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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의 현대시인·학자.
(병). Wen Yiduo. (웨). Wen Ituo.
본명은 자화[家驊], 자는 유싼[友三]·유산[友山]. 후베이 성[湖北省] 시수이[浠水] 사람이다.
1912년 가을 칭화 학교[淸華學校]에 입학했다. 1922년 미국으로 가서 미술과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시집 〈홍촉 紅燭〉을 펴냈다. 1925년에 귀국하여 신월사에 참여했다. 1926년 3·18학살사건이 발생한 뒤, 희생당한 지사들에 대해 동정과 찬양을 표시했다. 1927년 봄 우한[武漢]으로 가서 북벌군 총정치부 공작에 참여했다. 같은 해 가을부터 난징[南京]의 국립 제4중산대학교(나중에 중양대학교로 이름이 바뀜) 외국어과 주임을 맡았다.
1928년 1월 시집 〈사수 死水〉를 펴냈으며, 3월에는 잡지 〈신월 新月〉의 편집을 맡았다. 1930년 이후에는 칭다오대학교[靑島大學校]의 문학원장 겸 국문과 주임, 칭화대학 중국문학과교수를 역임했다. 중일전쟁 기간에는 쿤밍[昆明]의 시난연합대학교[西南聯合大學校] 교수를 지냈으며, 〈주역 周易〉·〈시경 詩經〉·〈장자 莊子〉·〈초사 楚辭〉 등 고대문학과 신화를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1943년부터는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를 쟁취하려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45년 중국 민주동맹 중앙위원을 맡고 국민당이 내전을 일으키려는 데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1946년 7월 15일 쿤밍에서 국민당 특수공작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유작으로는 주쯔칭[朱自淸] 등이 편집한 〈원이둬 전집 聞一多全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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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둬(聞一多, 1899년 11월 24일 ~ 1946년 7월 15일)는 중국 현대의 시인·고전문학 연구가이다. 이름은 가화, 이둬는 필명.
후베이(湖北) 희수 태생. 1922년 베이징 칭화학교(후의 칭화 대학) 졸업 후 시카고 미술학원, 콜로라도 대학교에 유학. 1925년 귀국 후 베이징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자유주의 문학 계파 '신월사(新月社)'의 동인으로서 현대시의 창작과 시론 발표에 힘을 기울였으나, 1928년 우한 대학, 1930년 칭다오 대학(이후 산둥 대학)을 거쳐, 1932년 모교인 칭화 대학 중국문학과 교수에 취임한 후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고전과 민속 문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중일 전쟁 중에는 창사(長沙)의 임시대학과 쿤밍(昆明)의 시난연합대학으로 옮겼다. 시난연합대학 해산 직전에 쿤밍에서 국민당의 내전에 반대하던 중에 암살되었다. 장제스가 암살자를 곧 처단했지만 중국 지식계 일부가 동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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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다(闻一多)
1899.11.24~1946.7.15.
호북성 희수현(浠水县) 인.
중국민주동맹(中国民主同盟) 맹원(盟员). 시인(诗人). 학자.
1912년 북경 청화학교(北京清华学校)에 입학하여 청화신극사(清华新剧社), 미술사(美术社)의 설립을 발기하였으며 청화주간(清华周刊)의 총편집 및 청화학보(清华学报)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19년 오사운동(五四运动)에 참가하였고 6월에는 학생대표로 상해로 가서 전국학생연합회 성립대회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시카고미술학원, 콜로라도 대학, 뉴욕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시의 창작과 문학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이 기간 동안 유명한 칠자지가(七子之歌) 등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고 1923년에는 국내에서 시집(诗集) 홍총(红烛)이 출판되었다.
1925년 귀국하여 북경예술전과학교(北京艺术专科学校)에서 교무장(教务长)을 맡으며 북경대학(北京大学)에서도 외국문학을 가르쳤다. 1927년 등연달(邓演达)의 초대를 받아 무한국민혁명군총정치부(武汉国民革命军总政治部)에 가서 예술분야의 업무를 담당하였고 얼마 후 부대를 떠나 남경제4중산대학(南京第四中山大学)으로 가서 외문계(外文系) 주임이 되었다. 1928년 3월에는 잡지 신월(新月)의 편집에 참가했으며 동년 가을 무한대학(武汉大学)에서 문학원(文学院) 원장 겸 중문계(中文系) 주임이 되었고 1930년 청도대학(青岛大学) 문학원(文学院) 원장, 1932년 북경으로 돌아가 청화대학(清华大学) 중문계(中文系) 교수가 되며 중국고전문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937년 7월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곤명(昆明)으로 가서 북대(北大), 청화(清华), 남개(南开)의 3개 학교가 합병된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의 교수가 되었고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직면하여 문화를 통한 구국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통해 민주와 반독재 투쟁에 투신하였다. 1944년 그는 중국민주동맹(中国民主同盟)에 가입하여 중국민주동맹 중앙집행위원, 운남 지부 선전위원(宣传委员) 겸 민주주간(民主周刊) 사장이 되며 적극적인 민주투사가 되었다.
