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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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출생
1898년 2월 10일
독일 아우쿠스부르크
사망
1956년 8월 14일
동독 동베를린
사인
심장병
거주지
독일, 동독, 미국
국적
독일
직업
극작가, 시인, 무대 감독
자녀
한나 히옵, 슈테판 브레히트, 바바라 브레히트
서명
베르톨트 브레히트(독일어: Bertolt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20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시인, 극작가,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연극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현주의를 거친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 스타일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풍자를 극화한 니힐리스트.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주요작품
2.1시
2.2희곡
생애[편집]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처녀작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는데, 《서푼짜리 오페라》는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불어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주요작품[편집]
시[편집]
브레히트의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례로 시 〈1492년〉은 이민을 심사하는 판사가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내서,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희곡[편집]
브레히트는 처음엔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처녀작인 ,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1928)와 (1930)을 낳았다. 와 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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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불리한 시대
브레히트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선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서정적, 독백적, 저항적
율격 : 내재율
어조 : 저항을 노래하는 남자의 의지적, 독백적 어조
심상 : 서술적, 상징적 심상
제재 : 나의 시 정신
주제 : 어두운 현실의 극복 소망
시구 연구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 토양이 좋지 않은 마당에서 자라난 나무가 뒤틀린 모양을 하는 것처럼 왜곡된 사회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그 시대에 자신의 시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느끼고 있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노래하면서 현실의 상처를 망각하기보다는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을 노래하면서 이들의 행복을 주장하고 찾아 내겠다는 것이다.
준트 해협의 -- 찢어진 그물뿐이다 : 바닷가의 낭만적이고 즐거운 풍경을 노래하면서 현실을 망각하기보다는 현실의 소외도고 억압받는 삶의 모습을 직시하겠다는 뜻으로 '즐거운 요트'와 '찢어진 그물'이라는 대립된 시어로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내 시에 각운을 -- 보일 것이다 : '운(韻)'은 서로 무관한 단어들의 화음을 통해 시 전체에 조화와 완결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작자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이므로 조화와 행복을 노래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선 --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 각운 등을 사용해 시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가슴 한 구석에서 숨쉬고 있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을 노래하기 보다는, 히틀러의 연설 내용이 지닌 여러 가지 비인간적 독소를 세계 만방에 드러내어 이를 차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의 2·3·5연은, 요트/어부들의 찢어진 그물, 마흔 살에 벌써 허리가 굽은 소작인의 여자/가슴이 뜨거운 소녀,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칠장이(히틀러)의 연설에 대한 경악(驚愕) 등과 같은 대립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대립적 문맥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적 불평과 억압을 함축한다. 첫 연에서 시적 화자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좋은 점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억압하는 사회적 어둠 속에서 화자는, 인간의 근원적 마음인 아름다움과 행복에의 추구에 대한 노래보다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시를 쓰고자 한다. 독일시에서의 운(韻)은 서로 무관한 단어들의 화음을 통해 시 전체에 조화와 완결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라는 시적 화자의 진술은,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조화와 행복의 세계를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시에 불리한 시대'라는 시의 제목은, 바로 운(韻)이 있는 조화와 행복한 세계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시대적 어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레히트의 시와 희곡의 특성
베르톨드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 1965)는 독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서사극 이론과 탁월한 희곡들을 통하여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그는 폭넓은 창작활동의 소산으로 상당히 많은 분량의 시도 남겼다.
브레히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문학에 대한 취미와 재능이 뚜렷하여 프랑소와 비용, 게오르크 뮈히너, 아르튀르 랭보, 프랑크 베데킨트 등의 작품을 탐독하고 학교에서 발간되는 교지 및 아우구스부르크 신문에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연대순으로 편집된 그의 시 전집을 보면 1913년 교지에 발표된 시가 그의첫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브레히트는 15세 때부터 공식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셈이다. 그후 평생에 걸쳐 40여년간 집필, 발표된 여러형태의 시는 1,2000여편에 이른다.
브레히트가 시를 쓰기 시작한 1910년대는 문예사조로 보아 표현주의 운동이 대두된 때였다. 그러나 당시의 독일 시단에서 실제로 널리 읽히는 신인들은 슈테판 게오르게, 후고 폰 호프만스탈, 라이너 마리아 림케 등 고답적인 신고전주의, 신낭만주의, 상징주의 유파의 대가들이었다. 전통적 시문학이 위세를 떨치던 이 무렵에 시대조류에 저항하는 방향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으로 우리는 고트프리트 벤과 베르톨드 브레히트를 꼽을 수 있다. 전자는 비의적 순수문학의 정점에 올랐고, 후자는 현실적 참여문학의 효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벤과 브레히트는 둘 다 의학도 출신으로 똑같이 1956년에 사망하였으며 특히 1950년대와 60년대의 독일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감정의 미학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언어를 시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된 출발을 했으나, 벤은 문학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형식을 중시하는 예술지상주의자가 되었고, 브레히트는 문학의 내용과 효용성을 강조한 리얼리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시인이라는 공통점을 빼놓으면 벤은 의사였고, 브레히트는 극작가였다. 체제순응적이던 벤과는 달리 브레히트는 일찍부터 반체제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브레히트 연극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 목적이 극예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있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H. Jendreiek는 이런 의미에서 말한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계급투쟁적인 막스주의를 극적으로 이행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물론 이런 의도를 지닌 연극이 브레히트 외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 피스카토르 E. Piscator의 『정치극』, 1960년대의 R.Hochhuth, P.Weiss, H.Kipphardt 등이 대표하는 소위 『기록극』도 사회개혁의 의도를 지향한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경우는 이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갖는다. 그의 극이 갖는 정치적 의도는 완전히 극예술의 형식으로 용해되여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은 극예술을 즐기면서 정치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브레히트의 말을 빌면 연극이 그의 서사극이다. 브레히트의 극에서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내용의 극예술적 형식은 양분될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억척어멈과 그녀의 자식들』, 『사천의 선인』, 『갈릴에이의 생애』, 『코카시아의 백묵원』 등과 같은 브레히트의 대표적 연극은 그 좋은 예이다.
