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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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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작가, 시인, 외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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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멕시코 |
활동기간 | 1931년-1965년 |
사조 |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
수상내역 | 노벨 문학상 (1990년) |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을 주제로 다수의 시와 수필을 남겼다. 평론가로서 문학 평론지를 창간·편집하고 시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의 시인ㆍ작가ㆍ외교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가족이 멕시코 내란으로 파산했기 때문에 궁핍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이 높았고, 로마 가톨릭계 학교와 멕시코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글쓰기에 몰두했다. 19세 때인 1933년 첫 시집 『숲속의 달 Luna silvestre』을 출간했다.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에 스페인을 방문하여 공화주의자들의 대의명분에 강한 공감을 느끼고, 1937년에 스페인에서 출판된 〈그대의 뚜렷한 그림자 밑에서 외(外) Bajo tu clara sombra y otros poemas』에서 당시 경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로 인정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이때 접한 초현실주의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멕시코로 돌아온 후에는 〈탈레르 Taller〉(1939)와 〈엘 이호 프로디고 El hijo prodigo〉(1943)를 비롯한 여러 권의 중요한 문학 평론지를 창간ㆍ편집했으며, 1970년대에는 또 다른 문학 정치 평론지인 〈플루랄 Plural〉을 편집했다. 파스는 마르크스주의ㆍ초현실주의ㆍ실존주의ㆍ불교ㆍ힌두교에서 차례로 영향을 받았고, 원숙기의 시에서는 풍부한 초현실주의적 형상으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이었다. 1963년 ‘벨기에 국제 시 대상’, 1981년 ‘세르반테스상’, 199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시집으로 『통과 금지! No pasaran!』(1937),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1949), 『독수리냐 태양이냐? Aguila o sol?』(1951), 『태양의 돌 Piedra de sol』(1957)이 있다. 같은 시기에 수필과 문학 평론을 모은 산문집도 출판했는데, 영향력 있는 수필집 『고독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1950)는 멕시코의 특성과 역사, 문화를 분석한 책이다. 『활과 금조 El arco y la lira』(1956)와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는 동시대의 스페인계 중앙 아메리카의 시를 연구한 문학 평론집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1946년에 멕시코 외교관으로 들어가 1962~1968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재임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에 항의하여 1968년 인도대사직을 사임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1962년 이후에 출간한 시집으로 『백색 Blanco』(1968), 『동쪽 비탈 Ladera este』(1971),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 등이 있으며, 수필집 『접합과 이합 Conjunciones y disyunciones』(1970),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atico』(1974) 등을 발표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고 성실성과 진정성으로 천착한 끝에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활과 리라』에 담았다. 잡지 「탕자」에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글을 발전시킨 것으로, 자신이 청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탐구해온 질문들이 실려 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은 아닌지,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쓰이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지,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한지 등에 대한 고민들이 드러나는 것. 그러나 시론서 『활과 리라』는 단순한 시 해설서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어보는 안목을 열어주는 길잡이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 파스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격동의 대륙 중남미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활과 리라』에서 시작된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낭만주의에서부터 전위주의에까지 이르는 서양문학사를 일괄하여 시와 역사의 관계를 탐색한 그는 『흙의 자식들』을 거쳐, 세기말의 시의 위상을 점검한 『타자의 목소리』에 이르러 자신의 시론을 완결시켰다. 『흙의 자식들 외』는 낭만주의에서 전위주의에 이르는 서양문학사를 점검한 작가의 두 번째의 시론집이다.
