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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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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미국 시인 -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댓글:  조회:5907  추천:0  2016-12-04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 출생 1807년 2월 27일 (75세) 포틀랜드 (메인 주) 사망 1882년 3월 24일 (75세)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 주) 직업 시인, 교수 국적  미국 학력 보든 대학교 장르 로맨티시즘 사조 시, 소설 대표작 Hyperion, a Romance (1839) Evangeline: A Tale of Acadie(1847) 배우자 메리 스토라 포터 프랜시스 파나 애플턴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년 2월 27일 ~ 1882년 3월 24일) 는 미국의 시인이다. 〈인생찬가〉나 〈에반젤린〉 등의 시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단테의 신곡을 미국에서 처음 번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첫 번째 유럽 여행 1.2두 번째 유럽 여행 1.3재혼 2작품 2.1소설 2.2시집 2.3번역 2.4명시선집 3각주 4바깥 고리   생애[편집]   롱펠로우의 생가 1807년 2월 27일 미국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질파 워즈워스 롱펠로와 스테판 롱펠로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변호사이고, 외할아버지 벨렉 워즈워스 장군은 미국 독립 전쟁 중에 장군이었다. 롱펠로의 가정은 1676년에 영국의 요크셔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가족이다. 또한 외가에서, 메이플라워 호의 승선자인 프리실라 알덴, 존 알덴, 윌리엄 브루, 헨리 샘슨, 존 하울랜드, 리처드 워런의 피를 받았으며, 또한 역대 대통령을 많이 배출한 존 라스 드롭 목사의 피도 이어받았다. 롱펠로의 형제는 스테판 (1805년생), 엘리자베스(1808년생), 앤(1810년생), 알렉산더(1814년생), 메리(1816년생), 엘런(1818년생), 사무엘(1819년생)로 7명이었다. 롱펠로는 읽기가 매우 우수하였고, 세 살때 사숙에 입학하여 6살 때 포틀랜드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1822년 14세의 나이에 브런스윅 보든 대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는 평생 친구가 될 너대니얼 호손과 만났다. 첫 번째 유럽 여행[편집]   첫 번째 아내 메어리 스토어러 포터 1825년 보든 대학교를 졸업한 후, 언어학의 연구를 위해 여러 번 유럽에 파견 근무를 한다는 조건으로 대학의 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1826년부터 1829년 사이, 유럽(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를 여행하고 귀국해서 버든에서는 처음으로 현대 언어학 교수가 되었고, 또한 비상근 사서가 되기도 했다. 이 교수 시절에 롱펠로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교본을 만들거나 여행기 《바다를 건너 : 바다를 건넌 순례자》(Outre - Mer : A Pilgrimage Beyond the Sea)를 저술하였고, 그해 1831년 포틀랜드의 메리 스토어러 포터와 결혼했다. 두 번째 유럽 여행[편집] 롱펠로는 또한 1년 정도의 해외 유학이라는 조건부로 하버드 대학의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의 스미스 교수(Smith Professor of French and Spanish) 자리를 얻었다. 롱펠로가 여행 도중에 로테르담에 있었던 1835년, 아내 메리는 유산 후 2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3년 후,롱펠로는 메리와 사랑에 영향을 받은 《천사의 발자국》(Footsteps of Angels)을 썼다. 1836년 롱펠로는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 교수직에 올랐다. 케임 브리지에 살며, 평생 거기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여름 동안만은 나한트에서 보냈다. 그즈음 시집 출간을 시작했다. 1839년의 처음으로 시집 《밤의 소리》(Voices of the Night), 1841년의 《발라드와 다른 시》(Ballads and Other Poems)를 발표했다. 《발라드와 다른시》에는 유명한 시 〈마을의 대장장이〉(The Village Blacksmith)가 들어 있다. 재혼[편집]   7년간 구애 끝에 결혼한 프랜시스 애플턴, 1843 롱펠로는 보스턴의 부유한 사업가 네이선 애플턴의 딸, 프랜시스 파나 애플턴과의 교제를 시작했다. 이 교제 기간, 롱펠로는 종종 하버드에서 보스톤 브리지를 넘어 보스턴에 있는 애플턴 집까지 걸어 다녔다. 이 교량은 오래되어 1906년에 재가설되었고 롱펠로 브리지라고 불렸다. 7년 후에 파니와 결혼에 동의하고, 1843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네이트 애플턴은 두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찰스 강이 내려다 보이는 "크레기 하우스"(Craigie House)를 구매했다. 이 집은 독립 전쟁 중에 조지 워싱턴 장군과 그 참모가 점령한 것이었다. 파니에 대한 롱펠로의 사랑은 1845년 10월에 쓴 그의 유일한 사랑의 시 소네트 〈밤의 별〉(The Evening Star)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 오, 내 사랑하는 사랑스런 금성이여! O my beloved, my sweet Hesperus! 나의 사랑하는 아침, 저녁 별아! My morning and my evening star of love!) ” 롱펠로와 그녀의 사이에서는 6명의 아이를 가졌다. 론구훼로과 웃기는 사이에 6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찰리 애플턴 (1844-1893), 어니스트 워즈워스 (1845-1921), 퍼니(1847-1848), 앨리스 메리 (1850-1928), 에디스 (1853-1915), 앤 알레그라 (1855-1934) 1847년 4월 7일에 파니의 출산 때 나단 쿨리 유지 박사는 파니에게 마취를 사용하였고, 이것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산부인과 마취가 사용된 사례였다. 1854년 하버드에서 은퇴하고 저술에 전념하기로 했다.1859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는 건전한 인생관을 바탕으로 알기 쉬운 표현을 하여 널리 애독되었는데, 한편 너무 통속적이고 낭만적인 교훈조여서 20세기에 들면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였다. 작품[편집]   "The Village Blacksmith" (손글씨 1페이지) 소설[편집] 《바다를 건너 : 바다를 건넌 순례자》 (Outre - Mer : A Pilgrimage Beyond the Sea, 1835) 《하이 페리온, 로맨스》(Hyperion, a Romance. 1839) 《스페인 학생》(The Spanish Student 3 막 극, 1843) 《카바나 : 이야기》(Kavanagh : A Tale. 1849) 《바닷가와 난롯가》(The Seaside and the Fireside. 1850) 《황금 전설》(The Golden Legend. 詩劇, 1851) 《뉴잉글랜드의 비극》 (The New England Tragedies. 1868) 《하느님의 비극》 (The Divine Tragedy. 1871) 《쿠리스투스》 (Christus. 신비, 1872) 《3권의 노래 책》 (Three Books of Song. 1872) 《아득한 목표》 (Ultima Thule. 1880) 《밤의 소리 : Voices of the Night : 발라드와 다른 시》(Ballads; and other Poems. 1839) 《발라드와 다른 시》(Ballads and Other Poems. 1842) 《노예시》(Poems on Slavery. 1842) 《브뤼헤의 종탑과 다른 시 (The Belfry of Bruges and Other Poems. 1845) 《에반젤린 : 아카디 이야기》(Evangeline : A Tale of Acadie. 서사시, 1847) 《하이아와사의 노래》(The Song of Hiawatha. 서사시, 1855) 《마일스 스탄디슈의 교제와 다른 시》(The Courtship of Miles Standish and Other Poems .1858) 《가정시》 (Household Poems 1865) 《길가의 여인숙 이야기》(Tales of a Wayside Inn.시, 1863) 《루스의 꽃》 (Flower-de-Luce.시, 1867) 《그 후》(Aftermath.시, 1873) 《판도라의 가면과 다른 시》 (The Masque of Pandora and Other Poems. 1875) 《녹색 모스와 다른 시》 (Kéramos and Other Poems. 1878) 《항구에서》(In the Harbor.시, 1882) 번역[편집] 《단테의 신곡》 (Dante's Divine Comedy, 1867) 《단 호르게 만리케의 코프라》 (Coplas de Don Jorge Manrique, 1833) 명시선집[편집] 《유럽 시인과 시》(Poets and Poetry of Europe, 1844) 《웨이프》(The Waif, 1845) 《시와 공간》(Poems of Places, 1874)   바깥 고리[편집]     자료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의 시와 전기 at PoetryFoundation.org "); padding-right: 13px;">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작품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 단순 텍스트와 HTML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의 작품 at Internet Archive - 스캔된 책과 많은 삽화 그리고 원본판 서적 "); padding-right: 13px;">낭송 - the Village Blacksmith 듣기 "); padding-right: 13px;">메인 역사 학회 검색 가능한 시 텍스트 데이터베이스, 전기, 교안 기타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 유적지 in Cambridge, 매사추세츠 주 "); padding-right: 13px;">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집 포틀랜드, 메인 주 "); padding-right: 13px;">Public Poet, Private Man: Henry Wadsworth Longfellow at 200 Online exhibition featuring material from the collection of Longfellow's papers at the Houghton Library "); padding-right: 13px;">Longfellow's Translation of Dante rendered side by side with that of Cary and Norton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의 명언   ===================================== 롱펠로 시선 [ Selected Poems of Henry Wadsworth Longfellow ]   저자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Longfellow, Henry Wadsworth, 1807-1882) 국가 미국 분야 시 해설자 윤명옥(충남대 영문학 박사,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 강사, 시인) 롱펠로의 시는 읽기가 쉽고, 이해하기가 쉽다. 이는 그의 시가 가진 대중성에 결부된다. 이 대중성은 월트 휘트먼이 지향했던 것과 유사하게, 미국에 국민문학을 구현하고자 했던 롱펠로의 열망을 반영한다. 그는 대중적이고 국민적인 시를 써서 이를 통해 자신이 인지하고 깨달은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당대에 떠오르던 민주주의의 개념과 함께 더 겸손하고 더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과 이상을 시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그의 시의 주요 특성 중 하나인 교훈성과 맞물린다. 대학교수를 지낸 교육자로서, 그리고 시인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인지하고 더 많은 것을 더 깊이 볼 수 있는 시력과 예견력을 가진 예지자로 여겼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당대에 그는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많은 영광을 누렸으며, 해외에 알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세기에 오면서, 시대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시에서 역시 주제나 기교가 좀 더 복잡하고 독창적인 면을 통해 호소를 하는 것들이 더 많은 작품성과 예술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시대로 변화되면서 롱펠로의 명성은 시들해졌다. 그의 대중성, 혹은 통속성과 교훈성에 대한 비판에, 그의 시가 유럽 스타일을 따라 했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고 모방적이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그러나 롱펠로의 시대에는 그가 가장 진지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상황은 시대적인 변천과 더불어 시대적 평가 기준의 변모와 독자의 취향의 변화, 엄밀히 말하면 비평가의 취향의 변화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쉬운 시, 어려운 시, 대중에게 호소하는 시, 소수의 독자에게 호소하는 시 등 다양한 종류의 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독자들은 각기 자신의 취향에 따라, 혹은 필요에 따라, 목적에 따라 맞는 시들을 골라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편에서는 롱펠로의 시가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각기 취향이 다르고, 삶의 여정 또한 다르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삶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고 겪고 이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롱펠로는 바로 이런 삶의 공통분모를 찾아 시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얼핏 보기에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 즉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나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인간의 실존을 감내해야만 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존재인 우리에게 중요한 기본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롱펠로는 직업적인 면이나 문학적인 면에서 대단한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사적이고 가정적인 측면에서 불운을 많이 겪었던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인생행로의 경험을 통해 불운하고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도 주저 없이 표현하는 시를 많이 썼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슬픔, 근심이나 걱정, 비탄, 혹은 좌절과 절망 등을 시로 표출해 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염세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는 낙천주의적이며 이상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인간의 건강한 의지와 힘찬 의욕,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그 슬픔을 뛰어넘는 영원을 향한 열망들이 그의 시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는데, 그는 자신을, 그리고 독자를 긍정적인 세계 속으로 끌고 가는 힘을 시 속에 담아 건전한 인생관으로 이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삶을 잘 표현하면서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과 위안을 주는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좌절과 절망으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일반 대중을 격려하는 데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은 그가 시대를 초월해 대중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된다. 그의 시는 또한 아름다운 언어로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음악성으로 유명한 그의 서정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에서 깨닫는 삶의 엄숙함을 잘 드러낸다. 게다가 그의 박학한 독서 편력과 유럽 여행의 경험 등을 통해 다양한 정경 묘사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 역사적인 이야기가 곁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시야나 시적인 스케일은 대체적으로 크고 남성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유 혹은 은유적인 비유에서는 매우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많은 현대의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롱펠로가 사물을 끈질기게 탐구하려는 창작 태도에서는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름다운 언어로 우리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고 삶의 슬픔으로 인해 웅크리고 있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풀어 준다는 점에서 롱펠로는 계속해서 우리 곁에 있게 될 것이다.   ====================                                                                                                                                         밤이 다가왔다. 너무 이르지 않게             And sinking silently,                                              조용히 아주 조용히             All silently, the little moon                                        작은 달이 가라앉으며             Drops down behind the sky.                                    하늘 뒤로 사라졌다.             There is no light in earth or heaven                           땅에도 하늘에도 빛이 없다             But the cold light of stars;                                       차가운 별빛밖에는.             And the first watch of night is given                           밤의 첫 파수꾼은             To the red planet Mars.                                          붉은 별 화성의 차지.             Is it the tender star of love?                                   그건 부드러운 사랑의 별인가?             The star of love and dreams?                                   사랑과 꿈의 별인가?             Oh no! from that blue tent above                              아 아니! 저 푸른 천막 위에             A hero's armor gleams.                                      번쩍이는 한 영웅의 갑옷이겠지.             And earnest thoughts within me rise,                          저녁 하늘에 매달린             When I behold afar,                                               저 붉은 별의 방패를              Suspended in the evening skies,                               멀리 바라보고 있노라면             The shield of that red star.                                   마음속 깊은 생각들이 떠오르나니.             O star of strength! I see thee stand                            오 힘의 별이여! 그대는 서서             And smile upon my pain;                                          내 아픔을 비웃고 있구나.             Thou beckonest with thy mailed hand,                 그대 갑옷에 덮인 손으로 나를 손짓하면             And I am strong again.                                            나는 또다시 힘을 얻노라.             Within my breast there is no light                               내 가슴속엔 빛이 없다.             But the cold light of stars;                                        차가운 별빛밖에는.             I give the first watch of the night                                밤의 첫 파수꾼은             To the red planet Mars.                                           붉은 별 화성의 차지.             The star of the unconquered will,                               정복되지 않는 의지의 별,             He rises in my breast,                                              고요하고 결연한             Serene, and resolute, and still,                                  말없고 침착한 그 별이             And calm, and self-possessed.                                  내 마음속에 떠오른다.             And thou, too, whosoe'er thou art,                            이 짧은 시를 읽는 그대             That readest this brief psalm,                                     또한 누구라 해도             As one by one thy hopes depart,                            그대 희망 하나하나 사라져 갈 때             Be resolute and calm.                                          굳센 의지로 냉정을 찾으라.             Oh, fear not in a world like this,                               이 세상 무엇이든 두려워 말라.             And thou shalt know erelong,                                 그러면 그대 멀지 않아 알지니             Know how sublime a thing it is                                괴로워하며 굳세어지는 것이             To suffer and be strong.                                            얼마나 숭고한가를.              인생 찬미가 슬픈 곡조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 사물의 진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는 아니다. 인생은 참된 것! 인생은 진지한 것! 무덤이 그의 목적지는 아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는 영혼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나 끝은 즐거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제각기 모두 내일이 오늘보다도 낫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빠른 것. 우리의 심장은 강하고 튼튼하지만, 마치 싸맨 북처럼, 무덤을 향해서 장례식의 행진곡을 치며 나아간다. 이 세상의 넓은 전쟁터에서, 인생의 거치른 야영장에서, 말못하고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그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것은 죽은 과거로 묻게 하라. 활동하라, --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활동하라, 안에는 용기를 갖고, 위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도 장엄한 삶을 만들 수 있고 떠날 땐 때라는 모래터 위에 발자욱을 남겨놓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 발자욱, 그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이, 엄숙한 생의 바다 위로 배저어가다가 홀로 외롭게 파선당한 사람이 보면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되리라. 그러나 우리 일어나 일하자, 어떠한 운명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완성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우리 일하며 기다리는 것을 배우자. 화살과 노래  화살 하나 공중에 쏘았네.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너무도 빨리 날아, 날아가는 화살을 눈으로 좇아갈 수 없었네. 노래 하나 공중에 띄워보냈네.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어느 눈이 그처럼 날카롭고 강하여 날아가는 노래를 좇아갈 수 있으랴. 오랜 뒷날 한 참나무에 아직도 성하게 박혀 있는 화살을 보았네. 노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벗의 마음 한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네.   [출처]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작성자 dgdgpp2  
1922    미국 시인 - 랠프 윌도 에머슨 댓글:  조회:3818  추천:0  2016-12-04
  무엇이 성공 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랠프 윌도 에머슨(미국 시인, 사상가)    7대에 걸쳐서 성직(聖職)을 이어온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학으로 하버드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829년 유니테리언파(派)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에머슨의 자유스런 입장에 대해 교회가 반발하여 1832년 사임하였다.  그후 유럽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835년 귀국하였다. 에머슨은 동양 사상에 밝아 청교도의 기독교적 인생관을 비판하는데, 편협한 종교적 독단이나 형식주의를 배척하고, 자신을 신뢰하며 인간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사상을 주장하여, 자연과 신과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범신론적인 초월주의 철학 입장에 섰다. 그는 세속을 싫어하고 구애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사색을 쌓아 '문학적 철인'이라고 추앙받기도 하였으며, 그의 이상주의는 젊은 미국의 사상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1921    [쉼터] - 원소 "주기률표"와 어머니 댓글:  조회:10161  추천:0  2016-12-03
안녕하세요 블로그 입니다. 오늘은 주기율표에 대해 알아 볼것인데요. '주기율표'란 원소를 주기적 성질로 나눠 표로 정리한 것을 말합니다.   1. 주기율(periodic law)의 발견 18새기 초반까지만 해도 발견된 원소의 종류는 20여가지에 불과했으나 18세기 후반에 많은 종류의 원소들이 발견됨에 따라 원소의 분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 갔다. 최초의 원소분류는 1789년 라부에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원소들은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 화학자들은 원소의 유사성을 찿아보려는 연구에 집중했다.   (1)라부아지에의 원소분류 라부아지에는 그 당시에 원소로 알려진 33종의 물질을 성질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가) 산소, 질소, 수소, 빛, 열 (나) 황, 인, 탄소, 염소, 플루오린 (다) 은, 코발트, 구리, 납, 수은, 니켈 (라) 생석회, 산화바륨, 알루미나, 마그네시아, 실리카   (2) 되베라이너의 세 쌍 원소 독일의 천재적 시인이자 과학자인 괴테의 화학 선생이었던 되베라이너(Johann Wolfgang Dobereiner, 1780~1849)는 1829년 세 개의 원소로 이루어진 어떤 원소 무리들은 첫 번째 원소와 세 번째 원소의 *물리량의 평균값이 두 번째 원소의 물리량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들을 세 쌍 원소라고 하였다.  (*물리량: 원자량, 밀도(g/mL), 녹는점을 뜻한다.)   (3) 뉴랜즈의 옥타브 법칙 1863년 영국의 뉴랜즈(John Alexcander Reina Newlands, 1837~1898)는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서로 배열하면  음악의 옥타브처럼 여덟 번째 원소마다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는 '원소들은 여덟 번쨰마다 성질이 비슷한 원소가 나타난다.' 라는 ' 옥타브 법칙을 발표하였다.     2.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① 원소의 주기율 발견 : 1869녀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Dmitri lvanovich Mendeleev, 1834~1907)는 당시에 알려진 63종의 원소들을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원소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멘델레예프는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가로줄을 몇 개의주기로 나누고, 세로줄을 8개의 족으로 분류한 주기율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릥 주기율표의 몇몇 원소들을 원자량 순서와 주기율이 맞지 않는 원소들이 있었다.     3. 모즐리의 주기율표 원자량 순서와 주기율이 맞지 않는 문제는 1913년 러더퍼드의 제자인 모즐리(Henry Gwyn Jeffreys Moseley, 1887~1915)에 의해 해결되었다.  모즐리는 음극선관 속에서 큰 운동 에너지를 가지는 전자를  금속판에 추돌사켰을 때 생성되는 X선의 파장이 금속원자의 양성자 수(원자번호)가 증가함에 따라 짧아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모즐리는 원소들의 양성자 수로 원자 번호를 정하고,  원소들의 주기적 성질은 원자 번호가 증가함에 따라 규칙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하여 모즐리는 원소들을 원자 번호 순서로 배열한 주기율표를 만들어  오늘날에도 모즐리의 주기율표가 사용되고 있다.   =====================     출생일 1834. 2. 8(구력 1. 27), 러시아 시베리아 토볼스크 사망일 1907. 2. 2(구력 1. 20),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화학원소들의 상호관계를 밝혀 화학의 기초와 근대 물리학의 상당부분을 통일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교원양성소에서 공부한 그는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수상, 교사자격을 얻었다. 오데사에서 화학 공부를 지속했고 1857년 대학에 입학해 1859년 국비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공업연구소 화학교수를 거쳐 3년 뒤 일반화학교수가 되었고, 고전적인 교과서 을 썼다. 혼자 공부해도 여러 가지 화학적인 관계를 알 수 있도록 주기율표를 작성했으며, 이 주기율표는 대부분의 화학이론의 뼈대가 되었다.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 도량형국 국장이 되어 죽기 전까지 일했다. 목차 접기 개요 유년시절과 교육 주기율표의 작성 그밖의 업적 멘델레예프(Dmitry Ivanovich Mendeleyev) 개요 원소의 주기분류법을 개발했다. 마지막으로 작성된 주기율표에 있는 빈 공간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그 가운데 3개 원소의 성질을 예측했다(주기율). 유년시절과 교육 토볼스크에 있는 김나지움 교장의 17명의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해 그의 아버지는 장님이 되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32㎞ 떨어진 곳에 유리공장을 임대해 운영했다. 학창시절 그는 수학·물리·지리 과목에는 매우 우수했지만 필수과목인 고어(古語)에는 낙제생이었다. 1847년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 유리공장에 불이 나 폐허가 되자 그의 어머니는 결단을 내려 2명의 어린 자녀만을 데리고(드미트리와 그의 누나) 토볼스크를 떠났으며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출신지에 따라 입학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대학교육에서 제외된 시베리아 출신의 그는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들과 의학학교에도 시도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어머니가 죽기 10주 전에 교원양성소에 입학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교사자격을 얻었다. 그뒤 건강 때문에 자청해 크리미야로 발령을 받았고, 오데사에서 화학공부를 계속했다. 화학으로 학위를 얻기 위해 18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1857년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1859년 국비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는 유명한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로베르트 분젠과 물리학자인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있었지만 그는 독자적으로 연구했다. 그당시 분자응집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유명한 카를스루에 학회에 참석해(1860. 9) 프랑스의 화학자들 및 이탈리아의 화학자인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와 사귀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지만 뚜렷한 일자리가 없어 그는 과학 관련저술과 편집 일을 했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공업연구소 화학교수를 거쳐 3년 뒤 그곳 대학의 일반화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적당한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교과서를 쓰기 시작해 고전적인 교과서 〈화학원론 The Principles of Chemistry〉(1868~70)을 완성했다. 주기율표의 작성 그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원소들의 성질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깊이 조사해 원소들의 분류체계를 고안했다. 다른 과학자들도 그런 분류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존 돌턴이 원자량 개념을 제시한 뒤 어떤 화학자들은 한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소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또다른 화학자들은 원소들의 성질의 유사성이 구조적으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원소들 사이의 산술적인 관계를 연구했다. 또 원자량을 연구했던 요한 되버라이너와 윌리엄 오들링과 같이 원소들 사이의 논리적인 순서를 밝히려 한 화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알려진 모든 원소를 원자량의 증가순으로 배열해 원소들의 성질에 주기성이 있음을 나타내고 혼자 공부해도 여러 가지 화학적인 관계를 알 수 있도록 주기율표를 작성한 사람은 멘델레예프였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주기율표에는 빈 칸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것들 중 3가지는 20년 내에 발견되었고 실제로 이 3가지 원소는 그가 예측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주기율표는 대부분 화학이론의 뼈대가 되었고, 한 원소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방사성 붕괴과정을 해석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교과서 역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이 주기이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그는 이론과 강의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실제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865년 그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적용해 농작물의 질을 높이고 수확량을 늘렸으며, 러시아의 일반적인 농업조건을 개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 방법을 개량했다. 그밖의 업적 1867년 러시아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파리 박람회에 가서 프랑스 화학공업을 둘러보고 온 뒤 러시아 소다 산업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후에 석유화학공업의 문제점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76년 미국을 방문해 산업의 효율성이나 그 제품의 품질을 과학적으로 높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제품 생산량만을 늘리려는 미국 석유업자들의 태도를 비난했다. 러시아에 돌아와서도, 석유자원개발을 외국업자에게 맡기는 방식을 비판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석유자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진보적이었고 사회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제정 러시아 체제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인정하지 않아 이 체제와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그의 재능은 억압받지 않았으나 그는 종종 냉대를 받았다.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않았고, 1890년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이상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능했기 때문에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일했던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 그는 건강의 악화와 1905년 봉기 전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초청강사 및 여러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서 많은 나라의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화학연구를 체계화하려는 운동의 지도자로서 인식되었다. 오늘날 그는 화학원소들의 상호관계를 밝혀 화학의 기초와 근대 물리학의 상당부분을 통일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일리야 레핀이 그린 멘델레예프의 초상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Менделеев 듣기 (도움말·정보), 문화어: 멘델레예브, 1834년 2월 8일 - 1907년 1월 20일)는 러시아의 화학자이다. 주기율표를 최초로 작성한 이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토볼스크(Tobolsk)인근 Verkhnie Aremzyani에서 11, 13, 혹은 17명의 자녀중 막내로 태어났다(그 수는 출처마다 다르며,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Ivan Pavlovich Mendeleev)가 시력을 상실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브나(Maria Dmitrievna Mendeleeva)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그녀 가족의 유리공장을 다시 세워 살림을 꾸려나간다. 1847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리공장이 화제로 파괴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는다. 멘델레예프가 15세이던 1849년 그의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남은 두 자녀(멘델레예프와 리자)를 데리고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건너가 정착했다. 멘델레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곧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남편 친구의 도움을 받아 Main Pedagogical Institute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이 기관에 들어간지 10주가 안되어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후 그는 결핵진단과 함께 단지 수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그는 주기율표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의 성질과 실제 원소의 성질이 맞아떨어진 사례가 몇 개 존재한다. 로타르 마이어도 거의 같은 시기 거의 비슷한 주기율표를 생각해 내었으나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을 예측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바깥 고리 (영어) "); padding-right: 13px;">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영어)"); padding-right: 13px;">멘델레예프의 초상화 (러시아의 가장 잘 알려진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5년작) (영어)"); padding-right: 13px;">멘델레예프의 사진 -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에드거 파스 스미스 소장품(Edgar Fahs Smith Collection) (영어)"); padding-right: 13px;">원래의 주기율표 - 설명과 함께 (영어)"); padding-right: 13px;">멘델예프의 첫 주기율표 초안 - 1869년 2월 17일 멘델레예프는 1889년 연 1회 열리는 페러데이 강연의 강사로 초청받았다. 그는 강연을 통해 새로 얻은 통찰 (영어)"); padding-right: 13px;">페러데이 강연 - 1889년 7월 4일 - 설명과 함께       ======================   멘델레예프 (Mendeleev, D. I. : 1834~1907) 러시아의 과학자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많은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과학에 흥미를 가진 막내를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까지 걸어서 갔다. 그러나 입학 허가가 나지 않아 페테르스부르크의 중앙교육 전문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입학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부에 열중하여 22세에 페테르스부르크대학의 화학과 강사가 되었다. 이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하여 액체의 열팽창과 표면 장력 등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867년 페테르스부르크대학의 화학교수가 되고, ‘화학의 원리' 라는 책을 저술하기 위해 당시에 알려져 있던 63종의 원소를 배열하는 과정에서 주기율을 발견하였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1869년 러시아 화학회에서 최초의 주기율표를 발표하였다. 특히 당시에 발견된 원소들만으로는 주기율표를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러 곳에 빈칸을 남겨 놓았으며 그 빈칸에 해당하는 새로운 원소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후에 새로운 원소들이 발견될 때마다 멘델레예프가 남겨 두었던 빈 자리가 채워져서 주기율표가 완성되었다. 주기율표를 고안한 멘델레예프의 성과는 톰슨, 러더퍼드, 보어, 아인슈타인 등 원자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다른 과학자 못지 않게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 과학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과 그의 이혼 경력 등으로 인해 그가 죽기 몇 달 전 실시한 투표에서 한 표 차이로 플루오린을 분리한 프랑스의 무아상에게 노벨상을 넘겨 주고 말았다.   ======================== 니오브·탄탈 차지하려 피 흘려가며 싸워 시인의 광기·조울증, 리튬으로 잠재우고 고온에 녹는 갈륨으로 찻숟가락 만들어 장난   사라진 스푼 샘 킨 지음 | 이충호 옮김 | 북하우스 ㅣ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와 공처럼 굴러다니며 뭉치는 수은을 흥미롭게 본 기억이 매력적인 책을 탄생시켰다. 미국 과학전문작가인 저자는 "수은을 통해 역사, 어원학, 연금술, 신화, 문학, 법의학, 심리학을 배웠다"며 무미건조하게 교실 벽에 걸려 있던 주기율표 속에 숨은 원소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밤하늘의 별, 피묻은 돈, 가슴 아픈 사랑, 냉혈의 정치, 비극적 전쟁까지 원소 이야기는 과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공간을 넘나든다. 1990년대 중반 이후 500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의 원인은 휴대전화에 쓰이는 원소 '니오브'와 '탄탈'이었다. 200여개 부족이 채굴을 둘러싸고 피를 흘렸고, 눈먼 돈이 살인 청부에 쓰였으며, 성노예 캠프가 곳곳에 세워졌다. 농부들이 농사를 내팽개치고 이 원소를 캐러 나서자 식량까지 부족해져, 애꿎은 고릴라들이 식용으로 사냥당하면서 멸종 위기에 몰렸다. 이 비극의 41번 원소 '니오브'는 여신 레토에게 아들 일곱과 딸 일곱을 살해당한 신화 속 여인 니오베에게서, 73번 원소 '탄탈'은 신들을 시험한 죄로 영원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형벌을 받은 탄탈로스에게서 따온 이름을 갖고 있다.   /corbis image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시인 로버트 로웰은 젊은 시절 예술적 광기의 화신이었다. 자신을 성모 마리아로 믿고 논쟁을 벌이는가 하면, 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며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팔을 벌리고 서 있기도 했다. 그의 책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지만 성격 파탄으로 고통받았다. 의사는 로웰이 뇌 속 화학물질의 불균형으로 인한 조울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고 3번 원소 '리튬'을 처방했다. 리튬을 복용한 뒤 그의 시에서는 광기가 사라졌다. 친구들은 "동물원에 갇힌 야수처럼 얌전해졌다"고 했다. 텅스텐을 얘기할 땐 2차대전 때 연합국과 추축국 양측에 강철 합금용으로 이 금속 원소를 팔아 천문학적 거액을 챙긴 포르투갈의 독재자가 등장한다. 독살에 주로 사용된 탈륨에 대해서는 냉전시기 미 중앙정보국(CIA)이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양말에 이 원소의 가루를 뿌려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일화를 전한다. "영하 269도에서 헬륨의 전기 저항이 '0'이 된다는 건 당신의 아이팟을 그 온도까지 얼리면 아무리 음악을 오래 들어도 배터리가 닳지 않는다는 뜻"(22쪽)이라던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신념에 눈이 먼 브롬은 필요한 전자 한 개를 빼앗아 오기 위해 세포에 포함된 약한 원소들을 공격한다"(109쪽)처럼 재치 넘치는 표현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원제 'The Disappearing Spoon'은 과학자들이 갈륨으로 만든 찻숟가락으로 손님들을 놀리는 장난을 즐겼다는 얘기에서 나왔다. 갈륨은 실온에서 고체이지만 녹는 점이 29.8도에 불과해 과학자들은 뜨거운 차 속에서 녹아 없어지는 갈륨 찻숟가락을 보고 손님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출처] 조선닷컴 ==================   으로 주기률 외우기. 연상법을 적용하려면 먼저 1번부터 118번 까지 순서를 나타내는 낱말(peg word)를 먼저 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펙(말뚝) 워드 랑 원소를 결합시켜 외우면 된다.    1=소나무에 풍선=수소(H) 걸렸네. 2=매화나무에 헬기=헬륨(He) 걸렸네. 3=벚나무에 리본=리튬(Li)을 매달아 사랑을 빌었네. 4=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낳는 베라먹을 놈=베릴륨(Be)이다. 5=난초를 심은 뜻은 붕새=붕소(B)를 보자는 뜻.   6=목단은 태워서 목탄숯=탄소(C)을 만든다. 7=멧돼지가 비료포대=질소(N)에 이빨로 구멍을 냈네. 8=팔공산 봉우리마다 산소(O)통이 주렁주렁  9=국화축제 열리는 불국사=불소(F)는 빨간 국화와 빨간 소가 유명 10=단풍이 울긋불긋 네온(Ne)사인 같네.   11=똥차 오면 소금=나트륨(Na) 뿌려라. 12=비에 사진기가 젖어 플래시=마그네슘(Mg)이 안터진다. 13=허수아비 팔에 깡통=알루미늄(Al)이 주렁주렁. 14=해녀의 잠수복은 실리콘=규소(Si)로 만든다. 15=호랑이가 할머니에게 인절미떡=인(P) 달라 하네.   16=휴지통이 성냥통이냐 휴지대신 성냥=황(S)이 가득 들었네. 17=회초리로 염소(Cl)를 때리니 염소가 똥을 싸네. 18=휘발유차에 알콜=아르곤(Ar)을 넣었더니 술에 취했는지 빌빌거리네. 19=후크선장 왼손은 갈고리=칼륨(K)로 되어 있다. 20=등뼈가 휜 것은 칼슘(Ca)부족이 원인이다.   21=다홍치마는 스칸디나비아=스칸듐(Sc)에서는 남자들이 입는다. 22=띠를 두른 타이탄=티타늄(Ti) 트럭에 돌을 실어라. 23=덧신을 신고 바나나=바나듐(V) 껍질을 밟았네. 24=대나무 집에 크로마뇽인=크롬(Cr)이 살았다. 25=도깨비 감투인 망건=망간(Mn)을 쓰면 투명인간이 된대.   26=듀엣가수가 철길=철(Fe)을 걸으며 노래하다 치었다. 27=돼지는 코=코발트(Co)가 들창코다.  28=뒤뜰에서 발견된 니켈(Ni)주화를 녹여 이빨을 씌었다. 29=투구는 구리(Cu)로 만든다. 30=스위스에서는 스님들이 모자를 쓰는 징크스=아연(Zn)가 있다.   31=산에는 갈대=갈륨(Ga)가 우거져 있네. 32=신은 게르만민족=게르마늄(Ge)이 처음 만들었다. 33=선수촌이 독극물로 비상=비소(As)이 걸렸다. 34=새가 세레나데=셀레늄(Se)를 노래하네. 35=소머리표 브로마이드=브롬(Br) 그림    36=슈퍼맨은 크립톤(Kr) 행성에서 왔다. 37=쇠구슬을 루비=루비듐(Rb) 대신 반지에 박았다. 38=쉰들러는 스트롱맨=스트론튬(Sr) 이다. 39=술은 이스트=이트륨(Y)로 발효시킨다. 40=늑대 우두머리 이름이 지코=지르코늄(Zr)이다.   41=낙화암에 눈물의 니오베=니오브(Nb)상이 있다. 42=닉슨대통령이 몰카=몰리브덴(Mo)를 설치했다. 43=너구리가 테크노춤=테크네튬(Tc)을 추네. 44=냇가에서 빨래하는 루터누이=루테늄(Ru) 45=논에서 로데오=로듐(Rh) 경기가 열렸다.   46=뉴욕에 팔레스 호텔에 팔레비왕=팔라듐(Pd)이 묵었다. 47=뇌수술을 예전에는 은(Ag)장도로 했다. 48=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카드놀이=카드뮴(Cd)가 웬말. 49=눈을 인두=인듐(In)로 지져버렸네. 50=오믈렛은 김구 주석(Sn)이 즐기던 음식.   51=요한은 안티크리스트=안티몬(Sb) 52=요트에 전화=텔루르(Te)기가 달렸네. 53=옷소매에  요오드(I) 얼룩이 묻었네. 54=옹녀는 악처 크산티페=크세논(Xe) 55=용왕이 세수대야=세슘(Cs)에서 목욕하네.   56=요리사는 바람둥이=바륨(Ba) 매일 오리구이에 잼을 발라먹네. 57=옷장 안을 랜턴=란탄(La)불로 비춰라. 58=오빠는 세리=세륨(Ce)야 59=옥경이 해외여행가서 선물로 사온 프랑스제 오디오=프라세오디뮴(Pr) 60=유모차에 자석=네오디뮴(Nd)이 주렁주렁.    61=유황불에 떨어져 고생하는 프로메테우스=프로메튬(Pm) 62=유태인을 구한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사마륨(Sm) 63=유성기는 유럽=유로퓸(Eu)인이 발명했다. 64=유니폼은 가톨릭사제=가돌리늄(Gd)들이 처음 착용. 65=유원지에 테러리스트=테르븀(Tb)가 폭탄설치.   66=유리창에 영어글자가 써있네. 디스 이즈 프로스=디스프로슘(Dy) 67=유치장에 홀몸=홀뮴(Ho)으로 들어가다. 68=유방이 에로틱해=에르븀(Er) 69=육군사관학교 심볼은 튤립=툴륨(Tm) 70=층계가 이태리제=이테르븀(Yb) 대리석이네.   71=차도 옆에 루터무덤=루테튬(Lu)이 있네. 72=치솔이 반으로 부러져 하프=하프늄(Hf)가 됐네. 73=처녀 뱃사공이 딴따라=탄탈룸(Ta)가 되었네. 74=채찍으로 전구를 깨니 텅스텐(W)이 들어있다. 75=촛불시위 원조는 레닌=레늄(Re)   76=츄리닝을 입은 오스카=오스뮴(Os)  77=최루탄 폭발로 이리역=이리듐(Ir)이 쑥밭됐다. 78=쥐 모양의 백금(Pt)상을 만들다.   79=축구공이 순금(Au)이다. 80=프랑스 사람 브라운이 수은(Hg)온도계 발명.   81=바가지로 탈=탈륨(Tl)을 만들었다. 82=피가 납(Pb)으로 오염됐다. 83=벌 비스무리=비스무트(Bi)한게 막 쏜다. 84=배를 만드는 폴란드=폴로늄(Po)조선소에서 자유노조가 파업. 85=포도주에 감미료 아스타틴(At)을 넣었다.   86=퓨리탄들은 라돈(Rn)탕에서 세례받는다. 87=반지의 제왕 프랑켄슈타인=프란슘(Fr) 88=팔팔올림픽은 라디오=라듐(Ra)로 중계방송 했다. 89=불은 악티늄(Ac) 해전에서 최초사용. 90=그물망에 토란=토륨(Th)이 가득 들었다.   91=강에서 싸운 해전이 프로탁티늄(Pa) 해전이다. 92=기도원에 원자탄=우라늄(U)이 떨어졌다. 93=검을 든 바다의 신 넵푼=넵투늄(Np) 94=개가 문을 지키는 지옥이 플루토=플루토늄(Pu) 95=곰의 천국 아메리카=아메리슘(Am)   96=귤은 퀴리부인=퀴륨(Cm)이 즐겨먹던 과일이다. 97=괴물 헐크는 버클리대=버클륨(Bk) 실험실에서 탄생. 98=귀신이 사는 호텔 캘리포니아=칼리포르늄(Cf) 99=국기에 아인슈타인=아인시타이늄(Es)이 그려져 있다. 100=백마가 페르몬=페르뮴(Fm) 냄새에 발광을 한다.   101=백합꽃으로 멘델=멘델레븀(Md)이 유전법칙 발견 102=백두산에 노벨동상=노벨륨(No)이 세워졌다. 103=백석 시인의 로맨스=로렌슘(Lr) 상대는 기생. 104=백내장에 걸린 러더포드=러더포듐(Rf) 105=백원에 두부=더브늄(Db)가 한모.   106=백로랑 세아가씨=세아보르기움=시보귬(Sg)가 놀고 있다. 107=백조는 보리=보륨(Bh)를 좋아해. 108=백발에 한숨=하슘(Hs)이 절로 난다. 109=백기들고 MT=마이트너륨(Mt) 갔다. 110=한문과 한자는 다르다=다름슈타튬(Ds)   111=한화에서 X선 발견한 뢴트겐=뢴트게늄(Rg)연구소를 세웠다. 112=황동상에 코페르니쿠스=코페르니슘(Cn) 얼굴이 새겨져 있다. 113=황소뿔 투구를 쓰는 일본=자포니움(Jp).  114=한니발 장군이 꽃=플레로븀(FI)를 들고 알프스를 넘었디. 115=한옥 위에 펜트하우스=우눈펜튬(Uup)   116=한라산에 리버모륨(Lv)을 설치. 117=한잔술에  우눈 셉튬(Uus) 118=한복 위에눈 옷고름=우눈옥튬(Uuo)을 달아라.   텅스텐의 원자번호는? 텅스텐은 백열전구에 들어가는데 그 전구를 채찍(74)으로 쳐서 깨뜨렸으니 74번.   원자번호 55번은? 55번은 용왕이고 용왕이 세수대야(=세슘)에서 목욕하니 세슘(Cs)   ========================================== 멘델레예프(Dmitri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주기율표(1869)               1869.3.6 러시아 화학회에서 근대적인 주기율표를 발표하다   19세기 들어 1803년 한 해에만 팔라듐, 세륨, 오스뮴, 이리듐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화학 원소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세상에는 원소가 몇 종류나 존재하는 것일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원소들이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을까?     일반적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고 예측도 불가능했던 19세기 화학계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려면 먼저 뭔가 규칙이나 원리가 필요했다. 한 세기 전 린네가 이명법을 이용해 생물을 분류하면서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했듯이, 이제 뭔가 일반적인 토대가 필요했다. 돌턴의 원자설 이후, 화학은 과거 연금술의 색채를 어느 정도 벗고 과학으로 인정받는 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미흡했다.과학이라면 모름지기 일반적인 법칙들과 그것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야만 한다.하지만 당시의 화학은 그렇지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국비 유학 후 상트페데르부르크 교수로 임명       아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멘델레예프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1834년 2월 8일 러시아 토볼스키 인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와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의 열 네 아이 중 막내였다(형제가 정확히 몇이었는지는 문헌에 따라 다르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집에 우환이 겹쳤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운영을 하던 유리 공장이 화재로 불타버린 것이다.   사업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남달리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멘델레예프와 딸 하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모스크바 대학에 보내려 했지만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그곳 대학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곳에서 멘델레예프는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었다. 한동안 크리미아에 있는 오데사라는 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화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국비 유학을 다녀온 후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일반 화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연구에 지쳐 깜빡 잠든 사이에 꾼 꿈 덕분에 완성된 주기율표   기존 화학 교과서에 불만이 많았던 멘델레예프는 1870년 라는 책을 펴냈다. 판을 거듭하며 세계 여러언어로 번역된 이 책을 쓰는 동안 멘델레예프는화학 원소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한연구를했다.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 원소들 사이에 분명일정한 규칙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것이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가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발표한 논문에 실린 주기율표   화학은 꿈과 인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가 1865년 벤젠의 고리 구조를 밝혀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리고 4년 후인 1869년 멘델레예프가 그토록 알아내고자 했던 원소들의 분류 규칙을 알아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는 종이 카드 63장에 각 원소 하나의 이름과 원자량, 성질 등을 쓴 다음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해 보았다. 며칠에 걸쳐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고, 심지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서까지 이 일에 몰두했다.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카드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에서 연구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 주 후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었다.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는자신이 작성한 표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오드 등 자신의 표와 차이가 나는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 역시 언젠가는 발견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듬해인 1870년에는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의 특성까지 예측했다. 이제는 그를 경멸하는 과학자들까지 나왔다.     멘델레예프 예측에 적중하는 새로운 원소들의 발견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멘델레예프   하지만 시간은 멘델레예프의 편이었다.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보아보드랑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 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갈륨이었다. 하지만 이 원소는 그가 예측했던 것과 성질은 유사했지만 비중이 달랐다. 멘델레예프는 이 원소의 비중을 5.9라고 예측했는데, 보아보드랑의 실험 결과치는 4.7이었다. 이때도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옳으며 보아보드랑의 측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나중에 재실험을 통해 멘델레예프의 예언이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게르마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원소에 대해 멘델레예프는 비중 5.5인 회색빛 금속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발견된 것 역시 비중 5.47에 회색빛 광채가 나는 금속이었다.   이로써 멘델레예프의 표가 확실하게 증명되었고, 화학도 이제 과학의 한 분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법칙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소는 모두 117개이다.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작성하던 당시와 비교해 54개가 늘어난 것이다. 그 사이 주기율표 자체도 조금씩 개선되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멘델레예프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주기율표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번호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멘델레예프 덕분에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면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 아들의 교육을 위해 시베리아 토볼스키에서 모스크바까지 그 먼 길을 마다 않던 어머니 마리야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아들은 훗날 자신의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이었다. 그는 현대 화학의 초석을 놓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55년 101번째 원소가 발견되었다. 그 원소는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푸른 눈의 과학자이자 이웃 농부들에게 작물 재배법, 치즈 제조법 등을 가르쳐주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고 명명되었다. =================================   멘델레예프(Dmitri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주기율표(1869)         한국화학연구원 항암제연구센터 조성윤                 대한 화학회로부터, 귀중한 책 한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전공이 화학이면서도, 화학자의 인생의 이면에 대해서는 지금껏 모르고 지나쳐 왔다. 오히려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의 화려한 명성과 천재성이 귀에 익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읽는 나로 하여금 화학자로서 지녀야할 중요한 덕목들을 가르쳐 준 책이기도 하다. 더욱 흥미로 왔던 사실은 그가 유기 화학자였으며, 대학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유기화학을 강의하고, 그에 맞는 책을 집필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화학에 끼친 그의 공헌을 너무나 모르고 지나쳐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 지녔던 천재적 감수성, 열정 등이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멘델레예프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암기하기 어려운 주기율표를 만든 사람정도로만 기억했기 때문이다. 화학에서 주기율표만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또 있을까? 주기율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주기율표를 강조한 말 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발견한 주기율표가 아니었더라면, 화학의 세계가 이토록 어마어마한 진보를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기율표는 기지의 원소에 대한 지식을 혼란의 질서로 바꾸어 놓았으며, 근대화학의 기본적 법칙을 수립하였다.이는 30대 한 청년의 대단한 성취였다. 멘델레예프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생,사회정의를 위한 투사, 러시아의 천연자원개발을 도운 과학자였으며, 주기율표가 받아들여진 지 15년 내에 그가 예언한 미지의 세 원소가 증명되는 등 일생을 통해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7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멘델레예프를 기려1955년에 만들어진 원소 101번을 멘델레븀 (Md)이라고 부른다”   이는 “멘델레예프와 주기율표”라는 책의 서언에 나오는 내용이다.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에 위치한 토볼스크 시에서 열네 명의 형제들 중 막내로 태어난다.그의 어머니는 어린 멘델레예프로부터 천재성을 발견하고, 목숨을 걸고 우랄 산맥을 넘어,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화학대학에 그를 입학시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숨을 거둔다.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배고픔, 추위등과 싸우면서 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머니의 이런 갸륵한 희생과 무모한 결단이 없었다면, 멘델레예프 같은 위대한 화학자는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1834년에 태어나 1907년까지 살았다.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유리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만드는 형형색색의 유리그릇들을 보면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어머니에게 묻곤 하였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지식들을, 총명했던 멘델레예프는 그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해 주곤 하였는데, “크롬의 산화물은 초록색유리를 만들고, 산화망간은 보라색이나 핑크색 또는 자수정 색이 되는데, 얼마나 산화망간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 자주색은 칼륨에서 오거든. 빨간 유리창은 산화구리를 넣어야 돼. 산화코발트는 파란색, 그리고 산화철은 노란색을 만들지.” 어머니는 그의 총명함을 발견할 때 마다, “언젠가 너는 모스크바에 가서 입맛이 당기는 수프처럼 접시위에 담긴 채,공급되는 지식을 찾을 수 있단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어린 멘델레예프는 점차 배움의 길로 모스크바를 향한 꿈을 키우게 된다. 나중에 멘델레예프가 대학을 진학한 후, 그의 어머니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라, 네 길은 말이 아니고, 공부였음을 알아라. 언제나 인내심을 가지고 숭고한 원리의 과학적 진리를 계속해서 추구하거라. 잊지 않겠지?”라는 말을 멘델레예프에게 남기고 세상을 뜬다.       그 후, 그의 생활은 강의와 공부가 그의 밤낮과 주말을 차지하였다. 잠도 적게 잤을 뿐 아니라 종종 식사하러 가는 것도 잊었다. 그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된다. 그 후에도 계속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도중, 연구 사정이 아주 열악하여, “언제쯤 러시아가 군대 또는 비밀경찰에 쓰는 돈의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과학에 사용할 줄 알게 될지........”라며 푸념을 하게 된다. 그 때나 지금이나 풍족하지 않은 연구비를 사용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던 중, 독일의 하이델 베르그 대학으로 약 3년 동안 공부할 기회를 갖으면서, 멘델레예프의 학문적 성취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곳에서 키르히호프,분젠 등의 화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분광스펙트럼, 분젠전지, 광도계,흡광계, 광량계 등의 기체 분석법을 섭렵하여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 무렵 유럽의 과학자들 사이에는 원자와 분자를 서로 교체가능하게 사용해 왔다. 어떤 이는 “화학원자”라고 불렀는데 아보가드로를 본 받아 원자를 “기본분자”라고 불렀다. 1868년 말 까지 63가지 물질이 원소로 밝혀졌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7가지 금속원소들을 알았는데, 금, 은, 구리, 납, 주석, 철, 그리고 액체인 수은이다. 수세기 동안 “7”은 신비적 의미를 가졌다. 연금술사들은 비천한 금속을 금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현대화학의 기초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멘델레예프의 두 스승, 분젠과 키르히호프가 그들이 발명한 분광기를 이용하여 세슘과 루비듐을 발견하였을 때, 멘델레예프는 여전히 하이델베르그에 있었다. 1861년 영국의 크룩스가 탈륨을, 1863년 라이히와 리히터가 분광기를 이용하여 무르고 은색이며, 스펙트럼에서 남색의 선을 나타내는 금속인 인듐을 발견하였다. 인듐은 63번째로 발견된 원소가 되었다.       이렇듯 원소가 발견될 때마다, 멘델레예프는 속으로 “과학의 궁전에서는 물질만이 아니라 설계도도 필요로 한다. 즉 조화가 필요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멘델레예프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자연계에서 이 원소들이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멘델레예프는 어떤 연관성을 찾아가기에 주력한다. 그리하여 이 63가지 원소들이 그의 과학적 생애에서 가장 크고, 가장 열중한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뒤이어 많은 세심한 실험자들이 헬륨을 제외한 모든 알려진 원소들에 대하여 원자량을 확립하게 되었다.       멘델레예프는 정확한 원자량을 얻기 위하여 벨기에의 과학자 스타스에게 편지를 써서, 원소들의 원자량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칼슘, 철, 비소, 스트론튬의 원자량은 프랑스의 뒤마에게서 받는다. 체코의 닐손은 토륨을, 브라우너 교수는 텔류륨, 란타늄, 그리고 세륨의 원자량을 제공한다. 그리고 멘델레예프는 이들 원자량과 다른 원자량 모두를 스스로의 실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검증하였다. 그는 흰 카드의 각장에 있는 원소명 옆에, 그 원소의 원자량을 적어 넣었다. 원자량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단서였으며, 그는 이 카드들을 수소부터 원자량 순서로 배열하였다. 그리고 특성도 적어 넣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어떤 원소들의 원자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그들을 포함하는 분자들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원소들의 경우 두개의 원자가 한 개의 산소원자와 쉽게 결합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이를 “원자가”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흰 카드에 그가 축적하여 왔던 모든 데이터 요약인 녹는점, 임계온도, 광택, 퍼짐성, 밀도, 비중과 같은 각 원소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적어 놓았다. 그는 이들로부터 원소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숨겨진 암호를 추출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갖고,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몇 달 동안 원자배열에 몰두하였다. 원자들 간의 규칙을 책상위의 원자량을 비롯한 다른 정보를 가지고, 파악하려 한 것이다. 그 무렵 “ 베라이너의 삼개조”이론으로, 사람들은 보다 포괄적인 원소표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영국학회에서 뉴렌즈는 “모든 원소를 원자량 순서로 나열하면 매 8번째 원소는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순서를 피아노 건반의 8도 음정 (옥타브)에 비유하였다. 이 특이한 관계를 그는 ‘옥타브 법칙’이라고 잠정적으로 제안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몇 가지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8도 음정’에는 화성이 맞지 않은 불협화음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한 회원은 뉴랜즈가 원소들을 알파벳 순서로 배열하였다면, 더욱 성공적이었을 거라고 비꼬면서 말하기도 하였다. 뉴랜즈는 자신의 옥타브 법칙에 대해서 비웃는 반응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과학 연구를 영원히 그만두었다.       비교적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감수성에 근거한 실낱같은 희망을 잡는 심정으로 연구를 하였던가 보다....... 그러나 이 비웃음을 받았던 가설은 놀랍도록 정교하게, 오늘날의 각 원자궤도의 채워짐 이론으로 발전된다.       멘델레예프도 원자표를 만들면서, 베릴륨의 원자량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13.7에서 9.4로 왜 바꾸었는지, 또 칼슘이 원자량을 다른 사람들은 20으로 하는데 왜 40으로 했는지에 대하여 물을 것을 알았다. 그는 이 두 원소들의 성질에 비추어 볼 때, 지금 까지 확립된 이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바꾸었노라고 설명했다. 그런 작업을 몇 달이고 계속하면서, 드디어 1869년 3월 18일 러시아 화학회에서 멘델레예프는 자신의 제자에게 “원소체계의 개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때 발표한 멘델레예프의 이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원소들을 원자량 크기 순서로 배열하면 분명한 주기적 성질을 보인다. (멘델레예프가 원자량 척도에 따른 나열에서 일정간격에 있는 원소들이 서로 유사한 성질을 보인다는 것을 지칭하는 바를 모든 사람들이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원자의 주기적 성질     2. 화학적 성질이 유사한 원소들은 서로 이웃하는 원자량을 가졌거나 (백금, 이리듐, 오스뮴과 같이), 아니면 원자량이 증가하는 것을 보인다 (포타슘, 류비듐,세슘과 같이).....     3. 원소 또는 원소 군을 원자량의 크기로 비교하면, 소위 말하는 원소들은 원자수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화학적 특징의 차이를 확립하게 된다...... 다시 한번 수수께끼 같은 원자수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4. 자연계에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는 단순물질들은 원자량이 작다.......     5. 원자량의 크기가 원소의 특성을 결정한다. 이는 분자의 크기가 복합체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6. 우리는 여러 알려지지 않은 단순물질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예를 들면, “알루미늄과 유사한 것과 실리콘과 유사한 것으로 이들의 원자량은65에서 75사이가 될 것이다“ 이 기막힌 말의 중요성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7. 원자들의 무게의 크기로부터 원소들의 여러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 발표로 멘델레예프는 그의 명성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일명 지금의 스타과학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 후 멘델레예프는 자기 제자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알루미늄 다음의 원소 (에카-알루미늄)에 대하여 말하고, 정확한 원자량까지 예측하였다. 그리고 붕소 다음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까지 원자량과 비중을 예측하면서 말하였다.   그 후로, 다른 17개 원소의 원자량도 과감하게 바꾸기 시작하였다. 텔루륨과 요오드의 원자량 순서를 바꾸어 텔루륨은 산소족에 들어가고, 요오드는 플루오르,염소, 브롬이 들어있는 줄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비슷한 이유로, 코발트와 니켈은 물론 금과 백금의 순서도 바꾸었다. 가장 획기적인 변경은 토륨의 원자량을116에서 232로, 우라늄의 원자량을 120에서 알려진 원소중에 가장 무거운 240으로 각각 2배로 바꾼 것이었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이와 같은 변경이 모두 타당한 것으로 입증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16개의 원소들에 대해서 빈칸을 남겨 두었다. 이들 중 에카-알루미늄, 에카-실리콘, 에카-붕소 (여기서 에카는 처음을 뜻함)를 포함한 6가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원자량을 제시하였고, 이 원소들의 몇 가지 성질까지도 기술하였다. 그는 우라늄보다도 원자량이 큰 "초우라늄“ 원소 5개를 예언하였는데,이는 그가 한 예언 중 가장 기막힌 것 중의 하나이다.   이 모든 예언의 기초는 멘델레예프가 발견한 “원소들의 성질은 원소들의 원자량의 주기적 함수이다.”라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 후로 그의 예언에 대한 증명은 러시아 밖에서 이루어졌다. 1875년 프랑스의 젊은 화학자 부아보드랑은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의 광산에서 섬아연광의 화학분석을 하던 중, 멘델레예프가 부르던 에카-알류미늄인 갈륨을, 멘델레예프가 예언한 대로의 원자량 (68)과 비중 (5.9)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가 예언한 것에 대한 검증은 년차를 두고 모두 사실이 되었고, 그가 예언한 원자량, 비중 등이 발견한 사람들의 오차까지도 교정해 줄 정도였다. 갈륨의 비중도 처음에는 4.7로 발표를 하였다가, 수차례의 실험을 반복한 끝에 멘델레예프가 예측해 놓은 값을 얻는다. 이 때 멘델레예프의 나이 40이었다. 해외에서는 명성이 널리 알려져, 그를 화학계의 원로라고 불렀다.   멘델레예프의 업적이 화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멘델레예프에 대해서 접하고 난 후, 그가 광적으로 연구에 전념한 화학자이며 단순히 원소의 주기율을 발견한 과학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국 러시아의 산업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황제들의 독거에 끊임없이 항거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리고 놀랍도록 정교하게 발달한 그의 통찰력과 천재성의 산물인 주기율표는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 버금가는 화학인의 성취라 하겠다. =============================   1869.3.6 러시아 화학회에서 근대적인 주기율표를 발표하다     19세기 들어 1803년 한 해에만 팔라듐, 세륨, 오스뮴, 이리듐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화학 원소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세상에는 원소가 몇 종류나 존재하는 것일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원소들이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을까?     일반적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고 예측도 불가능했던 19세기 화학계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려면 먼저 뭔가 규칙이나 원리가 필요했다. 한 세기 전 린네가 이명법을 이용해 생물을 분류하면서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했듯이, 이제 뭔가 일반적인 토대가 필요했다. 돌턴의 원자설 이후, 화학은 과거 연금술의 색채를 어느 정도 벗고 과학으로 인정받는 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미흡했다. 과학이라면 모름지기 일반적인 법칙들과 그것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시의 화학은 그렇지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국비 유학 후 상트페데르부르크 교수로 임명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1834년 2월 8일 러시아 토볼스키 인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와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의 열 네 아이 중 막내였다(형제가 정확히 몇이었는지는 문헌에 따라 다르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집에 우환이 겹쳤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운영을 하던 유리 공장이 화재로 불타버린 것이다.   사업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남달리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멘델레예프와 딸 하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모스크바 대학에 보내려 했지만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그곳 대학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곳에서 멘델레예프는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었다. 한동안 크리미아에 있는 오데사라는 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화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국비 유학을 다녀온 후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일반 화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멘델레예프의 어머니 마리아         연구에 지쳐 깜빡 잠든 사이에 꾼 꿈 덕분에 완성된 주기율표   기존 화학 교과서에 불만이 많았던 멘델레예프는 1870년 라는 책을 펴냈다. 판을 거듭하며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을 쓰는 동안 멘델레예프는 화학 원소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를 했다.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 원소들 사이에 분명 일정한 규칙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것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가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발표한 논문에 실린 주기율표   화학은 꿈과 인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가 1865년 벤젠의 고리 구조를 밝혀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리고 4년 후인 1869년 멘델레예프가 그토록 알아내고자 했던 원소들의 분류 규칙을 알아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는 종이 카드 63장에 각 원소 하나의 이름과 원자량, 성질 등을 쓴 다음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해 보았다. 며칠에 걸쳐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고, 심지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서까지 이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카드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에서 연구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 몇 주 후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었다.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작성한 표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오드 등 자신의 표와 차이가 나는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 역시 언젠가는 발견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듬해인 1870년에는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의 특성까지 예측했다. 이제는 그를 경멸하는 과학자들까지 나왔다.         멘델레예프 예측에 적중하는 새로운 원소들의 발견   하지만 시간은 멘델레예프의 편이었다.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보아보드랑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 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갈륨이었다. 하지만 이 원소는 그가 예측했던 것과 성질은 유사했지만 비중이 달랐다. 멘델레예프는 이 원소의 비중을 5.9라고 예측했는데, 보아보드랑의 실험 결과치는 4.7이었다. 이때도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옳으며 보아보드랑의 측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나중에 재실험을 통해 멘델레예프의 예언이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게르마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원소에 대해 멘델레예프는 비중 5.5인 회색빛 금속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발견된 것 역시 비중 5.47에 회색빛 광채가 나는 금속이었다.   이로써 멘델레예프의 표가 확실하게 증명되었고, 화학도 이제 과학의 한 분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법칙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소는 모두 117개이다.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작성하던 당시와 비교해 54개가 늘어난 것이다. 그 사이 주기율표 자체도 조금씩 개선되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멘델레예프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주기율표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번호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멘델레예프       "멘델레예프 덕분에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면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 아들의 교육을 위해 시베리아 토볼스키에서 모스크바까지 그 먼 길을 마다 않던 어머니 마리야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아들은 훗날 자신의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이었다. 그는 현대 화학의 초석을 놓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55년 101번째 원소가 발견되었다. 그 원소는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푸른 눈의 과학자이자 이웃 농부들에게 작물 재배법, 치즈 제조법 등을 가르쳐주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고 명명되었다.     ============예측했던 세가지 원소?...==============   갈륨(gallium, Ga), 스칸듐(scandium, Sc) 게르마늄(germnium, Ge)   멘델레예프가 한 일이 그게 전부였다면 (비록 수십 년 뒤에 밝혀질 양성자와 중성자를 알지 못하고 해낸 일이기는 하지만) 그가 제시한 주기율표는 그보다 앞서 다른 이들이 만든 주기율표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화학적 성질을 지닌 원소들을 같은 세로 줄로 배치하려고 멘델레예프는 표 안에 빈 칸을 두었다. 1871년에 이르러 그는 텔루르와 요오드를 자리바꿈하는 등 약간의 조정을 하면서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의 원소를 모두 주기율표에 넣었고, 세 개의 빈 칸을 남기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세 개의 원소에 해당되는 자리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그는 빈 칸이 있는 세로 줄에 있는 인접 원소들의 성질에서 세 가지 원소들의 성질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후 15년에 걸쳐 멘델레예프가 예상한 것과 같은 성질을 지닌 세 가지 원소가 실제로 발견되었다. 1875년에 갈륨(gallium, Ga), 1879년에 스칸듐(scandium, Sc), 1886년에 게르마늄(germnium, Ge)이 발견된 것이다. =======와 의 차이점?========= 주기율표에 대해서 멘델레예프가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현대에 사용되어지는 주기유표는 모즐리의 주기율표이지요.  가장 큰 차이점은.....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자량 순서로 되어있다는 것이고 모즐리는 원자번호 즉 양성자수 순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듯 보이지만...몇가지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지요.  중요한 앞번호 원소들을 생각해보면.....  대표적인 것이 칼륨과 아르곤의 차이입니다.  만약 이것을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로 본다면 아르곤이 더 무겁기에 칼륨보다 더 뒤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질상 아르곤은 0족에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수하였지만 아르곤(Ar)과 칼륨(K), 코발트(Co)와 니켈(Ni), 텔루르(Te)와 요오드(I) 등이 원자량의 순서에 따라 예견된 것과는 다른 성질을 보여준다는 결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결점은 1913년 영국의 모즐리에 의해 원자번호가 결정되고 이에 따라 원소를 배열함으로 해결된 것이지요.  1913년, 모즐리는 원소의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X-선의 파장을 측정하여 이것으로부터 원소의 원자번호를 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원자번호의 순서로 배열하면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고 오늘날의 현대적 주기율표로 발전시킨 것이지요. =============================   [출처] 주기율표에 대해서 멘델레예프가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현대에 사용되어지는 주기유표는 모즐리의 주기율표이지요.  가장 큰 차이점은.. 근대 과학의 아버지 멘델레예프   양정성 기자     세계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학자들에 의한 자연 속의 새로운 발견은 인류사회의 지식의 향상과 자연 신비의 탐구 및 인류를 위한 연구를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촉진시켰다. 그런 과학자들의 이름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인물이 멘델레예프다.  오늘날 화학이 이처럼 발전하게 된 뿌리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 ‘주기율표의 창시자’ 등의 수식이 항상 붙어 다니는 멘델레예프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멘델레예프는 어떤 다른 화학자들보다 오늘날 화학도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가 원소의 주기율을 만든 이후 화학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유명한 과학자인 그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인류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여기에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한다. 멘델레예프의 성공은 그의 어머니의 가정교육과 직결되어 있다. “학문에서는 먼저 경험하지 않고 추론에 의지하는 경향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하며 삶에 있어서는 말보다 행동을 우선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평생 지켜나간 그 실천력을 알 수 있고 또한 교육자, 학자, 민주 시민으로서의 멘델레예프의 삶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멘델레예프는 1834년 1월 27일 톨스토이보다 6년 늦게, 차이코스프키보다 6년 빠르게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멘델레예프는 당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이반 파브로빗치(Ivan Pavlovitch) 아버지와 이 지방 출신 마리아(Maria Dmitrievna)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14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평소 멘델레예프에게 “몸만 위하여 걱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사람은 영혼과 정신을 위하여 하루 중 몇 시간이라도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멘델레예프의 가정은 아름다운 가정이었으며 부러움의 표상이었지만 항상 봄바람만 불지는 않았다.  멘델레예프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유리공장을 경영하던 어머니는 공장에 불이나자 실업자가 되었으며 아이들도 병약해서 하나 둘씩 죽어가서 멘델레예프가 대학을 진학할 무렵에는 그의 누나 하나만 남게 된다. 멘델레예프 어머니는 정든 고향을 버리고 아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모스코바로 이사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성적이 최하위라 멘델레예프를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다. 이때 단 하나의 마지막 소망이었던 대학진학의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어머니의 낙망과 눈물겨운 얼굴은 멘델레예프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무서운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용기를 내어 다시 페테루스불크로 가 대학에 원서를 접수한다. 마침 이 대학의 총장은 멘델레예프의 아버지와 친한 대학 동창생이 어서 쉽게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입학의 기쁨도 순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평소 많은 자식을 낳고 얻은 고질적인 심장병의 악화로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게 된다. 때는 1850년 9월 가을바람이 들국화의 꽃잎을 스칠 때 만리타향, 조그마한 어머니 무덤 앞에서 엎드려 흐느끼는 고아 멘델레예프의 눈물겨운 심정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부모도 없고 재산도 없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외로운 고아 멘델레예프는 그날부터 새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멘델레예프는 자기 책상 앞에 삼각형을 그려놓고 그 꼭짓점에 도서관, 강의실, 기숙사를 적어놓고 4년 동안 삼각형만 다니는 생활을 계속한다. 그 결과 토볼스크 고등학교 낙제생이 펱루스불크대학에서는 전체 수석을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운동 부족으로 폐병 3기의 환자가 되어 1년 후엔 죽게 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다. 아버지 친구의 총장의 특별배려로 기후가 좋은 러시아 크리미아 지방의 중학교 화학교사의 발령을 받게 된다. 하느님의 가호인지 1년 후 죽는다는 멘델레예프는 폐병이 씻은 듯 완쾌되고 그의 모교 대학원에 다시 입학하고 졸업을 하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37년째 되던 해 즉 1887년에 ‘수용액의 연구’라는 책을 출판하게 될 때 그 권두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어머니의 영 앞에 올렸다. “이 연구는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신의 막내아들이 삼가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님은 여자의 몸으로 공장을 경영하시고 그 피땀으로 막내아들인 저를 양육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여 아들을 격려하셨으며 사랑과 자비로 엄하게 꾸짖어 주셔서 이 아들을 과학의 발전에 바치시려고 시베리아로부터 수만리를 걸으셔서 어머님과 저의 전 생애를 뜻하신 대로 다 바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어머니께서는 훈계하여 말씀하시기를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라. 믿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실행뿐이다. 거짓말에 속지 말라. 구하여야 할 것은 신의 지혜와 진리의 지혜이니라. 항상 이것을 바라고 구하여라.’ 라고 하셨습니다.” ===========================   14   1907년 시베리아 출신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은 알파벳 이름이 가득찬 팻말을 들고 장례행렬을 이끌었다.  멘델레에프가 완성한 ‘주기율표’였다. 그렇다면 멘델레예프야말로 ‘수헬리베 붕탄질산…’으로 시작되는 노래말까지 지어 외우게 만든 주입식 교육의 원흉이라 할 수도 있을까. 그러나 이 주기율표 안에는 태양과 흙, 생물의 세포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원소가 담겨있다.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118종) 가운데 지구 전체 무게의 65%는 산소(O)와 철(Fe)이 차지하고 있다. 우주 전체를 보면 우주 질량의 97%는 수소(H)와 헬륨(He)이 차지하고 있다.  고대 사람들의 주기율표는 ‘흙, 공기, 불, 물’이었다. 이 4가지 물질을 만물의 기본요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삼라만상이 원소, 즉 ‘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알갱이’(그리스어 Atomos)로 이뤄졌다고 주장한 이는 기원전 5세기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였다. 이후 새로운 원소들이 속속 발견되고, 19세기 중반에는 각 원소의 원자량까지 정확하게 계산됐다. 화학자들은 각 원소간 규칙을 찾고자 했다. 영국의 존 뉴랜즈(1837~1898)가 원소들을 원자량 순서대로 죽 늘어세우고 번호를 매기자 희한한 규칙을 발견했다. 원소들이 여덟번째 간격으로 비슷한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뉴랜즈는 이것을 음악의 옥타브가 여덟번째 음정에서 반복된다고 해서 ‘옥타브의 법칙’이라 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뉴랜즈가 처음 번호를 매긴 표에는 공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는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이 훗날 차지해야 할 몫이었으니까…. 그런데 빈칸이 꺼림칙했던 뉴랜즈는 다른 원소들을 무리하게 끼워넣었다. 천려일실이었다. 그는 졸지에 조롱의 대상이 됐다. 반면 멘델레예프는 1869년 각 원소의 성질을 기록한 카드로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빈칸을 그냥 두었다. 그러면서도 공란에 장차 발견될 원소의 이름과 성질까지 정확히 예측했다. 예컨대 아연(Zn)과 비소(As) 사이에 원자량 68과 72의 원소가 두 개 더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런데 1875년과 86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란의 두 자리에 들어갈 갈륨과 게르마늄이 발견됐다. 그는 또 붕소(B)와 알루미늄(Al) 사이에 원자량 44에 가까운 원소가 발견될 것이라 내다봤다. 그런데 얼마 후 스웨덴의 라르손 닐손이 육세나이트라는 광물에서 그 원소를 발견했다. 그 원소의 이름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딴 ‘스칸듐’이었다. 스칸듐의 원자량은 멘델레예프의 예측과 흡사한 44.956이었다. 신묘한 족집게가 아닌가. 이후 화학자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양성자를 토대로 정밀한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천연원소는 현재 93번(넵투늄·Np)까지지만, 이번에 새롭게 정식이름(사진)을 얻은 113~118번까지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에 만든 인공원소이다. 멘델레예프는 삼라만상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족보까지 꿰뚫은 천재였음이 틀림없다. ⓒ 경향신문 ========================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Менделеев/Dmitri Mendeleev 1834년 2월 8일 ~ 1907년 2월 2일   1. 소개2. 생애3. 일화   1. 소개[편집] 러시아의 화학자이자 화학의 아버지. 원소들이 가진 규칙성에 따라 원소들을 나열한 표인, 주기율표를 고안한 화학자로, 현대 화학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에도 원소를 질량 순으로 나열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규칙성을 찾아 나열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전부 조잡한 수준이었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어쨌든 원소들에 모종의 규칙성이 있음은 모두가 추측하던 것이지만, 이걸 제대로 파악하여 제대로 된 표로 정리한 것은 멘델레예프가 최초다. 