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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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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3    조숙한 동성련애자 천재 시인 - 랭보 댓글:  조회:7827  추천:0  2017-12-27
  출생 1854. 10. 20, 프랑스 샤를빌 사망 1891. 11. 10, 마르세유 국적 프랑스 요약 조숙한 천재 시인으로 근대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산문시집 은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개요 어린시절 반항과 시적 환상 여행가와 무역상 평가 랭보((Jean-Nicolas-)Arthur Rimbaud) 프랑스의 시인이다. 개요 한때 폴 베를렌과 깊은 관계(동성련애자)를 맺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린시절 랭보는 프랑스 북동부의 아르덴 지방에서 육군 대위와 그 지방 농부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살 위였고, 여동생은 2명이었다. 1860년 랭보 대위는 아내와 헤어졌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키우게 되었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적 능력을 보인 아르튀르는 8세 때부터 타고난 글재주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샤를빌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특히 라틴어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70년 8월에는 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시로 1등상을 받았다. 그가 처음 발표한 시는 1870년 1월 〈르뷔 푸르 투스 La Revue pour Tous〉에 실렸다. 187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전쟁 때문에 그의 정식 교육은 막을 내렸다. 8월에 그는 파리로 달아났지만, 차표 없이 여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옛날 은사가 벌금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두에로 보냈다. 두에에서 그는 국민군에 들어갔다. 10월에 그는 다시 사라져, 침략군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두에에 도착하여 2주일 동안 자유와 굶주림과 거친 생활 속에서 쓴 시들을 다듬었다. 삶과 자유 속에서 느끼는 천진난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들은 그가 처음으로 쓴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어머니의 고발로 그는 다시 경찰에 잡혔지만, 1871년 2월 그는 손목시계를 팔아 다시 파리로 가서 2주일 동안 거의 굶다시피하며 보냈다. 반항과 시적 환상 3월초에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에 쓴 시들을 가짜라고 내팽개치고, 삶에 대한 혐오감과 순진무구한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선과 악의 투쟁의식을 표현한 거칠고 불경스러운 시를 썼다. 그의 행동도 그가 쓴 시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그는 종교와 도덕 및 온갖 종류의 규율에 대한 의식적인 반항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동시에 그는 신비주의 철학과 밀교(密敎) 및 마술과 연금술에 대한 책을 읽었고, 2통의 편지(1871. 5. 13, 15)에 표현된 새로운 미학을 형성했다. 특히 2번째 편지는 〈견자(見者)의 편지 Lettres du voyant〉라고 불리는데, 이 제목은 시인이란 무릇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볼 수 있고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모든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영원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즉 '견자'(voyant)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71년 8월말 랭보는 샤를빌의 한 문우의 충고에 따라 시인인 폴 베를렌에게 그의 새로운 시를 몇 편 보냈다. 그중에는 각 모음에다 다른 색깔을 부여한 소네트 〈모음 Voyelles〉도 들어 있었다. 베를렌은 이 시들의 탁월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랭보에게 여비를 보내어 파리로 초대했다. 갑자기 폭발한 자신감 속에서 랭보는 〈취한 배 Le Bateau ivre〉를 썼다. 이 시는 전통적인 작시법을 따르고 있지만, 깊은 정서적·영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서 언어구사의 기교가 놀랍고 상징과 은유의 선택이 대담하기 짝이 없다. 이 걸작에서 랭보는 그의 예술의 가장 높은 정점들 중 하나에 도달했다. 187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랭보는 3개월 동안 베를렌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을 거의 다 만났지만, 거만하고 버릇없는 태도와 음탕함으로 베를렌만 제외하고 그들 모두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떠나라는 요구를 받자 술을 퍼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를 맺어 추문을 일으켰다. 1872년 3월 그는 베를렌이 아내와 화해할 수 있도록 샤를빌로 돌아갔지만, 5월에 다시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이제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맹세했다. 이 시기에(1871. 9~1872. 7) 랭보는 운문으로 된 마지막 시를 썼는데, 이 작품은 기법의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에서 뚜렷한 진보를 보이고 있다. 이때 그는 베를렌이 걸작이라고 격찬한 〈영혼의 사냥 La Chasse spirituelle〉이라는 작품도 썼지만 이 작품의 원고는 베를렌과 랭보가 영국에 갔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부 비평가들은 초월적인 산문시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도 이 창조적인 시기에 쓴 작품으로 보고 있지만, 랭보 자신은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어떤 시에도 날짜를 적지 않았다. 1872년 7월 베를렌은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쳐 소호에서 살았다. 랭보는 이곳에서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1873년 1월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랭보의 동정을 사기 위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연극을 했다. 4월에 랭보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머물고 있는 샤를빌 근처의 로슈에 있는 농장으로 가서 스스로 "이교도의 책, 또는 흑인의 책"이라고 부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이라는 작품이 되었다. 1개월 뒤, 그 근처에 머물고 있던 베를렌은 랭보를 설득하여 함께 런던으로 갔다. 랭보는 베를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거기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고, 이 죄의식 때문에 베를렌을 가학적일 만큼 잔인하게 다루다가도 금방 그것을 뉘우치고 다정하게 대하곤 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7월초 베를렌은 랭보와 다툰 뒤 그를 버리고 벨기에로 가버렸다. 그러나 아내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랭보를 불러온 다음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래도 랭보가 떠나려고 하자 베를렌은 랭보에게 총을 쏘아 손목에 상처를 입히고, 다시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베를렌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나중에 재판에서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랭보는 곧 로슈로 돌아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정신이 지옥에 떨어지고 예술과 사랑에서 실패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1873년 가을 벨기에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파리에서 호평을 받지 못한 데다 인쇄업자에게 돈을 줄 수도 없게 되자, 그는 인쇄된 책을 모두 포기하고 원고와 서류들을 샤를빌에서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책을 여러 권 묶은 꾸러미가 1901년에 벨기에의 장서가인 레옹 로소에게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 사실을 1915년에야 공표했다. 1874년 2월 랭보는 난폭하고 자유분방한 시인 제르맹 누보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잡역을 하여 번 쥐꼬리만한 돈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랭보는 이때에도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보는 6월에 파리로 돌아갔고, 랭보는 병에 걸렸거나 가난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7월말에 그는 버크셔 주 레딩에 있는 합승마차 매표소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집으로 간 뒤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랭보는 1875년초에 베를렌을 마지막으로 만났고, 이 만남도 역시 격렬한 말다툼으로 끝났다. 랭보가 베를렌에게 〈일뤼미나시옹〉 원고를 준 것은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여행가와 무역상 1875~76년에 랭보는 독일어·아랍어·힌두스타니어·러시아어를 배우고 세상을 구경하러 떠났다. 1879년 6월까지 그는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서인도 제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했고, 독일 서커스단과 함께 스칸디나비아로 갔고, 이집트를 방문했으며, 키프로스 섬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매번 병에 걸리거나 다른 어려움을 만나 고통을 겪었다. 1879년 겨울 내내 장티푸스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랑생활을 그만두고 장래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봄에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 그는 건축업자의 현장감독으로 취직했지만, 곧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아덴에서 커피 무역상에게 고용되어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에 들어갔다. 이 탐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프랑스 지리학회 회보(1884. 2)에 실려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885년 10월 랭보는 저금을 털어 셰와(에티오피아의 일부)의 왕인 메넬리크 2세에게 무기를 팔기 위한 원정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메넬리크 2세는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인 요한네스 4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88년 중엽에야 겨우 기반을 잡는 데 성공했고, 요한네스 4세가 이듬해 3월에 살해당하고 메넬리크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에는 총포 밀수로 얻는 수입이 계속 줄어들었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 그는 가장 가난한 원주민만큼 소박하게 살면서, 언젠가는 은퇴하여 느긋하게 살 수 있는 돈을 모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남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너그러웠고, 그가 원주민 여인과 함께 살던 작은 집은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럽인들의 집합 장소가 되었다. 그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타고난 재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정직성과 성실함으로 추장들의 신뢰까지 얻었으며, 특히 메넬리크의 조카인 하레르 총독은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애정과 지적인 친구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1891년 봄 그는 신부감을 찾기 위해 고국에 가서 휴가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서 살고 있던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에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ètes maudits〉(1884)에서 그에 대해 썼고, 그의 시를 발췌하여 발표했다. 이 시들은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지만 랭보한테서는 소식이 없었다. 랭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에게서 답장도 받지 못한 베를렌은 1886년 상징파의 정기간행물인 〈보그 La Vogue〉에 〈일뤼미나시옹〉이라는 제목의 산문시와 여러 편의 운문시를 '고(故) 아르튀르 랭보'의 작품으로 발표했다. 랭보가 이런 발표에 대해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저주받은 시인들〉이 출판된 뒤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1885년 8월에 그는 학교 동창생인 폴 부르드한테서 편지 1통을 받았는데, 부르드는 전위파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특히 소네트인 〈모음〉)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890년 7월에 한 평론지가 보낸 편지(프랑스로 돌아와 새로운 문학운동을 이끌어보라고 권유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가 그의 서류 틈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가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답장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다. 1891년 2월 오른쪽 무릎에 종양이 생겨, 4월초에 하레르를 떠날 때는 해안까지 1주일 걸리는 길을 줄곧 들것에 실려 가야만 했다. 아덴에서 받은 치료는 실패했고 그는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직후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거의 위안이 되지 못했고, 그는 여동생 이자벨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좌절감과 절망을 쏟아놓았다. 7월에 로슈로 돌아갔을 때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이자벨이었다. 그는 여전히 결혼하여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질 뿐이었다. 1891년 8월 그는 마르세유로 악몽 같은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를 따라간 이자벨은 오빠의 병이 나을 가망이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랭보는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뎌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이자벨은 그를 설득하여 신부에게 고해를 하게 했다. 신부와 나눈 이 대화는 그에게 새로운 평화를 가져다 주고, 소년 시절의 시적인 상상력을 다시 일깨워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견자'가 되어, 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일뤼미나시옹〉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보다 훨씬 더 깊이있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근거는 여동생 이자벨의 말일 뿐이고, 이자벨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히 랭보가 에티오피아에서 쓴 편지를 몇 군데 교정했다는 점에서 이미 믿을 수 없는 증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가 랭보보다 더 열렬한 연구대상이 되거나 근대 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도 드물다. 그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작품은 산문시 〈일뤼미나시옹〉인데, 이 시의 형식은 그의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선배 시인들과는 달리 산문시에서 일화를 이야기하고 서술하는 내용이나 심지어는 묘사적인 내용까지도 모조리 제거해버렸고, 낱말에서 사전적 의미나 논리적 내용을 박탈함으로써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에타 담'(état d'âme:영혼의 상태)이라는 정신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거의 마술적인 힘을 시에 부여했다. 그는 또한 잠재의식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감각 속에 얼마나 풍부한 시의 재료가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문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 자체에 대한 오늘날의 반감과 혐오감을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 =====================================덤으로 더...   아르튀르 랭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출생 1854년 10월 20일 프랑스, 샤르빌 사망 1891년 11월 10일 (37세) 프랑스, 마르세유 직업 시인 언어 프랑스어 국적 프랑스 사조 상징주의 영향 받은 분야·인물[보이기] 영향을 준 분야·인물[보이기]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프랑스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프랑스어 발음: [aʁtyʁ ʁɛ̃bo] ( 듣기), 1854년 10월 20일 – 1891년11월 10일)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저서 2.1지옥에서 보낸 한 철 2.2일뤼미나시옹 3관련 사진 4대중 문화 5외부 링크   생애[편집] 아르덴 주의 샤를빌(지금의 샤를빌메지에르)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일찍 집을 버리고 나갔고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학창시절에는 뛰어난 모범생이었으나, 차차 반항적으로 되었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방랑도 하게 되어 16세로 학업을 포기한다. 이 전후에 쓴 여러 시에는 그의 그리스도교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과격한 혐오감이 가득 차 있다. 랭보는 시인은 우주의 모든 것을 투시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871년 5월에 유명한 '견자'(voyant 부아양[*]=천리안이라는 뜻)의 설(說)을 제창하여 이 새로운 문학적 실험에 들어갔다. 얼마 뒤 100행의 장시 《취한 배》를 쓰고서는 베를렌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오고,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가 된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아 여러 곳을 방랑하면서 파멸적인 생활을 보내다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랭보를 권총으로 저격한 사건으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이 2년간의 이상한 체험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훌륭하게 정착되어 있다. 이때부터 그는 문학의 열의가 차츰 식어 실제적인 직업을 구하고자 분주하게 다닌 한편 환상적인 《일뤼미나시옹》의 산문은 대부분 이 시기에 썼다고 추정된다. 이 산문 시집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함께 프랑스 산문시의 최고봉을 이룬다고 하지만, 후자는 거친 그림자를 숨기고 그의 상상력에 의하여 해체된 현실이 보다 높은 차원의 시적 현실에 다시 구축되고 있다. 이미지의 풍요로움과 신선함은 다른 시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1875년 문학을 단념하고 유럽 각지를 유랑하다가 1880년경 아프리카로 건너가더니 상인·대상들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다리의 종기가 덧나 프랑스 마르세유 병원에서 한쪽 다리를 자르고 몇 달 후 숨졌다. 조숙한 천재 시인 랭보의 영향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뚫어서 현대시에도 파급하여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저서[편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입니다. 랭보가 1873년에 출판한 시집이다. 폴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였다가 베를렌이 브뤼셸에서 랭보를 저격하여 이별한 이후 완성되었다. 랭보 그 자신에 의해 출판된 유일한 책이며, 초현실주의자를 포함하여 후대의 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일뤼미나시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일뤼미나시옹입니다. 1886년 5월과 6월에 파리의 문학 평론지인 《라 보그》(La Vogue)에서 부분적으로 처음 출판된, 랭보의 미완성 산문 시집이다. 1886년 10월에 레 퓌블리카시옹 드 라 보그(Les publications de La Vogue)가 랭보의 전 애인인 폴 베를렌이 제안한 《레 일뤼미나시옹》(Les Illuminations)라는 제목을 붙여 책의 형태로 재출판하였다. 관련 사진[편집] 샤를빌메지에르에 있는 랭보 박물관   샤를빌메지에르에 있는 랭보 생가   샤를빌메지에르에 있는 랭보 무덤 ========================================================== 문학 랭보의 절절한 편지 (부제: 베를렌, 제발 돌아와줘...) 사뿐사뿐 2017.11.25 18:25     요즘 백수다.  그래서 예전에 영화 토탈이클립스로 인해 관심을 갖게 된 랭보옵빠의 책을 찾아 읽었다. 사실 랭보에 빠져든 이유는, 영화에서 랭보역을 넘나 잘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옵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일생에 흥미를 갖고 써치해보면서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어린나이부터 자기는 시인이 될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 그런 포부를 뱉어놓고 실제로 고군분투한 것, 당대 잘나가던 시인한테 제발 자기 작품좀 읽어달라고 여러번 편지를 보낸 것, 자기가 쓴 시에 대해서 엄청 자신있던 것, 등등 또라이 같은 짓을 많이 해도 밉지 않았던 것은, 그 나름대로 계속 노력을 해서가 아니었을까.   또 어린나이에 (10대에) 시를 쓰기 시작해서 20대초반 (정확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약 5년동안 시를 가열차게 쓰고 미련없이 관둔 것도 신기하다. 그 후로 바람구두를 신고 여기저기 싸돌아 다닌 것도...    나무위키를 읽다가 알게된 건데, 랭보의 유명 국내빠돌이로 타블로랑 하현우가 있다고 한다. 타블로는 '막을 올리며' 라는 곡에서 '난 숨만 쉬어도 랭보' 라고 작사했으며, 하현우는 랭보관련해서 팔에 문신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랭보가 살았던 샤를빌? 샤를르빌? 을 방문하는 전세계적 빠순 빠돌이들도 많다고 하니..  정말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건 분명하다.   아무튼, 회사에 쩌들어서 매일 집->회사->집->회사의 루틴만 반복하느라  나의 감수성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흑.   쨌든, 오랜만에 감수성에 푹 빠져보자.   도서관에서 빌릴 수가 없게 되어있어서 ㅡㅡ 관심이 가는 부분을 사진 찍어왔다. (불법은 아니겠지?) 좀 있다 밑에서 한 땀 한 땀 타이핑해가며 음미할 예정♡   시는 몇개 읽다가 도저히 무슨 말인지 (한글로도 어려운데 영어라서 더 멘붕) 모르겠어서 흥미로운 편지들부터 읽어보았다. 그 중에 제일 임팩트 강렬했던 거 ㅋㅋ  랭보를 버리고 떠난 베를렌느에게 제발 다시 오라며 보낸 편지.      영화 토탈이클립스 中, 배를 타고 떠나버린 베를렌느를 보며 우는 랭보 ㅠ ... 후회해도 소용 없는 각 ...      RIMBAUD TO VERLAINE    London Firday afternoon [July 4, 1873]   Come back, come back, my dear, my only friend, come back. (아 첫 줄부터... 절절하다. 제발 도라와죠....!!!)   I swear to you I'll be good. If I was mad at you, it was a joke I carried too far, and I'm sorry for it, more than I can say. (맹세할게, 너한테 잘할게...! 내가 너한테 화난거였다면, 그건 죠크였어.. 내가 너무 심했어. 암쏘쏘리...ㅠㅠ)   Come back, we'll forget the whole thing. It's awful that you should have taken that joke seriously. (도라와죠.. 다 잊자. 내가 그냥 생각없이 날린 죠크를 진지충처럼 받아드린거가 틀림없어.. 유감이야.. 잠깐만, 돌아와달라고 설득하는 중 마즘?;;;)   I haven't stopped crying for two days. Come back. Be brave, dear friend; nothing is lost. All you have to do is make the trip again. (나.. 이틀동안 계속 울었쪙... 돌아와!!!! 용감해지자. 잃을건 없쟈나. 너는 그냥 우리가 했던 여행을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거쟈나. 점점 번역이 이상해지고 있는 느낌적 느낌. 그치만 괜찮아 내가 읽을라고 하는 거니까 ㅎ)   We'll live here again very bravely and very patiently. Oh! I beg you, it's for your own good, really. (우린 여기 다시 같이 살거야.. 매우 용감하고 인내심있게?? 왜 자꾸 brave란 단어를 썼을까.. 동성애라? 베를렌느가 마누라 버리고 같이 여행중인거라?)   Come back, you'll find all your things here.  (도라와죠.. 니 물건 여기 다 있쟈나...)   I hope you realize now that there was nothing serious in our discussion. What a horrible moment! (우리가 했던 대화...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심각한건 아닌거 같지? 응? 정말 끔찍했던 순간이었어 ㅠㅠ. 내맘대로 번역중 ㅋㅋㅋ)   And that time when I waved at you to get off the boat, why didn't you? (그리구 내가 너보고 배에서 내리라고 눈물 콧물 짜면서 난리쳤을 때.. 왜 안내린거야..? 갑자기 책망하기 시작하는 랭보ㅋㅋ)   We've lived together for two years, and this is what it's come to! What are you going to do? (우리 2년동안 같이 살았는데, 우리의 끝이 겨우 이거인거야?? 베를렌.. 너 앞으로 뭐할 건데?)   If you won't come back here, do you want me to come meet you where you are? (너가 여기로 오지 않겠다면, 내가 니가 있는 곳으로 갈까? 응? 번역하다보니 점점 랭보에 빙의잼)   Yes, I'm the one who was wrong. Oh! Oh! You won't forget me, tell me you won't. No, you can't forget me. I have you always with me. (그래. 내가 호로자식이었어. 오! 오! 너 .. 나 잊지 않을 거지? 잊지 않겠다고 말해! 아냐, 넌 날 잊을 수 없어. 난 너랑 항상 함께 였는 걸. 아... 진짜 너무 짠하다. ㅠ 베를렌이 그렇게 떠나버린게 좀 많이 충격이었나보다)   Tell me, answer your friend, aren't we ever going to live together again? Be brave. Write me an answer right away. (말해줘, 우리 같이 다시 안 살거야??? 용감해줘... 또 용감이라 썼다... 읽씹하지 말고 당장 답장줘)   I can't stay here anymore. Don't listen to anything except your heart. Quick, tell me if I should come to meet you. (나 여기 더 못있어. 니 심장이 하는 소리만 듣고 판단해줘.. 빨리, 내가 너한테 가길 원하는지 말해줘)   Yours for the rest of my life. (뭔 표현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무튼 애정듬뿍 담긴게 느껴진다. 넌 내 남은생의 전부야??)   Answer right away; I can't stay here beyond Monday evening. I haven't got a penny left; I can't even mail this. (바로 답장줘. 나 여기 월요일 저녁이후로 더 못있어. 왜냐면.. 떙전한푼 없거든 ㅎ 너한테 이 편지를 보낼 돈도 없어 ㅎ)   I've left your books and manuscripts with Vermesch. (네 책이랑 원고들을 Vermesch와 함께 남겨뒀어. Vermesch가 뭔가염..)   If I can't see you again, I'll joing the navy or the army. (만약 내가 널 다시 못 만나는 날엔, 나 걍 군입대 해버릴거야.......!! 랭보..대박...)   Oh, come back, I Keep crying all the time. Tell me to come to meet you, I'll come. (오 제발 돌아와. 나 매일 울고있느라 넘 힘들어.. 널 만나러 오라고 말해, 내가 갈게!)   Tell me; send me a telegram. I must leave Monday night.  (말해줘, 아님 나한테 전보쳐. 나 월요일 밤에는 여길 떠나야만 해... 카톡이 없던 그 시절.. 연락이 바로 안되서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웠을까ㅠ)   Where are you going? What are you going to do? (너 어디로 가고 있는거야? 앞으로 뭐할건데? 응?)      .........여기까지 감명깊게 읽은 랭보의 편지였다. 물론 이 책도 French -> English라 그 당시 랭보가 썼던 뉘앙스의 100%를 담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소설보다도 더 재미있는 느낌ㅎ  남의 편지를 훔쳐읽는 그런 관음적인 느낌ㅎ   나중에 불어배워서 불어 원본그대로 또 읽어보고 싶다. 그땐 또 느낌이 다를수도...? 근데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듯싶다.   아 갑자기 토탈이클립스가 떙기는 밤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들리는 음울한 배경음악 들으러 꼬고♪ //////////////////////////////////////////     도시 위에 가볍게 비 내리네                                   내 마음은 울고 있다네 도시 위에 비 내리듯 ;   이 우수는 무엇일까, 내 마음에 파고드는 이 우수는     오 부드러운 비의 소리여 땅 위에 지붕 위에   내 지겨운 마음을 위해 오 비의 노래여!     이유 없이 우는구나, 이 역겨워진 마음은.   뭐라고! 배반은 없다고?... 이 슬픔은 이유가 없구나.     가장 나쁜 고통이구나, 이유를 모르는 것은   사랑도 없이 증오도 없이 내 마음은 그토록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구나!       나의 방랑 생활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나는 하늘 아래 나아갔고, 시의 여신이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꿈꾸었는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었지. -꿈꾸는 엄지동자인지라, 운행 중에 각운들을 하나씩 떨어뜨렸지.    주막은 큰곰자리에 있었고. -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하여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의 살랑거림에 귀기울였지,   그 멋진 구월 저녁나절에, 이슬 방울을 원기 돋구는 술처럼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한발을 가슴 가까이 올린 채, 터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면서!     감각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 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 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모음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들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터질 듯한 파리들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灣); E, 기선과 천막의 순백(純白), 창 모양의 당당한 빙하들;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살랑거림.   I, 자주조개들, 토한 피, 분노나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     U, 순환주기들, 초록 바다의 신성한 물결침,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글술사의 커다란 학구적인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한 금속성 소리로 가득찬 최후의 나팔,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는 침묵, 오, 오메가여, 그녀 눈의 보랏빛 테두리여!     취한 배     유유한 강물을 타고 내려올 적에, 더 이상 수부들에게 이끌리는 느낌은 아니었어   홍피족들 요란스레 그들을 공격했었지, 색색의 기중에 발가벗겨 묶어 놓고서     플랑드르 밀과 영국 솜을 져 나르는 선원들이야 내 알 바 아니었어,   배를 끄는 수부들과 함께 그 북새통이 끝났을 때 나 가고 싶은 데로 물살에 실려 내려왔으니,     격하게 출렁이는 조수에 휘말린 지난 겨울, 난, 노아보다 더 넉넉한 골을 싸잡고   헤쳐 나갔지! 떠내려간 이베리아 반도도 그처럼 의기양양한 혼돈을 겪지는 못했을 거야,     격랑은 내가 항행에 눈뜬 것을 축복해 주었어, 코르크 마개보다 더 가벼이 나는 춤추었지,   끊임없이 제물을 말아먹는다는 물결 위에서, 열흘 밤을, 뱃초롱의 흐리멍텅한 눈빛을 드리지도 않으며!     셔츠를 짓찢을 듯 모진 겨울바람에,       지옥에서 보낸 한 철                               1.서시     옛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들이 흘러다니는 하나의 축제였다.       어느날 저녁 나는 美를 내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보니 지독한 치였다- 그래서 욕을 퍼부어 주었다.     나는 정의에 항거하여 무장을 단단히 했다.   나는 도망했다. 오 마녀여, 오 불행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을 나는 너희들에게 의탁했다.   나는 내 정신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희망을 사라지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 희망의 목을 비트는데 즐거움을 느껴,   나는 잔인한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나는 죽어가면서 그들의 총자루를 물어 뜯으려고   사형집행인을 불렀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 속에 팍 쓸어졌다. 나는 죄의 바람에 몸을 말렸다.   나는 광대를 잘 속여 넘겼다.     봄은 나를 향해 백치처럼 무시무시한 웃음을 웃었다.   그런데, 요즘 마지막 껄떡 소리를 낼 찰라에,     나는 옛날의 축제를 다시 열어줄 열쇠를 찾으려 했다.   그러면 아마도 욕망을 되찾을지 모른다.     자애(慈愛)가 그 열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내가 전에 꿈을 꾸었나보다.   "너는 잔인한 놈으로 남으리라....." 따위의 말을,     그토록 멋진 양귀비 꽃을 나에게 씌어준 악마가 다시 소리친다.   "네, 모든 욕망과 이기주의와   모든 너의 죄종(罪宗)을 짊어지고 죽으라"       오! 내 그런 것은 실컷 받아드렸다. 하지만, 사탄이여,   정말 간청하노니, 화를 덜 내시라!     그리고 하찮은 몇 가지 뒤늦은 비겁한 짓을 기다리며,   글쟁이에게서 교훈적이며 묘사적인 능력의 결핍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 나의 저주받은 자의 수첩에서 보기흉한 몇 장을 발췌해 준다.       *죄종(罪宗)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7개의 주된 죄                교만, 탐욕, 사음(邪淫), 질투, 탐심, 분노, 태만    
2122    빈민굴 하숙방에서 쓸쓸하게 운명한 "시의 왕" - 폴 베를렌느 댓글:  조회:4264  추천:0  2017-12-26
             가을 노래 / 베를렌느      가을날 바이올린의 서글픈 소리   하염없이 타는 마음 울려 주누나.    종소리 가슴 막혀 창백한 얼굴   지나간 날 그리며 눈물 짓는다.   쇠잔한 나의 신세 바람에 불려   이곳 저곳 휘날리는 낙엽같아라.       내 마음에 눈물 내리네/베를렌느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 내린다.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이 슬픔은 무엇일까? 속삭이는 비 소리는  대지 위에, 지붕 위에! 울적한 이 가슴에는  아, 비 내리는 노래 소리여!   역겨운 내 맘 속에  까닭없이 눈물 흐른다. 웬일일까! 배반도 없었는데? 이 슬픔은 까닭이 없다.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베를렌느 Paul-Marie Verlaine 1844~1896 프랑스 상징파의 시인        로렌 주에서 태어났다.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에서 공부하였으나 중퇴하고,   20세에 보험회사에서 일하다가, 파리 시청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시풍은 낭만파나 고답파의 외면적이고 비개성적인 시로부터 탈피하여 무엇보다도   음악을 중시하고 다채로운 기교를 구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등이 있다.           //        흰 달빛--- / 베를렌느     흰 달빛 숲속에 환하고; 가지가지마다 한 목소리 흘러나와 나무 그늘 아래로---   오, 사랑하는 이여,   연못은 깊은 거울, 그 속에 검은 버드나무 그림자 드리우고 그 위에 바람이 운다---   자, 지금은 꿈꿀 때,   크고도 부드러운 안식이 달무리진 창공에서 내려오는 듯---   지금은 더없이 그윽한 때.     가을 노래 / 베를렌느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외로운 가락으로       내 마음 여이나니.   종소리 나면 가슴 꽉 막혀       파리한 얼굴로 지난 날 돌이켜보며       눈물 흘린다.   나도 가버리리라, 모진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떠도는       낙엽과 같이     거리에 비 내리듯--- / 베를렌느                      거리에 조용히 비가 내린다.                         -아르튀르 랭보-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맘 속에 눈물 내린다. 가슴 속에 스며드는 이 외로움은 무엇이런가?   속삭이는 비 소리는 땅 위에, 지붕 위에! 울적한 이 가슴에는 아, 비의 노래 소리여!   역겨운 내 맘 속에 까닭 없는 눈물 흐른다. 무엇, 배반은 없다고? 이 슬픔은 까닭 없는 것.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 베를렌느          1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나를 사랑하여 야 한다. 너는 보지 않는가? 창에 찔린 내 옆구리, 빛나며 피 흘리는 내 심장, 그리고 너의 죄로 무거운 내 아픈 팔을   그리고 내 두 손을! 그리고 너는 보지 않는가? 십자가와 못들과 담즙과 해면(海綿)1)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네게 육(肉)이 지배하는 이 괴로운 세상에서 내 살과 피, 내 말과 목소리만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나 자신도 너를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았던가? 오, 성부(聖父) 안의 내 형제여, 오, 성신(聖神)  가운데 내 아들이여 그리고 나는 기록된 바와 같이 고난을 받지 않았던가?   나는 너의 최후의 고뇌를 흐느껴 울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네가 밤마다 흘리는 땀을 흘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심한 친구여, 그대는 내가 있는 곳을 찾고 있다고?                                                    1)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목 마르다고 하자                                                                군사들은 담즙(혹은 초)로 적신 해면을                                                                그의 입에 갖다 대었다는 성경 구절을 말함.              8   아, 주님이시여, 어찌된 일입니까? 아아! 저는 지금 엄 청난 기쁨으로 온통 눈물에 젖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저에게 기쁨과 동시에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악(惡)과 선(善)은 똑같이 저를 끄는 힘을 가졌습     니다.   저는 웃고, 웁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마치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나오라 부르는 나팔 소리와 같습니다. 저는 봅니다, 방패 위에 높이 실려가는 청백(靑白)의 천군 천사(天軍天使)들을 그러나 이 나팔 소리는 저를 자랑스러운 불안으로 이끌어 갑니다.   저는 당신이 저를 택하심에 황홀하여 또한 두렵습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관용을 압니다. 아! 얼마나 큰 노력이, 그러나 이 얼마나 뜨거운 열정(熱情) 입니까! 그리하여 저는   겸허한 기도에 가득 차 지금 여기 있습니다. 비록 이 크 나큰 심적 동요는 당신의 목소리가 저에게 알려 주신 소망을 아직은 혼동하 고 있어, 저는 떨면서 갈망하고 있습니다.     폴 베를렌느(1844~1896): 베를렌느의 생애는 추문으로 얼룩지고 비참과 불행으로 연속되었다. 한 마디로 의지라는 것이 결여되어 음주와 방랑과 본능적 충동에 휘말려 아내에게는 동성애로 인해 이혼 당하고,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만년에는 가난과 병으로 계속 자선 병원의 신세를 져야만 했던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 추하게 생긴 용모와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알콜 중독자인 그에게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시가 흘러나왔다는 것은 기이한 신의 배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폴 베를렌느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도시 메츠에서 출생하였다. 외아들로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7세 때 부모와 함께 파리로 올라와 당시의 보나파르트 중고등 학교(지금의 콘돌세 중고등 학교)에 입학, 이를 졸업하고 바카로레아(대학 입학 자격 시험)도 합격하였다. 그러나 세상일에 별다른 야심이 없는 그는 대학 진학에는 뜻이 없어 얼마 후 그가 20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 친구의 주선으로 파리 시청의 하급 서기로 들어갔다.  그 후 7년 동안 보불 전쟁이 일어나 그가 그 자리를 물러나기까지, 그는 줄곧 같은 과, 같은 자리, 같은 책상에 앉아 매일 똑같은 일을 되풀이 했다. 그렇다고 불평하거나 전직을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의 유일의 관심사, 유일의 노력은 마음이 내키면 시를 써 보는 일이었으며 유일의 즐거움은 퇴근 후 카페에 들러 압생트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문학과 세상일을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그의 음주벽은 이 때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그의 부모나 친구들도 걱정할 정도이었다.  그는 시청 재직시 2권의 시집인 과 를 자비로 출판하였다. 이 두 시집이 나왔을 때 위고를 비롯, 일부 문인들의 형식적인 찬사와 격려도 없지 않았으나 그의 진가를 알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70년 보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마틸드 모테라는 16세 소녀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비록 전쟁의 위험과 불행이 예견되었으나 이로써 베를렌느는 오랜 외로움과 무위 끝에 그의 생애에 밝은 햇빛이 비추는 듯했다. 이 아름다운 심경을 노래한 얄팍한 시집이 이다. 그러나 가정적 불행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결혼한지 1년도 못 되어 랭보라는 소년이 나타났다. 베를렌느 보다 10년이나 아래인 17세의 폭풍 같은 이 천재는 그를 삽시간에 정복하고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신혼 가정을 산산이 부셔 버렸다. 드디어 베를렌느는 아내와 가정을 버리고 랭보와 함께 벨기에-영국 등지를 방랑하며 동거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 두사람 사이에도 갈등이 생긴다. 부뤼셀에서 사소한 일로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총을 쏘아 부상케 하여 벨기에의 몽스 감옥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875년 1월 베를렌느는 어머니만이 홀로 기다리는 옥문을 나섰다. 그는 2년 동안의 옥중 생활로 참회하고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감방에서 를 써서 아내 마틸드에게 용서를 구하고, 출옥하기 얼마 전에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하여 열렬하고 눈물겨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이로부터 훨씬 뒤에(1881) 출판한 시집 와 이외의 몇 편의 작품집은 이 때의 종교적 체험을 순수하고 솔직하게 담은 것이다.  감옥을 나온 그는 새사람이 되어 자기 힘으로 살기 위하여 파리를 떠나 그 후 몇 해 동안 영국과 벨기에의 시골 중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프랑스어 또는 영어를 가르쳤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선생으로 학생들과 학부형에게 사랑과 존경도 받았다. 한때는 농부가 되어 농원을 일으키려고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결심도 노력도 허사였다. 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사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로서 그가 내심 극진히 사랑하여 온 아내 마틸드가 그이 호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법적으로 헤어지게 된 사실을 든다. 여하튼 그는 다시 술을 마시게 되고 본능적 충동과 욕구가 그를 엄습해 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올라왔다. 파리에서의 그의 생활은 비참 그것이었다. 팔리지 않는 원고를 들고 떨리는 한 손에 단장을 짚고 한 쪽 다리를 끌려 두 눈을 반쯤 감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어려운 동안에도 시작(詩作)과 소설과 평론 등의 작품 활동은 계속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시학(詩學)이 들어 있는 , 그리고 당시 문단에서 무시되거나 참다운 가치가 알려지지 않았던 코르비에르, 빌리에 드 릴르-아당, 말라르메, 랭보와 자기 등 불행한 시인들의 예술적 가치를 논한 그의 시론 은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잊혔던 이들 시인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1886년, 그를 사랑하고 돕고 보살펴 주던 유일의 보호자인 그의 어머니도 죽었다. 이 헌신적인 어머니를 그는 한 해 전에 목을 졸라 죽게 할 뻔하여 1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제 베를렌느는 혼자 살아가기 위해 더욱 많은 시. 소설, 수기, 잡문 등의 글을 써야 했다. 이 가운데는 그의 시 작품 가운데 걸작이라고 인정되는 "평행하여(1889)"도 들어 있다.  그가 50세가 된 만년에는 그의 시가 차츰 알려지고 젊은 시인들 특히 상징주의와 데카당(퇴페주의)파의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에 대한 가치가 인정되고 이것은 또 그의 불행하고 파란 많은 생활과 겹쳐 그를 둘러싼 일종의 문학적 전설이 생겨났다. 이제 그는 카페나 병원으로 그를 찾는 많은 젊은 문인들에게 새로운 예술을 가르치는 시단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젊은 문인들의 추대로 르콩트 드 릴르의 뒤를 이어 '시의 왕'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896년 그는 52세로 빈민굴의 하숙방에서 청부의 팔에 안겨 쓸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운집한 시인, 화가, 문인, 배우 등 그의 숭배자들에 둘러싸여 성대하게 바티뇰 묘지로 갔다.  
2121    영국 시인 - 월터 드 라 메어 댓글:  조회:3931  추천:1  2017-12-21
  출생 1873. 4. 25, 영국 켄트 찰턴 사망 1956. 6. 22, 미들섹스 튀큰햄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시인·소설가.   삶의 희미하고 덧없는 순간들을 환기하는 비범한 힘이 두드러지는 작가이다. 런던의 세인트폴 스쿨에서 공부했고, 1890~1908년 앵글로아메리칸 석유회사의 런던 사무소에서 일했다. 1902년 월터 라멀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시절의 노래 Songs of Childhood〉를 발표하면서 점차 글쓰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첫소설 〈헨리 브로켄 Henry Brocken〉은 1904년, 〈시 Poems〉는 1906년에 출간되었다. 해마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는데,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시와 단편소설들, 시적 환상이 극치에 이른 〈꼬마의 회상 Memoirs of a Midget〉(1921)을 비롯한 소설, 요정극 〈교차점 Crossings〉(1921), 수필과 문학 연구서 등이 있다. 문집 〈여기로 오라 Come Hither〉(1923)는 독창적인 언어 구사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48년 명예훈장을 받았고, 1953년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그밖에도 1920, 1935, 1942년 〈시집 Collected Poems〉을 발표했고 1944년 〈동요집 Collected Rhymes and Verses〉, 1947년 〈동화집 Collected Stories for Children〉을 내놓았다. 후기 시집으로는 〈볼록 렌즈 The Burning Glass〉(1945)·〈여행자 The Traveller〉(1946)·〈마음속의 동반자 Inward Companion〉(1950)·〈오 아름다운 영국 O Lovely England〉(1953) 등이 있다. ========================   -세계의 동시-   파리                       월터 드 라 메어(영국)         저 쪼그만 파리 눈에는 작은 것이 얼마나 크게 보일까? 장미꽃 봉오리는 비단 침대로 뾰족한 가시는 날카로운 창만큼 보일까?   이슬방울은 화장대, 머리카락은 금빛 철사. 죄그만 겨자 씨 한 알은 불붙는 숯덩이로 보이겠지.   빵은 높은 산으로, 꿀벌은 무서운 표범으로 보일까? 하얀 소금은 목동들이 모는 어린양떼처럼 하얗게 반들반들 빛나 보이겠지.       -                  /송용구(시인. 고려대 연구교수)     우리들의 눈에 아주 작게 보이는 사물도 “파리 눈에는” 아주 “크게” 보이겠지요. 우리들의 모습은 “파리”에게 어떻게 보일까요? 소인국에 표류한 “걸리버”처럼 거인으로 보이겠지요. 우리들의 노래는 “파리” 귀에 어떻게 들릴까요? 천둥처럼 우람하게 들리겠지요. “파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귀여운 피조물로 보이네요. “파리”의 날아가는 소리가 동요처럼 들려오네요.     떠나고 나면                    / 월터 드 라 메어 시간이 치유 못할 슬픔 없고  회복하지 못할 상실과 배신도 없으니  그것은 영혼의 위안이라 무덤이 비록  사랑하는 이들과 그들이 함께 누린 걸 죄다  갈라놓을지라도. 보라, 태양은 기분 좋게 빛나고  소나기는 그쳤지않은가 꽃들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날들은 얼마나 화창한가!  사랑에 혹은 의무에  너무 아파하지 말라 오래 잊고 있던 친구들은 삶이 만사를 죽음으로 마무리짓는 곳에서  그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아무도 그댈 위해 오래 슬퍼하고 기도하거나 그리워하지 않으리 그대 자리 비어 있고  그대 가고 없으니   Away There is no sorrow  Time heals never;  No loss, betrayal,  Beyond repair.  Balm for the soul, then, Though grave shall sever  Lover from loved  And all they share;  See, the sweet sun shines,  The shower is over,  Flowers preen their beauty,  The day how fair! Brood not too closely On love, or duty; Friends long forgotten May wait you where  Life with death  Brings all to an issue;  None will long mourn for you,  Pray for you, miss you, Your place left vacant,  You not there.               (Walter de la Mare)     잠꾸러기 / 월터 드 라 메어 파란 달밤이었어.  나는 자지 않고 있었지.  숲속에서 들리는  가늘고 작은 노래소리.  ―일어나서 오너라.  잠꾸러기야.  신을 신고  여기로 오너라.  나무 아래 뿌리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 옆으로.  나는 봤어.  하얀 달이었지.  잎새는 빛나고  숲속은 흰 눈이 내린 듯.  ―오너라, 와서  노자.  우리들과 함께,  언덕 위에서  손에 손을 잡고서.  참 좋은 집이야  꿀은 달고  젖도 있다.  크림도  밀크로 끓인 죽도  맛나다.  조개껍질도 피이즈도  개자 씨앗도  모두 너를 주마.  나는 일어나  후다닥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신도 신었다.  푸르고 푸른 달밤이었지.  그런데 정답고 달콤한 노래소리가  사라져 버렸어.  먼동이 트기 시작했지.  숲 위로 장밋빛이 물들여오고  새가 와서 울고 있었다.  이슬이 자욱했다. 새는  미나리아재비의 이슬을 보고 지저귄다.     불을 켜는 사람 /월터 드 라 메어  해가 꼴딱 서산에 지고  하늘의 천사가 하느님의  등불의 별에 불을 켤 때,  성냥을 가지고 램프 켜는 아저씨가  어둔 골목을 종종걸음으로  지구의 불을 켜며 지나가신다.  밤길을 이리저리 도둑놈이  어정어정 가만히 돌아다니며  나쁜 짓을 못하게 환하게 밝혀주는,  만일 급한 볼일로 이 밤에  심부름을 가게 되는 그 길을  환하게 밝혀주기 위해서.  밤길 가는 나그네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친구를 찾아 놀러 갈 때에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게.  진정으로 램프불을 켜는 아저씨는  새까만 옷감의 그 깃마다  보석을 수놓으려고 바느질하는  아저씨와 꼭 같구나.  아암, 그렇지, 그분은 영웅이지.  멀고 먼 길을 환하게 불 밝혀  우리들의 앞길을 비춰주고  우리들의 앞길을 가르쳐주는  그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  더구나 훤하게 날이 밝아  동쪽 하늘로 해님의  빛이 비치고 숲 위에는  나무꼭지마다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는 이른 아침  불을 켜는 아저씨는 잠꾸러기들이  늦잠 자는 집집마다 문 앞을  총총걸음으로 달려가며  램프불을 꺼주고 지나간다.    Silver   달님은 천천히 조용히 은빛 신을 신고 밤을 걸어가네. 이쪽 저쪽으로 마냥 기웃거리며 은빛 나무 위 은빛 열매를 보네. 창문은 하나하나 휘영청 달빛을 드러내고 은빛 처마 밑에서 잠든 우리집 개 그늘진 둥우리에서 살며시 보이는 건 은빛 날개에 싸여 고이 잠든 비둘기 가슴. 낱가리 속의 쥐가 쪼르르 달아나네 은빛 발톱, 은빛 눈을 가지고. 물속에서 고기는 움쭉하지 않고 은빛 시냇물 은빛 갈대 옆에서 반짝이네.  
