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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시인 실러의 격려에 따라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1779년 어머니는 다시 남편을 잃고 혼자서 프리드리히와 그의 누이 하인리케,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카를을 부양해야 했다. 교구목사의 딸로서 단순하고 다소 편협한 신앙심을 가졌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성직자 지망생들은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는데,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소년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는 덴켄도르프와 마울브론의 '수도원학교'(종교개혁 이전 시기부터 그렇게 부름)에 보내졌고, 이어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는 했어도 성직에 몸담을 수는 없었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쉽지 않은 타협이었던 당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결코 그의 영혼을 안전하게 기대도록 해주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스 신화에의 몰두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몰두하면서 그리스 신들을 해와 땅, 바다와 하늘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력들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념 대상의 양분에서 오는 긴장이 횔덜린에게는 존재의 영원한 조건으로 남았다. 그는 루터교 목사로서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인 직업에 대한 의식은 대단히 강해서, 그에게 시인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하는 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793년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소개를 받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처음으로 가정교사직을 얻었다.
그후 여러 번 가정교사를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실러는 다른 방식으로도 횔덜린을 도와주었다. 그가 만드는 〈신(新)탈리아 Neue Thalia〉라는 정기간행물에 횔덜린이 쓰기 시작한 시 일부와 소설 〈히페리온 Hyperion〉의 일부를 실어주었다. 〈히페리온〉은 그리스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던 전사의 환멸을 그린 비가조 이야기로 미완성에 그쳤다.
횔덜린은 실러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는 1794년 예나로 가기 위하여 가정교사직을 그만둘 때 다시 실러를 만났다. 횔덜린의 초기 시에는 실러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그가운데 여러 편은 프랑스 혁명이 초기 단계에 약속해주는 듯이 보였던 새로운 세계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는 자유·인간성·조화·우정·자연 등에 대한 찬가들도 포함된다.
1795년 12월 가난 때문에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정다감한 젊은 가정교사는 주인의 부인 주제테에게 깊이 빠져버렸으며, 대단히 아름답고 감수성 있는 이 여인은 그의 애정에 응답했다. 1797년 2월 친구 C. L. 노이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들의 관계를 "이 비참한 시대에서 정말 헤매고 있던 존재와 맺어진 영원하고 행복한 성스러운 우정"이라고 묘사했다. 주제테는 그의 시와 1799년에 나온 소설 〈히페리온〉 제2권에서 '디오티마'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그녀는 고대 그리스 정신의 화신을 의미했다.
그들의 행복은 짧았고 주제테의 남편과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은 다음, 횔덜린은 1798년 9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야 했다. 육체적·정신적 동요 속에서도 그는 〈히페리온〉 제2권을 완성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이라는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 첫번째 원고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2번째 단편과 3번째 원고도 아직 남아 있다. 이즈음 그에게 아주 민감한 신경증 징후들이 나타나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럼에도 1798~1801년은 맹렬한 창조력이 발휘된 시기였다. 많은 고귀한 송시(頌詩) 이외에도 위대한 비가 〈디오티마에 대한 메논의 비탄 Menons Klagen um Diotima〉·〈빵과 포도주 Brot und Wein〉가 씌어졌다.
1801년 1월 하우프트빌에서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지만 주인의 사정이 바뀌어 결국 횔덜린은 같은 해 4월 집으로 돌아갔다.
실러의 영향력으로 예나대학교에서 그리스 문학 강사 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한 다음, 그는 다시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가정교사 자리를 얻었다. 1802년 6월 주제테 곤타르트가 죽고, 같은 해 여름 횔덜린은 갑자기 보르도를 떠나 걸어서 프랑스를 통과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그가 뉘르팅겐에 도착했을 때는 돈 한푼 없고 정신도 혼란스러웠다. 정신분열증이 더욱 심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서 친절하고 부드러운 간호를 받은 결과 다소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평화의 축제 Friedensfeier〉·〈유일자 Der Einzige〉·〈파트모스 Patmos〉 같은 1802~06년의 시들은 미치기 직전의 정신에서 쓴 작품들로 비할 데 없이 장엄한 묵시록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Antigone〉·〈오이디푸스 왕 Oedipus Tyrannus〉을 운문으로 완역하여 1804년에 출판했다. 같은 해에 헌신적인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를 위해 헤센홈부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사서라는 한직(閑職)을 얻어주었다. 싱클레어 자신도 온당한 급료를 주었으며 그의 보살핌과 동료애 속에서 횔덜린의 정신상태는 현저하게 좋아졌다. 횔덜린이 정신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던 싱클레어는 1805년 반체제활동을 했다고 무고를 당해 5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 횔덜린의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고 튀빙겐의 병원에서 한차례 발작을 일으킨 다음에는 어떤 목수의 집으로 옮겨졌으며, 정신착란의 그늘 아래 이후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거기서 죽었다.
