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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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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강릉출생 민족시인 심연수 육필원고 고향에서 품다... 댓글:  조회:3385  추천:0  2017-01-27
  민족시인 심연수 육필원고 강릉시에 기탁       강원 강릉출생 민족시인 심연수 시인의 조카 심상만 씨가 2016년 4월 27일 강릉시에 기탁한 심 시인의 육필원고 원본. 이번에 기탁한 육필원고는 10점으로 시 294편이 수록돼 있다. 육필원고는 1940년부터 1943년 사이에 창작한 원고다.    강원 강릉출생 민족시인 심연수의 유족이 시인의 육필원고 원본을 강릉시에 기탁했다.   심 시인의 조카 심상만 씨는 27일 강릉시청을 방문, 자신이 보관 중이던 시인의 육필원고를 안전하게 보존해달라며 최명희 시장에게 기탁했다.   이번에 기탁한 육필원고는 10점으로 시 294편이 수록돼 있다.    육필원고는 1940년부터 1943년 사이에 창작한 원고다.   중국 용정에 거주하는 심 시인의 동생 김호수(2월 작고)옹에 의해 55년간 항아리에 담겨 비밀리에 보관돼 오던 것이다.   원고는 2000년 7월 중국 연변 인민출판사에서 '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 전집' 제1권 심연수 문학 편에 수록됨으로써 심 시인의 작품세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육필원고를 보관하던 아버지가 지난 2월 작고하자 강릉에 사는 차남 심상만 씨가 육필원고를 이번에 강릉시에 기탁한 것이다.   시인의 육필원고는 한국 문학의 공백기 또는 암흑기의 한국현대문학사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릉시 관계자는 "현재 시가 전력을 다하는 국립한국문학관 유치 당위성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시공간이 마련될 때까지 오죽헌시립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릉=연합뉴스) 유형재 기자    
2002    [자료] - 윤동주 유고시집 보존했던 정병욱 가옥(4) 댓글:  조회:3991  추천:0  2017-01-25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망덕 정병욱 교수로 인해 햇빛 관광자원화 충분…광양시 안내판 설치 후 기초용역키로   진월면 망덕리 외망마을 23번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지난 3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문화재로 등록, 고시됐다. 고(故)정병욱(1922-1982)전 서울대 교수는 제11대 정남석 진월면장(1946.10-1948.12)의 장남으로 서울대에서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시조문학대사전’을 펴내는 등 국문학계의 태두라 불리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한 장본인이다. 이번 주에는 윤동주-정병욱 두 집안의 운명적 인연을 중심으로 진월면 망덕리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어떻게 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었는지 저간의 내용을 살펴본다.   정병욱 교수와 진월의 인연     고(故) 정병욱 교수는 1922년 4월 22일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태어나 하동초와 동래고보를 거처 연희전문을 졸업했다. 그런 그가 진월과 인연을 맺게된 것은 진월면장을 역임한 부친 정남섭(1899-1968)때문이다. 정 교수의 부친인 정남섭 전 진월면장은 망덕과 섬진강을 마주하고 있는 하동군 금남면 금남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그의 부친인 정상철을 따라 망덕리 외망마을로 이사를 왔다.  당시 정병욱 교수의 조부인 정상철은 1930년 8월 28일 망덕에서 조선탁주와 조선약주를 허가 받아 양조장과 정미소를 함께 운영했다.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 거북등에서도 양조장을 운영했다. 이후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외망마을로 온 정남섭 전 진월면장은 2년 후인 1932년 양조장 운영권을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아 경영수업을 쌓는다. 이때 정병욱 교수는 11살로 진정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하고 하동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한다. 1940년 연희전문학교를 입학한 정병욱 교수는 방학때면 아버지가 있는 진월을 찾아 섬진강 나루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웠다. 정병욱 교수는 부친 정남섭와의 사이에 3남1녀 중 장남이며 차남인 병완(79)은 대학교수를 지냈고, 장녀인 덕희(77)는 윤동주 남동생인 윤일주와 결혼해 윤동주의 제수이며 3남 병기(70)는 교사퇴직 후 서울에 살고있다.   두 집안의 운명적 인연이 오늘 있게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 국민들이 가장 즐겨 애송하는 윤동주의 ‘서시’.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로 응전하면서 절대적 양심에 도달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 윤동주. 그의 육필원고가 진월 외망마을에 서 보관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마침내 세상에 빛을 본 것은 윤동주-정병욱 두 집안의 운명적인 인연이 오늘을 있게했다. “정교수가 없는 윤동주는 상상하기 힘들다. 윤동주는 일제에 체포되기 전 자신의 원고를 정교수에게 맡겼다. 정교수는 43년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에게 원고를 부탁했고, 어머니는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원고를 묻었다. 정교수가 학병에서 살아 돌아와 원고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정교수는 48년 이 원고와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강처중이 가진 원고를합쳐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그 뒤 원고를 더 모아 중판·3판을 냈다. 오늘날 윤동주가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명이 된 것에는 정교수의 역할이 너무 크다.” 이는 윤동주 원전 연구서를 출간한 한 학자의 말이다. 이렇듯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며 자신의 육필원고를 연희전문 1년 후배이자 학교 기숙사와 인근 하숙집 생활때 룸메이트였던 정병욱 교수에게 맡겼다. 이후 정교수는 일제강점기 징병돼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일제에 발각되지 않도록 집 마루 밑에 잘 보관”을 당부드렸다. 또한 “만에 하나 내가 전장에서 죽을지라도 해방후 이를 발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후 정병욱의 여동생 덕희는 윤동주 남동생인 윤일주 교수와 결혼해 윤동주의 제수가 돼 양 집안은 사돈으로 6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이같은 자료를 목숨처럼 지키고 관리했기에 오늘의 윤동주가 가능했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는 진월면 망덕리 외망마을 23번지에서 그렇게 부활했다.   이제 남은 것은 관광자원화     진월면 망덕리 외망마을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문화재청으로부터 지난 3일 등록, 고시됐다.  이 가옥은 윤동주 유고를 보존했다는 역사적 의의도 크지만 정병욱 교수가 기거하던 가옥이라는 점에서 건축적.국문학사적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병욱은 1948년 1월 30일 윤동주 유고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한 장본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이에 앞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국문학산고’, ‘시조문학사전’, ‘구운몽 공동 교주’,‘배비장전.옹고집전 교주’, ‘한국고전시가론’,‘한국의 판소리’ 등을 간행해 우리나라 국문학계의 태두라고 불리고 있다. 특히 그는 지난 74년 판소리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문예진흥원 전통예술지원 심사위원과 남원 춘향제 전국명창대회 심사위원, 전국민속경연대회 심사위원 등의 공로로 3.1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국문학계 거장으로 각인돼 있다. 현재 정병욱 가옥은 그의 어머니(박아지)의 고종 사촌인 박영주(1924-1999)에게로 경영권을 넘겨 운영돼 오다가 지금은 박영주의 아들로 이마을 이장을 지낸 박춘식씨 소유로 돼있다. 한편 광양시는 조만간  먼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앞에 이를 안내하는 표지판을 세우고 내년에 예산을 세워 관광자원화를 위한 기초용역에 들어갈 예정이다.   [출처] [광양신문 광양뉴스]070712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망덕 정병욱 교수로 인해 햇빛|작성자 광양뉴스  
2001    [자료] - 윤동주 유고시집 보존했던 정병욱 가옥(3) 댓글:  조회:4777  추천:0  2017-01-25
  정병욱 가옥 ‘시대를 아우르는 문학관’ 으로 영화‘ 동주’ 인기 상승 불구 외면 받는 등록문화재로 전락     고귀한 정신 소통 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길 우리의 윤동주! 그의 짧지만 긴 인생이 담겨있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나오게 한 곳. 암울 했던 시기,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을 지도 모를 그의 작품을 우리 곁에 영원히 살게 한 곳. 그런 역사적인 장소가 '광양'에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별이 반짝이던 스무 살 어느 밤들, 주옥같은 그의 작품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베껴 쓰기도 했다. '별'을 헤는 대신 '윤동주' 헤는 밤을 보내다 도취돼 자기반성의 시를 여러 편 습작 했고, 아무나 윤동주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배웠다. 이런 추억들 속에 파묻혀 있던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을 뛰게 하고 설레게 했다. '정병욱 가옥'을 방문하기 전 나는 그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에 방문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안을 잠시 들여다보는 것 뿐이었다. ‘기대'한 만큼의 '씁쓸함'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 정병욱 가옥'은 2007년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됐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정병욱 박사가 받아 일제의 공출제도를 피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인 박아지 여사에게 맡겼다. 박 여사는 소중히 간직해 달라는 아들의 부탁에 마루 널장을 뜯고 항아리 속에 비단 보자기로 싸서 숨겨놓았다고 한다. 시집 한권도 일제의 눈을 피해 숨겨놓아야 했던 처참한 시대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그런 역사적인 장소에서, 그를 상기시키고 감성에 젖어들어도 모자랄 그 순간에, 남의 집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민망함'이 엄습해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화 동주' 상영이후, 윤동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그와 관련된 서적들이 다양한 형태로 출간돼 나오고 있다. 광양 역시 윤동주와의 인연을 알리는데 여념이 없다. 홍보의 효과인지 타 지역에 거주한 지인들까지 '너 광양에서 일하고 있다했지? 정병욱 가옥에 가봤어?'라며 덧붙여 '광양'에 대한 무궁무진한 관심을 쏟아낸다. 어깨 '으쓱'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이런 상황에 왠지 걱정이 일고 조바심이 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지금 현장은 ‘기대’한 만큼의 ‘씁쓸함’만 생생한 첫 방문 체험에 발로한 이러한 조바심과 걱정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방문한 이들이 이곳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 생각된다 . 눈에 띄는 안내판이 보이질 않았다. 어렵사리 정병욱 가옥을 겨우 찾는데 성공한다면, 이 가옥이 갖는 진가를 집 앞에 놓인 몇 줄의 글만이 설명해줄 것이다. 찾아오기 전에 인터넷을 뒤적였다면 이미 알만한 내용을 알려줄 뿐이다. 그곳에서 눈을 떼고 자연스럽게 유리창에 바짝 붙어 뚫린 마루를 감상 할 것이다. 그 감상을 작은 표지판 하나가 친절하게 돕는다.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   주변 지역에 비해 문화 관광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광양은 실로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 그 가치와 의미는 오래전부터 방치돼 왔었다. 이제야 세상이 윤동주를 외치는 지금에서야 조심스레 '정병욱'을 언급하고 '정병욱 가옥'을 언급한다. 다양한 행사들 속에 윤동주와 함께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정병욱 박사의 노력을 조금씩 서서히 이야기해 나가고 있다. 물론 지금이라도 좋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또 알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앞서 고민해 봐야 한다. '기대'를 품고 와서 뜯겨진 마룻바닥만 보고 가게 되기 전에 말이다. 윤동주 하면 정병욱 박사를 떠올리고 광양을 인식 할 수 있게 의미와 가치만 홍보할 것이 아니라 진짜 마룻바닥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고 갈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 되길 원한다. 더불어 광양을 찾는 이들에게 또는 시민들에게 광양 출신의 작가를 알리고 현재 광양 내에서 문학의 꽃을 피워 내는 지역 작가들도 동시에 알릴 수 있고 지역 내 문학 활성화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아우르는 문학관’으로 이용 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전국의 윤동주를 사랑하는 이들이 ‘기대’ 뒤에 ‘씁쓸함’ 대신 광양에 대한 더 큰 기대와 즐거움이 함께 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고귀한 정신적 산물을 함께 느끼고 소통 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길 바란다.   ================================== 정병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병욱 鄭炳昱 출생 1922년 3월 25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남해군 사망 1982년 10월 12일 (6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병원 필명 호(號)는 백영(白影) 직업 국문학자, 민속학자, 수필가 언어 한국어 국적 대한민국 소속 前 서울대학교 교수 前 한국판소리학회 회장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활동기간 1948년 ~ 1982년 장르 국문학, 민속학, 수필 수상내역 1967년 한국출판문화상 1979년 외솔상 1980년 3·1문화상 친지 정덕희(누이동생) 윤일주(매제) 윤인석(생질) 종교 개신교 정병욱(鄭炳昱, 1922년 3월 25일 ~ 1982년 10월 12일)은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민속학자 겸 수필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이력 1.2일생 1.3사망 2친척 관계 3학력 4바깥 고리   생애[편집] 이력[편집] 경상남도 남해애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하동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이후 전라남도 광양에서 성장한 그는 부산대학교와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1957년 민속학자로도 첫 입문하였으며 1964년에는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일생[편집] 1922년 출생한 그는 1934년, 부친이 구매한 양조장(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소재, 근대 문화 유산 등록)을 겸비한 주택을 구매해 그곳에서 가족이 거주했다. 학업을 위해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는 방학등에 동생들을 위해 선물을 사기도 하여 본가인 망덕에서 지냈다. 그는 윤동주의 유고집, 원고를 일제의 눈을 피해 본가인 망덕의 집에서 지켜냈다. 강제로 징용에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께 소중한 원고니, 꼭 지켜달라는 유언과도 같은 말에 어머니는 마루바닥을 뜯고 보관했다. 윤동주가 옥사하고, 해방 된 후 정병욱은 그 원고를 찾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찾아가 함께 시집를 발간하게 된다.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가 수필 에서 자세히 빍히고 있다.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외에도 한국 고전 문학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주 전공인 고전 시가를 비롯해 고전소설등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판소리에 있어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부산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27년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또한 하버드대 초빙교수로서, 한국 고전 시가 논문 발표및, 강의외에도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한국 문학 항목을 집필하였다. 그 외에도 유수의 권위있는 신문국제 학술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문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출판문화상, 외솔상, 3.1문화상등을 받았다. 현재 그가 살았던 전남 광양시 망덕에는 그의 집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이며, 원고를 보관했던 마루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망[편집] 1982년 10월 12일에 급성 저혈압과 양성 신장종양의 합병증세로 인하여 타계하였다. 친척 관계[편집] 그는 시인 겸 건축사학자 윤일주(尹一柱)의 손윗처남이다. 학력[편집] 경성 연희전문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문학박사 졸업 //////////////////////////////////////////////////////////////////////////////////////////////////////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유독 낡은 집 한채를 발견하게 됩니다. 양철지붕에는 뻘건 녹이 슬고, 짙게 변색된 나무는    섬진강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오랜세월 동안 서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마치 공장의 창고 같이 보이는 이 집은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입니다. 낡고 볼품없는 건물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시인 윤동주의 시집이 숨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국민 대부분이 좋아하는 윤동주시인의 ‘서시’는    일제시대 이곳 정병욱 가옥에 숨겨져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윤동주 시인은 위에서 언급한 ‘서시’가 포함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필로 3부의 시집을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한권은 은사였던 이양하 교수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권을 연희전문학교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각각 맡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정병욱은 강제 징용되어 전쟁터로 끌려 가면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어머니에게 해방전까지는 어떻게든 비밀리에 숨겨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정병욱 어머니는 가장 안전한 장소로 집의 마루 밑에 숨겨 두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해방을 6개월 남기고 스물일곱 나이로 일본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절명하게 되고,    해방이 된 이후 정병욱 가옥 마루 밑에 숨겨져 있던 유고가    정병욱씨에 의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으로 발간이 되었습니다.   ////////////////////////////////////////////////////////////////////////////////////////// ... ... 숙명여자대학교 김응교 교수가 ‘한글을 지켰던 두 청년, 윤동주와 정병욱’, 성균관대학교 윤인석 교수가 ‘역사적 터의 내력과 활용, 이야기가 있는 정병욱 가옥의 미래를 그려보며’ 등 4개 주제로 두 인물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 발표를 하게 된다. 시 관계자는 “정병욱 가옥은 백두산 북쪽 끝자락 용정 출신 윤동주와 백두산 최장맥 남쪽 끝자락 광양 정병욱 선생의 만남을 통해 한국 시문학사의 꽃을 피우는 운명적인 여운이 남겨진 곳으로 ‘우정’이라는 이야기를 간직한 역사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병욱 가옥은 1925년 건립된 전형적인 근대 상가 주택으로 지난 2007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2000    [자료] - 윤동주 유고시집 보존했던 정병욱 가옥(2) 댓글:  조회:4043  추천:0  2017-01-25
  ▲  정병욱의 아버지 정남섭. 1919년 남해 문항마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미군정 시기인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광양군 진월면장을 역임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선생님, 기사에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네요. 정병욱 아버지인 정남섭이 1934년에 면장을 지냈다면 친일 면장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남해 문항에서 3.1독립만세를 불러 일경에 쫓기다 진주사범을 나와 교사를 지낸 후 광양 망덕으로 오셨고 해방 이후 미군정 당시인 1946년에 면장을 지냈습니다." 윤동주 시집 유고를 보관했다가 윤동주 시를 세상에 알린 정병욱 생가에서 살았던 박춘식(정병욱 외조카)씨가 내가 쓴 기사 를 보고 전화한 내용이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연희전문학교에서 선후배로 만나(1940년) 하숙을 하며 문학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정신적 동지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일본의 전세가 기울자 일본은 대학생들도 징집해 학도병으로 내몰았다.  ▲  윤동주 유고를 숨겨뒀다가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정병욱의 생가. 현재 정병욱 외조카인 박춘식씨 소유로 광양시에서는 윤동주 문학관을 지을 예정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  1940년 연희전문에서 만나 문학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던 정신적 동지 윤동주와 정병욱. 정병욱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를 볼 수 없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1943년 여름 일본에서 유학하던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고 같은 해 정병욱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가기 전 만들었던 시집 세 권 중 한 권을 물려받은 정병욱은 원고를 모친께 맡기며 "저나 윤동주 시인이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드렸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살아 돌아온 정병욱은 자신의 집 마루 아래 숨겨두었던 윤동주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라는 시집을 발간(1948년)해 윤동주를 세상에 알렸다. 자료에 근거해 내가 쓴 기사 초안은 아래와 같다.  "1925년에 전형적인 근대 상가 주택으로 지은 정병욱 생가는 1934년 광양군 진월면장을 역임했던 부친 정남섭이 매입했다" 자료에는 1934년에 정남섭씨가 광양 망덕에 있는 집을 매입했다고 씌여 있었지만 무심코 흘려 본 것이다. 기사 초안을 쓸 당시 미심쩍었던 " 친일면장을 지냈지만 훌륭한 아들을 뒀네"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정병욱의 뿌리를 캐보자"라는 생각에 박춘식씨에게 전화를 하고 정남섭의 뿌리를 찾아 남해 문항마을로 향했다.  ▲  정병욱의 아버지인 정남섭이 근무했었던 하동군 진정초등학교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경남 남해로 가던 도중에 박춘식씨가 잠깐 들를 곳이 있다며 하동에 있는 진정초등학교로 안내했다. 1924년에 개교한 진정초등학교는 95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전통있는 학교였지만 안타깝게도 1960년대 이후에 근무한 교사들의 자료만 있었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 독립운동을 한 교사가 이 학교에 근무했는데도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며 안타까워하던 박씨가 외가 어른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정병욱 교수의 아버지인 정남섭 어르신은 진주사범 졸업 후 거제도에서 근무하다 고향이 가까운 하동군 진정초등학교에서 몇 년간 근무한 후 광양 망덕으로 이사 오셔서 양조장, 과수원, 방앗간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하셨어요. 해방이 되자 미군정에 발탁돼 진월면장을 역임했습니다." ▲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비가 있는 고갯마루 아래에 있는 문항마을로 남해에서 박사가 가장 많이 탄생한 마을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남해대교를 건너 정남섭이 태어난 설천면 문항마을로 갔다. 바다를 앞에 두고 넓은 평지를 품은 마을이 부유한 어촌같은 느낌이 들어 박씨에게 내력을 묻자 "남해에서 박사가 가장 많이 난 마을입니다"라고 자랑했다.  문항마을 뒤 도로변 고갯마루에는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비'라는 비석이 있고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1919년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남해 설천면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2일, 이예모의 선도로 설천면(남양, 금음, 문항) 사람들이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4월 4일에는 남해읍 장터에서 태극기를 든 군중 1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군청, 경찰관주재소와 각기관을 점령했다.  ▲  남해 설천면 문항마을 뒤 고갯마루에는 '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비'가 서있고 설천면 출신 독립만세운동 주동자들 중 맨 마지막에 '정남섭'의 기록이 있다. 정남섭은 윤동주 시인을 세상에 알린 정병욱의 부친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통분하게도 23명은 검거돼 1년 내지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정학순은 순국했다. 비석 글귀에는 설천면 주동자 중 맨 마지막에 정남섭이 선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요즘 매스컴을 보면 심심찮게 친일파 자손들에 대한 글들을 볼 수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대를 이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보며 굳건한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다.  /오마이뉴스 오문수 (시민기자)
1999    저항시인, 아동문학가 윤동주 재조명되다... 댓글:  조회:3718  추천:0  2017-01-25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올해는 시인 윤동주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친근한 시인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이 한 해동안 다각적으로 이뤄진다.  그 첫 행사로 23일 한국문인협회와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 공동으로 연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선 아동문학가로서의 윤동주의 모습과 저항시인, 또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이상주의를 꿈꿨던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새롭게 조명됐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일본 교토 동지사대학 유학중 독립운동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2년형 복역 중 목숨을 잃었다. 재판을 받을 때 부장판사가 윤동주가 죽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한 번만 부인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끝까지 부인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윤동주가 어둠의 시대를 견딘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가톨릭대 류양선 명예교수는 “신앙에 바탕을 둔 종말론적 희망에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종말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겪고 있는 현재에서 출발, 미래적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현재의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는 아동문학가로서 윤동주를 새롭게 조명했다. 정병욱이 윤동주의 유고 31편을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낸 것은 1948년 1월. 시가 계속해서 발굴되면서 증보를 거듭해 지금까지 윤동주의 시로 알려진 작품은 125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 30편 정도가 동시다. 윤동주가 지상에 발표한 첫 동시는 1935년, 19세 때 쓴 ‘조개껍질’. 본격적으로 동시를 발표한 것은 1936년부터이다.이 해는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학교를 폐교시켜버리고 학생들은 항의표시로 단체 자퇴를 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윤동주도 친구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다. 윤동주는 1938년 2월에는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을 하고 4월 9일에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는데 이 해에도 동시 ‘햇빛, 바람’‘해바라기 얼굴’‘애기의 새벽’‘귀뚜라미와 나와’ 등을 발표한다. 1939년에는 ‘아우의 印象畵’‘산울림’등을 발표한다. 연희전문 학생이 되는 1938년부터는 발표지면이 ‘소년’지로 넓혀진다. 윤동주의 집중적인 동시 창작은 정지용의 영향이 큰 것으로 이 교수는 평가한다. ‘정지용시집’이 나온 것은 1935년 10월로 89편의 시가 실려 있는 정지용의 제1시집에는 동시로 볼 수 있는 작품이 여러 편 실려 있다. 윤동주가 이 시집을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민중의 아픔을 담아낸 ‘사과’나 이산의 현실을 그려낸 ‘오줌싸개 지도’ 등은 윤동주 동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인인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윤동주를 시대의 저항 시인으로 부각시킨다. 그동안 ‘참회록’이나 ‘자화상’등의 시에서 윤동주는 나약한 이미지로 각인돼왔지만 강한 저항정신과 독립의지를 보여주는 시편들이 적지 않다. 절망의 시대이지만 희망을 갖고 전진하라는 ‘눈 감고 간다’는 시를 비롯, 죽어가는 민족, 죽어가는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끌어안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차가운 각오를 담은 ‘서시’등이 그렇다.  윤동주의 애국정신과 저항성은 그의 고향과 관련이 있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그 당시 우국지사들과 선각자들이 모였던 총 집합 장소였다. 윤동주 시인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독실한 장로요, 선각자로 윤동주는 할아버지가 독립투사들에게 독립자금을 대 주는 것을 보고 자랐다. 외삼촌 김약연은 명동촌에 학교와 교회를 세운 목사였다. 신앙과 저항정신, 애국혼은 그런 환경에서 어린 윤동주에게 자연스럽게 스몄다.  윤동주가 살았을 당시 용정의 기독교는 순혈주의적 신학과 신앙의 순결에 목숨을 걸었던 전혀 때묻지 않았던 기독교였으며, 애국 사상이 함께 녹아있었다. 소 목사는 “윤동주의 시 세계를 덮고 있던 인간의 보편가치와 자연의 서정성이라는 커튼을 젖히고 그 배후에 감춰진 기독교 정신과 애국 사상, 시대를 향한 저항적 예언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8    [자료] - 윤동주 유고시집 보존했던 정병욱 가옥 댓글:  조회:4591  추천:0  2017-01-25
윤동주·정병욱 유족들 광양 찾아 광양시와 문화재 관리 활용 방안 논의   = 윤동주·정병욱 유족들이 지난 20일 광양을 찾아 광양시 문화홍보담당관실 관계자 등과 최근 문화재로 등록된 ‘윤동주 유고 정병욱 가옥’에 대한 관리 활용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현 가옥 소유자인 박춘식씨 자택에서 광양시와 만남을 가진 이들은 정병욱 교수의 장남인 정한성(62)씨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의 아들인 윤인석(52)성균관대 교수 등이다. 이날 후손들은 광양시와의 만남에서 △유고 보존 장소를 복원하는 마루 밑 상황 재연 △정병욱 관련 서적과 사진 전시 △윤동주 육필시고와 사진 전시 등에 대해 다각적인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 정병욱 교수의 장남인 정한성 씨는 “먼저 가옥에 비 새는 것을 막기위해 지붕 수리가 급선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전문위원인 윤인석 교수는 “건물실측을 한 후 이에 따른 도면화로 원형 추적이 당면과제”라고 주문했다.   박춘식 씨는 “시장께서 문화재 등록을 권유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며 “지역의 명소가 될 수 있도록 서로 차근차근 논의해 가자”고 말했다. 장진호 문화담당은 “이곳을 어떤 식으로 관리 활용해야 좋을지는 가옥 소유자와 유족의 의지가 중요하다”며 “앞으로 가옥 소유자와 유족들의 의견이 모아지면 다각적인 관리 활용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   광양시와 가옥 긴급보수 논의   지난해 7월 문화재로 등록된 진월면 망덕리 외망마을의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유족들이 광양시를 찾았다. 유족들이 광양시를 찾은 것은 최근 광양시가 노후된 가옥에 대해 긴급보수를 앞둔 시점에서 감사의 표시와 함께 정비방향을 건의키 위해서다. 지난 달 29일 광양시를 찾은 유족들은 정병욱 박사의 동생인 정병완(국립도서관 사서과장 역임)씨와 장남인 정한성, 차남 정학성(인하대 국문과 교수)씨,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문화재청 전문위원)교수, 가옥 소유자인  박춘식씨. 유족들은 이날 이성웅 시장과의 만남에서 “유족들이 할 일을 광양시가 대신해줘 감사하다. 다만 가옥을 정비함에 있어 볼거리 위주의 관광적인 것보다 암울한 시대, 윤동주와 정병욱의 아름다운 우정으로 인해 세상에 빛을 보게된 시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교육적 차원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또 “기존 건물은 원형을 보존하고 건물내부에 작은 도서관 공간 마련과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자문단을 구성해 정비했으면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이성웅 시장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문화재로 등록돼 지역의 유산이 된만큼 유족들과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선양사업이 잘되도록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화엽 문화담당은 “먼저 노후된 가옥에 대해 장마철 이전에 3천만원의 예산으로 긴급보수에 들어간다”며 “이와 병행해 가옥기본활용계획에 대한 학술용역 또한 빠른 시일안에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정병욱(1922-1982)전 서울대 교수는 제11대 정남석 진월면장(1946.10-1948.12)의 장남으로 서울대에서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시조문학대사전’을 펴내는 등 국문학계의 태두라 불리고 있다. ================================ 1. 대한민국의 국문학자2. 슬램덩크의 등장인물   1. 대한민국의 국문학자[편집]       평생 윤동주를 추억했던, 윤동주의 친구 우리 국문학의 선구자 鄭炳昱, 1922.3. 25 ~ 1982. 10. 12. 수험생들에게는 윤동주의 친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전공자들에게는 국문학의 체계를 확립한 제1세대 학자로 유명하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대학에 윤동주와 함께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사카의 방공포에서 근무.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 후 바로 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른바 3음보 학설[1]을 비롯한 고려가요, 조선시대 시조의 체계와 특징을 정리한 첫 세대의 학자이다. 최치원을 연구하던 중 을 모조리 읽고 학사 졸업논문을 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모아서 간행하는 데 도움을 준 한 명으로도 유명하다.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시인의 육필을 전라남도 광양시에 위치한 본가[2]에 맡기면서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 달라'라고 모친에게 당부한 일화가 있다. 암울한 시절에 사실상 목숨을 걸고 윤동주의 유고를 지켜낸 장본인인 셈.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상)에는 "잊지 못할 윤동주"라는 그의 수필이 실려 있었다. 1982년 10월 12일에 급성 저혈압과 양성 신장종양의 합병증세로 인하여 6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2. 슬램덩크의 등장인물[편집] 정병욱(슬램덩크) 참조. [1] 최근 음보설이 각광받고 있다. 3.4조, 4.4조 운운하는 것보다 설명하기 좋고 범용성이 있다는 이유[2] 현재 등록문화제 제 341호로 지정된 정병욱 가옥 =================[출처] [광양신문 광양뉴스]080306 윤동주·정병욱 유족, 광양시 찾아|작성자 광양뉴스   [출처] [광양신문 광양뉴스]070726 윤동주·정병욱 유족들 광양 찾아|작성자 광양뉴스    
1997    [자료] - 윤동주 하숙집 옛터 댓글:  조회:3482  추천:0  2017-01-24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시인 윤동주가 서촌으로 이사한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1941년 5월 하숙집을 구하러 서촌으로 왔다. 서촌에서 사직단을 건너 금화산을 넘으면 바로 연희전문학교여서 통학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뒷날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정병욱은 다음과 같이 회고를 하였다. “그해 하숙집을 찾아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를 보았는데,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리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우리는 김송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면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알차고 보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반이던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이 집에서 살면서 문학과 음악을 즐기고, 상당수 대표작을 여기서 창작하였다. 정병욱은 이 시절 윤동주의 일과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 무렵 우리의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다. 아침 식사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증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잇었다.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나갔다.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하였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 일한서방 등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가면 조여사가 손수 마련한 저녁 밥상이 있었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선생의 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한 환담 시간을 갖고 방으로 돌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책을 보다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누상동 하숙집 분위기는 문학청년의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무섭기만 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기념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출간하려고 스스로 대표작을 골라 편집했는데, 전쟁 분위기 속에서 미처 출판되지는 못했다. 이 하숙집에서 지은 시는 「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새벽이 올 때까지」「십자가」「눈 감고 간다」「못 자는 밤」「돌아와 보는 밤」등 수 없이 많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윤동주는 밤으로 인식을 하면서 새벽이나 아침을 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9월에 이 동네를 떠나 11월에 아현동으로 이사하는데, 이곳에서 「별 헤는 밤」「서시」등의 명작을 창작하는데, 이 시들 또한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십자가 /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96    [쟁명] - 윤동주 리해조명돕기 댓글:  조회:5602  추천:0  2017-01-24
  윤동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동주(尹東柱, 일본식 이름: 平沼東柱 히라누마 도슈[*]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9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생애 초반 1.2 소년 시절 1.2.1 중학 시절 1.2.2 연희전문 시절 1.3 일본 유학 1.3.1 창씨개명 1.3.2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1.4 투옥과 최후 1.5 사후 2 작품 3 경향 및 평가 4 학력 5 상훈 경력 6 기념관과 기념물 6.1 기념관 6.2 기념물 7 가족 관계 8 기타 9 대중 문화에 나타난 윤동주 9.1 방송 10 같이 보기 11 주석 12 참고 자료 13 바깥 고리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2]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3]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기숙사인 핀슨홀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는 문익환, 오른쪽은 윤동주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소년 시절[편집]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을 발간하였다.[4] 중학 시절[편집]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편집]  연희전문학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유학[편집]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4]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5] 창씨개명[편집]   서시 육필 원고 (1942년)   윤동주의 원고 원본  창씨개명, 서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6]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7][8] 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참회록을 썼다.[9]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편집]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윤동주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10]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편집]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향년 29세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 말기에 있었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11] 사후[편집]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의해 제정되었다. 작품[편집]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새 명동》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경향 및 평가[편집]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12][13]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14]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15]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1] 학력[편집] 만주 북간도 밍둥 소학교(명동소학교) 졸업 만주 지린 다라쯔 학교(대랍자학교) 수료 만주 북간도 언전 중학교(은진중학교) 수료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만주 지린 광밍 중학교(광명중학교) 졸업 경성 연희전문학교 졸업 일본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일본 도시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제적 상훈 경력[편집] 서울 숭실고등학교 명예 졸업장 추서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국민훈장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기념관과 기념물[편집] 기념관[편집] 연세대학교   핀슨홀과 윤동주 연세대는 2013년 2월 6일, 캠퍼스 내의 핀슨홀을 윤동주 기념관으로 개편할 것을 발표하였다.[16] 종로구 종로구는 2012년 7월 25일,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 문학관의 개관식을 연다고 발표하였다.[17] 연변 연길의 용정 중학교에 윤동주 기념관이 있다.[18] 기념물[편집]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등이 모금한 성금으로 연세대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1985년부터 《월간문학지》에서 그를 기념한 「윤동주문학상」 수상자를 매년 선정, 수상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9] 1992년 9월, 모교인 용정 중학교에 〈서시(序詩)〉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20] 1995년 일본 도시샤 대학에 친필 〈서시〉와 일본어 번역본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21] 2005년에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 정지용의 시비가 그 옆에 건립되었다.[22] 또한 교토 대학 부근 그가 머물던 곳에 기념비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증조부 : 윤재옥(尹在玉, 1844 ~ 1906) 조부 : 윤하현(尹夏鉉, 1875 음력2.1 ~ 1948 9.4) 조모 : 강씨부인 고모 : 윤신영(尹信永) 고모부 : 송창희 고종사촌 : 독립운동가 송몽규 宋夢奎, 1917.9.28 ~ 1945.3.7) 내종조카 (송몽규의 조카) : 소설가 송우혜(宋友惠, 1947.12.5 ~ ) 부 : 윤영석(尹永錫, 1895 8.1 ~ 1965 4.20) 모 : 김용(金龍, 1891 10.1 ~ 1948 9.26) 누이 : (요절) 누이 : 윤혜원(尹惠媛, 1924 ~ 2011.12.11) 매제 : 오형범(1924 ~ 2015 3.11) 조카 : 오철주 남동생 : 윤일주(尹一柱, 아명 윤달환, 1927 11.23 ~ 1985 11.28 前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교수) 제수 : 정덕희 조카 : 윤인석(尹仁石, 1956 ~ 現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남동생 : 윤범환 (요절) 남동생 : 윤광주 (尹光柱, 아명 윤성주, 1933.5.15 ~ 1962 11.30 시인) 외삼촌 :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 1868 9.12 ~ 1942 10.29) 당숙 : 윤영춘(尹永春, 1912 12.12 ~ 1978 4.29) 재종형제(윤영춘의 아들) : 가수 윤형주(尹亨柱, 1947 11.19 ~ ) 사돈 : 정병욱(鄭炳昱, 1922 4.21 ~ 1982 국문학자) 기타[편집]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1990년대 이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창씨개명설을 지적받게 되자 윤동주를 연구하던 한 교수는 이를 언급하기를 꽤 난처해했다 한다.[6]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2005년 이후에 공식적으로 언급 인정되었다. \\   목차 시인을 꿈꾸던 시절 동주와 몽규, 같고도 다른 길 관념의 세계에서 순수의 세계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리라 치안유지법의 제물이 되다 죽음의 길, 새로운 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여명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있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윤동주를 ‘일제 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생전에 그는 유명 시인도 아니었고 독립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던 열혈청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100여 편의 시는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윤동주 시인을 꿈꾸던 시절 윤동주와 친구들 뒷줄 왼쪽 장준하,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앞줄 가운데 정일권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이었던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이었던 9월 28일, 친정에서 살던 고모 윤신영이 아들 송몽규를 낳았다. 고종사촌 관계인 윤동주와 송몽규는 그렇듯 한집에서 태어나 후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기아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너도 나도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 살던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간도의 자동으로 이사했고, 1900년에는 기독교 장로였던 할아버지 윤하현에 의해 명동촌으로 재차 이사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이상설과 이동녕이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민족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용정을 떠나며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이 명동에 명동서숙을 세운 다음 수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명동서숙은 1908년 4월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친구 문익환 목사와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비교적 가정이 유복했던 그는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고, 5학년 때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등사잡지를 만드는 등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년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이면서도 의연했고 씩씩했다. 재봉틀로 해진 교복을 직접 고쳐 입었고 항상 책 속에 파묻혀 살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공부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佩), 옥(玉), 경(鏡)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들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다. 이듬해인 1932년에 그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명동 북쪽의 소도시 용정(龍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집도 용정으로 이사했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 활약했으며, 교내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화제로 참가하여 1등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동주와 몽규, 같고도 다른 길 윤동주와 친구들 앞줄 중앙 송몽규, 뒷줄 오른쪽 윤동주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는 1934년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작품을 쓰면서 시인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1935년 1월 1일 송몽규가 송한범이란 아명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꽁트 〈술가락〉이 당선되었다. 송몽규는 그렇듯 한발 앞서 문단에 데뷔했지만 문학에 연연하지 않았다. 은진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하던 그는 3학년을 마치자마자 중국 남경으로 가서 백범 김구가 운영하던 낙양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던 것이다. 윤동주는 그해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했다. 친구 문익환은 이미 한 학기 전에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전학한 상태였다. 그때부터 윤동주는 숭실중학교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이어나갔다. 그해 10월에는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에서 발간하던 《숭실활천》 제15호에 시 〈공상〉을 게재했다. 그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었다. 20세 때인 1936년 3월 숭실중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면서 폐교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때 문익환과 장준하가 같은 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훗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도 이 학교에서 만났다. 한편 남경의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송몽규가 중국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제남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가 4월경 일경에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끌려왔다. 그때부터 2개월 동안 경찰에게 취조를 받은 송몽규는 8월 청진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가 거주제한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용정으로 돌아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 머물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관념의 세계에서 순수의 세계로 그 무렵 윤동주의 시 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화려하고 조숙한 낱말을 이용하여 관념적으로 그려내던 그의 시가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하고 순수한 표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은 용정의 외가에 온 동요시인 강소천을 만난 습작에 대한 조언과 함께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발간된 《정지용 시집》을 탐독한 영향이 컸다. 1936년 11월부터 윤동주는 연길에서 발행되던 어린이 잡지 《카톨릭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발표했고, 1937년에도 〈오줌싸개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 등을 실었다. 이때 그는 ‘동주(童柱)’와 ‘동주(童舟)’란 두 가지 필명을 사용했다. 9월에는 수학여행으로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해수욕장을 다녀온 뒤 〈바다〉, 〈비로봉〉 두 편의 시를 썼다. 광명중학교 5학년 2학기가 되면서 온순하고 다정다감했던 윤동주가 대학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심한 불화를 겪었다. 그는 문과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의대를 강권하면서 벌어진 사달이었다. 몇 달 동안 두 사람은 단식투쟁에 밥상을 엎는 등 격렬한 상황을 빚어냈다. 다행히 할아버지 윤하현이 개입하면서 결과는 윤동주의 바람대로 되었다. 그 무렵 송몽규도 문과대학을 지망했는데, 그의 아버지 송창의는 아이들을 부모 욕심대로 키우면 안 된다면서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8년 초봄에 나란히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 문과 입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북간도 전체에서 연전 문과 입학생은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간 그는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한방을 썼다. 원산 출신의 수재였던 강처중은 영어에 능통해서 문과 동기생들 가운데 1,2등을 다투어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강처중과 윤동주의 끈끈한 우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제 치하였지만 연전은 기독교계 학교였으므로 두 사람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연전 재학 시절 윤동주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도서관 촉탁으로 일하고 있던 외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웠고,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영시를 배웠다. 여름방학 때면 고향 용정의 북부감리교회 하계 아동성경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문학에 대한 열정도 한결같았다. 23세 때인 1939년 그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아우의 인상화〉 등을 기고했고, 《소년》 지에 동시 〈산울림〉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소년》 편집인 윤석중을 만나 생전 처음 원고료도 받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윤동주가 24세 때인 1940년 4월 광명학교 중학부 후배인 장덕순이 연전 문과에 입학했고, 경남 하동 출신의 정병욱까지 가세하여 교분을 맺었다. 윤동주는 정병욱의 2년 선배였고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매우 친하게 지냈다. 정병욱은 훗날 윤동주의 필사본 《바람과 구름과 별과 시》를 보관했다가 유족들에게 전했고,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의 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도록 노력하는 등 윤동주를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1941년 4학년 때 윤동주는 장덕순과 함께 신촌에서 하숙하다가 기숙사에 복귀한 뒤 다시 정병욱과 함께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 북아현동의 전문 하숙집 등지를 전전했다. 그 무렵 친구 라사행과 함께 인근에 살고 있던 시인 정지용을 찾아가 시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전시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그 동안 쓴 19편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표제로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다. 한데 이양하 교수가 〈슬픈 족속〉, 〈십자가〉 등의 작품이 시국이 하수상한 이때에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 테니 출간을 보류하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윤동주는 아쉽지만 출간을 포기하고 3권을 필사하여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각각 1부씩 증정했다. 이윽고 전쟁물자 동원령이 내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연이 자욱한 전장으로 끌려갔다. 그 때문에 윤동주는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고뇌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집안 어른들은 그의 일본유학을 결정하고 성씨를 히라누마(平沼)로 바꾸었다. 송몽규의 집안 역시 소오우라(宋村)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송몽규는 소오무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리라 도쿄 릿쿄대에 전시된 윤동주 '서시' 1942년 4월 2일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함께 현해탄을 건너온 송몽규는 4월 1일 교토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다. 애초에 윤동주도 교토대학을 지망했지만 송몽규만 합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도쿄의 한인YMCA 숙소에 머물다 헤어졌다. 1942년 1월 19일, 윤동주는 유학 수속을 위해 연희전문학교에 창씨계(創氏屆)를 제출했다. 그 때의 굴욕감은 나흘 뒤인 1월 24일에 쓴 〈참회록〉으로 씌어진다. 그가 이 땅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 사실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밝혀졌다. 그때부터 윤동주는 다카다노바바역 근처에서 동문인 백인준과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서울에 있던 친구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쉽게 씌어진 시〉 등 5편의 작품이 담겨있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면서도 그는 시인으로서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결코 절망하지 않고 펜을 들었던 것이다. 비 내리는 도쿄의 밤에 다다미가 깔린 하숙방에서 홀로 고향을 그리워하며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자괴하던 그의 소망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해 7월 방학을 맞아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일제의 발악을 예상했던 듯 동생들에게 우리 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테니 무엇이라도 사모으라고 당부했다. 불과 보름 남짓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10월 1일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던 송몽규와 재회할 수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도보로 5분 거리의 하숙집에 살았다. 그것은 일면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입학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그때부터 윤동주 역시 일경의 감시망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치안유지법의 제물이 되다 도시샤대학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 정지용이 저명한 민예운동가이자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구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로부터 영문학을 배운 학교다. 야나기 교수는 조선의 전통공예를 일본에 소개하는 한편 조선 지배를 강화하는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했던 인물이다. 정지용은 이 학교 재학 중 〈압천〉, 〈향수〉, 〈카페 프란스〉 등 빼어난 시 20여 편을 썼다. 이런 연관 관계가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었던 윤동주의 대학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1943년 3월 1일, 일제가 징병제를 공포하고 학병제를 실시하면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었다. 전황은 악화일로인 가운데 치안유지법에 의거한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악법이었다. 과연 여름방학 중이었던 그해 7월 10일 송몽규가 함께 하숙하던 제3고등학교 3학년생 고희욱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어서 7월 14일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 역시 같은 혐의로 하숙집에서 체포되어 시모가모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듬해인 1944년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2월 22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개정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운동)의 혐의로 윤동주에게 징역 2년을 언도하면서 이렇게 썼다.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의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 송몽규 역시 같은 혐의로 4월 13일 2년형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나란히 규슈 동쪽에 있던 후쿠오카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죽음의 길, 새로운 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2월, 그의 고향집에 갑자기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란 전보가 배달되어 가족들을 경악하게 했다. 아버지와 당숙 윤영춘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는 사이에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요지의 우편통지서가 고향에 배달되었다. 그처럼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위독 소식이 날아왔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상황이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후쿠오카형무소에 다다른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런데 초췌한 몰골의 송몽규는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 증언 때문에 두 사람이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추측을 낳았다. 후쿠오카형무소 측은 가족들에게 윤동주의 운명시각이 오전 3시 36분임을 통보했다. 그때 일본인 간수가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전해주었다. 윤동주의 시신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방부제 처리를 해두었으므로 생시와 똑같았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3월 6일 용정중앙감리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치러졌고, 《문우》에 발표했던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 그로부터 하루 뒤인 3월 7일 형무소에 남아있던 송몽규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해 단오 무렵 가족들은 묘소에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워 그를 기렸고, 반 년 뒤 일제는 패망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윤동주의 육필원고 윤동주 사후 2년이 지난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문과 함께 〈쉽게 씌어진 시〉가 발표되었다. 경향신문 기자로 재직하고 있던 친구 강처중의 노력 덕택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1948년 1월 30일,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자선시집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유품 속에 있던 12편을 합친 31편을 모아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했다. 이 뜻 깊은 시집의 서문에서 정지용은 이렇게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강처중은 발문에서 또 이렇게 썼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그해 12월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누이 윤혜원이 윤동주의 중학 시절의 육필원고와 스크랩, 사진 등을 들고 남편 오형범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그 결과 1955년 2월, 윤동주 사망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다시 간행되었고, 이후에도 수차례 개정증보를 거듭했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윤동주, 송몽규의 심문 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투옥 혐의가 밝혀졌다. 또 2년 뒤인 1979년 1월에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를 통해 윤동주와 송몽규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이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옥사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그에 따라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04년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가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온전하게 복원하고 의미를 새긴 《윤동주 평전》(푸른역사)을 출간했다. ===========================================     출생일 1917. 12. 30, 북간도 명동촌 사망일 1945. 2. 16, 일본 후쿠오카[福岡] 국적 한국 요약 일제 말기,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가족 모두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했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41년 졸업할 때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2년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했다.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송몽규와 함께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일제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아명은 해환(海煥).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하고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 〈공상〉을 발표했다. 〈공상〉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뒤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42년 도쿄[東京]에 있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각각 2, 3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고, 1968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문학세계 중학시절 동시 〈병아리〉·〈빗자루〉·〈오줌싸개 지도〉·〈무얼 먹구 사나〉 등을 발표했고, 연희전문학교 시절 〈조선일보〉에 산문 〈달을 쏘다〉와 교지 〈문우〉에 시 〈자화상〉·〈새로운 길〉 등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대부분 현실세계의 모순과 그 모순을 초월하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지만, 초기의 시 몇 편은 예외적이다. 초기에는 평화롭고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주로 읊었는데, 행복한 유년시절을 노래한 동시 〈햇비〉와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심(童心)을 노래한 시 〈반딧불〉·〈굴뚝〉·〈병아리〉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러한 사춘기의 낙관적인 생각은 시 〈눈〉에 와서 어느 정도 걸러지고 1937~38년에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읊었다. 그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갈등을 나타낸 좀더 성숙해진 시를 썼는데 이때의 시의식은 때로 자전적 성격에서 출발하거나 종교적 의식의 천착(穿鑿)으로 이어지고, 때로 민족의식과 시대의식으로 발전하거나 고향지향성으로 나타났다. 대표시 〈자화상〉(1939)은 자전적 시로 실존적 의식세계의 출발점이 되며, 〈별 헤는 밤〉(1941)·〈참회록〉(1942) 등에 나타나는 자아성찰과 미래를 향한 낙관적 의지, 실존적 윤리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달밤〉(1937)·〈유언〉(1937)·〈아우의 인상화〉(1938) 등에는 고독과 비애를 실감나게 담아냈다. 이러한 자전적 성격은 대표시 〈별 헤는 밤〉의 결구에 집약되어 있는데, 그것은 부끄러움과 절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자신의 지나간 삶을 토대로 자랑스러운 밝은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의 목소리였다. 또한 〈사랑의 전당〉(1938)에서 보이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은 〈십자가〉(1941)에 이르면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바탕을 둔 비장미로 바뀌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려는 결의를 실존적인 성실성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희생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나며 신앙인으로서의 실천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밖에 이러한 자기 희생과는 또다른 그리스도교적 세계인식을 보여준 시로 1941년에 발표한 〈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새벽이 올 때까지〉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부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그는 일제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의 현실에 정서적 연원을 둔 작품을 많이 썼다. 〈십자가〉를 비롯하여 〈무서운 시간〉(1941)·〈또다른 고향〉(1941)·〈간 肝〉(1941)·〈쉽게 씌어진 시〉(1942) 등이 그 예인데, 〈무서운 시간〉에서는 행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히려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이 나온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했는가 하면, 〈또다른 고향〉에서는 상황의식에 따른 자아성찰과 행동을 위한 결단을 내비치고 있다. 〈간〉에서는 구토지설(龜兎之說)과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연결시켜 고통스러운 현실과 맞서 유혹과 억압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본 유학중에 쓴 〈쉽게 씌어진 시〉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고독을 토로하고 시대의 어둠에 대해 시로 대응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또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되는 〈서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시로서, 특히 '하늘·바람·별'의 이미지가 서로 대응되어 그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정병욱이 그의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소중히 간직해두었다가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한 이후, 시집으로 〈별 헤는 밤〉(1977)·〈윤동주시집〉(1984) 등이 나왔다.
