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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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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    인생은 비극이라 생각할 때 비로서 살기 시작하는것... 댓글:  조회:4629  추천:0  2016-11-06
        술노래/ 예이츠  술은 입으로 흐르고 사랑은 눈으로 흐른다. 우리가 늙어서 죽기까지 전에 참이라 깨달을 건 이것 뿐이다. 나는 내 입에 잔을 들면서  그대를 바라보고 한 숨 짓는다. Drinking Song / Yeats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   낙엽 / 예이츠   가을은 우리를 사랑하는 긴 잎사귀에 왔다 그리고 보릿단속에 든 생쥐에게도 우리위에 있는 로우먼나무 잎사귀는 노랗게 물들고 이슬맺힌 야생딸기도 노랗게 물들었다   사랑이 시드는 철이 우리에게 닥쳐와 자금 우리의 슬픈 영혼은 지치고 피곤하네 우리 헤여지자 정열의 계절이 다 가기전에 그대의 수그린 이마에 키스와 눈물을 남기고   ------------------------------------------------------------------------------------------------------------------- 하늘의 천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하늘의 천]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호수위의 섬 이니스프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나뭇가지 엮어 놓고 그 위에 진흙바른 오두막 한 채에 콩은 아홉 이랑, 그리고 벌통 하나 놓으리 벌소리 다정하면 홀로 살만 할 것임에… 그러면 평안이 오리, 작고 느린 물방울로 평안이 오리 아침에는 안개로, 귀뚜라미 우는 밤엔 이슬로… 밤은 별빛으로 아련하고, 한 낮은 태양으로 붉게 타오르겠지 그리곤 저녁이 오리, 풍성한 홍방울새의 날개짓으로… 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부딪는 작은 소리의 물결들 잿빛 포장도로나 도시의 어느 길에 있거나 내 가슴 저 깊은 곳에 들리는 것을…   예이츠(1865-1939)의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이라는 시입니다. 도시의 소음과 번잡스러움을 떨치고 한적한 자연에 묻혀 홀로 살고 싶은 마음, 그 떨쳐버릴 수 없는 소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전원 서정시입니다. 시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전원적 삶에 대한 동경의 마음은 어린 십대 때부터 간직하게 되었답니다. 나중에 런던 한복판을 걷다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쇼윈도에 마련된 작은 샘 장식만 보아도 향수에 젖어 이 호수를 떠올리고는 이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이니스프리는 아일랜드 Sligo현의 Lough Gill 호수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어린 시절 시인은 아버지와 함께 이 섬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 그의 아버지는 쏘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구절들을 그에게 읽어주곤 했습니다.   시인은 그것에 감명을 받아 언젠가 “이니스프리라 불리는 작은 섬 오두막집에서” 살아갈 계획을 하게 됩니다. 쏘로우의 삶을 모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쏘로우는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삶에 충실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초절주의사상가입니다. 그는 국가주의에 의한 것이든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에 의한 것이든,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미국이 일으킨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하기도 했던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 정신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습니다.   ===================================================================================================   When You are Old - William Butler Yeats - When you are old and grey and full of sleep, And nodding by the fire, take down this book, And slowly read, and dream of the soft look Your eyes had once, and of their shadows deep;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And bending down beside the glowing bars, Murmur, a little sadly, how love fled And paced upon the mountains overhead And hid his face amid a crowd of stars. ===================================================================================================    그대 늙었을 때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그대 늙어 백발이 되고 졸음이 많아져 벽난로가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할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한때 그대 눈에 지녔던 부드러운 모습과 그 깊은 그림자를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운 기품을 사랑했고 또 그대의 미를 거짓 사랑 혹은 참사랑으로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다만 한 사람만이 그대의 순례의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의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달아오르는 쇠살대 곁에 몸을 구부리고서, 좀 슬픈듯이 중얼거리시오, 어떻게 사랑이 머리 위에 솟은 산 위로 도망치듯 달아나 무수한 별들 사이에 그의 얼굴을 감추었는가를.     ---------- Notes: full of sleep: “졸음이 많아져”. by the fire: “벽난로가에서”. pilgrim soul: “순례의 영혼”. bars: “쇠살대”. pace: ran. amid:among. a crowd of: “무수한”.   감상과 해설   이 시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의 것입니다. 아일랜드가 낳은 대시인 예이츠는 1865년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원래가 영국계였지만 아일랜드에서 200년 이상 살아온 오랜 정통있는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법률가였지만, 화가로 전향하여 변호사업을 버렸기 때문에 생활은 어려운 편이었습니다. 1883년에 더블린에서   고교를 졸업한 그는 미술 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곧 중퇴하고 시를 쓰는데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첫 시편들은 1885년에   『더블린 대학 잡지』 Dublin University  Review 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는 더블린과 런던 사이를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1891년에 존슨 Lionel Johnson, 도슨Ernest Dowson 등과 더불어 “시인클럽” Rhymer's Club을 시작하였고, 여기서   라파엘 전파 P운동의 영향을 받아 몽상적이고 영묘한 시를 썼습니다. 한편 그는 고향의 전원적 생활과 민요를 통하여 토속적인   정취를 받아들였고 더블린의 생활에서는 아일랜드의 국수주의(國粹主義)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그는 스펜서   Edmund Spenser, 셀리, 블레이크 등의 19세기 시인들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아 그의 시에 낭만주의적 색채를 띠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문학 이론은 그의 긴 생애를 통하여서 여러 번 번복된 바 있으나 1900년을 전후하여 알게 된 두 여인,   즉 모드 곤 Maud Gonne이라는 아름다운 배우와 그레고리 부인 Lady Gregory이라는 후원자를 만난 것이   그의 일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이 두 여인은 모두 열렬한 아일랜드 국수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어느덧 그는 아일랜드에서의 문예 부흥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고 “게일 동맹” Gaelic League과 “아일랜드 국민 극장”   Irish Literary Theatre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아일랜드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극과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시작하여 후에는 상징주의로 기울더니, 50세 때부터는 이제까지 애용해 오던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상징의   세계를 떠나서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그의 어휘는 점점 더 솔직하여졌습니다. 그는 평생을   보통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찬양하고 그들을 우상화하였으나 말년에 가서는 보통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꼈고 아일랜드에   문예 부흥을 실현시키겠다는 꿈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실에 실망을 느끼고, 저속한 사회의 흐름에 화를 내고는   결국은 영국을 떠나 남부 유럽에서 지냈습니다. 1939년 1월 28일에 지중해변의 니스 부근에 있는 로커브릔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젊었을 때의 뜨거운 정열을 잃고 만사를 냉소하면서 죽었음이 그의 글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는 예이츠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 모드 곤에게 바친 시입니다. 그가 곤을 만난 것은 1889년 1월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몇 차례의 구혼에도 불구하고 모드 곤이 존 맥브라이드와 결혼한 1903년 2월까지가 예이츠의 초기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곤은 그에게 있어서, 특히 초기에 있어서 삶을 질서잡힌 미로 형상화하는 길잡이가 되는 이상적인   여인이었으며, 미라는 추상적인 개념에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해 준 여인이었습니다. 모드 곤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사랑 가운데서 예이츠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속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라는 심오한 사색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용모와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을 소유한 여배우 모드 곤은 그 자신의 젊음을 바칠 어떤 위대한 행위를   찾고 있었고 그녀의 조국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애국적이고 정열적인   모드 곤에게서 예이츠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추구하던 영원미의 모형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초기시들은 대부분 곤을 찬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미와 모드 곤의 미를 결합해 주는 심볼로   장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장미는 현상적인 꽃이 아니라 시적인 심상으로서 그가   추구하던 영원미를 상징하는 동시에 모드 곤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례로서 “평화의 장미”라는 시의 일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늘과 지옥이 마주 싸울 때/ 천군의 지휘자   미가엘이/ 천성의 문간에서 그대를 내려다보면/ 자기가 하던 일도 잊어버리라>” 수려한 미모와 그 아름다움의 파괴적인   힘을 노래할 때는 트로이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헬렌에게 비유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모드 곤을 천사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찬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세상의 역사가 있기 전 천상에서는 그리스도의 군대와   루시퍼(반역천사)의 군대가 남북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때 천군의 지휘자는 대천사 미가엘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평화의 장미인 모드 곤을 내려다보았다면 싸울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시로 오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은 종전을 고하고 조용히 하늘과 지옥의 평화, 곧 장미의 평화를   만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이와 같이 예이츠는 장미의 상징을 통해 모드 곤을 정신적 미의 표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대가 늙었을 때”도 사랑의 슬픔과 그 슬픔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늙엊지면 많은 변화가 오기   마련입니다. 검은 머리가 희어지고 잠이 많아져 따뜻한 벽난로가에 앉아 있노라면 졸음이 밀려오게 됩니다. 눈도 희미해져   책도 읽기 어렵고 빨리 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나이가 되면 돌이켜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움과 기품과 미를 사랑한 것이 틀림업지만, 그러나 “그대의 순례의 영혼”을 사랑한 것은 오직 단 한 사람 자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순례의 영혼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활동적인 성격을 지칭한 것입니다.   또한 예이츠는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이츠 자신이 그의 시 “시간과 더불어 오는 지혜”   에서 밝히고 있듯이 모드 곤은 그의 시 전체에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의 완전한 아름다움은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영원미의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아름다움의 파괴적인 힘을 깨닫게 해준 표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모드 곤에 대한 사랑과 구혼을 거절한 데서 맛본 슬픔과 절망은 점차 그에게 모드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제공해 주었고   아름다움이 지닌 이중적인 속성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의 이중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또한 사랑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육체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변화와 쇠퇴의 슬픔까지도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1903년 모드 곤이 결혼하면서 예이츠는 그 꿈의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며 보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추구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녀는 예이츠의   영원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아일랜드 시인. 20세기 영미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더블린, 런던 등지에서 화가가 되려고 미술학교에 다니기도 했지만 곧 문학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정통적인 기독교 대신 여러 형태의 신비주의, 민담, 영매술, 신플라톤사상 등에 몰두했고, "라파엘 전 예술가(Pre-Raphaelites)"의 이념에 동조하여 꿈같고 환상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스펜서, 셸리 및 블레이크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시는 낭만주의의 향기를 풍긴다. 주소재도 시냇물, 언덕, 바위, 숲, 바람과 구름 같은 것이었다. 아일랜드 문예협회를 창립하여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하였고 아일랜드 국민극장을 창립하여 아일랜드 연극발전에 힘썼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아일랜드가 독립자유국이 된 뒤에는 그 공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192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시집으로 "오이진의 방랑기(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 책임(Responsibilities)", "쿨호의 백조(The Wild Swans at Coole)", "탑(The Tower)", "마지막 시집(Last Poems)" 등이 있다.   ================================================================================================================== ♡....예이츠의 생애  대립되는 전통의 계승 예이츠의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는 변호사였지만 나중에 초상화 화가가 되었다. 처녀시절 이름이 수잔 폴렉스펜인 어머니는 아일랜드 슬라이고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사람들은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압도적인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강력한 소수를 대표하는 영국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런던에서 학교에 다닐 때도 아일랜드의 영상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낄 정도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2가지 역사적 전통에서 분리된 채 있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도들과는 신앙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프로테스탄트들은 '출세만 생각하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이츠는 조너선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올리버 골드 스미스, 조지 버클리 같은 유명한 영국 문인들의 문학과 사상에 나타나 있는 18세기의 찬란한 프로테스탄트 앵글로아일랜드 전통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쇠퇴해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부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시대는 가톨릭 전통에 유리하며 영어보다 게일어로 표현되는 시대였다. 예이츠는 자신의 엄격한 예술적 취향과 조화시킬 수 있는 이 운동을 지지했지만 아일랜드가 영국 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을 주창하는 애국단체에서의 그의 행동은 자주 애매한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두 아일랜드 사회 중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의 입장을 주목할 만큼 애매한 자신의 고국의 입장과 관련지어 명백하게 밝혀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의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희망은 가톨릭 전통이나 프로테스탄트 전통보다 더욱 깊은 전통을 계발하는 것이었는데 그 전통은 그리스도교보다는 더 이교도적인 성격을 띠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관습·신앙·성지 같은 인류학적 증거 속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숨겨진 아일랜드의 전통이다. 1886년부터 발표된 예이츠의 많은 수필과 평론들은 시기가 적당했으므로 진정한 아일랜드를 알려야겠다는 시도였다. 1867년 예이츠가 불과 2세였을 때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더블린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받기를 희망했다. 1880년 가족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휴일에는 슬라이고에 있는 외삼촌 조지 폴렉스펜과 함께 지냈는데 이 슬라이고는 많은 시의 배경이 되었다. 1883년 더블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에 다녔으며 이곳에서 받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시인과 예술가들을 만난 것이었다. 탐미주의자·신비주의자·민족주의자로서의 예이츠 그동안 예이츠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발표한 것은 2편의 짧은 서정시로 1885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 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예이츠는 비술(秘術)에 관심이 있는 단체, 즉 더블린 연금술협회의 결성을 도왔다. 1887년 가족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자 예이츠는 '신지학(神智學)협회'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신비주의를 통해 지혜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마술은 일상 세계에서 멀리 떠난 상상의 삶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았다. 반면 과학의 시대는 혐오스러웠으며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이 시적 영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모험은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스베덴보리 신학, 연금술 등의 다른 신비주의 전통과 접촉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예이츠는 이미 자긍심이 강한 젊은이였고 이런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예술 감각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오만함이 잘 드러나곤 했다. 〈오이신의 방랑기 외(外) 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1889)에 수록된 초기 시는 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 1889년 예이츠는 열정적이고 화려한 미모의 아일랜드 여인 모드 곤을 만났다. 그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예이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드 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열정을 아일랜드에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와 몸으로 몸소 구사하는 반항자이며 웅변가였다. 예이츠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을 때 부분적으로는 신념 때문이었으나 대부분은 모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 시절 아일랜드에 대해 쓴 많은 글들은 모드를 향한 속삭임이었다. 1902년 더블린에서 희곡 〈캐슬린 니 훌리안 Cathleen ni Houlihan〉이 초연되었는데, 모드가 캐서린 역을 맡았다. 1891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과 죽음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다. 정치가 남긴 텅빈 공간을 문학·예술·시·희곡·전설이 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세이집 〈켈트의 여명 The Celtic Twilight〉(1893)은 이런 목적을 향한 예이츠의 첫번째 노력이었지만 1896년 오거스타 그레고리 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진전이 없었다. 그레고리 부인은 귀족으로서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한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서부 아일랜드 지방의 민간전승인 옛날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 전승 지식이 고대 의식 및 자신의 감정과 그리스도교가 완전하게 파괴하지 못한 이교도 신앙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민간전승이 농촌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몰두하여 연구하면 사람들과의 명백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민속을 엄격하고 고매한 문체로 표현하면 순수한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개인적인 용어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상을 정치에 적용하면 농부와 귀족을 연결시키는 것인데, 즉 경험은 농부의 것, 문체는 귀족적인 것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연결은 도시와 부의 산물인 미움받는 중산층을 비난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도덕적 효과는 가져올 것이다. 1897년부터 예이츠는 카운티 골웨이의 쿨파크에 있는 그레고리 부인 집에서 여름을 보냈고 쿨파크를 사라져가는 우아함의 세계와 결부시켰다. 그 공원이 농부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 시각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1899년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4년 후 그녀는 아일랜드의 애국 동지이며 영국의 압제를 함께 증오하던 아일랜드 군인 존 맥브라이드 소령과 결혼했다. 그는 1916년에 일어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죄로 사형당한 항거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했다. 그런 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고 이 극장은 1904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아들과의 반목을 주제로 한 〈베일 해변에서 On Baile's Strand〉는 첫 상연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후 수년 간 예이츠는 애비 극장의 일반적인 운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당시는 논쟁이 빈번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어서 반아일랜드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배우·제작자·신문 등과 논쟁도 잦았다. 1907년 존 밀링턴 싱의 〈서부의 난봉꾼 Playboy of the Western World〉의 초연 때는 극장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언제나 자긍심이 강하고 당당했던 예이츠는 논쟁시 만만찮은 투사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상처를 빨리 잊지 못해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으며, 중산층, 상인 및 대부분의 더블린 사람들처럼 인습적인 성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했다. 현대의 시민들, 가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 등은 모두 예이츠가 영웅적 가치관에 호소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점차 중산층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애비 극장도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애비 극장에서 상연된 많은 연극들이 그의 눈에는 천박하고 통속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이츠는 대중의 변덕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연극으로 마음을 돌렸다. 1913년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비서로 일하며 서식스 주에 있는 스톤카티지에서 그와 몇 개월을 보냈다. 파운드는 그당시 일본의 고전극인 노[能]의 번역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고 예이츠는 그 극으로 인해 큰 자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극들은 대중보다 조신들을 기준으로 한 귀족문화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노극에 해당되는 대응물로 간주될 수 있는 극들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무희를 위한 4개 극 Four Plays for Dancers〉(1921)으로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응접실에서도 상연될 수 있는 일련의 짧고 형식적인 극이었다. 예이츠는 이러한 연극들을 새로운 종류의 연극, 즉 말·가면·춤·음악, 모방이 아니라 상징적인 동작의 조화로 생각했다. 그 연극들은 상류 사람들, 즉 그런 형태의 장점을 즐기는 소수들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16년 초연된 〈매의 우물에서 At the Hawk's Well〉는 그가 믿어왔던 많은 가치관을 구현한 작품이었다. 돈과 대중을 위한 부르주아 극장은 고대 그리스 연극이 일으킨 동정과 공포보다는 '신경질적인 흥분'의 장소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관심을 가졌던 예술은 관객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지금까지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었던 마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도록 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아일랜드 생활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13년 휴 레인 경이 수집한 39점의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 처리문제에 대해 벌어졌던 분쟁은 예이츠의 눈에는 사악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인은 그 그림들을 더블린 시립현대미술관이 한 화랑을 마련해 그것들을 전시한다는 조건 아래 기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자 레인은 화가 나서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빌려주었고, 1915년 그가 죽자 두 미술관이 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913년 예이츠는 이 논쟁에 개입했다. 왜냐하면 레인의 훌륭한 행동이자 귀족적 조치가 한 비천한 더블린인에 의해 능멸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이츠의 〈책임 Responsibilities〉(1914)에 실린 많은 시들은 레인 논쟁에 의해 고취된 작품으로 매우 통렬한 작품들이다. 이것은 예이츠와 아일랜드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1907년 그레고리 부인과 함께 피렌체·밀라노·우르비노·페라라·라벤나 등지를 여행했고 이탈리아 마을과 도시들이 나타내는 귀족적 우아함의 증거를 결코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1913년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즉 예의와 정중함을 존중하던 완전히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갈망이 그의 작품 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숙한 시인이며 상원의원 1917년 예이츠는 모드 곤의 딸 이졸트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몇 주 뒤 조지 하이드 리스에게 청혼해 1917년 결혼했다. 1919년 딸 앤이 태어났고 1921년 아들 윌리엄이 태어났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어 예이츠는 아일랜드 상원의 새 일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수락했고 6년간 봉사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제는 유명한 인물이 되어 현대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상상력, 역사, 비술의 관계에 쏠려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을 한 위대한 책, 즉 예술에 관해 신성시될 만한 책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그결과 1925년 〈비전 A Vision〉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간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1937년 결정판을 냈다. 한편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기량을 더해가고 있었다. 〈탑 The Tower〉(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 노르만 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 중의 하나이며 매우 노련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는 일생의 경험이 완벽한 형태로 구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뒤에 씌어진 〈나선층계 The Winding Stair〉(1929)로 나왔다. 예이츠는 60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계속 작품을 썼다. 그의 감정은 예전처럼 강렬했지만, 이 시기의 시는 대부분 상상력의 병적인 흥분 때문에 손상되었고 현실과 정의 사이의 균형도 불안정했다. 세계는 산산 조각나는 것 같았고, 예이츠는 그것을 혐오했지만 자주 세상의 몰락에 매혹되기도 했다. 귀족적 스타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말년에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자신이 존중해온 가치관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끼며 예이츠는 그 가치들이 위대한 인물, 즉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구출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예이츠는 활력과 독재주의적인 명쾌함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 산문으로 된 소책자 〈보일러에 관하여 On the Boiler〉(1939)에서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부패한 세상에 토로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정치 권력을 갈망하며 그 권력을 갖게 되면 폭력적으로 사용하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예이츠의 분노는 시인의 분노였고 삶에 대해 갖고 있던 시각은 시인의 시각이었다. 그는 단지 도덕의 힘, 즉 어떤 위대한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원했다. 그는 아일랜드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 즉 검열, 레인의 그림들, 건강 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 보호, 아일랜드의 국제연합 가입 문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상원의 화폐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예이츠의 말년은 긴장의 연속이었었다.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습한 겨울을 피해 여행을 다녔으나 은퇴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폭력이 끝내 전쟁을 몰고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한편으로는 그 전망에 두려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매혹되었다. 그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군대의 행진소리가 사랑·예술·미·예의범절의 주제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시절 예이츠의 삶의 감각은 계시적인 것이었다. 가끔 그는 두려워 그 계시로부터 도망치기도 했으나 또 어떤 때는 그 계시에 동조했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 Book of Modern Verse 1892~1935〉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 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 알 The Hern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그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외국에서 죽었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결국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 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 수록된 시 〈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에 명시된 장소로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쿨 호수의 백조 / 예이츠 ~♬     나무들은 아름답게 가을 단장을 하고 숲 사이의 오솔길은 메마른데  10월의  황혼 아래 물은  고요한 하늘을 비춘다.  바위 사이로 치런히 넘치는   물 위에 떠노는 쉰 아홉 마리의 백조   내가 처음 세어 보았을 때로부터  열 아홉 번째 가을이 찾아왔구나.  그 때는 내가 미처 다 세기도 전에 모두들 갑자기 치솟아 올라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날개 소리도 요란히 흩어졌던 것을.   저 눈부신 새들을 바라보노라면,  내 가슴은 쓰라려진다.  모든 것은 변해 버렸으니  맨 처음 이 기슭에서 황혼에  머리 위에 요란한  날개 소리를 들으며,  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던 그 날 뒤로,   아직도 지칠 줄 모르고 자기 짝끼리  그것들은  차가운 정든 물결을  헤엄치거나 공중을 날아가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  어디를 헤매든지 그들에게는  정열과 패기가 항상 따른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고요히 물 위를 떠간다.   신비롭게, 또 아름답게  어느 동심초 사이에 둥우리를 짓고  어느 호수가 또는 물웅덩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것인가.   내 언제 잠깨어 그들이 날아가 버렸음을 깨달을 때. ======================================================================================================================    시인 예이츠가 베드포드 파크(Bedford Park)의 가족 저택에서 아름다운 여배우이자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였던 모드 곤(Maud Gonne:1866-1953)을 만난 때는 그가 스물 세 살 때의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그녀는 뺨에 홍조(紅潮)를 머금고 있었고 183센티미터나 되는, 하늘이 내린 조각상같은 몸에 동작이 우아하고 매력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예이츠는 이 여인을 첫 눈에 반하였다. 그의 자서전에서 당시의 첫 만남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안색은 빛을 받은 사과 꽃의 윤기처럼 빛났다. 생각건대 그 첫날 그녀는 마치 창문에 어리는 그러한 꽃무더기 옆에 서 있었던 것처럼 기억이 난다." 시인 예이츠는 그녀를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흠모하여 곧바로 구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때 다른 여인을 찾아 방황도 해 보았지만 결국 모드 곤에로 마음이 몰입되었다.    예이츠는 그녀를 만난 이래로 20여 년을 줄곧 구혼했고 수 많은 시를 바쳤으나 모두 허사였다. 또한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고 무단히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모드 곤은 예이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다고 절교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모드 곤은 다른 남자, 맥브라이드(MacBride) 장군과 결혼하였다가 얼마 후 이혼하였다. 예이츠는 이혼녀 모드 곤에게 다시 청혼하나 이번에도 그녀는 시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예이츠는 그녀를 단념하고 쉰 한 살 때에 하이드-리즈(Georgie Hyde-Lees)와 결혼하였다. 예이츠와 모드 곤과의 연인아닌 연인의 관계는 거의 삼십 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시인의 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이츠는 초기의 시에서 그녀를 트로이전쟁의 절세미녀 헬렌(Helen)과 같은 이상적인 여성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그녀는 아일랜드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투사의 이미지로 바뀌며 다소 어둡고 파괴적인 이미지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예이츠의 가슴 속에 모드 곤은 변함없는 찬미의 대상이었다. 결국 모드 곤과의 사랑이 미완의 결말로 끝나 버리자 예이츠는 그 실연에 대한 슬픔을 잃어버린 지중해의 문명국가였던 비잔틴세계로의 탐미와 환상으로 표출하였다. 즉 시인 예이츠에게 있어서 모드 곤은 삶의 전부였으며 시인의 정체성의 일부였던 셈이다.  예이츠는 여러 연애시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시들을 다수 남겼는데, 대체로 시 안에서 구현되는 두 사람의 관계는 미해결된 중간 상태이자 긍정과 부정, 수용과 거부가 교차하는 회색빛 상태에 머물렀다. 그리고 시인의 자서전이나 여러 기록들에서 모드 곤은 '사랑하나 합일될 수 없는', 동경과 반발의 두 요소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다소 소심하고 유약했던 시인에 비해 모드 곤은 강인한 투사의 성향이 뚜렷했다. 예이츠는 '투쟁하는 지식인'이라기보다 '조국을 사랑하는 예술인'의 입장이었는데 비해 모드 곤은 '열렬한 독립투사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정치.사회 활동을 시인은 신화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려 찬양할 뿐이었다. 예이츠는 한때 모드 곤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하나 큰 활약을 담당하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 예이츠의 의지와 심성은 당시 정치운동가들의 과격한 노선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로 가득했던 것이다. 사실 서로의 성향과 인생관이 다름을 먼저 깨달았던 쪽은 모드 곤이었다. 그녀는 예이츠의 감수성 높은 지성과 순수함을 존중하고 사랑하였으나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적 이상이나 노선과는 맞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예이츠의 애매하고 소극적인 연애관에 대해 비판하며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드 곤 역시 예이츠에 대한 연정과 호감을 평생동안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서로는 거리를 두고 사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예이츠는 그의 시 에서 그녀의 당당하고 강한 존재감을 한편으로는 칭송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다 어떤 처녀가 나타났지, 슬픔 머금은 붉은 입술의,  슬픔에 찬 세상의 위대함을 간직한 듯이 보이는 어떤 처녀가.  오딧세우스의 힘겹게 항해하는 배와도 같은 운명인 그녀는  신하들과 함께 살해당한 프리아모스처럼 자부심 넘쳐라;   A girl arose that had red mournful lips And seemed the greatness of the world in tears, Doomed like Odysseus and the labouring ships And proud as Priam murdered with his peers;                        카노바(Antonio Canova) 작,    시인 예이츠에게 트로이의 헬레나와도 같은 여인 모드 곤은 영웅이고 신화적 존재이면서도, 전쟁이 끝난 후 10년 동안이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해야 했던 오딧세우스처럼 불운한 여성이었고, 도주하거나 항복하는 대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살해당한 트로이의 왕처럼 자존심이 넘쳤던, 불행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시 에서 더욱 또렷이 나타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발랄하고 우아한 그대 모습 사랑하였고,  진실된 또는 거짓된 사랑으로 그대의 아름다움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그대 마음속 순례하는 영혼과  그대의 변화하는 얼굴에 깃든 슬픔을 사랑했음을;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만년의 예이츠는 세월의 힘을 어기지 못하고 늙어가는 여성 투사 모드 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그녀의 색바랜 얼굴에서 외로이 떠도는 방랑자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스스로의 인생과 사랑을 돌보지 못한 채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들을 위해 헌신하고 인내하는 한 여성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꿰뚫어 본 것이다.    시인 예이츠와 정치가 모드 곤은 서로를 흠모하고 친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미결로 끝났다. 시인은 유유부단했고, 정치투사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는 상대에게 몰입되거나 상대를 수용하지 못하였다. 시대적 상황과 서로가 처한 여건 또한 부합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두 사람은 각자의 분명한 세계가 있었고 그 영역이 사랑을 위해 포기하기에는 너무 크고 광대했다. 그렇게 이 불세출의 세기의 연인들은 화합되지 못하고 무수한 이야기와 주옥같은 시만 남겼다.    위 시에서 예이츠는 오랜 사랑의 결과는 오직 허무한 이별뿐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인끼리의 만남에서 시간의 경과는 그 풋풋한 설레임과 절실한 열정이 사그라짐을 의미한다. 사회심리학자 스턴버그(Robert Sternberg)의 '삼각형 이론'에 따르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서로의 관계에서 친밀감과 열정, 헌신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연애의 초기 단계에서 제일 먼저 발현되는 것은 열정이다. 열정적이고 도취감을 느끼는 이 단계는 서로가 취한 듯, 꿈꾼 듯 서로를 갈망하며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 기간은 짧고 쉽게 변질된다. 연인들의 관계는 친밀감으로 나아가면서 서로를 정서적인 관계로 지각하게 되며 상대방으로부터 따뜻한 느낌을 전해 받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헌신(또는 책임감)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구성요소 중 한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연애관계는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하여 그 결실을 보지 못한다. 친밀감 만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단순한 친구사이로 끝나 버리고, 열정만으로 가득한 사랑은 독한 술에 취한 듯 매혹적이나 진정된 후 허공으로 흩어진다. 또한 책임감만으로 구성된 관계는 공허하며, 친밀감과 열정으로 비롯된 사랑은 낭만적이나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고, 친밀감과 책임감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동반자적 관계로 끝나고, 열정과 책임감만 있으면 극적인 사랑으로 불타오른 후 사라진다. 열정과 친밀감, 책임감의 요소가 다 갖추어져야 진실로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오래된 연인들이 느끼는 사랑은 이 중 친밀감이나 책임감만으로 이루어진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브람스와 클라라가 이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예이츠와 모드 곤 또한 이 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 무릇 열정이 없는 사랑은 열기가 사라진 모닥불과 같다. 시인이 경계한 '유행에 뒤쳐진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연인들은 모름지기 오랜 기간 사랑하지 말아야 할 터이다. 상대를 향한 사랑의 헌신과 열정은 매 순간 새로워져야 하고 항상 뜨겁고 간절해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헌신해야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하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   방랑자 잉거스의 노래  - 예이츠  머리 속에 타는 불 있어  나 개암나무 숲으로 갔네  가서 나뭇가지 꺾어 껍질 벗기고  갈고리 바늘에 딸기 꿰고 줄을 매달아  흰 나방 날고  나방같은 별들 멀리서 반짝일 때  나는 냇물에 그 열매를 던져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 낚았네.   돌아와 그걸 마룻바닥에 놓고  불을 피우러 갔을 때  뭔가 마룻바닥에서 바스락거렸고  누가 내 이름을 불렀네.  송어는 사과 꽃을 머리에 단  어렴풋이 빛나는 아씨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곤 뛰어나가  빛나는 공기 속으로 사라졌네.  낮은 땅 높은 땅 헤매느라고  비록 나 늙었어도  그녀가 간 곳을 찾아내어  입 맞추고 손 잡으리,  그리하여 얼룩진 긴 풀 사이를 걸으며  시간과 세월이 다 할 때까지 따리라  달의 은빛사과  해의 금빛 사과를.  *'잉거스'는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美와 靑春과 詩歌의 신  ===================================================================================================================  이 세상의 장미 - 예이츠  아름다움이 꿈처럼 사라진다고 누가 생각했던가?  슬픈 교만이, 너무 슬퍼서  새삼 놀라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붉은 입술 때문에,  트로이는 치솟는 죽음의 화염에 휩싸여 사라졌고,  우스나의 아들들도 죽었다.  우리도, 움직이는 세상도 사라진다.  겨울 강물의 파리한 물살처럼  출렁이며 흘러가버리는 인간들의 영혼 속에,  하늘의 물거품, 꺼져가는 별들 아래서  이 외로운 얼굴은 영원히 살아남으리.  대천사들이여 그대의 어둠 속에서 머리를 숙여라.  그대들도, 어떠한 생명들의 심장도 뛰기 전에,  피로하고 친절한 한 미녀가 신의 옥좌 곁을 머뭇거렸고,  신은 이 세상을 풀밭 길로 만들었다.  그녀의 헤매는 발길 앞에.  =====================================================================================================================     ♧ 인생은 비극이라고 생각할때 우리는 비로소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료사진}= “公主”의 삶의 한 순간...
1762    미국 현대시인 - 월리스 스티븐스 댓글:  조회:3908  추천:0  2016-11-06
[ 2016년 11월 07일 09시 08분 ]     중국 문창(文昌) 발사기지에서... The snow man  Wallace Stevens: 1879-1955  One must have a mind of winter  To regard the frost and the boughs  Of the pine-trees crusted with snow;  And have been cold a long time  To behold the junipers shagged with ice,  The spruces rough in the distant glitter  Of the January sun; and not to think  Of any misery in the sound of the wind,  In the sound of a few leaves,  Which is the sound of the land  Full of the same wind  That is blowing in the same bare place  For the listener, who listens in the snow,  And,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the nothing that is. (CP, 9-10)  눈사람  월리스 스티븐스 (Wallace Stevens: 1879-1955)  영한대역 손근호  사람은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눈으로 입어 표피처럼 된 소나무 가지와  서리를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오랫동안 추위에 있어 왔다  얼음 덮혀 가지 늘어진 로뎀나무와  아득히 반짝이는  가문비나무 보기 위해서.  그리고  1월의 햇빛 속에 바람의 소리에,  부대끼는 얼마 남지 않은 잎들의 소리에  비참함을 잊기 위해서는  땅의 소리에 비잔함  늘상 똑같은 바람 전부를  늘상 같은 발가벗은 듯한 장소에서 불고있는 바람을..  설원에서 듣고 있는 그 청취자에겐,  그 자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곳에 있지 않는 것과 같이 존재하는 없음으로  자리 하고 있다.  월리스 스티븐스의 The snow man[눈사람] 감상  월리스 스티븐스는 미국의 모더니즘시에 대표적인 시인이다. . 그의 시는 이미지의 결합이 회화적이며, 그는 이미지즘(imagism) 물리적(physicality) 기법을 잘 적용 시켰다. 그는 이 세상을 혼란 confusion, 혼돈 chaos, 소동 turmoil 등으로 이루어진 논리없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시인의 역할은 시적 상상력poetic imagination, 시를 통해 인간을 이런 혼란한 세상에서 끌고 나와 상상력, 즉 Supreme fiction(최상의 허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라 보았다. 즉, 지도 제작자가 우리를 위해 세상을 그려 어디가 어딘지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한것과 같이, 시인의 역할을 혼란한 세계에서 우리의 영이 어디에 있고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작품중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위의 작-The snow man- 은 인간의 무위론을 관조적으로, 어느 황량한 곳에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에 대하여 시인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내심을 말해 주며 그 속에서 인간에 애잔한 희망을 부르고 있다.  겨울은 사람에겐 무섭고 황량한 계절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자기성찰을 위한 계절일 수도 있다. 눈사람이 비록 봄이 오면, 녹을 지언정 그 추운 겨울날에도 황량한 바람의 소리를 듣고 그리고 그 눈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기전부터 그리고 존재하는 나뭇가지의 서리에 성서러움을 시인은 노래 하고 있다. 그 춥고 매서운 바람에서도 굴하지 않고 서서 유지 하고 있는 눈사람을 설명하는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마음은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인간존재론에 관한 은유가 잘된 시이기도 하며, 일생활에 가장 간단한 소재,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광경. 한 겨울에 눈사람을 보고, 인간의 고뇌와 번뇌를 대입 시킨 시인의 힘이 대단 하다 하겠다.  또한 이 시에서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세계 상상력의 전통적인 기능을 충분이 이미져리화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선 것을 익숙한 심상의 풀이로 나타내었다. 지나쳐 볼 수 있는 눈사람의 제재를 만드는데 있다. 그는 그래서 위대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시인이며, 정신이 위대할수록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해 지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이 눈사람은 읽는 이로 하여금 "영감"(inspiration)과 상상력의 차이를 논하게 만든다, 본질적으로 영감이 우연적인 것이라면 상상력은 끊임없는 정신의 작용으로써, 상상력을 고취시키는 경이로운 이성에 의해 자신의 작업을 하듯이, 시인은 그래서 눈사람을 바로 정신의 노력인 상상력으로 자신의 과제를 행하는 사람과 같게 은유를 해놓은 것이다. 또한 이 시는 심연의 초월성이 뛰어난 작품이다.[설원에서 듣고 있는 그 청쥐자에겐,/그 자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그곳에 있지 않는 것과 같이/존재하는 없음으로/자리 하고 있다.]라고 하여 절대적인 고독이 존재의 불확실성이라 표현 하여 오히려 눈사람의 절대적인 존재의 초월성을, 영원무궁무진이라는 반전법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시인 손근호-  약력   월리스 스티븐스는 1879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이라는 곳에서 출생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와 뉴욕 대학교 법대에서 수학했으며 1904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1916년 까지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6년부터 Stevens는 '하트포드 사고배상 보험회사'에 근무하기 시작하여 1934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했으며 이후 은퇴할 때까지 그 보험회사에서 일했다. Stevens는 1910년을 전후해서 미국과 유럽에서 일종의 붐을 일으켰던 소위 소잡지운동(the little magazine movement)으로 인해 많이 발간되고 있었던 여러 소잡지들에 시를 발표하며 등장한 20세기초의 현대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1914년에 당시 유명한 소잡지 중의 하나였던 Poetry: A Magazine of Verse지 11월호에 시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의 최초의 시집인 Harmonium이 출판된 것은 Stevens가 44세 되던 해인 1923년이었다. 이 시집은 1931년 수정·증보되어 다시 출판되긴 했지만, Stevens는 첫 시집을 낸 지 12년만인 1935년에야 두번째 시집인 Ideas of Order를 출판했다. 그러나 이어서1936년에는 Owl's Clover, 그리고 1937년에는 The Man with the Blue Guitar를 간행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Stevens는 1942년에 Parts of a World 와 유명한 Notes Toward a Supreme Fiction을, 1944년에는 Esthetique du Mal을, 1947년에는 Transport to Summer, Three Acadmic Pieces, 1948년에는 A Primitive Like an Orb, 1953년에는 Selected Poems, 1954년에는 The Collected Poems, 그리고 사후인 1957년에는 S.F. Morse가 편집한 Opus Posthumous를 출판했다. Stevens는 또 자신의 시론이 담긴 에세이집인 The Necessary Angel: Essays on Reality and Imagintion을 1951년에 출판했다. 그는 1950년에는 Bollingen Prize를, 그리고 1955년에는 Pulitzer Prize와 National Book Award를 수상했으며, 1955년에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761    따옴표(" ")가 붙은 "시인"과 따옴표가 붙지 않는 시인 댓글:  조회:4687  추천:0  2016-11-06
...특이한 공연 광경이다.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청중들까지 미동도 않고 서 있으며, 개중에는 팔짱을 끼거나 눈을 감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그러나 사뭇 정적인 그런 태도야말로 지금 불려지고 있는 노래에 그들이 호응하는 합당한 방식이다. 그 노래에 담긴 압축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순진함과 아이러니를 오가는 노래 속 화자의 복합적인 어조에 반응하자면 비유컨대 독서할 때와 같은 집중력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그 노래를 끝맺는 각성과 결단의 요청에 응답하자면 온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공연은 1963년 7월에 열린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펼쳐진 것인데, 무대 위에서는 직전에 발매된 두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막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밥 딜런과 이미 포크 부흥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존 바에즈가 함께 딜런의 신곡인 「신은 우리 편」(With God On Our Side)을 부르고 있었다.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고발하는 명곡 「전쟁의 대가들」(Masters of War)과 더불어 딜런의 가장 뛰어난 반전가요라 할 수 있는 이 노래는 딜런의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성취를 해명하기에 좋은 사례이다. 「신은 우리 편」에서 딜런은 '침략전쟁의 연속'이라는 시각을 관통선 삼아 5분 남짓한 노래 한편으로 미국사 전체를 요약한다. "기병대가 돌진해서/인디언들이 쓰려졌고", "잘나갔던 미국-스페인 전쟁과 남북전쟁은" 연이어 "외워야 할 영웅들의 이름들"을 남긴 채 "금세 밀려났다." 딴 이유가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결정적으로 특정한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어두운 폭력의 역사를 고발하는 이런 진술들을 하나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나아가 공식적인 미국사가 그 전쟁들에 부여해온 정당성이 거짓임을 폭로한다. 이 노래의 화자는 중서부 출신이라는 것을 밝힐 뿐 "내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고/내 나이는 그보다도 더 의미없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이런 어투는 바로 미국문학에 숱하게 등장하는, 허클베리 핀을 원형으로 하는 사회 주변부의 미숙한 남성 1인칭 화자(겸 주인공)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자기소개에 시큰둥한 이 1인칭 화자는 자신의 문학적 선조들과는 달리 여러 전쟁을 직접 겪을 만큼 실로 긴 세월을 살아온 듯 보이지만, 그들처럼 순진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혹은 순진함을 연기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는 긴 세월을 살아온 경험의 권위에 더해 급진적인 순진함을 무기로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고안된 논리의 모순을 꿰뚫는 것이다. 노래 초반부에 "신은 우리 편"이라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잘 가르쳐준 역사책"을 칭송할 때 감지되는 아이러니가 이미 그런 결론을 예고한다. 화자는 앞서 언급한 전쟁들에 이어 참전의 명분이 분명치 않은 1차대전까지도 "자부심을 갖고 받아들이도록 배우지만",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적으로 싸웠던, 무엇보다도 "600만명을 오븐에서 튀겼던" 독일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도 신의 편이 되는" 사태까지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적이 우리 편이 되는 경험에 이어서 화자는 우리가 적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평생 미워하라고 배운 러시아"가 미래의 전쟁 상대지만 우리도 그 전쟁을 대비하는 동안 그들처럼 "버튼 한번 누르면" "세계를 한방에 갈라놓을" 무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다음번 전쟁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신의 거처를 정하는 문제는 무의미하게 된다. '순진한' 화자는 이 깨달음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 이 해소할 길 없는 모순을 두고서 고뇌하는 화자는 "지옥같은(끔찍한) 피로를 느끼는데", "그 어떤 말로도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배운 '도덕'을 거슬러 '검둥이' 친구 짐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즉 "지옥에 가기로" 결정하기까지의 허클베리 핀의 고뇌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화자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고뇌의 무게를 나누자는 요청을 하면서 퇴장한다. "나는 캄캄한 시간에 오래/이 문제에 대해 생각했지만", "내가 당신들 대신 생각해줄 수는 없고/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밥 딜런에게 심어진 예술의 전통 위의 간략한 분석은 자국 문학전통의 깊은 이해와 창의적인 활용이 딜런의 예술적 성취에 크게 기여한 요소임을 말해준다. 한국에서는 주로 「바람에 실려」(Blowin' in the Wind)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 On Heaven's Door) 같은 소품들이 그의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는 탓에 이런 면모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밥 딜런을 여러 문학전통 속에 자리매김하는 학술적 논의가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경우로는 빅토리아조 시문학의 권위자인 크리스토퍼 릭스의 『딜런의 죄악의 비전』 (Dylan's Vision of Sins)을 꼽을 수 있다. 딜런의 가사를 세밀히 분석하는 이 비평서는 딜런의 노래들이 죄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는 고전적인 시편들을 반향하고 변주하는 양상을 추적한다. 사실 딜런이 젖줄을 대고 있는 문학적 전통은 참으로 다채롭다. 2004년에 출간된 딜런의 자서전 『연대기 1권』(Chronicles: Volume One)을 보면, 20대 초반의 딜런이 당시 그리니치빌리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온갖 예술실험들과 그런 새로운 흐름을 자극했던 유럽의 전위적인 문학사조에 친숙했음을 알 수 있다. 1965년 「구르는 돌멩이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기점으로 포크 미학을 버리고 댄디-힙스터-록커로 '변신'했을 때 그는 랭보를 위시한 유럽의 반 부르주아지 방랑자 예술가 계보를 모범 삼아 도발적인 인터뷰나 관중들과 대치하는 기이한 공연행태를 통해 사회적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의 가사들 또한 전 시기의 리얼리즘적인 기조와 결별하고 소외된 예술가적 개인의 자의식을 드러내거나, 현란하고 공세적인 인용을 통해 애매함을 불러일으키는 등 모더니즘 풍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역시 딜런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영향은 포크 부흥운동에서 온 것이지 싶다. 물론 이 민중예술 전통은 좁은 의미의 문학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여러 다양한 인종적·민족적 배경의 이민자들이 새로운 땅에서의 치열한 경험을, 활자로 정리할 기회를 얻기 전에 먼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옛 민요에 담아 표현해왔기에, 블루스를 위시한 미국의 민중음악은 미국의 중요한 문화전통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예술 전통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대홍수 같은 재난과 영웅적인 노동쟁의의 기억들이 이런 민중음악에 담겨 전승될 수 있었다. 포크 부흥운동이 이런 전통을 기리는 한편으로 그 전통을 다소간 민속적인 유물로 박제화했던 면이 있다면, 그 전통을 생생하게 현재적인 예술로 되살린 이가 딜런이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만든 딜런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No Direction Home)을 보면 포크로 통칭되는 온갖 민중음악 장르들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던" 가수 지망생 딜런에 대한 피트 씨거 등등의 유명 포크 가수들의 증언이 나온다.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역시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첫 히트곡인 흑인영가 풍의 「바람에 실려」에 대해 일제히 열렬하게 호응했던 당시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칭송이 흥미롭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그 노래는 '흑인이 썼어야 했던 곡'이며, '기존의 어떤 곡들과도 직접적으로 닮지는 않았지만 가장 흑인영가처럼 들린다'고 평한다. 앞서 분석한 「신은 우리 편」도 기본곡조나 전개방식에서 아일랜드 반란민요(Irish rebel song)인 「애국자 게임」(Patriot Game)에 크게 빚지고 있지만, 딜런은 호전적인 민족주의를 호소하는 원곡을 아이러니한 반전가요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빛나는 시적 순간, 광대한 예술세계로의 통로 밥 딜런은 이 짧은 지면으로는 간략한 소개도 버거울 만큼 상당히 규모가 큰 창작자라는 사실이 전달되었기를 기대한다. 여기서는 위의 소략한 분석과 소개에 바탕해 나의 기본적인 입장 정도를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제목에서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 최선의 방식이지 싶다. 딜런은 글의 서두에서 스케치한 공연 풍경이 보여주는 것처럼 긴 활동기간 동안 거듭해서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전세계인들에게 말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준 창작자이다. 위의 공연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딜런은 워싱턴 행진(1963)에 참가했고, 미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현장 중의 하나인 그곳에서 그는 킹 목사의 그 역사적인 연설에 앞서 자신의 노래 「배가 들어오네」(When the Ship Comes In)로 '새 하늘, 새 땅'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선포했다. 그 자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예술가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그는 경력의 초기에 현대예술에서는 거의 사라진 예언자-시인의 모습을 구현했다.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당시의 딜런을 두고서 '블레이크와 휘트먼에게서 물려받은 횃불이 이제 딜런에게로 넘어갔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그의 개인적·예술적 행적은 복잡다단한 굴곡을 그리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고 결코 초기의 위엄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199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대신해 걸프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전쟁의 대가들」을 불렀던 때처럼 딜런은 때때로 역사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견제하는 예술의 힘을 환기시키는 순간을 연출했다.   밥 딜런이 1991년 2월 21일 미국 뉴욕 라이오시티뮤직홀에서 열린 제3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노래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성과들은 말을 다루는 솜씨가 없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딜런의 예술에서 초기 포크 미학의 영향으로 가사의 비중이 큰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딜런의 노벨문학상 선정 소식이 있고 나서 역시 비트 세대에 속하는 로런스 펠링게티 같은 시인은 딜런을 처음부터 동료 시인으로 여겼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다만 '딜런은 시인인가?'라는 비교적 점잖은 질문이 감추고 있는 공세적인 내용, 즉 '딜런의 가사가 종이 위에서도 똑같은 위력을 발휘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딜런의 예술을 기리기 위해서 따옴표 뗀 진짜 시인이라는 호칭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딜런은 보수적인 학계나 대중예술에 편견이 있는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협소한 '시인'의 정의에 조금 못 미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정의를 넘어서는 창작자다. 딜런이 '시인'이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직업가수로서 뭔가 젠 체하는 느낌이 싫기도 하고, 그 호칭이 자신의 기예를 다 담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이즈음 그는 자신을 'recording artist'로 소개하기를 선호한다). 노래 가사는 가락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가락의 제약을 받기도 한다. 내가 볼 때 딜런 예술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의 하나는 「구르는 돌멩이처럼」의 첫 대목처럼 그의 언어가 버팅기는 가락을 길들여서 어우러지는 장면에서 빚어진다. 그 결과 딜런은 좁은 의미의 시적인, 아름다운 가사 대신 서구문학의 온갖 전통과 관련이 있는 인물, 주제, 어구 들이 들어선 광대한 예술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고, 자주 나의 경우처럼 많은 청자들을 그 문학전통으로 건네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창비주간논평 ==========================그냥 ... 그냥 ... 뒷 그릇에 담고 보고지고... =============  미트룽 마을에서ㅡ   담배 한 대 태워 보시려우? ㅋ... 말려 잘게 부순 담뱃잎을 종이로 하나 하나 말아 한 개피씩, 다섯 개비씩 판다. 종이도 여의치 않으면 마른 나뭇잎으로 말아 피우기도..... 아! 담배가 뭐길래.... 나는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도대체 담배란 뭘까? 따플레중을 지나 구파포카리를 넘어 차인푸르를 향해 걸어가다 만난 아름다운 집 칸첸중가를 향해 가는 길, 셀렐레 라를(4740m)넘기 전, 단다패디에서(3200m), 너와 지붕에서도 비가 새어 잠자리를 옮기고.... [출처] Rest Da작성자 티르따 야뜨리  
1760    모더니즘 경향의 시인들 시를 알아보다... 댓글:  조회:3972  추천:0  2016-11-06
  쓰기전에(들어가기) 모더니즘 경향의 시인들의 계보와 시세계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그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과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시집을 출간한 김억 시인의 시 4편과, 우리나라 1930년대 모더니즘의 구심점이 되었던 김기림 시인의 시 3편. 그리고 천재 시인이며 미술, 소설, 수필, 시 다양한 부분에서 활동을 하였던 이상 시인의 시 3편에 대하여 읽고 써보며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해 보았으나, 막상 해석을 하려니 잘 되지는 않고 많은 고심을 하였다.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의 시를 읽고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은 매우 보람되고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1. 한국시문학의 역사 ○ 1910년대 국권상실과 신시의 태동기(근대시의 형성기) ↓ ○ 1910 - 1945 사이 현대시의 성장 동력과 생성과정 기 ↓ ○ 1945 - 1959 분단 체제 성립기 ↓ ○ 1960 - 1979 분단체제 심화기 ↓ ○ 1980 - 1995 분단체제 전환기 ↓ ○ 1995 - 2000 - 2011 다원화된 분열기   2. 한국 현대시의 지향성 1). 전통지향의 서정시 2). 리얼리즘의 지향시 3). 모더니즘의 지향시 ※ 시는 민족정신의 표현이며 시의 역사는 민족정신의 역사다     #. 모더니즘 경향의 시인과 시 1. 김 억 1) 작가 소개 -본명 : 김 희 권 호는 김안서 -출생 : 1896.11.30 평안북도 곽산에서 출생 -학력 : 오산중학교 졸업. 일본유학 -경력 : 김억은 1924년 6월30일 〈동아일보〉에 “가려나”라는 시를 ‘고사리’라는 필명으로 최초로 발표 -저서 : 한국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1921〉 한국최초의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 1923〉 -기타 : 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6.25때 납북 김억은 서구문예사조를 도입했던 시인으로 민요시인이라고 했으며, 현대시 개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서양시 번역과 창작시를 발표했다.   2) 작품 소개 설은 노래                           김 억 능라도의 실버들엔 보슬비가 밤새도록 어느때에 내려왓는고   닙을 말려 떨리냐고 모란봉의 갈바람은 메츨이나 불엇는고   대동강에도 한복판 뜬 배우엔 이 내몸의 눈물비가 내리누나   3) 작품 의견 -이 시는 민요시로서 능라도 실버들에 보슬비가 밤새도록 어느때에 내렸는고 하는 것은 능라도에도 일제의 힘이 미처 있음을 시를 통해 알 수 있고 -2연의 닙을 말려 떨리냐고 모란봉의 갈바람은 메츨이나 불엇는고는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벗어 나기 위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닙을 말려 떨리냐고로 표현하고 있으며 갈바람은 항일 운동을 하는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이며 -3연에 대동강에도 한복판 뜬 배우엔 이 내몸의 눈물비가 내리누나 하는 것은 평양의 한가운데 위치한 대동강에도 국권수복과 해방을 위해 저항하는 것을 시로써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 외세에 저항하는 깊은 뜻을 내재하고 있음   4) 작품 소개 나의 사랑은                         김 억 나의 사랑은 황혼의 수면(水面)에 해쑥 어려운 그림자 같지요 고적도 하게   나의 사랑은 어두운 봄날에 떨어져 도는 낙엽 같지요 소리도 없이   5) 작품 의견 -이 시는 외롭고 쓸쓸한 사랑을 노래한 시로 1연의 황혼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밤이 되면 추워지고 무서워 진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수면위에 해쑥 어려운 때문에 더더욱 을씨년스럽고 어깨가 으쓱 움추려드는 감을 느끼게 하며 그람자 같지요는 곧 사라질 허무한 것, 고적도 하게는 쓸쓸하게 하여 사람이 허전함을 말하고 있고 -2연의 어두운 밤이면 떨어져 도는 낙엽 같지요 소리도 없이 는 아무도 없고 캄캄한 밤에 떨어져서 외롭게 뒹굴고 있는 낙엽같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흐르는 허전함의 표현이지만 -역으로 말한다면 따뜻하게 해줄 사람이 필요해져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이란 대상이 이성일 수도 나라 일수도 있고 또 다른 대상이 될 수 도 있습니다.   6) 작품 소개 삼수갑산 三水甲山                            김 억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 첩첩에 흰 구름만 쌔고쌨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어하 촉도난이 이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못가네 아하 새더라면 날아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꿈만 오락가락   7) 작품 의견 -삼수갑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를 일컫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유배지로 유명하다 이렇다고 볼때 여기서 말하는 삼수갑산은 일제에게 빼앗긴 우리나라를 말하는 것으로 삼수갑산에 가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삼수갑산을 찾아가는 길에 흰구름만 쌔고쌨네 하는 것은 삼수갑산에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흰구름은 강압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시킨 일본의 세력을 말하는 것이고 촉도난이 이보다 더할소냐 하는 것은 촉도난은 ‘이백’의 ‘촉도난’ 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으로 멀고도 아주 험난한 사천성을 이루는 것으로 아주 그곳에 가는 길 보다 더 할소냐 한탄하고 있고, -내가 새라도 된다면 날아 날아 가련만 사람이기 때문에 날개가 없어 가지 못함을 한탄하는 것이다. -원수로다. 일본사람들이 원수로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놈들이 원수로다 외치는 것이고 광복될 꿈만 오락가락 한다는 내용으로 고국의 그리움과 향수를 삼수갑산에 대비해 노래하고 있음   8) 작품 소개 비                           김 억 포구 십리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말의 한나절을 모래알만 울려 놓았소 기다려도 않오다가 설은 날이면 보슬보슬 오늘 같이 만나도 웃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은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 魚泳島라 갈매기 때도 지차귀가 촉촉이 젖어 너훌너훌 날아를 들고 자취없는 물길 삼백리 배를 타면 어데를 가노 남포 사공 이 내 낭군님 어느곳을 지금해매노   9) 작품 의견 -집을 떠나 있는 낭군님을 그리워 하는 이별의 시로 비오는 날이면 낭군님이 더욱 그리워지며 오늘 내리는 보슬비는 마치 낭군님이 눈물처럼 보인다. -집을 떠난 갈매기들도 집을 찾아 들어오는데 자취없이 사라진 내낭군님은 어디에서 헤메고 있나 하는 것으로 여기서 낭군님은 조국을 일컫는 것이고 갈메기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뛰고 있는 광복군을 비롯한 독립 투사들을 이야기하는 것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조국을 위해 뛰고 있는데 조국의 광복은 언제나 오려나 하는 시임.   2. 김 기 림 1) 작가 소개 -본명 : 김 인 손 -출생 : 1908.5. 11 함경북도 성진시에서 출생 -학력 : 보성보통학교 졸업. 일본니혼대학교 문화예술과 졸업 일본도호쿠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경력 : 한국문학가협회 회원 조선문학가 동맹 조직 활동 구인회 회원으로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등과 활동 조선일보 기자 월북작가 -저서 : 시집 〈기상도. 1939〉, 〈새노래. 1947〉 시집론〈시론, 1947〉, 〈문장론 신강. 1949〉,〈시의 이해. 1950〉 -기타 : 시인 김기림은 엘리어트 이후의 영.미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엘리어트에게서 배운 기교 가운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시의 형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수법이다 또한 그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이미지를 결합시켜서 새로운 표현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데 이는 엘리어트가 상징파 시인들에게서 영향 받아 사용하던 수법의 하나이다 그는 시적 형상의 감각적 표현에 주력하는 한편 사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시에서는 시상 그 자체 보다도 감각적 등치물로 변형시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엘리어트의 현대적인 시 인식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로서 나타나게한 첫번째 케이스 이다   2) 작품 소개 시민행렬                           김 기 림 넥타이를 한 흰 식인종은 니그로의 요리가 칠면조 보다 좋답니다. 살결을 희게하는 검은 고기의 위력 의사 콜베-를 씨의 처방입니다. 헬멧을 쓴 피서객들은 난잡한 전쟁 경기에 열중했습니다 슬픈 독창가인 심판의 호각 소리 너무 흥분하였으므로 내복만 입은 파시스트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설사제는 일체 금물이랍니다. 필경 양복 입는 법을 배워낸 송미령(宋美齡) 여사 아메리카에서는 여자들은 모두 해수욕을 갔으므로 빈집에서는 망향가를 부르는 니그로와 생쥐가 둘도 없는 동무가 되었습니다. 파리의 남편들은 차라리 오늘도 자살의 위생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하고 옆집의 수만이는 석달만에야 아침부터 지배인 영감의 자동차를 부르는 지리한 직업에 취직하였고 독재자는 책상을 때리며 오직 ‘단연히 단연히’ 한 개의 부사만 발음하면 그만 입니다.   3) 작품 의견 -넥타이를 한 백인은 지배계급의 백인으로 니그로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권력사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어 유럽과 미주 등 서양의 현 상황 즉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난잡하고 추잡하며 이태리의 부정부패, 중국의 지배계급의 안에 어울리지 않는 서구화 바람과 미국 지배계급 여성들의 피지배계급인 노예계급인 니그로 여성들에 대한 일상등,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과 유색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민 행렬이라는 시를 통해 세계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변해야 한다는 의식을 불어 넣고자 하는 메시지를 넣은 시로서 -풍자를 통하여 세계질서에 대한 비판과 물질문명에 대한 인간성 상실의 비판을 통해 인간성 회복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4) 작품 소개 바다와 나비                                  김 기 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나비야 어디로 가려느냐 바다깊이는 1만미터가 넘고 바다의 넓이는 끝이 없다 파도 또한 집채처럼 높다 날개가 젖는다   나비야 어디로 가려느냐 꽃이파리 같의 너는 너무나 겁도 없이 가벼워서 서럽구나 나비야 청무우같이 파란바다위에 나비야     5) 작품 의견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인 작가는 멋도 모르고 세상에 뛰어들어 세상살이의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다 -누가 일러주지도 않고 가르켜 주지도 않은 세상살이 그리고 힘든 세상을 살아 나가는 방법 이에 무모하게 도전 했다가 고생만 하고 돌아 서서 서글퍼 하고 다음은 어데로 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한탄을 하고 있다 -또한 김기림은 바다를 비대해가는 물질문명의 시대로 생각하고 작가 자신은 나비에 비유하여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 자신이 어떻게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으로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푸른 바다가 파란 무우밭인가 싶어 꿀을 따러 갔다가 세파에 지쳐서 돌아 오는 자신, -아직 따스한 기운이 배이지 않은 삼월달 바다가 꽃이 필 수 없어 자신이 찾는 꽃이 없으므로 서글픈 것 그래서 이 힘들고 어려운 물질문명시대에 자신이 찾아 가야할 곳이 없어 서러운 것을 바다와 나비라는 시로 니타내고 있음.     6) 작품 소개 길                                   김 기 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7) 작품 의견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인 작가가 나이들어 찾아 보는 고향길 -순수한 시절의 모습이 진하게 그려지며 고향에서 잃어 버린 어머니와 첫사랑에 모두가 애닮고 가슴 아픈 추억이다 -누구나 한번 쯤은 겪었을 것 같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 그리고 어릴적 겪어야 했던 동네 순이의 첫사랑 생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길이라는 작품을 통해 공감하게 만들고 있다 작가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보이는 듯 하다   8) 작품 소개 유리창과 마음                                     김 기 림 여보 - 내마음은 유린가봐. 겨울 하늘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체 하더니 하로밤 찬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어간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어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 마음은 유린가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9) 작품 의견 -감각적이고 너무나 순수한 언어로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 것으로 여기지며 나도 순수 문학을 하기를 원하는 학생으로서 이와 같은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강한 것 같으면 서로 약하고 약한 것 같으면 서도 강한 여리고 굳은 마음을 순수한 사랑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이 상 1) 작가 소개 -본명 : 김 해 경(김해김씨) -출생 : 1910. 8. 20(음) 서울 종록구 사직동에서 출생 -학력 : 신명학교 졸업 보성고보 졸업. 경성고 공업과 졸업 -경력 :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근무 조선총독부 회계과 영선반 근무 조선문학가 동맹 조직 활동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 69다방운영 -작품 : 신문연재소설 - 「소설가 구보씨의 1일」등 다수 시- 날개, 오감도, 거울 등 다수 수필 - 서망율도, 조춘점묘, 가외가전 등 다수 단편 - 지주회사 등 다수 -기타 : 시인 이상은 서양화에도 많은 관심이 있어 「鮮展」에 자화상을 출품 함 조선건축회지에 「조선과 건축」표지 도안을 현상모집에 공모하여 1등과 3등 당선     2) 작품 소개 거울                                     이 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요   거울속에도내개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에나는참나와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가없으니퍽섭섭하오     3) 작품 의견 -이상시인은 거울이라는 것을 통해 거울속에 나와 거울밖에 나의 분열된 자아와 내부의 자아 즉 두 자아는 서로 소통할 줄 모름을 이야기 하며 -거울속의 나와 거울밖의 나의 외형은 서로 같으나 하나는 마음(속)이 있고 하나는 속이 없어 소통을 못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며 -또 이상 시인은 이 시의 띄어쓰기의 거부를 통해 글어 언어장애성과 소통질서에 대한 부정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문명의 흐름에 반하는 의식의 소유자로서 보통사람이 가지지 못할 이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이를 “싸이”라고 하기도 한다     4) 작품 소개 절벽 絶壁                        이 상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墓穴)을 판다.墓穴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속에나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 또꽃이香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다.香氣가滿開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再)차거기에墓穴을판다.墓穴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로나는꽃을깜박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아아.꽃이또香기롭다.보이지않는꽃이... 보이지않는꽃이.     5) 작품 의견 -이상 시인은 꽃이 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위면하기 위해서 눈을 감고 후각으로만 꽃이 향기로움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묘혈은 묘속에 사람의 시신이 들어가는 곳이다. 눈을 감고 있으니 묘혈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에 들어 앉는다. 그리고 들어 눕는다. 또 향기를 느낀다. -꽃도 보이지 않는데 향기가 만개 했음을 알고 잇다 아름다운 달콤한 향기속에 묘혈을 찾아 눕는 다는 것은 실제 죽음 보다는 안락을 즐기려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육체의 죽음과는 별도의 의지로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그 달달한 세상에 삶의 맛을 보고픈 마음을 그렇게 표현 했을 것이다.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고 부러워하거나 그리워 하는 자신만의 세상을 꽃의 향기로 만들어 자신에게 휴식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인다. -싸이코적 기질을 지닌 시인으로서 이상적인 세계관을 꿈꾸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꿈이다   6) 작품 소개 침몰                 이 상 죽고 싶은 마음이 칼을 찾는 다 칼은 날이 접혀서 펴지지 않으니 날을 보호하는 초조가 절벽에 끊치려 한다 . 억지로 이것을 안에 떠밀어 놓고 또 간곡히 참으면 어느곁에 날이 어디를 건드려 본다 건드렸나보다. 내 출혈이 뻑뻑해 온다. 그러나 피부에 상채기를 얻을 길이 없으니, 악령 나갈 문이 없다. 갇흰 자수로 하여 체중이 점점 무겁다   7) 작품 의견 -기존의 가치 체제를 부정하고 일체의 질서 파괴를 노리는 다다이즘운동에 앞장섰던 모더니즘 시인 이상은 일체의 질서 파괴를 노리는 편편한 가치체계에 빠져있던 시인은 이시의 띄어쓰기 부터 형식적 파괴를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시를 통해 자신의 앞날을 예고하듯이 출혈이 뻑뻑하고 피부 생채기가 아물지 않고 악령이 몸안에 갇혀 있어 직시적현실과 정신적 현실에서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겠다.   4) 작품 소개 가정                  이 상 문을암만잡아당겨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이보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조른다. 나를조른다. 나는우리집내문패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멸해간다. 식구야봉한창호어디라도한구석터놓았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 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았다 문을열려고안열리는문을열려고   7) 작품 의견 -이 시는 다른시와 마찬가지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그의 시의 특지에 기존의 형식을 부정하는 파괴적인 경향이 있으며 -이 시는 시인의 가난한 상황에서 절망감이나 문고리에 매달려야 하는 비참한 모습과 가정을 지켜낼 수 없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본인 때문에 가난한 가정에 대한 부담감과 절망감 그리고 본인의 처지를 처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1759    모더니즘시, 현대 문명을 비판하다... 댓글:  조회:4859  추천:0  2016-11-06
  전통과 단절하고 현대를 지향하다 모더니즘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과 단절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 경향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합리적인 이성과 도덕을 추구해 오던 인간이 세계대전과 같은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자 기존의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런 까닭에 모더니즘은 전통보다는 개인의 특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것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또한 도시 문명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적인 인식을 보여 주기도 하지요. 모더니즘은 형식적으로는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소설에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든가, 자동기술법과 같은 방법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자동기술법은 기억이나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아무런 장애나 간섭 없이 그대로 서술하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이 방법들은 기존의 서술방식과 달리 문법에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고, 앞뒤 맥락이 서로 맞지 않기도 했습니다. 합리적인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과 형식이 사용된 것입니다. ​ ​   모더니즘 시는 이미지를 중시한다 모더니즘 시는 리듬보다는 이미지를 중시합니다. 전통적인 시들이 리듬을 중요하게 받아들인 것과 달리 모더니즘 시는 회화성을 중시했습니다. 이미지란 순간적으로 포착해 내는 인상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합리적인 이성의 작용보다는 직관과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직관과 상상력은 전통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개개인마다 일어나는 특수한 정신적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모더니즘 시의 또 다른 특징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감정을 절제한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화자가 감정을 호소하는 것과 뚜렷한 차이가 있었지요. 그런 까닭에 모더니즘 시를 주지주의적이라고 규정짓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주지시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감정보다는 지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에서 이런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아래 시를 감상하며 모더니즘 시의 특징을 더 분명하게 알아볼까요.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 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이 시는 1930년대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이끌었던 김기림 시인의 작품입니다. 일단 이 시에서는 전통적인 리듬의식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연과 행의 구분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운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신 이 시에는 이미지가 분명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조적인 이미지가 쓰이고 있지요. ‘흰 나비’와 ‘청무 밭’에서 일단 흰색과 푸른색의 대비를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대비는 ‘나비 허리’와 ‘새파란 초승달’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색채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이미지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요. 모더니즘 시의 전형적인 특징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에는 감정 표현이 비교적 절제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나비’로 표현된 가녀리고 순진한 존재가 ‘바다’로 상징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상처를 입고 좌절하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시적 대상의 좌절과 슬픔, 비극이 직설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요. ‘서글픈’이라는 감정이입의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시적 화자라든가 시적 대상의 정서가 직접 표출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모더니즘 시는 감정에 대한 절제를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 ​   모더니즘 시, 현대 문명을 비판하다 모더니즘 시의 내용상 특징으로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들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은 인간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한 삶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이기심과 탐욕에 물들게 했고, 자연을 훼손해 왔습니다. 모더니즘 시는 이런 현대 도시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했습니다. 다음 시는 이런 예를 잘 보여 줍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 이 시는 도시의 쓸쓸하고 암담한 정서를 그려 내고 있습니다.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라는 표현에서 도시 문명이 지닌 폭력성을 느낄 수가 있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시적 화자는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다고 말합니다. 도시 문명 속에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더니즘 계열의 시에는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초현실주와 다다이즘 모더니즘 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통과 단절한 채 새로움을 추구하려 합니다. 내용상으로도 그렇고 형식적으로도 그렇지요. 그런 까닭에 모더니즘 시에서는 다양한 형식적인 실험이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숫자를 나열한다거나 그림을 활용하기도 하고 띄어쓰기를 무시한 채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을 추구해 왔습니다. 20세기 초에 유행하던 초현실주의라든가, 다다이즘, 아방가르드 등은 모두 모더니즘 안에 포함되는 개념들입니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서술하는 것이며, 다다이즘과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형식을 일부러 깨뜨려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사조를 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의 「오감도」가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모더니즘은 우리 시를 더욱 풍부하고 현대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정지용, 김광균, 장만영, 김기림, 이상의 작품들을 찾아서 읽는다면 모더니즘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아방가르드와 다다이즘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불어로 본래는 군대 용어입니다. 우리 말로는 흔히 전위라고 번역되지요. 전위 부대란 전투를 치를 때 선두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를 가리킵니다. 돌격대 내지, 선봉이라고 생각하면 쉽지요. 예술에서는 전통이나 관습에 맞서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을 뜻합니다. 과거에 없었던 혁명적인 예술 경향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지요. 다다이즘(dadaism)은 과거의 모든 예술 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무의미함’을 추구하는 예술입니다. ‘dada’라는 말도 본래는 ‘목마’를 뜻했지만 크게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예술이 등장한 까닭은 1차 세계대전 후, 예술가들이 기존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철학과 예술, 그리고 학문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의미 없는 예술을 추구했던 것이지요. ​ ​////////////////////////////////////////////////////   모더니즘 1920년대일어난 근대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예술상의 여러 경향.넓은 의미로는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에 반항, 과학이나 합리성을 중시하고 널리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기계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여 현대풍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 문인들로는 프랑스의 P.발레리, 영국의 T.E.흄, T.S.엘리엇, H.리드, 헉슬리 등의 이론과 작품의 영향을 받은 정지용(鄭芝溶) ·김광균(金光均) ·장만영(張萬榮) ·장서언(張瑞彦) ·최재서(崔載瑞) ·이양하(李敭河) 등이 있다. 김기림의 장시 《기상도(氣象圖)》(1936)는 엘리엇의 《황무지》의 영향을 받은 당시 모더니즘의 대표작이며, 김광섭(金珖燮) ·김현승(金顯承) 등의 시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어 1950년대의 김수영(金洙映) ·박인환(朴寅煥) ·김경린(金璟麟) 등과 ‘후반기’ 동인들에 의해 모더니즘 시운동이 전개되었다. 1960년대의 ‘현대시’‘신춘시’ 동인들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시가 상실했던 상징적 내면의식과 초월의식을 형상화하려 했다.     1. 정지용 카페 프란스, 향수, 유리창, 장수산, 고향, 인동차 등등   비                   정지용 돌에 그늘에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죵죵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거리.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는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닢 소란히 밟고 간다. -시집1941년   2. 김기림 바다와 나비, 기상도, 태양의 풍속   기상도           김기림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 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 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스마트라'의 동쪽.  ......5'킬로'의 해상(海上)...... 일행 감기(感氣)도 없다. 적도(赤道)가까웁다. ......20일 오전 열 시. ......   3. 이상 거울, 오감도,날개, 종생기, 소영위제, 권태, 산촌여정, 봉별기 등등   거울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1933년7월   4. 김광균 설야, 와사등, 외인촌, 추일서정, 데생   와사등(瓦斯燈)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긴-여름 해 항망히 날개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조선일보 1938년6월3일   5. 오장환 성벽, 헌사, 병든 서울, 나 사는 곳 , 성탄제, 나의 노래   나의 노래             오장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라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야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야   단 한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성탄제              오장환 산 밑까지 나려온 어두운 숲에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 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우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   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나리며 넓은 언덕에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   뭇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며칠씩 산 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 나어린 사슴은 보았다 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 표범과 늑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길이 돌아가는 사슴의 두 뺨에는 맑은 이슬이 나리고 눈 우엔 아직도 따듯한 핏방울...... . -조선일보 1939.10.24               [출처] 모더니즘 시인|작성자 보슬이와릴리     [출처] 모더니즘 시는 어떤 점이 모던한가요? |작성자 당느  
1758    김기림 모더니즘시 리론작업, 정지용 모더니즘시 실천작업 댓글:  조회:4185  추천:0  2016-11-06
[ 2016년 11월 07일 09시 08분 ]   ㅡ중국 문창(文昌) 발사기지에서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시의 수사학적 연구   금 동 철 (서울대학교 강사)     1. 서 론 한국 현대 시사에서 1930년대 모더니즘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 문학의 현대성을 드러내는 한 지표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후 한국 현대 시문학사 상의 중요한 이정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년대의 낭만주의적인 시와 카프 계열의 리얼리즘시를 넘어 본격적으로 현대화된 시문학의 시대를 연 것이 바로 이 시기의 모더니즘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져왔다. 모더니즘시에 대한 기존 논의의 관점 중 하나는 서구 모더니즘과 비교하는 비교문학적 관점1)이며, 또 하나는 문학사적 의의에 대한 연구이다2).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모더니즘시는 다분히 부정적인 모습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모더니즘 자체의 이론을 완전히 체계화시키지 못하고 막연한 이국적 정서를 나타나는 여러 단어와 서구 취향, 그리고 도시적 감성의 무분별한 사용 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 논의는 다분히 기법적인 차원에서 서구 모더니즘과의 비교 분석에 초점을 둠으로써 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를 서구나 일본의 원전과의 대비에 치우치거나 문학 기법의 혁신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이들 시가 지닌 내재적 특성에 대한 탐색이 다소 부족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최근에 나타나는 또 다른 한 관점은 모더니즘을 세계관의 차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단순한 기법적 차원에서 모더니즘시를 논의할 경우 이것은 서구의 그것에 형편없이 미달하는 그 무엇이 될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그들이 지닌 세계관을 분석하고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3). 이러한 관점 또한 서구 모더니즘의 세계관과의 비교검토가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서구 모더니즘의 세계관을 식민지 지식인이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없음 또한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모더니스트들이 보여주는 시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들 시작품 속에 내재해 있는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따져내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 중의 하나는 이 시기 모더니즘시인들4)이 보여주는 변화의 양상이다. 이들의 초기 모더니즘시가 보여주는 신기성에의 지향은 3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 상당히 다른 모양으로 바뀌면서도 모더니즘적인 속성들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시세계가 바뀌는 이유가 이제까지의 논의와 같이 그들 자신들의 모더니즘적인 시세계가 지닌 부정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지닌 특징을 규명할 수 있다면 이 시기 모더니즘시의 성격을 해명하는 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본고에서는 수사학적 방법을 동원하고자 한다. 시의 언어적 차원에서 표출되는 수사학적 특성을 검토함으로써 이들 시인들이 지닌 세계관까지 분석할 수 있다면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 시인들의 모더니즘 지향이 지닌 의미망을 새롭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는 기호의 차원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수사학을 상정할 수 있다. 은유와 환유가 바로 그것이다5). 은유는 기호가 기호 체계 너머의 세계나 관념과 같은 지시대상을 지칭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언어관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하나의 기호가 지칭하는 세계가 또 다른 기호일 뿐이라는 기호 내적인 언어관을 지향한다. 환유에 의해 형성되는 기호는 그러므로 기호 너머의 세계를 지칭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초현실주의로 대표되는 아방가르드나 포스트모더니즘시의 기호관이 대표적인 환유적 기호관이다. 이에 비해 서정시의 기호는 그것 자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 너머에 존재하는 진리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는 곧 은유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형성되는 동일성의 세계를 지향한다면 기호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기호와 지시대상 혹은 관념과의 사이에 형성되는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시의 언어는 언어 기호의 차원을 넘어 사상이나 관념, 정서 혹은 절대의 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서정시가 근원 혹은 본질을 지향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0년대 모더니즘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이와 같은 언어의 수사학적 특성에 대해 검토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 이 시기 모더니즘이 가졌던 상이한 두 흐름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들 시인들의 시세계가 어떠한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이미지즘을 통한 근원에의 지향 - 정지용 30년대 모더니즘시의 중심에 서 있는 시인 중의 하나는 정지용이다. 김기림이 이론적인 작업으로 모더니즘시 운동을 일으켰다면, 정지용은 시를 통해 모더니즘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의 초기시에 나타나는 모더니즘적 요소에 대한 논의는 주로 감각적 인식과 선명한 이미지의 창조라는 측면으로 집중되어 왔다6). 「파충류동물」이나 「슬픈 인상화」와 같은 데서 나타나는 형태주의적인 요소 도 모더니즘 기법의 한 종류로 지적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부분은 신기성을 좇는 초기 정지용의 한 편력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가장 모더니즘적인 측면은 그의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 사용법이라고 하겠다. 그의 시에서 이미지는 이전의 우리 시에서 보기 힘들었던 새로움과 선명함을 함께 볼 수 있다. 「호수」나 「바다」, 「향수」와 같은 시에 나타나는 선명한 이미지는 그의 시에서 모더니즘적인 요소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한다. 이들 시에서 사용된 이미지는 20년대적인 애상의 흔적을 걷어내고 이미지 그 자체를 선명하고 투명하게 제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고래가 이제 橫斷 한뒤 海峽이 天幕처럼 퍼덕이오.   ……힌물결 피여오르는 아래로 바독돌 자꼬 자꼬 나려가고,   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종달새……   한나잘 노려보오 훔켜잡어 고 빩안살 빼스랴고   미억닢새 향기한 바위틈에 진달레꽃빛 노개가 해ㅅ살 쪼이고, 청제비 제날개에 미끄러저 도-네 유리판 같은 하늘에. 바다는 -- 속속 드리 보이오. 청대ㅅ닢 처럼 푸른 바다 봄 -- 정지용, 「바다 6」 중에서     이 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이미지 사용법은 그의 초기시를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정서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비유를 통한 선명한 이미지의 창조를 통해 객관적으로 사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해협의 파도를 ‘천막’에 비유한다거나 바다종달새의 움직임을 은방울 날리는 모양으로 묘사하고, 하늘을 유리판 같은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창조를 통해 시인은 세계를 선명하게 독자들의 눈 앞에 제시한다. 그만큼 그의 초기시에서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정지용의 시를 평가할 때 두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하게 된다. 하나는 초기 모더니즘적인 시세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30년대 후기에 주로 나타나는 자연시와 관련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기 모더니즘시에 대한 평가는 서구적인 이미지즘의 미달형태이며, 그 속에 들어갈 사유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필요한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후기 자연시는 전통성의 세계를 받아들여 시의 사상성을 달성함으로써 훌륭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이다7). 이러한 입장은 30년대 중반의 정지용이 지에 관계하면서 발표한 다수의 기독교적인 시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연결된다. 이 시기의 시에서 정지용은 초기 모더니즘시의 기교적인 세계에 카톨릭이라는 사상성을 도입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3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 정지용의 자연시에서도 이미지즘적인 요소가 다분히 발견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의 시세계에서 기독교성이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이다. 「장수산」이나 「옥류동」 같은 작품에서 보면 선명한 이미지를 창조하고자 하는 이미지즘적인 요소의 흔적과 함께 전통적인 세계관만으로는 해명하기 힘든 요소가 함께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후기 자연시를 쓰던 3년대 후반에 발표한 여러 시론에서 기독교적인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8). 그렇다면 그의 시세계에는 기독교성이 상당부분 묻어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수사학적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지적이다. 정지용이 주장하는 바 시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덕목에 대한 강조는 그의 시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의 말이나 산문을 그대로 시의 해석이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시기의 정지용의 시에서 이러한 자신의 주장이 입증이 된다면 여기에는 상당한 의의가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특징을 일반적인 자연시의 세계관과 비교해 본다면 보다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0년대 후반의 그의 자연시에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분명히 내재해 있는 바, 그것을 이미지 사용법에서 간파할 수가 있다. 그의 자연시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전통 자연시가 보여주는 풍성하고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고 위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같은 문장파 시인인 이병기나 조지훈과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자리라고 하겠다9). 최승호는 문장파의 자연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병기와 정지용, 조지훈 세 사람의 자연시가 지닌 특징을 비교 검토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이병기의 자연시가 생명력의 확산적 교감을 보여주고, 조지훈의 자연시가 생명력의 현상유지적 교감을 보여준다면, 정지용의 자연시에는 생명력의 축소적 교감을 보여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정지용의 자연시에만 이러한 축소적 성향이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세계관의 차이로 보아야 제대로 그 이유를 제대로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지용은 자연이 이상화된 상태에서 낙원의 이미지로 그려지던 전통적인 유가의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자연을 전통적인 유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山새 걸음거리.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 정지용, 「비」     여기에도 분명히 이미지즘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그만큼 그의 시에서 모더니즘은 핵심적인 축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에 묘사된 자연의 모습이다. 산새의 걸음걸이가 ‘죵죵 다리 깟칠한’ 것으로 묘사된다든가 물살이 ‘수척한 흰’ 것으로 묘사되는 데서 전통적인 자연관과는 다른 그 무엇을 발견한다. 자연 사물들이 삭막한 인간 세상과는 달리 풍성하고 아름다워 언제든지 그곳에 가서 자연과 동화되면 안식을 누리던 세계가 바로 전통적인 유가적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지용의 이 자연시에서는 자연을 매우 중요한 동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자연은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척하고 까칠한 모습, 다시 말해 위축되고 축소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생명들도 이러한 위축된 분위기를 함께 지닐 수밖에 없다. 「백록담」에 나타나는 송아지의 모습이나, 「조찬」의 새도 마찬가지이다. 「장수산」의 노승의 이미지와 함께 제시되는 달밤의 이미지 또한 자연 속에 처한 자아의 풍성한 만족감이 아니라 시리도록 아픈 고독감이라는 점도 이러한 위축되고 축소된 자연 이미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을 묘사하는 이미지 너머에 기독교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자연 이미지가 하나의 기호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당대의 위축되고 소외된 인간들을 그릴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세계관까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그의 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수사학적인 차원에서 문제되는 자리는 바로 이 지점이다. 여기서 정지용은 언어 기호를 단순한 기표의 놀이라는 차원에서 사용하지 않고 그 너머의 세계를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유적 차원의 언어 사용법이라고 하겠다. 은유에서 말하는 주지와 매체 사이의 동일성의 세계가 여기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 이미지를 통해 관념적인 세계를 표현해 내고자 하는 정지용 시인의 시적 특징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은유적 세계관은 초기의 모더니즘시가 지닌 언어 기호의 특징에 대한 설명에서도 매우 유용하다. 이미지즘에서 추구하는 바 견고한 이미지를 통한 시의 창조라는 측면을 수사학적 차원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견고한 이미지란 낭만적 감성을 배제한 투명한 이미지의 창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이미지는 실제 세계에 대한 모사적 측면을 지니게 된다.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의 문제로 볼 경우 모사는 이 둘 사이의 동일성을 인정하는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언어 기호가 외부 세계를 모사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속에 깔려 있고, 이것은 곧 기호가 그 지시대상으로서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재현해 낼 수 있다는 은유적 상상력의 중요한 한 측면이 되는 것이다. 결국 견고한 이미지의 창조란 은유적 세계관을 토대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의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 속에는 기호로서의 이미지가 거느리고 있는 의미의 세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수사학적 특징은 흄이나 엘리어트가 카톨리시즘이라는 전통적 세계로의 복귀를 추구한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미지즘이 시에서 사용된 언어 기호를 통해 카톨리시즘이라는 관념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의 이미지가 관념의 세계, 사상의 세계, 정신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는 은유적 세계관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이미지즘이 은유적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10). 이미지즘을 지향한 정지용의 시세계에서도 은유적 세계관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초기의 몇몇 시편에서 발견되는 설익은 신기성에의 지향으로부터 차츰 견고한 이미지 창조로 이행하면서 그의 시가 성숙되어갈 때, 거기에는 은유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琉璃에 차고 슬픈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寶石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琉璃를 닥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유리창의 차가우면서도 투명한 이미지 속에 자신의 정서를 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이미지를 통해 다른 그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이미지들이 재현적 차원의 세계를 담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를 통해 시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사용에서 은유적 관점의 언어관을 읽을 수 있다. 「호수」나 「향수」 등에 나타나는 선명한 이미지 또한 이러한 재현적 관점을 유지함으로써 명확한 은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정지용의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그 너머에 항상 관념이나 정서의 덩어리들을 거느리고 나타나는 은유적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동일성을 상정하고 기호가 지시대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은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미지즘을 지향한 정지용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3. 은유적 동일성으로의 회귀 - 김기림 김기림의 시세계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그의 초기시가 보여주는 문명비판적인 요소에 맞춰진다. 그가 주장하는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러한 문명비판적인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자들이 인정하는 바 중의 하나는 김기림의 자본주의와 근대 문명에 대한 미숙한 이해는 이러한 문명비판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문명비판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도 이국적인 정취의 과도한 사용, 이국적인 지명이나 이름, 영어의 잦은 사용이라는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본고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이와 같은 김기림이 보여주는 문명비판의 정당성이나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서툰 문명비판 의식이 가져오는 수사학적 문제이다. 김기림은 자신이 주장하는 문명비판을 위해 풍자라는 기법을 도입한다11). 그가 가져온 풍자는 수사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환유라고 할 수 있다. 서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만 성립될 수 있는 풍자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동일성 파괴와 맞물리는 사유구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시에 과도하게 나타나는 이국적인 이미지와 영어식 표기법12)은 시 자체의 통일성을 방해하는 구성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는 단순히 김기림 자신의 시정신의 미숙으로만 보기에는 상당한 난점이 있다. 김기림은 첫 시집