원작 소설 『My Life with the Wave』를 그림책으로 구성한 『우리집에 온 파도』는 바닷가에서 만난 파도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소년의 이야기다. 가족들과 바다 여행을 처음 갔던 소년이 파도를 보고 마음이 끌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소년에게 바다를 떠난 한 파도가 다가온다. 소년은 파도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다. 야생의 바다를 떠나 문명의 도시에 온 파도는 소년과 즐거운 한 때를 함께 보내지만 파도를 길들이는 문제는 인간에게 아무래도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가족들은 파도를 바다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는다. 어린이와 가족들이 낯선 손님 파도를 맞아 어떻게 소통하는지 표현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긴박하고 흥미로운 스토리에 잘 녹여 놓았다. 흥미진진하고 기상천외한 줄거리 못지않게, 그림 작가 마크 뷰너의 역동적이고 밝은 그림은 웃음과 장난이 넘쳐난다.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환상적인 이야기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잘 살린 작품이다.
멕시코인과 그들의 사회, 국가를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이다. 『멕시코의 세 얼굴』에서 파스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멕시코의 어제와 오늘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정히 그려낸다. 출간 후 멕시코에서만 1백만 권 이상 팔릴 정도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동시에 상당수의 멕시코인들로부터 비판적인 시선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가는 멕시코인과 라틴아메리카인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밝히는데, 책의 가장 근원적 주제인 고독과 인간 상호 간의 교감, 구원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 문제이기도 하다. 즉, 파스는 이 작품을 통해 영원히 남을 화두를 독자들에게 던진 셈이다. 또한 책에는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역사, 국가발전,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들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멕시코의 세 얼굴』은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좋은 디딤돌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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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S PABLO BEAUREGARD - Madrid - 19/04/2008
GOYENCHEA - 2008-04-18
El escritor ingresó al Servicio Exterior mexicano después de la Segunda Guerra Mundial. Tras una breve estancia en Nueva York, Paz fue destacado en París en 1945. Allí escribió 'El Laberinto de la Soledad', una de sus obras más importantes.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인은 멕시코 해외공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뉴욕에 잠시 머문 뒤, 파스는 1945년 파리에서 명성을 날렸다. 거기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고독의 미로'를 썼다).
ANTONIO GÁLVEZ - 2008-04-18
De izquierda a derecha, el Premio Nobel de literatura, Gabriel García Márquez, el artista José Luis Cuevas y Octavio Paz. El intelectual mexicano mantuvo diversas polémicas ideológicas con escritores y pensadores de su generación.
(왼쪽부터 오른 쪽으로, 노벨 문학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화가 호세 루이스 쿠에바스 그리고 옥타비오 파스. 멕시코 지성인은 당대의 작가들과 사상가들과 함께 수많은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였다).
DAISY ASCHER - 2008-04-18
El jurado del galardón destacó la versatilidad de la obra de Paz. En su discurso de presentación, su poema 'Piedra de Sol' fue citado como una "magnífica" pieza surrealista. Los temas de su poesía transitaron por el budismo, el arte moderno, el erotismo y la naturaleza.
(스웨덴 한림원은 파스 작품의 다양성을 높이 평가했다. 수여식 연설에서 그의 시 '태양의 돌'이 "위대한"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인용되었다. 그의 시는 불교, 현대 예술, 에로티즘과 자연 등 다양한 테마를 아우르고 있다.
EFE - 2008-04-18
Uno de sus ensayos más celebrados es 'Las Trampas de la Fe', una biografía crítica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 una monja mexicana del siglo XVII, además de escritora y poeta.
(그의 수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인 '믿음의 덫'은 17세기 멕시코 수녀이자 작가, 시인으로도 작품활동을 했던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의 자서전이다).