세계 과학계를 뒤집어 놓은 원소 주기율표를 발표했을 때가 고작 35세였다.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했다. 아니, 그냥 현대 화학을 만들었다. 화학을 배울때 제일 먼저 만나는 주기율표가 없어진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애초에 주기율표가 정립되기 전에는 화학은 제대로 된 과학 취급조차 못 받았다! 다만 아쉽게도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1906년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불소의 분리에 성공한 무아상에게 단 1표 차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당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소의 주기성을 파악해 정교하게 원소를 나열한 것이었을 뿐, 원소가 왜 주기성을 가지고 있는 지는 알려지지 않은 탓에, 획기적인 발견이었음에도 포스가 좀 딸렸다. 러시아 국적이기에 차별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사망했기 때문에 탈 수 없었다.[1] 그러나 저 주기율표가 화학과, 나아가 물리학에까지 끼친 영향 덕에 훗날 '프라우다' 지에 '러시아 화학의 개척자'라는 헌사가 실렸을 정도이다. 지금은 원소의 주기성을 일으키는 원인이 밝혀지면서 확고하게 입증된 탓에 주기율표 = 넘사벽 취급을 받지만, 주기율표를 멘델레예프가 고안했을 당시에는 '원소의 주기성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원소들을 정밀하게 나열한 것'에 그첬다. 그래서 기나긴 기간동안 엄청난 고생[2]이 들어간 불소의 분리와 팽팽하게 맞붙은 업적이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주기율표가 압도적으로 더 대단한 업적으로 여겨지지만…. 후일, 주기율표의 굉장한 완성도가 후일 전자껍질이 밝혀지면서 입증되고, 미발견 원소에 대한 멘델레예프의 예측이 딱딱 들어맞으면서 모두가 오오 멘델레예프 오오를 외치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때 살아있었다면 험한 꼴 봤을지도….   주기율표 101번 멘델레븀이 여기에서 따왔다. 2. 생애[편집] 동시베리아의 '토볼스크'(Tobolsk)라는 마을에서 1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는 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는 유리공장 주인의 딸이었는데, 특히 어머니는 당시 여성들에겐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전근대적인 사회상에 저항해 오빠들의 공부를 훔쳐보는 것으로 배웠을 정도로 학식은 물론 사상적으로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드미트리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두 눈을 실명하여, 그 시점에선 친정의 유리공장을 물려받아 육아는 물론 경영까지 떠맡았음에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해낸 억척스러움도 갖고 있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위대한 과학자 멘델레예프는 고교 시절까지 공부에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15세가 됐을 적에 부친이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유리공장도 불이 나 전소되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지게 되자, 모친은 이 모든 상황들을 타개하기 위해 드미트리와 그 손위의 누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상경했다. 그리고 고등 교육기관인 모스크바 대학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고자 했으나, 당시는 타 지역 출신에 대한 입학 제한 규정 등이 존재했던 터라 시베리아 깡촌 출신의 드미트리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과 의학학교에도 신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3] 결국, 대안으로 드미트리는 교원 양성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교원 양성소에 들어간 지 10주만에, 드미트리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사랑하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 것이다. 모친이 작고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매진하여, 우수학생에게 수여되는 금메달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 때 본격적으로 화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1855년, 건강이 안 좋아 러시아 남부의 오데사로 자청해 발령을 받고 교원생활을 시작하며 동시에 본격적인 화학 공부를 하기 위해 준비하여 이듬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고 다시 1년 후인 1857년에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2년 후인 1859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국비 유학하여, 이 때 카를스루에 학회(1860년 9월)에서 이탈리아의 화학자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화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에 귀국했으나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과학 교재 관련 저술 및 편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186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공업연구소 화학 교수로 처음 발령, 3년 뒤엔 일반화학 교수가 되었다. 이 당시, 자기 눈에 차는 교재가 없어서 자기 손으로 500쪽짜리 '화학원론'이란 교과서를 집필했는데, 이게 세계적으로 히트해서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고, 또한 그 책을 저술하면서 당대 화학자들의 화두였던 원소들의 분류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이 '원자론'을 발표하면서 원자량의 개념을 내놓은 이래로 많은 화학자들은 원소들간의 유사성 및 논리적인 순서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는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는 주장을 했고,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와 뉴랜즈는 서로 교류하며 원소의 규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원소의 구성 체계에 대한 제안》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때 멘델레예프는 불과 35세였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어서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기존의 원자량 측정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비어있는 칸의 원소들도 곧 나타나게 될 것이라면 자신감을 보였다. 지금 시대가 아닌 당시 사람들이야, 당연히 이런 용자스런 반응에 '이뭥미' 내지는 '이뭐병'했지만…. 그 후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부아보드랑이 갈륨을 발견했다. 드미트리는 갈륨의 발견은 자신이 에카알루미늄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한 덕분이라고 주장했고 부아보드랑은 갈륨을 발견한 실제 연구는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드미트리는 부아보드랑이 발표한 갈륨의 데이터를 훑어보고는 아무 근거도 없이 일부 측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는데, 갈륨의 밀도와 질량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값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실험 결과 그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자 부아보드랑은 자신이 발표한 데이터를 철회하고, 드미트리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게르마늄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드미트리가 예언한 것과 거의 딱 들어맞는 성질과 원자량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이론이 점차 인정받으면서 화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라는 말도 나왔다. 듬성듬성하던 주기율표도 시간이 지나면서 빠진 부분이 채워지고 개선되어졌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 대우는 매우 미묘했는데,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못했다. 1890년에는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이상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멘델레예프가 관여해 국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에는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이때 멘델레예프는 보드카의 표준 도수 40도를 정했다. 후세의 보드카 브랜드 중에는 '멘델레예프가 도수 품질을 정한 보드카'란이 사실을 홍보에 이용하기도 한다. 다만 멘델레예프는 의학이나 생리학자가 아니라 순수 화학자이고, 도량형국 국장의 위치에서 정한 것이므로 객관적인 통계 자료를 통해 보드카의 도수를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말년에 냉대를 받다가 폐렴으로 190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원소 주기율표를 들고 따랐다. 그의 아들인 바실리 멘델레예프(1886~1922)는 크론슈타트 엔지니어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의 멘델레예프 전차를 설계하였다. 멘델레예프 전차는 생긴건 컨테이너 박스 비슷한 차체에 정면에 120mm 주포를 달은 아주 단순한 형식이었지만 당시 고안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전차였다. 가스압 피스톤 서스펜션을 통해 트랙의 장력 조절과, 높이 조절을 통해 트랙/구동부를 차체 안으로 넣어 보호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게만 해도 175톤이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중량과 기술력의 부족으로 인해 러시아군에게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령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차체에 주포가 고정된 전형적인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차 디자인인지라 이후 발전하게 되는 전차 기술에 뒤쳐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짜르 탱크보다는 전투의 효율성은 높앗을것으로 보인다. 짜르 탱크보단 눈에 띄지도 않고, 전면 150mm / 후면 100mm 수직장갑의 방어력도 그렇고. 티거 중전차가 차체 정면 장갑이 100mm, 포방패 장갑이 110mm인 점에서 상당한 두께인 셈. 다만 러시아의 당시 기술력으로 볼때 방호력이 제대로 제값을 하긴 어려울테지만 짜르 탱크에 비하면 상당한 떡장. 화력도 짜르 탱크는 측면에 달린 9파운드 포가 가장 강한 화력인데 비해 멘델레예프 전차는 120mm 해군용 함포를 탑재해서 화력 면에서도 앞섰다. 적어도 이동식 포대로 쓸 수도 있는 활용성은 있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역이 있다. 3. 일화[편집] 평생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거칠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여행을 할 때도 늘 3등칸을 탔다.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석유화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유조선과 송유관을 설계하고 저장 탱크도 만들었다. 세상의 관행이나 부조리에 저항했던 모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인지 진보적이고 사회 개혁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라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라는 유언을 소중히 간직하여, 훗날 자신의 논문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적어놓기도 했다. 상술한 학생들의 저항 활동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 위에서 인세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들인 농장을 경영할 때도 근대적인 농법을 도입해 수익을 올렸는데, 그는 이 농법을 주변의 다른 농가들에게도 흔쾌히 가르쳐주었으며, 아울러 치즈 제조법까지 가르쳐주었다. 그야말로 화학자라는 공인으로서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라는 개인으로서도, 유능하면서도 선량했던 인물.   [1]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한다. 단, 수상자 발표 이후 사망한 경우는 예외.[2] 문자 그대로 기나긴 시간 동안 개고생을 했다. 불소가 위험하기도 해서 실험하다 죽은 사람도 많다. 무아상 본인도 불소에 노출되어 한쪽 눈을 잃고 건강을 해쳤다.[3] 이 당시, 시체 해부 장면을 보고 졸도해 떨어졌다는 얘기가 있다. ========================= “난 마음 속의 자유를 얻었다. 두려워서 말 못할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누구도, 또 어떤 것도 나를 침묵시킬 수 없다. 아주 좋은 느낌이다. 인간이라는 느낌이다. 여러분도 이런 느낌을 가졌으면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 속의 자유를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나의 도덕적 책무다.” 이 말은 모든 물질의 성분이라고 할 수 있는 원소의 족보인 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화학자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yev 1834~1907)가 그의 마지막 대학 강의에서 들려준 위대한 명언이다. 주기율표는 원소를 구분하기 쉽게 성질에 따라 배열한 표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처음 제안했으며, 헨리 모즐리가 1913년 이를 개량시켜 만든 것이 오늘날 표준 주기율표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 위키피디아 “나는 평화를 추구하는 진화론자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05년, 그가 평생 교육자로 몸담고 있었던 성 피터스버그 대학 마지막 강의에서 제자들에게 들려 준 말이다. 이 강의를 끝으로 그는 대학은 물론 모든 연구와 제자들과도 영영 이별을 고한다. 곧 닥칠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멘델레예프의 마지막 강의 이야기는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평화를 추구하는 진화론자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나가라. 연구하며 평화를 추구하고, 연구 속에서 평온을 찾아라.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스쳐가는 행복들,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연구는 길고 영원한 기쁨을 남긴다. 그러나 그 연구는 다른 사람을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과학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을 이룩한 멘델레예프는 성 피터스버그 대학에서 물러나 지병인 결핵과 싸워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생에 대해 후회가 없었고, 죽을 날이 멀지 않지만 평온하고 마음의 행복은 넘쳐 흐른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또 항상 기쁜 마음으로 공부하고 남을 위해 노력하라고 당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학문적 철학 속에는 거룩한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 1907년 1월 20일, 73세의 일기로 간병인이 읽어 주는 쥘 베른(Jules Verne)의 공상과학소설(SF) ‘북극탐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영원의 안식처로 떠났다. 멘델레예프는 죽는 날까지도 이처럼 자연과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세기 프랑스 출신으로 근대 SF의 선구자로 통하는 쥘 베른은 미래를 정확히 묘사한 선구적 소설가로 통한다. 멘델레예프는는 늘 “쥘 베른은 우주적인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물고 아름다운 능력이다. 그가 훌륭한 시인이자 놀라운 예언자였으며 능력 있는 창조자였다”고 말하곤 했다. 제자들 주기율표 들고 장례 행렬 이끌어 멘델레예프가 죽은 뒤 그의 장례식은 독특했다. 그의 제자들은 알파벳 이름이 가득 찬 팻말을 들고 장례행렬을 이끌었다. 알파벳은 다름 아닌 그가 완성한 주기율표였다. 소위 오늘날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수헬리베 붕탄질산…’으로 시작되고 노래 말까지 지어 외워야 하는 주기율표가 장례식의 제일 선두에 등장했다는 말이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안에는 태양과 흙, 생물의 세포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원소가 담겨있다.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118종) 가운데 지구 전체 무게의 65%는 산소와 철이 차지하고 있다. 우주 전체를 보면 우주 질량의 97%는 수소와 헬륨이 차지하고 있다. 고대 사람들의 주기율표는 ‘흙, 공기, 불, 물’이었다. 이 4가지 물질을 만물의 기본요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 즉 ‘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알갱이’(그리스어 Atomos)로 이뤄졌다고 주장한 이는 기원전 5세기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였다. 이후 새로운 원소들이 속속 발견되고, 19세기 중반에는 각 원소의 원자량까지 정확하게 계산됐다. 화학자들은 각 원소간에 얽혀 있는 규칙을 찾고자 했다. 앞으로 발견될, 심지어 인공원소까지 알아 맞춰 그러면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완성하는데 공헌한 것은 무엇일까? 과학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주기율표 개발로 잘 알려졌다. 그의 주기율표는 원소들은 점점 증가하는 원자의 무게(원소의 질량)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주기율표를 이용해서 멘델레예프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의 성질을 정확히 예견할 수 있었다.” 멘델레예프가 만들어 낸 주기율표에는 원래 63개의 원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외에도 앞으로 발견될 원소들을 위해 빈칸을 남겨 두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차츰 그 빈칸에 모든 원소가 채워졌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질량 92번인 우라늄도 마지막으로 발견됐다. 멘델레예프에 앞서 영국의 분석화학자 존 뉴랜즈(John Newlands 1837~1898)가 원자량의 체계에 따라 원자량의 순서에 번호를 매기다가 희한한 규칙을 발견했다. 성질이 닮은 원소들이 여덟 번째 간격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고 음악의 옥타브가 여덟 번째 음정에서 반복된다고 해서 ‘옥타브의 법칙’이라 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뉴랜즈가 처음 번호를 매긴 표에는 공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빈자리는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이 훗날 차지해야 할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빈칸을 남겨두기가 꺼림칙했던 뉴랜즈는 다른 원소들을 무리하게 끼워 넣었다. 엄청난 실수였다. 그는 졸지에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그의 공로를 인정한 학자는 바로 멘델레예프였다. 멘델레예프는 1869년 각 원소의 성질을 기록한 카드로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빈칸을 그냥 두었다. 그러면서도 공란에 장차 발견될 원소의 이름과 성질까지 정확히 예측했다. 예컨대 아연(Zn)과 비소(As) 사이에 원자량 68과 72의 원소가 두 개 더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1875년과 1886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란의 두 자리에 들어갈 갈륨과 게르마늄이 발견됐다. 그는 또 붕소(B)와 알루미늄(Al) 사이에 원자량 44에 가까운 원소가 발견될 것이라 내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스웨덴의 라르스 닐손(Lars F. Nilson)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그 원소(에카붕소)를 발견했다. 그 원소의 이름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이름을 딴 스칸듐(Sc)이었다. 스칸듐의 원자량은 멘델레예프의 예측과 흡사한 44.956이었다. 삼라만상을 이루는 원소의 족보를 알아 맞추는데 그야말로 신묘한 족집게였다. 이로 인해 멘델레예프가 꿈 속에서정리된 주기율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다. 주기율표라는 자연의 규칙을 찾는데 바로 그 영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후 화학자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양성자를 토대로 정밀한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천연원소는 현재 93번(넵투늄·Np)까지지만, 이번에 새롭게 이름을 얻은 113~118번까지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공원소이다. 멘델레예프는 과거는 물론 미래에 태어날 원소의 족보까지 꿰뚫은 천재였다. 원소의 주기율을 제안하고, 스칸듐의 존재와 성질을 예언한 멘델레예프. 그에 의해 화학은 예측 가능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위키피디아 혁명의 태동기, 어머니가 학문의 길을 열어 줘 멘델레예프는 러시아 정치범 유배지인 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서 14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5년 시작된 피로 얼룩진 러시아 혁명의 태동기를 지켜보면서 생을 마감한 멘델레예프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격동기에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피난처는 어머니였다. 공장 노동자인 어머니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학문의 길을 열어 의지할 곳이었다. 멘델레예프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얼마나 대단한 여성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어머니는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쓸데 없는 망상을 하지 말라. 연구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인내를 갖고 신성하고 과학적인 진실연구에 매달려라.’” “그녀는 변론이 얼마나 사람을 속이는지,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폭력이 없는 과학, 사랑과 단호함을 통해 모든 미신과 거짓, 그리고 잘못을 없애고 미래의 자유와 행복이 내면의 기쁨을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신성한 것으로 간직했다.” 위대한 과학자 멘델레예프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 멘델레예프는 수백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도 서두에는 항상 “나의 이 연구를 세상을 하직한 존경하는 어머니에게 바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김형근 객원기자 =================================================================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는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당시 알려진 63개 원소들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가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가 꿈 때문에 원소들의 분류 규칙을 알아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 대한 당시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진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었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승자는 멘델레예프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가 예언에 맞는 원소들이 발견됐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 주기율표란, 우주 상에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공적으로 아주 잠깐이나마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원소를 규칙에 따라 배열해놓은 표입니다.     기호로 써져 있어서 안 와닿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탄소(C, 6번), 산소(O, 8번), 질소(N,7번), 철(Fe, 26번), 금(Au, 79번), 구리(Cu, 29번) 등이 모두 다 들어있습니다. 화학과, 화공생명학과, 기타 일반화학이 필수과목인 모든 학과생들은 이것을 외우라고 강요당한 적이 있을 겁니다. 저도 과외를 하거나 할 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주기율표는 외웠나"이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화학 관련 교수님들은 주기율표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살짝 비틀어서 시험 문제로 내기도 하고요.     그럼 이쯤에서 주기율표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의문점이 생기시겠죠, "저게 왜 중요한 것이냐?".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지금부터 해 나가려 합니다.   1. 순서가 '양성자 개수' 순서이다.   간혹가다 화학과 분들도 질량 순으로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아닙니다. 대체로 번호가 작으면 원자량(질량)이 더 작으나, 대표적인 오류인 52번 텔루르(원자량 127.6) - 53번 요오드(원자량 126.904) 등의 예시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원자에는 +를 띄는 양성자라는 것과 -를 띄는 전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의 개수는 화학에서의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데, 원자 번호는 양성자 수 (or 이온이 아닌 상태에서의 전자 수)를 나타내기 때문에, 번호만 기억한다면, 해당 원자가 몇개의 양성자, 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매치가 되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2. 좁은 관점에서, 같은 세로줄에 있는 원소들은 성질이 비슷하다. (수소 제외)   위의 주기율표에서 세로줄 (Group 1~18 이라고 되있는것)에 있는 6~7 원소들은 대체로 성질이 비슷합니다. 대표적으로 1족(첫 째줄)의 경우 금속이고, 무른 성질의 띄며, 물에 넣으면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14족(14번째 줄) 아이들인 C, Si, Ge 등은 모두 반도체의 소재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18족(마지막 줄)의 He(헬륨가스. 마셔도 되는 그 가스), Ne(네온사인에 사용), Ar 등은 매우 안정, 안전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원소 하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면, 같은 세로줄에 있는 아이들은 다 비슷비슷하겠구나 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3. 넓은 관점에서, 주기율표를 몇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위의 주기율표에서 같은 색깔은 비슷한 성질을 가지기때문에 일부러 같은 색깔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가고, 비슷한 아이들끼리 아무 패턴없이 떨어뜨려 놓은 것이 아닌,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1,2,3번을 종합하면, 우리가 만약 주기율표를 다 외우게 된다면, 그 어떤 원소가 나오더라도 대략적인 성질을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율표가 중요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지금 이걸 보시는 이공계 몇몇 분들은 (특히 저학년), 저걸 진짜로 외워야 하는가, 몇번까지 외워야 하는가 등의 의문점이 생길 수 있는데, 제 경험상 화학과가 아닌 분들은 20번 까지만 외워도 충분하고, 화학과의 경우 30번까지는 외우길 추천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시험에서 주기율표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외워서 손해볼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 무작정 암기하는 것을 되게 싫어하는데, 주기율표만큼은 예외적으로 외우라고 추천하는 편입니다.     각설하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주기율표의 탄생에 기여한 과학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주기율표의 발명가'라고 불리는 인물은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입니다.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며, 많은 책에서 주기율표를 고안하고, 만든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멘델레예프가 갑자기 자다 일어나서 주기율표를 쓱쓱 그려낸 것은 아니고, 그 당시에 이미 주기율표가 만들어질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멘델레예프 이전의 세대, 돌턴(1766년생)이나 라부아지에(1743년생), 프리스틀리(1733년생) 등의 화학자 세대에는 알고 있는 원소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끽해봤자 산소, 수소 정도?. 따라서, 그들은 일련의 표를 만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밝혀진 원소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죠. 그 시대 화학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의 수가 많아봤자 10개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굳이 어떤 규칙에 따라 나열할 필요도, 성질을 쉽게 알려고 할 필요도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발견된 원소의 수가 많아졌고, 과학자들은 이들을 적당한 근거에 의해 분류하여 표로 만드려고 노력합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되베라이너 (세 쌍 원소설), 뉴랜즈 (옥타브설) 등이 대표적이죠.   이러한 와중에 멘델레예프가 과학계에 떠돌던 힌트들을 모두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연구결과를 더해서 원소들을 원자량 순서로 배열한 주기율표를 만들게 됩니다. (앞서 이것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니 앞선 가설들도 모두 잘 맞고, 일정한 패턴을 띄게 되어 원소들 간의 성질 차이 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표로 딱 만들고 확신이 서게 되니,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이 어느 위치에 있고, 어떤 성질을 띌 것이다 라는 것을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되었는데, 멘델레예프가 있을 거라고 예언한 갈륨, 게르마늄 등이 몇십 년 뒤에 정확히 그 위치에 발견되면서 주기율표가 상당히 좋은 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됩니다.     보통 여기까지가 흔히 알고 있는 주기율표의 역사이고, 저는 잘 안알려진 인물인 모즐리 (Henry Moseley)에 대한 소개를 첨가하려고 합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의 과학자로, 당시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문제점으로 지목되었던, '원자량 순서로 하면 27번 Co와 28번 Ni의 순서가 맞지 않는다'를 '원자량 순서가 아닌 양성자 수로 하면 해결된다'라고 발표하였고, 이후 모즐리의 말이 맞는 걸로 판명나면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주기율표는 모즐리의 주기율표가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즐리가 멘델레예프보다 인지도가 심히 낮은 것은 그가 29살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멘델레예프가 정말 대단한 업적을 세우고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노벨상 수상에 실패 (앞서 말한 치명적인 문제점 + 그당시 영국/프랑스가 잡고 있던 과학계에 뜬금없는 러시아인 + 2번째 후보에 올랐는데 사망)했는데, 모즐리의 경우 일단 살아있고, 영국인이고,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문제점까지 해결했기 때문에 당연히 후보에 오르게 되고, 그 당시 경쟁자도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수상이 확실시 되었습니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20대 과학자, 거기에 영국인. 노벨상 까지 받으면 정말 금상첨화.     모즐리가 몇 십년 더 살아서 그런 천재적인 머리로 몇 개의 연구성과를 더 내었다면, 그는 뉴턴-아인슈타인-슈뢰딩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썩 유쾌한 예시는 아니지만, 2차 대전의 맨하탄 프로젝트의 멤버들인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보어, 페르미, 폰 노이만, 파인만 등이 모두 노벨상 수상자이거나 그에 필적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보면, 모즐리가 2차 대전때까지 살아있었더라면 훨씬 더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들을 모두 뒤로 한 채, 모즐리는 1차 대전 때 자원 입대하여 참전했다가 노벨상 수상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전사하고, '죽은 사람은 노벨상 후보로 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에 의해 노벨상 수상에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화학의 상징이자, 화학에서 가장 중요한, 모든 화학과 교수님들의 연구실 벽면에 붙어있는 주기율표를 발명한 두 인물은 모두 노벨상을 못받고 끝나게 됩니다. 어찌 보면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이죠.     문과 분들은 모즐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 주제를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이며, 더 정확히는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의 업적에 대해 소개하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사진 이외의 그 어떤 글도 복사-붙여넣기 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원소의 상태(상온에서)   금속 비금속   고체 액체 기체 미지 마그네타색은 원자번호 알칼리 금속 알칼리 토금속 란타넘족 악티늄족 전이금속 전이후금속 준금속 비금속 할로젠 비활성기체 족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주기   1 H 1  수소   He 2  헬륨 2 Li 3  리튬 Be 4  베릴륨   B 5  붕소 C 6  탄소 N 7  질소 O 8  산소 F 9  플루오린 Ne 10  네온 3 Na 11 소듐 Mg 12  마그네슘   Al 13  알루미늄* Si 14  규소 P 15  인 S 16  황 Cl 17  염소 Ar 18  아르곤 4 K 19  포타슘 Ca 20  칼슘 Sc 21  스칸듐 Ti 22  타이타늄 V 23  바나듐 Cr 24  크로뮴* Mn 25  망가니즈 Fe 26  철 Co 27  코발트 Ni 28  니켈 Cu 29  구리 Zn 30  아연 Ga 31  갈륨 Ge 32 저마늄* As 33 비소 Se 34 셀레늄* Br 35  브로민 Kr 36  크립톤 5 Rb 37 루비듐 Sr 38 스트론튬 Y 39  이트륨 Zr 40  지르코늄* Nb 41  나이오븀* Mo 42 몰리브데넘 Tc 43 테크네튬 Ru 44  루테늄* Rh 45  로듐 Pd 46  팔라듐 Ag 47  은 Cd 48  카드뮴* In 49  인듐 Sn 50 주석 Sb 51 안티모니 Te 52 텔루륨 I 53  아이오딘* Xe 54  제논 6 Cs 55 세슘 Ba 56  바륨 57~71  란타넘족 Hf 72 하프늄* Ta 73 탄탈럼* W 74  텅스텐 Re 75  레늄* Os76  오스뮴* Ir 77  이리듐 Pt 78  플래티늄* Au 79  금 Hg 80 수은 Tl 81  탈륨 Pb 82 납 Bi 83  비스무트 Po 84  폴로늄* At 85  아스타틴 Rn 86  라돈 7 Fr 87  프랑슘 Ra 88  라듐 89~103  악티늄족 Rf104  러더포듐 Db105  더브늄* Sg106  시보귬* Bh107  보륨 Hs 108 하슘 Mt 109  마이트너륨 Ds110  다름슈타튬 Rg 111  뢴트게늄* Cn112  코페르니슘 Nh113  니호늄 Fl 114 플레로븀* Mc115  모스코븀* Lv116  리버모륨 Ts117  테네신 Og118  오가네손 원자번호 118번 이후... 미발견•미확정 원소는 여기로. *:끝말잇기 한방단어 란타넘족 La 57 란타넘 Ce 58  세륨 Pr 59  프라세오디뮴* Nd 60  네오디뮴* Pm 61  프로메튬 Sm 62 사마륨 Eu 63  유로퓸* Gd 64  가돌리늄* Tb 65  터븀* Dy 66  디스프로슘 Ho 67  홀뮴* Er 68  어븀* Tm 69 툴륨 Yb 70 이터븀* Lu 71 루테튬 악티늄족 Ac 89 악티늄* Th 90  토륨 Pa 91  프로탁티늄*   U 92  우라늄* Np 93  넵투늄* Pu 94  플루토늄* Am 95  아메리슘 Cm 96  퀴륨 Bk 97  버클륨 Cf 98  캘리포늄* Es 99  아인슈타이늄* Fm 100  페르뮴* Md 101  멘델레븀* No 102  노벨륨 Lr 103  로렌슘   멘델레예프는 1861년 페테루스불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866년에 화학교수로 임명되었다. 1869년에는 ‘원소의 원자량과 그 성질과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1871년 세계인들이 오늘날 쓰고 있는 주기율표를 제정하였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자량 순서로 되어있다는 것이고 모즐리는 원자번호 즉 양성자수 순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듯 보이지만...몇가지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지요.  중요한 앞번호 원소들을 생각해보면.....  대표적인 것이 칼륨과 아르곤의 차이입니다.  만약 이것을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로 본다면 아르곤이 더 무겁기에 칼륨보다 더 뒤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질상 아르곤은 0족에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수하였지만 아르곤(Ar)과 칼륨(K), 코발트(Co)와 니켈(Ni), 텔루르(Te)와 요오드(I) 등이 원자량의 순서에 따라 예견된 것과는 다른 성질을 보여준다는 결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결점은 1913년 영국의 모즐리에 의해 원자번호가 결정되고 이에 따라 원소를 배열함으로 해결된 것이지요.  1913년, 모즐리는 원소의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X-선의 파장을 측정하여 이것으로부터 원소의 원자번호를 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원자번호의 순서로 배열하면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고 오늘날의 현대적 주기율표로 발전시킨 것이지요.주기율표란 무엇일까?|작성자 JH setsuna    
1920    시인, "시편", 그리고 독서 댓글:  조회:4244  추천:0  2016-12-03
  시편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 책이고 신약성서에도 가장 많이 인용된다. 히브리어 제목은 테힐림(Tehillim)인데, 그 명칭은 '찬가'라는 뜻이지만 시편에 실린 시들은 여러 가지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합당한 제목은 아니다. 시편은 그 다양한 내용 때문에 오래도록 널리 읽히게 되었다. 150수로 구성된 시편은 신앙의 모든 측면에 관한 시와 노래를 담고 있다. 찬양, 좌절, 희망, 탄원, 환희, 심지어 적에 대한 복수도 있다. 1500년대에 종교개혁의 지도자 마르틴 루터는 시편을 '성서의 축소판'이라고 불렀다. 시편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그중 73편의 시는 다윗 왕이 썼고, 그밖에 솔로몬, 모세 등 유명한 사람들도 썼다고 한다. 시편 119는 성서에서 가장 긴 장으로, 176개의 절과 모세의 율법을 찬양하는 긴 절이 하나 있다. 시편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유대 순례자들이 부르는 '인도하는 노래'가 있다. '탄원하는 노래'들은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응징해달라고 신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런 노래들이 고상하지 못한 복수심을 나타낸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편 23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하는 유명한 '목자의 노래'다. 시편 51은 다윗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고해하며 기도하는 내용이다. '회개의 노래'라고 불리는데, 신에게 자신의 영혼(아울러 죄)을 드러내고 자비를 구하는 일곱 편의 감동적인 시가 있다. 예수도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 시편을 인용했다. 시편 22는 깊은 좌절을 담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하는 첫 행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편 31:5)라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탄식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시편을 무척 좋아했으며, 독실한 유대인들은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가사만이 아니라 멜로디도 알았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는 전부 유대인이었으므로 시편에 깊은 애정을 가졌고 예수의 생애를 전하는 구절을 자주 읽었다. 시편은 그리스도교 예배를 볼 때 크게 낭독하거나 노래로 불렀다. 지금도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의 예배에는 시편의 낭독이 포함되는데, 대부분 음악에 맞춰 부른다. 중세에는 시편을 교창(交唱)하는 관습이 있었다. 합창대를 둘로 나눠 교대로 부르게 하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거의 대부분 시편이었다. 1500년대에 시인들은 시편의 구절에 운을 붙였으며, 시편의 가사를 수정해 많은 그리스도교 찬송가들을 만들었다(「기쁘다 구주 오셨네」도 그중 하나다). 시편은 성서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지만 다른 노래나 시는 "인간이 창작한 찬송가"일 뿐이었다. 영국의 계관시인 나훔 테이트(Nahum Tate)가 시편의 일부에 운율을 맞춘 것은 이후 오래도록 사용되었다. 1700년대에 이르러서야 교회에서는 인간이 지은 찬송가도 예배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축전 오라토리오」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시편 교향곡」에는 시편의 내용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작곡가 하인리히 슈츠(Heinrich Schutz)는 독일의 루터파 교회들을 위해 아름다운 「다윗의 시편」(1619)을 썼다. 시편은 또한 '솔터(Psalter)'라고도 표기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화려하게 장정되고 삽화가 수록된 책으로 소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1456년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서를 최초의 인쇄서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시편만을 인쇄한 책이 그보다 먼저 발간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최초로 인쇄된 책들 중에는 『찬송가집 Bay Psalm Book』이 있는데, 이것은 1640년 매사추세츠에서 인쇄된 시편이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그리스도교도가 아니더라도)은 시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19    영국 첫 녀성 계관시인 - 캐롤 앤 더피 댓글:  조회:4120  추천:0  2016-12-03
          영국 ‘계관시인(Poet Laureate)’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지명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캐롤 앤 더피(53)로 앤드루 모션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의 자리에 올랐다. 여성이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것은 1668년 존 드라이든 이후 341년 만에 처음이다. 더피는 누구나가  시를 읽을수 있도록 깔끔한 스타일로 글을 쓴다고  알려져 있으며, 영국의 많은 학교에서 그의 작품이 교재로 쓰이고 있다. 또한 그는 공개적으로 알려진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계관시인은  영국 왕실이 영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내리는 칭호로, 지금은 총리의 추천에 의해 임명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명예의 상징으로 월계나무 가지를  씌워준 데서 유래했다.
1918    영국 랑만파 계관시인 - 윌리엄 워즈워스 댓글:  조회:5043  추천:0  2016-12-03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계관시인   계관시인이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명예의 상징으로 월계관을 씌워준 데서 유래한다. 영국의 경우 종신제이며 지금은 총리의 추천으로 임명된다. 궁내관(宮內官)으로서 연봉을 받으며, 왕실의 경조사 때 시를 지어 바치는 등 특정한 의무가 주어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관시인 [poet laureate, 桂冠詩人] (두산백과) 쉽게 생각하면 국가 행사때마다 시를 지어다 바치는 공무원격인 직책인데 영국의 낭만파 시인으로 손꼽히는 그의 시를 읽다보면 그가 왜 시공무원(?)인지 짐작이 된다.   무지개 하늘의 무지개 바라볼 때면 나의 가슴 설렌다. 내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나 어른이 된 지금도 이러하거니 나 늙어진 뒤에도 제발 그래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여라. 바라기는 내 목숨의 하루하루여 천성의 자비로써 맺어지거라. Rainbow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now I am a man, So be it a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by natural piety 이 시는 사람이 어린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으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고 감동할 줄 모르는 인생은 무의미하며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인데  정말...낭만낭만한 내용이다... 그의 시 중 또다른 유명한 시는 수선화로 수선화 골짜기와 산 위에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다니다 나는 문득 떼지어 활짝 펴 있는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나니, 호숫가 줄지어 선 나무 아래서 미풍에 한들한들 춤을 추누나. 은하에서 반짝이며 깜빡거리는 별들처럼 총총히 연달아 서서 수선화는 샛강 기슭 가장자리에 끝없이 줄지어 서 있었나니! 흥겨워 춤추는 꽃송이들은 천 송인지 만 송인지 끝이 없구나! 그 옆에서 물살도 춤을 추지만 수선화의 흥보다야 나을 것이랴. 이토록 즐거운 무리에 어울릴 때 시인의 유쾌함은 더해지나니, 나는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 내가 정말 얻은 것을 알지 못했다. 하염없이 있거나, 시름에 잠겨 나 홀로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내 마음에 그 모습 떠오르나니, 이는 바로 고독의 축복 아니랴, 그럴 때면 내 마음은 기쁨에 넘쳐 수선화와 더불어 춤을 추노라. Daffodils I wonder'd lonelyn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Contiuous stars that shine And twinkle on the Milky Way, They stretch'd in never-ending line Along the margin of a bay: Ten thousand saaw I at a glance, Tossing their heads in sprightly dance. The waves beside them danced, but they Out-did the sparkling waves in glee: A poet could not but be gay, In such a jocund company: I gazed-and gazed- but little thought What wealth the show to me had brought: For oft, when on my couch I lie In vacant or in pensive mood, They flash upon that inward eye Which is the bliss of solitude; And then my heart with pleasure fills, And dances with the daffodils. 정말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느낌의 시인 듯 합니다...ㅎㅎ 수선화와 무지개를 보고 이런 낭만낭만한 시를 쓸 수 있는 남자!  윌리엄 워즈워드는 초식남 끝판왕...ㅋㅋ 더불어 이런 그의 자연친화적 낭만적 성향이  그 시절 73세까지 산 장수의 비결이 아닐까...합니다. ㅎ [출처]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영국의 계관시인|작성자 dgdgpp2  
1917    미국 계관시인 - 테드 쿠서 댓글:  조회:4230  추천:0  2016-12-03
       미국 시인의 시 읽기(2010 – 03) 테드 쿠서             테드 쿠서(Ted Kooser, 1939 -)는 미국 계관 시인 이다        (U. S. Poet Laureate, 2004 – 2006)          [테드 쿠서](Ted Kooser)의 시 한편을 읽어 본다.          This evening, I sat by an open window        and read till the light was gone and book        was no more than a part of the darkness.        I could easily have switched on a lamp,        but I wanted to ride this day down into night,        to sit alone and smooth the unreadable page        with the pale gray ghost of my hand.          (오늘 저녁, 나는 열린 창문가에 앉아 있다        불빛이 꺼지기 까지 책을 읽는다 그리고         책은 어둠의 일부 보다 더하지 않다         나는 쉽사리 등불을 바꿀 수 있었으나        나는 이 낮이 밤 가운데로 이길 수 있기를 원하였다        혼자 앉아 있도록 그리고 읽을 수 없는 장수를        부드럽도록 위해서도        내 손안에 어슴푸레하고 회색의 유령과 함께. )                                      시 [생일 축하] (A Happy Birthday)            * 위의 한글 시의 번역은 사역 임.                                                              간략한 프로필          테드 쿠서(Ted Kooser, 1939. 4. 25)는 Ames (LOWA 주)에서 출생.          풀릿츠 상(The Pulitzer Prize) 등 여러 상을 받음.        네브라스카 대학(The University of Nebraska – Lincoln) 교수(현)          저서는 Flying at Night(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05) 외         많은 시 선집이 있음.          현재, 가랜드 마을(The Village of Garland, 네부라스카 주) 가까운        한 에이커(토지)에 살고 있다.
1916    미국 첫 라틴계 계관시인 - 후안 펠리페 에레라 댓글:  조회:6438  추천:0  2016-12-03
멕시코 이주 노동자의 후손이 미국의 차기 계관시인에 임명됐다.   미 의회도서관은 10일(현지시간) 후안 펠리페 에레라(66)를 미국의 21번째 계관시인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  에레라는 2014~2015 계관시인으로 활동한 너태사 트레서웨이에 이어 9월부터 2015~2016 계관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1936년 미국에서 계관시인 제도가 생긴 이래 라틴계 출신이 계관시인에 임명되기는 거의 80년 만에 처음이다.         제임스 빌링턴 미 의회도서관장은 성명에서 에레라의 작품에는 미국 본연의 요소들이 담겨있다며 "미국 정체성의 필수적 부분인 문화적 관점, 전통, 목소리들을 그의 시는 대변하고 있다"고 임명 이유를 밝혔다.     에레라는 "첫 라틴계 계관시인이 됐다는 사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에레라는 1948년 캘리포니아 파울러에서 멕시코 출신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를 졸업했다.    그의 가족은 종종 길바닥 텐트, 트레일러(이동식 주택)에서 생활했을 만큼 거처를 자주 옮겨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동료 노동자에게 매일 한두 푼씩 줘가며 영어를 배웠다.   미국의 계관시인은 시와 관련된 각종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넓히기 위한 활동을 하는 명예직이다.     에레라는 다양한 인종,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카사 데 콜로레스'(House of Colors)라는 시 관련 프로젝트를 의회도서관과 함께 구상중이다.   그는 또 좀 더 많은 라틴계 학생들이 의회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으며 다양한 문학적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는 뜻도 내비쳤다.       미국의 첫 라틴계 계관시인으로 임명된 후안 펠리페 에레라 
1915    <<뇌의학계>> 미국 계관시인 - 오리버 색스 댓글:  조회:3572  추천:0  2016-12-03
올리버 색스가 죽음을 앞두고 써내려 간 감사의 찬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가장 뭉클한 질문 중 하나다. 알마 제공     올리버 색스 지음·김명남 옮김   죽음은 삶의 한 사건이다. 지나치게 두렵고 강력한 사건이어서 공포라는 형태로 미리 겪는 이 사건은 엄연한 삶의 일이다.   삶과 죽음은 대척적인 개념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나 너무 큰 용기를 요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휘청거릴 지경인데, 그것을 감사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의학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리던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에세이 4편을 묶은 책 ‘고맙습니다’는 이 불가능을 지성과 성찰, 유머와 품위, 겸허와 낙관의 힘으로 반박하는 뭉클한 책이다. 작고하기 반년 전인 지난해 2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나의 생애’가 널리 읽히며 이미 전 세계 신문 독자들이 그 감동을 선체험한 바 있다. 하지만 네 편의 글을 연달아 읽으며 떠올리는 삶과 죽음의 관계는 보다 진지하고 강렬하게 더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10년 전 진단받았던 안암이 간으로 전이돼 세상을 떠나기까지 2년간 쓴 이 글들에는 감사의 정서와 태도가 관통하고 있다.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었지만, 대부분 감사하고픈 기억들이었다”며 죽음을 앞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어 다행이라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노년만이 누릴 수 있는 생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죽음 앞에 선 이 의연한 존재는 “나는 여든 살이 되는 것이 기대한다”고 쓴다. “꼬마 때부터 상실에 대처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을 익혔”던 올리버 색스는 “살면서 스트레스를 겪는 시기에 늘 물리 과학에게로 귀향”했다. 그곳은 “생명이 없지만 죽음도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생일마다 나이와 같은 번호의 원소를 방 안에 둬왔던 이 인간적인 의학자에게 생의 이력은 그러므로 ‘나의 주기율표’다. “혐오스러운 것.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게이라는 아들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엄마로부터 이토록 잔인한 말을 들었던 그가 생의 마지막에 “솔직하게 밝힘으로써 죄책감 어린 비밀 없이” 삶을 마무리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할 때, 4번 원소 베릴륨은 서러운 슬픔으로 잊혀지지 않을 원소번호가 된다. 방을 장식하고 있는 81번 원소 탈륨, 82번 납, 83번 비스무트의 반대편에 놓인 베릴륨. “아름답게 절삭된 베릴륨 조각을 보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곧 끝날 내 인생이 얼마나 오래 전에 시작된 것이었는지를.” 저마다 제 각각일 마지막 순간, ‘이 삶은 좋았다’라고 우린 말할 수 있을까.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 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생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널리 알려졌지만 다시 쓰는 것이 아깝지 않은 문장들이다. 텍스트에 집중한 일반판과 함께 원서의 영문텍스트와 그림으로 디자인을 살린 스페셜 에디션(2만6,000원)도 동시 출간됐다. /박선영 기자  ========================================= © News1 “이제 쇠약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한때 단단했던 근육이 암에 녹아버린 지금, 나는 갈수록 초자연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훌륭하고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이 쏠린다. 자신의 내면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안식일, 휴식의 날, 한 주의 일곱번째 날,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일곱번째 날로 자꾸만 생각이 쏠린다. 우리가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고 느끼면서 떳떳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그날로.” (62쪽)      지난해 8월 여든두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2015)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의학 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 등에서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접한 환자들의 사연을 책으로 펴냈다. 그는 특히 인간의 뇌와 정신활동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또 감동적으로 들려준 과학저술가였다. 뉴욕타임스는 문학적인 글쓰기로 대중과 소통하는 올리버 색스를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세계 언론이 앞다퉈 애도한 것은 그가 뛰어난 뇌신경학자였거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온 더 무브' 등의 베스트셀러 저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감싸안았던 이 시대의 지성을 떠나 보낸 것에 대한 아쉬움과 탄식이 더 컸다.      올리버 색스가 죽음을 앞두고 2~3년 동안 썼던 에세이 4편을 묶은 '고맙습니다(gratitude)'는 인간이 자연스레 나이 먹어감에 따라 사고처럼 맞딱뜨리게 되는 질병, 나아가 누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놀랍도록 차분하게 얘기한다. “노년은 여유와 자유의 시간이다. 이전의 억지스러웠던 다급한 마음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탐구하고 평생 겪은 생각과 감정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여든살이 되는 것이 기대된다” 이처럼 말하는 듯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무덤덤하고 부드러우며 나직하다.      첫 번째 글 ‘수은’은 색스가 2013년 7월 여든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쓴 글로 노년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2015년 봄 자서전 '온 더 무브'의 원고를 마무리한 색스는 10년 전인 2005년 진단받은 희귀병 안구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돼 살 날이 6개월도 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번째 에세이 ‘나의 생애’는 좋은 삶을 살고 살게해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풀어낸 것이다. 2015년 초여름 쓴 세 번째 글 ‘나의 주기율표’에선 원소주기율표에 품었던 남다른 사랑과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사색한다. 마지막 에세이 ‘안식일’에서는 자신의 삶과 가족을 묵묵히 되돌아보며 삶의 안식일, 즉 죽음마저 기쁙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준다. 색스는 이 글을 쓴 지 2주일 후 세상을 떠났다.      끝으로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가 덧붙인 자료 일부를 첨가한다. “무엇보다 올리버 색스는 편견이나 경계없이 활짝 열려있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 동성애자이자 마약중독자로서 사회적 지탄과 비난, 죄의식과 자기파괴에 직면했지만 거기에 매몰되거나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그런 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하여 ‘예외성’을 보편성으로 승화함으로써 인간과 세상에 대한 더욱 큰 이해와 긍정으로 나아갔다. 올리버 색스의 글 역시 그의 삶과 꼭 닮아 투명하고 진솔하며 드라마틱하고 인간적이다.”         일찍부터 올리버 색스의 저작에 꽂혀 그와 영적 교제를 나눠온 옮긴 이의 이력도 흥미롭다. (올리버 색스 지음·김명남 옮김·알마·일반판 6500원-스페셜에디션 2만6000원)  
1914    미국 계관시인 - W.S 머윈 댓글:  조회:3650  추천:0  2016-12-03
1970년대부터 불교에 심취 작품엔 불교적 세계관 내포     ▲ W.S 머윈의 모습. 장로교 목사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70년대 이후 불교에 심취해 참선을 연구하게 된다. 이런 선적 천착은 그의 시 세계에 고스란히 담겼다. W.S 머윈은 미국 17대 계관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970년대 이후 불교에 심취하면서 참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거주지를 하와이로 옮기기도 했다. 머윈의 불교적 시 세계를 고찰한 논문이 발표됐다. 설태수 세명대 교수는 〈동서비교문학저널〉 34호에 기고한 논문 ‘W.S 머윈 시에서의 선(禪)’을 통해 불교적 관점으로 머윈의 작품 세계를 살펴봤다.  가장 먼저, 설 교수는 머윈을 “독자로 하여금 당황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했던 시인”이라고 평가하면서 “머윈의 시에는 선적 화법이 적지 않게 표출돼 있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은 없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설 교수는 머윈의 시를 ‘해 뜰 시간에 버섯 찾기’ ‘공기’ ‘잠의 무게’ ‘스승 찾기’ 등을 불교적 분석했다.  특히 화자가 낚시하는 친구를 만나 나누는 대화가 담겨 있는 ‘스승 찾기’의 경우 선적인 향취가 두드러진다. 설 교수에 따르면 이 시에서 반전을 보여주는 구절은 ‘그의 낚시줄에 바늘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설 교수는 “화자의 오랜 친구는 물고기를 낚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낚싯대를 통해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라면서 “이는 불교에서 참선 수행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일맥상통하다”고 강조했다.  설 교수는 “이분법적인 일상적 틀에 갇힌 사고의 영역을 선풍을 통해 한결 높은 수승한 세계로 인식체계를 확장시켜준다는 점에서 머윈의 시는 깊게 천착할 만한 매력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면서 “진부해지기 쉬운 우리의 관점을 아주 색다르게 환기시키는 머윈의 시를 보면, 그의 시세계에는 선시의 표현 기법이 적지 않게 녹아 있다”고 총평했다.
1913    19세기 미국 가장 독창적인 시인 - 에드거 앨런 포(포우) 댓글:  조회:9683  추천:0  2016-12-03
    에드거 앨런 포(AP=연합뉴스DB)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 1848년 11월 9일 아침에 촬영한 "극한의 미(Ultima Thule)" 다게레오타이프 출생 1809년 1월 1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사망 1849년 10월 7일 (40세)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직업 시인·단편 소설가·편집자·비평가 언어 영문학 모교 버지니아 대학교 중퇴 미국 육군사관학교 퇴학 활동기간 1827년 7월 ~ 1849년 장르 고딕물·추리물·시문학 사조 암흑낭만주의 배우자 버지니아 엘리자 클렘 포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포우[poʊ][*], 1809년 1월 19일 ~ 1849년 10월 7일)는 미국의 작가·시인·편집자·문학평론가이다. 미국 낭만주의의 거두이자 미국 문학사 전체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는 작가이다. 미스터리 및 마카브레 작품들로 가장 유명하며, 미국 단편 소설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또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최초로 만들어냈다고 평가받으며, 나아가 과학소설 장르의 형성에 이바지했다.[1] 그는 오로지 저술과 집필을 통해서만 생활하려 한 미국 최초의 전업작가이며, 이 때문에 생전에 심한 재정난과 생활고를 겪으며 유년기를 제외한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다.[2] 보스턴에서 배우 부부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10년 가정을 버리고 떠나 버렸고,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해 고아가 되었다. 이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 살던, 존 앨런과 프란세스 앨런 부부가 어린 포를 데려갔다. 앨런 부부는 포를 정식으로 입양하지는 않았으나, 포는 청소년이 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살았다. 어른이 된 포는 도박 빚 및 교육비 문제로 존 앨런과 사이가 악화하였다. 포는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돈이 없어서 한 학기만 다니고 중퇴했다. 포는 교육비 문제로 앨런과 싸우고 1827년 육군에 입대했다. 이때쯤 출판 경력이 시작되어 1827년 ‘보스턴 사람(Bostonian)’이라는 필명으로 《타메를란 외 시집》을 출간했다. 1829년 프란세스 앨런이 사망하자 포와 존 앨런은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그러나 이후 웨스트포인트 사관후보생이 되었다가 장교가 되지 못할 것 같자 시인이자 작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존 앨런과 완전히 갈라섰다. 포는 산문문학으로 관심사를 옮겨 그 뒤 몇 년 동안 문학학술지 및 정기간행물에 글을 기고했고, 특유의 문학비평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직업 관계로 포는 볼티모어·필라델피아·뉴욕 시 등지를 전전했다. 1835년 볼티모어에서 13살짜리 사촌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1845년 포는 시집 《도래까마귀》를 출간해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년 뒤 아내 버지니아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포는 《펜》이라는 이름의 자기 문학지를 만들기로 계획했으나(이후 제목은 《스타일러스》로 변경), 계획을 실현으로 옮기기 전에 사망했다. 1849년 10월 7일, 향년 40세였다. 포는 볼티모어에서 죽었는데, 그 사인이 불분명하다. 알코올·뇌내출혈·콜레라·마약·심장병·광견병·자살·폐결핵 등 다양한 원인이 거론되고 있다.[3] 포와 그의 작품은 미국 문학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우주론과 암호학 같은 문학 외의 분야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포의 작품들은 오늘날 문학·음악·영화를 막론하고 여러 대중문화에서 접할 수 있으며, 그의 생가 수 채가 박물관으로 지정 운영되고 있다.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은 미스터리 장르에 포가 남긴 족적을 기념하여 매년 에드거 상이라는 상을 수여한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초기 생애 1.2군 경력 1.3출판 경력 2사망 2.1그리즈월드의 〈회상록〉 3문체와 주제 3.1장르 3.2문학이론 4포의 유산 4.1문학적 영향 4.2물리우주론 4.3암호학 5대중문화와 포 5.1생가 및 박물관 5.2포의 건배자 6주요 작품 목록 7각주 8참고 자료 9바깥 고리   생애[원본 편집] 초기 생애[원본 편집]   에드거 앨런 포 탄생지로 추정되는곳에 세워진 명판. 보스턴 소재.[4] 1809년 1월 19일 포는 보스턴에서 영국계 배우 부부 엘리자베스 아놀드 홉킨스 포와 데이비드 포 주니어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손위 형제로 윌리엄 헨리 레너드 포가 있었고 손아래 누이로 로잘리 포가 있었다.[5] 조부 데이비드 포 시니어는 아일랜드 공화국 캐번 주 출신의 이주민이었으며, 1750년 무렵 미국으로 이주했다.[6] 에드거라는 이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등장인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포 부부가 1809년 그 연극을 공연했기 때문이다.[7] 데이비드 포는 1810년 가정을 버리고 떠났고, [8] 엘리자베스 포도 1년 뒤 폐결핵으로 죽었다. 포는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 살던, 존 앨런이 데리고 갔다. 존 앨런은 스코틀랜드계 상인으로, 담배·의류·밀·묘비·노예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을 다루는, 성공한 상인이었다.[9] 포는 앨런 집안의 정식 양자로 입양된 적은 없으나,[10] 사실상 앨런 집안은 포에게 양부모의 기능을 했기에 이후 포는 “에드거 앨런 포”가 된다.[11] 앨런 집안과 포는 1812년 성공회 세례를 받았다. 존 앨런은 양아들을 때로는 방치하고 때로는 쥐 잡듯 훈육하며 오락가락했다.[11] 존 앨런과 프란세스 앨런 부부 및 포는 1815년 영국으로 갔다. 포는 존 앨런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노스에어셔 어빈에서 중등학교를 잠시 다니다가 1816년 런던의 가족들과 합류했다. 포는 런던 첼시 지구에서 1817년까지 기숙학교를 다녔다. 그 뒤 런던 북쪽으로 4 마일(6.4 킬로미터) 교외인 스토크뉴잉턴의 존 브랜스비 목사의 장원학교에 입학했다.[12] 포는 1820년 앨런 부부와 함께 리치먼드로 돌아왔다. 1824년 라파예트 후작이 미국을 방문하자 그 환영식의 청소년 의장대로 참여하기도 했다.[13] 1825년 3월, 존 앨런의 삼촌이자[14] 사업상 후원자인 리치먼드 제일의 갑부 윌리엄 골트가 죽었고, 앨런에게 부동산으로 수 에이커가 유산으로 물려졌다. 땅값은 75만 달러였다. 1825년 여름, 앨런은 2층짜리 벽돌집을 구매하여 부를 과시했고 집 이름을 몰다비아라고 지었다.[15] 포는 1826년 2월 버지니아 대학교에 등록하여 고대 및 근대 언어를 공부했다. 첫사랑 사라 엘마이라 로이스터를 만난 것은 대학 입학 이전으로 생각된다.[16][17]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버지니아 대학교는 창립자 토머스 제퍼슨의 이상을 따르고 있었다. 도박·승마·사격·담배·음주가 모두 엄격히 금지되었는데, 대개 학생들은 이를 무시했다. 제퍼슨은 학생자치제도를 도입하여 학생들이 각자 연구주제를 선택하고 각자 기숙 준비를 하게 했고, 모든 비행을 교수진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런 시험적인 시스템은 도입 초기였던 만큼 혼란스러웠고, 학교 중퇴자도 많았다.[18] 포는 대학 재학 중에 로이스터와의 연락이 끊어졌고, 도박 빚 때문에 양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포는 앨런이 자신에게 충분한 돈을 주지 않아서 등록금·교재비·기숙사 가구비 등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앨런은 그래서 돈과 옷을 더 보내주었지만 포의 빚은 더 불어났다.[19] 포는 1년 만에 대학을 중퇴하고 리치먼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랑하던 로이스터가 알렉산더 셸턴이라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낙담하여 보스턴으로 훌쩍 떠났는데 이때가 1827년 4월이었다. 포는 점포 계원이나 신문 기고가 같은 낯선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했다.[20] 이 시기쯤에 앙리 르 르네(Henri Le Rennet)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1] 군 경력[원본 편집]   육군에 입대한 포는 보스턴의 인디펜던스 요새에 배치되었다. 먹고 살 길이 없어진 포는 1827년 5월 미국 육군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에드거 A. 페리(Edgar A. Perry)"라는 가짜 이름을 댔으며, 실제로는 18세였지만 22세라고 나이를 속였다.[22] 군에 입대한 포는 보스턴 항을 수비하는 인디펜던스 요새에 배치되었고, 월급 5달러를 받아가며 일했다.[20] 같은 해 포는 첫 번째 책인 40쪽짜리 시집 《타메를란 외 시집》을 ‘보스턴 사람(Bostonian)’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시집은 단 50부만 출판되었으며, 세간의 관심은 사실상 전혀 끌지 못했다.[23] 포가 배속된 연대는 찰스턴의 몰트리 요새로 재배치되었고, 1827년 11월 8일 브리그선 월탐 호(Waltham)를 타고 찰스턴으로 옮겨 갔다. 포는 대포 포탄을 준비하는 기술병(artificer)으로 진급해서 월급이 두 배로 올랐다.[24] 2년간 복무한 포는 비장교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계급인 포병원사(Sergeant Major for Artillery)까지 승진했고, 5년간 복무한 군을 제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포는 자기 부대의 대장인 하워드(Howard) 중위에게 자기 진짜 이름과 전후 사정을 밝혔다. 하워드는 포에게 양아버지 앨런의 허락이 있으면 포를 전역시켜주겠다고 하고 앨런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앨런은 이를 무시했고, 속절없이 몇 개월 동안 시간이 더 흘렀다. 앨런은 포에게 양어머니 프란세스의 병환마저 알리지 않았다. 프란세스 앨런은 1829년 2월 28일 사망했고, 포는 프란세스가 무덤에 묻히고 하루 뒤에야 찾아올 수 있었다. 아마도 아내의 죽음 탓에 성질이 유해진 것인지 존 앨런은 전역해서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겠다는 포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25] 마침내 포는 1829년 4월 15일 인수인계까지 끝낸 뒤에 전역했다.[26]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기 전에 포는 잠시 볼티모어로 돌아갔는데, 이때 과부가 된 숙모 마리아 클렘(Maria Clemm)·사촌 여동생 버지니아 엘자 클렘·친형 헨리·병으로 쇠약해진 할머니 엘리자베스 케언스 포(Elizabeth Cairnes Poe) 등 친가족들과 함께 지냈다.[27] 그러는 동안 포는 두 번째 책 《알 아라아프, 타메를란 외 시집》(Al Aaraaf, Tamerlane and Minor Poems)을 1829년 볼티모어에서 출판했다.[28] 웨스트포인트로 간 포는 1830년 7월 1일 사관생도가 되었다.[29] 1830년 10월, 존 앨런은 루이자 패터슨(Louisa Patterson)이라는 여성과 재혼했다.[30] 재혼한 앨런은 친자식들과 관련하여 포와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고, 결국 마침내 포를 파양하였다.[31] 포는 웨스트포인트도 때려치우기로 하고 고의로 군법회의에 부쳐지려고 했다. 그리하여 1831년 2월 8일 직무 태만 및 훈련·강의·교회 출석 거부 등의 명령 불복종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포는 퇴학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비행을 부인하지 않았다.[32] 사관학교에서 쫓겨난 포는 1831년 2월 뉴욕으로 가서 3권짜리 시집을 출판했다. 책 제목은 그냥 《시집》(Poems)이었다. 웨스트포인트 시절 동기들이 75센트씩 기부해 줘서 총 170달러가 모였고 이 돈을 책을 내는 자본금으로 삼았다. 동기들은 포가 부대 지휘관들을 비꼬아 쓰던 풍자시들 같은 것을 기대하고 돈을 모아줬던 것 같다.[33] 뉴욕의 엘람 블리스(Elam Bliss)가 출판한 제2판에는 “합중국 군단 사관생도들”에게 바치는 헌정사가 적힌 페이지도 추가되었다. 재판본에는 장편 시 〈타메를란〉과 〈알 아라아프〉가 재수록되었고, 〈헬렌에게〉·〈이스라펠〉·〈바닷 속 도시〉를 비롯하여 그전까지 발표되지 않은 새로운 시 6편도 수록되었다.[34] 포는 1831년 3월 볼티모어로 돌아가 다시 친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형 헨리가 알코올 중독 등의 이유로 건강이 악화하여 1831년 8월 1일에 죽었다.[35] 출판 경력[원본 편집] 형이 죽은 뒤 포는 더욱 절박하게 작가 경력을 영위하려고 했다. 그러나 포가 살던 시절의 미국 출판업계는 그러기엔 적절한 환경이 아니었다.[36] 포는 오직 집필로만 먹고살려고 한 미국 최초의 전업작가로서,[2][37] 국제저작권 개념이 부재하던 시대적 한계에 고통받았다.[38] 출판사들은 미국 작가의 글을 돈 주고 팔아주기보다는 역시 영어로 쓰인 영국 작품들을 해적판으로 유통해오곤 했다.[37] 1837년 공황 또한 출판업계에 타격을 입힌 요인 중 하나였다.[39] 이 시기를 전후해서 신기술에 자극받아 미국의 정기간행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대개는 몇 호 지속하지 못하고 종간되었으며,[40] 출판사들은 글을 투고한 작가에게 고료를 지급하지 않거나 약속한 시기보다 훨씬 늦게 주는 일이 다반사였다.[41] 포는 평생 작가로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금전적 지원을 비롯한 여러 도움을 구걸하며 다녀야 했고 이를 매우 수치스러워했다.[42]   1835년 26세의 포는 13세의 사촌 동생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11년간 지속하였고 버지니아는 24세로 요절했다. 어린 아내의 요절은 포의 문학에 다소의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에 시문학에 집중하던 포는 산문문학으로 관심사를 돌렸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출판사를 통해 단편 몇 편을 발표하고, 유일한 희곡인 《정치꾼》을 쓰기 시작했다. 1833년 10월 포는 지역신문 《볼티모어 새터데이 비지터》의 공모전에 단편 소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를 투고하여 입상했다.[43] 이 소설은 볼티모어의 자산가 존 펜들턴 케네디의 관심을 끌었다. 케네디는 포가 단편 몇 편을 발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를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시의 문예지 《서던 리터러리 메신저》 주필 토머스 W. 화이트(Thomas W. White)에게 소개해 주었다. 포는 1835년 문예지 부주필이 되었으나,[44] 술을 마시다 걸려 몇 주 만에 해고당했다.[45] 볼티모어로 돌아온 포는 1835년 9월 22일 비밀리에 사촌 동생 버지니아와 결혼했다. 신랑은 26세였고 신부는 13세였으나, 혼인신고서에는 21세라고 거짓으로 기술했다.[46] 화이트에게 열심히 하겠노라 약속하고 복직한 포는 버지니아 모녀와 함께 리치몬드로 이사했다. 포는 1837년 1월까지 《메신저》 지에서 일했으며, 그는 자신이 일하는 동안 발행 부수가 700부에서 3,500부로 늘어났다고 주장했다.[5] 포는 이 잡지를 통해 여러 편의 시·서평·평론·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1836년 5월 16일, 포는 리치먼드에서 버지니아와 두 번째 결혼식을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올렸다.[47] 1838년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발표하여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다.[48] 1839년 여름에는 《버튼스 젠틀맨스 매거진》의 부주필이 되었다. 포는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단편 소설·서평을 발표하면서 《메신저》 시절에 쌓아 올린 예리한 평론가라는 명성을 확고히 했다. 1839년에는 2권짜리 단편 소설집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을 발표했으나 이번에는 판매량이 시원찮았고 평도 엇갈렸다.[49] 포는 약 1년 뒤 《버튼스》 지를 떠나 《그레이엄스 매거진》 부주필으로 옮겨갔다.[50] 1840년 6월, 포는 자기 소유의 문예지 《스타일러스》를 창간하겠다는 계획안을 발표했다.[51] 원래 포가 염두에 둔 잡지 이름은 《펜》(The Penn)이었으며, 필라델피아에 거점을 두고 사업을 할 생각이었다. 포는 필라델피아의 석간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1840년 6월 6일 자의 광고란 하나를 사서 자신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홍보했다. “에드거 A. 포가 필라델피아 시에서 편집 및 발행할 월간 문예지 ‘펜 매거진’의 계획안.”[52] 그러나 포는 죽기 전까지 이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다. 이때쯤 포는 휘그당 당원을 자처하며 타일러 행정부의 공직을 한 자리 얻어보려고 기웃거렸다.[53] 타일러 대통령의 아들 로버트 타일러가 포의 친구 프레더릭 토머스(Frederick Thomas)의 지인이었는데,[54] 포는 로버트의 도움을 빌려 필라델피아 세관에 취직하고자 했다.[55] 그러나 포는 그 건과 관련해 토머스와 상의하기로 한 약속 일자(1842년 9월)에 나오지 못했다. 포는 자기가 아팠다고 했지만, 토머스는 포가 술에 취해서 못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56] 포는 여러 차례 엽관 청탁을 해서 약속을 받았지만 모든 감투는 번번이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갔다.[57]   포는 죽기 직전 몇 년 동안 오늘날의 뉴욕 시 브롱크스 구 포드햄 동에 소재한 이 작은 시골집에서 살았다. 1842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버지니아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돌연 처음으로 폐결핵 증세를 나타냈다. 포는 당시 상황을 그녀의 목 혈관이 터져나갔노라 묘사하였다.[58] 버지니아는 완치되지 못했다. 버지니아의 병환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포의 음주량은 점점 늘어났다. 포는 《그레이엄》 지를 떠나 새로운 자리를 찾아다녔고, 여전히 공무원 자리를 청탁하기도 했다. 뉴욕으로 돌아간 포는 《이브닝 미러》 지에서 잠시 일했다가 《브로드웨이 저널》의 주필이 되었고, 나중에는 자영소유주가 되었다.[59] 이때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표절을 저질렀다고 비난했으나 롱펠로는 일언반구 대응도 하지 않았고, 포는 다른 작가와 소원해졌다.[60] 1845년 1월 29일, 《이브닝 미러》에 시 〈도래까마귀〉를 발표, 선풍적 인기를 얻는다. 이 시를 발표한 즉시 포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으나,[61] 그 대가로 받은 고료는 고작 9달러였다.[62] 〈도래까마귀〉는 친휘그당 성향의 잡지 《아메리칸 리뷰: 어 휘그 저널》에 ‘퀄즈(Quarles)’라는 가명으로 동시 게재되었다.[63] 1846년 《브로드웨이 저널》이 폐간했다.[59] 포는 뉴욕 시 포드햄(오늘날의 브롱크스 구 포드햄 동)의 한 시골집으로 이사 갔다. 이 집은 오늘날 "포의 시골집"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랜드콩코스와 킹스브리지 로(Kingsbridge Road) 동남쪽 구석에 위치해 있다. 이 집에 살면서 포는 근교의 세인트존스 대학(오늘날의 포드햄 대학교)의 예수회의 원조사업을 빌어먹었다.[64] 1847년 1월 30일, 버지니아가 이 집에서 죽었다.[65] 전기작가와 평론가들은 포의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여성의 죽음”이라는 주제가 아내와의 사별을 포함한, 인생 내내 반복된 여인을 잃은 경험들에 그 뿌리를 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곤 한다.[66] 아내가 죽은 뒤 포의 상태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포는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시에 살던 여류시인 사라 헬렌 휘트먼에게 구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하지 못했다. 대개 그 원인이 포의 폭음과 기행이 원인이었다고들 알려졌으나, 또한 동시에 휘트먼의 어머니가 개입하여 둘의 관계를 심각하게 훼방 놓았다는 상당한 증거가 존재한다.[67] 그러자 포는 리치먼드로 돌아갔고, 어렸을 적 첫사랑인 사라 엘미라 로이스터를 다시 만났다.[68] 사망[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에드거 앨런 포 변사사건입니다.   에드거 앨런 포는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시 웨스트민스터 홀 묘지(위도 북위 39.29027; 경도 서경 76.62333)에 묻혔다. 포의 죽음의 원인과 그 전후 사정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849년 10월 3일, 포는 볼티모어 길거리에서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것은 조지프 W. 워커(Joseph W. Walker)라는 남자였다. 워커의 증언에 따르면 포는 심각하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으며, 즉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해 보였다.[69] 포는 워싱턴 의대병원으로 실려갔고, 1849년 10월 7일 일요일 오전 5시 정각에 죽었다. 향년 40세.[70] 포는 죽을 때까지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다가 그렇게 위독한 지경이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발견되었을 당시 입고 있던 옷은 자기 옷이 아니었고, 포의 사망증명서를 비롯한 모든 관련 의료기록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71]포는 죽기 전날 밤 “레이놀즈(Reynolds)”라는 이름을 여러 차례 소리쳐 불렀는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일부 출처에 따르면 포의 마지막 유언은 “주여 제 불쌍한 영혼을 도우소서(Lord help my poor soul)”였다.[70] 당시 신문들은 포의 죽음을 뇌출혈 또는 뇌염 때문이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실제 질환이 그랬다기보다 알코올 중독사 같은 점잖지 못한 죽음을 에둘러 말하는 완곡어법이었다.[72] 하여 포의 실제 사망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73] 진전섬망·심장병·간질·매독·수막염[3]·콜레라[74]·광견병[75] 등의 추측이 난무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일각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쿠핑(cooping)"이라는 부정선거행위가 포의 사망 원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쿠핑이란 부정선거자에게 고용된 깡패들이 행려자를 붙잡아 술을 먹이는 등 인사불성으로 만들고 옷을 갈아입혀 가며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억지로 투표를 시키는 짓으로서, 만일 끌려다니는 사람이 저항할 경우 구타를 당하거나 구타 끝에 맞아 죽는 수도 있었다. 포가 쿠핑의 희생자라는 추측은 1872년부터 제기된 상당히 유서 깊은 가설이다.[76] 그리즈월드의 〈회상록〉[원본 편집] 포의 주검이 묻히던 날, "루드비히"(Ludwig)라는 기자가 작성한 긴 부고 기사가 《뉴욕 트리뷴》 지에 올라왔다. 곧 이 기사는 전국으로 퍼졌다. 기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에드거 앨런 포 사망. 이틀 전 볼티모어에서 죽었다. 이 소식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겠지만, 이 소식 때문에 슬퍼하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77] "루드비히"의 정체는 곧 루푸스 윌머트 그리즈월드로 밝혀졌다. 평론가이자 문집 편집자였던 그리즈월드는 1842년부터 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즈월드는 어찌어찌하여 포의 유고관리자가 되었고, 이제는 죽어서 말이 없는 과거의 정적의 명성을 훼철하려고 시도했다.[78] 그리즈월드는 1850년 포의 유고집을 발간하면서 〈작가를 회상하며〉("Memoir of the Author") 라는 제목의 포에 대한 글을 써서 그 안에 수록했다. 그리즈월드는 포를 타락한 술주정뱅이에 마약에 찌든 광인으로 묘사했으며, 포가 쓴 편지들을 그 증거랍시고 함께 수록해 놓았다.[78] 그의 주장들 상당수는 거짓이거나 절반의 진실을 왜곡한 것이었다. 예컨대 포가 마약중독자가 아니었음이 오늘날에는 밝혀져 있다.[79] 포를 잘 알던 사람들은 그리즈월드의 글을 맹렬히 비난했으나,[80] 그리즈월드가 편집해서 출판한 책은 널리 팔리고 읽혔다. 이것은 그리즈월드의 글이 당시 존재하던 포에 관한 유일한 전기물이었던 탓이기도 했으며, 또한 독자들이 자신들이 "사악한" 인간의 글을 읽는다는 생각에 스릴감을 느꼈기에 이런 내용 자체가 인기를 끌어 그것이 수요로서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81] 그리즈월드가 포를 비난하기 위해 제시한 "편지"들은 나중에 조작된 것들임이 밝혀졌다.[82] 문체와 주제[원본 편집] 장르[원본 편집] 포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들은 고딕물으로,[83] 이러한 장르 선택은 당대 대중의 수요에 맞추는 면도 있었다.[84] 포의 작품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반복되는 주제는 물리적인 사망 징후·시체가 부패하는 효과·생매장에 대한 경계·망자의 부활·애도 행위 등 죽음에 대한 의문이다.[85] 포의 작품들 대부분은 대개 초월주의에 대한 반발적 사조인 암흑낭만주의의 산물이라고 판단된다.[86] 포는 초월주의를 끔찍하게 싫어했다.[87] 포는 초월주의의 추종자들을 보스턴 커먼의 연못 이름을 빗대 "개구리연못주의자(Frog-Pondians)"라고 불렀으며,[88][89] 초월주의 작품들을 “모호함을 위한 모호함(obscurity for obscurity's sake)”, “신비주의를 위한 신비주의(mysticism for mysticism's sake)”에 빠져 있는[87] “메타포로 작동하는 미친 짓(metaphor—run mad)”이라고 조롱했다.[90] 포는 토머스 홀리 치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월주의자들 중에는 겉치레꾼과 궤변론자밖에 없다며 그들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91] 포는 공포물로 유명하지만, 그 외에 풍자·유머·지적 사기 같은 것들도 썼다. 희극적 효과를 위해 포는 아이러니와 지나친 무절제를 사용하였고, 많은 경우 이는 독자를 문화적 순응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시도였다.[84] 포가 처음 발표한 단편 소설 〈메첸게르슈타인〉의[92] 공포물에 대한 첫 시도는 본래 통속장르에 대한 해학적 풍자를 의도한 것이었다.[93] 또 한편으로 열기구 같은 신기술에 대한 반응으로 〈열기구 보고서〉 같은 지적 사기성 기사를 쓰기도 했는데 이는 SF의 한 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94] 포가 쓴 작품 대부분은 대중독자들의 취향을 명확하게 그 목표로 삼고 있다.[95] 그런 탓에 포의 소설에는 골상학이나[96] 관상학 같은,[97] 당대에 유행한 사이비 과학적 요소가 포함되기도 했다. 문학이론[원본 편집] 포의 저술은 그 자신의 문학이론을 반영한다. 포는 자신의 평론들과 〈시의 원리〉 같은 소논문을 통해 자신의 문학이론을 제시하려고 했다.[98] 포는 교훈주의와[99] 알레고리를 혐오하면서도,[100] 문학에 담긴 의미는 그 표층 아래에 머물러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에 따르면 명백한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은 예술이기를 그만둔 것이다.[101] 포는 좋은 작품이란 간략해야 하고 특정한 효과에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으며,[98] 작가란 그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모든 감상과 사고를 세심하게 계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02] 〈도래까마귀〉를 쓴 방법을 설명한 소논문 〈작법 이론서〉에서 포는 자신이 이러한 방법을 엄격하게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포가 정말 이런 체계를 따랐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포가 자신의 시를 정말 그렇게 계산해가면서 썼을지 비추어보지 않으면서 그 소논문을 읽기는 어려운 일이다. 결과물이 그 방법론의 덕을 본 것은 거의 미미하다는 것은 포에게 약간의 고통을 더했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다.[103] 전기작가 조지프 우드 크러치(Joseph Wood Krutch)는 〈작법 이론서〉를 “예술의 합리화 측면에서 상당히 기발한 시도”라고 설명했다.[104] 포의 유산[원본 편집] 문학적 영향[원본 편집]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도래까마귀〉 삽화. 1875년 그림. 살아생전의 포는 작가보다는 문학평론가로 유명했다. 동료 평론가 제임스 러셀 로웰은 포를 일컬어 “가장 안목 있고 철학적이며 두려움 없는 평론가”라고 불렀으며, 그가 잉크 대신 청산으로 글을 쓸 때도 있다는 식으로 과장된 수사까지 사용하여 극찬했다.[105] 포는 신랄한 서평 덕분에 "토마호크 맨(tomahawk man)"이라는 별명도 얻었다.[106] 포의 주요 비판 대상은 보스턴의 당대 저명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였다. 문학계의 다른 이들은 롱펠로를 변호했고 이런 다툼은 후에 "롱펠로 전쟁"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포는 롱펠로가 “교훈주의의 이단자”이며, 그의 시는 사람을 가르치려 들고, 독창적이지도 않고, 주제는 남을 표절한다고 비난했다.[107] 포는 롱펠로의 명성과 실력이 퇴조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면서, “우리는 그에게 고상한 지위를 내주었지만, 미래는 부정한다.”라고 마무리 지었다.[108] 포는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유럽에서 저명해진 19세기 최초의 미국 작가 중 한 명이었다.[109] 특히 프랑스에서는 샤를 보들레르가 몸소 포를 번역한 덕에 포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들레르의 불어 번역본은 유럽에서 읽히는 포 작품들의 정본이 되었다.[110] 슈발리에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하는 포의 추리소설들은 미래의 추리물들이 세워질 터를 닦았다. 아서 코난 도일이 가라사대, 포의 단편 추리소설들 각각은 하나씩의 문학 갈래 전체의 뿌리가 되었다. 도일은 “포가 숨결을 불어넣기 전에 추리물은 어디에 존재했는가?”라고 경탄한다.[111]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은 추리 장르에 대해 시상하는 상 이름을 "에드거 상"이라고 하여 포를 기념하고 있다.[112] 또한 포는 SF에도 영향을 미쳤다. 쥘 베른은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의 속편이라는 설정으로 《남극의 미스터리》, 또는 《빙원의 스핑크스》를 쓰기도 했다.[113] 허버트 조지 웰즈는 《아서 고든 핌》을 더러 “한 세기 전의 매우 지적인 영혼이 남극에 대해 상상할 수 있던 바를 말해준다.”라고 평했다.[114] 다른 유명한 작가가 그러하듯이, 포의 작품들 역시 모방자들이 나타났다.[115] 한때는 모방자들 사이에서 자기네가 영능력자 또는 투시 능력자이며, 포의 귀신과 접신해서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 중 가장 유명한 자는 리지 도턴(Lizzie Doten)으로, 그녀는 1863년 《영적 삶에서 끌어낸 시들》(Poems from the Inner Life)이라는 시집을 출간하면서 포의 귀신이 새로 지은 시를 자기에게 전해주었노라 주장했다. 수록된 시들은 포의 〈종〉 따위 유명한 시들을 재작업한 것들이었는데, 뜻밖에 참신하고 괜찮은 면이 있었다.[116]   죽기 직전인 1849년 6월 촬영한 다게레오타이프. 하지만 포가 찬양만 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포라는 자연인에 대한 불호감에 기인하는 바가 있다.[109]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종종 포를 비판하면서 그를 “천박하다(vulgar).”라고 했다.[117] 포가 끔찍하게 싫어한 초월주의 사조의 거두 랄프 왈도 에머슨은 포의 〈도래까마귀〉에 대해서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하겠다.”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했으며,[118] 포를 “딸랑이(the jingle man)”라고 낮잡아 불렀다.[119] 올더스 헉슬리는 포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시적이기 때문에 천박하며, 마치 열 손가락 모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것과 같다고 평했다.[120] 전술했다시피 포의 첫 번째 책 《타메를란 외 시집》은 단 50부만 발행되었으며, 그 중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12부 정도로 추측된다. 2009년 12월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 그중 한 부가 입찰되어 662,500달러에 낙찰되었다. 미국 문학 작품에 대한 가격으로는 역대 최고기록가였다.[121] 물리우주론[원본 편집] 1848년에 쓴 소논문 《유레카: 산문시》에는 대폭발우주론이 나오기 80여 년 전에 그 원리를 암시하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122][123] 올베르스의 역설에 대한 최초의 타당한 설명도 나와 있다.[124][125] 포는 《유레카》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삼가고, 대신 순수한 직관을 통해 글을 썼다.[126] 때문에 포는 《유레카》를 문학작품이지 과학책이 아니라고 보았다.[126] 그러나 그러면서도 거기에 쓰인 내용들은 사실이라고 우겼으며,[127] 이것이야말로 자기 경력의 평생 걸작이라고 생각했다.[128] 물론 올베르스 역설의 해결 같이 현대과학의 기준으로 맞는 것들도 있지만, 다른 부분들에서 《유레카》는 과학적 오류로 가득 차 있다. 특히 포의 생각은 운명과 행성의 회전에 관해 논하면서 뉴턴의 운동법칙을 무시하고 있다.[129] 암호학[원본 편집] 포는 암호학에 상당히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필라델피아 신문 《알렉산더스 위클리 (익스프레스) 메신저》에 자기 능력에 대해 게시하고 암호를 받아 풀어내기도 했다.[130] 1841년 7월, 포는 《그레이엄스 매거진》에 〈비밀기호에 대한 몇 가지 말〉("A Few Words on Secret Writing")이라는 소논문을 투고했다. 이 주제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생긴 것을 기회로 삼아 포는 암호 해독이 이야기의 핵심 요소를 차지하는 〈황금충〉을 썼다.[131] 포의 암호해독에 관한 성공은 잡지 및 신문 문화에 대한 지식 덕분이었지 암호학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실제로 포의 암호해독은 단순한 치환 암호로만 한정되어 있다). 그래도 포가 예리한 분석적 능력의 소유자였음은 그의 추리소설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단순한 치환 암호였지마는 일반 대중들은 그마저도 잘 알지 못했고, 포는 이 점을 잘 이용했다.[130] 포의 암호해독 놀이로 인해 발생한 암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신문과 잡지들에 암호 관련 내용이 대중화되는 데 이바지했다.[132] 포는 단순히 암호학을 대중화하는 정도의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선구적 암호학자 윌리엄 프리드먼은 포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133] 프리드먼은 어렸을 때 〈황금충〉을 읽고 암호에 관해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른이 되어서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 제국의 97식 구문인자기를 해독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134] 대중문화와 포[원본 편집] 실존 인물 에드거 앨런 포를 창작물의 등장인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때 포는 대개 “미쳐버린 천재” 또는 “고통받는 예술가” 유형의 인물로 그려지며, 일생 동안의 고통이 내용 전개의 소재가 된다.[135] 또 포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과 작가 포를 혼합하여, 포 본인과 포가 창조한 인물들이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36] 포를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문제 해결 능력의 소유자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은데, 대표적인 경우로 매튜 펄의 《포의 그림자》 등이 있다.[137] 생가 및 박물관[원본 편집] 포가 어렸을 적 살던 집들 중 아직까지 남아있는 집은 없다. 앨런 가족에게 입양되었을 적 살았던 몰다비아 저택도 남아있지 않다. 가장 오래된 포 생가는 리치먼드의 올드 스톤 하우스로, 현재 에드거 앨런 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포는 리치먼드의 이 집에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박물관 소장품으로는 포가 앨런 가족들과 함께 살던 시절 사용했던 물건들과 포의 희귀한 초판본들 몇 점이 있다. 포가 1826년 버지니아 대학교를 중퇴하기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숙사 방도 보존되어 있어서 방문이 가능하다. 유지비는 학생단체 까마귀단이 담당하고 있다.[138]   필라델피아의 에드거 앨런 포 국립사적지는 포의 생가들 중 하나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포가 살았던 적이 있는 집들 중 가장 오래된 집은 볼티모어에 있으며, 현재 에드거 앨런 포 생가 및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포는 23세 때 이 집에서 미래의 아내와 장모인 클렘 모녀와 처음 함께 살았었다(친할머니 엘리자베스 포와 형 헨리 포도 함께 살았다).