1757    모더니즘 문학과 도시의 문학 댓글:  조회:4080  추천:0  2016-11-06
[ 2016년 11월 07일 09시 08분 ]     중국 문창(文昌) 발사기지에서ㅡ 1990년대 이후 모더니즘 시의 특징 ㅡ 문혜원   1. 도시성, 인공성, 반자연성 모더니즘 문학의 대전제는 도시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기술문명의 발당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응하며 변화해 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 순종하고 그것으로부터 의식주에 필요한 물적 자원을 조달받아온 농경공동체적 사고와는 구별된다. 도시에서 탄생한 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반자연적이며 인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술이 발당하면서 인간은 보다 효율적인 인공물을 만들기 위해 자연을 갈취하고 파괴해 왔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부여받은 바 그대로인 상태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을 제공했고, 그것이 인간의 파괴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러니 이 은 인간을 육체적인 노동에서 자유롭게 하는 한편,  인간 소외를 불러왔다. 월등하게 효율적인 기계가 들어서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분업으로 인해 생산량은 배가된 대신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은 약화되었다. 힘을 합쳐서 노동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개인 간의 관계는 점차 느슨해졌고, 그들은 각각 단절된 자기만의 공간 속으로 되돌려졌다. 물신주의가 팽배하면서  인간 사이의 관계는 더욱 황폐해졌다. 모더니즘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해 왔던 인간이 이러한 새로운 도시적 환경에 마주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반영한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는 모더니즘 문학의 고전적인 주제이다. 이는 우리의 모더니즘 문학을 설명하는 데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도시성은 1930년대의 정지용, 김기림 등의 시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더니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의 모더니즘이 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후의 모더니즘 시에서 도시성은 더 이상 새롭고 유니크한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만큼 도시적인 삶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성에 대한 반응은 경이와 매혹/비판과 우울이라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반응은 공존한다...   이에 비할 때 199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시는 도시 경험을 생래적인 것으로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세대의 시인들은 병원 분만실에서 내어타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고 단지 내의 놀이터와 놀이방에서 성장한 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인공의 공간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그들은 도시의 인공성을 받아들인다. 설령 젊은 시인들이 시에서 도시에 대한 환멸과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 환경에 대한 감상일 뿐이지 자연친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란 도식도 물론 성립되지 않는다.   도로에는 신호증과 횡단보도와 노란 중앙선이 있고 도 로의 위에는 구획 정리가 끝나지 않은 하늘과 세계를 불쑥불쑥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있다 도로의 밑으로 는 시간이 뿌리처럼 뻗어나가고 나도 그 배선의 일부여서 생산 목표가 있고 작동 조건이 있고 전원이 있다 나는  내 몸을 켜놓고 나를 전송해주는 휴대폰을 들고 지하철 순환선에 올라탄다 나를 태운 순환선이 움직 이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가벼운 것에 올라타 있다 날아가거나 녹지는 않는 것이다 나의 휘발성은 일시적이다   엘리베이터 자궁의 시간은 미끌거리고 깨질 듯이 환하다 소리는 천상에서 떨어진다 하늘의 자궁은 태양 뒤에 가려져 있다  사방의 미끄러운 벽에 두리번거리는 내가 복제된다 오른쪽 모니터에서는 쉴 새 없이 바뀌는 오늘의 증시가 표시되고 왼쪽 모니터에서는 습도와 온도가 있다 양쪽 눈에 모니터가 와 박힌다 모니터가 내 눈을 대체한다 내가 건너온  출렁거리는 강과 강을 가로지르는 은색 다리는 모니터 안에 저장되어 있던 것일까 7 층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떨어지자 정확히 엘리베이터의 한가운데가 쫙 갈라진다 순간 세계는 급작스럽게 광폭이 된다 나도 기억 장치쯤은 확장할 수 있다   -이원, 부분   화자의 생활공간은 자동차와 지하철, 모니터와 엘리베이터로 이루어진 인공의 도시이다. 도로 위에서는 차들이, 도로 아래에서는 지하철이 쉴 새 없니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화자는 거대한 자궁과도 같은 도시의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디지털로 번쩍이는 숫자들을 본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날씨와 세계 정세와 주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웹 사이트에 접속이 되고, 화자는 그 안을 돌아다니면 하루 종일을 잘 논다. 스스로 임을  자청하는 이들 세대는 더 이상 자연이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주거 환경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시는 인공적이고 반자연적이다. 자연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기억이나 친화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자연이 이상적이고 화해로운 공간이라는 것은 학습을 통해 얻어진 관념일 뿐이다. 이들의 시에서 유기체적인 사고나 친자연적이 성향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도시의 인공성은 이제 가장 일상적인 삶의 환경이 된 것이다.   2. 주체의 과잉과 유희성 모더니스트들은  객관적인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회의를 표명한다.  이란 사실주의 문학이 표방하는 진실이나 플라톤식의 진실과 같은 지상의 진실로부터 현실을 제시하거나 언표함으로써 현실을 창조하는 자아의 진실에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현실은 오직 개개인의 내면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즘은 주체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문학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더니즘 시에 객관적인 현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모더니즘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시인의 주관적인 시각에 의해 선택되고 재해석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보들레르가 라고 명명한 라는 존재는, 대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며 문명의 상징인 호화로운 건물들과 군중들을 본다. 는 것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의 심리적 거리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비판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현실을 그려냄으로써 일그러진 문명의 자화상을 그려내고자 한다.  세계와 심각한 불화를 겪으면서 불화한 자리에 자신을 세워둠으로써 긴장과 갈등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과 객관적인 거리감을 상실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이 에 비하면 199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시인들은 먼저 단절을 자청하고 닫아버린다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투영된 이미지들을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무관심하며 타자와의 의사소통에도 관심이 없다. 독자의 이해나 동조를 희망하지도 않는다. 모더니즘이 내면 회귀적인 성향과 사회비판적인 성격이 주기적으로 교차되며 진행되어 왔다고 할 때, 유희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최근의 모더니즘 시들은 내면회귀적인 성향의 변형 형태하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960, 70년대의 모더니즘 시의 내면성과 구별되는 이유는,  주체의 과잉상태가 놀이 형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혼자만의 놀이에 열중해 있는데, 혼자 하는 놀이이므로 규칙 따위는 필요치 않다. 순간순간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규칙을 바꾸기도 하고, 규칙 없이 마구 흩어놓기도 한다.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박상순, 부분   숫자를 가르치는 장난감에서 유추된 듯한 이 시에서, 숫자와 대응되는 사물간의 관계는 그야말로 우연적인 것이다.  설령 숫자들이 장난감에 있는 대응 관계를 따르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성은 없다. 2를 비행기, 8을 늑대라고 하더라도 시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이 대응 관계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특정한 기준에 의거한 것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의미 없는 우연적인 조합에 불과하다. 독자는 규칙을 발견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규칙이 일부 바뀐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놀 이의 규칙은 시인에 따라 개별적인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은 자신의 놀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각각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고립된 주체들의 집합이다.  유희적 성격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독자는 놀이를 이해하는 극소수 혹인 시인 자신으로 한정되는데, 그것은 결국 타자와의 단절을 불러온다. 그럼으로써 단절과 불화에서 시작된 유희는 결국 단절을 합리화하고 공고하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된다.   3. 닫힌 환상과 강박증 모더니즘 시에서  환상은 주체의 고립된 내면과 자아 분열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사용된다.  그것은 실제적 현실에서 억압당하고 배제된 것들을 호출함으로써 현실의 불확정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주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환상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보이는데, 이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비디오 등 시각적 매체에 익숙해진 세대의 특징을 반영한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는 전도된 상황이다. 기호에 의해 산출된 시뮬라크르로 채워진 세계는, 환상이 피어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환상은 현실과의 분리 여하에 따라 과 으로 나누어진다. 이 현실과 환상의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면,  은 현실과 환상이 철저히 분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환상을 말한다.  이 환상과 현실을 끊임없이 중첩시키며 결국에는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비해,  은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닫힌 환상은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 시는  의 구조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 와 비교할 때, 1990년 이후 모더니즘 시에서 현실은 대부분 지워져 있다. 대신 자유롭게 출몰하는 이미지와 동화에 가까운 이야기, 의미가 포착되지 않는 언어의 조합들이 시를 만들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절대적 분리를 지향하는 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 시들에서 역시 환상은 은폐되어 있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상처들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환상을 통하여 억눌려 있는 주체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트라우마에 얽어매고 그러한 강박상태를 시적인 원천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환상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인다.   장례식이 몇 시였지요 곧 가야 해요 겟 백 겟 백 미치겠군 그 노래 좀 꺼 주시겠어요 유리창의 무늬라도 가져갈래요 어땠든 오 년 넘게 이 방에서 당신과 딍굴었으니 시간이 흐른 뒤, 저 삐뚤삐뚤한 무늬들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만 죽고 싶겠죠 두시라고 했나요 그래요 그 손 좀 치워요 당신은 한 시도 내버려두지 않는군요   항 상 부르는 사람 방문을 열 줄만 알았지 닫을 줄 모르는 사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내 눈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데 나는 여자에요 때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작은 불을 켜고 한 계단, 한 계단, 눈썹이 참 짙군요 달신 아 당신 듣기 좋은 멜로디에요 귀를 자를까요 자르겠어요 꿈이겠죠 너무 멀리 가지 말아요 물고기는 싫어요 기르기 힘들죠 당신을 핥고 싶군요 입술이 차갑군요 당신 참 무서운 사람이에요 사랑할까요 사랑할래요 당신 차라리 죽어버려요 아니 죽지 말아요, 계단을 내려서듯 더 많은 혼잣말을 통해서만 계단 끝의 당신에게로 하는, 그래요 나는 상처투성이 여자 좀 까다로운 여자입니다   -황병승, 부분   최 근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새로운 시인의 시이다. 여기에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현실은 없다. 이 시에서 환상이 가지는 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비평가를 포함해서)은 많지 않다. 사실 이 시는 으로 읽히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환상은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상실하고, 현실과 무관한 동화 속 이야기처럼 제시된다.  시를 읽는 독자들 역시 이 시가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환상임을 알고 있으므로, 환상 이상의 다른 의미를 구하려 하지않는다. 독자들은 오히려 편하게 시를 읽고 별다른 부담 없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 이나 같은 판타지를 볼 때, 현실과 별다른 연관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때 환상성은 현실의 억압과 부조리를 폭로하는 고유의 전복적인 기능을 상실한다. 환상의 두 가지 측면 - 낯설음과 불편함을 제공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측면과 대리만족을 통해 거짓 화해를 부추기는 측면 - 중에서  비판적인 기능이 사라지고, 현실의 고통을 잠시 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환상성에 기잰 적지 않은 시들이 의외로 뿌리가 빈약해 보이는 것은, 환상이 종종 인위적으로 조작된 테크닉을 사용되기 때문이다. 놀이를  위한 놀이가 금방 진력이 나듯이, 놀이를 위해 강박적으로 되풀이되는 환상은 지루하고 뻔한 것이 된다.   3. 갈등의 미해결성과 상호복제현상 대부분의 환상이 어두움과 혼란스러움, 엽기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하고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모더니즘 시의 특징이다. 위악적인 포즈들은 김언희를 비롯하여 김민정, 이민하, 고현정 등  여성시인들의 시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이라는 주변화된 성별에서 오는 억압과 상처들을 뒤틀린 가족 관계나 절단되고 훼손된 신체, 난무하는 폭력과 죽음 등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형태로 표현한다.   이리 온 내 딸아 네 두 눈이 어여쁘구나 먹음직스럽구나   요리 중엔 어린 양의 눈알요리가 일품이라더구나 잘 먹었다 착한 딸아 후벼 먹인 눈구멍엔 금작화를 피고름이 질컥여 물 줄 필요가 없으니, 거 좋잔니...   -김언희, 부분   김 언희의 시에서 아버지는 권위와 남근의 상징으로서, 화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딸의 눈알을 파먹고 딸과 섹스하는 아버지의 형상은, 규칙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이성의 폭력에 대항하는 도발적이고 정복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이는 여성 일반으로서 겪는 불평등한 제도의 억압과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통과 갈등, 불화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확산될 뿐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사건의 미해결성은 모더니즘의 본연의 성격인 과도 연관이 있다. 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의 문학이다. 그것은 이상적인 과거와는 단절되고 미래는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과 고통으로 대변된다. 현재의 갈등은 과거의 유토피아로부터 분리된 데서 비롯되지만, 과거로 회귀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선조적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며, 과거와 현대, 미래는 단절되어 있다. 이러한  불연속적성은 모더니즘을 존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주체와 세계의 불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더니즘은 본래 비유기체적 세계관에 바탕하고 있다. 주체와 세계 사이에 교감은 성립되지 않고 유추와 상응 또한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더니즘 시가 주체와 세계와의 불화를 주제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화해가 가능하다면, 모더니즘 시는 과도적이고 한정된 것으로서 시효가 다하면 폐기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것이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고통과 갈등이 지속된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모더니즘 시를 의미 있게 한다. 문제는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거나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증식을 하면서 점점 타성화된다는 점이다. 이같은 현상이 반복될 때 고통은 놀이의 방법이 되고 자기 연민과 현실 도피를 정당화하는 방어막이 된다. 이는 병증의 원인을 규면하는 것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새디즘적인  기벽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또한 더욱 중요한 사실은, 고통이 서로 다른 시인들에게서 상호 복제되며 그럼으로써 확대 생산된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는, 뒤틀린 화법과 자기 분열적 상황의 전시,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행과 엽기의 상상력이 유행처럼 만연해 있다. 그들의 시는 각각 개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있지만,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보면 엇비슷한 문제의식과 그만그만한 언술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고통의 정체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들의 시는 기교의 모사와 복제에 그치고 말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기교주의를 낳을 것이다. - 2006 가을호,  2009. 9에 재수록
1756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은 어떠한가... 댓글:  조회:3516  추천:0  2016-11-06
미술전공 수험생 작품 만 매 바닦에 깔려... [ 2016년 11월 07일 10시 14분 ]     [ 2016년 11월 07일 10시 14분 ]     지난 11월 5일, 산서(山西)  태원(太原)의 미술작품을 전문 평가하는 선생님들이 여러 팀으로 나눠 바닦에 깔린 15,000매 미술전공 수험생들의 작품 ‘바다’에서 채점하고 있었다. 이날, 산서미술연맹의 대학 수능시험은 끝났고 5,000명에 달하는 미술전공 지망생들은 정식 입시 전 작품 모의시험을 치렀다. /////////////////////////////////////////////////////////////////////////////////////////////////////////////////////////////////////////////////////////////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 - 시적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중심으로   ㅡ 김석환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1.머리말   본고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 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의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소재로 하는 예술로서 하나의 구조체인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된 구조체, 즉 2차적 구조체이기 때문에 그 구조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곧 시적 특성을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에 사용된 언어가 어떻게 시적 구조를 구축하는가 또는 탈구축을 하며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그러한 고찰의 타당성 또는 필요성을 더욱 뒷받침 해 준다. 구체적으로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따라서 실제로 시에서 각 요소들, 즉 시어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임의성이 있으므로 구축과 탈구축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그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 곧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피는 일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것 역시 각각의 시들이 갖는 특징을 고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2. 구조의 탈구축과 의미의 확장   시인 이상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연작시 를 연재하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유럽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을 종합하여 최종 매듭을 지은 사조로서 무의식의 세계가 진정한 현실이라 여기며 이에 대한 탐색을 주요한 시적 과제로 삼았다. 다음의 시 역시 연작시의 한 편으로서 이른바 자동기술법으로 인간의 정신 심층에 내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려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 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이상 일부   화자인 '나'는 거울이 없는 실내에서 거울 속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있다. 거울은 이상적 자아가 존재하는 무의식적 공간을, 그리고 실내는 의식적 공간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이미 실내에 나와 있기 때문에 ‘外出中’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 이전에 거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나'가 있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욕망하는 '나'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謀’를 하는 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室內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도 존재하는데 그 두 명의 '나'는 화합이 되지 않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무의식에서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고 분열된 상태이다.   거울 속의 '나'와 일치하지 않은 '나'는 ‘罪를 품고’ 침상에서 잠을 자며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나'는 ‘缺席’하여 부재중이고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 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은 것만을 확인한다. '軍用長靴'는 곧 거울 밖에 있다가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의 공간인 '꿈의 白紙'로 들어간 '나'를 대신하는데, 욕망하는 '나'는 그곳에 없어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解放하려고’ 한다. 즉 분열된 채 존재하는 두 얼굴의 '나'가 부조화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와 미안한 뜻을 전하는데 서로 분열된 채 거울 속과 실내에 ‘囹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얼굴의 '나'는 서로 만나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거울'과 등가치인 '꿈'의 공간은 생각하는 '나'만 있을 뿐 현실 속의 나, 즉 '내 위조'는 결석하여 늘 부재중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즉 '자아의 이상'은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현실을 규제하는 법과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서로 일치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아예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자살할 수 있는 통로인 '들창'을 가리키는데 그 들창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자살이다. 들창 밖으로 나와 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에 '나'가 존재하는 한 살아 있으니 '불사조'에 가깝다. 이 역시 '생각하는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언제나 분열된 채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적 층위에서 보면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상황을 형상화하는 역설적 어법이 독자들에게 낯설음을 주지만 내적 논리로서 시적 구조를 구축하여 무의식의 세계와 그 흐름을 보여 준다.   한편 정지용 시인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영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시인들의 시들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동지사대학 졸업 논문에서 영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의 한 사람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연구하였다. 그렇게 일찍 영미모더니즘 시를 접한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 줌으로써 회화성이 강한 시를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단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영미 모더니즘은 아폴론적 경향이 강하여 디오니소스적인 유럽의 아방가르드 계열의 시에 비하여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의미에 통합함으로써 구조의 견고성을 보인다. 그런데 다음 시는 그가 후기에 쓴 것으로서 한밤중의 산골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리면서 내면 깊이 잠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 함끠 한나잘 벗어나온 그머흔 골작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남ㄱ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 치놋다 밤 이윽고 화로ㅅ불 아쉽어 지고 촉불도 치위타는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은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벼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어라 -정지용 전문     화자인 나는 그대와 함께 한나절 동안 걸어 먼 골짜기를 벗어나 산방에 도착한다. 가지를 스치며 창을 치는 바람은 그곳에 도착한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암시한다. 밤이 이슥하여 화롯불이 아쉽게 식어 가고 촛불도 점점 희미해지며 어둠이 더욱 깊어지자 화자의 시선은 '누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대도 ‘나’를 잠들이고 잠자리로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나의 슬기와 외롬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곳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요 사방이 어둠에 가려진 한 밤인데 그대마저 곁에서 떠나 홀로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들의 욕망을 좇아 살던 현실이 차단되자 시인은 그 동안 소외된 채 '외롬'에 처해 있던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찾는다.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은 소외되었다가 솟아오르는 그 욕망의 상징이다.   그렇게 화자는 비로소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는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확인하는데 이는 곧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환상을 통해 형성되는데 소외된 욕망의 주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환상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빼앗긴 나의 고유한 욕망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서 하자는 타자의 욕망이 얽힌 현실로부터 차단된 산골의 밤에 자신을 성찰하며 고유한 욕망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8. pp.79-80 참조) 한편 별도 없는 어둠 속에서 '성긴 눈발'이 내리는 것은 그러한 자유를 얻은 시인의 내면을 암시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하나님'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 비유되면서 시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구체화 또는 확장된다. 특히 비유적 이미지들이 ‘늙은/어리디어린, 생물/무생물, 밝음/어두움, 구체/추상’ 등으로 대립되면서 일상적 논리를 벗어나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미를 지연시키고 그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모호성이 극대화되어 그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시적 전체성을 유추하기가 불가능한 탈구축 양상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으로써 그 실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오히려 효율적이다.   사과나무의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고 뚝 뚝 뚝 떨어지고 있고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게 하는 어항에는 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에 젖는 섣달의 산다화가 있고 부러진 못이 되어 길바닥을 뒹구는 사랑도 있다. -김춘수 전문 사과나무의 사과알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어항에 크나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 등은 일상적 논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사과알, 금붕어, 산다화, 부러진 못, 사랑’ 등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이어지면서 낯설음과 시적 긴장감을 더해 준다. 그런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는 시적 상황은 제목인 '시'와 비유적 관계를 맺으면서 '시'의 의미를 지연시키며 확장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이미지의 전개와 그들 사이의 충돌과 논리를 벗어난 묘사와 진술로 탈구축의 양상을 보이며 '시'의 의미는 일상어로 규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임을 암시할 뿐이다. 즉 시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하면서 독자들과 대화를 요구하며 무한한 상상과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전문   ‘나의 본적’을 비유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들의 유사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즉 나의 본적은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 맑은 거울, 독수리, 고장, 교회당 모퉁이, 인류의 짚신, 맨발’ 등과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수정된다. 그러는 중에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의 본적'의 의미를 확장하며 그 모호성을 증대시킨다. 그리하여 나의 본적이 상징하는 인간 존재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암시한다.   曲馬團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地域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緯度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一生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指紋 -박용래 전문   한편 시 에서 1연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공간인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긴 꽃대 위에 핀 ‘코스모스’와 아슬아슬 곡예를 하고 마술을 부리는 ‘곡마단’이 비유적 관계를 맺게 한다. 이어서 코스모스 꽃은 하얀 눈이 덮인 ‘아라스카의 햇빛’과 그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와 다시 비유적 관계를 맺고 다시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과 그 ‘소녀의/ 지문’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지구의 북극에 가까운 '아라스카의 햇살', '위도', '지역', '소녀', '지문' 등으로 점점 축소 또는 확대되며 이어지는 공간적 이미지의 비약적인 변화와 서술어의 생략에 의한 여백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돌과 생략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코스모스의 시적 의미를 무한히 확장할 뿐 어느 의미로 한정하기에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시는 어느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그것으로부터 경험된 의미를 독자적인 언어적 상징체계를 구축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 자아는 그것을 현실을 판단하는 의식이나 초자아에 의해 인정되지 아니한 욕망을 교묘한 수단으로 엄폐하면서 나타낸다.(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2008. p.327 참조) 따라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며 상징계로 진입할 때 타자들의 욕망이나 상징계를 지배하는 법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왜곡된다. 그것은 언어의 양면인 기의와 기표가 일치하지 않고 떠도는 원인이 되는데 어떤 기표로 의미나 욕망이 드러나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어 또 다른 기표가 요구된다. 그래서 시에서 하나의 기의에 다양한 기표, 그 역으로 하나의 기표에 다양한 기의가 나타난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양한 기표의 연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동시적으로 고찰하여 그 기의, 즉 시인의 욕망 또는 시적 의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reality)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를 구축하는 기표, 즉 다양한 이미지들은 다만 그 실재의 흐릿한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란 없으면서도 있는 것으로서 그 일부가 기표로 상징계에 나타나는 순간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구조의 구축과 시적 의미의 집중   영미모더니즘의 시의 구조는 산업혁명의 근원지인 당대 영국의 사회적 구조와 상동성을 갖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신흥 자본가들이 부상하고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혼탁해지던 유럽에서 선구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대륙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국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되 전통을 존중하며 질서를 세우고 사회적 통합을 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시는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배열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향해 집중시키고 구조의 전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이론가이자 시인인 엘리옷(T.S. Eliot)의 는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 시에는 성서, 신화, 오페라의 대사, 일상적인 군중들의 말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열되어 텍스트를 구축하면서 산업혁명으로 혼란해지는 시대상을 비판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은 영미모더니즘 시의 구조적 특징의 핵심이며 한국 현대시단에서도 영미모더니즘 시의 영향을 받은 시들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서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求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네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明晣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전문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게 자연의 순리이지만 그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다는 것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 모순이다. 그런 현실을 두고 '너'는 제 자리에서 상승과 하강 운동을 반복하며 줄을 돌리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표인 '發散한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모순된 현실과 싸워야 하는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렵다'. 같은 대상을 두고 한국에서는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 하는 것처럼 그 지시체 또는 기의와 기표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표를 통하여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듯이 사물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그들의 관계와 진정한 의미의 실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적 관계, 그 수량과 한도를 바로 보겠다고 한다. 알고 보면 사물은 우매하여 형상 뒤에 숨은 본질, 그 명절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보는 인간이 우매하여 형상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실재를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위의 시에는 서로 이질적인 상황 또는 이미지들이 병치적으로 나열되면서 긴장감을 주고 시적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 해석을 어렵게 하는데 그것은 이 시가 갖는 독특한 미학이다. 이 시는 언어의 불확실성과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소외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은 모더니즘 시의 한 경향이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박용래 전문   이 시는 미메시스(mimesis)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지들이 환유적으로 배열되면서 추수가 끝나고 살얼음이 어는 초겨울의 들판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는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한 구조물로서 그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이 내포한 이차적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다른 것 또는 전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시 전체를 구축하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볏가리가 걷힌 논두렁'은 벼들의 한 해 살이가 끝난 죽음의 현장이요 '남은 발자국'은 죽은 이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수레바퀴에 끼인 살얼음'은 유동성이 있는 물이 고체화 된 부동의 물이며 우렁 껍질도 죽은 우렁이가 남긴 것이다. '바닥에 지는 햇무리'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의 햇살로서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기 위해 지평선 위를 날아가는 철새인 기러기떼 역시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이승의 세계로 떠나가는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 계열체들로서 주검을 매장하는 절차인 '하관'과 은유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죽음의 의미에 집중되며 시 전체를 구축한다.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한 귀퉁이   나도향 한하운 씨가 꿈속의 나라에서   뜬구름 위에선 꽃들이 만발한 한 귀퉁이에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스타프 말러가 말을 주고받다가 부서지다가 영롱한 날빛으로 바꾸어지다가 -김종삼 전문   '꿈 속의 나라'에서 공간을 지시하는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꿈 속의 나라, 뜬 구름 위' 등이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는데 모두 지상과 다른 비현실적 공간이다. 그곳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나도향, 한하운, 지그문트 프로이드, 구스타프 말러' 등 국내외의 소설가, 시인, 심리학자, 작가 등이다. 작가와 시인은 상상력을 중시하며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쓴 이들이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 정신분석학자인데 무의식은 꿈을 꾸는 정신적 영역이며 초현실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물들과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공간들은 모두 비현실성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곳은 또한 말을 주고받는 세계, 즉 현실이 아니라 '영롱한 날빛'이 존재하는 비현실적 또는 상상의 세계로서 무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 시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선구적으로 발표하며 한국 시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던 황지우 시인의 실험적인 의도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와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전문   이 시는 화자인 '나'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서 신문의 광고난에 실린 '심인' 광고문을 보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 광고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서로 다른 이들이 가출한 이들을 찾고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가출한 가족을 찾고 있는 광고문의 내용과 그것을 읽으며 똥을 눟는 상황이 대조를 이루며 시대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서로 우연히 인접하여 실려 있을 뿐 각각 다른 사정을 갖고 있는 광고문이 그대로 시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패로디의 일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크게 부상한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최근에 이런 광고문뿐이 아니라 만화, 영화, 유행가, 음악 등 문학의 주변 예술 또는 대중예술이 시와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 현상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상호텍스트성이 주요한 미학으로 부상한 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에 나온 것들을 직조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모든 텍스트는 이전 또는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전문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원텍스트인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하고 있다. 그림의 분위기를 차용하고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을 새롭게 변용하여 눈이 내리는 샤갈의 마을 사람들이 꾸는 부활의 꿈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3월에 눈이 오는데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욕망의 피가 활발하게 돌아 정맥이 돋는다. 하늘에서 내려 온 축복의 메시지인 눈은 겨울이 가고 봄이 곧 시작됨을 알리며 사나이의 가슴에 겨우내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피를 새로 활발하게 돌게 한다. 그리고 지붕과 굴뚝을 덮으며 사나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새 봄을 맞으려는 욕망을 더욱 익히고 다듬을 것을 권한다.   샤갈 마을 사람들의 욕망의 실체인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아낙들도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며 생명이 새롭게 부활하는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이처럼 샤갈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인물들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변용되며 집중적으로 겨우내 억압된 욕망의 실현을 암시한다.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한 이시는 그림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데 김춘수 시인은 이 외에도 화가 이중섭의 생애나 그림 또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등 다양한 원텍스트를 패러디 한 시들이 많다.   한편 하이퍼(hyper)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심상운 시인의 다음 시에 서로 이질적인 네 가지 국면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새로운 화면으로 전환하기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와 구조적 유사성을 엿보게 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촉촉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심상운 전문   위의 시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국면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어둠/빛’의 대립쌍이 내재된 계열체들이다. 첫째로 화자인 나는 감자밭 이랑에서 감자의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질문을 하며 그 ‘붉은 피’는 ‘우주의 꽃빛 파일’이라고 한다. 다음 국면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그녀가 자신이 헌혈한 피가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검정고양이가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뛰어 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헌혈한 피와 '헛간'에서 나온 검정고양이는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욕망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국면에서 화자는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이 역시 위의 두 가지 국면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이상의 국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또는 상황이 이질적이다. 이는 화면의 전환이 자유롭고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과 상통하는데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비약적인 상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이질적인 세 국면 속에는 모두 닫힌 공간에 내재되어 있던 '어둠'의 계열체들이 빛의 계열체가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감자가 묻힌 흙속, 그녀의 혈관, 고양이가 머물러 있는 헛간, 화자가 머물러 있는 승용차는 모두 그 무의식적 공간을 상징한다. 이처럼 세 국면은 표층적으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을 갖고 모두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욕망들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의 비약적인 상상은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것들이 빛이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통하여 욕망이 현실,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부르르 떠는', 깜짝 놀라면' 등은 욕망이 질서와 규칙으로 얽힌 현실로 진입하는 순간 받아야 하는 억압의 무게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여 주는 징후들이다. 또는 그것을 이기고 현실로 진입한 주체가 느끼는 경이감과 환희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시인은 그녀의 '붉은 피'를 '우주의 꽃빛 파일'에 비유한 것에서 보듯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어둠이 암시하는 욕망이 오히려 빛의 세계인 현실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선 시인의 다음 시는 디카시이자 하이퍼시의 일종으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차용하여 시의 일부로 배열하고 그 원텍스트를 패러디 하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 프리다 칼로의   보름달을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다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 먹은 죄로, 나는 노새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휘핑크림 바른 라임 파이(Lime pie),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한 조각 이름   노새사슴 몸통은, 사냥꾼들의 표적 목에 꽂힌 화살 허리에 박힌 화살 나는 신음소리를 뱉지 않고, 꿀꺽 삼킨다   달빛 커텐, 내 꿈을 가리는 밤 내 뿔은 1cm씩, 나의 별을 향해 그리움을 키운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 새 뿔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선 전문   보름달을 삼켜 앞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라임나무를 훔쳐 먹은 죄로 ‘노새사슴’이 된 나는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 별은 '디에고 리베라'와 동일시되며, 그 이름은 '라임 파이'에 비유된다. 따라서 ‘보름달, 라임나무, 별, 디에고 리베라, 라임 파이’ 등은 모두 노새사슴의 몸통 안에 저장된 욕망의 대상을 대신하는 계열체적 기표들이다. 욕망의 기의는 다양한 기표들에 의해 드러나면서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확장한다. 그런데 노새사슴의 몸통은 타자들의 상징인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어 목과 허리에 화살이 박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으며 별을 향해 1cm씩 그리움의 뿔을 키우고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화구로 삼아 이상세계인 푸른 바다와 클리토리아 해변을 그린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을 내던지고 새 뿔 왕관을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려 그 욕망의 대상에 이르고자 한다. 화자인 노새사슴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다시 뿔을 키우고 낡은 뿔을 가는 것은 욕망의 끝없는 분출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처럼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패러디 하며 자신의 '자화상'이라 밝힌 노새사슴을 통하여 타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이상세계를 향하려는 강한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산물인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에 시를 덧붙이는 디카시가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의 일종이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원용하여 쓴 '하이퍼시'라고 볼 수 있는데 화가의 그림 사진이 시텍스트의 일부가 됨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디카시들이 흔히 자연풍경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는 데 비하여 화가의 그림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시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시의 소재와 기법이 더욱 확대되고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유카 초목의 꽃들은 단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 유카 나방이는 그런 꽃들 중의 하나에서 그 꽃가루를 꺼내 반죽해 조그만 덩어리로 만든다. 그런 다음 나방이는 다시 또 한 유카 꽃을 찾아가, 그 암술을 찢어 열고 배추들 사이에 제 알들을 낳고서, 고깔 모양으로 생긴 암술의 터진 틈을 그 꽃가루 반죽덩어리를 메워넣어 막는다. 제 일생 중 단 한 번 유카 나방이는 이 복잡한 일을 행한다.”(칼 구스타프 융,『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서 인용)   1. 현대 문명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유카 나방이의 필요가 유카 꽃을 발명한다.   2. 이것은 저 유구한 문제의 또 한 변형판이다. 심(心)이 먼저인가 물(物)이 먼저인가, 심(心)이 있으매 물(物)이 있나 물(物)이 있으며 심(心)이 있나. 사실은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이다.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는 빛/그림자, 양/음, 생명-력(力)/생명-형태, 영 (靈)/혼(魂), 마음/육체, 이성/정서, 의미/이미지 등등의 관계와 같다.   3. 내가 왜 이런 것을 시(詩)라고 쓰냐 하면, 내가 한 마리의 유카 나방이-융을 받아들이는,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는, 한 송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저 물(物)만이 아닌 심(心)이 보태진 유카 꽃,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 된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의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최승자 「유카 나방이」   1연에서는 ‘유카 꽃’과 ‘유카 나방이’와의 미묘한 상생 관계를 밝힌 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러한 생태를 현대문명적으로 해석하고 3연에서는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를 ‘심(心)과 물(物)의 관계’에 비교하며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러 이항 대립쌍에 비교하며 그 자연 속의 상생 원리가 철학, 사상, 예술에까지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연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시 쓰기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자신은 '유카 나방이 -융을 받아들이는,/ 유카 꽃'이요,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화자는 '물(物)에 심(心)이 보태진'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의식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생태를 밝힌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고, 심(心)과 물(物)과의 관계에 비교해 보고, 다시 시 쓰기와 관련시키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인 문장에 시인의 해석과 비유적 상상력이 더함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다. 즉 유카나방과 유카꽃이 서로 ‘자웅동체의 유카꽃’을 이루는 상생 원리로써 시쓰기의 과정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주와 삶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학술적 문장을 도입하여 패러디 하고 연에 번호까지 부여하면서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관계에 다양한 논리적 관계를 병치하여 비유적 관계를 맺어 시를 완성한 이 메타시는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시의 구조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전체성을 갖는다.   4.결론   이상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에 나타난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상 시인의 와 김춘수 시인의< 나의 하나님> 등의 경우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하나의 의미에 집중되지 않은 채 구조의 탈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한 시들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유도하고 대상이 내포한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에 김수영 시인의 이나 박용래 시인의 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텍스트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유지하며 견고하게 구조가 구축된 시들이 있다.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영미모더니즘 시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박용래, 김춘수, 김종삼 등의 시인의 경우를 보면 위의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패러디를 한 시 또는 하이퍼시 등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에서도 그 구조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시들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구축 또는 탈구축,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추상적인 기준으로 시의 특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칫 그 구체적 특성과 시적 효과를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나라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모더니즘과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특성이나 문예사조 또는 소재나 기법의 특성으로 시의 예술성과 가치를 논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시란 굳어버린 일상어의 어법으로 다 보여주지 못하는, 오히려 그 아래 가려져 억압받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이나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의 실재를 보여 주기 위해 언어로 구축한 2차적 상징체계요 예술이다. 시인은 죽어서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그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여 언어의 그물을 엮는다. 시는 예술이기 때문에 창의성과 개성이 필수적 요소이지만 궁극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소재나 기법이 새롭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실재에 가까이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눈길을 일시적으로 끌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의 죽음을 논하기에 앞서 고급스런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독자들의 얇은 감성을 자극하고, 요설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낭비시키는 시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깊이 가려져 있는 그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시, 그곳으로 가는 데 꼭 필요한 이미지 또는 문장으로 쓴 고급스런 시만이 문화 창달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며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것이다.   2012년 한국현대시인협회 세미나 의 주제 논문 2012년 『한국현대시』8호 (한국현대시인협회)에 발표  
1755    [자료] -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3441  추천:0  2016-11-06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현상 Ⅰ. 서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현대에 이르러 한때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명확한 개념이나 한계가 분명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세련됨의 대화의 대명사처럼 마구 사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대체로 모더니즘 뒤에 나타난 예술 문화의 운동이라고 이해되었지만 이는 사상 영역의 후기 구조주의와도 대응하고 있다. 철학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온 이 하나의 경향은 문학 및 전 예술 영역으로 확산되었고, 현대 사회를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모더니티의 이성상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급진화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 인간이 견인하는 역사의 진보성, 사회의 합리화, 주체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실제라는 모더니티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들을 지적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기존의 관념들을 해체하고 요란하게 분해, 조립하여 정작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저에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해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해체 현상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오늘날 대중문화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어떤 의의를 가지며 문제점을 무엇인가? 본론에서는 이러한 '주체의 죽음', '인간의 종말' 현상의 근저에 있는 해체 현상에 대해 철학적 시각에서 근본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조건 거부가 아니라 진리, 규범, 양식 속에 깃들어있는 절대성과 중심성의 허구를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해체를 시도하는 것이며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탈중심이론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게 된다. 데리다, 푸코, 료타르, 라캉, 하버마스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진리관을 거부하고 해체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사상을 통해서 여러 가지 탈주체 이론 - 특히 현대 프랑스 철학계를 중심으로 - 을 그 형성 배경과 함께 제시하며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중심화 해체 현상이 문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 분야에서 그 특성이 나타나지만 특히 문화에서는 문학, 미술, 연극과 대중문화 전반에 두드러지는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특히 '작가의 죽음', '메타픽션'등으로 대표되는, 문학 분야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해체 현상은 열병처럼 퍼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써 기존의 이론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이에 입각해서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기존 사상을 비판하고 주체를 해체시키는 관점의 이론들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특히 철학 분야에서는 그러한 탐구가 활발해짐으로써 포스트 구조주의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자체적으로 가진 모순점역시 많이 비판되고 있다. 따라서 결론에서는 이러한 해체 현상에 대한 전반적이고 개괄적인 관찰과 의의 및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며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논함으로써 글을 맺고자 한다. Ⅱ. 본론 1. 해체 현상에 대한 철학적 이해 -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히 문학, 예술 면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몰고 왔다. 이렇듯 복잡 다단한 변화들 중에서 중심된 특징과 경향을 살펴보고자 할 때 사회와 개인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는 포스트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이 되므로 먼저 이에 대해 알아보아야 겠다. 1) 해체 이론의 기원과 생성 서양의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자아의 발견이라고 할 때, 인식의 주체, 사유의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탐구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아주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자아 중심의 철학은 자의식의 풍부한 활동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창조적 능력과 상상력을 강조하여 창조적 주체, 자유로운 개인을 핵심으로 삼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한 토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표방하는 것은 주체에 의해 파악된 객관적 실재가 진리의 기준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회가 이성의 힘에 의해 총체적으로 합리화될 것이라는 모더니즘의 이념의 거부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성 중심의 세계상이 해체되고 거시적 일반 이론도 거부되며 인식론 상의 기초 이들은 서구에서 상식처럼 통용되어 온 견해, 즉 이성적 '주체'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마련하여 '진리'로 비이성적인 현실의 장막을 제거하고 '이성적인' 사회,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적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거부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모든 관계들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성 중심주의 , 과학지상주의 , 체계화와 총채성의 이념은 해체와 다원화 탈중심과 불연속으로 대체된다. 이성과 비이성 주체와 객체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고 의미의 능동적 창출자로서의 주체는 갈가리 흩어져 종말을 맞이한다. 특히 이 모든 해체 현상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선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주체의 해체'현상이다. 사실 '주체'라는 개념 자체는 모호한 것으로 인식의 주체 일수도 있고 정치권력의 주체 일수도 있으며 인간의 자의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개인의 인식의 우선성과 보편적 타당성을 제공하는 절대절명의 원리인 이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세계를 포착하고 규정할 수 있는 특권화된 인식의 주체이며 자신의 삶과 역사의 원동력을 우리는 주체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주체의 죽음'은 의미의 능동적 구성자이며 창조적 인물인 이성적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성적 주체라는 것은 인간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그러한 인간관에 의해 구성된 존재와 인식자연과 타자 등의 모든 세계관적 문제를 주제 삼고 있는 것이다. '신의 죽음'을 주창한 니체에게서 인간의 규정은 사고의 핵심을 이루며 우리는 그의 철학을 '자아의 해체 작업'이라 명명할 때 그러한 점에서 니체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정신사에서 볼 때 인간은 고대로부터 이성을 가진 동물로 구분되어 왔으며 데카르트이후 근세 철학은 이성을 '자의식'형태로 전수하여 철학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데카르트에게서 확실한 학문의 기반으로서의 사유, 칸트에게서 모든 통일성의 기반으로서의 초월적 자아의 통일성, 헤겔에게서 모든 현실성의 기반으로서의 객관정신등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인간의 본질을 의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종의 도치된 인간 이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인식을 "인간의 핵심, 영원한 것, 근원적인 것, 확고히 주어진 것"등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과대평가와 오해"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우선적이고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하고 모순된 욕망과 의지의 충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충돌로부터 일종의 화해, 계약이 성립되며 그것이 곳 우리가 일컫는 지성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의식이나 지성이란 결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원리에 입각한 독립적 능력, 모든 다른 비이성적 충동들을 상호간의 투쟁이 서로 화해하며 끝날 때까지의 최후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힘, 의지로서의 생의 힘은 의식이 아니라 충동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니체에게서 의식은 생의 비본질적 부분적 영역으로 축소되어 이해될 뿐 아니라 나아가 생의 가장 약한 부분, 가장 표피적이며 가장 나쁜 부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니체에게서 의식이란, 인간에 의한 특수한 내적소여방식을 뜻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여 충동이나 기쁨이나 고통처럼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간접적인 소여, 즉 언어를 매개로 하여 주어진 것을 뜻한다. 니체에게서 의식은 한마디로 '언어적 파악', '언어적 사고'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의식의 기원과 기능을 밝혀 주는 단서는 바로 의사 전달 기호로서의 언어이다. 또한 이러한 언어적 사고를 따르는 의식은 개별자로서의 인간 각자의 본래적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일반적이며 군중적인 속성에 속하게 하여 자의식이란 것도 역시 인간의 개별적 자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의 길은 못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의 본질을 개인의 고유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존재'에서 찾았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이상과 위대함은 오로지 신의 속성으로 피안에서 설정된 가치이며, 차안의 인간은 단지 작고 힘없는 왜소한 존재로 규정된다. 이는 더욱 심화되어 끝에는 인간이 너무도 왜소하여 신의 위대한 자체가 인간에게 자기 모순적으로 나타나 결국 인간이 신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인간의 대비자로써 생각되고 세워진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에 의해 파멸되고 만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인간이 곧 신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신의 살상자라고 강조하는 의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곧 모든 인간에 의해 설정된 가치, 피안적 진리, 불변하는 진리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본래적 자아가 되고자 하는 인간은 사고되고 의식된 표상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기 자신에 의해 자유로운 긍정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생각하였다.  인간은 그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 나가야 할뿐이며 자기 자신을 자신 이외의 다른 이상이나 목적 아래 둔다거나 혹은 자신을 표피적 의식이나 일반화된 군중의 척도에 따라 평가하고 그에 예속시키려 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니체의 철학 정신을 한마디로 일반성과 군중을 앞서는 인간 각자의 고유성과 개별성의 강조, 즉 실존의 강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니체의 반형이상학적 정신들은 하이데거에 이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 계승되고 그들에 의해 니체의 정신은 방법적으로 보다 정교하게 심화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포스트 구조주의와 동일한 맥락으로 연계되어 있다. 즉 포스트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 해체 이론의 발달 -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적 관점에서도 그 이전의 입장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는데 새로운 철학적 입장은 주로 프랑스에서 1960년대 말엽부터 대두되기 시작하는 포스트 구조주의가 가장 잘 대변한다. 해체 주의를 포함한 포스트 구조주의는 후기의 롤랑바트르를 비롯하여 데리다, 푸코, 라캉, 료타르 그리고 들뢰즈 등의 이론가들이 주로 주창하였다. 이들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삶의 실재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해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실재를 편린적,이질적, 다원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주체에 회의적이면서 '존재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있다. 몇몇 철학자들이 흔히 '주체의 죽음'으로 일컫는 현상이다. 이 '주체의 죽음'은 장소의 고정성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 역사에서의 권위나 가치의 확실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의미한다. 또한 거대 이론의 붕괴를 몰고 와 신학과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등 각 분야에 거대한 파장을 몰고 왔다. ① 자크 데리다 지난 60년대 후반에 등장해 오늘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해체 이론은 서구인들의 바로 그러한 인식의 변화를 잘 표출해 주고 있는 중요한 사고 체계이다. 이의 창시자인 자크데리다는 (1967)라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해체 이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레비스트로스등 이에 앞선 구조주의자들역시 전통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할 때는 과학적 방법 등을 사용하여 접근하였다. 그들이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종래의 형이상학적인 방법이나 가설, 가정 등에 의존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체계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데리다는 우선, 서구의 형이상학적이 이차적이고 간접적인 언어인 글보다도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언어인 말에 더 우선권을 주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그는 말이 글보다 더 본원적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전통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말 역시 글처럼 불완전한 이차 언어에 불과하며 서구인들이 말속에 현존해 있다고 믿는 본원적 의미란 다만 착각일 뿐 사실은 부재 속에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자신의 이론을 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문자학 또는 해체 이론은 신이 사라진 시대, 곧 절대적 진리가 사라진 시대의 이론이 된다. 해체 이론은 아직도 신의 음성 곧 절대적 진리가 현존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시대착오적 지배 체제의 독선과 횡포에 도전하여 그것들의 눈먼 확신을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체제전복적 이론이다. 이러한 그의 해체 이론은 서구 사고 체계 전체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사실 그는 서구의 형이상학 전체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문화와 사상은 사물을 둘로 나누어 그중 첫 번째 것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두 번째 것은 이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소외시키고 제외시키는 양분법적 태도 위에 세워져 있다. 데리다는 바로 이와 같은 이분법적 태도가 그 동안 사회의 모든 구조에서 타자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배제시키는 것을 합리화시켜 주고 합법화시켜 주는 논리적 근거의 역할을 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깨달음은 곧 모든 사회적, 정치적 체제 속에 스며들어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지배올로기의 억압 구조를 드러내 보이고 그 횡포를 깨닫게 해준다는 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데리다는 그와 같은 양분법적 흑백 논리가 실은 상호보족적인 관계에 있음을 지적하며 그 둘 사이의 경계에 해체를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해체 이론의 궁극적 목적은 인식론적 변혁을 통한 지배 체제의 해체가 된다. 그러므로 '해체'라는 말은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탈구축'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은 예전부터 항상 그에게 고유한 종말로서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 '고유한 것'의 종말이다"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지배 체제의 독선과 횡포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절대적 진리에의 확신이었다고 하며 그 현존을 부정한다. 그의 해체 이론에 따르면 진리란 당대의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언술행위이고 또다른 진리를 침묵시킨 결과로 얻어지는 것일 뿐 결코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순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해체 이론은 진리와 허위의 오랜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데리다는 해체 이론을 통해 이성, 질서, 총체성 등의 존재와 회복을 신뢰하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비이성, 무질서, 파편성 등을 특성으로 하는 헤브라이즘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해체 이론은 가시적인 투쟁 대상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투쟁 대상까지도 찾아내어 붕괴시킬 수 있는, 현대의 고도로 복합적인 시대의 한 효과적인 저항 이론이 된다. ②질 들뢰즈 데리다가 철두철미한 반개념적인 철학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들뢰즈는 철저히 개념 철학에 의존하여 차이가 이 세계의 철학적 원인임을 규명해 나간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인정함은 존재가 곧 차이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복은 차이의 대긍정이며 그러므로 긍정을 역설하고 찬양함은 존재하는 것에 기대는 수동적 측면이 아니고 부정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분석하면서, 정신분열증 환자야말로 자연인에 가깝다고 보고 그야말로 기호의 세계에서 살면서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제도화된 의미의 경계를 거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체가 사회적으로 분절된, 훈련받은, 기호화된, 주체화된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된 것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정신분열증에서 찾았다. 들뢰즈에 의하면 차이를 긍정하고 창조하고 평가하는 자는 원한과 질투에 의해 비교하는 비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반복하는 영원 회귀는 동일성이 없이 연루된 세계 속에서 서로 서로 손잡고 있는 차이의 세계와 같다. 존재는 사실상 하나의 다양성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철학은 어떤 전체성도 거부하고 중심이 없는 것이다. ③ 료타르 료타르는 전체화, 중심화, 절대화는 그것을 통한 획일화를 조장하게 되므로 그것을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합리화하려는 행위와 차이점보다 동일성을 창조하는 행위를 비판, 해체시키고자 하였다. 료타르는 보다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가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투쟁과 갈등이 불가피하게 생기고 그런 사회적 갈등과 압력의 해결을 위한 보편적 법칙일 인간이 발견하기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인간관계는 '언어 놀이'와 '문장 놀이'에서 표출되고 이는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각각의 문장 놀이는 쉽게 다른 사람의 것과 일치되지 않는 각자의 특유 어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기존의 철학이 큰 체계를 중시하는 것에 반대하여 '조그만 이야기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④푸코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총체성의 관점은 그 자체로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는 기존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진리'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투명한' 사회를 목표로 삼는 혁명적 이상이 전면적 감시 프로그램과 연결된다고 본다 (이것은 진리의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푸꼬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연속적이고, 특수하고, 지역적인 비판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푸꼬는 해석의 다원론을 강조하며 열려진 해석학적 체계를 선호한다. 그에게서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곤 없다. 모든 것은 이미 해석이며, 모든 기호는 그 자체가 해석에 제공된 사물이 아니라, 다른 기호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세계에 관한 공유된 합의일 수 없고 그 상황에서의 힘의 균형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푸꼬는 사회· 역사에 관한 총체적 지식이 권력에 대한 주장을 지닌다고 본다. 그가 에서 밝히듯이 그것은 배제의 체계--참과 거짓의 구분, 특정한 담론에 대한 금지 등--에 의한 것이다. 참과 거짓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명제의 의미는 과학적 담론이 짜여진 실천의 체계와 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의 제도적 배열은 항상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나타낸다. 푸꼬는 어떤 체계도 실재의 복합성을 밝힐 수 없다고 보고, 그 자신의 탐구의 무질서하고 파편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체계적 통일을 거부한다. 이처럼 그는  참된 지식의 이름으로 걸러 내고, 위계화하고, 질서지우는 단일한 이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항하며, 견고하고 동질적인 이론적 地形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국지적이고, 불연속적이고, 비특권적이고, 정당화되지 않은 지식에 머물고자 한다. 푸꼬는 '보편적' 지식인이 아니라 '특수한'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지식인은 자신의 작업장, 수용소, 병원, 연구실, 대학 등에서 특정한 투쟁에 충실해야 한다. 이론은 단지 특수한 투쟁에 봉사하는 도구 상자일 뿐이며, 그것의 유용성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곧바로 버려야 한다. 한편 푸꼬는 권력 이론을 크게 3가지로 구별한다. 즉 1)'경제적' 이론, 2)권력을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비경제적' 이론과 3)권력 관계를 일종의 '전쟁'으로 보는 자신의 관점으로 대비시킨다. 권력을 어떤 개인, 집단, 기구가 소유하는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 또는 그물망으로 본다. "권력, 그것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복합적인 전략적 상황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소유된다기 보다는 행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계급의 '특권'이 아니며, 전략적 상황의 효과이다. 따라서 국가를 지배계급의 정치적 도구로 보고, 권력의 핵심을 국가 기구로 이해해서 모든 권력 현상을 국가 기구에 의해 설명하는 방식은 일면적인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권력이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고 '권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을 바꾼다. 그리고 권력은 자연, 본능을 억압하고, 개인이나 계급을 억압한다고 본다 (헤겔, 프로이트, 라이히 등의 견해). 권력을 권력이 오로지 제한하고 구속하며, 금지하는 법률과 금지의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푸꼬는 권력을 단순히 금지하는 힘으로 보지 않고 창조적, 생산적, 긍정적인 힘으로 보며 일종의 전쟁, 적대적 세력 관계들간의 상호 투쟁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을 통해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푸꼬는 18세기 후반에 감옥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일반화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규율적인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는 감옥 제도를 규율적 권력이 행사되는 전형적인 예로 보면서 이런 권력이 사회 전체에 침투해서 현대 사회를 규율적 권력이 편재하는 '유폐적' 사회로 만들어 나간다고 본다. 푸꼬는 이러한 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이 인간의 신체에 주목하면서 그 신체를 권력이 작용할 수 있는 유용한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에 주목한다. 푸꼬는 이러한 신체에 대한 권력의 작용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작업장, 군대, 감옥, 병원, 학교 등--에서 규율이 생산, 수행되는 일정한 방식들에 주목한다. 푸꼬는 이러한 규율적 권력이 '위계질서적 관찰'과 '정상화하는 판단'을 결합시킨 형태를 통해 작용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기준이 '정상화하는 판단'이다. 이것은 일탈을 없애 그것을 정상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이를 위해 일정한 정상적 질서를 정해 놓고 사소한 위반에 관해서도 처벌한다. 그래서 일상 행위의 가장 미세한 측면을 특정화함으로써, 거의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처벌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정상적인 질서에 적응하지 않거나 반항하는 자들은 규율의 감시, 처벌, 교정 대상이 된다. 푸꼬는 이와 관련해서 인간 과학이 탄생하고, 그것은 개체들을 인식론적 무대 안에 적절하게 배치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정리, 분류된 기록은 권력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체를 길들이고, 유용하게 만드는데 최대한 이바지하게 한다.  푸꼬는 어떤 사회에서도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고 특질화하는 다양한 권력 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권력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화의 생산과 축적, 유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권력은 '진리'를 생산함으로써 작용한다. 푸꼬는 권력이 신체에 작용하는 것이 사실은 정신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규율 체계는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를 심화시키면서 모든 개인을 정상적으로 기능 하는 위계질서의 한 지점에 배치시킨다. 이처럼 '비정상성', 위반이 배제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안으로 흡수, 통합된다. 그리고 규범적인 것의 '보편적' 지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권력이 완성된다. 푸꼬는 지식을 지식 외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입장--역사유물론,사회학주의 등--을 거부하고, 지식이 의식과 관념의 (제도적, 문화적) 산물이라는 입장--인간학주의--도 거부한다. 푸꼬는 인간 과학의 관리적 역할, 권력과의 공모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지식과 권력은 쌍둥이며, 지식 자체가 권력이고 권력은 지식을 통해 작용한다. 모든 지식 형태는 그 자체가 권력의 형태이며, 동시에 그 존재와 기능에서 다른 형태의 권력과 연결된 의사 소통, 기록, 집적, 대체의 체계가 없이는 행사될 수 없다. 푸꼬는 권력과 지식이 서로를 함축하고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를 강화시킨다고 본다. 그는 지식-권력이 지식의 형식과 가능 영역을 결정한다고 본다. ⑤ 롤랑 바르트 롤랑바르트는 언어의 상대성과 불명료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관을 비판하게 된다. 언어 자체가 확실한 것임을 전제로 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사실상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나 자각 이외의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는 무기력한 것에 불과하나 그러한 언어를 통해 사물의 본질이나 진정한 리얼리티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적 진리 그 자체를 언어 속에 붙들어 둘 수도 없으며 언어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의도, 사유, 전략 따위를 보여주는 것이지 그것과 유리되어진 진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에 의해 통제되고 발견되고 창조되는 진리란 이미 절대성을 손짓하기보다는 상대성을 드러내게 된다. 절대라는 말은 그러한 상태가 결핍된 인간이 만들어 낸 욕망과 미몽의 혼합물일 뿐이다. 그러나 언어가 환기시켜 주는 느낌은 일종의 현기증이나 현혹 작용을 일으켜 구원, 초월, 절대, 중심 따위의 말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주관과 그 주관의 상대성과 허구성을 은폐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롤랑바르트, 데리다, 푸코등은 언어에 기반을 두는 진리관을 철저하게 해부하며 그것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그 허구성을 사유의 공간 속에서 소멸시키려 한다. 나아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주체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인식론적, 역사적, 미학적으로 훨씬 다채롭게 발전시킨다. 이러한 포스트 구조주의의 탈 중심적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며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화 현상을 이론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 2. 문화에서의 해체와 탈중심화 경향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과 예술 전통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안고 있는 모순과 한계, 예술적 허상을 비판하는 문예적 개념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 부분에서 시작하여 문학과 미술, 연극등 다양한 분야로 퍼져 갔는데 이는 기술의 발달과 사회 변화로 인한 문화의 패턴이 변하여 대중매체에 뿌리내린 대중문화 속에 스며들면서 더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레데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켜, 제국적 자본주의가 다국적 자본주의 형태로 세계 시장에 파고드는 것을 도와주는 후기 자본주의 논리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징을 '미학적 대중 주의, 문화 생산물의 깊이 없음, 역사성의 빈곤, 의미의 해체, 비판적 거리의 말소, 재현 이데올로기의 약화 등으로 들고 있다. 이러한 판단의 공통적인 현상인 해체 현상은 문학에 경우 특히 지대한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이후 현대문학 이론의 전개와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데리다가 해체 이론서인 에서 보여주는 탈중심지향은 활발한 유희와 해석 작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중심의 횡포나 억압과 현존을 거부하게 했다. 그는 체제 내부에서의 해체 작업을 위해 패러디와 다원성 긍정의 두 가지 책읽기 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이후에 상호 텍스트성, 파편화현상, 메타픽션 등의 경향을 보이며 현재에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 상호 텍스트성 '상호텍스트성' 현상은 다른 문학 텍스트들과 맺고 있는 상호 연관성을 중시한다. 하나의 작품을 텍스트라고 한다면 작품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의도적으로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하여 장르 개념을 해체시킨다. 상호 텍스트 성은 무조건적인 모방이 아니라 비판이 개재되어진 텍스트의 적극적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독창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세상에서 진정한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마치 모자이크와도 같아서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작품들을 다시 결합하고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작가나 저자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작가는 더 이상 초월적인 신으로 간주되지 않고 한낱 언어라는 재료로 제품을 만들어 내는 생산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이 보여주는 의미란 무엇인가. 이는 무엇보다 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비판으로 형성되었고 독자성, 또는 독창성의 허구를 드러냄으로써 창작을 둘러싸고 있는 규제를 비판해 자율과 자유를 철저히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탈 장르, 탈 양식의 일환인 상호텍스트성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함유되게 되는 생명력이 중시되게 되었다. 각 장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비평이 독자적 기능의 하나였던 해석은 중시되었다. 소설은 영화를 텍스트로 하기도 하고 회화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상품광고의 한 장면을 텍스트로 하기도 하고 고전주의 문학작품을 텍스트로 하기도 한다. 여기에 패러디와 혼성 모방까지 뒤엉켜 사실상 장르나 양식 개념은 해체되고 있다.  여기서 작품의 형식적 요소는 더 이상 판단이나 비판의 기준이 되지 못하며 중요한 것은 작품이 지닌 설득력이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은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아닌, 텍스트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출발한 재창조로 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는 장르 개념이나 양식 개념을 비판하여 양식상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대항 문화'의 기능을 함유하려 드는 것이다. 2) 파편화 현상 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적인 비젼의 제시나 모든 현상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분산화, 파편화의 방법을 지향하게 된다. 전체화를 지향할 할 경우 중심을 만들고 보편적 개념을 만들어 내며 구체적 현실과는 유리된 이념의 허구적 중심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전체적 현상보다는 미시적이고 파편화된 현상에 접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문학 분야에서는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차용하여 개인 서술의 단편적 나열을 통한 심리묘사 방법을 쓰는 현대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아무런 상관도 없고 의미없을듯한 장면의 나열로 총체적 이미지를 주는 광고들에게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은 구체적이며 파편화된 현상에 대해 접근하며 그 미세함 속에 나타난 세계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도외시되었던 공포와 혐오를 자아내는 묘사를 거리낌없이 함으로써 도덕의 구현이나 종교적 구원, 이념의 생활화 따위의 식상한 구호들과는 먼 거리의 현대인들의 좌절감을 그려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총체적인 개념 제시보다 후기 현대사회의 인간들의 본질적인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 현상은 전체적인 전망이나 총체적인 시도가 가지는 거대 체계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써 제시되고 있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점을 부각해 본성의 차이를 비롯하여 사유와 구체적인 현실간의 차이를 드러내어 사유가 표방하는 진리, 합리화된 제도가 내세우는 목적 등과 상치되는 미세한 현상들을 부각시켜 그러한 사유와 제도가 갖는 허구성을 노출시키고자 한다. 또한 그것은 보다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현상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로 정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세기 후반의 등장한 특이한 소설 장르로써 메타 픽션을 살펴보겠다. 지난 60년대부터 서구의 소설들은 종래의 관습적인 소설 양식으로부터 탈피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대신 소설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성찰과 반성 속에서 스스로의 특성을 찾아갔다. 소설의 이러한 변화는 바로 소설이 더 이상 리얼리티를 제현할수 없으며 더 이상 진실을 제시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페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에 대해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스스로가 하나의 인공품임을 의식적`체계적으로 드러내는 소설 쓰기"라고 지칭하며 이를 통해 "해석과 해체의 개념 속으로 혼합시킨다"고 하였다. 이는 위에서 서술한 예술 작품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그를 밝혀 보이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창작 행위 그 자체에 대해 극도의 자의식을 보여주게 되는데 작품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픽션이며 환영이고 작가의 인식이나 감정의 소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그 자체가 현실이나 실제도 아니며 그러한 대상을 가리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성의 투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만든 환영에 현혹되어 그것을 실제로 착각하면 그를 만든 작가의 의도는 은폐되고 일종의 우상 숭배 현상이 일어나므로 메타픽션은 그러한 허구적 노력들을 거부하고 작품을 작가의 의도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이 속에서 작가의 자의식은 극도로 개입되게 되어 있다. 또한 현대에 와서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의 권력 구조가 극도로 복합되있는 상태에서 진실과 허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 소설의 저항 역시 복합적이고 불 가시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메타픽션이 현실 도피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고 워교수는 부연한다. 메타픽션의 자아반영적 요소 역시 작가들의 부단한 자기 성찰과 반성일 뿐 결코 현실 상황으로부터의 단순 도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또한번 패러디의 효용이 언급되고 있다. 패러디는 곧 하나의 창작이자 동시에 비평이 되고 새로운 것이 고갈된 어떤 것의 말기 현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교훈적 의도도 없이 다만 관습에 대한 과감한 조롱과 통렬한 자기 반성을 통해 출구를 찾는 행위라 할때 메타픽션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 Ⅲ. 결론 이상으로 해체 이론의 이론적 토대와 그 현상 등을 살펴보았다.  해체 이론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 우리가 당연시해 왔던 모든 형태의 지배 문화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합법성과 억압에 대해 새삼 회의와 의문을 던지게 해주었다는 점은 분명히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인들에게 자신들도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대한 심오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해체 이론은 또한 단순한 서구의 사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사회와 문화 모든 분야에서 전세계에 절실하게 느껴지는 중요한 지적 움직임처럼 보인다..그것은 결코 진리나 전통을 단순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진리와 전통으로써 그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 온 것들을 심문하고 외부로부터의 단순한 파괴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해체를 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 이론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축소시킴으로써 사회 정치적 역사적 담색을 소홀히 하는 단점이 있다. 또한 해체 이론은 텍스트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창작과 비평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비평이 창작을 압도하는 소위 비평 만능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해체 이론은 사변적 이론으로 인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그 스스로 유리화를 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전통과 진리를 해체한 후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가 또하나의 전통과 진리가 되어 갈 가능성도 보이는 것이다. 대안적 형이상학의 구축을 꾀하지 않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운동은 그것이 대항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가 이후 역설들에 의해 일단 무력화되면,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어 미세한 차이들의 세계로 만들것다. 한편, 이 차별화 전략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무한한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다. 새로운 유행의 창조와 광고를 통해 새로운 상품에 대한 구매 의욕의 자극이나 다품종 소량 생산과 같은 것이 그 구체적인 전략일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권위와 교조적 주체를 해체시켜 줌과 동시에 더 물을 수 없는 단절을 가져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다양해진 세계상은 또한 그만큼 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체를 통해 이성적 우상들은 해체되었을지라도 해체라는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따라서 이성적인 로고스는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이성 중심의 로고스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 모순을 범하게 된다. 또한 다양성의 기치를 들고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상품화를 통해 제도 권의 지배 문화에 종속되어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허물고 있다는 점이나 저자의 죽음을 역설하며 해석자를 크게 부각시킨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자기반영성 상호텍스트성 등을 통해 이를 이해하는 일부의 엘리트 해석자들에게만 호소력을 지닌 채 스스로 대중에게서 차단되어 엘리트 문화로부터 더 먼 거리를 보이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 자신의 논리에 묶여 새로운 논리로 세계를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략은 사회 내의 개인의 경우여도 마찬가지여서 차별성의 원리야말로 자아 동일성을 담보해 주는 원리이며 다양한 삶의 방식은 일관되고 공동체적인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 비난받는 것이 아닌, 오히려 끝까지 고무된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 내의 문화 전략으로 극단화되면 사회의 자기 분열의 상황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며 극도의 산만성, 집중성등으로 사회는 무책임한 자유방임의 무질서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해체가 극단화되면 주체가 해체되고 인식과 대화는 불가능해지며 객관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학도 자기 정체성을 잊고 세계의 유령으로 방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 이론은 탈 중심과 탈구축의 인식과 전략을 제시해 줌으로써 오늘날 기존의 지배 문화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문화와 현실에서 새로운 시각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모더니즘의 정형들, 이성 중심주의, 근원 주의 과학 지상 주의 역사주의 세계의 총체화 대신에 파편화 불연속성, 다원화, 분산화등 탈 정형화 등의 폐쇄와 분리를 통해 인류 문화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과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혼란성과 더불어 문화 주체로서의 인류가 유념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한, 임지현(편), , 지식산업사, 1994 뤽 페리, 알랭르노, , 인간사랑, 1995 김혜숙, , 이화 여자 대학교 출판부, 1995 이진우, , 서광사, 1993 윤평중, , 서광사, 1992 윤평중, , 교보문고, 1990 김성곤, , 열음사, 1990 김성곤 편, , 민음사, 1988 이광래, , 민음사, 1989 김동욱 , 현암사 김욱동 편, , 현암사, 1991, 이승훈 외, , 고려원, 1994 F.제임슨, , 정정호, 강내희 편, , 도서출판 터, 1989, 함세진, , 홍익 대학교 교육대학원, 1991
1754    [자료] -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4269  추천:0  2016-11-06
[ 2016년 11월 07일 09시 08분 ]     ...중국 문창(文昌) 발사기지에서    윤평중(철학)  1>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1.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각각 시대정신으로서의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에 종속되는 하위개념이다.  2.모더니티의 시대정신은 이다.  3.포스트 모더니티의 시대정신은 모더니티의 특성과 대칭 관계에 있고 따라서 하위개념으로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심적 특징은 모더니티의 3가지 특징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4.포스트 모더니즘을 규정할 때 다양한 입장가운데 한가지 공통점은 근대적인 라 는 개념을 더이상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의해서 주창된 근.현대적 이성에 대한 비판 내지는 해체작업이 라고 할 수 있다.  2>포스트 모더니즘의 형성  1.포스트 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프랑스 현대철학 자들,즉 후기구조주의 내지는 해체주의 라고 부르는 사상적 흐름이다.  2.포스트 모더니즘이 처음 논의된 것은 1950년대 이후 미국의 건축이론가들 사이에서 이며,미술  음악등의 쟝르로 확산되면서 1970년대 이후부터는 철학사상의 영역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 되는데, 그 논쟁의 불씨를 제공한 프랑스 현대철학의 후기구조 주의 내지는 해체주의에서 미셸 푸코,자끄 데리다,쟝 프랑소아 리오따르 등의 인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다.  3>미셸 푸코와 서양적 이성의 해부  1.푸코의 초기 저작인 에서 근.현대적 이성관에 의해서 당연시 되는것이 인간의 '이성적 주체'이고 자유의지로써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을 자신의 주관에 의해 행 해지는 것으로 여기는,그래서 오늘날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은 역사를 들춰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2.푸코는 과 광기,미침으로 대표되는 의 분리라고 하는 현상이 서양의 경우 17세 기에 비로소 커다란 사회적 흐름으로 형성되었다고 말하고 1656년과 1793년이 이성의 형성사 라는 관점에서 볼때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았다.그리고 18세기에는 비로소 이성과 비이성의 대 분리라는 유럽적 경험이 거의 완결되었다고 보았다.  3.1656년의 대감금시설인 종합병원의 유럽확장은 종합병원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이 감금시설이 노동의 규율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를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4.그러나 범법자들과 달리 정신병자들에게는 노동의 규칙을 실행하는것이 어렵다는 것이 드러나 기 시작하자 18세기에 들어와 1793년의 프랑스인 피넬이 비세뜨리 정신병원에서 인도주의적인 의료개혁을 실천 하는등 인도주의적 개혁이 생겨나 범법자들과 미친 사람을 분리하게 되었다.  5.그런데 이 인도주의적인 개혁은 처벌의 목표를 육체에서 정신으로 전이 시킨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푸코는 18세기에 문명화된,인간화된 정신병동이란 광인의 죄의식을 '치료'한 것이 아 니라 '조직'했다고 보았다.  6.푸코는 고대나 중세에는 미친사람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않았으 나 17~18세기에 정착된 '이성적 주체'라는 것은 정상인의 우월함과 정신병자의 열등함을 내면 화 하였고 이를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주입시켰다고 보았다.  7.푸코의 후기 저작인 에서도 비슷한 논리로 서구 역사에서 형벌제도를 설명하는 데 세가지의 과정 밟았음을 말한다. 처음 왕정시대의 '공개고문'에서 18세기의 계몽사상이 도 입되면서 '형벌제의 개혁'이 전유럽 차원에서 벌어지고 '사법적인 감금'이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이다.  8.일제시대에 형무소는 인과응보적인 처벌관이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면 인도주의적인 배경하의 오늘날 교도소는 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규범에 맞게 교화 시킨다고 볼 수있는데 푸코는 겉으 로는 비폭압적이지만 은밀하게 강제로 교화시키려는 데에 문제제기를 하였다.  9.푸코는 서양의 근.현대 사회를 '유폐적 그물망'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서양의 근.현대 역사라는 것은 정신병자나 범법자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 조차도 길 들이려하는 기제,장치를 갖고 있으이며 감옥외에 학교,가정,회사등 모든 사회조직체 속에 사회의 지배계층의 가치규범 에 길들이는 작용이 있다는 말이다.  10.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투명한 '이성적 주체'라는 개념은 17~18세기의 특정 시기와 지역 에 나타난 역사적 구성물로 보편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며 그러한 투 명하고 통일적인 의식을 가진 근대적 이성에 대한 비판작업, 이것을 이라 부른다.사이버미술대학  4>쟝 프랑소아 리오따르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조건  1.포스트 모던은 시간상으로 모던이후가 아니라 모던 자체내에 내제한 어떤 문제의식의 발로라 고 보았다.모더니티가 배태한 여러가지 부작용,구조적 모순,문제점들을 전향적이고 창조적으 로 해결해 보는 것이 포스트 모던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현현된다는 것이 리오따르의 주장이다.  2.리오따르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것은 논리와 번화와 창조적인 실험들에 의해서 계속 추동되어  지는 과학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오는날 당연시 하는 행위양식이나 말하는 방식등의 제한이나 한계 속에 사로잡히지 말고 모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색다르고,이질적인 담론의 양 식이나 실험등을 의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다.사이버미술대학  3.모더니즘의 특징인 등 이야기 방식은 모던적 담론  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다른 담론들을 억압하는 라는 것으로 포스트 모 더니즘 사상가들은 말하는데 리오따르는 이성적이지 못한 모든 양상이나 경험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비난하면서 자기발언을 못하도록 억누르면 그러한 양상들이 탐구의 값어치가 없다는 식으로 사장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4.리오따르의 관점은 모던적 상황에서 우리가 이미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어떤것이 유일한 진리 이며 다른것은 열등하다는 흑백논리의 식의 모든 이야기 방식을 정당하지 못한것 으로 거부하고 아주 들이 권장되어야 한다는 다원주의적 관점이다.  5>쟈끄 데리다의 해체주의  1.포스트 모더니즘의 중요한 방법론을 해체를 처음 주장한 사람이 데리다인데,그는 서양의 현대  에 이르기 까지 사유를 철두철미하게 지배해온 을 해체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비판 하였다.은 "존재의 의미를 현존으로 이해한다"는 것, 즉 "객관 적인 세계는 따로 존재하고, 우리가 그 객관적이 세계를 우리의 언어와 개념채계를 사용해서 정확하게 표상할 수 있다"는 관점을 말한다.  2.에서 화살의 운동은 과거와 미래를 감안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듯이, 나의 삷 에있어서도 현재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현존의 관점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될지 모르 나 사실은 과거와 미래의 영향없이는 현존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성립될 수 없다.  3.서양의 언어관은 보다 를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해 왔는데,이것은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는 아주 명료하고 확실하게'현존'하는 양태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4.데리다는 전통적인 서양의 언어관이 '현존'이라는 관점에서 언어라는 매체를 파악하기에 에 침윤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언어가 결코 '현존'-지금 이 시점에서 존재하는 것- 하는 것으로써 특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5.우리의 존재있어서 과거와 미래가 '현존'의 관점에서 보면 부재(없음)라고 말할 수 있어도 현재라고 하는 것이 과거와 미래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언어에 있어서도 특정한 단어의 의 미는 문맥의 다른 무수한 단어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그러므로 와 를 '현존'의 문맥에서 구별화 시키려고 하는 서양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이 도저히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언어관이다.그리고 그의 언어관이 낳은 결과를 보면 어떤 기호와 그  기호가 지칭하는 대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6.이렇게 기호 일반이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라는 데리다의 주장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것을 Text 라고 말할때 모든 것은 기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기호는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라는 것이고 그 러한 논리에서 생각하면 특정한 기호 체계가 다른 기호 체계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때문에 현대인에게 있어서 '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이라는 것도 특정한 기호체계 에 지나지 않기에 다른 학문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고 이러한 언어,기호 체계 의 각기 다른 다원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리오따르의 급진적 다원주의와 연결된다.  6>포스트 모더니즘의 수용과 비판  1.포스트 모더니즘의 전향적인 특징은 다원주의내지는 거의 무정부적인 다원주의이며 이것이 가 장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있다.  2.그러나 우리사회는 봉건적인 것과 모던적인 것이 중첩되어 있기에 모던적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서구상황과 다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양상도 수입되 복잡한 상태이어서 그들의 문제 의식을 그대로 차용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3.포스트 모더니즘을 비판할 때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정치적 관점에서 그것의 무정부적인 경 향 때문이다. 그래서 바람직한 부분은 인정되야 하지만 그대로 빌려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문제의식도 가져야 한다.  4.우리나라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인물들은 그배경이 '후레드 릭 제임슨'이라는 미국의 맑스주의 비평가의 논리를 그대로 빌려온 것으로 특히 강내희 교수 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비평할때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라는 한국 좌파들의 사회 변혁 론 입장에서 어러한 논의를 제임슨의 표현을 빌려 '후기 자본주의 문화논리'라고 바판을 한다  다시 말하면 제3세계 후진국인 우리나라를 문화적으로 세뇌시키고 있고 침윤,침략하려는 고등 수법이라는 것이다.  5.그러나 '신식민지 국가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제임슨이 표현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과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제임슨은 맑스주의자의 도식을 빌려 첫째 산업자본주의에 들어맞는 것 이 이고,둘째 독점자본주의에 조응하는 것이 이며,셋째 다국적 자본주의 에 조응하는 것이 이라고 하였는데 강내희 교수의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 주의라고 하는 방식은 세번째의 포스트 모더니즘과 연결되는 다국적 자본주의와 연결되는 것 이 아니라 독점 자본주의와 연결된다.그러므로 제임슨에게서 빌려온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문제가 있다.  6.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큰 이야기'에 대한 비판과 가치는 궁극적 목표가 개인의 차원에서나 사회의 차원에서 우리의 건강성과 다원성을 어떻게 암암리에 억압해 왔는가라고 하는 사실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만든다는 것이며 그래서 방법론적인 생각을 해봐야한다. 