2008-04-18
El anuncio de su muerte, hecho por el presidente Ernesto Zedillo, conmocionó a México. Se declaró un luto nacional y el Palacio de Bellas Artes, en el centro de la Ciudad de México, fue el lugar donde se instaló la capilla ardiente del poeta.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이 그의 죽음을 공포하자 멕시코는 슬픔에 잠겼다. 장례식은 멕시코 시티 시내에 중심부에 있는 베야스 아르테스 궁전에서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2013년 대산문화 겨울호
<가상 인터뷰>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 된다.” - 옥타비오 파스와의 만남
글 / 구광렬_시인, 소설가, 울산대학교 교수. 1956년생 시집 『슬프다 할 뻔했다』 『불맛』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밥벌레가 쓴 시』 『자해하는 원숭이』『텅 빈 거울』, 『하늘보다 높은 땅』『팽팽한 줄 위를 걷기』등, 장편소설『세뇨르 뭄』 『가위주먹』등, 기타저서『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체의 녹색노트』『바람의 아르테미시아』 등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_멕시코 시인. 1914~1998년 시집『언어 아래의 자유』『독수리인가? 태양인가?』『격렬한 계절』『태양의 돌』『불도마뱀』『『백지』『동쪽 저편』『허공의 아들들』『나무 속으로』등, 산문집 『고독의 미로』『활과 리라』『비평적 열정』『너릅나무에 열린 배』『원숭이 문법학자』『결합과 해체』등
구광렬: 1989년 7월 말경이었으니, 근 25만에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하는 셈입니다. 그것도 돌아가신 후에 말입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기억납니다. 나에 관해 박사논문을 쓴 양반이지요? 내 친구 마르킷 프랑크(Margit Frank)가 지도교수라 했고요.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인터뷰 했었죠?
구광렬: 당시 선생께서는 유력한 노벨문학상후보로 거론 되고 있었으며 제가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던 한국의 서울대학교에서 저에게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의뢰했었죠. 애석하게도 그 해 노벨상을 수상 못하셨지만 말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그 이듬해인 1990년 수상했지요. 기억나요. 두 권의 책을 나에게 준 것. 그중 한 권이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에 관한 책이었지요?
구광렬: 네, 맞습니다. 저의 은사이신 김현창 교수의 저서지요. 또 다른 책은 <순야타(Sunyata)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라는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저의 박사논문이었구요. 답례로 선생께서는 ‘라 부엘타(La Vuelta)' 잡지 두 권에다 친필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 시절이 좋았어요. ‘라 부엘타’ 잡지사를 운영하던 시절. 내 인생의, 내 시세계의 절정기였지요. 노벨상 수상 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시를 쓰질 못했어요. 저서도 겨우 에세이 집 두 서권 냈을 뿐이고…… 나이 탓(당시 76세)도 있었겠지만, 노벨상을 타고 보니 이래저래 바빠졌어요.
구광렬: 저 역시 ‘라 부엘타’ 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렙니다. 저의 풋풋했던 학창시절이 떠올라서이지요. 잡지사는 제가 살고 있던 ‘산헤로니모’ 거리와 불과 2km 정도 떨어져 있었거든요. 학교(멕시코국립대학교)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거의 매일 그곳을 지나야만 했어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비록 가상의 것이긴 하지만 지난 번 채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뭇 기대가 큽니다. 무엇보다 선생께서 이 세상 분이 아니시기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질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사실 1989년 당시에는 대시인 앞에서 주눅이 들어, 묻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묻지 못했거든요.
옥타비오 파스: 아이쿠, 이거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는걸요. 아주 날카롭게 나오실 것 같은데…….(웃음)
구광렬: 그렇게 말씀하시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정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데요.(웃음) 농담입니다. 부드럽게 나가겠습니다. 저도 부드러운 남자이고 싶거든요, 선생님처럼.
옥타비오 파스: 제가 부드러운 남자였던가요?(웃음)
구광렬: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저의 외숙부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저의 외숙부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부드러운 어른이셨구요.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의 비서였던 파띠(Patricia)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분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망설이지 않고 답하더군요. ‘simpatico’(정이 많은) 분이시라고. 자, 그럼 부드럽게 시작하겠습니다. 아주 여리고도 어린 옥타비오 파스로부터 시작할게요. 선생께서는 1914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조부께선 신문기자이자 정치가이셨고, 부친께선 변호사였으나 멕시코혁명 당시 싸파타(E. Zapata) 혁명군 축에 가담했었지요. 1920년 멕시코 정부가 싸파타와 그의 추종자들을 몰살시키려들자, 가족 분들 모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요. 그곳이 로스엔젤래스였던가요?