[139] 생가는 공개되어 있으며 볼티모어 에드거 앨런 포 학회의 본부로도 사용되고 있다. 포가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한 뒤 필라델피아에서 클렘 모녀와 함께 살던 시절 빌려 살던 집들 중 남아있는 집은 한 채 뿐이다. 포가 1843년에서 1844년 사이에 살았던 스프링가든(Spring Garden) 집은 현재 에드거 앨런 포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140] 포가 살았던 최후의 집도 뉴욕 시 브롱크스 구의 에드거 앨런 포의 시골집으로 보존 중이다.[65] 포의 출생지인 보스턴에서는 포의 실제 출생장소에서 몇 블록 떨어진 보일스턴 가(Boylston Street)에 기념명패가 존재한다.[4][141][142][143] 포가 태어난 카버 가(Carver Street) 62번지 집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동네 이름도 "남부 찰스 가(Charles Street South)"로 개칭되었다.[144][145] 카버 가와 파예트 브로드웨이가 교차하는 지점의 광장이 한때 포를 기념해 명명된 적이 있었으나,[146]동네 이름 자체가 바뀌면서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9년 포의 출생 장소에서 북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찰스 가와 보일스턴 가의 교차지점이 새로이 "에드거 앨런 포 광장(Edgar Allan Poe Square)으로 지정되었다.[147] 2014년 3월에는 이 장소에 영구 기념상을 세우기 위한 기금 조성이 완료되었다. 공모전 결과 스테파니 록낵(Stefanie Rocknak)의 설계가 입상하여 조각상이 세워졌다. 록낵이 설계한 조각상의 포는 도래까마귀 한 마리와 함께 바람을 맞고 있으며, 포의 열린 가방에서 종이 더미들이 쏟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148][149][150][151] 조각상 제막식은 2014년 10월 5일에 거행되었으며, 전직 미국 계관시인 로버트 핀스키가 참석했다.[152] 그 외에 포와 관련된 랜드마크로는 어퍼웨스트사이드의 건물 한 채가 있다. 포가 뉴욕으로 이사온 직후 잠깐 여기 살았었다. 건물 명패는 포가 여기 살면서 〈도래까마귀〉를 썼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전설에 따르면 포가 변사체로 발견되기 전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던 것이 목격된 선술집이 볼티모어 펠스포인트에 여전히 영업 중이라고 한다. 이 주점의 현재 간판은 "The Horse You Came In On"이며, "에드거"라는 이름의 유령이 그 위의 방들을 떠돌아다닌다는 지역 민담이 전승되고 있다.[153] 포의 건배자[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포의 건배자입니다.   2008년 1월 19일 포의 무덤에 바쳐진 코냑 병. 다만 진짜 "포의 건배자"가 아닌 모방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예나 지금이나 포의 죽음은 미스터리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데, 1949년 이래로 매년 포의 무덤에 참배를 온 소위 "포의 건배자(Poe Toaster)"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오늘날에도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참배가 거의 80년 가까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 "포의 건배자"는 단일한 인물이 아니라 여러 명의 집단행동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래도 그들이 하는 행동은 언제나 똑같다. 포의 생일인 매년 1월 19일 새벽, 포의 무덤에 코냑 한 병과 장미 세 송이를 놓고 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154] 2007년 8월 15일, 포의 매장지인 볼티모어 웨스티민스터 교회에서 일하던 역사학자 샘 포르포라(Sam Porpora)가 자신이 이 전통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포르포라는 1949년에 "포의 건배"를 처음 시작한 것은 교회의 인지도를 높여서 기부금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완전한 진실이라고 검증되지 않았으며,[155] 그의 발언 중 일부 세부사항은 사실관계가 불확실하다.[156] 포의 건배자는 포의 탄생 200주기인 2009년 1월 19일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157] 그러나 이듬해인 2010년 포의 건배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158] 1976년 이래로 포의 무덤 참배를 모두 지켜보았다는 제프 제름(Jeff Jerome)은 만일 건배자가 전통을 끝내고자 마음먹었다면, 2009년 포 탄생 200주기를 마지막으로 삼은 것은 그럴싸한 일이라고 말했다.[159] 그 뒤로 포의 건배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포의 건배"가 75년만에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다.[160] 주요 작품 목록[원본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목록입니다. 시 ");"> 〈알 알라아프〉("Al Aaraaf") 〈애너벨 리〉("Annabel Lee") 〈종〉("The Bells") 〈바다 속 도시〉("The City in the Sea") 〈정복자 구더기〉("The Conqueror Worm") 〈몽중몽〉("A Dream Within a Dream") 〈엘도라도〉("Eldorado") 〈율랄리〉("Eulalie") 〈귀신들린 궁전〉("The Haunted Palace") 〈헬렌에게〉("To Helen") 〈레노르〉("Lenore") 〈타메를란〉("Tamerlane") 〈도래까마귀〉("The Raven") 〈울랄룸〉("Ulalume") 단편 소설 ");">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 〈아몬틸라도의 술통〉("The Cask of Amontillado") 〈마엘스트롬 속으로의 하강〉("A Descent into the Maelström") 〈M. 발데마르 사건의 진실〉("The Facts in the Case of M. Valdemar") 〈어셔 가문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황금충〉("The Gold-Bug") 〈절름발이 개구리 또는 사슬에 묶인 여덞 마리 오랑우탄〉("Hop-Frog; Or, the Eight Chained Ourangoutangs") 〈심술궂은 임프〉("The Imp of the Perverse") 〈라지어〉("Ligeia") 〈적사병의 가면극〉("The Masque of the Red Death") 〈모렐라〉("Morella")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The Murders in the Rue Morgue") 〈타원형 초상화〉("The Oval Portrait") 〈구덩이와 진자〉("The Pit and the Pendulum") 〈성급한 매장〉("The Premature Burial")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The System of Doctor Tarr and Professor Fether") 〈고자질하는 심장〉("The Tell-Tale Heart") 기타 ");"> 《정치꾼》(Politian, 1835년) - 포의 유일한 희곡 《낸터킷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 of Nantucket, 1838년) -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 〈열기구 보고서〉("The Balloon-Hoax", 1844년) - 실화를 가장한 낚시 기사 〈작법 이론서〉("The Philosophy of Composition", 1846년) - 소논문 《유레카: 산문시》(Eureka: A Prose Poem, 1848년) - 소논문 〈시의 원리〉("The Poetic Principle", 1848년) - 소논문 〈등대〉("The Light-House", 1849년) - 미완성 유고 ==================================== 포 "영혼이 없다" 독설 등 대립…뒤늦게 첫 동상 설치 (서울=연합뉴스) 류창석 기자 = 19세기 미국의 가장 독창적인 시인이자 소설가·비평가로 손꼽히는 에드거 앨런 포(1809~1849)가 고향인 보스턴시와 화해를 이뤘다. 보스턴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18개월 만에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어머니마저 2살 때 숨지면서 고아 아닌 고아가 된 포는 생전에 자만심에 넘치는 보스턴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교훈적이라고 폄하했었다. 포는 보스턴 출신 작가들이 자신들의 시와 소설 등의 작품을 노예제 철폐와 여성인권, 사회 개혁과 같은 자신들의 명분을 주장하는 데 사용하면서 교훈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하고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의 존재 목적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보스턴 출신 작가와 작품들을 보스턴 코먼 공원 내 '개구리 연못'에 빗대어 연못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라고 조롱했으며 보스턴 시민들을 향해서는 "영혼이 없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보스턴 출신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포의 간결한 형식이 마치 TV광고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하면서 포의 '갈까마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조롱했다. 포는 시인인 헨리 롱펠로의 작품에서는 표절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롱펠로의 전기작가는 나중에 이런 주장에 일부 타당성이 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포는 또 '보스턴 이브닝 트랜스크립트'의 편집장인 코넬리아 웰스 월터와도 끈질긴 대립을 계속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포와 보스턴의 관계가 이처럼 틀어지면서 볼티모어나 필라델피아, 뉴욕, 리치먼드 등과 달리 그동안 포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나 동상조차 없었던 보스턴에 5일(현지시간) 포의 동상이 설치되면서 양측의 화해가 이뤄졌다고 뉴욕타임스와 보스턴글로브 등이 보도했다. 포의 생가 부근에 있는 코먼 공원 인근에 들어선 포의 동상 제막식에는 미국의 계관시인이었던 로버트 핀스키 보스턴대학 교수를 비롯해 문단 및 각계 인사 약 150명이 참석했다. 마틴 J 월시 보스턴 시장은 제막식에서 "이제 고향이 보스턴인 포를 보스턴시와의 연고로 기려야 할 시간"이라고 환영했다. 포의 기념 동상 문제는 포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지난 2009년 보스턴 칼리지의 한 대학원생이 영문학과의 폴 루이스 교수에게 보스턴은 왜 미국의 위대한 작가인 포를 기리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지를 물으면서 관심이 촉발됐다. 토머스 메니노 당시 보스턴 시장도 "포는 미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면서 포의 재평가 작업에 개입했다. 이에 따라 보스턴 공립도서관이 포 전시회를 후원하고 한 향토사학자가 에드거 앨런 포 보스턴협회를 창설, 모금 운동을 펼친 끝에 동상 제막의 결실을 보았다. 폴 루이스 교수는 포는 롱펠로의 인기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역사는 이 같은 포의 예상이 옳았음을 입증했다면서 역사는 보스턴 역시 포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도 입증했다고 말했다. ==================================      에드거 앨런 포우. 19세기 초,중엽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 평론가이며 동시에 추리 소설의 막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 이 소설가는 그 인생이 매우 불우했다. 친아버지는 가족을 버렸고 어머니는 그가 아기일 때 죽었다. 그는 나름 넉넉한 버지니아주의 어느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지만 10대 후반 경 양아버지와 다툰 후 사실상 의절했다. 의절 사유는 포우의 장래 문제, 그리고 양아버지가 돈을 안 대주자 자금 마련하겠다고 포우가 도박에 손을 댄 것이 컸다. 양어머니의 죽음으로 잠시 화해한 적도 있지만 곧 다시 갈라서 평생 왕래를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문학가이자 편집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가정 형편은 좋은 편이 되지 못했다. 어린 사촌 여동생 버지니아와 결혼했지만 버지니아는 결핵으로 시달렸고 집안에 난방을 땔 처지가 못 되서 장모랑 포우, 어린 아내가 서로 손 맡잡고 가까이 있어야 했을 지경이었다. 갈까마귀 등 몇 작품이 성공하기는 했지만 정작 그에게 떨어진 돈은 거의 푼돈이라 도움이 안 됬다. 이런 상황에서 포우는 잠시 사관학교에 재직했을 때부터 손댔던 술에 손을 대었고 알콜 중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술을 마셔댔다. 오죽하면 동료 롱펠로는 '술로 인생을 몰락한다면 그대의 이름은 에드거' 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이후 뉴욕으로 이주하며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고 잠시 버지니아의 건강이 좋아지자 술도 끊었고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외치나 했지만 버지니아의 건강이 악화되며 다시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버지니아가 죽자 포는 술을 엄청나게 마셔대었고, 아편 과다 복용을 통한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슬픔을 이겨냈다. 그는 여류 문학가 사라 휘트먼과 잠시 관계가 좋아져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으나 사라 휘트먼의 부모가 앨런 포우의 음주를 잘 알고 이를 거부해버렸기에 불발로 그쳤다. 이후 그는 어릴 적 약혼녀였던 과부 사라 로이스터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근데 정작 사라 로이스터는 일설에 의하면 그의 몰골을 보고 의사부터 만나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에 의하면 그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확실한 건 그가 자신의 숙모인 클렘을 데려오기 위해 1849년 9월 28일 볼티모어에 들렀다는 것이다. 이 때 그는 볼티모어의 한 병원에서 처참한 몰골을 한 상태로 목격되었으나 의사를 만나지 못했고 그 뒤 행적은 다시 묘연해졌다.  이후 10월 3일 앨런 포우는 볼티모어의 투표소(혹은 길가나 교회 병원 앞)에서 쓰러진 채로 조셉 W 월커란 인물에 의해 발견되었다. 월커는 당시 그가 매우 절망적이고 즉시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혼수 상태 혹은 빈사 상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설에 의하면 포우는 이 당시 "누구든 나를 생각하면 당장 나를 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결국 10월 7일 "신이시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 혹은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이상 애디는 없다."란 말을 한 뒤 사망했다.    그가 과연 9월 28일~10월 3일의 기간에 무엇을 했는지, 또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였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건 술. 실제로 그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스노드그라스는 그가 술로 인해 죽었다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는 열렬한 금주법 지지자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포우는 이 무렵 금주회에 가입하는 등 술을 끊으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고, 어느 정도 금주에는 성공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를 진찰했던 다른 의사는 1885년 포우는 술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당뇨병이나 희귀한 뇌질환의 발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고 광견병의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그 당시가 선거철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선거에 개입한 뒷골목 건달들이 주정뱅이들에게 옷을 여러번 입혀서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여러 투표소를 돌아다니며 특정 후보를 찍게 한 뒤 주정뱅이를 구타하거나 약을 먹여 죽이는 일이 빈번했는데 포우가 그 희생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2006년 경의 조사에서는 그가 수은 중독 혹은 비슷한 중금속 중독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동시에 콜레라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는데 중금속 중독의 경우 과연 그가 치사량에 해당하는 중금속이나 수은과 접촉했는지의 문제가 남게 된다. 아니면 이게 오랫동안 그의 몸 속에 쌓여있었던가.. 하여튼 그의 마지막 며칠 간의 행적이 불분명한데다가 처음에는 그래도 멀쩡했던 인물이 발견되었을때는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둥 불가사의하고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기에 그의 죽음의 이유, 그리고 그의 마지막 행적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갈 까 마 귀 / 에드거 앨런 포 언젠가 쓸쓸한 한밤중  내가 피로와 슬픔에 젖어  잊혀진 전설의, 기묘하고 신비로운  얘기책을 떠올리다가  선잠이 들어 머릴 꾸벅일 때  갑자기 들려왔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누군가 살며시  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누가 왔나 봐"난 혼자 중얼거렸지.  "방문을 두드리기만 하며  딴 짓은 않고"  아, 똑똑히 기억나네.  그건 음산한 겨울이었어.  타다 남은 검불 하나하나가  마루 위에 유령처럼  그림자를 새겨놓았던-.  난 간절히 원했지.  아침이 빨리 와주기를-  나의 책에서 슬픔의 마지막 장을-그 슬픔은 잃어버린 레노어를 위한 것-  찾아내 빌리려 했으나  그것은 헛일이었어.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지은  세상에 둘도 없는  찬란히 빛나던 그 소녀는  지금은 여기  영원히 이름 없이 누워 있네.  자줏빛 휘장마다  비단결 흐릿한 슬픔이  스치는 소리는  나를 떨게 하네.  한번도 느껴본 적 없던  환상의 공포가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네.  그래서 이제, 두근거리며  뛰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나는 일어서서 되풀이 말하네  "어떤 방문객이 문 밖에서  들어오기를 청하고 있군"  "어떤 늦은 방문객이  문 밖에서 들어오기를 청하고 있어"  "그것뿐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좀더 단단해진 나의 영혼은  더 이상 주저치 않네.  "여보세요. 남자분이든 귀부인이든"  -나는 말했지-  "저의 실례를 용서하소서"  "사실 저는 선잠이 들었었고  그렇게도 부드럽게 당신은  문을 두드리며 오셨습니다.  그처럼 약한 소리로  문을 두드리며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소리를 잘 듣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나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지.  그곳에는 한밤의 어둠-  그것밖엔 아무것도 없었네.  어둠 속 깊숙이 뚫어보면서  오랫동안 나는 거기 서 있었지.  이상히 여기며,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전엔 감히 꿈꾸지 못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꿈꾸면서.  그러나 침묵은 깨어지지 않고  정적은  아무런 계시도 보여주지 않고  거기 들리는 단 한마디는  속삭이는 음성-"레노어!"  나도 속삭였지,  메아리처럼 웅얼거리는 그 소리 "레노어!"  단지 이것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었네.  몸을 돌려 방안으로 돌아와,  내 몸 안 모든 혼이 불타오르자,  곧 나는 다시 들었지,  전보다 더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  "분명해"  -나는 말했지-  "분명히 저것은  창살에 무엇이 있기 때문이야  그럼 좀 볼까,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그래서 이 신비를 밝혀 봐야지  마음을 잠시 진정시킨 후  이 신비를 밝혀 보리라"  "그것은 바람,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덧창문을  갑자기 열어젖혔을 때,  펄럭이며 파닥이며  그곳에서 걸어나온 건  성스러운 태고로부터 온  위엄 넘치는 갈가마귀.  조금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잠시도 멈추거나 주저치 않고  그는 공작이나 귀부인의 몸가짐으로  내 방 문설주에 걸터앉았다-  문 위에 놓인 팔라스의 흉상 위에  날아올라 걸터앉았지.  다만 그것뿐이었어.  그러고 나서 흑단처럼 새까만  이 새는  그 얼굴 생김생김  신중하고 엄격한 표정으로  내 슬픈 환상을 속여  미소로 변하게 하네.  "볏을 잘라내고 밀어 버렸으나  그대는 분명 겁쟁이는 아니로군"  나는 말했지-  "밤의 피안을 떠나 방랑하는  소름 끼치게 냉혹한  태고의 갈가마귀여-  한밤중 지옥의 해변에서는  그대의 고매한 성명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 주구려"  갈가마귀는 말했지.  "이젠 끝이야"  나는 크게 경탄했지.  이 희귀한 새가 그처럼  쉽사리 대답하는 것에  허나 그 대답은 별 의미도 없고  믿을 만한 것도 아니었던 것-.  이제껏 살았던 사람 중에선  침실문 위에서 새가 앉아  축복하는 걸 본 사람이 없다는 것에  우리 모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침실의 문설주 위  조각된 흉상 위에  새든 짐승이든 간에  "이젠 끝이야"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그러나 그 갈가마귀는  평화로운 흉상 위에 외롭게 앉아  그 한마디밖엔 말하지 않았지.  그 한마디 속에 그의 영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는 듯이.  그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깃털 하나 펄럭이지 않고 있었네.  내가 혼잣말하는 순간까지도  "다른 친구들이 모두 날아갔었지-.  아침이 되면  저 새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리,  나의 희망들이 그렇게 날아갔듯이"  그러자 그 새는 말했네.  "이젠 끝이야"  그렇게 때맞게 나온 대답으로  정적이 깨어진 데 깜짝 놀라  나는 말했지.  "분명해  저것이 말하는 것은  어떤 불행한 주인에게서 배운-  유일하게 간직한 한마디.  무자비한 재앙의 신에게 쫓겨  더욱더 빨리 쫓겨  그 노래는 마침내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만 남았지.  그의 희망이 여신의 슬픈 노래도  음울하고 무거운 짐으로만 남았지  "끝이야- 이젠 끝이야"라는-  그러나 아직도 갈가마귀는  나의 슬픈 마음을 속여  미소로 변하게 하네.  나는 곧장 쿠션 있는 의자를  새와 흉상이 있는 방문 앞으로  굴려다 놓고  푹신한 벨벳 천 위에서  공상과 공상의 사슬을 이어본다.  이 태고적 불길한 새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이 냉혹하고 희귀하고 소름 끼치고 수척한,  그리고 불길한 태고적 새가  "이젠 끝이야"라고 울어대는  의미는 무얼까 하고.  이런 추측에 난 몰두해 있었지만  그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내 심장까지 타들어 오는  새에게는  한마디 비치지도 않고-  계속 이처럼 마음속으로  점을 치며 앉아 있었지.  등잔불빛이 방긋 웃음짓는  쿠션의 벨벳 장식 위로  편안하게 머리를 기댄 채  그러나 등잔불이 방긋 웃음 짓는  보랏빛 벨벳 장식 그 위에  그녀는 이제 다시는  기대지 못하네. 아, 이젠 끝이야!  그때 공기가 더욱 짙어지면서  -그렇게 여겨졌다-  향기가 가득 흘러나왔지.  술 장식 달린 방바닥에  희미한 발자국들을 반짝이며  천사들이 흔들고 다닌  향로로부터-.  "비참한 자여"나는 스스로에게 외쳤네.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빌려주셨어.  이 천사들 편에 너에게 보내주셨지.  진통제를-  너의 레노어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진통제와 시름 잊게 하는 약을-.  들이켜라, 오, 이 고마운 약을  들이켜고  잃어버린 레노어를 잊어 버려라!"  갈가마귀는 말했네.  "이젠 끝이야"  "예언자여!"-나는 말했지.  "마물이여, 새든 악마든 그러나 예언자여!  신의 뜻으로 보내졌든  폭풍에 날려왔든  황량한, 마술에 걸린 이곳 황무지  공포의 신이 붙은 이 집에  두려움 없이 날아든 새여!  청하노니 내게  진심으로 말해 주오  있소이까?-길르앗에도  슬픔을 고치는 향이 있는지?  제발 내게 말해 주오"  갈가마귀는 말했네.  "이젠 끝이야"  "예언자여!"-나는 말했지.  "마물이여, 새든 악마든 그러나 예언자여!  우리를 굽어보는 저 천국과  우리 둘 다 섬기는 신에 걸고  슬픔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 가련한 영혼에게 말해 주오.  저 멀리 에덴에서도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지은  성스러운 소녀를 껴안을런지-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지은  세상에 둘도 없이 빛나는 소녀를"  갈가마귀는 말했지.  "이젠 끝이야"  "그 한마디를 우리의  작별 인사로 삼자. 그대가  새든 악마든!"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  "폭풍 속으로, 밤의 피안으로  돌아가 버리라!  그대의 혼이 말하는 그 거짓을  상징하는 검은 깃털 하나도  남기지 말고!  나의 고독을 깨뜨리지도 말고-  내 문설주 위의 반신상을 떠나라!  나의 심장을 쪼던 부리도  가지고서!  그대의 모습을 나의 문으로부터  거두어라!"  갈가마귀는 말했지.  "이젠 끝이야"  그러고도 갈가마귀는 날아가지 않고  아직도 앉아 있었네.  나의 침실문 바로 위  팔라스의 창백한 흉상 위에  아직도 앉아 있었네.  그의 두 눈을 꿈꾸고 있는  악마의 온갖 표정을 담고-  새를 흝어내리고 있는 등잔불빛이  마루 위에 그의 그림자를  던져주는데  마루 위에 누운 채 떠돌아다니는  나의 영혼은  그 그림자를 떠나서는  두 번 다시 들리우지 못하리라-  "이젠 끝이야" 는 시에 있어서의 반복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인가를 나타낸다. 포의 평론 은 에 대한 스스로의 해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된다. " 반복을 사용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그 시를 스탠자(연)로 나누는데 불과하다. 즉 반복은 각 연의 결미가 힘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좋은 음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곁들여 확대한 어세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한다. 이에 대한 고찰은 O라는 장음이 가장 음향 좋은 모음이라는 것이며 또 그와 함께 R가 가장 효과 있는 자음임에 틀림없다는 데에 이른다. 반복의 음은 이렇게 결정되었으므로 이 음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나의 시의 색조로서 예정한 우수에 가장 적합한 말을 골라잡을 필요에 이르렀다. 그러한 점에서는 'Nevermore'란 말을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사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이 말이었다." 탁월한 작품으로 꼽히는 는 그가 죽기 4년 전에 발표되었던 시로서 그를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한 작품이다. 자기 작품에 대해서 스스로 세밀한 이론적 뒷받침을 시도한 예는 별로 찾아 볼 수 없지만 포는 그의 문학이론의 배경을 이루는 을 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의 뒷받침으로 시종하였다. 사실 포가 시에 있어서의 음악적 리듬을 누구보다 중시한 시인이라면 는 이러한 포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시이며 그것은 가 작품 중 'Nevermore'를 수 없이 되풀이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번역시의 어려움은 바로 이런 곳에서 가장 커다란 난관에 부딪친다. 가령 이 시집에서 'Nevermore'를 편의상 '이젠 끝이야'로 번역했지만 포가 중시한 언어의 음악적 효과의 면에서 본다면 이 말 자체의 번역은 거의 뜻이 없는지 모른다.   - 정규웅, 에서 애드가 앨런 포, 장미꽃 세 송이와 코냑 주인은 누구?  2월 5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추리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드가 앨런 포의 사후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제 다 끝났다'는 뜻 모를 유언을 남긴채 40년 후 실제로 일어날 사건을 예언한 작품을 남겼다. 그가 죽고 난 100년 뒤 그의 묘지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같은 일이 세상에 최초로 밝혀진 것은 1949년 이었다.        애드가 앨런 포 사망 100주년, 한 기자는 새벽 일찍 포의 무덤을 찾았다. 이후 그는 누군가 놓아두고 간 장미꽃 세 송이와 꼬냑 병을 발견하게 됐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기사를 내보냈다.  장미꽃 세 송이와 코냑 병은 1년 뒤에도, 또 30년 뒤에도 애드가 앨런 포의 무덤에 있었다. 그는 이후 애드가 앨런 포의 팬들에 의해 '포의 건배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과연 장미꽃 세 송이와 코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제프 제톱은 장미 세송이는 포와 그의 아내 버지니아 포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 칭했고 코냑은 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애드가 앨런 포는 26살이 되던 해 13살의 사촌동생 버지니아 클렙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강한 반대에도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고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끽했다. 하지만 24세의 나이에 아내가 병으로 사망했고 애드가 앨런 포 역시 코냑에 의지하다가 2년 후 사망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또 다른 주장도 제기됐다. 의문의 방문객은 애드가 앨런 포를 살해한 범인이라는 것이다.  포가 사망하기 5일 전부터 그의 행적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포가 발견된 날은 지역 정치인의 선거 날이고 당시 볼티모어는 정치적으로 과도한 시절이었다. 포가 사라진 5일간 시민들에게 은밀히 마약을 투약하거나 술을 먹여 강제 투표에 동원했다.  실제 애드가 앨런 포의 묘지에는 처음 장미와 코냑을 가져다 준 분은 사망했으며 두 아들이 대를 잇고 있다고 적힌 쪽지가 놓여져 있었다. 이에 살해범이 죄를 씻기 위해 이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  애드가 앨런 포의 200번째 생일을 맞이 한 2010년 수 천명의 사람들은 밤새 '포의 건배자'를 기다렸지만 다음 해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애드런 앨런 포의 죽음 역시 현재까지 미스터리에 쌓여있다.  [뉴스엔 조연경 기자] =================================== 'The Raven' (갈가마귀) (Edgar Allan Poe, 1845)   Once upon a midnight dreary, while I pondered, weak and weary, Over many a quaint and curious volume of forgotten lore, While I nodded, nearly napping, suddenly there came a tapping, As of some one gently rapping, rapping at my chamber door. “'Tis some visitor”, I muttered, “tapping at my chamber door ─ Only this, and nothing more.”   언젠가 쓸쓸한 한밤중에 내가 잊고 있던 분야의 기묘하고 흥미로운 책들에 관해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며 졸고 있을 때 어디선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 마치 누군가 내 방문을 가볍게 똑똑 두드리는 것 같이. “이건 손님이 와서 내 방문을 두드리는 거야” 나는 중얼거렸지. “그것 뿐이야, 다른 일은 없었어.”   Ah, distinctly I remember it was in the bleak December, And each separate dying ember wrought its ghost upon the floor. Eagerly I wished the morrow; ─ vainly I had sought to borrow From my books surcease of sorrow ─ sorrow for the lost Lenore ─ For the rare and radiant maiden whom the angels name Lenore ─ Nameless here for evermore.   아, 나는 분명히 기억해. 그때는 황량한 12월이었지. 난로의 꺼져가는 등걸이 마루 위에 귀신같은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지. 나는 빨리 아침이 오기를 간절이 원했어. 책 속에서 나의 슬픔ㅡ 죽은 리노어에 대한 슬픔이 끝나기를 간구했지만 헛일이었어. 천사들이 ‘리노어’라고 이름지어 준 귀하고 빛나는 아가씨. 이 세상에서 이제는 없어진 그 이름.   And the silken sad uncertain rustling of each purple curtain Thrilled me─ filled me with fantastic terrors never felt before; So that now, to still the beating of my heart, I stood repeating “'Tis some visiter entreating entrance at my chamber door─ Some late visiter entreating entrance at my chamber door;─ This it is, and nothing more.”   그리고 자줏빛 커튼마다 알수 없는 슬픔이 스치는 소리가 나를 떨게 하고 ─이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공포로 채웠지. 그래서 이번에는 떨고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나는 일어서서 반복했어. “이건 손님이 내 방문 앞에서 들어오려고 간청하는 거야─ 어떤 밤늦은 손님이 내 방문 앞에서 들어오려고 간청하는 거야─ 그것 뿐이야. 다른 일은 없었어.”   Presently my soul grew stronger; hesitating then no longer, “Sir,” said I, “or Madam, truly your forgiveness I implore; But the fact is I was napping, and so gently you came rapping, And so faintly you came tapping, tapping at my chamber door, That I scarce was sure I heard you”─ here I opened wide the door;─ Darkness there, and nothing more.   이윽고 나의 정신은 좀더 강해졌어, 그때 주저하지 않고 “선생님, 아니, 귀부인” 하고 나는 말했지. “정말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사실 저는 선잠이 들었고 그처럼 조용히 저의 방문을 두드려 주었는데 제가 미쳐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 자, 제가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둠뿐 아무도 없었어.   Deep into that darkness peering, long I stood there wondering, fearing, Doubting, dreaming dreams no mortals ever dared to dream before; But the silence was unbroken, and the stillness gave no token, And the only word there spoken was the whispered word, “Lenore!” This I whispered, and an echo murmured back the word, “Lenore!”─ Merely this, and nothing more.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는 오래도록 거기에 서 있었지. 의아해 하며, 두려워 하며, 의심하며, 꿈꾸면서-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아무도 꾸지 못한 꿈을. 그러나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고 정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거기에서 나온 유일한 말은 “레노어!” 하는 나의 속삭임이었어. 그리고 “레노어!” 하고 메아리가 즉시 돌아왔지- 단지 이것뿐 다른 일은 없었어.   Back into the chamber turning, all my soul within me burning, Soon again I heard a tapping somewhat louder than before. “surely,” said I, “surely that is something at my window lattice: Let me see, then, what thereat is, and this mystery explore ─ Let my heart be still a moment and this mystery explore; ─ 'Tis the wind and nothing more.”   방으로 돌아온 뒤 내 마음은 다시 불타올랐지. 잠시후 또다시 똑똑 소리가 들렀는데 이번에는 더 큰 소리였거든. “맞아” 나는 말했지. “내 창문에 무엇인가 보였어. 그렇다면 무엇인지 알아 보아야지. 그리고 그 미스테리를 밝혀내야지. 나는 잠시동안 숨을 멈추고 그 미스테리를 조사했어. 그건 바람이었어, 다른 일은 없었어.”   Open here I flung the shutter, when, with many a flirt and flutter, In there stepped a stately raven of the saintly days of yore; Not the least obeisance made he; not a minute stopped or stayed he;But, with mien of lord or lady, perched above my chamber door ─ Perched upon a bust of Pallas just above my chamber door ─ Perched, and sat, and nothing more.   여기서 나는 덧문을 활짝 열어저쳤지. 바로 그때 날개를 수없이 퍼덕거리며, 옛날 성도시절의 거만한 갈가마귀 한 마리가 걸어 들어왔지,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잠시 주저함이나 머뭇거림도 없이. 그는, 그러나 마치 영주나 귀부인처럼 우아한 태도로 방문 위로 날아올라 문 위에 놓여 있는 팔라스 흉상 위에 올라 앉았지. 그냥 올라 앉았을 뿐 다른 일은 없었어.   Then this ebony bird beguiling my sad fancy into smiling, By the grave and stern decorum of the countenance it wore. “Though thy crest be shorn and shaven, thou,“ I said, “art sure no craven, Ghastly grim and ancient raven wandering from the Nightly shore ─ Tell me what thy lordly name is on the Night's Plutonian shore!”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때 이 흑단같이 새까만 새는 나의 슬픈 환상을 웃음으로 바꾸어주었지. 근엄하게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그의 표정 때문이었지. “비록 그대의 볏은 밀어버렸지만, 그대는” 하고 나는 말했지. “겁쟁이가 아니라 밤의 해안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기분 나쁘고 고집센 옛날 갈가마귀로구만. 밤에 플루토의 해변에서 그대의 고귀한 이름은 무엇인지 말해다오.” 갈가마귀 가로되 “네버모어”   Much I marvelled this ungainly fowl to hear discourse so plainly, Though its answer little meaning ─ little relevancy bore; For we cannot help agreeing that no living human being Ever yet was blest with seeing bird above his chamber door ─ Bird or beast upon the sculptured bust above his chamber door, With such name as “Nevermore.”   이런 희귀한 새가 그처럼 분명하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나는 감탄했지. 비록 그의 대답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다소 엉뚱한 것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 중에는 아무도 자기 방문 위에 앉아있는 새를 바라보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 없다는 것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 자기 방문 흉상 위에 앉아 있는 새인지 짐승인지.. 이름이 “네버모어” 라는.   But the raven, sitting lonely on the placid bust, spoke only That one word, as if his soul in that one word he did outpour. Nothing further then he uttered ─ not a feather then he fluttered ─ Till I scarcely more than muttered, “other friends have flown before ─ On the morrow he will leave me, as my hopes have flown before.”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러나 갈가마귀는 평화로운 흉상 위에 외롭게 앉아서 오직 한마디 말 밖엔 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쏟아낸 그 말 속에 그의 영혼이 다 들어있는 것처럼. 그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고 깃털 하나도 펄럭이지 않았다 ─ 내가 혼잣말하는 순간까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아침이 되면 저 새도 나를 버리고 떠나겠지, 마치 나의 희망이 날아 버린 것처럼─” 갈가마귀 가로되, “네버모어”   Wondering at the stillness broken by reply so aptly spoken, “Doubtless,” said I, “what it utters is its only stock and store Caught from some unhappy master whom unmerciful Disaster Followed fast and followed faster so when Hope he would adjure ─ Stern Despair returned, instead of the sweet Hope he dared adjure“ ─ That sad answer, “Never─ nevermore.”   그처럼 때맞춰 나온 대답으로 정적이 깨어진 데 깜짝 놀라면서 “틀림 없어” 하고 나는 말했지. “새가 말한 것은 어떤 불행한 주인에게 배워서 간직한 유일한 말일거야, 그렇게 빨리 일어난 무자비한 재앙 때문에 죽은 그 주인한테서. 그가 그토록 간청한 달콤한 희망 대신에 더빨리 준엄한 절망으로 돌려준 그 재앙. 그 슬픈 대답은 “네버, 네버모어”   But the raven still beguiling all my sad soul into smiling, Straight I wheeled a cushioned seat in front of bird, and bust and door; Then, upon the velvet sinking, I betook myself to linking Fancy unto fancy, thinking what this ominous bird of yore ─ What this grim, ungainly, ghastly, gaunt and ominous bird of yore Meant in croaking “Nevermore.”   그러나 아직도 갈가마귀는 모든 나의 슬픈 마음을 미소로 바꾸어 주고 있으므로, 나는 곧장 쿠션 달린 의자를 새와 흉상이 있는 방문 앞에 굴려다 놓고 푹신한 벨벳 천 위에서, 나는 스스로 환상과 환상의 사슬을 이어보았다. 이 태고적 불길한 새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이 냉혹하고 희귀하고 소름끼치는 비쩍 마른 불길한 태고적 새가 “네버모어” 라고 깍깍대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This I sat engaged in guessing, but no syllable expressing To the fowl whose fiery eyes now burned into my bosom's core; This and more I sat divining, with my head at ease reclining On the cushion's velvet lining that the lamp-light gloated o'er, But whose velvet violet lining with the lamp-light gloating o'er, She shall press, ah, nevermore!   이렇게 나는 추측에 몰두해서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표현하지 못한채 그 불꽃같은 두 눈이 내 심장으로 타들어오는 그 새에 대해서. 이런 저런 예측을 하면서 앉아 있었다, 램프 불빛이 비추는 쿠션 벨벳 장식 위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댄채. 그러나 램프 불빛이 비추는 그 보랏빛 벨벳 장식 위에는, 아, 이제 그녀는 더이상 기대지 못하게 되겠지.   Then, methought, the air grew denser, perfumed from an unseen censer Swung by Angels whose faint foot-falls tinkled on the tufted floor. “Wretch,” I cried, “thy God hath lent thee ─ by these angels he hath sent thee Respite─ respite and nepenthe, from thy memories of Lenore; Let me quaff this kind nepenthe and forget this lost Lenore!” Quoth the raven “Nevermore.”   그때, 방안의 공기가 점점 짙어지는 것 같더니, 천사들이 흔들고 있는 향로에서 나온 향기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들이 신고 있는 술장식 달린 신발들이 반짝이며 마루 위에서 딸랑거렸다. “불쌍한 자여” 나는 울부짖었다. “그대의 하나님이 그대를 빌려주셨어. 천사들 편에 그대를 보내주셨어. 멈추어 다오, 레노어에 대한 그대의 추억을 멈추어다오. 나에게 이 망각의 약을 마시고저 세상에 간나의 레노아를 잊게 해 다오. 갈가마귀 가로되 “네버모어”   Prophet!” said I, “thing of evil!─ prophet still, if bird or devil! ─ Whether Tempter sent, or whether tempest tossed thee here ashore, Desolate yet all undaunted, on this desert land enchanted─ On this home by Horror haunted─ tell me truly, I implore ─ Is there─ is there balm in Gilead?─ tell me─ tell me, I implore!” Quoth the raven “Nevermore.”   “예언자여!” 나는 말했지, “사악한 것- 아직도 예언자라면, 만일 새나 악마라도!-, 신이 보내었든, 폭풍이 그대를이 황량한, 마술에 홀린 황무지에 보냈든. 공포의 귀신에 홀린 이 집에 겂없이 날아든 새여, 간청하노니 내게 진정으로 말해 다오. 길르앗에도 슬픔을 고치는 향유가 있는지? 제발 내게 말좀 해 다오.” 갈가마귀 가로되 “네버모어 ”   “Prophet!” said I, “thing of evil─ prophet still, if bird or devil! By that Heaven that bends above us─ by that God we both adore─ Tell this soul with sorrow laden if, within the distant Aidenn, It shall clasp a sainted maiden whom the angels name Lenore ─ Clasp a rare and radiant maiden whom the angels name Lenore.” Quoth the raven “Nevermore.”   “예언자여!” 나는 말했지, “사악한 것- 아직도 예언자라면, 만일 새나 악마라도!-, 우리를 굽어보는 저 천국과 ─ 우리가 둘 다 섬기는 하나님에게 걸고, 슬픔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 가련한 영혼에게 말해다오, 저 먼 아이덴에서도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지은 성스런 처녀를 껴안을 것인지.─ 천사들이 레노어라 이름지은 세상에 둘도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처녀를” 갈가마귀 가로되 “네버모어”   “Be that word our sign in parting, bird or fiend!” I shrieked, upstarting─ “Get thee back into the tempest and the Night's Plutonian shore! Leave no black plume as a token of that lie thy soul hath spoken! Leave my loneliness unbroken!─ quit the bust above my door! Take thy beak from out my heart, and take thy form from off my door!” Quoth the raven “Nevermore.”   “너의 그말로 우리의 작별 인사를 삼자, 그대가 새든 악마든”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 “폭풍 속으로 들어가서, 밤의 플루토 해안으로 돌아가 버려라! 그대의 혼이 말하는 그 거짓을 상징하는 검은 깃털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나의 고독을 깨뜨리지도 말고 ─ 내 문설주 위의 흉상에서 떠나라! 내 심장을 쪼던 그 부리도 가지고서, 그대의 거만한 모습도 나의 문에서 거두어 가거라!” 갈가마귀 가로되 “네버모어”   And the raven, never flitting, still is sitting, still is sitting On the pallid bust of Pallas just above my chamber door; And his eyes have all the seeming of a demon that is dreaming, And the lamp-light o'er him streaming throws his shadow on the floor; And my soul from out that shadow that lies floating on the floor Shall be lifted─ nevermore!   그런데 갈가마귀는 결코 날아가지 않고 아직도 않아 있었지, 아직도 앉아 있었지, 나의 방문 바로 위 팔라스의 창백한 흉상 위에. 그리고 그의 두 눈은 꿈을 꾸고 있는 악마의 온갖 표정을 모두 담고 있었고, 그 위에 걸려 있는 램프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마루 위에 던지고 있는데, 마루 위에 누워 있는 그의 그림자로부터 분리되어 내 영혼이 위로 들리는 일은 ─ 네버모어!   출처   [명시감상] '갈가마귀' (The Raven) - 에드거 앨런 포
1912    미국 시인 - 로버트 핀스키 댓글:  조회:4158  추천:0  2016-12-03
    로버트 핀스키의 詩 - 사무라이 노래 Paul Klee의 Dream City   Yesterdays by Miles Davis Samurai SSong (사무라이 노래) Robert Pinsky When I had no roof I made Audacity my roof. When I had No supper my eyes dined. When I had no eyes I listened. When I had no ears I thought. When I had no thought I waited. When I had no father I made Care my father. When I had No mother I embraced order. When I had no friend I made Quiet my friend. When I had no Enemy I opposed my body. When I had no temple I made My voice my temple. I have No priest, my tongue is my choir. When I have no means fortune Is my means. When I have Nothing, death will be my fortune. Need is my tactic, detachment Is my strategy. When I had No lover I courted sleep. 내게 집이 없었을때 나는 대담함을 지붕으로 삼았다. 내게 먹을것이 없었을때 눈으로 요기를 했다. 내게 눈이 없었을때 나는 귀기울였다. 내게 귀가 없었을때 나는 생각을 했다. 내게 아무 생각이 없었을때 나는 기다렸다. 내게 아버지가 없었을때 나는 배려함을 내 아버지로 삼았다. 내게 어머니가 없었을때 나는 질서를 받아드렸다. 내게 친구가 없었을때 나는 정막을 친구로 삼았다. 내게 적이 없었을때 나자신과 마주섰다. 내게 신전이 없었을때 나는 내음성을 나의 신전으로 삼았다. 내게 승려가 없으면, 내자신이 찬양대가 되리라. 내게 재산이 없으니 행운자체가 나의 재산이다. 나는 아무것도 갖은것이 없으니, 죽엄이 나의 행운이리라. 결핍함이 나의 전술이요. 초연함이 나의 책략이다. 내게 연인이 없었을때 나는 잠을 청했다. Robert Pinsky (1940 -)는 뉴저지 출신으로 렅거스대학에서 학사, 스탠포드대학에서 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에 출간한 "Sadness and Happiness" 이외에 여러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내놓았다. 그외에 그가 번역한 The Inferno of Dante(1994)와 폴란드출신 노벨상 수상시인인 Czeslaw Milosz의 The Separate Notebooks는 크게 인정을 받고있다. 1997년에서 2000년 까지는 미국계관시인 (Poet Laureate)의 자리에 있으면서 "The Favoirte Poem Project"를 주관하여 일반인이 즐기는 시에 관한 자료를 중심으로 세 권의 책자를 출판하여 시의 보편화에 큰 영향을 주고있다. 이 저서들이  American's Favorite Poems:The Favorite Poem Project Anthology(1999), Poems to Read (2002) 와 An Invitation to Poetry (2004)이다.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고 현재 보스톤대학의 교수로 있다. ~ 霧 城 ~                                                                                                                                           Samurai Song When I had no roof I made Audacity my roof. When I had No supper my eyes dined. When I had no eyes I listened. When I had no ears I thought. When I had no thought I waited. When I had no father I made Care my father. When I had no Mother I embraced order. When I had no friend I made Quiet my friend. When I had no Enemy I opposed my body. When I had no temple I made My voice my temple. I have No priest, my tongue is my choir. When I had no means fortune Is my means. When I have Nothing, death will be my fortune. Need is my tactic, detachment Is my strategy. When I had No lover I courted my sleep.         (Robert Pinsky)   사무라이 노래 지붕이 없을 때 난 담대함을 지붕으로 삼았다. 저녁거리가 없을 때 난 눈으로 식사했다. 눈이 없을 때 난 귀 기울였다 귀가 없을 때 난 생각을 했다 생각이 없을 때 나는 기다렸다  아버지가 없을 때 난 염려를 아버지로 삼았다. 어머니가  없을 때 난 세상 윤리를 껴안았다 친구가 없을 때 난 평온을 친구로 삼았다. 적이 없을 때 난 나의 몸에 대항했다 사원이 없을 때 내 목소리를 사원으로 삼았다. 사제가 없으니 나의 혀가 나의 찬양단이다 재산이 없을 때 내게는 운이 재산이다. 가진 것 하나 없으니 내 운은 죽음이 아닐른지 필요는 내 전술, 나의 전략은 초연함이다. 사랑해 줄 사람 없을 때 난 잠에 구애하였다.         (로버트 핀스키) 이 시는 일본의 사무라이와 직접 관련이 없다. 다만 일본 시와는 관련이 없지 않다. 시인은 어느 시 낭송회에서 “내가 ... 할 때 나는 ... 한다”는 말이 되풀이되는 14세기 일본시 낭송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마음에 깊이 남아 그 형식을 이용하여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제목은 “일본풍 노래” 정도의 뜻이 되겠다. Samurai: 사무라이. 일본의 무사 (계급).  Audacity: 대담. 과감. 거만. dined: dine=식사를 하다. 정찬을 하다. embraced: embrace=껴안다. 포옹하다. (주의, 신념을) 받아들이다. Quiet: 고요. 평온. 적막. opposed: oppose=대항하다. 맞서다. temple: 사원. 절. priest: 사제. 신부. choir: 합창단. means: 재산. tactic: 전술. detachment: 초연.  strategy: 전략. courted: court=구애하다. 유혹하다.       로버트 핀스키 Robert Pinsky (1940 _  ) 미국의 시인, 평론가, 소설가. 뉴 저지 주 롱 브랜치에서 출생하였다. 보스톤 대학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있고 1997년 이후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매서츄세츠 주의 뉴톤 코너에서 살고 있다. 시집으로 Jersey Rain (Farrar, Straus & Giroux, 2000); The Figured Wheel: New and Collected Poems 1966-1996 (1996), The Want Bone (1990); History of My Heart (1984); An Explanation of America (1980); Sadness and Happiness (1975). 등이 있고, 1999년에 Americans' Favorite Poems: The Favorite Poem Project Anthology (W.W. Norton & Company, Inc.)을 공동 편집하였다. 평론집으로 The Sounds of Poetry (Farrar, Straus, and Giroux, 1998), Poetry and the World (1988), The Situation of Poetry (1977), 번역으로는 The Inferno of Dante (1994), The Separate Notebooks (Czeslaw Milosz) 등이 있다.       美의회, 새 계관시인(계관(桂冠)詩人) 선정 (워싱턴 AP=연합(聯合)) 美의회는 28일 보스턴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는 시인 로버트 핀스키(56)를 미국(美國)의 새로운 계관(桂冠)시인으로 정했다. 핀스키는 미국 역사상 39번째 계관시인으로, 올가을부터 2년간 로버트 해스에 뒤이어 몇가지 의무 및 특전과 함께 연 3만5천달러의 보수를 받게 된다. 핀스키는 영어외의 외국어에도 능통할 뿐만 아니라 작품영역을 사이버스페이스로도 확장할 만큼 다재다능한 예인으로, 프로서 지포드 미의회 학술과장은 "그는 정말 팔방미인(八方美人)"이라고 평했다. 그는 번역은 물론 산문에도 탁월한 재능을 선보였으며 여느 시인과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시작(詩作)과 시론(詩論)을 발표하는데도 적잖은 관심을 기울여 일찍부터 주목을 모았다. 핀스키는 5개의 수상 시집을 낸데다 지난 94년 그가 새로이 영어로 번역해낸 단테의 "신곡"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紙의 도서상과 미국(美國)시인협회에서 주는 해럴드 모튼 랜든 번역상을 받기도 했다. 뉴저지州 롱 브랜치에서 성장한 핀스키 시인은 지난 80년대에 미국 지식인층이 즐겨 구독하는 뉴 리퍼블릭誌의 시편집장이었고 지금은 인터넷 주간지인 슬레이트의 詩부문 편집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의 계관시인은 풍족한 재정지원이 보장되기 때문에 생계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활동을 할 수 있으며 학교와 각종 모임, 의회 등에서 낭송회와 학술모임을 주관할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된다. 본래 영국(英國) 왕실 전속시인을 호칭하는 계관시인은 미국에서는 지난 85년까지 미의회 `詩담당 자문인'에게 붙여진 명칭으로 로버트 워런과 콘래드 아이켄, 로버트 프로스트 등 유명시인이 이 명예를 안았다. 85년부터는 美의회 자문인과 함께 명실상부하게 국가가 인정하는 `미국의 계관시인'이라는 명예 및 의무가 덧붙여졌다.
1911    미국 흑인 혼혈 녀성계관시인 - 나타샤 트레세웨이 댓글:  조회:4933  추천:0  2016-12-03
           흑인 혼혈 여성시인 나타샤 트레세웨이, 미국 19대 계관시인으로 선임돼     미국 의회도서관의 제임스 빌링턴 관장은 미국 19대 계관시인으로 미국의 오랜 인종주의적 유산과 모친과 연관된 비극적인 추억을 곱씹는 작품으로 유명한 나타샤 트레세웨이(Natasha Trethewey)를 선임했다고 7일 발표했다. 올해 46세인 트레세웨이는 어틀랜타 에모리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지금까지 3권의 시집을 펴냈고 이중 2006년에 출간한 세 번째 시집 ‘Native Guard'(흑인 경비병)으로 2007년 시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트레세웨이의 계관시인 선임은 로버트 펜 워렌 이래 남부 출신 시인으로 처음인데다, 1993년 리타 도브 이래 흑인 시인으로도 2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첫 시집도 30대 중반인 2000년에 펴냈고 가을께에야 네 번째 시집을 출간할 예정이어서 미국 시단에서나 주목을 받을 뿐,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더구나 현 계관시인 W. S. 머윈과 전임자인 필립 레빈이 모두 80대의 노장시인인데 비해 트레세웨이가 40대란 점 때문에도 그의 선임을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첫 번째 시집 ‘Domestic Work'(가사노동)은 제목 그대로 온갖 허드렛일에 시달리는 흑인 식모와 온종일 빨래만 하는 여성, 공장 여공의 고통과 슬픔을 노래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한 작품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낯모르는 여인 여덟명의 눈동자가 사진속에서 나를 뚫어질 듯 응시하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외친다....” 2002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 ’Bellocq's Ophelia'(벨로크의 오펠리아)는 사진작가 E. J. 벨로크가 20세기초 뉴올리언스에서 촬영한 흑인혼혈 창녀들의 모습을 보고 그중 한 창녀를 상상의 세계로 끌어들여 시적 영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트레세웨이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세 번째 시집 ‘Native Guard'(흑인 경비병)은 노예 출신으로 구성된 북군 흑인연대가 남군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활동했으나 포로들만 기릴 뿐, 경비병인 흑인들의 노고는 외면하는 남부 지역의 남북전쟁 관련 현충 활동을 지탄한다.   트레세웨이는 흑백 결혼을 금지한 미시시피주에서 1966년 흑인 어머니와 캐나다 국적의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트레세웨이가 어릴 때 부모는 이혼하고 어머니가 재혼했지만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가 다시 이혼했다. 트레세웨이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 비극은 그가 대학에 다니던 19세때 일어났다. 어머니가 이혼한 두 번째 남편에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 충격과 슬픔은 그의 시집에 스며든채 도처에서 깊은 회한을 소리없이 쏟아내고 있다.   2009년 4월말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던 트레세웨이는 자신의 계관시인 선임이 의외라는듯, “그저 얼떨떨할 뿐”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보통 차기 계관시인은 8월초에 선정되어 발표되는데 올해는 두달이나 앞당긴 6월초에 공표되었다. 트레세웨이는 오는 9월부터 시낭송회 등 여러 가지 관행적인 행사를 주관하면서 내년 늦여름까지 계관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출처] 흑인여성시인, 미국 19대 계관시인으로 선정돼|작성자 md4473    
1910    미국 계관시인 - 필립 레빈 댓글:  조회:4185  추천:0  2016-12-03
                              필립 레빈, 미국 18대 계관시인으로 뽑혀     미국 의회도서관의 제임스 빌링턴관장은 미국 18대 계관시인으로 디트로이트 노동자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한 시로 유명한 필립 레빈(Philip Levine)을 선임... 올해 83세의 레빈은 20여편의 시집을 펴낸 원로 시인으로 1995년에는 ‘담백한 진실’(The Simple Truth)이란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는 계관시인으로 선임된 뒤 전화 인터뷰를 통해 80대의 고령이지만 아직도 작품을 쓰고 있고 요즘에는 영국의 시인겸 소설가인 토머스 하디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하디가 90세가 다 되어 숨을 거뒀지만 죽기 직전까지 계속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속에 담긴 겸양의 깊은 의미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레빈은 미국 산업의 견인차 구실을 한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자랐다. 러시아계 이민자인 부모로부터 조상이 스페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레빈은 스페인 무정부주의와 스페인 내전상황에 깊숙이 빠져들기도 했다. 레빈은 5세때 아버지가 숨지면서 집안이 어려워져 캐딜락의 트랜스밋션과 시보레 기어, 차축 따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트럭 운전을 하기도 했다. 초기 시작품은 자신과 같은 노동자 계층의 삶을 노래하되, 분노를 감춘채 불굴의 강한 에너지를 표출시켰으나 만년에는 부드러움과 토머스 하디식의 겸양의 미덕이 깊이 스며있다.   미국 계관시인의 공식명칭은 Poet Laureate Consultant in Poetry to the Library of Congress이다. 꽤 긴 이름이다. 우리말로 옮긴다면 ‘시작(詩作)관련 의회도서관 계관시인 고문’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명칭에 의회도서관이 들어가는 것은 해마다 의회도서관 관장이 저명한 시인을 포함한 여러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 계관시인을 선임해 발표하기 때문이다. 의회도서관이 어떤 연유로 계관시인 선임을 주도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던 의회도서관장이 시단의 저명인사들과 그해의 계관시인과 협의해 7월이나 8월초에 차기 계관시인을 뽑아 발표하면 이 시인이 10월부터 그 다음해까지 계관시인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거나 행사를 주관하게 된다. 17대인 현재의 계관시인은 83세의 W. S. 머윈으로 레빈과 함께 최고령 계관시인 축에 들어간다.   [출처] 필립 레빈, 미국 계관시인으로 뽑혀|작성자 md4473  
1909    詩人은 절필할줄도 알아야... 댓글:  조회:5116  추천:0  2016-12-03
[ 2016년 12월 02일 08시 58분 ]     중국 신강(新疆) 거라준초원 겨울ㅡㅡㅡ   이성복 (李晟馥) [1952~] 詩는 '머리의 언어' 전복시키는 '몸의 언어'  “여배우의 모습 밑에서 수녀를 사랑하다니!…”  19세기 프랑스 작가 네르발의 ‘실비’라는 소설의 이 한 구절은 30년의 내 문학적 삶의 도정을 드러내는 적절한 비유로 쓰여질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내가 문학을 애지중지해 왔던 것은 구두 밑창을 파고든 압정처럼 좀처럼 빠지지 않는 신경증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 제목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끌어와 말하자면, 지난 세월 내 혼곤한 문학적 삶은 ‘야심’이라는 의지와 ‘문학’이라는 표상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대체 난공불락의 그 신경증적 야심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까닭으로 하필 문학이라는 탄두를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뒤에 전해들은 이야기로 조립된 것이겠지만, 어린 시절 내 최초의 기억은 시골 마을에서 이사를 가는데 두어 살 된 아이가 한사코 떼를 써서 소를 몰고 가는 장면이다.  이를테면 그 최초의 나이테 위에 오랜 세월 내 삶은 닮은꼴을 이루며 덧붙여졌고, 출세지상주의적인 한 소년이 열혈 문학청년으로 바뀌었다 해서 그 나이테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 출세 지상주의 소년의 변신  처음 문학에 맛들이기 시작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별나게 문학이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도 문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학에 대한 나의 신경증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문학 때문에 행복했고 문학 때문에 좌절했다. 마치 심한 몸살을 앓을 때 몸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분간할 수 없듯이, 지금 나는 대체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놈의 문학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문학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다. 아니다, 내가 문학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한참 문학에 미쳤던 보다 젊은 시절, 나는 대체 사람이 ‘어떻게 시 없이 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나 다방에서나 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었고, 그리하여 친구들은 하나 둘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시절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썼던 비유이지만, 지금 나에게 문학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랑하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그런 여자와 같다.  문학과의 신접살림은 첫 시집을 내기까지 3년쯤이나 계속되었을까, 그 이후로는 불화와 별거의 연속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까닭이 없지만, 지금에 와서 짐작되는 바로는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들이미는 신경증적인 야심이 애꿎은 문학을 볼모로 하여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장을 보호하는 갈비뼈가 부러지게 되면 날카로운 뼈끝으로 내장을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문학을 신주단지로 모시던 야심이 제 허영을 채우지 못하자 문학을 애물단지로 구박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완벽한 글쓰기’ 운운하며 글쓰기를 미루어 왔던 것도 무시당한 야심의 자기 합리화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자아 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 쪽의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의 행태가 신경증의 한 양상으로 분류되고 있고, ‘완벽주의’나 ‘미루기’라는 병명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문학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보다 정확히 말해 내 야심이 일으킨 것이고, 지난 세월 나는 내 살을 파먹으면서 이른바 ‘문학신경증’을 앓아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문제의 근원이 드러난 이상, 병과의 싸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며, 아무래도 이 싸움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 詩는 행복·좌절 동시에 안겨 그렇다면 일단 신경증적 야심을 괄호로 묶고 나서, 문학은 나에게 무엇인가. 동어반복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문학이 없었다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문학은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렌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치 현미경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육안으로 안 잡히는 갖가지 미생물들을 발견하게 되듯이, 문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베일에 가리어진 삶의 본모습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흙 속에 묻혀 있는 글자를 읽어내는 어린시절의 놀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문학의 본질이 들여다보는 것, 읽어내는 것, 발견하는 것이라면 꼭 그렇게 해야 할 까닭이 있느냐는 물음이 따를 것이다.  문학신경증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문학을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에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원의적(原義的) 의미에서의 ‘콤플렉스’, 즉 표층/심층, 거짓/진실, 추함/고움의 대립구조로 나타날 것이다.  문학을 통해 발견하는 심층, 진실, 고움은 캄캄한 지하실에서 켜 댄 한 개피 성냥불처럼 덧없고 무력하다. 그 불꽃은 우리를 위로해 주거나 해방시켜 주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불꽃이 사라져도 ‘우리가 보았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문제는 문학이라는 불꽃,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시라는 불꽃이 피어나는 곳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라는 것이다. 흔히 테니스 선수는 팔로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허리로 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팔로 공을 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의식할 때만 몸 전체가 돌면서 나오는 힘이 공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한 피아노를 칠 때 손목에 힘을 주면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힘이 손목에서 딱 끊어지고 손목 힘만으로 치게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머리는 제가 아는 것밖에 모른다. 머리는 상식과 체면의 자리이고 신경증의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공이나 피아노를 칠 때 라켓 헤드와 손가락을 의식하라거나, 돌을 실에 묶어 돌리거나 장도리로 못을 박을 때 돌과 쇠뭉치에 의식이 모인다는 이야기는 문학하는 사람에게도 의미 깊게 들린다.  헤드와 손가락, 돌과 쇠뭉치는 문학에서 바로 언어에 해당한다. 문학은 언어에 기대고, 기댈 뿐만 아니라 투신함으로써 머리의 개입을 막고 몸의 힘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캄캄한 밤 배 위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다 쓰레기통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는 해군수병의 이야기와도 같다.  몸의 언어 혹은 언어의 몸은 엄청난 돌파력으로 머리의 언어가 구축한 삶의 가건물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령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무릎에 안은 성모 마리아는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떠올리게 하며, 마야라는 이름은 환(幻)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야(maya)와 다른 것이 아니며, 다시 마야라는 말은 피 흐르는 심장을 주먹으로 움켜쥔 마야 문명의 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마리아/마야라는 이름을 통해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이는 미술에서의 스크래치라는 기법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 해달 생태서 작가운명 발견  며칠 전 나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에서 바다에 사는 해달의 행태를 보면서, 몸의 언어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그럴 듯한 은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에 사백 회 가량이나 물질을 하는 어미 해달은, 잠수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을 물위에 발랑 뒤집어 눕혀 놓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사 분이라 한다.  글쓰는 사람에게 어미 해달과 아기 해달은 한 몸이다. 그는 겉똑똑이 머리를 잠재워 두고 몸 속 깊은 곳을 들락거리며 쉬임없이 연상의 물질을 해대는 것이다.  해달이 먹이로 좋아하는 것은 조개류이다. 해달은 해변에서 주워온 돌을 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다 조개를 내리쳐 살을 꺼내 먹는데, 해달의 등뼈와 갈비뼈는 그 충격을 견뎌낼 만큼 견고하다. 재미있는 것은 해달이 조개의 빈 껍질을 배 위에 놓고 접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에게 조개 껍질은 언어가 아닐까.  언어는 글쓰는 사람 자신의 몸 위에서 갈라지고 부서지며, 딱딱한 일상의 외피를 벗고 나서야 비로소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속살을 걷어낸 한 언어의 껍질은 다른 언어의 속살을 담는 받침이 되는 것이다.  해달은 바다 밑에 뿌리를 두고 수십 미터 웃자란 해초 다발에 몸을 감고 잔다. 그것은 밤새 높은 파도에 떠밀려 가거나 해변이나 바위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의 언어로 글쓰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 글쓰기가 욕조를 타고 대서양 건너는 일과 같다고 했지만, 언어라는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것.  내가 본 프로에서 어미 해달은 폭풍이 몰아치던 밤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물질도 할 줄 모르는 아기 해달만 남아 떨고 있었다. 글쓰는 사람이여, 당신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가.  한국일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인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읍 오대리에서 아버지 이한구(李漢求)와 어머니 송정남(宋丁男)의 오남매 중 네째로 태어난다. 위로 누나 둘과 형,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1959년 상주 남부국민학교에 입학, 그후 서울과 지방의 여러 백일장에 참가하며 잠재되어있던 글쓰기 욕망을 밖으로 끄집어 낸다. 1963년 5학년 2학기에 서울 효창국민학교로 전학, 고모댁에서 기거 1965년 서울 중학교에 입학, 곧 형과 작은 누나가 올라와서 서대문구 천연동에 방을 얻어 비로소 안정된 생활. 이어 모든 식구가  서울로 솔거를 하여  이성복 일가는  서울생활을 시작 1968년 경기고등학교 입학. 교내 웅변반과 홍사단에 가입. 웅변반에서 나중에 국회의원이되는 유인태를 선배로 만난다. 고 2 때 교내 백일장 입선. 평론가 진형준과는 고교동창. 그때  이미 문학의  세례를 받고 있던 미래의 소설가  이인성을 한 해 후배로 만난다. 시인인 김원호  선생의 국어  시간을 통해서  끊어진 글쓰기를 다시 시작. 여러 장르의 글이 실린 등사판 [사조]를 묶는다. 고 2 때 [ 창작과비평 ]에서 김수영 추모 특집을 읽음 197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학과 입학,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부임한 김현 선생을 처음 만난다. 교양과정부 문학상에 시 [知, 不知]등을 투고하나 낙선. 1972년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형성]에 편집기자로 들어간다. 김열규 선생으로부터 딜런 토머스와 원형비평을 배운다. 토니오 크뢰거. 크눌프 등 독문학을 열심히 읽는다. 1973년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전홍표, 진형준과 교우. 4월에 해군 입대. 12주 훈련 끝에 해군 구축함 및 해군작전본부 근무. 카롯사, 릴케, 도스토예프스키, 니이체를 독서카드를 만들어  체크하면서  읽는다.  군복무중에 신문문예 투고도 할만큼 간간이 습작시를 만지나 다시 낙선 1976년 제대 후 복학.  불어에 대한 애정으로 열심히 공부.  황지우와 함께 교내 시화전을 하거나 정과리, 이인성,  진형준,  권오룡 등과 만난다.  산문집 [ 꽃피는나무들의 괴로움]에 실린 소설 [천씨행장]이 완성되고 [서시]가 씌어진다.  문리대 문학회 시화전이 열리고 황동규 시인을 처음 찾아가 인사한다. 1977년(25세) 김현 선생에게 노트 한 권 분량의 시를 보인다. 1977년 [ 문학과 지성 ] 겨울호에 [정든 유곽에서]와 [1959년] 두 편으로 등단.  졸업논문인 [폴 발레리 방법서설] 로 김봉구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한다 1978년 대학신문사 전임기자로 들어간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많은 시들이 이 시기에 씌어진다. 이성복이 '내 삶의 제1황금기'라고 말하는 시절. 김현 선생의 주선으로 [그날] 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거나 대학원 준비를 한다. 1979년 대학원에 진학. 대학원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유평근 교수를 만나게 된다. 소설가 김원일 씨가 상무로 있는 [국민서관]에서 아동문학서적의 교정 일로 8개월 가까이 근무한다. 1980년(28세) 서슬퍼런 5월에 같은 대학원 동기이던 김혜란과 결혼. 7월, 신군부 권력에 의해 [문학과 지성]이 폐간. 10월에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 지성사) 상재. 시인 박남철과 만나며, 오규원 선생의 주선으로 김혜순, 최승자 등과 도 알게 된다. 그리고 [문예중앙]에서 김광규, 윤재걸과 더불어 대담. 1981년 부인이 먼저 대구에서 직장을 잡는다. [보들레르에서의 현실과 신비]라는 석사 학위 논문 완성 1982년 대구 계명대학에 강의 조교로 부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그해 겨울에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대구에서 이성복은 이태수, 서종택, 이하석, 강현국, 이기철, 구석본, 최석하, 이문열 등과 만나 뒤에 남을 삽화를 만들어간다. 그가 편집 동인으로 참가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을 창간. 3월에 첫 아이 효원(曉遠) 출생 1984년 프랑스의 엑스-앙-프로방스에 부인과 함께 유학하면서, 처음으로 이국생활에서의 쓸쓸함과 환멸을 맛본다. 1985년 귀국.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 세째 아이 수유(茱萸)가 태어난다. 5월에 남해 금산 여행. 1986년 제2시집 [남해 금산](문학과 지성사) 출간 1987년 계명대 정문앞 대명한의원의 서찬호 선생으로부터 대학, 중용, 주역 등을 일 년 육개월 가까이 배운다. 1988년 계명대 중문과 교수들의 논어 윤독회에 참여, [문예중앙] 가을호에 [연애시와 삶의 비밀]을 창작 일기 형식으로 발표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란 박사학위 논문 완성. 제4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0년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과 [꽃 핀 나무들의 괴로움]이 살림에서 출간됨. 1991년 연암재단의 교수 해외파견 기금으로 파리의 Eoole pratigue des hautes etudes에 간다. 이성복의 기숙사방은 매주 토요일날 개방되어 여러 전공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서로의 학문을 교환. 이성복 삶의 '제2 황금기'. 이시기에 불교와 원불교 경전 등을 읽게 된다.불어로 쓴 논문 [역경으로 본 보들레르의 시적 여정]은 나중에 프랑스문학 연구지에 발표된다. 1992년 귀국. 계명대 미대 출신의 화가 이병헌과 교류.이병헌의 누드를 소재로 [소묘] 가 씌어진다. 1993년 제4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 지성사) 출간. [네르발 시 연구-역학적 해석의 한 시도](문학과 지성사) 간행. 1994년 (42세)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 불문과 부교수로 재직. 내려가는 삶의 바닥과 미궁                      -사십대의 퇴폐가 빚는 시의 지평       신범순(문학평론가) 7~80년대의 우리 역사가 새롭게 꿈틀거리도록 했던 시기에 자신의 인생중에서 가장 피끓는 세월,가장 창조적이고 야망에 가득 찬 젊음의 계절을 보낼 수 있었던 시인들의 사십대가 거기서 어떻게 비치는지  바라보기로 하자. 그들은 과연 자신의 젊은 계절 뒤에 찾아온 가을에 무엇을 해야하는 것일까? 과연 새롭게 시작할 무엇이 찾아오지는 않는 것일까? 이성복의 요즈음 시들은 을 들여다본다. 그러한 삶은 최승자가 말했듯이   위에 펼쳐져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성복은 그속에서 신비스러운 을 뜨고자 한다.         너의 살 속엔 천 개의 눈이 있다         심장의 파닥거림도 창자의 꿈틀거림도         다 가린 한 장의 이불 같은 살,         심장의 파닥거림과 창자의 꿈틀거림이         일으키는 천 개의 눈망울.                                                        - 「소묘」중에서 그 은 머리 속의 관념과 책 속의 관념들을 잊어버린 속 에서 눈을 뜬다. 그 은 더욱 많이 보고, 더욱 세밀히 보며, 서로 다르게 보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다.이러한 욕망은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 것일까? 다시금 세부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의미들을 쥐어짜 내어야 할 때, 더럽혀지고 부패해진,낡은 권력들의 냄새를 피울 뿐인 기존의 관념들, 지식들의 빛이 우리를 거치적거리게 하는 때,이러한 새로운 시선에서 욕망이란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성복의 그 은 일상의 넓은 표면을 민감한 촉수로 더듬는다.그것은 우리들의 정치적인 관심사나 형이상학적인 주제들 밖으로 빠져 나가 있는,지금까지 문학적 영역에서 별로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을 확대하고, 그 의미를 증폭시킨다. 그저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것들 속에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는 의미들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아내고자 하는 노력은 그의 시 도처에서 나타난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1」에서 언제나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길인 식당으로 가는 길을 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길은 자신의 일상생활의  사소한 한 측면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삶의 극적인 순간들도 죽음에의 압박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러한 사소한 순간들, 그 무덤덤한 순간들 속에서 진한 욕망과 슬픔의 진액을 짜낸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미세한 시선은 「파리」 같은 시에서 놀라움의 발견으로 그 가치를 높인다.초가을 한낮에 소파에서 벌어지는 파리 두마리의 에서 이 시는 를 발견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이성복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리키는 것인지, 또는 그러한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나름의 노력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3」에서 그것을 반인간중심주의적인 삶의 방식으로 소묘하는 듯하다.            아침부터 전해오는 새깃보다 가벼운 이 떨림, 나는 목구멍 눈구멍 다         열어놓고 떨림이 가시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기쁨의  시작인가, 불안인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한 마리 수줍은 짐승으로 만드는 떨림,이윽고 나는         내 옆에서 숨죽이고 있는 짐승들을 다만 내 눈시울로 떨게 한다  멀구나         멀어, 이 떨림이 멎는 곳은 어디인가                               -「높은 나무 흰 꽃은 燈을 세우고 3」 전문  지금까지 구축되어온 인간의 어떠한 지식이나 의미로도  붙잡아낼 수 없는 육체의 미묘한 감수성을 여기서 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자신의 육체가 인간주의적인 윤곽을 깨뜨리면서 세계에 대면하고 있는  순간을 이 이 포착한다. 이성복은 사십줄에 들어서서 비로소 이 육체의 떨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받아들이고, 몰두하며,고뇌했던 거창한 개념들과 가치들,의미들의 신성함에 대해 냉정하게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는 이제 인간들의 거대한 집단이 만들어낸 사회정치적 드라마들 밖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대신에 자신의 매우  사소한 개인적인 시선들 속에서 스스로를 구축해 나가고, 자신을 둘러싼 사물이나 가족들로만 그 작은 개인을 감싼다.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긴장된 떨림 속에서  새롭게 포착된  개인은  황지우의 느슨한 개인과 대립되는 것이면서,이 퇴폐의 시기에 마련되는 긍정적인 지평의 싹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개인을 인간들의 보다 넓은 관계의 망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한 인간이 들이켜야 할 보다 커다란 숨결인 타인들의 웅성거리는 삶이 그 속으로 스며들지 않게 되었다. 이성복의 시들은 사십대의 냉정한 어른을 갖게 되었지만, 외로움 또한 수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 속에 있는 이라는 시학에 대한 신념도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만큼 지속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천국의 입구」나「천사의 눈」을 보면 그 시학이 붕괴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때 그는 벌집같이 많은 눈을 가졌네 이제 씨가 빠진 해바라기 꽃대         궁처럼 그의 눈은 텅텅 비었네 그의 고통은 말라 버렸네 겨울에 그의 꽃         대궁이 꺾여 눈발에 묻힐 때 그의 생애는 완성되네 그가 본 것은 환상이         었네.                                                  - 「천사의 눈」 중에서  삶의 절개지로부터 능선에 이르는 여정                                                                이 경호(문학 평론가> 이 성복의 시는 삶의 절개지로부터 능선에 이르는 여정이란 구도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한낮이면 붉은 빛으로 선명하던 주작산 기슭의 절개지와 제 1 시집을,그리고 중턱에 자리잡은 그 바위들과 그의 제 2 시집을 그리고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던 시간에 섬세한 형상을 빚어 내던 주작산의 능선과 그의 세 번째,네 번째 시집을 겹쳐 놓을 수 있다. 절개지의 흔적,[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산의 절개지는 산의 존재 질서를 거스르고 훼손하는 인위적인 질서가 보여줄 수 있는  횡포의 최대치이다. 그 절개지로 인해 산에 자연스럽게 오를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 있듯이,절개지가 상징하는 유년,혹은 젊은 시절의 상처로 인하여  삶으로 원만하게 나아갈 수 있는 모든 통로 또한 가로막혀 버린다. 이성복의  제 1시집에 그려져있는 삶의 풍경과 언어의 풍경 또한 훼손되어 있다. 시인은 훼손된 삶의 풍경을 감추거나 익숙하게 만드는 낯익은 현실의 제도와 언어의 사용법 자체를 들추어내는 삶의 시선과 언어의 사용법을 선택한다. 그러한 삶의 시선을 담은 시적 상상력과 언어의 사용법으로 인하여 그의 시세계는 지나칠 정도로 과대포장되거나 수상한 혐의점을 지닌 것으로 평가 받기도 하였다. 제 1 시집에서 이성복은 유년시절의 가족사를 회상하면서유년시절의 훼손된 삶의 공간이나 아버지의 상처입은 모습을 통해 시인 자신의 훼손된 현실적 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1959년]이란 시에서     "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었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로 서술되는 봄이란      인생의 따뜻한 시간대인 유년시절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혹은 상처입은 존재의 모습을 환기시켜준다.     집에 적이 들어올 것 같았다     (집은 지하실,집은 개구멍)                          ----[금촌 가는 길] 부분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벌레가 나왕 책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처음엔 두 군데,다음엔 다섯 군데 쬐그만 홈을 파고(중략)     어머니가 말했다 창틀에 문턱에 식탁에까지 구멍이......약이 없다는     데                           ----[꽃피는 아버지] 부분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 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있다                           ----[연애에 대하여] 작품에서처럼 구멍이 뚫려 있는 집의 공간이나 상처입어 무기력한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훼손된 절개지의 상태와 다를 바 없다.이러한 삶의 고통스러운 절개지 속에서 시인이 모색할 수 있는 전략이란 절개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는 존재의 방향이 아니라 뿌리를 잘라 버리고 그 절개지에서 마구 뒹구는 존재의 방향을 찾는 것이다 그 방향은 나무에서 돌멩이로,식물성에서 광물성으로 나가는 것이다. "지금은 체위를 바꾸고 싶어"( [口話])라고 고백하는 것이나 제 1 시집 속에 '그날' '그해 여름' '그해 가을' 그날 아침'과 같은 불특정한 시간들이 작품 제목으로 자주 선택되는 것은 필연성이 없이 파편적으로  뒹구는 돌멩이에 무심하게 부딪치며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는 대상들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다. 돌멩이의 시선은 "당대의 廢品들을 열거하기 위하여?/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동원되는 것만은 아니다. 돌멩이의 시선은 훼손된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대한 우리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도 한다. 돌멩이의 정처없는 모양,흔들리는 모양처럼 상상력을 풀어낼 수 있는 언어의 사용법 속에서 이미지와 이미지의 어울림,이미지와 이미지를 서술하는 낱말들의 어울림은 기존의 일반적 묘사구도를 배반하며 파격적으로 성립된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았으면 좋겠어                   걸어가는 詩가 되었으면 물구나무 서는                   오리가 되었으면 嘔吐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발톱있는 감자가 되었으면 상냥한 工場이                   되었으면 날아가는 맷돌이 되었으면 좋겠어                                                 -[口話] 부분 이 작품에서처럼 시어들은 폭력적으로 결합되어 상황의 전복이란 의미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것들은 예쁜 모양을 무서운 모양으로,쓰러진 모양을 걸어가는 모양으로,안정된 모양을 불안한 모양으로 바꾸고 싶은 시인의 욕망을 암시한다. 주작산과 남해 금산 바위들의 흔적,[남해 금산] 주작산의 중턱에서 정상 쪽을 향해 자리잡은 바위들의 모양은 주작산을 가장 돋보이게 만든다.바위들이 버티고 있는 형상은 절개지의 노출을 무력하게 만든다.절개지는 상처를 온통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하지만 바위들은 드러냄보다 견딤의 자태로 완강한 형상을 이루어낸다. 시인은 그런 바위들의 모습에 어머니란 이름을 붙여준다.어머니의  이름은 뿌리뽑힌 존재가 아니라 뿌리박힌 존재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한 여자 돌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남해금산])라는 시행으로 노래하듯이 사랑으로 삶을 견뎌낸다. 제 2 시집에서 이성복의 상처는 확대되기보다 심화된다.가족의 삶이 펼쳐지는 공간 속에서 그의 훼손된 현실에 대한 상처 의식은 좁혀지는 대신 치욕으로 깊어지고 자연의 공간 속에서 그는 치욕을 위로받고 싶어한다.    [자고나면 龜甲같은 치욕이] 참조 가족의 현실은 사회현실의 축도로,시인의 자아가 투사된 현실로 파악된다. 80년대의 치욕적인 현실을 가족의 현실이란 상징체계로 읽어낼 수도 있으리라.이 상황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존재와 자연을 끌어들임으로  치욕스러움과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견디어 내려는 삶의 자세를 예비하게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 너의 어미를 만나라               어미가 누워있다 오래 전부터 앓아왔다               무슨 병인가 묻지 말고 어미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라               어미의 열이 너의 이마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라,뜨거운 어미의 열이 너의 가슴을 태울 때까지                                [문을 열고 들어가] 전체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강] 부분 인용한 두 작품에는 시인이 모색하는 새로운 삶의 자세를 구성하는 세가지 중요한 요소가 드러나 있다.절망을 견디는 법을 어머니를 통해 배우며 자연을 통해 사랑을 충전받고 강물과 같은 액성 이미지등을 통해 어머니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교감시키는 것이다.   주작산의 검은 몸체와 능선, 높은 나무의 검은 몸체와              흰 꽃의 흔적, [그 여름의 끝]과 [호랑가시 나무의 기억] 제 4시집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연작시에 나타나는 흰 꽃과 검은 나무 둥치는 절망과 고통을 이겨낸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1시집에서 시인은 삶의 상황을 광물성으로 파악하였다. 삶을 이루는 사건이나 사물들은 분리되고 흩어져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에서는 식물성에 대한 그리움이 유기적 상상력 속에 표현되어 있다. 식물성의 속성은  단지 견딤의 자세가 아니라 극복의 자세이다. 그 식물성에  그대 또는 당신, 어머니란 이름이 붙여진다. 작품 [산길]과 [숨길 수 없는 노래 1,2,3] [눈물]등을 참조. 한낮이면 삶의 절망적인 상처를 온통 붉은 색으로 과시하던 절개지와 그 절망의 상처를 견디어 내던 바위들을 품고 삶의 소망과 사랑의 기운이 은은하게 서려있는 식물성의 푸른 숲까지 품으면서도 그것들의 자취를 지워버린 주작산, 그러면서 몸체의 끝으로부터 섬세한 능선의 형상을 빚어내던 주작산의 검은 색상이야말로 세월의 흐름과 그에 따른 마음의 변화를 끌어 안으면서도 온전한 삶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의 유한함을 깊은 슬픔의 자취로 아로새겨 놓은 것이 아닐까, 이 구도 속에서 이성복 시의 여정을 가늠해본다.그 슬픔의 자취로 세상의 가장 '더러운 진창'에 대한 절망과 세상의 가장 '정결한 나무'에 대한 그리움 사이에 놓여있는 막막한 공간, 그 속에 그의 여정이 마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        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        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그것들 사이에 찾아        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                                                                    -[산] 부분 『 한 회원이 선생님은 글쓰시다가 글이 안될 때 어떻게 풀어가느냐고 묻자 그는 요즘도 글을 쓰다가 글이 안 되면 죽고 싶을 때가 많다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이 대답에 충격 받았다. 이미 일가를 이룬 시인이 뭐 그까짓 시가 좀 안 써진다고 죽고 싶기까지 할까? 하는 것이 안일한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문학에 대해 적어도 이 정도와 같은 초심자의 열의나 경건성이 있기에 우리에게 좋은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새삼 많은 것을 느꼈다. 이래저래 그는 나에게 평생교육의 장이다. 그 곁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무한한 행운으로 여긴다. 몇 년간 절필했던 그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적어도 앞으로 몇 년간은 다시 그의 작품을 따라 읽는 재미로 세상살이의 무료함이나 답답함이 좀 줄어들 것 같다. 』 ==============================================================================     가마귀의 노래―유치환(1908∼1967) 내 오늘 병든 짐승처럼 치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호을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여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朔風)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가마귀떼 날아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갖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두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 살아 오욕을 팔아 인색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    이런 시를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지 의문이다. 유치환의 시는 다정다감하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다. ‘…도다’, ‘…노라’로 끝나는 말투는 마치 회초리를 든 훈장님 같아서 도통 정이 가지 않는다. 쓰는 단어들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시에서도 ‘늠렬(凜烈)’이라는 한자가 참 어렵다. 이 말은 ‘추위가 살을 엘 정도로 매섭다’는 뜻인데 일상에서 자주 찾아볼 수 없다. 또 ‘육시’라는 단어는 무섭고 처절한 복수의 형벌을 의미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고집이 센 시이지만 작품에 담긴 시정을 알게 된다면 분명 우두커니 멈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시에서 ‘가마귀’는 시인 자신을 뜻한다. 그는 자신을 잘난 것 없고 무뚝뚝한 가마귀에 비유하곤 했다. 가마귀는 홀로 추운 곳에서 고난을 자처하고 있다. 벌판으로 나와 굳이 삭풍을 맞는 이유는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서이다.       대체 그는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일까. 가마귀가 살던 시대에는 “모두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과 영혼을 팔아 돈을 얻었나 보다. 그리고 가마귀 역시 그런 시류에 잠시 눈이 흐려질 뻔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증오하고 벌하면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람은 굶어 죽을지라도 영혼과 마음을 팔지는 않을 것이다. 증오와 정결을 아는 가마귀는 지금 어디 있을까. 삭풍이 뺨을 스칠 때면 그 가마귀가 그리워진다.
