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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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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3    중국 당나라 문사 - 류우석 댓글:  조회:3563  추천:0  2017-04-21
                 누실명(陋室銘)                                                                                                   유우석(劉禹錫)     山不在高 有僊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산불재고 유선즉명 수불재심 유룡즉령 사시누실 유오덕향 산이 높지 않더라도 신선이 있으면 곧 명산이요,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있으면 신령스럽다. 이곳은 누추한 집이나 오직 나의 덕은 향기롭다.   苔痕上堦綠 艸色入簾靑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 閱金經  태흔상계록 초색입렴청 담소유홍유 왕래무백정 가이조소금 열금경   이끼의 흔적으로 섬돌 위는 푸르고 풀빛은 발에 비추어 푸르다. 담소를 나누는 훌륭한 선비가 있고 왕래하는 백정은 없으니, 꾸밈없이 거문고를 탈 수 있고 부처님의 경서를 볼 수 있도다.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 孔子云 何陋之有! 무사죽지란이 무안독지노형 남양제갈려 서촉자운정 공자운 하누지유 음악이 귀를 어지럽힘도 없고, 관청의 문서가 몸을 수고롭게도 하지 않도다. 남양의 제갈량의 초가집이나 서촉 양자운의 정자와 같으니, 공자께서도 이르기를 "군자가 거처함에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도다. * 유(류)우석(劉禹錫) : 서기 772 년 경에서  서기 842 년까지 살았던 당나라 초기의 문사임. 자(字)는 몽득(夢得)이며 팽성(彭城 : 현재 하남성 낙양(洛陽)) 출생이다.          春詞(춘사)-劉禹錫(유우석;772~842) 춘사   新粧宜面下朱樓(신장의면하주루) 深鎖春光一院愁(심쇄춘광일원수) 行到中庭數花朵(행도중정수화타) 蜻蜓飛上玉搔頭(청정비상옥소두)   새로 화장하고 화사한 누각에 내려오니 봄 빛이 가득 갇힌 정원이 근심 보태네 뜰을 거닐다 새로핀 꽃들을 세고 있는데  잠자리 날아와 머리 위 옥비녀에 앉네.   * 봄날 궁녀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정원에 내려 와서 막 피어나는 꽃들을 세며 무료함을 달래는데 그 화장 향기를 맡은 잠자리가 날아와서 머리위에 꽂은 옥비녀에 살포시 내려앉는 모습을 표현.      
2082    중국 당나라 시인 - 맹호연 댓글:  조회:4864  추천:0  2017-04-20
  출생 689, 후베이 성[湖北省] 샹양[襄陽] 사망 740 국적 중국, 당(唐) 요약 중국 당대의 시인. (병). Meng Haoran. (웨). Meng Haojan.   맹호연(孟浩然) 맹호연의 시 [만소당죽장화전 晩笑堂竹荘畫傳] 어린시절 고향에서 묻혀 지내다가 나중에 장안으로 가서 진사과에 응시했으나 실패한 이후로 평생 벼슬을 하지 못했다. 장쑤 성[江蘇省]과 저장 성[浙江省] 등지를 자유로이 유람했으며 장구령에게 초빙되어 그의 막객을 지내다가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시의 소재는 넓지 않은 편으로 주로 전원의 산수경치와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심정을 묘사한 것이 많다. 시어가 자연스럽고 풍격이 청담하며 운치가 깊어서 당대의 대표적인 산수시인으로 꼽힌다. 왕유(王維)와 더불어 이름을 날렸으므로 왕·맹이라 병칭된다. 〈맹호연집 孟浩然集〉이 있다. [Daum백과] 맹호연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여제자등현산)             -孟浩然(맹호연;689-740) 與諸子登峴山(여제자등현산)-孟浩然(맹호연;689-740) 여러 사람들과 현산에 올라 人事有代謝(인사유대사) : 사람의 일이란 흥망이 바뀌는 법 往來成古今(왕래성고금) : 지난 일과 오는 일이 역사를 만든다 江山留勝跡(강산류승적) : 강산은 좋은 형적, 형산을 만들었나니 我輩復登臨(아배부등림) : 우리들 다시 올라 왔다네 水落魚梁淺(수락어량천) : 물 빠지니 어량은 바닥 드러나고 天寒夢澤深(천한몽택심) : 날 추워지니 몽택은 깊어진다 羊公碑尙在(양공비상재) : 그 옛날 善政을 펼쳤던 羊祜公의 追慕碑가 아직도 남아있어, 讀罷淚沾襟(독파누첨금) : 비문(碑文)을 읽고 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감상 ㄱ. 내용 : 작자는 고향인 양양에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불우하게 은거하던 시기에 쓴 시로  친구들과 현산에 올라 옛날 양호장군의 비를 읽으며 인사의 흥망성쇠를 서글픈 느낌으로 표현한 시임. ㄴ. 형식 : 하평성12 침侵을 압운한 오언율시로 첫 구가 하삼측에 평측이 전연 안 맞았으나  나머지부분은 비교적 잘 맞음. *낱말 1.현산峴山:현수산峴首山이라고도 하며 호북성 양양襄陽 남쪽에 있음. 여기서  제자諸子는 시인 맹호연의 여러 친구를 지적함. 2. 대사代謝:교체交替와 변화變化를 뜻함. 3. 왕래往來:옛것이 가고 새것이 옴을 뜻함. 4. 부등림復登臨 : 옛날 양호羊祜가 이곳 양양을 지킬 때 일찍이 그의 친구들과  자주 이 현산에 올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음.  5. 어양魚梁:모래섬 이름. 양양 녹문산鹿門山의 흐르는 물 가운데 있음.  6. 몽택夢澤:운몽택을 가리킴. 옛날 큰 늪지대.  7. 양공비羊公碑:후인들이 서진西晋 명장인 양호羊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작자 소개 맹호연孟浩然(689?740), 이름이 호浩,자는 호연浩然,호가 맹산인孟山人, 현재 호북성 양양襄陽 사람. 그는 일찍이 벼슬을 하지 않았음. 당나라 때 저명한  산수전원파山水田園派 시인. 왕유王維와 장구령張九齡과 함께 망년지교를 맺은 시인. ================================     당시삼백수 오언율시 與諸子登峴山(여제자등현산)                   - 孟浩然(맹호연) 〈여러 벗들과 현산에 올라〉          與諸子登峴山(여제자등현산)   孟浩然(맹호연) ​   人事有代謝(인사유대사),往來成古今(왕래성고금)。 江山留勝跡(강산류승적),我輩復登臨(아배복등림)。 水落魚梁淺(수락어량천),天寒夢澤深(천한몽택심)。 羊公碑尚在(양공비상재),讀罷淚沾襟(독파루첨금)。       與諸子登峴山/ 作者:孟浩然 全唐詩·卷160 / 本作品收錄於:《唐詩三百首》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   사람의 일은 바뀌고 변하기 마련 세월이 오가면서 고금을 이룬다   강산에 명승고적이 남아 있어 우리들 다시 산에 올라 굽어본다   물이 빠지니 어량주(魚梁洲)가 드러나고 날씨가 추워서 운몽택(雲夢澤)이 깊어졌구나   양공(羊公)의 비문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읽고 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   [通釋]  사람의 일은 흥하기도 쇠하기도 하여 변화가 있고, 세월이 흘러 지나간 과거와 다가오는 현재가 생겨난다. 강산에 뛰어난 명승고적이 남아 있어 우리가 좋은 기회를 만나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다시금 오게 되었다.산 위에서 바라보니 비가 오지 않아 수위가 낮아져 어량주(魚梁洲)가 수면 위로 드러났고, 나뭇잎이 다 떨어진 추운 겨울에 호수가 더 넓어 보인다. 양공을 기념해서 세운 비석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기에 읽어보니,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누나.    [解題]  이 시는 맹호연(孟浩然)이 현산(峴山)에서 양공(羊公)의 비석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노래한 것으로 옛날을 회고하며 오늘날을 슬퍼하는 정서가 시 전체에 흐르고 있다. 1·2구에는 시공 속에서 덧없이 소멸하는 인간의 무상함이 표현되어 있다. 3·4구에서 시인은 현산(峴山)에 오른다. 여기서는 1·2구의 ‘고금’을 이어받았는데, ‘강산에 남긴 뛰어난 자취’는 ‘옛날’을 상징하고, ‘고적을 다시 찾은 시인과 그의 벗들’은 ‘오늘’을 의미한다. 5·6구는 산에 올라가 내려다본 경관을 묘사하면서 작자의 처연한 심사를 표현했다. 7·8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양호(羊祜)를 슬퍼해서가 아니요, ‘오늘 우리가 오른 것을 후세에 누가 양호(羊祜)처럼 생각해주겠는가’라고 하는 데에 있다. 양호(羊祜)와 자신의 처지를 대조시킴으로써 이룬 것 없이 끝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 묵묵히 매몰될 시인 자신을 애탄(哀歎)한 것이다.     ---------------------------------------     ○ 峴山(현산) : 맹호연(孟浩然)의 고향인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 남쪽 9리 지점에 있는데, 일명 현수산(峴首山)이라고 한다.   ○ 代謝(대사) : 흥체(興替)라고도 하며 새것이 와서 묵은 것을 대신하는 것,곧 교체되어 바뀌는 것을 말한다.   ○ 往來(왕래) : 일왕월래(日往月來), 세월이 오고감을 가리킨다.   ○ 勝跡(승적) : 명승고적(名勝古蹟)으로 여기서는 현산(峴山)을 말한다. 산 위에 양호(羊祜)의 타루비(墮淚碑)가 있다.   ○ 登臨(등림): 높은 곳에 오름   ○ 魚梁(어량) : 양양(襄陽) 녹문산(鹿門山) 부근의 沔水 중간에 있는 모래섬을 지칭한다. ≪水經注(수경주)≫ 〈沔水(면수)〉에 의하면 어량주(魚梁洲)는 면수(沔水) 중간쯤에 있는데 동한(東漢)의 은사(隱士)인 방덕공(龐德公)이 살던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둑을 이용하여 고기를 잡는 곳이라고 보기도 한다. [당시삼백수] 52.夜歸鹿門山歌(야귀녹문산가) - 孟浩然(맹호연)     ○ 夢澤(몽택) : 운몽택(雲夢澤)으로 고대 초(楚)나라 땅에 있었던 큰 늪의 이름이다.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익양현(益陽縣)과 상음현(湘陰縣) 이북, 호북성(湖北省)의 강릉현(江陵縣)과 안륙현(安陸縣) 이남 및 무한시(武漢市) 이서의 넓은 지역을 가리킨다. 지금의 동정호(洞庭湖) 북안(北岸) 일대의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는 산 위에서 보이는 일반 소택(沼澤)을 가리킨다.   ○ 羊公碑尙在(양공비상재) : ‘尙’이 ‘字’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양공비(羊公碑)는 곧 현수산(峴首山) 위에 있는 타루비(墮淚碑)를 말한다.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을 진압하고 늘 여기서 술을 마셨다. 그는 산수를 즐겨서 자주 현산(峴山)에 올라 놀았는데, 종사(從事) 추담(鄒湛)에게 이르기를 “우주가 있을 때부터 이 산이 있었으니, 예로부터 현사(賢士)들이 여기 올라 조망하였을 것이다. 나와 그대 같은 사람이 많았을 것인데 모두 다 사라져 아는 이 없으니 슬프다. 내가 백년 뒤에도 혼백(魂魄)이 있다면 다시 이 산에 오르리라.” 하였는바, ≪晉書(진서)≫ 〈羊祜傳(양호전)〉에 이러한 내용이 보인다. 양호(羊祜)가 죽은 뒤에 양양 사람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현산에 비(碑)를 세우니, 보는 사람들이 슬퍼하여 눈물을 떨어뜨렸으므로 두예(杜預)가 그 비(碑)를 타루비(墮淚碑)라 하였다.       ※  襄陽歌(양양가) - 李白(이백)   君不見晉朝羊公一片石(군불견진조양공일편석),​龜頭剝落生莓苔(구두발락생매태)。淚亦不能爲之墮(누역불능위지타),心亦不能爲之哀(심역불능위지애)。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진(晉)나라 양공(羊公)의 한 조각 비석이 거북머리 깨져 떨어지고 이끼만 끼어 있네. 눈물도 이 때문에 떨어뜨릴 수 없고 마음도 이 때문에 슬퍼할 수 없다오.   ○ 羊公一片石(양공일편석) : 진(晉)나라 양호(羊祜)의 추모비를 이른다. 양호는 형주제군사도독(荊州諸軍事都督)으로 양양(襄陽)에 주둔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그 부(部)가 현산(峴山)에 속하게 되었다.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생전에 그가 노닐던 땅에 비석과 사당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냈는데, 보는 자들이 모두 그를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두예(杜預)가 타루비(墮淚碑)란 이름을 붙였다.《北堂書鈔》   ​ ///전통문화연구회 동양고전종합DB ----------------------------------           秦中感秋 寄 遠上人 ​(진중감추 기 원상인) ​ 孟浩然(맹호연)     一丘常欲臥(일구상욕와),三徑苦無資(삼경고무자)。 北土非吾願(북토비오원),東林懷我師(동림회아사)。 黃金然桂盡(황금연계진),壯志逐年衰(장지축년쇠)。 日夕涼風至(일석량풍지),聞蟬但益悲(문선단익비)。     秦中感秋寄遠上人/ 作者:孟浩然 / 《唐詩三百首》中   -----------------------------------------------------   한 언덕에 항상 눕고 싶었는데 세 오솔길 만들 돈이 없음이 괴롭다   이곳 북토(北土)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요 동림사(東林寺)에 있는 우리 대사(大師)를 그리워하네   황금은 계수나무로 불 때는 데 다 썼고 씩씩했던 마음은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니   해 질 무렵 서늘한 바람 불어오는데 매미 소리 들으니 슬픔만 더할 뿐이네   -----------------------------------------------------------------   [通釋]  나는 항상 산림을 찾아 은거하고 싶지만 은거할 기반을 마련할 돈이 없다. 지금 여기 북쪽장안에서 떠돌고 있는 것도 생계 때문에 온 것일 뿐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으니, 마음속으로는 항상 동림사(東林寺)에 있는 대사(大師), 그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여기 장안의 물가는 너무 비싸서 돈을 쓰는 것이 마치 계수나무로 불을 때는 듯하여 가진 돈을 다 써버렸고, 씩씩했던 의지와 기개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쇠약해져 간다. 저물녘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매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더욱 아파온다.   [解題]  맹호연은 개원(開元) 16년, 그의 나이 40세(728)에 장안에 가서 진사시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이 시는 낙방한 직후 장안에 머물고 있을 당시,가을이 오자 客中의 괴로운 상황을 묘사하여 원상인(遠上人)에게 부친 시이다. 원상인은 동림사(東林寺)의 승려로 행력(行歷)이 자세하지 않다. 당시 작자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 관리가 되는 것이 그의 진정한 소망이었지만 그를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고, 물러나 산림에서 은거하고자 한 바람은 부득이한 것이었지만 그 또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시는 원상인을 대상으로 쓴 것이지만 ‘東林懷我師(동림회아사)’ 구(句)를 제외하고는 원상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결국 시의 전체 내용은 시인이 자신의 궁고(窮苦)함을 토로한 것이라 하겠다.특히 7·8구는 이른바 감추(感秋), 비추(悲秋)의 시정(詩情)이면서 시인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사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시종일관 처량하고 괴로운 심사를 드러낸 시어(詩語)들이 맹호연의 다른 시들에서 보이는 기개(氣槪) 있는 운치(韻致)와 풍격(風格)과는 걸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때문인지 ≪全唐詩(전당시)≫ 교주(校註)에 “어떤 본에는 崔國輔(최국보)의 시로 되어 있다.[一作崔國輔詩]”고 하였고, 소계종(蕭繼宗)의≪孟浩然詩說(맹호연시설)≫의 경우 이 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관(仕宦)과 은거(隱居)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이 맹호연 시의 핵심적인 주제이고, 이 시 역시 그러한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맹호연의 시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     ○ 秦中寄遠上人(진중기원상인) : ≪全唐詩(전당시)≫에는 시 제목이 ‘秦中感秋寄遠上人(진중감추기원상인)’으로 되어 있고,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孟浩然集(맹호연집)≫에는 ‘遠(원)’자가 없다. 여기서는 장섭본(章燮本)을 따랐다. ‘秦中(진중)’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중부 지역인데 곧 관중(關中)이다. 여기서는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遠上人(원상인)’은 이름이 원(遠)인 화상(和尙)으로 생평(生平)이 자세하지 않다. 상인(上人)은 승려의 존칭이다.   ○ 一丘常欲臥(일구상욕와) : ‘一丘’는 은거하는 산림을 지칭한다. 丘는 작은 산인데 여기서는 산언덕, 山林의 뜻이다. ‘臥’는 은거한다는 뜻이다.   ○ 三徑苦無資(삼경고무자) : ‘三徑(삼경)’은 은거하는 장소 또는 시골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三徑苦無資(삼경고무자)는 은거할 기반을 마련할 돈이 없다, 또는 내가 사는 시골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이는 장안으로 와서 벼슬을 하려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三輔決錄(삼보결록)≫에 “장후(蔣詡)는 자(字)가 원경(元卿)으로 집 안의 대나무 아래에 세 오솔길을 만들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만 교유하였다.[蔣詡字元卿 舍中竹下開三徑 惟羊仲求仲從之遊]”고 하였다. ≪晉書(진서)≫ 〈陶淵明傳(도연명전)〉에 “잠(潛:淵明)이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애오라지 지방수령으로 있으면서 은거할 밑천을 마련하고 싶은데 가하겠는가?’ 하였다. 상관이 그 얘기를 듣고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임명하였다.[潛謂親朋曰 聊欲弦歌 以爲三徑之資 可乎 執事者聞之 以爲彭澤令]”는 기록이 있다. 도연명은 〈歸去來辭(귀거래사)〉에서 “세 오솔길에 잡초가 무성해도,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히 남아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 했다.   ○ 北土(북토) : 북지(北地)인데 진중(秦中)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장안을 말한다.   ○ 東林(동림) : 동림사(東林寺)인데 진대(晉代) 자사(刺史) 환이(桓伊)가 고승(高僧) 혜원(慧遠)을 위하여 여산(廬山) 동쪽에 지어준 절이다. 여기서는 원상인(遠上人)이 살고 있는 절을 지칭한 것이다.   ○ 燃桂(연계) : 생활비가 많이 든다는 것을 비유한 말로, 곧 땔나무를 태우는 것이 계수나무를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용이 많이 든다는 뜻이다. ≪戰國策(전국책)≫ 〈楚策(초책)〉에 “초(楚)나라의 음식은 옥(玉)보다 귀하고 땔나무는 계수나무보다 귀하니, 지금 저는 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습니다.[楚國之食貴於玉 薪貴於桂 今臣食玉炊桂]”라는 기록이 있다.   ○ 日夕(일석) : 저녁.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사이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 --------------------------------------- 맹호연(孟浩然, 689년 ~ 740년)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이름은 호이며, 자는 호연이며 호(號)는 녹문거사(鹿門處士)이다. 양양(襄陽) 사람으로 절개와 의리를 존중하였다. 한때 녹문산(鹿門山)에 숨어 살면서 시 짓는 일을 매우 즐겼다. 40세 때 장안(지금의 시안)에 나가 시로써 이름을 날리고, 왕유·장구령 등과 사귀었다. 그의 시는 왕 유의 시풍과 비슷하며, 도연명의 영향을 받아 5언시에 뛰어났다. 격조 높은 시로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어 왕유와 함께 ‘산수 시인의 대표자’로 불린다. 맹양양(孟襄陽)으로도 불리며 저서에 ‘맹호연집’ 4권이 있다.   ---------------------------------------   [출처] [당시삼백수]秦中感秋寄遠上人(진중감추기원상인) - 孟浩然(맹호연)|작성자 swings81   [출처] [당시삼백수]與諸子登峴山(여제자등현산) - 孟浩然(맹호연)|작성자 swings81      
2081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댓글:  조회:3350  추천:0  2017-04-20
      01. 자살한 시인에서 출발하는 중국 시문학__중국 최초의 시인 굴원 02. 혼신의 피를 갈아 시를 쓰다__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 03. 인간됨의 뜻을 탐구한 천태산의 은자__중국 당나라의 시인 한산자 04. 한 맺힌 피는 천년을 두고 푸른 옥이 되리라__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하 05. 사랑의 신비와 침묵의 승리__페르시아의 시인 잘랄 앗딘 알 루미 06.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예언자의 목소리__영국의 시인 블레이크 07.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불러야 할 노래__독일의 시인 횔덜린 08. 순수서정의 세계에서 현실참여의 세계로__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09. 날개 달린 천사도 부러워한 사랑__미국의 시인 애드거 앨런 포 10. 고통의 극한에서 추구한 추의 미__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 11. 지옥에서 열아홉 살까지만 시를 쓴 천재__프랑스의 시인 랭보 12. 사랑의 실패를 문학적 성공으로 승화시키다__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3.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없는 작품 세계__오스트리아의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 14. 생명을 가진 것들의 위대함을 예찬하다__영국의 시인 D.H. 로렌스 15. 프롤레타리아 혁명기의 시운동을 주도한 풍운아__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 16. 혁명의 시간과 도시의 공간에 적응하지 못한 시인__러시아의 시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17. 사랑과 저항, 혹은 순수와 참여의 이중주__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 18. 스페인의 자랑, 그라나다의 영광__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19. 전 세계의 대중이 사랑했던 시인__프랑스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 20. 끝없는 여행, 여성 편력, 그리고 시적 모험__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21. 아메리카 흑인의 삶과 영혼을 노래하다__미국의 시인 랭스턴 휴즈 22. 아프리카 흑인의 자존과 번영에 몸 바친 시인__세네갈의 시인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 23. 사형수의 인권을 외친 전과 10범 시인__프랑스의 시인 장 주네 24. 전쟁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__독일의 시인 보르헤르트 25. 시답지 않은 시를 쓴 현대의 모험가__독일의 시인 카를 리아의 시
2080    아프리카 세네갈 시인 - 디오프 댓글:  조회:3619  추천:0  2017-04-20
  출생 1906. 11. 11,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지금의 세네갈) 다카르 사망 1989. 11. 25, 세네갈 다카르 국적 세네갈 요약 아프리카의 시인.   올로프 사람들의 전통적인 민담집과 전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디오프는 세네갈의 생 루이와 다카르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까지 툴루즈대학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다. 뒤이어 수단·코트디부아르·어퍼볼타(지금의 부르키나파소)·모리타니 등지를 정부의 수의사 자격으로 두루 여행했다. 1961~65년 튀니지 주재의 독립정신이 강한 세네갈 대사로 근무했다. 그는 그의 작지만 아름답게 구성된 서정시집을 펴낼 수 있음을 알았다. 그의 동료이자 1930년대에 네그리튀드 운동의 주창자인 레오폴드 생고르의 도움을 받아 아프리카 문화의 가치관으로 다시 돌아옴을 보았다. 디오프는 1925년과 1960년 사이에 쓴 그의 산문을 엮어 〈미끼와 미광 Leurres et lueurs〉으로 펴내어 아프리카 생활의 신비로움을 탐험했다. 디오프는 1964년 〈아마두 쿰바의 이야기 Les Contes d'Amadou Koumba〉(1947)와 〈아마두 코움바의 새로운 이야기 Les Nouveaux Contes d'Amadou Koumba〉(1958)로 아프리카 누아르 문학상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1960년대에 2권 모두 재인쇄되어 〈Contes et lavanes〉로 발간되었다(1963). 이 책에 담겨진 이야기는 그의 가족의 그리오트(그의 부족의 구승전통을 이어받는 역할을 지닌 이야기꾼)를 최초로 밝힌 것이다. 제스처와 대화의 분위기를 묘사함에 있어서의 디오프의 재능은 책의 인기를 더해주었으며 1967년 교과서로 채택되어 재출판되었다. 1978년 〈오라의 이야기 Les Contes d'Aura〉를 펴냈다.
2079    독일 랑만주의 서정시인 - 아이헨도르프 댓글:  조회:4526  추천:0  2017-04-20
  출생 1788. 3. 10, 프로이센 라티보르 근처 사망 1857. 11. 26, 나이세 국적 독일 요약 아이헨도르프는 위대한 독일 낭만주의 서정시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1807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첫 번째 시집을 펴내고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1813년 프로이센 해방전쟁이 터지자 용병대에 입대해 나폴레옹에 맞서 싸웠다. 전쟁 후 1831년부터 베를린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이시기에 와 같이 자연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을 표현한 작품들이 민요로서 인기를 얻었으며 이는 슈만·멘델스존·슈트라우스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826년에는 낭만주의 소설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를 발표했다. 1844년 집필에만 전념하기 위해 공무원직에서 물러나 독일 문학사를 집필했고 스페인 작품도 여러 편 번역했다.   위대한 독일 낭만주의 서정시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슐레지엔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07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여기에서 첫번째 시집을 펴내고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1809~10년 베를린에서 공부를 계속하던 중 독일 낭만주의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1813년 프로이센 해방전쟁이 터지자 뤼초 용병대에 입대하여 나폴레옹과 맞서 싸웠다. 중편소설 〈뒤란데 성 Das Schloss Dürande〉(1837)과 서사시 〈로베르트와 기스카르 Robert und Guiscard〉(1855)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등장한다. 아이헨도르프 가문을 몰락시키고 루보비츠 성을 파괴한 나폴레옹 전쟁은 그의 시에 보이는 과거에 대한 향수의 원천이 되었다. 이 전쟁 동안 그는 가장 중요한 산문작품 2편을 썼다. 낭만주의 장편소설 〈예감과 현재 Ahnung und Gegenwart〉(1819)는 정치 상황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치료보다 정신적인 치료가 절실함을 보여준다. 〈대리석 조상의 이야기 Novellen des Marmorbilds〉(1819)는 초자연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데, 아이헨도르프는 이 작품을 동화라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단치히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의 공무원으로 일했고, 1831년 이후에는 베를린에서 일했다. 〈시 Gedichte〉(1837)와 같은 이 시기의 시들, 특히 자연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을 표현한 시들은 민요로서 인기를 얻었고, 슈만, 멘델스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826년에는 그의 가장 중요한 산문 작품인 〈어느 무위도식자의 생활에서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를 발표했다.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 작품은 낭만주의 소설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1844년 집필에만 전념하기 위해 공무원직에서 물러나 독일 문학사를 출판했고 스페인 작가의 작품도 여러 편 번역했다. [Daum백과] 아이헨도르프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남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Joseph Freiherr von Eichendorff   Grave in Nysa 요제프 카를 베네딕트 폰 아이헨도르프 남작  (Joseph Karl Benedikt Freiherr von Eichendorff,  1788년 3월 10일 ~ 1857년 11월 26일)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 후기낭만주의에 속하는 시인이며, 슐레겐의 귀족 출신으로 가톨릭 교도이다.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면서 슐레겔, 브렌타노 등의 낭만주의자들과 교제를 가졌다. 대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국방군으로 가담하였으며 1844년까지 상급관리로서 근무하였다. 그의 서정시는 다른 낭만파 시인에 비해 기교가 덜하며, 민요로부터 영향을 받은 간명하고 소박한 격조 (格調) 로, 부르기 쉬운 음악적 어구로 되어 있다. 〈월야(月夜)〉, 〈망가진 반지〉등 그의 시는 많은 작곡가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온화한 기독교의 신앙을 노래한 것도 많다. 산문으로는 〈명랑한 방랑아〉(1826년) 가 대표작이다. 자유롭고 몽상적인 방랑을 계속하면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밀가루 상점의 청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자연에 대한 낙천적 애정을 노래하는 이 작품은 낭만주의 문학 중에서 청춘 문학의 대표작이다. 또 장편소설 《예감과 현재》(1815년)는 교양소설의 한가지로서 청년의 정신적 성장을 주제로 하고 있다. ================== // 달과 시와 노래 - 아이헨도르프와 슈만의 달밤     Mondnacht                                                   Joseph von Eichendorff    Es war, als hatte der Himmel  Die Erde still gekueßt,  Daß sie im Bluetenschimmer  Von ihm nun traeumen mueßt.    Die Luft ging durch die Felder,  Die Aehren wogten sacht,  Es rauschten leis die Waelder,  So sternklar war die Nacht.    Und meine Seele spannte  Weit ihre Fluegel aus,  Flog durch die stillen Lande,  Als floege sie nach Haus.  달밤                                                                     조셉 폰 아이헨도르프       마치 하늘이 땅에게   살며시 입을 맞추는 것처럼,   땅은 은은한 꽃빛 속에서   하늘을 꿈꾸네.     들녘에 바람이 불어오고,   밀 이삭은 부드럽게 물결치며,   숲들은 나직하게 술렁거리고,   그토록 별빛 밝은 밤이었네.     그리고 나의 영혼은   나래를 활짝 펼치고,   고요한 대지를 날았네,   마치 집으로 가는 것처럼.   조셉 크리위버(Josef Kriehuber)가 그린 슈만의 석판화 초상(1839년)    슈만(Robert Svhumann:1810-1856)은 1840년 사랑하는 여인 클라라(Clara)와 결혼하였다. 9월 12일, 라이프치히 쇠네펠트(Leipzig-Schoenefeld)에 있는 전승 기념교회(Ged chtniskirche)에서였다.    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해에 그는 168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 중에 아이헨도르프(Joseph von Eichendorff(1788-1857)의 시로 만든 가곡집 가 있었다. 리더스크라이스는 '노래의 원(圓)', 즉 연가곡집을 뜻하는데, 슈만은 이 명칭의 연가곡을 두 벌 지었다.  결혼하기 전 그 해 5월, 클라라가 연주회를 위해 베를린(Berlin)에 머물렀을 때에 슈만은 그 곳으로 달려가 보름을 머물며 행복한 한 때를 보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간 슈만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사랑하는 클라라, 나는 이상하리만큼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습니다. 나는 밤에 우는 저 꾀꼬리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시인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맞추어 12곡의 가곡을 썼습니다. 아이헨도르프 가곡집은 나의 가장 낭만적인 음악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클라라, 당신에 관한 많은 것이 이 곡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인 아이헨도르프는 슐레지엔(Schlesien) 출신으로 할레(Halle)와 하이델부르크(Heidelburg)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고, 거기서 괴레스(J.Goeres),  아르님(B.Arnim), 브렌타노(C.Brentano) 등 낭만파 작가들과 교류했다.    아이헨도르프는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낭만적인 사무침이 신에 대한 경애와 합일되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의 섭리를 찬양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그런 탓에 그의 시에서는 타 작가들이 지녔던 병적이고 음습한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시 속에서 읊은 자연은 노을이 진 풍경, 별이 속삭이는 소리, 아름다운 달빛, 꾀꼬리의 노래, 신비로운 밤 안개 등 꿈결같고 아름다운 요소들이 많았다. 소박하고 건전한 문체로 자연을 노래한 그를 당시 사람들은 '숲의 시인'이라 불렀다.   이규환 작,    가곡 은 의 열 두 편 노래 중 다섯 번째 곡이다. 이 곡은 가곡집 중에서 낭만적인 서정성이 가장 돋보이는 곡으로, 슈만을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연인과의 행복한 사랑을 기억하며 달밤을 거닐고 있는 청년의 정경이 아련하게 펼쳐지고 있다.  곡은 3/8박자, 마장조로, 독일어로 섬세하고 비밀스럽게(Zart, heimlich)라는 악상기호가 쓰여 있다. 6마디의 피아노 전주는 마치 달빛이 소리 없이 스미는 듯 은근하고 부드럽다. 노래가 시작되면 피아노의 왼손은 성악의 멜로디 라인을 한 마디 뒤쳐서 따라가고, 오른손은 잔잔한 16분 음표의 화음으로 미묘한 달빛의 떨림을 묘사해 낸다. 첫 가사에서 "마치 하늘과 땅에게 살며시 입을 맞추는 것처럼(Es war, als hatt' der Himmel Die Erde still gekueβt)"의 첫 대목에서 흐르는 고요한 달밤의 아련한 정취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알아채지 못할 순간에 노래 속으로 함몰되게 만든다. 소소한 달빛이 입맞춤처럼 대지를 적시니 자연은 달빛에 화답하고 사람은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hatt' der Himmel"라는 대목에서 하늘에 맞닿는 듯한 상승음이 인상적이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작, (1970)    똑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며, "땅은 은은한 꽃빛 속에서 하늘을 꿈꾸네(Daß sie im Bluetenschimmer, Von ihm nun traeumen mueßt)"가 불려지는데, 이로써 하늘과 땅이 합일을 이룬다. 이 인상깊은 선율은 곡 전체를 휘감아 흐른다. 이 선율의 주 화음은 마장조-나장조-마장조(E-H-E)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결혼 모티브'라고도 한다.    가수(시적 화자)는 잠시 노래의 걸음을 멈추고 하늘의 달을 바라본다. 피아노 역시 리타르단도(Ritardando)의 머뭇거림으로 가수와 함께 하늘을 올려본다. 피아노의 오른 건반은 16분 음표 떨기마다 스타카토(Staccato)를 매겨나가며 그 보폭을 알려주고 있다.    조용히 다시 노래가 이어진다. 첫 번째 연(절)과 거의 비슷한 정조(情調)로 두 번째 연이 불려진다.    이 부분이 끝나면 간주가 없이 곧바로 세 번째 연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제 곡은 클라이막스로 나아간다. 서서히 음량이 커지다가 'Seele(영혼)'에서 한 차례, 'Fluegel(날개)'에서 또 한 차례 격앙(激昻)된다. 이 부분에서 피아노의 두 손은 서로의 음형을 바꾸며 "나래를 활짝 펼치고, 고요한 대지를 날았네(Weit ihre Fluegel aus, Flog durch die stillen Lande,)"라는 가사 내용처럼 비상(飛翔)하는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들뜬 감정이 사라진 후 곡은 첫 선율의 단아한 분위기로 돌아가 마치 집으로 가는 것처럼Als fl ge sie nach Haus.마쳐진다.  가수가 노래를 거둔 뒤에도 피아노는 8마디의 행보를 계속한다. 달빛은 은은하게 공기를 타고 흐르다가 저 산 너머로 조용히 사라진다. 지올콥스키(Gregor Ziolkowski) 작, (1999)    독일의 작곡가 슈만과 시인 아이헨도르프는 이 짧은 가곡을 통해 영원한 동경과 낭만의 상징인 달을 하늘에서 이탈(離脫)시켜 이 대지와 자연 속으로, 사람들의 마음 곁으로 다가서게 하고 있다. 이 충만한 낭만주의자들이 꿈꾸는 경지는 달과 지구,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세계, 신화의 광휘가 내리는 순수의 세상이었다. 우리는 본래 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틈에선가 달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회지의 마천루에 가려지고 가로등의 현란한 빛으로 바래졌다. 그렇게 우리는 달을 잃었고, 동심과 순정, 신화와 옛 이야기들을 잃고 살았다. 르네상스 작가 단테(Dante)는 그의 의 천국편에서 달의 신 아폴로(Apollo)를 불러낸다. 크리스트교 신앙의 정수(精髓)인 이 책에서 그는 불경스럽게 그리스 신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에는 깊은 생각이 스며 있었다. 그는 신화 속의 달을 불러내어 당대 독자들에게 되돌려 주려 했다. 중세 이래로 달은 불경의 상징, 반신앙의 징조로 외면당했다. 그런 달의 오명을 단테가 문필의 힘으로 씻어 바로잡은 것이다.    소설가 김선우는 헤어져 있어야 하는 지구와 달의 숙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달은 우리 은하가 만들어질 때 어떤 연유로 지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이 별의 일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구와 한 몸이었던 달, 그래서 달은 멀리 가지 못하고 허락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구를 그리워하며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그리움, 그 안타까운 일렁임이 저토록 교교 한 빛의 너울로 지구의 바닷물을 끌어당기고 밤마다 그 물살 속에 달빛의 아이들을 산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우주를 유랑하는 떠돌이별이었던 달이 우연히 지구 옆을 지나가다가 한 송이 푸른 꽃인 지구에 매혹되어 영영 지구 곁을 서성거리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서성거림, 우주를 떠돌며 그가 알게 된 다른 모든 은하의 별들에 구전되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밤마다 나지막이 불러주면서, 이 푸른 별이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날마다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면서, 단지 서성거리면서 혹은, 우연히 지나쳐 흐르던 달의 노래를 사모하여 지구가 달을 보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달은 또 다른 미지의 먼 은하를 꿈꾸고 지구는 창백하게 떨리는 달의 속눈썹을 단 한번 쓰다듬어 줄 수 있기를 꿈꾸고, 그렇게 두 별의 아득히 비껴선 그리움 때문에 달빛이 저토록 몽롱한 슬픔의 빛을 띠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성철 작,    달은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의 명부이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의 고향이다. 이번 한가위에는 그 소중한 추억들을 달에 영상으로 비추어 보며 윤동주 시인처럼 옛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둘씩 되뇌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주자 소개) 바리톤 디트리히-피셔 디스카우(Dietrich-Fischer Dieskau) 피아노 반주 볼프강 자발리쉬(Wolfgang Sawallisch) 1974년 녹음          
2078    프랑스 시인 - 폴 클로델 댓글:  조회:5397  추천:0  2017-04-19
폴 클로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폴 클로델 (Paul Claudel, 1868년 ~ 1955년) 은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시인이다. 북프랑스의 농촌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고, 랭보를 비롯한 상징주의적인 근대시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890년 처녀희곡으로 서사시극 를 발표, 이후에도 신비극 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30편이 넘는 극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 희곡은 1886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저녁기도때에 성령의 계시를 받은 후 열렬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던 클로델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신을 찬미하는 노래였고, 시작과 마찬가지로 양식이나 제재에 있어서도 일상적인 척도를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좀처럼 상연되지 못했다. 그의 희곡이 지니는 연극적인 진가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주 근년의 일이며, 연극의 사명이나 전체연극의 발상이나 제전(祭典)을 위해 상연된다는 점 등과 연결되어, 오늘날에는 20세기 연극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외교관으로 세계 각지를 순회한 클로델은 동양의 연극에도 이해가 깊었다. 그는 시의 운율은 사람의 호흡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하여 "클로델적 시형"을 만들었다. /////////@@=덤으로 같이 알아보기=@@//////// 카미유 클로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프랑스어: Camille Claudel, 1864년 12월 8일 - 1943년 10월 19일)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시인이자 외교관인 폴 클로델의 누나이다. 1884년경 로댕의 아틀리에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 이후 로댕과 연인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카미유 클로델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이자벨 아자니 - 1988년 까미유 끌로델 (1988년 영화) 쥘리에트 비노슈 - 2013년 까미유 끌로델 (2013년 영화) 같이 보기[편집] 까미유 끌로델 (1988년 영화) 까미유 끌로델 (2013년 영화)   출생 1864. 12. 8, 프랑스 빌뇌브쉬르페르 사망 1943. 10. 19, 아비뇽 근처 몽파베 몽드베르그 보호소 국적 프랑스 요약 클로델은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조각가로, 오귀스트 로댕의 오랜 연인이며 그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다.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10대에 이미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대 미술가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파리에 있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들어가 초기 작품활동을 했다. 1883년경 로댕과 처음 만난 그녀는 곧 그의 제자이자 협력자, 모델, 애인이 되어 자신의 작품 제작외에도 로댕의 작품들에 삽입될 많은 조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893년 무렵부터는 독립하여 작업하며서 점점 세상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공인된 미술전람들에는 작품을 계속 전시했다. 로댕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말년에는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오귀스트 로댕의 오랜 연인이며 그에게 영감을 준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시인인 동생 폴 클로델의 일기와 회고록은 그녀의 생애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다. 5~12세에 그리스도 교리수녀회에서 공부했다. 가족이 노장쉬르센으로 이주한 뒤로는 가정교사가 클로델가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수많은 책이 갖추어진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다. 10대에 이미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대의 미술가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1881년 아버지가 다시 직장을 옮기면서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녀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지금의 그랑드 쇼미에르)에 들어가 평생 친구인 제시 립스컴(뒤에 엘보른으로 알려짐)을 만났다. 현존하는 초기 작품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클로델과 로댕은 1883년에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뒤 곧 그녀는 그의 제자·협력자·모델·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당시 로댕의 작품들, 특히 〈지옥문 The Gates of Hell〉 등에 삽입될 많은 조상과 그 일부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888년 라폴리뇌부르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 근처로 숙소를 옮겼으나 1892년경 로댕과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1898년까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1893년경에는 독립하여 작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일을 했지만 가난해지고 점점 세상과 등지게 되었다. 그녀는 때때로 작업실에 있는 모든 작품을 완전히 부수기도 했으나 공인된 미술전람회들(살롱 도톤과 살롱 데 앵데팡당) 및 뱅 화랑과 외젠 블로 화랑 등에 작품을 계속 전시했다. 로댕이 자신에게 부당한 처사를 저질렀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그와 그의 '무리'에게 학대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멀리하고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가까웠던 동생 폴과도 멀리 떨어져 살았으며 이러한 사정이 그녀를 더욱 짓눌렀다. 1913년 3월 10일 그녀는 강제로 빌레브라르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1914년 9월 몽드베르그의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   예술가의 사랑 =  거장 로댕 만난 19세 여제자… 공동작업하며 사랑 불태워... 명작 '사쿤달라' 탄생 밑거름  결혼약속 불이행에 배신감… 정신착란 빠져 불행한 말년 나의 사랑, 그대를 보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다오. 그럴 수 없다면 끔찍한 광란이 있을 뿐이오. 나는 더 이상 작업할 수 없다오. 얄미운 당신. 그렇지만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하오…당신의 모습을 매일 볼 수 있게 해주오. 오직 당신의 관대함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오.  스물네 살 연하의 제자를 사랑하게 된 조각가 로댕(1840~1917)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1883년 친구 알프레드 부셰가 로마로 떠나면서 맡긴 조각 레슨에서 처음 만난 카미유 클로델(1864~1943). 이 19세의 조숙하면서도 매혹적인 제자에게 로댕은 완전히 백기를 들고 말았다. 클로델이 없는 생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사랑의 늪에 빠져들었다.  로댕은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은 나머지 이듬해 클로델을 ‘지옥의 문’ 제작을 위한 조수로 고용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이 불행한 사랑의 출발점이 되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둘은 또 다른 지옥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로댕은 클로델로 하여금 제작을 보조하는 업무뿐만 아니라 모델을 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영원히 돌 속에 고정시키고 싶은 조각가로서의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클로델의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거듭했고 로댕은 그런 제자에게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 제작하도록 맡겼다. 둘의 작품은 누구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 버렸다. 물론 두 사람의 몸과 마음도 분리할 수 없는 일체로 나아가고 있었다.   만난 지 3년이 되던 1886년 로댕은 클로델에게 6개월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끝낸 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맹세를 담은 편지를 보낸다. 복잡한 여자관계로 유명했던 로댕이 이 깜찍한 제자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로댕의 명작 ‘키스’(1886)와 클로델 최고의 명작으로 프랑스 예술인 상을 수상한 ‘사쿤달라’(1888)는 이 시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낸 값진 예술적 결실이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 사이는 1892년을 전후해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로댕은 이 드세고 독점욕이 강한 여인에게 점차 부담을 느꼈고 클로델은 결혼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로댕에 대한 반감을 점차 키워 나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로댕과 20년 넘게 동거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로즈 뵈레라는 여인이었다. 로댕이 결코 이 여인과 갈라서지 않으리라는 점을 감지하면서 클로델의 질투는 증오심으로 변해갔다. 클로델은 그런 격분의 감정을 자신의 작품에 쏟아부었다. 그럴수록 로댕은 이 여인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사랑의 감정도 식어갔다. 둘은 더 이상 함께 작업하지 않음은 물론 다시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다. 클로델은 로댕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로댕에게서 독립하려 했다. 그러나 로댕은 소리 없이 클로델의 독립을 지원했다. 후원자를 물색, 클로델에게 주문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런 선의는 되레 클로델이 로댕의 ‘판박이’라는 입방아를 부추겼고 클로델의 분노를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는 로댕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증오심을 담아 ‘중년’이라는 작품을 제작한다. 한 중년 남자가 무릎 꿇고 애원하는 젊은 여인을 뿌리치고 나이 든 여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누가 봐도 로댕과 뵈레를 풍자한 것이 분명했다. 정부는 당시 이미 거물이 된 로댕을 의식, 작품 구매를 거절했다.  다행히 클로델은 나름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아르튀르 드 매그레 백작부인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만난다. 독립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1906년 그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던 남동생 폴 클로델이 결혼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버리자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이때부터 클로델은 자신의 작품들을 파괴하고 작업실에 칩거한다. 그런 가운데 정신착란의 독버섯이 거침없이 자라났다. 그는 로댕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망상의 포로가 되고 만다. 화상 외젠 블로가 그를 도우려 했지만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클로델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때가 늦었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클로델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어머니는 그를 정신병원에 유폐시킨다. 외교관이었던 폴 클로델도 자신의 앞날에 누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누이의 감금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클로델이라는 천재는 주변의 몰이해와 무심한 세월속에 잊혀져갔다. 한때의 사랑이 가져온 결과치곤 너무나 참혹하지 않은가.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다. 둘은 어쩌면 종이 한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종이 한장 차이가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온다. 때로 그것은 행복과 비극의 갈림길이 된다. 클로델은 증오의 강을 너무 깊게 판 나머지 자신의 육신마저 가둬버린 비련의 주인공이 됐다. 클로델은 ‘비극의 터널’에서 영영 빠져 나오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1980년대 이후 재평가받아 다시금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비극적 삶을 보면서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한국경제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출생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17년 11월 17일, 뫼동 국적 프랑스 요약 웅대한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하며,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평가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배웠다. 1880년 파리와 브뤼셀의 살롱 전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40세의 나이에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에 세워질 장식미술관에 놓기 위해 의뢰받아 제작한 은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중에는 그의 역작인 , 이 들어 있다. 목차 접기 개요 초기 성숙한 작품으로의 발돋음 대립과 성공 로댕에 대한 평가 로댕(Auguste Rodin)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개요 웅대한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하며,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평가된다. 당시 파리에 세워질 장식미술관에 놓기 위해 1880년에 의뢰받아 제작한 〈지옥문 La Porte de l'Enfer〉은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중에는 그의 유명한 역작인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1880)·〈입맞춤 Le Baiser〉(1886)이 들어 있다. 초상 조각들로는 빅토르 위고와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기념상들이 있다. 입맞춤(Le Baiser) 1886년 로댕의 작품 초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배웠다. 17세 이후 에콜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3차례나 떨어지자, 그 다음해(1858) 석조 장식일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1862년 누이인 마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수도사가 될 생각까지 했지만, 1864년 재봉사인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되면서 결국 그녀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 결혼은 1917년 2월 그녀가 죽기 몇 주 전에야 이루어졌다. 로댕은 조각가 A.E. 카리에 벨뢰즈 밑에서 일하며 1864년 처음으로 살롱 전에 〈코가 이그러진 남자 L'Homme au nez cassé〉를 출품했으나 거절당했다. 초기 작품으로는 뵈레를 모델로 조각한 여러 점의 습작도 있다. 1871년 카리에벨뢰즈와 함께 브뤼셀에 가서 공공기념물을 장식하는 일을 맡았으나 카리에벨뢰즈에게 해고당했다. 얼마 후 청동장식물 만드는 일자리를 다시 찾았고, 로즈 뵈레도 브뤼셀로 와서 그와 함께 살았다. 1875년 35세가 되도록 장식일에만 쫓겨 독자적 표현양식을 개발하지 못한 그는 이탈리아(제노바·피렌체·로마·나폴리·베네치아) 방문을 계기로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에게서 감명을 받고 브뤼셀로 되돌아온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이 바로, 다시 태어나려는 활력을 정복당한 고통을 표현한 청동상 〈정복당한 자 Le Vaincu〉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브뤼셀의 미술계에서, 그리고 1877년 파리 살롱 전에 〈청동시대 L'Âge d'Airain〉라는 제목으로 전시되면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청동시대(L'Âge d'Airain) 1875-1876년 로댕의 작품 이 작품은 당대의 다른 조각상들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사실적인 표현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 몸에 틀을 떠서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1877년 파리로 돌아와, 1879년부터 세브르 자기(瓷器)공장의 공장장이 되어 있는 옛 스승 카리에벨뢰즈의 부탁으로 자기 도안을 맡았다. 그러면서 런던과 파리에 세워질 기념비 제작에 여러 차례 응모하여 실패했으나, 마침내 파리 시청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한편 〈설교하는 세례자 요한 St. Jean-Baptiste prêchant〉(1878)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양식을 개척했으며, 1880년 파리와 브뤼셀의 살롱 전에서 이 작품과 〈청동시대〉가 인정을 받으면서 40세의 나이에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성숙한 작품으로의 발돋음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미 많은 작품을 완성했을 나이에 로댕은 겨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그 당시 세워질 파리 장식미술관의 청동문 제작을 의뢰받자 2개의 작업실을 차렸으며, 작업 대금을 선불로 받아 재정적으로 안정되었다. 그는 약속한 1884년까지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1917년 그가 죽을 때까지도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그 문은 주제를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에서 따왔기 때문에 〈지옥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옥문(La Porte de l'Enfer) 처음의 구상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성당에 세운 〈천국의 문 Gates of Paradise〉에서 따오려 했던 것이나, 1881년 화가 알퐁스 르그로의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하면서 그 계획이 크게 바뀌었다. 로댕은 영국에서 단테의 영향을 받은 라파엘 전파(前派)의 많은 회화와 소묘들, 특히 윌리엄 블레이크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보고 그 영향으로 사랑·고통·죽음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인간군상들을 보여주기로 작품방향을 바꾸었다. 이 미완성의 작품은 커다란 네모틀 안에 독립적으로 제작된 인물상과 군상들을 짜맞추어 만든 것으로서, 그 가운데는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문의 윗부분에 놓여질 단테의 좌상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1884년에는 칼레 시로부터 기념물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것은 1347년 1년간의 포위공격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 도시를 구하기 위해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스스로 볼모로 잡혀간 시민들의 희생을 추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2년 안에 완성된 이 〈칼레의 시민 Les Bourgeois de Calais〉은 1895년에야 비로소 헌정되었으며, 1913년에는 당시 영국의 왕비가 남편 에드워드 국왕을 설득하여 그 영웅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중재한 것을 기념하여 런던의 국회의사당 정원에 이 작품을 청동으로 떠서 세웠다. 로댕의 명성은 올라갔으나, 그의 무절제한 사생활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잇달았다. 1885년쯤 그는 시인 폴 클로델의 재능있는 누이이며 자신의 제자인 카미유 클로델과 연인이 되어 잦은 말다툼을 하면서도 연애를 했지만, 결국 1898년 카미유가 미치면서 그들의 연애도 끝났다. 순식간에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모은 그들의 애정은 매우 열렬했으며, 로댕은 그 기간에 욕망으로 시달리는 연인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감각의 〈입맞춤〉은 원래 〈지옥문〉을 위해 구상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상(像)으로서 그의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 작품으로 로댕은 수많은 추문에 휘말렸다. 대립과 성공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국립미술아카데미인 프랑스 학술원과 일반대중, 심지어 국회와도 자주 충돌했다. 그는 10년을 바쳐 풍경화가인 〈클로드 로랭 Claude Lorrain〉·〈아르헨티나 대통령 도밍고 사르미엔토 President Domingo Sarmiento of Argentina〉·〈빅토르 위고 Victor Hugo〉·〈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등 4점의 기념상들을 제작했으나, 모두가 비평가들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클로드 로랭〉은 프랑스 낭시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 도밍고 사르미엔토〉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각각 큰 소동을 야기시켰고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는 훨씬 더 심한 충돌을 낳았다. 1886년 그는 프랑스의 위인 기념관인 팡테옹에 위고의 기념비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나체상을 제작하려 했으나 큰 물의를 빚게 되자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9년에 나체상이지만 앉아 있는 〈빅토르 위고〉가 뤽상부르 공원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결국 팔레 루아얄 미술관에 놓여졌다. 1891년 로댕은 저술가 협회로부터 발자크상을 의뢰받고 여러 개의 발자크 초상화를 조각으로 옮기는 대규모 작업에 몰두했는데 그는 발자크가 다니던 양복점에 가서 고인의 정확한 신체 치수까지도 알아냈다. 그는 조각상에 어울리는 자세를 잡느라고 온갖 상상과 실험을 거친 뒤, 마침내 옷을 반쯤 걸친 발자크의 모습을 구상해냈다. 간결하게 구상된 이 조각의 원형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멘히르 또는 수직 석제대(石祭臺)와 닮았으며, 현대미술의 간결함을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업이 늦어지고 조각상의 구도가 드러나자 저술가 협회는 그를 법적 소송에 걸었다. 1898년 그 원형이 국립미술협회전(展)에 선보여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을 때, 후에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가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다. 결국 로댕은 저술가협회에 손해배상을 해주고 그 원형을 철회했다. 그 발자크 초상은 1939년에야 비로소 청동으로 주조되어 파리에 있는 몽마르트르 네거리에 세워졌다.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는 로댕의 조각 150점과 수많은 드로잉들이 특별 전시되어 그의 국제적인 명성을 증명했으며,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1896년에 그가 뫼동에 사 두었던 집으로 옮겨졌다. 그의 집은 그의 제자들과 조수들로 붐비는 거대한 작업장이 되어 로댕은 조각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조각 청부업자에 가까웠다. 그 자신은 마음에 드는 형태를 찾느라고 오로지 원형만을 수없이 만들었다. 청동 주조를 전문가들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대리석의 절단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지휘만 했다. 산업 공장과도 같은 이 작업장에서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여러 사람의 비서들이 그를 보조했다. 1900년 이후로 로댕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미국·독일·오스트리아·영국·프랑스 등에서 흉상 제작 의뢰가 쇄도했고, 특히 영국에서 아주 유명해 많은 영국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1902년 그를 축하하는 런던의 한 연회장에서는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환호했다. 그는 1907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세운 시인 윌리엄 헨리 기념상 개막식에 참석했고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 상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 등과 함께 옥스퍼드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8년 5월에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직접 뫼동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당시 로댕은 커다란 정원에 둘러싸인 18세기 파리풍의 아름다운 비롱 저택의 한 층을 빌려쓰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이 저택을 로댕 박물관으로 만드는 조건으로 로댕의 전작품을 기증할 것을 제의했고 로댕은 이에 동의했다. 그후, 그의 마지막 추종자인 미국인(나중에 슈아쇨 공작부인이 됨)의 이기적인 음모로 이 협상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나 그의 연대기 편집자이며 이 협상의 성공을 위해 활동한 주디트 클라델과 그의 유산을 노리는 여자들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한 마지막 비서 마르셀 티렐의 도움으로 결국 성사되었으며 1916년 저택을 양도받고 작품들을 기증하였다. 이 미술관은 자치기관으로서 로댕이 남겨놓은 석고 주형에서 떠낸 주조물을 팔아 유지하고 있다. 로댕의 장례식 날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는 그를 추도하는 엄숙한 추모식이 치러졌다. 로댕은 일생 동안 조각 외에도 책 삽화와 드라이포인트, 동판화, 여인의 누드 드로잉 등을 많이 남겼다. 또한 문학적 자질이 있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중세 미술에 심취했으며, 주요역작으로는 〈프랑스의 대성당들 Les Cathédrales de France〉(1914)이 있다. 로댕에 대한 평가 20세기초에 로댕은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현대의 미켈란젤로이자 조각의 거장 또는 비범한 천재성의 화신으로 오랫동안 추앙받았다. 그의 유별난 여성 편력조차 뛰어난 재능의 상징으로 용납되었다. 그러나 그후 70~80년이 지난 근대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이전처럼 한결같지는 않아 어떤 비평가는 로댕의 작품에서 장식조각가로서의 경력이나 전문적 수업의 결여를 드러내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대의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나라 출신의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그의 조각양식은 널리 퍼졌다. 그의 작품은 특히 샤를 데스피오와 아리스티드 마욜, 에밀 부르델 등의 프랑스 조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주요미술관들마다 그의 복제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파리·필라델피아·도쿄[東京]에는 로댕 미술관이 있다. 로댕의 주요한 업적이라면 서양 조각의 근본적인 힘이 되어온 인체에 대한 지식과 그 풍부한 묘사를 되살려 놓은 데 있다.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나 〈니진스키 Nijinsky〉와 같은 작품들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   닫혀진 집 / 폴 클로델     땅은 이제 몇 줄의 모래에 불과하며 당신이 지으신 하늘만이 항상 가림 없이 눈에 보이는 이 땅 끝으로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     그들의 말도 모르는 제가, 이 미개한 백성들 가운 데서     저의 처나 자식과 똑같은 모든 사람들, 저의 형제들 을 잊게 하지 마옵소서.     천문학자가 뛰는 가슴으로, 마치 교태의 여인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듯,     감동된 호기심으로 화성(火星)의 모습을 살피며 측성기(測星器) 앞에서 밤을 새는데,    저에게는 작은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입니 까?     가장 작은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입니 까?     자비는 너무 많이 가진 것을 무심히 내주는 일이 아 니라 학문과 같은 정열입니다.      자비는 학문과 같이 당신이 지으신 이 가슴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찾는 발견입니다.     당신의 모든 성신(星辰)이 저에게 필요하다면 저의 모든 형제들은 얼마나 더욱 필요할 것입니까?     당신은 저에게 먹여 살려야 할 빈자(貧者)도, 고쳐 주어야 할 병자도 주지 않았습니다.     나누어야 할 빵을 주시지 않았고 저에게는 빵과 물로 다도 더욱 온전하게 받아들여진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 고 영혼 가운데에 용해(溶解)될 영혼을.     제가 이 말씀을 저의 맘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열매 맺게 하소서, 땅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길 가운데 떨어진 이삭까지) 계속 자라게 하는 수확(收穫)과 같이.     그리고 맺은 열매로부터 명예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가능한 열매를 내주는 성스러운 무지(無知) 속의 나무와 같이.     각자는 자기가 가능한 것을 줍니다; 어떤 사람은 빵 을, 다른 사람은 빵의 씨앗을 줍니다.     우상들을 멀리하여 / 폴 클로델        축복받으소서, 나의 하나님이시여, 저를 우상들에게 서 구원하시고,    이시스나 오시리스 신이 아니며    정의나 진보, 진리나 성물(聖物) 또는 인류나 자연의 법칙 혹은 예술이나 미(美)가 아니라    당신만을 경배하게 하신, 나의 하나님    당신은 있지도 않은 이 모든 것들, 또는 당신의 부재(不在) 로 생긴 허무를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목선을 짓고 남은 목재로 아폴론 상(像) 을 만든 미개인(未開人)처럼    이 모든, 말하기 위해 말하는 자들은 남아 도는 형용 사들로 실체 없는 괴물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괴물들은 어린애들을 잡아 먹는 몰로크 신보다도 더 실체가 없고 그 몰로크 신보다도 더 잔인하고 끔찍스 러운 것입니다.    이들은 소리는 가지고 있으나 목소리는 없으며 이름 은 가졌으나 인격은 없습니다.    그리고 불결한 정신이 거기 있으나 목소리는 없으며 이름은 가졌으나 인격은 없습니다.    주여, 그대는 저를 책과 사상과 우상과 그것들의 사 제(司祭)들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자인 에페니메 족속의 속박 아래 당신을 섬기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자들의 신이 아니라 산 자들의 신 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결단코 유령들과 꼭둑가시들을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디아나 여신도 의무도 자유도 아피스 황소도    그리고 그대들의 '천재들'과 그대들의 '영웅들', 그대 들의 위인들과 그대들의 초인들도.    저는 이 모든 변형자(變形者)들에 대하여 똑같은 혐 오를 가집니다.    그것은 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실재하는 사물 가운데 존재하며 이 사 물들로 하여금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를 갖도록 합 니다.    저는 어떤 것보다 우월하길 원치 않으며 다만 바른 사람,    그대 온전하심같이 따르기를, 다른 실재하는 정신 가운데서 바르고 생기 넘치기 원합니다.    저들의 지어 낸 이야기가 무슨 소용입니까? 다만 저 로 하여금 창가로 가 밤을 열게 하시고 저희 두 눈에 하 나의 동시적(同時的)인 숫자가 나타나게 하소서    저의 필요성이 계수(係數) 1의 수(數)뒤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0(零)의 숫자들을!     폴 클로델(1868~1955):  폴 클로델은 일생을 거의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문학사에 남는 많은 시, 연극, 평론 등을 써낸 드문 외교관 작가이다. 그가 얻은 작가로서의 큰 영광은 대부분 그의 연극 작품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하고 종교적인 시들도 우주적인 깊은 뜻과 신비로운 사상-독창적인 시법으로 당대에도 시단의 거성(巨星)이었으며 현대의 저명한 몇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클로델은 샹파뉴 지방의 한 지방 공무원의 경건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사했으며 유명한 루이 드 그랑 중고등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때부터 이미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리 대학에서는 법학 공부를 정치학 대학에서는 정치학 공부를 했다. 1890년 그가 22세 때 프랑스 외무성 외교관 채용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이후 약 40년간 그는 미국-중국-일본-유럽-남미 등 거의 전세계에 걸쳐 영사-공사-대사로 일하며 외교적으로도 활약한 바 적지 않았으나 도리어 문학계에 있어서 그는 더욱 찬란한 작품들을 남기었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떨치었다.   그의 작가로서의 창작 활동도 연극 작품과 시 작품으로 나뉘는데 그는 이미 1890년 이전 외교관이 되기 전부터 연극 , 등을 썼고, 외교관으로 유럽-남미 재국-일본-워싱턴에 근무하는 동안 그의 주요 작품을 완성하였다. , , 그리고 그의 대표작 등이 출판되고 상연됨으로써 그는 위대한 사상가-작가로 추앙받았다.  시인으로서의 클로델의 창작 활동은 주로 그가 극동 지방에서 체재한 1895년에서 1909년에 이르는 14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는 이 동안 중국의 상해-복건-북경-천진 등과 일본에 영사로 있었는데 당시 이국 만리 타향에서 고독과 신앙의 명상 가운데 많은 중요한 시를 썼다. , "두 편의 여름의 시" "3성(聲) 칸타타" 등이다. 이 외에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쓴 "전쟁 시집"과 "성도의 나뭇잎" 등이 있다.  1936년 주 벨기에 대사를 끝으로 40 여년의 외교관 생활을 은퇴한 그는 만년에는 시골에 있는 그의 소유지에서 주로 성경의 연구-해석과 주석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이 저작들은 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서정적이며 신비적인 것이었다. , 등이 있다.  194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1952년에는 그의 이 100회 공연이 있었다. 1955년에는 파리의 국립 극장에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늙은 시인-극작가에게 최후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 공화국 대통령 임석하에 의 특별 공연이 있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클로델은 86세를 일기로 영광과 추앙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시인으로서의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두 가지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886년 그가 20세 때 랭보를 발견한 일이며 또 하나는 같은 해 크리스머스 전날 밤 그가 우연히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경험한 신비로운 충격이었다.  19세기 후반 사상계에서는 물질주의와 기계주의가, 문학계에서는 자연주의가 지배하던 때에 소년기의 신앙을 잃은 쿨로델은 허무적이며, 부도덕하고, 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였다. 이 때에 그는 랭보의 과 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진리의 빛을 보았고 물질주의의 수용소에서 벗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분명하고 거의 물리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또 한 가지는 이 해 크리스머스 전날 밤 그는 성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노트르담 성당에 갔다. 믿음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호기심에서였다. 교회 내진(內陳)에 다른 신도들과 함께 서 있었고 합창단 어린이들이 성모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그의 가슴은 무엇에 접촉되고 자기가 신의 영원한 아들이라은 것을 느꼈다. 자신의 전존재가 공중으로 실려 올라감을 경험했고, 이 순간 그는 믿음을 얻었다. 이 믿음은 확실하고 강력하여 그 후 일생 동안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마치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의 회심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클로델의 중심 사상은 현존한 사물 가운데 초자연적인 것을 보는 것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합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보이는 것 만으로는 혼돈과 우연의 연속뿐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받쳐질 때 비로소 현실성과 참뜻을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그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는 신으로서 신 없는 세계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그 때에 세계는 무산될 것이며 무의미하며 허무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시는 은총의 행위이며 신에 대한 기도, 우주를 창조한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끝없는 기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시형이나 운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리듬, 자연과 정신의 맥박과 호흡을 쫓아 세계와 인간과 신의 리듬을 기록하는 소위 클로델 시절(詩節)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와 믿음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으므로 그는 "시인은 신의 모방자이며 시는 창조의 모방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시는 시형의 단조로움-자기 도취-판단의 조잡하고 난폭함-저속한 취미 등 많은 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만이 가질수 있는 우주적인 통찰력, 강력하고 진실된 독창성, 지성이나 기교를 넘어선 천재적인 서정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많은 사람은 그를 프랑스 낭만파의 거성(巨星) 빅토르 위고와 견주고 있다.      