브레히트 시의 이해/박찬일
1. 사용가치의 시
브레히트는 예술의 사용 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독일시단에서 쌍벽을 이룬 고트프리 벤과 대조를 이룬다. 벤은 문학을 통한 현실 참여에 반대했다. “가난한 자들은 올라가려고 하고 부자들은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다. 끔찍한 세계, 그러나 3천년이 경과한 후에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다만 현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벤은 문학적 형식만이 세상을 혼돈에서, 무의미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형식만이 신앙이고 행위이다./손에 의해 어루만져졌으나,/그 후 손을 떠난 조각품은/씨앗을 품고 있는 조각품이다”, “삶은 망상”이라는 것. 삶에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형식만 남는다는 것이다. 형식이 “씨앗”이라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는 상황을 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상황은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를 알아내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변화의 주체는 다수의 민중이고 변화의 객체는 소수의 지배계급이었다.
브레히트의 사용가치의 예술관은 계몽주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계몽주의 작가들은 문학의 과제는 ‘유익함과 즐거움’이라는 호라티우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레싱은 특히 문학의 유익함과 교술적 의미를 강조하여 무대를 “도덕 세계의 학교”라고 하였다. 브레히트의 예술관은 칸트 이래의 ‘예술의 자율성’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것이 “미적 취미”, 혹은 “아름다움”이었다. 예술은 사회적 이해관계,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뷔르거는 칸트가 예술을 최대 이윤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고 한 것으로 풀이했다.
2. 논리의 시
브레히트는 이성을 중시했다. 이때 이성은 시인의 이성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이성이기도 하다. 브레히트는 독자에게 이성을 요구했다. 장미는 시 한편이며, 독자는 꽃잎 떼어내듯 시행 하나하나(혹은 단어 하나하나)를 냉정한 논리로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훌륭한 시행과 잘못된 시행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능력 없이는 진정으로 시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능력은 논리적 능력이며, 진정으로 향유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즐긴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창작미학상의 목표는 논리적으로 즐기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낯설게 하기 효과”(소외효과)이다. 낯설게 하기 효과는 시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인식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소외시킨다는 것, 즉 낯설게 한다는 점에서 시학적 개념이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개념이다. 낯설게 만드는 과정이 논리적이다. 독자는 이 낯설게 만드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의 논리를 통과하면서 하나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는 시가 원래 “비사교적 요소들”이기 때문에 “주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주석이 시와 청자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청자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외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는 벤야민에 의하면 감정이입 대신에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또한 벤야민에 의하면 “중단”과 관계 있다. 시에서 의 예를 보자.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갑자기 짙은 빨강의 장미, 신선한 장미가 보이지 않는가?
아,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장미가 거기 있었네.
장미가 거기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장미가 거기 있었을 때 누구나 놀랐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이 시에는 시를 중단시키는 자아가 있다. 시를 중단시키는 자아는 ‘낯설게 하기 효과’를 노리는 자아이다. 중단은 낯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중단시키는 자아의 말이다. 특히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그렇다. 중단시키는 자아는 서사적 자아이다. 끼어드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서사적 자아는 첫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출발하지도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 둘째,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고 한 것이 그것.
독자에게 시를 논리적으로 즐기라고 하고 시인에게는 낯설게 하기라는 논리적 형식을 요구하는 것은 헤겔로 연원하는 서정시 개념에 반대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정시는 논리의 서정시가 아닌 ‘주관성’의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서사시는 “외적 실재의 형식”으로서 “사건 속에서 사실은 자유롭고 자립적으로 진행되며 서사적 자아는 뒤로 후퇴한다.” “객관적인 것”(내용)을 ‘주관성(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내면적 세계이며 “주관성”은 “직관, 느낌” 등이다.