1908    나이지리아 시인 - 월레 소잉카 댓글:  조회:5794  추천:0  2016-12-01
월레 소잉카     월레 소잉카  Wole Soyinka   국적  나이지리아 직업 저자, 시인 상훈 노벨 문학상 (1986년) 아킨완데 올루월레 "월레" 소잉카(Akinwande Oluwole "Wole" Soyinka, 1934년 7월 13일 ~ )는 나이지리아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다. 1986년 〈해설자〉라는 소설로 아프리카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앙카는 요루바 족 출신으로 오군 주의 아베오쿠타에서 태어났다. 영어로 글을 쓰면서, 요루바 족의 종교, 철학, 언어를 소개시켰다. 1965년 식민지주의, 인간의 책임과 관련된 〈길〉이라는 연극을 만들었는 데, 이 작품은 하류층과 중류층 간의 관계, 요루바 족의 전통적 신앙과 기독교 간의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유럽의 식민지주의를 보여주는 〈콩기의 추수〉(1965년)와 〈거인들의 연극〉(1984년) 등의 연극을 만들기도 했다. 이 극작들에서 주목할 점은 독재정치를 인정하는 아프리카 사회 안의 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967년 나이지리아 정부는 소잉카가 나라 안의 내전을 막으려한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였다. 징역 2년을 보낸 후, 〈사람이 죽다:소잉카의 교도소 기록〉(1972년)을 썼는 데, 이 책은 그가 어떻게 징역살이를 견디어낼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분석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         문화 빼앗기, 사람다움 빼앗기 한 사회에서 문화를 빼앗는다면 사람다움을 빼앗는 것이고,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보다 훌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동물이 더러 있다지만, 문화야말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대부분 다른 동물과 뚜렷이 다른 점이다. 정부는 크게 권력을 쓰지 않으면 권력이 아니라고 여기기 쉽다. 권력은 자유를 억눌러 거스르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유를 끝까지 막아설 수는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월레 소잉카Wole Soyinka(1934-). 아프리카 사람으로는 맨 처음 노벨문학상(1986)을 받아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온화한 사람이지만 폭력에는 온힘을 다 쏟아 맞선다. 소잉카 희곡작품은 런던, 베를린, 뉴욕, 파리에서 줄기차게 무대에 오른다. 소잉카가 쓴 시 읊는 소리가 미국대학 캠퍼스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소잉카 자서전 [새벽에 일어나 길을 나서라]는 2006년 봄 내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월레 소잉카는 1934년 나이지리아 남서부 아베오쿠타Abeokuta에서 기독교 목사이며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본명은 아킨완데 올루월레 소잉카Akinwande Oluwole Soyinka, 런던대학교 분교로 나이지리아에 세운 이바단대학University College, Ibadan을 나와, 1954년에 영국 리즈대학교University of Leeds로 유학 영문학을 전공했다. 월레 소잉카는 학업을 마치고 나서 런던 로열코트극장Royal Court Theatre에서 배우이자 감독으로 일하며 초기작품 [늪지대 사람들]과 [사자와 보석]을 썼다. 1960년 독립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극단을 만들어 연극을 하면서 여러 대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했다. 소잉카는 혼란을 거듭하던 신생 독립국 나이지리아 정치를 비판하며 반정부 활동에 가담했다. 1967년 이바단 라디오 기자로 있으면서 비아프라Biafra 전쟁에 반기를 들어 고원 대령에게 잡혀 지하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인 소잉카를 영국 작가들과 지식인들이 힘을 모아 간신히 살려냈다. 그 뒤로도 꾸준히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1993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가까스로 나이지리아에서 도망쳐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영국과 미국, 프랑스를 떠돌아야만 했다. 이 때문에 많은 서양 사람들이 월레 소잉카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달리 아프리카 지식인들은 외려 소잉카 덜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만 소잉카는 나이지리아가 불행한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서양이 저지른 인종차별이야말로 내 겨레가 불행을 겪는 까닭”이라며 목청 돋운다. 1999년 민정民政으로 돌아온 조국에 돌아와 강의를 하며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이 억압받는 일은 없어야 음식이나 물이 없으면 사람은 죽고 만다. 그래도 그 죽음은 존엄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존엄성을 잃는다. 그렇다고 겁을 주어 언제까지 사람을 묶어두거나 막아설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소유권, 존엄성을 애타게 바라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이 무릎을 꿇린다 해도 언젠가는 기어이 일어나 맞선다. 예술은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 그렇지 못한 예술은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냉엄한 실존과 맞장 떠 빈틈을 메워가는 가능성, 앙상한 가지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는 예술혼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월레 소잉카, 지난 5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화해와 용서로 새로운 지평을 연 평화주의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겹쳐 떠올랐다. 같은 아프리카 땅에서 어느 나라는 평화를 얻었으나 또 다른 나라는 아직도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버겁다.   넬슨 만델라는 1994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려면 우리 모두가 어우렁더우렁 보듬어 안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모든 이가 일자리와 빵과 물 그리고 소금을 갖도록 하겠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억압받는 일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자유가 넘치도록 우리가 만들자.”고 외쳤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TRC)’를 만들어 흑인을 탄압하던 백인들이 지난날 잘못을 저지른 잘못을 낱낱이 뉘우치고 참회하도록 만들어,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를 정리했다. 그 덕분에 낯빛이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갈 바탕이 마련됐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어린이재단, 만델라재단에서 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을 물리치려 애썼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교육기금마련과 자선활동을 펼치며 평화로운 길로 끊임없이 나아가 세계사람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넬슨 만델라가 더 돋보이고 벌써 그리운 까닭은 뒷걸음질 치는 한국 정치 탓이다. 지난 7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규탄 2013 비상시국대회’를 마치고 걷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25개 사회단체와 정당인 2만여 명에게 경찰이 물대포를 쏘아댔다. 21세기, 더구나 추운 겨울날 멀쩡한 나라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쏘다니 제 정신인가.  이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보며 “사람이 물과 공기가 없이 살 수 없듯이 사람은 마땅히 사람답게 존중받아야한다.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어떤 사람은 공기가 중요하다 하겠지만, 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존엄성이 가장 앞선다고 생각한다. 내 실존은, 내가 나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때 살아난다. 나는 ‘나’이어야 한다. 기어코 ‘나’이어야 한다.”고 외쳐대던 월레 소잉카가 떠올랐다.  / 변택주 ==========================   【라고스=AP/뉴시스】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왼쪽)이 9일(현지시간)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와 함께 '자유 공원'을 방문하고 있다. 2016.02.10 16-02-10 kakao naver facebook twitter 【서울=뉴시스】오애리 기자 = 나이지리아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82)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린카드(미국 영주권)를 찢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또 극단적 민족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소잉카는 지난 11월 2일(현지시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가진 강연에서 " 트럼프가 당선되면 가장 먼저 그린카드 소지자 전원이 영주권을 다시 신청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면서 "트럼프 승리가 발표되는 순간 그린카드를 찢어버리고 짐을 싸서 출국하겠다"고 말했다.  소잉카는 나이지리아 국적자이지만 내전 및 군부독재시절 옥살이를 하는 등 탄압을 받다가 고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하던 중 미국 영주권을 받았다. 현재는 뉴욕대학교의 아프리카 및 미국 문제 연구소의 레지던스 학자로 미국에 체류 중이다.  소잉카는 이날 연설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울트라 민족주의'의 국제적 고조에 따른 '어처구니없는 결정 (ridiculous decision)'이라는 것이다. 그는 "유럽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놀랍지 않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녹 파웰이 (영국에서) 흑인들을 내쫓자고 말한 적도 있다" 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노(No)'라고 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녹 파웰(1912~1998)은 영국의 국수주의 정치인으로,1968년에 한 일명 '피의 강'이란 연설로 악명높다. 그는 이민자들이 영국을 파괴하고 있으며, 피부 색깔과 관습이 다른 이민자들의 유입을 허용하면 영국에 '피의 강'이 흐를 것이라고 주장해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최근 반이민 정서가 다시 강해지면서, 영국의 극우 진영 일각에서는 파웰의 '피의 강' 주장을 다시 제기하고 있다.  한편 소잉카는 아프리카 문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는 자유로운 창조정신을 해치며 편협한 시각을 갖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나 역시 희곡을 쓰면서 노래 몇 편을 작곡한 적이 있는데, 그래미상에 후보로 오르고 싶다"고 슬쩍 꼬집었다.    인간의 첫 번째 조건, 문화 한 사회에서 문화를 빼앗아 버리면, 그 결과는 저항이기를 나는 바랍니다. 문화를 빼앗는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사람들을 모독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야말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 대부분과 뚜렷이 다른 점입니다(인간보다 훨씬 훌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동물이 더러 있기는 합니다만).   예술은 곧 자유입니다. 권력은 통제이며, 자유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최대한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권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자유입니다. 언제나 통제하려야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와 현상을 해석합니다.         무대 위의 예술도 어느 정도는 활동이지만, 사회에 투영되어 해석되는 예술이 훨씬 더, 위험할 정도로 활동적입니다. 성공적으로 미술관에, 무대에, 콘서트 홀에 가둬 놓아도 예술은 물론 활동이지만, 그것은 원초적인 수준의 활동일 뿐입니다. 더 고(高)단계로 예술이 사회의 일부분이 될 때, 그때 예술은 위험한 물건이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예술의 임무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 예술은 혼잣말에 불과하며, 혼잣말이 참된 의미에서 활동이 되는 경우는 아주아주 드뭅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즉흥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가공의 인물을 거기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은 가능성 하나입니다. 실존의 냉혹함과 맞짱 뜨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의 빈틈을 메워 나가는 그 가능성 말입니다.     인간의 두 번째 조건, 존엄성 사람들이 사실상 체념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고 말아 버리는 사회가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존엄성입니다. 존엄성.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재는 존엄성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물이 필요하고 공기가 필요한 것처럼 존엄성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어떤 사람은 공기가 중요하다고 하겠지만, 내 입장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으로 필요한 것은 존엄성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실존은 자기가 좌지우지한다는 그 느낌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음식이나 물이 없으면 인간은 죽겠죠. 그렇죠? 그래도 그 죽음은 존엄한 죽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두려움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자기소유권, 즉 존엄성이라고도 하는 그 재산을 언제나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 굴복시킨 인간 이하의 존재들은 언젠가는 반항하고 말 것입니다. 반항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반항이 자아 실현의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시;  전화 통화 /월레 소잉카 목차   핵심 정리 이해와 감상 보충설명         핵심 정리       갈래 자유시, 서정시 성격 현실 비판적 제재 아프리카 유학생의 하숙집을 구하기 위한 전화 주제 흑인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인종 차별 의식 비판 특징   시각, 후각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함.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방식으로 형상화함. 시적 인물들이 대화하는 형태로 시상이 전개됨.   작가 월레 소잉카 출전 "국어 시간에 세계 시 읽기"(2010)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아프리카 흑인 학생인 화자가 하숙집을 구하기 위해 신문 광고를 보고 전화를 하는 상황을그대로 보여 주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다른조건이 모두 맞는 집이지만, 집 계약을 위해 화자는 자신이 흑인임을 스스로 고백해야 함을 알고 있다. 화자가 예상했듯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말은 백인 여주인에게 강요된 교양인으로서의 면모를 이끌어 내게 된다. 자신이흑인이라는 화자의 말에 여주인은 '교양 있는'사람인 자신이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하다 '침묵'을 만들어 낸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은갑자기 구체적인 피부색을 묻는 여주인의 엉뚱한 질문에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화자는 집을 구해야 하는 세입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리고 흑인이기 때문에이런 모욕을 견뎌야 한다. 한편으로 침묵과 엉뚱한 질문으로 자신의 의도를 감춰 온 여주인은 대화가 진행되면서자신의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고 결국 수화기를 내려놓음으로써 대화로부터 회피한다. 이러한 여주인의 태도에 화자는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부인, 그보다는 직접 보시는게 어떨까요?'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통해 편견 없이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설명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보여주기'의 방식을 통해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고자 한다.     보충설명     ◇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월레 소잉카     월레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이다. 1986년 '해설자'라는 소설로 아프리카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잉카는 요루바 족 출신으로,영어로 글을 쓰면서 요루바 족의 종교, 철학, 언어를 소개했다.그는 계급 문제, 종교 문제, 독재 정치를 인정하는 아프리카 사회 안의 힘 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소잉카는 1967년 나이지리아의 내전을 막으려 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징역2년을 보냈다. 이렇듯 그는 나이지리아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며, 최근 2010년에는 나이지리아 내 신당을창당하여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소잉카의 시와 아프리카 문학                                      /권명식  전화통화1)  값은 적절한 것 같고, 위치는 무관하다.  집 여주인은 집밖에 살고 있음을 다짐한다.  남은 일은 없다, 그러나 아직 나의 고백  부인, 나는 경고했다. ‘괜시리 오갈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나는 아프리카인이라오’  침묵, 강요된 교양의 말없는 전달.  립스틱이 묻어 있고, 금박테가 둘린  긴 담배갑의 삐삐 소리처럼,  나는 사로잡혀 있었다.  ‘얼마나 검은가요?’ …잘못 들은 건 아니다.  ‘밝은 편인가요, 아니면 아주 새카만가요’ B단추, A단추.  숨바꼭질 공중전화의 썩은 숨소리, 더러운 냄새.  빨간 전화박스, 빨간 우체통, 타르를 뿜어내는  이중 타이어의 빨간 시내버스. 이건 현실이야!  무례한 침묵을 부끄러워하다. 패배자.  간단함을 요구하는 어리석음.  그녀는 신중하다, 어조를 바꾸어  ‘새카만가요, 아니면 아주 밝은 가요’ 계시가 왔다.  ‘요컨대 그냥 초콜렛이야, 우유 탄 초콜렛이야, 이 말씀이죠?’  그녀의 어조는 현실적이다. 비인격성을 쑤셔 넣으면서  전파의 길이에 맞추어 재빨리 덧붙힌다.  ‘서아프리카산 뼈오징어 먹물빛이오!’  그리고 뒤미처 ‘내 여권은 아내 쪽이라오’  분석학적 상상을 위한 질주  진실함이 송화기 속 그녀 어조를 힘들게 바꿔 놓을 때까지  ‘그게 뭐죠’ 인정하면서 ‘그게 뭔지 모르겠군요’  ‘브르넷같은 겁니다’  ‘그럼 검은 것 아니오’ ‘온통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얼굴은 브르넷이오, 하지만 부인,  나머지 부분도 보셔야 합니다.  손바닥, 발바닥은 표백한 금빛이지요.  마담, 주저 앉아, 우습게 일어나는 마찰로  엉덩이는 갈가마귀처럼 새카매졌답니다.  ‘잠깐만 부인!’ 천둥치는 찰칵 소리를  내 귓전에 보내는 수화기  ‘부인’ 나는 부탁했다.  ‘직접 한번 보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 시는 소잉카가 발표했던 초기 시들 중의 하나이다. 198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월레 소잉카는 1934년 7월 13일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의 서부 도시 아베오쿠타(Abeokuta)에서 태어났다. 나이지리아라는 나라는 영토가 92만 4천 평방 킬로미터이고, 인구는 1억을 상회하여, 아프리카 전인구의 1/4을 점유하고 있다. 이 나라는 400여 개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 부족, 문화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은 북부 하우사어, 풀라니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남부 요루바와 이보어를 쓰는 집단이 그것이다. 소잉카는 요루바족 출신으로 요루바 문화는 그의 문학활동의 크나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요루바 문화는 그 자체로써 풍부할 뿐만 아니라, 노예무역을 바탕으로 남아메리카, 카리브해 연안 그리고 시에라 레온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요루바 문화는 주로 서부 나이지리아 라고스, 이바단, 오요, 아베오쿠타, 이제부, 온두 등의 도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전통 요루바인들의 삶은 신들과 영혼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들 신들의 세계와 이와 관련된 신화들은 소잉카 문학의 굳건한 토대를 이루고 있다. 최고의 신은 올로두마레이지만, 그의 최대 관심을 끄는 신은 철의 신 오군이다. 오군은 그리스 디오니소스, 아폴로, 프로메테우스를 합친 총체성을 지닌 신이다. 이 신은 고아를 보호하기도 하고, 집 없는 자에게 지붕을 주기도 하지만 창조와 동시에 파괴의 속성을 지닌 신이기도 하다 소잉카는 그의 다양한 작품을 통하여 이 신의 본질을 구체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루바인들의 문화는 농경이다, 이에 관련된 다양한 이미지들이 그의 시에 형상화되고 있다.2)  소잉카는 그의 고향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후 1952년 이바단에서 대학 교육을 받는다. 당시 교육은 유럽식 그리고 기독교적 성격을 띠고 있어 소잉카에게 영향을 끼쳤다. 만 20세가 되던 1954년, 그는 요크셔 지방의 리드 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라 영어영문학과 창작술을 전공한다. 영국에서의 삶은 젊은 소잉카에게 강한 인상을 주게 되었고 이 경험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미 그의 영어 구사력은 나름의 수준에 오르게 되었고 문학적 재능은 여러 곳에서 이미 발견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흑인 유학생이 일반 서구인들과의 접촉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험들은 소잉카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일반 서구 대중들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그로 인한 편견에 기인된 기이한 것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당시에 쓰여진 시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앞에 소개한 「전화통화(Telephone conversation)」 「그리고 또 다른 이주자(…And the Other Immigrant)」 「나의 바로 옆 이웃(My Next Door Neighbour)」 그리고 「안식(Requiem)」이다. 이들 시들은 이후 소잉카가 『이단르와 다른 시들(Idanre and Other Poems, 1967)』이라는 단행본 시집을 발간했을 때 모두 제외되었다. 이들 시의 약점으로 저자 자신이 뭔가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동요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거나, 혹은 이후에 발표된 다른 시들과 비교해 볼 때 보다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소잉카의 철학과 세계를 표현하는 데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지 않느냐는 시각이 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시들은 하나같이 젊은 아프리카 유학생 소잉카가 이국적인 문화권안에서의 독특한 경험들을 명료하게 가시화 시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현대 아프리카 문학 및 지성을 주도했던 대부분의 아프리카 흑인들은 하나같이 프랑스 파리 혹은 영국의 대도시에서 하나의 통과의례를 거쳐 가듯 그들의 젊은 시절을 지나가야 했다. 더우기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고 난 오늘날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은 여전히,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유럽인들의 문화와 충격적인 해후를 되풀이해 나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잉카의 경험은 다른 아프리카인들의 것을 선행한 것이다.  위에 제시한 시는 어떤 아프리카 흑인 학생이 하숙집을 구하기 위해 신문광고에 난 전화번호에 전화를 한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의 첫 부분에서 이들 두 인물들은 상대방을 보지 못한 채 계약에 필요한 객관적인 사항들에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합의에 이르른다. 이것이 영국인들 사이에서였다면 전화의 종결을 의미했을 것이다. 값은 적절했고, 집의 위치는 흑인 학생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집주인으로서도 별도 거주지가 있으므로 세입자의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제 더이상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끝내면 안된다는 것을 흑인 학생은 여러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흑인들이 추가로 행해야 할 의무 사항―그것을 그는 자기고백(Self-confession)이라 했다―이 남아 있는 것이다. 흑인이라는 사항을 사전에 밝혀야 하는 것이다.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한가지 추가로 더 밝혀야 하는 것, 먼저 고백해야 되는 것, 그것이 이들 사이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평등한 것이 결코 아니다. 평등한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영국 여인의 반응은 전형적인 서구인, 아프리카인들을 대하는 서구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침묵. 강요된 교양의 말없는 전달(Silence. Silent transmission of / Pressurised good-breeding.)’ 침묵은 백인들의 부담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반응해야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강요된 교양’, 이는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님을 말한다. 의도적이고, 의무에 의해 꾸며진 행동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를 가져다 준다. 이 분위기는 백인에게도 곧 공유되게 된다. 문화적 차이가 있는 곳에서의 만남이 곧바로 이런 식으로 전개되기 십상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이같은 현상은 이런 상황에서는 보편적이기까지 하다. 컴플렉스에 빠져 들기 쉬운 약자들, 흑인들이 내뱉는 권리 선언, 그도 괜시리 헛걸음하기 싫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아주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흐른다. 그러나 그나마 이같은 침묵을 통하여 야비하고 잔인한 인간 관계가 순화되고 정화되어 나간다. 그러나 약한 입장에 처해 있는 흑인에게는 이런 것조차 견디기 어렵고,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얼마나 검은가요?’ 침묵 끝에 나온 이 말은 잘못된 행보이다. 최대의 예의를 지키려 했던 끝에 뭔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백인들의 예절에 따르다가, 엉뚱한 질문을 내뱉고 만 것이다. 이제 상황은 처음 이들 사이에 놓였던 실무적인 문제와는 아주 동떨어져 간다. 이들은 전혀 불필요한 대화들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대화는 서로서로에게 상처와 오해, 모독과 치욕감을 줄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시켜 나가야만 한다. 이것은 식민 백인들과 피지배 아프리카인들의 사이의 관계와도 상통한다. 이들 사이에 형성됐던 과거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같은 성격을 띤 것이었다.  여기서 피부색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초콜렛 색깔과 우유 탄 초콜렛 색깔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난데없이 이들은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같은 인종적 차이의 문제4)를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도 없고,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도 없다. 다만 오늘도, 그 이후로 이같은 문제로 수많은 인간들이 일상에서, 삶의 현장 속에서 개별적으로 되풀이하여 이같은 경험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새벽녁의 죽음  여행자여, 그대 새벽녁에 길 떠나야 하오  개의 코끝처럼 촉촉한 대지 위에  그대의 발을 문질러야 하오  해 떠올라, 그대 등불을 끄게 하오  희미한 빗살이 하늘의 빛속을 찌르는 걸 보시오  괭이 위로 일찍 나온 지렁이를 으깨기 위해  무명으로 싸 맨 다리와 그대의 그림자를 활기차게 뻗친다오  황혼의 죽음과 슬픈 보복이 아니오  이 부드러운 점화, 살며시 멀어져가는 미풍  달리는 상쾌함, 그리고 새로 시작되는 하루에 대한 불안감  짐 실은 노후한 배는 움츠리고,  잠든 시장을 깨우기 위한 얼굴 없는 무리가 되어  안개 속을 덮친다오.  이 덮개 위로  그때는 갑작스런 겨울  새벽녁 외로운 트럼펫 주자의 죽음에 찾아온  폭도와도 같이  하얀 깃털 조각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의식,  화해는 우울하게 지속되고.  오른발이 환희를 향해 나가기도 전에  왼발은 두려움에 떨다.  애절한 어머니의 기도,  아이야, 허기진 길이 기다릴 때에는  제발 길 떠나지 말아다오.  여행자여, 그대는 길 떠나야 하오  새벽녁에  성스러운 시간의 경이로움을 약속하지  파들거리며 늘어진 뒤틀린 흰 닭  인간의 진보라는 격노한 날개 위에  감히 도전하려는 자같은 잘못된 찢김.  그러나 그런 또하나의 죽어가는 영혼,  친구여, 네 발명품의 갑작스런 포옹 속에  말을 잃은 너, 이것은 흉내낸 찌그러짐  이 닫혀진 일그러짐―나!  1967년에 출간된 소잉카의 첫 시집 『이단르와 다른 시들』은 시인 소잉카가 갖고 있었던 다양한 이미지들을 아주 포괄적으로, 그러나 아주 세심하게 편집하여 발표된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독립성을 지니고 있지만 또 다른 일면으로 보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들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소잉카가 다른 문학 장르, 예컨데 희곡, 소설, 그리고 비평문에서 되풀이되어 혹은 다른 형식을 빌어 나타나곤 한다. 이 책은 일곱 개의 항목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제목 하나하나가 소잉카 시의 주된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다. 「길」 「외로운 형상」 「탄생과 죽음」 「여인」 「회색의 계절」 「66년 10월」 그리고 「이단르」가 그것이다. 위에 소개한 시는 제1장 「길에 대하여(On the Road)」에 수록되어 있는 두번째 시이다. 길이라는 이미지는 소잉카 문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는 동일한 이름의 희곡을 쓴 바도 있다. 처음에 나오는 시는 「새벽」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경험하게 되는 새벽녁 여명의 모습은 아프리카인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를 경험하는 모든 이주자,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공통된 이미지이다. 야자나무 위로 활짝 펼쳐지는 태양의 찬연한 빛살, 이것이 대지와 함께 만나는 모습은 하나의 성적인 합일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아침 여명의 이미지는 「새벽」이라는 첫번째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대지를 가로질러  터럭이 부얼부얼한 팔꿈치 위로  야자수 한 그루, 바람의 갈기를 꿰뚫고  꼿꼿한 잎자루 하나로 파수를 세운다.  아득히 높은 데까지 꽃가루를 날리는 이처럼.5)  아프리카 문학과 소잉카  아프리카 문학은 보통 세 가지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문학의 표출 형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하나는 소위 구비 전통문학이다. 아프리카인들의 대부분이 문맹임을 감안해 보면, 오늘에 이르기 까지 구비 전승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구비문학은 기록문학이 갖지 않는 또다른 장점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살아 있는 문학이다. 공연자와 참여자 그리고 관객들이 특정한 인생의 한 단락을 형성하는 현장에서 문학이 생생하게 연출됨으로써, 아프리카인들은 문학을 살아있는 것으로서 체험할 뿐만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 예컨데 출생, 생일, 결혼, 장례, 할례식, 성년식, 치료 등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항들과의 관계 속에서 문학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들 구비 문학이 갖는 문학의 특성들은 오늘날까지 여러 영역에서 기록문학으로 전환해 가는데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위 전통 토속어로 읊어졌던 이야기들이나, 노래들이 서서히 기록되어 서사문학 혹은 운문 문학으로 발전되어 나갔던 것이다.  아프리카 문학의 두번째 영역은 소위 아프리카 토속어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800여 다양한 언어들이 있고 이들 중에는 고유의 문자를 개발하여 기록된 문학을 보유한 언어권들이 없지 않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50여 개의 언어가 기록 문자를 보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근래에 들어와서야 기록문학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기록문학권으로는 에티오피아어권으로 이들 셈족은 일찌기 수세기동안 게에즈(Ge’ez)라는 언어를 바탕으로 종교와 그들의 사상을 기록했다. 이후 이 언어는 고대 암하라어(Amharic)로 발전되어 세속적인 다양한 일상 경험들이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국어인 암하라라는 문자어로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프리카 문자어의 발달과 관련하여 두번째 영향은 아랍어와 이슬람의 전파와 관련된다. 동부에서는 아랍인들의 진출과 더불어 이슬람, 도시문화 그리고 토속 반투민과의 혼혈이라는 문화적 특징으로 대변되는 독특한 스와힐리(Swahili)문화가 탄생되었다. 이들은 반투어를 채택하여 이에 수많은 아랍 어휘를 첨가하여 그들의 삶을 기록하였는데, 글자로는 아랍어 문자를 사용했다. 18세기 이후 이들은 이슬람 종교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 영웅담, 전설, 일화 등을 서사시 형태로 후대에 남겼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은 종교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일상적인 삶의 내용들을 문학소재로 채택하였고 표현 형식도 자유시, 혹은 노래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개발하기에 이르른다.6) 이후 서구 문학의 유입과 더불어 새로운 현대 스와힐리 문학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있다.7) 한편 서부지역에서는 알모라비드인들에 의한 11세기 베르버왕국은 강력한 회교 근본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바람에 한동안 아랍어 사용만을 고집해 왔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소위 아자미전통에 의하여 아프리카 토속어의 기록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아프리카의 월로프, 풀라니, 하우사 기록문학이 이렇게 하여 출현하게 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인들의 진출은 로마문자의 도입을 예고했고 수많은 남부 반투어들이 로마자로 표기되어, 선교사들에 의한 성경번역을 시초로 하여 독자적인 아프리카 토속어 기록의 길이 대규모로 열리게 되었다.8)  위와 같은 아프리카 전통과는 뿌리가 다른 새로운 정신적 움직임이 오래 전에 이미 싹터 오고 있었다. 그것은 흑아프리카인들의 독특한 과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인들이 신대륙에 노예로 끌려가 그곳에 영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대륙 본토 흑인과는 다른 삶을 영위해 나가야만 했다. 이들의 운명이 더욱 혹독하고, 처절하여 이에 대한 문학적 자각이 오히려 본토 흑인들보다 더 일찍 나타나게 된다.9)  이들의 정신적 자각은 아프리카인들이 이제 더이상 그들 대륙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다른 인종들, 예컨데 서구 백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주 독특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북미 대륙에 있던 흑인들은 그들의 언어와 전통문화를 완전히 말살당한 채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강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남은 것은 인종적 동질성 뿐이었으나, 혼혈의 출현으로 이 또한 다양한 형태로 변질되어 나갔다. 한편 흑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의 식민통치하에 들어가 새로운 유럽 언어와 문화가 강제로 유입되었다. 새로운 지식 엘리트층이 형성되었으나, 이들은 그 출발점부터 서구 식민 문명의 제도에 뿌리를 두어야 했다.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 문화의 전파, 영국 및 프랑스 문화의 전파라는 과정에서의 문자 해독 및 교양, 문화 수업이 새로운 아프리카 엘리트들의 필수 과정이었다. 이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졌다. 오랜 방황과 미로를 헤맨 끝에 가서야 그들은 서서히 서구 문명의 본질과 자신들의 정체를 깨닫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구 식민국의 수도에서 비로소 미주, 카리브 연안의 동족들과 해후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과 운명을 객관적으로 자각하게 된다. 소위 범아주의(Pan-Africanism)와 네그리튀드(Negritude)운동으로 표명되는 1930년대 이후의 흑인 문학, 정신운동은 이렇게 하여 태동되게 되는 것이다.10)  아프리카 대륙은 이제 구 식민국의 언어에 따라 아주 색다른 구분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영어권, 불어권, 포루투갈어권, 그리고 스페인어권이 그것이다. 네그리튀드 문학운동은 소위 불어권 흑인 지성인들에 의하여 수행되어져 독특한 아프리카식 불어 문학이 창출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영어권에서는 영어로 쓰인 아프리카 문학이 등장하게 되는데 주로 영국 식민지의 런던 대학 분교 형식을 띤 이바단, 캄팔라, 나이로비 대학 등의 영어영문학과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11)  소잉카도 동부의 응구기, 피텍 등과 함께 이 그룹에 속하는 아프리카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이들 유럽어 작가들12)은 한결같이 아주 어려운 문제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이 유럽어로 문학 활동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식민통치의 결과로 이들 작가들이 대개는 그들의 정신적 성장을 이들 유럽어를 매개로 이룩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유럽어를 매체로 선택하므로서, 아프리카 일반 대중이 아니라 유럽의 대도시 독자들과 지식층을 그들의 독자로 확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서구 출판사, 대학 연구가들과의 소통을 용이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소위 세계인과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유럽어를 십분 활용했고, 그 결과 많은 작가들이 유럽및 북미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이점을 누렸다.  그러나 이와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현재 아프리카 일반 대중과의 소퉁은 외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서구인들의 취향과 관심사에 부응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현대 아프리카 작가들이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소외되어, 동화된 프랑스인 혹은 ‘앙글로-아프리카’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현 시점으로 보면 그러나 유럽어로 쓰인 아프리카 문학의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언어는 유럽어로 쓰여져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소잉카의 경우처럼 현재 아프리카인들이 처해 있는 독특한 경험들을 인간의 보편적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려 작품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외국어 대학교, 아프리카어과 부교수)    1) Cook, David. 1977. African Literature, a critical view. Longman.  2) Dathorn, O.R. 1974. African Literature in the 20th Centry. Heinemann.  3) Gerard, Albert (ed.) 1986. European Languge Writing in Sub-Saharan Africa. Budapest.  4) Gibbs, James & Bernth Lindfors. (ed.) 1993. Research on Wole Woyinka. Africa World Press, New Jersey.  5) Goodwin, K.L. 1982. Understanding African Poetry, a study of ten poets. Heinemann.  6) Jones, Eldre Durosimi [1973] 1988. The writing of Wole Soyinka. James Currey & Heinemann.  7) Kesteloot, Lilyan. 1991 [translated by Ellen, C. Kennedy] Black Writers in French, a literay History of Negritude. Howard University Press. Washington, D.C.  9) Meja-Pearce, Adewale (ed.) 1994. Wole Soyinka, an appraisal. Heinemann.  10) Moor, Gerald. 1980. Twelve African Writers. Hutchingson University Library for Africa. London.  11) Moor, G. & U. Beier. 1966. Modern Poetry from Africa. London.  12) Soyinka, Wole 1967. Idanre and Other Poems, London: Methuen.(이원방 역, 1986. 이단레와 그밖의 시들, 하나).  13) 권명식. 1989 『아프리카 문학에 있어서의 이념논쟁』 민족 지성 11월호 214-221.  14) 1991a 『유럽어로 쓰인 서아프리카문학의 주요 흐름』 외대 아프리카 문제연구소 발간, 아프리카 연구 6호 71-101.  15) 1991b. 『스와힐리 고전문학의 주요 흐름, 주요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외대 논문집 24:3-19.  16) 1992. 『아프리카 소설에 나타난 서구 문명의 부정적 양상, 소잉카의 ’해설자들’ 읽기』 세계의 문학, 63호 312-419.  
1907    미국 계관시인 - 로버트 프로스트 댓글:  조회:4970  추천:0  2016-12-01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1874.3.26~1963.1.29] 미국의 시인. 농장의 생활 경험을 살려 소박한 농민과 자연을 노래해 현대 미국 시인 중 가장 순수한 고전적 시인으로 꼽힌다. J.F.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자작시를 낭송하는 등 미국의 계관시인적(桂冠詩人的) 존재였고 퓰리처상을 4회 수상했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요수상 퓰리처상 주요저서 《소년의 의지 A Boy’s Will》(1913),《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1914) 샌프란시스코 출생. 남부 옹호파인 아버지가 남군의 R.리 장군의 이름을 그대로 아들의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전한다. 10세 때 아버지가 변사하여 뉴잉글랜드로 이주, 오랫동안 버몬트의 농장에서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경험을 살려 후에 이 지방의 소박한 농민과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현대 미국 시인 중에서 가장 순수한 고전적 시인으로 꼽힌다. 그 후 교사·신문기자로 전전하다가 1912년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E.토머스, R.브룩 등의 영국시인과 친교를 맺을 기회를 얻었으며, 그들의 추천으로 처녀시집 《소년의 의지 A Boy’s Will》(1913)가 런던에서 출판되었고, 이어 《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1914)이 출간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 두 시집에는 대표작 《풀베기》 《돌담의 수리》 《일꾼의 죽음》 등이 수록되었다. 1915년에 귀국하여 미국에서도 신진시인으로 환영받았다. 이듬해 제3시집 《산의 골짜기 Mountain Interval》, 그 후 《뉴햄프셔 New Hampshire》(1923)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1928) 《표지(標識)의 나무》(1942) 등이 발표되었다. 신과 대결하는 인간의 고뇌를 그린 시극 《이성의 가면 A Masque of Reason》(1945)과 성서의 인물을 현대에 등장시킨 《자비의 가면 A Masque of Mercy》(1947)을 거쳐 1962년에 《개척지에서 In the Clearing》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최후의 시집이 되었다. 또 J.F.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자작시를 낭송하는 등 미국의 계관시인적(桂冠詩人的) 존재였으며, 퓰리처상을 4회 수상하였다.   로버트 프로스트 연보 출생 1874.3.26~ 사망 1963.1.29 1874 3월 26일 샌프란시스코 출생. 1884 뉴잉글랜드로 이주, 버몬트 농장에서 생활. 1912 영국으로 건너가 E.토머스, R.브록 등의 시인과 친교를 맺음. 1913 처녀시집 《소년의 의지 A Boy’s Will》 출간. 1914 《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 출간. 1915 미국에 귀국. 1916 《산의 골짜기 Mountain Interval》 출간. 1923 《뉴햄프셔 New Hampshire》로 퓰리처상 수상. 1928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 West-Running Brook》 출간. 1930 《프로스트 시 모음집 Frost’s Collected Poems》로 퓰리처상 수상. 1936 《더 먼 경계 A Further Range》로 퓰리처상 수상. 1942 《표지의 나무 A Witness Tree》로 퓰리처상 수상. 1945 시극 《이성의 가면 A Masque of Reason》 출간. 1962 마지막 시집이 된 《개척지에서 In the Clearing》 출간. 1963 1월 29일 심장병으로 사망.     '먼 훗날 난 어디에선가/ 한숨지으며 이런 얘기를 할 것이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국의 계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시 ‘가지 않은 길’ 마지막 부분이다. 이 시가 올해 11월로 탄생 101주년을 맞았다.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이 시는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시 중 하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프로스트는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며 인생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키운 농부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이뤄졌다. ‘시는 기쁨으로 시작해 예지로 끝난다’는 그의 말 그대로 예지의 철학이 빛나는 시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은행은 맑게 갠 날에 우산을 빌려 주고, 비가 올 때 다시 받아가는 곳이라는 재치있는 비유를 한 사람도 프로스트였다.  그를 흠모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1월 20일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하고 시 낭송을 부탁했다. 눈밭에서 반사된 강한 햇빛 때문에 준비된 원고를 읽을 수 없었던 프로스트는 즉석에서 자작시 ‘아낌없는 선물’을 낭송했다. ... 남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한번 가보자...   /예진수 론설위원 ======================================================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염려하면서......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먼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가지 않은 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두 길 다 가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은 풀이 더 우거지고 발자취도 적어 누군가 더 걸어가야 할 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 길을 걷는다면 다른 길과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먼 훗날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시인 [가지 않는 길] 전문 -         [생각 하나] 주저없이 시인의 대표작으로 뽑고 싶은 詩다. 미국 시인 중 가장 서정적인 시인으로 대표될 만큼 소박한 전원의 정서를 맑고 쉬운 언어로 인생의 의미를 승화시킨 서정시이다. 퓰리처상을 4번이나 받을 정도로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았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 놓았고, 선택한 길은 되돌아 올 수가 없고, 먼 훗날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고...     길은 인생에 있어 선택이다. 중년에 서서 다시금 이 시(詩)를 대하니 가슴에 와 닿고 눈시울이 적셔진다. 워낙 유명한 시이다 보니 번역에 따라 해설도 달라지기도 한다.       //////////////////////////////////////////////////////////////////////////////////////////////////////////// = 1961년 1월20일 당시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20세기 미국의 대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처음이었다. 케네디와 같은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케네디의 시인'으로도 불리는 그는 "조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수 있는지를 물어라"는 케네디의 유명한 취임 연설 직후 케네디의 소개로 연단에 올랐다. 프로스트는 케네디를 위해 '봉헌'이라는 시를 지었으나 눈 덮인 의사당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시를 읽을 수가 없어 즉석에서 1942년에 쓴 '아낌없이 주는 선물(The Gift Outright)'을 암송했다. 93년 클린턴 취임식에서는 알렉스 헤일리의 TV 드라마 '뿌리'에서 쿤타킨테의 할머니로 열연한 흑인 시인 마야 안젤루(Angelou)가 '아침의 맥박'을 낭송했다. 이어 4년 뒤 클린턴 2기 취임식에는 아칸소주 출신인 밀러 윌리엄스가 '역사와 희망에 대해'를 낭송했다. 앞서 지미 카터의 77년 취임식에는 시인이 초대받지 못한 대신 제임스 디키가 대통령 취임 전야제에서 '들판의 힘'을 낭송했다. 그렇다면 왜 전직 대통령들은 시인을 문전박대했을까. 63년 케네디가 암살되자 대통령직에 오른 린든 존슨은 백악관을 찾은 한 시인이 베트남전을 비판한 데 격분, 참모들에게 "시인과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 앞으로 내게 시인을 데려오지 말라"고 엄명을 놓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2001년 취임식에 시인을 초대하지 않았던 현직인 조지 부시 대통령의 경우 독서광인 아내 로라 부시 여사가 2003년 백악관에서 '시와 미국의 목소리'라는 문학 포럼을 열려다 시인들이 이라크전에 항의하는 행사로 삼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취소하는 등 시와는 인연이 없다. /////////////////////////////////////////////////////////////////////////////   "시를 길거리로 가져가라"   (사진/문학과 대중의 부단한 만남을 강조한 리타 더브.  아프리카계 최초, 최연소 계관시인 기록을 갖고 있는 미국  현대시단의 대표시인이다.)   미국 현대 시단(詩壇)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명인 리타 더브(Rita Dove) 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아프리카 흑인과 체로키 인디언 피를 물려받은 여성인 리타 더브(45·버 지니아대 석좌교수)는 1977년 로 문단에 나온 뒤 1987년 시집 (Thomas & Beulah)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지난 93년 에는 아프리카계 흑인으로서는 최초·최연소로 미국 시인에게 주는 최고 의 영예인 ‘계관시인’에 선정된 바 있다. 는 20세기 중 엽 미국 남부에서 북부 산업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는 조부모의 파 란만장한 역정을 토대로 흑인 가족의 삶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더브는 이 작품 등 5권의 시집과 장편소설, 단편집 등을 냈으며, 미국 내 에서 27개의 크고 작은 문학상과 15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더브는 19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제2 회 세계 작가와의 대화’에서 ‘시짓기의 현실:의 생성과 정’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고은 신경림 정호승 김혜순 김정환 등 한국 시인들과 함께 자작시 낭송회도 가졌다. 더브는 작품뿐 아니라 뛰어난 시 낭송가로도 유명하다. 더브는 미국의 계관시인으로서 시의 대중화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다. “시를 길거리로 가져가자!”는 더브의 ‘구호’는 90년대 들어 시가 독 자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한국 시단에도 확실한 좌표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8월12일 한국 도착 직후 가진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더브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시를 지키기 위한” 미국 문단의 노력을 소개했다. 공립 학교, 도서관, 공공집회 등에서의 시낭송회, 시와 재즈의 만남 같은 다른 장르와의 합동공연 등이 꾸준히 열리고 있으며, TV의 문학프로그램 및 < 세서미 스트리트>와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도 시인들이 출연해 시를 낭송하고 이야기한다. 더욱이 시를 위한 1분짜리 공익광고까지 만든다. 도서관의 시낭송회는 모두 녹음돼 도서관에 소장된다. 더브는 이런 작업 들이 “시와 대중과의 괴리가 매우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시를 살리기 위 한 노력”이라며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펼 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시인들이 1일 국어교사로도 많이 나서 는데, 시는 어려운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을 가진 청소년들이 시인을 직접 만나봄으로써 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자는 취 지다. 우리나라 문화정책자들이나 문단이 적극적으로 고려해볼 방법들이 다. 더브는 미국 내 흑인 및 소수민족과 여성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시를 쓸 때 항상 자신이 아프리카 흑인이고 차별받는 여성이란 사실을 의식하며, 그런 시각에서 미국 사회의 문제를 걸러내려 노력한다”는 더 브는 미국에서도 인종·여성차별은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흑인과 백인, 남자와 여자 따위의 대립적이고 획일적인 규정은 오 히려 편견을 심화하기 때문에, 자신은 인간 개개인의 개별적 감수성과 경 험을 기록함으로써 인간존재의 보편성을 드러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더브 시의 핵심적 주제가 집-가족인 것도 이런 자신의 문학관과 무관하지 않다 . 인간의 진실한 경험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인데, 대표작 역시 14세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회고하는 외할머니 의 이야기를 20여년 뒤 시로 ‘기록’한 것이다. 한편 더브는 미국 문학의 장래에 대해 비교적 어두운 전망을 토로했다. 소수의 뛰어난 본격 작가들이 있지만, 이는 아주 예외적인 존재로 대부분 의 작가들은 출판사의 상업주의적 요구 때문에 본격적인 문학작품을 생산 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진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출판하 기가 점점 어려워질 뿐 아니라 기성 작가도 총체적인 사회문제를 심도있 게 다루기보다는 단편적인 사실의 짜깁기식 창작으로 흐르고 있다고 비판 했다. 더브의 미국 문학에 대한 전망은 한 사회의 시대정신을 총체적으로 반영 하고 이끌어내는 문학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한국의 현실과도 흡사해 보 인다. 더브는 그러나 “시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 보면 대중들 속에 시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며 문학과 대중의 부단한 만남을 강조했다. 고은 시인의 시를 읽었고, 지난해 독일문학잡지의 한국특집을 통해 한국 시인들의 세부적이고 섬세한 디테일 묘사에 감명을 받았다는 더브의 문학 세계는 격월간 제8호(97년 7·8월호)에 자세히 소개 되어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세계 시인 초청 강연 프로그램인 ‘세계 작가와의 대화’는 더브에 이어 오는 11월에는 프랑스 원로시인 미셸 드 기를 초청할 계획이다. 이인우 기자    (서울=연합(聯合)) "대중들이 시를 멀리하는 것은 시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이란 인식 때문입니다. 이런 대중들에게 시를 이해시키고 가깝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저는 「열려라 참깨!」같은 TV 어린이프로에 나가서도 시를 낭송하고 공익광고에서도 광고 대신 시한편을 낭송합니다." 미국의 계관시인 리타 더브씨(45 / 1997년)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白樂晴) 초청으로 내한, ...서울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미국에서 더브시인은 "강단의 시와 대중의 시 사이의 괴리를 없애고자" 시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이는 계관시인으로서, 또한 무엇보다 `시의 진정성'이라는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잘 알려진 시인. 아프리카계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또한 최연소로 미국 계관시인의 영예를 차 지했고 87년 시집 「토마스와 뷸라」로 흑인여성으로서는 두번째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지난해에는 하인츠상과 찰스 프랭크상을 수상한 경력이 이를 잘 말해준다. "미국문단에서 흑인으로서, 또한 여성으로서, 시를 쓴다는 것은 아직 어려움이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흑인여성임을 자각하고 있으며 이같은 특정한 감성을 효과적으로 시화(詩化)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하이오주 옥스퍼드 소재 마이애미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1년간 독문학을 수학한 바 있는 더브시인은 89년까지 아리조나주립대학에서 창작강의를 했으며 현재는 『게티스버그 리뷰』등 12개 문예지의 편집인 및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버지니아대학 석좌교수로 있다. 이같은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날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동갑나기 한국 여성시인 김승희씨가 `문단에서의 성차별여부'를 묻자 "미국 문단에서도 엄연한 성차별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 오는 19일 오후 6시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의 제2회 `세계작가와의 대화'행사에서 더브시인은 자작시 낭송과 함께 「토마스와 뷸라」를 쓰게 된 배경설명 및 詩作論을 밝히는 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한다. 20세기 중엽 남부에서 북부 산업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방황한 외조부모의 파란많은 정신적 역정을 그린 이 시집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는 "하나의 민족과 문화,인종을 살아있게 하는 한가지 방법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은 그 전체적 진실을 말하지는 못한다. 뭔가 본질적인 것, 마음, 핵심, 독일사람들이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은 바로 그 정신을 전달한다. 시란 그러한 정신들의 결합"이라는 시론을 폈다. 73년 독일출신 소설가 프레드 비반씨와 결혼,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 하나를 두고 있는 더브시인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 첫발을 딛는 이번 여행길에 가족을 동반했다.  ==============================    
1906    詩는 기존의 삶의 설명서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설계도이다... 댓글:  조회:3810  추천:0  2016-12-01
 [ 2016년 12월 01일 02시 22분 ] 벨기에 브뤼셀에서ㅡㅡㅡ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박상천 ((시인, 한양대 교수  6. 시의 언어는 체험하게 하는 언어이다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시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그대로 시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능 면에서 두 언어는 차이를 보여준다.  언어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정보 전달의 기능이고 둘째는 행위 요구의 기능이며 셋째는 체험의 기능이다.  첫째 정보 전달의 기능은 일상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핵심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정보 전달을 위하여서는 언어는 가장 간명해져야 하며 사전적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간명하면서도 효과적인 정보 전달의 방법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한다고 하자. 사전에는 ‘사랑’을 ‘①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또는 그러한 일 ②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사전적인 정의를 통해 그 개념을 전달하면 읽는 이나 듣는 이에게 가장 간명하면서도 분명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 전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이러한 설명의 방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설명의 한계로 먼저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를 설명하는 데에는 따르는 어려움을 들 수 있다.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언어는 개개의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되는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이란 ‘낱낱의 구체적인 사물에서 공통되는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관념적으로 뽑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개인의 감정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해 보여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해보도록 하자. ‘나는 요즈음 A를 사랑하게 되어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라고 설명을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모두 전달할 수는 없다. 열 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 명의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 명이 지닌 각각의 사랑을 ‘구체적, 개체적’이라고 한다면 그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사랑’이 지닌 공통의 속성 즉,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이라는 관념을 뽑아낸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추상적 언어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언어는 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있는 대로 모두 다 표현해 낼 수는 없다.  둘째는 말하는 이가 말 듣는 이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거나 유도’하기 위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그 행위를 실행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어디까지나 듣는 이의 ‘의지’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하여, 설득하여 행동하게 하기 위하여 씌어지는 글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글들을 읽은 이들이 그 글에 설득당하거나 감동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간혹 그 글에 감동하여 그 글이 요구하는 어떤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언어 행위는 읽는 이의 ‘의지’라는 장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사랑하자.” 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 것인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 모두는 개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위 요구나 유도 지향의 언어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시의 언어는 정보 전달이나 행위 유도를 위해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의 언어는 어떤 기능을 하는 언어인가?  먼저 다음에 있는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당신 곁에 머물면  화상(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동상(凍傷)에 걸린다.  아나벨리 내 사랑.  아아, 불  ―이세룡의 「아나벨리」  이 시는 ‘사랑’을 ‘불’의 속성에 비유하여 시화하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신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凍傷에 걸린다.’는 사실(정보)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사람 곁에 머물면 火傷을 입으니까 가지 말라거나 또는 사랑은 이렇게 좋은 것이니까 사랑을 하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시인이 ‘사랑’의 속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또는 ‘사랑’을 요구하기 위해서 시를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는 산문의 언어, 일상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의 아이러니를 단 6행으로 표현해내고, 세계 어느 나라 사전에도 없는 ‘사랑’의 속성을 새롭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기존의 ‘사랑’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사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내는 ‘발견자’이며 그러한 발견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사물을 새롭게 존재하게 하는 ‘명명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또는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정보 전달의 언어가 지닌 관념성이나 추상성을 극복하려는 시의 언어는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일정한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시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가 지닌 추상의 세계를 극복하고 구체화한다. 이해의 대상은 될지언정 체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추상의 세계를 구체적인 체험의 세계로 만들어 준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이해하고 있었던) ‘사랑’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을 만족시켜주는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대상을 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게 한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보듯 한 시인에 의해 ‘사랑’은 새롭게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는 시인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과 만나게 되고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데 이를 ‘지각’이라고 하며 이러한 지각을 통해 대상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대상을 지각하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어떤 느낌(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고 이성적 사유를 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체험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체험들이 반복되면서 체험의 대상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상 만나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습관적이고 무감각해진 삶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자동화된 삶’이라고 말한다. 자동화된 삶 속에는 감동이 있을 수 없다. 어떠한 느낌도 주지 못하는 체험, 그 체험은 이미 체험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만 것이다.  이렇듯 일상의 반복되는 체험은 우리의 삶을 무감각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시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려 줄 수 있어야 하고 대상과 삶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새로운 체험이야말로 시를 시답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남녀가 서로 정을 들이어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여름에는 나무가 푸르고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내가 실연을 해서 슬프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시는 무디어져버린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주고  느낌이 사라져버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그리고 세계의 사물을 새롭게 지각하고 체험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시의 언어가 새로운 세계를 존재하게 한다. 우리는 시의 언어가 새롭게 존재하게 해준 세계를 만남으로써 현실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시는 기존의 삶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       고운 심장 ― 신석정(1907∼1974)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라 갈리라구…  첫 연, 저 구절에 눈이 딱 멈춘다. 멈춘 시선은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별도, 하늘도, 밤도 춥다니, 오늘날의 마음을 정확히 읊어 놓은 것만 같다. 첫 연, 저 구절에 눈이 딱 멈춘다면 지금 당신은 추운 거다. 이 시를 읽으면서 추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는 당신은 바로 추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거다.     요맘때는 으레 춥기 마련이지만 올해 11월은 유독 춥다. 그 이유는 마음이 춥기 때문이다. 그래, 추운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추워서, 혹은 추우니까 내내 춥기만 하고 있을 테인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추운 오늘과 춥지 않은 내일을 말하고 있다.   신석정은 1907년에 태어나 1970년대까지를 살았다. 그러니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을 때 그는 나라를 뺏기고 찢기는 일을 경험해야 했다.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공부하고 시를 쓰는 점잖은 사람이었지만 흔들림이 없었겠는가. 그에게도 엎어지고 고꾸라지고 황망하고 억울한 날이 많았다. 이른바 ‘얼어붙은 심장’의 나날이 많았다. 얼어붙은 심장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 시에 잘 나와 있다. 그것은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멈추고 푸른 별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절망 속에 시인은 내일을 위한 하나의 목소리를 숨겨 놓았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춥고 어두워도 서럽지 않다. 얼어붙은 심장이 아니라 여전히 고운 심장을 신뢰하므로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밤은 억만 년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비록 지금은 별도 하늘도 밤도 춥지만 이 추위의 밤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1905    스페인 시인 - 후안 라몬 히메네스 댓글:  조회:4426  추천:0  2016-11-30
‘숭고한 정신과 예술적인 순수함’, 스페인의 생택쥐페리 후안 라몬 히메네스 (1881~1958)   히메네스는 1881년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안달루시아의 항구도시 모게르에서 태어났다. 조용한 성격의 시인은 스페인의 여느 소년과 마찬가지로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세비야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할 때까지 시인은 대부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에서 자랐다. 그림과 글쓰기를 취미 삼았던 그 시절, 그는 지중해의 풍경을 눈에 담아 습작에 몰두했을 것이다. 이후 히메네스의 시 안에서 보여지는 푸른 바다와 눈부신 태양,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새와 같은 회화적 이미지는 이러한 그의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열네 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던 시인은 열아홉이 되던 1900년 마드리드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모더니즘의 기수인 루벤 다리오 등과 친교를 맺는 한편, 첫 시집 ,< 수련>등을 발표하였다. 모더니즘을 반영한 감각적인 시어의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구성된 시집이었다. 이 시기 시인은 '98세대'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모더니즘'을 창립한 루벤 다리오는 히메네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건강 문제로 고향으로 돌아간 시인은 오래지 않아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부친의 사망은 히메네스의 병약한 심신을 자극하여 그의 시 또한 감상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로 몰고 가게 되었다. 이 시가 , 등 많은 작품이 쓰여지고 발표되었는데, 시에서는 '원인 모를 슬픔'과 '고독', '공허함'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1912년 건강을 회복하고 마드리드로 돌아온 후 히메네스는 더욱 왕성하게 시작에 몰두하는 한편, 여러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풍의 시를 쓰는 등 예술적 지평을 확장시켰다.   1916년 뉴욕을 방문한 히메네스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세노비아와 결혼하였고 이 때의 경험을 모아 시집 를 발표했다. 아내의 영향으로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히메네스는 인도 시인 타고르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영미권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초기의 감각적 모더니즘으로부터 탈피, 서정시와 신비론적 사상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는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공화파를 지지하며 활동했던 작가였다. 그러다 프랑코 총통의 권력과 좌파 파시스트에게 협박을 받자 남미 푸에르토리코로 망명을 떠났다가 결국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그가 공화파였던 점이 50년대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작품 세계는 어떤 수상자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는 자신만의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작가이자,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스페인과 중남미의 여러 나라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벨 위원회에서는 그의 수상 이유를 이렇게 발표했다. "유달리 고귀한 정신과 예술적 순수성을 보여주는, 스페인어로 쓰인 서정시를 높이 평가하여 노벨문학상을 수여함."   195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당시, 히메네스는 아내의 병중을 이유로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아내는 시상식이 있던 날로부터 3일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16년 미국에서 체류할 당시 결혼한 히메네스의 아내는 동양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의 시를 번역했던 문학 전공자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다. 시인의 아내는 히메네스가 푸에르토리코, 아바나, 미국에서의 망명생활 동안 외로움과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게 하고자 최선을 다하여 내조했다. 또한 히메네스의 맑은 심성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올바르고 선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이러한 노력이 뒷받침된 탓인지 히메네스는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히메네스에게 '스페인의 생택쥐페리'라는 찬사를 보내며 소설에 가 있다면 시에는 가 있다고 했다. 출처: 네이버케스트 노벨문학상작가열전 후안 라몬 히메네스 중     오후의 길들은 밤이 되면 하나가 된다 그 하나의 길로 나는 네게로 가야만 되리   몸을 끝끝내 나타내지 않는 사랑하는 너에게 산의 불빛처럼 바다의 미풍처럼 그 하나의 길로 나는 네게로 가야만 되리   처음에 그녀는 순결한 몸으로 왔다 결백의 의상을 하고ㅡ 나는 소년처럼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고 무슨 의상인지 나는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여왕이 되었다. 보석으로 찬란함을 떨치며 나는 쓴 분노를 무감각하게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 했고ㅡ 나는 미소를 흘려 보냈다 예전의 그 결백한 가운을 걸쳤을 때 나는 다시 그녀를 믿었다.   가운도 벗어 버렸고.. 완전한 나신(裸身)으로 나타났다. 오, 나의 생명의, 나시(裸詩)의 정(精)이여! 그대 영원히 나의 것이리. 나는 돌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바람으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파도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불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나는 인간으로 재생하리 여인이여, 아직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노라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서 그는 순진한 그 소녀를 죽였어요. 미소 지으며, 미소 지으며 그 소녀를 죽였어요.   눈같이 하얀 작은 상자에 넣어 사람들을 그녀를 무덤가로 데려갔어요. 가슴의 상처에서는 가느다란 핏줄이 솟아나오고, 티없는 그녀의 얼굴은 첫 키스의 여운을 간직한 채, 눈은 울고 있었고, 반쯤 벌린 입술은 하늘의 눈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하얀 밀감 꽃들 사이로, 상자의 흔들거림에 따라, 미소 지으며, 미소 지으며 그 소녀는 떠나갔어요.     네가 내게 입맞춤하자, 나무는 요란한 소리로 황금 태양을 흔들어댄다. 그러자 태양은 도망가며 내 사랑의 나무에게 덧없는 보물을 던져준다.   내가 너를 경배하는 것으로 내가 받은 것은 광채도, 뜨거움도, 기품도 아니다. 그건 다만 사라지는 빛이며 너의 색깔인 응달로 만들어진 황금이다.   네 영혼의 색. 네 두 눈이 영혼을 만들고 태양이 자신의 황금으로 붉은색을 만들 때, 너는 창백하게 용해되고, 태양은 너의 두 눈에서 태어난다. 바로 그것이 나의 평화며, 너의 믿음이고, 나의 태양이며 나의 생명이다.   [출처] 스페인 시 여행 - 후안 라몬 히메네스|작성자 앨리스
1904    요절한 천재 시인 시세계를 알아보다... 댓글:  조회:5108  추천:0  2016-11-30
‘좌절한 스페인 양심’, 요절한 천재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   로르카의 삶   로르카는 1898년 6월 6일, 그라나다 근처 소도시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지주인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자연과 그 신비함은 어린 로르카에게는 지속적인 매혹이었으며,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의 다양함과 신기함을 관찰하곤 하였다. 그는 후에 그의 위트와 음악적 능력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그의 첫 피아노 교사가 되었을 정도로 자상하고 재능 있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녀로 있었던 돌로레스에게서 농부와 집시의 민요 및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스페인 로망스를 듣고 자랐으며, 그녀와 함께 나무와 합판으로 된 인형을 가지고 어린이들과 하녀로 구성된 관객을 매혹시키는 방법을 습득하며 연극적 재능을 익혀 나갔다.   1909년 그의 가족은 안달루시아 지역의 대표적 도시인 그라나다로 이사를 한다. 그 곳에서 그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국립음악학교에서 스승 돈 안또니오 세구라의 지도로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그리고 스페인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그라나다 대학에 진학하여 원하지 않았던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곧 문학과 음악과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서 법 공부를 제쳐두고 그 시대의 지성들과 만남을 가지게 된다. '작은 구석'의 뜻을 가진 '엘 린꼰시요'라는 이 그룹에서 그는 문인으로서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배경 삼아 1918년, 자신의 스페인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첫 시집 『인상과 풍경 Impresiones y paisajes』을 발간한다. 비록 이 작품의 작품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그의 작품 세계에 앞으로 면면히 흐를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엿보인다.   1918년 그는 그라나다를 떠났고, 1919년에는 마드리드 대학의 학생 기숙사에 머물게 된다. 이곳은 프랑스의 작가 로저 마르틴 드가가 "스페인 인문주의의 보고"라고 부를 정도로 스페인 지성의 요람인 곳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같은 나이 또래의 많은 미술가와 작가들을 만나는데 초현실주의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 Rafael Alberti, 영화가 루이스 부뉴엘 Luis Bunuel 같은 나이 또래의 많은 미술가와 작가들로부터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 Juan Ramon Jimenez같은 한 세대 위의 유명한 예술가들도 만나게 된다. 그는 그의 기숙사 생활 첫 2년 동안 자신의 시를 낭송 등의 방법으로 대중들에게 알려 출간 전에 이미 그의 시들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그리고 1921년, 주로 히메네스와 마차도 Antonio Machado y Ruiz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첫 시집인 『시서 Libro de poemas』가 발간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1922년 마누엘 데 파야 Manuel de Falla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그라나다에서 깐떼 혼도 축제 Fiesta de Cante Jondo를 그와 함께 주최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르카는 자신의 고뇌의 해법을 스페인 전통 예술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로 이러한 관념들이 그의 작품으로 녹아 들어 갔고 곧바로 『깐떼 혼도의 시 Poema del Cante Jondo』(1922년 완성, 1931년 출간)의 집필에 들어간다. 『노래집 Canciones』(1927), 『첫번째 집시 가곡집 Primer romancero gitano』(1924-27년 집필, 1928년 출간)등이 이어진다. 이러한 작품 각각에서 그는 스페인 시에서 어느 샌가 사라져 버렸던 음악성(혹은 리듬감), 독특한 메타포(혹자는 공고라 Gongora의 영향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신비적 감각 등을 표현해 내면서 그의 천재적인 측면을 가장 잘 드러냈다. 또한 그는 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극작가로서도 활동하였다. 『나비의 저주』(1920), 『돈 끄리스또발의 재단 병풍』(1923)의 극작에 이어 1927년에는 자신이 1925년에 지은 로맨틱한 시극 『마리아나 삐에다 Mariana Pineda』를 달리의 배경 그림과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공연,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바르셀로나에서 로르카의 그림전이 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품 활동으로, 특히 『첫번째 집시 가곡집』의 대성공으로 그는 스페인에서 지식인층에서뿐만이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가 로르카에게 행운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집시 시인"으로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비록 위대한 작품이라고 할 지라도, 완전히 그러한 것으로만 자신이 정의되는 것은 실수라고 여겼다. 몇몇의 전기 작가들은 이것이 그에게서 "집시의 시"와 분리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고 뉴욕으로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1929년부터 1930년까지 거주하였지만 생의 극적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이때의 그의 생각은 그가 뉴욕에 체류하면서 쓴 그의 작품 『뉴욕에서의 시인 Poeta en Nueva York』(1940)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 시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 비교할 때 매우 초현실적이며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침내 그는 방랑을 정리하고 스페인 극의 개혁을 꿈꾸면서 쿠바를 잠시 거쳐 귀국한다. 그는 일반 연기자들과 단기적으로 극을 공연하는 레퍼터리 극단에서 새로운 배우를 조련하고 관객을 불러모으도록 촉진하고, 고전을 살리고 그의 극에 활용하며, 극장에서는 극에서의 시의 필요성과 그 시의 그리스고전, 꼬메디야 델라르떼 commedia dell'Arte, 낭만주의, 그리고 스페인 전통시에서의 기원성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그는 대학생들로 구성된 '움집 La Barraca'이라는 순회공연 극단을 창단하였다. 이 극단은 스페인 공화국의 탄생으로 그 활동이 강화되면서 19세기에 유행했던 사실주의 극으로 만연된 무대를 배척하면서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 그리고는 스페인의 전통적 문화의 정수가 가득 담긴 로뻬 데 베가 Lope de Vega나 미겔 데 세르반떼스 Miguel de Cervantes등의 극을 상연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과는 그의 비극 3부작 중 첫 번째인 『피의 혼례 Bodas de sangre』(1933)의 대성공으로 나타난다. 극의 주제는 로르카가 어떤 신부가 그녀의 결혼식 날 비밀리에 사랑하던 사람과 도주를 했다가 신랑과 그 남자가 서로를 죽였다는 실제 뉴스를 들은 후 순간적인 영감에 의해 착상되었다. 그들은 이 극에서 죽음으로 마무리 된 사회의 양보될 수 없는 명예와 원초적 본능간의 운명적 비극의 희생자로 승화되었고, 이 극은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서 그는 1933-34년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도 방문한다. 그리고 1934년에 『예르마 Yerma』를 발표, 20세기 시극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인기를 끈다. 그리고는 1936년 6월, 비극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La casa de Bernarda Alba』을 완성한다. 그 외에도 시집으로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야스의 죽음을 통곡하며』(1934), 『따마릿 시집』(1936), 『어두운 사랑의 소네트』(1936)등이 있으며 극으로는 『경이로운 여구두 수선공』(1930), 『돈 끄리스또발과 로시따 처녀의 희비극』(1931), 『관중』(1930), 『돈 뻬르림플린과 벨리사와의 정원에서의 사랑』(1931), 『이렇게 5년은 흘러가려는가』(1931), 『독신녀 도냐 로시따 또는 꽃들의 언어』(1935) 등이 있다.   그러나 로르카는 운명의 장난으로 1936년 8월 어느 날 새벽, 그라나다에서 스페인 내전의 시작과 함께 국가주의자들에게 총살당하고 만다. 그가 왜 사형당해야만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에 휩싸여 있다. 그의 동성연애가 그의 죽음의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그리고 그의 극중에서 그것이 동성애의 형태이건 이성애의 형태이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자신의 그런 면에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그는 스페인 사회의 보수적이고 엄격한 성격에 많은 고통을 받았고 그 해방구로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측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사후에도 그의 정신을 잇는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의 사후 1년, 『독신녀 도냐 로시따 또는 꽃들의 언어』를 무대에 올린 후 해체되었던 극단 '움집'은 그의 조수 모데스또 이게라로 이어져 전쟁 후 독립적인 『스페인대학극단 TEU』로 발전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모든 것이 검열을 거쳐야 하는 시기에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젊은 극작가들을 양산해냈다. 이러한 흐름이 50년대 60년대를 거쳐 유럽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극과 반정부 문인이었던 우나무노와 무정부주의자 바예 잉끌란 및 라우라 올모, 알폰소 사스뜨레, 페르난도 아라발의 작품들을 상연하였다. 그리고 40년간의 독재체제가 끝난 후 『스페인국립극단』이 되어 로르카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로르카를 이해하기 위하여 ― 그의 죽음과 사상   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스페인의 환경과 파시즘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당시의 스페인은 19세기 중순부터 시작된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서 20세기 초에는 기득세력인 사회주의 노선의 공화당파와 파시즘의 프랑코파가 맞붙게 된다. 결국은 프랑코가 자신의 군대를 모로코로부터 이끌고 본국에 들어옴으로써 스페인 내전(1936-1939)이 시작된다. 그가 이 내전의 와중에서 파시스트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에 의한 보수혁명의 성격을 띄는 데, 이 혁명에서는 '지성'이나 '이성'을 가진 자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파시스트는 반이성주의자들이며, 그들은 실존은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이성 대신에 '힘과 용기'로 대변되는 '의지'가 가치판단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생각하는 사람은 의지에서 비롯되는 확신이 없고, 결국 행동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지'는 사람들을 한 힘으로 움직이게 하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데, 그러한 의지를 사람들에게 가지게 하고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예지'의 능력으로 파악하는 것은 선택 받은 지도자만이 할 수 있다는 귀족주의적 인식론으로 귀착된다.   그들에게 로르카라는 스페인을 깨우려는 지식인의 존재는 눈엣가시라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귀족주의적 인식론을 가진 파시스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가 나고 자란 안달루시아의 민중 정서가 뼈 속 깊이 박힌 사람이었다. 또한 그가 비록 어떤 정치적 모임에 관여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작품 전면에는 그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인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와 누이 꼰차와의 대화에서도 그는 "난 가난한 사람들 편일 뿐이야."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도 본능의 자유를 갈망하는 『베르나르다 알마의 집』의 아델라나, 개인의 자유의지를 찾아 헤매던 『예르마』의 예르마와 같은 인물에서 그의 그런 사상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지식인들은 이러한 천박한 정치의 논리에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반대로 말하면 로르카가 그것을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그만큼 그가 스페인 국민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컸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의 막대한 영향력은 그의 사후 18년 동안 프랑코 정권이 그에 관한 논의를 완벽하게 금지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강제의 탄압으로도 로르카의 빛나는 업적과 뜻을 가리지는 못했다. 꼭 스페인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의 사상의 전 인류적 보편성은 그의 탄생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의 곁에 이렇게 숨쉬고 있다. 그의 극에서 아직도 그가 인간에게 자신의 본성을 숨긴 가식의 가면을 벗으라고 외치는 듯 하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아직 맛볼 수 없었던 진실된 비극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로르카의 시     난 그녀를 강가로 데려갔지 그녀가 아가씨라고만 믿었었지 하지만 남편이 있었지 뭔가. 때는 바야흐로 산티아고 축제의 밤. 등불들은 꺼지고 귀뚜라미들이 불을 밝혔다네 마지막 모퉁이를 돌면서 잠들어 있던 그녀의 가슴을 건드리자 하이신스 가지처럼 화들짝 내게 열었다네. 풀 먹인 속치마 소리가 내 귀에 열 개의 칼에 찢긴 비단 조각같이 사각거렸지. 숲 속에 은빛도 비추지 않아도 나무들은 자라났고 개들은 강 멀리 수평선에서 짖고 있었지.   가시나무 숲을 지나서 골풀과 단상사나무를 지나서 여린 풀섶 아래 오목한 곳에 자리를 만들었지. 내가 넥타이를 풀자 그녀는 옷을 벗었지. 내가 권총 달린 허리띠를. 그녀가 네 개의 속옷을. 수선꽃도 소라고동도 그토록 고운 살결을 지니지 못하고 달빛 어린 수정도 그처럼 빛나지는 못하리라. 그녀의 몸은 반쯤은 타오르고 반쯤은 파르르 떨면서 놀란 물고기마냥 미끄러졌지. 그날 밤 나는 고삐도 안장도 없이 진주로 벼룬 준마를 타고 다시 없는 길 중의 길을 달렸지. 그녀가 내게 고백한 사연을 사내대장부로서 말하고 싶지 않네. 이해의 빛이 나를 무척 신중하게 만드는 걸세. 입맞춤과 모래로 더러워진 그녀를 강에서 데려왔지. 바람이 불어 창포 잎이 흔들렸지.   나는 나답게 행동했지. 당당한 집사로서 말일세. 그녀는 밀짚빛깔 융단으로 내가 그녀를 강가로 데려올 때 남편이 있었으면서도 아가씨라고 말했기에 그녀를 나 사랑하고 싶지 않았네.     1919년 11월 10일 그라나다   어두운 밤이면 나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별들이 달에게로 물 마시러 올 때 숨은 나무 이파리들의 잎 가지가 잠들 때 그때 나는 사랑도 음악도 없는 텅 빈 나를 느낀다 죽은 옛 시간을 헤아리며 노래하는 미친 시계   오늘 이 어두운 밤에 나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자 지금은 너의 이름이 어느 때보다 더욱 멀리 들린다 모든 별들보다 더욱 멀리 서서히 내리는 빗소리보다 더욱 아프게   그때처럼 언제 한번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마음에 무슨 죄가 있는가 이 안개가 걷히면 어떤 다른 사랑이 나를 기다릴까 그 사랑은 순수하고 조용할까 아, 나의 이 손가락들이 달의 꽃잎을 떨어낼 수 있다면     네가 오지 못하게 내가 갈 수 없도록 밤은 올 생각을 안 하고   하지만 내가 가야지, 아무리 전갈의 해가 내 관자놀이를 먹어도   하지만 네가 오겠지, 비처럼 쏟아지는 소금이 너의 혀를 태워도   네가 오지 못하게 내가 갈 수 없도록 낮은 올 생각을 안 하고   하지만 내가 가야지 물어뜯긴 내 카네이션은 두꺼비들에게 주고   하지만 네가 오겠지 어둠의 구정물 하수구를 통해서라도   너 때문에 나 죽으라고 나 때문에 너 죽으라고 낮도 밤도 올 생각을 안 하고     오직 벨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너에게 마편초 왕관을 씌웠지.   "그라나다는 하나의 달 담쟁이덩굴 사이로 빠져 죽은."   오직 벨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카르타헤나의 내 정원을 다 까부쉈지.   "그라나다는 한 마리 암노루 풍향계 언저리 장미."   오직 벨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너의 몸 속에서 나를 불태웠지 누구 몸인지도 모르고.     아무도 너의 뱃속에서 나오는 불길한 목련의 향기를 알지 못했다. 아무도 네가 달콤한 말로써 사랑의 작은 새를 괴롭혔는지 알지 못했다.   하얀 눈도 부러워할 너의 허리를 껴안고 내가 나흘 동안 밤을 지새는 동안 수많은 페르시아 말들이 너의 얼굴을 비추는 달빛을 받으며 광장에서 잠들곤 했다.   석고와 자스민 사이에서 너의 시선은 창백한 씨앗을 담고 있었다. 나를 찾았다 너에게 주기 위해 내 마음 속으로부터 라고 새겨진 상아빛 글씨를.   영원한, 영원한 내 고뇌의 정원이여 영원히 붙잡기 어려운 너의 육체여 너의 혈관의 피가 내 입에 스며들고 나의 죽음 앞에 너의 입은 이미 빛을 잃었네. [출처] 스페인 시 여행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작성자 앨리스
1903    詩人은 자기자신의 령혼을 련금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3451  추천:0  2016-11-30
(세계시의 현장)   안달루시아 대지의 영혼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안영옥)         랭보는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 면밀히 살펴 인식하고 음미하여 현실의 모습 너머에 숨겨진 다른 모습을 투시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영혼을 형성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은 환경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사회와 풍경과 그 지역민들에 민감하다. 특히 그러한 환경이 다른 지역과 상이하고 독창적일 때 그들의 작품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는 또 다른 의미의 정복자가 된다. 시인은 관조한 것을 자신의 예리한 직관과 무의식이라는 영혼의 용광로에 쏟아부어 녹이고 정제하는 작업을 하는 가장 생생한 삶의 증인으로, 그들이 만든 결과물들이 이해될 때면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은밀한 정신적 교감이 일어나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자는 법열의 순간을 가질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스페인을 모르는 사람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누구인지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천재적인 위대한 시인이며 극작가로, 세르반테스나 피카소만큼이나 스페인적이자 동시에 전 세계적인 존재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과연 어느 정도 이해되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이 드는 이유는 로르카는 스페인 남부, 아랍문화와 고대 그리스 로마, 집시 문화가 공존하고 다시스라는 유럽 최초의 문명이 존재했던 안달루시아에 있는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1898. 6-1936. 8). 안달루시아에 대해 스페인의 대표적인 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렇게 얘기한다. “갈리시아인은 갈리시아를 떠나도 갈리시아인이지만 안달루시아인은 그곳을 떠나면 안달루시아인일 수 없다. 그들만의 독창성이 수증기 마냥 사라지고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그 이유는 안달루시아인이라는 것은 안달루시아 대지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들의 우주적 은혜에 답하는 것이며, 그 대지가 주는 영감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제의 오페라로 인해 기타와 탬버린, 집시와 플라멩코의 고장으로 알려진 지역이지만, 사실 진정한 안달루시아는 이방인들의 눈에 보이는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 즉, 유구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 진 신비로움과 그런 땅의 기운을 먹고 마시고 자라는 식물처럼 이성보다 감각을 통해 몸 전체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지가 바로 안달루시아이다. 로르카는 안달루시아에서의 자신의 유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난 완전히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다. 난 그곳에서 나의 개성까지 얻었다. 나 는 그것들과 대  화를 나누었고 그들을 사랑했다. 우리 집 뜰에는 검정 버드나 무가 있었다. 어느 오후 나는 그 나무들이 노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 람이 그 나뭇가지 사이를 지날 때 음높이를 달리하는 소리가 났으며 그게 나 에겐 음악 같아 보였다. 난 그 검정 버드나무가 부르는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몇 시간이고 보내곤 했다. 언젠가 나는 정말 놀라 한 곳에 몸이 굳어 버린 채 멈춰 선 적이 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 ‘페-데-리-코’를 한 자 한 자 부르고 있었다. 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의 유년 시절은 시골에서 이루어졌다. 목동들과 들판과 하 늘과 고독. 한 마디로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이었다. 난 사람들이 내 작품 속에 배어 있는 시골의 정취들이 시인 개인의 가상 모험담이나 단지 그 의 이야기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 그건 내가 피부 로 느꼈기에 내게 남겨진 진실 된 이야기이다.(...) 이렇게 나의 예술세계를 이룬 최초의 경이로움은 나의 대지에서 나온 것이다.       로르카는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산과 하늘과 인간과 환영을 노래하고 꿈꾸고 재창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안달루시아의 테마가 자기 감각을 통해 신과 교감하듯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달루시아가 그의 무의식의 세계를 신화마냥 지배하고 있다. 그의 대지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나는 그 땅을 사랑한다. 난 내 모든 감각이 그 대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나의 어릴 적 가장 아득한 추억들도 그 땅에 대한 매력들로 젖어 있다. 그곳, 그 땅은 내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그 땅의 벌레나 짐승, 농부들에게는 아무도 감지하지 못하는 암시들로 가득하다. 난 지금 유년시절의 영혼으로 그것들을 느낀다.” 그것을 힘 있는 은유로 표현한 것이 아래 ‘1910년’ 으로, 시의 전문이다.     1910년, 그때의 내 눈은 죽은 자를 묻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새벽에 우는 자의 재의 축제를 보지 않았으며 해마처럼 구석에서 떨고 있는 심장도 보지 않았다. 1910년, 그때의 내 눈은 계집아이가 오줌을 눈 하얀 담을 보았고 투우의 콧잔등, 독버섯 그리고 구석구석을 밝히던 이해할 수 없는 달과 단단하고도 검은 병아래 마른 레몬 조각들을 보았다. 그때의 내 눈은 암말의 목과 잠든 성녀 로사의 괴로워하는 가슴과 신음 소리와 상큼한 손길의 사랑이 있는 지붕과 고양이들이 개구리를 먹어치우는 한 정원에 있었다. 오래된 먼지가 석상과 이끼들을 모으는 다락방과 게걸스럽게 먹혀 버린 가재의 침묵을 지키는 상자들과 꿈이 현실과 충돌하는 그곳에 나의 작은 눈이 있었다. 내게 아무 것도 묻지 마. 난 사물들이 자신의 흔적을 찾을 때 만나는 건 빈자리인 걸 알아. 대기로는 사람 없는 공허한 고통이 있고 내 눈에는 옷 걸친 생물들이 없는 공허함의 고통이 있으니, 헐벗음은 없어야 해!                                     -『뉴욕에서의 시인』 부분 (1929-1930년 시작, 1940년 출간 )         1910년 12살의 시인은 죽음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물론 소외되어 “새벽에 우는 자”의 고통이나 번민이나 후회도 알지 못했다. 등이 굽은 해마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심장의 모양을 닮았고 움직임 역시 심장 박동과 같다. 그가 본 것이라고는 유년의 성을 상징하는 “계집아이들이 오줌을 눈 하얀 담”과 “암말의 목”과 종교축제 때 본 성녀상의 가슴이다. 그를 두렵게 했던 것은 “투우의 콧잔등”과 “독버섯”, 그리고 “병에 든 레몬 조각”과 “이해할 수 없는 달”이었다. 연이어 성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줄을 선다. 개념적으로 이해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설명되지 못하지만 느낌으로 와 닿은 것들이다. 이성으로서 설명되지 않는 비이성의, 비합리적인 이미지는 그의 무의식의 반영물이다. 이들을 만일 설명하려고 한다면 시의 의미가 달아나 버릴 것이라고 로르카는 말한다. 이어 유년 시절의 매력인 다락방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 우리의 상상력을 깨운다. 꿈의 세계와 차별화하기 힘든 이미지들이 다시 등장한다. 로르카에게 왜 이런 이미지들로 시를 이어갔는지를 묻는다면 다음의 글이 한 가지 답이 될 지도 모른다.     “나의 정신세계의 밑바닥에는 안달루시아 농경문화의 복합적인 요소가 숨쉬고 있다. (...) 그곳에는 신비하고도 샤머니즘적이며 논리를 앞선 문화의 발자취 가 남아 있다.(...) 신비만이 우리를 살게 한다. 단지 신비만이”       이렇게 보면 그의 시어는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한다는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자들을 닮았다. 이러한 시어는 가슴으로 느끼고 절규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안달루시아의 문화는 정열의 태양이 아니라 신비의 달이다. 다시스 신화를 품고 있는 안달루시아에서 달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이 달이 218번에 걸쳐 로르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로르카가 현대의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제사를 달에게 드렸을 것이다. 달은 태어나서 기울며 생성과 죽음을 거듭하는, 즉 삶의 리듬을 대변하는 유일한 천체이다. 생식과 피와 죽음과 긴밀한 의미 관계를 맺고 있어 모두가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원시 종교에서 달은 죽은 자를 자기 세계로 데려가는 존재로 나온다. 로르카의 ‘달의 로망스’에서 달은 숲의 신인 바람에 전율하는 죽음이란 춤꾼으로 나와 어린애를 데리고 간다.     달이 노爐로 자기의 수선화 스커트를 갖고 왔다네. 아이가 달을 바라보네, 바라보네. 아이가 달을 바라보고 있다네. 전율하는 바람 속에서 미끈하고 티없는 달이 자기의 팔을 움직여 단단한 주석으로 된 자신의 가슴을 보여주고 있어. -달아나 달아, 달아, 달아. 집시들이 오면 너의 심장으로 하얀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어 버릴거야. -아이야, 나 춤추게 내버려 둬. 집시들이 올 때면 모두 위에서 눈을 감은 너를 만나게 될거야. -달아나, 달아, 달아, 달아. 그들의 말발굽소리가 벌써 들리거든. -아이야, 내 빳빳한 하얀 스커트 밟지 마. 기수가 북을 치며 평야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노안에는 아이가 눈을 감고 있다. 꿈꾸는 듯한 갈색의 집시들은 올리브 밭으로 오고 있었다. 치켜세운 머리와 절반 감은 눈으로. 부엉이가 어쩌면 저리도 운다지, 아, 나무에서 어쩜 저리도 운다지! 달이 아이의 손을 잡고 하늘로 간다. 노안에서는 집시들이 울부짖는다. 바람이 달의 망을 본다, 망을 본다. 바람이 달의 망을 서고 있다.                                          -『집시 가곡집』부분 (1923-1927년 시작, 1928년 출간)       달을 아름답고 하얀 수선화와 견주었다. 수선화의 가장자리를 하얀 달무리인 스커트로 보았다. 안달루시아의 주 광물이 주석인데, 그러한 가슴을 가진 달이 바람을 채우고 대장간의 노 안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니 대장장이인 집시들이 오면 그것으로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고 말 것이다. 로르카는 진정한 안달루시아의 해설자를 집시라고 하며 그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펼쳐 놓은 제단이 안달루시아라고 했다.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감춰진 뿌리라는 신화적 차원으로까지 집시를 치켜세웠다.   로르카는 19세에 자신의 저서『인상과 풍경』에 안달루시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종교적이며 또 비종교적임에 틀림없다. 이교 그리스의 신비와 엄숙한 고딕 성당의 신비주의를 합친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예술론「귀신의 이론과 놀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안달루시아 예술의 정서는 능력,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 살아있는 스타일이다. 즉, 피의 문제. 다시 말해 아주 오래된 문화의 문체이다. 행동으로 창조하는 문화의 문제이다. 그 모두가 느끼지만 어느 철학자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 신비스러운 힘, 그것이 바로 그 땅의 정신이다.” 그 땅의 정신을 “피의 마지막 방에서 깨워야 할” 대지의 영혼이라고 하며, 두엔데라고 하고 있다. “모든 예술에 그리고 나라마다 천사니 뮤즈와 같은 성질의 영혼이 있을 수 있다. 독일은 예외도 있지만 뮤즈신이 있고 이탈리아는 언제나 천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은 언제나 두엔데가 있다. 두엔데가 새벽 나절 레몬 즙을 짜내는 수천 년의 춤과 음악의 나라. 그리고 죽음의 나라가 스페인이다. 죽음에 열려 있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플라멩코 춤과 플라멩코 음악인 칸테 혼도와 투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죽음에 열려 있는 나라, 즉 검은 고통의 소리를 갖고 있는 나라만이 두엔데를 갖고 있다. 이 검은 소리는 신비이며 알면서도 모르게 흙에 박히는 뿌리로 이것이 예술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작용할 때 진정한 예술이 탄생한다고 로르카는 말한다. 괴테는 파가니니를 이야기할 때 로르카의 두엔데에 대한 정의인 “모두가 느끼나 어느 철학가도 설명하지 못한 신비로운 힘” 임을 반복했다.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분노와 쓰라림과 통곡, 그리고 죽음을 아는 민족에게만 두엔데가 있다고 한다.     아! 외침은 바람에 삼나무 그림자를 남긴다. (이 평야에서 울게 나 내버려둬) 세상의 모든 것은 부서졌다. 오직 침묵만이 남아있다. (이 평야에서 울게 나 내버려둬.) 빛이 없는 지평선은 모닥불에 물어뜯기고 있다. (이미 너희들한테 말했잖아 이 평야에서 울게 내버려달라고)                                                  -『칸테 혼도』 부분 (1921년 시작, 1931년 출간)       황혼이 지평선 너머로 붉디붉은 최후의 광휘를 발하며 끝없는 광활한 평야를 물들이고 있을 즈음, 모든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고된 하루의 휴식을 누릴 때 안달루시아의 평원 한 언덕기슭에는 예닐곱 명의 집시들이 모여 앉아 있다. 그들이 피운 모닥불은 대낮의 태양 빛을 대신하고 있다. 그들은 저녁을 나누며 와인 잔을 돌리면서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다가 심각한 테마로 들어간다. 메마르고 가혹한 땅에서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 애인이 자기를 배반했다,라는 이야기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한 등으로 이어져 나간다. 그러나 말로써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그들 중 하나가 고독과 버림에 대한 통곡을 노래로 읊조리기 시작한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한스러운 삶을 절규하는 방법을 만들어 간다. 바로 플라멩코라는 이름의 음악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래들을 모두 한 그룹에 넣어 ‘심오한 노래’라는 의미로 ‘칸테 혼도’라고 한다.   로르카의 안달루시아 영혼이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의 밤과 만났을 때 그의 시세계는 다시 요동친다.     하늘에서는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아, 어느 누구도, 아무도,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아. 달의 자식들은 냄새를 맡고 자신들의 거주지로 방황하고 있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을 물려고 살아 있는 이구아나가 올 것이고, 부서진 심장을 안고 도망가는 자는 모퉁이마다에서 행성들의 부드러운 저항아래 말없이 있는 믿을 수 없는 악어를 만나게 될 것이 다. 세상에는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어느 누구도 잠을 자지 않아. 가장 먼 무덤에서는 무릎에 마른 풍경을 가지고 있다고 삼년을 불평하는 한 죽은 자가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묻은 아기가 너무나 울어 달래기 위해 개를 불러야 했다. 삶은 잠이 아니야, 깨어 있어!, 깨어 있어!, 깨어나 있어! 우리는 습한 흙을 먹으러 계단으로 떨어지거나 죽은 달리아의 합창으로 눈雪의 날카로운 날에 올라선다. 하지만 망각은 없어, 꿈도 없어, 살아 있는 육신. 입맞춤은 갓 태어난 혈관의 얽힘으로 입술들을 묶고 고통이 아픈 자는 쉬지 않고 아플 것이며 죽음이 두려운 자는 죽음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지고 갈 것이다. 어느 한날 말들은 선술집에 살 것이고 화가 난 개미들은 소 눈으로 피신한 노란 하늘을 공격할 것이다. 또 어느날, 박제한 나비들이 부활하여 회색스펀지와 말없는 배의 풍경으로 노니는 것을 볼 것이며 우리의 반지가 빛나고 우리의 혀에서 장미가 솟아나는 것을 볼 것이다. 깨어 있어! 깨어 있어! 깨어 있으라구! 아직도 출항과 소나기의 흔적을 기다리는 자를, 다리를 발명할 줄 몰라 우는 그 소년을, 아니면 이제 머리와 신발만을 가지고 있는 저 죽은 사람을 이구아나와 흉측한 뱀이 기다리는 담으로 데려가야 한다. 그곳에는 미라가 된 어린아이의 손이 기다리며 낙타의 가죽이 격렬한 푸른 오한으로 곤두선다. 하늘에는 아무도 자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자지 않아. 하지만 누군가가 눈을 감으려 하면 나의 자식들이 그를 매질해, 그를 매질하라고! 뜬 눈들과 쓰라린 시뻘건 상처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내가 이미 이 말을 했지. 아무도 잠자지 않아. 하지만 밤에 누군가가 관자놀이에 너무 많은 이끼를 가지고 있다면 너희들은 달 아래 극장의 해골과 독과 거친 잔을 보도록 무대의 문들을 열어라.                                                                                  -『뉴욕에서의 시인』 부분       난해하다 못해 신비하다. 이를 두고 초현실주의라니 월트 휘트먼이니 T.S 엘리엇의 영향이라는 말들이 있다. 그런데 로르카가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한 스페인인이, 더군다나 안달루시아 사람이 차갑고 잔인한 으스스한 광경을 앞에 두고 느낀 혼란과 고통의 감정이 어떠했을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안달루시아의 세상과 미국의 문명화와 대조되는 소외된 지역의 풍경과 그러한 곳에 사는 소외된 인간의 삶을 보고 받은 충격을 시인은 자유시 형태를 빌려 분노와 혐오를 상징하는 은유들을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다.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 꼭대기에서 진저리를 치며 외쳐대는 이 절규는 안달루시아의 통곡이다. 현실에 있는 요소들로 완전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연관이 없는 이미지들을 서로 연결해 놓음으로써 모든 게 뒤틀리고 일그러지고 만다. 달과 꿈의 세계, 어긋나는 상황들이 시로 들어앉으면서 시인의 고뇌와 고통이 질식할 듯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렇게 문명화되었으나 비인간화된 세계를 보고 느낀 시인의 감정이 머리가 아닌 감각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과 같은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편히 쉴 수 없다는 절규이다. 로르카는 말한다. 안달루시아의 영혼은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 느껴야 한다고. 그러니 우리는 이 시에서 이야기를 찾을 게 아니라 암시를 통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무모하고 터무니없는 은유들의 행진으로 시인을 괴롭히는 고뇌의 감정을 우리는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이처럼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우물을 품고 있는 이미지가 던지는 암시는 그의 ‘몽중방황의 로망스’에 들어가면 더 은밀해진다. 그 시의 일부이다.     적어도 높은 난간까지 올라가게 날 내버려 둬. 올라가게 내버려 두라니까! 녹색의 난간 까지 올라가게 내버려둬 줘. 달의 난간으로 물이 울려 퍼진다. 벌써 그 두 명의 대부가 높은 난간으로 오르고 있다. 피의 자국을 남기면서. 눈물 자국을 남기면서. 지붕에서는 양철로 된 작은 초롱들이 떨고 있었다. 유리로 만든 천 개의 탬버린이 새벽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집시 가곡집』부분 (몽중방황의 로망스)       로르카 자신도 이 시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달의 난간이 무엇인지, 왜 물이 울려 퍼지는지, 왜 유리로 된 천 개의 탬버린이 새벽에 상처를 낸다고 썼는지 자기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 그저 천사들의 손과 나무들의 손에서 그것을 보았단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는 모르겠노라고 고백했다. 그냥 그래서 그렇단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철학자나 수학자가 말없이 등을 돌리는 곳으로 더 빨리 다가갈 수 있단다. 그러니 이러한 그의 시를 이해했다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다면 아마도 그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될 것이다. 은밀하고 신비스럽고 아름다울수록 더욱 더 의미가 있다는 게 로르카 시의 세상이다. 로르카 시가 품고 있는 신비는 그 시를 전하는 시인에게도 신비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를 때가 많단다. 그 신비는 풀 수가 없는 것으로 그저 느낄 뿐이다. 로르카가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가 뭐냐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절대로 합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두 단어의 결합이다. 그렇게 해서 뭔지 모를 신비를 만드는 것이다. 그 단어를 뱉어내면 낼수록 더한 암시만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그러니까 시란... ‘상처 입은 사슴’이다.” 로르카에게 시적 창조란 인간이 안고 있는 비밀처럼 해독할 수 없는 신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사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비밀을 갖고 있다. 시는 이 모든 사물들이 갖고 있는 신비를 공유하는 행위이다. 시인은 그러한 신비의식의 해설자일 뿐이다. 이러한 그의 시에 대한 개념은 논리 이전의, 즉 이성이 지배하지 않던 원시 시대의 마술적, 신화적, 상징적 세계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서 그럴 것이다. 바로 안달루시아 대지의 세계이다.         **안영옥: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교수.  