2077    "당나귀 시인"을 사랑했던 시인들 댓글:  조회:3280  추천:0  2017-04-19
    릴케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청년 말테가 반한 시인은 누구였을까. 당대 최고 명성의 베를렌이 아니었다. 문학의 마천루 파리에 사는 시인도 아니었다. 그는 ‘맑은 공기 속에 울려퍼지는 종소리 같은 시인’이자 ‘자기 집 창문이나 아련히 먼 곳을 비추는 책장의 유리문 이야기를 해 주는 행복한 시인’ 프랑시스 잠이었다.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에서 평생 사랑과 생명을 노래한 전원시인. 그를 좋아한 건 릴케만이 아니었다. 식민치하 조선의 백석과 윤동주도 그를 사랑했다. 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시스 잠과 릴케의 이름을 시에 녹여냈다. 백석은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라고 썼다. 프랑시스 잠 시어에 릴케도 반해  동주도 ‘별 헤는 밤’에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고 썼다. 이들이 그토록 그리워한 프랑시스 잠은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인 요소를 씻어낸 자연주의의 대가다. 프랑스 대혁명 후 ‘온갖 것에 대한 불만족’으로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며 어디로든 도피하려던 세태와는 달랐다. 그는 달아나기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포용과 모성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당나귀 이미지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박함의 상징인 당나귀를 좋아해서 자주 타고 다녔다. ‘나는 당나귀가 좋아’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한 기도’ 같은 시를 썼고 별명도 ‘당나귀 시인’이었다.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미명계’ ‘연자간’ ‘귀농’에 당나귀가 나오고, 동주 시 ‘밤’ ‘곡간’에도 당나귀가 등장한다.  이들과 프랑시스 잠을 잇는 당나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백석이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고 할 때 당나귀는 연인과 함께 산골마을로 가는 꿈의 매개다. 동주가 ‘밤’에서 한밤중 당나귀에 여물짚을 주는 아버지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모습을 겹친 것도 사랑과 생명과 희망의 메타포다.  증오사회 치유하는 '삼종의 기도'  한편으로는 생의 무게를 말없이 견디는 존재가 당나귀다. 프랑시스 잠은 시집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에서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다’며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들이 살던 시대는 냉엄했다. 프랑시스 잠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기에 태어났다. 백석은 105년 전 청나라가 망한 해에 나서 평생을 변방인으로 살았다. 동주는 100년 전 러시아 혁명기에 나 2차대전이 끝나기 6개월 전 옥사했다. 제국주의와 국수주의가 충돌하던 역사의 격변기에 인간과 삶의 근본을 되새기던 시인들….   지금도 다를 게 없다.  ...국세는 급변하고 ...열강의 패권 다툼은 치열하다. 그런데도 싸움에 정신이 없다. 분노와 증오, 경멸과 힐난의 ‘팔매질 사회’를 껴안을 희망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비관보다 낙관, 슬픔보다 사랑을 노래한 그 시절 시인들처럼 지금 우리 삶은 얼마나 깊이 있고 성찰적이며 엄숙한가.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2076    프랑스 시인 - 프랑시스 잠 댓글:  조회:4241  추천:0  2017-04-19
식당 / 프랑시스 잠       나의 식당에는 빛 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 그는 나의 고모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 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    하면 잘못이지요,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 시계가 하나 있지요, 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    어요. 그에게 물어 볼 생각도 없구요. 아마 용수철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 그저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 그 속에서는 밀랍, 잼, 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 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 어떤 물건도 훔쳐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리 집에 왔던 많은 남녀 손님들은 이 물건들의 작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손님이 집 안에 들어서면서 "잠 씨 어떠시오?" 하고 말할 때 그가 살아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웃음이 떠    오르지요.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 프랑시즈 잠                              M.R. 양에게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방금 도살장에 끌려가며 싫다고 발버둥치는 불쌍한 송아지는   이 작은 쓸쓸한 마음의 잿빛 담장 위에 붙은 빗물 방울을 핥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 하나님이시여! 감탕나무 우거진 이 샛길들의 동무였    던 그 송아지는 그렇게도 유순하고 그렇게도 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이시여! 무한히 자비로우신 당신, 말씀해 주십시요, 우리들 모두에게 용서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어느 날 금빛 찬란한 하늘 나라에 가면 거기 서는 귀여운 송아지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며   도리어 우리들은 더욱 착해져서 그들의 작은 뿔 위에 꽃을 걸어 줄 것이라고.   아, 하나님이시여! 송아지가 칼을 몸 속에 받을 때 너무 심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소서--     가을이 오면 우리는 본다---/ 프랑시스 잠     가을이 오면 우리는 본다, 전깃줄 위에 길게 줄지어 제비들이 떨고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낀다, 그들의 추워하는 작은 가슴이 불안에 떨    고 있는 것을. 이 가장 어린 새끼제비들마저, 본 적도 없는 저 아프리카의 덥고 구름 없는 하늘을 동경한다.   ---한 번 본 적도 없이! 그렇다, 그것은 우리들이 불안 가운데 하늘 나라를 그리워함과 같은 것, 그들은 뾰족한 형상으로 줄 위에 앉아 기류를 살피    든가 또는 공간 속에 유연한 원을 그리며 날았다가 다시 떠났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교회당 정문을 떠나가기란 어려운 일! 그 곳이 지난 몇 달같이 따스하지 않음은 괴로운 일--- 아, 그들은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가! 아, 호두나무는 어찌하여 잎사귀를 모두 떨어뜨려 그들을 실망시켰는가? 올 태생의 새끼제비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가을이 상복으로 덮어 버린 그 봄을.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고난을 겪은 영혼도, 성스러운 대양(大洋)을 지나 영원한 장미꽃 피는 하늘 나라에 오르기까지는, 해 보고 주저하고 떠나려다 다시 되돌아온다.       프랑시스 잠(1868~1938):  은유-순박-겸손의 상징인 나귀를 사랑하고 자주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프랑시즈 잠은 일생을 남 프랑스의 피레네산록에서 살면서 자연과 동물과 농민과 신을 노래한 자연 시인이다.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인 오트-피레네의 투르네이에서 태어나 보르도에서 중학 공부를 마치고 오르테즈라는 작은 고을에 정착하여 여기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잠은 어느 공증인(公證人) 사무소의 서기로 일하며 간간이 시를 써 왔다. 23세 이후 두 편의 단행 시집을 인쇄하여 파리의 여러 시인에게 보냈는데, 이는 말라르메의 찬사를 얻었고, 앙드레 지드의 권고와 도움으로 출판되었다(1898).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은 그가 제 1시집 와 제 2시집을 출간한 이후이다. 이 책들의 출현은 새로운 시와 시인의 탄생을 고하는 것이었다. 빈 내용과 난삽한 표현을 일삼던 상징주의 말기의 시에 대하여 그의 시는 프랑스 시의 청순하고 소박함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의 시 속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떠오르는 진실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천진스럽고 따스한 마음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제 1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 당신은 저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저는 괴로와하고 또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이 주신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가르치시고 그들이 저에게 준 말로 글을 썼습니다. 저는 길을 지나갑니다. 어린애들의 놀림을 받고 머리를 푹 숙이는 짐진 나귀와 같이 저는 당신이 부르시는 때에, 또 당신이 가라시는 곳에 흔연히 갈 것입니다. 저녁종이 울립니다.    실제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위 잠주의(Jammisme)라는 문학 운동이 일기까지 하였다. 이는 당시 문학(특히 시)의 주류를 이루던 현학적이며 기교적이며 지나치게 지성적인 시가에 대하여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평이한 시를 주장한 것으로 문학상의 일종의 자연주의였다, 잠의 순진하고 단순한 시와 그의 민중적인 주장은 당시의 너무나 고답적이고 애매하고 난해한 시에 불만과 혐오를 느끼던 독자와 세대에게는 마치 청순한 샘물과 같이 앞을 다투어 그의 시와 글에 목 축였으며 오르테즈 마을에 은거하는 이 자연 시인에게 경이와 찬탄을 보냈다.  이 동안 잠은 고향의 자연 속에 묻혀 동식물의 연구를 하는 한편, 작품도 써 등의 아름다운 단편 소설도 썼다.   그러나 그의 제 3시집 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시는 차츰 정신화하고 기독교화 한다. 원래 잠의 시 세계는 전체적으로 천진난만하고 밝고 깨끗하나 그 배후에는 일말의 불안과 우수가 있었다. 고독의 비애와, 영원한 것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그리움이 있었다. 이러한 슬픔과 불안과 고민을 통하여 신앙으로 향하는 마음의 행로가 전기한 시집 가운데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선량하고 겸손하였고, 사랑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즉 신의 은총이 필요했다. 잠은 전깃줄 위에 앉은 제비들의 슬프고 불안한 모습 가운데, 그리고 그들의 남국에 대한 동경 가운데 자신의 불안과 신앙에 대한 욕구와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의 괴로운 영혼과 신과의 대화를 "시인은 영혼의 숲에서 단 혼자이다"에서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결국 평생 친구인 크로델의 정신적 도움과 어느 일요일 보르도의 대성당에서의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그는 카톨릭 교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무의식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잠은 이후부터 시와 신앙을 조화시킨 종교적인 신비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므로써 자연 가운데 있는 초자연적인 것을 깨달았으며 그의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에서 정신적인 종교적인 가치를 찾았다. 이리하여 잠은 1919년 "기독교 농사시(農事時)을 발표하여 계절에 따라 변하는 는 자연 가운데 대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농부의 삶을 그렸고, 그들의 일이 지닌 종교적 가치와 그들의 생활이 가지는 신비로운 뜻을 소박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르네 랄루가 그를 가리켜 '우아의 시인이며 은총의 시인'이라고 한 것은 잠이 자연을 사랑하는 시인으로부터 종교적인 세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시인은 차츰 늙어 갔다. 50이 넘자 그의 머리와 가슴까지 내려오는 수염은 눈같이 희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오르테즈의 백조'라고 했다. 1921년 그가 고향을 떠나 아스파랑으로 이주하자 이곳 사람들은 그를 '아스파랑의 양'이라고 했다. 그 동안 늦게나마 결혼을 하고 가정과 많은 어린애들을 거느린 그는 가장적인 풍모를 띠었고 종교적 회심과 더불어 안정과 안주의 심경을 찾았다. 이 동안에 그는 몇 권의 종교적 시집과 철학적인 4행시집, 그리고 몇 편의 소설도 썼다. 클로델은 그의 을 잠의 최고 걸작이라고 했다.  70년의 생을 피레네 산록에서 자연과 가축들과 소박한 시골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명상과 신앙과 시작(詩作)으로 지낸 이 시인은 1938년 11월 1일 5개월의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이 날은 그가 그의 시에서 기원하였듯이 아름답고 깨끗한 날씨였다.            엘레지는 사실 비가(悲歌), 애가(哀歌), 만가(輓歌) 등으로 번역한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친한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나타나는 위로의 마음이나 인생 의미 혹은 생사관(生死觀) 등의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죽음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불행이나 혹은 실연당한 슬픈 감정등을 통틀어서 엘레지라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시스 잠 (Francis Jammes, 1868-1938)   프랑스 신고전파 시인으로 북아프리카 알제리 여행이나 약간의 파리 생활을 제외한다면, 일생을 거의 피레네 산맥의 자연과 벗하며 아름답게 지냈다.          Fourteenth Elegy   My Love, you said. - My Love, I answered. It's snowing, you said. I answered, it’s snowing.     Once more, you said. - Once more, I answered. Like this, you said. - Like this, I said.   Later on you said, I love you. And I, even more. The lovely summer is ending, you said. - It's autumn, I replied.    And our words were no longer the same. One day, finally, you said: Dearest, how I love you...   (just as vast Autumn ceremoniously descended) And I responded: Say it again...     애가 14     내 사랑이여, 당신이 말하면 내 사랑이여, 나는 대답했지. 눈이 내리네, 당신이 말하면 눈이 내리네, 나는 대답했지.   다시 한 번, 당신이 말하면 한 번 더, 나는 대답했네. 이렇게, 당신이 말하면 이렇게, 나는 대답했네.   그 후 당신이 말했지, 사랑해요 그러자 나도 대답했네, 당신보다 더. 사랑스런 여름도 끝나 가네, 당신이 말하자 이젠 가을이군, 나는 대답했네.   그리고 우리의 말들도 서로 달라졌네 어느 날 마침내 당신이 말했네 사랑하는 이여, 얼만큼 사랑하는데...   (마치 광활한 가을 날씨가 정중히 내려오는 느낌 속에서) 나는 대답했지, 그렇게 또 다시 말해 보오...       시인이 생각하고 표현한 엘레지 연작 중의 14번째...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 안해도 알아챌 만큼 말과 생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다른 차이가 생겨나고 동상이몽 생각도 나타나고... 언어가 어그적거리며 행동 표현도 밉게 느껴지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굳건한 마음...         "I believe that Truth is the praise of God; that we must celebrate it in our poems for them to be pure."   프랑시스 잠은 '신을 찬미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기에,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을 담아서 종교적이고 농목(農牧)적인 시를 많이 썼다.         프랑시스 잠의 단순하며 깨끗한 무덤.       프랑시스 잠 프랑시스 잠과 그의 어머니     [출처] 네이버캐스트;프랑시스 잠|작성자 Sarah  
2075    독일 시인 - 횔덜린 댓글:  조회:6176  추천:0  2017-04-19
  출생 1770. 3. 20, 뷔르템베르크 라우펜암네카어 사망 1843. 6. 7, 튀빙겐 국적 독일 요약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시인 실러의 격려에 따라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1779년 어머니는 다시 남편을 잃고 혼자서 프리드리히와 그의 누이 하인리케,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카를을 부양해야 했다. 교구목사의 딸로서 단순하고 다소 편협한 신앙심을 가졌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성직자 지망생들은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는데,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소년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는 덴켄도르프와 마울브론의 '수도원학교'(종교개혁 이전 시기부터 그렇게 부름)에 보내졌고, 이어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는 했어도 성직에 몸담을 수는 없었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쉽지 않은 타협이었던 당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결코 그의 영혼을 안전하게 기대도록 해주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스 신화에의 몰두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몰두하면서 그리스 신들을 해와 땅, 바다와 하늘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력들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념 대상의 양분에서 오는 긴장이 횔덜린에게는 존재의 영원한 조건으로 남았다. 그는 루터교 목사로서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인 직업에 대한 의식은 대단히 강해서, 그에게 시인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하는 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793년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소개를 받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처음으로 가정교사직을 얻었다. 그후 여러 번 가정교사를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실러는 다른 방식으로도 횔덜린을 도와주었다. 그가 만드는 〈신(新)탈리아 Neue Thalia〉라는 정기간행물에 횔덜린이 쓰기 시작한 시 일부와 소설 〈히페리온 Hyperion〉의 일부를 실어주었다. 〈히페리온〉은 그리스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던 전사의 환멸을 그린 비가조 이야기로 미완성에 그쳤다. 횔덜린은 실러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는 1794년 예나로 가기 위하여 가정교사직을 그만둘 때 다시 실러를 만났다. 횔덜린의 초기 시에는 실러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그가운데 여러 편은 프랑스 혁명이 초기 단계에 약속해주는 듯이 보였던 새로운 세계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는 자유·인간성·조화·우정·자연 등에 대한 찬가들도 포함된다. 1795년 12월 가난 때문에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정다감한 젊은 가정교사는 주인의 부인 주제테에게 깊이 빠져버렸으며, 대단히 아름답고 감수성 있는 이 여인은 그의 애정에 응답했다. 1797년 2월 친구 C. L. 노이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들의 관계를 "이 비참한 시대에서 정말 헤매고 있던 존재와 맺어진 영원하고 행복한 성스러운 우정"이라고 묘사했다. 주제테는 그의 시와 1799년에 나온 소설 〈히페리온〉 제2권에서 '디오티마'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그녀는 고대 그리스 정신의 화신을 의미했다. 그들의 행복은 짧았고 주제테의 남편과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은 다음, 횔덜린은 1798년 9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야 했다. 육체적·정신적 동요 속에서도 그는 〈히페리온〉 제2권을 완성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이라는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 첫번째 원고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2번째 단편과 3번째 원고도 아직 남아 있다. 이즈음 그에게 아주 민감한 신경증 징후들이 나타나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럼에도 1798~1801년은 맹렬한 창조력이 발휘된 시기였다. 많은 고귀한 송시(頌詩) 이외에도 위대한 비가 〈디오티마에 대한 메논의 비탄 Menons Klagen um Diotima〉·〈빵과 포도주 Brot und Wein〉가 씌어졌다. 1801년 1월 하우프트빌에서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지만 주인의 사정이 바뀌어 결국 횔덜린은 같은 해 4월 집으로 돌아갔다. 실러의 영향력으로 예나대학교에서 그리스 문학 강사 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한 다음, 그는 다시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가정교사 자리를 얻었다. 1802년 6월 주제테 곤타르트가 죽고, 같은 해 여름 횔덜린은 갑자기 보르도를 떠나 걸어서 프랑스를 통과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그가 뉘르팅겐에 도착했을 때는 돈 한푼 없고 정신도 혼란스러웠다. 정신분열증이 더욱 심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서 친절하고 부드러운 간호를 받은 결과 다소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평화의 축제 Friedensfeier〉·〈유일자 Der Einzige〉·〈파트모스 Patmos〉 같은 1802~06년의 시들은 미치기 직전의 정신에서 쓴 작품들로 비할 데 없이 장엄한 묵시록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Antigone〉·〈오이디푸스 왕 Oedipus Tyrannus〉을 운문으로 완역하여 1804년에 출판했다. 같은 해에 헌신적인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를 위해 헤센홈부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사서라는 한직(閑職)을 얻어주었다. 싱클레어 자신도 온당한 급료를 주었으며 그의 보살핌과 동료애 속에서 횔덜린의 정신상태는 현저하게 좋아졌다. 횔덜린이 정신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던 싱클레어는 1805년 반체제활동을 했다고 무고를 당해 5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 횔덜린의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고 튀빙겐의 병원에서 한차례 발작을 일으킨 다음에는 어떤 목수의 집으로 옮겨졌으며, 정신착란의 그늘 아래 이후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거기서 죽었다. 횔덜린은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기 2년 전에 〈고향 Die Heimat〉이라는 송시의 결말부에서 자신의 운명을 요약했다. "하늘의 불을 우리에게 빌려준 저 신들은 성스러운 슬픔도 같이 주었다네/두어라. 지상의 아들인 나, 사랑하고 고통받도록 태어난 듯하구나."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이다. 격렬한 열정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 첫눈에 반했다가 미쳐 버린 사랑    횔덜린과 주제테 부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독일의 서정시인이자 소설가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생애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연극의 제1막은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나서 성직자의 길을 가야 했던 그가 사제 서품을 받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대학 시절에 그리스 신화를 성경만큼이나 열심히 읽은 그는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할 꿈을 가진 시인 지망생이었다. 그는 시인이 되고픈 꿈 때문에 성직을 포기하고 당대 최고의 시인 실러의 소개로 가정교사를 시작한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두번째로 들어가게 된 집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야콥 곤타르트의 집이었다. 그의 운명은 이 집에 들어간 첫날 뒤바뀐다.  “어서 오십시오. 아내하고 아이가 조바심을 내며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소. 소개해 주신 에벨 박사님은 선생님 칭찬에 정신이 없더군요.” 이렇게 인사말을 한 주인 곤타르트는 곧바로 아내 주제테와 딸 앙리를 소개한다. 횔덜린보다 한 살이 많은 주제테 부인은 그때 결혼 10년째로, 이미 네 아이의 어머니였음에도 젊음과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던가 보다. 횔덜린은 부인의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는다. 흔히 하는 말로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부인은 그 시대의 유명한 조각가 온마하트가 흉상을 만든 데서도 알 수 있듯 대단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신비스런 우아함, 예의바른 행동, 타고난 소박함 등 매력적인 요소를 두루 갖고 있어 횔덜린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부인은 그의 시 속에, 특히 불후의 명작 소설 에 디오티마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그려지는데, 고대 그리스 정신의 화신이었다.  한 집에서 날마다 부인을 본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약간의 실수로도 구설수에 오를 수 있었고, 바로 실직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횔덜린의 활화산과 같은 연정을 부인은 곧바로 눈치채게 되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편과 젊고 잘생긴 시인 사이에서 주제테 부인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비극의 제2막은 부인이 횔덜린의 사랑을 받아들인 데서 시작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이었다. 눈인사, 목례, 독서 토론, 산책, 티 타임…. 횔덜린은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부인과의 관계를 '이 비참한 시대에 나눈 영원하고 행복하고 성스러운 우정'이라고 했지만 그 이상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어느 날 부인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횔덜린에게 몇 가지 충고를 한다. 앞으로는 남들 앞에서 다정하게 불러선 안 되며, 뚫어지게 쳐다봐서도 안 되고, 손을 잡아선 절대로 안 된다고….  이런 식의 가슴 졸이는 사랑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의 행복은 2년 반을 넘기고는 끝나고 만다. 소문은 온 도시에 퍼졌고, 결국 곤타르트도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횔덜린에게 모욕을 준 뒤 집에서 쫓아내 버린다. 여기서 2막이 끝나는데, 진정한 비극은 아직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아주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였던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를 타의에 의해 떠난 이후 신경쇠약이 심해진다. 2년 정도 부인과 편지를 주고받지만 그것은 고통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부인을 생각하며 미칠 듯한 심정으로 쓴 시는 그대로 독일문학의 주옥편이 된다.  횔덜린은 부인과 헤어진 지 불과 4년 뒤에 친구의 편지를 통해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녀는 어처구니없게도 아이들도 걸렸다가 나은 풍진에 걸린 지 열흘 만에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친구 요한나의 집에 의탁하던 횔덜린은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친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가슴을 친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치고 의자를 집어 들어 벽을 치더니 급기야 대야, 양동이, 발판 따위의 집기를 창 밖으로 내던지며 발광한다.  제4막은 36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1806년에 정신이상자가 된 횔덜린은 무려 36년을 병원과 요양원에서 그 상태로 살다가 죽는다. 주제테 부인과의 만남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런 식으로 생의 나락에 떨어져 살다 갔을까?  /필자 : 이승하 시인  출처 : 월간《좋은생각》      삶의 절반 /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담백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빵과 포도주] 박설호 옮김, 민음사, 1997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횔덜린이 생전에 쓴 시 ‘운명’의 일부분인 이 시구는 횔덜린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이 짧은 시구는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횔덜린의 일생을 요약적으로 보여 준다. 시인이라는 소명을 투철하게 살다 간 시인 횔덜린. 젊은 시절 횔덜린의 둘레를 둘러싼 것은 고독과 좌절이었고, 반생(半生)을 산 이후 횔덜린을 포박한 것은 정신 질환이었다. 1770년 네카어 강변의 라우펜(Lauffen)에서 출생한 그는 1806년부터 정신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그를 최후까지 돌본 이는 횔덜린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튀빙겐의 목수 에른스트 치머(Ernst Zimmer)였다. 횔덜린은 1843년 타계할 때까지 반구형의 옥탑방에서 치머 일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유폐 생활을 하면서도, 의식장애의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 시간관념을 잃고 지내면서도 방문객들에게 짧은 시를 지어 헌정하는 등 시인의 직업을 끝까지 천직으로 알고 시의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이야말로 "시인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다. 횔덜린이 보여 준 시 쓰기에서의 엄밀성(한 평자는 "횔덜린의 시에는 '법칙적 계산'이 깔려 있고, 그에게 시는 공예와 같았으며, 매우 정밀한 구성을 자랑한다."라고 말했다.)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지만 시인의 직분과 소명에 대해 횔덜린만큼 절박하게 고민한 시인은 일찍이 없었다는 찬사라 할 것이다. 가령, 횔덜린이 "나는 모르겠노라.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빵과 포도주’ 제7편)라고 썼을 때 이 질문에는 18세기 말 전제정치하에 놓여 있던 독일의 현실 사회를 매섭게 비판하는 시인의 절규, 그리고 그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인의 사명감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횔덜린은 물신주의와 속물 의식을 내몰고, "축복의 요람" 그리스의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주의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구현하고자 "종종 울면서 분노"했다. 그것은 고귀하고 "다정한 정신"이며, "사악한 혼란의 죄를 다시금 씻어 주"는 "사랑스럽고 해맑은 평화"였다. 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신성(神性)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그의 조국을 향해 부르짖듯이 열렬히 노래했다. "어리석은 아이가 목마를 타고 앉아,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아이를 비웃지 말라,/ 오 너희 선한 사람들이여! 또한 우리들 역시/ 행위는 부족하고, 사고는 풍부하구나!"('독일 사람들에게')라고.       횔덜린이 스케치로 그려낸 자화상(1842)   이 시는 1803년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압도하는 정서는 비감(悲感)이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는 횔덜린이 고결하게 사랑했던 여인,주제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의 죽음이 놓여 있다. 횔덜린은 주제테 곤타르트를 '디오티마(Diotima)'라고 불렀다. '디오티마'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대의 노랫가락이/ 나의 감각을 점점 맑게 씻어 주어/ 내 음울한 꿈들은 달아나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라고 썼다. 이런 대목은 횔덜린이 주제테 곤타르트에게서 그리스적인 아름다움과 이상을 발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에게 "아름다운 태양"이었으며 "찬란한 빛"이었던 이 여인이 이제 지상에 없다. 1연이 사랑의 시간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2연은 실연의 시간, 사지(死地)에 해당한다. 사랑의 화신, 사랑의 여사제의 죽음은 시적 화자에게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연시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는 생성과 소멸,행복과 불행, 지상적 삶과 천상적 삶이 대비되어 있으며, 그 양쪽의 차가운 경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일생의 후반부를 살아가야 할 시적 화자가 천상적인 존재 혹은 신성,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지상적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받으려는 간절한 기도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횔덜린의 작품들은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했다. 그에게 자연은 신화화된 자연이었으며,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대상이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을 향해 "만약 대가가 너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면, /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젊은 시인들에게')라고 권장했으며, "친밀한 정경이여! 복판으로/ 길이 평평하게 꿰뚫어 가고/ 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곳에/ 저녁 바람이 불어오며/ 자연은 간결하게 서 있고/ 산들이 숭고하게 서 있는 곳에/ 나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네"('즐거운 삶')라고 노래했다. 자연의 광휘를 찬탄했으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무한한 전체"로 결합되는 것을 소원한 이가 바로 "시인의 시인" 횔덜린이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3.20~1843.6.7) 1770년 슈바벤의 네카어강변 라우펜(Lauffen am Neckar)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덴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 학교, 마울브론 수도원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작(詩作),헤겔, 셸링등의 학우들과의 교류에 열중하였다. 1789년 시인 슈토이들린, 슈바르트등과 사귀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졸업 후 프리드리히 실러의 소개로 가정교사가 되었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부인 주제테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및 그 밖의 많은 시편에 등장하였다. 3년 후 이별을 하고 함부르크, 고향, 슈투트가르트, 보르도 등지를 방랑하였는데, 이 시기 맹렬한 창작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시들이 쓰였다. 1802년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고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디오티마],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귀향], [라인강], [유일자], [파트모스] 등의 걸작이 있다.       /글 문태준  ======================/// 횔덜린 자필 방명록
2074    헝가리 시인 - 브로샤이 댓글:  조회:3714  추천:0  2017-04-18
  출생 1899. 9. 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실바니아 브로쇼 사망 1984. 7. 8, 프랑스 니스 근처 에즈 국적 헝가리 요약 헝가리 태생 프랑스의 시인·화가·조각가·사진가. (프). Jules Halasz. 본명은 Gyula Halsz.   주로 파리의 밤풍경을 극적으로 나타낸 사진들로 알려져 있다. 예명인 브로샤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예술가로서 교육을 받고 1924년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조각가·화가·언론인으로 일했으며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작가 헨리 밀러와 같은 예술가들과 교분을 나눴다. 그당시에는 사진을 무시했으나 기자업무에 사진기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사진의 독특한 미적 특질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초기 사진은 당시 예술가와 범죄자들의 지역으로 유명하던 파리 몽파르나스의 밤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플라스 피갈 바의 보석 'Bijoux' in Place Pigalle Bar〉·〈매춘부 Streetwalker〉 같은 사진이 실린 〈파리의 밤 Paris de nuit〉이라는 사진집이 1933년에 출판되어 곧바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2명의 아파치 단원 Two Apaches〉과 같은 강렬한 작품을 싣고 있는 〈파리의 즐거움 Voluptés de Paris〉(1935)이 이어 출판되자 곧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그는 프랑스령 리비에라로 피신했으나, 파리에 숨겨두었던 음화들이 습기로 상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점령기간에는 거리에서 자유로이 사진 찍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림과 조각을 다시 시작했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의 그림은 프랑스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시와 함께 〈30개의 소묘 Trente dessins〉(1946)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1945년 사진작가로서 다시 일을 시작했고, 1947년 어슴프레한 파리 거리를 찍은 사진들을 크게 확대하여 프레베르의 〈만남 Le Rendez-vous〉이라는 발레의 배경막으로 사용했다. 초기작품의 주제와 기술들이 전후 그의 많은 작품에도 계속 나타난다. 그러나 〈모나코의 이국적인 정원 Exotic Garden in Monaco〉(1946)·〈리비에라의 하얀 우산 White Umbrella on the Riviera〉(1948)과 같은 사진들은 형태와 공간에 대한 한결 높아진 의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기록사진작가들과는 달리 브로샤이는 그의 사진집 〈축제 중의 세비야 Seville en fête〉(1954)에 실린 〈세비야의 신성한 주일 Holy Week, Seville〉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활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대상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낙서처럼 가장 무생물적인 대상에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느낌을 불어넣기도 했다. 1976년에 〈비밀, 30년대의 파리 The Secret Paris of the 30's〉가, 1982년에 유명한 예술가들, 예술품 판매상들, 친구들의 초상화를 사진과 글로 표현한 〈내 인생의 예술가들 Artists of My Life〉이 출판되었다.
2073    프랑스 시인 - 자끄 프레베르 댓글:  조회:4016  추천:0  2017-04-18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자끄 프레베르     우선 문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간단한 것을 뭔가 유용한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새장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 놓을 것 아무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려서 오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무관한 것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싱싱한 바람과 햇빛 또한 그릴 것 그리고는 새가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이 잘못된 것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싸인해도 좋다는 것 그러거든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라.     절망은 벤치 위에 앉아 있다   네모진 곳 안의 벤치 위에 한 사내가 앉아 지나가는 당신을 부른다 코안경을 쓰고 낡은 회색 옷을 입고 조그마한 담배를 피우며 그는 앉아 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이 지나갈 때 당신을 부른다 아니면 단지 손짓을 한다 당신은 그를 쳐다봐선 안 된다 당신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선 안 된다 당신은 마치 그를 못 본 양 마치 그의 말을 못 들은 양 지나가야 한다 당신은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가야 한다 당신이 그를 보면 당신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는 당신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당신이 그 사람 곁에 가서 앉는 것을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당신을 보고 웃는다 그리고 당신은 쓰디쓴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계속 웃는다 그리고 당신은 같은 웃음을 웃는다 똑같은 웃음을 당신은 웃을수록 더 쓴 고통을 느낀다 쓰디쓴 고통이 클수록 당신은 더 웃는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그 곳에 당신은 붙박이마냥 머문다 벤치 위에서 웃으며 아이들이 당신 가까이 놀고 있다 행인들은 지나간다 조용히 새들은 머물던 나무를 떠나  다른 나무로 날아들 가지만 당신은 그 자리  그 벤치에 머무른다 그리고 당신은 깨닫는다 깨닫는다 더 이상 당신은 이 아이들처럼 놀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깨닫는다 더 이상 이 행인들처럼 조용히 지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더 이상 새들처럼  살던 나무를 떠나 다른 나무로 날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크 프레베르 Jacques Prevert   자끄 프레베르--->>>  사회에 대한 희망과 감상적인 사랑에 관한 발라드를 주로 썼다. 또한 특히 1930, 1940년대에는 당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5~29년에 초현실주의 작가 로베르 데스노스, 이브 탕기,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 등과 활동을 같이하면서 오랜 전통의 구전시를 초현실주의 풍의 '노래시'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서 매우 큰 인기를 얻었다. 〈말 Paroles〉(1945)에 수록된 작품들 중 여러 편은 조제프 코스마에 의해 곡이 붙여짐으로써, 젊은 청중들로부터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그의 작품 중 고엽〈Les Feuilles mortes〉은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젊은이들은 프레베르의 반교회적·무정부적·우상파괴적 어조와 유머를 좋아했다.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 전쟁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한편, 거리와 지하철을 메운 연인들과 소박한 마음,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노래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프랑스 파리에서의 가면 만찬회 묘사의 시도 Tentative de description d'un dîner de têtes à Paris-France〉(1931)이다. 그는 독자를 스스럼없이 사로잡는 소박한 묘사에 능했으며, 자유시, 불규칙한 시행, 간혹 사용되는 각운, 말장난, 일부러 무질서하게 늘어놓는 말의 폭포, 열거, 반어 등 여러 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정치적으로 투쟁적인 극작가들을 위해서도 글을 썼으며, 그들과 함께 소련을 방문(1933)한 적도 있다. 우수한 영화 대본도 여러 편 썼는데 그중 가장 뛰어난 것들로는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이상한 이야기 Drôle de drame〉(1937)·〈밤의 방문객들 Les Visiteurs du soir〉(1942)·〈인생유전 Les Enfants du paradis〉(1944) 등이다. 대표 시집으로는 〈이야기들 Histoires〉(1946)·〈정경 Spectacle〉(1951)·〈봄의 대무도회 Grand bal du printemps〉(1951)·〈런던의 매혹 Charmes de Londres〉(1952)·〈이야기들, 그리고 또다른 이야기들 Histoires et d'autres histoires〉(1963)·〈사물, 기타 Choses et autres〉(1972)를 꼽는다     ///////////////////////////===   자끄 프레베르 /     1. 자크 프레베르   ● 프랑스 시인이자 극작가, 화가, 시나리오 작가, 연극연출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예술가. 지금도 파리에서는 자끄 프레베르를 기리는 전시회 등이 열리고 있음.   ● 자끄 프레베르의 프레는 불어로 초원, 베르는 초록을 뜻한다.   이 책 번역 김화영 “그의 시는 이름처럼 서늘하고 아름답고 단순하다.”   1900년 태어나 1977년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실직으로 1년 정도 툴룽으로 이사했던 때를 제외하곤 거의 평생을 파리에서 산 파리 예술가의 대명사격.   ● 15년 만인 1946년 첫 시집 을 냈는데, 출판되자마자 100만 부 이상이 팔림.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처럼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시인.   ● 어린 시절, 가족 모두 영화를 좋아해 먹을 것이 없어도 영화관은 간 가족.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티켓을 두 장만 끊어서 두 아들은 먼저 영화관에 들여보낸 후 나중에 들어감. “아이들이라니?”   ● 파리에서 보낸 어린 시절, 영화관, 고서점의 책들, 연극 등이 그의 큰 자산. 프랑스의 한 시대를 멋지게 만들어낸 시인이며 시나리오 작가.   ● 자끄 프레베르란 이름은 몰라도 그의 시는 우리도 많이 알고 있음. 대표작이 ‘고엽’.   이브 몽땅이 영화 에서 처음 부른 샹송의 대명사.   샹송을 몰라도 고엽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고엽은 삽에 그러담기는데/추억도 후회도 그러담기는데/   그러나 말없고 변함없는 내 사랑은/언제나 웃으며 삶에 감사하네/   내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던가/그대는 그토록 아름다웠지/   내 어찌 그대를 잊어버리리/그때는 지금보다 인생은 더 아름답고/   태양은 더 뜨거웠지/     절망이 벤치에 앉아있다     광장의 벤치 위에/어떤 사람이 앉아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그는 외안경에 낡은 회색옷   엽권련을 피우며 앉아 있다/그를 보면 안 된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그가 보이지 않는 양   그냥 지나쳐야 한다/그가 보이거든/그의 말이 들리거든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쳐야 한다/혹 그가 신호라도 한다면   당신은 그의 곁에 가 앉을 수밖에/그러면 그는 당신을 보고 미소짓고   당신은 참혹한 고통을 받고/그 사람은 계속 웃기만 하고   당신도 똑같이 웃게 되고/웃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혹하고   고통이 더 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당신은 거기 벤치 위에   미소 지으며 꼼짝 못 하고 앉는다   곁에는 아이들이 놀고/행인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날아가고   당신은 벤치 위에/가만히 앉아이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이제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이제 다시는 조용히 /이 행인들처럼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이 새들처럼/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나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 이 시는 특히 이 겨울과 어울리는 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   ● 쉬운 시 : 시가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된다고 해서 그 시가 쉽게 씌어진 것은 아닐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베르의 시는 쉽다.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있다는 표현 자체는 매우 시적. 그러나 그 내용은 우리 모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시어들. 그러나 너무 일상적인 언어로 씌어 있어서 실제 번역할 때는 매우 힘들었다고 함.   ● 은희경의 대표작 도 자끄 프레베르의 시에서 따온 것이며, 실제 작품 맨 앞에 전문 나와 있음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은희경은 글을 다 쓴 후 책 제목을 지었다 함.   은희경의 설명 : 해가 자기를 사모하고 흠모하는 해바라기씨를 거부하고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작품 에서 설정했던 1969년 소읍 마을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 이미지를 따왔다. 그러나 책의 내용과 동떨어진 제목이어서 제목고 내용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책 속에 시를 인용했으나 잘 안 됐다.   그런데 솔직히 이 시는 자끄 프레베르의 시 치고는 어려운 편.   그러나 대부분 그의 시는 쉽다.     4. 사랑에 대한 시들   ‘고엽’이 대표적.   ‘너를 위해 내 사랑아’ 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새를 사고, 꽃을 사고, 쇠사슬을 사봤지만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찾지 못한다는 시. ‘아침식사’라는 시는 매일 바라본 사랑이 떠나간 이야기.     아침 식사     그이는 잔에/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우유 탄 커피에/설탕을 탔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커피를 저었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그이는 담배에/불을 붙였지   그이는 연기로/동그라미를 만들었지   그이는 재떨이에/재를 떨었지   내겐 아무 말 없이/나는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그이는 머리에/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빗속으로 가버렸지/말 한 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그래 나는 두 손에/얼굴을 묻고/울어버렸지.     ● 순수성. 그리고 어린이, 약자, 열등생, 밑바닥 인생, 상처받은 사람 등의 시각으로, 따뜻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하지 않을까. 그들을 위한 일상적인 노래를 한 것   강자, 거만한 자, 위선자 들에 대해서 그의 시에서는 ‘그들’이라고 표현하고 신랄하게 풍자.   예를 들면 ‘열등생’이란 시에서 ‘그가 사랑하는 것에게 그렇다고 말하고/선생님에게는 아니라고 말한다’.     ● ‘하나님 아버지’란 시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거기 그냥 계시옵소서/그러면 우리도 땅 위에 남아 있으리다/땅은 때대로 이토록 아름다우니’     ● ‘안 됩니다’라는 시의 한 구절 ‘지식인이 불장난하고 놀게 두면 안 됩니다/왜냐하면 여러분 그를 혼자 두면/정신적 세계는 여러분/조금도 좋아지지 않으니까요/딴에는 인심 좋게/집짓는 일꾼들을 기린답시고/제자신의 기념비를 세운답니다/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그를 혼자 두면/정신적 세계는 기념비적으로/거짓이 됩니다/’     시인은, 예술가는 게오르규가 말한 것처럼 잠수함의 토끼. 잠수함 속에   서 토끼를 기르는 것은 토끼가 인간보다 산소부족을 더 민감하게 반응   하기 때문. 산소가 부족한 토끼가 발광을 할 때야 넋 놓고 지내던 잠수함   의 선원들은 잠수함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즉, 당대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시나 예술작품을 단순한 심미적 차원이 아닌, 우리 시대   를 살아가기 위해 감상하고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2072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 루이 아라공 댓글:  조회:5247  추천:0  2017-04-18
출생 1897. 10. 3, 프랑스 파리 사망 1982. 12. 24,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시인·소설가·평론가.   공산주의를 대변한 정치행동가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소개로 다다이즘 운동에 합류한 아라공은 필리프 수포 등과 함께 초현실주의 평론지 〈리테라튀르 Littérature〉(1919)를 창간했다. 아라공은 〈환희의 불길 Feu de joie〉(1920)·〈영원한 운동 Mouvement perpétuel〉(1925) 등 초기에 시를 발표한 데 이어, 〈파리의 농부 Le Paysan de Paris〉(1926)라는 장편소설을 썼다. 이데올로기를 추구한 끝에 1927년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그후로 그는 공산당의 문학과 예술적 표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와 공산당을 항상 연관시키게 되었다. 1928년에 그는 러시아 태생의 엘자 트리올레트(러시아 태생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처제)를 만나 결혼했고, 아내로부터 끊임없는 영감을 얻었다(엘자는 1970년에 죽었음). 1930년에 그는 소련을 방문했고, 1933년에는 그의 정치참여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전4권으로 이루어진 연작 장편소설 〈현실세계 Le Monde réel〉(1933~44)에서는 사회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역사적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전6권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장편소설 〈공산주의자들 Les Communistes〉(1949~51)에서도 전통적인 사회적 사실주의를 계속 고수했는데, 이 소설은 1939~40년에 걸친 공산당의 황량한 연대기이다. 그후에 쓴 소설 〈성스러운 주일 La Semaine sainte〉(1958)·〈임종 La Mise à Mort〉(1965)·〈흰색 또는 망각 Blanche ou l'oubli〉(1967)은 공산당을 위한 변명들로 엮어진 자서전이 되었다. 이 소설들은 당시의 새로운 소설기법을 반영하고 있다. 〈단장(斷章) Le Crève-Coeur〉(1941)·〈프랑스의 기상나팔 Diane franaise〉(1945)에 실린 시들은 아라공의 열렬한 애국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엘자의 눈 Les Yeux d'Elsa〉(1942)·〈엘자만의 파리 Il n'est Paris que d'Elsa〉(1964)에 실린 시들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아내의 얼굴에서 프랑스의 얼굴을 보았다. 1953~72년에 아라공은 공산당에서 매주 발간하는 예술·문학 잡지인 〈레트르 프랑세즈 Les Lettres Franaises〉를 편집했다. 71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전투적이었던 아라공은 1968년 파리 시내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거리시위에 동참했다. 그는 1981년에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Daum백과] 아라공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루이 아라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루이 아라공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은 프랑스의 시인·작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운동을 하였고, 1930년에는 국제 혁명 작가 대회에 참석하였다가 초현실주의와 갈라졌다. 1934년 시집 와 연작 의 첫권을 냈고, 반파시즘 운동에 참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 남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문화 운동을 지도하였다. 또 전국 지식인 동맹 서기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평론집 등이 있다. ====================////===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노래 - 루이 아라공 대낮 빛깔의 대성당 독일병들의 포로가 된 너는 지치지 않고 헤아리고 있구나 계절들 달들 순간들을 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이여 그들은 떠났다 배낭에 담은 것 네 장미창들과 알자스 위를 나르는 황새들의 추억을 데리고 이제 제법 시간이 흘렀다 가르침이란 희망을 말하는 것 연구란 충심을 말하는 것 그들은 역경 속에서 그들의 대학을 다시 열었다 프랑스의 한복판 클레르몽에서 오랜 드높은 지식의 주인 판관들의 눈 앞에 선 청년인 그대들은 피난처에서 스트라스부르가 제 식구들을 다시 만날 대홍수의 다음 날들을 준비한다 긴 인내인 앎 헌데 어찌 해 여기서 모든 게 입을 다물었나 나찌들이 들어와 살육을 한다 힘이 그들의 유일한 덕목이고 죽음이 그들의 유일한 앎이다 그들은 무쇠의 주먹으로 우리네 화로의 재마저도 날려 버린다 그들은 마구 총을 갈긴다 보라 의자 위에 널부러진 저 몸뚱이를 무얼 해야 하는가 친구들이여 무얼 해야 하는가 죄 없는 영아들의 학살 헤롯이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은 성모의 아기 하나가 두려웠기 때문 아닌가 그 아이는 그대들 가운데 태어나 아름다운 핏빛에 놀란다 쓰러진 스트라스부르의 아들들은 헛되이 사라진 게 아니다 조국의 길 위에 그들의 붉은 피가 다시 꽃을 피우고 거기 새로운 클레베르로 일어선다면 지금 이 시간 클레베르는 백 명도 있고 천 명도 있다 전사들 민간인들 우리네 산들과 우리네 도시들에  의용병들과 빨치산들 스트라스부르에 우리 함께 가리라 스물 다섯 해 전과 마찬가지로 승리는 우리 진영에 있으니 그대들을 말하는가 스트라스부르에 그런데 언제죠 바라보라 떨고 있는 프러시아인들을 스트라스부르에 프라하에 오슬로에 있는 순교자의 세 대학이여 그들을 바라보라 그들이 총을 쏠 때에 그들이 물러날 것임을 패배가 그들의 몫임을 진작 알고서 그들을 바라보라 어떻게 그들의 힘이 빠지고 그들의 운명을 의식하는지 망나니들이 사형수들이 되었나니 올해 우리는 그들을 몰아내리라 그들의 전차와 그들의 음모를 뚫고 무기를 들어라 무장을 해제당했던 영웅들아 스트라스부르 프랑스 세계를 위해 저 깊은 목소리를 들어라 철십자의 암살자들이 죽어 나가게끔 으르렁대고 으르렁대고 으르렁대는 대낮 빛깔의 대성당 독일인들의 포로가 된 너는 지치지 않고 헤아리고 있구나 계절들 달들 순간들을 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이여 -----------------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신영복 선생이 평소 강연이나 휘호에서 잘 인용하시던 구절입니다. 이것이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대개 압니다. 그러나 그 시의 전문을 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전에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한 친구가 고맙게도 이 시를 번역해준 적이 있습니다. 이 시의 전문을 보고서 그 맥락이 사뭇 예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나치의 살륙전이 자행된 스트라스부르의 젊은이들을 향해 감연히 총을 들고 대항하라는 격문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물론 상당한 감동이 있습니다. 신 선생이 인용하시던 구절은 세번째 연에 나옵니다. 대학의 핵심이자 젊은이들의 행동의 토대를 설파하는 대목입니다. 신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그 시의 전문을 여기 내겁니다.(Changhee Kim)     엘사의 눈 / 루이 아라공      너의 눈은 한없이 깊은 심연(深淵), 내가 마시려 몸을 굽 히면 이 세상 모든 태양들이 그 속에 와 비추고 모든 절망한 사람들이 죽기 위해 그 속에 몸을 던지는 것 을 나는 보았다 너의 눈은 한없이 깊어 나는 거기서 기억을 상실한다   네 눈은 새들 그림자에 거칠어진 대양(大洋) 짐짓 날씨가 개면 네 눈도 변한다 여름은 천사들의 앞치마를 잘라 구름을 만들고 밀밭 위에 보이는 하늘만큼 푸른 것은 또 없다   바람이 불어 창공 위의 슬픔들을 날려 버려도 소용 없어 눈물로 빛날 때 네 눈은 창공보다 더 맑아 비 내린 뒤의 하늘도 네 눈을 시새운다 깨진 유리의 틈살보다 더 푸른 빛은 없다   칠고(七苦)의 어머니, 아, 젖은 빛이여 일곱 개의 검(劍)이 오색의 프리즘을 꿰뚫었다. 눈물 속에 돋는 해는 더욱 감동적이며 검은 점이 박힌 홍채(紅彩)는 상복(喪服)을 입어 더욱 푸 르다   네 눈은 불행 속에 이중(二重)의 돌파구를 열고 이를 통하여 동방 박사의 기적이 또 다시 일어난다 세 박사가 모두 뛰는 가슴 누르고 말 구유에 걸린 성모 마리아의 망토를 보았을 때의 그 기적이   5월에 이 세상 모든 노래, 모든 탄식을 부르기 위한 말에 단 하나의 입이면 족하다 수백 만의 별을 담기엔 너무나 좁은 창공 성신(星辰)들에게는 너의 눈이 그리고 저들의 숨은 쌍동이 별이 필요했다   아름다운 그림에 도취한 어린애의 벌어진 눈도 너의 눈보다는 크지 못해 나는 네가 큰 눈을 뜰 때 혹시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 차라리 소나기가 야생의 꽃을 벌린다 하리라   네 눈은 벌레들이 격렬한 사랑을 벌이는 이 라벤더 꽃 그 속엔 번갯불이 숨어 있는가 나는 많은 유성(流星)의 그물에 걸렸다. 8월의 한중턱 바다에서 죽는 한 수부(水夫)처럼   나는 우라늄 광석에서 이 라디움을 뽑아 냈다 나는 이 금단(禁斷)의 불에 손가락을 태웠다 아, 백 번도 넘게 찾았다 되잃은 낙원이여 네 눈은 나의 페루(Perou)나의 골콩드(Golconde) 나의 인도 제국(帝國)   어느 날 저녁 세계는 해적(海賊)들이 불태운 암초에 걸려 깨졌다. 그러나 나는 바다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엘사의 눈 엘사의 눈 엘사의 눈   *아라공에 있어서 그의 부인이 된 '엘사 트리올레'와의 만남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남과 같이 그의 생에 일대 전기(轉機)를 가져다주었다.  엘라 트리올레는 러시아 여자로 소련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처제였으며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1928년 11월 4일 아라공은 이 여성을 몽파르나스의 기차 정거장 같이 넓은 카페 쿠폴에서 마야코프스키와 함께 처음 만났다. 그 다음 날 아라공은 같은 장소에서 엘사와 단 둘이서 만났으며 그 후 두 사람은 엘사가 1970년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엘사는 아라공의 문학의 원천이었으며 그의 시의 존재 이유였으며 그의 정신적인 이상이었다.  사실 엘사를 만나기 2 개월 전만 하더라도 아라공은 허무주의에 빠져 베니스에서 자살하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언제나 나의 고뇌의 교향악을 가지고 다녔다. 런던의 태양은 안개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파리의 마로니에는 얼마 안 되어 누래졌다. 나는 베니스에서 죽고자 한다.   이 때 엘사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도움으로 또한 그녀를 위하여 그는 다시 살고 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엘사에 대한 그의 사랑과 경애와 감격은 엘사가 죽은 뒤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그의 시 가운데는 엘사에 주는 노래, 가요, 송가 등이 수없이 많은데 "엘사의 눈"(이는 그의 두번 째 시집의 이름이기도 하다)은 그 중의 하나로 아라공의 엘사에 대한 사랑과 경이(驚異)를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이다.     (19)40년의 리처드 2세 / 루이 아라공   나의 조국은 사공들이 버리고 간 거룻배처럼 처량하며 나는 불행보다 더 불행해져 자기 슬픔의 왕으로 남아 있던 저 임금 같아   산다는 건 한낱 책략일 뿐 바람도 흐르는 눈물 말릴 줄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미워해야 하며 이미 내게 없는 것도 그들에게 내주어라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심장은 뛰지 않을지 모르며 핏줄에는 찬 피가 흐를지 모른다 도적들의 놀음놀이에서는 이미 2 더하기 2는 4가 아니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해가 죽으나 다시 사나 하늘은 그 빛을 잃었다 나의 젊은 시절의 다정한 파리여 케-오-플뢰르의 봄이여 안녕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숲과 연못들을 멀리하라 조잘대는 새들이여 입을 다물라 너희들의 노래는 격리(隔離) 당했다 새잡이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고난의 시대가 있는 법이니 이럴 때에 쟌느가 보쿨뢰르에 왔다 아 프랑스를 난도질하라 그 날도 이렇게 창백한 날이었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   *"리처드 2세"는 아라공이 1940년 9월에 쓴 단시이다. 1940년 프랑스 군이 허망하게 패배하고 독일군이 파리 시를 점령한 지 불과 2 개월, 잇단 충격으로 비탄에 빠진 아라공은 프랑스와 파리를 잃은 절망감과 슬픔을 리처드 2세의 고통과 불행에 견주고 있다. 리처드 2세는 14세기 영국에 실제 있었던 비운의 왕이나 아라공은 세익스피어의 동명(同名)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매 시절(詩節) 끝에 있는 후렴,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은 직접 세익스피어 희곡 제 4막 제 1장에서 옮긴 것이다. 이 장면에서 리처드 왕은 탄식한다. "그대는 나의 영광과 나라를 없앨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없앨 수 없다. 나는 변치 않고 나의 슬픔의 왕이로다" 또 독일군의 점령 아래 갇혀 살게 된 프랑스의 비참한 모습을 역시 국민과 신하들의 배신을 당하여 프린트 성 가운데 유폐된 리처드 2세의 신세에 비한 것이다.  아라공은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아이러니칼한 필치로 나치 지배하의 절망적인 생활 단면을 그리고 있다. 새잡이꾼의 통치와 도적들의 '놀이'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자연도 피해야 하며 새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라공은 최후의 기적을 믿는다. 그는 마지막 시절(詩節)에서 한 줄기 희망을 건다. 프랑스를 구원한 오를레앙의처녀 쟌느 다르크가 보쿨뢰르에 나타났던 것도 프랑스가 가장 비참한 때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바로 그런 슬픈 때이다.   루이 아라공(1897~1982): 1897년에서부터 20세기 거의 전부를 살아오면서 60여 년의 작품 생활과 시-소설-에세이-예술 비펑-정치 논설 등 근 80권에 이르는 작품을 남긴 그의 일생은 학실히 현대의 위대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라공이 그의 정수(精髓)를 보이고 후세에 그의 이름을 길이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 특히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에게 패배한 프랑스의 슬픔과 분노와 저항을 나타낸 시들과 또한 그의 아내이며 영원한 여성인 엘사(Elsa)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통하여 그의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자유와 희망을 노래한 10여 권의 시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라공은 실은 의학도였으나 청년 시절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가담하여 핵심적 인물로 활약했고 이를 계기로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에 쓴 시를 모든 시집으로 과 이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현실적이며 전투적이었던 그는 환상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초현실주의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차츰 이와 결별한다. 1017년 발발한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여파는 유럽에도 강하게 몰아쳐 아라공은 1927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고민의 돌파구에 지나지 않을 뿐 모든 것에 허무를 느끼고 생의 방향을 잃은 그는 한때 자살까지 기도하였다. 이 암담한 시기에 만난 것이 러시아 여인 엘사 트리올레였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결합되었는데 이후 엘사는 그의 생활과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라공이 시인으로서 특히 프랑스의 민중 시인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나타낸 것은 1940년을 전기로 한 그의 상황시(狀況詩)와 사랑의 시에서였다. 1940년 5월 그의 조국 프랑스는 썩은 집같이 무너졌다. 이 허망과 절망 속에서 그는 패배하고 점령당하고 자유를 잃은 프랑스의 설움과 분노와 희망을 노래로 부른 것이다. 아라공은 이 전쟁과 전후를 통하여 문필로써 항독(抗獨) 운동을 전개하며 "단장(斷腸)의 아픔(1941)>, , ,