3. 醜의 시
브레히트에게 보들레르의 쇼크는 부도덕적 쇼크로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도시의 정경, 대도시의 삶에 대한 기술은 부도덕적 쇼크의 판매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죽음, 주검, 파멸, 도박, 싸움, 신성모독 등에 대한 기술들이다. 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여 도덕적 단죄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쇼크에 관해서라면 브레히트도 보들레르 못지않다. 브레히트도 부도덕적 쇼크를 불러 일으켰으니 첫 시집 의 많은 시편들이 ‘부도덕’의 기록, 혹은 신성모독의 기록이었다.
악의 서술은 악(자본주의의 악)의 내용에 대해 ‘선의 방식’으로서의 대응이 아니라, 악의 내용에 대한 ‘악의 방식’으로서의 대응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서술은 악의 내용에 대한 선의 방식으로서의 서술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진선미의 법칙, 즉 진리의 법칙, 도덕의 법칙, 아름다움의 법칙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브레히트가 보들레르의 시편들을 부도덕적 쇼크라고 한 것은 그의 도덕적 엄숙주의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도덕적 엄숙주의자였다. 브레히트는 의 시편을 쓸 때는 도덕적 엄숙주의자가 아니었다. 보들레르의 시편들을 비판할 때 도덕적 엄숙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추의 미학은 ‘몰락’과 ‘폐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이다. 그의 초기 시집인 의 시편들은 19세기 말의 자연주의를 넘어 19세기 중반의 보들레르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자연주의에 와서 추의 미학이 보편적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는 산업화 시대의 문학이었다. 노동자, 빈민, 창녀, 알코올 중독자, 정신병자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문학이었다. 가난, 고통, 질병, 매춘, 살인이 미학으로서 자리 잡았다. 추의 미학이 자리 잡았다. 근대문학은 자연주의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추하기 때문에 문학에도 추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추의 미학’은 리얼리즘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 전통적인 진선미의 코드는 쉴레겔에 와서 완전히 그 위력을 상실한다. 문학예술은 진선미에서 완전히 독립한다. 진리 법칙, 도덕 법칙, 아름다움의 법칙에서 독립한다. 악과 추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문학적 형상화는 심미적인 것으로 정당화된다. ‘흥미로움/지루함’이었다. ‘흥미로움/지루함’의 코드가 이후의 문학의 잣대였다. 악과 추는 흥미로운 악과 추일 수 있고 지루한 악과 추일 수 있다. 지루한 문학보다 흥미로운 문학이 의미 있다면 의미 있는 악과 추일 수 있고 의미 없는 악과 추일 수 있다. 보들레르와 자연주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악과 추가 의미 있는 악과 추라면 ‘산업화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 김수용 외, 악의 문학적 형상화 연구,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19호, 2002
마지막으로 브레히트의 시 두 편을 감상해보자.
마리에 대한 추억
1
푸르른 9월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나는 그녀를, 그 고요하고 창백한 사랑을
조용히 품에 안았네. 마치 부드러운 꿈인 듯 했네.
우리 머리 위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떠있었네. 그 구름을 나는 오래 쳐다보았네.
아주 하얗고 엄청 높은 곳에 있던 구름.
내가 다시 올려 보았을 땐 사라지고 없었네.
2
그날 이후 수많은 달, 수많은 세월이
조용히 흘러 흘러 사라져갔네.
자두나무들은 아마 베어졌을 것.
사랑이 어떻게 됐느냐고 그대가 물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리.
그대가 말한 뜻을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정말이네, 그녀 얼굴이 생각나지 않네.
다만 그녀 얼굴에 언젠가 키스를 했다는 사실뿐.
3
그 키스도 구름이 여기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오래 전에 잊었을 것이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구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구름은
아주 희었네. 위에서부터 온 것이라네.
자두나무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을지.
그녀는 일곱 번째 아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그러나 구름은 몇 분 동안만 피어올랐고
내가 올려다보았을 대 벌써 바람에 사라지고 없었네.
악한 자의 가면
내 방 한쪽 벽면에 일본 목각 작품 한 개가 걸려 있다.
금색 칠을 한 악마 형상의 가면이다.
이마에 툭 불거진 힘줄을
감전된 듯 나는 본다. 그것은
악한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
죽은 병사의 전설 (1918) / 베르톨드 브레히트
1
전쟁이 일어난 지 네 번째 봄에 접어들어서도
평화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자
병사는 결단을 내리고
영웅적으로 전사했네.
2
전쟁은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자기의 병사가 죽어버린 것이
아무래도 너무 때 이르게 생각되어
황제에게는 유감이었네
3
무덤들 위로 여름이 오고
병사는 이미 잠들었는데
어느날 밤 의무부대가
이곳에 나타났네
4
의무부대 군인들은
묘지로 나가
신성한 군용삽으로
전사한 병사를 파내었네.
5
군의관은 그 병사를, 아니
그 병사의 아직 남아 있는 시체를 자세히 보고
그가 갑종합격자임을 알아내었네.
그리고 슬그머니 위험을 피해 도망쳤네.
6
그들은 곧장 그 병사를 데리고 갔네.
밤은 푸르고 아름다웠네.
철모를 쓰지 않았더라면
고향의 별들이 보였을 것이네.