1902    스페인 시인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댓글:  조회:5899  추천:0  2016-11-30
    가르시아 로르카의 상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9년~1936년)는 스페인의 시인·극작가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연극의 영향 밑에 놓여 있었던 스페인 연극을 혁신하고, 더욱이 외국의 극단에도 영향을 끼친 대작가 로르카는 가장 애도해야 할 스페인 내전 중의 희생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라나다 근처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총살된 이 시인은 미국을 여행한 후, 1931년에 극단 '바락카'를 조직하고 스페인 고전연극의 부흥에 분투, 이어 3대 비극 (1933), (1913), (1934)을 완성했고, 시와 극이 융합하는 경지를 민족적인 소재 중에서 실현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 연극의 중요한 상연 종목이 되어 있다. 스페인의 전통적 서정을 현대적으로 표현했으며 향토인 안달루시아의 마을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노래했다. 최초의 (1927)에 이어 (1927)에서 그의 시는 성숙해졌다. 작품도 실험적인 시도를 구사했으며 항상 민중을 떠나지 않았다. 시는 주제나 그 형식과 수법이 잡다하고 음악적·연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데 용어에 있어서는 어느 때는 철없이 보이고 어느 때는 신비한 베일에 싸여 있다.                                                                                  ===@@@=== 출생일 1898. 6. 5, 스페인 푸엔테바케로스 사망일 1936. 8. 19/20, 그라나다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시인·극작가. 목차 접기 개요 생애 < >평가개요죽음을 주제로 한 시와 3부작 희곡인 〈피의 결혼식 Bodas de sangre〉(1933)·〈예르마 Yerma〉(1934)·〈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La casa de Bernarda Alba〉(1936)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내란이 발생한 직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생애 농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직접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족이 그라나다 시로 이사한 뒤 그곳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그라나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곧 그만두고 문학·회화·음악에 몰두했다. 조숙한 작곡가이자 뛰어난 연주가로서, 친구들 사이에서 '음악가'로 통했다. 1918년 카스티야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인상과 풍경 Impresiones y paisajes〉이라는 산문집을 펴냄으로써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책은 '작가'로서의 가르시아 로르카를 예고해주었다. 1919년 스페인 수도의 문화적 중심이던 마드리드대학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제작자 루이스 부뉴엘, 시인 라파엘 알베르티를 비롯한 그와 같은 세대의 예술가 및 작가들과 사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를 비롯한 기성세대 저명인사들과도 만났다. 대학 기숙사에서 보낸 첫 2년 동안 스페인 문단 전체에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출판한 시는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시는 입으로 읊어야 한다. 책 속의 시는 죽은 것이다"라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학 기숙사와 마드리드의 여러 지역에서 중세 음유시인처럼 자신이 쓴 시와 희곡을 낭송했다. 그리하여 작가생활 내내 그의 작품은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입으로 창작되어 전파되었다. 이당시 그는 뒷날 〈시집 Libro de poemas〉(1921)·〈첫번째 노래 Primeras canciones〉(1936)·〈노래 Canciones〉(1927)로 엮어져 나오게 될 실험시들을 쓰는 한편 첫 희곡 〈나비의 장난 El maleficio de la mariposa〉을 쓰고 있었다. 이 희곡은 1920년 마드리드의 에슬라바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나 첫날 공연 뒤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가르시아 로르카는 1922년 그라나다에서 열린 민속음악축제(Fiesta de Cante Jondo)에서 저명한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와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이 지닌 천재성을 깨닫게 되었다. 민속음악과 집시음악의 전통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시적·영적 충동의 해답을 발견한 듯했다. 〈칸테 혼도의 시 Poema del cante jondo〉(1922 집필, 1931 출판)와 〈집시 노래집 Romancero gitano〉(1924~27 집필, 1928 출판)은 이러한 해답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집시 노래집〉에 실린 18편의 시에는 전통 시형식인 스페인 발라드(romance)가 지닌 전통적인 매력과 새롭고 놀라운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그 예로 〈스페인 민병대의 발라드 The Ballad of the Spanish Civil Guard〉에서 민병대가 집시 마을을 향해 불길하게 진군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검은 말들/검은 편자/검은 망토 위에 번들거리는/잉크와 밀랍 얼룩/두개골이 납으로 되어/그들은 울지 않네/칠피 가죽으로 된 영혼을 달고/그들은 길을 따라 내려가네" 〈집시 노래집〉을 쓰면서 그는 희곡도 썼다. 1927년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를 꾸며 시적이고 낭만적인 운문극 〈마리아나 피네다 Mariana Pineda〉를 바르셀로나에서 공연함으로써 극 부문에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역시 같은 도시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그림전시회도 열었다. 1928년에 펴낸 〈집시 노래집〉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행복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단순한 집시 기질을 과장된 신화로 만든다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그 스스로 "내 평생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정서적 위기에 시달린 끝에 위안과 새로운 영감의 샘을 찾아 1929~30년을 미국과 쿠바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1940년 그의 사후에 발간된 〈뉴욕의 시인 Poeta en Nueva York〉이다. 이 작품에서는 기계화된 문명에서 느끼는 생명의 말살을 잔인하고 뒤틀린 이미지들의 부조화스러운 결합을 통해 표현한다. "숟가락으로/그는 악어의 눈을 파냈다/그리고 원숭이의 엉덩이를 때렸다/숟가락으로" 1931년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나중에 〈타마리트 시집 Diván del Tamarit〉(1936)으로 펴내게 된 시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다시 희곡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꼭두각시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여 〈빌리클럽 꼭두각시 Los títeres de cachiporra〉와 〈돈 크리스토발의 인형극 Retabillo de Don Cristóbal〉이라는 2편의 인형극을 썼다. 이 인형 소극(笑劇)까지도 우울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스페인 공화국의 출범으로 가르시아는 연극 부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문교부는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고전희곡 가운데 명작들을 접할 수 있게 해준 학생극단 '바라카'(La Baraca)에 보조금을 지급했다(1932~35). 가르시아는 바라카의 설립자·지도자·연출자·음악가로서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폭넓은 연극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결실이 민속극 3부작 가운데 제1편인 〈피의 결혼식〉(1933)이다. 이 작품은 결혼식날 신부가 몰래 사랑해온 남자와 달아나는데 결국 두 경쟁자는 싸우다가 서로 상대방의 손에 죽었다는 뉴스 기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가르시아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운의 인물들로, 원초적인 열정과 문명사회의 단호한 명예규범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1934년 자신의 친구였던 한 투우사가 쇠뿔에 받혀 죽은 사건을 바탕으로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애도하며 Llanto por Ignacio Sánchez Mejías〉(1935 출판)를 썼다. 이 시는 그의 가장 뛰어난 시이며 현대 스페인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가장 뛰어난 애가로 손꼽힌다. 여기에서 "오후 다섯 시에"(A las cinco de la tarde)라는 공허하고 슬픈 후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오후 다섯 시에/정각 오후 다섯 시에/한 소년이 참회자의 흰옷을 샀네/오후 다섯 시에/한 바구니의 석회는 이미 준비되었다네/오후 다섯 시에/나머지는 죽음 그리고 죽음뿐이네/오후 다섯 시에" 1934년말 발표한 〈예르마〉는 3부작 가운데 제2편이며, 〈피의 결혼식〉과 더불어 20세기에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시비극(詩悲劇) 중 하나이다. '비극적 시'인 이 희곡은 아이가 없는 것에 절망해 불임 남편을 죽이는 한 여자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가르시아는 1936년 6월의 어느날 밤 친구들의 집에서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발표했다. 거의 모두 산문으로 쓴 이 희곡은 독재적인 어머니에 의해 상가(喪家)에 갇혀 지내는 4자매가 분노와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36년 7월 내전이 터지자 불안을 느끼고 마드리드를 떠나 그라나다로 갔다. 그러나 작품에 계속 등장하는 참혹한 죽음의 전조는 운명으로 다가왔다. 그라나다에서 지내던 어느날 밤 그는 재판도 받지 않은 채 민족주의자들에게 총살당했다.      * 낱장 /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최고로서  `좌절한 스페인 양심`으로 추앙 받고 있는 요절한 시인이며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인, 1998    * 낱장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 1980  * 낱장 / 로르카 탄생 100주년 기념, 이탈리아, 1998     * 낱장 / 로르카, 알바니아, 1998                      ===@@=======벙어리 소년 소년이 제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귀뚜라미들의 왕이 그걸 찾고 있었다) 물방울 속에서 소년은 제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말하려고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걸로 반지를 만들 거예요 그래서 그가 자기 작은 손가락에 내 침묵을 끼게 하려구요. 물방울 속에서 소년이 자기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유폐된 목소리가, 멀리서, 귀뚜라미의 옷을 입는다) ―《강의 백일몽》(정현종 옮김, 민음사)에서 때로 언어는 얼마나 무의미한가. 당신들이 지껄이는 언어는 자주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하는 잡음이기 쉽다. 우우, 당신들은 너무 많은 잡음들에 둘러싸여 있다. 진정한 언어는 침묵 안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침묵을 읽어내기란 잡음들의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러므로 이 시의 ‘말하려고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내 침묵을 끼게 하려구요’ 구절은 남다르다. 이미 침묵으로 모든 걸 말하는 벙어리 소년에게 목소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반지로 만들어 손가락에 낄 침묵 이상도 아니다. ‘물방울 속’이라는 공간의 설정은 이 시의 시적 공간이 침묵으로 가득찬 곳이라는 것을 극대화시키면서 이 시를 환상적으로 만들어준다. 그가 찾고자 하는 목소리는 그럼, 멀리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일까? 풍경 실수로 저녁은 추운 옷을 입었다. 창유리의 演舞를 통해 애들은 모두 노란 나무 한 그루가 새들로 변하는 걸 본다. 저녁은 저 아래 강가까지 퍼져 있다. 그리고 사과의 紅潮가 타일 지붕 위로 떨고 있다. 로르카는 집시민요시에서 보여주는 정열과는 또다른 아주 극단적인 서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서정은 말이 별로 없이 아주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마치 앞의 시에 나온 벙어리 소년처럼 겨우 얘기하지만,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 그가 잠시 언어를 거두고 침묵하는 사이 아주 많은 말을 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곧 모든 것일 수도 있는 그런 말이다. 그 말들은 그가 창조해낸 기이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자살 (그의 기하학을 몰랐기 때문인지) 어느 날 아침 열시 그 젊은이는 잊었다. 부서진 날개들과 造化로 그의 심장은 가득 차 올랐다. 자기 입 속에 말을 간직했으나 한마디 하찮은 말만이 남았다. 장갑을 벗자 손에서 더욱 엷은 재가 떨어졌다. 발코니에서 그는 탑을 보았다. 그는 자기가 발코니이자 탑이라고 느꼈다. 물론 그는 탑신의 시계틀 속에서 멎은 시계가 어떻게 자기를 보고 있는지를. 흰 빛으로 반짝이는 소파 위에 제 그림자가 조용히 뻗어 있는 걸 그는 보았다. 단단하고 기하학적인 그 젊은이는 도끼로 거울을 깼다. 그게 깨지자, 거대한 그림자의 흐름이 그의 환상의 방에 넘쳤다. 로르카의 세계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 환상은 언어와 언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환상으로 가득찬 세계란 궁극적으론 시의 세계일지 모른다. 당신들이 그 세계로 들어가길 멈칫거린다면 그 세계는 영원히 잊혀질지 모른다. 당신들은 삶의 귀중한 경험 하나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 따위는 필요없다. 거추장스런 당신들의 텅 빈 머리일랑은 잠시 발 밑에 내려둬라. 당신들의 가슴만으로 충분하다.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끼로 거울을' 깨는 일뿐이다. 당신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당신들이 도덕이라고 믿고 있는 그 허상과 허영들과 맞대면하고 그것을 가차없이 깨버리는 일이다. 그러면 당신들의 방에 얼마나 많은 환상들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환상이 사실은 진실이었다고, 그 거울을 깨기 전에는 당신들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을 거다. 거울을 깼다면 이제 당신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 환상들이 그 세계의 매혹들이 서서히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온 몸을 감염시키기까지, 매독처럼. 그 불온한 감염이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란 사실을 당신들은 알까. 우우, 당신들은 너무 많은 잡음과 거울들에 둘러싸여 있다. 내가 보기엔 여간해서는 그 허울 좋은 당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후후, 당신들은 영원히,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규리의 시와 함께] 진심이다/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진실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 이토록 힘이 들까! 너를 향한 사랑 때문에 바람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모자가 아프다. 누가 나에게 네 허리의 이 허리띠를 사 갈까? 누가 이 하얀 실오라기 슬픔을 사서, 하얀 손수건을 만들까? 진실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 이토록 힘이 들까!          9월이 왔어요. 도저히 물러갈 것 같지 않던 여름이 뒤를 보이고 도저히 변치 않을 것 같던 사랑도 어느덧 뒤를 보이며 가고 있겠어요. 참 슬프지만 아름다운 순리예요.    가는 여름에 싸여 긴 여행을 했어요. 먼 곳에서 이곳을 다시 바라보았어요. 그곳에도 바람이 불고 해가 졌어요. 아침저녁 서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득한 이름들을 불러보기도 했어요. 한결같이 그 이름들이 너무 멀어 어떻게 돌아갈지 막막했어요. 나무가 옮기는 그늘들, 바람이 데려가는 시간들 아래서 낯선 언어들에 깜짝깜짝 놀라며 중얼거리던 시에 로르카가 접혀 있었어요.    그리고 돌아왔어요. 9월이 짐가방처럼 함께 도착했어요. 어떤 사랑은 두고 오기도 했고 어떤 사랑은 다시 데려오기도 했어요. 슬픔의 실오라기 하나하나로 하얀 손수건을 짜야 하는 시간이 오더라도 또 견디어 갈 거예요. 진심으로 이곳의 시간들을 사랑했으니까요. 그리하여 가는 여름의 뒷모습에 대고 말해 보겠어요. 그 무덥던 날들의 행간들 진심이었다고, 또한 진심일 거라고. (시인)(매일신문)     몽유(夢遊)의 민요시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바다엔 배 산에는 말. 허리에 그림자를 감고 난간에서 꿈꾸는 그녀. 싸늘한 은빛 눈.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집시의 달 아래. 세상은 그녀를 아무것도 보지 못하네. ... ... .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두 명의 대부가 올라갔네 긴 바람이 입 속에 쓸개. 박하. 알바아카의 묘한 냄새를 남겨놓네. 대부여! 말씀해주세요. 어디에 있나요? 당신의 가련한 딸은 어디에 있나요?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렸는지!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릴 것인지! 싱싱한 얼굴 검은 머리칼이 이 녹색 난간에서                                =====================================================                                 악몽의 로맨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 허리에 어둠을 두르고 베란다에서 꿈꾸는 여인,  그 파란 살결, 파란 머리칼, 차가운 은빛 눈동자.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집시의 시뻘건 달이  불길한 세상사를 예언하지만 차마 달을 바라볼 수 없는 그녀.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성에가 만든 커다란 별 모양이 어둠의 물고기를 몰고 여명의 길을 연다. 무화과 나무가 줄질을 하듯 나뭇가지를 바람에 드르럭거리고, 산은 살쾡이처럼 가시나무 끝을 곤두세운다. 누가 오는 걸까? 어디로......? 그녀는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그 파란 살결, 파란 머리칼. 꿈에도 무서운 쓰라림의 바다.           형님, 저의 말과 형님 집을 바꿨으면 좋겠네요. 제 말안장 대신에 형님 집 거울 하나, 제 칼 대신에 이불 하나만 주세요. 형님, '염소 재' 너머에서부터 제가 피를 많이 쏟고 오누먼요.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이제 나도 내가 아니고 내 집도 이제 내 집이 아니라네.           형님, 저도 죽을 때는 점잖게 잠자리에서 죽고 싶구먼요. 침대는 되도록이면 쇠 침대, 이불은 네덜란드 최고급 이불. 이거 보세요, 이 가슴부터 목구멍까지 피투성이 상처를. 검붉은 3백 송이 장미꽃이  자네 하얀 셔츠에 피었구먼. 피가 스며들어, 허리에는  온통 피비린내뿐. 하지만 이제 나도 내가 아니고 내 집도 내 집이 아니라네. 어떻든 저 좀 올라가게 해 주세요, 저 높은 베란다까지만요! 저 좀 꼭 올라가게, 올라가게 해주세요, 저 파란 베란다까지요. 달이 있는 베란다 난간에 물소리가 메아리치네요.           마침내 두 친구가 위로 올라간다 그 높은 베란다 있는 곳까지. 줄줄 핏자국을 남기며 줄줄 눈물자국을 남기며.  지붕 위에서는  양철 등이 떨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빛살인지 북소리인지  새벽을 찢고 있었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 두 친구가 위로 올라갔다. 긴 바람이 입에 씁쓸하고 야릇한 입맛을 남겼다, 박하 냄새, 여뀌풀 냄새 같기도 한...... 형님! 어디 있습니까, 어디요? 그 불쌍한 형님 딸이 어디 있습니까?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상큼한 얼굴, 그 검은 머리칼로 이 파란 베란다에서......           큰 빗물받이 통 표면에 집시 아가씨가 떠돌고 있었다. 파란 살결, 파란 머리칼, 차가운 은빛 눈동자. 달빛 한 줄기 고드름이 되어 그녀를 물 위에 떠받들고 있었다. 밤은 그녀를 아우르며 자그만 안방 마루처럼 아늑하게 감쌌다. 술 취한 민병대 몇 명이  꽝꽝 대문을 두들겼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     *줄질: 톱질    *집시 아가씨의 죽음과 두 사내의 분투, 그리고 스산하고도 아름다운 자연의 조응이 두드러지는 시입니다.   *프랑코 독재시대 임을 알 수 있는 '민병대'. 스페인 시인 로르카는 실제로 그의 몇몇 시에 드러난 프랑코 독재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민병대'에 대한 혐오 표현으로 인해('소련의 첩보원'이라는 무고한 죄명으로) 정부에 쫓기고 결국엔 붙잡혀 총살 당하게 됩니다. 로르카는 한국에서의 입지로 비교하면, '김소월'에 해당하는 스페인 국민 시인이자 대표적인 서정시인입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유명한 '집시 이야기 민요집'이 있습니다. 그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에 따라 극우파 친구의 집에 숨어들었다가 붙잡혔다고 하네요......    시의 줄거리는 이렇다. ‘집시 아가씨’와 혼인하기 위해 ‘젊은이’가 집시 아가씨의 아빠인 ‘형님’ 집에 찾아간다. 이에 호응해 집시 아가씨도 그녀를 설레게 하는 방문객을 예감한다. 아마 이 두 사람이 천생연분임을 시는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뻘건 달’이 불길한 세상사를 예언하듯 젊은이는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형님은 ‘민병대’로 예상되는 사람들에게 집을 빼앗기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집에 집시 아가씨를 놓아둔 채였다. 이런 상황 속에 젊은이는 형님을 만나지만, 딸과 함께 집을 빼앗긴 형님은 이미 넋이 나간 상태로 ‘나도 내가 아니고, 내 집도 내 집이 아니라네.’라고 되풀이 한다. 어떻게든 집시 아가씨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젊은이’는 형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집시 아가씨는 민병대의 행패에 의해 이미 물에 빠진 채 죽은 뒤였다(젊은이가 올라가게 해달라고 하는 부분에 불길한 ‘물소리’가 메아리친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또다시 ‘술 취한 민병대’가 죽음의 그림자처럼 대문을 두드린다.   이 시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줄거리를 이루는 시부분과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로 대변되는 반복부로 나뉘는데,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반복구절이 심부를 깊게 파고든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번역할 수 있다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또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는 무엇이고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완전히 해석되지는 않지만, 나는 이 반복부의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에 어울리는지에 대해 느낀 바가 있다. 이 구절들은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몽의 로맨스’를 둘러싼 자연의 흐느낌이 아닌가한다. ‘파랗게 사랑해’라는 섬뜩한 말 속에는, 핑크빛이어야 했을 사랑이 시대의 총검(민병대)에 찢어져버린 채 나뭇가지에 걸려 파랗게 질려 황량하게 흩날리는 모습을 슬퍼하는, 말 못하는 자연의 ‘한(恨)’이 있다.   프랑코 독재시기 스페인에서는 집시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이루어졌다. 손기술이 뛰어나고 예술가 기질이 있는 집시들의 많은 수가 도둑이나 밀수, 강도질 등 암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었던 게 명분이 되었다. 스페인의 국민시인이자 미남시인이었던 로르카의 고향은 집시들의 본고장 ‘그라나다’였다. 집시가 미운 짓을 한다고 해도 그가 살면서 보아온 집시들의 정체는 도둑이나 밀수범이 아닌 재주 있고, 몸에 치명상을 입고도 결혼식 예물을 조율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듯, 익살을 좋아하는, 정감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할 지언정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특히, 위 시에서와 같은 경우는 ‘혼사’라는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경사가 고작 술 취한 누군가들에 의해 죽음의 현장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집시들을 죽이는 민병대원들을 그는 그의 시 이곳저곳에 등장시키며 간접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후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국민시인 로르카도 ‘소련의 첩보원’이라는 거짓 죄명으로 총살당한다. 나는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에 대한 분노를 존경한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독일의 시인 횔덜린은 시를 써서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생활과 사랑과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아무튼, 시는 그런 생활의 큰 단면인 사랑이 무참히 파괴되는 현실을 그 누구의 슬픔이 아닌 ‘자연’의 슬픔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의 곳곳에서 스산한 자연의 묘사는 죽은 사랑에 대한 ‘조의(弔意)’다. 마지막으로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의 존재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두 가지가 어울린다. 배와 말은 각각 바다와 육지의 이동수단이다. 그럼 누군가가 이동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동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시에서 이미 죽은 사람은 아직 집시 아가씨 하나뿐이다. 나머지 둘은 곧 그녀를 따라갈 것처럼 위태롭다. 어쩌면 배와 말은 젊은이와 집시 아가씨의 사랑이 안타깝게도 다른 한명마저 죽음을 맞음으로써 이어지는 것을 상징할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자연이 남은 두 사람에게 애처럽게 속삭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디어디에 배와 말이 있으니 이것들을 타고 멀리 멀리 도망치렴”하고 말이다.          [출처] 악몽의 로맨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작성자 시와 달과 사람                        뉴욕에서 달아나다: 문명을 향한 두 개의 왈츠 - 작은 빈 왈츠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스페인 시인)     빈에는 열 명의 소녀와 하나의 어깨가 있다. 그 어깨 위에서 박제된 비둘기 숲과 죽음이 흐느끼지. 성에 낀 박물관에는 아침 잔영이 남아 있지. 천 개의 창이 있는 살롱이 있지.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쉬잇, 이 왈츠를 받아 줘.   이 왈츠, 이 왈츠, 이 왈츠, 바다에 꼬리를 적시는 코냑과 죽음과 “좋아요!”의 왈츠.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우중충한 복도 언저리, 안락의자와 죽은 책까지; 여기는 백합의 어두운 다락방, 달이 있는 우리의 침대에서 거북이가 꿈꾸는 춤 속에서, 사랑해.   아이, 아이, 아이, 아이! 부서진 허리의 이 왈츠를 받아 줘.   빈에는 너의 입과 메아리들이 노는 네 개의 거울이 있지. 소년들을 푸른색으로 그리는 피아노를 위한 하나의 죽음이 있지. 지붕 위로는 거지들이 있지. 통곡의 신선한 화관들이 있지.   아이, 아이, 아이, 아이! 내 품 속에서 죽어가는 이 왈츠를 받아 줘.   왜냐하면 널 사랑하니까, 널 사랑하니까, 내 사랑아, 아이들이 노는 다락방에서. 아이들은 따스한 오후의 소란한 소리들을 듣고 헝가리의 오래된 빛들을 꿈꾸고, 네 이마의 어두운 고요를 느끼고 눈빛 백합들과 양떼들을 본단다.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영원히 널 사랑해”하는 이 왈츠를 받아 줘.   빈에서 나는 너와 춤을 추리라, 강의 머리를 그린 가면을 쓰고. 히아신스 꽃이 가득한 나의 강변들 좀 봐! 내 입을 너의 두 다리 사이에 두고, 내 영혼을 사진들과 수선화들 사이에 두리라. 그리고 네 발등의 어두운 물결에는 내 사랑아, 나의 사랑아, 바이올린과 무덤, 왈츠의 테이프를 선사하리라.                                    (번역: 민용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1898년 스페인 그라나다 근처 마을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출생. 시집 『시 모음』『노래집』 『집시 이야기 민요집』『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의 죽음』등. 희곡 「피의 결혼」「예르마」「베르나르다 알바의 집」등. 1936년 8월 19일 생을 마감함 (스페인 내전 초기, 공화주의자였던 로르카는 파시스트 반란군에 체포돼 사흘 뒤 총살당함).   시‘뉴욕에서 달아나다: 문명을 향한 두 개의 왈츠 - 작은 빈 왈츠’는 문화예술진흥원 황인숙의 시 배달로 온 시임.  ===@@===한 인간의 죽음은 비극이다. 거기엔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며, 제각기 다를 것이다.     한 시인의 죽음 또한 비극이다. 그러나 시인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과는 다르다. 워즈워스나 휘트먼 같이 살만큼 살고, 우리에게 그 천재성을 충분히 보여준 시인들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과 같다. 적어도 그들에게 몇 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어도, 그들이 우리에게 이미 남겼던 것 이상을 더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이미 시인으로서 그들은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그렇기에 시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비극적으로 다가서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약간의 천재성을 보여주었고, 살아있었더라면 일부가 아닌 전체를 남겨주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에서 나오는 슬픔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알고, 더 뛰어난 것들을 남겼을 것이란 것 또한 알기에,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시들을 그리는 것이다.     물론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는 것이 슬픔이요, 비극이지만, 키츠와 같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요절은 어느 정도 이해는 갈 만한 죽음이다. 그렇기에 로르라의 죽음은 더욱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죽는다는 것 자체에서 이성을 따지는 것이 부조리하지만 말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세르반테스 이후,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최대 스타이자 작가지만, 그는 비극적이게도 젊은 나이에,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국민군 측 민병대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이미 스페인은 물론, 유럽에서도 손꼽힐만한 대작가가 된 그였지만, 고작 38세의 나이에 로르카는 죽었다. 로르카가 왜 살해당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고 한다. 그가 굳이 국민군 측에게 살해당할 만한 이유도 모호하며, 아직도 처형당한 이유는 논쟁의 대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논쟁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로르카는 살해당했고, 우리가 결코 읽지 못할 책들은 불태워졌는데.     로르카는 시와 희곡 모두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나는 시만을 다루고자 한다.     로르카는 놀라울만큼 다양한 목소리의 소유자다. 같이, 서정적이며 낭만적이고, 말 그대로 집시들의 애환과 안달루시아의 풍경을 담은 노래들부터, 같이, 현대적이면서 고독의 정서를 담은 시들까지 이 시인이 보여주는 다양한 스펙트럼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아쉬움을 동시에 준다.         로르카는 확실히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에 더 가까운 시인처럼 보인다. 그의 어조 자체는 셸리나 키츠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연상시킨다.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로르카가 영문학에서도 인기가 많다는 점이 그 증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스페인적인 시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집시 발라드와 같이 안달루시아 산골짜기의 이미지를 그대로 시 속에 담는 것이 바로 이 스페인 국민시인의 재능이다.     그가 '집시'를 소재로 택한 것 또한 이해가 간다. 실제 집시가 아닌, '집시'라는 상징 자체는 흥겨운듯 보이면서도, 고독을 속에 감추고, 말 그대로 보헤미안 그 자체가 아닌가? 이러한 내면의 자리잡은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독은 그가 미국에서 있으면서 느낀 감정을 담았다는 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치 집시처럼, 그 또한 뉴욕에서 이방인이며 언제나 고독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     이러한 고독은 자연스레 '사랑'과 연관된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결국 연애시들이라고 불릴만한 조건들을 갖춘다. 물론 꼭 사랑의 대상이 애인이거나, 꼭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라면, 언제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그는 충실한 시인이다.     물론 로르카가 살해당하지 않고, 늙어죽었어도, 그의 시 세계 자체가 크게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더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젊은 천재의 비극적인 죽음에 슬퍼할 수 밖에 없다.       
1901    서아프리카 세네갈 대통령 시인 -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 댓글:  조회:6346  추천:0  2016-11-30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Léopold Sédar Senghor 세네갈의 제1대 대통령 임기 1960년 9월 6일 ~ 1980년 12월 31일 후임: 압두 디우프(제2대) 신상정보 출생일 1906년 10월 9일 출생지 세네갈 조알 사망일 2001년 12월 20일 (95세) 사망지 프랑스 노르망디 정당 세네갈사회당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1906년 10월 9일 ~ 2001년 12월 20일)는 세네갈의 시인이며 정치가이자 문화 이론가로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1960년 ~ 1980년)으로 5번의 임기를 역임했다. 상고르는 아프리카인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의 국립 학술원)의 멤버가 된 인물이며, 세네갈 민주당(Senegalese Democratic Bloc)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 지식인 중 하나로 손꼽힌다.   목차   [숨기기]  1어린 시절 1906년~1928년 216년간의 방황 1928-1944 3정치경력 1945-1982 3.1프랑스의 식민지 3.2세네갈 3.3프랑코포니 3.4아카데미 프랑세즈:1983-2001 4죽음 5유산 6서훈과 수상 7시 8네그리튀드   어린 시절 1906년~1928년[편집]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는 1906년 10월 9일 다카르에서 남쪽으로 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해변 마을인 조알(Joal)에서 태어났다. 레오폴의 아버지인 바실레 디오고예 상고르(Basile Diogoye Senghor)는 세네갈의 소수민족인 세레르족(Serer) 출신으로 중산층의 사업가였다. 레오폴의 어머니인 그닐레인 은디엠 바쿠(Gnilane Ndiémé Bakhou)는 바실레의 3번째 아내였으며 풀라니족(Peul)출신의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바실레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얻었다. 상고르의 아버지로부터 Senghor(포르투갈어로 Sir에 해당하는 단어)라는 성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 Sedar(세레르어로 "모욕을 당하지 않는 자)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상고르는 8살때 세네갈 북부 응가소빌(Ngasobil)에 위치한 "성령의 아버지들(Fathers of the Holy Spirit)"이라는 기숙 학교에 입학한다. 1922년에는 다카르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신앙생활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음을 깨닿고 일반 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그무렵 이미 그는 프랑스 문학에 열광해있었고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및 대수학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졸업 이후 그는 장학생 신분으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16년간의 방황 1928-1944[편집] 1928년 상고르는 세네갈을 떠나 프랑스로 향하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16년간의 방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소르본 대학에서 고등 교육을 시작했지만 곧바로 그만두고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 과정을 마치기 위해 루이 르 그랑(Louis-Le-Grand)에 입학한다. 입학시험에 떨어지자 그는 문법 교원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1935년 두 번째 도전 만에 문법 교원 자격을 취득한다. 그는 문법 교원 자격을 취득한 파리대학(University of Paris)을 졸업한다. 이후 1935년부터 10년간 투르와 파리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등교육원(대학원)에서 문법 강의를 들었고, 여러 저명한 사회 과학자들과 조우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상고르는 이 당시 식민지 수도에서 교육을 받던 여러 아프리카 혈통의 지식인들과 함께 흑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고안해냈다. 그가 고안해 낸 "네그리튀드"("négritude")라는 개념은 프랑스어로 흑인에 대한 경멸적 표현인 "네그르"("nègre")를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찬양을 의미하는 뜻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네그리튀드"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을 의미한다. "네그리튀드"는 상고르의 문화 비평과 문학 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정치 신념이 된다. 1939년 상고르는 프랑스 군의 식민지 군 장교로 징집되나 다음해 독일군에 의해 포로가 된다. 그는 여러 독일군 캠프를 전전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푸아티에의 캠프에 구금된다. 이 캠프는 전쟁중에 포로가 된 식민지 군대를 구금하는 곳이었다. 포로 생활 2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시를 쓰며 보낸 그는 1942년 질병으로 인해 풀려나게 된다. 이후 교수생활을 계속하면서 레지스탕스 활동에도 참여한다. 정치경력 1945-1982[편집] 프랑스의 식민지[편집] 전쟁이 끝나자, 상고르는 1960년 세네갈의 독립때 까지 역임했던 École Nationale de la France d'Outre-Mer의 언어학부 학장직에 취임한다. 시작(詩作)을 위한 여행을 하던 도중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라미네 기예(Lamine Guèye)를 만게 되었고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 받는다. 상고르는 이를 받아들였고 세네갈-모리타니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다카르-리제르간 철도 건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을때 상고르는 기예와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기예는 식민지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상고르는 노동자들을 지지했고 이는 세네갈 국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1946년 펠릭스 에부에 (Félix Éboué)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 (프랑시스, 가이)를 얻는다. 다음해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주었던 프랑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아프리카 지부(African Division of the French Section of the Workers International,SFIO) 를 탈퇴한다. 1948년 마마두 디아(Mamadou Dia)와 함께 세네갈 민주당을 창설했고 195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한다. 1951년 식민지 의석으로 할당된 국회의원으로 재선된 상고르는 프랑스의 국무총리 에드가 파레 아래에서 1955년 3월 1일부터 1956년 2월 1일까지 주 장관을 겸임한다. 또한 그는 프랑스 5공화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 위원회에 세네갈측 고문으로 참여하였으며 유럽 의회의 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1957년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이후 프랑스 국적의 노르망디 출신 콜레테 위베르트(Colette Hubert)와 재혼하여 아들 필리페 마귈렌(Philippe Maguilien)을 얻는다. 1964년에는 5권으로 이루어진 "자유(Liberté)" 라는 제목의 책의 첫 번째 권을 펴내는데 이 책은 다양한 연설문과 훈시, 에세이등을 담고 있다. 세네갈[편집] 상고르는 새로이 독립을 얻은 아프리카 국가들간의 연방체인 소위 "프랑스 연방(French Commonwealth)"의 지지자였다. 비록 이 구상이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옛 프랑스령 수단에서 독립한 말리의 모디보 케이타(Modibo Keita)와 함께 연방체를 조직한다. 상고르는 1960년 연방체가 해체되기 전까지 연방 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이후 1960년 9월 5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는 세네갈 국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총리인 마마두 비아는 세네갈의 장기 발전 계획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상고르 자신은 외교관계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두사람은 곧 이견을 드러내게 되었고 1962년 12월 마마두 비아는 쿠데타를 획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복역하게 된다. 이와 함께 상고르는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다. 1967년 3월 22일 상고르는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모면한다. 용의자 무스타파 로(Moustapha Lô)는 사형을 선고 받고 1967년 6월 사형이 집행된다. 이후 그는 1980년 5번의 임기를 마친 이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압두 디우프(Abdou Diouf)가 뒤를 이어 취임한다. 그가 임기에 있는 동안 세네갈은 다당제(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3가지 정당으로 제한)를 채택하였고 교육 체계를 정비하였다.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끝났음에도 세네갈의 환율은 프랑스에 의해 조정받았고, 공식 언어도 프랑스어가 채택되었으며, 프랑스인 조언자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였다. 프랑코포니[편집] 상고르는 프랑코포니의 창설을 지지하였으며 프랑코포니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그는 "프랑스와 개발도상국 연맹(Association France and developing countries)"의 창립자로 참여하는데, 이 연맹의 목적은 개발도상국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1983-2001[편집] 상고르는 1983년 6월 2일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멤버로 선출된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선출된 첫 번째 아프리카인 이었다. 그의 선출식은 1984년 3월 29일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사건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최초의 여성으로 마가리테 유세나르 (Marguerite Yourcenar)가 선출된데 이어 일어난 확기적 사건이었다. 1993년에는 "자유"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5권이 발간되었다. 죽음[편집] 그는 말년을 노르망디의 도시 캉(Caen)근교에 있는 베르송(Verson)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보낸다. 2001년 12월 20일 그곳에서 사망한 그의 장례식은 2001년 12월 29일 다카르에서 행해진다. 장례식에는 프랑스의 의회 의장인 레이몽 포르니(Raymond Forni)와 프랑스 공동체를 대표하여 외무부 장관직을 맡고있는 샤를 조셀린(Charles Josselin)이 참석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상고르의 죽음에 대해 "시는 명인을 잃었고, 세네갈은 대변인을 잃었으며, 아프리카는 몽상가를 잃었고, 프랑스는 친구를 잃었다" 라고 표현했다. 유산[편집]   2006년 몰도바에서 발행된 상고르 기념 우표 사회주의자였음에도 상고르는 당시 아프리카에 만연해 있던 공산주의와 반서구 정서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프랑스 및 서방세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이것은 세네갈의 정치적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세네갈은 아직도 아프리카 국가들 중 쿠데타를 경험하지 않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져온 몇 안되는 국가로 남아있다. 상고르가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 "네그리튀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아프리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아프리카 특유의 정치 철학으로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스마네 타노르 디엥(Ousmane Tanor Dieng)의 도움이 컸다. 그가 선출되었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16번째 의석은 그의 죽음 이후 당분간 공석이 되어 있었다. 이후 이 자리에는 프랑스의 전직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다시 선출된다. 서훈과 수상[편집] 상고르는 일생동안 여러개의 훈장을 받는다. 예술과 문학을 증진시킨 공헌으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1등급 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Grand-Croix)"를 서훈 받았고 그와 비견되는 "오드레 나치오날 두 메리테 훈장"(Ordre national du Mérite)을 받기도 했다. 또한 세네갈의 "오드레 두 리옹 두 세네갈"(Ordre du lion du Sénégal)훈장도 받았다. 1939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전쟁에서 받은 공훈을 인정받아 몇 개의 훈장을 받기도 했고 37개 대학이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어 국제 대학(The French Language International University in Alexandria)이 그의 이름을 따 1990년 개교하였다. 1994년 아프리카 학술 협회(African Studies Association)에서 수상하는 아프리카 공로상(Distinguished Africanist Award)을 수상하였으나 그가 수상 자격인 "아프리카의 연구와 아프리카 공동체에 대한 일생동안의 헌신"을 충족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1996년 그의 90세 생일을 기념해 다카르의 국제 공항을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시[편집] 그의 시는 널리 칭송받고 있으며 1978년에는 "Prix mondial Cino Del Duca"를 수상하기도 했다. 1936년 발표된 그의 시 "appel de la race de Saba"는 아디스 아바바에 주둔해 있던 이탈리아 군대에 영향을 주었다. 1948년 장 폴 사르트르가 서문을 써주었던 프랑스어 시집 "Anthologie de la nouvelle poésie nègre et malgache"를 편찬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쓴 다음과 같은 시가 쓰여져 있다. Quand je serai mort, mes amis, couchez-moi sous Joal-l'Ombreuse. Sur la colline au bord du Mamanguedy, près l'oreille du sanctuaire des Serpents. Mais entre le Lion couchez-moi et l'aïeule Tening-Ndyae. Quand je serai mort mes amis, couchez-moi sous Joal-la-Portugaise. Des pierres du Fort vous ferez ma tombe, et les canons garderont le silence. Deux lauriers roses-blanc et rose-embaumeront la Signare. When I'm dead, my friends, place me below Shadowy Joal, On the hill, by the bank of the Mamanguedy, near the ear of Serpents' Sanctuary. But place me between the Lion and ancestral Tening-Ndyae. When I'm dead, my friends, place me beneath Portuguese Joal. Of stones from the Fort build my tomb, and cannons will keep quiet. Two laurier roses -- white and pink -- will perfume the Signare. 네그리튀드[편집] 상고르는 에메 세자르(Aimé Césaire), 레옹 다마(Léon Damas)와 함께 아프리카의 독창적인 특징과 가치, 철학등을 한데 모아 형상화 하는 말로서 "네그리튀드"의 개념을 만들었다. 이는 프랑스 식민지에 프랑스 문화가 너무 깊숙히 침투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대두된 개념으로 아프리카는 유럽에 대적할만한 문화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선입견에 반발하는 개념이다. 상고르는 유럽 문화의 뿌리가 고대 이집트의 흑인 문화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유럽은 같은 문화의 동일선상에 있으며 이집트에서 기인한 문화가 그리스, 로마를 거쳐 현대의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네그리튀드 사상은 반백인주의를 표방하지 않으며 다양성과 다른 문화간의 교류를 강조한다. 전 자이르 공화국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는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오센티시트"(authenticité)를 주창하기도 했다. 전 임 (초대) 제1대 세네갈의 대통령 1960년 ~ 1980년 후 임 압두 디우프 [숨기기] v • d • e • h  세네갈의 대통령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1·2·3·4·5대) 압두 디우프 (6·7·8대) 압둘라예 와데 (9·10대) 마키 살 (11대) =============================== 아프리카의 지성, 시인, 대통령 ‘레오폴드 상고르' {C}   젊은 날의 레오폴드 상고르는 수백 년 동안 서구 열강들의 지배를 받아온 아프리카의 자유를 열망했다.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던 세네갈에서 태어나 22세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고 아프리카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의 중등교사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살며 아프리카 문화의 특징을 발견하고 아프리카의 잠재력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된 상고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네갈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아프리카 연방체의 설립을 위해 헌신했던 상고르는 1960년 조국 세네갈의 독립을 이끌며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아프리카의 현실에 바탕을 둔, 개방적이고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성격을 띤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주창했고 가톨릭 교도이면서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를 통치하며 5차례의 연임으로 20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정치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기도 한 그가 방한했을 때, 한 기자가 시인이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시화되지 않은 정치가 얼마나 삭막한지 아십니까?”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만큼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상고르 대통령에게 시 정신과 정치 신념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상고르 대통령 내외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1974년 4월 22일 우리나라를 공식방문했다. 아프리카 국가원수로는 이디오피아, 니제르, 가봉에 이어 네 번째로 한국에 온 상고르 세네갈 대통령 내외는 김포공항에서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큰 영애의 영접을 받았고 큰 길가에는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 국가의 대통령을 위해 국민적 환영행사를 벌이며 최고의 국빈대접을 해야 했던 이유는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962년에 우리나라와 수교했으나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것과 달리, 북한은 1972년 세네갈과 수교를 맺고 상고르 대통령을 평양에 초대했다. 평양을 다녀온 상고르 대통령이 유엔과 비동맹회의에서 북한을 지지하게 되었다고 해석한 우리 정부는 상고르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레오폴드 상고르 세네갈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진 1차 정상회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양국간의 우호증진을 위해 우리나라의 무궁화 대훈장과 세네갈의 최고훈장을 서로 교환하고 선물을 증정했다. 상고르 대통령은 국립박물관과 경복궁을 관람한 소감을 말하며 “오래된 한국전통문화의 정신에서 한국이 어떻게 오늘날 급속하고 훌륭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룩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상고르 대통령의 소감을 듣고 박 대통령은 “우리 한반도는 지정학으로 주변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관계로 과거에 외침을 많이 받아 많은 중요문화재가 손실됐다”고 대답했다. 상고르 대통령은 “한국이 통일되면 강대국이 될 것을 확신한다.”(2)고 화답했다. 양국 원수는 경제기술협력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한반도 정세를 비롯한 동북아와 아프리카에 관해서 광범위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한국과 세네갈 양국정부는 정상회담이 끝난 후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과 세네갈 양국 협력과 관련, 두 나라 원수는 협력관계가 여러 분야에서 점차 구체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상호이익이 되는 조치로서 문화경제기술 부문에 협력을 강화하는 데 합의했다”(3)고 밝혔다. 이 공동성명에서 박 대통령은 남북대화를 재개하기 위한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을 자세히 설명했고 상고르 대통령은 이를 높이 평가하며 한국의 통일은 성실한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이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국 원수는 상고르 대통령의 방한이 두 나라의 우호협력관계 증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인정했다. 상고르대통령은 박대통령과 큰 영애를 비롯해 한국 정부와 국민이 보여준 따뜻하고 친절한 환대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세네갈로 돌아갔다.   레오폴드 상고르 대통령은 20년간 재임한 대통령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문인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시는 명인을 잃었고, 세네갈은 대변인을 잃었으며, 아프리카는 몽상가를 잃었고, 프랑스는 친구를 잃었다.”(4) 2001년 12월 20일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 지식인이자 정치인을 잃은 날로 기록됐다.   출생일 1906. 10. 9,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세네갈 조알 국적 세네갈 요약 세네갈의 대통령(1960~80).   시인·정치가로서 온건한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주요 제안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레르족(族)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년간을 작은 마을에서 보냈으며, 최초의 꿈은 설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근의 가톨릭 선교회와 신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20세가 되자 그는 사제직이 자기의 천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카르에 있는 리세(중학교)로 전학했다. 어려서부터 상고르는 아프리카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끈질긴 신념을 드러냈다. 1928년에 그는 부분 장학생의 자격으로 파리에 가서 루이르그랑 리세와 소르본대학교에서 정식 공부를 계속했다. 이 기간에 상고르는 아프리카 예술이 현대의 회화·조각·음악·문학에 명백한 자취를 남겼음을 발견했으며, 이 발견은 아프리카가 현대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굳건하게 했다. 1935년 상고르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학교제도에서 최고의 유자격 교사인 아그레제(agrégé)가 되어 투르에서 프랑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 후 그는 파리 가까이에 있는 한 리세로 전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인 1939 년에 징집된 그는 1940년에 포로로 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2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그의 가장 우수한 시들 가운데 몇 편을 집필했다. 집단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그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다. 전후에 상고르는 프랑스 제헌의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국민의회에 세네갈의 대의원 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파견되었다. 사회당(SFIO)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한 상고르는 1948년에 세네갈민주연합(BDS)을 설립했으며, 이 당의 후보로 1951년의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차점자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5년 후 그는 세네갈의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티에의 시장이 되었으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6년 프랑스 의회가 아프리카의 프랑스 영토들에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하는 구역법(區域 法 loi cadre)을 통과시킬 때 상고르는 처음부터 동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이 법이 연방이 아닌 영토 정부를 강조했으며, 그 결과는 생존력이 없는 작은 나라들의 난립이 될 것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구역법의 효과를 무산시키기 위해 그는 아프리카 연방체의 설립을 위해 헌신할 일련의 정당 창설을 돕고 그 정당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정당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내 전선에서 그는 세네갈진보주의연맹(UPS)의 결성을 도왔는데, 이 연맹은 1976년 이후 사회당(PS)으로 불리면서 1980년대초까지도 세네갈의 집권 여당으로 존속했다. 1950년대말에 상고르는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동맹을 체결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1959년에 세네갈(프랑스령 수단[말리], 다호메이[베냉], 어퍼볼타[부르키나파소]와 함께)이 회원국으로 가입한 단명한 말리 연방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말리 연방은 1960년 8월 20일 세네갈이 탈퇴함으로써 해체되었다. 그후 세네갈은 공화국이 되었고 상고르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상고르의 일생에 닥쳐온 2번째의 큰 위기는 1962년말에 일어났다. 오랫동안 상고르의 비호를 받았던 마마두 디아 총리가 쿠데타를 기도한 것이다. 다시 한번 세네갈 국민은 상고르를 지지하여 궐기했고, 마마두 디아는 종신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새 헌법이 비준되고 상고르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는 1980년 12월 31일 5번째 임기 도중에 공직에서 은퇴했고 아브두 디우프가 그의 뒤를 계승했다. 최고행정관으로서 상고르는 세네갈의 농업을 현대화하고, 개화된 시민 의식을 고취하고, 부패와 무능력을 추방하고, 인접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무신론과 지나친 물질주의에서 다같이 벗어나 아프리카의 현실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같은 슬로건들과 거리가 먼 개방적이고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제3세계의 강력한 대변인으로서 그는 농업국들에 불이익을 초래하는 불공정한 무역 조건들에 항의했다. 또한 그는 1930년대 문학운동으로 '흑인 아프리카 세계의 문화적 유대의 총화'라 정의된 네그리튜드(negritude)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문학 작품과 정치적 업적을 인정받아 4개 대륙의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 12월에 그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윤리·정치학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84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회, 이 아카데미의 역사상 최초의 흑인 회원이 되었다. 상고르의 생애는 역설로 가득 찼다. 그는 가톨릭교도인데다 세레르족이면서도 이슬람교도와 월로프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를 이끌었다. 탁월한 지식인이면서도 농민을 가장 큰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뛰어난 시인이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직업 정치인으로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끌었고 그후 20년 동안 유능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벗은 여인아, 검은 여인아   벗은 여인아, 검은 여인아 그대 입은 피부 빛은 생명이라, 그대 입은 형상은 아름다움이라! 나는 그대의 그늘 속에서 자라났네, 그대의 부드러운 두 손이 내 눈을 가려 주었지. 이제, 여름과 정오(正午)의 한가운데서 나는 알겠네, 그대는 약속된 땅임을, 목마른 높은 언덕의 정상으로부터 그대의 아름다움은 독수리의 번개처럼 내 가슴 한복판에 벼락으로 몰아치네. 벗은 여인아, 검은 여인아 단단한 살을 가진 잘 익은 과일, 검은 포도주의 어두운 황홀, 내 입에 신명(神明)을 실어주는 입 해 맑은 지평을 여는 사반나, 동풍의 불타는 애무에 전율하는 사반나, 조각해 놓은 듯한 탐탐북이여, 승리자의 손가락 밑에서 우레 같이 울리는 탐탐북이여. 그대 콘트랄토의 둔탁한 목소리는 연인의 드높은 영혼의 노래. 벗은 여인아, 검은 여인아 바람결 주름살도 짓지 않는 기름, 역사(力士)의 허리에, 말리 왕자들의 허리에 바른 고요한 기름아. 하늘 나라의 띠를 맨 어린 양이여, 진주는 그대 피부의 밤 속에서 빛나는 별, 그대 비단 물살의 피부 위에 노니는 정신의 감미로움, 붉은 금의 그림자, 그대 머리털의 그늘 속에서, 나의 고뇌는 이제 솟아날 그대 두 눈의 태양 빛을 받아 환하게 밝아오네. 벗은 여인아, 검은 여인아 시샘하는 운명이 그대를 한 줌 재로 만들어 생명의 뿌리에 거름주기 전에, 나는 노래하네. 덧없이 지나가고 마는 그대의 아름다움을, 내가 영원 속에 잡아두고픈 그 형상을 나는 노래하네.   Femme nue, femme noire   Femme nue, femme noire Vêtue de ta couleur qui est vie, de ta forme qui est beauté J'ai grandi à ton ombre ; la douceur de tes mains bandait mes yeux Et voilà qu'au cœur de l'Eté et de Midi, Je te découvre, Terre promise, du haut d'un haut col calciné Et ta beauté me foudroie en plein cœur, comme l'éclair d'un aigle Femme nue, femme obscure Fruit mûr à la chair ferme, sombres extases du vin noir, bouche qui fais lyrique ma bouche Savane aux horizons purs, savane qui frémit aux caresses ferventes du vent d'Est Tamtam sculpté, tamtam tendu qui gronde sous les doigts du vainqueur Ta voix grave de contralto est le chant spirituel de l'Aimée Femme noire, femme obscure Huile que ne ride nul souffle, huile calme aux flancs de l'athlète, aux flancs des princes du Mali Gazelle aux attaches célestes, les perles sont étoiles sur la nuit de ta peau. Délices des jeux de l'Esprit, les reflets de l'or ronge ta peau qui se moire A l'ombre de ta chevelure, s'éclaire mon angoisse aux soleils prochains de tes yeux. Femme nue, femme noire Je chante ta beauté qui passe, forme que je fixe dans l'Eternel Avant que le destin jaloux ne te réduise en cendres pour nourrir les racines de la vie. Extrait de " Œuvres Poétiques" Le Seuil   생고르 Leopold (Sedar) Senghor 1906. 10. 9 ~ 2001,12,20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세네갈의 대통령(1960 ~80). 시인·정치가로서 온건한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주요 제안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레르족(族)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년간을 작은 마을에서 보냈으며, 최초의 꿈은 설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근의 가톨릭 선교회와 신학교에서 수업 을 받았다. 20세가 되자 그는 사제직이 자기의 천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카르에 있는 리세(중학교)로 전학했다. 어려서부터 상고르는 아프리카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끈질긴 신념을 드러냈다. 1928년에 그는 부분 장학생의 자격으로 파리에 가서 루이르그랑 리세와 소르본대학교에서 정식 공부를 계속했다. 이 기간에 상고르는 아프리카 예술이 현대의 회화· 조각·음악·문학에 명백한 자취를 남겼음을 발견했으며, 이 발견은 아프리카가 현대 문명 에 공헌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굳건하게 했다. 1935년 상고르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학교제도에서 최고의 유자격 교사인 아 그레제(agrege)가 되어 투르에서 프랑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 후 그는 파리 가까이에 있는 한 리세로 전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초인 1939 년에 징집된 그는 1940년에 포로로 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2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그의 가장 우수한 시들 가운데 몇 편을 집필했다. 집단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그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다. 전후에 상고르는 프랑스 제헌의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1946년 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국민의회에 세네갈의 대의원 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파견되 었다. 사회당(SFIO)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한 상고르는 1948년에 세네갈민주연합(BDS)을 설 립했으며, 이 당의 후보로 1951년의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차점자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5년 후 그는 세네갈의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티에의 시장이 되었으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6년 프랑스 의회가 아프리카의 프랑스 영토들에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하는 구역법(區域 法 loi cadre)을 통과시킬 때 상고르는 처음부터 동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이 법이 연방이 아닌 영토 정부를 강조했으며, 그 결과는 생존력이 없는 작은 나라들의 난립이 될 것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구역법의 효과를 무산시키기 위해 그는 아프리카 연방체의 설립을 위해 헌신할 일련의 정당 창설을 돕고 그 정당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정당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내 전선에서 그는 세네갈진보주의연맹(UPS)의 결성을 도왔는데, 이 연맹은 1976년 이후 사회당(PS)으로 불리면서 1980년대초까지도 세네갈의 집권 여당으로 존속했다. 1950년대말에 상고르는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동맹을 체결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1959년에 세네갈(프랑스령 수단[말리], 다호메이[베냉], 어퍼볼 타[부르키나파소]와 함께)이 회원국으로 가입한 단명한 말리 연방이 창설되었다. 1959년 12월 상고르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 독립을 호소하는 열변을 토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말리 연방은 이듬해 8월까지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회원국 세네갈과 프랑스령 수단이 탈퇴했기 때문이었다. 세네갈은 공화국이 되었고 상고르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상고르의 일생에 닥쳐온 2번째의 큰 위기는 1962년말에 일어났다. 오랫동안 상고르의 비호를 받았던 마마두 디아 총리가 쿠데타를 기도한 것이다. 다시 한번 세네갈 국민은 상고르를 지지하여 궐기했고, 마마두 디아는 종신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새 헌법이 비준되고 상고르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는 1980년 12월 31일 5번째 임기 도중에 공직에서 은퇴했고 아브두 디우프가 그의 뒤를 계승했다. 최고행정관으로서 상고르는 세네갈의 농업을 현대화하고, 개화된 시민 의식을 고취하고, 부패와 무능력을 추방하고, 인접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무신론과 지나친 물질주의에서 다같이 벗어나 아프리카의 현실 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같은 슬로건들과 거리가 먼 개방적이고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제3세계의 강력한 대변인으로서 그는 농업국들에 불이익을 초래하는 불공정한 무역 조건들에 항의했다. 정치 적·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그가 '흑인 아프리카 세계의 문화적 유대의 총화' 라고 정의한 네그리튜드(negritude)에 대한 그의 옹호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문학 작품과 정치적 업적을 인정받아 4개 대륙의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 12월에 그 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윤리·정치학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84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회, 이 아카데미의 역사상 최초의 흑인 회원이 되었다. 상고르의 생애는 역설로 가득 찼다. 그는 가톨릭교도인데다 세레르족이면서도 이슬람교도와 월로프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를 이끌었다. 탁월한 지식인이면서도 농민을 가장 큰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뛰어난 시인이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직업 정치인으로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끌었고 그후 20년 동안 유능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Léopold Sédar Senghor was a poet, author, politician, and most importantly: a leader. Senghor was the first president of Senegal, and the first African to be a member of the l'Académie Française (The group that decides the grammar rules of French). Leopold is loved by Senegalese like Americans admire George Washington. In 1939, Senghor joined the French Army. A year later, he was captured by the Germans. In the two years he was imprisoned, mostly he wrote poetry. In 1942, Leopold was released due to medical reasons, though he supported the French Resistance. He got married and had two sons (Francis and Guy) before getting divorced and remarrying in 1957. When Senegal got its independence from France in 1960, Leopold Senghor was elected president. He escaped an assassination attempt, and governed Senegal wisely after its independence up until 1980, when he resigned. As he got older, Leopold became more and more respected. Senegalese look at him as the “father” of their country. 네그리튀드(Negritude) - 흑인주의 1930~50년대에 파리에 살던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출신의 작가들이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저항하여 일으킨 문학운동. 그 주도적 인물은 1960년 세네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로서, 그는 마르티니크 출신의 에메 세제르, 프랑스령 기아나 출신의 레옹 다마스와 함께 서구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동화정책이 이론적으로는 인간평등의 신념에 근거를 두지만 아프리카 문화보다 유럽 문명이 우월하며 심지어 아프리카에는 역사와 문화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반박했다. 세계대전에서 동포들이 자신들과 상관없는 명분을 위해 죽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종처럼 취급받는 것을 보고 분노했으며, 역사연구를 통해 흑인들이 처음에는 노예제도로, 다음에는 식민통치로 고통과 굴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견해가 네그리튀드의 여러 기본사상을 형성하게 해준 요인이 되었다. 즉 자연과의 친근함 및 조상과의 부단한 접촉에서 비롯되는 아프리카인의 삶의 신비로움과 포근함은 서구문화의 영혼부재, 물질주의에 맞서 올바른 관점에서 자리를 찾아야 하며, 아프리카인들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가치와 전통이 가장 유익한가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풍요로운 과거와 문화유산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사상이 나왔다. 또한 사회참여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아프리카의 문제와 시적 전통을 다루어야 할 뿐 아니라, 아프리카인들이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도록 고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그리튀드라는 개념은 아프리카의 문화적·경제적·사회적·정치적 가치들을 모두 포괄하며,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전통과 민족의 가치 및 존엄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상고르의 시에는 이런 주제가 모두 드러나 있으며, 그는 다른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세네갈 출신의 비라고 디오프의 시는 아프리카 삶의 신비를 다루었고, 다비드 디오프는 혁명적 저항시를 썼다. 또 자크 라베마낭자라는 마다가스카르의 역사와 문화를 예찬하는 시와 희곡을 썼으며, 카메룬의 몽고 베티와 페르디난드 오요노는 반(反)식민주의 소설을 썼고, 콩고의 시인 치케야 위 탐지는 매우 개인적인 시를 쓰면서도 아프리카 민족의 고통을 다루었다. 그러나 1960년대초부터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이 운동의 정치적·문화적 목표가 이루어지자 네그리튀드를 주제로 한 작품은 많이 줄었으며, 서아프리카 문학운동의 중심지도 세네갈에서 나이지리아로 옮겨갔다.(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출처]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의 시|작성자 대석 ======================== *그대 얼굴의 아름다움  -'칼람'을 위하여  옛 시절 그대 얼굴의 아름다움!  흘러간 나날의 색조로  향기 그윽한 허리 옷을 꺼내놓으렴  역사도 없던 시절의 기억,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우리는 디욘바르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상념은 바닷가에서 서성이고  그곳에서 박자를 맞춘 찬미의 노래는  비단같이 가냘픈 메아리되어 비치고 ...  붉은 숲에 사는 짐승들이 황홀경 속에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목하게 패인 바다 위에  별들은 또 다른 신의 메아리  느릿 느릿 구성지게 젓는 노에는  유성들이 흐르고  메아리치는 심연 위에 몸 굽힌 조상처럼  뱃머리의 가면처럼  너는 그늘진 목소리로 느데이산느를  일어선 투사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다  붉은 숲에 사는 짐승들은  너와 같은 숨결을 취토록 마시고 ...  우리는 바닷가를 돌아 희미하게  디욘바르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때 너의 얼굴은 녹청빛에 묻힌  영원의 검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칼람'은 '찬미'라는 뜻  * 셍고르는 프랑스로 부터 독립한  세네갈의 초대대통령     세네갈 초대 대통령 셍고르 翁 타계  2001.12.21  SNS 공유하기 인쇄하기 글씨크기 작게글씨크기 크게   (다카르(세네갈)ㆍ파리=연합뉴스)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전 세네갈 대통령이 20일 프랑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세네갈 대통령궁이 발표했다. 향년 95세. 세리프 세이 대변인은 셍고르 옹의 타계 소식만 발표했을 뿐 그의 사인(死因)은밝히지 않았다. 한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시가 한 거장을 잃었으며 프랑스는 한 친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세네갈이 1959년 프랑스 통치에서 독립한 후 1960년 초대 세네갈 대통령에 당선한 저명한 시인 셍고르 옹은 여러 해 동안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살았다. 셍고르 옹은 최근 심장질환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인보다는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더 바란다고 종종 말해왔던 셍고르 옹은 1906년 10월 9일 다카르 남쪽 조알이란 해변 지역에서 세네갈의 소수종족 세레레족 출신인 부유한 무역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의 명문교 ‘콜레쥬 루이 르 그랑’ 출신인 그는 프랑스어와 세레레 방언으로 시를 써왔다. 그의 동창들 가운데 한 명인 조르주 퐁피두(1911-1974) 씨는 프랑스 대통령이 됐으며 셍고르 옹과 평생 친구로 지내왔다. 셍고르 옹은 프랑스 시골의사의 딸로 자신의 다른 동창인 클로드 카우르 씨를 퐁피두 씨에 소개했고 카우르씨는 나중에 퐁피두 씨와 결혼해 프랑스의 퍼스트 레이디가 됐다. 지난 1935년부터 1948년까지 프랑스 여러 도시에서 불어 교수를 지낸 셍고르 옹은 제2차 대전 중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해 프랑스 군인으로 자원 입대해 싸우던 중독일군에 잡혀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2차대전 대부분을 지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가장 신랄한 시들 중 일부를 썼다. 그의 첫 시집 "응달의 노래"(Chants d"ombres)는 지난 1948년에 출간됐다. 그는불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파리, 옥스퍼드, 그리고 기타 여러 주요 대학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1968년에는 "국가간, 인종간, 종교간 우호와 평화에 평생 기여한 공로"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서독 평화상"을 받은 바 있다.     출생 1906. 10. 9,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세네갈 조알 국적 세네갈 요약 세네갈의 대통령(1960~80).   시인·정치가로서 온건한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주요 제안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레르족(族)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년간을 작은 마을에서 보냈으며, 최초의 꿈은 설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근의 가톨릭 선교회와 신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20세가 되자 그는 사제직이 자기의 천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카르에 있는 리세(중학교)로 전학했다. 어려서부터 상고르는 아프리카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끈질긴 신념을 드러냈다. 1928년에 그는 부분 장학생의 자격으로 파리에 가서 루이르그랑 리세와 소르본대학교에서 정식 공부를 계속했다. 이 기간에 상고르는 아프리카 예술이 현대의 회화·조각·음악·문학에 명백한 자취를 남겼음을 발견했으며, 이 발견은 아프리카가 현대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굳건하게 했다. 1935년 상고르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학교제도에서 최고의 유자격 교사인 아그레제(agrégé)가 되어 투르에서 프랑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 후 그는 파리 가까이에 있는 한 리세로 전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인 1939 년에 징집된 그는 1940년에 포로로 잡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2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그의 가장 우수한 시들 가운데 몇 편을 집필했다. 집단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그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다. 전후에 상고르는 프랑스 제헌의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국민의회에 세네갈의 대의원 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파견되었다. 사회당(SFIO)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한 상고르는 1948년에 세네갈민주연합(BDS)을 설립했으며, 이 당의 후보로 1951년의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차점자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5년 후 그는 세네갈의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티에의 시장이 되었으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6년 프랑스 의회가 아프리카의 프랑스 영토들에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하는 구역법(區域 法 loi cadre)을 통과시킬 때 상고르는 처음부터 동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이 법이 연방이 아닌 영토 정부를 강조했으며, 그 결과는 생존력이 없는 작은 나라들의 난립이 될 것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구역법의 효과를 무산시키기 위해 그는 아프리카 연방체의 설립을 위해 헌신할 일련의 정당 창설을 돕고 그 정당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정당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내 전선에서 그는 세네갈진보주의연맹(UPS)의 결성을 도왔는데, 이 연맹은 1976년 이후 사회당(PS)으로 불리면서 1980년대초까지도 세네갈의 집권 여당으로 존속했다. 1950년대말에 상고르는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동맹을 체결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1959년에 세네갈(프랑스령 수단[말리], 다호메이[베냉], 어퍼볼타[부르키나파소]와 함께)이 회원국으로 가입한 단명한 말리 연방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말리 연방은 1960년 8월 20일 세네갈이 탈퇴함으로써 해체되었다. 그후 세네갈은 공화국이 되었고 상고르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상고르의 일생에 닥쳐온 2번째의 큰 위기는 1962년말에 일어났다. 오랫동안 상고르의 비호를 받았던 마마두 디아 총리가 쿠데타를 기도한 것이다. 다시 한번 세네갈 국민은 상고르를 지지하여 궐기했고, 마마두 디아는 종신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새 헌법이 비준되고 상고르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는 1980년 12월 31일 5번째 임기 도중에 공직에서 은퇴했고 아브두 디우프가 그의 뒤를 계승했다. 최고행정관으로서 상고르는 세네갈의 농업을 현대화하고, 개화된 시민 의식을 고취하고, 부패와 무능력을 추방하고, 인접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무신론과 지나친 물질주의에서 다같이 벗어나 아프리카의 현실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같은 슬로건들과 거리가 먼 개방적이고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제3세계의 강력한 대변인으로서 그는 농업국들에 불이익을 초래하는 불공정한 무역 조건들에 항의했다. 또한 그는 1930년대 문학운동으로 '흑인 아프리카 세계의 문화적 유대의 총화'라 정의된 네그리튜드(negritude)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문학 작품과 정치적 업적을 인정받아 4개 대륙의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 12월에 그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윤리·정치학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84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회, 이 아카데미의 역사상 최초의 흑인 회원이 되었다. 상고르의 생애는 역설로 가득 찼다. 그는 가톨릭교도인데다 세레르족이면서도 이슬람교도와 월로프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를 이끌었다. 탁월한 지식인이면서도 농민을 가장 큰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뛰어난 시인이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직업 정치인으로서 조국을 독립으로 이끌었고 그후 20년 동안 유능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00    중남미 수녀 시인 - 소르 후아나 이녜스 데 라 크루스 댓글:  조회:6183  추천:0  2016-11-30
"세상은 그냥 아름다움이였다"라고. 분명, 나는 아직 "봄"이 서툴다. 미겔 카브레作 1751년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그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다' -소르 후아나 이녜스 데 라 크루스 (1651~1695): 중남미 최초의 페미니스트 / 박 채 연 소르 후아나 이녜스 데 라 크루스 (Sor Juana Iñés de la Cruz(1651-1695)) 이름 앞에 붙는 “소르”라는 말은 수녀라는 뜻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한다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수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어권에서는 그녀를 가리켜 “소르 후아나”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어 이 글에서도 그렇게 부르겠다. 는 17세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중남미에서 배출한 뛰어난 작가이자 지식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 살에 글을 읽었으며 6세 무렵에는 글을 쓸 줄도 알았다. 일곱 살에는 여성으로서 갈 수 없었던 대학을 남장을 하고 가겠다고 조르기도 하였다.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녀는 외할아버지 서재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라틴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녀의 지식에 대한 욕구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8세에 고향의 백일장에서 종교시, “찬가”를 써서 입상하면서 문학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 재능이 알려지면서 소르 후아나는 13세의 나이로 당시 식민지 멕시코 부왕(副王)의 궁정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나 대학 교수들과 당당히 지식을 겨루어 궁정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궁정의 여러 행사 때 필요한 시를 씀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함과 동시에 문학가로서 성숙해 갔다. 그러나 그녀는 식민지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 사생아 출신의 -그녀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출신인 아버지와 멕시코 태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성으로서 글을 쓰고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곧 깨닫게 된다.   이러한 힘겨운 상황에서 소르 후아나는 결국 수도 생활을 선택한다. 18세에 그녀는 맨발의 갈멜회에 입회했다가 엄격한 규율을 지킬 건강이 허락하지 않자 성 예로니모 교단의 수녀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물을 만난 물고기인 듯, 그녀는 자신의 4000여권의 장서와 각종 악기들, 천체 관측기구 등으로 도서관을 만들어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우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녀의 방에는 식민지 멕시코의 최고의 인문학자였던 시구엔사 이 공고라 (Sigüenza y Góngora)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드나들었고 부왕이나 왕비 등 권력 상층부 인사들과도 밀접한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르 후아나의 위기는 안토니오 비에이라 신부(1606-1697)의 강론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언약의 설교]라는 제목을 가진 비에이라 신부의 강론은 이미 40년 전에 포르투갈에서 행해진 것이었으나 워낙 유명하여 소르 후아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에이라 신부가 정통 가톨릭 교리를 반박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반대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녀가 쓴 글을 푸에블라의 주교인 마누엘 페르난데스 데 산타 크루스가 [아테나 여신에 필적하는 편지 Carta Atenagórica]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여성의 몸으로, 또 수녀의 신분으로 비에이라 신부의 글에 이의를 제기한 무모함은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푸에블라의 주교는 소르 필로테아라는 가명으로 소르 후아나에게 바치는 서문도 실었는데 그는 소르 후아나의 재능을 극찬하면서도 “학문은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 아니며 어리석고 헛된 것이다...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천상의 것을 구하지 않고 지상의 천박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유감스럽다”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목적으로 소르 후아나는 [필로테아 수녀님에 대한 답신](1691)이라는 글을 쓰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녀는 종교 재판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침묵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때 교회에서 소르 후아나에게 다음과 같은 성경의 성 바울로의 충고를 인용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대로 여자들은 교회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1고린 14,34-35). 이후 소르 후아나는 1695년 페스트가 유행하여 수도회의 자매들을 열심히 돌보던 중에 전염되어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의 역사학자인 아메리코 카스트로는 후아나 수녀의 삶을 말하면서 “지성의 순교 Martir de Inteligencia”라고 정확히 표현하였다.   소르 후아나를 파멸로 이끌었던 [답신]은 자신의 유년기의 삶을 비롯해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 등을 구술한 자전적인 비판서이다. 이는 중남미 산문 문학에서도 흔치 않은 내용으로서 그녀의 시작품인 [첫번째 꿈]과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세속적인 학문과 예술에 경도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 나에게 최초로 이성의 빛이 비춘 순간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 어떤 외부의 억압에도 -수없이 받아 왔고- 나 스스로의 반성으로도-그것도 적게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열망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로서 학문에 대한 나의 열정이 지나치다고도 하며 심지어는 해롭다고까지 하는 까닭에 나는 하느님께 당신의 법을 따를 정도의 지력만을 남기고 거두어 주십사고 기도 드린 것도 하느님께서만 아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제가 제 이름과 함께 지식에 대한 열망을 묻어버리고 나에게 능력을 주신 분을 위해 희생하고자 했음을 아십니다. 그녀는 모든 학문과 예술이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서 결국 최고의 학문인 신학으로 가는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적인 학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속의 지식을 배울 권리를 수호하며 지식을 통하여 믿음의 신비로 나가는 길이 필요불가결함을 역설한다. 지성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님을 주장하며 자신의 작품 활동과 지식 추구가 믿음의 신비를 알기 위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행위임을 떳떳이 밝힌다. 따라서 그녀의 문학에는 스페인 신비문학의 거장인 테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에서 보여지는 신비의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르 후아나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이성의 빛으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신비 속으로 가고자 한다. 그녀의 종교적 입장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 즉 지식을 통해서 믿음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로 요약될 수 있다.   교회가 개개인의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수녀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살아가는 것은 지식에 대한 열망을 억압하는 요소였으나 동시에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길, 결혼을 하거나 수녀가 되는 것에서 후자를 택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수녀로서 여성이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은 알고자 하는 욕망, 지식 추구의 열망이었다. 그녀는 한 소네트에서 자신의 열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세상이여, 왜 나를 귀찮게 하는가?/ 아름다움을 위해 지적 능력을 쓰지 않고/ 지적 능력을 위해 아름다움을 소진하는 것이/ 당신을 화나게 했는가// 나는 보석이나 부귀를 원치 않는다네/ 부귀를 위해 나의 사고력을 쓰기보다/ 나의 사고력을 위해 부귀를 쓸 때/ 나는 항상 행복을 느낀다네// 세월이 빼앗아 가는/ 아름다움을 존중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부귀도 나를 즐겁게 못한다네// 허망한 일에 삶을 소비하기보다/ 차라리 허무한 삶을/ 나의 진리를 위해 바치고 싶네   이 시는 소르 후아나의 지식 추구 열망이 허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성으로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상황에서 그녀는 이렇듯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또 그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기도 하였다. 수녀로서의 종교적 헌신은 칭찬 받을 수 있었지만 문학적 행위는 교회 당국의 비난의 대상이었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의 당연한 본성인 순종을 거스르는 반역적 행위이자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이 여성들에게 지식 추구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서를 잘못 해석한 탓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하느님의 참된 구원은 수도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지식을 아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남성과 똑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성의 빛을 받은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성서와 신화, 역사에 등장하는 40여명의 여성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그 중에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성녀로 순교자이며 학자였던 카타리나 성녀를 언급하면서 이전의 많은 성녀들이 그들의 지식으로 존경받는데 자기는 왜 그럴 수 없는지 반문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비에이라 신부의 설교를 비판한 것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나는 그가 누리는 자유도 없단 말인가? 내가 비에이라 신부와 견해가 다르다는 것은 불경죄이고 그가 교회의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것은 죄가 아니란 말인가?”라며 항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로테아 수녀님에 대한 답신]은 중남미 최초의 페미니스트 선언으로도 간주된다.   후아나 수녀는 비에이라 신부를 반박하면서 “내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듯이 어느 누구나 나의 의견을 반박할 자유가 있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녀에게 차라리 남자가 되라고 야유하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나는 그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도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 왔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리고 라틴어에서는/ 단지 결혼한 여자들에게만/ 여자라고 부르며/ 처녀라는 단어는 두 성이 공통으로 있다.// 따라서 나를 여자로 보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성에게 봉사하는 그런 의미의/ 여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내 육체는 여성, 남성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영혼이 거하는/ 중성적인 것 또는 추상적인 것이다.”   수녀로서의 종교적 의무감과 지성인으로서의 열망 사이에서 그녀가 택했던 길은 언제나 후자였다. 그녀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수녀가 되는 것을 망설이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내 성격과 맞지 않는 점도 있었지만 절대로 결혼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의 구원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고 싶어하며 저의 공부를 방해하는 의무적인 일들을 싫어하고 공동생활의 소음이 나의 책의 고요를 깨는 것을 싫어하는 나의 단점들 때문에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혹은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보다는 그녀가 되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낀다. 그녀는 일생동안 자신을 억압하는 세계와 대립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즉 지식 추구의 자유를 얻고자 투쟁하였고 결국은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침묵하고 말았다. 그녀의 희망이자 목표는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질서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것, 절대 진리, 이성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고 있었다. 무질서와 혼돈의 세속 세계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이것이 그녀의 최초이자 마지막 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대는 그녀를 표류시키고 말았다. 소르 후아나는 자신을 격침시킨 남성의 세계를 향하여 무언의 저항을 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글쓴이 소개 :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 스페인문학 문학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대학교 출강)=====================================================================중남미 현대시 (1) 모데르니스모 1880년부터 1920년대는 중남미에서 새로운 문학 동향이 탄생한 중요한 시기이다. 이때 생겨난 혁신적 동향의 문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가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이다.   모데르니스모는 프랑스 고답파와 상징주의로부터 완벽한 형식에 대한 열망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산문은 더욱 경쾌하고 풍부한 리듬을 갖게 되었으며, 시는 새로운 틀과 운율 및 어휘의 조합을 갖게 된다. 또 한, 모데르니스모는 새로운 감각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현대로 들어선 19세기 말의 인간이 겪게 된 불안스럽고 복잡하며 근원이 모호한 고뇌였다. (2) 모데르니스 시인들 펠릭스 루벤 가르시아 사르미엔토(Félix Rubén García Sarmiento, 1867~1916) 펠릭스 루벤 가르시아 사르미엔토(Félix Rubén García Sarmiento)의 『푸름(Azul)』이 발표된 1888년과 그가 사망한 1916년은 모데르니스모의 절정과 쇠퇴를 의미한다. 그는 모데르니스모 운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중남미뿐만 스페인에도 이 시학을 전파했다. 중남미의 모데르니스 시인들로는 쿠바의 시인 호세 훌리안 마르티 페레스(José Julián Martí Pérez), 콜롬비아 시인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é Asunción Silva), 쿠바 시인 호세 훌리안 에르쿨라누 델 카살 이 데 라 라스트라 (José Julián Herculano del Casal y de la Lastra), 멕시코 시인 마누엘 구티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érrez Nájera), 아르헨티나 시인 레오폴도 루고네스 아르궤요(Leopoldo Lugones Argüello), 멕 시코 시인 아마도 네르보(Amado Nervo), 칠레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등이 있다. (3) 전위주의 시 문학 프랑스의 전위주의(vanguardismo) 시 문학에 영향을 받아 시작된 중남미 전위주의는 유희의 정신, 어휘의 비일관성, 독창성에 대한 열정,  새로움과 놀라움의 추구가 특징이며, 반서정주의, 반일반화주의, 반수사주의가 두드러진다. (4) 전위주의 시인들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1998) 칠레 시인 비센테 우이도브로(Vicente Huidibro)는 창조주의 시학(詩學, poetics)으로 중남미에서 최초로 전위주의 시운동을 시작하고 전파했다. 이외에도 페루 시인 세사르 세자르 아브라함 바예호 멘도사 (César Abraham Vallejo Mendoza)가 있고, 그의 대표작으로는 『검은 전령(Los heraldos negros)』과 『트릴세(Trilce)』가 있다.   쿠바의 니콜라스 크리스토 기옌 바티스타(Nicolás Cristóbal Guillén Batista)는 대표작으로 『두 할아버지의 발라드』가 있다. 칠레 시인으로서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대표작으로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 『총가요집(Canto general)』 등이 있다. 1   99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는 대표작으로 『태양의 돌(Piedra del sol)』이 있다.   이 밖에 포스트모더니즘 시인들로 칠레의 니카노르 파라 산도발(Nicanor Parra Sandoval), 에르네스토 카르데날(Ernesto Cardenal)등이 있다.