2071    프랑스 시인 - 레미 드 구르몽 댓글:  조회:5145  추천:0  2017-04-18
레미 드 구르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미 드 구르몽(프랑스어: Remy de Gourmont, 1858년 4월 4일 ~ 1915년 9월 27일)은 프랑스의 시인·소설가·문학 평론가이다. 상징파의 잡지 〈메르키르 드 프랑스〉를 창간하였으며, 비평과 미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노르망디의 명문 출신이다. 26세 때 결핵의 일종인낭창에 걸려 얼굴이 추해지자, 문 밖 출입을 하지 않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상징주의의 이론가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입장에서 세련된 취미와 학식을 가지고 시·소설·평론을 썼다. 그의 대표적인 상징시인 〈낙엽〉은 전 세계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설로는 《룩셈부르크의 하룻밤》, 평론집으로 《프랑스어의 미학》, 《문학 산책》등이 있다. ///////////////////===========/////////////////   출생 프랑스 바조슈 앙울므, 1858. 4. 4 사망 1915. 9. 27,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기의 지성적인 비평가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상징주의 미학의 원리를 널리 퍼뜨렸다. 그는 모든 진실은 상대성을 갖는다고 생각했으며 평론가로서의 장점은 순전히 미학적인 기준에 따라 문학평론을 쓴다는 점이었다.  캉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1881년에 국립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어 폭넓은 교양과 학식을 쌓았다. 그러나 1891년 라는 잡지에 비애국적인 기사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가 남긴 50권의 저서는 주로 수필집인데 그 내용은 18세기의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비교될 만큼 광범위하고 논조도 비슷하다. 그의 저서는 ①당시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시사해설인 (1903~13), ②문학과 철학에 대한 수필인 (1904~27)과 (1905~09), ③문체와 언어, 미학에 대한 연구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기의 매우 지성적인 비평가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상징주의 미학의 원리를 널리 퍼뜨렸다. 캉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1881년에 국립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어 폭넓은 교양과 학식을 쌓았다. 그러나 1891년에 〈메르퀴르 드 프랑스 Mercure de France〉라는 잡지에 비애국적인 기사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가 남긴 50권의 저서는 주로 수필집인데 그 내용은 18세기의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비교될 만큼 광범위하고 논조도 비슷하다. 그의 저서는 ① 당시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시사해설인 〈에필로그 Epilogues〉(1903~13), ② 문학과 철학에 대한 수필인 〈문학산책 Promenades littéraires〉(1904~27)과 〈철학산책 Promenades philosophiques〉(1905~09), ③ 문체·언어·미학에 대한 연구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구르몽은 모든 진실은 상대성을 갖는다고 생각했으며 평론가로서의 장점은 순전히 미학적인 기준에 따라 문학평론을 쓴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20세기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식스틴:정신적 삶의 이야기 Sixtine:Roman de la vie cérébrale〉(1890)와 〈디오메데스의 말들 Les Chevaux de Dioméde〉(1897)·〈한 여인의 꿈 Le Songe d’une femme〉(1899)·〈순결한 마음 Un Coeur virginal〉(1907)을 비롯한 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을 실제 인간보다 지나치게 지성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동생인 장 드 구르몽(1877~1928)도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기고했으며, 몇 편의 시와 〈황금양털 La Toison d’or〉(1908)이라는 소설 1편을 남겼다. =========================         낙엽 [落葉] / 레미 드 구르몽  프랑스의 소설가·시인·극작가·문예평론가인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시.  원어명 La Feuille 저자 ; 레미 드 구르몽. 장르 ; 시 ; 1892년   낙엽 [落葉]    레미 드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1892년 간행된 레미 드 구르몽의 시집 《시몬 La Simone》 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레미 드 구르몽이 34세 때에 출판한 것으로, 작가 특유의 독특한 감각과 상상으로 부조된 '시몬'이란 여성에 대한 깊고 강렬한 애정이 담긴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의 형식은 내재율을 지닌 자유시이며, 지성과 관능이 미묘하게 융합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낭만적 서정시이다.   가을 낙엽을 시의 제재로 삼아 인생에 대한 단상을 상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시의 첫구절에서 청유형 어미를 활용해 상징적인 여성인 '시몬'에게 가을숲으로 가자고 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표현을 후렴구처럼 반복 사용함으로써, 시에 전체적인 통일성과 음악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묘한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기법은 '시몬'이라는 여성에 대한 작가의 간절한 동경을 더욱 심화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 시는 1889년 문예지《메르퀴르 드 프랑스 Mercure de France》를 창간해 상징주의를 옹호하는 비평과 미학이론을 발표해 뛰어난 업적을 남긴 레미 드 구르몽의 대표적인 상징시로 오늘날에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애송된다.     Les feuilles mortes Remy de Gourmont     Simone, allons au bois : les feuilles sont tombées ; Elles recouvrent la mousse, les pierres et les sentiers.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Elles ont des couleurs si douces, des tons si graves, Elles sont sur la terre de si frêles épaves !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Elles ont l'air si dolent à l'heure du crépuscule, Elles crient si tendrement, quand le vent les bouscule !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Quand le pied les écrase, elles pleurent comme des âmes, Elles font un bruit d'ailes ou de robes de femme :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Viens : nous serons un jour de pauvres feuilles mortes. Viens : déjà la nuit tombe et le vent nous emporte.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레미 드 구르몽[Gourmont, Remy de] (1958 ~ 1915) 노르망디 오른(Orne) 출생. 프랑스의 문예평론가·시인·소설가. 문예지《메르퀴르 드 프랑스 Mercure de France》에 평론을 발표. 1884년 파리로 가서 파리 국립도서관의 사서(司書)가 되었으나 33세 때 필화(筆禍)로 면직당함. 저서:『가면집(假面集) Livres des masques』(1896∼1898), 『관념도야(觀念陶冶)』(1900), 『문학적 산보 Promenades 1itt?raires』(1904∼1913), 『철학적 산보 Promenades philosophiques』(1905∼1910) 등이 있음.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아름다운 사상은 아름다운 글에 있다고 주장.   [Daum백과] 구르몽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70    영국 계관시인 - 테니슨 댓글:  조회:4038  추천:0  2017-04-18
  출생 1809. 8. 6, 잉글랜드 링컨셔 서머스비 사망 1892. 10. 6, 서리 알드워스 국적 영국 요약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 계관시인으로, 대표작 을 펴냈다. 아버지의 광범위한 문학교육 덕분에 10대가 되기 전에 포프, 스콧, 밀턴의 문체대로 글을 썼다. 케임브리지 재학시절 라는 시를 발표하여 총장상을 받는 등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 시기 그의 생애에서 가장 깊이있는 교제가 된 아서 핼럼과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1833년 핼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한동안 절망적인 시기를 보냈다. 이 시기 , 의 초판과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시들을 썼다. 1850년 수년에 걸쳐 써오던 핼럼에 대한 애도시들을 담은 대표작 을 출판하여 큰 성공을 얻으며 계관시인으로 추천받았다. 그 후 시집 등을 발표하여 당대 최고 시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목차 개요 초기생애와 작품 주요문학작품 평가 개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초기생애와 작품 테니슨은 오랜 링컨셔 가문에서 12명의 자녀 중 4번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교구목사였다. 그의 두 형인 프레더릭·찰스와 함께 테니슨은 1815년 라우스 그래머 스쿨에 입학했지만 그 학교를 좋아하지 않아 1820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정형편이 어려웠으나 그에게 광범위한 문학교육을 시켰다. 테니슨은 조숙해서 10대가 되기 전에 포프·스콧·밀턴의 문체대로 글을 썼다. 1930년에 사후출간된 미발간 시집 〈악마와 숙녀 The Devil and the Lady〉는 젊은시절의 작품으로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적 운문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을 보여주고 있다. 테니슨은 바이런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아 1824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실의에 빠졌으며 "바이런이 죽었다"고 돌에 새겼다. 한편 같은 해 테니슨의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술마시는 것에서 위안을 구했다. 이런 가정적 불행으로 낙담했으나 테니슨은 계속 프레더릭·찰스와 함께 〈두 형제 시집 Poems by Two Brothers〉(1826, 출판 1827)을 썼다. 1827년 테니슨과 찰스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프레더릭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테니슨은 역사가 헨리 핼럼의 천재적인 아들 아서 핼럼과 사귀게 되었다. 이것은 테니슨의 생애에서 가장 깊이 있는 교제였다. 두 사람은 열렬한 지적 흥미를 가진 학부생 모임인 사도회의 일원이 되었다. 시인으로서 테니슨의 명성은 케임브리지에서 점차 커져갔다. 1829년 〈팀벅투 Timbuctoo〉라는 시로 총장 상을 받았고, 1830년 〈서정시집 Poems, Chiefly Lyrical〉이 출간되었다. 같은 해 테니슨·핼럼과 다른 사도회원 등이 페르디난드 7세에 대항하는 혁명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떠났으나 혁명은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핼럼은 테니슨의 여동생 에밀리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1년 동안 편지 왕래조차 금지했다. 1831년 테니슨의 아버지가 죽었으며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부채를 알아내면서 테니슨은 더욱 비참해졌다. 그는 학위를 받지 못한 채 케임브리지를 떠나야 했고, 그의 할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경제적인 배려를 해주었다. 같은 해에 핼럼은 〈잉글리시맨스 매거진 Englishman's Magazine〉에 〈서정시집〉에 대한 찬사를 게재했다. 핼럼은 1832년 에밀리의 구혼자로 인정받고 서머스비로 갔다. 1832년 테니슨은 〈시름을 잊은 사람들 The Lotos-Eaters〉·〈예술의 궁전 The Palace of Art〉·〈샬럿의 처녀 The Lady of Shalott〉 등을 포함하는 또다른 시집을 출간했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블랙우즈 매거진 Blackwood's Magazine〉을 통해 〈서정시집〉을 공격했던 스코틀랜드의 작가 존 윌슨을 크리스토퍼 노스라는 가명으로 풍자한 단시가 있다. 테니슨의 이러한 공격은 윌슨이 새 시집에 대해 〈쿼털리 리뷰 Quarterly Review〉에 혹평을 싣도록 만들었다. 혹평은 테니슨을 절망시켰으나 그는 계속 옛 시를 다듬고 새로운 시를 썼다. 1833년 가족들이 핼럼의 약혼을 인정했으나 9월에 빈을 방문중이던 핼럼이 갑자기 죽었다. 테니슨에게 그 충격은 상당히 컸으며 한동안 절망적인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의 형제 중 에드워드·찰스·셉티머스 등이 정신질환을 겪었고, 자신의 시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의 슬픔을 더욱 가중시켰다. 연구에 의하면 로자 베링에 대한 청혼이 거절당했고, 소피 론스리에 대한 애착으로 심리적인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의 가장 특징적인 시 〈두 목소리 The Two Voices〉(원제는 〈자살에 대한 명상 Thoughts of a Suicide〉)·〈율리시스 Ulysses〉·〈고행자 성 시미온 St. Simeon Stylites〉·〈아서 왕의 죽음 Morte d'Arthur〉의 초판 등을 썼다. 또한 핼럼의 죽음을 기념하는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의 구성부분이 된 시 몇 편과 나중에 〈모드 Maud〉로 발전된 서정시들을 쓴 것도 이 시기였다. 1836년 5월 그의 형 찰스는 혼캐슬의 루이자 셀우드와 결혼했고, 결혼식장에서 테니슨은 그녀의 여동생 에밀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에밀리의 아버지는 그의 방랑벽, 술과 담배 중독, 진보적인 종교관 때문에 테니슨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840년에는 편지 왕래가 금지되었다. 그동안 테니슨가(家)는 서머스비를 떠나 런던 근처에서 다소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테니슨이 정치가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 시인 월터 새비지 랜더 등의 많은 유명인사들과 교제했던 것도 이 시기였다. 1840년 테니슨은 유산을 벌목사업에 투자했으나 실패하고, 재정적인 곤경에 빠졌다. 악화된 건강과 정신적 불안정으로 그는 거의 파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당시 유행했던 '수료법'(水療法)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주요문학작품 1842년 그는 〈시집 Poems〉(2권)을 출간했는데, 한 권은 1830, 1832년 판의 개정선집이고 다른 한 권은 새 시집이었다. 새로운 시로는 〈아서 왕의 죽음〉·〈두 목소리〉·〈록슬리 홀 Locksley Hall〉·〈죄의 모습 The Vision of Sin〉 등과 〈5월의 여왕 The May Queen〉·〈클라라 베르 드 베르 Lady Clara Vere de Vere〉·〈벌리 경 The Lord of Burleigh〉 등 독특한 순진성을 드러내는 시가 있다. 전반적으로 새 시집은 평판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무렵 총리였던 로버트 필이 그의 경제적 근심을 덜어주었다. 1847년 그는 최초의 장시이며 독특한 반(反)여성주의적 몽상시 〈공주 The Princess〉를 출간했다. 1850년은 그의 전환기였다. 테니슨은 에밀리 셀우드와 다시 편지 왕래를 시작했고, 약혼을 인정받은 후 결혼했다. 그동안 에드워드 모손은 테니슨이 수년에 걸쳐 써오고 있던 핼럼에 대한 애도시를 출판하라고 제안했다. 처음 그 시들은 〈인 메모리엄〉이라는 제목을 붙여 익명으로 출판되었으나, 서평자나 대중으로부터 큰 성공을 얻게 되어, 빅토리아 여왕과도 우정을 나누고 같은 해 계관시인으로 추천받았다. 결혼 후 테니슨의 생활은 좀더 안정되고 외면적으로는 평온해졌으며 두 아들 핼럼(1852~1928)과 라이오넬(1854~86)을 두었다. 1853년 테니슨가가 와이트 섬 화링호드에 집을 구하면서 방황과 불안정의 시기는 끝났다. 테니슨은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과 1868년에 여름별장으로 지었던 서리 주 할스미어 근처에 있는 앨드워스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비평가들이 실망했다고 평하기도 했던 웰링턴의 죽음에 대한 송가(1852)와, 처음에는 신문에 게재되고 나중에는 〈모드〉 시집으로 나온 발라클라바의 경비병 돌격에 대한 유명한 시(1855)로 국가적인 시인으로서의 지위가 확고해졌다. 〈모드〉는 '단일극'으로서 독자들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테니슨의 숭배자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주인공의 병적인 정신상태·히스테리·호전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모드〉는 테니슨이 가장 애호했던 작품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구상했던 아서 왕 작품이 〈왕에 대한 찬가 Idylls of the King〉(1859)로 발간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테니슨은 대중의 인기를 혐오했으나 대중적인 명성을 누렸다. 1864년에 나온 〈이녹 아든 Enoch Arden〉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시는 이녹이 사랑하는 아내 애니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숭고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아서 왕 전설류의 〈목가〉가 1869년 〈성배와 그외 시들 The Holy Grail, and Other Poems〉로 출판되었다. 1874년 테니슨은 시극을 써보려고 생각했다. 1875년 〈메리 여왕 Queen Mary〉이 나왔고 요약판으로 1876년 라이시움에서 상연되었다. 뒤이어 〈해럴드 Harold〉(1876, 공연 1877)·〈베케트 Becket〉(1884)와 '시골 비극'을 그린 〈5월의 약속 The Promise of May〉을 썼으며, 1882년 11월 글로브에서 〈5월의 약속〉 공연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유일한 산문 작품인 이 극은 당대의 종교적·도덕적·정치적 성향에 대한 테니슨의 점증하는 낙담과 분노를 보여준다. 그는 이미 〈나인틴스 센추리 The Nineteenth Century〉(1881. 11)에 〈낙담 Despair〉이라는 시를 발표해 물의를 일으켰다. 그 시로 인해 스윈번의 모방시와 수많은 논설·강의·강론이 나왔다. 후기의 테니슨의 신념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입장은 〈티레시아스 외(外) Tiresias and Other Poems〉(1885)에 출간된 〈옛 현인 The Ancient Sage〉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전생과 후생에 대한 암시적인 느낌을 기록하고 있다. 1884년 테니슨은 어느 정도 망설인 끝에 귀족작위를 받아들였다. 1886년 주로 근대의 퇴폐에 대한 힐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초기시에서 보여주었던 필연적인 인간 진보에 대한 믿음을 철회했던 〈60년 후의 록슬리 홀 Locksley Hall Sixty Years After〉이 들어 있는 새 시집을 출간했다. 그당시 유행했던 진보적 사상에 대한 도전으로 글래드스턴은 1887년 1월 〈나인틴스 센추리〉에 반박하는 글을 썼다. 1889년 테니슨은 와이트 섬으로 가는 도중 〈장벽을 넘어 Crossing the Bar〉라는 유명한 단시를 썼다. 같은 해 그는 〈드미터 외 Demeter and Other Poems〉를 출간했는데, 그중에는 〈봄의 경과 The Progress of Spring〉의 도입부로 훨씬 일찍 씌어졌고 재발견된 훌륭한 서정시 〈메리 보일에게 To Mary Boyle〉와, 그의 시작 생활의 우화적 결산인 〈멀린과 섬광 Merlin and the Gleam〉이 들어 있다. 1892년 희곡 〈포레스터스 The Foresters〉가 뉴욕 시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마지막 시집 〈이논의 죽음, 아크바의 꿈 외 The Death of Oenone, Akbar's Dream, and Other Poems〉의 교열을 볼 수 있었다. 평가 테니슨에 대한 현대적 평가는 〈율리시스〉의 지속적인 위대성, 서정시들의 독특한 예리함, 무엇보다도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시로서의 〈인 메모리엄〉의 지위 등을 인정하면서 시작되었다. 테니슨 작품의 현실적·희극적인 면은 현대에 와서 더욱 각광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래톱을 넘어〉나 〈담장 틈바귀에 핀 한송이 꽃 Flower in the Crannied Wall〉에서처럼 그의 위대성의 근원을 이루는, 인생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은 지난 세기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20세기의 독자들에게도 감동을 주고 있다. 비록 테니슨의 작품들이 빅토리아 시대의 전성기보다는 덜 기억되고 있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             Alfred Tennyson 앨프리드 테니슨 번역 : 故 장영희 교수   Ring Out, Wild Bells 우렁찬 종소리여 울려 펴져라     Ring out, wild bells, to the wild sky, 울러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거친 창공에   The flying cloud, the frosty light; 저 흐르는 구름, 차가운 빛에 울려 펴져라,   The year is dying in the night; 이 해는 오늘 밤 사라져 간다,   Ring out, wild bells, and let him die, 울려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이 해를 보내라,   Ring out the old, ring in the new, (......) 낡은 것 울려 보내고 새로운 것을 울려 맞아라,   Ring out the false, ring in the true, (......) 거짓을 울려 보내고 진실을 울려 맞아라,   Ring out the feud of rich and poor, 부자와 빈자의 반목을 울려 보내고   Ring in redress to all mankind, 만민을 위한 구제책을 울려 맞아라,   Ring out a slowly dying cause, 울려 보내라 서서히 죽어 가는 명분을   And ancient forms of party strife; (......) 그리고 케케묵은 당파 싸움을,   Ring out the want, the care, the sin, 울려 보내라 결핍과 근심과 죄악을,   The faithless coldness of the times; (......) 시대의 불신과 냉혹함을,   Ring in the love of truth and right, 울려 맞아라,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Ring in the common love of good, 울려 맞아라, 다 함께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앨프리드 테니슨(1809 ~1892)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즈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다. 그의 詩들은 아름다운 운율과 서정미가 있어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愛頌 되었다.    장영희의 열두달 英美 詩 선물 "다시 봄" 중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모두 같은 모양입니다. 테니슨은 19세기 영국 시인이지만, 마치 지금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힘들고 버거운 한 해였지만,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종소리처럼  모든 거짓, 반목, 불신을 역사속으로 보내야겠습니다.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우리 마음에도 종을 울려서, 진리와 정의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맞아들여야겠습니다.    사실 12월 31일과 1월1일은 하나도 다를게 없는 똑 같은 하루지만, 그래도 마치 이제까지의 불운과 실수, 슬픔을 다 떨쳐 버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작에 가슴 설레고, 괜히 희망이 솟구 치기도 합니다.  1년 후 오늘, 또 다시 힘들고 버거운 해였다고 한숨 지어도 좋습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합니다. 자꾸 스러져 가는 희망을 다잡고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여정의 첫 발자국을 힘차게 내 딛으려고 합니다.     모래톱을 넘어서 - 앨프리드 테니슨 - 해는 지고 저녁별 빛나는데 날 부르는 맑은 목소리 내 멀리 바다로 떠날 적에 모래톱에 슬픈 울음 없고 너무도 충만하여 소리도 거품도 일지 않는 잠자듯 흐르는 그런 조수 있었으면 끝없는 심연에서 나온 이 몸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갈 때에 황혼이 깃든 녘 저녁 종소리, 그리고 그 뒤에 짙어지는 어두움 내가 배에 오를 때 이별의 슬픔 없기를 시간과 공간의 경계 너머로 물결이 나를 멀리 실어 낸다 해도 내가 모래톱을 건너고 나면  내 인도자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기를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이 시는 테니슨의 나이 팔십 세에 지은 것으로 최후의 작품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이 시를 그의 시선 집 맨 끝에 실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봐서 그 자신도 마지막 시라고 생각한듯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장례식에서 아내가 이 시를 낭송했겠지요. 따라서 이 시는 그의 “백조의 노래 (swan song)"라 해도 조금도 지나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이 시를 종종 백조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번역하기도 하는 것이요... 인간이 가장 두려워히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평온함이 묻어나는 시입니다. 강이나 바다처럼 커다란 물이 주는 이미지는 죽음과 갱생 즉 새로운 삶입니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고대 종교 제의나 현대의 기독교에서 죄악에 물든 어제의 나는 죽고 깨끗한 영혼의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상징적 의식으로 사람을 물에 담갔다 일으키는 침례 의식을 베푸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세계 모든 신화에 나타나는, 죽은 자가 스틱스 강이나 요단 강처럼 커다란 물을 건너는 장면도, 다 그런 이유일 겝니다. 따라서 이 시의 바다는 이승 세계와 저승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며, 모래톱 (sandbar)은 육지와 바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입니다. 이제, 자기의 죽음을 예견한 테니슨이 건너지 않으면 안 될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의 경계인 모래톱에 서서, 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그곳을 그리며 읊은 시입니다. 머릿속에 이 시의 장면을 하나하나 그리며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석양(sunset)이 지고 저녁별(evening star)이 뜨고 황혼(twilight)녘에 들려 오는 저녁 종소리(evening bell)는 다 죽음과 관련된 어두운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어둠을 밝혀 주는 별 그 자체의 이미지는 '신'이라는 절대적 타자와의 대화이면서 그 신에게로 다가가는 매개체로 보입니다. 해가 지면(sunset)서 날이 어두워지듯 이제 테니슨의 인생도 황혼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 별(신)이 나타나 맑은 목소리로 그를 부릅니다. 그는 이제 신을 따라 죽음의 세계인 저 먼 바다로 항해를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간절히 기원합니다. 자신이 바다로 떠날 때 이별의 슬픔이 더는 없기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육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 저 너머에 있는 내생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진실로 굳건하고 경건한 믿음의 시인인 테니슨은 죽음 앞에 서서 두려움이나 이별의 눈물과 헤어짐의 서러움보다는 저녁(죽음)을 지나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그를 인도해준 인생의 길라잡이였던 신과의 만남을 그리며 오히려 황홀한 감정에 빠져드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낭만논객의 사회자인 김동건 아나운서도 황홀하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2069    프랑스 시인 - 로베르 데스노스 댓글:  조회:4340  추천:0  2017-04-11
로베르 데스노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 1900년 7월 4일 – 1945년 6월 8일)는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로, 1900년 7월 4일 파리에서 태어나, 1945년 6월 8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로 4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소개[편집] 공교육을 받지 않았던 로베르 데스노스는 자신의 꿈인 시인이 되고자 1920년 경 모더니스트 문학가들과 교우하였으며, 1922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하였다. 그는 최면에 의한 가수면 상태에서 글을 쓰는 방식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후 마르셀 뒤샹이 창조한 가상의 여성 로즈 셀라비(Rrose Sélavy, 1922–1923)를 다루는 자신의 첫 작업물을 출판하였다. 데스노스는 1924-1929년 동안 잡지 《라 레볼뤼시옹 쉬르레알리스트(La Révolution surréaliste)》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앙드레 브르통이 운동 방향을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관계를 끊는다. 데스노스는 언론사에서 일하였으며 음악 애호가로 유명하였다. 작품[편집] 《로즈 셀라비》 (1922-1923) 《에로티슴에 관하여》 (1923) 《애도를 위한 애도》 (1924) 《자유 또는 사랑!》 (1927) 로베르 데스노스, 이주환 옮김, 《자유 또는 사랑!》, 읻다, 2016. 《어둠》 (1927) 《안드로메다와의 목욕》 (1944) 《시인의 명예》 (1943) 《올빼미》 (1938) 관련 기사[편집] "난 죽었다고 시작하는 소설"… 반수면상태에서 글 쓰는 '영매술 작법' ///////////////////////////////////////////////////////////////////////////////////////////////// 신비로운 여인에게 / 로베르 데스노스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었기에 너는 너의 현실성을 잃는다. 숨쉬는 이 육체에 이르러 입술 위에 흘러나오는 정다운 목소리에 입맞출 시간이 아직도 있을 것인가?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었기에 너의 그림자를 껴안으며 내 가슴 위에 겹쳐지던 나의 두 팔은 굳어져 너의 몸 둘레 맞도록 굽어지지 않으리라, 아마도, 그리고 이미 수많은 나날과 달 동안 나를 떠나지 않고 지배해 온, 네가 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 때엔 내가 하나의 그림자가 되리라, 틀림없이, 오, 애정의 숨박꼭질이여,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었기에 사실 나는 깨어 있을 때란 이미 없다. 나는 서서 잠잔다. 나의 육체는 인생과 사랑의 모든 형태에 내맡겨진 채, 그리하여 너, 오늘날 나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너와 만난다 해도 너의 입술이나 이마는 다른 어떤 입술이나 이마보다 다칠 수 없으리라. 나는 너를 너무나 사무치게 꿈꾸고 너의 환영과 더불어 너 무나 걷고 이야기하고 함께 잠잤기에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마도 환영 가운데 환영뿐이며 너의 인생의 해시계 위에 거 닐며 다닐 그림자보다 백 배 더한 그림자가 될 뿐이리라.     내일 / 로베를 데스노스       비록 내 나이 십만 살이 된다 해도 희망으로 예감되는 너,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있으리라. 시간,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이 노인도 시음하듯 말한다. 아침은 새롭고 새로운 건 저녁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일월(日月)을 잠자지 않고 지내며 우리는 밤 새워 빛과 불을 지킨다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노름판에서처럼 순식간에 꺼지고 없어지는 많은 소리에 귀 기울린다.   허나 우리는 깊은 밤에 증언한다 낮의 찬란함과 그가 가져다주는 모든 선물을, 우리들이 잠자지 않음은 새벽을 망보기 위함이며 새벽은 드디어 우리들이 현재에 살고 있음을 증명하리라.     로베르 데스노스(1900~1945): 로베르 데스노스는 파라의 서민가 생 마르탱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순수한 파리지엥이다. 집안이 가난하고 중고등 학교를 나오자 곧 약국의 점원이 되어 일했다. 이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실행활에 대한 고려나 조심성이 없고 어디나 도취하기 잘하는 그는 1017년 브르통-아라공-차라 등 당신의 다다이스트들과 만나 이들의 영향으로 장난기 많은 시를 썼으며, 1922년 브르통이 소위 초현실주의의 새 문학 운동을 일으키자 데스노스는 열성적으로 이에 가담하여 1924년 초현실주의자 선언시에는 이 운동의 선구자이며 실천가로 활약했다. 특히 최면술에 의한 무의식적 자동 언어 기술에는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최면 시법회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도 하였다.  그러나 데스노스는 차츰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벗어나 자기의 본령인 서정과 애수, 환상과 유머를 담은 좀더 정적(靜的)이며 평이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 수록된 "신비로운 여인에게"뿐만 아니라 "암흑". 경범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시집 , 등은 이 시기(1924~1930)의 작품들이다. 그의 시가 파리 서민층의 생활 감정을 표현한 감상적이며 대중적인 시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원래 비용-네르발 등을 좋아한 그는 자연히 꿈과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여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시를 많이 썼다. 1930년 브르통과 그의 초현실주의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방송계에 들어가 소의 '라디오 시'라는 새로운 시를 시도하기도 하고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며 새로운 매체를 통한 예술 세계를 이루어 보려고도 하였다. 그의 시에 나오는 일본 여인 유키와 만난 것도 이 때이며 그는 후일 그녀와 결혼한다. "시라무르", " 사랑 없는 밤마다의 밤"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28년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의 전시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다시 독일군 점령하의 파리에서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담하여 출판에 종사하였다. 1944년 2월 나치의 게슈타포 비밀 경찰에 체포되어 유럽의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진 수용소에 옮겨져 다음 해(1945) 6월 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이 주요 시 작품집으로는 전기한 작품 외에 , , 그리고 일종의 자서전인 소설 이 있으며 어린애들을 위한 작품 도 있다.  시인으로서의 데스노스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거쳐온 만큼 한때 하부의식(下部意識)의 기술자(記述者)로서, 초현실주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으로, 또는 재미있는 언어의 유희가로 유명하였지만, 그의 시의 참다운 본성과 독창성은 서정적인 데 있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서정성은 꿈과 현실, 환상과 진실이 뒤섞이고 넘나드는 특성이 있다.    
2068    프랑스 시인 - 브로샤이 댓글:  조회:3783  추천:0  2017-04-11
출생 1899. 9. 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실바니아 브로쇼 사망 1984. 7. 8, 프랑스 니스 근처 에즈 국적 헝가리 요약 헝가리 태생 프랑스의 시인·화가·조각가·사진가. (프). Jules Halasz. 본명은 Gyula Halsz.   주로 파리의 밤풍경을 극적으로 나타낸 사진들로 알려져 있다. 예명인 브로샤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예술가로서 교육을 받고 1924년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조각가·화가·언론인으로 일했으며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작가 헨리 밀러와 같은 예술가들과 교분을 나눴다. 그당시에는 사진을 무시했으나 기자업무에 사진기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사진의 독특한 미적 특질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의 초기 사진은 당시 예술가와 범죄자들의 지역으로 유명하던 파리 몽파르나스의 밤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플라스 피갈 바의 보석 'Bijoux' in Place Pigalle Bar〉·〈매춘부 Streetwalker〉 같은 사진이 실린 〈파리의 밤 Paris de nuit〉이라는 사진집이 1933년에 출판되어 곧바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2명의 아파치 단원 Two Apaches〉과 같은 강렬한 작품을 싣고 있는 〈파리의 즐거움 Voluptés de Paris〉(1935)이 이어 출판되자 곧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그는 프랑스령 리비에라로 피신했으나, 파리에 숨겨두었던 음화들이 습기로 상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점령기간에는 거리에서 자유로이 사진 찍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림과 조각을 다시 시작했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의 그림은 프랑스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시와 함께 〈30개의 소묘 Trente dessins〉(1946)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1945년 사진작가로서 다시 일을 시작했고, 1947년 어슴프레한 파리 거리를 찍은 사진들을 크게 확대하여 프레베르의 〈만남 Le Rendez-vous〉이라는 발레의 배경막으로 사용했다. 초기작품의 주제와 기술들이 전후 그의 많은 작품에도 계속 나타난다. 그러나 〈모나코의 이국적인 정원 Exotic Garden in Monaco〉(1946)·〈리비에라의 하얀 우산 White Umbrella on the Riviera〉(1948)과 같은 사진들은 형태와 공간에 대한 한결 높아진 의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기록사진작가들과는 달리 브로샤이는 그의 사진집 〈축제 중의 세비야 Seville en fête〉(1954)에 실린 〈세비야의 신성한 주일 Holy Week, Seville〉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활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대상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낙서처럼 가장 무생물적인 대상에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느낌을 불어넣기도 했다. 1976년에 〈비밀, 30년대의 파리 The Secret Paris of the 30's〉가, 1982년에 유명한 예술가들, 예술품 판매상들, 친구들의 초상화를 사진과 글로 표현한 〈내 인생의 예술가들 Artists of My Life〉이 출판되었다.
2067    프랑스 시인 - 자크 프레베르 댓글:  조회:5309  추천:0  2017-04-11
출생 1900년 2월 4일 프랑스의 뇌이-쉬르-센 사망 1977년 4월 11일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y)의 오몽빌-라-프티트 데뷔 1924년 (Les grands,프랑스) 요약 자크 프레베르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초현실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마르셀 카르네, 폴 그리모 등의 감독과 협력하면서 영화사에 기록될만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목차 생애와 이력 작품 세계 영화사적 평가 작품 목록 자크 프레베르 Jacques Prevert 생애와 이력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 시인. 1900년 2월 4일 프랑스의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태어났다. 자크 프레베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시인이며 시나리오 작가로 시적 리얼리즘 시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자크 프레베르의 아버지 앙드레 프레베르(Andre Prevert)는 생계를 위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취미로 영화와 연극 비평을 병행했던 아버지 덕분에 프레베르는 어린 시절부터 공연장과 극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학교생활에 싫증을 느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1925년에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마르셀 뒤하멜(Marcel Duhamel),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 이브 탕기(Yves Tanguy), 앙드레 브로통(Andre Breton) 등과 교류하였다. 자크 프레베르는 프랑스 공산당에 참여하였던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Jean Renoir)와는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장 르누아르와의 공동작업 (Le Crime de Monsieur Lange, 1936)는 두 예술가의 정치 성향이 잘 투영된 작품이었다. 또 한 사람의 참여파 감독인 장 그레미옹(Gremillon)과는 (Lumiere d’ete, 1943) 등에서 함께 작업하였다. 작품 세계 시나리오 및 대사 작가로서 자크 프레베르의 활동은 주로 1935년부터 194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프레베르는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e)와 더불어 프랑스 시적리얼리즘 사조를 대표하는 숱한 걸작들을 남겼다. (Drole de Drame, 1937), (Le Quai Des Brumes, 1938), (Le jour se leve, 1939), (Les enfants du paradis, Children of Paradise, 1945) 등이 프레베르와 카르네의 공동작업의 결과물이다.    왕과 새 The King and the Mockingbird 자크 프레베르의 또 다른 영화적 동반자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인 폴 그리모(Paul Grimault)가 있었다. 프레베르와 그리모는 30년 가까이 함께 작업을 하였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으로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각색한 작품 (La bergere et le ramoneur, 1952), (Le roi et l’oiseau, 1980), (La table tournante, 1988) 등이 있다. 특히 는 프레베르가 병상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몰두하였던 작품이었다. 사망 전날까지도 폴 그리모에게 전보를 보낼 정도로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크 프레베르는 그는 또한 평생에 걸쳐 사회 참여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흔들림 없는 초현실주의자로서 문학적 동반자들과도 연대를 구축하였다. 유랑극단 10월 그룹(Le groupe Octobre)에 참여하여 파업 중인 공장 등을 순회하며 공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영화사적 평가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자크 프레베르는 마르셀 카르네, 폴 그리모 등의 작가로 교류하면서 영화계에서 활동하였다. 프레베르는 스스로 ‘인민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사망 몇 해 전 인터뷰에서, 프레베르는 “유행을 따를지라도 나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은 독자들을 얻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위대한 비평가들이다”라고 말했다. 1977년 4월 11일, 자크 프레베르는 일흔 일흔의 나이에 노르망디(Normandy)의 오몽빌-라-프티트(Omonville-La-Petite)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마르셀 카르네는 프레베르의 사망 직후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 쓴 글에서 “유머와 시정이 가득했던 프랑스 영화의 유일한 시인”으로 프레베르의 죽음을 추모했다. 작품 목록 (Les grands,프랑스,1924) (Comme une carpe , 프랑스,1932,) (L’affaire est dans le sac, 프랑스,1932) (Tenerife, 프랑스,1932) (Ciboulette, 프랑스,1933) (L’hotel du libre echange ,프랑스,1934) (L’Atalante, 프랑스,1934) (Un oiseau rare , 프랑스,1935) (Jeunesse d’abord , 프랑스,1935) (Si j’etais le patron , 프랑스,1935) (27 rue de la Paix , 프랑스,1936) (Jenny , 프랑스,1936) (Le crime de Monsieur Lange, The Crime of Monsieur Lange,프랑스,1936) (Moutonnet , 프랑스,1936) (L’affaire du courrier de Lyon , 프랑스,1937) (Drole de Drame, 프랑스,1937) (Ernest the Rebel , 프랑스,1938) (Le Quai Des Brumes, Port of Shadows , 프랑스,1938) (Boys’ School , 프랑스,1938) (Le jour se leve, Daybreak , 프랑스,1939) (L’enfer des anges , 프랑스,1941) (Remorques, 프랑스,1941) (Les Visiteurs du Soir , 프랑스,1942) (Adieu Lonard , Original Idea,프랑스,1943) (Lumiere d’ete, 프랑스,1943) (Le soleil a toujours raison , 프랑스,1943) (Une femme dans la nuit, 프랑스,1943) (Sortileges, 프랑스,1945) (Les enfants du paradis, Children of Paradise , 프랑스,1945) (Les portes de la nuit, 프랑스,1946) (Aubervilliers, 프랑스,1946) (L’arche de Noe, 프랑스,1947) (Voyage surprise, 프랑스,1947) (La fleur de l’age, 프랑스,1947) (Les amants de Verone , 프랑스,1949) (Souvenirs perdus, 프랑스,1950) (La Marie du port , 프랑스,1950) (La bergere et le ramoneur, 프랑스,1952) (Bim, 프랑스,1954) (Carnet de Baile ,프랑스,1955) (Notre-Dame de Paris, The Hunchback of Notre Dame, 프랑스,1956) (La Seine a rencontre Paris, 프랑스,1957, 단편) (Amours celebres, 프랑스, 1961) (Le roi et l’oiseau, The King and the Mockingbird , 프랑스,1980) (La table tournante, 프랑스,1988) [Daum백과] 자크 프레베르 – 근현대 영화인사전,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자크 프레베르   "오!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네/ 우리가 다정했던 그 행복한 시절을/ 그때 인생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고/ 태양은 지금보다 더 뜨거웠지/ 낙엽을 삽에 쓸어담아 치우는데…/ 너는 알겠지 내가 잊지 못한다는 것을/ 낙엽을 삽에 쓸어담아 치우듯/ 추억과 회한도 그럴 수 있겠지" /// =('고엽' 부분) 공원 / 자크 프레베르       천년 만년 걸릴지라도 이 말  다 할 수 없으리   그대 내게 입맞추고 나 그대에게 입맞춘 이 영원한 순간을 겨울 햇살 비치는 어느 아침   파리 몽수리 공원에서 파리에서 지상에서   별의 하나인 지구 위에서.     매시지 / 자크 프레베르       누군가 열어 놓은 문 누군가 다시 닫은 문 누군가 앉았던 의자 누군가 쓰다듬었던 고양이 누군가 한 입 먹은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쓰러뜨린 의자 누군가 열어 놓은 문 누군가 계속 달리는 길 누군가 질러가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늦잠 / 자크 프레베르       이건 무섭다 아연판 카운터 위에 삶은 달걀을 두들겨 깨뜨리는 이 작 은 소리는 이 소리가 배고픈 사람의 기억 속에서 움직일 때 이 소리는 정말 무섭다 사람의 얼굴도 또한 무섭다 배고픈 사람의 얼굴은 그가 아침 여섯 시 백화점 유리창에 비친 얼굴, 잿빛 자기 얼굴을 바라다볼 때 그러나 그가 포텡 가게 진열장 속에서 바라다본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다 이제 그로서는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런 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다른 머리를 상상한다 예컨대 식초 소스를 친 송아지 머리 같은 것 또는 먹을 수 있는 모든 짐승의 머리를 상상한다 그리고 가볍게 아래턱을 움직인다 가볍게 그리고 가볍게 이를 간다 그 까닭은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놀림감으로 삼는데 자기는 이 사람들에 대항하며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리하여 그는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센다 하나 둘 셋 그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지 사흘째다 사흘 전부터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나 아무 소용 없다 이대로 그냥 지낼 수는 없다 그러나 계속하여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굶고 지낸다 그런데 이 유리창 뒤에 즐비한 이 고기 파이들 이 포도주병들 이 통조림들 죽은 물고기들은 통조림 깡통을 지키고 깡통들은 유리창이 지키고 유리창은 순경들이 지키고 순경은 공포가 지키고 있다 여섯 마리의 가엾은 정어리를 위해 이 많은 장애물들--- 조금 떨어진 곳에 목로 술집 크림 든 커피와 따끈따끈한 반달 빵들 이 사람은 비틀거린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에는 말(언어)과 말이 혼돈이 말과 말의 혼돈이 일어난다 양념된 정어리들 완숙(完熟)의 달걀 크림 커피 럼술을 친 커피 크림 커피 크림 커피 피 뿌린 범죄 거피--- 그의 구역에서 매우 존경받던 인사가 대낮에 목이 찔려 죽었다 그 살인자 부랑자는 그에게서 2 프랑을 훔쳤다 말하자면 술 친 커피 한 잔 값 0 프랑 70전과 버터 바른 빵 두 쪽 값 그리고 웨이터에게 준 팁 25전이다 이건 무섭다 아연판 카운터 위에 삶은 달걀을 두들겨 깨뜨리는 이 작 은 소리는 이 소리가 배고픈 사람의 기억 속에서 움직일 때 이 소리는 정말 무섭다. =====================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자끄 프레베르     우선 문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간단한 것을 뭔가 유용한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새장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 놓을 것 아무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려서 오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무관한 것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싱싱한 바람과 햇빛 또한 그릴 것 그리고는 새가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이 잘못된 것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싸인해도 좋다는 것 그러거든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라.     절망은 벤치 위에 앉아 있다   네모진 곳 안의 벤치 위에 한 사내가 앉아 지나가는 당신을 부른다 코안경을 쓰고 낡은 회색 옷을 입고 조그마한 담배를 피우며 그는 앉아 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이 지나갈 때 당신을 부른다 아니면 단지 손짓을 한다 당신은 그를 쳐다봐선 안 된다 당신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선 안 된다 당신은 마치 그를 못 본 양 마치 그의 말을 못 들은 양 지나가야 한다 당신은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가야 한다 당신이 그를 보면 당신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는 당신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당신이 그 사람 곁에 가서 앉는 것을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당신을 보고 웃는다 그리고 당신은 쓰디쓴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계속 웃는다 그리고 당신은 같은 웃음을 웃는다 똑같은 웃음을 당신은 웃을수록 더 쓴 고통을 느낀다 쓰디쓴 고통이 클수록 당신은 더 웃는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그 곳에 당신은 붙박이마냥 머문다 벤치 위에서 웃으며 아이들이 당신 가까이 놀고 있다 행인들은 지나간다 조용히 새들은 머물던 나무를 떠나  다른 나무로 날아들 가지만 당신은 그 자리  그 벤치에 머무른다 그리고 당신은 깨닫는다 깨닫는다 더 이상 당신은 이 아이들처럼 놀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깨닫는다 더 이상 이 행인들처럼 조용히 지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더 이상 새들처럼  살던 나무를 떠나 다른 나무로 날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크 프레베르(1900~1971): 이브 몽땅이 부른 유명한 샹송 "고엽"의 작사자는 자크 프레베르이다. 그는 파리 서쪽 변두리 태생의 파리지엥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는 사립 중학교 밖에 다니지 못하였고, 15세부터 시장과 백화점에서 사동이나 점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일찌기 시나 예술에 뜻을 두었던 그는 1926년에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의 대장이라 불리던 브르통이나 아라공 등과 뜻이 맞지 않아 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때부터 그는 그의 동생인 피에르 프레베르와 친구 마르셀 뒤아멜 등과 영화 시나리오, 샹송의 작사가로 활약하였으나 신통치 않았다. 후일에 마르셀 카르네와 함께 '제니의 집(1936)' '안개 낀 부두(1938)' '저녁의 손님(1942)' '천국의 아이들(1945)' '밤의 문(1946) 등 유명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와 대사는 그의 작품이다. 또한 '바르바라' 등 많은 샹송의 가사도 지었는데 전기한 샹송 '고엽'은 원래 '밤의 문'의 주제가였다.  그런데 1946년 출판사 에서 그의 옛날 시를 모아 이라는 시집을 펴냈는데 이것이 가히 이변(異變)이었다. 이 시집은 발간된 지 수주일 동안에 10여 만부가 팔렸으며 프레베르는 하루 아침에 일약 가장 인기 있는 시인이 되었다. 이 이라는 시집은 그 후 10 년 동안 500여 판 56만 부가 팔려 시집 출판 사상 신기록을 세웠다. 지금도 그의 시는 본국인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각계 각층의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 후 그는 , , 등 세 권의 시집을 내놓았는데 여기서도 그의 기지와 서정과 반항과 허무의 불꽃을 엿볼 수 있다  이 동안 그는 시인으로서뿐 아니라 계속 영화-사진-샹송 방면에서 일하였으며 특히 어린애들을 위한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많은 동화를 출판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는 1977년 4월 북부 프랑스의 셀부르에서 폐암으로 죽었다.       시 비평 전문 평론가 오생근 교수 프레베르 詩 재번역, 시화집 출간   샹송 '고엽'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1900~1977·사진)의 시선집이 새롭게 번역됐다.   /문학판 오생근 서울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프레베르의 대표시에 가브리엘 르페브르의 삽화를 붙인 시화집(詩畵集)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문학판)를 냈다. 오 교수는 "개인적인 고백부터 하자면, 예전에 나는 프레베르를 잘 알지 못했다"며 "나는 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반성하기 위해 그의 시 전집을 구해 읽었고, 프레베르가 대단한 시인임을 깨달으면서 그의 시들을 번역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오 교수는 난해한 초현실주의 문학을 전공한 학자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문단에선 시 비평을 전문으로 해 온 평론가로 꼽힌다. 그러다보니 대중 시인으로 여겨진 프레베르에 대해선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뜻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수년 전부터 프레베르에 대한 프랑스 문인들의 평론을 읽으면서 '잘못된 이해와 선입견'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프레베르는 대중적 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대한 위반과 전복과 변화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오 교수는 지난해부터 프레베르의 시를 번역하고 해설을 올리는 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노래하는 건 내 목소리만이 아니지/ 다른 목소리들 많은 목소리들'이라며 시작하는 시 '마음의 소리'로 번역 시집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에디트 피아프가 부른 샹송으로도 알려진 작품이다. 오 교수는 "사회의 폭력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실에 대한 믿음과 우정의 연대감을 표현한다"고 풀이했다. 프레베르를 개인적 감상(感傷)에 젖은 대중 시인으로 폄하한 관점에서 벗어나 진솔한 언어로 공동체의 사랑과 우정을 추구한 시인으로 재평가한 것.   프레베르의 시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는 '죽은 나뭇잎의 장례식에/ 두 마리 달팽이가 조문하러 길을 떠났다네'라며 시작한다. 달팽이들의 걸음이 느린 탓에 가을과 겨울이 지나 버린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봄이 와 죽은 나뭇잎들이 부활한다. 달팽이들은 상복(喪服)을 벗고 주변의 동식물과 함께 주연(酒宴)을 즐기며 노래한다. 취한 달팽이들이 느릿느릿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달님이 그 앞을 보살펴준다는 것. 오 교수는 달팽이를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인 시인으로 해석하면서 "죽음과 슬픔의 겨울을 지나 기쁨과 생명의 봄으로 전환된 축제의 분위기를 초현실적 상상력으로 노래한다"고 풀이했다. 프레베르는 거리와 카페에서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초현실주의적 시를 쓴 시인이란 점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오 교수는 "그는 문학보다 영화에 더 관심이 많았고, 시인이나 작가 행세를 한 적도 없다"며 "다만 시인이란 사람들이 꿈꾸고, 상상하고, 마음속 깊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만 가졌다"고 평했다.   /조선일보 박해연 문학기자
