용하여 가사로 차용했고, 록 그룹 ‘도어스’ 의 이름 또한 블레이크의 시에서 따온 것이었다.     물론 블레이크의 세례를 받은 유명인사는 이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스티브 잡스뿐이 아니었다. 1960년대‘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던 미국의 록 그룹 도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밴드의 이름인‘도어스(The Doors)’자체가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는 문이 있다. 인식의 문이 청결하다면, 모든 것이 무한하게 보일 것이다” 라는 블레이크의 시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반전 가수 밥 딜런은 ‘소중한 천사’ 라는 노래에 블레이크의 글을 인용해 “당신은 신자가 아니라면 무신론자이다. 그리고 중립 지대는 없다” 라는 가사를 쓰며 애매모호하게 중용의 미덕을 발휘하는 회색분자들을 꼬집었다. “나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멸되는 것을 보았다” 라고 외친 미국 비트 세대의 대표 시인 앨런 긴스버그 또한 블레이크 추종자였다.   20세기 블레이크 추종자들의 공통된 점은 그들이 블레이크의 급진적인 사상은 물론 성마르고 극단적인 성격까지도 공유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세계관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그들에게는 그러나 기존 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게 박혀 있었다. 근거 없는 루머에 이리저리 갈대처럼 휘둘리는, 오늘날 세치혀와 팔랑귀의 소유자와는 분명 달랐던 그들의 박력이 한층 더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글 :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순수의 전조 /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1757∼1827)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매는 들사슴은 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준다.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신성한 영혼에겐 안성맞춤의 옷, 모든 슬픔과 기쁨 밑으로는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아기는 강보 이상의 것, 이 모든 인간의 땅을 두루 통해서 도구는 만들어지고, 우리의 손은 태어나는 것임을 모든 농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그것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해와 달이 의심을 한다면 그들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국가의 면허를 받은 매음부와 도박꾼은 바로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짤 것이다.      - Auguries of Innocence(순수의 전조) 번역본   브레이크는 당시 그가 살았던 영국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잘못되어가는 조짐들을 통해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기득권층만을 위한 법과 제도로부터 소외당한 하급계층이 겪어야할 가난과 비통함을 신랄하게 묘사한 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눈과 시대를 앞서가는 신비주의적 감각은 훗날 높이 평가를 받지만 난해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 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공포의 상징으로 표현된 ‘사탄의 맷돌’은 구닥다리 비주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쓴 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속성을 비판하는 기재로 다시 인용된다. '돈 놓고 돈 먹는' 카지노자본주의로 치달아 지금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금융위기에서 보듯이 마침내 경제를 거덜 내고 말 것임을 예감했다.   캐피털리즘이 시장근본주의(신자유주의)와 만나면 사탄의 맷돌이 되어 인간(노동)도 자연(토지)도 구매력(화폐)도 온통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이 책은 전망했다. 1944년에 나온 이 책이 지금 조명을 받는 이유는 좌우 이념에서 벗어나 치밀한 비판적 접근을 거쳐 독특한 해법을 펼쳐 보였기 때문인데 브레이크의 신비한 감각과 상통한다.   오늘의 현실은 평생을 인간의 고통과 근원에 대해 고민하고 시장 만능주의에 맞서 ‘사회’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더불어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에서 보여주는 불길한 조짐들이 과연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인지도 눈여겨 볼 일이다.       이 시는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가 가장 좋아하는 詩라고합니다. 그는 時에서 세상을 뒤흔들 상상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신비와 공상으로 얽힌 화가로서 시작(詩作)과 회화를 발표했다. 블레이크는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단지 자연에 대한 외관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다. 또 일반적으로 보는 무감동한 작품을 부정하여, 대개 이론을 벗어나서 묵상 중에 상상하는 신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런던의 양말공장 직공의 아들로 교육도 거의 독학으로 이루었다.   14세 때에 판화가의 제자가 되어 고찰(古刹)의 조각이나 중세의 사본을 만들어, 그것이 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25세 때에 결혼했고, 회화에서는 유화를 꺼리고 수채화야말로 최고의 표현이라 생각하여 시화집을 만들어 간행했으며, 각 페이지마다 그림을 넣어 판각만의 독창적인 색채 인쇄까지 했다. 런던에서 생애를 보냈으며, 그 시화집에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0), 《경험의 노래》(1794) 등이 있으며, 성서 속에 신비한 사색을 곁들인 《욥기》(1825)가 유명하다.   블레이크는 만년에 다시 단테의 《신곡》에 100매의 삽화를 기도했으나 미완성으로 그쳤다. 이 밖에 프레스코라고 자칭한, 실은 템페라의 회화가 있는데, 그러나 삽화를 다른 회화와 나란히 견줄 만큼 인식시킨 것은 블레이크이다. 그의 순정적인 시작은 청순함을 나타내지만, 그밖의 시화에서는 괴이한 신비가 나타나고, 상식적인 기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선묘(線描)나 음영으로부터 생생하게 호소하는 설득력을 나타내어,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감각에 연결되고 있다.         서시                            윌리엄 블레이크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라!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보는 그 그의 귀는 들었다 오래된 숲 속을 걷던 신성한 말씀을   타락한 영혼을 부르며 저녁 이슬 속에서 눈물지은 말씀을 별이 빛나는 북극도 지배할 수 있었던 영혼 타락했지만 빛이 되살아난다!   오 대지여 오 대지여 돌아오라! 이슬 머금은 풀잎으로부터 깨어나라 밤이 이울고, 이제 아침이 잠에 취한 무리로부터 솟아난다   더 이상 도망가지 마라 왜 도망하려 하는가 별이 빛나는 하늘도 물 넘실대는 해안도 그대에게 주어졌노라 새날이 밝을 때까지   꼬마 흑인 소년                                    위리엄 블레이크 어머니는 나를 남쪽나라 거친 땅에서 낳으셨죠. 그래서 나는 검습니다, 그러나 오! 내 영혼은 흽니다. 영국아이는 천사처럼 흽니다. 그러나 나는 검습니다, 마치 빛을 빼앗긴 듯. 어머니는 나무 아래에서 나에게 가르치셨죠. 그리고 날이 뜨거워지기 전까지 앉아, 무릎 위에 나를 앉히고는 입맞춤을 해주면서, 동녘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봐라, 떠오르는 태양을 - 저기에 하나님이 사시면서, 빛을 주시고 열을 내 보내신단다; 그러면 꽃들과 나무, 짐승과 사람들이 아침엔 위로를, 한낮엔 즐거움을 받는단다. 그리고 우리는 잠깐 동안 이 세상에 머무르면서, 사랑의 빛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검은 몸과 햇볕에 탄 얼굴은 구름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늘진 숲과 같은. 우리 영혼이 열을 견디는 법을 배우게 되면, 구름은 사라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 '숲에서 나오너라, 내 사랑 내 자녀들아, 그리하여 내 황금빛 집 주위에서 양들처럼 즐기거라'라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어머니는 나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꼬마 영국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검은 구름에서, 그가 흰 구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집 주위에서 양들처럼 즐거워할 때면, 내가 그를 열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그가 기뻐하며 우리 아버지의 무릎에 기댈 수 있을 때까지; 그때 내가 일어나 그의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게 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호랑이(The Tyger) - 윌리엄 블레이크 ) Tyger! Tyger! burning bright(호랑아! 호랑아! 한밤 숲에서) in the forests of the night,(이글이글 불타는 호랑아.) What immortal hand or eye(어떤 불멸의 손 혹은 눈이) Could frame thy fearful symmetry?(네 무서운 균형을 빚어냈지?) In what distant deeps or skies(어떤 머나먼 심해나 하늘에서) Burnt the fire of thine eyes?(네 두 눈의 불길이 타올랐지?) On what wings dare he aspire?(어떤 날개를 타고 그가 날고자 했지?) What the hand dare seize the fire?(어떤 손길이 감히 그 불을 잡으려 했지?) And what shoulder, and what art,(그리고 어떤 어깨, 어떤 기술이) Could twist the sinews of thy heart?(네 심장의 힘줄을 비틀 수 있었지?) And when thy heart began to beat,(또 네 심장이 뛰기 시작했을 때) What dread hand? and what dread feet?(어떤 무서운 손이? 어떤 무서운 발이?) What the hammer? what the chain?(어떤 망치가? 어떤 사슬이?) In what furnace was thy brain?(어떤 용광로에 네 두뇌가 담겨 있었지?) What the anvil? what dead grasp(그 분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미소지었니?) Dare its deadly terrors clasp?(감히 그 무서운 공포를 움켜쥐었지?) When the stars threw down their spears,(별들이 저들의 창을 내던지며) And water'd heaved with their tears,(하늘을 그네의 눈물로 적셨을 때) Did he smile his work to see?(그 분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미소지었니?) Did he who made the Lamb make thee?(양을 만드신 그 분이 너를 만들었니?) Tyger! Tyger! burning bright(호랑아! 호랑아! 한밤 숲에서) In the forests of the night,(이글이글 불타는 호랑아.) What immortal hand or eye(어떤 불멸의 손 혹은 눈이) Dare frame thy fearful symmetry?(네 무서운 균형을 빚어냈지?) ================================  (저 무섭고 아름다운 호랑이는 누가 만들었을까? The Lamb과 짝을 이루는 시로 창조주의 작업에 경외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장장이의 이미지에 중요성을 부여 한듯합니다... 다녀가신 회원님들 행복하세요^^)
2006    [자료] - 서정주, 국화 옆에서, "친일시?"... 댓글:  조회:5107  추천:1  2017-01-30
(이하 창비)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3개월 전(2001년) '국화꽃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9회에 걸쳐 연재되면서 뜨거운 화제를 몰고 왔던 한 네티즌의 '국화 옆에서'에 대한 비평 논문이 마침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책의 제목은 연재 당시의 논문 제목과 같은 . 도서출판 새움이 발간했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 그 동안 '창비무명인'이라는 아이디로 활약했던 '얼굴 없는 논객'인 필자가 단행본 발간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나서면서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문학인들의 '사이버 광장'으로 알려져 있는 창비 게시판은 이른바 내공이 뛰어난 문학판의 논객들이 수시로 뛰어들어 그때 그때의 문학계 이슈를 두고 '진검승부'를 벌여왔기 때문에 '사이버 무림(武林)'으로도 불린다.  '창비무명인'도 그 논객들 중의 한 명. 그는 창비 게시판에 논쟁적 글을 잇따라 올리면서 '사이버 무사(武士)'로 명성을 떨쳐왔다. 그러나 '창비무명인(創批無名人)'이라는 아이디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 그는 '얼굴 없는 논객'이었다. 실제로 그는 글을 올리면서 단 한 번도 실명이나 이메일 주소를 밝히지 않는 등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겨 왔다. 창비무명인이 사이버 공간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은 지난 6월 24일.  미당 서정주의 대표작이자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상징어 '황국(黃菊)' '거울' '누님'이 실은 일본 천황에 대한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충격적 내용의 논문을 창비 게시판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화꽃의 비밀'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방대한 분량의 이 논문은 7월 3일까지 총 9회에 걸쳐 연재됐다.  그의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창비 게시판은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첫 번째 글의 조회수가 1800회를 넘어섰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창비 게시판 개장 이후 가장 뜨거운 논쟁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창비 측도 사이버 공간에선 보기 드문 이 역작에 대해 최대의 의전(儀典)을 베풀었다. 창비의 상징이자 발행인인 백낙청 교수가 이 논문에 대한 장문의 평문을 게시판에 올렸으며, 편집위원 한기욱 씨도 가을호에 '인터넷 글쓰기의 가능성-창비무명인의 미당론을 중심으로'란 평문을 실은 것이다.  이 논문이 일으킨 파장은 창비 게시판의 담장을 뛰어넘어 곧바로 인터넷의 바다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한 네티즌(박민규)이 7월 5일 인터넷 한겨레에 기고한 ''국화 옆에서'가 친일시라구?'가 그 징검다리가 됐다. 그리고 채 3개월이 흐르기도 전에 이 문제의 논문이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져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아마도 책표지 뒷면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4개의 도발적인 물음이 그 '열쇠'가 될 것이다. (1)일본 만화영화 의 요술봉이 왜 한 송이 국화꽃으로 이루어졌는지? (2) 주인공 이름이 왜 '아마테라스'인지? (3)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이 왜 국화꽃인지? (4)미당의 '국화 옆에서'는 오늘날 왜 국민적 애송시가 되어 있는지? 여기서 갑자기 우리는 궁금해진다.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일본 만화영화 과 청소년에게 인기가 높은 SF만화 . 이것들과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우선 물음 (1)과 (2)에 대한 필자의 답변을 책 속에서 찾아보자. ▲다섯 별 이야기의 주인공 '아마테라스' (1)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에는 일본제국주의 및 신도(神道)의 상징물인 삼종신기(三種神器)―쿠사나기의 검, 야타의 거울, 야사카니의 곡옥―가 주인공의 마법적 장신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2) "청소년들에게 인기있는 마모루 나가노의 공상과학만화 의 주인공 이름은 아예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입니다. 그는 미래의 우주왕국(태양성단)을 수 천년 동안 다스릴 불사불멸의 제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일본만화 속의 주인공 아마테라스는 흰색의 황제복을 입고, 목에는 곡옥 목걸이를 하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으며, 머리에는 노오란 국화꽃을 꽂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미당의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상징어인 '황국(黃菊)'과 '거울'이 예사롭지 않은 어떤 불길한 징후를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논쟁의 '몸통'을 거론하기 전에 살펴본 논쟁의 '깃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물음 (3)에 대한 답변을 찾아볼 차례이다. 이와 관련, '황국'이나 '거울'과 관련된 내용은 책 속 곳곳에서 발견된다.  (3)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스런 역사를 살아온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황국은 신중한 고찰이 필요한 상징입니다. 황국이 거울과 함께 등장할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황국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고, 를 보면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이란 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국화는 칼과 더불어 일본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황국은 왕실의 문장으로서 왕실가족의 모든 휘장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일왕의 예복, 일본국가훈장, 일본우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무기 등등―로 일본제국주의 문화와 삶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서구에서 발간되는 각종 세계 상징사전을 살펴보아도, 국화꽃은 일차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꽃이며 일본왕실 내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로베르 라퐁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의 '국화꽃'에 대한 설명에는 '16개의 꽃잎을 지닌 국화꽃으로 된 일본 문장엔 태양의 이미지와 나침반 지침면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는데, 그 중심에서 일왕이 세상을 통치하고, 우주의 모든 방향을 집약한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습니다." ●"일본 문화 속에서의 거울은 천손강림 시에 태양신이 자신의 혼을 담아 하사한 신기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은 삼종신기의 하나로 이세신궁에 모셔지고 있고, 또 일제 강점기엔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을 주신으로 삼는 조선신궁에도 거울이 있었습니다."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 이러한 진술 속에서, 우리는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국화꽃이 일본왕실의 상징물임을 알고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미당의 '국화 옆에서'에 대한 문학적 해석이 진행되면서, 위에서 서술한 '황국'과 '거울'의 문화적 상징성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서른 한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더욱이 그의 친일작품은 시, 소설, 평론, 수필, 르포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할 정도로 다양했고, 또 그 내용도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의 천황'은 그 외형만 바꾼 채 지속되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을 '제우스'와 '단군으로, 전두환을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으로 찬양한 것이다.  아마도 질문 (4)에 대한 답변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 필자는 "우리는 아직도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교과서에 실어, 좋은 시의 본보기로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일본문화의 제국주의적 공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할망정,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황국(黃菊)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친근한 누님'의 비유로만 가르친다면 이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강조한다. '국화 옆에서'의 시인에게 추서되어야 할 상은 국화문양이 새겨진 일본의 일등공로훈장이지 우리 민족의 금관문화훈장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내용을 골격으로 삼은 필자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추리소설 기법을 동원해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관련기사-서정주 '국화 옆에서' 등 시 3편  지난주 금요일인 9월 21일 저녁. 기자는 이 책의 필자인 창비무명인과 인터뷰를 가졌다. '김환희'라는 실명을 제외하곤 나이도, 성별도, 출신지도, 출신학교도 밝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촬영도 하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수용한 뒤에야 성사된 인터뷰였다. 우선 필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마침 책 날개에 필자를 소개한 글이 있어 여기 그대로 옮긴다.  김환희 씨는 네티즌 사이에서는 '창비무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치한 논리와 해박한 이론으로 인터넷상의 글쓰기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는 평을 듣는 필자는 이 책을 출간하면서 글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도를 고려해서 처음으로 실명을 밝혔다. 이 책의 논지가 워낙 문제적이기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단이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의 얼굴과 출생년도, 출생지, 출신학교를 자세히 공개하는 것은 피했다. 이 책의 문제적 발언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지만 '학연(學緣)과 지연(地緣)'이 형성한 그물과 편견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싶은 한 문학도의 소박한 소망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끝마친 후에, 미국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그 대학이 주는 장학금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91년 단편소설의 본질과 서구단편소설 이론의 한계를 분석한 (A Rhrtoric of the Short Story)이란 논문으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지난 10년 동안 서울과 수도권에 소재한 여러 대학(이화여대, 중앙대, 인하대, 추계예술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의 여러 학과(영문과, 불문과, 비교문학과, 문예창작학과 등)에서 10여 종이 넘는 다양한 문학과목을 강의해 왔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사이버 공간에서 논쟁이 됐던 글을 현실 공간에서 단행본으로 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더욱이 첫 책이라고 하는데, 소감부터 말해 달라. "맨처음 창비 게시판에 이 글을 올릴 때만 해도 열 몇 명 정도만 읽으면 보람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무리 공들여 쓴 글이라도 순식간에 밀려드는 다른 글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 인터넷의 생리 아닌가. 그러나 네티즌들의 반응은 나의 그런 예상을 뛰어넘고 말았다. 네티즌들의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내 글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묶여져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인터넷에 이 글을 연재하게 된 동기는. "지난 해 12월에 미당 서정주 시인이 작고한 후에 신문지상에 실린 문학평론가와 원로학자의 일방적인 미당 예찬론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앙일보가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상까지 제정하지 않았는가. 미당의 예술성이 제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백일하에 드러난 그의 친일행각을 도외시한 채, 그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민족을 배신한 불행한 예술인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그가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학상을 만들고, '단군 이래 최대 시인' 운운하며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결국 기성세대의 몰지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나라도 나서서 젊은 꿈나무 세대가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국민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로 비판하면서도, 구체적 친일 근거가 드러난 서정주를 기리고 본받자는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사회적 흐름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누가 미당 예찬론을 펼쳤나. "유종호 교수와 김화영 교수가 대표적이다. 특히 유 교수는 미당을 (1)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2)부족방언의 마술사 (3)단군 이래 최대 시인으로 극찬했다. 물론 나도 미당이 부족방언의 마술사라는 점은 인정하는 입장이다. 미당은 우선 상상력이 뛰어나고 나름대로의 시작법 정신을 가지고 시를 쓴 '천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결여했다는 점에서는 '백치'이기도 했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은 모든 족장에게 필요한 덕목이거니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급한 마술사'보다 '고급한 마술사'가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연구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미당이 작고한 뒤 유종호, 김화영 교수가 신문에 올린 글을 보고 놀랐다. 다각도로 미당을 고찰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극찬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추악한 삶에 아름다운 예술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사실 미당의 작품을 즐겨 읽지 않아 처음에는 주저도 됐다. 그러나 사상과 삶의 문제점을 덮을 만큼 미당의 예술성이 뛰어난지에 대해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미당의 시뿐만 아니라 자서전, 수필도 읽고, 전문가들의 자문도 구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2월 말이었고, 6월 말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 얼추 4개월이 걸린 셈이다." - 그렇게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성경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부하지 않고 결론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당이 장인정신을 가지고 시를 썼으면 그렇게 인정하고 평가할 생각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미당을 3류급 시인으로 매도할 수도 없었지만, 위대한 장인으로 평가할 수도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진정한 장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문학적 거장으로서 사랑할 수 없었다." - 기존의 미당 담론과는 다른 '국화꽃의 비밀'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미당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진영이 있는데, 두 진영 모두 자신들의 기존의 논리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선 친(親)미당파는 미당의 예술성이 그의 삶과 사상의 허물을 덮어주고도 남을 만큼 뛰어나다는 입장이고, 반(反)미당파는 미당에 대한 신화가 문화권력자로서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며 미당은 3류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은 현재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데, 양측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대화조차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고은 시인의 미당 비판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고은 시인에게 가해진 반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고은 시인도 결국 정치문인 아니냐. 