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블로그 입니다.
오늘은 주기율표에 대해 알아 볼것인데요.
'주기율표'란 원소를 주기적 성질로 나눠 표로 정리한 것을 말합니다.
1. 주기율(periodic law)의 발견
18새기 초반까지만 해도 발견된 원소의 종류는 20여가지에 불과했으나
18세기 후반에 많은 종류의 원소들이 발견됨에 따라 원소의 분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 갔다.
최초의 원소분류는 1789년 라부에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원소들은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
화학자들은 원소의 유사성을 찿아보려는 연구에 집중했다.
(1)라부아지에의 원소분류
라부아지에는 그 당시에 원소로 알려진 33종의 물질을 성질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가) 산소, 질소, 수소, 빛, 열
(나) 황, 인, 탄소, 염소, 플루오린
(다) 은, 코발트, 구리, 납, 수은, 니켈
(라) 생석회, 산화바륨, 알루미나, 마그네시아, 실리카
(2) 되베라이너의 세 쌍 원소
독일의 천재적 시인이자 과학자인 괴테의 화학 선생이었던 되베라이너(Johann Wolfgang Dobereiner, 1780~1849)는
1829년 세 개의 원소로 이루어진 어떤 원소 무리들은 첫 번째 원소와 세 번째 원소의 *물리량의 평균값이 두 번째 원소의 물리량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들을 세 쌍 원소라고 하였다.
(*물리량: 원자량, 밀도(g/mL), 녹는점을 뜻한다.)
(3) 뉴랜즈의 옥타브 법칙
1863년 영국의 뉴랜즈(John Alexcander Reina Newlands, 1837~1898)는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서로 배열하면
음악의 옥타브처럼 여덟 번째 원소마다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는 '원소들은 여덟 번쨰마다 성질이 비슷한 원소가 나타난다.' 라는 '
옥타브 법칙을 발표하였다.
2.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① 원소의 주기율 발견 : 1869녀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Dmitri lvanovich Mendeleev, 1834~1907)는
당시에 알려진 63종의 원소들을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원소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멘델레예프는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가로줄을 몇 개의주기로 나누고,
세로줄을 8개의 족으로 분류한 주기율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릥 주기율표의 몇몇 원소들을 원자량 순서와 주기율이 맞지 않는 원소들이 있었다.
3. 모즐리의 주기율표
원자량 순서와 주기율이 맞지 않는 문제는
1913년 러더퍼드의 제자인 모즐리(Henry Gwyn Jeffreys Moseley, 1887~1915)에 의해 해결되었다.
모즐리는 음극선관 속에서 큰 운동 에너지를 가지는 전자를
금속판에 추돌사켰을 때 생성되는 X선의 파장이
금속원자의 양성자 수(원자번호)가 증가함에 따라 짧아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모즐리는 원소들의 양성자 수로 원자 번호를 정하고,
원소들의 주기적 성질은 원자 번호가 증가함에 따라 규칙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하여 모즐리는 원소들을 원자 번호 순서로 배열한 주기율표를 만들어
오늘날에도 모즐리의 주기율표가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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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834. 2. 8(구력 1. 27), 러시아 시베리아 토볼스크
사망일
1907. 2. 2(구력 1. 20),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화학원소들의 상호관계를 밝혀 화학의 기초와 근대 물리학의 상당부분을 통일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교원양성소에서 공부한 그는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수상, 교사자격을 얻었다. 오데사에서 화학 공부를 지속했고 1857년 대학에 입학해 1859년 국비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공업연구소 화학교수를 거쳐 3년 뒤 일반화학교수가 되었고, 고전적인 교과서 을 썼다. 혼자 공부해도 여러 가지 화학적인 관계를 알 수 있도록 주기율표를 작성했으며, 이 주기율표는 대부분의 화학이론의 뼈대가 되었다.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 도량형국 국장이 되어 죽기 전까지 일했다.
목차
접기
개요
유년시절과 교육
주기율표의 작성
그밖의 업적
멘델레예프(Dmitry Ivanovich Mendeleyev)
개요
원소의 주기분류법을 개발했다.
마지막으로 작성된 주기율표에 있는 빈 공간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그 가운데 3개 원소의 성질을 예측했다(주기율).
유년시절과 교육
토볼스크에 있는 김나지움 교장의 17명의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해 그의 아버지는 장님이 되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32㎞ 떨어진 곳에 유리공장을 임대해 운영했다. 학창시절 그는 수학·물리·지리 과목에는 매우 우수했지만 필수과목인 고어(古語)에는 낙제생이었다. 1847년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 유리공장에 불이 나 폐허가 되자 그의 어머니는 결단을 내려 2명의 어린 자녀만을 데리고(드미트리와 그의 누나) 토볼스크를 떠났으며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출신지에 따라 입학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대학교육에서 제외된 시베리아 출신의 그는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들과 의학학교에도 시도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어머니가 죽기 10주 전에 교원양성소에 입학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교사자격을 얻었다. 그뒤 건강 때문에 자청해 크리미야로 발령을 받았고, 오데사에서 화학공부를 계속했다. 화학으로 학위를 얻기 위해 18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1857년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1859년 국비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는 유명한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로베르트 분젠과 물리학자인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있었지만 그는 독자적으로 연구했다. 그당시 분자응집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유명한 카를스루에 학회에 참석해(1860. 9) 프랑스의 화학자들 및 이탈리아의 화학자인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와 사귀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지만 뚜렷한 일자리가 없어 그는 과학 관련저술과 편집 일을 했다.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공업연구소 화학교수를 거쳐 3년 뒤 그곳 대학의 일반화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적당한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교과서를 쓰기 시작해 고전적인 교과서 〈화학원론 The Principles of Chemistry〉(1868~70)을 완성했다.
주기율표의 작성
그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는 원소들의 성질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깊이 조사해 원소들의 분류체계를 고안했다.
다른 과학자들도 그런 분류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 존 돌턴이 원자량 개념을 제시한 뒤 어떤 화학자들은 한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소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또다른 화학자들은 원소들의 성질의 유사성이 구조적으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원소들 사이의 산술적인 관계를 연구했다.
또 원자량을 연구했던 요한 되버라이너와 윌리엄 오들링과 같이 원소들 사이의 논리적인 순서를 밝히려 한 화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알려진 모든 원소를 원자량의 증가순으로 배열해 원소들의 성질에 주기성이 있음을 나타내고 혼자 공부해도 여러 가지 화학적인 관계를 알 수 있도록 주기율표를 작성한 사람은 멘델레예프였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주기율표에는 빈 칸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것들 중 3가지는 20년 내에 발견되었고 실제로 이 3가지 원소는 그가 예측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주기율표는 대부분 화학이론의 뼈대가 되었고, 한 원소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방사성 붕괴과정을 해석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교과서 역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이 주기이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그는 이론과 강의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실제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865년 그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적용해 농작물의 질을 높이고 수확량을 늘렸으며, 러시아의 일반적인 농업조건을 개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 방법을 개량했다.
그밖의 업적
1867년 러시아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파리 박람회에 가서 프랑스 화학공업을 둘러보고 온 뒤 러시아 소다 산업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후에 석유화학공업의 문제점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76년 미국을 방문해 산업의 효율성이나 그 제품의 품질을 과학적으로 높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제품 생산량만을 늘리려는 미국 석유업자들의 태도를 비난했다. 러시아에 돌아와서도, 석유자원개발을 외국업자에게 맡기는 방식을 비판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석유자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진보적이었고 사회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제정 러시아 체제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인정하지 않아 이 체제와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그의 재능은 억압받지 않았으나 그는 종종 냉대를 받았다.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않았고, 1890년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이상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능했기 때문에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일했던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 그는 건강의 악화와 1905년 봉기 전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초청강사 및 여러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서 많은 나라의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화학연구를 체계화하려는 운동의 지도자로서 인식되었다.
오늘날 그는 화학원소들의 상호관계를 밝혀 화학의 기초와 근대 물리학의 상당부분을 통일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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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일리야 레핀이 그린 멘델레예프의 초상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Менделеев 듣기 (도움말·정보), 문화어: 멘델레예브, 1834년 2월 8일 - 1907년 1월 20일)는 러시아의 화학자이다. 주기율표를 최초로 작성한 이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토볼스크(Tobolsk)인근 Verkhnie Aremzyani에서 11, 13, 혹은 17명의 자녀중 막내로 태어났다(그 수는 출처마다 다르며,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Ivan Pavlovich Mendeleev)가 시력을 상실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브나(Maria Dmitrievna Mendeleeva)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그녀 가족의 유리공장을 다시 세워 살림을 꾸려나간다. 1847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리공장이 화제로 파괴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는다. 멘델레예프가 15세이던 1849년 그의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남은 두 자녀(멘델레예프와 리자)를 데리고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건너가 정착했다. 멘델레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곧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남편 친구의 도움을 받아 Main Pedagogical Institute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이 기관에 들어간지 10주가 안되어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후 그는 결핵진단과 함께 단지 수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그는 주기율표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의 성질과 실제 원소의 성질이 맞아떨어진 사례가 몇 개 존재한다. 로타르 마이어도 거의 같은 시기 거의 비슷한 주기율표를 생각해 내었으나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을 예측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바깥 고리
(영어) "); padding-right: 13px;">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영어)"); padding-right: 13px;">멘델레예프의 초상화 (러시아의 가장 잘 알려진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5년작)
(영어)"); padding-right: 13px;">멘델레예프의 사진 -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에드거 파스 스미스 소장품(Edgar Fahs Smith Collection)
(영어)"); padding-right: 13px;">원래의 주기율표 - 설명과 함께
(영어)"); padding-right: 13px;">멘델예프의 첫 주기율표 초안 - 1869년 2월 17일
멘델레예프는 1889년 연 1회 열리는 페러데이 강연의 강사로 초청받았다. 그는 강연을 통해 새로 얻은 통찰
(영어)"); padding-right: 13px;">페러데이 강연 - 1889년 7월 4일 - 설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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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레예프 (Mendeleev, D. I. : 1834~1907)
러시아의 과학자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많은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과학에 흥미를 가진 막내를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까지 걸어서 갔다. 그러나 입학 허가가 나지 않아 페테르스부르크의 중앙교육 전문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입학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부에 열중하여 22세에 페테르스부르크대학의 화학과 강사가 되었다. 이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하여 액체의 열팽창과 표면 장력 등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867년 페테르스부르크대학의 화학교수가 되고, ‘화학의 원리' 라는 책을 저술하기 위해 당시에 알려져 있던 63종의 원소를 배열하는 과정에서 주기율을 발견하였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1869년 러시아 화학회에서 최초의 주기율표를 발표하였다. 특히 당시에 발견된 원소들만으로는 주기율표를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러 곳에 빈칸을 남겨 놓았으며 그 빈칸에 해당하는 새로운 원소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후에 새로운 원소들이 발견될 때마다 멘델레예프가 남겨 두었던 빈 자리가 채워져서 주기율표가 완성되었다. 주기율표를 고안한 멘델레예프의 성과는 톰슨, 러더퍼드, 보어, 아인슈타인 등 원자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다른 과학자 못지 않게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 과학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과 그의 이혼 경력 등으로 인해 그가 죽기 몇 달 전 실시한 투표에서 한 표 차이로 플루오린을 분리한 프랑스의 무아상에게 노벨상을 넘겨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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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오브·탄탈 차지하려 피 흘려가며 싸워
시인의 광기·조울증, 리튬으로 잠재우고 고온에 녹는 갈륨으로 찻숟가락 만들어 장난
사라진 스푼
샘 킨 지음 | 이충호 옮김 | 북하우스 ㅣ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와 공처럼 굴러다니며 뭉치는 수은을 흥미롭게 본 기억이 매력적인 책을 탄생시켰다. 미국 과학전문작가인 저자는 "수은을 통해 역사, 어원학, 연금술, 신화, 문학, 법의학, 심리학을 배웠다"며 무미건조하게 교실 벽에 걸려 있던 주기율표 속에 숨은 원소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밤하늘의 별, 피묻은 돈, 가슴 아픈 사랑, 냉혈의 정치, 비극적 전쟁까지 원소 이야기는 과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공간을 넘나든다.