2066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들 댓글:  조회:3669  추천:0  2017-04-10
  폰트확대|   릴케(Rainer Maria Rilke)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은 무엇일까요? 지난 2012년 한 문학잡지에서 시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위는 백석의 시집 《사슴》이었습니다. 백석은 스물다섯 살이던 1936년 1월에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했습니다. 워낙 적은 부수라 당시에도 희귀본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은 대학시절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백석의 이 시집을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실린 시는 40편이 못되었지만 그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컸다는 느낌이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끝내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수 필사본을 만들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탐독했고 ‘그림 같다’, ‘걸작이다’ 등의 메모를 남긴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입니다. 백석과 윤동주, 이름만으로도 벅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이지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는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82년도 출판본입니다. 그리고 1,800원이었네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될 일이지만 굳이 이 옛날 옛적의 시집을 찾아 꺼내든 까닭은 인터넷에 나오는 앞서의 구절이 어쩐지 원본과 다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달랐습니다. 어느 부분이냐 하면, ‘프랑시스 짬’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입니다. 이 부분을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꾸었더군요. 누군가는 그냥 ‘이름’일 뿐이잖아, 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획 하나도 손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것이 오타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가 불렀던 이름 그대로 불러보고 싶고, 백석과 윤동주가 썼던 대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경우에는 두 시인 모두 ‘라이넬 마리아 릴케’라고 불렀으나 프랑시스 잠에 대해서는 각각 다르게 불렀습니다. 백석은 ‘쨈’으로, 윤동주는 ‘잼’으로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는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와 쨈, 혹은 잼의 시집을 곶감 빼먹듯 두고두고 아껴 읽으며 시를 향한 꿈과 사랑을 키웠을 것입니다. 백석과 윤동주에게 서울은 타향이었습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윤동주는 만주 간도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요. 먼 북쪽에 고향을 둔 둘은 1930년대에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기도 했지만 교류를 나눴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윤동주보다 다섯 살 위인 백석은 이미 유명한 시인이었고, 윤동주는 백석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석이 1940년에 만주로 떠나면서 인연이 이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졌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남북분단의 비극 속에서 어떻게 희생됐는지는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이 시대에 남은 독자로서 두 시인의 시에 프랑시스 잠과 마리아 라이너 릴케가 똑같이 등장하는 구절을 읽으며 이처럼 닮은 취향을 가진 둘이 만났더라면 서로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꽃과 당나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하는 슬픔을 느낄 뿐입니다. 백석이 프랑시스 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북한의 시인’으로 억류됐던 영향이 크겠지요. 대신 윤동주가 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북간도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회고 덕분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가 연희전문대학 시절에 잠의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읽었노라 하면서 시집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냈는데 바로, 《밤의 노래》입니다. 이 시집은 나중에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됐는데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 삼종(三鐘)의 종소리가 웁니다. - 프랑시스 잠,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서문 중에서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그토록 사랑한 ‘흰 당나귀’가 어떤 당나귀인지 투명하게 그려지지요. 프랑시스 잠의 삶이 그런 당나귀와 같았습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진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시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일상은 화려했으며 미술과 음악, 문학이 활짝 피어나 훗날의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공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잠은 이 모든 것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파리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으로부터는 물론, 공허와 불안으로부터도 등을 돌려 평생 피레네 산맥 근처에 은거하며 단순하고 현실적인 삶, 자연과 종교에 뿌리를 둔 시를 썼습니다. 그 덕에 잠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며 다정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서양의 시를 읽을 때면 쉬이 느끼는 난해함 없이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일상으로부터 소재를 끌어온 덕입니다. 특히 〈식당〉이라는 시는 그냥 우리 시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친숙해서 윤동주가 왜 ‘짬’의 시는 구수해서 좋다고 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어느 늦은 오후, 석양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즈넉하게 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월의 태엽을 뒤로 돌려봅니다. 새삼 오랜 세월 내 곁에 말없이 있어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부서져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 어르신네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 잼 냄새, 고기 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한테 아무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영혼들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 안녕하신지요, 잠 씨? - 프랑시스 잠, 〈식당〉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어머니 방에 있는 30여 년 된 장롱처럼 오래된 사물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어느 날 잃어버린,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물건과 기억이었습니다. 가졌을 때는 이렇게 쉽게 잃어버릴 줄, 잊어버릴 줄 몰랐던 것들 말입니다. 그와 같은 사물, 그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을까요. 잠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프랑시스 잠을, 백석과 윤동주가 좋아한 또 다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좋아했습니다.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에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젊은 무명 시인 말테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한 행복한 시인의 생활을 접하고 그 시인처럼 글을 써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행복한 시인이 프랑시스 잠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테의 생활은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불안과 소외로 비참하기만 했지요. 이런 말테를, 아니, 릴케를 일으켜 세운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둘의 인연은 1902년, 릴케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로댕의 평전을 쓰면서 시작됐습니다. 190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로댕의 비서로 일했지요. 로댕은 릴케에게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바라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줬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관찰뿐 아니라 미학적 성찰까지 아우른 것이었습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쓴 구절이 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릴케의 문학론이자 예술가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이런 깨우침은 로댕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보다 전에 로댕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돈의 필요에 쫓겨 하찮은 일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에도 로댕은 자신을 잃은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체험한 일이 언제까지나 계획만으로 머무는 적은 없었으며, 낮에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날 밤 안에 곧장 실행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꿈만 꾸거나 계획과 기분에 젖어 멈추어 있지 말고 항상 모든 것을 무리하게라도 ‘물(物)’로 이입하는 일이다. 로댕이 그렇게 했듯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댕론》 중에서 로댕과 릴케가 천재이기 전에 얼마나 대단한 노력가였는지 깨닫게 해주는 글이지요. 로댕은 릴케가 예술가로서 힘든 순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조언을 구했을 때도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철인 로댕이라 해도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삶이 힘들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로댕이 릴케를 만났을 때가 60대, 릴케에게 매일 해준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힘내라고!”였습니다. ‘힘내라고!’ 밤에 헤어질 때, 아주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에도 아무 관련 없이, 로댕은 곧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젊었을 때, 얼마나 이 말이 매일처럼 필요한 것인가를. 두 사람의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젊은 시절에 로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나 곁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을 젊은 시인 릴케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힘내라고!”는 격려의 말이지요. 그리고 그 기운이 릴케에게로, 또 릴케에서 백석과 윤동주에게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로댕의 묵직하고 따뜻한 두 손이 어깨를 쓰다듬는 것 같은 이 말을 당신에게도 전합니다. “힘내라고!” 함께 들으면  [Daum백과] 윤동주와 백석이 동시에 사랑한 시인 –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65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소리를 그리워하네"... 댓글:  조회:5084  추천:0  2017-04-10
  목록열기                          자화상   장 콕토 자화상 / Jean Cocteau Self-Portrait   2017.03.02. 12:44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http://blog.naver.com/theory_heehee/220948166704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장 콕토 1954 장콕토 자화상 / Jean Cocteau Self-Portrait  자화상도 참 멋스럽네요! 사진 속 장 콕토는 하나같이 다 장 콕토만의 느낌을 준다. 그가 시을 쓰든 소설 영화를 하든 그의 감성이 묻어난다. 고양이와 함께 장 콕토와 그의 애인 마레 그의 애인 마레와 이 사진을 보니 영화 싱글맨을 보는 듯하다.  1950 라인팅 페인트 장콕토     친구 피카소와 함께     장콕토 Jean Cocteau 1889.07.05 ~ 1963.10.11 장 콕토 까르띠에 트리니티 반지 트리니티 세개의 고리에는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사물을 하나의 상징, 존경의 대상, 영원한 젊음의 표상으로 완전히 같은 크기의 3개의 링을 서로 짜 맞추고 하나의 형태 속에 융합돼있다.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독창적인 트리니티 그 곳에서 완벽한 삼위일체의 구조가 탄생했다.  트리니티의 탄생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인 장 콕토가 관련되어 있다.  그는 시, 영화, 그림 그 외에 수많은 장르에 걸쳐 다채로운 재능을 발휘했다.  ( 콕토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 비평가들은 그가 그 많은 예술 장르에 개입했지만 실상 그 어떤 영역에서도 최고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그를 가르켜 20세기 최후의 딜레탕트 정도로 치부해버리곤 했다. -씨네21) 1924년 친구이기도 했던 콕토에게 선물을 하기위해 루이 까르티에는 지금까지 누구도 본 적없는 상품을 디자인 한다. 그 곳이 트리니티 링이었다.  어떤 글에서는 장 콕토가 친구들에게 선물하기위해 트리니티 디자인을 의뢰했다고 하는데, 어찌되었든 장 콕토가 트리니티 반지와 연관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는 트리니티 반지를 새끼 손가락에 착용하고 다녔다.  숫자 3은 모든 문명에 있어서 성스로운 숫자이며, 카바라에서눈 신체와 정신과 혼, 도쿄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다.  2년전 결혼 반지를 트리니티로 했었다. 독특한 디자인이 다른 어떤 반지 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누구에 의해,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는 장 콕토 자화상을 공부하다가 알게되었는데, 오늘따라 반지가 너무 다르게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 내 귀는 소라껍질 Mon oreille est un coquillage  바다소리를 그리워하네 Qui aime le bruit de la mer - 장콕토 - * 내 귀 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장 콕토 (Jean Cocteau, 1889~1963)의 이 2행 시는   원래 연작 단시 중 제5번 시이다.  [출처] 장 콕토 자화상 / Jean Cocteau Self-Portrait|작성자 history  
2064    프랑스 시인 - 장 콕토 댓글:  조회:5588  추천:0  2017-04-10
  출생 1889. 7. 5, 프랑스 파리 근처 메종라피트 사망 1963. 10. 11, 파리 근처 밀리라포레 국적 프랑스 요약 콕토는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극작가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대표적인 프랑스 예술가 중의 하나이다.  파리에서 성장한 그는 교양이 넘치고, 부유하고, 음악과 미술, 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무대 예술에 실질적인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들은 발레단 감독의 "나를 한번 놀라게 해보라"라는 말이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이후 발레극 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품도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나중에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 천재 소년 레몽 라디게를 알게 되었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6년에 초연된 는 당대의 연극에서 비극을 부활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고, 대표적 희곡으로 알려진 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활동 영역을 넑혀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장 모리스 외젠 클레망 콕토(Jean Maurice Eugène Clément Cocteau, 1889년 7월 5일 ~ 1963년 10월 11일)는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영화 감독이다. 파리의 근교 메종라피트(Maisons-Laffitte)에서 출생하였으며, 학교를 싫어하여 문학적 사교계에 출입하였다. 당시 여성 예술가들과 사귀어 다다이즘 시인으로서 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위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1917년 사티·피카소·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라드》, 《지붕 위의 황소》, 《에펠탑의 신랑 신부》등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시·음악·회화·무용 등의 총화를 꿈꾸었다. 그 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연극에 있어서도 역사·풍속·탐정·발레 등으로 여러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 마술사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작 전념 시기를 거쳐, 1926년부터 극작으로 되돌아와 등 고전적 명작의 현대화를 시도했다. 1930년 코메디 프랑세즈의 상연종목이 된 를 비롯하여, 그 후 모든 장르와 모든 테마를 이용하여 재기(才氣)에 넘치는 작품을 차례로 발표해 나갔다. 등이 그 대표작이다. 1930년 전위적인 작품 《시인의 피》로써 본격적으로 극 영화 제작에 나섰다. 1955년 프랑스 예술원 회원이 되고, 프랑스 문화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작품으로 소설 《사기꾼 토마》, 《무서운 아이들》, 희곡 《지옥의 기계》, 《무서운 어른들》, 시나리오 《비련》, 《마녀와 야수》, 《오르페》 등이 있다. 장르를 넘나드는 화려한 예술적 역량은 한 장르 안에서도 갖가지 시도와 실험으로 다채로운 색채를 보여주고 있는데, 가령 희곡 장르만 하더라도, 동시대 예술가들(피카소, 마티스, 밀로, 에리크 사티, 스트라빈스키, 디아길레브 등)들과 협업하여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발레극, 오페라극(《퍼레이드》, 《지붕위의 황소》)을 시도하였는가 하면, 신화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발표하였으며(《오르페우스》, 《지옥의 기계》, 《앙티곤느》),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미학적 수술을 감행하여 새로운 셰익스피어를 선보였고(《로미오와 줄리엣》), 부르주아 연극과 낭만주의 연극, 자연주의 연극을((《쌍두 독소리》, 《성스런 괴물들》, 《무서운 부모들》 등) 시도하는 등 다양한 연극적 경험들을 보여주었다...=     Jean Cocteau 생애와 이력 1889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 북서쪽에 위치한 메종-라피트(Maisons-Laffitte)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연극, 영화 등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살 때 집을 떠나 콩도르세 고등학교(Lycée Condorcet)에 진학하지만 학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졸업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콕토가 19살이 되던 1908년에는 비극 배우 에두아르 드 막스(Édouard de Max)가 콕토의 시 발표회를 페미나 극장(le théâtre Femina)에서 개최하였다. 1909년 콕토는 자신의 첫 시집 『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을 출간하였으며, 이듬 해에는 두번째 시집 『 경박한 왕자 』(Prince frivole)을 출간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29년에는 소설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요절한 작가 레이몽 가디게(Raymond Radiguet)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미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세계 1930년 장 콕토는 중편영화 (Le Sang d’un poète, The Blood of a Poet)를 연출한다. 콕토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와 편집까지 담당한 이 영화는 4부로 구성된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 초현실주의적인 영화는 샤를르 드 노아이유 자작(Le vicomte Charles de Noailles)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는데, 자작은 이 영화 외에도 또 한 편의 초현실주의 영화의 대표작인 루이스 부뉴엘( Luis Buñuel) 의 (L'Âge d'or)를 후원하기도 했다. 는 애초 애니메이션으로 기획되었으나 실사 영화로 제작되었다. 는 콕토의 또 다른 대표작 (Orphée, Orpheus, 1950)를 예견하는 작품이다. 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로 옮겨 온 작품으로 상징적인 이미지와 시적인 대사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인의 피 Le Sang d’un poète 장 콕토는 1953년과 1954년 2년간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5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l'Académie française)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10월 11일, 자신의 친구인 가수 에디프 피아프(Edith Piaf)가 사망한 지 몇 시간후 심장마비로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영화사적 평가 콕토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러시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S. P. Diaghilev), 발레니노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 현대음악가 에릭 사티(Erik Satie),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전방위적인 예술활동을 펼쳤다. 등 그가 연출한 영화들은 당시 문화 전반을 휩쓸었던 초현실주의의 영향 아래 놓인 작품들이다. [Daum백과] 장 콕토 – 근현대 영화인사전,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김이석/차민철,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목차 개요 유산과 젊은시절 라디게의 영향 1940년대의 영화 제작 장 콕토 (Jean Cocteau) 프랑스의 극작가, 시인 개요 대표작으로는 시집 〈천사 외르트비스 L'Ange Heurtebise〉(1925), 희곡 〈오르페우스 Orphée〉(1926)·〈지옥의 기계 La Machine infernale〉(1934), 소설 〈무서운 아이들 Les Enfants terribles〉(1929), 초현실주의 영화 〈시인의 피 Le Sang d'un poète〉(1930)와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ête〉(1946) 등이 있다. 유산과 젊은시절 콕토는 파리에서 성장했으며, 말투·교육·사고방식·습관 등에서 언제나 자신을 진정한 파리 사람으로 여겼다. 그의 집안은 명실상부한 파리의 부르주아 계층에 속해 있었고, 그런 집안답게 교양이 넘치고, 부유하고, 음악·미술·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은 극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기억은 서커스나 고급 유흥장에서 펼쳐지는 흥행물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고,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되는 진지한 비극의 형태로 남아 있기도 했다. 19세에 그는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를 출판했다. 콕토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해 동안 말하자면 정치적 혼란이 전혀 없이 세련된 예술적 취향이 장려되던 시절의 산물이었다. 그가 무대 예술에 실질적인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였다. 콕토가 발레극을 쓰고 싶다고 의견을 밝히자, 당시 러시아 발레단 감독을 맡고 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나를 한번 놀라게 해보라"(Étonne-moi)라고 응수했다. 이 한 마디는 결국 젊은 시인으로 하여금 〈파라드 Parade〉(1917, 에리크 사티가 곡을 붙임)·〈지붕 위의 황소 Le Boeuf sur le toit〉(1920, 다리위스 미요가 곡을 붙임) 같은 발레극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품도 쓰게 만든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유명한 한 마디는 그의 연극과 영화에도 종종 인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콕토는 벨기에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이때 관찰한 풍경은 나중에 그의 소설 〈협잡꾼 토마 Thomas l'imposteur〉(1923)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조종사 롤랑 가로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공중 비행에서 영감을 얻은 초기 시집 〈희망봉 Le Cap de Bonne-Espérance〉(1919)을 그에게 헌정했다. 1916~17년에 그는 당시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현대 예술계에 이따금 출입하면서, 파블로 피카소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와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같은 문인들을 사귀었다. 라디게의 영향 전쟁이 끝난 직후 콕토는 나중에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 레몽 라디게를 막스 자코브의 소개로 만났다. 천재로 소문나 있던 16세의 소년 라디게는 단순성과 고전적 명증성의 미학을 옹호했는데, 이때 라디게가 주장한 미학은 뒤에 콕토 자신의 작품의 특성이 될 만큼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라디게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34세의 장년인 콕토는 사상과 용기와 열정을 끊임없이 공급해주던 우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연인이 죽고 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한 콕토는 아편에 빠져들었고, 이때문에 그는 일정 기간 요양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 철학자인 자크 마리탱이 요양소로 그를 찾아왔다. 이 신학자를 통해 콕토는 짧은 기간이나마 그리스도교로 귀의했다. 이 복합적인 체험은 그의 삶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고, 그 기간 콕토는 그의 가장 중요한 몇 작품을 썼다. 장시 〈천사 외르트비스〉에서 시인은 한 천사와 격렬한 다툼을 시작하는데, 이 천사는 뒤에도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여 콕토와 싸움을 계속한다. 1926년에 처음 무대에 올려진 〈오르페우스〉는 당대의 연극에서 비극을 부활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이 작품에서 콕토는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나름의 해석을 심화했다. 1929년 3월의 3주일 동안에 완성한 소설 〈무서운 아이들〉은 폴과 엘리자베스라는 두 남매를 통해 사춘기의 거칠 것 없는 특성을 파고들어 연구한 작품이다. 1950년에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거기에 따른 해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 〈시인의 피〉를 제작함으로써 활동 영역을 넓혔다. 영화로는 첫번째인 이 작품은 그 자신의 정신적 체험을 다룬 것으로, 주제는 그당시만 해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으나, 그후 다른 작품들을 통해 종종 표현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덜 사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주제로 느껴진다. 1930년대초에도 그는 흔히 그의 대표적 희곡으로 평가되는 〈지옥의 기계〉에서 그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다룬 바 있다. 이 두 작품에서 그는 인간성의 위대한 주제에 보다 가깝게 다가갔다. 1940년대의 영화 제작 1940년대에 콕토는 영화 쪽으로 다시 돌아와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다음에는 영화감독으로 뛰어들어, 동화를 각색한 〈미녀와 야수〉와 그 자신이 희곡에서 다룬 바 있는 시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재창조한 〈오르페우스〉(1950)를 제작했다. 당대의 중요한 시각 예술가로서 콕토는 1950년에 생장카프페라에 있는 '빌라 산토 소스피르'의 실내 장식을 맡았고, 일련의 중요한 그림 제작에도 착수하여 망통에 있는 시청사, 빌프랑슈쉬르메르에 있는 생피에르 예배당, 밀리라포레에 있는 생블레즈데생플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프레쥐에 있는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은 그가 74세에 죽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끝나 양자인 에두아르 데르미(화가로 나중에는 영화계에서도 활동함)가 맡아서 작업을 계속했다. =========================== -[장 콕토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1916 무희(舞姬) / 쟝 콕토      게는 발 끝으로 걸어 나온다 두 팔로 꽃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귀 밑까지 찢어진 듯한 웃음을 짓는다.  오페라의 무희는 꼭 게 모양을 닮아 색칠한 무대 뒤에서 두 팔로 원을 그리며 나온다.     너의 웃음은 / 쟝 콕토    장미꽃 잎의 가장자리처럼 위로 잦혀진 네 미소는 너의 변신(變身)에 원망스럽던 내 심사를 달래 준다. 너는 잠이 깨어 이제는 꿈은 잊어버렸다. 나는 또다시 너의 나무에 매어진 몸이 된다. 너는 제 작은 힘을 다하여 내 몸을 얼싸안는다. 우리는 어째서 나무가 되지 않는가, 한 껍질 한 체온(體溫), 한 빛깔의 나무가, 그리고 우리들의 입맞춤이 그 나무의 유일의 꽃이 되지 않는가     나의 시풍(詩風)이--- / 쟝 콕토   이 시집의 시풍이 전과 다르다 해도 오호라,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 나는 항상 시를 기다리기 힘들어 그저 오는 것을 붙잡는다.   독자여, 뮤즈 시신(詩神)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같아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를 무대로 삼아 움직이는 저들의 깊은 책략을 나로서는 추측할 수가 없다.   나는 저들이 내 머리 속에서 춤추며 맺었다 풀었다 혹은 중단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저들의 법을 쫓는 길 외에 별다른 무모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   장 콕토, 그의 연인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의 드라마틱한 애정행각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부르조아 출신의 젊은 장 콕토가 발레를 감상한 후 디아길레프를 찾아가 자신도 발레곡을 쓰고 싶노라 말했다. 그러자 러시아의 이 천재 발레 프로듀서이자 니진스키의 삶을 뒤흔든 대단한 호모인 디아길레프는 다소 거만하게 말했다.  "나를 놀래켜보게 Etonne-moi." 아마도 디아길레프는 장 콕토가 후에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해지리라는 사실을 그 순간 짐작이나 했을까? 나중에 장 콕토는 디아길레프가 자신에게 이때 던진 '나를 놀래켜보게'라는 말을 '오르페우스' 등의 희곡 대사로 즐겨 사용하게 된다.  장 콕토는 1, 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식자층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집약하는 독특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발레곡, 희곡, 소설, 영화 등 그의 능력을 다방면에서 확인한 놀라운 천재임에 분명할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후대 작가들에게 기묘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에릭 사티, 디아길레프와 연결된 발레곡, 당대 한창 창궐하던 초현실주의적인 연극, 피카소와의 우정, 그의 몽환적인 삽화들, 케네스 앵거 등의 전위 작가에게 영감을 부여한 그의 실험적 영화들, 평생의 친구이던 에디트 삐아프와 같은 날 함께 죽은 운명 등 소위 장 콕토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사 '그의 삶이 곧 예술이다!'를 증명하듯, 그의 인생은 화려한 파노라마로 점철되어 있다.  또 장 콕토는 게이였다. 그의 패션 감각은 당시 프랑스 패션을 선도할 만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람들은 재즈가 고요히 흐르는 30년대 씨시 바에 가만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는 세일러 복의 해군을 감상하는 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데생 작품들 중에는 당시 해군들에 관한 것들이 많다.  또 처녀작 '시인의 피'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은 신화적 원형에 호모 에로티시즘이 채색된 가장 훌륭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장 콕토의 평생 애인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애인은 20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인 레이몽 라디게.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던 라디게를 장 콕토가 만난 건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라디게는 16세였다. 장 콕토는 첫눈에 라디게에게 반하고 말았다. 콕토는 당장 라디게에게 줄 반지를 주문 제작했다. 세 가닥으로 꼬여진 '삼환반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복사되었다는 그 유명한 반지가 바로 라디게와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장 콕토가 제작한 것이다.  장 콕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라디게는 2년 여에 걸쳐 그의 짧은 필생의 역작인 '육체의 악마'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곧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신고전주의를 대변하는 역작으로 열렬히 환영받았고, 후에 장 콕토의 작품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잦은 음주와 피폐한 생활로 레이몽 라디게는 스무 살 나이에 장디푸스로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던 장 콕토는 심한 자기 학대와 아편에 빠져 버렸고, 결국 요양원에 실려가고 말았다.  장 콕토는 라디게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한다'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라디게를 줄곧 따라다니며 그를 즐겨 그렸던 장 콕토의 삽화는 그에 대한 애정이 애틋하게 묻어 있다. 그는 잠자는 라디게 삽화 밑에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하다'라고 적어 놓았던 것이다.  만일 철학자 마르탱이 요양원으로 찾아가 그를 카톨릭으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장 콕토의 인생은 거기에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카톨릭에 귀의했던 장 콕토는 그 속에서 신화적 모티브를 찾아냈고,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보다 더 비의적으로 변해갔다. 라디게를 그리워하며 써내려갔던 그의 걸작 소설 '무서운 아이들'과 그 소설 모티브가 일부분 차용된 영화 '시인의 피'의 일부분은 라디게에게 바치는 그의 사랑의 소네트였다.  이후 왕성하게 창작 활동에 몰입하던 장 콕토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26세의 마르셀 킬, 그가 바로 콕토의 두 번째 남자였다.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던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마약과 사랑 둘 다를 충족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영감까지 부여한 걸로 알려져 있다. 빈센트 킬은 콕토에게 그의 평생의 멋진 마지막 모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80일간의 세계 여행.  '80일간의 세계 일주'로 유명한 쥘 베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된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처럼 세계를 일주해보자는 거였다. 콕토는 이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현지에서 소식을 바로 글로 써서 보낸다는 조건 하에 그는 '파리-수아르'라는 잡지사에서 후원을 얻어냈다.  실제로 이 여행에서 콕토와 킬은 각각 필리어스 포그와 파스파르투 역을 맡고 있다. 당시 46세였던 콕토는 내기의 주체였고, 26세의 마르셀 킬은 여행에 수반되는 실질적인 흥정, 환전, 운반 등 육체적 힘이 필요한 하인의 역할을 맡았다. 예술가 입장에서 세계 곳곳의 광경을 음미하는 '80일간의 세계 일주' 곳곳에 마르셀 킬에 대한 애정이 또한 녹록치 않게 배어 있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게이임을 떳떳하게 공언하고 다닌 콕토이니만큼 그의 곁에는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돋보이는 그의 평생 연인은 단연 레이몽 라디게, 그리고 마르셀 킬이었다.  평생을 예술과 함께 살아온 장 콕토는 연애마저도 다소 드라마틱했으며 그의 삶이 하나의 멋진 향연이자 즐거운 퍼포먼스였음을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74세 나이로 죽기 전까지도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을 하던 콕토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 샹송의 대모인 에디트 삐아프가 죽은 몇 시간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2063    프랑스 시인 - 생 종(존) 페르스 댓글:  조회:4067  추천:0  2017-04-10
    생 종 페르스   출생 1887. 5. 31, 과들루프 생레제레푀유 사망 1975. 9. 20, 프랑스 프레스킬드지앵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외교관. 본명은 MarieRen-Auguste-Alxis Saint-Lger Lger.   1960년에 '시의 드높은 비상과 생생한 회화적 형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보르도와 파리의 대학에서 공부한 뒤, 1914년에 외교관이 되었다. 중국으로 가서 상하이 주재 영사와 베이징 주재 서기관을 지냈으며, 1921년에는 동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가했다. 그 후 정치가인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비서(1921~32)가 되었으며, 1933년에는 대사급인 프랑스 외무부 사무국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에 비시 정권이 그를 공직에서 해임하고 프랑스 시민권까지 박탈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국회도서관에서 프랑스 문학 담당고문으로 일했고 1957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가 정식으로 외교관이 되기 전에 발표한 초기 시로는 상징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찬가 Éoges〉(1911)가 있다. 그후에는 좀더 개성적인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특히 정확함과 순수함 때문에 시인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그의 시 언어는 매우 까다로워서, 일반대중에게는 별로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그의 시는 흔히 랭보의 시와 비교되었다. 그는 최면 상태에 빠진 듯한 환상을 기도서와 같은 운율과 특이한 어휘로 전달하고 있다. 초기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장시인 〈원정(遠征) Anabase〉(1924)이다. 망명시절에 쓴 시 〈망명 Exile〉(1942)·〈바람 Vents〉(1946)·〈항로 표지 Amers〉(1957)·〈연대기 Chronique〉(1960)·〈새 Oiseaux〉(1962) 등에서 그는 매우 개성 있는 문체를 구사했다. 어떤 사람들은 생 종 페르스를 프랑스 국민정신의 화신으로 생각한다. 즉 지적이면서도 열정적이고, 삶의 비극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완벽과 균형에 대한 예술가적 감각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그의 시 가운데 영어로 옮겨진 것은 〈나는 비둘기 나무 옆에 내 말을 세웠다〉·〈그리고 그대, 바다여〉·〈청동색 나뭇잎 아래서 수망아지가 태어났다〉 등이다. ==================================     원정(遠征) / 페르스     1 세 위대한 계절 위에 영예롭게 포진(布陣)하며 나는 나의 법을 세운 이 땅의 전도(前途)가 탄탄하리라 점친다.   아침에 무기들은 아름답고 또한 바다도: 우리들의 말에 맡겨진 이 편도(扁桃) 열매 없는 땅은 맑고 변함없는 이 하늘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손색이 없다. 태양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나 그 힘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 그리고 아침의 바다는 정신의 오만함과 같다. 힘이여, 너는 우리들의 야간 행군길에 노래 불렀다 --아침이 한창 퍼진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의 상속권자인, 꿈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아직 일 년 동안 그대들과 함께! 곡식의 주인, 소금의 주인으로, 그리고 공사(公事)는 공평의 저울로! 나는 다른 기슭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리라. 나는 산비탈 위에 산호(珊瑚)의 백사(白沙)로 도시들의 구역들을 긋지 않으리라, 허나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 계획이다. 천막(天幕) 입구에 높은 영광 있으라! 나의 힘은 너희들 가운데! 그리고 소금알같이 순수한 관념이 대낮에 회합한다     ---그런데 나는 너희들의 꿈의 거리에서 자주 나타나 인적 없는 장터에서 내 영혼의 순수한 교역을 결정하 는 것이었다. 너희들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그리고 재빨리 마치 강품 속의 가시나무 불같이 힘이여, 너는 우리들의 장도(壯途)에서 노래 불렸 다--- "정신의 모든 창(槍)날은 소금의 단맛에 황홀하며 ---나는 소금으로 욕망의 죽은 입을 소생케 하리라! 목마름을 찬양하며 모래밭의 물을 투구로 떠마시지 않은 자와의 영혼의 교역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그리고 태양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나 그 힘은 우리들 가운데 있다).   인간들, 먼지 같은 자들과 또 가지각색의 인간들, 상인과 한가한 자, 변두리 사람과 타처 사람, 아, 이 고장의 기억 속에 아무 무게도 없는 자, 골짜기와 고원에 사는 자, 우리들의 기슭의 말단에 사는 자: 징후(徵候)와 종자의 냄새를 맡는 자, 그리고 서방(西方)의 숨결을 듣고 보는 자; 발자취와 계절을 쫓는 자, 새벽의 미풍에 장막을 걷는 자; 오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이유를 찾는 자, 오, 그 이유를 얻은 자, 그대들은 이 때보다 더 강력한 소금을 사지 못한다. 즉 아침에 왕국들과 죽은 듯한 바닷물이 높이 이 세상의 연기 위에 걸려 있는 예조(豫兆) 가운데 유배의 북소리 가 변경에서 모래 위에서 하품하는 영원을 깨울 이 때.   * ---청결한 옷을 입고 너희들과 더불어, 아직 1년 동안 너희들과 더불어! "나의 영광은 바다 위에, 나의 힘은 너 희들 가운데! 우리들의 운명에 약속된 다른 기슭에서 오는 이 소슬 바 람은, 저울대에서 그 정점(頂點)에 이른 세기의 광휘를 시대의 파종을 넘어 저 먼 곳으로 싣고 간다----" 소금의 떠 있는 얼음에 매달린 수학! 시가 자리잡는 나의 이마의 예민한 점(點)에 나는 불멸의 배들을 조선 창(造船廠)으로 끌고 가는 나는 가장 도취된 한 민족 전 체의 이 노래를 새긴다.   *'Anabase'란 진군(進軍) 또는 원정이란 뜻이 있다. 역사상으로는 사이러스 2세가 이끈 그리스 용병대의 중앙 아시아 원정이 유명하며 또 이 장시(長詩)와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 시집 은 전후 두 편의 노래 와 10편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 게재한 것은 그 제1편이다.  전체적으로 어느 군단이 대륙의 연안을, 그러나 황무지와 고원을 넘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일면 파괴하며 일면 건설하며 진군하여 마른나무라는 도착지까지 이르는 군사적 원정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는 모험에 대한 인류의 끝없는 도전, 영원한 것, 상승, 확대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갈망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1편은 도시를 건설할 땅에 정복자가 도착한 장면이다.  생-존 페르스는 유년기의 회상을 담은 를 발표한 지 13년 만에 이 서사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가 외무성 재직시의 일이다.  이 장시는 그의 다른 모든(초기 작품은 제외) 작품같이 난삽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어구와 표현이 산재해 있 다. 이 점이 노벨 문학상과 세계의 여러 위대한 작가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경원시되고 일반 에게는 읽혀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인류적이며 문화사적인 서사시는 그 방대한 구상, 백과 사전적인 해박한 지식과 아울러 간소하 며 강력한 리듬, 고양(高揚)된 억양과 변화 있는 문체로 프랑스의 옛 서사시에 견주어지고 있다.       시인이 증언한 것은--- / 페르스     시인이 증언한 것은 이렇듯 극한적인 순간에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망(待望)의 극한점에서 누구도 방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라! "탄생되는 날이 황홀함--- 새 술이 이보다 더 진 실될 수 없으며 새로운 삼베가 이보다 더 신선할 수 없 으니---   이방인인 나의 입술 위에 느끼는 이 월귤의 맛은 무 엇인가? 이는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며 이상한 것인데? ---   서두르지 않으면 나의 시는 해방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 순간에 탄생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밖에 없다. (이는 마치 제주(祭主)가 새벽 제사(祭司)를 드리기 위해 한계단 한 계단 안내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와 같다. - 삭발한 머리와 맨손, 그리고 손톱에 이르기까지 빈틈 없이 차리고 - 그의 존재의 향기로운 이파리가 낮의 첫 햇살에 발하는 메시지는 매우 빠를 것이다.) 그리고 시인도 우리와 함께 그의 시대의, 인간의 길 위에 있다. 우리들의 시대의 흐름에 쫓아, 이 큰 바람의 흐름에 따라,   우리들 사이에 그의 사명; 주어진 메시지를 명료히 하는 일, 그리고 심정의 계시에 의하여 그의 마음 속에 주어지는 응답.   쓰여진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 생동하는 사물 에서 직접 얻은 것이며 전체적인 것.   복사된 것이 아니라 원본의 보존, 그리고 시인의 기술(記述)은 조서(調書)를 따른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기술된 것들도 또한 변하 리라고 - 문제의 장소; 이 세상의 모든 모래 사장들)   "드디어 나는 나타나리라, 잃어버린 숫자여!--- 너무나 많은 기대가 우리들의 청각의 기능을   무디게 하지 않기를! 어떤 불순함도 시각의 문턱을 더럽히지 않도록!---   그리고 시인은 아직 우리와 함께 있으니, 그 시대 사람들 가운데, 그 시대의 악을 지닌 채----   낙인 찍힌 자의 침상에서 자고 나서 그로 인해 온통 얼룩이 진 자와 같이 엎질러진 기름 속을 걸어 흠뻑 더러워진 자와 같이 꿈으로 부패된 인간, 성스러운 것에 감염된 인간,   스키타이* 인처럼 대마초 연기 속에 취함을 찾는 자 들이 아니라                     *스키타이: 기원 전 6~3세기에 걸쳐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활약한 이란계의 기마 민족                                     새나 짐승 무늬를 청동기에 새기는 등의 독자적인 문화를                                     확립했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초원 지대의 여러 유목 민                                     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가지의 식물 - 벨라돈나나 사리풀에 중독되는 것도 아니며   아마존의 사람들이 먹는 올로기의 둥근 씨앗을 냄 새 맡는 자도 아니며   사물의 이면(裏面)을 나타나게 하는 빈자(貧者)의 칡뿌리, 야게나 필루 풀도 아니고   자신의 명철한 정신을 주시하며 자신의 권위에 민 감하며 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대낮같이 명 확하게 견지하는 자.   "이 부르짖음! 신의 날카로운 부르짖음! 그것이 우리들을 방 속에서가 아니고 군중의 한가운데서 붙잡도 록   그 소리는 군중에 의하여 전파되어 우리들의 지각(知覺) 의 한계점까지 울려 퍼지기를----   자기의 열매를 찾아 끈적끈적한 담벽 위에 그려진 새벽이 우리들의 이 강렬한 소망을 흐리게 하지 못하리 라."   그리고 그 시인은 아직도 우리들 가운데 있다---- 이 시간, 아마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 시간, 아니 바로 이 순간, 이 찰나!--- 그런데 우리는 이 순간에 태어나기에는 너무나 짧 은 시간밖에 없다.   "---약속 자체가 숨결이 되는 이 기대의 극한적인 시점에서,   그대는 스스로 숨을 죽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보는 자에게 기회가 있지 않을까? 듣 는 자에겐 그 응답이?---   시인은 아직도 우리들 가운데----아마도 마지막일 이 시간---바로 이 순간--- 이 찰나!   -"이 부르짖음, 우리들 위에 신의 날카로운 부르짖 음!   *이 시는 그의 주요 작품의 하나인 의 제 3 제 6가(歌)이다. 생-존 페르스는 바람, 비, 눈 등의 자연 현상을 주제로 한 몇 편의 시집을 펴내었다. 에서는 우주 현상이 가진 무한한 힘과 이것이 인간의 생활-문명- 문화가 가지는 관계를 우화나 신화처럼 다루고 있다. 시인은 바람을 땅과 인간과 시와 정신을 창조하는 근원적 인 힘으로 보고 노래하고 찬양하고 있다. 여기 제 6가(歌)가 발췌된 제 3편에서는 이러한 창조적인 바람과 인간 과의 협력 관계가 취급된다. 따라서 에서 정복자의 동료들과 같은 인간 문명의 선구자들에 대한 열거가 전개 된다. 자산가, 상인, 법률가, 성직자, 개혁자, 과학자, 집제사(執祭司) 등등이다. 이 가운데 시인은 특수한 위치에 있다. 시인은 극한적인 간구에서 증언하기 때문이다. 제 6가에서는 시인과 시, 특시 시가 탄생하는 최고의 그리고 최후 의 순간에 대한 시인의 증언을 나타내고 있다. 시인은 현실 배후에 숨어 있는 시, 생동하는 사물 자체이며 전체적인 것 을 붙잡으려는 정신의 최후의 순간에 대하여 그 긴박성, 찰나성을 증언하고 있다.     생-존 페르스(1887~1975): 1960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생-존 페르스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모국인 프랑스에게서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더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현대 시인 가운데 가장 많이 외국어로 번역된 시인의 하나다.  그는 쿠바 동쪽 과들루프라는 프랑스 령(領) 섬에서, 프랑스의 오랜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귀공자와 같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11세 때 온 가족과 더불어 프랑스 서남단의 포(Pau)시로 이주하였는데 이 곳 중고등 학교에서 프랑시스 잠, 발레리, 라르보 등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또 잠의 소개로 그의 집에서 클로델과 알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젊은 페르스는 클로델과 같이 자기도 장차 외교관이 될 뜻과 시를 쓸 의욕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후 보르도 대학으로 진학하여 법률 공부와 함께 시의 창작도 병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수십 편의 시를 써서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적도 있으나. 1911년 여러 친구들의 권고와 주선으로 라는 첫 시집을 낸 것이 그의 문학 활동의 첫걸음이었다. 이 시들은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에서 지낸 그의 유년 시기의 생활과 그의 머리에 비친 어린 시절의 신선하고 이국적인 풍물에 대한 회상, 바다, 종려나무, 꽃 선풍(旋風), 원주민들의 풍습 등을 다채롭고도 섬세하게 그린 것이다.  1914년 외무성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중국 북경 공사관에 파견되어 서기관으로 약 5년 동안 근무하며, 일본, 한국, 몽고, 중앙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로 돌아와 외무성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유명한 정치가이며 외무 장관이던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중요한 보조자가 되어 1920년대에서 20년 동안 그는 외무성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맡았고 최고 실무 책임자인 외무 차관으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에도 일면 창작 생활을 계속한 듯하며 1924년 생레제 레제라는 필명으로 이라는 장시를 발표하였다. 이는 호메로스의 와 같은 모험과 정복의 서사시이나 전설과 현실과 꿈이 뒤섞인 신화(神話)와 같은 작품이다.  1940넌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6월 14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페탱 원수가 비시 정부를 수림함에 이르러 페르스는 6월 16일 보르도에서 배를 타고 처음에는 영국으로 갔으나 다시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는 미국 정부의 호의로 워싱턴의 국회 도서관에서 프랑스 어 자문 의원으로 일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2년 비로소 생-존 페르스라는 필명으로 를 1944년 , 1945년에 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인간 존재의 고뇌를 극복하려는 철학적인 시이거나 혹은 바람-비 등 자연적인 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우주적인 서사시로 방대한 구상과 장중한 음률, 박학 심오한 지식으로 위대한 시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영국-미국의 시인-비평가들로부터 높은 인정을 받고 있으며, 영국의 엘리어트는 일찍부터 그의 작품을 소개-번역하였다.  1944년 전쟁의 종식으로 그는 40년에 박탈당했던 프랑스 국적과 영예가 복권되었으나 1958년이 잠시 프랑스에 귀국하였을 뿐 계속 워싱턴 근처에 살며 시작과 연구 그리고 카리브 해와 뉴 멕시코 등지를 여행하며 지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바다와 사랑의 무한성을 찬미한 . 시간을 정복한 인간과 지구의 위대함과 영원함을 노래한 등이 있다. 이 해에 그는 프랑스 대사로 복권되고 그의 전작품에 대한 노벨상이 수여되었다. 이후에도 시의 창작 활동이 계속되어 1963년에는 13가(歌)로 된 를 출간하였고 1975년에는 몇 편의 장시를 모은 시집 를 내놓았다. 이는 그의 최후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는 이 해 지중해의 지앙 반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존 페르스는 넓은 뜻에서 자연 시인이다. 자연과 세계는 그에게 있어서 늘 경이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는 쉬지 않고 여행하며 보통 사람보다 훨씬 광대한 세계에 살았다. 이미 그의 초기 작품인 에서 자연에 대한 영광의 노래를 불렀고, 에서도 중앙 아시아 지방 유목지의 풍물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착과 동경을 그리고 있다. 또한 빛과 색체와 동식물이 넘쳐 흐르는 땅과 세계는 그에게 있어서 늘 신선한 놀라움과 신비의 근원이었다. 대지를 비단같이 감싸주는 눈, 때에 따라 부는 바람, 우주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바다 등은 그의 시의 영원한 원천이었다. 그는 자연을 무한히 또한 쉬지 않고 찬양한다. 현대시의 조류가 세계와 자연을 멸시하고 저주하는 경향과는 극히 대조되는 태도이다. 그러나 시인 생-존 페르스는 자연을 그리는 데 있어서 서정(抒情)이나 감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구성할 뿐 아니라 자연의 현상과 힘을 인간의 역사와 운명, 인류의 문화와 문명과의 관계에서 다룬 점에 그의 작품의 깊은 뜻이 있다. 또한 언어와 리듬의 장중함, 다채로움, 풍부함, 다양한 이미지와 불가해(不可解)한 상징이 곁들어 그의 작품의 위대함과 신비함과 또한 난해함을 이루고 있다.    