둘째 고은 시인은 미당의 제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사 '허물 있는 자'라도 '더 허물 있는 자'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미당이 고은의 실력을 인정해줬는데 배은망덕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도 본질을 벗어난 잘못된 것이다. 나는 거꾸로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삶과 분리된 예술이 있는가? 사상이 담기지 않은 시와 예술이 있는가?" - 지금 미당 담론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미당 담론의 디딤돌 하나를 놓는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작품을 통한 작가 연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상징과 신화의 구조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눈여겨 살펴봤다. 반미당파는 86년에 나온 을 적절히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현대사 자체를 깊이있게 평가하는 글은 적었다고 본다. 나는 내 글이 미당 연구의 작은 참고자료가 되길 희망할 뿐이다." - 이 책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미당의 시가 친일시라는 단선적 주장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미당의 시를 교과서에 싣기 전에, 민족의 이름으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 전에, 그리고 미당상을 제정하기 전에, 미당에 대한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갖더라도 늦지 않다. 사실 장준하 선생도 은관문화훈장밖에 받지 못했다. 우리는 한번 자문해 봐야 한다. 현실순응적, 종천순일적 삶을 살아온 미당이 장준하, 함석헌보다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보라. 시간에 쫓기듯, 뭐에라도 쫓기듯, 미당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글은 그러한 일방적 흐름에 대한 절박한 반론이자 문제제기이다." - 책 발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사회 발언을 해볼 생각은 없나.  "내 자신 개혁인사로 비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웃사이더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 문학연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리고 평론 발표 등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할 생각도 없다. 책상물림을 벗어난 인생을 살 생각도 전혀 없다. 비교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로서 좋은 문학연구가가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꿈이다. 그 과정에서 평생 두세 권의 책을 내더라도 그것이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창작자에게 좋은 참고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책을 많이 내는 것은 내 적성에 안 맞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기는 싫다." - '국화 옆에서'를 애송하던 일반 국민들은 이 시가 친일시라는 주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말해줄 생각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와 접하게 될 때는 두 가지 경로를 갖게 된다. 자율적 선택과 타율적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친구의 권유를 받거나 서점에서 자신의 의지로 직접 선택하는 경우가 자율적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국화 옆에서'는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수능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 접하게 된 타율적 선택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국민은 학창시절 문학교사가 제시하는 모법답안을 통해 이 시를 접했다. 그런 사실을 망각한 뒤, 20∼30년 뒤 마치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착각한다. 다시 말해 '국화 옆에서'에 대한 허상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굳어진 허상을 깨는 과정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작업은 그런 충격에 대한 상쇄작용인 셈이다. 내가 부지런히 미당에 대한 자료와 책을 읽고 이 글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 백낙청 교수도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했는데. "백 교수의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국화 옆에서'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일리가 있지만 황국(黃菊)을 천황으로 읽은 역사적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난 백 선생이 충분히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본다."  - '창비무명인'이라는 필명을 가지고 창비 게시판에서 활동해 온 것은 언제부터인가.  "작년 말에 있었던, 표절을 둘러싼 김윤식-이명원 사건 무렵부터였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이미 읽었던 터라 김 교수와 이명원 씨의 책을 구해 비교해가며 정밀검토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명원 씨가 제기한 것보다 표절의 양상이 더 참담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대학과 문학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이명원 씨는 소영웅주의자로 몰리는 양상이었다. 이명원 씨에 대해서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표절 건과 관련된 내 생각을 정리한 글을 올렸다. (참고로 이 글은 1천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네티즌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 '창비무명인'이라고 작명(作名)한 사연이 있는가. "당시만 하더라도 한번만 글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때 사용했던 아이디가 '무명씨'였다. 그런데 'S대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무명씨라는 내 아이디를 도용해 나와는 정반대의 논조로 글을 올렸다. 논쟁의 와중에 같은 이름으로 글을 올린다는 것은 독자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다고 여겨 '창비무명씨'라고 개명했다. 처음에는 '원조무명씨'라고 하려고도 생각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한때는 '책상퇴물'이라는 아이디로 바꾸기도 했는데, 다른 네티즌들이 내 트레이드 마크인 창비무명씨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는 바람에 바꾸게 된 것이 바로 '창비무명인'이다." - 나이는 얼마나 되나.  "공개하고 싶지 않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근 10년 대학에서 강사로 살면서 겪은 병폐가 바로 나이, 출신지, 학교, 학과, 종교를 따지는 것이더라. 바로 그런 것이 패거리 형성에 한몫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육십대이든, 이십대이든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만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인터넷 글쓰기에 몰입하게 된 이유다." - 이번 연구작업에 약점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 "미당의 시 전체를 거시적으로 고찰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국화 옆에서'라는 한 편의 시를 미시적으로 고찰한 것이었다. 물론 '국화 옆에서'를 센터에 두고 '신라초' '동천' 등과 불교정신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공부했다. 미시적 고찰을 하다 전체적 시야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서정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생각은 없나. "김윤식 교수는 언젠가 서정주 평전을 쓰겠다고 피력한 바 있지만, 나로서는 그런 책을 쓸 생각이 없다. 그저 내 글이 본격적인 미당 연구의 하나의 기폭제가 되길 바랄 뿐이다. 물론 더 좋은 글 나오면 내 글은 유효성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 글의 가치가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미련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는. "나는 매년 논문을 1편씩 쓴다.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나에게 주변에서 '너 아직도 논문 쓰니?'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다세대 주택 짓던 사람이 불황에도 다세대 주택을 짓듯이, 문학을 공부하는 나는 계속 문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작가의 미학을 내 나름의 시각으로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에 전력투구하고 싶다. 네거티브한 작업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 - 그런 작가가 보이나. "물론이다." - 실명을 밝힐 수 있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그 분의 삶과 문학을 심층적으로 고찰한 책을 쓰고 싶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미학을 밝히는 것에 시간을 투여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 /정지환 기자 ================================= "국화꽃의 비밀" - 서평울보공주|2006.04.06  지은이 : 김환희 발행일 : 2001.9. 펴낸곳 : 새움 시와 시인은 다르다고? 친일시와 친일시인은 다르다고?   서정주는 유명한 친일 시인이다. 유명하고 말고. 처음 참고서에서 그의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읽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내가 미당처럼 토속적이라 불릴 만큼 진하게 겹칠된 느낌의 시는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일 수 있겠지만, 나는 미당이 탐탁치 않다. 정확히는 그가 최고의 문화상을 타고 민족을 대표한다고 칭송받는 일이 탐탁치 않다. 이 책은 인터넷 창비게시판에 올라왔던 창비무명인의 글을 출판한 것이다. 내용이 전 국민의 애송시인 [국화 옆에서]가 친일시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미당이 죽어 추모분위기가 한창이던 시기에 출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버리기엔 글이 아까워 창비 게시판에 올렸다가 네티즌의 열성으로 출판까지 이르게 된 책이다. 서론은 그만하고 글의 내용으로 들어가자. [국화 옆에서]는 국어 혹은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다들 잘 아는 그 시다. 어째서 친일시라 하는 지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노오란" 국화, 즉 황국이다. 황국은 천황의 상징이다. 게다가 이 국화는 여러 송이가 수북한 모습이 아니라 "한 송이" 국화꽃이다. 상징화된 꽃이라는 뜻이다. 천황의 상징과 정확히 일치한다. 둘째, 전통적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국화꽃은 [오상고절]이라 하여 선비의 상징이다. 남성적인 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누님" 같은 꽃으로 등장한다. 일본에서 천황가의 시작은 태양신 아마테라스이며, 아마테라스는  [누님]의 이미지에 들어맞는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인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쫓겨나 한반도로 가서 단군이 되었다는 이론이 널리 유행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남동생, 일본은 누나라는 말이다. 시의 "누님"과 떼어놓고 생각하기에는 의심스럽지 않은가? 셋째, 이 시에는 "소쩍새", "천둥" 같은 일반적으로 우리네가 누이를 연상할 때 드는 것과 너무나 다른 어둡고 강한 시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시를 분석해보면 1연과 2연의 상황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묘사된 아마테라스의 탄생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마테라스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어 고통스러워하다가 -소쩍새의 울음- 황천국으로 여행을 하고, 거기서 아내의 변한 모습에 놀라 도망치다가 천둥신의 쫓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우연일까? 넷째, 서정주는 일본 신화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시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당 스스로 말하기를 이 시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국화 옆에서]의 창작시점은 1946년으로 일본천황이 패전을 인정하고 인간선언 -그 전까지 일본국민과 그 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에게 천황은 신이었다- 을 한 상황이다. 미당으로서는 느끼는 바가 많은 시기였을 것이다. 굉장히 짜임새 있게 논리를 전개해나간다. 문학이론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면 이건 아냐, 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굉장히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물론 내가 평소 미당을 탐탁치않게 보는 사람이어서, 혹은 적어도 지난 번 미당이 죽을 때 온 신문이 난리 치는 것에 삐딱했던 사람이어서 쉽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파고 드는 것이 추리소설 같은 재미마저 있으니 일독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친일시면 어떻냐고? 그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냐고? 나는 친일시라면 국민들이 암송하도록 권장해서는 안된다고, 적어도 교과서에서는 빼야한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민족이니 정체성이니 운운해가며 일본만화도 못보라는 사람들이 미당이 죽자마자 미당문학상을 급조하는 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 (그 쪽에는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니까, 라고 포기하고 있지만.) 미당이 그 많은 사람들보다 비난을 더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민족을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이라는 칭송을 받기 때문이다. 그가 일개 필부라면 나같은 인간까지 알고 나쁘다하진 않을 게다. 이름값은 해야하지 않을까?  어느 가난한 농민이 했대도 친일은 친일이되, 그에 대한 비난의 경중은 그 영향력과 자발성 등에 의해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구멍가게 아저씨가 돈 들고 튀는 것과 김우중이 자산을 빼돌리고 숨는 것이 다른 것처럼.  난 그 이름 앞에 [친일을 했던]이란 말을 지워 버리지만은 말길 바란다. 적어도 그가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성 한 마디 안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친일을 했던 혹은 독재정권에 칭송시를 바쳤던 민족 최고의 시인, 이라고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은 것 같으니까. (여기서 누구처럼 그렇게 교묘하게 친일시를 완성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칭찬해 버리면, 으음..글쎄-_-;;) 시인과 시는 정말 별개의 것일까? 친일시를 쓰니까 친일시인인 거잖은가? 만들기만 하고 끝, 이젠 관계 없음? 죽은 사람은 논하면 안되는 것일까? 죽으면 모두 덮어두고 함께 쉬쉬, 그 사람은 효자였어, 그 사람은 훌륭했어. ...그러게 왜 이완용은 역적이고 미당은 위대한 예술가냐고.  ○그 당시 일본 왕실의 국화꽃 문양은 작위를 받은 자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대다수의 우리민족은 국화꽃이 일본 왕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복       이후 지금까지 근 55년이 넘도록 국화꽃과 거울이 지니는 이러한 문화적 상징성이 우리 문학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고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문학판에선 국화꽃과 거울을 일본문화와 연계지어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금기시되어왔다고나 할까요.     -pp.30-31  ○따라서, 미당은 1946년 가을 내지는 초겨울, 일왕 및 그 가족을 상징하는 노오란 국화꽃을 보면서,       적국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현인신에서 범인(凡人)으로 몰락한 일왕을 떠올리며,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인간 선언 후, 일왕은 국화 훈장과 국화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일왕복을 벗어 버리고      평복을 입은 채 전국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다녔는데, 이러한       일왕의 극적인 변모를 지켜보면서 미당의 마음속이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참고 삼아 말씀드리면, 그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나이는 46세였습니다.     -pp.56-57  ○네 번째 마당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국화꽃의 시상 속에 중첩되어있는 여러 여인들의 영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에 대해선 그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는데, 저는 그 태모(太母)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이       아마테라스라고 생각합니다.     -p.91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일제강점기의 미당의 친일행위와 해방 후의 지속적인 독재정권 찬양행위를 무시한 채,       미당을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앉힌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명실상부한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기에는       미당에겐 참다운 족장의 덕목 -삶에 대한 통찰력, 준엄한 자기비판, 냉철한 이성, 역사의식, 미래에 대한 비전,      희생정신 등등- 이 결여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은,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에       종천순일(從天順日)의 정신"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주군을 섬기는 "백성의 멘탈리티"       내지는 주인을 섬기는 "종의 멘탈리티"를 보입니다.     -p.102-103 ///////////////////////////////////////////////////////////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시인 가운데 한 명이 미당 서정주(1915~2000)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화 옆에서'를 비롯해 '자화상', '푸르른 날', '귀촉도', '동천冬天' 등 민족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그의 많은 시는 국민적 애송시로 사랑받아 왔다. 하지만 서정주에 대한 평가는 그가 일제 말기에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했고, 독재까지 찬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친일문인의 시가 윤동주처럼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옥사한 시인의 작품과 함께 나란히 교과서에 실려 있어선 안 된다는 논리 때문이다. 이처럼 점점 역사에서, 문학사 가장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서정주를 다시 불러세우려는 책이 나왔다. 문학평론가인 이숭원(59)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쓴 '미당과의 만남'(태학사 펴냄)이다. 이 교수는 미당이 남긴 1천여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누구나 아는 대표작보다는 그에게 감동을 주거나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 80편을 골라 평설했다. 그는 13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미당의 친일이나 권력 추종의 전력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쓴 많은 좋은 시까지 다 매장하면 곤란하다"면서 "그것도 일종의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광수와 최남선이 잘못했다고 해서 초기의 업적까지 다 부정하진 않듯이 서정주 시의 시적인 가치는 가치대로 보자는 생각에서 책을 썼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서정주에 대한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러 저작을 펴내며 문학평론가로서 성취를 인정받아온 그가 나이가 들더니 이상한 짓을 한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 책을 썼다고 공격받아도 괜찮다"면서 "공격받음을 통해서 그게 하나의 이슈가 돼서 서정주 시인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이 교수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시인은 시 자체로써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당이 지탄을 받는 것도 그의 시에 의한 것이다. 그에 대한 논란을 고려했다면 적어도 친일시와 권력에 아부했던 시까지 포함해 균형을 맞췄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드는 책이다.   ============================= "국화꽃의 비밀"(1):       ㅡ금기로서의 [국화꽃]과 [거울]  미당 서정주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는 국민적 사랑을 받아 온 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를 암송할 정도로 사랑해 왔고, 또 지금도 대부분의 시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신세대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또한 이 시는, 미당의 수치스런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국정교과서에 수록되었었고 지금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리고 있을 정도로 좋은 시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미당이 시의 제3연에서 국화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걸어 온 후 관조의 경지에 다다른 중년 여인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어느 신문 기자의 다음 말은 [국화 옆에서]가 그 동안 어떻게 우리 나라에서 읽히고 있었는 지를 잘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ꡒ우리는 중․고교 국어시간에 「국화 옆에서」를 ꡐ모든 풍상을 겪고 인품이 완성된 경지에 이른 40대 누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배웠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으며 실제 미당 자신도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경향신문 2000-06-29).  하지만 [국화 옆에서]는 기존의 이러한 원론적 해석이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그 상징성이 단순한 시는 아닙니다. 미당이 시 속에서 "국화꽃=누님"이란 은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고, 또 외견상 시의 의미구조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해 보여도, 이 시는 심층에 간과하기 힘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점은 대충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데, 우선 오늘은 한 가지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국화 옆에서]가 보여주는 첫번째 문제점은 3연에 등장하는 거울과 그 국화꽃이 노오란 꽃잎을 지닌 황국(黃菊)이란 점입니다. 무릇 문학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상징은 그 의미가 다각도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국화 옆에서]읽기는 이 시에 등장하는 상징물인 황국과 거울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평론가들의 [국화 옆에서 읽기]가 "황국=친근한 누님," "거울=관조의 경지"로 등식화 시켜서 비유적으로만 해석했지,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칼 융의 용어를 빌린다면, 기존의 평론가들은 국화꽃과 거울을 표지적(semiotic)으로만 이해했지, 상징적(symbolic)으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참고자료"satgatlim님께: 융의 상징론에 관한 답변"(click)).  우선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서 설명드리기 전에 그림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왼편의 그림은 일본천황의 휘장이고, 오른편의 그림은 신궁에서 "20세기 일본의 신주(神主)가 신토(神道)의 신 태양을 상징하는 거울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칼 G. 융, {인간과 상징}, 열린책들, 22쪽).  특히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스런 역사를 살아 온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국화꽃과 거울은 신중한 고찰이 필요한 상징물입니다. 왜냐하면 황국(黃菊)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었고, [고사기]를 보면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란 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국화는 칼과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황국은 황실의 문장(紋章)으로서 황실가족의 모든 휘장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형태--일왕의 예복, 일본국가훈장, 일본우표,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무기 등등--로 일본 제국주의 문화와 삶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Japanese Royalty Flags. by Phil Nelson. 2000-09-09 (click))  서구에서 발간되는 각종 세계 상징 사전을 살펴보아도, 국화꽃은 일차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꽃이며 일본황실 내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소개되고 있다. 프랑스의 {상징 사전}은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국화의 꽃잎이 질서정연한 배열로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인해 이 꽃은 본질적으로 태양의 상징이 되며, 따라서 장수(長壽)와 불멸(不滅)을 뜻한다. 국화꽃이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이 된 이유도 그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16개의 꽃잎을 지닌 국화꽃으로 된 일본 문장(紋章)엔 태양의 이미지와 나침반 지침면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는 데, 그 중심에서 천황이 세상을 통치하고, 우주의 모든 방향을 집약한다" Jean Cheval‎!!ier & Alain Gheerbrant,, Dictionnarie des symboles (paris: Robert Laffont, 1982) 247쪽.  일본 문화에서, 국화꽃이 태양신과 일왕의 상징물로 해석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도 태양의 상징물로 해석됩니다. 보편적 문화상징으로서 '거울'이란 기표(signfier)는 여러 상징적 기의 (signfied)--통치자, 부부애, 자기성찰, 달, 태양, 진실, 자기애 등등--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일본 문화 속에서의 거울은 천손강림시에 태양신이 자신의 혼(魂)을 담아 하사한 신기(神器)로 전해지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태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은 삼종신기(三種の神器)의 하나로 이세신궁에 모셔지고 있고, 또 일제 강점기엔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을 주신(主神)으로 삼는 조선신궁에도 거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근 50년이 넘도록 국화꽃과 거울이 지니는 이러한 문화적 상징성은 단 한번도 우리 문학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고려의 대상이 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문학판에선 국화꽃과 거울을 일본문화와 연계지어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울 정도로 금기시 되어 왔다고나 할까요.      "국화꽃의 비밀"(2): ㅡ일본문화제국주의의 공략  어제의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네티즌들께 감사드립니다. 김흥년님의 조언은 저를 배려해서 해주신 유익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쇼쇼쇼님의 따스하신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옥문수님의 냉소엔 좀 섭섭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관심의 표시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쓰는 글엔 참고자료소개가 좀 많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 가방끈이 길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학자들과 작가들의 표절이 난무하는 이 땅에서 게시판에 올리는 글이라도 참고문헌을 되도록 정확히 명시함으로써 남의 지적 재산권을 침범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티즌들께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술적 글쓰기라는 것이, 작문(composition)의 어원이 '짜집기'(put together)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남의 글로 레고 장난감으로 집짓기 하듯 결합시키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짜집기' 과정에서 내 것과 남의 것의 차이는 제대로 밝히는 관행이 이 땅에도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태 22: 20-21)"  그럼, 일단 김흥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연 "미당이 일본 문화권에서의 국화꽃과 거울의 상징적 의미를 알고 그 시를 썼는 가?"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든지 아니면 개연성있게 풀어 나가든지 해야 할 의무가 제게는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제 논문은 실패한 논문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 논문의 성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는 나름대로 제 논문이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번째 이유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뼈아픈 상징일 수 있는 황국(黃菊)의 상징적 의미가 우리 국민 및 꿈나무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국화 옆에서]는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교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한 때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황국(黃菊)을 "성숙한 누님같은 꽃"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또 제가 친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유서깊은 광주 모(某) 고교에서 처음 교기와 배지를 만들 때 그 제작을 일본에 주문했었는 데, 일본인들이 교기에 음흉스럽게도 국화꽃 문양을 넣었다고 합니다. 제가 인터넷으로 그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까 아직 그 교기와 배지가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꿈나무들의 주체성확립을 위해서도 교육현장에서 국화꽃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광고 기법의 하나로 잠재의식적 광고 (subliminal advertising)라는 것이 있지요. 영화 필름의 한 컷에 "콜라를 마셔라"라는 문구를 새겨 넣을 경우, 사람들은 나중에 음료를 사 마실 때 콜라를 잠재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되지요(잠재의식적 광고).  영화 필름 속의 한 컷도 그런 무서운 효과를 지니는 데, 암송할 정도의 애송시가 지닌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따라서는, 저는 아이들이 황국(黃菊)을 보고 서정주의 시만 떠올릴 것이 아니고, 그 끔찍스런 일본 황실의 휘장도 함께 떠올리길 바랍니다.  2) 두번째 이유는, 이 시가 자랑스럽게 외국어로 번역되어 서구에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여러 세계 상징사전을 찾아보면, 거의 어김없이 "황국(黃菊)은 일본제국주의의 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국화꽃은 서구인들에게는 그렇게 다의적인 뜻을 가진 꽃이 아닙니다. 서구인들에게 국화꽃은 '일본황실의 꽃'과 '묘지의 꽃'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netscape와 같은 인터넷 영어 검색엔진에서 "chrysanthemum" 내지 "chrysanthemum throne"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시면, 많은 자료들이 뜹니다. 또 서구인들은 일본천황제도를 한결같이 "국화 제위(菊花帝位)"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서구인들의 머리 속에 "황국=일본천황"이라는 등식이 꽉 박혀있는 데, 일본 강점기의 악몽을 치룬 우리나라에서 "황국=누님"이란 비유를 사용한 시를 좋은 시로 외국에 자랑스럽게 소개한다면, 서구인이나 일본인 눈에 우리 민족은 너무 배알이 없는 웃기는 족속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엔 미당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두 세편의 수필에서 서구인들이 를 이해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시의 암시]란 수필에서 그는 "내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보이고 있는 그러한 고고 청순한 지조 같은 건 그런 빠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느낌의 습관을 통해서는 전달이 잘 안된다 하는 게 알려진 셈이지요"(292)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인들이 독일정부에 협력한 자국인들을 어떻게 혹독하게 단죄했는지를 상기한다면, 그들이 우리 민족이 황국을 예찬하는 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요?  3) 우리가 국화꽃의 상징성에 관심을 지녀야 될 마지막 이유는, 아직까지 이 땅에서 일본의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채, 문화의 옷을 입고, 우리 청소년들의 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이 땅의 아이들이 보고 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일본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 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등학생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세일러 문}에는 일본 제국주의 및 신도의 상징물인 삼종신기(三種の神器)--쿠사나기의 검,야타의 거울, 야사카니의 곡옥--가 주인공의 마법적 장신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에 관하여], [Japanese Culture: Sword, Mirror, Jewel]). 또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인기있는 마모루 나가노의 공상과학만화 [다섯 별 이야기(The Five Star Stories)]의 주인공의 이름은 아예 일본 천황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입니다. 그는 미래의 우주왕국(태양성단)을 수 천년 동안 다스릴 불사불멸의 제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일본만화 속의 주인공 아마테라스는 흰색의 황제복을 입고, 목에는 곡옥 목걸이를 하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으며, 머리에는 노오란 국화꽃을 꽂고 있습니다([화이브 스타 스토리즈 홈페이지]). 이렇게 일본의 문화적 제국주의가 우리 청소년들의 내면을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음험하게 공략해 들어오고 있는 데, 우리는 아직도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문학교과서에 실어, 좋은 시의 본보기로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문학 교사들이, 일본 문화의 제국주의적 공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할 말정, 황국(黃菊)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친근한 누님'의 비유로만 가르친다면 이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의 시인에게 추서되어야 할 상은 국화문양이 새겨진 일본의 일등공로훈장이지 우리 민족의 금관문화훈장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2): 기자는 이 책의 필자인 창비 무명인과 인터뷰를 가졌다. '김환희'라는 실명을 제외하곤 나이도,  성별도, 출신지도, 출신학교도 밝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 촬영도 하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수용한 뒤에야 성사된  인터뷰였다. 우선 필자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마침 책 날개 에 필자를 소개한 글이 있어 여기 그대로 옮긴다.  김환희 씨는 네티즌 사이에서는 '창비무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치한 논리와 해박한 이론으로 인터넷상의 글쓰기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는 평을 듣는 필자는 이 책을 출간하면서 글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도를 고려해서 처음으로 실명을 밝혔다. 이 책의  논지가 워낙 문제적이기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 에서 내린 결단이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의 얼굴과 출생년도, 출생지, 출신학교를 자세히  공개하는 것은 피했다. 이 책의 문제적 발언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 지만 '학연(學緣)과 지연(地緣)'이 형성한 그물과 편견으로부터 조금 이라도 자유롭고 싶은 한 문학도의 소박한 소망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끝마친 후에, 미국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그 대학이 주는 장학금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91년 단편소설의 본질과 서구단편소설 이론의 한계를 분석 한 (A Rhrtoric of the Short Story)이란 논문으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지난 10년 동안 서울과 수도권에 소재한 여러 대학(이화여대, 중앙대, 인하대, 추계예술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의 여러 학과(영문과,  불문과, 비교문학과, 문예창작학과 등)에서 10여 종이 넘는 다양한 문학 과목을 강의해 왔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사이버 공간에서 논쟁이 됐던 글을 현실 공간에서 단행본으로 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더욱이 첫 책이라고 하는데, 소감부터 말해 달라. "맨처음 창비 게시판에 이 글을 올릴 때만 해도 열 몇 명 정도만 읽으면 보람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무리 공들여 쓴 글이라도 순식간에 밀려드는 다른 글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 인터넷의 생리 아닌가. 그러나 네티즌들의 반응은 나의 그런 예상을 뛰어 넘고 말았다. 네티즌들의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내 글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묶여져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인터넷에 이 글을 연재하게 된 동기는. "지난 해 12월에 미당 서정주 시인이 작고한 후에 신문지상에 실린 문학평론가와 원로학자의 일방적인 미당 예찬론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앙일보가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상까지 제정하지 않았는가. 미당의 예술성이 제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백일하에 드러난 그의 친일행각을 도외시한 채, 그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민족을 배신한 불행한 예술인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그가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학상을 만들고, '단군 이래 최대 시인' 운운하며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결국 기성세대의 몰지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나라도 나서서 젊은 꿈나무 세대가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국민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로 비판하 면서도, 구체적 친일 근거가 드러난 서정주를 기리고 본받자 는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사회적 흐름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누가 미당 예찬론을 펼쳤나. "유종호 교수와 김화영 교수가 대표적이다. 특히 유 교수는 미당을 (1)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2)부족방언의 마술사 (3)단군 이래 최대 시인으로 극찬했다. 물론 나도 미당이 부족 방언의 마술사라는 점은 인정하는 입장이다. 미당은 우선  상상력이 뛰어나고 나름대로의 시작법 정신을 가지고 시를 쓴 '천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결여 했다는 점에서는 '백치'이기도 했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은 모든 족장에게 필요한 덕목이거니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급 한 마술사'보다 '고급한 마술사'가 더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연구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미당이 작고한 뒤 유종호, 김화영 교수가 신문에 올린 글을 보고 놀랐다. 다각도로 미당을 고찰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극찬 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추악한 삶에 아름다운 예술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사실 미당의 작품을 즐겨 읽지 않아 처음에는 주저도 됐다. 그러나 사상과 삶의 문제점을 덮을 만큼 미당의 예술성이 뛰어난지에 대해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미당의 시뿐만 아니라 자서전, 수필도 읽고, 전문가들의 자문도 구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2월 말이었고, 6월 말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 얼추 4개월 이 걸린 셈이다." - 그렇게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성경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부 하지 않고 결론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당이 장인정신을 가지고 시를 썼으면 그렇게 인정하고 평가할 생각으로 공부 했다. 그러나 미당을 3류급 시인으로 매도할 수도 없었지만, 위대한 장인으로 평가할 수도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진정한 장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문학적 거장으로서 사랑할 수 없었다." - 기존의 미당 담론과는 다른 '국화꽃의 비밀'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미당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진영이 있는데, 두 진영 모두 자신 들의 기존의 논리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선 친(親) 미당파는 미당의 예술성이 그의 삶과 사상의 허물을 덮어주고도 남을 만큼 뛰어나다는 입장이고, 반(反)미당파는 미당에 대한 신화 가 문화권력자로서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며  미당은 3류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은 현재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데, 양측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대화조차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고은 시인의 미당 비판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고은 시인에게 가해진 반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고은 시인도 결국 정치문인 아니냐. 둘째 고은 시인은 미당의 제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사 '허물 있는 자'라도 '더 허물 있는 자'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미당이 고은의 실력을 인정해줬는데 배은망덕 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도 본질을 벗어난 잘못된 것이다. 나는 거꾸로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삶과 분리된 예술이 있는가? 사상이 담기지 않은 시와 예술이 있는가?" - 지금 미당 담론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미당 담론의 디딤돌 하나를 놓는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작품을 통한 작가 연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상징과 신화의 구조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눈여겨 살펴봤다. 반미당파는 86년에 나온 을 적절히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현대사 자체를 깊이있게 평가하는 글은 적었다고 본다. 나는 내 글이 미당 연구의 작은 참고자료가 되길 희망할 뿐이다." - 이 책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미당의 시가 친일시라는 단선적 주장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미당의 시를 교과서에 싣기 전에, 민족의 이름으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 전에, 그리고 미당상을 제정하기 전에, 미당에 대한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갖더라도 늦지 않다. 사실 장준하 선생도 은관문화훈장밖에 받지 못했다. 우리는 한번 자문해 봐야 한다. 현실순응적, 종천순일적 삶을 살아온 미당이 장준하, 함석헌보다 과연 위대한 인물인가.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보라. 시간에 쫓기듯, 뭐에라도 쫓기듯, 미당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글은 그러한 일방적 흐름에 대한 절박한 반론이자 문제제기이다." - 책 발간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사회 발언을 해볼 생각은 없나.  "내 자신 개혁인사로 비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웃 사이더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 문학연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 했을 뿐이다. 그리고 평론 발표 등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할 생각도 없다. 책상물림을 벗어난 인생을 살 생각도 전혀 없다. 비교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로서 좋은 문학연구가가 되는 것이 나의 유일한 꿈이다. 그 과정에서 평생 두세 권의 책을 내더 라도 그것이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창작자에게 좋은 참고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책을 많이 내는 것은 내 적성에 안 맞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기는 싫다." - '국화 옆에서'를 애송하던 일반 국민들은 이 시가 친일시라는 주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말해줄 생각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와 접하게 될 때는 두 가지 경로를 갖게 된다. 자율적 선택과 타율적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친구의 권유를 받거나 서점에서 자신의 의지로 직접 선택하는 경우가 자율적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국화 옆에서'는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에 수능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 접하게 된 타율적 선택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국민은 학창시절 문학교사가 제시하는 모법답안을 통해 이 시를 접했다. 그런 사실을 망각한 뒤, 20∼30년 뒤 마치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착각한다. 다시 말해 '국화 옆에서'에 대한 허상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굳어진 허상을 깨는 과정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작업은 그런 충격에 대한 상쇄작용인 셈이다. 내가 부지런히 미당에 대한 자료와 책을 읽고 이 글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 백낙청 교수도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했는데. "백 교수의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국화 옆 에서'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일리가 있지만 황국(黃菊)을 천황 으로 읽은 역사적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난 백 선생이 충분히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본다."  - '창비무명인'이라는 필명을 가지고 창비 게시판에서 활동해 온 것은 언제부터인가.  "작년 말에 있었던, 표절을 둘러싼 김윤식-이명원 사건 무렵 부터였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이미 읽었던 터라 김 교수와 이명원 씨의 책을 구해 비교해가며 정밀검토를 했다. 그 과정 에서 나는 이명원 씨가 제기한 것보다 표절의 양상이 더 참담 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대학과 문학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이명원 씨는 소영웅주의자로 몰리는 양상이었다. 이명원 씨에 대해서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표절 건과 관련된 내 생각을 정리한 글을 올렸다.(참고로 이 글은 1천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네티즌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 '창비무명인'이라고 작명(作名)한 사연이 있는가. "당시만 하더라도 한번만 글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그때 사용 했던 아이디가 '무명씨'였다. 그런데 'S대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무명씨라는 내 아이디를 도용해 나와는 정반대의 논조로 글을 올렸다. 논쟁의 와중에 같은 이름으로 글을 올린다는 것은 독자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다고 여겨 '창비무명씨'라고 개명했다. 처음에는 '원조무명씨'라고 하려고도 생각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한때는 '책상퇴물'이라는 아이디로 바꾸기도 했는데, 다른 네티즌 들이 내 트레이드 마크인 창비무명씨로 돌아가라고 권고 하는 바람에 바꾸게 된 것이 바로 '창비무명인'이다." - 나이는 얼마나 되나.  "공개하고 싶지 않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근 10년 대학에서 강사로 살면서 겪은 병폐가 바로 나이, 출신지, 학교, 학과, 종교를 따지는 것이더라. 바로 그런 것이 패거리 형성에 한몫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 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육십대이든, 이십대이든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만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인터넷 글쓰기에 몰입하게 된 이유다." - 이번 연구작업에 약점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 "미당의 시 전체를 거시적으로 고찰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국화 옆에서'라는 한 편의 시를 미시적으로 고찰한 것이었다. 물론 '국화 옆에서'를 센터에 두고 '신라초' '동천' 등과 불교정신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공부했다. 미시적 고찰을 하다 전체적 시야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서정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생각은 없나. "김윤식 교수는 언젠가 서정주 평전을 쓰겠다고 피력한 바 있지만, 나로서는 그런 책을 쓸 생각이 없다. 그저 내 글이 본격적인 미당 연구의 하나의 기폭제가 되길 바랄 뿐이다. 물론 더 좋은 글 나오면 내 글은 유효성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 글의 가치가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미련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는. "나는 매년 논문을 1편씩 쓴다.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나에게 주변에서 '너 아직도 논문 쓰니?'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다세대 주택 짓던 사람이 불황에도 다세대 주택을 짓듯이, 문학을 공부하는 나는 계속 문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작가의 미학을 내 나름의 시각으로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에 전력 투구하고 싶다. 네거티브한 작업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 - 그런 작가가 보이나. "물론이다." - 실명을 밝힐 수 있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그 분의 삶과 문학을 심층적으로 고찰한 책을 쓰고 싶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미학을 밝히는 것에 시간을 투여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 菊花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松井伍長 頌歌(마쓰이 히데오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만 리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 (1987)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육천만동포의 지지를 얻어셨나니 이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국화꽃의 비밀(3) :  제 미발표 논문에서는 각주1에 실명과 더불어 언급한 사항입니다만,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미리 밝혀야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게 된 데에는, 제가 사부(師父)님으로 모시고 있는 어떤 교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문화권력 및 매문(賣文)과는 거리가 먼 '순수학자'이시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니시고 일본어에 능통하신 사부님은 제게 3가지 사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국화꽃은 일본황실의 문장(紋章)이다. 2) 미당은 를 쓸 무렵, 를 썼다. 3) "국화꽃=누님"은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에는 부합되지 않는, 뭔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이미지이다. 그러한 그 교수님의 견해를 참고 삼아 자료조사를 시작했습니다만, 2)의 경우엔 실증적 자료를 찾기가 힘들어서 제 논문에 반영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사부님과 나눈 대화를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기존의 읽기가 보여주는 두번째 문제점으로 국문학자나 평론가들의 비평적 관심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를 정답이 너무도 뻔한 쉬운 시, 대중적인 취향에 맞는, 격이 떨어지는 시라고 생각한 탓인지는 몰라도, 학자나 평론가들은 이 시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각주1). 제 생각엔, 를 가장 세밀하게 텍스트 중심으로 분석한 평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창작자인 미당 자신인 것 같습니다. 