7
그들은 병사의 썩은 몸뚱이에
독한 화주를 뿌렸네.
병사의 팔에는 두 사람의 수녀와
반쯤 벌거벗은 계집을 매달아 주었네
8
병사한테서 지독하게 썩은 냄새가 풍겨 나오므로
목사 한 사람이 앞장서 절뚝거리며
병사한테서 냄새가 풍기지 않도록
그의 몸 위로 향로를 흔들어대네.
9
앞에서는 악대가 쿵작작
신나는 행진곡을 연주하네.
병사는 그가 배운대로
엉덩이 높이까지 다리를 곧게 올려 내딛었네.
10
형제처럼 병사를 팔로 감싸고
두 사람의 위생병이 함께 걷고 있네.
그렇지 않으면 병사는 아마 진창속으로 쓰러져 버릴 터이니
그랬다가는 큰일이네.
11
그들은 병사의 수의에다
흑, 백, 홍색을 칠하여
그것을 병사의 앞에 쳐들었네.
색깔 때문에 온갖 더러운 것이 보이지 않았네.
12
가슴이 떡 벌어진 신사 한 사람이
연미복을 입고 앞장서 걸었네.
독일의 사나이로서 이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똑똑히 알고 있었네.
13
쿵작작거리며
어두운 가로를 따라 행진했네.
폭풍 속의 눈송이처럼
병사도 비틀거리며 함께 행진했네.
14
고양이와 개들이 울고 짖고
들판의 쥐들도 사납게 찍찍거리네.
그것들도 프랑스편이 되고 싶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것은 치욕이므로.
15
그들이 마을을 지나갈 때면
그곳의 여자들이 모두 나왔네.
나무들이 허리를 굽히고, 만월이 비치고
모두가 만세를 외쳤네
16
쿵작거리는 소리와 환송의 외침!
여자와 개와 목사!
그리고 그 한가운데 죽은 병사가
취한 원숭이 처럼 끼여 있네.
17
그들이 마을을 지나갈 때면
아무도 이 병사를 볼 수 없었네.
쿵작작거리고 만세를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네.
18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로싸고 춤추며 소리쳤으므로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네.
오로지 하늘에서만 그를 내려다 볼 수 있었으나
하늘에는 별들만이 반짝이고 있었네.
19
별들이 언제나 떠 있는 것이 아니네.
이제 아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오네.
그러나 병사는 그가 배운 대로
영웅적인 죽음을 행하여 행진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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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갑자기 짙은 빨강의 장미, 신선한 장미가 보이지 않는가?
아,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장미가 거기 있었네.
장미가 거기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장미가 거기 있었을 때 누구나 놀랐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브레히트 시 몇편 더...
우정에 대하여 /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無宿者)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브레히트,「임시 야간 숙소」(1931) 전문
"이 시의 핵심은 2연과 3연에 등장하는 두 번의 ‘그러나’이다. 그리고 두 번째 ‘그러나’ 이하의 행들을 이 시의 주제로 간주하고 첫 번째 ‘그러나’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면 시를 절반밖에 읽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주려는 노력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방법으로 이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몇 명의 사람들이 하룻밤 동안 바람과 눈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로 임시 야간 숙소를 비웃는 좌파는 얼치기이다."
그리고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보다 12년이 지난 후 브레히트는 「민주적인 판사」라는 시를 쓴다.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 앤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의 식당 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보칙(補則)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 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각하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왔으나
물론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는냐는
세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판사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 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본 결과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 브레히트, 「민주적인 판사」(1943) 전문
"'민주'라는 단어에서 합리적 의사결정, 절차, 다수결 등만을 떠올리는 사람은 이 시의 제목과 내용이 도대체 무슨 관련을 갖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합리적 의사결정, 절차, 다수결이 아니라면 어떤 '민주'일까? 우정, 우정어린 이해. 판사가 보여주고 있는 위대한 우정을 빼고 어떻게 우리가 '나'나 '너'가 아닌 '우리'로서 우리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임시 야간 숙소」에서 '임시야간숙소'와 '책' 사이에서 갈등하던 브레히트는 「민주적인 판사」에 와서 한층 더 담백하고 따뜻하게 '우정'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임시 야간 숙소」와 「민주적인 판사」 사이에 「후손들에게」가 있다.
Ⅰ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직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나의 행운이다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시라고.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쓰여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 들지 말고 짧은 한평생
두려움 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약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II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반란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누워 잠을 자고
되는대로 사랑에 빠지고
참을성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향해 나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도살자들에게 나를 드러내게 하였다.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안하게 살았고, 그러기를 나도 바랬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너무 약했다. 목표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비록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였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III
우리가 잠겨 버린 밀물로부터
떠올라 오게 될 너희들.
부탁컨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생각해 다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 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 다오.
- 「후손들에게」(1934/1938) 전문
이 시를 '암울한 시대'를 핑계를 삼은 변명으로 읽는 것은 잔인하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 느껴야만 하는 것은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와 그러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던 자신과 자신의 동시대인들에 대한 절절한 진심이다.