옥타비오 파스: 맞습니다. 로스엔젤래스……. 그 시절 에피소드 하나 말씀 드리죠. 여섯 살이 채 못 됐어요. 유치원 다닐 때였습니다. 점심시간이었지요. 숟가락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한 선생님이 지켜봤나 봐요. 왜 밥을 먹지 않나 하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스페인어로 숟가락(cuchara)을 외쳐댔죠. 그것도 큰 소리로…… 그 소리가 아마 미국 애들 귀에 거슬렸나 봅니다. 꽤 오랜 시간 싸웠어요. 그 뒤에도 사건 아닌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지요. 조국 멕시코에 관한 내 글들은 대부분 보호받지 못했던 미국 유년 시절과 관계가 있어요.
구광렬: 산문집인 <고독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 >도 그러합니까?
옥타비오 파스: 그 부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죠. 그 후 다시 멕시코로 왔지만 오히려 더 왕따를 당했습니다. 피부는 희고 눈은 파랗고 영어 악센트로 스페인어를 하니, 양놈이라 놀려대는 겁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이 마냥 괴롭고, 고독하지만은 않았어요.
구광렬: 내친김에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 문화, 문학에 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집안 친척, 특히 고모의 영향이 컸어요. 고모는 프랑스 매니아였지오. 그녀는 집에서 스페인어 대신 프랑스어를 했어요. 우리 집 서재에는 프랑스에 관한 책들로 가득 했고요. 프랑스어의 부드러운 연음과 굴절은 마치 음악을 듣는 양 착각에 빠져들게 했어요.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요. 그 후 프랑스어를 전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습니다. 특히 프랑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프랑스 유학시절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조안 니로(Joan Niro) 등 그쪽 젊은 예술가들과 파리 시내 카페에서 잘 어울렸어요. 하지만 초현실주의 시는 믿지 않았어요. 특히 자동기술법은 더욱 그랬고요. 단지 시적 혁명을 갈구했죠. 자유에 관한 사상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윤리나 정치 등의 자유가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자유…….
구광렬: 청년시절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생활에 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난 미국 생활을 꽤 오래 했어요. 1944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버몬트에 있는 Middlebury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틈틈이 그 고장 신문사에서 일했죠. 신문은 고속(高速)의 문학이라 할 수 있잖아요? 신문사 일은 시인인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줬어요. 또 다른 경험은 뉴욕에 있는 MGM사에서 영화 더빙을 하는 일이었어요. 영어를 스페인어로 말입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배우들의 입술 움직임을 파악해 스페인어 문장을 리드미컬하게 재생해내는 일. 정말 시인으로서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었어요. 전쟁이 막 끝난 후(2차 세계대전)였었기에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쳤어요. 물론 인종차별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선 박력이 있었어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시대였습니다. 그곳에서 미국 멋쟁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구요. 그들은 무척 개방적이었으며 정직했습니다.
구광렬: 그들 중, 한 사람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옥타비오 파스: 현대문명에 관한 한, 엘리엇(T.S. Eliot)은 젊은 시절의 나였습니다. 하지만 엄청 보수적이었던 그와는 달리 당시의 난 상당히 좌익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간화, 영혼의 황폐화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은 나를 매료시키고도 남았어요. 아시다시피 엘리엇은 역사를 시에 도입한 사람이잖아요. 그의 시들은 극히 주관적인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교육을 받은 나에게 청량제로 다가왔어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나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근사했습니다. 미국 시인들은 주관적인 것뿐만 아니라 범 우주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입체파 화가들이 말하는 입체적 영감 같은 엘리엇의 기술법 또한 흥미로운 것이었구요. 그는 현대 도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습니다. 1969년부터 1976년 사이에 써진 나의 연작시 <회전(Vuelta)>에 엘리엇의 메아리에 관한 것이 들어있어요.