미당은 1949년 조지훈, 박목월과 공저한 이란 책에서 자신이 를 어떻게 창작했는 지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당은 국화에 관한 여러 편의 수필과 등과 같은 시론에서 를 전문(全文) 소개하면서 창작 배경 및 시어의 상징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미당이 에 이토록 많은 애착을 지닌 것은 그가 이 시를 그만큼 공들여 썼을 뿐만 아니라 그 심층에 다른 많은 암시와 복선을 깔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당이 그의 시론에서 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 내지 구성으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소량(小量)으로 정선(精選)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無盡)한 암시력(暗示力)" 내지 "언외(言外)의 암시력(暗示力)의 효과적 구성"이기 때문이다 (각주2).  를 새로운 각도에서 읽어야 하는 세번째 이유로, 시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배합이 보이는 비상식성과 반전통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선, 시어들--소쩍새, 천둥, 먹구름, 거울, 누님, 국화꽃, 무서리--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들 사이에 부조화와 충돌이 느껴집니다. '누님'의 이미지는 친연성과 평범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누님'의 이미지를 보조하고 보강하는 다른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강렬하고 비극적이고 음울합니다. 누님같은 꽃의 탄생을 노래하기 위해, 죽음과 여인의 한(恨)을 연상시키는 불길한 소쩍새와 무서리를 언급하고, 천둥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과장이 심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고급한(?) 취향을 가진 문학 평론가들은 이 시를 심도있게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국문학자들의 시 해설 가운데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흥규교수와 이어령교수의 견해입니다. 물론 두 분의 해설도 심도있는 고찰은 아니었습니다.  그[미당]의 생각으로는 봄에 처절하게 우는 소쩍새, 여름의 천둥, 그리고 가을 밤 무서리와 그 자신의 잠 못 이룸이 모두 한송이 국화꽃과 어떤 신비스러운 인연을 가진 것만 같다. 그러나 상식적 논리를 넘어 생각해 볼 때 이 우주와 생명의 신비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더욱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떤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이라는 불교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비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적 인연의 가능성 위에서 한 송이 꽃의 피어남을 그 앞에 있었던 수많은 괴로움과 시련의 결과로 여기는 상상력이다 (각주3)  하지만 비상식적인 이미지 구성의 숨겨진 의미를 설득력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함이 없이, 불교의 인연설 내지 윤회설로 설명하거나 생명 탄생의 장엄한 신비를 노래한 것으로 확대 해석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불교적 관점을 도입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봄의 이미지 가운데 소쩍새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여름의 이미지들 가운데 천둥인가? 왜 하필이면, 그 많은 가을의 이미지들 가운데 무서리인가? 과연 이 시를 어느 무명씨가 썼더라도, 김흥규교수가 그렇게 심오한 의미를 담아 해석하였을 지 의구심이 듭니다.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지니는 반전통성에 대해선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한국 전통의 문학적 맥락과 연계시켜 해석했습니다만, 이어령교수와 박광용교수는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 두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국화꽃의 전통적인 한국적 이미지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정보(李鼎輔)의 시조--"국화(菊花)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매한 인품을 지닌 절개있는 선비라는 남성적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미당의 국화꽃은 여성적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에 한국문화상징으로서의 전통적 "국화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박광용교수의 해석은 내일 상술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생략하겠습니다). 박광용교수는 [와 이승만,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 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또 이어령교수도 미당의 국화꽃의 독특성 내지 새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각주4).  만약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국화(菊花) 옆에서]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이 시를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未堂)의 [국화옆에서]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이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국화의 성(性;젠다)을 바꿔 버렸다. [군자=국화]가 [누님=국화]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어령교수가 말하는 "그 두가지 다른 느낌"의 첫 번째 특성은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 원리가 감각적인 미(美)의 애정의 여성 원리로" 바뀌게 됨으로써, 기존의 "'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일자(隱逸者)'혹은 '책 앞에 앉은 선비'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또 이교수가 말하는 두 번째 특성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한국문학 속의 국화꽃이 고고하고 이념적인 존재를 상징하면서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당의 국화꽃은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親緣)관련을 이루며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당의 국화꽃이 한국고전문학 속의 국화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본 이교수와 박교수의 견해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시 전반에 걸친 그들의 해석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박교수는 나름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원인을 고찰하고 있습니다만, "국화꽃=이승만"이라는 등식만을 고집함으로써 자가당착적인 일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어령교수의 해설은 미당의 시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본질적인 질문들--'왜 미당이 하필이면 국화꽃의 탄생을 묘사하기 위해 소쩍새, 천둥, 거울, 무서리와 같은 이질적인 시어들을 선택했을까?' '미당의 국화꽃이 그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 원인 및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미당이 국화꽃의 젠더를 바꾼 것은 그의 독창적 발상인가?' 등등--에 대해선 구체적인 답을 모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 나갈 글에서 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모색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읽기가 보여 주는 문제점으로 신화적 해석의 부재를 들고 싶습니다. 고대 신화와 전설은 미당의 후기 시 뿐만 아니라, 시 창작 전반에 걸쳐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 등과 같은 초기 시에서도 살펴 볼 수 있듯이, 미당은 서양과 동양의 여러 신화와 전설에서 소재를 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미당은 외국과 한국의 신화 내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신과 여걸--이브, 클레오파트라, 헬레네, 선덕여왕, 성모 마리아,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 황진이, 웅녀, 세오녀 등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미당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天照大神)와 어머니 이자나미 (伊耶那美命)에 관한 창세신화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서른 살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장기를 아랫목에 세워두고 합장까지 할 정도로 신성하게 생각했으며,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에게 신사참배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각주5). 하지만 일본신화 내지 문화와 연계지어 미당을 해석하는 것은 기존의 학문적 논의에서는 배제되어 왔습니다.  기존의 [국화 옆에서] 읽기가 보여주는 이러한 문제점 내지 한계성은, 이 시를 새로운 각도에서 심층적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문학자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소홀히 취급해 온 상술한 문제점들은 미당의 미학과 세계관을 보다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가 아직도 국민적 애송시로 사랑받고 있는 데다 문학교과서에 실리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내일부터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할 이 글의 본문에서는「국화 옆에서」에 있어서의 국화꽃의 상징성과 일본신화와의 유사성을 역사사회학적인 측면과 텍스트 내재적 측면에서 상세히 고찰하고자 합니다.      "국화꽃의 비밀"(4): ㅡ국화꽃은 이승만일까?  제 논문의 본론은 크게 두개의 장---역사사회학적 측면의 분석과 텍스트 내재적 측면의 분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역사사회학적 측면에서의 분석은 제가 구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참고로 해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사부님이 말씀하신 '해방 이전 창작설'은 일단 실증적 자료를 찾기 힘든 관계로 역사적 고찰에서는 제외시켰습니다. 만약에, 제 사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미당이 총독부 기관지인 에 를 발표한 1944년 11월 무렵에 를 쓴 것이 확실하다는 고증적 자료만 있다면, 제 글은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고증적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감스럽지만 저는 일단 미당의 횡설수설하는 회고담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 조사했습니다. 실증적 자료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적 고찰을 할 경우, 잘못하면 그야말로 '무당판수놀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미당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하려는 의도보다는 미당이라는 야누스적 인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해보자는 의도에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비록 미당의 추악스런 삶을 혐오하지만, 예술가로서의 미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시집과 시론을 성실하게 읽었습니다. 도대체 유종호교수나 김화영교수 같은 원로 비평가가 미당이 작고했을 때, 그의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미당을 극찬했는 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역사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바로 읽기1: 박광용 교수의 글과 발표 당시의 국내상황  제 논문의 본론의 첫번째 장에 해당되는, 에 대한 역사사회학적인 고찰의 경우, 박광용교수가 이란 글에서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고 있는 만큼, 그의 견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제가 박광용교수의 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국화꽃=이승만"으로 본 그의 견해를 지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서정주의 국화꽃을 어떤 특정 개체나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기보다는 좀 더 초월적인 존재, 즉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인 삶을 살다 간 미당이 섬긴 '하늘'과 '태양'과 같은 존재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 미당은, 일제시대에 히로히토왕과 아마테라스를 하늘과 태양으로 생각하고 섬겼듯이, 해방 후에도 여러 다른 '하늘'(天)과 '태양'(日)--이승만, 전두환, 단군, 웅녀, 세오녀, 선덕여왕 등등--을 섬기고 따랐던 것 같습니다. 미당이 섬기는 이 초월적 존재는, 종이 섬기는 주인, 백성이 섬기는 주군에 비유될 수 있으며, 미당은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그에게 하늘과 태양이 되어줄 수 있는 인물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서 살았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가 섬긴 일군(一群)의 주군(主君)들의 정점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박광용교수가 의 국화꽃을 이승만으로 본 것은 이 시가 발표될 당시--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의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박광용교수가"가을에 피는 국화꽃은 외국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이든 독립투사"인 이승만을 상징한다고 해석한 것에 대해, 이남호 교수는 "는 미당의 수많은 명시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에 나오는 국화를 이승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시를 전혀 모르는 자의 무식한 소리이므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 '국화 옆에서'에 표현된 우리말의 아름다움, 삶에 대한 성숙한 통찰과 의젓한 태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해석을 할 수가 없다"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경향신문 2000-07-10).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국문학자가 보인 이러한 고압적인 태도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광용교수의 새로운 해석은 작년 여름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긴 했어도, 중앙 매스컴과 문단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제가 이 논문을 쓰면서 자료조사를 열심히 하고 미당의 시론과 자서전등을 찾아 읽은 것도, 저의 글이 박교수의 글처럼 문화권력적 평론가들의 희생양이 되어,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에 불운한 운명을 맞이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하지만, 박광용교수의 글은 시를 주로 텍스트 외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역사적 사실을 다소 자의적으로 해석한 문제점이 있긴 해도, "시를 전혀 모르는 자의 무식한 소리이므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혹평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형편없는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박광용교수의 글은 기존의 문학연구가들이 그 동안 소홀히 다루어 온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새삼 환기시킴으로써 이 시를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폭넓게 해석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으로 본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그는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도연명이나 이정보의 국화꽃의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국화꽃은 "'높은 뜻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 살아가는 은자(隱者),' 곧 한 사람의 서민으로 살아가는 뜻 높은 선비"를 상징하는 반면에, 일본문화 속에서 국화꽃은 황실을 상징하는 고귀한 꽃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51쪽). 하지만 박광용교수는 의 국화꽃이 일왕을 상징한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위상이 일왕과 다름없었던 이승만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 지는, 를 쓴 국문학자 김태준이 「단군론」에서 "국수주의적 역사 등이 천조대신(天照大神) 대신에 단군(檀君)을 가르치고, 왜왕(倭天皇) 대신에 이승만을 우상화하고 있으며 . . . "라고 경고한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박교수의 글 55쪽에서 간접인용). 즉 해방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천조대신' 대신에 '단군'을, '일왕' 대신에 '이승만'을 숭배했는 데, 그러한 외견상의 민족주의적 경향이 냉철한 역사의식과 자기성찰이 결여된, 당대의 시대상황에 순응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당의 경우,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성향은 농후했습니다. 미당은 [내가 본 이승만 박사]라는 글에서, 이승만을 대면하기 전에, "적어도 하늘의 庶子 桓雄의 아드님--檀君 비슷한 모습에, 그렇지, 적어도 그리이스의 神들의 우두머리--제우스만큼은 천둥소리 나게 하는 눈살과 이맛살에. . ."를 상상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각주1). 일왕과 천조대신을 섬겼던 미당이 어느 사이에 민족주의자가 되어서 이승만을 상상하며 환웅과 단군을 떠올리게 되었을까요?(부연설명 드리자면, 흔히 평자들이 와 및 다른 많은 수필에서 미당이 삼국유사 내지 삼국사기를 소재로 삼아 "단군," "웅녀," "세오녀," "파소" 등등을 형상화한 것을 갖고 민족정신 운운하는 데, 그것이 진정한 민족사랑에서 출발한 것인지에 대해선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민족주의의 옷을 입은 친일의 또 다른 변이가 아닌지 살펴 보아야지요. 또 저는 에 나타난 미당의 독특한 신(神)의 개념이 지닌 독자성과 민중성이 일본의 신(神, 가미)의 개념과 많이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직관(?)을 입증하기 위해선 많은 자료를 토대로 설득력있는 글을 써야 되겠지만요.)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의 상징으로 본 구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서정주가 그 당시 이승만의 전기를 집필했었다는 점입니다. 박광용교수는 1947년 여름부터 이승만의 집에 드나들면서 미당이 전기를 집필했었다는 사실과 그가 나중에 쓴 수필 (3)에서 회고한 내용에 주목합니다. 미당은 "그(이승만)와의 반 해쯤의 접촉은 내게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오는 민족혼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 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 다시 살 마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는 데, 박광용교수는 이러한 이승만의 이미지가 의 국화꽃의 이미지와 동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각주1). 박광용교수가 국화꽃을 이승만의 상징으로 본 또 다른 이유는, 시 제목이 이승만과 연관되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광용교수는 의 국화꽃이 이승만을 상징하기 때문에, 시인이 내지 라는 제목 대신에 친근하게 우러러 보이는 란 제목을 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승만을 회고하는 수필의 제목이 시 제목과 유사하게 이라고 붙여진 것도 "국화꽃=이승만"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박광용교수의 지적이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시의 창작 시기와 시어의 해석에 있어서 자의성이 짙습니다. 우선 미당은 국화를 소재로 쓴 수필 에서, "1946년 해방 이듬해의 가을 어느 날 밤 잠이 잘 안오던 끝에 나는 뜰에 피어있는 국화꽃들을 생각하며, 라는 한 편의 시를 썼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각주2). 이 회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의 창작 시점은 발표된 시점인 1947년 11월보다 일년 남짓이나 앞선 것이 됩니다. 즉 는 이승만을 만나서 전기를 집필하기 시작한 시점인 1947년 7월 보다 훨씬 오래 전에 씌여 진 것이 됩니다. 따라서, 「국화 옆에서」의 국화를 이승만으로 단정하기보다는 그 이전에 모델이 된 또 다른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해석이 될 것입니다. 를 1946년 가을에 쓰게끔 만든 인물 내지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여러 사유로 인해 발표 시점을 미루다가, 이승만을 만난 이후에 다소의 수정을 거쳐서 발표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따라서 의 국화꽃은 창작의 초기에 모델이 된 어느 인물의 이미지와 이승만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박광용교수는 창작시기와 발표시기의 편차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발표 시점만을 중시해서 국화꽃을 일관되게 이승만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박광용교수의 "국화꽃=이승만"이라는 등식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미당의 국화꽃이 지니는 여성적 이미지의 독특성을 인지했으면서도 이 여성적 이미지가 이승만과 어떻게 부합될 수 있는 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박광용교수는 미당의 국화꽃의 이미지가 일본문학 속의 여성의 이미지와 흡사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일본 최고 수준에 드는 단편소설로 인정받는 하야시 후미코(1903-1951)의 [철 늦은 국화]는 1948년에 발표되었는 데, 여기서도 고난의 세월을 겪은 55세라는 나이로 해서 '대단한 분별력을 가진 . .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는 단아한 표정'의 여인을 국화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마치 '거울 앞에선 누님'과 같이"(51-52). 하지만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미당의 시는 1947년에 발표되었는 데, 후미코의 소설은 1948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입니다. 1947년 이전에도, 후미코의 소설처럼, 일본문학 속에서 국화꽃이 여성적 이미지를 지닌 상징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는 지를 알아야, 미당이 일본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국화꽃=누님"이라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을텐데, 박교수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교수가 "이승만=국화꽃 누님"이란 등식을 형성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국화꽃의 특징:  1) 오랜 세월의 여정을 거치면서 잘 손질되어 고귀하게 우러러 보이는 품성을 지닌 꽃  2) 명치유신 이후에는 권력의 정통성을 지닌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진 꽃  3) 분별력과 단아함을 지닌 여인의 이미지를 지닌 꽃  이승만의 특징:  1) 모든 풍상을 다 겪어서 인품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우러러 보이는 낯익은 노인  2) 해방 후의 한국에서 천황의 위상을 지닌 존재  3) 분별력 있는 단아한 자세를 지켜서 친근하게 우러러 보아야 할 누님같은 존재  위의 도식에서 1)과 2)는 서로 부합된다고 볼 수 있는 데, 3)의 경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과연 이승만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닌 양성적인(兩性的, androgynous)인 이미지를 갖는 존재인지를 좀 더 개연성있게 설명해야 되는 데, 박광용교수의 글은 이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946년 가을에 서정주로 하여금 「국화 옆에서」를 쓰게끔 만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은 누구일까요? 이를 살펴보기 위해선, 미당의 말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어 보고, 당대의 한국의 역사적 상황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적 상황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   "국화꽃의 비밀"(5): ㅡ[국화꽃=천황+천조대신]일까?  역사적 관점에서의 바로 읽기2  그렇다면, 1946년 가을에 서정주로 하여금 「국화 옆에서」를 쓰게끔 만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은 누구일까요? 상술한 바 있는 를 보면, 미당은 의 창작시기에 대해 앞서 인용한 회고담과는 상당히 다르게 진술합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가 갑자기 어느 날 쓰게 된 시가 아니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된 다양한 여성적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결합되어 생긴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좀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마는 내가 二十代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있는 四十代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핼쓱한 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하고 비웃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인제 이 를 쓸 무렵에는 어느 새인지 거기에서도 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서상한 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 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일(靜溢)한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아마 2, 3년 그 표현의 그릇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각주1).  우선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창작시점은 1946년이 아니라 1947년이 되고, 국화꽃이 상징하는 '사십대 여인의 미의 영상'이 미당의 내면에 싹트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내지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미당이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 발표한 시점이 1944년 12월인 것을 고려할 때,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지닌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 있는 40대의 여인"의 이미지의 시원(始原)을 탐색하는 작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위 인용문보다 앞서 상술하길, 소복한 사십대 여인의 이미지에는 일련의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중첩되어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첩된 영상들의 예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새로 자라오르는 보리밭에 뜬 달빛과 같은 애절한 여인  2) 오월의 아카시아 숲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신선한 여인  3) 저 에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와 같이 오만하고 요염한 여인  4)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  5) 성모(聖母)마리아와 같이 다수굿하고 맑고 성스러운 여인  6) 황진이 같이 스스로도 멋지고 또 고차원의 온갖 멋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  미당은 이러한 여러 여인의 미의 영상의 체험이 중복되어서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미당의 국화꽃은 여인의 다양한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초월적인 여성, 융의 표현을 빌린다면, 태모(太母, Great Mother)의 이미지를 지닌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여성의 이미지가 일본 신화 속의 아마테라스의 이미지와 상당히 부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미당이 언급한 4)의 여인의 경우, 미당은 그 여인을 산악에 비유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 여인이 보통 여인이 아니고 신화적 여인, '태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누이를 산악(山岳)에 비유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미당은 그 산악과 같은 여인의 이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 크레오파트라를 언급하면서, 이 들보다 더 장엄한 이미지를 지닌 태모에 대해선 왜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해방 이후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산악과 같은 여인=아마테라스"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1991년에 발표된 시집 에 수록된 라는 미당의 시 때문입니다. 