항상 똑같은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우애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우정 역시 역사적인 것으로 고찰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말처럼 '암울한 시대'로 인해 인간이 인간에게 친절할 수 있는 능력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허약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 못할 때, 우리도 브레히트처럼 '암울한 시대'를 이야기할 것인가? 우리가 네트워크, 정동, 사랑을 이 시대의 혁명과 무엇보다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우정과 친절함이 강력한 싸움의 무기, 아니 싸움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인가?
조직, 실천, 운동과 같은 말들보다는 우정이 더욱 근본적이다. 어떠한 냉철함도 따뜻함의 계기로 배치될 때에만 사람을 살리는 일, 즉 혁명에 함께 할 수 있다. 증오와 분노 이후에 친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기 때문에 증오하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들의 순서가 역전될 때,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들 스스로를 숨막히고 답답하게 할 때 우리는 다름아닌 우리의 발밑에 브레히트의 '암울한 시대'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쓰게 될 「후손들에게」는 브레히트의 그것과는 달리 구차한 변명 이상이 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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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마지막 구원자///
독재자 히틀러의 폭압과
그에 대한 광신도들로 넘쳐나던 광란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동원하여 항거 하였으며
죽음의 직전에서 망명하였다
망명한 러시아와 중국에서 그는 이미 독재로 변질된 공산주의에 맞써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펜 한자루로 그가 할수 있는 유일한 저항을 하다 추방 되어진다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물질 자본주의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그를 이데올로기 우월의 증거로 삼으려는 미국에게 저항하며
자본의 계급화 인간성 말살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지척 거리에 고향을 두고 자신의 입국을 불허하는 당시 동독 정부에 의하여
고향을 그리워 하며
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오로지 사랑과 행동 만이 인류를 구원할수 있다" 는 메시지를 남기며
마지막 유언에서
"나의 비문에 오직 후세 사람들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써주길 바란다" 고 하였다
그의 시들을 흘려보지 말라
각자의 입장에서 듣기 좋은 시들로 추려진 이데올로기적 시선의 각색에 왜곡 당하지 말라
그를 단순히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소유자 라고 평한다면
그건 브레히트를 욕되게 하는것이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그토록 단순하고 편리하게 이름 붙여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를 단순히 민주주의 성향의 반 나치즘 반 공산주의자라고 단언하지 말라
그것은 그를 이용하여 상대를 공격하고 자화자찬하는 수단일뿐이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아래로부터 평등하고 모두의 지성으로 평화로우며
나누는 세상이다 추악한 고리대금 업자들과 그에 기생하는 정치꾼들의 권익이 아니다
그는
권력 투쟁으로 힘을 쟁취하려는 독재자들이
변질시키거나 왜곡시켜 놓은 이데올로기에 맞써
유일하게 인간의 지성으로 무지와 폭력의 시대와 맞써 싸운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한 전사였다
숨결에 관하여///
1
언젠가 이곳에 늙은 여자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2
그 여자는 먹을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3
빵은 군인들이 다 처먹어 버렸던 것입니다.
4
그때 그녀는 차가운 하수도에 빠졌습니다
5
그러자 그녀는 더이상 배가 고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6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7.
언젠가 이곳에 사망진단 의사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8
이 늙은 여자는 사망진단서를 떼어달라는군,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9
그러자 사람들은 이 배고픈 여자를 파묻어 버렸습니다
10
그리하여 이 늙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1
그 의사만 혼자서 이 늙은 여자를 비웃었습니다.
12
작은 새들도 숲숙에서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13
언젠가 이곳에 이상한 남자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14
이 남자는 질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15
그는 이 일에 수상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6
그는 그 늙은 여자에게 일종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17
인간은 무엇인가 먹을 수 있어야 해. 자 --- .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18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19
그때 갑자기 이곳에 경찰관이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20
이 사람은 고무로 만든 곤봉을 휴대하고 와서
21
그 남자의 뒤통수를 갈겨 묵사발을 만들었습니다.
22
그리하여 이 남자도 아무 말 못하게 되었습니다.
23
그래도 경찰관은 무슨 소리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24
지금도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한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25
언젠가 이곳에 수염을 기른 남자 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26
그들은 이 일이 오직 그 이상한 남자와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27
그들은 총소리가 울릴 때까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28
그러나 그 다음에는 구더기가 그들의 살을 뚫고 뼈 속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29
그러자 그 수염을 기른 남자들도 아무 말 못하게 되었습니다.
30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31
그때 갑자기 이곳에 네 사람의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32
그들은 군인들과 한번 담판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33
그러나 군인들은 기관총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34
그러자 모든 사나이들은 아무 말 못하게 되었습니다.
35
그래도 그들은 이마의 주름살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36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37
언젠가 이곳에 커다란 붉은 곰이 한 마리 나타났습니다.
38
이 곰은 이곳의 관습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고, 곰으로서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39
그 곰은 지난 날과는 달리 모든 암흑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40
그리고 그 곰은 숲속의 작은 새들을 잡아 먹었습니다.
41
그러자 작은 새들은 이제 침묵하지 않았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불안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이제 숨결을 느낀다.