2120    재래식 서정시의 혁신파 시인 - 정현종 댓글:  조회:5844  추천:0  2017-12-14
  출생 1939년 12월 17일 국적 대한민국 대표작 견딜 수 없네, 광휘의 속삭임, 섬, 날아라 버스야 수상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시인 정현종은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 ·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 발레, 철학 등에 심취했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1970∼1973년 문화부 기자로, 1975∼1977년에는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해서 시 창작 강의를 했다.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했다.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작가 '정현종' 1965년 을 통해 시단에 오르고,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쉼 없는 창작열과 언제나 자신의 시 세계를 갱신하는 열정으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다룬 시를 발표했다. 2008년 내놓은 아홉 번째 시집 『광휘의 속삭임』 역시 사물의 바깥에서 사물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복잡한 의미의 얼개를 부여하는 대신, 사물들과 한 몸으로 움직이는 시를 갈망하게 된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사물의 있음 그 자체, 움직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시적 화자의 자세에 저절로 주목하게 되는 작품집이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했다. 대표작 견딜 수 없네 " class="img_thumb" height="225" src="http://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t1.daumcdn.net/encyclop/m150/A28QDMexI2UQX4q8B7kaDgv5UWy3VGrhoYAKjlvo?t=1463983475000" style="border: 0px none; vertical-align: top;" width="155" /> 정현종의 초기 시가 전후의 허무주의와 토착적 서정시를 극복하고 현실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면 2000년대를 기점으로 현실과 꿈의 갈등보다는 생명과의 내적 교감, 자연의 경이감, 생명의 황홀 등에 천착한 새로운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런 점에서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을 표제작으로 한 시집 『견딜 수 없네』는 정현종의 시력에 그어진 새 획을 가늠해볼 수 있는 핵심적인 시들이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집 『견딜 수 없네』를 관류하는 정서는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것을 끌어안는 거대한 포용, 자연과 합일된 경지다. 정현종은 시간의 흐름에 마모되는 존재들을 민감하게 발견해내며, 고요하게 바라본다"(우찬제, 신판 해설 「어스름의 시학」) 시인은 모든 감각을 망라하는 관음의 눈으로 세계를 보며, 자연의 생리를 왜곡하지 않고 자체의 숨결과 교감을 시도한다. 광휘의 속삭임 " class="img_thumb" height="225" src="http://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t1.daumcdn.net/encyclop/m150/aWnxj6Cb81x911kQQgPunTlWW4OhfS5NdQHWdQo7?t=1463983541000" style="border: 0px none; vertical-align: top;" width="155" /> "한국 현대시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인 정현종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정현종의 시들은 삶 자체의 근원을 탐색하려는 의욕과 열정으로, 때로는 지극한 찬탄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한 능청스러움으로 독자를 즐겁게 한다. 이번 시집 『광휘의 속삭임』 역시, 의식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복잡한 의미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사물의 있음 그 자체, 움직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시적 화자의 자세에 주목하게 된다. 시인은 이제 사물의 바깥에서 사물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복잡한 의미의 얼개를 부여하는 대신, 사물들과 한 몸으로 움직이는 시를 갈망한다. "파동이나 숨결로 시인에게 무언의 전언을 보내오는 사물들의 숨겨진 비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몸 전체를 텅 비워"내고 있다는 평론가 박혜경의 지적대로, 정현종 시인은 사물에 의미를 들씌우려는 해석적 권위를 버리고, 사물의 천진한 유희자가 되어 사물들 속으로 잠입하고 있다. 섬 " class="img_thumb" height="225" src="http://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t1.daumcdn.net/encyclop/m150/heNQGj5lpWD7c9NOzofJIxYUR5ECgOXeEJgy03mK?t=1463983649000" style="border: 0px none; vertical-align: top;" width="155" /> 정현종 시인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하여 시선집 『섬』이 '정현종 문학 에디션' 시리즈로 새롭게 출간됐다. 시인이 만년필로 쓴 육필, 직접 그린 그림들과 함께 '자유로운 언어'로 표현한 34편의 시가 채워져 있다. 투박하지만 정감 넘치는 터치와 필치가 독자들에게 너울 깊은 파동을 전한다. 고통의 무게가 클수록 오히려 인간의 날아오르려는, 상승의 의지는 클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은 정현종 시인의 자유 혹은 자유인의 삶 또한 결국 고통스러운 하강의 시련을 뼈저리게 느낀 후에야 영혼의 상승과 비상의 행위가 수반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러한 삶의 의지는 「고통의 축제 2」에서 "무슨 힘이 우리를 살게 하냐구요? / 마음의 잡동사니의 힘!"으로 표현된다. 시인은 근원적으로 마음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다. 또한 시인은 변화하고 소멸되는 시간의 법칙에 연연하지 않고,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추억에 잠기는 회한의 탄식 대신 인생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임을 일깨우기 위해 목소리를 돋운다. 날아라 버스야 " class="img_thumb" height="225" src="http://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t1.daumcdn.net/encyclop/m150/GP7j95CKGGbq0jSwe0q1LIgCBtAQxilQxWuSmxzx?t=1463983713000" style="border: 0px none; vertical-align: top;" width="155" />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인문 정신의 치열함 속에 언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산문집이다. 시인이 30년 넘게 써온 글들 중에서 정수만 가려 뽑은 산문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우리의 삶에 유연하게 스며든다. 『날아라 버스야』는 세상의 무거움을 통과해 날아오르는 경쾌하고 자유로운 언어들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철학적인 사유와 무한한 상상력, 생동감 넘치는 시어로 우리 현대 시사(詩史)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해온 정현종 시인의 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한 권의 시론집으로도 손색없을 만큼 탄탄한 사유와 밀도 높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예술과 인문 정신이 결합된 산문의 한 진경을 보여 주는 이번 산문집은 육중한 바윗덩어리를 비집고 나오는 샘물처럼 가볍고 맑다. 시론이 곧 인생론이고 시와 삶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시인의 글들은 어둠 속의 별처럼 환하게 빛난다. =====================덤으로 더... 「사물의 꿈」 문단에 갓 나온 김현이 젊은 시인 정현종(鄭玄宗, 1939~ )을 포장도 채 되지 않은 서울 신촌 거리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65년께의 일이다. 첫 만남을 통해 김현은 ‘춤’을 사랑하고 ‘형이상학적 초월’을 꿈꾸는 ‘에피큐리언’쯤으로 정현종을 이해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게 이해한 것이다. 김현이 정현종에게서 본 것은 “미식취(美食趣), 멋냄, 연애 취미, 재치있는 담화”였고, 이런 대목은 그의 이해를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김현은 머지않아 젊은 시인의 가볍고 날렵해 보이는 쾌락주의 밑에 깔려 있는 ‘고통의 축제’를 보고 자신이 이해한 바를 수정한다. 젊은 시인이 지닌 의식의 맨 밑바닥에 깔려 있던 것은 다름아니라 ‘죽음’이었고, ‘바람’에 대한 시인의 탐닉은 그것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의식의 반작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진다. 시인은 ‘고통의 축제’를 주관하는 꿈의 사제다. 고통의 현실을 뛰어넘어 초월의 가능성을 모색해온 시인 정현종 정현종은 1939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관청 병참계 판임관이라는 공직에 있었다. 그는 천주교를 믿는 부모들에 의해 갓난아기 때 부근의 약현성당에서 영세를 받는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뀜에 따라 그가 세 살 나던 해에 그의 가족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화전으로 이사한다. 그는 1946년 덕은국민학교에 입학하고, 5학년 때 6·25를 겪는다. 그는 전란 때 모래밭에서 죽은 사람의 뼈를 치켜 들거나 막대기에 해골을 꿰어 든 채 마을 아이들과 함께 벌거벗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놀던 기억을 갖고 있다. 1953년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한 대광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화전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책읽기에 깊이 빠져드는데, 김내성의 『마인(魔人)』이나 방인근의 『벌레 먹은 장미』 같은 대중 소설부터 학생 잡지 『학원』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읽어 치운다. 왕성한 책읽기를 통해 그는 답답하게 닫혀 있는 듯한 현실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몽상의 천국’을 맛본다. 그는 사춘기에 그 나이 때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육체의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종교적 계율 사이에서 강박 관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런 강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즈음 그는 서양 고전 무용을 소재로 한 「로얄 발레」라는 영화를 중앙극장에서 관람한 뒤 전율과 함께 육체의 정화를 체험한다. 그는 영화 속의 춤을 통해 “비로소 육체의 아름다움에 눈떴고 육체의 빛”을 보며 “육체에 대한 경멸로부터 일시에 벗어”나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칙칙한 성적 억압을 떨쳐낸다. 그것은 ‘육체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김현은 그것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그때 그는 기이한 체험을 한다. 고등학교 때면 막 성에 눈뜰 때이고, 수음(手淫)을 배워 육체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될 때이다. 그 영화 속에서 그는 거의 전라에 가깝도록 엷은 옷을 걸친 여성이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거의 성욕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육체의 아름다움과 동작의 율동감이 그에게 부여해주는 쾌감만을 느낀다. 지나가는 여자만 봐도 성욕을 느낄 사춘기의 한 소년은 그 무희들의 춤을 보면서, 성욕을 느끼는 대신 그 율동의 아름다움에 너무나 감격을 한 나머지 눈물을 흘린다. 거의 벌거벗은 듯한 여자의 육체를 보고 눈물을 터뜨린 그는 그때 육체에 대한 혐오감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살의 아름다움을 실감한다. 김현, 「정현종을 찾아서」, 『김현 문학 전집 3권』(문학과지성사, 1991) 발레와 만나며 욕망과 금기 사이에서 싹튼 강박 관념을 털어버린 그는 고등 학교에 올라가서는 『사상계』를 애독하고 함석헌의 글들을 읽으며 감동하기도 한다. 1959년 진로 선택에 따르는 고뇌 없이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간다. 이듬해인 1960년 6월 그는 1년 6개월 동안 복무하는 학보병으로 자원 입대한다. 근무지는 경기도 양평이었는데, 그는 행정병 비슷한 보직을 맡아 비교적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한다. 1962년 군에서 제대한 뒤 복학한 그는 『연세춘추』의 기자들과 어울리며 학교 신문에 시와 산문을 발표하고, 실존주의 사상가들과 보들레르 ·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책을 읽으며 지낸다. 『연세춘추』에 실린 시들이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있던 박두진의 눈에 띄어, 정현종은 대학 4학년 때인 1964년 5월에 『현대문학』의 1회 추천을 받는다. 이 때 추천받은 작품이 「화음(和音)」과 「주검에게」다. 우아한 곡선을 그으며 하늘로 솟구치는 춤의 아름다운 동작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초기 시에는 시인이 청소년기에 몰입한 고전 발레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이것은 순수한 초월을 꿈꾸는 그의 시 공간에 펼쳐지는 비상의 세계에 대한 깊은 열망을 암시한다. 그대 불붙는 눈썹 속에서 일광(日光) / 은 저의 머나먼 항해(航海)를 접고 / 화염(火焰)은 타올라 용약(踊躍)의 발끝은 당당히 / 내려오는 별빛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달려간다. / 그대 발바닥의 화조(火鳥)들은 끽끽거리며 / 수풀의 침상(寢床)에 상심(傷心)하는 제. // 나는 그동안 뜨락에 가안(家雁)을 키웠으니 / 그 울음이 내 아침의 꿈을 적시고 / 뒤뚱거리며 가브리엘에게 갈 적에 / 시간(時間)은 문득 곤두서 단면(斷面)을 보이며 / 물소리처럼 시원한 내 뼈들의 풍산(風散)을 보았다. // 그 뒤에 댕기는 음식(飮食)과 어둠은 / 왼 바다의 고기떼처럼 살 속에서 놀아 / 아픔으로 환히 밝기도 하며 / 오감(五感)의 현금(弦琴)들은 타오르고 떨리어 / 아픈 혼(魂)만큼이나 싸움을 익혀 가느니. // 그대의 숨긴 극치(極致)의 웃음 속에 / 지금 다시 좋은 일이 더 있을리야 / 그대의 질주(疾走)에 대해 궁금하고 궁금한 그 외에는 / 그대가 끊임없이 마루짱에서 새들을 꺼내듯이 / 살이 뿜고 있는 빛의 갑옷의 / 그대의 서늘한 승전(勝戰) 속으로 / 망명(亡命)하고 싶은 그 외에는. 위의 시는 『현대문학』 추천 작품 가운데 하나인 「화음」이다. 정현종은 이렇게 처음부터 한국 시의 주류로 대접받던 서정주 · 박재삼의 토속적 미학의 세계나 허무주의, 그리고 1960년대에 한국 시의 큰 흐름을 이룬 채 사물의 외관을 통해 내면 탐구의 이미지를 추구하던 시인들과 다른 제 나름의 길을 개척한다. “연애와 무모(無謀), 알코올과 피의 속도, 어리석음과 시간”에 취해 고통스런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탐색하던 시인은 유추에 의해 서로 암시하고 환기하는 이미지를 중첩시키며 서구적 조사법(措辭法)으로 그것을 독특하게 끌어낸다. 그를 시단에 소개한 박두진은 이런 것을 “특이한 지적 예리성”으로 받아들인다. 정군의 시는 느닷없이 대상의 본질에 육박하여 그 내적인 존재의 질서와 의미를 새로이 발견, 해석해내는 특이한 지적 예리성을 가지고 있다. 시 전체를 감싸는 현대적인 신비성과 황홀하게 축제화된 미적 감동의 세련된 형상화 작업은 이 작가가 이미 지(知), 감(感) 양성의 훌륭한 통솔과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유력한 증표가 아닐 수 없다. 시 형태에 보이는 약간의 무리와 이미지의 언어적 연결상의 다소의 지나친 비약성은 그 내적인 생명력의 팽창과 긴장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유의되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박두진, 「추천 소감」, 『현대문학』(1964. 5.) 1965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신태양사’에 정식으로 들어간다. 정현종은 같은 해 『현대문학』 3월호에 「독무(獨舞)」라는 시로 완료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그는 「독무」에서 “지금은 율동(律動)의 방법(方法)만을 생각하는 때, / 생각은 없고 움직임이 온통 / 춤의 풍미(風味)에 몰입(沒入)하는 / 영혼(靈魂)은 밝은 한 색채(色彩)이며 대공(大空)일 때!”라고 춤의 풍미에 온통 빠져든 영혼의 찬란한 상태를 노래한다. 여기서 시인은 목표가 따로 없는 순수한 도약의 몸짓을 마룻장에서 새들이 가볍게 날아오르는 이미지로 묘사하고, 발레리나의 율동에 도취된 상태를 “살이 뿜고 있는 빛의 갑옷”으로 파악한다. 시인은 「화음」과 「독무」에서 비상하는 영혼의 환희를 드러내며, 그 “서늘한 승전” 속으로 망명하고 싶은 욕망을 고백한다. 이런 욕망은 그가 발 딛고 있는 대지가 궁극적 구원의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시인의 대지에 대한 초월 의지는 춤으로 표출되고, 초월의 상태인 무도에 취해 있을 때 영혼은 환희로 가득 찬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동료 교수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정현종 1966년 정현종은 황동규 · 박이도 · 김화영 · 김주연 ·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에 참여한다. 『사계』는 5집까지 나온 뒤 『68문학』으로 바뀌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된다. 1970년 그는 신태양사에서 나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자리를 옮긴다. 드디어 1972년에 들어, 선배와 동료 문인들이 제작비를 부담해 펴낸 그의 첫 시집 『사물의 꿈』이 ‘민음사’에서 나온다. 이 시집이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며 감격이 되는 까닭은, 지금 알 수 있는 바로는 김병익, 김주연, 김치수, 김현, 이청준, 홍성원, 황동규, 황인철 등의 친구들과 그 동안 내통해 마지 않았던 고은 선배가 어느덧 돈을 모아 제작비를 부담함으로써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출판 기념회도 해주었다. 정현종, 「작가 연보」, 김병익 · 김현 편, 『우리 시대의 작가 연구 총서 ― 정현종』(은애, 1979) 『사물의 꿈』의 세계는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 즉 존재의 상승과 하강을 표상하는 ‘춤’과 ‘죽음’의 대립 구도 위에 서 있다. 그는 삶의 자리인 대지를 어둠과 죽음의 장소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대지를 초월할 방법을 꿈꾼다. 선배와 동료 문인들이 제작비를 부담해 빛을 본 첫 시집 〈사물의 꿈〉 한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보편적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이 달라진다. 한 사회의 집단 무의식과 죽음 또는 삶의 일회성에 대한 그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 이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 방식과 그들이 향유하는 삶의 패턴에 공통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그 사회가 만들어내는 문화의 기초를 이룬다. “의식의 맨 끝은 항상 / 죽음이었네.”라고 선언한 시인은 삶의 불가항력적 조건인 죽음을 삶의 한계이자 절망과 좌절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역설적으로 삶의 밝음과 환희를 더욱 극명하게 표출시키는 능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삶을 ‘고통의 축제’로 파악하고 있는 그의 인식론의 바탕을 이룬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본능으로서의 고통과 유희적 본능으로서의 축제가 결합된 삶에 대해 허무주의적 낙관론을 갖고 있다. 죽음을 긍정하면서 이룩한 이런 낙관적 세계 인식은 자연스럽게 그를 에피큐리언적인 상상력의 세계로 이끈다. 초월 또는 존재의 극치에 이르기 위한 도취의 방법으로 시인은 무도와 술과 관능적 쾌락에 몰입한다. 물방울들은 마침내 / 비껴오는 햇빛에 취해 / 공중에서 가장 좋은 색채를 / 빛나게 입고 있는가. / 낮은 데로 떨어진 운명을 잊어버리기를 / 마치 우리가 마침내 / 가장 낮은 어둔 땅으로 / 떨어질 일을 잊어버리며 있듯이 / 자기의 색채에 취해 물방울들은 / 연애와 무모(無謀)에 취해 / 알코올에, 피의 속도에 / 어리석음과 시간에 취해 물방울들은 / 떠 있는 것인가. / 악마의 열정 또는 / 천사의 열정 사이의 / 걸려 있는 다채로운 물방울들은. 「무지개 나라의 물방울」은 시인이 왜 도취에 그토록 몰입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인은 이미 「사물의 정다움」에서 “허나 구원은 또 항상 / 가장 가볍게 / 순간 가장 빠르게 왔으므로”라고 노래한 바 있다. 시인에게 구원 또는 삶의 극치는 언제나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권태로운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만큼 일상은 따분하고 권태롭고 무미 건조하다. 시인에게 ‘물방울’이란 존재의 빛나는 상태 또는 상승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미지다. 물방울은 연애, 무모함, 알코올, 피의 속도, 어리석음에 취해 있다. 시인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심연 앞에서도 태연하게 낙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도취’ 덕분이다. 물방울들은 취해 있는 순간 하강해 소멸될 제 운명을 잊은 채 존재의 정상에서 눈부신 형상으로 떠 있다. 마치 우리가 “마침내 가장 낮은 어둔 땅”으로 떨어질 비극을 잊어버리고 있듯이. 시인의 초기 시 세계에서 ‘춤’과 함께 자주 나타나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바람’이다. 바람은 “숨을 번쩍이며 끓게” 하고,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는 어떤 것이다. 숨과 불은 생명력 또는 존재의 상승을 추진하는 원동력을 상징한다. 바람은 뜻없이 되풀이하는 일상을 넘어서도록 의식을 부추기고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치열하게 타오르도록 만드는 역동적 힘의 표상이다. 이와 대립되는 것이 모래와 사막, 밤의 이미지다. 이런 것은 건조하고 척박하며 불모적인 삶의 조건을 표상하는 이미지다. 따라서 ‘바람’은 원초적 생명력, 불멸 상태, 절대 자유, 무한, 초월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시인의 역동적 의식을 보여준다. 1974년 정현종은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와 국무부가 함께 주관하는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이 때 그의 시 15편을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있던 김우창이 영역해주는데, 이 인연은 1974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고통의 축제』에 붙인 김우창의 뛰어난 해설로 이어진다. 『서울신문』에서 나와 1975년 『중앙일보』 월간부 기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77년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된다. 그는 1982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갈 때까지 이 학교에서 재직하며 예비 작가와 시인들을 길러낸다. 김우창의 뛰어난 해설이 곁들여진 두 번째 시집 〈고통의 축제〉 정현종은 『사물의 꿈』과 『고통의 축제』 이후 『나는 별아저씨』(1978)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같은 시집을 펴내며 중견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 그의 시 세계가 변화의 낌새를 보인 것은 1980년 광주항쟁의 전개 양상과 관련이 깊다. 세상의 거칢과 반생명적 폭력에 질린 그는 이 무렵부터 ‘초록 풀잎’의 생명성을 눈여겨보고, 생명 현상에 고여 있는 기쁨을 노래하는 시편들을 내놓는다. 정현종의 시집 〈나는 별아저씨〉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이런 시집을 내놓으며 그는 중견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나는 생명 현상들에 감동합니다. 모든 생명의 움직임에 감동하지 않고는 시가 나오지 않는 것이니까 옛날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았을리 없겠습니다만, 근년에 한결 더 그렇습니다. 숲에 가서 초록 나뭇잎과 풀들을 보면 어떤 때는 거의 광희(狂喜)에 가까운 기쁨으로 부풀어 오르고, 날으는 새들, 꽃들, 풀벌레들 같은 것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감탄하며 혼자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만, 사실 생명의 기쁨은 무슨 추상적인 이념이나 거창한 철학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작은 것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에 대한 감각이 날로 민감해지는 것은 세상의 거칠음과 비례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가령 초록 풀잎들에 대한 감동의 배경에는 거치른 세상, 죽음이 떠도는 세상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생명적인 문명 속에서 거의 본능적인 생명에의 편집(偏執)이겠지요. 그러니 사람이 부당하게 죽는다거나 특히 비참하게 죽는다거나 그야말로 자기 고유의 죽음을 죽지 못할 때 우리는 다 같이 참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1) 막 나가는 ‘반생명적 문명’의 속도와 광포함에 질린 시인은 부쩍 ‘자연’ 쪽으로 기울어간다. 시인의 마음은 이내,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관습과 제도가 억압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사랑 · 생명 · 자유 같은 것과 연애에 빠지며 한껏 고양된다. 자연에 든 그 마음은 다름아니라 선적(禪的) 자유의 경지에 든 마음이다. 이런 마음만이 따뜻한 달걀 하나를 손에 쥐고 「새로 낳은 달걀」에서처럼 감격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 낳은 달걀, / 따뜻한 기운, / 생명의 이 신성감(神聖感), / 우주를 손에 쥔 나는 / 거룩하구나 / 지금처럼 / 내 발걸음을 땅이 / 떠받든 때도 없거니! 시인의 우주를 품어 안는 관능적 서정성 속에 무르녹아 있는 생명의 외경감에 대한 거듭되는 새로운 각성의 시편들은 ‘죽임의 행위’에 의해 열린 1980년대의 제도와 관습을, 그 속에 깃들여 있는 독과 같은 그 모든 ‘죽임의 문화’를 외설과 추문으로 낙인찍는다. 물론 이런 것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숨어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정현종의 시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따로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아주 극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생명 시편’들을 읽으면 “살아남음의 가장 야비한 형태는 죽임의 행위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1980년대 초반 최인훈(가운데) · 김병익(왼쪽)과 함께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시인은 고통의 현실을 뛰어넘어 초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상상력의 샘이 마를 줄 몰라, 『한 꽃송이』(1992) · 『세상의 나무들』(1995) · 『갈증이며 샘물인』(1999) 같은 시집을 잇달아 내놓는다. 이런 시집에 빈번하게 나오는 것은 나무 · 꽃 · 새 · 구름 · 시골 · 기운 · 숨 · 길 · 바람 · 공기 · 하늘 · 산 등이다. 정현종의 시적 화두가 ‘죽음’에서 ‘자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한결 분명해진 것이다. 생태학적 관심이 꾸준히 부풀어올라 그는 마침내 “인간은 만물과 더불어 인간이며, 더구나 시인은 만물과 더불어 시인이다.”라고 선언하게 되며, “시인이, 생물권(生物圈) 안에서의 인간의 인간 중심주의나 인간 우월주의와 결별하는 첫 번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새긴다.2) 자연에 깃들인 뭇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날로 깊어지고, 이와 같은 자세는 시인을 생태 근본주의자로 거듭나게 만든다. 시인의 이런 관심의 범주와 세계관의 변모에 대해 김주연은 “사물신(事物神)으로부터 자연신(自然神)으로의 귀환”이라고 말한다.3) 정현종은 뛰어난 시인일 뿐 아니라 자기 이론을 확고하게 정립한 시론가이며, 빼어난 시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론가로서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1975) · 『숨과 꿈』(1982) · 『관심과 시각』(1983) · 『생명의 황홀』(1989) 같은 책을 내며, 시 번역가로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와 로르카의 시집 『강의 백일몽』 등을 옮겨 펴낸다. 『문학사상』 창간사 이들을 위하여 분노의 주먹을 쥐다가도 결국은 자기 가슴이나 치며 애통해 하는 무력자들을 위하여, 지하실처럼 어두운 병실에서 5월의 푸른 잎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위하여, 눈물 없이는 한 술의 밥숟가락을 뜨지 못하는 헐벗은 사람들을 위하여, 위선에 지치고 허위의 지식에 하품을 하고 사는 권태자를 위하여, 돈이나 권력보다 더 소중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뒷전을 쫓아가는 소시민들을 위하여, 폭력을 거부하며 불의를 향해서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을 위하여, 요한처럼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예언자들을 위하여, 쓰레기터에 살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목마르게 갈구하는 미의 순교자들을 위하여, 무기고나 식량 창고보다는 영혼의 언어가 담긴 한 줄의 시를 더 두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개를 개라 부르고 구름을 구름이라고 명백하게 부를 줄 아는 대중들을 위하여, 텅빈 공허가 깔려 있는 월급 봉투와 아내의 시장 바구니 속에서도 내일의 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민들레와 진달래와 도라지, 박꽃, 냉이꽃들이 매연 속에서 시들어 가는 것을 고향처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오늘보다는 내일을 위해 허리띠를 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날이 무거워지는 저금통처럼 자기 머리속에 지식을 축적해 가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이 다 기진 맥진하여 절망의 흙구덩 속에 무릎을 꿇을 때 뜻밖에 나타난 기병대의 그 나팔수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또한 미래의 입법자(立法者), 심야에도 눈을 뜬 불침번, 도굴자를 막는 묘지의 파수군, 소돔성의 롯과, 7백의총(七百義塚)에 묻힌 의병―이렇게 남과 다른 생을 살고자 하는 이웃들을 위하여―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 가는 이 작은 잡지를 펴낸다. 그리하여 상처진 자에게는 붕대와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폐(肺)를 앓고 있는 자에게는 신선한 초원의 바람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역사와 생을 배반하는 자들에겐 창끝 같은 도전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지루한 밤이 가고 새벽이 어떻게 오는가를 알려주는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문학사상〉 1972년에 이어령이 창간한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은 새로운 감각의 편집과 대담한 기획으로 젊은 독자들의 사랑을 크게 받는다. 이 문예지는 한때 발행 부수가 5만여 부를 넘어선 적도 있지만, 잡지에 실린 오영수의 「특질고」가 특정 지역 주민을 폄하하고 모독했다고 해서 불매 운동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이어령이 쓴 창간사는 그 특유의 화려한 수사가 두드러진다. 발행인 김봉규 / 주간 이어령 \\\\ 김정숙 여사, 정현종 시인의 낭독해 中에 전파 시 낭독하는 김정숙 영상 /출처=청와대 공식 페이스북 청와대는 페이스북 공식 계정을 통해 김정숙 여사의 시 낭독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김 여사의 시 낭독은 중국 국빈방문에 맞춰 지난 13일(2017년 12월), 중국 '웨이니두스'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소개됐습니다.  중국의 '웨이니두스'는 시를 음성과 텍스트로 소개하는 중국의 유명 시 전문 플랫폼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펑리위안 여사, 영화배우 장쯔이 등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 김정숙 여사 정현종 방문객 / 사진= 청와대 페이스북 한국과 중국의 시 문화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문에 김 여사는 "중국의 그러한 시조, 창가를 아직까지도 많은 분들이 각 도시에서 경연대회처럼 하고 즐기고 참가하는 것을 봤고, 알고 있습니다"라며 "굉장히 놀라웠고 (우리나라 시조에도) 그렇게 운율을 음과 가락으로 노래로 하는 전통창법이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어 김 여사는 "여기는 웨이니두스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부인 김정숙입니다"라며 정현종 시인의 을 낭독했습니다. 김 여사는 이 시를 택하게 된 이유를 "한국과 중국의 인연도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오랜 인연으로 함께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이 시를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나라의 관계, 아니면 두 나라 국민과의 관계가 마음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고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고 그것이 '미래를 함께 한다'라는 그런 생각에 이 시를 택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MBN 뉴스센터] (서울=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1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중국 최대 시낭송 사이트 '웨이니두스'(爲爾讀詩·너를 위해 시를 읽는다)와 함께 한국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 낭송을 녹음하고 있다. ▲ 영부인 김정숙 여사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13일부터 취임후 첫 중국 국빈방문을 시작했다. ‘영부인’ 김정숙 여사는  중국 시낭송 플랫폼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한국 시가 낭송을 선보이고 양국 국민들이 서로 진심으로 대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갈 것을 희망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의 4일간 중국 국빈방문 기간 중국 시낭송 플랫폼 "웨이니두스(爲爾讀詩·The Poem For You)"가 한국 주요 인사들이 한국 시를 낭송하는 '한국 문화 주간' 특집을 송출해 중국 청취자들에게 한국의 시를 전하게 된다. 제1회는 바로 김정숙 여사가 전하는 한국 당대 유명 시인 정현종의 시 '방문객'이다.   이 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김정숙 여사는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예전이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지속될 것이며 또한 양국의 관계와 두 나라 국민들 간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고 말했다.   ▲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정숙 여사에 이어 시인 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도종환, 여러번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한국의 유명 시인 고은 선생, 그리고 중국 바둑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창호 바둑 9단 기사도 시를 낭송해 중국 청취자들에게 한국 시가의 정취를 전하게 된다   이번 '한국 문화 주간' 특집은 웨이니두스와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주중한국문화원이 공동 기획 추진했다. "웨이니두스" 공동 창시인 장현(張炫)총재는 한국은 우수한 대중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번 한국 문화 주간은 시 낭송을 통한 문화와 마음의 교류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는 한국 주요 인사들이 중국 청취자들에게 시를 낭송하는 것은 한국 각계가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방문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기대는 바로 중한 양국이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양국 민중들의 우호적인 감정을 더 깊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119    100세 할머니 일본 시인 - 시바타 도요 댓글:  조회:4453  추천:0  2017-12-12
  시바타 도요(일본 1911-2013)  * 92세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하여 98세인 2010년 첫 시집 『약해지지마』(じけないで)를 발간                                               할머니는 2013년 향년 102세 노환으로 별세. くじけないで   ねえ 不幸だなんて 溜息をつかないで   陽射しやそよ風は えこひいきしない 夢は   平等に見られるのよ 私 辛いことが あったけれど   生きていてよかった あなたもくじけずに     약해지지마!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마.   일본을 놀라게한 너무 아름답고 순수한 시  100세 시인 시바타 도요 할머니의  글들을 선사합니다!.   ♤약해지지 마♤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 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 저 금 ♤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마음에 저금을 해둬 쓸쓸할 때면 그걸 꺼내 기운을 차리지 너도 지금부터 모아두렴 연금보다 좋단다   ♤ 살아갈 힘 ♤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 하루하루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친구에게 걸려온 안부전화 집까지 찾아와 주는 사람  제각각 모두 나에게 살아갈 힘을 선물하네   ♤ 말 ♤  무심코 한 말이 얼마나 상처 입히는지 나중에 깨달을 때가 있어 그럴 때 나는 서둘러 그 이의 마음속으로 찾아가 미안합니다 말하면서 지우개와 연필로 말을 고치지   ♤ 하 늘 ♤ 외로워지면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족 같은 구름 지도 같은 구름 술래잡기에 한창인  구름도 있다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해질녘 붉게  물든 구름 깊은 밤 하늘  가득한 별 너도 하늘을 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 나 ♤ 침대 머리맡에 항상 놓아두는 것 작은 라디오, 약봉지 시를 쓰기 위한 노트와 연필 벽에는 달력 날짜 아래 찾아와 주는 도우미의 이름과 시간 빨간 동그라미는  아들 내외가  오는 날입니다 혼자 산 지 열 여덟 해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 비 밀 ♤ 나,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의 격려를  받아 지금은 우는 소리 하지 않아 아흔 여덟에도 사랑은 하는 거야 꿈도 많아 구름도 타보고  싶은 걸   ♤바람과 햇살과 나♤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따라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했네 그만 고집부리고 편히 가자는 말에 다 같이 웃었던 오후   ♤ 화 장 ♤ 아들이 초등학생 때 너희 엄마 참 예쁘시다 친구가 말했다고 기쁜 듯 얘기했던 적이 있어 그 후로 정성껏 아흔 일곱 지금도 화장을 하지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 어머니 ♤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아흔 둘 나이가 되어도 어머니가 그리워 노인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찾아  뵐 때마다 돌아오던 길의  괴롭던 마음 오래오래 딸을 배웅 하던 어머니 구름이 몰려오던  하늘 바람에 흔들리던  코스모스 지금도 또렷한 기억   ♤ 나에게 ♤ 뚝뚝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네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 끙끙 앓고만 있으면 안 돼 과감하게 수도꼭지를 비틀어 단숨에 눈물을 흘려 버리는 거야  자, 새 컵으로 커피를 마시자   ♤ 잊는다는 것 ♤ 나이를 먹을 때마다 여러 가지 것들을 잊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사람 이름 여러 단어 수많은 추억 그걸 외롭다고 여기지 않게 된 건 왜일까 잊어 가는 것의 행복 잊어 가는 것에 대한 포기 매미 소리가 들려오네   ♤ 너에게 ♤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어 있으면  안 돼 나도 96년 동안 못했던 일이 산더미야 부모님께 효도하기 아이들 교육 수많은 배움  하지만 노력은 했어 있는 힘껏 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자 일어나서 뭔가를 붙잡는 거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아침은 올 거야♤ 혼자 살겠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강한 여성이 되었어 참 많은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지 그리고  순수하게 기대는 것도  용기라는 걸 깨달았어 “난 불행해.......” 한숨을 쉬고 있는  당신 에게도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틀림없이 아침 해가 비출 거야   시바타 도요는 올해 100세 할머니이다  도요가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엔을 털어  첫시집 '약해 지지마'를 출판 100만부가 돌파되어  지금 일본열도를 감동시키고 있다  1911년 도치기시에서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도요는 열 살 무렵 가세가 기울어져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후 전통 료칸과 요리점 등 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 결혼과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33세에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와 다시 결혼해 외아들을 낳았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 가며 정직하게 살아왔다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는 우쓰노미야 시내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 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말한다.   그 손으로 써낸  평범한 이야기가 지금  초 고령사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일본인들을  위로하고 있다  이제 그녀의 위로가  현해탄을 건너와  한국사람들에게  그리고 미국에도 전해져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들어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 했네 배운 것도 없이  늘 가난했던 일생 결혼에 한번 실패 했고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한 후 2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던 노파 하지만 그 질곡 같은  인생을 헤쳐 살아오면서  100년을 살아온 그녀가 잔잔하게 들려주는 얘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먹고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는다   인생이란 늘 지금부터야 그리고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그러니 약해지지 마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시바타 도요 (しばたとよ, Shibata Toyo) 시인 1911년 6월 26일 ~ 2013년 1월 20일   [옮겨온 글]       시바타도요 < 말 >  무심코한 말이 얼마나상처 입히는지나중에깨달을 때가 있어 그럴 때나는 서둘러그 이의마음속으로 찾아가미안합니다말하면서지우개와연필로말을 고치지   난 말이지, 사람들이친절을 베풀면마음에 저금을 해둬 쓸쓸할 때면그걸 꺼내기운을 차리지 너도 지금부터모아두렴연금보다좋단다     외로워지면하늘을 올려다본다가족 같은 구름지도 같은 구름술래잡기에한창인 구름도 있다모두 어디로흘러가는 걸까 해질녘 붉게 물든 구름깊은 밤 하늘 가득한 별 너도하늘을 보는 여유를가질 수 있기를     침대 머리맡에항상 놓아두는 것작은 라디오, 약봉지시를 쓰기 위한노트와 연필벽에는 달력날짜 아래찾아와 주는도우미의이름과 시간빨간 동그라미는 아들 내외가 오는 날입니다혼자 산 지 열 여덟 해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나, 죽고 싶다고생각한 적이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많은 이들의 격려를 받아지금은우는 소리 하지 않아 아흔 여덟에도사랑은 하는 거야꿈도 많아구름도 타보고 싶은 걸   있잖아, 불행하다고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한 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많았지만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하루하루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친구에게 걸려온 안부전화집까지 찾아와 주는 사람 제각각 모두나에게 살아갈 힘을선물하네   바람이유리문을 두드려문을 열어 주었지 그랬더니햇살까지 따라와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나는 대답했네 그만 고집부리고편히 가자는 말에 다 같이 웃었던오후     아들이 초등학생 때너희 엄마참 예쁘시다친구가 말했다고기쁜 듯얘기했던 적이 있어 그 후로 정성껏아흔 일곱 지금도화장을 하지 누군가에게칭찬받고 싶어서 돌아가신 어머니처럼아흔 둘 나이가 되어도어머니가 그리워 노인 요양원으로어머니를 찾아 뵐 때마다돌아오던 길의 괴롭던 마음 오래오래 딸을 배웅하던어머니 구름이 몰려오던 하늘바람에 흔들리던 코스모스 지금도 또렷한기억   뚝뚝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멈추질 않네 아무리 괴롭고슬픈 일이 있어도언제까지끙끙 앓고만 있으면안 돼 과감하게수도꼭지를 비틀어단숨에 눈물을흘려 버리는 거야 자, 새 컵으로커피를 마시자 나이를 먹을 때마다여러 가지 것들을잊어 가는 것 같은기분이 들어 사람 이름여러 단어수많은 추억 그걸 외롭다고여기지 않게 된 건왜일까 잊어 가는 것의 행복잊어 가는 것에 대한포기 매미 소리가들려오네   혼자 살겠다고결정했을 때부터강한 여성이 되었어 참 많은 사람들이손을 내밀어 주었지 그리고 순수하게 기대는 것도용기라는 걸 깨달았어 “난 불행해.......”한숨을 쉬고 있는 당신에게도아침은 반드시찾아와 틀림없이 아침 해가비출 거야  못한다고 해서주눅 들어 있으면 안 돼 나도 96년 동안못했던 일이산더미야 부모님께 효도하기아이들 교육수많은 배움  하지만 노력은 했어있는 힘껏 있지, 그게중요한 게 아닐까   자 일어나서뭔가를 붙잡는 거야 후회를남기지 않기 위해   시바타 도요는 올해 100세 할머니이다.도요가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엔을 털어 첫시집 '약해 지지마'를 출판 100만부가 돌파되어 지금 일본열도를 감동 시키고 있다. 1911년 도치기시에서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도요는 열 살 무렵 가세가  기울어져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후 전통 료칸과 요리점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 결혼과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33세에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와 다시 결혼해 외아들을 낳았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정직하게 살아왔다.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는 우쓰노미야 시내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 하고 있다.그런 그녀가 말한다.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지그랬더니 햇살까지 들어와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바람과 햇살이 묻기에인간은 어차피 다 혼자야.나는 대답 했네. 배운 것도 없이 늘 가난했던 일생.결혼에 한번 실패 했고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한 후 2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던 노파.하지만 그 질곡 같은 인생을 헤쳐 살아오면서 100년을 살아온 그녀가 잔잔하게 들려주는 얘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먹고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는다. 그 손으로 써낸 평범한 이야기가 지금 초 고령사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일본인들을 위로하고 있다.이제 그녀의 위로가 현해탄을 건너와 한국사람들에게 그리고 미국에도 전해져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인생이란 늘 지금부터야.그리고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그러니 약해지지 마 ... 난 괴로운 일도있었지만살아 있어서 좋았어.   
2118    어학교사, 번역가, 유대계 시인 - 파울 첼란 댓글:  조회:5407  추천:0  2017-11-19
파울 첼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파울 첼란(Paul Celan, 1920년~1970년)은 루마니아 출생의 독일어 시인이다.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하고 소련군 점령 후에는 빈으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최초의 시집을 발표하였다(1947). 1948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러시아어(語) 어학교사 겸 번역가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시는 시선(視線)이 포착(捕捉)한 사물을 금욕적이라 할 만큼 응축된 시어에 정착케 하는 투명함과 순수함을 갖는 것으로 독일 현대시 가운데 이채를 발하는 존재이다. 주저(主著)로는 시집 (1952), (1955), (1959) 등이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 프랑스 시인 에드몽 자베스와 더불어 가장 돋보인 유대계 시인으로 손꼽힌다.   출생 1920. 11. 23, 루마니아 체르너우치 사망 1970. 5. 1, 프랑스 파리 국적 독일 요약 루마니아 태생 독일의 시인. 본명은 Paul Antschel.   독일에 거주한 적은 없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문학의 매우 강력한 혁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문체상으로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대인으로서의 비통함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가 실질적으로 나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첼란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의 부모는 살해되었다. 1945~47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 및 교정 일을 했고, 이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납골함의 모래 Der Sand aus den Urnen〉(1948)를 발표했다. 그의 시는 초기부터 현실의 공포와 상해에 대한 주마등 같은 지각방식, 확실한 심상과 작시법이 그 특징이었다. 1948년 전쟁 전 잠시 의학공부를 했던 파리에 정착하여 사범학교에서 어학을 강의하는 한편 셰익스피어와 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2번째 시집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1952)으로 독일에서 명성을 굳혔고, 1958년 브레멘 시(市) 문학상을, 1960년 모더니즘의 원조인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그후 〈빛의 강박 Lichtzwang〉(1970)을 비롯하여 7권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가장 충실한 영역본은 〈Speech-Grille and Selected Poems〉(1971)이다. ========================== 애굽에서                         파울 첼란     이방 여인의 눈에다 이렇게 말하라. 물이 있으라! 이방 여인의 눈 속에 네가 아는 물속의 여인들을 찾으라. 룻! 노에미! 미르얌! 그녀들을 물 밖으로 불러내라. 네가 이방 여인 곁에 누울 때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의 구름머리카락으로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룻, 미르얌, 노에미에게 이렇게 말하라. 보라, 내가 이방 여인과 동침하노라! 네 곁의 이방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 주라. 룻, 미르암, 노에미로 인한 고통으로 그녀를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에게 말하라. 보라, 내가 그녀들과 동침했노라고!   * 동침: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아홉 문장이 모두 마치 십계명처럼 나란히 '-하라'로 시작하고 있다. 룻, 미르암, 노에미는 유대 여인의 전형적인 이름들이다.  '동침'이라는 가장 밀착된 인관관계에 동족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이방 여인: 첼란은 1948년 '정월 스무날' 빈에서 잉에보르크 바하만을 만났다.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했는데,  최근 연구와 시간집 출간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밝혀졌다.  첼란의 시 , 와 바하만의 소설 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전영애   코로나   가을이 내 손에서 이파리를 받아먹는다. 가을과 나는 친구. 우리는 시간을 호두에서 까 내어 걸음마를 가르친다. 시간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거울 속은 일요일이고, 꿈속에서는 잠을 자고, 입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내 눈은 연인의 음부로 내려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어두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 양귀비와 기억처럼 사랑한다. 우리는 잠을 잔다, 조개에 담긴 포도주처럼, 달의 핏빛 빛줄기에 잠긴 바다처럼.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창가에 서 있고, 사람들은 길에서 우리를 본다.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돌이 꽃피어 줄 때, 그침 없는 불안으로 가슴이 뛸 때가. 때가 되었다, 때가 될 때가.   때가 되었다.   *코로나: 태양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 그 주위로 먼저 나오는 빛의 환(環). 한순간 태양 빛이 꺼지듯 시간의 어두운 원점에 선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연가이다.   무적(霧笛) 속으로     감춰진 거울 속의 입, 자부심의 기둥 앞에 꿇은 무릎, 창살을 거머쥔 손이여.   너희에게 어둠이 다다르거든, 내 이름을 불러라, 나를 내 이름 앞으로 끌어가라.     화인(火印)      더는 잠들지 못했다. 우울의 시계 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 우리,  시계바늘은 채찍처럼 휘었고,  도로 다시 튕겨져 피 맺히도록 시간을 후려쳤고,  너는 짙어 가는 어스름을 이야기했고,  열 두번 나는 네말의 밤에 대고 너를 불렀고,  하여 밤이 열렸고, 그대로 열린 채로 있었고,  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또 하나는 네 머리카락에 넣어 땋아 주었고,  두 눈을 도화선으로, 열린 정맥으로 읽었고-  갓 번뜩인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고.     누군가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는 이, 장미를 향 해 손을 뻗는다.  그 잎과 가시는 그의 것이니,  장미는 그의 접시에 빛을 놓고,  그의 유리잔을 숨결로 채우니,  그에게서는 사랑의 그림자가 술렁인다.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며 울리는 이,  그는 헛맞추지 않고,  돌을 돌로 치며,  그의 시계에서는 피가 울리고,  그의 시계에서는 그의 시각이 시간을 친다.  그이, 보다 아름다운 공을 가지고 놀아도 좋다.  너에 대해, 나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다.       출처 :시강(詩江) 원문보기▶   글쓴이 : 심우기 =========================     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 ㅡ파울 첼란.     망각의 집은 곰팡이 슨 초록빛.   나부끼는 문마다 너의 머리 없는 악사가 푸르러진다.   그는 너를 위해 이끼와 쓰라린 치모恥毛로 만든 북을 울려 주고   곪은 발가락으로 모래에다 너의 눈썹을 그린다.   그것이 달려 있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린다. 또 네 입술의 붉음도.   너는 여기서 유골 항아리를 채우고 네 심장을 먹는다.   /파울 첼란시집 ‘죽음의 푸가’ / 민음사       ♣ 아무리 읽어도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시를 먹는다. 아프다는 것으로는, 인간의 통점으로는 느낄 수 없는 저 너머를 읽는다. 디디 위베르만이 아우슈비츠를 다룬 영화 ‘사울의 아들’을 왜 괴물이라 했는지 끔찍하게 느끼는 새벽이다. 우리는 분단이 되어있고 지구 최후의 휴전 중인 나라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쟁까지 겪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학살당하고 이 아픔을 깨트리려 몸부림치고 고문당하고 죽어갔는가. 시인은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누구인가 나이고 또 우리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저 광화문의 촛불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왜 시인은 센 강에 몸을 던져야했을까 나도 먹어야 한다. 죽어간 수백만의 동족들을 그 심장을, 그런 시를 써야하는데 왜 못 쓰는가 부끄러운 새벽이다. /조길성 시인 ■     ==================== (시집 감상평) 세상이 따뜻해지리 파울 첼란‘죽음의 푸가’를 읽고   윤선미        빗살문학아카데미 상반기 주제는 5.18정신에 대해 깊이 있게 책을 읽고 글쓰기이다. 그중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파울 첼란의‘죽음의 푸가'시선집도 있었다.파울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첼란의 부모는 수용소에서 죽었고, 첼란 자신은  처형 직전 우연히 가스실행을 피하였다. 1970년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시 문학상을,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읽어도 읽어도 난독증이 있는 것처럼 난해하다. 그나마 내 감성을 자극한 시 몇 편을 감상해 본다.    “이건 시간의 눈/일곱 빛깔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시간의 눈」 전문    *시가 마치 꽃의 전설처럼 슬프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시간의 눈은 억압과 암울한 시간을‘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세상이 따뜻하다'라고 말하고 있으며‘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그 시간의 먹먹함이 극에 달해 속울음을 울게 만든다.    “꽃을 뿌리라, 낯선 이여, 마음 놓고 뿌리라./그대 저 아래 깊은 곳에 /정원들에 꽃을 건넨다.//여기 누웠어야 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누워 있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의 곁에 누워 있다./세계, 그것이 갖가지 꽃들 앞에서/눈을 떴다.//그러나 그는 붙들었다. 많은 것을 보았기에,/ 눈먼 사람들과 함께,/그는 갔다, 그리고 너무 많이 꺾었다./향기를 꺾었다-/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이제 그는 갔다, 낯선 물 한 방울을 마셨다,/바다를,/물고기들-/물고기들이 그 몸에 와 부딪힐까?” -「가묘」-전문   " 바람의 장례는 엄숙했다/평생 바다 내음 맡으며 살아간/ 죽기 직전 눈물 한 방울 남기고 간 그녀/삼베적삼 고이 입혀 돌을 비잉 둘러줬다/ 얽매이지 말라고/바다 바람이 무덤이다/바다가 웅웅 울었다/바람이 휭휭 떨었다/까마귀 바람 타고 찔레 곁 맴돈다/땅을 파서 묻어주고 싶었다/돌멩이 하나 더 둘러주고/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까옥깍 소리에 잠을 자지 못했다/몇 년 후/ 뼈마디만 나뒹굴었다/한창 찔레꽃 향기 쫓게하고/사랑, 세월 지나 바람에 삭아" -졸시「풍장」 전문    *‘가묘'를 읽는 동안 내가 쓴‘풍장'이 자꾸 떠올랐다. 가묘는 1연에서 보듯 꽃으로 묘를 장식하고, 풍장에서는 섬의 장례가 돌을 비잉 돌려주고 바람에 맡긴다. 죽음의 세계가 펼쳐진 슬프고도 참혹한 시다.'세계가 눈을 뜨고 향기를 꺾어버린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그는 누구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하는 시다.    “저 많은 성좌들, 우리 앞에/ 내밀어져 있는. 나는,/언제였던가? 너를 보았을 때/저 바깥/ 또 다른 세계들 곁에 있었다.//은하계의, 오, 이 길들./우리들에게로/우리들 이름의 짐 안으로/밤들을 흔들어 보내오는/이 시각,/나 이제 알겠네, 우리가 살았다는 건/틀린 말,/숨결 하나가 '저기' 와 '거기 없음' 과 '이따금씩' 사이를/눈먼 채 지나갔을 뿐./혜성처럼 눈 하나가/불 꺼져 버린 것을 향하여 휘익 날았을 뿐, 골짜기들 속에서,/거기, 그 작열이 스러진 곳/유두(乳頭)처럼 화사하게 시간이 멈추어 있다./거기서 이미 위로, 아래로/그 너머로 자랐다./있는 것, 있었던 것, 있을 것이-/나 알겠네./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우리가 알았네,/알지 못했네, 우리는/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그리고 이따금씩/오직 무(無)가 우리 사이에 서 있을 때라야/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였지.”-‘저 많은 성좌들’전문    *마지막 두 행이 맘에 들어 이 시를 골랐다.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을 때 온전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하였다.'알고 알지 못함이 무엇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숨결 하나가 눈먼 채 지나갔을 뿐 알지 못했네 우리는 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      “당신의/ 저 건너에 있음, 오늘 밤 /말[言]로써 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 여기 당신이 있다/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우리 창(窓) 앞을/콩 넝쿨이 기어 오른다, 생각하라/누가 우리 곁에서 자라며/그것을 바라보는가를.//신(神)은, 우리는 그리 읽었다,/하나의 조각이며 또 하나의, 흩어진 조각이라고./모든 베어진 이들의/죽음 가운데서/ 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그곳으로/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그/반쪽과/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당신의 저 건너에 있음 ’전문    * '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 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세월호의 진실이 생각나는 시다. 하루 빨리 진실이 밝혀지기를 소원한다.‘신이 죽음 가운데서 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한 것처럼 세월호 희생자 모두 좋은 곳으로 가서 잘 지내길 바란다.'그곳으로 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 반쪽과 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 남은 유가족들도 힘을 내 '한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 생각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밝혀지는 그 날까지 모두 건강하길 바래본다. 파울 첼란 시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가슴을 울리는 시임에 분명하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수 없다'라고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했다. 하지만 파울 첼란은 인간의 역사속 극한에 이른 서사를 상징적,초현실적 언어로 서정시를 쓰는데 성공했다.‘음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라고 말한 첼란은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시대를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가장 진실을 말하는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 지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더 공부를 해야겠다. 파울 첼란 시선집을 읽는 동안 어려웠지만 부족한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촛불집회 때처럼 국민들의 참여와 힘으로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혔으면 한다.‘세상이 따뜻해지리/죽은 이들이/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덤으로 더...   파울 첼란에 대하여 / 전영애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1945년 이후 독일의 시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구절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치 시대를 지난 독일 지식인들의 참담한 자의식이 밴 이 말은 이제 쉽사리 글을, 더구나 소박하거나 감상적인 미문을 쓸 수 없게 된 문학의 상황을 집약한다. 예리한 진단인 동시에 깨어 있는 의식을 촉발하는 도화선 같은 말마디였고, 실제로 문인들에게는 변명이자 합리화의 수단이 되었지만, 또한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수정 또한 유명하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첼란의 시를 두고 해석학자 스촌디가 한 말이다. 첼란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말해도 되겠지요. 한 편 한 편의 시에는 그것이 '정월 스무날'이 적혀 있다고. 어쩌면 오늘날 쓰이는 시들에서 새로운 점은 바로 이것 아닐까요. 여기서 가장 뚜렷하게, 그런 날짜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기억하려 한다는 것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그런 날짜로부터 쓰고 있지 않습니까?                             -뷔히너 상 수상 연설 중에서      '정월 스무날'이란 뷔히너의 작품 의 첫 구절인데, 이 작품은 주인공 렌츠의 정신병 발병 기록이다. 뷔히너 상 수상 연설이므로 표면적으로 뷔히너와 연관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첼란이 말하는 '정월 스무날'은 소위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의 날(1942. 1. 13.)'이다.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기로 한 결정이 최종적으로 내려졌던 날이다. 첼란이 남긴 시들에는 모두 이 화인(火印)이 찍혀 있다. 그의 문학 자체가 이 쓰라림의 '기억'이다.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회한이 배어 있다. 그러나 자료는 아니다. 역사는 단어 하나하나에 배어 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깊고 오랜 내면화(Erinnerung)의 침전을 거친 기억(Erinerung), 정화(淨化)된 고통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학이다.  1945년 이후 활동한 독일 시인들 중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첼란은 모국어가 독일어일 뿐, 한 번도 독일에서 산 적이 없다. 그가 독일을 처음 지나쳐 본 것은 바로 모든 유대교 사원과 가게 들이 일시에 파괴당한 유대인 습격의 밤, 소위 수정의 밤(1938. 11. 9.)'이 지난 아침이었으며, 후년에 낭독회 때문에 몇 차례 잠깐 다녀갔을 뿐이다. 첼란의 고향은 체르노비츠가 있는 부코비나('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 지방은 현재 루마니아 북부 소련 접경 지역으로,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변방이었던 이곳에서는 독일어가 쓰였다.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특히 신비적인 유대 사상 하시딤의 전통이 깃든 이 유서 깊은 동구 지역은 첼란의 청년기에 근세사의 격동에 혹독하게 휘말린 곳이다.(1940년 나치의 프랑스 진군과 발맞춘 소련의 부코비나 침공, 1941년 독일 루마니아 연합군의 재점령, 나치 친위대의 진군, 소련군 협력자 살해, 유대인 소탕, 1944년 소련군의 재진군, 독일 및 루마니아 협력자 소탕 등등의 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북부 부코비나에서만도 유대인 10만 명 중 8분의 7이 죽었다.) 첼란의 부모는 수용소에서 죽었고 첼란 자신은 그저 우연히 가스실행을 모면하였다. 첼란은 복잡한 배경으로 인해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독일어는 모국어였고 히브리어는 집에서 배웠으며 루마니아어는 열 살부터 다닌 김나지움에서 배웠다.  프랑스 투르 대학의 의예과를 다닐 때는 프랑스인으로 오해받을 만큼 프랑스어를 잘했고, 소련군이 고향을 침공하여 배울 수 밖에 없었던 러시아어는 를 원서로 읽을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의학 공부를 중단한 첼란은 고향에서 잠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시절에는 물분학을, 나중에 부쿠레슈티에서는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심취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48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번역으로 생계를 이었는데 발레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미쇼, 웅가레트, 만델슈탐, 예프투센코 등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툭히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번역은 명역으로 유명하다. 1958년부터는 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우울증에 시달리다 1970년 센 강에 투신하였다.  대체로 장르 구분 없이 여러 종류의 글을 쓰는 독일의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첼란은 거의 시집만 남겼다. 산문으로는 수상 연설문 두 편, 짧은 산문 한 편만 알려져 있다. (1952), (1955년) (1959) )(1963), (1967), (1968) (1970) (500부 한정으로 냈다가 오자가 많아 시인이 회수한 초기 시집 (1948)에 담겼던 중요한 시들은 에 재수록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두 권의 유고 시집(눈(雪)파트>(1971), (1976)이 발간되었다.  '양귀비'로 표현되는 망각과 기억이 교차하는 첫시집 은 시집 제목처럼 은유성이 짙은 언어와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들로, 다음 시집 는 모색의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에서는 소통과 차단이 동시에 일어나는 언어처럼 굳어 벌닌 세계가 '굳어진' 목소리로 그려지고 있으며, 에서는 '그 누구도 아닌 이'라는 이름으로 여렴풋이 신(神)의 존재가 다시 찾아진다. 시들이 몹씨 짧아지는 후기 시집 에서 압축되기 시작하는 시어는 ,등에 이르면 거의 소통 불가능한 암호로 응축된다. 언어는 침묵의 경계까지 가 있다.  존재의 '경사각'에서 쓰인 글들, 그러나 실어(失語)에 다다르고 착란과 자살에 이른 치열함이 첼란의 시어에, 거기에 담긴 존재에 전례없는 깊이와 높이를 부여하고 있다.           (18세 당시 찍은 여권사진. /출처; 독어 위키)   - 당시 루마니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1920년 11월 23일 출생.   파리에서 1970년 4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   - 독일어 서정시인, 원래 이름은 Paul Antschel이었지만 훗날 루마니아어인 Ancel로 이름을 바꿨고, 여기서 철자를 바꿔 Celan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 삶 파울 첼란은 북부 루마니아의 부코비나(Bucovina)지역의 수도였던 체르니우치(독일어로는 Czernowitz : 체르노비츠)출생으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오 안첼 타이틀러(Leo Antschel Teitler)와 그의 부인 프레데리케(Frederike)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가족의 집은 체르니우치 사다고라 구역의 바실코거리에 있는 첫번째 집이었다.   첼란은 우선 독일어 학교와 헤브라이어 학교를 다녔고, 5년을 루마니아어 공립김나지움(한국으로 치면 공립고등학교)을, 그리고 1938년 6월 3일 대입자격시험(Abitur: 아비투어)을 볼 때까지 우크라이나어 공립김나지움을 다녔다. 1938년 프랑스 투르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나, 1년 후에 로망스어학(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어 등 로망스어권의 어학과 문학에 대한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1940년 북부 부코비나지역과 첼란의 고향인 체르니우치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첼란은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1941년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체르니우치를 점령했고 유대인들은 해당 지역의 게토에 수용되었다. 1942년 첼란의 부모는 게토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현 루마니아 동-남부와 몰도바지역에 걸쳐있는 지역)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에서 아버지는 발진티푸스로 사망하고 어머니는 사살되었다. 부모의 수용소행과 죽음은 첼란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살아있는 내내 부모를 고통 속에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의 시들 속에서 이런 트라우마의 흔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942년부터 43년까지 첼란은 루마니아지역 곳곳의 강제노동수용소들에 수용되었고, 몰도바지역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체르니우치는 1944년 8월 적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첼란은 1944년 12월 체르니우치로 돌아와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1945년 그는 부쿠레슈티(현 루마니아의 수도)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 했다. 이곳에서 첼란은 번역가와 대학 강사로 일했다. 1947년 그는 헝가리를 거쳐 빈으로 도피했고 1948년 파리로 이주했다. 빈에 있던 1948년에 첫번째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Der Sand aus den Urnen)를 발표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1948년 5월 빈, 첼란은 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까지 연인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을 만난다.(둘은 1957년 10월부터 1958년 5월까지 파리에서 다시 연인관계를 맺는다.) 둘의 관계는 첼란의 일기와 유고로 출판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편지는 독일현대문학박물관(Deutsches Literaturarchiv)과 오스트리아국립도서관(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에 보관되어있다. 2008년 8월 주어캄프 출판사(Suhrkamp Verlag)는 'Herzzeit'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출간했다. 파울 첼란의 시 '코로나'(Corona)와 시집 '양귀비와 기억'(Mohn und Gedächtnis)에 나오는 많은 시들은 그녀를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다.   1951년 11월 첼란은 파리에서 화가 기젤 레스트랑주(Gisèle Lestrange)를 알게 되고, 일년 후 그녀와 결혼한다. 두 사람은 때때로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대표적인 예가 1965년 시 "Atemkristall"의 부식동판화 작업). 1952년 슈튜트가르트의 도이췌 페어락스 안슈탈트(Deutsche Verlags-Anstalt) 출판사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나치로 인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죽음을 주제로 삼은 시)와 함께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출판했다. 1955년 첼란은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리고 아들 에릭(Eric)이 태어났다.(Eric은 프랑스어로 '써라!''écris!'의 철자를 바꿔쓴 이름이다. 또 그의 아내는 2년 전 유산한 적이 있다.)   1960년, 첼란은 표절의혹에 휩싸인다. 첼란과 친하게 지냈으며 첼란이 시를 번역까지도 했던 유대인 시인 이반 골(Yvan Goll)의 미망인인 클레르 골(Claire Goll)이 표절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골 사건"(Goll-Affäre)으로 잘 알려진 표절의혹은 첼란이 죽을 때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첼란은 수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그중 한번은 착란상태에서 아내를 칼로 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1967년 두 사람은 별거하기로 결정했지만, 계속해서 부부로 남았다. (파울 첼란과 기젤 레스트랑주, 출처)   그가 죽기 몇달 전인 1969년 10월, 첼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외에도 낭송회에서 부코비나 출신의 옛친구들과 예후다 아미차이(Jehuda Amichai)와 다비드 로케아(David Rokeah) 같은 이스라엘 시인들을 만났다. 첼란과 고향이 같았던 소꿉친구 일라나 시뮤엘리(Ilana Shmueli)와의 재회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시적 전통 속에서 써진 그의 당시 시들에는 수많은 성경의 암시들이 사용되었는데, 그의 예루살렘행이 애인에 대한 성적인 찬사로 그려진다. * 원문 : (Getragen von zahlreichen biblischen Anspielungen, verbindet sich in den dabei in der Tradition jüdischer Jerusalemdichtungen entstandenen Gedichten das Werben um Jerusalem mit erotischen Elogen auf seine Geliebte.) -> 뜻이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서 의역한 부분.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 시뮤엘리의 회상록 "예루살렘이 있다고 말해."(Sag, dass Jerusalem ist), 첼란의 유고시집 "시간의 뜨락"(Zeitgehöft)의 시들이 이런 만남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료들은 첼란이 유대교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까다로운 논쟁에서 증거자료로 여겨진다.   첼란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가는 밝혀진 바가 없다. 1970년 4월 20일, 첼란이 미라보 다리에서 세느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1970년 5월 1일 세느강을 따라 파리에서 10km 떨어진 꾸흐브부와에서 발견되었다. 1970년 5월 12일 그의 시신은 발드마른 주의 띠에에 있는 파리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날은 그와 친했던 넬리 작스(Nelly Sachs, 독일 출신 유대인 여성작가로, 스웨덴에서 주로 독일어로 시와 극을 썼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문학작품의 번역을 장려하기위해, 독일문학기금은 1988년부터 뛰어난 문학번역가에게 파울첼란상을 수여하고 있다.   - 첼란과 47그룹(Die Gruppe 47)   47그룹이 니엔도르프에서 1952년 5월 모임을 가질 때, 당시 유명하지 않았던 첼란은 공식적으로 첫낭송을 하게 되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밀로 도르(Milo Dor), 라인하르트 페더만(Reinhard Federmann)의 중개로 낭송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당신이 그의 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 사람 만큼의 음악성과 짜임새를 갖춘 시인은 정말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1951년 밀로 도르가 한스 베르너 리히터에게 '첼란이 꼭 참석해야한다'며 이와 같이 보낸 편지에서 그룹 창립멤버들과 확고한 사실주의자 리히터의 부정적인 태도를 알 수 있다.   발터 옌스(Walter Jens)는 1976년 하인츠 루드비히 아놀드(Heinz Ludwig Arnold)와의 인터뷰에서 첼란의 낭송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첼란이 처음 무대에 설 때,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정말 들어줄 수가 없어!' 첼란은 너무 격정적으로 읊었어요. 우린 그걸 비웃었고, 누군가는 "괴벨스처럼 읊는구만.' 하더군요.... '죽음의 푸가'는 그룹에서 완전 실패작이었죠! 신사실주의 시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정말 다른 세계였어요." 한스 바이겔(Hans Weigel)이 덧붙여 말했다. "나중에 몇몇 동료들은 비웃으면서 앞에서 읊더군요. 'Schwarze Milch der Fruehe...' 그리고 한스 베르너 리히터는 그가 유대교 회당에서 읊는 것처럼 낭송한다고 생각했어요." 첼란 자신은 아내 기젤에게 편지에서 다음처럼 언급했다.   "시를 싫어한 사람이 다수였는데, 반발하더라고."   토니 리히터(Toni Richter)는 이때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파울 첼란의 낭송이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의 낭송 기법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그룹에서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 누구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파울 첼란의 운명을 몰랐다. 또 그룹사람들은 높은 톤의 리듬으로 시를 낭송하는 유대-루마니아의 전통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 하는 스타일상의 문제도 거기선 의미가 없었다. 첼란은 랭보(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여기서는 알려지지 않았냐고, 음악적인 율동으로 느슨해진 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도이체 페어락스 안슈탈트사의 편집장은 이 낭송에서 첼란을 주목했고, 출판사는 그해 12월에 '양귀비와 기억'을 출판했다. 에른스트 슈나벨(Ernst Schnabel)은 그룹의 모임 후에 NWDR(Nordwestdeutscher Rundfunk)에서 '죽음의 푸가' 낭송을 방송하기도 했다. 훗날 수차례 초대를 받았음에도, 첼란은 47 그룹의 모임에는 더이상 참석하지 않았다.   * 파울 첼란과 마틴 하이데거의 만남, 그리고 하이데거와의 만남 후 쓰여진 시 "Todtnauberg"에 대한 부분은 영문 위키에만 있다. 파울 첼란의 애인이었던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빈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시인 첼란 - 전쟁 후 독일에서 새로운 시인으로 주목받은 바하만 - 나치 옹호로 비판받던 하이데거. 세 사람이 책과 시를 통해 어떤 생각들을 주고받았을지가 참 흥미로운 주제다. ///출처: [Sprachgitter] =========================== 파울 첼란(Paul Celan)은 누구인가? 첼란의 본명은 파울 안첼(Paul Antschel)이다. 유태인이란 이름을 숨기기 위해 첼란이라고 이름을 거꾸로 바꾼 것이다.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부코니아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체르노비츠의 유태인 부모에게서 독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대적 전통을 중시하며  엄격한 유대 정통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강한 시오니즘은 첼란에게 오히려 반감을 갖게 하고, 어린 첼란은 아버지의 높은 요구와 기대로 인해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부자간의 거리감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속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그의 고향은 한 때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양 있는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첼란은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를, 학교에서는 루마니아어를 말하며 자랐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통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코비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표준 독일어, 슈바벤 사투리어 그리고 히브리어, 이외에도 여러 언어와 사투리들을 사용하였다. 첼란은 독일어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가 유대교육을 중시한 반면, 어머니는 독일어를 더 중요시하였으며, 첼란이 정확한 표준 독일어를 쓰도록 하였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난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지만 시는 모국어로 써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아픔과 시대적 고통을 그의 모국어이며 동시에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간다. 그는  여러 언어들을 능숙히 말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적 소질이 있음에도 모국어 외의 어떤 언어로도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룻 Ruth에게 늘 말하고는 하였다. 체르노비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첼란은 프랑스의 뚜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지만 한 학기 후인 1939년 체르노비츠로 귀향하여 그곳 대학에서 로만스 어문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은 유럽에서 영, 불, 독, 소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의 반유태주의가 그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니바의 북부가 1940년 소련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일년 후 독일과 루마니아군에 점령되어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Ghetto)가 되었다. 1942년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그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코스트라는 사람이 첼란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는 1952년에 출간된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chtnis』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에서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하며,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된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과 기억이다. 이 시에서는 죽음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사용이 창살처럼 교차" 배열되어 있다.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푸가(fuge)는 라틴어 fuga에서 나온 말로 '도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한 가락으로부터 다른 가락으로 달아나듯 음이 조정되는 데서 생겨났다. 푸가의 다양성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조바꿈하거나 변조시키면서 생겨나는 대위법상의 변화이다.  