그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옵니다.  얼시구!  天皇이 좋아하는 대나무에선  나비가 여덟 마리나 날아오르며  무우 아랫도리같이  자는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어서  '야 이건 우리들의 해의 女神님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께서  손수 낳으신 나비님들이시죠'하며  日本 사람들은 매우나 좋아했네 ({미당 시전집3}321)  여기서 미당은 천황과 해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언급하면서 일본 산들의 의미를 수수께끼같은 말들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당이 말년에 쓴 이 시는 그가 일본신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제 논문 본론부분의 두번째 장에서 를 일본창세신화와 연계시켜 상세히 풀어나갈 예정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미당이 를 창작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단지 국내의 상황만 고려할 것이 아니고, 국제적인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저는 미당의 국화꽃을 일본 문화적 상징물과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일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박광용교수의 연구는 거의 해방 이후의 국내상황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만, 제 생각엔 그 당시의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1944년 말엽에서 1947년 중엽사이에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일왕의 인간선언입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6년 1월 1일 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일왕의 인간선언이 지닌 의미에 대해, 역사학자 박경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조서에서 천황은 신일본 건설의 방침으로 5개조의 서문(誓文)을 내세우고, 이어서 천황과 국민의 유대는 상호간의 유대와 경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화와 전설에 의한 종전의 왜곡된 신적(神的) 권위를 버리고 민주주의 사회 국가의 일원으로 국민과 함께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천황을 신으로 숭상하여 천황을 위해 전쟁을 하고 왕을 위해 죽는 것이 책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각주2) 일왕의 인간선언은 일본인들에게는 패망보다도 더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스 베네딕트도 지적한 것처럼,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일본의 패망을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라기보다는 천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각주3). 일왕의 인권선언은 1946년 11월 3일 신일본국헌법이 공포됨으로써 법제화됩니다. 이 헌법에 따르면,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주권자였던 천황은 일본국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의거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각주4). 즉 신일본국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일왕이 아니라 국민이며, 일왕은 신적 권위를 더 이상 지니지 못한 상징적 존재, 일체의 정치적인 권한을 지니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 됩니다.  일본국헌법이 공포된 날짜가 11월3일이라는 것은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날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죽은 뒤에도 조선신궁에 신으로 모셔진 메이지왕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명실상부한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왕이 일본인들의 정신영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국화와 칼}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정말 큰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정신적 영역이었다. 주(忠)는, 최고 사제(司祭)이며, 일본의 통일과 무궁함의 상징인 신성한 수장 곧 왕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가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주(忠)가 이처럼 쉽게 왕에게로 옮겨진 것은 황실을 태양의 여신(天照大神)의 후예라고 하는 옛 민간 신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139-140쪽). 신화로부터 자신의 신성불가침한 권위를 끌어 왔던 왕이 11월3일을 기점으로 법적으로 한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한 일본인들에게나 친일파 한국인에게나 모두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정주는 1946년 가을 내지 초겨울, 일왕 및 그 가족을 상징하는 노오란 국화꽃을 보면서, 적국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현인신에서 범인(凡人)으로 몰락한 일왕을 떠올리며,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인간선언 후, 일왕은 국화 훈장과 국화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천황복을 벗어버리고 평복을 입은 채 전국을 순례하면서 자신이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다녔는 데, 이러한 일왕의 극적인 변모를 지켜보면서 미당의 마음 속이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존의 학자들이 를 일본제국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한 데에는, 부분적으로는 실증적 자료에 대한 부주의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국화꽃을 파란만장한 삶을 거친 후 관조의 단계에 이른 40대의 시인 서정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는 데, 이는 의 발표 시점 (1947)과 에 수록된 시점 (1956)을 혼돈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광용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서정주가 이 시를 발간한 때는 32세였으므로, 40대의 중년여인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그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나이는 46세 였습니다(52).    "국화꽃의 비밀"(6): ㅡ언어의 흑색 요술사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1:  1) 미당의 시작법의 특징  미당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시작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의 여러 시론을 읽으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입니다. 라는 시론에서 미당은 시(詩)가 산문과 다른 특징은, "백마디나 천마디 혹은 만마디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다 하는 것이 아니고 요약해서 말은 되도록이면 조금만 하고 그 나머지는 암시(暗示)로써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문학작품의 뉘앙스]라는 글에서, 미당은 당시에 일고 있던 민중문학운동의 비예술성을 비판하면서 "문학의 시나 소설이나 희곡은 그 언어 매력과 의미와 영상들의 효율 높은 구상-구성을 통해서, 시는 또 산문의 언어 사용량이 무제한성과는 다른 단축되는 언어 사용권의 필연인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의 구성의 노력에 의해서 성립되어 온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도 거부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각주1) 이러한 시론에 입각해서 시를 쓴 만큼, 미당은 온갖 시작법--비유(은유+직유), 상징, 인유(引喩), 생략 등등--에 통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부족방언의 마술사" 내지 흑색 요술사의 재능이 풍부한 인물이지요. 따라서 미당이 말하는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적 모티프(motif)와 상징이 지니는 의미를 해독해야하는 데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그야말로 '기상'(奇想, conceit)과 인유(引喩)의 요술사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을 시각적 청각적 암시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신화와 전설, 민담 및 다른 고전문학에서 그 모형(母型)을 빌려와 시상(詩想)을 형성하는 인유(引喩)라는 기법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니까요.  [시의 암시]란 글에서 미당은 스테판 말라르메의 라는 시에 나타난 거울을 상징적 암시의 예로 들면서 자신의 시론을 펼쳐나갑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거울을 시각적 암시를 위한 상징물로 활용할 때 시인은 거울의 밝은 경면(鏡面) 뿐만 아니라 거울 뒷면의 캄캄한 어둠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당산문}296-299). 상징물로서 거울이 지닌 여러 속성--빛, 어둠, 차가움, 시각적 환상등--을 다 알고 있는 미당이 에서의 거울을 관조 내지 자기성찰을 뜻하는 단순한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좀 순진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징에 대한 이러한 그의 시론에 걸맞게, 미당 자신이 사용하는 상징도 다의성과 양가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당의 시들은, 초기작인 [화사], [귀촉도]로부터 [신라초], [질마재 신화],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에 이르기까지, 신화와 전설에서 그 모티프를 따온 것이 많습니다. 에서 미당은 "아무리 작은 꽃잎사귀도 가로 세로 뻗쳐서 일만리는 가느니......"라고 표현한 불교적 상상력의 무한성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각주2). 그는 불교적 상상력을 지니지 못한 이들 혹은 '논리라는 속물'을 앞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무당판수' 놀음" 내지 '상상(想像)에 이로(理路)가 안 닿는 표현'으로 여겨지는 것이 실상은 고도의 상상과 은유에 바탕을 둔 것임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미당은 또한 그러한 '상상에 이로가 닿지 않는 표현'의 생성을 독자나 평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모형(母型)을 제시하는 데, 그 대부분이 신화 내지 설화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미당은 {동천}이란 시집에 수록된 라는 시의 첫 연을 예를 들면서, 자신의 시상(詩想)의 발생과정을 설명합니다.  행인들은 두루 이미 제집에서 입고 온 옷들을 벗고  萬里에  나라가는 학두루미들을 입고  이러한 시상을 소개한 뒤에 미당은 부연설명하길, "또, 이런 표현이 근년 내 시의 어느 귀절에 보인다. 그란, 그 상상의 유니크한 이유로 혹시라도 시새워하는 이가 있다면 안심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도 그 母型이 되는 이야기가 三國遺事 속의 이야기 속에 또 들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즉 미당의 이러한 독특한 발상은 그가 유에서 무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에 나오는 일화를 세 행으로 줄여서 표현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각주3). (여기에선 글의 흐름을 신속하기 위해 설화의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읽고 싶으신 분은 각주에 링크시킨 사이트로 들어가셔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당이 이처럼 상징과 인유를 즐겨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미당의 시는 대부분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표면서술과 심층서술 사이에 간극 내지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작법을, 롤랑 바르트라는 이론가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제1의 기호체계(언어체계)와 제2의 기호체계 (신화체계)가 있는 서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바르트는 그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이발소에서 본 프랑스 지의 표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 잡지의 표지는 프랑스 삼색기를 올려다 보면서 경례를 하는 흑인(negro)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바르트는 여기에서 두 개의 기호체계를 인지하게 됩니다. 제 1의 기호체계에서는 우리는 그 그림을 보면서, '군인이 프랑스 국기를 향해 군대식 경례를 한다'라는 의미를 읽어 내지만, 제2의 기호체계에서 우리는 "프랑스 제국주의(french imperiality)"라는 것을 읽게 됩니다. 즉, 제2의 기호체계에서 그 그림은 '프랑스는 식민지인이였던 흑인도 저렇게 군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표정으로 프랑스 국기에 기꺼이 경례하는 좋은 국가'라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Mythologies, Hill & Wang, 111-121).  저는 도 그러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화꽃과 거울이 일제 강점기를 체험한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적 상징물인데다 서정주의 친일행적이 뚜렷한 만큼, 그의 시를 제1의 기호체계에서만 의미해독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선, 내일 상술할 생각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다른 시들--목화, 누님의 집, 견우의 노래--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2) 목화, 누님, 직녀의 실체는?  서정주의 상징과 인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태껏 평자들은 미당의 시세계를 서구 고대신화 및 성경, 한국 신화와 연결지어 분석을 해왔지만, 일본신화와 연계지어 분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일 수 있는 영역을 불모지로 남겨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은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만큼, 일본 신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메이지 일왕이 바쿠후시대를 종결지은 후 현인신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게 된 결정적 근거가 일본의 고대신화의 천손강림설에 있었듯이, 일본인들은 우리를 통치하고 동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신화로부터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 제가 사부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고대창세신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최석영씨가 쓴 두 권의 책 {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권력}(서경문화사, 1999)과 {일제의 동화이데올로기의 창출}(서경문화사, 1997)을 읽으면, 일본이 우리 지식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쓴 주된 책략이 일본의 고대신화--와 --에 기술된 일화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만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 및 일본고대신화를 연구하여 '불함문화론"을 세운 최남선은 나중에 '한민족=일본민족'이라는 등식을 마련해 "일선문화동원론(日鮮文化同原論)"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단군사상은 민족의 주체성을 부각시키는 대신 한국인이 쉽사리 자신을 일본인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각주4). 그 일선동조론의 시원이 되는 신화는 에 나타난 스사노오노미꼬토(須佐之男命)라는 천신의 강림신화입니다. 이 신에 대해서는 내일 자세히 설명드릴 예정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만 언급하겠습니다. 이 신은 아마테라스 태양신의 친남동생으로 일본신 가운데는 두번째로 중요한 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영웅적인 일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난폭한 탕아의 기질이 있어서 천상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일본서기}(전용신역, 일지사, 30쪽)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내려와서 최초로 머문 곳이 '신라국의 스시모리' 혹은 '소의 머리땅(曾尸茂梨, 牛頭)'라고 합니다(각주5).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스사노오를 신라인으로 보았습니다. 또 일제시대에 많은 학자들은 "단군=스사노오"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신궁에 스사노오신인 단군을 추가봉재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석영의 {일제하 무속론......}113-116쪽). 얼핏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이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쫓겨난 악왕자(惡王子)로서 일본에서 제대로 존경받지도 못하는 신일 뿐만 아니라, 조선신궁에서도 제신으로 삼지 않은 신이였기 때문에, 한일불평등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동화이데올로기' 내지 조선신도 사상의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일본은 스사노오의 누님인 아마테라스가 군림하는 '누님의 집'이고, 우리나라는, 특히 신라는 '남동생의 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당의 시에 등장하는 누님 내지 신라를 좀 더 넓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선 일부 네티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방 이듬해에 발간된 {귀촉도}란 시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세 편의 시--, , --이란 시를 일본 신화와 연계지어 간략히 살펴 볼 생각입니다. 이 세 편의 시는 앞서 말씀드린 일차적인 기호체계 (표면구조)에선 순진무구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선 목화라는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누님.  눈물 겨웁습니다  이, 우물 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  다수굿이 젖어있는 붉고 흰 木花 꽃은,  누님.  누님이 피우섰지요?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르름엔  바윗돌도 모다 바스라저 네리는데  저, 魔藥과 같은 봄을 지내여서  저, 無和한 여름을 지내여서  질갱이 풀 지슴ㅅ길을 오르 네리며  허리 굽흐리고 피우섰지요?  이 시를 대부분의 평자들은 권일송씨처럼, "붉고 흰 목화꽃을 보면서 누님의 정성, 누님의 설움, 누님의 향수를 아련히 떠올리는 시의 묘법(妙法)이 펼쳐진다. 목가적, 동화적인 그리움과 현실 긍정, 잡티가 묻지 않은 영혼의 날개가 파닥이는 순간들의 기억이 묻어나 있다. 이쯤이면 굳이 시에서 시상이라든가 이미지 따위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해석합니다({시인 미당서정주-그 문학과 생애} 462 쪽). 하지만, 이러한 순진무구한 해석은 미당이 얼마나 음흉한 언어의 요술사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자에 의해서 읽혔기 때문입니다. 앞 부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서정주는 "언외(言外)의 암시함축미(暗示含蓄美)"와 시상의 정교한 배열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 시인입니다. 에서 누님은 아마테라스가 될 수도 있고, 천손강림신화의 주인공인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邇邇藝命)의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손(天孫) 니니기가 지상에 처음 내려와 첫눈에 반해 결혼한 여자의 이름이 '木花'(코노하나노사쿠야비메)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신화 속의 목화는 솜의 재료인 목화가 아니라, 벚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만, 어쨌건 일본 황실의 시조인 니니기의 아내 이름은 에서나 에서나 똑같이 '木花'로 기록되고 있습니다({고사기}149, {일본서기}44). 일본 신화 속의 많은 신모(神母)들이 그러하듯 일본황실의 대모(大母)라 할 수 있는 목화(木花)도 극적인 삶을 산 여인입니다. 천손인 니니기는 목화에게 반해서 혼인해 하룻밤을 잤는 데, 바로 그 날로 목화가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니니기는 목화를 의심해서 그녀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다른 신의 자식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화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문이 없는 방을 만들고 맹세하길, "내가 임신한 것이 다른 신의 아이라면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천손의 아이라면 반드시 씩씩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방에 불을 지릅니다. 결국 세 명의 아들이 불 속에서 무사히 태어나, 지상계를 지배하는 그 다음 통치자가 됩니다. 즉, 일본황실의 대모(大母)인 목화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자초할 정도로 한(恨)을 지닌 여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서정주가 라는 시를 1946년에 발표할 때, 자기 고장의 목화꽃만을 생각하고 토속적 정서에 젖어서 썼을까요? 다음은 이라는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다 넘어 九萬里  山넘어서 九萬里  등ㅅ불 들고 네려 가면,  우물 물이 있느니라.  먹탕 같은 우물 물  千길을 네려 가면  굴딱지 같은,  도적놈의 게와집이 서 있느니라.  大門열고 中門열고  돌門을 열고  바람되야 문틈으로 슴여 드러가면은  그리운 우리누님 게 있느니라.  도적놈은 어디 가고  우리 누님 홀로 되야  거울 앞에 흰옷 입고 앉었느니라.  이 시에 우물, 게와집, 흰옷등의 이미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이것을 상복을 입은 토속적인 한국적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경우, 이는 서술의 제1차 기호체계(표면구조)만을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 연을 제대로 읽어보면 화자가 말하는 공간이 흔한 동네 마을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다넘어서 구만리, 산넘어서 구만리'에 있는 어느 우물 속의 세상입니다. 즉 누님이 살고 있는 공간은 신화적 세계--지하의 세계(황천국) 내지 해저의 세계(용왕국)--입니다. 상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우물과 흰색을 단순하게 동네 우물 내지 소복한 여인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흰색은 색 중에도 가장 다의적인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는 색깔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러 세계 상징사전을 살펴보면, 흰색은 삶과 죽음, 순수와 공포, 햇빛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주적 비의 내지 신성성(神聖性)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도둑과 승려를 의미하는 색으로서, 특히 신도(信徒)의 신주(神主)의 옷이 흰색입니다 ({한국문화상징사전}참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詩}에 수록된 란 시를 보면, 미당이 흰색의 다의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웅이 맨처음 단군에게 입힐 옷을 정할 때 웅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야 아야 아야야 치사스레 아파 하는 빛이어서는 안돼! 엉엉엉 울지도 않고, 늘 점잖고 의젓하게 웃고만 있는 그런 빛을 한번 찾아 보시오. 쓰거운 쑥 맛, 매운 마늘 맛, 두루 다 겪고 난 임자 배가 덩그랗게 나아 놓은 아이 옷이니까요" 남편 환웅이 이렇게 말하면, "그럼, 깜짱 빨강 파랑 노랑 다 아니고, 흰빛이나 그래도 그 중 어울리겠어요" 곰이 둔갑해 낸 아내는 하얀 박꽃 비스듬히 웃어도 대면서 말씀이어요. 그래, '그게 좋겠소. 하늘도 사실은 흰빛입니다. 그게 너무 멀어서 낮에는 푸르게 보이고 밤에는 캄캄해 보일 뿐이지......" 환웅께서 대답하시어, 그 흰빛으로 이 겨레의 옷빛은 처음으로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이 올시다  이처럼, 미당은 흰옷의 다의성--생명, 성숙한 여인, 우주적 비의 내지 신성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물은 동양과 서양의 신화와 민담 속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물로서, 여성성(feminine principle), 재생, '대모(大母)의 자궁'을 뜻합니다. 특히 지하세계 내지 해저에 있는 우물은 많은 상징적, 신화적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은 내지 로 부터 인유를 발견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천손 니니기의 아내(木花)는 불 속에서 자식을 세 명 낳았는 데, 그 중 두 명--호데리노미코토(火照命)와 호오리노미코토(火遠理命)--이 서로 내기를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도구를 바꿔서 내기를 했는 데, 동생인 호오리가 형의 낚시도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해신(海神)이 사는 바다 속 궁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아내인 토요타마비메를 만나게 된 곳이 바다 속 궁전 밖에 있는 우물입니다. 토요타비메는 호오리에게 한 눈에 반해 결혼하게 되고, 나중에 호오리가 형의 낚시도구를 되찾아 지상계로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해산하기 위해 지상계로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호오리가 산실(産室)을 엿보아선 안된다는 자신의 금기를 깨고, 몰래 상어로 변신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자, 모욕감을 느껴서, 남편과 자식을 남겨둔 채, 홀로 바다 속의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아마테라스 증손부에 관한 신화의 내용이 을 구성하는 시상--바다, 우물, 홀로 된 흰옷 입은 여인, 도적놈--과 상당히 흡사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의 경우, 아마테라스 여신이 "베짜는 여인"(織女)이었고, 스사노오가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쫓겨 온 곳이 신라국의 '소의 머리땅(曾尸茂梨, 牛頭)'이었고, 또 이 시가 발표된 시기가 해방 이듬해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미당이 스스로를 지상에 유배 온 "스사노오-견우'로 생각하고, 구름 너머, 바다 건너, 천상계에서 비단을 짜는 직녀 아마테라스를 그리워하면서 쓴 시가 라고 보는 것이 아주 황당하기만 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비단은 연오랑과 세오녀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햇빛을 상징하는 천인만큼, 그 비단짜는 직녀를 아마테라스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木花, 바다 속의 우물, 비단을 짜는 천상의 직녀를 그리워하는 견우, 국화꽃과 거울, 이 모든 것이 1946년 전후에 쓰여진 시 속에 나타난 것은 우연에 불과할까요? 