아방가르트(avantgarde) 예술의 이해와 감상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법문 박태원 1. 서론    능엄경에서 말하였다. “견(見)을 볼 때에 견은 견이 아니다. 견은 견까지도 여의었으므로 견으로도 미치지 못한다“ (㘄嚴經에 云하되 見見之時에 見非是見이니 見猶離見이라 見不能及이니라하다) ”지견(知見)에 지(知)를 세우면 무명의 근본이요, 지견에 견(見)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열반이니라.“ (知見에 立知하면 卽無明本이요 知見에 無見하면 斯卽涅槃이니라) 이에 대하여 열재(悅齋)거사가 송(頌)했다. 달빛은 구름에 섞여 희고 솔바람은 이슬을 동반하여 차다. 이렇게 보거나 듣지 않는 자는 일체가 삿된 관법이다. 月色和雲白 松聲帶露寒 非玆聞見者 一切是邪觀 랭보는 말하였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타인이나 설사 구리쇠가 잠깨어 나팔이 된다 하여도 구리쇠의 잘못은 아닙니다.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자기 자신을 완전히 깨닫는 일입니다. 그는 그의 영혼을 추구하며, 그것을 검토하며, 시련을 가하고 가르쳐 갑니다. 자신의 영혼을 알고 나서는 곧 그것을 가꾸어가야만 합니다....나는 감히 견자(見者)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1. 아방가르트 예술의 개념 마시모 본템펠리는 아방가르트 예술을 “예술이 하나의 역사적 양상 아래 자체를 관조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서 태어난, 하나의 현저하게 현대적인 착상”이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 예술은 창조적인 것이며,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무엇”이다. 문화사에서 객관적인 현실은 그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의식과 일치된다. 문화의 분야에서 발견은 창조이며 의식은 존재다. 인문학에서 유일한 인식론적 원리는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또는 ’그것은 의식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한다 est cogitatum, erst est'라는 것이다. 아방가르트는 현재와 미래에 의하여 과거를 판단한다. 아방가르트는 집단의 선언이다. 그런데 고대의 집단화에는 학파라는 이름이 부여되는 반면 현대의 집단화에는 운동이라는 이름이 부여된다. 낭만주의 이래 출현했던 일체의 예술적 문화적 선언들은 운동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명명하고 정의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학파의 개념은 스승과 방법, 전통적인 기준과 권위적인 원칙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역사를 구성인자로 하지 않는다.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다만 시간이다. 학파는 논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학파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파의 개념은 현저하게 정태적이고 고전주의적인 반면 운동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고 낭만적이다. 운동은 문화를 축적된 보물로서가 아니라 창조로 이해하고 활동과 에너지의 한 중심으로 바라본다. 상징주의는 아방가르드의 가장 특징적인 외적표명들(집단과 모임, 운동의 정기간행물등 하나의 특수한 창작 유파, 어떤 하나의 심미안의 경향을 표방함)을 최대의 발전단계로 끌어올렸다. 아방가르드 잡지는 우리 시대의 상업적인 대중잡지의 출판에 정면으로 대립하며, 문화의 저속화 내지 통속화에 맞서는 반항의 도구로 정당화된다. 2. 운동의 변증법 a. 행동주의 쿠르트 힐러(Kurt Hiller)에 의해서 만들어진 행동주의라는 용어는 독일 표현주의에서 형성된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경향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는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충동을 신계몽주의적인 차원에서 개혁함으로써 심리적 반항을 실천적이고 사회적인 개혁으로 끌어올리려는 목적에서 행동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두 개의 표현주의 잡지인 과 의 제목에서 잘 표현되었듯이 표현주의는 직선적인 행동과 힘의 과시를 특징으로 하며 정열과 대중보다도 조작과 운동을 지향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미래파는 특히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을 통해서 전쟁이나 게릴라 이상 가는 살아있는 표현을 이 정신에 부여했다. 행동주의 또는 심리적 역동론은 육체적인 역동론의 찬미와 기계적 역동론의 취향을 배제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마야코프스키는 그의 유명한 시구인 “우리의 하나님은 달리기다. 우리의 심장은 북이다.”가 말해주듯이 스포츠를 메시아주의의 단계로 치켜세운다. 이탈리아의 미래파 시인 마리네티는 “포효하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치아의 승리보다 더 아름답다”라는 시구가 말해주듯이 기계의 미학, 속도의 미를 찬양한다. “우리는 공격적인 운동, 질주의 순간, 전력을 쏟음, 손뼉과 주먹을 높이 사고자 한다.”,“예술과 삶에서의 영웅주의와 광대정신”등으로 표현되는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창작보다는 운동에, 행위 자체보다는 표출에 더 관심을 쏟았다. 이는 속도의 개념과 진보의 이상을 혼동하여 예술을 순수한 감성과 감각작용으로 축소하는 심미주의 저속한 변형태를 나타낸 것이다. 랭보는 에서 “문학은 더 이상 행동을 리듬에 맞추어 노래하지 않는다. 시는 앞서나갈 것이다. elle sera en avant" 하여 문학의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비전을 관념적으로 보여준다. 문학의 꿈은 새로운 현실을 단순히 동반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미래의 문학이 존재의 순수한 원천으로 돌아가는 고귀한 꿈을 생각하는 것이 진보주의의 이상이다. b. 적대주의 아방가르드주의 중 가장 두드러지고 눈에 띄는 태도는 공중에 대한 적대주의와 전통에 대한 적대주의이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개인적인 반항을 전제로 한 무정부주의를 절대적인 정치적 이상으로 하며, ‘행복한 소수 happy few'를 찬미하는 배타적인 의미의 자유의지 관철론을 주장하여 귀족적인 특징을 띤다. 앙드레 말로는 에서 “예술가는 이전의 것과의 단절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점차적이고 의연한 정복에 의거해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술가는 스스로의 정복활동을 동지애로 뭉쳐진 ‘당파 clan'로 향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 정복활동은 예술가 자신의 특수하고 구체적이 상황에서 점점 더 분리된다.”라고 말하였다. 현대의 예술가는 "초(超)계급자 fuori-classe"로서 내적인 심리적 원인과 소명의식에 따라 운동과 분파에 참여하고 소속됨으로써 보다 넓은 범위의 외적 상황에 대처하는 “사회 예술가 milieu artiste"가 된다.
1752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감상하기 댓글:  조회:4314  추천:0  2016-11-05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이해와 감상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법문 박태원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의 시에서 보듯이 사물의 인상에 대한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현실생활에 투사된 인간의 내면과 감각의 통감각적인 예술적 표현을 위하여 시의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를 거부했다. 그들은 인간의 현실이 내면에 끼친 감각적 인상을 선험적인 순수 이성과 미묘한 직관으로 투시해 존재의 상징적 의미를 통감각적 예술美로 환기하고자 했다. 나는 시인은 투시자(見者)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그 자신으로부터 세계를 투시해야 한다. 시인은 멀고 긴 세계를 통과하여 세계를 투시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거대하며, 모든 감각의 교란을 이성에 맞게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시인은 모든 사랑의 고통, 광기까지도 그는 이성에 맞게 논리적인 감각으로 생각해야 한다. (주: 감각의 교란, 사랑의 고통, 광기는 곧 이성의 마비를 불어온다. 그러므로 랭보가 말하는 ‘이성’이란 의식을 넘어선 그 무엇(是, 眞我, 절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I say that one must be a seer, make oneself a seer. The poet becomes a seer through a long, immense, and reasoned derangement of all the senses. All shapes of love suffering, madness. 시인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 완전한 그 자신을: 그는 그의 영혼을 찾아야 한다, 그는 그의 영혼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는 그의 영혼을 시험하고 음미해야 한다, 그는 그의 영혼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가 그의 영혼을 배우자마자, 그는 그의 영혼을 갈아 엎어서 경작해야 한다! (주: 랭보가 말하는 ‘영혼’이란 불교의 업식, 업장, 아뢰야식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영혼을 시험하고, 음미하고, 배우고, 경작한다는 것은 업장에 가려져 있는 ‘그것’(是, 眞我)을 깨닫기 위한 과정이다.) The first study for the man who wants to be a poet is knowledge of himself, complete: he searches for his soul, he inspects it, he puts it to the test, he learns it. As soon as he has learned it, he must cultivate it! 시인은 그 스스로를 찾아야 한다, 그는 오직 본질만을 갖기 위해서, 그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독을 다 쏟아내야 한다. 모든 그의 신념을 필요로 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고통, 모든 그의 초인적인 지성, 시인은 위대한 인내로서 모든 평범한 범인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훌륭한 대죄인으로서, 위대하며 저주받은 하나의 인간으로서--그리고 최고의 학자로서! 시인은 미지의 세계의 탐구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시인은 진정 불의 도둑이다! (주 : ‘불의 도둑’이란 바로 인간에게 언어와 지혜와 자유를 선사한 프로메테우스를 말하는 것이다. 쉘리는 그의 희곡인 에서 제도적 상징체계인 제우스의 지배를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여 진정한 자아를 체득함으로써 자유를 얻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 He searches himself, he exhausts all poisons in himself, to keep only the quintessences. Ineffable torture where he needs all his faith, all his superhuman strength, where he becomes among all men the great patient, the great criminal, the great accursed one--and the supreme Scholar! For he reaches the unknown! ....So the poet is actually a thief of Fire! 그들은 詩神이 투사한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돈스러운 전인적인 통일체'를 암시하고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고 하였으며, 사물과의 교감을 통하여 체득한 상징적 시어와 언어의 고유한 화성, 음조 및 색채를 사용하였다. 보들레르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는 서로 교감하며, 물질세계는 상징을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서 정신세계에 접근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감각은 이 두 세계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신비를 알아내며, 따라서 시인의 사명은 "어렴풋한 말들"을 분명하게 해석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불교의 능엄경에는 수행을 하여 6근(六根-眼耳鼻舌身意: 業障)의 매듭 중에서 하나가 풀리면 나머지도 따라서 풀리고 六根이 서로 圓通한다고 한다. 즉 감각들간에 조응이 일어나 “향기와 색채와 음향이 서로 화합”하는 것이다. *조응(照應 correspondances)/보들레르 자연은 신전, 그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이따끔 어렴풋한 말들이 새어나오고, 사람은 상징의 숲들을 거쳐 거기를 지나가고, 숲은 다정한 눈매로 사람을 지켜본다. 멀리서 아련히 어울리는 메아리처럼 밤처럼 광명처럼 한없이 드넓은 어둡고도 깊은 조화의 품 안에서 향기와 색채와 음향은 서로 화합한다. 어린애의 살결처럼 신선하고 오보에처럼 보드라우며, 목장처럼 푸른 향기 어리고 -또 한편엔 썩고 푸짐한 승리의 향기 있어,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것으로 번져나가서 정신과 감각의 환희를 노래한다. 상징주의자들은 선택한 시어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 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과 이미지(心象)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母音/랭보 A는 흑, E는 백, I는 홍, U는 녹, O는 남색. 모음이여, 네 잠재의 탄생을 언젠가 말하리라. A(아), 악취 냄새나는 둘레를 소리내어 날고 있는 눈부신 파리의 털 섞인 검은 코르셋. 그늘진 항구, E(에), 안개와 천막이 백색. 거만한 얼음의 창날, 하얀 왕자, 꽃 모습이 떨림. I(이), 주홍색, 토해낸 피, 회개의 도취런가. 아니면 분노 속의 아름다운 입술의 웃음이런가. U(우), 천체의 주기, 한 바다의 푸른 요람, 가축들 흩어져있는 목장의 평화. 연금술을 연구하는 넓은 이마에 그어지는 잔주름살. O(오), 기괴한 날카로운 비명에 찬 나팔 소리려니, 온 누리와 천사들을 꿰뚫는 침묵. 오오, 오메가! 신의 시선인 보랏빛 광선. 랭보는 시에서 다섯 모음이 암시하는 심상(이미지)의 색채와 음조를 아름다운 화성으로 노래하고 있다. 불어와 마찬가지로 표음문자인 한글도 우주의 운행원리인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음과 자음의 색조를 유추할 수 있다. A(아)는 憂愁 (五情: 憂愁. 勇斷. 明朗. 仁慈. 重厚)를 띤 음조를 암시하고, 우수는 흑색 (五色: 黑. 白. 紅. 靑(藍色). 黃(綠色))의 이미지를 내포하며, 흑색은 북방 (五方: 北. 西. 南. 東. 中央(間方))에 속하고, 북방은 五形(타원형. 사각형. 삼각형. 한일자형. 원형) 중에서 타원형의 이미지를 내포하며, 五行(水. 金. 火. 木. 土)으로는 水에 해당한다. 五聲 중에서 羽音인 ㅁ. ㅂ. ㅍ(五聲: 羽.商.㨖(ㄴ.ㄷ.ㅌ.ㄹ>.角.宮)이 水의 이미지와 음조를 암시한다. ( 악취 냄새나는 둘레를 소리내어 날고있는 눈부신 파리의 털 섞인 검은 코르셋.) E(에)는 勇斷 – 백색 – 서방 – 사각형 – 金 – 商音 (ㅅ. ㅈ. ㅊ)의 이미지와 음조를 암시한다. (그늘진 항구 … 안개와 천막이 백색. 거만한 얼음의 창날, 하얀 왕자, 꽃 모습이 떨림.) I(이)는 명랑 – 홍색 – 남방 – 삼각형 – 火 –치음(ㄴ. ㄷ. ㅌ. ㄹ)의 이미지와 음조를 암시한다. (주홍색, 토해낸 피, 회개의 도취런가. 아니면 분노 속의 아름다운 입술의 웃음이런가.) O(오)는 仁慈 – 청색(남색) – 동방 – 한일자형(_) – 木 – 角音(ㄱ. ㅋ.)의 이미지와 음조를 암시한다. (기괴한 날카로운 비명에 찬 나팔 소리려니, 온 누리와 천사들을 꿰뚫는 침묵. 오오, 오메가! 신의 시선인 보랏빛 광선.) U(우)는 重厚 – 황색(녹색: 대지의 색조) – 중앙(혹은 間方) – 원형 – 土 – 宮音 (ㅇ. ㅎ)의 이미지와 음조를 암시한다. (천체의 주기, 한 바다의 푸른 요람, 가축들 흩어져있는 목장의 평화. 연금술을 연구하는 넓은 이마에 그어지는 잔주름살.) 상징주의는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은 근원적인 실재의 작용이라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상징주의는 마음의 근원적인 실재인 ‘是(그것)’를 깨달아 理事不二(無極而太極)의 대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삶의 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에 사는 고기는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 물에 사는 고기는 물을 알지 못하고 물결치는 대로 자유롭게 헤엄치네. 본래 잃어버리지 않았거니 득실을 말하지 말라. 미하지 않았거니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강조하는가. 이시정오처의운답지(以詩呈悟處依韻答之) 어룡재수불지수(魚龍在水不知水) 임운수파축랑유(任運隨波逐浪遊) 본자불리수득실(本自不離誰得失) 무미설오시하유(無迷說悟是何由) 장 모아레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ecadent)라는 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상징주의는 보들레르를 선구자로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에 의하여 전개되었으며 발레리에게 계승되어, 마침내 완성된 시적(詩的) 세계와 그 이론이 성립하게 된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 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보들레르는 하나의 시적 혁명(詩的革命)을 일으킨 것이다. 첫째로 의식적, 이지적 방법에서 말라르메를 탄생시켰다. * 백조/말라르메 순결하고 생기 있어라, 더욱 아름다운 오늘이여, 사나운 날개짓으로 단번에 깨뜨려 버릴 것인가. 쌀쌀하기 그지 없는 호수의 두꺼운 얼음. 날지 못하는 날개 비치는 그 두꺼운 얼음을. 백조는 가만히 지나간 날을 생각한다. 그토록 영화롭던 지난 날의 추억이여! 지금 여기를 헤어나지 못함은 생명이 넘치는 하늘 나라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벌이런가. 이 추운 겨울날에 근심만 짙어진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잊은 죄로 해서 길이 지워진 고민의 멍에로부터 백조의 목을 놓아라, 땅은 그 날개를 놓지 않으리라. 그 맑은 빛을 이 곳에 맡긴 그림자의 몸이여 세상을 멸시하던 싸늘한 꿈 속에 날며, 유형의 날에 백조는 모욕의 옷을 입도다. 둘째로 시의 음악성을 추구한 베를레느를 탄생시켰다. * 잊혀진 노래/베를레느 바람은 들에서 숨을 죽인다 -파바르 그것은 꽤 나른한 황홀 그것은 사랑의 권태로움 그것은 산들바람에 안긴 나무들의 온몸의 전율 그것은 회색 가지 근처의 소리 작은 합창. 오오 가냘프고 상쾌한 속삭임이여! 그것은 속삭이는 방울 소리 그것은 흔들리며 일어나는 풀이 내는 여린 흐느낌 소리와 같다. 저 소용돌이 치는 시내 밑의 조약돌들의 둔한 흔들림 같다. 이 어렴푸한 스며드는 소리에 신세를 탄식하는 이 혼은 우리들의 것이 아닌가? 나의 것이요 그리고 너의 것. 거기에서 이 미지근한 해거름 수줍은 기도가 낮게 낮게 올라간다. 셋째로 감수성(感受性)과 대응(對應)-교감의 이론에서 랭보를 탄생시켰다. *골짜기에서 잠자는 사람/랭보 푸른 잎의 구멍이다. 한 갈래 시내가 답답하게 풀잎이 은빛 조각을 걸면서 노래하고 있다. 태양이 거만한 산의 어깨로부터 빛나고 있다. 광선이 방을 짓는 작은 골짜기다. 젊은 병사 한 명이 모자도 없이 입을 벌린 채 싹트기 시작한 푸른 풀잎에 목덜미를 담근 채 잠자고 있다. 구름 아래 있는 풀밭에 누워 광선이 쏟아지는 초록색 침대에 창백한 모습으로. 민들레 떨기 속에 발을 넣고 자고 있다. 병든 아이가 미소 짓듯 웃으면서 꿈꾸고 있다. 자연이여,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져주어라, 추워보이는 그를. 초록의 향내도 그의 코를 간지럽히지 못한다. 햇빛 속에서 고요한 가슴에 두 손을 올려놓고 그는 잠잔다, 오른쪽 옆구리에 두 개의 빨간 구멍을 달고서.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 고정된 운율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티보데는 상징파의 새로운 바람이 다음의 세 가지 점이라고 하였다. (1) 자유시: 그 시작은 민중적인 노래의 형태를 필요에 따라 채용한 랭보의 《지옥의 계절》이다. 이후 프랑스의 시인은 정형(定型)을 채용하는 자와 자유시 형태를 쓰는 자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 가장 높은 탑의 노래/랭보 오라, 오라, 열중할 시간이여. 얼마나 참았나 내 언제까지나 잊었네 공포와 고통도 하늘높이 날아가 버렸고 불쾌한 갈증이 내 혈관 어둡게 하네. 오라, 오라, 도취할 시간이여. 잊게 되어 있고, 더러운 파리떼 기운차게 웅웅거리는데 향(香)과 가라지를 키우고 꽃피우는 들판처럼 오라, 오라, 도취할 시간이여. 나는 사막, 불타는 과수원, 시들은 상점, 미지근한 음료를 사랑했다. 나는 냄새나는 거리를 기어다녔고, 눈을 감고, 불의 신(神), 태양에 몸을 바쳤다. "장군이여, 황폐한 성벽에 낡은 대포가 남아 있으면, 마른 흙더미로 우리를 포격하라. 대단한 가게의 거울에! 살롱에! 온 마을이 먼지를 뒤집어쓰게 하라. 배수구를 산화시켜라. 규방을 타는 듯한 홍옥 화약으로 가득 채우라…" 오! 주막 공동변소에 취하는, 날개벌레여, 서양지치 식물을 그리워하며 한가닥 광선에 녹는 날개벌레여! -랭보, 중에서 (2) 순수시(純粹詩): “음악에서 그 부(富)를 빼앗는다”라는 말라르메의 말로 요약되는 순수시의 개념은 상징파에서 비롯된다(이 경우의 음악은 주로 바그너의 음악이다). 시 속에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의식적 노력은 바그너의 영향 아래 말라르메에서 시작되어 발레리에서 완성되었다. * 석류/발레리 너무 많은 알갱이에 버티다 못해, 반쯤 방싯 벌려진 단단한 석류여 스스로의 발견에 번쩍거리는 고귀한 이마를 나는 보는 듯하다! 오오 방싯 입 벌린 석류여 너희들이 겪어온 세월이 오만하게도 너희들로 하여금 애써 이룩한 홍옥의 칸막이를 삐걱거리게 해도 또한 껍질의 메마른 황금이 어느 힘의 요구에 따라 찢어져 빨간 보석의 과즙이 되어도 그래도, 그 빛나는 균열은 비밀의 구조를 지니고 잇는 내가 지닌 영혼을 생각케 한다.
1751    詩란 자연과 함께 인간의 덕성을 말하는것이다... 댓글:  조회:4278  추천:0  2016-11-05
  [시창작론] 시창작 강의 1. 효과적인 시작과정 1)시작의 과정 2)제재선택의 과정 3)제재의 이미지와 의미를 연상하는 과정 4)시상전개 구상의 과정 5)집필과 퇴고의 과정 6)제목 정하기 2. 감동적인 시 1)효용론적 문학관 2)시의 교훈적 기능 가)계몽주의 문학과 교훈적 기능 나)민중문학 3. 시의 쾌락적 기능 1)현대시의 쾌락적 기능 2)유미주의 4.시의 두 가지 기능 1)교훈적 기능 2)쾌락적 기능 1. 효과적인 시작 과정 ꒑시작의 과정 시를 창작하는데 있어서 정해진 순서라는 것은 없다. 시를 쓰는 사람의 개인적 취향이나 성격에 따라 자신에 알맞은 시작의 과정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전통적으로 시창작의 과정에도 낭만주의적 사관과 고전주의적 사관이 있다. 시작의 과정에는 시의 제재를 선택하는 과정, 상상력을 동원하여 제재가 지니고 있는 여러 이미지와 상징적 의미를 연상하는 과정, 시상전개를 구상하는 과정, 집필의 과정, 퇴고의 과정 등으로 나눌 수 있지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은 아니다. ꒒제재선택의 과정 시의 제재로 적합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사, 자연, 관념 등이 모두 제재가 될 수 있다. 시의 제재를 선택하는 것은 시작과정의 첫 단계에불과하며 시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제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미지와 상징적 의미를 상상력을 통하여 파악해야 한다. ꒓제재의 이미지와 의미를 연상하는 과정 제재는 작가가 처한 특수한 상황이나, 넓게는 시대와 관련하여 이루어지기도한다. 동일한 시대의 자장 안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제재를 가지고 모두 동 일한 형태의 시가 탄생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제재에 대한 자유로운 연상과 이미지의 탐색을 통하여 자신의 글감을 언어로 표시할 수 있는 기초적인 준비과정을 마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시상전개 구상의 과정 시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배열과 통합, 확산과 집중, 시적정서의 발단과 고조 등에 대하여 면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 숙달하지 않은 채 제재와 이미지를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는데 그치고 만다면 훌륭한 시작품은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집필과 퇴고의 과정 집필의 과정은 자신이 구상한 시상에 옷을 입히고 언어의 형상을 입히는 과정이다. 집필을 통하여 자신이 구상한 것이 그대로 형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욕심을 한정하여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적합한 언어를찾아낸다면 보다 좋은 시작품이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고의 3원칙에는 첫째, 구상의 단계에서 의도하였던 주제나 이미지, 운율 등의 시적장치가 적절히 표현되었는가를 살펴서 미흡한 면을 첨가, 삭제할 것. 둘째, 행과 연의 구성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적절하게 재구성 할 것. 셋째, 시는 압축된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 생명이므로 난삽하고 다변적인 표현은 되도록 멀리해야 한다. ꒖제목 정하기 시 창작을 함에 있어서 제목을 붙일 때에는 시 전체의 내용과 조화를 이루면서 인상적인 것으로 붙이는 것이 좋다. 시의 내용에 따라서 그 내용과 잘 어울리면서 시인의 의도가 창의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제목을 정하 것이 바람직하다. 2. 감동적인 시 ꒑효용론적 문학관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구조론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란 인간의 덕성을 계발하고 교훈을 주는 것 이어야 한다는 것이 효용론적 관점이다. 문학에 있어서 교훈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은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시의 교훈적 기능 가)계몽주의 문학과 교훈적 기능 : 문학이 독자에게 일정한 교육을 전달할 수 있다거나 전달해야 한다고 하는 이러한 문학관은 계몽주의 문학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의 탄생은 시대가 처한 상황과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의 상황 속에서 필연적으로 예고된 것이다. 나)민중문학 :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교훈적 기능을 강조하였던 시기는 카프문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독자를 교화시켜 혁명의 대열로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노동문학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데모대의 선동문처럼 직접적으로 노출되지는 않는다. 3. 시의 쾌락적 기능 최재서는 인간의 쾌락을 세가지로 나누었는데 관능적, 감각적(미적), 지적쾌락등으로 인간의 쾌락을 나누고 있다. 가)현대시의 쾌락적 기능 : 최근의 시에서는 육체성에 대한 담론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 간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나)유미주의 : 유미주의는 문학의 쾌락적 기능을 극대화 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예술자체를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이들 문학은 문학이 독자에게 무언가 의미있는 내용의 전제로부터 벗어나 있다.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을 피하고, 감정의 절제를 통해 시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궁극적으로 시의 미적인 속성을 드러나게 하여, 쾌락적 기능을 극대화 시킬 수 있게 된다. =======================================================================================     설조(雪朝) ―조지훈(1920∼1968) 천산에 눈이 내린 줄을 창 열지 않곤 모를 건가. 수선화 고운 뿌리가 제 먼저 아는 것을- 밤 깊어 등불 가에 자욱이 날아오던 상념의 나비 떼들 꿈속에 그 눈을 맞으며 아득한 벌판을 내 홀로 걸어갔거니   올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화이트든 블랙이든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다. 또,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하기만 할까. 성탄절이 되든 크리스마스가 되든 각자의 상황이나 처지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전국의 모든 어린아이들은 평범한 크리스마스를 상상도 하고 싶지 않겠지만, 아직 권태기를 겪지 않은 연인들은 이날만 기다리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에서 캐럴이 울리면, 맘이 요만큼씩 들썩인다. 캐럴은 올해가 끝나간다는 명백한 신호다. 한 해 동안의 특별한 사건과 인연, 깊은 슬픔과 기쁨들은 마음 안에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데 이제 송구영신의 자세로 그것들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캐럴은, 성탄절이라는 단어는 바로 그때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과거를 잘 보내고, 상서로웠으면 좋을 내일을 바라는 때라서 12월 25일은 특별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틈 사이에 놓여 있는 시기여서, 과거는 쉽게 정리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불안하기 때문에 하얀 눈을 더욱 바라는지 모른다. 눈이 사람의 기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눈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의 ‘눈이 온 아침’, ‘설조’라는 작품처럼 말이다. 시인은 간밤에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생각들은 나비 떼로 변신했고, 나비 떼는 다시 눈송이들로 바뀌어 꿈결 내내 시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 아침에 눈이 내렸을 수밖에. 보지 않고도 눈이 왔음을 이미 알고 있을 수밖에. 밤사이 나와 노닐던 상념들이 변해 저 밖에 쌓여 있다는 표현이 참 놀랍다. 우리는 어떤 상념,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진 눈을 보고 싶은 것일까. 눈이 아니라,  좋은 날들을  잘 맞이할 수 있다는 신호를 선물처럼 받고 싶다.=======================================================================  술에 취해 만난 사랑… 깨어보니 나 혼자 남았구나 [조선일보] 정신없이 술에 취한 밤 다음에는, 여지없이 공허와 환멸의 아침이 찾아올 것이다. 속이 쓰리거나 머리가 아픈 것보다 참기 힘든 것은, 그 전날 밤 의 술 취한 자신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분노이다. 술은 풍요와 도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내면의 억압된 것들이 고개를 내밀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술 취한 다음 날 아침의 쓰라린 회한은 안으로부터 참았던 것들을 쏟아낸 이후의 주체할 수 없는 허무감과 닿아있다. 술 취한 나는 ‘그이를 만나러 이제야 찾아온 길’이었다. 그이를 만나러 오는 것은 오래 참았던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술에 취하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술 취한 나의 얼굴은 결코 사랑스럽지 않았을 것이며, 잠에서 깨어난 아침 그이는 여기 없다. 술을 통해 전달되는 진실이란 언제나 불안한 것이다. 술 취했던 나에 대한 환멸은 그이의 부재와 겹쳐지면서 치명적인 이별의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벗어놓은 흰 양말과도 같은 나의 사소한 진실을 그이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라고 독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빨랫줄에 말없이 흔들리는 그의 옷은 이 모든 나의 회한과 절망에 대해 ‘살랑살랑’ 말을 받아준다. 그 빨래의 인사는 사랑의 참혹한 끝이 아니라, 이 아픈 회한조차 사랑의 일부라고 가만히 말해주는 것일까? (
1750    너무나 많은 라침판이여,-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라... 댓글:  조회:3685  추천:0  2016-11-03
[ 2016년 11월 03일 09시 48분 ]     \ 2016년 올해의 사진... [ 2016년 11월 03일 09시 48분 ]     ㅡ ‘2016년 올해의 사진’ [ 2016년 11월 03일 09시 48분 ]     ... ‘2016년 올해의 사진’ [ 2016년 11월 03일 09시 48분 ]     @@ ‘2016년 올해의 사진’ [ 2016년 11월 03일 09시 48분 ]     ===‘2016년 올해의 사진’ [ 2016년 11월 03일 09시 48분 ]     ]]] ‘2016년 올해의 사진’ 다채로운 레파토리 - 유종호   김수영처럼 노래하는 소재가 광범위한 시인도 드물 것이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소재를 붙잡아다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노래한다. 시집『달나라의 장난』 속에 수록되어 있는 40편을 보더라도 그 레파토리는 굉장히 다채롭다. 「달밤」「눈」과 같은 소박한 심경토로가 있는가 하면 「자」「봄밤」「예지」「광야」와 같은 우아한 반속적 에피그람이 세계가 있다. 「달나라의 장난」「생활」과 같은 자조적인 생활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헬리콥터」「백의」등 寓意의 세계가 있다. 「자장가」「체소밭 가에서」와 같은 동심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엉뚱하게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국립도서관」「아버지의 사진」과 같은 세계가 있다. 이렇게 분류를 하다 보면 한량이 없다.  그 다채로운 레파토리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굳이 한정해 본다면 도시인의 생활의 페이소스다. 그는 결코 슬픈 표정을 내세우려 하지는 않지만 또 감상-----여기서의 감상이란 부여된 상황에 대한 과도한 감정적 반응이란 의미로 쓴다-----은 본래 타기하는 터이지만 시편 곳곳에는 의외로 허탈한 페이소스가 빈번히 흐르고 있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달나라의 장난」 그러나 고  구태여 달과하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에  샘솟아나오려는 이 설움은 무엇인가  모독당한 과거일까  약탈된 소유권일까  그대들 어린 학도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연령의 넘지못할 차이일까...... -----「국립도서관」 이러한 생활인의 페이소스 곁에 공존하고 있는 것은 퓨리턴한-----어떤 경우엔 동심적이기까지 하다-----反俗정신이다. 이 반속정신은 우아한 에피그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화의 전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조적 분노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예리한 사회비판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작품 소재이 레파토리가 다채로운 것처럼 그의 언어구사도 다채롭다. 대체로 시인이 시어는 그의 작품세계에 따라서 한정되고 이에 따라 '입버릇'이 생기기 마련인데 수영에게는 그러한 자체 한정이 없다. 저널리즘이 언어가 흔히 광범위하게 동원되지만 그의 반속정신은 이러한 언어에서 속기(俗氣)를 말끔히 씻어낸다.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 사이에서 -----「동맥」 너무나 많은 나침반이여  밤이 산등성이를 넘어내리는 새벽이면  모기의 피처럼  시인이 쏟고 죽을 오욕의 역사 -----「광야」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봄밤」 이러한 기발한 이미지가 직유 그리고 화술의 묘기 바로 옆에는 다음 구절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회화체의 구절이 묘기를 발산하고 있다. 언어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리배」 그는 '자연이 하라는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대로 느끼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섹스의 待望(대망)을 노래한 「사치」속에 적어 놓지만 일견 무방법의 방법 같은 그의 시학이 비밀은 이 구절 속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영의 시에 완벽에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가 이렇게 '자연'에 붓을 의탁하는 데서 오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이 일종의 루우즈한 시풍은 '하.......그림자가 없다'의 마지막 스탠자가 나타내고 있듯이 독특한 묘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는 수영의 시는 가끔 가다가 매력적인 멜로디가 있는 얼마간 지루한 음악과 같다. 그러나 설령 여타의 부분이 아무리 지루한 것이라 할지라도 간간히 삽입되어 있는 매력적인 멜로디는 그것을 상살(相殺)하고도 남음이 있다. ========================================================================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1901∼1989)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응답하라 1988’이 한창 인기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서울 쌍문동이다. 그런데 원래 쌍문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함석헌이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은 함석헌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곳이고, 2015년에는 그 자리에 함석헌 기념관이 개관하기도 했다.      ‘함석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씨알사상과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떠올린다. 특히 이 작품은 어렵지 않고 감동적이어서 대중적으로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읽으면 첫째, 함석헌 선생의 사상과 생애가 떠오르면서 이내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둘째, 나에게는 ‘그 사람’이 있는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끝으로, 나는 과연 다른 누군가에게 ‘그 사람’인지 생각하면서 참회의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새해는 언제나 극단적이다. 그것은 희망이나 포기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지레짐작 희망이나 포기를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보다 힘써 선택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되는 일, ‘그 사람’을 가지고 지키는 일에 있다. 다시 2017년 벽두가 되어 이 시를 읽을 때에는, 지금보다 덜 부끄럽기를 바라본다.     
1749    詩는 "만드는것"이 아니라 생체를 통한 "발견"이다...... 댓글:  조회:4127  추천:0  2016-11-02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최근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편 썼다. 썼다라기보다는 라고 해야 더 가까운 표현이 될 것이다. 그만큼 이 시에는 시 자체로서의 자율성이 앞서고 있다. 로 정의되는 낭만주의 시의 본질론과는 다른 생명의 작동 같은 것이 거기 있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시에도 라는 것이 있음을 나는 근간 적극 동의해오고 있다. 제 스스로 언어의 몸짓을 하는 시와 더불어 나는 이즈음의 내 삶을 이끌고 있다. 내 의지로서의 이른바 언어적 조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건 언제나 후행의 작업으로 왔다. 그런만큼 퇴고의 시간이 전에 없이 줄어들었다.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 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문 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 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 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다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봄비⌋ 전문, 『시인세계』, 2003. 봄. 우이산록에 삼십여 년 가깝게 살고 있는 나는 어지간히 산의 냄새를 맡을 줄 알게도 되었지만, 자연을 느끼는 내 수준은 봄철이면 환경운동가들이 라고 작은 팻말들을 나뭇가지에 내어 걸은 것을 보고는 그저 발자국 소리를 스스로 죽이는 경외감을 가지는 그 정도였다. 그런데 요즈음엔 조금 다른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누구의 말대로 이순의 나이가 되었으니 가는귀가 먹어 이젠 들리는 소리보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더 잘 듣게 된 것일까. 어쨌건 그 발견에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나를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삼십여년 세월로서는 사뭇 늦깎이이다. 이 시를 쓴 지난 3월 하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을 오르다가 푸른 기가 감도는 나뭇가지들에 눈이 갔다. 그런데 나뭇가지들 끝에 물방울들이 조롱조롱 맺혀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밤 내린 이슬들의 결로結露현상이 아닌가 했더니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다. 시간으로 보거나 물방울의 크기로 보거나 그렇게 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 뽑아 올린 것이었다. 용쓰듯. 의아해하고 있는 내게 지나가던 노인이 봄이 와서 한참 가물다가 봄비가 내릴 징후가 보이면 나무들이 그런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온몸에 찌르르르 전율이 왔다. 식물학적으로 확인을 해 보지는 않았으나 수긍이 감동과 함께 온몸으로 왔다. 생체를 지닌 것들의 관능적인 반응이 모두 저러하지 않은가. 로 나타나지 않던가. 절대적인 사랑은 스스로 제 몸을 적시는 실체의 것이 아니던가. 절대적 교감의 실물반응, 오!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감히 라는 말에까지 의식의 더듬이가 가서 닿았다. 나무들도 예외가 아니라니! 눈을 돌려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라 쓰인 그 작은 팻말들이 나무들에 새로 걸려 있었다. 새들도 나무들과 봄비의 그 을 생명으로 실체화하는 절대의 시간과 공간 속에 스스로를 고요히 가두고 있었다. 어디선가 그랬던 것처럼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나는 또 한 번 외쳤다. 자연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우주적 화응이 있다. 나무들과 새들에게도 무슨 영성이 있는 것일까. 저러한 모습으로 보아 그들에겐 몸이 영성이자 영성이 몸이다. 우리 사람들처럼 따로따로에 늘 빠져 시달리지 않는 그들에게서 나는 초월의 궁극, 그 실체를 보았던 셈이다. 뛰도록 기뻤다.(호들갑 떨지 말자. 내 안을 흐르는 그간의 번뇌와 갈등, 마음공부의 기류가 막히지 않도록 몸을 잘 간수하자. 내 이 좀더 나가야 하리라.) 얼마 전에도 나는 라는 고전시화의 한 대목을 인용한 바가 있다. 이 말은 기존의 이론이나 시를 하나의 규범으로 삼아 거기 갇혀 버린 교주고슬膠柱鼓瑟의 답답함을 비판하고 경계한 것이겠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시의 성령으로서의 을 적극 내세운 말이다. 그러나 저간의 우리 시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이 같은 본체는 뒷전에 밀어 두고 소위 지적인 방법을 앞세우거나 윤리적 주장을 위한 도구로서 시를 전락시켜 왔음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또한 화자의 우월적 포즈에 의한 관념의 화법으로 무엇보다 오염되지 않은 시의 생체를 매장시키고 있는 시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물론 저러함들도 일면 시가 담아야 할 삷의 또 다른 모습들이며 시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저 한낱 도구로서 시를 수용할 때 시는 정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무들이 제 몸의 물기를 용쓰듯 뽑아 올려 봄비를 마중하듯, 봄비가 젖은 제 몸을 다시 한 번 적시듯 화응하는 시의 우주적인 울림, 그게 시의 본체요 자유가 아닌가. 저러함은 가 아니라 생체를 통한 만남으로 획득되는 이다.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시의 생태에 온몸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오늘도 산으로 간다. 이자 을 읽으러 나는 거기 간다. 그러나 놀러 가야 한다. 가서 함께 이 그것들을 잘 읽어 내는, 한 몸이 되는 지름길이다. 어제는 내가 오래 전부터 정해 놓고 놀러 가는 소나무 숲에서 장자가 말한 이른바 송뢰松籟소리를 듣다가 바람이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들이 열어 놓은 으로 바람이 지나가느라고 소리가 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피리가 왜 소리를 내는가. 을 비로소 요해了解하였다. 아하, 우주는 큰 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참 소나무를 바라보며 무심코 고장난 내 무릎 관절을 쓰다듬다가 소나무는 무릎 관절이 없다는 것도 비로소 알았다. 무릎 관절이 없어 줄창 한평생 제자리에만 서 있는 소나무는 고장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했다. 무릎 관절이 있다고 잘난 체하며 세상을 마음대로 쏘다니고 그래 보았댔자 말이 굴신자재屈伸自在 예저기 피하고 피해다닌 꼴이 아닌가. 그게 내가 아닌가. 부끄러웠다. 쏘다닌 만큼 때는 때대로 묻히고, 제자리를 제대로 지켰다 할 수도 없고 퇴화해 버린 나의 남루. 결국은 나무보다 수명도 짧은 내 허무를 아프게 읽었다. < 만들 것인가, 발견할 것인가.> 나는 오늘도 숲으로 간다   =========================================================     함박눈 ― 이병률(1967∼)   행색이 초라한 어르신 게다가 큰 짐까지 든 그 곁을 따라 걷다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어요 한 끼만 묵어도 되는데 오늘은 두 끼나 묵었으예 날은 추워 마음은 미칠 것 같아 담배나 몇 갑 사 드릴까 하고 담배는 피우시냐고 물어요 오늘은 두 끼나 묵어서 안 태워도 되이예     이제부터 낮달과 제비꽃이 배고파 보여도 하나도 그 까닭을 모를라구요 한 젊은이가 있다. 시인 본인은 젊은이라 불리기에는 쑥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아직 늙지 않은 한 사람이 지나가는 노인을 보게 되었다. 무심히 지나가도 그만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인은 행색이 남루했고, 나이에 비해 짐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젊은이는 노인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었다. 밥을 한 끼 사 드릴까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마음 아프다. 한 끼만 먹어도 되는데 이미 두 끼나 자셨단다. 그럼 담배나 사 드릴까 했는데 이미 밥을 먹어서 담배는 안 태워도 되신단다. 대답을 들어보면, 노인은 하루에 한 끼를 먹거나 아예 먹지 못하는 생활을 일상으로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고플 때에는 담배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낮달이며 제비꽃이 무슨 소용일까.     대화를 통해 노인의 상황을 짐작하게 된 젊은이는 ‘미칠 것 같다’고 썼다. 허공에 주먹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을 터. 하지만 젊은이는 뒤돌아서야 했다. 노인과 헤어져 오는 길에는 아마 함박눈이 내렸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 더 배고프라고, 남의 속도 모르는 함박눈은 더욱 풍성하게 내렸을 것이다.  이 시에서 젊은이는 노인을 동정하고 있지 않다. 그 대신 그는 공감하고 있다. 그 노인은 같다. 그는 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내 아버지와 같은 노인이다. 그는 내 미래와 같다. 많은 ‘같음’을 느끼는 공감의 능력은 타인과 세상과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모쪼록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능력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1748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와 시인들 댓글:  조회:4234  추천:0  2016-11-01
▲영화 에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렸다. 형무소에서 죽음을 앞둔 동주(강하늘 분)는 비록 처참했지만, 영화 전반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서정이 흐른다. 동주가 좋아하는 여학생과 별이 총총한 밤길을 걸을 때, 그녀가 물었다. "동주는 어떤 시인을 좋아하니?" 동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별 헤는 밤'을 읊조리는 동주의 나즈막한 음성이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또 정지용과 백석의 시도 좋아했다. 송몽규(박정민 분)가 어렵게 구한 정지용과 백석의 시집을 던져주자 동주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그것들을 필사했다. 여기, 동주가 그토록 사랑했던 시인들의 시 몇편을 소개한다. 우리가 동주의 시를 읽으며 동주의 진실한 마음에 닿았듯이, 동주가 사랑했던 시를 읽으며 동주의 더 깊은 마음에 닿을 수 있길 바라본다. ▲백석(백기행)은 1912년 태어난 한국의 시인이다. 방언을 활용한 민속적 시를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해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주는 세상의 괴로운 것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언제나 괴로워했던 한 시인을 사랑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느라 괴로웠던 백석을, 동주는 사랑했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백석, 중 동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별과 정오의 마을과 수탉 우는 소리를 음미했던 한 시인을 사랑했다. 모든 살아가는 것들을 사랑하느라 언제나 아름다웠던 프랑시스 잠을, 동주는 사랑했다. ▲프랑시스 잠(1868-1938)은 프랑스의 시인으로, 상징파의 후기에 신고전파 시인으로서 독자적인 시들을 남겼다.ⓒ 위키 오 주여, 내가 당신께로 가야 할 때에는 축제에 싸인 것 같은 들판에 먼지가 이는 날로 해주소서. 내가 이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낮에도 별들이 빛날 천국으로 가는 길을  내 마음에 드는 대로 나 자신 선택하고 싶나이다. (중략) 날 따라들 오게나. 갑작스레 귀를 움직여 파리와, 등에와, 벌들을 쫓는 내 아끼는 가여운 짐승들이여…….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이 짐승들 사이에서, 주여,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나도록 해주소서. 이들은 머리를 부드럽게 숙이고 더없이 부드러워 가엾기까지 한 태도로 그 조그만 발들을 맞붙이며 멈춰섭니다. - 프랑시스 잠, 중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독일의 시인이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만년에는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색채가 짙은 시를 썼다.ⓒ 위키 동주는 세상의 쓸쓸한 것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고독한 장미를 귀히 여겼던 한 시인을 사랑했다. 모든 가을처럼 스러지는 것들을 사랑하느라 쓸쓸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동주는 사랑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햇볕을 비추시어 그것들을 완성으로 몰아가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게 해주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 ▲영화 에서 우리는 동주를 사랑했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이 청년을 위해, 이제라도 함께 괴로워한다. 모든 가을 속의 별들을 사랑했던 동주를, 우리는 사랑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1747    죽은지 10여년 지나서야 시적 가치를 찾은 "악의 꽃" 댓글:  조회:4186  추천:0  2016-11-01
19세기 프랑스의 시인. 조숙한 천재로 15세부터 20세 사이에 작품을 썼다. 이장바르의 영향을 받았다. 작품은 《보는 사람의 편지》,《명정선》,《일뤼미나시옹》,《지옥의 계절》등이다. 베를렌과 연인 사이였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벨기에 국경 근처 아르덴 데파르트망(Department) 샤를빌 주요저서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1872) 주요작품 《보는 사람의 편지》(1871) 《명정선(酩酊船)》 《지옥의 계절》 벨기에 국경 근처 아르덴 데파르트망(Department) 샤를빌 출생. 아버지가 일찍 집을 버리고 나갔으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극히 조숙한 천재로서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초기의 습작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15세부터 20세 사이에 쓴 것들이다. 1870년 16세 때 샤를빌중학교에 새로 부임해온 젊은 교사 이장바르에게 문학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어머니와 평범한 시골생활에 대한 반항심에서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1870∼1871년 사이에 파리와 벨기에로 3번이나 가출하였다가 돌아왔다. 1871년 5월 그는 시인으로서 특이한 방법론적 각성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것을 이장바르와 친구에게 써 보냈는데, 그것이 《보는 사람의 편지 Lettres du voyant》(1871)이다. 그 해 여름에는 12음절 100행으로 된 장시(長詩) 《명정선(酩酊船) Le Bateau ivre》을 썼으며, 1872∼1875년에는 그의 시경(詩境)의 도달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1872)을 발표하였다. 1871년 P.베를렌의 초청을 받고 파리에 갔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동성애로 발전하여 베를렌은 신혼의 아내마저 버리고 랭보와 동거생활을 하였으나, 경제 상태가 악화되자 자주 다투게 되었다. 결국 1873년 브뤼셀에서 술에 만취된 베를렌으로부터 권총에 맞았으나 무사하였다. 랭보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산문시 《지옥의 계절》을 썼다. 그러나 1875년경부터는 차차 문학에 흥미를 잃어 네덜란드·자바·북유럽·독일·이탈리아·키프로스 등 여러 곳을 유랑하였다. 1880년에는 아라비아의 아덴으로 갔으며, 그 후에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교역(交易)에 종사하였다. 1891년 오른쪽 무릎의 관절염으로 프랑스에 돌아와 마르세유에서 37세로 사망하였다.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연보 출생 1854.10.20~ 사망 1891.11.10 1854 10월 20일 아르덴 데파르트망 샤를빌 출생. 1871 《보는 사람의 편지 Lettres du voyant》 집필. 12음절 100행으로 된 장시 《명정선 Le Bateau ivre》 집필. 1873 파리에서 동거중이던 P.베를렌이 쏜 권총에 맞고 그와 결별 후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감. 파리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산문 시집 《지옥의 계절 Une Saison en Enfer》 발표. 1874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 발표. 1875 네덜란드·자바·북유럽·독일·이탈리아·키프로스 등 여러 곳을 유랑. 1880 아라비아의 아덴으로 가 이후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교역에 종사. 1891 11월 10일 프랑스 마르세유 병원에서 다리 상처의 후유증으로 사망.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소개하였고, 랭보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낭만파·고답파에서 벗어나,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 관능과 음악성 넘치는 시에 결부하였다. 대표작은《악의 꽃》이다.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62세의 원로원(元老院) 사무국 고관이었고, 어머니는 후처로 28세였는데, 이러한 부모의 연령 불균형이 이상신경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6세 때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에 어머니는 육군 소령 자크 오피크와 재혼하였다. 의붓아버지가 대령으로 승진하여 리옹에 부임하자, 11세 된 그는 리옹의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리옹 왕립중학교의 기숙생이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루이르그랑중학교로 전학한 뒤 최고학년이 된 18세 때 품행 문제로 퇴학처분을 당하였으나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에는 단번에 합격하였다. 그뒤 문학지망을 표명하여 양친을 실망시키고, 카르테 라탱을 방랑하며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보다 못해 내려진 친족회의의 결의로 인도 콜카타행 기선을 탔으나, 인도양의 모리스섬(모리셔스 本島)과 부르봉섬(프랑스령 레위니옹섬)에서만 머물다가 9개월 뒤에 파리로 되돌아갔다.     성년이 되어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상속한 뒤에는 센강의 생루이섬에 거처를 두고 댄디즘의 이상을 추구하며 호화로운 탐미적 생활에 빠졌다. 흑백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 뒤발를 알게 된 뒤 관능적 시흥(詩興)의 원천으로 삼았고, 이후 20여 년간 애증의 악연(惡緣)이 시작되었다. 2년 동안에 유산을 거의 다 낭비해 버리자 법정후견인이 딸린 준금치산자(準禁治産者)가 되었다.     24세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하여 미술평론가로서 데뷔하였으며, 문예비평·시·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1848년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2월혁명의 폭동에도 가담하였다. 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소개하였고, 이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17년간 5권의 뛰어난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배우 마리 도브륀과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또 사바티에 부인의 살롱 단골이 되어 그녀를 성모처럼 받들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1857년, 청년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시를 정리하여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출판하였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수록된 시 6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해 의붓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센강 어귀의 옹푸루르 별장으로 옮겨 살았다. 1860년에 《인공낙원(人工樂園)》을 출판하고, 1861년에 《악의 꽃》의 재판을 간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1864년 벨기에의 브뤼셀에 가서 궁색한 생활을 면하기 위하여 강연여행을 하였으나 이미 건강이 악화된 뒤였다.     1866년 나뮈르시(市)의 생루 교회를 구경하던 중 졸도하여 뇌연화증(腦軟化症)의 징후로 브뤼셀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돌아와서 입원하였다. 그러나 성병으로 피폐해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여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오피크가(家)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사후 1868~1869년에 간행된 전집 속에는 고티에가 서문을 쓴 《악의 꽃》(제3판) 《소산문시 Petits poèmes en prose》, 만년의 작품인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 수록되었으며, 들라크루아·바그너·고티에 등에 관한 평론은 《심미섭렵(審美涉獵) Curiosités esthétiques》(1869), 《낭만파 예술 L'art romantique》(1868)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었다. 이밖에 만년의 수기인 《화전(火箭)》《벌거벗은 마음》은 《내심(內心)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 세대인 베를렌·랭보·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의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다. 발레리는 “그보다 위대하고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라고 절찬하였다. 에드거 앨런 포의 지적 세계에 감동하여 낭만파·고답파의 구폐(舊弊)에서 벗어났으며 명석한 분석력과 논리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인 관능과 음악성이 넘치는 시에 결부한 점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 두산백과사전 발췌   1821.4.9 프랑스 파리에서 시인 보들레르 태어나다. "내 인생은 처음부터 저주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운명은 평생 계속되었지요." 시인은 이렇게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파리의 우울, 악의 꽃, 금치산, 댄디즘. 시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19세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한 이 천재 시인은 자신의 태생을 '저주'라는 무서운 단어와 결부시켰다. 보들레르는 1821년 4월9일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어머니 카롤린느 드파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환갑의 나이에 젊은 여인과 결혼한 그의 아버지는 환속한 사제 출신으로 당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단히 지적이고 특이한 인물이었다.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고,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보들레르가 훗날 미술에 관한 비평과 스케치를 한 연유를 그의 핏줄에서 찾아볼 만하다 19세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한 천재 시인의 아버지는 보들레르가 6살 때 별세했으니, 어린 보들레르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인상만 남아 있었다. 사제 출신의 남편과 34살이나 차이 나는 젊은 엄마는 건장하고 전도가 유망한 오픽 장군과 재혼을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친부가 어린이 보들레르에게 물려준 재산을 관리하는 가족회의가 구성되었고, 군인 출신의 계부 아래서 예술가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고독했다. 보들레르의 이미지인 고통과 우울, 비참한 삶, 모멸감과 같은 정서는 유년기의 외로움에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탄생을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환속한 사제의 아들이니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보들레르, "[악의 꽃]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았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인 [악의 꽃]을 남김으로써 시인 보들레르가 되었다. 시인이 시집을 낸다는 건, 자신의 생명과 시간을 조탁한 언어의 집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 시집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은 사전'이라고 자평했다. 그의 생명과 시간의 집인 시집에 거주하는 고통들을 통하여 우리는 그 '상징'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인은 이란 '영혼이 초자연적인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아무리 평범한 풍경이나 사물일지라도 그 속에 생명의 깊이가 그대로 드러날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상징이 된다'라고 쓴다. 시인과 보통 사람들은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같은 풍경이나 사물을 본다. 세상은 시인에게만 특별한 풍경이나 사물을 선물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과 교감하고 소통하여 '영혼의 초자연적인 어떤 상태'로 자신을 끌어올린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펴는 모습이고, 항구를 출발한 범선이 돛을 올리는 이미지이다. 보들레르는 19세기를 살면서 이미 근대의 폭풍우를 지나 '현대'라는 항구에 닻을 내린 시인이다. 그가 교감하고자 하는 세상은 현실적으로 매우 지난한 세상이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저와 함께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저는 아직도 그 강둑을 기억하는데, 저녁 풍경이 어찌나 슬퍼 보였던지. 아!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었던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어머니에게는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순간을 제가 행복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는 어린 저에게 우상이며 동시에 친구였으니까요." 보들레르가 40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이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행복한 순간은 보들레르가 6살 되던 해, 즉 보들레르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하기 전까지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다. 만 스물한 살 되자 떼를 써서 아버지 유산을 받은 뒤부터 방탕한 생활   계부인 오픽 소령은 결혼 후에, 장군으로 승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주재 전권공사를 거쳐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상원의원으로 진출하는 잘 나가는 인생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부와는 달리 보들레르는 파리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노르망디파'라고 불린 문학 동아리에 참여했고,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거리의 창녀를 알게 되고 매독에 걸려 평생의 지병이 된다. 보들레르는 1842년 4월 9일 만 21세로 법적인 성인이 되자 선친의 유산을 달라고 떼를 써 가족들로부터 금화 십만 프랑을 받았다. 그 돈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진 빚을 다 갚고 펑펑 돈을 써대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그의 평생 연인이자 고통의 동굴인 잔느 뒤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역시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단역배우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모계 3대가 창녀 집안인 '아름다운' 창녀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14년간이나 지속되다가 끊어지게 된다. 하지만 보들레르가 '검은 비너스'라고 노래한 그녀와의 인연은 그의 문학과 인생에 생명 줄과 같은 것이었다. 관계를 끝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중풍에 걸리자, 경제적으로 다시 돌보아주는 연민의 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육감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은 늙고 병들어 거기에다 중풍에 걸려 목발을 짚고 어두운 파리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사라져 버렸다.) 유산을 받고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들레르에게는 천형과 같은 '금치산 선고'를 의뢰하고 법원은 그를 법적으로 미성년자로 취급하여 금치산자 선고를 내렸다. 그는 4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는 미성년자였다. 그의 인생은 항상 빚을 지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고, 빚쟁이에게 쫓겼다. 지병인 매독이 불청객이 되어 간헐적으로 온몸에 찾아들고 보들레르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시인으로 단련되었고, 숙성되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었다.  "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는 드 메스트로와 에드거 앨런 포" 시인 보들레르의 첫 번째 저작은 이다. 미술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을 연구 평가한 글이다. 보들레르는 연이어 도 출판한다. 미술비평가로서도 보들레르는 꾸준히 활동했다. 그는 화가 들라크루아를 높게 평가했고, 독일의 바그너 공연을 보고 열광하여 음악 평론도 쓴다. 그는 시와 음악 미술을 모두 받아들인 지성이었다. 그리고 1847년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보들레르와 에드거 앨런 포는 국적만 달랐지 여러 가지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시인들이었다. 작품을 통하여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았고, 보들레르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배우고 익히고, 교감했다. 그는 포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이는 드 메스트르와 에드거 앨런 포이다'라고 고백했다. 역시 저주받은 천재 포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경제적인 환경과 광기 어린 생활을 하던 보들레르의 영혼은 당시 부르주아들의 안락한 생활을 속물적인 것으로 보았다. 보들레르는 세속적인 부르주아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부정하면서 귀족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세상에 맞서 '댄디즘'으로 무장했다. 지금도 문학청년들은 한 때 댄디즘의 세례를 받는다. 댄디즘은 가난한 시인이 입기 좋은 외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외투 안에서는 배고픈 위장이 있다. 19세기에 이미 현대적인 시를 쓴 시인이 물질주의와 민중, 민주주의에 대해 갖는 거부감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중 도덕 훼손죄'로 기소된 시집 [악의 꽃] 1857년 소설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외설죄로 재판을 받고 무죄가 선고 되었다. 이즈음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의 원고를 풀레-말리사스 출판사에 넘겼다. 그리고 그 해 4월 계부인 오픽 장군이 사망하고 홀로 된 어머니는 옹플뢰르의 별장으로 이사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6월 25일 출간된다. 초판 [악의 꽃]에는 모두 100편의 시가 실렸다. [악의 꽃]이 '풍기문란하다'라는 서평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내무부 공안국이 이 책을 고발했고, 보들레르와 출판사는 '공중도덕 훼손죄'로 기소되었다. 플로베르에 이은 필화사건이었다. 저자와 출판사는 벌금형을 받았고 시 6편은 삭제 명령을 받았다. ([악의 꽃]에 대해 법적인 구속이 없어진 것은 한 세기가 지난 1949년이었다. 프랑스 대법원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한 유죄선고를 파기하고, 그와 작품에 법적인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날은 8월 31일 그의 제삿날이었다. 이 시집으로 그는 현대시의 시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시인은 파리를 떠나 어머니 곁에 머물 생각도 하고, 단상집인 [벌거벗은 내 마음]의 원고를 쓴다. 이 작업은 보들레르 말년의 내면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산문들이다. 절망적인 상태의 금치산자, 연인 잔느 뒤발과의 결별, 고독, 우울, 매독, 집필 구상 중인 원고에 대한 절망감 등 보들레르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가시나무와 같은 단상들이다. 이 단상과 더불어 산문시집인 [파리의 우울]은 그가 인생의 마지막 나날들에 기록한 산문 시편들이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단편소설인 [라 팡파를로]는 그의 유일한 소설이고, 문학청년 시절 소설에 대한 보들레르의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12,000부를 발행한다.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구름의 왕자와 비슷하다' 보들레르는 우울한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인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생활 역시 저주받은 시인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지경이 되어 보들레르는 [불쌍한 벨기에여]라는 산문집을 집필하면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시인은 브뤼셀에서 현기증과 구토를 극심하게 일으키고 결국 반신마비의 상태가 되어 늙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가 사랑하고 미워하였던 우울한 파리에서 이 세상의 여행을 끝냈다. 1867년 8월 31일 오전 11시, 시인의 나이 46세였다.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있다. 거대한 바닷새이다. 우주의 심연과 같은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장자의 대붕과 같은 이 새는 간혹 항해를 하는 선원들의 손에 잡혀 무기력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습을 알바트로스에 투영한다. 자주 선원들은 심심풀이로 붙잡는다. 거대한 바다 새인 알바트로스를 아득한 심연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를 태평스레 뒤따르는 길동무를. 선원들이 갑판 위에 내려놓자마자 창공의 왕자는 서툴고 창피해하며 그 크고 하얀 날개를 배의 노처럼 가련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이 여행객은 얼마나 어색하고 무기력한가! 조금 전까지도 멋있던 그는 얼마나 우습고 추해 보이는지 선원 하나가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절뚝거리며 다른 이는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불구자를 흉내 내는구나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이 구름의 왕자와 비슷하다. 야유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 이 시는 1859년인 그의 인생 하반기에 발표된 시이지만,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인의 가족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청년 보들레르를 인도행의 배에 실어 바다 위에 올려놓았다. 환락의 도시에서 먼 이국으로 유배를 보낸 셈이다. 시인은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잠시 머물렀던 열대 이국의 섬들을 보고 그 정서를 마음에 담았다. 시인은 인도 행을 거부하고 10개월 만에 다시 파리로 되돌아 왔다. 중년의 나이가 된 시인은 그때 보았을 거대한 바다 새를 떠올리면서 '지상에 유배' 당한 자신의 삶을 시로 노래했다. 나다르와 카르자가 촬영한 보들레르의 사진에 담긴 우울한 눈빛 카르자가 찍은 보들레르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마치 회화 작품과도 같은 절묘한 사진 한 장이다. 미술 평론가인 보들레르는 사진을 경멸하곤 했지만(그는 '현대의 대중과 사진'이라는 에세이에서 사진을 '이것은 재능이 없다거나 게을러서 실패한 모든 화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라고 했다.) 당대 사진예술가였던 나다르와 카르자는 보들레르를 보들레르 답게 찍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보들레리앙에게는 일종의 축복이다. 보들레르는 말년에 젊은 말라르메와 베를렌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이 젊은이들은 나를 몹시 무섭게 한다'고 했다. 병들고 피곤한 육체는 이제 후배 시인들의 열광마저도 부담스러웠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보들레르의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어둡고, 외롭고, 무서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보들레르의 우울한 눈빛을 떠올린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보들레르의 [악의 꽃(문학과 지성사)]을 우선 권한다. 보들레리앙 윤영애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이 시집은 보들레르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이다. 낭만주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어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1861년 출간된 제2판을 번역 텍스트로 삼았다. 더불어 역시 윤영애 선생의 번역인 [파리의 우울(민음사)]은 [악의 꽃]과 함께 보들레르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는 산문시집이다. 그가 개척한 이 산문시라는 형식은 베를렌, 랭보, 로트레아몽, 말라르메 등 근대 상징파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시인은 노파, 거리의 소녀, 노름꾼, 넝마주의 등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산문 시편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김붕구 선생의 명저인 [보들레에르(문학과지성사)]를 읽어야만 한다. '알면 보인다'라는 말처럼 이 평전을 통하여 한 시인의 총체적인 모습과 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 김붕구 선생도 지난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문학청년 시절 이 두툼한 책 한 권을 끼고 혜화동 거리를 배회하던 생각이 난다. 그땐 보들레르의 외투를 입고 싶었다. 가난해서 댄디한 척 하고 다녔었다. 마지막으로 [지상의 낯선 자 보들레르(민음사)]도 곁에 둔다면 다 읽지는 않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한국 원재훈 파일 [ 6 ]        
1746    프랑스 상징파 시인, 모험가 - 랭보 댓글:  조회:4197  추천:0  2016-11-01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모험가.  랭보는 프랑스 북동부의 아르덴 지방에서 육군 대위와 그 지방 농부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살 위였고, 여동생은 2명이었다. 1860년 랭보 대위는 아내와 헤어졌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키우게 되었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적 능력을 보인 아르튀르는 8세 때부터 타고난 글재주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샤를빌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특히 라틴어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70년 8월에는 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시로 1등상을 받았다. 그가 처음 발표한 시는 1870년 1월 〈르뷔 푸르 투스 La Revue pour Tous〉에 실렸다.  187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전쟁 때문에 그의 정식 교육은 막을 내렸다. 8월에 그는 파리로 달아났지만, 차표 없이 여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옛날 은사가 벌금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두에로 보냈다. 두에에서 그는 국민군에 들어갔다. 10월에 그는 다시 사라져, 침략군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두에에 도착하여 2주일 동안 자유와 굶주림과 거친 생활 속에서 쓴 시들을 다듬었다. 삶과 자유 속에서 느끼는 천진난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들은 그가 처음으로 쓴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어머니의 고발로 그는 다시 경찰에 잡혔지만, 1871년 2월 그는 손목시계를 팔아 다시 파리로 가서 2주일 동안 거의 굶다시피하며 보냈다.  [반항과 시적 환상]  3월초에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에 쓴 시들을 가짜라고 내팽개치고, 삶에 대한 혐오감과 순진무구한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선과 악의 투쟁의식을 표현한 거칠고 불경스러운 시를 썼다. 그의 행동도 그가 쓴 시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그는 종교와 도덕 및 온갖 종류의 규율에 대한 의식적인 반항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동시에 그는 신비주의 철학과 밀교(密敎) 및 마술과 연금술에 대한 책을 읽었고, 2통의 편지(1871. 5. 13, 15)에 표현된 새로운 미학을 형성했다. 특히 2번째 편지는 〈견자(見者)의 편지 Lettres du voyant〉라고 불리는데, 이 제목은 시인이란 무릇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볼 수 있고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모든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영원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즉 '견자'(voyant)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71년 8월말 랭보는 샤를빌의 한 문우의 충고에 따라 시인인 폴 베를렌에게 그의 새로운 시를 몇 편 보냈다. 그중에는 각 모음에다 다른 색깔을 부여한 소네트 〈모음 Voyelles〉도 들어 있었다. 베를렌은 이 시들의 탁월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랭보에게 여비를 보내어 파리로 초대했다. 갑자기 폭발한 자신감 속에서 랭보는 〈취한 배 Le Bateau ivre〉를 썼다. 이 시는 전통적인 작시법을 따르고 있지만, 깊은 정서적·영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서 언어구사의 기교가 놀랍고 상징과 은유의 선택이 대담하기 짝이 없다. 이 걸작에서 랭보는 그의 예술의 가장 높은 정점들 중 하나에 도달했다.  187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랭보는 3개월 동안 베를렌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을 거의 다 만났지만, 거만하고 버릇없는 태도와 음탕함으로 베를렌만 제외하고 그들 모두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떠나라는 요구를 받자 술을 퍼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를 맺어 추문을 일으켰다. 1872년 3월 그는 베를렌이 아내와 화해할 수 있도록 샤를빌로 돌아갔지만, 5월에 다시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이제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맹세했다.  이 시기에(1871. 9~1872. 7) 랭보는 운문으로 된 마지막 시를 썼는데, 이 작품은 기법의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에서 뚜렷한 진보를 보이고 있다. 이때 그는 베를렌이 걸작이라고 격찬한 〈영혼의 사냥 La Chasse spirituelle〉이라는 작품도 썼지만 이 작품의 원고는 베를렌과 랭보가 영국에 갔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부 비평가들은 초월적인 산문시〈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도 이 창조적인 시기에 쓴 작품으로 보고 있지만, 랭보 자신은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어떤 시에도 날짜를 적지 않았다.  1872년 7월 베를렌은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쳐 소호에서 살았다. 랭보는 이곳에서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1873년 1월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랭보의 동정을 사기 위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연극을 했다. 4월에 랭보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머물고 있는 샤를빌 근처의 로슈에 있는 농장으로 가서 스스로 "이교도의 책, 또는 흑인의 책"이라고 부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이라는 작품이 되었다. 1개월 뒤, 그 근처에 머물고 있던 베를렌은 랭보를 설득하여 함께 런던으로 갔다. 랭보는 베를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거기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고, 이 죄의식 때문에 베를렌을 가학적일 만큼 잔인하게 다루다가도 금방 그것을 뉘우치고 다정하게 대하곤 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7월초 베를렌은 랭보와 다툰 뒤 그를 버리고 벨기에로 가버렸다. 그러나 아내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랭보를 불러온 다음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래도 랭보가 떠나려고 하자 베를렌은 랭보에게 총을 쏘아 손목에 상처를 입히고, 다시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베를렌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나중에 재판에서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랭보는 곧 로슈로 돌아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정신이 지옥에 떨어지고 예술과 사랑에서 실패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1873년 가을 벨기에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파리에서 호평을 받지 못한 데다 인쇄업자에게 돈을 줄 수도 없게 되자, 그는 인쇄된 책을 모두 포기하고 원고와 서류들을 샤를빌에서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책을 여러 권 묶은 꾸러미가 1901년에 벨기에의 장서가인 레옹 로소에게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 사실을 1915년에야 공표했다.  1874년 2월 랭보는 난폭하고 자유분방한 시인 제르맹 누보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잡역을 하여 번 쥐꼬리만한 돈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랭보는 이때에도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보는 6월에 파리로 돌아갔고, 랭보는 병에 걸렸거나 가난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7월말에 그는 버크셔 주 레딩에 있는 합승마차 매표소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집으로 간 뒤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랭보는 1875년초에 베를렌을 마지막으로 만났고, 이 만남도 역시 격렬한 말다툼으로 끝났다. 랭보가 베를렌에게 〈일뤼미나시옹〉 원고를 준 것은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여행가와 무역상]  1875~76년에 랭보는 독일어·아랍어·힌두스타니어·러시아어를 배우고 세상을 구경하러 떠났다. 1879년 6월까지 그는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서인도 제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했고, 독일 서커스단과 함께 스칸디나비아로 갔고, 이집트를 방문했으며, 키프로스 섬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매번 병에 걸리거나 다른 어려움을 만나 고통을 겪었다. 1879년 겨울 내내 장티푸스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랑생활을 그만두고 장래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봄에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 그는 건축업자의 현장감독으로 취직했지만, 곧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아덴에서 커피 무역상에게 고용되어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에 들어갔다. 이 탐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프랑스 지리학회 회보(1884. 2)에 실려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885년 10월 랭보는 저금을 털어 셰와(에티오피아의 일부)의 왕인 메넬리크 2세에게 무기를 팔기 위한 원정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메넬리크 2세는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인 요한네스 4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88년 중엽에야 겨우 기반을 잡는 데 성공했고, 요한네스 4세가 이듬해 3월에 살해당하고 메넬리크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에는 총포 밀수로 얻는 수입이 계속 줄어들었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 그는 가장 가난한 원주민만큼 소박하게 살면서, 언젠가는 은퇴하여 느긋하게 살 수 있는 돈을 모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남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너그러웠고, 그가 원주민 여인과 함께 살던 작은 집은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럽인들의 집합 장소가 되었다. 그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타고난 재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정직성과 성실함으로 추장들의 신뢰까지 얻었으며, 특히 메넬리크의 조카인 하레르 총독은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애정과 지적인 친구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1891년 봄 그는 신부감을 찾기 위해 고국에 가서 휴가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서 살고 있던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에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ètes maudits〉(1884)에서 그에 대해 썼고, 그의 시를 발췌하여 발표했다. 이 시들은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지만 랭보한테서는 소식이 없었다. 랭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에게서 답장도 받지 못한 베를렌은 1886년 상징파의 정기간행물인 〈보그 La Vogue〉에 〈일뤼미나시옹〉이라는 제목의 산문시와 여러 편의 운문시를 '고(故) 아르튀르 랭보'의 작품으로 발표했다. 랭보가 이런 발표에 대해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저주받은 시인들〉이 출판된 뒤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1885년 8월에 그는 학교 동창생인 폴 부르드한테서 편지 1통을 받았는데, 부르드는 전위파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특히 소네트인 〈모음〉)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890년 7월에 한 평론지가 보낸 편지(프랑스로 돌아와 새로운 문학운동을 이끌어보라고 권유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가 그의 서류 틈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가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답장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다.  1891년 2월 오른쪽 무릎에 종양이 생겨, 4월초에 하레르를 떠날 때는 해안까지 1주일 걸리는 길을 줄곧 들것에 실려 가야만 했다. 아덴에서 받은 치료는 실패했고 그는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직후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거의 위안이 되지 못했고, 그는 여동생 이자벨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좌절감과 절망을 쏟아놓았다. 7월에 로슈로 돌아갔을 때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이자벨이었다.  그는 여전히 결혼하여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질 뿐이었다. 1891년 8월 그는 마르세유로 악몽 같은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를 따라간 이자벨은 오빠의 병이 나을 가망이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랭보는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뎌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이자벨은 그를 설득하여 신부에게 고해를 하게 했다. 신부와 나눈 이 대화는 그에게 새로운 평화를 가져다 주고, 소년 시절의 시적인 상상력을 다시 일깨워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견자'가 되어, 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일뤼미나시옹〉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보다 훨씬 더 깊이있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근거는 여동생 이자벨의 말일 뿐이고, 이자벨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히 랭보가 에티오피아에서 쓴 편지를 몇 군데 교정했다는 점에서 이미 믿을 수 없는 증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가]  랭보보다 더 열렬한 연구대상이 되거나 근대 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도 드물다. 그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작품은 산문시 〈일뤼미나시옹〉인데, 이 시의 형식은 그의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선배 시인들과는 달리 산문시에서 일화를 이야기하고 서술하는 내용이나 심지어는 묘사적인 내용까지도 모조리 제거해버렸고, 낱말에서 사전적 의미나 논리적 내용을 박탈함으로써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에타 담'(état d'âme:영혼의 상태)이라는 정신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거의 마술적인 힘을 시에 부여했다. 그는 또한 잠재의식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감각 속에 얼마나 풍부한 시의 재료가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문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 자체에 대한 오늘날의 반감과 혐오감을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   
1745    프랑스 상징파 시인 - 베를렌느 댓글:  조회:4806  추천:0  2016-11-01
                                                  베를렌느 (Verlaine, Paul-Marie) [1844.3.30~1896.1.8]   프랑스 상징파시인.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프랑스 로렌주(州) 메스  주요저서 : 《예지(叡智) Sagesse》(1881)   로렌주(州) 메스 출생. 아버지는 공병 대위였고 어머니는 농업과 양조업을 겸영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외아들이었으므로 양친의 사랑을 독차지, 유년시절을 행복하게 보냈다. 7세 때에 군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를 따라 일가가 파리로 이사하였다. 대학 입학자격 시험에 합격한 그는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에서 공부하였으나 중퇴하고, 20세에 보험회사에서 일하다가 파리시청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21세에 아버지를 잃고, 이듬해 시지(詩誌) 《현대 고답시집(高踏詩集)》 제5분책에 7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이어 외사촌누이 엘리자의 출자로 처녀시집 《토성인의 노래 Les Po暴mes Saturniens》(1866)를 출판하여 시인으로서의 제1보를 크게 내디뎠다. 제2시집 《화려한 향연 Les f泂tes galantes》(1869)에서는 18세기 루이왕조시대의 화려한 로코코 예술의 세계에서 취재하여, 근대의 우수와 권태를 노래하였다.   이 무렵 한 친구의 사촌 여동생인 16세의 마틸드 모테와 약혼이 성립되었는데, 이 청순무구(淸純無垢)한 약혼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천진난만하게 노래한 시편을 정리한 것이 제3시집 《좋은 노래 La Bonne Chanson》(1870)이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국방군에 입대하였다. 1871년에 파리코뮌의 봉기를 지원하였으므로, 그 진압 후에 밀고당할까 두려워 시청을 퇴직하고 말았다. 이 무렵부터 주사(酒邪)가 심해졌으며, 또 북프랑스에서 불러 온 젊은 시인 랭보와 동거를 하여 부부생활에 불화를 초래하였다. 랭보와 함께 벨기에를 방랑하다가 런던으로 건너갔으나, 1873년 7월 브뤼셀에서 술에 취해 랭보와 논쟁을 벌인 끝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의 왼손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2년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복역 중에 친구의 노력으로 제4시집인 《말없는 연가(戀歌) Romances sans Paroles》(1874)가 출판되었고, 아내와 이혼하였다. 출소 후로는 가톨릭교도로서 평온한 전원생활로 보냈으며, 감동적인 비애감을 불어넣은 경건한 제5시집 《예지(叡智) Sagesse》(1881)를 내놓았다. 한때 프랑스의 어느 시골의 사립중학교에서 교사가 되었으나 제자인 한 미소년과 동성애에 빠진 데에다 주사가 되살아나 마침내 면직을 당하고, 그 이후로는 추문과 빈궁의 비참한 만년을 보낸 끝에, 1896년 1월 데카르트가(街)의 어느 낡은 집방에서, 동거생활하고 있던 창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전에 간행한 시집은 위의 5권을 포함, 20권에 이르며 시편은 840편이나 된다. 1894년에 그는 시왕(詩王)으로 선출되고, 세기말을 대표하는 대시인으로 숭앙되었다.   그의 시풍(詩風)은 낭만파나 고답파(高踏派)의 외면적이고 비개성적인 시로부터 탈피하여 무엇보다도 음악을 중시하고, 다채로운 기교를 구사하여 유원(幽遠)한 운율과 깊은 음영(陰影)과 망막(茫漠)한 비애의 정감으로 충만되어 있다. 이 밖에 랭보, 말라르메 등 근대시의 귀재(鬼才)들을 소개한 평론집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憙tes maudits》(1884), 회상기 《나의 감옥 Mes prisons》(1893) 《참회록 Confessions》(1895) 등의 저서도 유명하다.       보들레르가 이원성의 시인으로 정의되면서(순수의 종교적 영감과 타락의 극단을 오갔던 시인)프랑스 현대시의 비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정신과 육체, 이상과 현실, 선과 악, 미와 추 사이의 갈등과 대립 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현대인의 모습을 전혀 새로운 도시적 감수성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또 랭보와 말라르메가 현대시의 전개에서 혁명을 이룬 시인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시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언어의 실험을 그 극단으로까지 몰고 간 까닭에서 이리라.    랭보의 경우, 그가 혁명적인 것은"절대적 반항"이라던가 파리 코뮌에 대한 열정적 지지라는 문학 외적 측면에서라기 보다, 가히 "언어의 연급술"의 결과라 할 언어, 이제까지 씌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를 빚어내었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고,    말라르메의 경우는 "절대"의 경지를 찾아 수도자의 자세로 언어를 갈고 닦아, 시적 언어의 새로운 문법을 발견하고, 마침내는 시를 종교의 차원으로가지 승화시켰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들 시인과 함께 프랑스 현대시의 첫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베를렌느의 모습은 어떻게 정의 될 것인가?  섬세하고 아련하기만 한 '우수'의 시인, 애틋한 사랑의 고백으로 가득한 와 기독교로의 회심에서 우러난 참회의 눈물로 적셔진 시집의 시인.    그러나 가정을, 어린 아내와 갓난 아들을 버리고 소년 시인 악마 랭보와 함께 동거를 하면서 브휘셀로 런던으로 떠나가버린 무책임한 가장이었고, 또 고질적인 주벽으로 아내는 물론 어머니에게까지 주먹을 휘두를 정도의 패륜아였으며, 평생을 동성애자로 또 만년에는 창년의 기둥서방으로 문한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며 온갖 추문을 일으켰던 문제아였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는, 자살을생각하며 산 총으로,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랭보를 쏘아 2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일이다.    어쨌든 그는 포르노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수많은 시편을 썼던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외설 시인이기도 했다. 랭보의 표현에 따르면 소년 시인(랭보 자신)이 지긋지긋해 하던 의지 박약의 "정신나간 처녀"였고, 끝내 "태양의 아들"의 위상을 되찾지 못한 "지옥의 동반자"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 이상자의 생활은 그에게 있어서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시인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혼란스러움, 정의되지 않는 모호함과 애매함으로부터 베를렌느의 진정한 모습은 드러난다.    실상 그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시편들이 너무도 진지하다 못해 진부해 보이는 종교시편들이나,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까닭에 외면바아온 외설 시편들이 아니라, 잦아들듯한 하소연으로채워진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의 시편들이라고 한다면, 베를렌느의 시를 베를렌느만의 시로 만드는 비밀, 보들레르와도 다르고, 랭보나 말라르메와도 다른 그만의 독특한 시학이란, 어쩌면 그같은 혼란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모호함과 애매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를렌느의 작품(詩)      Il pleure dans mon coeur  Il pleure dans mon coeur  Comme il pleut sur la ville;  Quelle est cette langueur  Qui pénètre mon coeur?  Ô bruit doux de la pluie  Par terre et sur les toits!  Pour un coeur qui s'ennuie  Ô le chant de la pluie!  Il pleure sans raison  Dans ce coeur qui s'écoeure.  Quoi! nulle trahison?...  Ce deuil est sans raison.  C'est bien la pire peine  De ne savoir pourquoi  Sans amour et sans haine  Mon coeur a tant de peine!  (Romances sans paroles)             거리에 비 내리듯  거리에 비 내리듯  내 가슴에 눈물이 흐르네.  가슴속에 스며드는  이 우수는 무엇일까?  땅 위에 지붕 위에  오, 부드러운 빗소리!  권태로운 가슴에  오 비의 노래여!  울적한 이 가슴에  까닭없이 눈물이 흐르네.  아니, 배반도 없는데?  이 슬픔은 까닭도 없네.  까닭 모를 고통이  가장 괴로운 것을,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가슴 괴로와라      하늘은 지붕 너머로   하늘은 지붕 너머로 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 나무는 지붕 너머로 가지를 흔들고 있다.   종은 저 하늘에 조용히 울리고 있는데 나무 위에 슬피 우짖는 새 한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했니?     괴로움   자연이여, 너의 그 무엇도 나를 감동시키지 않는다.  자양을 주는 들판도, 시칠리아 목가의 진홍빛  메아리도, 새벽 하늘의 찬연함도,  지는 해의 애달픈 장엄함도.  나는 예술을 비웃는다, 나는 인간도 비웃는다, 노래도  시도 그리스 성전들과 대성당들이  공허한 하늘에 뻗어 놓은 나선형 탑들도,  그리고 나는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다 같은 눈으로 본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모든 사상을 버렸으며 부인한다.  그리고 그 낡은 아이러니,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도 내게 더는 말하는 일 없기를.  삶에 지쳐, 죽음이 두려워, 흡사  밀물과 썰물의 노리개, 길잃은 돛배마냥,  내 영혼은 끔찍한 난파를 향하여 출범을 준비한다       돌아오지 않는 옛날   추억, 추억이여,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가? 가을은 흐릿한 대기를 가로질러 지빠귀새를 날게 하였고, 태양은 하늬바람이 부는 황금빛 수풀 위로 단조로운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우린 단둘이 꿈꾸며 걷고 있었다. 그녀와 난 머리칼과 생각을 바람에 나부끼며. 갑자기 감동의 시선을 내게 돌리면서 시원한 금빛 목소리 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천사의 소리처럼 부드럽고 낭랑하게 퍼졌다. 나의 잔잔한 미소가 그에 화답하였다 그리고 나는 경건하게 그 하얀 손에 입맞추었다.   -아! 처음 핀 꽃들이란, 얼마나 향기로운가! 그리고 연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첫 승낙이 얼마나 마음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속삭임인가!       Mon reve familier  Je fais souvent ce reve etrange et penetrant D'une femme inconnue, et que j'aime, et qui m'aime, Et qui n'est, chaque fois, ni tout afait la meme Ni tout afait une autre, et m'aime et me comprend. Car elle me comprend, et mon coeur, transparent Pour elle seule, helas! cesse d'etre un probleme Pour elle seule, et les moiteurs de mon front bleme, Elle seule les sait rafraichir, en pleurant. Est-elle brune, blonde ou rousse? - Je l'ignore. son nom? Je me souviens qu'il est doux et sonore Comme ceux des aimes que la Vie exila. son regard est pareil au regard des statues, Et pour sa voix, lointaine,  et calme, et grave, elle a L'inflexion des voix cheres qui se sont tues.     자주 꾸는 꿈  나는 자주 이런 이상하고 생생한 꿈을 꾼다. 알지 못하는 여인의 꿈,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여인, 매번, 완전히 같은 여인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여인도 아닌,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이해하는 여인의 꿈. 그녀는 나를 이해한다. 아! 내 마음은  그녀에게만은 속이 다 보여 그녀에게만은 내 마음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녀만은 창백한 내 이마의 땀을  울면서 서늘하게 해 줄줄 안다.  그녀가 갈색머리인가, 금발인가,  아니면 붉은 머리인가?- 모르겠다. 그녀의 이름? 부드럽고 울림있는 이름이라고 기억한다. 삶이 유배시킨 사랑받는 이들의 이름처럼. 그녀의 눈길은 동상의 눈길같고 그녀의 목소리는 멀리서, 고요하게, 엄숙하게 들려 자살한 다정한 목소리들의 억양을 지니고 있다.        오, 저 멀리 절름대며 가는  오, 저 멀리 절름대며 가는 너희 슬픔과 기쁨아  어제 피흘리다가 오늘 불타오르는 너, 마음아  하지만 끝난 것이 사실이다. 우리 감각으로부터  그림자들이 건 사냥먹이들이건, 모두가 도망쳤다는 것이  모든 다리가 빛나던 먼지 이는 길위에 한 줄로 늘어선  기러기들 같은 옛 행복들아, 불행들아  잘가거라! 그리고 웃음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슬픔  오랜 침울 속에 빠져 있는 너 슬픔도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도! - 아늑한 공허, 커다란 포기,  우리 내부에서 무한한 평화를 풍기는 어떤 이  감미로운 신선함으로 찬 천진스러움......  그리고들 보시오! 오만 밑에서 피 흘리던  우리 마음이 사랑속에서 불타오르고  삶을 맞이하러 간다. 값진 죽음을 위해서.          신비로운 저녁의 황혼  황혼이 되면 추억은  붉어지고 그리고 몸을 떨고 있다  뒷걸음질 치며 커지고 있는  불타는 희망의 뜨거운 지평선에서  하나의 신비로운 울타리처럼.  그 곳엔 숱한 꽃들이  ㅡ 달리아,백합,튤립 그리고 미나리아재비ㅡ  울타리 주위에 솟구쳐 피어나고, 그리고 그 독이  ㅡ 달리아,백합,튤립 그리고 미나리아재비ㅡ  내 감각과 영혼과 이성을 익사시키며  거대한 실신 속에  추억을 석양과 뒤섞고 있는  그런 무겁고도 더운 향기가  병적으로 뿜어나는 가운데 휘돌고 있다.      웬지 몰라라   웬지 몰라라, 슬픈 내 마음 미친 듯 불안스레 날개를 퍼덕이며 바다 위로 날으네. 내게 귀한 모든 것, 두려움에 떠는 나래로 내 사랑, 물결에 스칠 듯 품고 있네. 웬지 몰라라, 웬지 몰라라. 슬프게 날으는 갈매기처럼 내 생각, 파도를 따르네, 바람부는 대로 흔들리며, 물결에 비껴 갈 때 비껴 가며, 슬프게 날으는 갈매기처럼. 햇볕에 취하여 자유에 취하여 드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본능에 이끌려. 번쩍이는 파도 위로 여름 미풍에 가볍게 실려 조는 듯 마는 듯 흘러가네. 가끔 구슬피 우짖어 저 멀리 물길 안내인이 놀라고, 그러다 바람에 몸을 맡겨 퍼덕이다가 바다 속에 떨어지네. 그러나 상처입은 날개로 다시 날아 올라 구슬피 우짖네. 웬지 몰라라, 쓰라린 내 마음, 미친 듯 불안스레 날개 퍼덕이며 바다 위로 날으네. 내게 귀한 모든 것, 두려움에 떠는 날개로 내 사랑, 물결에 스칠 듯 품고 있네. 웬지 몰라라, 웬지 몰라라.     달빛  당신의 영혼은 선택된 풍경  류트를 타며, 춤을 추며,  환상적인 변장을 하고 가히 슬픈 듯  가면들과 베르가모 춤꾼들이 줄곧 매혹하며 가네.  승리를 거둔 사랑과 때맞은 삶을  단조로 노래하면서,  그들은 저희 행복을 믿는 것 같지 않은데  그 노래 달빛에 뒤섞이네,  나무들 속에 새들이 꿈꾸게 하는,  대리석상 사이로 날렵히 크다라니 뿜어나는 물,  분수가 황홀에 흐느끼게 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고요한 달빛에.        Green (초록) 열매, 꽃, 잎, 가지들이 여기있소.  그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고동치는  내 마음이 여기있소.  그대......  하얀 두손으로 찢지는 말아주오.  다만 이 순간 그대 아름다운 두눈에  부드럽게 담아주오.  새벽 바람 얼굴에 맞으며 달려오느라  온몸에 얼어붙은 이슬방울 채 가시시 않았으니  그대 발치에 지친 몸 누이고  소중한 휴식의 순간에 잠기도록 허락해주오.  그대의 여린 가슴 위에 둥글리도록 해 주오.  지난 번 입맞춤에 아직도 얼얼한 내 얼굴에  그리고 이 선한 격정이 가라앉게 그대 달래주오.  그대의 휴식 속에 가만히  잠들 수 있도록......       가을노래   가을날 바이올린의 서글픔은 하염없이 타는 마음 울려 주누나   종소리 가슴 막혀 창백한 얼굴   지나간 날  그리며 눈물짓는다 쇠잔한 나의 신세 바람에 불려 이곳 저곳 휘날리는 낙엽이런가        어느 여인에게  네게 이 노래, 부드러운 꿈이 웃고 우는  네 큰 눈의 마음 달래는 우아함으로 해서  순결하고 선량한 영혼으로 해서  내 격렬한 비탄에서 우러나온 이 시를 바친다.  아아! 나를 계속 사로잡는 불길한 악몽은  끊임없이 분노하고 발광하고 질투한다.  이리의 행렬처럼 갈수록 수가 늘면서  피로 물들인 내 운명에 매달리느니.  오! 이 괴로움, 몸서리치는 이 괴로움  에덴에서 추방된 최초의 인간의 첫 신음소리도  내게 비하면 한갓 목가[牧歌]일 뿐이라.  그리고, 네게 수심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사랑아! 서늘한 9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오후의 하늘을 날고 있는  제비와도 같다 할지니.  * 베를렌느는 젊은 시인으로서, 마틸드 모테를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였다.  사랑의 현실은 당연히 결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마틸드 모테에게 바쳐진 사랑의 세레나데였던 것이다.          문학사에서 시인의 위치 - 베를렌느 시세계의 특징    프랑스 문학사에서 베를렌느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떠한가. 프랑스 상징주의는 보들레르를 스승으로 하여, 가장 중요한 세 계승자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시의 감각성과 환상을 표현하던 랭보의 경향은 초현실주의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의 완전성을 추구하던 말라르메는 지적인 시를 대표한다. 끝으로, 바로 베를렌느가 있다. 베를렌느는 처음에는 고답파에 동조하였으나 점차로 상징주의로 옮겨갔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퇴폐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베를렌느 시의 특징은 순수 서정성과 음악성이다. 이 때문에 그는 19세기의 비용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는 이성으로부터 시를 해방시키고 감성을 강조하였다. 영혼을 단련하려는 노력으로, 베를렌느 특유의 음악적인 상징미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였다. 한편, 감옥에서 회개하여 쓴 시들은 그를 카톨릭적 신비 시인으로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감수성, 서정성, 깊은 감동 때문에 베를렌느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며,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사람받는 시인 중 하나로 무리없이 인정되는 것 같다.    