1995    [쟁명] - 서로서로 교류의 장을 열자(2)... 댓글:  조회:4492  추천:0  2017-01-24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中 조선족 자치주, 9억원 들여 새 단장 윤동주, 옌볜서 태어났지만 서울·평양·교토서 주로 활동… 모든 작품 한글로만 표현 유족·관련단체, 공식항의 꺼려 "中서 여러 기념사업 진행… 문제 삼기 곤란한 측면 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당시 윤동주. 그는 그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다 실패했다.   중국이 중국 옌볜에 있는 시인 윤동주 생가(生家)를 관광지로 개발하며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소개하고 윤동주 시를 중국어로 번역해 홍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6일 오후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시 밍둥촌(明東村)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를 찾은 '세시봉 친구들'의 가수 윤형주(66)씨는 새 단장된 윤동주 생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가에는 그전에 없던 시멘트 벽과 문이 생겼고, 가로 약 4m, 세로 약 2m 크기의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혀 있었다. 윤동주 생가는 룽징시가 우리 돈 9억여원을 들여 4개월간 공사해 정비했으며 작년 8월 준공식을 열었다. 윤동주의 외숙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에서부터 윤동주 생가까지의 흙길이 대리석으로 바뀌어 말끔해졌지만, 이 과정에서 명동교회 옆 십자가가 옮겨지고 곳곳에 중국어로 번역한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조선족의 국적은 중국이다. 윤동주는 룽징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작품을 한글로 썼으며,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시기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기, 일본 교토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기에 썼다. 윤동주의 육촌 동생으로 매년 이곳을 찾는다는 가수 윤형주씨는 "윤동주 시인의 원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며, 북간도로 이주한 것일 뿐 이민을 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국 국적의 시인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집안 어르신들이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는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라는 구절이 있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중국 국적의 소녀들을 '이국 소녀'라고 일컫는 등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도리어 한글로만 시를 쓰는 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윤동주 생가 주변 곳곳에는 중국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놓여 있다. 중국어로 번역돼 돌에 새겨진 윤동주의 시 ‘십자가’. 윤동주가 짓고, 리융이 번역했다고 적혀 있다. /이미지 기자 윤동주의 생가가 백두산 관광을 가는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되면서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쓰인 경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한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한 관광객은 "우리나라의 대표 시인으로 알고 있던 윤동주가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고 적혀 있어서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게 잘못된 건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2010년 겨울,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시 밍둥촌(明東村)에 있는 윤동주 생가에는 ‘윤동주 고향집’이라는 팻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생가 앞 터와 진입로는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이었다(사진 위). 룽징시는 작년 8월 준공식을 열고 윤동주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했다. 시멘트로 된 담벼락과 문이 생겼고, 경계석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사진 아래). /전주기전대학 제공, 이미지 기자   중국이 그간 방치돼 있던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복원하고 조선족으로 홍보하는 것은 윤 시인을 중국 소수민족의 시인으로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고, 그와 관련된 관광지 개발로 관광 수입을 증대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새로운 형태의 동북공정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내의 윤동주 유족이나 관련 단체는 이를 공식적으로 항의하기를 꺼리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유족은 "지난 10여년간 윤 시인의 생가를 왕래해왔지만 중국 조선족이라고 명칭을 붙인 건 처음 봤다"면서도 "윤동주에 대한 여러 가지 기념사업이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입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윤동주선양회 최태식(54) 회장은 "지금 생가가 있는 지역이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든 상황"이라며 "조선족들이 윤동주 시인을 알리기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다가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 삼기 곤란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 조선족들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옌볜대학교의 한 교수는 "위대한 시인은 국경을 넘어서 존재하고, 윤동주가 더 많이 알려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시인인 동시에 중국 조선족의 시인이라고 하는 게 더 좋지 않으냐"고 말했다. ========================================================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유작 발행식.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선전부에서는 2012년 8월 27일 선전부판공실에서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의 유작 번역작품발행의식을 열고 각급 선전부문에서 이를 계기로 진일보로 윤동주의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고향을 사랑하는 정신을 깊이 학습하고 널리 선전하여 연변을 보다 빨리, 좋게 건설하는데 기여할것을 호소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연변인민출판사와 북경출판사에서는 련합으로 윤동주의 유작 번역작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仰望天空毫无愧恨)》(리영 역)을 헌례작품으로 출판하였다.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저명한 저항시인이며 민족시인인 동시에 세계적인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룡정 명동촌에서 태여나 17세부터 시를 발표하여 짧디짧은 28년간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고 저항적이고 정열적이며 책임감높은 령혼의 시편들과 우리 민족 언어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일관된 불후의 시작을 펴내 민족의 걸출한 시인으로 각인되였다. 윤동주생가확건공사준공식에 참가한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주임(오른쪽)과 윤동주유가족. 윤동주는 일본에서도 아시아의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부상하였다. 1995년 일본 도시샤대학 아마데와교정에 윤동주시인시비가 처음 세워진 뒤를 이어 교또의 조형예술대학교정에서도 윤동주시비제막식을 성대히 치르는 등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졌다.교또조형예술대학 교정은 윤동주시인이 일본 도시샤대학 류학시절 주숙했던 아빠트가 있는 곳으로서 윤동주시인이 그곳에서 창작의 불꽃을 지폈던 마지막 보금자리였다. 시인은 그곳에서 조선글로 시를 썼다는 리유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루명을 쓰고 1943년 10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1945년 2월에 일본 후꾸오까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한국에서는 또 윤동주의 시와 사적자료를 대학입시시제에 올려 한때 윤동주를 모르면 대학입학이 어려울 정도로 민족시인을 부활시켰다. 한국에서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고 윤동주를 우상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 중한수교후로 윤동주의 생가를 찾는 관광객들이 한해에 수만명에 이르렀다. 윤동주생가 건설관리사업에 직접적인 지지와 지원을 보내준 룡정시 당위와 정부 관원들 유가족과 함께. 윤동주시인은 연변에서 태여났고 연변에서 자랐으며 연변에서 공부하고 연변에서 시를 쓴 우리 조선족시인이다. 연변에서는 지난 80년대 중반으로부터 윤동주에 대한 연구와 발굴 사업을 진척해왔고 학술계와 민간단체, 조선족학교들에서 각종 문학제, 문학상, 포럼, 백일장을 전개하면서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였다. 중국조선족중학생잡지사에서는 올해로 13회째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을 치르면서 윤동주의 녀동생부부를 오스트랄리아로부터 모셔오군 하였다. 《윤동주문학상운영위원회》고문을 맡고있는 윤동주 매형 오형범씨는 몇달전 안해를 저세상에 보내고 한국에 있는 따님 오인경녀사와 함께 이번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유작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발행식》에 모처럼 동참하여 윤동주의 고향에서 윤동주의 시의 정신을 계속 이어가고 발양해나아갈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계시던 윤동주의 생가. 룡정시 당위와 정부에서는 변강문화를 대대적으로 번영발전시키는 대환경속에서 민속문화를 발굴하고 발전시키며 관광문화산업을 대폭 춰세우기 위하여 북경삼한만방과학기술발전유한회사와 손잡고 윤동주생가를 확건하는 공사를 벌려 28일 준공식을 가졌다.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며 원 중앙통전부 부부장,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는 이 준공식에 참여하여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생가》라는 제자를 써주셨다. 연변주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 리득룡, 연변주정협 부주석 조룡 등은 윤동주의 유작과 생가는 귀중한 문화유산과 정신적재부이며 훌륭한 인문자원과 문화력량으로서 이에 대한 발굴, 보존, 관리 사업은 중화민족문화보물고를 풍부히 하는 훌륭한 사업이라 한결같이 긍정하였다. 수십년간 윤동주를 기리고 그의 시의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물심량면의 기여를 해온 해내외 인사와 민간단체, 문학조직 성원들은 윤동주기념사업에 대한 정부적차원의 지지와 지원이 있음으로 하여 앞으로 본격적인 발전을 거듭하리라 기대해보았다.     [동포세계신문=편집국] 한국의 언론매체가 연변 용정 명동촌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 표지석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지난해 2016년 10월 10일자 중앙일보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중국 생가에 표지석에 조선족이라는 표현이 있어 몇 년 째 논란이 되고 있다”, “'조선족'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윤동주 시인을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본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하면서 “지금이라도 '조선족'이라는 표현이 버젓이 적힌 윤동주 시인의 생가 표지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중앙일보는 “일본 검찰이 공개한 윤동주에 대한 재판 기록들을 봐도 윤동주 시인의 본적은 함경북도로 한국인임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윤동주의 가족이 일본의 폭압을 피해 북간도로 피난을 갔지만 국적이 바뀐 적은 없다.” “윤동주 시인이 '별 헤는 밤'에서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이라고 썼다. 중국에서 흔히 쓰는 이름을 '이국적'이라고 표현했다. 중국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라고 주장했다.   윤동주 시인이 조선족으로 표기된 시점은 2012년 중국 길림성에서 윤동주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부터로 보고 있다. “2014년 중국은 윤동주 생가를 ‘국가급 관광지’로 결정한 바 있다. 이는 관광 수입 증대의 목적뿐 아니라 중국이 조선족들이 한국 사회로 흡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일 가능성이 높다. 즉, 조선족의 정서적 이탈을 막기 위해 윤동주를 조선족 시인으로 만들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중앙일보는 분석했다.   또한 이용자가 20억 명이 넘는 중국 대표 포털 사이트 바이두 역시 윤동주 시인의 국적이 중국, 민족은 조선족이라고 적혀있어 논란이 됐다고 전했다.    전남일보 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은 10월 6일 칼럼에서 “조선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한민족 계열의 소수민족이다. 1910~30년대 만주에 거주한 사람들과는 애시당초 다르다. 1909년 청ㆍ일 간도협약에 '도문강 이북의 간도지역 내 한국민 거주를 승인한다'고 돼 있다. 간도 거주 한국민은 청의 보호(통제)를 받지만, 그 나라 백성은 아니었다.”면서 “윤동주는 간도에 거주한 한국민이지, 중국 국적 조선족은 결코 아니다. '중국 거주 한국민 윤동주 시인 생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윤동주 시인은 연변 용정을 중심으로 조선족 문인들 사이에서도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어 윤동주 생가의 중국조선족애국시인 표기가 고쳐질 지가 주목된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으로 변한  윤동주 生家 비석엔… 韩 . 伟大诗人莫名奇妙变“中国诗人” 中 조선족 자치주, 9억원 들여 새 단장 윤동주, 옌볜서 태어났지만 서울·평양·교토서 주로 활동… 모든 작품 한글로만 표현 유족·관련단체, 공식항의 꺼려 "中서 여러 기념사업 진행… 문제 삼기 곤란한 측면 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당시 윤동주. 그는 그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다 실패했다. ▲1941年从延禧专门学校毕业时的诗人尹东柱。   중국이 중국 옌볜에 있는 시인 윤동주 생가(生家)를 관광지로 개발하며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소개하고 윤동주 시를 중국어로 번역해 홍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经证实,韩国诗人尹东柱竟然在中国被介绍为“中国朝鲜族爱国诗人”。 지난 6일 오후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시 밍둥촌(明東村)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를 찾은 '세시봉 친구들'의 가수 윤형주(66)씨는 새 단장된 윤동주 생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가에는 그전에 없던 시멘트 벽과 문이 생겼고, 가로 약 4m, 세로 약 2m 크기의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혀 있었다.                                        本月6日下午,知名歌手尹亨柱来到位于中国延边朝鲜族自治州龙井市明东村的尹东柱故居,看到重修的故居后大吃一惊。这里出现了原来没有的水泥墙和门,长约4米、宽约2米的界石上写着“中国朝鲜族爱国诗人尹东柱故居”。     윤동주 생가는 룽징시가 우리 돈 9억여원을 들여 4개월간 공사해 정비했으며 작년 8월 준공식을 열었다. 윤동주의 외숙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에서부터 윤동주 생가까지의 흙길이 대리석으로 바뀌어 말끔해졌지만, 이 과정에서 명동교회 옆 십자가가 옮겨지고 곳곳에 중국어로 번역한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龙井市投资9亿多韩元对尹东柱故居进行翻修,工程进行了四个月,去年8月举行了竣工仪式。尹东柱的舅舅金跃渊成立的明东书塾通往尹东柱故居的土路被铺上大理石,看上去干净整洁,但明东书塾旁的十字架被搬走,而且到处都是翻译成中文的诗碑。   조선족의 국적은 중국이다. 윤동주는 룽징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작품을 한글로 썼으며,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시기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기, 일본 교토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기에 썼다. 윤동주의 육촌 동생으로 매년 이곳을 찾는다는 가수 윤형주씨는 "윤동주 시인의 원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며, 북간도로 이주한 것일 뿐 이민을 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국 국적의 시인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집안 어르신들이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朝鲜族的国籍是中国。尹东柱虽然出生在龙井,但他所有作品都是用韩文写的,而且大部分作品都是在他就读于平壤崇实初中、首尔延禧专门学校以及在日本京都留学时创作的。歌手尹亨柱是尹东柱的堂弟,每年都会来到这里。他说:“诗人尹东柱的原籍是咸镜北道会宁,他只是移居到北间岛,而不是移民,说他是中国诗人纯属无稽之谈。” 尹亨柱叹了一口气说:“如果长辈们知道,会气得从坟墓里跳出来。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는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라는 구절이 있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중국 국적의 소녀들을 '이국 소녀'라고 일컫는 등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도리어 한글로만 시를 쓰는 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延世大学社会系教授柳锡春表示:“正如尹东柱作品《数星星的夜晚》中的诗句‘佩、镜、玉这些异国少女们的名字’,诗人将中国籍少女称为‘异国少女’,并不认为自己是中国人。而且他只用韩文写诗,作为韩国人的认同感极其坚定。”  
1994    [쟁명] - 서로서로 교류의 장을 열자... 댓글:  조회:5244  추천:0  2017-01-24
[헤럴드경제=이슈섹션] 중국 최대 검색 포털사이트 바이두에 윤종주 시인을 검색하면 ‘조선족’이라고 표기되는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2016년 10월 6일, 민간 외교사절단 반크에 따르면 바이두 백과사전은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민족은 ‘조선족’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윤동주와는 전혀 맞지 않는 설명이다.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근거는 전무하다. 조선족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중국 정책에 따라 생겨난 용어로, 윤동주 시인은 2차 대전 이전 출생자이기 때문에 조선족으로 분류할 수 없다.   또, 윤동주의 생가가 중국 길림성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의 본적은 함경북도다. 이 사실은 일본 검찰의 재판 기록에도 명시돼 있다. 윤동주의 국적은 명백히 한국이다. 이 외에도 바이두 백과사전에 등재된 독립운동가의 국적은 중국, 조선, 한국, 북조선 등 오표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 국적 표기는 바르게 하더라도 민족을 오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경우 국적은 한국이지만 민족은 조선족으로 표기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백과사전 소개가 중국의 ..공정과 연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크 박기태 단장은 “바이두 백과사전 운영진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정확한 정보를 알리고 시정을 요청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 백과사전에 윤동주 시인이 중국인으로 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10월 6일 민간 외교사절단 반크는 “바이두 백과사전이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소개했고 민족은 조선족으로 기재했다”고 알렸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한반도에서 태어나 1945년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수감됐다가 몇개월이 지난 후 사망했다. 이외에도 바이두 백과사전은 독립운동가의 국적을 중국과 조선, 한국, 북조선 등으로 표기하는 등 오류투성이다. 백범 김구의 국적은 한국으로 올바르게 표기돼 있으나, 민족은 조선족으로 적어놨다. 시인 김소월의 국적을 북조선, 민족을 조선족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한편 민간 외교사절단 반크는 지난 1999년 사이버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비정부 민간단체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국가정보를 해외에 알리고 교정권고를 하는 등의 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출처=바이두 백과사전] /김상민기자 ============================ 민족시인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한 바이두 백과사전.  바이두 백과사전 캡처   중국 최대 검색엔진인 바이두에서 운영하는 ‘바이두 백과사전’이 시인 윤동주를 중국인이라고 소개하는 등 일제강점기 시인과 독립운동가의 국적 등을 잘못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일 민간 외교사절단 에 따르면 바이두 백과사전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대표적 시인인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민족을 ‘조선족’으로 소개하고 있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고문과 생체실험을 받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 검찰이 공개한 재판 기록과 판결문에도 그의 본적은 ‘함경북도’다.  이 밖에도 바이두 백과사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국적을 중국과 조선, 한국, 북조선 등으로 원칙 없이 표기하는 등 오류투성인 것으로 파악됐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국적은 ‘한국’으로 올바로게 표기돼 있으나, 민족은 ‘조선족’으로 적어놨다. 또한 시인 김소월의 국적을 ‘북조선’, 민족을 ‘조선족’으로 해놨고, 독립운동가 이봉창의 국적은 ‘조선’, 민족은 ‘조선족’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용운과 시인 이육사에 관해서는 ‘한국’ 국적으로 적었으나 민족은 아예 표시하지 않았다. 친일파인 이완용의 경우 국적은 ‘한국’, 민족은 ‘조선족’으로 분류했다.    바이두 백과사전의 오류를 찾아낸 이는 반크의 ‘사이버 외교’관인 중학교 3학년생 이시우군으로, 그는 최근 반크에서 사이버 외교관 교육을 받고 활동하면서 이 같은 사실을 제보했다.   이군은 “어머니가 백두산을 오른 뒤 중국 지린성 룽징의 윤동주 생가를 찾았는데, 안내원이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내게 알려줬다”며 “곧바로 바이두에서 ‘윤동주’를 검색해보니 국적이 ‘중국’으로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이군은 “일제강점기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이자 애국시인을 이렇게 중국인으로 표기해놓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바이두는 하루 이용자가 20억명이 넘는 중화권의 독보적인 인기 포털사이트로, 이 중 세계 최대 중문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바이두 백과사전은 1000만건 이상의 문서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영어 위키백과의 2배, 중국어 위키백과의 12배 이상이다. 바이두 백과사전을 찾는 하루 방문자는 2014년 기준 4억명 이상인 것으로 전해졌다.  반크는 바이두 백과사전 운영진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정확한 정보를 알리고 시정을 요청할 방침이다. 박기태 반크 단장은 “3·1절이나 광복절 때만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억하고 기리는 활동을 넘어 1년 365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제대로 홍보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크는 지난달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국내 청소년과 전 세계인에게 알리는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앞서 미국·일본·중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한글과 영어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배포하기도 했다. 박 단장은 “앞으로 전 세계 백과사전과 역사 웹사이트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홍보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고영득 기자 ================================== 류영현기자의 역사항쟁지 다시보기   윤동주 시인이 서거한 지 올해로 71주년이 됐다. 그와 관련된 시집과 비평서 출간이 잇따르고, 영화 ‘동주’도 개봉 한 달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영화의 무대인 윤동주 생가는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 명동촌이라는 한인마을에 있다. 명동촌은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집은 1900년경 할아버지 윤하현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 칸짜리 남향인 안채와 동향 사랑채가 전통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집은 윤동주 시인의 가족이 모두 떠난 뒤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그 후 1994년 8월 연변대학 조선연구센터의 주선으로 복원됐다.     윤동주 시인의 가족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외숙부인 김약연 선생의 영향이 크다. 그는 1899년 만주로 이주한 다음 북간도 화룡현에 자리를 잡고 명동교회와 명동학교, 간민교육회를 설립했다. 윤동주 생가 입구에는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중국은 윤동주 시인을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할 것 같아 불안해진다.   연변자치정부는 2012년 윤동주 생가 주변 1만㎡ 규모를 포함시켜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진행했다. 담장과 대문, 정자를 새롭게 세우고, 정자길을 조성했다. 생가 내부에는 정교하게 조각한 시비와 고풍스러운 기와집으로 윤동주 전람관을 세웠다. 그리고 생가 입구에는 한글과 한자를 병행한 대리석 표지석이 들어섰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中國 朝鮮族 愛國詩人 尹東柱 故居)’라고 한글과 한자로 나란히 새겨 놓았다.   왜 그들은 갑자기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이라고 표기하게 됐을까?  윤동주 시인의 선조들은 일제의 만행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으로 이주한 선조들은 엄밀히 말하면 대부분 ‘무국적자’였던 셈이다. 한반도에 거주하지 않다 보니 일제가 강제 실시한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고, 청나라 국적을 취득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1958년 호커우(戶口)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55개 소수민족을 호구증에 표기했고, 조선족이라는 것도 이때 생겼다.  따라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 같은 논리라면 1920~30년대 만주를 무대로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수많은 열사들도 조선족 중국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 항일열사의 업적마저 중국 역사의 일부로 만들려는 동북공정이 적용되면 안 된다. 머지않은 후세에 윤동주 시인이 중국인으로 불리게 될까봐 벌써부터 등골이 송연해진다.   용정에 오면 윤동주(尹東柱,1917.12.30 ~1945.2.16)의 흔적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일제말기의 2대저항시인으로 우리가 달달 외었던 윤동주는 용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시, 별헤는 밤, 자화상,,,,, 등 우리가 외고 있는 시가 가장 많은 시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도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명동明東'은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1899년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라고 한다. 이전에 이 땅의 이름은 '부걸라재(비둘기 바위)'였으나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이라는 의미로 ‘명동촌’이라 이름지었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인 윤재옥(尹在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북간도 이주 역사로 볼 때 윤동주 집안은 거의 초창기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중국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1920~30년대에 옮겨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수성가했다. 그리고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 때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명동 한인촌의 식구가 되었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마을이었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이 이상설 열사의 헤이그 특파로 문을 닫게 되자, 뒤를 이어 명동촌에서 '명동서숙'이 문을 열었다. 명동서숙에서 출발한 명동학교는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학교로 자리잡았다. 1910년 명동학교에 중학교 과정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명동촌은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윤동주 생가로 들어가는 길목 1909년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도 15세 나이로 명동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듬해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하고 1913년 3월 문재린(문익환의 부친) 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갔다와서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동주 생가의 대문과 입구 비석 윤동주의 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조부 윤하현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칸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 구조로 된 집이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용정 은진중학교로 진학하면서 그의 집도 함께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 후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용정시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했고 윤동주 생가는 1994년 연변대학 조선연구센터의 주선으로 중국 정부가 지원해 복원 건립했다. 그 후 2012년 중국조선족자치구가 9억여 원을 들여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전시하기 위한 전람관과 작품비석을 세운 정원 등을 조성했는데 전람관은 아직 문이 잠겨있다. 2012년 공사 과정에서 위 사진(오른쪽)의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는 거대 비석을 정문 바로 옆에 세웠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이걸 보면 헐! 하는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윤동주 시인이 중국 조선족? 따지고 보면 윤동주 시인은 증조부가 북간도 이주 1세대이니 조선족임에 틀림없고, 조선족은 현재 중국인이니 이 말이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만, '애국'이라는 말에 들어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 국경 안에 있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나 유명인의 유적지를 복원하는 일은 중국보다 우리나라가 먼저 관심을 갖고 앞장서야 할 것이다. 어차피 이런 유적지를 관람하는 이들은 거의가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우리가 무관심할 때 중국 정부에서 지원하여 건립한 것에 대해 우리가 뒤에 가서 왈가왈부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윤동주 생가 옛터 1994년 윤동주 생가 옛터를 복원하면서 세운 비가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명동교회와 그 맞은편에 전람관이 있고 윤동주의 시가 새겨져 있는 많은 시비가 있는 정원을 지나면 가장 안쪽에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가 있다.  비록 새로 건축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에도 그의 집은 명동촌에서도 벼농사를 하는 몇 집 가운데 하나로 가세가 넉넉했다고 한다.    윤동주 시비가 있는 정원     < 꿈은 깨어지고> 윤동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자연을 벗삼아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또한 명동교회의 장로였던 할아버지와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으로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를 체득하며 1925년 만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명동소학교 시절부터 윤동주는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동기동창으로 윤동주 집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김약연의 조카로 윤동주와 외사촌간이었던 김정우, 그리고 문재린 목사의 아들인 문익환 등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문학 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소년의 꿈을 키우던 이들은 5학년 때인 1929년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해서 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놀라워라! 초등학교 5학년 아해들이 원고를 모아 스스로 잡지를 발간하다니!   한국에서 온 단체여행객이 윤동주 비석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2016년 윤동주 서거 71주기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등과 함께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녔다. 옛날에는 정규 교육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여간이 허락하는 대로 학교를 다닌 것 같다.  1932년 4월 용정에서 당시 16세이던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한다.  우리가 잘 아는 고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윤동주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됐다. 문목사님은 윤동주와 함께 평양 숭실중학교도 함께 다닌다. 송몽규는 이후 윤동주와 함께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중에 참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생각만 해도 가슴 먹먹해지는 이름들이다. =============================== 중국 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의 백과사전(baike.baidu.com)이 윤동주 시인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김소월 시인의 국적을 '북조선', 이봉창 열사의 국적은 '조선'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단장 박기태)는 2016년 10월 6일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가나 시인 등에 대한 오류를 최근 확인했다"며 "서한을 보내 시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바이두 백과사전의 오류는 사이버 외교관인 중학교 3학년생 이시우 군이 찾아냈다. 그는 최근 반크에서 사이버 외교관 교육을 받고 활동해왔다.  그는 "어머니가 최근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의 윤동주 생가를 찾았는데, 안내원이 시인을 '조선족'이라고 말했다고 내게 알려줬다"며 "곧바로 바이두를 방문해 '윤동주'를 검색해보니 국적이 '중국'으로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는 일본 검찰이 공개한 재판 기록과 판결문에도 본적이 함경북도로 기록돼 있다.   반크는 지난달부터 널리 알려지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국내외 사람들에게 알리는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바이두는 하루 이용자가 20억 명이 넘는 중화권의 포털 사이트로, 이 중 바이두 백과사전은 2006년에 시험판이 출시돼 1000만 건 이상의 문서를 보유하고 있다. 바이두 백과를 찾는 하루 방문자는 2014년 기준 4억 명 이상이다.  /서정보기자    
1993    [쟁명] - 불멸의 영원 - "윤동주 현상"... 댓글:  조회:3549  추천:0  2017-01-24
  망각을 넘는 불멸의 기억 ‘윤동주 현상’       하나. 개봉된 윤동주 관련 영화가 우리에게 은은한 충격과 감동을 던져준 바 있다. 영화 ‘동주’는 윤동주의 삶과 죽음을 영상화한 거의 최초의 대중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평생을 함께한 오랜 벗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이겨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는 이준익 감독의 포부는, 한 세기 전의 신산한 세월을 꼼꼼하게 구성해 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달성된 것 같다. 그들의 일대기를 흑백 화면에 담아 고고학적 속성을 높인 것도 실감을 더해주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할 때 몽규가 동주에게 ‘정지용시집’이나 ‘사슴’을 전달하는 장면은, 그 시집들이 당선 시점보다 훨씬 뒤에 출간된 것을 감안하면 잘못된 고증이다. 동주, 몽규와 동기로 나오는 강처중은 윤동주의 작품 일부를 보관하였다가 해방 후에 대중에게 공개하였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의 발문까지 쓴 분인데, 영화에서는 다소 코믹한 단역에 머물러 참으로 아쉬웠다.   시의 창작 시점과 화면 시점이 맞지 않는 것도 꽤 있었고, 시가 낭송될 때는 자막 처리를 하여 대중의 이해를 도왔어야 했을 것 같다. 그리고 동주가 호감을 가진 두 여성이 등장하는데, 옥천 출신의 이화여전 학생 이여진은 추정에 불과한 인물이고, 일본 여성 쿠미는 철저히 허구적인 인물이었다(물론 영화에 이 여성들이 나온 것에 대해 불만은 전혀 없다.). 도쿄 릿쿄(立敎)대학에서 공부할 때 동주의 보고서가 깨끗한 A4 용지에 컴퓨터 글씨체로 제출된 것이나, 동주의 시집을 그 엄혹하던 시절 일본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하겠다는 발상을 쿠미가 하는 데서는 실소를 머금기도 했다. 몽규가 교토(京都) 친구들에게 동주를 이종사촌으로 소개하는 장면도 있는데, 몽규가 동주에게 고종사촌이니 몽규에게 동주는 ‘외사촌’이 맞다.   하지만 이러한 ‘옥에 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윤동주의 문학적, 사상적 생애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받고 죽어 가는 조선 청년들의 마지막을 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특별히 송몽규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린 점 또한 고무적이라 생각된다. 극중에서 정지용으로 출연한 배우 문성근은, 윤동주나 송몽규의 북간도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니까, 일종의 우정 출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라고 그의 시 ‘동주야’에 적었는데, 우리는 죽어 ‘불멸의 영원’이 되고 살아 ‘뜨거운 역사’가 된 두 선구자의 아름다운 만남을 여기서 느끼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윤동주-송몽규-강처중-문익환으로 이어지는 청춘의 아름다운 기억을 바라보고 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논쟁도 있었고,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서둘러 마친 시점 직후이기도 했던 터라, 우리는 ‘동주’가 던져준 전혀 다른 민족의 ‘빛’과 ‘상처’를 더욱 강렬하게 느낀 것일 터이다. 그 아름답고도 가혹하기 짝이 없는 빛과 상처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둘.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하다가 독립운동 죄목으로 체포되어 차가운 감옥에서 1945년 2월 16일 젊은 날을 마감하였다. 27년 1개월 남짓의 삶이었다. 이러한 생애를 거느린 윤동주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시와 삶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온 실례일 것이다. 그의 순결한 언어와 비극적 죽음이 이러한 결과를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고, 그는 이렇듯 불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결정(結晶)인 시편들을 남기고 그의 ‘또 다른 고향’으로 떠났다.   그런가 하면 윤동주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숭실중학)과 남한(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릿쿄대학,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유학하였으니 그야말로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공간 편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한중일(韓中日)에 모두 시비가 세워진 유일한 시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윤동주를 통해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라는 공간 확장의 기억 단위를 가질 수 있고, 윤동주의 현재성이 이러한 동아시아적 공간 확장성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심각한 ‘결손 민족’으로 과장하면서 하루빨리 일본에 동화되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신념을 표현했던 그때의 사람들은,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의 당위성을 고무하면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폭력적 담론들을 무반성적으로 양산하였다. 최근 탈(脫)국가주의의 목소리들이 점증하고는 있지만, 아직 국민국가 단위의 실천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윤동주가 보여주는 기억의 정치학을 경험하고 확장하는 일은 시의적으로도 썩 종요로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이, 치욕스러울 정도로 거듭되는 망각 관행에 반성적 함의를 던지게 될 것이고, 모든 타자를 자신의 안으로 해소하면서 강력한 동일성을 확보하려 했던 일제의 ‘전도된 오리엔털리즘’ 담론에 천연스런 논리로 부역했던 이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윤동주라는 기억 단위를, 국민국가 바깥으로 모든 것을 밀어내려는 담론 기획과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기원의 기억 상실’을 극복하는 자료로 간직해야 한다. ‘기원의 기억 상실’이란 기억과 망각의 장을 통해 기원이 은폐되고 자연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 자연화된 기억은 계급과 성 그리고 인종의 위계적 차별화를 지움으로써 한 개인을 동질화된 집단으로 호출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기제이다. 그것은 그래서 식민지 경험을 ‘원경(遠景)’으로 처리하는 이데올로기적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점에서 윤동주는 이중적 망각, 곧 ‘식민지’와 ‘언어’에 대한 망각에 대하여 저항하는, 기억의 정치학 혹은 미학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자료로 일정한 항구성을 가질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는 세 번 주인공들이 무언가를 찢는 장면이 나오는데, 몽규가 친일 인사의 작품을 찢고, 동주가 창씨개명 용지를 찢고, 동주가 서명 문서를 찢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세 지점의 파열 장면은 ‘친일-제국주의’의 흔적을 ‘윤동주’라는 이름으로 내파(內破)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시집 제목이 뭐냐고 묻는 쿠미의 질문에 동주가 또박또박 조선어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말하는 장면 역시, 윤동주 시가 ‘일본어-조선어’의 갈등을 넘어 조선어의 존재증명에 바쳐진 결과임을 알게 해주지 않는가.   셋.    윤동주는 적국(敵國)에서조차 역사의 ‘기념비(monument)’로 남은 거의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도시샤대학 교정에는 정지용과 윤동주 두 사람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시 정신의 두 정점을 만나게 해준다. 이렇게 늙지 않는 젊음으로 남아 누리는 윤동주만의 예외적 특권은, 비극적 생애를 불멸의 기억으로 바꾸어내는 예술사의 속성을 충족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시편들을 우리 현대시사의 정전으로, 교육 자료로, 더 활력 있는 젊음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최근 윤동주를 기억하고 각인하려는 지향과 실천이 여러 차원에서 일어났다. 지난해 3월 6일 다큐멘터리 ‘불멸의 청년 동주’가 KBS 1TV를 통해 방송되었고, 6월 3일에는 백상예술대상에서 ‘동주’가 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한 해 내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과 재판은 원본 그대로 인쇄되어 낙양의 지가를 끌어올렸다.   모두 망각을 넘어서는 불멸의 기억에 기여하는 실천적 움직임일 것이다. 그리고 내년 탄생 100년을 앞두고 윤동주를 역사적으로 기억하고 현재형으로 각인하려는 ‘윤동주 현상’이 일시적일 수 없는 이유들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작성자: 독고혁 // 에서 퍼옮.