2117    [타삼지석] - "세계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발신지"... 댓글:  조회:3610  추천:0  2017-10-28
시인 윤동주 마지막 흔적 머문 곳에 日시민들이 기념비 건립 (ZOGLO) 2017년10월28일  시민단체 12년만에 결실… 교토 윤동주 사진촬영지 인근에 詩 '새로운 길' 시비에 새겨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교토(京都)의 한 시골 마을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기념비가 시인의 일본 '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교토 우지(宇治)시 지역 시민들이 중심인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 위원회'(이하 위원회)는 28일 우지천(川) 신핫코바시(新白虹橋) 기슭에서 '기억과 화해의 비'(記憶と和解の碑)를 제막했다.  일본 시민들, 교토에 윤동주 시인 기념비 제막(교토=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28일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가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의 우지 강변 인근에서 윤동주 시인에 대한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 제막식을 열고 있다. 2017.10.28 윤동주 시인의 시가 적힌 기념비는 교토부(府) 내에만 도시샤(同志社)대학과 교토조형대 등 2곳에 이미 있다. 도시샤대학은 시인이 다녔던 대학교며 교토조형대는 시인의 하숙집이 있던 자리다.  이번에 설립된 기념비는 일본의 대학 캠퍼스 밖에 세워진 윤 시인에 대한 첫 번째 기념비다. 크기(가로 120㎝·세로 175㎝·폭 80㎝) 역시 가장 크며,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직접 모금을 하고 힘들게 지자체의 협조를 얻어내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우지시는 현존하는 윤 시인의 마지막 사진이 촬영된 장소라는 점에서 시인과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도시샤 대학 재학 중이던 윤 시인은 1943년 6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송별회를 한 뒤 우지천 아마가세쓰리바시라는 다리 위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시인 윤동주가 일본 교토에서 촬영한 마지막 사진(교토=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현존하는 윤동주 시인 최후의 사진. 일본 교토(京都) 우지(宇治)시의 우지천(川) 아마가세쓰리바시에서 촬영됐다. 윤동주는 1943년 자신의 송별회 자리에서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 1달 후 체포돼 감옥에서 숨졌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일본 시민들은 28일 이 다리에서 멀지 않은 우지강변에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를 세웠다. 2017.10.28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제공=연합뉴스] 이 사진은 1995년 NHK와 KBS가 공동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제작 중 함께 사진을 찍은 친구의 소지품 속에서 발견됐다. 윤 시인은 사진 촬영 한 달 뒤인 1943년 7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송몽규)와 조선문화와 민족의식 고양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1945년 2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숨졌다. 이날 건립된 시비는 처음 건립이 추진된 이후 12년 만에 힘들게 탄생한 결실이다. 시작은 윤동주 시인과 우지시의 인연을 알게 된 시민들의 모임에서였다. 시인에 대한 관심을 나누던 이들이 2005년 시비를 만들자며 모임(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을 만들었고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시비 제작까지 마쳤지만, 이번에는 장소가 문제였다. 교토부가 우지시와 시인 사이의 연고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시비 설치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서명운동을 하고 직접 발품을 팔아 우지시와 시인의 인연을 찾는 작업을 펼치며 계속 교토부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끝내 협조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시즈가와(志津川)구로부터 설치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소식이 왔고, 결국 모임 발족 후 10년을 훌쩍 넘겨 이날 기념비를 제막하게 됐다.  일본 교토 우지의 윤동주 시인 기념비(교토=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28일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에 의해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의 우지 강변 인근에 제막된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 윤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이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2017.10.28 한반도와 일본의 화강암 2개로 만들어진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윤 시인이 1941년 모교 연희전문학교의 학우회지 '문우'에서 발표한 시 '새로운 길'이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졌다.  윤동주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나무 그루터기라는 뜻의 '주(株)라는 것에 착안해 기념비는 한글이 새겨진 한반도산과 일본어가 새겨진 일본산의 화강암이 각각 윤동주를 상징하는 나무 기둥 모양의 화강암을 떠받치는 형상을 갖췄다. 이날 제막식에는 주민, 시민 활동가, 일본과 한국 언론 등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윤 시인의 유족 중에서는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참석했고 모교 연희전문학교의 후신 연세대의 백영서 인문대학장도 자리에 함께했다. 특히 시비 건립 소식을 듣고 부모와 함께 제막식에 참석한 한국 학생들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제막식에서 안자이 이쿠로(安齋育郞) 대표(리쓰메이칸대 특명교수)는 "기념비 설립은 글로벌 규모의 평화를 생각하면서 지역에서 행동을 일으키는 방식의 시민운동이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기념비를 세계적인 평화 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윤인석 교수는 "이 지역에 '기억과 화해의 비'가 세워지도록 힘써주신 분들께 고맙고 축하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기념비가 세계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발신지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일본 교토 윤동주 시인 기념비에 새겨진 '새로운 길'(교토=연합뉴스) 28일 일본 시민들이 만든 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에 의해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의 우지 강변 인근에 제막된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 ''기억과 평화의 비'. 윤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이 한글과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2017.10.28  
2116    시창작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시를 쓰겠다는 의지이다... 댓글:  조회:3597  추천:2  2017-08-28
시점의 선택과 내용의 변화  박주택  (시인·문학평론가,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1  시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를 쓰겠다는 의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를 쓰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거나 곧잘 씀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도에 그만 두는 것을 허다하게 보아 왔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저렇게 의지가 부족해서야 혹은 시라는 것을 아무나 쓰나 하는 망연감茫然感이었다. 다행히 인간은 타고난 위대함이 있어 시라는 형식을 재빨리 눈치채는 기술을 가졌다. 해서, 몇 달 안에 사람들은 시라는 것의 형체를 나름대로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게으름과 박약薄弱을 고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시점이라는 용어는 소설적 어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창작 용어로 굳이 차용하는 이유는 시점이 화자나 거리 또는 어조 등과 유기적 맥락을 이루기 때문이며 창작에 있어서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편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 이론가에 따라서는 시점과 화자의 불가분의 관계를 들어 화자의 선택이 곧 시점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화자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인 화제話題조차 시점의 간섭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시점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시점이 비록 소설의 경우에 보다 많이 쓰이는 용어이기는 하나 이것을 시에 관입貫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설의 시점은 통상 1인칭 주인공(서술자)시점, 1인칭 관찰자(객관적)시점, 3인칭 관찰자(객관적)시점 그리고 3인칭 전지적 시점 등으로 분류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가 주관적인 고백의 성향을 띠는 것이라 전제로 한다면 대부분의 시가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의 맹점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함으로써 독자와의 거리를 멀게 하는 데 있다.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 독자는 그 내용에 대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화자와 텍스트간의 거리는 가깝지만 텍스트와 독자와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진다는 뜻이다. 어조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 해서 격앙, 분노, 참담, 절망 등의 감정이 여과되지 않은 채 드러날 수 있으며 화제 또한 화자만이 알고 있는 사소성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1인칭 관찰자 시점은 화자가 대상 혹은 세계를 관찰하는 것으로 화자와 텍스트간의 거리는 멀지만 텍스트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즉 화자의 이야기가 객관적으로만 제시되어 있어 독자가 자세히 들려다 보지 않으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시점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제어하는 통제의 원리에 의존한다. 따라서, 자아를 타자화시키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함으로써 보다 냉정하게 자신의 생각을 보여줄 수 있다. 어조에 있어서도 차분하고 침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3인칭 시점은 1인칭 시점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폭을 보편적으로 확대시킨 것이 특징이다. 이는 1인칭 시점이 안고 있는 주관성을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은 주로 관찰하고 묘사하는 보여주기showing기법에 의존하는데 이 시점의 강점은 1인칭 시점이 안고 있는 동일화의 오류에서 벗어나 사물을 그 자체로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이에 따라 화제는 우리들 눈앞에 전경화前景化되어 보이고 어조 또한 침착함을 유지한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은 말 그대로 화자가 전지 전능한 관점에서 텍스트에 관여하는 것으로 내부 심리나 내용을 깊이 있게 전달하는 데 용이하다.  시에 있어서 시점은 매우 복잡한 이론 틀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글이 시 창작 실기에 도움을 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만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과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특히 3인칭 시점은 시라는 것이 다른 장르와는 달리 주관성의 문학이며 대상의 자기표현의 장르라는 것을 감안 할 때 과연 시에서도 존재하겠는가 하는 것을 상기할 때에도 그렇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떤 이론을 세워 그 준거에 맞추기보다는 필자 나름대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파악한 글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필자가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2  화자는 시속의 내용을 말하는 전달자로서 서정적 자아라고도 일컫는다. 화자의 결정은 시의 구조에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데 그것은 화자의 심리적 상태나 환경 등에 따라 시의 내용에서부터 시의 형식을 이루는 제반 요소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화자를 시인과 오해해서 읽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화자란 시인이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대신 내세운 대리인agent이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허구화시킨 시적 인물에 불과하다. 시점은 이 화자의 인칭과 관계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방조제 안에 오래도록 갇혀 있던 바다  나도 바다처럼 썩어  더 이상 똑바로 서 있지를 못하지  삶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라고  두꺼운 구름 아래에서 목 졸린  하루가 떨어지며 중얼거린다  겨울을 물고 온 철새들과  도시에서 밀려난 철새들이 늘어선 흉흉한 휴일이면  나는 내 발 밑에서 솟아오르려는 추억을  썩히려고 그곳으로 돌아오곤 했지  아프지 않은 추억이 있을까마는  몸뚱이를 던져버린 간척지에는  놀란 기억들이 구름을 지우고 날아오른다  바다 어디로부터 새어나오는 흔들리는 삶의 핏줄기를  바라보며, 위로 받을 수 없는 배고픈 하루  뜨거운 굴밥으로 허기를 채우려는  메마른 입 속에서는 굴 껍질 같은 하루가  썩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섞이지 못하고 흉흉한 휴일 속에서 서걱거린다  -박호균「A지구 방조제」전문  이 시의 문면에 드러난 화자는 ‘나’이다. ‘나’가 ‘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므로 이 시의 시점은 1인칭 주인공(서술자)시점이다. 내용은 이렇다. 화자(나)는 휴일에 서해에 있는 A지구 방조제에 가서 바다와 구름 그리고 철새들을 바라보며 과거의 고단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메마르고 허기진 현재적 삶에 대해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일상적 삶을 가라앉은 어조로 노래한다.  이 시의 약점은 시의 형식을 잘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인칭 서술자 시점이 안고 있는 딜레마대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정서를 적절히 통어하지 못하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나’가 서해에 간 것은 과거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를 쓰고 있거나 씌어진 상황은 바다를 다녀온 뒤의 상황인 현재이다. 즉 서해에 간 것은 과거인데 비해 이 시를 쓰고 있는 정서나 내용은 책상에 앉아 쓴 현재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이 말은 창작자가 바다 앞에 선 것 같지만 그것은 과거를 현재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창작자가 과도하게 감정을 과거 혹은 사물에 투사하고 있는 이 시는, 현재의 정서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채 나열에 그치고만 느낌이 든다. ‘나도 바다처럼 썩어’ ‘목 졸린 하루’ ‘흉흉한 휴일’ 등에서 보이고 있는 외부 세계와의 손쉬운 타협과 가학적인 동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마음은 시원하겠지만 자칫 개인의 사소한 경험에 그치는 수가 있으므로 자신의 감정이나 사유를 좀더 숙성시킬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시에서는 삶의 고단함을 술회할 때 삶의 발견이나 깨달음을 동시적으로 병치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벽 홍원항에 고래 한 마리  옅은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고 있다  바다에는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너는 이제 바다를 잊어야 했다  비린내가 질퍽하게 스며든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쑤셔 박고  물살을 가르던 네 지느러미를 늘어뜨리며  너는 너무 멀리까지 바다를 걸어나온 일들을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물빛이 네 눈가에 어리는 것 같기도 하고  고래에게는 이제 꼬리도 지느러미도 없다  검은 고무와도 같은 등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어릴 뿐  그리고 먼 곳처럼 배경에 바다가 있을 뿐이다  더는 나아갈 길이 없는 곳에서의 젖은 기억들은  그 절망의 순간조차도 얼마나 눈부신가  감은 고래의 눈에 아직 바다가 출렁인다  이은경「고래에게는 바다가 없다」전문  ‘나’가 ‘너’인 고래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이 시는 관찰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1인칭 관찰자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너’에 해당하는 ‘고래’는 실제의 ‘고래’일 수도 있고 타자화된 ‘자신’ 혹은 ‘그 어떤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는 앞의 시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것과는 달리 ‘고래’라는 사물을 묘사하고 관찰함으로써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는 하고 있다. 그러나,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층적이고 다성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강점이 있는 반면에 1인칭 관찰자 시점은 장면을 제시한다거나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약점이 있다. 이 시 역시 생명의 시원인 바다를 잃고 사지死地를 헤매는 ‘고래’의 절망이 다소 냉정한 어조로 묘사되어 있다. 1연에서의 ‘바다에는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2연의 ‘비린내가 질퍽하게 스며든/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쑤셔 박고/ 물살을 가르던 네 지느러미를 늘어뜨리며’ 등은 이 시에 사실성과 핍진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 시 역시 ‘나’가 바라보는 구체적 대상인 ‘고래’(너)에 이야기를 한정화시킴으로써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안고 있는 과도한 자기 고백의 위험만큼 관점과 ?六璨? 대한 해석과 견해가 축소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즉 대상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는 만큼 대상이 지니고 있는 속성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적절하게 창작자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여 표현하는 요령이 필요하고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는 축소된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3  낭낭한 새벽을 짊어지고 온 산은  아침 터는 물소리에 목을 적신다.  지난 밤  산 오른 물안개들 웅얼거림에  잠 못 들어 뒤척이다 그만,  청솔모도 다람쥐도 아니 깨우고  저 홀로 바삐 목을 적신다.  김재남「산 하나」전문  묘사로만 이루어진 이 시는 대상인 ‘산’이 전경화前景化되어 있다. 여기에는 화자의 해석이나 사유가 거세된 채 ‘산’의 풍경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관찰로만 제시되어 있는 이 시는 아침 산의 청신함과 정적이 이미지화되어 있을 뿐 화자나 청자가 개입할 틈이 보이지 않는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강점은 대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있다. 이미지 시나 즉물시 혹은 사물시 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화자의 정서가 억제되는 대신에 대상이 중요한 부면을 차지한다.  화제話題가 중심이 되는 이 시점은 1인칭 관찰자 시점과 마찬가지로 관찰과 묘사, 장면 제시 수법과 보여주기 기법 등이 사용되고 있으나 1인칭 시점보다 더 화자의 정서가 억제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훨씬 객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점이 빠질 수 있는 오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건조함이나 무의미한 내용의 나열에 있다. 그러므로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난점으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위시에서도 이 같은 것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아침 산에 오르면서 만날 수 있는 풍경만이 별다른 해석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함으로써 ‘그래서 어떻다’ 하는 화자의 사유가 빠져 있는 것이다.  거리의 측면에서 이 시는 1인칭 시점이 빠질 수 있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를 넘어서고는 있지만 이 시가 주는 주제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정보가 불충분하게 주어져 있는 까닭으로 시의 내용과 독자와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져 있다. 이에 따라 이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기술적 배려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그는 늘,  아내 몰래 질펀한 연애 한번 할 궁리를 한다  검은 구두가 현관을 빠져나오자마자 울리는 무선의 선  아내보다 젊은 연인이다  삶은 빨래의 군살이 배인 이야기 거리가 아닌  생 야채 즙의 신선한 풀 냄새, 살진 힘이 솟는다  퍽퍽한 화운데이션 향이 짙은 골동품 냄새를 낸다  적포도주 속에서 숙성시킨 비곗덩어리  아내의 뱃살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뚱뚱한 아내와 통통한 그녀  그는 늘,  그것의 이중적 신비함이 언제까지일까  그 궁금함을 즐긴다  아내의 첫 키스와는 다른  한잔의 생 야채 즙을 삼키며  무선의 다리미로 구겨진 아침의 주름살을 편다  그는 늘 궁리를 한다  아내와의 이불 속에서  죽통 같은 몸부림의 변명거리를  또한 궁리를 한다  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찍는  서영미「궁리」전문  이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는 바람을 피우는 사내이다. ‘그’는 아내 몰래 질펀한 연애를 꿈꾸며 아내와 젊은 연인 사이의 아슬아슬하게 이중적 삶을 오가는 사내이다. 이 시는 ‘그’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3인칭 시점이다. 그러나 ‘그’가 처해 있는 현재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심리적 상태를 화자가 일일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지적 시점이다. 이 시점의 강점은 1인칭 시점이 함몰될 수 있는 감정의 과잉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한편 ‘그’의 내부로 침투하여 화자의 정서를 용이하게 투여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1인칭 시점이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동일화의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객관성과 그 객관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화자의 정서나 사유의 침투가 쉽게 전달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시점의 한계는 시가 주관적 양식을 압축시킨 것이라 할 때 화자의 정서나 사유가 ‘그’를 통해 치환되어 전달될 수밖에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자칫하면 남의 이야기만을 공소하게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어떤 시점을 택하든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살펴 그 장점을 살리는 한편 단점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적절히 보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많이 읽고 많이 써 보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시라는 것이 인간의 무한한 사유를 제어하고 다듬어 그것을 구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같은 노력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궁리」는 재미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아내와 젊은 연인을 묘미 있게 대조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너무 많이 침투되어 있고 그 해석이 단순함에 그치고 있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 같은 의미에서라도 생략했어야 마땅하다.  시점은 시 창작에 있어 중요한 기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시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거리, 어조, 리듬, 시어의 선택, 정조 심지어 주제까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 창작에 있어 어떤 시점이 좋은가는 정답이 없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적절히 활용하는 기술적 태도가 요구될 뿐이다. 이에 따라 시적 구조뿐만 아니라 미적 완성도도 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115    문단에 숱한 화제를 뿌린 "괴짜 문인들"- "감방" 댓글:  조회:3558  추천:0  2017-08-22
  ▶김관식(金冠植.1934∼1970)      "좌충우돌의 미학은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드디어 끝난다.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점잖은 친구들아,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다오.      김관식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을"      천상병(千祥炳) 시인의 시 일부분이다. 55년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김관식은 타계할 때까지 거칠 것 없는 행동으로 문단에 숱한 화제를 뿌렸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며 시 1천수를 줄줄 외웠던 김관식은 한학에도 밝아 시의 세계가 깊고 그윽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문단에서 그의 행태는 광기를 띨 만큼 호탕해 ‘미친 아이’로 불리기도 했다. 문단 대선배도 ‘군(君)’자를 붙여 제자 다루듯 했으며 시 세계에 가식이 섞였거나 조금만 삐뚤어져 있으면 독설(毒舌)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김관식이 4ㆍ19로 열린 민주국가에 기여하겠다며 서울종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당시 거물급 정치인 장면(張勉)과 맞붙은 일화는 유명하다. 또 홍은동 산동네에다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멋대로 팔고 가난한 시인들에게는 거져 주기도 했다. 세상 거칠 것 없이 몸으로 ‘좌충우돌의 시학’을 가르치다 죽었으니 시도 아닌 시로 점잔을 빼던 시인들이 기뻐했을 법도 하다.     ▶김시습(金時習.1435∼1493)      멀리 조선조로 올라가면 중의 신분으로 문득 성안에 거지차림으로 나타나 지나가던 고관들에게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던 김시습이 방외문인의 한 전범으로 꼽힌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세상에 등을 돌려 왕까지도 안중에 안 두고 사대부 출신이면서 유교도, 또 중이면서 불교도 훌쩍 뛰어넘은 그의 자유혼이 웅혼한 시와 를 낳게 했다.     ▶김병연(김삿갓.金炳淵.1807∼1863)    풍자시의 진면목을 보인 김병연의 기행(奇行)은 가위 전설적이다. 철종 시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바로 그다. 할아버지가 홍경래난에 투항한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며 구름을 이불 삼고 시 한 수로 밥을 빌며 전국을 떠돌다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에 묻힌 그도 우리 문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괴짜 문인이다.     ▶박용래(朴龍來.1925∼1980)      “오오냐, 오오냐 적당히 살거라 시인들아!”라며 세상을 온통 긍정하면서도 눈물로 시적 에스프리(프랑스어로 esprit, 즉 기지, 재치, 정신)를 캐냈던 박용래는 천성적 순수로 현실에는 도저히 편입될 수 없는 시인이었다.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갔으나 돈 세는 것에 염증나 그만둬버린 박용래는 돈ㆍ사회와는 영영 등을 돌리고 술로만 살았다. 술을 마시면서도 울고, 별을 보고도 울고, 봄 햇살에 날리는 장닭 꼬리를 보고도 울고, 울면서 또 울던 박용래는 삼라만상에서 한 (恨)의 원형을 끌어올린 극순수의 서정시인이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기 마련인가.“   (중).     ▶신동문(辛東門.1928∼1993)      1956년에 등단, 1965년 절필할 때까지 참여시인으로 필명을 날렸던 신동문도 시인의 결벽성으로 시대와의 불화를 이겨낸 시인이다. 5ㆍ16군사정권에 맞서는 자신의 시도, 자기 자신도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다’며 신동문은 세상을 등져버리고 충북 단양의 초야에 묻혀버렸다. 거기서 그는 침술로 주민의 병을 치료, ‘단양의 신(辛)바이처’로 인술을 떨치다 자신의 암은 치유치 못하고 세상을 영원히 등졌다.     ▶오상순(吳相淳.1893∼1963)      오상순은 시대와의 불화가 빚어낸 대자유인이었다. 목재상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을 나와 전도사 활동을 하던 그는 1920년 김억ㆍ남궁벽ㆍ황석우ㆍ변영로등과 함께 [폐허] 동인으로 참가, 창간호에 이란 평론을 발표하면서 식민 치하의 허무주의자로 돌아선다.    불교에 귀의, 허무의 극한에서 공(空)을 깨치고 속세로 돌아와 동가식 서가숙하며 70평생을 문학도들에게 시의 순수를 자신의 삶 자체로 깨우쳐주다 갔다.    기독교도, 불교의 공사상도 초월해 ‘공초(空超)’라 한 오상순은 하루 2백개비씩 줄담배를 피운 ‘꽁초’로도 유명하다. 오상순같이 세상과의 불화를 견뎌낼 수 없는 타고난 순정한 기질로 세상 어디에도 편입하지 못하고 오직 자유혼으로 문학을 일군 방외(方外) 문인들. 이들의 맥은 우리 문학사에 깊은 골을 이루고 있다.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1910∼1937)      문단의 봉우리에 올랐으면서도 일체의 문단 출입도 없었다. 박제(剝製)된 천재 이상)은 대책 없는 자유혼으로 그의 문학을 한국 문학사에 문학의 영원한 ‘원형’, 속인이 쉽게 풀 수 없는 비의(秘意)로 각인시켜 놓았다. 건축기사 출신 이상(김해경.金海卿)은 인부가 잘못 부른 ‘이-상(李氏 이씨)’을 그대로 필명으로 쓰며 문단에 들어왔다. 기생 금홍과 기괴하고 방만한 풍문을 뿌리며 27세로 요절한 이 상. 청춘의 무한한 실험과 가능성 그 자체로의 요절이 오늘도 그의 문학을 푸르게 흘러들게 하고 있다.     ▶천상병(千祥炳.1930∼1993)      천상병 시인도 대책 없는 순수로 이 세상을 가난하게만 살다간 천상의 시인이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보장된 그 좋은 직장도 다 마다하고 천상병은 술로써만 시를 지키다 갔다. 그는 무직ㆍ방랑ㆍ구걸ㆍ주벽으로 우리시대 마지막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다 쓰러져가는 철거민촌 오두막에서 외로이 숨져갔다. 그러한 삶도 좋았노라고, 마치 소풍놀이 같았다며 하늘로 돌아갔다. 그가 죽자 문학평론가 김재홍(金載弘)씨는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곤궁한 삶의 극한 속에서도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인생의 의미를 깊이있게 일깨워준 참자유인, 진짜 시인의 타계로 이제 이 땅에서 시인의 신화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 ‘참자유인’은 천상병만이 아니라 ‘진짜 괴짜문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 아웃사이더 문인들을 우리가 기리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것이 문학의 핵심 아닌가. 시절이 수상해지면 방외자로서 숨어 있는 문인들이 우리의 시야에 다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참자유가 무엇인가를 깨우칠 것이다.      ▶한용운(韓龍雲.1879∼194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을 절절하면서도 단아하게 읊은 듯한 의 시인 한용운은 근대문학사의 최초의 방외문인으로 볼 수 있다. 만삭의 아내를 저버리면서까지 출가(出家), 속세와 인연을 끊은 그는 어디에도 구속되거나 굴하지 않은 숱한 기행을 남기고 있다. 변절한 최남선이 아는 체 하자 '당신을 장례치른지 오래다'며 죽은 사람 취급했던 일이나 언 방에서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세상의 도움을 거절했던 그다.     ▶한하운(韓何雲.1920∼1975)      김관식과는 정반대편에서 천형의 나병에 걸려 전국을 떠돌면서도 같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남긴 한하운도 빼놓을 수 없는 방외문인이다.    "맑은 생시의     속 깊은 슬픔은     어떻게 무엇으로     어떻게 달래나.     나는 취했다.     명동에서 취했다.     종로에서 취했다.      나는     나는     이런 것이 아니다.”( 중에서).      
2114    윤동주는 내성적으로 유한 사람이지만 내면은 강한 사람... 댓글:  조회:3595  추천:0  2017-06-09
'아침마당' 윤형주 아버님 윤동주 시인 사망 직전 마지막 면회가셨던 분 '조카지만 존경해' (ZOGLO) 2017년6월7일  (사진제공=아침마당 방송캡쳐)    가수 윤형주가 윤동주의 육촌동생으로 소개됐다.   6일 방송된 KBS1 '아침마당'에서는 가수 윤형주가 출연해 윤동주에 대해 소개했다.   오유경 아나운서는 저도 최근에 알았다며 윤동주 시인 육촌동생이시었다고 했다. 윤형주는 일본과 중국 조선족들이 우리말로 시 낭송을 하는 대회를 이어왔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산소를 44년동안 갈 수가 없었다고 알렸다. 1984년도에 제가 처음 가게 되면서 단장되고 했다.   일본 교토에서 시 낭송 대회가 열렸다며 어제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어떤 역할을 하시냐는 MC물음에 윤형주는 유족이기도 하고 심사위원도 하고 공연도 하는 역할을 하며 학생들 500명이 참가했다고 전했다.   VCR을 통해 일본 시낭송대회 현장을 전했다. 윤형주는 일본 동지사대학교는 윤동주 시인이 생에 마지막이었던 곳이다며 학교와 묶었던 하숙집을 소개했다. 이 하숙집에 살면서 체포가 된 거예요라고 묻자 그렇다고 알렸다.   윤동주 시인이 살던 교토를 떠나서 이제 오사카로 가 건국고등학교를 소개했다. 윤동주 시인을 잘 모르는 학생인데도 감성이 살아있었다고 칭찬했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곳에서 시낭송대회를 시작한 이유가 있냐는 물음에 윤동주가 태어나서 살았던 북간도와 일본분들은 윤동주 시는 한국어로 낭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국어를 배우는 분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제공=KBS)   윤형주는 아버님은 어릴 때부터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당숙지간이었지만 윤동주의 시 세계에 대해서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다고 한다.    연길에서 용정 선바위라는 것이 있다며 윤동주가 방학에 오면은 조용히 시집을 들고 소를 몰고 가서 선바위에서 시를 읽고 온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윤형주 아버님은 윤동주 시인보다 5살 위였으며 선생님과 제자 사이이기도 했다며 일본 유학갈 때도 아버님이 챙겨주시기도 했다며 윤동주 시인이 사망하기 마지막 직전에 면회가셨던 분이 아버지다라고 설명했다. 아버님은 조카지만 윤동주의 시 세계에 대해서 굉장히 존경했다고 밝혔다.   아버님이 해주셨던 윤동주 시인은 굉장히 유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내면은 강한 사람이었다며 일본에서 재판에 섰을 때 일본순사가 윤동주가 아까워서 회유를 했다고 에피소드를 전했다.  /국제신문
2113    터키 리론가 작가 - 에크렘 댓글:  조회:4028  추천:0  2017-05-31
  출생 1847, 콘스탄티노플 사망 1914, 콘스탄티노플 국적 터키 요약 터키의 작가.   19세기 터키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시인이자 학자의 아들로서 정규교육을 마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후에 수라 이 데블레트(주의회)의 관리가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유명한 갈라타사라이 국립고등학교와 뮐키예 메크테비(황립 정치과학학교)에서 터키 문학을 가르쳤다. 1908년 청년 터키 혁명 후 몇몇 관직을 역임한 후 상원의원이 되었다. 초기에는 전통 터키의 고전 문체로 글을 썼으나 터키의 유명한 모더니스트 나믹 케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자신은 위대한 시인이 아니었지만 예술과 시의 형식을 재정의하려고 노력했으며, 때때로 정치성을 띤 전위문학잡지 〈세르베트 이 퓌눈 Servet-i fünun〉에 기고하여 젊은 시인들 사이에 추종자가 많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고답파 시인들처럼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요기치로 삼았다. 대표작은 문학비평 및 이론서 〈문학의 가르침 Talim-i Edebiyyat〉(1882)과 시와 산문을 모은 〈명상 Tefekkür〉(1888) 등이다. 그밖에 희곡과 프랑스어 번역작품들이 있다. 이론가로서 문학양식과 사상뿐만 아니라 후대 터키 시인들의 작품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2112    터키 혁명가 시인 - 나짐 히크메트 댓글:  조회:4060  추천:1  2017-05-31
1...   살아 있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진심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한 마리 다람쥐처럼 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산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만큼 살아 있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진심을 다해 삶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등은 벽에 밀쳐진 것처럼 절실하게, 혹은 어느 실험실 같은 곳에서 흰 옷과 보안경을 걸치고 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하는 것처럼 절실하게, 비록 살아 있는 일이 가장 사실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일임을 잘 안다 해도 진심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일흔 살이 되었어도 올리브 나무를 심을 만큼, 후손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죽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음보다 훨씬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2   가령 심각한 병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그 흰 침대에서 다시 못 일어나게 될지 모른다 해도 다소 이른 떠남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해도 우리는 농담을 들으면 여전히 웃을 것이고 비가 내리는지 창 밖을 볼 것이고 가장 최근의 뉴스를 궁금해하지 않겠는가 가령 우리가 지금 싸울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를 위해 최전선에 있다고 해도 전투의 바로 첫날, 그 첫 번째 공격에서 얼굴을 바닥에 파묻고 죽는다 해도 분노 어린 감각이 그런 불길한 미래를 알려 준다 해도 우리는 무척 염려하지 않겠는가 몇 년 동안 끌어질 그 전쟁의 결말이 가령 쉰 살 가까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해도 철문이 열려 자유롭게 될 때까지 18년을 더 갇혀 있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다 해도 우리는 바깥 세상과 함께 숨을 쉬지 않겠는가 세상 속의 사람들, 동물들, 문제들, 그리고 바람과 함께 다시 말해, 감옥 벽 너머에 펼쳐진 세계와 함께 다시 말해,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디에 있다 해도 마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 나짐 히크메트 일부 (류시화 옮김) 독재 정치에 저항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했다는 이유로 성장기를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시인답게 절실하고 울림이 크다. 터키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나짐 히크메트(1902~1963)가 같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감된 8세 연하의 사상범 카말 타일에게 옥중에서 보낸 시 형식의 편지글이다. 석방 후에도 터키 국적을 박탈당해 러시아에서 생을 마쳤지만 히크메트는 참된 의미에서 터키 최초의 현대 시인이며 현재까지도 터키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출신의 화가 니콜라 드 스탈은 죽기 전에 남긴 메모에 ‘그림들을 완성할 힘이 없다’라고 썼다. 다시 읽으면, 죽기 전까지 마지막 힘을 다해 그림들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도 느껴지듯이 히크메트의 모든 시는 그가 감옥에서 쓴 대표시 의 변주곡들이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류시화 -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한 문장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고, 찰나가 평생의 행로를 결정하게 되는 순간은 한두 번은 경험해보는 일이다. 가령 사랑이 그렇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은 미리 대비하거나 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 그것은 계시처럼 불현듯이 와서 존재를 사로잡는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전도, 좁은 문의 알리사와 제롬이 그랬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작기에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작은 예배당에서 흰옷을 입고 목사의 설교를 듣던 그 순간은 열네 살 두 아이를 사로잡고 누가복음의 문장은 평생 두 사람이 추구해야할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추구하던 방식의 차이가 알리사와 제롬간의 고통과 갈등을 낳는다.    사랑과 신성, 양립할 수 없는 극과극?  알리사를 통하여, 알리사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통하여 신에게 이르고자했던 제롬. 제롬에게 있어 훌륭함과 탁월함은 오직 알리사를 기쁘게 하고 알리사에게 걸맞은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알리사를 매개로 신에게 이르고자 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존경할 때, 그 사람이 곧 나의 신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계산된 이타심이거나 이기심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알리사에게 있어 신성이란 모든 것을 다 버려야 도달할 수 있는 이데아다. 절대적으로 투명한 공(空). 알리사는 자신을 몽땅 비워낸 텅 빈 마음의 공간으로 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끝까지 제롬을 향한 갈망과 집착을 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실패한다. 제롬이 귀납적인 인물이라면 알리사는 연역적인 인물이다. 제롬은 알리사와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들을 통해 사랑을 느끼고 사랑에 대해 배워갔지만, 알리사에게 사랑과 신성은 처음부터 그 내용이 결정된 것이며 사랑과 신성은 양립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세계였다.   “제롬, 난 요즘 네 옆에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어. 하지만 우리는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이 행복에 앞서 무엇을 바래야한다는 거니?” 나는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성스러움.” “난 너 없이 거기에 이를 수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아이처럼 울먹였다. 슬퍼서라기보다는 사랑에 복받쳐 하염없이 흐느꼈다. “너 없이는 안돼. 너 없이는 안 된다고!” 그날 저녁, 알리사는 수정목걸이를 걸지 않고 나타났다. 약속한대로 다음날 아침, 나는 조용히 떠났다. - 좁은 문/푸른숲주니어 중에서   각각 도달해야 하는 생의 목표  좁은 문은 각각이 도달해야만 하는 생의 의미나 목표일 것이다. 목표가 구체적인 지향점이라면 의미는 그 목표를 통해 이루는 내용이다. 생각해본다. 알리사의 목표가 신앙이었다면, 신앙을 통해 그녀가 추구하려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제롬의 목표가 알리사였다면 알리사를 통해 그가 이루려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학업에 열중한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은 앞으로 수많은 좁은 문을 만날 것이고 문을 넘을 것이다. 문을 통과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 문안에서 그들이 만날 공간에 대한 상상이 의미다. 목표는 구체적이지만 의미는 자신이 채워가는 것. 언제나 상상했던 것과 실재는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꿈꿨던 것과 만난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실패하라, 그러나 이번에는 더 낫게 실패하라”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문에 머무르지 않고 자꾸만 다른 문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해서. 그러니 어쩌면 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나 우리가 만들며 가는 것이지. 그것이 꿈꾸는 인간의 숙명이자 조건이므로. 현재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우리의 염원이 현재를 만드는 것이므로. 터키의 혁명가이자 시인이었던 나짐 히크메트는 그 비의(秘義)를 알고 있었다.  박혜진   =========================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과거에 퓰리처상을 받았더라도 그의 가치는 가장 마지막에 쓴 기사가 말합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도 자신의 최고 저서는 과거의 어느 책이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책이요 앞으로 쓸 책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지만 한번 시인이 영원한 시인은 아닙니다. 시인은 그가 시인인 순간만 시인입니다. 사랑에 대한 모독도 “사랑했었어”입니다. “지금 사랑하느냐”가 사랑의 코어(core)입니다. 
2111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 말라르메 댓글:  조회:6660  추천:0  2017-05-24
  출생 1842. 3. 18, 파리 사망 1898. 9. 9, 프랑스 퐁텐블로 근처 발뱅 국적 프랑스 요약 말라르메는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언어의 마술적 사용으로 당대 가장 저명한 프랑스 시인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가족들의 죽음을 겪으며, 시를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현실세계를 떠나 또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갈망을 표현했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에 큰 영향을 받아 현실도피라는 주제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막연한 보들레르의 현실도피와는 달리, 이상적인 세계의 본질 및 그 세계와 현실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했고, 이는 와 라는 2편의 극시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시인은 현실 너머의 공허 속에 존재하는 본질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극도로 교묘하고 복잡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여생을 바쳤다.   폴 베를렌과 함께 상징주의 시운동을 창시·주도했다. 그가 안락하고 안정된 가정생활을 누린 것은 5년이라는 짧은 기간뿐이었으며, 그가 5세 되던 해인 1847년 8월 그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준 이 경험은 10년 뒤인 1857년 8월에 여동생 마리아가 죽고 1863년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은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표현한 갈망, 즉 가혹한 현실세계를 떠나 또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갈망의 대부분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갈망이 오랫동안 그의 시의 주제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어른이 된 뒤에도 비교적 가혹한 삶을 산 탓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1862년 후반과 1863년 전반을 영국 런던에서 보낸 뒤, 평생 동안 계속된 교사생활을 시작하여, 처음에는 시골학교(투르농·브장송·아비뇽)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파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이 직업에는 타고난 소질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이 일이 자신의 기질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의 경제적 사정은 결코 풍족하지 않았고, 특히 1863년에 결혼하여 1864년에 딸 주느비에브가 태어나고 1871년에 아들 아나톨이 태어난 뒤로는 더욱 살림이 궁색해졌다. 그는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 시간제로 부업을 했는데, 예를 들어 1874년말에는 몇 달 동안 잡지를 편집했고, 1877년에는 학교 교과서를 썼으며, 1880년에는 또다른 교과서를 번역했다. 그의 아들 아나톨은 6개월 동안 병을 앓다가 1879년 10월에 죽었다. 이런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는 시인으로서 꾸준히 발전했다. 1862년부터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한 초기 시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은 주로 현실도피라는 주제를 다루었는데, 그는 이미 이 주제에 사로잡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현실도피는 본질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감각적인 종류의 것, 모든 '사치와 평온과 관능'뿐인 열대 섬이나 평화로운 풍경에 대한 막연한 꿈이었다. 반면에 그는 훨씬 더 지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고, 이상적인 세계의 본질 및 그 세계와 현실의 관계를 분석하겠다는 결심은 1864년에 쓰기 시작한 〈에로디아드 Hérodiade〉와 1865년에 쓰기 시작한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라는 2편의 극시에 반영되어 있다. 〈목신의 오후〉는 후에 클로드 드뷔시에게 영감을 주어 유명한 〈전주곡 Prélude〉을 작곡하게 했다(〈목신의 오후 전주곡〉). 1868년 무렵 그는 현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이 완전한 공허 속에 완벽한 형태의 본질이 숨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시인이 할 일은 바로 그 본질을 감지하여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시의 형태로 바꾸어 기술하는 단순한 운문 작가 이상의 존재가 된다. 시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그가 표현했듯이 독자들을 위해 '부재(不在)의 꽃' 즉 현실의 꽃밭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꽃을 마법으로 불러내는 진정한 신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꽃을 묘사하는 대신, 이런 식으로 꽃의 본질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꽃의 개념을 창조하려면 언어의 모든 자원을 극도로 교묘하고 복잡하게 이용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 '대작'(Grand Oeuvre) 또는 '책'(Le Livre)이라고 부른 작업에서 이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러나 이 작업은 준비 단계에서 끝나버렸고, 지금껏 남아 있는 약간의 초안만 보고는 마지막 결과가 어떤 것이 되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미학). 그렇지만 주제나 언어 사용에 있어 자신이 계획한 '대작'과 관련되어 있는 시는 여러 편 완성했다. 그중에는 평생 동안 여러 번 주문을 받은 몇 편의 애가도 들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샤를 보들레르와 에드거 앨런 포, 리하르트 바그너, 테오필 고티에 및 폴 베를렌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였다. 그가 이런 작품을 써달라는 주문을 기꺼이 받아들였음이 틀림없다. 애가의 전통적 주제(사람은 죽었어도 작품을 통해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는 시인인 그의 믿음, 즉 현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시는 그 소멸을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믿음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시 자체에 대한 시를 써서, 자신의 목표와 그때까지 이룩한 성과를 재검토했다. 그는 '대작'과 관련된 이 두 부류의 작품 외에도 몇 편의 시를 썼는데, 이 시들은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역시 언어의 마술적 사용을 보여준다. 그는 그 부분에 이미 달인이 되어 있었다. 이 시들은 그가 1884~90년에 애인인 메리 로랑에게 바친 12편 정도의 소네트인데, 여기서 그는 현실에 대한 최고의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다. 당시 그는 생애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애인과의 관계가 만족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1883년 베를렌이 발표한 〈저주받은 시인 Les Poètes maudits〉이라는 제목의 연재 평론에 실린 그에 대한 논평과 J.K. 위스망스가 장편소설 〈거꾸로 A rebours〉에서 그에게 아낌없이 퍼부은 칭찬 덕분에 당대의 가장 저명한 프랑스 시인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목요일 저녁마다 파리에 있는 그의 작은 아파트에서 열린 유명한 모임에는 당대의 유명 작가와 화가 및 음악가들이 참석했다. 이 모든 상황이 아마도 이상적인 세계 속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경감했을 것이다. 죽기 전 해인 1897년에 발표된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poème〉에서 그는 시에 진정한 창조 기능을 부여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생각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은퇴한 뒤 주로 거주했던 퐁텐블로 근처의 센 강 연안에 있는 발뱅이라는 마을의 오두막에서 1898년에 세상을 떠났다. ====================     스테판 말라르메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é ; 1842년 ~ 1898년)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와 더불어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주도했다. 시인의 인상과 시적 언어 고유의 상징에 주목한 상징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 출신으로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귀》를 불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당대 파리의 문인들을 비롯 인상주의 화가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폴 클로델 등 20세기 전반 프랑스 문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 시집으로는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1877), 《주사위 던지기 (Un coup de dès)》(1897) 등이 있다. //////////////////////////////// ======================== ////////////////////////////////   소네트 / 말라르메   순결하고 생기 넘치며 아름다운 오늘이야말로 그의 취한 날개를 한 번 쳐서 달아나지 못한 비상(飛翔)들의 투명한 얼음 덩어리가 흰 서리 아래 배회하는 이 얼어 붙고, 잊혀진 호수를 깨   뜨려 줄 것인가!   지난 날의 한 백조는 회상한다. 그가 바로 황량한 겨울의 우수(憂愁)가 찬란할 때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을 노래하지 않았기에 화려한 생물이지만 이 구속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 자임을.   그는 온 목을 흔들어 떨쳐 버릴 것이다. 공간이, 원치 않는 새에게 억지로 과하는 이 백색의 임   종의 고뇌는, 그러나 그의 날개를 붙잡는 대지에 대한 공포는 없앨 수   없다.   그는 순결한 빛이 이 장소에 부착시키는 환영(幻影)이   되어 백조는 무익한 유배 속에서 그가 스스로 감싸는 경멸의 차가운 꿈을 안고 적연부동(寂然不動)이다.   * 백조는 그 아름다운 자태와 흰 빛깔로 예부터 많은 전설을 낳게 했다. 특히 그 새가 죽기 전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이야기는 백조와 순수한 시인을 동일시하는 풍조가 생기게 하였다. 이 소네트는 백조를 빌어 말라르메 시인 자신의 고뇌와 심경을 읊은 것이다.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 중 언어와 음악성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시일 뿐 아니라 그의 시풍(詩風)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의 하나로 꼽힌다.    차가운 기운이 넘치는 청명한 겨울날, 우리 눈앞에는 흰 서리롸 얼음 덩어리가 배회하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얼어 붙은 호수에는 백조 한 마리가 얼음에 갇혀 이를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린다. 날개를 한 번 쳐서 천상(天上)으로 향하고 싶으나 이 구속에서 빠저나갈 희망이 없다. 또한 이미 여러 번 실패를 하였다. 그에게는 순결하고 고독한 이상만이 있을 뿐 현세나 현실과의 타협이 없기 때문이다. 현세(공간)가 그에게 부과하는 종말의 고뇌는 뿌리칠 수 있으나 결국 백조는 얼음의 호수 속에 하나의 하얀 환상이 되어 부동의 자세로 조용히 죽어 간다. 그의 마음 속에 현실과 자신에 대한 부정(否定)과 멸시를 품은 채---    이것이 이 시의 내용이며 개요이다. 의미상, 백조는 물론 시인 자신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자주 시적 무력감에 빠졌고 백조가 얼음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 자신도 전혀 시를 쓰지 못하던 시기가 있어 자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순수하고 난삽한 시 정신은 백조와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나 일반 독자나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고, 그의 생활도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자연히 무익한 유배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유배를 죽어가는 백조와 같이 차가운 경멸감을 가지고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수시를 지향하는 말라르메는 이 시로 위와 같은 정경(情景)이나 시인의 심경-사상-도덕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상징-암시-연상을 통한 추상적 이미지와 순수한 언어가 가지는 음악성을 배치-조화시킴으로써 미적 세계와 시적인 미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에 언어는 그가 가지는 뜻이나 문법적 기능보다 악보와 같이 음(音) 부호의 구실을 많이 한다고 보겠다. 따라서 이 시의 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논리적 분석보다 음과 리듬의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우선 이 "소네트"는 전 14행이 모두 (i)나 (ui)음으로 끝나는 데 주목하여야 한다. 또한 이 (i)음은 마지막 3행시절의 끝 두 절 안에서도 반복된다. 그런데 알베르 티보데니 그 외의 여러 비평가에 의하면 (i)음은 이 시에서 방대하고 단조로운 흰 공간과 추위를 환기시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시를 장조(長調)의 소네트라고도 부른다. 그 외에도 첫쩨와 둘째 4행시절에서의 장중한 (v)음의 호응, 그리고 전체 시 위에 떠 있는 환상적인 신령스러운 기운, 추상적 언어에 의한 최후의 백조(Cygne)를 대문자로 써서 하늘의 백조 별자리를 환기시킨 점 등등으로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학의 표본을 이루고 있다.   창(窓) / 말라르메   음침한 병실과 허름한 흰색 커튼을 쫓아 향불 연기가 빈 벽에 지루하게 달린 큰 십자가상을 향해 올라가며 풍기는 빈사의 병자는 늙은 허리를 펴,   몸을 이끌고 썩은 육체를 따스하게 하려기보다 돌 위에 비치는 햇빛을 보기 위해 창가로 가 흰 수염과 여윈 얼굴의 뼈를 아름답고 맑은 햇살이 들이쬐는 유리창에 대고,   그리하여 열띠고 푸른 창공에 허기진 입으로 따스한 금빛 유리창에 오랫동안쓴 입술을 댐으로써 흔적을   묻힌다. 마치 그의 입이 젊은 시절 그의 보물인양 옛날 한때 순결했던 한 살갗을 들이마시려 하였듯이,   도취 속에 그는 살았다. 임종시의 성유(聖油)의 두려움도 탕약(湯藥)도 벽시계도 피할 수 없는 병상도 기침도 잊고; 그리하여 저녁 노을이 기왓장 사이에서 피를 흘릴 때 그의 눈은 빛으로 가득 찬 지평선 위에,   백조같이 아름다운 황금색의 범선(帆船)들을 본다. 이들은 보라와 향기의 강 위에 떠서 추억 가득한 한가   로움 속에 현란한 황갈색의 반짝이는 선(線)들을 본다. 이들은 보라와 향기의 강 위에 떠서 추억을 가득 실은 한가   로움 속에 현란한 황갈색의 반짝이는 선(線)들을 흔들면서 잠자고 있었다.   이리하여 냉혹한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 단지 식욕만으로 먹는 행복 속에 뒹굴며 자기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는 아내에게 바치려고 이 오물(汚物)을 찾아 광분하는 인간이 끔찍해,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나는 생(生)에 등을 돌리는 모든 창문가에 매달린다. 그리하여 영원한 이슬에 씻기고 무한의 청결한 아침이 금빛   으로 물들이는 창문 유리알 속에 축복받은 내가 비춰지고   내가 천사임을 본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 유리창이 예술이기를, 신비이기를-- 그리하여 나는 내 꿈을 면류관으로 삼고 미(美)가 꽃피는 전생의 하늘에서 재생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속세가 주인임을: 이 고정 관념은 때로 안전한 내 은신처까지 쫓아와 나를 메스껍게 하고 어리석음의 불결한 구토는 나로 하여금 창공 앞에서 코를 막게 한다.   오오, 인생의 고뇌를 아는 나는 괴물에게 멸시받는 수정문(水晶門)을 깨뜨리고 들어가 털 없는 내 두 날개를 펴 달아날 방법이 있는 건가? -영원한 시간 동안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말라르메는 중등 학교 영어 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1862년 11월 부터 1년간 영국에 체재하였다. 이 시는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의 극히 초기의 것으로 그가 21세 때의 창작이다. 그는 이 시와 그 외 몇 편의 작품을 1863년 6월 영국 런던에서 그의 친구이자 후견인인 카잘리스에게 보냈다.  그의 영국 체재는 불행한 것으로 그가 말한 바대로 고뇌-절망-가난에다 장차 그이 아내가 될 마리 제라르와의 사랑의 갈등이 뒤범벅이 된 시기였다. 또 그가 런던에 도착한 직후 발병하여 병상에 누운 일도 있다. 이 경험이 작품 "창"에 나타나는 음울한 병실과 빈사의 병자를 상상케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의 줄거리는 속세와 현실 세계를 혐오하는 병자가 병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창문 유리를 통해 빛나고 아름다운 바깥 세계를 몽상한다. 이 때 유리창은 그를 병실(현실)에 가두어 두는 벽인 동시에 열려진 세계(이상)로 통하는 문이요 길의 상징이다. 병자의 욕망은 일격으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열린 세계로 자유로이 비상하려고 하나 결국 자신의 무력(無力)으로 갇혀진 세계의 운명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과 자신의 무력감이라는 이 주제는 이후, "창공(1884)"과 위에 수록된 백조의 "소네트" 등으로 이어진다.     목신(牧神)의 오후(발췌) / 말라르메     목가   목신: 나는 이 요정들을 영원하게 하고 싶다.                                그녀들의 연분홍 살빛은 너무 깨끗하여, 무성한 잠에 졸고 있는 대기 속을 떠돈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꿈이었나? 옛 밤에 축적된 내 의혹은 많은 작은 나뭇가지 같이 끝나 버렸는데 이들이 그대로 진정한 숲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오호라! 나 혼자만이 장미꽃들에 대한 상상적 유린을 승리로 돌리    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대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여인들이란 그대의 상상적 감각이 원한 것의 형상이라면! 목신이여, 그 환상은 가장 정숙한 여인의 푸르고 찬 눈에서 나오듯 울고 있는 샘물 소리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한숨에 싸인 다른 여인에 대해선 반대로 그대 가슴털에 스치는 낮의 더운 미풍에서라고 할 것인가? 아니다! 더위는 부동(不動)의 권태로운 무력감으로 살아나려는 신선한 아침의 목을 죄고 속삭이는 물이란 단지 화음(和音)으로 젖은 숲 위에 내리는 내 피리 소리뿐이요, 다만 한 줄기 바람이란 소리를 메마른 빗속으로 흩뜨려 버리기도 전에 피리의 두 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날라 버리는 숨결뿐, 이 바람은 주름 하나 없이 평평한 지평선상에 하늘로 되돌아가는 영감(靈感)의 눈에 보이는 평온하며 인공적인 숨결이다.   * 오, 태양빛과 겨루려는 내 헛된 욕망이 유린하는 섬광(閃光)의 꽃다발 아래 묵묵히 누운 고요한 늪의 시칠리아 기슭이여, 이야기하라 "나는 이 곳에서 숙련으로 길들인 빈 갈대를 꺾고 있었다. 이 때 포도 덩쿨을 샘들 위에 드리우고 있는 아득히 보이는 초록의 녹색 금빛 위에 쉬고 있는 생물(生物)의 흰 모습이 잔물결친다. 그리고 풀피리가 살아나는 느린 서곡(序曲)에 이 백조의 무리, 아니! 요정들의 무리는 혹은 달아나고 혹은 물 속으로 뛰어든다----"                 만물은 무력하게 황갈색 시간 속에 타고 '라'의 화음을 찾는 연주자가 바라던 너무나 많     은 결혼이 어떠한 계략으로 일제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 그 때 나는 고대의 빛 물결 아래 홀로 우뚝 서 나의 첫 정열에 눈뜨리라 백합이여! 순결함에 있어 나는 너희 모두들 중 하나이다.   저들의 입술이 퍼뜨리는 이 달콤하고 실없는 일 속삭여 사랑의 배신자를 안심시키는 이 입맞춤과는 달리 완전무결하게 순결한 내 가슴은 어느 고귀한 이(齒)가 물어 생긴 신비로운 상처의 흔적을     증언한다; 그러나 좋다! 이러한 신비로운 흔적은 그의 마음을 들어 줄     친구로 창공 아래서 굵은 두 개의 갈대를 골랐다. 갈대는 빰의 동요를 자신에게 돌려 긴 독주(獨奏)로 주위의 아름다움과 우리들의 소박한 노래를 거짓 혼동케 함으로써 주위의 아름다움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꿈꾼다 또 갈대는 사랑의 노래를 힘껏 높여서 하나의 낭랑하고 공허하고 단조로운 선율이 내가 눈 감고 쫓는 등과 순결한 허리의 통상적인 환상을 사라져 흩어지게 한다고 꿈꾼다.   도주(挑走)의 악기여, 오 심술궂은 신(神)의 피리여. 네가 나를 기다리는 호수에서 다시 꽃피어나도록 하라; 나는 내 자랑스런 목소리로 여신들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말하리라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의 그림으로 저들의 어두운 부분에서 또 다시 허리끈을 풀리라; 그리하여 내가 거짓으로 위장에 물리쳤던 미련을 떨쳐 버    리기 위해 포도알들의 광명을 빨았을 때 웃으며 나는 그 빈 포도 송이를 여름 하늘에 쳐들고 빛나는 껍질 속에 내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도취를 갈망하며 저녁때까지 나는 그 속을 투사한다.   * 위의 시는 "목신의 오후"의 일부 발췌시이다. 이 시는 그가 일생 탐구한 절대시(絶對詩)가 어떤 것인지 보이기 위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문학도들에게도 난해하고 신비로운 이 시의 감상은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시를 이해-감상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드뷔시의 교향시 "목신의 오후 서곡"을 듣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학자-연구가-시인들의 계속적인 연구와 해설, 주석들로 인해 과거보다는 훨씬 시에 대한 이해도 분명해지고 시인의 의도도 밝혀졌으나 시에 대한 해석과 주석도 너무 구구하여 어떤 것이 정통적이며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난해-난삽의 평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그의 대표작으로 통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그가 새롭고 아름다운 시를 얻기 위해 주야로 악전고투하여 쓴 것이며, 10년 동안 닦은 각고(刻䇢)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독창적인 시가 그의 시를 늘 게재해 오던 제 3집에 편짐위원회, 특히 아나톨 프랑스로부터 거부를 당하였다. 그 이유는 "만일 이 작품이 게재되면 독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목신의 오후"는 그 다음 해 단행본으로 당대 유명한 화가 마네의 목판화를 곁들인 호화판으로 출판되어 다시금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마네에 이어 마티스-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시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1894년에는 말라르메 찬양가이던 드뷔시가 이 시를 주제로 한 교향시를 써 유명해졌다. 더우기 1912년에는 러시아의 무용가 니진스키가 발레로 안무-상연함으로써 이 시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목가는 18세기 프랑스 화단의 거장인 부셰의 그림에서, 또는 그의 선배 시인인 방빌의 한 연극에서 시상(詩想)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출발점, 대강의 줄거리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이나 분위기-상징은 전적으로 말라르메의 꿈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다. 그는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완전히 만들어 내야 한다. 꿈만이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 시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전반부: 목신이 잠에서 깨어난다. 간밤의 정사(情事)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스스로 묻는다. 그가 본 못가에서 미역을 감던 이 요정들은 실제의 인물이던가 혹은 그가 꿈을 꾸었던가? 그의 기억 속에 두 요정이 떠오른다. 하나는 정숙하고 차갑고, 다른 하나는 한숨만 쉬는 요정이었다. 그는 이 요정들의 육체를 범했던가?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자연 가운데 혼자 있었다. 그는 피리를 만들어 불며 기억을 더듬는다. 혹은 그들의 존재를 의심도 하고 혹은 사실을 낱낱이 회상도 하며--- 그러나 그는 피리를 불음으로써 사랑의 신비로운 잇자국을 잊어버리고 영감(靈感)의 기쁨을 맛본다.   참고로 여기 싣지 않은 후반부의 개요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후반부: 이 영감은 다시 목신이 욕정을 일으킨 장면을 상세히 보여 준다. 몸이 얽힌 두 요정이 잠들어 있다. 목신은 이 들을 하나씩 겁탈한다. 그러자 두 요정은 서로 떨어져 도망쳐 버린다. 허망에 빠진 그에게 또 다른 요정 비너스가 에트나 산에 나타난다. 그는 사랑의 여신을 포옹한다. 그러나 이 또한 환상으로 그에게서 사라진다. 이제 목신은 뜨거운 오후의 열기 속에 굴복하여 목마른 모래 위에서 다시 잠이 든다. 꿈에서 님프들을 다시 만나 보기를 바라면서---  이 시에 대한 해설도 구구하다. 말라르메에 대한 명쾌한 해설가 피튀로는 이 시는 우아한 상징 속에 격렬한 에로티시즘을 감추고 있다고 했고, 어떤 학자는 이 시는 말라르메의 집념인 사랑과 시, 욕정과 영감, 꿈과 현실의 갈등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시가 어떤 사상이나 도덕, 또는 감정을 전달하는데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단지 목신의 전설을 빌어 감각적이며 우아하고 몽환적인 세계의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짙은 육체의 향기와 원색적인 이미지, 추상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음악과 회화와 시의 종합적인 공예 작품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시의 길에서 이 시만큼 멀리 간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테판 말라르메(1842~1989): 말라르메는 문학 사조에서 상징파에 속하는 시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상징주의적인 시를 썼다기보다 순수시, 시의 이상적 형태를 위해 일생 생각하고 찾고 쓴, 시의 수도사(修道士)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의 양적으로 많지 않은(단 한 권의 시집) 시는 난해라는 장애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추앙자를 내었다.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된 지금에도 계속 많은 추종자들이 배출되어 그의 작품을 연구-해석하고 그의 교리에 따라 시를 짓고 있다.   말라르메는 파리 태생으로 하급 공무원 가정 출신이다. 5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재혼하여 일종의 고아와 같은 처지로 외할아버지-외할머니의 손 아래에서 자라났다. 학교 시절부터 심약한 그는 고독하였으며 야유하는 동료들을 피하여 혼자 몽상과 노트에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성인이 된 말라르메는 시골 중학교 영어 교사가 되어 이후 일생 동안 계속(약 30년 동안) 주로 지방 중고등 학교의 영어 교사로 빛 없는 평범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교사란 직업은 생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참다운 생은 시에 대한 사색과 탐구와 각고로 일관했다.  그가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경부터인데 때때로 산문시나 소네트를 문학 잡지 등에 기고하였다. 1866년 라는 문학지에 10편을 써서 발표한 것이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창문", "창공", "바다의 미풍" 등이 이 가운데 들어 있다. 이것은 그의 20대 때의 시이다. 그가 그의 온 정력을 다 쏟아 쓴 독창적인 시는 시극(詩劇) "에로디아드(1868)"와 "목신의 오후(1876)"이다. 이 2편의 시는 그가 오랜 시일에 결쳐 갈고 다듬은 것으로 특이한 사상과 정밀한 시적 언어를 구사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두번째 작품은 후일 드뷔시가 같은 이름의 교향시 서곡을 써서 더욱 유명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모두 극히 난해하여 전체적인 이해와 통일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난해성과 과작(寡作)으로 인하여 그는 1884년경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며 그의 작품은 경원시되어 왔다. 그의 유명한 "목신의 오후"는 원래 제 3집에 싣기로 되어 있었으나 심사 위원회에서 부결되어 게재되지 못하였다. 온화하고 누구에게도 친밀한 그도 이 일에는 격분하여 반대의 주동자 아나톨 프랑스에게 일생 원한을 가졌다 한다. 극소수의 시인들만이 그를 추앙했고 말라르메 자신 또한 대중적 명예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4년 베를렌느가 그의 시인론 가운데 말라르메의 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게재하였고, 같은 해 위스망스의 소설 의 주인공이 말라르메의 시 "에로디아"에 압도되었다는 대목이 널리 전파되어 그의 이름이 갑자기 유명해지고 이어서 젊은 상징파 시인들이 그를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다.  그는 1871년 가을 파리로 올라와 계속 영어 교사로 지내면서 로마 가(街)의 작은 그의 아파트에서 '화요회'를 주재했다. 그의 탁월하고 깊이 있는 시와 예술론에 힘입어 1880년대에는 당신의 유명한 시인과, 문인 라포르그, 레니에, 바래스, 클로델, 지드, 발레리 등이 참석-경청하여 그의 작품 못지않게 시단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이름을 높이었다. 그가 파리에 정주한 시기는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로 창작에 있어서도 일종의 휴식 시기였다. 생활을 위해서인지 - 등의 어학 서적과, 그리스 신화의 해설팜인 을 출판하였고, "최신 유행"이라는 유행 잡지의 편집을 맡는 등 상당히 세속적인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말라르메가 또다시 난해무쌍한 장시(長詩)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85년 "데 제생트를 위한 산문"을 발표한 이후이다. 데 제생트란 앞서 나온 위망스의 소설 의 주인공이다. 이 시는 시인을 위한, 시인의 이상을 노래한 시의 본보기라고 하나 이 시의 해석은 난해한 일 중의 난해한 일로서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상징주의자와 그의 주석자(註釋者)들에게는 일종의 경서(經書)가 되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산문이나 소네트 형식으로 시인의 입장과 사명감 같은 것을 내용으로 한 시를 많이 썼고 또한 보들레르-베를렌느 등의 시인, 바그너-샤반느와 같은 예술가,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은 항해사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써서 그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이제 그의 이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퍼지고 그의 작품도 세계 각국에서 번역-출판되었다. 그의 화요회는 유럽의 가장 유명한 문인 인사들이 참가하는 모임이 되었고 1896년에는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베를렌느에 뒤이어 시왕(詩王)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방랑가인 베를렌느나 반항아인 랭보와는 정반대의 성품으로 우아하고 절제 있고 다른 불행한 시인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주는(베를렌느도 보호 받은 사람 중 한 사람) 인정 있고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시론에 있어서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97년 1월 그의 예술론인 과 같은 해 5월에 국제적인 잡지, 에 시 "한번의 주사위가 우연을 없앨 수는 없으리라"가 발표되어 소수의 그의 동조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다음 해 9월 8일, 파리 근교 발랑에 있는 시골 집 서재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후두 경련을 일으켜 다음 날 아침 절명했다. 그의 나의 56세였다.    