1946년 7월 15일 운남대학(云南大学)에서 개최된 이공박(李公朴리궁푸) 추도대회에서 안전을 이유로 연설 기회를 주지 않았으나 그는 연단에 올라 강하게 국민당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날 오후에 그는 민주주간사(民主周刊社)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공박(李公朴) 암살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고 회견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국민당 요원의 습격을 받아 10여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2009년 9월 10일 중앙선전부(中央宣传部), 중앙조직부(中央组织部), 중앙통전부(中央统战部), 중앙문헌연구실(中央文献研究室), 중앙당사연구실(中央党史研究室), 민정부(民政部), 인력자원사회보장부(人力资源社会保障部), 전국총공회(全国总工会), 공청단중앙(共青团中央),전국부련(全国妇联), 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이 연합하여 조직한 100명의 신중국 성립에 특별히 공헌한 영웅모범인물(新中国成立作出突出贡献的英雄模范人物)과 100명의 신중국 성립 이래 중국을 감동시킨 인물(新中国成立以来感动中国人物) 선정 작업에서 100명의 신중국 성립에 특별히 공헌한 영웅모범인물로 선정되었다.
闻一多(1899年11月24日-1946年7月15日),
본명 闻家骅,자 友三,호북성(湖北省) 황강시(黄冈市) 회수현(浠水县) 출생
中国现代伟大的爱国主义者,坚定的民主战士,中国民主同盟早期领导人,中国共产党的挚友,新月派代表诗人和学者。
1912年考入清华大学留美预备学校。1916年开始在《清华周刊》上发表系列读书笔记。1925年3月在美国留学期间创作《七子之歌》。 1928年1月出版第二部诗集《死水》。 1932年闻一多离开青岛,回到母校清华大学任中文系教授。
1946年7月15日在云南昆明被国民党特务暗杀。
● 青少年时期
闻一多生于清光绪二十五年十月二十二日(1899年11月24日),湖北省黄冈市蕲水县(今黄冈市浠水县)巴河镇的一个书香门第,自幼爱好古典诗词和美术。五岁入私塾启蒙,十岁到武昌就读于两湖师范附属高等小学。
1912年十三岁时以复试鄂藉第一名的成绩考入北京清华留美预备学校(清华大学前身),在清华度过了十年学子生涯。喜读中国古代诗集、诗话、史书、笔记等。入校时他的姓名是闻多,同学就用谐音的英文词widow(寡妇)给他起了绰号。那时候,闻一多的革命主张是废姓,朋友间直呼其名,潘光旦便建议他改名为一多,他从善如流,立刻笑领了。他学习刻苦,成绩优异,兴趣广泛,喜读中国古代诗集、诗话、史书、笔记等。
1916年开始在《清华周刊》上发表系列读书笔记,总称《二月庐漫记》,同时创作旧体诗,并任《清华周刊》《新华学报》的编辑和校内编辑部的负责人。
1919年“五四运动“的爆发,闻一多紧随校园运动的潮流。他激清难捺,手书岳飞《满江红》,贴于学校饭厅门前,之后,毅然投身于这一伟大斗争中,发表演说,创作新诗,成为“五·四”新文艺园中的拓荒者之一,并作为清华学生代表赴上海参加全国学生联合会成立大会。
1920年4月,发表第一篇白话文《旅客式的学生》。同年8月,发表第一首新诗《西岸》。
1921年11月与梁实秋等人发起成立清华文学社。
1922年3月,写成《律诗的研究》,开始系统地研究新诗格律化理论。
●赴美留学
1922年7月,他赴美国留学,先后在芝加哥美术学院、珂泉科罗拉多大学和纽约艺术学院进行学习,在专攻美术且成绩突出时,他更表现出对文学的极大兴趣,特别是对诗歌的酷爱。年底出版与梁实秋合著的《冬夜草儿评论》,代表了闻一多早期对新诗的看法。
1923年9月出版第一部诗集《红烛》,把反帝爱国的主题和唯美主义的形式典范地结合在一起。
●回国任教