1992    [쟁명] - 윤동주 한민족 시인... 댓글:  조회:3814  추천:0  2017-01-24
조선족 시인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서시’는 우리나라 성인이라면 모를 리 없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시를 지은 사람이 ‘중국 조선족 윤동주’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주 취재차 들렀던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시. 포장된 들길을 달려 도착한 밍둥춘(明東村) 윤동주 생가는 새 단장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전에 없던 시멘트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고, 정문도 만들어 놓았다. 정문 옆 바위에는 ‘中國朝鮮族愛國詩人尹東柱故居(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조선족의 국적은 중국이다. ‘조선족 시인 윤동주’라는 말에는 결국 그의 국적이 중국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동행한 지인들이 한마디씩 했다. ‘고구려 역사까지 빼앗으려 하더니 이제는 시인까지?’ ‘그러면 교과서의 원작자를 중국 조선족 윤동주로 바꿔야 하나?’ 윤동주는 분명 우리 한민족의 시인이다. 그는 어린 시절 룽징에서 자랐지만 왕성하게 작품 생활을 했던 시기에는 평양(숭실중학), 서울(연희전문), 교토(유학) 등에서 보냈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했지, 중국인을 위해 붓을 들지는 않았다. 모든 작품은 아름다운 한글로 쓰여졌다. 이런 그가 중국인이라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 조선족 동포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조선족 윤동주’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함께 방문한 한 옌볜대 교수(조선족)는 “조선족 문인들이 새 단장 사업을 주도했다”며 “바위 글씨도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주장을 지낸 이덕수씨가 쓴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단장된 윤동주 생가는 위기에 빠진 조선족 커뮤니티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조선족 사회는 지금 위기다. 젊은이들이 외부로 나가면서 옌볜지역 주민 중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7%에 불과하다. 1953년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중국의 보이지 않는 소수민족 동화정책으로 민족 정체성은 약화되고 있다. 현지에서 ‘조선족 윤동주’는 정체성 회복의 한 수단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동행 교수는 “한국이 옌볜지역 조선족 사회 발전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되물었다. ‘중국 다른 곳에는 수백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옌벤지역에는 제대로 된 투자 프로젝트 하나 없는 게 현실 아니냐’는 지적이다. 우리가 팔짱을 끼고 있는 사이 조선족 동포들은 그렇게 멀어지고 있다. 후대 조선족들은 ‘윤동주는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가? 통일을 준비하고 동북아 시대에 대비해야 하는 지금 말이다. 혹 우리는 후대들에게 ‘한 점 부끄럼’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한우덕/중국연구소 소장   [중앙일보] 2012.09.10   / 작성자 : 독고혁 // 에서 퍼옮. //////////////////////////////////////////////////////////////////////////////////////////////////////////   서울시인협회 '윤동주 100년의 해' 선포 "그의 시정신이 그립다" 11일 프레스센터에서 선포식, 100주년 맞이 다양한 프로그램 추진 예정   2017년 01월 11일 (수) 19:51:28 임동현 기자/박우진 인턴기자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인협회가 11일, 2017년을 '윤동주 100년의 해'로 선포했다. 서울시인협회(회장 유자효 시인)는 이날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선포식 행사를 가졌다. 이 선포식은 올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첫번째 문학단체 행사다.      ▲ '윤동주 100년의 해 선포식'에 참석한 서울시인협회 회원들 전미소 시인의 사회로 열린 이번 행사는 유자효 서울시인협회 회장의 축사와 선포식을 시작으로, '윤동주의 삶과 시 세계'를 주제로 이숭원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와 이근배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의 강연이 이어졌고, 서울시인협회가 추진 중인 '윤동주 문학여행'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었다. 유자효 회장은 "요즈음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 정신이 더욱 그리운 때다. 그의 시와 문학,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려고 애쓴 청년정신을 좇아 윤동주 시인을 더 많은 국민들이 사랑하고 기리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이숭원 교수는 '순결한 영혼의 불꽃, 윤동주'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윤동주는 시 '십자가'에서 '무기력한 나'와 '자기 희생을 결의하는 나'의 대립을, 시 '간'에서는 순수한 정신을 지켜 나감으로써 저항 의식을 보여주지만, 시 '참회록'에서는 자신을 부끄럽고 나약한 존재로 그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친일 인사들 조차 쓰지 않은 참회록을 썼을 정도로 윤동주가 순결한 정신을 가졌음을 의미하고, 순결한 정신을 지키는 것도 저항이라고 본 윤동주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고 밝혔다.  이어서 강연을 맡은 이근배 부회장은 공초 오상순, 정지용, 윤동주 세 시인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세 시인 모두 당대의 선각자이면서 전혀 친일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자신들의 시 세계를 펼쳤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윤동주의 경우 70년대까지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지만 80년대 친일 문제가 발생하면서 새롭게 부각되었다"면서 "시집 는 커버가 없는 것이 진품"이라고 밝혔다.     ▲ 강연하는 이근배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 한편 서울시인협회는 올해 총 5회에 걸쳐 '윤동주 문학여행' 및 추모행사를 갖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오는 2월 16~18일에는 윤동주가 다닌 도쿄 릿코대학, 15일간 장기투숙한 도쿄 YMCA 호텔, 윤동주 하숙집 터, 윤동주가 구금됐던 시모가모 경찰서, 마지막 송별회 장소였던 우지강 등을 둘러보는 '일본 도쿄-교토 2박3일' 행사가 열린다. 이어 4월 8일에는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를 방문하고 시비, 협성교회, 정지용 아현동 집터, 누상동 하숙집 터, 윤동주문학관 등을 돌아보는 '서울 속의 윤동주 삶의 흔적 찾기'가 열리며 5월 8~9일은 1박 2일로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죽어간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 형무소 바로 앞 바다에서 추모식을 열고 영혼을 위로하는 꽃뿌리기 행사를 가진다. 이밖에도 명동촌 생가부터 윤동주-송몽규 묘소까지 돌아보는 '윤동주 생애여행'과 원고를 극비 보관했던 하숙집 후배 정병욱의 생가가 있는 전남 광양 망덕포구를 방문하는 행사도 진행된다. 유자효 회장은 "'윤동주 문학여행', '윤동주 캘리그라피 전', '윤동주 서시 여름시인학교' 등 여러 프로그램과 함께, 중국의 '윤동주 시인 중국 국적 조작'의 시정 활동과 윤동주, 송몽규 사망에 대한 일본의 진상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활동을 강화하고 압수된 윤동주 시 발굴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1991    [쟁명] - 윤동주 조선족 是是非非... 댓글:  조회:3361  추천:0  2017-01-24
  한국 언론 "조선족 윤동주" 언급 그림출처: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지난해 티비조선에서 중국이 윤동주를 중국조선족 시인이라 부른다고 보도했다. 근데 이 보도를 보는 순간 마음에 작은 흥분이 솔솔 끓어올랐다.   나의 머리속엔 그가 조선족이냐 한국인이냐를 따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한국언론에서 윤동주같은 민족시인이 니꺼냐 내꺼냐를 따지는 자체가 좋다. 즉 한국언론에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자꾸 들먹이는게 좋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은 여태까지 연변이 지방차원에서,조선족범위내에서 윤동주를 조선족시인으로 취급해왔기에 한국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았다고 보아진다.   허나 이번은 다르다. 윤동주생가가 국가급(별 세개) 사적지로 지정되었다는걸 한국 언론에서 특별히 의식한것이다. 따라서 언론에서 공식 언급하게 된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연변조선족들이 윤동주를 가지고 조선족이냐 뭐냐 하는건 그냥 어리광으로 봐줄수 있는데,중국 국가적 차원에서 개입되는건 이는 딴 문제다.   윤동주 생가 복원에 수백만원의 자금이 투입됐을 때부터 좀 지나치다고 생각한적은 있지만,그냥 주정부가 돈이 넘쳐나 그러나 했을뿐이다.   고구려에 비하면 윤동주는 당연히 작다. 허나 고구려는 이미 지난 역사일뿐이고 각자 국가전략에 관련된 사항이기에 우리가 시비의 해명에 제약성을 갖지만, 윤동주는 지금을 살고 있는 근 이백만 조선족의 삶과 직접 연결된 화제다. 즉 조선족 명칭의 산생이 없었다면 "조선족시인 윤동주"라는 지정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이번의 일을 통해 알수 있는건 한국 정부나 언론은 중국 조선족에 대해 전통적으로 상식적으로 동포로 간주해왔고 이들에 대한 태도나 시비에서 될수록 분촌을 지키려 했다고 볼수 있는것이다. 대 조선족 정책면에서의 제약성은 양국간 주어진 조건의 이해관계를 이탈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족" 명칭을 둘러싼 이해에 있어 우리는 습관적 인식과 현실적 제약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 조선족들은 무의식적으로 한국을 중심으로 한 민족토론의 참여필요성을 모르고 있고,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은 피해의식의 제약성에 갇혀 의식적으로 회피해온 것이다.   단지 내가 바라는건 본세기내에 반드시 해답을 찾아야 하고,또 꺼내놓고 논의해야 하는 민족관련 문제들이 언론에서 많이 제기되기를 바랄뿐이다.   대북정책문제,탈북자문제,통일화제,중국동포문제...역사가 남긴 이런 민족내부의 문제는 우리가 지금 해답을 찾고 후세에 완정한 민족적 자부심을 물려줄수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조선족 윤동주"화제는 한국 현재 주류의 시시비비에 끼어들수는 없으나 계속하여 꾸준히 존재할 민족토론화제의 일부분이다. 재한조선족 수십만,북한과 연결된 조선족의 고리,중한교류,정체성문제...   우리가 살아있는한,우리가 서로 연계되고 있는한 이런 화제는 계속하여 한국 여론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조선족 윤동주"화제의 성질은 양국간 모순으로 되는듯 하나, 화제의 쟁점은 결국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소속된 "조선족"에 있는것이다.   윤동주가 한국인이면 결국 조선족도 한국인이라는 "변증적 결론"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수 없고 떨쳐버릴수 없는 것이다.    /룡정인임다   댓글모음:   룡정인임다 (♡.62.♡.6) - 2014/08/13 20:48:40 애들은 많이 배우게 격려해야 합니다.   남한정부에서 윤동주 친척도 한국인으로 간주하며 그에 상응한 포용과 대접을 하기에 그들이 조선족 윤동주에 반응을 하는것입니다. 만약 윤동주 친척들이 아직도 명동촌에서 살고 있다면 그들도 그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윤동주 조선족이라 할것입니다. 만약 남한에서 윤동주 친척들에 상응한 한국인 대접을 안하고 북한에서 그들을 영웅가족 대접을 한다할때 그들은 윤동주를 북한의 영웅으로 간주할것입니다.   모든건 조건이 있는거죠. 그러니까 윤동주가 조선족이냐 한국인이냐는 시비는 사실상 우리 서민들한테는 의미없는 토론입니다. 윤동주는 조선족이고 한국인이며 조선인으로서 민족시인입니다. 윤동주를 두고 벌어지는 시비는 결국은 한중 두나라가 조선족이라는 군체를 두고 당기기를 하는 격이 되죠. 만약 한국에서 윤동주는 영웅이니까 한국인이고 조선족 서민들은 가치가 없으니까 중국인이라고 말한다면 얼굴이 뜨거워 공개발언을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에서 윤동주를 두고 시비가 벌어진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거죠. altjsdlsnr (♡.50.♡.37) - 2014/08/14 00:13:57   윤동주선생이 살아계셨던 당시로 돌아가서 그분께 당신은 무슨 민족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분은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altjsdlsnr (♡.50.♡.37) - 2014/08/14 01:08:14   민족명칭에 대해 누누히 언급되었지만... 옛날에는 모두 '조선사람'-'조선인'(지금도 중국에서 한족을 상대하여 우리를 일컬을때 조선사람이라 칭하지 조선족이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이였지 뚱단지같은 한인이란 말은 아예 없었다. 지금 조선에서 자신들의 민족명을 언급할라치면 조선족이라 한다. 중국에서 조선족이라 함은 완전히 도리가 있는 명칭이다. 무슨 세상에서 잠간이나마 그것도 위한제국을 백성들은 별로 개의치도 알지도 못했고 계속 조선사람-조선인으로 살아 왔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국이란 나라가 생겼고 또 국교가 성립되면서 서로간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으나 우리는 항상 옛것 즉 역사를 그때의 그것대로 받아들여야 정확한 역사관이라 하겟다. 조선족, 고려족, 한족(한민족)....무엇이 다른가.... 천년지존 (♡.48.♡.132) - 2014/08/16 12:30:36   한국언론: 좋은건 내꺼, 나쁜건 니꺼. 내건 좋고 니건 나쁘다. AGAYAKIDS (♡.166.♡.185) - 2014/09/08 23:21:50   용정님 글에 찬성은 합니다만 우리가 지금 니가 옳다 내가 옳다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뿐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과연 이런걸 바랬을까요? 어떻게 보면 저도 윤동주 시인의 후배? 용정중학교 학생이였고 정문 입구에 시인의 시비도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데.... 어쩌면 이러는 우리들을 예상하고 지은 한탄의 시인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중 이 글에 답글 다시는 분 중 윤동주 시비 생가 다녀오신분 몇 분 계실가요?         / 작성자 : 독고혁 // 에서 퍼옮.
1990    [쟁명] - 윤동주의 조선족 시인설... 댓글:  조회:3518  추천:0  2017-01-24
윤동주의 조선족 시인설을 생각해 보자   윤동주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아니 조선족 소설가 김학철처럼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 생존했다고 치자, (김학철과 윤동주는 한살 차이임) 즉 일본 교도소에서 살아남았다고 가정하자.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가서 길림성에 정착했을 지도 모르고 (북한에 갔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생각하지 말자) 반우파투쟁 및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로 고난을 겪다가 한중 수교 후 그를 알고 지냈던 남한의 old 문인을 방문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남한을 떠났다는 이유로 교과서에 그의 시는 전혀 찾아 볼 수도 없어서 일제시대때 활동했던 일부 문인 정도나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해방후 윤동주 시집을 낸 사람이 남한에서 금기시되었던 정지용이니 살았다면 더 그랬을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위대한 대한민국은 그의 위대한 시에 대한 보답으로 남한국적을 기꺼이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남한국적법에 따르면 윤동주와 같은 경우 자동적으로 남한국적을 부여하지는 않는다고 함)   이렇게 생각해 보면 윤동주는 조선족 시인될 뻔 하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제시대때 죽었기 때문에 조선독립을 염원한 한민족의 시인이 된 게 아닐까?   해방이후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남한이라는 나라는 해외 동포를 별로 도와줄 여력이 안되었거나 여력이 된 다음부터는 국제관계를 너무나 존중해서 못 본 척 하였다.   이런 나라가 일찍 죽은 덕분에 위대한 시인을 독점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닐까?   조선족은 윤동주를 자신들의 위대한 시인으로 자랑 할 수 있다. 평양과 서울 생활 합쳐봐야 6년밖에 안된다. 이러니 그의 시가 길림성과 전혀 무관하게 형성되었을리가 없다고 보는 게 상식일 거다.   안 그런가?   /내지사랑 // 작성자: 독고혁 ///에서 퍼옮.
1989    정지용과 윤동주 댓글:  조회:3849  추천:0  2017-01-22
  미국 콜로라도 강이 휘감아 도는 호스슈벤드. /헬스조선 DB       정지용과 윤동주의 자취를 찾아서                                             김완하(시인 · 한남대 문예창작학과교수)     ... ... 더욱이 나에게 기대감이 컸던 것은 일본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 남아있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 우리의 문인들은 적국(敵國)인 일본에 가서 유학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처해 있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굴속으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적을 이기기 위해서 일본으로 향하는 이들의 심정에는 비분강개함이 가득 차 있었으리라. 일본의 동지사대학에 유학한 문인은 앞서 오상순 시인도 있었다. 비단 윤동주만이 죽음으로 돌아오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실제의 작품 속에도 일본 유학체험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은 동주이다. 동주는 고향에서 부모님이 보내준 땀내 나는 돈 봉투를 들고 늙은 일본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가는 심정의 고통스러움을 시에 담아놓고 있다. 동지사대학에는 1995년 2월 16일에 세워진 윤동주의 시비가 있었다. 그것은 윤동주 50주기를 기념해 세운 것으로 2월 16일은 바로 윤동주의 기일이다. 그곳에 세워진 시비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시비와 똑 같은 모습으로 두 개의 시비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전한다. 연세대학은 동주가 다닐 당시는 연희전문으로 동주의 정신은 한국과 일본을 가로 지르면서 시비에 새겨진 「서시」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옆에 1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정지용의 시비가 새겨져 있었다. 지용의 시비는 2002년에 세워진 것으로 거기에는 그의 시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었다. 저녁때에는 시내에 나가서 카페 프랑스에 가보았다. 그곳은 정지용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즐겨 찾던 곳이고, 바로 지용의 시 「카․페․프란스」에 형상화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윤동주도 들러서 시작메모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원통형의 천장이 중앙에 솟아 있고, 유럽풍의 음악이 흐르고 있어 일본 속의 유럽처럼 느껴졌다. 커피를 한잔 시켜 마시며 정지용이 느꼈을 향수와 윤동주가 느꼈을 죄의식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정지용의 향수는 곧 나라를 잃어버린 한이었던 것이며, 윤동주의 죄의식도 곧 나라를 잃어버린 국민으로서의 죄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문학은 곧 역사가 되는 계기를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밖으로 나와 몇 장의 사진을 찍고 골목을 걸어 나왔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무엇을 잃어버린 듯이 급히 카페 안으로 달려 들어가 보았다. 그때였다. 저쪽 두 개의 구석에 앉아  한쪽은 정지용이 또 한쪽에는 윤동주가 쓸쓸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서는 이제 막 한편의 시에 마침표가 찍히고 있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길거리를 가다가 자주 마주치는 한국인. 그러면서 나는 우리들의 발길이 너무 쉽게, 쉽게 일본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덤으로 더 보기=@@ 아마 주제별로 유사성이 있는 작품끼리 같이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드립니다. 승무(조지훈), 바라춤(신석초),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깃발, 바위(유치환), 자화상, 추천사(서정주) 묘지송(박두진), 설일(김남조), 눈길(고은), 무등을 보며(서정주), 과목(박성룡) 귀천(천상병), 자화상(서정주),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한용운), 봉황수(조지훈)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김소월), 교목(이육사), 그날이 오면(심훈), 독을 차고(김영랑) 외인촌, 와사등, 추일서정(김광균), 꽃(김춘수), 폭포(이형기), 오렌지(신동집) 거울(이상), 가을의 기도(김현승), 가을에(정한모), 정념의 기, 겨울바다, 설일(김남조) 절정, 청포도, 교목(이육사), 서시, 참회록(윤동주),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폭포, 풀, 눈, 푸른 하늘을(김수영),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농무(신경림), 벼(이성부) 바람이 불어, 또 다른 고향(윤동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백석), 당신을 보았습니다(한용운), 기(고은), 목계장터(신경림), 깃발(이호우), 들길에 서서(신석정) 방랑의 마음(오상순), 깃발(유치환), 추천사(서정주), 들길에 서서,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꽃덤불(신석정), 돌의 노래(박두진), 바다와 나비(김기림),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김영랑), 마음(김광섭) 성북동비둘기(김광섭), 새(박남수), 산도화, 청노루(박목월),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산유화(김소월), 사슴(노천명), 산(김광림) 오다 가다(김억), 북청 물장수(김동환), 내 마음을 아실 이(김영랑), 자모사(정인보), 별헤는 밤(윤동주), 파초(김동명), 보리 피리(한하운), 석상의 노래(김관식), 산에 언덕에(신동엽), 밀어(서정주), 고향(정지용), 고향(백석), 고향(박용철), 고향 앞에서(오장환), 고향길(신경림) 성탄제(김종길), 추억에서(박재삼), 낙타(이한직)
1988    윤동주 탄생 100주년 계기로 "동주"를 재다시 바로알기 댓글:  조회:3629  추천:0  2017-01-22
지자체의 '윤동주 없는 윤동주 마케팅'     [탄생 100년, 윤동주 돌아오다]   윤동주를 바로잡자     윤동주 이름 남용하는 경우 많아 시인이 대학시절 자주 올랐다며 청운공원 내 조성된 '시인의 언덕' 유족 측 "아무 관련 없는 장소" 중국은 龍井 생가 앞 표지석에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 왜곡     서울 은평구는 지난해 "윤동주가 다닌 숭실학교 후신 숭실중학교 인근에 '윤동주 도서관'을 짓겠다"며 공사에 착수했다. 윤동주가 1935년 숭실학교에 입학한 건 맞지만, 당시 숭실학교는 평양에 있었다.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한 뒤, 1948년 서울 성동구에서 재개교해 용산구를 거쳐 1975년 은평구로 옮겨왔다. 유족은 은평구청장을 만나 "취지는 좋지만 억지로 윤동주와의 연고를 만드는 건 옳지 못하다"며 "도서관 이름에서 '윤동주'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지자체 아전인수식 '윤동주 마케팅'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청년 정신은 하나의 고결한 문화 브랜드다. 그렇다 보니 '청년 윤동주'를 홍보·마케팅 수단으로 남용하는 행태도 속출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를 제대로 기리려는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치는 이유다.       유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은평구는 현재 '윤동주 도서관' 대신 그의 시집 제목에서 따온 '하·바·별·시 도서관' 등을 후보로 놓고 저울질 중이다.         18일 찾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유족 측이 “윤동주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장소”라며 “‘윤동주’라는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했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아있다. /조인원 기자   지자체의 아전인수식 윤동주 마케팅은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 청운동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2009년 종로구청이 청운공원 내에 조성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가 누상동 하숙집에서 두 달 정도 지내는 동안 근처 이 언덕에 자주 올라 시상을 가다듬었다"는 게 이유였다. 유족 측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는 "기록에 근거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며 "큰 고민 없이 숟가락을 얹으려는 심보 같다"고 말했다. 문학 월간지 'See' 민윤기 주간은 "하숙집에서 이 언덕으로 향하는 산길은 급경사인 데다 당시엔 길도 없었을 것"이라며 "윤동주를 종로의 시인으로 삼기 위해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유족 측은 "언덕 이름에서 윤동주를 빼달라"고 요청했지만 '윤동주'는 여전히 명칭에 남아있다.         ◇윤동주가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중국에선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만들기 위한 노골적인 역사 왜곡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 룽징(龍井)의 윤동주 생가 앞 표지석엔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혀있다. 윤동주의 6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70)씨는 "시인이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이라며 "현지 대학교수 등에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했다.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 바이두에서도 윤동주는 중국 국적 조선족 시인으로 소개된다. 지난해부터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여러 차례 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감감무소식. 서울시인협회는 4월쯤 중국 대사관 측에 공식 항의 서한을 전달할 계획이다.         15일 찾은 중국 룽징의 윤동주 생가. 생가 앞 표지석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룽징=특별취재팀       ◇윤동주 作?… 인터넷 떠도는 엉뚱한 詩         사실 관계 확인 없이 윤동주 작품으로 둔갑해버린 시도 여럿이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 대표적인 예.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말들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시인데, 언론사들마저 윤동주 작품이라며 잘못 인용하고 있다. 이 시를 쓴 사람은 뇌성마비 장애인 김준엽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 작사·고승하 작곡으로 발표된 가수 안치환의 '편지'(1997) 역시 마찬가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로 시작되는 이런 시를 윤동주는 쓴 적이 없다. 고승하(70)씨는 "1985년쯤 문방구에서 팔던 학생용 노트 표지에 '윤동주의 시'라고 적힌 글을 보고 곡을 붙였는데 노래가 발표된 뒤 1~2년 뒤부터 여러 지적이 들어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해부터 '작자 미상'으로 곡 정보를 수정했지만, 여전히 잘못된 내용은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2012년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 '제1회 윤동주 시 작곡 경연대회' 1등 수상작은 이 잘못된 가사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최근 윤동주 시로 잘못 알려진 용례에 대한 글을 집필하고 있는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윤동주가 잘못 인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시가 맑고 서정적이기만 하다는 편견 때문"이라며 "윤동주는 긴장감 없는 서정 시인이 아니라 훼손된 세계와 개인의 견고한 관계를 고민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가벼운 인터넷 자료에만 의존하지 말고 윤동주 시집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고 기억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1987    현대시의 아버지, 민족과 우리 말 수호자 - 정지용시인 댓글:  조회:4744  추천:0  2017-01-22
  -현대시의 아버지, 민족과 우리말 수호자 이석우 著 / 충북학연구소 刊 / 274쪽 / 2006. 6.30   **인간 지용의 삶과 문학 정지용, 그는 1902년 충북 옥천군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는 이복 동생인 계용과 화용이 있었고, 자녀는 부인 송재숙과의 사이에 구관, 구익, 구원, 구상 등을 두었다. (모두 10명을 낳았으나 유아시절 질병으로 사망한 자녀가 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때 9살의 나이로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2세에 결혼한 후 집을 떠나 처가살이를 했다. 4년 간 한문을 수학하며 1918년에 휘문보고에 진학했다. ​ 그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학적이 상실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창간호에 첫 발표작인 '三人'을 게재했다. 휘문고 4년제를 마칠 즈음 마포에서 본 포구 모습을 그린 '풍랑몽(風浪夢)'을 썼다. 그의 첫 시작(詩作)이다. 당시 휘문고가 5년제로 바뀌면서 진급을 하고 문우회의 학예부장을 맡아 을 창간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2세. 그의 대표작인 '향수(鄕愁)'를 썼다. 그해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동인지인 에 시를 발표하였으며, 그 후에도 각종 문예지에 시작을 남겼다.   그는 열열한 천주교 신자로서 성당에서의 활동도 대단했다. 그래서 종교적 색채가 강한 '갈매기', '해바라기씨', '小曲', '유리창' 등의 시를 남겼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문학활동을 시작해 젊은 대학시절과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 , , , , , 등의 문학지에 시를 썼다.   첫 시집 은 34세에 89편의 시를 실어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다. 그는 또한 45세에 경향신문 주간을 지냈으며 이화여대 교수로 출강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1948년 남한정부가 단독으로 세워지고 남북 분단을 맞을 시기에 에 북한 정부 수립(9월 9일)에 대한 지지발언을 함으로 인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명목과 국민보도연맹과 반민특위에 연루되어 그의 시가 교과서에서 지워졌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1988년에야 해금되어 지용문학의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시를 대중적으로 읽을 수 없도록 한 이후에 그는 두문불출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자 했으나 국민보도연맹과 정부는 그를 사상전향시킨다는 명문으로 각종 우익단체에 이름을 올리라고 종용, 협박했다. 그로인해 6.25전쟁 당시 북한의 정치보위부의 술수에 넘어가 자수하러 갔다가 행방이 모연해 졌다. 결국 1950년 49세의 일기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옥중에 같이 있었던 지인의 증언)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중거는 없다. 그래서 아직도 그가 월북인사냐 납북인사냐가 분명치 않으나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근대사와 함께하는 마음의 고향(향수)으로 남아 있다. 충북 옥천에서는 '지용문학상'을 제정하고 그의 이름을 새긴 '지용로'가 있다. ** 지용의 시문학 세계에 대한 평가 현대시의 아버지, 동요의 아버지, 민족어 수호자, 지용은 민족성을 띤 사상의 전개가 불가능한 시대상황에서 현실과 충돌을 우회하는 것은 문학사의 단절을 막을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  "언어를 지키고 그 예술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곧 그 언어와 예술의 주체인 민족을 발전시킨다" ​ 지용의 작품에서 민족정신의 회절이나 결정적인 친일의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정치현실에 대한 침묵 속에서 진행된 그의 시세계도 저항의 한 수단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그의 시가 있어 민족애과 자연주의적 향수로 국민의 애환을 달랠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이 문학사에 남긴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남다른 민족어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현대 동시를 출발시켰다.  셋째, 그는 선구적 카톨릭시즘을 실현한다 넷째, 자연 친화의 동양사상이다. ​ 그는 같은 문학가들을 문단에 입적시키는 것에도 힘을 쏟았다. 그 중에서 청록파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을 비롯해 김종환, 박남수 등을 문단에 추천했다. 또한 평생을 지용도 모르게 그를 사숙해온 시인 윤동주도 지용의 시정신을 수용하여 민족이 고통받던 시절 '나라와 겨레와 아름다운 진실만을 추구'한 빛나는 민족유산을 남겼다. 지용은 윤동주의 시편을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들"이라고 평가했다. ** 정지용 시인의 대표시 향수를 감상해보자!! ​ 향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섭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거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옯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우리말을 이토록 회화성 짙게 표현하다니!! 보이는 음악, 들리는 그림 같은 시청각적인 감각 표현!! * 어린시절 고향의 개울가와 초겨울 벼밑둥이 들어난 논밭이 눈에 보이는 듯 * 실개천을 휘돌아나가는 물살 소리가 들리고, 노을빛이 어스름히 황소를 비추는 그림에서 "음메~"소리가 들리는 듯 * 추수를 끝낸 황량한 논밭에 부는 무심한 바람이 말소리를 '휘잉~' 내며 먼지를 데리고 가는 청각과 시각의 자극 * 마음껏 꿈꿨던 어린 시절의 포부와 희망을 갖고 쏘아버린 그 꿈을 찾고 싶은 작가의 심정 * 화롯불이 꺼져가는 살림살이에 지쳐 어설피 졸고 있는 아버지 * 밤바다의 물결이 출렁이는 듯 여동생(계용)의 귀밑 머릿결이 바람에 날리고 * 그 옆에는 가난과 고난의 삶을 평생 살아온 아내(정미하)가 허리 굽혀 이삭을 줍고 * 하늘엔 별똥별이 은하수로 빠져들고 서리에 젖은 까마귀 때가 가난하고 초라한 우리집 지붕 넘어로 날아가네 * 꿈있는 어린시절 자연과 함께 꿈을 키우며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살아가는 가족에 대한 연민과 사랑    ​     ​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평전 작가 이석우 출판 푸른사상 발매 2006.10.20. [출처] -현대시의 아버지, 민족과 우리말 수호자|작성자구르는 돌덩이
1986    "윤동주 연구가" ㅡ 오무라 마스오 日本人 학자 댓글:  조회:3639  추천:0  2017-01-22
"험한 세상에 아름다운 詩 남긴 천재… 난 매일 동주를 만납니다" 도쿄=최인준 특파원 | 2017/01/18 03:04 한국 문학계는 윤동주 연구에서 이 일본 노(老)학자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잊히다시피 했던 윤동주의 무덤을 1980년대 중국 시골 야산에서 찾아내고, 윤동주 육필 원고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그의 노력 덕에 국내 윤동주 연구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 영하로 내려간 지난 16일 오후 지바현 이치카와(市川)시의 한 작은 전철역에서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83) 와세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오무라입니다" 인사한 그는 잰걸음으로 자신의 집을 안내했다. 한국 문학 연구서들이 수백 권 보관된 자신의 서재를 먼저 보여줬다. "매일 여기서 나는 동주를 만납니다." 16일 자택 서재에서 만난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윤동주 책을 들고 있다. 노 교수는“내 연구를 통해 정갈하면서 엄선된 시어로 시대에 맞섰던 윤동주의 정신을 지금 시대에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도쿄=최인준 특파원 오무라 교수는 일본 학자 중에서 독보적인 윤동주 연구가로 꼽힌다. 윤동주 관련 논문과 책을 10편 이상 발표했고, 지난해에는 '윤동주와 한국근대문학'(초판·2001) 개정판을 펴냈다.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후쿠오카 형무소 부지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를 세우기 위해 동료 학자들을 모아 백방으로 뛰기도 했다. 책 개정판 출판을 위해 방한한 작년엔 서울 대한극장에서 영화 '동주'를 관람했다. 오무라 교수는 1957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중국 문학을 전공했는데, 지적 호기심이 넘쳤던 청년 오무라는 청나라 말기 중국의 정치소설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조선 문학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전공을 바꿔 조선 후기와 한국 근대문학을 파고들었고, 윤동주의 시와 조우하게 된다. 일본인 학자에게 윤동주 연구의 길은 쉽지 않았다. 1985년 5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윤동주의 묘를 발견할 당시 한국에선 "일본이 윤동주를 두 번 죽였다"는 날 선 비난이 날아왔다.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그 묘를 일본인이 찾아냈으니 아이러니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중국 룽징에서 윤동주 묘지를 찾은 뒤 절하고 있는 오무라 교수. /오무라 마스오 교수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였던 야산의 공동묘지. 산짐승이 파헤친 듯 어지러웠고 '詩人 尹東柱'라고 새겨진 묘비만이 윤동주의 무덤임을 증명했다. "'여기구나!' 싶은 생각에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1986년 경기도 과천에 있는 윤동주 유족을 찾아가 긴 설득 끝에 육필 원고를 손에 넣었다. 당시 그가 받아든 육필 원고 중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남긴 습작 노트도 있었다. 1999년 이 원고들을 모아 한국 교수들과 공동으로 출판한 '윤동주 자필시고집'은 윤동주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시뿐 아니라 윤동주 생가 터와 그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학적부, 송명규 생가 등을 직접 확인한 결과를 담아 발표한 논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도 주목을 받았다. 반평생 윤동주 연구에 헌신한 오무라 교수는 '시인 윤동주'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윤동주는 천재이면서 마음이 따뜻한 시인, 고뇌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나 스스로 '부끄러움 덩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서시의 구절을 읽으면 아직도 마음이 깨끗이 씻겨지는 기분"이라며 "일본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정갈한 시어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오무라 교수의 서재에선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고령 탓에 연구는 멈췄지만 노교수는 매일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는지…. 윤동주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예쁜 동시를 많이 썼을 겁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본 후쿠오카서 23년째…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ㅡ정상혁 기자 | 2017/01/18 03:04 외국에서도 윤동주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20년 넘게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 진행 중이다. 윤동주가 수감된 후쿠오카 형무소 부근에서 태어난 니시오카 겐지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가 1994년 창립한 이 단체는 매달 한 번꼴로 모여 윤동주 시를 읽고 토론하며 매년 2월 윤동주 기일에 맞춰 추모 행사도 열고 있다. 윤동주가 1942년 입학해 수학한 릿쿄대가 있는 도쿄에서도 10년째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20여 회원은 2008년부터 매년 2월 추모 낭독회를 열고 있다. 올해 행사는 2월 19일 열린다. 릿쿄대 한국사무소장 유시경(54) 대한성공회 교무원장은 "한·일 관계가 안 좋은 요즘 윤동주를 통해 역사를 바로 보자는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라며 "릿쿄대에 윤동주 명예졸업장 수여도 제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추모는 미국서도 이어진다. 2007년부터 윤동주 시에 곡을 붙여 미국 전역을 돌며 공연하고 있는 5인조 한인 밴드 '눈 오는 지도'가 대표적인 예. 1990년 워싱턴문학회 초대 회장을 맡은 최연홍 시인은 2000년쯤 미국 워싱턴에서 윤동주문학회를 만들고, 윤동주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등 윤동주 알리기에 앞장서 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문학잡지 시산맥 등이 주관한 '윤동주 서시문학상' 해외 작가 특별상을 받았다.  