1899    노르웨이 시인 - 비에른 스티에르네 비에른손 댓글:  조회:5551  추천:0  2016-11-30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 다른 표기 언어비외른손 , Bjørnstjerne Martinus Bjørnson     출생일 1832. 12. 8, 노르웨이 크비크네 사망일 1910. 4. 26, 프랑스 파리 국적 노르웨이 요약 노르웨이의 시인·극작가·소설가·언론인·편집인·대중 연설가·연극연출가. 19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목차 펼치기 당대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헨리크 입센, 알렉산더 헬란, 요나스 리와 더불어 19세기 노르웨이 문학의 '4대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시 〈예, 우리는 이 땅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Ja, vi elsker dette landet〉는 노르웨이 국가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롬스달렌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자랐는데, 이 마을은 나중에 그가 쓴 농촌 소설의 무대가 되었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교훈적인 의도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노르웨이의 역사와 업적에 대해 국민적 자부심을 자극하고 이상을 제시하려고 애썼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 15년 동안 북유럽의 전설과 자신이 알고 있던 당시 노르웨이의 시골생활에서 영감을 얻어 글을 썼다. 그는 이 두 분야를 번갈아 이용했고, 자신의 이러한 집필방식을 '윤작'체제라고 불렀다. 북유럽 전설에서 얻은 자료는 희곡으로 결실을 얻었으며 당대의 농촌생활에 대한 자료는 소설로 수확을 얻었다. 이 두 분야는 모두 새시대의 노르웨이를 옛날의 노르웨이와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적 사기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이 윤작체제방식이 낳은 초기 성과로는 농민소설 〈양지 바른 언덕 Synnøve solbakken〉(1857), 단막 역사극 〈전투와 전투 사이 Mellem Slagene〉(1857), 소설 〈아르네 Arne〉(1859)·〈행복한 소년 En glad gut〉(1860), 희곡 〈절름발이 훌다 Halte-Hulda〉(1858) 등을 들 수 있다. 1857년에 입센의 후임으로 베르겐 극단의 예술감독이 되어 1859년까지 일했다. 1858년에 여배우인 카롤리네 라이메르스와 결혼했고, 〈베르겐포스텐 Bergenposten〉지의 편집인이 되었다. 1859년 선거에서 보수당 국회의원들이 패배하고 얼마 후 자유당이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그가 이 신문에서 보인 활동 때문이기도 했다. 비외른손은 3년 동안 해외를 여행한 뒤 크리스티아니아 극단의 연출가가 되었고, 1866~71년에는 〈Norsk Folkeblad〉지를 편집했다. 같은 시기에 〈시와 노래 Digte og sange〉(1870) 초판이 나왔고, 서사시인 〈아른리오트 겔리네 Arnljot Gelline〉(1870)도 발표되었다. 정치 투쟁과 문학인들간의 싸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던 비외른손은 글쓰는 데만 전념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떠났다. 결국 국제적 명성을 가져다준 희곡 〈파산 En fallit〉(1875)·〈편집자 Redaktøren〉(1875)는 스스로 택한 망명 생활에서 얻은 성과였다. 이 2편의 희곡은 뒤이어 발표한 희곡 〈왕 Kongen〉(1877)·〈새로운 체제 Det ny system〉(1879)와 마찬가지로 문제를 제기하고 거기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덴마크 작가이자 비평가인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주장하던, 당대문학이 제공해야 하는 바를 충족시켰다. 후기 작품으로는 소설 〈쿠르트가의 유산 Det flager i byen og påhavnen〉(1884)·〈신의 뜻대로 På Guds veje〉(1889)·〈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 Over Ævne Ⅰ〉(1883)·〈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 Over Ævne Ⅱ〉(1895)을 비롯한 수많은 감동적 희곡들이 남아 있다. 〈쿠르트가의 유산〉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기적에 대한 믿음을 비난한 반면, 〈신의 뜻대로〉는 사회 변화를 다루면서 그런 변화는 우선 학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밖에도 〈파울 랑게와 토라 파르스베르그 Paul Lange og Tora Parsberg〉(1898)는 정치적 편협함을 주제로 했다. 만년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세계 평화와 국가간의 화해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비외른손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고, 그의 희곡은 유럽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19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래, 우린 이 땅을 사랑한다》(노르웨이어: Ja, vi elsker dette landet)는 노르웨이의 국가이다. 시인인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이 작사, 리카드 노닥이 작곡하였다. 노르웨이 왕실은 왕의 노래(Kongesangen)라는 국가를 사용한다. 보통은 1절과 7절, 8절만 부른다. 노르웨이어 가사[편집] 1. Ja, vi elsker dette landet, som det stiger frem, furet, værbitt over vannet, med de tusen hjem. Elsker, elsker det og tenker på vår far og mor og den saganatt som senker drømme på vår jord. Og den saganatt som senker, senker drømme på vår jord. 2. Dette landet Harald berget med sin kjemperad, dette landet Håkon verget medens Øyvind kvad; Olav på det landet malte korset med sitt blod, fra dets høye Sverre talte Roma midt imot. 3. Bønder sine økser brynte hvor en hær dro frem, Tordenskiold langs kysten lynte, så den lystes hjem. Kvinner selv stod opp og strede som de vare menn; andre kunne bare grede, men det kom igjen! 4. Visstnok var vi ikke mange, men vi strakk dog til, da vi prøvdes noen gange, og det stod på spill; ti vi heller landet brente enn det kom til fall; husker bare hva som hendte ned på Fredrikshald! 5. Hårde tider har vi døyet, ble til sist forstøtt; men i verste nød blåøyet frihet ble oss født. Det gav faderkraft å bære hungersnød og krig, det gav døden selv sin ære – og det gav forlik. 6. Fienden sitt våpen kastet, opp visiret for, vi med undren mot ham hastet, ti han var vår bror. Drevne frem på stand av skammen gikk vi søderpå; nu vi står tre brødre sammen, og skal sådan stå! 7. Norske mann i hus og hytte, takk din store Gud! Landet ville han beskytte, skjønt det mørkt så ut. Alt hva fedrene har kjempet, mødrene har grett, har den Herre stille lempet så vi vant vår rett. har den Herre stille lempet så vi vant vi vant vår rett.   8. Ja, vi elsker dette landet, som det stiger frem, furet, værbitt over vannet, med de tusen hjem. Og som fedres kamp har hevet det av nød til seir, også vi, når det blir krevet, for dets fred slår leir. også vi, når det blir krevet, for dets fred, dets fred slår leir.   한국어 해석[편집] 1절 그렇도다 우리는 이 조국을 사랑한다 이곳의 있는 그대로를 바위 투성이에 바다의 풍랑을 맞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안식처인 이곳을 사랑한다 기억하는 것을 사랑한다 우리의 조상들을 그리고 이것은 사가의 밤들을 깊게 하여 우리나라에 대해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가의 밤들을 깊게 하여 우리나라에 대해 꿈을 꾸게 한다 2절 집과 오두막에 있는 노르웨이인들은 위대한 하느님에게 감사한다 하느님은 이 국가를 보호하기 원했지만 어려운 일들도 있었다 아버지들이 싸웠던 모든 싸움들 어머니들이 흘렸던 눈물들 하느님은 고요하게 움직이셨고 그래서 우리는 정의를 가지게 되었다 하느님은 고요하게 움직이셨고 그래서 우리는 정의를 가지게 되었다 3절 그렇도다 우리들은 이 조국을 사랑한다 이곳의 있는 그대로를 바위투성이에 바다의 풍랑을 맞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안식처인 이곳을 그리고 조상들의 분투를 상기하여 승리하기 위해 우리 역시 그것이 필요로 할 때 평화를 위해 야영을 할 것이다 우리 역시 그것이 필요로 할 때 평화를 위해 야영을 할 것이다 4절 물론, 우리에게 많은 게 주어지지는 않았다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주어졌다네. 언젠가 그들은 우리에게 도전할 것이라네. 그것이 걸린 문제로 인해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 나라를 태우고, 가을보다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리라. 밑의 프레드릭셸드에서! 5절 힘든 시간은, 우리가 대항을 하고 있다네. 궁극적으로 거부되었다네. 하지만 최악의 고통은, 파란 눈의 자유는 우리에게 태어났다네. 그것은 아버지에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 기아와 전쟁. 그것은 자신의 명예에 죽음을 준, 그리고 그것은 화해했다네. 6절 적군이 자신의 무기를 멀리 던져 바이저까지, 우리는 그가 정말로 궁금했다네. 그가 우리의 형제였다네.. 치욕의 조건의 앞으로 추진하여, 우리가 남쪽으로 갔다네. 이제 우리는 세 형제라네. 그리고 일어나라! 7절 집과 오두막의 노르웨이 사람은, 당신의 위대한 하나님께 감사했다네! 그가 보호하려는 어두워 보였지만. 아버지는 싸웠고, 엄마가 주님을 조용히 이동시켰다네. 우리의 권리를 얻었다네. 주님은 조용히 이동했다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원했다네. 8절 자,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한다네. 그것은 위로 상승함에 따라 견고하고 물 위, 풍화되어 수천개의 가정에 그리고 조상의 투쟁으로 제기하였고 그대의 승리로 빈곤에서 우리도 그것을 주장하면 그 평화 캠프에서 우리도 그것을 주장하면 그 평화 그 평화 캠프라네.
1898    아이슬란드 시인 - 스노리 스튀르글뤼손 댓글:  조회:6548  추천:0  2016-11-30
스노리 스튀르들뤼손 다른 표기 언어Snorri Sturluson     출생일 1179, 아이슬란드 사망일 1241. 9. 22, 레이캬홀트 국적 아이슬란드 요약 아이슬란드의 시인·역사가·족장. 목차 〈산문 에다 Prose Edda〉·〈헤임스크링글라 Heimskringla〉의 저자이다. 위대한 시인이자 〈에길 사가 Egils saga〉에 나오는 영웅 에길 스칼라그림손의 후예로서 그는 3세 때부터 아이슬란드의 오디에 있는 가장 영향력있는 족장인 존 로프트손의 집에서 자랐으며 그를 통해 아이슬란드 전통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었고 유럽에 대해서도 폭넓은 식견을 갖게 되었다. 1199년 한 상속녀와 결혼하여 땅과 권력을 얻기 시작했다. 1206년 레이캬홀트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대부분의 작품을 썼다(1223~35). 1215~18, 1222~32년에 '법의 대변자'(lawspeaker)라는 아이슬란드 고등법원의 최고직에 있었으며 1218년 노르웨이 국왕 호콘 4세로부터 노르웨이를 방문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노르웨이 체류중 정치에 관계하여 호콘 왕에게 자신이 아이슬란드 왕이 될 수 있다고 설득시킴으로써 스노리는 호콘 왕의 가신이 되었다. 1220년 아이슬란드로 돌아왔으나 이듬해부터 호콘 왕과 관계가 악화되었고 1241년 결국 호콘 왕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스노리의 글은 광범위한 영역과 뛰어난 형식을 지닌 수작으로 손꼽힌다. 〈산문 에다〉는 시학(詩學)에 관한 지침서였으며, 그는 여기서 고대 노르웨이 전설을 재미있게 간추려 설명했고 고대 북유럽 음유시인들의 화려한 문체와 고대 북유럽 음유시 및 고대 아이슬란드 시(에다 시)에 사용된 매우 다양한 운율을 밝혀놓았다. 또한 노르웨이의 성자 올라프에 관한 전기를 썼는데, 이 작품은 전사 겸 마법사인 오딘 신(神)의 전설적인 후예들로부터 에를링손 대제에 이르기까지 노르웨이 왕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헤임스크링글라〉라는 저서에 수록되어 있다. 사무엘 레잉이 영문으로 번역한 3권(1844)은 판을 거듭했다. 스노리는 이전의 사실(史實)에 바탕을 두고 〈헤임스크링글라〉를 썼으나 자신도 새로운 자료를 많이 모았다. 그는 특히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당시로부터 입으로 전해져온 시를 중요시했으며, 그것이 당대의 정치적 사건과 인간 본성의 믿을 만한 반영으로 보였기 때문에 구전 형태의 시를 택했던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그가 역사가로서 비판적으로 인식한 모든 것을 직접 극으로 표현해내는 능력에 있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지성, 온화함, 학자적 근면성 등의 자질들은 조카가 그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스튀를륀가 사가 Sturlunga saga〉에서의 약하고 간사한 성격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에다, 헤임스크링글라                                                                                                                                  ///@@@\=     이 문서에서 나오는 이름은 아이슬란드식입니다. 마지막에 있는 것은 부칭 또는 모계명이지, 가족성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 사람은 스노리로 부릅니다. 스노리 스투를루손 Snorri Sturluson 스노리를 묘사한 1890년대 판화 출생 1179년 월 일. 아이슬란드 자유국 달라시슬라 사망 1241년 09월 23일 아이슬란드 자유국 레이크홀트 직업 정치인, 시인, 역사학자 언어 고대 노르드어 국적 아이슬란드 자유국 활동기간 12??년 ~ 1225년 장르 설화 대표작 신 에다 헤임스크링글라 부모 스투를라 토르다르손 구드뉘 보드바르스도티르 스노리 스투를루손(고대 노르드어: Snorri Sturluson, 아이슬란드어: Snorri Sturluson 스노리 스튀르들뤼손, 노르웨이어: Snorri Sturlason 스노리 스투를라손[*], 스웨덴어: Snorre Sturlasson, 1178년 ~ 1241년 9월 23일)은 아이슬란드의 시인·역사가·정치가이다. '스투를루손'은 성이 아니라 '스투를라(Sturla)의 아들'이라는 뜻의 부칭(父稱)이므로 이름을 줄여 부를 때는 '스노리'라고 불러야 옳다. 스노리는 《에길 사가》의 주인공 에길 스칼라그림손의 자손으로 두 차례에 걸쳐 아이슬란드의 의회인 알팅(Alþing)의 의장인 뢰그쇠귀마뒤르(Lögsögumaður; '법을 말하는 자') 자리를 지냈다. 오늘날에는 작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산문 에다》, 혹은 《스노리 에다》로도 알려져 있는 《신(新) 에다》와 《헤임스크링글라》를 집필하였다. 《신 에다》는 북유럽 신화와 고대 노르드 시(詩)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고 《헤임스크링글라》는 초기 노르웨이 왕들에 대한 전설과 역사가 혼합되어있는 사가를 묶은 작품이다. 스노리는 노르웨이의 왕 하콘 하코나르손(Hakon Hakonarsson)에 대한 모반 기도에 관여했으나 실패한 것이 화근이 되어 레이캬홀트의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노르웨이 문학의 뿌리는 지금으로부터 1,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초기 아이슬란드 문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현존하는 스칸디나비아의 모든 초기문학은 아이슬란드의 필사본에 기록되어 있고 그중 일부는 노르웨이인들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하던 9세기말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중세 아이슬란드의 방대한 자국어 문학에는 노르웨이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색인:게르만 종교와 신화). 가장 오래된 시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시 에다 Poet-ic Edda〉 또는 〈옛 에다 Elder Edda〉라고 하는 사본에 실려 있으며, 대체로 인간세계를 다루는 영웅시들과 신들의 세계를 다루는 신화시들의 2부류로 나뉜다. 또한 9~13세기의 노르웨이인들과 아이슬란드인들은 스칼드 시(skaldic poetry)도 지었다. 그 형식은 9세기에 노르웨이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의 아이슬란드 문학과 노르웨이 문학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색인:스칼드 시). 1000년에 아이슬란드가 그리스도교를 채택한 사건은 서유럽의 영향을 받는 계기가 되어, 선교사들과 함께 라틴어가 들어왔다. 라틴어와 자국어로 역사가 씌어졌고, 성자전을 위시한 종교문학도 인기를 얻었다. '사가'(Saga)란, 아이슬란드 말로 전해진 것이건 글로 씌어진 것이건 모든 종류의 이야기와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나, 영어에서는 특히 12~15세기에 쓰여진 아이슬란드의 영웅담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색인:아이슬란드 사가). 사가의 주인공들은 대개 노르웨이 왕들, 아이슬란드 시조들, 또는 4~8세기 게르만족의 전설적 인물들이다. 이른바 〈산문 에다 Prose Edda〉 또는 〈신(新) 에다 Younger Edda〉로 알려진 작시법 지침서의 저자, 스노리 스튀르들뤼손도 노르웨이 초대 왕들의 사가를 쓴 바 있다. 12~14세기에는 상당한 양의 문학이 라틴어로부터 번역되었고, 성경의 노르웨이어 번역도 시작되었다(→ 색인:라틴 문학). 대륙의 로맨스들이 도입되어서 트리스탄·샤를마뉴 등의 이야기들이 번안되었고, 아이슬란드 고유의 로맨스도 씌어지게 되었다. 이상을 아이슬란드 문학의 고전기라 한다면, 그 이후 13세기 후반부터 한동안은 그다지 괄목할 만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사본들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어 13세기 문헌의 14~15세기 필사본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1380년에 시작된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정치적 합병으로 인해, 덴마크어는 공식적·문학적 매체가 되었고, 코펜하겐은 두 나라의 문화적 수도가 되었다. 노르웨이의 자국적 문학활동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야 다시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A.P. 베이어와 P. 다스 등이 있다. 18세기는 덴마크 문학의 전성기였다. 세기 전반에 걸친 가장 위대한 문인 홀베르는 노르웨이 태생의 극작가로서, 덴마크 문학을 전 유럽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하였다. 그밖에도 덴마크 문학의 지도적 작가들의 상당수는 노르웨이인들이었으며, 이들은 1772년 코펜하겐에서 '노르웨이 협회'(Det Norske Selskab)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노르웨이 본토에서는 이렇다 할 문학활동이 없었으며, 단지 1760년 왕립 노르웨이 학회의 설립만이 그 문화적 여망의 일면을 보여준다. 1814년의 킬 조약 이후로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와 생활양식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에 이념적 갈등이 일어나서, 기존의 덴마크 문화를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J.S. 벨하벤 등의 '지식인'들과 덴마크와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하는 H. 베르겔란트 등의 '애국자'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노르웨이의 '민족적 낭만주의'로 알려진 19세기 중반의 문학은 더 큰 국가적 여망을 반영하고 있다. P.C. 아스비외른센, J.E. 모에, M.B. 란스타 등에 의한 민담 및 민요의 채집, P.A. 뭉크의 방대한 노르웨이 민족사 저술, I. 오센의 란스몰 운동 등은 모두가 민족적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시대에 발표된 작품들은 의식적으로 노르웨이의 과거 영웅시대와 노르웨이 농민들을 다루고 있다. A.O. 비녜의 서정시도 이 시대에 씌어졌다. 1870~80년대에는 입센과 비외른손으로 대표되는 사실주의적 '문제'문학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사회의 기둥 Samfundets Støtter〉(1877)로 시작되는 일련의 문제극들은 입센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유형의 극에 속하는 비외른손의 최초 작품은 〈파산 En fallit〉(1875)이다. 그밖에 근대 노르웨이 문학의 중심인물로는 J. 리, A. 헬란 등이 있다. 1870년대의 문학은 사회개혁에 관한 당대의 낙관적 태도와 보조를 맞추어 개인의 성장과 자기표현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점차 회의주의와 환멸이 스며들어 작가들은 기존의 사회제도를 더욱 신랄히 공격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다른 작가들로는 H.H. 예게르, A. 스크람, A. 가르보르 등이 있다. 1890년대에는 새로운 세대가 기성세대를 공격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크누트 함순이다. 그는 사회문제에 대한 당대의 지나친 집착에 반발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굶주림 Sult〉(1890)을 비롯한 초기 소설들에 잘 나타나 있다. 함순은 1920년에 노벨 문학상을 탔다. 한편 당시의 서정시인으로는 S. 옵스트펠데르와 N.C. 푸크트, 극작가로는 군나르 헤이베르와 한스 에른스트 힝크 등이 유명하다. 20세기 전반 노르웨이 문학의 진정한 성과는 소설과 서정시에 있으며, 희곡은 헤이베르와 G. 그리그의 작품들을 빼고는 그다지 뛰어난 것이 없다. 세기초에는 지방색이 크게 작용했으며 특히 소설가들은 방언을 구사하여 향토색을 드러내려 했다. K. 우프달, O. 브로텐, J. 팔크베르게, 올라브둔 등이 대표적이다. 1928년에 노벨문학상을 탄 S. 운세트는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에 대한 여성의 충성이라는 주제를 여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통해 다루었다. 그녀의 장편 역사소설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 Kristin Lavransdatter〉(1920~22)는 노르웨이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H. 빌덴베이, O. 불, T. 외랴시테르, O. 아우크루스트 등 훌륭한 서정시인들이 있었다.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시인 A. 외벌란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S. 호엘,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H. 크로그, N. 그리그 등 사회참여 작가들이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작가들로 T. 베소스, C. 산델, A. 산데무세, J. 보르겐 등이 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T. 스티겐, K. 팔바켄, B. 비크 등이 대표적인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1897    미국 國歌 "성조기" 작사가, 시인 - 프랜시스 스콧 키 댓글:  조회:6409  추천:0  2016-11-30
  프랜시스 스캇 키 Francis Scott Key 1825년경 프랜시스 스콧 키 출생 1779년 8월 1일(1779-08-01) 메릴랜드 주 캐럴 군 사망 1843년 1월 11일 (63세)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국적 미국 학력 세이트 존스 컬리지 직업 시인, 변호사 종교 미국 성공회 자녀 필립 바턴 키 2세 엘리스 키 펜들턴 친척 필립 바턴 키 (삼촌) 프랜시스 키 하워드 (손자) 프랜시스 스캇 키(Francis Scott Key, 1779년 8월 1일 – 1843년 1월 1일)은 미국 조지타운 출신의 변호사, 작가, 시인이다. 그는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 별이 박힌 깃발, 星條旗)의 가사를 썼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2 성조기 3 각주 4 바깥 고리 생애[편집] 프랜시스 스캇 키는 법률가, 미국 독립 전쟁 시 대륙군 장교로 존 로스 키(John Ross Key) 대위의 아들로서 메릴랜드 프레드릭 군의 테라 루브라에 있는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로스 키는 법률가, 판사, 그리고 대륙군 장교였다. 그의 고조부 필립 키와 수재너 바톤 가디너는 모두 런던에서 태어나 1726년에 이민을 왔던 이민자였다.[1][2] 키는 매릴랜드 주 애너폴리스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삼촌인 필립 바톤 키에서도 법률을 배웠다.[3] 1818년부터 그가 죽는 1843년까지 키는 ‘미국 성경 협회’에 관여를 하였다.[4] 키는 해방 노예를 아프리카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미국 식민지 협회’의 설립 멤버이자 현역 지도자였으나, 사실은 그의 생애 동안 노예 해방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변호하였고 노예를 소유하였다.[5] 성조기[편집] 1812년 전쟁 당시 키는 영국군 포로 교환 대리인 존 스튜어트 스키너 대령을 동반하고서, 부총독 알렉산더 코크레인, 해군 준장 조지 콕번, 소장 로버트 로스 3인의 영국 장교의 손님으로 영국 함선 ‘토넌트 호’(HMS Tonnant)를 타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스키너와 키는 포로 석방 협상을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인 매릴랜드 어퍼 말보로에서 사는 상근 의사인 윌리엄 빈즈 박사는 난동을 부리는 함선 선원을 사사로이 체포한 후 영국군에서 체포되었다. 스키너와 키, 빈즈는 영국군 병력과 부대 위치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볼티모어를 기습하려는 의도를 가진 영국군을 그들을 자신들의 배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키는 1814년 9월 13일과 9월 14일에 25시간에 걸친 볼티모어 전투 중에 맥헨리 요새에 있는 미국 군에 대한 포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6]                                                                                                                                             ///@@= 성조기여 영원하라 (미국 국가 [國歌])  [星條旗 ― 永遠 ―, Star-Spangled Banner, The] 미국의 국가(國歌).           법률가인 프랜시스 스콧 키가 미·영 전쟁중이던 1814년 영국의 메릴랜드 맥헨리 요새에 대한 공격을 보고 가사를 썼고  영국의 작곡가 존 스탠퍼드 스미스가 작곡한 (런던)아나크레온 협회의 축배의 노래 〈천상의 아나크레온에게 To Anacreon in Heaven〉에서 선율을 가져왔다.   프랜시스 스콧 키의 가사는 1814년 〈맥헨리 요새의 방어 The Defence of Fort McHenry〉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었고 그해에 이 노래가 낱장 악보로 재출판되면서 제목도 바뀌었다.   전체 4연으로 된 이 노래는 1세기 동안 불리다가 1931년 의회에서 국가로 공식 제정되었다. 오랫동안 수차례 출판되면서 가사와 음악 모두 조금씩 바뀌었다. 존 필립 수자가 미국 육·해군을 위해 편곡했고 그밖에도 여러 음악교육가들이 공식적인 편곡을 남겼다. 영국과의 의전행사에서는 국가간의 예법상 2·3절을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4절]     "그대 이른 새벽녘 저 빛을 보라/ 황혼의 마지막 광휘에 환호하는 우리들의 긍지/ 위험한 전투 속에서 광대한 선과 빛나는 별들/ 저  성벽 너머로 찬란히 빛나도다/ 창공에서 분주한 포탄과 탄환의 붉은 섬광들은/ 밤새 우리 깃발이 펄럭이는 증거/ 물결치듯 성조기여/자유와 용맹의 나라에 펄럭이리//   저 깊은 곳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해안에는/ 거만한 적 말없이 두려움 속에 휴식을 취한다/ 드높이 치솟은 절벽 위로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저 모습/ 반쯤은 가리고 반쯤은 모습을 드러낸 채 펄럭이고/ 이제 아침의 첫 광휘에 휩싸인/ 찬란한 영광 속 한 줄기 저 빛이여/ 우리의 성조기, 영원토록 펄럭이리/ 자유와 용맹의 나라에 펄럭이리//   폐허된 전쟁터와 전투의 혼란 속에/ 거만한 맹세 노래하던 저 악대는 어디에/ 이제 더이상 고향과 나라를 떠나지 말아야지/ 그들의 피로 사악한 자신들의 발자국을 씻어냈도다/ 노예된 사람이 어딜 가도 피하지 못하는 것은/ 패주의 공포와 무덤의 빛/ 승리 속의 성조기여/ 자유와 용맹의 나라에 펄럭이리//   자유인은 어디에서건/ 사랑하는 고향땅과 황량한 전쟁터 그 어디에서건/ 하늘이 구한 이땅 승리와 평화로 축복받도다/ 우리에게 나라를 보전시켜준 저 힘을 찬양하라/ 정당한 대의로 우린 이긴다/ 주님 안에 우리의 믿음 있다는 것을 좌우명 삼아/ 자유와 용맹의 나라에 펄럭이리."//     출처: 브리태니커 미국의 국가(國歌).                 ====@@===                     미국의 국가(國歌) 제목은 ‘성조기여 영원하라’이다. 영어로는 ‘The Star-Spangled Banner’로 쓴다. 하지만 정확히 번역하자면 ‘별이 빛나는 깃발’이다. 미국에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로 이름붙여진 노래는 따로 있다. 미국의 유명 작곡가인 존 필립 수자가 1896년 만든 ‘Stars and Stripes Forever’로, 노랫말 없이 주로 금관 합주로 연주된다. 그렇다면 왜 ‘The Star-Spangled Banner’가 ‘성조기여 영원하라’로 우리에게 알려졌을까. 미국 국가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기존에 관례적으로 불려왔던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제목을 쓰게 된 것이 정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도 한국에서는 이미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미국 국가의 제목으로 자리 잡은 만큼 같은 제목의 다른 노래가 미국에 있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미국의 법률가이자 문학가로 '위대한 캣츠비'의 저자인 프랜시스 스콧 키(피츠제럴드로 더 잘 알려짐)가 가사를 만들었다. 여기에 영국 작곡가 존 스탠퍼드 스미스가 작곡한 ‘천상의 아나크레온에게’의 곡을 붙여 노래가 탄생했다. 바로 국가로 채택된 것은 아니고 100년 넘게 미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1931년 오늘(3월 3일), 미국 의회가 국가로 공식 지정했다.   =최정암/편집부국장                                                              ///@@@=     "흑인차별ㆍ노예제 찬양 담겨"… 미국 "국가" 교체 주장도... 풋볼선수 캐퍼닉 국가연주 때 착석 놓고 찬반 맞서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김종우 특파원 = 미국에서 공식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spangled Banner)의 적절성 논란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성조기여 영원하라'에서 흑인 차별과 노예제를 지지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지적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차제에 국가의 교체도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논란은 미국 프로풋볼리그(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28)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시즌 시범경기에서 국가가 연주될 때 혼자서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게 발단이 됐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인 캐퍼닉은 경기가 끝난 뒤 "흑인과 유색 인종을 억압하는 나라의 국기를 향해 자랑스러움을 표현하려고 일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 흑인 인권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캐퍼닉의 행동을 놓고 미국 프로 스포츠계는 물론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서는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캐퍼닉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반응이 우세했다. 심지어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시애틀 라디오 방송 KIRO와의 인터뷰에서 캐퍼닉을 겨냥해 "끔찍하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나라를 찾아 떠나야 한다"고 비난했다. 美 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 하지만 미국의 흑인 R&B·소울 싱어송라이터이자 아카데미상·그래미상 수상자인 존 레전드(38)가 캐퍼닉의 저항을 두둔하면서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국가로서 위엄이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레전드는 31일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현재의 국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진정 이 노래를 좋아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 그 노래에 매우 익숙하게 부를 수 있지만…"이라고 밝혔다고 폭스뉴스가 전했다. 그는 "나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보다는 '아름다운 아메리카'(American the Beautiful)에 한 표를 행사할 것"이라며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어쨌든 아무튼 (국가로서) 약한 노래"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터셉트의 존 스와츠 기자가 쓴 '콜린 캐퍼닉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당하다: 현 국가는 노예제에 대한 축가'라는 기사를 링크했다. 이 기사는 1814년 프랜시스 스콧 키의 시 '맥헨리 요새의 방어'(The Defense of Fort McHenry)에서 나온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3절을 다시 음미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No refuge could save the hireling and slave(그 어떤 피난처도 그 용병들과 노예들을) / From the terror of flight, or the gloom of the grave(도주의 공포와 무덤의 암흑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했고), / And the star-spangled banner in triumph doth wave(성조기는 승리를 알리며 휘날리누나) /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자유의 땅과 용사들의 고향에서)". 존 레전드, SNS에서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국가로서 약하다고 언급 이와 관련해 CNN은 잘 불리지 않은 3절이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에 가담해 싸운 자유 흑인 노예들의 패배와 죽음을 찬양한 것으로 해석하는 주장이 적지 않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는 당시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프랜시스 스콧 키가 노예를 소유한 노예제 지지자인 데다가, 평소 흑인들을 '열등한 민족'이라고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당시 전쟁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자유를 미끼로 흑인 노예들을 받아들였는데, 키는 영국군에 합세한 흑인 노예를 배반자로 여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1931년 공식 국가로 지정될 당시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고, 이후에도 호전적인 가사와 어려운 선율로 국가 교체 주장이 적지 않았다. 미국 일각에서는 공식 국가를 9·11 테러 이후 많이 불린 '아름다운 아메리카''아메리카에 은총을'(God Bless America)로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고 CNN은 덧붙였다. 미국의 공식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spangled Banner)                       ///@@@\= 시대 낭만 분류 낭만주의 음악>관현악곡>기타 제작시기 1896년 12월 25일 작곡가 존 필립 수자(John Philip Sousa, 1854~1932) 초연 1897년 5월 14일, 필라델피아 출판 1897년, 필라델피아 구성 단악장 편성 군악대 / 오케스트라 요약 미국 작곡가이자 취주악단의 지휘자이며, 행진곡 작곡에 뛰어나 ‘행진곡의 왕’이라 불리는 수자가 작곡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수자가 미국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작곡한 행진곡으로 1987년 미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미국 국가 행진곡으로 지정했다. 목차 접기 미국의 애국심 고취를 위하여 미국의 군대 행진곡풍으로 존 필립 수자(1854~1932) 미국의 애국심 고취를 위하여 존 필립 수자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 곡은 1896년 크리스마스에 작곡되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아내와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상태였으며, 자신의 취주악단의 매니저의 부고를 막 접한 상태였다고 한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머릿속으로 음악을 구상하였으며, 미국에 도착하여 악보로 옮겨 적었다. 초연은 1897년 5월 14일 필라델피아 외곽의 윌로우 그로브 파크에서 이루어졌는데 즉각적으로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다.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미국의 군대 행진곡풍으로 이 작품은 미국 군대 행진곡의 표준적인 형식을 따른다. 네 마디 도입부로 시작되며 그 뒤를 부점 리듬을 가진 쾌활한 멜로디가 따른다. 가사를 수자 자신이 직접 썼는데, 1942년 존 처치 컴퍼니에서 이 곡을 피아노 반주를 가진 4성부 코랄 버전으로 출판하면서 가사 일부를 추가하였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악보 첫 페이지(1897)                                      ///@\\\=     1854. 11. 6 미국 워싱턴 D. C.~1932. 3. 6 펜실베이니아 레딩. 미국의 밴드 음악 거장, 군악대 음악 작곡가. 자신의 악단을 위하여 고안한 헬리콘(스자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최초의 음악 경력은 14세 때 춤 밴드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1868년에 미국 해병대 군악대의 견습생으로 들어갔고, 1880~92년 이 군악대를 지도해서   빈틈 없는 지휘자로 명성을 쌓았다. 1892년 군대음악과 일반 관현악에 능통한 정선된 멤버들로 자신의 악대를 처음 결성했고,   이 단체를 이끌고 미국과 유럽의 순회공연에 이어 마침내 전세계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가 작곡한 140여 곡의 군대행진곡들은 리듬 및 악기 편성의 효과가 뛰어났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성조기여 영원하라 The Stars and Stripes Forever>〈셈퍼 피델리스 Semper Fidelis>   〈워싱턴 포스트 The Washington Post〉〈자유의 종 The Liberty bell〉 등이 있다. 1879~1915년에는 여러 편의 오페레타들을 작곡했는데 특히 엘 카피탄 El Capitan〉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일리노이 주 그레이트 레이크 해군기지의 군악대 훈련소에서 일했다. 미국 해군사령부를 위해 〈National, Patriotic and Typical Airs of All Lands〉를 편집했고, 3권의 소설과 트럼펫 교본,   북 교본, 자서전 〈함께 행진을 Marching Along〉등을 저술했다.      
1896    <라면> 시모음 댓글:  조회:4278  추천:0  2016-11-30
+ 라면을 끓이면서 물을 데운다 라면을 끓일 요량으로 봉지를 뜯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이 한때 허기진 오후, 외출 중인 아내의 빈자리가 공복처럼 쓰리다. 멀리 낮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냄비엔 물이 끓고 가지런히 누운 대파를 숭숭 썰어 넣는다. 잘 익은 김치를 밥상 위에 올리면 더 이상 부러울 것 없는 시간 사람들아, 무지한 식욕을 부끄러워 말자 산다는 것, 정말 산다는 것은 허기를 다스리는 일 권력도 富도 라면 한 개의 포만감보다 못한 것을. (정구찬·시인) + 라면·1 쉽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작고 은빛 나는 법랑냄비에 라면을 삶는다. 세상 사는 재미도 함께 끓여보면 어떨까? 뜨거운 라면가락 속에 살다 얻은 슬픔을 녹여 담을 수 있다면 매운맛 수프는 뿌리지 않아도 되겠지. 그대의 깊은 잠 虛氣와 함께 라면 한 그릇 맛있게 비우고 돌아설 때 나의 꼬이고 비뚤린 일상은 풀려나고…… (김리영·시인, 1959-) + 라면 양파 송송 썰고 신김치 숭숭 썰어 끓는 물에 풍덩 잠수시켜서 사리수프 넣고 설설 끓이다 치즈 한 조각 살짝 얹고 친구가 준 오리알 하나 후르륵 풀어넣고 냄비뚜껑을 닫는다. 내가 내 의지대로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라면 끓이는 일밖에 없다. 넣고 싶은 대로 넣고 끓이고 싶은 만큼 끓이고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그렇게 자유롭다. '스트로가노프'를 먹을 때나 '믹스 파스타'를 먹을 때는 분위기를 잡아야 하고 입 언저리도 정결하게 해야 하고 품위도 지켜야 하는데 범생이에게는 갑갑한 일이다. 사는 일도 폼을 잡으려면 가려야 할 것 많아 답답하고 냄비뚜껑을 받치고 툇마루에 쪼그려 앉아 후루룩대며 먹는 오뚜기 열라면이 차라리 솔직하고 담백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꽃등심 집에서는 우아한 인생들이 우아한 얘기들만 하고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을까 말까 고민중이다. (김낙필·시인) + 라면을 먹기 전에 쓴 시 나뭇잎 하나 보려고 산으로 간다 나뭇잎 하나에 둥그러이 고인 물방울 하나 보려고 산으로 간다 아아, 우리가 늘 잊고 사는 나뭇잎과 물방울 속에 파르르 떨고 있는 산새의 두 눈동자 그리고 먼 옛날과 보이지 않는 먼 우리들의 미래! 그러나 누천년을 달려가야 할 우리들의 등불과 같은 나뭇잎과 물방울! (김준태·시인, 1948-) + 詩人과 라면 이 맛이 아니야 언젠가 누구에게 얻어먹은 라면 맛을 기억하는 시인 그 기막힌 맛을 찾아 오늘 아침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려,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떠올리듯 끓인 라면이 이름값 못하는 싱거운 莘라면이라 실망이다, 시인은 달걀 하나 풀어 시린 속 얼큰하게 공복의 아침을 넘기리라 생각했는데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책장만 넘어가고 김 서린 안경, 유리알 속으로 꼬불꼬불 살아온 날들이 불어터진다 너무 싱겁게 살아왔어, 중얼거리듯 국물을 마시며 파김치 하나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맵고 짜게, 쫄깃쫄깃한 詩 한 줄을 위해 시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의 모습이 낙엽처럼 고독하다 수프 색을 닮은 낙엽, 창밖엔 낙엽이 지고 있었다 (유정탁·시인, 1968-) + 라면을 먹으며 라면을 먹으며 인생을 돌아본다 수없이 꼬여있는 라면발 꼬여버린 내 인생 무심코 채워버린 첫 단추 운명의 매듭 이젠 너무 멀리 와버려 되돌아가 다시 채울 수도 없구나. (이문조·시인) + 라면을 먹으며 돌아앉아 라면을 먹습니다 밖에 비 쏟아지고 천둥 우를우르를 치는 밤 문득 허기가 졌나 봅니다 문득 식욕이 돋아났나 봅니다 세상일과는 아주 무관하게 여백처럼 앉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등 뒤에서 폭우는 더 거세게 나오고 그것보다 더 큰소리를 내며 돌아앉아 후루룩후룩 라면을 먹습니다 식어가며 몸집 부푸는 욕망이 마음에 들어 국물까지 들이키니 기어이 눈물납니다 나를 그립게 두지 않으려고 이 밤, 내 안의 서러운 구석구석마다 뜨거움 휘휘 풀어놓습니다 (박윤규·시인, 1963-) + 양은냄비와 라면 불 방석 깔고 앉아 무시로 시달려 온 세월 미끈했던 엉덩이 노란 피부도 검버섯이 피었구나, 심지가 얕아 쉽게 열에 받혀 울화로 그을린 뱃속 아로새겨진 수평선은 너와 나의 눈대중 약속 으스러질망정 풀리지 않게 오래 전에 작정하고 끌어안아 꼬불꼬불 굳어버린 고집불통 맛깔스럽게 풀어놓는 네가 사랑스럽다 상투 잡아 뚜껑 잦혀들면 콩 튀듯 하는 성깔 팍 수그려 허기진 입맞춤에도 덴 적 없는 나의 입술 오늘따라 너의 사랑이 유달리 쫄깃쫄깃하다 (권오범·시인) + 라면을 끓이다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 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이재무·시인, 1958-) + 흰 국화 한 다발과 라면 한 봉지 흰 국화 한 다발 가슴에 들쳐 안고 너를 찾아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라면 한 봉지를 샀다 라면 한 봉지 달랑달랑 거리며 산 중턱을 오르다 눈에 익은 곳이 보이자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려간다 눈물은 흘리지 않기로 한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땅을 적시면 눅눅해진 땅에 네가 한기를 느끼진 않을까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하늘을 본다 말없이 국화 꽃잎 오른손 한가득 훑어내어 여기저기 숨어 있는 너에게 이불처럼 덮어 주고 네가 심심할 때 오독오독 씹어 먹던 라면 한 봉지 잘게 부숴 내가 오지 않는 동안 심심해할까 여기저기 뿌려도 준다 갑자기 인사도 없이 숨이 턱까지 차도록 산을 달려 내려온다 그리곤 시냇물 가에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한다 눈물이 시냇물 따라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도록 애꿎은 얼굴만 박박 문질러 댄다 (김에스더·시인) + 라면 한 그릇 너는 절망에 익숙한 잡초다. 연탄불 위에서, 떨리는 젓가락 끝에서, 허기진 위 속에서, 죽은 기 펴게 하고 구겨진 자존심 일어나게 하는 끈끈한 질경이다. 일상의 난파당한 희망을 예언하는 한 끼의 실낱같은 암울한 쉼표다. 너는 한 마리 새다. 어떤 종교보다도, 어떤 위안의 말씀보다도, 어떤 정치가의 헤픈 약속보다도 가장 정직한 품삯의 눈금이다. 가장 절제된, 쪼개고 또 쪼갠 월급봉투의 진솔한 화음이다. 이 겨울 차가운 하늘을 하강하는 순백의 눈 먼 새다. 너는 한 잔의 막소주다. 어떤 수입양주보다도 폭탄주보다도, 더 강도 높은 이 시대의 뜨거운 분노다. 진하디 진한 노동의 혼불 속에서 막 건져낸 맑고 고운 사리다. 이 땅의 위태로운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서러운 자존심이다. 너는 어머니의 초상화다. 지금도 고향 아랫목에 묻혀 있을 보릿고개 긴긴 해거름에 지우던 어머니의 마른 눈물이다. 우리들 유년의 들판에 부활해 오는 한 묶음의 티풀이다. 청보리다. 어젯밤 포장마차에서 만난 잠 못 이뤄 보채는 고향의 강물 소리다. (이광석·시인, 1935-) + 라면을 먹으며 라면을 먹는다. 꼬부라진 면발을 쓰린 뱃속으로 밀어넣는다. 안녕, 불면의 밤들이여. 이십 년을 지탱한 꼬불꼬불한 삶. 이제, 다시는 어둠 속에서 쓰린 뱃속으로 쓰린 눈을 비비며 젓가락질을 하지 않으리라. 안녕, 꼬부라진 면발이여. 어디로든 떠날 채비를 하여야 하는 밤. 未定의 발길에 수북히 쌓이는 라면발들이여. 젖어오는 왼눈을 지긋이 감노라면 못난 삶, 그래도 부끄럽지 않다.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기계들은 더 낡아가는데. 그래 이제는 나도 가야지. 도망치듯 홀로 몸을 빼내어 가는 날, 용서해다오. 꼬부라진 라면을 더 먹어야 할 아우들아. 우리 다시 만나리라. 꼬부라진 면발로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처럼 다시 만나리. 그럼 그때 왼눈이 흘리는 눈물이 오늘처럼 비가 되어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파도가 되어 니 가슴을 적시리. 마지막으로, 낡은 기계들 곁에서 아우들과 불어터진 라면을 먹었다. 눈물로 불은 라면은 더 맛있었다. 맛있었다. (김시양·시인, 전남 목포 출생)
1895    詩人은 일상의 삶을 詩처럼 살아야 한다... 댓글:  조회:3767  추천:0  2016-11-30
  夕塘/김승기       일상의 삶이 곧 詩다 — 궁핍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심는 詩들 —   요즘의 한국시단은 ‘미래파’니 뭐니 하여 너무 관념적이고 난해한 詩들이 넘쳐나고 있다. 매달 받아보는 월간이나 계간의 문예지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서정시는 어쩌다 한두 편이 눈에 띌 뿐 거의가 관념적이고 난해한 詩들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詩 속에 구사하는 시어(詩語)에 있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를 남발하고 있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마치 그렇게 써야 좋은 詩이며 그렇지 않으면 詩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하다. 이 문제는 시인들도 그렇지만 문학평론가들도 한 몫 거들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시편들을 발표하는 시인들의 이력(履歷)을 보면 대개가 대학교 또는 대학원 졸업 출신의 시인들로 대부분 대학교수들이거나 최소한 강사로 대학의 강단에 서고 있는 시인들이다. 문예지에서 어쩌다 발견되는 서정시도 시인의 이력(履歷)을 보면 앞의 시인들과 마찬가지이거나 지명도(知名度)에 있어서 유명세를 타는 시인들이다. 필자와 같은 무명소졸(無名小卒)의 서정시인들은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내로라하는 지면에는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정도다.   詩는 왜 쓰는가? 독자(讀者)가 없는 詩도 詩라 할 수 있는가? 시인들끼리만 서로 나누어 읽는 詩를 뭐하러 쓰는가? 좋은 詩란 무엇인가? 어려운 말로 도무지 무슨 뜻인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詩를 과연 좋은 詩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일반 독자들이 외면하고 마는 詩를 詩라고 할 수 있는가?   쉬운 말로 쉽게 쓰고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詩,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어 독자의 가슴을 찡하니 울릴 수 있는 詩, ‘바로 이거야’ 하며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시詩, 그런 詩를 좋은 詩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쉬운 말로 깊이 있는 좋은 詩를 쓸 수 있을까. 그것은 詩를 생활화하여 시인의 삶 자체가 詩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삶이 곧 詩이며, 시인은 일상의 삶을 詩처럼 살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평소 생각이며 지론(持論)이다.   여기 쉬운 말로 쉽게 쓰면서도 깊이 있는 좋은 서정시를 쓰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의 시인들이 있다. 거창한 이력(履歷)도 없고 유명세도 타지 못하면서 누가 알아주든 말든 문예지에 실어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홀로 서정시의 길을 걷고 있는 시인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몇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늘 껍질을 벗기며 속껍질을 슬쩍 눈감아 준다 벌거벗은 마늘 몸에도 차마 손톱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아 상처 입는 것이 어디 마늘뿐이겠냐고 자신의 시퍼런 상처를 눈물로 쓱 문지른다 꽉 쥐고 펴지 않으려는 주먹 같은 마늘을 쪼개며 치마끈 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열여섯 꽃봉오리 눈보라 속에 파르르 떨고 있는 숫처녀를 본다 첫날 밤, 새 신랑이 풀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아니라면 아, 짐승들의 진흙투성이 군홧발로 짓밟히지는 말았어야 했다 군홧발이 바뀔 때마다 대못이 가슴 속 깊이 박혔다 하나, 둘, 셋, 아흔아홉…… 휘어진다, 못인들 제대로 박히겠는가 깐 마늘을 절구통에 찧는다 으깨어지면서 튀어나온 마늘이 손등에 닿는다 아리다 그래, 깨어진 마늘도 제 독한 상처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데 내 몸에서 한(恨)서린 사리(舍利)가 나오거든 대한해협 건너 그들에게 보여서 떠도는 영혼 달래준다면 열여섯 꽃봉오리 다시 한 번 활짝 꽃피워보련만 — 김명림「어느 노파의 독백」(시집『어머니의 실타래』고요아침, 2013)   김명림 시인은 2011년 60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에 계간《열린시학》으로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다. 그리고 2013년 11월에 첫 시집『어머니의 실타래』를 상재하여 초판이 나오고 열흘 만에 초판 2쇄를 찍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도 작품을 발표할 지면의 기회를 얻지 못해 허덕이고 있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의 신인이다.   시인은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며, 맏며느리도 아니면서 오랫동안 병석에 누운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는 한편 독거노인, 노숙자, 소년소녀가장,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 사회 저층(底層)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해왔다. 시집『어머니의 실타래』는 시인이 전업주부로 살아온 삶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겪은 생활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시편들을 묶은 시집이다.   위의 詩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봉사를 통해 느낀 시인의 감정을 詩로 풀어내고 있다. 쉬운 말로 아주 쉽게 표현하고 있지만 평생을 주부로 살아온 여성의 눈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표현을 통해 가슴 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詩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자꾸 되씹고 곱씹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130여 쪽이나 되는 시집 62편의 詩 한 편 한 편이 평이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시행(詩行)의 한 줄 한 줄 숨은 뜻이 도사리고 있어 쭉 읽고 지나갈 간단한 내용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날따라 만삭인 달이/제 뒤를 쫓아오며/야릇한 웃음 흘리는 게 아니겠어요/설마 저도 어미가 될 테니/동네방네/고자질이야 하겠어요?”(「공범」), “밥상머리에서, 시댁형님 바짓부리를 잡아당겼는데요(…)고무줄 바지를 위로 잡아당기고 당겨 반바지를 만들고 계시는 게 아니겠어요//(…)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조카, 까르르 아리랑 고개 넘어가는데요 쉿! 조용히 하라고 엉덩이 드는 그 찰나! 바로 그 찰나였는데요 뽀오옹 단풍 물든 얼굴 쥐구멍 찾고 있는 중인데요 녀석, 방귀소리 한번 실하네//시어머님께 드리는 두둑한 흰 봉투가 아깝지 않더라니까요”(「시어머님」), “눈깔사탕이 눈앞에 아른거려 꼬깃꼬깃 지전을 손에 들고 나오다 낮달한테 들켜버렸다 커다란 눈깔사탕 두 개를 사서 낮달의 입을 막았는데 녀석은 단맛도 채 가시지 않아 어머니께 고자질해버렸다”(「어머니의 속곳 주머니」)에서 보듯이 매 시편마다 그 심각하고 의미심장한 사건의 내용들이 무겁고 비장하게 느껴지지 않고 위트와 해학이 넘쳐난다.   시인의 詩는 따뜻하다. 우리 사회의 맨 밑바닥 저층(底層)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고단하고 슬픈 삶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고달프고 절망적인 삶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 안으며 위트와 해학이 넘쳐나는 밝은 웃음으로 희망을 그려내고 있다. 버림과 비어 있음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요즘은 자꾸 등이 가렵다 뒤꿈치 치켜들고 몸을 비틀며 어깨 너머 허리 너머 아무리 손을 뻗어도 뒤틀린 생각만 가려움에 묻어 손끝에 돋아난다 나와 내 몸 사이에도 이렇듯 한 치 아득한 장벽이 있다는 것이 두렵고 신비스럽다 빛과 어둠,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수리 어디쯤 죽음에 이르러야 열리는 문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 같고 때론 소슬바람에도 쉬 무너질 것 같은 그 무엇이 내 안 어딘가 덜컹거리고 있다 등이 가려울 때마다 등줄기 너머 보이지 않는 길들이 그립다 — 김명기「등이 가렵다」(시집『등이 가렵다』문학의전당, 2013)   김명기 시인은 필자와 같은 고향 속초 출생으로 필자보다 서너 살 아래의 연배(年輩)다. 필자의 은사(恩師)이신 고(故) 이성선 시인을 모시고 필자와 함께 속초에서 ‘물소리시낭송회’의 운영을 도맡아 했었다. 시인은 1991년 무크지《문학과지역》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2년《문학세계》로 문단에 나왔다. 불우한 집안의 가난한 살림으로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가방끈이 짧아 생계를 위해서라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막노동, 주점 종업원, 품팔이, 공공근로, 택시운전, 대리운전 등으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었으며 지금도 생계문제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늘 시인의 곁에는 문학이 있어 주눅 들지 않고 창작에 몰두했으며, 그렇게 써 모아두었던 詩들을 시집 낼 돈도 없어 등단 20년이 넘어서야 2013년 11월에 어찌어찌 도움의 손길을 받아 겨우 첫 시집『등이 가렵다』를 상재하였다. 등단 20년이 넘었지만 시인 역시 작품 한 번 제대로 발표할 지면을 얻지 못하고 있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의 시인이다.   시인은 이제 60고개를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생계를 위해서 뭐든지 해야 하는 가난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그 고단한 생애의 그림자를 작품 속에서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 위의 詩에서도 보듯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어 있으면 “요즘도 자꾸 등이 가렵”고 “뒤틀린 생각만 가려움 묻어 손끝에 돋아”나는 것이며, “소슬바람에도 쉬 무너질 것 같은 그 무엇이/내 안 어딘가”에서 “덜컹거리고 있”겠는가. 너무나 가난하다 보니 “죽음을 향해 서서히 굳어져 가”(「액자를 짜다가」)는 아픔과 고통이 그칠 날이 없었고, “흩어졌다 다시 쌓이고 지워지는 이 그림자”(「자화상」)를 떨치지 못하고 “철근처럼 빗줄기를 온몸에  꽂고 지나온”(「귀가」) 나날을 여태껏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내 몸 속에 병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병과 친구가 되듯이 아픔을 오래 앓으면 아픔도 친숙해져서 아픔이 멈추면 홀가분할 것 같지만 어느 한 순간 잠시나마 멈춘 그 아픔이 오히려 그리워 “내 몸 사이에” 있는 “아득한 장벽이 있다는 것이/두렵고” “신비스럽”고, “등이 가려울 때마다/등줄기 너머 보이지 않는 길들이 그”리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도 진절머리가 나는 가난 속에서도 “옹기종기 기다림들이 모여/창가에 불 밝히는 사람들의 마을”과 “낯설지 않은, 그런/환한 사람의 마을”(「길을 가다가」)을 소망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기대 하나로 버티면서 “가난도 이쯤이면 축복”(「꽃을 심으며」)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희망의 꽃을 심고 있다.   두 번도 말고 한 번만 믿어보세요. 가진 건 없지만 양심은 있습니다 제 양심을 걸고 파는 거니까 믿어보세요 치과에선 최소한 삼천 원입니다 이 자리에선 단돈 천 원! 큰돈 아니니 속는 셈 치고 인간적으로 사보세요 제가 분당선에서만 삼 년 이걸 팔고 있습니다 분당선에서 저 말고 이 칫솔 파는 사람 없습니다 여기 이 전화번호는 여주 ○○공장 번호고요 그 옆 휴대폰번호는 제 껍니다 사장이 제 친구로 특별히 봐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두 번도 말고 세 번도 말고 한 번만 믿어보세요……   — 나도 누구에겐가 믿어 달라 저처럼 외칠 수 있을까? 유난히 덜컹거리는 이 하오(下午)! — 박재화「전철에서 외치다」(시집『먼지가 아름답다』인간과문학사, 2014)   박재화 시인은 직장인의 소시민이다. 시인의 삶 역시 궁핍하다. 농사를 지을 농토가 없어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생을 마친 아버지의 죽음을 스무 살에 받아들인 우울한 성장기를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는 시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어도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졌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도 삭막한 대도시의 생활은 나아지질 않았다. 생업을 위해 낮에는 직장에 근무했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주경야독으로 성균관대학교 야간대학을 수석 졸업하였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대학 강사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시인은《현대문학》이 3회 추천제에서 2회 추천제로 바뀐 이후인 1984년에 2회 추천 완료로《현대문학》을 통해 늦깎이로 등단하여 문단에 나왔다. 그리고 2014년 6월 제3시집 출간 10년 만에 제4시집『먼지가 아름답다』를 상재했다. 그러나 시인은 여전히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얻지 못해 굶주리고 있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의 시인이다.   시인의 詩는 명쾌하다. 그리고 실제적 체험을 중시하며 원칙을 고수한다. ‘우리 말본 지키기’를 주창하며 우리 말 ․ 글 ․ 얼의 ‘지킴이’를 자처하여 바른 글쓰기 운동을 펼쳐 나가는데, 이는 시인의 각 시편(詩篇)들마다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이성적 탐미주의자다. 규범을 지키면서도 내면의 자유로운 의지를 확산한다. 천진성과 대상에 대한 통찰력을 함께 공유하며 본질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의지를 그만의 언어로 드러내려 한다. 위 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인은 매 시편(詩篇)마다 처음엔 평이한 문장으로 시행(詩行)을 서술해나간다. 그러나 “나도 누구에겐가 믿어 달라 저처럼 외칠 수 있을까? 유난히 덜컹거리는 이 하오(下午)!”처럼 마지막에는 위트와 해학이 넘치는 이미지의 변주로 대반전을 꾀하여 詩의 본질과 원형이 무엇인지를 복원하고 정화해 나가려고 한다. 외딴 숲 속 길 무심으로 혼자 걸어가면서 돌 위에 돌 올려놓고 고요 위에 침묵을 올려놓는다 돌 위에 돌 고요 위에 침묵 이걸 적막강산이라 부르는가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가만가만 고요의 소리 재운다 고요의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 나석중「고요의 소리」(시집『풀꽃독경』북인, 2014)   나석중 시인 역시 2005년 67세에 시집『숨소리』를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해온 늦깎이 시인이다. 그러나 詩의 열정은 식을 줄 몰라 2014년 77세 희수(喜壽)를 맞으며 등단 10년 만에 제5시집『풀꽃독경』을 세상에 내놓는다.   시인은 40년이 넘는 오랜 세월 탐석(探石)을 해온 수석(壽石, 水石) 전문가다. 그래서 시인의 詩에는 돌의 냄새가 배어있다. 직접적으로 돌을 노래하지 않는 詩에서도 돌의 향기가 난다. 그러한 시인은 지금 연립주택의 반지하층에서 홀로 궁핍한 생활을 하며 쓸쓸하고 고독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훨씬 적은 노후의 뜨락에서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오가며 꿈을 꾸고 있다. 서서히 죽음 이후의 세상을 맞이할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적막강산” 같은 죽음을 깊디깊은 고요처럼 두려움 없이 조용히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외딴 숲 속 길”을 “무심으로 혼자 걸어가면서/돌 위에 돌 올려놓고/고요 위에 침묵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가만가만 고요의 소리”까지 “재운다”. 그렇게 저승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연습이 만만치가 않다. “적막강산” 같은 죽음은 “악마 같은 적막”(「적멸(寂滅)」)이다. 이승에의 미련이 남아서일까. 애써 고요하게 죽음을 맞으려고 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이제는 서서히 죽음에 다다르고 있다는 설운 슬픔과 결국에는 맞닥뜨리게 될 죽음에 대한 가슴 시린 감정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바닥에서도 혼자서/씩씩하게 한 목숨 살려왔건만/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끌어 덮어도/머릿속 구름 일어 잠 못 드는 밤//창밖에는 겁먹은 바람이 덜컹거리고/어린 고양이는 울음으로 보채고/해소처럼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불면의 수돗물 똑똑 떨어지는 소리//여보, 죽으면 끝없이 잠만 자겠지만/저것이 다 살아있다고 가까스로/발버둥치는 소리, 오돌오돌 추워서/몸 오그라드는 소리//고스란히 내리는 눈옷 입고/뼈만 남은 어머니 아버지도 생각나서/뼈도 없이 소나무 밑에 심어진 아우도/자꾸 생각나서 잠 못 드는 밤”(「지층」)을 지새운다.   이상 몇몇 시인의 詩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너무도 궁핍하다 보니 시집 한 권 상재할 금전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건 다반사(茶飯事)다. 어찌어찌하여 겨우 시집을 상재하여도 아무리 좋은 詩를 세상에 내놓아도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보다 더 불우한 이웃들을 포근하게 품어 안고 따뜻하게 보듬는다. 비록 생활은 궁핍하지만 몸과 정신은 초라하지도 않고 구차하지도 않다. 오히려 순수하고 고결한 품위를 잃지 않는다. 삶 자체가 진실로 詩답다. 詩다운 삶을 통하여 얻어낸 생활의 체험을 詩로 표현한다.   또한 이들은 학력도 짧고 지명도(知名度)도 높지 않아 유명세를 타지도 못할뿐더러 문단(文壇)의 이력(履歷)이 길든 짧든 지금도 여전히 작품을 발표할 문예지의 지면(紙面) 하나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는 무명소졸(無名小卒)의 시인들이다. 그렇다고 지면(紙面)을 얻어내기 위해 구차하게 구걸하거나 발버둥치지도 않는다. 알아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좋은 詩 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의 詩는 어렵지 않다. 쉬운 말로 이해하기 쉽게 쓰면서도 깊이가 있다. 읽기 쉬운 문장으로 쉽게 시행(詩行)을 읽어 내려갈 수 있지만 다시 되씹고 곱씹어 보게 만드는 서정시를 쓰고 있다. 詩를 쉬운 말로 쉽게 쓰면, 원로시인이거나 지명도(知名度)가 높아 유명세를 타는 시인의 경우는 ‘아, 연륜과 경륜이 있으니까 이렇게 詩를 쓸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감탄하지만, 신인(新人)이거나 지명도(知名度)가 없는 시인의 경우에는 ‘에이, 이것도 詩라고 썼냐?’ 하고 무시해버리는 게 한국시단의 현 풍토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무시를 당하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어떻게 하면 더 쉬운 말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좋은 서정시를 쓸 수 있는가에 매달리고 있는 시인들이다.   이러한 시인들이 좀 더 많은 지면(紙面)을 부여받아 훌륭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하는 풍토가 자리 잡아 독자들로 하여금 좋은 詩를 많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시인들이 제대로 대우받고 편하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문단(文壇)의 세상이리라.   이 세 가지 문제에 있어서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끼리끼리 모여 작품을 발표하고 일반 독자도 없이 시인들끼리만 서로 나누어 읽는 난해한 詩가 문예지의 지면(紙面)을 가득 채우는 현재의 한국시단 풍토의 굴레에서는, 궁핍한 삶을 살며 쉬운 말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좋은 서정시를 쓰려고 노력하는 필자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
1894    詩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댓글:  조회:4088  추천:0  2016-11-30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박상천 /시인, 한양대 교수 4. 시의 언어는 왜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는가? 언어가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언어와 사물을 동일시하기 쉽다. 그러나 언어가 곧 사물은 아니다. 언어는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 ‘연필’ 두 자루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자루의 연필은 각각 별개의 사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별개의 사물을 모두 ‘연필’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러한 언어 사용법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두 자루의 연필 중에 하나를 A라 하고 또다른 하나를 B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의 언어 사용법으로 볼 때, A〓연필, B〓연필이고 이 명제에 따라 ‘A〓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A와 B는 서로 다른 사물이므로 ‘A〓B’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 까닭은 ‘A〓연필’, ‘B〓연필’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물과 언어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또한 사물 개개의 이름이 아니라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에 자의적으로 붙여진 이름(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연필’이라는 언어는 연필 하나하나에 붙여진 개별적인 이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필의 공통적 속성(흑연 심을 가느다란 나무때기 속에 넣어 만든 필기도구)에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 개별적인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공통적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언어의 성격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근본적으로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불완전한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A가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B도 ‘나는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말한 ‘슬픔’은 동일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의 ‘슬픔’이 동일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슬픔’이라는 말은, 모든 이들이 가진 그 다양한 ‘슬픔’의 공통적 속성(뜻밖의 일에 낙심하여 눈물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뽑아내어 ‘슬픔’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슬프다’ 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이 지닌 개별적인 ‘슬픔’의 진실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는 일상의 언어가 지닌 이러한 추상성과 불완전성을, 언어를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슬픔.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슬픔의 진정한 모습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한 노력이 시를 탄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시는 비유, 묘사, 상징, 이미지 등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동원하여 사물의 공통 속성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 개별적 사물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시에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법이 아닌 언어의 비정상적 사용법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셈이다. 5. 시의 언어는 의사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적 약속을 지켜 언어를 정상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언어의 정상적 사용법을 무시하고 깨뜨리고 왜곡한다. 따라서 시는 언어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그다지 효율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 시를 쓰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정상적 용법으로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는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의사 소통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시는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시도 언어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의사 소통이나 정보 전달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의사 소통의 목적을 위해 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의사 소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 시는 일상의 언어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생각해보자. 의사 소통이란 발신자(말하는 이)가 어떤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말 듣는 이)에게 ‘내용’을 보내고 수신자는 매체를 통해 받은 ‘내용’을 해독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과정이 제대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발신자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사용하여 수신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내야 하고 수신자는 발신자가 매체를 통해 보낸 내용을 발신자가 의도한 내용대로 해독하여야만 한다. 만약에 발신자가 보낸 내용이 수신자가 해독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거나 또는 발신자가 보낸 내용을 수신자가 임의로 해석하게 되면 의사 소통은 실패하게 된다.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적 원리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인은 발신자, 시의 언어는 매체, 독자는 수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에 따라 시인은 독자가 해독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에 따라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의사 소통의 일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어떤 세계를 창조하였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인이 창조해 놓은 세계를 해독할 뿐이다. 즉, 시인은 독자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독자는 시인의 의도를 알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     풍경 ― 김제현(1939∼ )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이 작품은 시조다. 시조 하면 대개 딱딱한 형식을 연상하지만 이 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편안하게 읽힌다. 게다가 참 좋다.  그저 따라 읽기만 했는데도 맑고 청량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맑은 이유는 이 시가 산속 절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공기가 맑은 곳, 정신이 맑아지는 곳에 시가 있으니 맑을 수밖에 없다. 청량한 이유는 이 시가 언어로 적혀 있지만 언어가 없는 세계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제현 시인은 시에서 탁한 것을 몇 번이고 여과해서 기존의 생각과 이미지를 정화하고 있다.  시의 처음, 우리는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만나게 된다. 풍경은 분명 종의 일종이지만 사실 그것은 일종의 소리에 가깝다. ‘뎅그렁’ 울리면 비로소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풍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풍경을 만나, 과감히 그것을 지운다. 사람들이 듣는 것은 다만 소리일 뿐, 안에 담겨 있는 적막의 의미까지는 모른다. 정말 봐야 할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다. 정말 들어야 할 것은 풍경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퍼지는 전체의 분위기와 느낌이다.  고요한 산속에서 바람 따라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 몹시 오묘하고 색다르다. 조금 과장하자면 세상의 잡음과 다른,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소리라고 할까. 풍경 소리를 들으면서 한참 앉아 있으면 지금까지 집착하던 욕망들이 참 헛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느낌과 마음을 시인은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무상이란, 그 위에 뭘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는 뜻이다. 별빛만 무상일까. 이 시도 무상의 작품이다. 그 위에 무엇을 더할 수 없이, 맑고도 좋다
현대 환상 문학의 대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출생일 1899년 08월 24일 사망일 1986년 06월 14일 국적 아르헨티나 대표작 《불한당들의 세계사》,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알렙》 등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와 환상적 사실주의로 라틴 문학의 대표 작가가 되었으며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목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소설과 시, 형이상학, 신화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문학 작품을 통해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축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르 루이스 보르헤스는 1899년 8월 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르헤 기예르모 보르헤스는 변호사이자 심리학 교수로, 영국계 집안 태생이었다. 때문에 보르헤스는 어린 시절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우고 영어권 소설들을 읽으며 자랐다. 아버지와 가정교사들에게 교육받았으며, 6세 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할 만큼 조숙했다. 일찍부터 문학, 철학,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고, 7세 때 영어로 그리스 신화 개관을 작성했으며, 8세 때 첫 단편소설을 썼고, 9세 때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신문 〈나라〉에 발표했다. 15세 때 아버지의 눈 치료 때문에 가족 모두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는데, 이곳에서 장 칼뱅 중등학교에 다니며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공부했다. 19세 때 스페인으로 옮겨갔으며, 본격적으로 시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기예르모 데 토레스와 함께 잡지 〈울트라〉를 중심으로 스페인 아방가르드 문예운동인 울트라이스모(Ultraísmo, 극단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울트라이스모 운동은 당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과 같이 전통적인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인간의 감성과 감각의 세계를 중시하는 운동이다. 22세 때 가족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보르헤스는 시와 에세이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문예지 〈프리즘〉, 〈프로아〉 등을 창간해 아르헨티나 문단에 울트라이스모를 소개했다. 보르헤스는 스페인에서 영향을 받은 극단적 간결미와 압축미를 강조하는 성향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활기차고 다문화적인 분위기, 탱고, 속어시 등에서 영향을 받은 토속적인 감성과 속어를 결합시키면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개화시켰다. 24세 때 첫 시집 《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를 펴낸 이후 시집 《앞의 달》, 《산 마르틴 노트》, 에세이집 《심문들》, 《내 기다림의 크기》, 《아르헨티나인의 언어》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 명성을 쌓았다.   팬에게 둘러싸인 보르헤스 1931년, 보르헤스는 아돌프 카사레스 등과 함께 문예지 〈수르〉에 참여하면서 서구적 문학 경향과 아르헨티나의 향토성을 결합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비판하면서 국지성을 극복하는 세계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면서 1930년대에는 소설 실험을 시도했으며, 1935년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펴냈다.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 이 시기에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가세가 기울자 보르헤스는 생계를 꾸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 1937년부터 시립 미겔 카네 도서관에서 수석 사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는 불행을 겪은 데다, 계단을 오르던 중 열려 있던 창문에 머리를 부딪쳐 다쳤는데, 이 상처가 패혈증으로 번지면서 한 달 넘게 병상 생활을 했다. 또한 보르헤스의 아버지는 유전적인 이유로 시력이 약화되다 실명했는데, 보르헤스 역시 이런 유전적인 요인에 더해 지나친 독서로 이 무렵 시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시력을 잃어 후기 작품들은 구술을 통해 비서에게 정서시켰다. 보르헤스는 병상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단편소설들을 창작했다. 상처의 후유증이 지나치게 커서 자신이 앞으로 시를 계속 쓸 수 있을지 의심하며 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 키호테의 저자〉를 쓰는 한편,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집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1941, 후일 몇몇 단편을 추가해 《픽션들》로 출간된다), 《알렙》(1949)에 수록되는 작품들 대다수를 썼다. 이 작품들은 '발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계시'로 탄생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이성적으로 통제 가능한 일시적 착란 상태를 일컫는다. 그는 패혈증으로 인한 환각을 겪으면서 자신의 정신질환을 의심했으며, 일시적으로 말을 못하게 되는 등의 일을 겪었는데, 이런 상태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일시적 착란 상태의 특징인 시공간의 무한한 확장과 이에 따른 심리적 공황 상태를 겪으면서, 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리는 무한하고 환상적이며 모든 시공간 및 관념의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라는 독특한 보르헤스 문학이 탄생한 것이다. 1946년, 보르헤스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의 집권을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시위와 시국 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다. 후안 페론은 1943년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부를 세우고 아르헨티나 정치를 장악했으며, 3년 후인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이 일로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사임하고,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1949년에는 누이와 어머니가 페론 집권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기도 한다. 이런 정치 상황 속에서도 보르헤스는 1950년에는 아르헨티나 문인협회 회장으로 뽑혔다. 1955년, 독재정치로 경제가 파탄나자 군사 혁명이 일어나 페론이 국외 추방되었다. 페론이 실각한 후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영문학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 무렵 거의 실명 상태에 이르렀는데, 국립도서관장으로서 80만 권의 책을 관리하게 되었음에도 책을 읽지 못하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라며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것'이라는 시를 쓰기도 한다. 보르헤스는 어머니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독서 및 집필 활동을 할 수 있었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는 강연에 집중했고, 산문 집필이 어려워져 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발표된 〈창조가〉, 〈가상의 존재들에 대한 책〉 등은 산문과 운문의 구별을 거의 없앤 작품들이다. 1961년에는 사뮈엘 베케트와 공동으로 국제 출판인 협회상인 포멘터상을 받았으며, 1960년대 서구 사회에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이 붐을 일으키자 그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인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67년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엘사 아스테트 밀란과 결혼했으나 1970년 이혼했으며, 1986년 오랫동안 비서를 지낸 일본계 아르헨티나인 마리아 고다마와 결혼했다. 1973년, 국민들의 향수로 페론이 재집권하면서 보르헤스는 도서관장 자리에서 물러나 이후 유럽, 미국 등지로 강연을 다녔다. 1980년에는 세르반테스 문학상을 받았다. 보르헤스는 시와 산문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소설의 본질은 허구임을 직시하고 현실 도피로서가 아닌 진정한 현실로서의 환상 문학, 즉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소설적 실험을 하여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및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보르헤스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상징적 인물로 꼽히지만, 노벨 문학상만은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보르헤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불명예가 아니라 노벨 문학상의 불명예라고 말하기도 한다. 1985년, 스위스에 강연을 갔다가 병 때문에 제네바에 정착했으며, 이듬해 6월 14일 간암으로 사망했다.             ///@@@책속으로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도 있고 재앙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두 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취급해야 해요. -104쪽 책은 상상력의 연장이고 기억의 연장이에요. 책은 아마도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일 거예요. -122쪽 우리에게 금지된 것은 없어요. 그걸 하는 것은, 적어도 시도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답니다. -155쪽 작가는 순수한 자세로 써야 해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하고 있는 게 자신의 시가 아닌 거예요. -170쪽 난 미학이라는 게 없어요. 나는 단지 시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뿐’이에요. -181쪽 시는 말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말은 단지 상징일 뿐이니까요. 시는 말의 음악성 속에 존재하는 거예요. -183쪽 궁극적으로 우정이 사랑보다 중요할 거예요. 어쩌면 사랑의 진정한 기능은, 사랑의 의무는 우정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도중에 끝나버릴 테니까요. -186쪽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212쪽 나는 시를 매우 사적이고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그걸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죠. 만약 느낀다면,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274쪽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 나의 모든 시도가 쓸데없으리란 것을 알지만,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303쪽     서평   눈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   1980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여든의 나이로 대담을 위해 뉴욕, 시카고, 보스턴을 여행했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중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시 눈이 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이었다.   그에게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이자 세상과의 통로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본 시인이자 철학자 윌리스 반스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예전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생각이움직이는 것이어서 파도 위의 잉크와 마찬가지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 남겨진 현자들의 기록은 대부분 그 시대에 우연히 그들의 말을 받아 적고 기록하게 된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반스톤은 보르헤스와 나눈 대화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사유와 정신을 발견했고, 이를 하나의 작품처럼 남겨두고자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받아 적던 플라톤을 자처하며 직접『보르헤스의 말』을 엮었다.   그의 말마따나 “보르헤스의 생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게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보르헤스의 말』은 그가 1976년과 1980년에 한 인터뷰 열한 개를 모은 책이다.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대한 담담한 회고뿐 아니라 말년에 이른 보르헤스의 문학, 창작, 죽음에 대한 견해까지 담고 있다. 그는 인터뷰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 유아론과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말이 하나의 주장으로 굳어질까 염려하여 ‘오늘은 그래요’ 라는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곤 했다.   “아, 그럴지도 몰라요. 오늘은 영지주의자, 내일은 불가지론자이면 어때요? 다 똑같은 거예요.” 이런 식의 불분명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호성, 사실과 허구 사이의 틈새라는 우주적 수수께끼를 연상시킨다.     세계 시민적인 사고와 개방성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모색한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출신 할머니와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모국어인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다. 이러한 유년기는 그에게 언어에 대한 개방성과 세계 시민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나는 두 할머니 중 한 분과 얘기할 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야 하고, 다른 분과 얘기할 땐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 두 가지 방식을 스페인어와 영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244쪽   보르헤스는 고대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도 꾸준히 공부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언어 간의 유의미한 차이뿐 아니라 개별적인 음악성에도 심취했다. 앵글로색슨인들은 로마(Rome)를 로마버그(Romaburgh)라고 불렀어요. 우린 그 두 단어에 흠뻑 빠졌지요. 그리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했어요. “줄리어스 시저는 브리튼 섬을 찾은 최초의 로마인이었다.”라는 문장이었어요. 그런데 그 문장을 고대영어로 읽으면 더 멋진 울림이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페루라는 거리를 달리며 소리쳤어요. “이울리우스 세카세르…….”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지만 우린 개의치 않았어요.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니까요! -197쪽   보르헤스는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다. 여기서 그가 쏟은 노력은 자신이 쓴 작품들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보르헤스는 언어를 통해 예술을 탐구했던 학자이고, 자신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들을 꾸준히 써낸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얻은 언어학적, 문학적 통찰은 아이러니였다. 좌절 속에서도 지켜야 할, 생의 의지였다.   반스톤 / 당신은 마음 상태나 감정이나 지성에 관한 한 단어를 찾고 있나요? 당신이 이 세상을 뜨기 전에? 만약을 가정해서 드리는 질문이에요? 찾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요?   보르헤스 / 참 단어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걸 찾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살아야 해요. 그러면 나중에 그 단어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어요. 안 주어질 수도 있고요. 우리는 시행착오를 통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우리는 실수를 저질러야 하고, 실수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건 평생 해야 하는 일이지요. -188쪽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죽음을 앞둔 문학가가 남긴 질문들과 답   『보르헤스의 말』은 눈멀고 나이든 문학가가 죽음을 앞두고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몸과 영혼, 모두 완전히 죽고 싶어요. 그리고 잊히고 싶어요. -92쪽   고통스럽게 삶을 유지해온 보르헤스에게 죽음은 “희망이 가득한 것”이었다. 그는 삶을 악몽처럼 견뎌왔기에 죽음을 매 순간 도래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난 사람이 늘 죽는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단순히 뭔가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느끼지 않고 뭔가를 발견하지 않아요. 그 순간 우리는 죽은 것이에요. 물론 삶은 어느 순간에나 돌아올 수 있어요. -38쪽   인터뷰 속에서 보르헤스는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삶도 죽음처럼 매 순간 돌아오는 것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삶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 보르헤스는 글쓰기가 아닌 말하기를 통해 언어를, 아름다움을 탐구해나갔다. 말은 시력을 잃은 그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새로운 돌파구로써 작용하기도 했다.   직접적이고 내밀한 소통 방식이라는 점에서 글과 비슷하되 전혀 다른 매체였기에,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마저도 바꾸어놓았다. 그러므로 『보르헤스의 말』은 20세기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친 대기가 남긴, 독특하면서도 유일한 형식의 ‘작품’일지 모른다.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 나의 모든 시도가 쓸데없으리란 것을 알지만,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303쪽 .   . 황현산 문학평론가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모든 방향으로 뚫려 있는 정신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르헤스 본인은 정신이 늘 메말라 있었다고 말한다. 뚫려 있는 길의 끝까지 갔다는 말이 되겠다. 대화록인 이 책에서 그는 그 뚫린 길을 어떻게 만났고, 또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만들었는지 가볍고도 명석한 언어로 말한다.   그가 시력을 잃고 모든 글을 구술해서 쓰던 시절에 이루어진 이 대화는 구어가 문어의 논리성을 확보하고 문어가 구어의 구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신기한 문체의 한 기적을 보여준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재미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더 재미있다.    ===@@===         축복의 시                         -  마리아 에스떼르 바스께스에게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탐문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필시 이를 지배하리니. 어떤 이가 또다른 희뿌연 오후에 이미 수많은 책과 어둠을 얻었지.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그라고 느낀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저주가 같을지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랴?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보르헤스의 시집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에 들어있는 '축복의 시'이다. 그의 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소설처럼. 보르헤스의 '픽션들' 역시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 누군가의 서평을 그대로 옮겨본다. 남미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이끈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시선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그는 '픽션들' 등 소설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문학적 출발점은 시다. 그의 내면이 담긴 이번 시집은 그의 문학과 삶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마시라/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높고도 깊은 눈 넌 도서관 구석구석을/나도 정처없이 헤매네' ('축복의 시') 보르헤스 스스로 손꼽는 이 시는 그가 거의 시력을 상실했던 국립도서관장 재임 시절 쓴 것이다. 그토록 좋아하는 책의 바다에서 단 한줄의 글도 읽을 수 없는 극한적 불행을 그는 축복이라는 아이러니로 노래한다. 물리적 세계는 그에게서 사라졌지만 세계의 불행하고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보는 심안은 더욱 밝아진 것인지 모른다.   ===============@@@========= 중남미문학의 거장 호르헤루이스 보르헤스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철학의 시조로 추앙되는 중남미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1986). 그는 생의 후반을 암흑 속에서 보내며 어둠을 질료로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 20세기의 거장이었다. 그는 1955년 그토록 바라던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을 때 서서히 약화되던 시력마저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신은 빛을 여읜 눈을/이 장서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며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를 시로 읊었다. 어린시절부터 과도하게 책을 본데다 유전적인 이유까지 겹쳐 생의 후반 30여년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잃은 대신 오히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린 금세기 세계문학의 독특한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에코,푸코,데리다 같은 이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됐던 보르헤스는 90년대 들어 국내에서도 열광적인 신도들을 거느리며 「보르헤스붐」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보르헤스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아직은 부족한 국내 사정을 감안해 「세계의 문학」 가을호는 그의 탄생 1백주년을 계기로 보르헤스의 진면목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집을 기획해 눈길을 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보르헤스는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가 가장 중요한 유년기의 기억이자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회고할 만큼 성장 환경 자체가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영국계 할머니로부터 배운 영어를 6살 때부터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유럽에 가서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독일어로 된 책을 읽었다. 1935년 단편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의 단편 「픽션들」과 「알레프」는 유럽과 미국의 문학과 비평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픽션들」 속에 삽입된 「바벨의 도서관」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소설의 죽음을 외치는 금세기말의 문학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대표적 작품들로 손꼽힌다. 보르헤스에게 세계란 「미숙한 신이 만들어낸 카오스」이자 「미로」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이런 세계 인식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후반을 이끄는 사조의 원류가 되었고, 보르헤스는 그 세계관을 탐정소설 형식에 환상적 내용으로 즐겨 담았다.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표주자로 지목되는 중남미의 소설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보르헤스는 내게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우주를 도서관으로 해석하는 보르헤스의 발상에서 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문학」 보르헤스 특집은 콜롬비아에서 보르헤스를 연구한 우석균씨(서울대 스페인어과 강사)의 보르헤스론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대표시들을 번역해 수록하고 있다. 우씨는 「흑백사진에 갇힌 보르헤스의 천연색 욕망」을 통해 『보르헤스에 대한 지나친 신비적 포장으로 그의 진면목이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다』며 『그의 내향성과 소심함,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이야말로 많은 작품의 모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68세에 첫 결혼을 한 뒤 87세에 자신의 여비서와 두번째 결혼을 했지만 불과 두달 후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보르헤스. 자신의 환상적인 작품만큼이나 기이한 인생을 살았던 보르헤스의 탄생 1백주년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그의 문학적 위상을 검증하는 새삼스러운 좌표인 셈이다. 출전: 세계일보 1999년 8월 13일   거리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 대평원 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 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 소박한 집들이 있는, 자애로운 나무들마저 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   이러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첫 시집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의 권두시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시의 꿈을 키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다양한 공간, 예컨대 거리·잡화점·점방·담벼락·오두막·광장·길모퉁이를 사랑했다. 그 거리는 그의 영혼의 “고갱이”(중심)였고 “행복의 약속”이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공간에 의미의 꽃을 심는 자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거리  