1744    詩란 우연스러운 "령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언어행위이다... 댓글:  조회:4319  추천:0  2016-11-01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       말라르메와 구도의 여정          말라르메(1842 - 1898)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의 재혼, 이어 여동생 마리아의 죽음 등 가정적으로 이미 어려서 불행을 체험한 바 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과 메리 로랑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이후의 삶은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여, 시인 스스로가 에서 '일화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포우를 더  잘 읽기 위해' 런던에 머문 적도 있지만, 평생을 지방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영어 교사로 지냈다. 그 외에는 오직 시작에만 전념하였다. 죽기 2년 전 '시인들의 왕'으로 뽑힌 것, 그리고 파리의 아파트에서 문학모임 를 가졌다는 외에는, 가난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정말 랭보식의 일화나 사회적 야망은 거의 없이 평온한 삶을 살다가, 퐁텐느블로 인근 발뱅의 시골집에서 삶을 조용히 마감한다.    그는 보들레르를 읽고 지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학적 삶의 결정적 계기를 맞는다. 고답파에서 언어 형태의 완벽성을 배웠고 에서는 자신의 내적 갈등과 비극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의 '창천(蒼天)', 즉 이상에 대한 꿈은 보들레르의 이상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도덕적이라기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그의 시학은 본질적이며 관념적인 어떤 실체를 찾기를 향하여 열려있다.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의 시적 경험은 대개 모험이 주는 영감에서 왔다."고 한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시란 우연스런 '영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삶의 우연과는 무관한 언어행위라고 말한다.    비록 '일화는 없었다.' 하더라도, 시인의 삶은 여러 문학적 시도들로 가득 찼다. 말년의 라는 작품은 그의 모든 언어 실험들의 종합편이자 정수들을 모아놓은 걸작으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시언어의 혁명을 촉발시켰다. 사망할 때까지 시인은 절대의 '책(Livre)'을 향하여 매진하였다.    그러나 "1868년과 1898년 사이에 쓴 몇 편의 시는 대단치 않은 것들이며 시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라는 것이 오랜 동안 말라르메를 보는 시각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시언어의 체계를 정립시킨 자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말라르메는 보들레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말라르메의 절대적 상징주의는 본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유래되어 나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말라르메의 절대 언어에 대한 탐구는 그의 문학을 '절대적 상징주의'라고 불리게 하였지만, 그 출발은 자아와 서로 분리된 이원성의 인식에서부터다. 아래에 실은 은 보들레르의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꼽히는 시이다. "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any where out of the world!)"를 외쳤던 보들레르처럼, 그도 또한 도망치라고 외친다. 현실이 아닌 이국의 자연이 보들레르에게뿐 아니라 그에게도 계속 '여행 초대'를 하고 있었다.            오! 육체는 슬픈 것,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        달아나자! 저기로 달아나자! 새들은 알 수 없는 물거품과 하늘 사이        있음에 취해있음을 나는 느낀다!        아무 것도, 눈에 비치는 낯익은 정원도        바닷물에 젖어가는 이 마음을 붙들지 못하리        오 밤들이여! 백색이 지켜주는 빈 종이 위에        쏟아지는 램프의 고적한 빛도        아이에 젖 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겠다!        기선이여 돛을 흔들며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잔인한 희망들에 낙담하고도 '권태'는        손수건 흔드는 최후의 작별을 아직도 믿네! (---)        여기까지 보들레르의 시선과 그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권태'는 보들레르의'우울(spleen)'과 색깔이 다르다. 이미 백지에 대한 고뇌가 언급되고 있으며, 생략한 시 뒷 부분에 나오는 파선(破船)의 이미지는 말년의 에 중요한 장치로 다시 등장한다.    1864년 그는 이상세계에 대한 꿈 속으로 단순히 도피할 수만은 없음을 깨닫는다. 현실을 대체할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논리를 갖는 것이야 하겠다. 그리하여 1864년과 1865년 사이에 그는 를 포함하는, 절대시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미 그때 시인은 '정신의 도구인 언어'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라르메는 보들레르와 구분되는데, 와 다음의 를 비교해보면 두 시인이 얼마나 다르게 각자의 세계를 펼쳐갔는지 알게 된다.            순수하고 경쾌하며 아름다운 오늘은        이루지 못한 비상의 투명한 빙하가        서릿발 아래 서성이는 잊혀진 이 굳은 호수를        취한 날개짓으로 우리에게 찢어줄까!          옛날의 백조는 기억한다        불모의 겨울 권태가 번쩍였을 때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노래하지 못한 까닭에 모습은        찬란하나 벗어나려 하여도 희망 없는 자가 바로 자신임을.          새는 온 목을 빼고 떨쳐버릴 것이다.        공간을 부정하나 공간이 안겨주는 이 하얀 번민을.        그러나 깃털이 묶여있는 땅에 대한 혐오는 떨치지 못한다.          자신의 순수 광휘가 이곳에 부여하는 유령이란 모습,        무용한 유형 중에 자신을 감싸는        모멸어린 차가운 꿈 속에서 굳어져간다. '백조'는.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이며, 프랑스 시에서 가장 많이 암송되는 시로 조사된 바 있다. 앞의 시에서 '백색이 방어'해주던 원고지는 이 시에서는 '하얀 번민'으로 나타난다. 하얀 번민이란 원고지를 마주하였을 때 시인이 느끼는 창조의 고뇌이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번뇌가 아니라. 자아의 위기. 글쓰기의 부정 등으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번뇌다. 시인은 글쓰기의 문제를 시의 주제로 꾸준히 내세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번뇌를 시화(詩化)하겠다는 생각은 잃어버린 창조의 의미를 되찾겠다는 욕구에서 나온다. 이 꿈은 낡거나 늙지 않도록 빙하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 꿈에는 절망적 모멸이 어려있다. 그것은 대중의 모멸이며 동시에 불모인 자신에 대한 모멸이다. 또한 현실 공간에 대한 모멸이며 글쓰기에 대한 모멸이다.    에서는 시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현실, 다시 말해 시인의 현실에서의 무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에서는 '이곳(celieu)'이라는 공간에 과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과 망설임이 지배한다. 공간의 무의미 때문에 번뇌가 이어진다. 공간은 삶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이며 여기에 글쓰기의 공간이 겹쳐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긍정적인 반전을 숨기고 있다. 백조는 죽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고 한다. 백조의 몸은 호수의 물과 마침내 함께 얼어붙어, 하나의 커다란 거울이 빚어지게 된다. 목숨은 이렇게 아름다운 빙하로만 남아야 한다. 완전한 거울이란 개인이 사라져야 생성되는 것이다. 그때 진정한 언어가 탄생한다. 그리하여 최후의 노래는 최고의 노래가 된다.    시는 백조를 뜻하는 대문자의 'cygne'라는 단어로 끝난다. 백조은 '기호'를 뜻하는 불어 'signe'와 같이, 발음이 모두 /싸인/이다. 이는 의도적인 것으로, 시인 자신이 언어의 존재론에 집착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인간의 기호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아래의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로잡힌 날개짓'이다. 그러나 백조의 모습으로 재현된 기호는 상징이자 노래이다. 시인 자신이자 인간의 언어다.            오, 꿈꾸는 여인이여, 다할 길 없는 순수한        환희 속에 내가 빠져들 수 있도록,        나의 날개를 정묘한 거짓으로        그대 손 안에 간직하고 있어주오.          황혼의 서늘함이        부채질할 때마다 그대에게 밀려오고        그 사로잡힌 날개짓은        지평선을 살짝 밀어낸다.          현기증! 이제 공간은        큰 입맞춤처럼 전율한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면서 태어나려 몸부림치나.        공간은 분출하지도 진정되지도 않는다.          당신은 느끼는가 야생의 낙원이        또한 묻혀버린 웃음이        당신 입가에서 나와 전면적인        주름 밑바닥으로 스며들어버리는 것을!                           (말라르메양의 다른 부채)        시의 외적 동기는 부채질하는 단순한 움직임을 뿐이다. 이 시에는 신비나 애매한 장치 같은 것은 거의 없다. 부채질이 공간의 전율을 일으킨다는 것은 시인의 관찰이다. 부채질에 따라 지평선이 물러나거나 다가오며 공간이 전율하는 듯하지만, 이는 바람으로 사라질 뿐인 공간, 태어나지 못하고 분출하지도 솟아오르지도 못하는 공간이다. 현상과 내면에 대한 극사실적 형용이다.    부채질이라는 흔한 움직임 속에 지평선을 꿈꾸지만 그것은 곧 매몰되어 없어질 무의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공간을 소유한 것이 아니며, 사실 공간이 전율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에 대한 헛된 소망이 전율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 모두 '사로잡힌 날개짓'이며 관념의 생성과 소멸의 되풀이다.    2연에서는 지평선을 상상하였다가 3연에서는 이는 현실화될 수 없는 공간임을 확인하다. 그리하여 4연에서는 낙원에 대한 가정을 거두어들였는데. 생략된 5연에서는 비상의 의지는 '하얀 도약'이었으며, 그것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고 말한다.    움직임은 바람과 숨결의 미세한 움직임이며, 욕망이나 시선의 이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어떤 희망이, 입술 가장자리로 스미듯 사라지는 웃음처럼 사라질지라도 순수한 낙원에 대한 가정은 정당하였다는 것이다. 가정임을 알고 있음으로 처음부터 '정묘한 거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5연에서 다시 부채는 팔찌 옆에 접혀져 놓인다.    집요한 것은 공간 구성에 대한 의지다. 거짓된 희망에서 지평선으로, 빈 공간으로, 다시 일상으로 이어지는 공간 양상 - 여기에 상징의 모두가 들어있다. 공간 자신은 태어나지 못하고 전율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시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치는 상징의 미학을 묘하게 숨긴다. 숨김으 미학은 상징의 맛이 두드러지게 한다.        말라르메는 이렇게 생각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 '언어의 효과'를 통해 그것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한다. 언어 외적인 것은 시에서 모두 배제시켜 전적으로 '말들에게 주도권을 양도'하는 것이다. 비인칭 상태 즉 자아를 지워 텅 빈 상태를 미리 마련해놓고 암시의 기법을 그 위에 사용함으로써, 언어 스스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인칭화 혹은 탈인성화란 고전주의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글 쓰는 주체의 지우기다. 이것을 그는 "시인의 화술적 사라짐"이라 한다. 앞에서 본 백조의 죽음은 시인의 죽음을 뜻한다. 이러한 죽음, 즉 인성의 사라짐에 의해 언어의 기능이 진정 생성되는 것이다.    탈인성화는 또 한편 내면의 '공(空)'을 만들어내면서, 백지상태 위에 정신 스스로가 펼쳐지게 한다.            나는 끔직한 한 해를 보낸 참이다. 나의 '생각'은 생각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순수개념'에 도달하였다. 그 결과 이 오랜 번민 중에 나의 존재가 겪었던 모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행이도 나는 완전히 죽었다.(---)        다시 말해 네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이 비인칭이 되었다는 것, 나는 네가 알던 스테판느가 더 이상 아니며 나였던 것을 통하여 스스로를 보고 스스로 발전해가는, 정신의 '우주'가 지니는 하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1867.5. 14; Barbier,1977,341)        이상이라는 문제를 마주하였을 때 시인은 먼저 세계 저편에는 "무(無)'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상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결코 버릴 수 없었으므로 그는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즉 이상세계는 '허무' 뒤에 있다. '무'안에 무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긍정적 전환은 불교와 헤겔의 도움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먼저 현실의 모든 '거짓된 외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대상과 자신을, 다시 말해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자발적으로 비운다. 그 텅 빈 '무' 위에 새로운 긍정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나는 완전히 죽어, 몰아상태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답파의 엄정한 중립주의에 도움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고답파의 객관성과도 다른 것이다. 몰아의 '공' 상태에서 정신과 우주는 자연스럽게 다시 펼쳐진다. 나는 그 전개를 바라보는 하나의 보는 '능력' 즉 시선이다. 시선은 매개체일 뿐, 인칭이 없다.    시인이 이 편지를 쓰고 몇 년 후인 1871년, 랭보는 '나는 타자이다'라고 말한다. 두 시인은 모두 주체의 위기에 대해 설파한다. 그런데 이 위기는 '미리 계획된' 것이다. 위기를 전개시키는 방법은 달랐을지라도 상징주의의 이상은 이처럼 의도적 위기와 자아의 정화 후에야만 진정 구축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상징과 상징체계란 모든 것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수 있고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스스로를 비우는 절차는 필수적인 것이다. 자아의 부정은 이처럼 새로운 세계의 구축을 겨냥한다.    그리하여 거미줄처럼 사물들의 관계 요소들이 섬세하게 그물망을 이루도록 관계의 구조물을 구축하는 것, 혹은 레이스처럼 논리의 실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 - 이처럼 탄탄한 체계들만이 무한한 확산력을 지닐 수 있다.    보를레르의 은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사물들로 퍼져나가는"확산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확산을 위하여 랭보에게는 광기와 착란이 필요하였다. 말라르메는 확산을 위하여 감각을 우선 안으로 응축시킨다. 사물에 대한 말들은 겉으로는 모두 지워진다.    아래의 시에서도 주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죽었거나 몰아상태일 것이다. 이 시는 1868년에 '자신에 대한 우화적 소네트'라는 제목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수정하다가 20년이 지난 1887년에야 무제로 출판한다. 완전히 상징들로만 이루어졌으며, 상징주의의 난해성을 대표하는 시로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주석이 가해졌던 시이다.            그의 맑은 손톱들은 자신의 줄마노를 아주 높이 바치고,        이 자정에 고뇌가 횃대를 떠받치고 있다        골호(骨壺)가 받아들이지 않는        '불사조'에 타버린 저녁의 꿈 몇을          빈 방, 제기단 위에는 아무 소라도 없다        소리 울리는 공허의 폐기된 장식품은,        ('허무'가 자랑하는 유일한 이 물건을 갖고서 '주인'은        '삼도천'에 눈물 길으러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텅 빈 북쪽 유리창 가까이        물의 요정과 싸우며 불을 내던지는        아마 일각수 장식을 따라. 금빛이 죽어가고 있다        요정은 벗겨진 채, 죽은 자로 거울 속에 있다        거울 테두리가 감싸고 있는 망각 속에        섬광의 북두칠성이 그렇게 빨리 고정되고 있지만.                           ()        이 시에서도 여전히 공간 창조의 고뇌가 문제되고 있다. 여기서는 빈 방과 선반 하나, 그리고 열린 창문의 덧창밖에 없는, 그야말로 텅 빔의 미학적 풍경 자체다. 주인은 삼도천(三途川)에 눈물 길으러 갔으므로, 실제로 그가 죽었는지 확실치 않다. 거울 테두리에는 금빛이 죽어가고 잇다. 그러니까 빛도 모두 스러져가고 있다. '불사조에 타버린 꿈 몇'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인이 작품 모두를 불태웠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소라'를 가리키는 "소리 울리는공허의 폐기된 장식품"이란. 악기이자 글 쓰는 도구이다. 삼도천에 이 악기를 가지고 갔다는 부분에서 오르페우스가 그려진다.    서양의 시에서 이처럼 비어있음만을 주제로 삼고 그것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하려한 작품은 많지 않다. 극도의 텅 빔이 시 전체를 지배하지만,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열린 북쪽의 덧창을 통해 보일 북두칠성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어떤 희망을 시사한다. 그것은 어떤 조화로운 탄생일 것이다. 이 해석하기 어려운 상징시는 말라르메식의 오르페우스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옛날 사람들이 '대작'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을 때기 위해 자기 집 가재도구와 지붕의 서까래를 불태웠듯이, 모든 허욕과 모든 만족감을 던져버릴 용의를 가지고 연금술사와도 같은 인내심으로, 언제나 다른 것을 꿈꾸고 시도했습니다. 어떠한 대작일지? 말하기 어렵군요, 간단히 말해 여러 권으로 된 하나의 책, 아무리 경탄스러울지라도 우연히 부딪치는 영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건축적 구성이며 미리 계획된, 책이랄 수 있는 책 말입니다. 나아가 나는 (대문자로) '책(Livre)'라고 하겠습니다.        (---)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설명, 이야말로 시인의 단 하나의 의무이자 더할 나위 없는 문학 작업입니다. 왜냐면 페이지를 매기는 방법까지도 비인칭적인 동시에 생생할 '책'의 리듬 자체는 이 꿈의 방정식, 혹은 '오드'와 병행하기 때문입니다.                                  (, 베를렌에게, 1885년 ; 말라르메, 1974, 662-663)          오르페우스는 말라르메의 꿈이었다. 오르페우스의 업은 노래하는 것이다. 꿈의 방정식은 오드라고 한다.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설명'이 꿈의 방정식의 해(解)인 것이다. 대문자 '책(Livre)'이다. '오드'를 통하여 '책'에 도달한다.    그는 "결국 세상은 아름다운 한 권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Huret, 1984;80) 말한다. 시인의 꿈은 이토록 소박한 것이었지만 정말 소박한 것은 아니었다. 대지에 대해 설명하겠다는 꿈은 절대의 책을 완성하겠다는 크나큰 야심이다. '책'은 그에게 언어와 정신과 삶이 어우러져 용해된, 인식론적이고 존재적인 어떤 총체, 어떤 '하나'였다. 시인에게 세상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보들레르가 교감이라는 사물 인식법으로 새로운 문학을 열어 낭만주의와 고답파를 버리게 하였다면, 말라르메는 그를 계승하면서 언어형식의 또 다른 혁명을 낳는다. 그 결과의 하나가 라는 시다. 시인은 절대의 책을 가정하며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페이지라는 형식을 버린다. 대신에 펼쳐지는 책의 (우좌가 아니라) 좌우 페이지를 합쳐서 한 '장'이라고 한다. 이 하얀 화폭 위에는 오직 하늘과 바다물밖에 그려져 있지 않다. 보들레르가 초대받고 싶어하였던 여행을 그는 거의 마지막 시도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실현시키고 있다. 그것에는 미학과 철학과 음악과 문자가 하나가 되어 있다.    베르나르는 를 '시와 산문의 종합'으로 보고 있다.(Bernard, 1988;311).            (---) 는 산문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와 산문을 나누는 칸막이를 깨고 '통합' 예술의 시도에 상응하는 총합의 양식을 발견하기 위해 당시 시인들이 시도하였던 언어 탐구들에 대한 의미있는 증언이다.(Bernard, 1988;328).        에서, "페이지를 매기는 방법까지도 비인칭인 동시에 생생한 '책'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가 어쩌면 실험에 그칠지 몰라도, 우선은 절대의 책으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사고의 질서이자 우주의 질서이며 언어의 질서이다. 인간은 말을 통하여 우주적 신비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자 속의 신비'를 구현하려는 이 다중의 언어 프로젝트를 통하여, 시인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두텁게 싸여진 상징체계를 생의 마지막으로 완성한다.    언어를 완성하려는 그의 의지는 언어에 모든 것을 바치고 '일화가 없는' 삶을 선택하게 하였다. 시인의 단 하나 의무란 이 땅에 대한 오르페우스식의 설명일 뿐으로, 삶의 '일화'는 모두 그 속으로 묻히면 되었던 것이다. 발뱅의 시골집에서 후두경련으로 사망하는 시간에까지 그는 아름다움 '책'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언어에 몸을 맡긴 그의 이 모든 여정은 사제의 삶에 근접하였다. 여기서 '시라는 종교', 그리고 '언어의 사제'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19세기 후반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가장 진정한 상징주의자"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Peyre,1976;37), 과작의 실패한 시인이라는 평이 1950년대까지도 주류였다. 과작은 그가 나태하거나 황폐하여서가 아니라, 상징의 완전한 체계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한계였다. 얼핏 보아도 동양적 성찰에 많이 닿아있는 말라르메의 공간학은 발레리의 것과 색채와 향기가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의 여정과 가닿는 길은 달랐다.            말라르메 작품의 특징은 난해성, 신비, 무, 부재, 우연의 폐기, 시의 현상학, 시의 본질적 환원등에 있다. 그의 시는 보들레르의 영향하에서 보들레르적인 우울, 이상, 도피등의 주제를 전개하던 초기시와 보들레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후기시로 구분한다. ·초기시  어린시인의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과 거기에서 생겨난 낭만적 정서는 청년기에 보들레르를 발견하면서 도취와 열광, 현실 도피등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 '문학교향곡'은 산문시의 형태로 자신이 열광하던 보들레르와 그의 작품 '악의 꽃'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들레르의 영향하에서 그의 시의 주된 내용은 도피와 탈출이다. 실재의 세계는 권태와 우울, 질식할 것 같은 무의미일 뿐이고 그 속에서의 삶이란 그 무의미의 반복에서의 허덕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들레르풍의 그러한 시들속에서도 말라르메 자신의 예술 창작에 대한 물음이나 창작의 무기력 같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물음이 번번히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들레를 모방하면서도 보들레르에게서의 일탈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기시  22세가 되던해 말라르메는 마침내 보들레르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말라르메는 보들레르적인 우울과 도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말라르메를 말라르메 그 자체로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에로디아드', '목신의 오후', '이지튀르' 등의 작품을 썼다. 그는 탈 보들레르의 시작을 '에로디아드'를 통해 시작하는데 그의 새로운 미학이란 사물을 그려내지 않고 사물이 발산하는 효과를 그리는 것이었다. 시의 대상이 외부적 존재에서 내부적 효과와 그암시, 그인상을 그리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보들레르의 영향에서 쓰여진 시들과는 달리 부재의 시학은 무의미로 나타나고 그 의미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무의 상태에 새로운 의미를 담아야하는 것이다. 말라르메가 목표하였던 그것은, 부재의 순수로 덮여있어 의미가 담겨질 때마다 비워지고 또 다른 의미를 찾아야하는 것이다.
1743    파블로 네루다 시모음 댓글:  조회:6271  추천:0  2016-11-01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해질 무렵  붉은 석양에 걸려 있는  그리움입니다  빛과 모양 그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름입니다.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부드러운 입술을 가진 그대여  그대의 생명 속에는  나의 꿈이 살아 있습니다  그대를 향한  변치 않는 꿈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사랑에 물든  내 영혼의 빛은  그대의 발 밑을  붉은 장밋빛으로 물들입니다  오, 내 황혼의 노래를 거두는 사람이여  내 외로운 꿈속 깊이 사무쳐 있는  그리운 사람이여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석양이 지는 저녁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나는 소리 높여 노래하며  길을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내 영혼은  그대의 슬픈 눈가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대의 슬픈 눈빛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슾른 시를 쓸 수 있네.     예를 들면 밤하늘을 가득 채운 파랗고 멀리서 반짝이는 별들에 대하여 하늘을 휘감고 노래하는 밤바람에 대해서.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네.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나를 사랑한 때 있었네.  이런 밤에, 나는 그녀를 내 팔에 안았네.  무한한 밤하늘 아래 그녀에게 무수히 키스했었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사랑한 때 있었네.  그녀의 크고 조용한 눈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네.  더이상 그녀가 곁에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하며 내가 그녀를 잃은 것을 느끼며   거대한 밤을 들으며 그녀 없이 더욱 거대한  그리고 시는 풀잎에 떨어지는 이슬처럼 영혼으로 떨어지네.   내 사랑을 지키지 못했는데 무엇이 중요할까.  밤하늘은 별로 가득 찼어도 그녀는 나와 함께 있지 못한데.   그게 다야. 멀리 누군가 노래하는 멀리 내 영혼은 그녀 없이는 없어.  그녀를 내 곁에 데리고 올 것처럼 내 눈은 그녀를 찾아 헤매지.   내 심장도 그녀를 찾아 헤매지만 그녀는 내 곁에 없지.  똑같은 나무를 더욱 희게 만드는 그날 같은 밤   우리 예전의 우리 우리는 더이상 같지 않지.  나 역시 그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예전에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바람 속을 헤매다가 그녀의 귀를 매만질 수 있겠지.  누군가 다른 사람을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사랑이겠지.  예전에 그녀가 나의 사랑이였던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가벼운 육체 그녀의 무한한 눈동자   나는 그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 그녀를 사랑해.  사랑은 짧게 지속되고 망각은 먼 것이니.  이런 밤에 내가 그녀를 내 팔에 안았던 것처럼.  내 영혼은 그녀 없이는 더 이상 없네.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내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녀를 위해 쓰는 마지막 시일지라도...             충만한 힘     나는 쓴다 밝은 햇빛 속에서, 사람들 넘치는 거리에서, 만조 때, 내가 노래할 수 있는 곳에서; 제멋대로인 밤만이 나를 억누르지만, 허나 그것의 방해로 나는 공간을 되찾고, 오래가는 그늘들을 모은다   밤의 검은 작물은 자란다 내 눈이 평야를 측량하는 동안. 그리하여, 태양으로만, 나는 열쇠들을 버린다. 불충분한 빛 속에서는 자물쇠를 찾으며 바다로 가는 부서진 문들을 열어놓는다 찬장을 거품으로 채울 때까지,   나는 가고 돌아오는 데 지치는 법이 없고, 돌 모양의 죽음은 나를 막지 못하며,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싫증나지 않는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내 모든 광물성의 의무를 어디에서 물려받았을까 아버지나 어머니일까 아니면 산들일까,   생명줄들이 불타는 바다로부터 펼쳐진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계속 가니까 나는 가고 또 간다는 것 또 내가 노래를 하고 또 하니까 나는 노래한다는 걸.   두 개의 수로 사이에서 그러듯 내가 눈을 감고 비틀거릴 때 일어난 일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쪽은 죽음으로 향하는 그 지맥속에서 나를 들어올리고 다른 쪽은 내가 노래하게 하기 위해 노래한다.   그리하여 나는 비존재로부터 만들어지고, 바다가 짜고 흰 물마루의 파도로 암초를 연타하고 썰물 때 돌들을 다시 끌고 가듯이 나를 둘러싼 죽음으로 된 것이 내 속에서 삶을 향한 창을 열며, 그리고, 존재의 경련 속에서, 나는 잠든다. 낮의 환한 빛 속에서, 나는 그늘 속을 걷는다.       건축가   나는 나 자신의 환상을 선택했고, 얼어붙은 소금에서 그것과 닮은 걸 만들었다 나는 큰비에다 내 시간의 기초를 만들었고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내 오랜 숙련이 꿈들을 분할한 게 사실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채 벽들, 분리된 장소들이 끝없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나서 나는 바닷가로 갔다.   나는 조선의 처음을 보았고, 신성한 물고기처럼 매끄러운 그걸 만져보았다- 그건 천상의 하프처럼 떨었고, 목공작업은 깨끗했으며,   꿀 향기를 갖고 있었다. 그 향기가 돌아오지 않을 때는 그 배가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눈물 속에 익사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별처럼 벌거벗은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돌아갔고.   내 믿음은 그 배들 속에 있다.   나는 사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이 없다.       작별들     안녕, 안녕, 한 곳에게 또는 다른 곳에게, 모든 입에게, 모든 슬픔에게, 무례한 달에게, 날들로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주週들에게, 이 목소리와 적자색으로 물든 저 목소리에 안녕, 늘 쓰는 침대와 접시에게 안녕, 모든 작별들의 어슴푸레한 무대에게, 그 희미함의 일부인 의자에게, 내 구두가 만든 길에게.   나는 나를 펼친다, 의문의 여지 없이; 나는 전 생애를 숙고한다, 달라진 피부, 램프들, 그리고 증오들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규칙이나 변덕에 의해서가 아니고 일련의 반작용하고도 다르다; 새로운 여행은 매번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장소를, 모든 장소들을 즐겼다.   그리고, 도착하자 또 즉시 새로 생긴 다감함으로 작별을 고했다 마치 빵이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달아나듯이. 그리하여 나는 모든 언어들을 뒤에 남겼고, 오래된 문처럼 작별을 되풀이했으며, 영화관과 이유들과 무덤들을 바꾸었고, 어떤 다른 곳으로 가려고 모든 곳을 떠났다; 나는 존재하기를 계속했고, 그리고 항상 기쁨으로 반쯤 황폐해 있었다, 슬픔들 속의 신랑, 어떻게 언제인지도 모르는 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고, 돌아가지 않은.   돌아가는 사람은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을 밟고 되밟았으며, 옷과 행성을 바꾸고, 점점 동행에 익숙해지고, 유배의 큰 회오리바람에, 종소리의 크나큰 고독에 익숙해졌다.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너무도 어렵게 지낸 나머지  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집도 땅도 없었고, 알파벳도 이불도  구운 고기도 없었으며,  그리하여 여기저기로 노상 옮겨다녔고,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  죽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   다행히도(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은 마음이 똑같았다, 주교에서부터 판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죽었다, 나무랄 데 없이 죽었다, 우리의 가나한 사람,  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그 많은 하늘을 갖고 뭘 할지 모를 것이다. 그는 그걸 일굴 수 있을까, 씨 뿌리고 거둘 수 있을까?   그는 항상 그걸 했다; 잔혹하게  그는 미개지와 싸웠다,  그리고 이제 하늘이 그가 일구도록 완만히 놓여 있다,  나중에, 하늘의 수확 중에  그는 자기 몫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높은 데서  그의 식탁에는, 하늘에서 배부르기 위해  모든 게 차려진다,  우리의 가난한 사람은, 아래 세상에서의  운명으로, 약 60년의 굶주림을 갖고 왔다,  마침내, 당연하게도,  삶으로부터 더 이상 두들겨맞지 않고  먹기 위해 제물이 되지 않은 채 만족스럽기 위하여,  땅 밑 상자 속에서 집처럼 안전해  이제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임금 투쟁을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정의를 바라지 못했다, 이 사람은. 갑자기 그들은 그의 컵을 채워주었고 그게 그는 좋았다; 이제 그는 행복에 겨워 벙어리가 되었다.   이제 그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은! 그는 뼈 자루였다, 검은 눈을 가진,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안다, 그의 무게 하나만으로,  너무 많은 걸 갖지 못했었다는 걸,  만일 이 힘이 계속 쓰여서  미개지를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밀을 거두고, 땅에 물을 주고,  유황을 갈아 가루로 만들고, 땔나무를 운반했다면,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사람이 구두가 없었다면,  아, 비참하다, 이 힘줄과 근육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사는 동안 정의를  누린 적이 없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때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넘어뜨리며, 그런데도  노동을 계속했고, 이제, 관에 든 그를  우리 어깨로 들어올리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적어도 안다 그가 얼마나 갖지 못했는지를,  그가 지상에 살 때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가 그에게 주지 않은 모든 걸 우리가 짊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때가 늦었음을;  그는 우리한테 무게를 달고, 우리는 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무게를 달까? 그는 이 세상이 하는 만큼 많이 무게를 단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이 죽은 사람을 어깨에 메고 간다. 분명히  하늘은 빵을 풍부하게 구우시리라.        물     지상의 모든 건 빽빽하게 서 있었다, 가시나무는 찔렀고 초록 줄기는 갉아먹혔으며, 잎은 떨어졌다, 낙하 자체가 유일한 꽃일 때까지, 물은 또다른 일이다, 그건 그 자신의 빛나는 아름다움 외에 방향이 없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깔 속을 흐르며, 돌에서 명쾌한 교훈을 얻고, 그런 노릇들 속에서 거품의 실현되지 않은 야망을 이루어낸다.       그건 태어난다   여기 바로 끝에 나는 왔다 그 무엇도 도대체 말할 필요가 없는 곳, 모든 게 날씨와 바다를 익혔고 달은 다시 돌아왔으며, 그 빛은 온통 은빛, 그리고 어둠은 부서지는 파도에 되풀이하여 부서지고, 바다의 발코니의 나날, 날개는 열리고, 불은 태어나고, 그리고 모든 게 아침처럼 또 푸르르다.         탑에서     이 장엄한 탑에는 투쟁이 없다. 안개, 공기, 날이 그걸 둘러쌌고 떠났으며 나는 하늘과 종이와 더불어 머물렀다, 고독한 기쁨과 부채와 함께. 증오가 있는 지상의 투명한 탑 그리고 하늘의 파동으로 움직이는 먼 바다. 그 구절에는 얼마나 많은 음절이 있는가, 그 단어에는? 내가 말했던가?   이슬의 불안은 아름다워라- 그건 아침에 떨어진다 새벽에서 밤을 분리하며 그리고 그 차가운 선물은 불확실하게 매달려 있다 강렬한 태양이 그걸 죽게 하기를 기다리며,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눈을 감는 건지 아니면 밤이 우리 속에서 별 박힌 눈을 뜨는 건지, 어떤 문이 열릴 때까지 그게 우리 꿈의 벽에 구멍을 파는 건지. 그러나 꿈은 한순간의 휙 지나가는 의복일 뿐, 어둠의 한 번의 고동 속에 소모되고, 우리 발 앞에 떨어져, 벗어던진다 날이 움직여 우리와 함께 출범할 때. 이게 거기서 내가 내려다보는 탑이다, 빛과 말수가 적은 물 사이, 칼을 지닌 시간, 그러고 나서 나는 살기 위해 서두른다, 나는 온 공기를 마시고 도시에 들어찬 불모의 빌딩들에 간담이 서늘하며,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혼잣말을 한다, 높은 곳들의 침묵에서 한 잎씩 떼어내며.              시인의 의무   이 금요일 아침, 바다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간에, 집이나 사무실에 갇혀 있거나 공장이나 여자, 거리나 광산 또는 메마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간에 나는 그에게 왔다, 그리고 말하거나 보지 않고 도착해서 그의 감옥문을 연다, 희미하나 뚜렷한 동요가 시작되고, 천둥의 긴 우르릉 소리가 이 행성의 무게와 거품에 스스로를 더하며, 바다의 신음하는 물흐름은 물결을 일으키고, 별은 그 광관光冠 속에서 급속히 진동하며, 바다는 파도치고, 꺼지고 또 파도치기를 계속한다.   그리하여, 내 운명에 이끌려, 나는 바다의 비탄을 듣고 그걸 내 의식에 간직해야 하며, 거친 물의 굉음을 느끼고 그걸 영원한 잔에 모아, 그들이 수감되어 있는 데가 어디이든, 그들이 가을의 선고로 고통받는 데가 어디이든 나는 유랑하는 파도와 함께 있고, 창문으로 드나들며, 내가 "어떻게 그 바다에 닿을 수 있지?" 하고 두 눈은 치켜뜬 채, 묻는 소리를 스스로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말없이, 파도의 별빛 밝은 메아리를 건넬 것이다, 거품과 유사의 부서짐을, 움츠러드는 소금의 바삭거림, 해변 바닷새들의 음울한 울음을,   그리하여, 나를 통해, 자유와 바다는 어두운 가슴에 대답해줄 것이다.       말   말은 피 속에서 태어났고, 어두운 몸속에서 자랐으며, 날개 치면서, 입술과 입을 통해 비상했다.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여전히, 여전히 그건 왔다 죽은 아버지들과 유랑하는 종족들에서, 돌이 된 땅들에서, 그 가난한 부족들로 지친 땅, 슬픔이 길이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은 떠나서 새로운 땅과 물에 도착하고 결혼하여 그들의 말을 다시 키웠느니. 그리하여 이것이 유산이다; 이것이 우리를 죽은 사람과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새로운 존재들을 연결하는 대기大氣   대기는 아직 공포와 한숨을 차려입은 처음 말해진 말로 떨린다. 그건 어둠에서 솟아났고 지금까지 어떤 천둥도 그 말, 처음 말해진 그 말의 철鐵 같은 목소리 와 함께 우르렁거리지 못했다- 그건 다만 하나의 잔물결, 한 방울의 물이었을지 모르나 그 큰 폭포는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그러다가, 말은 의미로 채워진다. 언제나 아이와 함께, 그건 생명으로 채워진다. 모든 게 탄생이고 소리이다- 긍정, 명확성, 힘, 부정, 파괴, 죽음- 동사는 모든 힘을 얻어 그 우아함의 강렬한 긴장 속에서 실존을 본질과 혼합한다.   인간의 말, 음절, 퍼지는 빛의 측면과 순은세공, 피의 전언을 받아들이는 물려받은 술잔- 여기서 침묵은 인간의 말의 온전함과 함께한다, 인간에게, 말하지 않는 건 죽는 것이니- 언어는 머리카락에까지 미치며, 입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고, 문득, 눈은 말이다.   나는 말을 취해서 그걸 내 감각들을 통해 보낸다 마치 그게 인간의 형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그것의 배열은 경외감을 느끼게 하고 나는 말해진 말의 울림을 통해 나의 길을 찾는다- 나는 말하고 그리고 나는 존재하며 또한, 말없이, 말들의 침묵 자체의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며 접근한다.   나는 한마디 말이나 빛나는 잔을 들어올리며 말과 건배한다; 나는 거기 들어 있는 언어의 순수한 포도주나 마르지 않는 물을 마신다, 말의 모성적 원천을, 그리고 컵과 물과 와인은 내 노래를 솟아오르게 한다 왜냐하면 동사는 원천이며 생생한 생명이므로-그건 피이다 그 참뜻을 표현하는 피, 그리하여 스스로 뻗어나가는. 말은 잔에 잔다움을, 피에 피다움을, 그리고 생명에 생명다움을 준다.       파블로 네루다/ 1904년 남칠레 국경 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스무 편의 사랑과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하여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고, 스물세 살 때 극동 주재 영사를 맡은 이후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의 영사를 지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스페인인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정치활동을 했으며,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곤살레스 비델라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자 망명길에 올랐다가, 귀국 후 아옌데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칠레)            Inner Link     아르튀르 랭보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뽈 엘뤼아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파블로 네루다 - 절망의 노래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파블로 네루다는 2004년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인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시와 그의 생애를 알게 된다면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본명은 리카르도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였다. 그의 아버지인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가 네루다의 시 창작을 좋아했다면 우리는 위의 기다란 그의 이름을 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자식의 이름에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경우에도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가브리엘 마르께스로 표기하기 보다는 그냥 마르께스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파블로 네루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서 체코 이름을 발견했고, 그 이름의 주인공이 체코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였다. 물론 그는 여러가지 필명을 사용했으나 최종적으로 네루다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이었기 때문에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中에서)이라고 말한다.     - 파블로 네루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생애   1904년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고 만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스트랄 역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이름을 따 필명으로 삼았다.)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詩作)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두번째 시집 (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 15세 무렵의 네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시에 재능을 보였고, 그가 칠레 전역에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것은 불과 20세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동안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게 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때로 도발적이었고, 관능적이었으며 고독과 죽음의 주제와 함께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네루다는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멈추지 않았다. 파블로 네루다의 공직 생활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이 말은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억들을 상당히 억누르며 하는 말이다.)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외국의 작가나 시인들이 공직에 나서는 경우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를 비롯해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 네루다의 파리 생활 무렵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그가 아시아에서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파블로 네루다. 투사가 되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 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 파블로 네루다가 칠레의 압정을 피해 이탈리아에 망명해있던 시절을 다룬 영화 , 실제로 그가 이탈리아에 망명해 있을 무렵 이탈리아 당국은 칠레와의 외교 관게를 고려해 네루다를 추방하려 했지만 이탈리아 민중들의 열렬한 반대에 부딪쳐 추방을 포기했고, 네루다는 계속해서 이탈리아에 머무를 수 있었다.         - 파블로 네루다   참고도서 & 참고사이트 마추피추의 산정/ 파블로 네루다/ 민용태 옮김/ 열음사/ 1985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추원훈 옮김/ 청하/ 1992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민음사/ 1994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서성철, 김창민 편/ 까치/ 2001 -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까치 출판사에서 출판한 여러 좋은 책들 중 물을 많이 내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국내의 라틴 아메리카 학회 소속 학자들이 각자 논문을 만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시인, 작가들에 대해 글을 상재하고 있다. 이번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글은 그 중에서 김세훈 선생의 글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 곽재성, 우석균 지음/ 민음사/ 2000년  - 위의 책이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간략한 통사와 더불어 문화, 예술, 환경 등에 대해서 곽재성, 우석균 두 명의 필자가 재미있게 잘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한 가지 장점을 더 추가하자면 인터넷 시대답게 관련된 사이트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을 꼽으라면 적은 분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대충대충이 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옥에 티인 셈이고, 라틴 아메리카 읽기를 시작하는 분들은 이 책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리란 생각이다. 칠레의 모든 기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지음/ 조구호 옮김/ 크레파스/ 1989 - 미겔 리틴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산티아고 알바레스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미겔 리틴은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때 해외로 망명했다. 칠레 당국은 그의 귀국을 영구히 허가하지 않을 사람 명단에 올려 특별 관리했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귀국해서 독재정권 하의 칠레를 촬영해 전세계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책은 그런 미겔 리틴의 영화 제작기를 마르께스가 인터뷰하여 기록한 것이다.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배윤경 지음/ 이후/ 2000 -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적인 가수이자 칠레의 저항가수였던 빅토르 하라의 일대기와 살바도르 아옌데 그밖에 많은 라틴 아메리카 가수들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게다가 부록으로 빅토르 하라의 노래가 담긴 음반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반드시 사 볼만 한 책이다. 놓치면 아쉬워 할 것이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계급적 존재로 인식했던 그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의지와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의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리고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단지 비현실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현실적인 시인은 모든 얼간이들까지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지독히 슬픈 일이다. 단순명료한 규칙이나 신이나 악마가 처방한 성분도 없지만, 이 두 중요한 신사들은 시의 영역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한 번은 첫번째 신사가 이기고, 다음에는 두번째 신사가 이기지만 시 자체는 결코 지지 않는다. - 파블로 네루다 중에서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민중의 불꽃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후 칠레가 어떻게 변해갔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의 우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중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도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파블로 네루다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창너머로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마자 장교 하나가 침실로 들어와 집안 수색하겠다고 통고했다. 네루다는 불쑥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시(詩)라네." 파블로 네루다 - 영원한 청춘의 시인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갔고 이 시간 현재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칠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들 피노체트 일당에게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는 지금까지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1742    칠레 민중시인 - 파블로 네루다 댓글:  조회:4938  추천:0  2016-11-01
네루다 Pablo Neruda 본명은 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 1904. 7. 12 칠레 파랄~1973. 9. 23 산티아고. 칠레의 시인·외교관·마르크스주의자. 1971년 노벨 문학상, 1953년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투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장 그라브의 저서를 번역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현실적인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출신의 이 낭만적인 학생은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 수도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해 10월 〈제가(祭歌) La canción de la 〉라는 시로 칠레 학생연맹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1등상을 탔으며, 이 연맹이 펴내는 잡지 〈클라리다드 Claridad〉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3년 갖고 있던 가구와 아버지에게 받은 시계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처녀시집 〈황혼의 노래 Crepusculario〉를 출판했다. 이듬해에는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업자를 만나 〈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ón deseperada〉(1924)를 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로도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네루다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이미 20세에 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던 네루다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불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시에만 몰두해 〈조물주의 시도 Tentativa del hombre infinito〉, 토마스 라고와 함께 쓴 〈반지 Anillos〉ㆍ〈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 El hondero entusiasta〉을 발표했다.   네루다는 1927년 버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그뒤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랑군에서 콜롬보·실론·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자바·싱가포르로 옮겨다녔으며,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대지에 살다 Residencia en la tierra〉를 쓴 것은 남아시아에서 지낸 이 무렵이었다. 193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았으며, 그곳에서 당시 그 도시를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칠레의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유럽 문학계에도 그의 시는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빠른 속도로 알려졌다. 스페인 시인들은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서명한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침 Homenaje a Pablo Neruda〉을 출간하여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시인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던 이 시기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짐으로써 중단되었다. 친구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과 미겔 에르난데스의 투옥을 비롯한 '거리의 유혈사태'는 이 칠레 시인의 정치적 태도를 성숙시켰다. 뒷날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ña en el corazón〉은 내전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칠레 정부는 곧 그를 멕시코로 보냈다. 이곳에서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1945년 상원의원으로 뽑혔고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칠레에 우익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활동은 끝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인 네루다는 다른 좌익 인사들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숨어 살던 이 시기는 작품을 쓰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쓴 가장 위대한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모든 이를 위한 노래 Canto general〉가 탄생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네루다의 시는 인간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는 서정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인 〈황혼의 노래〉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를 썼으며 뒤이어 좀더 영적인 작품 〈조물주의 시도〉·〈고무줄새총에 미친 사람〉을 쓰게 되었다. 외부세계와 이러한 세계가 주는 창조적 자극에서 내적 자아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독보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대지에 살다〉가 탄생되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시형식에서 벗어나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매우 개성적인 시적 기법을 창조해냈다. 그가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쓴 시들은 더 사실성이 강하고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현실지향적이며 고발조의 시에 이어 장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이 웅장한 문체는 곧 사라지고 좀더 단순한 주제를 다룬 사회비평시가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제와 기교의 다양함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했다. 〈100편의 사랑 노래 Cien sonetos de amor〉에서는 사랑이, 〈Estravagario〉에서는 해학이 다시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회고록 Memorial de Isla Negra〉은 향수 어린 자서전이다. 네루다는 "나는 장대한 연작시를 계속해서 써나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말로써만 끝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은 1973년 9월에 왔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 시인으로 불리며,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시인이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과 일상에 대해 노래하여, '사랑의 시인', '자연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 한편 극단적인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정치, 경제적 상황이 불안했던 칠레에서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투신해 동시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 작가이기도 하다. 1971년,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운명과 희망을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한 공로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본명은 리카르도 엘리에세르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로, 1904년 7월 12일 칠레 중부의 파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 모랄레스는 철도원이었고, 어머니 네프탈리 바소알토 오파소는 교사였다. 파블로는 네프탈리가 39세의 늦은 나이에 낳은 아이였는데, 그 때문인지 네프탈리는 분만 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두 달여 만에 산욕열로 사망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테무코로 이사하고 재혼했는데, 새어머니는 억압적이고 거친 아버지의 손에서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의 첫 시는 '사랑하는 엄마'에게 드리는 시였다.   6세 때 테무코에서 마을 남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학생 대부분은 유럽 이민자들이었다. 왜소하고 깡마르고, 조용한 네루다는 남자아이들 틈에서 잘 지내지 못했고, 혼자 동떨어져 책을 읽고 주변 곤충과 자연 풍경을 관찰하며 지냈다. 이 시기에 함께 공부하던 친구 헤라르도 세겔은 칠레 최초의 공산주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 된다. 또한 이 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로부터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을 비롯해 프랑스 상징주의자들, 특히 베를렌의 시를 접하는 기회를 갖는다. 미스트랄은 194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11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3세 때 일간지 〈라 마냐나〉에 기고문을 보내고, 각종 학생 잡지에 시를 발표했다. 16세 때부터는 문예지 〈셀바 아우스트랄〉에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네루다는 어린 시절부터 흠모했던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에서 따온 것이다. 필명을 선택한 것은 아들이 시 쓰는 것을 싫어했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42세 때부터는 파블로 네루다를 아예 법적인 이름으로 사용했다.   1921년, 테무코를 떠나 산티아고 칠레 대학에 들어간 네루다는 사범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사가 될 준비를 했다. 또 그해에는 학생잡지 〈클라리다드〉에 정치 칼럼과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23년에는 첫 시집 《황혼의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스무 편의 사랑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펴냈는데, 이 시집은 우아함과 애수 어린 서정으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세의 네루다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비센테 우이도브로와 함께 칠레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올려 준 작품이다. 후일 전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네루다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이다.   1920년대 칠레는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다. 네루다는 졸업 후에 잠시 방황하다가 1927년 외교 공관에 취직해 미얀마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어 칠레를 떠났다. 그 후 스리랑카, 싱가포르, 스페인 등에서 영사 생활을 하면서 자본주의와 식민 질서 아래에서 억압당하는 민중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스페인에서 내전을 경험하면서 희생당하는 민중을 직접 목도하고, 절친했던 가르시아 로르카의 처형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이때 반프랑코 운동,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다가 파면되었다.   이 시기에 겪은 절망과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에 대한 관심, 낯선 외국 생활의 고독 등은 《지상의 거처》, 《내 가슴 속의 스페인》 등에 표현되었다. 1938년, 네루다는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다가 거부당하고 멕시코로 갔다. 멕시코에서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억압과 박탈의 역사에 대해 탐구하고, 《마추픽추의 산정》을 썼는데, 이는 후일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이념, 사상을 포괄한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로 발전한다.   1945년, 네루다는 칠레로 귀국하여 사면받고, 공산당에 가입해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칠레는 경제가 악화되어 실업률이 증가하고,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네루다는 변호사 출신으로서 인민전선을 결정하고 사회 정의를 주장하는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에도 동참했다. 비델라는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하고 급진 좌파 연합 연립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곧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공산당과 맺었던 협약을 깨뜨렸다. 조직적인 파업과 시위가 경제에 악역향을 미친다고 보고, 이를 주도하던 공산당 지도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것이다. 네루다는 비델라 정권에 맞서면서 1948년 상원에서 대통령을 탄핵하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비델라 정부는 네루다를 국가원수 모독죄로 수배하고, 네루다는 수배를 피해 칠레를 탈출했다. 이후 아시아, 유럽, 미국 등지를 전전하다가 3년 만인 1952년 정권이 교체되면서 귀국했다.   귀국 후 칠레 정부는 네루다에 대한 모든 혐의를 사면해 주었으며, 그는 이슬라 네그라에 정착해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이 시기부터 네루다는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아내 마틸데 우르티아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은 일상적이고 소박한 것에 대해 노래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소박한 것들에 바치는 송가(頌歌)》는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부터 양파, 커피잔, 사전, 돌멩이 같은 주변 사물을 따뜻하고 정감 어린 시선으로 노래하고 있는 송시 모음집이다. 이 작품집을 통해 그는 삶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들로 세상을 바라보고, 민중의 일상 언어로 쓰는 소박한 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1960년대 칠레에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이 재점화되면서 그는 다시 시를 쓰던 생활에서 정치의 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1969년 칠레 공산당위원회는 네루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그는 이듬해 좌파 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다. 그 결과 오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70년 아옌데 정권에서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어 세계 여행길에 올랐다. 시인이자 정치가로서 네루다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드높았으며,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2년 여행 도중 암이 발견되어 대사직을 사임하고,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왔다.   칠레는 미국 등 외세의 정치, 경제적 압박 및 좌파 연합 내부의 갈등 등으로 계속 혼란스러웠다. 급기야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가 피살되고,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네루다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9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대해서는 네루다가 위독해져 구급차를 불렀으나 군사 정권이 구급차를 보내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생전에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의 자택에 묻히고 싶어 했으나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 그를 산티아고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시인의 유해는 20년이 지나 국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슬라 네그라의 집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계의 명시/ 파블로 네루다 - 시(詩) 세계의 명시/ 파블로 네루다 시(詩)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流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출전: (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7) 시를 말하다 문태준 l 시인 바다와 자전거와 섬이 있고, 사랑과 신념과 열정이 있고, 음악과 시와 시인의 삶이 있어서 좋았던 영화 . 가진 것의 전부였던 자전거 한 대 덕분에, 정치적 탄압을 피해 외딴 섬에 살게 된 파블로 네루다 시인의 전속 우편배달부가 된 가난한 청년 마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섬의 모든 여자들이, 무엇보다 자기가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까지 네루다 '시인'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시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야.”, “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가슴을 활짝 열고 시의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해.”, “해변을 거닐며 주변을 둘러보게.” 그러면 메타포(은유)가 나타난다며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시의 길을 열어준다. 마리오는 바다를 보며, 짝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메타포를 생각한다. 메타포는 매직과도 같이 네루다에게서 마리오에게로, 마리오에게서 베아트리체에게로 스며들고 또 분출한다. 시처럼! 사랑처럼! 시대처럼! 삶처럼! ▶영화 포스터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긴 본명을 가졌으나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에서 필명을 빌려 왔던 시인, 가난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공산당 대표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시인, 대부분의 남미 사람들이 그러하듯 칠레의 몸과 마음을 스페인어로 표출했던 시인, 외교관으로 망명객으로 여행자로 세계 도처를 떠돌며 자연과 사랑과 민중으로 시를 빚고 시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시인, 자신의 삶을 “모든 삶으로 이루어진 삶”으로 살아냈던 시인, 국제스탈린평화상(1950)과 노벨문학상(1971)을 둘 다 수상한 시인, 공산주의자였고 시인이었지만 공산주의 시인은 아니었던 시인, 시인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시인… 그러니까, 그렇게 네루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 되었다. 네루다적인 시법(詩法)을 일컫는 ‘네루디스모(nerudismo)’라는 말은 네루다의 시적 위상을 대변한다. 참신한 이미지가 범람하는 발견으로서의 메타포, 분출하는 정치적 선동성과 관능적 서정성, 초현실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자유로운 상상력, 격정적이고 거침없는 시 형식 등이 그 특징들이다. 열정과 연대, 사랑과 혁명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이런 다양성과 상극성의 혼연일치야말로 네루다의 삶과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라고 했던 그의 산문 한 구절은 그 자체로 네루디시모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 그는 69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정치가이자 시인으로서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 ‘모든 언어를 통틀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란 찬사를 들었다.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64)에 수록되었던 이 ‘시’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영화 의 라스트 신을 장식한 시이자 네루다의 삶과 시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시다. 시가 어떻게 우리에게 들고나는지를 시로 쓴 시이고, 우주의 삼라만상과 내 안의 뜨거운 가슴이 언어적 스파크를 일으키는 네루디스모를 메타포한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까닭은 우리가 사람이라서고, 그 시가 사람을 사람이게 해서다. 그러니까, 시가, 상상과 꿈과 공감과 감동과 이해와 연대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네루다 또한 “시는 어둠 속을 걸으며 인간의 심장을, 여인의 눈길을, 거리의 낯선 사람들, 해가 지는 석양 무렵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중에 최소한 한 줄의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 ‘시’는 우리가 매일매일 보는 ‘하늘’과 ‘유성(流星)’이, ‘논밭’과 ‘어둠’이, ‘밤’과 ‘우주’가, 그리고 우리가 매일매일 쓰는 언어가 생생한 시가 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네루다에게 시는 큰 ‘별’들이 총총한 ‘허공’에 취한 내 ‘심장’이 하나 되는 때다. 3연에서처럼 ‘취하고’ ‘느끼고’, 더불어 ‘구르고’ ‘풀리’면서 말이다. 그 별과 허공과 심장을 자유롭게 들고나는, 그러니까, 생명이 가득 찬 ‘바람’과 같은 존재다. 그런 ‘바람’은 1연의 ‘모르겠어’, ‘아니었어’, ‘불렀어’, ‘건드렸어’라는 술어의 속성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대체로 ‘모르겠는’ 게 시이고, 늘 ‘아닌’ 게 시이고, 문득 ‘부르는’ 게 시이고, 툭 ‘건드리는’ 게 시이기 때문이다. 시란 때로 애매하고 모호해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늘 존재론적 호명을 통해 존재의 살갗에 닿는 것이다. 쉽사리 이름 할 수 없으나 눈멀게 하는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와도 같은 것이기에 불에 데고 잘려 나간 그 상처들을 쉼 없이 해독하면서 쓴 첫 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헛소리 혹은 무의미와도 같은 것이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지혜와도 같은 것이다. 시는 그렇게 우리를 시인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그런 시가, 그렇게 네루다에게 찾아왔으니, 또 그렇게 내게도 찾아왔으면 하고, 당신에게도 찾아갔으면 한다. 그리하여, 티끌만 한 우리의 심장이 허공에 취한 큰 별들과 더불어 떠돌며 바람 속에 풀려났으면 한다. 그 바람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 숨 쉬었으면 한다. 그렇게 시가 우리에게 스며들고 분출하였으면 한다. 상상만으로도 벅차고 아름다운 인간적 연대이자 우주적 합일이 아닌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7.12-1973.9.23) 1904년 남칠레 국경 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를 출간하여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고, 스물세 살 때 극동 주재 영사를 맡은 이후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의 영사를 지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정치 활동을 했으며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곤살레스 비델라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자 망명길에 올랐다가 귀국 후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위의 첫 시집 외에 , , , , , 등이 있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국내 출간 파블로 네루다 작품 네루다 시선 (민음사)                                   충만한 힘 (문학동네)                                    안녕 나의 별 (살림어린이) 글 정끝별 1988년 에 시가, 1994년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 , , , 시론과 평론집에 , , , 등이 있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년 7월 12일 ~ 1973년 9월 23일)은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이다. 그의 시집을 읽고 좋아한 시, 한 편을 올려본다. 시대에 대한 경종이다. 파블로 네루다  당신들이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지드주의자들이여  고매한 지식인이여 릴케의 제자들이여  신비를 날조한 사기꾼들  실존주의의 가짜 마법사들  무덤 속에서 등불을 켠  초현실주의자의 개양귀비들  유럽의 최신식 유행의 의상을 걸친 시체들  자본가의 치즈에 눈이 팔린 창백한 당신들  도대체 당신들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이 죽음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  저 비참한 인간의 모습과 마주하고  인간의 존엄이 모욕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 가축우리와 같은 짚더미에서 잠을 자야 하는 인간과  발에 채인 처참한 생활을 눈 앞에서 보면서 도망치는 일 외에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부스러기를 팔았을 뿐이다  당신들은 찾아 돌아다녔던 것이다 천상의 머리카락을  시들어 빠진 식물을 접혀진 손톱을  '순수미'를 '주문'을  현실에서 눈을 돌린  가련한 비겁자들의 일을  저 부르조아 신사들이 던져준 접시 위의  더러운 음식찌꺼기로 살이 찌고  섬세한 눈동자가 흐려지면서-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돌처럼 누워있는 사람들이  그 눈동자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도 싸워 획득해야 할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묘지의 꽃다발보다도 맹목적인 것이다  줄줄이 나열된 무덤에 바쳐져  꿈쩍도 않는 말라빠진 꽃들 위에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  ================== 파블로 네루다 대서사시 '모두의 노래' 사랑의 시인, 저항의 시인,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중남미 민초들을 대변한 칠레의 외교관 · 정치가인 파블로 네루다의 대표작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가 출간되었다.   '모두의 노래'는 칠레인, 아메리카인으로서의 자신의 뿌리를 탐구하고 인류의 정의 구현을 염원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보여준다.   이 책은 스페인 내전 당시 영사로 근무했던 네루다가 공개적으로 공화파를 지지하다 해임되어 귀국한 1938년부터, 파리의 난민 담당 영사를 거쳐 멕시코 총영사로 근무하고 돌아와 정치가로 활동하다 정권의 박해를 피해 1949년 망명하기까지의 시를 모아 1950년에 펴낸 것이다.  앞선 작품들에서 내면세계의 감정, 고뇌, 갈등을 표출했던 네루다가 시의 방향을 전환한 이유는 스페인 내전 때문이었다. 민중의 삶의 질을 좀더 높이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세력의 충돌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네루다는 시인의 역할이, 자신의 역할이 시대의 충실한 증언자라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모국 칠레의 현실을 증언하려 했으나, 멕시코 총영사를 마친 뒤 귀국 길에 들른 페루의 마추픽추에서 그의 소명은 중남미 전체, 카리브 해 그리고 미국, 유럽의 그리스, 소련까지 공간적 범위를 넓힌다. 또한 잉카 시대의 유적을 보면서, 현재 시점부터 유적지를 건설한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 그 이전 시대, 아메리카에 인류가 살기 시작했던 시원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적 약자, 가난한 노동자, 평범한 민초들을 대변했던 시인 네루다는 중남미 원주민의 문화를 내적으로 소화하여 당대의 민중의 삶과 접합함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한 대서사시를 완성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 소수의 사람들만이 감지하는 세계에 익숙한 귀를 가진 독특한 이 시인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네루다는 철학보다는 죽음, 지성보다는 고통, 잉크보다는 피에 근접한 시인이다.” _가르시아 로르카(스페인 시인, 극작가)   시인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신을 둘러싼 외적 현실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주변 현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감시하고 반추하며, 이들을 이미지화해서 자신이 보는 관점의 세상을 시로 재창조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인은 시대의 충실한 증언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모두의 노래'는 전체가 사회적, 역사적 증언만은 아니다. 네루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연환경, 동식물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이들을 주제로 시를 썼다. 「위대한 대양」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양과 관련된 동식물, 조개, 해양도시, 바다를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 속으로  그 역사를 말하려고 나 여기 있다.   버펄로의 평화부터   지구 끝단, 영겁의 남극 빛 거품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낸 모래까지,   그리고 그늘진 평화가 깃든 베네수엘라의   깎아지른 곳에 난 굴에서까지   그대를 찾았다. 조상이시여,   검은 구릿빛의 젊은 무사여, [……] (I. 지상의 등불_22쪽)  투쟁하며 죽었던 이들을 당신들에게 인도하는 날,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삭은 땅에 주어진 하나의 밀알에서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은 밀처럼 뿌리를 모으고,   이삭을 모아,   고통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밝은 곳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IV. 해방자들_260쪽)  아메리카, 나는 너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다.   마음에 칼을 매달고   영혼에 떨어지는 방울을 참고,   창문으로 새로운 너의 날이 내게 밀려올 때,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를 만들어낸 빛 속에 있고   나를 규정하는 그림자 안에서 산다.   포도처럼 달콤하나 끔찍하고,   설탕을 만드나 체벌이 기다리는 너,   너와 같은 종류의 정액에 젖어,   네 유산의 피를 마시면서,   너의 본질적 여명 속에서 자고 깬다.   (IV. 아메리카, 나는 너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다._374~75쪽)  내 병든 심장은 여기 있네, 내 몸의   피멍을 보게나, 얼마나 살게 될지 나도 모르겠네.   그러나 그대에게 다른 건 요구하지 않겠네, 그저   그 못된 인간이 민중에게 하는 짓을 말하게.   우리처럼 고산지대로 끌려간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그자는 하이에나처럼 웃고 있다네. 동지,   그대는 이걸 말하게, 말해야 하네. 투쟁이 길어지니,   내 죽음은, 우리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네.   그러나 이 고난은 알려져야 한다네.   동지, 이 고난은 알려져야 하고, 잊혀서도 안 되네. (VIII. 그 땅 이름은 후안이라네_425쪽)  “자, 이제 나가서 대통령께 자유를 달라고 해라.   그 양반이 네게 이 선물을 보낸 거거든”이라고 하더군.   몽둥이찜질을 당했지. 이 갈비뼈 그때 부러진 거야.   그런데 내 속은 옛날 그대로야, 동지.   죽이지 않고는 부러뜨릴 수 없는 게 우리지. (VIII. 