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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18∼1945. 시인
강원도 강릉 출생.
1925년 심연수의 부모는 고향 강릉을 떠나 연해주로 갔으나 1931년 구소련에서 조선 사람을 중앙아시아로 집단 이주시키는 바람에 중국으로 이주해서 흑룡강성 밀산에 살다가 신안진을 거쳐 1935년부터 용정에 머물렀다. 용정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어렵게 가계는 이어졌다. 집안은 용남촌 은진중학교 주변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다음해 용지촌 연변대학 내 농학원 자리로 이사하여 소작이나마 농사일을 시작했으나 지주가 일제 앞잡이여서 삶의 터전을 또 옮겨야만 했다. 1년 뒤 태평촌으로 옮겨 소작을 하다가 광복 후 토지분배를 받고 자신의 농토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간도로 이주할 결심은 숙부 심우택이 간도에서 중학교,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서 이곳 사정이 훤했으므로 가족이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1940년동흥중학교, 용정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쓴 시는 떠도는 가족사를 중심에 둔 작품이 주를 이룬다. 『심연수 원본대조 시전집』1부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지의 봄」, 「여창의 밤」, 「대지의 모색」, 「해란강」 등이 그러하다. 2부에서는 「추억의 해란강」, 「돌아가신 할아버지」, 「만주」 등에서 유사한 시적체험이 발견된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가정살이로 그는 22살에서야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한인소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중국 신안진에 있을 때 김수산 선생 집에 다니면서 공부한 것도 정착하지 못한 가정사에 배경이 있다.
어려운 가정살림에도 불구하고 1941년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하였다. 부모와 가족의 배려덕분에 학교를 다닌 그는 유학시절 용정의 집으로 편지와 엽서를 보냈다. 집에서 보내준 돈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동생에게 엽서로 보낸 내용을 보면 “어떤 처지에서 온 것을 생각할 제 무위도식하는 것 같은 저를 위하여 이처럼 온 집안에서 애를 쓰며 힘을 쓰는 것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시기 경제적으로 곤궁한 유학생으로 고학을 했으므로 신문배달과 다양한 일을 했던터라 이때의 어려움은 「야업」, 「검은 사람」, 「과오」 등에서 잘 나타난다. 1943년 그는 강제징집을 피해 지바현에 있다가 나진항을 거쳐 용정으로 귀환하여 흑룡강성에서 진성국민우급학교, 서성국민우급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 소학교는 김수산 선생의 도움으로 김좌진이 설립했다고 한다.
1945년 왕청현 춘양진 역 앞 물탱크 부근에서 사람들과 다투다가 피살되었다. 그해 10월 그의 부친이 시신을 수습해서 용정 토기동 뒷산 가족묘지에 묻었다. 유복자 심상룡은 현재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공공연히 언급하는 1940년대 암흑기를 밝혀줄 새로운 작가로 조명되었다. 비극적인 생애에서 볼 수 있듯이 윤동주 시인과의 유사성은 연변,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를 서정적인 언어로 위무하면서 적극적인 항일의지를 밝힌 것과 관련있다. 특히 이국땅에서 민족문학을 지켜낸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심연수 문학은 일제강점기 재만조선시인들의 문학활동을 대중적으로 조명해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원전 왜곡되고 日 강점기 행적도 사실과 달라”
중국 연변 출판사 재조명으로 ‘민족시인’된 故 심연수 씨
평론가 이성천 씨 논문서 주장
‘민족시인’으로 선양사업이 진행 중인 강원 강릉 출신의 고(故) 심연수 시인(사진)이 과대 포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경희대 객원교수 겸 문학평론가인 이성천 씨(43·문학박사)는 최근 발표한 ‘재만(在滿) 시인 심연수 시 연구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심연수 시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적지 않은 연구들은 단순 착오에서부터 논리적 모순과 의도적 왜곡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심연수 시인(1918∼1945)은 재만 조선인 문단의 무명 시인이었으나 2000년 중국연변인민출판사가 심연수 문학편을 간행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그리고 최근까지 중국과 강릉을 중심으로 70여 편의 연구논문 및 산문이 발표됐고 ‘암흑기 민족의 별’, ‘일제 암흑기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윤동주에 버금가는 시인’ 등의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씨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1940년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에 발표된 시 ‘대지의 젊은이들’을 예로 들었다. 이 시에는 ‘왕도낙토(王道樂土)의 젊은이여/오족협화(五族協和)가 빛나는 곳에/솜씨야 빛나거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왕도낙토와 오족협화는 당시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통치이념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이 씨는 선행연구자들이 시를 왜곡 평가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대학 교수를 지낸 A 씨는 자신의 책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란 시에 대해 원전에도 없는 ‘놈들의 총에 맞아’, ‘찢어져 펄럭이는 흰옷’ 구절을 내세워 왜곡했다는 것. 이에 대해 A 씨는 “2002년 중국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책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그 책에는 이 구절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 씨는 또 선행연구자들이 기록한 일제의 징집 도피 시기와 대학 졸업 일자 등도 확인 결과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심연수선양사업위원회 측은 “시인의 행적 부분은 동생인 심호수 씨의 증언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심연수 시선집을 편저한 황규수 씨(인천 동산중 교사)는 “시인의 초기 작품에는 민족주의 경향이 없지만 일본 유학 이후 후기 시에서는 민족주의 경향이 나타난다”며 “초기 시만으로 민족시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2000년 심연수 시인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강릉지역 문인들을 중심으로 선양사업위원회가 만들어져 심연수문학상이 제정됐고 심연수문학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강릉시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선양사업에 2억7000만 원을 지원했다.
이인모
한자 | 沈連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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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Sim Yeons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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