이 모든 시가 한국의 목가적, 토속적 정서를 형상화한 것일까요?      "국화꽃의 비밀"(7): ㅡ소쩍새, 천둥, 천조대신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2:  1) 와 아마테라스 탄생신화  어제의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 생각에는 가 보이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비상식적인 시상의 배열과 시어의 구성은 그 모형(母型)이 되는 이야기가 신화 속에 있기 때문에 초래된 예술적 비약 내지 단층(斷層)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시는 국민적인 애송시이긴 합니다만 평론가나 학자들의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텍스트를 분석하기에 앞서 우선 {서정주시전집1}(민음사, 1994)에 수록된 [국화 옆에서]의 전문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처럼 모두 4연으로 된 는 국화의 탄생과정을 노래합니다. 각 연엔 핵심 단어 내지 상징물이 등장합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 보면, 제1연에선 봄-소쩍새-울음, 제2연에선 여름-천둥-먹구름-울음, 제3연에선 뒤안길-귀환-거울-누님-국화꽃, 제4연에선 노오란 꽃잎-무서리-불면이 될 것입니다. 외견상으로 볼 때 이 시는 서로 조화를 이루기 힘든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친근한 누님의 이미지를 지닌 국화꽃의 탄생을 노래하는 시에 있어서, 소쩍새, 천둥, 먹구름, 울음, 무서리, 불면등은 너무도 어둡고, 차갑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시어들입니다.  에서 말씀드렸듯이 가 보여주는 상식적 논리를 넘어선 시상의 배열을 설명하기 위해 김흥규교수는 불교적 시각을 도입해서, "우주와 생명의 신비" 내지 "우주적 인연의 가능성 위에서 한 송이 꽃의 피어남을 그 앞에 있었던 수많은 괴로움과 시련의 결과로 여기는 상상력"이라고 해석하였지만, 왜 하필 '소쩍새'와 '천둥'이 그 탄생의 과정을 형상화하기 위해 선택되었는 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미흡함을 보입니다. 이는 권일송교수나 김재홍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일송교수는 1연을 "인연과 시간"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2연을 '천시지리(天時地利)와 우주적 섭리'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김재홍교수는 소쩍새와 천둥 혹은 먹구름을 "비상의 이미지 또는 천체 이미지," "대지로부터 상승을 뜻하는 이미지군"등으로 막연하게 해석하였을 따름입니다. 서정주의 시를 꼼꼼히 텍스트 중심으로 분석해 단행본을 출간했던 김화영교수는, 의 경우, 아예 1연과 2연은 언급조차 않고 3연만을 따로 떼어 분석하였습니다(각주1).  제 생각엔, 에 등장하는 소쩍새와 천둥을 가장 설득력있게 분석한 국문학자는 무속신앙과 신화에 대해 그간 많은 연구를 한 김열규교수인 것 같습니다. 김교수는 이라는 글에서 분석심리학적 시각을 도입해 이 시를 분석하였습니다. 그는 미당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신모(神母) 또는 대모신(大母神)의 역할을 했던 영매자들이였다고 말하면서, 는 융이 말하는 '아니마 문디'(anima mundi, soul in the world, world-mother)를 실현하는 시라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국화와 소쩍새 사이에 일련의 대립적 징표--地/空中, 식물/동물, 정제/아픔, 빛/어둠--들이 존재하고, 또 국화와 천둥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대립--天/地, 靜/動, 광/암, 정제/혼돈--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은 진통, 여름은 파괴, 가을은 사멸을 뜻하는 데, 이러한 부정적인 힘을 점층적으로 연쇄적으로 받으면서 피는 꽃이 국화꽃이기 때문에, 이 시 세계에서는 이원론적 대립의 통합이 실현되고, "반대가 반대를 낳는 역설을 깔고 이룩된 적인 세계"가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김교수는 "미당의 는 상극의 극과 극끼리를 잇는 역설의 통합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미당연구}153-156).  이러한 김열규교수의 글은, 다소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이분법적인 등식에 있어서 작위성이 짙긴 하지만, 소쩍새와 천둥을 어둠과 혼돈의 세계로 파악하고 국화꽃을 이에 대립되는 빛과 고요(靜)의 세계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화꽃의 이미지 속에서 태모(太母)를 발견한 것 등은 섬세한 고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교수는 폭넓은 신화적 맥락 속에서 태모(太母)의 실체를 파악하지 않고 미당의 주변 여성들에게만 지나치게 천착하였기 때문에, 국화꽃이 암시하는 (太母)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아마테라스를 인지하는 데 있어서 한계성을 보인 것 같습니다. 아마테라스 신은 그야말로 대립되는 두 세계--지하/지상, 어둠/빛, 지상/천상, 죽음/탄생--가 결합해서 생긴 태모(太母)의 이미지를 지닌 여신입니다. 이를 미당의 시론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 창작을 위한 노-트]에서 미당이 특별히 소상히 설명한 부분은 평자들이 소홀히 다룬 첫번째 연입니다 (104-109). 첫번째 연을 쓸 때 그의 마음 속에 찾아든 여러 상념들에 대해 미당은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면, '저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사거(死去)하여 부식(腐蝕)해서 흙 속에 동화된 그 골육(骨肉)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그 액체는 수증기로 승화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우리 위에 퍼부었다가 다시 승화하였다가 한다'는 상념이라든지, '한 개의 사람의 음성에는--그것이 청하건 탁하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거기에는 반드시 저 먼 상대본연(上代本然)의 음향이 포함되리라'는 상념이라든지, '저 많은 길거리의 젊은 소녀들은 사거(死去)한 우리 애인의 분화(分化)된 갱생(更生)이다'는 환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107).  즉, 그는 '인체윤회(人體輪廻)', '음성원형(音聲原型)', '애인갱생(愛人更生)'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념이나 환각이 자신의 내면에 중복된 습성으로 한동안 자리잡아 오다가, 어느 가을날 국화꽃을 앞에 대하게 되었을 때, 소쩍새의 울음과 국화꽃의 이미지가 결합이 되어, 첫 연을 쓰게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연은 단지 생명체의 탄생을 예고하고 진통의 과정을 노래한 구절이라기보다는, 부식하는 시체를 거름 삼아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체를 노래한 구절입니다. 썩어가는 시체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의 윤회과정과 상대본연의 음향을 상징하기에 가장 적합한 새로 미당은 소쩍새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촉제(蜀帝) 두우(杜宇)의 한을 안고 있는 소쩍새가 사랑하는 님과 사별하고 단장의 슬픔과 그리움에 젖어있는 연인의 정서를 그 어느 새보다 청각적으로 잘 표출할 수 있는 상징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시론에서 미당은 소쩍새를 끌어 온 것과 같은 이치로 2연에서 "국화개발(菊花開發)의 원인"으로서 여름의 천둥소리들을 끌어 올 수 있었다고 간략히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생명 탄생의 과정은 파괴, 소멸, 부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미당은 본 것 같습니다.  의 1연과 2연이 담고 있는 이러한 내용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묘사된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탄생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너무도 흡사합니다. 일본 창세신화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일본 국토를 만들고 수많은 일본 신들을 창조한 남신(男神) 이자나기노미꼬토(伊邪耶岐命)와 여신 이자나미노미꼬토 (伊邪耶美命)의 딸입니다. 비록 이자나기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왼쪽 눈을 씻어 아마테라스를 홀로 낳았지만, 불의 신을 낳다가 죽은 아내 이자나미를 찾아 황천국(黃泉國)으로 여행한 결과 생긴 딸이기 때문에, 이자나미가 어머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사기} 제2장에 서술된 이자나기의 황천국 여행의 주요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각주2).  이자나기는 아내가 불의 신을 해산하다 죽자, 그 자식을 죽이고 아내를 찾아 황천국으로 여행한다. 하지만, 이자나미는 이미 황천국의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즉각 남편을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나미는 이자나기에게 황천국의 신들과 의논할 수 있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이자나미는 그동안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아달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이자나기는 아내의 모습이 보고 싶어 금기를 깨고 만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꽂힌 빗의 굵은 살을 떼어 내 횃불을 만들어 아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 때 여신의 신체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고, 온몸에는 8종의 뇌신(雷神)이 생겨나고 있었다. 결국 이자나기는 아내의 모습이 끔찍스러워 도망치고 만다.  이자나미는 금기를 깨고 자신을 치욕스럽게 한 후 달아난 남편이 괘씸해서 귀녀, 8종의 뇌신, 황천국 군사를 보내 남편의 뒤를 적극적으로 좇지만 실패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게 된다. 이자나기는 많은 고초를 겪은 후에 황천국 입구를 바위로 막음으로써 아내로부터 자유로와진다. 황천국에서 탈출한 이자나기는 "나는 아주 부정스럽고 더러운 나라를 다녀왔으므로 몸을 깨끗이 씻어 재계하여야겠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옷과 온갖 장신구를 벗어 던지고 바다 속을 들어가는 데, 몸을 씻는 동안 10명의 신이 탄생한다. 그 신들 가운데 맨 마지막에 태어난 세 명의 신을 이자나기는 가장 사랑하였다. 그 세 명의 자식은 이자나기가 왼쪽 눈을 씻었을 때 태어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오른쪽 눈을 씻었을 때 태어난 달의 신 쯔쿠요미노미꼬토(月讀命), 코를 씻었을 때 태어난 스사노오노미꼬토(須佐之男命)이다. 이 세 명의 자식 가운데, 아버지 이자나기는 딸인 아마테라스를 가장 사랑해서 자신의 구슬 목걸이를 주면서 천상계를 다스릴 것을 명하였고, 아들 쯔쿠요미에게는 밤의 세계를, 막내 스사노오에게는 바다의 세계를 다스릴 것을 명하였다.  이와 같이, 아마테라스는 이자나기가 명부의 세계로 내려가 아내인 이자나미의 구더기가 들끓는 끔찍스런 시체와 그 시체의 여러 부위에 존재하는 8종의 천둥신--머리엔 대뢰(大雷), 가슴엔 화뢰(火雷), 배엔 흑뢰(黑雷), 음부엔 석뢰(析雷), 왼손엔 약뢰(若雷), 오른손엔 초뢰(土雷), 왼발엔 명뢰(鳴雷), 오른발엔 복뢰(伏雷)--을 접촉함으로써 탄생하게 된 존재입니다. {일본서기}에도, 비록 {고사기}에 서술된 8종의 천둥신과는 다소 종류가 다를지라도, 똑같이 천둥신이 등장합니다. 박시인교수가 {일본신화}(탐구당, 1995)에서 기술한 바에 따르면, 죽은 이자나미의 머리에는 큰 천둥, 가슴에는 흙천둥, 등에는 어린 천둥, 엉덩이에는 검은 천둥, 손에는 산 천둥, 발에는 들 천둥, 국부에는 찢어진 천둥(裂雷)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주3).  이러한 아마테라스의 탄생과정은 '인체윤회(人體輪廻)', '음성원형(音聲原型)', '애인갱생(愛人更生)'으로 설명되는 국화꽃의 탄생과정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특히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에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의 사람의 음성 속에서 상대본연(上代本然)의 음향"을 들을 수 있는 시인인 만큼, '인체윤회'와 '애인갱생'이 연상되는 아마테라스 탄생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의 1연에 등장하는 소쩍새의 울음은 사별한 아내가 그리워 황천국으로 찾아간 이자나기의 고통에 상응하고, 2연에 등장하는 천둥의 울음은 자신의 부패한 몸을 보고 놀라서 달아난 남편을 좇기 위해 천둥신을 보낸 이자나미의 고통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합니다. 부연설명하자면, 일본신화와 연계지을 경우, 미당이 1연과 2연의 시작과정을 설명하면서, 왜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사거(死去)하여 부식(腐蝕)해서 흙 속에 동화된 그 골육(骨肉)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젊은 소녀들은 사거(死去)한 우리 애인의 분화(分化)된 갱생(更生)이다"라고 말했는 지를, 왜 소쩍새와 천둥이 서로 같은 이치로 형성된 시상들이라고 말했는 지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테라스의 탄생과 국화꽃의 탄생에 똑같이 천둥이 등장하고, 사거한 애인의 시상이 그려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간주하긴 힘든 것 같습니다.      "국화꽃의 비밀"(8): ㅡ거울, 누님, 천조대신  II. 신화적 관점에서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2:  2) 와 아마테라스 동굴 칩거신화  제3연의 경우, '젊음의 뒤안길,' '거울,' '누님'의 상징성을 풀이하는 것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거울을 상징물로 활용할 때 거울의 밝은 경면(鏡面) 뿐만 아니라 거울 뒷면의 캄캄한 어둠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상징의 다의성--빛, 어둠, 차가움, 시각적 환상 등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언어의 요술사입니다({미당산문}296-299). 많은 평자들이 에서의 거울을 관조 내지 자기성찰을 뜻하는 단순한 상징으로만 본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재홍교수는 3연의 처음 두 행을 젊은 날을 "살냄새와 피냄새가 섞여 있는 무겁고 어두운 모습"으로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뒤의 두 행을 "성숙한 정신의 가벼움"을 나타낸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거울을 "정관과 명상의 가벼움"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각주1). 또한 천이두교수와 김화영교수는 거울 속의 누님을 시인 자신으로 보았습니다. 천이두교수는 이 3연을 "을 영원히 이별할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조용히 살피는 관조의 거울 앞에 설 수 있을 만큼, '나이든' 시인 된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고, 김화영교수는 ''은 여기서 현재의 나와 욕망에 휘말리던 젊은 시절의 나 사이에까지도 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거리들 둔 親和를 의미한다. 거울에 비친 나도 여전히 어떤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菊花는 그러니까 거리를 둔 친화의 꽃이요, 그 인식이 피워낸 꽃이다"라고 해석합니다(각주2).  하지만 "국화꽃=시인=누님"이라는 천이두교수와 김화영교수의 생각은, 미당 자신의 회고담과 발표 시기의 미당의 나이, 또 시 속의 화자의 역할을 고려할 때, 억지스런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3연과 4연--"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을 연결지어 해석할 경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우선 누님이 관조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경우, 그런 누님의 내면은 불면의 밤을 보낸 시인의 내면과는 서로 대립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누님=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기 힘듭니다. 미당 자신은 에서 3연 속의 누님을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40대의 여인'으로 풀이하면서, 그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온 여러 여인들--달빛같은 여인, 아카시아 숲 같은 여인, 산악같은 여인, 클레오파트라, 성모 마리아, 황진이 등등--의 영상이 중첩되어 생긴 결과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서정주는 자신이 4연을 완결지었을 때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가을의 싸늘한 새벽이었는 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 있다'는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놈을 생각하자, 그것은 용이히 맺어졌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즉, 마지막 연의 국화꽃은 싸늘한 새벽의 무서리 속에서 고독하게 홀로 피어있는 존재,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고통을 초탈한 채 관조의 경지에 이른 존재는 아닙니다.  에서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국화꽃의 시상 속에 중첩되어 있는 여러 여인들의 영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산악(山岳)과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에 대해선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는 데, 저는 그 태모(太母)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이 아마테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선 텍스트 내재적 측면에서 말씀드리면, 어제 상술한 바와 같이, 아마테라스의 탄생에 등장하는, 사별한 아내가 그리워 황천국으로 간 남편, 모체(母體)의 부식과 천둥신 등의 시상(詩想)이 의 소쩍새와 천둥이 형성하는 시상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마테라스 동굴칩거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화소들--동굴칩거, 누이의 귀환, 거울 앞에 선 여인--이 의 3연과 4연의 시상과 맞물리는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당의 국화꽃이 황색이라는 것은, 굳이 일본문화권과 연계지어 해석하지 않아도, 태양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본문화권에서 거울이 태양신의 상징이 된 것은 아마테라스의 동굴칩거 신화 때문이었습니다. {고사기}에 기록된 동굴신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자나기는 황천국에 내려가 불결해진 자신의 몸을 바닷가에서 씻는 동안, 십여 명의 자식을 낳았는 데, 이자나기는 특히 딸인 아마테라스를 사랑해서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다스리게 하고, 스사노오에게는 바다를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황천국에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산천초목이 모두 죽어갈 정도로 울었다. 이에 화가 난 이자나기는 아들에게 황천국으로 갈 것을 명하였고, 스사노오는 누님에게 작별인사를 한다는 핑계로 천상계로 올라온다. 난폭한 동생의 등장에 놀란 태양신은 그가 천상계를 찾아온 이유를 의심하게 된다. 스사노오는 자신의 결백을 자식낳기 경쟁을 통해 증명한 뒤에, 기쁨에 도취되어 천상계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마테라스가 경작하는 논두렁을 부수고, 개천을 메워버리고, 제물로 바쳐진 신전의 햇곡식에 똥을 뿌리는 등 목불인견의 행동을 한다. 이러한 그의 망나니 짓을 선의로 받아들이려 애쓰던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자신이 거쳐하는 '기복실'(忌服室: 신의 옷을 짜는 청정하고 신성한 건물)의 천장을 뚫고 얼룩말 가죽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베짜는 하녀가 베틀북에 음부가 찔려 죽자, 동생이 두려워 '천석옥호(天石屋戶)'라는 동굴로 숨어 버린다. 이에 천상계와 지상계가 암흑으로 변하고, 각종 재앙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던 신들은, 결국 거울을 만들어 여신을 동굴 밖으로 끌어 낼 계획을 세운다. 아마테라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 위해, 신들은 동굴 밖에서 소란스런 축제를 벌리고, 여신은 암흑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상치 않던 축제가 궁금해서 동굴 문을 살짝 열고 내다 본다. 이에 다른 신들은 준비한 거울로 여신을 유혹한 후 손을 잡아 채서 동굴 밖으로 완전히 끌어 낸다. 다시 세상은 빛으로 가득차게 되고, 난폭한 동생 스사노오는 벌을 받은 후에 천상계에서 추방된다. 나중에 아마테라스는 자신의 손자 니니기(邇邇藝命)에게 지상계를 다스리도록 명하면서, 자신을 동굴 밖으로 나오게 한 거울을 징표로 준다, 이 때 아마테라스는 니니기에게 "이 거울을 오로지 나의 혼(魂)으로 여기고, 내 자신을 모시는 것처럼 우러러 모시도록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각주3)  이처럼 일본신화에서 거울은 아마테라스의 귀환과 천손강림을 다룬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상징물입니다. 문제아 동생 스사노오의 횡포로 인해 동굴로 피신 갔던 착한 '누님-아마테라스'가 밀폐된 동굴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굴 틈새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천손강림시 아마테라스가 손주 니니기에게 자신의 혼(魂)이 담긴 것이라고 하면서 주었다고 하는 이 거울(八咫鏡)은 그 진품이 이세신궁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데, 일본인들이 천손강림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의 혈통, 즉 영원성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 3연과 4연은, 아마테라스 신화가 보여주는 여러 시상들----베짜는 하녀의 죽음, 아마테라스의 동굴 칩거, 거울을 들여다보는 스사노오의 누이 아마테라스, 아마테라스의 귀환 등등--과 태양신의 후손인 일왕의 인간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형상화되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종천순일파적인 삶을 살아온 미당에게 있어서, 젊은 시절 광영의 길을 걷던 '국화꽃-일왕'이 패망 이후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와 상징적 군주로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가슴 속에 한(恨)을 지닌 채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40대의 여인'의 모습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특히 늦가을 무서리를 맞으며 홀로 새벽의 어둠을 견디는 국화꽃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의 3연에 등장하는 거울엔 두가지의 상징적 의미--동굴에서 귀환한 아마테라스 태양신의 혼이 담긴 신기(神器)로서의 거울과 영욕(榮辱)의 삶을 살아온 인간이 본래적 자아와 대면하는 장(場)으로서의 거울--가 중첩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 외에도, 아마테라스 신화를 구성하는 여러 다른 화소(話素)들--사별한 님을 향한 통곡, 수놓는 혹은 베짜는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누이, 여인의 고독한 은둔, 천상계에서 추방되어 세상을 떠도는 탕아(蕩兒) 등등--은 미당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견되어지는 화소들과 유사합니다.  그럼, 본론을 마무리 지으면서, 제가 미당의 국화꽃을 일왕과 아마테라스의 영상이 중첩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여러 근거들을 다시 간추려 적어보겠습니다.  1) 일본제국주의시대에 황국(黃菊)은 일본 황실과 태양을 상징했다. 조선신궁의 제신이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왕이었는 데, 그 곳에 삼종신기의 하나인 거울이 있었다. 신도(神道)의 신주(神主)들이 신궁이나 신사에서 흰색의 승복을 입은 채 둥근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할 때, 그 거울이 아마테라스를 상징했다.  2) 의 창작시점과 천황의 인간선언 시점이 다같이 1946년 무렵인 데다, 인간선언 후 현인신에서 평범인으로 돌아 온 히로히토왕의 이미지와 4연에 묘사된 늦가을 무서리 속에 피어있는 국화꽃의 이미지가 많이 유사하다.  3) 미당이 말하는 국화꽃 여인들의 영상 중에 하나인 산악(山岳)같은 여인이 말년에 쓴 라는 시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일 개연성이 높다.  4) 아마테라스 탄생신화에 등장하는, 이자나기의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 황천국으로의 여행, 모체(母體)의 부식(腐蝕)과 천둥신의 등장이 의 1연의 소쩍새와 2연의 천둥에 상응한다. 또한 아마테라스 동굴칩거 신화에 등장하는 거울과 누님의 귀환이 제 3연의 시상과 유사하다.  5) 일본신화 속의 大母들--이자나미, 木花, 토요타비메--이 한결같이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어니 홀로 앉아있는 여인' 내지 '서릿발 속의 국화꽃'의 이미지를 지닌 여인들며, 특히 시집에 수록 된 시 가 천손강림설의 주인공 니니기의 아내 이름과 동일하다.  6) 일제 강점기에 팽배해 있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에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를 단군 내지 신라인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 , 에 등장하는 누님을 일본 내지 아마테라스로, 남동생을 우리나라 내지 서정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7) 일본어를 국어로, 일장기를 국기로 생각해 온 미당이 국화꽃에 대한 여러 편의 시와 다양한 내용의 수필을 쓰면서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단 한번도 일본문화권에서의 국화꽃의 상징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즉, 국화꽃을 보면서 단군, 웅녀, 신시(神市)을 연상하는 미당이 일본의 상고시대를 연상하지 않았을 리 없는 데, 이를 고의적으로 은폐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화꽃의 비밀"(9): ㅡ의 사상  IV. 결론: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어서는 안될 '부족방언의 요술사'  저는 지금까지 글을 써오면서 의 국화꽃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비록 하나의 작품에 제 노력을 집중시키긴 했지만, 미당의 많은 작품들--시, 수필, 시론, 자서전--을 읽으면서, 제 생각의 균형을 잡기 위해, 미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해하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미당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제가 미당의 국화꽃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그토록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국민적 애송시로 칭송받는 그 시가 함축하고 있는 위험스런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당의 시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는 의 국화꽃이 지니는 언외(言外)의 부정적 암시력이, 즉 미당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량(小量)으로 정선(精選)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無盡)한 암시력(暗示力)"의 이면(裏面)이, 지난 반세기 동안 평자들에 의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국화꽃으로 상징될 수 있는 미당의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인 세계인식은 그 이후의 시세계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만큼, 저는 그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어제 쓴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가 왜 "국화꽃"이 천황과 천조대신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형성된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선 정리해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 쓰게 될 결론에선 미당의 다른 작품 속의 종천순일적 사상에 대해 제가 그간 공부해 온 바를 간략히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미당이 죽은 지 반년 남짓한 시점에, 미당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이 땅의 평론가들과 언론은 서둘러 졸속으로 을 제정했습니다. 그 상은 미당의 작품 속에 드러난 사상을 철저히 도외시한 채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온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미당이 작고했을 때, 원로 평론가 유종호교수는 동아일보에 미당 서정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유교수는 서기 2000년을 문학사에 있어서는 "이 나라 최고의 시인이 시쓰기를 그친 해"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하며, 미당의 "1000여편의 시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극히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고 극찬하였습니다 (각주1). 