2062    미국 시인 가수 밥 딜런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4633  추천:0  2017-04-03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밥 딜런       이름 밥 딜런 (Bob Dylan) 출생시 이름 로버트 앨런 지머맨 (Robert Allen Zimmerman) 출생 1941년 5월 24일 (만 75세), 미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 국적 미국  직업 싱어송라이터, 시인, 화가 학력 미네소타 대학교 중퇴[3] 신체 171cm 배우자 사라 딜런 (1965 - 1977)  캐롤린 데니스 (1986 -1992) 자녀 마리아[4], 제시, 안나, 사무엘, 제이콥, 데지레이 (3남, 3녀) 활동 1959년~ 데뷔 1962년 1집 레이블 유니버설 레코드[5] 주요 수상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1990)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1991)  케네디 센터 공로상 (1997)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 상 (2000)  폴라음악상[6] (2000)  골든글로브 주제가상 (2001)  퓰리처상 표창상 (2008)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7] (2012)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13)  노벨문학상 (2016) 서명   링크  [8] 공식 사이트   노벨문학상 수상자    2015년   2016년   2017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밥 딜런 →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주제가상     제72회  (2000년) → 제73회  (2001년) → 제74회  (2002년) 필 콜린스  (타잔) → 밥 딜런 (원더 보이즈)  → 랜디 뉴먼 (몬스터 주식회사)      역대 그래미 시상식 [9]   올해의 앨범상 제39회 (1997년) → 제40회 (1998년) → 제41회 (1999년) Falling into You - 셀린 디온 → Time Out Of Mind - 밥 딜런 →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 로란 힐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주제가상 수상작 제51회  (2000년) → 제52회  (2001년) → 제53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U2 (갱스 오브 뉴욕)   1. 개요2. 생애 2.1. 조안 바에즈와의 인연2.2. 음악 활동2.3. 노벨 문학상 수상 3. 평가와 영향력4. 여담5. 비틀즈와의 관계6. 종교7. 디스코그래피8. Traveling Wilburys9. 저서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입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합니다. ― 스티브 잡스 (2006년 8월, 발표회에서) #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같은 거인은 없다. ― 버락 오바마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화가이자 시인이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10]으로, 지금쓰는 밥 딜런은 예명이 아니라 법적으로 개명한 본명이다.[11] [12]. 밥 딜런은 미국 포크, 록 음악의 거장, 대중 음악사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의 하나이자 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전설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명이다. 수 십년동안 현재까지 음악, 문화의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13] 그의 가사는 광범위하게 정치, 사회, 철학적, 문화적 영향을 통합한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반전운동, 반문화운동,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늘 불편해 하여 음악 스타일, 대외적인 이미지를 몇년 단위로 바꾸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대 시국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하지 않고[14] (그를 접한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앞 뒤 연결이 힘들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이는 등[15] 대중과 언론의 기대를 아랑곳 않는 행보를 보여왔던 탓에 영미권에서는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전술한 것 못지 않게 강하다. 2016년에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로 가수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 생애[편집] [16] 1941년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중산층 자녀로 태어났다.[17] 어렸을 때부터 행크 윌리엄스,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의 광팬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엔 로큰롤 밴드를 조직하여 여러 번 공연을 했었다. 이 당시에 그가 속한 밴드는 다른 스쿨 밴드보다도 매우 시끄럽게 연주했다고 하며, 한번은 교장 선생이 마이크 줄을 끊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18] 미국에선 여러가지 이유로 로큰롤 배척 분위기가 팽배해져[19] 우디 거스리의 포크 음악과 흑인 전통 블루스에 관심을 돌리고 근처에서 밥 딜런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1년에 뉴욕으로 올라와 카페에서 반주를 하고 간간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이 때 그는 우디 거스리의 병실을 찾아가 그를 간병하며 초기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1962년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한다. 2.1. 조안 바에즈와의 인연[편집] 여기에 따르면 1961년 1월 딜런이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도착했을 동갑내기 조안 바에즈는 이미 "포크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딜런의 2004년 자서전에 따르면 딜런이 처음으로 TV에서 바에즈를 보았을 땐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눈을 깜빡이기조차 싫었다 (중략) 그녀의 모습에 난 한숨만 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 악령을 쫓는 목소리. 하느님에게 직접 노래하듯한 목소리 (중략) 못하는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1961년 바에즈는 딜런의 공연을 보고 별로였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63년 바에즈는 아직 무명인 딜런을 자신의 공연에 불러 듀엣도 하고 솔로의 기회도 주기 시작하였다. 만명에 달하는 관객은 딜런의 낯선 스타일에 야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과 더불어 딜런의 인기는 바에즈를 추월하였고 이제는 바에즈가 딜런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1965년 유럽 공연을 떠난 딜런은 초기 바에즈가 준 도움에 보답을 하고 싶다며 바에즈를 초대하였으나 이미 인기가 몰락해버린 바에즈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였고, 바에즈는 큰 상처를 입은 채 2년간 이어진 그들의 로맨스를 끝내고 말았다. 이후에도 늘 저항 가수로서 활동하던 바에즈는 딜런에게 다시 돌아오라며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던 딜런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수차례 합동 공연을 통해 인연을 이어갔고, 바에즈가 자서전에서 딜런을 엄청나게 씹어댔지만 현재는 서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바에즈는 딜런의 노래만큼 부르기 즐거운 음악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에즈와 결별한 해 밥 딜런은 비틀즈와 조우하면서 서로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고 대마초도 전수해준다, 폐쇄적인 포크 소사이어티를 벗어나서 서로 다른 장르들이 융합하는 포크'록' 아티스트로서의 행보를 걷게 된다. 2.2. 음악 활동[편집]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이었다.[20][21] "Blowin' In The Wind",[22][23]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24][25] 등의 명곡이 쏟아져 나왔으며, 시적이면서 정치적인 깊이가 있는 가사와 모던 포크의 간결함을 수용한 이 앨범은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이 앨범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밥 딜런이 되고자 했다.[26]  하지만 그는 곧 혼자서 통기타와 하모니카만으로 포크를 연주해야만 하는 상황과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질리게 되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유명해진 이후부터 자신을 저항의 기수로 띄우려는 움직임을 상당히 불편해 했는 데, 이런 감정을 후술할 Bringing It All Back Home 이전에 내놓은 포크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My Back Pages에서는 그땐 너무 늙었고 지금은 더 어려졌다고 비유하면서 정치색에 물들어 설교 스타일의 노래를 발표한 과거의 자신을 꾸짖는가 하면, To Ramona에서는 노래 가사 속에 등장하는 연인[27]에게 죽어가는 것들을 어찌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집단 정치적인 포크 운동 자체를 비판, It Ain't No Babe에서는 나는 당신들이 바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이 움직임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선언했다. 더군다나 이 앨범을 발표할 즈음에 포크 관련 행사에서 포크 팬들과 좌파 성향의 인물들 앞에서 '트롤링'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그 중엔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서 나의 일면을 본다[28]는 식의 발언은 그야말로 충공깽. 이 와중에 신은 딜런에게 비틀즈를 선사했다. 더불어 신은 비틀즈에게 딜런을 선사했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비틀즈는 심도있는 가사[29]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가진 에너지와 환희에 매료되었다.[30] 딜런은 후배 밴드인 "버즈(Byrds)의 "Mr. Tambourine Man"과 자신의 앨범인 "Bringing It All Back Home"을 통해 록을 시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본격적으로 포크 록에 도전한다. 그리고 기존 포크팬들에게 쌍욕을 먹기 시작한다. 당시 포크 씬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를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가 포크의 순수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5년 5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전기 기타를 드는 것으로 그들의 믿음을 배신했다.[31] 하지만 딜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8월 "Highway 61 Revisited"를 발표했다. 오히려 포크의 대부 우디 거스리는 "젊은 사람이 하겠다는 것이 바로 미래이다"라면서 딜런을 옹호했다. 이 앨범은 여러모로 밥 딜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선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간보기를 했던 포크 록을 본격적으로 완성시켰으며, 가사 역시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Dave Marsh)'는 이 앨범을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최고라고 평하면서, "이 무렵 그의 영향력은 너무도 확산되어 정말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언어 하나 하나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32]고 말했다. 수록곡 "Like A Rolling Stone"은 6분이라는 파격적인 곡 길이와 비의적이지만 신랄한 가사, 당시로서는 복잡한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싱글차트 2위에 올라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도 밥 딜런 커리어 중 으뜸으로 자리잡고 있다. 앨범전곡을 가사번역하신 분이 계신다.# 1966년에 발표한 "Blonde on Blonde" 역시 큰 찬사를 받았고, 작품성으로는 그의 정점이라 평해진다. 밥 딜런은 저 세 장의 앨범으로 천하를 제패했다. 하지만 앨범 발표 뒤에,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나 크게 다친 그는 잠시 세간의 눈을 피해 요양하게 된다. 이는 사실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먼과 짠 계획이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던 딜런은 그로스먼과 신비주의 전략과 가정을 위하여 일부러 크게 다쳤다고 발표하기로 하고, 그가 다쳤단 소식이 들리자 딜런의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다.  복귀 이후 그는 히피 운동이 한창이였던 1960년대 말을 "John Wesley Harding", "Nashville Skyline"[33], "The Basement Tapes"[34]같은 앨범을 녹음하면서 어쿠스틱과 컨트리에 집중하는 인상을 보였다. 이렇게 대중과 평단의 기대와 Self Portrait(1970)와 Dylan(1973) 같은 딜런의 이미지에 안맞는 전설적인 똥반을 발표하는 등[35] 어긋나는 행보에 미묘한 반응을 얻던 차에 이혼 직후인 1975년 발표된 'Blood on the Tracks'으로 다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앨범과 'Desire'[36]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한다. 종교 때문이었다. 1970년대 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한 밥 딜런은 1979년 "Slow Train Coming"이라는 가스펠 음반을 내놨으며 그래미 상도 타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밥 딜런은 기독교에 심취함을 넘어 전도사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전도사 생활 비중을 늘리면서 예전보다는 덜한[37]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정규적인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으로 1980년대를 보낸다. 허나 발표한 앨범들의 퀄리티가 전성기보다 못해서 이 시절은 그의 암흑기로 불린다. 정확히 콕 집어서 말하자면 백 밴드 놔두고 당대 유행인 뉴웨이브를 어정쩡하게 도입하려고 했다가 안 좋은 평을 받았다고.[38] 그 와중에도 기억될 만한 음악적 경력을 꼽자면 미국의 유명 뮤지션 25명이 녹음한 자선음반인 "We Are The World"의 녹음 참가 정도(...) 그래도 별다른 휴지기 없이 꾸준히 공연 돌고 반전 운동에 참여하긴 했다. 별로 눈에 안 띄는데다 상대적으로 걸작이라 할만한 앨범이 없어서 그렇지 1989년 "Oh Mercy"로 지금까지의 암흑기를 떨쳐버리고 재기의 가능성을 내비친 그는 1997년 "Time Out Of Mind"로 확실히 재기에 성공한다. 지금도 3~5년 터울로 꾸준히 음반을 내놓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적인 뿌리 (블루스, 포크)를 찾아 회귀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다룬 '스탠더드 팝' 앨범을 발표했다. 2.3. 노벨 문학상 수상[편집]   그의 작품을 통해, 밥 딜런은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Horace Engdahl (전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총장)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상 이유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 링크 1996년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제안으로 버지니아 군사대학교 교수 고든 볼이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한 이래 해마다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이름이 거론되긴 했지만, 2016년 진짜로 수상하게 됬다. 1993년 토니 모리슨 이후 23년만에 미국인이 받는 노벨문학상이다. 문인이 아닌데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경우는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인 윈스턴 처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의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범주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 같은 뛰어난 소설을 남겼다.">[39] 가수로서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40] 하지만 2016년 10월 19일 현재,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으며, 노벨위원회는 밥 딜런에게 연락을 포기했고 측근에게만 수상 사실을 알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사르트르처럼 노벨상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상태다.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에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10월 28일,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상을 받겠다고 했지만# 다른 약속이 있다는 사유로 불참을 선언했으며, 어떤 약속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기사도 있다.# 특히, 시상식 불참을 선언한 이후 비판적 시각이 늘어났다. 하지만 밥 딜런을 비판하고 있는 해당 조선일보 기사는 '아무 근거는 없지만, 필자는 전 세계 재계와 언론계를 꽉 잡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김이 이번 노벨문학상 선정에도 작용했다고 본다. 밥 딜런은 본명이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인 유대인이다. 공교롭게도 뉴욕타임스의 딜런 수상 기사에는 비판적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는 지극히 인종 차별적이고 편협적인 내용이다. 기자 본인이 인정했듯 아무 근거도 없는 비난을 기사로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밥 딜런은 문학인이 아님에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문학계의 반발은 단순한 엘리트주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생을 언어를 이용해 고도의 철학과 메시지를 담는 데 바치는 수많은 문학인들과, 이들을 연구해온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 있는건 사실이다. 딜런은 노벨상 시상식에 수락 연설문을 보내며, 다른 사람이 대신 연설한다고 밝혔다.# 그 다른 사람은 아지타 라지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대독하였다. 연설문에서 "만약 누군가가 내가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 가능성이 달에 서 있을 확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수상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이어서 "자신을 극작가로 여겼던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쓸 때만 해도 '역에 잘 맞는 배우는 누구일까' 등 다른 많은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라며 '내 작품이 과연 문학인가'라는 것은 그가 가장 하지 않았을 질문이라고 언급했고, 딜런 자신도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적 시도를 하고, 삶의 일상적 문제를 다루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다며 '내 노래들이 과연 문학인가'라는 질문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노래를 문학으로 여겨준 한림원에 감사를 전하며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버나드 쇼, 헤밍웨이 등 문학 거장들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함께 이름을 올리게 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을 한 가수 겸 작가 패티 스미스는 딜런의 노래 'A Hard Rain's A-Gonna Fall'를 선곡했다. 3. 평가와 영향력[편집] 에스콰이어 1965년 9월호 표지. 밥 딜런과 말콤 X, 피델 카스트로, 존 F. 케네디의 얼굴을 1/4씩 배치했다. 60년대 초중반 딜런의 가사가 얼마나 크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는 지를 알 수 있는 짤방. 정작 본인은 이걸 보고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냐고 질색했다. 밥의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밥의 가사를 읽어봐야 한다. 그것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다. 밥이 되어 노래를 하면 어느 누구도 평범하게 노래할 수 없다. 가끔 난 내가 곡을 만든 것처럼, 나인 것처럼 그의 곡을 노래한다. 난 밥과 같이 가사를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날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 지미 헨드릭스     나는 그를 존경했고, 나는 그를 많이 존경했다. [41] ― 존 레논, 1970년     And now Dylan has entered that pantheon, shoving against the boundaries of the definition of ‘literature’ just as he pushed past so many borders in music. 밥 딜런은 이제 신전에 올랐다. 음악에서 수많은 경계를 밀어냈듯이 '문학'의 정의라는 경계를 힘차게 밀어내면서. LA 타임스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중략)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임진모, 1999년   대중 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전설이자 포크를 현대 예술로 탈바꿈시킨 역사적인 인물. 밥 딜런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현대 음악사 최정상에 위치한다. 롤링 스톤은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 2위[42]에 꼽았고 2015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1위로 꼽기도 했다.# 음악 통계 사이트인 어클레임드 뮤직에서는 비틀즈에 이어 역대 아티스트 랭킹 2위를 기록했다. 딜런이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노랫말때문이다.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밥 딜런에 대한 가사를 감상하고 분석하는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 1970년대부터 영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하는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 시작했고, 문학계 일부에서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재는 대학 강의에서 밥 딜런의 노랫말이 문학 텍스트로 활용됨은 물론, 다른 문학가들과 동등하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내세운 이유 역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로, 시인으로서 밥 딜런의 공로를 인정했다. 또한 영문학 분야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선집으로 알려진 『노튼 앤솔러지』에도 딜런의 가사가 실려 있다. 〈스페인산 가죽 부츠(Boots of Spanish Leather)〉가 『노튼 시선집(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2005)에,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이 『노튼 문학 입문집(Norton Introduction to Literature)』(2010)에 수록됐다.  과학자들까지 그의 가사를 논문에 인용을 많이 해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시인 랭보를 좋아했고 지금의 이름도 영국 시인인 딜런 토머스에게서 따올 정도로 시와 가까이 있었다. 때로는 가사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저항정신을 담으면서도 사회와 인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시대와 주류에 맞서는 저항성에 예술성이 더해지면서 그의 노래의 진정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창법도 때로는 음정과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읊조리듯 불러[43] 아티스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존 레논 역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얘기밖에 몰랐는데 그의 음악을 듣고 나서 인생, 사회, 종교에 대한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 보헤미안들의 성지였던 그리니치 빌리지에 정착한 그는 우디 거스리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포크 커뮤니티의 정치적 성향을 받아[44] 저항적,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띤 포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1962년 밥 딜런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존 해먼드에 의해 컬럼비아레코드에서 데뷔앨범을 낸 후, 1963년 《프리휠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비롯한 〈전쟁의 지배자들Masters of War〉[45] , 〈궂은 비가[46]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 등 지금까지 불리는 수많은 곡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으로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이었으면 블랙리스트라 카더라 실제로 저 앨범을 내놓을 즈음에 예정되어 있던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이 거기서 부르려던 노래가 문제가 되어[47] 직전에 취소가 된 일이 있었다. 자신의 또다른 우상은 골반 춤 출 때 하반신은 안비추는 걸로 타협을 봤는 데... 1960년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맞붙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동서로 분할되고,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각축장이 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제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제국 어디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저항이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의 현실을 가장 적확하게 노래한 사람이 바로 밥 딜런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이러한 가사들로 밥 딜런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 반전가수로 인식되었다. 딜런은 장르적으로 포크, 록, 컨트리, 블루스에 걸쳐있으며, 포크록을 창시해 1960년대 청춘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포크록의 전형을 보여준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 앨범은 포크의 저항성과 록의 마이너(하위문화)를 결합한 것이다.  는 70년대의 가수들 이를테면 폴 사이먼, 닐 영, 도노반, 돈 맥클린, 조니 미첼[48] 등을 팝 역사는 다른 말도 아닌 '딜런의 자식들'로 분류했다. R.E.M., 벡에서부터 징징거리는 기타 소리의 메탈 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뮤지션들을 '딜런의 후예'라고 일컬었다. 유명한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그의 앨범을 연구한 저서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음악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대중음악의 정신혁명과 관계한다. 그의 음악은 20세기 모더니즘의 가장 강렬한 분출이다. 이 점을 빼놓고는 왜 그의 음악과 앨범이 명작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여기까지 읽고도 '도대체 이 사람이 뭐길래 이리 잘났다고 호들갑인가' 라고 생각한다면 임진모의 평을 읽어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밥 딜런의 노래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팝과 락 등의 대중음악 감상에 있어서 아마추어로는 거의 최고의 수준에 올라갔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의 노래들은 그만큼 미적으로 뛰어나지만 이해하기도 어렵다. 4. 여담[편집] 엄청난 워커홀릭이다. 1962년 앨범 발매 이후 최소 2~3년안에 무조건 앨범을 냈다. 이렇게 앨범을 자주 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작품의 퀄리티를 계속 유지한다. 가장 오래된 공백기는 2001년 'love and theft' 발매 후 5년만에 'modern times' 앨범을 낸것이다. 2015년, 2016년엔 2년 연속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가 가장 존경한 인물중의 한명이다.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말한적도 있다. 딜런이 녹음한 773곡 전곡이 담긴 디지털 패키지 세트를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판매하기로 했는데 상품의 출시를 알리면서 잡스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영화 ‘스티브 잡스’의 대니 보일 감독은 “그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반골로 부르며 우상화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딜런이 잡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애플 초창기 잡스는 100시간 분량이 넘는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다. 월터 아이잭슨이 저술한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와 애플 초기의 스티브 워즈니악은 딜런 팬으로서 마음이 맞았다.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 뒤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딜런과 상봉했다. 잡스의 전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딜런의 방 앞쪽 테라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잡스는 긴장했지만 그의 우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정말로 허심탄회하고 솔직했다.”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2004년 10월)뿐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1984년 매킨토시를 공식 발표할 때 스티브 잡스는 연설 첫머리에 딜런의 ‘세상이 변하고 있네(The Times They Are a-Changin’)’ 중 둘째 행을 인용했다.   ‘저술가와 비평가들은 오라 / 펜으로 예언하는 사람들 / 눈을 크게 뜨고 보라 /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 바퀴는 여전히 돌아간다 / 그리고 예측할 수 없다 / 누구의 이름을 부를지 /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자가 될 것 /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알다시피 가사 쓰는 실력을 보면 과연 보통이 아니다.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촌철살인적인 발언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잡게 했다.[49] 하지만 그런 인기와 달리 그의 행동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면모가 많았다. 이런 독단적이고 개인적인 행동들 때문에 인생사가 심각하게 우여곡절이 많은 편이다. 이혼도 자주 했고, 마약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불화도 심했다.   딜런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외적인 이미지와 행동양식 면에서도 동시대 및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썬글래스를 쓰고 담배를 꼬나물고 늘 티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방진 이미지와 수수께끼 같고 냉소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쿨한 락뮤지션 이미지의 원형을 만들어낸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역대 록 뮤지션들 중에 섹시한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 스타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지적인'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50] 특히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가 밥 딜런의 그런 이미지를 모방하며 이미지 스타일과 언행방식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점은 꽤 유명하다. 60,70년대에는 앤디 워홀과 관계가 있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2015년 20대 경관에게 노숙자취급을 받아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기도 했다.   90년대 번역 출판된 소설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비롯한 일본어 소설을 보면 밥 딜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인데, 이름이 보브 딜런으로 표기되어있다. 밥 딜런을 일본어 가타가나로 풀어쓴 걸 그대로 옮겨온 듯한 이 번역은 사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2001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심의를 거쳐 지금의 밥 딜런으로 고쳐졌다. 다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2001년 이후에도 여전히 보브 딜런으로 쓰는 사람도 꽤 있다.   90년대 초반에는 애플 컴퓨터 제품에 이름이 딜런이라는 것 때문에 소송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미국 언론에게도 딜런 토머스 지인들도 문제시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들었다.   외국에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동급의 본좌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번안된 "Blowin' In The Wind"가 국내에서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언어 문제와 앨범에 담긴 미국적인 향취 때문에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밥 딜런 자체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 그래도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 때문에 일반 대중의 밥 딜런에 대한 인지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   가창력 자체보다는 웅얼웅얼 읊조리며 부르는 독특한 분위기의 창법이 유명하다.[51]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If Not For You'나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Knockin' On Heaven's Door'[52]를 들어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2012년 작 "Tempest"에 수록된 "Duquesne Whistle"에선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창법으로 노래했다. 참고로 이것들은 노래와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목소리다. 지인들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미성의 소유자이며, Nashville Skyline에 나오는 목소리가 진짜 목소리에 가깝다고 한다.   2010년 3월 31일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열었다.   원피스 만화 연재본 572화의 제목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밥 딜런의 3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영화 왓치맨의 오프닝 곡으로도 쓰였다. 오프닝 영상은 원작에서 길게 소개되는 미닛 맨 소속의 과거의 히어로들의 역사를 20세기 미국사의 여러 장면들과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원작의 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요약해 보여줄 뿐 아니라, 노래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영욕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아가는 작중 히어로들의 상황을 잘 나타낸다.   첫째 부인에서 얻은 네 번째 자식인 아들 제이컵 딜런 또한 미국의 유명 밴드 '월플라워스(The Wallflowers)'의 리더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밥 딜런 정도의 전설은 아니지만, 아버지 후광 없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뜨고 나니 아버지가 밥 딜런이었구나 하고 알려질 정도. 1996년 앨범 Bringing down the horse, 그리고 이 앨범 최고의 히트곡 One Headlight는 상당히 유명하고 1998년 Time Out Of Mind로 아버지 밥 딜런이 그래미 앨범상을 받을 때 월플라워스 역시 락부문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앨범부터는 그만한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잇다. 활동은 중단하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하는 중. 밥 딜런이 심한 바람둥이었기 때문에 부자 간 사이는 좋지 않은 듯하다. 손자인 파블로 딜런은 래퍼로 활동 중인데, 할아버지나 삼촌과는 달리 철저하게 언더 활동 중이라 정보가 매우 부족한 편.   2013년 11월 13일 "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이 국내 정식 발매되었다. LP 미니어쳐로 제작된 정규 47개의 앨범들, 268쪽의 부클릿등 딜런의 음악을 귀로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구입해보도록 하자. Vol.1이라는 타이틀이 무섭게 느껴진다.   안 어울리게도 크리스마스 앨범도 냈다. 그런데 개봉 사진을 보아하니... 은근 밝히는 에로한 오야지 음반 평은 별로라고.   배우로도 아주 가끔씩 활동한 적이 있는 데,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이 있다.[53] 비중있는 조역인데 연기는 그닥(...) 감독 영화도 있는데 망했고. 10여년 이후 영화가 재발굴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Hearts of Fire이 혹평을 들은 이후로는 영 아니다 싶었는지 출연은 없다. 장난삼아 배우를 한 건 아니고,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로써 데뷔를 한 건 의외로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그것도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1963년에 BBC에서 만든 단편 영드 'Madhouse on Castle Street'에서였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존 포드와 찰리 채플린이라고. " 존 포드의 영화엔 용기와 용감한 행동과 구원 그리고 고뇌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찰리 채플린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조차 그렇다. 난 항상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 같다. "[54]   허영만의 1987년 작품 에도 나온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강토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반복해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이강토와 직접 만나게 되며, 이강토의 기타 실력에 빠져서 그의 멘토이자 프로듀서로 나선다. 이강토는 밥 딜런의 도움에 힘입어 전미를 석권한다. 실제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계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넘어 기축이 되었던 존재였다. 한국 포크록의 전설인 한대수도 밥 딜런의 창법과 스타일을 많이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든게 "행복의 나라"였다. 실제 그가 말하길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 등장에 씨앗을 뿌렸다라고 평한다.   2007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인 아임 낫 데어가 제작되었다. 감독은 토드 헤인스, 리처드 기어, 크리스천 베일, 히스 레저, 케이트 블랜칫, 벤 위쇼, 마커스 칼 프랭클린 6명의 배우가 각각 밥 딜런의 다른 모습을 연기하였다.   60~70년대 많은 유명곡을 뽑아내던 활동시절과 현재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 성향도 그렇고. 1980년대 이후 앨범들은 한국에서 그다지 잘 알려있지 않기 때문에 2010년 내한공연 때 예전 생각하고 보러 온 상당수의 관객들이 당황하기도 하였다. 본인은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팬들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2013년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모욕 및 혐오선동 건으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2012년 롤링 스톤 프랑스어판 인터뷰에서 '흑인들은 아직도 일부 백인들이 노예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노예 주인이나 KKK의 피를 갖고 있다면 흑인들이 알 수 있다는데 마치 유대인이 나치의 피를,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의 피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다.[55] 부디 하루빨리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여 크로아티아를 나치에 비유했다는 이유. 오프 더 레코드를 걸은 건데 그걸 어기고 기사에 실은데다가 특정 국가를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5. 비틀즈와의 관계[편집] 1964년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의 뉴욕에서의 만남이 성사된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서 비틀즈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었으나 비틀즈는 딜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딜런은 비틀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리화나를 선물로 준비한다. 이 만남은 이후 비틀즈와 딜런 상호간에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밥 딜런과 존 레논은 동갑내기다. 흥겹고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가사의 대부분이던 비틀즈는 밥 딜런의 노랫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65년부터 작사에도 큰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사에 멤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어 철학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가사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포크적인 요소도 수용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 출발점이 러버 소울(Rubber Soul) 앨범이다.   반대로 밥 딜런은 비틀즈의 다이나믹한 록큰롤 사운드의 영향력을 목도하며 과감하게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이런 그의 음악적 변신의 중심에 밥 딜런의 명곡, 'Like a rolling stone' 이 있다. 이 노래는 1965년 그의 세 번째 음반 < Highway 61 Revisited >에 실려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랐다. 밥 딜런, 비틀즈, 그리고 이 둘 모두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버즈(The Byrds), 이 세 뮤지션에 의해서, 종전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포크'와 '록'이 급속도로 융합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화학작용은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두 거물의 만남은 서로에게 엄청난 윈윈이 된 것이다.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과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관계를 쭉 유지했다. 6. 종교[편집] 밥 딜런의 종교적 회심에 대한 오해와 진실 1979년말 밥 딜런은 갑작스레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 나아가 이 때 발표한 세 장의 앨범 < Slow Train Coming >(1979), < Saved >(1980), < Shot of Love >(1981)에는 자신의 회심을 고백하고 신을 찬미하는 노래들로 채웠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전도자로 활동한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이런 충격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밥 딜런의 전기 작가인 로버트 쉘턴(Robert Shelton)에 의하면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대교 예식 참여는 물론 히브리어도 상당 수준으로 학습했다. 일부 언론과 평단은 늘 베일에 쌓여있던 그의 신비주의 전력을 근거로 그의 회심을 의심했다.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벌인 일종의 쇼라는 것이다. 더욱이 몇 년간의 뜨거운 전도활동 후 그는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으니 이런 의심이 생길만도 하다. 1970년 전후, 미국 음악계의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왜곡된 히피 정신을 가졌던 찰스 맨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배우 샤론 테이트(로만 폴란스키 감독 부인)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롤링스톤즈의 알타몬드 공연에서는 죄 없는 흑인 청년이 오토바이족 헬스 엔젤스의 칼에 맞아 죽었다. 패션이 된 약물은 수많은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위 '27클럽'의 '위대한 3J'(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가 약물중독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은 음악계에 흐르던 저항문화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대신 카펜터스, 캐롤 킹, 짐 크로취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노래가 사랑 받게 된다. 밥 딜런 역시 이 시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행복했던 결혼도 권태기에 빠졌다. 결국 밥 딜런의 외도로 아내 사라와 이혼했고 다섯 자녀의 양육권 역시 긴 소송 끝에 잃어버렸다. 또한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 Renaldo and Clara > 역시 평단의 지독한 혹평 가운데 실패했다.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 지독한 허무감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1970년대 밥 딜런은 시적 은유가 가득한 노랫말의 확장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계속했다. 당시 그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자신의 의미가 무언지를 되묻는 사상적 고뇌가 두드러진다. 당시 밥 딜런은 '흑인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흑인 음악, 흑인 음식, 흑인 스타일에 흑인 애인까지. 부인과 이혼 후 그가 사귀었던 여성들은 모두 남부 출신 흑인들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코러스 싱어 케롤린 데니스(Carolyn Dennis)와 결혼해 여섯째 아이를 낳았다. 그녀 역시 흑인이었다. 한대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밥 딜런은 흑인들의 가스펠에 매료되었고, 그 안에 담긴 그들의 신앙에도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다가 1978년 밥 딜런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빈야드 펠로우쉽 처치'의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 교회가 속한 '빈야드 크리스천 펠로우쉽'은 은사주의적 성격이 강해 기독교에서 이단 시비까지 일으킨 바 있는 초교파 교회이고, 이적과 체험을 강조한다. 이 교회는 1990년대에는 '모던워쉽'을 주도하며 기독교 음악계에 큰 획을 그었다. 지금도 미국 뿐 아니라 국내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빈야드가 발표한 노래들을 예배 때 부르고 있다. 이런 '복음주의' 기독교는 보수적 교리와 사회관, 그리고 종말론적 가르침을 강조한다. 밥 딜런이 회심한 빈야드 교회 역시 그 특성상 이런 '복음주의' 그룹에 속한다. 이 교회에서 그는 존 듀이어 목사의 영향을 받으며 결정적으로 회심하고 세례를 받는다. 신약성서를 깊게 읽으며 자신의 공허한 일상을 위로하는 예수의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1979년 발표한 < Slow Train Coming >은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프로듀싱하고 다이어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가 기타로 참여하며 평단으로부터도 큰 찬사를 받았다. 제리 웩슬러는 빌보드지 기자 시절 처음으로 '리듬앤블루스'(R&B)란 용어를 사용했고, 1950-1960년대 레이 찰스와 아레사 프랭클린 등의 음반을 프로듀싱하며 흑인 음악 활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때까지 그의 수많은 히트곡들을 외면해 왔던 '보수적인' 그래미는 놀랍게도 이 앨범의 타이클곡, 'Gotta serve somebody'에게 그의 첫 번째 그래미상(최우수 록보컬 남자 부문)을 안겨주었다. 밥 딜런의 크리스천 삼부작 앨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종교적 회심의 진정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딜런은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자신의 노래들에 인용했다. 앨범 발매 이후 딜런은 1979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투어를 진행했다. 총 79회의 공연에서 그는 오직 새롭게 만든 종교적 노래만으로 세트리스트를 채웠고, 공연 중 신앙고백과 전도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 5월 투어를 마치며 그는 저널리스트 카렌 휴스(Karen Hughe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분이 언제나 나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적절한 때와 뜻을 이루십니다. 나는 바로 그분의 때에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1980년 11월부터 1년간 지속된 다음 투어에서는 공연 중 종교적 노래와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불렀고, 공연 전 대기실에서 세션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함께 낭송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 밥 딜런 평전 >(실천문학사, 2008)을 보면 당시 그의 회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후대에 기독교에 심취하게된 이유는 미국의 혼란스런 사회상에서 이데올로기도, 아니면 그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도, 전쟁을 찬성하는 국가지배층도, 반대로 반전을 주장하는 이도, 그들의 행동 양식은 결국은 성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밥 딜런은 빈야드 교회와 결별하며 자신의 회심에 대한 지속적인 고백이나 전도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 1982년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중단하고 다시 유대교로 복귀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아울러 그의 종교적 입장과 변화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앨범, < Christmas In The Heart >을 발매한다. 종교적 다원사회가 된 미국에서 "Merry Christmas"라는 인사는 공식적으로 “Happy Holiday”라고 표현한다. 2000년대 발매한 대부분의 캐롤 앨범도 “홀리데이” 뮤직으로 명명하지만 밥 딜런은 앨범에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표기하고, 선곡도 예수에 대한 찬미의 노래들로 채웠다.  그의 새로운 신앙의 노래는 의외로 2012년 발표한 앨범 < Tempest >에서 나타난다. 이 앨범에 수록된 'On Narrow Way'의 가사다. 나는 광야의 길을 걷고 있어요. 내 영혼의 안식처를 찾기까지. 나는 내가 뒤에 남겨지리라(left behind)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날이 저물어가던 때에 한 음성을 들었어요. “평안하라 형제여, 평안히 기도하라”  그것은 먼 길이죠. 아주 멀고 좁은 길이예요.  만약 내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나를 끌어내리겠죠. 7. 디스코그래피[편집] 연도 제목 1962 Bob Dylan 1963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4 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4 Another Side of Bob Dylan 1965 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 Highway 61 Revisited 1966 Blonde on Blonde 1967 John Wesley Harding 1969 Nashville Skyline 1970 Self Portrait 1970 New Morning 1973 Pat Garrett & Billy the Kid 1973 Dylan 1974 Planet Waves 1975 Blood on the Tracks 1975 The Basement Tapes 1976 Desire 1978 Street Legal 1979 Slow Train Coming 1980 Saved 1981 Shot of Love 1983 Infidels 1985 Empire Burlesque 1986 Knocked Out Loaded 1988 Down in the Groove 1989 Oh Mercy 1990 Under the Red Sky 1992 Good as I Been to You 1993 World Gone Wrong 1997 Time Out of Mind 2001 Love and Theft 2006 Modern Times 2009 Together Through Life 2009 Christmas in the Heart 2012 Tempest 2015 Shadows in the Night 2016 Fallen Angel 8. Traveling Wilburys[편집] 1988년 딜런은 비틀즈의 기타리스트였던 조지 해리슨, Pretty Woman으로 유명한 로이 오비슨, 톰 페티(Tom Petty), 제프 린(Jeff Lynne) 등 이름만 들어도 후덜덜한 친구들과 함께 트래블링 윌버리스(Traveling Wilburys)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한다. 초유명 음악가들이 프로젝트성으로 내는 슈퍼그룹의 원조다. Handle With Care 감상해보자. 9. 저서[편집] 바람만이 아는 대답 (자서전) [56][57] 타란튤라 (소설, 1971년 출간)   10. 관련 문서[편집]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포크   [1]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0,9263,7601980608,00.html[2] 표지에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밥 딜런이다.[3] 1959년도에 입학해서 1년만에 중퇴하였다.[4] 양녀[5] 2010년대부터 소속되었다.[6] 폴라음악상은 스웨덴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음악부문의 상이다. 노벨상과 같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스웨덴의 국왕이 직접 시상한다는 상징성과 권위로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기도 한다.[7] 미국의 대통령이 수여하는 상으로, 미국 의회가 수여하는 미국 최고의 시민상인 의회 명예 훈장과 나란히 한다. 수상식 당시의 일화가 있는 데, 다른 아티스트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사진찍으려고 안달났는 데, 밥 딜런은 선글라스를 쓰고 아주 무덤덤한 자세만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바마 본인은 이 모습을 보고 '역시 내가 생각했던 밥 딜런은 이런 사람'이라며 좋아죽었다.(...)[8] 밥 딜런 본인의 sns는 아니며 밥딜런 공식 홈페이지의 sns다.[9] 그래미 시상식의 가장 중요한 상들로 여겨지는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노래상, 최고의 신인상만이 기록되있다. 나머지 부문의 상들은 따로 문서 내 수상 목록에 수록해주길.[10] 밥(Bob)은 로버트(Robert)의 애칭이다.[11] 그 중거로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성씨가 '지머맨'이 아닌 '딜런'을 썼거나 쓰고 있다.[12] 첫번째 음반을 내놓을 시기에 밥 딜런으로 법적 개명. 본인의 말로는 딜런 토머스의 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딜런이란 이름 자체가 멋있어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13] He has been influential in popular music and culture for more than five decades.[14] 베트남 전쟁부터 9.11 테러까지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슈에 대해서 본인의 견해를 딱부러지게 언급한 적이 별로 없다.[15] 처음으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즈음엔 언론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기 사진이 잘 나오는 지 신경을 쓰는가 하면, 후술할 첫 일렉트릭 콘서트에서 청중들과 거의 싸울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듯 하다나 공연이 끝나니 관객 수가 몇명인지 묻는 등. 또한 부랑자를 연상케하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섬을 몇 개씩이나 소유한(거기다 현재 집 주소가 말리부다.) 부동산 부자다.[16] 이 사진은 자신의 포크음악 우상이던 우디 거스리가 찍은 사진을 오마주한 것이다.[17] 아버지는 그 지역 노동자들에게 가구, 가전제품을 팔고 외상을 받아내는 사업을 하여 집안이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는 데, 딜런은 이런 가정 환경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18] 음악 활동에 치중하느라 학업을 매우 소홀히하여 1년도 못채우고 중퇴.[19] 58년과 60년 사이에 재수없게도 로큰롤 업계와 관계된 비극적인 사건과 스캔들이 연달아 터져버렸다. 자세한 사정은 해당 문서를 참고.[20] 약칭으로 'The Freewheelin'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1] 앨범 표지에 등장하는 여성은 당시 딜런의 전 여자친구인 수지 로톨로(Susan Elizabeth Rotolo, 1943년~2011년)이다. 여담에 따르면 수지의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다고 한다. 굴러온 복을 걷어찬 셈[22] 포레스트 검프에서 제니가 '바비 딜런'이라는 예명을 달고 나체로 스트립바에서 불렀던 노래.[23] 앨범의 서두를 장식하는 히트곡이자 밥딜런을 대표하는 노래로도 손색이 없지만, 정작 훗날에는 가사가 너무 1차원적이라며 젊은시절의 자신을 셀프디스(...)하기도 했다.[24] 이 곡의 경우, 양병집이 "역(逆)"라는 제목의 한국어 개사곡을 내놓은 바 있다. (곡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번안곡이라고 할 수 없고 사실 상 밥 딜런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2차 창작에 가깝다.) 김광석은 이 곡을 리메이크하면서 제목을 가사의 첫 소절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바꿨다. 그리고 가사 일부가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시대착오적이라 김광석은 스튜디오 버전은 물론이고 공연때 마다 일부 가사를 바꿨다.[25] 앞의 두 곡은 발표 당시에는 혼성 포크 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리메이크곡이 훨씬 유명했고 상업적으로 더 많이 팔렸다. 이 곡들이 담긴 그룹의 스튜디오 앨범은 100만 장 가까이 팔려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사실 밥 딜런의 유명세는 가수 활동 자체보단 이 곡들에 담겨진 비범한 가사와 곡조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더 먼저 주목받는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정설.[26] 이는 태평양건너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며 포크를 위시한 저항적인 기류가 퍼지는 포크붐을 일으키기도했다. 김민기, 한대수 등이 대표적인 가수.[27] 정치적 대의에 동참하여 물들어가면서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을 은유한 것이다.[28]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으로부터 며칠 지난 시기에 열린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29] Help!에 수록된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나 러버 소울에서 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30] 정확히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큰롤 배척 분위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포크에 자리를 물려주고 숨죽이고 있었던 록 스피릿(...)이 비틀즈를 접하고 나서 다시 꿈틀댄 것에 가깝다.[31] 이런 배신(?)행위는 이듬해 5월 16일에 영국 맨체스터의 자유무역회관에서 벌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는 데, 관중들 중 누군가가 유다(Judas)!!라고 외치자 난 너희들을 믿을 수 없어. 너희들은 거짓말쟁이야.라고 화답한 뒤 밴드 멤버들에게 존나 시끄럽게 연주해(Play fucking loud)!라고 지시를 했다. 곧바로 연주하는 곡은 바로 이 각주 다음에 올 문장에서 설명할 앨범의 수록곡인 Like A Rolling Stone.[32]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가사가 한층 심오해졌다. 다만 가사가 생각보다는 어렵지는 않다고 한다. ...영어/문화 장벽은 제외하자.[33] 밥 딜런의 음반 중 유일하게 미성으로 녹음하여 청자들을 경악에 빠트린 것으로 유명하다.[34] 더 밴드와 작업한 앨범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것은 앨범을 위해서 녹음한 것은 아니고 오토바이 사고 후 은둔을 하면서 더 밴드의 멤버와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벌인 세션을 녹음한 것을 간추린 것에 가깝다. 녹음은 1967년에 끝마쳤지만 2년 후에 이 녹음들을 담은 'Great White Wonder'라는 제목의 해적판이 유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딜런 측이 이를 막고자 애를 썼지만 이미 틀려버렸는 지, 결국 좀 늦은 시기인 1975년에 이 세션의 일부에 약간의 오버더빙을 거쳐서 The Basement Tapes라는 앨범을 발표했다.[35] 둘 다 커버곡이 대다수를 이루는 앨범인데, 그 중 Dylan은 자작곡이라곤 하나도 없고 각종 매체에서 최하의 평점을 받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36] 살인 누명을 쓴 전설적인 복서 '허리케인' 루빈 카터의 이야기를 담은 Hurricane, 유독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곡인 One More Cup Of Coffee가 이 앨범의 수록곡이다.[37] 사실 6,70년대 시절 밥 딜런은 요즘 웬만한 슈퍼스타, 걸그룹 뺨치는 수준이었다.[38] 심지어는 커티스 블로우(힙합, 랩 역사의 태동기에서(소위 올드스쿨 힙합)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 중 한명으로, 래퍼로써 최초로 메이저 레코드 사와 계약한 인물이고, 대표곡인 The Break는 랩 음악 역사 상 최초로 후렴구를 사용하여 상업적인 히트를 기록했다.)의 곡 Street rock이란 곡 도입부에서 랩을 하는 충공깽 행보를 보였다.(...)[39] 역사학자인 테오도르 몸젠을 제외하고서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회고록'를 집필. 러셀은 수필을 많이 남겼고, 사르트르는 같은 뛰어난 소설을 남겼다.[40] 1990년대 이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올랐다는 소문도 있어왔지만 실제로는 수상하지 못했고 2016년에 도박사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수상자로 예상했다.[41] Wenner, Jann S. Lennon Remembers, Rolling Stone Press (2000) 148쪽[42] 1위는 비틀즈[43] 초창기 창법은 우디 거스리의 영향을 받았다.[44] 본인은 그리니치 빌리지에 안갔더라면 이런 노래들을 결코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45] 영국 중세 민요인 Nottamun Town의 멜로디에 딜런이 쓴 새 가사를 입힌 곡이다. 다만 딜런이 부른 곡조는 영국 출신의 미국 여성 포크 가수 겸 애팔래치안 덜시머 연주자인 진 리치(Jean Ritchie)의 편곡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리치 측과 합의 하에 3000달러를 물어야 했다.[46] 인터뷰에서 폭우까지는 아니라고 언급.[47] 노래 제목은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 정규 앨범에 수록되지는 않고 나중에 발매된 공식 부틀렉에 수록되어서야 빛을 본 곡이다. 극우 반공 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 일원이 빨갱이를 색출하는 데, 급기야 자신의 신변까지 훑어보는 신세까지 이른다는 내용.(...) 저런 걸 TV로 내보내겠다고?[48] 근데 이 사람은 밥 딜런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했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49] 다만 말 솜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사석에서 말수도 적었다고 한다.[50] 그래서 엘비스가 록의 엉덩이(혹은 골반)고 밥 딜런은 록의 두뇌라는 비유도 있다. 참고로, 밥 딜런 본인도 다른 당대 로커들이 그랬듯이 엘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1] 사실 밥 딜런과 같은 수준의 보컬리스트들은 노래를 못하는 것조차 하나의 미적 효과로 작용하게 된다. 애초에 멋지게 잘 불러야 듣기 좋을 노래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52] 그런데 현실에서 이 노래는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것으로 더 유명한 듯 하다. 오죽하면 존 본 조비가 "아가들아 GNR 노래가 아니라 밥 딜런 아저씨 노래란다" 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이니.[53] Knockin' On Heaven's Door'가 바로 이 영화 사운드트랙에 실린 곡이다.[54] #출처 기사 / #중앙일보 번역 기사[55] 이 발언이 나온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우스타샤 문서 참조.[56] 2004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고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다.[57] 원제는 Chronicle. 연대기라는 의미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국내 출판사에서 Blowin' In The Wind의 국내판 제목에서 따와 붙인 제목이다.   분류   시인   미국 가수   노벨문학상 수상자  
2061    노벨문학상 타고 침묵으로 일관하다... 댓글:  조회:3375  추천:0  2017-04-03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 팝가수 밥 딜런/AFPBBNews=뉴스1 미국 팝가수 밥 딜런이 마침내 노벨문학상 메달과 상장을 직접 받았다. 4월 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스웨덴 한림원은 이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딜런에게 노벨문학상 메달과 상장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스톡홀름 시내의 한 호텔에서 비공개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스웨덴 한림원 관계자 12명이 참석했다. 샴페인이 돌았고 딜런도 기뻐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발언은 전해지지 않았다. 시상식은 이날 딜런의 첫 스톡홀름 콘서트를 앞두고 열렸다. 그는 유럽 투어 일정을 스톡홀름에서 시작했다. 딜런은 이날 밤 1시간 반가량 이어진 콘서트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딜런은 지난해 10월 싱어송라이터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노래를 과연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많았다.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한동안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고 지난해 12월 시상식 만찬에도 선약을 이유로 불참해 빈축을 샀다. 다만 그는 지난해 시상식 만찬 때 대독된 연설문을 통해 자신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노래가 문학인지 아닌지 자문해본 적이 없다"며 "스웨덴 한림원이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과 훌륭한 답을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밝혔다.   =====================================   【스톡홀름=AP/뉴시스】문예성 기자 =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이 1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상을 받았다.  작년 10월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 수상자 발표 이후 약 4개월 만이다.  공연을 위해 스톡홀름을 찾은 딜런은 이날 소수의 관계자들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사라 다니우스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 등도 자리를 함께했다.  스웨덴 한림원 회원인 클라스 외스테르그렌은 "딜런은 매우 멋지고 다정한 사람이고, 행사는 무사히 잘 치러졌다"고 말했다.  딜런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초의 대중음악인이란 점에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그는 수상자 발표 뒤 약 2주간 침묵을 지키며 관련 소감 등을 밝히지 않아 수상을 거부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었다.  딜런은 한림원 측에 노벨상 수상 의사를 전하긴 했지만 작년 12월 열린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딜런은 이날 시상식에서 800만크로네(약 10억원) 상당의 노벨상 상금도 받았다.  그러나 상금을 받은 노벨상 수상자에게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강연과 관련해선 "추후 녹음 테이프 형태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한림원 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딜런은 오는 6월10일까지 노벨상 수상 관련 강연을 하지 않으면 받은 상금을 되돌려줘야 한다.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75·사진)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 넉 달 만에 뒤늦게 노벨상을 받았다.    AP통신에 따르면 딜런은 1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공연을 앞두고 공연장 인근의 한 호텔에서 노벨상을 받았다. 시상식은 딜런의 요청에 따라 소규모로 치러졌다.   노벨상 관계자는 “예상과 달리 시상식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면서 “딜런이 아주 예의바르고 친절한 태도로 수상에 임했다”고 말했다. 딜런 역시 상을 받은 뒤 아주 만족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딜런은 수상 상금으로 800만 크로네(약 10억원)를 받게 된다. 그가 상을 공식적으로 접수함으로써 5월 10일 전까지 의무 사항인 대중 강연에도 나설 것으로 보인다.  /구성찬 기자 
2060    스페인 시인 - 히메네스 댓글:  조회:3666  추천:0  2017-04-02
  출생 1881. 12. 24, 스페인 모게르 사망 1958. 5. 29,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국적 스페인 요약 주로 시인으로 유명하며, 어떤 사람과 그의 당나귀에 관한 산문인 〈플라테로와 나〉(1917)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195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살라망카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뒤 1900년 시인 루벤 다리오의 초청을 받아 마드리드로 갔다. 같은 해 〈제비꽃의 영혼〉·〈수련〉 등 그의 초기 시집 2권이 출간되었다. 결혼한 후 〈갓 결혼한 한 시인의 일기〉(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년 〈한 시인의 일기와 바다〉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서 그는 모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서 탈피해 형식적인 운율이 없는 더욱 순수한 성격의 자유시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이른바 '벌거벗은 시'로 이행해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39)중에 공화파와 제휴했다가 후에 자발적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하여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히메네스 195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살라망카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뒤 1900년 시인 루벤 다리오의 초청을 받아 마드리드로 갔다. 같은 해 〈제비꽃의 영혼 Almas de violeta〉·〈수련 Ninfeas〉 등 그의 초기 시집 2권이 출간되었다. 보라색과 녹색으로 인쇄된 이 2권의 시집은 너무나 감상적이어서, 말년에 크게 당혹한 히메네스는 인쇄본을 닥치는 대로 없애버렸다. 체력이 약했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마드리드를 떠났는데, 〈목가시 Pastorales〉(1911)·〈머나먼 정원 Jardines lejanos〉(1905)·〈순수한 엘레지 Elegías puras〉(1908) 등 이 시기에 출판된 시집들은 자유시로 개성과 주관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다리오의 영향을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 1912년 마드리드로 돌아와, 그후 4년 동안 레시덴시아데에스투디안테스에 거주했으며 이 교육기관에서 발행되는 간행물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1916년 뉴욕 시를 여행했고 힌두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제노비아 캄프루비 아이마르와 그곳에서 결혼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직후에 〈갓 결혼한 한 시인의 일기 Diario de un poeta reciéncasado〉(1917)를 펴냈는데, 이것은 1948년 〈한 시인의 일기와 바다 Diario de un poeta y mar〉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서 그는 모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서 탈피해 형식적인 운율이 없는 더욱 순수한 성격의 자유시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이른바 '벌거벗은 시'(la poesía desnuda)로 이행해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39)중에 공화파와 제휴했다가 후에 자발적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망명하여 이곳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주로 시인으로 유명하나,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과 그의 당나귀에 관한 산문인 〈플라테로와 나 Platero y yo〉(1917)가 번역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존 밀링턴 싱의 〈바다로 간 기수 Riders to the Sea〉(1920)를 함께 번역했다. 일생 동안 그는 엄청나게 많은 시를 썼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영혼의 소네트 1914~15 Sonetos espirituales 1914~1915〉(1916)·〈돌과 하늘 Piedra y cielo〉(1919)·〈운문시 1917~23 Poesía, en verso 1917~1923〉(1923)·〈산문과 운문으로 된 시 Poesía en prosa y verso〉(1932)·〈나의 노랫소리 Voces de mi copla〉(1945)·〈막다른 길의 동물 Animal de fondo〉(1947) 등이 있다. [Daum백과] 후안 라몬 히메네스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59    스페인 시인 - 미겔 에르난데스 댓글:  조회:4061  추천:0  2017-04-02
  출생 1910. 10. 30, 스페인 오리우엘라 사망 1942. 3. 28, 알리칸테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시인·극작가.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을 20세기의 주관성과 결합한 작품을 남겼다. 젊은시절 염소치기였던 그는 1936년 스페인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내란(1936~39)에 참가했다. 내란이 끝난 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국제적인 항의가 있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얼마 후에 31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그의 시의 두드러진 주제는 사랑, 특히 슬픈 성격의 사랑과 전쟁, 죽음, 사회적 불의 등이었는데, 풍부한 공고라(Gongora)풍의 양식으로 출발하여 내면적이고 단순해지다가 말년에는 비극적으로 변했다. 첫번째 시집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달의 감식가 Perito en lunas〉(1933)이며, 대부분의 소네트가 뛰어난 고전적 순수성을 지닌 비극적이고 서정적 가락으로 구성된 시집 〈끝나지 않는 번개 El rayo que no cesa〉(1936)는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시집 〈잠복하고 있는 사람 El hombre acecha〉(1939)은 전쟁과 감옥의 공포로 가득 차 있으며 독자를 우수에 빠지게 한다. 사후에 출판된 〈부재의 노래책 Cancionero y romancero de ausencias〉(1958)은 그가 굶주리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감옥에서 쓴 시와 자장가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정열과 슬픔으로 충만해 있다. 시 외에 내란중에 선전을 위해 제작한 몇 개의 단막극이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죽음의 목자 Pastor de la muerte〉(1938)이다. ==============================   비행   / 미겔 에르란데스       사랑하는 사람만이 날 수 있다. 그렇지만, 누가 그토록 사랑하는가? 가장 가볍고 날쌘 새처럼 될 만큼 사랑하는가? 곧바로 살아서 날아오르고 싶어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에 퍼진 이 증오가 가라앉아간다   사랑한다... 그렇지만 누가 사랑하는가? 난다..... 그렇지만 누가 나는가? 깃털에 목마른 푸르름을 나는 정복하리라 그러나, 확실한 용기 주는 날개가 없음을 사랑은 언제나 아래에서 슬퍼한다   불타는, 욕망으로 빛나는 날개 달린 존재는 오르고 싶어했다. 둥지에 자유를 갖고 싶어했다 사람이 줄줄이 멀어져감을 잊고 싶어했다. 깃털이 필요한 곳에 용기와 망각을 놓아주었다   이따금 너무 높이 날아 그 가죽 위로 하늘이, 아래로 새가 반짝이곤 했다 언젠가 네가 종달새와 혼동했던 존재 때로는 거친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던 존재.   타인들의 삶이 너를 가둘 무덤임을 너는 안다 너의 삶을 삼켜버릴 감옥임을 너는 안다 삶이여, 육체들 사이로 아름다운 철책들 사이로 지나가라 철책들을 통해, 마음껏 흘러들어라 즐겁게 치장하는 슬픈 기구   불을 탐내고 호흡하는 성급한 관(管) 계속되는 사용으로 부서진 칼 육체, 그 세계 속에서 꼭 닫힌 채 내가 펼쳐쳐있는 육체   너는 날 수 없으리라, 너는 날 수 없다 나를 속박하는 대기의 회랑 사이로 방랑하는 육체여 네가 아무리 기를 쓰고 올라가도 너는 조난당하고 말리라 너는 외치지 못하리라. 평원은 계속해 황량하고 말이 없다   팔은 펄럭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가슴이 창공에 던지고픈 꼬리이리라 피는 홀로 몸부림침에 슬퍼진다. 눈은 불행한 인식으로 슬퍼진다   잠든, 깨어있는 미친 도시들은 저마다 감옥의 침묵을, 날개가 될 수 없는 거친 초시류의 날개처럼 불타고 비 내리는 꿈의 침묵을 발산한다 사람이 누워있다 하늘이 올라간다 대기가 움직인다         * 미겔 에르난데스, , 솔, 1995.     * * *   * 드디어 이 詩를 찾아 읽는다, 최정례의 시집 (붉은 밭, 창비, 2001) 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잊었지만 헌책방에서 몇줄 그를 읽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런 시를 읽을 때마다 모국어가 아닌 모든 시에 대해 질투를 느낀다, 번역시의 어려움, 뉘앙스가 거세된 절반은 죽은 말들, 바벨탑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붕괴되고 있다. 한국어로 된 아름다운 시는 얼마나 많는가, 한국어로 되지 않는 아름다운 시들은 얼마나 광활한가, 러시아어, 불어, 일본어, 에스빠냐어, 독일어, 영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멕시코어,등으로 되어 있는 시름들. * 음악가들은 얼마나 유효한가, 그들은 악보만으로 천년의 시간과 천 오백리의 공간을 지나 순정하게 소통할 수 있다, 조율 한번에 몸서리치는 악기를 들고 만나는 음률들, 그런데 말은 왜 이렇게 찢어지는가, 왜 이렇게 텅 비었고, 부서지며 와전하는가. 나는 왜 그 파편을 붙들고 애증하는가. * 최정례의 시를 첨부한다. 미겔 에르난데스의 시를 읽으며 일 없이 현기증이 돌았다고 또한 첨부한다. 그런 날이 있다. 아무래도 그런 날.     * * *   비행기 떴다, 비행기 사라졌다       비행기 떴다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목요일은 한잠도 못 잤다 금요일은 하루 종일 잤다 토요일은 일요일은 사라졌다   서른살 땐 애 업고 전철역에 서 있었다 15만원짜리 카메라를 사서 할부금을 붓고 있었다 스무살 땐 레드옥스란 술집에서 울었다 연탄가스 먹고 실려갔다   비행기가 또 떴다 이곳을 뿌리치고 가느다란 휜 선을 남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날 수 있다 그렇지만 누가 그토록 사랑하는가? 라고 시작되는 시가 있었다 누구였던가 누구의 시였던가   그는 나가라며 등 뒤에서 문을 꽝 닫았다 그때 그곳은 처음 가본 곳이라서 어디가 어디인지 무작정 어두운 골목을 더듬어 내려오는데 비행기가 소리없이 구름 속으로 지고 있었다   전화가 오고 전화가 끊어지고 육체는 감옥이라서 달디단 크림케익을 먹고 몸은 부풀었다 육체의 창살 안에서 부풀었다   트럭이 거울을 싣고 가고 있었다 거울 속에 집들은 통째로 실려가다 기우뚱 골목을 제치고 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미겔 에르난데스의 시였다 너는 날 수 없으리라 너는 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기를 쓰고 올라가도 너는 조단당하고 말리라   비행기가 무거운 쇳덩어리가 무작정 떴다 하늘 가운데 금속의 섬이 되어 돌고 있다       * *  *   * 아니리/ 2005.04.10.               비행 미겔 에르난데스             사랑하는 사람만이 날 수 있다. 그렇지만, 누가 그토록 사랑하는가? 가장 가볍고 날쌘 새처럼 될 만큼 사랑하는가? 곧바로 살아서 날아오르고 싶어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에 퍼진 이 증오가 가라앉아 간다   사랑한다… 그렇지만 누가 사랑하는가? 난다…… 그렇지만 누가 나는가? 깃털에 목마른 푸르름을 나는 정복하리라 그러나, 확실한 용기 주는 날개가 없음을 사랑은 언제나 아래에서 슬퍼한다   불타는, 욕망으로 빛나는 날개 달린 존재는 오르고 싶어했다. 둥지에 자유를 갖고 싶어했다 사람이 줄줄이 멀어져 감을 잊고 싶어했다. 깃털이 필요한 곳에 용기와 망각을 놓아주었다   이따금 너무 높이 날아 그 가죽 위로 하늘이, 아래로 새가 반짝이곤 했다 언젠가 네가 종달새와 혼동했던 존재 때로는 거친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던 존재.   타인들의 삶이 너를 가둘 무덤임을 너는 안다 너의 삶을 삼켜버릴 감옥임을 너는 안다 삶이여, 육체들 사이로 아름다운 철책들 사이로 자나가라 철책들을 통해, 마음껏 흘러들어라 즐겁게 치장하는 슬픈 기구   불을 탐내고 호흡하는 성급한 관(管) 계속되는 사용으로 부서진 칼 육체, 그 세계 속에서 꼭 닫힌 채 내가 펼쳐져 있는 육체   너는 날 수 없으리라, 너는 날 수 없다 나를 속박하는 대기의 회랑 사이로 방랑하는 육체여 네가 아무리 기를 쓰고 올라가도 너는 조난당하고 말리라 너는 외치지 못하리라. 평원은 계속해 황량하고 말이 없다   팔은 펄럭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가슴이 창공에 던지고픈 꼬리이리라 피는 홀로 몸부림침에 슬퍼진다. 눈은 불행한 인식으로 슬퍼진다   잠든, 깨어있는 미친 도시들은 저마다 감옥의 침묵을, 날개가 될 수 없는 거친 초시류의 날개처럼 불타고 비 내리는 꿈의 침묵을 발산한다 사람이 누웠다 하늘이 올라간다 대기가 움직인다           - 미겔 에르난데스, {양파의 자장가}/솔   [Daum백과] 에르난데스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58    동요 "반달"의 작곡가와 그리고 룡정 댓글:  조회:3499  추천:0  2017-04-02
동요 “반달”과 작곡가 윤극영 그리고 룡정 (ZOGLO) 2017년4월1일  우리 민족의 한을 담은 동요《반달》은 항일가요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널리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 동요의 작곡가 윤극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음악대사전》,《중국조선족아동문학》등 문헌들을 참조하면서 우리 민족 음악교육과 아동문학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작곡가 윤극영에 대한 일화를 수집해 보았다. 이야기에 앞서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반달”의 가사를 적어본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건 새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작곡가는 1903년 9월 6일 경성(서울)종로구 소격동에서 아버지 윤정구(尹政求)와 어머니 청송 심씨(青松沈氏)사이에 1남 3녀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1917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2년 후인 1919년의 《3.1》반일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반일시위에 참가하였다. 1920년 윤극영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갑자기 중퇴하고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동료들과 함께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련락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건너간 윤극영은 일본 도꾜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한편 1923년부터는 방정환, 정순철 등 동료들과 함께 도꾜에서 어린이 문화재단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말 가사로 된 노래는 찬송가뿐이였고 나머지는 정부노래였다. "색동회"회원들과 윤극영(뒤줄 오른쪽 두번째) 윤극영은 조선 최초의 노래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하고 지도해갔다. 1924년 윤극영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을 그린 동요 《반달》을 창작하였다. 1924년에 동요《반달》은 조선 최초의 아동가요로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었으며 조선반도는 물론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도 재빨리 보급되여 나이 구별이 없이 아동이거나 성인이거나를 물론하고 모든이들이 널리 애창하는 동요로, 류행가로 되였다.  세계명곡 200수에까지 기록된 동요 《반달》이 창작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윤극영의 어린 시절에 극영이보다 나이가 10년 이상 되는 누님 한분이 경기도 가평군으로 시집갔다. 째진 생활난으로 하여 누님은 10년이 퍽 넘도록 한번도 집에 오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으로 세상떴다. 그때 누님의 나이는 30세밖에 안되였다. 윤극영은 그토록 보고싶던 누님의 죽음으로 하여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너무도 울어 퉁퉁 부은 두눈으로 멍하니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윤극영은 은하수같은 엷은 구름너머에 반달이 걸려있고 그 멀리로 새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윤극영의 머리에는 《반달》 악상이 떠올랐다. 윤극영은 즉시 가사를 써내고 곡까지 지어냈다. 그는 21세 어린나이에 천재적 음악재질로 최초의 가요를 세계명곡으로 탄생시킨것이다. 연변대학의 우상렬교수는 《이(반달) 동요는 전통적인 7.5조 가사에 달에 깃든 전설을 곁들여 천진란만한 상상속에서 일종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평하고있다. 한국의 《아동문학사전》에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우리 민족의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그린 이 동요는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였다.》고 적혀있다. 1924년에 처음으로 동요 《반달》을 조선 최초의 아동가요로 탄생시킨 후 윤극영은 《설날》,《고기잡이》,《고드름》,《따오기》등을 작곡하였다. 그는 1926년 조선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을 출간함과 동시에 같은 제목의 음반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윤극영은 일본의 간섭과 집탈이 심해지자 간도(지금의 연변) 룡정에 건너와 동흥중학, 광명중학, 고등녀자학교 등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약 10년간 음악을 가르쳤다. 1936년, 윤극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 음악활동을 하다가 193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면서 극장가수로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때 일본에 있던 윤극영은 룡정에 있는 안해 오인경을 그리면서 《두만강의 노래》를 지었다. 노래가 나오자 절찬을 받았다. 일본에서 지명도가 가장 높은 《요미우리》신문에서 《한국예술인의 도꾜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윤극영과 우리 민족 무용계 거목인 최승희(崔承喜)에 대한 특집을 싣기도 하였다. 1940년에 다시 중국에 온 윤극영은 북간도(지금의 흑룡강성) 할빈에 할빈예술단을 설립하고 만주(지금의 동북3성) 지역과 서울 등지에서 공연활동을 벌리려고 하였으나 일제놈들의 잔혹한 탄압으로 결국 해산되고말았다. 더는 예술단을 경영할수 없게 된 윤극영은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아동가요를 창작하고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광복을 맞이했다. 《하늘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풍운이 있고 사람의 인생은 조석으로 뒤바뀐다.》고 일본이 관여하는 협화조직에 가입한것이 죄가 되여 1946년 겨울에 그는 경비대에 체포, 룡정에서 비판 투쟁을 받고 사형판결까지 받게 된다. 이 대목 이야기는 연변주당위에서 촬영사로 활약하셨던 황범송선생이 2005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 저명한 작사자이며 작곡가인 가수 반야월(원명 박창오, “번지 없는 주막”, “울고 넘는 박달재”, “유정천리” 등 5000여수의 곡을 창작) 선생에게서 들은후 옮겨놓게 된 것이다. 황선생은 반야월선생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그의 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첫 이야기로 윤극영에 대해 문의하였다. 반야월선생은 《윤선생이 간도에 오래동안 계셨으니 모두 알고있나봐요. 세상뜬지 10년이 많이 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광복후 룡정에서 있은 사형집행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일파로 당장 사형에 처하게 된 윤극영은 마지막 유언을 이렇게 남겼다.“나는 생활난으로 일제를 위한 노래도 많이 지었고 상도 많이 타다보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 무슨 할말이 있겠소만은 지금 와 보면 공산당을 위해서도 공로를 세웠습니다. 한가지 남기고 싶은 말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도 내가 작곡한 동요들을 계속 불러준다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한 사형집행자가 “당신은 공산당을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했는가?”라고 묻자  윤극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 이 노래도 내가 지은것입니다.” 당시 룡정현 현장으로 지내던 문정일선생은 사형장에서 사형수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검토하던중 윤극영이 노래《반달》과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의 작곡가임을 확인하고 사형결정을 당장에서 취소하였다. 《죽이지 마시오. 그의 음악재질이 아깝지 않습니까? 이러한 인재들은 사상을 개조해서 유용하게 써야 합니다.》 문정일현장의 그 한마디에 윤극영은 사형선고를 피면할 수 있게 되였다. 윤극영은 3년 도형을 받고 연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얼마후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그 후 윤극영작곡가는 한국에 살면서 자기의 생명의 은인 문정일선생을 늘 외웠다고 한다. 1950년대 북경에서 김정평과 김철남 부자간이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하여 음반(音盘)을 내기도 하였고 1979년에 《반달》은 《하얀쪽배》(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문)통용 음악교과서에까지 수록되였다. 아동가요 선구자중의 한 사람인 불멸의 작곡가 윤극영은 1988년 11월 15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윤극영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는 우리 민족 어린이들과 어른들 할 것 없이 영원히 즐겨 부르는 명곡으로 울려퍼질것이다. / 김원범 //길림신문
2057    영국 계관시인 - 벤 존슨 댓글:  조회:3267  추천:0  2017-03-30
벤 존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벤 존슨 벤저민 존슨(영어: Benjamin Jonson, 1572년~1637년)은 17세기 영국의 시인·극작가.비평가로 윌리엄 세익스피어와 동시대에 활약한 문인이다. 1616년 계관시인이 되었다.   목차    1생애 2작품 세계           생애[편집] 1572년 6월 11일 런던의 교외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웨스트민스터를 졸업한 후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으나 캠딘 교장의 뛰어난 교육으로 자기 자신도 자부했듯이 셰익스피어나 '대학수재'들보다도 뛰어난 학식과 깊은 교양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활약했다. 가업을 돕기도 하고 군대에 들어가 대륙 전쟁에 참가도 했다. 귀국한 뒤에 연기자 겸 극작가가 되었다. 비극의 연기자로 당시의 손꼽히는 명배우였지만, 희극 《십인십색》(Every Man in His Humour)(1598년)으로 일약 스타가 되어 그때부터 극작에 전념하였다. 이 《십인십색》의 초연에는 셰익스피어도 연기자로 출연하였다고 한다. 《연금술사》(The Alchemist)(1610년), 《볼포니》(Volpone)(1606년), 《에피신》(Epicoene, or the Silent Woman)(1609년) 등이 대표적 희극 작품이며, 풍자희극인 《서투른 시인》(The Poetaster)(1601)은 데카가 이에 대한 반론의 희극을 썼으며 또한 그는 비극과 시에도 뛰어났다. 배우수업을 한 뒤 40년 가까운 창작생활을 통해 희극·희비극·풍자극·비극·가면극 등 다방면에 걸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코미디 오브 유머즈(기질희극)'의 창시자, 또는 일련의 풍자희극의 걸작으로 제임스 1세 시대의 대표적 극작가가 되었으며 영국의 연극사상에 이채를 띤 바 있다. 제임스 1세의 연금을 받아 사실상 최초의 계관시인이 되었다. 작품 세계[편집] 《십인십색》(Every Man in His Humour)(1598)이 대표하는 '기질희극'은 인간의 4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배합으로 결정되는 기질(예컨대 점액질, 담즙질 등)에서 생겨나는 각양각색의 성격을 유형화하고 그것들의 충돌이나 상호작용을 희화화한 것이나, 셰익스피어 희극과는 그 취향을 달리하는 신기함으로 당시 크게 인기를 획득했다. 그 후 《신시아의 향연》(Cynthia's Revels, 1600)이나 《서투른 시인》(The Poetaster, 1601)으로 데커와 싸움이 끊이지 않고 극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서도 반감을 사게 되어, 한때 비극 《세자누스의 몰락》(Sejanus His Fall, 1603)로 옮겼으나 끝내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아 《검은 가면》(The Masque of Blackness, 1604) 이후 20여년 동안 궁정 가면극의 제1인자로서 군림했으나 그의 본령은 신랄한 비판정신에 바탕을 둔 풍자희극 분야에 있으며[1], 《볼폰》(Volpone, 1606), 《연금술사》(The Alchemist, 1610), 《에피신(침묵의 여자)》(Epicoene, or the Silent Woman, 1609) 등의 걸작이 크게 성공하였다. 후기의 대표작 《바톨로뮤의 시장》(Bartholomew Fair, 1614)은 당시 런던에서 열렸던 정기 시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시정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린 파노라마풍의 대작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 가면극 이외는 부진하여 찰스 1세 시대의 작품도 실패작이 많다. 그의 입장은 셰익스피어, 말로 등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흘러넘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당시의 주류에 대하여 삼일치의 법칙을 준수하는 고전주의로서 고립되어 있었으나 왕정복고기의 풍속희극을 거쳐 와일드, 서머싯 몸, 카워드 등 현대 풍속희극과 결부되는 영국 정통희극의 전통을 이끈 공적은 크다고 하겠다. 비평가로서는 해박한 학식을 가지고 고전적 전통에 입각하여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낭만적 작풍에 대립한 일파를 이루었으며 영국 초기 비평문학의 중요한 존재이다. 셰익스피어는 한 줄도 지우지 않은 채 썼다고 칭찬을 받았으나 한 천 줄쯤 지워버렸으면 좋았겠다는 비평은 특히 유명하다. ====================   고귀한 자연 / 벤 존슨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나무가 크게만 자라는 것과 다르다. 참나무가 삼백년 동안이나 오래 서 있다가 결국 잎도 피우지 못하고 통나무로 쓰러지느니 하루만 피었다 지는 오월의 백합이 훨씬 더 아름답다. 비록 밤새 시들어 죽는다 해도 그것은 빛의 화초요 꽃이었으니. 작으면 작은 대로의 아름다움을 보면 조금씩이라도 인생은 완벽해지지 않을까.             * 이해와 감상 300년을 살아도 그저 버릇처럼 무덤덤하게 사는 것보다는 하루를 살아도 빛을 발하며 강렬하게 사는 것이 낫다고 시인은 말합니다.무조건 육신의 눈에 크게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 세상에서, 시인은 영혼의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잘것없이 작고 생명이 짧아도 영혼이 빛을 발하고 아름다우면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입니다.   눈부신 가을햇살이 세상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칩니다. 마치 돋보기처럼,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크게 드러냅니다. 낙엽, 작은 풀꽃들, 흘러가는 구름, 그리고 우리들의 삶―결국은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애틋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영혼의 눈으로 주변의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찾으면 우리 삶이 조금은 더 나아질 거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 장영희·서강대교수·영문학 - ======================================== 친구의 소중함 진정한 우정은 친구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깊이와 소중함으로 판단할 수 있다.(벤 존슨 Ben Jonson)   누구나 파티를 즐기고, 저녁 모임으로 바쁘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많았으면 하고 바란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나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지 찾아보게 되고, 곁에 그런 친구가 많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진정한 친구는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지체 없이 달려와 “내가 도와줄 게 없어?”라고 묻는다. 귀에 거슬리지만 쓴소리도 기꺼이 해준다. 그런 친구는 즐거운 때와 힘들 때 늘 나와 함께 하며, 나를 마음으로 이해하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아끼고 사랑해 준다.