1990년대 중반 이후 500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의 원인은 휴대전화에 쓰이는 원소 '니오브'와 '탄탈'이었다. 200여개 부족이 채굴을 둘러싸고 피를 흘렸고, 눈먼 돈이 살인 청부에 쓰였으며, 성노예 캠프가 곳곳에 세워졌다. 농부들이 농사를 내팽개치고 이 원소를 캐러 나서자 식량까지 부족해져, 애꿎은 고릴라들이 식용으로 사냥당하면서 멸종 위기에 몰렸다. 이 비극의 41번 원소 '니오브'는 여신 레토에게 아들 일곱과 딸 일곱을 살해당한 신화 속 여인 니오베에게서, 73번 원소 '탄탈'은 신들을 시험한 죄로 영원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형벌을 받은 탄탈로스에게서 따온 이름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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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시인 로버트 로웰은 젊은 시절 예술적 광기의 화신이었다. 자신을 성모 마리아로 믿고 논쟁을 벌이는가 하면, 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며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팔을 벌리고 서 있기도 했다. 그의 책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지만 성격 파탄으로 고통받았다. 의사는 로웰이 뇌 속 화학물질의 불균형으로 인한 조울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고 3번 원소 '리튬'을 처방했다. 리튬을 복용한 뒤 그의 시에서는 광기가 사라졌다. 친구들은 "동물원에 갇힌 야수처럼 얌전해졌다"고 했다.
텅스텐을 얘기할 땐 2차대전 때 연합국과 추축국 양측에 강철 합금용으로 이 금속 원소를 팔아 천문학적 거액을 챙긴 포르투갈의 독재자가 등장한다. 독살에 주로 사용된 탈륨에 대해서는 냉전시기 미 중앙정보국(CIA)이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양말에 이 원소의 가루를 뿌려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일화를 전한다. "영하 269도에서 헬륨의 전기 저항이 '0'이 된다는 건 당신의 아이팟을 그 온도까지 얼리면 아무리 음악을 오래 들어도 배터리가 닳지 않는다는 뜻"(22쪽)이라던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신념에 눈이 먼 브롬은 필요한 전자 한 개를 빼앗아 오기 위해 세포에 포함된 약한 원소들을 공격한다"(109쪽)처럼 재치 넘치는 표현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원제 'The Disappearing Spoon'은 과학자들이 갈륨으로 만든 찻숟가락으로 손님들을 놀리는 장난을 즐겼다는 얘기에서 나왔다. 갈륨은 실온에서 고체이지만 녹는 점이 29.8도에 불과해 과학자들은 뜨거운 차 속에서 녹아 없어지는 갈륨 찻숟가락을 보고 손님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출처]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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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주기률 외우기.
연상법을 적용하려면 먼저 1번부터 118번 까지
순서를 나타내는 낱말(peg word)를 먼저 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펙(말뚝) 워드 랑 원소를 결합시켜 외우면 된다.
1=소나무에 풍선=수소(H) 걸렸네.
2=매화나무에 헬기=헬륨(He) 걸렸네.
3=벚나무에 리본=리튬(Li)을 매달아 사랑을 빌었네.
4=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낳는 베라먹을 놈=베릴륨(Be)이다.
5=난초를 심은 뜻은 붕새=붕소(B)를 보자는 뜻.
6=목단은 태워서 목탄숯=탄소(C)을 만든다.
7=멧돼지가 비료포대=질소(N)에 이빨로 구멍을 냈네.
8=팔공산 봉우리마다 산소(O)통이 주렁주렁
9=국화축제 열리는 불국사=불소(F)는 빨간 국화와 빨간 소가 유명
10=단풍이 울긋불긋 네온(Ne)사인 같네.
11=똥차 오면 소금=나트륨(Na) 뿌려라.
12=비에 사진기가 젖어 플래시=마그네슘(Mg)이 안터진다.
13=허수아비 팔에 깡통=알루미늄(Al)이 주렁주렁.
14=해녀의 잠수복은 실리콘=규소(Si)로 만든다.
15=호랑이가 할머니에게 인절미떡=인(P) 달라 하네.
16=휴지통이 성냥통이냐 휴지대신 성냥=황(S)이 가득 들었네.
17=회초리로 염소(Cl)를 때리니 염소가 똥을 싸네.
18=휘발유차에 알콜=아르곤(Ar)을 넣었더니 술에 취했는지 빌빌거리네.
19=후크선장 왼손은 갈고리=칼륨(K)로 되어 있다.
20=등뼈가 휜 것은 칼슘(Ca)부족이 원인이다.
21=다홍치마는 스칸디나비아=스칸듐(Sc)에서는 남자들이 입는다.
22=띠를 두른 타이탄=티타늄(Ti) 트럭에 돌을 실어라.
23=덧신을 신고 바나나=바나듐(V) 껍질을 밟았네.
24=대나무 집에 크로마뇽인=크롬(Cr)이 살았다.
25=도깨비 감투인 망건=망간(Mn)을 쓰면 투명인간이 된대.
26=듀엣가수가 철길=철(Fe)을 걸으며 노래하다 치었다.
27=돼지는 코=코발트(Co)가 들창코다.
28=뒤뜰에서 발견된 니켈(Ni)주화를 녹여 이빨을 씌었다.
29=투구는 구리(Cu)로 만든다.
30=스위스에서는 스님들이 모자를 쓰는 징크스=아연(Zn)가 있다.
31=산에는 갈대=갈륨(Ga)가 우거져 있네.
32=신은 게르만민족=게르마늄(Ge)이 처음 만들었다.
33=선수촌이 독극물로 비상=비소(As)이 걸렸다.
34=새가 세레나데=셀레늄(Se)를 노래하네.
35=소머리표 브로마이드=브롬(Br) 그림
36=슈퍼맨은 크립톤(Kr) 행성에서 왔다.
37=쇠구슬을 루비=루비듐(Rb) 대신 반지에 박았다.
38=쉰들러는 스트롱맨=스트론튬(Sr) 이다.
39=술은 이스트=이트륨(Y)로 발효시킨다.
40=늑대 우두머리 이름이 지코=지르코늄(Zr)이다.
41=낙화암에 눈물의 니오베=니오브(Nb)상이 있다.
42=닉슨대통령이 몰카=몰리브덴(Mo)를 설치했다.
43=너구리가 테크노춤=테크네튬(Tc)을 추네.
44=냇가에서 빨래하는 루터누이=루테늄(Ru)
45=논에서 로데오=로듐(Rh) 경기가 열렸다.
46=뉴욕에 팔레스 호텔에 팔레비왕=팔라듐(Pd)이 묵었다.
47=뇌수술을 예전에는 은(Ag)장도로 했다.
48=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카드놀이=카드뮴(Cd)가 웬말.
49=눈을 인두=인듐(In)로 지져버렸네.
50=오믈렛은 김구 주석(Sn)이 즐기던 음식.
51=요한은 안티크리스트=안티몬(Sb)
52=요트에 전화=텔루르(Te)기가 달렸네.
53=옷소매에 요오드(I) 얼룩이 묻었네.
54=옹녀는 악처 크산티페=크세논(Xe)
55=용왕이 세수대야=세슘(Cs)에서 목욕하네.
56=요리사는 바람둥이=바륨(Ba) 매일 오리구이에 잼을 발라먹네.
57=옷장 안을 랜턴=란탄(La)불로 비춰라.
58=오빠는 세리=세륨(Ce)야
59=옥경이 해외여행가서 선물로 사온 프랑스제 오디오=프라세오디뮴(Pr)
60=유모차에 자석=네오디뮴(Nd)이 주렁주렁.
61=유황불에 떨어져 고생하는 프로메테우스=프로메튬(Pm)
62=유태인을 구한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사마륨(Sm)
63=유성기는 유럽=유로퓸(Eu)인이 발명했다.
64=유니폼은 가톨릭사제=가돌리늄(Gd)들이 처음 착용.
65=유원지에 테러리스트=테르븀(Tb)가 폭탄설치.
66=유리창에 영어글자가 써있네. 디스 이즈 프로스=디스프로슘(Dy)
67=유치장에 홀몸=홀뮴(Ho)으로 들어가다.
68=유방이 에로틱해=에르븀(Er)
69=육군사관학교 심볼은 튤립=툴륨(Tm)
70=층계가 이태리제=이테르븀(Yb) 대리석이네.
71=차도 옆에 루터무덤=루테튬(Lu)이 있네.
72=치솔이 반으로 부러져 하프=하프늄(Hf)가 됐네.
73=처녀 뱃사공이 딴따라=탄탈룸(Ta)가 되었네.
74=채찍으로 전구를 깨니 텅스텐(W)이 들어있다.
75=촛불시위 원조는 레닌=레늄(Re)
76=츄리닝을 입은 오스카=오스뮴(Os)
77=최루탄 폭발로 이리역=이리듐(Ir)이 쑥밭됐다.
78=쥐 모양의 백금(Pt)상을 만들다.
79=축구공이 순금(Au)이다.
80=프랑스 사람 브라운이 수은(Hg)온도계 발명.
81=바가지로 탈=탈륨(Tl)을 만들었다.
82=피가 납(Pb)으로 오염됐다.