걷고 있건만 나아가지 않는다 이 도시에 둘러싸인 난 공기가 부족하다 몸뚱어리가 부족하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 회전(Vuelta) 중에서
구광렬: 이제부터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 노벨상 수상소감에서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해 언급하시던 도중에 ‘언어는 항상 작가의 의도보다 멀리 간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누구나 글을 쓸 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잘 파악하지 못 합니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가나 사회학자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죠. 저는 사실 언어통제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산문집 ‘고독의 미로’도 정말 고독한 시절에 썼지만 고독을 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요. 모두 저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환경 때문이었지요. 저에게 시는 항상 환경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시는 과학적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알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시 또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숨을 죽이고 정지한 부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기호입니다. 저는 이것을 회전하는 기호(signos en rotación)라고 부릅니다. 주체인 ‘我’와 객체인 ‘他’는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되고, 예술의 원초적 힘이 가해지는 순간 모든 타자성은 상실되고 맙니다.
구광렬: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한, 비트겐슈타인만큼이나 고뇌했던 시인이셨습니다. 적잖은 평자들이 선생을 가리켜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위의 시인이었노라 평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말씀 해주시죠.
옥타비오 파스: 젊은 시절 앙드레 브레통과의 만남 뒤 초현실주의에 빠지게 된 연유 역시 이러한 언어가 갖는 원초적 모호성을 극복하고자하는 저의 염원과 무관치 않습니다. 저의 시에서의 은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산치 않습니다. 오히려 의미의 해체와 가까우며, 침묵으로 인도하는 부호들의 만남에 불과합니다. 그 침묵 속에는 또 다른 낱말이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마저 변별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부호 또는 기호일 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저는 흔히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초현실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극도의 현실주의자내지 극사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가 소위 초현실주의자들이 애용한 자동기술법을 거부한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앙드레 브레통 등 저의 친구들이 현대의 이성주의내지 현실주의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노래하기를 주창하는 동안, 저는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책임 없는 현실도피라고 일축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특히 동양과의 해후 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 후(1960년 이후) 저는 지나친 이성주의와 현실주의에 의해 일그러진 서구문화를 강하게 비판해왔으며, 데카르트 이후 과학적 이성주의에만 기대온 서양의 현대문명에 대응해 강한 안티테제를 제시해왔습니다.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 한 생을 바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실재가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 말의 시초를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찾으려 했고요. 그것과 관련된 선생의 시 한 편을 낭송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그것을 꿈꿔야 한다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
피의 바다, 땅과 몸이 말해주는 걸 기억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도 아닌 교차로
모든 길들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빛은 물로 노래하고
물은 나무의 소리들로 노래하고
새벽에는 온갖 과실들이 하늘에 열리고
낮과 밤이 화해한 뒤
다시 잔잔한 강물이 되어
연인들처럼 애무하고 포옹하는……
세월을 담은 도도한 강물처럼
인간의 계절은 또 그렇게 흘러가야만 한다
태초부터 영위해온 삶의 한 가운데로
시작과 그 끝 너머 저 심오한 그곳으로
(옥타비오 파스의 시, 깨어진 항아리 중에서)
옥타비오 파스: 저에게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됩니다. 독자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났을 때, 두 개체는 하나가 되고 제 3의 부호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시의 부호인 이미지 역시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것들과의 대립변증을 거쳐 새로운 합(synthese)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의 것도 독자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 일 수도 있고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단초를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구하고자 했구요.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의 특히 1960년 이후 작품들은 불교 등 동양의 종교, 철학, 사상 등을 상당부분 논하거나 설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도나 일본 등 동양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시면서 그곳의 문화나 역사 등을 연구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 외,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옥타비오 파스: 20세기 초 멕시코에 호세 후안 타블라다(José Juan Tablada)란 아주 특별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소위 멕시코 초기 모더니스트 작가로, 일본의 하이쿠나 연가를 멕시코 및 중남미에 제일 먼저 소개했지요. 젊은 시절 난 그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신선함 그 자체였어요. 사실 외교관이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습니다. 외교관이 되자마자 부임지로 신청한 나라들이 일본과 인도였으니까요. 바쇼의 선시나 다이세츄 스즈키의 선불교론 등은 나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구광렬: 그러나 선생의 작품에는 중국, 인도, 일본 등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한국은 그 삼국 사이에서 문화연결을 위한 가교역할을 한 아주 중요한 나라입니다. 특히 고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 문화,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 사상을 담고 있는 선생의 대표적인 산문집들 <비평적 열정>, <너릅나무에 열린 배>, <결합과 해체>, <활과 리라> 등에는 한국에 관한 내용이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옥타비오 파스: 생전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저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올림픽이 열렸다는 것과 분단국가란 것, 그리고 중남미국가들처럼 정치가 불안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한국문화가 서양세계에 소개되어 있질 않았어요. 특히 문학작품은 더욱 그랬습니다. 의도적으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한국에 관한 읽을거리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런가요?