1985    윤동주 탄생 100주년에 붙여... 댓글:  조회:4162  추천:0  2017-01-22
  윤동주 탄생 100주년에 붙여     ​   ​윤동주, 그 이름은 늙지 않는 이름이다.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윤동주 탄생 100 주년,스물여덟 나이로 순국해 청년 정신의 상징이 된 윤동주가   2030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되살아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각종 장르를 넘나드는 영감으로 작용하며   강력한 문학 콘텐츠와 아이콘이 된 윤동주를 조명해 본다. ​ 윤동주가 다방면의 문화 콘텐츠가 되면서 영화.노래. 소설. 유튜브 영상 등 윤동주를 소재로 한 콘텐츠를 분석하는 국내 첫 연구서 '윤동주 원소스멀티유즈'가 나온다. 김영석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는 16일 '윤동주의 삶 자체가 원천 소스가 된다고 보고 전문인이 만든 정통 콘첸츠뿐 아니라 일반인이 제작한 유튜브 동영상까지 아울러 윤동주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고 말했다. 그간 권영임.마광수 등 윤동주 연구자들의 문학 연구서는 여럿 발표된 바 있지만, 윤동주를 소재로  사용해 재작된 콘텐츠를 연구한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 책은 윤동주의 생일(12월 30일)쯤 출간될 예정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윤동주 연구 서적이 쏟아져 나온다.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디아스포라 백석과 윤동주'를 올해 낼 예정이고, 내년엔 윤동주동시해설집 '갑북갑북'도 준비 중이다. 한양대 유성호 교수는 올래 하반기에 윤동주 전시해설집 '학생 윤동주가 시인 윤동주가 되기까지'를 ​ 낼 계획이다. 동시까지 아우르는 윤동주의 전 작품을 해설하는 방대한 시도다. 3월쯤 류양선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학자 20여명의 논문을 모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논집'을 묶어낼 예정이다.   생애[편집]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요절한 두 동생을 포함하여 4남 2녀였다. 그의 처음 이름은 해환(海煥)이었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로 부유한 농부였고,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 윤하현의 영향을 받았다. ​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6년 뒤인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2년여 뒤인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향년 27세)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대표작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작품으로써 '부끄러움과 자아 성찰의  윤동주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시 입니다.      
1984    암울한 시대에 묵묵히 위대한 문학을 이루어낸 시인 윤동주 댓글:  조회:4119  추천:0  2017-01-22
윤동주 탄생 100주년. 그를 기리며 1917년 12월 30일 태어난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년이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로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청년,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복을 눈앞에 두고 1945년 옥중에서 삶을 마쳤기에 많은 사람들이 더 안타까워 하는 그의 삶은 시집과 전기, 영화로도 많이 최근에 조명받고 있으며 도서관에서도 사랑받은 문학인 중의 한명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작가 윤동주 출판 소와다리 발매 2016.02.09.   . 이는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의 제목이다.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됐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고 시집이요, 저자인 그는 이 시집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교과서를 통해 시는 익히 접했지만 초판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해 보지 아니 했다. 마치 유행처럼 작가들의 초판본이 출판되고 있는 요즘, 윤동주의 시집도 초판의 형태로 출판됐다. 요즘 세대에겐 익숙지 않은 한자들이 시에 종종 등장하는데 어색하면서도 오히려 그래서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1917년생인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때도 없을 터인데 참 제 때 출판됐지 싶다. 듣자하니 책을 출판한 도서출판 소와다리는 1인 출판사란다. 투박한 초판본에 끌리는 독자 마음에 부응할 수 있었던 데는 저자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료가 들지 않는다는 현실도 큰 도움이 됐다. 드라마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복고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점 또한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윤동주 평전 작가 송우혜 출판 서정시학 발매 2014.05.20.     동주(東柱)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房)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東柱)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웃으며 반가히 마주 앉아주는 것이었다.  시인 동주 작가 안소영 출판 창비 발매 2015.03.06.   아무도 시를 쓰려 하지 않던 시대에, 묵묵히 위대한 문학을 이루어 낸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 등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은 작품이 등장하는 시인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담았다. 전작 『책만 보는 바보』와 『갑신년의 세 친구』 등을 통해 특유의 서정적이고 성찰적인 문체로 선하고 열정적인 조선 청년들을 이야기해 온 작가 안소영이 이번에는 근현대로 넘어와서 청년 윤동주 이야기를 친근하게 들려준다. 오늘날과 더욱 가까운 시대와 인물을 다루고 있어 청소년들이 감정 이입하기에도 훨씬 용이해졌다.   윤동주를 쓰다 작가 윤동주 출판 북에다 발매 2016.02.18.     티 없이 순수한 생을 갈구했던 청년 윤동주를 필사로 만나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별 헤는 밤]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초등학생을 위한) 윤동주를 쓰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라는 뜻 깊은 시기를 맞아 도서출판 ‘북에다’에서 출간된 윤동주 시선 필사집입니다. 이 책에는 시작 활동의 초기인 청소년기부터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기 전인 1942년까지 쓰인 백 여 편의 시 가운데 [겨울], [조개껍질], [버선본], [햇빛,바람] 등의 윤동주의 동시 32편과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쓰인 시 가운데 초등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의 대표작 [서시], [별 헤는 밤], [새로운 길], [자화상]도 함께 수록했습니다. 그의 시를 따라 필사해보며 식민지배하의 조국이라는 엄혹한 시대를 아파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순수함을 끝내 잃지 않았던 청년 윤동주를 만나보자 ​                  ​ [출처] 윤동주 탄생 100주년. 그를 기리며|작성자 작은도서관큰이야기  
1983    그 언제나 늙지 않는 그 이름 "동주" 댓글:  조회:3601  추천:0  2017-01-22
늙지 않는 그 이름 '동주'… 靑春들의 별이 되다 조선일보/정상혁 기자/2017/01/17 이 이름은 늙지 않는 이름이다.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윤동주(1917~1945·사진) 시인 탄생 100주년. 스물여덟 나이로 순국해 청년 정신의 상징이 된 윤동주가 2030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되살아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각종 장르를 넘나드는 영감으로 작용하며 강력한 문화 콘텐츠와 아이콘이 된 윤동주를 3회에 걸쳐 조명한다. ◇2030세대가 호명하는 동주 가온차트·소리바다 등 음원 사이트 1월 첫째 주 차트 1위는 윤동주였다. 래퍼 개코(36)가 윤동주의 삶을 랩으로 만들어 발표한 '당신의 밤'. "때론 사는 게 허무하고 무기력할 때 당신의 육첩방을 밝혔던 등불을 기억할게. … 오늘 밤은 어둡기에 당신이 쓴 시가 별이 돼, 광장 위를 비추는 빛이 돼."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는 "체념을 일삼던 청년이 성찰을 통해 각성하는 가사 내용이 젊은 층에게 공명을 일으킨 것 같다"면서 "최근 불안한 정국과 맞물리면서 좌절을 경험한 2030세대가 노래를 소비하며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MBC ‘무한도전’이 기획한 역사 특집에서 윤동주를 랩으로 형상화한 ‘당신의 밤’을 부르고 있는 래퍼 개코(왼쪽)와 아이돌 멤버 황광희. /MBC 열풍의 시발은 시였다. 지난해 2월 출간된 초판 복각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인터넷 서점 인터파크도서 '2016 올해의 책' 2위를 차지했고, 알라딘 집계에서도 소설 '채식주의자'에 이어 전체 도서 판매량 2위에 올랐다. 예스24에 따르면 이 시집 구매자의 55%가 2030세대였다. 이들이 윤동주 열풍을 점화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청년으로 죽은 윤동주는 정점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에서 종료된 일종의 사건"이라며 "청년들이 지닌 미완의 가능성이라는 측면도 동일시 효과를 일으키는 요소"라고 말했다. ◇다양한 장르로의 확산 윤동주의 청년 이미지는 발랄하고 새로운 감각의 변주를 쉽게 한다. 소설 분야에선 미스터리 요소를 섞은 '동주'(구효서·2011) '별을 스치는 바람'(이정명·2012) 등이 출간돼 화제를 모은 바 있고, 윤동주에서 모티프를 얻은 웹툰 '소동헌을 위한 기록'은 2014년까지 연재되다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스크린으로 옮긴 저예산 흑백 영화 '동주'는 지난해 117만 관객을 동원했고,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는 작년에 이어 올 3월에도 막을 올린다. 3월에 개막하는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투옥된 윤동주가 심적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인간 윤동주 전기(傳記)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도 새로운 창작의 씨앗이 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엔 윤동주의 시 '소년'에 나오는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등의 문장에서 영감을 얻어 파랑의 심상을 옮긴 그림책 '소년'이 나왔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성표(59)씨는 "윤동주의 파랑을 그리움의 감정으로 그려냈다"며 "윤동주의 마음속에 있는 소년을 통해 독자의 내면을 위로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림책으로는 이례적으로 2주 만에 초판 2000부가 나갔고, 2쇄를 3000부 찍었다. 지난 12일엔 윤동주 시 패러디 54편을 엮은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이 출간되기도 했다. ◇"소비로 끝나선 안 돼… 실천적 성찰로 이어져야" 윤동주 시인의 시 ‘소년’에서 영감을 얻어 파랑의 이미지로 그려낸 그림책 ‘소년’의 한 장면. /보림출판사 '윤동주 콘텐츠'가 다양해지면서 대중과 접점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2014년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소설가는 "영화 '동주'를 본 뒤 윤동주 관련 서적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는 편지를 여러 통 받았다"면서 "콘텐츠의 수준과 상관없이 윤동주라는 관문에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선 "윤동주를 팬시 상품처럼 가볍게 소비하고 끝내선 안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윤동주 전문가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윤동주는 자기 성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는 성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진다"며 "소비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불의에 맞서며 괴로워했던 그의 정신이 실천적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2    "윤동주시인은 결코 죽지 않았다..." 댓글:  조회:3935  추천:0  2017-01-22
【서울=뉴시스】2013년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연세삼성학술정보관에서 열린 윤동주 시인 유고·유품 기증 특별전 개막식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서시'로 기억되는 시인 윤동주(1917~1945)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서울시인협회는 지난 11일 '윤동주 100년의 해' 선포식을 열었다. 이 협회는 올해 5차에 걸친 '윤동주 문학여행'을 비롯해 7대 사업을 할 계획이다.  '윤동주 시의 재발견' 작업, '윤동주 100년의 생애와 100편의 캘리그라피' 전, '윤동주 생애' 전, '윤동주 서시 여름시인학교', '윤동주 시비공원' 조성, '윤동주 연구' 등이 예정됐다.  1600여 시인회원을 중심으로 지난해 시작한 '윤동주 시인 중국인 국적 조작' 바로잡기도 계속한다. 윤동주·송몽규 사망 의혹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활동, 윤동주가 일본에서 쓴 시를 발굴하기 위한 현지 탐사도 추진한다.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회장 김용학 연세대 총장)는 다음달 16일 72주기 추모식을 시작으로 5월 기념음악회, 12월 국제학술대회 등을 통해 윤동주를 조명한다.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1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윤동주 100년의 해' 선포식에서 이승원 서울대 교수가 '순결한 영혼의 불꽃 윤동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2017.01.11  특히 5월 또는 12월께 예정인 전시 '윤동주와 그의 시대'(가제)에서는 '청년 윤동주'를 주제로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에 발광다이오드(LED) 영상 등을 쏴 표현하는 기법)로 재현하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종로구 종로문화재단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일대기를 담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윤동주' DVD와 USB를 내놓기도 했다.  공연계에서도 윤동주를 기린다. 국산 창작뮤지컬 터전으로 자리매김한 서울예술단은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 기념작이자 2017년 시즌을 여는 첫 작품으로 창작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3월 21일부터 4월 2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를 준비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암울한 현실에 맞서 시를 통해 영혼을 쏘아 올린 청년 윤동주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서울예술단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2012년 초연부터 2013년, 2016년 공연까지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호평 받았다.  【서울=뉴시스】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사진=서울예술단) 이번 공연에는 초연과 재연, 삼연까지 윤동주로 무대에 섰던 배우 박영수와 더불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배우 온주완이 새로운 윤동주로 합류한다.  유자효 서울시인협회 회장은 "윤동주 시인은 결코 죽지 않고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있어 암울한 시대를 맑게 하라는 깨우침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1981    영원한 청년 - 윤동주시인 댓글:  조회:3609  추천:0  2017-01-21
  평전시집 '다시, 별 헤는 밤'…탄생 100주년 곳곳 기념행사   시인 윤동주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산모퉁이 외딴 우물 하나/ 하늘과 구름, 달과 별이 빛나는 우물 위로/ 잎새에 이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난, 외로운 동주처럼/ 혼자 말없이 우물을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나도 괜히 동주처럼 내 자신이 미워져/ 우물에 돌멩이 하나 던져놓고 돌아가다/ 다시, 문득 우물 속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윤동주(1917∼1945)의 '자화상'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소강석 시인이 윤동주처럼 우물에 비친 자신, 그리고 윤동주를 들여다보며 쓴 '동주의 우물가에서'다.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에는 윤동주의 삶과 시세계를 더듬은 시 54편이 실렸다.     시집은 윤동주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그의 삶을 운문으로 기록한 '평전시'다. 시인은 윤동주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가 못다한 말을 대신 하는가 하면 시로써 생애를 복기한다. 시집은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나 용정으로 이주해 자란 유년기(1부)와 연희전문학교 시절(2부), 일본 유학과 순국(3부) 등 연대기 순서로 묶였다. "그러나, 동주여/ 님의 별 헤는 밤의 시가/ 이 도시 어딘가/ 잠 못 드는 이의 낮은 숨결로 낭송되고/ 외롭고 쓸쓸한 자의 가슴에서/ 밤새 헤아리고 싶은 밤하늘 별로 빛나고 있다면// 우리의 밤은 어두운 암흑으로 갇히지 않고/ 다시, 별 헤는 밤이 되어/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겠지요" ('다시, 별 헤는 밤' 부분) 윤동주(왼쪽)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오른쪽) [연합뉴스 자료사진]     윤동주가 타국에서 창씨개명을 부끄러워하며 제 이름자를 써보고 덮어버린 '별 헤는 밤'은 한 세기 가까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시는 우리 가슴 속에 푸른 별로 떠올라 영원히 지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대가 어둡고 탁할수록 윤동주의 순결한 성찰의 시심은 더욱 빛난다. "윤동주 이후/ 우리 모두는 가슴에 시 한 편 가졌다/ 아무리 시에 관심 없고/ 문학에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 우리의 지저분한 마음을/ 가혹한 상처를/ 씻을 수 없는 후회를/ 위로하고 닦아주는 시 한 편 가졌다" ('서시, 이후…' 부분) 시인은 "처음에는 내 안에 윤동주를 끌어들였지만 나중에는 내가 윤동주 안에 들어가서 심연의 우물가에서 시를 쓴 것"이라며 "졸작이지만 윤동주 시의 제단에 불쏘시개라도 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올해 문단 안팎에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연중 열릴 예정이다. 우선 소강석 시인은 8일 오후 7시 자신이 목사로 있는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에서 추모음악회를 연다. 윤동주의 6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가 출연한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한국문인협회는 이달 23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류양선 가톨릭대 명예교수와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이승하 중앙대 교수 등이 발표자로 나서 윤동주의 시세계와 민족정신을 재조명한다. 한국작가회의는 4월말께 심포지엄과 함께 공연 형식의 문학의 밤 행사를 연다. 윤동주의 친필 원고가 보존됐던 전남 광양시도 7월께 학술행사와 음악회로 윤동주를 기린다. ========================================== '부끄럼없이 살기를’…윤동주 탄생 100주년 추모열기 [앵커] 올해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아파하고 고민한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문화ㆍ예술계에서는 다양한 추모 행사를 마련 중입니다. 임은진 기자입니다. [기자] “별이 바람에 스치는 밤, 내가 길을 잃은 밤.” 한 세기를 지나 젊은 힙합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영원한 청년 윤동주. 지난해 말 ‘무한도전-위대한 유산’ 편을 통해 발표된 이 곡은 3주째 음원 차트 상위권을 지키고 있습니다. 문화·예술계는 ‘저항 시인’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작품을 되돌아보는 행사를 마련합니다. 올해를 ‘윤동주 100년의 해’로 선포한 서울시인협회는 문학 투어와 사진전 등을 열기로 했고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는 5월과 12월에 기념음악회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공연계도 창작 가무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추모 행사와 함께 시인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하루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중국의 최대 인터넷 포털 바이두는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 민족은 조선족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인터넷에서는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글들이 돌고 있습니다. “그가 시를 통해서 어떻게 일제에 저항을 했는지, 소리 없는 깊은 외침이 있었다고 (집안 어른들은) 윤동주의 정신에 대해서 늘 들려주곤 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원했던 윤동주. 시대에 아파하며 조용한 저항을 이어간 그의 삶과 작품은 지금도 큰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연합뉴스TV 임은진입니다.
1980    2017년, 윤동주 탄생 100주년!... 댓글:  조회:3828  추천:0  2017-01-09
윤동주와 정병욱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1940년 연희전문학교 정병욱은 1학년, 윤동주 3학년   등록날짜 [ 2016년04월27일 22시04분 ]     광양시 진월면 망덕(望德)포구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341호’로 등록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있다.  1925년에 지어진 이 상가주택은 양조장과 딸린 살림집인데 이곳에 윤동주 자필시집 가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정병욱(1922-1982)이 윤동주(1917-1945)를 알게 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정병욱은 1학년, 윤동주는 3학년이었다. 윤동주가 5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선·후배로 깊이 사귀었다. (권오만, 윤동주 시 깊이 읽기, 소명출판, 2009, p 342)     1941년에 두 사람은 기숙사를 나온 후 10개월 동안에 세 번이나 하숙집을 옮겨가면서 한 방을 같이 썼다. 처음은 종로구 누상동에서 한 달 간, 두 번째는 5월말부터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였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김송을 요시찰 인물로 감시했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책과 짐까지 뒤지는 소동을 벌였다. 별수 없이 두 사람은 9월에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1941년 12월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시집 간행을 기획하였다. 이를 위해 그동안 쓴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1941년 11월20일에 쓴 ‘서시 序詩’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라는 표제를 붙이고 3부를 필사하였다.  윤동주는 자필시집 3부 중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1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고, 마지막 1부는 본인이 보관하였다.  정병욱이 받은 자필시집 필사본은 200자 짜리 세로쓰기 원고지였는데, 첫 페이지에 ‘鄭炳昱 兄(정병욱 형)앞에’, ‘尹東柱 呈(윤동주 정)’이라고 적었다. (권오만, 위 책, p 345) 그런데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에게 출간을 미루라고 하였다. 이 시집이 일본관헌의 검열에 통과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신변의 위험까지 부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결국 윤동주는 시집 발간을 포기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정병욱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월에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광양으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윤동주 시집을 잘 간수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윤동주가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이 독립되면 이 시집을 연희전문학교에 보내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윤동주 시집을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양조장에 딸린 살림집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 안에 깊숙이 숨겼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정병욱이 윤동주 시집을 챙기자 그의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를 내놓았다.   1948년 1월30일에 정음사는 윤동주 유고시집 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윤동주 자필시집의   시 19편과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 강처중이 보관한 시 12편 도합 31편이 실렸다. 1955년에 증보판이 나왔다. 88편의 시와 산문 5편이 실렸는데, 서울대 교수 정병욱은 편집 자문을 하였고, 시집 후기를 썼다.     또한 그는 1976년 외솔회 발행 에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을 기고하고 윤동주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윤동주 자필시집의 당초 제목은 ‘병원’이었단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라서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붙이려 했단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 1976, p 140-141)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1940.12)  한편 윤동주와 정병욱은 인척을 맺었다. 윤동주 동생 윤일주와 정병욱의 누이동생 정덕희가 부부가 되었고, 윤일주의 장남 윤인석은 정병욱 가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2017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다. 내년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가 활발할 것이다. 윤동주 자필시집을 고이 보관한 광양 망덕포구도 빛을 보길 기대한다.   윤동주, ‘디지털 청년’으로 부활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월11일  윤동주기념관이 마련돼 있는 연세대 핀슨홀(왼쪽)과 기념관 내부. - 탄생 100주년 맞아 풍성한 기념사업 내달 16일 추모식 시작으로 음악회·국제학술대회 열려 윤동주 기념관 핀슨홀 외벽에 삶과 문학 LED 영상으로 재현 韓中日 잇는 순례길 탐방 추진… 육필원고·유품 등도 전시 검토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디지털 ‘청년 윤동주’로 부활한다.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회장 김용학 연세대 총장)는 10일 “탄생 100주년인 올해 추모식·음악회·전시회·국제학술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오는 5월 또는 12월에 개최 예정인 ‘윤동주와 그의 시대(가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청년 윤동주를 주제로, 디지털 미디어 아카이빙 등을 이용한 쌍방향 전시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 연희전문(연세대)을 거쳐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독립운동 혐의로 현지에서 체포돼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한 민족시인이자 서정시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로 시작되는 ‘서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정작 윤동주에 관한 자료는 매우 드문 편이다. 연희전문 시절을 제외하곤 국내에 머문 시간과 생(生)이 짧고, 그나마 미스터리를 남긴 채 원인 모를 이유로 일본의 형무소에서 사망했으며, 일본의 감시와 위협이 끈질긴 나머지 현재 남아서 전해지는 원고도 귀하기 때문이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청년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에 발광다이오드(LED) 영상으로 표현하는 기법) 등 디지털 방식으로 재현할 계획이다. 그의 문학적 가치와 성과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자리다. 개최 장소로는 윤동주기념관이 있는 핀슨홀 등이 고려되고 있다.  연희전문 본관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기념사업회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상의 연세대 문과대 행정팀장은 “2013년 첫 공개 전시 이후 도서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 중인 윤동주 육필 원고와 유품 전시도 고려했으나 훼손의 위험이 커 미뤄둔 상태”라며 “다음 달까지 기념사업과 관련한 예산이 확정되는 대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확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세대 도서관 수장고에는 윤동주 유고와 도서 약 750점, 유품 48점이 보관돼 있다. 이 유고 및 유품은 2012년 8월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기증한 것이다. 연세대는 이를 바탕으로 2013년 2월 전시회를 열었다. ‘청년 윤동주 순례길’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오는 7∼8월쯤 윤동주의 묘소가 있는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시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 후쿠오카를 잇는 순례길을 탐방하는 한·중·일 대학생 순례단이 만들어진다. 윤동주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는 인문학 기행이다. 최근 급속도로 경색된 3국의 외교관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 달 16일 추모식을 시작으로 기념 음악회(5월 18일), 국제학술대회(12월 8∼9일) 등도 이어진다. 음악회에선 윤동주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곡을 연주한다. 임지선 연세대 음대 작곡과 교수가 참여한다. 국제학술대회에선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자연과학 부문에서 윤동주와 그의 작품이 현대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를 조명한다. 가능하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방법도 모색 중이다. 이밖에 정례행사인 윤동주 시문학상, 시 암송대회, 시 작곡대회, 기념 강연 등도 치러질 예정이다.  /글·사진 = 김인구 기자 /문화일보
1979    불러도 대답없을,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싶은 동주! 몽규!... 댓글:  조회:4517  추천:0  2017-01-09
  ▲  윤동주 하숙집이 있던 자리에 재건축된 2층 슬라브주택 ⓒ 유영호 관련사진보기 박노수가옥을 나와 조금 걸으니 이내 100미터도 안 되는 곳의 연립주택담장에 그곳이 시인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종로구 누상동 9번지)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본래의 집은 헐리고 지금은 2층 다세대주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본래 윤동주가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윤동주가 1941년 하숙하였고, 이곳에서 (1939) 그리고 (1941.9) 등 그의 대표작들이 창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이곳 종로구 누상동에 잠시 머문 윤동주의 영향력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012년 창의문 앞에 '윤동주문학관'까지 건립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윤동주와 종로구 누상동의 인연 ▲  윤동주가 머물렀던 하숙집(왼쪽 한옥)이 헐리기 전 1970년대의 모습 ⓒ 유영호 관련사진보기 ▲  2012년 종로구 청운동에 새로 조성된 윤동주문학관 ⓒ 유영호 관련사진보기 윤동주는 1941년 5월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집을 찾다 이 집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요시찰인물이었던 김송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없어 그해 9월까지 잠시 머문 것이 전부다.  거기에 여름 방학 때 만주에 갔다 온 것까지 치면 윤동주가 이곳 누상동에 머문 것은 무척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종로구에서는 이곳 옥류동천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졸지에 윤동주는 이곳 토박이처렴 대접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윤동주 시집에 있는 시 가운데 몇 편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으니 문학인으로서 이곳과의 인연을 무작정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곳 역시 윤동주가 거쳐간 곳이니 그에 대하여 좀더 깊이 알아보도록 하자. 당시 태평양전쟁의 개시로 조선은 전시체제로 전환되었고 이로 인해 학제 단축으로 윤동주는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을 졸업하였다.  당시 그는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시집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수기로 시집 3부를 만들어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나머지 2부를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 후배에게 증정했다.  본래 이 시집의 제목은 이었으나 '서시'를 쓴 후 명칭을 바꾼 것이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적 의미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시집이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은 옥사하면서 없어졌고, 이양하 교수에게 건넨 시집 역시 행방불명이되었다. 하지만 후배 정병욱에게 건넨 것은 그가 징병에 끌려가면서도 고향집 어머니에게 부탁해 보관되어 훗날 윤동주는 그가 남긴 시로 우리에게 되살아난 것이다. ▲  윤동주 '서시'의 육필 원고 '1941.11.20'이라고 그 창작시기가 명확히 적혀 있다. ⓒ 윤동주 서시 관련사진보기 분단으로 지워진 시집 발간자 강처중의 발문 윤동주의 시집발간에 후배 정병욱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벗 강처중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지고 있다. 윤동주 시집과 강처중의 이야기는 우리의 분단모순이 우정을 어떻게 갈라 놓았는가를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니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 이곳을 떠나도록 하자. ▲  1968년 세워진 '윤동주시비'와 그 뒤에 그가 연희전문시절 머물렀던 기숙사 '핀슨홀' ⓒ 유영호 관련사진보기 ▲  핀슨홀 입구 벽면에 윤동주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리는 부조물 ⓒ 유영호 관련사진보기 윤동주가 연희전문시절 함께 기숙사 핀슨홀에서 생활했던 일명 '핀슨홀 3총사'가 있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와 강처중이 모두 같은 해 입학한 친구다. 그리고 2년후 후배 정병욱이 입학하면서 넷은 함께 어울렸다.  그러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윤동주는 도쿄 릿교대학으로,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후 윤동주는 한 학기를 마치고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로 재입학 하였다. 송몽규가 교토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아마 백석과 그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의 숨결을 느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상상해본다. 하지만 송몽규가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책동'이란 혐의로 체포되면서, 이어서 윤동주 역시 체포되고 만다. 특별히 조직적인 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윤동주의 체포는 사회활동이 왕성했던 송몽규와의 관계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된다.  그 둘은 혈연적 관계는 물론 어릴 때부터 일본 유학까지 항상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후 윤동주가 먼저 사망하였고, 윤동주 죽음이 생체실험이었던 것 같다는 정보를 전해 준 사람이 역시 송몽규이다. 그 역시 같은 실험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몽규 역시 윤동주 사후 3주 뒤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일을 겪고 불과 6개월 뒤 해방은 되었지만 정신없이 보내다 1947년 2월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를 추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에 중지를 모았다. 이 일을 강처중이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 에 쓰인 열아홉 편의 시와 일본유학 시절 강처중에게 보낸 다섯 편의 시 등 총 서른 한 편의 시가 하나로 묶여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초판에 정지용이 서문을 쓰고, 강처중이 발문을 달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과 글은 그 후 10년 뒤 증보판을 내면서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역사가란 사실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워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증보판을 낸 시기는 이미 전쟁이 끝나고 38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고, 남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던 때이다. 따라서 월북한 정지용과 해방 전후언론계의 남로당 거물이었던 강처중의 이름은 지워진 채 윤동주만 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이다. ▲  윤동주 유고시집 재판본에서 삭제된 글의 주인공 정지용(좌)과 강처중 ⓒ 유영호 관련사진보기 최근 영화 (2016, 이준익 감독)가 상영되면서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벗인 송몽규에 대하여 널리 알려졌다. 영화의 특성상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카메라의 초점은 송몽규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조연으로 처리된 강처중의 존재 역시 윤동주에게는 커다란 부분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청춘으로 죽어간 윤동주의 삶을 알려주고 간 사람이다. 따라서 강처중의 존재와 함께 볼 때 윤동주는 완성되는 것이기에 분단으로 잘려져 나간 그의 '발문'을 아래 남겨본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1978    윤동주 시집 제목을 워낙 "병원"이라 붙일가 했단다... 댓글:  조회:5954  추천:0  2017-01-09
  # 윤동주(尹東柱) #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하고, 광명중학교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자화상」「쉽게 쓰여진 시」을 발표하였고 문예지 『새명동』발간에 참여하였으며, 대학시절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중이던 1945년 2월,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그의 사후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은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에 출간되었다.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1985년부터 한국문인협회가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와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인 「연변문학」에서도 동명의 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십자가」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이같은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빼어나고 결 고운 서정성을 빛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서정적 민족시인'이라는 평가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되뇌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며 부끄러운 삶을 경계했던 시인은 그 댓가로 일제에 의해 젊은 나이, 스물 여덟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 ​ ​ 일본 유학 중이다가 귀국했던 때의 윤동주와 송몽규 등 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윤동주. ​   ​ 중국 지린성에 있는 시인 윤동주의 생가​ ​ ​   은진중학교   "은진중학교는 미션스쿨로서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목청껏 부를 수 있었다. 동주와 나에게 이것은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주가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1934년 12월 24일은 동주의 생애에 퍽이나 중요한 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을 기해서 그는 자기 시에 또박또박 날짜를 적어 넣는다. 그날은 그의 나이 만 17세를 엿새 앞둔 날, 크리스마스 전날밤이었다. 동시만 써오던 자기 속에서 불현듯 시가 탄생하는 것을 보고 그 날을 자기의 둘째 생일로 알고 날짜를 적어넣은 것이 아닐까?” (문익환 목사)     ​ 숭실중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 ​   ​ 숭실중학시절 조부 윤하연 장로의 회갑연 ​   ​ 윤동주 시인 '최후의 사진' ​ 1943년 초여름, 교토(京都) 우지(宇治)강 구름다리에 늘어선 9명의 청춘남녀. 이들 중 단정한 교복 차림에 눈매에는 우수가 깃들어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는 범상치 않은 단호함이 엿보이는 청년 윤동주(1917∼1945)가 유난히 돋보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절 남긴 유일한 사진이자 최후의 사진이기도 하다.  ​       -윤동주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 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2학년 때이던가,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 한 일이 있어서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우리 집에 늘 걸려 있었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 ​ ​ '지금의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 ​ ​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기념으로 출판을 계획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내게다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외솔회, 1976) ​ 병 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  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  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  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 ​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 1941.11​   ​   ​  ​ ​ '병원'이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었던 시집은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윤동주, '병원'​   "일제 강점기, 암흑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없는 부끄러움을 이야기했던 젊음. 출간하고팠던 시집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어 원고를 서랍장 깊이 넣어야 했던  그는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손석희  ​ ​ ​ "지금의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 병원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에 혹시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 -윤동주 ​​   [출처]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작성자 참예쁜세아이 윤동주 :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집필 의도 및 감상  연희 전문학교 문과 졸업반이었던 윤동주(尹東柱)는 그 동안 써 놓은 시 19편을 모아 시집을 발간하려고 하였다. 총 77부 한정판으로 하여 이란 제목으로 출간하려고 했으나 시집 제목이 좋지 못하다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 란 제목으로 시집명을 고치었다. 그러나 그의 시 가운데 , 등이 일제 검열에 통과하기 어렵겠다는 이양하(李敭河) 교수의 충고로 시집 출판을 포기하고 수제본(手製本) 시집 3권을 만들었다. 그 중 한 권은 이양하 교수에게, 다른 한 권은 후배 정병욱(鄭炳昱 ; 1922~1982)에게 주었는데, 결국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 살아남아 해방 후 1948년에 유고 시집(遺稿詩集)으로 발간되어 유동주란 시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는 시집 의 로 윤동주 시 세계의 모든 요소가 이 한 편에 반영되어 있다. 윤동주의 시는 ‘부끄러움’의 미학(美學)인데, 시대 현실에 대한 그의 성찰과 인생 태도가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그의 순교자적 의식은 ‘부끄러움’의 자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목표를 달성하려는 굳은 의지와 결의를 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의 모티프가 되는 시어는 ‘부끄럼•죽음•별’인데, ‘부끄럼’은 현실에 대한 시적 자아의 반응이고, ‘죽음’은 수단으로서의 자기 희생을 뜻하며, ‘별’은 시적 자아가 목표로 삼아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 세계를 뜻한다. 이 세 시어야말로 윤동주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으로, 윤동주의 시 정신을 분명하게 상징한다.  기본 이해 항목  주제 : 부끄러움 없는 삶을 소망함.  성격 : 상징적, 의지적, 참여적, 자기 성찰적, 감각적.  어조 : 고백적, 의지적 어조.  이 시를 이해하는 관점 : 반영론적 관점.  시상 전개 방법 (제1연) : 시간 이동에 따른 전개.  [현재(제1,2행)→과거(제3,4행)→현재(제5,6행)→미래(제7,8행)]  창작 연월일 : 1941년 11월 20일.  출전 : 유고시집 (1948.)  시어 및 구절 풀이  죽는 날까지 ㅡ 평생, 일생 동안, 살아 있는 동안.  하늘 ㅡ 1) 절대적 가치관의 표상. 2) 자기 성찰(自己省察)과 반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우러러 ㅡ 시적 자아가 지상의 현실에 위치하여 천상(天上)의 영원한 가치를 찾고자 함을 알 수 있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ㅡ 시대 현실 속에서 치욕적인 자세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청교도적인 자세를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끝까지 자기의 양심과 지조를 지키겠다는 시인 스스로의 결의와 소망을 나타낸 의지의 표명이다. ‘ ~없기를’ 다음에 ‘기원한다’, 혹은 ‘바란다’가 생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ㅡ 이 구절은 의 ‘진심장구(盡心章句)’ 중 ‘군자삼락(君子三樂)’의 제2락인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ㅡ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 남에게 부끄럼이 없는 것”의 구절에서 영향받은 것이라 하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ㅡ 1) 섬세한 심경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2) ‘잎새에 이는 바람’은 보통 사람은 인식하기 어려운 미세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그 바람이 지금은 미약한 존재이지만 앞으로 거대한 폭풍으로 변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리한 시인의 감각으로 예감하고 있다. 3) 시적 자아는 시대 현실과 맞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4) 불안의 시대에 시인의 사명은 현실 상황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하여 시를 통해 이것을 나타내고, 부정적인 현실에 저항하며 미래상(未來像)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플라톤이 이상국(理想國)의 제도와 구조를 설명한 저서 에서 주장한 ‘시인 추방론(追放論)’은 이와 같은 시인의 본질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즉 시인은 영원한 이상을 추구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상국’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국’에 시인이 존재하는 한 완전한 ‘이상국’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 윤동주는 시인으로서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잘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ㅡ 시에 나온 별은 대체로 ‘이상•동경•영원성•아름다움’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별’은 ‘영원한 가치’를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영원한 가치를 기리는 심정으로’로 풀이할 수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 ㅡ 이 시가 씌어진 일제 말엽의 암흑기에 우리 민족이 처한 곤혹(困惑)한 시대 상황을 말한다.  사랑해야지 ㅡ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죽어가는 민족을 살리고 싶은, 민족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나한테 주어진 길 ㅡ ‘길’은 시적 자아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시적 자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시적 자아에게 명령한 소명 의식(召命意識)을 말한다. 그 ‘길’이란 어두운 시대 현실에서 민족을 구출하기 위한 자기 희생의 순교자적 의지를 말한다.  걸어가야겠다 ㅡ 확신과 결의를 표명하여 시적 자아의 미래 지향적 실천 의지를 분명히 나타낸다.  제2연 ㅡ 한 행으로 된 제2연을 독립시킨 것은 제1연의 주관적 관점이 제2연에 와서 객관적 관점으로 바뀌는 것을 구분하여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ㅡ ‘오늘 밤’과 ‘바람’은 암흑의 시대 현실을, ‘별’은 이상과 동경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객관적 관점에서 고도의 상징으로 시화(詩化)한 것이다. 평론가들은 이 구절을 윤동주의 시 구절 중 절조(絶調)라고 평가한다.                    @@ 윤동주의 고향 북간도 용정의 동쪽 외곽에는 ‘영국더기’란 자그마한 언덕이 있다. 용정 사람이라면 모두 알만한 곳이다.‘영국더기’란 영국 사람이 살던 언덕이란 뜻이다. 일제 강점기에 영국 국적을 가진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1907년 캐나다 장로회는 용정에 선교사를 잇달아 파송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시작했다. 성도가 늘어나자 캐나다 장로회는 용정 동쪽 산비탈 언덕 10만 제곱미터를 사들여 사택과 제창병원, 명신여학교, 은진 중학교, 동산교회 등의 건물을 지었다. 보잘것없던 시골 동네가 근대 서양문화를 접하는 통로가 됐고 항일 민족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도 이 영국더기에 있는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1941년 일제는 강제 퇴거령을 내리고 캐나다 선교사를 영국더기에서 몰아냈다. 이후 영국더기는 조락의 길을 걷는다. 일본 관동군 부대가 진주하면서 ‘군부더기’로 불리다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 바뀌었다. 이마저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 영국더기에 있던 제창병원, 동산교회, 명신여학교, 은진중학교는 흔적도 없이 파괴돼 사라졌다.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영국더기는 지금 허름한 가옥들이 판자촌을 이루듯 가득 들어서 있다. 좁은 소로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 윤동주의 묘소가 나온다. 양지바른 언덕엔 비탈을 따라 봉분이 꺼진 수많은 무명의 묘가 가득하다. 간혹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을 통해 이곳이 옛 동산교회 묘지 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윤동주 묘가 있다. 용정시 정부는 지난 1997년 6월 3일 윤동주 묘소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정하고 2014년 7월 15일에는 표지석까지 세웠다. 표지석에는 보호범위를 돌비석을 중심으로 앞으로 5m, 뒤로 10m, 좌우 5m라고 명시해 놓았다. 송몽규 선생은 영화 ‘동주’에서 많이 조명돼 일반인도 많이 알게 됐지만, 뼛속까지 독립운동가로 일본 유학 중에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친구인 김석관 선생이 쓴 ‘청년문사 송몽규 묘’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윤동주 묘역에는 또 하나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할머니 남신필, 아버지 윤영석, 어머니 김용, 동생 윤광주 이 다섯 분은 이 동산 어딘가에 잠들어 계시지만 오늘날 묘소를 찾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라고 쓰여 있다. 윤동주가 아끼던 막내 동생 윤광주는 1962년 11월 30일 폐결핵으로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폐결핵 환자라 급히 시신을 수습하는 바람에 아직도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간도로 이주한 윤동주 일가족은 이렇게 사라지고 윤동주는 관리할 사람도 없는 공동묘지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더욱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윤동주 묘소도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윤동주의 시를 흠모하던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에 의해서다. 1985년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소위 잘나가는 교수였지만 연변대학으로 와 윤동주 찾기에 나섰다. 오오무라는 윤동주의 ‘서시’,‘자화상’,‘별헤이는 밤’ 같은 작품은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극찬했다. 오오무라 교수의 각고의 노력 끝에 윤동주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윤동주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1977    "서정시 동서고금 속마음 모두 하나" 댓글:  조회:3981  추천:0  2017-01-08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시선집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출간 한국 현대시 명편 골라 싣고 漢詩·5개국어詩 번역해 해설   “세계 명시에 버금가는 가요 ‘비 내리는 고모령’노랫말도 책에 넣었다”며 동서양 명시 선집을 낸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조인원 기자 조동일(78)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가 세계 명시(名詩)를 한자리에 모은 시선집 시리즈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전 6권·내 마음의 바다)를 냈다. 조 교수는 '한국문학통사'(전6권)를 비롯해 '세계 문학사의 전개', '세계 문학사의 허실' 등의 저서로 문학의 거대 담론을 다루면서 국문학계의 거봉(巨峯)으로 꼽힌다. 조 교수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중국어·일본어를 구사하고 한시(漢詩)에도 능통하다. 그는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를 만들며 한국 현대시의 명편을 고르고, 외국어로 쓰인 시를 직접 번역하고 원문도 실으면서 해설까지 달았다. 한문(漢文)이 동아시아 공통의 문학 언어였다고 친다면 모두 7개 언어로 된 시선집이다. 서울대 불문학과 출신인 조 교수는 "영어와 독일어는 고등학생 때 배웠고, 대학원에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 일본어와 중국어, 한문(漢文)을 익혔다"며 "시 짓기를 즐거움으로 삼았던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해 지금껏 공부한 시를 이처럼 한자리에 모으는 데 60년이 걸린 셈"이라고 밝혔다. 조 교수는 지난 3년 동안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를 편집하고 집필했다. 첫 권 '실향의 노래'에서 출발해 각 권마다 '이별의 노래' '유랑의 노래' '위안의 노래' '자성의 노래' '항변의 노래'란 제목을 달았다. 조 교수는 "시인이 '고향'을 잃고 '이별'을 겪은 뒤 '유랑'을 하면서 시에서 '위안'을 얻고, 시인 노릇을 '자성'(自省)하고, 그릇된 세상을 바로잡으려 '항변'하는 과정을 담은 시편들을 순차적으로 담았다"며 "시인은 개인의 아픔에서 출발해 결국 시대와 역사의 고통을 노래한다"고 풀이했다. 그는 주제별로 부드러운 서정시를 선정해 섬세한 촌평을 달곤 "시를 공부하려는 젊은이들을 위해 책을 냈다"며 직접 그린 동양화로 삽화를 꾸몄다. 국내 시인 177명과 해외 시인 223명의 작품 650편이 실렸다. 중국의 두보(杜甫)와 독일의 하이네의 시가 13편으로 가장 많이 수록됐고 릴케(11편), 소월·보들레르·헤세(8편), 김지하(7편)가 그 뒤를 잇는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20세기 해외 시인들도 대거 소개했다. 특히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의 시인 라비아리벨로의 시 '서곡'을 비롯해 제3세계 문학에도 눈길을 돌렸다.   조 교수는 "국내 불문학계가 프랑스인의 문학에만 치중하면서 프랑스어로 쓴 비서구 문학은 외면하고 있다"며 "우리는 서구 문학에 편향된 시선에 갇혀 세계 문학을 폭넓게 보지 않은 채 남이 우리 문학을 몰라준다고 염치없이 불평하고, 일방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우리 이야기만 쓴다"고 비판했다. 그는 "소설이 사람살이의 차이를 보여준다면, 서정시는 사람의 속마음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다 똑같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 실향의 노래/조동일 엮음/240쪽/"내마음의바다"출판사  ‘뱃사람은 먼 섬에서 얻은 것 있어/고요한 물결에 집으로 돌아간다./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괴로움이 아닌 무엇을 얻었는가?//나를 키워주던 그대 거룩한 강가여,/사랑의 괴로움을 진정시켜 주겠나./어린 시절의 숲이여, 돌아가면/나를 다시 편안하게 해주겠나?’ (횔덜린 ‘고향’)  고향을 떠나온 시인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마음에 사랑의 상처를 갖고 있는 그는 고향에서 위로받기를 바란다. “고향 상실은 결핍의 하나이다. 시인은 결핍 때문에, 결핍을 보완하려고 서정시를 쓴다.” 실향(失鄕)에 대한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의 해석이다.   조 교수는 저서 ‘한국문학통사’(전 6권)로 잘 알려진 국문학자다. 그가 선보인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는 우리 시와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 독일의 시편들을 엮어 번역하고 해설한 시리즈다. ‘실향의 노래’는 그 첫 권이다.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시편마다 절절하다. 두보는 ‘돌아갈 꿈’이라는 시에서 ‘길은 때때로 통하다가 막히고,/강산은 날마다 적막하고 쓸쓸하네./목숨 연명하는 한 늙은이 신세,/반란 토벌이 세 조정을 지났네’라면서, 전란으로 고향을 떠나 돌아가지 못한 지 오래된 절망스러운 심정을 노래한다. W B 예이츠의 ‘호수 섬 이니스프리’에서는 실제의 고향이 아닌 마음의 고향을 가리키는 ‘이니스프리’로 가고자 하는 소망을 읽게 된다. ‘나는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거기서 진흙과 욋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짓고/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 통 하나를 두고,/벌 소리 요란한 공터에서 혼자서 살리라.’  공들여 고른 시편마다 함께한 해석이 명쾌하다. 여타의 배경이 아닌 작품 자체를 오롯이 바라보고자 한 엮은이의 노력이 엿보인다. 각국의 서정시를 한데 모아 읽어낸 이 작업을 통해 사람의 마음결은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별의 노래’ ‘유랑의 노래’ ‘위안의 노래’ ‘자성의 노래’가 함께 나왔다.  /김지영기자 =============================== 조동일 명예교수 시선집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소설이 '一卽多'(일즉다)라면, 서정시는 '多卽一'(다즉일)이다. 소설은 사람은 누구나 사람이면서 얼마나 다르게 사는지 보여준다. 서정시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알려준다." 국문학계 원로인 조동일(78) 서울대 명예교수는 불교 화엄철학의 세계관인 '일즉다 다즉일'(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이다)을 가져와 소설과 서정시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대비시킨다. 소설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겪는 체험을 보여주는 반면 서정시는 서로 다른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자아로 끌어들여 속마음이 하나라는 점을 내보인다. 조동일 명예교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관점에서 동서양의 이름난 서정시들을 속마음의 성격에 따라 나눠 묶은 시선집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가 최근 출간됐다. 실향·이별·유랑·위안·자성·항변 등 주제별로 100여 편씩 6권에 싣고 작품마다 해설을 달았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고향'에서 "나를 키워주던 그대 거룩한 강가여,/ 사랑의 괴로움을 진정시켜주겠나."라며 고향으로 돌아가 위안을 얻고자 한다. 100여 년 뒤 김소월 시인도 "죽어서만은 천애일방 헤매지 말고/ 넋이라도 있거들랑 고향으로 네 가거라."라고 썼다. 고향 상실은 결핍의 일종이고 실향시는 이 결핍을 보완하려는 시도라고 조 교수는 설명한다. 서정시의 주제는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서 시작해 먼 곳으로 가 유랑하고 시에서 위안을 얻는 데까지 나아간다. 시인 노릇에 대한 자성과 그릇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항변이 뒤따른다.   세계의 부조리, 그에 대한 투쟁 의지를 속마음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저항·참여시도 엄연한 서정시다. 조 교수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나란히 놓는다. 표절 시비로 비화할 만큼 빼닮은 두 작품의 차이를 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여유가 김지하에게는 없었다. 엘뤼아르의 초현실주의는 상상과 연상의 공중비행을 가능하게 했으나, 김지하는 사실주의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탄압을 무릅쓰고 부당한 현실과 대결해야 했다." 조 교수는 현역 시절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등 저서로 서사문학을 체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시 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상징주의 시에 심취했다"는 소회를 보면 서정시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 보인다. 조 교수는 "상징주의 시를 시가 되게 번역해 공감을 나누고 싶은 소망을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이제야 조금 실현한다"며 "소설을 편애한 잘못도 바로잡고 시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마음의바다"출판사. 각권 224∼256쪽.     