(1924년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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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1898-1956)
언젠가 브레히트는 그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 사람의 초상을 하나 만들어 그가 그것에 비슷해지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놀란 사람들이 물었다. "누가요? 그 초상이 그 사람에 비슷해진다고요?" 브레히트는 차분하게 "아니오, 그 사람이 초상에 비슷해지도록 말이오"라고 말했다. 이 뜻밖의 답변은 사람은 모름지기 마지막 순간에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브레히트의 신념을 반영해 주고, 또한 "내 자신 속에는 한 사람이 들어 있는데, 너희는 그 위에 (그것을 토대로 삼아 - 역주) 어떤 것도 지을 수 없을 것이다"는 그의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신뢰할 수 없음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변화를 옹호하는 말이다. 사랑이란 어떤 완성된 사람, 즉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가 (흔히 시민사회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듯이) 그 사람이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자 이내 실망해 버리는 어떤 "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고, 그 사람 이상의 것, 그 사람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태도이다. (...)
브레히트는 아욱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우선 부친이 아직 회사원이었을 때 소시민적 환경에서 살았다. 부친이 하인들 Haindl의 제지공장의 지배인으로 진급하고 나중에 공장장으로 까지 진급하자 그의 가족은 재단소유의 거주단지로 이사하였다. 주변은 프로레타리아적 환경 이었지만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의 크기나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은 그러한 주변환경과 대조를 이루었다. 젊은 브레히트는 이러한 삶의 장점들을 향유하였다.
그는 평범한 부르주아적 청소년기를 보냈고 최초로 습작도 시도했다. "조국의 출범 vaterländischer Aufbruch" (1914)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한 그는 (물론 위탁을 받아서이기는 했지만) 황제와 전쟁과 조국에 열광적인 찬사를 담은 글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그와는 반대되는 면모도 보였는데, 이러한 면모는 그가 주도하던 -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도 한 - 동호회인 브레히트派에서 발전되었다. 이들은 시민들을 놀라게 하면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고 주로 자연 속에서 모임을 가졌다. 1918년 최초의 장편 드라마로 구상된 바알 Baal이라는 인물은 비록 브레히트 자신을 제한적 의미에서만 반영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의 반부르주아적 태도가 반영된 인물이다. 바알은 사회적 인습들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애호받는 가치들을 모두 부정하며 (젊은 브레히트의 니힐리즘) 자신의 "천성적인" 생명력을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소진시키는 천재적 작가상을 나타낸다. 대학시절을 그는 아욱스부르크와 뮌헨을 왔다갔다 하면서 보냈다. (1917-1924) 1918년에 쓴 「죽은 병사의 전설」이라는 시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 때문에 그는 20년대에 벌써 나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브레히트는 뮌헨에서 한번도 제대로 대학공부를 한 적이 없다. 그 대신 그는 최초로 대성공을 거둔 드라마 『한밤의 북소리』(1919)를 써서 클라이스트 상까지 받게 된다. 브레히트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예링 Herbert Jhering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 문학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고 극찬하였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새로이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부르주아계층을 비판한다. 이 부르주아들은 자기들의 몫을, 시체를 넘어서까지 확보하려 한다. 20년대의 인간상을 브레히트는 현실적응주의자인 겔리 게이라는 인물 속에서 포착하였다. 1924년과 26년 사이에 쓴 희곡 『남자는 남자다 Mann ist Mann』는 인간을 내면 깊숙이까지 변화시키는 사회적 변화들에 대한 "동의"를 변호한다. 인간은 기술에 종속되어 있고 대중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고립, 소외, 익명성 등이 그러한 대중사회와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동의란 새롭게 주어진 것들을 아무 유보없이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라는 것이 단순히 소망의 영역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회적 현실에 개입해 들어갈 필요가 있음을 나타낸다. 흔히 "행동주의 Behaviorismus"라는 표제어로 기술되는, 대략 1924년에서 1931년 사이의 시기는 브레히트가 자본주의적 적응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시기가 아니다. 그 시기는 늦어도 『한밤의 북소리』에서 시작한 시기로서 그가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강압들에 항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압들의 사실성과 인간을 각인시키는 힘을 함께 계산에 넣은 시기다. 이야기 (이를 테면 「북해 새우들 Nordseekrabben」, 1926), 시 (『도시민들을 위한 책 Das Lesebuch für Städtebewohner』, 1930) 그리고 희곡 (『도시의 밀림 속에서 Im Dickicht der Städte』, 1922)에서 그가 거듭 보여준 것은, 사회의 발전은 자율적 시민으로서의 개인을 이미 시민계층 자체 내에서 말살시켰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대중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다시 개인으로서 자신을 회복하려고 하면 그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개인이 무엇이냐를 규정할 때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개인은 더 이상 주어진 것으로 전제될 수 없고 사회적 과정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 "동의한다"는 것 (즉 이해했다는 것,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변화, 인간 자체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전제이고, 아울러 그것은 "대중"을, 다시 말해 계급사회에서 프로레타리아를 역사적 힘으로 인정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브레히트의 리얼리즘에는 적절한 생산장소를 택하는 일도 속한다. 