83=벌 비스무리=비스무트(Bi)한게 막 쏜다.
84=배를 만드는 폴란드=폴로늄(Po)조선소에서 자유노조가 파업.
85=포도주에 감미료 아스타틴(At)을 넣었다.
86=퓨리탄들은 라돈(Rn)탕에서 세례받는다.
87=반지의 제왕 프랑켄슈타인=프란슘(Fr)
88=팔팔올림픽은 라디오=라듐(Ra)로 중계방송 했다.
89=불은 악티늄(Ac) 해전에서 최초사용.
90=그물망에 토란=토륨(Th)이 가득 들었다.
91=강에서 싸운 해전이 프로탁티늄(Pa) 해전이다.
92=기도원에 원자탄=우라늄(U)이 떨어졌다.
93=검을 든 바다의 신 넵푼=넵투늄(Np)
94=개가 문을 지키는 지옥이 플루토=플루토늄(Pu)
95=곰의 천국 아메리카=아메리슘(Am)
96=귤은 퀴리부인=퀴륨(Cm)이 즐겨먹던 과일이다.
97=괴물 헐크는 버클리대=버클륨(Bk) 실험실에서 탄생.
98=귀신이 사는 호텔 캘리포니아=칼리포르늄(Cf)
99=국기에 아인슈타인=아인시타이늄(Es)이 그려져 있다.
100=백마가 페르몬=페르뮴(Fm) 냄새에 발광을 한다.
101=백합꽃으로 멘델=멘델레븀(Md)이 유전법칙 발견
102=백두산에 노벨동상=노벨륨(No)이 세워졌다.
103=백석 시인의 로맨스=로렌슘(Lr) 상대는 기생.
104=백내장에 걸린 러더포드=러더포듐(Rf)
105=백원에 두부=더브늄(Db)가 한모.
106=백로랑 세아가씨=세아보르기움=시보귬(Sg)가 놀고 있다.
107=백조는 보리=보륨(Bh)를 좋아해.
108=백발에 한숨=하슘(Hs)이 절로 난다.
109=백기들고 MT=마이트너륨(Mt) 갔다.
110=한문과 한자는 다르다=다름슈타튬(Ds)
111=한화에서 X선 발견한 뢴트겐=뢴트게늄(Rg)연구소를 세웠다.
112=황동상에 코페르니쿠스=코페르니슘(Cn) 얼굴이 새겨져 있다.
113=황소뿔 투구를 쓰는 일본=자포니움(Jp).
114=한니발 장군이 꽃=플레로븀(FI)를 들고 알프스를 넘었디.
115=한옥 위에 펜트하우스=우눈펜튬(Uup)
116=한라산에 리버모륨(Lv)을 설치.
117=한잔술에 우눈 셉튬(Uus)
118=한복 위에눈 옷고름=우눈옥튬(Uuo)을 달아라.
텅스텐의 원자번호는?
텅스텐은 백열전구에 들어가는데 그 전구를 채찍(74)으로 쳐서 깨뜨렸으니 74번.
원자번호 55번은?
55번은 용왕이고 용왕이 세수대야(=세슘)에서 목욕하니 세슘(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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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레예프(Dmitri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주기율표(1869)
1869.3.6 러시아 화학회에서 근대적인 주기율표를 발표하다
19세기 들어 1803년 한 해에만 팔라듐, 세륨, 오스뮴, 이리듐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화학 원소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세상에는 원소가 몇 종류나 존재하는 것일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원소들이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을까?
일반적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고 예측도 불가능했던 19세기 화학계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려면 먼저 뭔가 규칙이나 원리가 필요했다. 한 세기 전 린네가 이명법을 이용해 생물을 분류하면서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했듯이, 이제 뭔가 일반적인 토대가 필요했다. 돌턴의 원자설 이후, 화학은 과거 연금술의 색채를 어느 정도 벗고 과학으로 인정받는 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미흡했다.과학이라면 모름지기 일반적인 법칙들과 그것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야만 한다.하지만 당시의 화학은 그렇지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국비 유학 후 상트페데르부르크 교수로 임명
아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멘델레예프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1834년 2월 8일 러시아 토볼스키 인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와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의 열 네 아이 중 막내였다(형제가 정확히 몇이었는지는 문헌에 따라 다르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집에 우환이 겹쳤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운영을 하던 유리 공장이 화재로 불타버린 것이다.
사업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남달리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멘델레예프와 딸 하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모스크바 대학에 보내려 했지만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그곳 대학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곳에서 멘델레예프는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었다. 한동안 크리미아에 있는 오데사라는 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화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국비 유학을 다녀온 후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일반 화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연구에 지쳐 깜빡 잠든 사이에 꾼 꿈 덕분에 완성된 주기율표
기존 화학 교과서에 불만이 많았던 멘델레예프는 1870년 라는 책을 펴냈다. 판을 거듭하며 세계 여러언어로 번역된 이 책을 쓰는 동안 멘델레예프는화학 원소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한연구를했다.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 원소들 사이에 분명일정한 규칙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것이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가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발표한 논문에 실린 주기율표
화학은 꿈과 인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가 1865년 벤젠의 고리 구조를 밝혀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리고 4년 후인 1869년 멘델레예프가 그토록 알아내고자 했던 원소들의 분류 규칙을 알아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는 종이 카드 63장에 각 원소 하나의 이름과 원자량, 성질 등을 쓴 다음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해 보았다. 며칠에 걸쳐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고, 심지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서까지 이 일에 몰두했다.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카드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에서 연구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 주 후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었다.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는자신이 작성한 표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오드 등 자신의 표와 차이가 나는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 역시 언젠가는 발견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듬해인 1870년에는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의 특성까지 예측했다. 이제는 그를 경멸하는 과학자들까지 나왔다.
멘델레예프 예측에 적중하는 새로운 원소들의 발견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멘델레예프
하지만 시간은 멘델레예프의 편이었다.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보아보드랑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 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갈륨이었다. 하지만 이 원소는 그가 예측했던 것과 성질은 유사했지만 비중이 달랐다. 멘델레예프는 이 원소의 비중을 5.9라고 예측했는데, 보아보드랑의 실험 결과치는 4.7이었다. 이때도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옳으며 보아보드랑의 측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나중에 재실험을 통해 멘델레예프의 예언이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게르마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원소에 대해 멘델레예프는 비중 5.5인 회색빛 금속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발견된 것 역시 비중 5.47에 회색빛 광채가 나는 금속이었다.
이로써 멘델레예프의 표가 확실하게 증명되었고, 화학도 이제 과학의 한 분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법칙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소는 모두 117개이다.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작성하던 당시와 비교해 54개가 늘어난 것이다. 그 사이 주기율표 자체도 조금씩 개선되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멘델레예프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주기율표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번호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멘델레예프 덕분에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면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 아들의 교육을 위해 시베리아 토볼스키에서 모스크바까지 그 먼 길을 마다 않던 어머니 마리야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아들은 훗날 자신의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이었다. 그는 현대 화학의 초석을 놓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55년 101번째 원소가 발견되었다. 그 원소는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푸른 눈의 과학자이자 이웃 농부들에게 작물 재배법, 치즈 제조법 등을 가르쳐주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고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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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레예프(Dmitri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주기율표(1869)
한국화학연구원 항암제연구센터 조성윤
대한 화학회로부터, 귀중한 책 한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전공이 화학이면서도, 화학자의 인생의 이면에 대해서는 지금껏 모르고 지나쳐 왔다. 오히려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의 화려한 명성과 천재성이 귀에 익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읽는 나로 하여금 화학자로서 지녀야할 중요한 덕목들을 가르쳐 준 책이기도 하다. 더욱 흥미로 왔던 사실은 그가 유기 화학자였으며, 대학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유기화학을 강의하고, 그에 맞는 책을 집필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화학에 끼친 그의 공헌을 너무나 모르고 지나쳐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 지녔던 천재적 감수성, 열정 등이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멘델레예프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암기하기 어려운 주기율표를 만든 사람정도로만 기억했기 때문이다. 화학에서 주기율표만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또 있을까? 주기율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주기율표를 강조한 말 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발견한 주기율표가 아니었더라면, 화학의 세계가 이토록 어마어마한 진보를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기율표는 기지의 원소에 대한 지식을 혼란의 질서로 바꾸어 놓았으며, 근대화학의 기본적 법칙을 수립하였다.이는 30대 한 청년의 대단한 성취였다. 멘델레예프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생,사회정의를 위한 투사, 러시아의 천연자원개발을 도운 과학자였으며, 주기율표가 받아들여진 지 15년 내에 그가 예언한 미지의 세 원소가 증명되는 등 일생을 통해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7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멘델레예프를 기려1955년에 만들어진 원소 101번을 멘델레븀 (Md)이라고 부른다”
이는 “멘델레예프와 주기율표”라는 책의 서언에 나오는 내용이다.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에 위치한 토볼스크 시에서 열네 명의 형제들 중 막내로 태어난다.그의 어머니는 어린 멘델레예프로부터 천재성을 발견하고, 목숨을 걸고 우랄 산맥을 넘어,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화학대학에 그를 입학시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숨을 거둔다.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배고픔, 추위등과 싸우면서 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머니의 이런 갸륵한 희생과 무모한 결단이 없었다면, 멘델레예프 같은 위대한 화학자는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1834년에 태어나 1907년까지 살았다.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유리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만드는 형형색색의 유리그릇들을 보면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어머니에게 묻곤 하였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지식들을, 총명했던 멘델레예프는 그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설명을 해 주곤 하였는데, “크롬의 산화물은 초록색유리를 만들고, 산화망간은 보라색이나 핑크색 또는 자수정 색이 되는데, 얼마나 산화망간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 자주색은 칼륨에서 오거든. 빨간 유리창은 산화구리를 넣어야 돼. 산화코발트는 파란색, 그리고 산화철은 노란색을 만들지.” 어머니는 그의 총명함을 발견할 때 마다, “언젠가 너는 모스크바에 가서 입맛이 당기는 수프처럼 접시위에 담긴 채,공급되는 지식을 찾을 수 있단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어린 멘델레예프는 점차 배움의 길로 모스크바를 향한 꿈을 키우게 된다. 나중에 멘델레예프가 대학을 진학한 후, 그의 어머니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라, 네 길은 말이 아니고, 공부였음을 알아라. 언제나 인내심을 가지고 숭고한 원리의 과학적 진리를 계속해서 추구하거라. 잊지 않겠지?”라는 말을 멘델레예프에게 남기고 세상을 뜬다.