2110    프랑스 시인 - 로트레아몽 댓글:  조회:5269  추천:0  2017-05-24
  출생 1846. 4. 4,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사망 1870. 11. 4,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 본명은 Isidore-Lucien Ducasse.   프랑스 문학에서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인물로, 랭보·보들레르, 나중에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영사관 일등서기관의 아들로서 학업을 위해 1860년 프랑스에 갔다. 1868년 파리를 향해 떠난 것은 표면상으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기 위해서였으나, 이후의 행적은 분명치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더이상 알려진 바 없으며 초상화도 남아 있지 않다. 로트레아몽이라는 가명과 백작의 칭호는 외젠 쉬의 소설에 등장하는 거만한 주인공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1868년 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 Les Chants de Maldoror〉가 인쇄되었지만, 그 격렬한 내용에 놀란 벨기에인 출판업자는 기소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서점에 배포하기를 거부했다. 1870년 6월 소품 〈시집〉이 인쇄되었다. 로트레아몽은 같은 해 파리에서 죽었다. 아마도 제3공화정 수립 때의 파리 포위공격 와중에 경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말도로르의 노래〉가 1890년 마침내 출판되었으나 처음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낯설고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의 불안한 병치에 깊은 인상을 받은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를 자신들의 본보기로 삼기로 함에 따라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세기초 시인과 화가들을 격동케 한 것은 무엇보다도 〈말도로르〉에 나타나는 반항의 흉포함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인간조건에 대한 반항이 결정적인 신성모독에 이른 것과도 같았다. [Daum백과] 로트레아몽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상위 문서: 시인 Lautréamont 1846~1870   1. 개요 [편집] 프랑스의 시인으로 본명은 '이지도르 루시앙 뒤카스(Isidore-Lucien Ducasse)' 2. 생애[편집] 아버지가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프랑스 영사관의 부영사로 재직 중에 태어나 우루과이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교육을 위해 프랑스로 귀국 유학생활을 했다.   1868년에 산문시집 을 로트레아몽 백작이라는 필명으로 자비 출판. 모두 6집으로 되어있는 산문시집이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고 다음해 출판사가 내용이 우울하고 음침하다는 이유로 절판 시켜버렸다.
2109    프랑스 시인 - 아폴리네르 댓글:  조회:5063  추천:0  2017-05-24
  출생 1880. 8. 26 사망 1918. 11. 9,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 20세기초에 프랑스 문단과 예술계에서 번창한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가하고 시를 새로운 분야로 안내한 뒤, 짧은 생애를 마쳤다.   폴란드 망명자인 어머니와 이탈리아 장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혈통을 비밀에 붙였다. 비교적 자유롭게 자란 그는 20세 때 파리로 가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1901년 독일에서 보낸 몇 개월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때의 경험은 자신의 시적 재능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라인 지방의 매력은 언제나 그의 추억에 남아 있었고, 이 지방의 숲과 전설에 깃든 아름다움은 나중에 그의 시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국 아가씨인 애니 플레이든을 사랑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는 런던까지 이 여인을 따라갔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했다. 이 낭만적인 실연에서 영감을 얻어 유명한 시 〈사랑받지 못한 애인의 노래 Chanson du malaimé〉를 썼다. 파리로 돌아온 뒤, 아폴리네르는 문필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카페의 단골 손님이자 작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나중에 유명해진 몇몇 젊은 화가들, 즉 모리스 드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 파블로 피카소 등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앙리 루소의 그림과 아프리카 조각을 동시대인에게 소개했으며, 피카소와 함께 그림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입체파 미학의 근본 원리를 밝히려고 애썼다. 그는 1913년에 〈입체파 화가들 Peintures cubistes〉을 발표했다. 그의 처녀작 〈타락한 마술사 L'Enchanteur pourrissant〉(1909)는 마술사 메를랭과 요정 비비안이 나누는 이상야릇한 대화를 시적 산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듬해 그는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생기 넘치는 단편집을 〈이교 창시자 회사 L'Hérésiarque et Cie〉(1910)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어서 격식을 차린 4행련구로 씌어진 〈동물지 Le Bestiaire〉(1911)가 나왔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알코올 Alcools〉(1913, 영어판 1964)이다. 이 시집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상상 속에서 다시 체험하면서 때로는 12음절 보격을 가진 정상적인 연으로, 때로는 짧은 무운 시행으로 그 경험을 표현했고, 구두점은 전혀 찍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폴리네르는 입대하여(1914) 보병 소위가 되었고, 1916년에 머리를 다쳤다. 제대한 그는 파리로 돌아와 상징주의적 소설인 〈살해된 시인 Le Poète assassiné〉(1916)을 발표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3번째 시집 〈칼리그람 Calligrammes〉(1918)을 발표했다. 이 시집을 지배하는 것은 전쟁의 이미지와 새로운 연애에 대한 그의 집착이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로 쇠약해진 그는 유행성 독감에 걸려 죽었다.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 Les Mamelles de Tirésias〉은 그가 죽기 전해에 상연되었다(1917). 그는 이 희곡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불렀는데, 초현실주의라는 용어가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프랑수아 풀랭크는 이 경희곡을 희가극으로 각색했다(초연 1947). 아폴리네르는 시에서 대담하고 무모한 기법을 실험했다. 그의 〈칼리그람〉은 독창적인 활자 배열 덕분에 시이면서 동시에 도안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폴리네르는 언어의 색다른 조합으로 놀라움이나 경악의 효과를 내고자 했고, 이 때문에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고 부를 수 있다.
2108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댓글:  조회:9174  추천:0  2017-05-24
  저작자 보들레르 창작/발표시기 1862년 국가 프랑스 원제 Le Spleen de Paris 요약 프랑스의 작가이자 시인, 미술평론가였던 보들레르의 산문시(1862). 시인 스스로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상념의 물결침과 의식의 경련에 걸맞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면서 동시에 거친 시적 산문”이라고 정의한 이 작품에 대해 테오도르 방빌은 ‘진정한 문학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 새로운 문학형식은 로트레아몽, 랭보, 말라르메, 베를렌 등 근대 상징파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목차 작품 해설 작가 소개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Charles(-Pierre) Baudelaire)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의 저자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1855년) 작품 해설 은 산문시 50편과 헌사, 그리고 에필로그인 운문시로 구성돼 있다. 을 통해 보들레르는 화려한 외양의 파리가 아니라 뒷골목과 변두리에 숨은 은밀하고 고독한 파리의 뒤안길을 보여준다. 그는 도시를 묘사하기 위해 유곽이나 병원, 연옥, 지옥, 도형장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나열하는데 이는 파리라는 도시를 표현하는 알레고리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파리에 대해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애착을 갖고 있었다. 파리에 대한 그의 우울한 시선은 이러한 애착과 등가관계에 있다. 그는 파리에서 천국을 열망했지만 그의 몸이 발 딛고 있는 땅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술과 마약, 섹스에 탐닉하며 인위적인 천국을 꿈꾸었던 것의 한편에 탄식하듯 누워 있는 영혼, 은 그렇게 태어났다. 시인 자신은 이에 대해 ‘보다 많은 자유와 디테일, 영혼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을 얻은 악의 꽃’이라고 말한다. 작가 소개 스물네 살에 을 출판하면서 미술평론가로 등장한 보들레르는 이후 단편소설, 비평, 시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프랑스 문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해 소개하는 등 번역가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857년 젊은 시절부터 다듬어온 시를 정리해 을 펴냈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벌금과 함께 수록된 시 6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프랑스에서 공공의 적이자 저주받은 시인이 되었지만 문인들은 그가 ‘시에 새로운 전율을 부여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명석한 두뇌와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녔으나 심약했던 보들레르는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방탕한 생활로 날려버리고 평생을 빚과 병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았다. 마흔 여섯에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오피크 가(家)의 무덤에 묻혔다. 죽은 지 10년 뒤 비로소 그의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으며, 이후 현대시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Daum백과] 파리의 우울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107    아르헨티나 시인, 20세기 중남미문학 대표자 - 보르헤스 댓글:  조회:5031  추천:0  2017-05-1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1] 1899년 8월 24일 ~ 1986년 6월 14일  20세기를 대표하는 중남미의 시인, 소설가   음악계의 베토벤과 함께 문학계의 대표적인 신체장애 극복 사례[2]   1. 개요2. 작품목록 2.1. 시집2.2. 단편 소설집2.3. 수필집2.4. 기타2.5. 대표 단편들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시인 겸 평론가 겸 수필가 겸 소설가. 20세기 세계 문학의 지배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시자격인 인물이며, 특히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보르헤스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보다야 개수에서 딸리지만, 에코가 이 사람 빠돌이다. 에코 말고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와 롤리타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 온갖 쟁쟁한 작가들이 고개 숙이고 찬양하는 본좌. 1944년 , 1949년 의 발매로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3][4] 보르헤스의 가정 환경 상 스페인어보단 영어를 더 많이 접하게 되었고, 보르헤스 자신도 영어로 생각하고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스위스, 스페인, 마요르카 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보냈고 1919년 스페인에서 최후주의 운동을 주도하다가 1921년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와 문예지 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머리를 심하게 다쳐 패혈증으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그 뒤 자신의 정신이 온전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뒤부터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5] 시인으로 시작해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문학사, 나아가 지성사의 키워드 대부분을 섭렵한 먼치킨. 굳이 이름붙이자면 환상소설에 가깝지만 보르헤스 소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환상적 사실주의. 20세기 모더니즘의 경직된 세계를 허물었다고 평가받는다.[6] 덕분에 인문학과 철학 쪽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는 편. 철학 교재로 써먹는 대학도 있다고 한다. 환상문학 전반에 관심이 있어서, 프란츠 카프카, 에드거 앨런 포우,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와 같은 탈모더니즘적인 문학에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포우의 팬이라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투자하여 포우의 책을 스페인어로 번역했다.[7] 그의 단편소설은 다시 쓰기, 혹은 추리 소설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보르헤스는 착상을 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서술하지 않고, 그 착상을 서술한 책이 있거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그 사실과 책, 인물에 대해 평을 하는 식으로 적는다. 그 사실과 인물, 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리고 서술이 핵심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문장을 끝내 문장과 서술, 상상의 갈증을 표현한다. 이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고 평했다. 또한 평생 동안 단편소설만을 선호했는데, 단편으로 끝낼 수 있는 내용을 굳이 장편으로 적어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종이 낭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는 이야기. 보르헤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어의 풍부함보단 빈곤함을 추종하라고 말해왔다. 여담으로 본인 왈 짧은 단편은 머릿속에서 퇴고할 수 있으니 편했다고....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그래서 기본적으로 보르헤스 책들은 1~200 페이지로 얇은 편이다. 짧다곤 했지 쉽다곤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냈고 거의 평생 동안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책벌레. 하도 책을 읽어댄 탓에 30대 후반부터 결국 그 때문에 시력을 서서히 잃기 시작해서[8][9] 말년에는 완벽하게 시력을 잃고 말았다. 시력을 잃은 뒤에도 어머니나 비서, 친구들에게 대필을 부탁하기까지 하면서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이 책덕심은 결국 시력을 잃은 지 오래인 55세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자리를 얻게 되면서 보답받게 된다. 불교나 하이쿠 등 동양 문화에 깊이 심취해 불교 강의서를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실제로 보르헤스 작품을 보다 보면 불교와 관련된 키워드가 상당히 많이 튀어나온다. 한국에서는 1999년 민음사에서 전집을 발매했다. (에세이나 시집은 없고[10] 전부 소설집) 여기저기서 보르헤스 책을 번역했지만 정식 번역본으로 인정받는 것은 이쪽. 그런데 이 번역본이 상당히 읽기가 난해하다는 문제가 있다. 안 그래도 현학적인 문체로 영어권에서도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수두룩한 작가인데 하필 번역자가 문학평론가 출신 (…) 이 분의 더욱 현학적인 번역 탓에 가끔 GG치는 사람도 생긴다고. 그런 점에서 고증이 잘 된 번역일수도 후에 과 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의 일부로서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송병선. 한편 인종차별 발언을 곧잘 했다. 인종차별적 성향이 있었던 듯.... 진보와 문명을 앞세워 원주민 학살에 앞장서 온 남아메리카 자유주의 지식인 집단이 역사에서 이어온 흐름을 생각한다면 사실 의외일 거 하나도 없다. 보르헤스는 원주민 학살을 "문명화"라고 부르면서 옹호하였다.참고 페이지 그래서인지 평론가 호세 미구엘 에르난데스는 "그의 문학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지만 그의 원주민 문제발언은 나치가 하는 헛소리처럼 무시할 가치만 있다"라고 쓴 소릴 했다. 사실 에르난데스 같은 경우가 되려 당시, 아니 지금도 남미에서 소수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11]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보르헤스를 세계의 불의는 이야기해도 자기 나라 불의는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이라고 깠다.">[12] 인종차별적 발언 뿐만 아니라 위의 피노체트 건만 해도 그렇고, 이 당시 스페인과 중남미 문학계가 전반적으로 스페인 내전의 참화를 겪고, 냉전 치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군사 독재자들 아래에서 고생하던 시기라 좌경화가 강성했던 시절에 혼자 우파적 행보를 걸어서 정치적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 일단 본인 나름대로는 나치스와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고, 위의 인종차별적 발언과는 별개로 독일의 영향을 받은 아르헨티나 내의 반유태주의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처음에는 후안 페론의 포퓰리스트 정권이나 훗날의 군사 독재 정권도 옹호했으나, 조만간 둘 다 글러먹은 권위주의적 정권이라고 지지를 철회한, 일종의 귀족적 성향과 뚜렷한 원칙을 가진 우파의 모두까기 인형이다. 그런데 이런 소위 말하는 귀족적 인생관 위에 형성 된 독고다이식 우파적 자유주의와, 여기서 비롯 된 양비론적인 태도가 당장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 미겔 에르난데즈의 옥사를 보고 자라 파블로 네루다의 독살을 보며[13] 늙은, 20세기 대서양 양쪽을 할퀴어 놓은 이념 대립의 용광로 복판에 있었던 히스패닉 문학계 내에서 옹호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정치관의 차이 때문에 평생 연인 관계였던 여류 번역가이자 문필가 에스텔라 칸토와의 관계도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보르헤스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깔고 있는 기계적 세계관이 인간의 자유와 의지가 아닌 국가의 통제를 숭상하는 공산주의의 폭압성을 낳는다고 반공주의적인 태도를 평생 견지한 반면 칸토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기 때문.  여담으로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도사가 바로 보르헤스를 모델로 한 것이다. 장님이며 도서관을 관리한다는 점. 호르헤가 있는 도서관 역시 보르헤스의 소설 에 나오는 도서관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보르헤스가 환상을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전개한 것에 대한 오마쥬. 그리고 호르헤 수도사가 자기확신에 가득찬 광신도로 나오는 것은 보르헤스의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지만 정작 에코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악역으로 등장한 건 단지 훌륭한 악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은 오마쥬라고 생각했기 때문. 친구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와 함께 이시드로 파로디란 탐정을 창조하기도 했다.  은 당시 문학의 보수적인 문체를 비판하는 풍조를 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2. 작품목록[편집] 2.1. 시집[편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Fervor de Buenos Aires, 1923) 앞의 달(Luna de enfrente, 1924) 산 마르틴 노트(Cauderno San Martin, 1929) 시선집(Poemas, 1943) 시선집(Poemas, 1958) 시선집(Obras poeticas, 1964) 여섯 개의 현(밀롱가곡)을 위하여(Para las seis cuerdas(milongas), 1965) 타자, 그 자신(El otro, el mismo, 1969) 심오한 장미(La rosa profunda, 1975) 동전(La moneda de bierro, 1976) 암호(La cifra, 1981) 음모자들(Los conjurados, 1985) 2.2. 단편 소설집[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El jardin de senderos que se bifurcan, 1941)[14] 이시드로 파로디를 위한 여섯가지 문제(Seis problems para don Isidro Parodi, 1942 공저 Adolfo Bioy Casares) 픽션들(Ficciones, 1944) 알렙(El Aleph, 1949)  브로디의 보고(El informe de Brodie, 1970) 칼잡이들의 이야기(El informe de Brodie, 1970)  셰익스피어의 기억(Veinticinco de Agosto de 1983 y otros cuentos, 1983) 2.3. 수필집[편집] 심문(Inquisiciones, 1925) 내 기다림의 크기(El tamano de mi esperanza, 1926) 아르헨티나인들의 언어(El idioma de los argentinos, 1928) 에바리스토 카리에고(Evaristo Carriego, 1930) 토론(Discusion, 1932) 영원의 역사(Historia de la eternidad, 1936) 시간에 대한 새로운 반박(Nueva refutacion del tiempo, 1947) 또 다른 심문(Otras Inquisiciones, 1952)[15] 단테적인 아홉개의 에세이들(Nueve ensayos dantescos, 1982) 2.4. 기타[편집] 상상동물 이야기(El libro de los seres imaginarios, 1967) 보르헤스 강연집(Borges oral, 1979) 7일 밤(Siete Noches, 1980) 2.5. 대표 단편들[편집] 바벨의 도서관 알레프   [1] 본명은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다.[2] 단 유명한 장님 문학인으로서 처음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일리아스의 호메로스, 실낙원으로 유명한 존 밀턴 역시 맹인이다.[3] 노벨문학상은 탄 적이 없지만, 스페인어 문화권에서 노벨상격이라고 일컫는 세르반테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가 노벨상을 타지 못한 것은 그의 정치적인 성향이 문제시 됐기 때문이다. 얄짤없이 사악한 독재자인 피노체트를 찬양한다든지. 그런데 백년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말에 따르면 찬양을 빙자한 빈정거림이 분명했는데 서구인들에게 잘못 받아들여진 거라고 한다.[4] 1983년 거의 마지막 기회처럼 여겨지던 노벨 문학상이 윌리엄 골딩(파리 대왕의 작가)에게 돌아가자 빡친 위원들이 탈퇴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보르헤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은 '보르헤스의 수치'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의 수치'다." 라는 말도 하였다.[5] 남부(El Sur)라는 단편이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듯 하다.[6] 환상적 사실주의의 한 예로 거의 모든 작품에 하나 둘씩은 꼭 들어가는 가짜 주석들.[7] 러브크래프트에게 헌정한 소설도 있다. 이 경우,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써내려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의 문체를 짜증스럽게 생각해서 비꼬려는 의도로 흉내 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8] 독서가 시력 약화에 한몫한건 사실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유전 때문이다. 부계 쪽 혈통이 문제. 보르헤스의 아버지는 보르헤스가 벽안(어머니가 벽안이다)인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으나, 보르헤스가 성장하면서 벽안에서 갈색 눈으로 바뀌는 걸 보고 운명을 직감했다고.[9]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인게, 보르헤스가 도서관에서 알바(?) 비슷한 걸 뛸 때 왕따를 당하는 걸 감수하고라도 지하 책창고에 숨어들어서 작은 불빛에 책을 읽으며 눈을 혹사했다. 이 시절 시력 감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10] 대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가 민음사 해외 시집선을 통해 발매되었다.[11] 실제로 중남미에서 "히스패닉" 분류를 완전히 제외하고 인구조사를 할 경우, 절반이 스스로를 백인이라 보고하고 나머지 절반 대다수가 스스로를 흑인이라고 보고하며, 자신을 원주민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는 원주민 혈통을 짙게 가지고 있을 것임에도 이토록 중남미에서 원주민에 대해 갖는 선입견은 심각한 수준이다. 간혹 페루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나 이는 페루 공화국의 구성원들이 과거 잉카 제국의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이다.[1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놀라운 섬세함과 날카로운 이지로 "수치의 세계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나라의 수치에 대해서는 묻지조차 않는다. [13] 정식 사인은 암으로 인한 심정지이다. 그러나 독살 가능성이 인정된 바가 있다.[14] Ficciones 中 1부[15] 만리장성과 책들 ==================== //////////////////////////////////////// ====================   시학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간과 물결의 강을 주시하며 시간이 또 다른 강임을 상기하는 것, 우리들도 강처럼 스러지리라는 것과 얼굴들이 물결처럼 스쳐감을 깨닫는 것.   불면은 꿈꾸지 않기를 꿈꾸는 또다른 꿈임을 우리네 육신이 저어하는 죽음은 꿈이라 칭하는 매일 밤의 죽음임을 체득하는 것.   중생의 나날과 세월의 표상을 모년 혹은 모일에서 통찰해 내는 것, 세월의 전횡을 음악, 속삭임, 상징으로 바꾸는 것.   죽음에서 꿈을 보는 것, 낙조에서 서글픈 황금을 보는 것, 가련한 불멸의 시는 그러한 것, 시는 회귀하느니, 여명과 일몰처럼.   이따금 오후에 한 얼굴이 거울 깊숙이 우리를 응시하네. 예술은 우리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하네. 경이에 지친 율리시즈는 멀리 겸허한 초록의 이타케가 보였을 때 애정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 예술은 경이가 아니라 초록의 영원인 그 이타케.   예술은 또한, 나고 드는 끊임없는 강물과도 같은 것. 끊임없는 강물처럼, 본인이자 타인인 유전(流轉)하는 헤라클라이토스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시학」감상 / 이원(시인)   드라마를 보고  있었어요. 사랑의 간절함이 939살 불멸을 중지하게 한다는 판타지는 익숙한 것이지만, “나도 사랑한다 그것까지 이미 하였다”, “비로 올게 첫눈으로 올게”, 이 말을 하는 얼굴은 응시하게 되지요.   모든 생을 기억하는 눈에는 심연의 슬픔과 당장의 햇빛이 동시에 담기지요. 그래서 비스듬히 보고 있다가도 시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되지요.   남미 문학의 거장 보르헤스는 소설로 더 많이 회자되지만 시로 출발하였어요. “우주(다른 사람들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는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의 문장. 수수께끼를 내는 자라고 불렸다는, 그리스의 시적인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 거울과 강물. 회귀와 유전(流轉). 흐르는 물은 늘 다르지요. 동시에 같은 물이기도 하지요. 어디에 찍느냐, 문제는 방점이지요.   응시하는 얼굴은 비추는 얼굴이에요. 여명과 일몰은 대립적 시간이며 대립적 시간이 아니지요. 경이와 초록 중 시는 초록에 방점이 있지요. 전면적 포용이거나 초월이 된다면 거울은 텅 비게 되지요. 꿈과 죽음의 대면이 매일매일이 키우는, 초록이지요.    ----------------------------------------------------------------------------------------- 내가 만일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 보르헤스 내가 만일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이제까지처럼 그렇게 너무 완벽하게만 살려고노력하지 않고 좀 더 실수도 많이 하고 마음 푹 놓고 한껏 늘어져 쉬기도 하며 이제까지 보다 더 바보가 되어 어떤 큰 일이 생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련다. 내가 다시 인생을 거듭 살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덜 깔끔하게 굴고, 더 많은 모험을 하고, 더 많은 여행을 하며 날 저물 때까지 더 많은 명상을 하고 더 많은 산엘 오르고 더 많은 강에서 수영을 하련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하고 더 적은 납작콩을 먹고 더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허상의 문제는 제쳐 놓고 더 많은 실상의 문제를 생각하련다. 나는 평생을 너무 신중하고 유익하게만 살려고 애쓴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때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 하지만 이제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전적으로 행복한 순간 순간만을 위해 살련다. 나는 어디로 여행을 가든 체온기와 온수 주머니와 우산과 낙하산을 꼭 가지고야 떠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지만 이제 다시 살 수 있다면 좀 더 가벼운 차림으로 유유자적 떠나리라 이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른 봄에 시작해서 늦가을까지 맨발로 뛰어다니고 내 집 근처 골목길을 더 많이 맴돌고 더 많은 새벽을 명상 속에서 맞이하고 더 많은 아이들과 뛰어 놀련다.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그러나 나는 벌써 85세, 이제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2106    시인 윤동주 "생체실험"의 진실은?... 댓글:  조회:5684  추천:0  2017-05-08
시인 윤동주  '생체실험' 진실은?... 2월 16일은 시인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72년이 되는 날입니다. 1945년 2월 시인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젊고 건강했던, 운동과 산책을 즐기던 시인이 감옥에 갇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확인한 결과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한다.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 명은 산 채로 해부된 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 끔찍한 생체실험은 집도 책임자였던 이시야마(石山)라는 의사였는데 그는 종전 뒤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취조 받다가 자살해 버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 실험의 전모는 묻혀 버렸다. 이때 기소된 30여 명의 관계자는 교수형과 무기징역 등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약리학자들에 따르면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윤동주의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와 연관지을 수 있겠다.    =================== [전쟁과 의술] 731부대와 마루타   日, 해마다 600명 생체실험… 최소 3000여 명 희생   병력 3000명에 8개 부서로 구성…전염병균 연구 전쟁포로·구속 수감자 대상 각종 세균·약물 실험 1945년 8월 소련군에 패하고 자료·시설 폭파 후 도주 반인륜적 범죄 저지른 가해자들 조용히 ‘일상’에 복귀     지난해 개봉된 영화 '동주'를 보면 일제 말 일본 유학 중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윤동주와 송몽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순국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았는데, 이는 일제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1935~1936년, 일제는 '일본은 금속 광물이 부족하므로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며, 세균전은 살상 범위가 넓고 전략적으로 이롭다'고 세균전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시이 시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히로히토 일왕의 명으로 네 개의 세균전 부대를 세웠다. 중국 헤이룽장(흑룡강)성 하얼빈에 있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는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지휘했는데, 1936년 만주를 침략할 때부터 세균전에 대비해 하얼빈 남쪽 20㎞ 지점에 관동군 산하 세균전 비밀연구소를 세웠다. 일제는 이를 '방역급수 부대'로 부르며 연구 사실을 은폐했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는 '731부대'로 이름을 바꿨다. 이 부대는 만주사변이 시작된 1936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전쟁포로와 구속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 등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방역급수 부대'서 '731부대'로 이름 바꿔 731부대는 병력 3000명에 8개 부서로 구성됐고 제1부는 전염병균에 관해 연구했다. 수감된 피험자들은 '껍질 벗긴 통나무'란 뜻의 일본어 '마루타'로 불렸다. 감옥은 300~400명의 마루타를 수용했고 1940년 이후 해마다 600명의 마루타가 생체실험에 제공돼 최소한 3000여 명의 중국·러시아·한국·몽골인이 희생됐다. 실험 내용을 보면 밀폐된 방의 공기를 빼내면서 인체가 파괴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도 있고, 말이나 원숭이의 피를 인체에 주사하는 잔악무도한 것도 있다. 총기를 만들 때 총알이 어느 정도 깊이로 사람을 뚫을 수 있는지 알몸, 갑옷, 그 밖의 다양한 옷을 입힌 조로 나눠 실험을 강행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독일과 일본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비단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생전 모습. 페스트균·장티푸스균·콜레라균 등  731부대에서는 세균 가운데 페스트균·장티푸스균·파라티푸스균·콜레라균을 주로 실험했다. 세균이 사람에게 감염되는 경로와 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임신부와 아이를 포함한 피험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근육주사법'이 가장 효과적인 감염법이라고 결론 내렸다. 노출 부위를 다르게 하려고 청동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팔을 가린 피험자들을 야외에 묶어두고, 비행기에서 세균 폭탄을 투하하는 실험도 했다. 피험자가 동상에 걸리게 해서 팔다리가 썩어들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실험을 하며 그에 따른 치료법 등을 연구했다. 이 실험에서 동상을 치료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물의 온도가 섭씨 37도라는 것도 알아냈다. 인간 육체의 특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려는 듯이 아이와 엄마를 함께 두고 뜨거운 바닥에 계속 열을 가해 아이를 살리려는 모성이 먼저인지 어머니의 살고자 하는 본능이 먼저인지를 알아보는 처참한 실험도 자행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에 패하자 일본은 급하게 철수하며 731부대의 자료와 시설들을 폭파했고 인적 증거마저 없애려 했다. 독가스로 죽인 40명 피험자의 시체는 미처 태우지 못하자 강에 던지거나 구덩이에 묻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책임자들 자료 美에 넘기고 전범재판 면해 전쟁이 끝나고 독일의 생체실험 의사들이 공개재판을 받은 데 반해, 일본의 경우 이시이 시로를 포함한 731부대의 책임자들과 의사들은 축적한 자료를 미국에 넘기는 조건으로 전범재판을 면했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 수만 쪽에 달하는 실험 보고서를 은폐한 가해자들은 조용히 '일상'에 복귀했다. 훗날 중국이 전범재판을 열어 그 가운데 몇몇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또 전범들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된 것은 필연이 아닐 수 없다. 의학이 인간의 가치와 생명 존중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이해 없이 오로지 이념이나 애국심의 가면을 쓴 악마와 손을 잡게 되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 사례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윤리 없는 과학의 마수를 오롯이 드러낸 것이다.      =================================== 아무리 우리의 아픈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이와 관련한 보도이라도 왜곡하거나  과장보도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일본으로부터 왜곡된 역사의 진상에 대해 논리적규명이 이루어질경우 공격당하거나 오히려 민족적 갈등과 국수주의의 부활을 야기시킬수 있기때문입니다!  이번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의 취재에 협조하면서도 윤동주시인의 후쿠오카 생체실험 의혹에 대해 인공혈액의 주사에 의한 생체실험보다는 이질균등의 백신투여에 대한 부작용일 가능성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SBS보도와 관련한 일본 큐슈대학 미군조종사 생체해부사건의  인공수혈실험은 일본731부대에서 1941년도부터 수차례에 걸쳐 마루타를 이용한  생체실험을 한 연구보고서가 존재하고 큐슈대학의 미군조종사2명에 대한 인공혈액 수혈과 같이 이와 관련한 실험은 그 주사량에 따라 관련 실험대상자의 생체해부를  즉시 필요로 하였던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공혈액의 투여량에 따라 반응을 측정하기 위한 인체해부실험대상 마루타의 장기부위에 대한 생채해부를 즉시 시행하지않고 윤동주시인의 경우와같이 해당 가족에게 시체를 반환통지한다는것은 인공혈액생체실험과는 거리가 있다고 사료되는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윤동주 시인과 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의 재소자에 대한 주사는  인공혈액주사에 의한 생체실험이 아니라 중국에서 일본731부대가 봉천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미군들에게 주사한 발진티푸스, 성홍열, 이질등의 백신실험주사를  수차례 투여한것과같이 당시 많은 미군포로가 그 부작용으로 사망한 사건과  유사하다고 판단합니다! 즉 치안유지법등의 가벼운 형을 받은 윤동주시인에게 일본의 사형수에 해당하는  마루타와같이 생체부검이 필요로한 인공혈액의 수혈로 인한 사망으로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것입니다! 비록 윤동주시인의 사인이 뇌일혈이라 하더라도 백신실험주사의 부작용에도  매한가지인것입니다! 단지 1945년 규슈대학의 미군조종사의 생체해부실험이 있었다하더라도  그와 동일하게 유추해석하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재소자에 대한 주사를  인공혈액의 주사라고 간주하는것은 무리가 있다는것입니다! 즉 만약 윤동주시인이 인공혈액의 생체실험대상자였다면 후쿠오카 형무소가  아니라큐슈대학 실험실에서 생체해부로 살해당했어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윤동주시인에 대한 후쿠오카형무소에서의 주사는 이질에 대한  백신실험주사이고 이의 부작용으로 사망한것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큐슈대학에서 이질과 관련된 많은 연구논문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전쟁말기의 광적인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올바르게  깊이 새겨 다시는 이땅에 전쟁의 씨앗이 싹트지않도록 염원합니다!-
2105    스웨덴 국민시인 -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댓글:  조회:5113  추천:0  2017-05-07
요약 뛰어난 은유기법과 간결하지만 공명이 있는 언어로 유명한 스웨덴의 서정시인으로 201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그가 작품에서 사용하는 은유는 다른 대상을 빌려서 표현하는 것이 아닌, 표현하려는 대상 자체를 언어적으로 변형한 것에 가깝다. 문학계의 초현실주의 작풍과 연결되어 있는 그의 시는 일견 이해할 것 같으면서 동시에 불가사의한 면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버지는 언론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외가에서 살게 되었다. 청년 시절 당시 스웨덴의 병역의무에 따라 군대를 다녀왔다. 최초의 시 모음집 〈17편의 시 17 dikter〉(1954)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절제된 언어와 놀라운 형상화를 보여주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956년 스톡홀름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심리학자이자 사회복지사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어진 그의 시집들, 곧 〈여정의 비밀 Hemligheter påvgen〉(1958), 〈미완의 천국 Den halvfärdiga himlen〉(1962), 〈반향과 흔적 Klanger och spår〉(1966)들은 화법이 좀 더 분명해지고 작가적 시각도 뚜렸해졌다. 이러한 시집들과 후기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시적 관찰은 극도의 간결함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의미적으로도 풍부함을 더했다. 한 비평가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들은 음향적으로 완벽한 실내악이다. 그 안에서 모든 모순된 떨림들을 긴장감 없이 들을 수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신세대 시인들과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시에 정치적 메시지가 결여되어 있다며 그를 비난했다. 1960년대 그는 미국 시인 로버트 블라이와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고, 이후 블라이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앞장섰다. 블라이가 처음으로 전권을 번역한 시집 〈어둠 속에서 보기 Mörkerseende〉(1970, 영문판 제목은 Night Vision)는 , 트란스트뢰메르가 스웨덴의 시인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보낼 당시에 쓰여진 시들이었다. 그가 1973년에 펴낸 〈작은 길 Stigar〉에는 블라이의 작품 몇 개가 스웨덴 어로 번역되어 함께 실렸다. 소년 시절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발트 해안은 〈발틱스 Östersjöar〉(1974)라는 시집의 배경이 되고 있다. 후기 작품으로 〈진실의 장벽 Sanningsbarriären〉(1978), 〈와일드 마켓플레이스 Det vilda torget〉(1983),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För levande och döda〉(1989) 등이 있다. 1990년 트란스트뢰메르는 노이스타드 국제문학상을 수상했으나 같은 해 뇌졸중에 걸려서 말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건강 상태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회고록 〈기억이 나를 본다 Minnena ser mig〉(1993), 2권의 시집 〈슬픔의 곤돌라 Sorgegondolen〉(1996)와 〈거대한 수수께끼 Den stora gåtan〉(2004, 모음집)를 출판했다. 〈곤돌라의 슬픔〉은 프란츠 리스트의 〈슬픔의 곤돌라 La lugubre gondola〉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2011년에는 〈시와 산문 1954~2004 Dikter och prosa 1954~2004〉을 발간했다. 직접적인 언어와 강력한 이미지로 만들어진 그의 시작품은 그를 20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번역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시인으로 만들었다. 블라이가 번역하여 세상에 나온 트란스트뢰메르의 모음집들에는 〈친구여, 어둠을 마셨는가 : 3인의 스웨덴 시인들, 하리 마르틴손, 군나르 에켈뢰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Friends, You Drank Some Darkness: Three Swedish Poets, Harry Martinson, Gunnar Ekelöf, and Tomas Tranströmer〉(1975),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1954~86년의 시선집 Tomas Tranströmer: Selected Poems 1954~86〉(1987, 다른 번역자들과 공동번역), 〈미완의 천국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명시 The Half-Finished Heaven: The Best Poems of Tomas Tranströmer〉(2001)가 포함되어 있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다른 많은 언어로도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는 그의 시와 에세이를 모은 〈기억이 나를 본다〉(2004)가 출간되었다. [Daum백과]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     출생 1931년 4월 15일 사망 2015년 3월 26일 국적 스웨덴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수상 2011년 노벨문학상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詩賞), 노이슈타트 국제 문학상 등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출신의 시인이다.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psychologist)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에서부터 70대에 이른 현재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한마디로 ‘홀로 깊어 열리는 시’ 혹은 ‘심연으로 치솟기’의 시이다. 또는 ‘세상 뒤집어 보기’의 시이다. 그의 수많은 ‘눈들’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시 한편 한편이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하다.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지만, 처녀작에서는 잠 깨어남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전도되어 있다. 초기 시에서 깨어남의 과정이 상승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 낙하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하강의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綠陰)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 스웨덴 자연시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 후 더 개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해졌다. 그리고 세상을 높은 곳에서 신비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연 세계를 세밀하고 예리한 초점으로 묘사하는 그를 스웨덴에서는 '말똥가리 시인'이라고 부른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서구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연 스웨덴의 국민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는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 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북구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냈다. 201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이러한 시작(詩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보여준 일관된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결코 서두름 없이, 또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고요한 깊이의 시 혹은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2015년 3월 26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90년대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다 끝내 2011년 수상의 영예를 안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1996년 폴란드의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이후 15년 만에 탄생한 시인 수상자였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시작 활동과 더불어 심리학자로서 약물 중독자들을 상대로 한 사회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트란스트뢰메르가 보는 이 세상은 ‘미완의 천국’이다. 낙원을 만드는 것은 결국 시인과 독자들, 자연과 문명, 그리고 모든 이분법적 대립구조들 사이의 화해와 조화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벨상 수상후보이자 스웨덴을 대표하는 트란스트뢰메르 시집의 국내 출간은 경하할 만한 일이다. 이 세상의 끝, 등 푸른 물고기들이 뛰노는 베링 해협이 산출한 시를 통해 한국 독자들은 미지의 세계로 지적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꿈꾸는 방랑자들이기에. -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대표작 기억이 나를 본다 순간에 대한 강렬한 집중을 통하여 신비와 경이의 시적 공간을 구축하면서 우리들의 비루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의 시는 말똥가리처럼 세상을 높은 지점에서 일종의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되, 지상의 자연세계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춘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인생의 빛나는 종합을 성취하였으며 자연과 초월과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이데일리 장서윤 기자]=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신문지 한 장이 몇 달째 누워있다. 사건을 가득 담고/ 빗속 햇빛 속에 밤이나 낮이나 신문은 그곳에서 늙어간다/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고, 배추머리가 되어가는 중이고/ 땅과 하나가 되어가는 중이다`(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역사에 대하여` 중).  15년 만에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스웨덴 출신의 작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영어권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으로는 가장 잘 알려진 현대 시인이다. 1931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그는 시인이자 심리학자, 번역가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23세였던 1954년 `17개의 시`로 데뷔한 그는 20대부터 70대까지 총 11권의 시집, 20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주로 세계와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깊은 사색을 다루고 있으며 모더니즘 시의 전통을 따라왔다. 또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 간 경계지역에 대한 탐구도 그의 작품 세계에서 주요 영역을 차지해왔다.   60여년에 가까운 시작(詩作) 활동을 통해 1년에 4~5편 정도로 비교적 적은 작품을 발표해왔으며, 그의 시는 미국의 로버트 블라이, 메이 스원슨 영국의 로빈 풀턴 등 영어권 시인들에 의해 번역됐다. 그간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 노이슈타트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도 쌓아 왔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국내에선 2004년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들녘)가 유일하게 번역·출간된 바 있다.     한편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지난 1996년 폴란드 출신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이후 15년 만이다.  ============================= 201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 출신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가 지난 2015년 3월 26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그의 작품 출판사 측이 27일 발표했다. 트란스트뢰메르는 스웨덴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 문단에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이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다 2011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96년 폴란드의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이후 15년 만에 탄생한 시인 수상자였다. 수상 당시 페테르 엥글룬드 한림원 종신 서기는 “역사와 기억, 자연, 죽음 같은 중대한 질문에 대해 집필했다”고 평했다. 그의 시는 은유와 심상(心像)이 특히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기억이 나를 본다’와 같은 작품이 번역 시집으로 나왔다. ///모바일한경 [Daum백과]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북 어워드 사전, 예스 24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Tomas Tranströmer 트란스트뢰메르(2008년) 출생 1931년 4월 15일 스톡홀름 사망 2013년 3월 26일 (81세) 스톡홀름 직업 시인 국적  스웨덴 배우자 모니카 블라드
2104    모택동 시가 심원춘. 눈 댓글:  조회:3821  추천:0  2017-05-07
모택동     모택동(1893.12.26-1976.9.9)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정치가, 사상가, 군사가, 철학가, 역사학가, 시인, 령수, 혁명가이다. 진시황으로부터 강희(康熙)에 이르기 까지 역대 국가 지도자 중 모택동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모택동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것이 그의 시라고 말한다. 그는 천부적인 시인이었으며, 시인 정치가이자 시인 철학가라는 것이다.           沁园春 ▪  雪                   심원춘▪ 눈   毛泽东                              모택동   一九三六年二月                 1936년 2월   北 国风光,                       북국의 풍광 千里冰封,                       천리에 얼음 덮이고 万里雪飘 。                       만리에 눈 날리네. 望长城内外,                    바라 보니 장성 안팍은 惟余莽莽;                       어디라 없이 백설 천지  大河上下,                       대하의 상하류도    吨失滔滔。                       갑자기 도도한 기게 잃었네. 山舞银蛇,                       산은 춤추는 은배암이런가 原驰蜡象,                       고원은 줄달음치는 흰 코끼리런가 欲与天公试比高。              하늘과 높이를 비기려네.   须晴日,                           날이 개어 看红装素裹,                     바라보면 붉은 단장 소복차림 分外妖娆。                        유난히 아릿다우리.   江山如此多娇,                  강산이 이렇듯 아름다워 引无数英雄竞折腰。            수많은 영웅들 다투어 허리 굽혔더라. 惜秦皇汉武,                      가석하게도 진 시황, 한 무제는 略输文采;                         문재 좀 모자랐고 唐宗宋祖,                         당 태종, 송 태조는 稍逊风骚。                        시재 좀 무디였네.              一代天骄,                        일대의 영웅 成吉思汗,                        칭키스칸도 只识弯弓射大雕。              활 당겨 독수리 쏠 줄 밖에 몰랐거니, 俱往矣,                           모두 지난 일이어라 数风流人物,                    풍류 인물 세려면리, 还看今朝。                       오늘을 보아야 하리.       모택동의 시 에서 모택동은 역사상 영웅 인물 다섯명을 손꼽았다. 육국(六國)을 멸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시황, 재위 오십사년 대학을 일으키고 유교를 숭상하였으며  와이(外夷·)를 쳐서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한 한무제, 이십삼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조(高祖)를 도와 사방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명주라 일컬어진 당태종, 춘추십이열국의 하나인 송나라를 세웠던 미자(微子), 원나라 태조이며 유럽에 원정하여 동서양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칭키스칸 등이 그들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공적인 혁혁했건만 아쉽게도 문채(文采)가 모자랐다고 평했다. 数风流物人物,还看今朝 (영웅 인물을 찾으려면 오늘을 둘러보아야 하리)라고 읊은 모택동의 기개는 1936년 당시 장개석 국민당 군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것이다. 조국과 인민의 미래를 위한 준비된 지도자로서의 자신감이 돋보이는 시다.                                                             
2103    꾸청, 모자, 시, 자살, 그리고 인생... 댓글:  조회:4462  추천:0  2017-05-07