2056    영국 형이상학파 시인 - 존.던 댓글:  조회:5629  추천:0  2017-03-30
출생 1572. 1. 24/6. 19, 런던 사망 1631. 3. 31, 런던 국적 영국 요약 대표적인 형이상학파 시인이며 런던 세인트폴 성당의 참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주로 쓴 세속적인 시뿐 아니라 종교적 운문과 논문 및 17세기의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 설교들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법을 전공했고, 후에는 성직자가 되었다. 그의 많은 시와 설교들은 이 무렵에 창작되었다. 19세기초부터 예리한 독자들은 던의 시적 천재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시뿐 아니라 설교문도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시인이자 산문작가로서 17세기와 20세기의 작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은 던의 기지 섞인 논리와 열정의 겸비, 복잡한 마음상태의 극적 표출, 참신하고 과감한 이미지, 셰익스피어와 비교해도 거의 손색이 없을 만큼 평범한 말로 영어의 진수를 살리면서 풍부한 시적 의미를 창출해내는 능력 등에서 자극을 받았다. 목차 접기 개요 초기생애 초기 관직생활과 작품활동 성직자 시절 사후의 명성 개요 대표적인 형이상학파 시인이며 런던 세인트폴 성당의 참사원장(1612~31)을 지내기도 했다. 사제 서품을 받기(1615) 전에 주로 쓴 세속적인 시뿐 아니라 종교적 운문과 논문 및 17세기의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 설교들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로마 가톨릭교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풍자시인이자 극작가인 존 헤이우드의 딸로, 헨리 8세의 서기였던 토머스 모어 경의 후손이었다. 던은 그녀의 가문만큼 종교 때문에 고통을 받은 가문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성공한 런던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유서깊은 웨일스 가문의 후손이어서 던도 그 가문의 문장(紋章)을 지녔다. 1576년 아버지가 죽은 뒤 6개월 만에 어머니는 존 시밍스 박사와 재혼했는데, 그는 여러 차례 왕립의과대학 학장을 지낸 인물로 던의 형제들을 교육시켰다. 1640년 던의 〈생애 Life〉를 출판한 아이작 월턴에 따르면, 던은 집에서 가톨릭교도인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다가, 1584년 10월 형 헨리와 함께 옥스퍼드의 하트홀(하트퍼드 칼리지의 전신)에 입학했다. 월턴에 따르면 던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낸 뒤 케임브리지대학교로 전학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증명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수장령(Act of Supremacy)과 영국국교회의 39개 조항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는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아 어느 대학의 학위도 받지 못했다. 그뒤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1591년 5월경 새비스 인(Thavies Inn)에 법학생으로 등록했고 1592년 3월 6일 링컨스 인(Lincoln's Inn) 법학원으로 옮겼다. 1593년 형 헨리는 가톨릭 사제를 숨겨주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같은 해 6월 던은 성년이 되어 아버지의 재산 중 자신의 몫을 받았다. 1594년말까지 링컨스 인 법학원에 남아 법률직에 필요한 최종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법학원을 정계로 나가는 통로나 실무가들과 접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겼다. 초기 관직생활과 작품활동 1596년에 카디스를 공격하는 해상과 육상 원정에 지원, 그처럼 공직을 갈망하는 많은 젠틀맨 출신 군인과 합류했다. 다음 해에는 아일랜즈 원정(Islands expedition)에 참여하여 아조레스 제도에서 스페인 보물선을 찾아다녔다. 이때 사귄 토머스 에저턴은 국새상서(國璽尙書)인 아버지 토머스 에저턴 경에게 그를 소개했다. 1598년초 토머스 경의 비서가 되어 높은 공직 진출이 보장된 직위를 맡았다. 토머스 경은 1601년 던을 의회로 보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회의 논쟁이나 위원회에 참여하지 못했고, 의원의 동향을 알아서 토머스 경에게 보고하는 역할만 했던 것이 확실하다. 이무렵 가톨릭 신앙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던은 야심을 성취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다. 이무렵에 많은 시를 썼는데, 대부분은 고대 라틴 시인들의 시를 모방한 것이다. 그 작품들로는 1592년경부터 쓴 남자 동료들에게 보내는 운문편지들이 있고,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풍(風)으로 쓴 형식을 갖춘 5편의 풍자시(1593~98경)와 풍자적 서사시 〈윤회 Metempsychosis〉(1601), 오비디우스의 시를 부분적으로 모방한 연애시와 비가집(悲歌集) 1권, 마르티알리스의 시를 다소 모방한 경구시(警句詩)가 있다. 그러나 고전적인 양식을 위트와 대담한 상상력으로 변형시킨 그의 시는 매우 독창적이다. 1601년경에 쓴 다양한 경향의 많은 연애시들은 유명한 시에 속한다. 이무렵의 시는 활력과 사실성, 열정이 넘쳐흘러 젊은시절 던의 활달한 생각과 행동을 반영한다. 동시대인 리처드 베이커 경은 던에 대해 "무절제(부주의)하지 않고 깔끔하여 귀부인과 숙녀들을 자주 방문하고 연극을 즐기는 기발한 착상의 운문의 대가"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던이 일생 동안 보여준 도덕적 엄격성과 진지성은 젊어서의 바람기를 믿기 어렵게 한다. 영국 극의 전성기에 극장 출입이 잦았다는 것은 그가 관심을 기울인 문학과 학문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를 반영하는 데 불과하다. 월턴은 던이 일생 동안 유별나게 학문에 전념한 점을 강조하는데, 그는 일찍이 1593년부터 영국 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의 쟁점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방문한 '부인들'이란 후에 후원자가 된 귀족부인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던은 위트와 매력이 있어서 국새상서 집안의 부인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특히 로슬리파크의 조지 모어 경의 딸이며 에저턴의 둘째 부인의 조카이자 피보호자인 앤 모어가 그를 좋아했다. 앤의 아버지는 1601년 의회가 소집되자 런던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둘은 비밀리에 만났는데 야심 많고 저명한 조지 경의 결혼동의를 얻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1601년 12월초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것은 예법과 교회법에 모두 위배되는 일이었으며, 사랑을 위해 그토록 큰 모험을 한 것은 월턴이 지적했듯이 "그의 인생 최대의 오류"였다. 1602년 2월 던이 조지 경에게 결혼사실을 알리자, 화가 난 장인은 그를 몇 달 동안 투옥시켰고 에저턴에게 그를 해고하게 했으며, 이 문제를 고등판무단 재판소에까지 올렸다. 판무관들은 이 결혼이 유효하다고 판정했으나, 던에게는 힘들고 긴 실업 상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사랑은 꺾이지 않았다. 성직자 시절 처음에는 서리 주 피어퍼드에 있는 에저턴 부인의 아들 프랜시스 울리 경의 집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여기에서 약 1년 동안 가족을 떠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기도 했다. 1606~11년에는 런던 남부의 미첨에 집을 마련하고 런던에도 아파트를 얻었다. 뒷날 더럼의 주교가 된 토머스 모튼을 도와 가톨릭교를 비방하는 논쟁적인 팜플렛에서 특히 제임스 1세가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충성서약을 강요하는 것을 옹호하는 일을 한 듯하다. 여기서 던은 〈사이비 순교자 Pseudo-martyr〉(1610)라는, 왕을 지지하는 인상적인 선전문을 썼는데, 이 글로 인정을 받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쟁의 여파로 쓴 것이 예수회 수사를 공격하는 환상적 풍자문 〈이그나티우스의 비밀회의 Ignatius his Conclave〉(1611, 라틴어와 영어로 출판)이다. 던은 삶의 방향을 잃고 낙심하기도 했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사람은 목숨을 올바로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추론식 저작 〈자살론 Biathanatos〉(1608경, 출판 1646)을 쓰면서 생각을 고쳤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계속 겪었다. 머튼은 그에게 영국국교회 목사가 되라고 여러 차례 설득했고, 1607년에는 자신이 사임한 성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던은 자신이 자격도 없고 뚜렷한 소명도 없다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으며 계속하여 세속적 직업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더구나 〈사이비 순교자〉를 썼을 무렵 제임스 왕은 던이 성직에 몸담기를 바라며 세속 직업을 갖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던도 물론 한동안은 영국성공회교도였다. 1596~97년에 반대파 가톨릭교도와 맞선 신교도인 여왕을 섬겼고, 에저턴 밑에 있기 전에 공식적으로는 가톨릭교를 포기했다. 그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주요교리를 받아들이는 교회는 모두 정당하며, 행정·의식 등 '종교와 무관한' 문제는 각 나라의 관행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확신을 얻기 위한 그의 노력은 1607~13년에 쓴 종교시들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영시(英詩) 가운데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던은 뒤늦게 지불된 아내의 지참금과 베드퍼드 백작부인 루시 러셀의 후원(1607 이후)으로 늘어나는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루시 러셀과 다른 귀부인들에게 매우 독창적인 운문 편지를 보냈으며 베드퍼드 부인의 친척이 죽으면 비가(悲歌)를 지어주었다. 1611년에는 로버트 드루어리 경이 새 후원자가 되었다. 1611~12년에 던은 그와 함께 프랑스와 북해, 연안 저지대를 여행했으며, 드루어리는 1612년까지 런던 저택의 부속채에 던 가족이 살도록 해주었다. 드루어리의 어린 딸 엘리자베스가 죽었을 때 비가를 썼고, 1611년과 1612년에도 역시 그녀의 죽음을 기리어 〈기일 Anniversaries〉을 썼다. 이 시들에서는 주로 부패한 세계를 깊이 있게 풍자적으로 '해부'하는 한편, 천상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인간의 영혼이 승천하는 것을 관조했다. 여전히 공직을 찾으면서, 1612년 헨리 왕자가 죽었을 때와, 1613년 엘리자베스 공주가 팔츠 선거후(侯) 프레더릭 5세와 결혼했을 때에도 시를 바쳤다. 1614년에 열린 '썩은' 의회에 참석하여 특별위원회 4곳에서 일했다. 던은 공직을 얻는 데 도움을 받으려고 사귀었던 궁정 총신 서머싯 백작 로버트 카르와 악명높던 에식스 백작부인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혼시를 지었다. 1614년 후반에 드디어 궁정에서 자리를 얻을 것 같았으나, 이번에도 왕이 교회 밖의 자리를 주는 데 반대했다. 마침내 신의 대리자인 왕에 의해 성직에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 그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한 뒤에 〈신성론 Essayes in Divinity〉을 완성했고, 교회에서 진로를 시작했다. 1615년 1월 23일에 존 킹 주교로부터 부제(副祭)와 사제직을 임명받았다. 곧 승급이 되어 왕실목사가 되었고, 왕의 명령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616~21년에는 왕의 하사로 헌팅턴셔에 있는 케이스턴의 교구를 얻게 되었고, 전에 그가 섬겼던 에저턴이 자청해서 1616년 켄트에 있는 세븐오크스의 교구를 주었으며, 1622년에는 베드퍼드셔에 있는 블러넘의 교구를 받게 되었다. 1624년부터 죽을 때까지 런던에 있는 서쪽 세인트던스턴의 교구신부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을 치유할' 유급 성직자의 특정직을 법이 왕실목사에게 허용한 대로 2곳에만 한정했다. 1616년 10월부터 링컨스 인 법학원에서 리더(reader:목사이자 정신적 지도자)의 중요 직책을 얻었다. 그의 설교는 곧 힘과 웅변력을 지니게 되었다. 1617년 8월 던의 아내는 12번째의 아이를 사산하다 죽었다. 그는 몹시 슬퍼했으며 더욱 종교생활에 헌신하게 되었다. 아내가 죽은 후 오랫동안 건강이 나빠 친구들을 염려하게 했으며, 1619년에 링컨스 인 법학원을 그만두고, 30년전쟁 초기에 돈캐스터 자작인 제임스 헤이의 사절단과 함께 목사의 자격으로 독일과 보헤미아의 군주들을 방문했다. 1620년초 영국으로 돌아와 1621년 11월 22일 세인트폴 성당의 수석사제로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부딪친 많은 일을 던은 아주 양심적으로 처리해나갔다. 세인트폴 성당의 관리기록부는 그의 유능함과 성실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1625년 제임스 왕이 죽었지만 그의 지위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왕위에 오른 찰스 1세는 그를 성직자며 시인으로서 존경했다. 그러나 찰스 1세의 즉위 후 던이 쓴 시는 '성가' 3편, 종교 소네트 2~3편, 제임스 해밀턴 경의 죽음을 추모하여 쓴 비가가 전부이다. 그는 모든 창의력을 설교와, 심한 재귀열(1624)에서 회복되면서 쓴 산문 〈비상시의 기도문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에 쏟았다. 중요한 설교문 몇 편을 더 발표하기도 했으나, 런던을 휩쓴 심한 흑사병을 피해 모들린 허버트(댄버스 부인)의 집에 피신해 있던 1625년과 사위의 집에서 병을 치료하던 1630년에 자신이 메모해놓았던 설교문 100편을 옮겨 정리했고 이것을 그가 죽은 뒤 아들이 출판했다. 말년에는 친구와 후원자, 자식들(그가 죽을 때 6명만 생존)의 죽음을 겪어야만 했고 1631년 1월에 노모마저 죽자 슬픈 나날을 보냈다. 병으로 쇠약해졌지만 1631년 2월 25일에 궁정에서 마지막 설교(〈죽음의 결투 Death's duell〉로 사후 출판)를 했으며, 그 다음날 차터하우스(Charterhouse)의 간사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고, 3월 21일 마지막으로 성당 일을 했다. 던은 1631년 3월 31일에 죽었고, 4월 3일 성당에 묻혔다. 월턴의 말에 따르면, 던은 마지막으로 병이 들었을 때 수의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니콜라스 스톤은 흰 대리석으로 된 조상(彫像)을 만들었는데,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세인트폴 옛 성당이 소실되었을 때 기념물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되어 지금 성당의 남쪽 복도에 세워져 있다. 사후의 명성 던은 〈기일〉을 출판할 때 친구들에게 "운문으로 된 아무 글이나 인쇄한" 데 대해 사과했다. 왜냐하면 그당시에는 시를 인쇄한다는 것이 다분히 상업적인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쓴 시 가운데 1편만이 자필로 남아 있고, 대부분은 비교적 규모는 작지만 그의 시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돌려 읽은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미 출판된 소수의 시들을 제외하고 그의 첫 시집 〈시집 Poems〉(1633, 1635)은 실제로 이런 복사본을 모은 것이었다. 〈시집〉은 던이 죽은 뒤 90년 사이에 8번이나 출판될 만큼 인기가 있었으나 18세기에 그의 작품은 일반적 취향에 맞지 않았고, 그는 위대하지만 별난 '기지'(wit)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세기초부터 예리한 독자들은 던의 시적 천재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시뿐 아니라 설교문도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시인이자 산문작가로서 17세기와 20세기의 작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들은 던의 기지 섞인 논리와 열정의 겸비, 복잡한 마음상태의 극적 표출, 참신하고 과감한 이미지, 셰익스피어와 비교해도 거의 손색이 없을 만큼 평범한 말로 영어의 진수를 살리면서 풍부한 시적 의미를 창출해내는 능력 등에서 자극을 받았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려 아쉬운 것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골목길을 채우던 두부장수의 종소리, 교정에서 울리던 종소리, 색채처럼 동네를 물들였던 교회 종소리, 사람이 손수 채를 흔들어 울렸던 따뜻하고 신비로운 종소리가 그립습니다. 정각마다 마룻바닥에 부서져 내리던 벽시계의 종소리도요. 사찰의 종소리와 달리 그 종소리들은 생활과 잇닿아 있어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종을 처음 만든 것은 고대 중국에서였습니다. 제사를 비롯한 종교의식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음악을 연주하는 용도로 쓰였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지만, 사찰에서 풍경을 다는 이유가 부처님께 소리공양을 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종소리 자체가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B.C.2세기 진나라 황궁에 6개의 커다란 종이 설치되면서 종교 외에도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가 되었다고 하지요. 서양에서 종을 만들기 시작한 것 역시 종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종소리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에 높은 종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종을 달아 먼 곳까지 소리가 전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종소리가 시각을 알리는 등의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소리, 종소리. 옛날 사람들이 시각적인 것뿐 아니라 청각적인 것에도 마음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건축물을 포함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사라졌을 때 표시가 납니다. 반면에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은 사라진 후에도 잘 인지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한 번 사라진 소리는 영영 돌아오기 힘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주변에 사라진 소리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풍경을 저장하듯, 소리도 저장해놓고 싶습니다. 그렇게 막연히 종소리를 그리워하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몇 년 전, 파리 여행 중에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카페 마고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9월 중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날씨가 꽤 쌀쌀해 실내에 앉았는데, 창밖으로 교회가 보였습니다. 그 교회가 558년에 건립됐으며 프랑스 대혁명 때 대부분 파괴됐다가 19세기 초에 지어진, 꽤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교회라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일요일도 아닌데 갑자기 종이 울렸습니다. 힘차고 명징했습니다. 종소리가 음표가 돼서 온 도시에 날리는 것 같았습니다. 파리에서 보았던 그 무엇보다 그날 들었던 종소리가 가장 반갑고 기뻤습니다. 진짜 종이 울리는 소리였으니까요. 세상의 모든 종은 짧게 울리고, 소리는 꼬리를 드리우다 이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소리가 끝났을 때 더 이상 욕심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던 모양입니다.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할머니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교회를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뭐라고 말하는데, 프랑스어를 몰라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기 봐요. 결혼식이야.” 정말 신랑신부가 교회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젊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종소리가 축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부부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동시에 가장 장대한 서사를 향해 출발한 그들을 위하여 종은 울리고 있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입 맞추는 예쁜 모습을 보며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첫 키스가 막 이루어지려는 순간 여자가 수줍게 반짝이며 물었지요. “코는 어디에 두어야 하나요?” 그 말 덕분에 남자의 심장 박동수는 더 올라갔을 겁니다.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했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속 명장면이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종이 사람이 죽었을 때 부음을 알리는 용도였다고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을 때려서 울리는 것은 사람이고, 종을 울리는 이유는 누군가의 죽음을 널리 알려 애도하도록 하기 위해서니까요. 이 구절은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였던 존 던이 1624년에 쓴 기도문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명상〉에 처음 나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 기도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에스파냐 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937년 5월 말, 토요일 오후부터 다음 주 화요일 낮까지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헤밍웨이는 전장에서 숱한 죽음을 목격했으며 스스로도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존 던은 기도문을 심한 고열 속에서 썼습니다. 같은 고열로 아내와 두 아이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서양에서는 누군가 죽으면 교회의 종을 울리는데 존 던이 그 소리를 듣고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려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보내려다 관둡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종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때 존 던이 썼던 기도문 중 일부를 옮기면 이렇습니다. 누구든 그 스스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흙덩이가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어떤 높은 곳이 바다에 잠겨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 혹은 그대 자신 소유의 땅이 물에 잠겨도 마찬가지니라.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느니. - 존 던, 기도문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명상〉 중에서 종이 울립니다. 죽은 자를 위해 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해 울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잃은 후에 작아져버린 우리를 위해 울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헤밍웨이가 에스파냐 내전에서 깨우친 것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이 나의 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묵상 17번 중에서       ............前略........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에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된다면, 유럽 땅은 또 그 만큼 작아질 것 이며, 만일에 모랫벌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어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지는 말지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後略.......         이별의 말 -  哀悼를 금함              점잖은 사람들은 점잖게 숨지며 그들의 영혼에게 가자고 속삭인다.   임종을 지켜보는 슬픔어린 벗들이 숨이 졌다, 아니다, 말하고 있을 때,     그처럼 우리도 조용히 사라지세나. 눈물의 홍수나 한숨의 폭풍이 없이   속물들에게 사랑을 알린다는 것은 우리 기쁨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지구가 움직이면 재난과 공포가 따르고 사람들은 그 피해와 의미를 계산한다.   전체의 움직임은 그보다 더하지만 사람에게 끼치는 해로움은 덜하다.     우둔한 속세 사람들의 사랑이란 것은 그들이 오로지 관능만을 아는지라   이별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별은 사랑의 요소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별을 모를 만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믿고 있고   사랑으로 세련되어 있음으로 해서 눈, 입, 손이 없음을 탓하지 않는다.     우리 둘의 영혼은 결국 하나이니 내가 떠난다 해도 헤어짐이 아니요   가공해서 엷어진 금박 모양으로 오로지 넓게 확장되는 것뿐이다.     우리 영혼이 만일 둘이라 하더라도 콤파스의 다리처럼 한데 붙은 둘이다.   고정된 다리인 당신의 영혼은 다른 다리를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당신의 다리가 중심에 서 있어도 상대방이 멀리 움직여 떠날 때면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쪽이 돌아와야 곧게 일어선다.     당신도 나에게 정녕 그러리라. 비스듬한 다리처럼 움직이겠지만   당신의 확고함이 내 원을 바르게 하고 내 출발한 곳에서 끝나게 한다.       @@ 이 시의 상대자는 던의 아내 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잠시 동안의 이별이매 눈물에 젖어 이별하지 말자는 호소이다.   지리상의 발견이라든가 썰물과 밀물에 관한 천문학이라든가 지구의라든가 하는 따위의 르네상스의 새로운 과학도구를 도입하여 사상의 애호가다운 면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정열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그런 변화가 생겨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결국 이별을 탄식한다고 하는 애정의 표현이 실은 사랑을 죽이는 일이 된다는 패러독스를 완성시키고 있다.     내 마음을 치소서                      내 마음을 치소서, 삼위일체 하느님 노크하고 숨쉬고 빛내고 고치려 마시고   내가 살 수 있도록 나를 밀고, 깨뜨리고, 불고, 태우고, 내가 새로워지게 당신 힘을 기울이소서.     나란 것은 적에게 점령된 포위된 도시, 당신을 맞으려 하나, 오, 소용이 없나이다.   내게 있는 당신의 섭리와 이성이 나를 막아야 하나 오히려 포로 되어, 약하옵고 참되지 못하나이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싶은데 당신의 원수에게 팔려가게 되었나이다.     나를 떼어놓아 그 매듭을 풀고 찢어주소서. 당신한테 나를 끌고 가 옥에다 가두소서.   투옥될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고 겁탈될 때 나는 비로소 정숙할 수 있사오매-.       @@ 이 시는 형이상학파 시인 던의 논리적인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던만큼 패러독스에 찬 사람은 많지 않다.   가톨릭과 영국국교회, 삶과 죽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소녀에 대한 사랑 등의 대립 속에 살았는데 이 시도 그런 패러독스에 차있다.           ==================================                   아마, 널리 알려진 영미 시 중에서 가장 ‘야’한 시일 것입니다. 제목부터 선정적입니다. 그리고 내용은 더 가관입니다. 한 남자가 달콤한 말로 여인을 유혹하는 시입니다.     허리 아래쪽을 다루는 이 선정적인 시는 영미 시 중에서 ‘명작’에 들어갑니다. 가끔 보면 예술가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 이성에게 이렇게 추근거렸다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사회적으로 칭송 받습니다.   물론 성공회 사제로 종교인이었던 존 던 본인도 이 시를 생전에 공개할 용기(?)는 없었나 봅니다. 이 시와 대부분의 그의 ‘야’한 시들은 사후에 편찬 되었습니다.       뭐, 읽어 보시면 아실내용이라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가능하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의역한 부분이 있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 한 번 봅시다. 시인이 꿀 바른 혀로 한 여인을 어떻게 유혹하는 지.       1. 오세요, 여인이여 오세요. 더 이상 참을 수 없구료. 내가 일을 치르기까지는, 나는 고통속에서 누워 있어야 하오. 어떤 적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오, 싸우지도 않았지만 말이오.   그 허리띠를 푸시오,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 하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을 감싸고 있는.   그 번쩍거리는 가슴받이를 벗으시오, 당신이 입고 있는. 분주한 바보들의 눈길이 머물 수 있도록. 풀어 버리시오, 그 아름답게 어울리는 장신구를,         2. 나에게 말해주오, 이제 침대에 들 시간이라고. 저 운좋은 코르셋 자식은 벗어 버리시오, 참으로 부럽소. 아주 조용히, 지금도 당신에게 그렇게 붙어 있을 수 있다니...   당신이 옷을 벗으면 똑같은 아름다움이 드러난다오, 물러나는 그림자가 꽃으로 가득찬 초원을 드러내듯이.   그 이상한 머리 장식을 벗어 버리시오, 당신의 왕관같은 머리가 보이도록.         3. 스타킹과 구두를 벗어 버리고, 부드럽게 걸으세요, 신성한 사랑의 신전인, 이 침대에서, 하늘의 천사도 남자들에게 나타났다오, 당신처럼 하얀 잠옷을 입고; 당신, 당신은 천사라오.   마호메트가 말한 천국이 여기구료. 악령이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면, 쉽게 알 수 있다오. 악령들은 나의 머리카락을 곤두세우지만, 당신같은 천사들은 육신을 곤두세우기 때문이라오.         4. 헤매는 내 손길이 지나게 해주오, 앞으로, 뒤로, 사이로, 위로, 아래로...   오, 나의 아메리카여, 나의 신대륙이여! 나의 왕국,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위한, 보석같은 나의 왕국이여!   당신을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축복이라오! 우리가 결합하는 것은, 자유롭기 위해서라오; 내 손길이 닫는 곳에 내 영혼이 있을 것이오.       5. 다 벗어 버리시오! 이 모든 기쁨은 당신덕분이오. 벌거벗은 육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오.   완전한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당신을, 여자들이 걸치는 보석들은 아틀란타의 공같은 것이라오, 남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래서, 멍청한 사내가 보석을 보면, 그 속물적인 영혼은 보석을 쫓는다오, 여자가 아니라. 그림처럼, 혹은 책의 화려한 표지처럼, 멍청한 녀석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모든 여인들은 이렇게 보석을 걸친다오. 여인들은 신비로운 책이라오, 우아하고 고귀하며, 반드시 속살을 봐야만 하는.         6. 그렇소. 나는 당신을 알아야만 하오. 당신을 보여주시오, 아주 거리낌없이, 산파에게 그랬던 것처럼. 던져 버리시오, 그 하얀 천을; 가책은 필요 없다오, 순수함을 위해서라면. 당신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먼저 벗겠소. 당신을 덮기위해 그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오? 남자로 충분하오.   존 던 Rev. John Donne 출생 1572년 1월 24일과 6월 19일 사이[1]  영국 런던 사망 1631년 3월 31일 (59세) 직업 시인, 비평가, 성직자 국적  영국 장르 풍자, 연시, 비가, 설교 주제 사랑, 성, 종교, 죽음 부모 존 던 / 엘리자베스 헤이우드 배우자 앤 모어 종교 영국 성공회 영향 받은 분야·인물[보이기] 영향을 준 분야·인물[보이기] 존 던(영어: John Donne, 1572년 1월 24일에서 6월 19일 사이[1]~1631년 3월 31일)신부는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다.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 성공회로 전향할 때까지 종교적 박해를 경험했다. 뛰어난 교양과 운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빈곤 속에 살아 부유한 친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15년에 성공회 성직자가 되었고, 1621년에 세인트 폴 대성당의 수석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런 배경이 존던의 문학 작품(초기의 연애시 풍자 운문에서 말년의 종교적 설법에 이르기까지)에 반영되고 있다. 대담한 위트와 복잡한 언어를 구사하고, 연애시, 종교시, 설법을 쓴다. 형이상학파 시인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대표작에 《벼룩》, 《일출》과 같은 노래와 소네트, 《성스러운 소네트 10번》이나 《관》이라는 종교시가 있다. T. S. 엘리엇 등에 영향을 주었고,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의 제목은 존던의 설교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앤 모어와의 결혼 1.2사별 1.3초기시의 특징 2경력과 후반기 삶 2.1후원자 2.2제임스 1세와의 만남 2.3성공회 사제 3후기 시 3.1종교시인 4시풍 5작품 5.1시 5.2산문 5.3비평 6같이 보기 7각주 8참고 자료     생애[편집]   젊은 날의 존 던의 초상, 1595년 존 던은 1572년 런던에서 여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로마 가톨릭 교도였던 부친은 런던에서 철물점의 관리인을 했으며 웨일즈계로 이름은 아들과 똑같은 존 던이다. 부친이 1576년에 죽자 모친 엘리자베스 헤이 우드가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극작가 존 헤이우드(John Heywood)의 딸로 형제로는 번역가이자 예수회 장로인 재스퍼 헤이우드(Jasper Heywood)가 있고, 역시 로마 가톨릭 교도였다. 유명한 로마 가톨릭 순교자 토마스 모어의 여동생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이 순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종교적 이유로 추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은 예수회의 교육을 받는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죽은 지 2, 3개월 후에 유복한 홀아비로 13명의 아이가 있는 존 시밍스 박사와 재혼했다. 다음 해 1577년, 어머니와 이름이 같았던 던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죽었고, 두 명의 자매 메어리와 캐서린도 1581년에 죽었다. 던이 10세가 되기 전에 네 명의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1584년 존던은 11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하트 홀(현 하트포드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3년 간 공부를 한 후 1587년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졸업에 필요한 "충성의 맹세 (Oath of Supremacy)"을 거부했기 때문에 학위를 얻지 못했다. 1590년 성공회 신자가 되었으며, 1591년, 던은 런던의 로스쿨 중 하나인 《세이뷔스 인 로스쿨》에 들어갔다. 1592년에는 다른 로스쿨인 《린컨즈 인 로스쿨》(Lincoln's Inn)로 옮겼다. 1593년, 동생 헨리가 로마 가톨릭 성직자를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헨리는 페스트 때문에 옥중에서 죽고 존 던은 로마 가톨릭 신앙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존던은 재학 중 그리고 졸업 후에 여성, 문학, 레크리에이션, 여행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던이 어디에 여행했는가는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알려진 바로는 로버트 데베로(Robert Devereux, 2nd Earl of Essex)와 월터 롤리(Sir Walter Raleigh)와 함께 카디스(1596년) 및 아조레스 제도(1597년)에서 스페인군과 싸운 것이다. 이 때 던은 스페인의 기함, ‘산 펠리페호’가 승무원과 함께 침몰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1640년에 던의 전기를 쓴 아이작 월튼에 의하면 “그는 몇 년 동안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에 머물렀으며 거기서 그는 그 나라의 정부의 법과 관습을 유익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 나라의 말을 완전하게 습득하고 나서 귀국했다”고 적고 있다. 앤 모어와의 결혼[편집] 이렇게 해서 던은 25세가 될 때까지 외교관 예비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국새 담담관 토마스 에저톤(Thomas Egerton, 1st Viscount Brackley)의 제1비서로 임명되어 잉글랜드 사교계의 중심 화이트홀 궁전에 가까운 에저톤의 런던의 저택 요크 하우스(York House, Strand)에 살았다. 거기서 4년 간 일하고 있는 동안에, 던은 에저톤의 17세 질녀(14세, 16세라고 하는 설도 있다) 앤 모어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1601년, 에저톤과 앤의 아버지로 런던탑 장관 대리 조지 모어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결혼했다. 이것으로 던의 지금까지의 경력은 엉망이 되었을 뿐 아니라, 둘을 결혼시킨 성공회 사제와 결혼식 입회인을 연기한 남자도 플리트 감옥(Fleet Prison)으로 잠시 투옥되었다.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인정받아 석방되었지만, 월튼에 의하면던은 아내 앞으로 보낸 편지에, "John Donne, Anne Donne, Un-done(존 던, 앤 던, 안 끝났어요!)"라고 썼다고 한다. 던이 장인과 화해하고 지참금을 받은 것은 1609년이 되고 나서였다.   존 던의 파포드 집 일부 석방 후, 던은 세레이의 파포드 (Pyrford)라는 시골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 3년동안 던은 변호사로서 가난 생활을 하며, 아내의 사촌형제인 서 프랜시스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앤 던은 거의 매년 아이를 출산했으므로, 사촌의 호의는 매우 후한 것이었다. 사별[편집] 던은 변호사 외에도 토마스 모튼(Thomas Morton)의 소논문 집필자 조수도 겸했지만, 가족이 늘어나서 생활은 항상 불안정했다. 앤과의 사이에 16년동안 12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중 두 명은 사산했다. 그의 딸 프랜시스와 메어리는 10세가 되기 전에 죽었지만, 던은 장례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던은 대담한 자살의 변명 「비아사나도스(Biathanatos)」를 썼지만 출판은 되지 않았다. 그의 아내 앤은 1617년 8월 15일 12번째 아이를 출산한 지 5일만에 사망했다. 그는 깊이 슬퍼했으며, 이 때 17th Holy Sonnet을 썼다. 그는 이후 재혼을 하지 못했으며, 이것은 부양 가족이 많은 그에게 당시로서는 꽤나 특이한 것이었다. 초기시의 특징[편집]   'Divine Poems'의 표지의 일부 던의 초기시는 영국 사교계를 날카로운 비판을 향한 것이었다. 법체계의 타락, 이류 시인, 오만한 대신들 같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일반적인 사건을 주제로 한 던의 풍자시는 지적 세련미와 부정적인 이미지 (병, 구토, 거름, 전염병)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풍자시 III'는 던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 즉 진정한 종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던은 기본 전통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인간의 신앙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A Harry, or a Martin taught this (해리나 마르탱이 이렇게 가르쳤다)"라고 했으며, 심판의 날에는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던의 초기시에서는 에로틱한 표현으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그의 엘레지에서 그는 비관습적인 은유를 사용했는데, ‘벼룩(The Flea)’이라는 구절에서 두 연인을 무는 벼룩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성교에 비유된다. 엘레지 19번 〈자고있는 애인에게〉('To His Mistress Going to Bed)에서는 그는 시적으로 연인의 옷을 벗기는데 이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탐사를 애무 행위로 비유하고 있다. 경력과 후반기 삶[편집] 후원자[편집] 1602년, 결혼 후 1년만에 던은 헌법 기관인 브랙클리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유급직이 아니어서 가족을 부양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결국 그는 부유한 친구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2] 당시 유행하는 동인 시는 그에게 후원자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이 시기에 그의 부유한 친구나 후원자를 위해 많은 시가 만들어졌다. 그 중 1610년에 주요 후원자였던 ‘로버트 드루리 경’도 있었다. 존던이 그를 위해 쓴 두 개의 축사가 1611년에 쓴 《세상의 해부》(An Anatomy of the World) 와 1612년에 쓴 《진보하는 영혼의》(Of the Progress of the Soul)라는 시가 있다. 제임스 1세와의 만남[편집] 던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난 진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영국 왕 제임스 1세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1610년과 1611년에 두 개의 반 로마 가톨릭 논설을 썼는데, 《사이비 순교자》(Pseudo - Martyr)와 《이그나티우스의 비밀회의》(Ignatius his Conclave)가 그것이다.[2] 제임스 1세가 이 작품을 기뻐하여 입조를 권유했지만, 존 던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한다.   죽기 2~3개월 전 묵시 기도 때 그린 초상화로 부할의 때를 위해 이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는 덧없는 인생의 유품으로 이 초상화를 벽에 걸었다. 성공회 사제[편집] 존 던은 처음에는 성직자가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제임스 1세의 요청을 받아, 1615년 영국 성공회의 신부가 된다. 1615년 말, 던은 왕실예배당의 사제(Ecclesiastical Household)가 되었고, 1616년에는 링컨즈 인(Lincoln 's Inn) 로스쿨 신학 교수 (Reader of Divinity)가 되었고, 1618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 1618년 말 제임스 헤이 자작 (James Hay, 1st Earl of Carlisle)을 따라 독일로 가서 1620년에 귀국을 하였다.[3] 1621년, 던은 영국 성공회 교회인 세인트 폴 대성당의 수석사제가 되었고,1631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던이 수석 사제로 목회하고 있던 시기에 딸 루시가 18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1623년 11월말에서12월 초에는 장티푸스나 감기 합병증으로 생각되는 중병에 걸려서 7일동안 지속되는 고열로 죽을 뻔하기도 했다. 회복 때까지 던은 건강, 고통, 질병에 대한 일련의 명상과 기도를 썼고, 그것은 1624년에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명상》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헤밍웨이의 같은 이름의 소설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구절은 "아무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라는 글에서 나온 말이다. 1624년 던은 세인트 던스탄 인 더 웨스트(St Dunstan-in-the-West) 교회의 교구 사제가 되었고, 1625년에는 찰스 1세를 위한 왕실 예배당의 사제가 된다. 던은 깊은 감동을 주는 웅변적인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설교 160편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중에는 1631년 2월에 화이트홀 궁전의 찰스 1세의 앞에서 설교한 《죽음의 결투》(Death's Duel)가 있다. 1631년 3월 31일, 던 위암으로 사망했다. 생전 출판되지 않았던 엄청난 시가 남겨졌다. 던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던이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라틴어 에피그라프와 함께, 성 카타비라에 둘러싸인 기념상이 만들어졌다. 이 상은 1666년의 런던 대화재 때에도, 타지 않고 무사히 남았다 후기 시[편집] “ ...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e;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 (1624) 누구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나는 인류에 포함되기 때문에 ... 그러니 누구 때문에 종이 울리느냐고(누가 죽었냐고)알려 하지 마라.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해 울린다. ” 어떤 이는 질병, 경제적 빈곤, 친구들의 죽음이 모두 존 던의 후기 시에서 나타나는 음산하고, 경건한 톤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는 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로버트 드루리 경의 딸 엘리자베스 드루리의 추억에 바친 시 《세상의 해부》(An Anatomy of the World, 1611년)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집에서 엘리자베스의 죽음을 인간의 타락과 우주 붕괴의 상징으로 사용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다. 《가장 짧은 날을 산 성 루시의 날들에 대한 야상곡》(A Nocturnal upon S. Lucy’s Day, being the shortest day)라는 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던의 절망을 노래한다. 그 시에서 던은 “나는 죽거나 없는, 또는 암흑, 죽음에서 소생한 모든 무생물이다.”라는 말로 철저한 타협과 절망을 표현했다. 이 유명한 구절은 1627년, 던의 친구인 루시(베드포드 백작 부인)와 딸 루시 두 사람이 죽었을 때 쓰여진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3년 후 1630년, 성 루시의 날 (12월 13일)에 자신의 유언을 쓴 것이다. 종교시인[편집] 던의 우울한 톤이 높아진 것은 유사한 시기에 쓰기 시작한 종교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회의론적이었던 던의 초기의 믿음은 이 시기에 성서가 가르쳐 온 전통적이면서, 확고한 신앙으로 변해 있었다. 로마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전향했던 던은 종교적인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던은 순식간에 마음 깊이 파고드는 설교와 종교시로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토머스 머턴(Thomas Merton)의 《누구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의 제목은 그런 설교 구절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최후를 향해가고 있음을 느낀 던은 죽음에 도전하는 시를 썼다. 그것은 죽은 사람은 영생을 위해 천국에 간다는 던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 예로, 《죽음아, 오만해 하지마라》(Death, be not proud)의 한 구절로 알려진 '홀리 소네트 10번'이다. 1631년 사순절 기간 동안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때도, 던은 병상에서 일어나 《죽음의 결투》를 설교하였고, 그것은 후에 자신의 장례식 설교에 사용되었다. 《죽음의 결투》는 인생을 고통과 죽음으로 향하도록 결정하는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구원과 불사 속에 희망을 찾는 것이다. 그는 설교시 아타나시우스 대주교 등 초대교회 교부들의 성서연구성과들을 소개하되, 성서말씀들을 많이 인용하였다. 저서로는 《긴급한 상황에서의 신앙》(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1623년),《노래와 소네트집》(Song and Sonnets)(1633년) 등이 있다. 시풍[편집] 존 던은 17세기에 들어 와 전혀 닮은 곳이 없는 두 개의 개념을 하나로 결합하여 확장을 하는 은유,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비유(Metaphysical conceit)"의 달인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삶과 그 기쁨에 대한 건강한 욕구를 암시하며, 반면에 깊은 감정들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는 이것을 기발한 비유(conceits), 재치, 그리고 지성을 통해 이루었으며, 그의 시 《떠오르는 태양》(The Sun Rising)과 《내 심장을 두드려라》(Batter My Heart)에서 보여주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다른 시, 예를 들어 "장미"와 "애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진부한 표현으로 대비되는 페트라르카 풍의 비유와 달리 형이상학적인 비유는 대비되는 것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급진적 역설 또는 내부 반분열법도 때때로 그러한 것이다). 던의 비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슬픔을 금하고》 (A Valediction : Forbidding Mourning)라는 글에서 헤어진 ‘두 연인’과 나침반의 ‘두 바늘’을 대비시킨 것이다. 던의 작품은 풍부한 기지와 역설과 미묘한 너스레, 그러나 주목할 만한 비유를 포함한다. 던의 작품은 때로 사랑과 인간의 모티브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의 시의 일반적인 테마는 사랑(특히 그 인생 초기), 죽음 (특히 아내의 죽음), 그리고 종교이다. 존 던의 시는 고전적인 형식에서, 보다 개인적인 시의 형식으로 방향 전환하고 있다. 시의 운율도 특징이며, 일상 회화와 매우 유사하고, 신경질적인 리듬으로 구축되어있다 (그 점을 꼬집어 고전적인 자질을 가진 벤 존슨은 “악센트를 지키지 않은 던은 교수형감이다”고 비난을 했다.). 던의 후계자들은 던의 작품을 양면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고전주의 시인들은 던의 형이상학적인 비유를 은유의 오용으로 주시했다. 코울릿지나 브라우닝 같은 낭만주의자에게 던은 재평가되어 20세기 초반에는 반낭만주의자인 T. S. 엘리엇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99년에 퓰리처상 연극 부문을 수상했던 마가렛 에도슨의 《위트》는 존 던의 시가 이야기의 핵심이다. 작품[편집] 시[편집] Poems (1634) Poems on Several Occasions (2001) Love Poems (1905) John Donne: Divine Poems (Holy Sonnets 포함), Sermons, Devotions and Prayers (1990) The Complete English Poems (1991) John Donne's Poetry (1991) John Donne: The Major Works (2000) The Complete Poetry and Selected Prose of John Donne (2001) 산문[편집] 《여섯 설교》 Six Sermons (1633) 《50 설교》 Fifty Sermons (1649) Paradoxes, Problemes, Essayes, Characters (1652) Essayes in Divinity (1651) Sermons Never Before Published (1661) John Donne's 1622 Gunpowder Plot Sermon (1996)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 and Death's Duel (1999; first published in 1624) 비평[편집] John Carey, John Donne: Life, Mind and Art, (London 1981) A. L. Clements (ed.) John Donne's Poetry (New York and London, 1966) Stevie Davies, John Donne (Northcote House, Plymouth, 1994) T. S. Eliot, "The Metaphysical Poets", Selected Essays, (London 1969) G. Hammond (ed.) The Metaphysical Poets: A Casebook, (London 1986) Sir Geoffrey Keynes, Bibliography of Donne, (Cambridge, 1958) George Klawitter, The Enigmatic Narrator: The Voicing of Same-Sex Love in the Poetry of John Donne (Peter Lang, 1994) Arthur F. Marotti, John Donne, Coterie Poet,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6) H. L. Meakin, John Donne's Articulations of the Feminine, (Oxford, 1999) Joe Nutt, John Donne: The Poems, (New York and London 1999) E.M. Simpson, A Study of the Prose Works of John Donne, (Oxford, 1962) C. L. Summers and T. L. Pebworth (eds.) The Eagle and the Dove: Reassessing John Donne (Columbia: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86) John Stachniewski, The Persecutory Imagination, (Oxford, 1991) Ceri Sullivan, The Rhetoric of the Conscience in Donne, Herbert, and Vaughan (Oxford 2008) James Winny, A Preface to Donne (New York, 1981) Francis William Teodoro, A New Tomorrow Needs Us James Lyle Canda, Someone is Needing My Love Pauline T.C Algas, Two Against My One Heart 같이 보기[편집] 성공회 영국 문학 각주[편집] ↑ 이동:가 나 Colclough, "Donne, John (1572–1631)",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년 9월; online edn, 2007년 10월. ) 100% 50%;">oxforddnb.com. ↑ 이동:가 나 다 Jokinen, Anniina. "The Life of John Donne." Luminarium. 22 June 2006. Accessed 22 January 2007. 이동↑ Jokinen, Anniina "The Life of John Donne."Luminarium. 22 June 2006. Accessed 2007-01-22. 참고 자료[편집] 《존 돈 신부와 영국 성공회 설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오덕교 교수)     [Daum백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릴까 – 문득, 묻다: 세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55    80세, 공부와 시쓰기가 인생 끝자락의 제일 큰 행복이라고... 댓글:  조회:3201  추천:0  2017-03-23
    ▲ 시집 ‘‘가’자 뒷다리’     ▲ ‘‘가’자 뒷다리’ 시인 황보출 할머니     ▲ 황보출 할머니가 시집 출판을 기념해 지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 황보출 어르신과 막내딸 김명순 씨가 하트를 그리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우리는 모두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게 아닌가. 욕심 없이 사는거지.”  골골이 패인 주름 사이로 생의 농익음이 물결친다.  1930년대에 태어나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까지 지난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 겪었다.  가난으로 초등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고 글을 몰라 평생을 다른 이 앞에 나서지 못했다.  8남매는 기쁨이었지만 때론 삶의 무게로 어깨를 짓눌렀고 70대 후반에서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초등학교 인정 졸업장을 받았다.  지난해 여든 넷이라는 고령에 첫 시집 ‘‘가’자 뒷다리’를 출간한 황보출 할머니의 이야기다.  한글을 깨치고 시를 쓰면서 비로소 자신을 찾았다는 황 할머니를 포항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 70대 후반에 공부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 이유가 있나.  나는 평생을 시금치와 쌀 등을 팔며 8남매 뒷바라지를 했다. 내 나이 육십 중반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들 교육으로 빚만 잔뜩이었다.  그 때 남편을 잃은 상실감과 빚을 갚기 위해 무리해 일하면서 몸이 많이 축났다. 과로로 쓰러진 뒤 막내딸이 자신이 모시겠다며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더라.  그렇게 서울로 가게됐다.  평생을 흙에서 노동을 하며 살던 내가 서울에 있으니 할 일이 없어 적적했다.  그 때 딸에게 내색은 많이 못했지만 집 앞 골목 골목을 매일 울며 한없이 걸었었다.  우울증이 와 도저히 안될 것 같을 때 딸아이가 어머니학교가 있다며 가볼 것을 권했다.  다 늙어 무슨 배움이냐 했지만 설레는 마음은 숨길 수 없더라. 못 배운게 평생 한이었으니까.  인천에서 서울 회기동의 어머니학교까지 전철을 타고 다니며 한글공부를 했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거리에도 힘들지 않았다.  2012년 2월에 초등학교 인정 졸업장을 취득했다.  그 때 꼭 하늘을 나는 기분이더라.    -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나는 삶의 구비구비마다 그저 참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글을 배우고 나니 그것을 털어놔야 내가 편안해지겠구나 싶었다.  일기인지 시인지 모를 글을 계속 썼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돌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그제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이 달라졌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쓰는 나를 보고 어머니학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시문학 공부를 해보지 않겠냐”고 묻더라.  “좋다”고 답하고는 열심히 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수업을 진행하던 이성수 시인을 만났다.  이성수 시인은 내가 쓴 시를 읽고 그렇게 많이 울었다고 하더라.  아마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라서 그랬지 않았을까 싶다.  내 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라.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의 할머니가 나와 같았다고.  나는 나의 지난 삶을, 또 지금 나의 삶을 쓸 뿐인데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오히려 내가 너무 고맙더라.    - 시집 ‘‘가’자 뒷다리’에 대해 소개해주신다면.  시집 속 시들은 팔십이 넘는 세월 속 나의 행복이자 상처에 대한 기록이다.  편안하게 나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때 그때 떠오르는 기억과 마주하는 자연의 아름다움 등에 대해 써봤다.  시집은 어쩌면 나의 삶 자체라 할 수 있다.    - 좋아하는 시와 시에 대해 설명해달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남편님 물신은’과 ‘말봉재 고개’, ‘고맙습니다’다.  “남편님 물신은 목장갑 입니다//발에 무좀이 심해서/장갑으로 물신을 만들어 신고/떨어지면 버려서/논둑마다 장갑 물신이 가득합니다.//십 년이 지나도 우리 논둑에는/남편님 신던 목장갑이 있습니다.”(‘남편님 물신은’ 전문)  시 ‘남편님 물신은’ 무좀이 있던 우리 남편이 목장갑으로 물신을 만들어 신었던 이야기를 시로 썼다.  이 시 쓰고 나도 어찌나 울고, 우리 딸래미도 어찌나 많이 울었던지.  고생만하다 떠난 남편이 생각날 때면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봄나물 하러/밥 한 그릇/삼베 보자기에 싸고/엄마랑 둘이 산으로 갔네.//이 산 저 산 다니면/배가 고파서//냇가로 내려와/두 모녀가 밥을 먹었네.//엄마는 나에게/많이 먹으라 하네.//나는/엄마가 많이 힘드니 엄마가 많이 먹으라고 했네.//산에 있는 배고픈 꽃들이/다들 입 벌리고 있네.”(‘말봉재 고개’ 전문)  시 ‘말봉재 고개’는 우리 어머니와의 기억을 그린 시다.  요즘따라 꿈에 자꾸만 어머니가 선명히 보인다.  나는 이렇게 늙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아직 너무 고우시다.  포항에서 나고 자란 나는 말봉재 고개에 대한 기억이 많다.  그 중 가난 속에서도 나를 위해 배고프지 않다 말씀하시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선명한 곳이다.  “얼굴이 못나고 잘나고는/중요하지 않습니다./내 마음이 밝아지면/얼굴이 밝아지고/삶이 밝아지기 때문입니다.//내 인생 아무리 머리 굴려도/정답은 없습니다./항상/내 마음을/맑은 얼굴을/사람들에게 보여주면/이 세상이 다/밝은 세월입니다.”(‘고맙습니다’ 중 일부)  시 ‘고맙습니다’는 시를 쓰면서 달라진 나의 삶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시가 아닐까 한다.  딸아이가 그렇게 말한다.  시를 쓰면서 엄마 얼굴이 밝아졌다고.  그러면서 자신도 또 다른 가족들도 밝아졌다고.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밝은 마음으로 얼굴이 밝아지고, 삶이 밝아지기를 바란다.    - 최근 다시 딸과 함께 포항으로 내려왔는데. 요즘도 시를 쓰고 공부를 하고 있나.  최근에도 계속 시를 쓰고 있다.  시를 처음 쓸 때는 일기와 같이 내 이야기를 마구 뱉어냈다면 요즘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쓰고 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일상의 풍경과 삶의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쓰고 있다.  공부는 한 달에 두 세번씩 서울을 오가고 있다.  한 번 서울에 가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딸네에서 며칠 있으면서 어머니학교 등지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공부와 시 쓰기가 인생 끝자락 나의 행복이다.  최근에는 그림도 그리고 있는데 그것도 재미있더라. 요즘은 하루하루가 행복이다.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고 공부하고 시를 쓰고 싶다.   © 경북도민일보 
2054    77세에 등단, 80세에 詩集 출간... 댓글:  조회:3467  추천:0  2017-03-20
  80세에 첫 시집낸 노시인 '별의 언덕' 노래 77세에 등단한 채행무 시인 출판기념회 열어   2010년 12월 05일 (일) 신영규 시민기자          ▲ 채행무 시인     시인은 가진 것이 없어야 한다. 시인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눈물이 많아야 한다. 시인은 그대 같은 아쉬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의 삶은 구도자의 삶과도 같다.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내지만 그 작품을 읽는 이들의 마음과 영혼을 맑게 하는 시인의 삶은 그의 시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꿈은 학창시절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 꿈 한 조각이 이제 이루어 진 것 같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허락하는 날까지 시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77세에 등단하여 80세에 시집을 낸 채행무(80) 시인의 첫 시집 “별의 언덕에서”출판기념회가 4일 오후 4시 전주 호남성 3층 대연회장에서 열렸다. 한국신문학인협회 전북지회가 주최한 이날 출판기념회는 신문학 김종선 회장을 비롯, 행촌수필 고재흠 회장, 전북수필 이남구 회장 임실문협 김여화 전 회장과 회원, 채 시인의 가족ㆍ친지 등 약 7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신문학 전북지회 신청림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신문학 김종선 전북지회장은 축사를 통해 “채 시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였으며,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익장을 과시해 시집을 낸 그 용기에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며 채 시인의 시적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이어 행촌수필 고재흠 회장은 “저서는 아무나 남기지 못하며, 77세에 등단, 80세에 시집을 낸 채 시인은 극히 보기 드문 예로 그의 시 창작열은 한국문단에 영원히 기억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인생 길”등 총 5부로 구성된 시집 “별의 언덕에서”는 자연과 인생, 그리고 일상의 편린을 모은 것으로 채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임실문협 김춘자, 김영숙, 이재복 회원과 채 시인의 가족이 채 시인의 시 “어머니”와 “아버지”를 낭송해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시인은 응당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또한 사소한 것에도 웃음을 풍기는 사람이 시인이다. 가족과 주위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즐거움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진짜 시인이다. 결국 시인은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인 것이다. 채 씨는 1931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여 1949년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직에 머물다 사직했다. 2007년 월간 으로 등단하여 시인이 된 후 한국문협, 공간시인협회, 한국신문학, 포천문인협회, 임실문인협회,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번에 첫 시집 “별의 언덕에서”를 상재했다.  /신영규 시민기자 ============================================= 한국신문학인협회가 주최하는 제5회 한국신문학상에 군산 출신 채행무(81)시인이 ‘별의 언덕에서’로 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26일 오후 6시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회관 4층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장인 김두환 원로시인은 “채행무 시인은 77세에 등단하여 80세에 첫 시집 ‘별의 언덕에서’를 상재한 늦깎이 시인이면서도 항상 시를 가슴에 담고 창작하며 살아가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며 “그의 첫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하여 이미지에 의거하여 시의 에스프리를 추구하는 현대시의 일방적 경향을 탈피하여 우리 시의 전통적 운율을 복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했다.  이에 채 시인은 “자신을 대상으로 선정해준 심사위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사는 날까지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늘 좋은 생각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채 시인은 군산 출생으로, 전주 사범을 나와 잠시 교직에 몸담았다가 퇴직했다. 2007년 월간 문학공간 시 부문에 등단 후 한국문협, 한국신문학인협회, 공간시인협회, 포천문협, 임실문협, 영호남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첫 시집 “별의 언덕에서”가 있으며, 올 10월 제6회 ‘한국문학신문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바 있다.  /송민애기자 
2053    80세에 첫 詩集... 댓글:  조회:3380  추천:0  2017-03-20
'나의 바다' 펴낸 김옥례 할머니 바다가 공책, 손가락이 연필… 2014년 본격적으로 습작   열두 살 소녀는 모래사장에 손가락으로 이름 석 자 썼다. 김옥례. 밀물 몰고 온 모래들이 다 덮어 버렸다. 이번에는 개펄에 들어갔다. "밀물 썰물이 몇 번이나 들락날락 했건마는/ 이름 석 자 이름 석 자 지워지지 않고/ 쓴 그대로 살아 있네/ 나의 바다 나의 개펄/ 개펄 이고 지고 가고 싶네"(김옥례 시 '나의 바다' 중)   팔순 시인 김옥례씨가 월세방에서 이면지에 시를 쓰고 있다. 그는 “시 짓고 그림 그리는 곳이 꽃밭이요, 천국”이라고 했다. /목포=김영근 기자 시인이 되고팠던 소녀는 60여 년 후 꿈을 이뤘다. 작년 12월 그의 시집 '나의 바다'가 출간됐다. 지난 6일 전남 목포 자택에서 만난 김옥례(80) 할머니는 13㎡(약 4평)짜리 월셋집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김씨는 "두 번째 시집에 넣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1937년 전남 무안군 운남면 동암리 원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딸 넷 중 막내였다. 원래 머슴을 수 명 부릴 정도로 집이 부자였지만, 부친이 세상 떠나고 가세가 기울었다. "언니들 모두 시집가고 홀로 어머니 모시고 사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도 12세 때 야학 다니면서 겨우 한글을 깨쳤다. "뻘 나가서 공부했어요. 바다가 공책이고, 평생 닳지 않는 내 손가락이 연필이었어요."   6·25 전쟁 통에 모친을 떠나보냈다. 모친 유언대로 수녀가 되고 싶었지만 "학교 못 나와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목포 사는 언니 집에 와서 고무신 공장에 다녔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다. "죽도록 나를 따라다니더니 결혼하니까 죽도록 못살게 굴고 돈 한 푼 안 줬다"고 했다. 남편에게 사정해서 "(재봉)틀 하나만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내 친구 재봉틀/ 낮에도 달달/ 밤에도 달달/ 쉴 새 없이 달달/ 너는 나의 친구/ 너는 나의 힘이었고/ 너는 나의 생명줄"(시 '재봉틀' 중) 재봉틀은 남편 대신 그의 "인생 동반자"가 됐다. "팬티, 파자마, 월남치마를 만들어 전국 돌아다니며 팔았고 그 덕에 아들딸 7남매를 먹이고 입혔다"고 했다. 그중 딸 둘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다. 김씨는 "그때, 쉰 살쯤부터 시를 썼다"고 했다. "장사하려고 열차 타고 창밖으로 자연을 보면 시가 써지는 거요.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머리로 쓰는 거요. 종이도 없고, 연필도 없으니께."   김옥례씨가 이면지에 쓴 시들. 띄어쓰기 못 하는, 서툰 볼펜 글씨로 80년 인생을 써내렸다. 남편은 김씨가 번 돈을 모두 탕진했다고 한다. 김씨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편이 너무 밉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시를 썼다. "당신 막차 나랑 꼭 합승하게요/ 함께 합승하면 차비 절약/ 우리 사랑하는 자식들/ 고생 모두 한 번에 끝낼 수 있어요/(…)/ 혹시라도 행여라도/ 당신 길 잘못 찾을까 봐 그래요/ 합승 승낙한 줄 믿고 그리 준비할게요"(시 '인생의 막차' 중) 그는 2014년부터 목포 공공도서관에서 본격적으로 시를 배웠다. 집에서 목포 공공도서관까지 4㎞ 거리를 걸어 다녔다. "2011년 교통사고 이후 차 타는 게 두려워서, 차비를 아끼려고" 느린 걸음으로 왕복 4시간이 걸리는데도 걸었다. 수업은 오후 2시부터 시작했는데, 1시간 일찍 도착했다고 한다. "30명이 수업 들었는데 모두 고졸 이상이고. 대학도 나왔더라고요. 또 애송이 방실방실 새댁들하고 무슨 대화를 허요. 저는 시 써와라 그러면 꼭 써 가고 그랬어요." 시 수업을 한 이대흠 시인이 김옥례씨를 눈여겨봤다. 그는 "주로 이면지에, 띄어쓰기도 못 하고 서툰 볼펜 글씨로 시를 써 왔는데, 인생의 진솔함이 있었다"고 했다. 이 시인은 할머니 습작이 쌓이자 시집을 내기로 했다. 시인과 화가들이 돈을 모아서 '나의 바다'를 출간했다. 김옥례씨는 "공부 못 해 서럽던 한을 이제야 풀었다"고 했다. "발이 땅에 닿는지도 모르지. 날아다니는 것 같고." 그가 자신의 시 중 제일 좋아하는 시는 '짝사랑'이다. "모르리 모르리 그대 내 맘 모르리/ 양 떼 몰고 가다 말고 그대 얼굴 보고파 숲에 숨은 내 맘 모르리". 할머니는 "저 짝사랑한 분을 세어 보자면 열 손가락도 모자라지요" 하며 웃었다. 할머니에게 봄이 왔다. ⓒ 조선일보/ 목포=전현석 기자
2052    윤동주의 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있다... 댓글:  조회:3477  추천:0  2017-03-18
올해는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했던 시인이 써내려간 시는 반세기가 흘렀어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윤동주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국내외 문인들의 작품을 탐독하던 그는 책을 읽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 해가 질 때까지 주변을 산책하며 시를 구상했다 한다. 우리에게 사랑받는 많은 시들이 그 시절에 지어졌다. 윤동주가 남긴 흔적들을 찾아 ‘윤동주 기념관’이 자리한 연세대학교 핀슨관을 방문했다.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윤동주 기념관’이 있는 핀슨관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지나 낮은 언덕을 오르자 돌로 지은 아담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돌벽과 그 위를 덮고 있는 담쟁이 식물들을 보니 유서 깊은 건물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핀슨관이었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윤동주 기념관` 핀슨관 2층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은 규모는 작지만 연희전문학교 시절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재현해 놓은 책상과 조그만 의자가 눈길을 끈다. 도스토옙스키 책이나 ‘실낙원’, ‘성경’ 등 문학청년 윤동주 시인이 읽었던 책들도 볼 수 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와 후배 정병욱 사진(좌), 재현해 놓은 윤동주 시인의 책상(우) 벽에는 한글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윤동주 시의 초고들이 전시돼 있다. 한글 사용이 금지된 시대에 우리 한글로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인의 단단한 마음이 엿보였다. 한글로 시를 지었기에 당했던 억압은 윤동주의 학적부 이름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빨간줄로 남아 있다. 옷에 잡힌 주름도 참기 힘들어 했던, 시가 쉽게 써지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던 시인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져왔다. 한글로 시 짓기를 멈추지 않았던 윤동주의 초고(좌), 창씨개명 흔적이 남아 있는 윤동주의 학적부(우) 핀슨관은 현재 일반 방문객에게는 2층 기념실만 개방하고 있어, 윤동주가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기숙사로 생활하며 시를 썼던 3층 다락방은 올라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핀슨관 전체가 ‘윤동주 기념관’으로 개방될 예정이라 하니, 3층에서 윤동주가 사색하며 바라봤던 그 교정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윤동주 기념관 내부, 한쪽 벽면에 윤동주의 한글 시들이 전시돼 있다. 핀슨관을 나서면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기리며 ‘당신의 밤’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가수 개코의 말이 떠올랐다. “용기 낼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용기 내지 못하는 게 부끄럽다”고. 그는 노래 가사를 통해 “당신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길. 당신의 꿈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길”이라고 고백했다.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에게 이정표가 필요한 이 시대 청춘들에게 핀슨관 ‘윤동주 기념관’은 총과 맞서 시로 싸웠던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기 좋은 곳이다. 윤동주는 오래 전에 떠났지만 그의 시는 남아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다. 3.1절 즈음에 찾아본 윤동주 기념관은 그래서 더욱 뜻 깊었다.