그가 1924년까지 작업했던 뮌헨은 비교적 비판적인 동시대인들이 볼 때에는 속물화한 거대한 시골로서 장기적으로 별 볼 일이 없었다. 브레히트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자신의 작품들의 공연을 주도하면서 베를린으로 이주할 준비를 한다. (『한밤의 북소리』는 1923년 12월 베를린의 Deutsches Theater에서 공연되었고, 『도시의 밀림 속에서』는 얼마 후 또 같은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헬레네 바이겔 Helene Weigel을 그는 벌써 1923년에 알게 되었고 사랑하였다. 브레히트는 고독한 작가적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찾기 보다는 분주한 활동을 찾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대도시의 정글, 사람들과의 교제, 자신의 작업이 공적으로 속히 인정받는 것, 많은 협력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필요한 공동작업을 이미 텍스트-생산 자체에 적용하였다. 그는 모든 정보의 가능성을 이용했고 대화할 때 끈기있게 경청했으며, 그 대화내용을 동시에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 언제나 남녀 친구들을 - 가장 중요하기로는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1924년부터 브레히트가 죽을 때까지)과 마가레테 스테핀 (1932년부터 1941년 요절할 때까지)을 - 직접적인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이것 또한 문학과 사회의 변화된 관계에 대한 통찰에서 이루어졌다. 고독과 자유 속의 개인이 아직 쓸모있는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큰 건물들, 개인이 지을 능력이 있는 그러한 건물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코이너씨의 이야기』의 말미에서 독창성 Originalität에 대해 조롱하는 말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서푼짜리 오페라』의 초연 뒤에 케어 Alfred Kerr가 가한 표절비난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기존의 것을 이용하는 것은 브레히트로서는 당연했다. 그는 케어가 자신에 대해 제기한 표절시비를 자신은 "정신적 소유의 문제에서 원칙적으로 느슨하다"는 말로 일축했다. 모든 전통은 이처럼 가공될 수 있었고 삼중적 의미에서 "지양"될 수 있었다. 즉 가장 즐겨 하기로는 고대 로마 (호라티우스), 셰익스피어, 그리고 - 비교적 대규모로는 - 루터의 성경이 그것이다.
1926년은 브레히트의 전기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로 기록된다. 그는 칼 맑스를 읽었다. 실제로는 "전환"이라기 보다는 그 자신의 리얼리즘에 대한 구상에서 파생된, 예견할 수 있었던 결과였다. 초기에는 전기적 성격을 띠었던 그의 작품세계는 점점 더 "시대적 작품"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현실의 문제들과의 대결을 담았고 "한 인격의 표현"이고자 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그의 작품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이 유래하는데, 즉 그는 작품들을, 텍스트든 공연이든, 언제나 새로이 개작하고 "현재화"하였다. 이를 테면 『갈릴레이』는 세 가지 판으로 존재하는데, 첫째 판(1938)은 작품의 주인공 갈릴레이라는 인물, 그가 과학을 배반한 이유로 "실각"하고 "제거"되는 과정이 중심에 놓여있다. 브레히트가 미국 망명시절에 Charles Laughton과 함께 작업한 둘째 판(1944/45)에서 비로소 원자폭탄이라는 주제가 추가되며, 셋째 판(1953)에서는 원폭의 일상성, 그리고 과학이 자명하게 그 원폭을 제조하는 일에 공조한다는 사실이 표현되고 있다. 흔히 주장되는 것과는 달리 브레히트의 맑스-읽기는 그의 문학의 "이데올로기화"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맑스주의는 브레히트에게 주어진 현실들을 파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교육극 시절"(1928-1931)에 씌여진 『조치 Die Maßnahme』와 같은 작품조차 맑스주의적 테제를 형상화한 작품이 아니라 재치있게 구성한 심미적 집단연습에 속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무식한 오락과 관객 얼르기를 통해 대중매체들이 확산되는 데 대해 일종의 의사소통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씌여졌다. 관객은 일방적으로 "서비스 받으며" 조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수용에서의 수동성), 적극적으로 도전받고 참여에로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적 형식들을 통해 사람들이 물어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사람들이 물어야 하는 것은 미학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미학도 아니다." 이것이 브레히트의 심미적 모토였다.
맑스주의로의 "전환"은 결코 브레히트가 "심미적인 것"을 포기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브레히트는 이 시기에 『서푼짜리 오페라』(1927/28)을 썼고 이 극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브레히트는 이 오페라를 자기에게 열광의 갈채를 보내는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의도했지만, 그는 시대에 맞는 심미적 수단을 찾아낸 것이다. 브레히트 자신이 쉰 목소리로 불렀던 매키 매써(오페라의 주인공 - 역주)의 노래는 유행가로 히트를 쳤고 베를린의 사회는 스스로 창녀와 뚜쟁이와 깡패들의 화류계로 등장했다. 그러한 한에서 이 오페라의 성공은 그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객관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보다 나은) 사회는 그 작품을 간지럽고-껄끄러운 오락으로 즐겼다. 다시 말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그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1930)
브레히트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알기 때문에, 비록 강력한 노동운동을 통해 어떤 대항세력이 만들어지지 않을 지언정,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을 냉철하게 예견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교육극들, 그리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Die Mutter』를 따라 만든 혁명극, 혹은 상황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 Kuhle Wampe (둘 다 1930)를 가지고 그는 적절하게 선동하고 또 노동자들의 연대를 촉진시키려고 했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무위로 끝났다.
