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장편 고체시를 확립했으며 그의 시는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의 '시사'라고 불린다.
두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당시(唐詩)는 이후 시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지는 중국 문학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심에 두보가 있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 스티븐 오웬이 두보에 대해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운 시인'이라고 평할 정도로, 두보는 한시의 내용과 형식 양쪽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고체시, 근체시 등 모든 시 형식을 실험했으며, 이를 토대로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을 지닌 율시라는 형식을 창안하고 완성시켰다. 특히 인간의 심리와 자연 만물의 새로운 면을 포착하는 데 탁월했으며, 그런 한편 당대의 사회 모순과 백성들의 고초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7세기 궁중 모임에서 사교술이나 유희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시가 당나라 때 의식 있는 예술 형태로 변모한 것은 두보의 이런 현실 참여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두보의 시와 정신은 중국 시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두보는 민중의 시인으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두보는 712년 중국 하남의 공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다. 진(晉)나라 시대의 장군이자 학자인 두예를 13대 선조로 두고 있으며, 측천무후 시대 명망 높은 시인이자 학자였던 두심언의 손자이기도 하다. 두보는 자신의 집안이 명문이라는 점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조정에 출사해 집안의 명망을 높이겠다는 공명심(功名心)이 남달랐다고 한다.
3세가 되기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이하면서 낙양에 사는 고모가 그를 길렀다. 어린 시절 그는 허약한 체질로 잔병 치레를 많이 해서 집 안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고전을 공부하고 시문을 연습하며 성장했다. 7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9세 때 서예를 했고, 15세 무렵에는 낙양의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교유할 정도로 학문과 시에 자질이 뛰어났다. 이 때문인지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두보는 20세 무렵부터 약 4년간 오월 지방으로 유람을 떠나 명승고적을 둘러보며 시를 짓고 이름을 날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문학 수업을 하고, 시를 지어 곳곳의 명망 높은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들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선비들은 청년이 되면 명승 유람을 다니곤 했다.
24세 때 낙양으로 돌아와 과거를 치렀으나 낙방했는데, 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달했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다시 그는 황허 하류의 제조 지역으로 유람을 떠났다.
두보는 4년 후에 돌아와 선산이 있는 낙양 외곽의 수양산 기슭에 토굴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서 사농소경이라는 관직에 있던 양이(楊怡)의 딸 양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두보는 열 살 정도 어렸던 아내 양씨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당시 선비들이 흔히 첩을 두던 풍속과 달리 첩도 두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아내를 늘 데리고 다녔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가 담긴 시를 짓곤 했다.
수양산 기슭에서 살면서 그는 낙양으로 와서 관리가 되기 위한 연줄을 찾아다니고, 선비들과 교제하면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낙양에 나온 지 2년, 가는 곳마다 계략과 조작뿐이구나."라고 한탄했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으며, 그마저도 기회가 많지 않아 친척이나 고관들의 줄을 이용해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했던 듯한데, 그런 자신의 처지와 당대 현실에 대한 한탄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 양귀비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쫓겨 온 이백을 만나 교유하고, 이백을 따라 약 1년간 유람길에 올랐다.
