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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20세기 초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아폴리네르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로, 현대시의 두 주류인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초의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예술가로 일컬어진다. 시인으로서는 현대시의 모든 개념과 방법, 형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며, 미술 평론가로서도 입체파, 아프리카 미술, 초현실주의 등 20세기 초 모든 전위 미술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프랑스 문단 및 예술계에서 모더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며, 초현실주의라는 말 역시 1917년 아폴리네르가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욤 알버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르 아폴리네르 드 코스트로비츠키는 1880년 8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폴란드인 귀족인 안젤리카 드 코스트로비츠키로, 16세 때 그를 사생아로 낳았다. 아폴리네르의 동생 알베르는 그녀가 24세 때 태어났는데, 알베르의 아버지 역시 밝혀져 있지 않다. 아폴리네르의 아버지가 이탈리아인 장교라는 설과 이탈리아 교황청 고위 성직자라는 설 등이 있으나 밝혀진 바는 없다.
유년 시절을 니스와 모나코에서 보냈으며, 7세 때 모나코에서 가톨릭 교단이 운영하는 생 샤를르 학교를 다니다 니스에서 중등학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모범생은 아니었다. 호탕하고 정열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술과 도박, 친구들과 함께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문학을 좋아했는데, 특히 고전보다는 현대 작품들을 좋아했으며, 이 시기부터 기욤 마카브르 혹은 기욤 아폴리네르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세 때 시인이 되기로 하고 파리로 갔다고 하는데, 재혼과 이혼을 거듭하던 어머니 안젤리카가 아들들을 데리고 모나코에서 파리로 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안젤리카는 기욤이 어린 시절에도 두 아들을 팽개쳐 두고 유럽 여행을 다니거나 도박을 하려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또한 이혼 후에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워 파리에서 궁핍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활발했던 두 아들은 각자 나름대로 재미있게 지내다가 어머니와 합류하곤 했다.
파리에서 아폴리네르는 생계를 위해 공무원이나 은행원이 되고자 했으나 외국인에 학력도 부족해 여의치 않자 소설 대필, 막노농꾼, 개인금융금고 사무원 등의 일을 전전했다. 그런 한편 계속해서 여자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연시와 소설을 썼으며,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를 들락거렸다. 22세 무렵부터는 계속해서 문예 비평문을 잡지에 기고했으며, 이듬해 문예지 〈펜〉에 시 두 편이 게재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아폴리네르는 활동 초기부터 많은 시들을 쓰고 발표했으나 처음에는 시인보다 미술 비평가로서 더욱 두드러지는 활동을 했다. 그는 피카소, 브라크, 앙리 루소 등이 시도하는 새로운 미술 경향을 알아보고, 아프리카 조각을 소개하고 입체파 회화의 시대가 열릴 것을 예견하는 등 미술계 전반의 전위운동을 주도했다.
아폴리네르는 27세 때인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을 만나는데, 그녀는 아폴리네르의 개인적, 예술적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전에도 영국 여인 애니에게 결혼해 주지 않으면 납치하겠다고 협박하는 소동을 벌일 정도로 열정적인 성격이었던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에게도 한눈에 반해 "그녀 이상으로 사랑할 여인은 없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녀에 대한 연심으로 시적 재능도 개화하여 1913년 시인으로서 문명(文名)을 알리게 될 시집 《알코올》의 기반이 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09년, 소설집 《타락한 마술사》를 앙드레 드랭의 목판화를 삽입해 펴냈으며, 1910년에는 소설집 《이교도 회사》를, 1911년에는 《동물 시집》을 펴냈다. 그런 한편 미술 평론가 및 문학 평론가로서 다양한 잡지에 평론을 발표했으며, 필명으로 가십 기사와 에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또한 그의 편집에 비평이 덧붙여진 《사드 후작 작품집》이 출간되면서 사드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난다.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폴리네르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던 제리 피에레라는 친구가 자신이 모나리자를 절도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쳐온 다른 몇 가지 소장품들을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 두고 있다는 글을 발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폴리네르는 사건 직후 자신의 집에 숨겨져 있던 미술품들을 루브르 측에 돌려주었으나 결국 모나리자 절도 혐의 및 장물 소지죄로 상테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주일 만에 예술가 친구들의 탄원으로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그는 계속 외설 작가, 불법 체류자(죽기 2년 전에야 프랑스인으로 귀화할 수 있었다)라는 언론의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리 로랑생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그녀와 이별하면서 쓴 시가 한국인에게 친숙한 〈미라보 다리〉이다.
1913년 4월, 입체파 이론의 기반이 되는 미술 비평서 《입체파 화가들》을 펴냈으며, 〈미래주의의 반전통-종합선언〉이라는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입체파 미술 및 미래주의 미술의 근본 원리를 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대화 형식, 동시성 구현, 구두점 삭제 등 다양한 시적 표현 형식을 실험한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 현대 도시 문명의 삶을 입체파,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실험한 시집 《알코올》이 탄생했다. 대담한 분석과 구성, 대상을 사실주의적 질서에서 해방시킨 새롭고 참신한 조형(造形), 그만의 독특한 도회적인 서정을 담은 이 시집은 전위 예술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20세기 새로운 시형의 포문을 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폴리네르는 총동원령에 따라 12월 5일 군에 입대했다.
전쟁 기간에도 아폴리네르의 창작열은 불타올랐는데, 여기에는 두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그는 입대하기 몇 달 전 한 화가의 집에서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옹[루(Lou)로 알려져 있다]이라는 부인을 만나 또다시 첫눈에 반했고, 정열적인 연시와 편지를 수백 통 썼다(연애 관계가 끝난 후에도 아폴리네르는 그녀와 계속 서신을 교류하고 시를 지어 바쳤다). 이 시들은 1918년 출간된 《상형시집(칼리그람)》에 일부 수록되었으며, 아폴리네르 사후 《루에게 바치는 시》로 편찬되었다. 또 편지들은 《아폴리네르 서간문》으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루와의 관계는 1914년 연말 무렵 허무하게 끝난다. 다음으로 1915년 1월, 아폴리네르는 휴가를 맞아 잠시 귀환하던 중 기차에서 만난 마들렌 파제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급속도로 가까워져 약혼까지 했으며, 역시 마들렌느에게도 수십 편의 시와 편지를 바친다. 현재 마들렌에게 바친 시 23편이 전한다.
1916년 3월 17일 아폴리네르는 전투에서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고 수술하기에 이른다. 이 부상으로 그는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상징주의적 소설집 《살해된 시인》을 발표했으며,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을 상연했다. 아폴리네르는 이 희곡을 일컬어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했는데, 초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새로운 정신과 시인들〉이라는 강연을 통해 랭보, 막스 자코브, 상드라르 등의 시인을 소개하고 모더니즘 시 이론의 초석을 놓는다.
1918년 4월, 아폴리네르는 주제에 따라 글꼴이나 문장 모양, 행간 등을 시각적으로 조절하여 문장을 도형화하면서 시 형식의 혁신을 시도한 《상형시집》을 발표했다. 그해 5월에는 〈아름다운 빨강머리 여인〉을 쓰게 한 자클린 콜브와 결혼했으며, 11월 9일 사망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폐충혈이 사인이었으나 포탄 파편에 맞은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것도 큰 원인으로 꼽힌다. 시신은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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