그 땅 이름은 후안이라네 442~43)  나는 일개 시인이다. 나는 그대들 모두를 사랑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세계로 떠돌아다닌다.   내 나라에서는 광부들을 가두고   군인들이 판사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작은 추운 나라의   뿌리까지도 사랑한다.   죽어야 한다면, 천 번이라도   고국에서 죽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면, 천 번이라도   고국에서 태어나고 싶다.   [……]   광부, 어린 여자아이,   변호사, 어부,   인형 만드는 사람이 내게로 와서   함께 영화관에 들어가고   가장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러 가기를.   나는 그 어떤 것도 해결하러 오지 않았다.   네가 나와 함께 노래하도록   노래하러 왔다. (IX. 나무꾼이 잠에서 깨기를_481~82쪽)  나는 내 민중이 제공한 층계를 통해,   내 민중이 숨겨주는 동굴에서,   내 조국과 비둘기 날개 위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꾸고, 네 국경을 쳐부순다. (X. 도망자_505쪽)  지상의 어둠에서   밤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민초, 셀 수도 없는 민초이다.   내 노래는 침묵을 통과할   순수한 힘을 가졌고   어둠 속에서도 배태된다. (X. 도망자_508쪽)   나는 다른 책들이 나를 가두도록 글을 쓰지 않고,   백합을 열심히 배우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쓰지도 않는다.  대신 물과 달, 바꿀 수 없는 질서의 요소들,   학교, 빵과 포도주, 기타와 연장이 필요한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   민중을 위해 글을 쓴다. 비록 그들이   투박한 눈으로 내 시를 읽지 못한다 해도.   단 한 줄이, 내 인생을 뒤흔든 대기가   그들의 귀에 닿을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면 농부는 눈을 들 것이고   광부는 돌을 부수면서 미소 지을 것이고,   공장 직공은 이마를 훔칠 것이고,   어부는 파닥대면서 그의 손을 태울   물고기의 반짝임을 더 잘 볼 것이고,   갓 씻어 깨끗해진 정비공은 비누 향기 풍기면서   나의 시를 볼 것이고.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동지였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왕관이다. (XV. 나는_위대한 기쁨_685~87)  파블로 네루다 지음 / 고혜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732쪽  ======================== 3  말해줄래, 장미가 발가벗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그냥 그녀의 옷인지?  나무들은 왜 그들의  뿌리의 찬란함을 숨기지?        누가 도둑질하는 자동차의  후회를 들을까?  빗속에 서 있는 기차처럼  슬픈 게 이 세상에 또 있을까? 14  루비들은 석류 주스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했을까?  왜 목요일은 스스로를 설득해  금요일 다음에 오도록 하지 않을까?  청색이 태어났을 때  누가 기뻐서 소리쳤을까?  제비꽃들이 나타날 때  왜 땅은 슬퍼할까? 32  파블로 네루다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인생에 있을까?  콜롬비아 하늘에는  구름 수집가가 있나?  우산들의 집회들은 왜  항상 런던에서 열리지?  시바의 여왕은  색비름 색깔 피를 가졌었나?  보들레르가 울 때  그는 검은 눈물을 흘렸나?   ===================================== 시  /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을 때 ...... 시가 나를 찾아왔다. 모른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인지 나는 모른다. 아니다. 그건 누가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며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혼자 돌아오는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얼굴 없이 있는 나의 가슴을 움직였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熱(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한 내 나름대로 해보았다.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지.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다.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구부러진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지.           네루다의 시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생동이다”라고 정현종 시인은 말했다. 민용태 시인은 네루다 시의 생동감을 한 단어로 ‘열대성’ 또는 ‘다혈성’이라고 표현했다. 실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 폭우에 흠뻑 젖는 느낌, 강렬한 태양 아래 벌거벗고 선 느낌, 폭풍우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 그리고 빽빽한 밀림 속에서 공룡알로 누워 있는 느낌이 교차한다.       네루다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파란만장한 삶을 산 만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어렵지만, 1945년 7월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야말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7월 8일, 네루다는 산티아고의 카우폴리칸 경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칠레 공산당 입당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대는 나에게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를 주었다. / 그대는 나에게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힘을 보태주었다”라고 노래한 그의 시 는 바로 이 순간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공산당 입당 이후 그의 생애는 격동의 세월 그 자체였던 칠레의 역사와 더불어 영광과 고난의 길을 번갈아 걸어야만 했다. 시작은 대단한 박수갈채, 바로 그것이었다. 7월 15일 브라질 상파울루의 파카엥부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서 열린 공산주의 혁명가 프레스테스의 환영 집회에서 네루다는 시를 낭송했고, 그의 시는 대중의 가슴속을 활화산으로 만들었다. 이후 네루다가 가는 곳에는 대중과 시가 있었고, 열렬한 환호가 있었다.   네루다가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희생당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파시스트들에게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이미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파시스트들이 마드리드 밤거리에서 준동하고 있을 때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이 세력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여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무어인들, 팔랑헤 당원들과 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힘이었다”라며,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그의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이를 보면 네루다의 공산주의는 파시즘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사실상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에 대한 애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선택이 그를 평생 가시밭길로 걸어가게 했지만, 그는 그 선택을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1934년 12월 6일에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유명한 강연에서 로르카는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가장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네루다의 시가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에너지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루다가 살아온 환경과 풍토가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시로 되살아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 초입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년 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비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마치 케이프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네루다는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와 같은 삶을 살았고, 그 비와 같은 시를 썼다.   1904년 7월 12일,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인 파랄에서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당시 네루다의 어머니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노산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이 꽤 힘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출산하고 나서 두 달 후인 9월 14일 사망했다. 네루다는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해준 여인을 영영 알지 못했다. 네루다가 그토록 절절한 사랑의 시를 썼던 것의 근저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생전에 매우 친절한 여교사로 학생들에게 시와 작문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네루다는 어머니의 이런 면모를 닮았음에 틀림없다.   네루다의 아버지는 자갈 기차 기관사였다. 자갈 기차는 침목 사이에 자갈을 제때 채워주지 않으면 철로가 유실되기 때문에, 그 자갈을 나르는 기차를 말한다. 이런 자갈 기차에서 일하는 인부는 철인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거칠었다. 아버지가 귀가할 때마다 문이 흔들리고 집 전체가 진동했으며, 계단은 삐걱거렸고, 험한 목소리가 악취를 풍겼다. 이런 아버지가 자식을 홀로 키워야 했다면, 네루다의 어린 시절은 몹시도 험난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재혼했고, 새어머니는 상냥하고 온화했다.   어린 시절부터 네루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정심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은 누군가 상처 입은 고니 한 마리를 네루다에게 주었다. 네루다는 상처를 물로 씻어주고는 빵조각과 생선조각을 부리에 넣어주었는데, 고니는 모두 토해버렸다. 상처가 아물었는데도 고니는 네루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네루다는 고니를 고향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를 안고 강가로 갔다. 그러나 고니는 슬픈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20일 이상을 고니를 강으로 데려갔지만, 고니는 늘 너무도 얌전했고 네루다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니를 다시 데리고 집으로 오려고 안았는데, 고니의 목이 축 처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어린 소년은 고니를 통해 죽음을 맨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1915년 6월 3일, 네루다는 어떤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생애 첫 시를 썼다. 그는 새어머니에게 이 시를 바치기로 했다. 뮤즈의 첫 방문을 맞이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그는 부모님한테 가서 시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건성으로 읽어본 아버지가 “어디서 베꼈니?”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그때 처음으로 문학비평의 쓴맛을 보았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미 식을 줄 모르는 독서열로 밤낮을 거의 잊고 살 정도였다. 194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여성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그 고장의 여학교에 부임한 것은 네루다의 문학열을 더욱 부추기는 일이었다. 미스트랄은 네루다가 찾아갈 때마다 러시아 소설책을 주곤 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등의 소설을 읽은 네루다의 꿈은 자연스럽게 문학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시인을 꿈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미 학생시인으로서 필명을 날리고 있었던 때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노트를 창밖으로 던진 후 불태워버렸다. 네루다가 필명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이러한 탄압 때문이었다. 1920년 10월, 그는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을 빌리고, 파울로(바오로, 바울)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처음에는 단지 필명이었으나, 1946년도에는 아예 법적인 이름이 된다. 이 이름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1921년 산티아고의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입학한 네루다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의 창작열은 칠레의 자연만큼이나 왕성했다. 1923년 8월 그는 첫 시집 를 펴냈다. 20세가 안 되는 어린 시인의 가슴속에서는 맑고 투명한 정열이 샘솟고 있었다. “하느님, 당신은 하늘을 불 밝히는 이 놀라운 / 구릿빛 황혼을 어디서 찾으셨나요? / 황혼은 저 자신을 다시 기쁨으로 채우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와 같은 구절은 젊은 영혼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학창시절 네루다가 숭배했던 칠레 시인 페드로 프라도는 “확신컨대, 나는 이 땅에서 그 나이에 그만한 높이에 다다른 시인을 따로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칭찬은 네루다의 창작열을 더욱 북돋아 1년 만에 두 번째 시집 (1924)를 펴내게 한다. 이 시집이야말로 네루다를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인기 있는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흥분제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들끓게 하면서도, 관능적이고 오묘한 여성의 몸처럼 아늑하고도 화려한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고,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의 세계 속으로 깊이 파 들어간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이 내게서 달아났고 밤은 내 가슴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난 살아남기 위해 그대를 벼렸다, 무기처럼,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은 오고, 난 그대를 사랑한다. 가죽과, 이끼와, 단단하고 목마른 젖의 몸뚱이여. 아 젖가슴의 잔이여! 아 넋 잃은 눈망울이여! 아 불두덩의 장미여! 아 슬프고 느릿한 그대의 목소리여!   내 여인의 육체여, 나 언제까지나 그대의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으리. 나의 목마름, 끝없는 갈망, 막연한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뒤따르고, 고통이 한없이 계속되는 어두운 강 바닥이여. -  전문(김현균 역)   네루다의 문학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후의 작품 (1926) (1933)을 거쳐, 초현실주의의 걸작으로 주목 받은 (1935)까지 그야말로 네루다의 시적 행진은 쾌도난마 그 자체였다. 그 사이에 1926년 버마의 랑군(오늘날의 양곤)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면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등 견문을 넓혔다. 1935년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바르셀로나로 옮겨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것이 네루다를 공산당에 입당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도 역사의식을 가슴속 깊이 품게 되었고, 그 결과 (1950) 같은 총체적인 서사시를 생산해낸 것이다.         네루다처럼 떠돌이 삶을 오래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 거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끊임없이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혼인을 세 번이나 한 것도 보헤미안의 삶에 어울린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가 확고해지지만, 보헤미안으로서의 삶은 더욱 강화된다.   공산당에 입당하기 전 1945년 3월 4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네루다의 본격적인 정치 행보가 시작된다.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한 곤살레스 비델라 대통령이 공산당과 체결한 협약을 파기하자 파블로 네루다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1948년 1월 6일의 의회 연설은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네루다의 상원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2월 5일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영장을 발급한다. 네루다의 은둔생활 혹은 방랑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월 24일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네루다는 파리, 폴란드, 헝가리를 거쳐 멕시코에 체류한다. 세계 곳곳을 거쳐 1952년 카프리 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칠레 정부는 네루다의 체포영장을 철회한다. 1969년 칠레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네루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이듬해 살바도르 아옌데를 단일후보로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한다. 1970년 9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네루다는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된다.          네루다는 세계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 받으면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지만 수상의 영예는 쉽게 오지 않았다. 1971년 10월 21일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 해에 전립선암 수술을 해야 했고, 2년 후에는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1970년 7월 12일, 예순여섯 살 되는 생일에, 그는 의사인 친구 프란시스코 벨라스코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봐, 나 걱정거리가 있는데 말이야.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거든.” 벨라스코는 지금 즉시 산티아고 최고의 비뇨기과 의사를 찾아가라고 충고했다. 그는 전문의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언가 작은 종양이 하나 보이는데, 한 달 안으로 다시 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가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항상 용감했던 네루다였지만, 죽을 병에 대해서는 용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1973년 건강상의 이유로 대사직을 사임했으면서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에게 칠레 내전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운명의 때는 오고 있었다.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칠레 독립기념일인 9월 18일, 네루다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아내 마틸데는 구급차를 불러 네루다를 병원으로 옮겼다. 9월 20일 멕시코 대사가 와서 네루다에게 칠레를 떠나도록 설득했다. 네루다에게 바깥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고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아내 마틸데에게 말했다. “그자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어. 산산조각이 난 시신들을 건네주고 있다고. 노래하던  시詩 / 파블로 네루다  *칠레의 민중시인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렸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POETRY  And it was at that age...Poetry arrived  in search of me. I don't know, I don't know where  it came from, from winter or a river.  I don't know how or when,  no, they were not voices, they were not  words, nor silence,  but from a street I was summoned,  from the branches of night,  abruptly from the others,  among violent fires  or returning alone,  there I was without a face  and it touched me.  I did not know what to say, my mouth  had no way  with names  my eyes were blind,  and something started in my soul,  fever or forgotten wings,  and I made my own way,  deciphering  that fire  and I wrote the first faint line,  faint, without substance, pure  nonsense,  pure wisdom  of  someone who knows nothing,  and suddenly I saw  the heavens  unfastened  and open,  planets,  palpitating planations,  shadow perforated,  riddled  with arrows, fire and flowers,  the winding night, the universe.  And I, infinitesmal being,  drunk with the great starry  void,  likeness, image of  mystery,  I felt myself a pure part  of the abyss,  I wheeled with the stars,  my heart broke free on the open sky.    ................................................   사랑이여, 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격자 위로 포도넝쿨이 기어오르는 곳: 당신보다도 앞서 여름이 그 인동넝쿨을 타고 당신 침실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 방랑생활의 키스들은 온 세상을 떠돌았다: 아르메니아, 파낸 꿀 덩어리—: 실론, 초록 비둘기—: 그리고 오랜 참을성으로 낮과 밤을 분리해온 양자강. 그리고 이제 우리는 돌아간다, 내 사랑, 찰싹이는 바다를 건너 담벽을 향해 가는 두 마리 눈먼 새, 머나먼 봄의 둥지로 가는 그 새들처럼: 사랑은 쉼없이 항상 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삶은 담벽으로, 바다의 바위로 돌아간다: 우리의 키스들도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전문(정현종 역)   ............................................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에서)   ................................................   ※네루다 관련 알아보기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858   *정현종 시인이 옮긴 (문학동네, 2004), (문학동네, 2007)은 시집 특히 는 네루다가 세 번째 부인 마틸데에게 바친 사랑시를 모은 시집이다. 사랑을 꿈꾸고 있거나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에 진저리를 치고 있거나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 네루다의 목소리로 그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네루다의 산문 또한 시처럼 거침없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약 1년 동안 집필한 이 책은 시인이 가장 시인답게 쓴 자서전이다. 시대순으로 엮여 있긴 하지만 시인의 자유로운 기질이 한껏 살아 있는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뜻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어느덧 우리는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인간과 시대의 격랑 속으로 휘말려들고 만다. *스페인과 중남미 시인들의 시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민용태 시인의 (창작과비평사, 1995)를 권한다. 외국 시의 감동을 우리말로 살리기 위한 시인의 노력이 만들어낸 특별한 책이다. 이 책 속에서 네루다를 다시 읽어보라. 감동의 차원이 달라진다. 네루다 외에도 페데리코 카르시아 로르카, 세사르 바예호, 라몬 로페스 벨라르데, 올리베리오 히론도, 헤라르도 디에고, 마리아노 브룰, 비센테 우이도브로, 호세 후안 타블라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스페인어권 시문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시인들의 시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 [출처] 시詩 / 파블로 네루다 |작성자 마하maha  
1741    詩쓰는것이 돈벌이 된다면 어렵다는 말은 사라질것이다... 댓글:  조회:3604  추천:0  2016-11-01
[ 2016년 11월 01일 07시 20분 ]   후난(湖南)성 이장(宜章)현 츠스(赤石)향, 공중에서 바라본 루천(汝郴) 츠스(赤石)대교의 웅장한 모습 10월 27일 후난(湖南)성 이장(宜章)현 츠스(赤石)향, 공중에서 바라본 루천(汝郴) 츠스(赤石)대교의 웅장한 모습   교량 건설에서 7가지 "세계 제일(최고)"을 기록한 호남 여침고속도로 적석대교. ㅡ 호남성 상서주 길수시 왜채진에서.  좋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최동호  4. 새로움과 옛스러움  세상살이 변화가 격해질수록 옛 것은 빨리 사라져 간다. 옛 것을 돌이켜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격언은 이제 그 효용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모두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움에만 집착하는 것이 최근 사람들의 심적 동향이다.  '새 것 콤플렉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20세기 한국은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그 결과 20세기 말에는 경제적 도약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가 재빨리 버리고자 했던 것들 속에 사실은 오늘의 경제적 기적을 이루게 하는 문화적 코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해 볼 시점에도 이른 것이다.  이런 생각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자든가 과거의 것이 좋다는 폐쇄적 보수주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 새로워지려면 과거로부터 우리의 문화적·정신적 뿌리로부터 새로움이 터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과거의 것이 과거 그 자체로 되풀이될 때 그것은 새로움을 추동하기보다는 과거의 속박이 될 것이요, 새로움이 새로움 그 자체일 뿐일 때 그것은 알맹이 없는 새 껍데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음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 소재가 옛스러운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옛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시를 쓰고 싶은 시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옛스러움을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옛스러움의 고착성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귀향]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사람들은 이토록 슬픈 눈이 내리면  시골집의 난로와 따뜻한 아랫목을 이야기한다.  토끼몰이나 눈썰매 타던 일을 자랑하며 마음속에 고향의 난로를  다시 피우는 것이다.  쌓인 눈을 털어 내고  낡은 문을 열면 어머니가 반가이 맞아 주신다고,  옛날 나의 집 사립문은 늘 열려 있었다.  눈 내리는 날은  저 쌓인 눈을 밟고 반가이 가족이름을 부르며  누군가 와 주기를 얼마나 목메었던가?  몇 마리 까치가 울고  매서운 바람이 늙은 소나무 위로 넘어가면  눈 내리는 나의 하루는 그리움으로 저물어  땟국물 절은 이불 속으로 야윈 몸을 숨긴다.  - [귀향]  위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이 시가 초고속통신망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오늘날에 쓰여진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다. 먼 옛날 전설의 고향 시대의 추억 한 토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위의 시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과거는 모두 아름답다는 회고적 성향 때문일까. 또는 현실에 패배하고 과거로 복귀하려는 퇴행적 사고 때문일까.  어떻든 이런 소재를 가지고도 위의 시가 가진 정태적 복고 취향이 아닌 시골 풍경을 어떻게 살려내는가가 우리들의 관심사이다. 우선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위의 시의 작자가 독자에게 심정적 호소를 매우 직접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 1 연의 '이토록 슬픈 눈', 제 2연의 '얼마나 목메었던가', 제 3연의 '그리움으로 저물어' 등등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나 이유보다는 당연히 모두 그럴 것이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서술된 것들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오늘의 독자들은 왜 '이토록 슬픈 눈'이 내리는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혼자만의 슬픔이라면 모르지만, 시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슬픔을 공감하도록 할 때 하나의 작품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슬픔으로 인식될 때 슬픔은 그 슬픔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작자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의 서두에서 '고향의 난로'를 피워 놓았다. 시골집의 사립문은 늘 열려 있다고, 누군가로부터 이름 불리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저물어 가는 하루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움을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움은 그러므로 작자는 '목메이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을 위한 서술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움을 말하고 표현하는 방법의 상투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좀더 개성적이기 위해서는 '쌓인 눈', '낡은 문', '매서운 바람', '늙은 소나무' 등의 관형어구들 또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따져 읽어보면, 누구나 감지할 것이다. 이러한 관형적 표현들에서 우리는 새로움보다는 고착된 과거의 정서를 느끼는 동시에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기다림 또한 진부한 기다림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땟국물 절은 이불'에서 작자는 조금 고심했을 것이다. 삶의 땀냄새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좋을지 나쁠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오히려, 나에게 말하라면 이런 표현들이 좀더 적극적이고 생동감 있게 살아나야 된다고 지적하고 싶다. 누군가를 소리내어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부름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그리움으로 자신을 야위게 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좀더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이러한 소재나 그 속에 담긴 그리움 그 자체는 그것대로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작자의 고심과 처리 능력에 따라 새로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두들기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시골집을 떠올리고 고향 난로와 더불어 그리움을 말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낡은 것도 아니다. 선배 시인들이 많이 다루었을 법한 소재를 자기 발전이 없이 그들의 상당수가 사용한 어법 그대로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인해 옛스러움의 품격을 살려내지 못하고, 퇴행적 상투성으로 마무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귀향]에서 읽을 수 있는 기다림을 간직한 작자에게 우리는 인간적 신뢰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신뢰가 농촌 공동체 시대에 통용되었던 인간적 유대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시의 작자에게 어머니와 가족이 없다면 어떠할까. 아마도 그것이 새로운 시대 우리들의 시적 화두가 될 것이다.  5. 시 쓰기의 괴로움과 즐거움  위에서 우리는 가급적 비판적 시각에서 몇 가지 예를 검토해 보았다. 위의 시를 썼던 분들에게는 아마도 지나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만큼 시적 감정을 정돈하고 마무리한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시를 써 본 사람들의 시 쓰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 쓰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말이 아닐까. 아마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변명을 후자 쪽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간단하다.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연습량이 문제이다. 불면의 밤들을 보내지 않고, 남을 흉내내어 한 두 번 시도하다 안되면 잘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시 쓰기가 출세의 수단이 되거나 돈벌이의 방법이 된다면 어렵다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전념한다 하더라도 쉽게 좋은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방황과 좌절에 빠지기도 할 것이며, 때로는 스스로 흥분하여 환호작약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쓰기는 그것이 어떤 세속적 보상과 관련이 없다는 점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방 보상이 주어지는 일이라면 누구나 쉽게 매달릴 것이지만, 동시에 또한 싫증나기도 쉬울 것이다.  세속적 보상도 없고, 뜻대로 잘 되지도 않지만, 끝내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 시 쓰기에 자기 생존을 건다면, 그는 분명히 좋은 시를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칭찬보다는 웬만한 비판과 질책에도 끄덕도 하지 않는 강한 의지가 발동할 때 그 사람의 시 쓰기는 제대로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1942∼ )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 한 중년 신사가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자동차를 타고 있는지, 전철을 타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심히 한강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얼음 조각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얼음 조각들이 마치 아래의 자잘한 물살들을 품어주는 커다란 등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커다란 등. 그것은 이 중년 신사에게 몹시 익숙한,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를 불러왔다. 어린 시절의 그는 외풍이 심한 집에 살았지만 추운 겨울에도 아버지의 체온으로 따뜻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억이 떠오르면서, 한강이 순식간에 아버지로 변신하는 부분은 참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 덕택에 중년의 신사는 오늘의 한강교 위에서 다시금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마법 같은 회상의 순간은 중년 신사의 건조한 일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가 아들의 언 발을 녹여 줬던 것처럼 말이다. 부자들만 유산이 있을까. 한강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아들은 좋은 기억, 훌륭한 유산을 받았다. 
1740    조기천시인과 김철시인 댓글:  조회:4294  추천:0  2016-11-01
   나는 학창시절 조기천의 시를 몹시 사랑했었다. 전투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의 정서, 가슴을 활짝 열고 창공에 대고 울부짖는 듯한 강한 시어와 탱탱한 시행, 그의 시를 읊으면서 나의 미래를 꿈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유명한 시인과 만나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일. 뜻밖의 일도 가끔 있는 법, 나는 그 상봉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투가 끝난 다음 우리는 계속하여 신작로를 따라 함흥 쪽으로 강행군을 하였다. 이날 밤 새벽, 날이 푸르무레해지자 우리선발부대는 함흥에서 멀지 않은 한 나지막한 민둥산 밑의 초가집에서 잠시 묵기로 하였다. 이 산에는 양산처럼 푹 퍼진 소나무가 우거져서 적의 공습을 피하기엔 안성맞춤 했다. 당시 낮이면 공습이 심해서 대부대가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의 공군부대가 아직 출동 못하는 형편에서 하늘은 몽땅 미군 세상이었다. 그때 제일 무서운 것이 B29 폭격기와 《쌕쌔기》라는 전투기였다. B29는 한번 폭격을 한다 하면 밀대를 놓아서 사람들은 이를 《담요 펴기》 폭격이라 했고 저공을 쌕쌕거리며 날아다니는 전투기는 길가의 소 한 마리만 보이도 기관포를 마구 쏘아대는 판이다. 마을이란 마을은 죄다 폭격에 날아나고 폐허가 되었는데 여기 소나무숲 속의 초가집 한 채 만이 요행 살아남아있었다. 헌데 주인은 피란가고 집안은 팅 비어 있었다.    우리 군부가 이집에 들었다. 전체 관병은 소나무 밑에 자리를 마련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전사들은 모두 제가끔 소나무 밑이나 바위 밑의 눈을 쓸고 그 우에다 소나무가지들을 꺾어다 펴고는 10여명이 한패씩 두 줄로 나뉘어 서로의 발을 상대방의 바짓가랑이에 넣고 누운 다음 그 우에 외투를 덮고 털모자를 꽁꽁 쓰고는 누웠다. 공습 때문에 모닥불은 피우지 못하고 온밤을 떨고만 있었다.    병사들이 단잠에 노그라졌을 때 눈은 계속 내려 잠자는 그들 위에 흰 이불을 덮어주었다. 온몸이 눈에 덮였는데 유독 코와 입에서만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때 군단사령부에서는 군단장과 정치위원이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군단장은 나이 50이 다되었는데도 키가 작고 똘랑똘랑해서 《꼬마군장》이라고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는 성질이 급해서 《콩밭에서 두부를 찾고》 욕부터 앞세우는 사람이지만 정치위원은 그와는 상반대로 성질이 느긋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한번 끔쩍 안하는 천하태평이었다. 그들은 군용지도를 펼쳐놓고 내일의 행군계획을 상의하였다. 우리 군단장은 한평생을 군대에서 지내다보니 지도 한 장만 펼쳐들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그만큼 지도에는 귀신이었다.    이때 밖에서 왁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좀 쉬어가자구.》  한패의 인민군 장교들이 들어왔다.  《어 추워, 미안합니다. 좀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 쪽의 동의도 없이 척척 들어와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끼워 앉았다.   바지에는 두 줄의 굵은 붉은 줄이 있는걸 보아 사단장이나 군단장쯤 되어보였다.   《지원군아저씨들이구만, 여기 통역이 없나요?》  당시 나는 군단 사령부 통역이었다. 내가 통역이라고 하니 그들은 반색했다.   《마침 잘 됐군, 이분들에게 말씀해 주어요. 우리는 저 낙동강일선에서 후퇴해오는 인민군인데 우리를  지원해주어 고맙다고요.》  나는  이 뜻을 통역하였다. 나는 지금도 한어가 그닥지 않는데 그때는 더구나 형편없었다.  《전사들에게 휴식하라는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군단장동지!》  부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문을 떼고 밖에서 깎듯이 거수경계를 하면서 보고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도 군단사령부 소속 인원인줄 알았다.  《좋소, 가서 소주 좀 가져와.》  《옛! 알았습니다.》  잠시 후에 그 부관이 군용물통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자, 우리 한잔 합시다.》  군단장은 몹시 시원시원한 분 같았다. 물통 덮개로 몇 순배를 돌렸다. 춥고 빈속에 소주가 들어가니 찡해났다. 물론 안주라곤 손가락 빠는 수밖에 없었다. 몇 순배 돌자 모두들 거나해졌다.   《시인선생, 시나 한수 읊어보지.》  군단장은 기분이 좋아서 한 분에게 이렇게 청을 들었다.   (시인?) 나는 귀가 벌쭉해졌다. 그때 물론 시인은 아니었지만 나는 시를 무척 사랑했고 장차 시인이 되어보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읊으라면 읊지요.》  키가 좀 후리후리하고 너부죽한 얼굴에 흰 테 안경을 쓴 사람이 쾌히 응낙하였다.   《저 분이 누구신데요?》 나는 곁에 앉은 군관에게 물었다.   《유명한 조기천선생이지요.》   《예 조기천?》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가장 흠모하던 조기천선생이 바로 저 분이란 말인가. 바로 그 전날 일이였다. 우리 부대가 반격을 개시했을 때 도망치던 미군이 한 마을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는데 우리 병사들이 달려들어 불을 끄는데 나는 어느 한 집의 무너진 담벽 밑에서 시집 한권을 발견했다. 보니 그것이 바로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이었다. 나는 보배라도 얻은 듯이 그 책을 주워 들고는 불에 달린 한쪽 모서리를 문질러 껐다. 그리고는 행군하면서 단숨에 내리읽었다. 밤에 잘 때도 그 책을 읽고파 공습이 무서워서 외투로 손전지불을 가리고 한 줄 한 줄 읽었다. 나는 조기천을 마음속으로 몹시 숭배하였다. 헌데 그런 성인 같은 사람이 문뜩 내 눈 앞에 나타날 줄이야! 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칫하면 소리를 칠 번했다.    조기천선생은 당시 종군기자로 전선에 나가 있다가 부대와 함께 후퇴하는 중이였다. 그도 꽤나 술을 좋아하는 편이였다.    《자, 문을 여시오.》 조기천선생은 눈을 지긋이 감고 명상에 잠기였다.    밖에서는 함박눈이 소리 없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린다. 고요히 내린다…》 그는 즉흥시를 조용히 읊기 시작하였다. 곁에 앉았던 한 젊은 군관이 급히 종이를 꺼내더니 그의 즉흥시를 받아 적는다. 그의 정서는 내리는 함박눈처럼 조용하기도 하고 가열한 전투의 순간처럼 격정이 터지기도 하였다. 대하의 흐름처럼 읊어 내리는 즉흥시, 과연 천재는 틀림이 없었다. 군소리하나 없이, 막히는데 하나 없이 술술 쏟아지는 시구. 온 방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시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격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후에 신문에 실려서 안 일이지만 그때 읊은 즉흥시가 바로 유명한 시 《조선은 싸운다》였다.    나는 그날의 감격을 조금도 잊을 수 없다. 내가 그렇게도  흠모하던 시인, 더구나 명인상봉이란 각별한 뜻을 갖는 것이 아닐 가. 그때로부터 나는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 길은 아주 좋은 창작시간이었다. 걸으면서 구상하고 쉴 짬에 적어놓고 나는 거의 시에 미쳐버렸다. 걸으면서도 뭘 자꾸 중얼거리니까 친구들은 혹 내가 정신이라도 잘못 되었나 해서 의아쩍게 바라보군 하였다. 그 어려운 싸움의 나날에도 남은, 특히는 노병들은 되도록 가벼운 행장으로 행군을 했지만 나의 배낭만은 언제나 불룩해 있었다. 그래서 노병들은 나를 농민의 보수사상이라고 골려주었다. 그 후 나는 그걸 시집으로 묶었다. 물론 출판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누런 포장지 같은 종이를 사다가 정히 책을 매서 거기에 활자처럼 정자로 적어놓고 첫 폐지에다는  내 사진을 찍어 붙여놓고 《저자상》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칼라사진이 없어 흑백에다 물감을 칠해 붙인 것이 지금도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출처] 제43편(전쟁편) 조기천시인과의 뜻 깊은 상봉|작성자 bjjinzhe    
1739    백두산은 말한다... 댓글:  조회:4029  추천:0  2016-11-01
                                          조기천의 서사시『백두산』 1. 조기천의 생애  분단이후 북한 문학사가 "평화적 건설시기"(1945. 8-1950. 6)의 걸작으로 꼽고있는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강승한의 서사시 『한라산』과 함께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이 서사시는 비단 이 시기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분단시대의 북한문학 전시기를 통틀어서도 이념적 경직성이 지나치지 않는 8·15직후의 빈약했던 우리 문학가에서 드물게 보는 성과로 평가받을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1970년대를 전후해서 본격화된 주체이념의 유일사상화 시기를 북한문학의 이해와 평가의 시대적 분수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방법론인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도 『백두산』은 오히려 주체사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예술작품이 지닌 그 부정적 측면을 잘 극복한 뛰어난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 조기천은 1913년 11월 6일 함경북도 회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내 시베리아로 이주해 갔다. 소련에서 그는 소년시절부터 지방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짤막한 시들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옴스끄의 고리끼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앙 아시아 끄실 오르따 조선사범대학에서 약2년간 교직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8·15때 조기천은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왔던 소련군에 참여했다가 이내 북한으로 오게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북한 문단의 구성요인이었던 재북·월북파,연안파,소련파 등의 구분에 따르면 소련파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조기천은『조선신무넬에서 일하면서 1946년 3월 서정시「두만강」을 발표하여 처음 시인으로서의 얼굴을 나타낸다. 이 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수난받는 민중상과 항일투사들의 투지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8·15의 감격을 노래한「울밑대에서 부른 노래」,토지개혁을 읊은「땅의 노래」등을 거쳐 1947년 『백두산』을 쓰게된다.  소련파였던 조기천이 이 시기에 가장 먼저 항일유격전을 소재로 하여 김일성을 부각시키는 작품에 손을 댄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으나 어쨌건 이 시로써 그는 일약 북한문단의 일급으로 부상한다. 1948년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항쟁의 려수」를 발표하여 그는 북한당국으로부터 공로메달을 받았는가 하면 8·15기념예술축전에서 연 세 번이나 수석 표창을 받았다고 전한다.   1949년 여름에는 휴가를 이용하여 흥남인민공장을 방문하여 약20일간 노동자들과 함께 한 체험을 바탕삼아 1950년6월에 장편 서사시『생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2개년 경제계획에 나서도록 노동자들을 독려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6·25가 일어나자 조기천은 9월에 종군작가로 나서서 낙동강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중에 저 유명한「조선은 싸운다」를 비롯하여「불타는 거리에서」「죽음을 우너수에게」「나의 고지」등 시작품을 썼다. 특히 "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로 시작되는「조선은 싸운다」는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지도에서 도시와 마을은 폭격으로 불타고 없으니 찾지 말아라는 이 시는 선전과 서정이 조화된 반전시로 세계문학사에 알려져 있다.  1951년 3월 조기천은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피선된다. 그 해 5월 그에게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이 수여되기도 한다. 그 두 달 뒤인 7월 31일 조기천은 39세로 평양에서 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품 속에서는 유고『비행기 사냥군』이란 서정서사시가 있어 사후에 발표되었다고 전한다.  조기천의 생애는 짧았기에 북한의 어떤 정치적 격변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애국적 시인"으로 남았고, 또한 그의 작품활동 기간은 "평화적 건설시기"와 "위대한 조국 해방전쟁시기"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기천은『생의 노래』에서 투철한 자신의 문학관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소련 시절부터 익혔던 사회주의 미학관의 한 표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엔 시가를 풍월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화조월석을 찾았고 초로인생을 설어했는가?   그래서 그들에겐 외적의 나팔소리보다 꾀꼬리소리 더 높이 들리었고 달이 둥그는 걸 잘 알았는가?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병든 마음을 파고들며 인생의 비애를 찬미하며--   무엇 때문이었느냐? 지는 곷이 서러웠드냐? 조선의 가슴에 일제의 칼이 박혔는데-- -『생의 노래』에서   8·15뒤 북한문학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창조를 그 바탕으로 삼으면서 민족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는데 비록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낸 조기천 일지언정 이런 원칙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던성 싶다.  2.『백두산』의 주제로서의 보천보 전투  8·15직후 남북한은 문학적으로 다 일제잔재 청산과 새 사회 건설을 위한 완전독립을 이루려는 반외세운동 등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친일파에 대한 처벌문제와 반제·반봉건 의식의 문학이 가장 긴박한 과제로 등장했으며 이를 다룬 작품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남북한에서 다 토지문제를 다룬 작품이 상당량에 이르며 그 뒤로 오면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탐구를 주로 다루는 한국문학과 사회주의 개혁의지를 다룬 북한 문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조기천의 『백두산』은 바로 그 갈림길에 이르는 길목에 있으면서 그 당시로서는 직접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항일빨치산을 소재로 했다는데서 이 시인의 특이한 역사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서사시의 소재인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항일투쟁사에서 여러 각도에 걸쳐 고찰된 것이 많은데 최근 소개된 와다 하루키(和母春樹)의「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사회와 사상』1988.11-12 연재)에 따르면 조국광복회 조직이 시작되면서 국내로까지 손을 뻗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지휘자는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커민테른 제7차대회의 새방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의 힘으로 조선독립투쟁을 수행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져 3개사가 공동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입안하게 된 것이라고 와다 교수는 보고 있다.  즉 제6사는 장백에서 보천보를 공격하고, 제4사는 무송-안도-화룡으로 돌아서서 조선의 무산을 치며, 제2사는 임진강 일대에서 장백으로 향하도록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제안은 김일성이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적으로 간삼봉(間三峯)에서 만나기로 한 이 3개사 합동작전은 제4사의 최현의 이름을 유명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의 제6사는 근대 민족해방 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북한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하 와다 교수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김일성의 제6사는 무산에서의 행동을 통보받고 6월 4일밤, 100여명이 강을 건너고, 대안에서 조국광복회 청년 80여 명과 합류하여 보천면 보전(保田)을 공격했다. 보건은 일본인 26호, 조선인 280호, 중국인 2호, 합계 308호인 소읍으로서 조재소에는 5명의 경관이 있었다. 이 주재소를 비롯하여 면사무소·삼림구(森林區)·우체국·관공서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부대는 〈10강령〉의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철수할 때 혜산서(署)의 오가와(大川)의 경부가 이끄는 병력의 추격을 받자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물러갔다.  보천보 작전을 성공리에 끝마친 제6사는 장백의 밀영으로 일단 철수했다가 제4사·제2사의 도착을 기다려 간삼봉으로 이동했다. 총인원 400이라고도 하고 600이라고도 한다. 그 사이 조선 침입사건으로 초조해진 일본군은 함흥의 제74연대를 김석원 소좌의 지휘하에 출동시켜 국경 일대의 토벌전을 시도했다. 이 군대에 6월 30일, 간삼봉에서 기다리고 있던 3사 연합군의 타격을 가했다. (『사회와 사상』1988. 11. 187쪽)   이어 와다 교수는 이 사건으로 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원이 일제 기관에 의하여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쓴다. (보다 자세한 자료는 남현우 엮음『항일무장 투쟁사』대동, 253-266쪽 참고)  이 1937년 6월4일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조기천의 『백두산』으로 이는 북한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많은 예술작품이 다뤄온 역사적인 한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조기천의 『백두산』은 이 보천보 사건을 다루면서도 결코 이 사건 하나만에 국한시키지 않는 항일빨치산 투쟁의 보편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서가고 있다. 즉 이 시에서는 김을 비롯한 몇몇 고유명사만 빼면 어떤 특수한 사건이 아닌 항일 투쟁의 민족적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했다고 풀이한다. 예술적인 일반화를 시도하려는 동기에서 이 시는 사건발생의 명확한 연도와 지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예컨데 H시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웅주의를 벗어난 영웅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민족적으로 일반화된 민중주체의 항일투쟁을 전형화 시킨다는 의도로 평범한 농민투사들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김만은 예외적 구상으로 이뤄져 있다.  3.『백두산』의 구성과 특징 머리시와 1-7장에다 맺음시로 이루어져 있는『백두산』은 조기천 자신의 서정시「두만강」을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즉「두만강」에 나오는 국토와 민족애가 『백두산』에 그대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째진 가난 속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리랴 겁내며/ 눈물에 치마고름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주이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여인이 아닌가?"(「두만강」)에 나타난 여인상이 그대로『백두산』의 꽃분이로 승화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의 민족문학에 나타난 여인상은 모두가 꽃분이일 수밖에 없다는 민족적 보편성이 성립할 소지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보편성을 먼저 내세우느냐 하면 분단 44년이 지나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지만 민족문학사의 긴 뿌리에서 본다면 결국은 동질성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대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백두산』의 모든 인물들은 근대 이후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반성을 지닌 인간상이 아닐까? 예컨데 꽃분이는 가난 속에서 민족의식을 지닌 채 자라나 빨치산 활동에 투신하여 박철호와 위험을 무릎 쓰고 항일선전 및 무장투쟁에 까지 가담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박철호가 죽어간 뒤에도 미래의 조국 건설을 위한 후비대로 눈물을 삼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한 여인상의 고난은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너무나 많은 변형으로 나타난다. 신동엽의 시에서는 아사녀로 상징되며, 소월의 시에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님을 보내드리는 그 여인상 모두가 우리의 꽃분이가 아닐까.  『백두산』은 그 앞머리부터 역사적인 현실성으로서의 평범성(곧 민중성)과 초자연적인 영웅성이 조화를 이룬 채 장엄하게 묘사된다. 이 조화로운 자연묘사는 영웅주의와 민중성을 하나의 역사적 진보의 작용으로 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 나타난 영웅상은 한 개인적인 위대성의 표현이 아니라 집단적 영웅상으로 그려진다. 물론 시에는 김을 그 정점으로 삼아 짤막하나마 초인화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다른 빨치산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홀로인 영웅주의로 우뚝 솟은 인물로 부각된 것은 아니다.  민중적 영웅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적 구도로 『백두산』은 가장 민중적 형식인 구비문학의 각종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는 철저한 전통적 민중성을 혁명의 기초로 삼으려는 의도된 문학적 형식이기도 한데 민요조로 이루어진 가락은 독자들에게 한결 친근감을 준다.  시적 사건 전개방법은 오히려 극히 단조롭다. 아내를 일본인에게 잃은 김운칠은 혜산에서 솔개 마을로 옮겨와 화전농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딸 꽃분이는 조선광복회 회원일시 분명한 박철호가 정치공작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왔을 때 그에게서 1년동안 지도를 받는다. (2장) 꽃분이와 철호는 유인물을 만들다 일본경찰에게 들킬뻔 했으나 꽃분의 기지로 위기를 넘긴다. (3장) 임무를 끝낸 철호는 16세 소년 영남이와 떠났으나 압록강을 건너다 영남은 사살되고 만다. (5장) 이미 국내에 조직되어 있는 과옥회 회원들과 연계하여 잠입한 빨치산은 쉽게 폭동에 성공한 후 각종 정치사업을 끝내고는 물러간다. 폭동 성공은 물론 꽃분이와 철호가 그 앞장을 선다. (6장) 그러나 압록강 뗏목을 타고 국경을 넘어가던 중 철호와 청년빨치산 중 가장 용감했던 석준이 총에 맞아 전사한다. (7장)  이미 밝힌 것처럼 보천보 전투를 그대로 묘사하면서도 특정 지명을 쓰지 않은 것은 항일투쟁의 보편성을 전형화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투쟁의 전형성은 먼저 투철한 조직의 부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H시에 들어온 빨치산들은 이미 만들어진 조직을 통하여 힘들이지 않고 잠입하여 쉽게 폭동을 일으킨 후 여유있게 물러간다. 그리고 이런 힘이 원천을 이 시에서는 민중의 편에 선 민중을 위한 조직으로 풀이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인 제4장은 나흘째 굶은 빨치산 대원들이 소 두 마리를 끌고 오자 그 소가 일본의 것이 아닌 조선과 중국 농민의 것임을 알고는 되돌려 주려다 실패하곤 그 대가라도 치뤄야 한다는 철의 규율이 나오는 대목이다. 제4장의 5절에 나오는 민중성의 강조는 근대이래 우리 민족문학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구절이다.  항일빨치산이 지닌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하여 『백두산』의 맺음시는 "그러면 백두야/ 조선의 산아 말하라!/ 오늘은 무엇을 보느냐?/ 오늘은 누구를 보느냐?"고 묻도록 만든다. 바로 8·15직후의 한반도로 항일의 의지를 끌어들여 역사적 진로를 모색코자 하면서 이시는 끝난다. 물론 문학의 당시 입장이 선명하게 스며있다, 그러나 8·15직후의 북한 입장이란 오늘의 분단고직화 시대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자유의 나라!/ 독립의 나라!/ 인민의 나라!/ 백두산은 이렇게 외친다!/ 백성은 이렇게 외친다!"는 마지막 구절은 당시 남북한 어디에도 들어맞는 말이었기도 하다.  이래서『백두산』은 분단시대 초기의 남북한 이질화가 옹고되기 이전의 동질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서사시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일제 식민지 아래서의 구체적인 민중적 삶의 실체가 좀 약하다든가 하는 나대로의 비판이 따를 수도 있지만 8·15직후의 작품수준을 감안할 때 우리 문학의 수확인 점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흰 바위에 앉아서(외1수)        *조기천  나는 개울물과 이야기하노라  바위에 바위 돌에 돌을 지나  구름인양 내리는 개울물  딩굴어 달리며 쫓으며  무삼 이야기 그리도 기쁘뇨?  골짜기를 지나 바위를 뚫고  이곳까지 밤낮 달리였노라  어려운 앞길이 천리 또 천리  그래도 어느 때나 웃어 떠들며  한갖 믿음으로 깊어 흐르겠노라----  맑은 물줄기여  나도 너처럼 씩씩하리라  또 싸움의 길에 낭떠러지가 있으면  떨어져서 천야만야 창창 떨어져서  산산이 부서져야 된다면  내 서슴없이 뛰여들리라!  어느 때나 인민을 위해  너처럼 내 살리라  맑게  쟁쟁하게  줄기차게---  흰 바위에 앉아서  나는 개울물과 이야기하노라  --------------------------  휘파람                                 조기천   오늘 저녁에도 휘파람 불었다오   복순이네 집앞을 지나며   벌써 몇 달째 휘파람 부는데   휘휘 ... 호호 ...   그리도 그는 몰라준다오      날마다 직장에서 보건만   보고도 다시나 못볼 듯   가슴 속엔 불이 붙소   보고도 또 보고 싶으니   참 이 일을 어찌하오      오늘도 생긋 웃으며   작업량 삼백은 넘쳤다고   글쎄 삼백은 부럽지도 않아   나도 그보다 못하진 않다오      그래도 그 웃음은 참 부러워   어쩌면 그리도 맑을가      한번은 구락부에서   나더러 무슨 휘파람 그리 부느냐고   복순이 웃으며 물었소   난 그만 더워서 분다고 말했다오   그러니 이젠 휘파람만 불 수밖에 ...      몇 달이고 이렇게 부노라면 ...   그도 정녕 알아 주리라!   이 밤도 이미 늦었는데   나는 학습 재료 뒤적이며   휘휘 ... 호호 ...      그가 알아줄가?  --------------------------------  〈주체문학의 거성들-4-〉 조기천(1913.11.6∼1951.7.31)  시대와 함께 산 열혈시인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없는 웃음에도  격파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  천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  곰팽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듯 고루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머리시에서)    장편서사시《백두산》(1947년)은 20세기 조선문학의 최대명작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혁명시인 조기천은 언제나 사색하고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것을 좌우명으로 한 열혈시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멀리 씨비리로 간 그는 조국해방과 함께 귀국하였다.    광복된 조국땅의 자유로운 현실과 밝은 미래를 시《두만강》(1946년)에서, 광복의 감격을 《을밀대에서 부른 노래》(1946년)에서, 력사적인 토지개혁을 《땅의 노래》(1946년)에서, 장편서사시《백두산》에서는 광복의 해빛을 삼천리강토에 비치여 개선하신 백두산의 호랑이 청년영웅을 격조높이 노래하였다. 남녘의 군민항쟁을 련시《항쟁의 려수》(1949년)에, 새조국건설에 나선 로동계급의 영웅적투쟁을 장편서사시《생의 노래》(1950년)에 담았다.    조국해방전쟁시기 군복을 입고 락동강계선까지 간 시인은 《조선은 싸운다》, 《나의 고지》, 《불타는 거리에서》, 《죽음을 원쑤에게》 등의 전투적시작품들을 창작하였다.    1951년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조직되자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대동강반에 자리잡은 작가동맹의 청사에서 서사시《비행기사냥군》을 집필하다가 붓을 둔채 미제의 폭격에 의해 희생되였다.    광복후 그의 창작생활은 불과 6년이다. 그러나 그가 시문학발전에 남긴 업적은 너무나도 크다. 변천된 새로운 현실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열정적인 시인이였을뿐아니라 전투적기백과 높은 열정, 풍부하고 세련된 언어로 시 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다른 나라말로 번역되여 널리 애독되고있다. 일본에서도 서사시《백두산》은 번역출판되고있다.(허남기역, 1952년 ハト書房, 1974년 太平洋出版社, 1987년 レンガ書房新社 조기천의 서사시 1. 조기천의 생애 분단이후 북한 문학사가 "평화적 건설시기"(1945. 8-1950. 6)의 걸작으로 꼽고있는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은 제주 4·3사건을 다룬 강승한의 서사시 『한라산』과 함께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이 서사시는 비단 이 시기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분단시대의 북한문학 전시기를 통틀어서도 이념적 경직성이 지나치지 않는 8·15직후의 빈약했던 우리 문학가에서 드물게 보는 성과로 평가받을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1970년대를 전후해서 본격화된 주체이념의 유일사상화 시기를 북한문학의 이해와 평가의 시대적 분수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방법론인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도 『백두산』은 오히려 주체사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예술작품이 지닌 그 부정적 측면을 잘 극복한 뛰어난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 조기천은 1913년 11월 6일 함경북도 회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내 시베리아로 이주해 갔다. 소련에서 그는 소년시절부터 지방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짤막한 시들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옴스끄의 고리끼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앙 아시아 끄실 오르따 조선사범대학에서 약2년간 교직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8·15때 조기천은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왔던 소련군에 참여했다가 이내 북한으로 오게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북한 문단의 구성요인이었던 재북·월북파,연안파,소련파 등의 구분에 따르면 소련파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조기천은『조선신무넬에서 일하면서 1946년 3월 서정시「두만강」을 발표하여 처음 시인으로서의 얼굴을 나타낸다. 이 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수난받는 민중상과 항일투사들의 투지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8·15의 감격을 노래한「울밑대에서 부른 노래」,토지개혁을 읊은「땅의 노래」등을 거쳐 1947년 『백두산』을 쓰게된다. 소련파였던 조기천이 이 시기에 가장 먼저 항일유격전을 소재로 하여 김일성을 부각시키는 작품에 손을 댄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으나 어쨌건 이 시로써 그는 일약 북한문단의 일급으로 부상한다. 1948년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항쟁의 려수」를 발표하여 그는 북한당국으로부터 공로메달을 받았는가 하면 8·15기념예술축전에서 연 세 번이나 수석 표창을 받았다고 전한다. 1949년 여름에는 휴가를 이용하여 흥남인민공장을 방문하여 약20일간 노동자들과 함께 한 체험을 바탕삼아 1950년6월에 장편 서사시『생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2개년 경제계획에 나서도록 노동자들을 독려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6·25가 일어나자 조기천은 9월에 종군작가로 나서서 낙동강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중에 저 유명한「조선은 싸운다」를 비롯하여「불타는 거리에서」「죽음을 우너수에게」「나의 고지」등 시작품을 썼다. 특히 "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로 시작되는「조선은 싸운다」는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지도에서 도시와 마을은 폭격으로 불타고 없으니 찾지 말아라는 이 시는 선전과 서정이 조화된 반전시로 세계문학사에 알려져 있다. 1951년 3월 조기천은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피선된다. 그 해 5월 그에게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이 수여되기도 한다. 그 두 달 뒤인 7월 31일 조기천은 39세로 평양에서 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품 속에서는 유고『비행기 사냥군』이란 서정서사시가 있어 사후에 발표되었다고 전한다. 조기천의 생애는 짧았기에 북한의 어떤 정치적 격변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애국적 시인"으로 남았고, 또한 그의 작품활동 기간은 "평화적 건설시기"와 "위대한 조국 해방전쟁시기"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기천은『생의 노래』에서 투철한 자신의 문학관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소련 시절부터 익혔던 사회주의 미학관의 한 표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옛날엔/ 시가를 풍월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화조월석을 찾았고/ 초로인생을 설어했는가?/ 그래서 그들에겐/ 외적의 나팔소리보다/ 꾀꼬리소리 더 높이 들리었고/ 달이 둥그는 걸 잘 알았는가?/ 시인이라 자처한 무리들은/ 병든 마음을 파고들며/ 인생의 비애를 찬미하며--/ 무엇 때문이었느냐?/ 지는 곷이 서러웠드냐?/ 조선의 가슴에/ 일제의 칼이 박혔는데-- 『생의 노래』에서 8·15뒤 북한문학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창조를 그 바탕으로 삼으면서 민족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는데 비록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낸 조기천 일지언정 이런 원칙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던성 싶다. 2.『백두산』의 주제로서의 보천보 전투 8·15직후 남북한은 문학적으로 다 일제잔재 청산과 새 사회 건설을 위한 완전독립을 이루려는 반외세운동 등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친일파에 대한 처벌문제와 반제·반봉건 의식의 문학이 가장 긴박한 과제로 등장했으며 이를 다룬 작품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남북한에서 다 토지문제를 다룬 작품이 상당량에 이르며 그 뒤로 오면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탐구를 주로 다루는 한국문학과 사회주의 개혁의지를 다룬 북한 문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조기천의 『백두산』은 바로 그 갈림길에 이르는 길목에 있으면서 그 당시로서는 직접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항일빨치산을 소재로 했다는데서 이 시인의 특이한 역사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서사시의 소재인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항일투쟁사에서 여러 각도에 걸쳐 고찰된 것이 많은데 최근 소개된 와다 하루키(和母春樹)의「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사회와 사상』1988.11-12 연재)에 따르면 조국광복회 조직이 시작되면서 국내로까지 손을 뻗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지휘자는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커민테른 제7차대회의 새방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의 힘으로 조선독립투쟁을 수행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져 3개사가 공동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입안하게 된 것이라고 와다 교수는 보고 있다. 즉 제6사는 장백에서 보천보를 공격하고, 제4사는 무송-안도-화룡으로 돌아서서 조선의 무산을 치며, 제2사는 임진강 일대에서 장백으로 향하도록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제안은 김일성이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적으로 간삼봉(間三峯)에서 만나기로 한 이 3개사 합동작전은 제4사의 최현의 이름을 유명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의 제6사는 근대 민족해방 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북한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하 와다 교수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김일성의 제6사는 무산에서의 행동을 통보받고 6월 4일밤, 100여명이 강을 건너고, 대안에서 조국광복회 청년 80여 명과 합류하여 보천면 보전(保田)을 공격했다. 보건은 일본인 26호, 조선인 280호, 중국인 2호, 합계 308호인 소읍으로서 조재소에는 5명의 경관이 있었다. 이 주재소를 비롯하여 면사무소·삼림구(森林區)·우체국·관공서 건물들이 불타버렸다. 부대는 〈10강령〉의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철수할 때 혜산서(署)의 오가와(大川)의 경부가 이끄는 병력의 추격을 받자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물러갔다. 보천보 작전을 성공리에 끝마친 제6사는 장백의 밀영으로 일단 철수했다가 제4사·제2사의 도착을 기다려 간삼봉으로 이동했다. 총인원 400이라고도 하고 600이라고도 한다. 그 사이 조선 침입사건으로 초조해진 일본군은 함흥의 제74연대를 김석원 소좌의 지휘하에 출동시켜 국경 일대의 토벌전을 시도했다. 이 군대에 6월 30일, 간삼봉에서 기다리고 있던 3사 연합군의 타격을 가했다. 『사회와 사상』1988. 11. 187쪽  이어 와다 교수는 이 사건으로 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원이 일제 기관에 의하여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쓴다(보다 자세한 자료는 남현우 엮음『항일무장 투쟁사』대동, 253-266쪽 참고) 이 1937년 6월4일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조기천의 『백두산』으로 이는 북한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많은 예술작품이 다뤄온 역사적인 한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조기천의 『백두산』은 이 보천보 사건을 다루면서도 결코 이 사건 하나만에 국한시키지 않는 항일빨치산 투쟁의 보편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서가고 있다. 즉 이 시에서는 김을 비롯한 몇몇 고유명사만 빼면 어떤 특수한 사건이 아닌 항일 투쟁의 민족적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했다고 풀이한다. 예술적인 일반화를 시도하려는 동기에서 이 시는 사건발생의 명확한 연도와 지명을 밝히지 않았는데 예컨데 H시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웅주의를 벗어난 영웅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민족적으로 일반화된 민중주체의 항일투쟁을 전형화 시킨다는 의도로 평범한 농민투사들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김만은 예외적 구상으로 이뤄져 있다. 3. 『백두산』의 구성과 특질 머리시와 1-7장에다 맺음시로 이루어져 있는『백두산』은 조기천 자신의 서정시「두만강」을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즉「두만강」에 나오는 국토와 민족애가 『백두산』에 그대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째진 가난 속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리랴 겁내며/ 눈물에 치마고름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주이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여인이 아닌가?"(「두만강」)에 나타난 여인상이 그대로『백두산』의 꽃분이로 승화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의 민족문학에 나타난 여인상은 모두가 꽃분이일 수밖에 없다는 민족적 보편성이 성립할 소지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보편성을 먼저 내세우느냐 하면 분단 44년이 지나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지만 민족문학사의 긴 뿌리에서 본다면 결국은 동질성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대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백두산』의 모든 인물들은 근대 이후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반성을 지닌 인간상이 아닐까? 예컨데 꽃분이는 가난 속에서 민족의식을 지닌 채 자라나 빨치산 활동에 투신하여 박철호와 위험을 무릎 쓰고 항일선전 및 무장투쟁에 까지 가담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박철호가 죽어간 뒤에도 미래의 조국 건설을 위한 후비대로 눈물을 삼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한 여인상의 고난은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너무나 많은 변형으로 나타난다. 신동엽의 시에서는 아사녀로 상징되며, 소월의 시에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님을 보내드리는 그 여인상 모두가 우리의 꽃분이가 아닐까. 『백두산』은 그 앞머리부터 역사적인 현실성으로서의 평범성(곧 민중성)과 초자연적인 영웅성이 조화를 이룬 채 장엄하게 묘사된다. 이 조화로운 자연묘사는 영웅주의와 민중성을 하나의 역사적 진보의 작용으로 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에 나타난 영웅상은 한 개인적인 위대성의 표현이 아니라 집단적 영웅상으로 그려진다. 물론 시에는 김을 그 정점으로 삼아 짤막하나마 초인화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다른 빨치산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홀로인 영웅주의로 우뚝 솟은 인물로 부각된 것은 아니다. 민중적 영웅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적 구도로 『백두산』은 가장 민중적 형식인 구비문학의 각종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는 철저한 전통적 민중성을 혁명의 기초로 삼으려는 의도된 문학적 형식이기도 한데 민요조로 이루어진 가락은 독자들에게 한결 친근감을 준다. 시적 사건 전개방법은 오히려 극히 단조롭다. 아내를 일본인에게 잃은 김운칠은 혜산에서 솔개 마을로 옮겨와 화전농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딸 꽃분이는 조선광복회 회원일시 분명한 박철호가 정치공작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왔을 때 그에게서 1년동안 지도를 받는다. (2장) 꽃분이와 철호는 유인물을 만들다 일본경찰에게 들킬뻔 했으나 꽃분의 기지로 위기를 넘긴다. (3장) 임무를 끝낸 철호는 16세 소년 영남이와 떠났으나 압록강을 건너다 영남은 사살되고 만다. (5장) 이미 국내에 조직되어 있는 과옥회 회원들과 연계하여 잠입한 빨치산은 쉽게 폭동에 성공한 후 각종 정치사업을 끝내고는 물러간다. 폭동 성공은 물론 꽃분이와 철호가 그 앞장을 선다. (6장) 그러나 압록강 뗏목을 타고 국경을 넘어가던 중 철호와 청년빨치산 중 가장 용감했던 석준이 총에 맞아 전사한다. (7장) 이미 밝힌 것처럼 보천보 전투를 그대로 묘사하면서도 특정 지명을 쓰지 않은 것은 항일투쟁의 보편성을 전형화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투쟁의 전형성은 먼저 투철한 조직의 부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H시에 들어온 빨치산들은 이미 만들어진 조직을 통하여 힘들이지 않고 잠입하여 쉽게 폭동을 일으킨 후 여유있게 물러간다. 그리고 이런 힘이 원천을 이 시에서는 민중의 편에 선 민중을 위한 조직으로 풀이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인 제4장은 나흘째 굶은 빨치산 대원들이 소 두 마리를 끌고 오자 그 소가 일본의 것이 아닌 조선과 중국 농민의 것임을 알고는 되돌려 주려다 실패하곤 그 대가라도 치뤄야 한다는 철의 규율이 나오는 대목이다. 제4장의 5절에 나오는 민중성의 강조는 근대이래 우리 민족문학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구절이다. 항일빨치산이 지닌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하여 『백두산』의 맺음시는 "그러면 백두야/ 조선의 산아 말하라!/ 오늘은 무엇을 보느냐?/ 오늘은 누구를 보느냐?"고 묻도록 만든다. 바로 8·15직후의 한반도로 항일의 의지를 끌어들여 역사적 진로를 모색코자 하면서 이시는 끝난다. 물론 문학의 당시 입장이 선명하게 스며있다, 그러나 8·15직후의 북한 입장이란 오늘의 분단고직화 시대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자유의 나라!/ 독립의 나라!/ 인민의 나라!/ 백두산은 이렇게 외친다!/ 백성은 이렇게 외친다!"는 마지막 구절은 당시 남북한 어디에도 들어맞는 말이었기도 하다. 이래서『백두산』은 분단시대 초기의 남북한 이질화가 옹고되기 이전의 동질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서사시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일제 식민지 아래서의 구체적인 민중적 삶의 실체가 좀 약하다든가 하는 나대로의 비판이 따를 수도 있지만 8·15직후의 작품수준을 감안할 때 우리 문학의 수확인 점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 시인. 우수리스크 출생. 함경북도에서 이민간 농부의 아들로 1937년부터 시작된 I.V. 스탈린의 소수민족 이주정책에 따라 조선인이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될 때 카자흐로 이주하였다. 크질오르다에서 2년간 문학수업을 하였으며 당국의 명령을 어기고 모스크바 고리키문학대학에서 문학공부를 하다가 투옥되었다. 41년 독·소전쟁 때 소련군에 징집되어 모스크바·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였는데 제 2 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위로 한국 관련 문서를 번역하다가 소련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48년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그의 부대는 소련으로 복귀하였으나 그는 계속 평양에 남아 조선작가동맹부위원장을 맡았다. 51년 7월 31일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서사시와 서정성 짙은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작품으로 장편서사시 《백두산》, 서정시 《휘파람》 《어머니》 등이 있다.