35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수도 장안으로 갔으나, 생활은 낙양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보통 선비들이 고향 집에 아내를 두고 홀로 장안에 올라오는 것과 달리 두보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고생이 훨씬 더했다. '아침에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공자들의 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남은 술과 식은 고기를 먹는' 생활을 한 지 10년 만인 751년, 두보는 드디어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당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쳐 칭찬을 받고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로 출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몇 년간 자신에게 보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755년에야 지방 말단 관리인 병조참군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오르기 전까지 곤궁에 시달리며 천거해 달라고 읍소하고, 편지를 쓰는 등 고생이 많았는데, 관직 생활마저 순탄치 않았다. 관직에 제수되자마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해 극심한 기근으로 가족들을 봉선의 친척 집에 맡겨 둔 두보는 관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리러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홀로 장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안이 곧 반란군에 함락되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현종이 양위하여 황태자 숙종이 즉위했다. 두보는 숙종이 있는 닝샤 성으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에서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마음, 망국에 대한 설움과 황실에 대한 충정을 표현한 시를 많이 지었다. 그중 〈춘망(春望)〉, 〈월야(月夜)〉, 〈애왕손(哀王孫)〉, 〈애강두(哀江頭)〉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한편 장안에서 10년간 살면서, 또 안녹산의 난을 거치면서 두보는 현종과 귀족들이 호의호식하고 지내는 동안 백성은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두보가 남긴 시는 약 1,500수에 이르는데, 34세 이전에 쓴 시 중 약 20여 수가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그 이후에 쓴 것들이다. 이 작품 중 많은 수가 그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질곡과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회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린 것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인 〈병거행(兵車行)〉은 751년 남조, 대식, 거란과의 전쟁으로 농민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무거운 조세에 시달리는 고통을 묘사한 시이다.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는 754년에 일어난 대기근으로 백성은 굶어죽는데, 현종은 양귀비와 고관들을 데리고 온천 등지를 유람하는 것에 탄식하며 쓴 시이다.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이렇듯 사회 비판적인 시와 황실에 대한 충정을 바친 시를 동시에 썼다는 점은 얼핏 보아도 꽤 모순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두보가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관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살았던 당시의 일반적인 사대부였음을 생각하면, 딱히 위선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하기는 어렵다. 위로는 황실에 충성하고, 아래로는 제도적 불합리함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을 제도 개혁을 통해 구제해야겠다는 관료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이런 사회 비판적인 시들이 후대에 관료의 귀감으로 여겨지면서 선비들의 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아이러니해 보일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757년, 반란군에 내분이 일어나 안녹산이 살해되었고, 두보는 장안을 탈출해 숙종에게 갔다. 그 공으로 좌습유에 임명되어, 숙종이 장안을 탈환하고 복귀한 후 잠시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두보는 가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황실에 대한 충성을 그린 〈구성궁(九成宮)〉, 〈옥화궁(玉華宮)〉, 〈행차소릉(行次昭陵)〉, 〈강촌삼수(江村三首)〉, 〈북정(北征)〉 등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그는 곧 조정에 자신의 의견이 개진되지 않고 중앙 관료 생활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사공참군 직책을 받고 화주로 좌천되었다.
759년, 사사명이 이끄는 안녹산 반란군의 잔당이 일어나 다시 전란이 시작되었고, 두보는 관직을 버리고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백성의 고난을 노래한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등을, 쓰촨성 피난길을 그린 기행시들과 동곡에서의 피난 생활을 그린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乾元中遇居同谷縣作歌七首)〉 등을 지었다. 잠시 쓰촨 지방에서 초당을 마련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때는 자연 생활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763년에 난이 완전히 진압되고, 764년 두보는 엄무의 후원으로 절도참모(節度參謀) 겸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변 관료들과 잘 맞지 않았고, 이전부터 앓고 있던 폐병이 악화되어 이듬해 사퇴했다. 몇 달 후 엄무가 사망하자 그 덕분에 기반을 잡았던 쓰촨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두보는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폐병에 중풍까지 들어 한곳에서 몇 달씩 요양을 하다가 떠돌아다니기를 반복했다. 이 시기에 지은 시들에는 공명에 대한 결기로 비장한 어조가 엿보이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늙고 병들어 우수에 젖어 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세상에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시로써 마음을 달래던 두보. 두보는 770년 겨울 탄저우에서 웨양으로 향하던 길에 쓸쓸히 사망했다. 시신은 웨양 지방에 묻혔으나 43년이 지나 손자 두사업에 의해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곁으로 이장되었다.
杜甫 (두보 712-770)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장편 고체시를 확립했으며 그의 시는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의 '시사'라고 불린다.