그 후, 그의 생활은 강의와 공부가 그의 밤낮과 주말을 차지하였다. 잠도 적게 잤을 뿐 아니라 종종 식사하러 가는 것도 잊었다. 그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게 된다. 그 후에도 계속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도중, 연구 사정이 아주 열악하여, “언제쯤 러시아가 군대 또는 비밀경찰에 쓰는 돈의 단 몇 퍼센트만이라도 과학에 사용할 줄 알게 될지........”라며 푸념을 하게 된다. 그 때나 지금이나 풍족하지 않은 연구비를 사용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던 중, 독일의 하이델 베르그 대학으로 약 3년 동안 공부할 기회를 갖으면서, 멘델레예프의 학문적 성취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곳에서 키르히호프,분젠 등의 화학자를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분광스펙트럼, 분젠전지, 광도계,흡광계, 광량계 등의 기체 분석법을 섭렵하여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 무렵 유럽의 과학자들 사이에는 원자와 분자를 서로 교체가능하게 사용해 왔다. 어떤 이는 “화학원자”라고 불렀는데 아보가드로를 본 받아 원자를 “기본분자”라고 불렀다. 1868년 말 까지 63가지 물질이 원소로 밝혀졌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7가지 금속원소들을 알았는데, 금, 은, 구리, 납, 주석, 철, 그리고 액체인 수은이다. 수세기 동안 “7”은 신비적 의미를 가졌다. 연금술사들은 비천한 금속을 금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현대화학의 기초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멘델레예프의 두 스승, 분젠과 키르히호프가 그들이 발명한 분광기를 이용하여 세슘과 루비듐을 발견하였을 때, 멘델레예프는 여전히 하이델베르그에 있었다. 1861년 영국의 크룩스가 탈륨을, 1863년 라이히와 리히터가 분광기를 이용하여 무르고 은색이며, 스펙트럼에서 남색의 선을 나타내는 금속인 인듐을 발견하였다. 인듐은 63번째로 발견된 원소가 되었다.
이렇듯 원소가 발견될 때마다, 멘델레예프는 속으로 “과학의 궁전에서는 물질만이 아니라 설계도도 필요로 한다. 즉 조화가 필요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멘델레예프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자연계에서 이 원소들이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멘델레예프는 어떤 연관성을 찾아가기에 주력한다. 그리하여 이 63가지 원소들이 그의 과학적 생애에서 가장 크고, 가장 열중한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뒤이어 많은 세심한 실험자들이 헬륨을 제외한 모든 알려진 원소들에 대하여 원자량을 확립하게 되었다.
멘델레예프는 정확한 원자량을 얻기 위하여 벨기에의 과학자 스타스에게 편지를 써서, 원소들의 원자량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칼슘, 철, 비소, 스트론튬의 원자량은 프랑스의 뒤마에게서 받는다. 체코의 닐손은 토륨을, 브라우너 교수는 텔류륨, 란타늄, 그리고 세륨의 원자량을 제공한다. 그리고 멘델레예프는 이들 원자량과 다른 원자량 모두를 스스로의 실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검증하였다. 그는 흰 카드의 각장에 있는 원소명 옆에, 그 원소의 원자량을 적어 넣었다. 원자량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단서였으며, 그는 이 카드들을 수소부터 원자량 순서로 배열하였다. 그리고 특성도 적어 넣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어떤 원소들의 원자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그들을 포함하는 분자들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원소들의 경우 두개의 원자가 한 개의 산소원자와 쉽게 결합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이를 “원자가”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흰 카드에 그가 축적하여 왔던 모든 데이터 요약인 녹는점, 임계온도, 광택, 퍼짐성, 밀도, 비중과 같은 각 원소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적어 놓았다. 그는 이들로부터 원소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숨겨진 암호를 추출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갖고,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몇 달 동안 원자배열에 몰두하였다. 원자들 간의 규칙을 책상위의 원자량을 비롯한 다른 정보를 가지고, 파악하려 한 것이다. 그 무렵 “ 베라이너의 삼개조”이론으로, 사람들은 보다 포괄적인 원소표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영국학회에서 뉴렌즈는 “모든 원소를 원자량 순서로 나열하면 매 8번째 원소는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순서를 피아노 건반의 8도 음정 (옥타브)에 비유하였다. 이 특이한 관계를 그는 ‘옥타브 법칙’이라고 잠정적으로 제안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몇 가지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8도 음정’에는 화성이 맞지 않은 불협화음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한 회원은 뉴랜즈가 원소들을 알파벳 순서로 배열하였다면, 더욱 성공적이었을 거라고 비꼬면서 말하기도 하였다. 뉴랜즈는 자신의 옥타브 법칙에 대해서 비웃는 반응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과학 연구를 영원히 그만두었다.
비교적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감수성에 근거한 실낱같은 희망을 잡는 심정으로 연구를 하였던가 보다....... 그러나 이 비웃음을 받았던 가설은 놀랍도록 정교하게, 오늘날의 각 원자궤도의 채워짐 이론으로 발전된다.
멘델레예프도 원자표를 만들면서, 베릴륨의 원자량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13.7에서 9.4로 왜 바꾸었는지, 또 칼슘이 원자량을 다른 사람들은 20으로 하는데 왜 40으로 했는지에 대하여 물을 것을 알았다. 그는 이 두 원소들의 성질에 비추어 볼 때, 지금 까지 확립된 이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바꾸었노라고 설명했다. 그런 작업을 몇 달이고 계속하면서, 드디어 1869년 3월 18일 러시아 화학회에서 멘델레예프는 자신의 제자에게 “원소체계의 개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때 발표한 멘델레예프의 이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원소들을 원자량 크기 순서로 배열하면 분명한 주기적 성질을 보인다. (멘델레예프가 원자량 척도에 따른 나열에서 일정간격에 있는 원소들이 서로 유사한 성질을 보인다는 것을 지칭하는 바를 모든 사람들이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원자의 주기적 성질
2. 화학적 성질이 유사한 원소들은 서로 이웃하는 원자량을 가졌거나 (백금, 이리듐, 오스뮴과 같이), 아니면 원자량이 증가하는 것을 보인다 (포타슘, 류비듐,세슘과 같이).....
3. 원소 또는 원소 군을 원자량의 크기로 비교하면, 소위 말하는 원소들은 원자수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화학적 특징의 차이를 확립하게 된다......
다시 한번 수수께끼 같은 원자수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4. 자연계에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는 단순물질들은 원자량이 작다.......
5. 원자량의 크기가 원소의 특성을 결정한다. 이는 분자의 크기가 복합체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6. 우리는 여러 알려지지 않은 단순물질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예를 들면, “알루미늄과 유사한 것과 실리콘과 유사한 것으로 이들의 원자량은65에서 75사이가 될 것이다“ 이 기막힌 말의 중요성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7. 원자들의 무게의 크기로부터 원소들의 여러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 발표로 멘델레예프는 그의 명성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일명 지금의 스타과학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 후 멘델레예프는 자기 제자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알루미늄 다음의 원소 (에카-알루미늄)에 대하여 말하고, 정확한 원자량까지 예측하였다. 그리고 붕소 다음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까지 원자량과 비중을 예측하면서 말하였다.
그 후로, 다른 17개 원소의 원자량도 과감하게 바꾸기 시작하였다. 텔루륨과 요오드의 원자량 순서를 바꾸어 텔루륨은 산소족에 들어가고, 요오드는 플루오르,염소, 브롬이 들어있는 줄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비슷한 이유로, 코발트와 니켈은 물론 금과 백금의 순서도 바꾸었다. 가장 획기적인 변경은 토륨의 원자량을116에서 232로, 우라늄의 원자량을 120에서 알려진 원소중에 가장 무거운 240으로 각각 2배로 바꾼 것이었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이와 같은 변경이 모두 타당한 것으로 입증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16개의 원소들에 대해서 빈칸을 남겨 두었다. 이들 중 에카-알루미늄, 에카-실리콘, 에카-붕소 (여기서 에카는 처음을 뜻함)를 포함한 6가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원자량을 제시하였고, 이 원소들의 몇 가지 성질까지도 기술하였다. 그는 우라늄보다도 원자량이 큰 "초우라늄“ 원소 5개를 예언하였는데,이는 그가 한 예언 중 가장 기막힌 것 중의 하나이다.
이 모든 예언의 기초는 멘델레예프가 발견한 “원소들의 성질은 원소들의 원자량의 주기적 함수이다.”라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 후로 그의 예언에 대한 증명은 러시아 밖에서 이루어졌다. 1875년 프랑스의 젊은 화학자 부아보드랑은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의 광산에서 섬아연광의 화학분석을 하던 중, 멘델레예프가 부르던 에카-알류미늄인 갈륨을, 멘델레예프가 예언한 대로의 원자량 (68)과 비중 (5.9)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가 예언한 것에 대한 검증은 년차를 두고 모두 사실이 되었고, 그가 예언한 원자량, 비중 등이 발견한 사람들의 오차까지도 교정해 줄 정도였다. 갈륨의 비중도 처음에는 4.7로 발표를 하였다가, 수차례의 실험을 반복한 끝에 멘델레예프가 예측해 놓은 값을 얻는다. 이 때 멘델레예프의 나이 40이었다. 해외에서는 명성이 널리 알려져, 그를 화학계의 원로라고 불렀다.
멘델레예프의 업적이 화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멘델레예프에 대해서 접하고 난 후, 그가 광적으로 연구에 전념한 화학자이며 단순히 원소의 주기율을 발견한 과학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국 러시아의 산업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황제들의 독거에 끊임없이 항거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리고 놀랍도록 정교하게 발달한 그의 통찰력과 천재성의 산물인 주기율표는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 버금가는 화학인의 성취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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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3.6 러시아 화학회에서 근대적인 주기율표를 발표하다
19세기 들어 1803년 한 해에만 팔라듐, 세륨, 오스뮴, 이리듐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화학 원소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세상에는 원소가 몇 종류나 존재하는 것일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원소들이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을까?
일반적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고 예측도 불가능했던 19세기 화학계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려면 먼저 뭔가 규칙이나 원리가 필요했다. 한 세기 전 린네가 이명법을 이용해 생물을 분류하면서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했듯이, 이제 뭔가 일반적인 토대가 필요했다. 돌턴의 원자설 이후, 화학은 과거 연금술의 색채를 어느 정도 벗고 과학으로 인정받는 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미흡했다. 과학이라면 모름지기 일반적인 법칙들과 그것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시의 화학은 그렇지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국비 유학 후 상트페데르부르크 교수로 임명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1834년 2월 8일 러시아 토볼스키 인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와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의 열 네 아이 중 막내였다(형제가 정확히 몇이었는지는 문헌에 따라 다르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집에 우환이 겹쳤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운영을 하던 유리 공장이 화재로 불타버린 것이다.