1738    "백두산"과 조기천 댓글:  조회:4187  추천:0  2016-11-01
장편 서사시   백두산            / 조기천     머리시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의 소리없는 웃음에도 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을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한가슴을 추기고 천년이끼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 곰팡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듯 고루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해지는 이곳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내린다는 천지 안개도 오르기 주저하는 이 절정! 세월의 류수에 추억의 배 거슬러올리라- 어느해 어느때에 이 나라 빨지산들이 이곳에 올라 천심을 떠닫으며 의분에 불질러 해방전의 마지막 봉화 일으켰느냐?   이제 항일에 의로운 전사들이 사선에 올랐던 이 나라에 재생의 백광 가져왔으니 해방사의 혁혁한 대로 두만강 물결을 넘어왔고 백두의 주름주름 바로 꿰여 민주조선에 줄곧 뻗치노니 또 장백의 곡곡에 얼룩진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력력하노니 내 오늘 맘놓고 여기에 올라 삼천리를 손금같이 굽어보노라!   오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았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듯 넘나든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해방된 이땅에서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머리에 섰느냐?   쉬! 바위우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여뻗치고 남쪽하늘 노려보다가  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시련듯 톱을 들어 그리곤 휘파람속에 감추인다 바위 호을로 솟아 이끼에 바람만 스치여도 호랑이는 그 바위에 서고있는듯 내 정신 가다듬어 듣노라- 다시금 휘파람소리 들릴지 산천을 뒤집어떨치는 그 노호소리 다시금 들릴지!   바위! 바위! 내 알리 없어라! 정녕코 그 바위일수도 있다 빨지산초병이 원쑤를 노렸고 애국렬사 맹세의 칼 높이 들였던 그 바위                                           이 땅에 해방의 기호치던 장백에 솟은 이름모를 그 바위 또 내 가슴속에도 뿌리박고 솟았거니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더듬으며 가난한 시상을 모으고 엮어 백두의 주인공 삼가 그리며 삼천만이여, 그대에게 높아도 낮아도 제 목소리로 가슴 헤쳐 마음대로 말하련다!     [조기천]  [백두산]그 진행형 테마  1.「백두산」과 조기천  은 조기천이 북한 정권 수립 이전인 1947년에 쓴 장편 서사시이다.  이 작품은 조기천의 대표작일뿐 아니라 해방공간에 북쪽에서 씌어진 항일무장투쟁 서사시로서 발군의 위치에 놓이는 것으로 회자돼 왔다.  이 작품은 1930년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을 기초로 하였으면서도 뚜렷한 날짜나 지명들을 사용치 않음으로써 일반화되고 전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른바 보천모전투(1937.6.4)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드라마타이즈되어 있는 것이다.  조기천은 소위「평화적 건설시기」(1945.8~1950.6)에 북쪽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빈농인 그의 가정은 일제 강점하의 수탈에 쫓겨 시베리아로 망명, 유이민의 길을 떠난다. 그는 옴스크에 있는 고리끼사범대학을 마치고는 중앙아시아의 조선사범대학에서 2년간 교원생활을 했다. 이 무렵부터 조금씩 시창작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 북한의 《조선신문》 문예부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전개한다. 1946년에는 두만강의 흐름을 역사에 견주어 쓴 서정시 을 발표하고, 이어서 1947년에 이 을 창작한 것이다. 오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 때 떨어져나간 그 토막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 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았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 듯 넘나든 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해방된 이 땅에서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머리에 섰느냐? -에서 이 시에서 직접 다루고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이다. 그렇지만 이 시는 일제하의 항일투쟁 정신을 이어받아 해방조국 건설의 추진력으로 삼고자하는 창작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서사시 은 지난 날 일제강점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면서도 당대 현실에 암유적 대응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실제적 의도로서 씌어졌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은 남쪽에서 작품 공개는 물론 그에 대한 비평적 고찰 또한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던 차 ‘88년의 7?19 해금조치에 힘입어 《실천문학》 ’88년 겨울호에 「북한문학걸작선」으로 작품이 수록되고, 다시 ‘89년 1월에 실천문학의 시집으로 《백두산》이 간행됨으로써 일반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로는 시집 해설인 임헌영의 이 발견될 뿐 아직 본격적인 작업이 없는 형편이다. 2. 「백두산」의 서사시적 요건 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시가 서사시적 요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 「장편서사시」라고 명기되어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서사시란 무엇인가? 연전에 필자는 우리의 근대서사시를 살펴본 결과 서사시가 ①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을 것, ② 역사적 사실과 연관?대응될 것, ③ 사회적 기능을 지니고 있을 것, ④ 집단의시을 바탕으로 할 것, ⑤ 창작된 당대현실과 암유적 관계를 지닐 것, ⑥ 노래체의 율문으로 짜여질 것, ⑦ 길이가 비교적 길어야 할 것 등을 그 범주로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비춰볼 때 은 모든 항목에서 대체로 부합됨을 알 수 있다. 즉 은 서사로서의 기본 요건인 일정한 성격을 지닌 인물과, 일정한 질서를 지닌 사건을 갖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①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을 것」에 부합한다. 또한 은 일제 강점하 민족의 수난사와 민족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② 역사적 사실과 연관 대응될 것」이라는 조건에도 부합한다. 또한 은 일제 강점하의 항일무장투쟁사를 직접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③④의 항목과 관련되며, 광복 후의 현실상황에서 새조국건설에 박차를 가하자고 하는 의도에서 집필됐다는 점에서는 「⑤ 당대현실과 암유적 관계를 지닐 것」과도 밀접히 대응된다. 아울러 노래체의 율문형식으로 씌어진 1,500여 행의 장시라는 점에서는 ⑥⑦과 연관된다. 따라서 은 서사시로서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최대 수난기에 처해서 그러한 민족적 위난을 타개하고 조국광복과 독립을 전취해 나아가려는 일제하의 무쟁투장과정의 한 모습이 서사시적 구성으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짐으로써 민족?민중서사시의 한 전형성을 확보한데서 이 작품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3. 「백두산」의 구성과 내용 은 머리시와 본시 및 맺음시로 구성돼 있다. 본시는 모두 7장으로 짜여졌는데 구체적으로는 다시 46절로 나뉘어져 있다. 전체시는 모두 약 1,564행 정도의 행 전개를 보여주는 바, 길이 면에서는 장편서사시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 내용을 사건 전개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머리시 발 단 : 1장(1~7절) 전 개 : (1) 2장(1~7절), 3장(1~8절) (2) 4장(1~6절), 5장(1~5절) 절 정 : 6장(1~7절) 대단원 : 7장(1~6절) 맺음시 따라서 이 시는 서사적 플롯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극적인 사건의 전개로 인해 긴박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도 일단 장편 서사시로서 자리잡힌 면모가 발견된다. 먼저 「머리시」에서는 「천지(天池)」와 「호랑이」로서 백두산의 신비스럽고 위엄있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해지는 이 곳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내린다는 천지 안개도 오르기 주저하는 이 절정! 세월의 유수에 추억의 배 거슬러 올리라― 어느 해 어느 때에 이 나라 빨찌산들이 이 속에 올라 천심을 본받으며 의분에 불질러 해방전의 마지막 봉화 일으켰느냐? (중략) 쉬―위― 바우 위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여뻗치고 남쪽 하늘 노려보다가 「따―웅―」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시련 듯 톱을 들어 「따―웅―」 그리곤 휘파람 속에 감추인다 (중략)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더듬으며 가난한 시상을 모으고 엮어 백두의 주인공 삼가 그리며 삼천만이여, 그대에게 높아도 낮아도 제 목소리로 가슴헤쳐 마음대로 말하련다! 천지와 백두산 호랑이는 오랜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신성한 민족의 성소 또는 영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녀왔다. 특히 백두산은 한 민족의 뿌리이자 영산으로서 민족혼과 민족정기의 표상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이 시가 백두산을 제재로 한 것부터가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백두산은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았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 듯 넘나든 이 그 뉘냐? 」처럼 항일민족투사들의 피어린 자취와 연결됨으로써 민족의 성소이면서 삶의 역사적 현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해방된 오늘」로서 현재화함으로써 이 서사시가 지난 시기의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하는 데만 목표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창작된 시기 당대의 민족의 삶과 역사적 방향성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는 점을 포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의 발달부분은 제 1장인데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서사구조에서처럼 배경제시와 등장인물 제시 및 사건의 실마리가 열리게 된다. ① 고개 뒤에 또 고개― 몇몇이나 있으련고? 넘어넘어 또 넘어도 기다린 듯 다가만 서라! 한 골짜기 지나면 또 다른 골짜기― 이깔로 백화로 뒤엉켜 앞길 막노니 목도군이 고역에 노그라지듯 골짜기는 으슥히 휘늘어져 있어라! 울림으로 빽빽하여 몇 백리 백설로 아득하여 몇 천리 ② 그 다음…… 그담엔 홍산골이 터졌다― 총소리, 작탄소리, 기관총소리, 놈들의 아우성소리! 그담엔 절벽이 무너졌다. 다닥치며 뛰치며 부서지며 바위돌이 골짜기를 쳐부신다, 「만세!」「만세!」 ―골안을 떨치며 산비탈에 숨었던 흰 두루마기들 나는 듯이 달려 내렸다. (중략) 「한 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부르짖었다. 바른손 싸창을 바위 아래로 번쩍이자 마지막 발악쓰던 원쑤 두 놈이 미끄러지듯 허적여 뒤여진다― 「한 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재쳐 부르짖었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삼도 일제가 치떠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 (중략) 이날 밤 대장이 든 천막엔 새벽까지 등불이 가물가물…… 하더니 아침엔 눈보라치는데 정치공작원 철호 먼길 떠났다 (하략) 그러고 보면 이 시의 배경은 한 겨울 눈보라 몰아치는 백두산 밀림 속임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수많은 고개와 골짜기로 이어진 첩첩 산중 밀림 속이며, 「칼바람?눈보라?서리발」날리는 백두산의 밀영지 홍산골인 것이다. 여기에 일제 토벌대의 기습이 있게 되고, 육박전이 벌어지면서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전사들이 등장하고, 용맹한 빨치산 김대장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는 「흰옷 입은 무리」로서 항일유격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민중서사시적 성격을 지니며, 「새별」로서 빨치산 김대장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영웅서사시의 범주를 지닌다고 하겠다. 실제로 여기에 [절벽 사이 칼바람이 쌓인 눈 위에/ 뚜렷이 그려진 이 발자국/ 어디론지 북으로 북으로 가버린/가없이 외로운 이 발자국/어느 뉘의 자취인가?/어느 뉜지 북으로 웨 갔느뇨?/지난 밤 흰 두루마기 사람들/설피 신고 이곳 꿰여 북으로 갔으니/사람은 몇 백이나 되어도/발자욱은 하나만 남겨두고]처럼 유이민(流移民)들의 쫓기어 간 모습이 한숨과 눈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민중서사시적인 측면을 강하게 지닌다. 여기에 철호라고 하는 젊은 정치공작원이 등장하여 밀명이 띄고 압록강을 건너 조국땅으로 잠입하는 데서 발단으로서의 제1장이 마무리된다. 전개 부분은 다시 2ㆍ3장과 4ㆍ5장으로 구분되는데, 그 주된 내용은 일제강점기 이땅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항일빨치산들의 고난에 찬 삶의 역정을 묘파하는데 초점이 놓여진다. 김때장과 더불어 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철호와 꽃분이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사건이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2ㆍ3장에서는 새로운 배경으로 조선땅 화전마을인 솔개골이 제시된다. 그러면서 꽃분이가 등장한다. [에그! 벌써 저무는데-] 칡뿌리 캐는 꽃분이 말소리 저물어도 캐야만 될 그 칡뿌리 저녁가마에 맨 물이 소품치려는, 쌀독에 거미줄 친지도 벌써 그 며칠 손꼽아 헤여서는 무엇하리! [에그! 벌써 저무는데!] 그래도 캐야만될 꽃분이 신세 (중략) 솔밭도 어둑어둑 맘 속도 무시무시 이때 그림자인 듯 언듯- 솔밭에서 사나이 나온다 [에구? 웬 사람인가?] 어느덧 꺼멓게 길막는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중략) [나는 박철호라 부르우, 얼마나 괴로우시우] 길막던 사나이의 첫말, 솔밭은 어둑해저도 꽃분의 뺨엔 붉은 노을- [아이고! 철호동무!] 가늘게 속삭일 뿐 처녀는 면목도 모르며 한 해나 그의 지도 받았다- 삐라도 찍어보내고 피복도 홍산으로 보내고. 중년은 되리라 한 그- 그는 새파란 청년, 강직하고도 인자스런 모습 호협한 정열에 끊는 눈- (스물넷이나 되었을까?) 머리 숙이는 처녀의 생각 (하략) 그렇게 보면 여기에는 철호와 꽃분이 사이에 일종의 연정관계가 복선으로서 암시됨을 알 수 있다. 간접적으로는 서로 전부터 선이 닿아 있었으면서도 직접적으로는 처음 만나게 된 이들 사이에는 애틋한 연정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연정의 모습은 그것이 3장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 선포문]을 비밀리에 찍는 행위를 통해서 강한 동지애로 결집된다. 따라서 이들 두 남녀의 관계를 설정한 것은 이 작품 속에 일종의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적 장치임을 알 수 있다. 3장에선 김윤칠, 즉 꽃분이 아버지로 초점이 옮겨진다. 그는 백두산 포수의 아들로서 의병에도 참여했던 항일투사이지만, [피투성의 을 다시 맞는 해 봄/안해도 뭇매에 맞아 죽고]와 같이 왜적에게 아내를 읽고는 품팔이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 솔개골에 의식화된 화전민으로 들어온 사람이다. 이 3장에는 또한 「백두산 속엔 크나큰 굴/해도 달도 있고 별도 반짝이는/넓으나 넓은 굴 있는데/그 속에선 용사 수만이 장검을 간다고//령만 내리면 석문이 쫘악 열리고/용사들이 벼락같이 쓸어 나오고/이 땅에 해방전이 일어난다고」하는 전설이 삽입가요 형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또한 [백두산! 백두산!/너 세기의 증견자야!/칭키스한의 들띄우는 말발굽도/도요도미히데요시의 피묻은 칼도/너의 가슴에 잊히지 않은 상처를 남겼고/오백년 왕업도/사신의 두 어깨에 치욕의 짐이 되어//인민만은 자유의 홰불을 쳐들고/홍경래의 창기를 뒤따랐고/갑오의 싸움을 펼쳤다//피를 들고 이 일어났다]와 같이 이 땅 역사에 대한 비판과 증언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 꽃분이 일가의 비참한 생활상과 투쟁정신을 접합시킴으로써 이 시에 민족서사시, 민중서사시의 맥박을 강하게 불어넣게 되는 효과를 유발한다. [꿈 속에라도 잠꼬대 피하려고/혀 물어끊어 벙어리 되고/고문대에 매인 채 소리없이 죽어간/그 이름모를 청년]이나 [빨찌산 남편을 천정에 감추고/놈들의 창에 찔려 죽으면서도/남편이 알면 뛰어내릴까/한마디 신음도 안낸 그 마을 아낙네―/남몰래 꽃분이 맹세했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민중들의 피어린 항일투쟁정신을 크게 강조하면서 꽃분이에게 그러한 투쟁정신을 접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꽃분이가 항일무장투쟁대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비밀리에 철호와 을 등사하다가 순사에게 발각될 찰나에, 처녀로서 젖가슴을 드러낼 정도로 용기와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대담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3장에서는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수난과 함께 민중적인 고난의 과정 및 역사에의 동참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전개부분 4?5장에서는 항일유격대의 생활상과 정치군사활동이 주로 묘파되는 가운데 김대장의 용맹과 인자함으로서 그 인간성이 미화돼서 나타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유격대의 근간이 바로 민중들이라는 점이 크게 강조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① 우둥불이 밤을 태운다― 무쇠같이 장백을 내려 누르는 캄캄한 밀림의 밤을! 끝없이 몰아 죄여드는 모진 어둠 머리 속에도 흑막이 드리운 듯― 허나 불길은 솟고 불꽃은 튀고 (중략) 빨찌산 우둥불 그것은 집이였고 밥이였다 그것은 달콤한 잠자리였고 그것은 레일의 투쟁― 하물며 [토벌]의 철망을 헤치고 사지를 육박으로 지났으니 그것은 승리의 상징 야반의 노도속 반 짝이는 구원의 등대 (중략) 깊은 잠 안식의 잠 그런데 한 분만이 잠 못들고 우둥불 옆에 비스듬히 앉아 밤 가는 줄 모르네― 이런 밤엔 그이는 책을 보았다― (중략) 불안의 구름장이 가슴가에 낮게 떠돌고 어느 구석에선가 절망이 머리 들 때도 그이는 책을 보았다― 그러면 새 힘을 얻고 목적을 보았다― ② 그렇게 기다리던 식량부대 아침에야 돌아왔다 얻은 것이란 소 두 마리 뿐, (중략) 동전을 단 굴레, 수놓은 굴레......아낙네 솜씨, 독특한 코뚜레―민족의 이색― 어김없이 일본소는 아니다 [동무들! 우리 빨찌산들이 어느때부터 마적이 되었는가? 어느때부터 평민의 재산을 로략했는가? 이 소는 조선 농민의 소다 저 소는 중국 농민의 소다 이렇게 김대장이 말했다. 이것은 소를 돌려 보내라는 명령 (중략) [뉘가 소를 죽였는가?] 대장이 낮게 묻는다. (중략) [제가 죽였습니다......] 한걸음 나서며 말하는 청년 빨찌산 최석준, (중략) [그렇다면......] 찰칵―총재우는 소리 자, 나는 죽어 마땅하니 석준이 총박죽을 내민다, [기척!]―대장의 호령소리 (중략) 민중과의 분리― 이것은 우리의 멸망, 이것은 일제들이 꾀한다 우리 이것을 모르고 어찌 대사를 이루랴! 인용한 구절들에는 항일 빨치산들의 생활상이 잘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참담한 고행과 투쟁의 연속이며, 굶주림으로 이어지는 참담한 삶의 과정이다. 그러면서도 [우동불]처럼 남성적인 건강미, 북국적이고 야성적인 아름다움이 빛나는 것이기도 하다. 시 ①부분에서는 풍찬노숙하는 항일 유격대의 고달픈 삶의 모습과 함께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하는 혁명투사로서 김대장의 모습이 미화되어 나타난다. 일컬어 앞에서 지적한 바 대로 [민중적 영웅주의]의 한 구현이라고 하겠다. 시 ②부분에는 궁핍과 기아 속에서도 규율을 생명처럼 알아야 한다는 유격대의 생활규범이 제시되어 있다. 식량부대가 조달해 온 소 두 마리가 조선농민의 소로 밝혀지면서 추장같은 김대장의 질타가 가해진다. 여기에 굶주림에 못이겨 청년빨치산 석준이 소를 도살하자 그를 총살하라고 하면서도, 끝내는 [소값을 물어주라]고 함으로써 그를 용서하는 김대장의 엄격하면서도 포용할 줄 아는 인간미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항일 빨치산이 민중들을 기반으로 성립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민중과의 혈연적 유대성을 강조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한편 5장에서는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일본수비대의 총에 맞아 죽는 소년 빨치산, 즉 철호의 연락원인 영남을 콩해서 무명전사들의 고난에 찬 삶과 죽음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끝까지 싸우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꺾어진 나래를 퍼덕이며/스르르 모으로 쓰러진다/입술로 두 줄기 피흘러서/풀잎에 맺힌 밤이슬에 섞인다.../눈동자에 구름장이 얼른.../바람이 우수수―/소나무를 흔든다]처럼 어둠 속에 사라져 간 이름 없는 소년전사 영남의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다가 사라져간 무명 전사들의 비장한 삶과 투쟁과정을 묘파한 것이다. 따라서 5장은 항일무장투쟁이 이러한 민중성에 기초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화 함으로써 제 6장의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영남의 죽음에 촉발되어 철호도 H시로 떠나고, 이어서 꽃분이도 그를 따라 무장투쟁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절정인 제 6장은 항일빨치산들의 국내침공작전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그 날짜나 장소가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이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나 미화 그 자체에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항일무장투쟁이라고 하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을 예술화함으로써 시대적 전형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 6장의 내용은 이들 항일유격대가 압록강을 넘어 전개한 H시 야습이 성공하는 모습에 초점이 놓여진다. 철호가 오랫동안 잠행하여 준비하던 일이 바로 이 H시 야습공작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① 이 나라 북변의 장강― 칠백리 압록강 푸른 물에 저녁해 비꼈는데 황혼을 담아 싣고 떼목이 내린다 떼목이 내린다 뉘의 눈물겨운 이야기 떼목우의 초막에 깃들었느냐? (중략) 강건너 바위 밑에서 휘-익 휘파람소리 나더니 떼목에서도 모닥불이 번뜩번뜩 (중략) 삽시간에 이어진 떼목다리 (중략) 군인들이 달아 나온다 달아 나와선 떼목으로 압록강을 건너온다- 빨찌산부대 압록강을 건너온다 (중략) 빨찌산들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일제가 짓밟은 이땅에 살아서 살 곳 없고 죽어서 누울 곳 없고 모두 다 잃고 빼앗겼으니 ② 바로 곁에서 신호의 총성 잠든 시가를 깨뜨린다. 그담 련이어 나는 총소리 총소리 우편국에서도 총소리 은행에서도 영림창에서도 어지러운 점선을 그으는 따-따-따-따-기관총소리 쿵-쾅-폭탄 치는 소리 적은 반항도 못하고 죽고 도망치고 (중략) 눌리우고 짓밟힌 이 거리에 반항의 함성 뒤울리거니 암담한 이 거리에 투쟁의 불길 세차거니 흰 옷 입은 무리 쓸어 나온다- (중략) [동포들이여! 저 불길을 보느냐? 조선은 죽지 않았다! 조선의 정신은 살았다! 조선의 심장도 살았다! 불을 지르라-] 이처럼 민족의 피눈물로 얼룩진 압록강을 넘어서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 주구들을 쳐부수고 승리를 전취하는 항일 유격대의 활약상을 묘파한 것이다. 결국 유격대의 H시 야습전투는 [조선의 정신이 살아있다]라고 하는 항일 무장투쟁의 현장성을 제시함으로써 민족혼이 불멸하다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 부분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서 구체적 현장성과 민족운동의 실천적인 방향성을 제시한 점은 중요한 일로 판단된다. 항일 독립투쟁이 민중적 기반 위에서 전개돼야 한다는 인식이 구체적 현장 묘사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7장 대단원에서는 항일 유격대가 H시 습에 성공하고 귀환하다가 퇴로에 역습을 당하고, 이때 영웅적인 전투를 전개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철호와 석준의 모습을 통해서 항일 무장투쟁의 고난으로 가득찬 역정과 그 비장미를 심화하고 있다. 허다가 철호 그만 우뚝 선다― 불의의 유탄이 전사의 심장을 꿰었다… [아하!] 우뚝 섰다가 앞으로 거꾸러져… 창―처절썩― 물결이 두 전사를 감춘다 압록강 찬 물결이… (중략) 강변에서 여자의 부르는 소리 [철-호-철-호-] 분명히 김대장의 목소리 허나…대답은 없었다 (중략) 사격― 례총소리 산하를 떨친다 [조선아! 조선아!] 너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사격 사격―] 례총소리 산하를 떨친다! 삼천리를 떨친다! 따라서 이 대단원은 끝내 사랑도 맺어보지 못하고 조국 광복도 보지 못한 채 고난과 형극으로 이어진 항일무장투쟁 끝에 장렬하게 죽어간 철호의 모습을 통해서 민족의 가슴에 새롭게 투쟁의 불길을 정화하는 것으로 대미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맺음시에서는 백두산과 시인의 말을 통해서 이 땅에 새 조국 건설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음한다. 백두는 웨친다― [너, 세계야 들으라! 이 땅에 내 나라를 세우리라! 내 천만년 깎아 세운 절벽의 의지로 내 세세로 모은 힘 가다듬어 온갖 불의를 족쳐부시고 내 나라를, 민주의 나라를 세우리라! 내 뿌리와 같이 깊으게 내 바위와 같이 튼튼케 내 절정과 같이 높으게 내 천지와 같이 빛나게 세우리라― 자유의 나라! 독립의 나라! 인민의 나라! 백두산은 이렇게 웨친다! 백성은 이렇게 웨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함의가 쉽게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항일 무장투쟁의 전형화를 통해서 이 땅에서 민족의 해방이 얼마나 어렵게 전취된 것인가를 강조하는 동시에 민주와 자유에 기초한 새 조국 건설을 강력히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백두산은 결론적으로 민족의 표상이며, 민중의 상징이라는 점이 제시된다. 따라서 이 시는 보천보전투라는 사실에만 연관지어서 살펴본다면 작품의 의미가 크게 절하되기 쉽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은 이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의 잘 알려진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어떤 구체적인 사건의 예술적 형상화를 추구한 것이라기보다도 항일 무장투쟁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가운데 무장투쟁의 성격을 일반화할 수 있는 소재들을 작가의 구상을 쫓아 임의로 구사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것이 주된 목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작품의 기본 전개는 [철호-꽃분]으로 표상되는 민중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민중서사시적 성격을 더 지닌다고 하겠다. 특히 민족의 고난에 찬 운명과 역사적 진로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민족서사시의 성격을 강하게 띄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4.[백두산]의 주제 한편 서사시 [백두산]은 주제면에서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 앞에서 우리는 [백두산]이 일제 강점기의 많은 저항적인 작품들과 같이 민족해방 의식과 민중해방의식이라는 두 가치축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두 가치축은 사상적인 면에서 민족주체사상과 민중적 세계관이라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백두산]의 큰 사상적 뼈대는 민족적 주체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반외세 민족해방 의식이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로 항일 투쟁을 통한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데 그 핵심이 놓여진다. ① 아아 칡뿌리! 칡뿌리! 이 나라의 산기슭에서 봄이면 봄마다 어김도 없이 꽃은 피고 나비는 넘나들어도 터질 듯이 팅팅 부은 두 다리 끄을며 바구니 든 아낙네들이 왜 헤맸느뇨? 백성이 한평생 칡넝쿨에 얽히였거니 이 나라에 칡뿌리 맣은 죄이드뇨? 음식내 치워 사람은 쓰러져도 크나큰 창고, 널따란 역장과 항구엔 산더미 같이 쌀이 쌓여 현해탄을 바라고 있었으니 실어간 놈 뉘며 먹은 놈 그 뉘냐? ② 갑오의 싸움을 펼쳤다 허다가 반만년 다듬기운 이 땅이 일제의 독아에 을크러질 제 백두야, 너도 가슴막히여 숙연히 머리 숙이였지! 그러나 인민은 봉화르르 일으켜 칼을 들고 의병이 일어났고 피를 들고 [3?1]이 일어났다. ③ 정의의 검이 침략의 목우에 내려지리라! 불의를 소탕하리라! 우리 애국의 기개를 살려 해방투쟁의 불길을 높이리라! (중략) [조선아! 조선아! 너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너의 민주 행복을 위하여 사격 사격―] 예를 들어본 이 세 부분에는 각기 민족해방을 통한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강조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시 ①에는 일제 강점하 이 땅의 궁핍상이 제시되는 가운데 수탈자로서 일제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이 분출되고 있다. [크나큰 창고, 널따란 역장과 항구엔/산더미 같이 쌀이 쌓여/현해탄을 바라고 있었으니]와 같이 일제의 식량 수탈이 무자비하게 전개되기 시작함으로써 이 땅의 궁핍화를 더욱 부채질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1차 대전 후 농업 생산력이 크게 떨어지고 대규모 쌀폭동이 일어남으로써 식민지 조선에서 식량 증산을 강행하여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이루어야 할 절박한 사정에 빠졌던 실정이다. 그럐서 조선 땅은 일본의 식량생산기지로 전락하였으며 조선민중들은 더욱 궁핍하여 인용시에서 보듯이 칡뿌리 등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②부분에는 일제의 이 땅 강점과정과 그에 대한 전민족적인 저항으로 3?1운동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③부분에는 일제의 침탈이라는 근원적인 모순과 불의를 쳐부수고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혁명적 열정이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 [백두산]은 민족해방투쟁을 통해서 이 땅에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 주체사상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 시집의 결구가 [너, 세계여 들으라!/이 땅에 내 나라를 세우리라/내 나라를/민주의 나라를 세우리라!]라는 절규로서 마무리 된다는 사실 자체가 민족주체사상을 웅변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백두산]에는 민족의 주체로서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민중적 세계관이 강력히 표출되어 있다. ① 일제가 짓밟은 이 땅에 살아서 살 곳 없고 죽어서 죽을 곳 없고 모두가 잃고 빼앗겼으니 물어보자 동포여! 가슴 꺼지는 한숨으로 이 강 건너 이방의 거친 땅에 거지의 서러운 첫걸음 옮기던 그 날― 그 날부터 몇몇해 지났느뇨? (중략) 빈민굴 어느 구석에선가 떼목에 치여 죽었다는 사나이를 거적에 싸서 방구석에 놓고 온 저녁 목놓아 울던 녀인의 사설도 끊치고 오뉴월 북어인양 벌거숭이 애들 뼈만 남은 젊은이들 꼬부라진 늙은이들― ② 장백의 높고 낮은 고개고개에 이 무덤이 첫 무덤이 아닌 줄이야 우리 어찌 모르랴! 침략의 피 서린 밤이 이 나라에 칭칭 걸치었으니 새 날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 헤여보라 몇 만이나 되는고? 어느 고개 어느 골짜기에 어느 나무 어느 돌 밑에 이름도 없이 그들이 묻히였노? ③ [가마 속의 물은 끓다가도 없어진다― 원천이 없거니― 허나 내물은 대하를 이룬다. 동무들! 우리는 대하가 되련다 바다가 되련다 우리의 근간도 민중 속에, 우리의 힘도 민중 속에 있다! 민중과 혈연을 한 가지 한 빨치산임을 우리 잊었는가? 우리 이것을 잊고 어찌 대사를 이루랴! 민중과의 분리― 이것은 우리의 멸망 이거을 일제들이 꾀한다 인용한 이 세 부분에는 [백두산]의 민중적 세계관이 잘 집약되어 있다. 먼저 ①에는 당대 민중들의 궁핍한 참상이 날카롭게 제시돼 있다.[살아서 살 곳 없고/죽어서 죽을 곳 없고/ 모두가 잃고 빼앗겼으니]라거나 [가슴 꺼지는 한숨으로/이 강 건너 이방의 거친 땅에/거지의 서러운 첫걸음 옮기던 그 날]과 같이 일제의 무자비한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인해 생존권이 박탈된 채 신음하거나, 그나마도 이 땅에서 살지 못하고 시베리아 등으로 유이민길 떠난 민중들의 궁핍상이 제시된 것이다. 이러한 민중생존권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작품의 도처에서 예리하게 표출된 점에서 민중적 세계관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시 ②부분에서는 항일민족투쟁의 주체에 대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 날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헤여보라 몇 만이나 되는고?]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이 땅의 이름없는 민중들인 것이다. [눌리우고 짓밟힌 이 거리에/반항의 함성 뒤울리거니/암담한 이 거리에 투쟁의 불길 세차거니/흰 옷 입은 무리 쓸어 나온다―/머리벗은 로인도 발벗은 여인도/벌거숭이 애들도](6장 6절)와 같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이 땅의 온 민중들은 하나가 되어 항일 투쟁의 대열에 열렬히 참가한 것이다. 특히 ③부분은 이러한 민중적 세계관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항일투쟁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모든 역사 전개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을 만해준다.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역사라고 하는 민중적인 세계관 또는 민중사관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실상 여기에서 민중적 세계관은 민족주체사상과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민중과의 분리―/이것은 우리의 멸망/이것을 일제들이 꾀한다]라는 구절 속에는 바로 민족해방의 길이 민중해방의 길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민족주체사상은 바로 민중적 세계관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역사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실상 이 작품에 빨치산 투쟁의 고난상이 강조되고 김대장의 영웅주의가 부각되는 것도 이러한 민족주체사상과 민중적 세계관의 매개고리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적, 의도적 장치라고 풀이할 수 잇으리라. 따라서 서사시 [백두산]은 민족주체사상과 민중적 세계관이 만주의 항일 빨치산 유격 활동이라는 서사적 사건전개를 통해서 형상화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의 문학이 프로문학적인 빈궁문학과 항일혁명문학에 중심축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과 밀접히 조응된다고 하겠다. [백두산〓민족〓민중]이라는 등가 인식을 통해서 민족주체성을 확인하고 민중적 세계관을 확립하려는 중심 의도가 작품 자체의 예술성과 결합되어 민족문학의 한 성과를 거둔 데서 서사시 [백두산]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5. [백두산]이 지닌 결함 이렇게 본다면 서사시 [백두산]은 우리 문학사에서 흔치 않은 항일 무장투쟁사를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특히 남쪽의 문학사에서 이러한 항일 무장투쟁 과정을 시로써 형상화한 작품이 거의 다루어져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주목을 환기하는 것이 분명하다. 항일무장투쟁이 우리 민족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진대 그것을 형상화한 작품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백두산]은 북한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의 전환기에 씌어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와 오늘날 분단 시대를 이어주는 한 매개고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백두산]이 오늘날 북한문학의 한 원형이 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백두산]은 오늘날 북한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경직성이나 김일성 찬양 일변도의 우매성과는 달리 어느 정도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항일민족의식과 민중의식을 두 가치축으로 하면서 전형성?예술성을 견지하려 노력하였으며, 또 그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백두산]은 작품 자체를 통해서 남?북한이 하나의 민족 공동체이며 운명 공동체라는 점을 당위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 형식 또는 감성적 체험의 차원에서 확인 시켜 준 노작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부분적인 면에서 서정성과 낭만성이 돋보이고 문체와 표현이 정제되어 예술성이 뛰어난 일면을 지니고 있다. 또한 부분부분 설화적 요소를 도입하거나 삽입 가요를 활용하는 등 민족문학적 양식화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꽃분이 일가의 삶이나 압록강?두만강?백두산 등 민중적 삶의 구체적 현장성을 확보한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작품 전체의 구성이 비교적 짜임새를 지니고 있는 것과 사건 전개가 극적 긴박감을 지님으로써 시적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을 성공시키는 데 중요한 힘으로서 작용한다. 사상성과 예술성에 있어 어느 정도 성공한 한 예라는 점에서 해방 공간에서의 한 시적 성과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백두산]은 주제의 형상화나 인물 형성에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발견된다. 아마도 이것은 주제를 지나치게 앞세운 데서 빚어진 무리의 결과라고 본다. 항일무장투쟁의 당위성이나 민중의식의 제고를 강조하려니가 자연히 목적의식이 작중인물을 압도하여 작품이 지녀야 할 내면성의 깊이를 결여하게 된 형국이다. 특히 이러한 결점은 인물의 성격에서 쉽게 드러난다. 김대장의 경우에는 옛날 이야기식의 신의성과 용맹성이 강조되어 오히려 희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게 된다. 축지법을 쓴다는 식의 허황성을 은근히 내비치면서 민중과의 연대감을 강조하기 위해 잡아온 소값을 물어주라든지, 밤새워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하는 등 인간미와 비범성을 함께 뒤섞는데서 오는 불일치가 엿보이는 것이다. 영웅성 과장에 따른 허황성과 인간성 강조에 다른 진실미 사이에 간극과 모순이 발생하여 아이러니의 희극성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일종의 의도의 오류를 빚고 있다고 하겠다. 민중적 삶의 고동스런 모습 속에서 성장하고 투쟁 속에서 성숙해가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천부적인 초인으로서 의 일단이 의도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오히려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이나 생동력은 철호나 꽃분이의 민중적인 생활 감각이나 투쟁성에서 비롯되는 요인이 크다. 이들의 고난에 찬 삶과 투쟁과정이 민중적인 전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단점이 드러난다. 이들의 용맹성이나 애국주의, 동지애, 희생정신 등이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만 이들에게서 인간미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 암시된 연정이 좀 더 성숙된 면모로서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형성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됐더라면 작품의 비장미가 더욱 고조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오직 투쟁만을 위해 일직선으로 달려감으로써, 이념에 의해 조작되는 으로 처리되고 마는 데서 아쉬움이 놓여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투사의 모습으로서는 성공적인 면이 있다고 하겠지만, 인간적 따뜻함과 진솔함에서 우러나는 살아 있는 인간형 창조라는 점에서는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인간의 완성적인 모습도 실상은 실존적 인간의 구체성과 진실미, 그리고 생동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오늘날 북한문학이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의거한 당성?인민성?노동 계급성의 원칙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러한 [백두산]의 주제와 인물 설정은 부족한 것이라는 점이 자명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은 민족의 수난과정과 그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과정을 비교적 큰 스케일로 다룸으로써 해방공간의 전환기에 충격을 가헸다는 점에서 의미가 놓여진다. 표면적으로 영웅담을 취급하고 있는 듯하지만, 내면적으로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극복 및 새 조국 건설을 향해 민중의 역동화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두산]은 다분히 오늘날 북한 문학의 한 원형성을 지니고 있으며, 주제의 작위성이나 인물의 상투성을 지니고 있다는 문제점 또는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두산]은 분단의 장벽이 공고화되고 민족의 이질화가 심화돼 가는 이 땅의 비극 속에서 남북문학의 진정한 만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한 봉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백두산]은 우리 문학사에서 현재 진행 중이며 미래완료형의 테마라고 할 수 있다. 통일의 그 날, 온 민족이 함께 해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계속적으로 탐구되고 다양하게 씌어질 상징적인 한 테마인 것이다. 고은(高銀)의 진행 중인 서사시 [백두산]도 그 한 예라고 하겠다. 
1737    "백두산", 완결물이 아니라 미완물이다... 댓글:  조회:5031  추천:0  2016-11-01
서사시 [백두산(고은)]의 민족문학적 의의 李 東 洵    1. 서사시 [백두산] 완간의 배경과 집필과정  고은 시인이 드디어 3부작 전7권의 방대한 서사시 [백두산]을 완간했다. 이는 지난 1947년 북의 시인 조기천(趙基天)이 같은 제목의 서사시 작품을 발표한 이래로 분단시대의 우리 문단에서 가장 크고 두드러진 문학사적 사건중의 하나이다. 지난 1980년 겨울, 옥중에서 이 작품은 처음으로 구상되었다. 그로부터 5년후 작품이 발표되기 시작하여 오늘의 완간에 이르러 지난 경과를 헤아려볼 때 구상으로부터 완간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무려 14년(첫작품 집필로부터는 9년, 제1부의 전작시집 발간으로부터는 7년)이나 걸린 셈이다. 작품의 질이나 규모의 여하를 떠나서 한 작품을 두고 거기에 장구한 세월을 중단없이 매어달려 완간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실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1900년대∼1940년대까지의 기나긴 싸움의 도정으로 일제침략기의 의병전쟁에서부터 독립전쟁 시기를 거쳐 일제말까지 펼쳐지는 반제 투쟁의 경과를 담고 있다. 작품의 1,2부가 발표되던 1985년, 작가는 '의병운동 관계자료를 보면서 이런 기록이 단지 지난 과거역사로서가 아닌 현재화된 움직임으로 형상화시켜야겠다는 강한 의무감 같은 것을 느껴'(동아일보, 1985년 11월7일자) 이 작품을 쓰게 되었노라고 창작동기를 밝힌다. 작가가 시집의 권두 머리말에서 밝힌 '무표정의 실무', 또는 '반드시 이루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원(悲願)'이란 표현은 이러한 민족문학적 의무감이 수반된 창작태도를 일러주는 말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그는 '가장 소외된 계층의 한 인물인 바우가 커다란 역사운동의 흐름 속에 참여하는 과정을 써나갈 계획'이라면서, 거대한 민족민중운동 자체가 다름아닌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전작서사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발표 또한 활발하게 나타나던 것이 당시 문단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시인들의 관심대상이 분단상황을 비롯한 사회 역사 쪽으로 확대 심화되어감에 따라 단형서정시의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와도 관련된다. 또한 상상의 힘이 가능한 서사시의 형식을 통해 리얼리티의 제약을 받는 소설적 담화의 한계까지도 거침없이 극복할 수 있다는 열망과 기대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서사시 [백두산]만 하더라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던 해에 감옥안에서 구상된 것이었으므로 이 작품의 심적 배경에는 반역사성이라든가 반민족성 따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 고뇌가 자리잡고 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민족의 공동선과 이익을 저해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극복의 열망에서 충동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작품은 거의 동시에 집필된 [만인보]와 함께 민족사의 내부에 깊이 동참하며 이를 실천하려는 작가적 신념의 표현이다. 이 두 작품의 동시집필로 시인 고은은 그 험난한 1980년대를 굳건히 버티어 갔으니,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이 두 작품에는 작가 자신만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을 터인즉 독자들이 바로 그 점에 착안하면서 작품을 읽어간다면 감동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무릇 서사시라는 것이 민족의 삶에 어떤 형태를 제공하는 기틀이라 할 때에 작품 [백두산]은 시인의 가열찬 노력에 의해 분명히 확정된 어떤 형태와 가치를 민족 앞에 흔쾌히 헌납하고 있으므로 서사시의 기본요건을 매우 훌륭하게 충족시킨다. 더구나 서사시의 전통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백두산] 완간의 의미는 참으로 큰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민족문학전사를 통틀어 이처럼 방대한 구성과 규모를 지닌 장편대하서사시는 전혀 초유의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는 진정한 가치가 담겨진 큰 정신으로서의 서사시가 출현하여 가치의 혼란과 가치부재로 고통받고 있는 시대의 대중들에게 용기와 격려, 충고와 각성을 주는 서사시는 재능있고 관심있는 시인들에 의해 계속 산출되어져야할 중요한 분야 중의 하나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우리 시대의 민족적 요청에 충실히 부응하고자 하는 서사시 [백두산]의 전모를 낱낱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2. 서사시 [백두산]의 주제의식  서사시 [백두산]의 서두는 지배계급의 딸 조화연과 그의 집에 고용된 피지배계급의 신분인 머슴 추만길과의 허용되지 않는 사랑으로 시작된다. 양반집 규수와 상놈 출신간의 사랑, 그리고 사랑을 위한 도피행각은 봉건적 관습이 철벽처럼 유지되던 왕조말기의 사회에서는 그리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매우 특수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둘의 관계는 어떤 측면에서 그토록 엄격하던 봉건적 질서의 와해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둘 사이의 사랑의 발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 어느 날 뜻밖에도 머슴과 말탄 꿈꾼 다음 날 백년 묵은 팽나무 밑에서 팽나무 이파리 사이 햇빛 어지러이 빛나고 있는데 거기에 나온 아씨더러 두엄 지고 논에 나가다 쉬는 머슴 불쑥 말 한마디 아씨께서는 수박등 같으셔요 환하셔요 하던 그 난데없는 말 한마디 들은 그 머슴과 눈맞아 천리길 도망쳐 온 아씨 ------[백두산] 1권17면 (이하 모든 인용작품의 표시는 '1-17'식으로 한다.)  매우 아름다운 이 고전적 사랑의 장면에서 작품속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선택하는 결단은 결코 보편성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양반집 가문에서 그 집안의 유가적 엄격성과 봉건적인 가풍에 의해 성장하였을 아씨가 자기집 하층배인 일개 머슴이 보내는 '아씨께서는 수박등 같으셔요 환하셔요'라는 단 한번의 추파에 곧장 마음을 주어버리는 것도 어찌보면 비현실적일 수 있다. 또한 두엄을 지고 논에 나가다 잠시 쉬면서 주인집 아씨에게 수작을 거는 것 역시 목숨을 건만큼이나 대단히 위험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상궤를 벗어났기에 그들은 천리밖으로 달아나야 했고,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곧 그들 두 사람의 비범한 용기를 말해준다. 도저히 해서는 아니될 것, 할 수도 없는 것, 즉 구시대의 낡은 관습과 규범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결행한 것이다. 지배계급도 자기신분을 스스로 허물고 피지배계급도 더이상 노예상태의 굴종에 억눌려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작가 자신의 민중해방적 의지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부분이다. 그리하여 이 대목은 각성된 자아와 자아가 만나 상호협력과 인격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작가의 관점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작품 초반부의 이 관점은 대단원까지 줄곧 유지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들이 반영된 표현체계로 말미암아 서사시 [백두산]의 정신적 지향과 기초는 일단 강력한 민중성 쪽으로 열려있다. 아무튼 양반의 혈통으로서 각성된 의식을 가진 조화연과 역시 자기 신분의 농노적 굴레를 일거에 깨뜨린 추만길이 부부가 되어 아들 바우와 딸 옥단을 낳고, 성장한 두 남매와 함께 구한말에서 일제강점시기까지를 반제 반봉건 투쟁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전편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추만길 일가의 가족사적 연대기(年代記)의 방식으로 전개 서술되고 있지만 기실 작가는 한 가족의 삶의 궤적을 통하여 민족의 집단적 운명을 그리고 있는 것이니, 일제 강점하에서의 우리 민족의 삶이란 유망민적 삶과 무엇이 달랐으랴. 추만길 일가가 고국땅에서 밀려나 백두산 자락으로 혹은 만주의 동북지역으로 혹은 쏘만국경인 밀산으로 더욱 멀리는 러시아땅까지 흘러서 떠도는 삶이란 고절 참담한 극한적 경험의 연속 바로 그것이었다. 등장인물의 유망민적 삶의 경과는 바로 서사시 [백두산]의 공간배경이며, 동시에 민족적 삶 그 자체이다. 그 어디에도 한군데 안착해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운명! 작가는 추만길 일가의 비극적 삶을 통하여 인간이란 존재의 허망함을 일깨우고 나아가서는 그 허망함에 대한 의식까지도 깨어부수고자 하는 종교적 인식으로까지 이끌어가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 작품의 전반적인 빛깔을 다소간 어둡고 우울한 수묵화의 색조로 보이게 하는데, 주인공들의 생애를 대개 비극적인 결말로 처리하고 있는것도 이러한 인식과 관련이 있는듯이 보인다. 서사시 [백두산]의 전편을 총괄하고 있는 시대정신은 다름아닌 민족주체사상, 자주독립사상이다. 그러므로 작품이 풍미하고 있는 사관은 자연스럽게 민중에 의해 현실이 개혁되고 개조되어야 한다는 민중중심적 관점이 대종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민족적 사회주의의 이념도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시대정신과 사관이 이러하므로 작품의 창작방법도 따라서 현실의 위기를 강력히 의식하고 거기에 내포된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여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문학 이념과 그 방법을 절대적으로 중시한다. 작가가 이미 밝힌 바 있는 '순한글 원칙'이란 것도 서사시 [백두산]에서 줄곧 실천하고자 하는 모국어정신이자 창작방법론으로서 작가의 민족문학적 신념 중의 하나이다. 가장 소외된 계층의 인물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가려는 자세도 그러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작가가 이 작품에서 실현하고 있는 주제, 제재, 문체, 율격, 작품의 주체적인 정서, 사상 등등 그 어느 것 하나에 이르기까지 민족문학적 신념과 실천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작가는 이 신념이 '민족해방을 위한 순결성에 보내는 고도의 지지'라고 밝힌다.) 이러한 자세의 견지가 작품의 구성과 전개를 매우 강건하게 만드는 장점도 있는 한편 너무 결연한 도덕성과 고집스러운 신념 자체가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도 발생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어떤 완고함 같은 분위기로 답답함을 줄 때가 간혹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작중 인물들의 거개가 봉건적인 윤리에 저항하고 새로운 시대의 윤리 창조에 강한 의지를 가진 성격들인만큼 작가가 그러한 분위기를 일관되게 이끌고가야 한다는 심적 부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 서사시 [백두산]의 구성과 전개과정  우리가 여기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서사시 [백두산]의 서술구조와 작품의 표현 형태, 결구(結構)의 방식 등 전체 서술구조와 관련된 모든 것이다. 서사시 [백두산]에서의 사건의 전개는 과연 얼마나 인과관계에 의한 정확성을 지니고 있으며, 작가의 태도는 이 점에서 어떻게 분명한가. 우선 이 작품은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싸우는 추만길 일가의 의병투쟁 활동이라는 일관된 구성방식을 견지함으로써 테마의 명확성을 시종일관 확보하고 있다. 이 점이 서사시 [백두산]의 가장 큰 특장이라 할 수 있다. 전개과정과 표현방식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균제미를 갖추고 있어서 전체의 통일성에 상당한 몫의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의 현실묘사 방법에서는 아주 뛰어난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화전민 촌에서의 화전장면 묘사(2-115)라든가, 밤바위말 주민 민지환 영감이 일본군에게 피살되는 장면(5-110), 일본군에 의해 만주지역 동포들이 대량학살된 '경신년대참변'(일본측 자료에는 '간도출병' 혹은 '간도사변' 등의 용어로 나타나 있다)에 관한 묘사(5-162,164) (6-13 ,17) 등은 참으로 비감한 격동을 주며 장엄미마저 느끼게 한다. 일제강점하 식민지 조선의 문단에서 경신년대학살을 소재로 다룬 작품은 필자가 알기로는 단 한 편도 없다. 다만 1920년 12월8일자 상해판 [독립신문]에 실린 춘원의 시 [간도동포의 참상]과 [삼천의 원혼]이 고작이다. 그러나 춘원은 이 작품에서 동포가 무참히 학살된 소식을 듣고도 단지 '번히 보고도 도와줄 힘이 업는 몸/ 속절업시 가슴만 아프다'([간도동포의 참상])라고 예의 그 나약하고 소극적인 패배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너희게 무슨 죄 잇스랴 망국백성으로 태여난 죄  못난 조상네의 끼친 얼 받아 원통코 참혹한 이 꼴이고나 -----춘원의 [삼천의 원혼](1920)의 부분  역시 간도대학살을 작품소재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춘원은 학살된 동포들의 불행이 첫째로는 망국백성으로 태어난 죄, 둘째로는 못난 조상 탓으로 돌린다. 결국 이런 논리는 동포들의 '원통코 참혹한 꼴'이 피할 수 없는 자신들의 필연적인 죄값일 뿐만 아니라 이미 마련된 숙명이라는 관점으로 [민족개조론]의 망령이 여기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삶을 해석하는 관점의 기본이 비뚤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얼마나 흉하고 가공할만한 것인가를 춘원의 작품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고은의 서사시 [백두산]은 춘원의 식민주의적 의식을 극복하는 동시에 왜곡된 역사속에서 거의 잊혀진 비극적 사건인 '경신년대참변'의 진실을 문학적으로 재구(再構,reconstruction)해내고 있는 소중한 민족문학 작품이다.  ①용아! 부디 개가 되어서라도…… 살아라…… 살아…… 네 자손…… 이어가거라…… 부디…… -------5-110  ②마을 가구마다 다 뒤져내어 남녀노소 5백 명 붙잡아다 그 가운데 젊은 사람 몸 성한 사람 1백 명은 바로 웅덩이 파 거기에 밀어넣어 죽이고 그 웅덩이 흙으로 덮는 일을 한 마을 노인들을 시키니 제 아들 제 손자의 송장 묻는 비통함이여 -------6-17  또한 각종 잡가와 민요 등의 구비문학 자료를 적절히 삽입 활용하므로써 장면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는 점은 탁월하다. 대체로 어떤 노래들이 활용되고 있는가. 일반 민요, 토속요, 가요, 군가, 교가, 만주지역의 민요들이 그것이다.  달이 산 위에 높이 떠오를 때 누나는 작대기로 앵두를 따는데 사람의 키는 작고 나무는 높아 꽃신을 벗고 나무 오를 때 지나가는 도련님 웃지 마세요 우리 집 아이가 큰 앵두 먹겠다 하니 어찌합니까 어찌합니까 -----만주노래 [앵두따기](4-17,18)  만주땅 너른 벌판 쌀이 자라네 밀이 자라네 옥수수 자라나네 우리가 가는 곳에 보리가 있고 보리가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 우리 자손이 있네 우리가 가진 것이 그 무엇이러뇨 호미와 바가지 밖에 그 무엇이더뇨 쇠스랑 찍어내어 새 흙을 내네 만주땅 거친 벌판 씨앗 뿌리어 우리네 새 살림을 이루어보세 -----만주정착민의 노래(3-240)  앞의 노래는 주로 만주지역의 민요나 가요를 활용한 것으로써 이밖에도 시집간 여자가 결코 친정나들이를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는 노래(4 -190)라든가 옥단이가 부르는 '말리화가(茉莉花歌)'(5-41), 시베리아 지역 유격대원들이 부르는 여름노래 '자쥔까'(5-140) 등이 있다. 기타 기민투쟁가, 토벌가, 피바다가, 조선의용군의 노래, 신흥학교 교가, 용진가, 독립군가 등의 자료들도 작품의 요소요소에서 제각기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가 바늘 끝으로 머리 가리마를 긁으며 아들이 올 때를 점치는 모습의 묘사는 사라진 옛 민간습속의 아름다운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매우 감동적인 대목이다.(4- 60) 서사시 [백두산]의 극적 효과를 상승시키기 위하여 작가가 얼마나 희귀자료의 수집과 정리 등에 세심한 준비와 공력을 기울였는지를 우리는 이 대목들에서 여실히 느껴볼 수 있다. 작품의 문체에서 풍겨지는 호흡과 율격에서도 시인 고은 특유의 거의 청산유수에 가까운 달변으로 서술 자체가 힘차고 격정적이다. 작품 전반에 걸쳐 이미 작가는 독자들의 가슴을 격동 고무시키는 민중적 문체를 완전히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달변 끝에 오는 공허함도 아울러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친 동어반복이 주는 따분함이라든가 공연히 과장된 강조에 열을 올리는 부분들이 바로 그러하다. 한 예를 들면  여기 사무쳐 대흥안령산맥 밖의 만주리 어쩌다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느냐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모진 목숨 갖가지 위난 무릅쓰고 살아 있느냐 여기는 만주리 더이상 갈 데 없이 여기는 만주리 어쩌다가 어쩌다가 여기는 만주리 후룬뻬이얼맹 ------5-11  조국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진 타관 객지로 쫓기다시피 밀려오게된 낭패감 당혹감 좌절감을 넋두리조로 탄식하고 있는 대목이긴 하지만 공허한 동어반복이 도리어 따분한 느낌을 자아낸다. 또한 우리는 이 작품의 도처에서 불필요한 부분이 돌출되고, 꼭 필요한 부분은 오히려 누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작 힘을 한껏 발휘해야할 대목에서 어이없이 맥이 빠져 있거나, 반대로 힘을 그리 쓰지 않아도 될 부분에서 도리어 무리한 힘을 쓰는 경우도 더러 보인다.플롯의 전개에 작가 스스로 너무 압도된 나머지 미리 계획된 경로를 일방적으로 따라만 가다가 보니까 창작의 자연발생성이 결여된 느낌을 주는 부분도 많다. 서술형태의 호흡에서 일정한 휴지(休止)를 전혀 주지 않고 끊임없는 장광설로 펼쳐지는 대목들에서 대부분의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쉬 피로감을 느끼거나 읽기를 포기해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서사시와 소설의 변별성이 바로 이런 점에서도 확정되는바 작가는 항상 자신이 먼저 심적 흥분상태에 빠져서 독자를 돌보지 않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냉철한 이성적 자세와 명확한 판단으로 주제를 장악하면서 때로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배려의 장치를 작품속에 설치해 두어야 한다. 또 어떤 경우는 전자와는 상반되는 현상으로 작중인물간의 대화체로 계속 서술되는 대목에서 행간을 너무 자주 끊고 토막을 숨가쁘게 지어놓으므로써 오히려 경박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도 발견되는데 이런 현상들도 재고되어야 할 부분이다.(5-136) 우리는 고은의 민족서사시 [백두산]의 완간을 결코 작품 자체의 완성으로 보지 않는다. 착상으로부터 14년, 첫 집필로부터 9년이나 걸린 이 작품이 이제 완간되었으니 완간이란 실제로 보다 정제되고 확정된 완성을 위한 예비단계인 것이다. 서사시 [백두산]은 시인 개인에 의해 산출된 것이지만 이제 이 작품은 시인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차원을 떠나 민족 전체의 문화적 자산으로 이미 전환되었다. 완간의 의미도 바로 이런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가 자신의 지속적인 노력은 물론이요 문단의 비평가 학자들은 이 작품의 진정한 완성을 위해 작품의 최종적인 책임을 떠맡고 있는 작가에게 고견과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 누구보다도 시인 자신은 이 작품의 완성을 필생의 대사업으로 여기고 이제부터 찬찬한 여유로써 작품을 숙독하며 이 과정을 통하여 세부적인 손질과 광채내기를 계속해가야만 할 것이다. 이런 판단에서 우리는 작가에게 대단히 외람되지만 서사시 [백두산]에 대한 몇 가지의 애정어린 충고와 제의를 덧붙이고자 한다. 편의상 작품의 전개과정에 따라 소상히 살펴보겠다. 먼저 작품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삼지연 의병부대 결성 및 준비과정에서 자금조달의 경과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에 관한 아무런 서술도 없으니 자연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한 신화적 느낌이 부각되고 생동감이 떨어진다. 다음으로는 김투만의 14살짜리 어린 아들 바우의 활약상이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①바우는 일본군 동정도 살피거니와 이런 못된 장사치도 적발해두었다가 한꺼번에 그물 쳐 붙잡을 작정이었다 그는 신가파장 객주점에 금점업으로 떵떵대는 사금장이들과 한 봉놋방 쓰며 장바닥 저자부터 훑어 보았다 (중략) 바우가 돌격전 중심의 강원윤 부대에서 첩보 척후에 이골이 난 차도선 부대로 전출되어 싸움의 지략을 넓히다가 신가파진으로 파견되니 열네 살 신병이나 놀랍게 활약하였다 ------2-211  ②총을 어깨에 걸고 두터운 옷에 탄띠 무겁게 둘러 과연 산중 노포수 꼴이 되어 젊은 얼굴에 수염발 거칠었다 싸움 치르고 난 소년 바우 ------2-237  인용된 부분은 아무래도 실감이 덜하다. 어린 소년의 몸으로 의병부대에 종군하게 된 것까진 납득이 가나 위에 묘사된 부분은 지나친 과장으로 흐르고 있다. 민중중심적 가치관으로 일관하려는 작품정서에서 이런 서술들은 자칫 영웅주의적 사고로 떨어질 위험성마저 있다. 또한 의병 경포수 윤종남이 왜적과의 교전에서 적의 포탄에 맞아 두 다리가 완전히 절단되었는데도 불과 몇달 뒤 천행으로 치유되어 신체불구의 몸으로 두 사람의 화전꾼 의병이 드는 담가를 타고 다니며 신출귀몰한 포격술을 구사한다는 장면이 있다. 여기에서 지체불구자 윤종남의 활동이 너무도 민첩하고 기민하게 묘사된 것이 도리어 어색한 느낌을 준다.(2- 136) 다음으로는 연도의 혼란이다. '1911년 10월 싸락눈이 변하여/ 큰 눈으로 퍼붓던 날'(3-179) 김투만 일가는 내둔촌을 떠난다. 그런데 동경성, 영안, 액하를 거쳐 목단강에 이미 도착했는데도 작가는 '1911년 새해가 왔다'(3-264)라고 착오를 보인다. 순서대로라면 1912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부터 틀려오니 계속 잇달아 혼란이 발생한다. 이미 투만 일가는 밀산 한흥동에 가서 정착해 살고 있는데 '돌석이와 바우가/ 1912년 음력 5월 단오날 대기 위하여/ 나흘 전에 밀산을 떠났다'(3-319)라고 되어 있다. 이 또한 1913년이 되어야 맞는데 이렇게 되면 뒤로 가면서 줄곧 연도의 혼란이 계속되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 속의 연도와 시간, 나이의 경과를 합리적 순차에 맞도록 전반적인 재조정을 주도면밀하게 해야만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들을 평면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활동과 적절히 배합하고 극화를 시켰더라면 그 효과가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도 있었고, 또 때로는 작가의 개입이 너무 지나치게 잦은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돌석이가 밀산 일대에 정착한 후 청국인 지주 왕뱁새의 양자가 되고 왕뱁새의 사후 그의 땅을 물려받아 지주노릇을 하며 원성을 듣는 대목도 너무 느닷없다는 생각이 든다.(3-297) 청국인 왕뱁새가 돌석을 아무리 자신의 목숨 구해준 은인이라 간주하나 만난지 얼마되지 않는 조선 청년에게 그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사실이 적절하지 않고, 또 그 다부진 투쟁정신의 소유자인 돌쇠가 재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신념의 파탄을 일으킨다는 표현도 어딘지 실감이 떨어진다. 또 김투만이 과거 왕뱁새의 땅을 인수받는 과정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4권 77면에서 79면까지의 서술은 바우와 구슬봉이가 혼례를 올린 첫날밤 이젠 낭군이 된 바우에게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어투나 내용이 아내가 낭군에게 하는 말투로는 어딘지 부적절하고 너무 강론적이라는 느낌이 있다. 4권 83면의 왕청현 덕화사가 86면과 132면에는 화룡현 덕화사로 되어 있는데 확실한 소재로 통일되어야 할 것이다. 완간이 된 초판본에서 아직 군데군데 탈자 오자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4권 186면에는 추만길(김투만)을 뒤쫓는 개털모자 성권형, 즉 이수동에 관한 서술이 나온다. 이수동은 조화연의 오빠 조방연으로부터 어떻게든 추만길을 몰래 처단하라는 밀명을 받은 자객이다. 그런데 만길이 이수동에게 잡혔다가 풀려나는 과정이 부자연스럽다. 이수동이 조방연에게 20원을 전보송금으로 받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도 어색하다. 일본헌병대의 특보로 있는 자가 만길, 즉 김투만의 항일투쟁 활동을 알면서도 그냥 풀어줄 리가 만무하다. 그냥 풀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투만에게 목욕과 이발을 시키고, 호화스런 요리에 간천엽까지 먹이질 않는가? 이 장면은 후대의 이유도 설명되어 있지 않고 그래서 실감도 현저히 떨어진다. 일반적인 진행대로라면 이수동이 돈은 돈대로 챙기고 또 김투만을 검거하여 일본군 헌병대로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처리방식이 아닐까. 그런데도 자신을 풀어주고 후대해준 이수동을 독립군 투만(김광수)은 나중에 밀산으로 이동한 후 몽고인 마을로 정찰을 나갔다가 인파속에서 다시 그를 만나 체포하여 처형하게 된다. 이때 이수동을 대하는 김광수의 자세가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이수동을 똥통으로 끌고가서 죽인 다음 살인행위에 대한 괴로움을 느껴서 '나는 살인자다'라고 외치는데 이는 여러 격전지에서 왜적들과 무수한 전투경력을 가진 역전의 노장이 보이는 의연한 자세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죽은 이수동의 시체가 빠져들어간 똥웅덩이의 얼음구멍에서 똥수달 한 쌍이 물고기를 물고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장면은 어색한 정도를 이미 훨씬 넘어섰다.(7-62) 수달이라는 동물의 생리는 깨끗한 물이 아니면 결코 살 수 없다. 강물의 오염 때문에 미시시피강 상류의 수달 서식지가 심각한 생존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는데 엄동설한, 그것도 똥웅덩이 속의 똥수달은 웬 넌센스인가. 작가는 아주 사소한 생태학적 지식조차 확인해 보지 않고 다만 충동적인 추측과 상상만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 이런 넌센스는 5권 24면에서도 계속된다. '시베리아호랑이 숫놈이/ 낙엽에 배깔고 앉아 있으니/ 바위 하나로 위장하고/ 지나가는 사슴을 노리는 것'(5-22)이라고 했다. 차철수가 그 호랑이를 잡아서 먼저 간을 꺼내어 소금에 찍어 먹고 드디어 호랑이의 배를 갈랐는데 어떤 광경이 나타나는가.  그놈의 피엉긴 밥통을 둘로 갈랐다 아 거기에 삼켜진 사람 가슴팍 있다 흰 종아리 한토막 있다 이놈이 사람 하나 잡아 먹고 오는 길이었다 -------5-24  이른바 식인호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사후의 호랑이는 결코 먹이를 노리지 않는다는 것이 사냥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배가 부른 호랑이는 포만감과 소화를 위하여 우거진 밀림속으로 몸을 숨기고 대체로 깊은 잠을 잔다고 한다.(이상오, {세계명포수열전} {수렵비화}(한국야생동물기), 박우사, 1971 참조) 그런데 금방 사람을 통볁로 삼키고 오는 호랑이가 다시 사슴사냥을 위해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동물학적 상식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거의 넌센스에 가까운 이런 표현들은 웃음꺼리가 될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고 그 경박성이 작품의 순조로운 이해를 차단하는 해로운 걸림돌이 된다. 돌석이와 투만이 왕뱁새의 논을 부친다 했는데 작품의 뒤에 가서는 바우네가 아직 쌀농사를 안짓고 사냥질로 일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두 사실의 설명도 앞뒤가 맞지 않다.(4-224) 밀산 생활 끝에 다시 독립군으로 복귀하려는 투만 부자를 보내는 조화연과 구슬봉이의 태도가 너무도 의연한 것이 도리어 부자연스럽다.(4-253, 256) 화연은 떠나려는 남편 투만에게 "그러시지요"라고 말하고 며느리 구슬봉이는 바우에게 "가 장부노릇 하오."라고 말한다. 나중에 바우(김부영)가 서울에서 만주로 떠나기 위해 아내 구슬봉이와 헤어지는 장면도 어색하다. 바우는 가장으로서 가솔들을 데불고 머나먼 부여땅까지 왔다가 다시 서울로 이주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남편이 '나 떠날 터이요.'라고 말했을 때 구슬봉이의 반응은 의외에도 담담할 뿐 아니라 전혀 놀라는 기색조차 없다.(9-42) 혁명가의 아내는 꼭 이런 자세를 보여야만 하는가. 왜 이들이라고 남편을 떠나보내는 인간적인 애달픔이나 처연함이 없었을까. 그러한 묘사가 오히려 더욱 실감나는 표현이 아닐까. 작가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일관되게 모범적이고 영웅적인 행동으로만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홍범도 의병장에 의해 주도된 왜적과의 전투에서 크나큰 전과를 올리고 민족의 가슴을 격동 고무시켰던 봉오동 대격전의 장면묘사가 너무 단조롭고 평면적 서술로 처리된 느낌이 없지 않다.(4-266) 방탕한 술집 여자 출신으로 중광단에 들어가 항일유격대의 여장부가 되고 두만강 압록강 일대에서 한충여장군으로 이름을 떨치던 앵순이에 관한 성격묘사가 도합 세군데(4-34, 38, 5-104,108, 5-157)에서 펼쳐지는데 이 묘사들에서 다소간 과도한 비약이 느껴지고 상호충돌하는 점이 있다. 5권 157면에서 김광수(추만길, 김투만과 같은 인물)가 번개작전이라는 특공대 선봉작전을 펼치며 신출귀몰한 전략전술가로 변신 발전하고 있는 과정이 너무 돌연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한편 김광수와 아들 바우가 모두 떠난 밀산의 집안 살림을 허총이라는 인물이 모든 살림을 도맡아 꾸려가고 있는데 김광수의 아내와 며느리가 집에 남아 있는데도 이런 역할을 맡아 있는 허총의 신분과 역할, 생존의 방식이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허총이 농사와 가사, 집안 대소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맡아 꾸려가고 또 이것이 김광수의 아내 조화연에 대한 사랑때문인 것처럼 표현하는데 이는 역할의 필연성이 결여된 대목이다. 허총이라는 인물의 성격이 단지 가장이 없는 밀산 한흥동의 집에 부녀자들만 남아있는 것을 우려하는 작가 자신의 의도에 충실히 복무시키기 위해 설정된 역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허총은 가래에 핏덩이가 섞여나오는 심한 폐결핵 환자로서 그 엄동설한에 북국의 여러 지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목적이 불분명한 정보수집을 하기도 한다.(6-69,70) 독립군의 밀산 이동에 따라 집에 돌아온 김광수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는데 이 부분의 묘사가 너무 담담하고 처절성이 부족하다. 양반집 규수의 몸으로 모든 것 다 파탈하고 험하디 험한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까지 따라와 독립군의 아내가 되어 온갖 고통과 고독을 감수하다가 죽은 조화연. 김광수가 이런 아내의 죽음을 접하는 대목이 너무 냉담하기까지 하다. 아들 바우도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알고서도 어떤 내색조차 보이지 않고 무턱대고 첩자제거작전에 나선다고 했는데, 전혀 처절한 실감이 들지 않는다. 독립군들은 모두 이렇게 피도 눈물도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까지도 억제해야만 하는 존재인가.(7-54,56) 밀산에 주둔하던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이동할 때에 아버지 광수는 떠나면서 아들 바우를 밀산에 잔류시킨다. 그 잔류의 이유는 다음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바우야 너는 여기를 지켜라 네가 여기를 지켜야 내가 돌아올 곳이 있게 된다 이제 이곳은 타향이 아니다 내 고향 네 고향이다 네 때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간도동포 7천명이 죽어갔다 그 원수 갚으려거든 네 어미 한을 풀어주려거든 네가 장승이 되어 여기를 지켜라 반드시 내가 돌아오리라 ------7-65   '네가 이곳을 지켜야 내가 돌아올 곳이 있게 된다'는 진술과 그 이후의 서술부분에서 인과관계가 부드럽지 않다. 또한 아버지의 이 말에 바우가 '단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는 대목도 어딘지 허전하고 어색하다. 바우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감정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성격이 아니던가.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소한 문제들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고 표현의 합리성 여부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8-41,42) 김광수가 러시아의 자유시에 머물면서 니콜라이 장, 알렉산드라 김 따위의 러시아식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세계가 넓어진 것을 새삼 깨닫는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제 조선은 조선만이 아니라 온 세상 어디에도 나아가 조선의 세계 그리고 세계의 조선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것을 깨쳤다 그는 이곳 시베리아에 와서 밀산의 바우 옥단도 그의 동지들도 떠올리지 않았다 ------8-48  주인공 김광수가 맑시즘을 경험하면서 한 사람의 세계주의자가 되어간다는 정황의 묘사이다. 마음 속에 최소한의 갈등조차 없이 새 세상,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혁명에 온힘을 기울인다는 변화가 느닷없고 어색하기까지 하다. 김광수로 말할 것 같으면 백전노장의 경력을 지닌 다부진 신념형 성격의 소유자이다. 밀산을 떠날 때도 아들 바우를 잔류시켜 놓고 자기가 돌아올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맑시즘이라는 신사조와 접하게 되면서 아들과 딸 등 가족 모두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 대목에서 김광수의 성격은 도리어 불분명해져 버렸다. 이렇게 변모한 김광수를 작가는 너무 돌연하게 흑하사변의 와중에서 의미없는 죽음으로 몰아가 버리고 만다. 부모를 모두 잃은 바우가 이명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후 허총도 죽게 되니 혼자 남은 외로움 속에서 바우는 밀산을 떠나 문득 어머니의 고향인 충남 부여로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데 이 대목이 느닷없고 어색하다.(8-81) 철령 낭떠러지 끝 바위굴에서 도망중이던 부모의 첫아들로 태어난 바우는 그후 줄곧 삼지연 등 북방지역으로만 떠돌며 성장해왔다. 바우는 철령 이남 지역은 가본 적도 없고, 전혀 고국의 형편을 모른다.(바우에게 고향의식이 있다면 아마도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삼지연 부근에 더욱 귀소의 정을 가졌을 것이다) 아무리 외가 고향이라 하지만 전혀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외국처럼 생소하게 느껴지는 부여땅을 돌연히 가겠다는 발상 자체가 다분히 충동적인 느낌이 있다. 그의 부여행은 드디어 굳은 결심으로 이어지고 또 '무엇보다 옥단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고국으로 가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귀국의 명분을 밝히는데 이 서술에는 아무래도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앞에서 보아온 바우의 성격은 결코 순간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우와 옥단이 원산, 서울, 천안을 거쳐 부여까지 가는 길이 첫길인데도 너무도 거침없이 찾아가는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바우, 구슬봉이, 옥단 일행이 부여가는 도중 서울에서 숙박할 때 남대문 옆 술청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집의 주인 노파가 뜻밖에도 부여 조감사댁 침모의 딸로 조감사댁 안주인을 시봉했던 처녀였다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은 우연이라도 너무 심한 우연으로 고소설적 우연성의 남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우연성은 이후에도 빈번히 구사되는데 그것이 도리어 작품의 실감이나 생동감을 떨어뜨리는 장치가 된다. 나중에 바우가 만주에 가서 지낼 때 해란강대혈안을 겪게 되고 곧 서울로 오게 되는데 이때 중로에서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될 금강산을 굳이 들어간다. 내금강 장안사에서 우연히 만난 한 승려가 또 님웨일즈의 {아리랑}의 중심인물인 혁명승 운암스님, 곧 김충창(김성숙)의 상좌 방건곤이었다는 것이다.(9-109) 바우의 금강산 유람이 꼭 김충창의 이미지와 인연을 지으려고 미리 계획된 것처럼 작위가 느껴지는데 이 장면은 몹시 어색하다. 서울 마포에 와서 살던 바우의 가족을 성북정으로 이사시키는 것도 작가의 욕심이다. 마치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과 관련된 서술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인듯 여겨진다. (10-16) 집필과정에서 우연성은 가급적 축소시키고 필연성을 더욱 확대 보강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이 작품의 실감과 자연스러운 표현을 위하여 보탬이 되는 조치라 할 수 있다. 우연성의 남발은 서사시의 진실성을 급격히 감소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므로 그것의 사용에는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 바우 일가가 외삼촌 조방연이 남긴 폐가로 와서 부여살림을 시작하는 과정이 비현실적이다. 조화연의 소식이 끊긴지 오래 되어 그녀의 소생이 있는지 없는지 존재조차 모르던 외삼촌 조방연의 집에 얼굴도 모르는 생질이 먼 북방에서 찾아왔으니 주변 마을에선 대단한 화제거리였을 것이다. 식민지의 관청에서 신분조사도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바우일가는 하등의 장애없이 편안히 정착한다. 원수처럼 생각하던 여동생의 아들에 대해 외삼촌 조방연이 과연 그처럼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8-95,96) 조방연의 성격에 관한 작가의 서술도 대체로 혼란스럽다. 조방연은 원래 총독부의 측근에 기생하는 타락한 친일적 관변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생질 바우와 구슬봉이의 시봉을 받아서 폐병이 완쾌되고 야학당 선생이 된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8-99) 더구나 1929년 전국노동자총파업 소식을 생질에게 전해주는 장면, 질녀 옥단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신간회, 근우회, 흑풍회 등 진보적 운동단체들과 관련을 맺게 해주는 장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물론 조방연이 회개를 하게 된 배경으로 머슴 만길과 누이 화연의 후일담을 듣고 무한한 감동에 빠진다든지 동경정치학교 졸업생인 친구 원종구의 영향으로 퇴폐적인 생활을 정리한다는 장면(10-11)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먼저 작가가 조방연을 개과천선시키려는 욕심이 너무 조급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폐결핵과 아편장이에다가 금치산자 선고까지 받았던 조방연의 집앞에 방연의 아기를 갖다버린다는 서술도 비현실적이다.(8-98) 그는 당시 아무런 항산(恒産)이 없는 거지와 다름 없는데다가 신체마저 거의 죽음 직전에 다다랐는데 어떤 여인이 방연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의 아기를 낳아줄 수가 있었을 것인가. 방연은 이미 극도의 심신쇠약에다 무일푼으로 전혀 외도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바우는 밭농사와 논농사를 익혀 옛날 아버지 일을 이어 받았다 ------8-98  바우가 부여에서 처음으로 농사를 익히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이건 작가의 착오이다. 바우는 밀산 한흥동 시절부터 이미 부친 밑에서 농사일을 도운 경험이 있다. 게다가 부친이 시베리아로 떠난 후 밀산에서 잔류 가족과 더불어 집을 지키며 살 때 부친이 짓던 농사를 도맡아 지었다. 바우가 밀산을 아주 떠날 때도 가옥(농가)과 축사에 대한 미련을 갖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도 논농사 밭농사를 새로 익힌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더우기 옥단을 서울로 보내놓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올 사람 하나가 여기 왔다 김옥단 장차 가시밭길 헤쳐나갈 조선여성의 별 김옥단 그가 여기 와 섰다 -----8-112  서사시 [백두산]에서 김투만과 아들 바우는 의병에서 독립군까지 영웅적 투쟁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투만의 아내 조화연과 딸 옥단까지도 모두 영웅화시키는듯한 표현은 경직되다 못해 답답하다. 왜 그들은 반드시 영웅이 되어야만 하고 또 영웅적 인간상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가. 어떻게 보면 이런 무리한 관점들이 서사시 [백두산]의 분위기를 자주 획일적 폐쇄적 분위기로 고착시키고 민중적 관점의 확대와 상승을 일정하게 억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바우 일가가 부여에서 서울로 이사한 뒤 비로소 민적을 취득한다고 하는데, 이전까지 살던 부여는 서울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시골인데도 어찌 민적도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조방연의 생질로 인근에 소문도 무성했을텐데 부여경찰서의 감시와 정보망에 과연 무사할 수가 있었을까. 그 뿐만 아니라 그날밤 두 사람은 실로 오랫만에 심신이 일치된 운우의 정을 나눈다. 정사를 끝낸 아내는 남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만날 날 있겠지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다분히 단순멜로드라마의 차원으로 품격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그동안 바우는 늙어 있다가 다시 젊음을 찾아서 몸과 마음이 불덩어리가 된다는 진술이 있으나 이는 석연치 않다. 느닷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만주에 온 목적도 불명확하다. 그러므로 해란강대혈안 후에 바우는 또 서울로 되돌아오는데 상경의 동기까지 잇따라 불분명하다. (9-103) 뚜렷한 목적없이 금강산 유람을 하고, 동생 옥단을 찾아가서 기껏 '옥단아 시집갈 생각을 하여라' 라고 맥빠진 권유를 하고 있다. (9-119) 옥단은 거의 철녀(鐵女)라 불리울만큼 냉혹하고 철저한 이지적 성격의 여성혁명가이다. 그런 그녀가 오빠와 상면한 후 돌연 감상적 태도로 바뀌는 모습도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그녀는 자기갈등에 빠져서 술을 마시고 '나는 무엇인가?'라고 탄식하며 눈물까지 짓는다.(9-123) 이는 혁명가의 전형적인 태도에 걸맞는 묘사가 아니다. 옥단이의 가명이 강주룡, 또는 김주룡으로 바뀌는 대목은 어색하다. 강주룡은 평양고무공장 여성노동자 출신 혁명가의 이름으로 옥단이가 지극히 흠모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이미 세상에 너무 노출된 이름이므로 반제투쟁에 종사하는 옥단과 같은 투사가 항시 사용하는 가명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이런 대목 자체가 진짜 강주룡과의 혼동을 일으킬 우려마저 있다.(10-16) 바우가 서울에서 외삼촌의 친구 원종구를 찾아가 그를 설득하여 거액의 공작금을 타낸다. 이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단지 그의 언설만 듣고 공작금을 흔쾌히 내어준다는 서술에는 필연성이 적다. 마치 연암의 {허생전}에서 허생이 변부자를 찾아가 장사밑천을 얻어내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바우도 만주에서 서울까지 간 목적이 기껏 원종구의 돈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던가.(10-15) 더우기 바우가 공작금을 챙겨서 만주의 봉천으로 가는데 뚜렷한 공작이나 씀씀이도 없이 장백까지 흘러오게 되고 '한갓 병든 방랑자'(10-36)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바우의 죽음도 너무 어처구니 없다. 작품의 전개과정에서 중심인물 바우의 역할을 너무도 급속히 위축시키고 있는 것이 혹시 작가의 초조감의 작용은 아닌지.  이제 나이 48세 그 뜨거운 세월 지나가 한쪽 손목 잘려나간 장사꾼으로 누워 있으니 그로서는 지난날이 강하였다 소년의병 청년독립군 그 시절의 싸움 지나 이제 그는 한갓 병든 방랑자 -----10-35  바우가 공작금으로 아편을 구매하여 동북항일련군의 전비로 헌납할 결심을 하게 되자 그토록 고질적이던 된기침과 각혈조차 멈추어지고 폐결핵이 완쾌되었다는 서술도 필연성이 결핍되고 이치에 맞지 않다. 바우가 비명에 죽고나서 한참 후에 서울에서 바우의 정체가 탄로나고 아내 구슬봉이가 잡혀가는데 어떤 연유로 탄로가 났는지가 밝혀져야만 할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중환자 조대운을 사랑하게 된 김옥단이 중환자 막사의 시체들 옆에서 조대운과 정사를 나누는 장면도 극히 부자연스럽다.(10-113)  4. 서사시 [백두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설정  서사시 [백두산]에는 많은 서사적 주인공과 극적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작품을 조금만 유의해서 읽어보면 대개 작품공간에서 활동하는 소수의 중심인물형상이 있고, 그 중심인물을 보조하는 보조인물형상이 있다. 그리고 기타 다수의 인물들은 거의가 방계적 인물형상의 성격을 지닌다. 무릇 서사시 작품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은 주인공의 형상창조에 관한 문제이다. 주인공의 성격과 형상에 대한 문제를 올바로 풀어가야 서사시의 인간학적 본성을 정확히 구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가가 내세우는 형상적 과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주인공은 작품의 형상체계와 구성조직에 있어서 형상의 초점이 된다.(리동원, {작품의 주인공}, 평양문예출판사, 1990) 한편의 서사시 작품을 보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은 대개 그 작품 주인공의 형상창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주인공의 형상적 위치는 어떠한가, 주인공의 성격표현 방식과 전형성의 문제는 과연 적절한가라는 항목들이라 하겠다. 그러면 지금부터 중심인물형상의 성격설정characterization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이 작품의 가장 대표되는 중심인물은 바로 추만길이다. 추만길은 주로 조감사댁의 농토를 맡아서 경작하는 머슴의 신분이다. 비록 피지배층에 속하는 일자무식의 하층민이지만 자신의 삶을 개척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다. 때로 가부장적 완고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집스러움, 억척스러움, 강한 신념, 현실개조형 심성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면서 현실의 여러 국면에서 그 현실의 상황에 걸맞도록 적절히 이름을 바꾸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추만길의 변성명에는 그의 삶의 전반적 경로가 압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추만길→심억만(심서방)→김투만→김광수(김동조)  추만길은 원래의 이름이요, 조감사의 외동딸 한양아씨 화연과 눈이 맞아서 북방으로 달아날 때의 이름은 심억만, 심서방이다. 삼지연 통나무 삼간집에 정착하고 사냥꾼으로 살아갈 때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양아버지 서필노인이 김투만으로 성씨와 이름을 다시 바꾸어준다.(1- 106) 투만은 아마도 두만(豆滿), 혹은 토문(土們, 圖們)의 중국식 음차(音借)로 여겨진다. 이로부터 그는 삼지연창의대, 백두산의병대, 대한독립군 홍범도연대 소속으로 봉오동, 청산리 등 대첩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국민회에 소속된 독립군으로서 민족주체의식으로 철저히 무장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한때 용정에서 김투만을 뒤쫓는 자객 이수동에게 체포되었다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하고 풀려난 후 김동조라 스스로 개명한다. '동조(東朝)'란 글자 그대로 '동쪽나라 아침'이란 뜻이니 민족해방 염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그는 투만이란 이름 대신 다시 한번 다른 이름 지어야 했다 기구하여라 또 이름 바꿔야 하다니 기구하여라 제 이름 하나 온전히 통할 수 없다 -----4-188  그러나 이 이름은 곧 아내 화연에 의해서 새로 고쳐진다. 이유는 이름에 뜻(민족주의적인 의미)이 너무 들어간다는 것. 하수상한 세월, 이름에 뜻이 너무 들어가도 감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서 다시 평범한 느낌으로 바꿔주는 이름이 김광수이다. 실제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이름을 바꾸거나 익명, 가명, 별호 등을 사용하며 활동한 예는 허다하다. 추만길로 시작된 중심인물의 민족해방을 위한 눈부신 활약은 끝내 김광수라는 이름으로 한 생애가 마무리된다. 시베리아의 자유시까지 밀려가서 한때 맑시스트가 되기도 하고 결국 이국땅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동족상잔인 흑하사변(1921:일명 '자유시참변')까지 경험한다. 통신특무군관으로 근무하던 김광수는 박일리아의 니항군대와 오하묵이 이끄는 자유대대 사이에 나아가 명분없는 동족대립이 곧 파멸임을 비판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8-55,56) 작품 속에서의 그의 삶의 경로는 분명히 개성적 인간이나 실제로 구현되는 그의 삶의 빛깔은 보편적 인간의 성격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 인간상의 위상으로까지 상승되지는 않고 있다. 두번째의 중심인물은 조화연이다. 그녀는 왕조말기 지배층의 한 사람인 조감사의 외동딸이다. 화연은 그녀의 본명 대신에 아씨, 한양아씨로 불려진다. 그러나 화연의 운명은 자기 집안의 젊은 머슴 추만길의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완전한 극적 전환을 이룬다. 추만길과 부부가 되고서 그는 더이상 지배층으로서의 자기신분을 포기해버린다. 지배층의 민중화라 할까. 이것을 기대하기란 예나제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이름도 심억만의 부인 심서방댁, 혹은 조백녀(백두산 여자라는 뜻)로 바뀌어졌다. 그녀의 삶의 경로는 다음과 같다.  조화연(아씨, 한양아씨)→심서방댁→조백녀(조화연)  이런 삶도 그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었므로 조화연도 추만길과 마찬가지로 억척스러운 심성을 가졌으며, 남편에 대해 더없이 순종적이고 주변현실에 대해선 적극적인 성격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조화연이 자기집 머슴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감행한다는 대목은 웬지 현실감이 부족하다. 아주 특수한 경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런지 모르지만 대개 일반적인 경우 지배층이 하층민과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과 신분을 송두리째 포기해버리는 일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조백녀는 남편 김광수를 위해 현실의 모진 고통과 외로움을 인내하며 살아가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장남 바우와 딸 옥단을 낳아 성장시킨다. 독립군으로서의 남편의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다부지게 남편의 결심에 서슬푸른 긴장을 주기도 하는 매섭고도 현명한 여인. 1911년 초겨울 그들이 삼지연 산채를 불지른 뒤 머나먼 밀산으로 떠나는 도중에서 투만은 격심한 고통을 참지 못해 농사꾼시절을 그리워 하며 돌아갈 계획까지도 한다. 그러나 바우어머니는 그 무서운 세월속에서도 비바람 눈보라를 견디며 살아온 사스래나무에 자신들을 비견하며 남편의 갈등하는 마음을 돌려 세운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서 마침내 남편과 아들을 독립전쟁터로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서 병마와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결국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밀산 한흥동 본구 바우네 집 안채 식구들 들에 나가 일하는데 바우어머니 조씨 혼자 숨거뒀다 말 한마디 남길 데 없이 그 방안 마지막 숨결 흩어지며 여기 한 일생이 다하였다 바람이 인다 말똥가리가 날아갔다 바람에 빗방울 섞여 뿌렸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지아비와 아들 싸움터 보내고 말 한마디 남길 데 없이 그 이름 조화연 눈감았다 ------4-290,291   세번째의 중심인물은 김광수 내외의 장남 김바우. 하층민 추만길과 양반집 가문의 외동딸 조화연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출생지는 철령 낭떠러지 끝 바위굴, 용납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수색과 정탐에 쫓기던 부모는 신분과 거주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먼 곳으로 도피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 자식아 내 세상아 바위굴 바위 위에서 낳은 놈이니 바우라고 부르리라 만고풍상 다 맞고도 끄떡없는 바위이거라 백성이거라 바우라고 부르리라 ------1-33  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으나 그들 일가가 터잡은 삼지연 통나무 삼간집에서 유평마을 산골 훈장 출신인 서필노인으로부터 본격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서필노인은 바우를 백두산 천지로 데리고 가서 천지의 차고 맑은 물에 세번 담근다. 일종의 세례의식이랄까. 서필노인은 바우를 천지의 물에 담그기 전, 천지신명께 어린 아기를 헌납하는 기도를 올린다. 이로부터 바우는 건실하고 다부진 의식을 가진 소년기와 청년기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삼지연 창의대에 참가하여 왜적과 싸우는 체험을 가진다. 김투만 부자의병의 모델의 근원은 정환직 부자의병의 활동에서 비롯된 듯하다.(2-207) 정환직은 을사조약 후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와 함께 영천 등지에서 기병하였다. 바우는 후치령전투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일본군을 죽인다. 이후 14살 소년병으로 중평장전투 등 여러 격전지를 종군하던 중 봉오동대격전에서 한 쪽 손목을 잃고 불구의 몸이 되어 독립군 전사로서의 혁혁한 경험을 쌓아간다. 그야말로 갖은 '비바람'속에서 살아간 풍운아적인 생애이다. 그는 갑오동학군 출신 노인의 손녀딸인 구슬봉이와 혼인을 맺게 되고 밀산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된다. 황막한 만주벌판을 누비며 거치른 격전지에서 전투경험을 쌓아온 바우는 부모 별세 후에 어머니의 고향 충남 부여로 가족들을 이끌고 떠난다. 부여에서 거주하며 타락자인 외삼촌 조방연과도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아들(김묵:8-99)을 낳는다. 그후 바우일가는 다시 서울로 이주하게 되고 바우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민적을 얻어 식민지 치하 조선사람의 서러움을 의식한다. 그러나 긴장이 아주 풀려버린 서울생활에 갈등하는 바우는 드디어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가서 혼란스런 생활을 한다. 바우는 큰 돈을 벌기도 하고 공산주의자들과도 교유를 가지다가 뚜렷한 목적이 없이 귀국하여 외삼촌의 친구 원종구에게서 거액의 공작금을 받아낸다. 이 돈을 휴대하고 다시 만주로 갔다가 폐결핵을 앓게 된다. 누이 옥단이 만주에 와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우는 누이가 소속된 항일련군으로 활동물자를 보낸다. 그러나 보천보전투의 여파로 바우는 일본군에게 결핵요양소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끝에 총살당하고, 시체는 혜산진 망루밑 벼랑에 유기된다.(10-67) 결국 48세를 일기로 곡절많은 생을 어이없이 마감한 바우의 처참한 주검은 압록강 세찬 물살에 허망하게 떠내려가고 만다. 이름을 통해서본 바우의 삶의 경로는 어떠한가?  김바우→김부영(김묘향, 김길주)  바우는 아버지의 잦은 변성명에 비해 이름을 그다지 많이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바우의 삶은 아버지 투만의 삶과 거의 동일한 궤적을 밟아가고 있으나 아버지보다도 훨씬 적극적이며 이지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때때로 발생하는 자신의 충동적인 성격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네번째의 중심인물은 김투만 내외의 외동딸 김옥단이다. 아버지 투만과 오빠 바우가 삼지연창의대에서 첫 의병활동에 종군하고 있을 무렵 삼지연 산채에서 태어난다.  이 어지러운 세상 한세상 살기 위하여 새 목숨 태어나고 새목숨 낳은 어미 살아났다 다음날 서필노인이 이름 짓기를 옥단이라 하였다 백옥같은 김옥단이라! 백두산 큰 산 아래 옥단이라! ------2-112  바우와도 나이 터울이 많이 져서 아버지와 오빠가 적극적인 투쟁활동을 펼쳐갈 때에도 옥단은 다만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작품 속에서 옥단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시기는 외숙 조방연이 질녀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신간회, 근우회 등과 연결시켜주게 되면서부터이다. 부여출신 근우회 회원 김신복에 의해 근우회의 지도자 정종명, 허정숙, 주세죽 등 당대 최고의 혁신여성지도자들 앞에 옥단은 '장차 가시밭길 헤쳐나갈/ 조선여성의 별'(8-111,112)로 데뷔한다. 그후 옥단은 근우회를 중심으로 맹렬한 여성운동을 벌여가다가 새로운 혁신계열 여성단체의 조직업무를 담당한다.(9-29) 이때 옥단은 자신을 찾아온 오빠 바우의 결혼 권유를 일축해버리고 나약한 생활에 빠져있는 오빠를 도리어 힐책한다. 옥단은 드디어 평양고무공장의 여성운동가 강주룡을 찾아가서 노동쟁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그후 옥단은 강주룡을 너무도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이름마저 주룡으로 바꾸어 행세한다.(10-16) 그러다가 다시 서울 노성회에서 활동하던 중 북방지역인 혜산진 갑산 일대의 여성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한다. 옥단은 드디어 항일련군 6사에 소속된 유격대원으로 김일성이 지휘하는 보천보전투에도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 같은 대원이 일제의 관동군 첩자로서 몰래 숨어든 민족반역자임을 알고 권총대로 찍어서 무자비하게 처치해버린다.(분단 이후의 남한문학에서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이 남한의 작가에 의해 작품속에 직접 반영된 것은 고은의 이 작품이 처음이다) 같은 유격대원으로 중상을 입은 조대운을 사랑하게 되나 조대운은 곧 숨을 거두어버린다. 항일련군이 궤멸되면서 옥단은 방황하게 되고 허기에 지쳐 뱀과 지렁이까지 날 것으로 먹는다. 계속 쫓기며 숨는 도피생활 중에 무참히 피살되고 만다. 이름을 통해서본 옥단의 삶의 경로는 다음과 같다.  김옥단→강주룡(김주룡)→김결사(김옥단)  옥단의 성격은 매우 빈틈없는 과학적 인식의 소유자로서 그의 철저한 사회과학적 신념을 현실속에서 부단히 실현시키려는 갈망을 갖고 있다. 이점에서 오빠 바우의 성격과도 대비된다. 옥단의 싸움은 오직 민족을 위하여, 아니 그 자신이 민족이기 위하여 싸울 수 밖에 없는 '작은 의무'요, '처절한 겸허'였다고 작가는 말한다.(10-136) 서사시 [백두산]에서 대표되는 중심인물 네 사람, 즉 김투만(김광수), 조화연(조백녀), 김바우(김부영), 김옥단 등 일가족은 죽음의 장소를 서로 알지 못한 채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이것은 조국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가족적인 평화란 보장될 수도 없고, 또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다름아니며 작가는 이것을 넌짓이 보여주고자 한다. 결국 민족과 조국의 제단에 바쳐진 김투만 일가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 정황이이야말로 가장 민중적인 삶의 실천이며 전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는다. 서사시 [백두산]에 등장하는 전체 설정인물들 가운데 그래도 개성적 인물유형에 가까운 성격은 조방연, 서필노인, 홍범도, 허총, 앵순이, 이수동 등이며, 삼지연창의대 대원이던 화적출신 박도깨비같은 인물의 행동에서 도리어 풍부한 민중적 보편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이 작품의 목표는 애당초 반영웅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영웅주의에 슬그머니 기울고만 혐의가 짙다. 서사시 [백두산]에서 주인공의 전형적 성격은 과연 제대로 확보되어 있는가. 핵심적 중심인물인 김투만 일가의 생애는 거의가 영웅적 인간상과 그에 걸맞는 위대한 삶의 행동으로 그려지고 있다. 중심인물의 전형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으므로 리얼리즘적 서사시 특유의 인물형상 창정(創定)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만 모든 중심인물들의 최후를 하나같이 비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작가는 이들이 민중적 보편성을 지닌 성격임을 강하게 환기시키려 한다. 하지만 이런 처리방식이 도리어 이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낙관적 전망을 차단하는 결과를 빚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의 전형성이란 가장 참다운 본보기적 성격이 되어야 하고 또 시대의 거울로서 타인의 모범적 인간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5. 맺는 말  서사시 [백두산]에서 작가는 전지적 시점을 구사하므로써 등장인물의 외면과 내면을 총체적으로 관장하는 어려운 일에 대체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는 서술자로서의 작가의 위치가 한군데에 고정되지 않고 매우 적극적으로 이동해 왔다는 반증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이 작품의 전편에 가득히 넘쳐흐르는 작가 자신의 사상과 지식, 관념의 배합을 경험한다. 중단강조, 대조강조, 경악강조 등의 다양한 강조법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하여 결말에 이르게 하는 솜씨도 가히 돋보인다. 더구나 이 방대한 작품의 구성과 전개과정에서 자칫하면 빠져들기 쉬운 산만성을 적절히 다스리면서 총체적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복합구성법의 과정과 그 실제도 놀라웁다. 또한 이 작품이 지니는 구성상의 풍부함과 클라이막스가 내뿜고 있는 이른바 '계시의 순간'에서 우리는 서사시 고유의 예술적 전율과 감동을 체험한다.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중요한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인 옥단이 비명에 세상을 떠난 후 작가는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서술을 보여준다.  마침내 눈 쌓인 세상 하나 그칠줄 모르고 눈 퍼붓는 세상 하나 높은 곳 낮은 곳 다 없어지는 세상 하나 아니 그것이야말로 한 나라가 아니라 온 세상 여러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므로 ------10-135  '높은 곳 낮은 곳/ 다 없어지는 세상 하나!' 아마도 시인이 서사시 [백두산] 전편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세계인지도 모른다. 모든 고통과 차별이 완전히 소멸된 아름다운 탕평의 공간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장 강렬하게 내뿜고 있는 꿈과 갈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민촌 이기영의 [두만강]을 읽고난 뒤의 그 오래도록 두근거리며 가슴 떨리던 감격과 감동의 파장을 이 작품에서 충족할 수 없었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하고자 한다. 어떤 면에서 위대한 서사시는 당대의 그 어느 소설작품보다도 더 재미있는,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즐거움과 예술적 감동, 유익함 따위를 독자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때의 '재미'란 정서적 감동을 주는 미적 즐거움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대다수 문학의 장르가 그러하겠지만 서사시야말로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한층더 삶의 총체적인 표현이 되어야 하며 인간성의 탐구이며, 더 나아가서는 삶의 진정한 의미랄까, 혹은 살아갈 방향까지도 제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금세기 말 우리의 민족문학사가 이만한 대작 하나를 소유하게 된 기쁨을 참으로 경하해 마지 않는다. 더불어 우리는 그동안 이 큰 작품을 쓰느라 혼신의 힘을 다 바쳐온 작가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 노고에 대한 경의와 위로를 드리고자 한다. 얼마나 남모를 난관도 많았으리. 아마 작가는 가슴을 조여오던 고통의 근원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떠나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에게 이 작품의 완간이 바로 완성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싶다. 작가 스스로도 이 작품을 '완결이 아니라 미완'의 성격으로 겸허하게 규정하고 있음을 전작시집의 머리말 말미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위대한 건축물을 그야말로 몇백년에 걸쳐 완전한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우리 모두는 민족문학에 대한 긍지와 정성어린 관심을 가지고 줄곧 서사시 [백두산]의 진정한 완성에 동참하며 노력해가야 할 것이다.  