구광렬: 작금은 선생의 생전시절과는 많이 다릅니다.
옥타비오 파스: 하긴, 내가 죽은 지 15년이 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저쪽 세상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구광렬: 맞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을 모르는 중남미 사람들은 없습니다. 자동차, 핸드폰, 텔레비전 등 중남미제국 도처에 한국산 물건들이 깔려있습니다. 대중문화면에서도 K. Pop을 비롯해 한류열풍이 불고 있구요. 하지만 문학작품 부문에서만은 여전합니다. 그만큼 번역이 안 되고 있는 탓이겠지요.
옥타비오 파스: 맞아요. 번역이 중요해요. 번역이 안 된 경우엔 그 나라 말을 공부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데,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구광렬: 멕시코유학시절 저는 멕시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소위 이민 백이라 불리는 가방에다 불교, 유교 등 동양의 철학 종교 사상에 관한 책들을 가득 싣고 와야만 했습니다. 선생의 시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서였지요. 신랄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서양시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뒤늦게 동양철학사상 책들을 뒤적이는, 그것도 서양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동양철학에 관한 공부를 제법 할 수 있었어요. 그 후 다시 선생의 시편들을 곰곰이 살펴봤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선생의 시에서 그리 심도 있는 동양 사상에 대한 사유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주역이라 하면 그래도 공자가 대나무 쪽을 엮어 만든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책이 아닙니까. 그 만큼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만큼 내용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하지만 주역을 응용해 썼다는 선생의 시편
옥타비오 파스: 부드러운 질문만 하시기로 했잖습니까? 결국 마각을 드러내시는군요.(웃음)
구광렬: (따라 웃으며) 이게 사후 인터뷰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사실 생전 인터뷰 때 시간이 없어서 질문을 못 드린 것 중 하나입니다. 한국독자 분들을 위해 허심탄회하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옥타비오 파스: (정색을 하며) 동양사상이 옷의 물감처럼 밴 저의 시편들 속에는 중국, 인도의 호방함과 일본의 예리함이 들어있지만, 왠지 그 셋을 어우를 원만성은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근데 사후에 알았어요. 이곳 저승에서………. 특히 생전에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일본의 Zen(禪)이 한국의 임제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아무튼 한국을 알지 못했던 게 크게 후회됩니다. 서양인이 동양, 특히 사상과 철학 책들을 섭렵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 면을 고려해서 내 졸작들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광렬: 역시 선생께서는 대인배이시며, 대시인이십니다. 그런 질문으로 난처하게 해드린 이 소인배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한국의 고故 김남주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들을 원서로 읽기 위해 옥중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습니다. 근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던 선생께서 한국에 관해, 한국 시인들에 관해, 김남주 선생의 네루다에 관한 열정의 반의 반 정도만 있었더라면, 아마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지도 모르지요.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신다면 한국어를 공부해보기를 추천해드립니다. 선생께서 전생을 통해 고민하셨던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문제의 해답을 한국어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국어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이니까요. 선생님, 잠시라도 천국에서의 평화스러운 심기를 흩으려 놓은 듯해 죄송합니다. 사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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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태양의 돌
-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도리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출처]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 |작성자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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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돌"- 옥타비오 파스지음/ 청하 간