나찌가 "집권"하자 브레히트는 모든 작업의 토대를 잃었다. 제국의회 화재(1933. 2. 27)를 본 그는 그 사건의 정치적 파장을 곧장 간파했고 독일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프라하, 비인, 파리를 거쳐 나중에 스벤드보르크(덴마크)에 간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조수인 스테핀과 함께 33년에 39년까지 살면서 작업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작품활동의 초점을 전적으로 반파시즘적 투쟁에 맞추었고 자신의 작품의 테마와 언어를 그 방향에 정향했다. 초반에만 해도 그는 자신의 그러한 활동을 통해 독일에서 반파시즘적 세력들이 강해져 이들이 정치적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랬다. 그는 파시즘에서 "야만의 분출"만을 보고 또 파시즘에 대항하여 "문화"를 "구제"해 내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조류들을 - "좌파"의 조류들까지 -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5년 파리에서 "문화의 방어"를 위한 국제 작가회의에서 그는 이제야 말로 "소유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고, 또 여전히 문화의 구제에 대해 떠드는 이 마당에 정작 구해야 할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촉구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목졸린 자에게는 말이 목에 걸려있다"고 하면서 브레히트는 "그 세계가 깨어났을 때 (나찌의 집권 - 역주)" "말은 잠들어 있었다"고 한 칼 크라우스에 반박하였다.
브레히트는 히틀러가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나중에 전쟁이 나서 핀란드(1940)와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하기 전에 덴마크에서 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1941)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전쟁을 (다른 수단으로) 계속 행하는 장사로서 보여주며 세 아이들을 잃는 억척어멈의 예를 통해 그 장사에 수반되는 희생들을 드러내 준다. 바이겔이 연기한 『억척어멈』은 나중에 브레히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 되었다. 겉보기에 다정하고 활동적이면서 무자비한 자본가의 전형을 제시한 핀란드의 민속극 『푼틸라 나리와 그의 종 마티』(1940)는 계급화해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1941)은 미국을 겨냥한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그는 - 시카고의 갱세계를 통해 - 자본주의 경제, 갱의 세계, 파시즘의 정치적 상승 사이의 연관관계를 그의 새 망명국에 제시하고자 했다.
애초에 브레히트는 미국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산타 모니카(캘리포니아)에 갔고 무엇보다 헐리웃에서 영화대본작가로 활동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일찍부터 소련이 승리하리라고 믿었으며 망명객들 (특히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멤버인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의 비판적 관찰자로 남았다. "다른" 독일 (전쟁에서 패망할 나찌독일 뒤의 독일- 역주)에 관해 망명객들 사이에 뜻을 일치시켜 이에 기여하면서 활동하려던 그의 시도는 "집단적 죄"를 주장하는 명제에 걸려 좌절하였다. 벌써 그는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 더 큰 - 대결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았다.
독일로 되돌아 온 것은 당연했다. 독일에서 브레히트는 자신의 관객, 또한 자신의 고향과 자신의 "민족"을 보았다. 접근은 스위스를 경유하여 이루어 졌다. 두 독일 국가가 세워진 뒤에 취득한 (1950) 오스트리아 여권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온전한 하나의 독일을 바라는 그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1945)와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국민이 소유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옹호하였고 - "있는 것은 그것을 위해 좋은 자들에게 속해야 한다" - 『파리 혁명정부 시절』(1948/49)을 통해서는 혁명적 해결, 즉 사회주의적 독일을 옹호하였다. 그가 동독 쪽으로 귀국할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브레히트는 말년을 베를린 앙상블에서 실제적 연극작업을 하는데 보냈다. 베를린 앙상블은 쉽바우어담 극장 Theater am Schiffbauerdamm에 자리잡았고 바이겔이 극장장을 맡았다.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소포클레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부르주아적 해석을 "물려받는" 데 반대하여 그들을 가공(재해석)함으로 그러한 해석전통을 비판적으로 제거하는 작업을 했고 또 평화의 유지를 위해 싸웠다. 그의 리얼리즘과 변화에 대한 동경은 그를 일찍부터 현명하게 만들었다. 『부코우 비가』 (1953)는 괴테의 『서동시집』에 비견할 만한 말년의 작품으로 그의 나이 55세에 씌여졌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나는 편안한 작가가 아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렇게 남기를 바란다고 써주시오.
그렇다 해도 모종의 가능성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의심을 찬양함
브레히트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합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한다
자기가 살 집을 짓는 남자도 땀을 뚝뚝 흘리면서 고된 일을 한다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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