  [일기]12월 15일 일요일   유리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 오전 장롱 안을 정리했다. 살이 쪄서 더 이상 입기 힘든 55 사이즈 정장이 아직 몇 벌이나 남았다. 다 직장 다닐 때 입던 옷이다. 워낙 보수적 집단이다보니 청바지나 원피스 종류는 입지 못했다. 옷과 집단성에 대해서 어디 쓴 글이 있는데 찾기 귀찮다. 그동안 셋째 올케와 숙자에게 처분했음에도 이렇게 남은 옷을 볼 땐 기분이 쿰쿰하다. 옷에도 기억이 스민다. 만난 사람, 일어났던 일, 다녔던 거리가 소환된다. 사진처럼 옷에도 추억이 담겨 있어서 찬찬이 쓰다듬다가 집어 넣었다. 새 봄에는 누군가에게 줘야겠다.    ■ 저녁나절 경향신문 블로그에 원자력 서평을 한 편 정리하고 복순이에게 저녁을 먹이면서 시럽을 한 숟가락 먹였다. 폐가 나쁜 상태에서 추운 날씨에 자꾸 바깥에 나가 걱정이다. 야단을 쳐서 집으로 들여 보냈다. 알라딘에 들어와 일기를 한 편 써야겠다고 로그인했다가 ‘꾸청의 모자’를 써야겠다는 지난 일기가 밟힌다. 웬만하면 이런 약조 아닌 약조는 하지 않아야지. 귀찮다.      공개일기를 쓰다보면 스스로에게 한 말이 익명의 독자에게 약조처럼 비춰질 우려가 있는 것 같다. 즐겨 읽는 티스토리의 한 블로그에서 비슷한 경우를 봤다. 독서일기는 아니었지만 “다음번에 계속”이라는 글을 기다린 적이 있다. 영화 에 얽힌 뒷담화였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마지막 영화이며 다음 편 글에 감독 이야기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다른 영화 이야기만 올라왔다.    처음엔 궁금해하다가 까무룩 잊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 블로그에 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댓글로 묻고 있었다. 주인장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깜빡했는데 언제 한 번 쓸게요” 그러니까 “다음번에 계속”은 대개 “다음번에 안 계속” 할 가능성이 높다. 내 버릇이 이렇게 굳어진 건 쓰는 일 보다 읽는 일에 더 치중하며, 쓰는 일 보다 읽는 일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깜빡 차원이 아니다. 귀찮다.   ■ 꾸청(顧城)의 모자   꾸청을 구글 이미지에서 찾으면 모자 쓴 사진이 수두룩하다. 터키 남자들이 쓰는 전통 모자 tarboosh와 비슷한 원통형 모자다. 꾸청이 이 모자를 쓰게 된 이유는 간략하게 나온다. 《잉얼》1권 말미에 붙은 에서 유세종 한신대 중국학과 교수 설명을 인용하면 이렇다. (공개 독서일기는 이런 것까지 쓴다는 점에서 번거롭다. 숙고해 볼 문제)   “이즈음부터 그는 굴뚝처럼 생긴 이상한 모자, 청으로 된 원형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꾸청이 자살한 뒤, 그의 아버지 꾸꽁은 이 모자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였다. 아들은 “무언가 둘러싸맨 듯한 원통형 모양의 헝겊모자를 즐겨 썼다. 그 아인 그 모자 모양이 베이징성(北京城)과 흡사해서 그것을 쓰면 자기가 집을 떠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청으로 된 모자는 무슨 모자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으로 된 모자’가 아닐까 추측한다. 아니면 청바지 원단과 같은 ‘청으로 된 모자’일수도 있다. 그러나 꾸청은 털실로 짠 모자, 수가 놓인 모자도 썼다.)   인용글에서 가리키는 ‘이즈음’은 열아홉 살에 하방(遐方)을 마치고 베이징 문단에서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을 무렵이다. 꾸청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다. 1969년 문화혁명 폭풍 속에 우파분자로 낙인 찍힌 아버지와 산동성 동북지방의 한 돼지농장으로 보내졌다. 베이징의 관리 자식으로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꾸청은 들판에서 거듭 났다. 산과 강, 들판과 계곡을 누비며 광활한 자연의 정기를 마음껏 흡수한다. 마치 물 먹은 스펀지처럼 이 때부터 꾸청의 사상은 풍부한 원시림처럼 풍성해진 것 같다. 굴원과 도연명과 두보를 비롯해 빅토르 위고, 발자크, 안데르센, 도스토예프스키와 월트 휘트먼 등 남들이 학교를 다닐 때 돼지가 뛰어 다니는 들판에서 책을 읽었다.    하방이 풀려 베이징으로 복귀한 후에도 목수일과 페인트 공, 공사장 잡부 일 등을 하면서 광적인 독서를 이어 나갔다. 하방 당시 읽은 책이 인식의 넓이를 확장해줬다면 베이징 복귀 후 독서는 깊이 있는 탐구였다. 헤겔의 변증법과 맑스주의를 공부하며 철학과 역사에 심취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고 싶었다.”. 당시 꾸청은 일기에서 탐독의 이유를 밝히며 책에서 자신과 세계를 찾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에서도 책을 좋아했던 데보라는 누들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워. 나는 모든 걸 알고 싶거든” 그러나 책에 세상의 모든 진리와 모든 이야기가 과일쨈처럼(‘잼’이 아니다. ‘잼’보다는 ‘쨈’이 침을 고이게 한다) 농축된 것은 아니다. 책 밖 방언이 펄떡펄떡 뛰는 활어라면 책 속에 깨알처럼 박힌 글자는 그 활어를 갖고 요리한 것, 레디컬인가 2차 가공인가의 차이.       ■ 그리고 하오랑   꾸청의 노동과 탐독은 프랑수아 쳉이 일흔 살에 쓴《티아니 이야기》의 주인공 ‘하오랑’을 연상시킨다. 막일을 하며 책을 읽은 하오랑의 광대한 독서는 그에게 지적 유희를 넘어 사상을 재편성하고 마침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숭고한 가치를 돌아보게 했다. 물론 꾸청은 베이징의 출세지향에 붕 뜬 분위기에 일찍 염증을 느꼈고 하오랑처럼 담대한 인물이 아니다. 두 사람의 광적인 독서는 비슷하나 하오랑은 생애 전체로 책을 완성한 실천적 인물이었고 꾸청은 심약한 자아에 매몰됐다.    그러므로 하오랑과 꾸청은 독서력을 견줄만하나 생애를 비교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삶은 그렇게 평면 액자처럼 단순하지 않다. 심약함과 대범함은 우열 대상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 크고 작은 것의 가치와 의미가 다르듯이 상대성을 띠었다고 해서 절대적 평가로 비교할 수 없고 가늠할 길 없고 동질화 할 수 없는 고유성, 한 개체와 개체는 같은 이름으로 호명되는 성질이 아니다. 그래서 지나친 확신은 무지와 같고 무지는 위험한 것일지 모른다. 아니 겪어 본 바에 의하면 무지는 맹목적 낙관만큼이나 위험하다. 여기서 무지는 지식을 많이 알고 적게 앎이 아니다. 아, 관두자. 이런 일기로 호젓한 밤 시간을 공연히 진지하게 만들기 싫다.    안 그래도《티아니 이야기》를 한 권 주문했다. 2001년 출간된 이 책은 어쩌면 절판이나 품절 위기에 처해질지도 모른다. 문화혁명을 관통하는 섬세한 대서사시를 읽으며 여러번 감탄했다. 그래서 두번째 책《독과 도》에서《티아니 이야기》를 가리켜 “비단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문장마다 진중한 공을 들였다.” 라고 소개했다. 내가 쓴 이 감탄문 때문에《티아니 이야기》를 위시리스트에 올려놨지만 절판되어 속상하다고 쓴 어떤 독자 푸념을 인터넷에서 봤다. 이렇게 잘쓴 소설이 왜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백년 동안의 고독》과 함께 뽑을 근사한 소설이다.    꾸청의 모자를 쓰다가 하오랑까지 훌쩍 넘고 말았다. 깊은 밤, 꾸청의 모자 사진 검색을 한참이나 계속했다. 누군가 남긴 흔적을 대면하는 일, 하물며 이제는 그 자국만 애잔하게 남은 과거를 보는 일은 스산하다. 함박눈이 펄펄 내렸으면 싶은 밤이다. 남은 막걸리나 한 잔 마셔야겠다.       [출처] 37세에 자살한 시인 꾸청顾城/ 김금용 |작성자 푸른섬        
2102    중국 현대시인 - 고성(꾸청) 댓글:  조회:4406  추천:0  2017-05-07
   37세에 자살한 시인 꾸청(顾城)    김금용/ 시인             몽롱파 시인 꾸청의 방황과 사랑      ‘우연’ 이라는 말을 극히 싫어하지만, 때론 나도 내 삶 속에서 ‘우연’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연히, 나는 꾸청顾城(1956- 1993)의 일생을 그린 영화 《꾸청의 이별과 사랑 顾城别恋》을 보게 됐다. 그것도 올 6월 초 홍콩에서, 아주 우연히,..!  마치 내가 ‘시와 세계’의 원고청탁을 받고 어떤 시인을 소개해야 할까, 고민하는 걸 알고 계시해 준 것처럼, 밤늦게 혼자 리모콘을 돌리던 내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알아들을 수 없는 광동어였지만, 분명 몇 년 전 내가 읽었던 한 시인의 사진 속 얼굴이 똑똑하게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 아래 눈이 휑할 정도로 동그란, 피리 부는 소년 같은 남자의 영상, 주방장 모자 같은 흰 모자를 높이 쓴 그 모습이 왠지 그를 슬프게 하던,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바로 중국 몽롱시의 대표시인, 꾸청이었다. 뉴질랜드 북쪽의 한 작은 섬을 배경으로 꾸청과 그의 아내 시에예谢烨, 그리고 그를 좋아하며 두 부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내던 한 여인 ‘잉얼英儿’과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던 뉴질랜드 이웃들과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왜 그가 그의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호 수팅舒婷과 그녀의 시편을 소개할 때 이미 거론한 것처럼, 꾸청은 몽롱시의 대표시인이다. 또한 당대의 낭만주의 시인이기도 하다. 초기의 그의 시는 아이들처럼 천진한 풍격과 몽환의 정서를 갖고 있었다. 직감과 인상적인 어휘를 사용, 영탄 섞인 동화 속 소년생활을 엿보이게 했다. 두 행으로 이뤄진 시《일대인一代人》 “어둠은 나에게 까만 눈동자를 주었다 / 나는 그것을 통해 광명을 찾는다 ”는 지금까지 중국현대시의 경전이 되고 있다.   꾸청은 1956년 9월 24일, 북경에서 태어났다. 문혁이 일어나던 해인 1969년에 비판을 받아 산동성 광베이廣北농장으로 쫓겨간 아버지 꾸공顾工을 따라 그는 12세에 학업을 중퇴하고 돼지를 키웠다. 1973년부터는 그림을 배우다가 1974年 북경으로 돌아와 운반공과 목공일을 하며 가끔 차출되어 편집을 도우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문혁이 끝나면서 1980년 초 직장은 해체되고 한 때 표류생활을 하면서도 21세인 1977年《민들레蒲公英》라는 시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으며 24세이던 1980년엔 《별들(星星)》이라는 잡지에 이란 시를 발표, 역시 시단의 강렬한 반향과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몽롱시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베이징문예北京文艺》、《산동문예山东文艺》、《소년문예少年文艺》등에 시를 발표하며 80년대 주류를 이뤘던 파의 아이 칭艾 青, 수 팅舒婷에 이어 3대 대표시인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985년 그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 87년엔 구미문화교류방문단에 끼어 창작 강의 활동을 하다가 88년엔 뉴질랜드로 가서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쳤으며 오크란 대학의 아시아언어 연구원으로 초빙,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지만 곧 사직하고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한편 1992년, 그는 독일학술교류중심(DAAD) 창작기금을 받으며 잠시 독일에서 시작생활을 시작했으나 현실과 이상사이의 갭을 허물지 못한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그마저 사직하고 뉴질랜드 북방의 한 작은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근 일 년 만에 생활고와 심약한 그의 정신상태 등을 이유로 그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1993年10月8日 급기야 아내를 도끼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많은 매체에선 “꾸청이 도끼로 부인을 살해하다”라고 보도하면서, 동화시인이었던 그가 악마에 의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살인자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사후 일부 그 누명은 벗겨졌지만 (꾸청의 누나 꾸샹顾鄕은 “꾸청최후의 14일”이라는 기획물에서 말하길, 도끼는 우연히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며,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 참혹한 사건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몇 달 전인 1993年 3月 그들 부부는 중국으로 귀국하여 가족과 문인들을 만나고 다시 독일을 거쳐 뉴질랜드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내 시예예와 꾸청은 1979년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4년간 연애를 하다가 1983년 결혼했다. 1987년 같이 조국을 떠나 자살을 할 때까지 그의 아내는 그의 잦은 실직과 이사, 가난, 그리고 꾸청을 쫓아다니며 함께 살기도 했던 여인,‘잉얼’ 등으로 많은 심리적 고초를 견뎌내는 중에도 관용과 미덕을 겸비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극단의 자기 중심적이었던 꾸청으로서는 그의 어머니이자 누나 노릇을 해오던 그녀를 떠나가게 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내가 보았던 홍콩에서 찍은 《꾸청의 이별과 사랑 顾城别恋》이란 영화는 꾸청 자신이 남긴 《잉얼英儿》라는 소설 내용이 반영된 것이었다. 꾸청이 최후에 보여준 광폭한 모습은 그의시를 좋아해 쫓아다니던 한 여인 때문이라는 항간의 추측도 있었는데, 그 ‘잉얼’이란 여인의 실제 본명은 리잉李英으로 현재《시간诗刊》잡지사의 편집을 맡아보는 마이치麦琪라는 필명의 여인이다. 그러나 마이치는 꾸청이 죽은 후 그녀에게 남겨진 이런 주홍글씨를 명확히 거부하고 있다. 한편 1993년 12월22일 뉴질랜드 경찰국을 통해 중국영사관에 전달된 그의 유서는 모두 네 통이었다. 부모님에게, 엄마에게, 누나에게, 아들 무얼木耳에게,..! 이 유서들은 사건현장에서 경찰이 취합했는데, 통합해서 보면, 그는 길이 끊어진 막다른 곳에 스스로 몰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아들木耳(三木Sam)에게만은 눈물을 보이며 아빠를 이해해달라는 문구가 있었다. 꾸청은 사진과 원고 등을 누이에게 부탁했으며 굳이 보관하지 않아도 되며 집이나 그 밖의 것 역시 아들에게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후 모든 원고나 모든 꾸청의 것들은 자연스레 누나가 보관, 최근 꾸청의 사후 50년에 즈음하여 북방문예출판사에서 4권의 “꾸청문학계열顾城文学系列”을 냈는데 그 첫 권《꾸청문학선: 다른 세계 顾城文选别有天地》은 꾸청이 1987년 5월 독일 밍스터明斯特에서 가진 “국제시축제”에 참가하면서부터 1993년 10월 8일 그의 아내와 한 섬으로 도피했을 때까지 쓴 작품들을  “꾸청의 성顾城之城”이라는 웹싸이트의 장샤오민江晓敏과 함께 편집한 것이다. 총 150만 여개의 문자로 산문 및 시를 실었다.     꾸청은 많은 시와 문장, 서법, 그림 등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저서로는 시집 《검은 눈동자黑眼睛》(1986年 인민문학출판)《한낮의 달빛白昼的月亮》、《수팅, 꾸청서정시선집舒婷、顾城抒情诗选》、《북방의 고독한 노래北方的孤独者之歌》、《쇠방울铁铃》、《베이다오,꾸청시선北岛、顾城诗选》、《꾸청의 시顾城的诗》、《꾸청의 동화우화 시선顾城童话寓言诗选》、《꾸청현대시자선집顾城新诗自选集》과 그의 사후 부친이 편집해서 출판한 《꾸청시전편顾城诗全编》이 있다.。그 밖에 1998년 인민문학출판사에서 낸 《꾸청의 시顾城的诗》와 소설《영자英子》(1994年 1월 북경 화예사출판 그의 아내 시에예 합작)、《성城》등 작품들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외 문집《생명이 정지된 곳, 영혼이 나간다 生命停止的地方,灵魂在前进》,조합시집《성城》、《귀신이성으로 들어간다鬼进城》、 《나로부터 자연에 도달하기까지从自我到自然》、《목적이 없는 나 没有目的的我》가 있다。       높고 흰 모자를 쓴 ‘동화시인’     문화혁명 중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 반사상反思想이 깃들어 있다. 물론 그런 반항과 부정적 비판의식을 통해서 생명의 고귀함, 인간본연의 영혼 찾기로 그 귀결점을 찾고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몽환의 세계, 동화적인 순수 미의 생명의식을 찾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그만의 독특한 인문주의적 시세계를 보여줘 그를 통칭 ‘동화시인’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시는 수팅의 고상하고 단정하면서도 미려한 우울함을 드러내는 것과는 비교되는 순진무구함, 암수가 구별되지 않는 몽롱함이 있다. 그만큼 그의 시엔 몽환과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는 천진함이 넘친다. 성인의 우울한 상처가 아니어서, 시인 개인의 우울한 상흔이 아니기 때문에, 한 세대가 각성한 상처이기 때문에, 그 각성한 한 세대들이 바라보는 현실로부터 파생된 상처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담담하며 때론 납처럼 깊고 무겁다. 그의 시《 나는 제멋대로인 아이我是一个任性的孩子》는 자신이 바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아이 ”임을 선포하고 있다. 자기만의 생각에 맞춰 자기만의 꿈을 고집하는 건 그의 집착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의 매력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억압된 성인세계 속에서 꾸청의 의식은 “눈을 감으면 세계와 나는 관련이 없어진다 ”고 보았으니 말이다。《我是一个任性的孩子》에서 차용한 아이들의 시각은 아동의 이상 안에서 개조된 성인세계다. 꾸청이 이 시에서 보여준 아이들 형상은 맑은 바람처럼 성인세계의 오염된 땅을 뒤흔들었다. 또 하나 몽롱시의 대표시인 베이다오北岛도 한탄하며 말하길 “비천함은 비천한 이들의 통행증이 되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이 될 때, 꾸청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서툴지만 ‘자유’를 찾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꾸청의 성顾城之城”의 장샤오민은 저장성浙江省의 한 중학교의 고3 어문교사이다. 그녀는 1993년 시집《海篮바다 광주리》에 실린 꾸청의 시를 처음 읽고 감동을 받아 1994년엔 《시탐색诗探索》에 꾸청의 친구가 쓴 《최후의 꾸청最后的顾城》을 읽으면서 꾸청과 그의 시에 빠져들면서 지금까지 그에 대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꾸청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 관리하고 있다. 초기의 《생명환상곡生命幻想曲》、《구별되는 바다分别的海》와 후기의 《노래는 나무들을 헤엄치게 한다颂歌世界?是树木游泳的力量》를 좋아했다는데 그 이유는 “진실”이 담겨져 있으며 “자연순화”의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만들어진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나온 것들이어서 시를 읽으면 너와 나를 잊게 되고 충돌되는 게 너이기도 하고 네가 흐르는 물인가 하면 돌이기도 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보고 美에 대해 말하라면 그것은 일종의 상태일 뿐, 비현실적인 허황한 세계로 받아들여진다. 왜냐면 미가 그 모습을 드러날 땐 너무 진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 아직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단지 나만 그렇게 바라보는 것에 희열을 맛보는 동시에 일종의 비밀감과 공포도 느낀다.  난 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두렵다. 혹여 그것을 파괴할까봐 두렵다. 그리고 난 또 다른 공포를 갖고 있다. 일종의 미라는 것을 내가 바라볼 때 다른 사람들 역시 그 훼손된 미를 미라고 알까봐 두렵다.                       __꾸청의 에서 _   “몽롱시朦胧诗”를 이끌던 《오늘今天》의 편집진인 쉬샤오徐晓는 자신이 쓴 《반평생半生为人》에서 꾸청에 대해서는 진실로 “자기만의 성안에서 살던 사람”이었다고 토로했다. 꾸청보다 2 년 2 개월 먼저 태어난 누이 꾸샹顾乡 역시 동생에 대해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한 살 되기 전부터 걸었는데, 큰 옷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곤 하던 게 기억이 새롭다, 유치원 다니던 때의 꾸청은 여전히 침착한 아이였으며 다른 아이들과 놀지 않고 누나 꾸샹만 찾곤 했다”고 회상한다. 많은 책 속에 파묻혔던 그는 자신을 따돌리곤 하는 친구들에게 《삼국연의三国演义》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야기꾼”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지만 친구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들 때마다 그는 포위되는 걸 못참았기 때문에 그는 늘 혼자였다. 외부와의 교류를 갈망하면서도 안으로 숨어드는 그는 누나가 유일한 그의 관중이었으며 그녀가 없을 땐 도리 없이 빈 방에 들어가 담장을 마주하고 이야기했다한다. 이처럼 그는 문혁의 거친 풍랑 속에서도 여전히 홀로 햇살 아래 있거나 낙엽 속에 파묻혀 있었으며 찬바람을 맞으며 고성 담장에 붙은 귀뚜라미나 황량한 풀숲 중의 메뚜기를 찾고 있었다. 높은 나팔소리나 인파가 그의 주위를 덮어도 그는 홀로였다. 꾸샹은 또 회상하길 “내가 그런 집단이나 사회 여러 행사 등에 참석하는 것도 반대했으며 안타까워했다. 그런 일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친구들은 모두 통속적이라고 조롱했다. ” 반면, 사람들은 “스스로 성에 갇힌” 그를 이상하게 보았으며 항상 높은 모자를 씀으로써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1992년 6월 네덜란드에서 강의를 할 때도 이 모자를 썼으며 1992년 12월 독일에서 강의를 할 때도 변함이 없었는데 외국인들에게도 그는 신비한 ‘동화 시인’이었다. 그들에게 이 높고 높은 모자는 시인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케 했으며 또한 왕관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왜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기실 꾸청은 독일에서 주는 안정적인 직업을 거부했다. 그리곤 그의 아내 시에예谢烨와 뉴질랜드의 한 섬으로 들어가 닭을 키우고 채소를 키우며 살았다. 이는 물론 그의 집은 자신만의 독립왕국이며 자급자족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뉴질랜드 이웃들에겐 이해되지 않는 점이었다. 왜냐면, 여러 마리의 닭을 임의로 키우고 죽여 요리에 쓰곤 하는 행위가 비위생적으로 비춰졌으며 위생국에 당연히 검색을 받아야 하는 불법행위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런 동양과 서양간의 사고 차이에서 오는 마찰 때문에도 그는 더 폐쇄적이고 이상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인과의 다툼도 이런 환경에서 더 두드려졌다하겠다.  북경의 영화학원 교수인 추이웨이핑의 눈엔 “꾸청은 담이 적은 사람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뒤로 물러서 있길 좋아해서 뒷줄에 앉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꾸청을 몽롱시파 중에 “최대로 공헌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다만 《한세대 一代人》에서 야기되는 의심은 “암흑이란 환경을 자기 광명으로 표현하는 건 일종의 임의의 표현이다.” “사회를 관조할 때 자신을 거꾸로 돌려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한편 《오늘今天》잡지의 임원인 류즈리刘自立도 꾸청의 시에 대해 혹평을 하면서도 그가 “동화시인”임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그는 어린아이같이 시를 쓴다, 때론 노숙한 아이의 성숙함도 보이나 어른이 쓴 시는 아니다. ” 그가 인식하는 꾸청의 창작은 문혁에 대한 강경한 사유모색의 반발일 뿐, 단순한 반항 의식으로서 일종의 어린아이식 사고를 완성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면, ‘개구쟁이’란 통제력을 잃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엔 이런 인격결여와 사회소통의 중단과 관련이 있다.        꾸청 시의 예술적 특징   꾸청의 시에 대한 전반적인 특징이자 우수성은 첫 째,비교적 우화적 의미와 상징성을 신중하게 지니고 있으며 시의 음악성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종의 동화 색채가 엿보이며 그것도 소위 개구쟁이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다. 꾸청 시의 최대 특징은 이미지의 실현이다 그 실현을 위해 제일 많이 사용한 표현은 상징은유법이었다. 이 수사법은 진실 그대로 그리거나 내심을 직접 토로하는 전통 방식을 깼으며, 서정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그의 시 중의 상징은 표면상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심층적으론 무한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어서 시의 감염력이 매우 크다. 조기 상징주의의 대가 마라메이가 반복 강조한 대로 “ 시는 단지 암시여야 한다. 직접 그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4분의 3을 생략하여 느끼도록 해야 즐길 수 있다.” 시의 매력은 직관으로 다 드러내지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해야 하며 무언가 증명할 게 없어야 한다. 즉 시는 총괄적으로 뭔가를 암시만 해야 한다.“ 이같이 상징성의 추구는 현대시의 한 특징이 된다. 상징수법은 중국 고전시의 비흥比兴수법과도 아주 가깝다. 상징은 일종의 비흥이며 비흥은 상징의 일종표현기법으로 비比는 시의 형상화를 구하는 것이며 흥兴은 시의 언어 너머의 의미를 구한다고 보았다. 다른 것이라면 상징수법은 대부분 교묘하게 비교 대상 사물을 감추고 시 주제 역시 다의성多义性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짧은 단시《한세대一代人》에서 “까만 밤黑夜”,“나我”“까만 눈동자黑色的眼睛”등은 감성 형성 구성을 위한 이미지의 조합이다. 이 시어들은 이미 그 단어 자체로 객관적 의의를 갖고 있다. 더불어 제목에서 주는 암시 때문에 더더욱 강렬한 상징성을 가진다.   즉, “까만 밤黑夜”은 한 세대의 정신세계의 암울한 배경을 상징한다. “눈동자眼睛”는 광명을 갈망하는 한 세대의 눈동자를 상징하며 시 중의 “나”는 바로 가장 고통받고 인간의 말로까지 가보았던 문혁세대들, 그 세대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시 상징의 심미적 특성은 실제 이미지의 내재의 미학 특성이기도 하다. 꾸청의 시의 이미지 세계 중에 드러나는 은유법과 상징은 역시 그 암시성을 갖고 있다.  꾸청 시의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한 수사법은 추상변형수법이다. 현대생활의 진전으로 사람들의 감상과 기호는 부단히 변화되어왔다. 예술변형도 가면 갈수록 다채로워졌다. 이에 “변형이 없는 건 예술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서구 현대파의 예술강령은 “묘사가 불확실한 것이 진실이다 ”“형태를 벗어날 때 더 진실에 가깝다” 약속이나 한 듯 이미지 창조에 대한 신시의 흐름은 늘 고전주의의 과대수식을  벗어난 “변형”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쓴 《생명환상곡生命幻想曲》중에 이런 글이 있다.   “ 빛의 폭포에/나의 피부를 검게 씻는다 /……/ 태양은 나의 인부/그는 날 잡아당긴다 /강렬한 빛의 밧줄로/……/ 让阳光的瀑布/洗黑我的皮肤/..../ 太阳是我的纤夫/它拉着我/ 用强光的绳索 .....) ”   여기서  “폭포瀑布”는 “햇볕阳光”을 은유한다,또 폭포로 검은 얼굴을 씻어줌으로써 햇볕은 내 피부를 검게 타게 함을 은유한다. 원래 검은 피부는 건강미의 표시이다. 그러나 그 검은 색은 어둠을 뜻하고 절망을 낳는다. 강렬한 생명력이 그를 잡아당기지만, 태양인 인부가 밧줄로 묶어 잡아당기는 데서 그는 오히려 속박으로 받아들여진다. 선택 없는 어둠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까닭에 이들 간의 복잡하고도 교묘한 본질구성은 시인의 주관적 직시와 감각에 의해 단순해지고 ‘변형’된다.  직감과 환각, 착각, 순간감각에 대한 인상은 대상을 쉽게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작가의 주관이 객관적 사실에 대립되면서 교묘히 대상을 변형 “무의식 중의 적절한 이치와 존재이유”를 밝히게 한다. 그의 숨겨진 속내를 드러나게 된다. 이로써 시인 눈앞에서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내재한 속내를 드러내게 할 수 있고 시인 안중의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한 줄기 피로 보일 수도 있는 이유이다. 세 번째로 많이 사용한 이미지 표현수법은 감각의 소통이다. 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통감痛感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이 통감법은 중국고전시에서도 늘 써왔던 수사법이기도 하다. 즉, 중국의 옛 선조들은 일찍이 “소리유형听声类型”을 숙지하여 예로 들면, ‘수愁’라는 글자 하나에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근심이 만리까지 간다一水牵愁万里长”,고 뜻을 담아 물소리에 그 음감을 넣었으니 현대시의 통감범위 역시 고전시의 범주를 크게 초과하지 못하고 있다. 좋은 시일수록 안색은 온도를, 소리는 형상을, 차갑고 따뜻함은 중량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런 오관의 상호소통은 서로의 공감각을 이끌어 시의 연상공간을 더욱 크게 한다. 또한 통감의 운용은 객관 세계를 풍부하게 변화시켜 준다. 더불어 대상끼리 상통, 각종 오감을 통해 시의 세계를 광활하게 창조하게 한다.  꾸청의 시에 사용한 이미지 표현법에는 이 밖에도 대상끼리 겹치면서 사물을 사람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나 상상을 통해 대상을 취하는 수법과 생략도약법도 많이 사용되었다. 총정리하면 시의 이미지는 본래 언어라는 기호를 본체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늘 그는 공식화된 언어를 초월하기를 꿈꿨다. 따라서 꾸청 시의 이미지는 그만의 독특한 천진함과 단순하고도 직선적인 표현 아래 자아비판적이고도 풍자성이 농후한 예술풍격을 낳았다고 본다.       꾸청의 대표시 6 편   한 세대   까만 어둠은 내게 까만 눈동자를 주었다 나는 이를 통하지 않고는 빛을 찾아낼 수가 없다   一代人   黑夜给了我黑色的眼睛 / 我却用它寻找光明   문혁“文革”을 거친 한 세대 청년이었던 꾸청은 윗 시 두 행으로 몽롱시의 대표시인(1956年9月∼1993年10月)이 되었다. 20세기 70년대 말에서 80년 대 초의 몽롱시는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해방解放”이라는 중요한 한 문학 조류를 만들었는데 그는 바로 이 당대 현대시의 혁신의 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윗 시에 대해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파란만장한 문혁시대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 역시 이 세대에 속한 자로서 “까만 어둠”은 그 시대를 반영한 것으로 우리의 눈동자가 까만 이유가 역설적으로 표현되었다. 더군다나 광명조차 이 까만 어둠을 건너지 않고는 다가오지 않음을, 그것도 까만 눈동자 아니면 바라볼 수 없음을 극명하게 아이러니컬하게 밝히고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이 표현 속에 감춰진 당시 중국 정치적 현실에 대한 냉소와 反思想이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을지 짐작이 간다.           눈을 깜박이기만 하면 ____저  착오의 시대에 나는 이런 "착시"를 일으켰다______     나는 굳게 믿는다 내가 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기 때문에   무지개, 분수 속에서 아른거리며    부드럽게 행인들 바라보다가도 내가 눈 한 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독사의 그림자로 변해버린다   괘종시계, 교회당에 은거하면서 고요한 새벽시간을 갉다가도 내가 눈 한 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깊은 우물로 변해버린다   붉은 꽃, 화려한 무대 위에서 봉우리 피우며 흥분 속에 봄바람 맞다가도 내가 눈 한 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피비린내로 변해버린다   굳게 믿으려고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80년 4월호 발표     贬 眼      __ 在那错的年代里, 我产生了这样的 "错误"____     我坚信, / 我目不转睛. // 彩虹, / 在喷泉中游动, / 温柔地顾昐行人, / 我一贬眼____ / 就变成了一团蛇影.// 时锺, / 在教堂里棲息, / 浸静地嗌着时辰, / 我一贬眼_____/ 就变成了一口深井.// 红花, / 在银幕上绽开, / 兴奋地迎接春风, / 我___ 贬眼____ / 就变成了一片血腥. // 为了坚信, / 我 目圆 //                             80. 4 发表   위 작품은 80년 꾸청 시인이 24세 때 발표한 것이다. 즉, 문화혁명이 막 끝난 직후 착오의 시대를 살아온 중국인민들의 반역사적인 "착각"과 그 "오류"를 치기 섞인 반어적 역설적 기법으로 표현, 기막힌 냉소를 보여주고 있다. 눈을 깜박거릴 수 없는 한 세대의 긴장감, 그러나 깜박거릴 수밖에 없어 지켜내지 못한 나의 과오이자 인민들의 과오는 ‘무지개’가 독사의 그림자로, ‘교회당 시계’는 시간을 쏠아대는 깊은 침묵의 우물 속으로, ‘붉은 꽃’은 문혁을 질풍노도로 피비린내를 일으켰던 홍위군의 봄바람으로 변하고 말았음을, 폭로하고 있다. 신처럼 받들어졌던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와, 문혁을 주도했던 4인방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이런 천지개벽의 변화를 시인은 과연 어떻게 시로 표현할 수 있으며 이율배반적 현실에 적응할 수 있었겠는가?  반어적 농담으로 내뱉는 아픈 시선이 이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는 버릇없는 아이   ___ 난 대지에 창문을 가득히 그려놓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가 빛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싶다._____                                                                                   어쩌면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아이처럼 난 제멋대로인지 모른다   나는 매 시각이 색깔 예쁜 크레용처럼 아름답기를 바란다 나는  내 맘에 드는 흰 종이에 서툴고 거친 자유를 그려내거나 영원히 눈물 흘리지 않는 눈동자를 그려내길 바란다 넓은 하늘 그 하늘의 깃털과 나뭇잎 그리고 엷은 녹색의 어둔 저녁과 사과를 그려내기를 바란다   난 새벽을 그리거나 이슬을 그리거나 눈에 보이는 미소를 그리고 싶다 가장 젊고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을 그리고 싶다 그녀는 검은 구름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눈은 하늘빛 그녀는 영원히 나를 바라본다 영원히, 바라본다 절대로 머리 돌려 홀연히 가지 않는다 난 요원한 풍경을 그리고 싶다 또렷한 지평선과 물결을 그리고 싶다 많고 많은 쾌락의 시냇물을 그리고 싶다 구름을 그려본다______ 잔털이 잔잔하게 가득 찬, 난 그들을 아주 가까이 붙게 하고 그들 서로를 사랑하게 한다 모든 묵계와 봄날의 모든 조용한 격동이 한 송이 작은 꽃의 생일이 되게 한다   난 또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 난 그녀를 만난 적이 없고, 또 그럴 리도 없다 그러나 그녀가 아주 아름답다는 건 안다. 난 그녀의 가을코트를 그리고 타오르는 촛불과 단풍잎을 그리고 수없이 그녀를 사랑하기에 재가 돼버린 마음을 그린다 결혼식을 그리고 일찌감치 깨어난 경축일을 그린다 그 위에 유리 빛 사탕종이와 북방동화의 삽화를 붙여 넣는다   난 제멋대로인 아이 모든 불행을 지워버리고 싶다 나는 대지 위에 창문을 가득히 그려놓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들이 빛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싶다. 난 바람을 그리고 싶다 하나하나 점점 높아지는 산들을 그리고 동방민족의 갈망을 그리고 막힐 것 없는 큰 바다의 유쾌한 소리를 그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종이 한 모퉁이에 나는 또 나 자신을 그리고 싶다 한 마리 코알라를 그린다 빅토리아의 깊은 숲 속에 조용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그는 집이 없고 한 조각 마음은 먼 곳에 나가 있다 그는 단지 수많은 장과(浆果)와 같은 꿈과 아주 아주 큰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나는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나는 크레용을 받지 못했고 색깔 있는 시각을 얻지 못했다 단지 나 자신만이 있을 뿐 나의 손가락과 상처의 아픔 한 장 한 장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으로 아끼던 백지만 있을 뿐 그들이 나비를 찾아가게 하고 그들이 오늘부터 사라지게 할 뿐이다.   나는 어린 아이 환상 속 엄마로부터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나는 제멋대로인 아이다   我是一个任性的孩子 ____ 我想在大地上畵满窓子, 让所有习惯黑暗的眼睛都习惯光明                                              也许/我是被妈妈宠坏的孩子/我任性//                     我希望/ 每一个时刻 /都像彩色蜡笔那样美丽/我希望/能在心爱的白纸上畵畵/ 畵出笨拙的自由/畵下一只永远不会/流泪的眼睛/一片天空/一片属于天空的羽毛和树叶/一个淡绿的夜晚和苹果// 我想畵下早晨/畵下露水/所能看见的微笑/畵下所有最年轻的/最有痛苦的爱情/她没有见过阴云/她的眼睛是睛空的颜色/她永远看着我/永远, 看着/绝不会忽然棹过头去/我想畵下遥远的风景/畵下清晳的地平线和水波/畵下许许多多快樂的小河// 畵下丘陵_____ 长满淡淡的耸毛/我让他们挨得很近/让他们相爱/让每一个默许// 每一陈静静的春天激动/都成为一朵小花的生日// 我还想畵下未来/我没见过她,也不可能/但知道她很美/我畵下她秋天的风衣/畵下那訾燃烧的烛火和枫叶/畵下许多因为爱她/而熄灭的心/畵下婚礼/畵下一个个早早醒来的节日______/上面贴着玻璃糖纸/和北方童话的插图// 我是一个任性的孩子/我想涂去一切不幸/我想在大地上/畵满窓子/让所有习惯黑暗的眼睛/都习惯光明/我想畵下风/畵下一架比一架更高大的山岭/畵下东方民族的渴望/畵下大海___/无边无际愉快的声音// 最後, 在纸角上/我还想畵下自己/畵下一只树能/他座在维多利亚深色的丛林里/座在安安静静的树枝上/发愕/他没有家/没有一颗留在远处的心/他只有,许许多多/奖果一样的梦/和很大很大的眼睛// 我在希望/在想/但不知为甚麽/我没有領到蜡笔/没有得到一个彩色的时刻/我只有我/我的手指和创痛/只有撕碎那一张张/心爱的白纸/让它们去寻找胡蝶/让它们从今天消失// 我是一个孩子/一个被幻想妈妈宠坏的孩子/我任性//   이 시는 그야말로 꾸청의 성격과 그만의 색깔이 드러난 시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잉얼英儿≫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안정적인 독일에서의 생활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리곤 누구의 간섭도 필요 없는 섬으로 들어가지만 여전히 사회성이 없는 그를 괴롭힌다. 그는 철없는 아이로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나는 크레용을 받지 못했고/ ..생략../ 단지 나 자신만이 있을 뿐/..생략.../마음으로 아끼던 백지만 있을 뿐“이다. 문혁은 끝났으나 뉴질랜드까지 도피해 왔으나 그가 살아남는 길은, 천진한,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색깔을 찾아 그리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백지’만 있고 ‘크레용’이 없다. ‘손가락도 다쳤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먼 것과 가까운 것                         당신은                                                 , 한 번은 나를 바라보다가                    한 번은 구름을 보고 있어요                     난 이제 느껴져요                               당신이 나를 볼 땐 아주 멀리 느껴지고           당신이 구름을 볼 땐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远 和 近   你 / 一会看我 / 一会看云   我觉得, / 看我时很远 / 看云时很近                                                 1980년 발표작   진실이란 무엇인가, 정말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는 것일까, 단절은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고 말하는 중에도 일어나고 있다. 정작 먼 구름은 가깝게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함께 사랑을 나눈 너와 나 사이에서는 여전히 먼 거리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틈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린 느낀다, 깨닫는다.     봄날   _나는 손수건을 가볍게 흔든다___     봄날,  너는 손수건을 가볍게 흔드는구나 내게 멀리 가라고 하지만 곧 돌아오라는 건가 아니, 어떤 것도 아니지, 어떤 것도 이유가 아니지, 꼭 물위로 지는 꽃 같구나 꼭 꽃잎 위의 이슬 같구나,.. 그림자만 아는구나  바람만 느끼는구나 채색나비만 놀라 탄식하는구나 여전히 마음 가운데 꽃은 분분히 날아가는데,..     《别》         (在春天,我把手帕轻挥)    在春天,/ 你把手帕轻挥,/ 是让我远去,/ 还是马上返回? / 不,什么也不是,/ 什么也不因为,/ 就象水中的落花,/ 就象花上的露水……/ 只有影子懂得,/ 只有风能体会,/ 只有叹息惊起的彩蝶,/ 还在心花中纷飞……   이별이 이리 가벼울 수 있을까, 단지 손수건 한 장 흔들듯 그대는 가고 어떤 이유도 댈 수 없는 채로 그렇게 봄날 속에 우리들 이별은 바람 한 점 남기며 떠난다. 그것도 봄날에, 아무도 귀 기울여 아는 체도 없는데, 오직 채색나비가 꽃잎 떨어지듯 그림자를 잠시 남기며 바람인듯 날아가는 그 가벼운 탄식 아래 그렇게 우리의 이별은 가볍고 또 가볍게 봄을 풀어내고 있다니,..!      작은 항구     작은 항구 굽이굽이 길구나       문도 없고 창문도 없어   난 오래된 열쇠를 들고 두터운 담장을 두들긴다     小巷                小巷/ 又弯又长 // 没有门 / 没有窗  //  我拿把旧钥匙 /  敲着厚厚的墙  //     아주 작은 항구에 몸을 숨겨도 여전히 창도 없고 문도 없다. 그를 가려줄 현관문 열쇠를 찾아보지만, 너무 녹슬어 쓸모가 없다. 별수 없이 막힌 담장에 가서 두들긴다. 자기 안의 성안에서 그만의 소통을 꿈꾼다. 그의 말을 들어주던 누이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걸어 들어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꿈꾼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뉴질랜드의 아주 작은 섬, 그곳에서 그는 숨어 살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생활을 맡은 그의 아내의 질책이 뒤따른다. 숨 막히는 그의 막다른 골목을 ‘小巷’ 이 두 글자에서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가을호, 2010 년           
2101    리백, 술, 낚시, 시, 그리고 인생... 댓글:  조회:4112  추천:0  2017-05-07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에게 친숙한 달타령 속에도 등장할 만큼 이태백의 시에는 술과 달을 읊은 노래가 많다. ◇ 이태백의 낚시 시 제목에서도 등 술에 관한 많은 시가 있을 뿐 아니라, "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대하니 세 사람이 되었구나.(擧盃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라는 구절은 술과 달로서 그의 장기를 마음껏 드러낸 명구절이다. 오죽했으면 이태백이 술에 취해 물속에 있는 달을 잡으려다가 물속에 빠져 죽었다는 설이 있었을까? 이백(李白)은 중국에서 두보(杜甫, 시성(詩聖))와 더불어 시선(詩仙)으로 불리며,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는다. 여광중(余光中)은 "술이 호걸의 내장 속으로 들어가면 7할은 달빛으로 숙성되고, 남은 3할은 휙 소리내는 검기(劍氣)로 되며, 빼어난 말이 한번 튀어나오면 곧 성당(盛唐)의 반을 차지하는구나."라고 하여, 술.달.기개.호방.재능.문단에서의 비중 등 이백과 관련된 것들을 몇 마디 말로 적절하게 설명하였다. 이백은 포부가 컸다. 그는 '하늘이 나의 재주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다.'란 생각을 가졌고,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의 담론을 펴고, 제왕의 술책을 꾀하여 왕을 보필하여, 세상을 크게 안정시키고 해현(海縣)을 통일시키고 싶었다.(申管晏之談, 謀帝王之術, 願爲輔弼, 使寰區大定, 海縣淸一.)"()는 포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루 제후를 찾아다니고 경상(卿相)들을 만나(遍干諸侯, 歷抵卿相.)'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펼쳐 보이고 포부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이백을 '해상조오백(海上釣鰲客)'이라 하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고사가 하나 전한다. 송(宋).조덕린(趙德麟)의 ≪후청록(侯鯖錄)≫卷6에, "이백이 개원(開元) 중에 재상을 방문하여 편지 하나를 건넸는데, 그 위에 '해상조오객이백(海上釣鰲客李白)'이라고 썼다. 재상이 '선생은 창해(滄海)에 임해서 거대한 자라를 낚았다는데 무엇으로 낚시줄을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으니, 이백이 대답하기를 '풍랑(風浪)으로 그 욕심을 없애고, 하늘과 땅에 그 뜻을 두고, 무지개로 낚싯줄을 삼고, 초승달로 낚시바늘을 삼았습니다.'고 했다. 또 묻기를 '무엇으로 먹잇감으로 삼았습니까?'라고 하니, '천하의 의기(義氣)가 없는 사내를 먹잇감으로 삼았습니다.'고 하였다. 그때 재상이 놀랐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통쾌하고 호쾌한 영웅적인 기개인가? 이백은 그만큼 포부가 컸고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백과 낚시는 어울리는 걸까? 이백과 낚시는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특히 젊은 시절 영웅적인 기개와 포부를 가진 이백에게 있어, 낚시는 이백의 이미지와 연결이 잘 안된다. 낚시는 정적인 활동이며(물론 지금은 바다낚시나 루어낚시가 있어서 그러한 개념이 많이 퇴색되었음), 세월을 낚는 기다림의 수양이다. 이런 욕심없고 자연그대로인 낚시터가 솟아오르는 혈기와 기개를 모두 감내할 수 있을까? 이백같은 사내가 낚시터에 앉아있으면, 낚시터의 물을 모두 끌어다 술을 담그고, 그곳의 물고기를 모두 잡아서 술안주로 삼아, 횃불을 잡고 밤새워 놀며(병촉야유(秉燭夜遊)) 밤낮으로 음주하고 시문을 짓거나, 조정의 실정을 성토하는 비판의 장소로 아예 바뀌어 버릴 듯 하다. 아니면 낚시터에서 술판을 벌이며 하늘 속에, 술잔 속에, 강물에, 떠있는 달이나 세지 않았을까? 그래서 애당초 '연파조도(煙波釣徒)'나 '소원선생(蘇原先生)'과 같이 자연과 하나되고, 산수화의 그림속 풍경이 되는 그런 조용하고 한가로운 낚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쨌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그 지나친 자신감은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광기(狂氣)로 표현되어, 그의 앞길을 막고 있음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미친 듯 상규에 구속됨이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였는데, '만승(萬乘)의 왕을 놀리며 동료처럼 여겼고, 짝하여 늘어선 사람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여겼고(戱萬乘若僚友, 視儔列如草芥.)', 그는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말하길 저는 술 속의 신선이라고 하였고(天子呼來不上船, 自云臣是酒中仙.)' '나는 본래 초나라 미친 사람으로, 미친 사람의 노래로써 공자를 비웃는다!(我本楚狂人, 狂歌笑孔丘!)'고 하였으니,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곱게 보일리 있겠는가? 상규에 구속되지 않는 행동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는 어쩌면 서로 모순되는데, 이러한 광적인 행동이 오히려 이백의 기질을 상징하는 말로 되었으니, 통치자들의 눈에는 가시같은 존재였을 터이다. 이백에게도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나이 40에 그의 친구 오균(吳筠)의 천거로 현종(玄宗)을 만나게 되었다. 현종은 그를 아주 우대하여 한림(翰林)을 시켰고, 더 높은 벼슬을 주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환관들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임금의 수건으로 입가를 닦고(龍巾拭吐)', '황제의 손가락으로 국을 맛보고(御手調羹)', '고력사(高力士)의 신발을 벗기고(力士脫靴)', '양귀비(楊貴妃)에게 벼루를 들게 하였다(貴妃捧硯)'는 등 숱한 일화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들이 문학방면에서는 장점이 되면서도, 정치적인 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되었을 터이다. 결국 화려했던 3년간의 장안생활을 끝으로,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인생 지금세상에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내일 아침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조그만 배를 띄우리(人生在世不稱意, 散髮弄扁舟)'라고 말한 것 말처럼, 그는 강호를 떠돌며 신선을 찾고 도사(道士)를 방문하지만, 이때까지는 자신의 포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열정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의 을 보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열정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수李白金樽淸酒斗十千, 玉盤珍羞直萬錢.(금중청주두십천, 옥반진수치만전)停杯投箸不能食, 撥劍四顧心茫然.(정배투저불능식, 발검사고심망연.)欲渡黃河冰塞川, 將登太行雪滿山.(욕도황하빙식천, 방등태행설만산.)閑來垂釣碧溪上, 忽復乘舟夢日邊.(한래수조벽계상, 홀복승주몽일변.)行路難! 行路難! 多歧路, 今安在?(행로난! 행로난! 다기로, 금안재?)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장풍파랑회유시, 직괘운범제창해.)금 항아리 맑은 술 수만 되,옥쟁반에 귀중한 음식은 만전의 값어치.잔 멈추고 젓가락 던져 차마 먹지 못하고칼 빼어 동서남북 둘러봐도 마음은 막막하다.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강을 막고태행산을 오르려니 온산이 눈으로 덮혔네.한가로이 푸른 시내에 낚시를 드리울까,갑자기 다시 伊尹처럼 발탁되는 꿈이나 꿔 볼까,가는 길이 어려워라! 가는 길이 어려워라,여러 갈래의 길, 지금 어디가 편안할까?바람을 타고 물결을 깨트리는 그런 때가 오리니,구름끝에 돛을 올려 푸른 바다 건너가리!   중국의 낚시글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閑來垂釣碧溪上, 忽復乘舟夢日邊.'의 구절을 인용하여 이백이 낚시를 즐겼다고 하지만, 사실 이 구절의 숨은 뜻은, "한가로와 시간이 넉넉하다면 강태공처럼 푸른 시내에서 낚시하여 주 문왕을 만나볼까? 아니면 다시 이윤(伊尹)처럼 배를 타고 해와 달 주위를 맴돈 꿈을 꾼 뒤 은(殷)나라 탕왕(蕩王)을 만나볼까?"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낚시와는 전혀 상관없고 낚시․배와 관련하여 재상이 된 옛 현인들의 고사로써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바로 아직까지 이백의 기백이나 희망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천보(天寶)14년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그는 여산(廬山)에 은거하였다. 그해 이백이 심양(尋陽 혹은 潯陽)의 이현(黟縣)에 놀러왔었고, 공교롭게도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반란을 일으켜 이곳을 지났는데, 평소 이백의 才名을 그리워하였기에 자신의 막료로 불렀다. 결과적으로 이린의 난이 실패하여,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때 지은 라는 시에, 磨盡石嶺墨(마진석령묵), 검은 바위등성 다 닳아 검고, 潯陽釣赤魚(심양조적어). 潯陽에서 붉은 고기를 낚네. 靄峰尖似筆(애봉첨사필), 안개 자욱하게 낀 뾰족한 봉우리는 붓 같은데, 堪畵不堪書(감화불감서). 감히 그림으로 그릴 수 있지만 글로는 표현하지 못하겠네. 라고 하였다. 실제로 이현(黟縣)에 백상(白象)․청사(靑獅) 두 봉우리가 서로 대치하고 있기에 詩를 썼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숙종(李亨)과 동생 李璘이 대치하는 형국으로, 동생이 반란을 일으킨 일을 읊은 듯 하다. 결국 심양(潯陽)에서 그는 붉은 고기, 이린(李璘)을 낚았고,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서로 대치한 뒷날의 형세는 예상할 수가 없었다. 뒤에 사면을 받고 당도(當塗)의 이양빈(李陽冰)에 의지하던 시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남쪽의 산수를 감상하면서 산수시를 쓰기도 했고, 좋은 낚시터를 만나 마음이 동하면 낚시를 하였던 것이다. 옛말에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학문하는 서생(書生)이 뜻을 잃고 곤궁할 때요, 가장 불쌍한 경우는 호탕하게 놀던 한량의 머리칼이 어느덧 하얗게 새버리는 것이라!" 이제 이백도 어느덧 60언저리에 앉아, 객지에서 남에게 의탁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낚시터는 왜 한창 젊은 혈기가 넘칠 때는 찾지를 않다가, 인생의 종착지에 도달할 즈음에야, 낚시찌를 바라보며 인생을 회상하게 되는가 말이다. 혈기왕성하여 앞만 보고 달려갈 때 오히려 낚시터를 찾아 심신을 안정시키고 생활의 활력을 충전하고, 한가로운 자연 속에서 옆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인생에 있어 마침 적절한 안배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인생이란 그런게 아닌 모양이다. 시련을 겪어봐야 안다고 그 시절에는 누구의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이니... 어쨌든 이 시기에 쓴 이백의 釣魚詩에는 제법 낚시꾼의 모습이 배어난다. 嚴陵不從萬乘游(엄릉불종만승유), 엄자릉은 황제를 따라 더불어 놀지 않고,歸臥空山釣碧流(귀와공산조벽류). 텅빈 산으로 돌아와 눕고 푸른 시내에서 낚시하네.自是客星辭帝坐(자시객성사제좌), 이로부터 客星은 황제와 멀어졌는데,無非太白醉揚州(무비태백취양주). 太白이 아니면 揚州에서 취할 사람 없으리.三門橫峻灘(삼문횡준탄), 三門은 가로 지른 험한 여울,六刺朱波瀾(육자주파란). 六刺는 붉은 파도가 밀려오는 물결.石驚虎伏起(석경호복기), 바위의 형상은 놀란 호랑이가 엎드리거나 일어선 듯 하고,水狀龍盤旋(수상룡반선). 물결의 형상은 용이 또아리를 튼 듯 휘감아 돌고.何愁七里瀨(하수칠리뢰), 무슨 근심이 七里瀨에 있어,使我欲投竿(사아욕투간). 나에게 낚싯대를 던지고 싶게 만드나?愛此溪水閑(애차계수한), 이 시냇물이 한가로운 것이 좋아,乘流興無極(승류흥무극). 물길을 타고 흥도 끝이 없어라.擊楫怕鷗驚(계즙파구경), 노로 물을 치면 갈매기가 놀랄까 두렵고,垂竿待魚食(수간대어식). 낚싯대를 드리우고 입질오기를 기다리네.波翻曉霞影(파번효하영), 물결이 밀려들며 새벽 놀이 비치고,岸疊春山色(안첩춘산색). 산기슭은 첩첩이 산에는 봄색깔.何處浣紗人(하처완사인), 어느 곳에 浣紗人이 있나,紅顔未相識(홍안주상식). 붉은 홍안에 안면도 없는데.我携一樽酒(아휴일준주), 나는 술 한통을 가지고,獨上江祖石(독상강조석). 홀로 江祖石에 올랐네.自從天地開(자종천지개), 천지가 열려서부터,更長幾千石(경장기천석), 몇 천개의 바위가 다시 생겨났네.擧杯向天笑(거배향천소),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해 웃으니,天回日西照(천회일서조). 하늘은 햇살을 서쪽으로 비쳐주는구나.永望坐此臺(영망좌차대), (나는) 이 釣魚臺에 올라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長垂嚴陵釣(장수엄릉조). 嚴陵은 낚시를 오랫동안 드리웠네.寄語山中人(기어산중인), 산중인에게 말을 건네면,可與爾同調(가여이동조). 당신도 함께 어울릴 수 있을텐데. 이백의 조어시를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 천지간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이백의 기개가 너무나 여리게 느껴져서일까? 초리대끝이나 찌를 바라보는 이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만년에 쓴 그의 조어시는 낚시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인생의 감회만이 가슴으로 밀려든다. 아마 가까이 엄자릉조대가 있었기에 그는 한 대(漢代) 광무제(光武帝)를 떠나 부춘강(富春江)에 은거하여 낚시한 엄자릉(嚴子陵)을 무척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릉조대(嚴陵釣臺)․칠리탄(七里灘)․청계강(淸溪江) 등을 시어를 인용하여, 엄자릉고사를 읊고 있지만 정작 낚시의 즐거움에 물아일체(物我一體)되는 모습이 없다. 그나마 가 낚시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지만, 정조는 외롭고 슬프기 그지 없다. 애당초 낚시와 이백과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있잖은가? 친구들과 낚시를 가면 낚시보다도 주변의 경치에, 분위기에 이끌려 낚시보다는 술에, 은은하게 비춰주는 달빛을 조명삼아 도란도란 얘기에 빠지는... 그런 부류들 있잖은가? 아니면 너무 활동적인 사람이고 말을 마구 뱉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어서 애시당초 입을 봉하고 묵수법(黙修法)을 연마하는 듯한 낚시는 오히려 고통일 수도 있는... [강경범 생활문화칼럼니스트] / 데일리안 대구·경북
2100    중국 현대시인 - 여광중 댓글:  조회:5067  추천:0  2017-05-07
余光中先生在中国诗界可算是一位奇人。 他写诗的产量多,写作的时间跨度长,而且现在还处于创作的巅峰状态,这种不曾退潮的“青春期”是让人艳羡的。余光中不仅写诗,而且评诗;不仅评诗,还选诗和译诗。诗人、选家、诗评家、翻译家,他全兼了。他是真正的多面手。这样的全才,在当今中国,不谓仅见,也算少有。 余光中(1928-),祖籍福建永春,生于江苏南京,1947年入金陵大学外语系(后转入厦门大学),1949年随父母迁香港,次年赴台,就读于台湾大学外文系。1952   年发表处女诗集 《舟子的悲歌》 ,同年转入本校研究院研究英国文学,获硕士学位。 1953年,与覃子豪、钟鼎文等共创“蓝星”诗社。后1958年赴美进修,获爱荷华大学艺术硕士学位。返台后任师大、政大、台大及香港中文大学教授,现任台湾中山大学文学院院长。        余光中是个复杂而多变的诗人,他变化的轨迹基本上可以说是台湾整个诗坛三十多年来的一个走向,即先西化后回归。他一生从事诗歌、散文、 评论、 翻译、自称为自己写作的"四度空间"。在台湾早期的诗歌论战和70 年代中期的乡土文学论战中,余光中的诗论和作品都相当强烈地显示了主张西化、无视读者和脱离现实的倾向。如他自己所述,“少年时代,笔尖所染,不是希顿克灵的余波,便是泰晤士的河水。所酿业无非一八四二年的葡萄酒。” 80年代后,他开始认识到自己民族居住的地方对创作的重要性,把诗笔“伸回那块大陆”,写了许多动情的乡愁诗,对乡土文学的态度也由反对变为亲切,显示了由西方回归东方的明显轨迹,因而被台湾诗坛称为“回头浪子”。      从诗歌艺术上看,余光中是个“艺术上的多妻主义诗人”。他的作品风格极不统一,一般来说,他的诗风是因题材而异的。表达意志和理想的诗,一般都显得壮阔铿锵,而描写乡愁和爱情的作品,一般都显得细腻而柔绵。著有诗集《舟子的悲歌》、《蓝色的羽毛》、《钟乳石》,《万圣节》、《白玉苦瓜》等十余种。  余光中先生热爱中华传统文化,热爱中国。礼赞“中国,最美最母亲的国度”。他说:“蓝墨水的上游是汨罗江”,“要做屈原和李白的传人”,“我的血系中有一条黄河的支流”。他是中国文坛杰出的诗人与散文家,他目前仍在“与永恒拔河”。呼吸在当今,却已经进入了历史,他的名字已经显目地镂刻在中国新文学的史册上。
2099    중국 현대시인 - 변지림 댓글:  조회:4597  추천:0  2017-05-07
    단장(斷章)                  - 변지림(1910~2000卞之琳)   你站在桥上看风景,   그대는 다리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고, 看风景人在楼上看你.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각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明月装饰了你的窗子,     밝은 달은 그대의 창을 장식하고, 你装饰了别人的梦 그대는 다른 사람의 꿈을 장식한다.     (Fragment)     When you watch the scenery from the bridge, The sightseer watches you from the balcony.     The bright moon adorns your window,     While you adorn another’s dream.                    -------------------------------------------   중국 대륙의 풍미 깃든 연애시 내 마음 비추는 듯 애틋하여라... 이 시 참 묘하다. 수묵화 한 폭을 연상케 하는 고졸하면서도 촉촉한 서정이 연애시를 넘어 애틋한 인생의 비장함을 풍긴다.   변지림(볜즈린)은 ‘현대파’라 불리는 중국의 모더니스트 시인 겸 번역가다. 1990년 홍콩에서 그를 만났을 때 팔순이 넘었어도 단아한 서정 시인으로서 인상이 진했다. 이 시는 수천 년간 면면히 이어져온 중국 산수화가 서른 몇 자에 농축된 느낌이었다.   ‘단장’은 변지림이 1930년대 베이징대 영문과에 다니던 시절에 만났던 명문가 재원 장충화(장충허)를 주제로 한 시다. 너무 담담한 마음이었기에 장충화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변지림이 자신을 좋아한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나도 최근에 와서야 알았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또 하나의 시에 대한 강평= 풍경 속에 그대와 나.   길을 걷다가 보면 앞서간 사람이  나에게 풍경이 되는 줄도 모른 채 걸어가고 역시 뒤 따라오는 사람에게 내가 풍경이 되는 줄을 모르면서 걸어갈 때가 있다.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늘 그러하리라. 내가 당신의 꿈을 가끔씩 들여다보고 싶은 것처럼 당신도 나의 꿈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다 할지라도 설령 들여다보아서 무엇을 알 수 있고, 변할 것이 무엇인가. 다만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꾸며 사는 것이 인생이고, 그게 행복이라면 행복인 것이 이 세상의 변할 수 없는 이치다.  중국의 현대시인인 변지림卞之琳은 이라는 시를 통해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과 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신은 다리 위에서 풍경을 보고 풍경을 보는 사람은 누각에서 당신을 본다. 명월은 당신의 창문을 장식하고 당신은 다른 사람의 꿈을 장식한다.“  꿈을 꾸며 또 다른 꿈을 꾸는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풍경이 되어 주고 꿈이 되는 경이로움이 여기저기에서 펼쳐지는 것이 이 지상이다. “너는 나를 풍경으로 삼고, 나도 너를 풍경으로 삼는다. 나와 너의 형상은 서로 상대방의 창구나 꿈속에서 교환된다.“고 변지림 시인이 자평했던 이 시를 두고 평론가 이건오李健吾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시인은 인생을 장식裝飾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암암리에 담고 있다.“ 꿈이 그렇지만 풍경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 보느냐에 따르고 누구와 보았느냐에 따라, 어떤 시간의 경과 끝에 보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뭇잎이 우수수 지고,  바람이 이 세상 구석구석을 스산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11월의 신 새벽, 조금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자 내 가슴을 파고드는 싸늘함, “그는 사라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듯,  자기가 방금 떠나온 그 사랑을 바라보고 싶었다.”라고 마르셀 프루스트가 에서 묘사한 것처럼, 가는 한 해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한 사내,  그래, 겨울은 겨울이로구나.  