사업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남달리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멘델레예프와 딸 하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모스크바 대학에 보내려 했지만 시베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그곳 대학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멘델레예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곳에서 멘델레예프는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55년 우수한 성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었다. 한동안 크리미아에 있는 오데사라는 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화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국비 유학을 다녀온 후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일반 화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멘델레예프의 어머니 마리아
연구에 지쳐 깜빡 잠든 사이에 꾼 꿈 덕분에 완성된 주기율표
기존 화학 교과서에 불만이 많았던 멘델레예프는 1870년 라는 책을 펴냈다. 판을 거듭하며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을 쓰는 동안 멘델레예프는 화학 원소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를 했다.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 원소들 사이에 분명 일정한 규칙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한 것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가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발표한 논문에 실린 주기율표
화학은 꿈과 인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가 1865년 벤젠의 고리 구조를 밝혀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리고 4년 후인 1869년 멘델레예프가 그토록 알아내고자 했던 원소들의 분류 규칙을 알아낸 것도 꿈 덕분이었다. 그는 종이 카드 63장에 각 원소 하나의 이름과 원자량, 성질 등을 쓴 다음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해 보았다. 며칠에 걸쳐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고, 심지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서까지 이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카드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에서 연구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 몇 주 후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었다.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작성한 표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오드 등 자신의 표와 차이가 나는 원소들의 원자량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 역시 언젠가는 발견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듬해인 1870년에는 빈 칸에 들어갈 원소들의 특성까지 예측했다. 이제는 그를 경멸하는 과학자들까지 나왔다.
멘델레예프 예측에 적중하는 새로운 원소들의 발견
하지만 시간은 멘델레예프의 편이었다.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보아보드랑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 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갈륨이었다. 하지만 이 원소는 그가 예측했던 것과 성질은 유사했지만 비중이 달랐다. 멘델레예프는 이 원소의 비중을 5.9라고 예측했는데, 보아보드랑의 실험 결과치는 4.7이었다. 이때도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옳으며 보아보드랑의 측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나중에 재실험을 통해 멘델레예프의 예언이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게르마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원소에 대해 멘델레예프는 비중 5.5인 회색빛 금속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발견된 것 역시 비중 5.47에 회색빛 광채가 나는 금속이었다.
이로써 멘델레예프의 표가 확실하게 증명되었고, 화학도 이제 과학의 한 분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법칙을 통한 예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소는 모두 117개이다.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작성하던 당시와 비교해 54개가 늘어난 것이다. 그 사이 주기율표 자체도 조금씩 개선되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멘델레예프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주기율표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번호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멘델레예프
"멘델레예프 덕분에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면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 아들의 교육을 위해 시베리아 토볼스키에서 모스크바까지 그 먼 길을 마다 않던 어머니 마리야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아들은 훗날 자신의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이었다. 그는 현대 화학의 초석을 놓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55년 101번째 원소가 발견되었다. 그 원소는 일년에 한 번 정도나 손질해 늘 더부룩한 머리와 턱수염을 한 푸른 눈의 과학자이자 이웃 농부들에게 작물 재배법, 치즈 제조법 등을 가르쳐주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고 명명되었다.
============예측했던 세가지 원소?...==============
갈륨(gallium, Ga), 스칸듐(scandium, Sc) 게르마늄(germnium, Ge)
멘델레예프가 한 일이 그게 전부였다면 (비록 수십 년 뒤에 밝혀질 양성자와 중성자를 알지 못하고 해낸 일이기는 하지만) 그가 제시한 주기율표는 그보다 앞서 다른 이들이 만든 주기율표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화학적 성질을 지닌 원소들을 같은 세로 줄로 배치하려고 멘델레예프는 표 안에 빈 칸을 두었다. 1871년에 이르러 그는 텔루르와 요오드를 자리바꿈하는 등 약간의 조정을 하면서 당시 알려져 있던 63개의 원소를 모두 주기율표에 넣었고, 세 개의 빈 칸을 남기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세 개의 원소에 해당되는 자리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그는 빈 칸이 있는 세로 줄에 있는 인접 원소들의 성질에서 세 가지 원소들의 성질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후 15년에 걸쳐 멘델레예프가 예상한 것과 같은 성질을 지닌 세 가지 원소가 실제로 발견되었다.
1875년에 갈륨(gallium, Ga), 1879년에 스칸듐(scandium, Sc), 1886년에 게르마늄(germnium, Ge)이 발견된 것이다.
=======와 의 차이점?=========
주기율표에 대해서 멘델레예프가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현대에 사용되어지는 주기유표는 모즐리의 주기율표이지요.
가장 큰 차이점은.....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자량 순서로 되어있다는 것이고 모즐리는 원자번호 즉 양성자수 순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듯 보이지만...몇가지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지요.
중요한 앞번호 원소들을 생각해보면.....
대표적인 것이 칼륨과 아르곤의 차이입니다.
만약 이것을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로 본다면 아르곤이 더 무겁기에 칼륨보다 더 뒤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질상 아르곤은 0족에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수하였지만 아르곤(Ar)과 칼륨(K), 코발트(Co)와 니켈(Ni), 텔루르(Te)와 요오드(I) 등이 원자량의 순서에 따라 예견된 것과는 다른 성질을 보여준다는 결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결점은 1913년 영국의 모즐리에 의해 원자번호가 결정되고 이에 따라 원소를 배열함으로 해결된 것이지요.
1913년, 모즐리는 원소의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X-선의 파장을 측정하여 이것으로부터 원소의 원자번호를 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원자번호의 순서로 배열하면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고 오늘날의 현대적 주기율표로 발전시킨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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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기율표에 대해서 멘델레예프가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현대에 사용되어지는 주기유표는 모즐리의 주기율표이지요.
가장 큰 차이점은..
근대 과학의 아버지 멘델레예프
양정성 기자
세계 과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학자들에 의한 자연 속의 새로운 발견은 인류사회의 지식의 향상과 자연 신비의 탐구 및 인류를 위한 연구를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촉진시켰다. 그런 과학자들의 이름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인물이 멘델레예프다.
오늘날 화학이 이처럼 발전하게 된 뿌리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 ‘주기율표의 창시자’ 등의 수식이 항상 붙어 다니는 멘델레예프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멘델레예프는 어떤 다른 화학자들보다 오늘날 화학도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가 원소의 주기율을 만든 이후 화학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유명한 과학자인 그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인류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여기에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한다.
멘델레예프의 성공은 그의 어머니의 가정교육과 직결되어 있다. “학문에서는 먼저 경험하지 않고 추론에 의지하는 경향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하며 삶에 있어서는 말보다 행동을 우선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평생 지켜나간 그 실천력을 알 수 있고 또한 교육자, 학자, 민주 시민으로서의 멘델레예프의 삶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멘델레예프는 1834년 1월 27일 톨스토이보다 6년 늦게, 차이코스프키보다 6년 빠르게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멘델레예프는 당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이반 파브로빗치(Ivan Pavlovitch) 아버지와 이 지방 출신 마리아(Maria Dmitrievna)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14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평소 멘델레예프에게 “몸만 위하여 걱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사람은 영혼과 정신을 위하여 하루 중 몇 시간이라도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멘델레예프의 가정은 아름다운 가정이었으며 부러움의 표상이었지만 항상 봄바람만 불지는 않았다.
멘델레예프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유리공장을 경영하던 어머니는 공장에 불이나자 실업자가 되었으며 아이들도 병약해서 하나 둘씩 죽어가서 멘델레예프가 대학을 진학할 무렵에는 그의 누나 하나만 남게 된다.
멘델레예프 어머니는 정든 고향을 버리고 아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모스코바로 이사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성적이 최하위라 멘델레예프를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다. 이때 단 하나의 마지막 소망이었던 대학진학의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어머니의 낙망과 눈물겨운 얼굴은 멘델레예프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무서운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용기를 내어 다시 페테루스불크로 가 대학에 원서를 접수한다.
마침 이 대학의 총장은 멘델레예프의 아버지와 친한 대학 동창생이 어서 쉽게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입학의 기쁨도 순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평소 많은 자식을 낳고 얻은 고질적인 심장병의 악화로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게 된다.
때는 1850년 9월 가을바람이 들국화의 꽃잎을 스칠 때 만리타향, 조그마한 어머니 무덤 앞에서 엎드려 흐느끼는 고아 멘델레예프의 눈물겨운 심정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부모도 없고 재산도 없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외로운 고아 멘델레예프는 그날부터 새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멘델레예프는 자기 책상 앞에 삼각형을 그려놓고 그 꼭짓점에 도서관, 강의실, 기숙사를 적어놓고 4년 동안 삼각형만 다니는 생활을 계속한다. 그 결과 토볼스크 고등학교 낙제생이 펱루스불크대학에서는 전체 수석을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운동 부족으로 폐병 3기의 환자가 되어 1년 후엔 죽게 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다.
아버지 친구의 총장의 특별배려로 기후가 좋은 러시아 크리미아 지방의 중학교 화학교사의 발령을 받게 된다. 하느님의 가호인지 1년 후 죽는다는 멘델레예프는 폐병이 씻은 듯 완쾌되고 그의 모교 대학원에 다시 입학하고 졸업을 하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37년째 되던 해 즉 1887년에 ‘수용액의 연구’라는 책을 출판하게 될 때 그 권두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어머니의 영 앞에 올렸다.
“이 연구는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신의 막내아들이 삼가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님은 여자의 몸으로 공장을 경영하시고 그 피땀으로 막내아들인 저를 양육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여 아들을 격려하셨으며 사랑과 자비로 엄하게 꾸짖어 주셔서 이 아들을 과학의 발전에 바치시려고 시베리아로부터 수만리를 걸으셔서 어머님과 저의 전 생애를 뜻하신 대로 다 바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어머니께서는 훈계하여 말씀하시기를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라. 믿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실행뿐이다. 거짓말에 속지 말라. 구하여야 할 것은 신의 지혜와 진리의 지혜이니라. 항상 이것을 바라고 구하여라.’ 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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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시베리아 출신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은 알파벳 이름이 가득찬 팻말을 들고 장례행렬을 이끌었다.
멘델레에프가 완성한 ‘주기율표’였다. 그렇다면 멘델레예프야말로 ‘수헬리베 붕탄질산…’으로 시작되는 노래말까지 지어 외우게 만든 주입식 교육의 원흉이라 할 수도 있을까. 그러나 이 주기율표 안에는 태양과 흙, 생물의 세포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원소가 담겨있다.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118종) 가운데 지구 전체 무게의 65%는 산소(O)와 철(Fe)이 차지하고 있다. 우주 전체를 보면 우주 질량의 97%는 수소(H)와 헬륨(He)이 차지하고 있다.