유교수의 미당 사랑은 애도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을 제정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일등공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신문이나 미당평론모음집에 반복적으로 실리는 유교수의 글은 놀라울 정도로 늘 똑같은 평문입니다. 1994년 {작가세계}에 실린 이라는 글은, 미당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잣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평문의 결론부분에서 유교수는 미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당은 청년기에 {시인부락}이란 시 동인지의 동인이었다고 한다. 반세기 후 그는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 되었다. 족장의 사상을 깊이 검토하는 일은 이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족장에 대해서는 시인부락 쪽에서 이런저런 비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그런 일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부족방언의 요술사이자 시인부락 족장인 미당 시가 좀 더 널리 향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씌어진 이 글은 어디까지나 미당론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각주2)  이 글에서 유종호교수는 미당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며 '부족방언의 요술사'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당을 '부족방언의 요술사'라 평가하는 유교수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당은 한 송이 연꽃 속에서 끝없는 공간의 확장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한 송이 국화꽃 속에 담겨있는 바다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습니다. 현재의 삶 속에서 '상대본연의 음향'을 듣고, 고대 설화와 현대시를 하나로 엮어내고, 죽은 영혼들과의 혼교(魂交) 내지 영통(靈通)을 통해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할 정도로, 뛰어난 신화적 상상력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은유와 상징을 통해 수(繡)를 놓듯, 베를 짜듯, 정교한 예술품으로 형상화할 줄 아는 예술적 능력을 지녔습니다. 아마도 유교수가 말한대로 "오묘한 부족 방언"의 마술사 내지 요술사로 평가될 수 있을 정도로 미당은 "'부족방언(部族 方言)'의 순화와 세련"에 큰 기여를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당은 '부족방언의 요술사' 내지 마술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시인부락의 족장'이 될 수 없는 인물, 되어서도 안되는 인물입니다. '족장의 사상을 깊이 검토'할려고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고, 족장이 만든 작품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여러 각도에서 고찰하지도 않고, 유교수와 같은 원로 평론가가 미당을 성급하게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 내지 "단군이래 최대의 시인"이라 극찬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일제강점기의 미당의 친일행각과 해방 후의 지속적인 독재정권 찬양행위를 무시한 채, 미당을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앉힌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각주3). 명실상부한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기에는 미당에겐 참다운 족장의 덕목--삶에 대한 통찰력, 준엄한 자기비판, 냉철한 이성, 역사의식, 미래에 대한 비전, 희생정신 등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은,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에, '종천순일(從天順日)의 정신'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주군을 섬기는 '백성의 멘탈리티' 내지 주인을 섬기는 '종의 멘탈리티'를 보입니다.  1988년에 발간된 {팔할이 바람}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從天順日派?]란 시에서, 미당은 회고하길,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친일행위를 한 것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일본의 패망을 상상하지 못한 탓에 일본의 장기 지배 속에서 호구 연명할 길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어서 한 행위였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각주4). 또한 그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이조 사람들이 그들의 백자에다 하늘을 담아 배우듯이 하늘의 그 무한포용을 배우고 살려 했을 뿐"이고, "지상이 풍겨 올리는 온갖 美醜를 하늘이 고 다 받아들이듯 그렇게 체념하고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 내지 '부일파(附日)'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스스로를 '從天順日派'로 칭하였습니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미당이 자신을 종천순일파로 칭한 저의는 스스로의 친일행위를 '하늘'의 뜻을 따른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 했던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명칭은 미당의 삶 전반을 통해 지속되어온 그의 독특한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가장 잘 정의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제 생각에도, 미당을 '친일파'라 칭하기보다는 '종천순일파'라 칭하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친일파'라 칭할 경우, 그가 섬긴 '하늘'이 일왕과 아마테라스에 국한되기 쉽고, '섬김받는 자'와 '섬기는 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부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시대에 국화꽃으로 상징될 수 있는 히로히토왕과 아마테라스를 하늘과 태양으로 떠받들어 섬겼듯이, 해방 이후에도 여러 다른 '하늘'(天)과 '태양'(日)을 섬기고 따랐습니다. 에서 말씀드렸듯이, 미당은 이승만을 만나기도 전부터 그를 "하늘의 서자 환웅의 아드님-단군" 내지 "제우스만큼은 천둥소리 나게 하는 눈살과 이맛살"을 가진 하늘같은 존재로 생각하였습니다(각주5). 그 이후로도 이승만을 향한 미당의 존경은 '숭배' 내지 '짝사랑'으로 그 스스로 표현할 정도로 맹목적인 것이었습니다 (각주6). 즉 미당에겐 이승만은 '국부'이며 '한국혼'이고, 단군과 제우스에 필적할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미당의 '하늘' 내지 '주군'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은 이승만에게만 보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당은 1987년에 쓴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란 시에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전두환에 대해 '새로운 햇빛'과 '하늘의 찬양'이란 거창한 표현을 쓰면서, 마치 그가 단군이나 아마테라스에 필적하는 초월적 존재이기나 하듯,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으로 찬양하였습니다(각주7).  이러한 그의 종천순일파적인 인생관은 그의 일부 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전 작품에 팽배해 있는 것이 그의 현실순응주의 내지 패배주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 이후엔 민족주의의 옷--신라정신, 풍류, 영원성, 영통, 혼교, 환웅, 웅녀, 단군 등등--으로 재빨리 갈아입고 나타나기 때문에 텍스트의 표면구조 속에서는 쉽게 간파되지 않습니다. 유종호 교수가 '전통 창제' 내지 '독자적인 신라정신의 구축'으로 평가한 {신라초}나 미당이 '득도의 경지'에 이르러서 썼다고 극찬한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그리고 그의 수필에 나타난 '신라정신,' '풍류도' '영원성' 등은 그의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적 인생관의 변형일 가능성이 큽니다. 미당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에 수록된 에서 풍류를 "살을 가진 사람의 한정된 목숨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한정 없는 하늘 속의 마음만의 나이로 사는" 신선의 길로 정의하고 있는 데, 이는 최남선의 풍류사상에 영향이 받아 내린 정의입니다. 란 시에는 최남선의 풍류사상을, 이라는 글에선 최남선의 무속이론을 소개합니다 ({서정주문학전집2}299). 즉, 미당의 단군사상 내지 신라사상의 근간이 되는 것이 최남선의 내지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남선의 사상을 연구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육당의 단군연구라는 것이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의 바탕이 된 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육당이 삼국의 신라시대의 화랑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은 "풍류"라는 것은 "조선신도(朝鮮神道)"에 불과하고, 화랑도는 무사도의 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각주8).  미당은 신라에 관해 쓴 여러 편의 시와 수필에서, '처용(處容)'이나 '검군(劍君)'과 같이 현실도피적 내지 체제순응적인 자세로 인생을 산 숙명론자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현실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수동적으로 감내한 신라인들을, 풍류도를 아는 '영원인'으로 거듭 부각시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선, 체제개혁적인 지조있는 선비 조광조를 풍류를 모르는 졸장부로 부각시키면서 우스개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당의 종천순일의 정신은 그의 초기 작품 뿐만 아니라 말기의 작품에서도 무수히 발견됩니다. 여기에선 구체적인 예로, 이라는 그의 글을 간략히 소개드리겠습니다. 은 소위 그가 말하는 신라인의 풍류도 내지 영원인을 기린 산문입니다. 에서 미당은 자신의 아내를 탐한 마귀를 향해 보인 처용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신라 서울 경주에 달이 밝은 날 밤에, 이란 이름의 사내는 밤깊도록 딴 데에서 놀다가 이슥해서 집에 들어와 제 침실의 잠자리를 본다. 그런데, 그 자리에 보이는 것은 아내의 두 다리뿐이 아니라, 딴 샛사내의 두 개를 더해서 다리가 네개가 있었다. 그래 '그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웬 놈거냐'고 한다. 그러나, 신라왕조의 고급관리였던 사내는 長劍도 쓸 만한 걸로 한 자루쯤은 가졌었을 테지만, 성급한 처럼 그걸 뽑는 일은 하지 않았음은 물론, 별다른 욕지거리 한 마디도 퍼부어 대는 일도 없이, 다만 '본래는 내것이었지만 빼앗은 걸 어찌 하리꼬'하고, 빼앗겼으니 그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만 하고 있다 (......)  그리고 이 두 길 [오델로의 길과 처용의 길] 중에 의 珍客歡迎의 길을 차라리 가리킨 건 물론 고대 인도의 석가모니다. 어차피 오기로 되어 있는 진객(珍客)을 칼 뽑아 대항하거나 피해 봤댔자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측 출혈만 심할 바에야 흥분 고스란히 가라앉히고 그냥 좋게 맞이해 대접해서 보내자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이 빤한 교훈은 그대로 인류의 정신사상 최상의 것이 된다 (각주9).  여기에서 미당은 처용의 패배주의를 석가모니의 지혜로 미화시키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처용과 석가모니의 지혜를 빙자해서 자신의 종천순일적 인생관을 정당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당이 자주 쓰는 수법 중의 하나가,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드리는 것입니다. 란 시에서,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일삼았던 자신을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무수한 조선인들과 같은 부류에 넣은 것처럼, 그는 자신의 철저한 현실순응주의 내지 패배주의를 지혜로 포장하기 위해 그 근거를 신라인들과 석가모니에게서 끌어오는 수법을 종종 씁니다. 그가 특히 석가모니가 가르쳐 준 지혜로 최대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석가모니가 죽음에 처해서 보인 독살자(毒殺者) 에게 베푼 관용성입니다. ({미당 산문})이란 글을 보면, 미당은 석가모니의 죽음에 관한 무수한 해석 가운데 아직 정설로 인정되지 않는 '에 의한 독살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합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이 중에 한 사람은 나를 팔았다"라고 지시해서 가롯 유다를 목매달아 죽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석가모니는 독살을 당하면서도 춘다를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당은 가장 높이 삽니다. 즉, 자신의 종천순일적 인생관--'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에 석가모니적 지혜의 옷을 입히고 자신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소인배로 부각시키는 것이 그의 왜곡된 불교정신의 핵심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삶과 글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요술사적 재능을 지닌 미당이 자가당착적인 일면을 극명히 노출시킨 것은 그의 보들레르 인용입니다. 그는 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 내지 '민중문학 운동'을 비판하면서, 뛰어난 예술가의 본보기로 보들레르를 내세웁니다.  샤를르 보들레르도 프랑스 혁명 때에는 다수 민중의 편이 되어 그 시가전의 전위대열에도 참가했으며, 또 그들의 신문 발간에까지도 앞장서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시집 이나 산문시집 을 통독해 보라. 거기 어디에 다수의 군중심리에 아첨하여 인기를 얻으려 한 작품이 단 한편인들 보이는가? 거기에는 시의 발견 노력자 보들레르 개인의 구전(俱全)의 자유와, 정밀한 심미탐구와 그래서 도달한 상징적 표현의 선각자로서의 면면한 창작노력의 흔적들만이 역연할 따름이다.  미당은 보들레르의 삶과 예술을 다 알면서도, 보들레르가 걸어온 삶의 진정성과 순수성에 대해선 눈뜬 장님이 되고, 오로지 그의 기법만을 배웠을 따름입니다. 석가모니의 참다운 지혜, 보들레르의 참다운 순수성에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유리한 일면 만을 보았다고나 할까요? 자신의 나이 20대에 쓴 에서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삶을 준엄한 자기비판 없이 철저한 순응주의로 일관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평생을 종천순일적 인생관에 충실하게 현실순응적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은밀한 형태로 작품 속에 담아 우리의 민족혼을 어지럽혀 온 미당을, 그의 빈곤한 사상에 대한 충분한 연구도 하지 않고 또 공개적인 논쟁의 장도 제대로 펼쳐보지 않고, 그에게 서둘러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란 월계관을 씌우고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을 제정한다는 것은 너무도 졸속으로 내려진 위험스런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족방언의 요술사'라 평가될 정도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자가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섬겨질 때, 그 '요술사-족장'의 종천순일파적 사상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너무도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전세계인들이 알고 있는 "황국(黃菊)=일본황실"이라는 등식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하고 {국화와 칼}을 읽었던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간과해 온 것은 미당이란 '부족 방언의 요술사'가 보인 마술적인 힘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당의 의 황국과 거울을 "국화꽃=친근한 누님" 내지 "거울=관조의 경지"로만 획일적으로 해석해 온 것도 모두 단순한 표피 아래 자신의 비밀스런 생각을 은폐해 온 흑색 마술사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이 땅의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미당의 마술사 내지 요술사 능력에 매혹당해, 혹은 미당의 실체를 알면서도 자신들 패거리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 아직도 미당의 빈곤한 사상과 볼품없는 실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평론가들과 어른들은 안데르센 동화 에 등장하는 어른들처럼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길 주저하고,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들이 보지도 못하는 화려한 겉옷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를 보니까 한 아이가 말하더군요. 안데르센 동화 속의 순진한 아이처럼, "하지만 임금님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걸요"라고.  저는 제 길고 긴 논문의 맺음말로, 를 다니는 문학평론가 지망생인 그 아이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해 모 대학의 집단면접에 응시했다가 미당 서정주에 대해 평가하라는 교수들의 질문을 받았다더군요. 그 아이는 수많은 지원자들 가운데서 자신 홀로 올바른 답을 말했기 때문에 당연히 시험에 붙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의외로 떨어져서 실망이 커 보였습니다. 그 아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머뭇거리듯 천천히 또박또박 한 말은 아직도 내 마음에 아프게 와 닿습니다.  "미당 서정주의 친일시를 접하고,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보면서 ...... 자기 사상의 뿌리가 썩어 있는 데 ...... 그 작가의 작품이 아름답다고,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라고 해서, 그 꽃이 진짜 진실된 꽃일까요?"  그동안 제 길고 긴 논문을 참을성있게 읽어주신 여러 창비네티즌들께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창비웹팀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미당 '菊花옆에서'는 친일시 / 이주하   유신말기, 고등학교 3학년 막바지에 교내 서클에서 한 선생님이 '미당 서정주와 노천명은 친일파'라며 그의 행적 을 이야기(낮은 톤으로) 해주셨을 때, 함께 있던 친구 몇 명과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한 친일파 장교놈이 총칼 앞세워 헌법을 유린하고 그것도 모자라 유신헌법을 만들어 종신 대통령 해먹던 시절이니,  감히(?) 사석에서 '친일'이라는 말 조차도 꺼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거니와 서정주의 '국화옆에서'와 노천명의 '사 슴' 따위의 시들은 당시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청소년 세대의 유일한 문화창구였던 교회  행사들에서  단골로 애송되던 시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교육을 받고 있는 거지?" 친구들과 나는 그날 저녁, 북한산 계곡으로 가서 소주 몇 병을 축냈다.   그 이후에 '친일문제'는 내게 매우 큰 문제의식의 하나가 되었고 대학 물 먹으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임종국님의  '실록 친일파'를 읽었는데, 그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적나라한 친일행적들과 해방 이후 뻔뻔하게도 미군정과 독재 정권에 기어들어 가 호의호식 함에 대해 혀를 내두르기도 하였다.   얼마 전 모 방송사 TV에서 기획된 '천황' 시리즈물을 보면서, 문득 소스라치게 놀란 대목이 있다.       메이지신궁 정문 문양   일본의 國花는 사꾸라가 아니다. 단지 일본인이 좋아하는 꽃일 뿐. 굳이 있다면, 일본왕실의 상징인 국화다.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도 국화문양을 따랐다.   저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국화 한 송이... 일본 천황이 계승하는 삼신기..거울,구슬,검   혹 우리가 순수시로 알고 있는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도 적나라한 "친일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니 나도  모르게 그랬다.     서둘러 인터넷에서 시를 다시 검색했다.   국화옆에서(1947)                     서 정 주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응? 1947년이라..친일시라면 응당 해방 전의 작품이라야 하는데, 이건 해방 후에 발표한 시가 아닌가? 그럴 리가 있나?   그래서 다시 '천황 국화꽃'으로 검색해 들어갔다. 그랬더니 놀랄 만한 책이 한 권 소개되어 있다.  서정주의 이 시를 비판한....바로 김환희 님이 쓴 "국화꽃의 비밀"이다.   "황국(黃菊)은 일본에서 지난 14세기 이후로 일왕과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 거울은 일왕이 현인신(現人神)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상징물"   요약내용은 아래 유알엘 참조 (글쓴이 : 황인산님)   황인산 ... '국화꽃의 비밀'을 읽고   2001년에 이 책이 나온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니 하는 생각에 내 무성의를 후회했다. (이글은 '뒷북'인 셈이다. 둥둥...) 미당의 이 시는 해방 전에 쓴 것으로 추측된다는 세간의 이론에 공감한다.   예술 작품에 작가의 삶과 사상이 배제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미당의 '일본인 같은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답은 저절로 나온다. 서정주는 이광수처럼 절대 '순수문학인'이 아니다. 노천명, 모윤숙, 주요한, 김동명, 김남조등도 그렇다. (일본군 만행..사진 올리자면 한이 없다.) 친일파의 시가 이처럼 '순수'의 탈을 쓰고 교묘히 위장하여 우리의 고정관념에  박혀 있듯이 친일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닌 현재의 족쇄다.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고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양심'의 문제며 '삶의 이야기'다.   이러저러한 핑게로 과거사에 대해 물타기를 하는 부류(한나라당과 조선일보 같은) 가 있다면, 그들은 분명 '뒤가  구린 부류들'일 것이다.   현혹되지 말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니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서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 백범(白凡) 김구 中에서 -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의 문제성 혹은 위험성(1)  창비무명인님의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 종천순일의 상징, '노오란 국화']를 경이와 경탄의 눈으로 읽었습니다.  방대한 글을 인터넷 게시판의 특성을 적절히 살리며,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며 글을 잘 마무리하신 데 대해 우선 경하합니다.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알 기회도 갖기 어려웠던 일본 신화의 세계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노라니, 근대문학작품의 해석에 일본문화와 일본체험의 존재를 살펴야 할 필수적인 예들이 적지않을 터인데 이 부분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넘어가는 학계 및 평단의 '공모'적 풍토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밑바닥엔 일본콤플렉스가 있고, 민족주의적 감정에 의해 왜곡된 도덕주의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  님은 "[국화 옆에서]의 국화꽃을 '누님'의 은유로만 생각하는 일반 사람들의 의식에 파문을 던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가 글을 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는 조심스런 서두로 글을 시작합니다. 그런만큼 이 글이, 미당은 친일 친독재 인사므로 그 작품도 모두 쓰레기다라는 식의 인터넷상의 많은 감정배설적인 단평들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진지하고 많은 자료를 동원하고 큰 공력이 들어 있는 만큼이나 문제점과 위험성도 크게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글이 시작될 때는 거의 외경에 가까운 느낌으로, 이 글의 모험이 그 폐해를 훨씬 뛰어넘는 유익한 탐색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만, 전문이 발표된 후에는 그것이 과연 유익한 탐색인지 단정할 수 없는 유보적인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나온 김흥년님의 몇몇 중요한 지적과 백낙청님의 날카로운 논평(과 앞으로의 집필 약속) 등을 볼 때 미당시와 근대시를 보는 시야를 한차원 높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는 믿음이 다시 생기기도 합니다.  저는 창비무명인님의 글로 미루어, [국화 옆에서]의 국화의 상징성을, 혹은 미당 시의 어떤 요소들을 일본황실의 상징 혹은 일본문화와 연결시켜 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국화 옆에서'의 국화를 일본황실의 상징, 나아가 히로히토를 나타낸 것으로 파악하는 논지는 거의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오상고절과 구별되는 '누님' 비유의 새로움에 대한 논의, 창작시기를 둘러싼 문제, 시인 자신이 '국화 옆에서'를 얘기한 글의 문제 등 주요 논제가 대부분 성립할 수 없거나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국화꽃의 비밀 3'에 덧붙여서 쓴 글과 시 전문 소개](6월 26일 글)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중 1) 창작시기 2) 미당의 애착 3) 해방 후 창작? 4) 소쩍새와 천둥의 울음 문제 5) 국화꽃=남성, 여성 문제의 다섯 가지는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거나 오도되어 있습니다.  1) 창작시기 문제는 국화꽃=천황 상징, 아마테라스 상징이라는 가정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고  2) 미당의 창작시기와 창작의도에 대한 횡설수설은 자기 작품에 대해 많이 얘기하면 할수록 사실상 횡설수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대부분 사후의 창작이니까. 또는 사후의 창작이라는 개연성을 갖고 읽는 것이 상식이지요.)  3) 거울과 황국. (거울 얘기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너무 심오한 해석이었어요. 저는 [국화 옆에서]는 아주 상식적인 독해를 하면 족한 시라고 판단합니다. 김재홍 교수 등등의 독해는 해석을 위한 해석, 참고서 만들기 위한 해석의 범주 아니겠어요.) 천황을 누님이라? 결국, 해방전 창작이든 해방후 창작이든 거울과 황국을 일본상징의 차용으로 보는 것이 무리하다는 질문 아닙니까. 뒤의 논증에서 그 무리가 해소되었나요?  4) "그 많고 많은 봄과 여름의 이미지 가운데 왜 하필이면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의 울음을 택했는지": 왜 '하필이면'이라고 생각하는지 저는 도저히 모르겠군요.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종달새는, 까마귀는, 비둘기는/그렇게 울었나보다"나 "봄부터 개구리는/그렇게 울었나보다"가 돼야 하나요?  5) 여성 패러다임: 현대시인이 오상고절을 그대로 읊어서는 그 시가 기억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국화 옆에서'는 오상고절 거의 그대로예요. 오상고절의 현대적 변용의 한가지지요.  6)번 질문은 '예'라고 답해야겠네요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한일 카프문학 비교 등도 있었지만, 금기가 강했죠. 그것은 우리의 자신감의 부족, 서양이론 중심주의 등등에 기인하죠. 그런데 서양이론에 매달린 사람들의 학문이 매판성을 보유하듯, 일본을 공부하다보면 역시 매판성을 보유하게 되기 십상이라는 점도 경계해야죠.  소개하신 국화꽃=이승만 설정도 흥미는 있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근거는 못 찾겠어요.  [일본 산들의 의미]가 91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은(그 무렵 쓴 것일 텐데), 저로서는 오히려 80년대 이후에 와서 이런 투의 시를 썼지 그 전에는 [신라초]니 [동천]이니 이런 세계에 몰입한 증거가 아니겠어요? 가령 "그가 일본신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게 언제부터 드러나는지 주밀하게 살펴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1)에서 이어집니다.  '[국화 옆에서] 바로 읽기'의 문제성 혹은 위험성 (2)  그리고 종종 사부님 말씀을 거론하시는 것은 글을 재미있게 해주는데, '사부님 말씀'이니까 님에게 어떤 신뢰가 저절로 내면에 생긴 것이란 느낌을 우선 줍니다. 또 독자들에게 뭔가 거역할 수 없다는 느낌을 심어주기도 하는데, 사실 가만히 보면 사부님이 '편견'에 집착해 있어요. 물론 거기에 예리한 직관이 없지 않은데, 님의 말씀의 분위기로는 사부님의 직관이 어떤 증거나 치밀한 반증에 의해 변동될 수 있는 직관이라는 판단이 전혀 안되거든요.  미당의 '행사시'들을 보면 차이가 있어요.  인용하신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를 봅시다. 