1892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일본 "김삿갓 방랑 시인" - 마쓰오 바쇼 댓글:  조회:8281  추천:1  2016-11-29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 松尾芭蕉     출생일 1644년 사망일 1694년 본명 마쓰오 무네후사(松尾宗房) 국적 일본 대표작 《노자라시 기행(野晒紀行)》,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 목차 마쓰오 바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촌철살인의 명구로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가슴을 울리며 많은 사랑을 받는 하이쿠 시인.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음유시인. 하늘을 지붕 삼아 살고 싶었고, 그저 그날 밤 잘 곳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랐던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 하이쿠는 에도 시대에 발달한 전통시의 형태로,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정형시이다. 근세에는 하이카이로 불렸으나 메이지 시대각주1) 에 하이쿠라는 명칭으로 정착했다. 하이쿠는 상류층의 와카나 렌가와 대조적으로 골계성을 강조한 말장난의 일종으로, 서민층에서 크게 유행했다. 하이쿠를 놀이가 아닌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인물이 바로 마쓰오 바쇼다. 바쇼는 말장난 유희에 불과했던 하이쿠를 풍류와 풍자가 담긴 자연시로 끌어올렸다. 바쇼는 1644년 이가국(미에 현 이가 시)에서 마쓰오 요자에몬의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이다. 농민 집안이어서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청년 시절 무사인 도도 요시타다 아래에서 고용살이를 했다. 이때 요시타다를 따라 이름난 가인이었던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을 만나면서 하이쿠에 눈을 떴다. 바쇼는 23세 무렵 요시타다가 죽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앞으로 먹고살 일을 궁리하면서 바쇼는 무사가 될지 승려가 될지 고민하다 결국 자신에게는 오직 하이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9세가 되던 해 바쇼는 고향을 떠나 에도로 떠났다. 그는 '도세이(桃靑)'라는 호로 활동하며 일약 촉망받는 신인 하이쿠 작가로 떠올랐다. 35세 무렵에는 그의 문하생이 되기를 자처하는 시인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바쇼는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은거와 방랑의 길을 택했다. 유망한 하이쿠 시인으로서 앞날이 창창했던 바쇼는 37세 무렵의 어느 날 돌연 후카가와에 파초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어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선종 수행법을 배워 참선하고, 《장자》를 비롯해 두보, 이백, 소동파 등 중국 고전을 탐독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잦은 방랑길에 올랐다. 마흔 살 무렵 가을 바쇼는 총 9개월간의 긴 여행을 시작했다. 방랑 인생의 시작이었다. 바쇼는 에도를 출발해 도카이도, 사요나카야마, 이세, 야마토, 요시노 산, 비와 호, 나고야, 우에노, 나라, 교토, 오쓰 등을 기행했고, 이 경험은 《노자라시 기행(野晒紀行)》이라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노자라시(野晒)'란 '비바람을 맞으며 백골이 되었다'는 의미로, 제목답게 목숨을 건 힘든 여행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여행은 그의 작풍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재치 있는 언어유희적 하이쿠를 지었던 바쇼는 보다 느긋하게 자연을 즐기고, 솔직하게 생과 자연의 진실을 포착해 내는 작품을 읊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문하생과 하이쿠 추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바쇼는 하이쿠의 일인자로 부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교토와 에도는 물론,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바쇼는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암자에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생활을 하고 참선 수행을 했다. 받아서 먹고, 청해서 먹고, 굶주려 죽지도 않은 채 한 해가 저무니 행복한 사람 축에도 들겠구나, 늙음의 끝자락. 달이여, 눈이여, 흥에 겨워 지내니 연말이구나. 이 무렵 바쇼의 하이쿠들에는 소박하게, 그저 일이 이루어지는 대로 살아가고, 풍류를 즐기며 자족하는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2년 후 바쇼는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두 번째 방랑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져서 가는 곳마다 떠들썩한 환대를 받았다. 탈세속적인 작풍과 풍류를 즐긴 바쇼로서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쇼의 암자도 고독을 즐기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종자들의 방문을 받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쇼는 곧 암자를 팔고 홀로 낯선 곳을 떠돌아다니기로 결심했다. 1689년 3월 제자와 함께 방랑길에 오른 바쇼는 고전에 등장하는 명승고적을 둘러보았다. 중국 고전을 비롯해 일본의 전통시에 심취했던 그는 사이교, 노인 법사 등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선인들의 시혼(詩魂)을 배우고자 했다. 존경했던 노인 법사가 지났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오우 지방의 입구인 시라카와 관문을 지나면서는 "내 살던 고향, 봄 안개 피어날 때 떠나왔는데, 가을 바람 스산한, 시리카와의 관문"이라며 감동을 표현했다. 일세기를 풍미했던 후지와라씨의 근거지 히라이즈미에서는 "장맛비도 비껴간 듯하구나, 금박 입힌 금당"이라며 공명과 부귀영화도 한낱 허무한 꿈일 뿐이라고 노래했다. 약 150여 일간의 이 기행은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로 탄생했다. 이 방랑을 통해 그는 유한한 역사와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존재와 삶은 일시적이고 나약할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절감하고, 노장적인 자연 사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의 예술적 경지는 한 차원 더 끌어올려졌다. 소나무에 대한 것은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관한 것은 대나무에게 배워라. 하이쿠를 행하는 사람은 조화를 따라서 사계를 친구로 삼는다. 조화를 따라서 조화로 돌아가라. 에도로 돌아온 후 바쇼는 제자들에게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천지 만물의 조화에 따라 살 것을 설파했다. 그리고 하이쿠에 있어서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영속적으로 변화하고 재생산되는 자연의 법칙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제자들과의 만남도 잠시, 그는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바쇼는 오랜 방랑을 통해 자연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종래 관념적·논리적·유미주의적 관점에서 정형화되어 있던 하이쿠를 보다 자연스럽게 인생의 애환을 담는 그릇으로 발전시켰다. 마쓰오 바쇼는 1694년 오사카에서 객사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이쿠를 읊었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 · 1682년 : 이하라 사이카쿠가 《호색일대남》을 발표하다. · 1703년 : 최초의 세와모노 작품인 《소네자키 신주》가 발표되다. · 1689년 : 마쓰오 바쇼가 《오쿠노 호소미치》의 배경이 되는 방랑길에 나서다.    ///@@@     마쓰오 바쇼 松尾 芭蕉 이와테 현 히라이즈미에 있는 바쇼의 동상 출생 1644년 일본 이가노쿠니 사망 1694년 11월 28일 (50세) 일본 오사카 국적 일본 장르 하이쿠 대표작 오쿠노 호소미치 영향 받은 분야·인물 도도 요시타다 영향을 준 분야·인물 기타무라기긴 마쓰오 바쇼(일본어: 松尾芭蕉 (まつお ばしょう) 마츠오 바쇼[*], 1644년 ~ 1694년 11월 28일)는,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 전기의 하이쿠 시인으로 에도 시대 전기 하이카이(俳諧)[1]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긴자쿠(金作)이며, 통칭은 진시치로(甚七郎) 또는 진시로(甚四郎)이다. 본명은 주고에몬 무네후사(忠右衛門宗房)로 처음에는 이 「무네후사」를 필명으로 사용하다가 그 뒤에 도세이(桃青), 마지막으로 바쇼라는 필명을 썼다.[2] 에도 전기의 가인(歌人)이자 학자였던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의 문하에서 하이쿠를 배웠다. 「쇼후(蕉風)」라 불리는 예술성 높은 문장 경향을 확립하여 후세에 「하이쿠의 성인(俳聖)」으로서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일본 역사상 최고의 하이쿠 시인의 한 사람이다. 제자 가와이 소라(河合曾良)와 함께 겐로쿠(元禄) 2년 3월 27일(1689년 5월 16일)에 에도(江戶)를 비롯한 도호쿠(東北), 호쿠리쿠(北陸) 지방을 돌며 기후(岐阜)의 오가키(大垣)까지 여행한 기행문 『오쿠노 호소미치(おくのほそ道)』를 남겼다. 목차 1 생애 2 작품 3 대표작 4 관련 서적 5 각주 생애[편집] 1644년 이가 국(지금의 미에 현(三重県) 이가 시(伊賀市)) 농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무네후사(宗房)이다. 처음에는 무네후사를 배호로 사용하다가 그 후 모모아오, 마지막으로 바쇼라고 고쳤다. 1662년 쓰 번의 번주 도도 다카쓰구의 조카 요시타다에게 봉사했고, 요시타다가 세상을 떠난 1666년까지 섬기는 한편 하이쿠를 배웠다. 쇼후로 불리는 예술성 높은 문장 경향을 확립하여 하이쿠의 명인으로 불린다. 작품[편집] 바쇼가 제자인 가와이 소라를 동반해 겐로쿠 2년 3월 27일(1689년 5월 16일)에 에도를 출발하여 도호쿠, 호쿠리쿠를 돌아 다녀 기후 현 오카이까지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 『오쿠노 호소미치』가 있다. 대표작[편집]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る櫻哉//いのちふたつのなかにいきたるさくらかな//두사람의 운명이여 그 사이에 핀 벚꽃이런가 = 1685년작. 雲折々 人をやすむる 月見哉//くもおりおり ひとをやすむる つきみかな//구름이 잠시 달구경 하는 사람 쉴 틈을 주네 = 1685년작. 古池や蛙飛込む水の音//ふるいけやかわずとびこむみずのおと//오랜 못이여 개구리 뛰어들어 물치는 소리 = 1686년작. 관련 서적[편집] 《일본 하이쿠 선집》/마쓰오 바쇼 등 지음/오석윤 옮김/책세상/2006년 《바쇼의 하이쿠 기행 1~3》/마쓰오 바쇼 지음/김정례 옮김/244, 164, 160쪽/바다출판사/2008년 각주[편집] ↑ 일본 특유의 짧은 시. ↑ 바쇼는 파초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파초와 비슷한 열대식물인 바나나에서 착안했다. 매일신문, 야고부 바나나///@@@ 일본의 하이쿠와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 일본의 하이쿠 우리나라에 전통 정형시로 시조가 있다면, 일본에는 와카(和歌)라고 하는 문예장르가 있다. 와카는 5-7-5-7-7로 된 일본의 전통시로, 이것은 중세 전란기에 지방을 떠돌던 문인들에 의해 5-7-5와 7-7로 나누어져 번갈아 읊는 렌가(連歌)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렌가가 근세에 들어 대중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5-7-5형식이 단독으로 읊어 지게 되는데, 그 형식이 문예형식의 하나로서 위치를 확립하고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한편, 이 시대 문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하이카이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였다. 그는 모든 문물이 도시로 향하고 일찍이 자본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한 17세기 에도 시대에 저 변방으로의 고된 여행을 통하여 하이카이 문예를 완성해 갔다. 따라서 일본인에게 있어 바쇼의 이미지는 오로지 하이카이와 여행으로 평생을 일관한 속세를 초월한 여행 시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현대 일본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하이쿠는 일본이라는 고향을 떠나 전 세계를 무대로 지어지며 읊어지고 있다. 단지 작가들만이 창작을 독점하는 시문학이 아닌 일반인들의 생활 속에서 창작되고 애송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로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일생 마츠오 바쇼는 1644년 지금의 미엔 현 우에노 시(市)인 이가우에노에서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원래 마츠오 가는 12세기를 전후해 권세를 떨쳤던 무사 가문인 헤이케의 말류에 해당하는 토호의 한 지족이었으나, 그의 아버지의 신분은 하급 무사에 해당하는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이 호(俳號)는 처음에 무네후사(宗房), 도세이(桃靑)로 하다가 나중에 바쇼라고 부르게 되었다. 13살 되던 해인 1656년 아버지를 여의고, 19살에 도도 번 이가부(藤堂蕃 伊賀府)의 사무라이 대장 도도 신시치로 가(藤堂新七郞家)에 출사(出士)했다. 또한 그는 자신보다 2살 위이며 도도 가의 상속자였던 도도 요시타다(藤堂 良忠)의 총애를 받으며, 그와 하이카이를 통한 교분을 두텁게 했다. 요시타다가 데이몬 하이카이 시인이었던 관계로, 당시 크게 유행하고 있던 데이몬 하이카이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바쇼가 23살 되던 해, 요시타다가 향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바쇼는 무사로서의 길이 막히게 되고, 인생 또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후 고향 이가 우에노를 떠나 교토로 가, 교토의 사원에 머물면서 와카학(和歌學), 의술, 신도, 불교 등에 대해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29살 되던 해(1672년), 이가 우에노의 신사 덴만 궁에 자신이 편집한 홋쿠아와세(發句合: 2수의 하이쿠를 비교하여 평한 다음 우열을 가린 것)『가이오호이』를 봉납했다. 이로써 하이카이 시인으로서 출발하는 스스로의 결의와 성공을 신사에 기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봄, 에도에서 『가이오호이』를 출판했다. 30세부터 37세까지는 주로 에도에서 생활하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단린 하이카이(교토를 중심으로 한 언어 유희적인 경향의 하이카이)에 탐닉해 있었다. 31세 때, 교토의 하이카이 종장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으로부터 렌가 하이카이 작법의 비전서(秘傳書) 『우모레기』를 전수 받았다. 이 비전서를 전수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이카이 시인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업으로 하는 하이카이 지도자로서 독립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33세 때 하이카이 친구 소도와 함께 출판한 『에도양음집(江戶陰陽集)』에 수록된 작품들은 바쇼가 당시에 유행하던 단린 하이카이에 탐닉해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37살이 되던 해인 1680년, 시정을 벗어나 후카가와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다음 해 제자인 리카(李下)가 그가 머물던 오두막의 정원에 파초를 심었던 것에서 후카가와의 오두막을 '바쇼 암(庵)'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호가 바쇼인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또 바쇼 암 근처에 임재종 묘심사 파의 숙박소인 임제암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시마 곤폰 사(鹿島 根本寺)의 주지승 붓초가 머물렀던 인연으로, 이 즈음 그로부터 참선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후 4년여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특히 노자와 장자, 이백, 두보, 한산, 백낙천, 소동파 등의 중국 시인의 시와 사이교 등 일본의 전통 시가에 심취해 있었으며, 이 시기의 그의 하이카이의 특징은 노장(老莊)취미와 한시조를 도입한 격조 높은 새로움에 있었다. 41살이 되던 1684년, 바쇼는 라는 하이쿠를 읊으며, 이제까지의 은둔 생활을 박차고 『노자라시 여행』의 길을 떠났다. 이 후 1687년 8월 『가시마 모데(鹿島詣)』 여행, 10월 『오이노 고부미(おいの小文)』, 1688년 『사라시나 기행(更科紀行)』, 1689년 『오쿠노호소미치(おくのほそ道)』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활은 거의 여행과 은둔의 연속이었다. 이들 여행 속에서 그는 각지의 하이카이 시인들과의 만남의 장을 열어, 자신의 하이카이를 전파해 갔다. 5개월이 더 걸려 6000여리의 『오쿠노호소미치(おくのほそ道)』의 긴 여행을 끝낸 바쇼는, 이 여행이 끝나고 나서 2년도 더 지난 다음 에도로 돌아왔다. 이 동안 쇠약해진 몸으로 교토와 오사카 등지를 전전하면서 많은 문하생들을 맞아들이는 한편, 그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함과 동시에 여행을 통해 체득한 자신의 하이카이를 작품화했다. 그러던 1694년 10월14일, 라는 하이카이를 세상에 남기고, 여행지였던 오사카에서 51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았다.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 나의 시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저자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해설자 김정례(전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목차 '꿈'은 황야를 달리고 하이쿠는 '풍아(風雅)'2)이다 나의 풍아(하이쿠)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지금 여기'의 시, 하이쿠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꿈'은 황야를 달리고 한 해 저무네 머리에는 삿갓 쓰고 짚신을 신으면서   삿갓 하나, 봇짐 하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들면 어느 오두막에서건 잠시 숙소를 빌려 머무는 방랑 시인. 이것은 일본인이 가장 쉽게 떠올리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모습이다. "여기서 짚신을 벗어 쉬고 저기서 지팡이를 버리고 머물면서 나그네 잠을 자다가 한 해가 저무니"라고 시의 배경에 대해 쓴 전서(前書)가 붙어 있는 위의 하이쿠(俳句)1)는 1684년 12월 말, 바쇼가 여행 중에 고향인 이가 우에노에 들러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읊은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 그에게 고향은 더 이상 돌아가 머물 안식처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 세상 모든 곳을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숙한 인간이라고 했던가. 이 하이쿠 작품에서는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이라도 설을 맞기 위해 고향을 찾는 세밑, 또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는 바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94년 음력 10월 12일, 여행 중에 들렀던 오사카에서 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숨을 거두기까지, 바쇼는 은둔과 여행을 반복하며 오로지 하이쿠 외길의 삶을 살았다. 향년 51세로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읊었던 하이쿠는 이렇다.   여행길에 병드니 꿈은 저 황야를 헤매고 다니네   1694년 10월 8일 한밤중, 열흘 전부터 심한 설사로 자리에 눕게 된 바쇼는 자신을 간호하던 이에게 먹을 갈게 하여 이 하이쿠를 종이에 적는다. 그리고는 병상을 지키던 제자 시코에게 이 작품을 보이며, "꿈은 저 황야를 / 헤매고 다니네"와 "더욱 헤매고 다니는구나 / 꿈속에서는" 중에서 어느 쪽이 좋은지 묻기도 한다. "여행을 하다가 병이 들어 눕게 되니, 저 황량한 들판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꿈을 꾸게 되는구만.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신없이 헤매고 다니는 거야." 바쇼는 여행 중에 앓아누운 자신을 온갖 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제자에게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말했던 것일까. 원문을 직역하면 꿈을 좇아 "헤매고 뛰어다닌다"고 해석될 만큼 절실함이 베어 있는 이 작품은 그러나 그의 마지막 시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하이쿠의 성인(聖人)으로 신격화될 만큼 일본의 전 문학사를 통틀어서 일본의 대중과 지식인 모두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나아가서 일본인이 세계를 향해 자기 나라의 문학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입에 올리는 시인이 되었다. 옛날에 일본에는 죽음에 임박한 시인이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는 '사세(辭世)의 시'를 읊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위의 하이쿠는 바쇼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읊은 '사세의 시'라고 하기에는 이 세상과 시에 대한 집착, 그 '꿈'이 너무 집요하지 않은가. 세속을 초월하여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하면서 하이쿠를 위해 정진했던 시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이 집착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런데 바쇼는 이 시에 '병 중에 읊음'이라는 전서(前書)를 달아서 사세의 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평소 사는 것 그 자체가 사세"라고 말했던 그의 말대로 이 대시인에겐 사세의 시가 없다. 시인 자신이 결코 사세의 시로 읽히기를 거부했던 시. 그러나 일본의 사세의 시를 말할 때는 위와 같은 에피소드와 더불어 언제나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시. 사세의 시든 아니든, 생애 마지막에서조차 자신이 평생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을 찾아 겨울의 황야를 헤매는 이 시인의 '꿈'의 간절함과 절박함, 비통함은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는 '나'의 발걸음을 문득 멈추게 한다. 언젠가 올 삶의 마지막날, '나'는 어떤 꿈을 꾸게 될까, 아니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싶은가 하고.   하이쿠는 '풍아(風雅)'2)이다 1680년 겨울, 근세 일본의 정치 중심지였던 에도 시내에 정착해 살던 바쇼는 갑자기 시내를 벗어나 변두리 후카가와의 작은 오두막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다음 해 봄, 친구 리카(李下)가 어린 파초 한 그루를 보내오자 그는 이 파초를 오두막 한 켠에 심었는데, 파초가 있는 이 오두막은 어느새 '바쇼암(芭蕉庵)'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파초가 있는 오두막에 사는 이 은둔 시인은 '바쇼(芭蕉)'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바쇼'는 이 시인의 대표적인 별호가 되었다. 바쇼암은 자칫 암자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처럼 파초가 심어진 조그만 오두막, 바쇼의 은둔처였다. 파초가 있는 오두막에서의 은둔 생활 첫해, 가을 태풍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밤, 바쇼는 커다란 파초 이파리를 거세게 헤집으며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 하이쿠를 읊는다.   파초 태풍에 날리고 대야의 빗방울 소리를 듣는 밤이로다   일본은 기후 풍토상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많은 태풍이 온다. 지난 2004년에는 무려 13번이나 왔다고 한다. 이 하이쿠를 보면, 바쇼는 태풍 속에 찢겨지는 파초의 이파리 소리를 들으며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며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비바람에 쉬이 찢기는 연약함' 때문에 파초를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던 그는 자신의 별호를 '후라보(風羅坊)'라고 지었다.   그 사람 후라보(風羅坊)는 교쿠(狂句)를 즐기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은 그의 일생을 건 일이 되었다. 어떤 때는 싫증이 나서 던져버릴까 생각하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열심히 노력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하려 하기도 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하다가 그 때문에 심신이 더러 편치 못했다. 한 번은 남들처럼 출세하기 위해 뜻을 세운 적도 있었으나 그것이 방해가 되어 안 되었고, 또 언젠가는 불교를 배워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려 한 적도 있지만 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는 무능무예(無能無藝)의 오로지 이 길 하나로 살게 되었다. 사이교3)의 와카, 소기의 렌가4), 셋슈5)의 그림, 리큐6)의 다도(茶道), 이들의 근저를 관통하여 흐르는 정신은 하나이다. 풍아(風雅)라는 것은 천지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로 삼는 것이다. 보는 것 모두 꽃이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가 달이 아닌 것이 없다. 그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미개인과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을 보고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야만인이나 새, 짐승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그 조화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리라. - 『오이노 고부미 기행』   1687년 음력 10월 초, 나라와 교토 등지로 떠났던 여행에 대해서 쓴 이 기행문의 서문에서 바쇼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예술에 대해서 매우 고조된 어조로 말하고 있다. "하이쿠는 풍아이다." 그는 이 선언을 하기까지 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하이쿠에 걸었던 것이다. 말장난으로서의 하이쿠가 아니라 풍아로서의 하이쿠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에 차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해서 '풍아'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렇다면 도대체 풍아란 무엇인가. 풍아(風雅)의 어원은 중국의 『시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풍(風)'은 민간에서 행해지는 가요, '아(雅)'는 조정에서 불려지는 우아한 시가를 말하다가, 나중에는 『시경(詩經)』의 시 전체를 일컫는 말로 '시가 문장의 도(道)'나 예술 전반을 나타내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풍아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특히 품위가 있고 귀족적인 것을 나타낼 때, 즉 정통적인 예술 일반에 대해서 이 말이 쓰여졌다. 따라서 전쟁으로 얼룩져 있던 일본의 중세 시대, 그 하극상의 시대에 일본의 정통 시가인 렌가를 패러디하면서 전통을 뛰어넘고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생겨났던 하이쿠는 결코 '풍아'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바쇼도 말하고 있듯이 '보잘것없고 장난스러운 시', '교쿠(狂句)'였다.   꽃(하나) 보다도 코(하나)에 있었구나 벚꽃 향기는   초창기 하이쿠 시인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가 읊은 이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 하이쿠 문학은 이처럼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거나 재미난 비유를 통해 우아하고 고상한 정통 문학의 세계를 패러디했다. "봄 안개마저 / 얼룩얼룩 피어나네 / 호랑이해에는", "알 수 없는 세상이로고 / 석가모니의 죽음 뒤에 / 금전이 있네" 이 작품들은 바쇼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것이지만, 이처럼 '풍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바쇼는 이처럼 언어유희적인 하이쿠를 배우고 성장한 사람이었지만, 언어유희적인 하이쿠의 안티테제로서 자신의 하이쿠를 일구어 나갔다. 그가 하이쿠의 예술적 완성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은둔, 그리고 여행이었다. 말하자면 생활의 실천을 통한 예술적 완성을 시도한 것이다.   나의 풍아(하이쿠)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오랜 전란이 이어졌던 일본의 중세 시대7) 사람들은 내일의 목숨을 알 수 없었기에 이 세상을 쓰라리고 근심 많은 난세(亂世), 이른바 '우키요(憂世)'로 보고, 그 덧없음을 '무상(無常)의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문학으로 형상화시켰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태평성대를 구가한 근세에 이르자, 이 세상은 즐길 만한 것, 잠깐 머물다 갈 현세라면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뜬 세상'의 '우키요(浮世)'라 생각하고 현실에 매우 충실한 문학을 시도했다. 우리나라와의 관련에서 보자면 임진왜란 직후에 해당하는 일본의 근세의 '우키요'는 중세 시대의 그것과는 이토록 달랐다. 일본의 근세 시대, 현실적 쾌락 지향형의 문학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향유하는 사람들은 무사로서 할 일이 없어진 하급의 무사 계급 출신과 이 시대에 새롭게 대두된 도시 상인 그룹인 조닌(町人)이었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성적 쾌락과 돈 버는 일. 이 두 가지 소재는 다양하게 소설로 쓰여지고 가부키 연극으로 상연됨으로써 근세라는 공간을 향락주의로 넘치는 '뜬 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시기 문화의 내용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세속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조닌 문화의 감각적 쾌락주의와 무사 문화의 금욕적 윤리 가치의 이중구조가 같은 틀 안에서 발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뜬 세상'의 시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금욕적'이기도 했던 시대, 바쇼는 이 같은 세상의 흐름의 어느 것과도 다른 삶을 지향했다.   나의 풍아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일반 사람들의 취향과는 달라서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오. -「교리쿠(許六)와의 이별사」   무사 출신의 제자로 공직에 있으면서 그림을 잘 그렸고 하이쿠도 잘했던 모리카와 교리쿠(森川許六)가 에도 근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스승 바쇼는 제자를 보내는 아쉬움을 담아 긴 이별사를 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풍아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바쇼가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이룩한 풍아, "보는 것 모두, 생각하는 것 모두가 꽃과 달이 아닌 것이 없다"고 그토록 고조된 어조로 말하던 그 '풍아'가 아무데도 쓸 데가 없다니. 그러나 바쇼는 이 말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요약했다. 이른바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1997년엔가, 나는 예기치 않은 데서 이 말을 듣고 흥미로워했던 적이 있다. 개혁을 부르짖던 젊은 정치인 몇 명이 선거에 패배하자 여의도에 '하로동선'이라는 식당을 냈던 것이다. 당시 그것은 꽤 화제가 되었는데, 바쇼의 '하로동선'적인 삶과 문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 식당 이름 때문에 그들의 활동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70~80년대엔 민주투사로 활약하다가 90년대 초반엔 일선 정치에서 뛰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온몸으로 부르짖던 사람들이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자 느닷없이 '여름날의 난로, 겨울의 부채'라는 이름의 식당이라니···. 신문에 실린 음식 나르는 그들의 모습에선 '와신상담(臥薪嘗膽)'과 같은 치열함과는 다른, 아웃사이더를 선언하고 생활전선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담박함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그 '하로동선'을 꿈꾸었던 정치가들은 지금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정치적 실세가 되어 '참여'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하로동선'과 '참여', 가장 먼 개념의 말을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자신들의 지향점으로 삼은 사람들의 행로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또 그들이 도모하는 일이 위태위태해 보일 때, 나는 '하로동선'을 표방했던 수년 전의 그들의 담박했던 표정과 실천적 삶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부디 나의 기대가 저버려지는 일이 없기를···. 그렇다면 바쇼가 말하는 '하로동선'은 어떤 것일까? 바쇼의 태생 자체가 아웃사이더였고 하이쿠라는 문학 자체가 당대의 주류이기보다는 아웃사이더인 서민 중심의 문학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바쇼의 행보와 지금의 하이쿠 존재 양상, 그리고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일본 문화의 독특한 일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참여'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불참'이야말로 하이쿠라는 시를 문학적으로 독립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의 여정을 좇아가 보자. 1684년 음력 8월, 바쇼는 4년간의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며 읊는다.   들판의 해골로 뒹구리라 마음에 찬 바람 살 에이는 몸이로다 - 『노자라시 기행』   '노자라시'는 '해골'이란 뜻이다. 이른바 '들판에 나뒹구는 해골'이 되리라는 비장한 각오에 차서 떠나온 여행 도중에 강가에서 울고 있는 '버려진 아이'를 보게 되었을 때, 바쇼는 묻는다.   잔나비 울음 듣는 이여 버려진 아이에게 가을 바람 부네 어떤가 - 『노자라시 기행』   "예로부터 시인들은 잔나비 우는 슬픈 소리에 소매를 적시며 여행을 했다지만, 나는 이 가을 여행길에서 하필 버려진 아이까지 서럽게 울어대는 모습과 맞닥뜨렸습니다. 옛 사람이여, 가을바람 속에서 우는 저 아이를 그냥 보고 지나칠 수밖에 없으니, 저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바쇼는 이 하이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버려진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러한 때, 그는 옛 시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끝없이 묻는다. 그리고 이 여행의 끝자락에서는 여행 출발 당시 '들판의 해골' 운운하며 비장한 포즈를 취했던 자신을 야유한다.   죽지도 않은 나그네 길의 끝이여 가을 저물녘 - 『노자라시 기행』   "여행을 떠나올 때는 결국 이 여행 중 어느 들판에선가 죽게 될지도 모르리라 싶어 각오를 단단히 했건만, 이렇게 죽지도 않고 여정을 풀었네. 때마침 계절은 늦은 가을, 한숨을 돌리고 나니 오히려 여행의 쓸쓸함이 가슴에 파고드네." 바쇼는 자신의 여행 끝에서 이렇게 자조 섞인 쓸쓸함에 휩싸여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문학적으로 성공했고 많은 제자와 문하생을 두게 된 그는 여전히 자기 야유 속에 자신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임종을 맞이하기 2주일 전, 바쇼는 1694년 9월 26일 오사카에서 열린 하이쿠 모임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번 가을에는 왜 이리 늙는 것일까 구름 속의 새 이 길이여 가는 사람도 없이 가을 저무네   이 하이쿠들을 읊고 난 이틀 뒤, 9월 28부터 그는 앓아누웠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저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새, 자신이 50평생을 통해 그토록 갈망해 온 하이쿠의 길에는 가는 사람도 없는데, 가을은 저물어 가고 있다는 담담한 토로. 이처럼 그의 야유는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향해 있다. 결코 세상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그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그 자신을 가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동시대의 사회가치로부터 도피를 위해 은둔을 하고, 나아가서 여행을 떠남으로써 특정한 도시(에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바쇼. 그는 은둔과 여행을 통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고 스스로 자기 소외를 도모했다. 그는 끝내 '시대'에도 '계급'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나의 풍아는 하로동선, 즉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고 말하며, '무용(無用)의 미학'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예술적 순수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여기'의 시, 하이쿠 1980년대 중반, 일본 유학 중에 하이쿠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생소했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 피어있는 꽃과 지저귀는 새들과 저 산을 넘어가는 구름을 그토록 섬세하게 묘사하는 시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러한 시의 창작과 감상에 열중하는 일본인의 열정, 나아가서 하이쿠에 심취한 서양 사람들의 하이쿠 예찬이 더욱 놀라웠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다 만 것 같은 시, 이렇게 단순한 시, 이렇게 시대와 무관한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단 말인가. 일본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시인은 잠수함의 새와 같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잠수함에 산소가 모자라면 가장 먼저 알아채고 우는 새, 그 새의 울음이 배 안의 사람들을 일깨워야 하는 것처럼 시대의 공기 속에 산소가 모자랄 때 그 상황을 시로 읊어야 하는 것이 시인과 시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이쿠 속의 꽃과 나무는 너무나 생소할 것이다. 이데올로기 지향적이며 시와 시인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우리나라 시의 저 먼 대극점, 그곳에 하이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눈앞의 자연에 눈을 돌리게 하고, 일상의 한순간을 사진 찍듯이 언어로 읊어내서 다른 사람들과 그 순간을 공유하며 옆 사람과 대화하게 하는 시가 곧 하이쿠다. 17음절의 그 사소함과 섬세함이 빚어내는 자연 친화적인 시 세계 속에 거대한 시대 담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현세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바쇼와 같은 삶을 지향하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까. 평생 동안 시대와 계급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고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로서 '무용자(無用者)'의 삶을 살았던 바쇼의 문학은 뜻하지 않은 데서 빛을 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고전 교육은 여러 가지로 수난을 받았는데, 바쇼의 하이쿠와 기행문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문예적 교재'로 분류되어 그러한 시대적 수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패전 후 많은 고전 작품이 천황 이데올로기와의 관련 때문에 경원시 되었던 시기에도 여전히 바쇼의 하이쿠와 기행문은 교과서에 실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바쇼는 명실공히 근대 이후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일본의 '국민 공유의 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일본의 지식인과 대중으로부터 동시에 사랑받는 가장 대표적인 시인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연구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하이쿠 역사 500년, 지금 일본에서 하이쿠를 읊는 사람은 500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정통을 패러디하던 장난스러웠던 시 하이쿠는 이제 일본인의 시심(詩心)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형식으로 통한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의 담론에는 '참여'하지 않고,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포착하고 표현함으로써 서로의 일상을 공감하는 장으로서의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일본인의 일상을 노래하는 17음절의 시 하이쿠, 그 짧고 사소한 시가 '풍아'로 되기까지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시로 남아있기까지, 그 이면에는 일본어의 시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며 스스로 '무용자(無用者)'의 삶을 실천했던 바쇼가 있었다. 그가 생애 마지막 순간의 '꿈'속에서까지 황량한 벌판을 헤매면서 찾고자 했던 진정한 시의 세계에 대한 절실한 갈구 그리고 거기에 화답하려고 애썼던 많은 제자와 문하생과 대중이 이루어 낸 하이쿠의 역사를 보며, '무용(無用)의 용(用)'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하이쿠라는 정형시(5ㆍ7ㆍ5의 음수율)가 500년이나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문화는 전반적으로 형식을 존중하고 그 형식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호인층을 형성하는 성격이 있다. 하이쿠의 발전과 계승, 현재 하이쿠 향유 양상의 이면에는 이러한 일본 문화적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바쇼는 제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의 문학에서 보이는 고독한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 아닐까? 바쇼에게는 무사와 도시 상인 등 신분을 뛰어넘은 제자들이 많았는데, 바쇼가 이렇게 유명해지기까지는 그들의 역할이 컸다. 평생 개인 시집이나 시론집을 낸 적이 없는 바쇼이지만, 제자들이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다. 그는 인간을 싫어해서라기보다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둔을 했고, 속세에서 살았던 제자들은 바쇼와의 하이쿠 모임을 통해서 문예공동체로서의 집단을 형성했다. 3. 일본 천황이 읊은 하이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이쿠는 정통을 패러디하던 시, 서민의 시였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시의 형식에 따라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이 달랐는데, 원래 천황이나 귀족이 읊던 시는 5ㆍ7ㆍ5ㆍ7ㆍ7의 음수율에 의한 시 '와카(和歌)'였다. 근대에 들어서 이러한 전통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지금도 천황은 와카만을 창작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조를 왕부터 서민까지 모든 계층이 향유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바쇼의 하이쿠 기행』, 마츠오 바쇼 지음ㆍ김정례 역주, 바다출판사, 1998.     각주 1) 5ㆍ7ㆍ5의 음수율에 의한 정형시. 시 속에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인 기고(季語)가 들어 있어야 한다. 바쇼의 시대에는 하이쿠를 하이카이 또는 홋쿠라고 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하이쿠로 통용된다. 2) 원래는 시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품격 있는 예술을 뜻하게 되었다. 바쇼는 자신의 시를 이야기할 때 특히 이 말을 즐겨 썼다. 3) 무사계급 출신의 승려이며 일본 전국을 여행했던 시인으로 바쇼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바쇼의 동북 지방 여행기 『오쿠로 가는 작은 길』에는 사이교와 관련된 장소가 많이 나오는데, 이 여행이 사이교 500주기(1689)를 추모해서 기획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4) 여러 사람이 함께 읊는 렌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각 지방 영주들의 초대를 받아 일본 전국을 여행했다. 5) 화가이며 승려로 명나라에 유학하여 일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6) 일본 다도를 완성한 사람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다도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나중에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할복자살했다. 바쇼는 당시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읊던 하이쿠 모임이 추구하는 세계를 강구함에 있어 다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7) 1192년에서 1603년까지의 기간이다.   ///@@= 바쇼의 하이쿠 기행 1 : 오쿠로 가는 작은 길 마츠오 바쇼 | 바다출판사 |   김삿갓[김병연(金炳淵)]과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이 책을 통해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라든지, 그의 생애라든지 하는 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한국의 방랑시인인 김삿갓[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 떠오른다.      우선 두 사람을 상징하는 매개체가 우연하게도 “삿갓”으로 일치한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민중/서민 시인이며, 길 위를 돌아다니다가 길 위에서 죽었다는 점에서도 “평행이론”이 떠오를 만큼 유사성이 나타난다.      비록 내가 두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잘 모르기에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유사성을 밝혀내지는 못하지만, 이만하면 마츠오 바쇼[松尾芭蕉]를 일본의 김삿갓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쿠[奧], 여행의 끝나는 곳이자 동시에 또 다른 여행의 출발하는 곳      은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쿠[俳句]1) 시인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남긴 걸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자신의 형인 한자에몬[半左衛門]을 위로하기 위해 남긴 글이기에, 그의 생전에 제자들에게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2)      이런 저자의 창작 목적에도 불구하고 “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고전작품으로 꼽힌다. 또한 외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되어 있는 일본 고전 작품으로도 유명3)”하다는 사실은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보인다.      이 책은 기행문이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행문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이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귀착점으로 끝나는 일반 기행문과는 (달리) 그 전의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땅인 오가키[大垣]에서 다음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4)” 즉, 스미다가와 강[隅田川]에서 귀환하여 오가키[大垣]를 향해 떠났다가 다시 이세[伊勢] 신궁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일종의 순환적 기행이라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정철(鄭澈; 1536~1593)의 처럼 하나의 과정으로서 여행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런 목적 없이 발길 닫는 대로 돌아다닌 것은 아니다. “사이교 법사가 머물렀던 버드나무 아래에서”라는 소제목의 글에 실린      논배미 하나 [田一杖]      모 심고 떠나가는 [植て立去る]      버드나무로다 [柳かな]5)라는 하이쿠[俳句]에서 볼 수 있듯이 옛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도 하고,      흙으로 돌아간 옛 영웅의 흔적에서 무상함을 느끼기도 하는, 일종의 테마여행을 기행문의 형식으로 쓰면서 그의 하이쿠[俳句]를 곁들인 그런 글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이쿠[俳句], 인생의 압축      하이쿠[俳句] 한 구절만 놓고 보면, 마치 야구경기에서 첫 타자가 들어서서 투수의 첫 공을 노려보다가 미쳐 치지 못하고 스트라이크가 선언되면서 동시에 경기가 끝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허무함을 이어짓기를 통해 극복한다. 즉,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하이쿠[俳句]를 지어 다르면서도 같은 그런 미묘한 완성품을 만드는 셈이다. 여기에서 흔히 말하는 일본인들의 “화(和)”가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에 대해 일본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하이쿠[俳句]를 통해, 그들의 내면에 흐르는 사유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약 400개의 주석을 모두 책 뒤편에 몰아버리는 편집방식은 누구를 위한 발상이었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읽는 이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페이지마다 아래에 주석을 달 수 없다면, 차라리 초/중/고 문제집에 끼어진 답지처럼 별도 분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 1) 하이쿠[俳句]는 5.7.5의 3구 17자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인 키고[季語]와 구의 매듭을 짓는 말인 키레지[切れ字]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의 하이카이 혁신운동 이후를 하이쿠[俳句]로, 그 이전은 하이카이 렌가[俳諧連歌]로 각각 구분해야 하나 하이카이 렌가[俳諧連歌]의 첫 구를 하이쿠[俳句]로 칭하기도 한다. 또한 하이쿠[俳句]는 귀족들이나 승려들이 즐겼던 렌카[連歌]와는 달리 평민들이 즐긴 운문 문학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사설시조와 통하는 측면도 있다. 2) 마치오 바쇼[松尾芭蕉], , 김정례 옮김, (바다출판사, 2008), p. 224 3) 마치오 바쇼, 앞의 책, p. 228 4) 마치오 바쇼, 앞의 책, pp. 225~226 5) 마치오 바쇼, 앞의 책, p. 40                                    ///@@@\ 마츠오 바쇼(松尾 芭蕉, まつお ばしょう)   이름 松尾 芭蕉(まつお ばしょう) 생몰 칸에이 21년 ~ 겐로쿠 7년 10월 12일(1644년 ~ 1694년 11월 28일)   “방랑에 병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 바쇼가 사망 사흘 전에 쓴 하이쿠[1] 에도시대의 하이쿠 시인. 시성(俳聖)이라고까지 불리는 대단히 고명한 일본역사 최고의 하이쿠 시인의 한 사람이다. 1. 개요2. 바쇼 닌자설3.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바쇼4. 검용전설 야이바의 등장인물 바쇼는 배호(하이쿠 시인의 필명)이며 이름은 무네후사(宗房).[2] 1. 개요[편집] 이가우에노 출신으로 농업 집안(이라지만 사실 재야무사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에 아버지가 사망, 생활이 어려워져 지역 유지인 토도 가에 시종으로 들어간다.무네후사가 모시던 사람은 두 살 위인 토도 요시타다였는데 이 둘은 함께 하이쿠를 배웠다. 요시타다를 모시던 마츠오는 따르던 주군이 25살로 요절하자 갈 곳이 없어졌는데 무사를 그만두고 하이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젊은 나이에 키타무라 키긴에게 사사하고 하이쿠의 길에 들어섰다. 자주 여행을 다니며 노자라시 기행, 카시마 기행 등의 기행문을 남겼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카와이 소라와 함께 겐로쿠 2년(1689년)부터 반년간 토호쿠, 호쿠리쿠 지방을 돌며 기후현 오오가키까지 여행하고 남긴 '오쿠로 가는 작은 길(奥のほそ道, 오쿠노호소미치)'[3]이라는 기행문이 가장 유명하다. 최후도 여행 도중의 객사였다. 향년 51세. 쇼몬짓테츠(蕉門十哲)라고 불리는 타카라이 키카쿠, 핫토리 란세츠, 모리카와 쿄리쿠, 무카이 쿄라이, 카가미 시코우, 나이토 죠소우, 스기야마 산푸, 타치바나 호쿠시, 시다 야바, 오치 에츠진 등 특히 뛰어난 수제자 10명을 포함한 많은 제자를 두었다. 유명한 구절(중에 번역이 있는 것) 古池や蛙飛びこむ水の音(고요한 연못/개구리 뛰어드는/물소리 첨벙) 五月雨をあつめて早し最上川(오월 오란비/거두어모아 거센/모가미가와) 夏草や兵どもが夢の跡(여름 나절 풀/수많은 병사들이/꿈꾸던 자취)[4] 名月や池をめぐりて夜もすがら(밝은 달이여/정원을 산책하며/밤을 새누나) 閑さや岩にしみ入る蝉の声 (고요함이여/바위에 스며드는/매미의 울음) 2. 바쇼 닌자설[편집] 출신지가 닌자로 유명한 이가우에노[5]이고, 전문 하이쿠 시인들은 여러 곳을 여행하곤 해서 첩보활동을 맡게 되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또한 바쇼 자신도 여행 중에 여러 의문점을 남겨 실은 닌자가 아니었느냐는 설이 있다. 특히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기술이 여행 중 동행한 카와이 소라가 쓴 '소라 여행일기'와 80가지 이상에 달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근거가 되곤 한다. 여행출발일자가 '오쿠로 가는 작은 길'에서는 5월 16일인데 '소라 여행일기'에서는 5월 9일로 기록되어 있다. 쿠로바네마치에서 14박, 스카가와에서 7박을 하며 수많은 시구를 남겼지만 출발 시에 절찬했던 센다이번 내의 마츠시마에서는 단 1구도 남기지 않고 하루만 묵고 통과해버렸다.(이것은 센다이번의 내부를 조사할 기회를 찾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소라 여행일기'에선 바쇼가 센다이한의 군사요새라고 하는 즈이간지(瑞巌寺), 상업항구인 이시노마키 항을 집요하게 구경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소라는 막부에서 임무를 받고 그 위장으로 바쇼의 여행에 동행했다는 설도 있다) 하루 400km를 이동했다는 등 상식을 벗어난 여행속도 이런 설로부터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기행문이 아니라 센다이 다테번의 내부에 대한 보고서라는 견해도 있다.[6] 또 다른 이야기로는 핫토리 한조의 가명이 바로 마츠오 바쇼이고 그가 동요로 유명한 카고메카고메를 지었으며 그 노래가 말하는 속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숨은 진실(혹은 그가 숨긴 보물)이라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물론 후대의 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탓에 마츠오 바쇼는 현대의 창작물에서 닌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1891    조선시대 비운의 천재 녀류시인 - 허난설헌 댓글:  조회:4861  추천:0  2016-11-29
  허난설헌 동의어 경번(景樊), 난설헌(蘭雪軒), 초희(楚姬) 다른 표기 언어許蘭雪軒     시대 조선 출생일 1563년(명종 18) 사망일 1589년(선조 22) 유형 인물 직업 여류문인 대표작 난설헌집 성별 여 분야 문학/한문학 본관 양천(陽川) 요약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목차 접기 개설 생애와 활동사항 < >작품세계저서개설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엽(曄), 오빠는 봉(篈), 남동생은 균(筠)이다.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가문으로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했다. 엽이 첫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 김씨(江陵金氏)광철(光轍)의 딸과 혼인해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허난설헌은 문장가문에서 성장해 어릴 때에 오빠 봉과 동생 균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균에게 시를 가르쳤던 이달(李達)에게 한시 수업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安東) 김씨(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했으나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기녀들과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비극이 연속됐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한시로 슬픔을 달래며 불우하게 살다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작품세계 조선사회의 모순과 계속 닥쳐온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세상을 떠나 신선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은 시가 128수나 된다. 그만큼 신선사상에 심취했으며 삶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한문가사로는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저서 허난설헌의 작품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임종 때 그의 유언에 따라 모두 소각됐다고 전한다. 한편, 동생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었고 1606년(선조 39) 그녀가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한편,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인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해 일본 열도에서도 애송됐다. ///@@ 3불행을 자탄하면서 아깝게 요절한 비운의 천재여류시인 허난설헌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호이고 본명은 허초희(許楚姬)다. 강릉의 오문장가(五文章家)로 알려진 초당 허엽(草堂 許曄)의 딸이요, 악록 허성(岳麓 許筬), 하곡 허봉(荷谷 許篈)의 여동생이며, 홍길동전의 작가로 유명한 교산 허균(蛟山 許筠)의 누이이다. 사대부가에서 곱게 자랐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오라비들과 차별 없이 글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딸에게 번뜻한 이름을 붙여주고 잘 가르쳤던 것으로 보아 여성에게도 너그러웠던 비교적 열린 가풍의 집안이었던 것 같다. 초당두부로 유명한 초당마을에는 그의 아버지 초당선생과 그의 자녀 4남매가 살았던 생가 터가 있고 근래에 조성된 허난설헌공원이 있다. “강릉에 오거들랑 맛만 찾지 말고 멋도 찾으라.”는 말이 있다. 동해의 맑은 바닷물로 만든 전통두부만 찾지 말고 난설헌을 비롯한 오문장가의 문학의 멋도 즐기라는 말이다.                                강릉 초당마을 5문장가 생가와 기념관   유명한 인물에게는 으레 출생설화가 따르듯이 그에게도 출생설화가 있다. 강릉 경포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으로 좀 올라가면 사천해수욕장이 있는 사천면 사천진리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고 그 산 봉우리 숲속에 난설헌의 외할아버지가 살았던 집 애일당(愛日堂)터가 있다. 백두대간의 중심에 불끈 솟은 오대산 줄기 하나가 동해로 내려오다가 잦아지면서 뱀처럼 뻗어 나와 아직 용이 되지 못한 교룡(蛟龍)의 형국이라고 하는 교산(蛟山)이 있다. 그 교룡의 머리 부분에 애일당이 있었고 허균의 호 교산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애일당은 허균의 외조부 김광철(金光轍)이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명당자리인 이곳에 집을 짓고 동해에서의 해돋이를 바라보면서 애일당이라고 이름했다. 장차 용이 될 인물이 날 터라고 믿은 김광철은 명당의 정기를 빼앗길까 봐 사위와 딸이 찾아와도 각방을 쓰게 하였는데 그래도 어느 틈엔가 교룡의 정기는 강릉김씨에게서 양천허씨에게로 넘어가 태어난 외손이 난설헌이요 허균이라고 한다. 용이 되지 못한 교룡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그들 모두 용이 될 번했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강릉 사천의 애일당 터                 애일당 터의 교산시비     그가 조선시대의 여성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것은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가춘 현모양처로서도 아니고 율곡 같은 아들을 길러내서도 아니었다. 그는 여덟 살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시를 써서 세상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이름조차 내놓을 수 없던 시절에 난설헌이라는 이름으로 주옥같은 시를 끊임없이 써 나갔다. 아깝게도 27세에 죽으면서 모두 불태웠지만 그대로 두었으면 한 방 가득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동생 허균의 말이었다고 한다. 그이 시가(媤家)에 있던 시는 그의 유언대로 모두 불태워지고 친정에 있던 시만 일부가 남았으며, 그의 동생 허균이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되살려낸 시들을 합하여 한 권의 시집을 엮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성의 이름으로 시집을 낼 수 없었다. 후에 중국의 대학자 주지번(朱之蕃)이 명나라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고, 허균이 그를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릉 경포대를 안내하는 자리에서 누이 난설헌의 시집을 보였다.                      강릉 경포대의 주지번 친필 현판               난설헌 시비                               강릉 초당마을 허난설헌공원 5문장가 시비   주지번이 조선에 이런 여류시인이 있었느냐고 탄복을 하면서 그 시집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허난설헌시집’으로 발간했는데 베스트셀라가 되어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렸다고 한다. 중국에서 애송되던 그의 시는 일본으로 전해져18세기 초에 시집으로 발간되었으며 일본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토록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진 불세출의 여류시인이었지만 그의 일생은 불행했다. 그 자신이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 된 것’을 삼불행(三不幸)이라 하여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고 하듯이 여성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는 사회에서 온갖 제약 속에 자기능력, 자기포부를 한껏 발휘하지 못했고, 남편마저 탐탁지 않았으며, 며느리로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남편은 5대가 문과(文科)에 급제한 안동김씨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그 자신은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끝에 겨우 병과(丙科: 모두 33명을 뽑는데 성적순으로 甲科 3명, 乙科 7명, 丙科 23명으로 하여 최초 보직에 차별을 두었다.)로 합격하는 등 재능도 그렇고 사람도 장부답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남자였다면 단번에 장원급제를 하였을 것이고, 문명(文名) 높은 친정오라비들과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거 공부한다고, 또는 과거보러 간다고 가정에 등한히 하기도 하고, 당시 부유층 선비들에게 흔히 있었던 기방출입도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들보다 글 잘하는 며느리, 남편을 존경하여 하늘 같이 떠받들지 않는 며느리가 시부모의 눈에 꼽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 화목하지 못하고 시부모에게 밉보인 며느리의 시집살이가 편안할 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아버지가 외지에서 병으로 객사를 하더니 자기가 가장 따랐던 바로 위의 둘째 오빠 허봉이 귀양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한 객사를 했다. 그보다 먼저 자기의 아린 딸과 아들이 차례로 죽었다. 친정의 몰락, 자식들의 죽음이 병이 되었을까.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을 하더니 드디어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자기가 죽고 말았다. 천재는 단명하고 미인은 박명하다던가. 애석할 따름이다. 그는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가면서 자기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죽음을 예언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스며들고     碧海浸瑤海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었구나    靑鸞倚彩鸞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芙蓉三九朶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 차구나      紅墮月霜寒   구슬바다와 채색 난새는 모두 시선세계의 바다요 새다. 그 예언이 적중이라도 하듯 난설헌은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선경(仙境; 신선이 사는 세계)으로 떠났다. 이보다 앞서 딸을 잃고 다음해에 아들 희윤(喜胤)이를 잃었을 때 그 아픔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경기도 광주 지월리의 난설헌 묘    오빠 허봉이 쓴 난설헌 아들 희윤묘비       아들에게 곡한다. (哭子)    난설헌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는데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앞세웠구나          今年喪愛子 슬프디 슬픈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이 마주보고 솟아 있도다               雙墳相對起 백양나무엔 소슬한 바람이 부는데             蕭蕭白楊風 도깨비불 소나무 가래나무 사이에 밝구나   鬼火明松楸 지전을 사르며 너희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한 잔 술을 너희 무덤 앞에 붇는다             玄酒奠汝丘 너희 넋은 응당 오누이임을 알테니            應知弟兄魂 밤마다 서로 좇으며 어울려 놀겠지            夜夜相追遊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하나                         縱有服中孩 어찌 장성하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            安可冀長成 황대사를 읊조리고                                 浪吟黃臺詞 피눈물로 울음 삼키며 슬퍼한다                血泣悲呑聲 젊은 어머니 난설헌은 작년에 딸이 죽고, 올해 또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겪는다. 어린 자식들의 무덤이 마주 보고 있는 광릉 땅은 그에게 슬픔의 땅일 수밖에 없다. 그는 백양나무에 바람이 불고 소나무와 가래나무 사이에 희미한 도깨비불이 너울거리는 무덤가에 도착하여 자식들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지전을 사르며 혼을 부르고 망자를 위로하는 한 잔 술을 붓는다. 자식들의 혼백이 서로 어울려 노는 모습을 상상하고 다시 한 번 슬픔에 잠기면서 뱃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였지만 과연 이 아이는 탈 없이 잘 클 수 있을까 불안해하며 황대사(黃臺詞; 중국 당나라 황제 고종의 아들이 차례로 죽어간 것을 슬퍼한 시)의 고사를 떠올리며 자식을 앞세운 비통함과 회한을 이기지 못해 숨죽여 운다.                                               난설헌의 곡자 시비비운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雪軒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다가 옥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청란기채란)   푸른 난새 고운 난새 어울려 있네.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스물 일곱 송이 부용화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꽃 떨어지니 달빛만 차갑도다.   ☜ 부용(芙蓉/ 꽃말 : 섬세한 아름다움)      조선시대 비운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특별한 지병(持病)도 없었는데 스물일곱 살(27歲) 되던 해 3월, 목욕재계(沐浴齋戒)한 후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今年乃三九之數(금년내삼구지수) 금년이 바로 三九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금일상타홍) 오늘 서리에 붉은 꽃이 떨어지네.    라 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위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은 23세 때 꿈속에서 광상산(廣桑山/신선이 사는 곳)을 거닐고 깨어난 후 쓴 시라고 하는데 자신의 임종일(臨終日)을 예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에서 옥 바다 요해(瑤海)는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사는 북두계(北斗界)에 있는 바다로 요(瑤)는‘옥구슬이 잘랑거리는 의미’이니‘옥구슬 바다’라는 의미겠다. 즉 이승세계와 저승세계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란(靑鸞)과 채란(彩鸞)의 어울림도 같은 의미다.   삼구타(三九朶)는‘삼구의 꽃다발’이니‘삼구는 이십 칠’이라, 꽃송이 스물일곱 송이를 의미하므로 자신의 죽을 나이(27세)를 예언하고 있으니 신기하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조선 명종, 선조)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조선 연산군, 명종)보다 50여 년 후의 사람으로 두 사람 모두 강릉(江陵) 출생으로 보기 드문 여류 천재였다.   신사임당은 율곡(栗谷 李珥)이라는 걸출한 학자를 낳아 지금까지 세인의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지만 허난설헌은 그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27세로 요절(夭折)한 비운의 천재였다.      난설헌의 아버지 엽(曄)은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한 명문 양천허씨가문(陽川許氏家門) 출신으로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으로 강릉김씨(江陵金氏)와 결혼하였는데 봉(崶), 초희(楚姬), 균(筠) 세 자녀를 둔다.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자(字)는 경번(景樊), 호(號)가 난설헌(蘭雪軒)으로 강릉시 초당동(草堂洞)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인 당시 여자가 호(號)와 자(字)를 썼다는 것이 특이하다.    난설헌은 15세 되던 해 안동김씨 성립(誠立)과 결혼하여 두 남매를 낳았으나 어려서 돌림병으로 잃고 뱃속의 아이도 유산하여 자식 복이 없었는데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 녀자가 시(詩)를 쓴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시기(猜忌)와 무지(無知)에 끝없이 시달렸다.   거기다 오빠 봉(葑)이 유배(流配) 중 금강산에서 객사하고 동생 균(筠)마저 역모(逆謀)에 휘말려 귀양을 가는 등 불운이 계속되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자신이 쓴 시를 모두 불 태워 버리고 수물아홉으로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동생 균(筠)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와 즐겨 암송하던 누님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蘭雪軒集)’이라는 시집을 출간한다.    허씨 남매는 적출(嫡出)이 아니고 서출(庶出)이었기에 난설헌의 시집살이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시대 신분제도를 비판한  ‘ 홍길동전’도 그러한 배경에서 씌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균(筠)이  ‘난설헌집’을 중국 명나라에서 온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보여주자 크게 감동하여 중국으로 가져가   ‘許蘭雪軒集’을 중국에서 출간(1606)하여 크게 인기를 얻었고,   후일 일본의 분다이지로(文臺屋次郞)에 의하여 일본에서 출간(1711)되어 크게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중국 시인들은 누구나 품에 난설헌집을 품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중국의 어느 유명한 여류시인은  ‘아~! 나는 왜 스물 일곱에 죽지 못하는가... ’라고 한탄하였다고도 한다.   또 슬픈 일 중의 하나는 동생 허균(許筠)은 광해군 때 역모(逆謀)에 연루되어 저자거리에서 참수(斬首)되었다고 하니 천재 집안의 몰락이 너무도 안타깝다.    허난설헌의 시는 총 213수가 전한다고 하는데 이 중에 도교(道敎)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바탕으로 한 신선시(神仙詩)가 128수나 된다고 하니 현실세계를 뛰어 넘어   이상세계를 표방하는 신선사상이 당시 주변 정황과 맞물려 난설헌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오언고시(五言古詩) 15수, 칠언고시(七言古詩) 8수, 오언율시(五言律詩) 8수, 칠언율시(七言律詩) 13수, 오언절구(五言絶句) 24수, 칠언절구(七言絶句) 142수 등이 전한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것으로 채련곡(採蓮曲/연밥 따는 노래), 빈녀음(貧女吟/가난한 처녀의 노래), 규원(閨怨/규방에서 흘리는 원한의 눈물), 감우(感遇/어리석었네), 곡자(哭子/아들을 잃고 통곡함),   규정(閨情/여자의 정), 기부강사독서(寄夫江舍讀書/멀리서 공부하는 남편에게), 야야곡(夜夜曲/깊은 밤의 노래), 산람(山嵐/산 아지랑이), 춘우(春雨/봄비) 등이 있다.      난설헌의 생가가 있는 강릉시 초당동(경포대 호수 옆)은 현재「허균․허난설헌 기념관」과 기념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다.       哭子(곡자) 허난설헌(許蘭雪軒 )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춘우(春雨/봄비/五言絶句)   허난설헌(許蘭雪軒 )   春雨暗西池 (춘우암서지)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輕寒襲羅幕 (경한습라막) 찬바람이 장막 속에 스며들 제     愁依小屛風 (수의소병풍) 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薔頭杏花落  (장두행화락)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호정(湖亭/鏡浦湖 亭子에서/七言絶句) 교산(蛟山) 허균(許筠) 烟嵐交翠蕩湖光(연남교취탕호광) 연기 안개 푸른데 호수 빛 넘실거려 細踏秋花入竹房(세답추화입죽방) 가을 꽃 밟고서 죽방으로 들어가네. 頭白八年重到此(두백팔년중도차) 머리 희고 팔 년 만에 다시 와 보니 畵船無意載紅粧(화선무의재홍장) 그림배에 홍장 싣고 갈 뜻이 없구나.   애도시(哀悼詩) 교산(蛟山) 허균(許筠)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1890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멕시코시인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5784  추천:0  2016-11-29
옥타비오 파스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출생일 1914년 3월 31일 사망일 1998년 4월 19일 국적 멕시코 대표작 활과 리라, 흙의 자식들 외, 우리집에 온 파도, 멕시코의 세 얼굴 수상 1990년 노벨문학상 옥타비오 파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을 주제로 다수의 시와 수필을 남겼다. 평론가로서 문학 평론지를 창간·편집하고 시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목차 접기 대표작 ┗ 활과 리라 ┗ 흙의 자식들 외 ┗ 우리집에 온 파도 ┗ 멕시코의 세 얼굴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의 시인ㆍ작가ㆍ외교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가족이 멕시코 내란으로 파산했기 때문에 궁핍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이 높았고, 로마 가톨릭계 학교와 멕시코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글쓰기에 몰두했다. 19세 때인 1933년 첫 시집 『숲속의 달 Luna silvestre』을 출간했다.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에 스페인을 방문하여 공화주의자들의 대의명분에 강한 공감을 느끼고, 1937년에 스페인에서 출판된 〈그대의 뚜렷한 그림자 밑에서 외(外) Bajo tu clara sombra y otros poemas』에서 당시 경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로 인정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이때 접한 초현실주의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멕시코로 돌아온 후에는 〈탈레르 Taller〉(1939)와 〈엘 이호 프로디고 El hijo prodigo〉(1943)를 비롯한 여러 권의 중요한 문학 평론지를 창간ㆍ편집했으며, 1970년대에는 또 다른 문학 정치 평론지인 〈플루랄 Plural〉을 편집했다. 파스는 마르크스주의ㆍ초현실주의ㆍ실존주의ㆍ불교ㆍ힌두교에서 차례로 영향을 받았고, 원숙기의 시에서는 풍부한 초현실주의적 형상으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이었다. 1963년 ‘벨기에 국제 시 대상’, 1981년 ‘세르반테스상’, 199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시집으로 『통과 금지! No pasaran!』(1937),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1949), 『독수리냐 태양이냐? Aguila o sol?』(1951), 『태양의 돌 Piedra de sol』(1957)이 있다. 같은 시기에 수필과 문학 평론을 모은 산문집도 출판했는데, 영향력 있는 수필집 『고독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1950)는 멕시코의 특성과 역사, 문화를 분석한 책이다. 『활과 금조 El arco y la lira』(1956)와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는 동시대의 스페인계 중앙 아메리카의 시를 연구한 문학 평론집이다. 1990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옥타비오 파스' 옥타비오 파스는 1946년에 멕시코 외교관으로 들어가 1962~1968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재임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에 항의하여 1968년 인도대사직을 사임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1962년 이후에 출간한 시집으로 『백색 Blanco』(1968), 『동쪽 비탈 Ladera este』(1971),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 등이 있으며, 수필집 『접합과 이합 Conjunciones y disyunciones』(1970),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atico』(1974) 등을 발표했다.   대표작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고 성실성과 진정성으로 천착한 끝에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활과 리라』에 담았다. 잡지 「탕자」에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글을 발전시킨 것으로, 자신이 청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탐구해온 질문들이 실려 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은 아닌지,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쓰이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지,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한지 등에 대한 고민들이 드러나는 것. 그러나 시론서 『활과 리라』는 단순한 시 해설서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어보는 안목을 열어주는 길잡이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 파스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격동의 대륙 중남미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흙의 자식들 외 『활과 리라』에서 시작된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낭만주의에서부터 전위주의에까지 이르는 서양문학사를 일괄하여 시와 역사의 관계를 탐색한 그는 『흙의 자식들』을 거쳐, 세기말의 시의 위상을 점검한 『타자의 목소리』에 이르러 자신의 시론을 완결시켰다. 『흙의 자식들 외』는 낭만주의에서 전위주의에 이르는 서양문학사를 점검한 작가의 두 번째의 시론집이다. 우리집에 온 파도 원작 소설 『My Life with the Wave』를 그림책으로 구성한 『우리집에 온 파도』는 바닷가에서 만난 파도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소년의 이야기다. 가족들과 바다 여행을 처음 갔던 소년이 파도를 보고 마음이 끌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소년에게 바다를 떠난 한 파도가 다가온다. 소년은 파도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다. 야생의 바다를 떠나 문명의 도시에 온 파도는 소년과 즐거운 한 때를 함께 보내지만 파도를 길들이는 문제는 인간에게 아무래도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가족들은 파도를 바다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는다. 어린이와 가족들이 낯선 손님 파도를 맞아 어떻게 소통하는지 표현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긴박하고 흥미로운 스토리에 잘 녹여 놓았다. 흥미진진하고 기상천외한 줄거리 못지않게, 그림 작가 마크 뷰너의 역동적이고 밝은 그림은 웃음과 장난이 넘쳐난다.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환상적인 이야기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잘 살린 작품이다. 멕시코의 세 얼굴 멕시코인과 그들의 사회, 국가를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이다. 『멕시코의 세 얼굴』에서 파스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멕시코의 어제와 오늘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정히 그려낸다. 출간 후 멕시코에서만 1백만 권 이상 팔릴 정도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동시에 상당수의 멕시코인들로부터 비판적인 시선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가는 멕시코인과 라틴아메리카인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밝히는데, 책의 가장 근원적 주제인 고독과 인간 상호 간의 교감, 구원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 문제이기도 하다. 즉, 파스는 이 작품을 통해 영원히 남을 화두를 독자들에게 던진 셈이다. 또한 책에는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역사, 국가발전,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들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멕시코의 세 얼굴』은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좋은 디딤돌이 되어준다.  ///@@     옥타비오 파스 직업 작가, 시인, 외교관 국적 멕시코 활동기간 1931년-1965년 사조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수상내역 노벨 문학상 (1990년) 영향 받은 분야·인물[보이기] Gerardo Diego, Rabindranath Tagore, Juan Ramón Jiménez, Eugenio Montale, Sor Juana de la Cruz, D. H. Lawrence, Nathaniel Hawthorne, William Butler Yeats, Alfonso Reyes, Antonio Machado 영향을 준 분야·인물[보이기] Guillermo Sheridan, Giannina Braschi, Eric Whitacre, Carlos Fuentes, Eliot Weinberger, Ilan Stavans Monique Fong Wust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 ~ 1998년 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그는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텍사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 (1968년 작)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숨기기]  1 주요 작품 1.1 시집 1.2 수필집 2 외부 연결 여담[편집] 그는 일본의 하이쿠 시인인 마츠오 바쇼(1644~1694)를 매우 좋아해 1984년 아내 마리 호세와 같이 그의 암자를 방문하기도 하고, 바쇼의 하이쿠인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스페인어 번역을 맡을 정도로 대단한 바쇼의 팬이었다고 한다. 또 그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아 장자 사상에도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 중에서 호접몽에 대해서 다룬 것까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주요 작품[편집] 시집[편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 (1949년 작)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1951년 작)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 (1956년 작) 《일장석 (Piedra de sol)》 (1957년 작) 《도롱뇽 (Salamandra)》 (1962년 작) 《하양 (Blanco)》 (1968년 작)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1969년 작)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년 작) 수필집[편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년 작)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70년 작)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1974년 작)  ///@@2013년 대산문화 겨울호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 된다.” - 옥타비오 파스와의 만남   글 / 구광렬_시인, 소설가, 울산대학교 교수. 1956년생 시집 『슬프다 할 뻔했다』 『불맛』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밥벌레가 쓴 시』 『자해하는 원숭이』『텅 빈 거울』, 『하늘보다 높은 땅』『팽팽한 줄 위를 걷기』등, 장편소설『세뇨르 뭄』 『가위주먹』등, 기타저서『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체의 녹색노트』『바람의 아르테미시아』 등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_멕시코 시인. 1914~1998년 시집『언어 아래의 자유』『독수리인가? 태양인가?』『격렬한 계절』『태양의 돌』『불도마뱀』『『백지』『동쪽 저편』『허공의 아들들』『나무 속으로』등, 산문집 『고독의 미로』『활과 리라』『비평적 열정』『너릅나무에 열린 배』『원숭이 문법학자』『결합과 해체』등   구광렬: 1989년 7월 말경이었으니, 근 25만에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하는 셈입니다. 그것도 돌아가신 후에 말입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기억납니다. 나에 관해 박사논문을 쓴 양반이지요? 내 친구 마르킷 프랑크(Margit Frank)가 지도교수라 했고요.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인터뷰 했었죠?   구광렬: 당시 선생께서는 유력한 노벨문학상후보로 거론 되고 있었으며 제가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던 한국의 서울대학교에서 저에게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의뢰했었죠. 애석하게도 그 해 노벨상을 수상 못하셨지만 말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그 이듬해인 1990년 수상했지요. 기억나요. 두 권의 책을 나에게 준 것. 그중 한 권이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에 관한 책이었지요?   구광렬: 네, 맞습니다. 저의 은사이신 김현창 교수의 저서지요. 또 다른 책은 라는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저의 박사논문이었구요. 답례로 선생께서는 ‘라 부엘타(La Vuelta)' 잡지 두 권에다 친필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 시절이 좋았어요. ‘라 부엘타’ 잡지사를 운영하던 시절. 내 인생의, 내 시세계의 절정기였지요. 노벨상 수상 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시를 쓰질 못했어요. 저서도 겨우 에세이 집 두 서권 냈을 뿐이고…… 나이 탓(당시 76세)도 있었겠지만, 노벨상을 타고 보니 이래저래 바빠졌어요.   구광렬: 저 역시 ‘라 부엘타’ 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렙니다. 저의 풋풋했던 학창시절이 떠올라서이지요. 잡지사는 제가 살고 있던 ‘산헤로니모’ 거리와 불과 2km 정도 떨어져 있었거든요. 학교(멕시코국립대학교)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거의 매일 그곳을 지나야만 했어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비록 가상의 것이긴 하지만 지난 번 채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뭇 기대가 큽니다. 무엇보다 선생께서 이 세상 분이 아니시기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질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사실 1989년 당시에는 대시인 앞에서 주눅이 들어, 묻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묻지 못했거든요.   옥타비오 파스: 아이쿠, 이거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는걸요. 아주 날카롭게 나오실 것 같은데…….(웃음)   구광렬: 그렇게 말씀하시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정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데요.(웃음)   농담입니다. 부드럽게 나가겠습니다. 저도 부드러운 남자이고 싶거든요, 선생님처럼.   옥타비오 파스: 제가 부드러운 남자였던가요?(웃음)   구광렬: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저의 외숙부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저의 외숙부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부드러운 어른이셨구요.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의 비서였던 파띠(Patricia)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분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망설이지 않고 답하더군요. ‘simpatico’(정이 많은) 분이시라고.   자, 그럼 부드럽게 시작하겠습니다. 아주 여리고도 어린 옥타비오 파스로부터 시작할게요. 선생께서는 1914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조부께선 신문기자이자 정치가이셨고, 부친께선 변호사였으나 멕시코혁명 당시 싸파타(E. Zapata) 혁명군 축에 가담했었지요. 1920년 멕시코 정부가 싸파타와 그의 추종자들을 몰살시키려들자, 가족 분들 모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요. 그곳이 로스엔젤래스였던가요?   옥타비오 파스: 맞습니다. 로스엔젤래스……. 그 시절 에피소드 하나 말씀 드리죠. 여섯 살이 채 못 됐어요. 유치원 다닐 때였습니다. 점심시간이었지요. 숟가락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한 선생님이 지켜봤나 봐요. 왜 밥을 먹지 않나 하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스페인어로 숟가락(cuchara)을 외쳐댔죠. 그것도 큰 소리로…… 그 소리가 아마 미국 애들 귀에 거슬렸나 봅니다. 꽤 오랜 시간 싸웠어요. 그 뒤에도 사건 아닌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지요. 조국 멕시코에 관한 내 글들은 대부분 보호받지 못했던 미국 유년 시절과 관계가 있어요.   구광렬: 산문집인 도 그러합니까?   옥타비오 파스: 그 부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죠. 그 후 다시 멕시코로 왔지만 오히려 더 왕따를 당했습니다. 피부는 희고 눈은 파랗고 영어 악센트로 스페인어를 하니, 양놈이라 놀려대는 겁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이 마냥 괴롭고, 고독하지만은 않았어요.   구광렬: 내친김에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 문화, 문학에 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집안 친척, 특히 고모의 영향이 컸어요. 고모는 프랑스 매니아였지오. 그녀는 집에서 스페인어 대신 프랑스어를 했어요. 우리 집 서재에는 프랑스에 관한 책들로 가득 했고요. 프랑스어의 부드러운 연음과 굴절은 마치 음악을 듣는 양 착각에 빠져들게 했어요.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요. 그 후 프랑스어를 전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습니다. 특히 프랑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프랑스 유학시절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조안 니로(Joan Niro) 등 그쪽 젊은 예술가들과 파리 시내 카페에서 잘 어울렸어요. 하지만 초현실주의 시는 믿지 않았어요. 특히 자동기술법은 더욱 그랬고요. 단지 시적 혁명을 갈구했죠. 자유에 관한 사상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윤리나 정치 등의 자유가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자유…….   구광렬: 청년시절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생활에 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난 미국 생활을 꽤 오래 했어요. 1944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버몬트에 있는 Middlebury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틈틈이 그 고장 신문사에서 일했죠. 신문은 고속(高速)의 문학이라 할 수 있잖아요? 신문사 일은 시인인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줬어요. 또 다른 경험은 뉴욕에 있는 MGM사에서 영화 더빙을 하는 일이었어요. 영어를 스페인어로 말입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배우들의 입술 움직임을 파악해 스페인어 문장을 리드미컬하게 재생해내는 일. 정말 시인으로서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었어요. 전쟁이 막 끝난 후(2차 세계대전)였었기에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쳤어요. 물론 인종차별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선 박력이 있었어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시대였습니다. 그곳에서 미국 멋쟁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구요. 그들은 무척 개방적이었으며 정직했습니다.   구광렬: 그들 중, 한 사람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옥타비오 파스: 현대문명에 관한 한, 엘리엇(T.S. Eliot)은 젊은 시절의 나였습니다. 하지만 엄청 보수적이었던 그와는 달리 당시의 난 상당히 좌익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간화, 영혼의 황폐화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은 나를 매료시키고도 남았어요. 아시다시피 엘리엇은 역사를 시에 도입한 사람이잖아요. 그의 시들은 극히 주관적인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교육을 받은 나에게 청량제로 다가왔어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나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근사했습니다. 미국 시인들은 주관적인 것뿐만 아니라 범 우주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입체파 화가들이 말하는 입체적 영감 같은 엘리엇의 기술법 또한 흥미로운 것이었구요. 그는 현대 도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습니다. 1969년부터 1976년 사이에 써진 나의 연작시 에 엘리엇의 메아리에 관한 것이 들어있어요.   걷고 있건만 나아가지 않는다 이 도시에 둘러싸인 난 공기가 부족하다 몸뚱어리가 부족하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 회전(Vuelta) 중에서   구광렬: 이제부터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 노벨상 수상소감에서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해 언급하시던 도중에 ‘언어는 항상 작가의 의도보다 멀리 간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누구나 글을 쓸 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잘 파악하지 못 합니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가나 사회학자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죠. 저는 사실 언어통제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산문집 ‘고독의 미로’도 정말 고독한 시절에 썼지만 고독을 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요. 모두 저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환경 때문이었지요. 저에게 시는 항상 환경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시는 과학적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알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시 또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숨을 죽이고 정지한 부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기호입니다. 저는 이것을 회전하는 기호(signos en rotación)라고 부릅니다. 주체인 ‘我’와 객체인 ‘他’는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되고, 예술의 원초적 힘이 가해지는 순간 모든 타자성은 상실되고 맙니다.   구광렬: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한, 비트겐슈타인만큼이나 고뇌했던 시인이셨습니다. 적잖은 평자들이 선생을 가리켜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위의 시인이었노라 평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말씀 해주시죠.   옥타비오 파스: 젊은 시절 앙드레 브레통과의 만남 뒤 초현실주의에 빠지게 된 연유 역시 이러한 언어가 갖는 원초적 모호성을 극복하고자하는 저의 염원과 무관치 않습니다. 저의 시에서의 은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산치 않습니다. 오히려 의미의 해체와 가까우며, 침묵으로 인도하는 부호들의 만남에 불과합니다. 그 침묵 속에는 또 다른 낱말이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마저 변별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부호 또는 기호일 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저는 흔히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초현실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극도의 현실주의자내지 극사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가 소위 초현실주의자들이 애용한 자동기술법을 거부한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앙드레 브레통 등 저의 친구들이 현대의 이성주의내지 현실주의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노래하기를 주창하는 동안, 저는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책임 없는 현실도피라고 일축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특히 동양과의 해후 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 후(1960년 이후) 저는 지나친 이성주의와 현실주의에 의해 일그러진 서구문화를 강하게 비판해왔으며, 데카르트 이후 과학적 이성주의에만 기대온 서양의 현대문명에 대응해 강한 안티테제를 제시해왔습니다.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 한 생을 바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실재가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 말의 시초를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찾으려 했고요. 그것과 관련된 선생의 시 한 편을 낭송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그것을 꿈꿔야 한다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 피의 바다, 땅과 몸이 말해주는 걸 기억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도 아닌 교차로 모든 길들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빛은 물로 노래하고 물은 나무의 소리들로 노래하고 새벽에는 온갖 과실들이 하늘에 열리고 낮과 밤이 화해한 뒤 다시 잔잔한 강물이 되어 연인들처럼 애무하고 포옹하는…… 세월을 담은 도도한 강물처럼 인간의 계절은 또 그렇게 흘러가야만 한다 태초부터 영위해온 삶의 한 가운데로 시작과 그 끝 너머 저 심오한 그곳으로   (옥타비오 파스의 시, 깨어진 항아리 중에서)   옥타비오 파스: 저에게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됩니다. 독자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났을 때, 두 개체는 하나가 되고 제 3의 부호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시의 부호인 이미지 역시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것들과의 대립변증을 거쳐 새로운 합(synthese)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의 것도 독자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 일 수도 있고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단초를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구하고자 했구요.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의 특히 1960년 이후 작품들은 불교 등 동양의 종교, 철학, 사상 등을 상당부분 논하거나 설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도나 일본 등 동양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시면서 그곳의 문화나 역사 등을 연구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 외,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옥타비오 파스: 20세기 초 멕시코에 호세 후안 타블라다(José Juan Tablada)란 아주 특별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소위 멕시코 초기 모더니스트 작가로, 일본의 하이쿠나 연가를 멕시코 및 중남미에 제일 먼저 소개했지요. 젊은 시절 난 그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신선함 그 자체였어요. 사실 외교관이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습니다. 외교관이 되자마자 부임지로 신청한 나라들이 일본과 인도였으니까요. 바쇼의 선시나 다이세츄 스즈키의 선불교론 등은 나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구광렬: 그러나 선생의 작품에는 중국, 인도, 일본 등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한국은 그 삼국 사이에서 문화연결을 위한 가교역할을 한 아주 중요한 나라입니다. 특히 고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 문화,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 사상을 담고 있는 선생의 대표적인 산문집들 , , , 등에는 한국에 관한 내용이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옥타비오 파스: 생전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저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올림픽이 열렸다는 것과 분단국가란 것, 그리고 중남미국가들처럼 정치가 불안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한국문화가 서양세계에 소개되어 있질 않았어요. 특히 문학작품은 더욱 그랬습니다. 의도적으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한국에 관한 읽을거리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런가요?   구광렬: 작금은 선생의 생전시절과는 많이 다릅니다.   옥타비오 파스: 하긴, 내가 죽은 지 15년이 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저쪽 세상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구광렬: 맞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을 모르는 중남미 사람들은 없습니다. 자동차, 핸드폰, 텔레비전 등 중남미제국 도처에 한국산 물건들이 깔려있습니다. 대중문화면에서도 K. Pop을 비롯해 한류열풍이 불고 있구요. 하지만 문학작품 부문에서만은 여전합니다. 그만큼 번역이 안 되고 있는 탓이겠지요.   옥타비오 파스: 맞아요. 번역이 중요해요. 번역이 안 된 경우엔 그 나라 말을 공부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데,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구광렬: 멕시코유학시절 저는 멕시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소위 이민 백이라 불리는 가방에다 불교, 유교 등 동양의 철학 종교 사상에 관한 책들을 가득 싣고 와야만 했습니다. 선생의 시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서였지요. 신랄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서양시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뒤늦게 동양철학사상 책들을 뒤적이는, 그것도 서양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동양철학에 관한 공부를 제법 할 수 있었어요. 그 후 다시 선생의 시편들을 곰곰이 살펴봤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선생의 시에서 그리 심도 있는 동양 사상에 대한 사유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주역이라 하면 그래도 공자가 대나무 쪽을 엮어 만든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책이 아닙니까. 그 만큼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만큼 내용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하지만 주역을 응용해 썼다는 선생의 시편 를 들여다보면 음양에 해당하는 낱말들을 그저 좌우 양편에 늘어놓기만 한 느낌입니다. 1989년 출간하신 에 실린 ‘Ejemplo(본보기)’라는 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장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한 두 줄 베낀 정도에 불과해보입니다. 단지 장소적 배경이 뉴욕이라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동양철학이나 사상 종교에 지식이 짧은 서양독자들에게는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동양인 독자들에게는 그 시편들은 그저 무책임한 복사내지 표절작으로만 보입니다. 그 밖에도 선생의 여러 작품에서 그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특히 을 비롯한 1960년 이후 작품집에서 말이지요. 물론 선생의 시편들을 헤아려보는 혜안이 저에게 없거나, 아주 어두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옥타비오 파스: 부드러운 질문만 하시기로 했잖습니까? 결국 마각을 드러내시는군요.(웃음)   구광렬: (따라 웃으며) 이게 사후 인터뷰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사실 생전 인터뷰 때 시간이 없어서 질문을 못 드린 것 중 하나입니다. 한국독자 분들을 위해 허심탄회하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옥타비오 파스: (정색을 하며) 동양사상이 옷의 물감처럼 밴 저의 시편들 속에는 중국, 인도의 호방함과 일본의 예리함이 들어있지만, 왠지 그 셋을 어우를 원만성은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근데 사후에 알았어요. 이곳 저승에서………. 특히 생전에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일본의 Zen(禪)이 한국의 임제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아무튼 한국을 알지 못했던 게 크게 후회됩니다. 서양인이 동양, 특히 사상과 철학 책들을 섭렵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 면을 고려해서 내 졸작들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광렬: 역시 선생께서는 대인배이시며, 대시인이십니다. 그런 질문으로 난처하게 해드린 이 소인배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한국의 고故 김남주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들을 원서로 읽기 위해 옥중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습니다. 근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던 선생께서 한국에 관해, 한국 시인들에 관해, 김남주 선생의 네루다에 관한 열정의 반의 반 정도만 있었더라면, 아마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지도 모르지요.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신다면 한국어를 공부해보기를 추천해드립니다. 선생께서 전생을 통해 고민하셨던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문제의 해답을 한국어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국어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이니까요. 선생님, 잠시라도 천국에서의 평화스러운 심기를 흩으려 놓은 듯해 죄송합니다. 사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구광렬///@@태양의 돌"- 옥타비오 파스지음/ 청하 간       시집 은 시선집《활과 리라》와 《멕시코의 세 얼굴》의 저자 옥타비오 파스의 시선집이다. 참으로 어렵게 구했다. 그 만큼 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많은 시 애독자들이 옥타비오 파스를 찾는 결과이리라. 