2051    정병욱 큰 보람=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 댓글:  조회:4370  추천:0  2017-03-18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민족서정시인 윤동주. 일제 치하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풀어낸 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담겨진 그의 문학정신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윤동주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다. 청년 윤동주가 남긴 시들은 자칫하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전 친구 정병욱에게 그가 써놓은 원고를 맡기는 데 정병욱은 이 원고를 그의 집 마루 밑바닥에 숨겨놓고 잘 간직했다. 그 장소가 바로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이다. 윤동주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2년여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곳이 바로 광양이다. 광양을 통해 어둠속에 갇혀 있던 ‘윤동주시인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정지했던 바람’은 다시 생기를 얻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빛을 잃었던 별’들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윤동주와 광양과의 이런 인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한 지역 언론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으며 시는 지난 2007년 7월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지만 윤동주시인과 광양시 간에 맺어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 인연을 어떻게 가꿔나가느냐는 광양시민들의 몫이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2년여동안 원고를 숨겨두었던 마루밑.                       ■ 일제감시 피해 윤동주 유고 숨겨둔 정병욱 생가   섬진강변에 위치한 진월면 망덕리 길가에는 1925년에 지어진, 가옥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정 병욱 가옥으로 알려진 이 집은 과거 양조장이었다. 따라서 도로 쪽 가옥에는 가게가 나 있고 뒤쪽은 살림집으로 돼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 등이 살고 있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윤동주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졸업을 (1941) 즈음해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접는다. 은사였던 이양하교수는 일제가 시의 내용을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해 출판을 만류했다. 윤동주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교수와 후배이자 친구인 정병욱에게 각각 건넸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용 당하게 되자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일본헌병에게 들키지 않게끔 잘 간직해줄 것과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님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 왔다고 한다. 광복 후 학병에서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로부터 2년여 동안 숨겨왔던 유고를 건네받았고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발간했다. 윤동주 본인과 이양하교수가 지니고 있었던 원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어서 정병욱 집안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없을 뻔했다. 한편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 등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밝혀왔다     ===============덤으로 더 보기@=@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아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냇벌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느날 신촌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달 밝은 밤이면 으레 나섰던 그의 산책길에 풀벌레 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그가 사색의 보금자리로 삼았던 외인묘지는 계절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가 묵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지만,  동주에 대한 나의 추억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가 동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연희 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 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에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교복의 단추를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 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 이처럼 그는 깔끔하고 결백했다.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하지 않는 태산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희 전문 학교 문과에서 나보다 두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처럼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생활의 대중을 그로 말미암아 잡아 갔고, 촌뜨기의 때도 그로 말미암아 벗을 수 있었다. 책방에 가서도 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책을 샀고,  시골 동생들의 선물도 그가 골라 주는 것을 사서 보냈다.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 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달이 밝으면 곧잘 내 방문을 두드려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이끌어 내어, 연의의 숲을 누비고, 서강의 뜰을 꿰뚫는 두어 시간의 산책을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그 시간동안 그는 입을 여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가끔은 "정 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하는 정도의 질문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뚜렷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겁니다."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그 책은 대강 읽어서는 안 돼요.  무척 고심하면서 읽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 라고 일러 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정병욱[잊지 못할 윤동주]中- 정병욱1922∼1982. 국문학자.     윤동주 유고 시집과 정병욱 이야기   1940년 봄, 열여덟의 정병욱이 연희점문에 입학했다. 그가 가장 먼저 친한 선배가 윤동주였다. 멀리 북간도에서 온 윤동주는 정병욱의 2년 선배였다. 전남 광양에서 상경한 정병욱과 윤동주는 같은 하숙방에서 지냈다. 그 하숙방이 서촌 부암동에 있는 소설가인 金松의 집이었다. 이 무렵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보여준 시가     같은 것이었다.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에 다녔는데 정병욱도 같이 다녔다고 한다.    당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윤동주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졸업 기념으로 시집을 낼 계획을 세웠으나 시대가 허락지 않았다. 윤동주는 1941년 졸업을 앞두고 19편의 시를 노트에 적어놓고   란 제목까지 써 두었다. 이 시집의 서문으로 써둔 것이 다. 윤동주는 이 시첩을 자기가 하나 갖고 연희전문 문과 교수였던 이양하 교수와 또 하나는 정병욱에게 주고는 일본으로 갔다.     정병욱 교수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윤동주의 시 원고를 고향 전남 광양의 어머니께 맡겼다. 그리고는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전선에서 부상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동주가 세상을 뜬 것을 알게 되었다. 정병욱은 어머니께 맡긴 윤동주의 시를 어머니께 여쭙는다.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에 싼 시 노트를 아들께 내놓았다.    이리하여 이 원고는 서울로 보내졌고 1948년 1월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가 정음사에서 출판되었다. 정부는 2007년 정병욱의 광양 집을 국가가 관리하기로 했다. 1925년 건축된 일본식 목조건물인 이 집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 생가 옆에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기 지금 관리하고 있다.           잊지 못할 윤동주                                                             정병욱(1922~1982)       1941년 9월, 우리의 알차고 즐거운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 서가에 꽃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보면, 1941년 5월 31일 하루에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등 세 편을 썼고, 6월 2일에는 '바람이 불어'를 썼는데, 동주와 같은 과작의 시인이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쏟아 놓고, 이틀 뒤에 또 한 편을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완성된 시를 다만 원고지에 옮겨 적은 날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詩語)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 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해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작품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그는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로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 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처럼,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수용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면, 동주의 그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정병욱. 국문학자(1922~1982).  호는 백영(白影).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고전문학의 여러 분야를 두루 연구하였으며,  특히 판소리 연구에 업적을 쌓았다. 저서에 ,  등이 있다.           지난 2007년 전라남도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등록한다는 통보를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소재하는데, 1925년에 건립된 가옥으로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1922∼1982)과 그의 가족에 의해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의 유고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곳이다.   윤동주는 1943년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형을 받고 광복 전인 1945년 2월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또한 위의 수필을 쓴 그의 친우 정병욱은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한글 연구 등에 매진한 인물로 우리나라 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 원고를 정병욱에게 맡겨 그의 집에서 보관함으로써 어렵게 보존되다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의 대표작으로는 , , 등이 있는데, 그의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그리고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사진의 가옥은 고 정병욱 교수가 기거하던 고택이라는 점,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해 온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사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글로 작성된 시고가 두 분의 우정과 신뢰로 보존됨으로써 광복 후에 시집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건축적ㆍ국문학사적인 의미가 크다. 건물 뿐만 아니라 윤동주와 정병욱 두사람만 알 수 있는 사연을 정병욱 자신이 글로 표현한 점도 이채롭다. 물질적인 유산의 형태는 찾아서 보존하면 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두사람 간의 무형의 우정은 이렇게 글로써 표현되어 후세에 남겨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로 보아진다.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와 함께 찍은 정병욱의 사진 만년의 정병욱 교수 평생 윤동주를 추억했던, 윤동주의 친구 우리 국문학의 선구자 鄭炳昱, 1922.3. 25 ~ 1982. 10. 12. 수험생들에게는 윤동주의 친구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전공자들에게는 국문학의 체계를 확립한 제1세대 학자로 유명하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대학에 윤동주와 함께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사카의 방공포에서 근무.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 후 바로 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른바 3음보 학설[1]을 비롯한 고려가요, 조선시대 시조의 체계와 특징을 정리한 첫 세대의 학자이다. 최치원을 연구하던 중 을 모조리 읽고 학사 졸업논문을 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모아서 간행하는 데 도움을 준 한 명으로도 유명하다.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시인의 육필을 전라남도 광양시에 위치한 본가[2]에 맡기면서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 달라'라고 모친에게 당부한 일화가 있다. 암울한 시절에 사실상 목숨을 걸고 윤동주의 유고를 지켜낸 장본인인 셈.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상)에는 "잊지 못할 윤동주"라는 그의 수필이 실려 있었다. 1982년 10월 12일에 급성 저혈압과 양성 신장종양의 합병증세로 인하여 6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자료@=== '윤동주 정병욱 학회' 만들어 문학사적 조명을"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 개최 (광양=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전남 광양시 13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백영 정병욱과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사적 조명을 통한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2013.11.13 광양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 개최 (광양=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전남 광양시가 청년시인 윤동주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존해 우리에게 건네준 백영 정병욱 선생 가옥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광양시는 2013년 11월 13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백영 정병욱과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사적 조명을 통한 정병욱 가옥 활용 방안'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정병욱 가옥을 '윤동주와 정병욱'을 동시에 기리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윤동주 학회' 또는 '윤동주 정병욱 학회'를 결성해 문학사적 조명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날 '한글과 시혼을 지킨 윤동주와 정병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숙명여자대학교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의 한글 유고가 섬진강 가의 한 양조장 마루 밑에 숨겨 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며 정병욱의 가옥을 윤동주의 유고만을 기리는 공간을 넘어 정병욱을 기리는 공간으로도 의미망을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배의 시집을 목숨처럼 보전하고 알려온 정병욱은 이후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시조문학사전', '한국고전시가론', '한국의 판소리' 등을 냈고 1979년 외솔상, 1980년 3·1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국문학계의 거목으로 기록된다"며 "이 공간을 '윤동주'만 강조되는 곳을 넘어 '윤동주 + 정병욱'이 합해질 때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정병욱의 여동생 정덕희와 윤동주의 남동생 윤일주의 결혼으로 두 사람은 인척 관계가 되면서 두 인물의 관계가 한국 문학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를 형성한다"며 "따라서 정병욱이 이뤄놓은 삶과 학문적 업적의 궤적만으로도 정병욱의 유고나 자료를 전시하는 부스도 마련하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삶과 우정을 설명하는 동영상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성균관대학교 윤인석 교수는 '역사적 터의 내력과 활용, 이야기가 있는 정병욱 가옥의 미래를 그려보며'라는 주제 발표에서 "전문적인 학자들이 중심이 돼 유족과 함께 '윤동주 학회' 또는 '윤동주 정병욱 학회'를 만들면 광양시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처럼 대학과 학자와 국제적인 관계망을 가질 때 광양시를 찾아오는 방문자도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광양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청년시인 윤동주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를 보존해 우리에게 건네준 백영 정병욱 가옥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또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선생의 인연을 기념하고 시인의 순결한 시 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적 장소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인 1962년의 정병욱 교수의 집 전경이다. 망덕산 자락에 딱 붙어서 옹색하게 보이는데 축대 앞 선착장 쪽으로 20여m 바다쪽을 메꿔서 지금은 아래 사진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50여년 전의 모습이 훨씬 정겨웠었다. 전라도 동부 6군에서는 장어를 먹으려면 망덕이(망덕포구)로 모였고 그것도 돈많은 사람들 몫이었고 대부분은 백합조개와 갱조개를 즐겼다. 우럭조개나 맛조개, 새조개 등은 축에도 끼지 못했던 넉넉한 그런 때가 있었다.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보관되었었다 해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갑작스런 관심에 급히 함석을 덧대어 보수하여 어쩐지 어설픈 모습이다.    문은 잠겼고 안내는 물론 물어 볼 곳도 없어 도둑처럼 흘깃할깃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지만 왠지 허망하다. 아예 폐쇄를 하던지, 멀리서 와가지고 헛걸음 하니 기분은 썩 좋지 않다. 그럼 그렇지!.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미뤄 짐작한다는 것이 쉽진 않다. 망덕포구 '랜드마크'조형물을 만들겠다고 공사중이다.        정병욱이 학병으로 강제 징용 당하자 그의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항아리에 담아 마루밑에 묻어 뒀던 것을 정병욱이 해방되자 귀가하여 이 원고를 1948년에 시집을 간행하였다.    윤동주가 1917년생이고, 정병욱이 1922년생이다. 윤동주는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김약연의 누이동생)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동주의 유해를 안고 나온 사람이 경희대 교수를 지낸 당숙 윤영춘이고  세시봉의 윤형주가 윤영춘의 아들이다. 윤동주가 윤형주의 6촌형이다.     윤동주 시인 유고 보존 정병욱 교수 가옥 1925년에 건립된 이 가옥은 국문학자 鄭炳昱(1922~1982)의 옛 가옥으로 尹東柱 (1917~1945)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었던 곳이다.윤동주 시인은 1943년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친우 정병욱(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은 한국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등 민족문화진흥에 크게 공헌한 학자로서 윤동주와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자선시집 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자필원고를 정병욱에게 맡기고 유학을 떠났다. 이 가옥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은밀히 보존되던 윤동주시인의 유고는 정병욱에 의해 1948년 한 권의 시집으로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시인의 시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다듬은 순수 서정 속에 민족의식을 담아내 일제 암흑기의 어두운 문학사를 밝혀주는 저항의 등불로 밝혀지고 있으며 . . . 등의 대표작은 널리 애송되는 작품으로 유고가 이곳에서 보존되지 않았다면 그 존재조차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이 가옥은 국문학자 정병욱 교수가 기거했던 옛 가옥이라는 점, 요즘은 보기 힘든 1920년대 점포주택이라는 점, 그리고 특히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쓰여진 민족문학의 귀중한 시집이 두 분의 우정으로 온전히 보존되어 겨레에 전해지게 된 자리라는 점에서 문학사적·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던 배알도해수욕장,이 섬 정상에 큼직한 정자가 있어 좋은 쉼터였었다. '망덕산'을 향해 절하는 형국이라는 '배알도'는 이야기거리가 많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전우치가 쇠섬 궁기마을에 왕국을 세우고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출처 :윤동주기념사업회
2050    [고향문단소식]- 화룡 출신 최룡관시백 "하이퍼시창작론" 출간 댓글:  조회:3116  추천:0  2017-03-17
최룡관시인의 '하이퍼시창작론' 출간 (ZOGLO) 2017년3월17일  최룡관시인의 '하이퍼시창작론'이 최근 연변대학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하이퍼시창작론에는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 "무의식에 대한 리해", "하이퍼시의 10대 촉구", "갈무리" 등 내용이 수록되여있다.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최룡관 시인은 하이퍼시란 무의식적으로 쓴 시, 그 고리는 다선, 불련속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시는 서양시문학의 최신 조류이라며 하이퍼시를 하는것은 국제적인 시와 연변의 시를 접목하는 대사라고 말한다. 저자 최룡관의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조글로미디어 
2049    일본 민주주의 녀류시인 - 이바라키 노리코 댓글:  조회:4402  추천:0  2017-03-12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はじ)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行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與えられた道を  步みゆかねば。  今宵も空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윤동주  /아바라키 노리코 日譯.   좀 더 강하게                   / 이바라기 노리코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아카이시(赤石)의 도미가 먹고 싶다고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몇 가지 종류의 잼이 언제나 식탁에 있어야 한다고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아침 햇빛이 비치는 밝은 주방을 갖고 싶다고   닳아빠진 구두는 깨끗이 버리고 딱 들어맞는 소리 나는 새 구두의 감촉을 좀더 느끼고 싶다고   가을 여행을 떠나는 이가 있다면 윙크로 보내는 것도 괜찮다 왜일까 위축되는 것이 생활이라고   믿어버리고 마는 촌락과 도시 집들의 차양은 눈을 치켜뜬 눈꺼풀   어이 조그마한 시계집 주인이여 구부러진 등을 펴고 당신은 소리쳐도 괜찮다 올해도 결국 토요일의 장어는 맛보지 못했다고   어이 조그마한 낚시도구집 주인이여 당신은 소리쳐도 괜찮다 나는 아직 이세(伊勢)의 바다도 보지 못했다고   여인을 사귀고 싶으면 빼앗아도 괜찮다 남자를 사귀고 싶으면 빼앗아도 괜찮다   아 우리들이 좀더 탐욕적으로 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시작되지는 않는다       -시집『대화』(1955년) / 《현대문학》(2012년 5월호) 재수록       -이바라키 노리코  / 1926년 오사카 출생. 제국여자약전(현재 도호[東邦]대학의 전신) 약학부 졸업.  대표시집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보이지 않는 배달부』『진혼가』등. 2006년 사망.   -번역 / 양동국(상명대 일본어문학과 교수)   윤동주 시의 윤회, 이바라기 노리코           사실 나는 어떤 유행에 대해 기피하는 기질이 있어, 윤동주 시에 대해 그리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이나 신동엽이다. 그런데 일본에 와서 윤동주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윤동주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은 유별나다. 그 사랑을 통해 윤동주의 의미를 다시 감득(感得)하는 것이다.  사에구사 토시카츠[三枝壽勝] 교수는 한국문학을 논하는 일본인의 자세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 한국문학에서 일본문학의 영향을 찾아보려는 태도다. 둘째,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를 정의로운 행동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대해 사에구사 교수는 예민하게 지적한 바 있다. 사에구사 교수는 일본인이 한국문학을 대하려면, 우월하다는 자세나 뭔가 사죄한다는 정의로운 생각이 아니라, 단순히 '외국문학'으로 읽어야지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사에구사 교수의 본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경청한다. 어떤 선입견을 두고 작품을 대하면 작품의 본뜻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담감을 그대로 안은 채 윤동주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연구자는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다. 2003년 겨울, 소설가 김학철 선생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자리에서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김학철과 윤동주를 비교해서 말했다.  "한국문학에서 세계문학에 내놓을 수 있는 작가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인 윤동주이고, 소설가 김학철입니다." 이 말대로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1985년 5월 연변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를 발견하고, 친필책을 냈다. 또한 오오무라 마스오는 소설가 김학철을 가장 처음 만난 외국인이며, 김학철이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에 만난 외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윤동주와 김학철의 많은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를 처음 번역한 이는 이부키 고오[伊吹鄕]지만, 그의 번역은 지나친 의역과 꺼릭칙 한 대목이 있다. 나아가 윤동주의 시를 일본 교과서에 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다.       전후 민주주의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 1945년 일본이 패전했을 때 그녀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고, 이듬해 그녀는 지금의 토호[東邦]대학인 제국여자약전(帝国女子薬専)의 약학부를 졸업한다. 말이 공부지, 전쟁에 동원되어 해군 약제조공장에서 일하는  이른바 '군국소녀'였다. 이 무렵에 시를 쓰기 시작한 그녀는 동인지 『카이[櫂, 노]』를 창간했는데, 첫시집『대화』(1955)부터 이바라기의 시는 시원시원한 상상력이 넘쳤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58년에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을 내면서 당시 풍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도시를 으스대며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 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중략)   때문에 결심했다 되도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화가 루오 할아버지처럼              - 시집「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서,『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이바라키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시「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그녀가 32살 때 20대 초기를 생각하며 쓴 시로, 일본의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다. 온 거리가 대공습으로 와르르 무너진 건물 안에서 천정을 보았을 때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였다는 증언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죽어가는 사람들, 전쟁에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내들이 등장한다. 이 전쟁을 그녀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단정한다. "비굴한 도시를 으스대며 쏘다녔다"라는 표현처럼  자유롭게 활보한다. 끝연에 나오는 루오(Henri Rousseau, 1844~1910)는 뒤늦게 명성을 얻었던 할아버지 화가였다. 루오처럼 뒤늦게라도 청춘을 즐기고 싶다는 역설적 표현이 이 시를 역경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노래로 빚어낸다. 그녀의 시에는 역사적인 어둠과 비극적 현장이 분명하게 담겨있다. 가령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대지진의 도쿄에서 / 왜 죄없이 살해되었는가"(「쟝 폴 사르트르에게」)라며 1923년 9월 1일에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녀는 흑인 차별, 부락민(〓백정) 차별, 여성 차별 문제 등 그늘에서 사는 사람에 대한 시선을 평생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그 어느 곳에도 패배적인 비장미는 없다. 오히려 낙관적이며 밝기만 하다. 바로 이러한 자세로 인해, 전쟁 후 풍경을 숨막히는 비극적 어둠으로 표현했던 일반 시인들과 달리,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 한 편의 시로 전후시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었던 것이다. 두번째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이후 세번째 시집 『진혼가』(1965), 『자기 감수성만큼(自分の感受性くらい)』(1977)등 시집이 출판될 때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주었다. 1980년대 50세 때 남편을 잃은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글을 공부하며 미지의 경계(境界)를 넘어선다. 아래 시「이웃나라 말의 숲(隣国語の森)」은 1982년에 낸 시집『촌지(寸志)』에 실려 있는데, 그녀가 한글과 윤동주를 얼마나 동경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지도 위 조선을 새까맣게 먹칠 해놓고 가을 바람을 듣는다        다쿠보쿠(啄木, 일본의 민요시인)의 메이지 43년의 노래                                         일본말이 한때 걷어차 버리려 했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워 버리려 해도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었던 한글                   용서하세요 「유루시테 쿠다사이」                                    땀을 줄줄 흘리며 이번엔 이쪽이 배울 차례입니다              그 어떤 나라의 언어도 끝내 깔아눕히지 못했던      굳건한 알타이어, 이 하나의 정수(精髓)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왜놈의 후예인 저는      긴장하지 않으면      금세 한 맺힌 말에      붙잡혀 먹힐 것 같고      그러한 호랑이가 정말 숨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옛날 옛날 그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대' 라고      말해온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이기에        어딘가 멀리서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      노래      시치미 떼고      엉뚱하기도 한      속담의 보물 창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는      대사전을 베개로 선잠을 자면      "자네 늦게 들어왔네"라고      윤동주가 조용히 꾸짖는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으려 합니다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降伏節)      8월 15일을 거슬러 올라 불과 반 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학생복을 입은 채로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당시 용감하게 한글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잔합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을      서투른 발음으로 읽어 보지만      당신은 씽긋도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도 없는 것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 데까지      가서 쓰러져 눕고 말고 싸리 들녘에                                - 「이웃나라 말의 숲(隣国語の森)」, 시집『촌지(寸志)』(1982)    '한글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오솔길부터 시는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한글와 일본어를 하나 하나 대비시키는 부분은 무척 재미있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모두 아는 독자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시의 중반에 이르러 일본 군국주의가 한글을 없애려는 대목부터 시는 진지해진다. 그리고 숲 속에서 윤동주가 등장하여, 시인과 대화를 나눈다. 윤동주는 시인에게 "늦었네"라고 말을 건다. 이 말은 시인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책(自責)일 것이다. 이 시는 이바라키 노리코가 윤동주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 원점을 보여주는 시다.  이어 그녀는 『한글에의 여행(ハングルへの旅)』(1986)이라는 에세이집을 내기도 했다. 이 에세이집에 실린 「윤동주」라는 수필을 치쿠마쇼보 출판사의 편집국장이 우연히 읽었고, 1990년 고교 현대문 교과서에 11페이지에 걸쳐 실리게 된다. 이바라기는 이 글에서 윤동주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한(痛恨)의 감정을 갖지 않고는 이 시인을 만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썼다.   '청춘시인' 윤동주―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있는 시인. 수난의 상징, 순결의 상징‘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장본인. 일본유학 중,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윤동주가 대학생이었을 때 자신은 여고생이었다며, 만났다면 ‘동주오빠’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고 농담하곤 했다던 이바라기 노리코.  그러면서도.  윤동주의 시가 다치하라[入原道造]을 받은 흔적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바라기가 윤동주를 알리면서 1995년 일본 공영방송 NHK TV에서 '윤동주 특집'이 방영하기도 했다. 1990년 63세 때 번역시집『한국현대시선(韓國現代詩選)』(花神社)을 펴낸다. 12명의 한국 시인의 시를 실은 이  번역시집으로 그녀는 1991년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다.   이미 만들어진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제는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아 마음속으로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만으로 서서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기대고자 한다면 기댈 건 의자 등받이뿐   만년에 낸 시집은 오히려 20대의 싱싱한 상상력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녀는 모든 권위적인 파시즘을 거부했다. 권위주의가 만들어낸 일체의  사상, 종교, 학문을 그녀는 거부한다.  오히려 "기댈 건 / 의자 등받이뿐"이라는 표현으로 일본의 우익을 경멸했다.  만년의 그는 일본사회에 전후 민주주의 이념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 시집『기대지 말고(倚りかからず)』(1999)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분노의 시집이었는데, 기록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던 2006년 2월 이바라기를 아는 사람들은 난데없는 부음 편지를 받는다.   "이번에 저는 2006년 2월 17일, 뇌막졸중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장례ㆍ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위금이나 조화 등 아무 것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 사람도 떠났구나'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기억해 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서경식 칼럼「심야통신」(『한겨레신문』2006.3.31)에 실린 「죽은 자가 보내온 부음」에 실린 인용문은 이바라기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써놓은 편지였다. 2006년 2월9일, 도쿄의 자택에서 79세의 나이로 그녀는 조용히 먼 여행을 떠난다.   정신적 윤회 : 윤동주, 이바라기 노리코, 서준식 서경식 칼럼에 따르면, 그의 형 서준식이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서준식이 17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250통 이상의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차례에 걸쳐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 시「6월」도 인용되어 있다.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이 끝나면 한 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워놓고 바구니를 두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조끼를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먹을 수 있는 열매 달린 가로수가 끝없이 뻗어 있고, 제비꽃 빛깔의 황혼은 젊은이의 정찬 술렁거림으로 넘치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친근함과 재미와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이 시는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읽는 시다. 각연의 첫행에 모두 "어딘가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을 읽으면 마음이 이내 환해진다. 1, 2연은 단순히 아름다운 인간 공동체의 정경이 재현되어 있다. 그런데 3연에 이르면 개인적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들의 삶과 공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3연 첫행 하나로 이 시는 상상력이 비약(飛躍)한다.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의 힘은 없을까"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어서 시인은 아름다운 마을과 아름다운 거리를 읊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이 시를 읽었던 서준식은 1982년 7월31일 소인이 찍힌 편지에서는 「6월」을 스스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이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유토피아’다.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옥중서간집』야간비행)고 썼다. 1982년에 아무 꿈도 꾸지 못할 깜깜한 시대에 서준식은 이 시 한 편으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은 평생 생활의 질감(質感)을 느낄 수 있는 시를 투명하게 빚어냈다.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희생자, 차별대우 혹은 여성차별 문제를 시로 써온 그녀는 인간을 억압하는 온갖 모순에 이성적으로 응전했다.  윤동주와 함께 순수의 꿈을 꾸었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학술적으로 꼼꼼히 비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바라기 노리코 시를 읽으면서 윤동주를 느낀다. 윤동주 시의 핵심에는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있다. 윤동주 시의 원점에는 그가 쓴 많은 동시(童詩)가 있다. 윤동주가 갖고 있던 어린 아이의 맑고 투명한 심성이 이바라키 노리코의 시에도 보인다. 윤동주가 살아 있다면 이바라기 노리코처럼 쓰지 않았을까? 이바라기 노리코가 윤동주에게 받은 영향은 무엇일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정신에서 나는 윤동주 시정신의 환생(幻生)을 본다. 전혀 학술적이지 않은 짐작이지만 나는 이바라기 노리코 시를 읽으면서 꺼꾸로 윤동주를 만나는 것이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나는 "저도 이바라키 노리코처럼 한글을 배워서 윤동주의 마음을 배우고 싶어요"라는 말을 어떤 일본인에게 들었을 때 이바라키 노리코의 보이지 않는 힘을 느꼈다.     그녀의 시는 감옥 안에 있던 서준식의 마음밭에 희망의 유토피아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서준식은 석방되자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사랑방을 만든다. 이렇게 윤동주에서 오오무라 마스오, 그리고 이바라키 노리코에서 다시 서준식, 그의 동생 서경식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계보는 참으로 아름다운 정신적 윤회(輪廻)라 아니할 수 없다. 윤동주의 시정신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이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 아름다운 그대들, 그대들에게 힘은 있는가.   (김응교 2009.1.19)     이바라키 노리코 대표작 (번역 김응교)      6월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이 끝나면 한 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워놓고 바구니를 두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조끼를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먹을 수 있는 열매 달린 가로수가 끝없이 뻗어 있고, 제비꽃 빛깔의 석양은 젊은이의 정찬 술렁거림으로 넘치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들,그들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친근함과 재미와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지고 생각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부릴 계기를 잃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아름다운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굳어 있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올리고 비굴한 도시를 으스대며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 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때문에 결심했다 되도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화가 루오 할아버지처럼                               -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자신의 感受性 정도는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가 물 주는 것을 게을리 하고서는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해지는 것을 친척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얼 하든 서툴기만 했던 것은 나 자신   초심(初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시당초 유약한 결심일 뿐이었다   쓸데없는 모든 것을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내는 존엄(尊嚴)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어리석은 자여                                   - 시집『자기 감수성만큼(自分の感受性くらい)』(1977)          이웃나라 말의 숲                           숲속 깊이                                                               가면 갈수록                                                                나뭇가지 엇갈리며 더욱 깊숙해져                                 외국어의 숲은 울창해 있다                                         한낮 어두운 오솔길 홀로 터벅터벅                                 「구리(栗)」는 밤                                                    「카제(風)」는 밤                                                    「오바케」는 도깨비                                                     「헤비(蛇)」 뱀                                                       「히미츠(秘密)」 비밀                                                  「다케(茸)」 버섯                                                         무서워 「코와이」                                                     입구 근처에는                                                            들떠 있었다                                                             모든 것이 죄다 신기하고                                 명석한 음표문자와 청렬한 울림에                          「히 노 히까리」 햇빛                                 「우사기」 토끼                                         「데타라메」 엉터리                                   「아이(愛)」 사랑                                         「키라이(きらい)」 싫어요                                      「다비비토(旅人)」 나그네                                     지도 위 조선을 새까맣게 먹칠 해놓고 가을 바람을 듣는다    타그보그(啄木, 일본의 민요시인)의 메이지 43년의 노래                                     일본말이 한때 걷어차 버리려 했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워 버리려 해도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었던 한글               용서하세요  "유루시테 쿠다사이"                               땀을 줄줄 흘리며 이번엔 이쪽이 배울 차례입니다         그 어떤 나라의 언어도 끝내 깔아눕히지 못했던 굳건한 알타이어, 이 하나의 정수(精髓)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왜놈의 후예인 저는 긴장하지 않으면 금세 한 맺힌 말에 붙잡혀 먹힐 것 같고 그러한 호랑이가 정말 숨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옛날 옛날 그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대' 라고 말해온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이기에   어딘가 멀리서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 노래 시치미 떼고 엉뚱하기도 한 속담의 보물 창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는 대사전을 베개로 선잠을 자면 "자네 늦게 들어왔네"라고 윤동주가 조용히 꾸짖는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으려 합니다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降伏節) 8월 15일을 거슬러 올라 불과 반 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학생복을 입은 채로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당시 용감하게 한글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잔합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을 서투른 발음으로 읽어 보지만 당신은 씽긋도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도 없는 것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데까지 가서 쓰러져 눕고 말고 싸리 들녘에             - 「이웃나라 말의 숲(隣国語の森)」전문, 시집『촌지(寸志)』(1982)            기대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제는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아 마음속으로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만으로 서서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기대고자 한다면 기댈 건 의자 등받이뿐         -『기대지 말고(倚りかからず)』(1999)  
2048    천재시인 李箱의 시작품 뮤지컬로 재탄생하다... 댓글:  조회:3057  추천:0  2017-03-04
▲ 뮤지컬 '스모크' 캐스팅 사진(ⓒ(주)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시대를 앞선 천재시인 이상의 작품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 '스모크'가 더욱 강력해진 출연진과 업그레이드된 작품성으로 오는 3월 18일~5월 28일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공연된다.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 제15호'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뮤지컬 '스모크'는 지난해 12월, 프로듀서 김수로가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선보이며 성공적인 초연 무대를 가졌다. '스모크'는 순수하고 바다를 꿈을 꾸는 '해(海)', 모든 걸 포기하고 세상을 떠나려는 '초(超)', 그들에게 납치된 여인 '홍(紅)'. 세 사람이 아무도 찾지 않는 폐업한 한 카페에 머무르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천재시인 이상의 위대하고 불가해한 시는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와 감각적인 음악과 만나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극의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캐릭터의 강렬한 감정은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며 강한 울림을 전한다.  추정화 작가와 허수현 작곡가 콤비는 시인 이상의 작품들을 뮤지컬 속에 유기적으로 녹여냈다. 작품의 핵심 소재인 '오감도' 외에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거울', '가구의 추위', '회한의 장', 소설 '날개', '종생기' 등 한국 현대문학사상 가장 개성 있는 발상과 표현을 선보인 이상의 대표작을 대사와 노래 가사에 절묘하게 담아냈다.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성, 식민지 조국에서 살아야만 했던 예술가의 불안, 고독, 절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날고 싶었던 열망과 희망까지 작품은 세상과 발이 맞지 않았던 절름발이 이상의 삶과 예술, 고뇌를 세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림을 그리는 소년 '해' 역은 정원영, 고은성, 윤소호가 캐스팅됐다. 시를 쓰는 남자 '초' 역에는 김재범, 김경수, 박은석이 함께한다. 부서질 듯 아픈 고통을 가진 여인 '홍' 역은 정연, 김여진, 유주혜가 연기한다. 뮤지컬 시장을 이끄는 대세 배우로 이루어진 뮤지컬 '스모크'의 배우들은 탁월한 연기력과 강렬한 에너지로 관객들을 시인 이상의 심오한 작품 세계로 인도한다.  극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추정화 작가는 작품 속 대사와 가사를 간결하게 수정하고 압축하여 드라마의 밀도를 높였다. 속도감 있는 극의 전개는 캐릭터의 극대화된 심리상태를 스릴감 있게 전하는 동시에, 그들 사이의 관계성을 더욱 명확하게 표현한다. 상징적 소품과 영상을 활용한 새로운 무대 연출은 공연에 풍성함을 더하고 완성도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신원선 기자
2047    프랑스 시인 - 페기 댓글:  조회:4591  추천:0  2017-03-01
  출생일 1873. 1. 7, 프랑스 오를레앙 사망일 1914. 9. 5, 발레루아 근처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철학자.   그리스도교·사회주의·애국주의 등을 결합하여 마음속 깊이 개인적 신앙으로 삼고 실천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가 의자 수선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오를레앙에서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교수가 될 생각으로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895년 사회주의가 현대세계의 빈곤과 결핍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확신하여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또 죽을 때까지 깊은 신앙심만은 버리지 않았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 의식은 거부했다. 이무렵 그는 인상적인 3부작 〈잔 다르크 Jeanne d'Arc〉(1897)의 초판을 써 종교적이면서도 사회주의적인 자신의 원칙을 주장하고 선언했다. 당시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드레퓌스의 무죄석방을 위한 싸움에 주저 없이 뛰어들어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힘썼다. 페기는 책방을 운영하면서 그곳을 드레퓌스 지지운동의 중심지로 만드는 한편, 잡지 〈카예 드 라 캥젠 Cahiers de la Quinzaine〉을 발간하여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 잡지는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그뒤 15년 동안 프랑스 지성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나톨 프랑스, 앙리 베르그송, 장 조레, 로맹 롤랑 등 프랑스의 지도적 문필가들이 이 잡지에 기고했다. 페기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몇 권의 수필집을 냈지만, 그의 완숙성이 잘 드러난 중요한 작품들은 시였다. 대표적인 시로는 〈잔 다르크의 희생의 전설 Le Mystère de la charité de Jeanne d'Arc〉(1910)·〈성스러운 순결의 신비 Mystère des Saints Innocents〉(1912)·〈이브 Eve〉(1913) 등이 있다. 특히 〈잔 다르크의 희생의 전설〉은 〈잔 다르크〉의 몇몇 장면을 확대하여 신비적으로 명상한 시이다. 〈이브〉는 그의 말년의 명상과 기도가 정점에 도달한 것을 보여주는 시로, 4,000개의 알렉산더격 시행으로 된 장엄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그는 인간의 조건을 그리스도교 계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페기는 육군 중위로 전선에 나갔다가 첫번째 마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Y. 세르베스의 〈샤를 페기 : 구원의 추구 Charles Péguy:the Pursuit of Salvation〉(1953)와 마르조리에 빌리에르의 〈샤를 페기, 고결함에 대한 연구 Charles Péguy, A Study in Integrity〉(1965) 등이 있다. [Daum백과] 페기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46    일본 시인 - 혼다 히사시 댓글:  조회:3645  추천:0  2017-02-23
     ▲시집 [☆ 피에타Piieta’☆]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 피에타Piieta’] 권택명 옮김 / 혼다 히사시本多壽시집 / 문학세계사(2015.09.15) /  ================= =================   피에타Piieta’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오늘, 쓸쓸함은 쓰라리고 밝고, 푸르게 빛나는 소금 같다     네 안에 있는 숲의 거처 너를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지만 끝내, 네가 보이지 않는다     젖은 모래 같은 눈 안쪽에 너를 불러내려 해도 끝내, 너는 나타나지 않는다                  ¤     나를 둘러싸는 나무들 우물거리는 꿩과 비둘기의 울음 소리 나가 버린 후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 탁류에 삼키어 버린 산기슭의 마을 한 없이 늘어가는 죽은 자의 숫자                   ¤     오늘, 슬픔은 깊고 끝없이, 높으며 넓은 하늘 같다     마른 바람에 부쳐 보내고 싶은 한 개의 푸른 과일 하지만, 네 있는 곳을 모른다     네 발 밑의 작은 산골짜기에서 너를 쳐다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지만 네 시초가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우울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하느님도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었지요 바로 그 증거로 산속마다 바다를 행해 똑바르게 한 줄기 강을 그리려고 그는 붓의 흔적이 저처럼 굽어 있다 때때로 망설인 흔적이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먹이 튄 흔적이 연못이 되어 있다 먹물이 적어 땅속으로 사라진 지류支流도 있다     하늘위에서 대지를 내려다보렴 한 줄기 강을 그리려다 결국 마음에 드는 강을 그리지 못한 하느님이 “아아, 어쩌나!”하고 조바심을 내며 엉망으로 그은 선이 마치 자신의 몸을 세게 긁어 생긴 상처 같다                        ¤     하느님도 실패한 적이 있었지요 바로 그 증거로 숲속이나 바닷속에, 그래서 참으로 기괴한 생물들이 저처럼 가득 흩어져 있다 세가 되지 않은 물고기와 말이 되지 않는 해마 비틀어 버려진 채로 있는 권패卷貝와 물레 붙어 떠도는 해파리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식충식물     하지만 하늘 위에서 아래 세계를 내려다보렴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을 만들 수 없었던 하느님은 “에이, 이런!”하고 자포자기하여 이렇게 맨 끝에 만든 생물이 아직도 전쟁만 하고 있다           무궁화 환상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길이란 길들은 모두 한 줄로 늘어서서 창공을 향해 높이높이 순백의 꽃을 바쳐 올리고 있는 무궁화     저것은 일찍이 모국어를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고, 끝내는 이름까지 빼앗긴 사람들의 유한遺恨과 하늘에 닿지 못한 기도의 모습     나라를 뒤흔든 무수한 외침들 아이고 아이고 하는 통곡은 지금도 가지들을 올리는 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 귀를 기울이면 비분悲憤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가지를 꺾으면 안 된다 꽃을 따면 안 된다 하물며 줄기에 도끼를 내리찍으면 바로 죽은 자의 뼈가 반란을 일으키리라     눈을 집중하여 잘 보면 나무 밑둥치에서 뻗어가는 피부 같은 땅바닥에 피의 강이 흐르고 시체가 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무궁화가 피는 길을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말없이 걷는다 따끔따끔 통증이 이는 발을 어루만지며 걷는다 가슴의 동통疼痛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가야금 환상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푸른 오동나무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나무 밑둥치에잊혀진 가야금 한 개가 있고 열두 마리의세가 놀고 있다 천 년이나 전에 멸절滅絶한 의 환상이다     작은 부리가 마치모습을 지니지 않는 연주자의 손가락 끝처럼 현을 퉁기며 망국의 곡을 연주하고 있다 그 애절한 가락 속에 옛날과 다름없는 산하가 있고 하늘에 초승달이 걸려 있다 달빛 아래 훌쩍이며 울고 있는 신라에 멸망당한 가야의 여인이다 이미 천 년 동안이나 계속 울고 있는데도 다 울지 못하는 슬픔의 바다 사랑으로 변환할 수 없는 한恨의 노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인의 슬픔에 다가가서 함께 울어주는 것뿐이다 환상의 새가 연주하는 쓸쓸한 곡을 들는 것뿐이다 그밖에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끝내나지 않은 가락 언제까지 함께 울면서 곡이 끝날 것인가     여인이여 언젠가 가야금으로 변신해 버린 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안고 애도哀悼의 여행에 나서리라 그리고 낙동강 가를 찾아가리라 고향에 도착하면 푸른 오동나무 밑둥치에 그대를 묻어 주리라           비 오는 양수리兩水里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세차게 비가 내리는 가운데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 기슭에 섰다     양 기슭은 안개가 끼어서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어디까지가 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 갈래 탁류에는 명확히 경계가 있어서 하나로 융합되지 않은 채 서로 다투고 있었다     빗소리에 뒤섞이고 물소리에 헷갈리고 있어도 내 귀는 분명 찢겨진 한민족의 통곡을 듣고 있었다     수면을 바라보고 있자 눈앞 물 위에 백발의 한 사람이 나타나 두 물줄기에 손을 넣허 휘젓고 있다 자세히 보았더니 그날 명동에서 점심을 함께한 김광림 시인이다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늙어서도 여태 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인의 눈물을 봐서 한강 물이여 북과 남으로 흐름을 가리지 않고 그나마 하나가 될 수는 없겠는가     고여 올라 넘쳐나는 눈물은 양 콧날 옆으로 흘러 금방 하나가 되어 가슴으로 흘러들고 있는데           태양의 뜰∙4월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빛을 차단하기 위해 친 레이스 달린 커튼의 흰 그물코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커튼의 그림자가 그 사람의 전신에 비치어 있다 모르는 새에 죽음이 그를 잡으려고 그물을 친 것이다     “임종의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기를!” 그렇게 외쳐 온 사람이 죽음의 그물에 걸려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 번민도 하지 않고 발버둥도 치지 않고 그러나 체념도 하지 않고 타고르의『기탄잘리』를 말한다     그의 옆에 앉아 맞장구를 치면서 나도 그의 전신을 감싸는 빛의 그물에 걸려 있다 계속 시를 말하지만 실은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미완으로 끝날 생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근일 출판될 시집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정원에 넘치고 있는 빛을 등지고 있다 그로 인해 스스로 그림자를 짙게 하는 사람과 대좌하고 있는 네게 대체 무엇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걸까 그가 생각하고 있는 죽음을 함께 생각하고는 것 외에 무엇이     그는 목마름을 호소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머리맡의 물을 마신다 그는 고통으로 호소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왼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이 다, 내가 거짓말로 상황을 엿보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있지도 않은 용건을 핑계로 온 것을 그가 음미하고 있는 죽음의 예감을 나도 음미한다           사후死後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육체는 죽음보다 조금 큰 것 같다     당신의 발이 이불에서 조금 비어져 나와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의 실재를 부정해 보였는가 핏기를 잃은 입술이 푸른 미소를 띠고 있다     침대 옆의 작은 탁자 위의 컵에 물이 반쯤 남아 있다     나머지 반은 어디로 갔을까 어제까지 한 송이 장미가 꽂혀 있었다면 장미는, 어디로 사라졌나     당신의시선이 한때 방치된 채로 공허한 방 창문에 봄의 어둠이 퍼져 있다     나는 당신의 죽음을 새로운 종양처럼 지닌 채 당신의 사후死後를 살리라     지금, 조그만           저녁놀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책상 너머로 밖을 보고 있을 때 유리창을 향해 작은 세가 날아 들어왔다 창에 비친 하늘을 진짜 하늘로 착각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진짜 하늘과 창에 비친 하늘,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걸까 어느 쪽이든 처음부터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실체가 있는 것은 두 하늘을 갈라놓고 있는 한 장의 유리창뿐 허실虛實 사이의 창이 깨어지고 당신은 처음인 것처럼 창의 존재를 인식한다     하지만 뜰에 떨어진 작은 새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당신은 창 저편의 금이 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한 방울의 피가 수조水槽에 퍼지듯이 하늘에 퍼져가는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작은 새의 행방을 찾고 있다     당신의 죽음이 행방을 찾듯이           영원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다 물받이 가에 참새가 나란히 앉아 물을 마시고 있다 가늘게 날개를 떨어서 물방울이 하얀 불꽃처럼 흩날리고 있다     몰두해서는 안 된다 풀숲에서, 예리한 살의殺意를 낫처럼 빛을 내는 것이 있다 창고 그늘에 자신의 그림자보다 검은 그림자를 지닌 것이 젖은 혀를 늘어뜨리고 있다     잽싸게 위험을 감지한 참새가 물보라보다 높이 날아올라 잎새들 안으로 사리진 후 물받이에서 넘치는 물이 천천히 뜰을 적셔 간다     이윽고, 나뭇잎이 내려오듯 참새가 날아 내려앉는다 물받이 가에 시끌벅적한 지저귐이 돌아오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한 시간이 다시금 돌아온다     당신이 없는 뜰에 물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겨울날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먼나무의 붉고 둥근 귀여운 열매 윤기 있게 반사하는 겨울빛 사랑을 경험하고 인식하려면, 빛이 한 마리의 개똥쥐빠귀로 변신하는 한순간을 포착하여 다시, 언어로 성취하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조금 바람이 있는 듯하다 몸을 뒤집으며 가늘게 흔들리는 마른 풀 그늘에서 문득 낫처럼 굽은 목을 쳐드는 것 죽음도 또한, 그와 같이 평온한 일상의 나날 속에 모습을 나타내고 조심스러운 대화를 얼어붙게 하는 것이다     채소밭에서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양배추 껍질을 벗기고 있다 몇 겹이나 몇 겹이나 겹쳐진 조물주의 생각을 해독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꺼풀 한 꺼풀 정성스레 벗기고 있는 것이다 생애의 자승자박을     안심하고 스스로를 죽음에 넘겨주기 위해서는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침저녁 식탁을 꾸미는 부추, 파, 상추 그리고 시금치, 근대를 태양의 힘을 빌려 기품 있고 아름답게 부활하는 생명이 반짝이기 위해           봄무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뜰 구석에 끌어들인 수도 곁에 어머니가 팔뚝만 한 무를 씻고 있다 저녁 식사 메뉴가 전갱이구이라는 걸 들은 어머니가 함께 먹을 무즙을 내려고 가져온 것이다 진흙을 털어내고 수세미로 문질러서 수염뿌리를 뜯고 있다     그저 한 개지만 그 희게 빛나는 것이 저녁놀 깃든 뜰을 밝히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조바심내며 보낸 나의 하루 저처럼 씻을 수가 없을까     무를 다 씻은 어머니가 발 앞에 있는 구덩이에 무 잎을 잘라 내고 조용히 일어선다 주변의 공기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저수조에 비쳐 있던 하늘이 흔들린다     무 잎은 아니지만, 내게도 무언가 싹둑 잘라 내 버릴 것이 있지는 않을까 웃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불필요해진 것이 저녁 식사 시간 무즙의 쓴맛에 눈썹을 찡그린 순간 하루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은총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귤 수확이 끝난 과수원에의 가장 높은 가지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한 개의 열매 어머니가 새를 위해 남겨 두었다고 하는 한 개, 나는 고심한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던 내게 ‘있을 수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을 함께 보는 걸 가르쳐 준 한 개 그것은, 이미 나무에 속해 있는 게 아니다 ‘사랑’에 속해 있는 거다           어미니의 땅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오래 살아 정든 집에 돌아가고 싶어도 점적點滴 튜브가 달려 있어 갈 수 없는 어머니가 있다 돌아가고 싶은 집 뜰 앞에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줄에 매여 있는 개가 있다 만나러 가고 싶어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기다리고 있다 풀꽃들이 기다리고 있다 초목들 또한 대지에 연결되어 있는 거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집도 땅도 실은 어머니의 눈꺼풀 안에 있어서 귤나무에 예방 조치를 하는 시기도 비파나 매실을 따는 계절이 온 것도 모두, 손에 잡을 듯이 알고 있다 또한, 개가 목줄이 조인다고 호소하고 있으니 “조금 느슨하게 해줘!”하고 나무란다     바닷가 병원에 입원하여 반년 어머니는 집 처마 밑에 감시 카메라도 장치해 놓은 것일까 풀이 우거지면 “베어라”고 명령하고 진달래가 피었는지 수국이 피었는지 벚꽃이 졌는지 하고 마음을 졸인다 약간 계절은 맞지 않아도 누워만 있으면서도 어머니는 꽤 바쁘다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와 움직이지 못하는 산천초목 그 위를, 오늘도 해가 돌고 있다 달은 신실하게 차고 기울기를 되풀이하고 별들은 변함없이 눈을 깜박이면서 어머니가 가꾼 밭에 빛의 씨앗을 계속 뿌리고 있다 물론 죽음의 씨앗도 섞여 있지만 비옥한 어머니의 땅은 그것들까지 풍성하게 가꿔 온 거다     어머니여, 무엇을 한탄하고 슬퍼하리오 계절이 순환하고, 때가 찰 때 죽음도 또한, 당신이 정성 다해 기른 귤나무처럼 그 가지가지에 밝게, 나뭇가지가 휘도록 등불 같은 사랑의 열매가 열리게 하리라 그리고, 당신은 바로 지나간 날들 속에 계속 살고 있다           대지大地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오늘 나는 네게서 두 개의 복숭아를 수확한다 ‘사랑’과 ‘죽음’이라 이름 짓는다     나는 그것을 젖가슴처럼 손바닥으로 감싸 볼에 대고 비빈다     풍성한 과즙을 감추고 망가지기 쉬운 네 마음을 상상한다            ¤     네가 돌보고 네가 기르며 너로 가득 차 있는 과일     나는 네게 이빨을 세운다 번갈라 씹는다     나는 너를 먹는다 다 먹이 치운다              ¤   내 손가락은 젖고 먹어 치울 수 없는 것이 남는다 그것을 네 속에 묻는다     두 개를 나란히           작은 소원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그때 뱀을 벗고 새로운 생을 구불구불 비틀며 풀숲으로 사라져 갔다     내 앞에는 바람에 날리는 뱀의 허물이 있었다     나는 허물을 주워 하늘로 치켜 올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날려 보냈다     허물은 바람을 타고 잠깐, 반짝반짝 빛나면서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     빛 속으로 뱀처럼, 나는 나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벗고 영원한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영겁의 둘레에 가라앉아 한 개의 피리가 되는 꿈을 꾸면서, 조용히 파리똬리를 틀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삭 Issac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수확이 끝난 포도원에 숫양을 몰고 이삭이 왔다. 노래를 부르면서 왔다. 이삭의 노랫소리를 들은 마른 나무가 부러진 돛대 같은 가지에 녹색 새 잎을 틔웠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이 이삭의 숫양을 위해, 서둘러 준비하신 것 같았다.                          ¤          숫양이 어린 잎사귀를 먹기 시작했다. 이삭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대속물이 된 숫양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삭은 하느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에 의해 번제의 제물이 되려던 순간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늘은 아무 것도……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하늘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해 아래의 일도 생겨나서 사라져 가는 구름의 일도 그리고 새가 그린 둥근 호弧나 직선도     하늘은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작은 골짜기에서 밥 짓는 연기와 더불어 매일같이 위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기도도 그리고 눈물의 의미도 비애의 의미도     하늘은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만지려고 하지 않는다     하늘은 아무것도 투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투영하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있을 뿐 하지만, 다만 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것이 우리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     오늘,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하늘 아래에서 마주 본다 서로 눈동자 속에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남과 북으로 헤어진다 다시 만날 날가지 서로의 온기를 끌어안고 견딘다 견디며 소중히 길러내기 위해 오늘을 산다           3월의 뜰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무료했던 하루의 끝에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기에 거짓말을 썼다 그러자, 다음 날 아침 뜰 안 복숭아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다     현실이 거짓의 진술을 따르는 것도 있다 당신은 복숭아나무 아래 서서 복사꽃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날도 무료했다 하루의 끝 무렵에 ‘복사꽃이 졌다’고 일기에 거짓말을 썼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뜰 안의 복숭아나무 꽃은 만개한 상태였다     현실이 거짓의 진술을 배반하는 일도 있다 당신은 복숭아나무 아래 서서 복사꽃을 쳐다보았다     그날도, 역시 무료했다 하루의 끝에 ‘복사꽃 가지 하나를 빈 병에 꽂았다’고 일기에 거짓말을 썼다 다시 아침이 왔다 뜰 안의 복숭아나무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름다운 거짓말조차 현실에 의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 당신만이 공허한 뜰 가운데 서 있다           추억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풀잎에 마른 잎 부스러기 같은 나비가 앉아 있다 날개가 여닫힐 때마다 연한 푸른 빛이 도는 색소mauve가 굴러 떨어진다     무질서하게 자란 풀숲에서 일제히 제비꽃이 개화한다     인분鱗粉 같은 빛이 명멸하고 있는 어두운 서재書齋에서 푸른 냄새가 나는 수액樹液이 섞인 콧물을 훌쩍이며 소년이 열중하여『빌리티스의 노래』*를 읽고 있다     허구하구의 옛 시가 이미 거대한 누에가 되어 미래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도 모른 채        *프랑스의 여성시인 피엘 루이스의 시집.           