고대 사람들의 주기율표는 ‘흙, 공기, 불, 물’이었다. 이 4가지 물질을 만물의 기본요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삼라만상이 원소, 즉 ‘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알갱이’(그리스어 Atomos)로 이뤄졌다고 주장한 이는 기원전 5세기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였다. 이후 새로운 원소들이 속속 발견되고, 19세기 중반에는 각 원소의 원자량까지 정확하게 계산됐다. 화학자들은 각 원소간 규칙을 찾고자 했다.
영국의 존 뉴랜즈(1837~1898)가 원소들을 원자량 순서대로 죽 늘어세우고 번호를 매기자 희한한 규칙을 발견했다. 원소들이 여덟번째 간격으로 비슷한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뉴랜즈는 이것을 음악의 옥타브가 여덟번째 음정에서 반복된다고 해서 ‘옥타브의 법칙’이라 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뉴랜즈가 처음 번호를 매긴 표에는 공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는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이 훗날 차지해야 할 몫이었으니까…. 그런데 빈칸이 꺼림칙했던 뉴랜즈는 다른 원소들을 무리하게 끼워넣었다. 천려일실이었다. 그는 졸지에 조롱의 대상이 됐다.
반면 멘델레예프는 1869년 각 원소의 성질을 기록한 카드로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빈칸을 그냥 두었다. 그러면서도 공란에 장차 발견될 원소의 이름과 성질까지 정확히 예측했다. 예컨대 아연(Zn)과 비소(As) 사이에 원자량 68과 72의 원소가 두 개 더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런데 1875년과 86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란의 두 자리에 들어갈 갈륨과 게르마늄이 발견됐다. 그는 또 붕소(B)와 알루미늄(Al) 사이에 원자량 44에 가까운 원소가 발견될 것이라 내다봤다. 그런데 얼마 후 스웨덴의 라르손 닐손이 육세나이트라는 광물에서 그 원소를 발견했다. 그 원소의 이름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딴 ‘스칸듐’이었다. 스칸듐의 원자량은 멘델레예프의 예측과 흡사한 44.956이었다. 신묘한 족집게가 아닌가. 이후 화학자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양성자를 토대로 정밀한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천연원소는 현재 93번(넵투늄·Np)까지지만, 이번에 새롭게 정식이름(사진)을 얻은 113~118번까지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에 만든 인공원소이다. 멘델레예프는 삼라만상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족보까지 꿰뚫은 천재였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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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Менделеев/Dmitri Mendeleev
1834년 2월 8일 ~ 1907년 2월 2일
1. 소개2. 생애3. 일화
1. 소개[편집]
러시아의 화학자이자 화학의 아버지.
원소들이 가진 규칙성에 따라 원소들을 나열한 표인, 주기율표를 고안한 화학자로, 현대 화학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에도 원소를 질량 순으로 나열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규칙성을 찾아 나열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전부 조잡한 수준이었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어쨌든 원소들에 모종의 규칙성이 있음은 모두가 추측하던 것이지만, 이걸 제대로 파악하여 제대로 된 표로 정리한 것은 멘델레예프가 최초다. 세계 과학계를 뒤집어 놓은 원소 주기율표를 발표했을 때가 고작 35세였다.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했다. 아니, 그냥 현대 화학을 만들었다. 화학을 배울때 제일 먼저 만나는 주기율표가 없어진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애초에 주기율표가 정립되기 전에는 화학은 제대로 된 과학 취급조차 못 받았다!
다만 아쉽게도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1906년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불소의 분리에 성공한 무아상에게 단 1표 차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당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소의 주기성을 파악해 정교하게 원소를 나열한 것이었을 뿐, 원소가 왜 주기성을 가지고 있는 지는 알려지지 않은 탓에, 획기적인 발견이었음에도 포스가 좀 딸렸다. 러시아 국적이기에 차별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1907년에는 사망했기 때문에 탈 수 없었다.[1] 그러나 저 주기율표가 화학과, 나아가 물리학에까지 끼친 영향 덕에 훗날 '프라우다' 지에 '러시아 화학의 개척자'라는 헌사가 실렸을 정도이다.
지금은 원소의 주기성을 일으키는 원인이 밝혀지면서 확고하게 입증된 탓에 주기율표 = 넘사벽 취급을 받지만, 주기율표를 멘델레예프가 고안했을 당시에는 '원소의 주기성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원소들을 정밀하게 나열한 것'에 그첬다. 그래서 기나긴 기간동안 엄청난 고생[2]이 들어간 불소의 분리와 팽팽하게 맞붙은 업적이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주기율표가 압도적으로 더 대단한 업적으로 여겨지지만…. 후일, 주기율표의 굉장한 완성도가 후일 전자껍질이 밝혀지면서 입증되고, 미발견 원소에 대한 멘델레예프의 예측이 딱딱 들어맞으면서 모두가 오오 멘델레예프 오오를 외치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때 살아있었다면 험한 꼴 봤을지도….
주기율표 101번 멘델레븀이 여기에서 따왔다.
2. 생애[편집]
동시베리아의 '토볼스크'(Tobolsk)라는 마을에서 1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는 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는 유리공장 주인의 딸이었는데, 특히 어머니는 당시 여성들에겐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전근대적인 사회상에 저항해 오빠들의 공부를 훔쳐보는 것으로 배웠을 정도로 학식은 물론 사상적으로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드미트리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두 눈을 실명하여, 그 시점에선 친정의 유리공장을 물려받아 육아는 물론 경영까지 떠맡았음에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해낸 억척스러움도 갖고 있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위대한 과학자 멘델레예프는 고교 시절까지 공부에 재능을 보이지 않았다. 드미트리가 15세가 됐을 적에 부친이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유리공장도 불이 나 전소되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지게 되자, 모친은 이 모든 상황들을 타개하기 위해 드미트리와 그 손위의 누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상경했다. 그리고 고등 교육기관인 모스크바 대학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고자 했으나, 당시는 타 지역 출신에 대한 입학 제한 규정 등이 존재했던 터라 시베리아 깡촌 출신의 드미트리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과 의학학교에도 신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3] 결국, 대안으로 드미트리는 교원 양성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교원 양성소에 들어간 지 10주만에, 드미트리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사랑하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 것이다. 모친이 작고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매진하여, 우수학생에게 수여되는 금메달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 때 본격적으로 화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1855년, 건강이 안 좋아 러시아 남부의 오데사로 자청해 발령을 받고 교원생활을 시작하며 동시에 본격적인 화학 공부를 하기 위해 준비하여 이듬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고 다시 1년 후인 1857년에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2년 후인 1859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국비 유학하여, 이 때 카를스루에 학회(1860년 9월)에서 이탈리아의 화학자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화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에 귀국했으나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과학 교재 관련 저술 및 편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186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공업연구소 화학 교수로 처음 발령, 3년 뒤엔 일반화학 교수가 되었다.
이 당시, 자기 눈에 차는 교재가 없어서 자기 손으로 500쪽짜리 '화학원론'이란 교과서를 집필했는데, 이게 세계적으로 히트해서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고, 또한 그 책을 저술하면서 당대 화학자들의 화두였던 원소들의 분류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이 '원자론'을 발표하면서 원자량의 개념을 내놓은 이래로 많은 화학자들은 원소들간의 유사성 및 논리적인 순서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는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는 주장을 했고,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와 뉴랜즈는 서로 교류하며 원소의 규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원소의 구성 체계에 대한 제안》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때 멘델레예프는 불과 35세였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어서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기존의 원자량 측정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비어있는 칸의 원소들도 곧 나타나게 될 것이라면 자신감을 보였다. 지금 시대가 아닌 당시 사람들이야, 당연히 이런 용자스런 반응에 '이뭥미' 내지는 '이뭐병'했지만….
그 후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부아보드랑이 갈륨을 발견했다. 드미트리는 갈륨의 발견은 자신이 에카알루미늄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한 덕분이라고 주장했고 부아보드랑은 갈륨을 발견한 실제 연구는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드미트리는 부아보드랑이 발표한 갈륨의 데이터를 훑어보고는 아무 근거도 없이 일부 측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는데, 갈륨의 밀도와 질량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값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실험 결과 그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자 부아보드랑은 자신이 발표한 데이터를 철회하고, 드미트리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게르마늄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드미트리가 예언한 것과 거의 딱 들어맞는 성질과 원자량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이론이 점차 인정받으면서 화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라는 말도 나왔다. 듬성듬성하던 주기율표도 시간이 지나면서 빠진 부분이 채워지고 개선되어졌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 대우는 매우 미묘했는데,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못했다. 1890년에는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이상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멘델레예프가 관여해 국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에는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이때 멘델레예프는 보드카의 표준 도수 40도를 정했다. 후세의 보드카 브랜드 중에는 '멘델레예프가 도수 품질을 정한 보드카'란이 사실을 홍보에 이용하기도 한다. 다만 멘델레예프는 의학이나 생리학자가 아니라 순수 화학자이고, 도량형국 국장의 위치에서 정한 것이므로 객관적인 통계 자료를 통해 보드카의 도수를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말년에 냉대를 받다가 폐렴으로 190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원소 주기율표를 들고 따랐다.
그의 아들인 바실리 멘델레예프(1886~1922)는 크론슈타트 엔지니어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의 멘델레예프 전차를 설계하였다. 멘델레예프 전차는 생긴건 컨테이너 박스 비슷한 차체에 정면에 120mm 주포를 달은 아주 단순한 형식이었지만 당시 고안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전차였다. 가스압 피스톤 서스펜션을 통해 트랙의 장력 조절과, 높이 조절을 통해 트랙/구동부를 차체 안으로 넣어 보호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게만 해도 175톤이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중량과 기술력의 부족으로 인해 러시아군에게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령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차체에 주포가 고정된 전형적인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차 디자인인지라 이후 발전하게 되는 전차 기술에 뒤쳐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짜르 탱크보다는 전투의 효율성은 높앗을것으로 보인다. 짜르 탱크보단 눈에 띄지도 않고, 전면 150mm / 후면 100mm 수직장갑의 방어력도 그렇고. 티거 중전차가 차체 정면 장갑이 100mm, 포방패 장갑이 110mm인 점에서 상당한 두께인 셈. 다만 러시아의 당시 기술력으로 볼때 방호력이 제대로 제값을 하긴 어려울테지만 짜르 탱크에 비하면 상당한 떡장. 화력도 짜르 탱크는 측면에 달린 9파운드 포가 가장 강한 화력인데 비해 멘델레예프 전차는 120mm 해군용 함포를 탑재해서 화력 면에서도 앞섰다. 적어도 이동식 포대로 쓸 수도 있는 활용성은 있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역이 있다.
3. 일화[편집]
평생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거칠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여행을 할 때도 늘 3등칸을 탔다.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석유화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유조선과 송유관을 설계하고 저장 탱크도 만들었다.