1976    시인은 시대와 력사의 고통을 노래해야... 댓글:  조회:3836  추천:0  2017-01-06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시선집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 출간 한국 현대시 명편 골라 싣고 漢詩·5개국어詩 번역해 해설   “세계 명시에 버금가는 가요 ‘비 내리는 고모령’노랫말도 책에 넣었다”며 동서양 명시 선집을 낸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조인원 기자 조동일(78)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가 세계 명시(名詩)를 한자리에 모은 시선집 시리즈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전 6권·내 마음의 바다)를 냈다. 조 교수는 '한국문학통사'(전6권)를 비롯해 '세계 문학사의 전개', '세계 문학사의 허실' 등의 저서로 문학의 거대 담론을 다루면서 국문학계의 거봉(巨峯)으로 꼽힌다. 조 교수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중국어·일본어를 구사하고 한시(漢詩)에도 능통하다. 그는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를 만들며 한국 현대시의 명편을 고르고, 외국어로 쓰인 시를 직접 번역하고 원문도 실으면서 해설까지 달았다. 한문(漢文)이 동아시아 공통의 문학 언어였다고 친다면 모두 7개 언어로 된 시선집이다. 서울대 불문학과 출신인 조 교수는 "영어와 독일어는 고등학생 때 배웠고, 대학원에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 일본어와 중국어, 한문(漢文)을 익혔다"며 "시 짓기를 즐거움으로 삼았던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해 지금껏 공부한 시를 이처럼 한자리에 모으는 데 60년이 걸린 셈"이라고 밝혔다. 조 교수는 지난 3년 동안 '서정시 동서고금 모두 하나'를 편집하고 집필했다. 첫 권 '실향의 노래'에서 출발해 각 권마다 '이별의 노래' '유랑의 노래' '위안의 노래' '자성의 노래' '항변의 노래'란 제목을 달았다. 조 교수는 "시인이 '고향'을 잃고 '이별'을 겪은 뒤 '유랑'을 하면서 시에서 '위안'을 얻고, 시인 노릇을 '자성'(自省)하고, 그릇된 세상을 바로잡으려 '항변'하는 과정을 담은 시편들을 순차적으로 담았다"며 "시인은 개인의 아픔에서 출발해 결국 시대와 역사의 고통을 노래한다"고 풀이했다. 그는 주제별로 부드러운 서정시를 선정해 섬세한 촌평을 달곤 "시를 공부하려는 젊은이들을 위해 책을 냈다"며 직접 그린 동양화로 삽화를 꾸몄다. 국내 시인 177명과 해외 시인 223명의 작품 650편이 실렸다. 중국의 두보(杜甫)와 독일의 하이네의 시가 13편으로 가장 많이 수록됐고 릴케(11편), 소월·보들레르·헤세(8편), 김지하(7편)가 그 뒤를 잇는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20세기 해외 시인들도 대거 소개했다. 특히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의 시인 라비아리벨로의 시 '서곡'을 비롯해 제3세계 문학에도 눈길을 돌렸다. 조 교수는 "국내 불문학계가 프랑스인의 문학에만 치중하면서 프랑스어로 쓴 비서구 문학은 외면하고 있다"며 "우리는 서구 문학에 편향된 시선에 갇혀 세계 문학을 폭넓게 보지 않은 채 남이 우리 문학을 몰라준다고 염치없이 불평하고, 일방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우리 이야기만 쓴다"고 비판했다. 그는 "소설이 사람살이의 차이를 보여준다면, 서정시는 사람의 속마음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다 똑같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 박해현 기자
1975    대가, 천재, 명인, 그리고 病이 명작 만들다... 댓글:  조회:4040  추천:0  2017-01-06
[문화]  고흐·드가·드 쿠닝… 病이 명작을 만들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1904~1997)은 잭슨 폴락(1912~1956)과 함께 추상표현주의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드 쿠닝은 화풍이 가장 극적으로 변한 작가로도 꼽힌다. 화려한 색상으로 거칠고 모난 인물을 주로 그리다가 중년 이후에는 부드러운 추상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영국 과학자들은 드 쿠닝의 화풍 변화가 그가 앓았던 알츠하이머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시적(詩的)이고 여유로운 후기 명작(名作)들이 드 쿠닝의 질병 때문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 파킨슨·알츠하이머가 만든 명작 알렉스 포시드 영국 리버풀대 교수는 국제학술지 ‘신경심리학’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유명 화가 7명이 그린 작품을 분석한 결과 알츠하이머(치매의 주원인인 뇌질환)나 파킨슨병(신경세포 손상으로 운동 능력이 급격히 저하돼 몸을 가누지 못하는 뇌질환)을 앓았던 화가들은 정식으로 병을 진단받기 수년 전부터 그림에 극적이고 과도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클로드 모네·파블로 피카소·마르크 샤갈·살바도르 달리·노르바 모리소·드 쿠닝·제임스 브룩스 등 7명이 평생에 걸쳐 그린 2000여점의 작품을 특수 제작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연구했다. 붓질의 방향이나 형태를 분석하고, 붓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하학적 패턴(프랙털·fractal)’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살폈다. 프랙털은 붓놀림에 따라 만들어지는데 화가마다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최근 진품 감정에 많이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붓질 횟수가 많고 가늘게 반복될수록 프랙털의 복잡도가 증가한다.    (위쪽 왼쪽부터)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의 1950년 그림 ‘여자1’과 1983년작 ‘무제’.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화풍이 급격히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왼쪽)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에 그려진 소용돌이는 고흐가 색소성 망막염을 앓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 오른쪽) 에드가 드가는 젊은 시절 세밀한 묘사를 즐겼지만, 망막 질환에 시달리면서 점차 모호한 형태의 그림을 그리게 됐다./위키미디어·뉴욕현대미술관·시카고미술관 분석 결과 화가 7명 모두 나이가 들면서 그림에 변화가 있었다. 특히 모네·피카소·샤갈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크게 나타났다. 드 쿠닝과 브룩스가 이런 경향이 가장 심했다. 연구진은 대(大)변화의 이유를 뇌질환 때문이라고 봤다. 모네·피카소·샤갈은 평생 별다른 뇌질환을 겪지 않았고, 달리와 모리소는 파킨슨병을 앓았다. 드 쿠닝과 브룩스는 알츠하이머로 고통받았다. 포시드 교수는 “일반적인 화가는 나이가 들면서 프랙털의 복잡도가 일관되게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면서 “하지만 달리와 모리소는 복잡도가 증가하다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드 쿠닝과 브룩스는 급격히 줄어드는 양상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특히 알츠하이머를 앓은 화가들은 본격적으로 발병하기 10년 전에 이미 이런 변화가 시작됐다. 겉으로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징조가 뇌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처드 테일러 미국 오리건대 교수는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번 연구 결과는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쿠닝의 작품이 그의 질병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뜻한다”면서 “프랙털 연구를 통해 진품 감정 수준을 높이거나, 일반인들의 알츠하이머 조기 진단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흐의 노란색과 소용돌이도 질병 때문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이 아니더라도 화가의 질병이 만들어낸 명작은 셀 수 없이 많다. ‘별이 빛나는 밤에’ 등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나타나는 소용돌이 모양은 색소성 망막염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병에 걸리면 눈앞에 소용돌이가 아른거린다. 또 고흐가 ‘해바라기’ 등에 즐겨 사용했던 강력한 노란색이 황시증(黃視症)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독한 술에 중독될 때 나타나는 황시증에 걸리면 사물이 노랗게 보인다.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마이클 마머 교수는 인상주의의 대가 에드가 드가(1834~1917)의 의료기록을 토대로 그가 심각한 망막 질환을 앓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드가의 초기 작품은 세밀한 묘사가 장점이었지만, 나이가 들고 망막 질환이 심해질수록 사물이나 인물의 윤곽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작품의 모호함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안과 질환이 눈으로 본 풍경을 담아내는 화가의 그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 셈이다. ⓒ 조선일보  
1974    리투아니아 음유시인 - 마이로니스 댓글:  조회:4004  추천:0  2017-01-02
    리투아니아의 시인 마이로니스(Maironis) 출생   마이로니스 [Maironis, 1862.11.2~1932.6.28]     본명은 Jonas Mačiulis.   리투아니아의 시인. 민족문학 부흥의 음유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로마 가톨릭교 사제였던 그는 카우나스의 신학교와 1888~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카우나스에서 2년간 지내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서 장학관 겸 도덕신학교수로 근무했다(1894~1909). 그뒤 모교인 카우나스의 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중 1922년 리투아니아대학교의 도덕신학교수로 선출되었다. 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이던 당시 리투아니아 민족의 바람과 열망을 자신의 시에 표현했으며 리투아니아의 과거와 시골의 모습, 언어, 전설 등으로 조국에 대한 사랑을 썼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음절수 중심의 시를 강세와 음절수 중심의 시로 바꾸었으며 낭랑하고 음악 같은 시로 생전에 널리 인기를 끌었다. 그가 쓴 서정시 전 작품이 선집 〈봄의 목소리 Pavasario balsai〉(1895년, 초판 45편 수록, 1926년 6판 131편 수록)로 출판되었다. 또한 그는 3편의 서사시를 남겼는데 첫번째 작품인 〈젊은 리투아니아 Jaunoji Lietuva〉(1907)는 매우 서정미 넘치는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도 리투아니아 대공(大公) 비타우타스(1350~1430)의 일대기를 다룬 3편의 역사 드라마를 썼으나, 다른 작품에 비해 문학적 가치는 매우 떨어진다. /브리태니커    
1973    칠레 시인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댓글:  조회:4197  추천:0  2017-01-02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Gabriela Mistral (1889-1957) 칠레 시인·외교관. 본명은 Lucila Godoy y Alcayaga. 필명은 이탈리아 작가인 G. 단눈치오와 프랑스 시인 F. 미스트랄에서 유래한다.   16세부터 지방 학교 교사로 있다가, 1923년에는 칠레대학 교수가 되었다. 3편으로 구성된 《죽음의 소네트(1914)》로 국민시가상(國民詩歌賞)을 받아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제1시집 《비탄(悲嘆, 1922)》은 연인의 자살로 막을 내린 연애의 후유증을 자세히 그린 것인데, 거기에 보이는 애정·절망·공허감은 차츰 보편적인 대상, 즉 인간·하느님·자연으로 향하여 모성(母性)과 무한한 자애로 승화되어 갔다. 이 점에서 관능적 사랑을 구사하는 신낭만주의에 머물렀던 그 시대 여류시인들을 능가하였다. 그 밖에 《애정(1924)》을 거쳐 제2시집 《파괴(1938)》에서는 정신적 고뇌가 종교(가톨릭)를 통한 영혼의 구원으로 승화되며, 마지막 시집인 제3시집 《포도통(葡萄桶, 1954)》에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노래하여 성숙한 여류시인으로서의 부드러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1930년 이후 컬럼비아대학 등에서 문학을 강의했고, 외교관으로는 1933년부터 1957년까지 마드리드·리스본·니스·로스앤젤레스 등의 영사로 근무했다. 1945년 중남미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위의 내용에서 보시면 제1시집 《비탄(悲嘆, 1922)》, 《애정(1924)》,제2시집 《파괴(1938)》, 제3시집 《포도통(葡萄桶, 1954)》등의 시집을 낸것 같습니다.
1972    이탈리아 시인 - 단눈치오 댓글:  조회:6229  추천:0  2017-01-02
  출생일 1863. 3. 12, 이탈리아 페스카라 사망일 1938. 3. 1, 가르다 호숫가의 가르도네리비에라 국적 이탈리아 요약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이탈리아 문단을 이끈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자이다. 16세 대 첫 시집 를 펴냈다. 이후 개성이 뚜렷한 시집 , 자전적 소설 , 단눈치오 시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를 펴내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군에서 여러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공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전투 중 한쪽 눈을 잃었다. 1919년 300여 명의 지원병들과 함게 달마치야 항구를 점령했으며, 1920년 12월까지 집정관으로서 피우메를 다스렸다. 그뒤 파시스트가 되어 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 훈장과 함께 국정판으로 작품집을 펴내는 포상을 받았고, 이후 은둔하면서 회고록과 고백록을 썼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이탈리아 문단을 이끌었다. 저명한 정치가이자 페스카라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로마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6세 때 첫 시집 〈이른봄에 Primo vere〉(1879)를 펴냈다. 시집 〈새로운 노래 Canto novo〉(1882)는 개성이 더 뚜렷하고 활기가 넘치며, 정열적이고 감각적인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자전적 소설 〈기쁨의 자녀 Il piacere〉(1898)에서는, 이후 그의 소설에 많이 나오는 니체의 초인과 같은 정열적 주인공이 첫선을 보인다. 〈침입자 L'innocente〉(1892)에도 그러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죽음의 승리 Il trionfo della morte〉(1894)를 발표할 무렵에는 그는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이 소설과 그뒤에 발표한 대표작 〈바위산의 처녀들 Le vergini delle rocce〉(1896)에는 악독할 정도로 이기적이며 철저하게 비도덕적인 니체적 주인공이 등장한다. 단눈치오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시 부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서정시집 〈하늘·바다·땅·영웅을 예찬하며 Laudi del cielo del mare della terra e degli eroi〉(1899)이다. 이 연작시의 제3권 〈알키오네 Alcyone〉(1904)는 토스카나 지방 여름의 냄새·맛·소리·사건들을 그려낸 작품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단눈치오 시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다. 1894년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와 오랜 기간 계속된 불륜의 관계를 시작했고, 그녀를 위해 비극 〈조콘다 La gioconda〉(1899 상연)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Francesca da Rimini〉(1901 상연)를 비롯한 희곡을 쓰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쓴 관능적인 소설 〈불꽃 같은 삶 Il fuoco〉(1900)에서 둘의 관계를 드러냈다. 가장 뛰어난 희곡은 아브루치 농민들의 두려움과 미신을 그린 힘찬 시극 〈이오리오의 딸 La figlia di Iorio〉(1904 상연)이다. 뒤이어 여러 편의 희곡과 장편소설 1편을 발표했으나 그 수입으로는 사치스런 생활을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빚을 지게 되어 1910년 프랑스로 피신해야만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도 참전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이탈리아가 참전을 선언한 뒤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군에서 여러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마지막으로 공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전투중에 한쪽 눈을 잃었다. 1919년 300여 명의 지원병들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에 반기를 들고 피우메의 달마치야 항구(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리예카)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정부와 연합국 측에서는 이곳을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주로 합병시키자고 제안했으나, 단눈치오는 이탈리아에 속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12월까지 집정관으로서 피우메를 다스리다가 이탈리아 군부의 강압에 못이겨 통치권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행동으로 피우메에서 이탈리아의 이권을 확보했으며, 이 항구는 1924년 마침내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뒤 열렬한 파시스트가 되어 베니토 무솔리니로부터 훈장과 함께 국정판으로 작품집을 펴내는 포상을 받았으나, 이탈리아 정치에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롬바르디아의 가르도네리비에라로 은둔하여 회고록과 고백록을 썼다(피우메 문제). 다채로운 경력, 말썽 많은 연애사건, 전시에 보여준 대담성, 2차례의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발휘한 정치적 지도력과 웅변술 때문에 그는 당대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문학작품들은 자기중심적인 관점, 매끄럽고 음악적인 문체, 여성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통해 얻은 감각적 만족감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점 등이 특징이다. 〈밤중 Il notturno〉(1921)을 비롯한 몇몇 흥미로운 자전적 작품을 빼면 산문은 지루한 느낌을 준다. 또한 당대의 사상과 양식을 지나치게 받아들인 까닭에 다른 작가들의 영향을 무분별하게 반영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부분의 희곡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지만 〈이오리오의 딸〉만은 힘차고 박진감있는 인물묘사로 돋보인다. 시인 단눈치오의 위력은 풍부한 감수성에서 나온다. 일찍이 〈이른봄에〉와 〈새로운 노래〉에서 여인과 자연을 사랑하는 소년의 넘치는 건강과 젊음의 패기를 명료하고도 힘있게 그려내는 놀라운 재능을 보인 바 있다. 비록 그뒤의 시에서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주제로 돌아섰지만, 성숙기의 대작 〈하늘·바다·땅·영웅을 예찬하며〉, 특히 제3권 〈알키오네〉에서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되찾았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새롭고 음악적인 형식을 찾아냈다. 〈알키오네〉에 실린 시 가운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감각적이고 환희에 찬 느낌을 표현한 몇 편은 이탈리아 현대시의 걸작에 속한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년 ~ 1938년)는 이탈리아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아브루치의 페스카라에서 태어났다. 카르두치의 영향을 받은 1880년 시집 으로 인정받았다. 정력적인 작가로 시집 13권, 단편집 4권, 소설 8권, 극작 17편, 그 밖에 평론, 산문집 등이 있다. 1893년에 의 불역(佛譯)이 나와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1910년에 빚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조국 이탈리아의 참전을 주장하고 귀국, 그해 7월 의용군에 가담하여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그 이듬해 비행 중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종전 후 국제 연맹의 결정에 항의하여 피우메 시(市)를 점령하는 장거를 감행하였다. 1921년 동시를 자국군에 인계하고 귀국, 1924년 몬테 네보소공(公)으로 봉(封)함을 받아 파쇼 정부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1938년 가루다 호반에서 사망하였다.   목차   [숨기기]  1작품 세계 1.1시 및 소설 작품 1.2희극 작품 1.3여성 편력   작품 세계[편집] 시 및 소설 작품[편집] 그는 프랑스 자연주의와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시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활기에 찬 운율로 생의 환희를 노래하며 관능적 미가 넘치는 것이었다. 특히 중의 제3권 (1904) 가운데에 우수작이 많다. 19세기 말 퇴폐적인 남부 유럽적 향락을 구가하는 소설도 많이 썼는데, (1889), (1892), (1894) 등이 걸작이다. 육체의 쾌감을 추구하면서 항시 불안에 괴로워하는 향락주의자의 심리를 시와 같이 응축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어느 작품에나 대중 취향을 꺼려한 니체적인 초인사상(超人思想)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한없는 미의 추구자이던 그는 동양 문물에도 흥미를 가져 이를 작품 속에 취급한 것이 있다. 희극 작품[편집] 1898년 을 가지고 극단에 등장했다. 이듬해에 발표된 과 함께 대화체의 시(詩)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연극성은 빈약하다. 산문으로 쓰여진 3작품 (1898) (1913)도 지나치게 대사에만 의존하여 무대에서의 성공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낭만파가 묘사한 중세라는 이질적인 피비린내나는 황량한 세계에서, 단테로부터 힌트를 얻어 엮은 사랑의 이야기를 전개한 시극(詩劇) (1902)는 단눈치오의 본령(本領)을 보인 것이며, 또한 (1904)는 원시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농민극으로, 신앙의 기적과 동물적인 욕정의 대립에 고도의 긴장을 보이는 걸작으로, 각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1906)는 고도의 서정성이 있는 작품으로서 연출가에게 큰 흥미를 주며, 그리스 비극에서 취재한 (1909)와 함께 주목된다.   여성 편력[편집] 그는 단신에 과히 뛰어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면 어떤 귀족 부인이든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을 지녔다. 부드러운 음색과 달콤한 수사어로 상대를 찬미했으며, 과감하고도 은근한 눈길로 여성을 사랑에 빠지게 했다. =========================     [TV리포트=문지연 기자] =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정신적 지주가 된 시인 단눈치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피우메를 차지한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이야기가 담겼다. 이탈리아의 방해에도 피우메를 차지했던 단눈치오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후 무솔리니의 집권 기간 동안에는 전쟁 영웅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손을 잡기로 했으나 피우메 영토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이에 승전국이 됐지만 피우메를 차지한 단눈치오 탓에 피우메는 묶인 땅이 되고 말았다.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그를 따르던 2000여명의 추종자와 함께 피우메를 점령했고 이에 이탈리아는 적당한 때를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단눈치오는 피우메를 자유사상으로 통치했고 이에 이탈리아 국민들은 거주지를 점점 옮기기 시작했다.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단눈치오 정권은 생각보다 오래 가며 이탈리아의 골치를 썩였다.    이탈리아는 피우메를 무력으로 차지하지도 못한 채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탈리아는 피우메를 차지하기 위해 식량보급로를 차단했다.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이 작전에도 피우메는 끝까지 이어갔다. 단눈치오가 독립국으로 인정 된다면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 따라 경제적 지원이 이뤄질 것이고 이 전에 이탈리아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결국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조약을 맺고 공동 관리하기로 했다.   결국 단눈치오의 자유사상은 피우메의 규제와 도덕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매음굴에 범죄 소굴로 불리는 등 불명예를 안은 것. 이에 이탈리아는 단눈치오를 내려보낸 뒤 이탈리아로 데려왔고 피우메를 차지할 수 있었다. 5년 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집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정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로 존경했다.   무솔리니는 1938년 열린 단눈치오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이탈리아 국왕은 무솔리니의 청에 단눈치오를 몬테네보소공으로 봉했고 직위를 줬다. 단눈치오는 말년을 호화롭게 보내며 75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잠들었다.  /문지연 기자 ==================   엘레오노라 두세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 산 마르코의 장녀,     선율적인 자태.     고통과 무한한 관용을     창조하는 여인."  그들은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랐다. 그는 명성과 그 외적인 표상들을 즐겼고, 독자가 보내는 반응과 경의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떠들썩한 것을 기피해서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숭배자들 앞에서 몸을 숨겼으며, 자기 삶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는 낭비가 심했고 그녀는 검소했으며, 그는 사치를 즐겼고 그녀는 소박하게 살았다. 그는 장광설에 이를 정도로 고도의 수사, 충만한 감정, 풍부한 암시를 작품에 담았기 때문에 걸출했고, 그녀는 인위적으로 꾸며진 당시의 부자연스러운 연극 관례를 깨고 극단적인 소박함을 택했기 때문에 탁월했다. 이런 점에서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연극배우 엘레오노라 두세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그들의 재능과 사랑이 모든 성격적 특성보다 더 강하게 두 사람을 결속시켜 주었기 때문에 커플이 되었다.      페스카라의 상인 집안 출신이었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이미 열일곱 살 때 청소년 작가로 주목을 받았으며, 서정시와 산문으로 일찌감치 문학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정말 불 같은 사나이로 , 새로운 영감을 얻고 책을 쓸 때마다 매번 아름다운 여인을 필요로 했고 또 이용했다. 그의 예술적 모범은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였으며 '  좋합 예술 작품' 에 대한 바그너의 비전이 이탈리아에서도 실현되기를 바랐다.   엘레오노라 두세는 유랑 배우들 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가 롬바르디아 지역을 돌아다니는 극단을 운영했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무대에 섰던 엘레오노라는 열두 살 때 이미 눈이 크고 여린 소녀로 연인 역을 연기했다. 그녀의 탁월한 재능은 서서히 드러났기 때문에 절대적인 인정을 받기까지는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두세는 먼저 무대위에서의 자연스러움과 명확한 이미지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가르쳐주어야만 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극단을 갖고 공연 계획에서 잡동사니들을 제거하고 연출의 상세한 부분까지 함께 결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성공하게 된다.      단눈치오와 두세는 1895년 베네치아에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서른여섯 살이었던 두세는 작가 알고 보아토와 애인 관계였으며 연극배우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몇 차레의 순회 공연을 통해 지구의 반을 돌았고, 디바의 화신으로 숭배받으면서 자기 고향은 물론 유럽의 다른 지역이나 해외에서 신격화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와 정반대의 격앙되고 인위적인 스트일을 연기했던 프랑스의 최고 여배우 세라 베르나르와 대등한 위치에 오르는 데도 성공했다. 그녀보다 다섯 살이 어렸던 단눈치오는 나폴리 공주의 연인으로 그녀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고, 소설가 , 시인, 바람둥이로 나라 밖에까지 유명해져 있었다.      두 사람 다 결혼을 했으나 오래 전부터 배우자와 헤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그들의 만남과 사랑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이 활발한 관심을 보였는데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시인과 디바가 나름대로 우상이자 수출품으로 각자 모두의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공주는 단눈치오에게 이미 넌더리가 나있었고, 보이토는 두세에게서 완전히 물러난 상태였다. 연장 순회 공연이 두세를 애인한테서 끊임없이 빼앗아갔기 때문에 두 연인에게는  함께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함께,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 하자면 그러한 상황에 적응하는데 더 큰 어려움은 없었다. 두세는 피렌체 아주 가까이에 작은 집 ' 라 포르치운콜라(제비집) ' 를 빌렸다. 단눈치오는 이웃해 있는 빌라 ' 라 카폰치나' 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 이들의 여러 전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듯이 --   " 르네상스 군주방식으로 " 화려한 생활을 했다.       이제 단눈치오에게는 두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서 ' 종합 예술 작품' 의 이탈리아적 변형 형식을 무대에 올릴   일만 남아 있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 있는 바그너의 축제 극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극장에 대한 꿈을 꿨다. 그 당시까지 극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의 무대 이념에 대한 훌륭한 해석가이자 비평가가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세도 자신에게 새 아침이 밝기를 희망했다. 프랑스 살롱 연극이 주를 이루었던 레퍼토리를 가지고 20년 가까이 항상 똑같은 것만을 연기했던 그녀는 에 진저리가 나 있었다. 이미 입센 작품이 있었고 골도니 (1707~1793), 이타리아 극작가 - 옮긴이) 의 작품은 항상 새롭게 각색할 만한 가치가 있긴 했지만 , 극단장 두세는 이탈리아인으로 자신과 함께 국립극장을 현대화할 수 있는 동시대 극작가를 원했다.     두 사람이 함게 보낸 6년은 그들에게 예술적으로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해주었다. 단눈치오는 뛰어난 소설 『 불 』 과 중요한 시들을 썼고, 두세는 비극 배우로서의 명성을 하나 더 얻고 자신의 예술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런데도 이탈리아 연극이 제대로 부활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단눈치오가 극작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근거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작품들을 -- 두세만이 아닌 -- 자기 애인을 위해서 썼지만, 그 작품들은 모두 부담스러울 정도로 언어의 수식이 심했다. 두세는 사실 '삶보다 과장된' 애인의 표현 방식에 당연히 반발심을 느껴야 했지만, 오히려 그를 믿고 지지하면서 자신이 평생 동안 저축했던 돈을 모두 그의 작품 제작에 투자했다. 다행이 최소한의 성과는 거두었고, 두세의 표현 예술은 언제나처럼 만장일치의 공감을 얻었다.  단눈치오는 소설 『 불꽃 』에서 자신의 수많은 연인들 중 자신이 유일하게 인격체로 여겼던 여성한테 모순적인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그는 두세를 더 젊은 여자에게 사심 없이 자리를 내주고 씁쓸해 하며 늙어가는 여자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실제 삶을 미리 정확하게 표현했다. 어쨋든 그는 책을 인쇄하기 전에 그녀의 동의를 구했다. 두세는 한 번역가에게서 "소설을 출판하세요. 예술 작품은 한 인간적인 존재보다 다 많은 가치가 있으니까요." 라고 썼다.           정말 두세는 그렇게 확신했을까? 그녀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슴으로 느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배유로서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창출했던 여성이었다면, 단눈치오에게 있어 천재란 인간적인 동정과는 무관했다. 이 위대한 시인은 자신의 작품과 그 작품에 예속된 노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이기부의자로서 자신을 선택받은 자, '초인' 으로서 생각했고, 또 틀림없이 그렇게 행동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단눈치오는 예술과 삶에 대한 니체적특징을 지닌 자신의 이해 방식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회의를 느끼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정치에 뛰어들어 베니토 무솔리니 편에 서면서 그런 태도를 반민주주의적인 격정을 지닌 변종된 위용으로 개조했다. 그는 1938년 가르다 호 근처에 잇던 자신의 마지막 거주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문학가보다 고급 장교들의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두세는 1924년 미국 순회 공연 중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단눈치오의 연인들 중에서, 헤어진 후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갔던 유일한 여성이다. 더구나 공백기를 보내고 난 후인 1920년대 초에 그의 작품들을 다시 연기함으로써 그를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용서했다.   평가>>  모든 사람이 감탄한 위대한 여배우는 뛰어난 재능의 작가를 사랑했고, 이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   읽을만한책 ; 『 불 』- 가브리엘라 단눈치오 볼만한영화 ; < 죄 없는 자> ,  이탈라아;1976 , 원작;가브리엘라 단눈치오  감독; 루키노 비스콘디                                     출연 ; 엘리지 체가니 (엘레오노라 두세) 둘러볼만한관광지 ; 가르다 호의 단눈치오 빌라 ' 비토레 알레'의 단눈치오 박물관      
1971    영국 시인 - 에디스 싯웰, o. 싯웰, s. 싯웰 댓글:  조회:5199  추천:0  2017-01-01
출생일 1887. 9. 7, 영국 요크셔 스카버러 사망일 1964. 12. 9,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시인.   처음에는 독특한 문체상의 기교로 명성을 얻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깊이있는 감정 처리와 심오한 인간애로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고집스러운 성격, 엘리자베스 시대의 복장, 기발한 의견을 가진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저명한 문인 집안에서 태어난 에디스 싯웰은 조지 싯웰 경의 딸이며, 두 동생 O. 싯웰 경과 S. 싯웰 경도 시인이다. 첫 시집 〈어머니 외 The Mother and Other Poems〉는 1915년에 출판되었다. 1916년에 2명의 동생들과 더불어 당시 조지 왕조의 영국 시단에 대항해 맹렬한 반항을 주도한 시선집 〈바퀴 Wheels〉 를 해마다 발간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들의 반항적인 태도로 인해 그녀의 독창적인 재능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초기시집 〈광대의 집 Clowns's Houses〉(1918)·〈목가적인 코미디 Bucolic Comedies〉(1923)에 나타난 시각적인 감수성과 음악적인 단어 사용, 〈잠자는 미인 The Sleeping Beauty〉(1924)의 아름다운 대상, 동요적인 상징, 낯선 이미지로 이루어진 독특한 세계 등은 W. B. 예이츠와 T. S. 엘리엇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시의 음악성을 특히 강조한 기법은 특히 〈정면 Faade〉(1923)에서 나타나는데, 윌리엄 월턴 경이 여기에 음악을 작곡해주었다. 더욱 거칠고 고통스런 이미지가 담긴 〈황금 해안의 풍습 Gold Coast Customs〉(1929)은 이미 습작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준다. 1930년에 〈시집 Collected Poems〉이 나왔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씌어진 〈거리의 노래 Street Songs〉(1942)·〈푸른 노래 Green Songs〉(1944)·〈추위의 노래 Song of the Cold〉(1945) 등 만년의 작품에서는 더욱 세련된 기법과 심오한 의미의 고통이나 정신성이 나타나 있다. 〈정원사와 천문학자 Gardeners and Astronomers〉(1953)·〈추방자들 The Outcasts〉(1962)에 특히 강조되어 있는 종교적 상징성으로 인해 비극적인 장려함과 심도를 가진 시인으로 전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1955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녀의 폭넓은 독서량과 학식, 잃어버린 화려한 귀족적 전통에 대한 편애 등은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1930)·〈베스 Bath〉(1932)·〈영국의 기인들 The English Eccentrics〉(1933)·〈나는 검은 태양 아래 살고 있다 I Live Under a Black Sun〉(1937, 스위프트의 생애를 다룬 소설)·〈시인의 비망록 A Poet's Notebook〉(1943)·〈윌리엄 셰익스피어에 관한 비망록 A Notebook on William Shakespeare〉(1948) 등의 산문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다. 미국을 여러 번 방문했으며 1953년 할리우드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소녀시절을 다룬 〈엘리자베스를 위한 팡파르 A Fanfare for Elizabeth〉(1946 초판)의 영화대본을 완성했다. 미국에서 〈1914~64년의 서한집 Selected Letters 1914~64〉(1971)으로 출판된 〈서한집〉은 존 레먼과 데렉 파커가 편집했다. 1954년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존 피어슨의 〈싯웰가(家) The Sitwells:A Family Biography〉가 1980년에 출판되었다. //////////////////////////////////   출생일 1892. 12. 6, 영국 런던 사망일 1969. 5. 4,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문인.   누나 에디스, 동생 서셰버럴과 함께 문학과 예술에서 전통적 조류에 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산문 회고록은 잘 알려져 있다. 〈풍자와 시 The Collected Satires and Poems〉(1931)·〈킴버 부인 Mrs. Kimber〉(1937)·〈시선집 Selected Poems, Old and New〉(1943)·〈타이드센드의 난파 Wrack at Tidesend〉(1952) 등의 시집에는 풍자적이면서 진지한 시들이 실려 있다. 소설은 〈폭격 전야 Before the Bombardment〉(1926)가 가장 유명한데,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요크셔 스카버러를 배경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마지막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싯웰은 이밖에도 단편소설과 비평을 썼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명성은 자전적 연속물 〈왼손! 오른손! Left Hand! Right Hand!〉(1944)·〈주홍나무 The Scarlet Tree〉(1946)·〈위대한 아침! Great Morning!〉(1947)·〈옆방의 웃음 Laughter in the Next Room〉(1948)·〈고귀한 본질 Noble Essences〉(1950) 등을 통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들 작품 속에서는 깊은 향수를 가지고 셰필드 근처의 영지 레니쇼홀과 스카버러에서 보낸 어린시절, 이튼 학교의 학창시절, 영국 척탄병부대(근위보병대 제1연대) 근무시절(1912~19)등 사라진 시기의 초상을 그려냈다.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괴짜이며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아버지 조지 싯웰 경에 대해 쓴 〈메리 여왕과 측근들 Queen Mary and Others〉(1974)이다. 이 회고록은 유고로 출판되었으며,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43년 준남작 5세가 되었다. 존 피어슨이 쓴 〈싯웰가(家) The Sitwells:A Family Biography〉가 1980년에 출판되었다. /////////////////////////////////     출생일 1897. 11. 15, 잉글랜드 요크셔 스카버러 사망일 1988. 10. 1, 노샘프턴셔 토스터 근처 웨스턴홀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시인·비평가.   시인이며 에세이 작가인 E.싯웰과 O.싯웰의 동생이다. 예술과 건축 및 여행에 관한 저술로 잘 알려져 있다. 주로 전통적인 운율로 쓴 시집 〈사람들의 궁전 The People's Palace〉(1918)·〈13번째 황제 The Thirteenth Caesar〉(1924)·〈리오 그란데 The Rio Grande〉(1929, 콘스탄트 램버트의 음악과 더불어 낭송)·〈시선집 Selected Poems〉(1948) 등과 기타 작품들은 그 전형적인 기법으로 예술과 음악에 대한 관심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해설풍의 저술들이 보다 독창성을 갖고 있는데, 처녀작 〈남부 바로크 예술 Southern Baroque Art〉(1924)은 학문적 연구 분야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의 운문체 산문은 '환상적인 자서전'이라 불리는 〈하루 동안의 여름 All Summer in a Day〉(1926)과 침울한 명상록 〈영광과 불행 Splendours and Miseries〉(1943)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1969년 형 O. 싯웰이 죽자 준남작작위를 승계하여 준남작 6세가 되었다. 〈For Want of the Golden City〉(1973)는 인생과 예술에 관한 수필집으로 자서전적 요소가 짙다. 뛰어난 여행가이기도 한 싯웰은 1982년 "전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에서 베네치아가 최고이며, 그 다음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존 피어슨의 〈싯웰가(家) The Sitwells:A Family Biography〉가 1980년에 출판되었다. ===============================     [출처] 이디스 시트웰 - 남에게 비춰지는 나의 모습|작성자 신축빌라 길라잡이 아직도 비는 내린다                      1940년 밤과 새벽 공습                                       이디스 시트웰 작/ 원 응순 역주   아직도 비는 내린다ㅡ 인간의 세상처럼 어둡고, 우리의 상실처럼 암담하고ㅡ 십자기에 못 박힌 1940개의 못처럼 눈먼 비가 내린다.   아직도 비는 내린다. 무연묘지*에서 망치소리로 변하는 심장의 고동과도 같은 그 무덤을 짓밟는   불경스런 발자국소리 같은 소리로, 아직도 비는 내린다. 거기에 작은 희망들이 싹트고 인간의 두뇌가 저 탐욕, 카인의 이마를 가진 벌레를 기르는 피의 들판에서.   아직도 비는 내린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 굶주린 사나이의 발치에 매일 밤과 낮으로 거기서 못박히는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ㅡ 부자(디베즈)와 나자로*에게도: 비 아래에서는 나창癩瘡과 황금도 하나이오니.   아직도 비는 내린다ㅡ 아직도 굶주린 사람의 옆구리에서 피가 내린다: 그는 그의 마음에 모든 상처를 지닌다ㅡ 사라진 빛의 상처를, 몸소 죽은 자살자의 심장의 최후의 아련한 불꽃, 막막한 슬픈 어둠의 상처, 호림을 당한 곰, 주인들이 그의 가엾은 살결에 매질하는 눈먼 울고 있는 곰의 상처를-----쫓기는 토끼의 눈물을.   아직도 비는 내린다ㅡ 그때에ㅡ“아 나는 나의 하나님에게로 뛰어 올라가련다! 누가 나를 끌어내리나?ㅡ 보라, 보라 그리스도의 피가 궁창에 넘쳐 흐름을*” 그 피는 흐른다, 우리가 나무위에 못 박았던 그 이마로부터 깊이 죽어가는 자에게로, ㅡ세계의 불을 소유한 목마른 심장, 씨이저의 월계관처럼, 고통으로 검게 더럽혀진 심장으로.   그때에, 인간의 심장처럼, 한때 짐승들 속에 누웠던 한 어린애였던 분의 목소리가 들린다ㅡ “아직도 나는 사랑하고, 아직도 나는 너희들을 위해 내 순결한 빛을, 내 피를 흘리노라.”     *Still Falls the Rain ㅡThe Raids,1940. Night and Dawn   by Edith Sitwell/ tr. by Won Eung-Soon   Still falls the Rainㅡ Dark as the world of man, black as our lossㅡ Blind as the nineteen hundred and forty nails upon the Cross.   Still falls the Rain With a sound like the pulse of the heart that is changed to the hammer beat In the Potter's Field, and the sound of the impious feet   On the Tomb: Still falls the Rain. In the Field of Blood where the small hopes breed and the human brain Nurtures the greed, the worm with the brow of Cain.   Still falls the Rain At the feet of the Starved Man hung upon the Cross, Christ that each day, each night, nails there, have mercy on usㅡ On Dives and Lazarus: Under the Rain the sore and the gold are as one.   Still falls the RainㅡStill falls the Blood from the Starved Man's wounded Side: He bears in His Heart all wounds,ㅡthose of the light that died, The last faint spark In the self-murdered heart, the wounds of the sad uncomprehending dark, The wounds of the baited bear,ㅡ The blind and weeping bear whom the keepers beat On his helpless flesh...the tears of the hunted hare.   Still falls the Rainㅡ Thenㅡ “O Ile leape up to my God: who pulls me douneㅡ” See, see where Christ's blood streams in the firmament.” It flows from the Brow we nailed upon the tree Deep to the dying, to the thirsting heart That holds the fires of the world,ㅡdark-smirched with pain As Caesar's laurel crown.   Then sounds the voice of One who, like the heart of man, Was once a child who among beasts has lainㅡ “Still do I love, still shed my innocent light, my Blood, for thee.”   [주] Edith Sitwell(1887-1964):  영국의 한 귀족 가문에 태어난 여류 시인으로, 옥스퍼드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생들 Osbert와 Sacheberell등과 함께 당시의 Georgian Poetry를 공격하는 시집“Wheels”를 1916~21까지 편집하기도 했으며,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를 비롯한 8권의 시집, 평전, 비평집, 그리고 소설 등 다양한 문학활동을 했다. 그녀의 시는 시형, 리듬, 기괴한 이미저리 창조 등 다양한 실험적인 시들을 쓰면서도 시의 음악적 기교에 큰 관심을 기우렸다.   *해설: 위의 시는 부제에 언급한대로 제 2차세계대전시 1940년 밤부터 새벽사이에 독일군에 의한 런던시의 폭격을 보면서 그 비참한 파괴와 죽음에 대해 느낀 바를 시로 읊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이런 처참한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실한 현대인이 겪는 비극으로 인식하고, 다시 그리스도를 찾는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노래한다. 이 시의 제목이 주는 “비 Rain”의 이미지는 많은 상징을 내포하는 것으로 계속 떨어지는 폭탄의 이미지와 그리스도의 흘러 떨어지는 피의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중요한 표현] *무연고 무덤 혹은 나그네의 묘지(the Potter's Field): ‘토기장이의 밭’의 의미로 성경 마태복 음 27장 3~10절에 나오는 내용을 말함. *부자와 나자로(on Dives and on Nazarus):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에 나오는 이야기로 사후에 부자 디베즈는 지옥으로, 문등병에 걸린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 *오 나는 내 하나님께로 뛰어 올라가련다! 누가 나를 끌어내리나? (Ile leape up to my God! who pulls me doune?): dl 독백 같은 구절은 16세기 영국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크리스토 퍼 말로우(C. Marlowe)의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사 The Tragical History of Doctor Faustus”의 재인용된 구절로서,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먹은 포스터스 박사가 악마와의 계약 기간 이 끝나는 12시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외치는 말. (역주자: 시인, 경희대 명예교수, 영문학박사)   [출처] 이디스 시트웰 - 받은 사랑|작성자 신호안차랑  