2098    중국 현대시인 - 대망서 댓글:  조회:4028  추천:0  2017-05-07
戴望舒(1905-1950) : 本名은 戴夢鷗.  浙江省 杭州 출신. 上海 復旦大學 佛文科 수학. 1930년대 中國 詩壇을 풍미했던 現代詩派의 핵심인물로 활동. 저장성[浙江省] 항셴[抗縣] 출신.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문학논총(文學論叢)의 편집 ·번역에도 관여하였으나, 작품은 프랑스 상징시의 영향을 받은 관념적 ·신비적인 시가 많으며, 주로 잡지 《현대》를 발표무대로 한 현대시파(現代詩派)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항일전(抗日戰)이 벌어진 후에는 시풍(詩風)이 일변하여 홍콩[香港]에서 항전시(抗戰詩)를 발표하였는데, 특히 1941년 일본군에 붙잡혀 홍콩의 옥중(獄中)에서 쓴 시는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격렬한 애국의 정(情)을 노래하고 있다. 시집에는 《나의 기억》(1931) 《망서초(望舒草)》(1934) 등이 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외국문학의 번역도 다수가 있다. 대망서 시에 나타난 상징 분석   1)김희진*   ◁ 목 차 ▷ Ⅰ. 들어가기 Ⅱ. 욕망과 절망의 대상 Ⅲ. 상실과 자기 극복의 형상화 Ⅳ. 순수와 회귀 본능의 상징 Ⅴ. 나오기   I. 들어가기 「雨巷」 詩人 대망서는 西歐의 象徵主義⋅超現實主義 등 다양한 외래 문예사조 를 수용하여 이를 중국 전통시와 전통적 정서 위에 조화시키고 독특한 풍격의 중국 적인 상징시로 창조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상징주의 문예사조 내지 상징시와 관련하여 대망서와 그의 시에 대한 연구는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었고, 이것은 중국 현대시단에 그가 남긴 영향이 지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 나 대부분 現代派라는 유파적 관점과 외국 문예사조와의 영향관계 규명에 집중되 어, 여전히 그의 시가 지닌 서정성에 대한 논의는 부족한 실정이다. 시인의 작품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야 한다. 다양한 테마를 통한 작품의 연구는 여러 관점에서 시인의 의식세계를 심 도 있게 탐구할 수 있으며 연구 영역의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고는 여성을 테마로 대망서의 시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입체적인 조망을 시도하고 자 한다. 여성이라는 시적 대상에 주목한 이유는 먼저 그의 시세계가 일정한 여성 편향성의 패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왜 이처럼 여성 편 * 극동대학교 중국어학과 전임강사 184 《中國文學硏究》⋅제46집   향적 성향을 드러내는가에 대하여 그의 傳記와 문학적 경험을 토대로 그 원인을 일 정 부분 규명한 바 있다.1)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과 전기에 바탕을 둔 해석 방식은 시인의 창작 과정과 동기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작품 안 에서 여성 상징이 표상하는 의미와 본질을 문학적인 시각으로 조명하지 못하는 한 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중심 테마인 여성 상징을 문학적 맥락과 서정성 차원에서 조명함으로써, 시인의 의식 세계를 새 롭게 탐구하고, 그의 시세계 전반의 특질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2)   Ⅱ. 욕망과 절망의 대상 대망서의 시집 《我底记忆》과 《望舒草》 중 많은 시편들은 사랑과 이별의 노래이 며, 실제로 施绛年이라는 여인과의 사랑⋅실연 체험이 바탕을 이룬다. 그녀는 대망 서의 삶과 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여성으로, 여러 시편에서 그녀와의 우여 곡절 -약혼과 파혼- 많은 사랑을 나누며 느꼈던 愛憎을 발견할 수 있다.   我覺得我是在單戀着, 난 짝사랑하고 있음을 느끼네, 但是我不知道是戀着誰: 그러나 알 수 없네,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是一個在迷茫的烟水中的國土嗎끝없이 아득한 안개 낀 수면 속의 국토인가, 是一枝在靜黙中零落的花嗎정적 속에 시들어 떨어지는 한 송이 꽃이던가, 是一位我記不起的陌路麗人嗎?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낯선 아름다운 아가씨던가? 我不知道。모르겠네. 我知道的是我的胸膨脹着, 내가 아는 것은 나의 가슴이 부풀고, 而我的心悸動着, 나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음을, 象在初戀中。 첫사랑에 빠진 듯 1연 話者 스스로 「짝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고백하였듯이, 「한 송이 꽃」 「아름다   1)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拙稿, , 《중국문학연구》; 18 집, 1999년 6월, 165-185쪽 참조. 2) 본고에서 인용한 시는 梁仁 編, 《戴望舒全編》(杭州: 浙江文藝出版社 1991년)을 텍스 트로 하였다.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85   운 아가씨」는 바로 施绛年이며, 그녀에 대한 사랑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다. 그 녀는 문단 동료인 施蛰存의 여동생으로, 비록 대망서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시작 되었지만, 狂的으로 그녀를 사랑하였다.   我將對你說我的戀人, 당신에게 내 연인을 소개하리, 我的戀人是一個羞澁的人, 내 연인은 부끄럼쟁이, 她是羞澁的, 有着桃色的臉, 그녀는 부끄럼쟁이, 복숭아빛 얼굴, 桃色的嘴脣, 和一顆天靑色的心. 복숭아빛 입술 그리고 하늘빛 마음을 지녔답 니다. 她有黑色的大眼睛, 그녀의 검은 커다란 눈동자. 那不敢凝看我的黑色的大眼睛― 나를 응시하지 못하는 검은 커다란 눈동자― 不是不敢, 那是因爲她是羞澁的; 쳐다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부끄럼 쟁이기 때문; 而當我依在她胸頭的時候, 내가 그녀의 가슴에 기댈 때, 你可以說她的眼睛是變換了顔色, 당신은 그녀의 눈동자 색깔이 변했다고 말하리, 天靑的顔色, 她的心的顔色. 하늘빛, 그녀 마음의 빛깔로. 她有纖纖的手, 그녀의 섬섬옥수, 它會在我煩憂的時候安撫我내가 번민에 빠질 때 위로해 주고, 她有淸朗而愛嬌的聲音, 그녀의 맑고 애교있는 목소리, 那是只向我說着溫柔的, 내게만 부드럽게 속삭일 뿐, 溫柔到銷熔了我的心的話的。그 부드러움에 내 가슴의 말도 녹아버리네. 1,2,3 연   「복숭앗빛」 얼굴과 입술, 「하늘빛 마음」, 「섬섬옥수」, 「검은 커다란 눈동자」, 「부 끄럼쟁이」, 「애교 있는 목소리」의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매력적인 여인의 자태와 모습을 초상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여성인 「그녀」는 施绛年일 수도 있고 詩的 話者가 꿈꾸는 이상형일 수도 있다. 시 적 화자가 사랑의 욕망을 느끼는 대상임은 분명하다. 에는 求愛의 표현 나아가 육체적 욕망까지 나타난다. 她有太多的蜜餞的心― 그녀에겐 과일 젤리 같은 마음이 아주 많다. 在她的手上, 在她的脣上; 그녀의 손안에, 그녀의 입술 위에; 然后跟着口紅, 跟着指爪, 그런 후엔 잇달아 립스틱, 손톱자국을, 印在老紳士的頰上, 늙은 신사의 뺨 위에 남기고, 刻在醉少年的肩上。 취한 소년의 어깨 위에 새긴다. 我們是她年輕的爸爸, 誠然 우리는 그녀의 젊은 아빠, 확실히 但也害怕我們的女兒到懷裏來撒嬌, 하지만 우리의 딸이 품속으로 파고들어 애 교부릴까 두려워 할 뿐 因爲在蜜餞的心以外, 왜냐하면 과일 젤리 같은 마음 말고도, 她還有蜜餞的乳房, 그녀에겐 과일 젤리 같은 젖가슴이 있으니, 而在撒嬌之后,她還會放肆. 그리고 애교를 부리고 나선, 방자해질 터이니. 你的襯衣上已有了貫矢的心, 그대의 블라우스 위로는 이미 큐피트의 화 살을 맞은 심장이, 而我的指上又有了紙捻的約指. 나의 손가락엔 종이로 엮은 반지가 있다. 如果我愛惜我的秀發, 만일 내가 나의 아름다움을 안타까워한다면, 那么你又該受那心愿的忤逆。 그럼 그대 또한 그 소망의 거부를 당하겠지.   총 3연으로 구성되었으며, 「딸」같은 어린 소녀와 「젊은 아빠」인 듯 나이 든 남성 사이의 애정심리와 에로틱한 애정행각을 묘사하였다. 1연은 어린 소녀지만 사랑 경 험이 많은 듯, 색색의 「과일 젤리」처럼 여러 마음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녀가 「늙은 신사」와 「취한 소년」에게 남긴 「립스틱」과 「손톱자국」에서 만남과 헤어 짐의 경험도 추측해 볼 수 있다. 2연은 「과일 젤리」처럼 부풀어 오른 젖가슴과 애 교로 남성을 유혹하는 소녀 그리고 적극적인 소녀의 유혹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혹 시 소녀가 버릇없이 행동할까 근심하는 남성의 모순 된 심리묘사이다. 3연은 「그녀」 와 자신의 사랑을 확인 후, 서로를 향해 아픔 없는 사랑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나 이 차이 많은 남녀의 애정 행각과 심리 묘사라는 모티브에서 대망서와 施绛年의 애정을 비유한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3) 그러나 「딸이 품속으로 파고들어 애교부릴 까 두려워 할 뿐」처럼 소녀의 육체적 충동을 은근히 기대하는 남성 심리를 우회적 으로 드러낸 것을 볼 때, 일본인 댄서의 求愛 행동과 표현을 빌어서, 여성을 향한   3) 孫玉石 主編 《戴望舒名作欣賞》(北京; 中國和平出版社 1993년), 139-140쪽.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87   시인의 육체적 욕망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육체적 욕망과 구애는 「립스틱, 손톱자국」 「과일 젤리 같은 젖가슴」 「큐피트의 화살을 맞은 심장」 등 여성의 신체⋅ 사랑 표현을 통해 감각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에서도 에로틱한 사랑 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我的小戀人, 今天我不對你說草木的戀愛, 귀여운 나의 연인, 오늘 그대에게 초록의 사랑을 말하기보다, 却讓我們的眼睛靜靜地說我們自己的, 눈동자로 우리 자신을 조용히 얘기 하기를, 而且我要用我的舌頭封住你的小嘴脣了, 그리고 나의 혀로 그대의 입술을막 으려 하오, 如果你再說: 我已聞到你的愿望的氣味。그대가 다시 말한다 해도: 나는 이 미 그대 욕망의 체취를 맡았어요. 3연   而這裏, 鮮紅竝寂靜得여기 네 입술처럼 與你的嘴脣一樣的楓林間, 새빨갛고 쓸쓸한 단풍 숲에서; 雖然殘秋的風還未來到, 비록 남은 가을바람 아직 불어오지 않았어도, 但我已經從你的緘黙裏, 난 벌써 네 침묵에서 覺出了他的寒冷。 추위를 느꼈다. 중에서   인용한 두 작품은 연인으로부터 촉발된 사랑의 욕망과 상실의 비애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연작시이다. 의 「나의 혀로 그대의 입술을 막으려 하오.」에서 나타나듯, 사랑하는 여인과 산책하면서 나눈 입맞춤의 에로틱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나는 이미 그대 욕망의 체취를 맡았어요.」라며 거부할 지라도 여인에 게 입맞춤을 하려는 話者의 원초적 욕망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의 시적 화자는 입맞춤을 나눈 여인의 침묵으로부터 이별을 예감한 듯 상실의 절망 속으로 빠지고 있다. 연인과의 이별에 상심하여 비애에 빠지는 화자의 모습은 다음 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願她溫溫的眼波그녀의 따스한 눈길이 蕩醒我心頭的春草: 내 마음의 봄풀을 흔들어 깨우길 바랄 뿐: 誰希望有花兒果兒? 누가 꽃과 열매 맺기를 희망하나요? 但願在春天裏活幾朝. 다만 봄날에 며칠이라도 살 수 있기를 바랄 뿐. 2연   可是只要你能愛我深, 그러나 당신이 나를 깊이 사랑할 수 만 있다면, 只要你深情不改, 당신의 깊은 情이 변하지 않는다면, 這今日的悲哀, 오늘의 비애는, 會變作來朝的歡快! 내일의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 啊, 我的歡愛! 아, 나의 환희!(歡愛) 여! 3연   여인을 향한 求愛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한 작품이다. 「그녀의 따스한 눈길 」, 「다만 봄날에 며칠이라도 살 수 있기를 바랄 뿐」 이라며 여인의 눈길과 몸짓에 一 喜一悲하는 사랑에 빠진 남성 화자의 심정과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여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여인의 사랑이 사라진 현실은 비애와 고통 의 공간이지만, 그 사랑이 존재하는 시공간은 환희와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다. 여 기서 「그녀」, 「당신」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화자의 강렬한 사랑과 욕망의 대상이기 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화자는 그 여성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절망과 비 애에 빠진다. 따라서 시인에게 여성은 사랑과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절망과 고독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다음 시는 사랑하는 남성과의 이별을 읊은 이다.   在比志步爾啓碇的前夜, 比志步爾호가 출항하기 전날 밤, 托密的衣袖變作了手帕, 토미(托密)4)의 옷소매는 손수건으로 변해, 她把眼泪和着脣脂拭在上面, 그녀는 눈물과 연지를 닦아내며, 要爲他壯行色, 更加一點粉香. 그의 첫 출발을 위해, 한 점 분 향기를 더한다. 明天會有太淡的烟和太淡的酒, 내일이면 너무나 싱거운 담배와 술, 和磨不損的太堅固的時間, 흘러가지 않는 너무도 견고한 시간일 뿐 而現在, 她知道應該怎樣的忍耐: 지금, 그녀는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지 안다: 托密已經醉了, 而且疲倦得可怜. 토미(托密)는 이미 취했고, 애처롭게 지쳤다. 這的橙花香味的南方的少年, 이 등꽃 향기 같은 남방(南方)의 소년, 他不知道明天只能看見天和海― 내일은 하늘과 바다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或許在“家, 甛蜜的家”裏他會康健些, 어쩌면 “즐거운 나의 집”에서 그는 건강 할 지도, 但是他的溫柔的親戚却要更瘦, 更瘦. 그러나 그의 가냘픈 연인은 더욱 야윌 것이다. 4) 토미(托密)는 일본 댄서의 이름이다.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89   이 시의 화자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불분명하지만, 정서적으로 볼 때 여성에 가깝 다. 떠나는 사람은 토미의 연인 「남방의 소년」이고, 보내는 사람은 댄서 「토미」이 다. 그녀는 떠나는 연인을 위해 서글픈 마음을 숨기고 화장을 고친다. 이별 후, 그 녀의 상심을 위로하는 것은 싱거워진 술과 담배뿐, 연인 「남방의 소년」이 그녀를 잊고 건강해지는 것과 반대로 토미는 술에 취해 고통스러운 심정을 달래면서 더욱 야위어 간다. 이렇듯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 때문에 절망에 빠진 토미의 모습은 다름 아닌 戴望舒 자신의 형상이다. 그는 토미의 슬픔을 통해 자신의 서러운 심정 을 토로하였다. 대망서는 1927년 4⋅12사변으로 인해 施蛰存의 집으로 잠시 도피하면서 施绛 年을 향한 사랑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유학과 학위취득 그리고 안정된 직업 을 얻은 후 결혼이라는 단서가 있기는 했지만, 1930년 초여름 그녀와 약혼했고, 1935년 5월 프랑스에서 귀국 후 정식으로 파혼하였다. 이 연애 기간에 창작 된 여 러 詩篇 안에는 여인을 향한 사랑의 욕망 그리고 이별로 인한 절망⋅비애가 담겨 있다. 시인이 목숨까지 걸 정도로 사랑하였지만5), 짝사랑이라는 일방통행식 애정이 었기 때문에, 달콤한 密語나 사랑의 감정 보다 힘들고 가슴 졸이는 그리고 失戀에   5) 瘂弦, 《戴望舒卷》(臺北: 洪範書店 1983년), 236쪽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어 느 날 그는 약속대로 영안 공사 천운루에서 그녀를 만나 거닐고 있었다. 戴詩人은 돌연 히스테릭하게, 난간 쪽으로 올라가더니, 그녀에게 즉시 그와 결혼을 약속할 것을 요구하 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였다……결국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他約了她在永安公司天韻樓去閒逛, 戴詩人突然的歇司的裏, 跳上了欄杆邊, 要求她立 刻應允與他訂婚, 否則他就從那兒跳下去.……允許了戴的要求.) 190 《中國文學硏究》⋅제46집   따른 두려움⋅상실감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 있다. 게다가 경제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과 떨어져 프랑스 유학을 떠나야 했던 시인이 느꼈을 그리움과 절망은 남성 시인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이별을 두려워하는 여성의 심성에 가 깝고 그 중에서도 떠나버린 연인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여인의 의식 세계에 더욱 근접해 있다. 一枝, 兩枝, 三枝,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床巾上的圖案花침대보 위에 그려진 꽃은, 爲什么不結果子啊! 어찌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 過去了: 春天, 夏天, 秋天。 흘러가 버렸다: 봄, 여름, 가을. 1연 你舊日的蜜意柔情예전 그대의 달콤한 말과 따뜻한 마음 如今已抛向何處? 지금 어디로 갔나요? 看見我憔悴的顔色, 초췌한 내 얼굴을 보고, 你啊, 你黙黙無語! 그대, 그대는 묵묵히 아무런 말이 없군요! 你會把我孤凉地抛下, 그대는 날 쓸쓸히 냉정하게 버리고, 獨自蹁躚地飛去, 홀로 훨훨 춤추며 날아가 버리겠지, 又飛到別枝春花上, 또 다른 봄꽃에게로 날아가, 依依地將她戀住예전처럼 그 꽃과 사랑에 빠지겠지. 明朝曉日來時내일 새벽이 찾아올 때 小鳥將爲我唱薤露歌; 작은 새는 날 위해 輓歌를 부르겠지; 你啊, 你不會眷顧舊情그대, 그대는 옛정을 봐서라도 到此地來憑弔我! 이리와 날 위해 눈물 흘리지 주지 않겠니! 5⋅6연   은 떠난 임을 기다리며 獨守空房하는 恨 많은 여인을 형상화 하였 다. 시 속에 주체와 객체 모두 생략된 채, 침상 위에 그려진 꽃그림과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이라는 고전적이고 상징적 이미지만으로 고독한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암 시하고 있다. 은 꽃과 나비에 비유하여, 애인의 변심과 이별에 따 른 상실감과 비애 그리고 애인을 잊지 못하는 화자의 안타까움을 함축적으로 표현 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미 변심한 애인 때문에 초췌해진 話者와 미련 없이 떠나는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91 애인을 결코 붙잡지 못하는 화자의 태도이다. 남성보다는 여성, 강자보다는 약자에 게 더 어울리는 이별의 자세로 여성 화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6) 대망서는 남성 시인이지만 여성 화자와 여성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별의 슬픔과 절망을 더 욱 비극적으로 만들면서 극대화 시키고 있다.   Ⅲ. 상실과 자기 극복의 형상화   撑着油紙傘, 獨自종이우산을 받쳐들고, 홀로 彷徨在悠長, 悠長방황하네. 길고, 긴, 又寂寥的雨巷, 적막한 비 내리는 골목에서, 我希望逢着난 만나련다 一個丁香一樣地라일락처럼 結着愁怨的姑娘. 시름 맺힌 아가씨를. 她是有그녀에겐 丁香一樣的顔色, 라일락 같은 빛깔, 丁香一樣的芬芳, 라일락 같은 향기, 丁香一樣的憂愁, 라일락 같은 우수가 있다, 在雨中哀怨, 빗속에서 슬퍼하고, 哀怨又彷徨; 슬퍼하며 방황하는; 她彷徨在這寂寥的雨巷, 그녀는 이 비 내리는 쓸쓸한 골목을 방황한다. 撑着油紙傘종이우산 받쳐 들고 像我一樣, 나처럼 像我一樣地나처럼 黙黙彳亍着, 말없이 비척거린다. 冷漠, 凄淸, 又惆悵. 냉정히, 쓸쓸히, 슬프게. 她靜黙地走近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走近, 又投出다가와서는, 太息一般的眼光, 탄식하는 눈길을 던지고 6) 천이두 《綜合에의 의지》(서울; 일지사 1974년), 32-37쪽 참조: 시 속의 여성화법을 여 성적 어법, 복종적⋅인고적 자세, 현실부재의 임에 대한 갈망 등으로 설명한다. 192 《中國文學硏究》⋅제46집 她飄過 그녀는 훌쩍 지나 간다 像夢一般地, 꿈처럼, 像夢一般地凄婉迷茫. 꿈처럼 구슬프게 아련히. ................................ ........................................... 撑着油紙傘, 獨自종이우산을 받쳐들고, 홀로 彷徨在悠長, 悠長방황하네. 길고, 긴, 又寂寥的雨巷, 적막한 비 내리는 골목에서, 我希望飄過 난 스치련다 一個丁香一樣地 라일락처럼 結着愁怨的姑娘. 시름 맺힌 아가씨를. 1, 2, 3, 4, 5, 7연   戴望舒에게 「雨巷詩人」의 명예를 안겨준 대표작이다. 시의 배경은 1927년 공산 당에 대한 蔣介石의 무력 탄압으로 인해, 중국의 청년층과⋅지식인들은 혁명 실패 로 인한 환멸감을 느끼던 때이다. 1930년대 초의 중국 사회는 당시의 젊은이들을 환멸과 적막에 잠기게 하였다. 군벌의 득세가 가져온 사회 불안과 정치적인 불안정 및 매판 자본의 난립으로 인한 반식민지적 경제 상황은 농민의 파산⋅노동자의 궐 기⋅경제 공황 등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北平⋅上海 및 沿海 等地와 같이 공업이 발달한 도시를 중심으로 젊은 지식층들은 出路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였다.7) 시 속 의 「적막한 비 내리는 골목」 「무너진 담장, / 비 내리는 골목」은 당시 암울했던 중 국의 상황이며 시적 자아가 인식한 현실이다. 「라일락」같은 「아가씨」는 아름다운 이상이며 희망의 상징이며, 추악한 현실로부터 자아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여신 이다. 시적 자아는 구원의 상징인 아가씨를 기다리며 홀로 방황한다. 아가씨는 꿈 길처럼 왔다 사라지고 남은 것은 희망이 사라진 뒤의 절망과 허무뿐이다. 유일한 구원의 상징인 아가씨의 형체⋅눈길⋅향기마저 사라진 현실에서, 그는 환멸의 비애 와 상실감을 느낀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여전히 이상과 희망의 상징인 아가씨를 기다리며, 비 내리는 골목에서 고통스럽게 배회하고 있다. 절망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하려는자아의 모습이며 그 의지의 반영인 것이다. 에는 異國 여성 통해 꿈⋅이상을 상실한 시인의 자아를 형상화하고 있다.   7) 李麗 , 《中國現代文學硏究叢刊》(作家出版社 1987년 4월), 164-165쪽.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93   百合子是懷鄕病的可怜的患者, 유리꼬는 가련한 향수병 환자, 因爲她的家是在燦爛的櫻花叢里的; 찬란한 벚꽃 우겨진 속에 그녀의 집이 있기 때문에 我們徒然有百尺的高樓和沈迷的香夜; 우리에겐 단지 높은 빌딩과 흠뻑 취하는 향기로운 밤 뿐, 但溫煦陽光和朴素的木屋總常在她緬想中. 그러나 따사로운 햇빛과 소박한 오 두막은 언제나 그녀의 추억 속에 있다 她度着寂寂的悠長的生涯, 그녀는 쓸쓸하고 긴 생애를 보낸다. 她盈盈的眼睛茫然地望着遠處; 웃고 있는 눈동자는 무심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 人們說她冷漠的是錯了, 사람들은 그녀가 냉정하다고 말하 지만 사실은 아니다. 因爲她沈思的眼里是有着火焰. 사려깊은 그녀의 눈 속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她將使我爲她而憔悴嗎? 그녀는 나를 귀찮게 굴지도 모르겠 다? 或許是的, 但是誰能知道? 어쩌면 그럴지도, 그러나 누가 알 런지? 有時她向我微笑着, 때로 그녀는 나에게 미소를 짓기도 하지, 而這憂郁的微笑使我也墜入懷鄕病裏。 하지만 우울한 미소는 나를 향수병 으로 추락시킨다. 1,2,3연   에는 고향 일본을 떠나 중국에서 생활하는 일본인 댄서인 유리 꼬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異國에서 화류계 생활을 하며 벚꽃 우 거진 고향집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삶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조하다, 향수병에 걸 린 유리꼬의 우울한 미소를 통해 「향수병 속으로 추락」하는 동병상련의 고통을 느 낀다. 八重子是永遠地憂鬱着的, 야에꼬는 영원히 우울하다, 我怕她會鬱瘦了她的靑春。그녀가 자신의 청춘을 여위게 할까 두렵다. 是的, 我爲她的健康挂慮着, 그렇다, 나는 그녀의 건강이 염려된다, 尤其是爲她的沈思的眸子。특히 사색에 잠긴 그녀의 눈동자가. 發的香味是簪着遼遠的戀情, 머리 내음은 아득히 먼 사랑을 꽂고서, 遼遠到要使人流淚; 저 멀리서 찾아와 눈물 흘리게 한다; 但是要使她歡喜, 我只能微笑, 그러나 그녀를 기쁨에 들뜨게 해도, 나는 다 만 미소지을 뿐, 只能象幸福者一樣地微笑。 행복한 사람처럼 미소를 지을 뿐. 因爲我要使她忘記她的孤寂, 왜냐하면 나는 그녀가 자신의 고독을 잊고, 忘記縈系着她的渺茫的鄕思, 그녀를 휘감고 있는 아득한 향수를 잊고, 我要使她忘記她在走着그녀가 끝없이, 쓸쓸하고 처량한 길을 無盡的, 寂寞的, 凄凉的路。가고 있음을 잊게 해주고 싶기 때문. 而且在她的脣上, 我要爲她祝福,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그녀를 위해 나는 축복하련다. 爲我的永遠憂郁着的八重子, 영원히 우울해 하는 나의 야에꼬를 위해, 我愿她永遠有着意中人的臉,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영원토록 간직하기를 바라며, 春花的臉, 和初戀的心。 봄꽃의 얼굴과 첫사랑의 가슴을.   의 야에꼬 역시 중국의 대도시 화류계에서 생활하는 일본인 댄 서로, 떠나 온 일본의 고향집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자이다. 화자는 고향을 상실한 야에꼬의 「쓸쓸하고 처량한」 삶을 빌어 안식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화자 자신의 영 혼을 발견한다. 두 편의 인용 시에서 유리꼬와 야에꼬는 화려한 都市에서 생활하는 舞姬로, 일 본의 고향을 그리워하다 향수병에 걸린 불행한 女人들이다. 시인은 향수병에 걸린 여인의 형상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이상과 낙원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낯선 타국의 화류계 여인이라는 절망스러운 현실이지만, 유리꼬와 야에꼬 모두 아 련한 추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고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리워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95 때문이다. 유리꼬와 야에꼬가 안식처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바로 꿈을 찾 아 현실에서 방황 갈등하는 시인의 모습이며 시인 자아의 投射體이다. 향수병에 걸 렸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슬픔과 실의에 빠진 여성 형상은 꿈⋅ 이상을 상실한 시인의 자아이며, 상실한 꿈⋅이상을 찾아 헤매는 시인의 모습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들의 눈물과 한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위안 받으려는 심리적 기제라 할 수 있다. 가공의 여성에게 시인의 자아를 투사하여 형상화하고 자신의 상황을 드러냄으로써, 슬픔을 위로 받고 극복 의지를 회복하려는 의도된 장 치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참된 자아 의 회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8) 戴望舒가 인식한 당시 현실은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스스로 「멀고 먼 나라를 동경하는 자, 난, 나는 적막한 생물」9)라고 인식하였던, 孤立된 그의 自 我는 현실과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는 구체적인 노력 즉 불만스러운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이를 해소하려는 의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는 다만 이국적 여성 상징을 통해 고향과 안식처의 부재로 인한 비애와 고통을 드 러내고 상실한 그 무엇인가를 찾아 노래함으로써, 불만족한 현실의 喪失感을 克服 하고 慰安 받기를 원하고 있다. 8) 김경중 《한국비블리아 발표논집》 제14 집, 2006년 5월, 79-181쪽 참조; 문학은 우리 자신이나 어느 누구의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야기가 아니지만, 문학과의 만남은 지금까지 왜곡되고 편협한 자신과 세상에 대 한 통찰과 생각의 구조를 다시 형성하게 해서 자신에 대한 존중, 감사와 기쁨, 사랑, 세 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지금까지 잃어버린 행복감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 다. 정신 분석학적 관점에서의 문학적 치료 원리로 동일시, 정화(카타르시스),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문학에서 동일시는 작품의 내담자가 등장인물에 자신의 감정, 사 고, 성격, 태도를 투사하거나, 반대로 등장인물의 이상적인 감정, 사고, 성격, 태도 등을 자신에게서 찾아내서 내면에 섭취(ingestion) 하고 증대시켜 나가면서, 문학작품에서 자 아를 이끌어 내는 가장 전형적인 지각 과정이다. 이렇게 동화("ッ化), 이화(異化), 중립, 체험 등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작품에 개입하게 되고, 자신을 변화시켜가게 되는 것이 다.   9) 「遼遠的國土的懷念者, 我, 我是寂寞的生物.」 196 《中國文學硏究》⋅제46집   Ⅳ. 순수와 회귀 본능의 상징 戴望舒 詩의 서정적 특징 중 하나가 고향을 향한 그리움 즉 鄕愁이다. 여기서의 고향은 시인이 태어나 자란 삶의 터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그가 간절히 귀향하길 원하는 고향은 현실에 존재하는 地理的 空間이 아니라, 현실을 떠나고 存在를 떠난 이상향이다. 현실에서 상처받은 시인의 영혼으로 하여금 安息과 상처 를 치유해주는 장소이다. 때문에 시 속에서 실존적인 고향을 부정하는 대신 현실에 서 찾을 수 없는 樂園世界⋅유토피아를 향한 강한 노스탤지어를 드러낸다. 戴望舒가 시에서 강한 歸鄕 의식을 드러내는 공간은 하늘이다. 그는 하늘을 자 신의 원초적 故鄕으로 상정하고, 「언제나 하늘의 소식에 관심을 보였고, 하늘의 고 향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였다.(他總是關心着天上的消息, 渴望着回返到天上的故 鄕去.)」10) 순수와 회복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하늘 고향은 어머니와 모성애라는 상 징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다음 인용 시에서 시인은 스스로 鄕愁病을 앓고 있다 고 말하며, 푸른 하늘로 돌아가길 간절히 희망한다. 懷鄕病, 哦, 我啊, 향수병, 아, 나는, 我也是這類人之一, 나도 이런 사람들 중 하나인가, 我呢, 我渴望着回返 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到那個天, 到那個如此靑的天, 저 하늘로, 저토록 푸른 하늘로, 在那里我可以生活又死滅, 그 곳에서 나는 살수도 죽을 수도 있으리. 像在母親的懷里, 엄마의 품속에서, 一個孩子笑着和哭着一樣. 아기가 웃고 우는 것처럼. 我啊, 我是一個懷鄕病者나, 나는 향수병자, 對于天的, 對于那如此靑的天的; 하늘을 향해, 이렇게 파아란 하늘을 향해; 那裏, 我是可以安憩地睡眠, 그곳에서 편안히 잠잘 수도 있으리, 沒有半邊頭風, 沒有不眠之夜, 편두통도 없고, 불면의 밤도 없이, 沒有心的一切的煩惱, 마음의 모든 번뇌도 없으리, 它, 已不是屬于我的, 이런 마음, 그건 이미 내 것이 아니지, 10) 紀弦, , 瘂弦 編, 《戴望舒卷》(臺北; 洪範書店 1983년), 167-168쪽, 「他 總是關心着天上的消息, 渴望着回返到天上的故鄕去.」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97 而有人已把它抛棄了, 這心, 누군가 그것을 던져버렸다, 象人們抛棄了敝舃一樣。낡은 신을 버리듯. 2,3연   시인이 태초의 고향으로 규정한 「파아란 하늘」은 현실에 존재하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현실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초월적 고향이다.11) 현실에 존재하는 시인의 자아가 귀향하기를 갈망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잃어버린 세계⋅상실된 고향이다. 하늘 고향은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함과 따스함이 넘치는 모성 공간이자 원초적 충 족성을 갖추고 있기에 슬픔이나 고독과 소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아갈 수 있는 母胎같은 곳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상처받은 시적 자아는 그 곳으로 돌아가 엄마 품안의 아기처럼 울고 웃으며 평화롭게 안식하고, 불면의 밤과 편두통 그리고 모든 번뇌도 사라져,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지상에 발이 묶인 화자로서는 그러한 지향 자체가 멀고 먼 동경일 뿐 지상의 삶에 속박 받고 있는 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안식과 위로를 주는 원초적 고향의 상징이다. 하늘에 대한 동경과 歸鄕을 통해 순수성을 회복하고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시인의 자아가 고향 상실감을 드러내며 하늘 고향을 향한 강한 회귀를 표 출한다는 것은 현실의 삶이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며 삶의 근간이 흔 들리는 현실 지상과 멀리 동떨어진 곳에 자신의 이상향을 구축하고 찾아가는 것이 다.12) 따라서 대망서 시의 鄕愁에는 喪失된 樂園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고, 이것은 悲劇的 現實 認識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그리움과 함께 비애의 정조를 지니게 된다. 잃어버린 고향⋅세계를 그리 워하며 유랑하거나 방황하는 형상은 바로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그의 시 가운데   11) 김종철 《시와 역사적 상상력》(서울; 문학과 지성사, 1978년), 11쪽 참조.; 인간에게는 두 가지 고향이 있는데, 1. 생래적인 현실적 고향 2. 현실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초월 적 고향이다. 인간은 현실의 갈등 ⋅대립을 벗어나 안식처인 고향을 추구하고 그곳에 머물기를 희망한다. 12) 이종은 외, , 《한국학논집》 28집(1996년), 한 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7-10쪽 참조;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 삶이 유한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에 완전하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에서 행복을 느끼는 희망을 추구하게 된다. 즉 낙원세계 또는 유토피아를 동경한다. 198 《中國文學硏究》⋅제46집   종종 발견된다.13) 다음의 시편은 이러한 형상을 담고 있다 故鄕蘆花開的時候, 고향의 갈대꽃이 필 때, 旅人的鞋跟染着征泥, 나그네의 신발 뒤축은 먼 旅路의 흙으로 더러 워지고, 粘住了鞋跟, 粘住了心的征泥, 신발 뒤축에 달라붙고, 마음에 달라붙은 旅路 의 흙먼지, 幾時經可愛的手拂拭? 언제쯤 사랑스러운 손길이 털어 낼 수 있을지? 1연 시 속 나그네는 현실 공간 그 어디에서도 安住할 수 없고 安息處를 찾아 유랑⋅ 방황하는 형상이다. 나그네 신발에 달라붙은 흙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현실에서 정 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형상과 旅程의 고단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14) 유랑 생활로 인한 흙먼지는 신발뿐만 아니라 마음 속 까지 「달라붙은 旅路의 흙먼 지」이기에, 「언제쯤 사랑스러운 손길이 털어 낼 수 있을지?」 간절히 기다린다. 「사 랑스러운 손길」이 의미하는 것은 나그네가 만나기를 희망하는 대상으로, 안식과 위 로를 주는 어머니의 손길일 수도, 라일락 같은 아가씨의 손길 일 수도 있다. 남성 보다 여성의 손길을 상징하며 그 사랑스러운 손길을 통해 유랑으로 지친 心身을 위 로받기 원하고 있다. 하늘을 자신의 원초적 고향으로 여겼던 戴望舒에게 혼돈스러운 현실 지상의 삶 자체는 욕구불만의 원인이자 대상이었다.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잃어 버린 고향을 대신할 安息處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하늘로 귀향하기를 원하는 한편 自然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여기서 自然은 단순한 田園 空間이 아니라, 이상향으 로서 순진무구한 세계이다. 이곳으로 돌아가 현실의 좌절과 회의를 극복하고 훼손 된 자아를 위로 받으려 한다.15)   13) 周敬老陽 著 《現代派文學在中國》(沈陽: 遼寧大學出版社 1986년), 65쪽에서 「핵심 상징은 바로 시인 자신의 자아임을 발견한다. 일례로 의 향수병자, 의 짝사랑에 빠진 자, 의 꿈을 찾는 이, 의 기구한 첩, 의 유랑인, 의 밤나방, 의 만돌린 등 이러한 상징은 모두 자아의 화신으로, 자아 영혼의 기탁처로 삼아 체계를 구성하여 시인의 고민⋅방 황⋅추구하는 심정을 토로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14) 盧斯飛⋅劉會文 編 《馮至⋅戴望舒詩歌欣賞》(廣西敎育出版社 1989년), 162쪽.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199   孤心逐浮雲之炫燁的卷舒, 외로운 마음은 찬란하게 변화하는 뜬구름을 좇고, 慣看靑空的眼喜侵閾的靑蕪. 푸른 창공을 바라보는데 습관된 눈 은 문지방을 넘어온 푸른 잡초를 즐긴다. 你問我的歡樂何在? 그대 내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窓頭明月枕邊書. 창가의 밝은 달과 머리맡 책에 있 다고, ………………………………… …………………………………………… 渴飮露, 飢餐英; 목마르면 이슬을 마시고, 배고프면 꽃잎을 따먹고; 鹿守我的夢, 鳥祝我的醒. 사슴이 내 꿈을 지켜 주고, 새가 내 깨어남을 축복한다. 你問我可有人間世的罣慮? 그대 내게 인간세의 근심이 있는지 묻는다면? ――聽那消沈下去的百代之過客的蛩音. 저 의기소침한 나그네 발걸음 소리 를 듣는다고. 1,3연   시 속에서 화자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초월한 仙人과 같이,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 어 합일에 도달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구분⋅대립하고 갈등하는 존 재가 결코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과 만물은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자연은 결코 서로 구분⋅대립하고 갈등하는 세계가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인간과 만물은 하나로 조화를 이룬 세계이다. 바로 「사슴이 내 꿈을 지켜 주고, 새가 내 깨어남을 축복」 하는 세계이다. 바로 시인의 자아가 꿈꾸는 이상향이다. 따라서 회귀공간으로서 자연은 불만스러운 現實을 초월하는 장소이며, 현실의 상 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탈속적 공간이다. 이러한 이상적 공간에서의 행복한 삶은 자 15) 이건청, 《한국전원시 연구》(서울; 문학세계사 1986년), 14쪽 참조; 서구의 전원시가 황금시대를 지향하며 양치기들의 생활과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경우의 황 금시대란 상실된 시기이다. 따라서 전원은 현재의 좌절이나 회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 스탤지어의 근원이 되기 마련이다라고 하고 있다. 200 《中國文學硏究》⋅제46집   연친화적 모습으로 나타나며, 특히 여성 상징을 통해 회귀 실현의 공간으로 더욱 사실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村里的姑娘靜靜地走着, 시골 아가씨가 조용히 걸어가네, 提着她的蝕着靑苔的水桶; 푸른 이끼 낀 물통을 들고서; 濺出來的冷水滴在她的跣足上, 차가운 물방울 튀겨 맨 발 위에 떨어져도, 而她的心是在泉邊的柳樹下. 그녀 마음은 우물가 버드나무 아래에 있네 這姑娘會靜靜地走到她的舊屋去, 아가씨는 조용히 그녀의 낡은 집으로 갈 거라네, 那在一棵百年的冬靑樹陰下的舊屋, 백년 묵은 감탕나무 그늘 아래의 낡은 집으로, 而當她想到在泉邊吻她的少年, 우물가에서 도련님과의 입맞춤을 떠올 리고, 她會微笑着, 抿起了她的嘴脣. 그녀는 미소지으면서, 자기 입술을 오 무릴거라네. 她將走到那古舊的木屋邊, 그녀는 낡고 오래된 오두막집으로 갈 거라네. 她裝在那里驚散了一群在啄食的瓦雀, 거기서 곡식을 쪼고 있던 참새를 놀라 달아나게 하고, 她將靜靜地走到廚房里, 조용히 부엌으로 가서, 又靜靜地把水桶放在干芻邊. 살며시 물통을 마른 짚더미 옆에 내려 놓을 거라네. 她將幇助她的母親造飯, 그녀는 어머니를 도와 저녁을 짓고, 而從田間回來的父親將坐在門檻上抽烟,밭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문턱에 앉아 담배 피우고, 她將給猪圈里的猪喂食, 그녀는 우리 안의 돼지에게 먹이를 주고, 又將可愛的鷄趕進它們的窠里去. 귀여운 닭들을 닭장 안으로 몰아 넣을 것이라네. 在暮色中吃晩飯的時候, 저녁 노을 속에 밥을 먹을 때, 她的父親會談着今年的收成, 그녀의 아버지는 올해의 수확을 얘기하며,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201 他或許會說到她的女兒的婚嫁, 아마도 그녀의 혼사 얘기를 꺼낼지도, 而她便將羞怯地低下頭去. 그럼 그녀는 금새 부끄러워 고개를 떨 굴 것이라네. 她的母親或許會說她的懶惰, 어머니는 아마도 그녀의 게으름을 얘기 할 것이라네, (她打水的遲延便是一個好例子,) (그녀가 물 길으며 늦장 피우는 것을 나무라며), 但是她會不聽到這些話, 그러나 그녀는 이런 얘기를 듣지 않을 것이라네, 因爲她在想着那有点魯莽的少年. 그녀는 조금 성급하게 굴었던 청년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는 총 6연으로 되어 있으며, 누구에게나 추억 속에 있음직한 고향의 모습과 삶을 서정성 넘치게 묘사하였다. 나아가 그러한 안식처인 고향을 향한 간절한 그리 움의 정서를 드러내러 냄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고 있다. 평화로운 시골 저녁을 배경으로 맨 발로 물 긷는 순박한 시골 처녀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심정 그리고 어 느 農家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온하고 화목한 가정의 정경을 그려내어 시골 고 향 집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석양 아래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 구성원의 모습은 화목하고 평온해 보인다. 순수의 공간으로서 고향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 합일 그리고 화목한 가족과의 애정 어린 친밀감으로 이루어진 시공간 이다. 이 시에 그려진 전원 속의 삶은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멀지만 지켜보는 시 적 화자는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이 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꿈꾸는 이상향이 소박한 전원, 고향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농촌의 목가적 풍경과 그 곳의 정겨운 삶을 묘사함으로써, 실현 가능한 공간, 구체적인 현실 공간을 제시하여 불만스러운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구체 성을 획득하고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안식처를 그려보며 만족해하는 것은 그리워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와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러한 고향의 情景을 떠올리게 하고 순수 공간으로 이끄는 심정적 통로는 바로 시골 202 《中國文學硏究》⋅제46집   처녀이다. 따라서 시골처녀는 회귀하고 싶은 순수한 고향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인이 도달할 수 없는 과거의 공간이자 추억의 시간인 고향을 향한 그리워하는 밑바탕에는 안온하고 화평한 삶에 대한 염원이 깔려 있고, 현재의 훼손된 삶과 대 비되는 순수한 삶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인간의 의식에서 가장 편안하고 충족 된 시간이 유년 시절로 기억되며, 그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의 공간이 가장 안온하 고 순수한 모습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유 년에 대한 그리움이며, 순수한 삶에 대한 동경이며, 평화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다.16) 이러한 순수의 회귀 공간은 어머니에 대한 향수와 童心의 상징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燈守着我, 劬勞地, 등불은 나를 지켜 준다, 수고스럽게, 凝看我眸子中 내 눈동자 속을 응시한다. 有穿着古舊的節日衣衫的낡은 명절 옷을 입고서 歡樂兒童, 기뻐하는 아이, 憂傷稚子, 슬퍼하는 어린아이, 象木馬欄似地 회전목마처럼 轉着, 轉着, 永恒地…… 돌고, 돌고 있다, 영원히…… 而火焰的春陽下的樹木般的 불꽃의 봄볕아래 나무처럼 小小的爆裂聲, 작은 폭발음, 搖着我, 搖着我, 나를 흔든다, 나를 흔든다, 柔和地。 부드럽게. 美麗的節日萎謝了, 아름다운 명절은 시들었고, 木馬欄猶自轉着轉着…… 회전목마는 여전히 돌고, 돌고 있다…… 燈徒然懷着母親的劬勞, 등불은 부질없이 어머니의 수고를 품고 있고, 孩子們的彩衣已褪了顔色아이들의 색동옷은 이미 바래졌다. 1,2,3연   16)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서울; 민음사 1990년), 116-117쪽 참조; 「어린 시절 의 추억 자체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그때에 느꼈던 아름다움, 이중의 아 름다움으로 하여 어린 시절은 그 자체가 정녕 인간의 이상향, 그 자체가 인간의 상상 력이 지향하는 원형이 된다.」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203   등불을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가운데 유년 시절 명절 옷을 입고 즐거워하는 아 이들 그리고 슬퍼하는 아이들이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며 아련한 향수 속으로 이끈 다. 등불 아래 밤새도록 어머니의 수고로 명절 새 옷이 만들어지고 시간이 흐르면 헌 옷이 되기 때문에 슬퍼지는 것이다. 영원한 새 옷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과 수고도 사라지기 때문에 서글퍼진다. 초현실주의 기법의 영향으로 詩想의 도약이 심해 난해하기는 하나, 등불에 대한 응시와 끝없는 돌아가는 「목마 대」의 회전을 빌어 시간과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였으며17), 분위기 면에서 과거의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그리는 향수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시적 자아를 과 거로 이끄는 것은 등불이지만, 유년의 시간과 동심을 상징하는 것은 어머니의 수고 와 명절 옷이다. 어머니의 손길에서 탄생된 명절 옷을 통해 회귀하고픈 순수했던 동심의 시공간을 형상화 하고 있다.   Ⅴ. 나오기 대망서는 개인적으로도 비극적 삶을 영위하였다. 반봉건 반식민지 시대에 처했던 중국의 지식인으로서도 주변인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목숨 받쳐 사랑했던 여 인의 배신과 이별에서 소외와 고독을 체감하였고. 결혼을 한 후에는 한 가장으로서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삶을 꾸려갔지만 결국 이혼으로 가족과 떨어져 가난이라는 경제적 어려움과 고독한 생활을 겪어야만 했다.18) 격변기의 지식인으 로서도 역사의 소외감을 절감했으며, 시대에 대응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자학과 허 무에 빠지기도 했다. 역사의 주변인, 변두리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선천적인 기질조차 내성적이고 내향적이었고, 어린 시절 앓은 천연두 때문에 남은   17) 민용태 지음, 《로르까에서 네루다까지》(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5년), 23-24쪽 참조; 연상의 전개와 다른 시간⋅공간으로 의식을 유동시키는 수법에서 초현실주의적인 기법 이 엿보인다. 로르까의 로부터 상징적 언어와 반복⋅후렴의 구사 면에서 영향 받았다. 18) 1936년 5월 소설가 穆时英의 여동생 穆丽娟과 결혼 후 큰 딸 詠素(1937년 출생), 1943년 5월 广东省 출신의 杨麗珍(杨静)과 재혼 후, 詠絮(1943년 출생), 詠樹 (1945년 출생) 두 딸을 얻었다. 이후 杨麗珍의 불륜 때문에 1948년 6월 정식으로 이 혼한다. 204 《中國文學硏究》⋅제46집   곰보자국은 평생 그를 괴롭혀 심리적 콤플렉스를 형성하였다.19) 이렇게 개인사적, 시대사적 질곡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비극의 연속이었다. 풍부한 상상력과 관능, 퇴폐를 상징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번역 출판해서, 중국에 소개한 상 징주의 시인 대망서가 모택동 작품을 佛語로 번역하다가 삶을 마감하였다는20) 사 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런 대망서이기에 그의 시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스펙 트럼을 지닌다. 그의 시에 나타난 여성 역시 다층적인 양상을 띤다. 지금까지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을 욕망과 절망의 대상, 상실과 자기 극 복의 형상화, 순수와 회귀 본능의 상징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그의 시에서 서정 적 자아는 여성 상징을 통해 현실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려고 한다. 그가 작품 속 여성 형상을 빌어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사하고 드 러낸 것은 현실의 삶을 탐색하고 새로운 극복의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욕망과 절망의 대상으로서 여성은 아가씨, 연인, 여인,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나 며,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을 담는 한편 비애와 상실도 드러낸다. 이것은 실제 시인 과 施绛年의 사랑⋅失戀을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경험한 열렬한 사 랑과 이별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특히 대망서는 남성 시인임에도 여성 화자와 여성적 태도를 빌어 연정과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는데 정서면에서 비극성을 더욱 극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19) 대망서의 품성과 기질에 대해, 주변인들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鄭家鎭, , 《香港文學》, 1985년 2기, 25쪽; 香港 체류시절 《星 座》를 함께 편집하였던 鄭家鎭의 증언: 「그는 체구가 건장한 사람으로, 곰보였지 만, 사람은 오히려 부드럽고, 선비 기질이 있었다. (他是一個魁梧大漢, 大麻子, 人 却和藹, 好一副書生氣質)」 ② 馮亦大, , 《新文學史料》, 1980년 4기, 164쪽; 후배 문인 馮亦大 의 회고; 「근시 안경 너머로 두 눈에는 부드러운 눈빛을 띄고 있었으며, 알 수 없 는 우울을 지니고 있었다. (透過近視眼鏡, 兩眼露出柔和的光芒, 帶有莫名的憂 鬱)” “그의 두 손은 도리어 부드럽고 연약하여, 다소 소녀의 손과 같았다. ....그가 말하는 목소리는 나지막하였다, (而他的雙手却又是那麽柔軟, 有點象少女的手似 的. ....他說話的聲音是那麽低沈.)」 ③ 王文彬, 《戴望舒 穆麗娟》(中國靑年出版社, 1987년), 8쪽; 王文彬과 施蟄存의 對 談; 「왜 어렸을 적에 나의 천연두를 다 치료하지 않으셨나요? (爲什麽小時候沒有 把我的天花治好?)」 20) Gregory Lee, 《DAIWANGSHU》(Hong Kong; THE CHINESE UNIVERSITY PRESS, 1989년), 104쪽, 馮亦代와의 인터뷰 내용 참조.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205   상실과 자기 극복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비 내리는 골목을 스쳐 지나가는 아가씨, 일본 여성인 유리꼬(百合子), 야에꼬(八重子)라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 다. 라일락 같은 아가씨는 이상⋅꿈⋅희망의 상징이자 화신이다. 동시에 허무와 상 실을 안겨주는 원인이기도 하다. 에서 시인은 이상을 상징하는 아가씨와의 만남을 갈망하지만 실패하고 다시 꿈과 희망을 찾아 방황한다. 비록 이상 실현은 실패하고 상실에 빠지지만, 끊임없이 꿈⋅이상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또한 유리꼬 (百合子), 야에꼬(八重子)는 고향인 일본을 떠나 중국에서 생활하는 댄서로, 시인 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가상의 여성 형상이다. 집⋅고향을 떠나 화류계에서 생활 하는 그녀들의 모습과 상황은 꿈⋅이상을 잃어버린 시인의 형상이다. 안식처로서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녀들은 꿈을 찾아 현실에서 방황 갈등하는 시인의 또 다른 자아이다. 이들 가상의 이국적 여성 상징을 통해 서정적 자아를 드러내며 잃어버린 세계와 상실한 그 무엇인가를 찾아 노래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喪失感을 克服하고 慰安 받기를 원하고 있다. 순수와 회귀 본능을 상징하는 여성은 시골 처녀와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늘을 어머니 품과 같은 곳으로 여기고 돌아가길 원했던 시인에게 자연⋅전원은 하늘 고향을 대신하여 회귀하고픈 순수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고향 마을의 목가적 풍경과 人情을 함께 담아냄으로써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공간을 제시하고 현실극복 의지의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한다. 시골 처녀는 순수와 회귀 공간인 고향을 상 징하며, 평화로운 고향의 情景을 떠올리고 고향으로 이끄는 심정적 통로이다. 어머 니는 안식과 위로를 주는 원초적 고향을 상징한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고향으로, 회귀함으로써 모성애를 통해 순수성을 회복하고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參考書目】 Gregory Lee 《DAIWANGSHU》 Hong Kong, THE CHINESE UNIVERSITY PRESS, 1989 梁仁 編 《戴望舒全編》 杭州, 浙江文藝出版社, 1991 陳丙瑩 《戴望舒評傳》 重慶, 重慶出版社, 1993 206 《中國文學硏究》⋅제46집 瘂弦 《戴望舒卷》 臺北, 洪範書店, 1983 孫玉石 主編 《戴望舒名作欣賞》 北京, 中國和平出版社, 1993 王文彬 《戴望舒穆麗娟》 北京, 中國靑年出版社 1995 盧斯飛⋅劉會文 編 《馮至⋅戴望舒詩歌欣賞》 廣西敎育出版社, 1989 周敬老陽 著 《現代派文學在中國》 沈陽, 遼寧大學出版社, 1986 王文彬, 《戴望舒 穆麗娟》 中國靑年出版社, 1987년 천이두 《綜合에의 의지》 서울, 일지사, 1974 김준오 《詩論》 서울, 삼지원, 1995 김종철 《시와 역사적 상상력》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78 가스통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詩學》 서울, 민음사, 1990 金容稷 《文藝思潮》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79 馮亦代 ; 《新文學史料》 1980년 4기 민용태 《로르까에서 네루다까지》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5 김홍중 ; 《한국사회학》 제40집 3호, 2006 이건청 《한국전원시 연구》 서울; 문학세계사 1986 李麗 ; 《中國現代文學硏究叢刊》 作家出版社, 1987.4 鄭家鎭 ; 《香港文學》, 2기, 1985. 馮亦大 ; 《新文學史料》, 4기, 1980. 拙稿 ; 《중국문학연구》 18집, 1999. 6   【中文提要】 戴望舒的詩歌得自傳統文化的精氣滋養,加上現代主義詩歌的藝術熏陶, 體現了中國的象徵主義詩歌, 并认为他在中国传统的诗歌向现代诗歌的发展过 程中做了很大的贡献。 在总體上, 戴望舒的詩篇里有女性的性向, 本人已經從 戴望舒詩的女性偏向性和外來文藝思潮的影響關係的角度來進行分析。(《中國 文學硏究》18輯1999年6月) 本稿論述目的在戴望舒的詩篇里所表現的女性象 徵和詩人自我意識的關係, 進而更深刻的理解詩人戴望舒的精神意識世界。 本 論文內容把女性象徵分爲三個部分來進行硏究, 慾望與絶望的對象, 喪失與自 대망서 시에 나타난 여성 상징 분석 207 我克復的形象, 純粹與回歸本能的象徵, 通過以上三個角度的分析, 1. 戴望 舒詩中女性的形象作爲詩人的愛情的對象描繪戀人,小姐,女人。 這些女性反 映到戴望舒的戀人「施绛年」的女性性與戴望舒本人潛意識中的女性性。 2. 詩中 的喪失與自我克復形象有「雨巷」的小姐, 日本舞姬百合子, 八重子的形象, 這 些女性實際上還是精神上皆痛失家園的孤獨的懷鄉病者, 可是內面意識上尋夢 者,理想追求者. 所以认为戴望舒詩中的理想追求女性形象是懷鄉病者與尋夢者 的結合形象。 3. 詩中的純粹與回歸本能的象徵有村里的姑娘與天上的母親. 通 過故鄕村里的姑娘描寫了人間內面原初的故鄕心象, 通過描寫了詩的主人公形 象對母性愛的內涵作深入探索。 【主題語】 中國現代詩, 戴望舒, 女性人物, 女性象徵, 女性形象 ======================= ///////////////////////////////////////////////////// ======================= 雨巷 - 戴望舒  yǔ xiàng - dài wàng shū  비 내리는 골목 - 대망서       撑着油纸伞,独自彷徨在悠长、悠长又寂寥的雨巷。기름 먹인 종이 우산 손에 들고 홀로 배회합니다      我希望逢着一个丁香一样的   길고도 긴 쓸쓸히 비 내리는 거리에서 라일락꽃처럼      结着愁怨的姑娘。           우수에 젖어 있는 아가씨를 만나 보고 싶어서              她是有                      그녀에게는      丁香一样的颜色,            라일락꽃 같은 빛깔      丁香一样的芬芳,            라일락꽃 같은 향기      丁香一样的忧愁,            라일락꽃 같은 우수가 잔잔히 배어 있습니다      在雨中哀怨, 哀怨又彷徨;    비 속에서 슬퍼하고 슬퍼하다 다시 떠돕니다      她彷徨在这寂寥的雨巷,       그녀는 쓸쓸히 비 내리는 이 거리에서 배회합니다               撑着油纸伞                  기름 먹인 종이 우산 손에 들고      像我一样,                  나처럼      像我一样地                  나처럼 그렇게      默默彳亍( chì chù )着     아무말 없이 천천히 걷습니다      冷漠、凄清,又惆怅          무심히 처량히 그리고 슬프게      她默默地走近,走近          그녀는 말 없이 다가와 다가와서는      又投出 太息一般的眼光       한숨서린 눈빛을 던지고는      她飘过                      훌쩍 스쳐 지나갑니다      像梦一般地,                마치 꿈처럼      像梦一般地凄婉迷茫。        꿈처럼 구슬프고 아스라하게      像梦中飘过 一枝丁香地,     꿈속에서 라일락꽃 가지를 스쳐 지나가듯      我身旁飘过这女郎;          내 곁으로 그녀가 스쳐 갔습니다      她静默地远了,远了,        그녀는 조용히 저 멀리 멀어져      到了颓圮(pǐ)的篱墙,       무너져 내린 담장      走尽这雨巷。                비 내리는 이 거리 끝으로 그렇게 가 버렸습니다      在雨的哀曲里,              비의 애상곡 속에      消了她的颜色,              그녀의 빛깔이 사라지고      散了她的芬芳                그녀의 향기가 흩어지고      消散了,甚至她的 太息般的眼光, 그녀의 한숨서린 눈빛      丁香般的惆怅。                 라일락꽃 같은 수심마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撑着油纸伞,                기름 먹인 종이 우산 손에 들고      独自彷徨在悠长,悠长        홀로 떠돕니다      又寂寥的雨巷,              길고도 긴 쓸쓸히 비 내리는 거리에서      我希望飘过 一个丁香一样的    라일락꽃처럼 수심에 젖은 아가씨를      结着愁怨的姑娘。            스쳐 지나가고파서      대망서가 시단의 주목윽 받게 된것은 1928년 시집 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적막한 골목에서 방황하는 우수에 젖은 여인의 형상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 이 작품으로 대망서은 ‘우항시인’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대망서는 “시의 운율은 글자의 억양이 바뀌는데 따르는것이 아니라 정서의 억양이 멈추고 바뀌는데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시 창작의 기본 틀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내용 면에서 볼때 그의 시가 근거하고 있는 정서는 외면한 현실에 대한 환멸과 좌절 그리고 허무감이었다.   舒缓优美的意境诗 — 戴望舒《雨巷》 雨巷诗人戴望舒的成名作,就是这首朦胧的意境诗《雨巷》。这首诗暗示出作者既迷惘感伤又有期待的情怀,给人一种幽深的美感。这首丁香姑娘是诗人心中期待已久的美丽、高洁而忧郁的姑娘,还是什么?      雨巷》是戴望舒早期的成名作和代表作。诗歌发表后产生了较大影响,诗人也因此被人称为“雨巷诗人”。诗歌描绘了一幅梅雨时节江南小巷的阴沉图景,借此构成了一个富有浓重象征色彩的抒情意境。在这里,诗人把当时黑暗阴沉的社会现实暗喻为悠长狭窄而寂寥的“雨巷”,没有阳光,也没有生机和活气。而抒情主人公“我”就是在这样的雨巷中孤独的ㄔ亍着的彷徨者。“我”在孤寂中仍怀着对美好理想和希望的憧憬与追求。诗中“丁香一样的姑娘”就是这种美好理想的象征。但是,这种美好的理想又是渺茫的、难以实现的。这种心态,正是大革命失败后一部分有所追求的青年知识分子在政治低压下因找不到出路而陷于惶惑迷惘心境的真实反映。在艺术上,本诗也鲜明地体现了戴望舒早期诗歌的创作特色。它既采用了象征派重暗示、重象征的手法,又有格律派对于音乐美的追求。诗中的“我”、“雨巷”、“姑娘”并非是对生活的具体写照,而是充满了象征意味的抒情形象。全诗还回荡着一种流畅的节奏和旋律。旋律感主要来自诗韵,除每节大体在第3、6行押韵外,每节的诗行中选用了许多与韵脚呼应的音组。诗中重叠反复手法的运用也强化了音乐效果。正如叶圣陶所说,《雨巷》是“替新诗的音节开了一个新的纪元”。  
2097    중국 현대시인 - 서지마 댓글:  조회:3446  추천:0  2017-05-07
徐志摩 (1897~1931) 现代诗人、散文家。名章垿,笔名南湖、云中鹤等。浙江海宁人。 1915年毕业于杭州一中、先后就读于上海沪江大学、天津北洋大学和北京大学。1918年赴美国学习银行学。1921年赴英国留学,入伦敦剑桥大学当特别生,研究政治经济学。在剑桥两年深受西方教育的熏陶及欧美浪漫主义和唯美派诗人的影响。   1921年开始创作新诗。1922年返国后在报刊上发表大量诗文。1923年,参与发起成立新月社。加入文学研究会。1924年与胡适、陈西滢等创办《现代评论》周刊,任北京大学教授。印度大诗人泰戈尔访华时任翻译。1925年赴欧洲、游历苏、德、意、法等国。1926年在北京主编《晨报》副刊《诗镌》,与闻一多、朱湘等人开展新诗格律化运动,影响到新诗艺术的发展。同年移居上海,任光华大学、大夏大学和南京中央大学教授。   1927年参加创办新月书店。次年《新月》月刊创刊后任主编。并出国游历英、美、日、印诸国。1930年任中华文化基金委员会委员,被选为英国诗社社员。同年冬到北京大学与北京女子大学任教。1931年初,与陈梦家、方玮德创办《诗刊》季刊,被推选为笔会中国分会理事。   同年11月19日,由南京乘飞机到北平,因遇雾在济南附近触山,机坠身亡。 著有诗集《志摩的诗》,《翡冷翠的一夜》、《猛虎集》、《云游》,散文集《落叶》、《巴黎的鳞爪》、《自剖》、《秋》,小说散文集《轮盘》,戏剧《卞昆冈》(与陆小曼合写),日记《爱眉小札》、《志摩日记》,译著《曼殊斐尔小说集》等。他的作品已编为《徐志摩文集》出版。徐诗字句清新,韵律谐和,比喻新奇,想象丰富,意境优美,神思飘逸,富于变化,并追求艺术形式的整饬、华美,具有鲜明的艺术个性,为新月派的代表诗人。他的散文也自成一格,取得了不亚于诗歌的成就,其中《自剖》、《想飞》、《我所知道的康桥》、《翡冷翠山居闲话》等都是传世的名篇... ======================= 《翡冷翠的一夜》是徐志摩的第二个诗集,是他的1925至1927年部分诗歌创作的汇集。这一时期徐志摩的思想和生活发生了一个较大的波折。1924年4月,他在北京认识了陆小曼,并着了魔似的与她热恋起来,此事招致社会的非议和家庭的反对。   但他俩全不顾这一切,可一时又难以解决,徐志摩在十分痛苦和矛盾的心情下,于1925年3月11日启程出国欧游,想暂时摆脱一下生活上的苦恼和困境。他在意大利的翡冷翠(即佛罗伦斯)住了一段时间,他将他的伤悲,他的感触,托付纸笔,写了不少诗,因此,这部诗集就题名为《翡冷翠的一夜》,这个诗集,除了有哈代、罗赛蒂等英国作家的译诗外,还有象《西伯利亚》、《在哀克刹脱教堂前》那样漫游欧洲时对异乡他国生活的感受。他也写了一不少爱情诗篇。《翡冷翠的一夜》,可以看作是记叙了当时他和陆小曼之间的感情波澜,他的热烈的感情和无法摆脱的痛苦。   1925年和1926年,中国的革命运动蓬勃兴起,五卅事件与三?一八惨案引起他的“愤慨”和“悲切”,为纪念 “三?一八”,他写了《梅雪争春》,揭露了军阀屠杀无辜,连十三岁的儿童也惨遭杀害。在《大帅》、《人变兽》的诗篇中,暴露了军阀活埋伤兵、杀死人民的血腥罪行。他的思想起了“波折”,“流入怀疑和颓废”,认为现在是受罪时期,因此,不少诗篇失去乐观调子,相反染上了一层忧郁、失望、逃避现实的颓废色彩。他诅咒生活,赞颂死亡,要辞别人间去殉恋爱。   想象奇特,思想灰暗。当然,这个诗集也还有少量调子比较积极明朗的诗篇。   这个诗集在艺术技巧上如闻一多说的“确乎是进步了”。对诗的形式技巧更加注意推敲,除了在诗式上更多样化,什么对话体,打夯歌、豆腐干式;既有叙事,也有抒情,他也醉心于诗的音节与格律。 ============== ==============   중국에서 현대시라고 하면 주로 1919년의 5.4운동 전후부터 시작해서 개혁개방시기까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유파는 주로   상식파: 현대시를 시험삼아 햇던 사람들의 무리, 호적, 유반농, 유평백 등을 대표로   문학연구회 파:  빙심, 로신, 주작인, 주자청 등을 대표로,   창조사: 곽말약과 성방오를 대표로,   호반파: 왕정지, 응수인, 풍설봉을 대표로,   신월파: 서지마, 문일다를 대표로,   상징파: 이금발, 풍내초를 대표로,   현대파: 대망서, 변지림, 하기방, 서지, 풍지 등을 대표로,   7월파: 애청, 우한, 전간, 호풍을 대표로,   중국신시파: 목단, 정민을 대표로,   사회주의 현실주의: 공목, 하경지, 곽소천 등을 대표로,   현대파: 기현, 양환을 대표로,   남성사: 여광중, 하청 등을 대표로,   창세기: 낙부, 양목을 대표로,   몽롱파: 북도, 서정, 고성, 망극 등을 대표로(개혁개방초기부터, 즉 1970년대 중/후반부터)   신현실주의: 엽연빈, 이소우를 대표로,   신변새시파: 창요, 양목을 대표로,   신성사작: 해자, 낙일화 등을 대표로(1970년대 중/ 후반부터)   등 이 외에도 원명원, 그들, 망한주의, 비비주의, 지식분자사작, 신 향토주의 등 많습니다.