횔덜린은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기 2년 전에 〈고향 Die Heimat〉이라는 송시의 결말부에서 자신의 운명을 요약했다. "하늘의 불을 우리에게 빌려준 저 신들은 성스러운 슬픔도 같이 주었다네/두어라. 지상의 아들인 나, 사랑하고 고통받도록 태어난 듯하구나."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이다. 격렬한 열정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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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절반 /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담백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빵과 포도주] 박설호 옮김, 민음사, 1997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횔덜린이 생전에 쓴 시 ‘운명’의 일부분인 이 시구는 횔덜린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이 짧은 시구는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횔덜린의 일생을 요약적으로 보여 준다. 시인이라는 소명을 투철하게 살다 간 시인 횔덜린. 젊은 시절 횔덜린의 둘레를 둘러싼 것은 고독과 좌절이었고, 반생(半生)을 산 이후 횔덜린을 포박한 것은 정신 질환이었다. 1770년 네카어 강변의 라우펜(Lauffen)에서 출생한 그는 1806년부터 정신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그를 최후까지 돌본 이는 횔덜린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튀빙겐의 목수 에른스트 치머(Ernst Zimmer)였다. 횔덜린은 1843년 타계할 때까지 반구형의 옥탑방에서 치머 일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유폐 생활을 하면서도, 의식장애의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 시간관념을 잃고 지내면서도 방문객들에게 짧은 시를 지어 헌정하는 등 시인의 직업을 끝까지 천직으로 알고 시의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이야말로 "시인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다. 횔덜린이 보여 준 시 쓰기에서의 엄밀성(한 평자는 "횔덜린의 시에는 '법칙적 계산'이 깔려 있고, 그에게 시는 공예와 같았으며, 매우 정밀한 구성을 자랑한다."라고 말했다.)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지만 시인의 직분과 소명에 대해 횔덜린만큼 절박하게 고민한 시인은 일찍이 없었다는 찬사라 할 것이다. 가령, 횔덜린이 "나는 모르겠노라.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빵과 포도주’ 제7편)라고 썼을 때 이 질문에는 18세기 말 전제정치하에 놓여 있던 독일의 현실 사회를 매섭게 비판하는 시인의 절규, 그리고 그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인의 사명감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횔덜린은 물신주의와 속물 의식을 내몰고, "축복의 요람" 그리스의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주의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구현하고자 "종종 울면서 분노"했다. 그것은 고귀하고 "다정한 정신"이며, "사악한 혼란의 죄를 다시금 씻어 주"는 "사랑스럽고 해맑은 평화"였다. 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신성(神性)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그의 조국을 향해 부르짖듯이 열렬히 노래했다. "어리석은 아이가 목마를 타고 앉아,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아이를 비웃지 말라,/ 오 너희 선한 사람들이여! 또한 우리들 역시/ 행위는 부족하고, 사고는 풍부하구나!"('독일 사람들에게')라고.
횔덜린이 스케치로 그려낸 자화상(1842)
이 시는 1803년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압도하는 정서는 비감(悲感)이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는 횔덜린이 고결하게 사랑했던 여인,주제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의 죽음이 놓여 있다. 횔덜린은 주제테 곤타르트를 '디오티마(Diotima)'라고 불렀다. '디오티마'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대의 노랫가락이/ 나의 감각을 점점 맑게 씻어 주어/ 내 음울한 꿈들은 달아나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라고 썼다. 이런 대목은 횔덜린이 주제테 곤타르트에게서 그리스적인 아름다움과 이상을 발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에게 "아름다운 태양"이었으며 "찬란한 빛"이었던 이 여인이 이제 지상에 없다. 1연이 사랑의 시간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2연은 실연의 시간, 사지(死地)에 해당한다. 사랑의 화신, 사랑의 여사제의 죽음은 시적 화자에게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연시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는 생성과 소멸,행복과 불행, 지상적 삶과 천상적 삶이 대비되어 있으며, 그 양쪽의 차가운 경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일생의 후반부를 살아가야 할 시적 화자가 천상적인 존재 혹은 신성,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지상적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받으려는 간절한 기도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횔덜린의 작품들은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했다. 그에게 자연은 신화화된 자연이었으며,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대상이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을 향해 "만약 대가가 너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면, /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젊은 시인들에게')라고 권장했으며, "친밀한 정경이여! 복판으로/ 길이 평평하게 꿰뚫어 가고/ 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곳에/ 저녁 바람이 불어오며/ 자연은 간결하게 서 있고/ 산들이 숭고하게 서 있는 곳에/ 나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네"('즐거운 삶')라고 노래했다. 자연의 광휘를 찬탄했으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무한한 전체"로 결합되는 것을 소원한 이가 바로 "시인의 시인" 횔덜린이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3.20~1843.6.7)
1770년 슈바벤의 네카어강변 라우펜(Lauffen am Neckar)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덴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 학교, 마울브론 수도원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작(詩作),헤겔, 셸링등의 학우들과의 교류에 열중하였다. 1789년 시인 슈토이들린, 슈바르트등과 사귀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졸업 후 프리드리히 실러의 소개로 가정교사가 되었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부인 주제테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및 그 밖의 많은 시편에 등장하였다. 3년 후 이별을 하고 함부르크, 고향, 슈투트가르트, 보르도 등지를 방랑하였는데, 이 시기 맹렬한 창작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시들이 쓰였다. 1802년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고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디오티마],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귀향], [라인강], [유일자], [파트모스] 등의 걸작이 있다.
/글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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