두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당시(唐詩)는 이후 시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지는 중국 문학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심에 두보가 있다.
미국의 문학 비평가 스티븐 오웬이 두보에 대해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운 시인'이라고 평할 정도로, 두보는 한시의 내용과 형식 양쪽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고체시, 근체시 등 모든 시 형식을 실험했으며, 이를 토대로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을 지닌 율시라는 형식을 창안하고 완성시켰다.
특히 인간의 심리와 자연 만물의 새로운 면을 포착하는 데 탁월했으며, 그런 한편 당대의 사회 모순과 백성들의 고초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7세기 궁중 모임에서 사교술이나 유희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시가 당나라 때 의식 있는 예술 형태로 변모한 것은 두보의 이런 현실 참여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두보의 시와 정신은 중국 시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두보는 민중의 시인으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두보는 712년 중국 하남의 공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미(子美)이다.
진(晉)나라 시대의 장군이자 학자인 두예를 13대 선조로 두고 있으며, 측천무후 시대 명망 높은 시인이자 학자였던 두심언의 손자이기도 하다.
두보는 자신의 집안이 명문이라는 점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조정에 출사해 집안의 명망을 높이겠다는 공명심(功名心)이 남달랐다고 한다.
3세가 되기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이하면서 낙양에 사는 고모가 그를 길렀다.
어린 시절 그는 허약한 체질로 잔병 치레를 많이 해서 집 안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고전을 공부하고 시문을 연습하며 성장했다.
7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9세 때 서예를 했고,
15세 무렵에는 낙양의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교유할 정도로 학문과 시에 자질이 뛰어났다. 이 때문인지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두보는 20세 무렵부터 약 4년간 오월 지방으로 유람을 떠나 명승고적을 둘러보며 시를 짓고 이름을 날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문학 수업을 하고, 시를 지어 곳곳의 명망 높은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들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선비들은 청년이 되면 명승 유람을 다니곤 했다.
24세 때 낙양으로 돌아와 과거를 치렀으나 낙방했는데, 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달했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다시 그는 황허 하류의 제조 지역으로 유람을 떠났다.
두보는 4년 후에 돌아와 선산이 있는 낙양 외곽의 수양산 기슭에 토굴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서 사농소경이라는 관직에 있던 양이(楊怡)의 딸 양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두보는 열 살 정도 어렸던 아내 양씨를 지극히 사랑했는데, 당시 선비들이 흔히 첩을 두던 풍속과 달리 첩 도 두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아내를 늘 데리고 다녔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가 담긴 시를 짓곤 했다.
수양산 기슭에서 살면서 그는 낙양으로 와서 관리가 되기 위한 연줄을 찾아다니고, 선비들과 교제하면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낙양에 나온 지 2년, 가는 곳마다 계략과 조작뿐이구나." 라고 한탄했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으며, 그마저도 기회가 많지 않아 친척이나 고관들의 줄을 이용해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했던 듯한데, 그런 자신의 처지와 당대 현실에 대한 한탄인 것이었다.
이 시기에 양귀비의 미움을 사 조정에서 쫓겨 온 이백을 만나 교유하고, 이백을 따라 약 1년간 유람길에 올랐다.
35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수도 장안으로 갔으나, 생활은 낙양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보통 선비들이 고향 집에 아내를 두고 홀로 장안에 올라오는 것과 달리 두보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고생이 훨씬 더했다.
'아침에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공자들의 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남은 술과 식은 고기를 먹는' 생활을 한 지 10년 만인 751년, 두보는 드디어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당 현종에게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쳐 칭찬을 받고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로 출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몇 년간 자신에게 보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755년에야 지방 말단 관리인 병조참군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오르기 전까지 곤궁에 시달리며 천거해 달라고 읍소하고, 편지를 쓰는 등 고생이 많았는데, 관직 생활마저 순탄치 않았다.