세상의 관행이나 부조리에 저항했던 모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인지 진보적이고 사회 개혁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라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라는 유언을 소중히 간직하여, 훗날 자신의 논문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적어놓기도 했다.
상술한 학생들의 저항 활동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 위에서 인세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들인 농장을 경영할 때도 근대적인 농법을 도입해 수익을 올렸는데, 그는 이 농법을 주변의 다른 농가들에게도 흔쾌히 가르쳐주었으며, 아울러 치즈 제조법까지 가르쳐주었다.
그야말로 화학자라는 공인으로서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라는 개인으로서도, 유능하면서도 선량했던 인물.
[1]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한다. 단, 수상자 발표 이후 사망한 경우는 예외.[2] 문자 그대로 기나긴 시간 동안 개고생을 했다. 불소가 위험하기도 해서 실험하다 죽은 사람도 많다. 무아상 본인도 불소에 노출되어 한쪽 눈을 잃고 건강을 해쳤다.[3] 이 당시, 시체 해부 장면을 보고 졸도해 떨어졌다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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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마음 속의 자유를 얻었다. 두려워서 말 못할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누구도, 또 어떤 것도 나를 침묵시킬 수 없다. 아주 좋은 느낌이다. 인간이라는 느낌이다. 여러분도 이런 느낌을 가졌으면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 속의 자유를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나의 도덕적 책무다.”
이 말은 모든 물질의 성분이라고 할 수 있는 원소의 족보인 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화학자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yev 1834~1907)가 그의 마지막 대학 강의에서 들려준 위대한 명언이다.
주기율표는 원소를 구분하기 쉽게 성질에 따라 배열한 표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처음 제안했으며, 헨리 모즐리가 1913년 이를 개량시켜 만든 것이 오늘날 표준 주기율표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 위키피디아
“나는 평화를 추구하는 진화론자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05년, 그가 평생 교육자로 몸담고 있었던 성 피터스버그 대학 마지막 강의에서 제자들에게 들려 준 말이다. 이 강의를 끝으로 그는 대학은 물론 모든 연구와 제자들과도 영영 이별을 고한다. 곧 닥칠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멘델레예프의 마지막 강의 이야기는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평화를 추구하는 진화론자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나가라. 연구하며 평화를 추구하고, 연구 속에서 평온을 찾아라.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스쳐가는 행복들,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연구는 길고 영원한 기쁨을 남긴다. 그러나 그 연구는 다른 사람을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과학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을 이룩한 멘델레예프는 성 피터스버그 대학에서 물러나 지병인 결핵과 싸워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생에 대해 후회가 없었고, 죽을 날이 멀지 않지만 평온하고 마음의 행복은 넘쳐 흐른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또 항상 기쁜 마음으로 공부하고 남을 위해 노력하라고 당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학문적 철학 속에는 거룩한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
1907년 1월 20일, 73세의 일기로 간병인이 읽어 주는 쥘 베른(Jules Verne)의 공상과학소설(SF) ‘북극탐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영원의 안식처로 떠났다. 멘델레예프는 죽는 날까지도 이처럼 자연과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세기 프랑스 출신으로 근대 SF의 선구자로 통하는 쥘 베른은 미래를 정확히 묘사한 선구적 소설가로 통한다. 멘델레예프는는 늘 “쥘 베른은 우주적인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물고 아름다운 능력이다. 그가 훌륭한 시인이자 놀라운 예언자였으며 능력 있는 창조자였다”고 말하곤 했다.
제자들 주기율표 들고 장례 행렬 이끌어
멘델레예프가 죽은 뒤 그의 장례식은 독특했다. 그의 제자들은 알파벳 이름이 가득 찬 팻말을 들고 장례행렬을 이끌었다. 알파벳은 다름 아닌 그가 완성한 주기율표였다. 소위 오늘날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수헬리베 붕탄질산…’으로 시작되고 노래 말까지 지어 외워야 하는 주기율표가 장례식의 제일 선두에 등장했다는 말이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안에는 태양과 흙, 생물의 세포 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원소가 담겨있다.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118종) 가운데 지구 전체 무게의 65%는 산소와 철이 차지하고 있다. 우주 전체를 보면 우주 질량의 97%는 수소와 헬륨이 차지하고 있다.
고대 사람들의 주기율표는 ‘흙, 공기, 불, 물’이었다. 이 4가지 물질을 만물의 기본요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원자, 즉 ‘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알갱이’(그리스어 Atomos)로 이뤄졌다고 주장한 이는 기원전 5세기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였다. 이후 새로운 원소들이 속속 발견되고, 19세기 중반에는 각 원소의 원자량까지 정확하게 계산됐다. 화학자들은 각 원소간에 얽혀 있는 규칙을 찾고자 했다.
앞으로 발견될, 심지어 인공원소까지 알아 맞춰
그러면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완성하는데 공헌한 것은 무엇일까? 과학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주기율표 개발로 잘 알려졌다. 그의 주기율표는 원소들은 점점 증가하는 원자의 무게(원소의 질량)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주기율표를 이용해서 멘델레예프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원소들의 성질을 정확히 예견할 수 있었다.”
멘델레예프가 만들어 낸 주기율표에는 원래 63개의 원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외에도 앞으로 발견될 원소들을 위해 빈칸을 남겨 두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차츰 그 빈칸에 모든 원소가 채워졌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질량 92번인 우라늄도 마지막으로 발견됐다.
멘델레예프에 앞서 영국의 분석화학자 존 뉴랜즈(John Newlands 1837~1898)가 원자량의 체계에 따라 원자량의 순서에 번호를 매기다가 희한한 규칙을 발견했다. 성질이 닮은 원소들이 여덟 번째 간격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고 음악의 옥타브가 여덟 번째 음정에서 반복된다고 해서 ‘옥타브의 법칙’이라 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뉴랜즈가 처음 번호를 매긴 표에는 공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빈자리는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이 훗날 차지해야 할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빈칸을 남겨두기가 꺼림칙했던 뉴랜즈는 다른 원소들을 무리하게 끼워 넣었다. 엄청난 실수였다. 그는 졸지에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그의 공로를 인정한 학자는 바로 멘델레예프였다.
멘델레예프는 1869년 각 원소의 성질을 기록한 카드로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빈칸을 그냥 두었다. 그러면서도 공란에 장차 발견될 원소의 이름과 성질까지 정확히 예측했다. 예컨대 아연(Zn)과 비소(As) 사이에 원자량 68과 72의 원소가 두 개 더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1875년과 1886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란의 두 자리에 들어갈 갈륨과 게르마늄이 발견됐다.
그는 또 붕소(B)와 알루미늄(Al) 사이에 원자량 44에 가까운 원소가 발견될 것이라 내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스웨덴의 라르스 닐손(Lars F. Nilson)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그 원소(에카붕소)를 발견했다. 그 원소의 이름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이름을 딴 스칸듐(Sc)이었다. 스칸듐의 원자량은 멘델레예프의 예측과 흡사한 44.956이었다.
삼라만상을 이루는 원소의 족보를 알아 맞추는데 그야말로 신묘한 족집게였다. 이로 인해 멘델레예프가 꿈 속에서정리된 주기율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다. 주기율표라는 자연의 규칙을 찾는데 바로 그 영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후 화학자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양성자를 토대로 정밀한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천연원소는 현재 93번(넵투늄·Np)까지지만, 이번에 새롭게 이름을 얻은 113~118번까지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공원소이다. 멘델레예프는 과거는 물론 미래에 태어날 원소의 족보까지 꿰뚫은 천재였다.
원소의 주기율을 제안하고, 스칸듐의 존재와 성질을 예언한 멘델레예프. 그에 의해 화학은 예측 가능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위키피디아
혁명의 태동기, 어머니가 학문의 길을 열어 줘
멘델레예프는 러시아 정치범 유배지인 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서 14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5년 시작된 피로 얼룩진 러시아 혁명의 태동기를 지켜보면서 생을 마감한 멘델레예프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격동기에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피난처는 어머니였다. 공장 노동자인 어머니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학문의 길을 열어 의지할 곳이었다. 멘델레예프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얼마나 대단한 여성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어머니는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쓸데 없는 망상을 하지 말라. 연구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인내를 갖고 신성하고 과학적인 진실연구에 매달려라.’”
“그녀는 변론이 얼마나 사람을 속이는지,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폭력이 없는 과학, 사랑과 단호함을 통해 모든 미신과 거짓, 그리고 잘못을 없애고 미래의 자유와 행복이 내면의 기쁨을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신성한 것으로 간직했다.”
위대한 과학자 멘델레예프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 멘델레예프는 수백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도 서두에는 항상 “나의 이 연구를 세상을 하직한 존경하는 어머니에게 바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김형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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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는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당시 알려진 63개 원소들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가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가 꿈 때문에 원소들의 분류 규칙을 알아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는 꿈속에서 모든 원소들이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표를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즉시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 대한 당시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진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었다. 하지만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승자는 멘델레예프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가 예언에 맞는 원소들이 발견됐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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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란, 우주 상에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공적으로 아주 잠깐이나마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원소를 규칙에 따라 배열해놓은 표입니다.
기호로 써져 있어서 안 와닿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탄소(C, 6번), 산소(O, 8번), 질소(N,7번), 철(Fe, 26번), 금(Au, 79번), 구리(Cu, 29번) 등이 모두 다 들어있습니다. 화학과, 화공생명학과, 기타 일반화학이 필수과목인 모든 학과생들은 이것을 외우라고 강요당한 적이 있을 겁니다. 저도 과외를 하거나 할 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주기율표는 외웠나"이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화학 관련 교수님들은 주기율표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살짝 비틀어서 시험 문제로 내기도 하고요.
그럼 이쯤에서 주기율표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의문점이 생기시겠죠, "저게 왜 중요한 것이냐?".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지금부터 해 나가려 합니다.
1. 순서가 '양성자 개수' 순서이다.