이 책은 일전에 읽었던 시선집《활과 리라》와 《멕시코의 세 얼굴》의 저자 옥타비오 파스의 시선집이다. 참으로 어렵게 구했다. 그 만큼 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많은 시 애독자들이 옥타비오 파스를 찾는 결과이리라. 나는 저자의 도서들을 어렵게 구해서 읽은 만큼 많은 생각들로 뒤범벅이 되어 시를 읽고 쓰고 사유의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고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마다 나라가 안고 가는 시 세계와 취향 그리고 패턴의 방향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 것은 자신의 모국어로 씌어진 작품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민족어로 씌어지거나 번역 된 것들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흘륭한 문학작품을 감상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본의 유입으로 인하여 두 가지의 변수가 작용하게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첫째는 자본의 본산 서구나 유럽의 풍을 모방하여 나의 것 혹은 우리의 것을 무가치하게 여겨 버린다는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의 논란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예술 공간에서 호흡하며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충분히 문제가 있다. 두 번째로는 역시 인간성 상실의 경험이다. 이는 감정, 감동 그리고 이성이 종합적인 패턴을 그리면서 인간의 참된 행복이나 의미, 가치를 드러내야 마땅할 그 본분을 망각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의 선상에서 옥타비오 파스를 읽어나가면 가장 훌륭한 독서방법이자 시를 감상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역시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옥타비오 파스를 읽었다. 그 결과 한국의 시가 가장 맛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므로 인해서 깨닫게 된 참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다양한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적인 시어의 혁명에서 그 기원을 살펴야 한다. 신낭만파주의와 앙가쥬망 사이에서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문제에 천착, 형이상학적인 작품세계에 몰두하였던 그는 쉬르레알리즘과의 접촉 이후 언어의 해방에 주목하며, 비논리성이 지닌 시적인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옥타비오 파스에게 있어 시는 아담과 이브 이전의 말을 곧 창생하며 사물이었던 시절로 되돌려주는 작업이었다. 에덴동산의 전락 이후 말이 지칭하는 사물과 실제 사물과의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고 보는 그는 시작업이란 바로 이 간격을 메꾸기 위한 안타까운 노력이라고 본다. 이 노력 중의 하나로 그의 시어가 지향하는 것은 침묵이며, 침묵이 곧 실체가 된다는 시론을 유도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상상의 존재이며, 인간이 지닌 이성이라는 것도 상상의 형태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는 우리에게 문화적 혁명이 요청된다면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궤도 수정의 차원을 넘어서 상상력으로의 회귀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폭 넓은 관심과 실험 정신은 여러가지 형식의 판독을 가능하게 하며, 독자가 작품 구성이나 창작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한 시작시를 개발, 시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에 기여하며, 동양시의 이미지 사용법을 서구적인 것으로 비약, 환치시킨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한다."
1
새가 노래한다,노래한다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울대뿐.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이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일 뿐.
3
투명한 수정의 맑음은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수사학>의 전문
차갑고 날쌘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껍질을 벗긴다.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 생생한 상처⑴의 한가운데
-<새벽>의 전문
⑴ 이유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나의 실체, 나의 아픔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빛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 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것,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 있는 거짓⑴ 이숭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너의 눈동자>전문
⑴사위어 갈 목숨이 활기 찬 과일로 거짓처럼 황홀하다.
이처럼 우리는 아시아존 그리고 서구의 작품 외에는 다른 비 서구권의 작품들을 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타국의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의 작품의 우수성과 순수성 그리고 적합성을 발견해는 훈련은 잊지 않아야 충분조건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옥타비오 파스의 작품을 대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좋았다라고 거듭 고백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선택이며 동시에 타자의 선택으로부터 것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글사랑 이충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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