관직에 제수되자마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해 극심한 기근으로 가족들을 봉선의 친척 집에 맡겨 둔 두보는 관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리러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홀로 장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안이 곧 반란군에 함락되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현종이 양위하여 황태자 숙종이 즉위했다.
두보는 숙종이 있는 닝샤 성으로 가다가 반 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에서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마음, 망국에 대한 설움과 황실에 대한 충정을 표현한 시를 많이 지었다.
그중 〈춘망(春望)〉, 〈월야(月夜)〉, <애왕손(哀王孫)〉, 〈애강두(哀江頭)〉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한편 장안에서 10년간 살면서, 또 안녹산의 난을 거치면서 두보는 현종과 귀족들이 호의호식하고 지내는 동안 백성은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두보가 남긴 시는 약 1,500수에 이르는데, 34세 이전에 쓴 시 중 약 20여 수가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그 이후에 쓴 것들이다.
이 작품 중 많은 수가 그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질곡과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회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린 것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인 〈병거행(兵車行)〉은 751년 남조, 대식, 거란과의 전쟁으로 농민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무거운 조세에 시달리는 고통을 묘사한 시이다.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는 754년에 일어난 대기근으로 백성은 굶어죽는데, 현종은 양귀비와 고관들을 데리고 온천 등지를 유람하는 것에 탄식하며 쓴 시이다.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이렇듯 사회 비판적인 시와 황실에 대한 충정을 바친 시를 동시에 썼다는 점은 얼핏 보아도 꽤 모순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두보가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관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살았던 당시의 일반적인 사대부였음을 생각하면, 딱 히 위선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하기는 어렵다. 위로는 황실에 충성하고, 아래로는 제도적 불합리함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을 제도 개혁을 통해 구제해야겠다는 관료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이런 사회 비판적인 시들이 후대에 관료의 귀감으로 여겨지면서 선비들의 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아이러니해 보일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757년, 반란군에 내분이 일어나 안녹산이 살해되었고, 두보는 장안을 탈출해 숙종에게 갔다. 그 공으로 좌습유에 임명되어, 숙종이 장안을 탈환하고 복귀한 후 잠시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두보는 가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황실에 대한 충성을 그린 〈구성궁(九成宮)〉, 〈옥화궁(玉華宮)〉, 〈행차소릉(行次昭陵)〉, 〈강촌삼수(江村三首)〉, 〈북정(北征)〉 등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그는 곧 조정에 자신의 의견이 개진되지 않고 중앙 관료 생활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사공참군 직책을 받고 화주로 좌천되었다.
759년, 사 사명이 이끄는 안녹산 반란군의 잔당이 일어나 다시 전란이 시작되었고, 두보는 관직을 버리고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백성의 고난을 노래한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등을, 쓰촨성 피난길을 그린 기행시들과 동곡에서의 피난 생활을 그린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乾元中遇居同谷縣作歌七首)〉 등을 지었다.
잠시 쓰촨 지방에서 초당을 마련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때는 자연 생활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763년에 난이 완전히 진압되고,
764년 두보는 엄무의 후원으로 절도참모(節度參謀) 겸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변 관료들과 잘 맞지 않았고, 이전부터 앓고 있던 폐병이 악화되어 이듬해 사퇴했다.
몇 달 후 엄무가 사망하자 그 덕분에 기반을 잡았던 쓰촨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두보는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폐병에 중풍까지 들어 한곳에서 몇 달씩 요양을 하다가 떠돌아다니기를 반복했다.
이 시기에 지은 시들에는 공명에 대한 결기로 비장한 어조가 엿보이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늙고 병들어 우수에 젖어 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세상에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시로써 마음을 달래던 두보. 두보는 770년 겨울 탄저우에서 웨양으로 향하던 길에 쓸쓸히 사망했다. 시신은 웨양 지방에 묻혔으나 43년이 지나 손자 두사업에 의해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곁으로 이장되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