2096    중국 현대시인 - 문일다 댓글:  조회:4751  추천:0  2017-05-07
  출생 1899 사망 1946 국적 중국 요약 중국의 현대시인·학자. (병). Wen Yiduo. (웨). Wen Ituo.   본명은 자화[家驊], 자는 유싼[友三]·유산[友山]. 후베이 성[湖北省] 시수이[浠水] 사람이다. 1912년 가을 칭화 학교[淸華學校]에 입학했다. 1922년 미국으로 가서 미술과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시집 〈홍촉 紅燭〉을 펴냈다. 1925년에 귀국하여 신월사에 참여했다. 1926년 3·18학살사건이 발생한 뒤, 희생당한 지사들에 대해 동정과 찬양을 표시했다. 1927년 봄 우한[武漢]으로 가서 북벌군 총정치부 공작에 참여했다. 같은 해 가을부터 난징[南京]의 국립 제4중산대학교(나중에 중양대학교로 이름이 바뀜) 외국어과 주임을 맡았다. 1928년 1월 시집 〈사수 死水〉를 펴냈으며, 3월에는 잡지 〈신월 新月〉의 편집을 맡았다. 1930년 이후에는 칭다오대학교[靑島大學校]의 문학원장 겸 국문과 주임, 칭화대학 중국문학과교수를 역임했다. 중일전쟁 기간에는 쿤밍[昆明]의 시난연합대학교[西南聯合大學校] 교수를 지냈으며, 〈주역 周易〉·〈시경 詩經〉·〈장자 莊子〉·〈초사 楚辭〉 등 고대문학과 신화를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1943년부터는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를 쟁취하려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45년 중국 민주동맹 중앙위원을 맡고 국민당이 내전을 일으키려는 데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1946년 7월 15일 쿤밍에서 국민당 특수공작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유작으로는 주쯔칭[朱自淸] 등이 편집한 〈원이둬 전집 聞一多全集〉이 있다. [Daum백과] 원이둬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원이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원이둬 원이둬(聞一多, 1899년 11월 24일 ~ 1946년 7월 15일)는 중국 현대의 시인·고전문학 연구가이다. 이름은 가화, 이둬는 필명. 후베이(湖北) 희수 태생. 1922년 베이징 칭화학교(후의 칭화 대학) 졸업 후 시카고 미술학원, 콜로라도 대학교에 유학. 1925년 귀국 후 베이징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자유주의 문학 계파 '신월사(新月社)'의 동인으로서 현대시의 창작과 시론 발표에 힘을 기울였으나, 1928년 우한 대학, 1930년 칭다오 대학(이후 산둥 대학)을 거쳐, 1932년 모교인 칭화 대학 중국문학과 교수에 취임한 후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고전과 민속 문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중일 전쟁 중에는 창사(長沙)의 임시대학과 쿤밍(昆明)의 시난연합대학으로 옮겼다. 시난연합대학 해산 직전에 쿤밍에서 국민당의 내전에 반대하던 중에 암살되었다. 장제스가 암살자를 곧 처단했지만 중국 지식계 일부가 동요하였다. ========================== ========================== 문일다(闻一多)    1899.11.24~1946.7.15.  호북성 희수현(浠水县) 인.  중국민주동맹(中国民主同盟) 맹원(盟员). 시인(诗人). 학자. 1912년 북경 청화학교(北京清华学校)에 입학하여 청화신극사(清华新剧社), 미술사(美术社)의 설립을 발기하였으며 청화주간(清华周刊)의 총편집 및 청화학보(清华学报)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19년 오사운동(五四运动)에 참가하였고 6월에는 학생대표로 상해로 가서 전국학생연합회 성립대회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시카고미술학원, 콜로라도 대학, 뉴욕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시의 창작과 문학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이 기간 동안 유명한 칠자지가(七子之歌) 등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고 1923년에는 국내에서 시집(诗集) 홍총(红烛)이 출판되었다.     1925년 귀국하여 북경예술전과학교(北京艺术专科学校)에서 교무장(教务长)을 맡으며 북경대학(北京大学)에서도 외국문학을 가르쳤다. 1927년 등연달(邓演达)의 초대를 받아 무한국민혁명군총정치부(武汉国民革命军总政治部)에 가서 예술분야의 업무를 담당하였고 얼마 후 부대를 떠나 남경제4중산대학(南京第四中山大学)으로 가서 외문계(外文系) 주임이 되었다. 1928년 3월에는 잡지 신월(新月)의 편집에 참가했으며 동년 가을 무한대학(武汉大学)에서 문학원(文学院) 원장 겸 중문계(中文系) 주임이 되었고 1930년 청도대학(青岛大学) 문학원(文学院) 원장, 1932년 북경으로 돌아가 청화대학(清华大学) 중문계(中文系) 교수가 되며 중국고전문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937년 7월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곤명(昆明)으로 가서 북대(北大), 청화(清华), 남개(南开)의 3개 학교가 합병된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의 교수가 되었고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직면하여 문화를 통한 구국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통해 민주와 반독재 투쟁에 투신하였다. 1944년 그는 중국민주동맹(中国民主同盟)에 가입하여 중국민주동맹 중앙집행위원, 운남 지부 선전위원(宣传委员) 겸 민주주간(民主周刊) 사장이 되며 적극적인 민주투사가 되었다.      1946년 7월 15일 운남대학(云南大学)에서 개최된 이공박(李公朴리궁푸) 추도대회에서 안전을 이유로 연설 기회를 주지 않았으나 그는 연단에 올라 강하게 국민당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날 오후에 그는 민주주간사(民主周刊社)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공박(李公朴) 암살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고 회견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국민당 요원의 습격을 받아 10여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2009년 9월 10일 중앙선전부(中央宣传部), 중앙조직부(中央组织部), 중앙통전부(中央统战部), 중앙문헌연구실(中央文献研究室), 중앙당사연구실(中央党史研究室), 민정부(民政部), 인력자원사회보장부(人力资源社会保障部), 전국총공회(全国总工会), 공청단중앙(共青团中央),전국부련(全国妇联), 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이 연합하여 조직한 100명의 신중국 성립에 특별히 공헌한 영웅모범인물(新中国成立作出突出贡献的英雄模范人物)과 100명의 신중국 성립 이래 중국을 감동시킨 인물(新中国成立以来感动中国人物) 선정 작업에서 100명의 신중국 성립에 특별히 공헌한 영웅모범인물로 선정되었다.     闻一多(1899年11月24日-1946年7月15日), 본명 闻家骅,자 友三,호북성(湖北省) 황강시(黄冈市) 회수현(浠水县) 출생    中国现代伟大的爱国主义者,坚定的民主战士,中国民主同盟早期领导人,中国共产党的挚友,新月派代表诗人和学者。     1912年考入清华大学留美预备学校。1916年开始在《清华周刊》上发表系列读书笔记。1925年3月在美国留学期间创作《七子之歌》。 1928年1月出版第二部诗集《死水》。 1932年闻一多离开青岛,回到母校清华大学任中文系教授。       1946年7月15日在云南昆明被国民党特务暗杀。   ● 青少年时期   闻一多生于清光绪二十五年十月二十二日(1899年11月24日),湖北省黄冈市蕲水县(今黄冈市浠水县)巴河镇的一个书香门第,自幼爱好古典诗词和美术。五岁入私塾启蒙,十岁到武昌就读于两湖师范附属高等小学。       1912年十三岁时以复试鄂藉第一名的成绩考入北京清华留美预备学校(清华大学前身),在清华度过了十年学子生涯。喜读中国古代诗集、诗话、史书、笔记等。入校时他的姓名是闻多,同学就用谐音的英文词widow(寡妇)给他起了绰号。那时候,闻一多的革命主张是废姓,朋友间直呼其名,潘光旦便建议他改名为一多,他从善如流,立刻笑领了。他学习刻苦,成绩优异,兴趣广泛,喜读中国古代诗集、诗话、史书、笔记等。    1916年开始在《清华周刊》上发表系列读书笔记,总称《二月庐漫记》,同时创作旧体诗,并任《清华周刊》《新华学报》的编辑和校内编辑部的负责人。    1919年“五四运动“的爆发,闻一多紧随校园运动的潮流。他激清难捺,手书岳飞《满江红》,贴于学校饭厅门前,之后,毅然投身于这一伟大斗争中,发表演说,创作新诗,成为“五·四”新文艺园中的拓荒者之一,并作为清华学生代表赴上海参加全国学生联合会成立大会。    1920年4月,发表第一篇白话文《旅客式的学生》。同年8月,发表第一首新诗《西岸》。    1921年11月与梁实秋等人发起成立清华文学社。    1922年3月,写成《律诗的研究》,开始系统地研究新诗格律化理论。  ​  ●赴美留学      1922年7月,他赴美国留学,先后在芝加哥美术学院、珂泉科罗拉多大学和纽约艺术学院进行学习,在专攻美术且成绩突出时,他更表现出对文学的极大兴趣,特别是对诗歌的酷爱。年底出版与梁实秋合著的《冬夜草儿评论》,代表了闻一多早期对新诗的看法。       1923年9月出版第一部诗集《红烛》,把反帝爱国的主题和唯美主义的形式典范地结合在一起。   ●回国任教   1925年5月回国后,任北京艺术专科学校教务长,并从事《晨报》副刊《诗镌》的编辑工作。   1928年1月出版第二部诗集《死水》,在颓废中表现出深沉的爱国主义激情,标志着他在新诗方面所取得的进步和成就。    从武汉大学开始,闻一多开始致力于中国古代文学研究。他从唐诗开始,继而上溯,由汉魏六朝诗到《楚辞》、《诗经》,由《庄子》而《周易》,由古代神话而史前文学,同时对古文字学、音韵学、民俗学也下了惊人的功夫,涉猎之广,研究之深,成果之丰,郭沫若叹为不仅前无古人,恐怕还要后无来者。   1930年秋,闻一多受聘于国立青岛大学,任文学院院长兼国文系主任。 ​  1932年,南京国民党政府和山东地方势力的争权夺利斗争延伸到青岛大学内部,派系纷争,风潮迭起,闻一多受到不少攻击与诽谤,被迫辞职。      1932年闻一多离开青岛,回到母校清华大学任中文系教授   1932年秋,他回到母校清华大学任中国文学系教授,从事中国古典文学的研究。    ●投身革命    1937年7月,全国抗战爆发,闻一多随校迁往昆明,任北大、清华、南开三校合并后的西南联合大学教授。面对严酷的现实,他毅然抛弃文化救亡的幻想,积极投身到抗日救亡和争民主、反独裁的斗争中。    1943年,他开始得到中共昆明地下党和民主同盟的帮助,党通过不同渠道,给他送去毛泽东的《新民主主义论》等著作。他开始认识到要救中国,必须从根本上推翻帝国主义和封建军阀的统治。蒋介石的《中国之命运》发表后,他表示五四给他的印象太深,《中国之命运》公开的向五四宣战,是无法接受的。     1944年,他加入中国民主同盟,后出任民盟中央执行委员、民盟云南支部宣传委员兼《民主周刊》社社长,成为积极的民主斗士。   1945年12月1日,昆明发生国民党当局镇压学生爱国运动的一二一惨案,闻一多亲自为死难烈士书写挽词:“民不畏死,奈何以死惧之”。出殡时,他拄着手杖走在游行队伍前列,并撰写了《一二一运动始末记》,揭露惨案真相,号召“未死的战士们,踏着四烈士的血迹”继续战斗。    1946年6月29日,民盟云南支部举行社会各界招待会,他在会上宣布民盟决心响应中共的号召,坚持“民主团结、和平建国”的立场,号召“各界朋友们亲密地携起手来,共同为反内战、争民主,坚持到底!”    ●枪杀遇难    1946年7月11日,民盟负责人、著名社会教育家、当年救国会七君子之一的李公朴,在昆明被国民党特务暗杀。闻一多当即通电全国,控诉反动派的罪行。他为《学生报》的《李公朴先生死难专号》题词:“反动派!你看见一个倒下去,可也看得见千百个继起来!”    1946年7月15日,在云南大学举行的李公朴追悼大会上,主持人为了他的安全,没有安排他发言。但他毫无畏惧,拍案而起,慷慨激昂地发表了《最后一次演讲》,痛斥国民党特务,并握拳宣誓说:“我们有这个信心:人民的力量是要胜利的,真理是永远存在的”,“我们不怕死,我们有牺牲精神,我们随时准备像李先生一样,前脚跨出大门,后脚就不准备再跨进大门!”下午,他主持《民主周刊》社的记者招待会,进一步揭露暗杀事件的真相。散会后,闻一多在返家途中,突遭国民党特务伏击,身中十余弹,不幸遇难。   ●主要作品     1920年4月   上海古籍出版社 《旅客式的学生》       1920年9月   新诗《西岸》。       1922年3月    《律诗底研究》       1922年   清华文学社 《冬夜草儿评论》 ​     1923年   上海泰东图书局 《红烛》(诗集) ​     1925年    《七子之歌》        1928年   上海新月书店 《死水》 ​     1948年   上海开明书店 《闻一多全集》(1一4册) ​     1951年   上海开明书店 《闻一多选集》 ​     1955年   人民文学出版社 《闻一多诗文选集》 ​     1983年   云南人民出版社 《闻一多青少年时代诗文集》 ​     1985年   武汉大学出版社 《闻一多论新诗》(评论) ​     1942年   重庆国民图书出版社 《楚辞校补》(古典文学研究) ​     1956年   古籍出版社 《神话与诗》(古典文学研究) ​     1956年   古籍出版社 《古典新义》 ​     1956年   古籍出版社 《唐诗杂论》(古典文学研究) ​     1984年    重庆出版社 《闻一多论古典文学》       1985年   上海古籍出版社 《离骚解诂》(古典文学研究)     [출처] 중국 학자이자 시인-문일다(闻一多)|작성자 pinmingxuan      
2095    중국 명나라 시인 - 당인 댓글:  조회:4346  추천:0  2017-05-06
  출생 1470, 중국 장쑤 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사망 1523 국적 중국, 명(明) 요약 중국 명대의 학자·화가·시인. (병). Tang Yin. (웨). T'ang Yin.   그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당인은 문징명(文徵明)의 친구이자 대화가인 심주(沈周)의 제자였고, 문징명의 아버지인 문림의 도움을 받았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에 뛰어났던 그는 향시에서 부정을 저질렀다고 고발당했는데 이것은 부당한 고발이었던 것 같다. 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면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관직과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관직으로 출세할 수 없게 되자,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런 생활 때문에, 예술가가 자신의 독특한 예술양식과 영감을 추구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금전과는 동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후세의 예술비평가들, 예를 들어 명나라 때의 문인화가인 동기창(董其昌) 같은 사람들은 그를 혹평했다. '당인' 하면 여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그림을 연상하지만, 그의 그림(특히 산수화)은 그의 동료들 못지 않은 다양성과 표현력을 보여주어 그가 예술적 기량과 심오한 통찰력을 겸비한 뛰어난 예술가라는 것을 시사한다. [Daum백과] 당인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2094    러시아 국민시인 - 푸슈킨 댓글:  조회:4445  추천:0  2017-05-05
  출생 1799. 6. 6(구력 5. 26), 모스크바 사망 1837. 2. 10(구력 1. 29),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며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1814년 에 운문편지를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푸가초프 반란을 다룬 역사소설 과 그 반란을 역사적으로 검토한 등도 써냈다. 목차 개요 초기생애 상트페테르부르크 남러시아 유배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유배지에서의 귀환 말년 평가 푸슈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 이다. 개요 흔히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초기생애 푸슈킨의 아버지는 유서 깊은 대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아브람 하니발의 손녀였다. 집안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푸슈킨의 외증조부는 아비시니아의 어린 군주로 콘스탄티노플에 노예로 팔렸다가 표트르 대제의 양자가 되어 그의 전투 동료로 활약했다고 한다. 푸슈킨은 외증조부의 이야기를 미완의 역사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 Arap Petra Velikogo〉(1837 출판)으로 옮겼다. 19세기초의 러시아 귀족가문에서 으레 그랬듯이 그의 부모도 프랑스 문화를 받아들여 푸슈킨과 그의 형제자매들은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기를 배웠다. 그들은 주로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외할머니는 어린 푸슈킨에게 러시아어로 선조들의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한편 푸슈킨은 자유농노였던 늙은 유모 아리나 로디오노브나 야코블레바(〈예브게니 오네긴 Yevgeny Onegin〉에 타티야나의 유모로 형상화됨)로부터 러시아 민화를 들었으며, 여름이면 모스크바 근처의 할머니 영지에서 농부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홀로 시간을 보내는 조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였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종류의 책을 두루 섭렵했고 집으로 찾아오는 문필가들에게서 자극을 얻었다. 1811년 푸슈킨은 차르스코예셀로(나중에 푸슈킨으로 개칭됨)에 새로 생긴 귀족학교에 들어갔고, 재학중인 1814년 〈베스트니크 예브로피 Vestnik Evropy〉('유럽 통보')에 운문편지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초기에는 선배 낭만주의 시인인 K. N. 바튜슈코프와 V. A.주코프스키, 그리고 파르니 자작을 비롯한 17, 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귀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최초의 원숙한 걸작으로 꼽히는 낭만주의 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yudmila〉(1820 출판)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시풍은 아리오스토와 볼테르의 설화시 형식을 빌린 것이지만, 러시아 민화를 사용해 고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삼았다. 러시아 전통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을 모델로 한 인물 루슬란이 결혼한 날 밤에 사악한 마법사 체르노모르에게 납치당한 신부인 키예프 대공의 딸 류드밀라를 구하기까지 겪는 온갖 모험을 들려주는 내용이다. 이 시는 기존의 작법과 장르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의 주류이던 고전주의와 감상주의 작가들에게 모두 공격받았다. 그러나 푸슈킨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시인 주코프스키는 '패배한 스승으로부터 승리한 제자에게'라는 헌사를 적은 자신의 초상화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817년 푸슈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외무부의 한 관리직을 맡았다. 또한 친척 아저씨의 친구들이 설립한 배타적인 문학단체인 '아르자마스회' 회원으로 뽑혔으며 '녹색등협회'에도 가담했다. 이 협회는 문학과 역사 토론을 목적으로 1818년에 설립되었으나 데카브리스트 비밀결사 '복지동맹'의 비밀지부로 발전했다. 여기서 그는 필사본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된 정치시와 풍자시를 통해 훗날 초기에 진압된 러시아 혁명운동인 1825년 데카브리스트 봉기의 주역이 될 사람들의 이상과 염원을 대변했다. 남러시아 유배 이 정치시가 화근이 되어 그는 1820년 5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멀리 남러시아로 추방당했다. 가족들 및 1812년 전쟁의 영웅인 라예프스키 장군과 함께 처음에는 예카테리노슬라프(지금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보내졌으나 병에 걸렸다가 서서히 회복되자 북카프카스를 여행한 뒤 크림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서 받은 인상을 토대로 '남부 작품군'에 속하는 일련의 낭만적 이야기체 시 〈카프카스의 포로 Kavkazski plennik〉(1822)와 〈도적 형제 Bratya razboiniki〉(1821~22, 출판 1827),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ysky fontan〉(1821~23, 출판 1824) 등의 소재를 얻었다. 이 일련의 작품으로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작가로서 그의 명성을 확인받았고, 당시 러시아의 주도적인 시인으로서, 또 1820년대의 낭만적인 자유 애호 세대의 기수로서 갈채를 받았음에도 그 자신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823년 5월 그는 중요한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1833 출판)에 착수해 쉬엄쉬엄 작업한 끝에 1831년 완성했다. 여기에서 그는 당대의 전형적인 인물을 제시했으며, 더욱 광범위한 배경에 새로운 예술적 방법과 기교를 사용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의 삶을 파노라마식으로 펼쳐보인다. 삶에 환멸을 느끼는 회의론자 오네긴, 자유를 사랑하는 낭만주의자 렌스키, 애정이 넘쳐흐르는 러시아 여성의 이상형인 여주인공 타티야나 등 여기에 등장하는 불멸의 인물들은 모두 전형적인 러시아인으로, 그들을 빚어낸 사회 및 환경의 영향과의 관계 속에 그려진다. 작품 형식은 바이런의 〈돈 주안 Don Juan〉과 비슷하지만, 푸슈킨은 바이런의 주관적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객관적 서술방식을 채택해 자신의 주인공을 이국적인 환경이 아닌 러시아적 생활양식 한가운데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황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되어 한 시골 영지를 배경으로 계속되다가 모스크바를 거쳐 마지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가 전개된다. 한편 푸슈킨은 키시뇨프(1820~23)를 거쳐 오데사(1823~24)로 이송되었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계속되는 유형생활의 고통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 서한들을 모아 엮은 첫번째 출판물은 빼어난 러시아 산문을 보여주는 영원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몰도바의 변경인 키시뇨프에서 그는 사교계에 나가 애정행각·폭음·도박·싸움 등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오데사에서는 자신의 상관이자 그 지방의 현지사인 보론초프 백작의 아내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는 몇 번이나 결투를 치렀고 결국 보론초프 백작은 푸슈킨의 사면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친구에게 보낸 그의 편지 1통이 경찰의 손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순수한 무신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고 씌어 있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는 다시 프스코프 근처 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예로 유배되었다.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보낸 2년은 불행한 기간이었지만 가장 왕성한 창작 시기였다. 고립되고 외로운 생활 속에서 그는 러시아 역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영지 내의 농부들과 사귀고 민화와 민요 채록에 흥미를 가졌다. 이 시기 그의 시에서는 러시아다운 특성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발라드 〈신랑 Zhenikh〉(1825)은 러시아 민화에 모티프를 둔 것으로, 간결하고 빠르게 흐르는 시풍은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화려함, 사치스러움이나 황량한 비극을 강조한 '남부시'의 낭만성, 음악적 선율과는 확연히 다르다. 1824년 그는 '남부시'의 초기에 착수했던 〈집시 Tsygany〉(1827 출판)를 완성했다. 역시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중 시골을 배경으로 한 장과 시골 지주의 생활을 다룬 〈눌린 백작 Count Nulin〉(1825, 출판 1827), 그리고 주요작품인 역사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4~25, 출판 1831)를 썼다. 프랑스 고전주의 드라마와의 결별을 뜻하는 〈보리스 고두노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원칙', 특히 사극과 비극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민중을 위해' 씌어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녀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 작품이다. 데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에 쓴 이 작품은 차르를 수뇌로 하는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관계라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푸슈킨이 강조하는 것은 '민중의 심판'이 내포한 정치적·윤리적 의의이다. 17세기에 임박한 러시아의 사회적·정치적인 대혼란기를 배경으로 이반 뇌제(雷帝)의 총신 말류타 스쿠라토프의 사위인 위대한 영웅 보리스 고두노프의 비극적 죄과와 피할 길 없는 운명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아울러 이반 뇌제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의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제시한다. 정치적·역사적 측면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행위들이 파란만장한 사건과 잔인한 야망을 배경으로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희곡은 푸슈킨도 말했듯이 대담하고 자유롭게 등장인물을 다루고 있고, 박진감 넘치는 묘사와 간결함을 추구한 셰익스피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옛날에 읽었던 러시아 연대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비록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같은 고양된 시적 정열이 모자라긴 하지만 이 작품은 대화체 산문과 5음보 약강격 운문을 매우 유연하게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푸슈킨이 목표한 대로 '상황의 개연성과 대화의 자연스러움'이 뛰어나다. 왕위 요구자 가짜 드미트리는 예민하며 동정을 자아낼 만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결과적으로 이 등장인물을 왕위에 오르게 한 민중들의 힘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이 희곡은 검열에 걸려 출판이 지체되었다. 일화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심리적·극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푸슈킨의 능력과 절제된 언어, 세부 형상화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재능은 이 훌륭한 희곡을 러시아 드라마 역사에서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 유배지에서의 귀환 1825년 12월 14일(구력)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진압한 뒤 새로운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푸슈킨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데카브리스트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1826년 가을 그의 모스크바 귀환을 허락했다. 차르는 푸슈킨과 오래도록 얘기를 나눈 끝에 검열에 관한 시인의 불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푸슈킨의 검열관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위로부터의 몇 가지 출판개혁과 특히 농노해방을 준비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다. 심정적으로는 전적으로 '유죄'이며 데카브리스트에 동조하고 있던 푸슈킨에게는 봉기의 참패가 매우 쓰라린 경험이었다. 데카브리스트들 가운데 5명은 처형당했고 나머지 당원들은 시베리아 강제노동에 보내졌다. 그러나 푸슈킨은 민중의 지지 없이 전제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시골 Derevnya〉에서도 표현했다시피 '차르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여겼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18세기초 개혁의 시기에 끊임없는 관심을 쏟고 '교육자 황제'로 알려진 표트르 대제에 흥미를 가졌다. 〈시절(詩節) Stansy〉(1826), 〈표트르 대제의 흑인〉과 역사시 〈폴타바 Poltava〉(1828, 출판 1829)·〈청동기사 Medny vsadnik〉(1833, 출판 1837) 등을 통해 당시의 차르에게 모범을 제시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푸슈킨의 입장은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었다. 차르의 검열은 검열관들보다 더 혹독했고 그는 개인적 자유까지 제약받았다. 경찰로부터 비밀리에 감시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공공연히 경찰총감 벤켄도르프 백작의 관찰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인정을 거의 받지 못했고, 몇몇 친구는 그의 변절을 비난하기까지 해 그는 〈벗에게 Druzyam〉(1828)라는 시를 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정당화해야 했다. 이 시절에 그가 체험한 정신적 소외의 고통은 시인과 군중에 관한 일련의 시(1827~30)와 미완성으로 남은 〈이집트의 밤 Egipetskiye nochi〉(1837 출판)에 반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푸슈킨의 천재성은 완전히 꽃을 피웠다. 그의 예술은 새로운 차원을 더했고 1829~36년에 씌어진 작품 하나하나는 러시아 문학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나갔다. 그는 1830년 가을을 가족 영지인 니주니노브고로트(지금의 고리키)의 볼디노에서 보냈는데, 이 몇 개월은 그의 작품활동기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이다. 이때 그는 4편의 '단막 비극' 〈인색한 기사 Skupoy rytsar〉(1836)·〈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zart i Salieri〉(1831)·〈목석 같은 손님 Kamenny gost〉(1839)·〈역병이 돌 때의 향연 Pir vo vremya chumy〉(1832)과 〈고(故) I. P. 벨킨의 이야기 Povesti pokoynogo I. P. Belkina〉(1831)로 엮어진 5편의 단편,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그린 익살맞은 시 〈콜롬나의 작은 집 Domik v Kolomne〉(1833)을 썼으며, 그외에도 비평적인 논쟁조의 논문 몇 편과 거친 초고, 소품, 그리고 여러 가지 다양한 분위기의 서정시를 남겼다. 푸슈킨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셰익스피어, 바이런, 월터 스콧과 일단의 호반 시인 등 영국의 작가에게 보인 관심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과 '보편적인 감수성', 그리고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시대, 다양한 민족의 기질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악마적 정열'을 분석한 '단막 비극'과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의 주제와 기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년 1831년 푸슈킨은 격렬한 구애 끝에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와 결혼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3년 뒤에는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영위해야 하는 궁정의 사교생활은 아내에게는 즐거움을 주었지만 창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작품활동을 계속해나갔다. 간간이 시작활동을 하면서도 점차 산문에 치중했다. 그는 이제 표트르 대제에 관한 주제 외에도 대중적인 농민봉기라는 모티프를 중요하게 다루어 풍자적인 미완성작 〈고류히노 마을의 역사 Istoriya sela Goryukhina〉(1830, 출판 1837)와 장편소설 〈두브로프스키 Dubrovsky〉(1832~33, 출판 1841)·〈기사도 시대의 장면 Stseny iz rytsarskikh vremen〉(1835, 출판 1837),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그의 산문 작품이자 푸가초프 반란을 다룬 역사소설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3~36)과 그에 앞서 그 반란을 역사적으로 검토한 〈푸가초프 이야기 Istoriya Pugachova〉(1833, 출판 1834) 등을 써냈다. 한편 가정문제와 공적인 업무 때문에 그의 삶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궁정에서는 의심과 적의의 눈길이 쏠렸으며,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 창작에만 몰두하고 싶다는 탄원서는 번번이 거부당했다. 마침내 1837년 그를 미워하는 세력가들이 꾸민 음모에 말려든 그는,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에 나섰다가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평가 푸슈킨은 이미 생전에 그의 후계자이며 제자인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에 의해 러시아의 위대한 국민시인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다음 세대의 위대한 러시아 비평가이자 민주주의자이며 혁명론자인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는 푸슈킨의 작품에 대해 심도 있는 비평적 연구를 했는데, 그의 글은 오늘날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러시아 문어의 창시자이며 러시아 문학의 표본이 될 작품을 쓰고 '현실을 노래한 시인'이었던 그는 19세기의 후기 고전주의 작가들의 눈에 러시아 문학의 초석으로 비쳤으며,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민족뿐 아니라 그의 작품이 전해졌던 제정 러시아 치하 다른 민족의 문화적·정신적 세계와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고, 오페라를 비롯한 러시아 문화의 여러 영역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결한 관념을 내포하고 시민적 책임의식을 강조하며(그는 '언어로써 인간의 가슴에 불을 당기는' 예언자적 시인을 요구했음), 삶을 긍정하는 활력이 넘치고, 이성이 편견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이기며, 인간애가 노예근성과 압제를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는 푸슈킨의 작품은 전세계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주요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러시아 민족의식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면서도 민족성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덤으로 보기@@= 요약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의 총칭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영미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이 있다.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은 첫 번째 시기의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자각하게 되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온정주의와는 달리 파운드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를테면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더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19세기의 유물론적 경향과 관련이 깊은데 모더니즘은 그러한 세계관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로 해석하고 배격했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서양 어디에서나 널리 쓰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영미 비평계에 치우친 명칭이다. 유사한 문예사조가 독일에서는 흔히 '전위주의'(Avantgardismus)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영어로 '모더니즘'이라 번역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기원에 해당하는 상징주의 예술이 일찍이 19세기부터 자리잡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명칭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영미계통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을 들 수 있다.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 중심무대의 하나가 런던이었고 그 주도적인 인물이 에즈라 파운드였다. 인류학·심리학·철학·정치이론과 정신분석의 새로운 사상들에 자극을 받은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모더니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들이 주도했다. 낡은 시적 전통에 대항하여 이미지스트들은 목가적인 정감이나 제국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니라 정확한 기술(description)과 심상(心像)의 환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언어를 정련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시와 비정형시를 사용했으며,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화가이자 작가인 W. 루이스의 '소용돌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입체파의 추상기법과 그들의 그림·조각·문학에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현대적 산물들의 새로운 감각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들의 기법을 결합시켰다. 그 잡지명부터 눈길을 끄는 〈돌풍 : 위대한 영국의 소용돌이 평론 Blast : Review of the Great English Vortex〉은 소용돌이파의 대변지였으며 그 편집자인 루이스가 가장 적극적인 선전자이자 대표자였다. 1914년 〈돌풍〉에 게재된 그의 실험희곡 〈별들의 적 Enemy of the Stars〉과 실험소설 〈타 Tarr〉는 넘쳐 흐르는 충일감으로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생생히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의 첫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너무도 명백히 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들이 볼 때 전쟁의 엄청난 참화와 공포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전래의 형식과 문체를 패러디화하게 되었는데, D.H. 로렌스와 T.S. 엘리엇이 그 대표자들이다. 혁신적인 소설 〈무지개 The Rainbow〉(1915)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에서 D.H.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질병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 있다. 전래의 소설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은 그의 매우 혁명적인 시 〈프루프록과 그밖의 묘사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황무지 The Waste Land〉 등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함과 현대적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D.H.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T.S. 엘리엇은 종래의 시 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포기와 자기극기에 의해서만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판이한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 및 온정주의와는 달리 E. 파운드(1920년 영국을 떠나 1925년 이탈리아에 영구적으로 정착함)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영미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반민주적 관점이 모더니즘 운동의 초기부터 내재해 있었던 반동적 성향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다른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야기된 비극적인 균형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E.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난해한 심상서사시 〈칸토스 The Cantos〉(1917~70)와 루이스의 정치·신학 소설 〈인간의 시대 The Human Age〉의 문학적 공로에 대한 평가와 그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모더니즘 전통적인 권위와 도덕을 반대하고 현대 기계문명과 도시감각을 중시하는 사상적·예술적 사조로서, 한국에서는 모더니즘을 주지주의라는 개념으로 한정시키기도 한다(→ 한국문학).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1930년대초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쇠퇴하고 일제의 군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등장하면서 김기림·이양하·최재서 등이 영미 모더니즘 이론을 도입했다. 먼저 김기림은 시의 낭만주의적 성격을 배제하고 시의 음률과 의식성을 강조했다. 그는 평론 〈시의 기술·인식·현실 등 제문제〉(조선일보, 1931. 2. 11~14)·〈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주의적 태도〉(신동아, 1933. 4)·〈오전의 시론〉(조선일보, 1935. 4. 20~5. 2) 등을 발표해 영미 주지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과거의 한국시를 자연발생적인 센티멘털리즘이라고 비판하고 시에 있어서 현대문명의 비판과 시각적 회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이양하는 〈조선현대시 연구〉(조선일보, 1935. 10. 4~17)에서 리처즈의 주지주의 이론을 소개했고, 리처즈의 저서 〈시와 과학〉(1946)을 번역해 단행본으로 펴냈다. 김기림과 이양하가 시론을 전개한 반면, 최재서는 산문 분야에서 모더니즘 이론을 펼쳤다. 그는 〈현대 주지주의 문학이론의 건설〉(조선일보, 1934. 8. 7~12)·〈비평과 과학〉(조선일보, 1934. 8. 31~9. 5)에서 T.E. 흄의 불연속적 실재관을 바탕으로 낭만주의의 극복과 신고전주의 이론을 내세웠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시인 김기림·정지용·김광균·장만영 등과 소설가 이상(李箱) 등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어 1949년을 전후해 모더니즘 운동이 다시 일어났는데, 김경린·김수영·박인환 등의 '후반기 동인'들이 모더니즘 시이론에 입각한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펴냈다. 이들은 당시 한국문단에 유행하던 주정적인 시풍을 반대하고 제재를 현대도시와 기계문명에서 택했으며 이미지와 관념의 조화를 중시했다. 1950년대 후반에 와서는 1920년대의 영미 모더니즘 이론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모더니즘이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다. 송욱의 비순수와 문명의 표정, 김춘수의 현실의식과 존재론적 이미지, 전봉건의 초현실적 발상과 전쟁 이미지, 김종삼의 음악적 이미지, 김광림의 주지적 서정 등으로 나타났다.  
2093    미국 시인 - 로웰 댓글:  조회:4363  추천:0  2017-05-01
  출생 1874. 2. 9, 미국 매사추세츠 브루클린 사망 1925. 5. 12, 브루클린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시인.비평가.강사.   대표적인 이미지스트 시인이다. 보스턴의 유명한 로웰 가문 출신으로 A. 로렌스 로웰과 퍼시벌 로웰은 그녀의 오빠들이며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여행을 많이 다녔다. 28세에 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지만, 시집은 1910년에야 출판되었다. 첫 시집 〈채색유리의 둥근 지붕 A Dome of Many-Coloured Glass〉(1912)에 이어서 펴낸 〈칼날과 양귀비 씨앗 Sword Blades and Poppy Seed〉(1914)에는 그녀가 쓴 최초의 자유시들이 들어 있는데, 로웰은 이것을 '시적 산문'이라고 불렀다. 〈비평적 우화 A Critical Fable〉(1922)는 친척인 제임스 러셀 로웰이 쓴 〈비평가들을 위한 우화 Fable for Critics〉의 모방으로,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작품임을 밝히기 전까지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녀는 발랄하고 강한 개성과 독립심, 열정으로 돋보였으며, 흡연과 같은 도전적인 행동으로 관습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기도 했다. 로웰에 앞서 이미지스트 시인들을 이끈 에즈라 파운드는 그녀의 지배적인 성격에 찬사를 보내는 뜻에서 그들을 '에이미지스트'(Amygists)라고 새롭게 이름붙이기도 했다. 형식과 기교면에서는 대담한 실험가였지만 핵심에서는 보수적인 그녀는 전통적인 시 형식을 고수했고, 말년에는 모든 급진적인 시인들과 관계를 끊었다. 〈라일락 Lilacs〉·〈문양 Patterns〉은 그녀의 시선에 자주 등장하는 시들이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6명의 프랑스 시인들 Six French Poets〉(1915)·〈현대 미국 시의 경향 Tendencies in Modern American Poetry〉(1917)·〈칸 그란데의 성 Can Grande's Castle〉(1918) 등과 2권으로 된 전기 〈존 키츠 John Keats〉(1925)가 있으며 〈What's O'Clock〉(1925)·〈동풍 East Wind〉(1926)·〈파는 노래 Ballads for Sale〉(1927) 등이 있다. 〈시선집 Complete Poetical Works〉은 1955년에 출판되었다. 또 정기간행물에 비평기사를 썼고 자주 강연도 했다. 로웰에 관한 전기물로는 호러스 그레고리가 쓴 〈에이미 로웰 Amy Lowell:Portrait of the Poet in Her Time〉(1958)이 있다.
2092    미국 시인 - 프로스트 댓글:  조회:4137  추천:0  2017-05-01
  출생 1874. 3. 26,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망 1963. 1. 29, 보스턴 국적 미국 -프로스트 요약 일상적인 언어와 익숙한 리듬, 평범한 생활에서 취한 상징을 사용하여 뉴잉글랜드 지방 생활의 평온함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시인이 된 뒤 결핵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듣고 농촌으로 이주해 가축을 키우며 살다가 영국으로 건너갔다. 목차 접기 생애 생애와 활동 프로스트에 대한 평가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미국의 시인이다. 생애 아버지 윌리엄 프래스콧 프로스트 2세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루이스타운의 한 사립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스코틀랜드 태생의 교사 이자벨 무디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가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되었다. 1885년 그가 폐결핵으로 죽자 미망인과 두 아이들(여동생은 1876년에 태어났음)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매사추세츠의 로렌스까지 가야만 했다. 그후 가난했던 프로스트의 어머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매사추세츠와 뉴햄프셔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돌보았다. 그녀는 아들 로버트의 성격과 문학 발전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의 스코틀랜드인다운 성실함과 강한 신앙심이 실용성과 신비주의를 혼합한 프로스트의 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어린시절 프로스트는 야구와 축구를 무척 좋아했고 책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의 열성으로 그는 뉴햄프셔의 세일럼 그래머 스쿨을 가까스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렌스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의 태도는 바뀌어, 1892년 그 학교를 졸업할 때는 후일 그가 결혼하게 된 엘리노 미리엄 화이트와 함께 졸업식 고별사를 할 만큼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 시에 대한 관심은 그가 편집인이던 학교신문에 이미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던 사실에서 잘 드러나며, 졸업식 고별사에서도 그는 시인의 경험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프로스트의 할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고 졸업하던 다음 해 가을 그를 뉴햄프셔의 하노버에 있는 다트머스대학으로 보냈다. 그러나 단조로운 학과 공부에 적응하지 못한 프로스트는 한 학기가 채 못 되어 학교를 떠났다. 그뒤 몇 년 간 로렌스에 있는 집에서 시를 쓰며 때로 학교교사, 방적공, 신문기자로 돈을 벌면서 지냈다. 1895년 결혼한 뒤 2년 동안 그와 그의 아내는 어머니를 도와 조그마한 사립학교를 운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잡지 등에 시를 기고했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가 처음으로 시를 써주고 원고료를 받은 것은 1894년 주간 문학잡지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에 실린 〈나의 나비 : 비가 My Butterfly : An Elegy〉였다. 1897년 가을 프로스트는 고등학교 수준의 라틴어와 그리스어 교사가 되기 위해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들 과목에서 훌륭한 성적을 얻었으나 병 때문에 2년이 채 못 되어 공부를 중단했다. 결핵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듣고 그는 생활방식을 철저히 바꾸어 매사추세츠 머슈언에서 가금 사육사가 되었다. 이런 모험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1900년 할아버지가 그를 위해 사두었던 뉴햄프셔 데리의 한 농장으로 이사했다. 프로스트의 첫 아들은 1896년에 태어났으나 그가 이사하기 전에 죽었고, 2번째 아이인 딸은 당시 1세가 채 안 된 때였다. 데리에 살면서 4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고 농부로서 실패한 프로스트는 다시 교사가 되었다(1906~12). 프로스트의 훌륭한 걸작시 대부분은 그가 데리에 있을 때 씌어진 것이지만 그때는 어느 편집자도 그의 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11년 프로스트는 1901년에 죽은 할아버지로부터 농장을 물려받았지만 즉시 농장을 팔고 그 다음해에는 시작(詩作)에만 전념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갔다. 그는 버킹엄셔의 비컨스필드에 정착한 뒤 데리에서 썼던 서정시를 모아 정리했다. 이 원고는 런던의 한 출판업자에 의해 1913년 〈소년의 의지 A Boy's Will〉로 출간되었다. 그 다음해 같은 출판업자에 의해 이야기체 시모음집 〈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이 나왔다. 영국 비평가들의 열렬한 찬사가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출판업자 3명이 출판의뢰를 해올 정도였다. 영국에서는 E. 파운드, E. 토머스, W. W. 깁슨, T. E. 흄, L. 애버크롬비 등과 친교를 가졌다. 전원으로 오라는 조지아의 시인 깁슨과 애버크롬비의 권유를 받아들여 1914년 글로스터셔의 시골로 이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1915년 2월 프로스트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그무렵 그의 시집 2권이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그후 뉴햄프셔의 프랭코니아에 한 작은 농장을 샀고, 그의 시가 미국인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자 그의 무명시절도 막을 내렸다. 그는 암허스트대학의 영문학 교수(1916~20), 미시간대학교의 시학 교수(1921~23), 애머스트대학(1923~25), 미시간대학교(1925~26)의 교수로, 그후 1938년까지는 애머스트대학의 시간강사로 일했다. 1939~43년 하버드대학교의 랠프 왈도 에머슨 펠로, 1943~49년에는 다트머스대학의 인문과학교수로, 1949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애머스트대학에서 심프슨 렉처러로 한직(閑職)을 유지했다. 생애와 활동 프로스트는 지극히 복잡한 사람이었다.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인정이 많고 적극적이며, 남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이런 우애관계는 1909년 프로스트가 뉴햄프셔 데리빌리지의 핑커턴 아카데미에 있을 때 그의 제자였던 존 바틀릿과 맺은 친교가 대표적이다. 이 우애는 바틀릿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마거릿 바틀릿 앤더슨의 〈로버트 프로스트와 존 바틀릿 : 그 우정의 기록 Robert Frost and John Bartlett : The Record of a Friendship〉(1963)에 기록되어 있다. 데리의 농장시절에도 프로스트는 자질이 별로 없는 농부였다. 그후 그는 자기가 너무 게을러 농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데리의 농장으로 가기 전에 이미 그는 열정적인 식물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결과 농장경영보다는 농장에 심었던 각종 식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이들이 식물학에 관한 흥미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자라자, 그는 산책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농장보다 더 먼 곳까지 다녀오곤 했다. 〈소년의 의지〉에는 농사보다는 식물에 관심을 보인 시가 더 많다. 프로스트는 계속 농장 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농사일을 직접 하는 것은 잘 하지 못했으나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또 뉴욕에서 출간된 2권의 시집에는 농부다운 목소리로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러나 프랭코니아에 농장을 산 지 몇 개월이 못 되어 그는 애머스트대학의 교수직을 받아들였고 가족과 함께 매사추세츠로 이사했다. 그후 수년 간 프랭코니아의 농장은 별장일 뿐이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타관을 떠돌면서 시 낭송회를 열 때도 시와 연설에서 자신을 뉴잉글랜드의 농부라고 소개하기를 좋아했다. 비록 프로스트가 농사일을 잘하는 농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농부가 되고자 했던 그의 욕망만이 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으면 안 된다. 농장은 그의 동료 교수들과 그의 독자들과의 사교에 별장 이상의 역할을 했다. 프로스트에게서 자연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는 매일 넓은 풀밭을 건너고 농장의 숲을 지나, 때로는 그보다 더 멀리 친구의 농장까지 돌아다니기를 좋아했고, 그의 이웃들은 프로스트가 그들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산책이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새로운 시를 발견하게 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식물학자와 꼭 같았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들꽃의 이름을 댈 수 있었다. 1939년 부인이 죽던 해에 그는 버몬트 립턴의 브레드로프 영어학교 근처에 상당한 규모의 농장을 샀다. 프로스트에 대한 평가 프로스트의 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층의 독자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이는 그의 시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어 읽는 사람마다 그의 시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20세기의 여러 시인들이 시도했던 실험적인 방법을 피했고 '새로운 옛 방법'에 만족한다고 거듭해서 말했다. 그는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로부터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상황, 그리고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것에 가까운 언어를 서정적인 시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는 그의 시를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행하던 감성적인 시와는 달리 '시적이지 않은 시'가 되게 했다. 또 19세기의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에게서 극적인 독백과 대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고대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 중 특히 테오크리토스와 베르길리우스를 공부했으며 그결과 대화체 전원시, 즉 에클로그의 목가적인 전통을 세웠다. 프로스트를 읽는 이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자연적인 대상의 외양과 시골 사람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관찰한 그의 기록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찰 그 이상이다.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그는 그가 상상하는 시골풍경에 상징적·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결과 그의 대표적인 시들은 그의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의 관계, 또한 타인·자연·우주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심오한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둔 가치를 설명한다. 폭넓은 그의 시에는 공포와 두려움의 분위기를 지닌 것도 있지만 확신이 주류를 이룬다.