일요일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검은 나비가 뜰을 가득 메우고 있다. 흰 파라솔을 쓰고 언덕길을 올라온 여자가 물을 끌어오는 홈통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산장의 주인이 벽면 밖으로 튀어나온 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비탈진 산골짜기 사이의 차 밭에서는 두견새가 울고 있다.          화석 속에 잠들어 있는 뿔고동.      커다란 송충이와 닮은 밤나무 꽃.      구석기 같은 산의 어두운 그림자에 덮인 산자락 마을.      빛의 비늘을 지닌 강.          파라솔을 접은 여자의 이마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늘. 수조水槽에서 흔들리고 있는 물. 하늘 안쪽에 퇴적된 옛 시간, 조용함을 견디지 못해 부서진 의자. 여자가 조그맣게 기침을 하고 가장 연한 박하 담배에 불을 붙인다.          푸른 잉크 방울 같은 하루.           종달새, 까치 혼다 히사시本多壽 / 권택명 옮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속새풀 군락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바다 같았다. 한 걸음 발을 내디디면, 살짝 젖은 풀씨가 신발 주둥이와 바짓자락을 물보라처럼 장식했다.          나는 바다 위를 걷는 것처럼, 완만하게 파도치는 풀숲을 걸었다. 여기저기 산재하는 그루터기들이 빛의 파도에 씻기고 있다. 앞서 가는 개가, 빛을 발로 차 흩으며 달려간다. 앞쪽의 숲이 검은 섬 그림자 같다.          나는 숲 입구에서, 나를 벗고 숲으로 들어간다. 둘러붙는 넝쿨 풀들을 헤치고, 가지들의 채찍을 맞으며, 그곳에는 오래된 늪이 있고, 둘레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솟아 있다. 나는 느티나무에 가볍게 인사를 하고, 그 앞에 누워 있는, 이끼가 낀 채 쓰러져 있는 나무에 걸터앉는다.          나는 작은 물고기처럼 날아다니는, 나무 잎새 사이로 스미는 햇살 속에서, 나뭇잎의 수런거림을 들으며 느티나무와 마주한다. 풀과 나무들, 그리고 꽃들처럼, 가지와 가지에서 나래를 쉬고 있는 작은 새처럼, 돌처럼, 흙속에 있는 벌레처럼, 번식기에 있는 짐승처럼, 또는 느티나무를 비추는 물처럼.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숨막힐 듯한 초록들의 냄새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곳에 거짓은 없다.      삶과 죽음이 혼연일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대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느티나무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나서 낯선 길을 더듬어 숲을 나오자, 벌써 해는 중천에 있고, 눈앞에 펼쳐지는 밭 일대一帶에 밀이 익어가고 있었다. 밭두렁의 쑥들이 하얀 잎 뒷면을 드러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르자,      문득, 종달새가 울었다. .♣. ================= ■ 시인의 말     하늘 아래에서 - 한국어역 시집『피에타 Piieta’』에 부쳐   혼다 히사시本多壽              내 머리 위에 하나의 하늘이 있다. 작지만, 언제나 존재한다. 그, 빛과 그늘을 지닌 하늘을 태양과 구름, 성죄가 돈다. 새가 건너간다. 잠자리가 날아다닌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늘을 쳐다본다.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마주한다. 비애나 우수를 가슴에 숨기고 있을 때도, 절망으로 깨지고 부서져 있을 때도 하늘을 쳐다본다. 조그만 기쁨이나 분노를 품고 있을 때도, 역시 하늘을 쳐다본다.      만일 하늘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고뇌에 차서 지상에서의 일상을 살아갈 수가 없으리라. 왜냐하면, 하늘은 내게 자유로이 꿈꾸는 것을 허락하고, 끝없는 상상력을 촉발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하늘이란 무엇인가일까? 샘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이, 하늘에서 퍼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리 하늘을 향해 기도해도, 지상에 사는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인간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인간의 탄생에 앞서서, 태초부터 변함없이 존재해 온 공허한 공간을, 왜 인간은 필요로 하는가?      아마도 하늘은 인간이 언어를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근원적인 침묵에서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며, 지상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여백이다. 이 어쩔 수 없는, 터무니없는 여백이 있어, 인간은 고생으로 가득 차 찬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시모야마 토쿠지霜山德爾는 그의 저서『인간의 한계』에서, 하늘을 궁창으로 보고 “모든 이미지가 소진되지 않는 원천이다. 그것은 밀도 없는 공간으로서, 육체화의 법칙에서 일탈한 모든 존재의 고향이자 신들과 부처들, 정령이나 죽은 자들의 영혼 등, 모든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것들의 조국일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          하늘 아래에서 태어나, 하늘 아래에서 성장하고 하늘 아래에서 배우고, 하늘 아래에서 일하고, 하늘 아래에서 결혼하고, 하늘 아래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하늘 알에서 늙어 간다. 하늘 아래에서 일생을 마친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살인자도 피살자도, 속이는 자도 속은 자도, 빼앗는 자도 빼앗긴 자도, 모두 하늘 아래에서 살고 하늘 아래에서 죽어간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늘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죽음의 그늘에서 산다는 것이다. 즉 하늘과 죽음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아날로지적 관계에 있다. 그 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사랑과 신을 더한다 해도, 하늘과 아날로지적 관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 아래에서 사는 인간이 하늘을 묻는 것은, 비로 사랑을 묻고, 신을 물으며, 죽음은 묻는 것과 동의어이다.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는 “thaumazein, 즉 경이는 철학의 시작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늘을 묻는 것, 사랑을 묻는 것, 신을 묻는 것 죽음을 묻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하는 첫걸음이리라.      묻는 일, 계속 묻는 일, 지속해서 묻는 일 가운데서 경이를 발견하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라면, 시도 경이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경이 그 자체가 시는 아니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것, 즉 죽음이나 사랑에 속해 있다. 시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기술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데 이른다.”고 말하며,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지시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해 왔으나.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만나, 시와 철학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철학은 시가 아니다. 그러나 “말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기술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는 데 이른다.”는 부분까지는 철학과 동일하다. 그러나 시는 지시나 암시하는 것이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답지 않으면 인간의 비애는 위로받을 수 없다. 사는 희망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의 비애를 위로하고,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이나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실용 가치나 효용가치가 없는 것, 즉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으로 인간에게 위로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신명기 8장 3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사는 데는 떡도 필요하지만 떡 이외의 것도 필요하다’라는 말이리라. 이 ‘떡 이외의 것’이 내게는 시이다. 쓰고 싶은 시이다.      내가 쓰고는 시가 설사 졸품이라도 사랑이나 죽음에 속하여, 목마름을 치유하는 한 방울의 물이기를 소원하며 쓰고 또 쓸 뿐이다. .♣. =============== == = == =============== 권택명 옮김, 혼다 히사시本多壽 詩集 [※ 피에타 Piieta’※]   [ 해설 ] - 천∙지∙인을 아우르는 깊은 눈빛 - 위로의 시학 혼다 시사시本多壽의 시 세계   권택명(시인)                1      혼다 히사시 시인의 두 번째 한국어역 시집인『피에타-Peta』는, 제목 자체가 시집의 총체적 내용을 함축하며, 작자의 시 세계와 시적 지향점을 포괄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먼저 표제작인「피에타-Peta」를 본다.          오늘, 쓸쓸함은 쓰라리고/밝고, 푸르게/빛나는 소금 같다//네 안에 있는 숲의 거처/너를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지만/끝내, 네가 보이지 않는다//젖은 모래 같은 눈 안쪽에/너를 불러내려 해도/끝내, 너는 나타나지 않는다//나를 둘러싸는 나무들/우물거리는 꿩과 비둘기의 울음 소리/나가 버린 후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탁류에 삼키어 버린 산기슭의 마을/한 없이 늘어가는 죽은 자의 숫자//오늘, 슬픔은 깊고/끝없이, 높으며/넓은 하늘 같다//마른 바람에 부쳐 보내고 싶은/한 개의 푸른 과일/하지만, 네 있는 곳을 모른다/네 발 밑의 작은 산골짜기에서/너를 쳐다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지만/네 시초가 보이지 않는다 -「피에타-Peta」전문          시인의 아홉 번째 개인 시집인『풀의 영[草靈〕』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나를 둘러싸는 나무들’로 시작되는 5연을 중심으로, 1-3연과 6-8연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쓸쓸함은 쓰라리고’, ‘슬픔은 깊다’고 각 대구對句의 첫 머리부터 ‘쓸쓸함’과 ‘슬픔’을 직설적으로 거론하고, ‘보이지 않는다’, ‘나타나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삼키어 버린’, ‘모른다’, ‘보이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서술어들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여, 고통과 슬픔〔비애〕의 정도를 중층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고통과 슬픔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근원적 제약인 죽음이 있고, 그 줄음으로부터 파생되는, 피할 수 없는 고독(쓸쓸함)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40여 년에 걸친 혼다 히사시 시인의 세계 인식과 시업詩業을 관류하는 중요한 한 축으로서의 죽음과 상실, 그리고 이보다 앞서는 본원적 부재와 비재非在 또는 무無와 연관되어 있는 원형적 심상心象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죽음 또는 이와 연관되는 상실이나 이별, 소멸은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이고, 이에 대한 인식은 모든 예술과 철학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만 혼다 히사시 시인의 경우, 스무살 무렵 원인불명의 질병으로 하반신 불수가 되어, 오랫동안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한 그의 체험과 연관된 구체적인 자각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죽음의 이미지는 관념이 아닌 경험적 실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쓸쓸함이나 슬픔은 보다 내재적이고 근원적인 통찰에 연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시에서 시인이 비애를 느끼는 이유는 5연의 ‘자신을 둘러싸는 나무들’이나, ‘우물거리는 꿩과 비둘기의 울음소리’, ‘나가 버린 후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 ‘탁류에 삼키어 버린 산기슭의 마을’ ,‘한없이 늘어 가는 죽은 자의 숫자’ 들에 연유하는 것이다. 나무나 비둘기, 고양이, 마을, 죽은 자와 같은 대상은, 이번 시집을 포함한 혼다 시인의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시적 오브제인데, 특히 죽은 자[死者]의 이미지는 그의 시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이다. 이 대상물들이 시인의 비애를 자아내고 있는 것은 ‘둘러싸는’, ‘나가 버린 후 돌아오지 않는’, ‘탁류에 삼키어 버린’, ‘한없이 늘어 가는’이 환기하고 있는, 제약적이거나 부재적 상황이다.      또한 시인의 비애는 무엇보다 되풀이 언급되고 있는 ‘너’의 부재이며 상실에 연유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도 그렇지만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2인칭 대명사 너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지 않을 때가 많다. 부재나 비재가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타자(他者:너)인 경우도 있지만, 화자(話者:시인자신)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인 자신 또는 자신의 원초적인 자아일 수도 있다.      이는 바로 인간의 근원적 삶의 인식과 연결되는 것이며, 혼다 시가 지닌 철학적 사유와 미학의 한 근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총 53편이 수록된 이번 시집의 절반가량인 25편의 작품에서 죽음 또는 죽음과 연계된 시어들이 등장할 정도로, 죽음과 상실, 소멸이 혼다 시의 중요한 본원적 심상의 한 축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비애나 어둡고 절망적인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는 점에, 이 시인이 지닌 존재와 세계 인식의 건강성이 있다. 혼다 히사시 시인이 죽음과 상실을 표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를 통해 그 대척對蹠 또는 이웃에 있는 삶과 생명을 역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빛이 고여 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거룩한 환상의 기록[聖幻記]」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들 속에 군데군데 보석처럼 박혀 있는 ‘빛’이라는 언어와 그에 연관되는 이미지들이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만 보면 쓸쓸함을 ‘밝고, 푸르게/빛나는 소금’이라고 비유한 것이나, ‘마른 바람에 부쳐 보내고 싶은/한 개의 푸른 과일’같은 표현이 그렇고, 특히 이 시집의 제3부 「어머니의 땅」에 실린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생명의 경과 생사합일과 경지를 보여 주는「배나무」를 비롯하여, 생명순환의 모습을 표현한「풀 뽑기」와「어머니의 땅」같은 작품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죽음과 비애의 상황에서도 시인은 결코 공감자共感者 또는 위로자로서 감당해야 할 소명을 잊지 않고, 생명을 상기시키는 모습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모래범벅이 되어/하늘을 보고 누운 채 숨진 소년병 위에/희미하게 초연硝煙이 흐른다//지뢰가 묻힌 대지를 뒤로/보이지 않는 대낮의 은하를 마주하는 죽음을/하늘이 조문한다/바람이 조문한다//오늘, 시체 위를/또다시 전차가 지나가고/그 뒤에 여전히 시체가 남는다//그리고 소년병의 동생이/형이 남긴 총을 들고/전장으로 나간다/살육의 무한 연쇄/인간이라는 흉기/신의 이름을 빌린 정의//그래도/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듯이/신도 또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있을까“마르틴 부버『고독과 사랑-나와 너』에서      -「무명無明」부분          「피에타-Peta」에 나타나는 죽음과 연관된 비애가 개인적이고 내포적 차원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위에 인용한 시「무명」에서는 시인의 죽음에 대한 시각과 공간이 사회성을 띤 외연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어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제1부 하느님의 우울’에 수록되어 있는「신기루」「증언」「눈물바다」「기념비」등의 작품군이 이에 속한다.      이제는 과거의 사건이 되어 버린 아프간 전쟁에서부터, 현재도 지구촌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충돌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하늘(신)에게 추궁하고(따지고) 싶은’ 불가해한 죽음들이 시인의 신음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존엄한 생명에 대한 살육을 고발하는 문명 비평적 시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희생자들이 소년 또는 소년병(「증언」에서는 ‘갓난아이’)이라는 사실을 반복함으로써, 아픔과 충격의 진폭을 넓히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자인하게 하는,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을 만들 수 없었던 하느님이/‘에이 이런!’하고 자포자기하여/이렇게 맨 끝에 만든 생물이/아직도 전쟁만 하고 있다”(「하느님의 우울」)는 표현에 이르면, 시인의 야유적 언사가 오히려 통렬한 고발로 다가온다.      이와 같은 시인이 지닌 고뇌의 눈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비롯하여, 아우슈비츠, 소말리아, 수단, 캄보디아, 르완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 멀고 가까운 재앙과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현장으로 이어지며(「그날도…」), 자연스럽게 이 시집의 제목인『피에타-Peta』에 주목하도록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는 이태리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하며,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제작한 것이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두산백과」,네이버지식백과) 는 또한 슬픔, 비탄을 뜻하기도 하는데, 서양미술 사학자 정은진은 와 관련하여, ‘조용한, 그러나 깊은 슬픔’을 나타내고 있으며 ‘비극적 탄식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다.(『명화 속 성서 이야기』,네이버캐스트)      혼다 히사시 시인은,『피에타-Peta』라고 이름 붙인 이 시집을 통해 타자의 아픔과 비극을 외면하지 못하는 시인으로서의 결 고운 양심을 드러낸다. 시인 자신 ‘조용한, 그러나 깊은 비애’를 품고, 불가해하게 죽어간 소년과 소년병을 비롯한 모든 죽은 자와 그리고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체에게 진혼곡(레퀴엠)을 바치고 있다. 동시에 따뜻하고 명징하며 견고한 이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모든 살아 있는(결국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위해 신의 자비를 간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2        運柩      이번 시집은, 시인의 첫 한국어역 시집과 비교할 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고 있다. 첫 시집이 ‘불’의 이미지였다면 이번 시집은 ‘물’의 이미지가 강하다. 계절 감각을 표현한 다수 작품들이 변함없이 주지적 서정의 맥을 잇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첫 시집이 작품 제목에서부터「말[馬]․진혼제」,「불의 관[柩]」등 역동적이고 장대하며 신화적인 세계가 두드러졌다면, 이번 시집은 ‘산비둘기’, ‘파랑새’ 등의 작은 동물들과, ‘물소리’ 등 물의 이미지가 두드러져 보인다.      시의 길이도 대체로 짧아지고, 시어들도 눈에 뜨이던 사변적인 관념어 대신 구체적인 사물을 더욱 견고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일차적으로는 끊임없이 시의 그릇에 담아야 할 내용과 정치精緻한 시적 방법론에 대해 부단한 모색과 변화를 추구해 온 시인의 시작 태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거기다 자연적인 연조와도 연계되어, 전반적으로 어조가 차분하고 관조적이며, 세상과 자아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층 넓고 깊어졌음을 느끼게 한다. 깊은 우물에 가득 고인 청량한 샘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을 보기로 한다.          각각의 높이에서/하늘에 닿고 있는 나무들의 우듬지//나는 느티나무 그림자 속에 있어/모습이 없는 작은 새의 지저귐을 듣고 있다//환청인지도 모르지만/그 진위眞僞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죽음, 말할 수 없는 것에는 굳게 입을 다물고/당신이 없는 뜰에 아네모네의 구근球根을 심는다//꽃을 지탱하지 못하는 완두콩 줄기에는/대나무를 베어 부목副木을 대주자//갈라진 창고의 벽을 보수하고/처마 밑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낙엽을 치우자//그 다음, 푸른 여백에/당신의 만년필을 두자//내일은 황금색 펜촉에서/작은 새의 지저귐이 잉크처럼 떨어지리라//틀림없이      -「여백餘白」전문          혼다 히사시 시의 본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적으로 통제된 서정이 견고한 이미지와 언어 미학 속에 녹아 있다. 하늘, 나무, 우듬지, 작은 새, 아네모네, 구근, 꽃, 완두콩, 줄기, 대나무, 부목, 창고, 벽, 처마 밑, 낙엽, 만년필, 펜촉, 잉크 등의 사물 언어들이, 지저귐, 환청, 진위, 여백, 보수, 내일, 황금색 등의 명사들과 어울려 군더더기 없는 산뜻한 명품처럼 제시되고 있다. 추상적인 ‘여백’이 구체적․ 즉물적인 언어들과 어울려 깊이와 감동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馬]’을 타고 숨가쁘게 질주해 가던 시인의 사물과 세계 인식에, ‘여백’이 평화처럼 고여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작품은 ‘제2부 레퀴엠’에 실린「부재不在」,「영원」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이며, 제3부에서 제5부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서정의 계열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부재 또는 비재가 혼다 히사시 시의 핵이라고 한다면, 일견 어렵지 않게 읽히는 이 서정 역시 그 배경에 그림자와 같은 그늘을 복선으로 깔고 있는 것이어서, 어천정심語淺情深의 탁월한 기법으로 무장된 견고한 시적 성취이기도 한 것이다.      위의 시「여백」에서도 충분히 감지되는 것이지만,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밤하늘에 숱한 별들을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 놓은 것처럼, 삼라만상이 광막하고 웅혼한 우주를 천天, 지地, 인人의 영역에 다양하게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혼다 시인이 사계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지금도 귤 과수원을 가꾸며 계속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인과 인간에게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고 감동의 원천을 제공하는 존재이다. 더욱이 혼다 시인의 경우에는 과거의 추억이나 머릿속의 관념으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현재도 매일 살아 숨 쉬는 공간이자, 이미 시인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된 존재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정직하고 무공해한 시의 영역이다.      이런 상황을 잘 감지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보기로 한다.          낡은 집 뜰 배나누 고목에, 일찍이/포로였던 개가 묶여 있다/눈 앞에는, 탁 터진 풍경이/밝게 펼쳐진 풍경만이 있고/천 그루 귤 나무의 환상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환상의 잎새들 무리가 술렁이고 있다/이승의 것인가, 저승의 것인가/제주직박구리와 찌르레기가 시끄럽게 울고는/빛 속으로 사라져 간다//(중략) 아침 햇살 속에서 성경을 펴고/좋아하는 구절을 우물거리며 읽는다//-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지나간 어제 같으며/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중략)//까마귀 무리가 시끄럽게 울어 젖힐 때/한때 늦게 찾아오는 석양보다도/더욱 늦게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보리밭 속의 휘어진 길을/부지런히 손을 흔들면서 걸어온다/하지만 도무지 내 앞까지 다가오지 않는다/그러다, 빙글 방향을 바꾸어/역시 손을 흔들면서 사라져 간다/그리고, 완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나는, 어렴풋이, 그것이/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하략)      -「풀의 영[草靈]」부분          역시 시인의 아홉 번째 개인 시집인『풀의 영[草靈]』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 198행의 장시이다. 표로 연의 구분을 해놓았지만 한 연이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될 정도로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위 시에서도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번 시집에는 이십여 종의 꽃과 화초류, 십여 종의 나무, 새, 채소와 과일, 동물들을 포함하여, 곤충과 바다 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80여 종의 생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시 속에서 때로는 그저 그곳에 있는 한 존재로서 언급이 되고 있을 뿐이지만, 작품 전체 또는 시집 자체로 보면 각각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생명으로서, 우주의 대합창 같은 화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어머니, 소년, 소년병 등과 더불어 하늘(天)과 땅(地)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체, 즉 ‘인人’의 영역에 소속되어 있는 존재들로서, 혼다 시인의 시를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채색하며, 때로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지地’의 영역은 시인이 직접 대지나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다수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과수원, 숲, 들판, 초원, 사막, 광야, 지평선, 바다, 하늘 등과 같은 넓은 공간적 개념에서부터, 주로 뜰이나 정원으로 표현된 사적(개인적․ 가족적) 영역의 비교적 좁은 공간 개념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지[땅]는 천[하늘]과 대칭되는 개념이지만, 아래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공간이며, 무엇보다 인간의 지상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영역이기도 하다. ‘제3부 어머니의 땅’에 수록되어 있는 다수의 작품들에서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 같은 대지의 존재가 바로 사랑의 표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나는/네게서 두 개의 복숭아를 수확한다/‘사랑’과 ‘죽음’이라 이름 짓는다//나는 그것을/젖가슴처럼 손바닥으로 감싸/볼에 대고 비빈다//풍성한 과즙을 감추고/망가지기 쉬운/네 마음을 상상한다      -「대지大地」부분          앞에서 죽음을 혼다 시인의 세계 인식과 시업詩業을 관류貫流하는 중요한 한 축으로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한 축이 ‘사랑’임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생사와 인생의 희로애락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는 시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제외하고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사랑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는 기본적으로 사랑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신의 대속적代贖的 사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거룩한 희생을 한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사랑이 고통과 비탄으로 동시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혼다 히사시 시인의 시는 근본적으로 땅(대지)과 사람(인간)에 대한 사랑의 포에지가 변주되고 있는 것이며, 그의 사랑의 대상인 땅과 사람이라는 개념 안에는, 풀과 꽃을 비롯한 나무, 새, 곤충, 짐승 등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물론이고, 하늘과 해, 달, 별, 비, 바람, 눈, 구름 등의 모든 자연 현상이 포괄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죽음까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마지막으로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늘(천)’이다. 하늘은 천․ 지․ 인의 첫 번째로, 이 시집의 시작이며 끝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핵심적 개념이다. 53편의 수록 작품 중 30여 편에서 하늘 또는 이와 관련된 언어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시인 자신이 이번 시집의 서문 격인 ‘시인의 말’ 제목을 ‘하늘 아래에서’로 붙여 놓고 있다. 그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는 몇 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전략) 아마도 하늘은 인간이 언어를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근원적인 침묵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며, 지상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여백이다. 이 어쩔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여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고생으로 가득 찬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늘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죽음의 그늘에서 산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면 인간의 비애를 위로하고,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이나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실용 가치가 없는 것, 즉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에 의해 인간에게 위로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중략) 내가 쓰는 시가 설사 졸품이라도 사랑이나 죽음에 속하여, 목마름을 치유하는 한 방울의 물이기를 소원하며 쓰고 또 쓸 뿐이다.          한 마디로 하늘은 고뇌에 찬 지상에서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공간이고, 꿈꾸는 영역이며, 지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여백이라는 것이다. 곧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하게 열려 있는 숨구멍 같은 공간이다. 이 여백이 없으면 인간은 고생으로 가득 찬 삶을 영위할 수 없다고 한다.      아울러 시는 말할 수 없는 죽음이나 사랑에 속해 있으며, 인간의 비애를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시는, 하늘이나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실용 가치나 효용 가치가 없는 것, 즉 배를 채울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에 의해 인간에게 위로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늘이 주제로 된 작품 중 한 편을 보기로 한다.          하늘은 아무것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만지려고 하지 않는다//하늘은 아무것도 투영하지 않는다/아무것도 투영하지 않는 대신/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아무것도 하지 않는다//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다/다만,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있을 뿐/하지만, 다만 있을 뿐이라는 간단한 것이/우리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하늘은 아무것도……」부분          제4부에 수록된「그날도……」등의 작품과 더불어 하늘의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시편이다. 하늘이 그저 하늘인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이 ‘아무것도 말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무위無爲의 공간으로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러기에 하늘은 곧 치유healing의 하늘이고 자비를 간구하는 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그저 있어 주는 것, 하늘이 그러하듯, 시인도 고통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곁에 위로와 소망의 언어로 함께 있어 주는 위로자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때로는 그들을 대신하여 신에게 추궁하기도(따지기도) 하고, 인간 존재의 위기를 계속 호소하는 존재이기도 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혼다 시인과 함께 원로 시인 김남조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거실에 놓인 조각가 노준 작가의 를 보고 감동과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 대신, 검은 개가 노란 고양이를 무릎에 눕혀 안고 있는 작은 목각, 현세에서 원수지간 같은 개와 고양이가 로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자비가 해답임을 증언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당시 이미 이 시집 『피에타-Peta』를 번역하고 있던 터라 한일 관계 또한 이렇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둘이서 한참이나 그 목각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혼다 히사시 시인은 1995년 8월 한일 전후 세대 100인 시선집『푸른 그리움(한성래 역,도서출판 세림, 1995)』에 참여하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 시집은 자신이 한국과 만난 지 20년이 되는 올해, 한국 시와 시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시 세계가 한층 넓고 깊어졌음을 새겨 두기 원하는 그의 희망에 의해 기획이 되었다.      제1부에 수록된「무궁화 환상」과 「가야금 환상」「비오는 양수리」등의 작품은 이와 같은 그의 마음을 한국에 전하는 우정의 헌시이기도 하다. 2013년《시인세계》의 혼다 히사시 시 특집과 2003년 첫 한국어역 시집이 고 김종철 시인의 문학수첩사에서 간행된 인연 등을 생각하여, 김종해 선생의 문학세계사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금년이 광복 7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한일 간에 놓여 있는 현해탄의 파고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저런 사유로 양국 간의 현대시 교류 역시 여타 문화 분야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상태에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혼다 히사시 시인의 두 번째 한국어역 시집 발간이 지니는 의의는 크다. ‘일류日流’로 불릴 만큼 한국 서점가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소설류들과 달리, 일본의 현대 시인으로 두 권째의 한국어역 시집이 출간된 것은 국민 시인격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大郞 시인 외에는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끼리 비교할 때 더욱더 미묘한 차이점이 드러날 수 있다. 한일 양국어는 여러 면에서 유사하기에, 문화의 핵심이 언어이고, 언어 예술의 최고봉이 시라는 관점에서, 양국 현대시를 서로 많이 읽고 교류할 때, 각각 자국 시만의 독특한 특징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상호간의 시적 성취도를 자극하는 데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미흡할 수밖에 없는 ‘번역’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양국의 시가 상대방 국가에서 더 많이 읽혀야 하는 이유이다. 좋은 시는 국가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정신과 삶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광활하고 유현한 사유의 세계 속에서, 천 ․ 지 ․ 인을 아우르는 깊은 눈빛으로, 고통과 고뇌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과 삼라만상에게, 희망의 메신저로 존재하며, 지속적으로 소망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혼다 하사시 시인의 시 세계가 더욱 깊고 넓어지기를 기대하며, 그의 시가 한일 양국의 시문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 일본 시인 미에노 후미아키는, 혼다 히사시 시인의 작품론에서, “시란 현존sein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이다”라는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의 말을 들어, “현실에서는 볼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꿈꿀 수밖에 없는 것을 언어로써 볼 수 있게 하고,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다”라는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혼다 시사시 시의 핵核을 ‘비재非在’라고 언급하고 있다. (『혼다 히사시 시집』해설, 2002년, 토요미술출판판매) .♣. =================  ◆ 표4의 글 ◆     시적인 철학, 철학적인 시     혼다 히사시本多壽 시인은 독특한 철학적 슬픔을 기조基調로 시를 써왔다. 청년 시절 오랜 동안 병상에서 보내면서 이미 그때 인간적 희노애락의 여러 의복을 입어 보았고 시와 철학의 두 갈래 길을 자신의 내면에 열어 온 듯하다. 그의 시는 강건한 척추와 섬세한 감수성의 시적 배합으로 이루어진 좋은 작품 들이며 또한 성실한 정진을 쌓아 올려 오늘 그 자신을 빛나는 시인의 높은 반열에 세워두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의 내면은 여러 사람의 깊은 곳을 비춰 내는 거울이기도 하기에 어느덧 한국에서도 그의 독자층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 권택명 시인이 번역과 해설을 완결하고 문학세계사의 김종해 시인이 간행하는 혼다 시인의 한국어 번역 시집은 뜻깊게 읽혀지고 그 문학적 가치는 오래 보존되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김남조(시인) .♣. =================  ▶ 혼다 히사시本多壽 시인∥ ∙ 일본의 시인, 평론가. ∙ 1947년 7월 25일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宮崎현에서 출생했다. ∙ 시집으로『피뢰침(1978)』,『성스러운 꿈 이야기聖夢譚(1984)』,『과수원(1991)』외 다수. ∙ 역시집『Tales of Holy Dreams(영어: Michael Huissen˙ 오누마 타다요시(尾沼忠義 역, 1978)』,『Pyha Uni(핀란드어: Kai Nieminen역, 2002, NII-IIL INTERIT 출판사)』,『7개의 밤의 메모(한국어: 한성례 역, 2003, 문학수첩사)』가 있다. ∙ 평론집으로『시의 숲을 걷다-일본의 시와 시인들(2011)』, 『시 속의 전쟁과 풍토-미야자키의 빛과 그림자(2015)』등 다수가 있다. ∙ 제1회 이토 시즈오伊東靜雄상(1991)을 수상했고, 시집『과수원』으로 제42회 H씨氏 상, 『기록 ·도로쿠土呂久』로 제47회 마이니치每日 출판 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     ▶ 권택명 시인∥ ∙ 시인, 한일 번역문학가. ∙ 1950년 경북 경주시 안강읍 출생. ∙ 1974년『심상心象』신인상으로 데뷔. ∙ 시집으로『예루살렘의 노을』등 5권, ∙ 한일, 일한 문학 번역서로,『한국 현대시 3인집 - 구상, 김남조, 김광림』등 9권이 있다. ∙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교류위원장. ∙ 혼다 히사시 시인과는 1999년 8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개최된 아시아 시인대회에서 만난 이래 국적을 초월하여 의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 ================= =================                  
2045    남아메리카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칠레 녀류시인 -미스트랄 댓글:  조회:5513  추천:0  2017-02-22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미스트랄 , Gabriela Mistral |   출생일 1889. 4. 7, 칠레 비쿠냐 사망일 1957. 1. 10, 미국 뉴욕 헴스테드 국적 칠레 요약 칠레의 시인. 본명은 Lucila Godoy Alcayaga.   남아메리카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1945) 여류시인이다. 스페인·바스크·인디언의 혈통을 이은 그녀는 칠레 북부의 한 마을에서 자랐으며, 15세에 교사가 되었고 뒤에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일생 동안 교육자·문화상·외교관을 거치면서 창작활동을 했다.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곳은 마드리드·리스본·제노바·니스 등지였다. 1914년 3편으로 구성된 〈죽음의 소네트 Sonetos de la muerte〉로 칠레상을 받음으로써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두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에서 따온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초기 작품들을 수록한 〈황량함 Desolación〉(1922)에는 연인의 자살로 막을 내린 연애의 후유증을 자세히 그린 시 〈슬픔 Dolor〉이 실려 있다. 이같은 슬픔 탓으로 그녀는 끝내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좌절된 모성애에의 강한 충동이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난다. 〈부드러움 Ternura〉(1924, 증보판 1945)과 〈파괴 Tala〉(1938)에서는 인류에 대한 더욱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나, 대표적 주제는 여전히 어린이들과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밖에 시집 〈포도 압착기 Lagar〉(1954)를 출판하기도 했다. 문화사절로서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여행했으며, 국제연맹 및 국제연합의 사회·문화 위원회에서도 일했다. 풍부한 감정과 자신만의 독특한 비유와 언어로 채색된 그녀의 시는 널리 번역되었다. 1957년 랭스턴 휴스가 영어로 시선집을 번역하여 출판했고, 1971년 도리스 데이너가 또다른 시선집을 펴냈다. =======================   죽음의 소네트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인간들이 집어 넣은 얼어 붙은 틈새로부터 태양이 비치는 겸손한 대지에 나, 그대를 내려 놓으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대지 위에 나는 잠들지니 그대와 나는 같은 베개를 베고 누워야만 하니.   잠든 아기를 위한 자상한 어머니와도 같이 태양이 비치는 대지에, 나 그대를 잠재우리. 고통스런 아기와도 같은 그대 육체를 안음에 있어 대지는 부드러운 요람의 구실을 하리. 그 뒤 나는 떠나리. 푸르스름한 연한 달빛에 가벼운 폐물들이 차근차근 쌓여 갈 때 나는 이곳을 떠나리 아름다운 복수를 찬미하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여하한 손길도 그대의 한 줌의 뼈를 탐내어 이 남모르는 깊숙한 곳에 내려오지 못하리.        밤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아가야, 이제는 잠을 자거라 이제는 석양이 타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이슬밖에 더 반짝이는 것이 없구나. 나의 얼굴보다 더 하얀 그 이슬이 -. 아가야, 이제는 잠을 자거라 이제는 길도 말이 없단다. 이젠 개울밖에 더 웅얼거리지 않는구나 나만 홀로 남아 있단다. 평원은 안개로 잠겨 있는데 벌써 파란 한숨은 움츠러들었구나 이제 세상을 쓰다듬는 건 부드러운 평온의 손길이란다. 아기는 자장가 소리에 맞추어 잠이 들었다. 대지도 요람의 미동에 잠이 들었다.          평온한 말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Serene Words / Gabriela Mistral    Now in the middle of my days I glean 이제 인생의 중간에 와서 나는  this truth that has a flower's freshness: 꽃처럼 싱그러운 진실을 줍는다. life is the gold and sweetness of wheat, 삶은 밀처럼 귀하고 달콤하며 hate is brief and love immense. 미움은 짧고 사랑은 광대하다     Let us exchange for a smiling verse 피와 상처로 얼룩진 시를  that verse scored with blood and gall. . 미소 짓는 시와 바꾸기로 하자. Heavenly violets open, and through the valley 천상의 제비꽃 열리고 골짝 사이로 the wind blows a honeyed breath. 바람이 달콤한 숨결을 불어 보낸다   Now I understand not only the man who prays; 이제 기도하는 이의 마음만 아는 것이 아니라 now I understand the man who breaks into song. 이제 노래하는 이의 마음도 이해하게 된다. Thirst is long-lasting and the hillside twisting; 목마름은 오래가고 산허리는 구불구불하나 but a lily can ensnare our gaze. 한 떨기 나리꽃은 우리의 눈길을 잡아맨다     Our eyes grow heavy with weeping, 우리의 두 눈은 눈물로 무거우나 yet a brook can make us smile. 시냇물은 우리를 웃음 짓게 하고 A skylark's song bursting heavenward 하늘 향해 터지는 종달새 노래는 makes us forget it is hard to die. 죽는 일이 어려움을 잊게 만든다.   There is nothing now that can pierce my flesh. 이제 내 살을 뚫는 것은 없다. With love, all turmoil ceased. 사랑과 함께 모든 소란은 그쳤다. The gaze of my mother still brings me peace. 어머니의 눈길은 아직도 내게 평온을 주고 I feel that God is putting me to sleep. 하나님이 나를 잠재우고 있음을 느낀다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네 엄마가 자기의 손을 낮추듯이  아들아, 밀은 공기로 된 것이고, 햇빛과 괭이로 된 것이란다.  그러나, 이 빵 '신의 얼굴'이라 불리는 이빵은  모든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이 그걸 갖지 못했다면  아들아, 그걸 건드리지 않는게 좋고,  부끄러운 손으로 너는 그걸 가져가지 않는게 좋다            작은 일꾼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엄마 이 다음에 자라나면 나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일꾼이 될거예요. 바람에 춤을 추는 보리 이삭처럼 내 팔뚝도 아주 건강하게 자라날거예요. 힘이 불쑥불쑥 생기면 내 손으로 어여쁜 집 한 채 지어 드릴게요. 포도송이 알알이 영글게 하여 엄마 실컷 드시라고 내놓을게요. 꿀보다 더 맛있고 향기로운 과일도요.   풀 돗자리를 만드실 때는 엄마 대신 내가 짜 드릴게요. 그리고 풍차 집도 지어 드릴게요. 밀가루를 빻아 맛있는 빵을 굽고 대장간 일도 내가 맡을게요. 랄랄라 흥겹게 노래 부르며 조각배로 고기잡이도 나갈거예요.   마을에 있는 집들을 바라보시고 싶으면 창문을 얼마든지 내 드릴게요. 엄마가 “얘야 그만 됐단다” 하실 때까지 베어 온 보리를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드릴게요.   마을에서 으뜸가는 일꾼이 되어 엄마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거예요. 베어 온 보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엄마 마음을 즐겁게 해드릴거예요.            발라드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그이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여느때 처럼 부드러웠고 길은 여느때처럼 고요한데 그이가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불쌍한 눈이여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사람을 사랑하였다 신사꽃이 피었다 노래가 지나간다 꽃밭을 지나가며 그이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해안에서 그이는 그 삶에게 입을 맞추었다 레몬의 달이 물결 사이에서 미소지었다 바다는 내 피로  붉게 물드는 일 없이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감미로운 하늘이 있다 그이는 영원히 그 사람 곁에 있다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당신 아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당장 채워져야만 한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기다려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내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이름은 '오늘'이기 때문이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1889년 4월 7일 비쿠냐 ~ 1957년 1월 10일 미국 뉴욕 주 헴프스테드)은 칠레의 시인이자 작가, 외교관인 루실라 고도이 데 알카야가 (Lucila de María del Perpetuo Socorro Godoy Alcayaga)의 필명이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4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Daum백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중남미 시연구     1. 낭만주의 문학   중남미의 낭만주의 문학은 대략 1830년에서 1860년까지를 포함한다. 이 기간은 사회적 불안, 내란, 전제주의로 특징지워진다. 또한 지역의 족장들이 국가 권력의 공백을 대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힘있는 자들이 출현해 정적들과 역경을 이겨내며 통치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는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며 1829년에서 1852년까지 아르헨띠나를 통치했다. 에꾸아도르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ia Moreno)가 1854년에서 1861년까지 신정 정치를 유지했다. 베네스엘라에서는 안또니오 구스만 블랑꼬(Antonio Guzman Blanco)가 1870에서 1887년까지 독재 정치를 자행했으며 빠라구와이에서는 후란시아(el doctor Francia)가 1840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잡았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군주제로 복귀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뚜르비데(Iturbide)와 합스부르가의 막시밀리아노의 군주제가 있었으나 막시밀리아노는 1876년 베니또 후아레스(Benito Juarez)에 의해 제거되었다. 폭력으로 대변되는 내란의 시대가 지나고 정치적인 안정의 시대가 도래해 국가권력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낭만주의 특징으로는 자기 중심적, 이국적 요소, 독창성, 개인주의, 상상력,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 등이 있다.   1)시    낭만주의자를 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인간의 가장 고양된 정신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시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슬픈 심적 상태를 표현할 욕구를 느낄 때에는 고통을 토로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따라서 주정적인 한 편의 시가 사회에 주는 영향은 점점 커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에스떼반 에체베리아(Esteban Echeverri -a)의 『포로』(La Cautiva), 『도살장』(El matadero), 호세 안또니오 마이띤(Jos Antonio Maitin)의 『시집』,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띤(Juan Zorrilla de San Martin)의 『따바레』(Tabare), 가우쵸 문학6)으로 호세 에르난데스(Jos Hernandez)의 『마르띤 휘에로』(Martin Fierro)가 있다.   2.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   중남미대륙의 19세기는 역사적 정치적으로 3시기로 나누어 진다. 첫째 독립기(100-1830), 둘째, 지방 호족의 시대 또는 무정부 시대(1830-1860), 셋째, 국가 확립기(1860-1890) 등이다. 첫째 시기가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되었고 낭만주의가 둘째 시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셋째 시기에 각각 해당된다. 낭만주의는 국가적 특징을 추구하였고 후에 국민의 생활상과 습관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시기가 바로 초기 산업주의의 개혁과 이민의 물결이 있었던 때이다. 또 이 때부터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과도기에 후기 낭만주의 작품이 나타난다. 소리야 산 마르띤의 『따바레』가 그 한 예이다. 이렇게 신대륙에서는 새로운 문학 조류가 뒤 늦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문학 사조가 유행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사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의 결여는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시대에는 소설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결과 상대적으로 시가 매우 위축되었다.     3. 모더니즘   모더니즘 문체를 특징짓는 요소들은 상징주의(simbolismo)와 고답주의(parnasianismo)에서 영향을 받은 혁신과 새로운 언어의 추구이었다. 원래 고답주의는 사회적 측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면서 언어적 측면에서는 형식의 잔잔함을 옹호하였다. 그리스 고전 신화에서 작품의 주제를 삼아 시를 통해 정적이고 대리석같은 미를 표현하였다. 불란서의 T. 고띠에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한편 상징주의는 불란서에서 1870년에서 1880년까지 고답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문예 운동이다. 음악적으로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순수한 언어를 찾는다. 언어는 더이상 이성의 언어가 아니고 상징으로 짜여진 환상의 언어이다. 한 담론의 논리적 구문적 연결은 서정적 음악적 연결로 대치된다. 운율, 리듬, 유성 현상, 첩운법 등이 상징주의자들의 시에서는 관능적인 이메지의 부각을 위해 무시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폴 발레리 등이 문학에서 음악성을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모더니즘 문체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면은 루벤 다리오가 언급했듯이 시에다 ‘언어의 조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율감이 있는 세련된 시어들을 사용하여 시의 형식에서 자연스러운 음악성이 베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고답주의에서 회화적인 면으로 중요시 되었던 시어들과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음악적으로 가치를 부여 받았던 시어들이 모더니즘의 시인들과 산문가들에 의해 새로운 운율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단순한 언어적 표현과 귀족적인 시각에서 요구되어온 교훈적 내용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의 구사를 지향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상아탑의 주인임을 자각한다. 그 상아탑은 일상적인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 루벤 다리오(Ruben Dario)는 ‘나의 시에서 공주, 왕, 황실의 일, 먼 나라와 상상적인 나라들의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삶과 내가 태어난 시간을 나는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속세에서 격리된 시인의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에는 무관심한 예술, 다시 말해서 소수를 위한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초창기에 등장한 무관심의 예술, 이름지어 ‘세련주의예술’(preciosista)은 사실주의와 실증적 물질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예술 운동이다. 세게적인 예술가의 의지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는 길목을 준비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문학 운동도 그들에게 남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답주의의 변화없는 형식과 상징주의자들이 추구한 시에 내재하는 음악성을 그들 나름대로 수용해서 모더니즘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예술가를 일반인과 차별하여 예술가의 낭만적인 정신을 고양하여 고독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신의 탑이여! 시인이여! 하늘의 피뢰침이여! (루벤 다리오)   모더니즘주의자들은 사실주의를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아름다움의 순수한 형태를 형상화할 수 있는 먼 도시, 신화, 상징, 이국적인 이름 등을 찾아나섰다. ‘모데르노(moderno)’라는 용어도 불란서의 상징주의에서 택했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하나의 광범위한 지적, 예술적 운동을 이루었다. 중남미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문학운동을 넘어 19세기와 20세기의 과도기로서의 ‘한 시대’를 뜻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성격이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1) 시   19세기 말부터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은 독립국가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예술가들 사이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 문학도 월터 휘트만과 에드가 알렌 포우의 시와 함께 더 이상 영국 문학의 아류가 아님을 선언했다.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의 작가들도 모더니즘의 첫 세대들로서 불란서의 고답주의와 상징주의를 소화해내며 중남미 문학이 스페인 문학의 음지가 아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벤 다리오의 『푸름』(Azul)으로부터 이러한 문학적 독립은 중남미 대륙에서 커다란 물결을 이루며 진행되었다. 주요 작가와 작품으로는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e Asuncion Silva)의 『야곡 III』(Nocturno III), 호세 마르띠(Jos -e Marti)의 『이스마엘리요』(Ismaelillo), 『자유시』(Versos libres), 『유배지의 꽃들』 『Flores del destierro), 『황금시기의 시』(Versos de la edad de oro), 마누엘 구띠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errez Najera)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La serenata de Schubert), 『그 때를 위하여』(Para entonces), 『공작부인 욥』『La duquesa Job), 루벤 다리오(Ruben Dario)의 『푸름』(Azul), 『불경스런 산문들』(Prosas profanas), 『삶과 희망의 노래들』(Cantos de vida y esperanza), 아마도 네루보(Amado Nervo)의 『흑진주』(Perlas negras), 『작은 목소리로』(En voz baja), 『고즈넉함』(Serenidad), 훌리오 에레라 이 레이시그(Julio Herrera y Reissig)의 『시간의 빠스꾸아』(Las pascuas del tiempo), 『밤의 근행』(Los maitines de la noche), 레오뽈도 루곤네스(Leopoldo Lugones)의 『황금산』(Las montanas del oro),『가축과 과일 예찬』(Oda a los ganados y las mieses), 『마른 강의 로만세』(Romances del Rio Seco) 등이 있다.     4. 현대시   중남미 현대시는 20세기 예술이 경험했던 모든 혁신적인 면들이 그대로 반영했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최초로 그려낸 루벤 다리오를 선두로 전위시를 선 보인 바예호(Vallejo), 네루다(Neruda), 우이도브로(Huidobro), 보르헤스(Borges), 히론도(Girondo) 등의 낯설지 않은 시인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감수성’을 소개한 위에 언급된 시인들의 노력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안목이 젊은 세대의 시인들 사이에 심어졌다. 시기적으로 볼 때 중남미 시의 발전 단계는 후기 모더니즘(Posmodernismo), 전위주의(Vanguardismo), 후기 전위주의(Posvanguardismo)로 나뉘어진다.     1) 후기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모더니즘과 전위주의 사이의 세대를 일컫는다. 구체적인 시기는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해당된다. 후기모더니즘의 문체적 특징은 간결함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적인 표현형식과 내용을 순화하는 것이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발도메로 훼르난데스 모레노(Baldomero Fernandez Moreno)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이며, 의사이면서 시인이었다. 두 직업 사이에서 시를 선택하기까지의 고뇌를 노래한 『한 의사의 삶과 사라짐』을 1957년에 발표한 데 이어 『꽃 한송이 없는 70개의 발코니』를 선보인다. 몬떼비데오 태생인 델미라 아구스띠니(Delmira Agustini)는 『흰 책』(El libro blanco, 1907), 『아침의 노래』(Cantos de la manana, 1910), 『빈 성잔들』(Los calices vacios, 1903) 등이 있다. 『아침의 노래』의 시집은 인간 내면의 세계, 꿈의 비젼, 힘의 원동력으로서의 삶, 감정을 담은 어둠의 세계를 주제 면에서 다루고 있다. 라몬 로뻬스 벨라르데(Ramon Lopez Velarde)는 멕시코풍의 시를 남긴 시인으로 중남미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심오한 시적 형상으로 옮기는 빼어난 면이 돋보였다.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현란한 장식을 피하면서 구어체 표현법을 견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숭고한 피』(La sangre devota, 1919), 『비탄』(Zosobra) 등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칠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남긴 예술가의 십계명을 보기로 하자.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으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리울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 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리움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도주이다. 네가 남자나 여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는 더이상 예술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요 작품으로는 『황폐』(Desolacion)가 있는데 이 시집은 「예술가의 십계명」을 비롯해 불후의 명작인 「시골 선생님」(La maestra rural), 「바램」(El ruego)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 등의 시를 담고 있다.   2) 전위주의(El vanguardismo)   일 이차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기간 동안의 전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의 혁신적인 예술 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바로 그 예이다. 전위주의는 시기적으로 1920년과 1940년 사이에 유행한 예술 운동으로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포기,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 운동으로는 칠레에서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과격주의(Ultraismo), 뿌에르또 리꼬에서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ens Torres)의 빤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까에서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 Jime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꼴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o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 Nuevos)그룹, 꾸바에서 마리아노 브불(Mariano Brull)의 순수시, 뻬루에서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에서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비센떼 우이도브로는 1931년 『알따소르』(Altazor)를 발표한다. 그의 창조주의는 형식의 자유로운 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 면에서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세계를 창조했다.   내가 한 개의 명멸하는 별 또는 반딧불이라면. 가슴엔 나비들이 머물고 상승하는 노래를 타고 한 줄기의 빛은 사막을 식민지로 삼고 이 눈빛 종달새는 나로부터 사라져만 간다.7)   뻬루의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는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에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을 발표하고 뒤이어 1922년 『뜨릴세』(Trilce)를 발표했다. 『뜨릴세』는 표현법, 그림, 심상,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창조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조각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나 지금에야 점심을 먹었고 가진 게 없네 어머니, 소원, 음식을 권하는 말, 물, 혼혈인이 달변으로 봉헌기도할 때, 심상의 늦음과 소리의 커다란 이음매 단추들에 관해 질문하실 아버지조차도 없네8)   빠블로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 1924), 『땅에서의 거주』(Residencia en la tierra), 『총 가요집』(Canto general), 유고집인 『내가 살았음을 고백한다』(Confieso que he vivido)가 있다. 『땅에서의 거주』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 이성을 배제하고 소위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서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심상,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은 이해될 만하다.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이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ia negra)라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 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꾸바, 뿌에르또 리꼬, 도미니까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e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꾸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as Guille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 (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1937), 『송고로 꼬송고와 다른 시들』 (Songoro cosongo y otros poemas, 1942), 『전체의 소리』(El son entero, 1947),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대중의 몸짓으로 날으는 비enf기』(La paloma de vuelo popular, 1958)가 있다.   3) 후기전위주의(El posvanguardismo)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시는 전위주의 추구와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구어체와 일상적인 언어를 선호하지만 단지 사실묘사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서사적 담론의 형태로 현실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증언한다. 중남미 후기전위주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시의 구조가 열려져 있다. 한 편의 시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독자들이 자기나름대로 시를 해석할 수 있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열려진 시를 ‘움직이는 시’라고 했다. 둘째, 시어가 이미지와 은유법의 사용이 아니라 다양한 글자의 혼합인 ‘꼴라쥬’ 라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셋째, 주제의 선택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후기전위주의자의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는 오늘날 중남미의 시와 비평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의 뿌리』 (Raiz del hombre, 1937), 『단어속에 자유』(Libertad bajo palabra, 1949), 산문으로는 『고독속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 『활과 칠현금』(El arco y la lira)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있다.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는 칠레에서 ‘반시’(antipoesia)를 주창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현실을 증언하는 시각과 초현실주의의 시각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태동되기 시작해 신중한 산문시가 되거나 놀람과 유머가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와 반시』(Poemas y antipoemas, 1954), 『러시아의 노래들』(Canciones rusas, 1967)이 있다.   출처;zsf                                                                            2009년에 새로 발행된 미스트랄 도안의 5000페소 폴리머지폐    
2044    페루 시인 - 바예호 댓글:  조회:4000  추천:0  2017-02-22
바예호 César (Abraham) Vallejo 폰트확대   출생일 1892. 3. 16, 페루 산티아고데추코 사망일 1938. 4. 15, 파리 국적 페루 요약 페루의 시인.   망명생활을 하면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통해 사회변혁을 주창한 주요인물이 되었다. 스페인인과 원주민 간의 혼혈 가문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굶주림과 가난, 원주민에게 가해지는 불의를 직접 목격했다. 1913~17년에 트루히요대학교에 다니면서 문학을 공부해 논문 〈카스티야 시에 나타난 낭만주의 El romanticismo en la poesía castellana〉(1954)를 썼고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첫 시집 〈검은 사자(使者) Los heraldos negros〉(1918)는 그의 어머니와 형이 죽었을 때의 상실감과 이에 따른 허무감, 인생 본연의 한계, 사회적 압력과 부정 때문에 인간이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는 무력함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문체상 고답주의와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1920년에는 원주민과 관련된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어 거의 3개월 동안 수감되었는데, 이 경험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을 더욱 고조시켰고 그의 여생을 괴롭힌 우울증의 발단이 되었다. 단편집 〈음계 Escalas melografiadas〉(1922)와 좀더 복잡한 시들을 모은 〈트릴세 Trilce〉(1922)는 수감기간에 착상된 것이다. 대표작인 〈트릴세〉에서 그는 생물학적 삶과 사회조직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한계, 인간 본래의 열망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괴리감 등을 표현하기 위해 신조어(新造語)·구어체, 혁신적인 구조, 놀랄 만한 이미지들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전통과의 완전한 결별을 보여주었다. 정신적으로 혼란상태에 있는 한 원주민의 몰락을 그린 짧은 심리소설 〈미개인의 우화 Fabula salvaje〉(1923)를 발표한 뒤 파리로 가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파리 생활은 힘겨운 것이었고 번역, 언어 교습, 정치적 저술 활동 등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자신의 원주민 혈통으로 인해 사람들과 쉽게 동화되지 못한 반면, 중요한 전위예술가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페루 공산당을 창설한 친구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가 창간한 〈아마우타 Amauta〉지에 기고함으로써 조국인 페루와 계속 관련을 맺었다. 그는 인간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 시어(詩語)는 어떤 전통적인 장치도 없어야 하며, 동시에 문학은 대중의 이상에 부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이 체험한 사회의 악습과 불의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1928, 1929년 2차례의 러시아 방문으로 정치적 사명감에 고취되어 1931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 정치투쟁가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추방된 후 마드리드로 갔다. 그곳에서 프롤레타리아 소설 〈텅스텐 El tungsteno〉(1931)을 썼는데, 이 작품은 페루 텅스텐 광산의 원주민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착취와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1932년 파리로 돌아간 뒤에 내란(1936~39)이 일어난 스페인에서 2년간 지냈다. 스페인 내란은 후기의 주요시집 〈인간적 시 Poemas humanos〉(1939)에 실린 대부분의 시에 영감을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집단적인 악·소외·절망 등에 봉착해 위기에 빠진 한 산업사회를 묵시적인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1930년대에 쓴 대부분의 시는 그가 죽은 뒤 출판되었다. 소설과 시 작품들은 〈소설 및 단편 전집 Novelas y cuentos completos〉(1970)·〈시 전집 Obra poética completa〉(1974)에 각각 실려 있다. 바예호에 관한 책으로는 앙드레 코이네가 쓴 〈세사르 바예호 César Vallejo〉(1968), 제임스 히긴스가 쓴 〈바예호의 후기 시 작품에 나타난 인생관과 인간관 Visión del hombre y de la vida en las últimas obras poéticas de Vallejo〉(1968), 앙헬 플로레스가 편집한 〈세사르 바예호에의 접근 Aproximaciones a César Vallejo〉(전2권, 1971), 장 프랑코의 〈세사르 바예호:시와 침묵의 변증법 Céar Vallejo:The Dialectics of Poetry and Silence〉(1976) 등이 있다. [Daum백과] 바예호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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