1736    체코 문학을 알아보다... 댓글:  조회:5943  추천:1  2016-10-31
중세기의 문학 ┗ 개요 ┗ 후스파 운동의 영향 16, 17세기 체코 문학 18, 19세기 체코 문학 1918년 이후 체코 문학 1918년 이전까지 체코족의 본향인 모라비아·보헤미아 지역은 독자적인 왕국을 이루었거나 주변 열강 영토의 일부로 분할되어 있었다. 체코 문학의 등장은 이 지역의 주민인 체코족이 역사적으로 주체성을 찾으려는 노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체코어로 씌어진 문서의 등장은 모라비아의 대공 로스티슬라프의 요청에 따라 863년 비잔틴 황제 미카엘루스 3세가 모라비아에 선교단을 파견한 일과 관련이 있다. 프랑크 왕의 정치적 비호를 받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서쪽으로부터 슬라브족의 땅 모라비아에 도착하자 모라비아의 대공 로스티슬라프는 프랑크의 영향력을 알아보기 위해 동쪽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주교이자 교사'인 인물을 구했다. 이 선교단은 키릴루스로 더 잘 알려진 노련한 학자이자 외교관인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동생 메토디우스가 이끌고 있었다. 이들 형제는 성서의 대부분과 중요한 전례서들을 키릴루스가 창안한 슬라브 문어로 번역했다. 키릴루스는 자신의 고향 살로니카의 슬라브 방언을 기초로 그밖의 언어, 특히 그리스어 및 모라비아 방언을 채용해 더욱 풍부한 문어를 만들어냈다. 이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씌어진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적 업적은 이들 형제의 〈전기〉이다. 이것은 후대의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거의 확실히 900년 이전에 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들 형제가 선교활동을 한 그 땅에서 쓴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0세기경에 쓰인 성 벤체슬라스(보헤미아의 군주 바츨라프:920~929 재위)와 그의 할머니 루드밀라에 관한 〈전설〉을 비롯한 다른 교회 슬라브어 문헌은 체코에서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부터 등장한 라틴어 성자전들은 초기 보헤미아 공국 수도원의 중심지에서 이루어진 문학의 수준을 입증해주고 있다.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1097년 라틴어가 보헤미아의 전례 언어로 쓰이게 되면서 사용이 중단되었다(성인전기학). 중세기의 문학 개요 남아 있는 체코어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 후반에 씌어진 것이다. 프르셰 미슬 가문의 벤체슬라스 1세(바츨라프 1세:1253 죽음)와 오타카르 2세(1278 죽음)의 보헤미아 궁정에서는 독일어로 쓴 궁정문학을 장려했기 때문에 13세기말까지는 체코어로 씌어진 비중 있는 문학은 찾아볼 수 없다. 14세기에는 체코 문학작품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14세기초에 씌어진 일군의 운문 '전설'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기교가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애를 다룬 서사시 〈알렉산드레이스 Alexandreis〉는 최초의 세속문학이며 독일의 울리히 폰 에셴바흐가 쓴 알렉산드로스 서사시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체코어로 된 궁정시는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 없으며, 그밖에 인상적인 서사시 〈달리밀 연대기 The Dalimil Chronicle〉는 체코족의 역사를 생생하고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카렐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이기도 했음) 치하 보헤미아와 독일에서는 학문과 문학이 꽃을 피웠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시 〈성 카테리나의 전설 Legend of St. Catherine〉이 있다. 1350년경부터 산문 장르가 발달하기 시작해 성자전과 연대기, 그 다음에는 늘어나는 도시 중간계층을 위한 몇몇 인기 있는 중세 이야기체 시가 등장했다. 14세기말에 이르러서는 풍자시와 교훈시가 매우 뛰어난 독창성과 개성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익명의 풍자시 모음집인 흐라데츠 필사본과 파르두비체의 스밀 플라슈카가 왕권에 맞서 보헤미아 귀족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쓴 정치적 알레고리 〈신(新)귀족회의 Nová rada〉가 뛰어나다. 후스파 운동의 영향 14세기말 체코 문학에서는 사회적·도덕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슈티트니의 토마스는 체코어를 사용해 후스파 운동의 주요경향을 예고한 논문을 썼다. 얀 후스에 의해 추진된 이 종교개혁운동은 15세기 전반기에 보헤미아인들의 삶을 지배했다. 이 시기의 종교논쟁과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체코어 작품들이 대부분 실제적이고 논쟁을 위한 목적을 띠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후스가 문학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는 체코어로 설교하고 편지를 썼을 뿐 아니라 논문 〈보헤미아어 철자법 De orthographia Bohemica〉에서 주장한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했다는 데 있다. 후스파가 지은 단순하고 감동적인 찬송가들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후스파 전쟁은 바우첸 필사본에 실린 여러 편의 시와 많은 연대기, 그밖의 산문에 반영되어 있다. 얀 후스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인물인 페트르 헬치츠키는 자신이 쓴 일련의 훌륭한 논문과 설교를 통해 급진적인 사회사상과 평화주의를 발전시켰다. 바로 헬치츠키의 사상을 토대로 보헤미아 형제단(Unitas Fratrum)이 발족되었다. 모라비아 교회의 원형인 이 분파는 다음 2세기 동안 체코 문학의 산실이 되었다. 16, 17세기 체코 문학 16세기에는 많은 양의 산문이 나왔는데 교훈적·학문적인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인문주의의 영향은 공인 역사가인 프세흐르디의 빅토린 코르넬이 쓴 우아한 문체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 시기부터 나온 소규모 여행기들은 매우 흥미롭다. 체코 산문의 발전은 보헤미아 형제단 소속 학자들이 성서 번역작업을 통해 크랄리체 성서(1579~93)를 만들어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책의 언어는 고전 체코어의 본보기가 되었다. 1620년 빌라호라 전투에서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합스부르크 군대에 패배한 후, 체코의 여러 지방이 합스부르크 제국에 통합되었고 프로테스탄트는 사멸했다. 귀족층은 거의 체코어를 알지 못하는 새로 온 사람들로 대체되었다. 체코 문학의 전통은 단지 망명귀족들 사이에서만 유지되었는데, 망명가들 중 얀 아모스 코멘스키(요한네스 아모스 코메니우스)가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라틴어로 쓴 교육과 신학 문제에 관한 그의 저서와 체코어로 쓴 작품은 유럽적인 시각을 갖춘 작가·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세계의 미궁과 마음의 낙원 Labyrint svĕta a raj srdce〉(1631)은 체코 산문문학의 진수로 꼽힌다. 한편 예수회 교도의 몇몇 작품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베드르지흐 브리델의 시와 보후슬라프 발빈의 라틴어 작품이 뛰어나다. 발빈은 조국의 과거를 연구하고 체코어를 옹호함으로써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18세기초에는 보다 높은 문학적 목적을 띤 작품은 사실상 체코어로 쓰지 않게 되었다. 조야한 체코어로 씌어진 드라마와 통속소설이 나왔을 뿐이나 민요를 포함해 농민들의 불만을 강하게 표현한 체코 시들은 인기가 있었다. 18, 19세기 체코 문학 18세기에 들어 역사주의와 복고적 취향이 불어닥치자 체코의 많은 학자들이 조국의 고대 문학과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정부의 중앙집권화 경향에 대한 당연한 민족적 반발로서 보헤미아 애국주의가 부활했고, 지방 귀족들의 자체 권력에 대한 관심으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요세프 도브로프스키는 부활한 체코 문학어를 집대성했고 고대 체코 문학사를 쓰면서 이제껏 간과되어왔으나, 후대 문학가들이 따르게 될 양식을 밝혀주었다. 그 자신은 라틴어와 독일어로 글을 썼으나 운문체 연감을 남긴 안토닌 야로슬라프 푸흐마예르 등 몇몇 작가들은 다시금 체코어를 사용했다. 이와 동시에 18세기말의 사회적·정치적 발전으로 체코 문학을 수용할 대중들이 형성되었다. 1786년부터 프라하에서 체코어 희곡들이 공연되었고 도시의 발달로 형성된 새로운 중간계층을 겨냥해 바츨라프 마테이 크라메리우스가 펴낸 신문 등 근대 체코 저널리즘이 대두되었다. 도브로프스키는 체코어를 집대성하는 데 만족했으나 요세프 융만은 체코어를 근대적인 문학어로 만들기 위해 그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착수했다. 그는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을 번역하는(1811) 등 번역작업을 통해 이를 실현했으며, 무엇보다도 기념비적인 체코어-독일어 사전(1835~39)을 펴내 결실을 보았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역시 체코 문화의 부흥을 가속화했는데, 그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역사서는 고전 체코 문학의 마지막 걸작이었다. 일부 슬로바키아 사람들도 체코 문학 부흥에 이바지했다. 그중 얀 콜라르의 풍유적인 소네트 연작 〈슬라브족의 딸들 Slávy dcera〉은 부활한 체코어로 쓴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다. 이 시기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은 〈크랄로베 드부르 사본 Rukopis Královédvorsky〉·〈젤레나 호라 사본 Rukopis Zelenohorsky〉이다. 여기에 실린 시는 중세초에 쓴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비양심적이면서도 재능 있는 바츨라프 한카 등의 시인들이 만들어낸 위작이다. 비록 18세기말에 위작임이 밝혀지긴 했지만 이 두 작품은 남부 슬라브인들의 민중시를 모방한 낭만적인 시의 본보기로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모든 체코의 시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을 들자면 카렐 히네크 마하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서정시, 산문 단편들, 서정적 서사시 〈5월 Máj〉(1836) 등은 바이런과 윌터 스콧 경, 그리고 폴란드 낭만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강렬한 시적 통찰력과 완벽한 언어 구사는 더욱 돋보인다.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이 1840년대의 많은 작가 사이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카렐 하블리체크 보로프스키와 보제나 넴초바 같은 작가는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은 산문의 거장으로서 체코의 산문을 한층 더 일상어에 가깝게 접근시켰다. 하블리체크는 정치 저널리스트로서 합스부르크가의 절대주의에 맞서 체코 민족의 권리를 대변한 비판적인 기사와 훌륭한 풍자시를 남겼다. 특히 유배지에서 죽기 직전에 쓴 〈라브라 왕 Král Lávra〉·〈티롤의 비가 Tyrolské elegie〉·〈성 블라디미르의 세례 Křest svatého Vladimíra〉 등이 대표작이다. 체코 문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최초의 여성인 보제나 넴초바는 〈할머니 Babička〉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단편 속에 시골생활을 그린 이 작품은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견고하면서도 체코 산문에서는 새로운 개성적인 언어가 뛰어나다. 하블리체크와 넴초바, 그리고 인기 있는 시인 카렐 야로미르 에르벤 등의 작품은 185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고 부활된 체코 문학의 낭만주의 단계인 19세기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했다. 이 후반기에 작가들은 더 넓어진 독자층을 위해 글을 쓰면서 다른 유럽 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가치 있는 문학을 수립하려 애썼다. 1858년 〈5월〉이라는 연감이 출판되었다. 마하를 기념해서 헌정된 이 책에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었는데 그중에서 얀 네루다와 비테슬라프 할레크가 출중하다. '5월' 그룹에서 중요한 소설가는 카롤리나 스베틀라(요한나 무자코바)인데, 19세기초 프라하 사회와 북부 보헤미아 시골을 다룬 그녀의 장편소설은 주제와 구성 면에서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상당한 재능을 보여준다. 도덕적·사회적인 문제와 특히 19세기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가 그녀 작품의 주된 주제이다. 아돌프 헤이두크도 이 그룹의 후원을 받으면서 문학에 발을 내디뎠다. 그의 애국적인 시, 특히 체코 민족과 슬로바키아 민족의 연관성에 영감을 얻어 쓴 시들은 시대의 시련을 가장 잘 딛고 일어선 작품이었다. 1870년대에 이미 시와 소설 장르는 완전히 확립되었으나 드라마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문단은 〈루미르 Lumír〉·〈루흐 Ruch〉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명확히 두 그룹으로 갈라졌는데, '루미르' 그룹은 체코 문학의 유럽화를 강조했고 '루흐' 그룹은 민족적 전통과 주제를 중시했다. 세계주의 경향을 띤 '루미르' 그룹의 주도적 인물은 체코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야로슬라프 브르흘리츠키(에밀 프리다)였다. 그의 서정시는 놀랄 만한 언어 구사력을 보여주며, 최고 걸작을 담은 역사적 서사시들은 방대한 전집을 이루었다. 또한 그는 많은 유럽 작품을 번역함으로써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끼쳤고 그 자신 근대 체코 시어의 형성에 이바지했다. 역시 '루미르' 그룹 작가인 율리우스 제예르는 신낭만주의 서정시와 서사시를 통해 세계주의적인 사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자서전적인 요소가 많은 〈얀 마리아 플로이하르 Jan Maria Plojhar〉(1888)를 비롯한 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더욱 독창적이다. '루흐' 그룹의 중요인물은 스바토플루크 체흐인데 조국과 전통에 대한 사랑과 자유주의적 인간애에 기초한 작품을 썼다.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인 〈보리수 그늘 아래서 Ve stínu lípy〉는 체코의 시골생활을 목가적으로 그렸다. 한편 그는 풍자적 산문을 통해 체코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풍자한 인물 브로체크를 창조했다. 체코의 장편소설은 세기말에 들어서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두드러졌다. 이 경향은 알로이스 이라세크와 지크문트 빈테르라는 2명의 중요한 장편역사소설 작가의 작품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미스트르 캄파누스 Mistr Kampanus〉 같은 빈테르의 장편소설은 역사가로서 행한 활동의 부산물이다. 두 사람 모두 체코의 역사를 낭만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세부복원 작업은 학문적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이라세크의 장편소설은 자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체코의 전 역사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의 성숙한 기교는 민족 쇠퇴기를 다룬 장편소설 〈암흑 Temno〉에서 가장 빛난다. 1890년대에 이르러 시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는데 더욱 섬세한 내용과 복잡한 형식의 서정시가 안토닌 소바에 의해 산출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2명의 주목할 만한 시인 오타카르 브르제지나(바츨라프 예바비)와 페트르 베즈루치(블라디미르 바셰크)가 걸작을 선보였다. 브르제지나는 섬세하고 독창적인 언어로 개인적인 신앙을 표현했다. 자유시적 운율을 포함한 그의 운율구조는 후대의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베즈루치는 지방주의적인 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슐레지엔의 체코 민족이 당한 억압을 다루고 있다. 민족부흥이라는 낭만적 이상주의에 대한 1890년대의 비판적 반동은 T. G. 마사리크의 역사적·사회적 저작에 영향을 주었다. 문학비평에 대한 더욱 세련된 접근은 프란티셰크 크사베르 샬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조국의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그의 섬세한 해석은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1918년 이후 체코 문학 1918년 독립 체코슬로바키아가 수립되면서 체코의 작가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했다. 이 시기부터 체코 문학이 거둔 가장 훌륭한 성과는 특히 서정시의 극단적인 다양성이다. 체코 드라마도 제자리를 찾아 카렐 차페크의 이상주의적이고 풍자적인 희곡과 다재다능한 프란티셰크 랑게르의 희곡이 나왔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야로슬라프 하셰크는 〈훌륭한 군인 슈베이크 Osudy dobrého vojáka Svejka za svĕtové války〉(1921~23)라는 장편연재소설을 시작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배경으로 한 이 풍자소설은 폭넓은 찬사를 받았다. 프라하의 생활을 다룬 사실주의적 소설은 카렐 마테이 차페크 호트의 작품과 이그나트 헤르만의 가벼운 작품으로 성공적으로 다듬어졌으나 체코의 이야기체 산문은 개성이 매우 뚜렷한 3명의 작가들, 카렐 차페크, 이반 올브라흐트(카밀 제만), 블라디슬라프 반추라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차페크는 섬세한 심리학적 분석인 웨일스 환상곡과 3부작 〈호르두발 Hordubal〉(1933)·〈유성 Povĕtro〉(1934)·〈평범한 삶 Obyčejny život〉(1934)·〈핵의 판타지 Krakatit〉(1924)·〈영원과의 전쟁 Válka s mloky〉(1936) 등을 썼다. 그의 최고 희곡은 중앙집권화된 20세기 기계사회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있는 〈R.U.R.〉(1920)·〈곤충의 놀이 Ze života hmyzu〉(1921) 등이다. 그의 〈R.U.R.〉를 통해 로봇이라는 단어가 영어에 도입되었다. 그의 후기 희곡은 평화주의 대신 애국적 의무를 받아들이고 있다. 올브라흐트가 가장 성공을 거둔 작품은 루터교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반추라는 복잡하고 개성이 강한 문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얀 오트체나셰크의 장편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많은 소설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다. 전쟁중에는 심리학적인 소설이 바츨라프 르제자치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절정에 올랐다. 1948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르제자치 등 많은 작가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수용했으나 오히려 문학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1960년대초에 정치적 통제가 느슨해지자 요세프 슈크보레츠키, 밀란 쿤데라, 루드비크 바출리크의 장편소설과 보후밀 흐라발과 아르노슈트 루스티크의 단편소설, 미로슬라프 홀루프의 시, 이반 클리마와 바츨라프 하벨의 희곡 등이 곧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정력적인 개혁가 블라디미르 파랄 같은 다른 작가들은 국내에서 비판적인 성공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1968년 소련군이 침공해오자 이 가운데 많은 작가들이 해외에서 명성을 떨치면서도 국내에서는 탄압을 받았다. 많은 작가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쿤데라와 슈크보레츠키는 문학의 주제와 처리를 선택함에 있어서 민족 혈통을 버리지 않은 채 망명국에서 곧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의 문학은 197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판된 대부분의 작품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 같은 기간에 외국에서는 20세기 체코 문학이 이룩한 가장 뛰어난 업적에 대해 뒤늦게 관심을 보였다. 요세프 호라, 프란티셰크 할라스, 비테슬라프 네즈발,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가 2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쓴 서정시가 특히 주목을 받았다. 1980년대까지 생존한 세이페르트는 자신의 후기 시가 영어 및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735    시인이 된다는것은... 댓글:  조회:3843  추천:0  2016-10-31
시인이 된다는 것            /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곱셈 속에서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게 때문이지   시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시집 『시인이 된다는 것』(세시,1999) ............................................................    소설 으로 잘 알려진 체코의 작가이자 시인인 밀란 쿤데라의 첫 시집에 실린 작품이다. 그는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전 방위적 글쓰기로 옥타비오 파스와 더불어 세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위트와 패러독스와 지성이 넘치고 섹스와 정치가 뒤얽힌, 모든 것은 농담 한 마디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과 느림의 미학을 강조한 등도 유명하다. 그의 시는 우리가 이해하는 리얼리즘 시와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중간쯤에 있다. 그의 시들은 모두 자기만의 개성적 언어로 한 차원 높은 경지에서 표현된 것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더라도 결코 알아먹지 못하는 횡설수설과는 차원이 달라 그의 사유는 늘 명민하고 명쾌하다. 사소하게 보이는 글 한 줄에도 인생의 비밀을 통째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시인이 된다는 것’ 또한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일찍 계산하고, 너무 일찍 절망하여, 너무 일찍 포기하고 일어서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끝까지 가보지 않은 길은 늘 후회만 남겼으므로, 설령 둘레가 또다시 자신을 배신하더라도 가야할 길은 가야하고 끝을 봐야할 것은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작의 태도가 그러해야 하고 시인은 대저 그런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야 한다. 이성복도 시인에게 있어 '자신의 삶이 담보되지 않은 시는 잔고가 없이 남발하는 수표와 같다. 그에 반해 가장 아름다운 시는 전 재산을 걸고 떼어주는 백지수표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렇게 무모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발 디디려 하지 않은 조악하고 추잡한 현실의 늪이야말로 시가 자라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 덧붙였다.     시는 곧 시인이어야 하고 시인의 삶이 곧 시로 표출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성복은 '바닷가에 시체들이 파도에 밀려온다면 그 시체에 가장 먼저 달려드는 것은 파리다. 그 파리가 곧 시인의 자리다'라는 어마무시한 비유로 엄혹한 시론을 펼쳤다. 일상생활에서 불요하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예민한 감각을 시인에게 요구한다. 감각의 사제가 되어 아무런 유익이 담보되지 않고 무엇도 원치 않는 가운데서 끊임없이 정수리를 찧으며 '절망의 끝까지' 가야한다. 이성복 시인은 교수직에서 물러나 팔공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예전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대중 강의 나들이를 가끔 한다고 들었다. 어쩌면 그의 시 강좌는 빵조각과 찬밥 덩어리 위로만 윙윙거리면서 언어 유희에만 사로잡힌 시인들에게 스스로 나자빠지도록 권유하며 휘두르는 파리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듯 설익은 말놀음이 아니라 생각의 줄기를 잡아채 끈질기게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이 곧 시다. 시는 사물에 대한 관심 차원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집요한 관찰을 통하여 관통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 다른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다.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이성의 힘으로 다스려 치열하게 언어를 조탁해내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거쳐 사물이 새롭게 태어난다. 좋은 시인은 그 과정에서 자기를 잊어버리는 아름다운 몰입 속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항상 끝까지 가보는’ 그 도정에는 치러야 할 댓가들이 즐비하다. 고뇌하지 않고 고독하지도 않으면서 좋은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권순진 ====================   시인들이여, 그대의 광활한 영혼을 노래 부르시오  - 밀란 쿤데라  시인들이여, 그대의 광활한 영혼을  수천의 박수소리를 불러일으키는 피리를 노래 부르시오  이제 꽃바구니에서 시대신 수백 번 갉아 먹힌 사과를  건네주는 그들을 도산케 하시오  만일 그대들의 가슴이 사회주의 신념으로 충만하다면  그대 노래하시오, 그리고  그가 아니 저 예술쟁이가 혹여 무어라 하는지 묻지 마시오  인생이 질풍이 치듯 귀에 쨍쨍하면  현기증이 그를 사로잡고 신음케 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노래하시고, 집의 창문들이 열리고  먼지 낀 창턱에서 꿈들이 춤추기 시작할 것이오  노래하시오, 램프의 물결처럼  충만되고 거대한 우리의 인생이  인민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오도록 !  진정 투쟁과 전쟁이 몰려오면  시인은 단지 울려퍼지는 슬로건 몇 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생의 수천 가지 색깔의 깃발을  인민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외다  * 김규진 옮김, 밀란 쿤데라 시집 '시인이 된다는 것' 중에서.  - 시하늘에 사는 시인들 마다의 영혼은 광활함이 끝닿아서 더더욱 광활함으로, 이미 시들은 이데올로기며 사상, 철학, 모든 것이 시로 승화되어 세상은 그래도, 한 번, 살아볼 만한 것임을...    
1734    "풀"의 시인 김수영을 다시 떠올리다... 댓글:  조회:5198  추천:0  2016-10-31
시인 김수영     김수영 시인은 앞서 말한 기준에서 볼 때 위인이 맞다. 시인으로서 뛰어나고 훌륭했으니까. 그의 시가 교과서에 수록되어서인지, 그래서 시험을 보기 위해 그의 시를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인지 김수영은 대중적으로도 매우 잘 알려진 시인이다. 중고등학교를 별 탈 없이 졸업한 사람이라면 그가 「풀」이라는 시를 썼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조금 더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까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이 있다. 한국 문학사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자 '참여시인', 그리고 끊임없이 '자유를 노래한 시인'이라는 평가다. 맞는 말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를 빗대어「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의 업적을 모두 논하기에는 그것이 이 글의 주제와 맞지도 않을뿐더러 필자의 능력으로 모두 설명하기에도 벅차다. 또한 그러기에는 지면, 아니 화면(?)이 너무 협소하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 남긴 시인 김수영의 족적이 매우 굵직하다는 의견에는 대부분 이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제위들도 그가 위인이라는 필자의 견해에 수긍해 주시길. 그렇지 않다면 그의 ‘찌질함’에 대해 논할 이유가 없어지잖아...   이 글에서는 되도록이면 그의 시를 최소한도로만 인용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이 자리는 시와 문학을 이야기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시에 한해서는 예외다. 시인은 시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의 찌질함   백 마디 말 보다 시 한 편으로 설명하는 것이 낫겠다.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한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년에 발표된 이 시는 발표 5년 전인 1958년에 쓰여졌다 한다. 그리고 이 시는 김수영의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 내용 그대로 김수영은 길 한복판에서 그의 부인을 우산으로 두들겨 팬 것이다. 그것도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부인 김현경의 말에 의하면 당시 김수영은 술에 만취할 때면 1년에 두세 번씩 아내에게 사정없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김수영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었던 것이다.   천천히 시를 살펴보자. 길 한복판에서 우산으로 자기 아내를 패는 것도 충분히 못났는데, 그 다음이 더 가관이다. 홧김에 아내를 패고 나서 정신을 차린 뒤 기껏 한다는 생각이,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나 후회가 아니라 사건 당시 아는 사람이 자신을 보았을까 하는 걱정이다. 두들겨 맞은 아내에 대한 생각에 앞서 자신의 체면이 먼저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아예 그보다 먼저 버리고 온 우산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김수영과 김현경,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   당시 마흔 여섯의 김수영, 그리고 김현경 여사의 현재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수영은 그 시절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했듯, 한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모두 겪으며 살았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일제의 징집을 피해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에 살기도 했다.   해방 후 아내 김현경과 결혼했으나 6.25전쟁이 터지면서 인민군에 의해 강제로 의용군으로 끌려갔으며, 인민군의 후퇴 과정에서 탈출했지만 UN군에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김수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4.19혁명, 그리고 이어진 5.16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김수영이 김현경을 처음 만난 것은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후였다. 선린상업학교 전수부(야간)를 졸업한 김수영은 같은 학교 선배인 이종구와 사이가 가까웠으며 이종구와 같은 집에서 동경 유학 생활을 함께했다. 이종구는 동경상대에 다니고 있었고 김수영은 미즈시나 연극 연구소에서 연극을 공부했는데, 당시 김수영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 김수영에게 충분한 돈을 보내지 못하는 처지여서 동경 생활의 상당 부분을 이종구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종구가 잘 아는 동생이었던 사람이 훗날 김수영의 아내가 되는 김현경이었던 것이다.   동경 유학 생활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 김현경을 알게 된 김수영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해방 후 김수영과 김현경은 부부가 되어 한 집에 살게 되었고, 김현경은 이들의 첫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6.25 전쟁은 비극이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개인에게도. 김수영 또한 그러한 개인 중 하나였다   서울에서 미처 이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 김수영과 그의 가족.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수영은 다른 문인들과 함께 ‘의용군’이 되어 인민군에 끌려 가고 만다. 가족과 헤어진 김수영은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뒤집어지자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북쪽으로 행군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김수영은 행군 도중 전열을 이탈하여 탈출을 결행하고 온갖 죽을 고비를 넘는다(실제로 첫 번째 탈출 후 도망치다 북한 내무성 군인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할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반 거지꼴이 되어 남하하던 김수영은 유엔군에 다시 붙잡혀 결국 거제도 포로수용소에까지 끌려간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가장 처절한 이념 대립이 있었던 그곳 말이다. 반공포로 신분의 김수영은 동료들이 친공포로에 붙잡혀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과, 반대로 반공포로가 친공포로를 집단 린치하는 장면을 모두 목격한다.      그 살벌한 지옥의 현장을 견딘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난 후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에 아내 김현경의 소식을 듣는다. 그가 그토록 처절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 인민군에 붙잡혔을 때는 자신이 의용군이라고 항변하며 살아남았고, 유엔군에 붙잡혔을 때는 거꾸로 자신이 인민군이 아니라고 주장해야만 했다. 그토록 그가 기어이 살아남아야만 했던 이유가 그의 아내와 아이였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추측일까?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는 악착 같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김현경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산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수영은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한     김현경은 부산에서 이종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수영이 한 방에 기거하는 이종구와 김현경을 목격했을 때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그것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도 일지 않는 잔잔함 그 상태였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전쟁 발발 후 여태까지 넘어왔던 수많은 죽음의 고비와, 그 고비고비를 넘을 때 스스로 살고자 했었던 다짐들이 김수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김현경 또한 나름의 사정은 있었을 것이다. 전쟁은 터졌고, 남편은 끌려갔다. 남편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아니 사실상 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현명한 것이었을 그 아득한 시간을 보낸 그녀가,전쟁 중 다른 이와 살림을 차린 것이 무에 그렇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여기까지가 김수영과 김현경,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던, 살아가야만 했던 그들에게 누구의 잘잘못도 따질 수는 없다. 그저, 사정이 그러했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김현경과 이종구의 동거를 김현경의 ‘외도’나 ‘바람’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김수영은 방 안에 있는 김현경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가자.”     김수영 같이 자존심 강한 이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지를 가늠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김현경의 한마디는 어쩌면 그들의 동거 사실을 목격했을 때 김수영이 받았던 충격 보다 더 컸을 것이다.     “그럴 수 없어요.”       김수영은 혼자가 되었다. 홀로 가족이 있는 서울에 돌아왔다. 혼자된 그의 심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역시나 그가 남긴 시다. 상편에서 말했듯, 시인은 시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侮辱(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圓周(원주)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遊星(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억만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김수영의 마음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1년 후, 김현경은 이종구와 헤어지고 김수영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김수영과 김현경의 결혼 생활은 김수영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것은 ‘가족의 재결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고는 표현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이 사건은 김수영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흉터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이 김현경에게 주기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편에 소개한 김수영의 시 「죄와 벌」,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난 김수영의 폭력을 설명하면서 그의 찌질함을 말해놓고 이제와 그의 사연을 구구절절 하게 말하는 의도가 그에게 어떤 면죄부를 주고자 함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 또한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핑계 있는 무덤’ 중 하나일 뿐일 테니 말이다.     「죄와 벌」의 모순     앞선 회에서 소개한 김수영의 「죄와 벌」에는 길 한복판에서 우산으로 아내 김현경을 두드려 패는 김수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김수영의 ‘못난’ 고백. 집에 돌아와서 마음에 가장 꺼리는 것이 혹시나 그 사건의 현장을 아는 사람이 보지는 않았을까 했다는 것. 그런데, 이 시에는 모순이 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시 「죄와 벌」의 화자가 완벽하게 김수영 그 자신이라고 가정한다면, 집에 돌아와서 혹시 아는 사람이 보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그의 고백은 한가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가 아내를 구타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순은 여기에 있다. 아는 사람이 볼까 부끄러운 자신의 행동, 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 그런데 그걸 시로 써서 발표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은 물론, 현장에 없었던 불특정 다수가 알게 될 것임에도?그리고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마득한 시간 후에 태어난 나조차도 그 사건을 알게 되어 버렸다. 그가 아내를 구타한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후에 아는 사람이 봤을까 걱정했다는 것과, 두고 온 우산이 먼저 생각났다는 속마음까지 그의 시를 본 모두가 알게 된 것이다.   모두가 다 아는 비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김수영을 위인이게 하는 이유가 있다.         자유의 시인 김수영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 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 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김수영을 표현하는 단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유’. 그는 자유를 갈망한 시인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김수영이 꿈꾸는 자유가 어느 정도의 자유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위의 시,「김일성 만세」를 보여줄 것이다. 심지어 김수영은 ‘이 정도면’이라는 전제가 붙은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와 개인의 금기가 되어 있는 ‘김일성 만세’라는 다섯 글자. 그렇다면 그는 소위 말하는 ‘빨갱이’인가?       김수영이 전쟁 중 겪었던 그 일들. 남하한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일. 가족들과 헤어져 생사를 넘나든 경험. 지옥 같았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기억, 그리고 씻지 못할 상처가 되었던 김현경과 이종구의 동거. 이 모든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6.25전쟁에 있었고 그 전쟁은 다름아닌 북한이, 바로 김일성이 주도한 것이다. 만약 김수영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차라리 그는 어버이연합의 기수가 되어 ‘종북주의 척결’을 외치고 있어야 했다. 김수영의 경험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그게 훨씬 자연스럽다.     사람이 가장 뛰어넘기 힘들다는 경험적인 한계. 김수영을 그걸 넘어서 ‘김일성 만세’가 인정되는 자유를 꿈꾸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연쇄살인범에게 희생당한 사람이 ‘사형제 반대’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라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김수영에게 ‘김일성 만세’는 그가 동조하는 신념이 아니라 그저 그가 꿈꾸었던 자유의 완성이었을 뿐이다.     그가 남긴 시와 산문, 그리고 그의 삶에서 김수영은 지독하리만큼 끊임없이 자유를 외쳤다.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당사자를 찬양하는 것까지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만큼.       ‘인간 김수영’으로부터 자유한 ‘시인 김수영’     김수영이 추구한 자유의 범위와 그 의미가 단순히 언론의 자유, 사회적 자유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김수영이라는 인간 본인으로부터 또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죄와 벌」의 모순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시에 나타난 인간 김수영은 어디까지나 그저 평범하고 찌질한 인간이다. 그의 시 안에는 한 때 아내에게 버림받았던 상처가 되살아날 때마다 그것을 물리적 폭력으로 해소했던 ‘인간’ 김수영이 있다.그러나 그것을 시로 나타낸 것은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 시인의 육필 원고     그가 생전에 남긴 여러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 「죄와 벌」 외에도 자기 비하 혹은 자기 폭로에 가까운 시가 여러 편 눈에 띈다. 익히 알려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는 사회와 정부의 부조리함에는 고개 숙이고 침묵했던 자신이 설렁탕집 주인에게는 갈비에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욕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 시인임에도 내가 시에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고백, ‘나 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설움이 곳곳에 묻어있다. 시인 김수영이 인간 김수영을 바라보는 눈은 제 3자의 그것보다도 훨씬 냉혹하다. 이토록 시인으로서 김수영은 김수영 그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가 추구하는 자유에는 한계와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바로 보마’라는 여섯 글자     이렇게 스스로에게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에는 반드시 한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밑바닥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 진저리 치게 싫어하는 스스로의 밑바닥, 애써 외면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으려 해도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악순환. 남에게 들키고 싶어하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본인조차 그것을 들여다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애써 외면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합리화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좌절하고 그대로 주저앉거나.     그러나 스스로의 굴레에서 자유하려면,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온몸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과 화해를 하던, 시원하게 욕을 쏟아내던, 최소한 그 모순의 실체를 발견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그림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때 등 뒤에서 나를 비추는 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하림은 「김수영 평전」에서 그의 초창기 시 「공자의 생활난」이 발표 직후부터 오늘까지 반세기를 두고 주목되는 것은 ‘나는 바로 보마’라는 6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보마’가 김수영을 자유이게 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김수영은 자신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바로 보려고 했을 뿐 아니라 인간 김수영 그 자신 또한 바로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고통스럽고 처절한 작업. 내가 내 자신을 바로 보는 일. 그것을 통해 김수영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서 자유할 수 있었다.     김수영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자신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물리적 폭력으로 해소할 수 밖에 없었던 그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던 그가 어떻게...       김수영의 불가능한 꿈과 이상     60년대 한국 문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김수영과 이어령(우리가 알고 있는 그분 맞다)의 논쟁에서 김수영은 ‘문학의 본질은 꿈꾸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수영에게 있어 불가능한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김수영은 시인이 되고 싶어했다. 그가 시인임에도 그는 끊임없이 시인이 되고 싶어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스스로가 시에 반역하는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했고 때문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가 꿈꾸는 시인의 이상향에 미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그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심지어 그가 생각하는 시인의 잣대에 미치지 못하는 시인이라면 자신뿐 아니라 동료 시인들에게도 거침없는 비판의 화살을 퍼부었다. 우리에게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또한 김수영과 꽤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내내 김수영으로부터 알맹이는 없고 겉멋만 잔뜩 든 시를 쓴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이는 김수영이 오만하고 건방져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김수영은 그 자신 또한 자신이 꿈꾸는 시인의 모습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김수영과 박인환     김수영이 생각하는 시, 그리고 시인은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를 쓰는 것이었다. 김수영에게 있어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우직하게 한걸음씩 전진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김수영을 위인이게 한 그것     불가능한 꿈과 이상! 도달하고 싶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곳에 이르기 위해 김수영은 자신의 흉한 내면, 밑바닥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에서 자유할 수 있었다. 김수영이 한국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결코 그의 태생적 비범함에 있지 않다. 이것이 필자가 의 첫 번째 위인으로 김수영을 소개하고자 한 가장 큰 이유이다.     ‘불가능한 꿈과 이상’, 그리고 ‘스스로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어찌 보면 식상하기 그지없는 이 말이 김수영이 나에게 던져준 가장 묵직한 울림이었다.     내가 김수영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찌질하다. 그리고 그런 찌질한 내 모습이 밖으로 튀어 나올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찌어찌 그 시간이 지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은 찌질함을 반복하는 내게 미래나 희망 같은 것은 너무 먼 나라 이야기였다. 찌질함. 심하게 말하면 병신스러움.   반복되는 찌질함의 끝은 어디인가     그런 나에게 그 다음을 보여준 것이 김수영이었다. 나 자신의 찌질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끝이자 결론이 아님을 알게 해준 사람이 김수영이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벌거벗은 내 앞에 마주섰다. 앞으로도 나는 꾸준하게 찌질할 것이며 이 지난한 굴레를 반복하는 것이 나에게 정해진 미래일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찌질한 내가 그럼에도 예전과 같지는 않아진 것은, 그럼에도 뭔가 바라보는 저 끝이 생겼다는 것이다. 도달하지 못해도 좋다. 처음부터 그건 불가능한 꿈이었을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가  김수영편, 졸필의 마지막이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처럼 살다 떠난 김수영. 196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수영은 풀처럼 누웠고  「풀」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뱀발.   필자가 김수영편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이 여러분께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인 능력의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여 그걸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언젠가 필자가 졸필을 벗어나게 되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모두 전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왠지 그 또한 불가능한 꿈이 될 것만 같아 씁쓸하다. 벌써부터 ‘다음은 누구로 하지? 어떻게 쓰지?’하는 걱정이 태산 같으니...          
1733    "곰팡이는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것처럼..." 댓글:  조회:4166  추천:0  2016-10-31
김수영 시론의 비극성     박정근 (평론가, 『윌더니스』 발행인)   김수영시인은 대표적인 4.19 혁명의 상징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가 4.19 혁명의 자유정신을 시를 통해서 가장 절실하게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으로서 부조리한 상황을 수용하기보다 부조리가 없는 사회를 꿈꾸고 그것의 현실화를 추구하였다. 완벽한 민주적 사회는 아직 미지의 영역에 존재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현실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과정 속에서 고통이 뒤따르고 심지어 불가피하게 충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온몸으로 밀고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저항을 노래한 김수영 시인은 그로 인해 외적인 압력에 시달리고 실존적인 고통을 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 고통을 피하는 것은 시인의 도리가 아니며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용기를 요구하였다. 그런 극단적 선택은 시를 쓰는 행위를 실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적 행위로 보는 시각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시쓰기에 대한 실존적 인식이 시 한편마다의 창작의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며, 한편의 시가 완성되고 나면 시인은 이전의 자아의 죽음을 자초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해야 한다고 보았다. 만일 시인이 불변의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를 집착한다면 진정한 시를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죽음의 순례를 지속해야 한다. 김수영 시인의 자유에 대한 추구는 참된 창작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며, 그의 일관된 죽음의 시론이 되었다. 결국 김수영의 시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언급했듯이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행방과 그 행방의 거리에 대한 해석과 측정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진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수영이 시론으로서 내거는 ‘죽음’은 결코 패배주의적이거나 염세주의적 관점의 육체적 파멸의 개념이 아니다. 시인의 죽음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한계에 의해서 육체적으로 소멸하는 현상에서 머물지 않는다. 고대 풍요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노쇠한 노왕을 야음을 틈타 제거하고 젊은 왕이 등극함으로써 공동체의 존속을 꾀하던 비극적 긍정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노왕의 죽음이란 낡은 것의 제거를 통한 새로운 것의 탄생을 기도하는 제의적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인들이 갠지스강에 몸을 담고 씻는 행위는 죽음을 통한 재생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식이라는 해석을 김수영의 죽음의 시론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개체의 자아가 불가피하게 가지는 한계로 인하여 생기는 타자와의 소통과 나눔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개체는 사회 공동체에 속해있으면서도 마치 세계 속에 홀로 존재하는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세계의 현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대양처럼 개체의 존재를 위협하기 때문에 개체는 자신의 주위에 ‘마야의 베일’을 씌우고 그 환상 속에서 숨고자 한다. 니체는 이러한 기만적인 도피를 ‘아폴로적 환상’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런 환상 속에서 안주하는 개체는 세계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관계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개체는 이런 자아나 세계와의 불가능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과 함께 공존해야할 공동체나 대자연으로 시야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개체적인 죽음을 불사한다. 그 마야의 베일인 환상의 막을 찢어버리고 개체의 죽음을 초래하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의 주장과 연관해보면 그의 시론에서의 죽음이란 “가장 고유한 나만의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바깥으로의 타자로의 열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을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말이 아니다 (「말」 부분)     시인이 작품 속에서 구사하는 말은 결코 주관적이고 개체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개체의 한계를 규정짓는 사고나 가치관은 시인을 과거의 시간에 가두는 감옥이다. 그것들은 그가 추구하는 자유와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요, 시인이 바라보고자 하는 미래를 가리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자신을 죽이려고 결단해야 한다. 여기서 죽음은 패배적인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재생을 위해서 시인이 벌이는 의도적인 자살행위이다. 진정으로 살기 위해서 죽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지만 진정한 시를 창작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주관적 환상의 막을 찢어내고 죽임으로써 보편적 세계를 획득한 시인의 말은 이미 우주적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시어로 승격될 수 있는 것이다. II   시인의 상징적 죽음은 타자나 공동체와의 진정한 열림의 가능성을 확장시킴으로써 당대 사회에 대해 정직하게 진단하게 한다. 김수영은 그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경직성이나 폐쇄성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50년대나 60년대에 그를 포함한 한국인이 가장 치명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도그마가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정신적 압박이다. 이승만 독재 정권이 부정선거를 비롯하여 자유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정치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상황은 시인에게 자유에 대한 갈구를 하게 한다. 시인은 작품을 통해서 정치 및 사회적 병폐를 개혁하고자 나설 때 ‘참여’라는 명칭을 쓰고자 한다. 그는 참여에 대한 판단기준을 “죽음을 어떤 형식으로 극복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정의한다. 시인이 살았던 50, 60년대는 적색 콤플렉스가 만연했었고 그가 갈구했던 “자유와 전위의 시적 혁명을 용인하지 못할 만큼 경직된” 시대였다. 그가 추구했던 “혁명정신과 글쓰기는 현실적으로 시인의 존재를 위협하였고 죽음의식으로” 몰아갔으며 “빠져나갈 곳을 몸부림치며 모색과 운산을 거듭하는” 삶은 그로 하여금 다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했다. 그는 민주사회가 내세우는 정의와 자유가 단지 활자로서만 존재하는 상황에 대해서 환멸과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사령」 전문)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창작과 글쓰기의 자유를 필수적인 가치로 여기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한국이 분단국가로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고 획책하는 것을 묵과하지 못한다. 당시 정치세력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규제하는 모순된 상황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내세웠다. 김수영은 이념적 경직성이 시민들과 시인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에 대해서 회의를 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창작과 글쓰기에서 필수적인 사고의 다양성을 해치는 검열과 규제는 시인에게는 죽음과 같은 감옥이 아닐 수 없다. 김수영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묶인 사회 현실 속에서 불러일으킬 일신상의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트적이고 독재적인 체제에 대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태도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선언적 시, 「김일성 만세」를 쓰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발표의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2008년 계간 창비 여름호 특집을 통해 미발표 유고시로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 시야말로 분단국가의 금기를 풀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을 담고 있으며 정치세력에 의해서 시인으로서의 신분상의 파멸을 각오함으로써 쓸 수 있는 용기를 획득한 ‘죽음의 시론’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일성 만세」 부분)   김수영이 시쓰기에 있어서 아방가르드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그의 죽음의 시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시인은 한순간도 어떤 이념이나 가치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매순간 변신을 꾀해야 한다고 본다. 첨단의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서 기존의 사고와 감정을 버리는 것은 시인에게는 죽음의 의식이 된다. 항상 새로운 시적 방법과 소재를 추구하기 위하여 완성된 시를 시인의 손을 떠나는 순간 버리고 독자들에게 맡긴 채 다시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진정한 시를 쓸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김수영은 시인의 정신은 옛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서 자유분방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움직임은 시의 본성이면서 이 본성은 삶과 세계의 본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시인은 이런 시의 속성을 수용해야 하며, 또한 그는 “인간이기에 움직이고, 시를 쓰는 주체이기에 움직”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김수영의 죽음의 시론이나 아방가르드 정신은 새로운 시를 쓰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죽음의 시론’을 통해서 “시의 탄생은 곧 시인의 죽음의식을 통해 완성되고 이러한 고비를 넘어설 때마다 새로운 시를 창작하려는 시인의 열망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김수영의 이러한 태도는 타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타난다. 그는 감명을 받은 책일수록 읽자마자 자신의 서고에서 버리고 만다. 일단 자신의 소화해낸 것을 반복적으로 읽고 그것을 작품 속에서 같은 형식과 내용을 표현하는 것은 그의 아방가르드적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III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죽음의 의식을 마치 제의를 진행하는 사제처럼 진지하게 임하고자 한다. 시인에게는 죽음이란 결코 패배주의적 파멸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또한 죽음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 미지의 세계로 이어지는 구원의 줄이 되는 비극적 영웅의 운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극의 주인공은 고통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성숙의 계단에 올라가 선다. 시인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고통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해야 한다. 김수영에게 “몸의 통증은 태고적 원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삶의 조건”이며 현재에 존재하는 실체였고 고통은 현재의 실체일 뿐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어서 “원시적 과거의 먼 시간에서부터 예측 가능한 미래의 시간에 이르기 까지” 반복되는 운명적 존재였던 것이다. 고통은 그에게 자신의 시론 속의 죽음처럼 결코 부정적이고 고질적인 저주가 아니다. 겨울에 죽음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봄에 재생의 환희를 맛보기 위해서 자연은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웠다가 그 꽃잎을 모두 떨어뜨려야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울 수 있다. 인간의 탄생은 여성의 산고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 과정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극복해야 한다. 김수영은 그러한 운명적인 고통의 상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먼 곳으로부터 전문」)   김수영 시의 비극성은 연극적 구조를 전제로 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갈등구조는 김수영이라는 비극적 주인공으로서 시인과 그의 시창작을 가로막는 적대자(antagonist)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것들은 시인의 사고와 정신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도그마일 수 있고, 시인의 전위적 행위나 표현을 가로막는 수구적인 도덕, 윤리, 전통일 수 있다. 그것들은 시인의 끊임없는 변화를 방해하거나 규제하기 때문에 시인은 그것들을 적으로 여기고 일전을 불사한다. 시인은 자유정신과 아방가르드를 구가하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끊임없이 규제의 성을 쌓고 장애물의 그물을 던지기 때문에 그의 창작은 자꾸만 미완성과 소화불량에 의한 설사를 거듭할 수 있다. 즉 시인이 추구하는 자유정신과 권력이 주입하는 통제와 규제가 시인의 정신 속에서 갈등구조를 구축하며 전투를 벌이는 형국이다. 그의 창작정신은 자유와 전위의 투사들을 비극적 영웅으로 진영을 구축하고 전투를 벌이지만 냉전의식이라는 계엄령 아래에서 승전하기가 쉽지 않다. 고작 자유정신이 투정을 부리듯이 돌멩이를 던지면 레드 콤플렉스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는 기관총으로 난사하는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런 정치적 이념은 도덕이나 윤리 등의 보수적 가치를 방패막이 삼아 근엄한 가부장적 마스크로서 뒤집어쓰고 있다. 김수영은 단지 전위적 광대로서 윤리나 도덕의 허위적 마스크를 벗기려 애쓰지만 오랜 시간 덕지덕지 밀착해있던 마스크라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균형적 전투에 너무 탈진된 나머지 진실을 토로하지 못하고 심리적 설사의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 죽음의 시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즉생의 결단으로 진실을 토로하지 못하는 자신을 포함한 소시민의 허약함에 고통을 느끼며 혁명적 외침이 아니라 풍자나 조롱의 간접적 형태로 빈정대는 시는 설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규제로 시를 쓰고 있다 타의 규제 아슬아슬한 설사다   언어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성의 윤리와 윤리의 윤리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이행이다 우리의 행동 이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설사의 알리바이」 부분)     김수영의 시의 새로움을 위한 투쟁의 대상은 당연히 옛 것의 상징인 전통이다. 변화를 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사회는 흔히 전통의 반복성을 강조하여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김수영은 전통이 가지는 완고성에 대해 투쟁을 벌일 뿐 전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전통을 수용하는 것은 전통의 긴 역사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죽은 전통이 살아있는 전통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가 「더러운 향로」에서 원하는 전통은 박물관에 화려한 조명 아래 전시되어 있는 획일적으로 각질화 되어 있는 향로가 아니라 어느 창고에 흙먼지에 뒤덮힌 향로 같은 비인위적인 전통이다. 박물관이나 교과서에 일정한 시각에 의해서 포장되어 있는 전통은 시인에게 새로움을 주지 못하고 식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창고에 처박혀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향로는 시인에게 과거라는 시간 속에 감추어져 있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호기심을 낳는다. 시인은 더러운 향로를 닦아가며 향로의 연원을 더듬으며 흘러간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함으로써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발견의 과정을 통해서 “이미 향로 이상의 것으로 새롭게 소생한 것이며, 그것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결국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만을 고집하며 그것을 관성적으로 보여주고 수용하는 기계적인 전통을 극복하고 시인의 전복적 시각에 의해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반복되는 전통의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향로인가보다 나는 너와 같이 자기의 그림자를 마시고 있는 향로인가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원인을 네가 지니고 있는 긴 역사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오였다 길을 걸어가면서 생각하여보는 향로가 이러하고 내가 그 향로와 같이 있을 때 살아있는 향로 소생하는 나 덧없는 나 (「더러운 향로」 부분)   김수영 시의 비극성은 투쟁의 대상이 외부에만 두지 않고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정직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그것이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또는 그것이 물질적이든 추상적이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모든 것을 내포한다. 이로 인해 시인은 자신의 모든 것과 싸움을 벌이는 꼴이 된다. 시인은 자신이 일생 운명처럼 끌고 다니는 자신의 그림자와도 결투를 벌임으로써 스스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학적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김수영이 주장하는 죽음의 시론에 의하면 그것은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하기 위해서 과거의 모든 것과 결별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시인이 쓰는 “시는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시인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의 이행”과 “모험”을 결행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과거의 모든 것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고통 속에서 전투를 벌이며 “시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일 대 일의 대결의식’으로 순교”하는 의식을 치루며 새로운 창작을 향해서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아픈 몸이」 부분)     김수영의 싸움의 대상은 정치적 권력이나 부정한 자본 등 흔히 자유나 정의를 부르짖는 투사들이 논하는 것들만은 아니다. 시인은 독자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대상을 시적 혁명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그가 이미 그 당시 한국인들의 소시민의식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들을 포함해서 중산층들이 집에서 애지중지로 귀여워하는 아이들에게도 싸움을 거는 것을 알면 실소를 금치 못할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지상정이라 아이의 잘못을 보고도 대충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남의 자식의 흠이야 가벼운 힐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좀처럼 비난하려는 부모는 흔치 않다. 하지만 시인은 어미가 없어서 동정의 눈으로 지켜보아도 시원치 않을 자식에게 혹독하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본다. 마치 독수리나 매가 새끼를 어느 정도 키워놓고는 벼랑으로 데리고 가서 떨어뜨리는 교육방법과 유사한 개념이다. 그는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뿌리는 식초를 치듯이 자식에게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지나친 애정이나 감상성을 배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지나친 애정이나 관심은 자식에 대한 객관적 교육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식을 망치는 것을 의식하여 홀로 독립할 수 있도록 객관적 관찰자로 자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잔인한 교육방법의 상징으로서 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사탕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냉담, 무관심, 회초리 등같이 “아이에게 있어 죽음의 세례”로 매가 새끼를 단련시키는 냉혹한 의식의 소산이며, 이러한 잔인함으로 그에게 “자생력”을 길러줄 수 있을 것이다.   초가 쳐 있다 잔인의 초가 요놈-요 어린 놈-맹랑한 놈-6학년 놈- 에미 없는 놈-생명 나도 나다-잔인이다-미안하지만 잔인이다- 콧노래를 부르더니 그만두었구나-너도 어지간한 놈이다-요놈- 죽어라 (잔인의 초 부분)   김수영이 창작자로서 가장 절실하게 추구하는 가치는 자유정신이다. 하지만 시인의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적들과 투쟁을 벌이는 필사적인 노력은 성공의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적과의 전투는 시인으로 하여금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타협적인 시인들은 “〈오늘의 적〉은 옹호하면서도 〈내일의 적〉을 몰아내는 데”열성적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적〉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내일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시인의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존재들은 과거와 기득권에 집착하여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형식을 거부하는 시인의 아방가르드적 추구에 대해서 사회의 전통이나 도덕, 윤리 등의 보수적 가치들은 역사발전을 위한 변화를 ‘불온’이나 ‘퇴폐’등의 죄목으로 판결하고 시인을 구속하고자 한다. 시인은 아방가르드성과 전위성에 대한 몰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무서운 것은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의 문화의 위험의 소재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치스가 뭉크의 회화까지도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그 전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하나의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문예시평」자가 역설하는 응전력과 창조력-나는 이것을 문학과 예술의 전위성 내시 실험성이라고 부르고 싶다-은 제대로 정당한 순환작용을 갖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또한 시인을 둘러싼 환경과 계절, 그리고 습관조차도 한사코 변화를 거부하고 시인에게 반격을 가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시인의 내면속에서도 똬리를 틀고 있는 옹고집의 성격적 요소들이 방패로 가로막으며 변화를 추구하는 자유의 정신에게 배반의 칼을 갈고 있다. 시인을 둘러싼 어느 쪽도 시인의 ‘사즉생’의 창작 정신에 대해서 동의를 하지 않는 상황을 맞은 시인은 그야말로 죽음의 순간과 같은 실존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밀려드는 파도가 그를 익사시킬지라도 변화를 막는 환상적 ‘마야의 베일’을 찢어버려야 한다. 즉 시인은 죽음을 불사하는 순간에 삶의 정체성(status-quo)에 대해서 절망과 좌절의 외침의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절망」 전문)   시인이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지만 반성하지 않는 것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가. 모든 가치나 사물들이 본래적으로 과거의 안락을 지속하려고 하는데, 시인만이 온몸을 들이대며 고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죽음’의 경계를 넘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과정을 통해서 비극적 위대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김수영은 민중을 노래하는 문인들이 자신은 달리지 않고 군중만 달리게 하는 유리현상을 허위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그가 높게 평가하는 신동엽은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획득하는 기술”을 지녔다고 보았다. 이 과정 속에서 비극적 주인공으로서 시인은 한계상황에 의해서 생물학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평범한 속인들이 속물성이나 소시민주의를 위해서 현실과 적절하게 타협하는 순간에 시인은 자유와 아방가르드 정신 부재에 대한 절망과 저항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온통 완강하게 거부의 손짓을 하면서 그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비극성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의 비극성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의 투쟁이 머리로만 수행되었을 때 발생하듯이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으며, 가슴으로만 수행되었을 때처럼 감상적이거나 자기 몰입적이지 않다. 그의 투쟁은 “〈몸〉으로 하는 것”으로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모두 내포하면서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유와 아방가르드를 위한 자신의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안과 밖을 동시에 밀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적으로 삼는 대상은 결코 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분류로 가려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적은 기득권과 안락을 취하려는 자신의 내면의 속성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적 상태에 머무르는 것들을 온몸으로 밀어서 변화시키려는 시인의 행위는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사랑’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희생을 통한 자유정신과 아방가르드의 획득이라는 영웅적 비극성으로 볼 수 있다. 김수영 시가 현대시로서 위대성을 획득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물의 움직임의 속성을 파악하고, 시인 또한 발을 맞추어 부단히 모든 존재적 변화의 움직임에 동참하기 위해 “상승의 힘을 초월의 세계가 아닌 땅의 세계, 생활과 현실에서 찾아낸다”는 것이다.
1732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것을 아는 모양이다"... 댓글:  조회:3829  추천:1  2016-10-31
    온몸의 시학, 김수영을 읽다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위해 / 양심과 정직에 다가가기’                                                                                                 이나무(사회복지학박사/시인)     1      김수영을 떠올리면 일순간 떠오르는 한 장의 흑백 사진이 있다. 비범하게 느낄 만큼 퀭하고 형형한 그 눈빛은 어떤 상흔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포스가 있다. 그 런닝구 포스의 깊고 쓸쓸한 표정은 무엇이 크게 결락된 존재적 고뇌에 잠겨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런 바라봄이 김수영에게 다가가는 우리의 첫 시선은 아니었을까. 뺨을 괴고 앉아 그는 묻는다. “나, 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물음은 현재도 유효하다. 시대를 거듭하며 그 시대가 요구하는 화두는 변하게 마련이지만 김수영의 시에 서려 있는 자유와 양심 그리고 정직이 살아있는 동력은 그만의 상징적 메타포로 지금도 파고든다.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다 되어 가지만 그 존재의 물살은 내리꽂히는 ‘폭포’처럼 부드러운 ‘풀’처럼 넘실댄다. 오늘 그의 시적 시간성을 따라 그 배면의 울림을 건져보려 한다.    문인이건 그렇지 않건 이 자리에서 우리가 김수영을 읽는 것은 한 시대의 역사적 지성인을 만나 문학적 향유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그 끝닿는 곳은 그가 서려 있는 배음과 강고한 정신을 공유하거나, 각자의 정신을 회복하려는데 있을 것이다. 김수영의 정신은 자유, 양심, 정직이다. 곧 삶은 시의 텍스트였으며, 현대시의 가장 지적인 것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시인이다. 온몸의 시학으로. 생각해보면, 현시점에서 자신의 삶을 자기 시의 텍스트로 삼는 시인은 얼마나 될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시 따로 인생 따로 가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자기 삶의 비루함, 양심의 부조화, 자기 환멸의 회복을 위해 고투하는 이들이 있다면 기꺼이 김수영의 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보통 우리의 내부에는 여럿의 자아가 있다. 바깥세계와 관계 속에서 정의와 양심, 위선 없는 간절한 마음도 가져보지만, 그것도 잠시 일뿐, 돌아서면 일상의 몸이 익숙한 패턴대로 거짓 자아로 휩쓸려 사는 경우가 많다. 진실한 순간이 짧은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문득 어떤 일을 떠올린다. 종종 양심과 정의를 따르지 못하는 자신이 가끔씩 술자리에서 자신의 태도를 방어하려고 정치인이나 이름난 명사들의 가식적 위선을 목청껏 지적하며 스스로에게 작은 면죄부를 주려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돌아가 보면 4.19의 역사적 시간을 김수영시대라 할 만큼 그를 4월혁명과 연동시키는 이유가 있다. 김수영의 모던이즘과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김수영의 문학적 혁명은 1968년 그가 돌연 하직할 때까지 계속됐다. 다른 문인들처럼 현실을 예술로 순치시키려는 문학하고는 차별화가 있었다. 그 동향으로 1970년대 이후 시문학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김수영에 대한 조명은 활발하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서 비롯될까. 살아있는 양심과 정직의 바탕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도 구현된다. 김수영은 자유가 가능하게 되는 조건과 역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는 조건을 시적 공간에서 성찰했다. 그 경계의 천착은 아마도 식민지로서의 왜곡되고 추락된 과거의 시간에 대한 기억, 4.19혁명의 분출과 좌절, 군부독재의 성립이 전면에 드러나며 벌어지는 인간의 위악과 속악함을 삶 전체에 체험하며, 시가 존재가 되어 “반란성”으로 이어진다. 즉 ‘자유’가 화두가 된 것이다. 이런 토대로 김수영의 시는 치열한 자기반성과 실천적 자아가 통일된 명징한 텍스트이다. “먼지야 풀아 나는 정말 얼마만큼 적으냐” 라는 시인의 정직하고 일상적 반성은 우리로 하여금 위선을 들여다보게 한다.    오늘 우리가 그의 시를 읽으며 스스로 따갑지만, 뜨겁게 응시하는 정직한 환한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수영 문학관이 설립되고 가 결성되면서 ‘김수영 문학 특강’이 오늘이 세 번째이다. 오래 오래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 김수영의 시를 불러 세워 현재화하고 조명하는 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 우리의 반성과 진정한 진보의 쾌감도 줄 것이다.     2      김수영 시세계의 변천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크게 보면 1945~49년간의 제 1기, 1953~59년간의 제2기, 1960~61년간의 제3기, 1961~68년간의 제4기 등, 네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가 등단 및 수업 시대라면, 제2기는 현대성(근대성)의 관념적 추구기로 볼 수 있고, 제3기는 혁명적 양양기로 볼 수 있으며, 제4기는 혁명의 좌절로 인한 현실로부터 퇴각과 일상성의 획득을 바탕으로 풍자와 해탈의 모색 등 다양한 시적 실험이 지속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시대적 흐름에 맞춰 초기시부터 후기시까지 몇 편의 시를 낭독하고 그의 시적 사유의 깊이를 따라가 본다.          제1기 시 -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장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초기시에서는 ‘본다’는 행위를 두드러지게 의식하는 시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난해성이 두드러지고 시적인 형상화에 있어 추상성이 이 시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태도가 단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연에서 시인은 꽃의 개화와 줄넘기 장난을 병치적인 이미지로 구성한다. 시적 주체가 구하는 것은 “발산한 형상”이지만 그것은 “장난” 같은 것이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느닷없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국수를 잘 먹는 것을 “나의 반란성”이라고 한다면 ‘개화’로부터 “발산한 형상”을 얻는 것 대신에 세계에 대한 다른 태도를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본다’는 표현으로 축약된다. 그러니까 ‘바로 본다’는 것은 보는 주체의 의지가 강조된 표현이다.    따라서 이 시는 김수영 시에서 ‘보는 주체’의 자기 정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선언은 ‘보는 주체’의 자기 의지가 삶을 관통하며 죽음 시간까지 온몸으로 밀고 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시의 제목이 ‘공자의 생활난’인 것은 기이하다. 한편에서는 이 ‘바로 봄’이 “朝聞道夕死可矣”라는 구절과 연관시켜 김수영의 ‘바로 봄’이 도(道), 진리를 깨침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물의 생리”와 “수량” “명석성”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겠다는 본질 직시의 의지가 이 시작(詩作)의 출발이고 끝인 듯싶다.       제2기 시 -        나의 가족 ∣김수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영(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 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그가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성북동 집에 돌아와 쓴 한 편의 시가 이 시다. 그 시점에서 시인의 사변(思辨)은 사라진다. 사변의 저장고였던 ‘서책’은 전쟁 후 50년대 초기시에서는 가족들이 묻혀온 세속의 먼지와 장구한 세월의 때에 파묻혀 사라진다. 서책의 장엄한 역사의 위대성이 얼마나 일상에 비해 추상적이고 덧없고 부질없는 것인가를. 이 순간의 일상의 진리를 깨달으며 오래되어 낡고 “고색이 창연한” 단면들이 “억세고도 아름다운” 세월의 지층 속에서 새롭게 머무는 시인의 시선이 이 시에 머문다.    전쟁을 거치며 부조화와 번잡, 낡은 일상의 색깔을, 그는 ‘사랑’이라 불렀을까. 피난지에서 돌아와 쓴(1954) 작품이니만큼 가정의 평범한 일상과 평화에 대한 안도와 휴식이 드러나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가족주의적 부드러움이 표현된다.  「나의 가족」은 인간임을 인식하게 하고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는 ‘릴케론’의 핵심적인 구절과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이 가족주의적 시적 어조는 아마도 전쟁을 겪는 와중에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체험에서 최우선으로 다가오는 절대적 목소리가 가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의 가족주의는 높은 이상과 정신적 지향이 좌초당한 뒤에 오는 운명애적인 느낌을 주는 그런 가족주의이다    이후, 김수영의 ‘가족’은 물질적 궁핍과 일상적 삶의 생존 경쟁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끝없이 표류한다.        제2기 시 -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은 많은 대중들한테 알려져 있는 시다. 치열한 자기 성찰을 보여주는 시로 ‘눈’을 보는 시선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임을 의미한다. ‘눈’에 대한 경의나 깨끗함의 관념을 덧씌우지 않고 그 생명체로서의 어떤 정신을 표상한다. 김수영 시의 가장 특징은 시적 대상에 대한 이념이나 관념을 씌우지 않는 데 있다. 오로지 시의 관심은 그 정신의 움직이는 힘 자체이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는 행위이다.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라는 표현에서 보듯 기침을 하는 것은 억압과 싸우는 것이다. ‘눈’은 따라서 주체이면서 대상인 존재이며 ‘눈’은 시선의 대상이며 시선의 또 다른 주체이다. 청유형의 문장으로 ‘젊은 시인’을 끌어들여 표면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흥미롭다.                                                                                    제3기 시 -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우리의 역사적 사건 중 4.19 혁명하면 김수영 시인을 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작가들 중에서 한 역사적 사건과 이토록 연동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단연코 김수영은 4월혁명의 시인이다. 4월혁명을 주제로 쓴 김수영의 여러 시 중에서도 가장 절창이라 할 수 있는 시는「푸른 하늘을」꼽는다. 당대의 시 중 신동엽의「껍데기는 가라」와 함께 가장 훌륭한 시라 생각한다. 1960년 6월 15일에 쓰인 이 시에는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했던 고귀한 희생과 의미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김수영의 시문학이 터져 나오던 당대의 시점을 조금 들어가 보자. 1960년대 초반은 실존주의와 모던이즘의 경향이 혼재하면서 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대 이와는 대척점에서 동시대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시 안에서 반영하고 현실타개의 의지를 노래한 시인들이 있다. 이때 김수영, 신동엽이 단연 꼽히며 신동문, 박봉우, 조태일, 황명걸 등이 그 목록에 드는 인물이다. 이 열기로 1970년대 이후 사회 참여시를 확장시켜 나가는 발판을 이루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 민중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푸른 하늘을」다시 읽으며 4월혁명의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미친 현재적 의미를 생각한다.       제4기 시 -       사랑의 변주곡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가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욕망-입’의 이미지를 ‘사랑’과 대비시키며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변두리 낡은 집 방구석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희미한 불빛 아래서 시작(詩作)에 몰두하는 시인의 영상이 스쳐지나간다. “아들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사랑을 배울 거다”라는 확신에 찬 선언, 예언이 나오는 맥락은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로서 “혁명의 기술”로 전화(轉化)하는 비밀이 이 시에 있다. 김수영은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 바로 ‘사랑’과 ‘혁명’의 동력이라고 규정한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은 도시생활의 피로와 우울을 ‘사랑’으로, 그 사랑을 다시 혁명의 열광으로,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환멸을 통해서, 시인은 사랑의 참된 의미를 경이롭게 변주한다.    “간단(間斷)도 사랑”이라는 구절은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사랑은 자신을 성찰하고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 혁신하는 과정은 사랑을 만들고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김수영의 시선의 기술은 허위의 조작술에서 정직한 바로보기로, 피로와 우울의 삶에서 “단단한 고요함”의 삶으로, 비주체적인 것에서 주체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이 땅의 평범한 시민들인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가 열망하는 것은 욕망과 광신을 넘어 존재하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일 것이다. 없는듯하지만 있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그 단단한 고요함의 각질을 뚫고 사랑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울 주체가 민중이라 생각한다.        제4기 시 -         성(性)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튼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마지막으로 이 시는 기만적 화자가 비속한 언어를 가지고 치열한 자아성찰에 이르는 과정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춘다. ‘그년’하고 외도를 하고 온 ‘나’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나를 의식하고 있는 ‘나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있다. 화자는 여편네가 자신의 위선을 감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상태는 아내와 나의 성관계를 황홀이 아니라 연민의 순간으로 만든다.    ‘개관(槪觀)’하는 위치에 서게 될 때 두 사람의 성적인 상호 관계는 비대칭적인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주체의 시선과 응시 속에 들어오는 대상에 대한 사랑 혹은 성적 욕망은 벗겨보면 텅 빈 베일 속의 구멍인 바로 그것(the Thing)이란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울 속에 비친 타자(이미지)를 자신인 줄 착각하는 라캉의 거울단계와도 같다. 대상에 대한 그 자체가 착각으로 미혹적 거리를 두게 된다. 여편네에 대한 미혹적 사유, 즉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이 환상이다. 따라서 주체는 대상을 바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속아주고 속이는 잘못된 관계를 의식함으로써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으로 화자는 자기의 위선과 기만을 반성으로 이끌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속고 만다”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남을 속이는 것이 곧 자기를 기만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속한 언어로 치열한 자기 성찰에 이르는 이 시의 과정이 어떤 아름다운 시보다도 우리를 바짝 양심의 벌판에 세워 환기시키는 힘을 느낀다. 이것이 김수영의 시힘이고 본질이라 생각한다. 자유와 양심에 다가갔던, 그러나 매끄럽지 않았던, 그 만의 존재성이 지닌 그의 원시성을 우리는 사랑한다.              고맙습니다!      