나는 저자의 도서들을 어렵게 구해서 읽은 만큼 많은 생각들로 뒤범벅이 되어 시를 읽고 쓰고 사유의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고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마다 나라가 안고 가는 시 세계와 취향 그리고 패턴의 방향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 것은 자신의 모국어로 씌어진 작품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민족어로 씌어지거나 번역 된 것들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흘륭한 문학작품을 감상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본의 유입으로 인하여 두 가지의 변수가 작용하게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첫째는 자본의 본산 서구나 유럽의 풍을 모방하여 나의 것 혹은 우리의 것을 무가치하게 여겨 버린다는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의 논란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예술 공간에서 호흡하며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충분히 문제가 있다. 두 번째로는 역시 인간성 상실의 경험이다. 이는 감정, 감동 그리고 이성이 종합적인 패턴을 그리면서 인간의 참된 행복이나 의미, 가치를 드러내야 마땅할 그 본분을 망각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의 선상에서 옥타비오 파스를 읽어나가면 가장 훌륭한 독서방법이자 시를 감상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역시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옥타비오 파스를 읽었다. 그 결과 한국의 시가 가장 맛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므로 인해서 깨닫게 된 참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다양한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적인 시어의 혁명에서 그 기원을 살펴야 한다. 신낭만파주의와 앙가쥬망 사이에서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문제에 천착, 형이상학적인 작품세계에 몰두하였던 그는 쉬르레알리즘과의 접촉 이후 언어의 해방에 주목하며, 비논리성이 지닌 시적인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옥타비오 파스에게 있어 시는 아담과 이브 이전의 말을 곧 창생하며 사물이었던 시절로 되돌려주는 작업이었다. 에덴동산의 전락 이후 말이 지칭하는 사물과 실제 사물과의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고 보는 그는 시작업이란 바로 이 간격을 메꾸기 위한 안타까운 노력이라고 본다. 이 노력 중의 하나로 그의 시어가 지향하는 것은 침묵이며, 침묵이 곧 실체가 된다는 시론을 유도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상상의 존재이며, 인간이 지닌 이성이라는 것도 상상의 형태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는 우리에게 문화적 혁명이 요청된다면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궤도 수정의 차원을 넘어서 상상력으로의 회귀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폭 넓은 관심과 실험 정신은 여러가지 형식의 판독을 가능하게 하며, 독자가 작품 구성이나 창작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한 시작시를 개발, 시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에 기여하며, 동양시의 이미지 사용법을 서구적인 것으로 비약, 환치시킨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한다."   1   새가 노래한다,노래한다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울대뿐.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이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일 뿐.     3     투명한 수정의 맑음은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의 전문       차갑고 날쌘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껍질을 벗긴다.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 생생한 상처⑴의 한가운데     -의 전문     ⑴ 이유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나의 실체, 나의 아픔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빛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 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것,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 있는 거짓⑴ 이숭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전문   ⑴사위어 갈 목숨이 활기 찬 과일로 거짓처럼 황홀하다.     이처럼 우리는 아시아존 그리고 서구의 작품 외에는 다른 비 서구권의 작품들을 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타국의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의 작품의 우수성과 순수성 그리고 적합성을 발견해는 훈련은 잊지 않아야 충분조건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옥타비오 파스의 작품을 대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좋았다라고 거듭 고백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선택이며 동시에 타자의 선택으로부터 것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글사랑 이충재///@@ Diez años sin Paz (옥타비오 파스가 떠난 10년[2008년도]) Los jóvenes escritores mexicanos analizan la figura del escritor a diez años de su muerte (멕시코 젊은 작가들이 옥타비오 파스 1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의 삶을 재조명하였다) LUIS PABLO BEAUREGARD - Madrid - 19/04/2008   Se cumple una década de la muerte del poeta y Premio Nobel de literatura, Octavio Paz. Los jóvenes escritores mexicanos hablan sobre este caudillo cultural. (노벨 문학상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죽은지 10년이 지났다. 멕시코 젊은 작가들이 이 문화의 거장에 대해 이야기 한다) El poeta en una fotografía de su juventud. (젊은 시절 시인의 모습) GOYENCHEA - 2008-04-18   El escritor ingresó al Servicio Exterior mexicano después de la Segunda Guerra Mundial. Tras una breve estancia en Nueva York, Paz fue destacado en París en 1945. Allí escribió 'El Laberinto de la Soledad', una de sus obras más importantes.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인은 멕시코 해외공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뉴욕에 잠시 머문 뒤, 파스는 1945년 파리에서 명성을 날렸다. 거기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고독의 미로'를 썼다). ANTONIO GÁLVEZ - 2008-04-18   Eterno polemista (영원한 논객) De izquierda a derecha, el Premio Nobel de literatura, Gabriel García Márquez, el artista José Luis Cuevas y Octavio Paz. El intelectual mexicano mantuvo diversas polémicas ideológicas con escritores y pensadores de su generación. (왼쪽부터 오른 쪽으로, 노벨 문학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화가 호세 루이스 쿠에바스 그리고 옥타비오 파스. 멕시코 지성인은 당대의 작가들과 사상가들과 함께  수많은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였다). DAISY ASCHER - 2008-04-18   Premio Nobel de Literatura, 1990 (1990년 노벨 문학상) El jurado del galardón destacó la versatilidad de la obra de Paz. En su discurso de presentación, su poema 'Piedra de Sol' fue citado como una "magnífica" pieza surrealista. Los temas de su poesía transitaron por el budismo, el arte moderno, el erotismo y la naturaleza. (스웨덴 한림원은 파스 작품의 다양성을 높이 평가했다. 수여식 연설에서 그의 시 '태양의 돌'이 "위대한"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인용되었다. 그의 시는 불교, 현대 예술, 에로티즘과 자연 등 다양한 테마를 아우르고 있다. EFE - 2008-04-18   Pensamiento escrito (사상) Uno de sus ensayos más celebrados es 'Las Trampas de la Fe', una biografía crítica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 una monja mexicana del siglo XVII, además de escritora y poeta. (그의 수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인 '믿음의 덫'은 17세기 멕시코 수녀이자 작가, 시인으로도  작품활동을 했던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의 자서전이다). 2008-04-18   19 de abril de 1998 (1998년 4월 19일) El anuncio de su muerte, hecho por el presidente Ernesto Zedillo, conmocionó a México. Se declaró un luto nacional y el Palacio de Bellas Artes, en el centro de la Ciudad de México, fue el lugar donde se instaló la capilla ardiente del poeta.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이 그의 죽음을 공포하자 멕시코는 슬픔에 잠겼다. 장례식은 멕시코 시티 시내에 중심부에 있는   베야스 아르테스 궁전에서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REUTERS - 2008-04-18   ///@@@@\새 천년에 되돌아보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학 김  은  중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 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옥타비오 파스 I. 시인의 편력―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그의 역사적 실존 속에서 파스는 무엇보다 시인이기를 원했다. 끊임없는 편력을 통하여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썼고, 전체를 바라보는 형안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식인의 임무를 치열하게 수행했지만, 그는 언제나 시인이기를 원했다. 일관되게 시인이기를 바랐던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새로운 천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희망과 부정하기 어려운 위기가 복합되어 있는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이제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나 그가 지나왔던 사유의 행로를 더듬어가며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편력에 있어서 옥타비오 파스는 ‘보편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많지 않은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80년대에 들어와 스페인어 문학권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르반테스상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9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경력, 그리고 멕시코의 뿌리에서 자라나 중남미의 줄기로 성장하고 세계적인 꽃을 피운 그의 문학적 편력을 살펴보면 이러한 단정은 수긍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시인에 대한 진정한 인정은 상을 수여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행사가 아니며 “소수의 좋은 독자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는 데 그는 자신의 시를 “거대한 소수의 독자에게” 바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보편성’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구호가 되었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말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탈근대적인 상황에서 파스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가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재직하면서 썼던 책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의 결론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그의 직관적이고 과감한 선언이다. 그의 선언은 “오늘날 중남미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全)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1) 전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자생적인 문화의 뿌리를 갖는 모든 민족주의는, 만일 그것이 편협한 우상화가 아니라면, 최종적으로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탐구의 대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제 한 문화적 집단이나 한 국가가 당면한 위기와 기회는 인류 전체의 위기이며 기회라는 의미다. 사라져버린 유위(有爲)의 폐허 앞에서 발레리나 엘리엇이 노래했던 문명에 대한 우울한 반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내일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  제국이나 문명이 아니라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제 모든 문화 유형론은 보편 인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파스의 보편성에 있어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서구의 어떤 시인보다도 동양적 세계관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The Meeting of East and West)이라는 책에서 노드롭(F. S. C. Northrop)은 현대 세계의 중요한 네 가지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 동양과 서양의 관계 증진이며, 둘째, 미국 문화와 중남미 문화의 동시적 등장이고, 셋째,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산주의적 가치의 동등한 옹호이며, 마지막으로 중세적 가치와 근대적의 가치 사이의 진정한 화해를 들고 있다. 그 중에서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진실성과 성실함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금세기에 들어와 동양적 세계관이 서구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수없이 많으며 동양과 서양의 화해적 만남은 일반적인 조류가 되고 있다.2)     1952년에 인도와 일본을 처음 방문하여 거의 일 년간 머물렀던 파스는 1962년에는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부임하여 약 6년 동안 그 곳에 살았다. 이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코르시카 섬 출신의 마리-조 트라미니(Marie-Joe Trimini)를 만나 ‘님’(Nim) 나무 아래서 결혼한 일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파스는 인도가 자신에게 다른 문명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고,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회상한다. 예일대학의 교수였던 마누엘 두란(Manuel Durán)이 말한 것처럼 언젠가 파스에 대한 훌륭한 전기가 쓰여진다면 그의 삶과 문학에 있어서 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로 강조될 것이다.3) 슈펭글러가 지적한 것처럼 다른 문화에 대한 해석이 “정교한 오해의 기술”이라는 한계를 가질지라도4),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파스의 해석학적 접근 방법은 결코 이국적 취향에서 비롯된 얄팍하고 현혹적인 비전에 그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점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불교에서 우리의 전통과 다른 말을 찾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확인하려는 것이다. 서양은 그들 스스로 그리고 자신들의 지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으로 동양이 이미 이천 년 전에 발견한 것과 유사한 증거를 이제 막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새로운 행위는 동양적 교의에 대한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서구 역사의 편력의 결과이다. 어떤 진리도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세 명의 사상가―비트겐쉬타인,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의 책에서 불교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사유는 동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들 서로간에도 상이한 경향성을 보여주며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언어에 대한 것이었으며 모두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 결론은 모든 말은 침묵으로 용해된다는 것이다.5)     헨리 제임스나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보르헤스의 비평이 서구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의 깊게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나 탄트리즘에 대한 파스의 언급도 전문가들 사이에 흥미 있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지적 명철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어떤 진리도 개념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자신의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파스의 말은 문화적 상대성을 통한 진리로의 접근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원칙이 명철한 사고와 계몽적 지성임을 보여주는 언급이다. 많은 평자들이 파스의 글을 로고스중심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의 계몽적 지성에 대한 옹호는 로고스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섣부른 신비주의나 무질서로의 퇴행을 비판하는 작업의 일환일 뿐이다. 이성의 편협성을 견제하는 힘은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신비가 아니라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의 성숙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스의 관점은 근대적 이성의 명철함과 계몽성에 대한 옹호와 더불어 그가 줄곧 개체적 성찰을 이야기하는 글 속에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두 개의 축은 명철한 비판과 개체적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II.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근대시 II-1. 비판 위에 세워진 근대성     파스의 글이 겨냥하는 곳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험의 애매한 부분이다. 그러한 애매한 부분에 대한 누락이나 신비화로 인해서 인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러왔다. 그리고 그가 인정하는 그의 문학의 뿌리는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의 역사적 배경은 근대성이므로 결국 그의 인식의 뿌리는 근대적 인간의 조명에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낭만주의는 문학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도덕이고 에로티시즘이고 정치였다. 근대를 성립시킨 것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었으므로 낭만주의가 표방하는 것이 종교는 아니었지만 단순한 미학이나 철학을 넘어서서 사유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투쟁하며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방법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민중들에 의하여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헤겔은 몇몇의 친구들과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 헤겔이 이해한 불란서 혁명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신대륙 발견과 과학 혁명,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과 계몽사상 등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사건들의 마지막 국면으로 비로소 인간 역사의 보편론적 인식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간 역사의 보편적 인식이란 바로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가? 인간은 군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군주에게 신권을 부여한 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인들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한 근대의 자유의 개념은 전근대적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전체와의 교감이라는 부분을 희생시킨 값비싼 대가였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는 근대성의 소산이면서 근대성에 반기를 들어야 했다. 근대성과 더불어 탄생했으면서도 (근대성에) 반항하는 낭만주의는 (근대의) 비판적 이성을 비판하며 역사의 직선적 시간을 반대하고 역사 이전의 근원적 시간을 옹호하였으며, 유토피아가 내세우는 미래 시간을 비판하고 열정, 사랑 그리고 혈기의 현재적 시간을 지지하였다. 낭만주의는 비판적이며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이성으로 인식되었던 근대성에 대한 중대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 부정, 즉 근대성의 영역 안에서의 부정이었다. 오직 비판의 시대만이 그런 식의 부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6)     파스는 근대성을 성립시킨 가장 핵심적 요소는 비판(crítica)이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역시 이러한 근대의 비판 개념을 무시하고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역사의 중심에 등장시킨 것이며 비판을 통하여 인류는 비로소 근대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가 가졌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운명을 인지하지 못한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역설적 출생증명이었다. 모르고 저지른 일에 대한 참회와 뉘우침이 아니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이 낭만주의의 운명이었다. 근대를 탄생시킨 비판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판 역시 또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II-2. 사유의 이가적(二價的) 대비극: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그렇다면 근대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는 낭만주의가 이해하는 근대적 인간 이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근대적 자유의 획득의 대가로 상실한 전체와의 교감이란 무엇인가? 낭만주의는 거듭해서 근대성에 거역하기 위해서만 근대성과 동거하며 근대성에 융합한다. 그러한 거역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만 언제나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그 두 가지 방법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이다. 내가 이해하는 아날로지란 우주를 상응의 체계로 보는 비전이며 또한 언어를 우주의 복제(doble)로 보는 비전이다.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전통으로, 문예 부흥기의 신플라톤학파에 의하여 재정비되어 16~17세기의 다양한 비의적(秘義的) 흐름에 전달되었고 18세기의 철학적이고 방탕한 분파들에 자양분을 공급한 다음 낭만주의자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로 이어졌다. 비록 지하에 숨어 있기는 했지만 아날로지는 초기 낭만주의 시인들에서부터 예이츠와 릴케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근대시의 주된 전통이었다. 우주적 상응의 비전과 동시에 아이러니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아날로지에 대해 적의를 품은 쌍둥이 자매이다. 아이러니는 아날로지로 엮어진 그물에 생긴 구멍이며 상응을 저지하는 예외이다. 만일 아날로지가 이것과 저것,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활짝 펼쳐진 부챗살이라면, 아이러니는 이러한 상응의 부챗살을 찢어 놓는다. 아이러니는 상응이 빚어내는 화음을 깨고 소음으로 만드는 불협화음이다. 아이러니는 예외, 불규칙함 혹은 보들레르가 말했던 것처럼 기이함(lo bizarro) 등의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갖는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의 이름은 죽음―중대한 우연―이다.7)     파스가 파악하는 근대시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이중의 원리에 의하여 규율되고 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적 명철한 비판과 개체의 성찰이라는 두 개의 축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의 원리가 동양의 음양의 원리를 상기시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56년에 발표한 자신의 시론집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에서 파스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인들에게는 음과 양이다. 아스테카인들에게는 사박자 리듬이며 히브리인들에게는 이원적(dual) 리듬이다. 그리스인들은 우주를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으로 파악했다. 서구의 근대 문명은 삼박자 리듬으로 충만되어 있다”라고 말한다.8)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중심으로 언어와 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Claude 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과 서구 기독교 문명, 인도 문명 그리고 중국 문명에 대한 비교 문명론을 논하고 있는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에서는 이러한 리듬의 가장 보편적 형태는 이박자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원성, 즉 이가적 사유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문명들을 구별짓게 하는 것은 이 기본 짝을 결합하는 방법―삼가적, 사가적, 순환 구조 등―이다.9)     서구의 근대성은 삼박자를 역사의 기본 리듬으로 생각했으며 이러한 삼박자의 리듬이 의지하고 있는 시간관은 묵시록적 시간관의 단선이며 직선이다. 근대성을 두 세기 이상 경험한 현시점에서 이러한 시간 개념은 오류이며 근대성의 “3박자 사관의 오류는 리듬 구조의 원초성과 가치 구조의 인위성을 혼동한데 있다.”10) 이러한 3박자 사관이 갖는 인위론적 가치 조작의 토대는 희랍과 히브리의 이박자 사관인데 이것이 음양의 이박자와 다른 것은 그들의 이가적 사유는 상대적(相對的)이고 상극적(相克的) 실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극을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실체로 이해할 때 이러한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제3의 실체가 따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서양은 존재와 비존재(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그었다.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태초의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낸 최초의 구분이 서양적 사유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개념 위에 ‘확실하고 분명한 관념들’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서양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이러한 관념의 건축물은 그런 원리를 통하지 않고 존재를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불법적인 것으로 처단했다. (...) 서양의 형이상학이 마침내 유아론(唯我論)에 닻을 내리고 만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유아론을 깨기 위해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의 시도가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견고한 변증법의 유리성은 결국 거울의 미궁임이 드러났다. 훗설은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고 “사물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훗설의 관념론 역시 유아론으로 끝났다. (...) 서양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즉 이중적 의미의 탈선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서양은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11)     근대성의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낭만주의는 생성론적 이가를 옹호했다. 파스에 의하면 서구가 새로이 시작하는 방법은 바로 생성적 이가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가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를 뜻하며, 생성적이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역동적이며 상대적(相待的) 관계를 뜻한다. 아날로지는 총체를 규율하는 원리이며 아이러니는 개체로서의 근대적 인간을 규율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사유의 이가적 대비극은 대비극에 놓이는 개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대비극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즉, 상대(對)적이고 상극(克)적이냐 아니면 상대(待)적이고 상보(補)적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파스는 이런 생성적이고 역동적인 이가적 원리에 대해서 대단히 일찍 깨달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1942)에서 발표한 「고독의 시와 참여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라는 글에서부터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결합과 해체』에서는 언어의 원리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성 혹은 유사성이다. 지나친 대립성은 관계를 형성하는 술어들 중의 하나를 제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지나친 유사성 역시 관계를 망가뜨린다. 그러므로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과장된 유사성이나 과장된 대립성에 의해서 언제나 위협받고 있다. 술어를 구성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우세하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불균형―억압 혹은 이완―을 초래하게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양자 사이의 완벽한 동등함은 중립 상태를 유발하고 결국은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이상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술어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는 첫째, 양자 사이의 미세한 힘의 불균형을 필요로 하며 둘째, 서로간에 상대적인 자율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가 승화(문화)의 원천이며 자발성(창조)을 가지고 문화를 개간해 가는 가능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한된 상대적 자율성이 곧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술어 사이의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움직임과 정지 사이의 역동성이 문화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생명에 형태를 부여한다.12)     이러한 이가적 대비극은 근대적 비판과 비판에 의하여 추방당한 종교적 총체성에도 적용된다. 비판은 총체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총체성을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비판 속에는 총체성이 들어 있고, 총체라는 개념은 비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생-존 페르스의 『아나바시스』에서 불란서의 모더니즘을 발견하고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영, 미의 모더니즘을 발견한 (양자의 모더니즘은 중남미의 모데르니스모와 다르며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위주의라고 함이 더 적당하다) 파스는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던 총체적 비전을 ‘기독교적’ 신의 개념이 탈색된 자연의 신성에서 찾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가치가 기독교적인 사회에서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파스가 인식한 자연은 자연스러움, 즉 “스스로 그러함”이다. “스스로 그러한 실재”, 즉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를 받쳐주며 살찌우는 동시에 삼켜버리는 실재란 그것을 담으려는 상징적 체계보다 더 풍요롭고, 더 역동적이며, 더 생생한 무엇이다. “스스로 그러함”이 가지는 풍요롭고 거의 공격성에 가까운 자발성을 인간의 관념적 완고함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의 가장 매혹적인 특성인 자연스러움을 훼손시킨다. 만질 수 없는 스스로 그러한 생생한 실재를 대하는 인간의 본래적인 반응은 놀라움이며, 놀라움은 그러한 실재를 신성화시키고 매혹 혹은 공포의 감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와의 합일의 상태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예찬의 행위의 뿌리는 사랑이며 사랑이란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고 동시에 자신을 잊고 “타자” 속에 존재를 용해시키고 합일하려는 열망이다. 파스는 22살의 젊은 나이에 쓴 시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모든 목소리들이 불타오르고 입술들이 재가 된다. 가장 높은 꽃봉오리에 밤이 멈추어 있다. 이제 아무도 너의 이름을 모른다. 비밀스러운 너의 기운이 부동의 바다 같은 정지된 밤과 별을 찬란하게 성숙시킨다.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입을 다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이글거리는 목소리 앞에.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고요하다. 이름도 없이, 말을 벗어버린 밤 속의 그대여.13)     파스가 노래하는 사랑에는 개체적 존속을 부추기는 본능(Eros)과 죽음의 본능(Tanatos), 즉 영혼의 중력이 이끄는 상실의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모순적 인간을 구성하는 양면이며 이것 역시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이가적 사유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II-3. 인간의 본성과 글의 본성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 그리고 기타의 주제들에 대해 쓰여진 30여권이 넘는 파스의 평론집들과 수많은 시작품들은 상반된 영역을 관통하여 서로의 힘을 견제하는 거대한 자력장(磁力場)을 형성한다. 그 자력장의 한 극은 명철한 근대적 비판에 의해서 형성되는 기호들의 단절적 형상이며 다른 한 극은 망아적(忘我的) 참여이다. 이 말을 쉽게 하자면 한 극은 비평이요, 다른 한 극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시의 뿌리를 낭만주의에 두고 있는 파스가 파악하고 있는 근대시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언어에 대한 비판은 곧 바로 현실에 대한 가장 과격하고 통렬한 형태의 비판이 된다. 근대시는 시이며 동시에 시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다.     1974년에 옥타비오 파스는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과 『문법적 원숭이』(El mono gramático)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두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출간하였다. 『흙의 자식들』은 스페인어로 출간되기 이전에 영어 번역본이 먼저 나왔고, 『문법적 원숭이』는 불어로 먼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흙의 자식들』은 서구의 시와 정치 그리고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문법적 원숭이』는 힌두교 문명의 신성에 대한 글이다. 전자는 비평적 담론이며, 후자는 산문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매우 피상적인 것이며 이 두 책은 깊숙한 상응의 관계에 있다. 양자의 저술을 자극한 근간은 언어와 의사소통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변증법적 투쟁이다. 즉 한쪽 극에는 자의적이지만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불연속적인 표상으로서의 언어가 있고, 또 다른 한 극에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수행하는 의사소통이 있다. 그리고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로부터 글(시)이(가) 탄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호들이 또 하나의 기호인 인간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며 동시에 하나의 기호인 인간이 기호들―언어―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다.14)     글의 본성에 관한 파스의 위의 언급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기호들의 순환―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의 방향 전환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이며 이러한 순환의 중심축으로서의 의문부호(의미한다는 것)이다. 파스가 보는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의 관계의 역사”이다. 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 그리고 다시 기호들/언어에서 기호/인간으로의 순환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인데, 여기서 사유는 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가 말보다 먼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소쉬르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란 자의적이고 서로간에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언어를 사물의 세계(자연)와 의사소통시키는 것이 인간이라는 기호가 던지는 질문이다. 자연에는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인간이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식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다.  파스에게 있어 이러한 글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는 곧 인간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프톨로메우스에게 바치는 시 「親交」(Hermandad)에서 파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찰나를 사는 인간이고 밤은 거대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거기 별들이 글을  쓴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건 나 역시 글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풀어쓴다.15) II-4. 근대적 자아의 편력     플로베르는 “예술가가 만드는 모든 것은 진실하다”고 말했는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혹은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인간에 있었다. 데카르트 이래로 적어도 서구의 전통에 있어서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성적 자아였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이 역사의 주체로 들어서면서 아날로지적 우주관은 단절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말과 사물 사이에 존재했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제 말은 사물들의 진정한 실재를 표상하지 않으며 사물들은 투명성을 잃어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중세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알레고리의 형식은 빛을 잃고 근대 세계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근대 소설의 효시로 꼽는 이유도 말과 사물의 의사불통이 가져온 선택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의 말을 들어보자. 사물과 말 사이의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양자 택일이었다. 돈키호테가 미치지 않았다면 세상이 미친 것이며, 돈키호테의 언어가 잠꼬대라면 그는 세상에서 추방되어야만 한다. (...) 근대 세계는 두 번 째의 해결을 택했고 그 결과 돈키호테는 광기에서 회복되어 시골 양반 알론소 키하노의 현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다. 세상이 비실재를 표상하는 언어의 전형인 돈키호테를 추방했을 때 우리가 상상력, 시, 신성한 언어, 다른 세상의 목소리로 부르던 것들도 함께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비일관성, 소외, 광기 등의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16)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적 주체의 등장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상응을 단절시킨 것인데, 이러한 단절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의 상응도 무너뜨렸다. 파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밀도 있게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시와 종교는 같은 샘에서 솟아 나왔으며 그것들의 기능은 인간을 변화시켜 본래면목을 보게 하는 것이다. 파스의 말은 달리 설명하면, 시적 증언은 우리에게 이 세계 안에 있는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이면서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감각들은, 그들의 기능을 잃지 않고, 상상력의 조력자가 되어 우리에게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듣게 하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파스는 “인간의 본래적 행위는 시이며 종교들은 시적 언어의 법전화이다. 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 텍스트들―베다, 성경 혹은 코란―에는 본래 말의 계시가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서구의 모든 문학 작품의 위대한 법전이라는 윌리암 블레이크의 언급과 인생의 말년에 『위대한 법전(Great Code)』이라는 책을 쓴 노드롭 프라이의 의도에서도 공감대를 찾을 수 있다. 블레이크가 그랬던 것처럼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도는 종교를, 더 정확하게는 종교적 신성함을 시적인 관점에서 끌어안는 것이다. 시의 관점에서 바라본 신성함의 경험을 파스는 다시 이렇게 설명한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17)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이때 “타자성”이란 유한하며 변화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타자화될 때 비로소 인간은 실현되고 충족된다. 타자화될 때 나와 타자가 분리되기 이전의 본래적 존재를 회복하는 것이다. “본래 일체 중생이 부처였는데 망상에 사로잡혀 그를 잊었으니 딱하다. 내가 방편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본래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는 석가모니의 사자후와 동일한 맥락이다. 그런데 여기서 파스가 강조하는 것은 망상으로 중생됨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태어남의 원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됨의 원초적 조건, 즉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타자화의 욕구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합일을 향한 열망과 개체적 소유의 욕구, 존속 본능과 상실 본능 사이의 불균형 상태에서 유발되며 이는 창조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무한성의 신 앞에서 결핍으로 인식되는데 바로 이 결핍이 예술적 창조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멕시코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을 겸하고 있는 후안 가르시아 폰세는 이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에 두 개의 기본적인 흐름이 나란히 존재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평행하는 두 개의 흐름 안에서 시인은 작품을 창조하고 자신을 세워 나가며 그것을 운명으로 시인한다. 하나의 흐름은 인간의 삶에서 타락과 은총의 부재를 아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뿌리 뽑힘의 감정, 세상에서 떨어져 나옴 그리고 본래의 순진함을 상실한데서 오는 소외의 느낌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은, 파스가 이러한 타락의 인식에 맞서는 자세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되는 것인데, 예술적 창조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소외되어 있는 세계를 언어의 힘을 빌어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 정렬하여 우리와 화해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흐름은 전자에서 비롯되는데 왜냐하면 타락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파스는 결코 기독교적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어디에도 잃어버린 신앙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지 않고 그러한 신앙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타락이란 본래 가지고 있었으나 빼앗겨버린 재능이 말소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총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서 본래 부재한 것이다. 인간은 혼자이며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이기 때문이다.18)     파스는 종교적 신성(함)을 언어적 창조를 통하여 껴안으려 한다. 파스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언어의 전능함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을 철저히 수긍하기 때문이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노자 도덕경 1장을 인용할 만큼 실재의 스스로 그러함과 언어의 한계성을 잘 알고 있다. 언어와 생생한 실재(道)의 관계에 대한 파스의 인식은 이중적이다. 한 쪽 극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 극에는 오로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는 것이다. 고로 언어에 대한 파스의 관심은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말을 낚는 그물은 말로 만들어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파스에게 언어는 초월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나 이 때의 초월은 “이데아적이거나 하늘나라에로의 초월이 아니라 거꾸로 현상에로의 복귀를 뜻한다.”19) 그의 시 「수사학」(Retórica)을 읽어보자.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 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이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20)     흐르는 물이란 道이며 도는 길이고 길은 어디론가 흐른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上善若水)! 위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수사학’이란 의미의 투명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의 쓰임의 상선(上善)이다. 의미의 투명성이란 현상의 총체로서의 도에로 끊임없이 돌아오는(흐르는) 것이며, 현상의 총체란 말이 가지는 본래적 다의성(多意性)이다. 이때 시인은 무엇인가?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말도 괴로워한다. 인간처럼 말도 착취당하고 분규에 휘말리고 거짓과 중상모략에 시달린다. 시인은 괴로워하는 말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말에게 본래의 순수와 신뢰와 천진함을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파스가 「시」(La poesía)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인은 “허상의 가면을 벗기고 가장 예민한 부위에 창을 꽂아 분출하게 하는 것”이다.21) 이러한 시인의 작업은 상처 입은 언어에 향유를 발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는 역설적으로 일상의 언어를 부수는 과격한 파괴를 뜻하기도 한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뒤집어엎어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 두들겨 패라, 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 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 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 말라비틀어지게 해, 거세해버려라, 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 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 털을 벗겨버려라, 창자를 꺼내버려, 투우처럼, 숫소처럼, 질질 끌고가라, 가르쳐준대로 해, 시인아,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22)       언어에 갖는 파스의 관심은 취향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절되기도 하는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전적으로 참여시키는 동기에 의해 선택하는 결단의 문제이다. 언어에 생긴 상처는 인간에게도 세상에게도 피를 흘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반응은 온전한 인격의 결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 앞에 선 시인의 결단은 무엇인가? 시인의 결단은 죽음 다음에 오는 언어의 부활이다. 그리고 언어의 부활은 생생한 실재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사명과 결단은 말과 생생한 실재 사이의 미세한 불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언어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통하여 총체를 포착하려고 시도하지 않지만 총체의 포착은 언어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주체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가능해진다. III. 탈근대적 근대시     파스는 1956년에 그의 시론집이라 할 수 있는 『활과 리라』 초판을 출간하였는데 11년이 지난 1967년에 초판을 개정 증보하여 이판을 출간한다. 초판과 이판 사이에 생긴 중요한 변화는 언어에 대한 파스의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초판에서 파스는 앞서 말한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시인의 창조성을 강조했다. 파스는 시는 자유로운 창조 행위이므로 창조적 마음이 없으면 시도 없고, 시적 창조는 단지 인간의 자유의 실천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자유의 개진이며 선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구조주의의 영향과 인도에서의 경험이었다.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의 지적을 살펴보자. 이제 파스에게 동양은 서구의 동양학 전문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얻은 직관이나 현혹적 비전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 말은 파스가 이제 더 이상 서양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예전보다 더 서양적이다. 그러나 동양은 이제 서양 사람으로서의 그의 비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양 문화를 통해서 그는 서구 세계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23)     개정판에서 파스는 시인의 영웅적 역할 대신에 구조주의와 동양적 경험의 영향을 받아 언어의 새로운 역할을 강조한다. “말하는 것과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는 순전한 말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치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척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모두들 언어의 가장 특이한 점을 모르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이다”24)는 노발리스의 언급에 파스도 동의한다. 그는 “시는 무엇을 지칭하는가?”(¿Qué nombra la poesía?)라는 글에서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시는 외부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의 지시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 이렇게 시의 의미가 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에 있어서 의미의 문제가 명백해진다. 다시 말해, 시의 의미는 말이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이 지시하는 다른 말이다.”25) 앙드레 브르통에 대한 언급에서는 “진실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즉 영감을 받은 사람은 단지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언어이다”라고 말한다.26) 시인은 말을 부리고 조종하는 자가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자이다. 창조적 행위의 소관은 시인의 손에서 언어로 자리를 옮겨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시는 시인의 희생의 대가로 완수된다”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와 역사의 중심을 차지한 이성적 주체가 이제 언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후퇴는 전근대적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는가? 또 이것이 시인에게만 국한된 상황이라면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제 풀에 꺾이고 근대시는 근대성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이것이 시인이 언어 앞에 백기를 든 것이 아니라면 이제 시인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동인(動因)이 될 것인가?     파스가 구조주의와 동양적 세계관에서 새롭게 인식한 것은 침묵과 사변(contemplación)의 개념이다. 근대적 자아의 개념에 근본적인 회전을 가져온 것이 바로 이 침묵의 개념이었다. 근대적 자아 개념에 대해서는 초현실주의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미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특히 불란서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말단 외교관으로 머무는 동안 그는 벵자멩 페레(Benjamin Peret)의 작품에서 자아와 세계,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사이의 오래된 대립을 해소하는 방법―초현실주의 시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힌 문제이지만, 그들은 자동 기술법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한 점에서 페레와는 다르다―을 발견한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글에서 파스는 그가 페레의 책에서 발견한 “숭고한 자아”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햇빛에 반사된 폭포수처럼 수많은 영롱한 물방울로 흩어지는 자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서구의 시는 자아란 허상이며 감각과 사유 그리고 욕망의 덩어리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발견한다.27)     파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자기 초월의 욕망으로 고통받는 존재이다. 인간의 숙명은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긴장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긍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아의 부정은 개체의 소멸이 아니라 개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서 설정된 자아 개념을 버리고 열린 개체로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우주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파스가 초현실주의를 통하여 배운 것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28) 시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은 손이기도 하다.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29)     수동성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완전히 수동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동성의 상태에는 실상 극도의 능동적 의지가 필요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지만 의지의 절반은 의지를 가라앉히는데 사용해야한다. 시는 계획적이고 의지적인 의식 행위의 산물이며 동시에 잠재 의식 혹은 전의식 혹은 무의식의 과정의 산물이다. 시인의 수동성은 적극적 수동성이며 결단을 통한 수동성이다.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비우고 언어가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장 자리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30) 그래서 시인은 욕망을 버리고 말(言)의 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시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움직임에 동인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풍경은 늘 제자리에 있지만 시인이 길을 감으로써 늘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은 둥그니까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중심이다. 그러나 시인은 늘 길의 중간에 있다. 그가 가는 길의 목표가 어디든지 간에 그는 늘 새로운 풍경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로에 있지 않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의 중간에 있다.                    나를 어디로 데려 가는 걸까? (...)               나는 중간에 있다, 새장 속에 갇혀,               이미지에 붙잡혀. 시작은 멀어지고                끝은 사라진다. 끝도 시작도 없다.                 나는 멈추어 있다, 끝나려는 것도 시작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발도 머리도 없다.                 나는 내 속에서 맴돈다 내가 만나는 것은                 똑같은 이름들, 똑같은 얼굴들일 뿐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한다.31)     파스가 말하는 시인이란 형식의 완고함과 이미지의 추상성을 등(等)거리에 두고 마음을 놓은 자이다. 마음을 놓은 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우주 만물에 이끌림을 느끼는 자이다. ‘언제나 길의 중간에 있음’은 절망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왜냐하면 길의 끝에 도달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길이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에의 열림을 동시에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인의 마음을 군자의 마음에 비유해도 좋을까? 군자는 (어떤 집단에) 조화되지만 그렇다고 같아지지는 않는다(君子和而不同).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세상을 소요하며 이따금씩 몇 마디 말들을 두런거린다. 그는 혼자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가 되며 시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시는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양극의 긴장을 한 순간 둥근 화해의 원으로 닫아놓는 것이다. 파스가 일본의 단가와 하이쿠에서 확인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시적 경이로움과 일상의 단조로움의 교차이다. 일상의 단조로움은 시적 비상을 늘상 지상으로 추락시키지만 시인의 편력은 천천히 대지에 뿌리를 내린다. 실상 시를 통한 언어의 초월은 세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시간의 부챗살이 접히고 이미지가 그림자를 거두어드릴 때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부유(浮遊)한다 죽음에 둘러싸여서, 기지개를 켜는 을씨년스러운 밤의 위협 속에, 가면을 쓴 끈질긴 죽음의 뜻 모르는 소음의 위협 속에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스며든다, 움켜진 주먹처럼, 안으로 안으로 익어 들어가 마침내 자신을 마시고 흘러내리는 과즙처럼 불투명한 순간은 둥그렇게 닫히고 안으로 성숙하고, 뿌리를 내려, 내 안에서 자라나, 나를 온통 점령하고, 나는 무성한 잎새들의 두런거림에 쫓겨난다, 나의 사유는 그 나무에서 노래하는 새일 뿐이다, 나무의 은빛 수액이 나의 핏줄을 타고 돈다, 정신의 나무, 무르익은 시간의 과일들.32)     시는 무르익은 시간의 파편이다. 우주는 파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사는 생성하는 실재를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주는 낱알로 흩어진다. 그 중 하나의 세상이 땅에 떨어져 씨앗으로 싹트고 말들이 고동친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의 맥박을 듣는다. 모래 시계의 수수께끼를 듣는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과 파편 속에 숨쉬는 생생한 순간이 수렴되는 공간으로서의 시는 언어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두 개의 극단이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는 본래적 자연의 속성이다. 모든 것은 門이다                    모든 것은 다리(橋)이다 지금 우리는 피안으로 걸어간다 기호들의 강이 흘러가는 천체들의 강을 바라본다 그들은 포옹하고 헤어지고 다시 껴안는다 그들은 서로 격정의 언어로 말한다 그들의 투쟁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창조이며 파괴이다 밤이 열린다            거대한 손 기호들의 성좌 세기들 세대들 시대들 글 노래하는 침묵 누군가 말하는 음절들 누군가 듣는 말들 투명한 石柱들의 回廊 울림들 부르는 소리들 표적들 미로들 순간이 깜박인다 그리고 말한다 무언가를 듣는다 눈을 떴다 감는다 물결이 일어서고                무언가를 예비한다33)         파스에 의하면 글은 변화하는 공간이며 끊임없이 관계의 망을 짜는 기호들의 총체이다. 관계의 망을 짜고 풀고 다시 짜는 역동적 작업에서 예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침묵이다. 말 뒤에 오는 침묵이다. 수많은 고통스러운 편력 뒤에 오는 잔잔한 미소 같은 침묵이다. 말은 침묵을 향해 열리고 의미는 무의미를 향해 열린다. 시는 끊임없이 타자성을 향해 열려 가는 길이며 이러한 타자성과의 만남을 통하여 존재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인데 여기서 파스가 발견한 것은 시의 목표는 곧 길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인도 시도 언제나 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길의 중간이라는 뜻은 시는 말과 침묵의 수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詩)는 말(言)이며 도량(寺)이다.     글은 글이 쫓아낸 의미의 탐색이다. 탐색의 끝에서 의미는 소산하고 글자 그대로 무차별하고 무분별한 실재가 우리 앞에 드러난다. 이러한 실재 앞에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글의 이중의 움직임 즉, 의미를 향한 길과 의미의 소산이 남을 뿐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글은 쓰여지면서 지워지고 부서진다. 끝은 없고 모든 것은 영원히 다시 시작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코 말을 끝마치지 못할 것을 끝없이 말하는 것이며 언제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의미의 탐색은 의미 저 편에서 의미를 해체하고 의미를 부수는 실재의 등장으로 끝난다. 시는 출현의 장소이며 동시에 사라짐의 장소이다. 말하는 것: 행위하는 것                   로만 야콥슨에게 1.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사이에, 침묵하는 것과 꿈꾸는 것 사이에, 꿈꾸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 사이에, 시.    그렇다와 아니다 사이를 미끄러져 간다:               시가 말하는 것은 내가 침묵하는 것이고,                      시가 침묵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며,                    시가 꿈꾸는 것은 내가 잊은 것이다.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하는 것이다.                 시가 행위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시는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듣는다.                                그것이 실재이다. 그리고 “그건 실재야”라고                         내가 말하자마자 사라진다.          그래서 더 실재일까? 2. 만질 수 있는 관념,                   만질 수 없는 말:    시는 있음과        없음 사이를 오고 간다.           그것들의 비추임을 짜고 다시 푼다.           시는 종이 위에 눈(目)을 뿌리고, 눈에는 말(言)을 뿌린다. 눈들은 말하고,               말들은 바라보며, 시선들은 사유한다.                   생각을 듣고,      말하는 것을 보고,      관념의 몸을 만진다.        눈들은 눈을 감고,           말들은 열린다.34)               근대성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로의 낭만적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근대성의 편력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근대성의 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기 성찰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성찰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근대성이 세운 명철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관조적 자기 비판을 수행하는데서 완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작품에서 시와 담론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상호 삼투한다. 이성적 담론이 적절한 방법으로 질서의 세계에 거주하는 길을 탐색하도록 조언해준다면, 시적 느낌은 이러한 질서의 세계를 투명하게 한다. 비판의 기능은 객관적 실재에 도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내세운 모든 그릇된 시도들을 경계하는데 있으며 동시에 신비주의적 이상주의에 의탁하는 것 또한 거부한다. 탈근대적 비판은 ‘있음’(여기서의 있음이란 존재론적 유(有)가 아니라 관계의 양상이다)과 ‘없음’(없음 또한 존재론적 무(無)가 아니라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빔(虛)이다) 사이에 위태롭고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를 유지하는 중용론적 자세이다. 이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격리되고 고립된 자아가 아니고 역사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도 아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전체의 부분임을 깨닫는 것이며 우주의 숨결을 느끼는 맥박임을 깨닫는다. 또는 파스가 말한 것처럼 “무지(des-conocimiento) 즉, 존재가 무인 것을 알면서 의미를 존재 속에 용해시키는 순간”35)임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IV. 문명화된 공존의 새 천년을 위하여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뿌리는 견고하게 대지에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36) 파스는 글쓰기를 유혹하는 두 개의 힘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하나는 당대적(當代的)이고 현장적(現場的)인 가치를 내세우는 역사이며, 또 다른 하나는 초월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진리다. 역사와 진리가 상대방을 배타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도 문명도 한꺼번에 절름발이가 된다. 역사와 진리를 소통시키는 다리인                              시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시는 움직이면서 제자리에 있고                         제자리에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37)     왜곡된 세상을 곧게 하고자 시도했던 근대의 비판이 또 다른 왜곡을 초래하는 것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켜보았던 파스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완전무결함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고 말했다.38)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겸손함이란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만 매달려왔던 근대인들에게 또 다시 가치의 문제를 일깨워주는 자기 성찰의 씨앗이다.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며 “비어 있음으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이다.39)     시간의 경계는 다분히 자의적인 설정에 불과하지만 유한한 생명을 갖는 인간에게 새로운 시간의 경계는 희망과 불안의 양면성을 내포한다. 새로운 천년의 경계에서 근대성에 대한 검증은 근대적 인간과 문명에 대한 총체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화해, 종교간의 화해, 삶과 지식의 화해 등은 새로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1998년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옥타비오 파스는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에 대해서 밀도 있는 사유를 진행시켰다. 그는 평생에 걸친 편력의 과정을 통해 상관적 세계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주체성이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화해하는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 속에서 근대적 인간과 근대적 문명의 근원적 형성 원리를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생성적 이원론의 시각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전통과 전통에 대한 비판, 자아와 타자, 동양과 서양, 이성과 감성 등은 세계를 구성하는 이가적(二價的) 구성 요소들이다. 이가적 요소들은, 그것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생명을 유지하는 미세한 불균형의 원리 속에서 서로 길항한다. 다시 말해 생성적 세계는 두 힘 사이에 작용하는 미세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면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한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언어의 존재 조건이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논의에 접근하는 방법론 역시 동일한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파스에게 역사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를 성찰하는 시험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는 너와 나를 가르는 모든 인칭대명사가 사라지고 인간의 문화가 우주의 생성 원리에 순응할 때 역사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존재가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인 단일한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 때(不自生)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언제나 정체성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넘나들며 정체성의 영토화된 사고와 행동을 탈영토함으로써 끊임없는 생성적 현실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새로운 시간의 경계선 앞에서 우리가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89    詩人은 神이 준 언어를 잘 련금술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3643  추천:0  2016-11-29
       강물을 건너는 큰 개와 작은 개... 시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박상천 ((시인, 한양대 교수) 시를 일컬어 흔히 언어예술이라고 한다. 언어예술이라는 말은 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언어는 시의 질료(material)이면서 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건 시 창작의 방법을 공부하건 그 출발은 언어일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공부는 시 공부의 출발이자 기초이며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 공부를 언어 공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먼저 언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일상의 언어와 시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일이 시 공부의 출발이다. 1. 언어는 사물을 존재하게 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언어란 가장 쉽게 말해 어떤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 ‘하늘’ ‘책상’ ‘물고기’ 등 물질적인 것들을 일컫는 언어만이 아니라 ‘슬픔’ ‘기쁨’ ‘사랑’ 등 추상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들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감정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물들은 이러한 이름(언어)에 의해 구별되고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언어에 의해 사물들이 구별되고 존재한다’는 말을 더 쉽게 설명해보자. 여기 우리가 ‘볼펜’이라고 부르는 사물과 ‘연필’이라고 부르는 사물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 사물들을 각각 ‘볼펜’ ‘연필’이라고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필기도구’라는 이름만을 붙였다고 한다면 ‘필기도구’는 존재하지만 ‘볼펜’과 ‘연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장롱’ ‘식탁’ ‘의자’라는 각각의 이름이 없이 ‘가구’라는 이름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가구’는 있지만 ‘장롱’ ‘식탁’ ‘의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름이 붙지 않은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므로 ‘필기도구’라는 이름이 ‘필기도구’를 존재하게 하고 ‘볼펜’이라는 이름이 ‘볼펜’을 존재하게 하며 ‘연필’이라는 이름이 연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이데거는 언어를 일컬어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어는 이처럼 사물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일부 어떤 사물이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이 된다. 2.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이지만 사회적 약속이다 언어는 가장 쉽게 말해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사물과 사물의 이름인 언어의 결합 관계에는 필연성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는 언어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만약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과 ‘나무’라고 부르는 언어 사이에 꼭 그렇게 결합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다면 세계 각국의 언어가 서로 다를 수가 없고 시대를 따라 언어가 변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사물을 15세기에는 ‘나모’라고 하였고 영어에서는 ‘tree’라고 부른다. 사물과 언어의 결합이 필연적이라면 동일한 사물을 이렇게 다르게 부를 수는 없고 또 다르게 불러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사물의 결합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은 여기서 명백해진다. 그러나 사물과 언어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해서 말하는 사람이 임의로 그 이름을 바꿀 수는 없다. ‘나무’를 ‘나무’라 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늘’이라고 한다면 의사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사물과 언어 결합의 자의성은 사회적으로 용인을 받아야 하고 용인을 받은 이름으로 사물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일상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3. 시의 언어는 사회적 약속을 깨뜨린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분명 자의적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면 의사 소통이 불가능해지거나 어려워진다. 그런데 시는 이러한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고 그 약속을 깨뜨리려고 한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이 시는 우리가 잘 아는 유치환의 「깃발」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목도 없이 이 시를 처음 대했다고 했을 때, 이 시가 무엇을 대상으로 쓴 글인지 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전을 찾아보면 ‘기(旗)’는 “헝겊이나 종이 같은 데에 무슨 글자, 그림, 부호, 빛깔 같은 것을 잘 보이도록 그리거나 써서 막대 같은 것에 달아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쓰는 물건의 총칭”이라고 되어 있고 ‘깃발’은 ‘헝겊이나 종이로 된 기의 근본 부분’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들을 보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유치환은 누구에게나 뜻이 통하는 이런 정상적인 언어를 버리고 깃발을 일컬어 ‘소리없는 아우성’이니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니 ‘백로처럼 날개를 편 애수’니 하는 말로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비틀고 왜곡’하는 것이다. 일상 언어가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 소통’ ‘정보 전달’이라 할 수 있는데 의사 소통을 위하여서는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잘 지켜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한 일상어의 사용법을 ‘정상적 언어 사용법’이라고 한다면, 시의 언어는 그러한 정상적 언어 사용법을 어기고, 부수고, 비틀어 비정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시는 일상 언어의 정상적 용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회적 약속을 깨뜨리며 비정상적 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과 둘째, 그러므로 시는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효율적이거나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밥상 앞에서 ―박목월(1916∼1978) 나는 우리 신규가 젤 예뻐.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목월 선생의 시는, 너무나 좋다.  왜 좋은 것일까. 그의 시는 날카롭지 않아서 좋다. 있는 척, 잘난 척하지 않아서 좋다. 시인의 작품들 가운데 ‘크고 부드러운 손’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제목이 박목월 시인을 표현하기에 딱 적절해 보인다. 크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두툼한 손. 우리는 이 손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내 아버지의 손이고, 이 시대 가장 아버지다운 아버지들의 손이다. 다시 말해, 시인의 시를 읽으면 아버지의 다정하고 굵은 육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시가 좋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정의 가난한 저녁 밥상 앞에 아버지가 돌아와 함께 앉았다. 강아지같이 옹기종기한 아이들은 없는 반찬에도 밥을 잘 먹어 준다. 그 모양이 고맙고 예뻐 아버지는 내내 바라보고 있다. 소박한 밥상을 벌어온 것이 아버지의 최선인데, 아이들은 선물을 이만큼 사 달라고 어리광을 부린다. 사실 가난한 시인 아버지는 사랑밖에 줄 것이 없다. 그렇지만 “오냐, 사다 주마”라고 약속을 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안고 돌아서는 아버지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신이여, 저는 왜 이리 무능하고도 보잘것없습니까. 이렇게 짠한 모습으로 아버지는 뒤돌아서서 신을 부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에서 저 아버지는 세상 가장 큰 사람으로 보인다. 이러니 목월 선생의 시가, 또는 저 아버지가 좋지 않을 수 없다.
1888    어머니, 100원, 그리고 모성애... 댓글:  조회:4037  추천:0  2016-11-28
/ 장진성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 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그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 원으로 밀가루빵 사 들고 어둥지둥 달여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는 그 여인은
1887    시인, 시, 그리고 돈... 댓글:  조회:5315  추천:0  2016-11-28
최악의 종이자 최상의 군주 ‘돈’ 2016.06.13 임병걸 [시로 보는 경제] 어떠신가요? 돈 없이는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동병상련을 느끼시나요? 아니면 자학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마지막 구절은 더욱 서글픕니다. 하루도 돈 없이는 움직일 수 없고,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니, 배알이 뒤틀려 불현듯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 팽개쳐버리고도 싶습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지상의 맘몬(Mammon, 부, 부의 신)은 분명 인간을 웃기고 울리고, 들었다 놓았다, 품에 안겼다 달아났다, 그야말로 인간을 쥐락펴락하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됐습니다. 어떤 학자는 돈은 인간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물건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 무소불위의 절대자인 돈을 붙들고 있음으로써 우리는 불멸의 환상을 누릴 수 있다. 나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하는 온갖 힘들에 맞서 자아를 지켜내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선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돈이다.” (김창호, ‘돈의 인문학’) 고달픈 시인의 삶...돈이 절실한 문인들 정말 우리는 시인의 말대로 돈 계산에 따라 부모·형제건, 친구이건 가까이하거나 멀리하는 속물들이 된 걸까요? 정말 이익 없이는 오지도 가지도 않는 돈이 노예가 된 걸까요?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돈의 위력을 더욱 실감하는 시인은 믿었던 세상마저 믿지 못하게 되었나 봅니다. 흔히 시인들은 세속의 냄새가 진동하는 돈과 가장 초연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을 '시를 써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누구보다 돈에 시달리고 쪼들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정부가 해마다 발표하는 직업별 소득을 보면 시인들은 최하위에 속해 있습니다. 더 이상 시를 돈 주고 사지도 않고 살 필요도 없는 세상, 인터넷에 들어가면 시가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시대에 시인의 삶도 눈송이처럼 흔들립니다. 한 줄 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시인들의 노고는 불행히도 돈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평균 수입은 연간 1,255만 원, 그러니까 한 달에 1백만 원에 불과합니다. 시인은 여기에도 훨씬 못 미쳐 30만 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시를 전업으로 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지요. 베스트 셀러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낸 시인 최영미 씨. 5월 16일 페이스북에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 세무서로부터 근로 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지난 1990년대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베스트 셀러 시집을 내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던 최영미 시인은 최근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 세무서로부터 근로 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연간소득이 1,300만 원이 안되고 집도 없어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을 주겠다는 것이라지요. 베스트셀러 시인이 이 정도니 다른 시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디 시인 뿐일지요? 금수저를 물었거나, 물고 나온 소수의 부자를 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야말로 돈 걱정을 온몸에 달고 삽니다. 가난하지만 시만을 써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한 시인은 만 원짜리 지폐를 들여다보면서 온갖 상념에 잠깁니다. 만 원짜리를 골똘히 바라보면서 위조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만 원짜리 한 장이면 조카딸에게 과자도 사줄 수 있고 잡지도 맘껏 사볼 수 있는데, 세상의 모든 욕망을 압축해 놓은 돈 앞에서 시인은 그저 할 말을 잃습니다. 우리에게는 '봄봄'이나 '동백꽃' 같은 향토색 짙으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단편소설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김유정은 폐결핵을 앓다 29살에 요절하고 맙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그는 폐결핵에 좋다는 닭을 고아 먹고 싶어 고교 동창생 안회남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망이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이 편지의 답장을 받기도 전에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병마와의 최후 담판을 나 몰라라 한 겨우 몇 푼의 야속한 돈 때문에 비운의 삶을 마감한 김유정을 떠올리면 정말 할 말을 잃습니다. 돈은 최악의 종이면서 최상의 군주 돈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경제학적으로는 상품의 가치를 매기고, 교환과 거래를 매개하며 자산의 축적 수단이 되는 물건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악마도 천사도 아닌 가치 중립적인 물건이라는 말이지요. 자본주의 출현과 돈의 역할, 돈과 영혼의 문제를 깊이 탐구한 게오르그 짐멜은 그의 명저 '돈의 철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은 어떻게든 무차별화되고 외화(外化)되는 모든 것에 대한 상징이자 원인이다. 그러나 돈은 또한 오로지 개인의 가장 고유한 영역 내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가장 내면적인 것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기도 한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돈은 모든 것을 그 속성과 관계없이 숫자와 형식으로 만들어버리는 상징이라는 것이죠. 그 물건이 지니고 있는 내재적 가치, 주관적 의미 등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돈은 인간의 영혼을 포함해 모든 것을 객관화, 수치화시키는 동시에, 다시 인간들이 자기만의 개성과 인격을 추구하는 길을 열어주고 지켜주는 수문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어리둥절한 얘기인지요?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인가요? 사랑도, 우정도, 예술도, 상상력도, 주관적 인격적 특성도 무시하고 단순히 수량적 관계로 환원해 평준화시킨 돈이 다시 탈개성화, 탈인격화로 개인이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니요? 이 알쏭달쏭하지만 정확하게 돈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게오르그 짐멜의 주장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사람은 프란시스 베이컨입니다. "돈은 최상의 종이며 최악의 주인" 그러니까 돈을 잘 쓰면 이 몰개성적이고 물질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과 영혼을 지킬 수 있고, 잘못쓰면 돈에 휘둘리는 몰개성적인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평생을 빚에 시달려 누구보다 돈이 절실했던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돈의 본질을 짐멜과 유사하게 파악합니다. " 돈은 절대적인 힘이다. 동시에 평등의 극치다. 돈은 모든 불평등을 평등하게 한다." 사회학자 임석민 씨도 돈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쁘기보다는 활용에 따라 백 가지로 얼굴을 바꾸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돈이 폭군이 아닌 성군이 되고, 악마가 아니고 천사가 되는 방법은 도는 것입니다. 돈은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 우스개 아닌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부자의 지갑에 들어가 좀처럼 나올 줄 모른다면 그 돈은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필경은 가난한 이에게도 주인인 부자에게도 재앙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부자의 곳간을 빠져나와 가난한 집 장롱에도 들어가고, 유럽의 성채에서 빠져나와 칼라하리 사막의 원주민 흙집으로도 들어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돈이 왕 행세를 하는 정의롭지 못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야만적 자본주의'라고 비판합니다. 인류가 이 야만을 벗어나는 길은 더불어 잘 사는 길이고 그 길은 돈이 돌고 도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인 차원에서 돈의 속박, 돈의 주술에서 벗어나는 길은 정말 없는 걸까요? 이용하기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정작 이용하고 말고 할 돈 자체가 적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개의 사람들은 한 푼도 없는 절대 빈곤의 빈털터리라기보다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에는 부족한 돈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다 출판업을 하는 다카키 유코씨는 아주 평범하지만 퍽 일리 있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사람들 머리에 늘 붙어 다니는 걱정거리 가운데 가장 밀도가 높고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돈 문제이다. 나는 지금 돈에 대해 거의 걱정하지 않는다. 돈 문제는 간단하다. 자기가 가진 돈의 범위 내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돈이 없다면 깨끗이 포기하고 가진 것만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러한 물건이 없어도 잘만 살았다." -다카키 유코 '즐거운 돈'- 그러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늘 강조했던 '안분지족'과 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눈만 돌리면 사방팔방에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지갑을 열게 만드는 먹거리, 입을 거리, 탈 거리, 보석, 아름다운 집, 가고 싶어 몸살이 나는 여행지..... 세속을 등지고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사는 수행자가 아닌 이상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 청빈과 수행을 실천하다 돌아가신 법정 큰스님도 무소유의 삶을 강조하시면서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필요와 불필요가 그렇게 두부 자르듯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우주의 화폐 나뭇잎 전자 화폐 비트코인.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정체불명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창안했다. 요즘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화폐까지 넘쳐나고 있다. 돈은 종류에 따라 동전과 지폐로 나뉘기도 하지만 요즘은 눈에 보이는 화폐를 쓰는 일보다 신용카드나 직불카드, 심지어 전자화폐라는 비트코인(bitcoin)까지 등장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요술장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시중에는 돈이 넘친다, 돈줄이 막혔다. 돈이 몰린다고도 하는데 정말 시중에는 얼마나 돈이 풀려 있는 것일까요? 경제학에서는 통화(currency)라는 용어를 쓰는데요, 이 통화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시중에 도는 현금과 은행이 언제라도 내줄 수 있는 예금을 합해 M1이라고 해서 가장 적은 규모의 돈(협의통화)이 있습니다. 여기에다 일정 기간을 은행이 묶어 둘 수 있는 정기적금이나 정기예금, 회사채, 국공채 같은 돈을 더해 M2(광의통화, 총통화)라고 합니다. 여기에다 보험이나 증권사 등 비은행금융기관의 예탁금 등을 합하면 (M3) 돈의 규모는 더욱 늘어납니다. 한국은행의 통계를 보면 지난 1986년 광의 통화 (M2)는 불과 47조 원이었는데요, 1995년에는 300조 원 정도, 2006년에는 1,000조 원을 넘었고, 올 들어 4월에는 무려 2,300조 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0년 만에 무려 50배나 넘게 불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엄청나게 세상의 돈은 불어났는데 내 호주머니의 돈은 왜 줄어들기만 하는 걸까요? 그래서 시인들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을 아껴쓴다거나, 없는 것에 만족하는 소극적 차원이 아니라, 시중에 떠도는 종이로 된 화폐 말고 더 소중한 우주의 화폐를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가을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나뭇잎을 보면서 정말 화폐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름내 나는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땀을 닦아주고 그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곡비'가 돼주는 송경동 시인의 생각은 더욱 웅숭깊습니다.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인간의 삶은 거리에 뒹구는 나뭇잎 같은 것이지만, 그 나뭇잎이 역설적으로 화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탐내는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도구로 살면서 정작 자신은 구멍 뚫려 파쇄되는 생을 살아가야 하는 화폐의 운명을, 평생 광합성 노동으로 나무를 살찌우다 속절없이 대지로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환치하고, 다시 시인 자신의 삶으로 환치합니다. 평생 노동자들을 대변하느라 구속되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면서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서글플 법도 하지만 그 화폐, 그 나뭇잎들처럼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생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라면 주눅이 드는 세상, 돈이라면 할 말을 잃게 되는 세상,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처럼 돈이라면 영혼이라도 파는 세상,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도 시인을 따라 저 나뭇잎 한 장을 돈보다 소중하게 바라보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1886    문학예술인, 삶, 그리고 비극... 댓글:  조회:3934  추천:0  2016-11-28
아주, 아주 유명한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아래 사진은 고흐(왼쪽)과 그의 헌신적이었던 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1857~1891)의 모습이라고 해. ↑ 차례로 13살, 19살 때의 빈센트 반 고흐 ↑ 그 자신 미술상으로 활동했던 테오 반 고흐 ↑ 이 사람 역시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1957~2004), 네덜란드 영화감독이었어.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증손자였고. 무슬림에 비판적인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걸 빌미로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했어ㅠㅠ... 이 집안 사람들 인생이 참 평탄치 않은 게, 이 사람 아버지는 네덜란드 첩보부에서 일했었고 역시 이름이 '테오'였던 삼촌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나치에게 암살당하셨대; =========================================================  비운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1932~1963). 미모의 재원이었던 그녀는 역시 훤칠한 외모에 전도유망한 신세대 영국 시인이었던 테드 휴즈Ted Hughes(1930~1998)와 결혼해. 두 사람 사이에선 딸 하나, 아들 하나가 태어났고. 하지만 다들 아는 것처럼, 실비아는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테드는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불륜을 저지른 데 대해 세상의 비난을 받고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꾸준히 집필활동을 하고 말년에는 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어. ↑ 테드 휴즈와 두 아이들.  딸 프리다 휴즈Frieda Hughes(1960~)와 아들 니콜라스 휴즈Nicholas Hughes(1962~2009). 프리다는 시인이자 화가로 몇 권의 어린이 그림책을 출간했고, 니콜라스는 생전에 어류학자였어. ↑ 1999년 아버지 테드 휴즈의 추모식에 참석한 프리다, 테드와 재혼했던 캐롤, 그리고 니콜라스. 이 가족 역시 안타까운 경우인데, 알래스카에 살면서 연구에 매진하던 니콜라스는 역시 우울증을 앓다가 2009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아ㅠ 이 사진이 찍힌 뒤 꼭 10년 만이었네. 나도 인터넷으로 그 소식 접하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ㅠㅠ
1885    시의 건초더미에서 찾은 "바늘" 댓글:  조회:4191  추천:0  2016-11-28
    “제발 개구리처럼 앉지 마시고 여왕처럼 앉으세요”  ―데니즈 두허멜(1961∼ )  ―필리핀 어느 대학의 여자 화장실 벽에 쓰인 낙서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세상은 여드름투성이 소녀에게 보상하지 않는다.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머리채에 광채를 내는 샴푸를 사라.  머릿결이 직모라면 파마를 해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숨결은 박하 향이 나도록 하고 이는 희고 깨끗이.  손톱은 매니큐어 발라서 반짝이는 진주 열 개로.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웃음 지어라. 특히 기분이 더러울 때.  차를 운전하면서 급회전할 때에는 머리를 숙여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욕망에 자신을 내맡기지 말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사교춤 출 때 치맛자락을 추켜올릴 수 있지.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교수와 혼인하지 말고 학장하고 해라.  왕하고 혼인하지 백작하고는 하지 마라.  제멋에 살기를 잊지 말라, 멋 부리기를 잊지 말라.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주한 미국대사관 공보과’에서 한국어판으로 발행한 ‘2006 미국 올해의 가장 좋은 시’에서 옮겼다. 이 시선집의 편집자로 시를 선정한 빌리 콜린스(시인)가 쓴 서문 제목이 ‘시의 건초더미에서 찾은 75편의 바늘’이다. 해마다 거듭 탈락된 ‘건초더미’ 시인들의 불쾌감을 언급하며 그는 ‘제목은 기껏해야 마케팅 전략일 뿐’이라고, ‘그럭저럭 읽을 만한 시’라는 시집에 독자의 손이 선뜻 가겠느냐고 눙친다.    여대생과 여왕처럼 변기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있을까. 새침한 여대생도 고고한 여왕님도 거기서 거기일 화장실에서 취할 자세가 떠오르면서 빙긋 웃게 되는 화장실 낙서. 그에 촉발된 요즘 젊은 여성의 살아가는 모습과 생각을 나열하며 언뜻 부추기는 모양새다. ‘멋 부리기’는 기본! 화장 안 해도 예쁜 나이라는 건 네 라이벌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몸을 가꾸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해라. 그렇게 해서 기껏 멋진 여인이 돼도 아무 남자나 만나면 ‘꽝’이니라! 최고의 남자를 만나라. 좌식변기에서는 여왕인들 개구리처럼 앉을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라.   결혼을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젊은 여인에게 결혼시장에서 상품 가치를 높일 지침을 이리 내려주시는 이는 아마 신붓감의 어머니이리. 젊은 여인들이여, 이런 삶에 완전 공감인가요? 여하간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는 건 바람직한 자세. 황인숙 시인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50508/71128584/1#csidx3cf584284336d79b01dd36b4d51fd50
1884    시인, 시쓰기, 그리고 시암송... 댓글:  조회:3356  추천:0  2016-11-28
미국 고교에서 시암송 교육이 `부활'하고 있다.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미국 고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 시암송 교육이 `부활'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미국 계관시인인 찰스 시믹과 빌리 콜린스가 전하는 시쓰기와 암송에 관한 조언을 실었다. 신문은 지난 40년간 시암송은 미국의 교실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으나, 최근 들어 부활하고 있으며 학생들도 이를 억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은 계관시인들의 조언.= ◇시쓰기(찰스 시믹) ▲독자들이 이미 삶에 대해 알고 있는 얘기는 하지 말라. ▲당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위대한 시 가운데는 소네트(14행시) 또는 그 길이를 넘기지 않는 시가 많다. 그러니 너무 길게 쓰지 말라. ▲직유, 비유, 은유는 시를 간결하게 한다. 눈을 감고 무엇을 해야할지를 상상해 보라. ▲쓰고자 하는 단어를 큰 소리로 읽어본 뒤 당신의 귀로 하여금 다음에 오게될 말을 결정하도록 해보라.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추가적인 손질이 필요한 초고임을 명심하라. 그 손질은 몇달, 아니 몇년이 걸릴 수도 있다. ◇암송(빌리 콜린스) ▲시가 이해될 수 있도록 천천히 읽어라. ▲제목을 읽고 난후 시의 첫 행을 읽을 때까지 몇초간 쉬어라. ▲정상적이고 편안한 목소리로 읽어라. 마치 무대에 선 것 처럼 극적인 느낌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읽기를 쉬는 때는 행의 맨 끝이 아니라 구두점이 있을 때만 하라. ▲익숙하지 않은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을 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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