1925年5月回国后,任北京艺术专科学校教务长,并从事《晨报》副刊《诗镌》的编辑工作。
1928年1月出版第二部诗集《死水》,在颓废中表现出深沉的爱国主义激情,标志着他在新诗方面所取得的进步和成就。
从武汉大学开始,闻一多开始致力于中国古代文学研究。他从唐诗开始,继而上溯,由汉魏六朝诗到《楚辞》、《诗经》,由《庄子》而《周易》,由古代神话而史前文学,同时对古文字学、音韵学、民俗学也下了惊人的功夫,涉猎之广,研究之深,成果之丰,郭沫若叹为不仅前无古人,恐怕还要后无来者。
1930年秋,闻一多受聘于国立青岛大学,任文学院院长兼国文系主任。
1932年,南京国民党政府和山东地方势力的争权夺利斗争延伸到青岛大学内部,派系纷争,风潮迭起,闻一多受到不少攻击与诽谤,被迫辞职。
1932年闻一多离开青岛,回到母校清华大学任中文系教授
1932年秋,他回到母校清华大学任中国文学系教授,从事中国古典文学的研究。
●投身革命
1937年7月,全国抗战爆发,闻一多随校迁往昆明,任北大、清华、南开三校合并后的西南联合大学教授。面对严酷的现实,他毅然抛弃文化救亡的幻想,积极投身到抗日救亡和争民主、反独裁的斗争中。
1943年,他开始得到中共昆明地下党和民主同盟的帮助,党通过不同渠道,给他送去毛泽东的《新民主主义论》等著作。他开始认识到要救中国,必须从根本上推翻帝国主义和封建军阀的统治。蒋介石的《中国之命运》发表后,他表示五四给他的印象太深,《中国之命运》公开的向五四宣战,是无法接受的。
1944年,他加入中国民主同盟,后出任民盟中央执行委员、民盟云南支部宣传委员兼《民主周刊》社社长,成为积极的民主斗士。
1945年12月1日,昆明发生国民党当局镇压学生爱国运动的一二一惨案,闻一多亲自为死难烈士书写挽词:“民不畏死,奈何以死惧之”。出殡时,他拄着手杖走在游行队伍前列,并撰写了《一二一运动始末记》,揭露惨案真相,号召“未死的战士们,踏着四烈士的血迹”继续战斗。
1946年6月29日,民盟云南支部举行社会各界招待会,他在会上宣布民盟决心响应中共的号召,坚持“民主团结、和平建国”的立场,号召“各界朋友们亲密地携起手来,共同为反内战、争民主,坚持到底!”
●枪杀遇难
1946年7月11日,民盟负责人、著名社会教育家、当年救国会七君子之一的李公朴,在昆明被国民党特务暗杀。闻一多当即通电全国,控诉反动派的罪行。他为《学生报》的《李公朴先生死难专号》题词:“反动派!你看见一个倒下去,可也看得见千百个继起来!”
1946年7月15日,在云南大学举行的李公朴追悼大会上,主持人为了他的安全,没有安排他发言。但他毫无畏惧,拍案而起,慷慨激昂地发表了《最后一次演讲》,痛斥国民党特务,并握拳宣誓说:“我们有这个信心:人民的力量是要胜利的,真理是永远存在的”,“我们不怕死,我们有牺牲精神,我们随时准备像李先生一样,前脚跨出大门,后脚就不准备再跨进大门!”下午,他主持《民主周刊》社的记者招待会,进一步揭露暗杀事件的真相。散会后,闻一多在返家途中,突遭国民党特务伏击,身中十余弹,不幸遇难。
●主要作品
1920年4月
上海古籍出版社 《旅客式的学生》
1920年9月
新诗《西岸》。
1922年3月
《律诗底研究》
1922年
清华文学社 《冬夜草儿评论》
1923年
上海泰东图书局 《红烛》(诗集)
1925年
《七子之歌》
1928年
上海新月书店 《死水》
1948年
上海开明书店 《闻一多全集》(1一4册)
1951年
上海开明书店 《闻一多选集》
1955年
人民文学出版社 《闻一多诗文选集》
1983年
云南人民出版社 《闻一多青少年时代诗文集》
1985年
武汉大学出版社 《闻一多论新诗》(评论)
1942年
重庆国民图书出版社 《楚辞校补》(古典文学研究)
1956年
古籍出版社 《神话与诗》(古典文学研究)
1956年
古籍出版社 《古典新义》
1956年
古籍出版社 《唐诗杂论》(古典文学研究)
1984年
重庆出版社 《闻一多论古典文学》
1985年
上海古籍出版社 《离骚解诂》(古典文学研究)
[출처] 중국 학자이자 시인-문일다(闻一多)|작성자 pinmingx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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