1970    "반디불" 저자 조룡남 원로시인 "반디불나라"로 가다... 댓글:  조회:3854  추천:0  2016-12-27
애창동요 '반디불'의 저자 조룡남시인 타계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2월27일 00시15분      지난 반세기동안 여러 세대 조선족어린이들 동심세계에 밝고 따뜻한 꿈을 안겨준 명동요 “반디불”(조룡남작사, 김덕균작곡)의 저자 조룡남선생이 2016년 12월 23일 7시 25분 간암으로 치료받다가 효험을 보지 못하고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조룡남선생은 서정시 700여수, 동시 300여수, 장시 20여편, 론픽션 100여편을 창작하고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에 이어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밖에서》, 《반짝반짝 반디불》, 《사람아 사람아》등 시집들을 펴냈다. 그중 “어머니”, “옥을파간자리”, “고향생각”, “반디불”등 10여수의 작품이 중소학교교과서에 수록되였다. 조룡남선생은 중국조선족의 가장 저명한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아리랑문학상, 천지문학상, 연변일보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진달래문예상, 길림성아동문학상,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2회),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준마상(2회)등을 수상했다. 2002년에 연변사범학교 교정에 “반디불 노래비”가, 2004년에 “비암산 진달래”시비가 세워졌다(박정웅). 인민넷    '조룡남시인 타계 1주기 기념 세미나'가 지난 12월 23일(2017년), 연변작가협회 회의실에서ㅡ
1969    독일 시인 - 베르톨트 브레히트 댓글:  조회:5515  추천:0  2016-12-27
베르톨트 브레히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르톨트 브레히트   출생 1898년 2월 10일  독일 아우쿠스부르크 사망 1956년 8월 14일  동독 동베를린 사인 심장병 거주지  독일,  동독,  미국 국적  독일 직업 극작가, 시인, 무대 감독 자녀 한나 히옵, 슈테판 브레히트, 바바라 브레히트 서명 베르톨트 브레히트(독일어: Bertolt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20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시인, 극작가,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연극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현주의를 거친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 스타일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풍자를 극화한 니힐리스트.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주요작품 2.1시 2.2희곡   생애[편집]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처녀작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는데, 《서푼짜리 오페라》는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불어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주요작품[편집] 시[편집] 브레히트의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례로 시 〈1492년〉은 이민을 심사하는 판사가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내서,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희곡[편집] 브레히트는 처음엔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처녀작인 ,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1928)와 (1930)을 낳았다. 와 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시에 불리한 시대                     브레히트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선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서정적, 독백적, 저항적 율격 : 내재율 어조 : 저항을 노래하는 남자의 의지적, 독백적 어조 심상 : 서술적, 상징적 심상 제재 : 나의 시 정신 주제 : 어두운 현실의 극복 소망     시구 연구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 토양이 좋지 않은 마당에서 자라난 나무가 뒤틀린 모양을 하는 것처럼 왜곡된 사회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그 시대에 자신의 시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느끼고 있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노래하면서 현실의 상처를 망각하기보다는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을 노래하면서 이들의 행복을 주장하고 찾아 내겠다는 것이다.   준트 해협의 -- 찢어진 그물뿐이다 : 바닷가의 낭만적이고 즐거운 풍경을 노래하면서 현실을 망각하기보다는 현실의 소외도고 억압받는 삶의 모습을 직시하겠다는 뜻으로 '즐거운 요트'와 '찢어진 그물'이라는 대립된 시어로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내 시에 각운을 -- 보일 것이다 : '운(韻)'은 서로 무관한 단어들의 화음을 통해 시 전체에 조화와 완결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작자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이므로 조화와 행복을 노래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선 --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 각운 등을 사용해 시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가슴 한 구석에서 숨쉬고 있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을 노래하기 보다는, 히틀러의 연설 내용이 지닌 여러 가지 비인간적 독소를 세계 만방에 드러내어 이를 차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의 2·3·5연은, 요트/어부들의 찢어진 그물, 마흔 살에 벌써 허리가 굽은 소작인의 여자/가슴이 뜨거운 소녀,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칠장이(히틀러)의 연설에 대한 경악(驚愕) 등과 같은 대립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대립적 문맥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적 불평과 억압을 함축한다. 첫 연에서 시적 화자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좋은 점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억압하는 사회적 어둠 속에서 화자는, 인간의 근원적 마음인 아름다움과 행복에의 추구에 대한 노래보다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시를 쓰고자 한다. 독일시에서의 운(韻)은 서로 무관한 단어들의 화음을 통해 시 전체에 조화와 완결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라는 시적 화자의 진술은,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조화와 행복의 세계를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시에 불리한 시대'라는 시의 제목은, 바로 운(韻)이 있는 조화와 행복한 세계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시대적 어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레히트의 시와 희곡의 특성 베르톨드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 1965)는 독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서사극 이론과 탁월한 희곡들을 통하여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그는 폭넓은 창작활동의 소산으로  상당히 많은 분량의 시도 남겼다.   브레히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문학에 대한 취미와 재능이 뚜렷하여  프랑소와 비용,  게오르크 뮈히너,  아르튀르 랭보,  프랑크 베데킨트 등의 작품을 탐독하고 학교에서 발간되는 교지 및 아우구스부르크 신문에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연대순으로 편집된 그의 시 전집을 보면 1913년 교지에 발표된 시가  그의첫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브레히트는 15세 때부터 공식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셈이다. 그후 평생에 걸쳐 40여년간 집필, 발표된 여러형태의 시는 1,2000여편에 이른다.   브레히트가 시를 쓰기 시작한 1910년대는 문예사조로 보아 표현주의 운동이 대두된 때였다. 그러나 당시의 독일 시단에서 실제로 널리 읽히는 신인들은 슈테판 게오르게, 후고 폰 호프만스탈, 라이너 마리아 림케 등 고답적인 신고전주의, 신낭만주의, 상징주의 유파의 대가들이었다.  전통적 시문학이 위세를 떨치던 이 무렵에 시대조류에 저항하는 방향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으로 우리는 고트프리트 벤과 베르톨드 브레히트를 꼽을 수 있다. 전자는 비의적 순수문학의 정점에 올랐고, 후자는 현실적 참여문학의 효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벤과 브레히트는 둘 다 의학도 출신으로 똑같이 1956년에 사망하였으며 특히 1950년대와 60년대의 독일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감정의 미학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언어를 시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된 출발을 했으나, 벤은 문학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형식을 중시하는 예술지상주의자가 되었고, 브레히트는 문학의 내용과 효용성을 강조한 리얼리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시인이라는 공통점을 빼놓으면 벤은 의사였고, 브레히트는 극작가였다. 체제순응적이던 벤과는 달리 브레히트는 일찍부터 반체제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브레히트 연극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 목적이 극예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있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H. Jendreiek는 이런 의미에서 말한다: 브레히트의 연극은 계급투쟁적인 막스주의를 극적으로 이행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물론 이런 의도를 지닌 연극이 브레히트 외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 피스카토르 E. Piscator의 『정치극』, 1960년대의 R.Hochhuth, P.Weiss, H.Kipphardt 등이 대표하는 소위 『기록극』도 사회개혁의 의도를 지향한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경우는 이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갖는다. 그의 극이 갖는 정치적 의도는 완전히 극예술의 형식으로 용해되여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은 극예술을 즐기면서 정치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브레히트의 말을 빌면  연극이 그의 서사극이다. 브레히트의 극에서는 헤겔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내용의 극예술적 형식은 양분될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억척어멈과 그녀의 자식들』, 『사천의 선인』, 『갈릴에이의 생애』, 『코카시아의 백묵원』 등과 같은 브레히트의 대표적 연극은 그 좋은 예이다.     브레히트 시의 이해/박찬일     1. 사용가치의 시       브레히트는 예술의 사용 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독일시단에서 쌍벽을 이룬 고트프리 벤과 대조를 이룬다. 벤은 문학을 통한 현실 참여에 반대했다. “가난한 자들은 올라가려고 하고 부자들은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다. 끔찍한 세계, 그러나 3천년이 경과한 후에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다만 현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벤은 문학적 형식만이 세상을 혼돈에서, 무의미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형식만이 신앙이고 행위이다./손에 의해 어루만져졌으나,/그 후 손을 떠난 조각품은/씨앗을 품고 있는 조각품이다”, “삶은 망상”이라는 것. 삶에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형식만 남는다는 것이다. 형식이 “씨앗”이라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는 상황을 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상황은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를 알아내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변화의 주체는 다수의 민중이고 변화의 객체는 소수의 지배계급이었다.     브레히트의 사용가치의 예술관은 계몽주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계몽주의 작가들은 문학의 과제는 ‘유익함과 즐거움’이라는 호라티우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레싱은 특히 문학의 유익함과 교술적 의미를 강조하여 무대를 “도덕 세계의 학교”라고 하였다. 브레히트의 예술관은 칸트 이래의 ‘예술의 자율성’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것이 “미적 취미”, 혹은 “아름다움”이었다. 예술은 사회적 이해관계,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뷔르거는 칸트가 예술을 최대 이윤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고 한 것으로 풀이했다.   2. 논리의 시     브레히트는 이성을 중시했다. 이때 이성은 시인의 이성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이성이기도 하다. 브레히트는 독자에게 이성을 요구했다. 장미는 시 한편이며, 독자는 꽃잎 떼어내듯 시행 하나하나(혹은 단어 하나하나)를 냉정한 논리로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훌륭한 시행과 잘못된 시행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능력 없이는 진정으로 시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능력은 논리적 능력이며, 진정으로 향유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즐긴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창작미학상의 목표는 논리적으로 즐기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낯설게 하기 효과”(소외효과)이다. 낯설게 하기 효과는 시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인식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소외시킨다는 것, 즉 낯설게 한다는 점에서 시학적 개념이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개념이다. 낯설게 만드는 과정이 논리적이다. 독자는 이 낯설게 만드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의 논리를 통과하면서 하나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는 시가 원래 “비사교적 요소들”이기 때문에 “주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주석이 시와 청자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청자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외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는 벤야민에 의하면 감정이입 대신에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또한 벤야민에 의하면 “중단”과 관계 있다. 시에서 의 예를 보자.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갑자기 짙은 빨강의 장미, 신선한 장미가 보이지 않는가? 아,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장미가 거기 있었네. 장미가 거기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장미가 거기 있었을 때 누구나 놀랐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이 시에는 시를 중단시키는 자아가 있다. 시를 중단시키는 자아는 ‘낯설게 하기 효과’를 노리는 자아이다. 중단은 낯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중단시키는 자아의 말이다. 특히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그렇다.  중단시키는 자아는 서사적 자아이다. 끼어드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서사적 자아는 첫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출발하지도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 둘째,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고 한 것이 그것.     독자에게 시를 논리적으로 즐기라고 하고 시인에게는 낯설게 하기라는 논리적 형식을 요구하는 것은 헤겔로 연원하는 서정시 개념에 반대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정시는 논리의 서정시가 아닌 ‘주관성’의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서사시는 “외적 실재의 형식”으로서 “사건 속에서 사실은 자유롭고 자립적으로 진행되며 서사적 자아는 뒤로 후퇴한다.” “객관적인 것”(내용)을 ‘주관성(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내면적 세계이며 “주관성”은 “직관, 느낌” 등이다.   3. 醜의 시     브레히트에게 보들레르의 쇼크는 부도덕적 쇼크로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도시의 정경, 대도시의 삶에 대한 기술은 부도덕적 쇼크의 판매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죽음, 주검, 파멸, 도박, 싸움, 신성모독 등에 대한 기술들이다. 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여 도덕적 단죄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쇼크에 관해서라면 브레히트도 보들레르 못지않다. 브레히트도 부도덕적 쇼크를 불러 일으켰으니 첫 시집 의 많은 시편들이 ‘부도덕’의 기록, 혹은 신성모독의 기록이었다.     악의 서술은 악(자본주의의 악)의 내용에 대해 ‘선의 방식’으로서의 대응이 아니라, 악의 내용에 대한 ‘악의 방식’으로서의 대응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서술은 악의 내용에 대한 선의 방식으로서의 서술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진선미의 법칙, 즉 진리의 법칙, 도덕의 법칙, 아름다움의 법칙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브레히트가 보들레르의 시편들을 부도덕적 쇼크라고 한 것은 그의 도덕적 엄숙주의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도덕적 엄숙주의자였다. 브레히트는 의 시편을 쓸 때는 도덕적 엄숙주의자가 아니었다. 보들레르의 시편들을 비판할 때 도덕적 엄숙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추의 미학은 ‘몰락’과 ‘폐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이다. 그의 초기 시집인 의 시편들은 19세기 말의 자연주의를 넘어 19세기 중반의 보들레르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자연주의에 와서 추의 미학이 보편적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는 산업화 시대의 문학이었다. 노동자, 빈민, 창녀, 알코올 중독자, 정신병자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문학이었다. 가난, 고통, 질병, 매춘, 살인이 미학으로서 자리 잡았다. 추의 미학이 자리 잡았다. 근대문학은 자연주의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추하기 때문에 문학에도 추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추의 미학’은 리얼리즘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 전통적인 진선미의 코드는 쉴레겔에 와서 완전히 그 위력을 상실한다. 문학예술은 진선미에서 완전히 독립한다. 진리 법칙, 도덕 법칙, 아름다움의 법칙에서 독립한다. 악과 추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문학적 형상화는 심미적인 것으로 정당화된다. ‘흥미로움/지루함’이었다. ‘흥미로움/지루함’의 코드가 이후의 문학의 잣대였다. 악과 추는 흥미로운 악과 추일 수 있고 지루한 악과 추일 수 있다. 지루한 문학보다 흥미로운 문학이 의미 있다면 의미 있는 악과 추일 수 있고 의미 없는 악과 추일 수 있다. 보들레르와 자연주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악과 추가 의미 있는 악과 추라면 ‘산업화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 김수용 외, 악의 문학적 형상화 연구,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19호, 2002   마지막으로 브레히트의 시 두 편을 감상해보자.     마리에 대한 추억     1 푸르른 9월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나는 그녀를, 그 고요하고 창백한 사랑을 조용히 품에 안았네. 마치 부드러운 꿈인 듯 했네. 우리 머리 위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떠있었네. 그 구름을 나는 오래 쳐다보았네. 아주 하얗고 엄청 높은 곳에 있던 구름. 내가 다시 올려 보았을 땐 사라지고 없었네.     2 그날 이후 수많은 달, 수많은 세월이 조용히 흘러 흘러 사라져갔네. 자두나무들은 아마 베어졌을 것. 사랑이 어떻게 됐느냐고 그대가 물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리. 그대가 말한 뜻을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정말이네, 그녀 얼굴이 생각나지 않네. 다만 그녀 얼굴에 언젠가 키스를 했다는 사실뿐.     3 그 키스도 구름이 여기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오래 전에 잊었을 것이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구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구름은 아주 희었네. 위에서부터 온 것이라네. 자두나무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을지. 그녀는 일곱 번째 아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그러나 구름은 몇 분 동안만 피어올랐고 내가 올려다보았을 대 벌써 바람에 사라지고 없었네.           악한 자의 가면       내 방 한쪽 벽면에 일본 목각 작품 한 개가 걸려 있다. 금색 칠을 한 악마 형상의 가면이다. 이마에 툭 불거진 힘줄을 감전된 듯 나는 본다. 그것은 악한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   죽은 병사의 전설 (1918) / 베르톨드 브레히트 1 전쟁이 일어난 지 네 번째 봄에 접어들어서도  평화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자  병사는 결단을 내리고  영웅적으로 전사했네. 2 전쟁은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자기의 병사가 죽어버린 것이  아무래도 너무 때 이르게 생각되어  황제에게는 유감이었네 3 무덤들 위로 여름이 오고  병사는 이미 잠들었는데  어느날 밤 의무부대가  이곳에 나타났네 4 의무부대 군인들은  묘지로 나가  신성한 군용삽으로  전사한 병사를 파내었네. 5 군의관은 그 병사를, 아니  그 병사의 아직 남아 있는 시체를 자세히 보고  그가 갑종합격자임을 알아내었네.  그리고 슬그머니 위험을 피해 도망쳤네. 6 그들은 곧장 그 병사를 데리고 갔네.  밤은 푸르고 아름다웠네.  철모를 쓰지 않았더라면  고향의 별들이 보였을 것이네. 7 그들은 병사의 썩은 몸뚱이에  독한 화주를 뿌렸네.  병사의 팔에는 두 사람의 수녀와  반쯤 벌거벗은 계집을 매달아 주었네 8 병사한테서 지독하게 썩은 냄새가 풍겨 나오므로  목사 한 사람이 앞장서 절뚝거리며  병사한테서 냄새가 풍기지 않도록  그의 몸 위로 향로를 흔들어대네. 9 앞에서는 악대가 쿵작작  신나는 행진곡을 연주하네.  병사는 그가 배운대로  엉덩이 높이까지 다리를 곧게 올려 내딛었네. 10 형제처럼 병사를 팔로 감싸고  두 사람의 위생병이 함께 걷고 있네.  그렇지 않으면 병사는 아마 진창속으로 쓰러져 버릴 터이니  그랬다가는 큰일이네. 11 그들은 병사의 수의에다  흑, 백, 홍색을 칠하여  그것을 병사의 앞에 쳐들었네.  색깔 때문에 온갖 더러운 것이 보이지 않았네. 12 가슴이 떡 벌어진 신사 한 사람이  연미복을 입고 앞장서 걸었네.  독일의 사나이로서 이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똑똑히 알고 있었네. 13 쿵작작거리며  어두운 가로를 따라 행진했네.  폭풍 속의 눈송이처럼  병사도 비틀거리며 함께 행진했네. 14 고양이와 개들이 울고 짖고  들판의 쥐들도 사납게 찍찍거리네.  그것들도 프랑스편이 되고 싶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것은 치욕이므로. 15 그들이 마을을 지나갈 때면  그곳의 여자들이 모두 나왔네.  나무들이 허리를 굽히고, 만월이 비치고  모두가 만세를 외쳤네 16 쿵작거리는 소리와 환송의 외침!  여자와 개와 목사!  그리고 그 한가운데 죽은 병사가  취한 원숭이 처럼 끼여 있네. 17 그들이 마을을 지나갈 때면  아무도 이 병사를 볼 수 없었네.  쿵작작거리고 만세를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네. 18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로싸고 춤추며 소리쳤으므로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네.  오로지 하늘에서만 그를 내려다 볼 수 있었으나  하늘에는 별들만이 반짝이고 있었네. 19 별들이 언제나 떠 있는 것이 아니네.  이제 아침 노을이 붉게 물들어 오네.  그러나 병사는 그가 배운 대로  영웅적인 죽음을 행하여 행진해 가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갑자기 짙은 빨강의 장미, 신선한 장미가 보이지 않는가? 아,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장미가 거기 있었네. 장미가 거기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장미가 거기 있었을 때 누구나 놀랐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브레히트 시 몇편 더...  우정에 대하여 / 브레히트 듣건대, 뉴욕 26번가와 브로드웨이의 교차로 한 귀퉁이에 겨울철이면 저녁마다 한 남자가 서서 모여드는 무숙자(無宿者)들을 위하여 행인들로부터 동냥을 받아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브레히트,「임시 야간 숙소」(1931) 전문   "이 시의 핵심은 2연과 3연에 등장하는 두 번의 ‘그러나’이다. 그리고 두 번째 ‘그러나’ 이하의 행들을 이 시의 주제로 간주하고 첫 번째 ‘그러나’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면 시를 절반밖에 읽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주려는 노력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방법으로 이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몇 명의 사람들이 하룻밤 동안 바람과 눈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로 임시 야간 숙소를 비웃는 좌파는 얼치기이다."  그리고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보다 12년이 지난 후 브레히트는 「민주적인 판사」라는 시를 쓴다.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 앤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의 식당 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보칙(補則)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 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각하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왔으나 물론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는냐는 세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판사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 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본 결과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 브레히트, 「민주적인 판사」(1943) 전문   "'민주'라는 단어에서 합리적 의사결정, 절차, 다수결 등만을 떠올리는 사람은 이 시의 제목과 내용이 도대체 무슨 관련을 갖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합리적 의사결정, 절차, 다수결이 아니라면 어떤 '민주'일까? 우정, 우정어린 이해. 판사가 보여주고 있는 위대한 우정을 빼고 어떻게 우리가 '나'나 '너'가 아닌 '우리'로서 우리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임시 야간 숙소」에서 '임시야간숙소'와 '책' 사이에서 갈등하던 브레히트는 「민주적인 판사」에 와서 한층 더 담백하고 따뜻하게 '우정'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임시 야간 숙소」와 「민주적인 판사」 사이에 「후손들에게」가 있다. Ⅰ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직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나의 행운이다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시라고.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쓰여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 들지 말고 짧은 한평생  두려움 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약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II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반란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누워 잠을 자고  되는대로 사랑에 빠지고  참을성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향해 나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도살자들에게 나를 드러내게 하였다.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안하게 살았고, 그러기를 나도 바랬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너무 약했다. 목표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비록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였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III  우리가 잠겨 버린 밀물로부터  떠올라 오게 될 너희들.  부탁컨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생각해 다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 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 다오.  - 「후손들에게」(1934/1938) 전문   이 시를 '암울한 시대'를 핑계를 삼은 변명으로 읽는 것은 잔인하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 느껴야만 하는 것은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와 그러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던 자신과 자신의 동시대인들에 대한 절절한 진심이다.  항상 똑같은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우애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우정 역시 역사적인 것으로 고찰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말처럼 '암울한 시대'로 인해 인간이 인간에게 친절할 수 있는 능력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허약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 못할 때, 우리도 브레히트처럼 '암울한 시대'를 이야기할 것인가? 우리가 네트워크, 정동, 사랑을 이 시대의 혁명과 무엇보다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우정과 친절함이 강력한 싸움의 무기, 아니 싸움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인가?  조직, 실천, 운동과 같은 말들보다는 우정이 더욱 근본적이다. 어떠한 냉철함도 따뜻함의 계기로 배치될 때에만 사람을 살리는 일, 즉 혁명에 함께 할 수 있다. 증오와 분노 이후에 친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기 때문에 증오하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들의 순서가 역전될 때,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들 스스로를 숨막히고 답답하게 할 때 우리는 다름아닌 우리의 발밑에 브레히트의 '암울한 시대'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쓰게 될 「후손들에게」는 브레히트의 그것과는 달리 구차한 변명 이상이 되기 힘들 것이다.  ======================= 이 시대의 마지막 구원자/// 독재자 히틀러의 폭압과 그에 대한 광신도들로 넘쳐나던 광란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동원하여 항거 하였으며 죽음의 직전에서 망명하였다   망명한 러시아와 중국에서 그는 이미 독재로 변질된 공산주의에 맞써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펜 한자루로 그가 할수 있는 유일한 저항을 하다 추방 되어진다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물질 자본주의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그를 이데올로기 우월의 증거로 삼으려는 미국에게 저항하며 자본의 계급화 인간성 말살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지척 거리에 고향을 두고 자신의 입국을 불허하는 당시 동독 정부에 의하여 고향을 그리워 하며 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오로지 사랑과 행동 만이 인류를 구원할수 있다" 는 메시지를 남기며 마지막 유언에서 "나의 비문에 오직 후세 사람들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써주길 바란다" 고 하였다   그의 시들을 흘려보지 말라 각자의 입장에서 듣기 좋은 시들로 추려진 이데올로기적 시선의 각색에 왜곡 당하지 말라   그를 단순히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소유자 라고 평한다면 그건 브레히트를 욕되게 하는것이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그토록 단순하고 편리하게 이름 붙여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를 단순히 민주주의 성향의 반 나치즘 반 공산주의자라고 단언하지 말라 그것은 그를 이용하여 상대를 공격하고 자화자찬하는 수단일뿐이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아래로부터 평등하고 모두의 지성으로 평화로우며 나누는 세상이다 추악한 고리대금 업자들과 그에 기생하는 정치꾼들의 권익이 아니다   그는 권력 투쟁으로 힘을 쟁취하려는 독재자들이 변질시키거나 왜곡시켜 놓은 이데올로기에 맞써 유일하게 인간의 지성으로 무지와 폭력의 시대와 맞써 싸운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한 전사였다          숨결에 관하여///  1  언젠가 이곳에 늙은 여자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2  그 여자는 먹을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3  빵은 군인들이 다 처먹어 버렸던 것입니다.  4  그때 그녀는 차가운 하수도에 빠졌습니다  5  그러자 그녀는 더이상 배가 고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6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7.  언젠가 이곳에 사망진단 의사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8  이 늙은 여자는 사망진단서를 떼어달라는군,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9  그러자 사람들은 이 배고픈 여자를 파묻어 버렸습니다  10  그리하여 이 늙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1  그 의사만 혼자서 이 늙은 여자를 비웃었습니다.  12  작은 새들도 숲숙에서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13  언젠가 이곳에 이상한 남자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14  이 남자는 질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15  그는 이 일에 수상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6  그는 그 늙은 여자에게 일종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17  인간은 무엇인가 먹을 수 있어야 해. 자 --- .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18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19  그때 갑자기 이곳에 경찰관이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20  이 사람은 고무로 만든 곤봉을 휴대하고 와서  21  그 남자의 뒤통수를 갈겨 묵사발을 만들었습니다.  22  그리하여 이 남자도 아무 말 못하게 되었습니다.  23  그래도 경찰관은 무슨 소리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24  지금도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한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25  언젠가 이곳에 수염을 기른 남자 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26  그들은 이 일이 오직 그 이상한 남자와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27  그들은 총소리가 울릴 때까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28  그러나 그 다음에는 구더기가 그들의 살을 뚫고 뼈 속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29  그러자 그 수염을 기른 남자들도 아무 말 못하게 되었습니다.  30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31  그때 갑자기 이곳에 네 사람의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32  그들은 군인들과 한번 담판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33  그러나 군인들은 기관총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34  그러자 모든 사나이들은 아무 말 못하게 되었습니다.  35  그래도 그들은 이마의 주름살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36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37  언젠가 이곳에 커다란 붉은 곰이 한 마리 나타났습니다.  38  이 곰은 이곳의 관습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고, 곰으로서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39  그 곰은 지난 날과는 달리 모든 암흑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40  그리고 그 곰은 숲속의 작은 새들을 잡아 먹었습니다.  41  그러자 작은 새들은 이제 침묵하지 않았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불안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이제 숨결을 느낀다.  (1924년 브레히트)  ============================================   베르톨트 브레히트 (1898-1956)     언젠가 브레히트는 그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 사람의 초상을 하나 만들어 그가 그것에 비슷해지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놀란 사람들이 물었다. "누가요? 그 초상이 그 사람에 비슷해진다고요?" 브레히트는 차분하게 "아니오, 그 사람이 초상에 비슷해지도록 말이오"라고 말했다. 이 뜻밖의 답변은 사람은 모름지기 마지막 순간에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브레히트의 신념을 반영해 주고, 또한 "내 자신 속에는 한 사람이 들어 있는데, 너희는 그 위에 (그것을 토대로 삼아 - 역주) 어떤 것도 지을 수 없을 것이다"는 그의 고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신뢰할 수 없음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변화를 옹호하는 말이다. 사랑이란 어떤 완성된 사람, 즉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가 (흔히 시민사회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듯이) 그 사람이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자 이내 실망해 버리는 어떤 "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고, 그 사람 이상의 것, 그 사람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태도이다. (...)     브레히트는 아욱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우선 부친이 아직 회사원이었을 때 소시민적 환경에서 살았다. 부친이 하인들 Haindl의 제지공장의 지배인으로 진급하고 나중에 공장장으로 까지 진급하자 그의 가족은 재단소유의 거주단지로 이사하였다. 주변은 프로레타리아적 환경 이었지만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의 크기나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은 그러한 주변환경과 대조를 이루었다. 젊은 브레히트는 이러한 삶의 장점들을 향유하였다.     그는 평범한 부르주아적 청소년기를 보냈고 최초로 습작도 시도했다. "조국의 출범 vaterländischer Aufbruch" (1914)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한 그는 (물론 위탁을 받아서이기는 했지만) 황제와 전쟁과 조국에 열광적인 찬사를 담은 글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그와는 반대되는 면모도 보였는데, 이러한 면모는 그가 주도하던 -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도 한 - 동호회인 브레히트派에서 발전되었다. 이들은 시민들을 놀라게 하면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고 주로 자연 속에서 모임을 가졌다. 1918년 최초의 장편 드라마로 구상된 바알 Baal이라는 인물은 비록 브레히트 자신을 제한적 의미에서만 반영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의 반부르주아적 태도가 반영된 인물이다. 바알은 사회적 인습들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애호받는 가치들을 모두 부정하며 (젊은 브레히트의 니힐리즘) 자신의 "천성적인" 생명력을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소진시키는 천재적 작가상을 나타낸다. 대학시절을 그는 아욱스부르크와 뮌헨을 왔다갔다 하면서 보냈다. (1917-1924) 1918년에 쓴 「죽은 병사의 전설」이라는 시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 때문에 그는 20년대에 벌써 나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브레히트는 뮌헨에서 한번도 제대로 대학공부를 한 적이 없다. 그 대신 그는 최초로 대성공을 거둔 드라마 『한밤의 북소리』(1919)를 써서 클라이스트 상까지 받게 된다. 브레히트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예링 Herbert Jhering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 문학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고 극찬하였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새로이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부르주아계층을 비판한다. 이 부르주아들은 자기들의 몫을, 시체를 넘어서까지 확보하려 한다. 20년대의 인간상을 브레히트는 현실적응주의자인 겔리 게이라는 인물 속에서 포착하였다. 1924년과 26년 사이에 쓴 희곡 『남자는 남자다 Mann ist Mann』는 인간을 내면 깊숙이까지 변화시키는 사회적 변화들에 대한 "동의"를 변호한다. 인간은 기술에 종속되어 있고 대중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고립, 소외, 익명성 등이 그러한 대중사회와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동의란 새롭게 주어진 것들을 아무 유보없이 긍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라는 것이 단순히 소망의 영역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회적 현실에 개입해 들어갈 필요가 있음을 나타낸다. 흔히 "행동주의 Behaviorismus"라는 표제어로 기술되는, 대략 1924년에서 1931년 사이의 시기는 브레히트가 자본주의적 적응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시기가 아니다. 그 시기는 늦어도 『한밤의 북소리』에서 시작한 시기로서 그가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강압들에 항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압들의 사실성과 인간을 각인시키는 힘을 함께 계산에 넣은 시기다. 이야기 (이를 테면 「북해 새우들 Nordseekrabben」, 1926), 시 (『도시민들을 위한 책 Das Lesebuch für Städtebewohner』, 1930) 그리고 희곡  (『도시의 밀림 속에서  Im Dickicht der Städte』, 1922)에서 그가 거듭 보여준 것은, 사회의 발전은 자율적 시민으로서의 개인을 이미 시민계층 자체 내에서 말살시켰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대중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다시 개인으로서 자신을 회복하려고 하면 그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개인이 무엇이냐를 규정할 때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개인은 더 이상 주어진 것으로 전제될 수 없고 사회적 과정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 "동의한다"는 것 (즉 이해했다는 것,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변화, 인간 자체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전제이고, 아울러 그것은 "대중"을, 다시 말해 계급사회에서 프로레타리아를 역사적 힘으로 인정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브레히트의 리얼리즘에는 적절한 생산장소를 택하는 일도 속한다. 그가 1924년까지 작업했던 뮌헨은 비교적 비판적인 동시대인들이 볼 때에는 속물화한 거대한 시골로서 장기적으로 별 볼 일이 없었다. 브레히트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자신의 작품들의 공연을 주도하면서 베를린으로 이주할 준비를 한다. (『한밤의 북소리』는 1923년 12월 베를린의 Deutsches Theater에서 공연되었고, 『도시의 밀림 속에서』는 얼마 후 또 같은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헬레네 바이겔 Helene Weigel을 그는 벌써 1923년에 알게 되었고 사랑하였다. 브레히트는 고독한 작가적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찾기 보다는 분주한 활동을 찾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대도시의 정글, 사람들과의 교제, 자신의 작업이 공적으로 속히 인정받는 것, 많은 협력자들을 좋아했다. 그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필요한 공동작업을 이미 텍스트-생산 자체에 적용하였다. 그는 모든 정보의 가능성을 이용했고 대화할 때 끈기있게 경청했으며, 그 대화내용을 동시에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 언제나 남녀 친구들을 - 가장 중요하기로는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1924년부터 브레히트가 죽을 때까지)과 마가레테 스테핀 (1932년부터 1941년 요절할 때까지)을 - 직접적인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이것 또한 문학과 사회의 변화된 관계에 대한 통찰에서 이루어졌다. 고독과 자유 속의 개인이 아직 쓸모있는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큰 건물들, 개인이 지을 능력이 있는 그러한 건물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코이너씨의 이야기』의 말미에서 독창성 Originalität에 대해 조롱하는 말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서푼짜리 오페라』의 초연 뒤에 케어 Alfred Kerr가 가한 표절비난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기존의 것을 이용하는 것은 브레히트로서는 당연했다. 그는 케어가 자신에 대해 제기한 표절시비를 자신은 "정신적 소유의 문제에서 원칙적으로 느슨하다"는 말로 일축했다. 