간혹가다 화학과 분들도 질량 순으로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아닙니다. 대체로 번호가 작으면 원자량(질량)이 더 작으나, 대표적인 오류인 52번 텔루르(원자량 127.6) - 53번 요오드(원자량 126.904) 등의 예시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원자에는 +를 띄는 양성자라는 것과 -를 띄는 전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의 개수는 화학에서의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데, 원자 번호는 양성자 수 (or 이온이 아닌 상태에서의 전자 수)를 나타내기 때문에, 번호만 기억한다면, 해당 원자가 몇개의 양성자, 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매치가 되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2. 좁은 관점에서, 같은 세로줄에 있는 원소들은 성질이 비슷하다. (수소 제외)
위의 주기율표에서 세로줄 (Group 1~18 이라고 되있는것)에 있는 6~7 원소들은 대체로 성질이 비슷합니다. 대표적으로 1족(첫 째줄)의 경우 금속이고, 무른 성질의 띄며, 물에 넣으면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14족(14번째 줄) 아이들인 C, Si, Ge 등은 모두 반도체의 소재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18족(마지막 줄)의 He(헬륨가스. 마셔도 되는 그 가스), Ne(네온사인에 사용), Ar 등은 매우 안정, 안전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원소 하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면, 같은 세로줄에 있는 아이들은 다 비슷비슷하겠구나 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3. 넓은 관점에서, 주기율표를 몇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위의 주기율표에서 같은 색깔은 비슷한 성질을 가지기때문에 일부러 같은 색깔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가고, 비슷한 아이들끼리 아무 패턴없이 떨어뜨려 놓은 것이 아닌,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1,2,3번을 종합하면, 우리가 만약 주기율표를 다 외우게 된다면, 그 어떤 원소가 나오더라도 대략적인 성질을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율표가 중요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지금 이걸 보시는 이공계 몇몇 분들은 (특히 저학년), 저걸 진짜로 외워야 하는가, 몇번까지 외워야 하는가 등의 의문점이 생길 수 있는데, 제 경험상 화학과가 아닌 분들은 20번 까지만 외워도 충분하고, 화학과의 경우 30번까지는 외우길 추천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시험에서 주기율표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외워서 손해볼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 무작정 암기하는 것을 되게 싫어하는데, 주기율표만큼은 예외적으로 외우라고 추천하는 편입니다.
각설하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주기율표의 탄생에 기여한 과학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주기율표의 발명가'라고 불리는 인물은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입니다.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며, 많은 책에서 주기율표를 고안하고, 만든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멘델레예프가 갑자기 자다 일어나서 주기율표를 쓱쓱 그려낸 것은 아니고, 그 당시에 이미 주기율표가 만들어질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멘델레예프 이전의 세대, 돌턴(1766년생)이나 라부아지에(1743년생), 프리스틀리(1733년생) 등의 화학자 세대에는 알고 있는 원소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끽해봤자 산소, 수소 정도?. 따라서, 그들은 일련의 표를 만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밝혀진 원소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죠. 그 시대 화학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의 수가 많아봤자 10개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굳이 어떤 규칙에 따라 나열할 필요도, 성질을 쉽게 알려고 할 필요도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발견된 원소의 수가 많아졌고, 과학자들은 이들을 적당한 근거에 의해 분류하여 표로 만드려고 노력합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되베라이너 (세 쌍 원소설), 뉴랜즈 (옥타브설) 등이 대표적이죠.
이러한 와중에 멘델레예프가 과학계에 떠돌던 힌트들을 모두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연구결과를 더해서 원소들을 원자량 순서로 배열한 주기율표를 만들게 됩니다. (앞서 이것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니 앞선 가설들도 모두 잘 맞고, 일정한 패턴을 띄게 되어 원소들 간의 성질 차이 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표로 딱 만들고 확신이 서게 되니,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이 어느 위치에 있고, 어떤 성질을 띌 것이다 라는 것을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되었는데, 멘델레예프가 있을 거라고 예언한 갈륨, 게르마늄 등이 몇십 년 뒤에 정확히 그 위치에 발견되면서 주기율표가 상당히 좋은 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됩니다.
보통 여기까지가 흔히 알고 있는 주기율표의 역사이고, 저는 잘 안알려진 인물인 모즐리 (Henry Moseley)에 대한 소개를 첨가하려고 합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의 과학자로, 당시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문제점으로 지목되었던, '원자량 순서로 하면 27번 Co와 28번 Ni의 순서가 맞지 않는다'를 '원자량 순서가 아닌 양성자 수로 하면 해결된다'라고 발표하였고, 이후 모즐리의 말이 맞는 걸로 판명나면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주기율표는 모즐리의 주기율표가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즐리가 멘델레예프보다 인지도가 심히 낮은 것은 그가 29살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멘델레예프가 정말 대단한 업적을 세우고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노벨상 수상에 실패 (앞서 말한 치명적인 문제점 + 그당시 영국/프랑스가 잡고 있던 과학계에 뜬금없는 러시아인 + 2번째 후보에 올랐는데 사망)했는데, 모즐리의 경우 일단 살아있고, 영국인이고,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문제점까지 해결했기 때문에 당연히 후보에 오르게 되고, 그 당시 경쟁자도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수상이 확실시 되었습니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20대 과학자, 거기에 영국인. 노벨상 까지 받으면 정말 금상첨화.
모즐리가 몇 십년 더 살아서 그런 천재적인 머리로 몇 개의 연구성과를 더 내었다면, 그는 뉴턴-아인슈타인-슈뢰딩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썩 유쾌한 예시는 아니지만, 2차 대전의 맨하탄 프로젝트의 멤버들인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보어, 페르미, 폰 노이만, 파인만 등이 모두 노벨상 수상자이거나 그에 필적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보면, 모즐리가 2차 대전때까지 살아있었더라면 훨씬 더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들을 모두 뒤로 한 채, 모즐리는 1차 대전 때 자원 입대하여 참전했다가 노벨상 수상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전사하고, '죽은 사람은 노벨상 후보로 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에 의해 노벨상 수상에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화학의 상징이자, 화학에서 가장 중요한, 모든 화학과 교수님들의 연구실 벽면에 붙어있는 주기율표를 발명한 두 인물은 모두 노벨상을 못받고 끝나게 됩니다. 어찌 보면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이죠.
문과 분들은 모즐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 주제를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이며, 더 정확히는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의 업적에 대해 소개하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사진 이외의 그 어떤 글도 복사-붙여넣기 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원소의 상태(상온에서)
금속
비금속
고체
액체
기체
미지
마그네타색은 원자번호
알칼리 금속
알칼리 토금속
란타넘족
악티늄족
전이금속
전이후금속
준금속
비금속
할로젠
비활성기체
족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주기
1
H 1
수소
He 2
헬륨
2
Li 3
리튬
Be 4
베릴륨
B 5
붕소
C 6
탄소
N 7
질소
O 8
산소
F 9
플루오린
Ne 10
네온
3
Na 11
소듐
Mg 12
마그네슘
Al 13
알루미늄*
Si 14
규소
P 15
인
S 16
황
Cl 17
염소
Ar 18
아르곤
4
K 19
포타슘
Ca 20
칼슘
Sc 21
스칸듐
Ti 22
타이타늄
V 23
바나듐
Cr 24
크로뮴*
Mn 25
망가니즈
Fe 26
철
Co 27
코발트
Ni 28
니켈
Cu 29
구리
Zn 30
아연
Ga 31
갈륨
Ge 32
저마늄*
As 33
비소
Se 34
셀레늄*
Br 35
브로민
Kr 36
크립톤
5
Rb 37
루비듐
Sr 38
스트론튬
Y 39
이트륨
Zr 40
지르코늄*
Nb 41
나이오븀*
Mo 42
몰리브데넘
Tc 43
테크네튬
Ru 44
루테늄*
Rh 45
로듐
Pd 46
팔라듐
Ag 47
은
Cd 48
카드뮴*
In 49
인듐
Sn 50
주석
Sb 51
안티모니
Te 52
텔루륨
I 53
아이오딘*
Xe 54
제논
6
Cs 55
세슘
Ba 56
바륨
57~71
란타넘족
Hf 72
하프늄*
Ta 73
탄탈럼*
W 74
텅스텐
Re 75
레늄*
Os76
오스뮴*
Ir 77
이리듐
Pt 78
플래티늄*
Au 79
금
Hg 80
수은
Tl 81
탈륨
Pb 82
납
Bi 83
비스무트
Po 84
폴로늄*
At 85
아스타틴
Rn 86
라돈
7
Fr 87
프랑슘
Ra 88
라듐
89~103
악티늄족
Rf104
러더포듐
Db105
더브늄*
Sg106
시보귬*
Bh107
보륨
Hs 108
하슘
Mt 109
마이트너륨
Ds110
다름슈타튬
Rg 111
뢴트게늄*
Cn112
코페르니슘
Nh113
니호늄
Fl 114
플레로븀*
Mc115
모스코븀*
Lv116
리버모륨
Ts117
테네신
Og118
오가네손
원자번호 118번 이후...
미발견•미확정 원소는 여기로.
*:끝말잇기 한방단어
란타넘족
La 57
란타넘
Ce 58
세륨
Pr 59
프라세오디뮴*
Nd 60
네오디뮴*
Pm 61
프로메튬
Sm 62
사마륨
Eu 63
유로퓸*
Gd 64
가돌리늄*
Tb 65
터븀*
Dy 66
디스프로슘
Ho 67
홀뮴*
Er 68
어븀*
Tm 69
툴륨
Yb 70
이터븀*
Lu 71
루테튬
악티늄족
Ac 89
악티늄*
Th 90
토륨
Pa 91
프로탁티늄*
U 92
우라늄*
Np 93
넵투늄*
Pu 94
플루토늄*
Am 95
아메리슘
Cm 96
퀴륨
Bk 97
버클륨
Cf 98
캘리포늄*
Es 99
아인슈타이늄*
Fm 100
페르뮴*
Md 101
멘델레븀*
No 102
노벨륨
Lr 103
로렌슘
멘델레예프는 1861년 페테루스불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866년에 화학교수로 임명되었다. 1869년에는 ‘원소의 원자량과 그 성질과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1871년 세계인들이 오늘날 쓰고 있는 주기율표를 제정하였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자량 순서로 되어있다는 것이고 모즐리는 원자번호 즉 양성자수 순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듯 보이지만...몇가지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지요.
중요한 앞번호 원소들을 생각해보면.....
대표적인 것이 칼륨과 아르곤의 차이입니다.
만약 이것을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로 본다면 아르곤이 더 무겁기에 칼륨보다 더 뒤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질상 아르곤은 0족에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수하였지만 아르곤(Ar)과 칼륨(K), 코발트(Co)와 니켈(Ni), 텔루르(Te)와 요오드(I) 등이 원자량의 순서에 따라 예견된 것과는 다른 성질을 보여준다는 결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결점은 1913년 영국의 모즐리에 의해 원자번호가 결정되고 이에 따라 원소를 배열함으로 해결된 것이지요.
1913년, 모즐리는 원소의 특성에 따라 나타나는 X-선의 파장을 측정하여 이것으로부터 원소의 원자번호를 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서로 배열하지 않고 원자번호의 순서로 배열하면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들이 주기적으로 나타남을 발견하고 오늘날의 현대적 주기율표로 발전시킨 것이지요.주기율표란 무엇일까?|작성자 JH sets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