1731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댓글:  조회:4329  추천:0  2016-10-31
  공자의 길, 김수영의 길 -1- 유교적 모더니즘의 실험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일러스트 /강일구  15년 전쯤 『김수영론(論)』을 펴낸 적이 있는데, 독자들이 진지하게 읽어주고 자주 인용해주어 요즘도 많은 보람을 느낀다. 가끔 나의 저서에만 초점을 맞춘 글도 눈에 띄는데, 그런 글을 읽을 때는 모종의 채무의식에 빠져들기도 한다. 과분한 찬사를 받아 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심정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치기가 채 가시지 않은 글에 그토록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으니 저절로 부족했던 부분이 눈앞에 맴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어떤 호평에도 부끄럽지 않을 당당한 ‘김수영론’을 써보아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이런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얼마 전부터 김수영(1921~68)을 다시 붙잡고 있다. 과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면모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해서 점점 재미가 붙어가고 있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몸서리를 친 적도 있다. 그것은 김수영이 선비의 차림으로 나타날 때였다.   양복보다 선비 도포가 어울리는 김수영 사실 김수영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 분류된다. 그의 시 정신은 자유라는 한 단어로 압축되곤 한다. 이때 자유는 근대성의 정수를 담는 개념이며 내면적 자율성과 전위적 실험, 그리고 진보적 참여라는 세 가지 구심점을 지닌다. 김수영의 시학은 심미적 창조와 정치적 비판을 통합하여 존재론적 극한으로까지 수렴시켜간다. 근대성의 첨단에 서서 당대의 문화적 낙후성과 정치적 후진성을 소리 높여 질타했던 김수영이었다. 그런 김수영을 계속 읽어갈수록 양복을 차려 입고 나와도 시원치 않을 그의 모습은 자꾸 갓을 쓴 선비로 바뀌어 갔다. 그의 작품 세계 전체가 초지일관 유교 전통의 유산에 물을 대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영의 데뷔작은 ‘묘정의 노래’와 ‘공자의 생활난’(1945)이고, 마지막 작품은 ‘풀’(1968)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폭포’(1957)나 ‘거대한 뿌리’(1964) 같은 시가 있다. 최초의 두 시가 표제어로 내건 묘정(廟庭·사당의 앞뜰)과 공자는 유가 전통의 심장부에 속한다. 공자는 유교의 창시자이고, 묘정이 상징하는 제례(祭禮)는 유교 문화의 근간이다. 김수영은 시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자신을 공자의 친구로, 혹은 옛 사당의 복원자로 그리고 있다. 시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군자의 길과 동일시하고, 시인의 역할을 전통을 창신하는 화공(畵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20년 후에 발표된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과 같은 문장이 괜히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김수영은 나이가 들어서야 불현듯 역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부터 이미 전통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논어를 패러디한 듯한 마지막 작품 ‘풀’ 이런 관점에서 읽는다면,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인 ‘풀’은 『논어』의 한 대목(12:19)을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것이 틀림없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이런 원래의 문장이 김수영에게 와서는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전복의 노래로 바뀐다. ‘공자의 생활난’에 나오는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사물의 우매와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역시 『논어』(4:8)에서 자주 인용되는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문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풀’보다 대략 10년 앞서 발표된 ‘폭포’는 단도직입적인 반역의 용기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현대적 자유의 이념을 표현한다고 평가된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이런 대목은 앞에서 인용된 시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충동이 숨 쉬는 모더니즘의 정신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시들을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점이다. 사실 곧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비정신의 핵심 아닌가. 『논어』(6:19)에는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곧음(直)이다(人之生也直)”라는 말이 있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는 이 구절을 근거로 곧음을 생명의 원리로 끌어올렸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곧음을 공적 실천의 최고 이념으로 발전시켰다. 가령 조선 후기의 사대부 송시열은 세자 책봉의 문제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되자 이렇게 일갈했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원리와 성인이 만물에 대응하는 원리는 오로지 곧음에 있을 뿐이다(天地之所以生萬物, 聖人之所以應萬物, 直而已)”. 자신이 바른 소리를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쪽 같은 선비정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선비정신의 역사 안에서 읽어야 해석 가능 김수영의 ‘폭포’는 모더니즘의 역사만이 아니라 이런 선비정신의 역사 안에서 읽어야 한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이런 구절을 통해 모더니즘의 죽음충동은 선비정신의 죽음 충동과 하나로 뒤엉켜 식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서의 죽음 충동이 마주 보는 가운데 서로 풍자하고 있다. 이런 장면은 김수영의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가령 ‘공자의 생활난’에서는 국수와 마카로니가, ‘백지에서부터’에서는 쇠라의 점묘화와 선비의 수묵화가 마주 서 있다. 이렇게 시선을 동서로 이중화시켜 상호 풍자의 장면을 연출하는 기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김수영의 시들은 반쪽밖에 읽을 수 없거나 아예 읽을 수 없는 난해 시로 전락한다. 가령 ‘격문’(1961) 같은 것이 좋은 사례다. “편편하고 시원하고”라는 술어가 하늘·땅·물·도시·버스 등 온갖 주어에 반복적으로 결합하면서 길게 이어지는 이 시는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 … 이 시원함은 진짜이고/ 자유다”로 끝난다. 그런데 왜 이런 시에 격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인가? 그것은 무엇을 선언하는 격문인가? 이는 『논어』(7:37)에 나오는 “군자의 마음은 평탄하고 물로 쓸어내린 듯 시원하다(君子坦蕩蕩)”는 구절에 기대지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다. 시인의 길과 군자의 길을 구별하지 않는 김수영은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일정한 경지에 들어섰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제 3의 상상력의 길 열려고 노력 김수영의 작품 중에는 이렇게 유교 전통으로 돌아갈 때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시들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인의 의도와 방법이다. 그 의도는 서양의 모더니즘과 당대의 낙후한 한국적 현실 사이의 거리로 향한다. 그 아득한 거리를 시적 주체로서 살아내고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유교 전통의 상상력을 현대적 상상력과 마주 세우는 데 있다. 김수영은 두 전통의 상상력을 상호 풍자적인 관계 속에 배치하는 가운데 한국의 문화적 조건에 부합하는 제3의 상상력의 길을 열고자했다. 이런 의도와 방법을 통해 김수영이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의 문제는 유교적 모더니즘의 가능성에 있다. 과연 서양 문화의 첨단인 모더니즘과 동아시아 문화의 근간인 유교 전통은 서로 만날 수 있는가? 서로 자극하고 변용하면서 미래의 역사적 현실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을 정초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미래의 선도자 역할 해야 할 동아시아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서구 진영과 쌍벽을 이루는 정치경제학적 위상을 획득해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성취를 설명하고 미래의 선도자로서 인류 전체의 이상적 진로를 가늠하는 이념적 시야를 구축할 필요성까지 내다보게 되었다. 과거에는 유교적 자본주의니 유교적 민주주의니 하는 것이 거론될 때는 그 배후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급조해내기 위한 방편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지구촌의 음지에서나 거론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21세기의 역사는 동아시아에 위대한 기회를 선물하는 동시에 무거운 책임을 맡기고 있다. 동아시아는 이제까지의 성공을 자화자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과연 저성장, 양극화, 생태위기 같은 기존의 정치경제학적 체제가 부딪힌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촌 전체의 화해와 희망을 약속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문화적 비전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도, 단기간 내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만큼 수많은 시행착오와 논쟁의 고비를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김수영이 걸었던 여정은 동서 문화의 창조적 횡단을 꿈꾸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아름다운 선례로 남을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공자의 길, 김수영의 길’이 오늘부터 연재됩니다. 동서양 철학에 정통한 김 교수는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인 김수영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김 교수는 김수영 시인의 모더니즘에서 유교사상과의 접점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야 할지 성찰할 예정입니다.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프랑스 파리4대학 (Paris-Sorbonne) 철학박사. 근현대프랑스철학 전 공.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 역임. 한국연구재단 책 임전문위원, 네이버 열린연단 자문위원. 최근의 저 서로는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등이 있다       //              
1730    한국적 모더니즘 대변자 김수영 작품 공자에 젖줄 대다... 댓글:  조회:3938  추천:0  2016-10-31
  김수영(1921∼1968)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대변자로, 혹은 저항시인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런데 그의 작품세계가 공자에 젖줄을 대고 있단다. 동서 사상사를 횡단하는 이런 흥미로운 주장을 편 이는 서울대 철학과 김상환 교수다. 데카르트 철학의 권위자인 그는 신간 ‘공자의 생활난’(북코리아)에서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더니즘과 전통주의가 김수영에 이르면 서로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몇몇 평론가들이 김수영의 대표시 ‘풀’을 논어의 한 구절과 연관시켜 해석한 바 있다. 저자는 이를 확장시켜 김수영과 논어의 연관성을 하나의 학문체계로 완성한다. 첫 작품에서 마지막 시에 이르기까지 싯귀 하나하나를 예로 들어 설득력 분석하고, 일관성 있게 풀어가는 솜씨가 놀랍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의 우매와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의 첫 시 ‘공자의 생활난’(1945)이다. 이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사상 속에 꿈틀대는 죽음충동이 분출하는 문장이라고 지적한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에 한강을 건널 때 마음에 새긴 문장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밝힌 대로 혼돈의 시류와 억압적 정국에 맞서려는 김수영의 ‘바로 보마’ 정신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정신이다. 이는 명석 판명한 진리를 구하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시선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 ‘풀’(1968) 역시 군자의 덕을 바람에 비유한 논어의 문장을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했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도 같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 가혹한 형법주의에 이의를 제기하던 공자는 자신의 덕치주의를 바람과 풀의 관계를 끌어들여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에서 풀은 바람의 구속력에서 해방되어 자발적인 운동의 주체로 거듭난다. 김수영은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며 일견 덕치 논리를 따르는 듯 하면서도 종국엔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게 된다”며 민초의 힘을 우위에 둔다.  이 뿐 아니다. ‘더러운 향로’(1954)는 군자를 청동향로에 비유하는 유교전통과 이어져 있고, ‘나의 가족’(1954), ‘가옥찬가’(1959)는 유교적 가족 윤리에 대한 자긍심을 노래한다. ‘폭포’(1954)는 선비정신을 집약하는 직(直·곧음)과 연결된다. 저자의 말대로 김수영의 핏줄에는 면면히 선비정신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안의 서구 추종주의를 부끄럽게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충분히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인 만큼 보다 대중적인 글쓰기를 시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 공자(孔子)의 생활난 / 김수영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장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로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1945)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 김수영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먼 바다를 건너온 용이하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에서 온 것이다 주변 없는 사람이 만져서는 아니 될 책 만지면은 죽어버릴 듯 말 듯 되는 책 캘리포니아라는 곳에서 온 것만은 확실하지만 누가 지은 것인 줄도 모르는 제2차 대전 이후의 긴 긴 역사를 갖춘 것 같은 이 엄연한 책이 지금 바람 속에 휘날리고 있다 어린 동생들과의 잡담도 마치고 오늘도 어제와 같이 괴로운 잠을 이루울 준비를 해야 할 이 시간에 괴로움도 모르고 난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 그저 멀리 보고 있는 것이 타당한 것이므로 나는 괴롭다 오 - 그와 같이 이 서적은 있다 그 책장은 번쩍이고 연해 나는 괴로움으로 어찌할 수 없이 이를 깨물고 있네!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여                                (1947)   아메리카 타임 지(誌) / 김수영     흘러가는 물결처럼 지나인(支那人)의 의복 나는 또 하나의 해협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   기희와 유적(油適) 그리고 능금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여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   와사(瓦斯)*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또 활자를 본다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을 보고 와사의 정치가들을 응시한다   *와사: 개스(gas)의 일본식 표기.                                           (1948)     이(蝨) / 김수영   도립(倒立)한 나의 아버지의 얼굴과 나여   나는 한번도 이(蝨)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어두운 옷 속에서만 이는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울린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의 수염을 바로는 보지 못하였다      신문을 펴라   이가 걸어나온다 행렬처럼 어제의 물처럼 걸어나온다                       (1947)      
1729    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어도 문학이란 친구는 있다... 댓글:  조회:3906  추천:0  2016-10-31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자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적 충격을 받는다. ‘아, 나도 한번 저 사람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다. 지식욕도 일종의 허영이다. 한번 폼 나고 싶은 거다. 사람은 남들에게 폼 나 보이고 싶을 때 성장한다.       어릴 때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이 들면서는 대중에게 폼 나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애나 어른이나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폼 나 보이고 싶어 한다.       헤겔의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핵심은 나도 한번 폼 나고 싶다는 심리학적 ‘동기motivation’다. 내 지적 성장 과정에서는 이어령 선생과 도올 김용옥 교수가 그렇게 폼 나 보일 수 없었다. 나도 그들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었다.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84년, 반정부 시위로 제적당했던 사람들을 일괄 구제해준다며 군사정권이 유화정책을 폈다. 그 덕에 나 역시 채 1년도 못 다니고 제적당했던 고려대학교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해직되었던 사학과의 강만길 교수, 이상신 교수 등도 제적된 학생들과 함께 복직되었다. 그들은 전설이었다. 복교 후, 그때 그 강의실의 벅찬 흥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싶어 했고, 선생들은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학생들은 강만길 교수에게 서울대 신용하 교수와의 한국 근대사 논쟁에 관해 집요하게 질문했다. 아, 그땐 교수들 사이에 그렇게 폼 나는 학문적 논쟁도 있었다. 이상신 교수는 의외로 키가 작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쓰리보단three button’의 양복을 항상 단정하게 입고 나타났다. 그의 콧수염도 참 멋졌다. 해직 기간에 썼다는 그의 『서양사학사』는 책의 두께만으로도 학생들을 압도했다. 그토록 그리웠던 ‘공부하는 캠퍼스의 냄새’였다. 지식을 폼 잡을 수 있었던 그 허영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해직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주 특이한 교수의 이름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철학과 김용옥 교수였다. 지금과는 달리, 아주 촌스러운 ‘하이카라’ 스타일이었다. 검은색, 흰색 한복을 번갈아 입고 나타났다. 가끔은 이소룡 영화에 나오는 중국옷을 입고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욕설이나 성적性的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성들의 ‘주관적인 성적 수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표현들이었다. 요즘 세상이라면 바로 구속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온통 억압뿐이던 그 시절, 그의 언행은 ‘통쾌함’ 그 자체였다. 사실 그의 도발적 언행은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그의 인정투쟁은 이제 많이 진부해졌다. 통쾌함이 없다. 아니, 별로 안 재밌다! 그러나 당시, 김용옥 교수는 내게 아주 특별했다.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인문·사회과학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김용옥이 처음이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여겨진 후, 인식주체인 ‘나’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사라졌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주체가 배제된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객관성objectivity’,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신뢰성reliability’,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의 ‘타당성validity’, 그리고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표준화standardization’ 및 ‘비교 가능성comparability’이다.       과학적 주장이란 그 누구도 주관적 의견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관성은 과학성의 최대 적이다.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 이 자연과학적 과학성이 어느 순간부터 인문·사회과학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학문의 주어가 생략되어버린 것이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 또한 객관화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같은 객관성의 신화가 구체화되고 제도화된 결과가 바로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신념의 결과다. 그래서 심리학과에 들어가면 통계학과 자연과학적 실험방법론을 필수로 배워야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이야기만 주워듣고 인간 심리를 분석해보겠다며 심리학과에 진학한 이들은 죄다 실망한다. 프로이트는 객관적 심리학의 적이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인문·사회과학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포스트모던 논쟁을 거치면서 ‘객관성의 신화’는 무너진다. 자연과학에서조차 그러했다. 하이젠베르크W. K.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핵심은 객관성의 해체다. 객관성 개념 대신 이제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란 개념이 사용된다. 주체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유효한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상호주관성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에 계몽이나 강요가 설 자리는 없다.       서구 객관성의 신화에 억눌린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기 이야기 하기를 주저했다.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아예 자기 생각이 없는 듯했다. 스스로 생각해서 이론을 수립하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의 위대한 학자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변부 열등감에 주눅 들어 보였다. 그러나 김용옥은 달랐다.       그는 ‘내 이야기’를 했다. 그가 쓴 글의 주어는 대부분 ‘나’였다.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용도 엄청났다. 『논어』 『맹자』 『주역』을 말하다가 느닷없이 가다머H. G. Gadamer나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의 해석학을 설명했다. 고루한 『논어』 『맹자』 이야기가 그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그런 식의 접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김용옥은 그 모든 학술적 담론을 항상 ‘자기 자랑’으로 끝냈다. 죄다 ‘깔때기’였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좀 이상했다. 미국 사람이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과 비슷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의 주체적 글쓰기의 탁월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크로스 텍스트는 텍스트를 떠나지 못한다       대부분의 한국 교수들이 두려워하는 자기 생각 말하기, 즉 주체적 글쓰기가 김용옥에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크로스 텍스트cross-text’적 사유 때문이다. 동양적 텍스트의 근본적 이해와 더불어 서구 해석학적 방법론이라는 그의 무기는 해당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문화·언어·정치적 콘텍스트context, 맥락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크로스 텍스트적 독해는 당연히 주체적 글쓰기로 이어지게 된다. 텍스트의 콘텍스트를 상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김용옥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무한하다는 거다. 죽을 때까지 한 이야기 또 할 수 있다. 개신교의 목사, 천주교의 신부, 불교의 스님들이 평생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가 항상 변한다. 같은 이야기도 콘텍스트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는 말이다. 해석학의 본질은 ‘에디톨로지’다.       나는 요즘 한양대 국문과의 정민 교수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신문에 연재하는 내용이나 출간하는 책을 보면, 참 고수다. 틀에 박힌 공자, 맹자 이야기가 아니다. 내 연배에서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하는 이는 드물다. 그에 비하면 내 성과물은 참 우울하다. 그다지 겸손할 이유가 없는 나지만 그의 저작들을 보면 기가 많이 죽는다. 그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해석의 근거가 무한하다. 고전을 다룰 줄 아는 이는 기본적으로 한 자락 깔고 들어가는 거다.       나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모두 내 머릿속에서 나와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한두 번 반복하면 ‘자기표절’이라고 욕먹는다. 억울하다. 다 그놈의 청문회 때문이다. 어설픈 교수들이 정치하겠다고 나서니 자기표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나오는 거다. 세상에 자기 생각을 표절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굴 표절하라는 것인가? (허접한 변명인 것 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위로가 된다.)       난 그래서 앞뒤 꽉 막힌 ‘한글 전용론자’들이 몹시 원망스럽다. 한글의 의미론적 배후에는 죄다 한자가 숨어 있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더욱이 21세기는 동양이 대세다. 실용적으로만 생각해도 한자는 필수다. 영어는 유치원 때부터 배우면서 왜 한자는 필수로 배우지 않는 것일까? 한반도의 문화사적 이해가 배제된 어설픈 민족주의는 정말 위험하다. 한국 사람이 동양고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다.       김용옥이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 텍스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전 해석학은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과거’가 만나는 곳이다. ‘과거라는 해석의 콘텍스트’ 속의 ‘현재의 텍스트’와 ‘현재라는 해석의 콘텍스트’ 속의 ‘과거의 텍스트’가 서로 교차한다는 뜻이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이 ‘과거의 현재’ 혹은 ‘현재의 과거’라는 해석학적 맥락과 아울러 ‘동양의 서양’ 혹은 ‘서양의 동양’이라는 해석학적 맥락이 이중적으로 교차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래서 남들은 전혀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한계도 있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반드시 텍스트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를 떠나면 ‘순 구라’가 되는 까닭이다. 개신교 목사나 가톨릭 신부가 『성서』라는 텍스트를 떠나면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콘텍스트를 바꿔가며 한 이야기 또 해도 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김용옥의 정치적 발언들이 조마조마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크로스 텍스트의 숙명이다.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유학을 다녀온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수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전공이 있다. 흥미롭게도 다 위대한 서구 학자를 전공했다. 헤겔 전공, 마르크스 전공, 하버마스 전공 등등. 나 또한 비고츠키L. S. Vygotsky를 전공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상하다. 그럼 헤겔은 누구 전공인가? 마르크스나 하버마스는 대체 누구를 전공했단 말인가?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옳은 소리다. 깜냥도 안 되는 미국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들이 수십만 달러씩을 받고 한국 사회에 대해 아는 체하며 훈수 두는 것보다 훨씬 정직한 태도다. 외국의 석학이라며 어설픈 ‘선수’들 모셔와 영양가 떨어지는 이야기 듣는 데 그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신문사나 기업을 보면 아주 속이 터진다. 한국의 지적 콘텍스트를 처절하게 고민하는 내 원고료는, 죽어라 하고 수십 매 써봐야 몇십만 원이 안 된다. 그것도 많이 주는 것이라며 생색을 낸다.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하려면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 텍스트의 해체와 재구성은 김용옥 식 크로스 텍스트로는 불가능하다. 탈텍스트, 즉 하이퍼텍스트가 가능해야 한다. 한국에도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IT 혁명’이라며 다들 ‘디지털’을 이야기하고 흥분할 때,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디지로그’를 이야기했다. 디지털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의 디지로그 개념을 ‘비데와 휴지’로 설명한다. 비데가 나왔다고 화장실 휴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휴지는 더 고급이 되어야 한다. 어설픈 싸구려 휴지를 쓰면 그 부위에 부푸러기가 낀다! 엄청 가렵다.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 개념의 핵심은 디지털의 발전이 아날로그의 변화를 가져오고, 아날로그는 여전히 디지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폰의 터치다. 앞서 설명한 대로 디지털을 쓰다듬고 만지는 아날로그적 행위가 아이폰의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이다.       가끔 이어령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개념 구성을 ‘말장난’이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말장난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말장난 중에 최고는 하이데거M.Heidegger의 실존철학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말장난이 아니던가? 변증법의 핵심 개념으로 ‘지양止揚’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식 번역으로는 아주 폼 나 보이고 그럴 듯하다. 도무지 못 들어본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양’은 독어의 ‘Aufheben’을 번역한 것이다. 독일어로는 지극히 단순한 단어다.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나사처럼 돌면서 위로 올라간다는 변증법적 역사 발전의 메타포를 헤겔은 ‘들어올린다’는 의미의 ‘Aufheben’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번역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적 ‘들어올림’, 이렇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문화·언어적 콘텍스트를 생략하고 헤겔 철학을 읽으려니 그토록 어렵고 힘든 것이다. 그 따위 어설픈 일본식 번역에는 기죽어 지내면서 자기 언어로 학문하려면 그렇게들 폄하한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이 둘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김용옥은 고전 텍스트의 권위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해석학에 머물고 있다. 이어령은 다르다. 텍스트의 끝없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모험을 시도한다. 어떻게든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령의 마이크’를 뺏을 사람이 없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는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혼자만 이야기한다. 제발 좀 귀 기울여 한번 들어보라는 거다. 그는 그래도 된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라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를 만나도, 속으로 ‘그 정도 생각은 나도 한다’며 항상 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고 나면 열등감에 풀이 죽는다. 팔십 노인에게 당할 재간이 도무지 없다. 매번 좌절이다. 도대체 그런 새로운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이어령은 아주 단순하다고 했다. 그는 기호학적 개념인 ‘선택paradigmatic’과 ‘결합syntagmatic’의 구조를 설명했다.       음악을 작곡할 때, 작곡가는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고, 이어지는 음 또한 7음 중에서 또 하나를 뽑는다. 처음에 ‘레’를 뽑았다면, 다음에는 ‘솔’을 뽑고, 그 다음에는 ‘도’를 뽑는 식으로 멜로디를 만들어나간다. 이때 각각의 7음 중에서 한 음을 뽑는 것은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뽑힌 각각의 음들을 이어가는 것은 ‘결합’이다.       음악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려면 현존하는 음악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즉, 각각의 음들이 어떻게 선택되었고, 왜 그러한 순서로 결합되었는가를 의심해보면 된다는 말이다. 바흐의 대위법,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은 모두 그런 식으로 창조된 것이다.       더 쉽게 설명해보자. 코스 요리를 먹는다 치자. 애피타이저를 먹을 때, 메뉴에 있는 여러 가지 애피타이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수프도 하나를 고르고, 이어 샐러드를 고르고, 메인 메뉴를 고른다.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고른다. 새로운 메뉴는 선택의 종류를 달리하고, 그 선택의 순서를 바꾸면 가능해진다. 창조적 셰프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주어, 술어, 목적어 등으로 구성되는 문장의 결합 구조를 해체하면 된다. 동시에 주어, 술어, 목적어가 선택된 각각의 맥락에서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고민한다는 말이다.        이어령은 자신이 어릴 적 품었던 『천자문』에 관한 의심을 이야기한다. 『천자문』의 첫 구절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천자문』을 몇 시간 만에 외웠다는 양주동을 천재라고 했다. 그러나 이어령은 의문 없이 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가『천자문』을 배우며 품었던 의심은 이렇다.       다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의 순서로 외운다. 그러나 이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적 독해는 각각의 단어가 ‘선택’되는 그 기호학적 구조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일단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할 때, 왜 하늘을 검다고 하는가에 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하늘이 파란 것을 안다. 그런데 왜 다들 ‘하늘은 검고……’라고 『천자문』을 외우는가.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첫 문장부터 이상한 『천자문』을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1000년 이상 동안 죽어라 외우기만 하느냐는 거다. 이어령은 이런 의심이 가능해야 동양사상에 숨겨져 있는, 방향과 색깔의 연관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렇게 해체할 수 있어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재구조화, 즉 편집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어령의 질문은 계속된다. 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순서인가를 의심해야 한다는 거다. 왜 ‘천天, 현玄, 지地, 황黃’이라 하지 않는가. ‘천天과 지地’를 함께 묶고, ‘현玄과 황黃’을 차례로 묶어내는 이 결합 구조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의심을 할 수 없으면 새로운 생각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어령은 자신의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의 핵심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古典’의 ‘전典’ 자는 책을 받들고 있는 모양을 상징화한 것이다. 다들 책, 즉 텍스트를 받들고만 있을 때, 자신은 이 텍스트를 해체하는 일부터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로 납득이 안 되면 일단 들이받았다. 텍스트의 선택과 결합 구조를 해체하는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적 사고는 이해 안 되는 것을 묻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런 자신의 태도가 뭐 그리 특별하냐고 되묻는다.       이어령은 너무 억울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항상 건방진 놈, 잘난 체하는 놈, 얄미운 놈이라는 욕을 먹고 자랐다. 항상 미움을 받았다. 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다. 자신은 그저 이해 안 되는 것을 질문했을 뿐이었는데, 다들 그렇게 미워했다는 거다. 단지 텍스트만 해체했을 뿐인데, 그토록 힘들고 외롭게 살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문학을 한 것이라고 이어령은 고백한다. 자신이 만약 사회 규범이나 도덕을 해체하고, 경제 시스템을 해체하는 정치가나 혁명가가 되었더라면 돌을 맞아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책상 앞에 앉아, 앞뒤로 놓인 여섯 대의 컴퓨터로 텍스트의 선택과 결합의 구조를 파괴하고 재창조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서. 
1728    니체은 니체로 끝나지만 공자는 공자로 지속되다... 댓글:  조회:3632  추천:0  2016-10-31
    유교의 미학은 무엇인가?     ‘문명의 충돌’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화의 충돌이 더 실질적이다. 결국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문화다. 문화는 만남의 수단이다. 어떤 문화인가는 누구와 어느 레벨에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다.     결국 인간이 원하는 것은 만남이다. 돈과 명성과 지위는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나 대상에 접근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만난 다음에는? 의사결정한다. 만남의 한 순간에 인간은 전율하고 만나서 의사결정할 때 인간은 즐겁다.     그것이 인간의 전부다. 우월한 문화가 열등한 문화를 잡아먹는다. ‘문화 상대주의’를 떠드는 사람이 있지만 그거 낡은 시대의 계몽주의다. 초딩들에게는 필요한 교양이 되겠으나 어른이라면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한다.     21세기 문화전쟁의 시대다. 승자가 패자를 비웃으면 안되지만, 그 시점에 이미 승자와 패자는 가려져 있다. 문화 상대주의는 승자의 표정관리에 다름 아니다. 우월주의에 취한 백인 하고도 WASP들의 교양에 불과하다.     ‘숨은 전제’가 있다.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는 문화전쟁의 승자이므로 패자들 앞에서 관대해야 한다는 거다. 그게 문화 상대주의다. 분명히 말한다. 문화는 격차가 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다.     문화는 한 방향으로 흐른다. 부지런한 독일인이 게으른 프랑스인을 먹여살리듯이, 문화의 격이 낮으면 보이지 않게 착취당한다. 우월한 문화는? 사람을 만나게 한다. 열등한 문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세운다.     만나려 해도 만나기 어렵다. 카스트는 열등한 문화다. 만남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성차별을 한다면?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한다. 문화실패다. 인종차별을 한다면?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만나지를 못한다.     역시 문화실패다. 인간의 간間은 사이다. 사이는 만나고자 하는 두 사람의 사이다. 만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다. 노예는 만나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지 못한다. 사장은 아무 때라도 부하를 호출하여 만난다.     부하는 회의 때 아니면 사장 얼굴보기 힘들다. 돈으로 만남의 권한을 사므로 착취 당한다. 명품으로 치장하면 만날 확률이 올라가지만 그렇게 조롱당한다. 명품을 휘감고도 조롱당하고 있음을 모르니 더욱 비참하다.     만남의 문화를 결정하는 것은 철학이다. 그 철학을 반영하는 것은 종교다. 기독교를 두고 ‘노예의 도덕’이라고 시비한 사람이 니체다. 현대철학이 거의 니체로 시작되고 또 니체에게서 끝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니체를 이리저리 붙였다가 뗐다가 하며 주무르고 있으니 이를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탈근대’니 한다. 니체가 주장한 것은 ‘귀족의 도덕’이다. 귀족의 도덕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공자다. 공자의 표현으로는 군자다.     귀족 혹은 군자의 신분이 아니라 정신의 귀족 혹은 군자 포지션임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군자의 도덕이냐 소인배의 도덕이냐다. 유교가 군자의 도덕이라면 도교는 소인의 도덕이다. 약자의 생존술이다.     한때 유럽이 노예의 도덕인 기독교에 빠져 질식했으니 중세 암흑시대다. 종교개혁이 유럽을 살렸다. 그러나 조금 살아났을 뿐이다. 서구정신은 여전히 혼미하다. 좋은 사상이라도 좋은 시대와 만나지 못하면 실패한다.     공자를 망친 사람은 제자인 증자이고, 니체를 망친 사람은 여동생 엘리자베스다. 그들 개인을 탓한다면 허무한 일이고, 시대의 한계로 봐야 한다. 유교는 역대 중국의 군주들이 망쳐놓았고, 니체는 히틀러가 망쳐놓았다.     시대를 앞서가면 손해를 본다. 시대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본래면목을 봐야 한다. 군자냐 소인배냐 혹은 귀족이냐 노예냐는 표현이고 중요한건 의사결정권이다. 니체의 표현으로는 권력의지the will to power가 된다.     ‘힘에의 의지’라고도 한다. 권력의지가 더 입에 달라붙는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권리의지다. 니체가 종이에다 뭐라고 써놨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니체의 직관을 봐야 한다. 니체를 움직인 그 사유의 모듈 말이다.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기起에 서려고 하는 것이 권력의지다. 자신이 사건의 원인측에 서려고 한다. 그것이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성적인 욕망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근본이다.     구조론의 언어로는 ‘존엄’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려는 것이다. 어떤 일의 첫 시작부분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만날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화가는 붓을 만나려고 하고, 악사는 현을 만나려고 한다.     철학자는 신을 만나려고 한다. 뛰어난 연주자는 가장 좋은 바이얼린을 가지고자 한다. 니체가 그것을 '힘에의 의지' 혹은 '권력의지'로 표현한 것은 단지 그 단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빈곤한 독일어 어휘 중에서 말이다.     철학은 의사결정원리다. 일의 어느 단계에서 의사결정하느냐다. 인간은 기에서 만나고, 승에서 대장을 뽑고, 전에서 방향을 틀고, 결에서 수확한다. 결을 강조하는 문화는 보석과 화려한 장식으로 다수의 이목을 끈다.     전을 강조하는 문화는 우아함과 세련됨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승을 강조하는 문화는 권위적인 질서를 강조한다. 파시즘 예술양식을 떠올릴 수 있다. 웅장함을 강조하는 바로크 양식도 같다. 사람을 제압하려는 의도다.     기를 강조하는 문화는 만나기 좋게 한다. 권위적인 분위기로는 진지하게 만날 수 없다. 우아한 분위기로도 진지하게 만날 수 없다. 그것은 다수의 군중을 만나려는 것이다. 연기자가 대중의 인기를 끌려고 하는 것과 같다.     진짜라면 일대일로 만나야 한다. 조용하고 담백한 만남이어야 한다. 그 안에 미학이 있다. 미학은 만남의 장에서 질을 균일화 한다. 판을 고르게 해야 만날 수 있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계로 나눈다.     질의 만남, 입자의 만남, 힘의 만남, 운동의 만남, 량의 만남이 있다. 귀족의 만남이 있는가 하면 노예의 만남도 있다. 차 한 잔의 만남이 있는가 하면, 배불리 먹는 만남도 있다. 나의 전부로 세상 전부를 만나야 멋진 거다.     철학이 타락하여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면 종교다. 대개 타락한다. 대중이 량의 만남을 원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노예였던 시대라면 자연히 노예의 도덕을 따르게 된다. 다수가 원하는대로 가면 당연히 문화가 망한다.     문화는 그 시대에 가장 잘나가는 사람 기준에 맞추어 평균을 끌어올리는 장치다. 대개 왕실의 문화가 전파된다. 왕실이 망해서 졸지에 실업자 된 궁중요리사가 파리 시내에 식당을 개업하니 프랑스 요리가 발전한 거다.     일은 만남으로 시작된다. 군자의 직업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CEO의 일은 만나야 할 사람을 찾는 것이고, 말단직원의 일은 만나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만나는 것이다. 유교 미학은 최고의 사람과 어떻게 만날거냐다.     공자를 나쁘게 말하는 것은 니체를 인종주의자로 몰아가는 것과 같다. 그 시대가 나쁜 시대였다. 공자든 니체든 난세에 처하여 고군분투 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왜곡되어졌다. 시대를 앞서가면 그렇게 된다.                 무위자연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기제는 자연법칙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일의 흐름입니다. 엔트로피에 따라 일은 앞이 뒤를 지배합니다. 구조론의 마이너스원리입니다. 그것이 도입니다. 앞에는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를 행사하면 권력입니다. 행사하지 않으면 덕입니다. 인간은 권력을 원하는게 아니라 존엄을 원합니다. 본질은 같으나, 권리를 행사하면 욕을 먹고, 행사하지 않으면 칭찬을 듣습니다. 공자는 권력을 적극 행사하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본인은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1727    詩란 사자의 울부짖음이다... 댓글:  조회:3853  추천:0  2016-10-31
좋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강사/ 최동호  시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구나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할까.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쓰는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이런 과장된 주장에 반대한다. 좋은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말할 것이다. 그게 그 말이 아니냐,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바로 특별하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시를 쓰려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어떤 환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이다.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지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탐닉적 주관성이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천재의 시가 있다. 김소월이나 정지용과 같은 경우가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김소월은 물론 정지용의 경우에도 단어 하나 시 한 줄의 첨삭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 또한 누구보다 치밀하게 초고를 가다듬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교단에서 창작 지망생을 많이 접하는 나의 경우 수많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장단점을 지적해 주었는데, 그들 중의 어떤 이는 몇 마디 언급을 발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지적해 주어도 절대로 자기 주장을 고치지 않아 별다른 진척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남들의 모든 지적을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만 듣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제 3자의 지적을 심각하게 음미하여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이를 수정하는 사람이 좋은 시를 쓰게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두루뭉수리한 지적이나 모호한 칭찬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직접적이고 신랄한 지적일수록 도움되는 바 크다.  2. 모호함과 명료성  시적 감성이나 표현은 명료해야 한다. 모호함은 금물이다. 물론 감정의 엉킴이 복잡하여 때로는 뿌옇게 복합된 심정 상황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명료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들에게 그런 심정을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적 감정을 모호하게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용된 [눈 오는 날은]은 모호한 표현들로 인해 시적 감정이 적절히 정제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눈오는 날은  내리는 눈발 사이 북녘  소식 같은 것 섞여서 온다  새벽녘  시베리아 바이칼호반쯤 휩쓸던  기마민족들 말발굽소리 무수히 지나가고  희뿌옇게 동녘이 처음 열릴 때  하늘에서 내리는 글발, 희끗희끗 단군 한배님의  긴 수염 눈발 사이 휘날리고  환상의 새 한 마리 천년을 거슬러 올라  송화강 언덕을 치닫고  고구려의 위업 삭지 않는  요동벌판 모습 솜처럼 피어오르는  눈오는 날은  별 피듯 송곳송곳 지울 수 없는 생각  한숨에 묻어나는 입김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들  내리는 눈발 사이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고 있는 나를 본다  - [눈오는 날은]  전체적으로 보아 시의 구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자의 감각은 살아 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그 나름으로 갖추어 시상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전개가 판에 박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상의 균형과 안정감을 갖게 한다는 점에 이러한 구성은 커다란 장점이다. 이 시의 전환은 제 4연에 있는데, 여기서 지나치게 무겁고 어색한 느낌을 받는다. 앞의 시행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1연의 '소식 같은 것', 제 2연 '시베리아 바이칼호반쯤', '말발굽소리 무수히' 등에서 '같은 것', '호반쯤', '무수히' 등이 모호하게 돌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3연의 '글발'과 '눈발'도 작자로서는 고심한 결과였을 터이나 제 4연의 시상을 설득력 있게 끌어오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이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작자는 '환상의 새'를 날려 올리지만, 그 새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시적 필연성이 독자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천 년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니 '고구려의 위업'은 더욱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제 4연 마지막 행 '요동벌판 모습 솜처럼 피어오르는'은 이미지를 실감나게 살려 보고자 했다고 판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아도 구체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막 제 5연의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고 있는 나'에서 화자가 너무 표면에 나서서 설움에 떨고 있다고 판단된다. 설명적이고 불필요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라면 더욱 감추거나 다른 이미지를 빌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뒤틀림은 이미 제 5연 제 2행의 '별 피듯 송곳송곳 지울 수 없는 생각'과 제 3행의 '한숨에 묻어나는 입김처럼 지워 버리고 싶은 생각들'의 엇갈림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다.  제 3행의 진술은 그 나름으로 통용될 수 있지만, 제 2행의 경우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송곳송곳'이란 어휘가 이 문맥에서 생경하게 드러남으로 인해 더욱 그러하다. 이 시를 다 읽고 난 독자가 왜 눈 오는 날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떨어야 하는지 선뜻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의 약점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시적 감정은 강렬한 것이지만, 그 강렬함이 선명한 이미지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쉬운 시행 하나를 더 지적하자면 '기마민족들 말발굽소리 무수히 지나가고'에서 작자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시를 읽은 사람 쪽에서 보자면 구체적으로 각인된 무엇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라는 시어가 막연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수히'는 '고구려의 위업'과 '주체할 수 없는 설움'의 동기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역사성을 갖게 하는 시적 긴장 없이 평범하고 느슨하게 사용된 까닭에 시가 전체적으로 생명감과 탄력이 느껴지기보다는 모호하고 막연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3. 명료함과 추상성  명료한 시는 우리에게 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군더더기나 잡박함이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그 명료함은 일단 호감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명료하게 쓰여진 시에서 삶의 깊이가 발견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시적 사고의 단순성에 실망하기도 한다. 명료성은 복잡한 시적 감정이 여과되고 정련된 결과물일 때 독자들로부터 시적 공감력을 갖는다.  다음에 인용된 [유리창에 비, 그리고]는 간단하고 명료한 진술로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온다. 물론 작자가 하고 싶은 시적 전언은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우주의 섭리는 물론 태초의 생명 탄생까지 시적 상상을 확대하고자 한다.  유리창에 빗줄기가 부딪친다  잿빛 하늘의 방사다  무차별 난사되는 수정 알들  투명한 정자가 되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물과 흙의 슬픈 정사  저 어두운 땅속 깊숙이  끝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우주의 섭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어둠은 이제  더 이상 어둠만이 아니다  태초에 생명은 그렇게 얻어졌느니  - [유리창에 비, 그리고]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성적 이미지를 떠올림은 물론 그 아득한 시원으로까지 상상의 진폭을 확장시켜 보고자 한 것이 이 시에서 작자가 시도한 시적 의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일상에서 우주의 섭리와 생명의 창조까지 연상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적 발상은 결코 범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락이 연결되는 제 2연과 제 4연을 한 행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간결 명료하게 시행을 마무리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아 어딘가 이 시가 추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수정의 알들이 투명한 정자가 되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는 시적 전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 1연 4-5행의 진술들이 시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얻고 있는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투명한 정자'가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작자의 시적 상상력의 변증법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것이다. 빗줄기가 유리창에 떨어져 투명한 정자가 되고 이것이 흙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 물과 흙이 뒤섞이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된다는 것이 전체적인 구도이다. 그러나 이 구도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관찰이나 사물의 생명력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미리 설정한 자신의 선입관을 그대로 반영하여 쓴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작자 자신은 우리에게 이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제 3연과 4연의 시적 논리가 어둠은 이제 어둠만이 아니라 생명이다라고 요약되는 것 또한 그러한 진술의 연장선에 있음을 뜻한다. 물과 흙의 뒤섞임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어둠이 생명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이지 시적 통찰에 의한 구체적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위의 시는 크게 공감을 주지 못한다. '우주의 섭리가 천둥처럼 울리고'에서도 산문적, 개념적 진술은 있어도 시적 공감을 유발하는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꼬집어 말하자면, 제 1연에서 '무차별 난사되는 수정 알들'이란 표현이, 마구 쏟아지는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정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일차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무차별 난사' 이상의 표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이 시의 작자가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면 '무차별 난사'가 아닌 그 나름의 다른 표현을 찾았을 것이며, '우주의 섭리'가 어둠 속에서 빗방울을 머금어 어떻게 생명으로 탄생되는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명료한 진술들은 유리창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방안에서 바라보며 떠올린 이런 저런 상념들의 스케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봄부터 우는 소쩍새의 울음과 먹구름 속에서 우는 천둥소리가 있고, 무서리가 내리는 가을 새벽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둠에서 탄생하는 생명 현상에 동참하는 시적 상상력 없이 사물과 거리를 두면서 현상을 외곽에서 묘사하는 시적 진술은 시적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노동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손은 노동에 짓이겨지지 않았을지라도 시인의 펜촉은 노동으로 뭉그러져 있어야 참된 땀냄새가 밴 시가 쓰여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자면 '우주의 섭리'와 같이 크나큰 뜻을 머금고 있는 어휘들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시적 문맥이 아니라면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커다란 것보다는 사소한 것에서, 관념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에서 우리는 시적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짧은 시에 태초에 이루어졌던 생명의 탄생과 같은 거창한 주제를 범박한 언어로 다루어서는 좋은 시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울러 지적해 두고 싶다     ==============================================================================     목숨 ―유치환(1908∼1967) 하나 모래알에 삼천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星芒)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 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 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 데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飄飄)한 이 즐거움이여     시를 들고 찾아온 한 학생이 물었다. 왜 우리 시에서는 강하고 웅장한 시인이 없나요. 왜 다들 애상적이고 절망적인가요. 짐작건대 이 학생은 지친 자신을 퍼뜩 깨어나게 할 대갈일성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경우에 추천해 줄 시인은 많지 않다. 많지 않지만 그중에 유치환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청마 유치환의 시 스타일은 사자후에 가깝다. 사자의 울부짖음이라는 뜻이다. 어떤 말씀이라든가 호통이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즉 유치환의 시는 목소리가 크고, 스케일이 웅장하며, 굵은 진리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목숨’이라는 이 시를 한 번 보자. 첫 연은 땅에서 시작한다. 몹시 작은 모래알에도 몇억 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둘째 연은 하늘에서 시작한다. 반짝이는 성망, 즉 별빛은 유구한 역사의 변천을 지켜봤다. 만물이 죽고 살고 태어나고 사라지는 긴 역사의 끄트머리에, 변함없고 광대한 우주 사이에, 작은 내 목숨이 놓여 있다. 시인은 이때 웃는다. 너무나 큰 시간과 공간 사이 모래알처럼 작은 목숨은 허허허 웃는다.      이때 ‘작은 목숨’은 초라할까. 아니, 이 시는 몹시 자유롭고 시원해 보인다. 하늘 아래, 땅 위에 태어나 지금 내 목숨이 존재한다는 말은 매우 단단하게 들린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압박당하는 목숨은 초라하지만, 갑과 갑 사이에서 작아지는 을의 모습은 서글프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작은 목숨’은 초라한 것이 아니다. 원래, 목숨은, 초라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1726    참말이지 과거는 한줌 재일 따름... 댓글:  조회:3741  추천:0  2016-10-30
  김기림론                                 모더니즘의 한국적 전개 /< 박 철희 > = 문학평론가/서강대교수  한국 시사에 있어서 1930년대초 모더니즘 운동은 한국시의 현대적 전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1920년대 전반기 시의 감상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역이자, 시적 구조(명징한 지성)에 대한 새로운 욕구다. 이러한 반역과 욕구가 20년대 전반기 감상시만이 아니라 후반기 편 내용주의의 시까지 포함한다고 하면, 그에 대한 반명제로 모더니즘의 건설과, 그 옹호를 그 무엇보다도 강조한 김 기림의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이 당시 시의 순수운동을 표방한 시문학파운동과 함께 한국 시사에 차지하는 의의는 자못 큰 것이다. 김 기림에 의해 강조된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은 이렇듯 낭만주의의 병적 감상성과 경향파의 정치적 관념성의 부정에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시의 건강성, 명징성, 조소성을 시의 을 위한 시적 징표로 내세웠다. 이런뜻에서 김 기림이야말로 한국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전위적인 이론가였던 셈이다. 그만큼 그의 시론은 질 양 양면에 있어서 아주 괄목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김 기림 또한 이론가로서의 활동 못지 않게 그의 시작은 한결 더 정력적이고 생산적이었다. {태양의 풍속} {기상도} {바다와나비} {새노래} 등의 시집이 보여주듯이 1930년 이후 6725사변 때 그가 납북되기 전까지 20여 년을 지속적으로 작품활동을 해왔으며, 그 작품수 또한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때 방대한 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구시와 시론과 접촉하면서 이루어진시와 시론, 그 중에서도 시가 시론보다 서구적 자극 못지않게 전통에 대하여 유념하고 있었다. 서구적인 에 매료되어 전통과 무관한지대에서 작업하면서도 그 지대를 다시금 전통과 맞물리게 하는 반작용 시의  을 빚어내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2 김 기림의 시는 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동경에서 비롯한다. 1930년 9월 6일자 {조선일보}에 G.W.의 필명으로 발표된 그의 첫작품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부터 그의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과 심취는 압도적이다. 그만큼 그의 초기시, 특히 시집 {태양의 풍속}을 특징짓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현실안은 철저히 서구지향적이며 문명지향적이다. 이러한 서구지향 문명지향이 그가 처음에 생각한 모더니즘에 틀림없다. {태양의 풍속}의 시편들은 한결같이 의 이미지를구심점으로 해서 모든 시작품에 메아리쳐 있다. 는 을 이루는 대표적 이미지다. 그러기에 을 위하여 은 전면적으로결별되어야 할 세계다. 시집 {태양의 풍속}의 서문과 같이 다. 그것은 이며 이며 또한 이다. 그래서 은 ([십오야(十五野)])이며, 은 태양의 죽여야 할 세계라고 절규([태양의 풍속])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만큼 은 이자 다. 는 그러므로 신선 활발 대담 명랑 건강의 이미지다. 하지만 을 위하여 보다 오히려 을 노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모순, 을 노래함으로써 를 구현한 역설, 이러한 모순과 역설로 이루어진 시가 그가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할 때 쓴 그의 초기 시편이며. 시[가거라 새로운 생활로]이다. 이 시를 시집 {태양의 풍속}에서 [오후(午後)의 예의(禮儀)]편에 시인 자신이 넣은 것은 이 때문이다.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가 보여주듯이 으로 상징되는 문명세계에 대한 동경과 심취는 그만큼 각별하다. 사실 그의 이국적 기질은 너무나 강하다. 그곳은 아침이며 밝음이며 깃발의 세계다. 하지만 이곳은 밤이며 어둠이며 비탄과 울음의 세계다. [기차] [고독] [이방인] 등의 시가 그 시공을 밤과 어둠으로 선택했을 때, 그 세계는 눈물과 울음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있어 이나 이곳의 과거는하루빨리 결별되고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태양의풍속}에 실린 시편들은 동양의 세계, 어둠의 세계로부터 결별과 강렬한 부정을 의미한다. [출발] [깃발] [바다의 아침] [일요일 행진곡(日曜日 行進曲)] 등 여행시는 을 읊은 시다. 여행시는 말하자면 . 문명세계로 항해하기 위한 태양의 풍속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그에게 있어 시는 노래이기보다 인식이며 또한 인식의 기호론이다. 시는 스스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짓는 것이다. 시가 인식되었을 때, 시는 당시 감상주의와 편내용주의에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20년대 전반기 시가 감상에 집착했을 때, 그는 단연코 시의 건강성으로서 지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감상과 지성의 대립은 다시 운율과 이미지로 대체된다. [대합실] [쵸코레 1트] [함흥평야] 등의 시에 나오는 이미지의 조형, 관념의 감각화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미지의 조형, 관념의감각화는 그것이 형식면에서 새로운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이 현실에서 온 것이 아니라 관념에서 온 것이다. 그만큼 타설적이고 관념적이다. 이들 시가 결국 기교주의적 말초화로 시종한 것은 이 때문이다. 3 고 스스로 표방한 장시 {기상도}는 시집 {태양의 풍속}의 시편이 보여주듯이 현실과 유리된 시의 관념적 세계에 대한스스로의 반성이자, 에 부응한 구체적 표현이다. {기상도}는 그동안 그가 시도한 어떤 시보다 크고 넓은 세계이며, 현대문명의 상황을 비판한 의욕적이고 실험적인 시적 구조물이다. 현대문명은 그것에 걸맞는 시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하면서 엘리어트의 [황무지], 스펜더의[비엔나]와 같은 장시를 그는 {기상도}에서 실험한 것이다. 그러기에 {기상도}를 발표한 1930년대 중반은 김기림에 있어 모더니즘과 사회성의종합이라는 시의식의 변화를 보여준 주목할 만한 시기다. 그것은 말하자면 20년대 경향파와 모더니즘의 종합이었다. 그만큼 30년대 중반에서 모더니즘이 위기에 다다른 것이다. 그래서 경향파와 모더니즘의 종합이 낳은 시가 다름 아닌 {기상도}다. 시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기상도}는 현대사회의 어지러운 기상을 진단 비판한 자본주의 문명의 기상도이자 현실의 기상도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 현대문명의 내습을 태풍에 비유하고, 그것으로 인한 세계의 붕괴와 그 재생을 주로 다루고 있는 우의적이고 의욕적인 문명비평시다. 비늘  돋친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두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幅)처럼 미끄러웁고  오만한 풍경(風景)은 바로 오천(午前) 칠시(七時)의 절  정(絶頂)에 가로누웠다 로 시작되는 {기상도}는 모두 424행의 장시로서 [세계(世界)의 아침] [시민행렬(市民行列)] [태풍의 기침시간(起寢時間)] [자취] [병(病)든 풍경(風景)] [올빼미의 주문(呪文)] [쇠바퀴의 노래] 등 7부로 이루어져 있다. 7부로 엮어진 이 시는 7부 각각이 이라는 한 핵을 향해 수렴되고 긴밀하게 엮어지면서 유기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1부 [세계(世界)의 아침]과 이 시의 대단원인 7부 [쇠바퀴의 노래]는 그시적 구조가 시간상으로 원형을 보여주듯이 공간상 원형을 보여주고 있음을 놓칠 수 없다. 말하자면 구조상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이 시의 특색이다. 1부 [세계(世界)의 아침]이 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라면, 7부 [쇠바퀴의 노래]는 태풍을 거침으로써 또 하나의 이 거듭남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재생이자 쇄신작업이라고 할 만하다. [세계(世界)의 아침]의 단순한 무조건적인 새로운 생활에 대한 동경이 [쇠바퀴의 노래]에 와서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의 믿음으로 바뀐 것이다. 는 벗어던지고 을 갈아입어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시 {기상도}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3부[태풍의 기침시간(起寢時間)]을 구심점으로 해서 그 여파를 다룬 2부 [시민행렬(市民行列)]과 4부 [자취]라고 생각한다. 현대문명의 기상(위기)을 태풍의 기상 상황에 비유하여 현대문명의 위기로 인한 모순과 비리와 불합리를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시의 다양한 기법을 맘껏 실험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풍자와 기법이 전통적 형식보다 서구적 형식이 크게 작용한 점에 있다. 그만큼 {기상도}는 그 형식과 내용이 {태양의 풍속}의 시편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서구지향적이며 문명지향적이다. 그의 시만이 아니라 {시론}이 그렇고. {문장론신강}이 그렇다. 더구나 라고 스스로 자처하면서, 을 가지고 모더니즘 못지않게 시의 사회성을 강조했던 그가{기상도}에서 보여준 사회는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한 식민지 조선의 사회가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팽창과 대내외적 갈등과정에서 빚어낸 저쪽 지식인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시방법은 타설적일 수밖에 없고그 때문에 {태양의 풍속}의 시편과 결과적으로 너무나 비슷한 것이다. 다만 {태양의 풍속}이 현실에서 유리된 관념적 세계라면, {기상도}는 현실에의 적극적 관심의 소산이면서 그 현실은 한국적 리얼리티와 유리된 또 하나의 관념적 세계인 것이다. 4 이런 뜻에서 그후 김기림이 {새노래}에 와서 자기비판을 시도한 것은 여러 모로 그의 시적 변모를 이해하는 데 시사적이다. 물론 시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어야 한다는 자각과 모더니즘에대한 이러한 자기비판은 이미 시집 {바다와 나비}에서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태양의 풍속} {기상도} 이후 1939년 대전 발발까지 발표된 시가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 [요양원] [공동묘지] [유리창] [겨울의 노래] 등이 보여주듯이 그가 그동안 의욕했던 모더니즘의 탈지향성에서 남의 현실이 아닌 나의 현실, 말하자면 으로 귀의한 것이다. [유리창] [공동묘지] 등이 환기하는 주정적이고 정감적인 세계는그 자체만으로 매력과 장점이 되어준다. 그것은 서구적인 경험에 입각하여짓고 노래하던 종래시에 대한 자기반성과 자기인식이며, 그러한 인식이 낳은시가 [바다와 나비]며 [겨울의 노래]다. [바다와 나비] [겨울의 노래]는 어떤 의미에서 시인의 자화상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지혜에게 바치는 노래]등 8715광복을 노래한 {바다와 나비}의 시편 등의 일부와 {새노래}의 시편들은 이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감수성이나 경험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보다 광복 후의 감격과 환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시는 개인적인 것보다 우리라는 공동체 언어를 지향한다. 이제 모더니스트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고 남은 것은 청중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자아내는 경향시(사회성)의 지향이다. 비록 이러한 시편들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제로 나타 나 있다 하여도 그것은 내면의 필연성에서 오는 시인의 표현 의지가 아니라, 외부의 시대적 요청에서 제작된 것이며 광복후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부응이다. 이런 점에서 초기시 {태양의 풍속}이나 {기상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초기의주요 내용인 가 로 바뀐 것이 다르다. 시집{새노래}의 첫머리에 샌드벅의 시구절 을 인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출처; 네이버지식인  
1725    정지용, 김기림과 "조선적 이미지즘" 댓글:  조회:4125  추천:0  2016-10-30
  은유의 인식론에서 길어낸 ‘조선적 이미지즘’의 길 정지용과 김기림의 이미지즘의 정체는?   2016년 08월 17일  최익현 기자                한국 시문학사에서 빛나는 별, 좀 더 친근한 이들을 뽑는다면 누굴 고를까. 「고향」이란 노래로 더 알려진 시인 정지용이라면 다들 친근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김기림을 가리켜 ‘친근한’ 시인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둘 다 이미지즘과 관련 깊은 시인임에도 한 사람은 친근하게, 다른 한 사람은 조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두 시인의 내력인 동시에 한국 시문학사의 어떤 전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에서 강의하고 있는 나민애 박사가 최근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다듬어 『1930년 ‘조선적 이미지즘’의 시대: 정지용과 김기림의 경우』(푸른사상, 341쪽, 26,000원)를 내놨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 ‘조선적 이미지즘’이란 용어 때문이다. 저자는 두 시인의 행보가 결국은 ‘조선적 이미지즘’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애초 만석꾼 부자로 출발하지 못했던 우리 시단을 밝고 아름답게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무엇이다. 저자는 이를 “‘조선적 이미지즘’은 가시적인 스펙터클에 매혹된 시인의 모습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근대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 문단에서 이미지의 특수성을 밝히는 연구는, 비단 근대적 문명에 대한 受容과 反射의 작업을 넘어 새로운 板을 꿈꾸고 상상 세계를 지향하면서 시적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 1930년대 근대문학의 가치관이었음을 논증하는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한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이미지즘’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수용된 외래 사조다. 여기에는 근대적 조선 문학의 성립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이미지즘은 서구의 이국적 풍속에 대한 나열, 또는 의미가 부재하는 이미지의 향연에 그치지 않는다. 정지용과 김기림, 김광균과 신석정, 장만영과 장서언, 박재륜과 조영출 등 당시 많은 시인들이 이미지즘과 관련돼 있다. 그렇기에 이미지즘에 대한 재고는 조선 근대문학의 형성 과정 고찰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저자는 1930년대 이미지즘의 대표 시인인 정지용과 김기림의 문학 세계를 고찰한다. 정지용과 김기림에게서 확인한 이미지즘의 조선적인 특질을 바탕으로, 제목에서 보이듯이 ‘조선적 이미지즘’이라는 용어를 제언한다. 저자는 이미지즘에 ‘조선시’의 단초가 담겨 있고,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이 동반되고 있으며 서구 이미지즘에 대한 주체적인 변용이 있다는 점을 그 용어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주요 관련 부분을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조선의 1930년대은 식민 체제의 지배 야망이 극에 달하고 근대화의 최절정기를 맞았던 시기다. 그렇다면 이 말은 식민 체제의 은유와 근대화의 은유 역시 가장 막강하고 폭넓게 확산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필 동일한 시기에 조선 문단에서도 은유가 가장 활발하고, 정교하게 개발됐던 것은 단지 우연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전제하다면 조선의 이미지즘 역시 식민지화, 근대화되는 조선 사회 자체가 은유적으로 구조화됐다는 사실과 무관할 수 없다. 이렇게 강압적인 은유의 시대에 대응해 문학적이고 주체적인 은유를 선보인 것이 바로 ‘조선적 이미지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식민 체제와 근대화의 은유에 대응하는 은유의 주체적인 방식이 정지용과 김기림으로 대별되는 이미지즘을 통해 구체화됐다. 이미지즘이 서구 사조가 이입된 결과만이 아님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조선적 이미지즘에는 조선만의 개성적인 은유와 이미지를 확립하려는 주체적인 시도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 주체적인 시도에 대한 인식론적인 은유 분석을 통해 볼 때, 당대 이미지스트들은 조선 반도를 문학적이며 민족적인 상상의 공간으로 재기술했다. 즉, 현실에 지배적이고 체제적인 은유의 압박이 만연할 때 이미지즘 시인들은 주체적인 은유를 창조해 이에 대응하고자 했다. 정지용과 김기림의 은유는 이러한 식민 체제의 은유적 심상지리 위에서 그 의의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정지용 등의 은유가 식민지학의 은유적 심상지리와는 전혀 다른, 새롭고 주체적인 심상지리를 형성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은유적 동일화의 강제와 차별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1930년대 이미지즘은 주체적인 은유의 세계를 확립하며 가장 강렬한 문학적 저항의 모습을 보여줬다. 일본이 조선이라는 ‘바탕 공간’을 가지고 內地라는 ‘소망 공간’을 지향했다면, 조선 이미지즘의 은유는 조선 반도라는 ‘바탕 공간’을 가지고 새로운 조선 반도라는 ‘소망 공간’을 구현하는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의 지리를 재편해서 드러낸 문학적인 토폴로지의 형성은 이 시기 이미지즘의 시대적 의의를 드러낸다. 이것은 민족주의라든가 독립의 열망과는 또다른 주체적인 노선으로서 현실에 토대를 둔 조선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필자가 이미지즘의 ‘회화성’이 아닌 ‘공간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리고 그 공간성의 구성 요소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상상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은유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강요하는 식민 체제의 은유와 근대화가 강요하는 문명의 은유는 조선의 정체성을 소외시킨다. 정지용과 김기림은 이 소외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적 정체성을 복권하는 일은 복고주의적 과거 회귀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본 식민 체제의 은유, 근대화의 은유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 유산과 현대적 문제점이 충돌하는 지점에 새로운 지도와 주체적 은유를 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 주어진, 근대화의·식민 체제의 은유적 허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은유의 독법을 개발해야만 한다. 모순으로서의 현실 은유를 걷어내는 주체적인 문학 은유의 확립을 위해 정지용 등은 이미지를 강조했고, 이 이미지를 통해서는 공간의 재건설과 재기술이 이뤄졌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지용이 조선의 지리를 상상적인 화원으로 의미화하면서 물리적인 지리를 토폴로지의 수준으로 재편하는 것, 김기림이 서판적 상상력을 토대로 전복적인 상상-판을 구축하는 것은 식민 체제하의 조선 지리를 구원적 은유의 세계로 건너가도록 해준다. 식민주의 사고방식에서 기획된 이미지가 재생산·파급되는 상황에서, 이에 맞서는 조선 시인들의 시적 이미지의 생산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미지는 단순히 소재의 반영과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적인 문제와도 결부돼 있는 것이다. 조선적 이미지즘의 이미지는 기교와 언어의 문제를 넘어 현실적이고 주체적인 문학 정체성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당대 이미지즘의 이러한 시대적 의의에 착안한다면 조선 문단에서 이미지즘이 지닌 의의는 상당히 적극적이며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제의 심상지리에 맞서는 조선 반도의 심상지리, 일제의 은유에 대항하는 조선 문학의 은유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것은 문학으로 만든 자기 정체성이자 민족적 정체성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정체성이 제국주의의 아래에서 창씨개명의 정체성으로 와해돼가는 시기에 조선 문단은 ‘문학의 위기설’을 제창했고, 그러한 1930년대의 요청 앞에 이미지즘은 조선적인 방향으로 적용·발달했던 것이다. 정지용과 김기림이 은유적인 현실의 모순에 문학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대치한 결과, 현실에는 없으나 문학의 세계에서는 능히 꿈꿀 수 있는 상상세계의 공간을 명확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구현해냈다. 그것은 개인의 내밀한 감각을 넘어서 공동체(민족)의 정신이 노닐 숨터로서의 상상적 공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공간의 토대와 윤곽과 구조를 만드는 하나하나가 바로 정지용과 김기림의 이미지들이고, 이미지들에 창조력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은유의 인식론이다. 궁극적으로 김기림과 정지용의 이미지스트적인 공통점은 ‘樂土’를 재창조했다는 것이다. 상징주의나 낭만주의에서 강조했던 것은 감정과 정신(영혼) 그 자체였다면, 이미지즘은 불확실한 정신 자체가 아니라 정신들의 장소를 마련함으로써 그것이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공동체의 정신적 숨터가 있어야 공동체적인 정신이 배양·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성장의 모색과 형성이 정지용과 김기림의 이미지즘적인 문학 세계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정지용에게는 토폴로지의 ‘화원’으로, 김기림에게는 천상과 지하의 전복적 공간으로 나타났다.
1724    김기림, 그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4395  추천:0  2016-10-30
  시대 근대 출생일 1908년 사망일 미상 경력 조선일보 기자, 서울대학교 조교수, 신문화연구소 소장 유형 인물 관련 사건 한국전쟁 직업 시인, 문학평론가 대표작 기상도, 바다와 나비, 새노래 성별 남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1908∼미상. 시인·문학평론가. 목차 접기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의의와 평가 개설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 함경북도 학성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14년임명보통학교(臨溟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릿쿄중학[立敎中學, 또는 名敎中學이라는 설도 있음]에 편입했다. 1930년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문학예술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입사, 뒤에 신설된 학예부 기자로 옮겼다. 1933년김유정(金裕貞)·이태준(李泰俊) 등과 구인회(九人會) 결성에 참가하고, 1936년에 재차 도일, 센다이(仙台)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영문과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리처즈(Richards, I. A.)론이었다. 귀국 후(1939)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1940년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으로 한때 실직했으며,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으며, 이 때의 제자에 시인 김규동(金奎東)이 있다. 1946년 1월 공산화된 북한에서 월남하였는데, 이 때 많은 서적과 가재를 탈취당해 곤궁한 나날을 보냈다. 1946년 2월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 때 ‘우리 시의 방향’에 대하여 연설하였으나, 정부수립 전후에 전향하였다. 월남 후 중앙대학·연희대학 등에 강사로 출강하다가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고, 그가 설립한 신문화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북의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부인과 5남매가 서울에 살고 있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生活)로」(『조선일보』, 1930.9.6.)·「슈르레알리스트」(조선일보, 1930.9.30.)·「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1.23.)·「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학등』 창간호, 1931.10.)·「고대 고대(苦待)」(『신동아』 창간호, 1931.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관한 단상(斷想)인 「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1.27.)·「시의 기술·인식·현실 등의 제문제」(『조선일보』, 1931.2.11∼14.) 등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주로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첫 시집이며 장시인 『기상도(氣象圖)』(창문사, 1936 ; 재판 산호장, 1948)는 엘리어트(Eliot, T. S.)의 장시 「황무지(荒蕪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통일적인 주제의식의 유무에 대한 시비, 민족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의 결여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상과 감각의 통합을 시도한 주지주의 시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한 것이다. 제2시집 『태양의 풍속』(학예사, 1939)은 몇 편의 이미지즘(imagism) 시를 제외하고는 주지성과 지적 유희성이 두드러진 것이고, 광복 후의 『바다와 나비』(신문화연구소, 1946), 좌경적인 『새노래』(아문각, 1947) 등이 있다. 『바다와 나비』는 삶의 한계의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투명한 이미지로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 『새노래』는 모더니즘(modernism)을 극복하여 민족공동체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나 예술로서의 성숙성이 모자란다. 중편소설 「철도연변」(『조광』, 1935.12∼1936.2.) 등 3편의 소설과 희곡 등이 있으나 주목을 받을 만한 대상은 아닌 듯하다. 평론 및 저서로서 『시론(詩論)』(백양당, 1947)·『시의 이해』(을유문화사, 1950) 등이 있다. 전자는 1930년대에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전환시킨 중요 시론집이며, 후자는 리처즈의 심리학적 이론에 의거한 계몽적인 저서이다. 이밖에 『문학개론(文學槪論)』(신문화연구소, 1946)·『문장론신강(文章論新講)』(민중서관, 1949), 수필집 『바다와 육체』(평범사, 1948)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그가 우리나라 문학사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주지주의 시의 도입과 그 창작,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 시학(詩學)의 정립을 위한 노력, 자연발생적인 시를 거부하고 의식적인 방법에 의한 제작의 강조, 음악이나 감정보다는 이미지와 지성의 강조, 민족 및 사회현실의 수용과 모더니즘의 극복, 그리고 전체시의 주장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기림』(김유중, 문학세계사, 1996) 『김기림 연구』(김학동, 시문학사, 1991) 『한국 모더니즘시 연구』(문덕수, 시문학사, 1981) 『한국시사 연구』(박철희, 일조각, 1980) 『궁핍한 시대의 시인』(금우창, 민음사, 1977) 『한국대표시론비판』(김윤식, 일지사, 1975) 『한국현대시 연구』(김용직, 일지사, 1974) 『시학평전』(송욱, 일조각, 1963) 「현대시의 생리와 성격」(최재서, 『문학과 지성』, 인문사, 1938)                                         바다와 나비 (외 8편)                                                                                        김     기     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길       나의 소년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덕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태양의 풍속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세워 가며 기다린다.                       연가 (戀歌)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나비의 여행                    ㅡ 아가의 방  5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氣盡脈盡)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오후(午後)의 꿈은 날 줄을 모른다                                                                                                                        날아갈 줄을 모르는 나의 날개.  나의 꿈은  오후의 피곤한 그늘에서 고양이처럼 졸리웁다.  도무지 아름답지 못한 오후는 꾸겨서 휴지통에나 집어 넣을까?  그래도 지문학(地文學)의 선생님은 오늘도 지구는 원만하다고 가르쳤다나.  갈릴레오의 거짓말쟁이.  흥, 창조자를 교수대에 보내라.  하느님,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성한 날개를 다고.  나는 화성(火星)에 걸터앉아서 나의 살림의 깨어진 지상(地上)을 껄 껄 껄 웃어주고 싶다.  하느님은 원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을까?                            공동묘지   일요일 아침마다 양지 바닥에는 무덤들이 버섯처럼 일제히 돋아난다. 상여는 늘 거리를 돌아다보면서 언덕으로 끌려 올라가군 하였다. 아무 무덤도 입을 벌리지 않도록 봉해 버렸건만 묵시록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는가 보아서 바람 소리에조차 모두들 귀를 쭝그린다. 조수(潮水)가 우는 달밤에는 등을 일으키고 넋없이 바다를 굽어본다.                  아롱진 기억의 옛바다를 건너     당신은 압니까. 해오라비의 그림자 거꾸로 잠기는 늙은 강 위에 주름살 잡히는 작은 파도를 울리는것은 누구의 장난입니까.   그리고 듣습니까. 골짝에 쌓인 빨갛고 노란 떨어진 잎새들을 밟고 오는 조심스러운 저 발차취 소리를― 클레오파트라의 눈동자처럼 정열에 불타는 루비빛의 임금(林檎)이 별처럼 빛나는 잎사귀 드문 가지에 스치는 것은 또한 누구의 옷자락입니까.   지금 가을은 인도의 누나들의 산호빛의 손가락이 짠 나사의 야회복을 발길에 끌고 나의 아롱진 기억의 옛 바다를 건너 옵니다.   나의 입술 가에 닿는 그의 피부의 촉각은 석고와 같이 희고 수정(水晶)과 같이 찹니다.   잔인한 그의 손은 수풀 속의 푸른 궁전에서 잠자고 있는 귀뚜라미들의 꿈을 흔들어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슬픈 쏘푸라노를 노래하게 합니다.   지금 불란서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검은 포도송이들이 사라센의 포장에 놓인 것처럼 종용이 달려 있는 덩굴 밑에는 먼 조국을 이야기하는 이방(異邦) 사람들의 작은 잔채가 짙어 갑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순교자의 찢어진 심장과 같이 갈라진 과육(果肉)에서 흐르는 붉은 피와 같은 액체를 빨면서 우리들의 먼 옛날과 잊어버렸던 순교자들을 이야기하며 웃으며 이야기하며 울려 저 덩굴 밑으로 아니 오렵니까.                  연륜(年輪)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덜며            산호(珊瑚)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年輪)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                       #[작가소개]ㅡ김기림(金起林, 1908~ ?)  *  호는 편석촌(片石村).  함북 성진 출생.  *  일본 동경 니혼대학 문학예술고. 동북제대(東北帝大) 영문과 졸(1939).  *  함북 경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1931년 에 ,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  *  1933년 구인회에 가입하고, 기자 역임.  *  19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의 이론가이자 모더니즘 시론을 실제 창작에      실험했으며,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곧 전향.  *  시집으로 장시의 (1936)와 (1939) 등은 일제시대에      출간되고, 광복 이후 (1946), (1947) 등 간행.  *  중앙대 교수, 동국대, 국학대 출강.  *  6.25 때 납북, 1988년 해금조치.  *  저서로 (1947), (1950), (1949) 등이 있음.   김기림 소개 김기림(金起林, 1908- ?)  함경북도 성진 생. 시인. 평론가. 보성고 졸. 일본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거쳐 도호쿠제대 영문과 졸업. 1931-32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사이에 , 등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한 시를 발표, 문단의 각광(脚光)을 받음. 1933년 이효석과 '구인회' 결성. 이양하,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문학 이론 도입, 이후 한국적 모더니즘 문학 운동의 선구자가 됨. 시집에 [기상도(氣象圖)](1939), [새 노래](1947), 시론집에 [시론](1947), [문장론신강](1949). 6 25때 월북, 1988년 해금 조치. 작품 활동을 보면, 시 등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모더니즘 이론을 충실히 이행 하려 하였으며, 현대시가 지녀야 할 주지성과 회화성, 그리고 문명 비평적 태도 등을 시도하려 애썼다. 1940년대에는 시론을 발표하면서 '겨울의 노래', '소곡' 등 서정과 지성이 결합된 선명한 시각적 영상이 두드러진 시를 발표했는데, 그의 문학사적 공적은 주지주의 시론 의 확립, 과학적 방법의 도입, 모더니즘적 시의 시도 등이다.   ① 모더니즘에서의 김기림의 위상  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을 이미지즘->모더니즘=주지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규정하고 나면 김기림은 30년대 한국 모더니즘에서 한 구심점이 되었다. 그 이전 우리 주변에서는 모더니즘이란 명명(命名)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더니즘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굳혀지자 곧 정지용, 신석정 등을 같은 유파의 이름으로 묶었다. 그리고 이어 그 주변에 김광균 등을 이끌어 들였던 것이다. 본래 그의 명명이 있기 이전, 정지용이나 신석정은 그저 단순한 서정시인이며 시문학파의 일원인 데 그쳤다. 그것이 그의 명명을 통해서 하나의 특별한 사조 경향을 지닌 시인으로 새롭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② 김기림의 모더니즘 성격  김기림은 엘리어트 이후의 영.미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엘리어트에게서 배운 기교 가운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시의 형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수법이다. 또한 그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시켜서 새로운 표현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데 이것 또한 엘리어트가 상징파 시인들에게서 영향받아 곧잘 사용했던 표현 수법의 하나이다. 그는 시적 형상의 감각적 표현에 주력하는 한편 사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방萱?사용하기도 했다. 시에서는 시상 그 자체의 진위보다도 시상을 감각적 등치물로 변형시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엘리어트의 현대적인 시 인식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로서 그 빛을 발하게 된 첫 케이스가 된 것이다. ③ 김기림의 시론(詩論)  김기림은 시인으로서 시론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詩論] (1947),[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특히 [시론]에는 30년대의 우리 시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이 체계적으로 서술된 글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의 모더니티](1933),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8), [기교주의 비판](1935) 등이 있으며 앞의 두 시론을 중심으로 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시의 모더니티](1933) 첫째, 감상적인 낭만주의와 격정적 표현주의의 재래시를 비판하였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시가 비판되는 것은 이들이 강조하는 감정이 구체적 현실과의 관련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새로운 시적 감성을 강조하였는데, 재래의 시가 보여주는 지나친 주관성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과거의 시와 새로운 시를 비교하였다. 나.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9) 첫째, 우리 신시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학사의 개념을 정의할 필요가 있으며 이에 과학적 문학사를 강조하였다.  둘째, 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앞 시대의 낭만주의와 경향파를 비판하였다.  셋째, 모더니즘은 이상의 두 가지 문학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나타나며 그것은 시가 무엇보다도 언어의 예술임을 자각하고 동시에 문명에 대한 일정의 감수(感受)를 기초로 한다.  넷째, 모더니즘의 위기를 주장하였다. 30년대 중반이 되면서 우리 시가 모더니즘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말의 중시로 인한 언어의 말초화와 문명의 부정적 양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 김기림의 모더니즘 시론 정리 ㄱ.현대시의 회화성  시의 회화성 강조는 곧 그의 모더니즘 시론의 중심 지주를 이룬다. 이런 회화성 중시는 전시대의 시들이 지나친 리듬 의존에 의한 것으로 단정하고 이를 극복하고 회화체의 내재적 리듬에 의한 새로운 시작법을 건설하려는 데 기인한 것이다. ㄴ.과학적 태도  그가 시도한 과학적 시론의 요점은 과학적인 문학 이론과 비평 용어를 통하여 통일된 문법 체계를 세운다면 구체적인 작품에 관한 실제적 비평이 한층 더 높고 완성된 단계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현대시란 의식적인 시의 제작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해 객관성. 시의 과학화. 문학의 과학화를 주장했다. ㄷ.전체적 사상  서구 모더니즘시의 이념을 도입하고 시의 본질적인 요소인 形, 音, 意 味를 고립적으로 강조한 입체파, 로멘티시즘, 상징주의의 시적 태도를 비판하고, 유기적으로 혼합된 전체로서의 시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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