모든 전통은 이처럼 가공될 수 있었고 삼중적 의미에서 "지양"될 수 있었다. 즉 가장 즐겨 하기로는 고대 로마 (호라티우스), 셰익스피어, 그리고 - 비교적 대규모로는 - 루터의 성경이 그것이다.     1926년은 브레히트의 전기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로 기록된다. 그는 칼 맑스를 읽었다. 실제로는 "전환"이라기 보다는 그 자신의 리얼리즘에 대한 구상에서 파생된, 예견할 수 있었던 결과였다. 초기에는 전기적 성격을 띠었던 그의 작품세계는 점점 더 "시대적 작품"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현실의 문제들과의 대결을 담았고 "한 인격의 표현"이고자 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그의 작품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이 유래하는데, 즉 그는 작품들을, 텍스트든 공연이든, 언제나 새로이 개작하고 "현재화"하였다. 이를 테면 『갈릴레이』는 세 가지 판으로 존재하는데, 첫째 판(1938)은 작품의 주인공 갈릴레이라는 인물, 그가 과학을 배반한 이유로 "실각"하고 "제거"되는 과정이 중심에 놓여있다. 브레히트가 미국 망명시절에 Charles Laughton과 함께 작업한 둘째 판(1944/45)에서 비로소 원자폭탄이라는 주제가 추가되며, 셋째 판(1953)에서는 원폭의 일상성, 그리고 과학이 자명하게 그 원폭을 제조하는 일에 공조한다는 사실이 표현되고 있다. 흔히 주장되는 것과는 달리 브레히트의 맑스-읽기는 그의 문학의 "이데올로기화"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맑스주의는 브레히트에게 주어진 현실들을 파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교육극 시절"(1928-1931)에 씌여진 『조치 Die Maßnahme』와 같은 작품조차 맑스주의적 테제를 형상화한 작품이 아니라 재치있게 구성한 심미적 집단연습에 속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무식한 오락과 관객 얼르기를 통해 대중매체들이 확산되는 데 대해 일종의 의사소통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씌여졌다. 관객은 일방적으로 "서비스 받으며" 조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수용에서의 수동성), 적극적으로 도전받고 참여에로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적 형식들을 통해 사람들이 물어야 하는 것은  현실이다. 사람들이 물어야 하는 것은 미학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미학도 아니다." 이것이 브레히트의 심미적 모토였다.     맑스주의로의 "전환"은 결코 브레히트가 "심미적인 것"을 포기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브레히트는 이 시기에 『서푼짜리 오페라』(1927/28)을 썼고 이 극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브레히트는 이 오페라를 자기에게 열광의 갈채를 보내는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의도했지만, 그는 시대에 맞는 심미적 수단을 찾아낸 것이다. 브레히트 자신이 쉰 목소리로 불렀던 매키 매써(오페라의 주인공 - 역주)의 노래는 유행가로 히트를 쳤고 베를린의 사회는 스스로 창녀와 뚜쟁이와 깡패들의 화류계로 등장했다. 그러한 한에서 이 오페라의 성공은 그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객관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보다 나은) 사회는 그 작품을 간지럽고-껄끄러운 오락으로 즐겼다. 다시 말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그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1930)     브레히트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알기 때문에, 비록 강력한 노동운동을 통해 어떤 대항세력이 만들어지지 않을 지언정,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을 냉철하게 예견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교육극들, 그리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Die Mutter』를 따라 만든 혁명극, 혹은 상황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 Kuhle Wampe (둘 다 1930)를 가지고 그는 적절하게 선동하고 또 노동자들의 연대를 촉진시키려고 했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무위로 끝났다.   나찌가 "집권"하자 브레히트는 모든 작업의 토대를 잃었다. 제국의회 화재(1933. 2. 27)를 본 그는 그 사건의 정치적 파장을 곧장 간파했고 독일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프라하, 비인, 파리를 거쳐 나중에 스벤드보르크(덴마크)에 간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조수인 스테핀과 함께 33년에 39년까지 살면서 작업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작품활동의 초점을 전적으로 반파시즘적 투쟁에 맞추었고 자신의 작품의 테마와 언어를 그 방향에 정향했다. 초반에만 해도 그는 자신의 그러한 활동을 통해 독일에서 반파시즘적 세력들이 강해져 이들이 정치적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랬다. 그는 파시즘에서 "야만의 분출"만을 보고 또 파시즘에 대항하여 "문화"를 "구제"해 내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조류들을 - "좌파"의 조류들까지 -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5년 파리에서 "문화의 방어"를 위한 국제 작가회의에서 그는 이제야 말로 "소유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고, 또 여전히 문화의 구제에 대해 떠드는 이 마당에 정작 구해야 할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촉구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목졸린 자에게는 말이 목에 걸려있다"고 하면서 브레히트는 "그 세계가 깨어났을 때 (나찌의 집권 - 역주)" "말은 잠들어 있었다"고 한 칼 크라우스에 반박하였다.     브레히트는 히틀러가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나중에 전쟁이 나서 핀란드(1940)와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하기 전에 덴마크에서 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1941)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전쟁을 (다른 수단으로) 계속 행하는 장사로서 보여주며 세 아이들을 잃는 억척어멈의 예를 통해 그 장사에 수반되는 희생들을 드러내 준다. 바이겔이 연기한 『억척어멈』은 나중에 브레히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 되었다. 겉보기에 다정하고 활동적이면서 무자비한 자본가의 전형을 제시한 핀란드의 민속극 『푼틸라 나리와 그의 종 마티』(1940)는 계급화해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1941)은 미국을 겨냥한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그는 - 시카고의 갱세계를 통해 - 자본주의 경제, 갱의 세계, 파시즘의 정치적 상승 사이의 연관관계를 그의 새 망명국에 제시하고자 했다.     애초에 브레히트는 미국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산타 모니카(캘리포니아)에 갔고 무엇보다 헐리웃에서 영화대본작가로 활동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일찍부터 소련이 승리하리라고 믿었으며 망명객들 (특히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멤버인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와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의 비판적 관찰자로 남았다. "다른" 독일 (전쟁에서 패망할 나찌독일 뒤의 독일- 역주)에 관해 망명객들 사이에 뜻을 일치시켜 이에 기여하면서 활동하려던 그의 시도는 "집단적 죄"를 주장하는 명제에 걸려 좌절하였다. 벌써 그는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 더 큰 - 대결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았다.     독일로 되돌아 온 것은 당연했다. 독일에서 브레히트는 자신의 관객, 또한 자신의 고향과 자신의 "민족"을 보았다. 접근은 스위스를 경유하여 이루어 졌다. 두 독일 국가가 세워진 뒤에 취득한 (1950) 오스트리아 여권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온전한 하나의 독일을 바라는 그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1945)와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국민이 소유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옹호하였고 - "있는 것은 그것을 위해 좋은 자들에게 속해야 한다" - 『파리 혁명정부 시절』(1948/49)을 통해서는 혁명적 해결, 즉 사회주의적 독일을 옹호하였다. 그가 동독 쪽으로 귀국할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브레히트는 말년을 베를린 앙상블에서 실제적 연극작업을 하는데 보냈다. 베를린 앙상블은 쉽바우어담 극장 Theater am Schiffbauerdamm에 자리잡았고 바이겔이 극장장을 맡았다.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소포클레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부르주아적 해석을 "물려받는" 데 반대하여 그들을 가공(재해석)함으로 그러한 해석전통을 비판적으로 제거하는 작업을 했고 또 평화의 유지를 위해 싸웠다. 그의 리얼리즘과 변화에 대한 동경은 그를 일찍부터 현명하게 만들었다. 『부코우 비가』 (1953)는 괴테의 『서동시집』에 비견할 만한 말년의 작품으로 그의 나이 55세에 씌여졌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나는 편안한 작가가 아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렇게 남기를 바란다고 써주시오. 그렇다 해도 모종의 가능성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의심을 찬양함 브레히트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합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참을성 없는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서서 듣는다 이 세계가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세계이며 자기 방의 천장에 뚫린 구멍도 하느님이 손수 계획하신 것이라고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 이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는 힘들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짓는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일한다 자기가 살 집을 짓는 남자도 땀을 뚝뚝 흘리면서 고된 일을 한다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1939년)  ===
1968    몽골 시인 - 째.바트바타르 댓글:  조회:3994  추천:0  2016-12-26
공감     ▲ 시인 째. 바트바타르   ⓒ 김상헌 지난 2007년 8월 12일 강원도 만해마을에서 만해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동아시아 시인 포럼'에 참가한 칭기즈칸의 후예 시인이 있다. 바로 째.바트바타르(Jamiyansuren Batbaatar). '한국현대시 100주년 및 한국시인협회 5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이번 포럼에서 몽골의 대표시인이자 교수로 참석한 그는 "시와 예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자유의 터전"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대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비밀과 이면의 개념들을 관통하여 규명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시에만 존재"한다며 "현대의 시는 단순한 예술이나 아름다운 시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나 또는, 그것의 독특한 하나의 형태"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시인은 사상가"라며 "시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독립된 세계'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는 인간관계의 '마법의 교량'" 째.바트바타르 시인은 "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마법의 교량'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21세기에 들어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지역"이라며 "그것은 경제적 발전뿐만 아니라 아시아인의 생활양식, 전통, 독특한 감정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시아는 여러 면에서 비밀스럽고 은밀한 세계이며 바로 여기에 그 비밀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며 노래하는 시인.  진주처럼 영롱하며 불경의 한 구절처럼 비밀스러워 서양보다 동양으로 기울어진다네, 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중에 촛불이 꺼져 가는 순간에도 더욱 맑고 투명해서 낮보다 밤을 더 원하다네, 나는 사원의 종이 울릴 때면 달의 친척인 너를 그리워한다네. 아! 동양이여 거기서 너는 빛을 발하고 여기서 나는 슬퍼하고 있네. - 째.바트바타르 시인의 '아! 동양이여'  특히 시인은 "한 민족의 언어와 문화는 세계화와는 별도로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서도 "세계화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어 "현대 몽골의 시에는 정교한 묘사나 뛰어난 비유, 혹은 수식이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 평이한 말이나 표현을 통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독특한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대초원의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몽골의 시인답게 "자연은 신이 만들어 우리 인간에게 선물한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째. 바트바타르 시인. 덧붙여 그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은 현재 '활자의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인터넷이나 영상 등은 결국은 매체일 뿐 인간의 감정이 존재하는 한 시(문학)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신문방송학과 교수로서의 낙관적인 견해를 혔다. 대초원의 자연 간직한 시인... "물질화·자동화·기계화가 시적 위기 불러와..." 한편 그는 "물질화, 자동화, 기계화로 대변되는 현대 기술이나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감정을 유혹하고 있음이 시적 위기를 불러 오고 있으며, 이는 유아기 교육에서 보다 많은 예술적 체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의 미래를 걱정하는 교육자적 면모도 읽을 수가 있다.  '몽골의 자연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이 어디냐'는 기자의 마지막 물음에 그는 "고비사막"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어 "고비사막에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별들이 잡히며, 느림과 마음의 안정이라는 안식을 통해 쉼을 준다"며 꼭 한번 방문해 보라는 추천도 잊지 않았다. 광대한 몽골이여, 나는 너를 위하여 위험이 엄습하는 캄캄한 밤에도 보름달처럼 늠름하게 비취이네 내 고향 고비의 6월의 대낮 같은 사랑으로 배내옷을 입혀 아이를 키운 모국이여, 너에게 허리 굽혀 존경하며 노래를 바친다. 나의 수명, 모국을 생각할 때면 부드러운 마음이 녹아내려 속눈썹이 젖지 않을 수가 없다네. - 째, 바트바타르의 '모국'  시인의 작품 '모국'에서 노래한 것 같이 "고비의 6월의 대낮 같은 사랑"처럼 칭기즈칸 집안의 후예로서 간직한 모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이 젊은 시인을 더욱 커보이게 하는 이유는 아닐까.    ▲ 동아시아 시인 포럼 - 바트바타르 시인과 함께   ⓒ 김상헌     덧붙이는 글 | 째. 바트바타르 시인은 1968년생. 몽골 국립 울란바타르 교육대학 졸업, 아일랜드 더블린대학 신문방송학과 수학. 철학박사. 몽골국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시집  등이 있으며 수십 권의 저서가 있다.
1967    대통령, 총통, 그리고 시인 댓글:  조회:4606  추천:0  2016-12-26
    타이완 중정기념관(중정은 장개석 본명임)에 걸려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장총통 사진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친구 구상 시인 이야기      구상(具常) 시인의 문학 외적인 부분에 대통령 박정희가 있습니다.  구상 시인이 문단에서 유일하게 박정희 대통령과 개인적 우정을 나눈 친구임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과 같이  진실하였던 두 분 친구의 우정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우정을 상징하는 꽃, 라일락을 두 분의 영전에 바칩니다. 대통령 박정희의 카리스마와 시인은 걸맞지 않은 느낌을 주지만,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의 세월은 반세기를 헤아립니다.  시인 구상과 대통령 박정희는 격동의 근대사 한복판에 함께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50 년대부터 시작됩니다.  구상은 서울에서 태어나 원산 근처 덕원으로 이주, 해방후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작품 성향 때문에 반체제분자로 몰려 월남해야 했습니다.  가난과 전쟁으로 국가적 고난이 극심했던 시절, 국방부 신문 승리일보 주간이며 종군기자단장이었던 구상은 피란지 대구에서 두살 위의 청년 장교 박정희를 만납니다.  육군본부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준장이 그에게 작전국 차장 박정희 대령을 처음 대면시키며 “의리의 남아”라는 한마디 말로 소개를 했습니다. 이용문은 박정희가 드물게 존경했던 군선배입니다.  구상의 눈에 비친 박정희, 이 날카롭고 고독한 눈매의 조그맣고  새까만 남자는 플라톤의 , 를 탐독하는 등  지적 탐구심이 강했으며 민족주의 성향의 투철한 국가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구상과 박정희는 자주 만나 조국과 인생을 담론하며의기투합으로 친분을 쌓아갑니다. 둘은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역사의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지를 뜨겁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먼발치에서 서로를 존경하는 반면,  강한 역사의식과 현실참여의 행동주의로 밀착되어 있었고, 고난과 모험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게 됩니다.   구상에게 닥친 고난은 정치적 사건입니다. 자유당 정권 시절 그는 정치적 사건으로 15년 구형을 받고는 고 요구, 재판부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냅니다. 사생관(死生觀)이 투철한 면에서 군인 박정희에 못지 않은 행동주의 시인의 강골(强骨)입니다. 시인과 군인은 서로 다르고 먼 길을 가게 마련이지만,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의 격변이 그들의 재회(再會)의 중력(重力)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박정희의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구상은 친구의 거사가 성공했음을 알고 주저없이 이를 구국운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인은 말했습니다.  혁명의 돌개바람 속에서 4.19혁명의 주체인 학생 세력은 5.16혁명의 군인으로 국가의 주체가 교체되었습니다.  -이해인 수녀와 시인 구상- 훗날 시인은 친구를 위해 시 한편을 선물합니다.   구상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비판적이었던 지식인과 문단 인사들의 곱지 않은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친구 박정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주저함이 없었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혁명 거사 며칠 뒤, 둘은 재회를 합니다. 박정희가 국정에 참여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사양을 하고 며칠 뒤 구상은 서둘러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경향신문 도쿄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난 것은 친구 박정희의 청을 물리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목메인 소리로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의 맑은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두번 꺼내지 않았습니다. 딱 한번으로 끝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 내내 구상은 멀리 친구로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구상에게 만만한 너나들이 친구였으며, 남들처럼 고개 조아리고 ‘대통령 각하’를 존칭하는 일도 없었고, 박정희도 그걸 원치 않았습니다.  집권 말기, 정치적 저항과 혼란이 심해지자  구상은 친구의 외로운 처지를 근심하다 청와대로 찾아갔습니다. 1979년 9월이었습니다.   은퇴를 권유했습니다.  박정희의 대답은 고뇌어린 침묵뿐이었습니다.  묵묵히 현관까지 배웅을 하던 박정희의 쓸쓸해 보이던 그 모습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한달 뒤 그가 세상을 하직하고, 구상은 5년 동안 그의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미사를 올렸습니다. 제사를 지내준 것입니다.   그후 그는 거주지인 여의도 아파트에서 친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내려다보며 우정을 홀로 새김질하다  2004년 봄과 여름이 갈마드는 5월, 저만치 다가올 채비를 마친 여름은 이제 자기 몫이 아니라는 듯, 가는 봄을 따라 훌훌 먼길을 떠났습니다.  우국의 충정으로 의기투합했던 시인과 대통령은  슬픈 가족사(家族史)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비슷했습니다. 박정희가 부인 육영수를 먼저 잃었듯이, 구상도 부인을 먼저 잃고 외로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상은 두 아들마저 병으로 잃은데다 그 자신도 투병 생활을 하는 남다른 불행을 한몸에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남의 불행을 더 챙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전란기에는 갈 곳 없는 상이군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정이 많아 주변의 가난한 시인들을 힘 닿는대로 도왔으며,  나라의 벼슬은 사양했지만 시단(詩壇)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얼굴 내밀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평생 따라다닌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폐결핵, 가난의 병이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투병하던 그가, 17평짜리 구형 아파트에서만 30년을 살아온 그가 장애인 문학지(文學誌)를 돕기 위해 2억원을 보내주어 주위를 숙연케 했으며, 그렇게 훌훌 털어주고 그 자신은가난의 병을 가지고 떠난 것입니다. 박정희가 눈에 띄는 대로 서민들의 아픔을 챙기고 거기에 자신의 권력을 대입하여 그들을 손잡아 일으키며 눈물을 지었듯이, 시인과 대통령은 고난의 친구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같았습니다. 재물에 관심이 없는 청렴한 삶도 그들은 같이 살았습니다.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시 ‘오늘’ 중에서)  구상은 기교를 배제한 간결한 시어(詩語)에 풍부한 의미와 암시를 담아냈습니다.  박정희는 일체의 정치적 수사(修辭)가 없이 요점을 딱딱 집어 말하는 어법을 구사했습니다.  구상은 친구 박정희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먼저 간 친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진혼축(鎭魂祝)을 썼습니다.  하느님 앞에 친구를 보내는 그의 우정이, 사랑과 용서의 기원이 지금도 절절히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시인과 대통령의 우정은 둘이 나눈 30년, 홀로 남아 새긴 20년을 합해서 반세기의 세월이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가 먼저 떠나고 시인 구상이 뒤따라 먼길을 떠났습니다.         출처 :중년 노을빛그리움
1966    뿌리는 중국, 줄기는 대만, 가지와 잎은 미국 댓글:  조회:5157  추천:1  2016-12-25
90세 녜화링(聂华苓) 작가의 인생 스토리   90세 녜화링-뿌리는 중국, 줄기는 대만,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 ”나는 한 그루 나무이다. 뿌리는 중국에 있고 줄기는 대만에 있으며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미국 중서부)에 있다.” 녜화링(聂华苓)은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녜화링과 남편 폴 엥글(Paul Engle)이 공동으로 창립한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은 수많은 양안(两岸-중국과 대만)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온라인팀                녜화링과 남편 폴 엥글 [기자/수졔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보냄)]  아이오와강 강물은 마치 검은 비단처럼 콸콸 흐르며 아이오와 도시 전체를 구불구불 휘감으며 펼쳐져 있다. 40년 전 녜화링과 남편 미국 시인 폴 엥글은 강 옆에 있는 집에 정착한 후 이름을 ‘훙러우(红楼)’라고 지었다.     ‘훙러우’는 산과 넗은 숲을 뒤로 하고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슴들이 부근에 와서 먹이를 찾기도 한다. 젊었을 때 녜화링은 엥글과 함께 자주 훙러우 뒤에 있는 숲에 가서 사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슴들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그들의 사슴원(鹿园)까지 생기게 되었다.   매번 여행을 마치고 아이오와에 돌아와 사슴원으로 가는 길에서 끝없이 펼져진 광야를 보며 엥글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화링, 저기 좀 봐, 흙토지대! 얼마나 좋은 흙이야!”    올해 아이오와의 겨울도 변함없이 강 옆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높이 서있다. 다람쥐가 나뭇가지 위를 뛰어다닌다. 차를 몰고 도로표지판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면 높고 낮은 나무 숲속에 있는 훙러우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문에는 바르게 ‘안위(安寓)-편안한 거처’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문에 달려 있는 풍경이 달랑거린다. 녜화링은 자주색 스웨터를 입고 겉에는 솜털 블라우스를 걸치고 있었다. 체구는 작고 왜소했지만 말하는 톤은 높고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그녀는 거실의 전등을 켰다. 노란색 전등은 거실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추억이 가득 담긴 집처럼 보였다.   벽에는 사진과 그림이 걸려있고, 책상에는 시대를 느끼게 하는 액세서리들이 놓아져 있다. 책자에 들어있는 책과 CD는 주인의 스타일을 보여주었고 예술작품이 집안 곳곳에 놓여있었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는 식탁, 창가, 거실에 활짝 핀 꽃을 놓아두었다.    정성스럽게 가꾼 꽃들이 생기발랄하게 느껴진다. 주방에서 바라본 사슴원은 고요했다. 녜화링은 셜리주 두 잔을 따랐다. 엥글이 함께 있을 때 매일 셜리주를 마시는 것은 두 사람이 즐기는 시간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들은 아이오와강에서 배를 타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셜리주를 마시고 엥글은 쥬네바 술을 즐겨 마셨다. 나중에 홀로 남은 녜화링은 셜리주를 마시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적게 마시게 되었다. “당신 알고 있나? 이 램프는 나와 엥글이 미주에 여행 갔을 때 산건데”. 녜화링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때 이 램프을 보고 너무 맘에 들어 바로 구매했는데 아이오와에 와서 아무리 기다려도 배달이 되지 않는 거야, 그래서 포기하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받게 됐어.” 녜화링은 테이블에 놓아져 있는 정교한 조개램프를 가리키며 말한다.  90세 된 녜화링은 자주 잊어버린다. 어떤 때는 방금 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물음도 몇 번씩 물어보면서 사과를 한다. “죄송해요, 방금 물어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집안에 놓인 사물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과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사소한 것들도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 “1978년에 소설가 아이칭을 만나러 중국에 갔을 때 차가 골목길에서 더는 들어갈 수 없어 나와 엥글은 걸어가게 됐었지. 당신도 알잖아, 베이징 골목길이 얼마나 좁은지. 걸으면서 멀리 보니 누군가 집 앞에 서서 이리저리 보고 있는 거야, 가까이 가서 ‘아이칭’하고 불렀지. 그러자 아이칭은 나보고 ‘왜 인제서야 왔어!’하는 거야.”     1978년, 이별한 지 30년 만에 녜화링은 다시 조국 대륙에 발을 딛게 되었다.   중국에 돌아오는 전날 밤 아이오와는 큰 비바람이 몰아쳤다. 사슴원에 있는 백 년 묵은 참나무는 윙윙 소리를 내고 아이오와강은 출렁거렸다. 18시간 장시간 비행하는 내내 녜화링은 잠을 자지 않았다. 홍콩에 착륙한 후 다시 뤄후(罗湖)로 향했다. 뤄후교의 맞은편이 바로 고향 땅이다. 녜화링 일가족은 중국으로 향하는 도로표지판을 따라 이동하였다. 뤄후교에 올라선 녜화링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길게 뻗어진 길이다. 기차는 부드러운 기적소리를 내며 보슬비와 안개, 파란 벌판을 가로질러 선전(深圳)에서 광저우(广州)에 도착하였다. 30년 동안 만나지 못한 큰 형과 동생 두 집 가족들이 역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는 장소를 잘못 알고 있어서 한참을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전부 흩어지고 나서야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서로 부르짖으며 원망하고 해명도 하면서 손에 쥔 가방도 들어야 해서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만나기 전에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했지만 정작 만나고 나니 기쁨과 혼란 그 자체였다. 한자리에 모인 일가족은 차를 타고 광저우에서 우한(武汉)으로 갔다. 마침내 큰 강 옆에 있는 고향에 도착하게 되었다. 창강(长江)의 물은 예전과 같이 흐르고 있고 쟝한관(江汉关)의 시계도 여전히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집은 이미 없어졌다. 모든 것이 변했다.” 녜화링이 말한다. 1925년 녜화링은 우한에서 태어났다. 부친 녜시(聂洗)는 꾸이저우성(贵州省) 핑웨(平越)의 행정 전문 요원이고 모친은 온화하고 선량한 여성이었다. 여덟 명의 아들 딸을 낳아 키웠다. 녜화링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모친을 묘사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올 블랙 치파오를 입고 모기장이 있는 침대에 기대어 손에 있는 책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읊었다. “ ” 어릴 때 녜화링은 모친 옆에서 모친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평온한 어린 시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집안의 기둥인 부친이 돌아가셨다. 1937년 중국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일어났다. 녜화링의 모친은 일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피난하러 내려갔다. 비록 피난 중이지만 모친은 녜화링이 계속 학교에 다니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녀를 후베이언스(湖北恩施)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언스에 서 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모친은 동행하지 못했다. 녜화링을 보내는 길에 모친은 눈물을 보이며 몸 챙기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너는 이 어미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데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너희들이 출세하길 바란다.”고 녜화링 모친이 말했다. 녜화링은 에게 그때 마지막 그 한마디 말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었다고 말했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은 거의 녜화링처럼 집을 떠나 공부하러 왔다. 생활 구역에서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웃는 친구가 있고 우는 친구가 있다. 고민을 모르는 나이에 고민이 생겼으니 어떻게 그 답답함을 해결할지 몰랐다. 저녁 자율시간에 둘이서 등잔불을 사용한다.    불빛이 깜빡거린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만리, 장성 밖에는 고향, 수수는 지름지고 콩은 향기로우며 곳곳이 황금이고 재난이 없다.” 동북에서 온 여학생이 숙제를 하며 를 부른다. 따라 부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책상에 누워 우는 친구도 있다. 노래 소리에 울음소리가 들린다. 집 생각을 하면 고통스럽지만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 그 당시의 삼시세끼와 드레스 옷은 전부 정부에서 대부금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대부금을 받지 못해 공부를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우리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은 외부를 향해 팔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중국행을 하고 나서 그녀는 성공적으로 중국대륙 작가인 삐수왕(毕朔望)과 쇼우챈(萧乾)을 제1기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초청하였다. 1979년 초 가을, 중국대륙의 작가를 환영하기 위하여 녜화링과 폴 엥글은 특별히 ‘사슴원’에서 ‘중국주말’이라는 파티를 열었다. 양안의 세 개 지역과 미국, 유럽 등지의 30여 명의 화교 작가들이 30년 단절 후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다들 대륙에 오랫동안 가지 못했습니다. 아이오와에 온 작가들은 대륙작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쇼우챈.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그 당시 쇼우챈은 누명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작가의 신분으로 국제무대에 선 그녀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다른 작가들은 분위기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유독 쇼우챈만은 원고를 들고 하나하나 읽었다. 원고에도 글씨가 정연하게 쓰여 있었다.  쇼우챈 외에 녜화링은 잇따라 아이칭, 딩링(丁玲), 왕멍(王蒙), 왕증치(汪曾祺) 등 작가의 문을 열었다. 아이칭을 만났을 때 그는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하였다. 처음에 그녀를 만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러 번 이이칭을 만나겠다고 부탁해서야 만나게 되었다. 1979년 아이칭이 복귀하고 공식 연설을 할 때 처음으로 한 말이 “나의 대문은 녜화링과 엥글이 열어주었다. 다시는 닫을 수가 없다.”이다. 1980년 아이칭 부부는 아이오와로 가서 미국에서 4개월간의 교류 방문 시간을 가졌다. “아이칭과 고우잉(高瑛)은 아이오와주를 좋아했어요. 이곳이 큰 공원 같다고 했어요.” 녜화링은 아이칭 부부는 미국에 와서도 중국음식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모두 불러서 만두를 먹든지 산시(山西) 칼국수를 먹었다. 시간이 나면 함께 한자리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문하러 온 중국 작가들과 사슴원에서 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점차 녜화링 부부의 습관이 되었다. 딩링 부부가 미국에 있을 때에는 저녁을 먹은 후 녜화링 집에 와서 넷이서 마당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런 추억들을 딩링은 25편의 방미 기록지에 적었는데 이는 당시의 과 에 기재되기도 하였다.   딩링은 이곳이 와서 본 것은 상상 속의 미국과 완전 달랐다. 죽어가는 미국이 아니었다. 그녀는 온통 푸른 나무와 풀로 뒤덮여 있고 강물이 흐르며 아름다운 집들이 있는 아오이와를 좋아했다. 편안하고 편리한 우위에화(五月花公寓) 오피스텔과 없는 게 없는 슈퍼마켓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쇼핑하는 것도 좋아했다. 초기 미국에 간 중국대륙 작가 중에서 녜화링과 딩링은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딩링은 녜화링에 보내는 편지에 아오이와에 있었던 시절을 말한다. “올해 아오이와는 춥나? 나는 아직 네가 얼음과 눈이 뒤덮인 산길에서 트럭을 몰고 내려가는 장면이 생각하네. 얼마나 걱정했는데. 하지만 너희 부부 둘이서 집을 소유하고 창문 앞으로 경치를 구경하며 글을 쓰고 난로에 기대여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가장 좋았던 것은 손님들이 적게 오고 친구들과 같이 문학과 예술에 대해 말하고 시집을 보면서 팝콘을 먹고 좋은 차를 마시는 것이었어. 너무 좋다!” 딩링은 후베이에서 구매한 ‘소우쥔 식기(昭君餐具)’를 미국의 ‘소우쥔’인 녜링화에게 선물하였고 타이바이(太白) 음주 주기(酒具)를 미국의 ‘타이바이 시인’인 엥글에 선물하였다.  1986년 딩링이 세상을 떠났다. 녜화링은 회고록에서 이런 글을 적었다. “1986년 딩링이 세상을 떠났다. 1991년 폴도 세상을 떠났다. 딩링과 폴은 상대에게 호기심이 있고 좋아하며 존중한다. 그들은 20세기의 온갖 풍파를 겪었다. 그들은 감성적이고 솔직하며 세심하다.    그들은 같은 날인 10월 12일에 태어났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딩링은 공산주의에 대한 사명감이고, 폴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사명감이다. 딩링과 폴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한 권의 현대사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다. ”   1949년 초, 해방군은 베이핑(北平)에 진입하려 한다. 버줘이(傅作义)는 공산당과 협상을 한다. 집집마다 라디오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공산당과 국민당 방송국에서 보내는 내용을 듣고 있다. 전쟁 형세를 전해주고 있으면서 각자 승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전한다.   간혹 제갈량이 성루에서 술을 마시며 악기를 다루는 방송이 전해지는데 이상하게만 들려졌다.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맑고 깨끗한 소리가 들려왔다. “료선전투(辽沈战役)가 승리로 끝났다. 화이하이전투(淮海战役)는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인민해방군은 지금 적극적으로 강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핑진전투(平津战役)도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녜화링은 인민해방군의 승리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같은 목소리를 난징(南京)에서 들은 적이 있다.   1949년 2월 3일, 해방군은 침착하고 조용하게 베이핑에 입성하였다. 그 해 6월 녜화링 일가족은 베이핑에서 광저우로, 광저우에서 타이베이(台北)에 왔다. 대만에 온 녜화링은 중학교에서 교사직을 맡고 어렵게 안착하게 되었다. “푸른 섬은 한 척의 배와 같다, 달빛 아래 떠돌고 있다. 아가씨, 당신도 나의 마음속에서 떠돌고 있구나.” 1950년 중기 즈웨이(紫薇)가 부른 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대만 섬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위로해 주었다.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민주와 자유공간을 얻기 위하여 잡지는 대만에서 창간되었다. 후쓰(胡适)가 발행인을, 레이쩐(雷震)이 책임자를 맡았다. 국민당과 함께 대만에 온 레이쩐은 1917년에 국민당에 입당하여 국민정부에서 여러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였다. 대륙을 떠나기 전에는 국민참정회의 부 비서실장으로서 국민당의 헌법 제정에 도움을 주었고 장제스(蒋介石)를 대표하여 공산당과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은 문학적인 편집자가 필요했다. 그 당시 녜화링은 여러 작품을 발표하여 문학계에서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었다. 그녀를 레이쩐에게 소개해 주었다. 잡지사는 타이베이 진산제(金山街)에 있다. 녜화링은 문을 열고 작은 다다미방에 들어갔다.    이곳이 의 사무실이다. 편집자 한 명, 사장 한 명, 세무사 한 명, 발행 책임자 한 명, 총 네 명이다. 레이쩐은 책상에 앉아 원고를 보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래! 내일부터 시작하자.”라고 하였다. 녜화링은 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한다. “나는 그렇게 에 가입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문학계는 거의 전부 공산당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통제되어 정치 외에 단순한 문학 작품을 볼 수 없었다. 의 편집위원회는 모든 자유 자식인과 국민당 개명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베이징대학 교수 모우즈수이(毛子水)와 짱퍼쵠(张佛泉), 대만대학 인하이광(殷海光), 사상이 투철한 문인 따이뚜헝(戴杜衡)과 쌰또우핑(夏道平). 국민당 관원인 교육부장 항리우(杭立武), 대만은행 총경리 취징저우(瞿荆州)이다. 편집위원회에서 가장 어리고 유일한 여성인 녜화링은 편집회의에서 보수파와 개명파를 변론하는 것이 큰 재미로 여겨졌다. 1961년 9월 1일, 은 장제스의 연임을 비판하였다. 3일 후에 큰 재난이 닥쳐올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녜화링은 회고록 에 9월 4일 아침에 일어난 일을 적었다. 9시 넘어 잠에서 일어난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복 경찰들을 보게 된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잘못 찾았다고 하고는 건물의 다른 한쪽에 가서 편집 버쩡(傅正)의 문의 두드렸다.    버쩡이 문을 열자 경찰들이 떼로 모여들어 버쩡을 방안으로 몰고 방문을 잠그었다. 녜화링은 창밖으로 사복 경찰들이 골목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녜화링은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몇 시간이 지나자 버쩡의 방문이 열렸다. 경찰과 사복 경찰들이 그를 둘러싸고 밖으로 나왔다. 녜화링과 그녀의 모친은 버쩡을 맞이하러 갔다. 버쩡은 열쇠 뭉치를 녜회링의 모친 손에 쥐어주면서 “녜이모, 저를 도와서 이걸 보관해 주세요.” 버쩡은 붙잡혀 갔다. 녜화링은 자신도 잡혀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서 반나절을 기다리며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선생이 잡혀갔다!” 그날 오후 의 천찌콴(陈济宽)이 마당으로 들어오면서 녜화링한테 말한다. ”마즈커우(马之筘)도 잡혀갔다! 류즈잉(刘子英)도 잡혀갔다! 신문사가 몰수 당했다! 자료와 원고를 모두 가져갔다!” 천찌콴이 소리를 지르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버쩡도 잡혀갔어요.” 녜화링이 급하게 말한다. 천찌콴은 쇼크를 먹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갔다. 그때부터 녜화링과 의 동료들은 격리되었다. 그들의 집 밖에서는 밤낮없이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녜화링은 대만경찰본부가 반란협의로 레이쩐과 편집장 류즈잉, 마즈커우, 버쩡 등이 체포했다는 것을 매체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군사법정에서 레이쩐은 비적(匪賊)을 위해 홍보하고 비적을 알고도 제보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고, 버쩡과 마즈커우는 3년 감화 받는 것을 선고 받았으며 류즈잉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이번 일이 벌어진 후 동료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후쓰(胡适)가 미국에서 대만으로 돌아올 무렵에야 만나게 되었다. “내 눈에서 정치는 전쟁 같기도 하고 한편의 연극 같기도 합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녜화링의 모친은 2년 후에 돌아가셨다. 남편과 6년을 떨어져 살던 녜화링은 혼자서 두 딸을 보살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하고 있을 때 1962년 대만대학 중문과 교수 타이징눙(台静农)은 녜화링의 집에 와서 그녀를 대만대학에 와서 문예창작을 가르쳐 달라고 초청하였다. 그제야 녜화링은 다시 문학과 창작을 하게 되었다.     녜화링 부부가 그네를 타고 있다.   녜화링은 사회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963년 봄, 녜화링은 대만 미국신문사 뜰에서 열린 칵테일 파티에서 대만에 있는 청년 작가를 미국에 요청하러 온 미국 현대파 시인, 아이오와대학 ‘작가 작업장’의 책임자 폴 엥글를 만나게 되었다.      엥글은 놀랍게도 왜소하고 여린 이 여성이 그가 즐겨 읽던 단편 소설 를 쓴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4년에 녜화링은 미국에 갔다. 1967년 녜화링과 폴 엥글은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창립하였다. 지금까지 천여 명이 넘는 작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아이오와를 다녀갔다. ”이곳은 축소된 세계이다.” 아이오와를 방문한 작가 류헝(刘恒)이 말한다.   “이 프로그램은 서로 다른 종족, 다른 국가, 다른 의식형태, 다른 경력, 다른 성격의 각양각색의 작가와 사람들을 융합시켜 주었다. 새롭고 독특한 교류 방식을 창설한 녜화링과 엥글 선생님의 위대한 창조와 구상이었다.” 중국 대륙 작가 중에서 쇼우챈, 아이칭, 딩링에 이어 왕멍, 왕안이(王安忆), 루즈죈(茹志鹃), 천바이천(陈白尘), 왕증치(汪曾祺), 위광중(余光中), 펑지차이(冯骥才), 베이도우(北岛), 수퉁(苏童), 류헝, 리루이(李锐), 츠즈잰(迟子建), 모옌(莫言) 등 중국 대륙의 당대 유명 작가와 대만의 바이센융(白先勇), 정처우위(郑愁予), 위광중, 양무(杨牧), 린화이민(林怀民), 장쉰(蒋勋), 장다춘(张大春), 홍콩의 둥치장(董启章), 리이(李怡), 중링(钟玲), 판요밍(潘耀明)이 아이오와에 와서 ‘국제작가 프로그램’을 통하여 각국의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아이오와대학 ‘국제작가 프로그램’에 와서야 나는 세계가 이렇게 자유롭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에 있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사회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책임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오와를 떠나 대만에 돌아온 린화이민은 ‘윈먼우지(云门舞集)’를 창설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항상 측근들과 담소를 나눌 때 “오늘 내가 춤을 추게 된 것은 모두 녜화링 선생님 덕분이다.”고 하였다. 장다춘은 녜화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无所不包,有所不为)” ”그녀가 처신하는 방식과 포용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결단력 있는 선택은 아직도 우리들이 실천하려고 하고 있다. ” 1976년 24개 국가에서 연합하여 녜화링 부부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그들을 “국제합작의 꿈을 실천하는 독특한 문학조직의 건축가”라고 표현하였다. 1990년 녜화링의 작품 은 ‘미국도서상(美国书卷奖)’을 받았다. 1991년 3월 22일 녜화링과 폴은 폴란드 정부 문화부에서 수여하는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들은 즐겁게 유럽으로 친구도 만날 겸 수상을 하러 떠나게 되었다. 녜화링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그녀와 폴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카고에서 환승해야 했어요. 폴은 신문을 사러 가고 나는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죠.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찾으러 갔더니 폴은 쓰러져 있었고 누군가 인공호흡을 해주고 있었어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미 늦은 거예요.” 녜화링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그 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어요. 아이오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죠.” 지금 훙러우 2층에 있는 폴의 서재는 폴이 살아있던 원래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폴이 자주 사용하던 낡은 타자기는 창 밖에 있는 아오이와강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물을 좋아해서 물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취재가 끝난 후 녜화링은 아오이와 강변의 식당에 앉아 창밖을 보며 유유히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한 그루 나무입니다. 뿌리는 중국에 있고 줄기는 대만에 있으며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에 있습니다. ” 녜화링은 이렇게 자신의 일생을 표현하였다. 요즘 들어 거동이 불편한 녜화링은 먼 거리 여행을 하지 않지만 강변에 와서 산책하는 것을 즐긴다. 녜화링은 이 강에서 폴과 함께 20세기의 인경(人景)-기쁨, 재난, 죽음, 생존을 겪었다고 말한다.        