그게 제목입니까? '탄신'이라니! 그리고 "새맑은 나라…" 운운은 그게 미당 시입니까? 아니, 그냥 시입니까? 중학생 작문도 요즘엔 그렇게 안 써요.  [마쓰이 히데오 송가]는 종천순일파의 '시'라고 할 수 있어요. 친일시지만 그래도 미당 시다운 솜씨가 조금은 있는 시죠. 그런데 이 축시는 종천순일파도 아니에요. 미당이 아니라면, 좀 과장해서 전두환을 희롱한 시라고까지 읽을 수 있겠어요. 미당의 친일작품으로 단편작품도 있지요. 전황을 전하는 우체부를 그린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인물 구성 묘사 문체 주제표출방식 모두 빼어나요. 이것은 미당의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미당이 이미 80년대에 접어들면 예전의 미당이 아니라 많이 풀려버린 것이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미당은 이런 행사시에는 분명하게 메시지를 드러냈어요. 사실 그가 무얼 그렇게 의뭉하게 감추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런 점도 고려해서 다른 시들을 읽어야겠지요.  종천순일파란 얘기가 언제 나온 겁니까? 보니까 88년 무렵인가 보네요. 미당이 40년대에도 종천순일파라고 생각했나요? 친일문학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탐구가 깊이 있어야겠어요.  물론 미당의 이런 자기규정이 재미있고 정곡을 찌른 면도 있지만, 그것도 오히려 미화된 것이라 보아야 하겠고, 오히려 마름 기질에 가깝죠. 줏대 없는 삼류 광대죠. 그렇다고 그의 시가 이런 규정에 모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하신 '현실순응주의' '패배주의'의 미학을 좀더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종요로운 과제겠습니다.  미당시에 씌워진 신화를 벗겨야겠습니다. 사실 분단 후, 많은 뛰어난 시인들의 월북, 사망 등으로 남한문단에서 행세할 시인이 별로 없었고, 미당은 게다가 장수한 덕분에 많은 신화가 생기고 문단 부대가 생겼어요. 이제 그의 시의 본질, 그의 미학의 정체를 똑바로 짚어보는 첫걸음이 조금씩 진전되는 것 같네요.  백낙청님의 '부족방언의 마술사' '언어의 마술사'의 의미를 더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사실 김수영이나 신동엽, 신경림, 박노해, 정희성, 윤동주 이런 시인들을 떠올릴 때 '부족방언(모국어)의 요술사'나 '언어의 마술사'란 말은 안 어울리고, 극히 제한적인 부면만을 바라보는 용어가 돼요. 따라서 이 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내용도 시의 총체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매우 한정적인 영역밖에는 안 되죠. '시인부락의 족장'---과연 유종호님은 명명의 마술사입니다. 지금은 '족장'의 시대가 아니죠. 민주주의의 시대, 시민의 시대, 내가 왕이다의 시대 등등이겠는데, 그렇다면 역으로 '족장'의 비유가 정곡을 찌른 것이군요.  님의 이번 논문은 역작임에 틀림없지만, '국화꽃은 천황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앞서 있습니다. 시와 삶을 분리하자는 분리주의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전체성의 인간을 가정하는 것 또한 곤란합니다.  가령 미당 시의 이런 대목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6·25사변과 1·4후퇴의  긴 4년의 피난살이도 피난살이였지만  1960년에 이박사가 올빼미표 선거를 하게 두고  중고등 학생들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총으로 쏘게 한 건  웃기네.  -[8·15의 은어]  오히려 {문학과 역사적 인간}에서 김흥규가 김영랑과 최재서, 이육사 등을 분석한, 작가의 생애와 그 물적 토대를 짚어보며 작품의 전반을 살펴본 논문들이 새삼 떠오르네요. 그런 작가론이 씌어진다면 일차적인 서정주의 세계관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백낙청님의 논평에 대해 답하신 님의 글이 저의 이 글에 대한 답도 어느정도 되었다 싶고, 그런 톤이 오히려 님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80년대 중반 이후 미당 시를 거의 안 읽었어요. 다시 그의 시 전반을 보고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 그대로 감상을 적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존관념과 새로운 생각이 뒤섞이는 느낌입니다.)    @@@@@@@@@@@@@@@@@@@@@이어령 교수 시평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소쩍새 : 올빼미과의 새. 일명 귀촉도, 자규. 한(恨)과 원(怨)의 심상으로 고 전 작품에도 자주 등장함. * 뒤안길 : '뒤꼍'의 뜻을 지닌, 으슥하여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 * 무서리 : 그 해의 가을 들어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 ... 가장 한국적인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당의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현대시를 대표하는 명시의 하나이다. 국화의 개화(開花) 과정을 통하여 어떠 한 생명체라도 치열한 생명 창조의 역정을 밟고 태어난다는 것을 선명히 보 여 주는 이 시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因緣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독으로 이루어 지는 것 이 아니며, 강한 힘을 부여하는 인(因)과 약한 힘을 보태는 연(緣)과의 상호  결합의 결과로 본다. 이 시에서도 국화 자체의 힘(因)과 소쩍새·천둥·무서리 가 봄부터 가을까지 작용(緣)함으로써 국화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여기서  국화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이자, 나아가 생명이 그러한 아름다움으로 승화 된 상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시적 자아의 '누님'과 같은 40대 중년 여인이 도 달할 수 있는 원숙하고 평온한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래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지만,  이러한 관습적 상징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인은 생명 탄생의 고귀함과 원숙 한 중년 여인의 불혹(不惑)의 미를 상징하는 창조적 상징의 차원으로 국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함축미를 지닌 국화의 개화를 위해서 외적(外的) 으로는 소쩍새의 울음·천둥· 무서리 등의 협동이 필요했고, 내적(內的)으로 는 설움과 번민의 시련과 고통 등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통 하여 국화는 마침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우게 되는 것이고, 무수한 괴로 움과 역경을 극복한 인간은 거울 앞에 앉아 조용히 자신을 투영, 성찰하는 완 전한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 모든 풀들이 시드는 가을철, 서리 속에서도 국화는 홀로 향기롭게 핀다. 그  고고한 품격 때문에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시인 묵객(詩人墨客)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중양절(重陽節)에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꽃이라  하여 술에 담그고 전(煎)으로 부쳐 먹는 풍습도 있었다. 은군자(隱君子)의 유 교적 이념이든 혹은 신선을 나타낸 도교적 상징이든, 국화는 워낙 우리 의식  깊숙이 배어있는 꽃이어서 잘못 노래하다가는 그야말로 똑같은 틀로 찍어낸  국화빵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서양에는 「맨 처음 장미를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그 말을 두번다 시 쓴 사람은 바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국화를 군 자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두번째로 그와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은 바보」 가 되고 만다. 만약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가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 이나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예찬한 이정보의 국화였다면 우리는 이 시를 읽 지도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당(未堂)의 를 읽는다는 것은 곧 국화를 노래한 다른 텍스 트와의 차이를 읽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가장 돋보이 게 하는 것이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바로 그 은유이다. 봄에 피는 봉숭아가 여성적인 것이었다면, 국화는 지금까지 남성 그것도 고 결한 사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미당은 그것을 「머언 먼 젊음 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 고 국화의 성(性;젠다)을 바꿔 버렸다. 「군자=국화」가 「누님=국화」로 패 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첫째는 관념적인 이념의 남성 원리가 감각적인 미(美)의 애정의 여성 원리 로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거울 앞에 선 누님」의 모습은 췌언(贅言)할 필 요없이 「먼 남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일자(隱逸者)」 혹은 「책 앞에 앉 은 선비」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군자라고 할 때의 도덕적 가치 규범과는 달리 「누님」이라고 하면 아무리  나이 든 여성이라도 심미성이나 애정과 관련된 세계를 연상하게 된다. 「거 울 앞에 선」이라는 「거울」은 용모를 가꾸고 다듬는 도구로 '책-선비'에  대응하는 '거울-여성'의 환유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시의 평자(評者)들은 누님의 모습을 흔히 「오랜 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성숙한 인간의 인고(忍苦)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해 왔 다. 그렇게 되면 서정주의 국화 역시 군자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윤리적인 원숙이 아니라 미(美)의 원수성,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관능적인 애욕이나 유혹에 들떠 있던 젊음의 미(美)가 아니라 실연의 고 통이나 삶의 환멸과 좌절같은 것을 다 겪고난 뒤에 비로소 얻어지는 중년 이 후의 여인에게 맛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봄에 피 는 붉은 도화(桃花)와 가을꽃인 노란 국화의 의미론적 차이를 결정짓는 서정 주의 시적 전략이다. 「머언 먼 젊음」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거울 앞에선 누님은 인생의  봄과 여름을 지나 겨울철로 접어든, 적어도 중년을 넘어선 여인이다. 그 얼굴 의 화장 밑에는 처연하면서도 침잠된 미-젊음의 미와는 또다른 진짜 여성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두번째의 지향점은 그냥 누이가 아니라 「나의」 누님이라고 했듯이 매우  가까운 개별성과 혈연성을 느낀다.  군자는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존재로 우리와는 먼 존재로 느껴진다. 은자 (隱者)는 세속과 단절된 것으로 그 품격은 오상고절처럼 주위로부터 단절된  배제적 가치로 이루어진다. 미당의 국화가 다른 국화와 차이성을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지나고 /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느냐 /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라는 전통 적인 그 국화는 「네 홀로」, 「너뿐인가 하노라」로 강조되어 있듯이 홀로  있는 절개(고절)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미당의 국화는 정반대이다. 주위의 모든 것과 친연(親緣) 관련을 이 루며 피어난다. 시간의 단위로 볼 때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이 하나의 고리쇠 로 지속하고, 사물의 층위에서 보면 모든 사물이 무생(無生), 유생(有生)의  담쟁이를 넘어 일체화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화는 봄의 소쩍새, 여름의 천둥과 인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연과 대응되는 인생의 경우에서는 「누님」과 「나」와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너뿐인가 하노라」의 초절성(超絶性)이 아니라 모든 것과 결합된 친연성 (親緣性)으로 새롭게 태어난 미당의 국화는 봄의 소쩍새 소리와 여름의 천둥 소리와 인과 관계를 갖게 된다. 국화꽃은 가을에 피는 꽃이다. 그것은 봄철에 우는 소쩍새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나는 식물이고 하나는 동물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 향기를 지닌 것 과 날개를 지닌 것, 땅에서 사는 것과 공중에 사는 것, 국화꽃과 소쩍새는 어 느 모로 보나 같은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전설과 시의 상상적 세계라고 해도 소쩍새는 지금까지 국화가 아니라 같은  봄철에 피는 진달래 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서정주의 시 속에서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 는 밤마다 운」 것으로 되어 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되어 있 다. 「봄부터」란 말에서 우리는 금시 국화꽃의 시원(始源)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시간적 인과 관계만이 아니다. 꽃은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는 시각과 후 각의 대상물이다. 그런데도 미당의 국화는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먹구름 뒤 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의 청각물과 어울려서 감각적 세계에 있어서도 통합  관계를 이루고 있다.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도 죽었다' 라고 하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왕의  죽음과 왕비의 죽음에 슬픔이라는 인과성을 부여할 때 비로소 소설의 플롯 (plot)은 형성된다. 이 유명한 정의처럼 미당은 관계없이 흩어져 있는 사물이나 그 현상 속에서  어떤 인과율을 찾아내는 것으로 시의 구성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최종적으 로는 「봄-소쩍새-국화」, 「여름-천둥소리-국화」에서 「가을-서리-국화 」에 도달한다. 그리고 서리는 직접적으로 노란 꽃잎을 피운다. 그리고 동시 에 거울 앞에 선 나의 누님과 국화의 관계 역시 「나」와 국화의 관계로 옮겨 지면서 「노란 네 꽃잎이 필라고 /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 도 오지 않았나 보다」의 마지막 시행이 되는 것이다. 처음엔 한 송이 「국화 꽃」이라고 부르던 것이 마지막에 오면 「네 꽃잎」으로 그 인칭이 바뀐다.  너라고 직접 불린 국화는 이미 밖에 있는 꽃이 아니라 은유의 거리마저 소멸 한 「나-국화」의 동일성으로 변한다. 봄과 여름의 계절, 그리고 누님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 나에게 오면 「 간밤」이라는 아주 가까운 시간이 되고, 가슴 조이는 그 의미 역시 무서리와  직접 연결된다. 시가 진행되어 갈수록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넓은 데서 좁은  데로 국화는 우리 옆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국화옆에서」의 그 「 옆」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국화 속에서는 모든 생명을 죽이는 서리가 오히려 꽃을 피우는 초월의 힘으 로 작용한다. 누님도 나도 이 서리의 역반응에 의해서 비로소 삶의 「노란 꽃 잎」은 그 아름다움을 얻는다. 누님의 그 노란 꽃잎이 여성으로서의 최종적인 아름다움의 도달점이라고  한다면 잠 오지 않은 간밤의 무서리 속에서 피어나는 「나」의 그 노란 꽃잎 은 시인이 고통 속에서 얻어낸 아름다운 몇 줄의 시일 것이다. 신라의 스님 월명(月明)이 밤길을 가며 피리를 불면 가던 달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 천체의 운행이 멈추는 순간, 만물이 교감하고 조응(照 應)하는 그 순간에 시가 태어난다. 가을에 피는 국화꽃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거울 앞에선 누님, 그리고 밤에 잠 못이루는 나(시인)는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 행복한 은유는 서리 내린 이 현실 세계를 교감과 조응 으로 가득 채우는 시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
2005    강릉출생 민족시인 심연수 유품 고향에 돌아오다... 댓글:  조회:3784  추천:0  2017-01-27
    ▲ 심연수 시인의 유품이 최근 중국 용정에서 강릉으로 돌아온 가운데 심연수 선양회 관계자들이 심 시인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다 ‘민족시인’ 심연수 시인(1918∼1945년)의 유품이 강릉에 돌아왔다. 심연수 선양회(회장 이진모)는 지난달 중국 용정에서 심 시인의 유품들을 가져왔다고 밝혔다. 이번에 가져온 유품은 조선어·영어·일어 도서 147권을 비롯,교과서 14권과 동흥소학교 졸업기념사진·우등상장,동흥중학교 학업성적통지서,용정국민고등학교 졸업앨범,일본대학 전문부예술과 학생증·졸업앨범 등이다. 특히 심 시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부영(復影)’이라는 제목의 시 1편이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 유품에는 또 심연수 시인의 동생 심해수 씨가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광주 씨에게 빌린 것으로 추정되는 ‘윤동주 시인의 스크랩북’ 2권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스크랩 북은 역사 인물을 다룬 신문기사와 칼럼,문학작품 기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유품들은 현재 심연수 시인의 조카인 심상만 씨의 뜻에 따라 강릉에 위치한 삼척 심씨 대종회 사무실에 보관되고 있다. 한편 심연수 시인은 지난 2000년 강원도민일보 등에 의해 사후 55년만에 시 312편 등 유작이 발굴되면서 재조명·선양사업이 활발히 진행됐다. 심연수 시인의 유품은 동생인 심호수 씨가 보관해 왔으며 그가 작고함에 따라 지난 4월에는 강릉시에 심 시인의 육필원고가 기탁되기도 했다. /이서영  ==================================  
2004    민족시인 심연수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4685  추천:0  2017-01-27
沈連洙   시대 현대 출생일 1918 사망일 1945 유형 인물 직업 시인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본관 삼척 심씨 요약 1918∼1945. 시인 목차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의의 및 평가 개설 강원도 강릉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25년 심연수의 부모는 고향 강릉을 떠나 연해주로 갔으나 1931년 구소련에서 조선 사람을 중앙아시아로 집단 이주시키는 바람에 중국으로 이주해서 흑룡강성 밀산에 살다가 신안진을 거쳐 1935년부터 용정에 머물렀다. 용정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어렵게 가계는 이어졌다. 집안은 용남촌 은진중학교 주변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다음해 용지촌 연변대학 내 농학원 자리로 이사하여 소작이나마 농사일을 시작했으나 지주가 일제 앞잡이여서 삶의 터전을 또 옮겨야만 했다. 1년 뒤 태평촌으로 옮겨 소작을 하다가 광복 후 토지분배를 받고 자신의 농토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간도로 이주할 결심은 숙부 심우택이 간도에서 중학교,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서 이곳 사정이 훤했으므로 가족이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1940년동흥중학교, 용정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쓴 시는 떠도는 가족사를 중심에 둔 작품이 주를 이룬다. 『심연수 원본대조 시전집』1부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지의 봄」, 「여창의 밤」, 「대지의 모색」, 「해란강」 등이 그러하다. 2부에서는 「추억의 해란강」, 「돌아가신 할아버지」, 「만주」 등에서 유사한 시적체험이 발견된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가정살이로 그는 22살에서야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한인소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중국 신안진에 있을 때 김수산 선생 집에 다니면서 공부한 것도 정착하지 못한 가정사에 배경이 있다. 어려운 가정살림에도 불구하고 1941년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하였다. 부모와 가족의 배려덕분에 학교를 다닌 그는 유학시절 용정의 집으로 편지와 엽서를 보냈다. 집에서 보내준 돈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동생에게 엽서로 보낸 내용을 보면 “어떤 처지에서 온 것을 생각할 제 무위도식하는 것 같은 저를 위하여 이처럼 온 집안에서 애를 쓰며 힘을 쓰는 것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시기 경제적으로 곤궁한 유학생으로 고학을 했으므로 신문배달과 다양한 일을 했던터라 이때의 어려움은 「야업」, 「검은 사람」, 「과오」 등에서 잘 나타난다. 1943년 그는 강제징집을 피해 지바현에 있다가 나진항을 거쳐 용정으로 귀환하여 흑룡강성에서 진성국민우급학교, 서성국민우급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 소학교는 김수산 선생의 도움으로 김좌진이 설립했다고 한다. 1945년 왕청현 춘양진 역 앞 물탱크 부근에서 사람들과 다투다가 피살되었다. 그해 10월 그의 부친이 시신을 수습해서 용정 토기동 뒷산 가족묘지에 묻었다. 유복자 심상룡은 현재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공공연히 언급하는 1940년대 암흑기를 밝혀줄 새로운 작가로 조명되었다. 비극적인 생애에서 볼 수 있듯이 윤동주 시인과의 유사성은 연변,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를 서정적인 언어로 위무하면서 적극적인 항일의지를 밝힌 것과 관련있다. 특히 이국땅에서 민족문학을 지켜낸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심연수 문학은 일제강점기 재만조선시인들의 문학활동을 대중적으로 조명해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전 왜곡되고 日 강점기 행적도 사실과 달라” 중국 연변 출판사 재조명으로 ‘민족시인’된 故 심연수 씨 평론가 이성천 씨 논문서 주장     ‘민족시인’으로 선양사업이 진행 중인 강원 강릉 출신의 고(故) 심연수 시인(사진)이 과대 포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경희대 객원교수 겸 문학평론가인 이성천 씨(43·문학박사)는 최근 발표한 ‘재만(在滿) 시인 심연수 시 연구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심연수 시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적지 않은 연구들은 단순 착오에서부터 논리적 모순과 의도적 왜곡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심연수 시인(1918∼1945)은 재만 조선인 문단의 무명 시인이었으나 2000년 중국연변인민출판사가 심연수 문학편을 간행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그리고 최근까지 중국과 강릉을 중심으로 70여 편의 연구논문 및 산문이 발표됐고 ‘암흑기 민족의 별’, ‘일제 암흑기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윤동주에 버금가는 시인’ 등의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씨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1940년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에 발표된 시 ‘대지의 젊은이들’을 예로 들었다. 이 시에는 ‘왕도낙토(王道樂土)의 젊은이여/오족협화(五族協和)가 빛나는 곳에/솜씨야 빛나거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왕도낙토와 오족협화는 당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통치이념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이 씨는 선행연구자들이 시를 왜곡 평가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대학 교수를 지낸 A 씨는 자신의 책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란 시에 대해 원전에도 없는 ‘놈들의 총에 맞아’, ‘찢어져 펄럭이는 흰옷’ 구절을 내세워 왜곡했다는 것. 이에 대해 A 씨는 “2002년 중국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책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그 책에는 이 구절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 씨는 또 선행연구자들이 기록한 일제의 징집 도피 시기와 대학 졸업 일자 등도 확인 결과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심연수선양사업위원회 측은 “시인의 행적 부분은 동생인 심호수 씨의 증언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심연수 시선집을 편저한 황규수 씨(인천 동산중 교사)는 “시인의 초기 작품에는 민족주의 경향이 없지만 일본 유학 이후 후기 시에서는 민족주의 경향이 나타난다”며 “초기 시만으로 민족시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2000년 심연수 시인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강릉지역 문인들을 중심으로 선양사업위원회가 만들어져 심연수문학상이 제정됐고 심연수문학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강릉시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선양사업에 2억7000만 원을 지원했다.   이인모  ====================== 한자 沈連洙 영어음역 Sim Yeonsu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강릉 출신의 민족 시인. [개설] 심연수는 1918년 5월 20일 강릉시 경포면 난곡리 399번지에서 삼척심씨 심운택과 최정배 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 3월경 가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1945년 8월 8일 영안현에서 용정으로 귀환하던 중 왕창현 춘양진에서 일제 앞잡이에 의해 피살되었다. 2000년 7월 중국 용정시 길흥8대에 거주하는 동생 심호수에 의해 55년 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되어 오던 육필 유고가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1집 심연수문학편에 수록됨으로써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학력] 1937년 중국 용정시 소재 동흥소학교 졸업, 1940년 동흥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43년 7월 13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졸업하였다. [경력] 중국 연안현 신안진 등지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활동사항] 1940년 4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대지의 봄」, 「여창(旅窓)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5월 조선 전역과 중국 북부 일부를 대장정하는 20여 일간의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 64편의 기행시를 창작하였다. 현재 2,400여 편의 시작품과 일기문, 편지글 등이 전해진다. [학문과 사상] 심연수의 문학 세계에 대하여는 그동안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엄창섭은 심연수 시의 특성과 경향을 ‘시의 유연성과 병폐성’, ‘전통의 인식과 고향 회귀성’, ‘시의 호방성과 거창성’으로 분석하며 심연수의 시세계에 대해 ‘정직한 시어의 구사력, 남성다움과 신념의 노래, 빛나는 서정과 시의 틀’로 규정하여 그의 시적 특성을 고찰한 바 있다. 임헌영은 일본의 폭압이 점차 가혹해졌던 1940년을 전후하여서는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 지역에 조선 학생 수가 급증했으며, 간도 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 공간이었다고 논급하며, 심연수를 ‘암흑기’로 낙인 찍혔던 시대에 간도 지역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문학작품을 썼던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일본 유학 중 쓴 시는 마치 윤동주의 유학시절 시를 연상할 만큼 생생한 타국에서의 삶을 느끼게 해주며 반일적 색채가 강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심연수의 시가 일본 유학 이후에 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하다고 보고 모더니즘 중 윤동주가 정지용 계열이었다면, 심연수는 김기림 계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명재는 심연수를 ‘암흑기 문학사의 한 등불’이라고 지적하며 윤동주 시와의 대비점, 항일 문학의 한 모델로 논의하였으며 특히 심연수가 직설적인 항거에만 그치지 않고 보다 문화적인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배달 겨레의 역사나 시조 양식을 통한 민족 정체성으로 항일 대응을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상훈과 추모] 심연수를 추모하는 단체는 중국 용정과 강원도 강릉에 각각 조직되어 있다. 강릉에는 2001년 11월 8일 심연수 시인선양사업위원회[위원장 엄창섭]가 조직되어 매년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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