2091    미국 시인 - 윌리엄스 댓글:  조회:4984  추천:0  2017-05-01
  출생 1883. 9. 17, 미국 뉴저지 러더퍼드 사망 1963. 3. 4, 러더퍼드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시인 - 윌리엄스   명료하고 분리된 이미지를 통해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06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뉴욕에서 수련의(인턴) 과정을 마치고 라이프치히에서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 1910년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시작과 의사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는 〈그것을 원하는 자에게! Al Que Quiere!〉(1917)에서 독특한 문체를 선보였으며, 감각적 세계의 신선하고 직접적인 인상을 표현한 〈유쾌한 윌리엄 Lighthearted William〉·〈By the Road to the Contagious Hospital〉·〈붉은 손수레 Red Wheelbarrow〉 같은 개성있는 시들은 명시선집에 자주 실린다. 1930년대 경제공황기에는 시상이 세상을 찬양하는 쪽에서 세상의 죄악을 늘어놓는 쪽으로 바뀌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초상화 Proletarian Portrait〉·〈요트 The Yachts〉 같은 시들은 설명보다 제시를 통해 입장을 전달하는 그의 기교를 보여준다. 〈패터슨 Paterson〉(5권, 1946~58)에서는 도시의 개념을 나타내면서 도시의 복잡성 안에 인간의 복잡성도 표현했다. 이 시는 퍼세이익 강가에 있는 뉴저지의 산업도시가 무대인데, 미국과 현대인의 복합적인 모습을 환기시킨다. 많은 산문을 쓴 윌리엄스는 〈미국인의 기질 In the American Grain〉(1925)이라는 작품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논평을 통해 미국인의 특성과 문화를 분석했다. 〈흰 노새 White Mule〉(1937)·〈In the Money〉·〈발전 The Build-Up〉(1952)은 한 가족을 다룬 3부작 소설이다. 주목할 만한 단편으로는 〈장 베크 Jean Beicke〉·〈냉혹한 얼굴 A Face of Stone〉·〈농부의 딸들 The Farmers' Daughters〉이 있다. 희곡 〈사랑의 꿈 A Dream of Love〉(1948)은 오프브로드웨이와 대학가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1951년 〈자서전 Autobiography〉을 펴냈고, 사후인 1963년 〈브뢰헬의 그림 외(外) Pictures from Brueghel, and Other Poems〉(1962)로 시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시인인 리드 휘트모어가 쓴 〈윌리엄 카를로 윌리엄스 William Carlos Williams〉가 1975년에 출판되었다. [Daum백과] 윌리엄스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90    시법과 글쓰기 댓글:  조회:3311  추천:0  2017-05-01
詩法      아치볼트 맥클리쉬 (1892~)     시는 구체球體의 과일처럼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오래 된 큰 메달이 엄지손가락에 대하듯이 말을 못해야 한다   이끼 자라는 창턱의 소매 스쳐 닳은 돌처럼 침묵이어야 한다   시는 새의 비상과 같이 말이 없어야 한다   시는 시간 안에서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달이 올라올 때   마치 그 달이 밤에 얽힌 나무들에서 가지를 하나하나 풀어주듯이   겨울 나뭇잎 뒤에 숨은 달과 같이 기억 하나하나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간 안에서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달이 올라올 때   시는 동등할 것이지 진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슬픔의 사연에 대하여는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에 대하여는 기울어진 풀들과 바다 위의 두 불빛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여야 한다         글쓰기                         옥타비오 빠스       고즈넉한 시간 붓이 종이에 글을 쓸 때 누가 붓을 움직이는가? 내 대신 글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는가? 입술과 몽상으로 얼룩진 해변 말 없는 언덕, 좁다란 항구 영원히 잊기 위해 세상에서 돌아선 항아리   누군가 내 안에서 글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헤아리고 잠시 멈춰 망설이고 푸른 바다일까 파아란 산언덕일까 생각하며 싸늘한 불꽃으로 내가 글쓰고 있는 것을 응시하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꽃 그러나 이 재판관 역시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함은 스스로를 벌하는 일 기실 그 글은 누구에게 쓰는 것도 아니다 누구도 부르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서 쓴다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다 마침내 무엇인가 살아 남은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금 내 자신이 된다    
2089    미국 녀류시인 - 힐다 둘리틀 댓글:  조회:4698  추천:1  2017-05-01
  출생 1886. 9. 10, 미국 펜실베이니아 베슬리헴 사망 1961. 9. 27, 스위스 취리히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시인. 별칭은 H. D.   본래 이미지파로 알려졌던 그녀는 번역가·소설가·극작가이며 자칭 '이교적 신비주의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천문학교수였으며 외가의 엄격한 모라비아 전통에 따라 양육되었다. 1895~1911년에 필라델피아 근교의 어퍼다비에서 학교를 다녔고, 1911년 유럽으로 건너간 뒤로는 미국을 몇 번 방문했을 뿐 계속 외국에서 살았다. 오래전부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와 교제했고, 1905~06년 브륀마우르에 있을 때 에즈라 파운드를 만나 짧은 기간 약혼한 적이 있었다. 1913년 리처드 앨딩턴과 결혼했으나 1938년 이혼했다. D. H. 로렌스와 매리언 무어, T. S. 엘리엇, 에이미 로웰, 싯웰가(家) 사람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첫 시집 〈바닷가 정원 Sea Garden〉(1916)에 이어 〈결혼축가 Hymen〉(1921)·〈헬리오도라 Heliodora and Other Poems〉(1924)·〈청동의 붉은 장미 Red Roses for Bronze〉(1929)·〈3부작 Trilogy〉(1944~46) 등을 발표했다. 〈H. D. 시집 Collected Poems of H. D.〉(1925, 개정판 1940)과 〈H. D. 시선집 Selected Poems of H. D.〉(1957)·〈시집 1912~1944〉(1983) 등은 20세기 주요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이밖에도 번역물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투스로부터의 합창 Choruses from the Iphigeneia in Aulis and the Hippolytus of Euripides〉(1919)과 〈에우리피데스의 이오니아 Euripides' Ion〉(1937), 시극 〈히폴리투스의 타협 Hippolytus Temporizes〉(1927), 산문작품 〈양피지 Palimpsest〉(1926)·〈헤딜루스 Hedylus〉(1928)·〈선물 The Gift〉(1982) 등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내게 삶의 권리를 달라 Bid Me to Live〉(1960)·〈프로이트 예찬 Tribute to Freud〉(1974)·〈고통의 종말 End to Torment〉(1979)을 비롯해 자서전적인 작품들이 여러 편 있다. 바버러 게스트가 집필한 전기 〈자기 규정의 시인 H. D.와 그녀의 세계 Herself Defined:The Poet H. D. and Her World〉는 1984년에 출판되었다. ==========================   "바람아, 이 열기를 베어다오" Heat _ Hilda Doolittle O wind, rend open the heat,  cut apart the heat,  rend it to tatters.  Fruit cannot drop  through this thick air…  Cut through the heat-  plow through it  turning it on either side  of your path.  열기           _ 힐다 둘리틀 아 바람이여 이 열기를 찢어 열어라  열기를 베어 갈라라  갈가리 찢어 발겨라  이렇게 갑갑한 공기 사이로는  과일 하나 떨어지지 못한다...  열기를 자르며 나가라-  열기를 갈아엎어라  네가 가는 길  양옆으로 치워버려라             ◇힐다 둘리틀 (1886-1961, 미국의 여류시인)  필명이 H.D.이고 에즈라 파운드와 함께 이미지즘 시운동을 이끌었다. 그녀의 이미지즘은 시 속에 설명과 규칙적인 박자를 배제하고 이미지의 힘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감상 TIP] 덥습니다. 정말 과일 하나 떨어질 틈새가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어제는 미국 가서 갖은 고생 끝에 돈 많이 벌어 30년 만에 돌아온 지인을 만났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어린 시절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추웠고 여름은 이처럼 덥지 않았는데. 달동네 겨울은 얼마나 춥던지 밤에 어머니가 다섯 형제 구멍난 내복을 빨아서 마루에 널어놓으면 아침이면 꽁꽁 얼어서, 형들과 얼어붙은 내복으로 칼싸움을 했는데…. 여름에는 웃통 벗고 엎드려서 등목 한번 하면 하나도 덥지 않았는데….” 백만장자가 되어 에어컨 바람 씽씽 나오는 호화로운 거실에 앉아서 그는 내복으로 칼싸움을 하던 가난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 '생일' -    
2088    영국 시인 - 크리스토퍼 말로 댓글:  조회:4882  추천:0  2017-05-01
크리스토퍼 말로 (Christopher Marlowe.1564.2.26∼1593.5.30)      영국의 극작가ㆍ시인. 캔터베리 출생. 말로는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오면서 즉시 런던 문사(文士)들과 사귀었다. 대학 재인파(才人派) 중의 최연소자. 재학 중에 를 번역하기도 하고, 무신론자들과 사귀기도 하였다.    비극작가로서 예봉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857년경부터였다. 이때 상연된 (1590년 출판)은 무운(無韻) 오시각(五詩脚)의 자유로운 활용과 동유럽이나 전 아시아를 자신의 정복욕에 제공하려는 초인적인 성격의 등장으로, 극단(劇團)에 하나의 전회(轉回)를 주었다. 파우스트 전설을 극화한 영국 최초의 작품 (1592)를 연속 상연하여 무한의 지식욕을 주제로 하였다.    다시 1592년경에는 (1633년 출판)을 상연하여 끈덕진 금전욕에 더하여 마키아벨리즘의 잔인함을 그려서 유행의 선단(先端)을 열었다. 다시 사극 (1592) 외에 극이 2가지가 있는데, 서정시인으로서의 우수함은 (1598) 등의 시편(詩篇)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그는 또한 정부의 전령으로 공문서를 급송하고 카톨릭 교도들의 동정을 살피는 스파이 역할도 했다고 한다. 처녀작으로는 런던에서 무대에 올려져 호평을 받은 이었다.    셰익스피어와는 개인적인 교섭도 있었으며, 그의 초기의 작품에는 말로의 영향이 보인다. 정치적 암살인지 논쟁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불행히도 요절하고 말았다.      영국 시인ㆍ극작가. 캔터베리의 제화공 존 말로의 큰아들로 출생. 초등교육에 대해서는 1579년 1월 14일 장학생으로 캔터베리의 킹스 스쿨에 입학했다는 것만이 전해진다. 1년 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코퍼스크리스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1584년 학사학위를 받고서도 계속 케임브리지에 머물렀는데 이는 영국국교의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587년 대학에서는 그에게 석사학위 수여를 망설였는데 그의 잦은 결석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구심은 말로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충실히 섬겼으며 '조국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에 종사했음을 확언하는 추밀원의 편지에 의해 수그러들었다.    1587년 이후 런던에 머무르면서 연극을 위한 작품을 썼고, 때로는 자신의 격렬하고도 불명예스러운 행동 때문에 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몇 차례 관직에 근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무신론자'라는 위험한 명성을 얻었는데 이는 단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비정통적인 종교적 견해를 의미한다. 그 밖에도 그의 비정통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은데 스파이 리처드 베인스가 그에 대해 폭로한 글이 대표적이며 말로가 사망한 뒤 1593년 토머스 키드가 영주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키드는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는 불온한 문서들이 자기 방에서 발견되자 2년 전에 같이 지낸 말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인스와 키드는 말로를 대신해 더욱 엄밀한 의미로 무신론을 규정짓고 말로가 신성모독을 즐겼다고 말했다. 결국 1593년 5월 18일 추밀원은 체포령을 내렸고 이틀 후부터 그는 '불온함이 사라졌음이 보일 때까지' 매일같이 그들의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5월 30일 데트퍼드의 한 술집에서 니콜러스 스케어스, 로버트 폴리와 하루종일 같이 지낸 말로는 술값 시비로 싸움이 일어나 잉그럼 프라이저에게 살해되었다.    6년도 채 안 되는 극작 경력이지만 작품들은 다양하고 훌륭하다.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전에 이미 을 쓴 듯하며 2부로 된 이 극은 1587년 말엽에 상연되었다. 말로는 말년에 케임브리지에서 오비디우스의 와 최초로 루카누스의 를 번역했다. 이 무렵 또한 토머스 내시와 함께 (1594)도 썼다. 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그 후 몇 년 동안 극작에 몰두했다.    1590년 이 작품의 1ㆍ2부가 익명으로 출판되었는데 출판사는 이 극의 진지한 관심사인 역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문구들을 삭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은 명백히 말로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외의 어떤 극, 시, 번역 작품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출판되지 못했다. 미처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서사시 는 1598년 출판되었고 엘리자베스 시대 시 가운데 스펜서의 시를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비(非)극적 시로 평가된다.    이후의 작품들이 씌어진 순서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하지만 이후 곧 을 썼고 그 뒤 좀더 중립적이고 사회적인 작품 와 을 썼다는 견해가 가장 보편적이다. 마지막 극작품으로 추정되는 은 파격적으로 새로운 배경을 도입했다. 은 로드애드미럴스맨 극단(Lord Admiral's Men)에 의해 상연되었고, 이 극단의 뛰어난 배우 에드워드 앨린이 탬벌레인, 포스터스, 유대인 바라바의 역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작품】    극작품 중 최초의 작품인 (1587, 출판 1590) 1ㆍ2부에서는 벤 존슨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특징인 '힘찬 운율' 덕분에 무운시가 엘리자베스 후기와 제임스 1세 시대 극작의 중요한 매개체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본래 말로는 탬벌레인이 체노크라트와 결혼하고 세상의 모든 것과 휴전한다는 결론으로 1부만을 쓸 생각이었으나 1부의 인기에 힘을 얻어 탬벌레인이 죽을 때까지 이 작품을 끌게 되었다. 1부에서 이미 자신의 역사 지식을 모두 쏟아버렸기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후편은 메꾸기에 급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부에서는 더 많은 노력을 들인 결과 젊은 극작가는 자신이 택한 영웅을 더욱 냉정하고 엄격하게 바라볼 수 있어서 1부에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피상적인 것 이상의 모습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은 14세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잔인한 정복자 티무르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작품이다. 그는 권력과 사치와 미인을 탐하는데, 1부 초반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디아 목동에 불과하지만 타고난 능변과 대담성, 충절을 쉽게 저버릴 수 있는 자세로 페르시아 왕관을 얻는다. 또 뒤이은 투르크의 황제 바야제스 정복과 다마스커스 시 약탈, 이집트의 군주 공략 등의 일을 저지르지만 군주의 딸 체노크라트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의 호소대로 군주를 용서하고 휴전하게 된다.    한편 2부에서 탬벌레인의 정복행위는 계속되고 싸울 때마다 승리하는데 심지어 병마가 덮쳤을 때조차 승리한다. 그러나 체노크라트가 죽고 세 아들이 넓은 영토를 지키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탬벌레인은 아들 칼리파스가 아버지를 따라 참전할 것을 거부하자 그를 죽인다. 또한 항상 전투를 했으며 지상에서 어느 한순간 적이 없는 경우에도 하늘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이끄는 꿈을 꾸며 자신이 '천벌의 대상'이 되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자신과 신 사이에 매개자가 필요없다고 여겨 을 불태우며 심지어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한다. 말로는 주인공 탬벌레인에 공감을 느껴 그로 하여금 아래와 같은 장엄한 시구를 읊게 하고 그가 권력과 미인을 가지고 싶어하는 꿈을 가졌음을 작가 자신이 즐긴다.    "우리는 가슴 속에서 서로 우위를 다투는     사대(四大)요소로써 우리를 만든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향상심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영혼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 세계의     신비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모든 혹성의 운행과정도 측정할 수 있지만     여전히 무한한 지식을 좇아서 기어오르고     쉬임 없는 천체처럼 언제나 움직여서     우리가 가장 무르익은 과일을 딸 때까지     스스로를 진력하게 하고 쉬지 않도록 한다.     그 완전한 기쁨과 더없는 만족     지상의 영광인 그 달콤한 결실을 딸 때까지."    그러나 2부에 와서는 다른 고난들이 나타난다. 이 영웅은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시하기 위해 끊임없는 싸움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잔인함은 극에 치달아 병적이 되며 인간적 약점이 점차 드러나는데 이는 분노한 그가 〈코란〉을 태우자마자 치명적인 병에 걸리는 것으로 극명해진다. 이 작품에서 말로는 이미 그의 비극적 주인공에게 웅장함과 동시에 불구적인 면을 부여함으로써 한 인물을 하나의 각도 이상으로 그릴 수 있는 작가로서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말로의 가장 유명한 극은 인데 현존하는 작품은 원작에서 많이 변형되었고 쓴 시기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1604년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1616년 또 다른 판이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유혹, 몰락과 지옥에 빠지는 이야기 속에 선한 천사, 악한 천사, 악마 루시퍼, 메피스토펠레스, 7가지 대죄(大罪) 등의 도덕적 인물들을 자유롭게 등장시켜 도덕극을 극적으로 전개시킨다. 이 작품은 지식과 힘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의사에서 마법사로 변한 포스터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극에서 악마의 중개자인 메피스토펠레스는 악마적 자부심과 암울한 절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타락한 천사로서, 스스로 비극적 숭고함을 성취하고 있다. 이 극에서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개념이, 포스터스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저당잡히기 직전에 예수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최후의 간절한 애원과 잃어버린 천국에 대한 메피스토펠레스의 감동적인 애도로 설득력있게 표현된다.    "별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시간은 흘러가 시계가 곧 칠 것이다.     악마가 올 것이니 포스터스는 지옥에 떨어지겠지.     오, 신에게 뛰어 오르면 누가 나를 밀어내릴 수 있겠는가?     보라, 보라, 하늘에서 예수의 피가 흘러 내리는 곳을     단 한방울이라도 맞으면 나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을 텐데 아니 반방울이라도. 오, 나의 예수!     오, 예수의 이름으로 나의 심장을 가져가지 말아다오.     그러나 그를 맞이할 것이다. 오, 루시퍼! 나를 살려다오!     지금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가버렸네. 그리고 보라, 신이 그의 팔을 뻗치고 성난 얼굴로 향하는 곳을,     산과 언덕들이 다가와서 내게로 떨어지고     무섭게 성난 신으로부터 나를 숨긴다."    에서 작가가 자신의 영웅에 대해 웅대함과 동시에 잔인성과 어리석음을 파악한 것처럼 포스터스의 웅장한 지적 야망에 대해서도 그 야망의 무익하고 자기 파괴적이며 어리석은 단면들도 그려냈다. 이 극본에는 후에 이류 작가들이 꾸며낸 질 낮은 우스운 장면들이 들어가 문제가 많지만 더 건전하고 일관성 있는 부분이 말로의 작품인 듯하다.    역시 권력에 굶주린 인물 유대인 바라바가 등장하는데 그는 그리스도교의 몰타 섬이라는 비열한 사회에서 재산축적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인물은 최고의 정복자 탬벌레인이나 신에 대항하는 외로운 모험가 포스터스와는 달리 자신이 속한 사회로의 결속력이 강하다. 결국 바라바는 신의 일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적인 인간들의 뭉친 행동에 의해 파멸된다.    은 1633년까지 출판되지 않았으므로 현존하는 작품이 말로의 원본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은 성 바르톨로메오 대축일의 대학살을 비롯한 프랑스의 당시 역사적 사건들을 극적으로 재현한 (1593)과 말로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극에 지대한 공헌을 한 (1594)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탐하는 가이즈 공을 등장시키는 것처럼 에서는 더욱 젊은 인물 모티머를 통해 권력을 갈망하는 마음과 그 권력에 가까워질수록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 작품에서 작가는 영광을 추구하는 작중 인물이 흥분에 편승하지만 이 3편의 극은 그러한 인물들을 반드시 사회적 틀 안에서 다룬다. 이는 말로는 사회적 책임감, 권력을 통한 타락, 권력행사에 수반되는 고난을 표현하는 데 특히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토머스 내시와 공동작으로 1594년 출판한 비교적 중요치 않은 작품 나 과는 달리 는 현존하는 작품이 원본인 유일한 작품이다. 또한 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최초의 영국 역사극이라는 평가 이외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왕, 왕이 무시하는 여왕, 왕이 총애하는 가베스턴과 야망에 찬 모티머 사이에 맺어진 관계는 사심없는 감정과 탁월한 이성으로 파헤쳐진다. 이 작품에서는 어떤 인물도 함부로 처리되지 않았으며 에드워드의 왕위 양도와 그가 잔혹하게 살해되는 것을 통해 포스터스가 맞이하는 최후의 시간에서처럼 작가는 어둡고 폭력적인 상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과 같이 도 엘리자베스 시대의 왜곡된 마키아벨리즘에 매료된 작가의 모습이 드러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작가가 재난의 본질, 사회의 권력과 개인적 고난에 대해 시사하는 통찰력있는 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극작뿐만 아니라 오비디우스의 와 최초로 루카누스의 를 번역했고 시 를 썼다. 이 시를 말로가 끝내지 못하고 죽자 조지 채프먼이 완성, 1598년 두 사람의 공동작으로 출판되었다. 말로는 여기에서 놀라운 솜씨로 이야기체의 10행연구를 썼으며 연인들과 그들의 만남에 대한 감각적 묘사는 극의 끝무렵에 포스터스가 트로이의 헬렌에게 읊는 다음과 같은 장려한 성애시(性愛詩)와 필적할 만큼 훌륭하다.    "수천 척의 배를 진수시킨 자가 이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리움의 옷 벗은 탑들을 태운 자도?"     (Was this the face that launch'd a thousand ships      And burnt the topless towers of Ilium?) 【평가】    말로는 극작가로서의 자질보다 서정적·수사학적 재능을 격찬받았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놀라운 정열과 격렬함, 아름다운 무운시로 이루어진 대화, 등의 작품이 원래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그의 극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살펴보면 극의 기교가 눈에 띄게 점차 발전해간다.    1부 같은 초기 작품에는 과장에 가까운 호언장담이 지나치지만 그보다 후에 씌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에서 말로는 극의 소재를 확실하게 통제하고 감상을 배제해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인물들을 다룬다. 당시 말로는 뛰어난 무운시를 통해 영국 연극계를 사로잡았고 셰익스피어 등장 전까지 탁월한 위치에 있었다. 【희곡】(1589) (2부.1590) (1592)  (1592) (1593) (1594) (1604) 【서사시】(1598)     [출처] 영국 극작가ㆍ시인 크리스토퍼 말로|작성자 재봉틀
2087    아이랜드 시인 - 잉그럼 댓글:  조회:4261  추천:0  2017-05-01
  출생 1823. 7. 7, 아일랜드 도니골 템플칸 사망 1907. 5. 1, 더블린 국적 아일랜드 요약 아일랜드의 경제학자·시인 -잉그럼   1843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수학과 고전문학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고 일찍부터 시인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그의 종교적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 현상만을 다루는 고전경제학의 방법론을 거부하고 발전의 법칙을 규명하는 콩트의 노선에 따라 경제학을 통일적인 사회과학으로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이 주제를 다룬 가장 유명한 논문은 〈정치경제학의 현황과 전망 Present Position and Prospects of Political Economy〉(1878)이다.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연역적·수학적인 방식을 경제학에 이용하는 것을 경시했다. 경제사상사에 관한 업적은 훗날 경제학자 리처드 T. 엘리에게 영향을 끼쳤다. ============================덤으로 @@= [이미지즘] 이미지즘, 모더니즘의 이해   이미지즘(Imagism)---현대시 운동, 1910년대에 영국·미국에서 전개된 반(反)낭만주의 시운동, 사상주의(寫像主義)라고도 한다.   이미지즘(Imagism)은 20세기 초 영미시인들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시운동이다. 확고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명확한 이미지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흄(T.E.Hulme)의 영향을 받아서, 1차 대전 직전에 런던에 거주하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가 촉진시킨 이미지스트 운동은 시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애매성과 안이한 주정주의에 대한 반명제로 나타난 것이다. 이 운동은 대서양의 양편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고, 그 초기의 회원으로는 아미 로우얼(Amy Lowell). 리차드 올딩틴(Richard Aldington). 힐다 둘리틀(Hilda Doalittle).존 굴드 플레처(John Gould Fletcher). 그리고 플린트(F.S.Flint)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운동은 단명하였고, 이 운동에 관계한 시인의 수 역시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와 시론이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다. 플린트가 1913년 3월에 발표한 (Imagism)에도 설명되었듯 이 "사물을 직접적으로 다룰것, 이미지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절대로 쓰지말 것, 연속되는 음악적 문구로 리듬을 창조할 것"등은 무엇보다 정확한 이미저리와 자유로운 리듬을 강조한 것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종래의 애매하고 안이한 시와 구분짓게 하는 현대시의 가장 뚜렸한 징표가 되어준다. 비록 그들의 시 세계가 각각 그 내용을 달리하고 모두가 현대시로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다양성 속에서 어떤 통일성을 지향하는 공동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특히 그들의 실지 시작품에서 보다 오히려 그들이 내세운 시론, 이른바 이미지를 강조하고 시는 존재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현대시 운동의 이론적 바탕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종래의 개념화 내지 감정화의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거부하고 고전주의적 예술관을 모색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낭만주의의 막연한 정신편향, 센티멘탈리즘에 반대하고, 벽돌을 쌓아올리는 듯한 정밀함과 억제력을 요구하는 고전적 태도를 한결같이 지향한다. 그만큼 시의 특색을 선명하고도 적절한 이미지와 질서에서 구하였다.       이미지즘의 배경과 특징   이미지즘이 하나의 시운동으로서 19세기 영. 미詩의 전통을 청산하고 현대시의 시대로 넘어오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그 이후의 詩에 많은 영향을 끼친것은 그들에게 우수한 지도자가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견실한 이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이상학파 T.E.흄과 애즈라 파운드의 중세문학과 동양시에서 영향을 받은 의(Neo)고전주의 시론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다가 프랑스 상징파 시운동의 영향도 외면할 수 없다.   이미지즘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고 세계 1차 대전에서 전사한 젊은 철학자 T.E.흄은 종래 낭만주의 문학의 주관주의와 모호성을 공격 하였으며, 일반 예술에 있어 객관성과 지적 훈련은 물론 시에 있어서의 'dry(건조하고) hard(견실한) 이미지를 강조 하였다. 흄은 자신의 논문집 "思索錄(speculation)"에 수록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에서 그는 낭만주의가 한숨과 눈물을 동반하여 흐리고 축축한 것은 시인들이 현실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여 인간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 한데서 기인 한다고 말하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문학은 그러한 인간 중심의 현실안목에서 벗어나 다시 고전주의적 현실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로 시각적인 이미지와 언어의 긴축미, 새로운 음율을 내세웠고, 또한 그것 자체가 자족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미지는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그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시의 세 가지 목표로서 정확, 정밀, 명확을 내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정확한 윤곽을 얻기 위하여는 시각적 이미지를 구사해야 한다" 고 강조한다. 시는 결국 이미지와 메타포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의미의 정확한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흄에게 있어 시의 이미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직각적 언어의 정수"(the very essence of an intuitive language)이다.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나는 포크뮤직의 완전한 스펙트럼을 믿을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삶 자체보다 더욱 진실하고 확대된 삶이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포크뮤직이었다.…나는 포크뮤직과 함께 살기로 작정했다. (252쪽)”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포크록의 살아있는 전설 밥 딜런(76). 가수이자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그의 유일한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문학세계사)’에는 딜런이 품었던 꿈과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솔직하고 담담하게 묻어 있다.   포크 음악에 빠져들게 된 계기부터 음악가 밥 딜런으로서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빼곡이 담은 음악 여정의 이야기다. 동시에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이자 청년시절엔 누군가의 사랑스런 남자친구이기도 했던 한 인간의 내밀한 독백이기도 하다. 시적이고 열정적이며 진지한 딜런의 삶이 녹아있다.   자서전은 비틀스와 롤링스톤스가 미국 음악계에 활기를 불어넣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작한다. 1961년 21살의 나이에 유명한 포크 뮤지션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뉴욕을 찾은 무명가수 딜런의 모습이 등장한다.   포크음악이 주류음악이 아니던 시절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들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을 뿐 시대 의식을 표출하진 않았다. 딜런이 즐겨 읽던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나 긴즈버그의 ‘외침’에 담겼던 비트세대(1920년 대공황 시기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체험한 세대로 보헤미안적 문학가나 예술가 그룹)적 욕구를 표현하는 노래는 없었다.   딜런은 당대 주류 대중음악과는 다른 음악적 행보를 걷는다. 포크 음악에 매료됐고 뉴욕 일대의 조그만 클럽이나 작은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했다. 자신이 세상에 대해 느낀 것을 정의하기 위해 가사를 썼고 노래했다.   그를 포크 음악의 길로 인도한 것은 18살 때 우연히 듣게 된 우디 거스리의 음악이었다. 1941년 미네소타 히빙에서 자란 딜런은 18살이 되던 해에 혼자 북부 미니애폴리스로 이사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 플로 캐스트너의 초대로 거스리의 음악을 듣게 된다.   “노래를 차례로 들으면서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숨이 막히고 땅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 거스리는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너무 시적이고 멋있고 리드미컬했다. 긴장감이 넘치는 목소리는 단검과도 같았다.(261쪽)”   당시 그가 들었던 음반은 ‘카네기 홀의 영가와 스윙 콘서트’와 12곡을 담은 정규 앨범 콜렉션이었다. 이후 딜런은 우디가 카터 패밀리의 곡에서 많은 것을 취해 자신의 곡에 추가했듯 자신도 거스리와 로버트 존슨, 행크 윌리엄스 등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21살 때 뉴욕 맥두걸 거리 1위 클럽 ‘개스라이트’에서 고정 급료를 받는 연주자가 되고 당대 최대 음반사인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하게 된다.   그 후의 음악 여정은 드문 드문 드러나 있다. 시간을 뛰어넘은 1968년 아치볼드 맥클리쉬의 ‘스크래치’란 희곡에 들어갈 음악을 작곡하다 결렬된 이야기부터 1987년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와의 음악적 마찰을 겪으며 완성시켜낸 ‘더 트래블링 윌버리스’ 음반 등의 에피소드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물론 그 속에서 딜런은 한결 같이 말한다. 자신의 가사를 마구잡이로 해석해 시대의 대변자가 되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자신은 대중을 선동하려는 야망은 없었으며 어떤 주의나 누구의 대변인이 아니고 단지 음악가였을 뿐이라고.   책 속에서는 군데 군데 그의 인간적인 진면목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자란 히빙 지역을 회상할 때는 자동차 뒤 범퍼를 잡고 눈 위를 달리는 ‘범퍼 잡기’ 놀이를 하거나 BB총으로 친구들과 편을 갈라 온종일 게임을 하는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이 그림처럼 흘러간다.   뉴욕생활 시절 17살의 수즈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전에도 큐피드의 화살이 귀를 스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심장을 맞추었고 그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282쪽)”면서 사랑꾼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디킨스의 소설들과 바이런과 쉘리, 롱펠로우의 시를 읽어 젖히며 친구들과 자유롭게 토론하는 모습에선 ‘귀를 위한 시’가 만들어진 기원도 추적해볼 수 있다.   또 1968년 사회 전면에 나서라고 과격하게 외치는 반전시위대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까지 준비하고 자신을 마약복용자가 아닐까 의심하는 언론과 직접 대면하는 모습에서는 가장으로서의 고뇌와 용기도 드러난다.   물론 딜런의 회상에 따라 시간적 구성이 뒤죽박죽 전개되는 이 책은 딜런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독자들이 처음부터 읽기엔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다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곱씹다 보면 딜런의 기억들이 조각난 퍼즐처럼 곳곳에 배치돼 있음을, 그리고 퍼즐을 맞추다 보면 결국 자신의 맞은 편에서 삶을 읊조리는 60대의 딜런과 마주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살아있는 포크록의 전설 밥 딜런. 사진/뉴시스   권익도 기자  
2086    프랑스 시인 - 장 드 라 퐁텐 댓글:  조회:4991  추천:0  2017-04-24
장 드 라 퐁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 드 라 퐁텐 장 드 라 퐁텐 (Jean de La Fontaine, 1621년 7월 8일 ~ 1695년 4월 13일)  프랑스의 시인이자 동화 작가이다. 생애[편집] 라 퐁텐은 1621년 7월 8일 프랑스 샹파뉴의 샤토티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성장하면서, 자연과 자유를 사랑하게 되었다. 후에는 고전을 연구하며 시·극·우화 등을 썼다. 판차탄트라와 같은 고대 인도 문학, 이솝, 호레이스 등에서 영감을 받아서 1668년에서 1695년까지 발표한 시문으로 된 우화집으로 유명하다. 라 퐁텐의 우화는 이솝 우화에 비해 내용 면에서 인간 세태에 대한 풍자의 강도가 세다. 루이 14세의 여섯 살 난 손자에게 헌정된 최초의 우화집인 《우화 선집》(Fables Choisies)에는 124개의 우화가 실려 있는데, 동물에 비교하여 사람의 참다운 모습을 생각케 해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프랑스 언어의 시적 기능을 잘 살린 수작으로 꼽힌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지식인들은 라 퐁텐의 시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1995년 프랑스에서는 라 퐁텐과 우화 기념우표 시리즈를 발간한 바 있다. 한국어로는 《라 퐁텐 우화집》 또는 《라 퐁텐 그림우화》와 같은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그의 소설로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 이야기》 등이 있다. ======================================================   출생 1621년 07월 08일 사망 1695년 04월 13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 《우화 시집》, 《콩트와 노벨》 등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우화 작가로 동물을 의인화하는 형식을 통해 프랑스 사회를 풍자했다.   장 드 라 퐁텐 라 퐁텐은 프랑스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도덕적 우화 장르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의 우화는 오늘날까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듣고 자라는 이야기들이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 희극을 부각시키는 우화는 라 퐁텐이 만들어 낸 장르는 아니다. 우리에게 우화로 매우 잘 알려져 있는 고대 그리스의 이솝이 대표적인 우화 작가이며, 그 밖에도 작자를 알 수 없는 많은 동서양의 민간 동화들이 우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라 퐁텐 이전의 우화들이 교훈을 주려는 목적에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형식적으로 차용하는 데 반해, 라 퐁텐의 우화는 그가 고안한 단막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라 퐁텐은 고대 그리스의 이솝 이야기, 동양의 우화 등에서 차용한 동물과 고대 영웅 이야기를 기반으로, 서정시, 풍자시, 대화, 콩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만들면서, 독창적인 사회 비판 우화, 인간 희극을 만들어 냈다. 장 드 라 퐁텐은 1621년 7월 8일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샤토 티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그 지역에 있는 왕실 산림의 감독관이어서, 라 퐁텐은 어린 시절 산림에서 뛰놀고 사냥을 했으며, 아늑한 시골 마을에서 한가롭게 몽상하고 독서를 하며 자랐다. 20세 때 오라토리오회 신학교에 들어가 졸업한 뒤 성직자가 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후에 다시 법학을 배워 고등법원 변호사가 되었으나 별다른 야망도 없고, 쾌락주의자였던 탓에 얼마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고 같은 계층의 여성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기로 한다. 이에 26세 때 마리 에리카르와 결혼하고, 31세 때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성격상 이마저도 부담스러웠는지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며, 35세 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산림 감독관 일도 생계를 위해 자리를 유지하는 수준으로만 했다. 글을 쓰면서 그는 자주 파리에 가서 문인들과 교류했으며, 퓌르티에르, 샤플랭 등의 문인들과 '원탁 기사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37세 때 재무장관 푸케에게 장시 〈아도니스〉를 헌정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라 퐁텐의 쾌활하고 다소 안이한 성격이 푸케의 성격과 잘 맞았던지, 라 퐁텐은 푸케가 실각하는 1661년까지 그의 측근에서 왕실 어용 시인으로 활동했다. 푸케가 루이 14세를 화나게 하면서 실각 위기에 처했을 때 라 퐁텐은 왕에게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 달라는 〈보 성의 님프들의 비가〉를 써서 올리기도 했는데, 이 일로 루이 14세의 미움을 받아 아카데미 프랑세즈 입회를 1년간 금지당하였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라 퐁텐은 다소 실의에 빠졌으나 곧 새로운 후원자와 친구들이 생겼다. 이후로는 오를레앙 대공비, 드 라 사블리에르 부인, 뒤 델바르 부인 등의 후원을 받고 그들의 집에서 기거하였다. 오를레앙 대공비의 후원을 받으면서는 몰리에르, 라신 등 당대 인기 작가들과 교류했으며, 드 라 사블리에르 부인의 후원을 받을 때는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살롱 중 하나인 그녀의 살롱에서 많은 학자와 철학자, 작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드 라 사블리에르 부인의 집에서는 20년이나 기숙했는데, 이 부인은 개와 고양이 그리고 라 퐁텐과 함께가 아니면 여행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그럼에도 그는 드 라 사블리에르 부인이 죽은 뒤 델바르 부인이 자신을 후원하겠다는 전언을 보내자 시종에게 "기다리고 있었소. 지금 댁으로 가려던 참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후원자들의 호의 덕분에 라 퐁텐은 한평생을 안온하고 근심 없이, 경쾌하고 방탕한 사교계 생활을 했다. 이런 성격과 생활 방식 때문인지, 라 퐁텐이 프랑스 문학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1살 연하인 몰리에르, 18세 연하인 라신이 이미 명망을 떨친 지 한참 후였다. 44세 때부터 3년에 걸쳐 운문 이야기집인 《콩트와 노벨》을 펴내면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으며, 오늘날 '라 퐁텐 우화'로 널리 알려진 우화시들은 47세 때나 되어서야 발표되기 시작했다. 《콩트와 노벨》은 이탈리아 문학, 특히 보카치오의 문학에서 각 이야기들의 재료와 형식을 빌려 온 것으로, 색을 밝히는 성직자들, 음탕한 여자들 등 당대 프랑스의 상스럽고 음탕한 이야기들을 관능적이고도 해학적인 필치로 그린 작품이다(라 퐁텐은 만년에 종교에 귀의한 뒤 이 작품의 음란함을 인정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우화 시집》은 총 12권으로 세 차례에 걸쳐 출간되었는데, 라 퐁텐은 이 작품집에서 동서양의 다양한 우화 형식에 자신만의 실험을 더해 당대 프랑스 사회를 해학과 기지, 풍부한 표현력으로 교묘하고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1692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우화 시집》 속표지 라 퐁텐이 자필로 쓴 《우화 시집》 한 페이지 첫 번째 《우화 시집》 6권을 펴내고 난 이듬해에는 경쾌하고 재기 발랄한 이야기집인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을 펴냈다. 그 밖에도 성인전(聖人傳)의 이야기들을 변용한 《성(聖) 말크의 수인(囚人)의 시》, 테렌티우스를 번안한 《환관》, 시정 사건을 소재로 한 소극(笑劇) 《보리샤르의 익살꾼》, 《다프네》의 오페라 대본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들을 썼다. 라 퐁텐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안이하고 태평무사한 성격으로 자유분방하게 한평생을 살았다. 작품 역시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모든 소재, 모든 분야에 대해 세간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고 쓰고 싶은 것을 썼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르거나 방종한 이기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상당한 학식과 약삭빠름, 재간꾼으로 위장한 음모가적 기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귀족들을 비롯해 철학자, 문인, 학자 등 주변 많은 인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니콜라 랑크레, 〈벌 받는 가스콩〉 《우화 시집》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 그의 작품들은 번뜩이는 통찰력이나 작가적 고민의 흔적,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 등을 토대로 했다고는 보이지 않으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전, 특히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부터 단테, 보카치오 등에 대한 정통한 이해를 기반으로 쓰인 것이다(라 퐁텐은 후일 《위에게 주는 서간집》에서 고전에 대한 존중을 역설하기도 한다). 또한 라 퐁텐의 작품들은 매우 사실적이며, 해학 뒤에 날카로운 비판이 서려 있다. 이는 그가 겉모습처럼 낭만주의자, 낙천주의자만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라 퐁텐은 성격상 문제인지 열정적인 개혁가도 되지 못했다. 라 퐁텐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문학적 유산들을 기반으로 당대 프랑스 사회를 풍자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도덕률을 전파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때문에 《우화 시집》은 각 편이 형식적으로 불완전하고 가벼운 소극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당대 프랑스인에게 필요한 보편적인 도덕률과 인생관이 깔려 있다. 이런 인생의 진실에 대한 라 퐁텐의 통찰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내용적 측면만이 아니라 구어체의 사용, 풍부한 언어 표현력,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변화무쌍한 자유시 형식으로 이후의 프랑스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Daum백과] 장 드 라 퐁텐 –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이한이,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대표적 우화작가. 대표작은《우화시집》. 시구의 거의 완벽한 음악성,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희극을 부각시키는 절묘성 등이 높이 평가된다. 샹파뉴 지방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1641년 오라토리오회(會)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법률을 공부하면서 F.모크루아, 퓌르티에르 등의 문인과 교유하였다. 1658년 재무장관 푸케에게 장시(長詩) 《아도니스 Adonis》를 바치기 시작하여 1661년 그가 실각할 때까지 어용시인으로서 수많은 소시편(小詩篇)을 바쳤다. 푸케 실각 후에는 오를레앙 대공(大公) 부인, 드 라 사블리에르 부인, 델바르 부인 등의 집에 기식하면서 몽상가적인 성격과 천진난만성으로 재미있는 여러 일화를 남기고 생애를 마쳤다. 우화시인(寓話詩人)으로서 불후의 명성을 남긴 그의 작품 종류는 다양하다. 그외에도 서정소시(敍情小詩), 서간시(書簡詩), 보카치오와 아리오스토 등으로부터 취재한 풍류담(風流譚) 《콩트와 누벨 Les Contes et Nouvelles en vers》(1665∼1685), 아풀레이우스에게서 주제를 얻은 소설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이야기 Les Amours de Psyché et de Cupidon》(1669), 성인전(聖人傳)에서 취재한 《성(聖)말크의 수인(囚人)의 시 Poème de la Captivité de Saint Malc》(1673), 키니네의 효용을 노래한 《키니네송(頌) Poème de Quinquina》(1682)을 비롯하여 테렌티우스의 번안 《환관(宦官) L’Eunuque》(1654)과 시정사건(市井事件)에서 취재한 소극(笑劇) 《보리샤르의 익살꾼》(1659 상연?) 등 극작에도 손을 대어 《다프네》(1682) 등 오페라 대본도 썼다. 그의 대표작은 12권으로 이루어진 《우화시집 Fables》(1668∼1694)으로, 약 240편의 우화시가 엮어져 있다. 예지와 교묘한 화술로 폭력을 제압한 고대의 노예 이솝에 대한 공감과 우화의 장르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흥미에서 출발하여 이솝 ·동양 우화를 비롯한 다양한 소재를 독창적 수법으로 다루어 서정 ·풍자 ·경묘(輕妙)한 대화 ·콩트풍(風) 등 모든 패턴을 구사(驅使), 일종의 자유시형으로 노래하였다. 시구(詩句)의 거의 완벽한 음악성 및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희극을 부각시키는 절묘성 등은 후세의 모방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에게까지 친숙한 프랑스 유일의 우화작가로 알려져 있다.
2085    [고향문단소식]-화룡출신 "허씨 3형제" 유명작가로 등록되다... 댓글:  조회:4029  추천:0  2017-04-24
허씨 3형제의 남다른 문학사랑 —문학인 3형제 허충남, 허봉남, 허두남의 이야기                                                                /채선애       독일에 수많은 동화작품을 창작해서 이름을 날린 그림형제가 있다면 우리 연변에는 여러가지 쟝르의 문학작품을 무더기로 발표하고 도합 17권의 책자를 출판하여 문학인 3형제로 소문을 놓은 허충남, 허봉남, 허두남이 있다.     두만강변에서 태여나 맑은 물을 마시고 자란 이들 3형제중에서 맏이 허충남선생은 시작품을, 둘째 허봉남선생은 소설작품을, 셋째 허두남선생은 극작품을 많이 창 작하였지만 세분이 모두 아동작품창작을 더없이 사랑하는지라 얼마전에는 3형제 아동 문학작품을 함께 묶은 단행본 《자기를 잃어버린 아이》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맏형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둘째형님이 인사불성이 되여 누워계신지 여러해 되는 지금에 와서 홀로 문필활동에 종사하고있는 셋째 허두남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마당형님” 허충남     어린 시절 셋째 허두남은 맏형님이라는 발음을 잘 번지지 못해 큰형님인 허충남선생을 “마당형님”이라고 불렀다. 그 말이 “씨”가 되였는지 허충남선생은 진짜로 평생 시골을 떠나지 않고 명실공히 제집 마당을 지키는 “마당형님”이 되였다. 기실 자식이 9남매나 되는 대가정에서 제일 먼저 문학의 길에 들어선 사람도, 동생들을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 사람도 맏이인 허충남선생이였다.       1939년생인 허충남선생이 태여난 곳은 두만강변에 위치한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량영리 오리장마을, 다년간 월강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던 가정이 1946년에 강건너 중국땅으로 이민오면서 13호 동네인 화룡시 남평진 길지촌 송전동에서 살게 되였다. 목재판에서 뜨개소를 잘 다루기로 이름난 아버지는  또한 이야기를 잘해 소문을 놓았다. 아버지는 밥상에 마주앉아서도 국수오리가 질기면 “줄싸움(바줄잡아당기기)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언어가 다채롭고 형상성이 풍부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랄가 허충남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문장을 제법 잘 지었는데 초중 1학년때에는 작문 “소조학습의 저녁”을 소년아동신문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남평향이 생겨나서 어른이고 아이고 다 하여 처음 발표한 글이다.)     그후 가정생활난으로 초중를 중퇴하고 농사일에 몸을 담았지만 문학만은 버릴수 없었던 그는 열심히 독서를 하고 부지런히 습작을 하면서 차곡차곡 문학기량을 쌓았다. 20살의 애젊은 나이에 허충남은 발목뼈에 이상이 생겨 3년동안 앉음뱅이로 살았다. 현립병원에서 발목을 절단하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죽으면 죽었지  못하겠다고  한사코 자르지 않았다. 눈물겨운 그 3년동안 바깥출입을 마음대로 할수 없게 된 그는 병치료를 하는외의 시간을 몽땅 독서와 습작에 할애하였다. 이 시기에 와서 끄릴로브의 우화시에 특별한 흥취를 가지게 되면서 시인이 되기로 작심한 그는 시공부에 심혈을 쏟기 시작했고 우화시 “메돼지”를 소년아동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동불사에 있는 로중의 서의사의 처방에 따라 메밀엿을 환부에 붙이고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허충남은 부모님들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 한편 시간만 있으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시와 문학평론을 애독했던 그는 하많은 문학작품을 접촉하면서 국내외의 문학명인들을 더없이 흠모하였다. 한번은 수수깡으로 액자를 만들어 마야꼽스끼, 로신, 박지원, 엄호석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그때 집에 주숙했던 군대들이 머리를 빡빡 깎은 마야꼽스끼를 흐루쇼브인가해서 자꾸 캐물은 일이 있다.      허충남의 영향으로 두 동생인 허봉남과 허두남은 물론 남평향에는 많은 문학애호가들이 나타났다. 1975년 시를 쓰는 젊은이들이 많아지자 허충남은 당시 남평문화소 소장인 김응룡을 도와서 이런 시애호가들을 조직하여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공사의 아침》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이 책은 문화대혁명후 제일 처음으로 출간된 지방작품집이다. 책에는 허씨 3형제 외 김응룡, 최룡관, 신창수, 박상국 김영철. 최홍일(당시 남평향에 하향지식청년으로 내려갔던 지금의 연변작가협회 부주석)등 남평향의 문학애호가들의 시작품 46수가 수록되여있다.  출판사에서는 남평향의 시집원고가 올라온다니 거개 민가가 올라올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알쭌한 서정시들이여서 어지간히 놀랐다고 한다. 작품집중의 “로전사 고향에 돌아왔네”는 초중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차츰  남평은 화룡시 나아가 전반 연변의 농촌문학활동중심지로 중시를 받게 되였고 허충남은 문학스승으로 젊은이들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였다.     1976년부터 남평중학교에 들어가 조선어문교원으로 된 허충남선생은 문학리론연구와 작품창작에 정진하는 한편 후대양성에  알심을 넣어 여러명의 문학애호가들을 양성해내였는데 현재 시인으로 성공한 제자들로는 박장길과 김영건이 있다.     시인으로서의 허충남선생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조선의 조기천과 영국의 바이론이였다. 시창작에서 랑만주의풍격을 선호한 선생은  중국시인들가운데서는 두보보다 리백을 더 좋아했다.      수십년의 창작생애에서 선생은 또 리영식아동문학상을 수상한 동화집 《꺼꾸로나라려행기》를 비롯해서 많은 아동작품을 어린이들에게 선물하였다.     당년에 허충남선생의 그늘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던 두 동생을 포함해서 김응룡, 최룡관, 리태학, 김호근, 박장길, 김영건 등은 선후로 연길에 진출했지만 허충남선생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치였다. 평범한 시골백성으로 한생을 살아가는것이 소원이였던 선생은 화룡3중에서 작문교원으로 초빙할 때도, 남평중학교에서 교장직을 맡으라고 할 때도 완곡하게 사절하고 2009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갈 때까지 고스란히 “마당형님”으로 살았다.   “애서가” 허봉남     형님 허충남선생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태여났지만 어머니의 잔등에 업혀 중국땅에 들어온 허봉남은 형님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소학교 6학년때에 소년아동신문에 “눈내리는 아침”이라는 작문을 발표하였다.     당시 선생님들로부터 천재적인 문학소년이라고 긍정을 받을 정도로 글솜씨가 뛰여났던 그는 그때에 벌써 《범죄의 길》(미발표작)이라는 장편소설을 썼고 초중시절에는 동화 “다람쥐”룰 완성해서 소년아동신문에 투고하였지만 편폭이 너무 긴 관계로 채용되지 못했다.(편집부에서는 동무를 발견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작품을 참고로 두었다고 했다.)     장남인 형님이 초중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농사일을 하는판에 고중공부를 기대할수도 없게 된 허봉남은 초중졸업전야에 진학시험을 포기하고 매일 두만강가에 나가서  조선작가 리기영의 장편소설 《두만강》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복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진학시험에 참가한 그가  다른 2명 녀학생과 더불어 고중에 진학하게 될줄이야?     여느 집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기뻐날뛰겠는데 돈이 없어 뒤바라지를 해줄수 없는 허씨네 가정은 초상난 집처럼 썰렁했다. 미구에 자식의 전도를 막을수 없게 된  부모님들이 이를 악물고 둘째아들을 고중에 보내지만 구차한 살림형편때문에 공부를 계속할수 없게 된 허봉남은 몇달뒤 휴학을 결심, 1년간 농사일을 하면서 문학창작에 종사했다. 그즈음 최우등의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한 녀동생도 초중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에 몸을 담았다.     모처럼 길지촌에 내려왔던 남평향당위 제1서기  최해당동지(후에 화룡현 현장)가 이 정황을 알고 녀동생을 공급판매합작사 판매원으로 취직시켜주었다. 이렇게 허봉남은 녀동생이 출근하면서 벌어들인 로임으로 고중공부를 마칠수 있게 되였다. 고중시절 허봉남이 창작한 “상처자국”이란 단편소설은 상당한 수준이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즈음 발표된 황봉룡선생의 희곡 “상촌의 소나기”와 내용이 비슷한바람에 해빛을 보지 못하고말았다. 허봉남의 동창이고 문우였던 리태학은 지금도 그 소설에 쓰였던  “억병으로 취하여” “장잎 쩍쩍 뻗은” 등 구절을 입에 올리면서 허봉남의 높은 어휘기교에 대해 감탄을 아끼지 않고있다. 책을 눈동자처럼 아끼는 허봉남이였지만 사전을 통으로 외우려는 욕심에 하루 사전 한장씩 찢어서 외우고는 찢은 책장은 구겨서 버리군 했다. 그런데 1년 휴학으로 고중을 한해 늦게 졸업하면서 대학진학의 길이 막혀버렸다.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학생을 모집하지 않는통에 평생 대학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유감을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어쩔수없이 귀향지식청년이 된 허봉남은 농사일을 하는 여가에 문학작품을 창작하면서 농촌문화활동의 골간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한마을의 김응룡과 함께 화룡현교원강습반에 들어가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이렇게 몇년간 농사일을 하다가 중학교 조선어문교원이 된 허봉남선생은 교수임무를 착실하게 완수하는 전제에서 문필활동에 열성을 쏟았고  10년뒤에는 화룡현문련 창작실에 전근되여 김문회선생과 더불어 전직창작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그뒤 다시 연변일보사, 연변인민출판사를 전전하며 문학편집사업에 몸을 담게 된 허봉남선생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정성껏 다듬어서 신문 또는 책자에 실어주면서도 새록새록 새로운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에 극성을 부렸다. 이 시기에 와서 선생이 고중시절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사소한 이야기들이 작품의 뼈가 되고 살이 되여 선생은 현실생활을 반영하면서도 음미할 가치가 있는 소설작품을 련속 내놓을수 있게 되였다.     동생 허두남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허봉남선생은 고중에 다닐 때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을 키웠다. 하루동안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세부묘사까지 하면서 어찌나 생동하게 적었는지 소설책보다 더 재미있어서 동생인 허두남은 한시기 심심할 때면 형님의 일기장을 뒤적이는것을 소일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허두남선생은 만약  문화대혁명기간에 여러권이나 되는 일기장을 없애버리지 않았더라면 형님이 더욱 많은 작품을 발표할수 있었을거라며 아쉬운 심경을 내비치였다.     소설가 허봉남선생에게서 가장 특징적인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다. 소학교시절에는 금방 서점에 나온 조수리의 중편소설 《리가장의 변천》을 하도나 사고싶어 어머니 몰래 남비를 페품수매소에 팔아서 돈을 마련했고 고중시절에는 한사발에 3전씩 하는 국도 사먹지 않으면서 돈을 절약해서 한권에 2원도 넘는 《세계문학선집》을 사들였다는 허봉남선생이다. 아글타글 책을 모은 선생은 화룡에서 세집을 10여차씩 옮기며 힘들게 살던 나날에도 책만은 단 한권이라도 버릴세라 비닐마대에 담아 정성들여 간수했고 장서가 아무리 많아도 눈에 드는 책이 있으면 주머니사정과는 상관없이 꼭 사놓고야 시름을 놓았다.     사위가 책을 빌려달라고할때 “딸은 가져가도 되지만 책은 안된다!”고 하면서 말도 다시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책에 대해서만은 지나치게 몰인정하고 린색한 “애서가”이다. 아빠트에 들게 되자 선생은 객실 한칸 벽을 몽땅 책장으로 만들고 건축설계사가 고층건물을 설계하듯 낡은 책과 겉보기에 못한 책들은 안쪽에, 표지가 멋스러운 책과 정제본은 바깥쪽에 두겹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금고문을 잠그듯  자물쇠를 꽁꽁 잠궈놓고 동생들이 빌리러 가도 “그 책이 어디에 꽂혔는지 모르겠다”, “책장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째 도서관에 가서 빌리지 못하니?”라고 하면서 빌려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허봉남선생은 작가중에서 발자크를 가장 숭배했고 작품으로는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을 특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조선작가중에서는 리기영과 천세봉을 제일 좋아했다. 소설창작에 조예가 깊은 허봉남선생도 형님 허충남선생과 마찬가지로 아동작품창작에 취미가 있어서 중병에 걸려 인사불성이 되기전까지 성인소설을 많이 창작한외 아동장편소설 “엄마 찾는 아이” 동화집 “수림속의 생사박투”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처음으로 된 과학소설집 《까불이 모험기》 등 7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런 책들은 모두 주급이상의 상을 수여받았다.   말없는 실천가 허두남     1950년생인 허두남선생은 소학교시절부터 큰형님이 보는 《끄릴로브우화집》을 따라 읽고 형님을 본받아 우화시를 쓴답시고 머리를 쥐여짰다. 소학교 6학년때에 작문 “생일날”을 소년아동신문에 발표하면서 문학창작에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대대선전대의 공연프로를 창작할 중임을 떠메고 재담이며 촌극, 가사 등을 닥치는대로 창작하며 실천가운데서 창작기량을 닦았다.     1977년 봄에 이웃향인 용화향에 가서 대과교원으로 사업하게 된 허두남선생은 2년뒤인 1979년에 31편의 우화시로 우화시집 《개미와 코끼리》를 묶어서 연변인민출판사에 투고했다. 당시 문예편집이였던 류원무선생님과 김창욱선생님은 그 작품들을 높이 평가해주었고 김창욱선생님은 멀리 용화에까지 찾아와서 수정의견을 제기해주었다. 용화중학교 교장 조창송은 덕재를 겸비하고 흉금이 넓은 호남아였는데 이름없는 시골의 대과교원이 책을 낸다는건 대단한 일이라고 하면서 개학초 다른 교원들이 참나무버섯재배때문에 로동에 종사하는 드바쁜 와중에 집에서 작품을 수개할 특혜를 주었다. 이렇게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우화책이 없던 공백을 메꾼 허두남의 처녀작작품집은 고마운 여러 사람들의 지성어린 관심속에서 고고성을 울리였다.     1982년 가을에 허두남선생은 화룡탄광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전근해간지 1달만에 연변작가협회에서 문학반을 모집하게 되였다. 그때 30대초반의 조선족작가중에 단행본을 낸 사람은 허두남뿐이였는데 문학반의 초생을 책임진 당시 작가협회 김기형비서장은 현문련에다 허두남을 보내달라고 이름을 찍어 부탁했다. 그런데 탄광에서 내놓지 않는 바람에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탄광을 떠나 보다 많은 시간을 문학창작에 투입할수 있는 단위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던 허두남선생은 후에 당시 현당위 선전부장인  김동운동지(주인대 부주임 력임)의 도움으로 현방송국 문예편집으로 전근하게 된다.     방송문예로 전문창작의 길에 들어선 선생은 선후로 중학생신문, 연길시 창작실 등 단위로 자리를 옮기며 창작이라는 한우물만 팠다. 연길시 창작실에서 사업하면서 선생은 소품 “감주”, “로임봉투”, “아첨경기”, “남매간” 등 많은 작품을 창작해서 연길시구연단에 공급, 여러차나 주급, 성급 창작상을 수상하였다.     주위에서 발생된 진실한 이야기를 주선으로 창작한 이런 작품들은 진실성, 해학성으로 관중들을 울고웃게 만든것이 특징적이였는데 소품 “남매간”에서는 출국해서 돈을 벌고 돌아온 오빠가 자기를 보러온 녀동생을 돈꾸러온걸로 생각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과 그런 오빠를 야속해하는 녀동생의 마음을 하도 생동하게 표현하여 이름난 연출가 최인호선생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품 “로임봉투”에서는 가짜 부조명세를 봉투에다 가득 적어넣고 안해를 속이다가 발각되는 이야기를 썼는데 어찌나 현실생활을 잘 반영했던지 친구 여러 사람이나 허두남선생을 보고 “당신이 그걸 다 폭로해놔서 인젠 그 방법을 못 쓰게 됐다이.” 했단다. 가장 대표적인 소품은 그래도 감주일것이다. 돈 한푼이라도 벌겠다고 감주 팔러나온 안해한테서 감주를 홀려먹는 주정뱅이 남편의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꼽 잡고 웃게 한 뒤끝에 눈굽을 찍게 한다.     정년퇴직한후에도 여전히 창작에 정진하고있는 선생은 또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에서 조직한 공모활동에 적극 참가해서 솜씨를 자랑하고있는데 단편소설 “천렵” 가곡 “첫날색시” 재담 “로천화장실” 등  작품으로 련속 3년간 수상의 영예를 안아왔다.     두 형님들처럼 아동작품창작에서도 손을 펴고있는 허두남선생은  한국계몽문학상을 수상한 아동소설 “보배야 보배야”와 소학교 음악교과서에 수록된 가요 “꿈에 울었답니다”를 비롯해서 많은 아동문학작품을 창작하여 아동문학작가로도 뚜렷한 위치를 굳히고있다.     2009년에 큰형님 허충남선생이 하늘나라로 떠나가고 둘째형님 허봉남선생이 더는 작품을 발표할수 없게 된 오늘에 와서 혼자서 외롭게 문필활동에 종사하고있는 허두남선생은 최근에 3형제의 아동작품가운데서 제일 알쭌한 작품들을 정선한외 두 형님을 그리면서 쓴 수필 “마당형님“, “둘째형님의 책장”을 곁들여서 허씨 3형제의  아동문학작품집인 《자기를 잃어버린 아이》를 출간하였다. 선생이 계속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하면서 두 형님의 몫까지 다 하길 기대해본다.     ========================== ==========================   우화와 동시의 절묘한 “하모니” 우화동시 작가 허두남선생 2015-6-11      요즘 허두남선생의 여덟번째 우화동시집 《빵순이 다이어트》가 출판되여 화제를 모으고있다. 우화동시ㅡ문예사전을 펼쳐봐도 없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우화동시는 허두남선생이 수십년간의 창작생애에서 더듬고 연구하면서 세상에 내놓은 참신한 새 형식으로 선생은 개념을 이렇게 세워본다고 했다. “비뚠 인물의 비뚠 행동을 빌어 작고 깜찍한 도리를 귀띔해주는 유머동시…” 지금까지 근 40년 동안 오직 우화라는 한 우물만 꾸준히 파온 허두남선생은 지금까지 시로 쓴 우화집 6권과 산문으로 쓴 우화집 2권을 출판하였다. 허두남선생은 맏형님을 추모하여 쓴 수필 “마당형님”에서 이렇게 썼다. “나를 우화창작에로 이끈 사람도 맏형님이다… 소학생이였던 나는 형님이 보는 《크릴로브우화집》을 따라 읽었고 형님을 본받아 우화시를 쓰느라고 긁적거렸다. 그것이 내 우화인생에서 걸음마전의 엎치기련습이였을것이다. 그 엎치기련습이후에 첫 걸음마로, 미력의 내가 라 퐁텐과 크릴로브 같은 작가가 될 뜻을 품고 부단히 자신을 갱신하려 고행을 거듭한 수십년의 려정으로 이어졌다.” 맏형인 허충남선생의 영향으로 우화를 사랑하게 된 허두남선생은 소학교때 《위풍 없는 사자왕》이라는 제목으로 첫 우화시집을 묶었다. 책속에는 “위풍 없는 사자왕”, “남의 공을 모르는 달”과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긴 “꿀을 훔치는 곰” 등 20여편의 우화시를 수록하였다. 물론 그 우화시들은 한편도 발표되지 못한것들이였다. 1979년 우화시집 《개미와 코끼리》를 출판해서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내놓은 여러권의 저작에 수록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우화시를 개혁하려고 얼마나 모대겼는지 한눈에 알린다. 한 제재로 여러편의 우화시를 쓴것도 볼수 있는데 비록 하나의 제재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초기에 허두남선생은 조선 우화시의 영향을 받아 동화시처럼 과정을 전개시켰는데 후에 과정전개를 생략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 수십년의 끈질긴 노력끝에 마침내 동요동시의 형태로 고정시켰는데 이번에 출판된 《빵순이 다이어트》가 그 결과물이다. “살구나무가지끝에서/ 바람이 앵앵 울고있어요/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못된 장난 재미 삼던 개구쟁이 바람/ 빨래줄에 걸린 옷 팽개치고/ 장독뚜껑 허공중에 날려버리더니/ 나무가지 부러뜨리려 심술 부리다가/ 가지끝에 옷자락 걸렸나봐요/ 도와줘요/ 도와줘요/ 애처롭게 구원 청하는데/ 아무도 내다보지 않네요/ 저러다 옷자락이 찢어지면 어쩐담?/ 아이참, 그러게 / 고약한 미운짓 일삼지 말게지.” —우화동시 “바람” 얼핏 봐도 한편의 훌륭한 동시이다. 내용으로 보면 또한 교훈과 풍자를 두루 갖춘 완벽한 우화라고 할수도 있다. 이 시는 잘 짜인 동시에 “남잡이 제잡이”라는 철리와 나쁜 일을 일삼는자는 도와주는이가 없다는 인생교훈을 담고있다. 허두남선생은 크릴로브의 우화시와 조선의 우화시들을 배우면서 우화시를 창작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완성해놓은 우화동시는 크릴로브동화시와도 조선의 우화시와도 다르다. 허두남선생의 우화동시는 다음과 같은 특점을 갖고있다. 성인을 상대로 쓴 끄릴로브우화시와 달리 어린이를 상대하였으며 이야기과정을 전개하는 조선의 이야기시와 달리 완전히 동요동시로 개변했다. 그리고 동식물을 주로 쓰던 재래우화시의 전통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랑만주의 우화시”로부터 “사실주의 우화시”로 개조하였으며 일일이 다 말하지 않는 수법을 많이 썼다. 우화동시를 쓰자면 서사적인 내용에 운률을 갖춰야 하기에 일반적인 서사문이나 동시보다 구상도 집필도 더 어려운바 서사문과 운문 두가지를 다 다룰줄 알아야 우화동시를 창작할수 있다는것이 허두남선생의 일가견이다. 허두남선생은 자신의 우화동시에 아직도 보완해야 할 점들이 적지 않는바 시의 편폭이 긴것과 여전히 이야기전달식으로 기술하는것 등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선생은 우화동시는 정감을 쓰는 일반 동시보다 달리 이야기를 담는 시이기에 자칫 무미건조해질수 있다면서 앞으로 우화동시 창작에서 재치, 유모어, 생활적인 세부 등 세가지에 모를 박으련다고 창작타산을 피력한다. 우리 조선족문단에 한떨기 이색적인 꽃을 피운 우화작가 허두남선생이 앞으로도 갱신이란 두 글자를 등대로 걸어놓고 더욱 완전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스찔을 갖춘 우화작가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글·사진 김인덕 기자    
2084    중국 북송 시인 - 황정견 댓글:  조회:4311  추천:0  2017-04-21
황정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황정견 황정견(黃庭堅, 1045년~1105년) 중국 북송의 시인.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 또는 부옹이며 소식 문하인의 제1인자이다. 23세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국사원(國史院)의 편수관이 된 이외 관리생활은 불우했다. 소식의 시학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시는 소식의 작품보다 더욱 내향적이었다. 또한 왕안석, 소식보다 더욱 두보를 존경했다. 소식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칭해져서 북송 시인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2세기 전반은 황정견 일파의 시풍이 세상을 풍미하였는데, 황정견이 강서(江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강서파’라 칭해졌다.   황정견의 글씨       북송 4대 명필 황정견 서예작품     한화 770억원에 거래된 북송시대 명필 황정견의 서예작품 ‘지주명’. 역대 중국 미술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 총 길이가 14.45m에 이르는 대작. 급성장하는 중국미술시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폴리옥션 제공] 4억3680만 위안(약 770억원)-.   중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가 경신됐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폴리(保利) 옥션 5주년 기념경매에서 북송(北宋)대의 시인 겸 서예가인 황정견(黃庭堅·1045~1105)이 쓴 서예작품 ‘지주명(砥柱銘)’이 3억9000만 위안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12%의 수수료가 붙어 총 4억3680만 위안에 거래됐다. 이는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거래된 중국 미술품 경매가 중 가장 높은 가격이다. 2005년 런던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원나라 시대의 청화자기가 기록했던 2억3000만 위안을 두 배 가까이 뛰어넘는 것이라고 북경청년보(北京靑年報)가 보도했다. 이에 앞서 베이징에서 열린 자더(嘉德) 춘계 미술품 경매에서는 장다쳰(張大千·1899∼1983)의 유작이 1억80만 위안(약 175억원)에 판매되면서 중국 그림 경매 사상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전 기록은 2007년 11월 자더 추계 경매에서 구영(仇英·1498∼1552)의 ‘적벽도’가 세운 7952만 위안이었다. 황정견은 스승인 소동파(蘇東坡)와 함께 송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글씨도 행초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북송 4대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폭이 37㎝, 소유자가 느낌을 적는 제발(題跋)까지 포함해 총 길이가 14.45m에 이른다. 글씨는 8.24m에 82행 407자가 쓰여 있다. 황정견이 1095년께 쓴 이 작품은 중국 민간에서 보관돼 오다 20세기 초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 민간 박물관이 소장해 왔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대만 수집가 손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번에 처음으로 경매시장에 나왔다. 이 작품은 프리뷰 기간 중 이미 “박물관급 작품이 나왔다”는 소문과 함께 경매가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를 모아왔다. 현재 세계 미술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크리스티 뉴욕 경매장에서 팔린 파블로 피카소 작품의 1932년작 ‘누드, 녹색잎과 흉상’(1억640만 달러, 약 1180억원)이다.             戱和答禽語 (희화답금어: 장난삼아 새소리에 화답함)                                      - 황정견(黃庭堅 1045~1105) 字는 노직(魯直), 號는 산곡山谷道人. 涪翁이라 하였고, 北宋 分寧 사람.                                        治平 4년에 進士가 된뒤 校書郞, 神宗實錄檢討官, 著作郞 등을 지냈다. 그의 詩는 형식상 두보를                                        배우면서도 ‘無一字無來處’ ‘點鐵成金’ 등을 내세우며 독특하고 딱딱한 풍격을 추구하였다.                                        [黃豫章集] 30권과 [別集]14권이 있다. 書法에도 뛰어나 많은 碑刻과 墨跡도 남기고 있다.       南村北村雨一犁(남촌북촌우일려)하니,    남촌이고 북촌이고 비 오자 다 같이 밭을 가는데,            一犁: 다 같이 쟁기로 논밭을 가는 것, 犁: 쟁기 려, 얼룩소 리, 떨 류 新婦餉姑翁哺兒(신부향고옹포아)라.     신부는 시어머니께 밥을 권하고 시조부는 아이에게 밥을 먹인다.            餉姑: 시어머니에게 밥을 갖다가 먹게 하는 것,            餉:건량(乾糧: 도시락). 세금. 음식이나 물건을 보냄.            哺兒: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 田中啼鳥自四時(전중제조자사시)하니,     밭 가운데서 우는 새는 사철 따라 다른데,            自四時: 스스로 사계절을 안다. 사계절을 따라 다르다. 催人脫袴著新衣(최인탈고착신의)라.     지금은 뻐꾹새가 바지 벗고 새 옷 입으라 재촉한다.            催人脫袴著新衣: 중국에선 옛날에 뻐꾹새가 탈각포고(脫却布袴), 곧 천으로 만든 바지를 벗어버려라‘하고 운다고 하였다.            袴: 바지 고, 샅 고. 著新替舊亦不惡(착신체구역불악)이나,     새것 입고 낡은 것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去年租重無袴著(거년조중무고착)이라.     지난해 세금이 많아 입을 바지가 없단다.       解說:    題名에선 ‘장난’이라 하였지만 시는 장난이 아니다. 평화로운 농촌에서 뻐꾹새는 제철을 잊지 않고 찾아와 새 옷을 갈아입으란 듯한 소리로 울고 있다. 새옷이 헌옷보다 좋은 줄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농민들은 1년 내내 피담흘려 농사를 지어도 가을이면 위정자들이 세금으로 다 빼앗아 가기 때문에 갈아입을 옷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위정자들은 새만도 못한가고 힐난하는 소리가 밑바닥에서 들리는 듯하다.           清明(청명) 黃庭堅(황정견)     佳節清明桃李笑(가절청명도리소), 野田荒隴紙生愁(야전황총지생수). 雷驚天地龍蛇蟄(뇌경천지룡사칩), 雨足郊原草木柔(우족교원초목유). 人乞祭餘驕妾婦(인걸제여교첩부), 士甘焚死不公侯(사감분사불공후). 賢愚千載知誰是(현우천재지수시), 滿眼蓬蒿共一坵(만안봉호공일구).     清明/ 作者:黃庭堅   ------------------------------------------------------   청명 좋은 계절에 복사꽃 자두꽃 활짝 피었는데 들판의 황량한 무덤은 시름만 묻어나네   천둥 소리에 놀란 뱀은 땅으로 숨고 봄비를 촉촉히 맞은 풀과 나무는 부드럽네.   제사음식을 구걸해서 먹고 처와 첩에게 자랑하던 사람과 벼슬이 싫다 하여 불에 타 죽은 선비도 있었지만   현명한지 어리석은지 천년이 흘러 누가 알겠는가 눈에 잡초 가득차서 같이 묻혀 있을 테니.   -------------------------------------------------    ○ 천가시(千家詩) : 의 원제목은 으로 송(宋)대 유극장(劉克藏)이 편집한 아동 계몽서이다. 세상에 많이 알려지고 쉬운 내용의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아동들이 암송하기에 적절했다. 현재 통용되는 는 사방득의 과 왕상의 를 합본한 것으로 모두 22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명칭은 비록 천가시이지만 실제로는 122명 시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 清明(청명) ; 24절기 중의 하나로 춘분과 곡우 사이이다. 24절기는 양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4월5일 또는 6일이다. 중국 한족전통의 청명절의 역사는 대략 주나라 때부터로, 지금부터 약 2천5백여년 전의 역사를 가졌다. 에 "춘분후 15일을 청명이라 하니, 이 시기 만물이 맑고 청명해진다." 하여 청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 人乞祭餘驕妾婦(인걸제여교첩부) : 맹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처첩을 거느린 제나라 사람이 제사 음식을 구걸하여 먹고 처첩에게 자랑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하였다.   ○ 士甘焚死不公侯(사감분사불공후) : 춘추시대 진나라의 개차주 고사를 인용하였다.   ○ 蓬蒿(봉호) : 쑥   ---------------------------------- [출처] [천가시(千家詩)] 清明(청명) - 黃庭堅(황정견)|작성자 swings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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