1965    "중국의 솔제니친" - 北島 시인 댓글:  조회:3940  추천:0  2016-12-25
  중국 현대 최고 10 대 시인 ㆍ문학지 ‘종산’(2015년) 10대 시인 선정 발표     ‘중국의 솔제니친’으로 불리는 베이다오(北島·61)가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선정됐다.    중국 장쑤성 작가협회가 발간하는 중국문학지 ‘종산(鍾山)’ 최근호는 1979~2009년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을 대상으로 ‘중국 10대 시인’을 선정한 결과 베이다오가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교수·시인·평론가 등 12명으로 구성된 중국 10대 시인 선정위원회는 베이다오를 만장일치로 현존 중국 최고시인으로 추천했다. 2~10위에 오른 시인은 시촨(西川), 위젠(于堅), 자이융밍(翟永明), 창야오(昌耀), 하이쯔(海子), 어우양장허(歐陽江河), 양롄(楊煉), 왕샤오니 등이다.   베이다오는 사회주의 선전문학에 반대하며 개인의 서정과 감정을 중시하는 현대 중국 ‘몽롱파’ 문학의 대표자로 꼽힌다. 베이징 출신인 그는 1978년 시인 망커(芒克) 등과 함께 시전문지 ‘오늘(今天)’을 창간하며 중국 내 시 창작운동을 이끌었다. 인권운동에도 참여한 베이다오는 89년 톈안먼 사태에 연루돼 90년대에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8년 이후 홍콩 중문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나 아직도 중국 본토 방문은 금지당하고 있다.   자오전카이(趙振開)가 본명인 베이다오는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깃든 서정시를 발표해 92년을 비롯해 몇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베이다오의 작품은 낭송하기가 쉬워 독자층이 많다. 그가 30여년 전에 쓴 정치서정시 ‘대답(回答)’의 첫대목 ‘비루는 비루한 자의 통행증이고,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지명이다’는 구절은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또 본문이 ‘망’(網)이라는 한 글자로 이뤄진 ‘생활’이란 제목의 시는 독특한 발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한 평론가는 이 시에 대해 “생활의 그물은 속박에서 나오고, 속박은 희망의 그물 구멍을 만들어 낸다”며 “시인은 묶인 그물 안에서 그물 구멍을 통해 희망을 찾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베이다오의 시집 등이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편이다. 그는 창원시가 제정한 ‘창원 KC 국제시문학상’의 수상자 자격으로 한국을 다녀간적이 있다.  
1964    중국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 - 최건(음유시인) 댓글:  조회:4566  추천:0  2016-12-25
  한 시대의 비가, 최건의〈한 쪼각의 붉은 천>   김 관 웅     차례: 1.       최건의〈한 쪼각의 붉은 천〉의 텍스트 소개 2.〈한 쪼각의  붉은 천〉의 상징적의미 3.〈한 쪼각의  붉은 천〉과 “문화대혁명”의 상호 텍스트성 4.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둘러싼 찬반 량론의 대립 5.  최건의 락음악이 우리들에게 주는 계시     1.    최건의〈한 쪼각의 붉은 천〉의 텍스트 소개   최건(崔健)의 락음악(摇滚) 창작을 크게 전후(前后) 두 단계로 나누어 볼수있다. 첫번째 단계는 주로 1986년에 창작된 〈내가 모르는것 아니다(不是我不明白)〉,〈새 장정길에서의 락(新长征路上的摇滚)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从头再来)〉,〈더는 덮어감추지 않으련다(不再掩饰)〉,〈탈출(出走)〉 , 〈빈털털이(一无所有)〉등이다. 이 단계의 주요한 특점은 정신 대동란시대의 곤혹, 방황, 배회, 사색 및 자유에 대한 갈망과 추구를 표현하였다. 두번째 단계는 1990년 이후인데 이 시기에는 보다 높은 예술 수준으로 중국인들이 극좌정치로선의 통치하에서 겪었던 경력과 운명을 보여주었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은〈한 쪼각의 붉은 천(一块红布)〉이다. 그 가사 원문과 조선어역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那天是你用一块红布      그날 당신은 한 쪼각의 붉은 천으로 蒙住我双眼也蒙住了天    내 두 눈을 감싸주었고 하늘도 가려놓았네 你问我看见了什么        당신이 나를 보고 무얼 보았는가 물었을 때  我说我看见了幸福        난 행복을 보았다고 대답했었지   这个感觉真让我舒服      그 감각은 정말로 나의 마음 편안케 하여 它让我忘掉我没地儿住    내가 살곳이 없는것도 잊게 했지 你问我还要去何方        당신이 또 어디로 가겠는가 나한테 물었을 때 我说要上你的路          나는 당신이 가는 길로 따라가겠다고 대답했네.   看不见你也看不见路      당신도 보이지 않았고 길도 보이지 않는데 我的手也被你攥住        나의 손은 당신의 손에 굳게 잡혀 있었네 你问我在想什么          당신은 내가 무얼 생각하는가 나한테 물었를 때 我说我要你做主          나는 당신은 나의 주인이 돼주어야 한다고 대답했네   我感觉你不是铁          내 느낌에 당신은 무쇠덩이가 아니였지만  却像铁一样强和烈        무쇠처럼 강하고 뜨거웠네 我感觉你身上有血        내가 당신의 몸에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음은 因为你的手是热呼呼      당신의 손이 뜨거웠기 때문이였네   我感觉这不是荒野        난  그곳은 거치른 들판이 아니라고 느꼈고 却看不见这地已经干裂    그 땅덩어리가 말라서 갈라져있음을 발견하지 못했네 我感觉我要喝点水        난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可你用吻将我的嘴堵住    당신은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렸네   我不能走我也不能哭      내가 더 갈수도 없고 울수도 없었음은 因为我身体已经枯干      내 몸은 이미 말라버렸기 때문이였지.  我要永远这样陪伴着你    내가 영원히 그대로 당신을 그냥 따르려 했음은  因为我最知道你的痛苦    당신의 고통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네.   이 가사에서 시적화자 “나”는 “당신”에 의해 두 눈이 붉은천에 의해 가려진 채로 행복감에 젖어서 “당신”이 끌고가는 대로 따라간다. “나”는 “당신”이 영원히 “나”의 주인으로, 상전으로 되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목이 말라서 물을 먹자고 해도 “당신”이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온몸이 다 말라서 빈사상태에 이르지만 “나”는 “당신”의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영원히 “당신”을 모시고 따르겠다고 한다. 이 가사의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의미는 이처럼 명백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빈털털이〉와 마찬가지로 이 〈한쪼각의 붉은 천〉은 세상에 나타난 후에 즉각 광범한 공명을 일으킴과 동시에 치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것은 찬양파나 반대파 모두 마치나 약속이나 한듯이 이 가사가 갖고있는 상징적의미를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석의 방향이 정반대이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2.〈한쪼각의 붉은 천〉의 상징적의미   그 자체로 다른것을 대표하는 사물이나 현상 일체를 상징이라고 한다면 이 가사는 수사학적 의미에서 국부적인 상징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하나의  상징체계를 이룬다. 즉 가사중의 “한 쪼각의 붉은 천”, “거치른 들판”, “나”,”당신”,  “물”이나 “당신은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렸네”와 같은 개별적인 심상이나 시행만 상징성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가사 전체, 즉 텍스트 전체가 상징성을 갖고있다는 말이다. 어느 때부라고 꼭 찍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붉은 색”은 중국에서 결코 일종 색채의 의미만 갖고있은것은 아니였다. 많은 경우에 “붉은 색”은 신앙이나 리상이나 추구를 상징하였는바 “홍색 중국” , “동방홍”, “오성 붉은기”, “홍보서(红宝书)”, “붉은 색의 바다(红色海洋)”, “붉디붉은 붉은 태양이신 모주석”……이 모든것은 온통 “붉은 색”으로서 “붉은 색”은 희망을 상징하고, 혁명을 상징하고, 행복을 상징했다. 그러나 중국인민의 정치생활과 정신생활에서 “붉은 색”의 범람으로 인하여 생겨난 홍색환각은 생명의 나무의 초록색이나 바다나 하늘의 푸른색이나 수확계절의 황금색이나 빙설세계의 흰색 등 다른 색깔에 대한 감응력이 쇠퇴하게 되였고 심지어 공포감까지 생겨나게 되였으며, “붉은 색” 자체의 진위(真伪) 및 그 다양성에 대한 분별능력마저 잃게 되였다. 특히 “붉은 색”이 범람하는 이런 와중에서 림표, 4인방 같은 정치간상배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팔아먹은 것은 홍색상표를 붙인 저질품이나 짝퉁들이였다.  비록 이들이 가짜산품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뛰여났으나 “문화대혁명”중에 나타났던 홍색 대범람은 홍색캡슐속에 넣은 정치독약과 정치몽혼약의 대범람이였다. 이런 정치독약이나 정치몽혼약을 달갑게 받아먹은 수많은 중국인들은 이 “홍색의 바다”에서 처음에는 “행복을 보았고”, “정말로 마음 편안 감각”을 갖게 되였다. 수천수억의 중국인들은 손에 붉은 모주석어록책을 받쳐들고 붉은 태양을 우러러 “모주석 만세 만만세”를 목이 터지라고 부르고 뜨거운 눈물을 좔좔  흘리면서 “살곳이 없는것도 잊은채” “모주석이 이끄는 길”로 천방지축 따라나섰다. 하늘과 땅이 온통 붉은 색으로만 도배되여 그만 그 청일색의 붉은 빛깔로 하여 현운증을 일으켜 까무라칠번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나의 손은 당신의 손에 굳게 잡혀 있”었던 터라 도망칠래야 도망칠수 없었고 또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신이 내가 무얼 생각하는가 나한테 물었를 때/나는 당신은 나의 주인이 돼주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당시 이른바 “민주(民主)”란 무었이였던가? 바로 혁명의 수령이 인민의 주인으로 되여주는것이였다. 혁명의 수령이 인민들의 주인으로 되여 주지 않으면 인민들은 바람에 나붓기는 여린 풀처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민주”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전국에 널리 퍼졌던 〈큰 바다에서의 항행은 조타수에 의지하네(大海航行靠舵手)〉라는 노래가 이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大海航行靠舵手          큰 바다에서의 항행은 조타수에 의지하고 万物成长靠太阳          만물이 자라남은 태양의 덕분이네 雨露滋润禾苗壮          비와 이슬이 적셔주어 곡식들이 자라고 干革命靠的是毛泽东思想。혁명은 모택동사상에 의지해야 하네. 鱼儿离不开水呀,        고기는 물을 떠나 살수 없고 瓜儿离不开秧。          호박은 넌출을 떠나 열릴수 없네 革命群众离不开共产党,  혁명군중은 공산당을 떠날수 없고   毛泽东思想是不落的太阳。모택동사상은 지지 않는 태양이라네.   그런데 갑자기 그 조타수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고 태양도 서산으로 기울어지려고 하고 비가 내리지 않는데 어찌 이슬이 맺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마른 목을 추기려고 물을 좀 먹으려고 했으나 “당신”은 혁명적인 키스로 “나”의 입을 막아버린다. 어떻게 하랴? 기진맥진한 사람들은 분분히 “물”을 찾으려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 카나다 후에는 서독, 호주, 그 다음에는 일본, 벨지크……그러나 “나”는 떠나려고 하지도 않고 울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나”의 몸이 말라서 비틀어졌고,  “나”는 “당신”의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노예근성”, “복종심리”, “짝사랑 콤플렉스”는 중국인, 특히는 지식인들의 수천년 동안 내려오면서 형성되였던 비극성격이였다. 력사가 지식인들을 거듭 짓밟고 우롱하였으나 그들은 언제나 묵묵히 참고 견디여왔다. 력사가 그들에게 조금만 사과를 해도 그들은 눈물코물 흘리면서 감지덕지해 했다.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은 이러한 중국 지식인들의 인격의 비극을 가장 준확하게 그려냈으며, 동시에 “붉은 천”이라는 이 상징부호를 동원하여 수억의 인민들이 눈먼 망아지처럼 워낭소리 듣고 따라가듯이 혁명수령을 그릇된 로선을 맹종하여 전 중국이 온통 혁명과 계급투쟁의 아수라장으로 되였던 한 단락의 력사의 내함에 대한 전반 중국인들의 비장한 심리체험을 반영하였다.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이르러서 중국의 상흔음악은 사상예술상에서 고봉에 오르게 되였으며, 이 노래는 가장 심각한 한 시대의 비가(悲歌)라고 평가 받고 있다. 최건의〈빈털털이〉와 〈한쪼각의 붉은 천〉은 일종 문화 력량으로서 음악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미술, 영화, 희곡, 무용 심지어 문학마저 추월해 버렸음을 표징한다.   3.〈한 쪼각의  붉은 천〉과 “문화대혁명”의 상호 텍스트성   탈구조주의리론중의 하나의 중요한 리론범주가 바로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다.  문학텍스트는 하나의 독립적이고 페쇄적인 계통이 아니라 다른 계통과 밀접란 상호 련관성을 갖고있다는 주장이 “상호 텍스트성” 리론이다. 하나의 문학적텍스트라는 기호체계를 문화라는 큰 기호체계속의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개별 문학작품을 사회의 문화와 떼여놓고 다루던 형식주의나 구조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그것의 사회문화적의미화의 과정을 보다 전면적이고도 준확하게 파악할수 있다. 최건의 〈한 쪼각의 붉은 천〉이 갖고있는 상징적의미를 보다 전면적으로 그리고 준확하게 파악하려고 하면 반드시 중국에서 혁명수령의 개인권위, 혁명수령에 대한 개인숭배가 극에 달하였던 문화대혁명의 실상과 이 가사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상호 텍스트성”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중국력사는 물론이고 세계력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문화대혁명”의 발발은 모택동의 개인의 주장, 개인의 의지와 직접적련관성이 있다. 모택동은 중국인민을 령도하여 중국을 도탄속에서 구원한 중국인민의 대구성인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택동 같은 절세의 위인도 중국의 수천년의 봉건전통의 관성속에서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였다. 특히 수깁년의 혁명전쟁 가운데서 점차 수립되여온 모택동의 절대적인 권위는 점차 당내에서 모택동의 일언당(一言堂)으로 나타나게 되였으며, 이는 봉건사회의 제왕의 권위와 별다른것이 없게 되였다.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의 지고한 원칙은 “공화(共和)”의 원칙으로서 이는 혁명수령의 절대적권위와는 수화상극이다. 1966년 8월, 모택동은 중화민족을 심중한 재난속에 빠뜨려넣은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였다. 비록 우리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었던 대소란이였진만 광범한 중국인민, 특히는 당년의 청년세대들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신앙을 갖고 이 동란속에 주동적으로 뛰여들었다는 점이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마치도 하늘의 수많은 행성들이 태양을 따라 돌듯이, 마치도 지상의 수천만 송이의 해바라기들이 태양을 따르듯이 중국의 수천만의 홍위병들은 붉은 홍위병완장을 두루고 붉디붉은 붉은 태양 모택동, 붉은 사령 모택동을 따라나섰던것이다. “문화대혁명”의 주력군이였던 수천수백만의 홍위병들은 얼마나 경건하고 유치하였던가. 모택동이 한번 명령만 내리면 그들은 피를 흘리고 목이 날아날지언정 자기의 청춘과 정열을 모조리 “문화대혁명”의 제단우에 바칠 각오를 갖고있었다. 중국의 청년들은 너무나도 천진하고 너무나도 불쌍했다. 그것은 그들의 이런한 경건함과 뜨거운 정열은 지극히 우매하고 비인간적인 천방야담식의 활극들이 중국땅에서 비일비재로 벌어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작가 량효성(梁晓生)의 회억록 《한 홍위병의 자백》중의 한단락을 인용하기로 한다.   “모주석이 명령만 내리면 우리들은 오대양에 뛰여들어가 자라를 잡고, 구천에 날아올라 룡을 잡으며 전 세계의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동파들을 향해 최후의 돌격전을 벌릴 각오를 갖고있었다. 빠리를 산산쪼각 내고, 뉴욕을 짓밟아 버리고, 런던을 해방하고 모스크바를 광복시키며, 크레물린궁의 붉은기를 빼앗아 북경으로 가져다가 천안문성루우에 꼽으려고 했다. 그리고 레닌의 수정관을 빼앗아 북경으로 옮겨와 천안문광장에다 모시려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뜨거운 피로 새로운 세계를 붉게붉게 물들이려고 생각했다. ……”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는 순전히 잠꼬대 같은 소리이고 미치광이의 과대망상증이지만 이는 확실히 그때 수천만 나젊은 홍위병들의 공동한 리상이였다. 당시 홍위병들은 마치도 몽혼약을 먹은 사이비종교의 신도들처럼 리성을 잃고 날뛰였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을 하지 않으면 중국은 필연코 붉은 색깔이 변하고 천백만의 사람들의 머리가 땅바닥에 나뒹굴게 되며, 세계의 3분의 2의 로동대중들은 지옥속에서 살고 있기에 자기들이 해방시켜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중국의 홍위병들은 처음에는 문화대혁명의 도구로 되였다가 종당에는 문화대혁명의 희생품으로 전락하였다. 수많은 홍위병들이 학업을 전페하고 무단적인 투쟁에서 붉은 피를 흘리면서 목숨을 잃었고, 종당에는 시골로 변강으로 쫓겨가게 되였다. 중국의 수천만 홍위병 세대는 10년이란 귀중한 청춘의 세월을 문화대혁명이란 이 제단우에 제물로 고스란히 바치고 말았다. 중국의 봉건전통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전제주의, 몽매주의, 개인미신, 종법사상 등은 중국인들의 뿌리 깊은 맹종, 노예근성, 복종심리, 유치함과 결합하여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10년 동란을 불러왔던것이다. 절대적권위를 갖고 있는 혁명수령이 친히 발동하고 그 혁명수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수천만의 중국인들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대재난이고 일장 악몽이였다.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에서 서정적자아인 “나”는 혁명수령을 맹종하였던 수천만 중국인들의 상징적형상이고, “당신”은 혁명수령의 상징적인 형상이라고 해석해도 대과(大过)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문화대혁명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령의 제왕사상과 공화(共和)원칙의 겨룸이였고 수령의 절대적권위와 당의 민주력량간의 겨룸이였다. 그런데 전자가 승리하고 후자가 패했다.”[①]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한 시대의 비극을 가장 심도 있게 표현한 가사이다.   4.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둘러싼 찬반 량론의 대립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은 창작된 후에 전국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문화대혁명을 겪었거나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이 노래를 소리 높혀 긍정하였다.   “나는 오랜 지식청년이다. 처음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들었을 때 깊이 감동되였다. 솔직하 말한다면 붉은 색은 우리 같은 당년의 지식청년들에게 있어서 그 감수가 너무나도 깊다. 붉은 색은 당시 우리들의 신념과 리상의 상징이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무력충돌이 일어났는데, 나의 제일 친한 동학이 자기 홍위병조직의 붉은 기발을 지키기 위해 대방이 내리치는 칼에 십여곳이나 찔려 선혈이 랑자하였다. 그가 흘린 피도 붉은 색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미욱한지 모르겠다. 그뒤로 나는 붉은 색만 보면 온몸이 불편해졌고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나는 붉은 색을 보지 않으려고 우리 집안의 모든 문과 창문을 모두 흰 페인트로 칠했다. 붉은 색은 일장 악몽이였다. 〈한쪼각의 붉은 천〉은 정말 잘 썼다. 심도가 있다. 삼십도 안된 그가 어떻게 이런 심도있는 작품을 창작했는지 정말 불가사의하다. 나는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과 〈빈털털이〉는 그의 작품들중에서 가장 력사 심도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②]   ............................................................................................................................ [1] 梁晓生 《凝视九七》,经济日报出版社,1997年,제 265페지. [1] 赵健伟 《崔健在一无所有中呐喊 - 中国摇滚备忘录》, 北京师范大学出版社, 1992년, 제263페지. “나는 대학생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는 짜개바지를 입고있었으니 그 시대의 사정을 모른다. 그러나 필경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어제날의 일이므로 우리들 역시 그 력사의 그림자의 영향에서 벗어날수 없다. 내가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을 처음 들었을 때 우선은 그 비극적인 풍격에 감동을 크게 받았다. 〈빈털털이〉와 마찬가지로 이 노래에도 일종 비장미가 흘러넘친다. 이런 비극적 미가 갖고있는 힘은 〈우리의 생활을 꿀보다 달콤하네〉같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노래만 들어오던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건의〈한쪼각의 붉은 천〉과 〈빈털털이〉는 그 비할바 없이 진솔한 마음의 소리와 비장한 힘으로 단꺼번에 우리들의 심금을 크게 울렸다.”[③]   중국에서는 그 누구도 최건의 락음악을 홍보해 주지 않았으며, 각종 행정수단으로 강박적으로 들으라고는 더욱 하지 않았다. 최건은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관변측의 전파매체를 타지 않고 대성한 가수이다. 이 자체는 일종 문화반역정신의 상징으로서의 최건의  락음악은 진정으로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왔음을 보여준다. 최건의 락음악은 우리들에게 시대와 동보적으로 전진하고 인민대중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인민대중에게 사상내용이 심각하고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선물해야만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은 일부 좌적사상을 갖고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산계급자유화”의 산물이라는 비판과 부정을 받기도 했다. 이를테면 1990년 6월 26일, 중국의 한 저명한 로시인은 중국문화계의 최고장관의 신분으로 최건의 〈한쪼각의 붉은 천〉의 가사를 거론하면서 “자산계급 자유화”라고 부정하기도 했다.[④] 이에 대해 최건은 조금도 숙어들지 않고 자기를 변호하였다. ....................................................................................... [1] 동상서 제263페지. [1] 동상서, 제264페지를 참조하라. “저의 부친은 공산당원이고 저의 모친은 공청단원입니다. 그리고 저는 어려서부터 사회주의환경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무슨 자산계급으로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유를 추구하려는 념원이 있는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유는 종래로 인류사회가 추구하는 종극적임 목적중의 하나가 아닙니까.” [⑤]    “저는 중국문화속에 마땅히 이런 개념을 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매개 사람들은 모두 위대하다는 개념 말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마다 자기는 독립적존재로서의 의의를 갖고 있고 그러한 기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도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복종하려고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복종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질식시켜 죽이고 자기가 날로 왜소해지게 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의 창조력을 압살하게 됩니다. 한 사회가 진보할수 있는 원인은 매개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창조력과 위대한 일면으로 그 사회를 부각시키고 만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락음악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인식하는 면에서 일정한 기여가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⑥]   최건은 이처럼 개성이 뚜렷하고 자시의 소신을 속이는 법이 없이 당당하게 주장하여 왔다. 최건의 락음악의 선률과 가사에는 모두 이러한 개성의식이 뚜렷하게 표현되여 있는것이다. 최건은 최근 몇년동안은 영화제작에 정열을 쏟고있다. 《북경잡종(北京杂种)》(1993), 《나의 형제자매(我的兄弟姐妹)》(2004), 《태양은 여전히 솟아오른다(太阳照常升起)》(2006)에는 배우로 출연했고, 《처녀막 재생 년대(修复处女膜年代)》(2006), 《성도여, 나는 너를 사랑해(成都我爱你)》下集(2009),《푸른 뼉다귀(蓝色的骨头)》(2010)등에서는 감독을 담당했다. 우리들은 최건의 영화창작에서도 락음악의 창작에서처럼 큰 성취를 쌓아올리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5.      최건의 락음악이 우리들에게 주는 계시   최건의 이른바 “요우꾼(摇滚)”은 20세기 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미국에서 류행한 대중통속음악의 일종인 락(rock)의 영향하에서 생겨난것이다. ............................................ [1] 동상서, 제11페지. [1] 동상서 제272페지. 주지하다시피 락은 미국의 당대 통속음악으로서 어쩌면 가장 선명한 포스트 모던적인 예술양식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최건은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라고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최건은 단순히 미국의 락음악의 이 형식을 중국에 이식(移植)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락이란 이 양식에 중국 1980년대의 시대적정서를 접목시킴으로써 그 시대를 살았던 중국인들의 마음의 목소리를 대변할수 있게 하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의 락음악은 전 중국을 열광시킬수 있었던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최건의 락음악을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도, 극력 지지, 성원하는 사람들도 모두 사회적측면에서, 정치적측면에서 그의 락음악의 상징적의미를 파악하고 해석하였다. 이는 최건의 락음악은 결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예술”,  ”시대를 위한 예술”,  “인간을 위한 예술” 그리고 최건 본인이 극력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는 정치적요소가 다분한 예술이였음을 알수 있다. 설사 최건이 본인이 자기의 락음악의 정치적경향성에 대해 극구 부인했다고 해도 수용미학의 각도에서 볼 때 수용자들은 필연적으로 최건의 락음악에 자기의 주관적인 정감과 생각을 가미하게 되는 법이다. 수용미학의 각도에서 볼때 최건의 락음악이 국내국제적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게 된것은 커다란 적인 영향은 확실히 국내외에서의  최건의 락음악의 영향은 그 정치적영향이 음악적영향보다 더 컸던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락음악 역시 일종 정신적인것으로서 정신적인것에는 필연적으로 정치 혹은 신앙적요소가 가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 중국을 진동시켰던 최건의 락음악과 사회, 시대, 인간, 정치와 밀접한 련관성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자연스럽게  몇년전에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우리 문단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탈정치, 탈사회, 탈시대, 탈민족의 탐미주의적인 문학주장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된다. 사실 서양의 모더니즘문예운동에는 형식주의적인 실험적요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결코 탈정치, 탈사회, 탈시대, 탈민족적인 탐미주의의 단일구조로 이루진것은 결코 아니였다. 이를테면 표현주의소설가 카프카의 많은 작품은 근현대문명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소외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왔고, 실존주의철학가이며 문학가인 사르트르의 많은 작품들 역시 자본주의문명사회의 부조리와 황당성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와 황당한 사회속에서 자기의 본질을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곤혹을 보여주었으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한 탐미주의와는 인연이 없다. 우리문단에 최근 년간에 나타난 탐미주의문학경향은 결코 자신의 독창적인 창조는 아니며 백여년전의 서구에 나타났던 탐미주의의 힘 빠진 메아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스스로 대단한것처럼, 아주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전반 인류문학예술의 발전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아무런 20세기 말 21세기에도 연장되고 있는 중국조선족문단에서의 이른바 “탐미주의”나 “모더니즘”이나 “실험문학”들은 별로 신선한 감도 주지 못한다. 마치도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는 “낯익은 제비들이 돌아온것(似曾相似燕归来)”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탐미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와 영국에서 한때 류행했던 문예사조로서 문학예술은 그 스스로를 위하여 있는것이므로 도덕적, 정치적, 민족적, 사회적 그리고 기타의 비예술적표준에 의하여 판단수 없다는것이 근본 립장이였다. 문학예술의 독립성을 강조한 면에 있어서, 문학예술을  문학예술 이외의 다른 분야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려고 하였다는 측면에서 탐미주의는 나름대로의 존재의 리유와 일정한 합리성을 갖고있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일정한 도를 넘으면 모두 자기의 합리성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탐미주의가 도를 넘어서 문학예술과 모든 기타 분야와의 련관성을 완전히 부인하면서 문학과 예술이 현실생활의 모습이나냄새를 멀리하면 할수록, 현시대 인간들의 희노애락과 담을 높게 쌓으면 쌓을수록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진다고 주장할 경우에는 자기의 존재의 합리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문학예술은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일종 대화이고 일종 심령의 소통이고 정감의 교류와 공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에게 보이지 않는것을 전제로 하는 “일기 쓰기”나 자기 침실안에서 창문을 꽁꽁 닫아놓고 자오자락(自娱自乐)을 목적으로 하는 “노래 부르기”와는 달리 무릇 대중매체에다 발표를 전제로 하는 문학예술행위는 본질적으로 개인적행위가 아니라 사회적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문학이 준엄한 격변기에 처한 우리민족의 어려운 실존상황을 외면하고 오로지 탐미주의적인 언어실험이나 이미지조합이나 유치한 환상세계에서만 소요하게 된다면 그런 문학예술은 조만간에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것이다. 그것은 문화는 민족의 혈맥이고, 인민대중들의 정신적고향이며, 문학예술은 민족정신의 홰불이기 때문이다. 결코 단순히 개인적취미와 개인적기호에 좇아 영위되는 언어실험이나 상아탑속에서의 순개인적인 상상이나 몽환속에서의 잠꼬대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이후 최건의 락음악이 한동안 전 중국의 수많은 청중들을 열광케 한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문학예술은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외면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것을 알려주고 있다.   -------------------------------------------------------------------   [①] 梁晓生 《凝视九七》,经济日报出版社,1997年,제 265페지. [②] 赵健伟 《崔健在一无所有中呐喊 - 中国摇滚备忘录》, 北京师范大学出版社, 1992년, 제263페지. [③] 동상서 제263페지. [④] 동상서, 제264페지를 참조하라. [⑤] 동상서, 제11페지. [⑥] 동상서 제272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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